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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四三八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新 里 <인명>李容器</인명> 納一金 貳圓 六拾九錢也 地稅(國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二期分一金 貳圓 四錢也 地稅附加稅(道稅) 仝一金 壹圓 九拾六錢也 地稅附加稅(面稅) 仝計金 六圓 六拾九錢也右 領收候也<연도>昭和十七年</연도> 二月 二十八日領收ス<관청명>南原郡巳梅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인명>崔成海</인명>[印]稅金은必히期限內에納付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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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용기(李容器)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임야세(林野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 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容器 昭和 年 月 日 1942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容器 전북 남원시 1.2*1.2 2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용기(李容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임야세(林野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임야세(林野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이용기는 1941년도 2기분 임야세로 1원 99전을 납부하였다. 당시 보절면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한 회계원은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의 임야세는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실시된 임야조사사업의 결과를 기반으로 정비되었다. 이 조사사업은 일제가 한국에서 식민지 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임야에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이다. 일제는 종래의 한국의 토지 및 임야소유제를 근대적인 사적 소유제로 재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를 통하여 토지 및 임야에 대한 식민지 수탈의 기초로 삼았다. 일제는 한국을 병합하기 이전부터 전 국토의 73%에 해당하는 임야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삼림조사를 시도했다. 이 조사는 임야의 상황, 한국의 삼림제도와 임정(林政), 삼림식물분포, 임산물(목재)의 수급상태 및 압록강유역의 벌목사업을 위시한 지권(地權) 등에 대한 것으로, 임야 강점의 기초작업이었다. 1908년에는 「삼림법」을 제정, 공포해 국유·민유를 구분하고 대부분의 임야를 국유림화했다. 1911년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출된 국유림을 보다 효과적으로 정리, 경영하기 위한 조처로서 「삼림령」을 발포했다. 이어 '국유림구분조사'를 실시해 「삼림령」의 합리적 운용을 꾀했다. 1912년에는 「삼림·산야 및 미간지국유사유구분표준(森林山野及未墾地國有私有區分標準)」을 제정해 국유·민유임야의 인정표준(認定標準)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국유림조사만으로 일본인 자본가나 일본인 이민들에게 대부 양여해주었다. 결국 일제는 임야에 대한 조사를 별도로 시행하지 않고 「삼림법」과 그 법인과정(法認過程)에 불과한 「삼림령」 및 국유림구분조사 등으로 임야의 정비를 대신했다. 그 결과 임야소유권 및 경계에 관한 분의쟁송(紛議爭訟)이 격증하게 되어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될 무렵부터 임야조사사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일제당국은 이 사업의 목적이 토지조사에서 제외된 임야와 임야 내 개재지(介在地)의 소유권, 경계를 법적으로 확립함으로써 종래 분쟁의 화근이었던 혼란스런 권리관계를 명백히해 인민의 이용후생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한국임정의 정비에 자료를 제공함에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한국 임야에 근대적인 등기제도를 도입해 지번제(地番制)를 창설함으로써 삼림수탈의 주대상이던 국유임야를 최종적으로 사유임야의 소유관계를 재편해 확고부동한 소유권만을 재공인함으로써 임야에 대한 권리확보 및 이용을 편리하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제도적 보장 하에서 일본인 임업자본가를 보호 육성하고 일본인 이민들에게 창출된 국유임야를 분급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컨대, 국유임야 창출의 극대화 및 법인과 사유임야 소유권의 재법인을 통해 한국인의 소유권과 사유림을 약탈하려 했던 것이다.이 사업은 1916년 시험적 준비조사를 거쳐 1917년부터 1924년까지 9년간 1차 사정사무(査定事務)가 완료되었고, 이에 부수하는 2차 재결사무(裁決事務)는 조선총독부임야조사위원회의 주관으로 1919년 개시되어 1935년 비로소 완결되었다. 일제는 이 사업에서 국유림 창출의 극대화를 위해 구두계약이나 관문기(官文記)만으로도 효력을 가지던 종래의 한국 임야소유관계를 무시하고, 관문기의 유무라는 구분만으로 국유·민유를 사정했다. 따라서 민유림을 부정할 수 없는 임야만 민유림으로 재법인해 적어도 160만 정보라는 이미 확정된 사유림을 국유로 강제편입시켰다. 또한, 조선 후기 이래 임야사점(林野私占)이 확대되어 소유자나 다름없는 지위를 점유해 특수한 연고관계를 가진 상당수의 임야를 연고권만을 법인한 국유림으로 귀속시켰다. 한국의 주체적 임야조사였다면 당연히 민유로 사정되어야 할 한국민의 임야를 연고림이라는 명목으로 국유화한 면적만도 무려 337만 5000정보에 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야조사사업(林野調査事業)) 일제는 임야조사사업의 종료에 즈음하여 산림녹화를 행한다는 명분에서 삼림조합을 조직하여, 이 삼림조합을 통해 민유림 소유자들로부터 조합비를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삼림조합이 묘목을 강매하는 한편, 조합원들에게 삼림조합비 및 각종 잡비를 부과하여 부담을 가중시키자, 조선인들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조합비 징수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일제는 임야세제를 도입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임야세는 1932년 11월 총독부령 15호로 공포된 「도제시행규칙(道制施行規則)」에 따라 도세(道稅)의 하나로 규정된 세목이다. 