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全羅道潭陽居同知李嚞鉉原情右謹言生日前以先山訟卞事仰籲特蒙不日督掘之 題旨河海之澤銘骨鏤肝不知攸達 關文到付於本官則其言內雖有 本府關飭若無本道監營關文則自本邑擅自擧行爲難云雖涉煩瀆旣蒙仁恤之澤更爲呼籲伏乞洞燭敎是發關于完營自完營嚴加關飭於本邑不日掘去之地千萬祈懇之至行下向敎是事宗親府 處分丙寅四月 日〈題辭〉捉囚督掘之意發關巡營向事五月初七日[宗親府印]堂上[署押]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全羅道潭陽居同知李嚞鉉原情右謹言憤惋情由段生之先祖山局內當禁之地本邑吏崔仁炯之單靑龍偸葬也朴興俊之主脉上偸葬也淳昌人金在懋之龍尾上偸埋也果涉變恠也故呼訴營邑者不止一再納侤音捧手記前後成軸然而彼三漢素是㐫獰豪悍蔑視生之窮孱一向頑拒終不掘去豈不痛恨哉曾以此事呼籲 本府特蒙 嚴題使之掘去左右延拕不掘故緣由更訴爲去乎伏乞洞燭敎是後 嚴關于本道監營與本邑上項三漢着枷上使嚴治其蔑分之罪自本官掘移三塚之地千萬伏祝伏祝行下向敎是事宗親府 處分丁卯四月 日〈題辭〉發關巡營甘飭該邑向事十七日[宗親府印]堂上[署押]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行郡守爲擧行事昨年所報川沙結卜今纔俵下故同分俵把掌出送消詳知委靣靣俵給後形止馳報之地爲遣合下仰照驗施行須至帖者右下鄕約執綱準此丁酉四月初七日擧行[官印]行郡守[署押] [帖]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66년 이철현(李嚞鉉) 원정(原情)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李嚞鉉 宗親府 宗親府<押> 宗親府印 3顆(9.0×9.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920 1866년 4월에 담양부에 사는 동지중추부사 이철현이 6대조 묘소에 투장한 박흥준 등 4인을 유배하고 바로 관에서 묘를 파 옮기도록 관문을 보내줄 것을 종친부에 청원한 원정 1866년(고종 3) 4월에 담양부(潭陽府)에 사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철현이 6대조 묘소에 투장(偸葬)한 박흥준(朴興俊) 등 4인(人)을 유배하고 바로 관에서 묘를 파 옮기도록 관문(關文)을 보내줄 것을 종친부(宗親府)에 청원한 원정이다. 이철현의 육대조(六代祖)는 성종(成宗)의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이수(李?, 1480∼1509)의 손자이자 순흥군(順興君)의 아들로, 묘소는 담양 고지산면(古之山面) 학동(鶴洞) 뒤 기슭에 있어 수백 년 동안 수호(守護)하였다. 그런데 근래 담양부 서리 박흥준이 묘소의 주맥(主脉) 위에, 김영운(金英運)이 지척에 놓인 계체 옆에, 최인형(崔仁炯)이 단청룡(單靑龍)에, 순창(淳昌) 사람 김재우(金在愚)가 용미(龍尾) 위에 몰래 묘를 썼다. 이에 전라감영(全羅監營)과 담양부에 정소(呈訴)하여 독굴(督掘)하라는 처분을 여러 차례 받아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친 다짐[侤音]과 수기(手記)가 축(軸)을 이루었으나 가난하고 힘없는 후손을 멸시하여 완강히 거부하며 옮길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이철현은 종친부에 원정을 올려 전라감영과 담양부에 관문을 보내 투장한 네 놈을 형장(刑杖)으로 추문(推問)하여 귀양을 보내고, 담양 고을에서 바로 투장한 묘를 파 옮기도록 처분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원정을 접수한 종친부는 4월 15일에 '하루속히 독굴하라는 뜻으로 해당 고을에 관문을 발송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리고, 종친부 당상이 서압(署押)하고 종친부 관인(官印)을 찍었다. 이철현에 대해 『선원속보(璿源續譜)』 「완원군파(完原君派)」 권4에 '정조(正祖) 정축(丁亥)? 2월 4일생(生), 음동추(蔭同樞), 고종[當宁] 신미(辛未, 1871) 7월 29일 졸(卒), 묘(墓) 담양탄금정(潭陽彈琴亭) 축좌(丑坐) 덕행재묘갈(德行載墓碣)'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全羅道潭陽居同知李嚞鉉原情右謹言泣血憤寃事生之六代祖即宣陵第四男完原君之孫也順興君之子也墓所在於潭陽古之山靣鶴洞後麓而數百年守護矣挽近以來弱子孱孫爲遐土所欺▣(本)府吏朴興俊之主脉上偸葬也金英運之尺堦邉偸埋也崔仁炯之單靑龍偸葬也淳昌人金在愚之龍尾上偸葬也呼訴營邑督掘嚴題者非止一再而納侤音捧手記前後成軸矣噫彼四漢軰素是㐫獰豪强蔑視後孫之窮孱左右延拕一向頑拒頓無掘去之意以么麽之漢無難偸埋於王孫山所壓逼者豈不心寒骨冷哉伏乞 洞燭敎是後嚴關于本道監營與本邑上項四漢朴興俊金英運崔仁炯金在愚上使于 營門先治其蔑分之罪刑推定配自本 官即刻掘移之地千萬伏祝行下向敎是事宗親府 處分 丙寅三月 日〈題辭〉不日督掘之意發關該邑向事十五日[宗親府印]堂上[署押]○ 관련자료1866년 이철현(李嚞鉉) 원정(原情) 21867년 이철현(李嚞鉉) 