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종 26년이다.2)】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먼 길을 내달려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關北)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 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성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4)에 숨자, 민가의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성의 현문(懸門)에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 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을 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국세필 등 13인을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보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자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노리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과 길주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那)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績)》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5)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다투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사양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노략질하여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 보낼 일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격려하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고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일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사대부들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의 장좌(將佐)가 이따금 불려가 매질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여 공도 없이 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정문부가 비로소 군병을 해산하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고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한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정예병으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으로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6) 같은 옛 영 영토가 오랑캐의 땅7)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8)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여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바가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출신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출신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출신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萬曆二十年 【宣宗二十六年】 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 明 鏡 富等鎭, 入曾寧, 擄王子, 從渡江, 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渡江, 歷入穩城 慶源 慶興 沿海路, 還趨鏡城. 於是, 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 鏡城則寺奴鞠世弼 【世弼, 乃是官奴, 寺字, 或誤, 疑卽寺奴, 而移屬官奴】 爲首,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 八月, 淸正使一偏將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 安邊 各置重兵, 以爲聲援. 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獲脫免. 遂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彥 輸城察訪崔東望 謫人韓伯謙 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 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 文孚復窘, 匿禦亂里, 民家儒生等, 聞而赴之. 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 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 及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 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 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 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糧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己者, 爲裨將. 【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 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 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斬, 以徇諸鎭. 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 "本興義兵, 國耳, 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 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 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 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 又激見龍等主文孚軍, 六易將, 軍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 其間誤戰機多, 以此故. 見龍初恇怯,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 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止之. 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 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 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嗚呼, 關北俗, 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 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 從事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 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 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反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 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濕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紀其實者. 頃於從役之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飾,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槪, 僭付于事蹟之末. 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 奉事吳大男, 鏡城出身權管姜文佑, 訓導李生鵬壽 【戰死】 朴銀柱, 儒生崔配天 池達源 朴惟一 金麗光 【戰死】 吳允迪, 富寧出身車應麟 朴克謹, 儒生金銓 金鏡 車得道, 慶源人鄭允傑 應聖父子, 鏡城出身金嗣朱 崔敬守 南繼仁 【本官奴】, 穩城余貞, 【本官奴, 癸未從申砬有戰功, 至是死於嶺東之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자는 여고(汝固)이며, 호가 택당(澤堂)이다. 장유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종 26년이다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여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팔문장가로 꼽혔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준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