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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구암 명길 한백겸91)에게 보낸 편지 與久庵韓參議鳴吉百謙書 지난번 공께서 우연히 찾아오셨을 때 비록 식사하며 정담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지만, 당상의 존귀함에 압도되어 자세히 대화를 나누며 평온하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더욱 답답합니다. 요즘 날씨가 맑고 화창한데 삼가 몸조리를 조용히 보중하고 계신지요?제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지만, 백발로 세상 풍진을 겪었으니 무슨 심정이겠습니까? 몸소 큰 환란을 겪고, 또 노모와 오랜 벗들이 모두 신원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하여 이에 감히 평소 소신을 바꾸고 변변치 않은 일들로 분주하였으나 결국 이룬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초복(初服)92)에 부끄러워 참으로 몹시 절로 슬픕니다.우리 조선 200년간 유학93)의 근원을 밝게 탐구하고 정주학(程朱學)94)을 계승한 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성리학을 처음 열었고, 그 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네 분의 선생께서 서로 계승하여 도학을 일으켜 비로소 세상을 밝혔는데, 모두 뜻밖의 재앙을 면치 못하시어 그 도가 크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95)와 을사사화(乙巳士禍)96)의 참혹함을 차마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어 죽이고 소멸시킨 나머지 자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그 사이에서 출현하여 사문(斯文)을 창도하여 일으키셨습니다. 성상께서 초년에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시어 일대의 어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무성히 세상을 위해 등용되니 사람들은 모두 선을 지향하게 되고 세상의 도(道)가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무리 또한 이러한 풍조를 듣고 흥기한 자들이고, 우리 형께서 이런 마음을 제기하셨으니 어찌 선현(先賢)들의【아마도 글자가 빠진 듯하다】 풍조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아! 기축(己丑 1589)년의 변고가 진신(搢紳)들로부터 나왔을 때 만약 조정에서 협력하여 같은 마음으로 함께 분노하며 간적(奸賊) 정철(鄭澈)이 세상을 속였던 상황을 극진히 간언하였다면 어찌 사림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간적 정철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때를 틈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려 이미 조정에 섰던 명사들을 죽이고, 산야에 은거하던 선비들마저 살해하였습니다. 벼슬길의 풍파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산림에 숨어 수양하면서 도학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자들까지 아울러 역모를 꾸몄다는 화(禍)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참으로 원통함이 심합니다. 율곡은 비록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밝지 못하였으나 본심은 선량하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살육의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간적 정철처럼 사납고 강퍅하며 화를 잘 내는 사람과 같겠습니까.곤재(困齋) 선생께서 평생 사도(師道)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성리학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여 사도(斯道)를 창도하고 밝히셨으니, 후생 소자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 나아가면 반드시 예법으로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저 정철은 해학하고 방종하였으니 절의로 맑고 담박하며 스스로 고상한 자들을 몹시 시기하는 바가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어내어 때를 틈타 모함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鄭大淸)은 형이 비명에 돌아가심을 애통해하여 상복을 입고 슬피 울부짖다가 14년 만에 말라 죽게 되었으니,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십여 년 이래로는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하고 인심(人心)을 속이기 어려워 초야의 선비들이 자주 상소를 올려 은혜를 바랐고 조정에서도 대신들이 자주 진언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차자(箚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서로 먼저 죽자고 하는 친구가 조정에 없었고 지성으로 힘써 간쟁(諫爭)하러 나서는 자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통곡이 나올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삼가 생각건대 고명(高明)께서 반드시 함께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며 계실 것인데 그 또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존형께서 서관(庶官)97)의 반열에 있어 손을 쓸 처지가 아님을 알지만, 상서(尙書)의 두 대인(大人)께서 때때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도를 논하는 책임이 있으시니, 형님께서 조용히 그 사이에서 억울한 죄상을 뒤집어쓴 원한을 풀어주신다면 무덤 속에서 감읍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연장하는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 형님의 깊은 계책을 믿고 성기(聲氣)98)에 의탁할 뿐입니다. 감히 마음속의 일을 진술하였으니 불쌍히 여기고 살펴 주시어 지극한 뜻에 부합되기를 바랍니다. 크게 바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向也, 仍公偶進, 雖得一餉之款, 而壓尊堂上, 不克細話, 穩承緖論, 迨增憒憒. 卽日淸和, 令攝理毖重潤. 年踰五十, 始霑一命, 白首風埃, 有甚心情. 身經大患, 又有老母知舊, 咸謂伸雪階梯, 乃敢輒渝素守, 碌碌奔走, 未知畢竟所成何事, 有愧初服, 良切自悼. 我朝二百年間, 灼然有以探源乎洙泗, 接響乎洛建者, 有幾人哉. 麗末鄭圃隱始闡性理之學,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四先生, 相繼而起道學, 始明於世, 而皆不免奇禍, 其道不得大行, 己卯乙巳士禍慘矣, 尙忍言哉. 斬伐消鑠之餘, 退溪南冥出於其間, 倡起斯文. 聖明初年崇儒重道, 一代賢才, 蔚爲世用, 人皆向善, 世道可觀. 如吾輩亦聞風而興起者, 吾兄之提起此心, 豈非有賴於先正【恐缺遺字】風耶. 嗚呼。己丑之變, 出於搢紳, 如使朝廷諧協, 同懷共憤, 極陳鄭賊欺世之狀, 則豈有延及士類之理. 奸澈挾憾乘時, 陷人於機穽, 旣殺立朝名流, 又殺山野高蹈. 宦海風波, 古亦有之, 安有藏修林下以道學自任者, 幷被弑逆之禍耶. 古今天下, 寃亦深矣. 栗谷雖知人不明, 素心良善, 使斯人當此事, 必無殺戮之禍. 夫豈如奸澈狠愎悻悻者乎. 困齋平生, 以師道自任, 硏精性理之源, 倡明斯道, 後生小子, 咸造其門, 必以禮法自持, 彼其恢諧放曠, 以節義淸淡自高者, 深有所忌克至. 是乃出排節義之說, 乘時傾陷, 至於竄死朔北. 其弟大淸, 痛兄非命, 服喪悲號, 十四年而枯死, 人有秉彝, 孰不動心於斯乎. 十許年來, 公議至嚴, 人心難誣, 草野之士, 累上章乞恩, 朝廷亦有大臣敷奏, 玉堂陳箚. 而却緣無相先相死之友於朝, 不見出血誠力爭者, 可謂長痛哭處也. 竊念高明, 必同病相憐, 其亦念及於此否. 固知尊兄在庶官之列, 無下手地, 尙書兩大人有銓時論道之責, 令兄可從容其間, 以解覆盆之寃, 則豈但爲竁中之感泣, 抑亦扶斯道壽國脈之一大機. 惟吾兄熟計之恃, 有聲氣之托. 敢陳心裏之事, 幸加憐察, 以副至意. 不勝大願. 한백겸 1552~1615.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157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1589년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되고, 다시 벼슬에 기용되었다. 특히 선조가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에 정탁은 한백겸을 재략(才略)이 있는 인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역》에 뛰어났으며,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학술 경향이 있다. 저술로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기전고(箕田考)》와 문집 《구암유고(久菴遺稿)》가 있다.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떠나 처음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의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유학 원문의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학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정주학(程朱學) 원문의 '낙건(洛建)'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희(朱熹), 또는 그들의 학문인 정주학을 가리킨다. 정호와 정이는 낙양(洛陽)에서, 주희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사화.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士林派)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을 말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일어난 사화. 윤형원이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윤임과 함께 했던 사림(士林)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서관(庶官) 6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이르는 말이다. 성기(聲氣)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나온 말로, 뜻이 맞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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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한음 이덕형99)에게 올린 편지 【1610년】 上領相李漢陰德馨書 【庚戌】 가을 기운이 싸늘한데, 삼가 대감의 기거가 평안하고 강녕하십니까?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 대감의 덕스러운 모습을 흠앙하였던 한결같은 제 마음은 감히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 가문은 불행히도 흉화(凶禍)가 거듭 닥쳐와서 아우의 초상을 치른 지 오래되지 않아 형이 또 세상을 등졌으니 슬프고 참혹하여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연로한 어머니의 노년에 양식을 마련할 길이 없어 구차하게 우관(郵官)100)을 보전하며 보잘것없는 것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가만히 들으니 상국께서 밀어주고 끌어주신 뜻이 매우 크다고 하는데, 용렬한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지극한 뜻에 부응하겠습니까? 한갓 감회만 깊을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원통함을 푸는 일은 이윽고 임금의 뜻을 돌려 이승과 저승을 지극히 감동시켰으며 경사가 사림(士林)에 관계되는 일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 중에 누구인들 흔쾌히 여기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조정의 처리와 결말이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관직만 회복시키고 적몰(籍沒)101)했던 재산만 지급해주는 정도라면 어떻게 민심을 기쁘게 하고 정기가 펼쳐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경함(景涵)【이발(李潑)의 자(字).】 형제는 효성스럽고 공손한 사람인데 대궐문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원통함이 아마도 천지에 다 하였을 것입니다. 곤재(困齋) 선생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항상 스승의 도리로 자임하였으나 함께 잔혹한 수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은 슬픔을 머금고 상복을 입은 채 결국 말라 죽게 되었으니 천고의 고통 중에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수우당(守憂堂) 최영경(崔永慶)은 오로지 기상과 의리를 숭상하여 한결같은 절조를 지닌 고상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포증(褒贈)102)이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곤재 선생께서 평생토록 이룩한 학문의 조예는 한 가지 절조만 지닌 선비와 견줄 수 없거늘, 세상에 도(道)를 아는 자가 없으니 누가 이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생각건대 상공께서 선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사랑하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왔고, 억울함을 슬퍼하며 풀어주심은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절로 나왔으니, 이러한 큰 기회를 맞이하여 마땅히 몸과 마음을 다해 덕을 드러내고 후세에 밝히심이 좋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고명께서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선진(先進)들께서는 쇠락(衰落)하거나 거의 다 돌아가셨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03), 두암(斗巖) 조방(趙垹)104), 사순(士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자(字).】, 숙부(肅夫)105)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자(字).】와 같은 여러 현인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으니 한 시대의 인물들을 돌아보면 아득해지니, 적을 물리쳐 깨끗이 소탕하는 공(功)을 상공께 바라지 않으면 누구에게 기대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시되 빨리 도모하시어 사우(士友)들의 마음에 부응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저처럼 온갖 걱정과 환란 속에서 갖가지 염려들을 덜어내려면 죽음을 각오할 뿐이며 다른 것에는 겨를이 없습니다. 【두 글자가 결락되었다.】 사우(師友)들의 뜻이 중하고 인정상 차마하지 못하였는데 황공하게도 알아주시고 장려해주셔서 마음속에 하나의 떡처럼 맺힌 부분을 직접 토로한 것이니, 다시 바라건대 너그러이 포용하시고 헤아려주십시오. 삼가 절하며 드립니다. 秋氣凉肅, 伏惟台候起居神相休福. 久不聞問, 仰德一心, 不敢少置. 德潤私門, 不幸凶禍荐至, 喪弟未久, 兄又見背, 哀傷慘惻, 不自堪忍. 老母臨年, 辦養無由, 苟保郵官, 碌碌逡巡, 他無足喩者. 仄聞相國推輓之意甚盛, 自惟蹇劣, 將何以副至意? 感懷徒深. 竊念伸寃事, 已得回天, 感極幽明, 慶關士林, 凡有血氣, 孰不欣忭. 第未知朝家處置結末如何, 只復其官, 只給籍沒, 則奚足以快人心, 而伸正氣乎. 景涵【李潑字也】兄弟, 以孝悌之人, 閤門騈首就戮, 其爲寃抑, 窮天極地. 至於困齋, 白首窮經, 常以師道自任, 而並爲毒手所陷. 其弟大淸, 含哀服素, 竟至枯死, 千古之痛, 孰甚於斯. 守愚堂專尙氣義, 不過一節之高士, 而褒贈已極. 困齋平生, 學問造詣, 非一節之可擬, 世無知道者, 誰能識此人. 惟相公好善愛士, 發於赤心, 悼屈伸枉, 出自悃愊, 當此大機會, 宜盡心力, 暴揚其德, 昭揚後世, 可也. 不審高明之秤量如何. 先進凋落殆盡, 如鵝溪斗巖士純【金鶴峯字也】肅夫【金東岡宇顒字也】諸賢, 皆已作古人, 顧瞻一世人物渺然. 摧陷廓淸之功, 非有望於相公而何願. 熟思而亟圖之, 以副士友之心, 幸甚幸甚. 如德潤憂患叢中, 百念消歇, 分死而已, 他無暇.【缺兩字】 師友義重, 情不自忍, 辱荷知獎, 直吐出胸中一餠結, 更冀寬容以裁之. 謹拜以聞.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우관(郵官) 우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로, 역(驛)의 찰방(察訪), 역승(驛丞)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적몰(籍沒) 적록(籍錄)하여 몰수(沒收)하는 일을 말하는데, 중죄인의 재산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을 관가의 문적(文籍)에 적고 모두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 포증(褒贈) 나라에서 포창하여 관직을 추증하는 것이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로, 156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1591년(선조24) 서인 측 대신인 좌의정 정철(鄭澈)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게 만들고, 이를 빌미로 정철,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의 주요 인물들을 대거 축출하고 권력을 잡아 서인으로부터 소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방(趙垹) 1557~1638.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이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현손이다. 숙부(肅夫)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자(字)이다. 호는 동강(東岡)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조식(曹植)의 문인이며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조선시대 병조참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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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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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순상 우복 정경세108)에게 올린 편지 上巡相鄭愚伏經世書 작별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떠난 지 여러 세월이 지났는데 온통 대감의 덕을 우러르는 제 마음은 감히 조금도 그치질 않습니다. 지금 늦더위로 여전히 괴로운데, 삼가 시절에 마땅히 순응하며 기거는 강녕하십니까?저는 몸조리에 어두워 질병이 번갈아 침투하였는데 다행히 조금 나아져 몸을 이끌고 역(驛)으로 돌아와 적막한 우정(郵亭 역관)에서 예전에 했던 공부를 복습하고 연구하고 있다가 지우(知遇)109)의 은혜에 감격하였으나 달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사색하여 한 가지 어리석은 생각을 얻었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오니, 별지에 기록한 것을 부디 한 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바라건대 너그럽게 받아주시고 헤아려주십시오. 삼가 격식을 갖추지 못한 채 편지를 드립니다.별지지난번 그대110)에게 인사드렸을 때 합하(閤下)를 처음 뵈었습니다. 합하께서는 공문서로 일이 많아 바쁘신 중에도 주자의 서책을 읽고 의리(義理)를 궁구하며 토론하시니 이는 이른바 옛 사람이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한다.111)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앙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칭송하면서 우러러보게 하여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글을 써서 즐거움을 취할 자료를 갖추어보았는데, 제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니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무릇 사람이 천지 사이에 서서 삼재(三才)112)에 참여한 까닭은 마음이 한 몸을 주재하여 온갖 변화에 수작(酬酌)하며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을 화육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113) 그러나 마음이라는 물건은 홀연히 나갔다 홀연히 들어오고, 있는 듯 하면서 없는 듯 하며, 연못에 빠졌다가도 하늘로 날아오르고,114) 불처럼 뜨겁다가도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리니115) 힘써 제어할 수 없고 억지로 제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오사(五事)116)를 공경히 하고 사물(四勿)117)을 지켜서 겉으로 희롱하는 것에 방탕하게 현혹되지 말고, 안으로 살펴서 구차하게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動)과 정(靜)을 아울러 기르고 표(表)와 리(裏)에 간극을 없게 하며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118) 제어하여 기(氣)가 개인적인 사욕을 쫓지 않게 하며, 성찰하고 깨달아 일이 반드시 의리를 따르게 하여 수작(酬酢 응대(應對))하고 참여해 돕는다면 어찌 가는 곳마다 마땅함을 얻지 않겠습니까.그러나 사물에는 선악의 차이가 있고 일에는 옳고 그름의 구별이 있으니, 만약 학문(學問)과 사변(思辨)의 공부에 우선적으로 힘쓰지 않고 천리와 인욕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바가 다만 지엽적인 일에 자질구레하게 얽매입니다. 비록 혹시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우연히 도리에 합치되더라도 그 과정과 근본은 진실로 성현의 모양(模樣)이 아니니 어찌 천지와 그 큼을 함께하여 사물의 마땅히 그러함을 따르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학(大學)》의 가르침은 반드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먼저 한 뒤에 성의(誠意), 정심(正心)하고, 수신(修身)한 이후에 미루어서 제가(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미치는 것이니,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119)】의 소재를 먼저 알게 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땅함으로 채워야 합니다. 