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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郡 本村面 日谷里盧軫永氏 殿(피봉_뒷면)東台里朴泰慶 拜上緘.(簡紙)伏未審日間侍中體候康健, 伏慕區區. 弟姑依前樣耳. 就悚奉納条의莫大ᄒᆞᆫ 惶恐은 不可形白이올시다.只其土地의 廢畓리라ᄒᆞ심은 暫時遺感中으로 自知ᄒᆞ오나 水旱에 關ᄒᆞ야 廢畓이되다은것션 假使的 有災無目리라는말슴과갓사오이 此則安心ᄒᆞ시요. 餘在面白, 不備禮.己巳三月九日, 弟 朴泰慶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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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日谷里盧 生員 軫永氏(피봉_뒷면)池內里范在烋(簡紙)拜別於焉春夏代序矣. 謹未審旱餘潦初,侍中靜候萬旺, 寶覃均迪, 伏溸區區之至. 生惟以省側之粗依爲幸也. 就拱先大夫人忌辰復臨, 知而難可空過, 故此雖薄些忘弱却呈, 冀領萬千伏望耳. 餘在追後面拜口達. 不備禮.己巳棲月初一日, 生 范在烋 二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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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 芝山面 日谷盧 斯文 軫永 氏(피봉_뒷면)全南 光州郡 飛鴉面 月桂里 武陽書院 內開城杜門洞司院刱建所全羅南北道分事務所(簡紙)謹詢經體萬相, 間接開城本所公函內, 槩祠院建築事, 已自四月望沿木以五月晦內廟宇竣功豫定, 間自貴所解事員選送, 保爲董役之地, 仰告云云. 故爲其協商本月五日任員會開催于本事務所, 揚萬 枉臨之地, 幸甚.此亦中, 依其形便, 當日散會爲料. 則早朝登程午前九時出席之地, 切要.癸酉五月一日[開城杜門洞祠院刱建所全羅南北道分事務所印]開城司院全南分事務所常務 李載春崔鍾涉李玩相崔光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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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김성기(金成基) 서간(書簡)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金成基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293 1934년 2월 26일, 제 김성기가 노진영에게 원지 값의 도난 사건과 자신이 상대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했던 사유 등을 전한 서간. 1934년 2월 26일, 제(弟) 김성기(金成基)가 노진영(盧軫永)에게 원지(院誌) 값의 도난 사건과 자신이 상대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했던 사유 등을 전한 서간(書簡)이다. 봄 날씨에 상대의 아버님인 선생님, 상대, 그리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못난 모습 여전하다고 했다. 바야흐로 원지(院誌)를 교정하는 일에 골몰 중이어서 겨를이 없다고 한 후 작년 12월 상대에게 도(道)의 장의(掌議)를 부처 드렸는데 다만 구원지(舊院誌)만 도착하고 회답이 없기에 배도(裵道)란 놈에게 물었더니 형과 소실(小室) 부인이 광주읍에 사는데 대답이 오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기에 그 뒤로 형에게 여러 차례 다시 편지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지난달 배(裵) 한(漢)이 단자 비용를 거두러 흥덕과 고창의 3~4 곳을 가서는 40엔(円) 돈을 횡령하고는 밤에 몰래 가솔을 데리고 도주했음을 전하고, 자신이 즉시 관할 주재소에 고소하고 그 집을 경관(警官)이 수색했다는 것, 수색중에 5~6인의 답장편지 중에 형의 편지를 발견했다는 것, 그 중에는 단금(單金) 10엔과 단자(單子)만이 있었지 봉안운(奉安韻)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그 놈에게 분통이 터져 남쪽 북쪽 도(道)를 대 수색했다고 말하며 어찌 감히 용서를 바라겠느냐고 말했다. 아우의 편지에 형이 읽고 답하였지만 그 때는 추적을 당해 도망중이거나 아니면 감옥에 갇혔을 때라서 답장을 할 수 없었다고 사정을 전했다. 또한 배가 놈에게 50엔이 넘는 돈을 손실 본 뒤에 원지 비용으로 인한 갈등으로 우선 간행을 정지하고 있으며, 자신도 그로 인하여 한 달간 병이 생겨 죽을 지경이었고, 지금에야 겨우 일어났다고 말하고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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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배신권(裵信權)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裵信權 順天府使 使<押> □…□ 4顆(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118 1873년 2월에 배신권이 순천도호부사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73년(고종 10) 2월에 쌍암면(雙巖面) 군장동(軍藏洞)에 거주하는 배신권(裵信權)이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관아에 올린 소지(所志)이다. 