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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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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五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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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月 雪與月雙明 江山一色淸 夜深誰訪我 筵憶故人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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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淸夜 雪月揚明色 閒吟庭畔行 星稀雲亦歸 偏勝故人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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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輓張生仁伯【永立】 吾於人也見張君 蓬嶽元巖耕白雲 氣局平居無狹隘 心交逢處表懇懃 同歡僧舍多聯榻 豈料仙鄕遽作羣 肖子令孫能繼述 只歎荊室暮年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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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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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67년 광주행 용하기(光州行 用下記)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치부책 丁未正月二十一日 丁未正月二十一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丁未) 1월 21일 광주를 포함한 각 지역을 다녀오며 사용한 내역을 기재한 용하기. 1967년(丁未) 1월 21일 여행을 다녀오며 사용비용을 기재한 용하기이다. 이 여행은 문중 일로 인해 경로가 다방면임이 특징이다. 여행은 1월 21일에 고흥을 출발하여 벌교에서 환승을 하고 광주를 도착하였다. 광주에서 1박을 묵고 문중에 사용할 석물(石物)을 계약한 후 광주를 출발해 보성 득량까지 도착을 하고, 득량 예당리에서 점심을 하고 다시 순천을 도착해서 순천에서 1박을 한 후, 순천에서 벌교를 거쳐 벌교에서 환승을 하고 고흥으로 왔다고 적고 있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엔 각 군 문중에 공문을 보냈고 4월 23일에는 통문을 보냈다. 공문과 통문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내역을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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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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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82년 추수기(秋收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회계/금융-치부책 壬午正月日 壬午正月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2년(壬午) 작성한 추수기. 1982년(壬午) 1월 기준으로 작성한 추수기이다. 읍내 호동(虎東)에서 노(奴) 춘매(春每)가 30을, 노 효돌(孝乭)이 50을 가져갔다. 노 유월(六月)이 34복(卜)을 내주었는데 그 중 5복2속을 수원(水元)이 가져갔다고 적었다. 이후 노 팔□(八□)에게 내 준 것은 춘금의 몫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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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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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83년 추수기(秋收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회계/금융-치부책 丁亥十一月 丁亥十一月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3년 11월 문중 논에서 거둬들인 벼 추수기다. 1883년(丁丑) 11월 고흥 류씨 문중 논에서 거둬들인 벼 추수 수봉기(收捧記)다. 이 중 호산(虎山)에서는 류영시(柳永蒔), 류영기(柳永祺), 류영효(柳永孝), 류영명(柳永蓂), 류호준(柳昊俊), 류관준(柳瓘俊), 류영방(柳永芳), 류성준(柳城俊), 류구준(柳龜俊), 류순조(柳順祚) 등 10명, 소곡(蔬谷)에서 류장호(柳璋浩) 1명, 고소(姑蘇)에서는 류길호(柳吉浩), 류영우(柳永佑), 류준(柳俊)등 3명 총 15명이다. 여기에 적혀있는 구성원은 호산에서 11명, 두원(豆原)에서 14명, 풍호(豊湖)에서 26명으로 총 55명이다. 15냥과 11냥은 유사(有司)의 몫이며 실재 있는 것은 14냥이라고 기재했다. 여기서 호산은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일대를 뜻하며, 소곡은 고흥군 풍양면 안동리 소곡을, 고소는 고흥군 고흥읍 고소리를, 두원은 고흥군 두원면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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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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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92년 추수기(秋收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회계/금융-치부책 壬辰十二月日 壬辰十二月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2년 문중 땅에서 거둬들인 추수기다. 1892년(壬辰) 12월에 수확한 추수기로 호산(虎山)에서 거주하는 계원들은 류영회(柳永澮), 류영기(柳永祺), 류영효(柳永孝), 류호준(柳昊浚), 류영범(柳永範), 류관준(柳瓘浚), 류경준(柳坰浚), 류영방(柳永芳), 류영보(柳永輔), 류중원(柳重元). 류계준(柳桂浚), 류귀준(柳龜浚), 류영명(柳永蓂), 류길준(柳吉浚), 류영우(柳永佑)등 총 15명이다. 계원들에게 1냥씩 내주었고 합계는 15냥이라고 적혀있다. 뒷면에는 1892년 12월에 다시 한 내역이 류영학(柳永學)은 5전은 받았으나 1냥은 못받았고, 쌀 1냥 3전 내역이 있으며, 류경준(柳敬浚)은 2냥 5전중 쌀 7전을 빌려갔으며 류영우(柳永旴)는 1냥 5전 중 쌀 4전 5복을, 류영방(柳永芳)은 2냥중 쌀 5전6푼을, 류영보(柳永甫)는 1냥중 쌀 3전을 갚았으며, 류종모(柳宗模)는 1냥 5전 중 쌀 5전을 꿔갔고, 곽억돌(郭億乭)은 6전 3복중 쌀 1전을, 류억근(柳億根)은 1냥중 쌀 3전을, 김달진(金達振)은 2냥중 쌀 6전을 갚았다. 정산 한 내역들은 모두 ㄱ자로 표기하였다. 