도제 실시에 따라 세원 확보가 필요해진 상태에서 일제는 삼림조합의 '산림녹화' 실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이를 폐지하면서 동시에 임야세 제도를 도입하여 조선인들의 불만을 억누르는 한편 도 재정을 확충하려고 하였다.(최병택, 「1930년대 전반 일제의 민유림정책 '전환'과 임야세제 도입의 배경 및 의미」, ?한국사연구? 13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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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용기(李容器)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소득세(所得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 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容器 昭和 年 月 日 1942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容器 전북 남원시 1.2*0.8 1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용기(李容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보절면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그가 낸 세금은 제3종 소득세 1기분으로, 22원이었다. 당시 해당 사무를 담당한 직원은 남원군 보절면 회계원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세무관련 업무는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다. 소득세의 경우, 1934년 4월에 '조선소득세령'을 개정하여 개인소득세를 도입하였으며, 1936년에 이르러서는 19개의 세목을 갖추게 되었다. 즉 수득세 8개(지세·광세·거래소세·영업세·자본이자세·소득세·상속세·임시이득세), 유통세 6개(톤세·조선은행권발행세·등록세·인지세·거래세·출항세), 소비세 5개(관세·주세·사탕소비세·골패세·청량음료세) 등이었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의 기운이 드세지고 군부 내각이 드러서는 등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1937년에 세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임시조세증징령」을 공포하여 소득세·자본이자세·임시이득세를 증징(增徵)의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부도 전시 재정을 꾸릴 필요성이 생기자 1937년 8월에는 「북지나사변특별세령」을 공포하여 1년 한정으로 소득특별세·임시이득특별세·이익배당특별세·공사채이자특별세·물품특별세를 신설했으며, 다음 해 3월에는 「지나사변특별세령」을 제정하여 소득세·법인자본세·사탕소비세·거래소세를 증징하고 이익배당세·공사채이자세·통행세·물품세·입장세·특별입장세를 신설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임시이득세령」과 「지나사변특별세령」을 개정하여 세율을 인상하고 건축세와 유흥음식세를 신설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세제 개편을 시사하고 나서자 총독부도 제3차 세제 개정에 착수하였다. 기본 목적은 전쟁에 대비해 세수를 늘리고 국세와 지방세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복잡해진 세제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서 세제를 정리하고 개편한 것은 전비(戰費)를 조달하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으로, 세제의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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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주(黃鳳柱)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黃鳳柱 李殷弼 黃鳳柱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황봉주(黃鳳柱)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황봉주(黃鳳柱)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황봉주는 유학자로, 기성(箕城)의 후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원문 텍스트 自成花抄互連墻導以務養敎義方契事 鄕帿都失主村容蘭蕙總無光舊緣琴瑟新 緣續前蔭子孫後蔭長儀範忽然千古逈薤歌一曲 淚滂滂 箕城后 侍下生 黃鳳柱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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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一○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 <지명>新波里</지명> <인명>李容器</인명> 納一金 貳拾貳円 錢也 第三種所得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二期分右 領收ス昭和 年 月 日<관청명>南原郡寶節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李本光器[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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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一二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新波里 <인명>李容器</인명> 納一金 壹円九拾九錢也 林野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二期分右 領收候也昭和 年 月 日<관청명>南原郡寶節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李本光器[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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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철수(李喆壽)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소득세(所得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 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喆壽 昭和 年 月 日 1942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喆壽 전북 남원시 1.2*1.2 2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철수(李喆壽)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철수(李喆壽)가 보절면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그가 낸 세금은 1941년도 제3종 소득세 2기분으로, 96전이었다. 