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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80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權成道 權成道<着名>, 尹應振<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0년 2월 18일에 권성도가 수급자가 무덤으로 쓴 상치등면 남쪽 산기슭의 땅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1880년(고종 17) 2월 18일에 권성도(權成道)가 수급자가 무덤으로 쓴 상치등면 남쪽 산기슭의 땅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매득한 사람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권성도의 나뭇갓[柴場]에 지난해 윤 3월에 수급자가 자기 어버이의 무덤을 써서 소송이 벌어졌으나 주변의 의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무덤이 있는 자리만 팔기로 했다. 나뭇갓의 위치는 순창 상치등면(上置等面) 신평(新坪) 남쪽 산기슭이며, 값으로 15냥을 받고 이 명문 1장과 함께 땅을 넘겼다. 명문의 끝부분에는 뒷날 문제가 생기면 이 명문으로 빙고(憑考)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며, 산지주(山地主) 권성도와 증인(證人) 윤응진(尹應振)이 각각 착명(着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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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계묘년 양사재(養士齋) 하기(下記) 1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金俊伊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149 계묘년 4월 초2일에 양사재에서 작성한 하기(下記) 계묘년 4월 초2일에 양사재(養士齋)에서 작성한 하기(下記)이다. 양사재는 주로 지방에서 선비들의 학문 증진을 위해 향교 내에 설치한 교육기구이고, 하기는 관청, 향교 등 재정활동을 하는 조직에서 작성하는 지출부이다. 무엇에 대한 기록인지, 혹은 어디에서 작성한 기록인지에 따라 하기의 이름도 다양했는데, 가령 해마다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것들을 기록할 경우 '응하기(應下記)', 그렇지 않을 경우 '별하기(別下記)',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을 경우 '용하기(用下記)', 제사에 사용한 지출목록은 '제하기(祭下記)' 등으로 이름붙였다. 문서의 서두에 '帖 下記'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이 문서를 帖으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이어서 생원에게 전문 5냥을 처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출을 기록한 문서로 추정된다. 문서 말미에는 발급일을 쓰고 양사재의 감고(監考) 김양섭(金良剡), 번노(番奴) 김준이(金俊伊)·김몽치(金蒙致)의 이름을 적었다. 금전 출납에 관여했거나 문서의 보증인으로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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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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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0년 조재의(趙在義)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趙在義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30년 2월 18일에 유학 조재의가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1830년 2월 18일에 유학 조재의(趙在義)가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천부 황전면(黃田面) 구포평(九浦坪)에 있는 위토답(位土畓) 4두락을 대대로 경작해오다가 필요한 곳이 있어 부득이 전문 62냥에 팔고 본문기(本文記)까지 매수인에게 양도하니, 이후 다른 말을 하는 폐단이 있다면 이 문서로써 바로잡을 것을 약속하였다. 매수인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명문은 주로 매매 등의 거래 내역을 작성하여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발급한 조선시대의 계약서를 말한다. 명문에 기재된 매매 관련 사항은 명문의 작성일, 매수인의 신분과 성명, 매매목적물의 권리 유래, 매매 이유, 매매목적물의 표시, 지불수단의 종류 및 액수, 본문기의 교부 여부 등이 있다. 마지막에는 거래에 참여한 매도인, 매매 시 참여한 증인, 명문을 작성한 필집의 성명과 서명 등을 한다. 매매 계약이 성립한 후에는 새롭게 작성한 매매 명문인 신문기(新文記)와 매매목적물의 권리 유래가 적힌 구문기(舊文記)를 매수인에게 함께 양도해야 했다. 구문기로는 주로 분재기와 명문이 사용되었으며, 이들을 본문기(本文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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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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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조윤상(趙潤相)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1880 趙潤相 趙潤相<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유학 조윤상이 발급한 수표 유학 조윤상이 발급한 수표이다. 