본 소지의 작성 연대인 계유년이 언제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1883년에 작성된 소지에 쌍암면에 사는 배정권(裵鼎權)이 언급되고, 1864년 준호구에 쌍암면 군장에 사는 배상권(裵相權)이 32세라고 기재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배신권은 이들과 같은 집안이면서 '권(權)'을 항렬자로 쓰는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소지는 187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신권은 그의 선산이 쌍암면 노구치(老嫗峙)에 있는데 이달 초 고산촌(高山村)에 사는 조동석(趙同錫)이 송추(松楸) 40짐(負)을 몰래 베어갔다고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죄를 법전에 있는대로 처벌하고 목재값을 받아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순천도호부 관아는 12일에 "남의 산에 있는 송추를 어찌 몰래 베며, 하물며 법으로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시 데려와 대령하라."라고 문서를 올린 자에게 지시하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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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拾玖年甲戌四月二十二日五男一女等處和會分▣…▣右文爲惟我夫妻年至耋髦 ▣▣交劇 入木之期 非朝卽夕 略干所在田畓許衿之擧 不可不爲於我生前如是區別均分爲去乎 須體予▣▣鎭長執指爲去乎矣 日後諸子族屬中若有▣…▣攘內中▣…▣只霜里防築底▣▣陸斗落只 諸金洞結字畓伍斗▣▣(落只) ▣(東)方洞秋字畓肆斗落只 山所洞藏字畓陸斗▣▣(落只)內肆斗落只 牛岩坪冬字畓柒▣(斗)落只 詄頭里雨字田伍斗落只 仸堂洞結字田肆▣▣▣(斗落只)所浦騰字田參斗落只 垈田參斗內蕃內貳斗落只奴太應金伊壹所生奴謀伊▣年十二二子衿後洞露字畓伍斗落只 芦田坪出字畓壹斗▣▣(落只)同坪崑字畓玖斗落只中 混洞崗字畓▣斗▣(落只)吾也洞羽字畓參斗落只 芦田前坪崑字▣…▣斗落只 同字畓下邊參斗落只 諸金坪結▣(字)…▣斗落只 同字畓參斗落只 牛岩列字畓柒▣…▣芦田前坪崑字畓貳斗落只 後坪雲字田貳斗落只 同字田參斗落只 家前致字田參斗落只 所里洞騰字田貳斗五升落只 致字田柒斗落只內 ▣▣斗落只 ▣田貳斗落婢 隱丹二所生奴今年生年 代方下橋調字畓▣斗落只三子衿家前坪致字畓伍斗落只 無心坪呂字畓上邊柒▣(斗)落只 山所洞冬字畓拾斗落只 藏字畓陸斗落只 同畓拾壹斗落只 牛岩坪冬字俠畓柒斗落只 諸今洞▣▣(結字)伍斗落只 將軍橋雲字田貳斗落只 所里浦騰字田參斗落只 致字田柒斗落只內下邊參斗落只婢每良貳所生奴白山年七四子衿馬頭坪歲字畓柒斗落只 無心坪律字畓肆斗落▣(只)呂字畓參斗落只 舟橋洞 字畓肆斗落只 牛岩坪冬字畓十七斗落只內下邊伍斗落只 諸今洞露字畓▣邊陸斗落只 馬頭坪歲字畓肆斗落只 金靈洞陽字畓伍斗落只 牛岩坪列字畓柒斗落只 松亭雲字田肆斗落只 所里洞騰字田肆斗落只 無心坪律字▣參斗落只 垈田貳斗落只 調字畓貳斗落只 上書五子衿牛岩坪冬字畓十七斗落只內上邊柒斗落只 山所洞▣字畓伍斗落只 同字畓陸斗落只 方下橋調字畓伍斗落▣(只)家前坪致字畓肆斗落只 東方洞潤字畓肆斗▣▣(落只)諸今洞結字畓伍斗落只 山所洞藏字六斗落內畓貳斗落▣(只)牛岩坪列字畓柒斗落只 方下橋調字田肆斗落竹林底雲字田肆斗落只 所里洞騰字田伍斗落只垈田參斗落只內蕃外壹斗落只 家前坪致字畓▣▣落只 婢隱丹壹所生奴甫音金年十二 婢雪化壹所生婢鋤雲年十五一女衿氏岩坪 字畓貳斗落只 家前坪致字畓拾壹斗落只 馬頭坪歲字畓陸斗落只 牛岩坪▣▣畓拾斗落只 合卄九斗許給 印▣(婢)每良壹所生婢介德年十五孫子右文處 藍洞藏字畓五斗追給奴太應金處許給藍洞藏字畓伍斗落只【還收給右文】方下橋調字畓▣斗落只婢隱丹處許給方下橋調字畓貳斗落只 詄頭里露字▣貳斗落只婢每良處許給牛岩坪冬字畓貳斗落只婢鋤雲處許給方下橋調字畓貳斗落只羅州鴨周洞畓柒斗落只 遺漏又閏字畓五斗落只牛岩坪加畓貳石落只 來頭起墾則當爲分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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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城生全永五右議送事 夫松者 國典之一大禁 而雖灰場之木 不敢偸斫 況於人之先山邱木偸斫者 順天雙巖面居裵漢祚裵鼎權等是也. 