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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김달오(金達五)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達五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789 1852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52년(철종 3)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달오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1통 2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44세 기사생(己巳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달오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성인(聖仁), 할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증조(曾祖) 한량 상건(尙巾), 외조(外祖) 한량 박득대(朴得大)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달오의 아내 황씨(黃氏)는 나이 39세 갑술생(甲戌生)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석용(碩用), 할아버지 한량 헌(憲), 증조(曾祖)는 한량 무지(無知), 외조 한량 정미(鄭美)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동생 달표(達表)가 있으며, 나이 27세 정해생(丁亥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자개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49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기유호구상준(己酉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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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789 1846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46년(헌종 12)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2통 6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78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71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증조(曾祖) 한량 계춘(桂春),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38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자개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43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계묘호구상준(癸卯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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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김달오(金達五)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達五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789 1849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49년(헌종 15)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주 김성인이 작고하여 그의 아들 김달오가 호주가 되었다. 김달오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2통 6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41세 기사생(己巳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달오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성인(聖仁), 할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증조(曾祖) 한량 상건(尙巾), 외조(外祖) 한량 박득대(朴得大)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달오의 아내 황씨(黃氏)는 나이 36세 갑술생(甲戌生)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석용(碩用), 할아버지 한량 헌(憲), 증조(曾祖) 한량 무지(無知), 외조 한량 정미(鄭美)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동생 달표(達表)가 있으며, 나이 24세 정해생(丁亥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자개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46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병오호구상준(丙午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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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八年 月 日和順縣考戊子成籍戶口帳內東面住第十水冷川里第二統第三戶幼學金啓鉉故代子幼學在宇年三十一戊午本光山父學生啓鉉祖學生日海曾祖學生錫三外祖學生李萬榮本全州母李氏歲六十九庚辰妻金氏歲三十一戊午本慶州父幼學光浹祖學生鼎元曾祖學生重鎰外祖學生李命奎本光山弟在仁年十八辛未婢惡春年二十七壬戌 乙酉戶口相凖印 [周挾無改印][官印]行縣監[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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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谷面雲臥里丙子戶口單子 八統四戶戶 幼學崔德連年二十八己酉本全州父學生 東龍祖學生 龜善曾祖贈嘉善大夫工曺叅判五衛都㧾府副㧾管聲南外祖學生黃慶河本長水妻朴氏歲二十九戊申籍密城父幼學 光旭祖學生 璟曾祖學生 茂春外祖學生張時燁本安東賤口婢尙元 癸酉相凖印 [周挾無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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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貳年 月 日和順縣考壬午成籍戶口帳內東面住第十一水冷川里第六綂第一戶幼學金啓鉉年六十三庚辰本光山父學生 日海祖學生 錫三曾祖學生 自光外祖學生朴仁森本密陽奉母朴氏齡八十二辛酉妻李氏齡六十三庚辰籍全州父學生 萬榮祖學生 遇春曾祖進士 旭外祖學生金大白本義城子 東學改名在宇年二十五戊午婦金氏齡二十五戊午籍慶州[周挾無改印]賤口婢惡春年二十一壬戌己卯戶口相凖印[官印]行縣監[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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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日谷里盧軫永 氏親展(피봉_뒷면)蓮堤里李㝢老謹.