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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獻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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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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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香笏 贊引入自東門先就階間拜位再拜燃燭設香立於西階之西唱焚香官及諸生入自東門就階間拜位北向西上鞠躬再拜拜興拜興平身焚香官升自東階詣香卓南北向跪三上香俯伏興降復位鞠躬再拜拜興拜興平身焚香官及諸生出自東門贊引滅燭再拜以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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宴飮笏 會日早朝開廟門灑掃設香爐香盒具燭臺布席于廟庭設席于講堂及階上司饌陳器具饌時到鳴鼓賓贊引上賓以下立於門外東向北上主贊引主人【直講】及掌色直月諸執事出門外西向南上主人與上賓相向立主人揖上賓報揖引主人入門右掌議以下隨入引上實八門左衆賓隨八引主人以下立於神門外西向北上引上賓以下立於神門外東向北上主人揖上賓答引主人以下八自東門引上賓以下八自西門引主人以下立於東庭北面重行西上引上賓以下立於西庭北面重行東上執事者燃燭賓主以下皆再拜引主人升自東階詣神位前北向跪三上香引降復位與在位者皆再拜撤燭闔廟門引主人以下出自東門引上賓以下出自西門撤廟庭席闔神門引主人以下立於講堂東庭西向北上掌議以下稍却引上賓以下入於講堂西庭東向北上上賓與主人正相向主人揖上賓報揖主人將進揖上賓報揖主人當階揖上賓報揖主人請賓升上賓辭主人固請賓升上賓固辭主人終請賓升上賓終辭引主人先升東階上賓從升西階引主人以下北向西上立引上賓以下北向東上立重行引上賓斤堂西邊東向立引主人以下升堂東邊西向南上立掌議以下稍却主人以下拜上賓答拜引上賓詣北壁下少西南向立引尊者【長於主人二十年者】升堂四邊東向南上立主人以下拜尊者答拜引尊者詣上賓之西南向東上立【無尊者則拜尊者條不唱】賓贊引長者【長於主人十年以上者】升堂西邊東向南上立主人以下拜長者答拜引長者詣西壁東向北上立【無長者則拜長者條不唱若有異爵則如拜長者】引主人詣堂中少東南向立主贊引掌議以下就主人前北向西上拜主人答拜【於主人爲少者則跪而半拜爲幼者則跪而微俯首】引掌議以下詣東壁西向北上相拜上賓與尊者南向相拜【無尊者則否】引長者枕尊者及上賓前北向東上拜上賓及尊者答之引長者退西壁東向北上相拜【無長者則否】引主人東邊西向立掌議以下稍却其後西向南上立賓贊引敵者【上下不滿十年者】升堂東向北上與主人以下交拜引敵者就上賓及尊者前北向東上拜上賓及尊者答之引敵者就長者前西向北上拜長者答拜【無張者則否】引敵者序立於長者之南東向北上相拜【無敵者則拜敵否條不唱】賓贊引少者【少於主人十年以下者】升堂就主人前東向北上拜主人以下答之【主人跪而半拜】引少者就上賓及尊者前北向東上拜上賓及尊者答之引少者就長者敵者前西向北上拜長者敵者答之【長者敵者俱無則否】引少者序立於南行北向西上相拜【無少者則少者拜條不唱】賓贊引幼者【少於主人二十年以下者】升堂就主人前東向北上拜主人以下答之【主人跪而微俯首】引幼者就上賓及尊者前北向東上拜上賓及尊者答之引幼者就長者敵者前西向北上拜長者敵者答之【長者敵者俱無則否】引幼者就少者前南向西上拜少者答拜【少者無則否】引幼者序立於少者之東北向西上相拜【幼者無則幼者拜條不唱】儒生升堂就主人前東向北上拜主人揖儒生就上賓及尊者前北向東上拜上賓及尊者揖儒生就長者敵者前西向北上拜長者敵者揖【長者敵者俱無則否】儒生就少者幼者前南向西上拜少者幼者揖【少者幼者無則否】儒生序立於幼者之東北向西上相拜主人揖就北壁之東南向坐引掌議以下坐於東壁西向北上上賓以下各於立位坐【有親咸之妨於位次者坐於直月之南西向北上不屬】設書案于北壁下案上置節目冊白鹿洞學規直月就書案北向跪敬讀節目訖敬讀白鹿洞學規訖撤書案設卓子於兩楹間置大杯於卓上設爵洗於卓南酒注於卓北主贊引主人降席卓東西向立在位者皆起賓贊引上賓降席卓西東向立主人取杯親洗上賓辭主人置杯卓子上執事者進酒注主人執酒注斟酒于盃以注授執事者主人執杯獻上賓上賓受杯置卓子上主人西向拜上賓東向拜興取酒東向跪祭于坫遂飮以杯授執事者遂拜主人答拜【若少者以下爲上賓則飮畢拜時主人跪受如常儀若主人是少者以下則上賓飮後主人乃拜上賓跪而半拜】上賓取杯親洗主人辭上賓置杯卓子上執事者進酒注上賓執酒注斟酒于杯以注授執事者上賓執杯酢主人主人受杯置卓子上上賓東向拜主人西向拜興取酒西向跪祭于坫遂飮以杯授執事者遂拜上賓答拜引上賓復位引尊者降席卓西東向立主人取杯親洗尊者辭主人置杯卓子上執事者進酒注主人執酒注斟酒于杯以注授執事者主人執杯獻尊者尊者受杯置卓子上主人西向拜尊者東向拜興取酒東向跪祭于坫遂飮以杯授執事者主人拜尊者跪而半拜引尊者復位【尊者衆皆如是無尊者則獻尊者條不唱】引長者降席卓西東向立司洗洗杯尊置卓子上執事者進酒注主人執注斟酒于杯以注授執事者主人執杯獻長者長者受杯置卓子上主人西向拜長者東向拜興取酒東向跪蔡于坫遂飮以杯授執事者主人拜長者跪而半拜引長者復位【長者衆皆如是無長者則獻長者條不唱】引敵者