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契約書右契約은 右前所有畓一斗只伏在<지명>宝節面內黃里</지명>伏山坪卜數二負五束㐣本人이 數三年 小作인바 賭租을 已往就侵이고 又此乙卯賭租七斗을 催促이오나 現無所存穀하와 來二月初間의 以代金報償之意로 玆에 成契約홈<연도>大正五年丙辰</연도>一月二十三日契約主 <인명>金白鉉</인명>(<인명>道三</인명>改名) [章]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領收證一金貳百參拾円也右는<지명>南原郡宝節面新波里</지명>陽地坪所在畓価로 正히 沒數領收홈<연도>大正九年</연도>陰正月卄三日領收人畓主<인명>金顯</인명>[章]殿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연도>甲戌</연도><연도>甲午</연도><연도>癸酉</연도><연도>己亥</연도><연도>四柱</연도>成困 君臣位內止外悅坐觀時夏夏大成小動六不吉必敬必愼似有所坹人孰無困戎則咸吉陰陽正中可得循序以象推之陽在陰中悅則易散健順爲主無爲欲悅所特何事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主事叔主前 上書昨日伏告事傳人三十升半此人便勿疑出給千萬伏望耳<연도>壬子</연도>五月初九日卽朝族姪 再拜上米三十升価二十四兩則九兩九戔壬子五月八日上一戔九日上在十四兩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32년 정윤면(鄭允冕)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昭和七年參月拾七日 鄭允冕 李容器 昭和七年參月拾七日 鄭允冕 李容器 전북 남원시 1.0*1.0 3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2년 3월에 정윤면(鄭允冕)이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1932년 3월에 정윤면(鄭允冕)이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이다. 당시 정윤면은 남원군 보절면 도룡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 지주(地主)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가 남원의 전주이씨 소장문서이고, 같은 시기에 작성된 토지소작계약서에 지주를 이용기(李容器)로 밝히고 있는 것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용기가 지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용기는 관련문서에 따르면 남원군 보절면 신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소작료 등 8개의 조항이 계약서에 적혀 있고, 토지소재, 지번, 지목, 지적, 지가, 적요 등 6개 항목을 정리한 표가 그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이미 인쇄된 서식에 지나지 않고, 소작료의 액수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소작인과 연대보증인 2인의 주소와 성명에 날인만 찍혀 있다. 요컨대 사실상 백지 계약서나 다름없는 토지소작계약서인 셈이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면서 미곡의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다. 연평균 미곡생산량이 증가하였지만 한국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1917∼1921년 평균 0.68석에서 1927∼1931년 평균 0.49석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산미증식계획이 한국 농민의 식량을 약탈하여 일본인들의 배를 채우는 제국주의 식량수탈정책의 표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시행된 토지개량사업은 대지주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수리조합 설치비용을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심지어 소작농민들에게까지 전가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920년대 농민층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화전민으로 하층분해되어 갔다. 소작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은 지주의 지시에 따라 소작계약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작계약서에는 소작료의 납입방법과 기준, 계약기간 설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소작인이 부담해야 할 소작료는 지대(地代)와 토지개량비, 영농에 필요한 자재비, 공과금을 포함한 것이다. 그밖에도 소작인들은 소작료 운반비와 종자대·수리조합비·비료대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수리조합 구역 내에서는 수확량의 7∼8할까지도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한 소작지 관리인으로 농민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소작계약 체결권을 악용하여 소작인들의 경작권을 위협했고, 소작료를 증액하며, 소작인들의 선물증여 등 물품공세 여부에 따라 소작권을 이동하는 등 각종 폐해를 자행하였다. 