원정(原情)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玉巖面第 里頭瑟村第 統第 戶鰥夫幼學崔旻廷 年六十戊辰 本朗州父學生 鳳球祖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至孝曾祖 贈通政大夫戶曹參議 運華外祖學生 蔡世玉本平康奉母蔡氏 齡八十一丁未故妻金氏 籍光山父學生 在鉉祖學生 仁泳曾祖學生 重鍊外祖學生 金兌政本義城率子鍚衡 年四十一丁亥婦崔氏 齡四十戊子子鍚嵂 年三十八庚寅婦金氏 齡三十八庚寅子應龍 年十三乙卯孫宗出 年十五癸丑富出 年十三乙卯貴出 年十三乙卯善出 年十戊午賤口秩婢水德故 一所生奴千年金年四十二丙戌 二所生婢哲今年三十九己丑 三所生奴萬年金年三十七壬辰 哲今一所生婢玉伊年十八己未 二所生婢加玉年八庚申 三所生婢加銀年五癸亥 四所生奴仙伊年三丙寅 婢古邑丹年四十九戊寅 一所生奴萬兆年二十二丙午 二所生婢今壬年十七庚寅 三所生奴今兆年十一丁巳 四所生奴正兆年八庚申 婢順壬年三十八庚寅 一所生婢上今年十四甲寅 二所生保今年十二丙辰 三所生婢又今年十戊午 婢貴禮年三十一丁酉 一所生奴士郞金年七辛酉丁卯式[署押][準][관인] 1[周挾改印]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0년 최민정(崔旻廷)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寶城郡守 崔旻廷 行郡守<押> 寶城郡守之印(6.5x6.5), 周挾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972 1870년에 보성군(寶城郡)에서 최민정(崔旻廷, 62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주소: 玉巖面 第 里頭瑟村第 統第 戶 *가족사항: 奉母 蔡氏(83세), 子 鍚衡(43세), 婦 耽津崔氏子(42세), 子 鍚嵂(40세), 婦 光山金氏(40세), 子 應龍(15세), 子 應權(5세), 孫 宗出(17세, 敬淳으로 改名), 孫 富出(15세), 貴出(15세), 善出(12세), 甲出(6세) *소유노비: 奴婢 14口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28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羅聖采 牧使<押> □…□(7.0×7.0),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14 1828년(순조28)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성채(羅聖采, 48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28년(순조28)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주목 신촌면 내영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삼영동)에 사는 나성채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나성채는 48세이고, 신축년(1781)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언회(羅彦晦)이고, 조부는 나종유(羅宗有)이며, 증조부는 나윤명((羅允明)이다. 외조부는 정익성(鄭益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내는 김씨(金氏)로, 나이는 50세이고, 기해년(1779)생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운흥(金運興)이고, 조부는 김윤상(金胤商)이며, 증조부는 통덕랑(通德郎) 김시규(金始圭)이다. 외조부는 김이서(金履瑞)이고, 본관은 면성(綿城, 현 전라남도 무안)이다. 아들은 나시화(羅時化)으로 나이는 21세이고, 무진년(1808)생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2명으로 이름은 영덕(永德)과 채덕(采德)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道光八年月日 羅州牧考戊子成籍戶口帳內 新村面內永里住第四統第二戶幼學羅聖采年四十八辛丑 本羅州父學生彦晦祖學生宗有曾祖學生允明外祖學生鄭益成 本晉州妻金氏齡五十己亥 本金海父學生運興祖學生胤商曾祖通德郞始圭外祖學生金履瑞 本綿城率子時化年二十一戊辰仰役秩 奴永德年甲寅 婢采德年三十四等 戊子戶口相準者牧使[署押][周挾字改印]○ 연결문서1816년 나성채(羅成采) 준호구(准戶口)1819년 나성채(羅成采) 준호구(準戶口)1825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28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31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34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40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43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46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55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1861년 