降席卓西東向立司洗洗杯置卓子上執事者進酒注主人執注斟酒于杯以注授執事者主人執杯獻敵者敵者受杯東向跪祭于坫遂飮與主人相向拜引敵者復位【敵者衆皆如是無敵者則獻敵者條不唱】引少者降席卓西東向立司洗洗杯置卓子上執事者斟酒于杯主人執杯授少者少者受盃東向跪祭于坫遂飮以杯授執事者遂拜主人跪而半拜引少者復位【少者衆皆如是無少者則獻少者條不唱】引幼者降席卓西東向立司洗洗杯置卓子上執事者斟酒于杯主人執杯授幼者幼者受杯東向跪祭于坫遂飮以杯授執事者遂拜主人跪而微俯首幼者復立【幼者衆皆如是無幼者則獻幼者條不唱】引主人復位賓主以下皆坐進饌【五十以下二豆六十者三豆七十者四豆八十者五豆九十者六豆主人豆視賓豆】賓贊設饌上賓以下主贊設饌于主人以下無算爵撤饌進點心飯賓贊進飯于上賓以下主贊進飯于主人以下進熟冷撤飯諸執事設食于他所執事者進主人之左請少休賓主以下皆起一時揖以次退執事者進主人之左請復會鳴鼓賓主以下就堂一時揖皆坐講論從容【或行己之要或院中之事或經書疑義】俗禮行酒執事者進主人之左白禮畢賓主以下皆起因其位皆拜一時揖上賓以下以次出主人以下以次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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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菜祝文 維歲次干支某月干支朔幾日干支具位姓某敢昭告于高麗三重大匡太師開國壯節公伏以公國而忘家主而忘身一樹風節實敍彝倫非忠無君非孝無親不有大人小子何依式陳虔誠敢冀格思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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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正上人軸中韻 爾從太白山中來峭壁攢峰隔幾曲邂逅東樓打話頭夕陽帶雨江雲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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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嶺河滯雨奉次使令公【閔汝任】韻 雨聲遼左夜如年一盞靑燈在壁前弔古思鄕頭欲白越吟安得不悽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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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嶺河次李知事【彦華】韻 路左孤村在前臨斗嶺河朝來峽中雨沒盡岸邊沙征馬何時發行人或坐歌嚴程知有限敢歎遠離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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途中集唐詩卽分水嶺 靑山無限水潺潺塞外征人殊未還猶有別時今不忘斷腸聲裡唱陽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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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中奉次振衣令公韻 遼陽問前路羈思我何堪疲馬嘶靑草荒山滴翠嵐平林煙漠漠高嶺石巉巉所幸陪長者垂鞭踵後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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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락 題缺 땅이 비옥해 잎 길게 자라나고비 흠뻑 내려 싹이 돋아나네굳이 금단을 단련할 것 없으니도랑물 삼켜 흑발 남기네 土肥抽葉長雨足生芽茁不必鍊金丹呑渠留漆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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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삽 메고 영험한 뿌리 베어광주리에 잘 자란 풀 담는다체에 걸러 비결대로 하니거울 속에 흰머리 없어졌네 帶鍤斲靈根領筐貯肥茁篩和依秘方鏡裏除華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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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서 밤을 줍다 後園拾栗 후원에서 여장 짚고 걸으며시리 내린 숲에서 밤 줍네어린 아들 애써 찾아 와서말 전해 취한 나를 놀래키네 