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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卄三日田權玉錢文壹仟兩捧上印捧<인명>辛</인명>[着名]欠則四戔一卜二月卄四日錢文㱏仟兩捧上印捧<인명>辛</인명>[着名]欠則四戔一卜二月卄六日錢文㱏仟兩捧上印捧<인명>辛</인명>[着名]二月卄七日錢文㱏仟兩捧上印捧<인명>辛</인명>[着名]<연도>戊戌</연도>閏三月十七日錢文參仟兩畢捧印票主 <인명>辛元默</인명>[着名]<연도>戊戌</연도>四月初八日右票事切有緊用處定只堤下畓土十三石二斗落折價錢文七仟兩永永放賣而価文無一加遺漏已爲畢捧而他別二万錢加捧而更無侵魚之意如是成票事票主 <인명>辛元默</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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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모년(某年)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추수기(秋收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추수기(秋收記)의 일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추수기(秋收記)의 일부이다. 작성연대는 알 수 없다. "定其堤下", "益上里", "泉谷坪"등 세 곳의 전답에 소작을 주었던 소작인의 이름과 전답의 두락 수가 적혀 있다. 이보다 훨씬 많은 지역과 소작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문서가 결락되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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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6년 이면수(李勉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年丙午 苧田主自筆 李勉秀 大韓光武十年丙午 李勉秀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 11월 9일 이면수(李勉秀)가 모시밭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1906년 11월 9일 이면수(李勉秀)가 저전(苧田), 즉 모시밭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이 밭은 선은동(仙隱洞)에 있었는데, 크기는 1대락(隊落)이었으며, 매매 대금은 50냥이었다. 밭의 크기를 재는 단위 가운데 대락은 매우 생소하다. 고문서에서 대락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도 거의 없는 듯하다. 따라서 1대락이 어느 정도의 크기를 말하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면수가 위 모시밭을 팔게 된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였다. 아마도 올해 가을 작황(作況)이 좋지 못하였고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곡식을 살 정도의 돈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면수는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위 모시밭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된 문서들도 같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전 문서를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중간유실 고이신문일장 우전영영방매위거호(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라고 말한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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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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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第二女許氏婦 維歲次甲午七月甲子朔十三日丙子家父大受哭于亡女許婦像生之筵曰嗚呼痛哉生于乙丑撫爾鞠爾玆愛之情無間育子免懷三年敏慧且孝婉娩聽從善受姆敎年將及笲尤盡友恭不喜粉脂儉素雍容平生寡言自持婦德克勤女事織紝紡績嗚呼痛哉歲在甲申二十而嫁事姑對夫聲怡氣下至於族戚敦睦以和日月幾何十年已過嗚呼痛哉地隔相望一無覲行父母兄弟似非人情不幸短命天耶人耶淑容德儀復覩於何爾之遘疾我將科行爾之夭逝我已發程疾病之初俾不聞知是非他故爾之孝思乃爺乃孃使不驚憂得年三十遺恨千秋人間夭壽固無老少至於爾身寔出逆理嗚呼痛哉儀影森目魂頻入夢三更寤寐五內崩痛汝母號泣喚女振聲親戚揮涕老媼斷腸嗚呼痛哉壽盡之夕幾多呼母壽則多辱古語信矣思之又思無憑蹤跡運耶命耶問天冥默爾之餘憾死而无后惟有一女依誰善後吾年六十不遠九原行將逝矣早晩相見酹爾像生摧我心曲靈若有知願言來格桐塢遺稿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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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永嘉權純命謹撰】 