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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例 一院誌分爲三篇一篇載院中日用見在之事二篇書古今文獻以爲不朽之蹟一列聖敎書諸賢撰文古來物目極行書之新補文字或低一字或註雙行以別之一遺墟圖在申泰冕家牒故模本以存溯本之意一園林圖以明四表之界限院宇圖以明黌祠之方位陳設圖以辨籩豆之左右充腯圖省牲禮以辨執事之周旋一記事實一以徵刱建重修之年代一以著經財設力之功跡而汾涯申公事績雖無見文惟於文壯公所撰上樑文及審院錄可考者存焉故記之以俟後之君子之可否也一立事例以別主管之各殊定儀規以整祭饗之威儀笏記以備忘定式以遵則一書籍什物田畓奴婢生保記于誌以便其憑考傳掌一別錄敎書祭文行蹟碑銘請額疏重修記上樑文諸序詩歌吟詠以爲說院誌之文獻一錄文蔭武官之有勞於斯院者以爲搢紳案之淵源儒林之藏修者興本孫之出力者以爲靑襟宗禊案之淵源一院誌分置于本院及東陽紀功表忠道浦諸院與鄕洛本孫有數家燭鑑本院事例無有違規之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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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云云 【南平試入格而擢榜時爲其副所弄偶失試卷仍而見拔矣出榜後上試索而對還】 對南之方在於南之位而南之氣本乎南之對其對何也北是也是以先儒王相之說曰粤若天地之初生也氣轉水盪凡五千四百年而爲子會之半則其於泰濛鴻厖之中一運之先凝而聚者聚於北而爲地臍一運之先晶而浮者浮於北而爲天樞則其浮者其象易成而兩曜五緯之經綸漸以昭著而極于南其聚者其形難堅而五嶽四瀆之瀦峙必復待兩箇五千四百年而爲丑會之半然後方始成質而充于南然則天地之根只是北也其主張也在乎是其翕施也在乎是其處乎無事推而行之者在乎是是知北者體而南者用也體則正而用則變正則靜而變則動非正則變無統而只爲流盪無常而已非靜則動無所管而只爲撓亂無紀而已然而有變而後正有所施有動而後靜有所行吾之所可見而推其理者顧不在於動與變也乎曰雖吾人立乎其兩間而參而參之則其道亦是也是以耳口臟腑人身之南也公卿大夫人君之南也至若百姓四民又其南之南也於是焉司聽司味行氣行血之萬變無窮者所以爲南之用於人身也禮樂刑政宣化布令萬變不紊者所以爲南之用於人君也文行耕農工賈征徭之萬變承化者又是盡其道於吾身之南而上供乎人君之南也者乃若窮其理而細論則人心之居敬存養有似乎北之體而言語動用之著於外者爲其南之用者也人君之正位居體有似乎北之靜而發號施令之顯乎外者爲其南之動者也以至於百僚之一心盡已存乎中之體也而執事勤恪所以不負其爲南者小民之一意時雍成其俗之體也而因材盡業所以不謬其南者也然而苟無居敬存養之體雖欲尙德於言語動用不可能也苟無正位居體之德雖欲道於發號施令不可得也何況無革心時雍之意而其能爲淳厖盡業之民也乎然則一身之體在乎心百僚庶民之體在乎君君之所自以爲體者又在乎其燕涓蠖濩之中惟精惟一之心古人豈不以此心譬之北極之樞也乎亦不以人君譬之北辰之居其所也乎是知北極失其運則一己之云爲悖其常矣北辰失其所則天下之萬事隳其絰矣然則天人一理體用相須愚未見玄天一小星差失其躔而六氣絰綸猶能有序也愚也是以謂南之所以爲南不在於南而都在於其北也其北旣正則其南亦正南北旣正天經正矣何況其東西乎苟斯言也天地之南北只在乎吾身而可驗執事何必指九萬里而南爲者哉雖然旣有指南之問可無圖南之對乎遂爲之說曰傳不云乎爲天地文明之鄕爲萬物阜庶之宅者莫尙乎南方盖南者五方之一而純陽之所居也非如少陰少陽之不極其氣而與夫太陰之閉藏也則於位爲尊而於方爲正是以古人因其理而寓其象取之天而反之人事物非一而取義殊異於他方測驗不一而稱說特著乎傳記以是而謂之尊且正者良有以也雖然天道之輸贏不常方運之否亨隨變於是焉其氣之流行其運之敷施不能無失其常也則南之爲方固自若也而南之所以爲南則乖矣南之名豈亶使然哉嗚呼天人無二致吾未知南者天乎南之者人乎恭己履端對越而取法者何道也開牗向陽反躬而自悟者奚理也必也以吾之心良尊者而合彼方之尊焉以吾身之本正者而配彼位之正焉然後吾身之南始正而天地之南亦正矣古人盖曰致中而位天地豈欺我哉請援古而列之純陽胞陰者火而有五行之分配超厲飛散者徵而有五聲之屬火於是焉色之朱者火色而味之苦者火味也五常之體明乎節文則象火之照五事之言颺乎聲響則如火之揚也然而細究其理則音之明快者徵而色之明鮮者朱也味之爽烈者苦而常之文華者禮也五事之言又是人事之最明爽者也此豈人之强分也哉莫非火之爽明者乎河圖二七居南洛書之純九在南是則自然之常數而其實河圖則五行各旺生鄕故地二所生配成數而居前洛書則陰陽待對行化故天九望一而在上若窮其源言之長也圜丘必在正陽之郊黃道必由鶉大之陸其本則郊祭陽祀而南者乃乾之位也倚盖欹側而南陸實天之央也車不必獨指乎南而軒轅氏爲一時誅亂之計宅不必往居于南而伊祈氏有分方秩訛之命其實則蚩尤之國在於嶽南而大霧晦冥故爲此制也夏至之日近於魁南而圭表有測故有是命也人君向明而治斯有南面之儀王宮爲尊之居宜其向南而築其義則南北高低天地之勢也居高而臨卑向明之德自合焉墐北牗南居室之常也背暗而取明帝居之象自耦焉同類相求則陰得明於离陰陰不抗陽則地自縮而偏北其實則离爲陽中之陰而長物坤以老陰之變而成萬物類類以從其功乃成矣北爲坤之木位而讓南於天南爲水澤所歸而匯爲大壑天地定位造化以成矣玉戚之舞三成而行綴由南宮懸之設肆而篪業面南其豈非文化所被象德於二南而庭工北面取偏於考擊者乎南風爲長養之風宜其鮮愠而阜財運氣自陰方而倡宜乎變治而爲亂然而何時無薰而歌之者舜也地氣逆行而致之者誰歟南士執拗勿令爲相者固也半壁忸逆不欲偏安者宜矣然則茍有俊乂之人誠爲無方之當立奚問其南北也苟有重恢之志莫非用武之形勝何問其北南老人之星秋分而西沒則春分以前行乎北極何必常在乎南也靑袍之士飄泊乎他鄕則京華之望倚乎南斗只以身在乎南也然而氣偏於所臨故南人多壽是亦有宜於南方者歟志專於戀君故到處寄歟是固心懸於北闕者歟椘囚之音只是思鄕而已師曠之評只是審樂而已何必多論於言南之義也南方之强君子之强也孝子之行至大之道也寬柔君子皆可當之推極論之何方不準武昌之玩月者誰歟只取南樓一時之景越州之吠雪者何物盖以嶺南稀見之故也山南則背北而向南故以南而爲南水涯則北曝而南沍故以北而爲陽焉一定南北雖自不變而彼此南北各隨所居彼北我南我南彼北彼此一般何必多論凡此數節皆非有關於曰南之理者愚也不欲煩下分䟽大低南之爲方不偏於東不偏於西背北而居陽獨占純陽亭正之位偏鍾离火溫厚之氣故吾夫子固稱君子居强朱先生亦嘗禀氣篤生南方之殊異於三方者盖有故矣逮我聖朝尤有異焉嶺湖二南風氣淳明地靈磅礴盖非東西北之所可比也以言乎其人才則道德節義質天地鬼神文章知謀若河漢雷霆者前後軰出比肩接跡盖已四百年于玆矣何況貢篚之所出租賦之惟貞有似中州之楊荊而達河之航轉陸之輦相望乎水站郊驛則天廥國窖之阜積賓祭軍資之需用非二南盖無以取其足矣南方之有關於國家菀爲域中之名區果如何哉柰之何近年以來士習漸趍於浮薄絶乏溫厚之氣像民心日歸於渝濁斷無明正之俗習以斯而立於朝者烏可望黼黻王猷而鳴邦國之化也以此而治其業者何可望下安家室而從國家之敎也哉是以人才漸稀而登于明庭者尠物産亦殘而輸于王府者亦少若言士習則專事奔競不務實學而爲文則徒尙浮華遊學則徒趨勢利冠圓帝博都是穿窬之換面者也曳裾躡珠都是術緯之桅貌者也遂至於京國之人蚩笑而恥與之爲列修餙之士隱晦而恥言其居南士習旣如此則降於是而甚焉者亦無足怪矣是以自官府之胥吏以至坊曲之佃民擧皆頑狡渝墮則地方數千里擧爲柒黑世界素稱之南方旣如此陋矣則其餘三方尤可知矣以之而物産不阜貢賦多漏固無足怪矣此豈淸淑磅礴之氣獨厚於前偏薄於今也乎其何昔日之菀然者焂爲此零殘極弊之方也嗚呼嶺湖之山川自若也土地之生植依舊也何其絶無降生之靈蕃庶之風耶若以爲天地之生久矣氣漸澆漓而然也則其何遽變於十數年來耶若以爲兩南獨然而他方不然則愚也誠亦未之信也是何聖明在上而南方之化若是之甚嗇也嗚呼弊生有源捄弊有本愚也旣以南北體用之說陳于前矣寧敢曰不知弊源而不盡布其救之之本乎然則爲今日計者寧不思反求乎吾身靜正之體乎子思子所謂致中者卽愚所謂靜正之體也夫致中者聖人之極功也恭惟我聖上盖加已致力於精一之學極工於致中之道矣然歌其久執之際猶不免絲毫未盡而不及於用工之聖人者有如舜不及於堯者乎是以朝紳未必皆南士而未盡和一於難愼之際地氣未必自南先而未免北見於治乖之之漸此卽向所謂南之爲南專係於北者也竊願自今以往我聖上益盡執中之工於厦[亶+瓦]之上率卿士大夫是以中焉飭百姓群生以是中焉必至於天地位而後已焉則將見南方之士擧爲南方之强而海嶺之人皆慕考亭之學蔚乎其爲國之楨而【缺數句不可攷】南極之壽星愈輝東西北南遂皆熙皥於壽域天地矣其餘財賦庶物豈復有不得其常於偃草之薰風也哉篇已就矣又有賡焉經曰能以禮讓爲國乎何有禮者豈非南方之所屬乎今日之弊專由於不知禮讓而廉恥都喪若在上者先以禮倡則一國興於讓而爲堯舜之氓矣非獨南方之幸也抑亦西東之幸也執事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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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云云 【物失其常歟國失其政歟】 對執事問馬乎愚請以馬對雖然以馬喩馬之非馬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在易乾之係曰利牝馬貞釋之者曰牝馬者柔順而剛健者也柔順利貞而健行無疆君子之行也是則大人之以德行爲馬者也在大畜之損曰良馬逐釋之者曰良馬者剛健之馬也陽剛之材與上合志其進之速如良馬逐也是則賢人以之達行爲馬者也在渙之中孚曰用極馬壯釋之者曰馬者人之所托也托於剛中之材以極渙如得壯馬而致遠也是則邦家之以賢材爲馬者也是三馬者其所以爲馬之用則恒相得而益章而其所以爲馬之馬則亦區以別矣若乃柔貞以爲形質剛健以爲胎骨豢之以仁性之穀閑之以道德之郛者此所謂德行之馬也而遵彼周道範我駈馳則四海八荒皆入於車轍馬迹而可以馬上治天下矣道義以爲軀體經綸以爲鞅靽荷一顧而遇伯樂奮逸蹄而嘶靑雲者此所謂達行之馬也而馬鳴達意趍陪飛龍則覊金絡月增光於皇旒帝黻 