수표를 작성한 까닭은 산령촌(山嶺村)의 뒷산을 매수자에게 이미 매도하였는데 값을 치루는 날에 함께 양도해야 할 구문기[古文記]를 잃어버렸으므로 부득이 이 수표로써 증빙한다는 내용이다. 산령촌은 전라남도 순천부 황전면에 있는 마을이다. 수기(手記)와 수표(手標)는 매매 등 쌍방 간에 맺어진 약속을 기록한 문서이다. 내용상 주로 산송(山訟)과 관련한 수기·수표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어떠한 내용이든 그것을 다짐하고 약속하며 써주는 문서라면 수기·수표로 볼 수 있다. 수기와 수표는 문서의 특성상 정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와 유사한 문서로 불망기(不忘記)가 있다. 불망기는 어떠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이다. 개인이나 문중의 기록 차원에서 작성하는 불망기도 있었지만 주로 매매 등 타인간의 거래관계에서 증빙을 위해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수기·수표와도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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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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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902년 원릉참봉(原陵參奉) 공명첩(空名帖) 고문서-교령류-공명첩 宮內府印(8x6.5), 宮內府□署理(5x3.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2년에 발급한 원릉참봉(原陵參奉)으로 제수하는 내용의 공명첩 1902년(광무6) 8월에 발급한 공명첩으로 수취자의 성명을 적는 부분은 비워져 있다. 임명하는 관직은 원릉참봉(原陵參奉) 종사랑(從仕郞) 판임관(判任官) 8등(等)이다. 궁내부(宮內府) 관인이 찍혀 있고, 작성 일자 좌측에는 "의정부(議政府) 궁내부(宮內府) 대신(大臣) 찬정임시서리(賛政臨時署理) 대신(大臣) 성기운(成岐運)"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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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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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1년 배상권(裵相權)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順天府使 裵相權 行府使<押> □…□(7.0×7.0), 周挾無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에 배상권이 순천도호부 관아에 제출하고 다시 내려받은 준호구. 1891년(고종 28)에 호주인 배상권(裵相權)이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관아에 제출하였다가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문서 본문에 호적단자(戶籍單子)라고 기재했지만 '무자년 호구와 상준(相準)함'이라는 준호구에 적는 문구도 기재되어 있다. 호주가 호구단자를 제출할 때 일부 준호구 양식에 따라 작성하였고, 이를 관아에서 착압하고 관인과 주협개자인(周挾改字印)을 찍어 준호구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돌려주었다. 거주지는 쌍암면(雙巖面) 군장려(君長閭)이다. 호주의 직역은 유학(幼學), 출생년은 계사년으로 올해 59세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호주 이외에 호주의 사조(四祖), 처 김씨(金氏, 58세 갑오년생, 본관 慶州)와 처의 사조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 하단에는 소유 노비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는데, 노 1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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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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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70년 양식(梁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寶城郡守 梁植 行郡守<押> 寶城郡印(6.0×6.0), 周挾改因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0년에 보성군에서 양식에게 발급한 준호구. 1870년(고종 7)에 보성군(寶城郡) 관아에서 호주인 양식(梁植)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문서 여백에 군수의 서압과 주협개인(周挾改印) 및 관인이 찍혀 있다. 