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遇順風到長山島奉呈鄭下叔 舟舡到處不相違濟海雲帆疾若飛竣事東歸知幾日長山島上祝天妃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춘첩 응제 春帖應製 섣달 궐에 내린 눈 녹아내리고봄날 구름 비단 창에 밀려오네멍하니 새로 찾아온 제비를 보니오고 가며 쌍쌍이 저저귀네 臘雪乾瑤陛春雲撲繡窓佇看新鷰到來去語雙雙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우뚝 솟은 바위 立巖 우뚝 솟아 위태로워 넘어질 듯한 형세꼿꼿하여 기울어진 그림자 없네천지신명이 지켜주는 바이니들판 강물에 깎이지 않았네 孤危勢欲仆正直影無斜神明之所護野水莫相磨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강에서 여름에 송지제와 이별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次江夏別宋之悌韻 고향가는 길은 어찌 이리도 먼가변경에 소식 끊겼네-이하 결락- 鄕國路何遠關塞信不通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삼이 왔으나 문하에 들이지 않다 參來不納門 높고도 높은 성인의 문하는 활연하게 열려 있어 위의(威儀)가 삼백이요, 예의(禮儀)가 삼천이네.184) 안회(顔回)와 자공(子貢)은 강론하는 자리 함께하였지만, 어찌하여 증삼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어찌 실천이 부족하여서 그러했겠으며 어찌 독실함이 모자라서 그러했겠는가? 군자의 가르침은 생각해보면 일천 층에 한 층을 더하는 것이라네.효자의 지극한 마음은 오직 부모의 마음을 받드는 것인데 만일 아이가 죄를 지어 매질을 당하면 피 흘리는 것에 대해 감히 미워하고 원망하기도 하네. 만약 부모의 분노가 의(義)에 어긋나 심하게 훼손하거나 손상하면 어찌 이 몸을 구휼 하겠는가? 자애롭지 못하다는 말이 있을 수 있기에 큰 몽둥이를 들면 마땅히 피하고185) 부자간의 지극한 은정을 온전히 해야 하네. 분한 기운이 염천(炎天)186)보다 심하면 자애로운 하늘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자식의 도리로 잘 처신하며 마음이 맑고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네. 도망하지 않고 팽형(烹刑)을 기다리는 것은 비록 공손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대효(大孝)라고 할 수는 없네. 순임금에게 우물을 파게 한 것을187) 우러러보고 성현이 변화에 처신하는 것을188) 근원으로 삼으며 물고기와 곰 발바닥189)의 취사를 분별하니 성인 문하의 고제로서 어찌 이런 이치를 살피지 않았겠는가? 양지(養志)190)의 지극한 뜻을 미루어 단지 뜻을 따르는 것으로 의(義)를 삼았으니, 마땅히 성인이 질책하시어 매우 힘쓰라는 뜻을 보인 것이네. 그러나 자식으로 부모를 섬기면서 나아가는 바에 깊고 얕음이 있으니 큰 몽둥이를 피하라는 성인의 가르침에 증자처럼 하면 괜찮으나 보통 사람이 실수를 한다면 용서하기 어려운 불순(不順)의 죄일 터이니 어찌 도리어 그 정성을 살피지 않겠는가? 아! 후세의 자식이여. 聖門高高, 洞開豁然, 威儀三百, 禮儀三千. 回也賜也之函席, 胡爲乎參來斯不受. 豈踐履之不足,寧篤實之或少. 想君子之敎訓, 又一層於千層. 伊孝子之至情, 惟親意焉是承, 苟兒罪之當笞, 敢疾怨於流血. 倘親怒之乖義, 致毁傷之斯酷, 豈此身之足恤, 恐不慈之有言, 故大杖則宜避, 全父子之至恩. 當憤氣劇於炎天, 而慈天不暇容, 思在子道而善處, 竢淸凉之有時. 無所逃而待烹, 雖其恭之可, 尙曰大孝則未也. 仰虞舜之浚井, 原聖賢之處變, 判魚熊之取捨, 以聖門之高弟, 胡不審夫此理. 推養志之至意, 只順旨以爲義, 宜聖人之有責, 示十分之加勉. 然人子之事親, 有所造之深淺, 避大杖之聖訓, 若曾子則可也, 在凡人而差失, 罪不順之難赦, 盍反察於其誠, 嗟! 後來之人子. 위의(威儀)가 …… 삼천이네. 예의(禮儀)는 기본적인 대강령(大綱領)인 경례(經禮)를 말하고, 위의(威儀)는 구체적인 소절목(小節目)인 곡례(曲禮)를 말한다.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3백 가지요,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는 구절이 있고,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위대하다, 성인의 도여. 물이 넘쳐흐르듯 끝없이 만물을 발육시켜 그 높은 도의 경지가 하늘에까지 닿았도다.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3백 가지요, 위의가 3천 가지로다.〔大哉,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는 구절이 있다. 큰 몽둥이를……피하고 일찍이 증삼이 부친 증점과 함께 오이밭을 김매던 도중에 실수로 오이 뿌리를 끊자 증점이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증자가 땅에 쓰러져 실신했다가 깨어났는데,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순(舜)과 고수(瞽瞍)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작은 회초리를 들면 화가 풀릴 때까지 다 맞고, 큰 몽둥이를 들면 얼른 피해 달아나야 한다.〔小棰則待過, 大杖則逃走.〕"라고 증자를 타이른 일화가 전한다. 《孔子家語 六本》 《후한서(後漢書)》 권52 〈최인열전(崔駰列傳)〉에 "순 임금이 부친을 모실 적에 작은 회초리로 때릴 때에는 맞고, 몽둥이로 때릴 때에는 도망을 갔는데, 도망을 간 그것이 불효는 아니었다.〔舜之事父, 小杖則受, 大杖則走, 非不孝也.〕"라는 구절이 있다. 염천(炎天) 원문에는 '염천(炎天)' 아래에 "아마도 화(火) 글자의 오류인 듯하다.〔恐火字之誤〕"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순(舜)임금에게 …… 한 것을 《맹자》 〈만장(萬章)〉 2장에 "순(舜)의 부모가 순으로 하여금 곳집을 손질하게 하고서 사다리를 치운 다음, 고수(瞽瞍)가 창고에 불을 질렀으며,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하고는 순이 나오려 하자 따라서 흙을 덮었다.〔父母使舜, 完廩捐階, 瞽瞍焚廩, 使浚井, 出, 從而揜之.〕"라고 하였다. 성현이 …… 것을 《조선왕조실록》 〈光海朝日記[一]〉에 "아! 순임금은 옛 성인인데, 변고에 대처하는 방도에 있어〔嗟嗟! 大舜古之聖人, 處變之道.〕"라는 말이 나온다. 물고기와 곰 발바닥 두 가지를 다 원하지만 한꺼번에 할 수 없을 경우는 의(義)에 맞는 쪽을 택하겠다는 뜻이다. 원문의 '어웅(魚熊)'은 물고기와 곰 발바닥 요리를 가리킨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물고기도 내가 먹고 싶은 바이고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은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을 경우 나는 물고기를 놓아두고 곰 발바닥을 먹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얻을 수 없을 경우에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하였다. 《孟子 告子上》 양지(養志) 어버이의 뜻을 받드는 효성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가 부친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의 일과 증자의 아들이 증자를 봉양할 때의 일을 비교해 거론하면서, 효행은 비슷하지만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고[養志], 증자의 아들은 부모의 몸만 봉양한 것[養口體]이라며, 진정한 효도는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 書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병조판서 홍여순191)에게 보내는 편지 【1599년 3월】 與洪兵判書 【己亥三月】 예전에 변방에서 한번 뵙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었는데 갑작스러운 거취 때문에 태산북두192)의 회포를 아직 풀지 못하였으니 남과 북에서 근래에 삼가 만나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하였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적을 피하여 떠돌아다니다가 한강 가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병판께서 성에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댁으로 찾아뵙고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보이고 싶었으나 제가 상중이라 감히 최질(衰絰)193)의 복장을 보여 놀라게 할 수 없어 객지에서 문을 걸어 닫고 있으며 다만 그리는 마음만 더했습니다. 급기야 적이 물러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니 산천이 아득히 멀고 현회(顯晦)194)의 자취가 달라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으니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저는 지난달 초 담제(禫祭)195)를 마치고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선영 아래에 초가삼간을 짓고 삶을 마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남쪽 지방이 한 번의 병란을 겪고 난 뒤에 물력(物力)이 모두 쓸려나갔으니 천자의 조정196)에서 오랫동안 병사를 머물게 하여 우리 호남과 영남을 보호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황제의 은혜도 끝이 있을 것이니 비록 오랫동안 주둔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천자의 병사를 먹일 군량이 어찌 남아 있겠습니까? 8년간 이어진 병란으로 살아남은 백성은 뼈와 살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결단코 지탱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한 사람이 외진 지역에 살고 있는데 해마다 강도의 침입을 받아 가장과 자제들이 수수방관하며 오직 이웃이 와서 구원해주기를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 이웃의 정성은 한계가 있으니 도적이 쳐들어오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집안을 망하게 한 뒤에야 그만둘 것건만, 부자와 형제가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것은 천명이고 운수이다."라고 말하며 천명과 운수로 돌리고 담장을 수리하거나 활과 칼을 준비하여 견고하게 스스로 방어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는 격입니다.지금 우리나라의 형세가 정녕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력은 천자의 조정에서 오랫동안 빌릴 수 없고 흉악한 도적의 근심은 해마다 없어지지 않을 테니 호남과 영남에 얼마 남지 않은 백성으로 장차 다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자리를 방어하는 장구한 계책은 백성을 보호하는 하나의 일에 불과할 뿐이나 백성을 보호하는 일은 비록 늙은 선비의 진부한 말일지라도 진부(陳腐)한 말속에 스스로 활법(活法)이 있을 것입니다.생각건대 합하(閤下)께서도 이미 헤아리고 계실 텐데 제가 어찌 감히 번잡한 혀로 지껄이겠습니까? 다만 하늘 끝 아득히 먼 곳에서 숨어 지내며 지금의 일을 눈으로 보고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제가 때때로 집정자(執政者)를 만나면 힘써 간쟁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집정자들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지난해에도 이와 같았고 올해도 이와 같다면 틀림없이 국가의 명맥이 날로 무너지게 될 것이니, 식견이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길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통제사(統制使)와 감·병·수사(監兵水使)가 여러 아문(衙門)을 다스리고 각각 둔전(屯田)197)을 설치하는데 더러는 여염(閭閻)의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유사(有司)로 삼기도 하고, 더러는 군관 중에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을 차관(差官)으로 삼기도 합니다. 별처럼 많은 주현(州縣)에서 민전(民田) 열 가운데 둔전이 다섯을 차지하는데 통제사의 둔전이요 병·수사(兵水使)의 둔전이라고 합니다. 둔전이라 이름을 붙이면 요역(徭役)이 없고 연호(煙戶)198)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둔전으로 앞다투어 달려가 바로 하나의 아문(衙門)을 이루면 이른바 차관과 유사의 무리가 흉악한 속셈으로 위복(威福)199)을 행사하여 밭을 갈고 파종을 할 때면 마을의 백성을 가노(家奴)처럼 부립니다. 급기야 가을 추수 때가 되면 관아에 납부하는 것은 겨우 10분의 3이나 4이고, 모두 자신을 살찌우는 자본으로 삼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심한 자는 사전(私田)을 가리켜서 둔전이라 하고, 공물과 부세를 모두 폐하고 수확한 허다한 곡식으로 편안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오직 이와 같은 까닭으로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을 바치는 백성이 몹시 드물어 수령은 상사(上司)의 위엄에 겁하고, 둔전에 거주하는 백성은 둔전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으며 유사의 권위가 도리어 수령보다 우위에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는 것이니, 길게 탄식할 일이라 할만합니다.지금을 위한 계책은 마땅히 여러 아문의 둔전을 급히 폐지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백성을 관장하여 부역을 균등하게 하며, 백성에게 권면하여 힘껏 농사짓기를 힘쓰게 하여 묵은 땅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백성에게 반드시 남은 곡식이 있을 것입니다. 백성에게 남은 곡식이 있으면 군국(軍國)의 수요에 어떻게 여유가 없겠습니까? 이렇게 지키고 방어한다면 백성은 병란에도 고달파하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출정하여 싸운다면 백성은 날카로운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옛날 사람이 손과 발을 가지와 잎에 비유한 것이 과연 이와 같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오랑캐를 방어할 장구한 계책이 바로 이것입니다.삼가 바라옵건대 합하께서는 특별히 이 뜻을 비변사(備邊司) 여러 회의 중에 발의하시고, 속히 사자를 보내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둔전을 폐하게 하시어 백성으로 하여금 각자의 밭에서 밭 갈게 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국가의 근본을 세워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둔전을 반드시 두고자 한다면 조충국(趙充國)의 고사200)에 의거하여 관내의 군졸들이 묵은 땅을 얻어 경작하고 파종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제가 또 시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둔전의 여러 차관과 유사를 폐지하고 가을 추수를 기다렸다가 밭 1결당 곡식 1섬을 납부하도록 하여 둔전의 곡식을 채우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는 둔전에 속하지 않는 백성이 계속해서 지나친 요역에 고달파하고 차관과 유사의 침해에 시달리므로 이런 계책이 있는 것입니다.제가 멀리 초야에 있으나 칠실(漆室)의 근심201)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민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갖추어서 근엄한 위엄을 더럽혔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합하의 뜻에 어떠하신지요? 혹시라도 사람 때문에 그 말까지 폐하지 않아 주신다면202) 국가에 큰 다행이요 백성에게도 큰 다행이겠습니다. 前於塞上, 始副一識之願, 只緣去留忽迫, 未討山斗之懷, 南北年來, 敬戴常切. 去年夏, 某避賊流轉, 僑寓於漢濱, 傳聞令駕在城, 準擬尋拜門屛, 以酬景慕, 而生持孤時也, 不敢以衰絰冒駭令視, 杜門旅榻, 徒增傾傃. 及其賊退還鄕, 非但川原浩渺, 顯晦殊迹, 披承無路, 奈何奈何? 生前月初, 過了禫事, 寄身無地, 於先墓下, 構草三間, 以爲終焉之計矣. 第念南州一經兵火, 物力如掃, 未知天朝長留戍卒, 以護我湖嶺否乎. 皇恩有終, 雖使屯戍長年, 天兵糧餤, 何以贏了? 兵連八載, 孑遺生靈, 膏骨殆盡, 其勢決不可支也. 比如有一人, 居在僻地, 歲受强盜之侵, 其家長子弟, 束手無措, 唯賴隣人之來救. 噫! 隣人之誠有限, 盜來不止, 則必至於亡家後已. 父子兄弟, 相對涕泣曰: "此天也數也." 歸之於天也數也, 而曾不爲修垣墻備弓劍, 以固自禦之策. 今我國家之勢, 正類是, 焉何者? 兵力不可長借於天朝, 而凶寇之患, 無歲無之, 則以兩南些少餘民, 將復如何? 防戍長策, 無過於保民一事而已, 保民一事, 雖曰老儒陳談, 陳談之中, 自有活法. 想閤下亦已斤兩有的, 生何敢喋喋煩舌? 但屛伏天涯, 目見時事, 病民一弊, 不可不革, 而生時遇執政, 力爭不已, 執政暗於自智, 前年如是, 今年又將如是, 必使國脈日至傷敗, 其在有識, 孰不長吁? 唯統制監兵水使, 調度諸衙門, 各設屯田, 或以閭閻中碌碌者爲有司, 或以軍官之貪虐者爲差官. 星布州縣, 民田之十, 屯田居五, 曰統制使, 曰兵水屯田. 名之曰屯田, 則無徭役無煙戶. 故民爭趨之屯田之所, 便成一衙門, 所謂差官有司之輩, 行胸臆作威福, 當耕種時, 役村氓如家奴, 及其秋來收穀也. 納于公, 僅是十分之三四, 皆以爲肥己之資, 不特此也. 甚者指私田爲屯田, 專廢貢賦, 許多收穀, 晏然享之. 惟其如是, 故貢賦徭役之民甚尠, 而守令劫於上司之威, 屯田處居民, 則不敢下手屯田, 有司之權, 反出於守令之右, 此所謂首顧居下, 可爲長太息處也. 爲今之計, 當急罷諸衙門屯田, 使守令掌其民均賦役, 惟務於勸民力農, 俾無陳土, 則民必有餘穀矣. 民有餘穀, 則其爲軍國之需, 豈不有餘裕哉? 以之爲守禦, 民不苦其兵革, 以之爲征戰, 民不畏其鋒刃, 古人手足枝葉之喩, 果如斯歟. 向所謂防戎長策此也. 伏願閤下, 特以此意, 發議於備邊司諸會之中, 速馳星關, 罷屯田於未農前, 使斯民各田其田, 使守令均其賦役, 以植國本, 千萬幸甚. 屯田如不得已, 而必欲爲之, 則依趙充國古事, 以管下軍卒得陳地耕種可也. 生又聞村巷之言, 願罷屯田諸差官有司, 待秋成, 田一結納穀一石, 以充屯穀云云. 此不屬屯田之民, 苦其徭役之偏. 又困於差官有司之侵, 而有是計也. 生遠在山野, 不能無漆室之憂, 敢具民間疾苦之狀, 以瀆嚴威, 不審閤下之意, 以爲如何? 倘無以人而廢其言, 則國家幸甚, 生民幸甚. 홍여순(洪汝諄) 1547~1609. 자는 사신(士信),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임진왜란 중에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와 밀착하여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을 몰아내고 북인 세력이 정권을 잡는 데 기여하였다. 난후(亂後)에는 병조 판서로서 무반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대북을 영도하면서 남이공(南以恭) 등의 소북과 대립하다가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 복관되어 유영경(柳永慶)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태산북두 원문의 '산두(山斗)'는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에서 그에 대한 찬(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 그의 말이 크게 행해져,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최질(衰絰) 최는 4치, 6치짜리 베 헝겊을 왼쪽 가슴에 붙인 것이며, 질은 머리에 두른 띠〔首帶〕와 허리에 두른 띠〔腰帶〕로 상주에 있는 것을 말한다.. 현회(顯晦) 드러나거나 가려지는 것으로 세상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담제(禫祭) 3년의 상기(喪期)가 끝난 뒤 상주가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하는 제례 의식이다. 