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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장윤문(張潤文)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張潤文 同福縣監 官[着押] 4顆(6.5×6.2)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0년 3월에 동복현 내서면 학당리에 사는 장윤문이 동복현감에게 서손에 대해 거짓으로 소송한 죄로 감옥에 갇혀있는 장유의 소장을 관에서 불태우고, 종지의 진위를 언급하여 뎨김해 줄 것을 청원한 소지 1850년(철종 1) 3월에 동복현(同福縣)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에 사는 장윤문(張潤文)이 동복현감에게 서손(庶孫)에 대해 거짓으로 소송한 죄로 감옥에 갇혀있는 장유(張裕)의 소장을 관에서 불태우고, 종지(宗支)의 진위(眞僞)를 언급하여 뎨김해 줄 것을 청원한 소지이다. 장윤문의 친족 장유가 장윤문이 서손이라고 무고한 일로 소송하여 판결문을 받은 뒤 각자 근거 삼을만한 문적(文蹟)을 가지고 법정에서 대변할 때, 자료를 제출하기도 전에 먼저 말 하는 사이에 장유가 허위로 꾸민 사실이 밝혀져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장윤문은 장유의 처벌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정소(呈訴)하였다. 그 이유는 장유의 완악함은 장수(杖囚)로 징계할 수 없는 점이 있고, 그가 윤리를 어지럽힌 행동이 오늘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유는 현 아산(牙山) 이 씨 수령과 온양(溫陽) 윤 씨 재임시절에 두 차례 무고(誣告)하여 패소하였다. 그러나 흉악한 마음과 망령된 계책이 갈수록 심해져 오랜 세월 뒤에 다시 소송을 일으킬 계책으로 감영과 암행어사에게 정소하여 애초 동복현감에게 뎨김이 접수되기도 전에 암암리에 권축(券軸)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요행을 엿보고서 이런 무소(誣訴)가 있게 되었으니 지금 동복현감이 제대로 판결하지 않았다면 그의 분란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교활한 성질은 앞으로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보장할 수 없다. 장윤문이 어제 올린 소지의 뒷면에 적힌 뎨김에 '논문서를 종통(宗統)에게 내준다'는 판결은 매우 명백하지만 적서(嫡庶)의 구별이 애초 언급되어 있지 않아 훗날 근거할 만한 문적으로 쓸 수 없고, 또 장유가 앞뒤로 감영에 올린 소장이 그의 손에 있으므로 어느때고 간사한 짓을 할지 모르는 근심이 남아 있다고 여긴 장윤문은 다시 이 소지를 올려 종파와 지파의 진위를 이치를 따져 판결문을 내려주어 훗날 근거로 삼게 해주고, 장유가 거짓으로 쓴 소장은 관에서 불태워 뒷날의 폐단을 막아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소지를 접수한 동복현감은 3월 24일에 '이른바 장유가 적통이라 자칭하고 너를 지서(支庶)라고 말했다면 그가 감영과 어사에게 정소할 때에 어째서 종지(宗支)의 구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돈 냥의 일만 말했는지, 이는 돈 냥에 군침을 흘려 서파(庶派)의 설에 다른 사람을 빠뜨리는 말에 불과하다……장유의 소지는 돈 냥 간의 일에 불과하고 애초 적서의 구별을 다투지 않았으니 반드시 소장을 불사를 필요가 없다'는 판결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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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西學堂居化民張潤文右謹言再昨日良中以族人張宥誣民庶孫事呈訴承 題各持可據文蹟 公庭對卞之時不待現納文券先於言貌之間歸誣罔方在囚禁是乎所爲民道理事當待畢竟勘處之如何而又且煩聒極涉猥越是乎矣大抵宥也之頑獰有非杖囚之所可懲而且其亂倫之擧亦非今日伊始也粤自牙山 李等城主及溫陽 尹等城主時已然而兩次詐誣莫售於 明斷之下則不惟不自戢獰心悖計愈徃愈篤乃敢以年久後更發之計或呈於 營門或呈於 繡衣而初不到付於本 官暗成券軸是如可至於今日而敢伺僥倖有此誣訴是乎所苟非我城主明燭奸狀則其所紛亂容有其已乎然而渠之巧僞成性安保其後日之必無此擧乎且伏見民之昨呈狀背題則畓券付宗雖極明白而嫡庶區別初不言及是乎則在民有目前明決之澤而無日後可據之蹟是乎乙遣且宥之前後誣呈 營邑之訴自在渠手則亦不無某時因緣售奸之患故緣由仰訴 參商敎是後以宗支眞僞論理 題下以爲後考是白遣宥之僞券自 官燒火以杜後弊事 處分行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 