양식의 거주지는 송곡면(松谷面) 박곡촌(亳谷村) 제1리(里)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며, 출생년은 을해년으로 56세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처 윤씨(尹氏, 나이 60세 신미년생, 본관 咸安)와 처의 사조, 동생 정(楨, 나이 49세 임오년생), 아들 두환(斗煥, 나이 35세 병신년생)과 며느리 안씨(安氏, 나이 38세 계사년생, 본관 竹山), 아들 정환(廷煥, 나이 32세 기해년생)과 며느리 이씨(李氏, 나이 33세 무술년생, 본관 廣州), 아들 익환(翼煥, 나이 29세 임인년생)과 며느리 김씨(金氏, 나이 27세 갑진년생, 본관 安東), 아들 종환(鐘煥, 나이 25세 병오년생)과 며느리 박씨(朴氏, 나이 17세 갑인년생, 본관 珍原)의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 하단에는 천구질(賤口秩)이라는 명칭으로 앙역노비의 인적 사항이 도망 노비를 포함하여 기재되어 있다. 종환(鐘煥)의 처는 1867년 준호구에 안씨(安氏)였지만, 본 준호구에는 사망(故)했다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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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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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64년 조병덕(趙秉德) 서문(序文) 고문서-시문류-서 趙秉德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066 1864년에 조병덕이 작성한 ?은봉전서? 서문 1864년 봄에 조병덕(1800~1870)이 작성한 ?은봉전서(隱峯全書)?의 서문이다. ?은봉전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문집으로 1773년에 간행된 초간본, 1864년에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에서 간행된 중간본, 1969년에 대전 이문사에서 간행된 삼간본이 전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은봉전서?의 서문은 송내희와 조병덕 두 사람이 작성하였다. 서문을 작성한 조병덕은 양주 사람으로 홍직필(洪直弼)과 오희상(吳熙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2년(철종 3) 음보(蔭補)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1859년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서문에는 ?은봉전서?가 중간되기까지의 간략한 과정과 안방준의 생애를 서술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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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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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64년 송근수(宋近洙) 발문(跋文) 고문서-시문류-발 宋近洙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066 1864년 10월 4일에 송근수가 작성한 ?은봉전서? 발문 1864년 봄에 조병덕(1818~1903)이 작성한 ?은봉전서(隱峯全書)?의 발문이다. ?은봉전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문집으로 1773년에 간행된 초간본, 1864년에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에서 간행된 중간본, 1969년에 대전 이문사에서 간행된 삼간본이 전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은봉전서?의 발문은 안수록(安壽祿), 송근수(宋近洙), 유건환(兪建煥), 안상(安相) 네 사람이 작성하였다. 이 중 문서의 작성자인 송근수는 송시열의 8대손으로 형 송달수(宋達洙)와 함께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이이 송시열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계승하였다. 1848년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한 뒤 대하선, 공조판서, 우의정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발문은 ?은봉전서?가 중간되기까지의 간략한 과정과 안방준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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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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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64년 송내희(宋來煕) 서문(序文) 고문서-시문류-서 宋來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066 1864년에 송내희가 작성한 ?은봉전서? 서문 1864년 봄에 송내희(1791~1867)가 작성한 ?은봉전서(隱峯全書)?의 서문이다. ?은봉전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문집으로 1773년에 간행된 초간본, 1864년에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에서 간행된 중간본, 1969년에 대전 이문사에서 간행된 삼간본이 전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은봉전서?의 서문은 송내희와 조병덕 두 사람이 작성하였다. 