(簡紙)懸際, 便人忽到, 袖致 惠存, 新年喜消息, 孰過於此. 承審春意尙煖體度迓新萬祉, 慰溸滿千. 弟家嚴, 近以老症, 六七日欠攝, 爲子之道,焦煎之心, 以筆難喩. 第 惠書中示意, 滿幅辭意, 無非繾惓, 不覺惺汗也. 已作人中保証者數人, 有脫退之意,拒絶書到此矣. 不得已因於事勢, 有此移定, 以是改作之說紛挐也. 他人則因旧仍置矣. 如是仰 告, 則以是 諒下如何.慙負實多. 餘在便人口悉, 不備謝禮.卽武, 弟 盧軫永 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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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진천사(眞泉祠)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眞泉祠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4월 20일, 진천사의 이계종 등 9인이 노진영에게 진천사 유허비 수립 기념식에 참가해 줄 것과 압운대로 시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 1935년 4월 20일, 진천사(眞泉祠)의 이계종(李啓琮) 등 9인이 노진영에게 진천사 유허비(遺墟碑) 수립 기념식에 참가해 줄 것과 압운대로 시(詩)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이다. 4월의 상대방 안부를 간단히 묻고 자신들은 전과 같이 지내어서 분수에 다행이라고 인사했다. 진천사의 유허비 세우는 일이 여러분의 후사(厚賜)에 힙입어 좋은 재료를 얻고 거장(巨匠)의 공역(工役)으로 이제 완성되니 사림의 다행이라고 했다. 다음달 단오날에 옛 터에 유허비를 세울 것이니 광림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 또 '진(眞), 친(親), 신(辰), 린(隣), 신(新)'이란 압운자에 맞추어 시를 지어 투고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발신인으로 적힌 사람은 총9인으로 이계종(李啓琮), 기종섭(奇琮燮), 고유상(高維相), 정우원(鄭友源), 양일묵(梁鎰黙), 김기수(金錡洙), 이재춘(李載春), 고광찬(高光瓚), 유사(有司) 박로선(朴魯宣)이 적혀 있다. 진천사(眞泉祠)는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진천마을에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1655~1723)을 배향하여 세워졌던 사우이다. 박광일은 본관이 순천(順天), 자가 사원(士元), 호가 손재(遜齋), 시호가 문숙(文肅)이며, 송시열(宋時烈)에게 사사하였다. 숙종 때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翊衛)·왕자사부(王子師傳)·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다가 영조 때 죽었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광주 진천사에 제향되었다. 진천사의 건립 연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광주읍지』에 의하면 원생(院生) 20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 현재는 두 기의 유허비만 남아 있다. 진천사 유허비의 초건 시기는 1635년으로 추정되며, 1935년 김동수가 찬하여 새로 유허비를 세워 옛것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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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芝山面 日谷里盧 斯文 軫永 氏宅(피봉_뒷면)下南面 眞谷里眞泉祠(簡紙)伏惟麥黃體宇萬重. 生等依劣分幸. 就眞泉祠遺墟碑, 幸賴貴執之厚賜, 得良材, 巨匠工役, 今玆垂成. 此是吾道之所寄士林之慶幸. 以來月端午日, 將堅碑于佳作舊址. 惟願座下屆期光臨, 指揮方畧, 期圖玉成, 而當日欲各自言志, 以寓追慕之誠, 不有佳作, 何伸雅懷. 故拈出四律韻字以呈, 幸勿惜金玉之音, 投稿于當席乎否? 餘不備. 惟下在.乙亥四月二十日李啓琮 金錡洙奇琮燮 李載春高維相 高光瓚 等鄭友源 有司 朴魯宣梁鎰黙押韻 眞親辰隣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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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日谷里盧軫永氏(피봉_뒷면)陽山里崔南斗(簡紙)拜啓時餘體候大安耳. 生, 惠念無事, 是幸. 就悚碧梧桐木三本,山櫻木三本送呈, 則 貴庭院植栽, 仰祝仰祝耳. 餘惟不備禮上.乙亥二月念八日,生 崔南斗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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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城隅分手 迨今缺然 而案上留○書 足敦錫朋 謹審仲熱侍餘棣履 連衛萬重 何等伏慰 弟老親筋力 每多損節 煎悶難量 相議事匪不努力 而但人心之不如我心 奈何 近處僉議 皆以隨後爲上計 以○觀先唱之如何矣 兄必極力 自○貴邑先爲周章 期於竣事 如何 吾輩幾百年宿債 至於兄快了 則豈不幸哉 豈不幸哉 惟望吾○兄千萬鄭重 不備 伏惟下照丁亥午月念日 弟 錫駿 拜辛丈平安否 未有候書 若有逢君之路 恨意傳致 如何(皮封)西岡 侍案 將命弄花謝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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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便來得拜○惠翰敬審窮聿齋體蔓衛 仰慰且溯 齋末衰相轉深 又當歲暮百感蝟集 悶人悶人歲儀受之 甚歉然不備謝儀戊午臘月卄二 成在平 拜謝(皮封)査兄○棣座下○執事謹候狀上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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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去念官褫付書 想已登照矣 伊後閱月 未審霜令客候連衛安勝○主丈體內萬安 