마지막에 실재로 있던 내역은 20냥 8전 4복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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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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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爲永久遵行事卽接官奴等訴則以爲小人廳無等身舊逋還穀數甚不些乃爲千有餘石之多以數小殘奴之糴稅所當每年移施徵納僅爲一年之耗穀是白如乎以此之故所謂官奴輒欲謀避不顧隨役莫可成樣者誠爲邑獘所關而切迫情私仰暴無所是白加尼何幸今年特蒙官上典主山海仁恤之盛澤許多奴逋期於振刷敎是乎則於公爲徵逋之大幸於私爲歌頌之至恩是白如乎婢子廳畓三庫在於一道面之飛里前坪渠冀每年禾利致爲放賣以爲補用數旣無多而官奴之於官婢俱爲一體則今此似字丁二十一畓四十四負八束庫果蘭字丁三十六畓四十負七束庫乙捧価錢二百兩特令放賣以納奴逋婢子廳用段以其畓每禾利一例小人等春稅中旣受條拍排分牧成節目逐年上下之意特施處分完文成給使此凋殘奴婢俾爲保存事所志是置大抵此邑之一大痛獘莫過於吏奴還逋而吏逋今旣了刷則奴逋亦不可抛置期於畢捧乃已者乙仍于同畓兩庫依渠等所訴特許放賣爲在果畓價錢二百兩屬之於奴逋備衲之資婢子廳所用段依所願官奴所受春稅中分數排定逐年上下之意一邊成節目以給婢子等處爲㫆完文成給以此憑後宜當向事<연도>辛巳</연도> 正月 日完文官[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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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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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2년 채공하(蔡恭夏)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二十二年壬寅十一月十一日 幼學 蔡恭夏 道光二十二年壬寅十一月十一日 幼學 蔡恭夏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6.5*6.5 1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2년(헌종 8) 11월 11일에 유학(幼學) 채공하(蔡恭夏)가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42년(헌종 8) 11월 11일에 유학(幼學) 채공하(蔡恭夏)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이 논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적고 있다. 거래가 된 토지의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고, 이자답(李字畓) 5승락지로 부수(負數)는 2부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거래가격은 3냥 5전이었다. 거래시 구문기 없이 신문기 1장만 매입자에게 넘겨 주었다. 뒷날 이 논에 대하여 말썽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증인이자 필집(筆執)으로 박공수(朴恭壽)가 답주(畓主) 채공하와 함께 거래에 참여하여 문서에 서명하였다. 당시 박공수는 상중(喪中)이었다. 이 문서는 "1854년 이계민(李啓敏)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이다. 12년이 지났지만 거래가는 변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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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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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4년 이계민(李啓敏)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四年甲寅十二月十三日 幼學 李啓敏 咸豐四年甲寅十二月十三日 幼學 李啓敏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12월 13일에 유학(幼學) 이계민(李啓敏)이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12월 13일에 유학(幼學) 이계민(李啓敏)이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이 논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적고 있다. 거래가 된 토지의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고, 이자답(李字畓) 5승락지로 부수(負數)는 2부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거래가격은 3냥 5전이었다. 뒷날 이 논에 대하여 말썽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답주 이계민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의 구문기는 "1842년 채공하(蔡恭夏)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러나 이 문서에는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넘겨주었다는 구절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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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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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4년 이안우(李安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四年甲午三月初五日 李安遇 道光十四年甲午三月初五日 李安遇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4년(순조 34) 3월 초5일에 이안우(李安遇)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4년(순조 34) 3월 초5일에 이안우(李安遇)가 부북(扶北)에 있는 망자답(邙字畓) 14두락지, 결부(結負)로는 31복 2속이 되는 곳을 1백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이다. 그는 흉년으로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논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본문기(本文記)는 중간에 잃어버려 신문기 1장만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뒷날 자손 중에 이 논을 두고 이의를 제기하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답주인 이안우가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유학(幼學) 김길(金吉)과 김광옥(金光玉)이 증보(訂保)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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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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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지명>東道面仙隱洞</지명>居化民<인명>李奎煥</인명>右謹言憤寃情由事今此人心尤極凶獰其有甚於<지명>上東翼上里</지명><인명>金成淑</인명>爲名人乎去癸酉年良中渠之兄元淑爲名者累次過限連爲不報故民不勝憤惋累次呈訴是乎則題音截嚴而或囚或杖終是不報豈有如許之陰慝頑惡者乎恒切憤寃之際同<인명>元淑</인명>之弟<인명>成淑</인명>快言曰該錢渠之擔當備報之意成標是白去乙民依其言許之矣同<인명>成淑</인명>兄弟同一心腸至于今延拖不報眞所謂難兄難弟不知何年何月捧之而又況當王稅辦納之時束手無策故玆敢前呈所志與手標帖連仰籲 