庚戌三月 日[官印]官[署押]〈題辭〉所謂張宥渠自稱嫡綂謂汝以支庶則呈營呈繡之時何其一言不及於宗支之別只說錢兩之事是喩此不過朶頥錢兩陷人於庶派之說眞若渠嫡汝庶則宗綂一款任置汝邊是喩此無非狂言悖說無足多卞只宥也所志不過錢兩間事初不爭嫡庶之別則不必燒火向事卄四日[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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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장욱(張旭)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同福縣監 張旭 行縣監[着押] *周挾無改印, 1顆(墨印, 13.0×4.7)*1顆(6.5×6.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722 1822년(순조 22) 9월에 전라도 동복현에서 호주 장욱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 1822년(순조 22) 9월에 전라도 동복현(同福縣)에서 호주 장욱(張旭)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이다. 장욱의 거주지는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 4호이다. 직역은 유학이고, 나이는 59세 갑신생(甲申生)이며, 본관은 흥덕(興德)이다. 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한신(漢臣), 할아버지 학생 효지(孝智), 증조 학생 치언(致彦), 외조(外祖) 학생 김진채(金振採)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장욱의 아내 이씨(李氏)는 나이 50세 기축생이고 본적은 전주이다. 김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필달(苾達), 할아버지 학생 갑훈(甲勳), 증조 성균생원(成均生員) 상회(相會), 외조 학생 이택후(李宅垕) 본관은 공주이다. 이외 가족으로 아들 유학 윤문(允文), 나이 29세 갑인생이 있으며, 소유하고 있는 여종은 예선(禮先)으로, 어머니는 반비(班婢) 수영개(水永介)이고, 아버지는 사노(私奴) 돌윤(突潤)이다. 문서에는 동복현감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이 찍혀있으며, 1819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기묘호구상준인(己卯戶口相準印)'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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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月二十六日本祠孫公白巖追配禮成擧行特賜 枉臨以助俎豆之禮仰望戊申六月十五日富春祠儒會所[印]座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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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고광선(高光善) 간찰(簡札)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高光善 李允洪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112 1932년 고광선(高光善)이 매성(梅城)의 이윤홍(李允洪)에게 안부를 묻고 자신은 이질을 오래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내용의 간찰 임신년(1932) 6월 20일에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이 매성(梅城)의 이윤홍(李允洪)에게 보낸 간찰이다. 형제분들의 생활은 편안하고, 봄에 아드님의 혼례는 잘 치렀으며 집안 식구들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설사와 이질을 오래 앓느라 좋은 일은 전혀 없이 고생스럽다고 소식을 전하였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병으로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혹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할지 물었다. 고광선은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 또는 복헌(復軒)이며 본관은 장택(長澤)이다.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의 문인이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출입한 인물이다. 