삼가 그 염려하는【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120)】 마음을 항상 육체에 보존하고 몸이 한쪽으로 빠지지 않게 한 이후에 집안과 국가와 천하가 이로써 제자리에 놓이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학문이며, 자기를 이루고 남을 이루어주는 도(道)입니다. 성인과의 거리가 비록 멀더라도 남아 있는 경전은 아직 존재하고 있으니 그 책을 읽고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어찌하여 옛 사람들에게 미칠 수 없겠습니까.우리 조선 200년간 유학의 근원을 밝게 탐구하고 정주학을 계승한 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성리학을 처음 열었으나 입언(立言)121)의 공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원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다섯 분의 선생께서 서로 계승하여 도학을 일으켜 세상에 크게 밝혔는데, 모두 때를 만나지 못하여 그 도가 크게 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유풍과 남은 공렬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근세의 풍습이 경박스럽고 거짓되어 갑자기 20년 전의 규모로 변하여 예법을 천하게 여겨 버려두고 오로지 부화(浮華)한 것만을 일삼아서 말 잘하는 것은 숭상하나 덕은 숭상하지 않으며, 이익은 아나 의리는 알지 못하니, 인심이 둘로 나뉘고 시론(時論)이 분열된 것이 어찌 괴이하게 여기기에 족하겠습니까. 선배들께서 쇠락하고 다 돌아가셔서 주맹(主盟 주장(主掌))이 없으니 한 세대를 돌아보아도 인물이 묘연한데, 붕당은 나뉘어 대립하면서 오직 이익만 추구하고 세도(世道)는 오랑캐와 금수(禽獸)로 귀결되니, 오히려 어떻게 유가의 대업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오직 합하께서 지위가 높으신데 독서를 그만두지 않으시고, 지혜가 밝은데도 겸양의 덕에 더욱 힘쓰시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확고하고 세상을 붙들려는 뜻에 독실하시니, 이는 모두 부귀하고 현달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나 오직 합하께서만 능하시므로 여기에서 유래한 연원을 볼 수 있고 반드시 남다른 명성이 있습니다. 스스로 책임을 중히 여기고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니 거의 속세에서 견줄 바가 없어 구구한 마음으로 경탄하며 제 자신은 하루도 마음속이 석연(釋然)치 않았습니다. 이에 미치광이나 소경[妄靈]의 말로 시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던 정성을 대신하고, 또한 은혜로 보살펴 주신 데 대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합니다. 삼가 살펴보시고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어질고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독서에 공력을 더 가하시며,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다시금 겸허함에 힘쓰시며, 의리를 살펴 사물에 처하시고, 눈과 귀를 넓혀 시비(是非)를 살피시며 사람들의 폄훼나 칭찬으로 평생의 정해진 뜻을 바꾸지 말고 자신의 이익과 해로움으로 천하의 공변된 도(道)를 폐하지 않으시면, 내 마음을 제어할 수 있어 허물이 없어지고 들릴 만한 것이 있을 것이며, 천리(天理)를 회복할 수 있어서 더 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니, 저승에서는 반드시 말없이 도움이 있을 것이고 이승에서는 반드시 드러나는 도움이 있을 것이며,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키고 올바름으로 사악함을 제압하며,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나란히 서는 책임을 거의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합하의 덕은 한 집안의 덕이 아니라 천하의 큰 덕이 되며, 합하의 영광은 한때의 영광이 아니라 만세토록 길이 전해지는 영광이 되리니, 원컨대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유념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拜違命席, 屢轉駒陰, 一心仰德, 不敢少置. 目今老暑猶苦, 伏惟順時之宜, 起居休吉. 某昧於攝理, 疾病軼侵, 幸得少蘇, 扶曳還驛, 寂廖郵亭, 溫繹舊學, 感蒙知遇, 稱效無他. 思以一得之愚,冀其萬一之補, 別紙所記, 幸賜一覽. 伏惟寬容以裁之. 謹狀不備.別紙向也得拜, 下風創見. 閤下於簿牒倥傯中, 讀朱子書, 窮討義理, 是所謂古人仕優之學. 令人欽聳, 不覺讚仰, 久而不能忘也. 因爲之說, 以備樂取之資. 愚不自揆, 竊冀少垂察焉. 夫人之所以立乎兩間, 而參爲三才者, 以其心能主宰一身, 酬酢萬變, 而可以位天地贊化育也. 然而心之爲物, 忽出忽入, 若存若亡, 淵淪而天飛, 焦火而凝氷, 不可以力而御, 不可以强而制. 唯能敬用五事, 守以四勿, 勿蕩眩於外玩, 勿苟恕於內省. 動靜交養。表裡無間, 操存攝伏而氣不逐於己私, 省發警悟而事必循於義理, 以之酬酢, 以之參贊, 何所往而不得其當者乎. 然而物有善惡之殊, 事有是非之別, 若不先務學問思辨之功, 而不知天理人欲之所在, 則寅夕所爲, 徒規規於事爲之末. 雖或一言一行, 偶合於道, 而其田地本領, 則固非聖賢模樣, 安能與天地同其大, 而順事物之當然乎. 是以大學之敎, 必先致知格物而后, 誠意正心, 修身而后, 推而及於齊治平者, 欲使學者, 先知【缺二三字】之所在, 而實其好惡之當. 謹其念慮【缺三字】心常存於軀殼, 身不陷於一偏而后, 家國天下以是而措之耳. 此所謂明德新民之學, 而成己成物之道也. 去聖雖遠, 遺經尙存, 讀其書以治其心, 則何古人之不可及哉. 我朝二百年間, 灼然有以探源乎洙泗, 接響乎洛建者有幾. 麗末鄭圃隱, 始闡性理之學, 而不見立言之功.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退溪五先生, 相繼而起道學, 大明於世, 而皆不遇時, 其道不得大行, 其遺風餘烈, 猶有存者. 近世風習澆訛, 頓變二十年前規模, 賤棄禮法, 專事浮華, 尙言而不尙德, 知利而不知義, 人心之携貳, 時論之分裂, 何足怪也. 先進凋落殆盡, 主盟無人, 顧瞻一世, 人物渺然. 朋分角立, 唯利是趨驅, 世道於夷狄禽獸之歸, 尙奚足與論儒家之大業乎. 惟閤下, 位高而不廢讀書, 智明而益懋謙德, 斷斷乎憂國之念, 眷眷乎扶世之志, 此皆貴達所不能, 而惟明公能之, 於此可以見淵源所自, 必有異聞. 自任之重, 逈出常情, 殆非流俗之所可擬. 區區敬歎, 自不能一日釋然於中也. 玆將狂瞽之言, 以代詩人授粲之誠, 且以效其恩顧之萬一. 伏願垂察留意. 不自賢智而加功讀書, 不自矜滿而更勉謙虛, 審義理而處事物, 廣聰明而察是非, 勿以人之毁譽而易平生之定志, 勿以己之利害而廢天下之公道, 則吾心可制而無過可聞, 天理可復而無已可克, 幽必有黙佑, 明必有顯比. 誠足以格天, 正足以壓邪, 參三竝立之責, 庶可塞矣. 然則閤下之德, 非一家之德而爲天下之大德, 閤下之榮, 非一時之榮而爲萬世之長榮, 願明公熟計之加之意, 千萬幸甚. 정경세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숙(文肅)에서 문장(文莊)으로 개시(改諡)되었다. 1586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이 되었고,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과 반목 끝에 삭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발탁되어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경전에 밝았고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지우(知遇) 인격(人格)이나 학식(學識)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해 주는 것을 뜻한다. 그대 원문의 '하풍(下風)'은 자신이 상대방의 교화 아래에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상대방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옛 사람은 …… 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 삼재(三才) 우주를 구성하는 세 가지 바탕, 곧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말한다. 천지가 …… 때문입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서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 하였는데, 집주(集註)에, 이것을 일러 학문(學問)의 극공(極功)이요 성인(聖人)의 능사(能事)라고 하였다. '參天地 贊化育'은 '參贊化育'의 의미이다. 즉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돕는다는 뜻으로, 제왕(帝王)의 덕화(德化)가 자연과 부합됨을 일컫는 말이다. 연못에 …… 날아오르고 마음의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한다. 《주자시집》 권4 〈재거감흥(齋居感興)〉에 "인심의 오묘함은 예측할 수 없어, 드나들 때에 기를 타고 나오네. 얼음처럼 얼었다가 불처럼 타오르며, 연못에 빠졌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네.〔人心妙不測, 出入乘氣機. 凝冰亦焦火, 淵淪復天飛.〕"라고 하였다. 불처럼 …… 얼어버리니 《장자》에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뜨거워지면 불처럼 타올라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차가워지면 얼음장처럼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其熱焦火 其寒凝冰]"고 한 말이 나온다. 희로애락 등 인간의 마음속에 이는 번뇌(煩惱)를 뜻하는 표현이다. 오사(五事)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이다. 《서경》 〈홍범(洪範)〉에 "오사(五事)이니, 첫째는 모(貌), 둘째는 언(言), 셋째는 시(視), 넷째는 청(聽), 다섯째는 사(思)이다."라고 하였는데 외모는 공손히, 언어는 조리 있게, 보는 것은 밝아야하며, 듣는 것은 분명해야하며, 생각은 지혜로워한다고 했다. 사물(四勿)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論語集註 顔淵》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원문의 '조존(操存)'은 마음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공자가 이르기를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를 향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하였다."라고 한 데서 나왔다. 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 《우득록(愚得錄)》 〈與崔監司書〉에 의거하여 '선악(善惡)' 두 글자가 결락한 것으로 보인다. 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 《우득록(愚得錄)》 〈與崔監司書〉에 의거하여 '지발이(之發而)' 세 글자가 결락한 것으로 보인다. 입언(立言)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하거나 저술 또는 불후의 학설을 남긴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 조에 "가장 뛰어난 것은 덕을 세움이고,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며, 그 다음은 후세에 전할 만한 말을 남겨서, 비록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면 이를 일컬어 영원히 썩지 않는다고 한다.〔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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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김우옹 문장135)의 〈우분시〉136)에 삼가 차운하다 敬次金東岡文丈憂憤詩韻 【壬辰五月, 東岡自謫所蒙放, 赴行在所時.】 【1592년 5월 동강이 적소에서 사면되어 풀려나 행재소137)로 나아갔을 때이다.】만년에 어쩌면 이리도 기구했던지 末路一何奇보름이 거듭되어 육십 삼세 되었네 三五重七九온갖 흉악함으로 눈앞이 번잡하니 百兇叢目下내가 뒤늦게 태어남이 슬프구나 哀哉我生後왕망138) 때처럼 이미 내분이 일어나거늘 賊莽旣內訌추한 오랑캐가 밖에서 짓밟네 醜虜又外蹂어찌 생각이라도 했겠나 이백년 기업이 何圖二百基하루아침에 경계수비를 잃을 줄을 一朝失警守원대한 계책139) 세운 자 누구의 아들인지 訏謨者誰子부끄러운 그 얼굴 어찌 그리 두꺼울까 忸怩顔何厚나라의 근본에 대한 계책 일삼지 않고 不事邦本計다만 우리 임금 기만하는 것만 잘하네 徒能瞞我后백성들 오래도록 원망으로 떠들썩한데 赤子久嗷嗷부모를 받드는 일을 어찌 알겠나 焉知戴父母조정의 계획은 이전 계책을 잃어버렸으니 廟算失前籌어떻게 호랑이처럼 헌걸차게 돕겠는가 有何補虎赳임금님 수레가 홀연히 몽진을 하시니 乘輿忽蒙塵신료들은 차고 있던 인끈 벗어 던졌네 臣僚捐綰綬이리저리 흩어져 세력을 떨치지 못하니 離披勢不振의로운 군대 누가 규합할 수 있겠는가 義旅孰能糾살아있는 백성 모두 어육이 되고 生民儘魚肉남녀 모두 놀라서 달아나기만 할뿐이네 士女但驚走누가 무목140)의 마음을 품고 誰懷武穆心누가 문상141)의 손을 잡을까 孰握文相手의관이 모두 엎어지고 넘어져 衣冠盡顚倒대궐 연못142)에는 초목만 무성히 우거졌네 鳳池生灌莽당당하던 우리나라 조정이 堂堂我國朝어찌 차마 왜적에게 시달릴 줄이야 豈忍困海醜옥에 갇힌 신하는 새로운 은총을 입으나 纍臣荷新恩근심과 울분이 우두성143)을 찌르네 憂憤衝牛斗원하건대 장차 재앙을 야기한 이유를 願將階禍由양쪽을 들어서 다 말하고자 하시니144) 欲竭兩端叩간악한 자를 주벌하고 요사한 기운 쓸어내 誅奸掃氛祲우리 백성들 크게 위로하여 주소서 大慰吾黔首선생께서는 도가 서로 같으니 先生道相同충직한 단심으로 피를 토하며 忠赤垂血嘔제 몸 잊은 채 왕 계신 곳으로 가시니 忘身赴王所선택받은 그 의미145) 저버리지 마소서 不背熊魚取본분에 맞는 행위146) 이미 정해졌으니 素履已先定마음을 저버리지 마소서147) 毋令負心肘 末路一何奇, 三五重七九.百兇叢目下, 哀哉我生後.賊莽旣內訌, 醜虜又外蹂.何圖二百基, 一朝失警守,訏謨者誰子, 忸怩顔何厚.不事邦本計, 徒能瞞我后.赤子久嗷嗷, 焉知戴父母.廟算失前籌, 有何補虎赳.乘輿忽蒙塵, 臣僚捐綰綬.離披勢不振, 義旅孰能糾.生民儘魚肉, 士女但驚走.誰懷武穆心, 孰握文相手.衣冠盡顚倒, 鳳池生灌莽.堂堂我國朝, 豈忍困海醜.纍臣荷新恩, 憂憤衝牛斗.願將階禍由, 欲竭兩端叩,誅奸掃氛祲, 大慰吾黔首.先生道相同, 忠赤垂血嘔,忘身赴王所, 不背熊魚取.素履已先定, 毋令負心肘. 문장(文丈) 재주가 높고 덕이 뛰어나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우분시〉 《동강선생문집(東岡先生文集)》에는 〈壬辰五月聞倭賊大擧入寇京城不守〉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 할 때 머무르던 곳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임진왜란 때 임금의 피난처를 가리킨다. 왕망 전한(前漢) 말기 평제(平帝)를 독살한 뒤 두 살 된 유영(劉嬰)을 추대하고,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인심을 모았다. 후에 결국 유영을 몰아낸 후 국호를 신(新)이라 고치고 황제가 되었으나, 한말(漢末)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하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건국한 지 15년에 멸망하였다. 원대한 계책 원문의 '우모(訏謨)'는 우모정명(訏謨定命)으로, 《시경》 〈억(抑)〉의 "원대한 계책으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며, 장구한 계획을 세우고 때맞추어 알린다.〔訏謨定命, 遠猶辰告.〕"에서 인용한 것이다. 무목 '무목(武穆)'은 남송(南宋)의 명장 악비(岳飛, 1103~1142)로, 자는 붕거(鵬擧), 시호는 무목이다. 금(金)나라의 남하(南下)에 대항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정충악비(精忠岳飛)'라고 쓰인 사자기(四字旗)를 하사받을 정도로 고종(高宗)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진회(秦檜)의 참소로 결국 옥사(獄死)하였다. 문상(文相)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 1236년~1282년)을 이르는 말이다. 송(宋)과 원(元)의 전쟁 중 원나라에 사로잡혔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그를 이용하여 송나라의 잔당을 치려했으나 문상은 충절을 굽히지 않았고 3년 간의 옥살이 끝에 살해되었다. 대궐 연못 '봉지(鳳池)'는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금원(禁苑)에 파 놓았던 연못인 봉황지(鳳凰池)를 가리키는 말인데, 전하여 대궐 안의 연못을 의미한다. 우두성(牛斗星) 견우성(牽牛星)과 북두성(北斗星)을 말한다. 양쪽을 …… 하시니 《논어(論語)》 〈자한(子罕)〉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지만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그가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양단을 들어서 다 말해주노라.〔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선택받은 그 의미 원문의 '웅어취(熊魚取)'는 좋은 것을 선택한다는 뜻. 《맹자》 〈고자상(告子上)〉에 "고기[魚]도 갖고 싶고 곰 발도 갖고 싶지만 두 개를 모두 가질 수 없을 때에는 고기를 버리고 곰 발을 갖는다." 하였다. 본분에 맞는 행위 소리(素履)는 본분대로 행함을 의미한다.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에 "본래의 행함으로 가면 허물이 없으리라.〔素履, 往, 無咎.〕"라고 하였다. 마음을 저버리지 마소서 원문에는 '肘(주)' 아래에 "아마도 오류의 글자가 있는 듯하다.〔恐有誤字〕"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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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의 원운시 原韻 【東岡】 내 생애 때를 잘못 만나 고생함이          吾生苦不辰어찌 재앙148)를 만난 것 때문만일까          胡獨遭陽九하늘이 내린 죽음의 환란은 旻天降喪亂지난 일도 아니고 앞으로의 일도 아니네 不自我先後해충 같은 적들로 내홍이 일어났는데 蟊賊作內訌오랑캐의 기병마저 제멋대로 짓밟으니 戎馬恣躪蹂백성들은 원수가 되어 赤子化仇讎국경을 지킬 사람조차 없다네 疆圉無人守슬프구나 이백년 동안 哀恫二百年그 은택 얼마나 깊고 두터웠던가 恩澤何深厚하루아침에 백성을 잃었으나 一朝失丘民우리 임금을 위로하는 말이 없네149) 不云撫我后조정에는 보좌하는 신하들 있고 廟堂有相臣변방 성곽에는 헌걸찬 무인들 많으며 邊城多武赳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에 高官與厚祿겹겹의 도장에 인끈 거듭 매었거늘 纍印若若綬좋은 책략 있단 말 들어본 적 없고 不聞籌策紆의병 모집하는 모습 본 적도 없으니 不見義旅紏어지러이 문환150)처럼 항복하고 紛紛文煥降요란스레 단공151)처럼 달아나네 擾擾檀公走칠묘152)는 타고 남은 재 되고 七廟化灰燼도성은 적들의 손에 떨어졌네 京邑付賊手임금님 수레 어디 쯤 향하실지 玉輅向何許공경대부들은 초야로 흩어졌네 公卿落草莽누가 환란을 초래하였기에 誰生禍亂階도적을 이르게 하고 오랑캐까지 불렀는가 致寇招戎醜외로운 신하 북쪽 변방에 있으니 孤臣在北塞속절없이 한 말 간담만 남아 空餘膽一斗고개 들어 서쪽 하늘 바라보고 擧頭望西方대궐 섬돌 향해 머리 조아리네 欲向螭階叩원하건대 상방검153) 빌려서 願借尙方劍아첨하는 신하 머리 단번에 참하리라 一斬佞臣首답답한 마음 누구에게 하소연 할까 腷臆誰與訴쓰라린 피를 토해내고자 하네 辛酸血欲嘔일찍이 고인의 가르침을 들으니 嘗聞古人訓물고기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한다고 했네 魚舍熊掌取바람 부는 처마에서 주자의 서책 펼쳐드니 風簷展朱書도리가 가슴에 사무치네 道理貫心肘 吾生苦不辰, 胡獨遭陽九.旻天降喪亂, 不自我先後.蟊賊作內訌, 戎馬恣躪蹂,赤子化仇讎, 疆圉無人守.哀恫二百年, 恩澤何深厚.一朝失丘民, 不云撫我后.廟堂有相臣, 邊城多武赳,高官與厚祿, 纍印若若綬,不聞籌策紆, 不見義旅紏,紛紛文煥降, 擾擾檀公走.七廟化灰燼, 京邑付賊手.玉輅向何許, 公卿落草莽.誰生禍亂階, 致寇招戎醜.孤臣在北塞, 空餘膽一斗.擧頭望西方, 欲向螭階叩.願借尙方劍, 一斬佞臣首.腷臆誰與訴. 辛酸血欲嘔.嘗聞古人訓, 魚舍熊掌取.風簷展朱書, 道理貫心肘. 재앙 양구는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추출해 낸 말로, 4천 5백 년 되는 1원(元) 중에 양액(陽厄)이 다섯 번 음액(陰厄)이 네 번 발생한다고 하는데, 1백 6년 되는 해에 양액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엄청난 재액(災厄)을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漢書 律歷志 上》 우리 …… 없네 원문에는 '后(주)' 아래에 "이 아래 '무(毋)'자 운(韻)이 없으니 아마도 빠진 듯하다〔此下無毋字韻恐脫〕"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문환(文煥) 송말(宋末) 원초(元初) 때 사람이다. 일찍이 송나라에 벼슬하였는데 원 나라 세조의 권유로 투항, 이후 송을 공략하는 데 많은 계책을 제공하였으며 결국 송조(宋朝)의 멸망에 공헌하였다. 《新元史 列傳 74》 단공(檀公) 유송(劉宋) 때의 장군 단도제(檀道濟)를 말한다. 그는 지략(智略)이 뛰어나서 고조(高祖)를 따라 북벌(北伐)할 적에 전봉장(前鋒將)으로 누차 공을 세워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났는데, 뒤에 남제(南齊)의 왕경측(王敬則)이 일찍이 매우 급한 때를 당하여 어떤 사람에게 고하기를, "단공(檀公)의 삼십육책(三十六策) 가운데 주(走) 자가 상책(上策)이었으니, 너희들은 응당 급히 도주해야 한다."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적과 싸우다 불리하면 도주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칠묘(七廟) 칠묘(七廟)는 종묘(宗廟)이니,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삼소(三昭), 삼목(三穆)의 총칭이다. 상방검(尙方劍) 임금이 신하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의미에서 내려 주는 보검이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이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황제의 신임을 믿고 정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장우(張禹)를 베어 죽여야 하니 상방검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37 朱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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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유고부록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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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승훈랑 행 의금부도사 소포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承訓郞行義禁府都事嘯浦羅公事實記 공의 휘(諱)는 덕명(德明)이고, 자는 극지(克之)이며, 호는 구암(龜巖) 또는 소포(嘯浦)이고, 성은 나 씨(羅氏)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고려 시대 나부(羅富)는 감문위(監門衛)1) 상장군(上將軍)으로 곧 공의 시조가 된다. 이후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에 이르러 매우 귀하게 되었다. 