而可以展足而恢天步矣至如剪拂其倜儻之姿餧養以紅粟之秩駕皇輿而淸蹕路鞬帝輈而振長策揚鏕於泰階之垣而一人有慶周馳於皇華之濕而萬民受賜則王國之賢材是亦一馬也然則達行之馬也者是人臣進而行道之馬也賢材之馬也者是人君任而致治之馬也而德行之馬也則又是君臣之所共必有而不可無者也爲人君者以德行爲馬然後在下者合志進速而可以致達行之馬也爲人臣者以德行爲馬然後在上者托志致遠而可以當賢材之馬也三馬合德明良相得載駕載御以復以驂則馬之道始亨而馬之物始阜百官有司之周爰執事率土庶民之奔走服役以至天地間含生蠢蝡之物無非三馬之同胞而共與也彼蘭筋赭沫虎文而龍翼者只是馬中之四足而鬣焉者也只可以備騎駟試駈馳而已雖然三馬而馬之然後鬣焉之馬始得爲馬而遂其生而盡其用矣若三馬而欠其一則鬣焉者亦不得以爲馬而不能遂其生而盡其用也然則欲言馬者必先以此三馬爲馬也故曰善觀馬者猶且馬況馬之馬也者乎愚嘗以是說相於馬矣其自負恒不在九方堙之下而每思長鳴於執策之前者久矣執事其欲聞馬之說乎請從隗始遂爲蒭蕘之言曰易係不云乎棄馬致遠以利天下盖馬者畜物而最良者也其形也毳也而風騣霧鬣而有文而有儀其生也戰也而彗性靈識可馴而可服五輅之儀仗八方之驂劇非此無以備物而表貴六軍之奇正九都之關堠非此無以騁武而傳命以之以越險踰夐以之而傳貨殖賄語其用則甚大語其功則甚博其所以異於犬豕牛羊麋鹿之止於犬豕牛羊麋鹿而已者有如是夫是以應天成象而爲靈爲瑞行地無疆而有德有能校人趣馬之官列於六典出入博豢之政詳於邦憲可以富軍國可以考理亂由是而謂之爲貴於六畜慈亶其然乎雖然馬之馬也在乎馬而馬之所以爲馬也在乎人馬之用也存乎馬而馬之所以爲用也存乎人苟徒知馬之馬而不知馬之所以爲馬則馬不能以自馬而馬不得以爲馬矣徒知馬之用而不知馬之所以爲用則馬不能以自用而馬不足以爲用矣物未嘗不有其生而亦未嘗常遂其生物未嘗不有其良而亦未嘗常濟其良嗚呼天封之苑雕胡之箕自若也馬乎馬無馬乎無馬金縷之纓鋈鈌之韁自若也馬乎馬不馬乎不馬夫以踐霜之蹄禦風之毛齕草而飮水者馬之所以性其性也而種別而成群則恒見於泰熙之世以權奇之精趹後之步逆景而薾雲者馬之所以良乎良也而呈端而稱德則必著於至治之日然則馬者馬乎馬之者馬乎故曰苟欲馬之蕃息莫若以政請質舊聞倚馬而對禀午靈而文明風驪負紫泉之圖從乾剛而健行霧鬃協純陽之象房星爲蒼龍之正中而其精是應則其性也有種也冀州來朔野之勁風而其畜是蕃則其性也有喜也邦國以井地出馬則問爾富之幾何數其馬而可知治政以及物爲效則頌君德之如何歌彼駉而可徵至若德無稱焉而有馬千駟將焉用之敬敎之君而有騋三千誠可歌也匪馬惟人優劣自見朕則修其玄默一日千里乘此安之我匪樂乎逸䂊異國名貢只可駕鼓乃祖有孫優劣何論陽精則必胞於陰德宜呈瑞於水中稱德者未必遇有德又何怪乎致逸藏之外府晉人之譎也貪賂賈禍虞氏之愚也虞則失矣晉未爲得也以二絶而見踂亂流之鮮終也佐三分而馳駈人物之相得也呂布何足道雲長眞天授也烏騅雖駿奈猾賊之天厭的盧旣得宜帝冑之利涉馬何與焉易地皆然赤文候日際峻德之欽明赭沫絶景値雄材之黷武在乎德耳不祥也亦宜若乃坦途長坂則馬戰愈於車戰平原廣陸則車戰勝於馬戰山磎阻寥林木蔽虧則馬與車俱不及於步兵矣致遠深入則牛運不如馬運引重不敗則馬運不如牛運兼負千斤倍日三百則馬與牛俱不及於槖駞矣雖然勝敗之由於奬三戰同一致也何必問地勢之便不便時措之隨其宜三運同一揆也何必問輸轉之善不善六種十二閑諸苑三十六豈非周漢之所以養者乎鳳厰龍厩五千匹爲上監駟監牧司三萬頃爲牧地豈非唐宋之所以養者乎御人乘而窮轍迹厩百駟而循古制前後之所愛一也而逆儉不同舞殿庭而上壽盃備邊急而抹禁庭古今之所受均也而逸勤亦懸然則歷代之沿革不同而得失互見人性之嗜好不同而賢愚自別欲究其詳言之長也維我東方雖僻處日出之鄕而開西之浿水以北則其山川風氣與冀丌北土相近而其馬皆堅勁而不耗敗關北之五嶺以北則其山川風氣與胡地之魚海狼居相近而其馬慣風寒而耐飢寒至若兩南之沿海州邑則其風氣水土同於中州之㜈墨海故常多虛腝而脆㥘然亦多有祿髮頳鬣能鳴善走而風流可受者亦或有精悍短小之不耗不虺者是以未必博易於境外而亦自致用於國中上足以充御厩中足以備官博下足以資庶人以至於三沿魚鹽海錯之交走於東西者兩界皮幣財貨之轉遷於都鄙者山邑正供之輸於漕庾者少大使行之修聘於大邦者與夫嚴戎備而扞外侮者皆是物也馬之爲用而不可關固與中國而無異也若稽羅麗二代新羅絶影之騶百濟果下之馬皆名於天下而至上貢中國則其詳不必枚擧而其皆有事於馬者槩可想矣至於勝國之世有如出使人員餔馬之制上自牢樞十匹下至於參外三匹各有等第以至大小官員覲親給驛之規皆有定式其所以養所以用之有具有典而皆有條理亦可想矣逮我聖朝德洽覆載而庶物咸若道存憲章而萬目畢張以爲御乘則不可以不備其物也以爲君子則不可以徒步而行也念邦政莫大於軍旅而必以騎士爲重念治道亦資乎傳命而必以馹郵爲要於是蒭牧之方大備而調用之典甚密內而設司僕之寺則有周氏交人之制焉外而設郵驛之官則有姬氏傳劇之則焉相水草之偏而布置牧場與漢唐之置閑設監同一揆也分三等之馬而節制乘匹與周禮之分閑計種同一道也丘甸之藏馬於民間爲上古之良法而我則命保伍而蓄馬矣前來之摠領於大臣爲往世之所稱而我則命重臣而提調矣措置密勿集前古而大成細大莫漏詔來後而昭垂魯駉斯臧頌思慮之無邪衛牝孔阜歌秉心之塞淵庶見後之元之字牝擯會而阡陌成群庶致貞觀之七十萬匹而駿良盈厩奈之何養之兪久而馬愈不蕃用之愈節而馬愈不給以至龍蛇之變戰馬不贍而湖南之起義者必須耽羅之追鹿則可知民間之無馬也苑牧之間駿駉不産而御乘之上供者未聞飛黃之服皀則可知天閑之無馬也若以近年言之則瀛州之公私馬渡海者一歲凡幾匹矣諸牧之大小乘出場者一歲凡幾群矣博易於胡地者亦不爲不多孳息於丘民者亦自以不少攷其數則愈匱而愈乏語其用則愈艱而愈索何況望其駿良駚蹄護威神而騰大厩哉內則司僕之馬多虛蒙外則郵驛之馬多殘缺以其齒則[馬+蒙]稚而不中等第以其力則癃羸而不堪騎服三十六之毛色不備吉馬焉何以比物上中下之四蹄不具佃馬焉何以齊足靑袍白頭徒步者幾人九貿八遷失業者何限道途之上百人一騎田原之間千里一群乃至各邑之官馬不備不足以迎送令長騎伍之陣馬不具不得以馴服操練擧皆僦乘雇服臨時取應是何望明之世馬政之耗弊一至於此哉盖牧馬之上供於可僕也官吏只見馬於貨賂而不見馬於王事伯樂撫紫燕而泣玉孔方譽款段而售朴椎可使爲壯病可使爲良蒭減於皀吏之花消而馬羸於空棧冷櫪料減於寺監之騙弄而馬斃於殘豆剩槽考閱不以其時戡簿不以其時此則內厩之馬所以不登也若乃各邑郵驛則驛丞受情賄進退馬而馬夫告病矣驛胥希官旨恣椎剝而郵隷受毒矣驛丞注情於知舊而駑馬冑進以馹厩達官勒賣於驛丞而胡馬多斃於水土郵官馹胥蟊賊於廩田而馬恒瘐於不飽水雲粉堞電轉於星 軺而馬恒斃於越站乃有有馬而不準常數者亦有無馬而臨時雇立者此則外郵之馬所以不阜也至於諸邑之牧場則牧監專不監護終歲一不到牧而待其秋登物阜方始赴任爬括其場屯之禾物箕斂其群頭之情賂旬月之間動逾千金乍到永去謾不知爲何官蒭積不具冬無所喂牢蔀不成霜雪難庇太半死太半失太半盗餘者能幾此則苑牧之馬所以不蕃也至若馬兵則漏富簽貧自不能備馬士族則弊奢則貧遂不能具騎院郵騙狡而行旅窶於盤纏則雖有馬而不騎四民失業而商賈耗其奇贏則雖欲畜而不得此則大小上下之馬所以不備也執事以爲孶息之不畜而然歟其言則可矣而愚未知其所以不蕃者何也執事以爲牧養之不勤而然歟其言則信矣而愚未知其所以不勤者何也嗚呼曺寶臣立馬社而後人取法王介甫創户馬而天下受弊此則馬政之不可不愼也以隴馬五千匹而致七十萬於貞觀之間者張萬世之功也以監馬二十萬而致四十萬於開元之際者王毛仲之力也此則馬政之在於得人也隨日中而節出入見於周禮相河汾而廣牧地載於宋史此則馬政之資於木養也若乃公私虛耗籍吏馬而補車騎者漢之馬政失其便於武帝之末也百官解體蒙虛實而耗太半者唐之馬政失其人於嗣聖之初也殿最不嚴於主帥而牧養之綱領廢優恤不加於士卒而牧養之節目廢者宋之馬政所以失其養於南渡之後也是知馬之蕃息必在於人存政擧之日馬之耗敗怕在於綱弛政壞之世然則救今日之弊者亦可以知所先矣誠使廟堂之上修邦政以嚴憲章嚴憲章以立紀綱立紀綱以勵廉恥勵廉恥以公銓選則馬不期於蕃而自蕃矣盖銓選公然後百官有司咸得其人而馬政之任者亦得矣廉恥勵然後貪墨嗜利之習革而馬政之賄賂者亦戢矣紀綱立然後大小臣子奉職不墮而馬政之勤慢者亦見矣憲章嚴然後壞廢之法擧考課之政公而馬政之弛墮者亦修矣是以有方召爲政於內外然後方見我馬之旣同有韓張相繼於執政然后方可致陣馬之若錦其本旣正其政旣擧則民自富而家有馬矣兵自精而軍有馬矣道路之待行人有禮而行旅有馬矣貨財之化居積有道而商賈有馬矣古人有言曰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余於此亦云若徒區區於主牧之任蒭牧之場而已則如對癕得濃隨決障川非識時務之所貴也執事以爲如何愚請盡喩馬之說而玉振之環東土數千里是大牧場也八區民物之林林芸芸是大馬群也州之長邑之令是大牧子也八方伯爲大群頭廟堂宰爲大司馬若使牧子以保馬之心保百姓而盡其字養之方群頭以課牧之法課令長而嚴其怠慢之誅其大司馬乃以擇馬之道擇人才而審相試之法韅靷之和鑾之隨所用而盡其材然後我聖上卽牧意馬於半畝塘邊御德輿於靈臺之畔周流普觀去其馬者而已將秉心塞淵不足頌而騋牝三千不足誇矣執事又以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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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壽峰下見連理樹 二幹共連理枝葉何參差山行忽見之佇立獨移時歎息竟無言樂子不相離【悼亡後自白雲庵往棲萬景臺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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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江感吟 炎風千里道去去爲誰往念彼洛浦人已矣乖心賞默算斷絃日秣馬錦江上可羨含泥燕飛飛猶自兩漁童不知恨橫笛送哀響美哉萬頃波無以洗悲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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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黑土坪懷伯氏 