生之祖考兩位入葬於順天雙巖面老嫗峙山麓 而基址則沈洛彬先山也 四山基址買得於沈民處 而白日入葬是遣 定山直守護禁養者 于今四十餘年矣 其時買山之初 所謂裵塚 雖在於其間 都無裵塚之說 而沈哥主賣是遣 且裵民所居不遠至近之地是乎矣 不能禁葬者 初豈不知而不言乎 大抵入山後 意外裵民 渠之先塚在傍是如 釀計健訟 而圖形後 明決斷案之 題音 昭然在玆是去乙 故更無影響辭說矣 千萬意外 去戊寅良 同裵漢祚 渠之族人四五十名作黨 結縛生之山直 四十年禁養邱木拱把之材 數數萬株 一時偸斫 沒取以赭 山形忽地見失 寃乎否乎 究厥所爲 則欲以都奪基址 而嘗試之計也 不勝憤寃 前後文記帖連 仰籲於 明察之下爲去乎 右禁養內偸斫松楸價 依律推給 使此殘氓 毋至禁養見失之地 千萬伏祝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繡衣閤下 處分癸未三月 日果如所謂 詳査措處 更無寃呼之弊事隻在官初六日[暗行御史] [署押][馬牌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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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천일관(千鎰貫)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千鎰貫 領議政 領議政 <着名> □…□ 3顆(적색, 정방형, 9)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179 1891년 10월에 곡성현에 사는 유생 천일관·천일권·천일표 등이 영의정에게 전라도 곡성현에 관문을 보내 전교에 따라 잡역을 면제시켜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91년(고종 28) 10월에 곡성현(谷城縣)에 사는 유생(儒生) 천일관·천일권(千鎰權)·천일표(千鎰杓) 등이 영의정(領議政)에게 전라도 곡성현에 관문(關文)을 보내 전교(傳敎)에 따라 잡역(雜役)을 면제시켜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천일관 등은 명나라 만력(萬曆) 때의 명장(名將)으로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천만리(千萬里, 1543~?)의 후손이다. 화산군의 후손은 종손(宗孫)·지손(支孫)·천얼(賤孽)을 막론하고 잡역을 면제하라는 전교와 완문(完文)을 내려 폐단 없이 잘 지켜지고 있었으나 근래 잡역과 여러 징구토색(徵求討索)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에 전교와 완문 및 앞뒤 문적(文蹟)을 점련하여 곡성 현감에게 청원하였다. 곡성 현감은 수교(受敎)와 완문이 명백하므로 정소(呈訴)에 따라 잡역을 면제해주고 침탈하지 말 것을 처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처분에 불과하므로 영의정에게 전라도 곡성현에 관문을 보내 전교의 뜻을 받들게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에 대해 영의정은 10월 16일에 전라감영(全羅監營)과 곡성 현감에게 '완문에 따라 잡역을 면제해주어서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지 말도록 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당시 영의정은 문충(文忠) 심순택(沈舜澤, 1824~1906)이다. 문서 배면에 적힌 '경술(庚戌) 십일월(十一月) 십삼일(十三日) 진시(辰時)'는 후대에 문서의 훼손된 부분에 종이를 덧대어 손질하면서 기록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만리의 본관은 중국 영양(穎陽),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으로 명나라에서 귀화하였다. 1571년(선조 4) 무과에 급제한 뒤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원병(援兵)으로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가 되어 아들 천상(千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 전투와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울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서 살았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하여 화산군에 봉하고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 하였으며, 그의 아들 천상도 한성윤에 승진시켰다. 저서로 『사암천문집』이 있으며, 고성 호암사(虎巖祠)와 청도 황강사(皇岡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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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김우영(金雨英)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金雨英 盧軫永 雨英(타원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3월 27일, 김우영이 노진영에게 사촌을 부탁하면서 보낸 서간. 1935년 3월 27일, 김우영(金雨英)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사촌을 부탁하면서 보낸 서간이다. 