나진은 전농시(典農寺)2) 정(正) 나공언(羅公彦)을 낳았는데 홍무(洪武)3) 연간에 왜적을 물리친 공훈이 있어 대대로 호남의 명문집안이 되었다.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져 중종(中宗)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를 받았다. 선조(宣祖) 초에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어짊을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을 지냈고 벼슬이 이산 현감(尼山縣監)4)에 이르렀다. 그의 거사비(去思碑)5)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각기 세 아들을 낳았기에 그들을 육룡(六龍)이라 불렀는데 공은 그 중 장자로 자질과 품성이 빼어나고 훌륭하여 식견을 지닌 자들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나이 8~9세에 길에서 고을 아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아전이 예로써 대하지 않자 공은 이치를 들어 꾸짖으니 아전이 곧바로 숙연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탄복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만력(萬曆)6) 기묘년(1579) 진사에 급제하니 때는 선조 12년이었다. 전조(銓曹)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는데, 임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명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두 아우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은 정곤재(鄭困齋)7)의 문인으로 모두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마침내 그들을 좋게 여기지 않은 자들의 시기를 받았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8)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위관(委官) 정철(鄭澈)9)이 기미를 틈타 있지도 않은 죄를 꾸몄다.10) 정암수(丁巖壽), 양천경(梁千頃), 홍천경(洪千璟)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세상의 유명 인사 30여명을 모함하였다.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등이 정여립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게 교유를 하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빠져나가려고 하니 모두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장을 심사하는 자리에 나가 큰 소리로 그들을 배척하였다.정암수의 상소가 임금에게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몰래 사악하고 간교한 상소를 올려 훌륭한 재상과 이름 있는 경들까지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교한 사람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이도록 하셨다. 이에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태학생(太學生)들로 하여금 혹은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혹은 글을 올리도록 하여 임금의 명이 중단되었다.얼마 후 무안 유생 배명(裵蓂)이 곤재(困齋)와 공의 부자의 원통한 상황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상소하였으나 정철은 끝내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한 것으로 죄목을 엮어 공의 여섯 부자가 일시에 심문을 받게 되었다.찬성공(贊成公)은 특별히 효로 용서받았고, 공은 경성(鏡城)11)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며, 여러 아우들은 각지에 나뉘어 유배 갔다. 공이 유배지에 이르러 시를 지어 아우에게 척강(陟岡)의 회포12)를 부쳤다.변방의 구름 높이 떠가고 기러기 무정한데 關雲迢遞鴈無情어느 곳 외로운 성에서 부모형제 그리나 何處孤城憶父兄촛불 깜박이는 깊은 밤 서리 맞은 잎 소리에 殘燭夜深霜葉響꿈속의 연못 풀은 자라나지 못하네 夢中池草不能生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들끓어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이 말을 달려 쳐들어오니, 북쪽 변방의 회령(會寧)13)사람 국경인(鞠景仁)14)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및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15) 황정욱(黃廷彧)16) 등을 잡아두고 왜적에게 대응하였다. 이에 진보(鎭堡)17)의 배반한 군졸들이 지키던 장수들을 다투어 결박하고 적들에게 항복했으니 종성(鍾城)18)사람 국세필(鞠世弼)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19),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공은 함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한백겸(韓百謙)20)과 함께 그들의 계획에 힘을 모으기로 찬성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도 역시 와서 모여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목을 베어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졌다. 이듬해 봄에 별장(別將) 이붕수(李鵬壽)21)와 만호(萬戶) 이희당(李希唐)이 왜적과 전투를 하던 도중 같은 날 죽었다. 공과 정문부가 시를 지어 이 일을 슬퍼했는데, 이 일은 택당(澤堂) 이식(李植)22)이 편찬한 《북관지(北關志)》23)에 실려 있다. 그해 공이 비로소 죄를 용서받고 풀려나 돌아왔다.병신년(1596)에 찬성공(贊成公)의 장례를 무안(務安) 주룡(住龍) 나루에서 치르고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공이 여러 동생들과 함께 주룡으로부터 은적산(銀積山)24)으로 난리를 피하려할 때 고향사람 효자 이유경(李有慶)이 공과 함께 나루를 건너고자 하였다. 공이 이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건너십시오."라고 하자, 이공이 사양하면서 "주객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비록 뒤에 떨어져 낭패를 당한다 한들 형세가 그러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내가 만약 먼저 나루를 건너간다면 우리 집의 종들이 반드시 그대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그를 먼저 건너게 하였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는 데 피차 양보함이 없음을 칭찬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주룡 소포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안히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다. 매번 선산을 성묘할 때면 회포를 노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아침마다 선산에 올라 朝朝上丘壟떠나려다 또 주저하네 欲去還躕踟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度幾侍誾誾늘 평생의 거동 보이리라 一見平生儀공은 가정(嘉靖)25) 신해년(1551)에 태어나 60세에 돌아가셨으니 만력(萬曆) 경술년(1610) 5월 28일이었다. 찬성공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은 키가 매우 크고 위용이 경외할만하여 그를 본 사람들은 산하 간의 기운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본주의 목사는 공과 나이가 비슷했으나 반드시 그를 '노형'이라고 불렀고, 대여섯 살 적은데도 반드시 '어르신'이라고 불렀으니 그 공경하고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고을 사람 문화(文化) 임환(林懽)은 재주와 기개로써 당세에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잘 지냈다. 한번은 산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임공이 먼저 도착하여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는 듯 거침없이 담론하다가, 공이 뒤이어 이르자 임공은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잃고 공이 말하기만 하면 '예, 예' 하고 대답만 하였다. 당시 절의 승려 가운데 이를 목격한 자가 이 미담을 전하였다. 성품 또한 호방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고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화장실을 가려는데, 지주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가까스로 맞아 당에 오르고는 곧장 섬돌 위에다 볼일을 보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상에 설사를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였다.공은 이미 남쪽에서도 명성이 알려져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모두 일면식이라도 있기를 원하여 여러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찾아왔는데 맞이할 때의 예모는 자못 단출하였다. 그러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26)가 영암(靈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주룡으로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문에서 응대하는 자로 하여금 곽거사가 당도했음을 들어가 전하게 하자, 공은 허둥지둥 옷과 갓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공이 평소 남에게 굽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거사에게만 공께서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곽공과 토론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 뒤 곽공이 조정으로 돌아가 임금이 원수(元帥)의 재주를 가진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을 천거했다고 한다.공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뜻과 절개로 시대를 걱정하여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방법을 상달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할 것과 잘못된 정치를 혁파하고 고역을 균등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청하였고 조목조목 나열한 바를 두어 각 영에 설치한 둔전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 병신년 상소와 기해년의 저촉은 병서와 그림을 통해 모두 징험할 수 있다.공이 한번은 여름날 주룡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산모퉁이에서 큰 뱀이 기어와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이 잠에서 깨어 그것이 뱀인 줄 알고는 끝내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스스로 떠나가기를 기다렸으니 그 기량과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또 장을 청소하는 방법에 능통하여 저녁마다 물은 한 그릇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토해내 반드시 그 그릇에 가득 찼다. 홍시 같은 과일도 삼켰다가는 한참 후에 씨와 벌레를 토해내니 사람들 중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웅대하면서도 맑고 씩씩하여 국한 되지 않는 훤칠한 기개가 있으나 이는 공에게 그저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읊조린 시 몇 수가 있기는 하지만 글자에 잘못된 것이 많아 그 진수를 전할 수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공이 돌아가시자 아우 나덕윤(羅德潤)이 글을 지어 곡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가슴에는 운몽을 삼키고27) 胸呑雲夢말은 보불을 토하도다28) 詞吐黼黻뜻은 우주를 넘고 志凌宇宙눈은 천지를 초월하네 眼空霄壤용처럼 강가에 누워 龍臥江潭자신을 관중과 제갈공명에 견주었네 自擬管葛공의 평소 뜻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공을 세상에 낼 때는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한 것인데 끝내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공의 첫째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문과에 급제하여 담양(潭陽) 부사(府使)를 지낸 김경헌(金景憲)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절(劉節)의 따님이다. 모두 나주(羅州) 장흥동(長興洞)에 장사를 지냈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와 나인소(羅因素)는 김 씨가 낳았고, 나성소(羅成素)와 나취소(羅就素)는 유 씨가 낳았다. 나성소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나이소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나인소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나결(羅袺), 나격(羅䙐)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시화(柳時華)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를 두었는데 나겹(羅裌)이다. 나성소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參奉) 이소(李韶)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나취소는 후손이 없다. 공의 자손이 대를 이어 점차 쇠락하다가 나결의 손주 나만영(羅晩榮)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올라 집안의 명성을 다시 떨치니 이를 통해 남은 경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아! 공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6년이 되었다. 그 평생 행적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증험할 것이 없으므로 간략하게나마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한다. 만에 하나라도 훗날 공에 대해서 더 논할 것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하여 공의 간략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숭정(崇禎) 병자년(1636) 이후 79년 을미년(1715) 7월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쓴다. 公諱德明, 字克之, 號龜菴, 又號嘯浦, 姓羅氏, 羅州人. 麗朝有諱富爲監門衛上將軍, 是公鼻祖也. 後至工曺典書諱璡, 最貴顯, 生典農寺正諱公彦, 洪武間, 有克倭功, 仍世爲湖之右族. 曾祖諱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師事履素齋李仲虎, 以至行聞, 中宗旌其閭復其戶. 宣祖初, 道臣薦其賢, 累除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詩, 贈議政府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人, 以六龍目之, 公卽其冢嗣, 資稟魁偉傑特, 識者, 期以遠大器. 嘗在約年八九時, 路逢州吏, 吏不爲禮, 公擧理叱責, 吏乃肅然敬服, 聞者咸奇之. 萬曆己卯擧進士, 實宣祖十二年也. 銓曺聞公名, 除義禁府都事, 罷遞歸鄕時, 公蔚有聲華, 爲人所偢倈. 二弟德峻 德潤, 以鄭困齋門人, 俱有令名, 遂被不悅者所忌嫉. 己丑冬, 有鄭汝立上變事, 委官鄭澈, 乘機羅織, 丁岩壽 梁千頃 洪千璟等, 承澈旨, 投誣疏陷諸名流三十餘人, 而又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與汝立交至密, 知禍及己, 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弟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其疏會, 大言斥之. 及岩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禁府, 拿鞫岩壽等十人. 於是, 澈懼使臺官及太學生, 或陳啓, 或上章, 寢其命. 俄而務安儒生裵蓂, 疏伸卞困齋及公父子寃狀甚悉, 而澈竟以謀沮岩壽疏, 搆成罪目, 公之六父子, 一時就理. 贊成公特以孝見原, 公謫鏡城, 諸弟等幷分配. 公到配, 吟詩寄弟, 以寓陟岡之懷曰 : "關雲迢遞鴈無情, 何處孤城憶父兄. 殘燭夜深霜葉響, 夢中池草不能生." 壬辰, 島夷充斥, 賊將淸正長駈至, 北邊會寧人鞠景仁, 遂作亂, 執王子臨海君珒 順和君?及宰臣金貴榮 黃廷彧等, 以應倭. 於是, 鎭堡叛卒, 爭縛守將, 相繼附賊, 鐘城人鞠世必, 卽其渠魁也. 北評事鄭文孚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彦 輸城察訪崔東望等, 謀起義兵. 公與同謫人韓百謙, 協贊其謀. 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等, 亦來會, 捕得首惡者, 斬之, 軍聲仍以大振. 明年春, 別將李鵬壽 萬戶李希唐等, 與賊戰, 同日死. 公與文孚作詩, 以哀之事, 載李澤堂植小撰北關志. 其年, 公始得宥還. 丙申, 丁贊成公憂, 奉行襄禮于務安住龍渡, 仍居墓下. 丁酉, 倭賊更熾, 公與諸弟, 自住龍將避于銀積山, 同鄕孝子李有慶, 偕公舡欲渡, 公謂李公曰 : "君可先渡." 李公辭曰 : "主客有異, 吾雖落後狼狽, 理勢固然耳." 公曰 : "吾若先渡, 吾家奴必不致誠於君." 竟使之先渡. 人稱顚沛必是之義, 彼與此無讓矣. 亂定, 作亭于住龍嘯浦上, 優游以終老. 每省拜先壟有詠懷詩曰 : "朝朝上丘壟, 欲去還躕踟. 度幾侍誾誾, 一見平生儀." 公生于嘉靖辛亥年, 六十卒, 卽萬曆庚戌五月二十八日也. 葬贊成公墓下. 公體甚長大, 威容可畏, 見之者, 以爲得山河間氣. 本州牧與公年相敵者, 必稱老兄, 少五六歲, 必稱丈, 其見敬禮如此. 鄕人林文化懽, 以才智氣槪, 知名當世, 公與之相善. 嘗約會山寺, 林公先到, 談論自若傍若無人者, 及公追, 至林公, 自不覺沮喪, 公出言輒唯唯, 其時寺僧之目擊者, 傅以爲美談. 性又豪放, 不拘小節, 傲視一世, 於人少許可. 一日, 將如厠, 地主猝至, 公僅得延之上堂, 仍卽遺矢于堦上, 處之晏然曰 : "此愈於在堂上滑泄." 人服其廣度. 公旣名重南, 服人皆願一識, 使星冠蓋歷候者絡繹, 而迎接之除, 禮貌破簡. 至於郭忘憂堂再祐之謫居靈岩也, 訪公住龍, 使應門者入傳郭居士來到, 公顚倒衣冠, 下堂迎之, 一村人皆驚曰 : "公平生未嘗屈於人, 何狀居士, 能令公致敬若是哉?" 公遂與討論, 襟懷甚相得. 其後郭公還朝, 上問元帥才, 至以公薦剡云. 雖在草野, 志切憂時, 以感天意結人心之道, 有所上達, 而請伸己丑寃死之類, 以革弊政均賦役之策, 有所條列, 而請罷各營屯田之設, 此於丙申疏及己亥抵兵書畵中, 俱可徵也. 公嘗於夏日, 晝眠于住龍, 山隅有大蛇來, 蟠于腹上, 公覺來知其爲蛇, 終不動身, 以待其自去, 其器量凝重類如是矣. 又能通洗腸之術, 每夕飮水一器, 翊朝還吐, 必滿其器. 至於紅柿等物呑下, 良久吐其核與虫屑, 人莫不異之. 爲詩語必雄放淸健, 有不局底氣岸, 然此特公之餘事耳. 其所吟詠者, 有若干首, 而字多訛誤, 不得傳其眞, 可勝歎哉. 公之歿也, 弟德潤爲文, 哭之其略曰 : "胸呑雲夢, 詞吐黼黻, 志凌宇宙, 眼空霄壤. 龍臥江潭, 自擬管葛." 可謂摹得公之平生也. 惜乎! 天之生公, 宜若有爲, 而竟未克一試, 命也. 公先聘光山金氏文科潭陽府使景憲之女, 繼娶文化柳氏節之女, 俱葬羅州長興洞. 有四男曰以素 因素, 金氏出也, 曰成素 就素, 柳氏出也. 成素武科宣傳官, 以素有四男, 褕 襑 袿 袨. 因素有二男, 袺 䙐, 一女, 柳時華. 又有庶出子裌. 成素有一女, 李韶參奉. 又有庶出子表 衤方 袁 三人. 就素無後. 公之子孫, 連世陵替, 而袺之孫晩榮, 擢文科壯元, 官至持平, 能使家聲復振, 斯可見餘慶之未艾也. 嗚呼! 公之歿, 今已百有六年矣. 其平生行蹟, 必不止此, 而久遠無徵, 略述見聞記, 其萬一後之尙論公者, 亦可因此而得公之梗槪矣. 崇禎丙子後七十九年, 乙未七月日, 從曾孫生員斗冬, 謹記. 감문위(監門衛) 고려 시대 육위의 하나로,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과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의 통솔 아래 1영의 군대가 있었다. 전농시(典農寺) 고려 말기에 국가의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당시의 연호로,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사용되었다. 이산 현감(尼山縣監) 이산(尼山)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이며,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서 현의 수장이다. 거사비(去思碑)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만력(萬歷) 중국 명(明)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부터 1619년까지 사용되었다. 정곤재(鄭困齋) 1529~1590. 자는 의백(義伯), 이름은 개청(介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나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 씨(羅氏)이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이해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임금만 볼 수 있는 비밀 장계(지방에 나간 관원이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올렸고, 글 속에는 정여립이 주도하는 세력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은 사실을 미리 알고 피했으나,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끌고 와서 포위하여 자결하였다. 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 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정철은 파직되어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있지도 …… 꾸몄다 원문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경성(鏡城) 함경북도 경성군을 말한다. 척강(陟岡)의 회포 원문 '척강(陟岡)'은 《시경》 〈척호(陟岵)〉에서 나온 표현으로, 행역(行役) 나간 효자가 "저 언덕에 올라 형을 바라보네.〔陟彼岡兮, 瞻望兄兮.〕"라고 한 것에서 파생하여, 부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함을 말한다. 회령(會寧)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의 옛 지명이다. 국경인(鞠景仁) ?~1592.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명천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김귀영(金貴榮) 1520~1593.