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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宋素心聖求寄贈韻 我友題詩寄海鄕方知交道未嘗亡應思先世通家好故向窮途借壁光千里紫宸懸夢想二年丹府守封疆回頭莫道遮重嶺每夜相思月滿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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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眞寶岦上京 天涯相見卽相諶幾度臨觴動越吟聚散古來知有數別離今日自傷心孤城近海波聲壯涼露侵窓夜氣深洛下親朋如問我爲言華髮已盈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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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殿春帖字 三陽回節始萬象建春初雪裡梅香動風前柳意舒靑丘蒙至澤紫殿下寬書靈沼層氷解波心有戲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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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安季彦五友堂韻 誰刈荒榛爲結廬情知此趣昔人如冷冷綠玉包貞色鬱鬱蒼髯伴索居冷蘂最宜霜後徑暗香偏襲月邊除臨池更見花君子佳賞隨時未覺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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尼山路中望鷄龍山 ▦左名山意象豪秋空爽氣襲征袍宿雲散盡朝陽出萬岫千峰各自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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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洪樂夫【命元】韻 雪擁終南易夕暉參尋聊與故人期可憐多少要津客何似閑窓一局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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賦蠟梅贈蔡善述 靑枝白蕊脫緇塵乍見偏驚滿座人不用燈前重相笑世間何限假爲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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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蘆嶺 桃花流水自潺潺蘆嶺參雲路九盤南去北來俱有戀鏡中嬴得鬢毛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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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峰寺留別梁士立諸友 溪水泠泠去涼風颯颯時停驂傾美酒摻手問前期高岫歸雲斂寒林暮景移平生丈夫志臨別不須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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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月汀先生 象望虛臺席元功上景鍾死生公自達文獻我誰宗天象奎星暗丘原馬鬣封先銘蒙不朽感涕豈無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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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李正郞一吾【涵一】韻 春到天街柳色新客中懷抱與誰親謾將濁醑傾深盞忽有淸詩自故人十載交情殊世俗一時郞署共風塵瓊瑤欲報慙非似吟倚晴窓戀想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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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李學士天章韻【天章卽月沙之胤與余情好有同一家】 流光何忽忽行色任遲遲酒熟無親奮春生足別離嶺梅猶自發海月照相思誰念天涯裡孤吟我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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宿德坪酒幕 旅店已云暮行人殊未休衆山皆北向孤水自西流回首京塵遠挑燈蜀魄愁明朝問前路應上錦江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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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謝石村【林公㥠】市西【金公璇】兩兄來訪 貧病無人問聯鏕到我家丹心雖未改白髮已云多酒烈霜威却宵殘燭影斜開窓瞻北斗何處是京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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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趙與叔【希進】歸宜寧縣 十載悲歡見故人天涯此別各沾巾秋高瑞石山容肅何處煙波是鼎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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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山醉呈畦翁 迢迢北歸路芳草解迎人江外君猶謫天涯節自新風塵嗟久別詩酒更情親明發雲山隔那堪獨問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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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공들의 시편 諸公詩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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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언사운에 차운하여 又次五言四韻 그대 아들 손잡고 오니 君來携一子나까지 홀연 셋이 되었네 得我忽成三쑥이 삼속에서 자라면 곧아지고 蓬入麻中直부평초도 사슴이 먹으면 달아지는 법 萍因鹿食甘어찌 내가 감히 인을 돕고 輔仁吾豈敢그대에게 부끄럼 없이 충고하겠나 忠告子無慙마주하여 흰 머리 상심하니 相對傷頭白타향의 혼이 아름다운 연못을 휘감아 도네 羈魂繞錦潭세상살이 오랫동안 골몰하여 紅塵長汨沒자연의 차가운 맹세 저버렸네 泉石負寒盟늙어 머리는 점점 희어가고 老去頭將白수심에 꿈조차 이루기 어렵네 愁來夢不成들판에 가을 기운 움직이니 郊原秋氣動강한의 객은 마음 놀라네 江漢客心驚어느 날 형제를 데리고 何日携兄弟어머니 모시고 살아갈까 萱堂侍此生 君來携一子, 得我忽成三.蓬入麻中直, 萍因鹿食甘.輔仁吾豈敢, 忠告子無慙.相對傷頭白, 羈魂繞錦潭.紅塵長汨沒, 泉石負寒盟.老去頭將白, 愁來夢不成.郊原秋氣動, 江漢客心驚.