부모상(父母喪)과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손자가 지내는 조부상(祖父喪) 및 부상(夫喪)과 처상(妻喪)에만 행한다. 일반적으로 부모상의 경우 대상재(大祥齋)를 치른 뒤 3개월째, 곧 초상을 치른 후 27개월이 되는 달의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을 택하여 지내고, 남편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지내는 담제는 상후 15개월째 지낸다. 천자의 조정 원문의 '천조(天朝)'는 천자의 조정을 제후국에서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명나라를 가리킨다.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하는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가는 경우가 있다. 연호(煙戶) 연역(煙役)이라고도 하는데, 민가(民家)의 매 호(戶)마다에 부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을 가리킨다. 위복(威福) 벌(罰)과 상(賞)을 뜻한다. 원래는 군주만이 상벌을 행할 수 있는데, 후대에는 집권자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내치기도 하고 벼슬을 주기도 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 〈홍범(洪範)〉에 "오직 군주만이 복을 짓고 오직 군주만이 위엄을 지을 수 있다.〔惟闢作福 惟闢作威〕" 하였다. 조충국(趙充國)의 고사 조충국(趙充國)은 자가 옹손(翁孫)으로 용기와 지략이 있었고 사이(四夷)의 일에 능통하여 한 선제(漢宣帝) 때에 장군에 올랐다. 선제가 흉노의 정황과 얼마의 군사면 방비할 수 있는지 물으니, 조충국은 "병사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금성에 가서 방략(方略)을 세워 올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서, 금성에 가서 살핀 후에 기병(騎兵)을 없애고 요해처에 보병 수만을 주둔시키자는 취지로 둔전(屯田)의 열두 가지 편리한 점을 아뢰었다. 매번 상주문이 올라오면 선제는 공경들에게 의논케 하였는데, 승상 위상(魏相)이 그 계책을 시행할 만하다고 하니 선제가 따랐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칠실(漆室)의 근심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칠실이라는 읍(邑)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임금은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가 할 근심이니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卷3 漆室女》 이는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국사(國事)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겸사로 쓰인다. 사람 …… 않는다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말만으로 사람을 높이지 않고, 사람 때문에 그 말까지 폐하지 않는다.[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좌의정 오리 이원익203)에게 올리는 편지 【1600년 봄】 上左相李梧里元翼書 【庚子春】 예전에 여관에서 비로소 한번 뵙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었는데 상국(相國)께서 포의(布衣, 평민)라고 경시하지 않고 따뜻한 말씀을 해주시면서 남다르게 대우하시니 저는 마음에 감격하여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대감의 뜻을 살펴보니 도탄에 빠진 백성을 지성으로 구제하고, 상국께서 남쪽 지방을 왕명으로 몸소 살펴 백성의 병폐를 힘써 제거하며 국가의 근본을 굳건하게 한 것은 상국의 어짊입니다. 문교(文敎)를 붙들어 세우고 풍화(風化)를 떨쳐 일으킨 것은 상국의 지혜입니다. 제가 비록 무식하나 감히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도 사람들 축에 끼어 있기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산처럼 우러러보는 마음이 이에 이르러 더욱 간절합니다.오직 백성 지키는 한 가지 일만은 상국과 여러 집정자가 잘 헤아리고 생각하시어 이미 세워두신 계획이 있을 테니, 우활(迂闊)한 서생이 어찌 그 계획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비 중에 어진 자의 말을 듣고 싶으시다면 저 또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삼가 생각건대 남쪽 선비 중에 아무개가 효자이고 아무개가 현자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니, 상국께서도 일찍이 들으신 것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유명한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모두 어질지 않고, 유명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모두 어리석지 않다고 여깁니다.삼가 생각건대 상국께서는 덕이 크고 지혜가 높으시며, 현자(賢者)를 숭상하고 유능한 자를 천거하시니 한강 이남에서도 이미 감화되어 도의가 행해지고 있거늘204) 누가 청황(靑黃)205)의 선비를 대인군자에게 속여 추천하겠습니까? 혹여 있을지라도 밝은 거울 아래에서는 곱고 추함이 저절로 구별됩니다. 저처럼 무상(無狀)한 사람이 외람되이 대감의 문하를 바라고 만약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말한다면 의리상 마땅히 문하에서 거절을 당할 따름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남들이 알지 못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윽한 난초206)가 골짜기에 있는데 맑은 바람이 불지 않으니 그윽한 향기를 누가 맡겠습니까?저의 친구 이유경(李有慶)은 어려서부터 지조가 있었고, 장성해서는 학문과 품행에 힘썼습니다. 저와 10년을 함께 공부하면서 속마음 털어놓기를 자기 일처럼 하였으니 과연 충효(忠孝)하고 독실한 선비였습니다. 교유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부모님 섬기는 것에만 정성을 다하였는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겨를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었거늘 미관말직도 받지 못하였으니 또한 성스러운 시대에 부끄러운 일입니다.나덕현(羅德顯)207)은 제 동생입니다. 마음이 한결같게 밝고 깨끗하여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문을 닫고 서책을 읽으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을 형으로서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성취한 것이 빼어납니다. 사람들의 이목에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기축년(1589)년 겨울에 양천경(梁千頃) 등이 무리를 모아 상소를 올려 어진 재상과 선비들을 모함할 때 나덕현은 그 아우 나덕헌(羅德憲)208)과 그 모임에 쳐들어가 큰소리로 배척하니 양천경 등이 상소 내용 가운데 함께 넣어 나추(拿推)209)를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아마도 '청(請)'자가 빠진듯하다】 그때 위관(委官)210)이 양천경의 사주를 듣고 상소를 저지하고 도모함을 헤아려 법률에 따라 북관(北關)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영사(令使) 김성일(金誠一)211)은 항상 그의 의열(義烈)에 감복하고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상국께서도 이 일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생각건대 상국께서 반드시 독실한 선비에 대해 듣고자 하시기 때문에 저는 옛사람들이 거자(擧子)212)를 위해 추천하던 뜻을 본받아 문득 외람되이 말씀드립니다.이 두 사람은 실로 이름은 없지만 행실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상국께서 이끌어 이르게 하여 더욱 자세히 살펴보신다면 틀림없이 칭찬하고 권장하는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밝은 구슬이 모래에 더럽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상국의 상자에 거두어지기를 바라니, 이 또한 덕을 우러러보는 사사로운 마음인데 상국의 뜻이 어떠하신지는 모르겠습니다. 前於旅館, 始遂一識之願, 而蒙相國不以布衣鄙薄, 賜語溫款, 見遇殊常, 生感激于心, 不知所報. 竊瞯台意, 塗炭生靈, 血誠拯濟, 神相南州, 王命體察, 務去民瘼, 以固邦本, 相國之仁也, 扶植文敎, 振起風化, 相國之智也. 生雖無識, 敢不欽聳. 且以生比數於人, 而有欲聞者, 山仰之懷, 到此益重. 惟保民一事, 相國與諸執政, 商確斤兩, 已有成算. 迂闊書生, 何敢容籌. 如欲聞士之仁者, 則生亦有言. 第念南士之某也孝, 某也賢, 衆人之所共知, 相國之所嘗聞者, 不一其數, 而愚則以爲有名者未必皆賢, 無名者未必皆愚. 伏以相國德鉅而智高, 尙賢而與能, 漢江以南, 旣化而行矣, 誰得以靑黃之士, 誣薦於大人君子耶. 雖或有之, 明鏡之下, 姸醜自別. 如生無狀, 幸叨台門, 若徇私以告之, 則義當見絶於門下耳. 生之所欲薦者, 人不知而實有餘者也. 幽蘭在谷, 淸風不吹, 暗香誰聞. 生之友李有慶, 幼有志操, 長懋學行. 生十年同榻, 肝膽如己, 果忠孝篤實士也. 不喜交遊, 唯事親盡誠, 定省之暇, 手不釋書, 經史子集, 無不通曉, 年踰五十, 不霑一命, 亦聖代之所恥也. 羅德顯, 生之弟也. 一心皎潔, 嫉惡如讐, 杜門讀書, 不求人知, 家間孝友之行, 兄也未敢言, 而就卓卓. 在人耳目者言之, 則己丑冬, 梁千頃輩, 聚黨封疏, 謀陷賢相與士流時, 德顯與其弟德憲, 撞入其會, 大言排之, 千頃等, 幷入疏中, 至【恐脫請字】拿推. 其時委官聽千頃之嗾, 照謀沮封疏, 律竄配北關. 金令使誠一氏, 常服其義烈, 稱道不已, 相國亦嘗聞乎? 惟相國必欲聞篤實之士, 故生體古人擧子之義, 輒冒言之. 玆二人實無名而有行者也. 倘相國引而致之, 密加識察, 則必有嘉獎之心矣. 生誠不忍明珠穢沙, 欲收入於相國之篋櫝, 是亦仰德之私衷也. 不審相國之意, 以爲如何. 이원익 1547∼163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04년(선조37)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삼가 …… 있거늘 한유(韓愈)의 〈상병부이시랑서(上兵部李侍郞書)〉 "삼가 생각건대 합하께서는 내심(內心)이 인자하고 외행(外行)이 의로우시며, 행실이 고상하고 덕이 크시며, 현자를 높이고 유능한 자를 薦擧하시며, 곤궁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억울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니, 강남 서도(西道)의 백성들이 이미 감화되어 도의(道義)가 행합니다.〔伏以閤下內仁而外義, 行高而德鉅, 尙賢而與能, 哀窮而悼屈, 自江而西, 旣化而行矣.〕"의 말을 인용하였다. 청황(靑黃) 화려한 관직 생활을 뜻한다. 《장자》 천지(天地)에 "백 년 된 나무를 베어서 제기(祭器)를 만들고 그 위에 청황(靑黃)의 문채로 장식한 뒤에는 나머지 나무토막들을 구렁 속에 내버리는데,[其斷在溝中] 제기와 나무토막 사이에 아름답고 추하게 된 차이는 있다 하겠지만, 나무의 본성을 잃은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하겠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청황은 벼슬을 가리키고 구목(溝木), 즉 구렁 속의 나무토막은 벼슬을 잃고서 실의에 빠진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윽한 난초 원문의 '유란(幽蘭)'은 빈 골짝에 피어난 난초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지만 홀로 향기를 내뿜는 초야의 군자(君子)를 상징한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집집마다 쑥을 허리춤에 가득 차고 다니면서 유란은 찰 것이 못 된다고 한다네.[戶服艾以盈腰兮, 謂幽蘭其不可佩.]"라고 하였다. 나덕현(羅德顯) 1565∼1625. 자는 회지(晦之), 호는 반계(潘溪)이다. 유희춘, 이이, 박순, 청개청 등에게 배웠다. 나덕헌(羅德憲) 1573∼1640.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원종(振武原從)의 훈공을 받았다. 나추(拿推) 범죄 혐의자를 의금부(義禁府)의 옥에 가두고 의금부의 당상관(堂上官) 등이 회좌(會座)하여 신문하는 것을 말한다. 위관(委官)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 의정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장으로 당시 정철(鄭澈)이 담당하였다. 김성일(金誠一) 1538∼159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경상 우도 관찰사, 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학봉집(鶴峯集)》 등이 있다. 거자(擧子) 과거(科擧) 때에 추천을 받아 응시하는 선비를 거자(擧子)라 칭한다. 《구당서(舊唐書)》 고적전(高適傳)에, "고적이 유도과(有道科)에 합격하였는데, 그 당시 정승 이임보(李林甫)가 문아(文雅)가 경박하여 오직 거자(擧子)로만 대우했다."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 참봉에게 보내는 편지 與鄭參奉書 지난번 산사(山寺)에서 이미 술에 취한 데다 또한 덕으로 배가 불렀습니다.213) 이따금 글 읽는 것보다 나은 말을 보내주시어 자못 일깨워주는 점이 있으니 더욱 마음에 몹시 감격하여 감사함을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학(聖學)을 논하신 한 단락에 대하여서는 삼가 제가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성인은 하나이나 태어나면서 알기도 하고 배워서 알기도 합니다.214)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요(堯), 순(舜), 주(周), 공(孔)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우(禹), 탕(湯)입니다. "능히 생각하고[克念] 생각이 없다[罔念]215)"라고 말한 것은 모두 스스로 배워서 아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만약에 태어나면서 안다면 어찌 이러한 공부의 과정이 있겠습니까? 시청언동(視聽言動)은 혼연(渾然)한 천리(天理)이니 어떻게 감히 사물(四勿)216)을 그 사이에 두겠습니까? 전자의 성인들 또한 견지(堅持)하는 곳이 있다고 하셨는데, 경을 위주로 하는 공부를 섭렵해야 할 듯합니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다른 쪽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여217) 사물의 이치가 극진한 곳에 이르게 합니다. 무엇이 천리이며, 무엇이 인욕(人欲)이겠습니까? 택선고집(擇善固執)218)과 고수기궁(固守其窮)219)이 성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태어나면서 아는 성인은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사람이니220) 온화한 천리가 마음에 가득 채워져 발하는 것이 모두 절도에 맞고 경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는 효도해야 한다고 하며, 임금에게는 충성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비유하자면 천지의 성(誠)이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 것은 사계절의 춥고 더움이 자연에서 들으면 털끝만큼도 경영할 의사(意思)가 없는 것과 같으니, 경(敬)이 아니면 배나무에서 복숭아꽃이 피고 복숭아나무에서 배꽃이 피어 뒤섞여 무질서하게 되는 실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심원하여 그치지 않아 초목이 각각 그 바름을 얻는 것은 천지의 성(誠)과 경(敬)이요 발하는 것이 모두 천리이고 사물이 그 자리를 어기지 않는 것은 성인의 성과 경입니다. 성과 경을 위주로 하지 않았는데 성과 경이 저절로 운행되니 이것은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고, 하지 않았는데 행해진 것입니다. 어찌 이 마음을 관섭(管攝)하여 내려놓지 않는 것이 배우는 자들의 경(敬)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성인의 마음이 오로지 주재한 바가 없는 것이라 한다면 성인의 마음 잡고 빈 껍떼기로 돌아갈 테니 어찌 함께 의론하겠습니까?생각건대 노형께서 논하신 바는 성인께서도 견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거경(居敬)하고 힘쓰라는 저의에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배워서 아는 것이고 우와 탕이 이런 사람입니다. 우와 탕이 그것과 반대로 하여 혼연(渾然)함에 이르렀다면 견지하는 수단이 없었을 터인데 견지하는 것은 배우는 자의 일입니다. 안자(顔子) 같은 경우 3개월 동안 인(仁)을 떠나지 않다가221) 3개월 후 물처럼 일렁이려 하자 곧바로 존양(存養)을 견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3개월 안이라고 하면 안자 또한 대화(大化)222)의 영역이 있었으니 문득 견지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태어나면서 아는 성인 중에 주공과 공자 같은 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또 일설에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천하를 주면서 "진실로 그 중도를 잡으라."라고 하였으니 순임금은 태어나면서 안 사람인지라 요임금의 말이 비록 미치지 않았더라도 순임금이 어찌 분명히 알지 못했겠습니까? 천하를 주고받은 것과 성인이 서로 전하는 도가 마땅히 이와 같습니다. 순임금은 우임금에게 천하를 주면서 다시 세 마디 말223)을 덧붙였으니, 모두 신사(愼思), 명변(明辨)224), 택집(擇執), 고수(固守)의 학문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임금은 그것을 반대로 한 성인이시니 유정유일(惟精惟一)의 뜻을 어찌 순임금께서 경계하여 고한 말을 기다려 알았겠습니까? 순임금도 이같이 운운하였으니 성인이 서로 전하는 도입니다. 만약 이것으로 우임금을 가리켜 경을 위주로 하는 공부가 있었다고 한다면 일찍이 우임금께서 도를 전하는 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태어나서 아는 것이나 배워서 아는 것이 성공을 이루기에 이르면 똑같습니다. 성인은 사물의 위에서 천리를 유행시켜 자연의 경이 그 가운데 있으니 관섭(管攝)하고 그것을 위주로 하는 공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부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이 부합하며, 일월과 그 밝음이 부합한다."225)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벗어나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노형의 앎이 여기에 이르지 않음이 아니나 다만 성인께서 견지하는 곳이 없다는 말이 배우는 사람의 경(敬)을 위주로 하는 일에 가까움으로 감히 하찮은226) 견해를 펼쳤으니, 좌우에 질정하여 취하십시오. 삼가 바라건대 비루하게 여기지 마시고 맑은 가르침을 내려주시어 막힌 마음227)을 열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頃於山寺, 旣醉以酒, 又飽以德. 時輸勝讀之語, 頗有喚醒之, 益感極于心, 謝不容口. 但論聖學一段, 愚竊惑焉. 聖一也而有生知學知. 生知者, 堯舜周孔也, 學知者, 禹湯也. 其曰: "克念罔念.", 皆自學知上說來, 若生知則, 安有這工程也? 視·聽·言·動, 渾然天理, 何敢以四勿下於其間. 前者聖人, 亦有把持處云云, 似涉主敬工夫. 此學者收拾身心, 主一無適, 極致事物. 何者天理, 何者人欲. 擇執固守, 以爲作聖之開鍵也. 生知之聖, 則自誠明者也, 藹然天理充積於內, 發皆中節, 而敬在其中. 故在父曰孝, 在君曰忠. 比如天地之誠於穆不已, 四時寒暑, 聽於自然, 無一毫經營上意思, 而非敬, 則梨樹桃花, 桃樹梨花, 有錯雜無序之失矣. 然則於穆不已, 而草木各得其正者, 天地之誠敬也, 發皆天理, 而事物不舛其位者, 聖人之誠敬也. 不主於誠敬, 而誠敬自行, 此自然而然, 無爲而爲者也. 寧有管攝此心, 不使放下, 如學者之敬乎. 