고광선은 갑술년(1934) 가을부터 이질로 고생하다가 12월 25일에 현와정사(弦窩精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와유고(弦窩遺稿)》 권9 부록에 〈가장(家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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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城棣座下 允洪氏亢陽爲咎 不審棣體益衛 春間令允巹禮 想必利行 而閤節均穩耶 爲溸區區者 摯情下長時泄痢 專沒佳况 苦憐奈何 第俟一者奉攄 而各在貧病 亦不能得 或可從速惠然耶 病甚不備候禮壬申六月卄日 情下高光善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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綾州儒生金鍾常李致鎬梁其煥 謹齋沐上書于巡相閤下 伏以文學德行賢能才藝 人事之所當爲 似不當褒而勸之 然民稟不同 人心有蔽 則不可不嘗之勸之 後人有所向賢才蔚興 國以致治矣 固國家有擧賢之詔刺史守相 有薦賢之政 因以成規也 但今之文學賢士 不及於古 而文學賢士之報 猥多於古 其間固不無虛實之可言 在上君子 當察其虛實 公私之分措 其所之擧 其所擧而薦進 則虛僞自戢 實行自著 薦不失當矣 大抵本州士人鄭義林 系出光山古觀察使諱麟晋十八世孫 弘文應敎諱熊十三世孫 戶曹判書諱演十一世孫 完山縣監諱斆七世孫也 素有卓異之行 受學於蘆沙奇先生之門 事親極其孝敬 鄕里稱賞 親沒哭泣哀毁 幾至滅性 而至於樵者不歌 商者撤市 居廬三年 其至行至德 傳爲里巷誦說者多矣 及其從學 四子六經性理群書 貫通浹洽 而深得蘆沙之宗旨樣轍 逍遙林邱 不以貪窮動心易操 惟以義理 自娛自適所講者 孔顔之道 程朱之書 而於天人性命之原 禮義儀則之節 博洽貫通 遠近學者 逐日踵門 問難萬變 酬答如洪鍾之應響 賢愚不齊 敎育如化工之無遺 此非特今日南服之矜式 名聲大著於畿湖嶺海之間 在前石塘鄭先生 世安堂金先生 全齋任先生 相與講論 在今淵齋宋先生 勉庵崔先生 仁山蘇先生 重庵金先生通書相講 而惟朝廷不聞名聲 鄕報道報 及前等城主之薦報頻仍 尙未蒙褒揚之典 其爲士林之抑鬱何如哉 伏願閤下 特採鄭義林之文學實行 薦進朝堂 以蒙褒典 則非特勵風敎勸後學 其爲國家之器用何如哉 生等不避猥越 摭實仰稟爲去乎 伏俟處分 千萬顒祝行下向敎是事巡相閤下 處分 戊子三月 日 儒生 金鍾常 李致鎬 朴基繪 梁其煥 李贄鎬 文極煥 梁會一 金時豊 鄭在淑 魯錫采 閔致魯 朴海鴻 安澈煥 文永祚 鄭在勳 李文洙 尹滋郁 吳秉祚 安澤煥 金鍾湖 閔啓鎬 崔相翊 文泰煥 朴璟煥 宋錘 洪珽謀 梁在鎬 朴在源 金源錫 安檃 李章茂 李相鎬 具桂勳 金鍾龍 閔泳東 梁益煥 鄭英錫 吳在鴻 等(題辭)若此道義之學非徒一省之華亦是邦國任(背面)道之器 孰不起欽 於此如有獎美之梯 當存念向事十八日都巡使[着押][全羅道觀察使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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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양회락(梁會洛)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梁會洛 全羅都觀察使 使<押> 綾州牧使之印((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162 1888년 4월에 양회락 등 38명이 능주목에 올린 상서 1888년 4월에 양회락 등 38명이 능주목에 올린 상서이다. 양회락 등 능주의 유생들은 1885년부터 지난 1888년 3월까지 정의묵의 효행과 학행을 조정에 알리고 그가 관직에 등용되기를 여러 번 청원하였지만, 여전히 합당한 처분이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감영에 상서를 올린 것이다. 김종상 등의 상서에 대하여 능주목에서는 마땅히 전라감영에 보고하겠다는 처분을 내렸다. 상서(上書)란 백성들이 관에 청원이나 탄원할 일이 있을 때 제출했던 소지류(所志類) 문서의 일종이다. 소지류 문서에는 상서 외에도 단자(單子)·발괄(白活)·의송(議送)·등장(等狀) 등이 포함되었고 각 문서들은 발급 주체나 수취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서식적 차이가 있었다. 상서의 경우 기두어에 '上書'라는 문구가 기재된다는 특징이 있다. 관에서는 이러한 소지류 문서의 여백에 제사(題辭) 혹은 뎨김[題音]이라고 부르는 처분을 내렸다. 