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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연간에 올린 글 萬曆中呈文 김응기(金應期)의 자는 언정(彦挺)으로 타고난 기질이 성실하고 훌륭하며 효성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곧장 부모님에게 올렸고 부모님께서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병오년(154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양친에게 병이 있어 관사에서 거처하는 과거의 계책에 다시는 뜻을 두지 않았다. 정미년(1547)에 부친이 위독하자 곁에서 모시며 탕약을 올리고 대변을 맛보아 길흉을 살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름에 정성과 슬픔이 상례의 법도를 넘어 몸을 훼손할 정도였다. 삼 년 동안 죽을 먹고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으며 몸소 묘소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였고 또한 맛있는 음식으로 모친을 봉양하였다. 겨우 부친의 상을 마치자, 모친 또한 오랜 지병이 있어 여러 해 동안 탕약 시중을 들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엎드린 채 아침을 기다렸으며 흙 걸상에 무릎 닿는 곳이 움푹 패여 들어가 오목한 모양이 만들어지니 의원들이 그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평생 사사로운 재산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모친이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따로 재산을 베풀어 주고자 하니 모친의 뜻에 앞서 이루게 하였다.무진년(1568)에 모친께서 돌아가시자 갑자기 쓰러졌다가 곧 회복하여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게으른 행동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던 날 밤새도록 많은 비가 내리자 슬프게 울부짖으며 하늘에 비니 하늘이 갑자기 맑아졌다. 조문하는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모두가 효성에 감복한 것이라고 여겼다. 아침저녁으로 묘를 살펴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제수를 깨끗하게 하여 반드시 평소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공판을 지극히 힘썼다. 또 미음을 먹으며 삼년상을 마치니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들리지 않았으며 몸은 가시처럼 말랐기에 그를 본 사람들 중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상을 마친 후 반드시 묘를 향하여 앉았고 부모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먼저 줄줄 떨어졌다. 그 효행의 독실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명종 때 그의 행동을 가상히 여겨 두 차례 참봉을 제수하였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우리 선조는 김공과 더불어 한 고을 【고을은 노곡(蘆谷)이다.】 에 살면서 함께 지극한 행실이 있어 송서교[宋贊]의 추천을 함께 받았으니, 생각건대 반드시 서로 미루어 인정해 주는 것이 마치 지초와 난초의 향취가 서로 꼭 부합함과 같다. 일찍이 창강(槍江) 조장령(趙掌令)33)이 손수 쓴 글을 보니 김공의 효성에 관한 사적을 책 앞에 두고 〈만력중정문〉을 그 아래에 둔 다음 또 나공 이산 현감이 기록한 것에 적었는데 우리 선조가 이 글을 지어 포장하여 올린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을 우리 선조가 취하여 기록하신 것일까? 우선은 우리 선조가 지은 조목을 끝에 덧붙여 사정을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현손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金應期字彦挺, 氣賦愿懿, 孝誠純至, 自在髫齔, 遇異味, 輒獻父母. 父母有微蛘, 涕泣憂悴. 丙午中司馬, 以雙親有疾, 不復有居館赴擧之計. 丁未, 父病沈綿, 侍側湯藥, 嘗糞以驗吉凶. 及歿喪葬, 以誠哀毁踰禮. 啜粥三年, 不食菜果, 躬執奠具, 且供甘旨, 以奉慈親. 服闋, 母又有宿疾, 積年侍藥, 衣不解帶, 俯伏待朝, 土床當膝處, 坎入成窠, 醫師見之, 嗟歎. 平生不營私財, 母嘗於子婦中欲別有施給, 先意導成. 戊辰, 遭母憂, 頓絶方蘇, 三日不怠. 及葬之日, 終夜大雨, 哀號禱天, 天忽開霽. 吊者大悅, 皆以爲孝感. 朝夕省墓, 雨雪不廢, 奠羞蠲潔, 必思平日所嗜, 極力供辦. 又啜糜粥, 終三年, 眼昏聽重, 紫毁骨立, 見者莫不哀慘. 終喪之後, 坐必向墓, 語及父母, 涕淚先零. 其孝行之篤, 大槪如此. 明廟朝, 嘉其行, 再授參奉, 而皆不赴.吾先祖與金公, 同居一鄕 【蘆谷】, 同有至行, 同被選於宋西郊薦啓, 想必互相推許, 有如芝蘭臭味之相符耶. 曾見滄江趙掌令凁手筆文字, 卽金公誠孝事蹟, 而起頭書, 以萬曆中呈文其下, 又書以出羅尼山所記云, 無乃吾先祖製此文褒呈之耶, 抑或他人所製而吾先祖取而記之耶? 姑附于先祖著述條末端, 以俟知者. 玄孫斗冬, 謹書. 창강(滄江) 조장령(趙掌令) 조속(趙涑, 1595~1668)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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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묵 【당시 공의 나이 63세였다.】 遺墨 【時公年六十三】 아들 나덕명(羅德明), 나덕준(羅德峻), 나덕윤(羅德潤) 등은 성현을 사모하고 법으로 삼으며 행실은 세속을 넘어선 진실로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하고 실상에 힘쓰는 선비였다. 일찍이 형제들끼리 같이 거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나에게 여러 차례 자문을 구했고, 나 역시도 일찍이 이러한 뜻이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여 매우 감개한 마음이 있은 지 수년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지금 부모형제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고 나만이 홀로 심야에 남아 비통함 또한 이미 지극하다. 어찌 우리 아이들이 옛사람들의 뜻을 두어 이와 같은 미풍양속을 행하고자 하는가. 이에 당(堂)을 같게 하고 실(室)은 다르게 하는 제도에 대해 도안을 하여 그 법규와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올렸더니 진실로 전 현인들이 남긴 뜻을 법으로 삼으로 것이다. 어찌 가상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실상을 생각해보면 말세에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비록 그 처음에는 힘써 행하더라도 끝까지 잘 할 수 있을 지는 어려운 일이니 두렵다. 그러나 여섯 아들이 한 집안의 사람들을 잘 이끌어 끝내 연익(燕翼)34)의 아름다움을 거둘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아! 조심하고 부지런함을 숭상하여 세속의 비웃음을 사지 마라. 나는 지금 늙고 병도 많아 너희들이 함께 살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을까 두렵다. 비록 이러한 뜻을 잘 성취하는 것을 미쳐 볼 수는 없을지라도 또한 지하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라건대 우리 여섯 아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깊이 새겨 집안을 욕되게 하지 마라. 男明峻潤等, 慕法聖賢, 行超流俗, 實爲己務實之士也. 曾有兄弟同居之志, 屢稟于余, 余亦曾有是志而未就, 深以爲感慨者, 幾年于玆. 今則父母兄弟已皆辭世, 余獨留在中夜, 悲痛亦旣極矣, 豈意豚犬輩志在古人欲爲此懿美之行耶. 乃圖雁同堂異室之制, 呈之觀其規畵, 實法前賢之遺意也, 豈不爲之嘉歎耶. 第思玆實, 末世所難爲之事, 雖力其始, 恐難善終也. 不知我六男, 其能導率一家之人, 卒收燕翼之美耶. 明乎峻乎潤乎, 尙愼勖哉, 毋爲俗流之譏笑也. 余今老且多病, 恐不及見爾曹同居之美也. 雖未及見如能就此志, 則亦可瞑目於泉下矣. 願吾六男體余至懷, 毋忝爾所生也. 연익(燕翼) 조상이 자손을 위해 세운 계책이나 교훈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에서 주(周)나라 문왕에 대해 "후손에게 계책을 남겨 두어 공경하는 아들을 편안케 하셨다.[詒厥孫謀, 以燕翼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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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경인년(1590)에 심문할 때의 전교 萬曆庚寅就理時 【傳敎】 전교(傳敎)는 다음과 같다."'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39)라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자들은 용서해 주고, 무고한 혐의를 씌운 자들은 파직하라." 【지난해 기축년(1589)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으로써 옥사를 일으키자, 좌찬성(左贊成) 정철(鄭激)이 위관(委官)이 되어 옥사를 주관하고선 기회를 틈타 무고한 이들을 잡아들였다. 동복(同福) 사람 진사 정암수(丁巖壽) 등은 은밀한 뜻을 이어 여러 명사들을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함정에 빠뜨렸는데 공의 부자 이름 또한 그 안에 실려 있었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정암수 등을 잡아들이라 명하셨다. 정철이 대간(臺諫)과 태학생(大學生)들을 부추겨 그만 둘 것을 청했더니 결국 윤허를 받아냈다. 이듬해 경인년에 공과 다섯 아들 모두 끝내 체포당했으나 이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라는 전교가 있었기에 죄를 용서받게 된 것이다.