若曰聖心, 專無主宰, 則把聖人腔子, 歸之於空殼也, 何足與議. 惟老兄所論, 聖人亦有把持處云云, 以愚思之, 未免有居敬思勉底意, 此學知也, 禹湯是也. 禹湯反之, 及至渾然, 則亦無把持上手段, 把持者, 學者事也. 如顔子三月不違仁, 三月之後, 如水欲波, 便卽把持存養, 以此之三月之內, 則顔子亦在大化之域, 頓無把持者矣. 況生知聖人, 如周孔者哉. 且有一說, 堯授舜曰: "允執厥中", 舜生知也, 堯言雖不及此, 舜豈不的然有獲. 以天下受授, 聖人相傳之道, 當如是也. 舜授禹, 復益之以三言, 皆愼思·明辨·擇執·固守之學, 始於此矣. 然禹反之之聖也, 精一之意, 何待舜之告戒而知耶? 舜之如是云云, 亦聖人相傳之道也. 若以此指禹有主敬工夫云爾, 則曾謂禹爲傳道之聖乎? 生知學知, 及其成功, 則一也. 聖人者, 事物之上, 天理流行, 自然之敬, 存於其中, 其有攝而主之之功哉. 故曰: "聖人與天地合其德, 鬼神合其吉凶, 日月合其明." 外此則不可言聖人也. 老兄之知, 非不到此, 而第聖人無不把持處說話, 近於學者主敬之事, 故敢陳爝火之見, 取正於左右. 伏冀勿鄙夷之, 特垂淸誨, 以開茅塞如何? 이미 …… 불렀습니다.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에 "이미 술에 흠뻑 취하였고 이미 덕에 배가 불렀도다. 군자께선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시기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태어나면서 …… 합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혹은 태어나면서 알고, 혹은 배워서 알고, 혹은 곤란을 겪은 뒤에 아니, 그 앎에 미쳐서는 마찬가지이다. 혹은 편안히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서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행하니,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마찬가지이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20章》 능히 생각하고[克念] 생각이 없다[忘念] 《서경》〈주서(周書) 다방(多方)〉에 "오직 성인도 생각이 없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라고 하였다. 사물(四勿)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논어》 〈안연(顔淵)〉에,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 데서 보인다. 마음을 …… 하여 원문의 '주일무적(主一無適)'은 정자(程子)가 경(敬)을 설명한 말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다른 쪽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다.'라는 뜻이다. 주희가 이 말을 계승하여, 《논어》 〈학이(學而)〉의 '경사이신(敬事而信)'에 대한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경은 주일무적을 의미한다.[敬者, 主一無適之謂.]"라는 말이 나온다. 택선고집(擇善固執) 성(誠)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0장 "성실함은 하늘의 도요, 성실히 하려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고도 도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도에 맞으니 성인이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선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수기궁(固守其窮)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진실로 궁할 때가 있는 것이니, 소인은 궁하면 죄를 짓는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고궁(固窮)을 '궁함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固守其窮.〕'라고 하였는바, 여기서는 바로 정자의 해석에 따라서, 군자는 곤궁하거나 현달하거나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지킨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論語 衛靈公》 성으로 …… 사람이니 원문의 '자성명(自誠明)'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에 보이는 구절로, 본성이 거짓이 없이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를 환히 아는 것이다. 이는 천성으로 덕을 간직한 성인(聖人)의 경우를 뜻한다. 안자(顔子)……않았다 《논어》 〈옹야〉 5장에 공자가 "안회는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인을 떠나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뿐이다.[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 則日月至焉而已矣.]"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대화(大化)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네 단계의 큰 변화로, 유아기, 청년기, 노년기 그리고 죽음을 말한다. 《列子 天瑞》 세 마디 말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요 임금이 순 임금한테 전한 말인데, 순 임금이 세 마디를 덧붙여서 우(禹)에게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면서 한결같이 행해야만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당부였다. 《書經 大禹謨》 신사(愼思)·명변(明辨) 《중용장구》 제20장에 학문을 하는 데서는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성인은 …… 부합한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성인은 천지와 덕이 부합하며 일월과 밝음이 부합하며 사시와 차례가 부합하며 귀신과 길흉이 부합하는 것이다.[聖人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 道體》 하찮은 원문의 '작화(爝火)'는 횃불이라는 의미로, 흔히 자신의 능력을 겸손히 낮추는 말로 쓰인다. 요(堯) 임금이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넘겨주려고 하면서 "해와 달이 나와 밝은데, 횃불을 끄지 않는다면 그 빛은 빛나기 어렵지 않겠는가.〔日月出矣而爝火不息 其於光也 不亦難乎〕"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莊子 逍遙遊》 막힌 마음 원문의 '모색(茅塞)'은 띠풀이 자라서 길을 막는 것으로, 사욕에 가려진 마음을 비유한다. 맹자(孟子)가 고자(高子)에게 이르기를 "산속의 오솔길이 잠깐 사용하면 길을 이루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띠풀이 자라 길을 막나니, 지금 띠풀이 그대의 마음을 꽉 막고 있구나.[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則茅塞之矣. 今茅塞子之心矣.]"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孟子 盡心下》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소 疏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병신봉사 【선조 29년(1596) 겨울, 금오랑228)으로 산거(散居)해 있을 때.】 丙申封事 【宣祖二十九年冬, 金吾郞散居時.】 삼가 아룁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사람에게 달려있고, 인심의 향배(向背)는 하늘에 호응하는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사랑하고 돌보아준 연후에 나라를 보호하고 안정하여 인심이 흩어지는 근심이 없을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돌아온 연후에 천명(天命)을 맞이하고 이어229) 하늘의 뜻이 순(順)한 자를 도와주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진실로 하늘의 뜻을 돌아오게 하면 큰 환난을 이겨낼 것이니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되는 계기가 여기에 있고, 진실로 인심을 결속시키면 윗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니 적국을 제어하고 수치를 씻는 방책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난리를 평정하는 방도는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아오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적국을 제어하는 방도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키는 것보다 간절한 것이 없으니, 인심을 굳게 결속시키고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오직 군주의 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신들이 이 두 가지의 말을 오늘날에도 늘 마음에 잊지 못한 것은230) 오직 우리나라에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섬나라 오랑캐가 틈을 타서 침략하니, 삼도(三都)231)가 연달아 함락되고 칠묘(七廟)232)가 몽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성상의 계책에 힘입어 난리를 평정하고 이미 적병이 물러가는 날을 보게 되었으니, 중흥(中興)의 경사와 유신(維新)233)의 교화를 거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난리를 싫어하지 않아 왜적234)을 섬멸하지 못하고 흉악한 꾀가 더욱 방자하여 난리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아오게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곽에 올라가 피눈물을 흘리며 누가 사수(死綏)235)의 뜻으로 분발할 것이며, 싸움에 임하여서는 물결이 갈라지듯 먼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날 마음을 품으니, 인심이 굳게 결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뜻이 돌아오지 않으면 비록 백만의 무리가 있어도 오히려 그 난리를 평정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애당초 백만의 무리가 없었으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인심이 결속되지 않으면 비록 이길 만한 형세가 있더라도 진실로 그 공을 이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당시에 이길 만한 형세가 없었으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계책으로는 하늘의 뜻을 돌리고 인심을 결속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을 따름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까?아! 위로 푸르른 것은 하늘이고 아래로 지극히 작은 것은 사람입니다. 높고 낮음이 현격하게 다르고, 보고 듣는 것이 미치지 못하여 처음에는 상관이 없는 것 같으나 한 이치로 서로 감응하는 것은 마치 한 집안에서의 부자(父子)와 같아 사람의 기운이 화평하면 하늘이 화평함으로써 호응하고, 사람의 기운이 어그러지면 하늘도 반드시 어그러짐으로써 호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국가에 재앙이 내려오는 것도 한 지아비가 원한을 품은 것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를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지난 기축(己丑 1589)년에 역적 정여립(鄭汝立)236)이 왕망(王莽)237)처럼 세상을 속이는 재주를 끼고 육당(陸棠)238)처럼 거짓으로 착한 척하며 명성을 가장(假裝)하니, 온 나라의 선비들이 모두 속았습니다. 더러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있었으나, 그 마음에 반역의 행위239)가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꿰미에 가득 찬240) 죄는 밝은 일월(日月) 아래에서 도망가기 어렵고, 흉악한 꾀와 큰 악행은 하루아침에 발각되니, 한때 속았던 선비들 중에 마음으로 놀라고 뼈 속까지 아파하며 대역적이 사람을 기만한 악행에 분하게 여기고 자신들이 밝지 못했던 죄를 후회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이른바 그 이름을 알고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어떻게 모두 역적의 당파라 하겠습니까?성상께서 위에 계시면서 감형(鑑衡)241)으로 스스로를 바르게 하시고, 항상 옥(玉)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을242) 마음 아파하며 삼가 요수(要囚)를 크게 결단할 때243) 더욱 간절하고 신중히 분별할 것을 생각하셨으니 어떻게 청명함 아래에서 원통한 마음을 머금은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간신 정철(鄭澈)은 사납고 고약한 성질로 잔인하고 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희학과 방탕으로 가식하고 속으로는 시기심이 가득 차니, 맑은 의론에 용납되지 않아 항상 만족하지 않고 분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 몰래 그 틈을 기다렸다가 필시 보복하는 자리에서 한 번 독한 성미를 마음껏 부리려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역적이 사대부의 사이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오늘에야 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며 몸소 심문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에 일망타진할 계책을 이루고자 공법(公法)을 개인적인 원수를 보복하는 은밀한 함정으로 삼고, 의금부244)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깊은 구덩이로 삼았습니다. 평소에 조금이라도 흘겨보는 눈초리가245) 있는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여 주머니 속에 두었다가 죄가 있든 죄가 없든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살리고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은혜와 원망으로써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의 감식안(鑑識眼)이 중천의 일월처럼 밝지 않았더라면 한 시대의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들 중에 반드시 남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아! 일시에 원한을 품고 죽음에 나아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한 도(道)에서 가장 원통한 자로 말한다면 정개청(鄭介淸)246)은 행실이 진실되고 입각(立脚)247)한 것이 확고하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아248) 의리를 밝혀 사문(斯文)에 큰 공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훤히 보이건대 간신 정철은 한 시대의 상황을 그르쳐 항상 〈항백(巷伯)〉249)편처럼 악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정철이 음험한 수단으로 남을 해치려 한 것이250)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유몽정(柳夢井)251)은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행실은 효성과 우애로 독실하였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구차히 영합(迎合)하는 태도가 없었으며,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청렴근신(淸廉謹愼)한 실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헌부(司憲府)252)의 자리에 있으면서 문득 간얼(奸孽)의 싹을 자르니, 정철이 이를 갈며 분노한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이황종(李黃鍾)은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고 식견이 뛰어났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였습니다. 당초에는 간신 정철과 죽마고우253)였는데 중년에 이르자 간사하고 괴이한 실상을 보고는 단번에 끊어버리고 일절 서로 만나지 않다가 마침내 최영경(崔永慶)254)과 마음으로 교유를 맺었는데, 정철이 평소에 시기하여 죽이고자 한 사람이 최영경이었습니다. 이황종이 정철을 버리고 최영경을 취하였으니, 정철이 원한을 품게 된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조대중(曺大中)255)은 사람됨이 강개하고 뜻을 세움이 청고(淸苦)하여 권문세가의 옷자락을 끌어당기지 않고 매번 간사한 것을 막으려고 격렬하게 의론하니, 도(道) 안에서 고립되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그가 좌막(佐幕)256)이 되어서는 정철의 집이 가까이 있어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가 거리낌 없이 지적하며 말하는 것은 모두 정철의 악이니 저들에게 노여움을 사게 된 것도 괴상할 것이 없습니다.아! 얼음과 숯이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간사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인의 도(道)가 왕성하면 군자의 도(道)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곧은 도리로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운 군자가 사람을 해치고257) 간독(奸毒)을 자행하는 소인을 만났으니, 꿩이 그물에 걸리는 화258)를 어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소인이 군자를 죽이려고 도모할 때에 혹은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고, 혹은 불측한 말로 얽어 남김없이 섬멸하여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두니 그 꾀가 참혹합니다.아! 정개청의 절의설(節義說)259)은 선유(先儒)들의 정론에 의거하여 후학들의 허황된 습관을 금하는 것인데, 정철은 그 당파들을 사주하여 정개청이 저술한 설(說)에 임의로 '배(排)' 자를 더하여 '배절의(排節義)'라고 이름하고 마침내 북방 밖으로 귀양 보내 죽게 하였습니다. 유몽정은 역적과 비록 같은 도(道)라고 하지만 이미 친밀하거나 가까운 교분이 없었으며, 비록 얼굴을 보았다고 하지만 또한 교유하여 왕래하는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거늘, 정철은 평소에 자기와 다르다는 분노를 품고 오늘날 원수 갚을 꾀를 마음대로 하여 역적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고 지목하여 마침내 형장 아래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이황종이 최영경에게 보낸 편지에 정철을 '노간(老奸)'이라 하고, 정철을 '괴귀(怪鬼)'라고 한 것은 단지 그 '노간'과 '괴귀'에서 모습을 적절히 보고 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일찍이 이름을 알거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또 정확히 역적의 초사(招辭)260)에도 나오지 않았거늘, 정철은 자신의 심술이 군자의 바른 견해에 탄로 나는 것을 꺼려서 단지 한 조각 편지를 빙자하여 참혹한 형벌을 거듭 가하고 죽음에 나아가게 하였으나, 그 실상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조대중은 역적과 이미 같은 조정의 신하가 아니었고, 비록 안면을 아는 정도의 교분은 있었으나 원래 두텁게 교유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반드시 죽음에 슬퍼할 정도의 마음은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역적의 죽음에 어찌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 슬퍼하였겠습니까? 