나시완(羅時完) 준호구(準戶口)1872년 나도일(羅燾溢) 준호구(準戶口)1876년 나도일(羅燾溢) 준호구(準戶口)1879년 나도일(羅燾溢) 준호구(準戶口)1885년 나도식(羅燾植) 준호구(準戶口)1888년 나도운(羅燾雲) 준호구(準戶口)1894년 나도신(羅燾臣) 준호구(準戶口)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장택기(葬擇記) 4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장례(葬禮) 일정을 정하기 위해 작성한 장택기(葬擇記). 下棺 시간, 墓穴, 啓殯, 開土 시간, 破墓 일짜, 發引, 停喪 방향, 歲壓, 呼冲 등 기록 *亡人: 坤仙命甲申水 *安葬日: 丙午十二月十一日癸酉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行縣令爲擧行事田結作夫今二十一日入塲二十五日出塲是如乎以此知委爲旀鄕員與鄕長擇報之事及夫作綂鄕約■(長)〔章〕程奉行事必須一邑大小民人齊會爛商收議而措處者也作夫時各面執任例有鄕會者云而以作夫事鄕會又以鄕員約長等事鄕会者事甚煩劇故諸般鄕会而措處者必以一次大鄕会後可以議處矣同鄕会日字以今二十三日完定爲去乎各面執任冝其如例來会矣不必多言其外各面各村大小民人中可參鄕会之人與各村頭頭民及面內有履歷觧事之人各面執任一一知委幷爲領率二十三日午前及良一齊來會于鄕社堂俾無未及生梗之弊爲遣合下仰照驗施行須至帖者右下鄕約執綱凖此乙未正月十七日擧行此亦中各村戶首必以饒宲斡人另擇修成冊直納官庭次[官印]行縣令[署押] [帖]〈背面〉甲鄕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장택기(葬擇記) 3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술생 남성 망자의 장택기 병술생 남성 망자의 장택기이다. 갑신생 아내는 생존해 있으며, 정미생인 아들과 며느리를 주상(主喪)으로 적었고, 차자(次子) 넷의 간지만 쓰고 다른 자손들은 적지 않았다. 묫자리인 장산(葬山)의 방위와 좌향을 적었고 산지의 연운(年運)을 표시하였다. 안장(安葬)하는 날짜는 9월 15일, 하관(下棺)은 자시(子時)이다. 정상(停喪), 입복(立伏), 취토(取土)는 임병(任丙) 방향이고, 조궁(釣弓)과 세압(歲押)은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입관과 계빈(啓殯)할 때 일진과 맞지 않는 생년을 기록하는 호충(呼冲)은 신사생, 신미생, 을미생 사람은 하관(下棺)할 때 피하라고 되어 있다. 매장 연월일시의 간지를 쓰는 사과(四課)는 조명(造命)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는 정묘년 경술월 을축일 병자시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868년 장수현고학생이규현학행급기자낙승효행실적사보성책(長水縣故學生李奎鉉學行及其子洛丞孝行實蹟査報成冊) 고문서-첩관통보류-보장 長水縣監 官<押> □…□ 10顆(6.5×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63 1868년 9월에 장수현 전주이씨 고학생 이규현의 학행과 아들 이낙승의 효행을 조사하여 장수현에 제출한 보장 성책 1868년(고종 5) 9월에 장수현 전주이씨 고학생 이규현(1766~1812)의 학행과 아들 이낙승의 효행을 조사하여 장수현에 제출한 보장(報狀) 성책이다. 작고한 학생 이규현은 완원군(完原君) 이수(李?, 1480∼1509)의 11세손이다. 그의 중조(中祖)인 정랑(正郞) 이계송(李繼宋)이 선조(宣祖)의 특지(特旨)로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2)의 큰아들 해관(海寬)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송씨의 선산과 가장(家庄)이 담양부에 있어 외손이 우거하면서 제사를 받들다가 이후 후손이 담양부로 이주하였다. 증조 휘(徽)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할아버지 양섭(陽燮)이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아버지 재원(在元)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규현은 1766년(영조 42)에 담양 두곡면(豆谷面) 상덕리(上德里)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나이 여덟 살에 사물을 주제로 시로 읊었다. 