당시 해당 사무를 담당한 직원은 남원군 보절면 회계원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세무관련 업무는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다. 소득세의 경우, 1934년 4월에 '조선소득세령'을 개정하여 개인소득세를 도입하였으며, 1936년에 이르러서는 19개의 세목을 갖추게 되었다. 즉 수득세 8개(지세·광세·거래소세·영업세·자본이자세·소득세·상속세·임시이득세), 유통세 6개(톤세·조선은행권발행세·등록세·인지세·거래세·출항세), 소비세 5개(관세·주세·사탕소비세·골패세·청량음료세) 등이었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의 기운이 드세지고 군부 내각이 드러서는 등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1937년에 세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임시조세증징령」을 공포하여 소득세·자본이자세·임시이득세를 증징(增徵)의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부도 전시 재정을 꾸릴 필요성이 생기자 1937년 8월에는 「북지나사변특별세령」을 공포하여 1년 한정으로 소득특별세·임시이득특별세·이익배당특별세·공사채이자특별세·물품특별세를 신설했으며, 다음 해 3월에는 「지나사변특별세령」을 제정하여 소득세·법인자본세·사탕소비세·거래소세를 증징하고 이익배당세·공사채이자세·통행세·물품세·입장세·특별입장세를 신설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임시이득세령」과 「지나사변특별세령」을 개정하여 세율을 인상하고 건축세와 유흥음식세를 신설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세제 개편을 시사하고 나서자 총독부도 제3차 세제 개정에 착수하였다. 기본 목적은 전쟁에 대비해 세수를 늘리고 국세와 지방세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복잡해진 세제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서 세제를 정리하고 개편한 것은 전비(戰費)를 조달하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으로, 세제의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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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一一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 <지명>新波里</지명> <인명>李喆壽</인명> 納一金 九拾六錢也 第三種所得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二期分右 領收候也昭和 年 月 日<관청명>南原郡寶節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李本光器[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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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철수(李喆壽)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지세(地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十七年 二月 二十八日 南原郡巳梅面會計員 崔成海 李喆壽 昭和十七年 二月 二十八日 南原郡巳梅面會計員 崔成海 李喆壽 전북 남원시 1.2*1.2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철수(李喆壽)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철수(李喆壽)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이철수는 1941년도 2기분 지세(地稅)(국세(國稅))로 2원 40전, 지세 부가세(도세(道稅))로 1원 85전, 지세부가세(면세(面稅))로 1원 72전 등 모두 5원 97전을 납부하였다. 당시 보절면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한 회계원은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지세는 조선왕조 때에도 국가 세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세 수입의 원천이었다. 일제는 지세의 원천인 토지제도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1912년부터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규정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14년 '지세령'을 공포해 세율을 인상했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됨에 따라 토지대장 및 지적도가 정비되자 지세령을 개정하여 과세표준과 세율을 개정하는 등 세 단계를 거쳐 조세제도를 구축해 나갔다. 제1단계는 과세대장에서 누락되어 있던 탈세자를 탖아내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05년 등록된 토지면적이 약 96만결이던 것이 1910년말에는 약 102만결로 늘었다. 특히 오랫동안 지역토호들에 의해 자행되어온 은결(隱結) 등 지세 부과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토지들에 대한 과세를 정비하자 세수가 크게 늘었다. 그러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상당수는 가지고 있던 전답의 소유권을 박탈당하였다. 제2단계는 1914년 3월에 지세의 부과, 면세 및 징수에 관한 기본법인 지세령 및 시가지세령을 제정 공포한 것이었다. 