정철의 도당들이 정철의 비위를 맞추려고 근거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혹자는 역적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혹자는 역적을 위하여 채식하였다고261) 하여 무고한 사람을 부당한 형벌에 죽게 하였으니 참담합니다. 소인이 어진 사람을 얽어서 죽인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아! 고금 천하에 비록 사림의 화가 있었지만, 어찌 오늘날과 같은 원통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옛날 미천한 신하가 가슴을 두드리자 6월에 서리가 내렸고262), 서녀(庶女)가 하늘에 호소하자 3년 동안 가물었으니263), 보통 남녀의 원통함도 화평한 기운을 손상시켜 재앙을 이루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현인(賢人)과 군자 중에 죄 없이 죽음에 나아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니, 그 원통함이 어찌 동해의 한 아낙네와 연나라 감옥의 외로운 신하에게 특별하겠습니까? 여러 사람의 원한이 거듭 쌓여 하늘에 사무치니 하늘의 기운이 손상되어 화평한 것은 패려함으로 변하고, 요얼(妖孽)의 재앙이 겹겹이 나타나 선비의 기풍은 날로 상실되고 국가의 명맥은 날로 허물어졌습니다. 이어서 임진년(1592)에 변란이 일어나 2백 년 종묘사직이 하루아침에 비린내 나고 더럽혀져 수많은 백성은 간과 뇌가 땅에 문드러지듯 참혹히 죽게 되었고 계속된 병란으로 화를 불러옴이 이제 5년의 긴 세월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른바 큰 옥사 후에 반드시 큰 병란이 있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다행히 성상게서 재앙을 가져오는 실마리를264) 깊이 아시고 널리 누명을 씻는 은명(恩命)을 내리신 덕분에 최영경이 모함을 입은 일로 한밤중에 눈물을 흘렸다는 교지가 있어 특별히 그 원통함을 풀어주며 높은 벼슬을 포증(褒贈)265)하기에 이르렀으며, 나머지 귀양 가고 폐고(廢錮)266)된 자들도 아울러 은전을 입었으니, 이는 천지의 신과 사람의 복이요, 국가를 회복하는 기틀입니다. 그러나 왜적이 아직도 우리 강토에 주둔하고 있어 국운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막힌 것은 진실로 남은 원통함을 모두 씻어주지 못하고 하늘의 뜻을 모두 돌리지 못한 까닭입니다.우리나라의 일을 돌아보건대, 인심이 이미 흩어지고 병력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이와 같은 형세로써 저와 같은 적을 제어하려면 별다른 방책이 없어 믿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늘의 뜻뿐입니다. 진실로 하늘의 뜻이 돌아보신다면 비록 막강한 적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어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체로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니267) 감동시켜 돌아오게 하는 기틀은 오직 원통함을 풀어주는 한 가지 일뿐입니다.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해와 달 같은 밝은 빛을 넓혀 어두운 곳까지 비치지 않음이 없게 하시고, 천지와 같은 어진 은혜를 베풀어 하나의 사물도 받지 않음이 없도록 하시며 네 사람의 원통함을 통찰하시고, 한 번에 씻을 수 있는 덕음(德音)268)을 빨리 내리시어 위로는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망(輿望, 여러 사람의 기대)을 위로하시며, 구천269)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초보은의 정성을 다투어 품게 하고, 많은 선비의 기상이 의로운 것을 따르는 뜻을 더욱 가다듬게 하시면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통쾌할 것이고 하늘의 뜻도 바야흐로 돌아올 것이니 자그마한 역적은 우리의 근심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이발(李潑)270)과 이길(李洁)271)의 경우 망령되이 역적과 사귄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할 수 없으나, 역적의 흉측한 꾀와 반역의 마음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반드시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신들은 같은 도내에 있으면서 이발과 이길의 평생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나와 집안에서의 행실이 옛 사람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익히 들었습니다.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찾으라272) 하였으니, 효도하면서 충성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다만 식견이 어두웠기 때문에 역적에게 속임 당하는 것을 면할 수 없었으니, 그 죄는 죽을 만하나 그 실정은 용서할 만합니다. 이발과 이길이 정철에게 평소 물과 불의 관계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아울러 굽어 살피소서. 어떻게 하면 인심을 굳게 결속시킬 수 있겠습니까?아! 구중궁궐 위에 살며 백성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임금이요, 나라 안에 거처하며 한 사람의 명을 받든 사람은 백성입니다. 임금은 백성과 상하 관계이니 비록【아마도 '수(殊)'자의 오류인 듯하다.】 귀천의 현격한 형세로 막혀 있어 마치 서로 미치지 못하는 것 같으나, 그 마음은 풀과 바람273), 그림자와 메아리274)처럼 서로 호응합니다. 임금이 뜻을 정성스럽게 하면 백성 또한 정성으로 호응하고, 임금의 뜻이 게으르면 백성 또한 게으름으로 호응합니다. 대개 백성의 마음을 보합(保合)275)하는 요체는 임금이 정성껏 대하는 것에 기인하지 않음이 없고, 흩어지게 하는 폐단 또한 임금의 태만으로 기인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과 백성이 서로 호응하는 기틀을 어찌 소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소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성인과 현인이 계속해서 나와 보위(寶位)를 전한 것이 12대에 200년이 지났습니다. 백성을 쉬게 하고 길러주며,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고 함양하여 의로써 묶고 인으로써 결속시키니 그 발원이 깊고 뿌리내린 것이 견고합니다. 삼가 우리 전하에 이르러 마침내 선왕의 업을 따르고 선대의 공렬(功烈)을 아름답게 빛내며 다친 사람을 본 듯한276) 마음으로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에 대한277) 근심이 절실하였고, 보호하듯이 하는 정성으로 자주 산동(山東)처럼 조령(詔令)을 반포하시니278) 백성들이 모두 사랑하여 떠받들고 차마 배반할 수 없는 마음을 가졌습니다.나라의 근본이 공고해져서 이미 흔들릴 수 없는 형세를 이루었으나 한번 기축년의 변고를 겪으면서 하늘의 뜻은 이미 손상되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와해되었습니다. 임진(壬辰 1592)년에 왜적이 이르러 아직 호경(鎬京)279)을 침범하지 않았으나 이미 흙이 무너지는 형세가 있었고, 금수(禽獸)가 달아나 숨듯 오직 구차하게 살아날 계책만 알았습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었으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없었고 오랑캐280)가 이르자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듯 하였으니281) 어찌 강한 우리나라가 하루아침에 꺾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아! 성곽과 해자가 높거나 깊지 않아서가 아니고 병기와 갑옷이 견고하거나 날카롭지 않아서가 아니며 쌀과 곡식이 많지 않아서가 아닙니다.282) 성상께서는 변방을 수비할 계책이 진실로 한나라 문제(文帝)보다 뒤지지 않거늘, 도성을 지키지 못함이 요(遼)와 금(金)이 하수(河水)를 건너는 날보다 심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흩어진 인심은 수습하기 어려워 하늘도 사랑하여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하께서 국난을 널리 구제하신 것에 힘입어 원릉(園陵)283)을 빨리 소제(掃除)하고 옛 도읍에 환궁하시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거의 회복될 기미가 보였으나 승냥이 같이 탐욕스러운 자들이 아직도 날뛰고 뱀처럼 똬리를 틀고 풀지 않고 있습니다.근래에 또 국경에 왜구가 온다는 소문이 있자 도성 밖 인심이 흉흉하여 안정되지 못하고 모두 와해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아마도 '의(宜)'자가 빠진듯하다.】 이제 분산된 마음을 진정하고 수습하기에 이르렀으나 길가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듣자니 성상께서 확고하게 정해진 뜻이 없이 전교(傳敎)284)를 발의하면 도읍의 인심이 더욱 어지러워질 것이며 도성 밖에 있는 사람도 따라서 소동이 일어나니 앞선 소문으로 겁먹는 바가 오히려 이와 같습니다. 만약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는 형세가 있다면 무엇으로 적을 막을 것이며 무엇으로 나라를 지킬 것입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지극히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아! 성상께서 위에 있고 조정에 사람이 있으니 오랑캐를 방어할 상책을 버려둘 일은 없을 것이나 초야의 사이에도 취할만한 견해285)가 없을 수 없으니 감히 먼지와 이슬 같은 하찮은 말로 말씀드리겠습니다.【아마도 '부(夫)'자가 빠진듯하다.】천하의 일에는 완급이 있으니 마땅히 천천히 할 일에 급하게 하면 일이 전도(顚倒)되어 어쩔 줄 모르는 근심이 있게 되고, 마땅히 급히 할 일에 천천히 하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286) 뉘우침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마땅히 천천히 할 때는 조치하고 대비하는 계책을 강구하여 만전을 도모함이 좋습니다. 일을 급히 해야 할 때는 반드시 한번 죽기를 각오하고 그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이 또한 좋습니다. 오늘의 일로 살펴보자면 급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옛 사람들의 말에 "일이 급하면 천천히 걸어갈 수 없고, 마음이 아프면 느긋하게 말할 수 없다.287)"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찌 조정에서 아직도 아무 말이 없다고 하여 또한 전하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겠습니까?신들은 예사롭지 않는 변란을 만난 뒤에 예사롭지 않는 경사가 있고, 예사롭지 않는 일이 있은 뒤에 예사롭지 않는 공을 세운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선왕(宣王)은 몸소 창을 들고 적을 물리쳤고, 당(唐)나라 숙종(肅宗)은 몸소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를 입고 적군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급급한 날을 당하면 반드시 몸소 정벌하는 일이 있은 뒤에야 인심이 격동할 수 있고, 천토(天討)288)가 행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백성의 마음을 만약 감동하게 하거나 격려할 방도가 없다면 비록 아침에 장수 하나를 보내고 저녁에 장수 하나를 보낸다 한들 반드시 이 백성으로 하여금 감히 목숨 바칠 마음으로 나아가 저 적군을 섬멸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아마도 '의(矣)'자가 빠진듯하다.】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빨리 애통해하는 교시(敎示)를 내리시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측은히 여기고 애통해하는 정성으로 위로는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을 유시(諭示)한 뒤 몸소 임금의 수레289)를 몰고 삼군(三軍)에게 명령을 내려 남쪽 지방에 어가를 머물며 요새에 의거하여 험지(險地)를 지키면서 도내 수령에게 각각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게 한다면 백성들이 숲처럼 모이고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할 것입니다. 백성들을 불러 맹세한 말을 모두 듣게 하고 목숨을 바치려는 충성으로 앞 다투어 분발한다면 백성들은 임금의 거마(車馬) 소리를 듣고 임금의 아름다운 깃발을 보고 모두 흔연(欣然)히 기뻐하는 낯빛으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정벌을 나가시니 우리가 무슨 근심을 하겠는가? 우리 왕께서 여기 계시니 우리가 어디로 떠나가겠는가?"라고 하며 비록 궁벽한 산야의 어린아이나 늙은이라도 임금과 함께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290) 함께 일어나서 임금을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면 우리가 무위(武威)를 떨치고 임금께서 위엄을 더욱 떨쳐 적군의 간담을 부수고 적군의 혼백을 흩어버리기에 족하며 적장(賊將)의 머리를 북쪽 궁궐 아래에 매달 수 있을 것입니다.게다가 호남은 물력이 풍부하고 창고가 완전하여 분탕(焚蕩)질 당한 지역과 다릅니다. 또 산성이 천혜의 험준하고 견고한 곳에 만들어져 있으니 어떻게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외성을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291) 국가의 근본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있고, 회복하는 일 또한 여기에 달려있으니 중대한 이 지역이 어찌 강회(江淮)의 보장(保障)292)과, 세류영(細柳營)에서 군대를 위로하려고 임한 행차293)와, 단연(澶淵)294)에서 적을 물리치고자 주둔한 행차 일뿐이겠습니까?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땅히 급히 할 일과 천천히 할 일의 형세를 살피시고 (몸소 창 든)선왕(宣王)과 (몸소 갑주를 입은)숙종(肅宗)을 법으로 삼아 당장에 편한 것만 취하는 계책을 삼지 마시고【아마도 '중(中)'자의 오류인 듯하다.】 중흥의 일을 살피셔야 합니다. 만약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강약의 형세가 달라진다면 마땅히 진(秦)나라에서 통곡하던 신포서의 정성을 본받고, 형(邢)나라를 구원했던 것처럼 군대를 내어주기를 청하여295) 힘을 모아 일제히 거행한다면 저 적들이 반드시 이기고 우리 병사들은 반드시 패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신하 종택(宗澤)296)의 상소에 "하늘이 진실로 송나라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큰일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소순(蘇洵)297)이 또 말하기를 "백 번 싸워 이기면 상대가 비록 굴복하더라도 우리 또한 수고로울 것이다.298)"라고 하였습니다. 저 적의 군대는 늙고 병사는 피폐하며, 하늘이 버리셨고 귀신까지 벌을 내렸으니 멀리서 건너올 수는 있으나 소리나 형체의 움직임에 미리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아! 소강(少康)299)은 군사 500명【아마도 '중(衆)'자가 빠진듯하다.】으로 중흥하였고, 포서(包胥)는 3호로【아마도 '오백승(五百乘)'의 오류인 듯하다.】 초(楚)나라를 보존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병사가 적다고 하여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신들은 인심을 수습하고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 급하니 감히 구준(寇準)이 강을 건너고자 했던 소원과 장준(張浚)300)이 스스로 장군이 되고자 했던 청을 본받겠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의 말에 "천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히지 않는다.301)"라고 하였으며, 또 "적로(賊虜)를 처리하는 일을 군부(君父)에게 남겨드리지 않는다.302)"라고 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전하께서 몸소 시석(矢石)303)의 사이에서 위험을 무릅쓰기를 바라겠습니까? 단포(丹浦)의 승리를 위해 군주가 몸소 철계(澈溪)에 이르러 정벌할 필요가 없으니 중신(重臣)을 택하여 보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한 사람이 원수(元帥)의 직임을 겸임하게 하여 활을 당길 수 있는 백성을 다 취하여 원문(轅門)304)에 모아 한결같이 강습하고, 여러 곳으로 흩어져 때에 임하여 낭패의 환난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벼슬하지 않는 선비 가운데 재주와 지략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막하(幕下)에 두어 계책을 묻고 함께 계획을 세우면 완급의 사이에서 적군에 대응할 걱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아! 하늘의 뜻이 감응(感應)하면 반드시 사람을 감응시키고, 인심이 감응하면 반드시 하늘에 통하니 하늘의 뜻이 감응하는 것이 곧 인심이 감응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귀신을 감동시킨 우(禹) 임금은 완악한 묘족(苗族)이 복종하는 것을 보았고305), 애통한 조서306)를 내린 당(唐)나라 덕종(德宗)은 봉천(奉天)으로 가는 수레를 돌이킬 수 있었으니, 참으로 하늘의 뜻을 되돌리고 인심을 결속시키는 것은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기틀에 크게 관련이 있습니다.아! 신들이 임진년의 변란이 기축년의 원통함으로 초래되었다고 여겨 이 어지러운 날에 반드시 억울함을 씻고자 한 것이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이제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덕을 잃은 것이 하늘에 죄를 얻지 아니하였거늘, 오늘날 막대한 변란이 있으니 이 어찌 전하 때문이겠습니까? 실로 간신이 현자(賢者)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여 화평한 기운을 손상시킨 탓입니다. 이 때문에 신들은 변란을 안정시키는 방책을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리는 데 귀착시키고,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돌아오게 하는 일은 원통함을 밝게 씻겨주는 데 귀착시키니 전하를 위하여 거듭 말씀드립니다.신들은 또 적의 침략을【아마도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 인심이 흩어졌기 때문이라고 여겨 반드시 군대의 사이에 직접 거둥하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어찌 성상을 위험한 곳에 이르시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친히 거둥하시어 군사를 어루만지지 않으시면 민심을 고무할 수 없을 것이고, 적의 흉악한 병기가 다시 일어나 개미집이 강물에 터진 듯하면 우리나라의 형세도 다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신들이 적의 칼날에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하께서 어디로 돌아가시며, 종묘사직이 어디에 의지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은 적을 토벌하는 요체가 인심을 굳게 결속시키는 것에 귀결되고, 인심을 굳게 결속시키기 위하여 임금의 수레가 친히 거둥하기를 바라기에 전하를 위하여 거듭 말씀드립니다. 