洞燭敎是後特加別般處分上項成淑卽刻捉上嚴囚督捧該錢幷本利一一推給俾無空失之幣千萬祝手行下 向敎是事城主 處分<연도>甲申</연도> 四月 日官[署押](題辭)非但渠之手票消詳前後官題截嚴何不報給有此更訴所謂金成叔萬萬無憾嚴治推給次星火捉待事初八日 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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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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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6년 유승언(劉承彦) 수표(手票)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丙午正月初五日 劉承彦 丙午正月初五日 유승언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광무 10) 1월 초5일에 유승언(劉承彦)이 작성해 준 약속 문서 1906년(광무 10) 1월 초5일에 유승언(劉承彦)이 작성해 준 약속 문서이다. 유승언은 당초에 논의 가격을 얼마 받기로 약속하는 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그 후 매수자와 합의가 원만하지 않아 이전에 써 준 약속 문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약속 문서가 유실(遺失)되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약속 문서를 다시 작성하여 주었다.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표(票)'를 가지고 약속을 증빙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본 약속 문서를 누구에게 써 주었는지,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수표는 매매, 임대, 전당(典當), 차용(借用) 등을 할 때 서로 간에 맺은 계약이나 약속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표를 작성한 유승언은 "1906년 유승언(劉承彦)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에서 논의 매도자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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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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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00년 노(奴) 각금이(角金伊) 패자(牌子)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경제-매매/교역-배지 上典金 奴角金伊 1800 上典金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노(奴) 각금이(角金伊)에게 상전(上典) 김(金) 아무개가 발급한 패자(牌子). 노(奴) 각금이(角金伊)에게 상전(上典) 김(金) 아무개가 발급한 패자(牌子)이다. 각금이는 이 패자를 근거로 하여 상전을 대신하여 토지를 거래하였다. '1800년 이인방(李仁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각금이는 부안에 있는 온자답(溫字畓) 4두락지를 이인방(李仁芳)에게 40냥을 받고 팔았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직접 상거래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여 자기 노비를 시켜 대신하게 하였는데, 이때 양반이 노비에게 토지 거래를 위임하면서 발급한 문서를 패자 또는 패지(牌旨)라고 하였다. 이 패자에는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지만, 위의 명문을 통해서 토지 거래가 이루어진 같은 해, 즉 1800년에 패자가 작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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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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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임인년(壬寅年) 김하순(金河舜)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壬寅十二月初十日 幼學 金河舜 壬寅十二月初十日 幼學 金河舜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임인년 12월 초10일에 유학(幼學) 김하순(金河舜)이 부안군(扶安郡) 좌산면(左山面) 연동리(蓮洞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임인년 12월 초10일에 유학(幼學) 김하순(金河舜)이 부안군(扶安郡) 좌산면(左山面) 연동리(蓮洞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하순은 이 논을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으나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밝히고 있다. 거래대상이 된 논은 연동리 동평(東坪)의 만자답(滿字畓) 6두락지이며, 부수(負數)로는 7부 7속이 되는 곳으로 거래가격은 550냥이었다. 만일 뒤에 문제가 있으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시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건내주었다. 그리고 문서의 맨 끝에 만일 뒤에 여력이 있으면 환퇴(還退)하겠다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즉 지금은 방매자가 형편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논을 팔기는 하지만, 나중에 금전의 여유가 생기면 되사겠다는 조항을 삽입한 것이다. 증인으로 유학 이영춘(李永春)이 거래에 참여하여 방매자 김하순과 함께 서명하였다. 논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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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金文玉【命楫】 金乃源【璐彦】 春光供逸興 殆若躡蓬岡 樽酒簫歌發 遨遊白日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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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七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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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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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灘柳上舍【東植】江亭韻 主人底意此亭起 純素門欄無綠紅 觸石灘鳴朝暮雨 跨郊㩜受去來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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