제사가 기재되었다는 것은 관의 공증을 거쳤다는 의미이므로, 백성들은 제사가 기재된 문서를 소송 자료 또는 권리나 재산 등을 증빙하는 자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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綾州幼學朴道漢尹再衡金遇喆等 謹齋沐上書于巡相公閤下 伏以 孝爲百行之源 而萬代之所不泯 故天必感之 而有氷魚雪筍之驗 國必褒之 而有旌閭贈職之典 矧乎 一家雙孝 嫂叔並出 俱養其親者乎 一門雙孝 卽本州士人裵以仁及其弟嫂氏是也 裵以仁卽前太師武烈公諱玄慶密直公諱廷芝及開 國元勳貞節公諱克廉之後 而孝行參奉允德之五世孫也 且以烈行旌閭金氏 卽其高祖母則其家孝烈 亦其箕裘也 以仁家甚貧寒 與其弟嫂文氏 俱養其親 躬自傭賃負米 以供甘旨 倘所謂體尙無全衣 而親極滋味者也 其父享年八十有四而逝 其母享年一百有五而逝 鄕隣咸稱以其子其婦之至孝 而以致其親之壽考也云耳 一日則其母病谻 醫云可用山蔘 而山蔘難得云 故以仁與其弟以潑 求採山蔘 遍行深山 數日竟無得處號泣 歸路暫憩林下 忽見老蔘 伏于巖阿 採歸煮服 因致其積病之皆瘳 而又得其肌膚之豊厚 此實天感之致 而宜與氷魚雪筍匹美也 其弟嫂文氏 係出南平 卽江城君三憂堂之後 性本慈孝 躬執採汲 以養舅姑 便身宜齒之物 極力求之 必以供之 是故 其姑年至百有五 而尙無恙焉 一日則其姑病深口焦 百味皆失 食飮頓廢之際 忽有野鶉飛入竈下 文氏因煮而供之 以啓病中粥餌之念 亦豈非天感之致 而寔與崔山南家乳姑之婦齊孝者也 玆故文氏之誠孝 皆出於隣里之觀感 而便成兒童之歌謠云耳 生等居在同鄕 瞻聆所及 不勝欽獎 故玆敢齊聲 仰籲於巡宣孝理之下 伏願 勿以人廢言 而另 加採賢 俾得 登聞 使此一門雙孝無至湮沒 千萬顒祝之地 伏惟藻鑑庚戌九月 日幼學 朴道漢 梁伯永 洪吉文 文思稷 閔喆邦 李志徽 鄭志煥 梁樂必 宋桓黙 李文國 朴海鵬 高鎭泰 安橚 李龍炡 梁相遇 具相稷 南鎬 閔珏顯 李時必 奇夏三 洪湸禹 朴相堯 李膺奎 尹再衡 金遇喆等聞極嘉尙 而狀聞體重 不可遽命事初四日[巡使]封印 [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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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鄕多士幼學朴相堯文永伯李應奎等 齋沐上于城主閤下 伏以 董夫子卓異之行 刺史不薦 則 天子不聞 名聲東海 孝婦特絶之烈 于公不報 則太守難知其像 且夫旋淑褒善 朝家之晠典也 闡幽拔滯 卽閤下之仁政也 本州士人裵以仁 卽太師密直公廷芝之后 而孝行參奉允德之五世孫也 而忠與孝烈連綿之家也 其慈親光山金氏 卽壬辰忠臣忠壯公之后 以庚申生 享年一百五歲 言語精神少無昏耗 抑亦孝養之致乎 其子裵以仁 今年九十一歲 色養其親 則此豈非古今罕有之事乎 在去壬午仲冬 其母不幸患瘧 常願山蔘 卽爲我病之良劑云爾 故與其弟以潑 不顧祈寒 踏霜履雪 得採卒難 仰天歎曰 余若有誠 天豈無感 號泣昊天 含淚歸路 幸得蔘枝一莖 忙采歸家 煮用一次 則厥疾卽瘳矣 又在庚子春 癘疫方熾 渾家沒痛之中 其弟以潑之妻文氏 亦以孝養其姑親極滋味眞元不奪癘染 不敢獨犯 一日忽有山鶉 飛入廚中灰 而供饌 此亦豈非感天之誠乎 一門之內 幷出孝子與孝婦 則孰不敢欽歎哉 民等居在一鄕 已所稔服 故齊聲仰籲於孝莅之下 細細垂察焉 轉報 天陛 俾蒙褒揚之典爲白只爲城主閤下 藻鑑甲辰十二月 日朴相堯 文永伯 洪壽巖 梁伯永 高大殷 朴道漢 梁樂三 金德敏 安命禧 具光烈 洪吉文 李文國 宋漢黙 曺允珏 尹得衡 梁相集 文載樹 閔致珏 鄭吉相 金遇喆 閔奎邦 朴海鵬 梁周求 南鎬 李萬亨 鄭錫喆 高鎭台 金昌基 金漢益 奇夏三 李應奎等一門之內 孝子孝婦 尤極嘉尙 轉報有時 退俟公議宜當事初九日[使] [署押][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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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정의림(鄭義林)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鄭義林 金錫龜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912 1905년 5월 20일, 정의림이 어머니의 연제를 앞두고 있는 대곡 김석구에게 위문하고 자신이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을 전한 서간. 1905년 5월 20일, 정의림(鄭義林, 1845~1910) 생(生)이 어머니 연제를 앞두고 있는 대곡(大谷)의 김석구(金錫龜)에게 보낸 위문편지이다. 어머니 상중인 상대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연기(練期)가 돌아왔다며 아픔이 어떠한지 물었다. 자신은 이치상 달려 가봐야 하지만 궁재(窮齋)에 매여 있고, 질병이 이어져 발을 빼낼 수가 없다고 말하며 부끄럽다고 전했다. 연제(練祭)를 잘 지내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아드님이 돌아간다고 하여 급히 위장을 쓴다고 했다. 연제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돌아가신 날로부터 12달 만에 지내는 소상(小祥)을 한 달 앞당겨 11달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수신자 김석구(1835~1885)의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전라북도 세산(細山: 지금의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에서 태어났다.