杖藜步後園收栗霜林下稚子强來覓引語驚醉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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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삼고 錦城三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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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2) 三稿合部序 【二】 말이라는 것은 몸의 문채(文彩)이다.18) 행동은 몸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말이 문채로써 빛난다. 중앙과 지방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진실로 곡식을 주면서 올바르게 기른다면 글에서도 도(道)를 볼 수 있다. 지금 금성 나씨의 소포·금암·금봉 삼형제의 유묵을 합편한 책을 삼가 세 번 반복해서 읽으니 감탄하고 흠모할 만한 점이 있었다. 세 분은 대개 선조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고 태어나 생장하는 동안 금호공(錦湖公)께서 독실히 지키는 떳떳한 도리의 전형(典刑)에 몸담고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 때문에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가 있었다.19) 곽망우(郭忘憂)20)의 훌륭한 절조를 마음으로 헤아리니 선조(宣祖)께서 군사에 대해 질문하던 날 추천을 받았고, 곤재 정개청의 정학(正學)을 가슴에 새기니 혹자는 '고명(高明)하여 경외롭다.'라고 칭송하며, 혹자는 '세간의 인물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이 때문에 인간의 도리를 행하고 남은 힘으로 한 학문21)은 뜻을 펼침에 뿌리가 무성해지고, 글을 지음에 기름을 부어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22) 어둠 속에서 헤아려보아도 덕스럽고 의로운 마음에서 흘러나와 시인과 문사의 구기(口氣)가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진실하다.여 시강(呂侍講)23)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안으로는 현명한 아버지나 형이 없고, 밖으로는 엄한 스승이나 벗이 없는데도 이룰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라고 한 말과 《맹자(孟子)》에서 "그 시를 외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한 말이 더욱 의미가 있다. 《예기(禮記)》24)에서 "선조에게 착한 일이 있는데도 모르면 현명하지 못하고, 알고도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주옥같은 문장을 가리고 인도한 두 후손이 전전긍긍함이 있다.금암의 증손 상사(上舍) 나두동(羅斗冬)이 과거를 그만두고 서책을 읽으며 오직 선조의 일에 책임을 지고 크고 작은 것 가릴 것 없이 반드시 드러낸 뒤에 이윽고 끝마쳤다. 이에 종이25)로만 남아 있는 말과 이야기가 날마다 사라질까 두려워 어느새 남은 시문과 침식된 간찰을 대추나무에 판각하여 영원토록 하고, 닥나무 종이로 간행하여 귀하게 한 뒤 내종(內從)인 침랑(寢郞) 정중원에게 서문을 지어주기를 요청하였다.정중원 군은 본래 가학(家學)이 풍부하고 외손자의 서열로 시종일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간절하고 진실하며 곧고 굳어 삼가 그 말이 행동과 일치하였다. 당화(黨禍, 기축옥사)와 도적들의 난[임진왜란]으로 그 글이 거의 다 망실됨을 개탄하였다. 죽은 스승의 원통함을 변론하고 아울러 뭇사람들의 억울함도 신원하며 기축년의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 모함한 상황을 진술하였다. 더욱 격앙된 세 분 상소의 말은 엄정하고 뜻은 정당하여 세도(世道)와 관계되어 귀신도 질정할 수 있으니, 아! 어찌 다만 이것뿐이겠는가?소포옹께서 선산을 참배한 시와 분발하여 오랑캐를 막자는 계책은 효와 충의 모범이 되어 의리가 신명(神明)을 관통하였고, 금암옹께서 자식을 경계한 글과 금봉옹께서 형님에게 바친 제문은 의방(義方)26)과 형제간의 우애에 대한 도(道)가 인륜의 차례를 다하였으니, 큰 솥에 있는 한 점의 고기나 길광(吉光)의 조각 털27)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곧 〈촉도난(蜀道難)〉 시처럼 귀신을 울렸고28) 강을 건너며 쓴 글처럼 공경대부와 필적할 만하였으니29) 삼가 재주가 있을 따름이었다.