서문을 작성한 송내희는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815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835년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황간현감, 평안도 도사를 거쳐 1857년 이후로는 여러 차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1865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서문에는 ?은봉전서?가 중간되기까지의 간략한 과정과 안방준의 생애를 서술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을 목판에 새겨 ?은봉전서?에 수록했다는 점에서 이 문서가 문집 간행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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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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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隱峯全書序牛溪成文簡公講道坡山 四方之士多負笈摳衣者 重峯趙文烈公 隱峯安文康公皆爲及門而差有後先 與重峯未嘗覿面 以風誼曠感 裒輯遺文 續附圖繪 名之曰抗義新編 不佞蓋嘗受讀而感其嗜義之深 每有執鞭之思 迺者先生之六代孫參奉壽祿就其原集而更加編摩成帙 藏之巾衍而未卽鋟梓矣 參奉公之從子命宣族曾孫永煥等懼其因循未遑 將謀壽傳 問序於不佞 雖不敢遽當 而亦不敢終辭 竊惟先生生於 穆陵盛際 骨相奇偉 志氣卓犖 年纔弱冠 蚤從賢師 專心爲己之學 又合圃隱 重峯之號 扁其舍曰隱峯 以致崇慕之志 嘗語節義 是學問中一事 不可岐而二之 徒以繩行尺步小廉曲謹爲務 而不以節義自勵者 是可慨也 聖人修道立敎 三綱五常而已 豈有捨節義而爲道學也 是以所著文字 皆是尙忠孝崇道德之類也 至於華夷尊攘之義 陰陽淑慝之分 嚴於斧鉞凜如霜雪 故聞醜正之徒詆誣栗 牛兩先生 卽上疏痛斥 絶爾瞻好爵之誘 避纘男踵門之訪節義之本 已立於其初矣 我東戎狄之禍 莫甚於壬丁丙 而輒倡義起旅 竟因媾和而罷 縱未成功於當時 而乃心王室則亦足暴於後世矣 其偉器卓節 可以有爲於世 而適因寇賊交亂 倫常斁滅 遂卷懷于湖徼 不以爵祿嬰其心 而當時群彥之過從薦引者 皆詡以南服高士 名隨實彰 嶷然爲儒林之標 仁廟臨御 恩召屢降 孝廟初服 寵擢優異 旣沒之後 贈以爵諡 妥侑祠院 寔出於朝野尊慕之至意 罔有遺憾也 蓋人之成就 隨其氣質所稟而各有不齊淸粹者未必造高明之域 持守者未必盡臨履之工 而言語文章 旣出於精神心思之所寓 觀於是集 槩認其學問則本之人倫 事功則準於王道以拓其氣量 以廓其地步 羽翼斯文維持世敎者 豈不韙哉 略書所感於誰昔者 遂爲之弁其卷云爾 時崇禎紀元後四甲子春季 恩津宋來熙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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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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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0년 이용근(李龍根)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金秀坤 李龍根 金秀坤<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65 1870년 11월 5일에 유학 김수곤이 유학 이용근에게 갑향면 행정리에 있는 대밭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1870년(고종 7) 11월 5일에 유학(幼學) 김수곤(金秀坤)이 유학 이용근에게 갑향면 행정리에 있는 대밭[竹田]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김수곤은 자기가 매입하여 여러 해 동안 대나무를 베어 쓰던 대밭을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이용근에게 팔았다. 대밭의 위치는 갑향면(甲鄕面, 현 담양군 대전면) 행정리(杏亭里)에 있으며, 자호(字號)는 국자(匊字)이다. 대밭의 면적은 1말 5되지기이고 짐수[卜數]는 4짐 8뭇이다. 김수곤은 이용근에게 밭값으로 15냥 5전을 받고, 이 명문 1장과 함께 대밭을 넘겨주었다. 명문의 끝부분에는 뒷날 불미스러운 문제가 생기면 이 명문으로 빙고(憑考)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며, 대밭 주인 유학 김수곤이 이 명문을 직접 작성하고 착명(着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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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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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병인년 안명혁(安命㷜)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安命㷜 寶城郡守 官<押> 寶城郡印 7顆(6.5x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950 병인년 11월에 백야면에 사는 안명혁이 보성군수에게 산지의 매매 이후 본문기를 내주지 않는 박백손으로 부터 본문기를 받아내고 이 토지에 대한 입안을 성급해줄 것을 요청하는 소지 병인년 11월에 안명혁이 보성군수에게 올린 소지이다. 안명혁은 지난달에 망부(亡父)의 산지를 매득한 뒤에 본문기(本文記)를 내주지 않는 박백손을 상대로 보성군수에게 소지를 올렸고, 보성군수는 박백손에게 빨리 본문기를 내주라는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박백손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끝내 본문기를 내주지 않으므로, 다시 이 소지를 올려 관에서 발패(發牌)하여 엄히 다스림으로써 문기를 받아낼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보성군수는 '이미 방매한 전답의 문기를 핑계를 대면서 내주지 않는 것은 매우 못된 짓이고, 더구나 관의 처분이 내렸는데도 줄곳 미루는 것은 더욱 간교하므로, 엄히 다스려서 추급(推給)해주기 위해 박백손을 붙잡아오라.'