조금 장성하여서는 성실히 어버이를 섬기고 예로써 어른을 공경하여 언행(言行)이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용모가 뛰어나고 변론이 맑고 명확하여 스승과 덕망이 뛰어난 어른들에게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과거 공부에 뜻이 없어 『심경』·『근사록』·『성리대전』을 덕성 함양의 근거로 삼고 성리(性理)의 심오한 이치를 궁구하였다. 중년(中年)에는 성담 송환기(性潭宋煥箕, 1728~1807)의 문하로 가서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여 칭찬받은 바가 많았다. 이규현의 효성과 우애, 행의(行義)는 원근의 학자들이 앞다투어 칭송할 정도로 사림(士林)의 으뜸이었다.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추포(秋圃)'라고 편액(扁額)하여 학자들이 추포장석(秋圃丈席)이라 일컬었다. 학행(學行)과 재국(才局)이 뛰어나 여러 차례 관찰사의 천거를 받았으나 출사하지 못하다가 1812년(순조 12) 향년 47세에 고종하였다. 이후에 전라도 유생 오용규(吳龍圭) 등이 여러 차례 청원서를 올린 지 수십 년이 지났으나 추증받지 못하였다. 작고한 학생 이낙승은 1793년(정조 17) 8월에 담양부 사가에서 태어났는데 총명한 자질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물고기와 땔나무를 마련하고 조촐한 음식으로나마 효양(孝養)에 힘썼다. 평소 부모를 곁에 모시면서 불평한 적이 없었으며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근심과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하며 약을 바치고 죽을 쑤어 먹이는 데에 극진하였다. 1812년에 그의 아버지 규현이 이유 없이 병들었을 때 약과 변을 맛보았는데 의약(醫藥)에 효험이 없자 하늘에 빌며 자기의 수명을 대신 바치기를 원하였다. 19살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맞았는데, 5일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서 일어나 장사(葬事) 치르고 3년 동안 하루같이 묘 아래에 시묘살이하며 아침저녁으로 애통해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영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일찍 아비를 여읜 것을 평생의 아픔으로 삼았다. 어머니 송씨(宋氏)를 아버지와 같이 여겨 몸소 밥을 짓고 주경야독하였으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창평 향정(杏亭) 마을로 이사하였다. 1836년(헌종 2)에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이전보다 극진히 보살폈고, 모친상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정(情)과 절차에 따라 장사를 치르고 묘 곁에서 시묘살이하며 끊임없이 곡하였는데 슬픔이 예에 지나쳤으며 그가 무릎 꿇은 곳에는 풀뿌리가 말라 죽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는 초가집을 지어 야은(埜隱)이라고 편액하고 제월광풍(霽月光風)의 풍미를 느꼈는데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들이 지은 많은 글을 통해 초야에 유일(遺逸)의 의리를 알 수 있다. 가난하고 궁핍한 친척과 벗들이 사례(四禮)에 빠진 것이 있으면 온 힘을 다해 구원하여 이웃 마을이 모두 즐거워하여 떠받들었다. 1853년(철종 4)에 집에서 고종하였는데 그 뒤에 도의 장계와 유생들의 통문이 많았으나 아직 정포(㫌褒) 받지 못하였다. 성책 앞표지와 본문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표지와 본문에 장수현감(長水縣監)의 관인(官印)이 찍혀있고 본문 제3장 뒷면에 현감의 서압(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868년 장수현고학생이규현학행급기자낙승효행실적사보성책(長水縣故學生李奎鉉學行及其子洛丞孝行實蹟査報成冊) 초(抄) 고문서-첩관통보류-보장 長水縣監 官<押>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63 1868년 9월에 장수현 전주이씨 고학생 이규현의 학행과 아들 이낙승의 효행을 조사하여 장수현에 제출한 보장 성책 1868년(고종 5) 9월에 장수현 전주이씨 고학생 이규현(1766~1812)의 학행과 아들 이낙승(1793~1853)의 효행을 조사하여 장수현에 제출한 보장(報狀) 성책이다. 작고한 학생 이규현은 완원군(完原君) 이수(李?, 1480∼1509)의 11세손이다. 그의 중조(中祖)인 정랑(正郞) 이계송(李繼宋)이 선조(宣祖)의 특지(特旨)로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2)의 큰아들 해관(海寬)의 후사(後嗣)가 된 이후 후손이 담양부로 이주하였다. 