그 외에도 소작인에게서 받는 소작료와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료 사이의 차액을 가로채고, 추수 종사원들의 접대비를 소작인에게 전가시키며, 소작인에게 금전이나 곡물을 고리대로 빌려주거나 물자를 고가로 팔아 폭리를 취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농촌은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리조합 건설비의 부담과 고율 소작료 등으로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갔고, 거기에 더한 마름의 횡포로 인해 소작농민의 궁핍화는 가속화되었다.(1920년대의 대중운동, ?신편한국사? 49, 국사편찬위원회, 2002)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銃後ノ守は持叅納付て示セ領收證第四二○號 <연도>昭和十七年度</연도> 新 里 <인명>李窮容器</인명> 納一金 拾五圓四拾七錢也 (戶 別 稅) <연도>昭和十七年度</연도>第一期分一金 貳拾四圓五拾五錢也 (戶別附加稅) 仝一金 四拾六圓拾五錢也 (戶別附加金) 仝一金 四字(削除)計 金 86.17<연도>昭和十七年</연도> 月 日領收ス 持叅納付 委託納付 受督納付<관청명>南原郡寶節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인명>李本光器</인명>[印]⊙稅金은必히期限內에納付할事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42년 이교정(李敎政)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지세(地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十七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 李敎政 昭和十七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 李敎政 전북 남원시 1.2*1.2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교정(李敎政)이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교정(李敎政)이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이교정은 1941년도 2기분 지세(地稅)(국세(國稅))로 1원 20전, 지세 부가세(도세(道稅))로 78전, 지세부가세(면세(面稅))로 71전 등 모두 2원 69전을 납부하였다. 당시 보절면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한 회계원은 이본광(李本光)이었다. 지세는 조선왕조 때에도 국가 세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세 수입의 원천이었다. 일제는 지세의 원천인 토지제도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1912년부터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규정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14년 '지세령'을 공포해 세율을 인상했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됨에 따라 토지대장 및 지적도가 정비되자 지세령을 개정하여 과세표준과 세율을 개정하는 등 세 단계를 거쳐 조세제도를 구축해 나갔다. 제1단계는 과세대장에서 누락되어 있던 탈세자를 탖아내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05년 등록된 토지면적이 약 96만결이던 것이 1910년말에는 약 102만결로 늘었다. 특히 오랫동안 지역토호들에 의해 자행되어온 은결(隱結) 등 지세 부과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토지들에 대한 과세를 정비하자 세수가 크게 늘었다. 그러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상당수는 가지고 있던 전답의 소유권을 박탈당하였다. 제2단계는 1914년 3월에 지세의 부과, 면세 및 징수에 관한 기본법인 지세령 및 시가지세령을 제정 공포한 것이었다. 지세령의 개정으로 세율이 크게 오르자 세수도 크게 늘었다. 예컨대 1913년도 지세수입이 647만원이던 것이 1914년에는 945만원으로 47.4%나 증가하였다. 제3단계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1918년 세제 정리를 통해 지세에 대한 과세율을 개정한 것이었다. 종래의 과세면적 단위인 '결(結)'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수익에 기초하여 토지대장에 등록된 '지가(地價)'를 과세표준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물납제에서 금납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1920년에는 지세 수입이 1910년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했다. 당시 총 조세 수입 가운데 지세가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으며 일제의 조세수입은 연평균 15.9%라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일제는 이렇게 확보된 지세 수입을 통해 총독부의 예산을 확충해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우리 농민들은 지주에게 유리한 기한부계약제 소작농 혹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일본 등지로 이주했다.(이재은, ?일제강점기 조선지방재정사 연구?, 한국지방세연구원, 2015.)