桐塢處士李公沒之三十八年癸酉禮官稟公孝子太皇帝 命旌其閭又五十七年庚午二月日公之曾孫時澤抱公家狀曁蘆沙奇文簡公所撰墓文訪至天台山社徵余狀德之役曰吾曾王考沒且百年然文獻炳乎人耳目 朝已表宅儒又銘阡子其無辭余謹受卒業按狀叙之公諱萬祿字大受桐塢其自號瀛州氏自勝國文憲公敬祖世厥簪組至執義諱伯瞻以詩文鳴不仕 光廟子司直錫祉始居扶安三傳有諱雲齡學行薦授寢郞曰小心齋克守從師尤菴先生曰長春曰崇曰鎭燁是公四世文行相襲綾城具氏撥之女其妣也有閫德以 正廟丙申七月九日擧公于乾仙鄕第公自幼性不喜雜戱恪遵長者敎上學不煩提督能專心所受應對進退不失殼率家故貧躳樵漁以供甘旨餘力劬聖賢書以爲養親讀書幷進之道人皆難之十七遭內憂執禮孔巖哀毁幾滅性以家乏中饋奉父就食于從叔鎭黙家備經險阻八九年于玆未曾少懈其志學有所成就二十五始行聘禮三十三遽喪父得以專瀡滫之供者僅十年矣以是爲沉恨送終哭擗視前喪有加斥家事營葬葬地徵價無節應之不少吝夫日別處齊潔一心致慤嘗隔忌辰家狗臨乳是俗狗也爲慰孝子心有避日之異薷菜是羊棗也家人偶失夙儲有非時之生鄕里稱孝感也中年絶意榮途築室屛處與上舍文祿柿陰八祿昆季團聚有酒自娛以友于之篤兼知己之樂秋淸月皓陶然抱孤桐而自適不知世閒復有何事所謂桐塢者志其實也倣蘭亭故事同志五六人結契立約春秋會講命觴賦詩以終餘年人稱蓬壺六逸 憲宗丁未二月七日考終于正寢壽七十二禮月初葬于古阜斗升山南麓後移所居梓鄕書堂洞負壬原從先兆也配蔡氏父德胤籍平康生後公六年沒後公四年從祔生三男三女男長東烈次東益季東麟出后女咸豐李澈洪詩山許錫龍義城金箕亨奎魯廣魯驥魯張采承妻東益出奎魯爲東烈后錫魯金思庚妻東麟出餘不■盡錄公天資淳厚不設崖岸志行皎潔不役外誘辭不近鄙俚口不屑勢利所嗜者經史所業者吟詠終日危坐引接後進必以孝弟忠信爲築底處及門士多以儒素自持嗚呼公可謂孝友恬靜士也其阡文有曰悠然自得者人莫窺其際表以處士非溢君子一言可以百世不朽更何贅焉此其所以儒論之愈久愈不泯鄕而省而達于 朝竟蒙綽楔之典而烏頭赤脚輝暎千秋者也有詩稿一局任眞自放不甚雕琢嗟乎東烈之孝行奎魯之問學固是世家 而驥魯時澤父子師事艮翁先生以樸實見稱公之門一何多賢也孝子錫類其斯之謂與是爲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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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表【文簡公幸州奇正鎭撰】 李生奎魯言若不出口顧嘗爲余縷縷其先王大人桐塢公文而不售行與身俱?先大人是悼臨歿惓惓不及餘事旣又狀其行來示盖以不朽事屬余也余謝淺薄且告之曰見子年尙弱狀亦不可容易姑徐之表章世豈無人乎日者生來言曰昔者狀頗修刪矣乞垂一覽噫生之不釋余已十年矣何忍終辭謹按其狀公自未齔無雜戲稍長卽躬子職至于山樵至于水漁然不以是闕讀課由是父母安其養不之嗔宗族知其孝也十七歲喪妣哀動隣里素窶甚送終多不及禮者以爲平生恨與妻子語及必言淚俱發父自失中饋不能家挈以食於從兄鎭默家八九年文業成就二十五有室三十四遭父艱伸執爨之愛未十年傾貲營壙無慮居之累其於祭祀尤盡誠意先期必嚴自齊潔渾家化之畜狗臨乳有避日之異物感然乎中身卽廢試場曰人間自有樂事何必科擧每風晨月夕盤桓一株桐下吟弄遣懷其悠然自得者人莫窺其際也末年與五六同志修契立約春秋講會一觴一詠與後生言必依孝悌忠信因以善良者亦多丁未二月七日卒上距生年元陵丙申恰七十二歲始葬古阜斗升南麓遷而得扶安乾先鄕書堂洞壬坐原卽曾居陽宅近地也夫人平康蔡氏合窆三男三女東烈東益東麟男也李徹洪許錫龍金基亨壻也東烈娶金無男女奎魯以二房子後焉東益娶金生三男長卽奎魯次廣魯承魯[譜諱驥魯]一女張采承東麟出后一男錫魯一女金思庚內外曾孫多幼余輩行差晩雖不獲接公顔色竊諷公吟詠幾首意者其任眞由衷不事雕鏤者又聞東烈之未亡有追遠誠多過人行而奎魯亦有典刑非不匱永錫而然乎表以處士非溢也最其行如上方姓系附焉瀛州之李自高麗大司成敬祖世襲衣纓十六傳而執義伯贍著於我 朝又一傳而司直錫祉始居扶安又三傳而參奉雲齡有聞望以上詳參奉公墓表參奉之後曰承宗曰培曰鮮白曰克守曰長春曰崇曰鎭燁鎭燁於公考也妣綾城具氏父撥公諱萬祿字大受蔡夫人父德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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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高興柳永善撰】 故孝子瀛州李公諱萬祿字大受蘆沙奇公表其墓曰桐塢處士而闡發其潛德公之曾孫時澤以此表與吾友權純命狀託余幽誌余辭謝非其人時澤之懇愈勤余與時澤同師艮齋先生義不可牢辭於乎孝弟爲仁之本本立而道生公旣以純孝蒙旌於洪陵癸酉而烏頭赤脚輝映宅里是可證朝家尙賢敦本之實而爲爲善者勸也公自幼不違親敎專心所學語默有度稍長躬執漁樵以修子職然不以此而闕課敬義菽水互相貫通未冠遭內艱盡哀常以家窶送終之不得爲悅爲至冤極痛後喪哭擗毁瘠傾家貲完葬忌日齊潔追遠致愛畜狗臨乳避日之異薷菜羊棗非時之生亦可見誠孝之攸感也早攻擧業不利於有司自分數畸不喜赴試曰人間自有樂事昆季友于怡怡每晴晝月夜悠然撫孤桐而風詠遣懷剩有自得之趣其不役外誘率眞樂飢雖曰生質之美而學問之力更不可誣也其獎進後學敎誨兒孫惟有孝弟忠信四字鄕里至今傳誦不已此豈可强之使然哉暮年與同志修稧有時會講賦詩足使蘭亭罔或專美世所稱蓬壺六逸者也有詩集若干得於段爛方謀鋟梓公以 正祖丙申生 憲宗丁未二月七日卒享年七十二扶安乾先坊書堂洞枕壬之藏卽公衣履而曾所攸芋近地也李氏自高麗文憲公諱敬祖始顯累傳至諱伯瞻不仕 光廟生司直諱錫祉來家扶安三傳諱雲齡學行薦授齋郞高祖諱克守號小心齋從學尤菴先生曾祖諱長春祖諱崇考諱鎭燁世以文行相傳綾城具氏橃其外祖也配平康蔡氏德胤女合兆擧三男東烈東益東麟出后女適咸豐李澈洪詩山許錫龍義城金箕亨長房無嗣東益生奎魯出爲其后尸公祀次廣魯驥魯艮翁門人女張采承東麟生錫魯女金思庚噫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公之後仍方繁衍福蔭蓋未艾而多能繼述家行典刑有存天之報施未可謂不厚矣孰謂靈芝無根醴泉無源也是宜銘銘曰誠孝其行醇厚其質謝絶榮途自有所樂鄕里傳頌聖朝綽楔納銘幽竁用示來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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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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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41년 