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의 3대 제자로 불렸다. 문집으로 『대곡선생문집(大谷先生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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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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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무신년 부춘사 유회소(富春祠儒會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富春祠儒會所 富春祠印(3.5×3.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신년에 부춘사(富春祠) 유회소(儒會所)에서 오는 26일에 백암(白巖) 손영렬(孫永烈)의 추배례(追配禮)를 거행하므로 참석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간찰 무신년 6월 15일에 부춘사(富春祠) 유회소(儒會所)에서 보낸 간찰이다. 이번 달 26일에 부춘사에서 백암(白巖) 손영렬(孫永烈)의 추배례(追配禮)가 거행되므로 특별히 참석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부춘사는 1927년에 건립되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둔재(遯齋) 문달환(文達煥), 화은(華隱) 양재해(梁在海), 백헌(栢軒) 이병섭(李秉燮), 신암(新巖) 박준계, 백암 손영렬을 향사하고 있는 곳이다. 1937년에 훼철되었다가 1945년에 복설되어 춘산사(春山祠)로 개칭된 곳으로, 전남 화순군 춘양면 부곡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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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92년 이동우(李棟宇) 증조비(曾祖妣) 유인한씨(孺人韓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高宗 孺人韓氏 1顆(10.8×10.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113 1892년 6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이동우의 증조모이자 이장욱의 부인인 유인 한씨를 종부직 숙부인으로 추증한 4품이상 고신 1892년(고종 29) 6월에 임금의 명에 따라 이동우의 증조모이자 이장욱의 부인인 유인 한씨를 종부직(從夫職)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한 4품이상 고신이다. 숙부인은 정·3품 당산관의 부인에게 내리는 작호(爵號)이다. 발급 연호 위에 어보(御寶)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으며, 연호의 좌우방(左右傍)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장의 증조비를 법전에 따라 추증한다'라는 추증사유가 방서(傍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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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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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85년 양상보(梁相輔)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梁相輔 綾州牧使 使<押> 綾州牧使之印 3顆(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162 1885년 7월에 양상보 등 13명이 능주목에 올린 상서 1885년 7월에 양상보 등 13명이 능주목에 올린 상서이다. 능주 송석면(松石面) 묵곡(墨谷)에 사는 정의림(鄭義林)은 관찰사공(觀察使公) 정인진(鄭麟晋)의 18세손일 뿐만 아니라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고제(高弟)인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았고 학문적 자질 또한 훌륭하여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처음에는 석당(石塘) 정구석(鄭龜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가 약관이 되었을 때 기정진에게 배웠는데 20여 년쯤 되자 선생의 학문을 계승했다고 여겨졌다.