삼가 전하께서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신들은 모두 초야의 미친 서생으로 감히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구중궁궐에 우러러 호소하는 것은 진실로 국가 흥망의 기틀에 관계되기 따름입니다. 삼가 성상을 사모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문득 망녕되고 참람됨을 잊어버리고 마음속에 있는 바를 토로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밝게 살피시어 조금이라도 받아들이신다면 신들에게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묘사직의 복이기도 합니다. 신들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伏以國家之興衰在於人, 人心之向背應乎天, 天必眷顧, 然後足以保定爾邦, 而無人心渙散之憂, 人必歸心, 然後可以迓續乃命, 而有天意助順之理. 是以苟回天意, 則克戡大難, 而轉禍爲福之機在乎是, 苟結人心, 則可使死長, 而制敵雪羞之策在乎是. 然則戡亂之方, 莫先於感回天意, 制敵之道, 莫切於固結人心, 而人心之固結, 天意之感回, 惟在於人主之一心耳. 臣等以此兩說, 眷眷於今日者, 惟我國家, 天降大割, 島夷乘之, 三都繼陷, 七廟蒙塵. 幸賴睿謨撥亂, 已覩寇退之日, 則中興之慶, 維新之化, 庶幾見之, 而天不厭難, 鯨鯢未翦, 兇謨益肆, 亂未有定, 則可謂天意之感回乎? 登城泣血, 誰奮死綏之志, 臨戰浪坼, 爭懷棄甲之心, 則可謂人心之固結乎? 天意未回, 則雖有百萬之衆, 猶不得濟其亂, 況我國家, 初無百萬之衆乎? 人心未結, 則雖有可勝之勢, 固不得成其功, 況我國家, 時無可勝之勢乎? 然則爲今之計, 莫急於回天意結人心而已. 何以則感回天意耶? 嗚呼! 蒼然於上者天也, 眇然於下者人也. 高卑懸絶, 視聽莫及, 初若不相關, 而一理之相感, 若家人父子, 人之氣和, 則天應之以和, 人之氣乖, 則天必應之以乖. 故凡國家災孼之降, 莫不由於一夫之含冤, 則天人相感之理, 焉可誣哉? 焉可誣哉? 往在己丑, 逆賊鄭汝立, 挾王莽欺世之才, 詐陸棠假善之名, 一國士類, 盡爲所欺. 或有知其名者, 或有見其面者, 而不知厥心之不軌也. 貫盈之罪, 難逃於大明之下, 凶謀巨惡, 一朝敗露, 則一時受欺之士, 莫不心驚骨痛, 而憤大賊瞞人之惡, 悔自己不明之罪, 則其所謂知其名見其面者, 豈盡爲逆賊之黨耶? 聖明在上, 鑑衡自正, 睿念常軫於玉石之俱焚, 愼簡益切於要囚之丕蔽, 則豈有含冤痛於淸明之下哉? 第以奸臣鄭澈以狠愎之資, 懷慘毒之心, 外假謔浪, 內實猜忌, 爲淸議所不容, 常有怏怏憤憤之心, 陰俟其隙, 欲一肆毒於必報之地, 及聞逆賊出於搢紳之間, 自幸今日可遂吾志, 身爲按問之任. 乃成網打之計, 以公法爲復私讎之陰穽, 以王獄爲殺無辜之深坑. 平日之少有睚眥者, 率以錄置囊中, 有罪無罪, 蔽九重之聰明, 生之殺之, 以一己之恩怨. 倘非聖鑑如日月之中天, 一世之忠賢, 必將無遺類矣. 可不寒心哉? 可不寒心哉? 嗚呼! 一時之抱冤就死者, 不知其幾許. 而以臣等所居一道之最爲冤痛者言之, 則鄭介淸踐履眞實, 立脚堅確, 不倦不厭, 闡明義理, 有大造於斯文, 而洞見奸澈誤了一世之狀, 常有巷伯惡惡之心, 則澈之含沙者非一日矣. 柳夢井性稟耿介, 行篤孝友, 入朝無苟合之態, 臨民有淸謹之實. 一居風憲之地, 便折奸孼之萌, 則澈之切齒者, 爲如何哉? 李黃鍾, 天資篤實, 識見高邁, 一心好善, 嫉惡如讎, 而初與奸澈爲蔥竹之交, 及其中年, 見其奸怪之狀, 斷然絶之, 一不相接, 遂與崔永慶, 托爲心契, 則澈之平日所忌而欲殺者, 永慶也. 黃鐘棄澈而取永慶, 澈之含憤, 固其宜也. 曺大中, 爲人慷慨, 立志淸苦, 不曳權門之裾, 每激拒奸之論, 孤立一道, 衆口咻之. 及其佐幕, 澈家在近, 亦不經過, 而其所斥言而不諱者, 皆澈之惡, 則逢彼之怒, 無足怪也. 噫! 氷炭不同器, 邪正不兩立, 故小人道長, 則君子道消. 以直道難容之君子, 逢射影肆毒之小人, 則雉離之禍, 豈能免於道消之日乎? 是以小人謀殺君子, 或造無根之說, 或構不測之言, 殲滅無遺, 必至空國而乃已, 其爲計慘矣. 嗚呼! 介淸節義之說, 據先儒已定之論, 禁後學浮誕之習, 而澈也嗾其黨類, 於其所著說上, 任加排字, 名之曰排節義, 終致竄死於朔北之外. 夢井與逆賊, 雖曰同道, 旣無親厚切近之分, 雖曰見面, 又無交遊往來之好, 而澈也挾平昔異己之憤, 逞今日報怨之謀, 目之以與逆賊交厚, 竟令殞命於杖下. 黃鍾與永慶書, 以澈爲老奸, 以澈爲怪鬼者, 只是的見其老奸怪鬼之狀, 而發之於書辭者也. 曾不是知名見面之類, 又不出於賊招, 而澈也忌其心術之呈露於君子之正見, 只憑一片之書, 重加慘酷之刑, 使之就死, 莫白其情. 大中與逆賊, 旣無同朝之臣, 雖有識面之分, 元非交厚之間, 則必無哀死之心, 況於逆賊之死, 豈有悲傷於人人所見之處乎? 澈之徒黨, 承望澈意, 捏造無形. 或以爲爲賊涕泣, 或以爲爲賊行素, 令其無辜, 斃於淫刑慘矣. 小人之構殺仁賢, 至此極也. 嗚呼! 古今天下雖有士林之禍, 豈有如今日之冤也哉? 昔者賤臣叩心, 六日飛霜, 庶女號天, 三年枯旱, 則匹夫匹婦之冤, 亦足以感傷和氣, 致災降戾, 有如此者. 況今賢人君子無罪就戮者, 不知其幾, 則其冤豈特東海之一婦燕獄之孤臣也哉? 衆冤積鬱, 蒸薄于天, 天氣感傷, 和變爲戾, 妖孼之災, 疊現層出, 士氣日以鎖鑠, 國脈日以憊毀. 仍致壬辰之變, 使二百年宗社, 一朝腥穢. 億萬姓蒼生, 肝腦塗地, 兵連禍結, 今至五年之久, 所謂大獄之餘, 必有大兵, 豈不信哉? 幸賴聖明, 深知厲階之由, 渙降昭雪之命, 以永慶受誣之事, 至有中夜泣下之旨, 特伸其冤, 褒贈崇秩. 其餘竄逐廢錮之輩, 竝蒙恩宥, 此天地神人之福, 而國家恢復之機也. 然而海醜尙屯於境上, 國運猶否於今日者, 實由餘冤未盡雪而天意未盡回也. 顧念我國之事, 人心已散, 兵力已竭, 以如此之勢, 制如彼之賊, 更無其策, 則所可恃而仰望者, 惟天意而已. 苟得天意之眷顧, 則雖有莫强之敵, 其於予何哉? 然則凡所以感回天意者, 宜無所不用其極, 而感回之機, 則惟在於伸冤一事而已. 伏願殿下廓日月之明, 無幽不燭. 垂天地之仁, 無物不被, 洞察四人之冤, 枉亟下一雪之德音, 上答天意, 下慰輿望. 使重泉之人, 爭懷結草之誠, 多士之氣, 益勵仗義之志, 則人情已快, 天意方回, 而蕞爾之賊, 不足爲吾憂矣. 至若李潑李洁, 妄交逆賊之罪, 萬死無赦, 至於逆賊之兇謀異志, 則恐未必知之也. 臣等同在一道, 飽聞潑洁一生孝友, 出於天性, 居家之行無愧古人. 求忠臣必於孝子之門, 則未有孝而不忠者也. 只緣識見昏暗, 未免爲逆賊之所欺, 其罪則可誅, 而其情則可原. 潑洁之於澈也, 平日水火, 殿下亦已知矣. 伏願殿下竝垂矜察焉. 何以則固結人心? 嗚呼! 居九重之上, 而爲萬民之主者君也, 處方域之內, 而奉一人之命者民也. 君之於民也上下, 雖【恐殊字之誤】隔貴賤遼絶勢, 若不相及, 而其心之相應, 如風草影響. 君之意誠, 則民亦應之以誠, 君之意怠, 則民亦應之以怠. 凡民心保合之要, 莫不由於人主之推誠, 渙散之弊, 亦莫不由於人主之怠慢, 君民相應之機, 其可忽哉? 其可忽哉? 恭惟我國家, 賢聖繼作, 傳祚十二, 歷年二百. 休養生靈, 撫綏涵育, 維之以義, 結之以仁, 則其發源也深矣, 植根也固矣. 式克至于我殿下, 聿遵先業, 休有前烈, 如傷之念, 每切於宵肝之憂, 若保之誠, 累著於山東之詔, 民皆愛戴, 咸有不忍叛之心. 邦本鞏固, 已成不可動之勢, 一經己丑之變, 天意已傷, 民心已解. 及乎壬辰之賊, 未侵鎬京, 已有土崩之勢, 禽奔獸遁, 唯知偸活之計. 主辱臣死, 未見授命之人, 至使玁狁及方太王去邠, 是何我國之强, 而一朝摧創, 至此極也? 嗚呼! 城池非不高深也, 兵甲非不堅利也, 米粟非不多也, 則聖上備邊之策, 固無讓於漢文, 而京師之不守, 則甚於遼金渡河之日, 其故何也? 已散之人心, 難可維係, 而天亦不爲愛佑也. 然而尙賴殿下弘濟艱難, 迅掃園陵, 還御舊都. 得至今日, 庶見恢復, 而狼貪尙肆, 蛇屯未解. 近日, 又有掃境來寇之聲, 京外之人心, 恟恟未定, 皆有瓦解之意.【恐脫宜字】 及今鎭定收拾渙散之心, 而流聞道路, 自上亦無堅定之意, 至發於傳敎之際, 使都下人心益致紛擾. 而在外之人, 亦隨而騷動, 先聲所劫. 猶尙如此. 脫有長驅闌入之勢, 則其何以禦賊, 其何以守國? 言之至此, 不勝痛哭之至. 嗚呼! 聖明在上, 廟堂有人, 禦戎上策, 必無遺矣. 而草野之間, 亦不無一得之愚, 敢言塵露之說. 【恐脫夫字】天下之事, 有緩有急, 當緩而急之, 則有顚倒失措之患, 當急而緩之, 則致噬臍莫及之悔. 是故當其可緩之時, 則宜講措備之策, 以圖萬全可也. 及其事急之時, 則必決一死, 以濟其難亦可也. 以今日之事觀之, 則可不謂不急乎? 古人有言曰: "事急不可徐行, 心痛不可緩聲." 臣等當此危急之時, 豈以爲朝庭之未發言, 而亦含默於殿下之前哉? 臣等聞遇非常之變, 然後有非常之慶, 有非常之擧, 然後立非常之功. 昔周宣王親執殳而薄伐, 唐肅宗躬甲冑而削平. 故人君當汲汲之日, 必有親征之擧. 然後人心可激, 而天討可行矣. 今此民心, 若無感動激勵之方, 則雖朝遣一將暮遣一將, 必不能使斯民, 出敢死之心, 而殲彼賊.【恐脫矣字】 爲今之計, 莫如亟下哀痛之敎示. 以惻怛之誠, 上告宗廟, 下諭臣民. 親御六飛, 申令三軍, 駐蹕南州, 據要守險, 使道內守令, 各率其兵馬, 其會如林, 一乃心力. 咸聽格汝之誓, 爭奮效死之忠, 則"百姓聞王車馬之音, 見王羽旄之美, 擧欣欣然有喜色而相告曰: "吾王出征, 吾何以爲憂? 吾王在此, 吾何以去?" 雖窮山僻野黎童白叟, 莫不欲與子. 偕作爲王前驅, 則我武維揚, 王威震疊, 足以破賊之膽, 禠賊之魄, 而賊酋之頭, 可懸於北闕之下矣. 況此湖南, 物力之衆, 倉庫之完, 非如焚蕩之地. 又有山城, 天設險固, 豈是三里之城七里之郭, 可圍而攻之者哉? 國家本根, 專在於此, 恢復之業, 亦在於此, 此地之重, 豈特江淮之保障, 細柳勞軍之行可臨, 而澶淵却敵之駕可駐矣. 伏願殿下, 察當急當緩之勢, 以宣王肅宗爲法, 而無爲姑息之計, 以作候【恐中字之誤】興之擧也. 倘或衆寡不敵, 强弱異勢, 則宜奮哭秦之誠, 請出救邢之師. 合力而齊擧, 則焉保彼賊必勝, 而我兵必敗也哉? 宋臣宗澤之疏曰: "天苟不欲絶宋, 則猶可爲也." 蘇洵又曰: "百戰而勝之, 人雖屈而我亦勞." 彼賊師老兵廢, 天厭鬼誅. 亦可遙度, 不可先劫於聲形之動也. 噫! 少康以一旅【恐脫衆字】中興, 包胥以三戶【恐五百乘之誤】存楚. 伏願殿下, 勿以兵少爲慮焉. 臣等急於收拾人心, 殲滅賊醜, 敢將寇準過河之願, 以效張浚自將之請. 然古人有言曰: "千金之子, 坐不垂堂." 又曰: "不以賊遺於君父." 臣等亦豈敢望親冒於矢石之間哉? 丹浦之捷, 不必親到澈溪之征, 可以汝往擇遣重臣, 民所見膽者一人, 兼帶元帥之職, 悉取引弓之民, 聚于轅門, 一以講習, 無使散在諸處, 以致臨時狼狽之患. 又求韋布中有才智者, 置諸幕下, 諮諏謀猷, 以相劃策, 則緩急之際, 庶無應賊之憂矣. 嗚呼! 天意有感, 則必應人, 人心有感, 則必通天, 天意之所應, 卽人心之所感也. 是故至誠感神, 大禹見頑苗之格, 哀痛有詔, 唐宗回奉天之駕, 信乎回天意結人心, 大有關於討賊興復之機也. 嗚呼! 臣等以壬辰之變, 爲己丑之冤所召, 而必欲伸雪於搶攘之日者, 自殿下臨御以來, 三十年于玆矣. 而少無失德獲戾于天, 而有今日莫大之變, 是豈殿下之故也? 實是奸臣賊賢病國, 感傷和氣之所致. 是故臣等, 以靖亂之策, 歸之於感回天意, 以感回天意, 歸之於昭雪冤枉, 而爲殿下申申焉. 臣等又以致寇之至【恐有脫字】, 爲人心之散所由, 而必請親臨於行陣之間者, 豈欲致君父於阽危之地? 若非親幸撫軍, 則無以鼓舞民心, 而兇鋒再擧, 河決蟻封, 我國之勢無復可爲, 而臣等之血肉於賊刃, 固無足惜, 未知主上何歸, 宗社何依. 是故臣等以討賊之要, 歸之於固結人心, 以固結人心, 望之於車駕親臨, 而爲殿下申申焉. 伏願殿下留神焉. 臣等俱以草野狂生, 敢冒萬死, 仰叫九重者, 誠以係國家興亡之機耳. 竊不勝愛君憂國之誠, 輒忘狂僭, 刳瀝肺肝. 伏惟殿下特垂明察, 少有採納, 則非獨臣等之幸, 抑亦宗社之福也. 臣等不勝惶恐之至, 謹昧死以聞.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의 별칭으로 금부랑(禁府郎)이라고도 한다. 너희의 …… 이어주려 하니 《서경(書經)》 〈반경 중(盤庚中)〉에 "나는 너희들의 명을 하늘에서 맞이하고 이어 주려 하노니, 내가 어찌 너희들을 위협하겠는가. 너희들을 받들어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予迓續乃命于天, 予豈汝威. 用奉畜汝衆.〕"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늘 …… 것은 권권(眷眷)은 '권권(睠睠)'으로 쓰는데, 마음속에 잊지 않고 있는 모양, 헤어지기를 못해 아쉬워하는 모양 등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ㆍ소명(小明)〉 "저 공인을 생각하니, 아쉬워 돌아보며 그리워하네.〔念彼共人, 睠睠懷顧.〕"라고 하였다. 삼도(三道) 한성(漢城)·개성(開城)·평양(平壤)을 가리킨다. 칠묘(七廟) 천자(天子)의 종묘(宗廟)로, 시조(始祖)의 사당에 삼소(三昭)와 삼목(三穆)을 합쳐서 7묘가 된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종묘를 가리킨다. 유신(維新) 구법(舊法)을 혁신하고 새로운 정사를 펼친다는 것으로,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문왕이 위에 계시어 아, 하늘에 밝게 계시니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천명은 새롭도다. 주나라가 드러나지 않을까 상제의 명이 때에 맞지 않을까 문왕의 오르내리심이 상제의 좌우에 계시니라.〔文王在上, 於昭于天. 周雖舊邦, 其命維新. 有周不顯, 帝命不時. 文王陟降, 在帝左右.〕"고 하였다. 왜적 원문의 '경예(鯨鯢)'는 고래의 수컷과 암컷을 가리키는 말로, 소국(小國)을 병탄(幷呑)하려는 흉악무도한 자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宣公12年》 사수(死綏) 군사가 패하면 장수는 마땅히 죽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좌전(左傳)》 문공(文公) 12년에 "사마법(司馬法)에 장군은 수레에 오르는 끈을 잡고 죽는다.〔死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본래 서인(西人)으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에는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ㆍ성혼을 비판하면서 동인의 이발(李潑)과 특히 친하게 지냈다.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라도로 돌아가,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지어 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과 모사(謀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에 이들의 기밀이 누설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으며, 정여립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자살하였다. 왕망(王莽) 전한(前漢) 말기 평제(平帝)를 독살한 뒤 두 살 된 유영(劉嬰)을 추대하고,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인심을 모았다. 후에 결국 유영을 몰아낸 후 국호를 신(新)이라 고치고 황제가 되었으나, 한말(漢末)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하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건국한 지 15년에 멸망하였다. 육당(陸棠) 육당은 송(宋)나라 양시(楊時)의 사위이다. 처음에 양시가 육당의 용모가 매우 단정하고 앉은 자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호인(好人)이라 하여 그를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에 범여위(范汝爲)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당(黨)이 되었기 때문에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朱子語類 卷133 本朝7》 반역의 행위 원문의 '불궤(不軌)'는 마땅히 좇아야 할 법이나 도리에 벗어났다는 뜻으로, 모반이나 반역을 뜻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비록 교활한 백성이 있더라도 주상을 떠난 마음이 없다면, 불궤(不軌)의 신하가 그 간사한 지혜를 꾸밀 길이 없어서 포란(暴亂)의 간사함이 그쳐집니다.〔雖有狡猾之民 無離上之心 則不軌之臣無以飾其智 而暴亂之奸弭矣〕"라고 하였다. 꿰미에 가득 찬 원문의 '관영(貫盈)'은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의 준말로, 죄악이 찰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감형(鑑衡) 거울과 저울을 말한다. 거울은 연추(姸醜)를 비추어 보는 것이고 저울은 경중을 다는 것이므로, 시비(是非)와 호오(好惡)를 가리는 마음ㆍ기준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임금의 사물을 감별하는 안목을 말한다. 옥(玉)과 …… 것을 선인과 악인이 모두 함께 재앙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하서(夏書) 윤정(胤征)〉에, "불이 곤륜산을 태우면 옥과 돌이 다함께 불타고, 임금이 덕을 잃으면 사나운 불보다 더 무섭다.〔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라고 하였다. 요수(要囚)를 …… 때 요수(要囚)는 옥사를 처결할 때 죄인의 진술을 잘 살펴서 그 정실(情實)을 파악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강고(康誥)〉에서, "요수하는 데 5, 6일을 생각하며 열흘이나 한 철을 신중히 생각해서 명확하게 판결하라.〔要囚, 服念五六日, 至于旬時, 丕蔽要囚.〕"라고 하였다. 의금부 원문의 '왕옥(王獄)'은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이다. 흘겨보는 눈초리가 원문의 '睚眦(애자)'는 사소한 원한을 뜻한다.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진(秦) 나라에 망명한 범저(范雎)는 출세한 뒤, 자신에게 밥 한 그릇 준 사람에게도 반드시 보상하고 눈 한번 흘긴 사람에게도 반드시 보복했다고 한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이다. 서인(西人) 박순(朴淳)의 문인이었으나, 박순이 영의정(領議政)에서 파직되자 동인(東人) 이발(李潑)ㆍ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을 맺었다. 스승 박순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니, 정철(鄭澈) 등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절의론(排節義論)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연루되어 죽었다. 입각(立脚) 다리를 세운다는 말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을 의연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가르치기를 …… 않아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옛날에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은 성인이십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성인은 내가 능하지 못하지만 나는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昔者, 子貢問於孔子曰, 夫子聖矣乎. 孔子曰, 聖則吾不能, 我學不厭而敎不倦也.〕"에서 나온 말이다. 항백(巷伯) 참소하여 작은 허물을 가지고 큰 죄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시경》 〈항백(巷伯)〉에 "조그마한 무늬로 이 자개 비단을 이루도다. 저 남을 참소하는 자여, 또한 너무 심하구나.〔萋兮斐兮, 成是貝錦. 彼讒人者, 亦已大甚.〕" 하였다. 음험한 …… 것이 원문의 '함사(含沙)'는 함사역(含沙蜮)과 같은 말로 흉독을 품고 남을 음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시경집전(詩經集傳)》 〈하인사(何人斯)〉에 "저 사람은 도깨비도 되었다가 또 물여우도 되었구나.[爲鬼爲蜮]"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註)에 "이 물여우가 입에 모래를 머금고 물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를 쏘면 그것에 맞은 사람은 바로 병에 걸리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能含沙以射水中人影 其人輒病 而不見其形也〕"라고 하였다. 유몽정(柳夢井) 1529∼1590.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청계(淸溪)이다. 생원 진사시에 합격했고, 유일(遺逸)로 집의 지냈고, 남원 부사로 있다가 기축옥사로 국문을 받고 죽었다. 사헌부(司憲府) 원문의 '풍헌(風憲)'은 풍교와 헌장이라는 뜻으로, 백관의 비리를 탄핵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직책을 이르는 말이다. 당(唐)나라 원결(元結)의 〈사감찰어사표(辭監察御史表)〉에 "신이 일반 백성의 신분으로 출사한 지 몇 달이 안 되어서 풍헌의 벼슬을 하여 군사를 사찰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죽마고우 원문의 '총죽(蔥竹)'은 파로 만든 피리와 죽마(竹馬)이다. 