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귀남남유록(龜南南遊錄) 고문서-치부기록류-일기 李載晩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4년(고종 11) 초가을에 종씨인 니동의 교리 신암 이재만이 강진 고호 고금도에 유배되어 박 오위장 집에 머물고 있어, 11월 3일에 유배지로 가서 위로해 주고자 현재 나주인 금성에서 출발하여 유람하면서 지은 7언율시 19수와 5언절구 1수를 적어놓은 「귀남남유록」 1874년(고종 11) 초가을에 종씨(宗氏)인 니동(泥洞)의 교리 신암(新岩) 이재만(李載晩)이 강진 고호(古湖) 고금도에 유배되어 박 오위장(朴五衛將) 집에 머물고 있어, 11월 3일에 유배지로 가서 위로해 주고자 현재 나주인 금성(錦城)에서 출발하여 유람하면서 지은 7언율시 19수와 5언절구 1수를 적어놓은 「귀남남유록」이다. 7언율시 19수 중 17수의 제목은 「자금성월영산진(自錦城越{氵+穎}山津)」, 「과영암군망월출산(過靈岩郡望月出山)」, 「강진도중(康津道中)」, 「석제마도(夕濟馬島)」, 「월야입고호(月夜入古湖)」, 「잠류건천용지동(暫留乾川龍池洞)」, 「근차신암(謹次新岩)」, 「임별우증신암(臨別又贈新岩)」, 「모저장흥객산(暮抵長興客山)」, 「체우청포(滯雨靑浦)」, 「남지야숙보성압포치(南至夜宿寶城鴨抱峙)」, 「지후회기정서돈륜(至後會旗亭叙惇倫)」, 「능성객중우음(綾城客中偶吟)」, 「과인물역등가옥치추모도사공유적(過人物驛登加玉峙追慕都事公遺蹟)」, 「화순판치우풍주저(和順板峙遇風蹰躇)」, 「지숙광산공북루(止宿光山拱北樓)」, 「증학암이첨사종호(贈鶴岩李僉使鍾浩)」이고, 5언절구의 제목은 「득진주갑학상귤(得珍珠甲鶴上橘)」이다. 이재만(18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부친은 이면응(李冕應)이고 할아버지는 문과 급제자 이상중(李相重, 1783~?)이며, 거주지는 포천(抱川)이다. 1871년(고종 8)에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해 3월에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는데, 1874년 7월 5일에 모친의 병으로 교대할 사람이 오기 전에 퇴근하였다. 이에 그 다음날인 6일에 이병두(李丙斗)의 원정(原情)에 적힌 허다한 불법적인 일로 섬에 유배되는 처분을 받게 되고, 7일에 의금부의 계사(啓辭)에 따라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 귀양보내라는 전교가 내려져 압송되었다. 이후 2년 뒤인 1876년 2월 27일에 고향으로 추방되었으며, 1879년(고종 16) 2월 9일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