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나 단지 공자의 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며 이익을 쫒지 않고 탐욕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처럼 정의묵은 효행과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아직까지 벼슬에 천거된 적이 없으므로 그를 조정에 천거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양상보 등의 상서에 대해 능주목에서는 효행과 탁행은 진실로 흠모할 만하나 지금은 감영에 보고할 시점이 아니므로 우선 후일을 기다리라는 처분을 내렸다. 상서(上書)란 백성들이 관에 청원이나 탄원할 일이 있을 때 제출했던 소지류(所志類) 문서의 일종이다. 소지류 문서에는 상서 외에도 단자(單子)·발괄(白活)·의송(議送)·등장(等狀) 등이 포함되었고 각 문서들은 발급 주체나 수취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서식적 차이가 있었다. 상서의 경우 기두어에 '上書'라는 문구가 기재된다는 특징이 있다. 관에서는 이러한 소지류 문서의 여백에 제사(題辭) 혹은 뎨김[題音]이라고 부르는 처분을 내렸다. 제사가 기재되었다는 것은 관의 공증을 거쳤다는 의미이므로, 백성들은 제사가 기재된 문서를 소송 자료 또는 권리나 재산 등을 증빙하는 자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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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石面化民梁相輔閔啓鎬尹滋鉉謹齋沐上書于城主閤下 伏以敦尙儒術 尊德崇賢 卽我列聖朝衛道興學之大政 而窮搜巖阿 擧賢進能 又是刺史守相薦剡鄕貢之先務也 本面墨谷鄭斯文義林卽故觀察使公諱麟晋之十八世孫也 故應敎公諱熊之十三世孫也 故判書永思公諱演之十一世孫也 蘆沙奇先生諱正鎭之高弟也 自在孩提 已有敦孝之心 事父母極盡誠敬 凡戲嬉言語大有動人者 而材器超越 天性好學 年甫六七 學通史 八九歲 涉獵經傳 一自就傳之後 博洽群書 深究問學之要 纔逾成童 不遠千里 負笈往從於石塘鄭先生門下 先生與之講論 大加獎許 學未成就 先生旣沒 弱冠執贄于蘆沙奇先生之門 先生一見其儀容端正言語純粹 許之以朋遠來之樂焉 服事二十年 得其宗旨 其箚錄中難疑答問 積成卷帙 而尤精於庸學性理之書 旣篤於存養修齊之要 則先生之道 賴以不墜 而依鉢之託 可謂得其人矣 又於世安堂金先生 全齋任先生之門 俱有書贄之禮 無不延見 而稱賞之坼湖嶺海之間 鴻儒碩士 與之從遊 與之書問 則可見其師友之正學問之博矣自蘆沙易簀之後 固守林樊門不受 徒所讀者 程朱之書 所樂者 孔顔之道 而不以名利易其操 不以貪窮動其心焉 則尤見踐履之篤 出處之正矣 及持父母之制 哭泣之哀 喪葬之節 務盡誠禮 居廬三年 身不釋衰 鄕里莫不觀感而欽慕焉 苟無篤學之實 而其孝如是乎 其學行也 孝行也 冠冕於南服而前等時 累被鄕薦是乎乃 終未見闡揚之擧 則士林之抑鬱爲當何如哉 民等居在一坊 旣飽其德 亦不無好賢之心 而終不可泯默 故玆敢齊籲於孝理文治之下 特念擧賢進能之義 鄭斯文義林之文學行義 卽爲報營 薦聞朝廷 得蒙闡揚之地 千萬幸甚 伏惟藻鑑乙酉七月 日 化民梁相輔 閔啓鎬 尹滋鉉 鄭鳳鉉 梁益煥 鄭在綱 梁斗默 金佑鍾 文命純 廉錫浩 吳在鴻 南相必 閔致伯 等(題辭)孝行學行 固所欽歎而報營今非其時 姑俟後日向事 二十一日使[着押][綾州牧使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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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詩不云乎孝者不匱永錫爾類孝親然後事君則盡忠事長則盡敬六德六行著發於孝之一字中也是故粤自周漢之世司徒賓興之敎刺史貢擧之典莫不先於興孝勸善之政矣際玆我東 聖明之世苟有根天之孝隱淪之行則豈可無 朝家勸獎之盛典士林進擧之公議耶仄聞 貴郡士人鄭溵弼系出東萊即藝文館應敎諱承甫之十六代孫大護軍諱絪之十五代孫吏曺判書諱昇之十四代孫禮曺判書諱可宗之十三代孫吏曺判書賜號楓川諱守弘之十二代孫兵曺判書諱傑之十一代孫也忠孝古家簮纓望族斯人也玆在齠齡天性誠孝至於長成入孝出恭化隣敦睦子侄戒訓之節不失尺寸矣其親沉病數月百方藥餠一心調治及其丁憂也泣血面墨送終以禮襄奉以禮事死如生誠益不損常如袒䄆〖括〗之日豈非沒身不忘之大孝也是以章甫之公議 營邑之題音已有宿昔尙未㫌 贈之恩非但若子若孫之抑欝亦爲冠儒服儒之缺望故其在同道之誼玆以發通惟願 僉執事更加公議俾蒙旌褒之典千萬幸甚右敬通于古阜鄕校 [印]丁丑正月日南原鄕中多士發文 崔遇年 申哲模 尹泰永 金永錫 盧東鉉 李炳純 蘇應述 張載雲 崔炳九 林貞洙 邊相黙 權琦錫 金宗烈 晉命秀 宋祉豊 李東信 陳正洙 房斗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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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희현당도회소(希顯堂道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希顯堂道會所 全州長館 1顆(墨印, 5.1×4.