龍湫蕭瑟水聲哀日高霧散楓枏紅去年拜墓聯騎歸天寒凍雨來濛濛嗚呼我今重到此矯首但見孤飛鴻愴時感事一長哭山木爲我生悲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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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槎哭兄墓 可憐博遊山七年今始來下馬步榛徑孤墳鎖泉臺逝者豈必知我淚如波頹徘徊竟何見日暮松聲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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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和畸庵留贈韻 聚散從來無定期綠荷香露瀉秋池故人此夕遊何處隱几吟君七字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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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謝剡湖【陳公景文】來訪 自遠來相訪看山把酒時貧家無所贈秋菊滿東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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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訪李見卿 從前交契兩相知把酒還題七字詩瑞石山靈應記我夕陽溪上醉歸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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宿宗家有感 窓壁依然尙記前慈顔已隔九重泉當年勸飯言猶昨默數寒更獨不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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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省醉贈分沙李公【聖求】 昔年遠別傷心日江上丹楓千萬枝此夕相逢把酒處龍池晩雨細如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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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應閑上人還三角山次軸中韻 五年南國憶秦關華岳蒼然入夢間羨爾去來無滯礙水雲蹤跡一筇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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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학봉79)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 上鶴峰金副題提學誠一書 성주80)께서 왜국에 사신의 임무를 받드신 뒤로 마음이 온통 걱정스러워 일찍이 먹고 쉬는 사이에도 감히 잊지 못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거센 파도를 잘 건너시고, 또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81) 돌아와서 임금의 은혜에 감응하고 임금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셨더군요. 이는 실로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신물(神物)이 호위한 바이니, 변변찮은 저는 공경히 박수를 보낼 뿐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저는 행실이 신명(神明)을 저버려서 이런 기이한 화를 만나 칠십이 되신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삼천리 밖에 유배되었습니다. 불효의 죄는 스스로 속죄할 길이 없고, 엎어지고 고꾸라지는 고통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 겨우 죽음만 모면했으니 다른 일이야 어찌 말씀 드리겠습니까. 믿을 것은 하늘의 태양 같은 임금의 밝고 밝음이 엎어진 항아리의 속의 어둠82)을 비추어 주시는 일 뿐입니다.별지(別紙)에 적은 슬픔과 간절함은 오로지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마음을 믿고 사사로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니, 한 번 보시고 불에 태워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쯤 다시 빛나는 모습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고 나니, 다만 더욱 목이 메일 뿐입니다.별지기축(己丑 1589)년 겨울에 있었던 일83)을 생각하니 여섯 부자(父子)84)가 함께 중대한 옥사로 모함을 받을 적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한마디 말도 위로해준 적이 없었으나 오직 우리 성주께서 편지를 내려 위로해주셨고, 우리 일가족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기에 이르자 그것을 효성이 응한 소치로 돌리셨으니, 군자의 마음이 평탄하거나 어려움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은 점에 삼가 탄복하고, 또한 보잘것없는 제가 어찌 성주의 지우를 입어 이와 같기에 이르렀는지 감탄하였습니다.스스로 도깨비나 살 것 같은 시골에 들어가 흙집에서 흙덩이처럼 엎드려 살면서 예전의 잘못들을 들추어보니, 대체로 평생의 제 행실은 단지 선(善)을 좋아하나 밝게 분별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나 미워함이 지나치게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소인배들이 농간을 부리고 말을 만들어내며 기회를 엿보아 모함에 빠지게 하여 그 재앙이 장차 친족을 모조리 죽일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남쪽 지방 선비들의 습속이 괴팍하고 심술이 그르다고 알려져 여우와 쥐새끼85) 같은 무리가 우르르 모여 벼룩이 호랑이나 표범에 달라붙은 형세를 이루어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웠거늘, 성상께서 위에서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86) 보이지 않는 곳까지 통촉하시어 감히 그 흉악한 생각을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이요, 사림(士林)의 행운입니다.아! 정적(鄭賊)87)은 애초에 마을 입구를 막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둑이 아니라 진실로 고상한 말로 사람을 속이는 간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박학다식하여 사물의 이치에 막힘이 없다는 명목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벼슬이 청요직에 이르렀으니,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숨겨진 흉악함과 간특함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저와 같이 어둡고 아둔한 자야 어찌 그 사람이 거짓을 꾸며 온 세상을 속일 줄 알았겠습니까.