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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物解辨 金文人澤榮集中。有所謂格物解者。有曰物者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也。格則格此而已。物有本末一節。非三綱之結辭及下文提起之辭。又曰曾子立傳。舍格物致知。而秖以誠意爲首。又有曰原道不言及於格物。以格物卽格誠正以下六物之理。非於六物外別爲專門一位也。此韓子特明處。非疎也云云。彼一生役於詞章。而未曾用工於聖經。無怪其言之醜差。不足多辨。然彼不自知謬妄。刊其文廣布天下。而以爲因朱子之說。而補朱子之未及。以資於天下之君子。於是文人之倫。一旣寵許。【金集中與曺仲謹牘曰。格物說旣蒙左右寵許。故刊之云云。】二將和之。二旣和之。將十百從之。朱子之平生精力。恐將壞矣。噫。夫格致者。大學之學之最初下手處。窮天下萬物之表裏精粗。致吾心之全體大用。可以誠意。可以正心。可以修身。可以齊家治國平天下矣。今以格物秖格誠正修齊治平之理者。固已偏矣。而又謂非於六物外別爲專門一位。動稱三綱六物。而不曰三綱八條。若然則古經簡奧。經文何反覆說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列數之不憚煩也。朱子不可信。孔子之言亦不可信矣乎。設如彼之所云。而格物不爲一位。則綱領之止至善。亦不得自爲一綱。而何謂三綱云爾。退之之不及格致。若謂信筆綴言之際。偶未及之則猶可也。謂之特明而非疎則可笑。孔子之言。曾子之述。猶未襯當。而退之乃千古時見耶。且以誠意爲傳首而舍格致云。則此謂知之至也一句。上不屬於經文。下不屬於誠意。亦將奈何。準諸經文。推之傳例。此決是格致傳之結語。而知其上之當有闕文。何敢遽異議。物有本末一節。結上文兩節之釋。何所不當。而必欲做提起下文看耶。且置其他。以文法言之。知所先後則近道矣。決是結語。非提起之辭也明矣。未知識者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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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灣遺稿序 論人必觀大者。死生之際。去就之間。士之節行莫加焉。故有能審幾而決於正。卽百世下。尙論者歸之。余讀龍灣金公遺稿。歎其文章之能。而尤有慕於其大節也。公自少攻文藝。才高而淹涵百氏。名聲噪於藝林。旣而陞上庠占黃甲。歷踐淸顯。琅函啓沃。至使人主改容。固將平步亨衢。雍容廊廟。經綸國章而左右大猷者矣。値黨論起。朝著紛紜。歎曰士禍作有日矣。遂去遯跡于武靈之南。杜門講學。無復當世之念。壬燹之憯。奮身敵愾。與健齋金文烈齋峰高忠烈。同聲擧義。權管光州。竟以丁酉再燹。殉義于月巖。嗚呼。使夫人而處公之地。遭公之時。黨爭可以資進取之路。寇難蓋若非退閒之任。而以前則退。以後則奮。群趨而背。衆避乃赴。豈故矯世拂俗以干譽哉。蓋其所見者幾。所安者義。卷舒行藏惟其宜。死生榮辱無所顧。是以其樹立卓卓有如此哉。公早從栗谷高峰二先生。講理氣四七等說。又從牛溪重峰辛白麓諸賢。髹染道義。碬礪名節。窮硏乎聖賢之奧。搜括乎文章之府。其中之蓄積。蓋已深且不窮。故其著之事也已如彼。發之言。又皆婉重贍雅。絶不效世俗葷膩淫哇之爲。而縱控周旋於軌度之中。優優其大雅之章矣。惜其收拾不以時。風霜劫火。散佚殆盡。其幸存於塵笥蠹鼠之餘者。僅詩文若干。公之群裔懼夫竝此而泯湮也。將鑱梨壽傳。後孫相基責余以丁乙。且索弁言。余謂如公之文。而歷數百年始行。晩矣。然由今而前。公固無待文字傳也。由今而往。非前日矣。世變激以下。奕耀者漸就沈昧。又公文與其事。適可以大警于人。于是而出之。正其有待於會耳。而豈得謂晩也哉。謹爲之序。以寓高山景行之思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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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變祝輯序 凡士大夫家。家必有廟。廟必有主。有事必告。祭必有祝。其所以愼終追遠之儀備矣。然禮有常有變。其節至夥。其文至繫。蓋自朱夫子著之家禮。中東諸賢之相繼纂述。不啻盈車。而或詳於常而略於變。或此存而彼無。雖多聞博古之人。卒然臨事。有難索據於卷帙浩穰之中。而應其變節之無窮。況避鄕僻峽荒濱絶海之書籍未具者乎。琦故嘗鈔定冠婚喪祭四禮儀。如笏記然。以爲簡易照檢倉卒應副之需。與朋友共之。旣有一朋友請曰。凡告辭祝文。固多前輩成式。而散見於諸書。旣難倉卒考求。且人家變節恒有之。而臨時措語。非狃於禮熟於文者。不能。盍爲之輯成一局以便其用。琦乃黽勉就諸家書。俱收常變成式。附以外祀數條於卷末。其或成式之互見而文不同者。竝錄之以備當人自擇。名曰常變祝輯。第窮居少書籍。無得以博搜悉採。同志之士。冀有以隨見隨取。塡補其闕漏焉則幸矣。雖然世級寖降。禮敎先亡。雖有文繡。誰將服之。雖有簠簋。誰將用之。秖得繕寫一本。藏之巾衍以爲家間之用而已。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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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不川詩契序 方丈之南文壽之洞。有他不川者。近故二山柳翁命名遊息之地也。川流上下三十里。廣磐穹巖。侹松脩竹。左右相映。而若其大石林立。渙若雲奔。錯若碁置。如龜如鳳。將仆將翔。百泉之水。瀉出其中。奔放決裂。爲泓爲瀑玉瑩雪噴。隨處異狀。他不得以抵此。儘一壑之撰也。然而莫遇賞者。慳秘數千年。樵叟漁人。過而睨焉。翁乃得之一顧眄之際。居然作主。意至必往。遇有嘉賓勝流。邀而與偕。或縱談千古。或觴詠舒暢。囂囂乎塵累之不能侵。而風騷之發。鏘然與靑山流水同其節簇矣。少焉人去山空。閒雲潭影。還復幾春秋于玆。而他不川爲鐵罏步而已。郡人士慨然于斯。相與謀曰。他不之川寂寞。則二山先生之剩韻歇矣。先生之剩韻歇。則吾鄕之風騷。且衰替不振矣。