또 이듬해 신묘 윤 3월에 양사(兩司)에서 정철이 조정의 기강을 제제하여 마음대로 한다는 논의로 합계(合啓)를 올려 일시에 파직을 청하였더니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조정의 당(堂)에 그의 죄목을 방문으로써 보이도록 명하였다. 6월에 대사헌(大司憲) 이원익(李元翼) 등과 대사간(大司諫) 홍여순(洪汝薛) 등이 정철은 조정을 어지럽히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며 호남의 유생들을 유도하여 명경과 사류들을 상소함으로써 역모의 무리로 몰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는 논의로 합계를 올려 멀리 쫓아내기를 청했는데,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특별히 강가로 유배를 보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양사에서는 일찍이 이전의 대간들은 권세가 있는 간신들의 사주를 받아 정암수 등을 구하라는 논의를 하여 잡아들이라는 명을 그치게 했으니 모두 파직해 주시기를 청하는 합계를 올렸는데,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전교에 "정철은 타고난 성품이 교활하고 간악하여 이미 유배를 받았고, 그와 교제하는 여러 사람들조차도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죄상이 엄중하므로 위리안치 시켜라."라고 하셨다. 2년 뒤 계사년(1593) 12월에 정철은 죽었다. 이듬해 갑오 11월에 양사와 대사헌 김우옹(金字願) 등과 대사간(大司諫) 이기(李墍) 등은 정철이 옥사를 주관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죄를 논하여 관작을 추가로 삭탈함을 청하자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다.】 敎曰 : "求忠臣, 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前年己丑十月, 鄭汝立逆獄起, 左議政鄭澈以委官主獄事, 乘機羅織. 同福進士丁巖壽等, 承其風旨, 投誣疏陷諸名流, 公父子之名, 亦載其中. 及巖壽疏入, 上震怒, 命拿鞫巖壽等. 澈嗾臺諫及太學生, 請寢之, 蒙允. 明年庚寅, 公竝五子, 竟被逮, 有此求忠孝門之敎, 而蒙宥焉. 又明年辛卯閏三月, 兩司合啓論鄭澈擅弄朝綱裁制, 一時請罷職, 依允, 命搒示其罪目于朝堂. 六月, 大司憲李元翼等 大司諫洪汝諄等, 合啓論鄭澈濁亂朝廷, 欲陷異己之人, 敎誘湖南儒生, 上疏名卿士類, 驅入逆流, 欲盡殲滅, 請遠竄, 依允, 特命配江界. 七月, 兩司合啓曾前臺諫承權奸指嗾, 論救丁巖壽等, 仍寢拿命, 請竝罷職, 依允, 傳曰 : "鄭澈賦性, 狡猾奸毒, 旣到配所, 交通雜人, 未知作何等, 罪狀嚴加圍籬." 後二年癸巳十二月, 鄭澈卒. 明年甲午十一月, 兩司大司憲金宇顒等 大司諫李墍等, 論鄭澈主獄羅織之罪, 請追削官爵, 依允.】 충신은 …… 구한다 《후한서(後漢書)》 권56 〈위표열전(韋彪列傳)〉에 "국가는 현자를 선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며, 현자인지 아닌지는 효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버이에게 효성스러운 사람은 이 효성을 임금에게 옮겨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찾아야 합니다.〔夫國以簡賢爲務 賢以孝行爲首 孔子曰 事親孝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必於孝子之門〕"라고 위표가 황제에게 건의한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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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기 事實記 공의 성은 나 씨(羅氏)이고, 휘는 사침(士忱)이며, 자는 중부(仲孚)이고, 자호(自號)는 금호(錦湖)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주성(州城)에 거주하였다. 시조는 나부(羅富)로서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이었다. 그의 후손 중 계첩(系牒)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나득규(羅得虬),나중윤(羅中允),나송기(羅松奇)로 3대가 모두 영동정(令同正)이었다. 나수영(羅守永)은 진사를 합격하였고, 나원(羅源)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동정(同正)을 지냈고, 나진(羅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홍무(洪武) 23년(1391) 이전에 판사(判事)로서 영산(榮山)에 조창(漕倉)과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일은 양촌(陽村) 권근(權近)40)의 기록에 있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홍무(洪武) 14년(1381) 이전에 소윤(少尹)으로서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己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다. 이 일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나자강(羅自康)은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郞)을,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다. 나일손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일찍이 같은 고을의 훌륭한 사람들 11명과 함께 난정(蘭亭)의 고사41)를 모방하여 금강계(錦江稧)를 만들어 풍류와 고상한 운치를 즐기니, 이 일이 전해져 호남의 미담이 되었다.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탐진 최씨(耽津崔氏)로,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냈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분의 따님이다. 금남(錦南) 선생은 "최부(崔溥)가 외할아버지인데 문학과 절개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당하였다."라고 하셨다.가정(嘉靖) 을유(1525) 2월 28일에 공이 태어났다. 타고난 기질이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고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나이 겨우 16세에 어머니 최 부인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의 피를 약에 타서 드렸더니 곧장 나았다. 이 일은 중종 임금께 알려져 정려로 표창되었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장성해서는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 선생을 종유하고,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등의 동학들과 교유하며 서로 미루어 인정해 주었다. 명종(明宗) 때 을묘방(乙卯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선조 원년 무진년(1568)에 서교(西郊) 송상 찬(宋相贊)이 호남을 순찰하다가 전라도의 훌륭한 선비 다섯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공을 으뜸으로 여겨 학문과 훌륭한 행동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칭찬하였다. 다른 네 사람은 김응기(金應期), 김천일(金千鎰), 유호인(劉好仁), 김윤(金胤)이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나사침 등은 행실이 매우 가상하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하여 포장하시오."라고 하시니, 이조에서 드디어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혹은 정려로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하도록 하자고 하였고 혹은 식물(食物)을 공급하여 학업을 마치도록 힘쓰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려의 표창과 부역과 세금 면제는 이미 선조 때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의 벼슬을 내리게 하였다. 이듬해 맏형 나사선(羅士愃) 시정공(寺正公)이 서울에서 돌아가시자, 공이 정신없이 달려가 곡을 하고서 관을 들고 남쪽으로 돌아와 안치하였다. 이 일로 고과에 관한 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종형 부제학(副提學)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은 감탄하며 "나중부는 멀리에서 와서 형의 상을 치르고 돌아갔으니 그의 체직(遞職)은 실로 훌륭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상서(尙書) 홍담(洪曇) 또한 자주 공을 칭찬하였다.신미년(1571)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고 5년 뒤(1576)에 경기전 참봉으로 관직이 바뀌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와 종묘 직장(宗廟直長)으로 옮기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외지로 나가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어 정치를 청렴하고 간소하게 하였으며 고을의 세도가와 농사꾼 간에 송사가 있으면 공이 한 마디 말로 판결하였다. 방백의 뜻을 거슬러 고과의 점수는 낮았지만 그 고을 백성들은 비석을 세우고 시를 새겨 공을 추모하였으니 다음과 같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으로 옥사를 일으키자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기미를 틈타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씌워 재앙이 넘쳤는데 그 여파는 평소 함께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그들을 몰아 일망타진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동복(同福)사람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여러 유명 인사 10여 명을 함정에 빠뜨려 무고하여 상소했는데 이를테면 재상 이산해(李山海), 재상 정언신(鄭彦信)42), 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징군(徵君)43)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등 모두 그 안에 포함되었다. 또 공의 부자를 거론하며 "나 모씨는 그의 아들과 정여립이 평소 교분이 두터웠으나,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죄를 용서받고자 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그밖에 위험한 말들은 끝이 없었다. 