並庸溸念 無任切切 從舅省狀如昨萬安 上下諸家具安 是幸 而所謂科事 又未免落莫 何其運塞之甚耶 浩歎浩歎 婚事果何以爲定耶 旣以此月上來 則俾完大事 諒宜爲之如何 彼家亦云 燥撓云耳 慶州玉山李丈啣字鎭宅■與家親屢十年深契也 今番科行 委此躬訪 連留鄙第 而適有事於靑邑 欲一次進探 轉訪足下爲敎 故玆付數字 而至於從傍周旋之道 想不待此言 而靡不容極 然我旣委提 則尤加另念 幸須善稟於○主丈 俾生萬丈光色如何 尊之謀忠 比我善圖 故惟不多言耳 餘在官便 更書 不備式乙巳九月初七日 從舅 汝陽 拜(皮封)靑榮 朴碩士 旅座 傳納畜洞從舅候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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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目恐鑑伏地問 安爲白乎旀伏以 本院卽道 院也院長院貳以京宰相付啣是遣執綱掌議色掌有司以道內雅操謹飭之士付啣由來 院規故今番道會時士林公議均符爲臥以 生員主本院道內執綱之任薦望而望帖修正封上爲乎尼特借華啣今番朔焚香時 行次于本院爲是臥祗謁奉審之意緣由告課詮次李 生員 主 前己巳十一月十五日武城書院西齋 張大榮 姜炳善 裵道三 徐寶培 吳應七 等告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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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城書院道內色掌 望幼學 李太沃 薦居康津郡鵲川面內基里原 甲子八月 日[儒會所印]儒會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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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山郡 芝山面 日谷里盧軫永 氏(피봉_뒷면)武城書院內 金煥相謹答(簡紙)省禮拜言.芝宇信宿, 蘭香尙襲.謹請比令,孝體支嗇, 覃儀鴻禧,幷溯且禱. 弟無撓抵巢, 劣狀粗保耳. 就曩臨 錦地, 厚蒙淸誨, 滌盡備腔. 産蟾何感如之. 爲探 近節,玆呈尺索, 恕燭若何.餘謹不備疏禮.壬午三月念八日,弟 金煥相權寧祚 拜疏.令從氏春岡兄, 孝體保重否?此意雷告仰企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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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정순묵(鄭淳默)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鄭淳默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2년 6월 29일에 사생 정순묵이 사돈댁에 안부를 묻기 위해 노종룡에게 보낸 서간. 1912년 6월 29일, 사생(査生) 정순묵(鄭淳默)이 광주(光州) 일곡(日谷)에 사는 사돈 노종룡(盧鍾龍)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서간이다. 초여름에 와 주셨던 것이 아직까지 감사하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그 뒤로 갈수록 그리워졌는데 사람을 보내시어 편지를 주시니 마치 음성을 듣고 있는 듯 하고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극렬한 더위에 사돈댁 어르신의 건강이 편치 않으시다니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경서를 읽으시는 사돈도 아드님과 가족들과 모두 평안하신지 묻고 자신집의 노인은 그럭저럭 지내시고, 아주 작은 우려로는 더운 계절의 예사스런 증세이니 어찌 하겠느냐고 했다. 금년의 농사는 자신의 농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큰 흉년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가뭄으로 시작해서 병충해로 끝날 것이니 앞으로의 걱정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이 결정해주는 일을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탄식했다. 상대가 편지로 말한 것은 잘 알았다며 조금 서늘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찾아뵙겠다고 했다. 중부(仲父)께서 성묘 행차를 가시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며 오시면 하나하나 말씀드려 물을 계획이라고 했다. 선(選) 아이의 다리에 조그마한 종기가 난 것은 아직 씻은 듯이 낫지 않았다고 말하며 자애(自愛)하시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편지를 마쳤다. 본 간찰이 들어 있던 피봉의 뒷면에는 갑인년 12월 23일로 기록되어 있어 1912년(임자)과는 다른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발신자 정순묵은 ?승정원일기?에, 어의(御醫), 화순현감(和順縣監), 수안군수(遂安郡守), 나주영장(羅州營將), 내금위(內禁衛) 등에 임명된 사람으로 나온다. 간찰 피봉에 의하면 포평(蒲坪)에 살고 있었다. 수신자 소해(蘇海) 노종룡(盧種龍, 1856~1940)은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구한말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면서 을사오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향인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으로 와서 교육과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30년에 본인의 아호를 딴 소해정을 지었다. 소해정은 이후 1965년 그의 아들인 노진영이 같은 공간에 있는 만주사(晩州祠)의 강당으로 헌납하면서 경의재(敬義齋)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만주사는 한말 문신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과 노종룡을 배향한 사당으로 노종룡의 문인들과 고을 유림들이 송병선의 유풍을 추모해 1944년에 세운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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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向者霎晤 迨此耿仰伏惟花昫起居候崇衛○庇節各穩 隣戒近就淸淨否 拱溯勞祝 族末奉率依昨 而家役沒緖 勢窮力盡自不堪勝 此將奈何 所○恳材斫事 想留○念 而四株價文貳兩 仰似考領 如何 餘〔如〕有不足 則當斫加數而準送矣 適値晩憂 未晋替肆具木手處委牌耳 餘擾劇 不聲辛三初吉 族末 在徵 拜(皮封)東上宅 入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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