총죽지교(蔥竹之交)라 하여 죽마고우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학문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나가지 않다가 1584년(선조17) 교정청 낭관(校正廳郞官)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校正)에 참여하고 곧 낙향하였으나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무고로 투옥되어 정적(政敵)인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였다. 그 후 신원(伸寃)되어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고, 진주(晉州) 덕천서원(德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조대중(趙大中) 1549∼159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우(和宇), 호는 정곡(鼎谷)이다. 1589년 전라도도사로 지방을 순시하던 중 보성에 이르러 부안에서 데려온 관기(官妓)와 이별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것이 당시 반란의 음모로 처형된 정여립(鄭汝立)의 죽음을 슬퍼한 것으로 오해되어,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 장살(杖殺)되었다. 국문을 받던 중 읊은 시가 '난언(亂言)'이라 하여 죽은 뒤 추형(追刑)을 당하였다. 좌막(佐幕) 각 도의 도사(都事)를 말한다. 사람을 해치고 원문의 '석영(射影)'은 물여우의 별칭으로 남모르게 사람을 해친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 되기도 하고 물여우가 되기도 한다.〔爲鬼爲蜮〕"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에서 '역(蜮)'을 설명하면서 "이 물여우는 입에 모래를 머금고 사람의 그림자에 뿜으면 그 사람에게 바로 피부병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꿩이 그물에 걸리는 화 원문의 '치리지화(雉罹之禍)'는 토저치리(兎罝雉理)와 같은 말로 토끼그물에 꿩이 걸린 것이니 무고한 사람이 횡액에 걸린 것을 말한다. 절의설(節義說) 정개청이 지은 동한절의진송청담설(東漢節義晉宋淸談說)을 말한다. 정개청은 본디 서인(西人) 박순(朴淳)의 문인이었으나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동인(東人) 이발(李潑)ㆍ정여립과 교분을 맺음으로써 스승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고는 절의청담변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니, 정철(鄭澈) 등 서인들로부터 배절의론이라는 비난을 얻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卷40. 초사(招辭) 죄인이 법관의 신문(訊問)에 따라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 공초(供招), 공사(供辭)와 같은 의미이다. 채식하였다고 원문의 '행소(行素)'는 상을 당하여 고기나 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菜食)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고기를 먹는 것은 개소(開素)라고 한다. 미천한 …… 내렸고 전국 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연(燕)나라에서 무함을 받고 하옥되어, 하늘을 우러러 억울함을 호소하며 통곡을 하니, 5월에 하늘에서 서리가 내렸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유월비상(六月飛霜)이 원옥(冤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後漢書 卷57 劉瑜列傳》 남조(南朝) 양(梁)의 강엄(江淹)이 지은 〈예건평왕상서(詣建平王上書)〉에 "옛날에 천신이 가슴을 두드리자, 하늘이 연나라 땅에 서리를 내렸다.〔昔者賤臣叩心 飛霜擊於燕地〕"라는 표현이 나온다. 서녀(庶女)가 …… 가물었으니 중국의 한(漢)나라 때 동해 효부(東海孝婦)의 고사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동해(東海)에 사는 수절 과부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며느리가 개가하지 못한다고 여겨 스스로 목을 매 죽었는데, 이에 시누이는 며느리가 핍박하여 시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고소하였다. 이때 우공(于公)이 옥리(獄吏)로 있으면서 힘껏 변호했으나 며느리는 변명할 길이 없어 죄를 시인하고 죽게 되었다. 그후 동해 지방이 3년 동안 가물었고, 나중에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새로 부임하자, 우공이 그 사실을 말하여 그 며느리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게 하니, 곧 비가 내렸다고 한다. 후에 우공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에 올랐는데, 바로 우공이 옥리로 있으면서 쌓은 음덕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史略 卷2 西漢》 재앙을 가져오는 실마리 《시경》 〈상유(桑柔)〉의 "누가 화의 계제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도록 병들게 하였는가.[誰生厲階 至今爲梗]"라는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포증(褒贈) 나라에서 포창하여 관직을 추증하는 것이다. 폐고(廢錮)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말한다. 그 지극함을 …… 하니 《대학장구》 전2장에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是故, 君子無所不用其極.〕"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덕음(德音)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라는 뜻에서 군주가 내리는 명령이나 조칙을 뜻한다. 구천 원문의 '중천(重泉)'은 구천(九泉)과 같은 말로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가는 곳 즉 저승을 가리킨다. 이발(李潑) 1544∼158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이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모반에 가담하였다 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인조반정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길(李洁) 1547∼158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연(景淵), 호는 남계(南溪)이다. 1577년 태묘별시 문과(太廟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사인을 거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뒤에 죽음을 당하였다. 1694년에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충신은 …… 찾으라 《후한서(後漢書)》 권26 〈위표열전(韋彪列傳)〉에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는 까닭에 충성을 임금에게 옮길 수가 있다. 그래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구하는 것이다.〔事親孝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必於孝子之門.〕"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인용한 것이다. 풀과 바람 바람이 불면 풀이 쓸리듯이 윗사람이 인도하면 아랫사람이 따른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이르기를,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된다.〔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草尙之風, 必偃.〕"라고 하였다. 그림자와 메아리 형성에 따르는 그림자와 소리에 따르는 울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밀접하게 호응하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보합(保合) 안정시키고 화합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 〈건괘(乾卦) 단(彖)〉에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고 하였다. 다친 사람을 본 듯한 원문의 '여상(如傷)'은 백성들을 보기를 마치 다친 사람 대하듯이 걱정한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 보기를 마치 다친 사람처럼 하였다.〔文王視民如傷〕"라고 하였다. 아침부터 …… 정사에 대한 원문의 '宵肝(소간)'은 소의간식(霄衣肝食)의 준말로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 입고, 해가 진 후에 늦게 저녁을 먹는다는 뜻으로, 군주가 정사에 부지런함을 뜻하는 말한다. 산동(山東)처럼 …… 반포하시니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박사제자(博士弟子) 가산(賈山)이 천자를 간(諫)하기 위해 지은 〈지언(至言)〉가운데 "산동의 관리가 조령을 포고하자, 아무리 늙고 병든 백성이라도 모두 지팡이를 짚고 와서 들으면서, 잠시나마 죽지 않고 더 살아 덕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山東吏布詔令, 民雖老羸癃疾, 扶杖而往聽之, 願須臾毋死, 思見德化之成.]"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漢書 卷51 賈山傳》 호경(鎬京) 주(周) 나라에서 호경(鎬京)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낙양(洛陽)을 동경(東京)이라 하였으므로, 이것을 모방하여 평양을 호경이라 하였다. 오랑캐 원문의 '험윤(玁狁)'은 중국 북방의 오랑캐 종족인 흉노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랑캐를 통칭한다. 태왕(太王)이 …… 하였으니 빈은 주(周)나라의 근거지로, 옛날 주 태왕(周太王)이 빈 땅에 거주할 적에 적인(狄人)이 침략하자 그곳을 버리고 기산(岐山) 아래로 갔다는 말이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여기서는 임금이 난을 피해 옮겨 간다는 의미로 쓰였다. 성곽과 …… 아닙니다. 《맹자(孟子)》 〈공손추하(公孫丑下)〉에서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해자가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무기와 갑옷이 견고하고 날카롭지 않은 것도 아니며, 양식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다. 〔城非不高也, 池非不深也, 兵革非不堅利也, 米粟非不多也.〕"라고 한 말에 나온다. 원릉(園陵) 일반적으로 왕실의 묘를 통칭하여 원릉이라 한다. 원은 세자ㆍ세자빈, 또는 왕의 후궁(後宮)인 왕의 생모(生母)의 무덤이고,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전교(傳敎) 임금이 명령을 내리는 일이나 그 명령을 이르던 말이다. 어리석은 견해 원문의 '일득지우(一得之愚)'는 자신의 견해에 대한 겸사이다. 천 번을 생각하여 하나를 얻는 어리석음이라는 말로,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에 반드시 한 번쯤의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얻는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원문의 '서제(噬臍)'는 사람이 자기 배꼽을 씹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이 잘못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6년에 "초 문왕(楚文王)이 신국(申國)을 토벌하러 가면서 등(鄧)나라를 지나니 등나라 기후(祈侯)가 초 문왕을 머무르게 하고 대접하였다. 추생(騅甥), 담생(聃甥), 양생(養甥)이 초 문왕을 죽이라고 요청하였으나 등후가 듣지 않았다. 삼생(三甥)이 등나라를 망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니 '만약 미리 도모하지 않으면 나중에 배꼽을 씹으려 한들 되겠습니까.〔若不早圖 後君噬臍 其及之乎〕'라고 하였으나 등후가 듣지 않다가 초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일이 급하면 …… 수 없다 왕암수(王巖叟)의 〈상신종왕안석(上神宗王安石)〉에서는 원문의 '불가(不可)'가 '무(無)'로 되어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원문에 의거하여 국역하였다. "신이 듣자니 일이 급한 자는 천천히 걸을 수 없고, 심장이 아픈 사람은 느긋하게 소리를 낼 수 없다.〔臣聞事之急者, 無徐行, 心之痛者, 無緩聲〕"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宋代名臣奏議 卷116》 천토(天討) 천토유죄(天討有罪)의 줄임말로 하늘이 죄 있는 사람을 응징하고 다스리는 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 일을 임금이 대행하는 것이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법관인 고요가 우(禹) 임금에게 건의하면서 "하늘이 죄 있는 자를 토벌하려 하시거든, 왕께서는 다섯 가지 등급의 형벌을 적용하여 그들을 처벌하십시오.〔天討有罪 五刑五用哉〕"라고 하였다. 임금의 수레 원문의 '육비(六飛)'는 여섯 필의 빠른 말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수레를 끄는 말을 이른다. 당(唐)나라 두목(杜牧)의 〈장안잡제장구(長安雜題長句)〉에 "육비(六飛)가 남쪽으로 부용원으로 행차한다〔六飛南幸芙蓉苑〕"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 할 것입니다 《맹자》 〈양혜왕장구 하〉에 "지금 이곳에서 사냥을 하시면 백성들이 왕의 수레 소리, 말소리를 들으며 깃발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모두 흔연히 기뻐하는 기색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이 질병이 없으신가. 어떻게 사냥을 다 하시는가.' 한다면,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과 더불어 즐거워하시기 때문입니다.〔今王田獵於此, 百姓聞王, 車馬之音, 見羽旄之美, 擧欣欣然有喜色而相告曰; 吾王庶幾無疾病與. 何以能田獵也. 此無他, 與民同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리 …… 있겠습니까? 《맹자》 〈공손추 하〉에서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외성을 포위하여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포위하여 공격하면 반드시 천시(天時)를 얻을 때가 있으련마는,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시가 지리만 못하기 때문이다.〔三里之城、七里之郭, 環而攻之而不勝. 夫環而攻之, 必有得天時者矣, 然而不勝者, 是天時不如地利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3리와 7리는 성곽이 작은 것을 뜻한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 원문의 '강회(江淮)'는 강수 회수를 말하나, 여기에서는 호남(湖南)을 가리킨다. 참고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수양성(睢陽城)이 반란군에 포위되었다. 성 안에 양식이 고갈되자 사람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고 하였으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수양은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깊이 쳐들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수양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新唐書 卷192 張巡列傳》 세류영(細柳營)에서 …… 행차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 주발(周勃)이 장군이 되어 군사를 세류(細柳)에 주둔해 놓고 흉노를 방비하였다. 문제가 직접 가서 군사를 위로하려고 군문에 이르렀으나 위에서 명령한 바가 없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문제가 사자(使者)에게 병부(兵符)를 주어 장군에게 명을 내리자 주발이 명을 내려 문을 열고 군례(軍禮)로 뵙기를 요청하였다. 문제가 군영으로 들어가 돌아보고 말하기를 "정말 장군다운 장군이다. 엊그제 패상(霸上) 극문(棘門)의 군대는 어린아이가 장난하는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57 周勃世家》 단연(澶淵)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으로, 송(宋) 나라 때 구준(寇準)이 거란(契丹)을 물리친 곳이다. 송 나라 진종(眞宗)이 즉위한 함평(咸平) 초년에 거란군이 침입해 오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황제에게 남쪽으로 피해 가 있을 것을 청하였으나, 구준만은 친정(親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진종이 친정을 결정하였으나, 남성(南城)에 이르러서는 군사를 주둔한 채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구준이 다시 강을 건너기를 고집하여 황제가 할 수 없이 강을 건넜는데, 이로 인해 사기가 고무되어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거란을 물리친 뒤 거란에서 화친을 요청하자, 구준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황제가 구준의 말을 듣지 않고 화친하였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진(秦)나라에서 …… 내어주기를 청하여 춘추 시대 초(楚)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일찍이 초왕(楚王)이 자기 가족을 주멸(誅滅)할 때에 홀로 오(吳)나라로 도망가 있다가 뒤에 그 보복(報復)을 하기 위해 오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로 쳐들어가자, 초나라의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나라에 가서 원병(援兵)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가 정장(庭墻)에 기대서서 7일 밤낮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통곡을 계속하니, 진나라에서 그의 정성에 감동되어 마침내 원병을 보내서 초나라를 구원해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종택(宗澤) 1060∼1128. 북송 말 남송 초의 명신으로, 자는 여림(汝霖)이다.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재직할 때 20여 차례에 걸쳐 고종(高宗) 조구(趙構)에게 상소하여 남경(南京)에서 동경 즉 개봉(開封)으로 환도할 것을 주장하고 중원을 수복할 방책을 제정하자고 건의하였는데,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화병이 났고, 7개월 뒤 임종할 때에 "황하를 건너라.〔過河〕"라는 말을 세 번 외치고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360 宗澤列傳》 소순(蘇洵) 1009∼1066. 중국 송(宋)나라의 문인ㆍ학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예리한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평론(評論)으로 구양수(歐陽脩)의 인정을 받아 명성을 떨쳤으며, 아들 소식(蘇軾)ㆍ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로 일컬어진다. 백 번 ……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소순(蘇洵) 편 〈심적론(審敵論)〉 "우리가 백 번을 싸워 상대를 이겨서, 상대가 굴복하더라도 우리 또한 수고로울 것이다.