앞머리에는 자신의 겨를 없는 생활을 전하고, 어른을 모시고 사는 상대와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주요내용은 이번에 편지를 들고 찾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종씨(從氏)라고 소개하고, 천대전(千代田) 생명보험 상호회사(生命保險相互會社) 대리점(代理店)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것, 당신의 군(郡)에 살고 있는데 당신이 알선해 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룰 수가 없으니 성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청한다는 부탁의 내용이다. 발신자 김우영(1886~1958)은 일제강점기 관료로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복천동(福泉洞) 출신이다. 1919년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19년 10월부터 1921년까지 항일운동과 관련해 변호인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던 중, 1920년 신여성 나혜석(羅蕙錫)과 재혼하였다. 1921년 양재하(梁在河)와 함께 조선인 최초로 부영사로 임명되면서 중국 안동(安東: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주재 일본영사관에서 고위관료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10월 15일 변호사 등록을 취소하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 정부의 배려로 미국 및 유럽의 각지를 여행하고 돌아왔으나, 1930년 부인 나혜석이 최린(崔麟)과 불륜사이로 밝혀져 이혼을 하였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전라남도 도이사관(道理事官)으로 재직하면서 전라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농촌진흥과장‧수산과장을 겸임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1936년 훈6등 서보장(瑞寶章)과 1940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또한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1940년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도 받았다. 이후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충청남도 참여관(參與官)으로 재직하면서 충청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충남어업조합연합회 이사장‧충청남도 방공(防共)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하였다. 재직 중 고등관 3등에서 고등관 2등으로, 정5위에서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3년 충청남도 참여관에서 퇴직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에 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또 1943년 임시특별지원병경성익찬회(臨時特別支援兵京城翼贊會) 지구별 위원회 회의에 동대문위원회 대표로 참석하여 전쟁에 나가는 학도병에 대한 행사와 지원을 위한 대책 등을 논의하였다. 1944년 5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일본에 조선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명사 파견원이 되어 훗카이도[北海道]를 시찰하였다. 광복 후 1949년 1월 부산 부용동에서 중앙반민조사위원회(中央反民調査委員會) 김용희(金容熙) 조사관에게 체포되어 반민피의자로 특위(特委)에 구금되었으나 병으로 1949년 2월 12일 보석되었으며, 195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편지를 쓰던 당시에는 전라남도 도이사관(道理事官)으로 재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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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기미년 희현당동고록(希顯堂同苦錄)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미년 5월에 작성된 희현당(希顯堂) 동고록(同苦錄) 기미년 5월에 희현당에서 거접(居接)하며 함께 공부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학임(學任)과 부접(賦接), 시접(詩接)으로 나뉘어 각기 참여한 인물의 성명과 함께 그에 대한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각 인물별로 호(號)와 출생년, 본관,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거접인들은 전주를 비롯 주로 전라도 각지의 인물들인데, 학임은 3인, 부접은 21인, 시접은 36인이다. 