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발문(1)12) 重刊跋(1) 대개 문학(文學)과 충량(忠良)은 바로 나라의 정간(楨幹)13)이다. 옛날에 뛰어난 문장과 탁월한 절개가 백대에 빛나는 자가 있으면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동관(彤管)14)으로 먼저 능연각(凌煙閣)15)과 죽백(竹帛 사서(史書))에 기록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게 하였다. 또 그 자손 된 자가 혹 판각하여 길이 전하고 활자(活字)로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배포하여 그 영광과 그 공렬을 해와 달처럼 빛나게 하고 서리와 눈처럼 늠름하게 하였으니, 어찌 천년 뒤에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아! 생각건대 나의 9대조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선생은 풍부한 문학으로 일찍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선묘조(宣廟朝) 임진년(1592)을 당하여 북쪽 지역을 안정시켰으니, 곧은 충정은 백세토록 빛나서 국사(國史)에 밝게 드러날 뿐만이 아니라고 이를 만하다. 또 전후로 기실(記實)을 찾아내고 채집하여 여러 선생이 집필한 글에 자세히 갖추었으니, 이제 후손의 좁은 소견을 어찌 감히 그사이에 덧붙이겠는가.아! 나의 5대조 불우헌공(不憂軒公 정상점(鄭相點))은 바로 선생의 현손이다. 일찍부터 강개한 마음을 가지고 조상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선생이 평소 집에 소장하고 있던 본초(本草)와 유사(遺詞) 및 일고(逸稿)를 좀먹거나 교감(校勘)16)한 뒤에 수습하고, 병란과 환란을 겪은 뒤에 모아서 주선하여 판각한 것이 바로 두 권의 책17)이다.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 지가 100여 년에 이르렀으며, 각판(刻板)은 진주(晉州) 용암(龍巖)의 재실(齋室)에 보관되어 있기에 이로 인해 사모하는 마음을 부친 지가 오래되었다.그러다가 근래에 경향(京鄕)의 세가(世家)와 북쪽 지방의 유생들이 소중하게 보관한 것을 널리 채집하고 두루 찾아서 또 몇 권을 문집에 편입(編入)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바야흐로 활자로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예전대로 구집(舊集 정상점 간행본)을 속간(續刊)한다면 책 모양의 크기, 목판과 활자의 자체(字體)와 편차(編次)의 선후에 착란의 잘못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전부 활자로 하기로 논의를 결정하였다. 구집의 각판은 자연스럽게 존각(尊閣)18)에 돌려놓았을 따름이니, 우리 불우헌공의 자손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의 5대조께서 조상을 위한 일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 결국에는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완집(完集)을 간행하는 것이 도리어 구집을 속간하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 하겠다.숭정(崇禎) 기원후 5번째 경인년(1890) 3월 하현(下弦)에 9대손 혁교(奕敎)가 두 손 모아 절하며 삼가 쓰다. 蓋夫文學、忠良, 卽國之楨幹也。古有偉文、卓節, 光耀於百世者, 則太史氏彤管, 先以凌烟、竹帛, 而與天地相終焉。且爲其子孫者, 或鋟梓壽傳, 印鑄廣布, 使其光其烈, 煥乎若日月, 凜乎若霜雪者, 豈非起死人於千載之下云者乎? 噫! 唯我九代祖忠毅公農圃先生, 以贍實文學, 早登甲科, 當宣廟朝壬辰歲靖北, 貞忠可謂百世光耀, 而不但於炳著國乘。又前後採訪記實, 備悉於諸先生秉筆之下, 則今以後孫之管見, 何敢贅附於其間哉? 粵我五代祖不憂公, 卽先生之玄孫也。夙抱慷慨, 殫誠爲先, 先生之平日家藏本草與遺詞、逸稿, 收拾於蠹食、偏傍之餘, 裒葺於兵燹、患亂之後, 而周旋剞劂者, 乃兩卷冊子也。刊行傳世, 至於百有年所, 而刻板則藏于龍巖齋室, 仍以寓慕者久矣。近於京鄕世家與北儒珍藏, 博採旁搜者, 又爲數卷編集, 故今方印鑄布行, 而若仍舊續集, 則冊樣大小, 板鑄字體, 編次先後, 有失於舛錯, 故不獲而全以活字歸論。而舊集板刻, 自然歸之於尊閣而已, 則爲吾不憂公子孫者, 孰不慨惜? 而以吾祖爲先, 未遑底意, 究竟則其在繼述之道, 印行完集, 反有賢於續舊也哉。崇禎紀元後五庚寅暮春下弦, 九代孫奕敎, 拜手謹識。 대본에는 제목이 없는데, 이 중간 발문은 정문부의 9대손 정혁교(鄭奕敎)가 1890년에 7권 4책으로 편차한 뒤에 활자본으로 중간하고 붙인 것이다. 정간(楨幹) 정은 담의 양쪽 끝에 세우는 나무이고 간은 양면에 세우는 나무로, 사물의 근본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관(彤管) 자루가 붉은 붓으로, 사필(史筆)을 가리킨다. 옛날 주(周)나라 때 여사(女史)가 이러한 붓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다. 《詩經 邶風 靜女》 능연각(凌煙閣) 당 태종이 정관(貞觀) 17년(643)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두여회(杜如晦) 등 훈신(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여기에 걸어 놓게 하였다. 《新唐書 卷2 太宗皇帝本紀》 교감(校勘) 초고(草稿)를 정리하여 간행하는 과정 중에 글자의 변(偏)과 방(傍)이 비슷한 속자(俗字)를 교감하여 수정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두 권의 책 1758년에 정상점(鄭相點)이 간행한 것을 말한다. 존각(尊閣) 존경각(尊經閣)의 준말로, 지방 향교나 서원의 장서각(藏書閣)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