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진천사(眞泉祠)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眞泉祠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4월 20일, 진천사의 이계종 등 9인이 노진영에게 진천사 유허비 수립 기념식에 참가해 줄 것과 압운대로 시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 1935년 4월 20일, 진천사(眞泉祠)의 이계종(李啓琮) 등 9인이 노진영에게 진천사 유허비(遺墟碑) 수립 기념식에 참가해 줄 것과 압운대로 시(詩)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이다. 4월의 상대방 안부를 간단히 묻고 자신들은 전과 같이 지내어서 분수에 다행이라고 인사했다. 진천사의 유허비 세우는 일이 여러분의 후사(厚賜)에 힙입어 좋은 재료를 얻고 거장(巨匠)의 공역(工役)으로 이제 완성되니 사림의 다행이라고 했다. 다음달 단오날에 옛 터에 유허비를 세울 것이니 광림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 또 '진(眞), 친(親), 신(辰), 린(隣), 신(新)'이란 압운자에 맞추어 시를 지어 투고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발신인으로 적힌 사람은 총9인으로 이계종(李啓琮), 기종섭(奇琮燮), 고유상(高維相), 정우원(鄭友源), 양일묵(梁鎰黙), 김기수(金錡洙), 이재춘(李載春), 고광찬(高光瓚), 유사(有司) 박로선(朴魯宣)이 적혀 있다. 진천사(眞泉祠)는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진천마을에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1655~1723)을 배향하여 세워졌던 사우이다. 박광일은 본관이 순천(順天), 자가 사원(士元), 호가 손재(遜齋), 시호가 문숙(文肅)이며, 송시열(宋時烈)에게 사사하였다. 숙종 때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翊衛)·왕자사부(王子師傳)·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다가 영조 때 죽었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광주 진천사에 제향되었다. 진천사의 건립 연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광주읍지』에 의하면 원생(院生) 20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 현재는 두 기의 유허비만 남아 있다. 진천사 유허비의 초건 시기는 1635년으로 추정되며, 1935년 김동수가 찬하여 새로 유허비를 세워 옛것과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