는 처분을 안명혁에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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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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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을해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南澔 ▣南澔<着名>, ▣▣哲<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을해년 11월 16일에 ▣남호가 유학 아무개에게 갑향면 고두원에 있는 논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을해년 11월 16일에 ▣남호(南澔)가 유학 모(某)에게 갑향면 고두원에 있는 논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남호는 조상에게 물려받아 몇 년 동안 농사짓고 살던 논을 어쩔 수 없이 팔았다. 논의 위치는 갑향면(甲鄕面, 현 담양군 대전면) 고두원(高頭員)이며, 자호(字號)는 사자(四字)이다. 논의 면적은 4마지기이고 짐수[卜數]는 25짐 5뭇이며, 값을 받고 이 명문과 함께 논을 넘겼다. 명문의 끝부분에는 뒷날 문제가 생기면 이 명문으로 빙고(憑考)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며, 답주(畓主) ▣남호, 필집(筆執), 증인(證人)이 각각 착명(着名)하였다. 그러나 문서가 대각선으로 훼손되어 논값과 필집 이름 등의 내용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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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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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가포서(稼圃序) 고문서-시문류-서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가포 이낙인의 호이자 당호인 가포를 주제로 그의 안빈낙도, 주경야독하는 행실을 적어 기록한 서문. 가포(稼圃) 이낙인(李洛仁)의 호(號)이자 당호(堂號)인 '가포'를 서술한 서문으로 그를 안빈낙도, 주경야독하는 호남 선비로 칭찬한 내용이다. 어디에 거처하더라도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고, 부모를 효로 모시고, 친구 간에 믿음으로 교유하고, 성학(聖學)을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학문한다고 하는 것이 선비라는 말로 시작하여 완남(完南) 담양부(潭陽府) 화지곡(華之谷)에 은거하는 처사 이낙인에 대해서 서술했다. 그는 청렴개결한 성품을 지니고,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아침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돌아와 옛책을 읽으며 스스로 천하 백성의 즐거움을 얻고 기뻐했다는 것, 어려서는 부모를 극진히 모셔서 향리에 이름이 났고, 조정의 성전을 받지는 못했어도 그 행실 옛 정려를 받은 효자에게 대어도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 가정이 가난해서 채소를 먹고 나물국을 먹어도 즐거워했으며, 염락제의 일들을 그리워 하며 성현의 심법(心法)을 수수받아 마음속에 갖추고, 일찍이 과거에 과거보는 일을 사양하고, 농업에 힘썼으며, 궁한 때에는 자신의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를 호좌(湖左)의 탁월한 선비인데 아무 칭호가 없이 은거하는 사람과 똑같다며 '가포(稼圃)'가 여기에서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이러한 일을 호남 선비의 입으로 이 같은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며 그 사람의 당호(堂號)를 물어보니 이와 같아 작은 서문을 남겨 그의 행실을 적는다고 했다. 작성시기와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종이의 지질로 보아 일제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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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稼圃序夫士之生於世也 不得於朝則或處於山林 或處於畎畝 箕{氵+頴}之操不改 堯舜之道自樂 事父母以孝 交朋友以信 雖不爲聖學 亦必謂之學矣 完南潭陽府華之谷有隱士曰李洛仁 持性廉介 與物無競 朝出耕上平之田 暮歸讀古人之書 怡怡然 自得於天民之樂者也 少時事親至孝聞於鄕里 雖未蒙槕稧之典 其實行果不愧於古之旌孝之倫也 家契寒素 飯蔬羹藜 不改其樂 德公耕隴之耦兒 寬帶經之 鋤庶匹美 於千載之下 南畝之饁 已訖東榮之洗相敬 聚諸子百家書探賾 奧義上窺姚姒 敻溯濂洛帝王之與替■(之)事蹟 聖賢之授受心法 瞭然備具於心胷之間 早謝科臼之業 乃喟然而歎曰 士之不遇命也 益務農業 於是饘 於是粥周窮恤貧 不惜貲財 嗚呼 如斯人也 可謂湖左卓犖之士 沒沒無稱 同歸於荷篠丈人 學稼高弟之類 稼圃之號 寔出於此乎 有子曰 澮根自弱冠時文名播於四隣 信知有是父 故有是子 盖冬夏敎以詩書 春秋敎以易禮 窓前桑無一枝 門外雪深三尺 父師之敎訓苟不尊嚴 其成就之美 葛若是其偉歟 余因湖士之口傳聞若人之名 實不覺獵纓而聳異之 問其堂號曰稼圃 遂爲小序 畧叙其實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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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기미년 보성군(寶城郡) 백야면(白也面) 존위(尊位) 등 서목(書目) 고문서-첩관통보류-서목 白也面 面任 劉氏 寶城郡守 尊位 劉<着名>, 洞任 金<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미년 보성군 백야면(白也面)의 존위(尊位)와 평화촌(平化村)의 동임(洞任)이 보성군수에게 올린 서목 기미년 8월 28일에 백야면(白也面)의 존위(尊位)와 평화촌(平化村)의 동임(洞任)이 보성군수에게 올리기 위해 작성한 서목이나, 관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올리지 않은 불발문서(不發文書)로 보인다. 