於是醵金作契。以每歲春三秋九。會于川上。少長咸聚。觥籌迭錯。拈韻酬唱。各酬其技。鏘鏘者啞啞者。皆自鳴其天機。誠亦衰季盛事也。余自憍右。晩寓玆土。未及拜翁之牀。而聞其風則稔矣。今獲覩玆會之盛。翁之作人之德之入人深。又可想已。第有可諗者。鳳流結社。嘯咏於石色泉聲之中。未嘗非世間淸餉。然必須脫略機變。藐視榮顯。絶新嗜之脂膩。慕前修之澹遠。物與理契。庚與神融。然後可以詮吾眞樂吾天。而彼泉石之蒼蒼潔潔。亦可以適吾用矣。不然直一候蟲時鳥之爲景物役耳。奚足尙乎哉。會中諸公。其必有商講者矣。五石柳君瑩業。以翁之家孫命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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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영윤과 같이 자면서 실로 뜻이 맞아,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어서 주었다.우연히 서로 만난 것이 기약해서 만난 것보다 나으니(偶與相逢勝有期)산은 온통 붉은 단풍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든 시절이라(山多紅葉野黃時)하룻밤 나란히 누워 자니 오히려 서글픈 마음만 남기에(一宵聯枕猶餘悵)은근한 마음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어서 주네(贈以慇懃惜別詩)영윤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벗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기약도 없이 만났으니(朋自遠方會不期)단풍 물들고 노란 국화 피는 마침 좋은 계절이라(丹楓黃菊正佳時)가슴에 쌓인 회포 다하지 못했건만 도로 이별하니(襟懷未盡還爲別)은근한 마음에 같이 술을 마시며 다시 시를 논하네(慇懃同酌更論詩)율지가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세 늙은이 옷깃 나란히 하여 기약이 있는 듯하니(三老聯襟若有期)마침 북쪽 기러기가 남쪽으로 가는 계절이로구나(正當北雁向南時)새벽 창가에 새벽달 희미해질 때 서로 헤어지니(曉窓殘月相分手)아쉬운 작별의 회한이 남아 시를 지어서 드리네(惜別餘懷贈以詩)그길로 헤어져 출발하였다. 여산(礪山)85) 읍 앞 객점에 이르러 밥을 먹기로 하고 황산(黃山)86)과 부여(扶餘)로 가는 노정(路程)을 물었다. 그곳에 들리는 것은 황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87)에 참배하고, 그길로 부여로 가서 생원 김호일(金浩一)을 찾아가는 일 때문이었다. 황산에 못미처서 중도에 길을 잃은 것이 수차례여서 간신히 찾아가 황산의 서원 밑에 이르렀다. 먼저 장암(場岩)에서 이 마을로 이거한 송문언(宋文彦)을 찾아갔다.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서원을 참배하려는 뜻을 말하고, 이에 모두 원우(院宇)로 갔다. 수복(首僕)을 불러 분부하니, 수복이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 2벌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재복을 입고 서원 마당에서 참배하고 신실(神室)로 들어가 봉심(奉審, 사당을 살핌)하니, 정암(靜庵), 퇴계(退溪), 율곡(栗谷), 우계(牛溪), 사계(沙溪), 우암(尤菴) 여섯 분의 선생이 배향되어 있었다. 신실(神室)의 처마 사이에는 '죽림서원'이라고 걸려 있었다, 강당 앞에는 작은 석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앞면에 팔분체(八分體)로 '황산서원비(黃山書院碑)'라고 적혀있었다. 서원 터와 원우(院宇)가 아주 넓고 훤했다.참배하고 나서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고, 송문언을 따라 황산 봉우리에 오르니 송림이 깊고 그윽한 곳에 정자 하나가 있었다. 처마에 '팔괘정(八卦亭)'88)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방안 사방 벽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노 선생(송시열)이 그 당시 독서를 하던 당이었다. 지금도 독서하는 두서너 관동(冠童)이 있었다. 당 뒤의 수풀 사이 석벽에는 "청초안(靑草岸), 몽괘벽(夢掛壁), 일감당(一鑑塘), 삼계리(三桂里), 평주도(平疇島)"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노 선생의 필적이었다. 앞에는 큰 바다(금강(錦江)을 말함)가 있고 뒤에는 강경(江鏡)이 있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갈 길이 바쁜 관계로 상세히 보지는 못하고 그길로 내려와 술을 사서 서로 마시고 작별하였다. 송문언은 영윤이 알려준 사람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급히 강경 마을 앞 나루를 건너 5리를 갔다. 또 굴암(屈岩) 나루를 건너 출발하였다. 석성(石城)89)의 마치(麻峙)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강경은 여염집이 즐비하고, 선박이 왕래하여 원산(元山)보다 못하지 않았다. ○與令倫同聯枕, 實是意同, 吟一絶以贈。 "偶與相逢勝有期, 山多紅葉野黃時。 一宵聯枕猶餘悵, 贈以慇懃惜別詩。" 令倫次曰: "朋自遠方會不期, 丹楓黃菊正佳時。 襟懷未盡還爲別, 慇懃同酌更論詩。" 聿之次曰: "三老聯襟若有期, 正當北雁向南時。 曉窓殘月相分手, 惜別餘懷贈以詩。" 仍爲分袂而登程。 抵礪山邑前店期飯, 問黃山扶餘路程。 仍入者, 欲爲審拜於黃山竹林書院, 仍向扶餘, 訪金生員浩一故也。 未及黃山, 中路失路者數次, 艱尋抵黃山院底。 先訪自場岩移寓於此村宋文彦。 敍寒暄後, 因言瞻拜書院之意, 則仍爲偕往院宇。 招首僕分付, 則首僕持來齋服二領。 故着齋服, 瞻拜院庭, 入神室奉審, 則靜菴、退溪、栗谷、牛溪、沙溪、尤菴六先生配享。 而神室楣間, 揭以"竹林書院"。 講堂前立小石碑, 前面以八分書"黃山書院碑"。 基址與院宇甚宏闊。瞻拜後, 書名《審院錄》, 隨宋文彦上黃山山峯, 則松林深邃之地, 有一間亭閣。 楣間扁以"八卦亭"。 房內四壁畵八卦, 卽老先生當日讀書之堂也。 而至今有數三冠童讀書矣。 堂後林間石壁, 刻"靑草岸、夢掛2)壁、一鑑塘、三桂里、平3)疇島" 皆是老先生筆。 前有大洋, 後有江鏡, 甚佳麗之地, 以行忙之致, 不能詳玩, 仍爲下來, 沽酒相飮而爲作別。 宋則令倫指示之人也。 日已夕矣, 急渡江鏡村前津, 行五里。 又渡屈岩津發。 抵石城麻峙店留宿。 行六十里。 江鏡閭閻之櫛比, 船隻之往來, 不下於元山矣。 여산(礪山) 전라북도 익산의 옛 지명이다. 황산(黃山)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이다. 죽림서원(竹林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2년 뒤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 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 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팔괘정(八卦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누정으로, 1663년(현종 4)에 송시열이 건립하였다. 석성(石城)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이다. 掛 저본의 '桂'는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에 의거하여 '掛'로 수정하였다. 平 저본에는 없는 글자인데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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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일찍 출발하여 석성읍 앞 콩죽 객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부여읍 앞에 이르러 김호일이 사는 마을을 물으니 규암(窺岩)90) 마을에 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암 나루를 건너 김 생원 집을 찾아갔는데, 사랑채가 마침 비어있었다. 사랑 앞에서 서성거리니 소동(小童)이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김 생원의 거취를 자세히 물으니 주막에 갔다고 대답하였다. 소동과 주막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김 생원을 만났다. 안부를 묻기도 전에 하는 말이, 수백 리 밖에서 누추한 곳을 찾아준 것이 실로 뜻밖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랑에 들어가 안부를 물으니, 그간에 그 동생 김호선(金浩善)이 부인상을 당했다고 하였다.안채에서 삶은 밤 한 그릇을 대접해 주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모두 나룻가 객점으로 나와 술을 사서 마셨다. 수북정(水北亭)91)에 올라 잠시 구경하였는데 정자는 규암 절벽 위에 있었다. 난간 앞에는 백강(白江)92)이 흐르고, 정자 뒤에는 푸른 벼랑이었다. 곳곳이 높은 봉우리고 사방은 강모래로 정취가 가득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눈에 담긴 풍경은 흥양(興陽)의 쌍충사(雙忠祠)93)보다 더 아름다웠다. 정자의 사방 벽에 고인의 제영(題詠)이 많이 있었으나 바빠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작은 나루를 건너 백강서원(白江書院)94)에 가서 참배하고 봉심하였다. 신독재(愼獨齋)95) 김 선생과 백강(白江)96) 이 선생이 배향되어 있었다.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었다. 그길로 백강 나루를 건너 김 진사 집으로 들어가 잠시 쉬고 나서 뱃사공을 불러 배를 타고 낙화암(落花巖)97)을 지나 고란사(皐蘭寺)98) 앞에 이르러 육지에 내렸다. 고란사에 오르니 암자는 큰 강가 절벽 아래 있었고, 낙화암은 그 왼쪽에 있고, 조룡대(釣龍臺)99)는 그 오른쪽에 있었다.사방에 펼쳐진 강과 산은 모두 정감에 젖게 하였고, 굽이굽이 흐르는 모래와 강물은 모두 아름답고 수려하였다. 절에는 책을 보는 관동(冠童)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유숙하였다. 