우리들의 사업은 문장이나 공명(功名)에 있지 않으니 구구하게 그 사이에서 우열30)을 가릴 필요는 없다. 오직 때가 불행하여 일찍 재앙의 그물에 떨어졌고, 결국 낮은 벼슬에 머물러 매우 드러났던 재주와 학문을 한두 가지도 다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 글을 보는 자 또한 남은 감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두 사람[나두동·정중원]에 대하여 벗인데도 경외하는 것은 이런 행동이 좋아서이다. 감히 좋지 못한31) 한마디 말이라도 빌리려고 하니 대략이나마 만생(晩生)32)이 산야에서 생활하고 도를 음미하는 경회(景懷)를 드러낸다.숭정 후 두 번째 계묘(癸卯 1723)년 10월 상순 여흥(驪興) 민창도(閔昌道)33) 言者, 身之文也. 行著於身, 故言炳以文. 揆元都卒, 亶在穀貽而正養, 可以卽辭而觀道. 迺今於錦城羅氏嘯浦錦巖錦峰伯仲叔遺墨合編也, 竊有所三復而歎仰者. 盖其胚胎前光, 生長食息, 不離於錦湖公篤守天經之典刑, 耳濡目梁, 不學而能. 其推衿於郭忘憂之偉節, 被其薦剡於穆陵問帥之日, 鏤膺於鄭困齋之正學, 或稱高明可畏, 或稱間世人物. 是以行餘之學, 根茂於宣志, 膏沃於屬辭. 暗中模索, 知其流出於德肚義腸中, 非詩人文士口氣, 忱哉! 呂侍講所謂人生內無賢父兄, 外無嚴師友, 能有成者鮮矣, 與夫鄒傳所謂誦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之益有味也. 若戴記所謂先祖有善而不知, 不明也, 知而不傳, 不仁也, 則有兢兢乎揀珠導玉之二裔子. 錦巖曾孫上舍斗冬, 廢擧讀書, 唯先事是任無鉅細, 必宣著後已末. 乃懼話言之寄赫蹄者, 日就陻沒, 居然使殘篇囓簡, 壽之棗而貴之楮, 要內從鄭寢郞重元弁其端. 鄭君素富家學, 以自出序列, 始卒以倜儻懇實貞確, 欽其言如其行. 以黨禍寇難, 慨其文之亡失殆盡. 以爲亡師訟寃, 兼伸群枉, 備陳己丑奸人乘機陷害狀. 益激昻, 其鼎峙三疏, 辭嚴意正, 世道所關, 神理可質, 噫噫! 豈但是哉. 浦翁拜先壟詩, 勵志禦戎策, 孝範忠模, 義貫神明, 巖翁誡子文, 峰翁祭兄文, 義方友悌, 道盡倫類, 亡論大鼎一臠吉光片羽. 卽蜀道詩之泣鬼神, 過江文之敵公卿, 祗藝焉耳. 吾人事業, 不在文章功名, 不必區區軒輊其間. 唯時不幸, 早墜禍網, 終沈下僚, 使競爽才學, 皆不克展其一二, 覽斯文者, 其亦有餘感也. 余於二君, 友而畏之, 則悅是擧也. 敢藉手不腆一言, 粗效晩生餐風味道之景懷焉.崇禎後再癸卯十月上浣驪興閔昌道. 말은이라는 …… 문채(文彩)이다. 《사기(史記)》 권39 진세가(晉世家)에 "말은 몸을 꾸미는 것입니다. 장차 몸을 숨기려 하면서 무엇 때문에 꾸미겠습니까. 만약 꾸민다면 이것은 현달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言, 身之文也. 身將隱, 焉用文之? 是求顯也.]"라는 개지추(介之推)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조의 …… 있었다. 한유(韓愈)의 〈청하군공방공묘갈명(淸河君公房公墓碣銘)〉에 "공은 선조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고 태어나 생장하는 동안 언제나 고전의 세계에 몸담고서 항상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왔기 때문에 굳이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가 있었다.〔公胚胎前光, 生長食息, 不離典訓之內, 目擩耳染, 不學以能.〕"라고 한 표현을 인용하였다. 곽망우(郭忘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망우당(忘憂堂)은 그의 호이다. 조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인간의 …… 학문 원문은 '행유지학(行餘之學)'으로, 《논어》 〈학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자제가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으로 나오면 공경하며, 행동은 삼가며 말은 믿음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자한 사람을 친하게 지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하였다.〔子曰:弟子入則孝,出則弟,謹而信,汎愛衆,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라고 하였다. 