〔我百戰而勝人, 人雖屈, 而我亦勞.〕라고 한 말에 나온다. 소강(少康) 상(相)의 유복자로, 한착(寒浞)을 죽여 아비의 원수를 갚고 하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이다. 《春秋左氏傳 襄公4年, 哀公元年》 후예(后羿)가 태강(太康)을 내쫓고 중강(仲康)을 세우고서 정권을 독단하였고, 그의 신하 한착이 후예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고, 한착의 아들 오(奡)가 상을 시해하였는데, 상의 아들 소강(少康)이 5백 명의 군사로 오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장준(張浚) 1097∼1164. 남송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금(金)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고종(高宗)은 항주(杭州)로 피신하였는데, 고종을 호위하던 묘부, 유정언 등이 고종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장준이 한세충(韓世忠) 등과 군사를 내어 난을 토벌하고 고종을 복위시켰다. 《宋史 卷361 張浚列傳》 천금의 …… 않는다. 임금이 험난한 곳에 가지 말라는 뜻이다. 참고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말을 타고 험한 언덕을 치달리려 하자, 원앙(袁盎)이 "귀한 집 아들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 법이다.〔千金之子, 坐不垂堂.〕"라고 하면서 만류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101 袁盎列傳》 적로(賊虜)를 …… 남겨드리지 않는다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노(魯)에 있을 적에, 경감(耿弇)이 장보(張步)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출동하였는데, 이에 진준(陳俊)이 경감에게 상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잠깐 전투를 멈추고 기다리자고 건의하자, 경감이 "승여가 곧 도착할 터이니, 신자로서는 응당 소를 잡고 술을 걸러서 백관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 거꾸로 적로를 처리하는 일을 군부에게 남겨 드린단 말인가.〔乘輿且到, 臣子當擊牛釃酒以待百官, 反欲以賊虜遺君父邪.〕"라고 하고는 크게 싸워서 적을 대파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0 耿弇列傳》 시석(矢石) 화살과 쇠뇌로 발사하는 돌을 이른 말로, 전하여 전쟁을 뜻한다. 원문(轅門) 수레의 끌채를 마주 세워 문의 모양을 만든 것으로, 병영(兵營)의 문을 가리킨다. 우(禹)임금은……보았고 우 임금이 군대를 거느리고 묘족을 복종시키려 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묘족이 지형의 험고(險固)함과 군대의 강함을 믿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익(益)의 간언을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하고 덕교(德敎)를 숭상하는 의미에서 간척(干戚)과 우모(羽毛)를 들고 춤을 추자 70일 만에 묘족이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書經 大禹謨》 애통한 조서(詔書)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亂)을 피하여 봉천(奉天)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육지(陸贄)가 덕종에게 아뢰어 황제 자신을 책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내리게 하였다. 《당서(唐書)》에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금암습유 錦巖拾遺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해봉사 【선조 32년(1599) 8월 2일, 전 별좌로 산거(散居)해 있을 때.】 己亥封事 【宣祖, 三十二年八月初二日, 以前別坐散居時.】 삼가 아룁니다. 옛날 제왕은 어려움을 구제하고 막힌 것을 제거하는1) 때를 당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돌아왔다고 여기지 않고 천명을 받들어 따르는2) 정성을 더욱 생각하였으며, 인심이 이미 안정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위로하며 기뻐하는 도리를 더욱 지극히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품은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깨우쳐 이끌어준 뒤에야 아래에서 막히는 마음이 없고,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다면 반드시 씻어준 뒤에야 위에서 슬퍼하는 환란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이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사이입니다.지금 우리나라는 막힌 운수가 다시 형통하여 흉악한 적이 물러가 변방의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고, 세자3)가 탄생하는 상서를 맞아 경사가 종묘사직에 이어졌으니, 오늘날 하늘의 뜻이 보살펴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신(君臣)을 거짓으로 속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4) 통쾌하게 분별하니 신민(臣民)은 서로 기뻐하고, 전쟁의 아픔에서 막 일어나 사졸들이 편히 쉬게 되니5) 오늘날의 인심이 대체로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미 돌아오고 인심이 이미 안정되었는데 전하께서 정사를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는 마음이 하나같이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에서 나와 백성의 괴로움을 돌보고 날마다 조세를 덜어 감면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며,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하여 수신(修身)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더욱 부지런히 하시니, 이것은 바로 성탕(成湯)이 백성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성대한 마음6)인 것입니다. 마땅히 한 사람의 백성과 하나의 사물도 은택을 입지 않음이 없으나 홀로 역적의 변란에 갑자기 걸려 황천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억울함을 깨끗이 씻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과 사람이 감응한 바를 성상께서 마땅히 측은하게 생각하실 바가 아니겠습니까?아! 지난해 국운이 불행하여 역적의 변란이 사대부의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정여립은 당초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적이 아니어서 왕망(王莽)7)처럼 세상을 속이는 교묘한 재주를 끼고, 육당(陸棠)8)처럼 착한 척하는 명성을 가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선비들 중에 그 이름을 알거나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자가 없었는데, 겸허하거나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속임을 당하였으니, 그 극악무도한 형태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꿰미에 가득 찬 죄가 갑자기 천만 뜻밖에 일어나니, 당시 속았던 선비들은 마음으로 놀라고 뼛속까지 통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자신들이 밝지 못했던 죄를 후회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밝게 살피고9) 널리 비추시어 거울과 저울대처럼 스스로 바르게 하고, 일찍이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을 아프게 여기시어 요수(要囚)10)를 크게 결단할 때 더욱 간절하고 신중히 분별할 것을 생각하셨으니 어찌 청명한 아래에서 원통한 마음을 품은 자가 있었겠습니까?다만 간신 정철(鄭澈)은 사납고 고약한 성질로서 잔인하고 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희학(戱謔)과 방탕으로 가식을 떨지만 속으로는 시기심이 가득하니, 맑은 의논에 용납되지 않아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몰래 그 틈을 엿보아 반드시 보복하고자 하더니 오늘에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 몸소 심문하는 관원이 되어 일망타진할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조금이라도 흘겨보는 눈초리가 있는 자는 은밀하게 경박한 무리를 사주하였으니, 소장(疏章)에 나오지 않으면 반드시 대론(臺論)11)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만약 하늘같은 성상이 아니었다면 당대의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 중에 반드시 남은 자가 없었을 것이니 당시의 일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그 당시 원통함을 안고 죽음에 나아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신들이 거주한 도내(道內)에서 가장 원통한 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개청은 진실한 실천으로 덕이 완성되었고 행동은 존엄하였으며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따라 사도(斯道)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일찍이 호남 일부 선비들의 습관이 간신 정철에게 물들어 오로지 교만하고 포학하기에만 힘쓰고 의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으니, 어떤 이는 스스로 절의를 표방하였으나 명교(名敎)12)에는 전혀 몽매하였고, 어떤 이는 청담(淸談)을 흠모하고 본받는다고 하나 실은 이록(利祿)을 탐하였습니다. 그 귀결점을 돌아보면 모두 세교(世敎)에 해로움이 있기 때문에 정개청은 매번 이를 일세(一世)를 그르치는 폐해라 여겨 후학의 폐단이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급기야 《주자어류(朱子語類)》13)를 읽다가 혹자가 이천(伊川)의 말을 인용하며 "진송(晉宋)의 청담(淸談)이 동한(東漢)의 절의(節義)로 인하여 한번 물결이 쳐서 이에 이르렀다."고 하자, 주자(朱子)가 "동한에서 절의를 숭상할 당시에도 청담과 같은 의사가 본래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대개 당시 절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거만하게 흘겨보고 조정을 더럽게 여기는 뜻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사에서 자연히 천하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게 되어, 얼마 있다가 청담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14) 또 "절의 있는 선비는 진실로 마땅히 말할 지위에 있지 않았으니, 재앙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였습니다.15) 또 "후한(後漢)의 명절(名節)이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은 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었다. 이것이 그치지 않고 쌓이면 그 폐단이 반드시 허탄(虛誕)함에 이르러 노장(老莊)으로 들어가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16) 또 "진송(晉宋)의 인물이 비록 청고(淸高)한 것을 숭상한다고 말하였으나 개개인마다 관직을 탐내었으므로 이쪽에서는 청담을 말하지만 저쪽에서는 일면 권세를 부리며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습니다.17) 정개청은 이 주자의 논설로 인하여 진・송 시대 청담의 폐해를 밝혀 호남의 선비 습관에 대한 폐단을 구제하려 한 것이었습니다.그러나 간적(奸賊)은 평생 심술이 군자의 올바른 견해에 드러남을 미워하여 은밀히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으되 엿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역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간적은 본도(本道)에서 행동에 검속(檢束)이 없고 망령된 홍천경(洪千璟),18) 임회(林檜)19)와 같은 무리들을 사주하여 이에 정개청이 저술한 논설에 임의로 '배(排)'자를 더하여 배절의(排節義)20)라 지목하고, 유생들의 공론으로 빙자하여 상소를 올려 모함하니, 일시에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그 상소에 들어가 거의 한 그물에 모조리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성상이 실상을 밝게 살핌을 힘입어 상소의 앞부분에 이름을 올린 10여 명을 잡아와서 장차 무함한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정철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이를 막고 도리어 정개청이 저술한 절의설에 대해 엄한 형벌을 내릴 것을 청하여 마침내 먼 변방에서 죽게 하였으니, 천지 사이의 원통함 중 무엇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아! 하늘은 푸르지만 말이 없고 죽은 사람 또한 구천에서 스스로 밝히지 못하니, 신들이 청컨대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가 지은 글의 뜻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 글의 첫머리에 "동한의 절의를 공명(功名)과 비교한다면 그 고상함이 오히려 완고한 자를 격동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킬 수 있으며, 진송의 청담을 이익만 도모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 기개가 또한 세상의 마음을 바로잡고 외물을 진정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는 참된 절의를 비방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말류의 폐단을 구제하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르기를 "그 처음을 살펴보면 모두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학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절의라는 것은 바로 명덕(明德)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명덕이라는 것은 바로 절의의 근본인 것입니다.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명덕(明德)을 알게 하면 환란에 임하거나 생사의 기로에 처할 때에 의리가 있음을 알고 이욕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임금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절의에 대해 기약하지 않아도 높은 절의가 곧바로 해와 달과 함께 다투어 빛날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륜(彝倫, 사람으로서 떳떳이 지켜야할 도리) 밖에서 독선(獨善)하며, 자신을 단속하고 예방하는 절도를 스스로 방일(放逸)한 것은 말세에 숭상하는 일이요, 성현의 중화(中和)하는 도(道)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중화(中和)의 두 글자는 만 가지 선(善)이 구비되어 오직 요(堯), 순(舜), 공자(孔子), 맹자(孟子)만이 해당할 것입니다. 만일 자식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신하가 신하된 도리를 다하여 삼강오륜의 도리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마땅함을 얻지 아니함이 없으면 곳곳마다 중도(中道)를 얻어 중화(中和)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절의를 버리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이 두어 조목을 가지고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그가 저술한 논설은 정자·주자가 남긴 의론을 조술(祖述)21)하여 절의의 근본을 북돋고 후세에 허황되고 실상이 없는 폐단을 구제하려 한 것이니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간적이 중상모략하는 자료가 되어 사방에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온 세상의 이목을 어지럽히기게 이르렀으니, 어떻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아! 고금 천하에 비록 사림의 화가 많이 있었으나, 어찌 오늘날처럼 참혹함이 있었겠습니까? 정개청은 머리가 세도록 경서(經書)를 연구하면서 산림에 자취를 감춰 본래부터 역적과는 서로 접촉하지 않다가 계미(癸未 1583)년에 사서 교정 낭청(四書校正郞廳)으로 공무를 보는 좌석에서 함께 나란히 하고서야 비로소 그 얼굴을 알았으나 갑자기 어버이 병환으로 먼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 교분이 매우 얕았으며, 마침 동료였기 때문에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물은 것이 겨우 두 차례였을 뿐 이것은 마음을 비우고 있다가 속임을 당한 소치에 불과하니 한때 사대부가 살피지 못한 공죄(公罪)입니다.그 아우 정대청(鄭大淸) 또한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여 행실이 효우(孝友)에 독실하였는데, 형이 무고하게 죽은 것을 애통하고 신원(伸冤)될 것을 바라며 상복을 입고 슬퍼하다가 파리하여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이 지금 10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으니, 대개 보고 들은 자라면 누구인들 오열하며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15~6세 때로부터 일찍이 외종숙(外從叔) 유희춘(柳希春)22)에게 수학하였는데, 유희춘은 정개청을 함양한 공력이 깊어 마땅히 후배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라 여겨 신들에게 빨리 가서 따르도록 권하였으니, 신들이 마침내 자신의 몸을 맡겨 스승23)으로 섬기고 따른 지 거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외우고 강론하는 것은 《소학(小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육경(六經)의 책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강론하며 밝혔던 것도 다만 인(仁)·의(義)·예(禮)·악(樂)·천리(天理)·인욕(人慾)을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결점을 살펴보니 신하된 자는 충성하고 자식된 자는 효도하라는 것 아님이 없거늘, 어찌 감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고 이미 죽은 스승을 두둔하여 성상을 기망하고자 하였겠습니까?