예전 도성에서 노닐 적에 율곡 선생께서 일찍이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쪽 지방에서 학문하는 선비 중에 정철이 최고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평소 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그 사람됨을 보고 싶어서 을유(乙酉 1585)년 봄에 어버이를 뵈러 도성에 올라갔다가 비로소 한번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과장되고 허황되었으며, 급기야 경연(經筵)에서 율곡 선생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일찍이 형제간에 말하기를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옛 사람도 경계한 일88)인데 빛과 어둠처럼 서로 등지게 되었으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그를 매우 의심하였기 때문에 왕래하고 지나면서 일찍이 한 번도 그 문에 이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술(丙戌 1586)년 사이에 쇠약한 가문에 괴이한 변고가 있고 의론이 분분할 때 정적이 상도(上道)89)에 있으면서 시비를 주장하므로 도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과연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그 일의 전말을 논하였을 뿐이니, 어찌 받들어 존중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성주께서 나주에 계실 때 일찍이 정적의 심술을 논하였는데 제가 추종하여 그의 단점을 지적했던 일이 또한 많았습니다. 결국 한 번 얼굴을 보고 한 번 편지를 보낸 일로 마침내 큰 재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실로 운명이 기구해서이니 어쩌겠습니까. 이 한 몸의 길흉화복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겠지만, 다만 연로하신 아버지의 노년을 생각하면 밤낮으로 통곡하게 될 것이니 자식 된 입장으로 마땅히 어떤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대개 겸허하고 선을 좋아하는 선비 중에 세상을 속이는 사람에게 연루되어 큰 참화를 입은 사람이 많으니, 조정에 어찌 그 원통함을 마음으로 아파하고 한랑(寒朗)90)처럼 다스려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속으로 이해를 따지는 마음이 있고 겉으로 행적을 의심하여 그러한 일을 좌시하며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구원하지 않으니,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비록 소득이 있는듯하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오직 성주께서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키고 믿음은 신명과 통하여 이해와 행적을 초월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신다면 반드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갖고 한랑으로 하여금 앞시대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실 터인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주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곁에서 듣기로 조정에서 관대한 법을 적용하고 성스러운 덕이 또한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을 수 있는 한 번의 큰 기회입니다. 원컨대 성주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고 빠르게 도모하소서. 서애 유성룡 상공(相公)께서 조사하여 국문하시는 것이 공평하고 분명하여 잘 처리되어 석방된 자 또한 많으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고 민심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도(斯道)를 붙들고 나라의 명맥을 연장하는 책무를 더욱 사양하셔서는 안 됩니다. 원컨대 성주께서 협력하여 세상에 없던 공적을 도모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自城主奉使海國, 一心憂虞, 未嘗食息之敢忘, 今聞利涉鯨濤, 又能專對, 歸膺明恩, 受天寵光. 是實誠貫金石, 而神物所拱衛, 區區欽抃, 豈可以言語形容. 某行負神明, 遘此奇禍, 違七十老父, 拘三千里外, 不孝之罪, 無以自贖, 顚沛之苦, 殆不可堪, 僅免一死, 他何足言. 所恃者, 天日昭明, 應照覆盆之幽耳. 別紙悲懇, 專恃愛念之眷, 直討幽蘊之私, 一覽付丙, 毋掛他眼. 安得更接儀光? 訟此幽鬱, 但增嗚咽而已.別紙憶在己丑冬, 六父子俱陷重獄, 所識朋舊無一言以慰者, 而惟我城主賜書存撫, 至於保全一家, 歸之於孝感所致, 欽服君子之心不以夷險易操, 而又歎無狀何以見知於明公, 至於如是耶. 自入魑魅之鄕, 塊伏土宇, 抖擻前愆, 大槪平生行己, 只是好善而卞之不明, 惡惡而嫉之太甚, 故群小輩, 作弄造語, 乘機傾陷, 其禍將至赤族之地, 而況又南方士習壞心術誤知見, 群聚狐鼠之輩, 虱附虎彪之勢, 上自搢紳, 下及韋布, 盡爲網打之計, 而聖明在上, 离明燭幽, 不敢恣其胸臆, 是則宗社之福, 士林之幸也. 噫! 鄭賊初非逄州劫人之盜, 而實是高談罔人之奸. 故在當世以博洽鳴世, 而官至淸要, 雖智者, 不能逆探包裝凶慝, 況如生之昏愚, 豈知僞情飾冒, 以誣一世也哉. 在昔遊洛時, 栗谷嘗謂生等曰: "南中學問之士鄭爲最云." 以生平日好善之心, 嘗欲見其爲人, 而乙酉春覲親上洛, 始一見焉. 聽其言論浮誇, 及聞筵中攻栗谷已甚之語, 嘗語兄弟間曰: "不遺故舊, 古人所戒, 幽明相負, 乃至是耶." 心甚疑之, 故往來經過, 未嘗一至其門. 而丙戌間, 衰門怪變, 議論紛紜時, 鄭賊在上道, 主張是非, 故自京歸路, 果爲一書以論其事之顚末而已, 有何推重之意. 城主在羅時, 嘗論此賊之心術, 生之從以短之者, 盖亦多矣. 竟以一面之分一度之書, 而終陷大禍, 是實氣數之奇蹇, 奈何奈何. 一身禍福, 且當聽天, 而只念老父臨年, 日夜號痛, 爲人子者, 當作如何懷抱. 大抵虛恢好善之士, 坐誣欺世之人, 最被慘禍者多矣, 朝廷之上, 豈無心傷其寃, 欲其理出如寒朗者, 內有利害之心, 外爲形跡之疑, 坐視其然, 而不敢出一言以救之, 其於保身之道, 雖似得矣, 愛君憂國之誠, 恐不若是也. 惟明公正色立朝, 誠足以動天地, 信足以通神明, 能超乎利害形跡之外, 而一以愛君憂國爲己任, 則其必思有以昭雪幽寃之責, 而不使寒朗專美於前, 不審明公其亦念及否. 仄聞朝廷用寬典, 聖德又日新, 此正昭雪幽寃之一大機. 願明公深量而亟啚之. 西厓相公按鞫平明, 理出且多, 衆志咸服, 人心屬望, 扶斯道壽國脈之責, 益不可以辭也. 願明公恊贊之, 以圖不世之功, 幸甚幸甚.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8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ㆍ초유사ㆍ경상 우도 관찰사ㆍ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학봉집(鶴峯集)》 등이 있다. 성주(城主)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가리킨다.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 원문의 '전대(專對)'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시경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사신 가서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말이 보인다. 엎어져서 …… 속까지 원문의 '복분(覆盆)'은 태양이 밝아도 땅에 엎어 놓은 동이 속에는 태양빛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억울한 사정을 윗사람이 몰라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해와 달도 비치지 못하는 곳이 있고,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찌 이 때문에 성인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천하에 신선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삼광이 엎어 놓은 동이 안을 비추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격이다.[日月有所不照, 聖人有所不知. 豈可以聖人所不爲, 便云天下無仙. 是責三光不照覆盆之內也.]"라고 하였다. 