뜻을 …… 같았다. 한유(韓愈)의 답이익서(答李翊書)에 "그대가 장차 옛 작가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다면,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요, 권세와 이익의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 될 것이다. 우선 그 뿌리를 길러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기름을 부어서 광채가 나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니, 뿌리가 무성하게 퍼져야 열매가 여물고 기름을 부어 닦아야 광채가 나는 것이다.〔將蘄至於古之立言者 則無望其速成 無誘於勢利 養其根而竢其實 加其膏而希其光 根之茂者其實遂 膏之沃者其光曄〕"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여 시강(呂侍講) 송나라 때 시강을 지낸 여희철(呂希哲)을 가리킨다. 《예기(禮記)》 원문의 '대기(戴記)'는 《예기(禮記)》의 다른 이름이다. 중국 한나라 때 대성(戴聖)이 편찬한 《예(禮)》 49편의 《소대례(小戴禮)》가 바로 《예기》다. 《소대기(小戴記)》라고도 한다. 종이 원문의 '혁제(赫蹄)'는 혁제(赫蹏)와 같은 말로, 고대에는 글씨를 쓰는 데 썼던 폭이 좁은 비단을 지칭하였는데 후대에 와서는 작고 얇은 종이를 가리킨다. 의방(義方) 원문의 '의방(義方)'를 정도(正道)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나온다. 큰 솥에 …… 조각 털 원문의 '대정일련(大鼎一臠)'은 적은 양의 시문이 남았지만 소량의 시문으로 전체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이고, '길광편우(吉光片羽)'은 전설상의 신마(神馬)인 길광의 털 조각처럼 남겨진 시문이 우수하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촉도난(蜀道難)〉의 …… 울렸고 시가 매우 뛰어나 귀신이 보고 탄복하여 울 것이라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기이백(寄李白)〉이란 시에서 이백(李白)의 뛰어난 시재(詩才)를 찬탄하여 "붓이 떨어지면 풍우가 놀라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이 울었지.[落筆驚風雨 詩成泣鬼神]" 하였다. 강을 …… 만하였으니 백거이의 〈곡황보칠낭중식(哭皇甫七郞中湜)〉 "강을 건너며 쓴 글월 한수는 곧 공경대부의 글에 필적할만하네.〔涉江文一首, 便可敵公卿.〕"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우열 원문의 '헌지(軒輊)'는 고저(高低)ㆍ경중(輕重)ㆍ우열(優劣)을 의미한다.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수레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고 한다. 좋지 못한 원문의 '부전(不腆)'은 좋지 않다는 뜻으로, 자기의 글재주에 대한 겸사이다. 만생(晩生) 후배가 선배에 대한 자신의 겸사(謙辭)로 쓰는 말이다. 민창도(閔昌道) 1654~1725.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이다. 1678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 중시(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693년(숙종19)에 대사성(大司成)에까지 올랐다가 1722년(경종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장수(長壽)에 유배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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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유고 嘯浦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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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절구 五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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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1) 三稿合部序 【一】 금성 나씨(錦城羅氏)의 가숙(家塾)1)에서 새로 간행한 《소포유고(嘯浦遺稿)》에 금암(錦巖)2)과 금봉(錦峰)3)의 약간의 유고를 덧붙여 한 부로 합편하였으니, 금암의 증손 상사(上舍) 나두동(羅斗冬)4) 씨가 실로 수집한 것이다. 