공의 자식 중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가 큰 소리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 등의 상소가 어느새 임금에게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감히 함정에 빠뜨리는 계책을 내고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고 거짓된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경들조차 배척하고 지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흉악하고 참혹한 상황이 매우 놀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반드시 간악한 자들의 부추기는 말을 들었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고는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이하 10명을 잡아 국문하도록 하셨다. 정철은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어 대각의 신하들을 부추겨 간쟁하게 하고 태학생들을 부추겨 어리석은 상소를 올리도록 하자 이미 내렸던 명이 그만두게 되었고 그 상소 안의 일 또한 묻지 않게 되었다. 이때 무안 유생 배명(裵蓂) 등이 역시 곤재와 공의 무고함에 대하여 자세하게 상소를 올렸는데, 옥사를 주관했던 자가 또 홍천경(洪千璟) 등으로 인하여 죄를 만들어 모해하였다. 그러다 결국 정암수의 상소를 막았다는 이유로 죄목을 날조하는 바람에 공과 다섯 아들 모두 체포되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효자로 든 자들은 용서하고 무고히 죄를 씌운 자들은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공은 곧바로 풀려났지만, 다섯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나덕명은 경성(鏡城)으로, 나덕준(羅德峻)은 부령(富寧)으로, 나덕윤(羅德潤)은 회령(會寧)으로, 나덕현과 나덕헌은 철원(鐵原)으로 도배를 당하였다가 계사년(1593)에 풀려났다. 공이 병신년(1596) 12월 23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2세였다.공의 성품은 진실하고 덕행이 순수하고 돈독하였으며 효도와 공경이 지극하였으니 신명에 통하였다고 하겠다. 상을 치를 적에도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시묘살이를 하는 전후로는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반드시 경건히 조상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지어 외증조 진사 최택(崔澤)의 묘소가 무안에 있는데 이미 대가 끊겨 대를 지키고 보호할 사람이 없자 공은 그것을 위해 묘를 정하고 성묘를 하며 곧장 나무하고 소먹이는 일을 금지시켰으니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감동하였다. 일찍이 형제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이루지는 못했으니 형제들 모두 공과 같은 거처에 살고자 하는 마음을 통한으로 여겼다. 여러 아들이 그 뜻을 잘 이어 당(堂)은 같되 실(室)은 다르게 하려는 제도를 모두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기고 힘쓰게 하여 태어난 집안의 가르침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집안에 윤리와 기강을 잇는 큰 송사가 있었으나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고을의 목사가 되어 곧바로 송사를 판결하고는 공과 여러 아들 중 송사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세상 쟁송은 대다수가 이익으로써 하는데, 이들의 쟁송은 곧 천리로써 한다."라고 하였고 또 공을 학문으로써 업을 삼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명종의 제사 때마다 공은 소식(素食)을 했는데 60여 세에 이르기까지 병을 핑계대어 혹 게을리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명종 때 인재를 두텁게 대하는 교화로써 국자(國子)에 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은 비록 늙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44)이 공에게유유히 베개 높이 벤 곳에 悠然高枕處대궐의 꿈 아득하네 雲闕夢蒼茫라는 시구를 글을 주었으니 이는 바로 공의 심경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평소 고을에 거처하며 신의를 죽을 때까지 지녀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힘썼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 또한 미물에까지 이르렀다. 한번은 주방에서 작은 물고기가 뱃속에 알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그릇에 놓아 물고기를 살리도록 명하였다. 음식을 대함에 비록 작은 예절이었지만 그의 어진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산 현감으로 있을 때 도둑질하는 아이 하나를 잡아 의리로 가르치고 놓아주니 그가 드디어 감동하여 잘못을 고쳤다. 고을 앞에 여관을 설치하고 길을 가는 사람을 대접하여 그가 자신을 부지런히 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덕화가 남에게 미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의 지극한 행동은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신편 속 삼강행실(新編續三網行實)》에 실려 있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이이첨(李爾瞻)45)의 성명 또한 효자의 반열에 섞여 있던 까닭에 그 책이 전하지 않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이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공은 무안의 주룡 나루 건좌(乾坐)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아들 나덕윤, 나덕신, 나덕헌이 모두 종훈(從勳)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여러 차례 벼슬이 더해져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네 아들을 낳았고, 별도로 본주의 장흥동(長興洞)에 장사지냈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사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나덕명은 기묘년(1579)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나덕준은 재주와 행실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나덕진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덕윤은 무자년(1588) 진사를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나덕현은 효행으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다. 부인 정씨(鄭氏)는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나덕신은 신묘년(1591)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나덕헌은 계묘년(1603)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큰딸은 충의위(忠義衛)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둘째 딸은 참의(參議)에 추증된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도사(都事)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 나성소(羅成素)는 무과에 급제를 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현감(懸監)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갔고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으며, 둘째 딸은 선교랑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감찰(監察)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이천 부사(伊川府使)가 되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宣敎郎)을,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사위 윤항(尹抗)은 아들 우탕(禹湯)을 두었다. 참봉(參奉)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素)는 효행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으며,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 등이 있다. 첫째 딸은 군수를 지낸 정환(鄭渙)에게, 둘째 딸은 민희일(閔喜一)에게, 셋째 딸은 유천(柳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위홍주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위정보(魏廷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鄒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두 딸은 주부(主簿) 정경일(鄭敬一)과 장사랑(將仕郞) 최환(崔渙)에게 각각 시집갔다. 수사(水使)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부인 김씨(金氏)는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으며,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다. 두 딸 중 첫째는 김용건(金用健)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진사 이준신(李儁臣)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안팎의 자손이 수백 수천에 이르러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아! 《예기》에 "산 사람 섬기는 것을 사랑과 공경으로 하고 죽은 사람 섬기는 것을 애도와 슬픈 마음으로써 한다면, 생민의 근본을 다한 것이요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일이 끝난다."46)라고 하였다. 또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장차 착한 일을 할 적에 부모의 아름다운 이름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하며, 불선한 일을 할 때에는 부모에게 치욕이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47)라고 하였다. 