지세령의 개정으로 세율이 크게 오르자 세수도 크게 늘었다. 예컨대 1913년도 지세수입이 647만원이던 것이 1914년에는 945만원으로 47.4%나 증가하였다. 제3단계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1918년 세제 정리를 통해 지세에 대한 과세율을 개정한 것이었다. 종래의 과세면적 단위인 '결(結)'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수익에 기초하여 토지대장에 등록된 '지가(地價)'를 과세표준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물납제에서 금납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1920년에는 지세 수입이 1910년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했다. 당시 총 조세 수입 가운데 지세가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으며 일제의 조세수입은 연평균 15.9%라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일제는 이렇게 확보된 지세 수입을 통해 총독부의 예산을 확충해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우리 농민들은 지주에게 유리한 기한부계약제 소작농 혹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일본 등지로 이주했다.(이재은, ?일제강점기 조선지방재정사 연구?, 한국지방세연구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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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민병숙(閔丙淑)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소득세(所得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 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閔丙淑 昭和 年 月 日 1942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閔丙淑 전북 남원시 1.2*1.2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민병숙(閔丙淑)이 남원군 보절면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민병숙(閔丙淑)이 보절면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그가 낸 세금은 1941년도 제3종 소득세 2기분으로, 75전이었다. 당시 해당 사무를 담당한 직원은 남원군 보절면 회계원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세무관련 업무는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다. 소득세의 경우, 1934년 4월에 '조선소득세령'을 개정하여 개인소득세를 도입하였으며, 1936년에 이르러서는 19개의 세목을 갖추게 되었다. 즉 수득세 8개(지세·광세·거래소세·영업세·자본이자세·소득세·상속세·임시이득세), 유통세 6개(톤세·조선은행권발행세·등록세·인지세·거래세·출항세), 소비세 5개(관세·주세·사탕소비세·골패세·청량음료세) 등이었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의 기운이 드세지고 군부 내각이 드러서는 등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1937년에 세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임시조세증징령」을 공포하여 소득세·자본이자세·임시이득세를 증징(增徵)의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부도 전시 재정을 꾸릴 필요성이 생기자 1937년 8월에는 「북지나사변특별세령」을 공포하여 1년 한정으로 소득특별세·임시이득특별세·이익배당특별세·공사채이자특별세·물품특별세를 신설했으며, 다음 해 3월에는 「지나사변특별세령」을 제정하여 소득세·법인자본세·사탕소비세·거래소세를 증징하고 이익배당세·공사채이자세·통행세·물품세·입장세·특별입장세를 신설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임시이득세령」과 「지나사변특별세령」을 개정하여 세율을 인상하고 건축세와 유흥음식세를 신설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세제 개편을 시사하고 나서자 총독부도 제3차 세제 개정에 착수하였다. 기본 목적은 전쟁에 대비해 세수를 늘리고 국세와 지방세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복잡해진 세제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서 세제를 정리하고 개편한 것은 전비(戰費)를 조달하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으로, 세제의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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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六月初七日<인명>李生員</인명>前明文右明文事錢文十一兩貸去矣當此大荒之年無一分錢報給而亟於流移之境<지명>宅上洞</지명>坪天字田一斗五升落所耕三負五束果同字苧田一斗落所耕一負五㐣右宅前並新舊文記永永次持爲去乎日後若有異說持此文記憑考事田主 閑良 <인명>房致安</인명>[喪不着]證人 幼學 <인명>田溶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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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一二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 <지명>新波里</지명> <인명>閔丙淑</인명> 納一金 七拾五錢也 第三種所得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二期分右 領收候也昭和 年 月 日<관청명>南原郡寶節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인명>李本光器</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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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二二○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지명>新 里</지명> <인명>李喆壽</인명> 納一金 貳圓 四拾錢也 地稅(國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二期分一金 