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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정해) 1827年(丁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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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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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정해년(1827, 순조27) 5월 순찰사(巡察使)가 먼저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으므로 감사의 뜻을 표하려고 하였다. 丁亥五月, 巡相以書先問, 故以回謝之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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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僊巖【自百花潭一里餘】 萬嶂遮攔之中一道飛泉砰湃喧豗直奔兩壑間忽覺雙眸明豁截兩壑橫一橋穹然如螮蝀截雲漢躡而渡之晴空雷響生雙履下便覺心膽?悸轉入洞門更坐光明世界精神頓爽石頭刻四仙巖又刻先天潭後天臺四山紆鬱裏開豁一巖區緩踏衝波去長橋架兩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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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吉祥【自四仙巖數里許】 巖壑明朗林泉淸晶忽見東邊有百丈削壁刻一大佛像前有臺砌砌上建數仞長明燈鏤石頗巧佛像邊石壁大書妙吉祥三字字畵如斗尹判書師國筆妙吉祥卽胡佛名一云老胡◌椒泉翁詩曰短笻暫住坐斜陽石像屹然妙吉祥雨泐風磨經百劫有時應放白毫光◌又曰跌坐閱來幾劫輪行人指點岸冠巾儒仙以外虛無界天地之間自在身稍稍近前將欲語巖巖遙望若存神三字特書誰筆蹟掃苔細看宛如新洞壁無端大放光端嚴佛像見堂堂翩[䙴+羽]字畵尙書筆特揭高名妙吉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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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地庵【表訓寺屬庵自妙吉祥數里許】 山開別局庵又瀟灑但寂無一僧可嘆壁上有楓臯【永安國舅金公祖淳】黃山【金判書攸根】兩代贈江月師題咏庭外有石間甘露泉傍置小碗快飮三杯【無人處置碗可怪◌次壁上韻【揭板表訓寺僧富欣所刻下同】佛家名勝地怊悵見空庵危石玉如削老松天欲參磵聲餘貝葉雲影又伽藍甘露寒泉液留人小砌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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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비가 개지 않았지만 곧바로 길을 나섰다. 천안(天安) 읍내(邑內)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실음소(失音所)에 이르러 묵었다. 雨雖不霽, 卽爲發程。 至天安邑內中火, 至失音所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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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날씨가 자못 따뜻하였다. 日氣頗溫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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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청배에 가서 집에 보낼 편지를 부치고 왔다. 날씨가 매우 흐렸다. 往靑排付家書而來。 日氣甚陰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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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맑았다. 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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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몹시 추웠다. 병세가 위중한데 약효가 전혀 없고 원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동(注洞)의 종인 익정(翼貞)이 와서 보고 갔다. 極寒。 病勢沈重, 專無藥效, 眞元漸奪, 奈何? 注洞宗人翼貞來見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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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19일 十八日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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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밤에 눈이 내렸다. 