증조 휘(徽)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할아버지 양섭(陽燮)이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아버지 재원(在元)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규현은 1766년(영조 42)에 담양 두곡면(豆谷面) 상덕리(上德里)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나이 여덟 살에 사물을 주제로 시로 읊었다. 조금 장성하여서는 성실히 어버이를 섬기고 예로써 어른을 공경하여 언행(言行)이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용모가 뛰어나고 변론이 맑고 명확하여 스승과 덕망이 뛰어난 어른들에게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과거 공부에 뜻이 없어 『심경』·『근사록』·『성리대전』을 입덕(入德)의 계제로 삼고 성리(性理)의 심오한 이치를 궁구하였다. 중년(中年)에는 성담 송환기(性潭宋煥箕, 1728~1807)의 문하로 가서 도의(道義)를 연마하였다. 이규현의 효성과 우애는 집안에서 드러났고, 행의(行義)는 성 안에서 일컬어져 원근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사림(士林)의 으뜸이었다.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추포(秋圃)'라고 편액(扁額)하여 학자들이 추포장석(秋圃丈席)이라 일컬었다. 학행(學行)과 재국(才局)이 뛰어나 여러 차례 관찰사의 천거를 받았으나 출사하지 못하다가 1812년(순조 12) 향년 47세에 고종하였다. 이후에 전라도 유생 오용규(吳龍圭) 등이 여러 차례 청원서를 올린 지 수십 년이 지났으나 추증받지 못하였다. 작고한 학생 이낙승은 1793년(정조 17) 8월에 담양부에서 태어났는데 총명한 자질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물고기와 땔나무를 마련하고 조촐한 음식으로나마 효양(孝養)에 힘썼다. 평소 부모를 곁에 모시면서 불평한 적이 없었으며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약을 바치고 죽을 쑤어 먹이는 데에 극진하였다. 1812년에 그의 아버지 규현이 이유 없이 병들었을 때 약과 변을 맛보았는데 의약(醫藥)에 효험이 없자 하늘에 빌며 자기의 수명을 대신 바치기를 원하였다. 19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5일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서 일어나 장사(葬事) 치르고 3년 동안 묘 아래에 시묘살이하며 아침저녁으로 애통해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영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일찍 아비를 여읜 것을 평생의 아픔으로 삼았다. 어머니 송씨(宋氏)를 아버지와 같이 여겨 몸소 밥을 짓고 주경야독하였으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창평 향정(杏亭) 마을로 이사하였다. 1836년(헌종 2)에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전보다 배로 극진히 보살폈고, 모친상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정(情)과 절차에 따라 장사를 치르고 묘 곁에서 시묘살이하며 끊임없이 곡하였는데 슬픔이 예에 지나칠 정도였으며 그가 무릎 꿇은 곳에는 풀뿌리가 말라 죽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는 초가집을 지어 야은(埜隱)이라고 편액하였으며, 뜰에 쌍오동을 심고 문에 버드나무 하나를 심어 제월광풍(霽月光風)의 풍미를 느꼈는데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들이 지은 많은 글을 통해 초야에 유일(遺逸)의 의리를 알 수 있다. 가난하고 궁핍한 친척과 벗들이 사례(四禮)에 빠진 것이 있으면 온 힘을 다해 구원하여 이웃 마을이 모두 즐거워하여 떠받들었다. 1853년(철종 4)에 집에서 고종하였는데 그 뒤에 도의 장계와 유생들의 통문이 많았으나 아직 정포(㫌褒) 받지 못하였다. 