백용섭(白龍燮)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지세(地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十六年 月 日 南原郡巳梅面會計員 李本光器 白龍燮 昭和十六年 月 日 南原郡巳梅面會計員 李本光器 白龍燮 전북 남원시 1.2*1.2 2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1년에 백용섭(白龍燮)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1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백용섭(白龍燮)이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백용섭은 1941년도 1기분 지세(地稅)(국세(國稅))로 1원 18전, 지세 부가세(도세(道稅))로 90전, 지세부가세(면세(面稅))로 84전 등 모두 2원 92전을 납부하였다. 당시 보절면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한 회계원은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지세는 조선왕조 때에도 국가 세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세 수입의 원천이었다. 일제는 지세의 원천인 토지제도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1912년부터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규정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14년 '지세령'을 공포해 세율을 인상했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됨에 따라 토지대장 및 지적도가 정비되자 지세령을 개정하여 과세표준과 세율을 개정하는 등 세 단계를 거쳐 조세제도를 구축해 나갔다. 제1단계는 과세대장에서 누락되어 있던 탈세자를 탖아내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05년 등록된 토지면적이 약 96만결이던 것이 1910년말에는 약 102만결로 늘었다. 특히 오랫동안 지역토호들에 의해 자행되어온 은결(隱結) 등 지세 부과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토지들에 대한 과세를 정비하자 세수가 크게 늘었다. 그러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상당수는 가지고 있던 전답의 소유권을 박탈당하였다. 제2단계는 1914년 3월에 지세의 부과, 면세 및 징수에 관한 기본법인 지세령 및 시가지세령을 제정 공포한 것이었다. 지세령의 개정으로 세율이 크게 오르자 세수도 크게 늘었다. 예컨대 1913년도 지세수입이 647만원이던 것이 1914년에는 945만원으로 47.4%나 증가하였다. 제3단계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1918년 세제 정리를 통해 지세에 대한 과세율을 개정한 것이었다. 종래의 과세면적 단위인 '결(結)'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수익에 기초하여 토지대장에 등록된 '지가(地價)'를 과세표준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물납제에서 금납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1920년에는 지세 수입이 1910년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했다. 당시 총 조세 수입 가운데 지세가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으며 일제의 조세수입은 연평균 15.9%라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일제는 이렇게 확보된 지세 수입을 통해 총독부의 예산을 확충해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우리 농민들은 지주에게 유리한 기한부계약제 소작농 혹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일본 등지로 이주했다.(이재은, ?일제강점기 조선지방재정사 연구?, 한국지방세연구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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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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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四六八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農會費 地主 邑面 <지명>新波里</지명> <인명>李敎政</인명> 外 一人 代理人 邑面 里 納一金 參拾錢也 (會員割)一金 貳拾六錢也 (地稅割)計 金 ,五六右 領收候也昭和 年 月 日<지명>南原郡</지명>農會 邑面分區取扱者注意一 期限內納付セラルベシ(할)事二 期限經過セバ(하면)過怠金ヲ(을)賦課ス(함)三 