何日携兄弟, 萱堂侍此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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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만사 【당시 만사가 반드시 이 작품에 그치지 않았겠지만 다만 이 한 편만 전해질 뿐이다.】 附挽詞 【當時挽詞, 必不止此, 而只傳此一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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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록 師友錄 이소재(履素齋) 선생은 휘가 중호(仲虎)이고, 자는 풍후(風后)이다. 종실인 고안(高安)80) 정(正) 이정(李精)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효공(靖孝公) 이보(李補)81)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태종 때 좌의정(左議政) 충경공(忠景公) 이직(李稷)의 후손이다. 고안 정(正) 이정이 아내로 맞이하여 정덕(正德)82) 임신년(1512) 9월 무자일에 선생을 낳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 장성함에 뜻을 엄하게 하여 문장을 지음에 그 문체가 기이하고 우뚝함을 숭상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83)이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귀신이 아니면 저렇게 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서봉(西峰) 처사 유우(柳藕)84)에게 학업을 전해 받았는데 서봉은 바로 한훤당(寒暄堂)의 문인이니, 그 학문은 대개 연원이 있다.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사람들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85)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침내 깨닫는 바가 있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을 두고는 낮에는 외우고 밤에는 사색하여 잠자고 밥 먹는 것조차 잊기에 이르렀다. 죽간에 구용(九容)과 구사(九思)86)를 새겨 혁대에 꿰어 차고 종신토록 지녔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띠를 묶어 종일 강론하고 정미하게 분석하니, 서화담(徐花潭)87)이 그와 함께 수일을 강론하고 감탄하며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기묘사화(己卯士禍)88) 이후 《소학》의 가르침이 세상에서 크게 금지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후학을 가르치니 학도들이 모여들자 반드시 《소학》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으로 《근사록》을 가르친 뒤 점차 여러 경전에까지 이르렀다. 논의가 뛰어나 배우는 사람들의 학문을 북돋아 진작하는 효과가 있기에 전조(銓曹)에서 교직(敎職)에 천거하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병이 심해져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언관(言官)들이 그의 품행과 도의를 칭송하여 계속 서울에 머물도록 청하자 명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6품의 관직을 내렸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가정(嘉靖) 갑인년(명종 9, 1554) 11월 26일로 향년 43세였다. 문인들이 그의 상례를 다스리고 이듬해 정월 25일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선영에다 장사지냈다. 그의 저술은 〈심성정도(心性情圖)〉, 〈성리명감(性理明鑑)〉, 자경(自警)의 시문 수백 편이 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깊이 생각하여 곧장 이해해서 직접 제작한 물건이 조금도 도수가 어긋나지 않았다. 【〈이소재묘지유사(履素齋墓誌遺事)〉와 박상 세채(朴相世采)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보인다.】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은 자가 연지(衍之)이고, 동래(東萊) 사람이다. 봉상시 정(奉常寺正)89) 정유인(鄭惟人)의 아들이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나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였다.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은 자가 인지(訒之)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서봉(西峯) 선생 유우(柳藕)의 아들이다. 가정 계사년(1533)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의뢰할 곳이 없어 다소 무리배였으나 훗날 뜻을 고쳐 이소재의 문하에서 배워 학업에 뜻을 둔 것이 남달랐고 특히 예(禮)에 밝았으며 각기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 퇴암(退菴) 박응남(朴應男), 월담(月潭) 최황(崔滉) 등 막역한 교우를 맺었다. 만력 계미년(1583)에 남봉이 우의정에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충과 효와 큰 절개가 있어 삼군(三軍)의 장군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침내 출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자, 공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걸어서 임금을 따라가 2년을 지냈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90)은 총재(冢宰)로서 공의 충성과 절개를 알려 통정(通政)91)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599)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92)에 보인다.】홍용(洪溶)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판관(判官) 홍필세(洪弼世)의 아들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익원군(益原君) 홍경림(洪景霖)의 손자이다. 벼슬은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에 이르렀다.정유신(鄭惟愼)은 동래(東萊) 사람으로, 돈녕부(敦寧府) 정(正) 정익겸(鄭益謙)의 아들이고 참봉(參奉) 정위겸(鄭撝謙)의 양자이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이다. 