소포(嘯浦)5)의 현손 나만운(羅晩運)과 금봉의 증손 나두흥(羅斗興)이 그와 함께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도모하고는 소백산(小白山) 아래로 편지를 보내어 나6)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주(羅州)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금암은 내 선비(先妣)의 할아버지이니 내가 이에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장차 행여 글재주가 없다고 바로 사양하여 그만둘 수 있겠는가?생각건대 외고조 금호공(錦湖公)7)은 행실로 이름이 났고, 그의 장자 휘 덕명(德明)은 자가 극지(克之)로 금오랑(金吾郞) 벼슬에 나아갔다가 곧바로 그만두고 호수나 바다를 방랑하였으니 뛰어나고 걸출한 사람이었다. 이분이 소포이다. 차남의 휘는 덕준(德俊)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벼슬은 지현(知縣)이었다. 셋째의 휘는 덕윤(德潤)이고 자는 유지(有之) 또는 성지(誠之)이며 벼슬은 전중(殿中)이었다. 모두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8)의 제자가 되어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였다. 금암과 금봉은 그들의 호이다.소포는 시격이 매우 빼어나서 당세에 명성이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시는 단지 고율(古律)·절구(絶句)·근체(近體)·장편 총 50여 수와 부(賦) 2편, 서(書) 3편, 소(疏) 1편뿐이다. 금암과 금봉은 사문(斯文)을 강론하고 연마하여 저술한 글이 마땅히 또한 적지 않을 텐데, 금암은 소(疏) 1편, 서(書) 1편, 자식을 경계하는 글 2편뿐이고, 금봉은 소(疏) 1편, 서(書) 7편, 〈五賢祠揭虔文(오현사게건문)〉 1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9)의 시에 차운한 시 1수뿐이다.대개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형제가 멀리 떨어진 북쪽 지역으로 함께 유배되었고, 이윽고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 위급한 상황에서 삼천리를 떠돌아다녔으니, 6, 7년 동안 병란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평소에 지은 글이 망실되어 이미 모두 사라졌을 터이다. 소포는 만력(萬曆) 경술(庚戌 1610)년에 죽었고, 금암이 죽은 것은 소포보다 6년 전이었으며, 금봉이 가장 뒤에 죽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이다. 그의 시문은 겨우 백 분의 일만 남았으나 백여 년 뒤에라도 수습하였으니, 장차 후세에 완전히 민멸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아! 이는 참으로 감격스러우면서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대체로 고금 사람들의 문집이 세상에 간행되어 많은 것은 수십 권, 작은 것은 한두 권이나 더러는 흩어지고 남은 몇 편의 글귀에 불과하여 유사(遺事) 사이에 덧붙여 전해질 뿐이다. 그 시를 외우고 그 문을 읽어 그 사람을 살피고 그 시대를 논하고자 한다면 수십 권도 넉넉한 것이 아니지만, 또한 두어 편도 부족한 것은 아니다. 만일 세상에서 세 현인의 주옥 같은 책 한 권을 보배로 여긴다면 그 사람의 평생을 상상해 보는 데 또한 충분하니, 어찌 반드시 많은 것만 귀하다고 하겠는가? 