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황정욱(黃廷彧) 1532~1607.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진보(鎭堡) 진영(鎭營)과 보루(堡壘)를 함께 이르는 말로 대개 군대의 진영을 말한다. 종성(鍾城) 함경북도 종성군을 말한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자는 중항(仲恒)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북관지(北關志) 북관 각 군의 읍지(邑誌)를 개괄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식(李植)이 북평사로 있을 때에 함경도 북부 지방의 각 군읍지를 모아 편집에 착수한 것을 그 아들 이단하(李端夏)가 계승, 완성하였다. 은적산(銀積山) 황해북도 은파군(銀波郡)에 소재한 산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로, 1522년(중종17)부터 1566년(명종21)까지 사용되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가슴에는 …… 삼키고 광대한 포부가 있음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나라에는 칠택이 있고 그중에 하나인 운몽택은 사방이 9백 리인데, 운몽택 같은 것 여덟아홉 개를 삼키어도 가슴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楚有七澤, 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말은 …… 토하도다 벼슬할 만한 재주가 있음을 말한다. 보불(黼黻)은 임금이 대례(大禮)에 사용하던 제복(祭服)이다. 구장복(九章服)에 용(龍), 산(山), 화충(華蟲), 화(火),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그림을 수놓는다. 전하여 벼슬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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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선교랑 보은현감 금암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宣敎郞報恩縣監錦巖羅公事實記 공의 휘는 덕준(德峻)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성은 나 씨(羅氏)이고, 호는 금암(錦巖)이다. 조상은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대대로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았고, 자손들은 고향을 벗어나지 않아 호남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그 계통의 구체적인 것은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선고(先考)의 〈사실기(事實記)〉에 실려 있다. 선고는 나사침(羅士沈)으로, 중종 때 효자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일찍이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모셔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다. 벼슬은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여러 아들은 종훈(從勳)으로 여러 번 추은(推恩)되었다.두 아내를 두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두 부인은 각자 아들 셋을 두어 육룡(六龍)이라고 일컬어졌으니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다.공이 6살이 되었을 때 윤 부인이 세상을 뜨자, 후비 정 부인은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길러 주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는데, 찬성공 또한 몸소 인륜에 독실하여 귀에 익고 눈에 젖었으니 가정에서 보고 감복한 것이 다만 글의 가르침뿐만이 아니었다. 나이 17~8세에 이미 고인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세속에 휩쓸리거나 과거공부에 개의치 않았다. 아우 나덕윤(羅德潤) 금봉공(錦峰公)과 함께 날마다 서로 학업을 갈고 닦으며 형제를 지기(知己)로 삼았다.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29)은 찬성공에게 이종형(姨從兄)이므로 그 문하에서 배우기를 청하여 선유들의 실마리를 얻어 들었다. 경저(京邸)30)에서 찬성공을 따르며 이름난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 교유하였는데,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과 더불어 《예경(禮經)》을 강론하였고, 사암(思庵) 박순(朴淳)31), 율곡(栗谷) 이이(李珥)32)가 모두 인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는 공을 전송하며 "들으니 남쪽에 정개청(鄭介淸)33)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학행이 독실하여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땅히 종유하여 학업을 마치시오."라고 하였다. 율곡은 내사한 《주자어류(朱子語類)》34) 한 질을 전별품으로 주었다. 정개청은 호가 곤재(困齋)이다. 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성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예를 갖춰 곤재에게 스승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강의계(講義契)를 맺고, 절목은 향약을 더하거나 빼어 법으로 삼고 학령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35)을 준칙으로 삼았으니, 요컨대 학문을 닦고 힘써 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곤재 선생이 늘 공을 애지중지하여 그를 추천하고 장려했던 말이 편지글에서 문답한 글에 나타나 있으니, "타고난 본성이 강하면서도 밝아 소견이 날로 발전하고 두렵고 위로됨이 모두 지극하다."라고 한 것, 또 "뜻이 성현의 공부에 돈독하여 전적으로 수양공부에 나아가 성명(性命)의 온전함을 구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라고 한 것, 또 "그대처럼 고상하고 밝고 두려워할만한 이에게 감히 스스로를 크고 망령되이 높다고 하여 후생이 예의를 지켜 대우하는 것을 기대하겠는가. 그와 함께 의심스런 예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면 탄복하게 된다."라고 한 것들이다.공은 돈후하고 정밀하며 자세하여 몸소 은혜롭고 자애로운 행동을 살펴 남들에게 추앙받았지만 그 스스로는 실례를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례가 매우 많으니, 모두 정 씨의 《우득록(愚得錄)》36)에 기록되어 있다. 집안에 간사한 부인이 유복자라 사칭하여 양자를 기르고자 도모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찬성공이 막 호읍(湖邑)에 부임하여 공의 형제들이 그 일을 가지고 윤리와 기강을 근거로 소장을 올렸으나 오랫동안 지체되어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37)이 고을에 부임하여 거짓을 밝혀내 결단하며 "세상의 쟁송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은 하늘의 이치로써 하니, 그대들은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교유하였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우고 한훤(寒暄)38), 일두(一蠹)39), 정암(靜菴)40), 회재(晦齋)41), 퇴계(退溪)42) 등 다섯 분의 선생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게 했는데 실제 공의 형제가 의논하고 학봉이 지은 것이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있었다. 정여립은 일찍이 거짓된 마음과 가식적인 행동으로 당세를 두루 속였다. 처음에는 율곡과 우계(牛溪) 성혼(成渾)43)에게 발을 들여 칭찬을 받고 인재로 뽑혀 자못 힘을 얻었으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정여립은 비로소 마음과 얼굴을 바꾸어 도리어 율곡을 배척하고 비판하였다. 선조(宣祖)가 교서에서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와 같은 자이다.44)"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개 조정의 의론이 어그러진 이래로 동서가 서로 배척함이 갈수록 격해지자 정철은 속이 좁고 괴팍하여 불평이 많았다. 또 곤재가 일찍이 정철이 주색에 빠지고 예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45) 세상의 도가 유폐될 것을 걱정했는데 이 때문에 정철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홍천경(洪千璟)과 양천경(梁千頃)은 향리에 살면서 행실이 경박하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사류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자들이었는데 오직 정철만을 우러러보면서 곤재를 업신여김이 특별히 심하였다. 공의 형제가 곤재를 따라 공부를 하는 사람 중 가장 이름이 났기 때문에 질투를 받는 것 또한 심하였다. 정여립이 옥사를 일으키기에 이르자, 정철이 위관을 맡아 때를 틈타 없는 죄를 꾸미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생각을 받들어 모함하는 상소를 지어 조야의 유명 인사 30여 명을 무고했는데 곤재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또 공의 부자의 이름을 들어 말하기를,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엄밀히 교유를 맺고 있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죄 없는 사람들을 신원해 주는 글을 꾸몄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공의 형제들의 말을 날조하여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다. 수년이 지나면 반드시 태평한 세상이 올 것이니 기다려라."라고 했으니 그 밖의 다른 말들도 흉악하고 참람하기 그지없었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이 분통함이 심하여 정암수 등이 모인 장소에 가서 면전에서 그를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들의 변란을 틈타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여 몰래 사악한 상소를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벼슬아치들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 그만둘 것이다. 이들은 반드시 간교한 사람들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정암수 등 10인을 잡아와 국문하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더욱 속이고 진실을 가리는 계획을 세워 양사(兩司)와 태학생들을 부추겨 교장(交章)으로 구제하기를 힘써 '상소한 선비는 국문할 수 없다.'라고 말하게 하니 마침내 그 명령이 그치게 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자들이 더욱 많아 향읍으로 하여금 죄인 무리, 홍천경, 품관 중 불량한 자들을 수소문하게 하였는데 유발(柳潑) 등의 무리가 그 사이에서 모함하기도 하였다.경인년(1590) 여름에 곤재가 체포당하고 공의 부자 여섯 사람도 모두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것을 도모했다는 것이 죄의 사안이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특별히 내려 "이름이 효자에 든 자는 용서하고, 증오를 쌓아 무고하게 끌어들인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마침내 곧바로 용서받았지만, 공은 차율에 따라 부령으로 귀양 갔다. 여러 형제 중 어떤 사람은 변방 고을로 옮기고, 혹은 중도에 유배 갔다. 이때 죽음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찬성공의 지극한 행동에 묵묵히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함이 있어서였다. 곤재 또한 경원(慶源)으로 장배(杖配)되어 가는 길에 공의 처소에 들러 마주했는데 근심하는 낯빛이 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에서 위패를 만들어 곡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후회하고 국시(國是)가 안정 되자, 옥사를 주관한 정철이 강계(江界)에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또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자 크고 작은 죄를 지어 귀양 간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에 공도 계사년(1593)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갑오년(1594)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46)이 영의정이 되어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10가지 조목에 따라 선비를 취하여 발생한 난리에 방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청하고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47) 등 3인을 뽑았는데, 공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재상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48)이 천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망운(望雲)49) 감목관(監牧官) 겸(兼) 장모속사(掌募粟事)의 관직을 내렸다. 예전에는 임금께서 목관의 다스림이 허술할까 걱정하여 일찍이 대관(臺官)을 거친 자들을 등용하여 감목(監牧)으로 삼아 수령(守令)들을 규찰하고 왕래하면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 당시에는 마음대로 둔전을 만들어 군대의 양식에 보충할 계획을 세웠으니 아예 사람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한 것이다. 전임 수령과 낭서(郎署)에 임명된 자들을 대부분 임명했으나 공은 초야에서 뽑아 임명했으니 어쩌면 공의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듬해 서애 재상이 나라를 막는 대책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論啟)를 올리라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50)의 종사관으로 공을 취하도록 청하여 전년에 모은 곡식을 품자하여 연변의 여러 둔전에 파종 허가를 청하였는데, 이 일은 《서애유고》에 실려 있다. 이윽고 사포서(司圃署) 별좌(別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찬성공의 나이가 70이 넘었기에 부모를 섬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상례를 치름에 예를 어김이 없었고 장례를 치를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의 배가 갑자기 앞에 있는 강에 이르자 비록 매우 위급한 때를 당하나 슬픔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더욱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 봄에 상복을 벗었다. 그해 가을에 곤재의 원통함을 상소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발탁되었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전에 그를 좋아하지 않은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공의 형제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를 매우 원통해 하며 비록 난리 속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의리상 차마 잊을 수 없어 지하에 계신 분을 위해 한번 씻어주기를 바랬다.그보다 앞서 을미년(1595)에 공의 아우 금봉공(錦峰公)이 처음 상소를 올려 바로잡으려 하였다. 비답에 "너희들의 의론이 지극하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라."라고 하며 비변사에 명을 내리셨다. 재상 서애 유성룡이 회계(回啓)하고 애통해 하면서 애당초 옥사가 너무 지나친 이유를 아뢰고 또 정개청(鄭介淸)이 학술과 검박한 행동으로 자임하다가 우연히 한 편 지은 글로 인하여 몸을 망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이러한 원통함을 하소연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께서는 훗날 얼굴을 마주하고 의논하자고 답하는 데 그치셨다. 이듬해 큰형 나덕명(羅德明) 소포공(嘯浦公)이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맺는 도를 상소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에 이르러 또한 공의 상소가 있었다. 대개 큰 옥사가 있은 뒤에는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의 형제는 위기를 피하지 않고서 소리를 내어 진심을 드러내 앞뒤로 서로 이어 거의 임금께서 생각을 되돌리기를 바랐지만 임금께서는 속으로 어렵게 여기셔서 여전히 사림(士林)들의 섭섭함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사람들 중에 정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또 공의 집안을 원망하여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지만 공은 어려움을 겪고서도 일찍이 근심과 수모 때문에 뜻을 꺾지 않은 채 평탄하게 일을 처리함이 이와 같았다.공은 가정 계축년(1553) 2월 3일에 태어나 52년을 살았다. 만력 갑진년(1604) 8월 28일에 세상을 떠나 남영산(南榮山) 간좌(艮坐)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인조 때 아들 나위소(羅緯素)가 원종(原從)에 참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현종(顯宗) 때 동추(同樞)에 오르자 다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덕을 갖추었고 순수함이 넘쳐 두루두루 교제를 하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정도를 따르면서도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화한 기운과 온후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했음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공의 뜻은 자공(子貢)이 풍부함과 절약 사이에 마음을 두었기에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여 어렸을 때부터 집안 식구들의 생산 작업을 일삼지는 않았다. 그는 학문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의를 강마하여 밝힐 수 있다고 여겼다.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로부터 사서(四書)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했고 또 여러 책에 두루 통하였는데 스승과 벗들을 섬기며 종유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수양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글을 남김으로써 가르쳤으니 마음을 보존하고 체득하며 몸을 이기고 형체를 실천하는 노력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여 그것에 힘쓰라고 했으며 분수에서 벗어나고 몸을 영화롭게 하거나 집에 편안히 거처하면서 스스로 편하게 살려는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신당부하면서 경계하고 조심하도록 하였다. 종신토록 효친의 뜻에 성의를 다하며 "효도란 천경(天經), 지의(地義), 강상(綱常), 윤기(倫紀)의 중한 것과 큰 것이요 모든 행동의 근원이며 사람 도리의 늘 해야 하는 것이니, 학자들은 이를 배울 따름이고 행하는 사람은 이것을 행할 뿐이다. 효자의 집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어 평생의 한으로 여겨 영리에는 생각을 끊고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는 데 뜻을 두었다. 타인을 만날 때도 집안에서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부모님께 음식을 올릴 때에도 그것을 나누어 드려야 되는지를 여쭈어 부모님의 뜻을 받들었다.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정 부인(鄭夫人)은 공의 집에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은 별좌(別坐)의 집에서 거처하는 것이 편안하다고 늘 말하였다.공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을 때 아우 나덕신이 막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으니 영화로움과 부모 모양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으며 공은 능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왕래하고자 하였다. 고을 사람들 중 자손을 가르치고 두 번째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보은(羅報恩)을 모범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선조의 제사가 있을 때면 반드시 3일 전부터 소복을 입고 조용히 거처하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옛사람을 사모하여 형제들과 함께 살며 당(堂)은 같지만 실(室)은 달리하려는 제도를 계획하여 장차 의전(義田)51)을 만들고자 했으나 생각지 못한 화를 당한데다가 다시 나라의 난리까지 더해져 모든 뜻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종족을 극진히 사랑하고 정다운 마음이 망운에 있었다.52) 심한 흉년을 만나 백성이 매우 곤궁해지자 공은 장랑(長廊)을 짓고 일가의 자제들을 모두 모아 기근에서 구제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서 학문을 권장하니, 전하는 자들이 미담으로 삼아 칭찬하였다. 그의 실제 행동이 집안에서 드러난 것이 대략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장수 황씨(長水黃氏) 어모장군(禦侮將軍) 황호(黃顥)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領議政)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6세손으로, 신해년(1551) 8월 9일에 태어나 45년을 누리고 을미년(1595)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렴(柳濂)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의 8세손으로 정축년(1577) 7월 22일에 태어나 30년을 누리고 병오년(1606)에 세상을 떠났다. 