거접은 과거를 보기 위해 글방이나 조용한 곳에 모여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희현당은 1700년(숙종26)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김시걸(金時傑)이 지역 인재양성을 위해 전주에 건립한 학당이다. 1907년에 소실되었으므로 기미년은 1859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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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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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己未五月希顯堂同苦錄學任李翼九 聖謙丁巳 延安人居龜洞 全州則不書邑而書村金翊聲 公集癸未 義城人居府南 客舍洞權克壽 保明甲申 安東人居龍進賦接鄭鎭魯 明翼癸亥 東萊人居金溝許 鏞 間汝丁卯 泰仁人居扶安李觀述 光國己巳 古阜人居扶安吳宗爀 子明庚午 海州人居泰仁朴慶旭 錫賢辛未 密陽人居泰仁李謙述 益受辛未 古阜人居扶安李鶴成 舜卿壬申 全州人居可山鄭洛周 乃中丙子 慶州人居古阜羅在徽 聖七丙子 羅州人居金堤愼漢喆 聖瑞庚辰 居昌人居興德柳 詗 明悟癸未 全州人居南溪權奎一 達瑞癸未 安東人居古阜朴膺鍾 重呂戊子 密陽人居九龍陸 燾 應七戊子 沃川人居長水 東皐李龍根 景見庚寅 全州人居昌平金命殷 羲仲庚寅 慶州人居茂朱金潤浩 仲玉戊子 扶寧人居扶安 錯金鼎錫 平佐壬辰 金海人居府西蘇輝楨 致秀丁酉 晋州人居新塘李昌奎 聚瑞庚子 全州人居可山黃萬鍾 起千癸卯 紆州人居竹村詩接洪鍾一 長遠辛酉 南陽人居萬頃庾聖烈 德賢庚午 茂松人居茂長白昌鎭 德老己卯 水原人居興德金維鑑 德賢庚辰 扶寧人居扶安羅基祚 定鎭庚辰 羅州人居金堤李東琦 景韓癸未 全州人居府北金濟弼 士楫乙酉 慶州人居塔洞金在羲 文初 道康人居府西金奎爀 景三丙戌 扶寧人居扶安徐鶴權 景聞戊子 鰲城人居古阜金相萬 慶三戊子 扶寧人居扶安申泰五 宣弼戊子 平山人居沃溝金憲珪 禹洪戊子 居南原殷奎說 聚瑞戊子 幸州人居古阜金禧遠 允執己丑 慶州人居任實金用坤 黃叔辛卯 扶寧人居扶安徐夔聞 利川人居府北河星杓 元七辛卯 晋州人居府南金佐模 公益壬辰 光山人居扶安林基洙 浩然壬辰 羅州人居任實白夢洙 敬周壬辰 水原人居興德權 濟 汝楫壬辰 安東人居古阜李炳黙 光祜甲午 全州人居任實李敦壽 利見甲午 全義人居古阜尹泰一 祿憲丙申 南原人居任實李斗炫 殷仲丙申 全義人居古阜李可豊 文景丙申 全州人居興德楊周泳 文汝丙申 南原人居興德金鶴桓 景和丙申 金海人居府西金相斗朴麟萬 元會壬寅 密陽人居鎭洞吳泰玟金瓊桓禹瑞龍全星燁吳永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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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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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1년 이홍식(李鴻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昌平縣監 李鴻植 行縣令<押> □…□(6.5×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56 1891년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이홍식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 1891년(고종 28)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이홍식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홀아비 이홍식의 거주지는 창평현(昌平縣) 갑향면(甲鄕面, 현 담양군 대전면) 행정리(杏亭里) 오가작통 순번은 제1통 4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49세 임인생(壬寅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홍식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통덕랑(通德郞) 낙승(洛承), 할아버지 학생 규현(奎鉉), 증조(曾祖)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재원(在元), 외조(外祖) 학생 김상선(金商璇)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가족으로는 아들 유학 응용(應容) 나이 27세 갑자생(甲子生)이 있으며, 소유하고 있는 여종은 장례(長禮)이고 나이 24세 정묘생(丁卯生)이다. 