한 점의 고기로 큰 솥의 고기 맛을 알 수 있다는 것10)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이 유고를 살펴보니 대체로 소포의 말은 기개가 있어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으며, 금암의 말은 간절하고 진실하면서 차례가 있고, 금봉의 말은 곧고 정확하면서 구차하지 않은데,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삼음은 똑같았으니 어찌 한 기운으로 태어나 한 가정에서 얻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곤재 정개청,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동강 김우옹,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11),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2),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13), 목승선(穆承宣) 등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여러 현인들이 그 사람됨을 덕망있다 여기고, 논변한 것은 의리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아! 기축옥사 때 조정 대신은 논할 것도 없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던14) 선비조차 꾸며낸 죄15)로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재앙의 그물에 걸린 나머지 금봉이 먼저 을미(乙未 1595)년에 선혈을 뿌려16) 수천 언(數千言)의 상소를 올려 죽은 스승17)을 위하여 원통함을 변론하고 아울러 그 당시 억울한 자들을 언급하여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 모함한 상황을 모두 서술하였다. 계속해서 소포의 병신(丙申 1596)년 상소는 하늘의 뜻을 돌리고 인심을 결속시키는 도리를 말하여 구천의 원통함을 풀어주도록 거듭 반복하였고, 이어 분발하여 오랑캐를 막자는 계책을 올렸다. 또 이어서 금암의 기해(己亥 1599)년 상소가 있었으니 말이 더욱 격렬하고 간절하였다. 이는 사제 간의 의리로 마땅히 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시비(是非)의 소재가 세도(世道)와 관계되는 일이니, 귀신에게 질정해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훗날 기축년의 사건에 대해 알고자 하는 자는 이 세 상소를 읽고 반드시 감개(感慨)하여 탄식할 것이다. 아울러 글을 써서 《소포금암금봉삼고합부(嘯浦錦巖錦峰三稿合部)》의 서문으로 삼는다.숭정(崇禎) 정축 후 85년 임인(壬寅 1722)년 4월 초하루 외후손 3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이 삼가 쓰다. 錦城羅氏家塾, 新刊嘯浦遺稿, 附以錦巖錦峰若干稿, 合成一部, 錦巖曾孫上舍斗冬氏實收輯之. 嘯浦玄孫晩運, 錦峰曾孫斗興, 與之同圖所以壽其傳者, 走書小白山下, 屬重元序之. 羅吾自出也, 錦巖吾先妣之王父也, 重元於此, 烏可不爲之感. 且幸直讓以不文而止乎. 粤惟外高祖錦湖公, 以行誼聞, 其長子, 諱德明, 字曰克之, 筮任金吾郞, 旋已之, 放迹湖海, 卓犖傑魁人也. 是爲嘯浦. 第二諱德俊, 字曰大之, 官知縣. 第三諱德潤, 字曰有之, 亦曰誠之, 官殿中. 俱爲困齋鄭氏弟子, 篤學力行, 錦巖錦峰其號也. 嘯浦詩格超逈, 有聲當世, 今其遺什, 只有古律絶句近體長作, 摠五十餘首, 及賦二書三疏一而已. 錦巖錦峰, 講磨斯文, 所著於文字間者, 宜亦不少, 而錦巖疏一書一戒子文二而已, 錦峰疏一書七五賢祠揭虔文一次東岡韻語一而已. 蓋當己丑禍, 兄弟竝投極北絶域, 已又有龍蛇寇亂, 三千里流離顚沛之際, 六七年兵革搶攘之中, 平日文字亡失, 固已盡矣. 嘯浦以萬曆庚戌歿, 錦巖之歿先六年, 錦峰最後歿, 距今百有二年. 其詩文之僅存十一於千百者, 得追拾於百餘年之後, 將不至全泯于來世. 嗚呼! 此誠可感, 亦可幸也. 凡古今人文集行于世, 多者累數十卷, 小者一二卷, 或不過零章瑣篇, 附傳遺事間焉耳矣. 至於頌其詩讀其文, 以觀其人論其世, 則不以累十卷而有餘, 亦不以數篇而不足. 如世所珍三賢珠玉一卷, 其人平生, 亦足想見, 奚必多之爲貴哉. 一臠可以識大鼎之味, 信乎其有是也. 試以斯稿, 槪之嘯浦之言, 倜儻自奇, 錦巖之言, 懇實有倫, 錦峰之言, 貞確不苟, 其本之以孝弟則一也, 庸非共氣而生得乎家庭者爲然歟. 且觀書翰所與若梧里困齋鶴峯東岡久庵漢陰愚伏茶山睦承宣, 諸賢德其人, 而所論卞無非出於義理, 是豈可以等閑視也. 噫嘻! 己丑之獄, 亡論朝紳, 卽林下藏修之士, 竝被羅織而死. 當禍網之餘, 先有錦峰乙未疏瀝血數千言, 爲亡師訟寃, 竝及一時群枉, 備盡奸人乘機陷害狀. 繼而有嘯浦丙申疏, 言回天意結人心之道, 申申於雪寃泉壤, 仍獻勵志禦戎策. 又繼而有錦巖己亥疏, 言益激切. 此非特師生之義, 所宜爲也, 是非所在關係世道, 可以質諸鬼神而無疑. 後之欲知己丑事者, 於此三疏, 其必有感慨而喟然者矣. 竝書之以爲三稿合部序.