아침에 청파에 가서 고을 사람 편에 집에 보낼 편지를 부쳤다. 夜雪。 朝往靑坡。 付家書於邑人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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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17일 十一日二日三日四五六七日 몹시 추웠다. 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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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을 먹은 뒤에 비가 올 기색이 잠시 멈추기에 즉시 길을 떠났다. 차령(車嶺)에 이르자 비가 세차게 쏟아져 어쩔 수 없이 원터에서 머물렀다. 朝飯後雨意乍止, 卽爲發程。 至車嶺雨大作, 不得已留院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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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아침을 먹고 일찍 출발할 때 눈이 내렸다. 이에 눈을 맞으며 유치(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기에 가까스로 영귀정(咏歸亭)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仍朝飯早發時雪作, 仍爲冒雪, 抵峙中火。 大雪作咫尺不辨, 艱抵咏歸亭留宿。 行八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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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계미) 1823年(癸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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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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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 순자강(蓴子江)을 건너고, 주포(周浦)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돈 1전(錢)을 주인집 사내에게 주며 《서재실기(西齋實記)》를 도산(道山)의 송필흥(宋弼興) 집에 전해 달라고 하였다. 길을 떠나 남원읍(南原邑)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나는 먼저 향교(鄕校)로 출발하여 실기(實記) 한 권을 전한 뒤 곧바로 출발하여 전석치(磚石峙)2)를 넘어 임실(任實) 야당(野塘)에 이르렀다. 동행은 먼저 주막으로 가고, 나는 송필동(宋弼東) 씨의 집에 들러 실기 한 권을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전하게 하였는데, 예조에 재록(載錄)했는지에 대해 묻기에 아직 재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서원을 세운 지가 이미 오래인데 어째서 재록하지 않았느냐며, 신안서원(新安書院)은 작년에 실었는데 들어가는 것이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계의 초고를 청하여 주막으로 가지고 와서 여환(汝煥)에게 베껴 오도록 하였는데, 이는 나도 예조에 소장을 올리려는 계획에서였다.-등서한 장본(狀本)은 뒤에 붙였다.-저녁을 먹은 뒤에 주막으로 나와 동행들과 함께 머물렀다. 90리를 갔다. 낮에 남원 길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천릿길 동행한 열세 사람(千里同行十有三)호남에서 북쪽 여행길 떠나 왔네(北征行色自湖南)며칠이나 걸려야 경성에 도착할꼬(間開幾日京城到)훗날 고생한 만큼 즐거움도 볼 수 있으리(可見他時苦盡甘)정 진사(丁進士)가 화답하였다.늦봄 삼월 서쪽으로 떠나는 천릿길(西行千里暮春三)산색은 푸르르고 물은 남쪽으로 흘러가네(山色蒼蒼水盡南)천 자나 높은 용문 계수나무 잡은 곳에서(千尺龍門攀桂地)오늘 함께한 고초와 즐거움 떠오르리(却思今日共辛甘)신윤보(申允甫)가 화답하였다.곤륜의 한 줄기 빼어난 삼각산(崑崙一脈三角秀)천지간에 정신 온통 남쪽에 있네(天地精神盡在南)천릿길 떠나온 노고 도리어 잊어버리고(千里還忘勞苦我)어사화 어주가인 듯 술동이 가득 달기만 하네(賜花御酒滿樽甘)정 진사(丁進士)가 또 읊었다.밤새 비는 강남에 쏟아져 다리가 잠기고(夜雨江南水沒橋)푸른 회화나무 길을 막고 보리는 허리까지 잠겼네(靑槐擁路麥齊腰)이번 길 용꿈을 꾼 나그네 누구인가(此行誰是龍夢客)들새가 노래하는 것도 비웃는 것도 같구나(野鳥如歌又似嘲)내가 화답하였다.