내용은 용문면(龍門面)의 최석형(崔錫衡)이 올린 소지(所志)의 제음(題音)에 근거하여 백야면의 소내일(蘇乃日)을 상대로 조사한 사실에 대해 보고하겠다는 것이다. 존위 유(劉) 씨와 동임 김(金) 씨가 착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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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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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1년 배상권(裵相權)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裵相權 順天郡守 順天郡印(4.0×4.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1년에 호주 배상권이 순천군에 제출한 호적표. 1901년(광무5)에 배상권(裵相權)이 순천군(順天郡)에 제출하여, 군수 이재현(李載現)이 관인을 찍어서 돌려준 호적표(戶籍表)이다. 주소는 전라남도 순천군 쌍암면(雙巖面) 군장리(軍壯里)이다. 호주의 나이는 69세, 본관은 달성(達城), 직업은 농업이다. 가족사항은 처 김씨(金氏, 나이 64세 본관 慶州), 아들 인섭(寅燮, 나이 39세)과 그의 처 구씨(具氏, 나이 40세 본관 綾州), 차자(次子) 계언(啓彦, 나이 14세)이다. 현존 인구는 남자 3명 여자 2명이다. 가택은 초가 4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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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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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계묘년 양사재(養士齋) 하기(下記) 2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鄭達五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149 계묘년 4월 초2일에 양사재에서 작성한 하기(下記) 계묘년 4월 초2일에 양사재(養士齋)에서 작성한 하기(下記)이다. 양사재는 주로 지방에서 선비들의 학문 증진을 위해 향교 내에 설치한 교육기구이고, 하기는 관청, 향교 등 재정활동을 하는 조직에서 작성하는 지출부이다. 무엇에 대한 기록인지, 혹은 어디에서 작성한 기록인지에 따라 하기의 이름도 다양했는데, 가령 해마다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것들을 기록할 경우 '응하기(應下記)', 그렇지 않을 경우 '별하기(別下記)',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을 경우 '용하기(用下記)', 제사에 사용한 지출목록은 '제하기(祭下記)' 등으로 이름붙였다. 문서의 서두에 '替 下記'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이 문서를 替(帖)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이어서 생원에게 전문 8냥을 처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출을 기록한 문서로 추정된다. 문서 말미에는 발급일을 쓰고 양사재의 전직(殿直) 김선권(金善權), 고자(庫子) 정달오(鄭達五), 수서원(首書員) 김후선(金後善)의 이름을 적었다. 금전 출납에 관여했거나 문서의 보증인으로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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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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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병신년 추방첨의(秋房僉議) 완문(完文) 고문서-증빙류-완문 1836 秋房僉議 順天□□□□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신년에 추방첨의에서 발급한 완문 병신년에 추방첨의에서 발급한 완문이다. 황전면(黃田面)에 사는 정씨가의 노 예화가 납부한 15냥 중 화전(禾錢) 3냥은 영구히 면해주겠다고 여러 번 언급했으므로 추방의 논의에 따라 침탈하지 말 것을 증빙하는 내용이다. 추방(秋房)은 형방(刑房)을 의미하는데, 문서에 답인된 인장에 순천(順天)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순천부(시기에 따라 순천군, 순천현)의 형방으로 보인다. 이처럼 관청에서 특정인에게 감역·면세 등의 특권을 부여할 때 사용한 문서를 완문이라고 한다. 다만 일반적인 완문의 경우 정해진 투식이 있고 관찰사나 수령 등 행정책임자의 명의로 발급된 반면 이 문서는 형방의 첨의(僉議)에 의해 발급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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