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989 1877년 1월 희현당 도회소 선비 31인이 전주장관에 고부군에 사는 정은필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하게 하여 민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 1877년(고종 14) 1월 희현당 도회소 선비 31인이 전주장관(全州長舘)에 고부군에 사는 정은필(鄭溵弼)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하게 하여 민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서두에 '민자건의 효는 『논어』에서 일컬어졌고, 동중서의 행실은 한유의 찬(贊)에서 드러났으나 효와 행이 모두 아름다운 행적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이 모두 아름다운 실적을 갖췄으니 지금까지 이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그의 실적을 높게 평하였다. 이어서 '그의 계보는 동래에서 나온즉 홍문관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 생진사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으로 충효의 명성이 있는 남쪽의 명문가임을 언급하였다. 정은필의 효행과 독행(篤行)에 대해 '인효(仁孝)를 타고나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절도를 스스로 깨우쳤으며, 조금 장성해서는 어버이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낮에는 물고기 잡고 땔나무 하고, 저녁에는 베를 짜 좋은 의식으로 봉양하는 데 힘썼다. 여름에는 잠자리에서 부채질하고, 겨울밤에는 온돌을 따뜻하게 지폈으며, 한결같이 뜻을 봉양하였다. 부모가 여러해 병을 앓자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구하여 온마음으로 치료하고, 똥을 맛보고 안부를 살피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하늘과 산에 제사지내며 지극한 정성으로 천명(天命)을 기도했던' 실적 및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장례에 예를 다하고, 매일 소식하고 죽을 먹으며 3년 여묘살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70세가 다 되어가는데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를 다녀 산골짜기에 길이 생긴 일, 젊었을 때부터 노성하여 의를 행하고 선을 닦고, 안분자족하며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며, 자질을 가르칠 때 항상 성선(性善)과 효제(孝悌)의 도를 칭한 일 등의 일화를 하나하나 드러냈다. 끝으로, 한 성의 사림(士林)이 모두 모인 곳에서 침묵할 수 없어 통문을 보내, 여러 군자들이 이처럼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 행실을 드러내고 그 사람을 발탁하여 민몰되지 않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희현당은 현재 신흥중고등학교 있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에 있었던 정자로, 관찰사로 부임한 김시걸(金時傑, 1653~1701)이 학교를 일으키고 지방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1701년(숙종 27)에 건립한 학당이다. 이후 퇴락하여 1907년경에 미국인 선교사가 기독교 학교인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세워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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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0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孫在春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0년 손재춘(孫在春)이 이매(移買)하기 위해 밭을 방매하는 내용의 매매명문 1910년 12월 18일에 전주(田主) 손재춘(孫在春)이 작성한 토지 매매명문이다. 