30리를 갔다. 모래는 밝고 물은 푸르며 산은 수려하였지만, 평생 보아온 것이기도 하고 내가 갈 길이 바쁜 관계로, 여러 날 동안 머무를 수가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早發, 抵石城邑前豆粥店朝飯。 抵扶餘邑前, 問金浩一所居村, 則居在窺岩村云。 故越窺岩津, 訪金生員家, 則舍廊適空。 廊前徘徊之際, 有小童自內而出, 故詳問金生員去就, 則答以往于酒家。 偕小童往酒家, 路上逢金生員。 則寒暄前所言, 數百里之外, 委訪陋巷, 實是意外。 仍入舍廊, 得問伊間, 遭其弟浩善之妻喪云矣。 自內間待之以一器熟栗矣。 移時談話後, 皆出津頭店, 沽酒以飮。 上水北亭暫玩, 則亭在窺岩絶壁上。 檻前百江, 亭後蒼崖。 處處峯巒而面面江沙, 無非多情, 滿目景處, 勝於興陽 雙忠祠矣。 亭之四壁。 多有古人題詠。 而忙未記之可歎。 越一小津, 往白江書院, 瞻拜奉審, 則愼獨齋金先生、白江李先生腏享矣。 書名《審院錄》。 仍越白江津, 入金進士家, 暫憩後, 招津夫乘船, 過落花岩, 抵皐蘭寺前下陸。 上皐蘭寺, 庵在大江上絶壁下, 落花岩在其左, 釣龍臺在其右。 面面江山, 皆是多情;曲曲沙流, 盡爲佳麗。 寺有讀書冠童數人, 與之同留宿。 行三十里。 沙明水碧, 秀麗群山, 平生所見, 以吾行忙之致, 不得數日留連, 可歎可歎。 규암(窺岩)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이다. 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절벽 위에 있는 누각으로, 광해군 때에 양주 목사로 있던 김흥국(金興國)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었다. 백강(白江) 충청남도 부여의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쌍충사(雙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전기 무신 이대원(李大源, 1566~1587)과 정운(鄭運, 1543~1592)을 배향하였다. 백강서원(白江書院) 부산서원(浮山書院)을 말한다. 1719년(숙종 4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같은 해에 '부산(浮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 군수 정연달(鄭然達)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에 의해 1980년에 복원되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다. 자는 사강(士剛)이고,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이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ㆍ봉암(鳳巖)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세종의 7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이다. 저서로는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바위로,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절이다. 앞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가에 있는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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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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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에 가서 우 참봉(禹參奉)과 박상현을 만났다. 그 자리에 모르는 손님 서너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는 곳을 물으니 고부(古阜)에 산다고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두 사람은 김씨 성이고, 한 사람은 배씨 성이였다. 내가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 당시, 덕원 부사(德原府使)로 안변(安邊)에서 전사한 배공(裵公)113)이 누구인지 물이니, 그의 8대 조부라고 답하였다. 그 또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114)이 누구냐고 묻기에, 나는 나로서 5대조 되신다고 하였다. 모두 같은 날 전사한 분의 후손으로, 뜻하지 않게 만나 대대로 이어온 정의를 푸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볼 생각으로 그가 머무는 데를 물으니 창동 객점이라고 하였다.그길로 정동의 석사 이혜길(李惠吉) 집으로 갔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 조카 선(善)의 천연두가 어떤지 물으니, 낭패를 당해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길로 그 아우 집으로 가서 상을 당한 곡절을 위로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채에서 몇 가지 음식을 내와서 몹시 고마웠다. 