壹圓 八拾五錢也 地稅附加稅(道稅) 仝一金 壹圓 七拾貳錢也 地稅附加稅(面稅) 仝計金 五圓 九拾七錢也右 領收候也<연도>昭和十七年</연도> 二月 二十八日領收ス<관청명>南原郡巳梅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인명>崔成海</인명>[印]⊙稅金은必히期限內에納付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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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용기(李容器)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지세(地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十七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 李容器 昭和十七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 李容器 전북 남원시 1.2*1.2 2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용기(李容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이용기는 1941년도 2기분 지세(地稅)(국세(國稅))로 44원 76전, 지세 부가세(도세(道稅))로 34원 50전, 지세부가세(면세(面稅))로 32원 22전 등 모두 111원 48전을 납부하였다. 당시 보절면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한 회계원은 이본광(李本光)이었다. 지세는 조선왕조 때에도 국가 세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세 수입의 원천이었다. 일제는 지세의 원천인 토지제도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1912년부터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규정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14년 '지세령'을 공포해 세율을 인상했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됨에 따라 토지대장 및 지적도가 정비되자 지세령을 개정하여 과세표준과 세율을 개정하는 등 세 단계를 거쳐 조세제도를 구축해 나갔다. 제1단계는 과세대장에서 누락되어 있던 탈세자를 탖아내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05년 등록된 토지면적이 약 96만결이던 것이 1910년말에는 약 102만결로 늘었다. 특히 오랫동안 지역토호들에 의해 자행되어온 은결(隱結) 등 지세 부과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토지들에 대한 과세를 정비하자 세수가 크게 늘었다. 그러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상당수는 가지고 있던 전답의 소유권을 박탈당하였다. 제2단계는 1914년 3월에 지세의 부과, 면세 및 징수에 관한 기본법인 지세령 및 시가지세령을 제정 공포한 것이었다. 지세령의 개정으로 세율이 크게 오르자 세수도 크게 늘었다. 예컨대 1913년도 지세수입이 647만원이던 것이 1914년에는 945만원으로 47.4%나 증가하였다. 제3단계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1918년 세제 정리를 통해 지세에 대한 과세율을 개정한 것이었다. 종래의 과세면적 단위인 '결(結)'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수익에 기초하여 토지대장에 등록된 '지가(地價)'를 과세표준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물납제에서 금납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1920년에는 지세 수입이 1910년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했다. 당시 총 조세 수입 가운데 지세가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으며 일제의 조세수입은 연평균 15.9%라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일제는 이렇게 확보된 지세 수입을 통해 총독부의 예산을 확충해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우리 농민들은 지주에게 유리한 기한부계약제 소작농 혹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일본 등지로 이주했다.(이재은, ?일제강점기 조선지방재정사 연구?, 한국지방세연구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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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명(宋在明)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송재명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송재명(宋在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송재명(宋在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송재명은 덕은(德殷), 곧 은진(恩津)송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楓 高臥湖山八耋年詩書契活樂悠然誰曰寄歸皆有命只憐 敎誨更無緣古宅深燈餘硯墨名樓閑榻散風姻平生行謝 今何地四顧茫茫但一阡 侍下生德殷宋在明謹再拜哭輓 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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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돈태(崔燉泰)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燉泰 李殷弼 崔燉泰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돈태(崔燉泰)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돈태(崔燉泰)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돈태는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생이다.○ 원문 텍스트 古家詩禮槿瀛州成憶樂生洵美休蘭芽準擬三珠檮竹韻聯 成五鳳樓海上神仙應自許淤西風月共將悠病勢恨之無臨壙訣精 靈鑑此勿次尤 少弟 臨瀛 崔燉泰 謹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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