기축년(1589) 겨울에 있었던 일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났으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동인이 서인의 박해를 받은 옥사를 말한다. 여섯 부자(六父子) 아버지 나사침(羅士忱), 첫째 나덕명, 둘째 나덕준(羅德峻), 셋째 나덕윤(羅德潤), 넷째 나덕현(羅德顯), 다섯째 나덕신(羅德愼), 여섯째 나덕헌(羅德憲)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우와 쥐새끼 원문의 '호서(狐鼠)'는 여우와 쥐를 이른다. 본래는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안에 사는 여우와 사당에 사는 쥐[城狐社鼠]'라는 고어(古語)에서 온 말로, 흔히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소배(奸小輩)에 비유된다.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 원문의 '이명(离明)'은 곧 일월(日月)의 밝음을 말한 것으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 상(象)〉에는 "밝은 것 둘이 이를 만드니, 대인이 그것을 인하여 밝음을 이어서 사방에 비추니라.[明兩作離 大人以 繼明 照于四方]" 하였다. 정적(鄭賊) 기축옥사를 이끌었던 정철(鄭澈)을 말한다. 오랜 …… 경계한 일 《論語》의 〈泰伯〉에 나오는 말로 "군자가 친족에게 두터이 하면 백성들이 인에 흥기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투기하지 않는다.〔君子 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고 하였다. 상도(上道) 남원(南原)ㆍ순천(順天) 일대의 전라도 동반(東半) 지역을 말한다. 한랑(寒朗)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가 백기(伯奇)이다. 명제 때 초왕(楚王) 유영(劉英)의 역옥이 발생하였는데, 유영의 무리인 안충(顔忠)과 왕평(王平) 등이 함께 역모를 하였다고 끌고 들어간 사람 가운데 수향후(隨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郎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리(鄧鯉),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建) 등이 있었다. 한랑은 이때 알자수시어사(謁者守侍御史)로서 이 옥사를 다스렸는데,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들 황제가 몹시 노한 데 겁을 집어먹고서 이들이 역모를 하였다는 내용으로 조서를 꾸몄으나, 한랑만은 이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사실대로 말하여 풀려나게끔 하였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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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서원122) 봉안 제문 五賢書院奉安祭文 【金鶴峰誠一知州時, 創建書院於州西大谷洞, 未訖工. 任公允臣來代踵成 以萬曆丁亥十一月二十二日奉安】 【학봉 김성일이 나주 목사123) 시절 나주의 서쪽 대곡동124)에 서원을 창건하였는데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임윤신125)이 후임으로 부임하여 공사를 이어 완성하여 만력 1587년 11월 22일에 봉안하였다.126)】기자의 홍범127)이 전해지지 않아 箕範失傳문장과 충심은 실마리가 끊어졌는데 文忠絶緖오직 우리 다섯 현인들께서 惟我五賢우리나라에서 앞장서서 도를 이끄셨네 倡道東方《소학》의 글 속에서 小學書中천기128)를 신묘하게 깨달았네 【한훤당 김굉필】 妙契天機【寒暄】깊은 공부로 벗에게 도움을 주고129) 功深麗澤덕이 온전하여 효도하고 공경하였네 【일두 정여창】 德全孝悌【一蠹】그 근원이 분명하여 有的其源우리나라를 동주로 기약하였네130)【정암 조광조】 期我東周【靜庵】독실한 학문으로 경계하고 경계하며 學篤箴警간절한 뜻으로 임금께 계옥하였네131) 【회재 이언적】 志切啟沃【晦齋】성현의 깊은 도를 천명하여 闡揚聖蘊진실로 집대성 하였네【퇴계 이황】 展也大成【退溪】태어난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生雖異時도는 한가지로 귀결되니 道則同歸우리 소자132)로 하여금 俾我小子밤이 아침이 돌아오듯 하게 하네 如夜復朝진실로 선생들께서는 允矣先生만세의 법도를 만들어 萬歲作程잘 받들어133) 어긋남이 없었으니 靈承不爽마치 물이 땅 위에 흐르는 것과 같았네 如水在地이에 비로소 계획하여 爰始爰謨이 재실에 함께 배향하고자 合享斯室좋은 날과 좋은 때를 잡았으니 吉日辰良서원의 모습 벌써 엄숙해보이네 廟貌旣嚴정결한 제수134)가 향기로워 蘋藻維馨정성스러운 뜻에 감통하네 誠意感通경건히 진설하여 제수를 올리니 式陳明薦강림하여 굽어 살펴주소서 尙克鑑臨 箕範失傳, 文忠絶緖,惟我五賢, 倡道東方.小學書中, 妙契天機.【寒暄】功深麗澤, 德全孝悌.【一蠹】有的其源, 期我東周.【靜庵】學篤箴警, 志切啟沃.【晦齋】闡揚聖蘊, 展也大成.【退溪】生雖異時, 道則同歸,俾我小子, 如夜復朝.允矣先生, 萬歲作程,靈承不爽, 如水在地.爰始爰謨, 合享斯室,吉日辰良, 廟貌旣嚴.蘋藻維馨, 誠意感通.式陳明薦, 尙克鑑臨. 오현서원(五賢書院) 1583년, 유림이 상소를 올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을 모실 서원 창건을 허락받았다. 당시 나주 목사로 있던 김성일(1538~1593)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이듬해인 1584년에 금양서원(錦陽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되었다. 김성일에 이어 나주목사로 임윤신이 부임해오자 나덕준 등이 발의하여 1589년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4위를 추가로 배향하고 명칭을 오현사(五賢祠)로 바꾸었다가 정유재란 때 소실된 뒤, 1608년(광해군 원년)에 중건하고 1609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경현(景賢)'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나주 목사 김성일은 선조 1584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였다가 1586년에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대곡동 현재는 나주의 경현동 부근을 말한다. 임윤신 1529~1588.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경룡(景龍)이다. 1585년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7년에 나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 봉안하였다. 《일두집(一蠧集)》 부록(附錄)에 "학봉 김성일이 나주(羅州) 수령이 되어 오현(五賢)을 추모하여 주(州)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경현서원(景賢書院)을 건립하였는데,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 임윤신(任允臣)이 후임으로 부임하여 공사를 이어 마무리하고 제사를 올리고, 선비들의 학문 수양 장소로 삼았다. 〔鶴峯金誠一知羅州, 追慕五賢, 建景賢書院于州西大谷洞, 未訖而任允臣來代踵成, 設俎豆, 以爲士子藏修之所.〕"는 기록이 나온다.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원문의 '기범(箕範)'은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전해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을 가리킨다. 천기(天機) 만물 속에 내재(內在)한 하늘의 기틀, 즉 자연의 이법(理法)을 뜻한다. 벗에게 도움을 주고 원문의 '이택(麗澤)'은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동주(東周)로 기약하였네 이상적인 나라인 옛 주(周)나라의 문물제도를 우리나라에 다시 일으키겠다는 포부를 이른다. 