기일은 같은 정월 10일이다.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모두 공의 무덤에 합장하였다.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를 지냈고, 나계소(羅纘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고을에서 고생을 하다가 만년53)53) 만년 : 원문 '질대년(秩大年)'은 대년질(大年秩)과 같은 장수하여 맡은 직책을 말한다. 곧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인데, 여기에서는 만년에 벼슬함을 표현한 것이다.에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공의 첫째 딸은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가서 절의를 지키다 죽어 정려로써 표창 받았고, 둘째는 선교랑(宣敎郎)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이들은 황 씨가 낳았고, 나치소와 나경소는 유 씨가 낳았다. 또 양자로는 나함소(羅緘素)가 있다.나찬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나겁(羅衱)은 선교랑(宣敎郎)을 지냈고, 딸은 김훈(金壎)에게 시집갔다. 나계소는 아들이 없어 동추(同樞)의 셋째 아들 나진(羅袗)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위소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세 아들 중 나염(羅袡)은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냈고, 나금(羅襻)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고, 나진(羅袗)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첫째 딸은 생원 김만수(金晩壽)에게, 둘째 딸은 이만종(李萬鍾)에게, 셋째 딸은 서령(署令) 정기수(鄭岐壽)에게 시집갔다. 김잡은 후손이 없고, 최광헌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최명해(崔鳴海)와 최익해(崔翼海)가 있는데, 최익해는 생원시에 합격했고, 딸은 조종경(趙宗慶)에게 시집갔다. 나치소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장남 나기(羅褀)는 통덕랑(通德郎)을, 나겸(羅衤兼 )은 선교랑(宣敎郎)을, 나균(羅袀)은 수작(壽爵)으로서 부호군(副護軍)을, 나형(羅衤瑩 )은 통덕랑을 지냈다. 두 딸은 강석종(姜碩宗), 정두형(鄭斗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경소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적(羅襀)은 통덕랑을 지냈고, 나단(羅襢)과 나선(羅䙋)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딸은 이진교(李震嶠)에게 시집갔다. 나함소는 딸을 하나 두었는데 양변(梁忭)에게 시집갔다. 나겁은 나두천(羅斗天)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는 나두우(羅斗宇)이다. 나염은 나두삼(羅斗三)을 낳았는데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 나두장(羅斗章)은 교관을 지냈다. 나반은 아들이 없어 나두장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진의 첫째 나두춘(羅斗春)은 좌랑을 지냈고, 나두하(羅斗夏)와 나두추(羅斗秋)는 모두 통덕랑을 지냈으며, 나두동(羅斗冬)은 생원에 합격했다. 나기는 나두규(羅斗奎), 나두서(羅斗緖), 나두집(羅斗集), 나두홍(羅斗弘)을 낳았다. 나겸은 두회(羅斗會)를 낳았다. 나균은 자식이 없어 나두선(羅斗璇)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형은 나두선, 나두종(羅斗琮)을 낳았다. 나적은 나두남(羅斗南)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차남 나두창(羅斗昌), 나두형(羅斗亨)은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나단은 아들이 없어 나두형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선(羅䙋)은 첫째 나두원(羅斗元), 둘째 나두문(羅斗文)을 낳았는데 모두 통덕랑을 지냈고, 셋째 나두도(羅斗度)를 낳았다. 나두천은 나만형(羅晩亨)을 낳고, 나두우는 나만성(羅晩成)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나머지 내외의 자손들 모두 거론할 수 없다,아! 공의 재주와 학업과 품행과 도의로써도 불행한 때를 만나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하셨으며, 돌아가신 지 또 백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장차 이름이 묻혀 전하여지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동추(同樞)의 따님이다. 내가 일찍이 작은 외삼촌을 섬기고 또 여러 내종형제를 종유하여 매번 선조의 옛일에 대해 들었는데 그 말들이 마치 어제 들은 것과 같다. 내외증손들 중 뒤에 죽은 자들로 하여금 다만 몇 명 있지만 남은 사람들 또한 많이 늙었다. 이에 나두동 씨가 세월이 장차 멀어질수록 더욱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을 개탄하여 사적들 가운데 여러 문적에서 뒤섞여 나오는 것을 모으고 또 집안에서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를 가지고 증거로 삼아 후세에 볼 수 있게 도모하고자 고개 넘어 천리에 부쳐 나로 하여금 다듬고 수정하여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 삼가 이 뜻에 감격하여 감히 보잘 것 없는 말로 거절할 수가 없기에 일의 본말을 차례대로 서술하여 〈사실기〉로 삼는다.숭정(崇禎) 정축(丁丑) 후(後) 85년인 임인년(1722) 3월 16일에 외증손 전 참봉(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公諱德峻, 字大之, 姓羅氏, 號錦巖. 自上祖麗朝監門衛上將軍富以來, 世貫羅州, 子孫不出鄕, 爲湖南望姓. 其系具在先考贈贊成事實記. 先考諱士忱, 中廟世, 旌孝子之閭. 嘗師履素齋李氏仲虎, 以學行聞, 官尼山縣監, 追爵左贊成, 用諸子從勳, 累推恩也. 兩妣坡平尹氏府使彦啇之女若光州鄭氏僉使虎之女, 俱贈貞敬夫人. 兩夫人各有丈夫子三人, 有六龍之稱, 公其第二也. 生六歲, 尹夫人歿仰, 後妣鄭夫人, 撫育如所生. 公天資純美, 贊成公又躬篤人倫, 濡染耳目, 有得於觀感家庭者, 非特文字之敎而已. 十七八歲, 已有志古人之學, 不以流俗擧子事屑意. 與其弟德潤錦峰公, 日相砥礪爲業, 兄弟爲知己. 眉巖柳文節公於贊成公姨兄也, 請學其門, 得聞儒先緖論. 從贊成公于京邸, 遍遊名流間, 與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朴思庵淳 李栗谷珥, 皆許可之, 送公南歸謂曰 : "聞南中有鄭介淸者, 學行篤實, 可爲人師表, 宜從遊卒業也." 栗谷以內賜朱子語類一帙爲之贐. 鄭介淸乃號爲困齋者也. 公旣還鄕,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以禮請困齋爲師. 與同志學子, 結講義契, 節目以增損鄕約爲法, 學令以白鹿洞規爲準, 要以講磨力行, 困齋常敬重之. 其推獎之言, 發於簡牘答問者有曰 : "資稟剛明, 所見日進, 畏慰俱極." 又曰 : "志篤聖賢, 功專進修, 以求必得夫性命之全, 是所謂君子爲己之學." 又曰 : "如賢高明可畏, 其敢自大而妄尊, 待以待後生之禮乎. 至於與之論疑禮則歎服." 公敦厚精詳, 躬督恩愛之行, 能善推於人, 而示其自悔失禮之意, 凡若此類, 甚多, 俱在鄭氏愚得錄. 門有陰譎婦人, 詐稱遺孕, 謀育假兒, 時贊成公方任湖邑, 公兄弟以其事, 稟據倫紀, 申狀卞之事, 久滯未決, 金鶴峰誠一莅州, 燭其僞斷之曰 : "世之爭訟以利, 而君等所爭爲天理, 君等眞義士也." 遂心許之, 與爲交. 城西大谷洞創書院, 俎豆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五先生, 令士林有所肯式, 實公兄弟奉議, 鶴峰所經紀也. 己丑冬, 有鄭汝立獄事. 汝立者嘗僞情飾行, 以博洽欺當世, 初托迹於栗谷及成牛溪渾, 吹獎汲引, 頗得其力. 栗谷旣歿, 汝立又始改頭換面, 反攻斥栗谷. 宣廟之敎所云, 汝立今之邢恕者, 此也. 蓋自朝議睽乖以來, 東西互相排擯, 轉加層激, 鄭澈褊愎積不平. 又困齋嘗以澈眈荒酒色, 蘧蒢禮法, 惧流弊世道, 爲澈所銜. 洪千璟 梁千頃等, 居鄕里, 輕佻無行, 不齒士類. 惟澈俯仰, 嘲侮困齋特甚. 公兄弟從困齋遊, 最有名稱, 故被媢嫉亦甚. 及汝立獄起, 澈爲委官, 乘時羅織, 凡異諸己者, 靡不待以機穽. 丁巖壽 洪千璟 梁千頃等, 承望投疏誣陷朝野名流三十餘人, 困齋亦入其中. 且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爲汝立密交, 知禍及己, 譸張伸救." 又捏公兄弟曰 ; "不必應擧衰世, 過數年, 須待太平. 其他說話, 凶慘罔極." 公之弟德顯 德憲等, 忿忿甚, 往巖壽等會所, 面折之甚峻. 及其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岩壽等十人鞫之. 澈恐事覺, 益爲欺蔽計, 囑兩司及太學生等, 交章力救, 謂之疏儒不可鞫問, 遂得還寢其命. 獄又益多株累, 令鄕邑搜問罪人黨與千璟與品官不逞者, 柳潑輩媒蘖其間. 庚寅夏, 困齋被逮, 公父子六人, 亦幷就理, 以謀沮岩壽疏爲罪案, 上敎特曰: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遂卽蒙宥, 公用次律, 竄富寧, 諸兄弟或徙邊邑, 或配中道. 當是時, 得免就殞桁楊, 實賴贊成公至行, 有所默感上衷也. 困齋亦杖配慶源路, 過公所相對, 無慽慽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歿于配所, 爲位哭之. 明年, 上心追悔, 國是乃定, 主獄者澈, 栫棘江界. 又明年, 當倭亂, 命釋大小竄謫人, 公乃於癸巳赦還. 甲午, 柳西厓成龍爲首相, 建請勿拘資格, 以十條取士, 以備撥亂之用, 選韓久菴百謙等三人, 而公居其一, 斗巖金相應南薦也. 初授望雲監牧官兼掌募粟事. 前時, 上慮牧政虛疏, 嘗命用曾經臺官者, 爲監通糾守令, 往來撿察, 又時當搶攘設屯田, 爲補軍食計, 擇人幹其事, 前任守令郞署者, 率多見差, 公自草野被掄爲任, 蓋欲試公才也. 明年, 西厓相論啓防守措置事, 請令統制李舜臣從事官取公. 前年所聚穀, 以資沿邊諸屯播種, 語在西厓遺稿. 尋除司圃署別坐, 時贊成公年逾七旬, 以事親日短, 辭不就.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執喪, 無違禮, 旣葬, 廬墓下. 丁酉, 倭舡猝到前江, 雖當顚沛, 不弛哀慽, 人益稱之. 己亥春, 服闋. 是秋上困齋訟寃疏, 不得命. 已而, 擢拜報恩縣監, 未之官, 爲不悅者所嗛. 公兄弟嘗痛師至寃, 雖在亂離遑遑之中, 義不忍忘, 願爲泉壤一洒之. 先是乙未年間, 公之弟錦峰公, 始陳疏卞之, 批曰 : "爾等之論, 至矣. 當議處." 下備邊司. 西厓相回啓痛陳當初獄事, 多濫之由, 且言鄭介淸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箸論, 以至滅身, 宜此訴冤云云. 答以後當面議而止. 其明年, 伯氏德明嘯浦公, 上疏言感天意結人心之道, 而請伸己丑寃死, 至是又有公疏. 蓋大獄之後, 人心惴惴未息. 公之兄弟, 不避危機, 倡聲瀝血, 前後相繼, 庶幾有回天之望, 而上意持難, 未見施士林憾之. 人之護澈者, 又怨公家不置, 而公經歷險難, 未嘗以患辱挫其意, 處之夷如也. 公生以嘉靖癸丑二月三日, 得年五十二, 萬曆甲辰八月二十八日歿, 葬州南榮山艮坐坤向之原. 仁廟世, 以子緯素參原從追, 贈承政院左承旨, 至顯廟世, 又以躋同樞, 故加贈戶曹參判. 公稟性眞醇, 德宇粹盎, 通而不汙, 貞而不諒, 和順之氣, 溫厚之風, 令人望之, 可知也. 其志嘗以爲子貢留心於豊約之間, 故不及於顔曾也, 自少時, 不以家人生産作業爲事. 其學以爲氣質可以變化, 義理可以講明. 自小學家禮, 由四書達六經, 又以博通群書, 從事師友, 以修其可願也. 有訓諸子遺文, 以存心 體認 克己 踐形之功, 眷眷焉勸勉之, 以分外 榮身 居室 自便之恥, 申申焉, 警飭之. 終致意於孝親之意曰 : "天經 地義 綱常 倫紀之重且大者, 而百行之源, 人道之常, 所以學之者, 學此而已, 行之者, 行此而已, 求忠臣於孝子之門者, 此也." 公以早違慈顔, 爲平生恨, 絶念榮利, 專意奉養. 凡遇物, 不私於家, 獻于親庭, 聽其分與, 以承志意. 贊成公旣卒, 鄭夫人處公家爲多, 嘗言處別坐家, 得心身俱安. 公之除報恩也, 弟德愼方爲茂長, 致榮養而聞, 公得縣決意欲從往. 鄕人有訓子孫奉繼母者, 必曰以羅報恩爲法也. 遇先忌, 必前期三日素服, 靜處不接人, 以行祀事. 嘗慕古人, 兄弟同居畫同堂異室之制, 且營義田, 中罹奇禍, 加以亂離, 齋志未就, 愛宗族克盡, 情款在望雲. 値歲歉甚, 人民顚連, 公作長廊, 多聚一家子弟, 以濟其飢, 且爲之勸學, 傳者稱爲美談. 其實行之著于家, 大略如此. 初聘長水黃氏禦侮將軍諱顥之女, 領議政翼成公喜之六世孫也. 辛亥八月九日生, 四十五而歿于乙未. 繼娶文化柳氏諱濂之女, 右議政文簡公寬之八世孫也. 丁丑七月二十二日生, 三十而歿于丙午. 忌日同正月十日. 幷贈貞夫人, 葬皆祔公壟. 有五男二女, 曰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 爲怨家所中落拓州郡, 秩大年同中樞, 贈左參贊. 女長適主簿金磼, 節死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黃氏出也, 曰緻素 經素, 柳氏出也. 又有側子緘素. 贊素一男, 衱宣敎郞, 一女適金壎. 繼素無子, 取同樞第三子袗爲嗣. 緯素三男, 袡戶曺正郞, 襻成川府使, 袗禁府都事. 三女長適生員金晩壽, 次適李萬鍾, 次適暑令鄭岐壽. 金磼無后. 崔光憲二男, 鳴海 翼海生員, 一女適趙宗慶. 緻素四男, 褀通德郞, 衤兼 宣敎郞, 袀壽爵副護軍, 衤瑩 通德郞. 二女適姜碩宗 鄭斗亨. 經素三男, 襀通德郞, 襢 䙋文科掌令, 一女適李震嶠. 緘素一女, 適梁忭. 衱生斗天武科縣監, 斗宇. 袡生斗三縣監, 斗章敎官. 襻無子, 取斗章爲嗣. 袗生斗春佐郞, 斗夏 斗秋 皆通德郞, 斗冬生員. 褀生斗奎 斗緖 斗集 斗弘. 衤兼 生斗會. 袀無子, 取斗璇爲嗣. 衤瑩 生斗璇 斗琮. 襀生斗南武科宣傳官, 斗昌 斗亨, 皆通德郞. 襢無子, 取斗亨爲嗣. 䙋生斗元 斗文, 皆通德郞, 斗度. 斗天生晩亨, 斗宇生晩成, 文科持平. 自餘內外玄雲, 不可悉擧. 嗟乎! 以公之才學行誼, 遭時不幸, 未能有施于世, 歿且百有餘歲, 將名凐滅而無傳, 豈不悲哉! 重元先母, 同樞女也. 重元嘗逮事仲舅, 且從諸內兄, 每聞稱說先世故事, 其言若前日聞, 令內外曾孫之後死者, 只有若而人亦旣老矣. 迺者斗冬氏有慨於世將愈遠而愈無徵也, 裒聚事蹟之雜出諸文籍者, 證以家中舊聞, 啚所以垂示後世, 寄來嶺外千里, 使重元磨正成編. 竊感是意, 不敢以鹵莽辭, 敍次本末爲事實記. 崇禎丁丑, 後八十五載壬寅季春旣望, 外曾孫 前參奉 八溪鄭重元, 謹述.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을 말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호가 미암(眉巖)이며, 해남 출신이다. 경저(京邸) 조선 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서 그 지방의 공물(貢物), 입역(立役)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사무소를 말한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 등이 있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송대 유학의 집대성자인 주희가 강학하면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어록 모음집이다. 모두 140권이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가 훤당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말한다. 자는 백욱(伯勗)이고, 호가 일두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말한다.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가 정암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31)을 말한다.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가 회재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말한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가 퇴계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자는 호원(浩源), 호는 묵암(黙庵), 우계(牛溪)이다. 오늘날의 …… 자이다 스승을 저버리고 배반한 제자를 가리킬 때 흔히 거론하는 인물이 형서(邢恕)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형서의 자는 화숙(和叔)으로, 《근사록(近思錄)》 권9 치법류(治法類)에 자기의 스승인 정명도(程明道)를 통유(通儒)요, 전재(全才)라고 극찬한 말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보주(補註)에 "형서가 명도에 대해서는 이처럼 추앙하며 심복하였지만, 명도의 아우인 이천에 대해서는 아마도 불만스러운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배운 벗들이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많이 꾸짖게 되었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자기 …… 해석하여 원문 '거제(蘧蒢)'는 악한 병의 이름이다. 원래는 죽석(竹席)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으로 둥근 곳집〔囷〕을 만들면, 마치 종기가 나서 구부릴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추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나쁘게 만듦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厓)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망운(望雲) 전라남도 영광의 망운면을 말한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1598. 자는 여해(汝諧)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옥포 대첩, 사천포 해전, 당포 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하였다. 의전(義田) 문중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하는 전지(田地)이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처음 명명한 것으로, 범중엄은 한창 현달했을 때에 부곽(負郭)의 좋은 토지 천묘(千畝)를 마련하고 이를 의전이라 호칭하여, 여기에서 수확한 재물로 가난한 종족들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310 范仲淹列傳》 정다운 …… 있었다 원문의 '망운(望雲)'은 타향에서 멀리 떨어진 부모나 형제, 친지를 그리워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멀리 남쪽으로 흰 구름 하나가 떠가는 것을 보고는, 저 구름 아래에 부모님이 계실 것이라면서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구름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떠났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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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峰寺奉寄宋察訪福汝 湖外從遊豈偶然便將交契許忘年棋燈夜醉鳴陽館別袂朝分石堡煙車下逸才人莫贖澗邊幽草世誰憐小槽酒滴如相問直向横塘共賞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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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 금봉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錦峰羅公事實記 나 씨(羅氏)는 대대로 나주(羅州)에 살면서 덕이 두텁고 경사스러움이 쌓여 벼슬이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호남의 명문가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 씨를 말한다. 고려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가 실로 시조이며, 후대의 나진(羅璡)에 이르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어 공양왕 2년(1390) 영산(榮山)에서 조창과 축성을 감독했으니, 이 일은 《여지지(輿地志)》54)에 실려 있다.아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우왕 7년(1381)에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는데, 이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아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지냈고, 아들 자강(自康)은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아들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郎)을 지냈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행이 있어, 중종께서 정려로 표창 하셨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동문들이 모두 추대하고 중히 여겼다. 선조 초에 관찰사(觀察使) 서교(西郊) 송찬(宋贊)이 그를 학행으로써 천거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이르렀는데, 그의 거사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가 있네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두 분은 각기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도사(都事)를 지낸 나덕명(羅德明)으로, 영특하고 호걸스러워 명예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둘째는 현감을 지낸 나덕준(羅德峻)으로 곧 나의 증조부이다. 효도와 우애와 품행과 도의로 이름이 났었다. 공은 바로 셋째이다. 그 다음 넷째는 처사 나덕현(羅德顯)으로, 효행이 있어 추증되었다. 또 그 다음 다섯째는 군수(郡守)를 지낸 나덕신(羅德愼)이며, 막내는 수사(水使)를 지낸 나덕헌(羅德憲)인데, 두 분 모두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웠고, 오랑캐의 조정에서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기도 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나서, 어떤 이는 찬성공의 만사에사 씨 집안의 쌍벽55)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순호의 팔룡56)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라고 했으니, 공의 형제들을 칭송한 것이다.공의 휘는 덕윤(德潤)이다. 처음엔 자를 유지(有之)라고 했다가 훗날 성지(誠之)로 고쳤다. 금봉(錦峰)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36년인 정사년(1557) 3월 1일에 태어났다. 이듬해 9월에 어머니 윤 부인(尹夫人)이 세상을 뜨자 공은 울면서 젖을 먹지 못하여 늙은 여종에게 길러졌다. 나이 열다섯57)이 되자 비로소 학문에 나아갔다.임신년(1572)에 찬성공이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공이 따랐는데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어도 문사는 이미 통달하였다. 당시 같은 고을 사람 함양(咸陽) 이언양(李彦讓)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58)의 문인으로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난 인물이었는데 찬성공과 함께 경저(京邸)에서 생활하면서 수 년 동안 공을 가르쳐 선비의 정식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전수하니 공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이공은 그의 재주를 매우 아껴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장성하여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둘째 형과 뜻을 같이 하여 학문에 힘써 늘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에게 의심나는 것을 물었으니, 미암은 곧 찬성공의 이종형으로 학문이 넓고 들은 것이 많아 경연의 이름난 선비였다. 