문서에 '호적단자(戶籍單子)'와 작성년인 '신묘식(辛卯式)'이 적혀 있고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창평현령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이 찍혀있고 주묵(朱墨)의 오가작통 통호(統戶)가 적혀 있다. 이는 제출한 호구단자를 구호적(舊戶籍)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에 이홍식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므로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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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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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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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寶城井谷面居朴桂聖右謹陳所志情由事段矣亡父生時去辛卯年分本邑井谷面內玉泉村後寺基峙下姜哥世來先塋山地處矣祖母入葬而姜哥子孫弼良弼龍山直田牧字皮牟二斗落只及前後養山草木幷以價錢五十七兩五戔買得成文記後未過三年癸丑年分姜貴三姜萬三等又到曰同姜哥子孫是如爲遣尤加禁斷故以私力不可相爭又以價錢二十兩買得成文記後矣父丁未年分身死故祖母墓下亡父入葬之後一無雜談矣千萬意外本邑垈如居廉宗鳳爲名人戊申年分忽來稱托曰姜哥外孫是如爲遣索徵賂物故矣爲其先山又以價錢三兩五戔買賣成文後永無雜談之人矣去年十二月日本邑能墨里居金哥爲名漢二人來曰稱爲姜哥外孫云爲遣矣先山掘移次劫徵非常此不過矣先山欲奪之計也大抵金哥等實爲姜哥外孫則金哥所居處姜哥先山相距不過十里之許而其間姜哥先山盡爲陳蕪將爲馬場者至近二十餘年而其間一無伐草而又一無省墓是如可至今自稱姜哥外孫之說乎金哥實爲外孫是良置山主之孫旣已賣食又有放賣文記昭昭明白是去乙金哥等忽生非理之慾無端他人山地臆奪次橫侵非常世豈有如此無雙之人乎不勝冤痛乙仍于山主處奉文記幷以敢將仰訴爲白去乎伏乞明政之下緣由一一洞燭敎是後上項金哥等忽生非理之慾他人山地無端臆奪次橫侵之罪另加嚴治而日後孤弱殘孫處勿爲更侵之意 特爲嚴題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巡使道主 處分辛酉九月日〈題辭〉意在索賂不在禁山民習良可駭痛卽爲詳査嚴治決給事本官 初四日巡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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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양식(梁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寶城郡守 梁植 行郡守<押> 寶城郡印(6.5×6.5), 周挾改因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7년에 보성군에서 양식에게 발급한 준호구. 1867년(고종 4)에 보성군(寶城郡)에서 호주인 양식(梁植)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문서 여백에 군수의 서압과 주협개인(周挾改印) 및 관인이 찍혀 있다. 호주인 '양식(梁植)'은 다른 호구 문서에 '양식(梁栻)'으로도 나온다. 양식의 거주지는 송곡면(松谷面) 박곡촌(亳谷村) 제1리(里)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며, 출생년은 을해년으로 53세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처 윤씨(尹氏, 나이 57세 신미년생, 본관 咸安)와 처의 사조, 동생 정(楨, 나이 46세 임오년생), 아들 두환(斗煥, 나이 32세 병신년생)과 며느리 안씨(安氏, 나이 35세 계사년생, 본관 竹山), 아들 정환(廷煥, 나이 29세 기해년생)과 며느리 이씨(李氏, 나이 30세 무술년생, 본관 廣州), 아들 익환(翼煥, 나이 26세 임인년생)과 며느리 김씨(金氏, 나이 24세 갑진년생, 본관 安東), 아들 종환(鐘煥, 나이 22세 병오년생)과 며느리 안씨(安氏, 나이 22세 병오년생, 본관 竹山)의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 하단에는 천구질(賤口秩)이라는 명칭으로 앙역노비의 인적 사항이 도망 노비를 포함하여 기재되어 있다. 