過怠金賦課納入告知書ヲ(을)受ク(하고도)尙完納セサルトニキハ(치아니한時는)財産押差ノ(의)處分ヲ(을)爲スベシ(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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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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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四七四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農會費 地主 邑面 <지명>新波里</지명> <인명>李喆壽</인명> 代理人 邑面 里 納一金 參拾錢也 (會員割)一金 七拾五錢也 (地稅割)計 金 一,○五右 領收候也昭和 年 月 日<지명>南原郡</지명>農會 邑面分區取扱者注意一 期限內納付セラルベシ(할)事二 期限經過セバ(하면)過怠金ヲ(을)賦課ス(함)三 過怠金賦課納入告知書ヲ(을)受ク(하고도)尙完納セサルトニキハ(치아니한時는)財産押差ノ(의)處分ヲ(을)爲スベシ(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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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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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領收證第六四八號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지명>新波里</지명> <인명>李敎政</인명>外一人 納一金 壹円參錢也 地稅(國稅) <연도>昭和十六年度</연도> 第一期分一金 七拾九錢也 地稅附加稅(道稅) 仝一金 七拾四錢也 地稅附加稅(面稅) 仝計金 貳円五拾六錢也右 領收候也<연도>昭和十六年</연도> 月 日領收ス 持叅納付 托納 付 受督 付<관청명>南原郡巳梅面</관청명><관직명>會計員</관직명> <인명>崔 本 成 海</인명>[印]⊙稅金은必히期限內에納入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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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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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4년 신중지(辛重之)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三年六月 日 辛重之 同治三年六月 日 辛重之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4년(고종 1) 6월 17일에 신중지(辛重之)가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의 진자답(盡字畓)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4년(고종 1) 6월 17일에 신중지(辛重之)가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의 진자답(盡字畓) 25두락지, 부수로는 48부 4속이 되는 곳과, 그 북변의 3부 1속이 되는 곳을 46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거래시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넘겨주었다. 뒷날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신중지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증인으로 김원여(金元汝)가 거래에 참여하여 답주 신중지와 함께 문서에 서명하였다. "1821년 김중전(金仲田)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은 이 문기의 구문기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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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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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계유년(癸酉年) 김원숙(金元淑)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癸酉十二月二十九日 幼學 金元淑 癸酉十二月二十九日 幼學 金元淑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계유년(癸酉年) 12월 29일에 김원숙(金元淑)이 빚을 갚기로 약속하면서 작성한 수표(手標). 계유년(癸酉年) 12월 29일에 김원숙(金元淑)이 빚을 갚기로 약속하면서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상대방으로부터 매시(每市) 1분례(分例)로 30냥을 빌렸다. 