성책 앞표지와 본문 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표지 앞면에 현감의 서압(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3년 이양근(李漾根)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昌平縣監 李漾根 行縣令<押> □…□(6.5×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63 1873년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이양근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 1873년(고종 10)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이양근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이양근의 거주지는 창평현(昌平縣) 갑향면(甲鄕面, 현 담양군 대전면) 대성리(大成里) 오가작통 순번은 제1통 3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41세 계사생(癸巳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양근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통덕랑(通德郞) 낙승(洛丞), 할아버지 학생 규현(奎鉉), 증조(曾祖)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재원(在元), 외조(外祖) 학생 김상선(金商璇)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이양근의 아내 양씨(梁氏)는 나이 43세 신묘생(辛卯生)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양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필성(必成), 할아버지 학생 석원(錫元), 증조(曾祖) 학생 제기(濟耆), 외조 학생 정백순(鄭{忄+百}淳)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외 가족으로 어머니 김씨는 73세 신유생(辛酉生)과 아들 응태(應泰) 무오생(戊午生)이 있다. 소유하고 있는 여종은 복금(卜今)이고 병술생(丙戌生)이다. 이풍식(李灃植) 준호구의 이풍식 인적사항 등을 볼 때 이양근은 이풍식의 개명(改名) 전 이름이며, 그의 아버지 '낙승(洛丞)'과 '낙승(洛承)'은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문서에 '호적단자(戶籍單子)'와 작성년인 '계유식(癸酉式)'이 적혀 있고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창평현령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이 찍혀있고 주묵(朱墨)의 오가작통 통호(統戶)가 적혀 있다. 이는 제출한 호구단자를 구호적(舊戶籍)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에 이양근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므로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第十甲鄕靣大成里戶籍單子新 第一統第三戶幼學李漾根年四十一癸巳本全州父通德郞 洛丞祖學生 奎鉉曾祖 贈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捴府副捴管 在元外祖學生金商璇本蔚山奉母金氏歲七十三辛酉籍蔚山妻梁氏歲四十三辛卯籍濟州父學生 必成祖學生 錫元曾祖學生 濟耆外祖學生鄭□{忄+百}淳本光山率子 應泰年戊午賤口婢卜今年丙戌癸酉式[昌平縣令之印]行縣令[署押]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85년 이풍식(李灃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昌平縣監 李灃植 行縣令<押> □…□(6.5×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856 1885년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이풍식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 1885년(고종 22)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이풍식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이풍식의 거주지는 창평현(昌平縣) 갑향면(甲鄕面, 현 담양군 대전면) 행정리(杏亭里) 오가작통 순번은 제1통 1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53세 계사생(癸巳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풍식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통덕랑(通德郞) 낙승(洛承), 할아버지 학생 규현(奎鉉), 증조(曾祖)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재원(在元), 