아들 두환과 정환은 1852년 보성군(寶城郡) 양식(梁栻) 준호구(準戶口)에 기재된 아들 창득(昌得)‧창문(昌文)이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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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谷面亳谷村第一里第 統第 戶幼學梁植 年五十三乙亥 本濟州父 通德郞 義浩祖 通訓大夫行萬頃縣令全州鎭管兵馬節制都尉 喆鎭曾祖 學生 冑厦外祖 宣略將軍行忠武衛副司果金㝡煐 本光州妻 尹氏 齡五十七辛未 籍咸安父 學生 範遇祖 學生 夢淵曾祖 成均進士 奎鼎外祖 學生 鄭在機 本延日弟 楨 年四十六壬午子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斗煥 年三十二丙申婦 安氏 齡三十五癸巳 籍竹山子 廷煥 年二十九己亥婦 李氏 齡三十戊戌 籍廣州子 翼煥 年二十六壬寅婦 金氏 齡二十四甲辰 籍安東子 鐘煥 年二十二丙午婦 安氏 齡二十二丙午 籍竹山丁卯式賤口秩 仰役奴壽萬 年庚辰 婢命德年壬子 二所生婢三丹 年丙子 逃居晉州 三所婢占禮故 婢水今 年己亥 四所生婢粉禮 年丙午 仰役奴雙童 年甲辰 婢分壬 年庚戌 婢布葉 年甲寅 婢鳳業 年丁巳 外居秩 婢貴大 年丁卯 居茂長 婢時德 年辛酉 婢次云 年丙辰 居京 婢旕箇 年辛亥 婢士今 年己亥 婢士化 年戊申 居金海婢禮今 年庚辰 婢禮分 年庚戌 婢士辰 年戊戌婢次分 年戊子 居醴川 婢元辰 年癸巳 婢銀太 年丙辰 居昌原 婢禮郞 年辛巳 甲子戶口相準印[準][周挾無改印]行郡守[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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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송내희(宋來煕) 서문(序文) 초(草) 고문서-시문류-서 宋來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066 1864년에 송내희가 작성한 ?은봉전서? 서문 초고 1864년 봄에 송내희(1791~1867)가 작성한 ?은봉전서(隱峯全書)?의 서문 초고이다. ?은봉전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문집으로 1773년에 간행된 초간본, 1864년에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에서 간행된 중간본, 1969년에 대전 이문사에서 간행된 삼간본이 전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은봉전서?의 서문은 송내희와 조병덕 두 사람이 작성하였다. 서문을 작성한 송내희는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815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835년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황간현감, 평안도 도사를 거쳐 1857년 이후로는 여러 차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1865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서문에는 ?은봉전서?가 중간되기까지의 간략한 과정과 안방준의 생애를 서술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초고라고 하였듯이 이 문서에는 자구를 수정한 흔적이 여럿 나타난다. 여기서 수정된 문구들이 정본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또 정본의 내용이 ?은봉전서? 간행시 목판으로 판각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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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隱峯全書序牛溪成文簡公講道坡山 四方之士多負笈摳衣者 重峯趙文烈公 隱峯安文康公皆爲及門而差有後先 ■(公)與重峯未嘗覿面 以風誼曠感 裒輯遺文 續附圖繪 名之曰抗義新編 不佞嘗〔蓋〕讀〔嘗〕其〔受〕編〔讀〕而感公〔其〕嗜義之深 每有執鞭之思迺者公〔先生〕之後孫命宣永煥等就公原集而採錄 將謀剞劂問序於不佞 雖不敢遽當 而亦不敢終辭 竊惟公〔先生〕於穆陵盛際 骨相奇偉 志氣卓犖年纔弱冠 蚤從賢師 專心爲己之學 又合圃隱 重峯之號扁其舍曰隱峯 以致崇慕之志 嘗語節義 是學問中一事不可岐而二之 徒以繩行尺步小廉曲謹爲務 而不以節義自勵者 是可慨也 聖人修道立敎 三綱五常而已 豈有捨節義而爲道學也 是以所著文字 皆是尙忠孝崇道德之類也 至於華夷尊攘之義陰陽淑慝之分 嚴於斧鉞凜如霜雪 故聞醜正之徒詆誣栗牛兩先生 公〔卽〕上疏痛斥 絶爾瞻好爵之誘 避纘男踵門之訪節義之本 已立於其初矣我東戎狄之禍 莫甚於壬丁丙 而輒倡義起旅 竟因媾和而罷 縱未成功於當時 而乃心王室則亦足暴於後世矣其偉器卓節 可以有爲於世而適因寇賊交亂 倫常斁滅遂卷懷于湖徼 不以爵祿嬰其心 而同時群彦之過從薦引者 皆詡以南服高士 名隨實彰 嶷然爲儒林之標仁廟臨御 恩召屢降孝廟初服 寵擢優異 旣沒之後贈以爵諡 妥侑祠院 寔出於朝野尊慕之至意 罔有餘憾矣 蓋人之成就 隨其氣質所稟而各有不齊淸粹者 未必造高明之域 持守者未必盡臨履之工 公〔先生〕於學問則本之人倫 事功則準於王道 以拓其氣量 以廓其地步 羽翼斯文維持世敎者 豈不韙哉略書所感於誰昔者 遂爲之弁其卷云爾 時崇禎甲申〔紀元〕後四甲子春季 