崇禎丁丑后八十五年壬寅孟夏初吉, 外後屬三世孫八溪鄭重元謹稿. 가숙(家塾) 글방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가(家)에는 숙(塾)을 두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술(術)에는 서(序)를 두고, 국(國)에는 학(學)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黨有庠、術有序、國有學.〕"라고 하였다. 금암(錦巖) 나덕준(羅德峻. 1553~1604)의 호를 말한다. 자는 대지(大之), 호는 금암이다. 금봉(錦峰) 나덕윤(羅德潤, 1557~1621)의 호를 말한다. 자는 유지(有之)·성지(誠之), 호는 금봉이다. 나두동(羅斗冬) 1658~1728. 자는 간이(幹而), 호는 약헌(藥軒)이다. 부친은 중직대부(中直大夫)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나진(羅?)이다. 저서로 《약헌유고(藥軒遺稿)》, 《의예집록(疑禮輯錄)》, 《사예요람(四禮要覽)》, 《동사(東史)》 등이 있다. 소포(嘯浦) 나덕명(羅德明, 1551~1610)의 호를 말한다. 자는 극지(克之), 호는 소포·귀암(龜菴)이다. 나 정중원(鄭重元, 1659~1726)을 말한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선장(善長), 호는 천천옹(喘喘翁)으로, 1678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정희량(鄭希亮)의 아버지이다. 금호공(錦湖公) 나사침(羅士忱, 1525~1596)을 말한다. 자는 중부(仲孚), 호는 금호이다. 155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과 이성 현감(尼城縣監)을 지냈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이며, 나주 출신이다. 예학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김우옹(金宇顒) 1540~160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이고,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한 점의 …… 것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김취문(金就文) 1509~1570.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에 《구암집》이 있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 《우복집》,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朱文酌海)》가 있다. 목대흠(睦大欽) 1575~1638.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湯卿, 호는 다산(茶山)ㆍ죽오(竹塢)이다. 160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 참의ㆍ강릉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다산집》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던 원문의 '장수(藏修)'는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로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에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하였다.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꾸며낸 죄 원문의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선혈을 뿌려 원문의 '역혈(瀝血)'은 상소를 올려 간곡하게 호소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시 〈귀팽성(歸彭城)〉에 "간을 파내어 종이를 만들고, 선혈을 뿌려서 글을 쓰네.[刳肝以爲紙 瀝血以書辭]"라고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죽은 스승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유배 중에 죽은 정개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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