매번 공을 장려하여 힘쓰도록 하였고 기량이 크고 중하다고 여겼다. 또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을 종유하며 《예경(禮經)》을 강론하였는데 이로부터 벗들에게 크게 인정받았고 사암(思庵) 박순(朴淳)59), 율곡(栗谷) 이이(李珥)60) 같은 이들도 더욱 가상하게 여겨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61)의 어짊을 칭찬하며 공의 형제들이 종유하여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권장하였다. 마침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 고을 성의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곤재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 동지들과 강의계를 결성하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특히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힘썼다.정축년(1577) 무렵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막 좌막(佐幕)62)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스승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상을 당하자 달려가 곡을 하고 난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비단 방석에 앉아 관직의 일을 임하였다. 대개 김천일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일재에게 학업을 받아 실로 가르침을 받아 추천에 힘입어 세상에 중임을 맡게 되었으나, 스승이 돌아가셨는데도 상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공은 마음속으로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곤재에게 편지를 올려 스승의 상복제도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다. 김천일의 문인들 가운데 질책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공은 개의치 않았으니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이 일은 《우득록(愚得錄)》63)에 실려 있다. 이보다 앞서 공의 큰아버지 목사공(牧使公)의 후처 서 씨(徐氏)가 성격이 사납고 사람들을 잘 속이며 질투가 심하여 전처의 자손들이 이미 쫓겨나게 되었다. 아들 나덕순(羅德純)이 일찍 죽은 뒤 서 씨는 그의 부인 임 씨와 함께 몰래 남의 자식을 데려다 유복자라고 속였다. 공의 형제들은 그의 패륜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찬성공에게 자문하고 미암에게 의논하여 관에 소장을 올려 일을 밝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64)가 이른바 "나 씨 가문에서 그의 거짓됨을 변별하고 집안을 어지럽힌 것을 쟁송하였다."라고 한 것은 대개 이 일을 가리킨다. 여러 번 추핵(推覈)을 거치고 몇 년 동안 결판이 나지 않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목사로 부임함에 이르러 그 거짓이 밝혀지고 곧장 판결을 하였다. 학봉이 공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쟁송들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이 쟁송은 천리로써 하니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진심으로 교유를 맺었다. 이에 공의 형제들이 학봉에게 의논을 드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워 한훤(寒暄), 일두(一蠹),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 등 오현(五賢)을 함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는데 일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 채 학봉이 물러나게 되자, 임윤신(任允臣)65)이 와서 그 일을 대신하여 이루었다.정해년(1580) 겨울에 비로소 봉안의 예를 행했는데, 그 제문이 바로 공이 지은 것이다. 공이 스승을 따른 지 십 수 년이 되었지만 틀에 박힌 공부를 일삼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뜻에 따라 억지로 향시를 보아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하였다. 총산(葱山) 정언응(鄭彥?)은 함께 같은 시험장에 들어가 공이 지은 것을 보고 글이 근원이 있고 넓어 저절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 통하게 한다고 칭찬하였다.이듬해 무자년(1581) 봄, 진사에 급제했으니 바로 선조 21년이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나누어지고 더욱 더 격렬해지자 정철(鄭澈)은 늘 뜻을 잃고 원망하고 있었기에 나주 사람 홍천경(洪千璟)과 창평 사람 양천경(梁千頃) 등이 그의 부하66)가 되어 당을 만들고 무리를 결성하여 뜻을 마음대로 하고 바른 것을 날조하여 곤재가 더욱 천경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공의 형제가 곤재의 문하생으로 모두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여 이를 갈고 틈을 노린 것이 대개 수년이나 지속되었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의 반역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기미를 틈타 없는 죄를 꾸몄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67)이 훗날 등대(登對)68)하였을 때, 기축년의 옥사가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짓이라고 진설하였다. 동복(同福) 사람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상소를 하여 여러 이름난 사람들을 무고하니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69)와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70)은 모두 임금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인데 상소에 들어 있었고 심지어 공의 부자 이름 또한 들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정여립과 교유를 긴밀하게 하다가 일이 드러나자 거기에서 자신을 구하려 한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들이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으니, 장차 태평시대를 기다려라."고 했으니 어의(語義)의 흉악함이 극심하다. 공의 동생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무고를 받은 것을 분하게 여겨 상소한 자들이 모인 곳에 가서 지극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드러나지 않은 말을 거짓으로 꾸미고 사악하고 속이는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이나 이름 난 경(卿)들까지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 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신배들의 부추김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는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여 국문하여 죄를 밝히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걱정하여 대간(臺諫)과 태학생(太學生)들을 시켜 힘써 구제하게 하자 이미 낸 명령이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옥사가 오랫동안 끝나지 않자 옥사는 더욱 심해졌다.경인년 여름에 또 군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들과 홍천경, 품관(品官) 유발(柳潑), 정여릉(鄭如陵) 등을 염탐하게 하여 묵은 감정을 드러내 이에 따라 죄목에 묶으려 하였다. 이에 곤재가 체포되었고 공의 여섯 부자 또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전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이유로 죄목을 엮은 것이었다. 심문의 답변이 이르자 임금께서 특별히 전교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사람은 용서하고, 무고하여 미움을 받은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다행히 곧바로 사면되었지만 공의 형제 다섯은 모두 풀려나지 못하였다. 공은 회령으로 유배 갔고, 나머지 형제 중 어떤 이는 바닷가로, 어떤 이는 도형(徒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때 재앙을 예측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감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학봉(鶴峯)71)만은 홀로 편지를 써서 위로하며 "한 집안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있는 이유는 진실로 효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72)이 회령에 먼저 유배 갔었는데 공이 유배지에 이르자 마침내 서로 종유하며 마음으로 인정하고 글을 써서 회포를 풀어 시름을 보냈다. 곤재 또한 장형을 받고 유배가게 되어 북쪽으로 가다가 공의 유배지에 들렀는데 조금도 원망하는 말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서 달려가 간호했으며 초상이 나자 공서(公西)의 일73)을 행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비로소 정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아시고는 간악하고 악독한 정철에 관한 교서를 특별히 내리시고 방을 붙여 조정에 알렸다. 헌장(憲章) 이원익(李元翼) 등이 마침내 달아난 정철을 잡아야 된다는 장계를 올리고 형벌의 법률을 추가하였는데 공론이 대개 이렇게 정해졌다.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자 동강이 은혜를 입어 먼저 사면되어 시를 지어 공에게 회포를 보냈는데, 공도 그 운에 따라 답시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온갖 흉악한 자들 눈앞에 모였으니 百兇叢目下슬프다! 우리가 뒤에 태어남이여 哀哉我生後적들이 무리지어 이미 안에서 시끄러운데 賊莽旣內訌추악한 오랑캐들마저 밖에서 짓밟고 있네 醜虜又外蹂계사년(1593)에 공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혼란한 상황을 당해서도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지극한 원통함을 의리상 잊을 수가 없었다. 을미년(1595) 봄에 둘째 형님과 함께 임금께 글을 올려 몇 차례나 스승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사건이 비변사에 내려지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애당초 옥사를 다스림이 지나쳤던 이유를 모두 진설했으며 또 정개청(鄭介淸)은 호남 사람 가운데서도 더욱 이름이 난 사람으로 평소 학술과 행실의 검박함으로 자임한 자인데 우연히 한 편의 글을 지었다가 자신을 죽게 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덕윤과 무리들이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발을 싸고 대궐의 문을 두드리며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아뢰었지만, 임금께서는 처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다. 비록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았지만 화를 당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 기운을 잃고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먼저 피눈물을 토하며 마음을 드러내어 사림(士林)들로 하여금 흥기하도록 하여 점차 회복될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힘이었다. 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시자 무안(務安)의 주룡(住龍) 나루에 장사를 지내고 곧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자 비록 난리를 피해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상례를 한결같이 예를 지켜 마쳤다.기해년(1599)에 또 둘째 형님과 함께 곤재의 원통함을 거의 앞뒤로 대궐에 하소연하여 두 번 세 번 지속하자 마침내 유음이 내려졌다. 공은 처음에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사은하고 곧장 그만두었다. 또 금부 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곧이어 그만두었다.광해군 초 무신년(1608)에 왕자의 사부에 으뜸으로 의망(擬望)되었다가, 3월에 다시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그만두고 12월에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이 되었으며, 신해년(1611)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계축년(1613) 5월에 또 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경력(經歷)이 되었으며 갑인년(1614)에 사재감 주부(司宰監注簿)로 승진했다가 7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8월에 후처 정 부인(鄭夫人)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나이 60이 다 되었지만 상례를 게을리 않았고 상을 치른 뒤에는 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공이 만년에 벼슬에 나간 것은 단지 어버이를 위하여 뜻을 굽힌 것이었다. 얼마 후 어버이께서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면서 종신토록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하게 살며 스스로 편안히 지내기로 마음먹은 지 5~6년 지나 신유년(1621) 윤달 2월 28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찰방(察訪) 이극부(李克扶)는 공의 막역한 친구로서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중년에 기러기를 놀라게 할 활을 함께 만들고 中年共作弓驚鴈만년엔 눈 덮힌 소나무를 함께 보자 했었지 晩歲同爲雪後松대개 공이 험난한 일을 겪고도 지키는 바의 확고한 바를 탄식한 것이었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훌륭하고 뛰어났으며 기량이 출중했고 예를 잘 지키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효우의 가르침을 받들어 어버이 모시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하고 몸을 바로잡기를 예로 하였다. 또 스승의 문하에 올라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의리의 심오함을 강구하니 스승 곤재가 그를 칭찬하여 세상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공이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를 잃었을 때 유모의 남편이 극진하게 양육의 도리를 다 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자 함께 밥을 먹은 식구가 죽은 듯 시복(緦服)의 의리로 백건(白巾)을 쓰고 곡을 하며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는 공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작은 절개이지만 작은 것도 잊지 않는 은혜로운 마음이 또한 높이 칭송할 만하다. 형제들과 함께 화락하고 허물없이 지냈으며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자 당(堂)을 같이 하면서 실(室)만 다르게 살 계획을 세우자 찬성공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격려하였다. '너의 부모를 더럽히지 말라.'74)는 가르침을 두고 실천하려 했지만 재앙과 변란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집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 반드시 정명과 분수를 우선으로 삼았다. 집안이 엄숙하여 질서가 있으니 사람들 가운데 출입하는 자들은 모두 경외하면서 감히 분수를 넘는 사람이 없었다.약관의 나이로부터 이미 선생과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 훌륭한 스승을 얻어 귀의하였다. 처음에는 사암과 율곡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중년 이후 명성이 날로 드러나 학봉이나 동강 같은 일대의 유현들이 공을 인정하여 그냥 두지 않았다. 심지어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75)은 공을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76)는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공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알아주고 대우해준 것에 사례하였다. 유학(儒學)의 연원, 전후, 법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자들은 공과 함께 공사를 의논하여 순안(巡按)하던 날이면 그때마다 공을 머물게 하여 대접하려는 뜻을 미리 관문(官文)으로 알렸으니 고을사람들은 전하여 미담으로 삼았다. 매번 스승과 벗들이 원통하게 죽은 아픔을 생각하며 그들의 원통함을 씻어내길 바랐으나 임금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밤낮으로 마음아파 하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77),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78), 남이공(南以恭), 정협(鄭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변(申抃)하는 말을 하였다. 또 스승을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곤재의 사우를 지어 제사를 올려 덕을 숭상하는 정성을 드러내는 일을 의논하였으니 그 섬기는 바를 한결같이 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였다.공은 처음 고을의 금성산(錦城山) 북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뒤에 점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집에 이롭지 않다고 하여 병신년(1656) 3월에 현손(玄孫) 만석(晩錫) 등이 대안(大安) 동쪽의 자라바위 위 건좌(乾坐) 손향(巽向)79)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96년이 되는 해였다. 아내인 의인(宜人)80) 이 씨는 본관이 양성(陽城)81)으로, 정사년(1557) 5월 17일에 태어나 경신년(1620)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와 이천 부사(伊川府使)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을 지냈고, 나의소(羅宜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는데, 성품이 대범하고 우뚝하여 세상과 더불어 뜻이 뭉개져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부사(府使)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성(羅衤成 ) 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고, 나첨(羅襜)은 통덕랑을 지냈고, 사위 이명구(李鳴衢)는 진사에 합격하였다. 선교(宣敎)는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었는데, 아들은 나일(羅衵)이고, 사위는 윤적망(尹啇望), 임고(任暠), 조정오(曺挺五), 진사에 합격한 정헌(鄭櫶)이다. 정랑(正郎)은 후사가 없어 나첨을 후사로 삼았다. 선전(宣傳)은 아들 나두정(斗正)과 서출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나두점(羅斗占), 문과에 급제한 나두평(羅斗平)이다. 나일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두흥(羅斗興), 나두진(羅斗鎭), 나두응(羅斗應)이다. 나첨은 서출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두원(羅斗遠), 무과에 급제한 나두승(羅斗承), 나두주(羅斗冑), 나두영(羅斗盈)이다. 나두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만석(羅晩錫), 나만우(羅晩遇)이다. 나두흥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나만현(羅晩賢)이다.아! 내가 언젠가 공의 제문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증조의 제문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함께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시와 예를 공부하고82), 같은 스승을 섬겨 학문을 강습했으니,83) 마음과 덕을 함께했던 즐거움이 어찌 다만 형을 형으로 섬기고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는 대의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형제간이요 지기라고 할 만하다." 이 글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 지금 나만석이 공의 소장, 문적, 역관(歷官), 편지 등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차례로 글을 엮어 후손에게 전해지도록 요청하니 더욱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감히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의 전말을 써서 보낸다.숭정(崇禎) 병자(丙子) 후(後) 80년 병신(1716) 윤3월 모일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羅氏世居羅州, 德厚慶積, 簪紳不絶, 世之人數湖中望閥, 必稱羅氏, 在麗朝, 有監門衛上將軍諱富, 實爲始祖, 後至諱璡工曺典書, 恭讓二年, 監榮山漕倉築城, 事載在輿地誌. 子諱公彦典農寺正. 禑之七年, 從都巡問使李乙珍, 克倭有功, 事載麗史. 子諱諿式目都監錄事, 子諱自康務安縣監. 