그리고 다음달 10월말까지는 돈을 갚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표를 작성하여 상대방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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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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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5년 김창희(金昌希) 영수증(領收證) 1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四年陰二月十一日 金昌希 大正四年陰二月十一日 金昌希 전북 부안군 [印] 3개 1*1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5년 음2월 21일에 김창희(金昌希)가 집값으로 20원을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收證). 1915년 음2월 21일에 김창희(金昌希)가 집값으로 20원을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收證)이다. 김창희는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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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31년 오수철(吳守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一年辛卯七月卄五日 吳守哲 道光十一年辛卯七月卄五日 吳守哲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1년(순조 31) 7월 25일에 오수철(吳守哲)이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의 진자답(盡字畓)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1년(순조 31) 7월 25일에 오수철(吳守哲)이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의 진자답(盡字畓) 25두락지, 부수로는 48부 4속이 되는 곳과, 그 북변의 3부 1속이 되는 곳을 34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 문서에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넘겨주었다는 구절은 적혀 있지 않지만, 소장처에 구문기에 해당하는 문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거래하면서 해당문기를 넘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1821년 김중전(金仲田)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바로 그 구문기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답주 오수철은 이 논을 자신이 매득하였다면서 뒷날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증인으로 김철흥(金哲興)이 거래에 참여하여 답주 오수철과 함께 문서에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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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定其堤下<인명>李元孝</인명> △ 二十斗落<인명>金化三</인명> △ 十五斗落<인명>全致玉</인명> △ 九斗落<인명>金致文</인명> △ 八斗落又<인명>致文</인명> △ 十二斗落<인명>吳三郞</인명> △ 九斗落<인명>金京得</인명> △ 十二斗落<인명>黃蒙哲</인명> △ 十三斗落<인명>金元兼</인명> △ 九斗落<인명>金贊西</인명> △ 六斗落又<인명>贊西</인명> △ 五斗落<인명>黃文贊</인명> △ 七斗落<인명>田稚玉</인명> △ 十六斗落<인명>田明集</인명> △ 十三斗落<인명>黃元執</인명> △ 四斗落<인명>柳永西</인명> △ 八斗落<인명>鄭達宗</인명> △ 二十五斗落<지명>益上里</지명><인명>金化三</인명> △ 三十斗落<인명>林致水</인명> △ 五斗落又<인명>致水</인명> △ 九斗落<인명>尹成孝</인명> △ 十三斗落<인명>朴贊西</인명> △ 九斗落<지명>泉谷坪</지명><인명>任子成</인명> △ 五斗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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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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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672년 김후제(金後磾)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康熙十一年壬子三月二十日 金後宗 金後磾 康熙十一年壬子三月二十日 金後宗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672년(현종 13) 3월 20일에 김후종(金後宗)이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부안현(扶安縣)의 논을 김후제(金後磾)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672년(현종 13) 3월 20일에 김후종(金後宗)이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부안현(扶安縣) 지비리(之飛里)의 온자답(溫字畓) 21부 되는 곳을 김후제(金後磾)에게 상목(常木) 5동(同)을 받고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후종은 이 논을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으나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았다. 