恩津宋來熙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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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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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34년 양의호(梁義浩)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梁義浩 寶城郡守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34년에 양의호가 보성군 관아에서 발급받은 준호구 1834년(순조 34)에 호주인 양의호(梁義浩)가 보성군(寶城郡) 관아에 제출하였다가 돌려받은 호구단자이다. 양의호의 거주지는 송곡면(松谷面) 박곡촌(亳谷村) 제1리(里)이다. 직역은 통덕랑(通德郞)이며, 출생년은 갑진년으로 51세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호주 이외에 호주의 사조(四祖), 처 김씨(金氏, 49세 병오년생, 본관 光山)와 처의 사조, 아들 백영(伯榮, 20세 을해년생)과 며느리 윤씨(尹氏, 24세 신미년생, 본관 咸安), 아들 지영(之榮, 나이 13세 임오년생)의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 하단에는 소유 중인 노비의 인적 사항이 도망 노비를 포함하여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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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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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回文右文爲回諭事 子孫之於祖先 猶萬物之於天地 無所逃於萬世 故不敬其祖謂之悖孫 自絶其祖 謂之叛孫 有一於此 已非人理之所容 况兼有而又多者乎 吾族之生出安圭直 何其不幸也 吾族自文康府君以降 世守先法 無有一人大得罪於宗黨鄕園 亦遠近之所共稱也 喩彼圭直 以梟獍之性 挾羊狼之忮 不顧所本 惟利是徇 利在不敬則不敬 利在自絶則自絶 豈非大可痛而絶可惡者乎 盖我府君神道之碑 二百年而始成於今日凡爲子孫 莫不歡喜 趍功而直也 獨懷不滿 越自始事之日 百方沮撓 所排錢物 輒拒不應 以至誘脅其近親 使之助桀 及其公是所同 無所售其志願 則惡口悖說 無所不至 曰此碑不可爲也 曰碑文不中用也 曰爲碑適以穢之也 曰踣碑終有日也 嗚呼桑梓之鄕 尙或敬之 况在頌德揭烈之碑 而疾視如此 亦獨何心哉 此猶不足 則曰吾家世世義不拜墓 曰我以同福公爲始祖 嗚呼 我府君何負於渠而受辱至此 見絶至此 念到於此 爲之痛心疾首 而繼之以涕也 夫宗族所以爲宗族 以祖先也 彼旣不以祖爲祖 則凡我之祖吾祖者 尙可以宗族彼乎 伏願僉族位斷以大義 自今以後 截然處之 永刊門籍 勿與周旋 而若有執義不固眷戀徘徊者 是亦圭直之徒 當依朱夫子賊邊人之律以施於圭直者 施之無使悖叛之孫汚壞我門 不勝幸甚 傳曰見無禮於吾君者 若鷹鸇之逐鳥雀 爲君爲祖 義無二致 惟僉位圖之庚子五月十八日發文 鍾黙[着名]澤煥[着名]璣煥[着名]基煥[着名]啓煥[着名]成煥[着名]錫煥[着名]圭萬[着名]此亦中文到之日 各自其派 齊會一場 布告此由卽爲回通之地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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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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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24년 양의호(梁義浩)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梁義浩 寶城郡守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4년에 양의호가 보성군 관아에서 발급받은 준호구 1824년(순조 24)에 호주인 양의호(梁義浩)가 보성군(寶城郡) 관아에 제출하였다가 돌려받은 호구단자로서 식년인 다음 해(1825년)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양의호의 거주지는 송곡면(松谷面) 박곡촌(亳谷村) 제1리(里)이다. 직역은 통덕랑(通德郞)이며, 출생년은 갑진년으로 42세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호주 이외에 호주의 사조(四祖), 처 김씨(金氏, 40세 병오년생, 본관 光山)와 처의 사조의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3년 전 호구단자에 있던 봉모(奉母) 안씨(安氏)는 사망한 것[故]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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