자하께서 "부모 섬기기를 능히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임금 섬길 때는 능히 그 몸을 다하며, 친구와 더불어 사귈 때는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그가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할 것이다"48)라고 하였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공은 학문을 함에 일상생활의 떳떳한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로써 선한 행동을 닦고 선한 이름을 세웠고 저 서교께서 공을 학행으로 천거하였고 학봉께서 학문을 들어 칭찬하신 데에는 진실로 이유가 있다. 여러 자식들도 훌륭한 사람의 행적을 이어 육룡(六龍)이라고 칭송받았으니, 예컨대 나덕명은 귀양 갔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북평사 정문부(鄭文孚)와 의병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바닷가 백성들 중 왜적을 이끌어 난을 선동한 자들을 붙잡아 목을 베었고,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안현(鞍峴) 전투에서 이괄(李适)49)의 무리를 물리쳤고 또 사신의 명을 받들어 심양(潘陽)에 가서 절개로 항거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나덕준과 나덕윤은 모두 의를 행하여 이름을 알렸다. 나덕현은 난리 중에 위급함을 만나 어머니를 안고 울부짖어 왜적을 감동시키고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나득소는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딸, 손녀, 며느리, 손부도 순절하였다. 또 네 아들과 손자들이 이 대에 걸쳐 충신과 효자와 열녀로 나란히 나와 세상에서 영예롭게 여겼으니, 공이 가정에서 가르침을 완성하고 그 효과가 나타난 것 아님이 없다. 《시경》에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복을 주리라."50)라는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지위가 덕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삶의 중간에 횡역을 만난 것은 운명이고 시운이지만 공의 덕에게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공께서 돌아가신 지 127년이 지나자 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세대가 더욱 멀어져 선대의 사적이 없어 징험할 것이 없을까 걱정하여 집안의 유사(遺事), 족첩(族牒), 묘문(墓文) 등을 수습하고 보고 들은 것을 미루어 한 권의 책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나는 외손의 반열에 있어 이를 산정하라는 부탁을 받고 감히 그 초고에 바탕하고 개괄적인 내용을 간략히 하여 공의 처음과 끝을 이상과 같이 적었지만 진실로 공의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선철왕(先哲王) 두 조정에서 세 번이나 포장하신 뜻을 우러러 보건대 공의 행실과 의리가 몇 백 년 뒤에도 남아있으리라는 사실을 징험할 수 있으니 또한 마땅히 효도의 교화와 떳떳함의 천성에 감발함이 있을 것이다. 옛날 도연명(陶洞明)이 외할아버지 맹장사(孟長史)를 위하여 전을 지어51) "내가 행적을 살펴보다가 혹 잘못을 범하여 훌륭하신 군자의 덕이 훼손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이와 같은 두려움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한 마디 말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질박하게 적을 뿐이다.숭정(崇禎) 정축(丁丑) 후 85년 임인년(1722) 늦봄 상현(上弦)에 외현손 통덕랑(通德郎) 전 행광릉참봉(行光陵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公姓羅氏, 諱士忱, 字仲孚, 自號錦湖, 世爲羅州人, 家州城. 始祖曰富 高麗監門衛上將軍. 其後系牒所載曰得虬, 曰仲允, 曰松奇, 三世俱令同正. 曰守永 進士, 曰源 司醞署直長同正, 曰璡 工曹典書. 洪武二十三年以前, 判事監榮山漕倉築城, 事有陽村權近所記. 曰公彦, 典農寺正. 洪武十四年以前, 少尹從都巡問使李乙珍, 有克倭功, 事在麗史. 曰諿 式目都監錄事, 曰自康 務安縣監, 曰繼祖 將仕郞, 曰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嘗與一州賢豪十一人, 倣蘭亭故事, 修錦江稧, 風流雅致, 傳爲湖中美談. 曰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爲公皇考. 妣眈津崔氏, 弘文館副應敎 贈禮曺參判. 錦南先生曰 : "溥爲外翁, 以文學氣節名世, 被燕山戊午史禍." 嘉靖乙酉二月二十八日, 公生. 稟質異凡兒, 孝愛出天. 年甫十六, 崔夫人病篤, 血指和藥卽愈, 事聞中廟, 命旌閭復戶. 長而從履素齋李仲虎, 遊與鄭南峰芝行 柳汎愛祖訒同學, 相推許. 明廟朝, 擧乙卯榜生員試. 宣廟元年戊辰, 西郊宋相贊按湖南, 薦一道遺逸之士五人, 以公爲首, 稱學行俱備, 其四人, 金應期 金千鎰 劉好仁 金胤也. 上敎有曰 : "羅士忱等, 行實甚嘉, 令該曺議大臣, 襃獎之." 天官遂與大臣議, 或旌閭復戶, 或給食物, 俾勉卒學業, 以公㫌復已在先朝, 故特擢除慶基殿參奉. 其明年, 伯氏士愃寺正公, 卒于京, 公蒼黃奔哭, 扶櫬南歸坐. 是課殿, 姨兄眉巖柳副學希春歎曰 : "羅仲孚遠來, 護兄喪以歸其遞職, 實有光." 洪尙書曇, 亦亟稱之. 辛未, 除宣陵參奉, 後五年, 復換慶基殿, 轉義禁府都事, 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出爲尼山縣監, 治尙淸簡, 邑有勢家田民訟, 公片言折之. 忤方伯考下, 其民樹石刻詩, 以追思之, 其詩曰 : "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 云. 己丑, 鄭汝立逆獄起, 委官鄭澈乘機, 羅織禍多, 波及凡平日所不與者, 無不驅之一網. 同福人丁巖壽等, 承其風旨, 投誣疏搆陷諸名流三十餘人, 如李相山海 鄭相彦信 西厓柳相成龍 困齋鄭徵君介淸, 皆入其中. 且擧公父子爲言曰 : "羅某以其子等交汝立素密, 知禍及己, 譸張其說, 欲爲伸救." 其他做語危險, 罔有紀極. 公之子德顯 德憲等, 不勝憤惋, 入其會中, 大言峻斥之. 巖壽等疏旣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敢肆搆陷之計, 捏造無形之語, 陰陳詐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凶慘之狀, 極爲駭愕. 此必聽奸人指嗾的然無疑." 命禁府, 拿鞫巖壽以下十人. 澈懼甚, 嗾臺閣爭之, 太學生迭爲之投童, 乃還寢成命. 其疏中事, 亦不問也. 時務安儒生裵蓂等, 亦上疏訟困齋及公寃狀甚悉, 而主獄者又因洪千璟等媒孽, 竟以謀沮巖壽疏捏爲罪目, 公及五子竝被逮. 上有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名. 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公卽宥, 出五子, 俱流竄. 德明鏡城, 德峻富寧, 德潤會寧, 德顯 德憲徒配鐵原, 癸巳赦之. 丙申十二月二十三日卒, 壽七十二. 公性度眞醇, 德行純篤, 孝悌至誠, 可通神明. 居喪, 一遵禮制, 前後廬墓, 足不到家. 祀享, 必致虔慤, 追遠報本, 靡不盡心. 至於外曾祖進士崔公諱澤墓在務安, 旣血孫絶, 世守護無人, 公爲之拜掃定墓, 直禁樵牧, 聞者感之. 嘗欲與兄弟同居有志, 未就, 兄弟皆盡公居常爲恨, 及見諸子能繼志, 盡進同堂異室之制, 深加嘉勉, 申以無忝爾所生之敎. 門有係倫紀大訟, 久未決, 及金鶴峯誠一爲州牧, 卽斷之, 謂公諸子就訟者曰 : "世之爭訟, 多以利, 而此所爭, 乃天理也." 且稱公以學問爲業者云. 公値明廟諱辰, 輒爲素食, 至六十餘, 不以衰病或怠, 蓋當明廟朝, 厚沐菁莪之化, 陞國子故也. 公雖老伏田園, 未嘗忘戀闕之心, 玉峰白光勳贈公以 "悠然高枕處, 雲闕夢蒼茫"之句, 此正寫出公心境也. 平居鄕里, 信義有終, 賙窮恤乏, 務極悃款, 惻隱之心, 亦及微物. 嘗見廚饌, 小魚卵滿腹, 命放盆中活魚, 將待食者, 雖一瑣節, 其仁愛所推可知也. 在尼山, 捕一偸兒, 諭以義理而釋之, 其人遂感動懲創. 設縣前旅店, 應接行路, 以效其勤身自新, 德化及人, 又如此. 公之至行, 在柳西坰根新編續三綱行實以事, 在光海世, 爾瞻姓名, 亦嘗混孝子中, 故其書不傳, 譚者或以爲憾. 公葬務安住龍渡乾坐巽向之原, 從治命也. 以子德潤 德愼 德憲, 俱參從勳, 故初贈吏曹參判, 累加至議政府左贊成. 配坡平尹氏, 府使彦商女. 生四子, 別葬本州長興洞. 繼配光州鄭氏, 僉使虎女, 生三男二女, 葬祔公. 竝追封貞敬夫人. 子德明己卯進士, 義禁府都事. 德峻薦才行, 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戊子進士, 司憲府監察. 德顯以孝, 贈司饔院參奉, 妻鄭氏節行旌閭. 德愼辛卯武科, 靈巖郡守. 德憲癸卯武科, 京畿水使 贈兵曺參判. 女長適忠義衛尹沆, 節行旌閭. 次適贈參議魏弘宙. 都事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縣監五子, 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同中樞 贈左參贊. 緻素 經素. 二女長適主簿金磼, 節行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監察三子, 繪素武科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朝正郞. 沆子曰禹湯. 參奉六子,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 以孝旌閭. 尙素 純素 重素. 一女適鄭渙郡守, 二女適閔喜一 柳遷. 魏弘宙三子, 山寶武科縣令. 廷寶武科縣監, 國寶. 二女, 適主簿鄭敬一 將仕郞崔渙. 水使三子, 守素宣務郞. 妻金氏節行旌閭. 泰素從仕郞. 貞素. 二女, 長適金用健, 次進士李儁臣. 自餘內外雲仍多至千百, 不可勝錄. 嗚呼! 禮曰 : "生事愛敬, 死事哀慽, 生民之本, 盡矣. 孝子之事親, 終矣." , 又曰 : "爲人子者,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 子夏曰 : "事親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竊觀公之於學, 不外日用彛倫之則, 以之修善行立善名. 若西郊之薦以學行, 鶴峰之稱以學問, 信有以也. 諸子趾美人稱六龍, 如德明謫中, 當壬辰亂與北評事鄭文孚, 謀起義兵捕斬邊民, 導倭煽亂者, 德愼從統制李舜臣, 殲賊露梁. 德憲從戰鞍峴, 蹙适賊, 又奉使瀋庭, 抗節不屈. 德峻 德潤, 俱行義知名. 德顯亂離中, 臨危急抱母悲號, 感倭賊, 獲免. 得素居喪, 致毁歿, 女若孫女, 婦若孫婦, 殉節. 又四人子孫, 兩世忠孝烈騈出, 爲世所榮, 莫非公成敎於家而有以致之也. 詩云; "孝思不匱, 永錫爾類." 此之謂矣. 位不滿德, 中遭橫逆, 命也時也, 於公, 何損焉. 顧公之歿, 今爲一百二十有七年, 有玄孫斗冬, 懼世代益遠, 先蹟浸至無徵, 收拾家中遺事 族牒 墓文, 凡見聞所追, 及欲具成一通文字以傳後, 以重元在外裔之列, 屬以刪定玆, 敢因其草本, 略施檃括槪, 公始終事實, 如右固知不足以揄揚德美. 然仰覵先哲王兩朝三褒之旨, 可證公行義不遠在玆百世之下, 宜亦有所感發於孝理之化秉彛之天矣. 昔陶淵明爲外王父孟長史傳, 有曰 : "按採行事, 懼或垂謬, 有虧大雅君子之德." 重元亦不能無懼於斯也, 不敢侈一辭書之以質而已. 崇禎丁丑後八十五載壬寅季春上弦, 外玄孫通德郞 前行光陵參奉 八溪 鄭重元 謹述.