그길로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에 용동의 참봉 이경화(李景燁)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곧 《성원현록(姓苑賢錄)》의 개간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관정동(冠井洞)에 들러 공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유숙하였다. ○朝食後, 往冠井洞, 見禹參奉及朴祥顯。 座上有不知客數三人。 故問其所居, 則居在古阜云。 故問其姓名, 則兩人以金爲姓, 一人以裵爲姓。 余問丁丑胡亂時, 德原府使戰亡於安邊裵公爲誰, 則答以渠八世祖。 而渠亦問吾祖承旨公爲誰, 故余以吾爲五世祖。 俱是同日戰亡人後裔, 意外相逢, 敍其世誼, 其喜可掬。 日後尋訪之意, 問其所住處, 則蒼洞旅店云矣。 仍向貞洞李碩士惠吉家。 敍暄後, 問其姪兒善痘與否, 則見敗云慘矣。 仍往其弟氏家, 慰其見慽之由暫話。 自內間出送數器饌以饋, 可感可感。 仍向廟洞, 與公瑞暫話後, 來龍洞李參奉景燁家談話。 此卽《姓苑賢錄》開刊所也。 來路入冠井洞, 與公瑞談話, 同留宿。 배공(裵公) 배명순(裵命純, 1597~1637)이다. 자는 수초(遂初)이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병자호란 때 퇴각하는 후금(後金)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南山驛)까지 이르러 강행군을 하던 중, 복병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무덤은 성주군 조곡에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승지공(承旨公) 송심(宋諶, 1590~1637)이다. 자는 사윤(士允)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는 노모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라도 병마우후(兵馬虞侯),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함북 병마절도사 이항(李沆) 휘하에서 척후장(斥候將)으로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횡포를 부리며 철수하는 후금군사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安邊南山驛)에서 전 ㆍ후 영장(前後營將)과 함께 분전 끝에 전사했다.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고, 고흥 서동사(西洞祠)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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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몹시 추웠다. 얼어 죽은 사람들이 많다. 極寒極寒。 多有凍死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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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춥고 눈이 내렸다. 寒雨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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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아침에 안신환 2제(劑)를 복용했다. □□는 김 동지가 전후로 낸 약값이다. 朝服安神丸二劑。 □□金同知前後藥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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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나 우연히 나주(羅州) 사람을 만났다. 그는 금호(錦湖)의 방손(傍孫)이라고 하였으므로 잠시 그와 집안 소식과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에 올라 길을 나섰는데, 빗방울이 이따금 떨어지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반드시 비 올 징조가 있으니 걱정스러웠다. 채찍을 재촉하여 삼례(參禮)에 이르렀다. 찰방(察訪)인 김척(金戚)을 만나 보고자 하니, 병이 나서 약을 복용하였다는 문리(門吏, 문지기)의 말에 김척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나 보다고 생각하였다. 요기하고 조촌(助村)의 앞들에 이르니 비가 크게 내려 옷이 모두 젖었다. 간천(艮川)에 이르자 비가 바로 개었다.부내(府內)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서문 밖 여점(旅店)에 앉았다. 