子諱繼祖將仕郞, 是公高祖. 曾祖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童而有至行, 中宗命旌閭, 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人皆推重. 宣祖初, 道臣宋西郊贊薦學行, 累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句. 贈議政府左贊成. 前聘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 長都事公諱德明, 以英傑不覇名. 仲縣監公諱德峻卽我曾王父, 以孝友行誼名, 公卽序居第三. 其次處士公諱德顯, 以孝贈職. 又其次郡守公諱德慎, 季水使公諱德憲, 俱以武擧進, 或殲倭立功, 或抗節胡庭. 兄弟六人, 俱有聞當世. 有人挽贊成公詞曰, "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者, 蓋贊公兄弟也. 公諱德潤, 初字有之, 後改誠之, 錦峰, 其號也. 嘉靖三十六年丁巳三月初一日生, 明年九月尹夫人歿, 公呱呱失乳, 養于老婢, 甫成童, 始就學歲. 壬申, 贊成公供仕京中, 公從之, 年纔十六, 文詞已達. 時同鄕有李咸陽公彦讓, 以金河西麟厚門人, 知名士類間者也. 與贊成公同舍京邸, 數歲敎公, 以士子程式, 仍授小學四書及心經近思錄, 所造日就, 李公愛其才, 以女妻之. 年旣長, 不屑擧子業, 與仲氏同志力學, 常質疑於柳眉岩希春, 眉岩卽贊成公姨兄, 而博學多聞, 爲經幄名儒者也. 每於公獎勗而器重之. 又從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自此大爲朋輩所偢倈, 如朴思菴淳 李栗谷珥 尤嘉尙焉. 仍稱鄭困齋介淸之賢, 而勸公兄弟從游以卒業. 遂南歸,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奉困齋師事之, 結同志爲講義禊, 討論經傳, 尤致力於朱子書. 丁丑間, 金倡義使千鎰, 方任佐幕, 而遭其師李一齋恒之喪, 奔哭之後, 卽返于家坐花茵, 奉官供, 蓋金早孤, 受業一齋, 實賴敎誨推薦之力, 取重於世, 及師死不爲之服, 故公心非之, 以書上困齋, 講論師喪服制. 金之門人, 多有詆責者, 而公略不介意, 時公年二十一矣. 事載愚得錄. 先是, 公之伯父牧使公之繼配徐氏, 性鷙悍多譎憎嫉, 前室子孫當已出. 子德純夭折之後, 與其婦林氏, 潛謀取他人子, 詐爲遺孕, 公兄弟憤其悖倫, 稟贊成公且議眉岩, 狀于官斥之. 鄭寒岡逑, 所謂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者, 蓋指此也. 累經推覈, 積年不決, 及金鶴峯誠一牧州, 明其爲僞卽斷之. 鶴峯謂公兄弟曰 : "世之爭訟者以利, 而君輩所爭則天理, 眞義士也." 遂結爲心交. 於是, 公兄弟奉議鶴峯, 營建書院於城西大谷洞, 以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 五賢, 竝享之, 欲爲士林模範之, 所功未及, 訖鶴峯遞歸, 任公允臣來, 代之踵成其事. 以丁亥冬, 始行奉安之禮, 其祭文, 公所製也. 公從師十數年, 不事科臼之工, 而爲順親旨, 强赴鄕解, 俱占兩場. 鄭葱山彥?同入試圍, 見公作, 稱詞源浩汗, 自令人意思通暢云. 明年戊子春, 成進士, 卽宣祖二十一年也. 時朝議, 已岐轉加層激, 鄭澈常失志怏怏. 羅州人洪千璟 昌平人梁千頃等, 爲其爪牙, 連黨結侶, 恣意醜正, 而困齋尤被千璟輩所誚詆. 公兄弟以困齋門生, 俱有令名, 奸人惡之, 磨牙俟隙, 蓋有年矣. 己丑冬, 鄭汝立逆獄起, 澈爲委官, 乘機羅織, 李梧里元翼, 後日登對時, 所陳己丑治獄, 人所不忍者也. 同福人丁岩壽與洪千璟 梁千頃等, 承澈旨, 投疏誣陷諸名流, 領相李山海 禮判柳成龍, 皆上之所倚毘者, 而入於疏中, 至於公父子之名, 亦與焉. 有曰 : "與汝立交密, 顯爲伸救." 或曰 : "不必應擧衰世, 且待太平." 語意極其凶慘. 公之弟德顯 德憲等, 憤受誣, 往疏會, 極言峻斥. 巖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來岩壽等十人, 推鞫定罪. 澈恐其情跡之敗露, 使臺諫及太學生, 力救之, 還寢成命. 獄久不竟, 鍛鍊愈酷. 庚寅夏, 又令郡邑廉問罪人黨 與洪千璟與品官柳潑 鄭如陵等, 逞宿憾, 隨而媒孽. 於是, 困齋被逮, 公之六父子, 亦就理, 蓋以前沮岩壽疏, 構成罪目也. 及置對, 上特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幸卽蒙宥, 而公兄弟五人, 俱未得脫. 公謫會寧, 餘或徙邊, 或徒配. 當是時, 禍網叵測, 人皆畏怵無敢問者, 而鶴峯獨致書慰問, 有曰 : "一家全活, 寔賴孝感"云. 金東岡宇顒先配于會, 及公到配, 遂與從遊許以心期, 論文敍懷以自遣. 困齋亦杖流, 朔北過公所, 少無嗟怨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病篤, 馳往救護, 旣喪, 仍行公西之事. 明年, 上始覺爲澈所誤, 特下奸澈毒澈之敎, 榜示朝堂. 憲長李原翼等, 遂發竄澈之啓, 仍加栫棘之律, 公論蓋於是定矣. 壬辰倭亂, 東岡先被恩赦, 以詩詠懷贈公, 公步其韻以謝有; "百兇叢目下, 哀哉我生後. 賊莽旣內訌, 醜虜又外蹂."之句. 癸巳, 公始得宥. 還時, 當搶攘而亡師至寃, 義不忍忘. 乙未春, 與仲氏上章伸卞, 縷縷甚悉. 事下備局, 柳西厓成龍, 洞陳當初治獄濫及之由, 且曰鄭介淸於湖南人中, 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裹足, 叩閽訴寃也." 云云. 上意持難事. 雖不見施, 然禍網之餘, 人皆喪氣, 無敢容喙, 而公能先傖瀝血致, 令士林興起, 稍有陽復之望, 皆公之力也.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奉襄務安住龍渡, 仍守墓下. 丁酉, 倭寇再肆, 雖在奔避顚沛中, 持喪一以禮. 己亥, 又與仲氏爲困齋訟寃, 凡前後叫閽, 至再至三, 而兪音竟閟. 公初授顯陵參奉, 謝恩卽已. 又除禁府都事, 尋罷. 光海初戊申, 首擬王子師傅, 三月再除禁府都事, 旋遞, 十二月爲靑嚴都察訪. 辛亥, 中人嗛罷. 癸丑五月, 又爲禁府都事, 轉經歷. 甲寅, 遷司宰監主簿, 七月爲司憲府監察. 八月丁繼妣鄭夫人憂, 公年迫六十, 喪禮不懈. 旣葬又廬墓, 以終三年. 公晩年從仕, 只是爲親屈也. 旣親不待養痛恨, 終身不復以世事, 爲意閑居自頤者五六年, 以天啓辛酉閏二月二十八日卒, 得年六十五. 李察訪克扶, 公之莫逆友也. 詩以哀之曰 '中年共作弓驚鴈, 晩歲同爲雪後松.' 蓋歎公經歷險巇, 所守確如也. 公禀賦英邁, 器局凝重, 生長禮法之家, 奉承孝友之訓, 事親以誠, 律身以禮. 又登師門, 好學不倦, 講究義理之奧, 困齋稱之, 以間世人物. 嘗在襁褓失恃之日, 乳母之夫, 極盡育養之道, 故及其死也, 用同爨緦服之義, 白巾以哭之, 具棺歛以葬之, 此在公爲一瑣節, 而其不忘之恩, 亦可尙矣. 與兄弟湛樂無間, 欲同居一室, 畵同堂異室之制, 贊成公深加嘉勉. 至有毋忝爾所生之敎, 而遭禍亂未就. 居家接下, 必以正名分爲先. 門庭肅然有序, 人之出入者, 擧皆敬畏, 無敢犯分者. 自弱冠時, 已見重於先生長者, 其得賢師爲依歸. 初以思菴 栗谷所指敎者, 而中歲以後聲名日益著, 如鶴峯 東岡, 皆一代儒賢推許公不置. 至於金斗岩應南則待之以國士, 鄭愚伏經世爲方伯, 公有書謝知遇, 論儒學淵源前後處臬者, 欲與公議公事. 當其巡按之日, 輒以公留待之意, 預示于官文, 鄕人傳之, 以爲美談. 每念師友寃死之痛, 期以一洒不得回天, 日夜疚心. 與李漢陰德馨 韓久庵百謙, 及南公以恭 鄭公協, 有往復書牘備, 及伸卞之語. 又與景慕者, 議建困齋祠宇, 以俎豆之庸, 表尙德之誠, 其所以事之如一者, 吁亦至矣. 公初葬于州之錦城山北麓, 其後卜人皆謂兆宅不利. 歲丙申三月, 玄孫晩錫等, 移窆于大安東鱉岩上乾坐巽向之原. 距公歿爲九十六年. 配宜人李氏, 籍陽城, 生于丁巳五月十七日, 歿于庚申十二月二十日, 合祔公墓. 生三男曰 繪素武科通政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曺正郞. 性簡伉與世抹摋, 而官未達, 人皆惜之. 府使生二男, 衤成 武科宣傳官, 襜通德郞, 一女李鳴衢進士. 宣敎生一男衵, 四女尹啇望 任暠 曺挺五 鄭櫶進士. 正郞乏嗣, 以襜後. 宣傳生一男斗正, 又有庶出子二人, 斗占斗平武科. 衵生三男, 斗興 斗鎭 斗應. 襜有庶出子四人, 斗遠 斗承武科 斗冑 斗盈. 斗正生二男, 晩錫 晩遇. 斗興生一男晩賢. 嗚呼! 斗冬嘗見公祭, 我曾王父文略曰 : "共趨鯉庭, 幾承詩禮, 同事師門, 麗澤是資, 同心同德之樂, 豈但兄兄弟弟之大義哉!云. 爾則斯可謂兄弟間知己者也."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 今者晩錫持公疏章文迹及歷官資牒, 示斗冬, 要令撰次以傳後, 尤有所感於中者, 不敢以不文辭, 謹敍顚末以歸之. 崇禎丙子後八十年丙申閏三月日, 從曾孫生員斗冬謹記. 여지지(輿地志)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펴낸 지리서이다. 사 씨 …… 쌍벽 원문 '사가(謝家)'는 진(晉)나라 때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을 말한다. 또 '쌍벽(雙璧)'은 본래 한 쌍의 옥벽(玉璧)을 말하는데, 전하여 형제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귀한 집안이나 벼슬을 한 훌륭한 자식 등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순호의 팔룡 후한(後漢) 때,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을 가리킨다. 모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므로 '순씨팔룡'이라고 불렸으며, 후세에 남의 자제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할 때 흔히 사용한다. 열다섯 원문 성동(成童)은 15세를 말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과 등이 있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좌막(佐幕) 조선 시대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견외(遣外)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이다. 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다. 6대조 정총(鄭摠)과 그 아우인 정탁(鄭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살았다. 임윤신(任允臣) 1529~1588. 자는 경룡(景龍)이다. 부하 원문 '조아(爪牙)'는 여기에서 '앞잡이', '부하'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자는 공려(公勵)이고, 호가 오리(梧里)이다. 등대(登對)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말한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공서(公西)의 일 공서(公西)는 공자의 문인으로, 공서(公西)가 씨(氏)이고 적(赤)이 이름이며, 자는 자화(子華)이다. 공자 앞에서 공자의 여러 제자들이 자신의 소원을 각자 말했는데, 공서화는 '예복(禮服)과 예관(禮冠) 차림으로 종묘의 제사를 돕는 일이 소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너의 …… 말라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노력하여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祖寐, 毋忝爾所生.]"에서 나온 말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가 우복(愚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가 한음이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건좌(乾坐) 손향(巽向) 풍수지리에서, 묏자리 또는 집터 따위가 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말한다. 의인(宜人) 조선 시대, 정육품과 종육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어지던 품계이다. 양성(陽城)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일대이다. 함께 …… 공부하고 원문 '이정(鯉庭)'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鯉)는 공자(孔子)의 아들 이름으로 자(字)가 백어(伯魚)인데, 뜰에 계신 공자의 앞을 지나다가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고사가 있으므로, 자신이 이(鯉)처럼 뜰을 지나면서 부모의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학문을 강습했으니 원문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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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五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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呈四休堂 十載林泉共一溪南北㞐護園偏養菊垂釣爲隣魚得醉忘窮契纔醒問酒餘百年能㡬許螻蟻一丘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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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友人 少壯交遊問㡬何只存䨇差臥田村相逢两日情猶恰不必西山待日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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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沈士吉【彦慶】韻 窮前千日千相見達後一䄵一得書癡夢不知窮達異有時相欵少時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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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柳進士適 哭君之死惜君才天不可階誰問哉竹架有書癡弟泣草堂無主野僧來朱絃望斷陳淸廟白璧那堪委夜臺萬事卽今皆已矣德山松柏自生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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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참의에 대한 만시 趙參議輓 그대 형님은 나에게 장인뻘이요그대 아우는 나보다 한 살이 많지옛날 호서에서 사별할 때 흘닌 눈물 생각나니지금 또 옷깃 적실 줄 어찌 알았으랴 令兄爲我丈人行賢季於吾一歲强憶昔湖西死別淚豈知今日又霑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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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夢 꿈꿀 땐 꿈이 참이 아님을 어찌 알랴그저 서로 만나면 바로 친하게 지내세깨어난 후 곧바로 천 리로 이별하니도로 꿈속 신세가 되는 게 낫겠구나 夢時那識夢非眞但得相逢卽可親覺後便成千里別不如還作夢時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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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시에 차운하다 次三角韻 이곳은 원래 하늘의 한 귀퉁이요남쪽 누각은 또 성 남쪽의 귀퉁이라내가 날마다 와서 이 누각에 오르건만보고 보아도 어찌 삼각산 볼 수 있으랴 此地元來天一角南樓又是城南角我來日日登玆樓望望那能見三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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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襃獎 중종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였다. 【어떤 이는 정려를 세워 표창한 일이 가정(嘉靖) 갑진년(1544)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본도 감사의 계문(啓聞)과 전교(傳敎)의 글에는 모두 증거가 없다. 이후 만력 갑인년(1614) 가을에 광해군이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35) 등에게 《동국신속 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을 충신 1권, 효자8권, 열녀 8권으로 편차하여 그림을 그리고 사적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사적에 이르러서는 '사침단지(士沈斷指)'를 제목으로 삼아 그 아래 손가락을 깨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끝에 사적을 적었는데 "현감 나사침은 본관이 나주이다. 효성을 타고나 나이 16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올렸더니 병이 즉시 나았다. 중종36)께서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라고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혼탁한 조정의 간신 이이첨(李爾擔)37)의 성명 또한 일찍이 효자의 반열에 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이 세상에 유행하지 않았고 당초 간행본 중에 여전히 전해지는 것이 있어 이처럼 덧붙여 보인다.】만력 무진년38) 본도의 감사 송찬(宋贊)의 계본(啓本) 【본주의 목사 한복(韓輹)이 논하여 알린 것을 따른다. 송찬은 자가 치숙(治淑)이고, 호는 서교(西郊)이며, 진천(鎭天) 사람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경자년(154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일찍이 무진년(1568)에 호남의 방백이 도내의 훌륭한 선비를 천거했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고, 그 다음으로 같은 고을의 전 참봉 김응기(金應期), 유학(幼學) 김천일(金千鎰), 장흥(長興) 진사 유호인(兪好仁), 김윤(金胤) 등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그대로 대신들이 포장 교지를 의논하라는 일이 있었다.】생원 나사침(羅士沈)이 모친의 병이 수개월 간 치료되지 않자 의술로 낫게 할 수 없음을 슬피 여겨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약과 함께 올렸더니 어머니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중종 때 임금께 알려져 정려로써 표창을 받았다. 그 사람됨은 천성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학문과 행실을 겸비하여 그의 부모형제간에도 다른 말이 없었고 일을 처리하고 남들과 만날 때에도 믿음과 의리를 실천했고 부모의 상에도 한결같이 예를 따랐으니 시묘살이를 하는 전후에 한 번도 집에 이른 적이 없었으며 추모함에 정성스럽고 독실하게 하고 제사를 지낸 때도 반드시 삼가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할 때에도 불쌍히 여겨 지극 정성으로 했으며 일찍이 과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 명성이 알려지거나 현달하기를 구하지도 않아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행실에 모두 감복했기에 선조께서 교지에 "나사침 등의 행실은 지극히 가상하여 포장할 만한 일이니, 해당 부서는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미암일기(眉巖日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무진년 5월 15일에 나중묵(羅仲黙) 【사선(士愃)이다.】 의 형이 내게 고하기를 '아침에 이조판서 이공을 만났는데, 나사침과 유호인은 품계에 맞는 직을 내리고, 김천일에게는 식물(食物)을 내려 학업을 마치도록 하고, 김응기에게도 식물을 내리고, 김윤에게는 정려문을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줄 것이니, 이는 대개 이조와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미암은 유희춘(柳希春)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는 성은(城隱)이다. 유계린(柳桂隣)의 아들로, 공과는 이종형제 사이다. 정덕 계유년(1513)에 태어나 배움을 널리 했고 기억하는 데 힘을 쏟은 인물이다. 가정 정유년(1537) 생원에 합격하고, 무술년(1538)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1545)에 권세 있는 간신들의 재앙이 있던 날, 정언(正言) 벼슬에 있다가 대사헌 민제인(閔齊仁) 등과 함께 연좌되어 파직 당하였다. 정미년(1547)에 제주로 유배를 갔다가, 무신년(명종 3, 1548)에 종성으로 이배되어, 을축년(1565)에 특별히 은진(恩津)으로 이배되었다. 선조 초에 교리로서 부름을 받고 이어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경학을 시강(侍講)하였다. 정축년(1577) 5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中宗朝, 旌閭復戶. 【或云, 旌表在於嘉靖甲辰年而未詳. 本道監司啓聞及傳敎文字俱無徵 △後至萬曆甲寅秋, 光海命晉原府院君柳根等, 編次東國新續三綱行實, 忠臣一卷, 孝子八卷, 烈女八卷, 啚像記事. 而至於公之事蹟, 則以士忱斷指爲題目, 其下畵斷指之狀, 未端記事曰 : "縣監羅士忱羅州人, 誠孝出天, 年十六, 母病斷指, 以進卽愈, 恭僖大王朝旌門."云云. 及仁祖反正後, 以昏朝蘖臣 李爾瞻姓名, 亦嘗冒入於孝子之列, 故其書不得行世, 而當初刊出本, 猶有傳者, 附見如此.】萬曆戊辰, 本道監司宋贊啓本 【從本州牧使韓輹論報也. 宋贊, 字治叔, 號西郊, 鎭川人. 嘉靖丁酉, 生員壯元, 庚子文科, 官至贊成. 嘗在戊辰, 以湖南伯啓薦道內遺逸之士, 以公居首, 其次同州前參奉金應期 幼學金千鎰 長興進士劉好仁 金胤 凡五人也, 仍有議大臣襃獎之敎】生員羅士忱, 母病數月不瘳, 悶無醫術, 自斷手指和藥以進, 母病卽愈已. 在中廟朝, 事聞旌表. 爲人性稟眞醇, 學行俱備, 其於父母昆弟之間, 人無異言. 處事接物之際, 信義竝行, 父母之喪, 一遵禮制, 前後廬墓, 一不到家, 追慕誠篤, 祀事必謹, 賙窮恤乏, 至誠惻怛, 早廢擧業, 不求聞達. 一鄕之人, 咸服其行. 宣祖敎曰 : "羅士忱等行實, 至爲可嘉襃獎事, 令該曺議于大臣."柳眉巖日記曰 戊辰五月十五日羅仲黙 【士愃】 兄報云 朝見吏書李公則士忱與劉好仁, 相當職除授, 金千鎰賜食物勉卒學業, 金應期賜食物, 金胤旌門復戶, 此蓋銓曺與大臣議定者也. 【柳眉巖, 諱希春, 字仁仲, 善山人, 號城隱. 桂隣之子, 與公爲姨從兄弟也. 生于正德癸酉, 博學强記. 嘉靖丁酉生員, 戊戌文科. 乙巳權奸釀禍之日, 以正言, 折大司憲閔齊仁等, 仍被坐罷. 丁未配濟州, 戊申移配鐘城, 乙丑量移恩津. 宣廟初, 以校理承召, 歷官大司憲, 吏曹參判, 特陞資憲長, 以副提學侍講經學. 丁丑五月卒. 贈左贊成, 諡文節公.】 유근(柳根) 1549~1627. 자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서경(西坰)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중종 원문 '恭僖大王'은 중종(中宗)을 말한다. 공희(恭僖)는 중중의 시호이다.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자는 득여(得輿)이고,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만력 무진년 만력(萬歷) 연간에 무진년은 없다. 아마도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석을 참고하면 무진년은 선조의 원년이며 1568년에 해당되므로 융경(隆慶)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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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집록 行蹟輯錄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무진년(1568) 6월 20, 도목정(都目政) 나사침(羅士沈)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되었다.""8월 1일, 나사침을 불러 함께 외조부 금남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당시 공은 사은숙배(謝恩肅拜)61)를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기사년(1569) 6월에 나중부(羅仲孚)가 관직을 버리고 멀리 와서 형의 상을 지내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으니 훌륭한 행동이다. 