외조(外祖) 학생 김상선(金商璇)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이풍식의 아내 양씨(梁氏)는 나이 55세 신묘생(辛卯生)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양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필성(必成), 할아버지 학생 석원(錫元), 증조(曾祖) 학생 제기(濟耆), 외조 학생 정백순(鄭{忄+百}淳)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외 가족으로 큰아들 유학 응태(應泰) 나이 29세 병진생(丙辰生)과 둘째 아들 응국(應國) 나이 27세 무오생(戊午生)이 있다. 소유하고 있는 여종은 복금(卜今)이고 나이 44세 임인생(壬寅生)이다. 문서에 '호적단자(戶籍單子)'와 작성년인 '갑신식(甲申式)'이 적혀 있고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창평현령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이 찍혀있고 주묵(朱墨)의 오가작통 통호(統戶)와 1882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임오호구상준인(壬午戶口相凖印)'이 적혀 있다. 이는 제출한 호구단자를 구호적(舊戶籍)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에 이풍식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므로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호적개정은 자·오·묘·유자(子·午·卯·酉子) 식년(式年)이므로 '갑신식(甲申式, 1884년)'은 '을유식(乙酉式)'의 오자(誤字)로, 이는 호적개정 식년 전해에 호구단자를 제출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97년 정기현(鄭箕鉉) 호적표(戶籍表) 1 고문서-증빙류-호적 順天郡守 鄭箕鉉 □…□(7.0x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152 1897년에 정기현(鄭箕鉉, 77세)이 순천군(順天郡)에 제출한 호적표(戶籍表). *주소: 黃田面山嶺里 *가족수는 4명이고, 초가3칸에 살고있음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97년 정기현(鄭箕鉉) 호적표(戶籍表) 2 고문서-증빙류-호적 順天郡守 鄭箕鉉 □…□(7.5x7.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152 1897년에 순천군에 사는 호주 정기현이 인쇄된 양식에 따라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가택 현황 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뒤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호적표 1897년(광무 1)에 순천군에 사는 호주 정기현이 인쇄된 양식에 따라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가택 현황 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뒤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호적표이다. 1896년 「호구조사규칙」과 「호구조사세칙」이 시행된 이후, 인쇄된 호적표에 기입하여 제출하도록 했는데, 본 문서는 그 호적표 양식에 기록되어 있다. 정기현의 거주지는 전남 순천군(順天郡) 황전면(黃田面) 산령리(山嶺里)이다. 올해 나이는 78세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직업은 유학(幼學)이다. 과거의 호구단자에서 직역 표시를 했으나 신 호적표 양식에서는 이를 '직업'으로 명기하고 칸을 채워넣게 되어 있다. 따라서 유학이 직업은 아니지만 정해진 양식이므로 직업란에 써넣은 것이다. 정기현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시호(時浩), 할아버지 학생 인찬(仁燦), 증조(曾祖) 학생 상수(相壽), 외조(外祖) 학생 정지문(丁志文)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씨 나이 78세 본관 경주, 아들 유학 영진(永震) 나이 48세, 며느리 박씨 50세 본관 밀성(密城)이다. 현존 가족 수는 남자 2인, 여자 2인 모두 4인이며, 가택(家宅)은 초가 3칸이다. 가택 역시 호적표 양식에 새로 추가된 부분이다. 문서의 발급 연월 위에 순천군수(順天郡守)의 관인(官印)이 찍혀있고 군수 윤성구(尹成求)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