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박증송(朴曾松)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朴曾松 李殷弼 朴曾松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증송(朴曾松)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증송(朴曾松)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박증송은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임영(臨瀛)라 썼는데 여기서 '임영'은 강릉의 옛 지명이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증송은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최문수(崔文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文洙 李殷弼 崔文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문수(崔文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문수(崔文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문수는 유학자로, 경주(慶州)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一區林壑窈而深中有高人善養心鑿井耕田閒夜月採山釣 水弄春禽爲仁可見災殃去積德從知福祿臨何處北邙埋 玉匣薤歌聲曲淚沾襟 慶州后人 崔文洙 謹再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00년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萬頃) 남일면(南一面) 묘라제평(竗羅堤坪) 답안(畓案) 고문서-치부기록류-전답안 경제-농/수산업-전답안 전북 김제군 [印] 1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0년 4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에서 매입한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萬頃) 남일면(南一面) 묘라제평(竗羅堤坪)의 답안(畓案). 1900년 4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門中)에서 매입한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萬頃) 남일면(南一面) 묘라제평(竗羅堤坪)의 답안(畓案)이다. 묘라제는 오늘날의 전북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문서의 맨 끝에, "大韓光武四年庚子四月 日萬頃李福宗處給價壹萬{扌+八}千伍百兩買得畓案 舍音吳[印]"라고 적혀 있다. 즉 만경의 이복종(李福宗)에게서 18,500냥을 주고 매입하였고, 마름[舍音] 오(吳)가가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이 문서의 소장처가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전주이씨가에서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름 오가는 이복종의 마름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만경 남일면 묘라제평에 산재한 논 가운데 어느 곳을 누가 얼마큼 소작하고 있는 지를 밝히고 있다. 예컨대 방자답(方字畓) 17두락(斗落)은 부수로는 38부(負) 1야미(夜味)인데 김운경(金雲卿)이 현재 소작인, 즉 시작(時作)이라고 적고 있다. 방자답은 7필지이며, 개자답(盖字畓) 10필지, 식자답(食字畓) 3필지, 차자답(此字畓) 5필지, 장자답(場字畓) 1필지, 화자답(化字畓) 1필지, 발자답(髮字畓) 1필지, 신자답(身字畓) 1필지, 만자답(萬字畓) 1필지, 목자답(木字畓) 1필지, 백자답(白字畓) 2필지, 재자답(在字畓) 1필지, 의자답(衣字畓) 1필지, 제자답(制字畓) 2필지, 수자답(樹字畓) 1필지, 명자답(鳴字畓) 4필지, 봉자답(鳳字畓) 3필지, 뢰자답(賴字畓) 1필지, 식자전(食字田) 3필지, 장자대전(場字垈田) 1필지 등이다. 묘라제평의 규모는 논 20석 9두, 밭 9두로, 합계 20석 18두이며, 결부(結負)로는 9결 92부 9속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원문텍스트(사진 번호 순서 다시 고쳐야 함!!!) 全羅北道萬頃南一面竗羅堤坪畓案 方字畓十七斗落所耕三十八負一夜味 時作金雲卿 方字畓六斗落所耕十三負七束一夜味 時作李允化 方字畓五斗落所耕十一負一束二夜味 時作李允化 方字畓九斗落所耕二十三負七束二夜味 時作金允權 方字畓三斗落所耕七負六束一夜味 時作白光洙 方字畓四斗落所耕九負五束一夜味 時作白德云 方字畓十二斗落所耕二十六負七束一夜味 時作任道亨 盖字畓九斗落所耕二十六負一夜味 時作李允化 盖字畓十五斗落所耕三十三負六束一夜味 時作任殷叔 盖字畓六斗落所耕十五負六束一夜味 時作吳權守 盖字畓六斗落所耕十五負四束一夜味 時作任文卿 盖字畓十斗落所耕二十五負七束一夜味 時作吳成洛 盖字畓十二斗五升落所耕二十七負一束一夜味 時作任京夫 盖字畓六斗落所耕十二負三束一夜味 時作金有卿 盖字畓九斗落所耕二十四負五束一夜味 時作金成八 盖字畓九斗落所耕二十一負七束一夜味 時作李允化 盖字畓十二斗五升落所耕二十七負一束一夜味 時作任在弼 食字畓四斗落所耕七負四束二夜味 時作金大然 食字畓六斗落所耕十六負七束一夜味 時作姜處仁 食字畓四斗落所耕十一負八束一夜味 時作李允化 此字畓十三斗落所耕二十五負七束一夜味 時作吳道君 此字畓九斗落所耕二十二負三束一夜味 時作金有卿 此字畓九斗落所耕二十二負三束一夜味 時作洪永叔 此字畓十三斗落所耕三十負四束一夜味 時作任德元 此字畓四斗落所耕十一負九束一夜味 時作姜學秀 場字畓九斗落所耕二十四負七束一夜味 時作吳權守 化字畓八斗落所耕二十二負二束一夜味 時作李允化 髮字畓九斗落所耕二十九負四束一夜味 時作任京夫 身字畓六斗落所耕十七負一束三夜味 時作吳光叔 萬字畓四斗落所耕七負三束一夜味 時作吳成洛 木字畓十二斗落所耕二十六負七束五夜味 時作任道亨 白字畓十五斗落所耕三十五負二束一夜味 時作任正三 白字畓六斗落所耕十負二束一夜味 時作白德宗 在字畓 樹字畓十五斗落所耕三十三負二夜味 時作金明臣 衣字畓九斗落所耕二十四負一束三夜味 時作李福宗 制字畓十三斗落所耕二十八負八束三夜味 