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희현당도회소(希顯堂道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希顯堂道會所 全州長館 1顆(墨印, 5.1×4.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989 1877년 1월 희현당 도회소 선비 31인이 전주장관에 고부군에 사는 정은필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하게 하여 민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 1877년(고종 14) 1월 희현당 도회소 선비 31인이 전주장관(全州長舘)에 고부군에 사는 정은필(鄭溵弼)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하게 하여 민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서두에 '민자건의 효는 『논어』에서 일컬어졌고, 동중서의 행실은 한유의 찬(贊)에서 드러났으나 효와 행이 모두 아름다운 행적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이 모두 아름다운 실적을 갖췄으니 지금까지 이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그의 실적을 높게 평하였다. 이어서 '그의 계보는 동래에서 나온즉 홍문관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 생진사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으로 충효의 명성이 있는 남쪽의 명문가임을 언급하였다. 정은필의 효행과 독행(篤行)에 대해 '인효(仁孝)를 타고나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절도를 스스로 깨우쳤으며, 조금 장성해서는 어버이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낮에는 물고기 잡고 땔나무 하고, 저녁에는 베를 짜 좋은 의식으로 봉양하는 데 힘썼다. 여름에는 잠자리에서 부채질하고, 겨울밤에는 온돌을 따뜻하게 지폈으며, 한결같이 뜻을 봉양하였다. 부모가 여러해 병을 앓자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구하여 온마음으로 치료하고, 똥을 맛보고 안부를 살피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하늘과 산에 제사지내며 지극한 정성으로 천명(天命)을 기도했던' 실적 및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장례에 예를 다하고, 매일 소식하고 죽을 먹으며 3년 여묘살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70세가 다 되어가는데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를 다녀 산골짜기에 길이 생긴 일, 젊었을 때부터 노성하여 의를 행하고 선을 닦고, 안분자족하며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며, 자질을 가르칠 때 항상 성선(性善)과 효제(孝悌)의 도를 칭한 일 등의 일화를 하나하나 드러냈다. 끝으로, 한 성의 사림(士林)이 모두 모인 곳에서 침묵할 수 없어 통문을 보내, 여러 군자들이 이처럼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 행실을 드러내고 그 사람을 발탁하여 민몰되지 않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희현당은 현재 신흥중고등학교 있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에 있었던 정자로, 관찰사로 부임한 김시걸(金時傑, 1653~1701)이 학교를 일으키고 지방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1701년(숙종 27)에 건립한 학당이다. 이후 퇴락하여 1907년경에 미국인 선교사가 기독교 학교인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세워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