동주는 본디 동쪽 노(魯)나라에 주나라의 도(道)를 일으키겠다는 말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인 공산불요(公山弗擾)가 일찍이 공자를 불렀을 때 공자가 가려고 하자, 자로(子路)가 하필 공산씨(公山氏)에게 갈 것이 있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기므로,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공연히 불렀겠는가. 만일 나를 써 주는 자가 있다면 나는 동쪽 주나라를 만들 것이다.[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陽貨》 계옥하였네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한다는 뜻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셔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하였다. 소자(小子) 원문의 '소자(小子)'는 일반적으로 제자, 자식, 임금의 겸칭어로 사용되나, 여기에서 말하는 소자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고 후학의 의미로 보인다. 잘 받들어 원문의 '영승(靈承)'은 《서경》 〈다방(多方)〉에 "능히 백성을 잘 받들지 못하며[不克靈承于旅]"라고 한 말에 나온다. 경결한 제수 원문의 '빈조(蘋藻)'는 모두 물풀의 이름으로, 옛 사람들은 이를 채취하여 제수로 사용하였다. 《시경(詩經)》 〈채빈(采蘋)〉에 "남간의 물가에서 빈을 캐고, 저 도랑에서 조를 채취해 오네.〔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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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주하 八洲河 가을 강은 맑고 얕으니 참으로 좋아할 만한데게다가 그물에 걸린 은빛 물고기도 신선하네문득 생각건대, 한강의 낚시질하는 벗들몇 사람이나 달밤에 배에 올랐을거나 秋河淸淺正堪憐更有銀鱗入網鮮却憶漢濱釣魚侶幾人乘月上江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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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종 26년이다.2)】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먼 길을 내달려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關北)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 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성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4)에 숨자, 민가의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성의 현문(懸門)에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 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을 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국세필 등 13인을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보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자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노리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과 길주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那)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績)》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5)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다투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사양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노략질하여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 보낼 일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격려하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고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일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사대부들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의 장좌(將佐)가 이따금 불려가 매질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여 공도 없이 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정문부가 비로소 군병을 해산하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고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한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정예병으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으로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6) 같은 옛 영 영토가 오랑캐의 땅7)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8)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여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바가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출신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출신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출신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萬曆二十年 【宣宗二十六年】 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 明 鏡 富等鎭, 入曾寧, 擄王子, 從渡江, 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渡江, 歷入穩城 慶源 慶興 沿海路, 還趨鏡城. 於是, 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 鏡城則寺奴鞠世弼 【世弼, 乃是官奴, 寺字, 或誤, 疑卽寺奴, 而移屬官奴】 爲首,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 八月, 淸正使一偏將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 安邊 各置重兵, 以爲聲援. 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獲脫免. 遂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彥 輸城察訪崔東望 謫人韓伯謙 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 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 文孚復窘, 匿禦亂里, 民家儒生等, 聞而赴之. 