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이고, 호가 양촌(陽村)이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저서에는 《입학도설》,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다. 난정(蘭亭)의 고사 중국 회계 산음(山陰)에 있던 난정(蘭亭)에서 동진(東晉) 때 회계 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하여 손작(孫綽)ㆍ사안(謝安) 등 당시의 명사 42인이 그곳에 모여 계제사(禊祭祀)를 행한 뒤에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던 고사가 있다. 《蘭亭考 卷1》 정언신(鄭彦信) 1527~1591. 자는 입부(立夫)이고, 호는 나암(懶庵)이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징군(徵君) 징사(徵士)와 같은 말로 학문과 덕행이 있어 나라의 초빙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은 선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며, 관향은 수원이다. 해남에서 살았다. 시조와 글씨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일직이 원접사(遠接使),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벼슬은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자는 득여(得輿)이고,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하였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산 사람 …… 끝난다 《예기》에는 "生事愛敬, 死事哀慽, 生民之本盡矣, 死生之義備矣, 孝子之事親終矣."라고 하여 몇 글자가 더 있다. 사람의 …… 안 된다 《예기》 〈내칙(內則)〉에 보인다. 부모 …… 것이다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이괄(李适) 1587~1624.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규(白圭)이다.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으나,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이전(李栴),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서울에서 군대가 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대패하고 피신하던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효자가 …… 주리라 《시경》 〈기취(旣醉)〉에 보인다. 맹장사를 …… 지어 맹장사전(孟長史傳)〉은 도잠(陶潛)의 외조부인 맹가(孟嘉)의 전(傳)인데, 도잠은 401년에 모친 맹씨(孟氏)의 상중에 이를 지었다. 《도연명전집(陶淵明全集)》 권6에 〈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晉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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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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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는다.】 墓碣銘 【竝序】 나는 어려서부터 관직에 있는 분들과 종유하면서 호남의 나 씨(羅氏) 가문이 찬란하게 대대로 덕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노인이 되어 선비 나두하(羅斗夏)를 만났는데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돌아가신 큰형님 비문을 부탁하였기에, 내가 사모하던 마음을 표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 그 적임자가 아님에도 사양하지 못하고 애써 일을 마쳤다. 지금 또다시 그 고조와 증조 2대의 묘문을 부탁받으니 돌아보건대 나는 더욱 늙고 병들어 실로 내 힘으로 다시 나두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어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그러나 남쪽을 향하여 길 떠난 사람이 영(郢) 땅52)에 이르지도 못하고 돌아와서 "나는 이미 초(楚)나라를 다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에 마침내 억지로 일어나 마른 몸에 기운을 불어 넣어 글을 짓는다.나생의 고조부는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나사침(羅士沈)으로, 자는 중부(仲孚)이다. 그 시조는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나부(羅富)이다. 그 후손으로는 공조 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과 전농시(典農寺) 정(正) 나공언(羅公彦)이 가장 현달하였다. 나자강(羅自康)은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내고 장사랑(將仕郎) 나계조(羅繼祖)를 낳았으며, 장사랑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나일손(羅逸孫)을 낳았으며, 승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나질(羅晊)을 낳았으니, 이 분이 찬성공의 4대조이다. 어머니 최 씨(崔氏)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금남(錦南) 선생 최부(崔溥)의 따님이다. 금남 선생은 박학하고 장엄한 절의가 있어 성종 때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찬성공은 가정(嘉靖) 을유년(1525) 12월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지녀 16세에 최 부인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약에 타서 올리니 곧바로 병이 나았다. 중종께서 정려를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 명하셨다. 장성하여 이소재(屬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동문인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등 모두 서로 추대하며 인정해 주었다.명종 을묘년(1555) 국자생(國子生)이 되었고, 선조 원년 무진년(1568)에 관찰사 송찬(宋贊)이 공의 바른 행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겨 여름에 경기전 참봉(慶機殿參奉) 관직을 내리셨으나, 맏형의 상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선릉 참봉(宣陸參奉)을 맡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을 지냈다.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자, 세력이 강한 자를 억제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치를 펼치다가 방백에게 미움을 받아 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53) 그러나 고을의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여 비를 세웠으니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기축년(1589) 겨울에 역신(逆臣)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발생하자 위관 정철이 기회를 타서 죄상을 꾸몄는데 호남인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상소를 작성하여 한 시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화를 덮어씌웠으니 재상 이산해(李山海), 재상 정언신(鄭彦信), 유성룡(柳成龍),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등 모두 30여 명이 모두 한 그물에 걸려들었고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며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사귐이 지극히 친밀합니다. 아무개는 그가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여러 차례 속임수를 펴서 풀어날 것을 구할 것이니 모두 죄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정암수의 소장을 심문하는 자리에 나가서 큰 소리로 변론하고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소장이 임금께 오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반역의 변란을 틈타 부정한 소장을 진언하여 어질고 이름 있는 재상들을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사한 놈이 있어 부추긴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인을 붙잡아 심문하게 하셨다.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부탁하여 소를 올려 요구하여 임금의 명이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혜안은 대단히 밝았기에 믿고 근심하지 않았다. 또 무안(務安)의 유생(儒生) 배명(裴箕) 등이 상소를 올려 곤재와 공의 원통한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하지만 끝내 이전 정암수의 소장을 저지한 것이 죄가 되어 경인년(선조 23, 1590)에 공과 다섯 아들이 모두 연루되었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길 "효자는 용서해주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인 자는 자세히 살펴라."라고 하셨다. 공은 곧 다행히 용서를 받았지만 다섯 아들은 벗어나지 못하여 북쪽으로 귀양 갔으니 참으로 위태로웠다.만력 병신년(선조 29, 1596) 12월 23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무안 주룡(住龍) 나루 손향(巽向)에 터를 잡아 장사를 지냈는데 그것은 유언을 따른 것이다. 