벼슬은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이르렀다.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93)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살펴보니 "이소재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스승의 도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94) 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이나 되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그 문하에서 배움을 청한 선비들이 이처럼 많았을 것이나 문인 가운데 우리 선조께서 크게 인정했던 이들로는 다만 남봉, 범애, 홍공, 정공 네 사람뿐이므로 위와 같이 선별하여 기록한다.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履素齋李先生, 諱仲虎, 字風后, 宗室高安正精之子, 孝寧大君靖孝公補之玄孫. 妣星山李氏, 太宗朝左議政忠景公稷之後也. 高安正竝娶焉, 以正德壬申九月戊子生先生. 早失怙, 及長勵志, 爲文章, 體尙奇偉, 金慕齋安國見而奇之曰 : "非鬼神, 不能!" 受業於西峯柳處士藕, 而西峯卽寒暄堂門人也. 其學蓋有所淵源焉. 嘗讀孟子, 至人皆可以爲堯舜, 遂有所悟屛棄科業, 慨然有求道之志, 晝誦夜思, 至忘寢食, 刻九容九思於竹簡, 串以革帶, 終身佩服, 雖隆寒盛暑, 整冠束帶, 講論終日, 剖於精微, 徐花潭與之講論數日歎曰 : "不可及也." 自己卯士禍以後, 小學之敎, 爲世大禁, 而先生能杜門敎誨, 學徒坌集, 必先小學, 次及近思錄, 漸達諸經. 論議超詣, 致有聳動振作之效, 銓曺薦爲敎職, 累辭不就. 晩年病痼, 將欲歸田, 言官稱其行誼, 仍請留洛, 明廟嘉之, 授六品職, 不數月而歿, 卽嘉靖甲寅十一月二十六日也. 享年四十三. 門人經紀其喪, 明年正月二十五日, 葬于楊州松山先塋. 所著有心性情圖 性理明鑑 自警詩文數百篇. 至於璿璣玉衡之制, 致思輒解, 手自裁造, 度數不差. 【見履素齋〈墓誌遺事〉, 及朴相世采〈東儒師友錄〉】鄭南峰芝衍, 字衍之, 東萊人, 奉常寺正惟仁之子, 領議政文翼公光弼之曾孫也. 生于嘉靖乙酉, 隆慶己巳登第, 官至右議政. 萬曆癸未卒, 年五十九.柳汎愛祖訒, 字訒之, 晉州人. 西峯先生藕之子也. 生于嘉靖癸巳, 少無賴, 後折節, 爲學游履素齋門, 志業兼人, 尤以知禮各與鄭南峯芝衍 朴退菴應男崔 月潭滉爲莫逆交. 萬曆癸未, 南峯以右相薦公, 有忠孝大節, 可將三軍, 始出仕. 壬辰倭亂, 車駕西幸, 公適家食徒步追, 至居二年. 金斗巖應南, 以冢宰白公忠節, 陞階通政, 拜戶曹參議. 己亥卒, 年六十七. 【見東儒師友錄】洪溶, 南陽人, 判官弼世之子, 工曺判書益原君景霖之孫也. 官至掌隷院司議.鄭惟愼, 東萊人, 敦寧府正益謙之子, 參奉撝謙之繼子, 文翼公光弼之孫. 官至淸風郡守.按李芝峯睟光類說曰 : "履素齋當己卯士禍之後, 以師道爲己任, 摳衣受業者, 日數百人."云云, 則當時踵門請益之士, 若是其多矣, 而同門人中, 吾先祖所與之最相推許者, 只是南峯 汎愛 及洪公 鄭公四人, 故抄錄如右. 玄孫斗冬謹書. 고안(高安) 경기도 용인군 내사현의 옛 이름이다. 이보(李補) 1396~1486.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으로,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인 세종(世宗)에게 세자의 지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많은 불사를 주관하여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로, 중종 원년(1506)~16년(1521)까지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자는 국경(國卿)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고, 15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천녕현(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서봉(西峰) …… 유우(柳藕) 1473~1537. 자는 양청(養淸)이며, 서봉(西峰)은 그의 호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갑자사화로 스승이 죽음을 당한 뒤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심하였다. 사람들 …… 있다 《맹자》 〈고자(告子)〉하 제2장을 말한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 구사(九思)는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용모는 공손하기를, 말할 때는 충성스럽기를,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의심날 때는 묻기를,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얻을 것을 보고서는 마땅히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구용(九容)은 《예기》 〈옥조(玉藻)〉에 나오는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함에 있어서 응당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등을 말한다.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으로, 자는 가구(可久), 본관은 당성(唐城), 화담은 그의 호이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선시대 제사(祭祀)와 시호(謚號)의 의정(議定)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봉상시(奉常寺)의 정삼품(正三品) 관직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이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통정(通政) 조선조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말한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조선 후기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신라시대부터 조선 선조까지 유학자들의 사우 연원을 밝혀놓은 책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보인 학자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저술로는 문화백과사전의 성격을 띠는 《지봉유설》과 사후에 그의 글들을 모은 《지봉집》이 전한다. 옷자락을 …… 치켜들고 원문 '구의(摳衣)'는 스승이나 어른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어른이 계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 실내 구석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얼른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에 응대를 반드시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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