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 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 及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 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 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 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糧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己者, 爲裨將. 【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 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 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斬, 以徇諸鎭. 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 "本興義兵, 國耳, 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 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 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 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 又激見龍等主文孚軍, 六易將, 軍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 其間誤戰機多, 以此故. 見龍初恇怯,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 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止之. 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 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 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嗚呼, 關北俗, 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 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 從事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 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 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反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 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濕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紀其實者. 頃於從役之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飾,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槪, 僭付于事蹟之末. 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 奉事吳大男, 鏡城出身權管姜文佑, 訓導李生鵬壽 【戰死】 朴銀柱, 儒生崔配天 池達源 朴惟一 金麗光 【戰死】 吳允迪, 富寧出身車應麟 朴克謹, 儒生金銓 金鏡 車得道, 慶源人鄭允傑 應聖父子, 鏡城出身金嗣朱 崔敬守 南繼仁 【本官奴】, 穩城余貞, 【本官奴, 癸未從申砬有戰功, 至是死於嶺東之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자는 여고(汝固)이며, 호가 택당(澤堂)이다. 장유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종 26년이다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여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팔문장가로 꼽혔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준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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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초 【농포 정문부】 狀啓抄 【農圃 鄭文孚】 장계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병조 좌랑(兵曹佐郎) 서성(徐渻)과 정배인(定配人) 나덕명(羅德明)이 외촌(外村)에서 마을에 사는 군정(軍丁)들을 잘 타이른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모두 성 【즉 경성(鏡城)이다.】 으로 들어갔습니다. 【만력 20년인 임진년 10월 14일이다.】신이 대장에서 체직된 뒤에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大將)으로 삼았습니다. 지난해 12월 그믐께 정현룡이 겸절도사(兼節度使)에 차임되어 육진(六鎭)을 순하였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로 대장을 개정(改定)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巡察使)의 관문(關文)에 오응태를 대장에서 체차(遞差)하고 전처럼 평사(評事)를 다시 대장으로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 겸 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체차되어 북쪽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1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도사가 왜적을 토벌하는 정예병을 자기가 거느리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져 왜적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이러한 때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지극히 염려되므로 신도 관문을 보내어 병사를 모아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각별히 사목(事目)을 주어 그 숫자대로 병사를 모으게 하는 일로 누군가를 방어사(防禦使)라 칭하여 정현룡에게 내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언뜻 들으니 팔도 중 남도(南道)에서는 이미 과거가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유독 이 북도(北道)에서는 과거를 보러 갈 수 없으니 진작시키려는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순찰사가 임금께 아뢰어 처치해 달라고 청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변변찮은 소관(小官)이 임금께 아뢰어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내(道內)에서 의병을 일으킨 우두머리인 경성에 사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驥秀), 경성에 정배(定配)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富寧) 좌수 김전(金銓) 등이 온 힘을 다하여 내달려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들을 잘 타일렀으니 지금까지 일을 거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바입니다.