時作李福宗 樹字畓十三斗落所耕二十三負九束一夜味 時作崔乃元 鳴字畓九斗落所耕十七負七束一夜味 時作洪贊西 鳴字畓八斗落所耕十三負一束一夜味 時作金永煥 鳴字畓九斗落所耕三十負八束一夜味 時作吳權叔 鳴字畓十八斗落所耕四十負一夜味 時作吳權守 鳳字畓十斗落所耕二十三負九束一夜味 時作吳權叔 鳳字畓九斗落所耕二十二負一夜味 時作白光洙 鳳字畓三斗落所耕六負二束一夜味 時作姜學永 賴字畓九斗落所耕二十負三束五夜味 時作任在弼 制字畓三斗落所耕五負二束二夜味 時作吳達元 食字田三斗落所耕九負 時作吳光叔 食字田三斗落所耕七負八束 時作姜處仁 食字田二斗落所耕五負 時作任乃俊 場字垈田一斗落所耕一負 時作金俊京 畓二十石九斗 田九斗 合二十石十八斗所耕九結九十二負九束 大韓光武四年庚子四月 日萬頃李福宗處給價壹萬{扌+八} 千伍百兩買得畓案 舍音吳[印] 已往丁未三月散放畓案旧文件 或有日後事端矣封藏印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양제(李良濟)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李良濟 李殷弼 李良濟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양제(李良濟)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양제(李良濟)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이양제는 유학자로, 그는 자신을 백하후인소생(白夏后人小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또한, 소생도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양제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八年壬辰</연도>正月二十五日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지명>上西安德洞</지명>前坪 字畓七斗落所耕二十三負三束㐣價折錢文肆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他畓倂付故未得出給而以新文一張永永放爲去乎日後如有爻象之端則持此新文一張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高道日</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張德良</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上有高峰下甑山分明靈地此中間左蘭右蕙芬芳宅北海東湖水繞環杜宇緣何啼血淚庭柯爲孰尙怡顔人間無有長生術斯日斯程復不還 侍生 <지명>臨瀛</지명><인명>朴曾松</인명>謹再拜哭輓竹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호준(金鎬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鎬俊 李殷弼 金鎬俊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호준(金鎬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호준(金鎬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호준은 유학자로, 선산(善山)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近年一契誼承則活相怡暫阻雪寒節因違看花時窓風如聽嘯樑月 完懸儀短誄寂情爲頌稱五福宜寂寂掩山扉世情太半 非寄歸孰未有眞惜大仁歸 契下生 善山后 金鎬俊 謹再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二年癸亥</연도>六月二十二日幼學<인명>金炳斗</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지명>東道仙隱洞</지명>前坪一作玄字畓四斗落所耕拾負㐣折價錢文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日後還退次舊文三丈倂右人前放賣爲去乎日後系人中若有他端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幼學 <인명>黃海鱗</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任弼常</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권달수(權達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達洙 李殷弼 權達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달수(權達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달수(權達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달수는 유학자로, 화산(花山)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惟公仁性賦於天鄕里聲名正尉然訪往平生高寄客春山二月永歸仙 射帿殃德欽多日尙義矯鳳己有年去去玆臺無憾地草蘭苞 竹溓庭前 花山后契下生 權達洙 謹再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진억(金鎭億)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鎭億 李殷弼 金鎭億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진억(金鎭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진억(金鎭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진억은 유학자로, 이은필과 인척으로 맺어진 처남이며 분성(盆城)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蓬萊靈境送孤身砌竹庭蘭號泣天治家勤業耕 與讀敎子訓謨德又仁愁雲碧峀成幽宅落月空樑吊 遠賓丹旌飄紼歸去路薤露歌中永訣情 盆城后人 姻弟 金鎭億 謹拜 哭輓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