짚신 신고 지팡이 끌며 오작교3)를 걷노라니(竹杖芒鞋步鵲橋)잘록한 허리의 미인들 성에 가득하네(盈城美女盡纖腰)이번 길 봄을 만끽하기 위해 온 게 아니건만(此行不是貪春客)혹여 옆 사람 비웃을까 두렵구나(或恐傍人有笑嘲) 早朝發程, 越蓴子江, 至周浦酒幕朝飯。 傳《西齋實記》於道山 宋弼興家之意, 出給錢一戔主漢。 發行抵南原邑, 乃中火秣馬。 余則先發鄕校, 傳實記一卷, 卽發越磚石峙, 抵任實 野塘。 同行則先去酒幕, 余則入宋弼東氏家, 傳實記一卷于新安書院, 問禮曹載錄, 故姑未載錄云爾, 則建院已久, 而何其不載乎? 新安書院則昨年載, 而所入不小云, 故請其狀草, 持來酒幕, 使汝煥謄書以來者, 余亦欲呈禮曹計耳【謄書狀本附後】。 夕飯後, 出來酒幕, 與同行同留。 行九十里。 午間南原路上, 咏一律曰: "千里同行十有三, 北征行色自湖南。 間關幾日京城到, 可見他時苦盡甘。" 丁進士和曰: "西行千里暮春三, 山色蒼蒼水盡南。 千尺龍門攀桂地, 却思今日共辛甘。" 申允甫和曰: "崑崙一脈三角秀, 天地精神盡在南。 千里還忘勞苦我, 賜花御酒滿樽甘。" 丁進士又號曰: "崑崙一脈三角秀, 天地精神盡在南。 千里還忘勞苦我, 賜花御酒滿樽甘。" 余和曰: "竹杖芒鞋步鵲橋, 盈城美女盡纖腰。 此行不是貪春客, 或恐傍人有笑嘲。" 전석치(磚石峙) 일명 '박석고개'로 전라북도 남원시 광치동과 사매면 대율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박석치는 비포장 시절에 고갯마루가 지표 유출에 의한 토양침식으로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얇고 넓적한 돌을 깔아 놓은 데서 유래하였다. 오작교 원문의 '작교(鵲橋)'는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있는 오작교(烏鵲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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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晦日 아침을 먹은 뒤에 빗줄기가 약간 누그러졌기에 길을 나서 정오에 오촌(鰲村)으로 들어갔다. 장석(丈席)을 들어가 뵙고 그 내부인(內夫人)의 상(喪)을 위로한 뒤 물러나 상제(喪制)7)에게도 또한 위로하였다. 장석(丈席)의 건강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어 몇 년 사이에 모습이 더욱 쇠약해지니 걱정스러웠다.잠시 쉬고 나서 행랑으로 나와 점심을 먹은 뒤에 실기(實記) 한 권과 가지고 온 약간의 물건을 드렸다. 장석(丈席)이 먼저 세충사(世忠祠)8)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지난번 흥양(興陽)의 송원(宋)이 왔을 때 한 말이 있었는데, 육(六)자를 세자(世字)로 고치라는 뜻의 편지였다고 하였다. 내가 "출발하기 며칠 전에 편지를 살펴보았습니다."라고 답하자 장석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육충사(六忠祠)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교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대로 묵었다.저녁을 먹은 뒤에 임실(任實) 종인 두 사람도 왔다. 행랑에 한 객이 머물고 있기에 거주하는 곳을 물었더니 같은 도에 사는 광양(光陽)의 박정일(朴楨一)이라 하였다. 그를 만난 반가움은 다른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달리 더욱 컸다. 그대로 함께 머물렀다. 30리를 갔다. 食後雨勢稍歇, 故發程午時入鰲村, 入謁丈席, 致慰其內夫人喪, 退與喪人亦致慰, 丈席氣候近以添重, 數年之間, 衰象漸甚悶悶。 暫憩後, 出來廊底, 午飯後, 入納實記一卷與持來略干物。 丈席先言以世忠祠之事, 頃者興陽 宋來到, 有云云說話, 以六字改世字之意折簡矣, 故余答曰: "臨發前數日奉覽矣。" 丈席曰: "與人相話, 不可以六忠祠爲可"云, 故答曰: "依敎施行矣。" 仍爲留宿。 夕飯後, 任實宗二人亦來。 廊底留一客, 故問其所居, 則乃同道光陽 朴楨一也。 其喜與他有別, 幸幸。 仍爲同留。 行三十里。 상제(喪制) 부모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나 상중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세충사(世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여산송씨 송간(宋侃)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 김시습(金時習) 등 11위를 향사하는 사우(祠宇)인 서동사(西洞祠)의 이전 명칭으로, 1785년 최초 건립 당시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1796년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으며, 1801년(순조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배하여 일문 육충사(一門 六忠祠)라 이름하였다. 이후 1833년 세충사, 1846년(헌종12)에 매월당 김시습을 함께 봉안하면서 서동사로 칭하였고,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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