천노(千奴)에게 주인집에 가서 흥양(興陽)의 지자(持者)21)와 군휘(君徽)가 올라왔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게 하였다. 잠시 있다가 천노가 군휘를 데리고 왔으므로 함께 말을 타고 남문 밖 여점(旅店)에 이르러 안장을 풀고 여막에 들어가 유숙할 작정이었다. 즉시 첨지(僉知) 김지행(金持行)의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곧바로 여점(旅店)으로 돌아와 묵었다. 이날 50리를 갔다.밤에 흥양(興陽)의 소식을 상세히 물어보니, 연회를 베풀 비용이 터무니없다고 하였다. 비록 염려스럽다 하더라도 이랑(吏郞)이 이미 출발하였을 것이니 장차 어찌 하겠는가. 早朝發行, 偶逢羅州人, 云是錦湖傍孫, 故暫與敍族談話。 上馬登程, 則點雨時下, 天氣昏黑, 必有雨徵, 可悶。 促鞭至參禮, 欲見察訪 金戚, 則所謂門吏云有病服藥意者, 金戚之不欲見故也。 療飢至助村前野, 雨勢大作, 衣服盡濕。 至艮川, 則雨卽晴矣。 至府內下馬, 坐西門外旅店。 使千奴往主人家, 問興陽 持者及君徽上來與否矣。 須臾千奴引君徽而來, 故同與上馬, 至南門外旅店, 鞍入幕爲留宿計。 卽往金僉知 持行家, 暫與相話, 卽還旅店留宿。 是日行五十里。 夜間詳問興陽消息, 則設宴之資孟浪云, 雖爲憂慮, 然吏郞想已發行, 將奈何? 지자(持者) 지방 관아들 사이에서 공문이나 물건 따위를 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지자군(持字軍)이라고도 한다. 《韓國漢字語辭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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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잠시 원등(院登)의 도청(都廳)에게 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즉시 들어왔다. 暫往院登 都廳, 暫話卽爲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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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무오) 1798年(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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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종일토록 가랑비가 내렸다. 3, 4월에 내리는 비와 같이 내리니 더욱 괴이한 일이다. 終日細雨, 若三四月之雨, 尤可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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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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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아침을 먹은 뒤에 주동(鑄洞)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죽동(竹洞)에 가서 사수(士壽)를 만나고 왔다. 食後往鑄洞談話, 因往竹洞, 見士壽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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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주동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往鑄洞, 談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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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아침을 먹은 뒤에 주동(鑄洞)에 가서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다. 흥양(興陽)의 지자(持者)가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그 편에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食後往鑄洞, 終日談話而來。 聞興陽 持者下去, 便付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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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주동(鑄洞)에 가서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파에 와서 머물렀다. 往鑄洞, 終日相話, 來留靑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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