세 아들은 모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거듭 추증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첫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으로 네 아들을 낳았으며, 묘는 나주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둘째 부인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사도첨사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낳았으며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아들 나덕명(羅德明)은 기묘년(1579)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고, 나덕준(羅德峰)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고, 나덕진(羅德進)은 어려서 요절하였고, 나덕윤(羅德潤)은 무자년(1588)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나덕현(羅德顯)은 효행으로 알려져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고, 나덕신(羅德愼)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나덕헌(羅德憲)은 무과에 급제하고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큰딸은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나덕명(羅德明)은 아들 넷을 두었다.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가 있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나성소(羅成素)가 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나덕준(羅德峰)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합격하여 동지 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또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사위는 주부(主簿)를 지낸 김잡(金據)과 최광헌(崔光憲)이 있다. 나덕윤(羅德潤)은 아들 셋을 두었다.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와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나덕현(羅德顯)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素)는 지극한 행실이 있어 삼년상에 죽을 마시고 피눈물을 흘리다 죽었고,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가 있었으며, 정환(鄭換)은 그 사위이다. 나덕신(羅德愼)은 딸 둘을 두었다. 민희일(閔喜一)과 유천(柳遷)이 사위이다. 나덕헌(羅德憲)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을 지냈고,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郎)을 지냈고,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으며, 진사 김용건(金用健)과 이준신(李備臣)은 그 사위이다. 윤항(尹抗)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우탕(禹湯)이다. 위홍주(魏私苗)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위정보(魏廷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懸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정경일(鄭敬一)과 최환(崔渙)은 그 사위이다. 내외 자손들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순박하며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이르렀으니 부모형제간에 남들이 나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상을 당하여 치룰 때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고 부모의 삼년상에 시묘살이를 할 때 전후로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며 제사를 모실 때 정성을 다하였고 남을 구휼해 줌에 어진 마음을 다하였다.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함에 이른 것이 있다. 예컨대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쳤으며, 사신으로서의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과 같은 것은 충(忠)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가 삼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들은 효(孝)이다. 예컨대 윤항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에게 시집간 덕준의 큰딸, 수소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 받은 것은 열(烈)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網)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효로 부모를 섬기고 孝於事親청렴으로 몸을 단속하며 廉以律身의로 궁핍한 자들에게 베푸니 義施于窮乏가르침이 자손들에게 행해졌도다 敎行于子孫아! 공은 독실한 행동이 있는 분이라 할 것이다.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서우(李端雨)가 쓰다. 不侫瑞雨自少從薦紳先生, 聞湖南之羅氏彬彬有世德. 老遌羅生斗夏, 托以其先考及亡伯之顯刻, 思有以效吾慕用者, 不以匪其任爲解, 而勉焉卒事. 今又以其高曾二世之墓文見屬, 顧瑞雨益老且病, 實無以自力重副生之所須, 遲回久之. 然南面而行者, 不至郢而却返曰 : "吾已盡楚之觀" 不可也. 遂強起噓枯而爲之叙曰; 羅生之高王考, 贈贊成公諱士忱, 字仲孚. 其始祖曰高麗 監門衛上將軍諱富. 其後, 工曹典書諱璡, 典農寺正諱公彦, 最顯. 有諱自康務安縣監, 縣監生將仕郞諱繼祖, 將仕生典涓司直長 贈左承旨諱逸孫. 承旨生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諱晊, 是爲贊成公之四世. 妣崔氏司諫院司諫 贈禮曹參判錦南先生諱溥之女. 錦南以博學壯節爲成宗名臣. 贊成公生於嘉靖乙酉二月二十八日. 自幼性至孝, 十六, 崔夫人病篤, 斷指和藥, 以進卽愈, 中宗命旌閭復戶. 長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如鄭南峯芝衍 柳汎愛祖訒, 皆相推許. 明宗乙卯補國子生, 宣祖元年戊辰, 道臣宋贊以公行誼聞于上, 上嘉之, 夏除慶基殿參奉, 遭伯氏喪棄歸, 後除宣陵參奉, 再除金吾郞, 由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拜尼山縣監, 爲治抑豪強恤小民, 忤方伯居殿, 邑民追思立石,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題. 己丑冬, 逆臣鄭汝立之獄起, 委官鄭澈, 乘機羅織, 湖人丁巖壽等, 承徹旨, 將投䟽嫁禍於一時名流, 如李相山海 鄭相彦信 柳相成龍 鄭困齋介淸, 凡三十餘人, 皆入一網, 而又擧公父子之名, 曰 : "某之子某, 與汝立交至密, 某恐其株累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子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巖壽䟽會, 大言辨斥. 及巖壽疏上, 上震怒曰 : "乘逆變陳邪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欲空國而後已, 此必有奸人嗾者." 命禁府拿鞫巖壽等十人, 澈恐, 囑臺啓太學疏救之, 寢其命. 然天鑑孔昭, 恃而無虞. 又有務安儒生裵蓂等疏, 訟困齋及公寃狀甚晢. 然竟以前沮巖壽等疏爲罪. 庚寅, 公與五子, 俱就繫. 上敎若曰 : "孝子原之, 誣引者審之." 公卽幸宥, 而五子不免投北, 吁其危矣. 萬曆丙申十二月二十三日, 以疾卒, 壽七十二. 葬于務安住龍渡向巽之原, 從治命也. 以三子俱有原從功累贈至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彦商之女. 擧四子, 墓在羅州長興洞. 繼配光州鄭氏蛇渡僉使虎之女, 擧三子, 葬祔公, 皆贈貞敬夫人子. 德明己卯進士, 義禁府都事. 德峻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戊子進士, 司憲府監察. 德顯以孝聞, 贈司饔院參奉. 德愼武科, 靈巖郡守. 德憲武科京畿水使. 女長適尹沆, 次適魏弘宙. 德明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德峻五子二女, 纘素宣務郞, 繼素武科价川郡守, 緯素文科同知中樞, 緻素 經素. 主簿金磼 崔光憲, 其婿也. 德潤三子, 繪素武科咸安郡守, 由素 宜素文科禮曹正郞. 德顯六子一女,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有至行. 居憂啜粥, 血泣而圽, 尙素 純素 重素. 鄭渙, 其婿也. 德愼二女, 閔喜一 柳遷, 其婿也. 德憲三子二女, 守素宣務郞, 泰素從仕郞, 貞素. 金用健進士 李㒞臣, 其婿也. 尹沆一子, 佑湯. 魏弘宙三子二女, 山寶武科縣令, 廷寶武科縣監, 國寶. 主簿鄭敬一 崔渙, 其婿也. 內外雲仍多, 不能盡記. 公禀性眞醇, 孝友天至, 父母昆弟之間, 人無間言. 居喪盡禮, 前後廬墓, 一不到家, 祀享虔謹, 賙恤惻怛. 有子皆賢, 人穪六龍, 庭訓所及, 世濟懿行. 如德愼, 從統制李舜臣殲賊于露梁, 德憲從諸將蹙适于鞍峴, 奉使虜庭, 抗節不屈, 忠矣. 如德顯之善養, 得素之毁死, 孝矣. 如公之女適尹沆者, 德顯妻鄭氏, 德峻女適金磼者, 守素妻金氏, 竝殉節旌閭, 烈矣. 一門而三綱備, 嗚呼! 世豈多有也哉. 銘曰 : "孝於事親, 廉以律身, 義施于窮乏, 敎行于子孫." 於虖! 公可謂篤行人也. 嘉善大夫 工曹參判 兼藝文館提學 李瑞雨 撰. 영(郢) 땅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수도였다. 낮은 …… 받았다 원문 '거전(居殿)'은 성적 고사에서 하등을 차지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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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다.】 墓誌銘 【竝序】 중종 경자년(1540)에 호남 나 씨의 자제들이 어려서는 상(象)에 맞춰 춤을 추고54) 정려로 표창을 받았으며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았으니 곧 손가락을 잘라 피를 올려 어머니를 소생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성하여 더욱 명성이 높아져 선조 원년 무진(1568)에 포장되어 벼슬에 천거되었다.55)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이르러 또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가르침을 널리 알렸고, 시상(柴桑)56)에서 벗어나 산중턱 학과 메추라기 사이에서 날갯짓을 게을리 했다.아! 두 임금의 조정에서 세 번이나 포장을 받은 것이 경전(經典)에서 이른바 "하늘과 땅의 바른 도리."57)인데 모두 이 사람을 말하는 것 또한 어찌 유래한 바가 없겠는가. 