【같은 해 6월 7일에 맏형 시정(寺正) 나사선(羅士愃)이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경기전 부임지에서 15일에 부고를 듣고 다음날 곧바로 출발하여 곡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 참봉(參奉) 최감사(最監司)가 주관했는데 관직을 버리고 멀리 떠나면 근무평가 점수가 낮기 때문에 이처럼 관직을 그만둠이 훌륭하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7월, 나사침이 27일에 보낸 편지를 길 가던 중에 보았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길목마다 각 관아에서 군인과 수레와 소를 성대하게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내어주고 노자를 도와준 곳도 있었으니 이는 모두 형님께서 편지를 써준 덕분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낱낱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처음 출발하던 날 광주(廣州)에서는 군인과 소를 또 성대하게 내어주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출발한 날에 용인의 행원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각 관아에서 감사가 노자를 소략하게나마 주어 상하 노비의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은진(恩津)62) 현감은 특별히 모두를 대접하고 또 노자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같은 달 21일에 공은 시정공을 모시고 상갓집을 가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러 편지를 썼다.】""경오년(1570) 5월 15일, 나사침의 편지를 보았는데 지난 4월 26일 무안(務安) 석진리(石津里)에 있는 외증조 최진사(崔進士)의 묘를 찾아 가서 묘지기를 정하고 풀을 베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으며 묘의 모습은 예전과 같고 무덤 앞 땅도 완전했으며 석물들도 옛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여 감개가 무량했다고 하였다. 【최진사의 휘는 택(澤)이고, 부인은 여양 진씨(驪陽陳氏)로, 태평관직(太平館直) 최용지(崔用之)의 따님이니, 곧 금남(錦南)의 어머니이다. 묘소는 석진리 어을곳(於乙串)에 있다. 미암이 일찍이 공에게 가서 성묘를 요청하니 이에 산지기를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했고 또 본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으므로 공이 요청을 따른 뒤에 이처럼 답장을 한 것이다.】 ""9월 12일, 호조판서(戶曹判書) 홍담(洪曇) 태허공(太虛空)이 지나가다 들러 조용히 말해주기를 '나사침이 형의 죽음을 듣고 급히 달려갔다가 최하의 평점을 받았습니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63)고 했는데 내년 6월이면 부임한 지 2년이 되어갑니다. 영공께서 만일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시면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홍공은 '매우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였다.""신미년(1571) 6월 5일, 중부가 나의 선조 제사를 위하여 담은 술 두 병을 보내와 냉수에 담가 두었다. 【미암이 본도의 감사로서 순행하다 나주에 도착했는데 6월 6일이 곧 부모님의 기제(忌祭)이므로 공관에서 지방을 써서 제사를 올리고자 했으니 공이 제사에 쓸 술을 걸러 보내온 것이다.】""8월 19일, 나사침이 선릉 참봉(宣陵參奉)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을 받았기에 매우 기뻐 급히 편지를 보내 축하하였다. 【곧 20일 곡성을 순행할 때의 일이다.】""갑술년(1574) 4월, 나사침이 정(正) 나중묵(羅仲默) 형의 아들 나몽남(羅夢男)이 3월 26일 상한(傷寒)64)으로 죽었다고 알려왔다. 이 사람은 바로 병사(兵使) 임진(林晉)의 사위이다. 깜짝 놀라고 슬프다. 【몽남은 바로 나덕순(羅德純)의 어릴 때 이름이다. 재작년에 겨우 혼례를 치렀는데 올해 16살로 요절한 것이다. 공이 초상을 치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매일같이 소찬을 먹었기에 미암이 공을 맞이하여 간곡히 육식을 권하며 말려놓은 꿩 한 마리를 보냈다.】""5월 6일, 나사침을 맞이하여 잘 정미한 쌀을 주고 매화시(梅花詩)를 주었다. 【이는 퇴계의 작품이다.】""7일, 황해감사(黃海監司) 민기문(閔起文)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나사침에게 보냈으니 답서를 보내왔는데 '이는 평소 경모하고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보배처럼 진주처럼 아끼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서 씨가 아들을 잃은 후 나사침에게 편지를 보내 나덕윤을 양자로 삼기를 청하였지만, 나사침은 그럴 수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가 의를 안다고 칭찬하였다. 【서 씨는 나정(羅正)의 둘째 부인이자 나몽남의 어머니이다. 6월 그믐과 7월 20일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양자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 서 씨가 부인 임 씨와 더불어 간사한 꾀를 내고서는 몰래 고을 서문 밖에 살고 있는 사노비 김서비(金西非)의 아들을 유복자라고 속이고 윤달 12월 22일 해산했다고 하였다.】""병자년(1576) 4월 20일, 나사침을 다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삼았다.""김학봉(金鶴峰)이 임 씨와 나 씨의 송사 결미의 문건에 '임 씨가 나사침을 불러 말했지만, 그의 자식을 양자로 들이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말을 지어냈다. 당초 서 씨가 나사침에게 양자를 들일 수 있도록 요구했지만, 나사침이 허락하지 않자, 서 씨는 억지로 그 일을 하고자 하여 언문으로 무식한 부인이 무슨 법을 알겠나 하고 썼으니 서 씨의 간절한 요구와 나 씨의 견고한 사양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서 씨가 간곡하게 양자를 요구했으나 끝내 도리가 아닌 말을 더했으니, 나사침은 매우 흉험함에 빠진 것이다.' 【김학봉은 김성일(誠一)이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의성 사람이며, 거주지는 안동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에 생원에 급제하였다. 융경(陰慶) 무진년(1568) 문과에 급제하였고, 계미년(1583)에 사인(舍人)으로 특별히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직을 받았다. 병술년(1586)에 임 씨와 나 씨에 대한 송사를 판결을 내려 거짓자식에 관한 복잡한 사연을 밝혔다. 그해 겨울 파직되어 체임되었다. 계사년(1593)에 경상 우감사(慶尙右監司)로 진주(晉州)에서 죽었다. 훗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라고 하였다.""학봉이 송사를 판결한 이후 추고공함(推考公緘)65)에 '나 씨의 집안은 화목한 가문이라 온 고을사람들이 감복한다. 나사침이 정려를 표창 받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은 일 또한 온 나라 사람들도 아는 것이다. 일이 드러나기 전에는 서 씨가 매번 슬픈 말과 괴로운 말로써 나사침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나사침이라는 사람은 천리나 떨어진 부임지에서 답장을 쓰면서 우선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주려는 뜻을 지극하게 했으니 이는 인정상 매우 지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부제학 유희춘은 나 씨 가문과 사촌으로서 두 번이나 편지를 써서 선처해 줄 계획을 냈다. 부사(府使) 김천일(金千鎰)은 임 씨와 서 씨의 이웃으로서 그들의 간악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 의리상 은혜를 끊어야 한다고 권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모두 《추안(推案)》에 실려 있다. 유희춘의 글에는 6~7월에 양자를 구한 일들이 분명히 실려 있고 김천일의 공함(公緘)에도 김서비(金西非)가 아이를 요구한 일이 분명히 실려 있다. 오직 이 두 사람의 말로도 옥사를 판단하기에 충분한데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아녀자의 말을 믿으니, 나 씨 가문에 대한 편지 전후가 서로 어긋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다.""3월부터 7월까지 이전에는 조금도 사악한 뜻이 없었고, 단지 나사침에게 양자를 요구할 생각만 있었다. 7월 20일 편지에는 마음을 유복자에 두어 또한 어디에 의탁하여도 따질 수 없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뜻이 정성스럽고 비통하여 양자를 구하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것이다. 나사침이 의로써 준엄하게 사양한 뒤라면 계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8월에 처음으로 거짓 임신하였다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6~7월에는 형태도 없던 임신이 갑자기 8월에 형태가 생기는 이치가 있겠는가. 그 거짓 임신한 곡절이 이러하다.""가령 나 씨 한 집안이 진실로 흉험하다 한들 반드시 남에게 혐의를 씌우고 자기에게 이익이 있은 뒤에 송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나 이들은 화목한 행실이 평소에 있고 재물로 다투는 일이 없다. 18세의 질부가 유복자가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무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기쁜 행실과 슬픈 감동의 마음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효행으로 정려를 표창 받고 학업으로 일을 삼는 자가 온 집안이 한 마디 말을 한다고 하여 반드시 죽은 조카의 후손을 끊으려고 했겠는가. 이런 일들은 법사(法司)가 이미 명확하게 살폈기에 다시 미루어 법으로 다스릴 것이 없는 데에도 굳이 여의사의 말을 믿고서 그렇게 했으니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정한강(鄭寒岡)이 쓴 〈학봉행장(鶴峰行狀)〉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계미년(1583)에 특별히 나주목사의 관직을 받았다. 고을에 임 씨와 나 씨가 있는데 모두 한 고을의 명문 집안이다. 나 씨가 임 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으나 자식 없이 죽었다. 임 씨가 몰래 다른 사람의 아이를 취하여 노비와 더불어 몰래 계획하여 유복자가 있어 자기가 낳았다고 하였다. 나 씨 집안에서 그것이 거짓임을 판별함과 동시에 그가 집안을 어지럽힌 것에 대하여 송사를 청하여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몇 년 동안 판결이 나지 않았다. 공이 한 번에 거짓임을 간파하고 그것이 거짓임을 밝혀 판결했기에, 공론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정한강은 정구(鄭逑)로, 자는 도가(道可)이고, 청주(淸州) 사람이며, 거주지는 성주(星州)이다. 한훤당(寒暄堂)의 외증손으로 도학은 대개 유래가 있었고, 퇴계(退溪) 선생과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여 더욱 학문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선조 초에 음덕으로 벼슬을 받아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 초에 특별히 대사헌(大司憲) 겸 보양관(輔養官)을 지냈다. 정사년(1617) 겨울에 〈학봉행장〉을 짓고 경신년(1620)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문목공(文穆公)의 시호를 받았다. 효종 때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무안의 유생 배명(裵蓂) 등이 상소한 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 이산 현감(尼山縣監) 나사침은 바로 중종 때 정려로 표창된 효자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에 특별히 참봉(參奉)의 관직을 내리고 승진시켜 이산 현감에 임명하셨는데, 그 고을에 많은 업적이 있으므로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를 세웠습니다. 임금과 어버이가 비록 같지 않다고 하지만, 충성과 효도가 본래 두 이치가 없습니다. 가정의 교훈이 미치는 곳에 반드시 그 근본이 있으니 그 한 집안사람이 비록 모두 충성스럽고 신의를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역적이 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전 도사(都事) 신(臣) 나덕명(羅德明)은 모두가 학문과 독실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서 상소 안에 들었으니 억울하고 또한 비참합니다. 대낮에 햇빛이 비쳐 충성심이 밝으니 진실로 신 등의 어리석은 말이 필요도 없이 잘 가려서 사실을 조사하여 주십시오.'66)""임금께서 '알았다.'라고 하셨다. 【기축년(1589) 12월에 정암수(丁巖壽)의 무고한 상소가 있었기에 배명 역시 상소를 올려 정곤재(鄭困齋)와 공의 원통함을 밝혔다.】 ""전해오는 기문(記聞)에 '나의 형님 취암(鷲巖) 【유성춘(柳成春)이다.】 은 예전 이조 좌랑(吏曹佐郎)을 지내다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손녀는 있지만 부모가 없었기에 내가 공의 형제들에게 사위를 택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공이 외5대조 최유중(崔有中)의 후손 최수경(崔秀景)이 괜찮다는 뜻을 편지로 보내왔는데 나이가 겨우 18세에 인물이 훤칠한 데다 배움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평소 공을 신뢰해 왔기에 마침내 그와 혼인시켰다.' 【최공의 실제 계파 외조(外祖)의 선조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 내력은 반드시 공의 고조인 무안 현감(務安縣監)이고, 공의 아내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선고(先考)이다.】 라고 하였다.""이산으로 부임하였을 때 도적질하는 사람 하나를 붙잡아 의리로 가르치고 놓아주었으니, 도적질을 했던 사람이 감동하여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을 앞에 객점을 설치하여 오가는 손님을 대접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땅이라며 애써 부지런히 일했으니, 사람들은 덕화가 남에게 미치는 것이 이와 같다며 칭찬하였다.""이산에 부임하였을 때 사위의 집과 종손의 집에서 모두 말을 보내와 요청하였기에 응하였다. 종가의 물품을 사위의 집보다 넉넉하게 주었으니 사람들은 종가를 중시 여기는 의리에 감복하였다고 한다.""이산현 앞길 옆에 처음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는데 임진년(1592) 병화에 손상을 입었기에 유민(遺民)들이 다시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 잊지 않는다는 뜻을 깃들이고 칠언 절구를 새겼다.시든 꽃 한 송이 외로운 학 한 마리 倭花一朶鶴一隻쓸쓸히 행리에 옛사람의 풍모 있네 行李蕭然古人風백성은 훌륭하신 당신 떠남을 안타까워 하니 齊民痛惜仁賢去소백에 대한 포장도 썩 넉넉한 건 아니리67) 召伯修褒亦不公이 시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공이 경인년(1590)에 붙잡혀 갈 때 다섯 아들까지 일시에 잡혀가 어려움이 많았기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로지 같은 고을의 효자 이유경(李有慶)만이 도움을 행하여 환난에서 서로 구제해주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듣는 자들은 그것을 바른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유경의 자는 효숙(孝叔)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일찍이 고을의 모산촌(茅山村)에 살면서 효로 이름이 났으니 곧 기묘(己卯)의 이름난 선비 생원 이해(李蟹)의 증손이다. 역시 경인년에 고을 사람들에게 무고로 체포되었으나 곧바로 방면되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두 번 사부(師傅)의 관직을 내렸지만 모두 나아가지는 않았다.】" 眉巖日記曰 戊辰六月二十日, 都目政羅士忱, 以慶基殿參奉首望受點.又曰 八月初一日, 邀羅士忱, 相與校正外祖錦南先生集. 【時公以肅謝入京】又曰 己巳六月, 羅仲孚棄官遠來, 護兄喪而得罷職, 亦有光矣. 【同年六月初七日, 伯兄寺正士愃公卒于京第. 公自慶基殿, 任所十五日聞訃, 翼日卽發奔哭之. 行舊例本, 前參奉殿最監司主之, 而以棄官遠去置下考, 故有此罷職有光之語.】又曰 七月, 見羅士忱二十七日中路書, 略曰 一路各官, 不特盛出軍人與車牛, 亦有饋餉, 而助行資處. 此皆尊兄主折簡之力, 感泣之意, 益難枚喩. 初出之日, 廣州軍與牛, 亦盛出, 故發京之日, 能到龍仁行院. 忠淸道各官, 則以監司行下略, 供饋上下奴主. 恩津宰則特盡餉一行, 又大助行資. 【同月二十一日, 公陪寺正公喪行, 自京離發到礪山, 有此書.】又曰 庚午五月十五日, 見羅士忱簡, 則去四月二十六日, 往尋務安石津里外曾祖崔進士墓, 定山直禁樵牧, 墓貌如昨, 階砌尙完, 石物依舊, 感愴不已. 【崔進士諱澤, 配驢陽陳氏, 太平館直諱用之之女, 卽錦南之考妣, 而墓在石津里於乙串. 眉巖嘗要公往省之, 仍使定山直守護, 且致書于本縣宰, 助成其事, 故公依示後裁答如右.】又曰 九月十二日, 戶曹判書洪曇太虛公過臨, 談話從容, 仍及羅士忱以奔兄之喪遭殿, 觀過知仁. 來年六月, 乃經二年令公, 若判銓曺, 幸可收拾, 則答以甚可矜念云又曰 辛未六月初五日, 仲孚爲我祭先釀酒送二甁來, 卽浸冷水中. 【眉巖以本道監司巡到羅州, 而六月初六日, 卽其親忌, 故欲以紙榜設祭于公廨, 公精釀祭酒, 以送之.】"又曰 八月十九日, 政羅士忱入宣陵參奉首望, 受點, 深喜卽馳書以賀. 【卽二十日巡到谷城時事也.】"又曰 甲戌四月, 羅士忱報羅正仲默兄之男夢男, 三月二十六日死於傷寒, 卽林兵使晉之婿. 驚悼驚悼. 【夢男, 卽德純之乳名. 再昨年, 纔成婚, 年今十六, 致夭. 公成服後, 尙累日行素. 眉巖邀致懇論勸肉▣, 送乾雉一首.】又曰 五月初六日, 邀羅士忱授粲, 贈以梅花詩. 【卽退溪所作也.】又曰 初七日, 以黃海監司閔起文所送家禮, 送于羅士忱, 答書略曰 此平日之所景慕而欲得者, 敢不寶藏而珍玩耶.又曰 徐氏哭子後, 致書于羅士忱, 請以德潤爲侍養, 士忱以不可之意回報. 希春獎其知義. 【徐氏, 卽羅正之後室, 而夢男之母也. 六月晦日及七月二十日, 兩度致書, 懇乞侍養, 而不許之. 後徐氏與其婦林氏, 幻出奸謀, 潛竊本州西門外居私婢金西非之子, 詐爲遺孕, 而謂以閏十二月二十二日解胎.】 云云.又曰 丙子四月二十日, 政羅士忱復換慶基殿參奉.金鶴峰林羅訟結尾文案曰 林氏招內羅士忱, 憤其子不爲侍養, 成此不測之言, 而當初徐氏求侍養于士忱, 士忱不許, 而徐氏則堅欲爲之其諺書內乃曰 無識婦人, 何以知法乎云云. 則徐之懇求, 羅之固辭, 於此, 可知. 初則徐氏懇求侍養, 而終以不道之言加之, 士忱極爲兇險. 【金鶴峰諱誠一, 字士純, 義城人, 居安東, 退溪門人. 嘉靖甲子生員. 隆慶戊辰文科. 癸未, 以舍人特拜羅州牧使. 丙戌, 決折林羅訟, 明卞僞子委折. 其年冬, 罷遞. 癸巳, 以慶尙右監司, 卒于晉州. 後贈 吏曹判書, 諡文忠公.】鶴峰決訟後, 推考公緘曰 羅門睦族, 一鄕之所取服, 士忱則至於旌閭復戶, 抑亦國人之所知也. 事跡未彰著之前, 則徐氏每以悲辭苦語, 抵書於士忱, 則爲士忱者, 千里仕宦, 其答書之際, 姑致慰解之意, 此人情之所必至者也.又曰 副提學柳希春, 羅門之四寸, 而兩度致書, 以示善處之策. 府使金千鎰, 林徐之比隣, 而明知奸狀, 勸其以義斷恩, 此等曲折備載推案云云.又曰 柳希春書中, 明言六七月求侍養之事, 金千鎰公緘中, 明言金西非覓兒之事, 惟此兩人之言, 足斷是獄, 不此之信, 而信妖婦之言, 謂羅門之書前後牴牾, 實所未解.又曰 自三月至七月, 前少無邪意, 只圖侍養於士忱. 七月二十日書乃曰 意謂有遺腹而亦無計較於何依托云. 則其志誠悲而求侍養之計, 益切矣. 及士忱以義峻辭之後, 則計無所出. 八月間, 始爲僞胎之狀, 寧有六七月未形之胎, 遽形於八月之理, 其爲僞胎曲折如此.又曰 設使羅家一門實爲兇險, 必有嫌於人, 有利於己然後乃可起訟, 而此則素有和睦之行, 而萬無爭財之事. 十八歲姪婦有遺腹之兒, 則雖大無道之人, 猶有喜行悲感之心, 何故以孝行旌閭, 以學問爲業者, 擧族一談必欲殄絶亡姪之後耶. 此等事狀法司旣已明察, 而不爲更加推卞, 必曰女醫之爲信, 實所未解.鄭寒岡所撰鶴峰行狀曰 癸未, 特授羅州牧使云云. 州有林氏 羅氏, 皆一邑巨族也. 羅娶於林, 無子而死, 林竊取他人家兒, 與婢陰謀詐爲遺孕而爲己出.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 累經推覈, 積年不決. 公一覰看破, 明其爲僞而斷之, 公論大快. 【鄭寒岡諱逑, 字道可, 淸州人, 居星州, 以寒暄堂外曾孫, 道學蓋有所自, 遊退溪 南冥之門, 益聞爲學之方. 宣祖初以遺逸被薦, 歷官內外. 光海初, 特拜大司憲 兼 輔養官. 丁巳冬, 撰鶴峰行狀. 庚申卒. 仁祖朝, 贈吏曹判書 諡文穆公. 孝宗朝, 加贈領議政.】務安儒生裵蓂等疏略曰 前縣監羅士忱, 乃中廟朝旌表孝子也. 殿下卽位之初, 特命爲參奉, 陞拜尼山縣監, 有茂績, 立淸德去思碑, 君親雖曰不同, 忠孝本無二致. 庭訓所及, 必有其本, 其一家之人, 雖不得皆爲忠信, 而必不欲爲逆賊之所與也. 其子前都事臣羅德明等, 皆以學行之人, 而授入疏內, 寃亦慘矣. 白日照臨, 丹心可明, 固不待臣等愚妄之說而不覈之也. 云云.答曰 知道. 【己丑十二月, 有丁巖壽搆誣疏, 故裵蓂亦陳疏仲卞鄭困齋及公之案狀.】傳來記聞曰 眉巖兄鷲巖 【成春】, 嘗爲吏曹佐郞, 早世. 有孫女無父母, 眉巖要公兄弟擇婿, 公乃以外五代祖崔公有中之後孫秀景, 合宜之意, 書以復之曰 年纔十八, 人物英明, 又有學氣. 云云. 眉巖素信公, 遂與之定婚. 【崔公實係外祖先而未詳. 其來歷必是公之高祖 務安縣監. 公配永川崔氏之考也.】又曰 尼山莅任時, 捕得一賊人, 諭以義理, 而釋之, 賊人感動而懲創之. 創設縣前旅店, 接應行客, 以爲勤苦自新之地, 人稱德化之及人如此云.又曰 尼山莅任時, 女婿家及宗孫家, 俱送馬求請而酬應. 宗家之物, 優於女婿家, 人服其重宗之義云.又曰 尼山縣前路傍, 初有去思碑, 爲壬辰兵禍所傷, 故遺民爲之更立石, 以寓不忘之義, 而奮刻七言絶句, "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 齊民痛惜仁賢去, 召伯修褒亦不公"之詩, 不傳焉.又曰 公之庚寅被拿也, 竝五胤一時發行, 事多艱辛, 而人皆畏禍, 無敢問者, 獨同鄕孝子李有慶, 以其所騎助行, 不負患難相救之義, 聞者韙之云. 【李有慶, 字孝叔, 慶州人. 嘗居州之茅山村, 以孝著聞, 卽己卯名流生員蟹之曾孫. 亦於庚寅爲鄕人所搆被逮尋宥. 後朝家聞其賢, 再除師傅, 皆不就.】 사은숙배(謝恩肅拜) 관료로 처음 임명된 자가 궁중에서 임금에게 국궁사배(鞠躬四拜)하여 은혜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은진(恩津)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을 말한다. 잘못한 …… 있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인다. 상한(傷寒) 추위로 인한 급성 열병을 말한다. 추고공함(推考公緘) 글로써 죄인을 심문하는 것 또는 그 내용을 말한다. 전 …… 주십시오 〈기축록(己丑錄)〉과 〈혼정편록(混定編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소백에 …… 아니리 거사비를 세웠지만 미진하다는 백성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원문 '소백(召伯)'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남국(南國)을 다스릴 때 선정을 펼치자 백성들이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생각하여 "무성한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머무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하였다. 《詩經 甘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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