지난번에 상(賞)을 논할 때 과거(科學)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던 유생들 가운데 금위(禁衛)를 임명한 일을 원통하게 여기는 듯하여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했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본부 역시 큰 도회지라서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태반이나 마련하는데 진에 머물고 있는 가장(假將)인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은 책응(策應)하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치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잘 아뢰어 주소서. 만력(萬歷) 21년 계사(1593), 1월 16일." 略曰 兵曹佐郞 徐渻 定配人 羅德明 在外村, 曉喩村居軍丁爲白如乎, 節段竝只入城 【卽境城】 爲白有齊云云. 【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 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 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 在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 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 入歸是如爲有臥乎所,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加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 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 仄聞爲白乎矣, 八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 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 座首徐遂 李麒壽, 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 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 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厼, 詮次以善啓向敎是事. 萬曆二十一年癸巳, 正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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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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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금봉유사》의 뒤에 쓰다 題錦峰遺事後 나의 외가인 나주 나 씨(羅州羅氏) 상사(上舍)84) 나두동(羅斗冬) 종형과 삼종 나두흥(羅斗興) 아우가 함께 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선고조(先高祖) 금호공(錦湖公), 증조 금암공(錦巖公), 금봉공(錦峰公) 형제의 행적에 대해 추술(追述)한 일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지극한 뜻과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감히 임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내준 여러 기록을 상고하여 외람되이 그 사이를 고쳐85), 금호와 금암 2대의 〈사실기(事實記)〉를 지었다. 돌아보건대 금봉의 사적은 상사 종형이 장초(狀草)한 것으로 절로 편의 체제를 이루어 처음과 끝이 차서가 있고 어의(語義)에 흠이 없었다. 끝부분에 증조 금암공의 제문을 인용하고 그에 대하여 "여러 번 이 글을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라고 쓴 글 또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도외시하지 않는 뜻에서 그 가운데 나아가 더러는 한 글자를 빼기도 하고 더러는 한 글자를 바꾸기도 한 곳이 약간 있었을 뿐이니 어찌 굳이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삼가 살펴보건대 금봉은 금암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지만,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같고, 스승을 따른 바가 같고, 추구한 바의 뜻이 같고, 강론한 바의 학문이 같고, 힘쓴 바의 행실이 같고, 세상의 변란을 만난 바와 어려움을 겪은 바도 같다. 어려서는 공손하고 장성해서는 글을 짓고 늙어서는 덕을 쌓아 당세 훌륭한 사람과 군자들에게 어질다는 칭송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었으나, 다른 것이라고는 생사의 연월과 벼슬 경력과 계급 차서에 불과하였다. 옛날 이천 선생(伊川先生)86)이 명도(明道)87)의 행장(行狀)을 쓰고 문인들에게 "나의 도는 거의 명도와 같으니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글에서 구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지금 금봉의 뜻과 학업, 품행과 도의는 그 평생을 개괄해 볼 때 실로 금암과 같다. 나는 금암의 사실기를 지은 뒤 또 붓을 옮겨 금봉의 사실기를 짓고자 했으나 한 편의 같은 글로 귀결되었다.나는 상사 종형에게 장초한 글의 제목을 고칠 것을 청하며 "금봉의 사실기와 금암의 사실기가 모두 전하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 글을 합하여 서로 참고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이러한 말을 책 뒤에 써서 돌려보낸다. 나는 금암의 생증손(甥曾孫)이다.임인년(1662) 봄 3월 하순에 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 쓰다. 吾外氏錦城羅上舍斗冬從兄曁三從斗興弟, 幷抵重元書, 見層以先高祖錦湖公 曾祖錦巖 錦峰兄弟公行蹟追述事. 重元感至意勤懇, 不敢辭以非其人, 按所寄示諸錄, 猥檃括其間, 爲錦湖 錦巖兩世事實記. 顧錦峰事, 上舍兄所爲狀草, 自成篇體, 首尾有次, 語意無欠, 至末端引祭曾祖錦岩公文而爲之語曰 :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云者, 亦足令人感動. 第以不自外之意, 就其中或有省一字易一字若干處而已, 何必改作爲哉. 竊觀錦峰少錦岩四歲爲弟, 受庭訓同, 遊師門同, 所求之志同, 所講之學同, 所勉之行同, 遭罹世變, 履險涉艱又同. 幼而遜弟, 長而有述, 老而蓄德, 于躬爲當世鉅人君子之所賢, 始終無不同, 其所不同者, 不過生卒年月官歷階次焉耳矣. 昔伊川先生狀明道行, 與門人言 "我之道, 蓋與明道同, 欲知我者, 求之此文, 可也." 今夫錦峰之志業行誼, 槪其平生, 實與錦巖同. 重元旣爲錦巖事實記, 又轉其筆, 欲爲錦峰有所云云, 則歸疊一件文字也. 已請以上舍兄所爲狀草改題目曰 : "錦峰事實記與錦巖事實記, 俱傳, 使觀者, 合兩文有以互看參考之爲善也." 遂以是說書其後歸之. 重元, 錦巖之甥曾孫也. 歲壬寅春三月下澣, 外後屬八溪鄭重元題. 상사(上舍) 생원이나 진사를 일컫는 말이다. 고쳐 원문 '은괄(檃括)'은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기구를 말하니, 여기에서는 다소의 수정을 가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굽은 것을 잡는 것을 은(檃)이라 하고, 모난 것을 잡는 것은 괄(括)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에, "그 굽은 것이 발라지게 되는 것은 은괄의 힘이다.〔其曲中規, 櫽括之力.〕" 하였다. 이천 선생(伊川先生)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으로, 정이(程頤, 1033~1107)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명도(明道)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로, 정호(程顥, 1032~1085)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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