대개 세상에서 나 씨에게 기대를 건 것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에게서 시작되었고,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과 전농시(典農寺) 정(正) 나공언(羅公彦)이 가장 현달했다고 전한다.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나집(羅諿)이 덕의 기초를 닦아 나자강(羅自康)은 무안현감을 지냈고,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을 지냈고,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4대가 박식하고 장엄한 절개가 있었다. 성종 때 이름난 신하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금남 선생(錦南先生) 최부(崔溥)가 외할아버지이고 또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가 스승이 되어 선조들의 영광을 품고 몸으로 먼저 올바름을 깨우치니 이후는 알 만하다. 그러므로 고을에서는 일찍부터 강남에 훌륭한 효자가 있다고 일컬었고, 동학들은 마치 마문(馬門)과 정현(鄭玄)58)처럼 추존했다고 한다.명종 을묘년(1555) 국자생(國子生)이 되었으나, 기사년(1569)에 큰형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천을 받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신미년(1571) 이후 선릉 참봉(宣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에 연이어 임명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어 부호들을 억누르다가 상관을 거슬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시를 새겼으니 마치 조청헌의 거북과 학59) 같은 말들이 담겼다. 이로부터 도서(圖書)와 송죽(松竹)을 즐기며 천기가 깊었으니 이른바 기축년(1589)의 화는 장계(狀啓)와 갈문(碣文)에 상세히 있다. 당시 옥사를 다스린 자가 화로를 갖추고서 모두 해치려고 했으나 공의 부자는 형장의 귀신을 면했으니 하늘의 해가 머리에 임한 듯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다섯 아들이 모두 유배가게 되어 머리 털 한 올 마냥 쓸쓸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병신년(1596) 12월 23일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그의 태어난 해가 을유년(1525) 2월 28일이니 향년 72세다. 무안의 주룡(住龍) 나루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세 아들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공이 있어 여러 차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공의 휘는 사침(士沈)이고, 자(字)는 중부(仲孚)이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고 장지는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나덕명(羅德明)은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고, 나덕준(羅德峻)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고, 나덕진(羅德進)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덕윤(羅德潤)은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나덕현(羅德顯)은 효행으로 명성이 있어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으며, 나덕신(羅德愼)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나덕헌(羅德憲)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큰딸은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나덕명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 나성소(羅成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나덕준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는데,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 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또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김잡(金磼)과 최광언(崔光憲)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윤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와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나덕현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所)는 피눈물을 흘리며 상례를 이기지 못하는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또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가 있다. 정환(鄭換)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신은 딸 둘을 두었는데, 민희일(聞喜一)과 유천(柳遷)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헌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郎)을 지냈고,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다. 진사 김용건(金用健)과 이준신(李儁臣)은 그의 사위이다. 윤항(尹抗)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우탕(禹湯)이다. 위홍주(魏弘宙)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와 위정보(魏廷寶)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정경일(鄭敬一)과 최환(崔渙)은 그의 사위이다. 내외의 후손이 천백 명에 이른다.이시랑(李侍郞) 서우(端雨)는 묘갈명에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함에 이른 것이 있다. 예컨대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쳤으며, 사신으로서의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과 같은 것은 충(忠)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가 삼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들은 효(孝)이다. 예컨대 윤항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에게 시집간 덕준의 큰딸, 수소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 받은 것은 열(烈)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網)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내가 이로 인하여 삼가 공의 행적을 대략 개관해 보건대, 공은 다리 살을 베어 부모님께 올리고 눈물로 무덤 가 송백나무 마르게 했으니 효의 근본이다. 부모와 형제들과 사이가 벌어진 것 없이 힘껏 인륜을 앞다투어 실행했으니 효의 가지이다. 자기를 단속하고 벼슬을 경계하며 다른 사람을 마땅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했으니 효의 잎이다. 마땅히 찬란하고 아름다워 만세토록 한 가문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제 이 글로 묘비명을 삼는다.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신묘함은 至仁至神오직 그대와 오직 하늘 뿐 惟君惟天하늘이 포상하사 명성 알려지고 褒而誼芬하늘이 도우사 경사가 영원하리니 祐而慶綿군자의 무덤이라 하노라 曰君子之阡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민창도(閔昌道)60)가 쓰다. 中宗庚子, 湖南有羅氏子裁舞象膺旌棹蠲符, 則血指甦天只故之以長而愈騫登, 宣廟元年戊辰, 薦剡牽絲於獎, 至己丑逆獄, 乃又渙發求忠孝門之諭, 脫柴桑倦翮於半山鶴鶉中. 噫! 致兩朝三褒者, 經所謂天經地義, 皆是物也, 亦豈無所自乎! 蓋世之望於羅也, 始乎監門衛上將軍富, 工曹典書璡, 典農寺正公彦, 最顯傳. 式目都監錄事諱諿, 基于德, 則以諱自康務安縣監, 諱繼祖將仕郞, 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爲四世以博學壯節. 成宗朝, 名臣司諫院司諫 贈禮曺參判錦南先生崔公諱溥爲外翁, 又以履素齋李仲虎爲師, 其胚前光, 而體先覺韙, 而後可知也. 故鄕黨早有江巨孝稱, 同學推挹如馬門鄭玄云. 明宗乙卯, 補國子生, 己巳遭伯氏喪棄若云, 薦拜慶基殿參奉歸. 辛未以後, 除命相續以宣陵參奉, 義禁府都事, 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監尼山縣坐, 抑溫戶强工, 奮髥而歸, 邑人刻碑詩, 如趙淸獻龜鶴語. 自是婆婆圖書松竹, 天機也深, 所謂己丑之禍, 則詳在狀若碣文中. 時治獄者, 烘爐叢忮, 公父子之免桁楊之鬼, 則天日之臨頭也, 五子皆流竄, 凜凜一髮, 吁其危矣. 丙申十二月二十三日, 以疾卒, 距其生乙酉二月二十八日, 得年七十二. 葬于務安住龍渡, 向巽之原, 以三子俱有原從功, 屢贈至左贊成. 公諱士忱, 字仲孚. 前配坡平尹氏, 府使彦啇之女, 擧四子, 葬在長興洞. 繼配光州鄭氏, 僉使虎之女, 擧三子二女, 葬祔公, 皆贈貞敬夫人子. 德明進士義禁府都事. 德峻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進士司憲府監察. 德顯以孝聞, 贈司饔院參奉. 德愼武科靈巖郡守. 德憲武科京畿水使. 女長適尹沆, 次適魏弘宙. 德明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德峻五子二女, 纘素宣務郞, 繼素武科价川郡守, 緯素文科同知中樞, 緻素 經素. 主簿金磼 崔光憲, 其婿也. 德潤三子, 繪素武科咸安郡守. 由素 宜素文科禮曺正郞. 德顯六子一女,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 有至行泣血不勝喪. 尙素 純素 重素. 鄭渙, 其婿也. 德愼二女, 閔喜一 柳遷, 其婿也. 德憲三子二女, 守素宣務郞, 泰素從仕郞, 貞素. 金用健 進士, 李儁臣, 其婿也. 尹沆一子, 佑湯. 魏弘宙三子二女, 山寶 廷寶, 皆武科縣監, 國寶. 主簿鄭敬一 崔渙, 其婿也. 內外雲仍多, 至千百. 李侍郞瑞雨之墓碣曰 : "公有子皆賢人, 稱六龍. 庭訓所及, 世濟懿行. 如德愼, 從李統制舜臣, 殲賊于露梁. 德憲從諸將, 蹙适于鞍峴, 奉仕虜庭, 抗節不屈, 忠矣. 如德顯之善養, 得素之毁死, 孝矣. 如公之女適尹沆者, 德顯妻鄭氏, 德峻女適金磼者, 守素妻金氏, 竝殉節旌閭, 烈矣. 一門而三綱備, 嗚呼! 世豈多有也." 不侫因是竊槪, 公雷股和糜, 玉淚枯栢, 孝之本也. 無間昆弟, 力爭倫紀, 孝之枝也. 律己箴官, 誼物孚人, 孝之葉也. 