거래시 매입자에게 이 문기를 주며서 뒤에 이 거래를 두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기를 관에 알려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답주인 김후종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증인으로는 친동생 김후주(金後柱)가 거래에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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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지명>東道仙隱洞</지명>化民<인명>李奎煥</인명>右謹言情由事段暗懷不良期欲害人者豈有如本里田<인명>仁鳳</인명>乎同<인명>仁鳳</인명>渠之履字畓所耕二十三卜九束庫乙放賣於島浦<인명>辛公守</인명>處其所納稅已爲四五年又於昨年臨字畓所耕十八負八束於欲斥賣故民果爲買得而新舊文券中結卜數爻以十八負八束昭詳懸錄矣其後田民稱以緊急錢五兩來恳於民而適無所存果未酬應矣因此而遺憾是可喩昨秋考卜時民之所買畓所耕十八卜八束庫更爲移錄於<인명>辛公守</인명>同<인명>公守</인명>之許多年徵納履字畓所耕二十三卜九束暗爲換錄於渠之名下稱云民之畓結欲爲加徵民是何意思乎苟如是也則所謂畓券中懸錄結卜其將無用則此許良遐土民習待不當之結一若橫徵必爲終身痼疾故緣由畓券粘連仰訴 洞燭敎是後該書員考前冊依前移錄亦爲遵行文券使民至寃徵是乎㫆同田民無據之習別般嚴處以杜後獘來處分行下爲之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연도>庚午</연도> 五月日官[署押]題辭<인명>田仁鳳</인명><인명>辛公守</인명>兩漢卽刻捉來向事二道主人初七日(追題)八斗落只結卜拾捌負捌束昭著於書員成冊以此徵則無有日後紛紜之獘向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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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9년 김영환(金永煥)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隆熙三年己酉二月初八日 幼學 金永煥 隆熙三年己酉二月初八日 幼學 金永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9년 2월 초8일에 유학(幼學) 김영환(金永煥)이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만화동(萬化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9년 2월 초8일에 유학(幼學) 김영환(金永煥)이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만화동(萬化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만화동 전평(前坪)에 있는 이자답(而字畓) 4두락, 부수(負數)로는 9부 2속이 되는 곳을 450냥에 팔았4다. 매입자에게 구문기와 신문기를 함께 건네 주었으며, 차후에 만일 이 논에 대하여 문제가 생기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유학 서기환(徐己煥)이 증인으로 방매자 김영환과 함께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었던 만화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보안군 신복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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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本縣薦章 癸酉三月二十日扶安儒林幼學權弼憲宋潤泰金瑞植高鎭五李可眞金洛獻金基豊朴齊豊金孝源李豊述金東奎崔龍煥李懿述金基灝崔鳳煥宋潤福金潤瓊金秉鏞許澳白致欽等謹上書于城主閤下伏以孝子百行之源也故周制興物以孝爲首漢詔擧賢惟孝居先然則一門一孝猶爲難也而況一門兩孝乎乃於玆鄕故處士李萬祿家見之矣自是簪纓古閥孝友世家粤在齠齡天姿溫怡地步卓異不喜遊戲常侍親側惟命是順未嘗小咈家甚貧寒窮執漁樵餘力課讀遂成碩儒至於講論文義雖老師宿儒皆爲推許曰嗟哉孝兒且兼文學十七歲丁內艱攀躃哭踴幾至傷孝送終凡節極力辦備情文俱至奉養嚴親便身之物無不畢給及其遭憂殫誠凡備無所餘憾盡傾家貲以爲營壙每値忌日宿亝衣冠危坐終日不與人語祭則俯伏哀痛無異袒括老而深篤適有雌狗當乳躬自臨諭曰爾雖微物不知主人之意耶因汝闕享是吾誠淺狗乃垂頭低尾因爲避乳誠之感物豈非偶然哉此是隣里宗族之所共目擊而欽嘆者也其子東烈號省巖能繼父道趨養無方當暑則扇以撓之當寒則身以溫之以悅親心供爲子職矣且其居喪之節一遵古禮曰爲人子者送終之節襄禮爲大山地所當深誠求之結床林園千夜禱天築壇蓬岳百日祭山果占幽宅至誠所到神明乃應間日省楸哀毁深讀隆冬祁寒躬箒積雪炎夏酷暑手鋤雜草蝗虫遍境無一靑松惟獨此墳傍之植松不犯乃止見之者稱異曰至哉誠孝微物猶感此豈非出天超人之至孝耶一門兩孝今古罕有而共萃於李氏之門其在公議終不可泯默故玆敢齊聲仰籲于 孝理之下特爲轉報營門俾得 登聞闡揚之地千萬祈懇屛營題曰父子之孝美可傳世微物之感誠乃格天此家不失行源令人欽歎處也當採議報營向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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