손재춘은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밭을 이매(移買)하기 위해 방매한다고 사유를 적었다. 토지의 소재지는 능주군 회덕면(懷德面) 백암동(白巖洞) 가양평(可良坪)에 있고 자호(字號)는 여자(餘字), 면적은 2두락지(斗落只) 부수(負數)로는 4부(負) 8속(束)이며, 거래 가격은 전문(錢文)으로 85냥이다. 해당 토지에 대한 구문기(舊文記)는 없이 신문기(新文記) 1장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김양숙(金良淑)이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장(里長)이 거래에 참여하여 인장을 찍었다. 이장이 거래에 참여하여 도장을 찍은 것은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과 1907년 토지가옥증명사무처리순서(土地家屋證明事務處理順序)에 따른 것인데, 이에 따르면 거래사실에 대한 증명을 받기 위해서는 통수(統首) 또는 동장(洞長)의 인증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별도의 인증서 양식에 따라 작성한 경우도 있고, 그 중에는 기존 명문에 증인이나 필집(筆執) 외에 이장이 참여하여 도장을 날인하여 인증서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명문에 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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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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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明治四拾三年庚戌十二月十八日明文右明文事襟得田累年捧禾是如多可移買次伏在懷德面白岩洞可良坪餘字田一片二斗落負數四負八束㐣價折錢文捌拾伍兩依數捧上是遣右前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弊則持此文記憑考事田主孫在春[着名]證人金良淑[印]里長李此化[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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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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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6년 장성용(張聲容)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張聲容 同福郡守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722 1896년 10월에 전라도 동복군 내서면 학당리에 사는 호주 장성용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가옥 형태 등을 기록하여 제출한 호구단자 1896년(건양 1) 10월에 전라도 동복군(同福郡)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에 사는 호주(戶主) 장성용(張聲容)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가옥 형태 등을 기록하여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장성용의 나이는 54세 갑진생(甲辰生)이고, 본관은 흥덕(興德)이다. 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동식(東植), 할아버지 학생 정규(珽奎), 증조 학생 욱(旭), 외조(外祖) 학생 정문옥(丁文玉)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장성용의 아내 류씨(柳氏)는 나이 39세 기미생이고 본적은 고흥(高興)이다. 그 외 가족과 고용(雇傭)은 없으며, 살고 있는 가옥은 초가 3칸 집이다. 당시 동복군수의 이름은 최준상(崔俊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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