宜乎振振彬彬, 爲一門萬世棟樑哉. 是可以賁諸幽銘曰 : "至仁至神, 惟君惟天, 褒而誼芬, 祐而慶綿, 曰君子之阡."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 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閔昌道 撰. 어려서는 …… 추고 원문 '무상(舞象)'은 《예기》 〈내칙(內則)〉에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작무(勺舞)를 배운다. 15세 이상이 되면 상무(象舞)를 배우고 활쏘기 및 말 다루는 법을 배운다. 20세가 되면 관례(冠禮)를 행하고 비로소 예(禮)를 배운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 成童舞象, 學射御, 二十而冠, 始學禮.〕"라는 말이 나온다. 천거되었다 원문 '천섬(薦剡)'은 추천(推薦)이나 천거와 같은 말이다. 중국 섬계(剡溪) 지방에서 생산된 종이에 추천을 쓴 데에서 유래된 말로, 인재를 천거하는 공문서(公文書)를 말한다. 시상(柴桑) 진(晉)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와서 시상에서 은거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하늘과 …… 도리 천지간의 당연한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 조에 "대저 예라는 것은 하늘의 떳떳한 도이고, 땅의 후한 덕이며, 사람이 행하는 길이다.〔夫禮,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는 말이 나온다. 마문(馬門)과 정현(鄭玄) 마문(馬門)은 마융(馬融)을 지칭한다. 정현(鄭玄)은 후한(後漢)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둘 모두 경(經)을 주석하여 이름을 날렸다. 《南史 王僧虔列傳》 조청헌(趙淸獻)의 거북과 학 조청헌은 송(宋)나라 인종(仁宗), 신종(神宗) 때의 조변(趙抃)을 말한다.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조변이 성도지부(成都知府)를 여러 번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그가 성도로 부임할 때, 거북 한 마리, 학 한 마리를 가지고 갔고, 재임(再任) 때는 그 거북과 학마저 버리고 다만 종 하나뿐이었다. 민창도(閔昌道) 1654~1725.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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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 衛尉將軍李先生伏以爲國殉節百世愈篤興陽君李先生卒以清愼貽厥孫謨靖簡公李先生位高德崇斯文是賴雪巖李先生文章深醇詞命多岀良敬公洛濵李先生令聞登徹嘉乃清白牧使李先生昏朝政非退歸鄕里晦軒李先生從師佔?學得眞詮竹溪李公智勇專美扶安社稷判官李公矢盡槍折投身深河鼇川李先生學博行篤以訓蒙士 贈兵判李公多?戰功 仁齋李公致遠明志文學被薦官至主簿丙子虜變與安牛山倡義 贈兵判梅谷李公敵慨效忠正學立身一體幷享兹値寒食謹粢盛庶品式陳明薦尚 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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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常大夫通禮門副使興陽君事蹟 公諱吉嗚呼奉常科第出身位遇未隆?若爲一時之憾而然卒以清愼爲貽燕之謀一家珠王之羡如是而陰德之及於外孫者亦未艾其中文敬之賢最爲傑岀觀其禀賦旣異充養有力鷄鳴而起莊誦小學中庸日用切於爲己之學其發於論議措諸事業者嚴正縝密皆有條理至於撰定五禮而典故可稽創置四學而風化蔚興律令苛刻則六典有續邑宰數遷則久任有請其他證據今古折群議定是者不可勝紀 太宗嘗憑肩而立顧謂 世宗曰此予柱石其注意之隆如此佐三朝致太平澤及斯民功在於國使太史書之曰某也某之子某之外孫兩家餘慶篤生若人云則於奉常豈不有光乎先生凡一男三女男贊成婿曰郭忠秀景靈判官歷清顯至通憲曰崔霔司醖丞同正曰許貴龍寬厚有大度歷判書位終奉翊大夫開城尹生三男曰周資憲判漢城府事謚簡肅次稠左議政謚文敬次倜嘉善中樞院副事稠學於陽村擢庚午科成䂖璘趙浚其座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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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陽君贊成公兩世祭壇碑銘并序 李氏之先自夫厥初生民必有司商錫姓之故而旣久遠無所徴其在高麗中葉時諱彦林起縣吏登上庠寔爲吾家逹摩祖嗣後至六世諱吉文科奉常大夫通禮門副使封興陽君七世諱舒?文科崇政大夫門下贊成事仍父子位列宰貳圭組蟬聯而惟是窀穸衣履之藏間値喪亂後人靡得以考信焉從先祖文簡公嘗撰家牒歷叙先蹟而贊成府君傍註下始書墓在抱川然不稱爲某坐原竊想當時亦僅記流傳之言而至於睪如之封蓋已失其處也本縣治南十里許有洞曰普天卽姓孫世居之地而古老相傳五百年近山有李相公墓云或者普天與抱川聲相近而訛以抱川故家牒因之歟是未可知也用是而興之諸宗不忘報本追遠之誠爲壇於洞之後麓以祀贊成府君又推原所自出之義而增其一焉合享奉常府君君子曰禮也禮或縁情而義起矧有云去墓而壇者乎且子孫之於祖考一氣流通體魄之託雖曰於此乎於彼乎若魂氣則無不之也萃格之道祇在誠不誠如何耳苟其誠也吾先兩世陟降之靈其將焄蒿旿蠁洋洋乎如在如在顧我而歆我矣豈不休哉於乎今距二府君之世逖矣平日之嘉言懿行所以佑啓我後人者曷其微哉藐玆後孫生於十七八世之下耳目絶不逮未能陳述其萬一可慨也已略記先系及壇享顚末庸寓羹墻之慕云系以銘銘曰於休吾氏貫玆南鄕厥有鼻祖發迹上庠别將家胤衛尉國殤尙瑞尙衣繼序而昌儀郞克世源遠流長奉常篤生受封興陽贊成趾媺左右巌廊紹先?後二公益彰金火迭遞言行湮湮亦越墓垗莫的斧堂誰與目髯俾也可詳耳孫起感謂督不忘有幽普洞肇設壇塲橋梓幷享咸曰允臧尙冀明靈來格洋洋下誠無物矧伊蒸嘗勿替千億降福穰穰鑱珉紀辭神壝之傍山夷石泐毋毀毋傷凡百君子視此銘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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壇祀前一日告由文 維歲次云云祭爲報本豺獸獺魚相物猶然矧伊不如禮重擧廢亦或義起恭性二祖實基吾李寢廟奉主四世而止先王所制曷敢違止尙有斧封瞻掃以時云胡喪亂曠失頹隳古碑没字誰信誰徵白楊青獐狐兔憑陵鬼餒若敖餘五百年春露秋霜怵焉愴焉睠玆普洞雲仍攸宅一氣流通將見衣舃山明水麗其佑我矣爰設壇壝宛上下只牲酒肥馨肇薦禋祀神理人情庸距遠邇於昭陟降休哉丕冒先事是式䖍告謹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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壇祀祝文 維歲次云云先祖考奉常大夫通禮門副使興陽君府君皇矣烈祖啓我後昆若根於木如水之源功而德而敢忘崇報載營祀壇用寓瞻掃雨露時濡僾乎將見 神其格思敬恭明薦以先祖妣完山郡夫人全州崔氏配食尙 饗維歲次云云先祖考崇政大夫門下贊成事府君顯允我祖承先垂後陵谷替代塋墓失守追慕無地來雲是悼義取傳後祀壇創造瓣香庻羞式禮罔愆 神其佑之於千萬年以先祖妣貞敬夫人文化柳氏配食尙 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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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報堂記 堂以追報名追遠報本之謂也曷之謂遠而本歟曷之謂追而報歟人莫不本之於祖而惟其旣遠則易忘故聖人者作制爲祭祀之禮於以溸本而逮遠追愛而報功故傳曰追遠而民德歸厚又曰豺獺而猶知報本追報之義不已重且大歟於戱吾氏之本于玆土遙遙遠矣儀卽以上杞宋無徵卽不知已錫土受封蓋自我奉常府君始而贊成府君仍繼述而昌之木根水源實二祖爲之本而子姓之散處湖嶺者不百其麗綿綿至數十世胡寧以久遠而有所忽忘也歟此今日縣居諸宗之壇祀我二祖而亦越斯堂之建置於壇下爲宿齊蠲饎之所有以也堂凡五架重之得八間房櫳深靚囱{木+靈}濟楚登堂四眺而第見海山岧嶢海水渺溔風帆沙鳥煙雲竹?交暎於咫尺欄楯之外儘可樂也諸宗氏屬余以名若記余亦二祖之遺胤也敢不樂爲之言乎名之有貴於實故謹以追報而名革翬觀覧之美不與焉於是旣述追報之義如右從而申誥之曰不曰追乎追之爲追遠而遠者近之積也不曰報乎報之爲報本而本者末之柢也苟或擧本而遺末捨近而趨遠亦惡乎可哉其必也自近而至於遠因末而循其本不紊乎本末遠近之序然後所謂追與報者斯盡其道矣惟我諸宗氏顧名而思義先從末近而始愈遠而不忘其本益?肯搆之方庸非斯堂之幸歟是役也宗老奎斗奎燮瓚奎甫不計時詘而擧嬴創議而營度之宗少鍾哲潤河柱河瑾河等幷奔奏而效勞焉若其佗念書者輟經而敦其事服田者釋耒而殫其力一乃心膂不月而成厦屋玆皆可記也己年 月 日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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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溪秋夜 蟋蟀在床下古簟生素塵庭空栗子落窓月弔愁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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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禮原遇北渚金冠玉【瑬】罷官北歸 此日相逢離別難凍雲如墨路漫漫遙知故里思君處翠竹千竿雪裡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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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陽城聞琴 骨靑年少眼如刀三峽流泉指下挑風露滿空人寂寂壯元峰上月輪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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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詠亭次板上韻留別餞行諸友 鞍馬浮生不暫休高亭出宿散離愁飛飛旅雁下遙野歷歷寒煙生遠洲親友摠傷遊子去淸歌偏得暮雲留梅窓醉臥未能寢江水夜鳴如別秋【九月晦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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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金晦卿韻【光爀】 靑燈耿寒焰醉裡細論情雪屋人無寐風篁夜有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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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夕祭先墓有感 松暝祭初罷露寒秋已深平生移孝志孤燭照吾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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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發洛中寄淸陰 墻角蟲鳴涼夜遙半輪殘月在窓腰思君不見江南去秋色催寒慘泬寥陶山東去路非遙底事風塵久折腰江上年年送歸客邇來心境轉寥寥 淸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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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謝竹陰城主來訪 爲農山磵已多年仙旆臨門忽儼然七步舊推詩法妙一州今賀使君賢自知先世交偏厚誰信窮途志益堅村酒未能留五馬半窓松影夕陽邊相憶俱非少壯年每懷瓊樹轉依然閉門頓忘身榮辱枕麯聊知酒聖賢窓竹受風陰不改澗松經雪節彌堅邇來萬事灰心久猶向中宵夢日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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