삼가 생각건대 스승과 제자의 의리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떳떳한 본성에 근거하여 차마 존망(存亡) 때문에 그 마음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망령된 생각에 사유(師儒)가 역당(逆黨)에 연좌됨이 진실로 사문(斯文)의 성쇠와 치도(治道)의 고하(高下)에 관계된다고 여겼으므로 지난 을미년(1595) 봄 신들이 감히 발을 싸매고 천 리 길을 와서 구중궁궐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소원하고 미천한 신하의 말을 굽어 살피어 채택하여 주시고, 이에 지당한 의론이라고 하유(下諭)하시니, 정녕 혈기 있는 모든 이들 중에 흥기하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당시에 대신(大臣)의 회계(回啓)24)하는 말이 애매모호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성상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뜻이 조정과 재야에 명백히 선포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조정의 의론과 대각(臺閣)의 논의가 지성으로부터 나와 기필코 국시(國是)25)를 정하고자 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인심이 더욱 막히고 사론(士論)이 더욱 격절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아! 10년이면 반드시 회복하는 것은 천도(天道)이며, 민멸되었다가도 다시 펴지는 것은 공론입니다. 지난날 다행히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 민심을 통촉하시어 당시에 모함 받아 귀양 갔던 자들이 모두 용서받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원통함을 풀어 높은 벼슬의 포증(褒贈)이 이미 최영경에게 더하였으나, 유독 정개청만은 아직 은전이 늦어지고 있으니, 어찌 오구(梧丘)26)가 구천에서 눈을 감지 못할 뿐이겠습니까? 민심이 꽉 막히고 선비의 기상이 사라져 천하의 어짊이 이에 이르러서 유감이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신들이 지난 사적을 살펴보니 동탁(董卓)의 화27)가 바야흐로 커질 때 식자들은 금고(禁錮)의 형벌을 풀어줄 것을 급선무로 삼았고, 백안(伯顔)의 난이 비로소 성대했을 때 왕응린(王應麟)은 제왕(濟王)의 후손 세울 것을 청하였으니,28) 한두 명의 군자가 원통함을 머금은 것이 적(敵)과 보루에서 대치하는 것보다 급하지 않은 것 같으나, 옛 사람들이 반드시 이에 급급한 까닭은 어찌 한 사람의 마음이 곧 천만인의 마음 같아 보이지만 인심의 향배와 천명(天命)의 길흉에 진실로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두 더불어 유신(維新)하는 날이 진실로 적과 보루에서 대치하는 때와 다르며, 원한을 머금고 죽은 혼백이 당고(黨錮)29)와 제왕(濟王)30)의 원통함보다 더 심함이 있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그 원통함을 씻어 인심을 위로하고, 인심을 위로하여 천심(天心)을 흠향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신들이 간절하게 피눈물을 흘리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전하를 위함이요, 억울한 자를 위함이 아니라 사직을 위해서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히 초야의 말을 받아들이시고, 비와 이슬31) 같은 은택을 널리 펼치시어 오랫동안 막혔던 인심과 땅속에 묻혀 썩은 백골로 하여금 푸른 하늘의 대낮처럼 시원함을 보게 하신다면 진실로 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오래케 하는 하나의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유념하여 받아들이소서. 신들은 지극히 황공하여 떨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비답(批答)에서 대략 "처음부터 역적으로 지목하여 국문하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대개 옳고 그름은 마땅히 조정의 처분에서 나올 것이니, 너희들의 뜻이 비록 근실(勤實)하지만 매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伏以古之帝王, 當濟屯傾否之時, 不謂天意之已回, 而益思其奉若之誠, 不謂人心之已安, 而更盡其慰悅之道. 民有所抱而必使之導達, 然後下無壅閼之情, 冤有可釋而必爲之湔滌, 然後上無感傷之患. 然則不可不通者, 冤鬱之情, 而不可不愼者, 天人之際也. 今我國家否運重亨, 劇寇退遁, 而邊警少弛, 春闈誕祥而慶延宗祊, 則今日之天意, 可謂眷佑矣. 邦誣快辨而臣民胥悅, 鎗病初起而士卒息肩, 則今日之人心, 可謂粗安矣. 天意已回, 人心已安, 而殿下憂勤之念, 一出於惻怛, 恤民隱, 而日下蠲免之令, 懼天災而益勤修省之道, 此政成湯與民, 更始之盛心也. 宜無一民一物之不被其澤, 而獨有橫罹逆亂, 抱冤重泉者, 尙不能昭雪於此時, 則豈非天人之所感, 而聖明之所當惻念者乎. 嗚呼! 頃年, 邦運不淑, 逆賊之變, 出於搢紳之間. 汝立初非放火劫人之賊, 挾王莽欺世之巧, 假陸棠詐善之名, 一國士類, 莫不有知其名見其面者, 而虛懷好善之人, 最爲所誣, 夫豈知窮凶大懟, 至於此極也? 貫盈之罪, 忽出於千萬意慮之外, 一時受欺之士, 莫不心驚骨痛, 悔自己不明之罪, 而自上离明旁燭, 鑑衡自正, 睿念嘗軫於玉石之俱焚, 愼簡益切於要囚之丕蔽, 則豈有含冤抱痛於淸明之下哉? 第以奸臣鄭澈, 以狠愎之資, 懷慘毒之心, 外假謔浪, 內實猜忌, 爲淸議所不容, 常有怏怏之心, 陰伺其隙, 以爲必報之地, 自幸今日可遂吾志, 身爲案問之官, 乃成網打之計. 平日少有睚眥者, 陰嗾浮薄之輩, 非出於疏章, 則必發於臺論, 倘微聖明如天, 一世之忠賢, 必將無遺類矣. 當日之事, 可不寒心哉? 其一時抱枉就死者, 不知其幾何, 以臣等所居一道內之最爲冤痛者言之, 鄭介淸眞踐履實, 德成行尊, 一從程朱之學, 以闡明斯道爲己任. 嘗患湖南之一種士習, 薰染於奸澈, 專務驕虐, 不循義理, 或自托於節義, 而專然曚昧於名敎, 或慕效於淸談, 而實是貪戀於利祿. 顧其歸則俱有害於世敎, 故介淸每以是爲誤一世之害, 恐爲後學之弊, 而及讀朱子語類, 有或引伊川之言, 而晉宋淸談, 因東漢節義, 一激而至此, 朱子曰: "東漢崇尙節義之時, 便自有這箇意思了. 蓋當時節義底人, 便有傲睨一世, 汚濁朝廷之意, 這意思, 便自有高視天下之心, 小間流入於淸談." 又曰: "節義之士, 固非是其位之所當言, 宜足以致禍." 又曰: "後漢名節, 至於末年, 有貴己賤人之弊. 積此不已, 其弊必至於虛浮, 入老莊." 又曰: "晉宋人物, 則雖曰尙淸高, 然箇箇要官職, 這邊一面淸談, 那邊一面招權納貨云云." 因此朱子之說, 以發明晉宋淸談之害, 以救湖南士習之痼弊, 而奸賊惡其平生心術敗露於君子之正見, 陰畜欲殺之心, 而無隙可乘. 及逆變之出, 奸賊指嗾本道無行檢悖妄如洪千璟·林檜輩, 乃於介淸, 所著說上, 任加排字, 目之以排節義, 托以儒生公議, 上疏構陷, 一時名流, 盡入於其疏, 幾爲打盡於一網之中. 而幸賴聖上洞燭情狀, 乃以疏頭十餘人拿來, 將治誣捏之罪, 而澈也嗾臺諫沮之, 反以介淸所著節義說, 請爲嚴刑, 竟死於絶域. 天地間冤痛, 孰加於此乎? 嗚呼! 天旣蒼然而無語, 死者亦不得自明於九原, 臣等請代死者, 釋其著書之旨也. 其書之首曰: "東漢節義, 較以功名, 則其高尙猶可以激頑起懦, 晉宋淸談, 視之謀利, 則其氣岸, 亦足以矯情鎭物"云, 則非訾其眞節義, 而只救其末之弊明矣. 又曰: "源其所始, 皆不知有明德新民之學"云, 則節義者, 卽明德中一事, 明德者, 乃節義之根柢也. 如使人皆知明德, 則臨患難處死生, 知有義而不知有利, 知有君而不知有身, 不期於節義, 而節義之高, 直與日月爭光明矣. 又曰: "獨善於彝倫之外, 自逸於檢防之節, 是衰世之所尙, 而非聖賢中和之道"云, 則中和二字, 萬善具足, 唯堯舜孔孟, 可以當之. 如子而盡爲子之道, 臣而盡爲臣之道, 以至於三綱五常, 莫不各得其當, 而隨處得中, 乃可謂之中和, 是豈捨節義而言之乎? 將此數條而究其旨, 則其所著說, 乃祖述程朱之餘論, 以培壅節義之根本, 而救後世浮虛無實之弊也, 至深且切矣, 而反爲奸賊射影之資, 至於榜示四方, 以惑亂一世之耳目, 可勝痛哉? 嗚呼! 古今天下, 雖有士林之禍, 豈有如今日之慘酷哉? 介淸白首窮經, 晦跡林下, 本與逆賊不相接, 而歲在癸未, 以四書校正郞廳, 同列公座, 始知其面, 而旋以親病先歸, 則其相知之分甚淺, 而適以同僚故,以書相問者, 纔二度, 此不過虛懷見欺之所致, 是則一時士夫不察之公罪也. 其弟大淸, 亦嘗從事於學而行篤孝友, 痛兄非辜, 冀其伸雪, 悲哀服喪, 枯朽將死, 今至十年之久, 凡在瞻聆, 孰不嗚咽而傷痛哉? 臣等自十五六歲時, 嘗受學於表從叔柳希春, 希春以鄭介淸爲涵養功深, 宜後生師表, 勸臣等亟往從之, 臣等遂委己從事於函丈之間, 幾二十餘年. 其所誦說者, 不過小學語孟六經之書, 所講明者, 又只是仁義禮樂天理人欲之辨, 而考其歸趣, 無非爲臣者忠, 爲子者孝而已, 豈敢阿其所好, 欲護已死之師, 而欺罔聖聰哉? 第念師生之義, 根於秉彝之天, 不忍以存亡貳其心, 而妄謂師儒坐黨, 實關於斯文之盛衰治道之汚隆, 故頃在乙未春, 臣等乃敢千里裹足, 訟冤於九重. 自上俯採疏賤之言, 乃以至論下諭, 丁寧凡有血氣者, 莫不聳動感泣, 而第緣當時大臣回啓之辭, 糢糊不明, 遂使聖上好善惡惡之意, 不得昭布於朝野, 厥後廟堂之議, 臺閣之論, 未聞有出血誠擔當期以必定國是者, 人心之愈鬱, 士論之益激, 政在於此也. 嗚呼! 十年而必復者, 天道也, 泯滅而再伸者, 公論也. 頃幸天啓聖心, 洞燭輿情, 其一時被誣竄謫者, 並皆蒙宥, 枉死者, 得以伸雪, 崇秩之褒, 已加於永慶, 而獨於介淸, 尙稽恩典, 豈唯梧丘之目, 不瞑於九原而已? 抑恐羣情堙鬱, 士氣銷鑠, 天地之仁至此, 而不能無憾也. 臣等考諸往牒, 董卓之禍方張, 而識者以解黨錮之禁爲先, 伯顏之亂始熾, 而應麟以立濟王之後爲請, 一二君子之含冤, 似不急於臨敵對壘之日, 而古人之所以必汲汲於此者, 豈不以一人之心, 卽千萬人之心, 而人心之向背, 天命之吉凶, 實有大可畏者而然歟? 咸與維新之日, 固異於臨敵對壘之時, 而茹恨閉骨之魂, 有甚於黨錮濟王之冤, 則今日之急務, 其不在於釋冤枉而慰人心, 慰人心而享天心乎? 此臣等之所以懇懇瀝血不能已者, 非爲死者也, 爲殿下也, 非爲冤枉也, 爲社稷也. 伏願殿下, 特採草野之言, 渙發雨露之澤, 使久鬱之人心, 入地之朽骨, 快覩靑天之白日, 則實扶斯道壽國脈之一大機也. 伏惟殿下, 留神採納焉. 臣等不勝兢惶戰慄之至, 謹昩死以聞.答略曰: "初非指爲逆賊而鞫之也." 又曰: "大抵是非, 當出於朝廷, 爾等之志雖勤, 不須每煩." 막힌 것을 제거하는 원문의 '경비(傾否)'는 비색(否塞)한 운수를 없앴다는 말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구(上九)〉에 "상구는 비색함을 제거하는 것이니 먼저는 비색하고 뒤에는 기쁘다.〔上九, 傾否, 先否後喜.〕"라고 하였다. 천명을 받들어 따르는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유하가 덕에 어두워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거늘 하늘이 마침내 왕에게 용맹과 지혜를 내려주시어 만방을 표정하여 우왕(禹王)이 옛날 행하셨던 것을 잇게 하시니, 이는 그 떳떳함을 따라서 천명을 받들어 순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有夏昏德, 民墜塗炭, 天乃錫王勇智, 表正萬邦, 纘禹舊服, 玆率厥典, 奉若天命.〕"라고 한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세자 원문의 '춘위(春闈)'는 봄에 시행하는 과거 시험장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춘궁(春宮)'과 같은 말로 세자를 가리킨다. 군신(君臣)을 …… 왜곡하는 것을 원문의 '방무(邦誣)'는 군신(君臣)을 거짓으로 속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례》 〈추관(秋官) 사사(士師)〉에 죄와 사건을 판결한 여덟 가지 성례(成例)인 팔성(八成) 가운데 하나이다. 편히 쉬게 되니 원문의 '식견(息肩)'은 짐을 내려놓고 어깨를 쉰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년에, "정나라 성공이 병을 앓았을 때 자사(子駟)가 진(晉)나라에 식견(息肩)하기를 청하였다.〔鄭成公疾,子駟請息肩於晉.〕" 하였다. 성탕(成湯)이 ……마음 은(殷)나라 왕 성탕(成湯)의 천품은 지극히 어질어 금수(禽獸)까지도 살리려 하였으며, 7년의 큰 가뭄이 있을 때에는 자신이 희생(犧牲)이 되어, 상림(桑林) 들에 나가 비를 빌어서 큰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히기도 하였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은기(殷紀). 왕망(王莽) 한(漢)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친정 조카이다. 자는 거군(巨君)이다. 대사마(大司馬)로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다. 평제(平帝) 때에 안한공(安漢公)이라 불렀고 지위가 더욱 귀해지자, 평제를 시해하고 유자(孺子) 영(嬰)을 세워 섭정(攝政)하고 가황제(假皇帝)라 불렀다. 마침내 한실(漢室)을 찬탈(簒奪)하고 국호(國號)를 신(新)이라 하였다. 뒤에 법령이 까다로워 민심을 잃고 난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광무제(光武帝)에게 패하여 죽었다. 《漢書 卷99 王莽傳》 육당(陸棠) 구산(龜山) 양시(楊時)의 사위로, 그가 구산을 찾아올 적마다 용모가 장중하고 언제나 단정하게 앉아 있어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이에 구산이 사위로 삼았는데 후에 난리를 일으킨 범여위(范汝爲)의 무리가 되었다가 범여위가 패하자 극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朱子書節要講錄刊補 卷3 答楊子直》 밝게 살피고 원문의 '이명(离明)'은 원래 밝은 해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임금에 위에서 밝게 비추는 것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离)는 불이 되고 해가 된다.[离爲火, 爲日.]"라고 하였다. 요수(要囚) 요수는 죄인을 심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대론(臺論)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공론(公論)을 말한다. 명교(名敎) 명분(名分)을 중시하는 예교(禮敎)를 이르는 말로 흔히 유교(儒敎)를 지칭한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와 제자들의 문답(問答)을 기록하여 모은 책이다. 송(宋)나라 경정(景定) 4년(1263, 이종4)에 여정덕(黎靖德)이 분류, 편집하여 함순(咸淳) 6년(1270, 도종6)에 《주자어류대전(朱子語類大全)》 140권을 간행하였다. 혹자가 …… 하였습니다 《주자어류》 권34 〈논어(論語)16 술이편(述而篇)〉 자위안연왈장(子謂顔淵曰章)에 나온다. 절의의 …… 하였습니다 《주자어류》 권135 〈역대(歷代)2〉 문기원조(問器遠條)에 나온다. 후한의 …… 하였습니다 《주자어류》 권129 〈본조(本朝)3 자국초지희령인물(自國初至煕寧人物)〉에 나오는데, 대본은 원문의 일부 내용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비록 …… 하였습니다. 《주자어류》 권34 〈논어16 술이편〉 자위안연왈장(子謂顔淵曰章)에 나온다. 홍천경(洪天璟) 1553~163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옥(羣玉), 호는 반환・반항당(盤恒堂)이다.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ㆍ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군량의 수집과 수송을 담당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에서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하였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임회(林檜) 1562~1624.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1년 50세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나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고, 1613년에는 양산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 정랑에 복직되었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 경안역(慶安驛)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배절의(排節義) 선조(宣祖)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로 화(禍)를 입은 정개청(鄭介淸)이 지은 〈동한절의진송청담설(東漢節義晉宋淸談說)〉을 가리킨다. 그 내용이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고 하여서 정철(鄭澈)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화를 입었다. 정개청은 본래 서인(西人) 박순(朴淳)의 문인이었으나,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동인(東人) 이발(李潑)ㆍ정여립과 교분을 맺음으로써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비난을 받고는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니, 정철 등 서인으로부터 '배절의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술(祖述) '조(祖)'는 조종(祖宗)처럼 높인다는 뜻이요, '술(述)'은 이어서 따른다는 뜻이니 '조술한다'는 말은 높이어 따른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0장에 "공자는 멀리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조종(祖宗)으로 받들어 계승하고, 가까이로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드러내 밝혔다.〔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라는 하였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저서에 《미암일기(眉巖日記)》, 《역대요록(歷代要錄)》, 《주자어류훈석(朱子語類訓釋)》, 《시서석의(詩書釋義)》 등이 있다. 스승 원문의 '함장(函丈)'은 선생(先生)이나 장자(長者)가 앉는 자리를 뜻하는 말로, 함연(函筵)이라고도 한다. 제자는 스승의 자리와 한 발[一丈]의 거리를 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던 일을 말한다. 국시(國是) 국민 전체가 옳다고 인정한 주의(主義)와 시정(施政)의 근본 방침으로 다시 말해, 확정되어 있는 한 나라의 방침을 말한다. 오구(梧丘) 죄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가리킨다. 제 영공(齊靈公)이 사냥갔을 때 무죄한 다섯 장부(丈夫)를 죽여 그들의 머리를 잘라 묻었는데, 그 뒤에 경공(景公)이 오구(梧丘)에서 사냥할 때 꿈에 다섯 장부가 나타나서 무죄함을 호소했다. 경공은 그곳을 파서 다섯 해골을 찾아내어 장사를 잘 지내주었다 한다. 《안자(晏子)》 잡하(雜下). 동탁(董卓)의 화 후한(後漢)의 장군으로,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였다. 원소(袁紹)가 기병하여 동탁을 토벌하러 나서자, 낙양의 궁묘(宮廟)와 100리에 걸친 지역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으며 스스로 태사(太師)가 된 후에는 횡포가 더욱 심하였는데, 이후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다. 《後漢書 卷72 董卓列傳》 백안(伯顏)의 …… 청하였으니 송(宋) 나라 영종(寧宗)이 아들이 없어서 종실 중에서 제왕 횡(濟王竑)을 양자로 데려왔는데, 그때의 권력 있는 신하 사미원(史彌遠)의 참소로 죄없이 죽고, 다시 다른 종실에서 양자하여 들여서 후에 이종(理宗)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북쪽에서 몽고의 대군이 침입하여 내려오는데 백안(伯顔)은 몽고의 대장이었다. 그의 침략으로 송 나라의 국운은 풍전등화 같았으나, 그때 왕응린이라는 사람이 제왕(濟王)이 무죄하게 죽은 것을 말하고 그를 위하여 입후(立后)할 것을 청하였다. 당고(黨錮)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때 진번(陣蕃)ㆍ이응(李膺) 등 우국지사가 환관(宦官)의 발호를 미워하여 대학생(大學生)들을 거느리고 환관을 공격하니, 환관들이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이라고 도리어 몰아 이들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그 사진(仕進)의 길을 막았으며, 영제(靈帝) 때 두무(竇武)ㆍ진번(陣蕃) 등이 환관 등을 죽이려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그와 뜻을 같이하는 1백여 명과 함께 피살한 사건을 말한다. 제왕(濟王) 송나라 조횡(趙竑)으로, 기왕(沂王) 조병(趙抦)의 후사가 되어 황자(皇子)에 책립되었으나, 사미원(史彌遠)의 농간으로 이종(理宗)이 즉위한 뒤 제왕에 봉해지고 핍박을 당하여 죽었다. 《宋史 卷255 鎮王竑列傳》 비와 이슬 원문의 '우로(雨露)'는 곧 촉촉이 내려 적셔 주는 비와 이슬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임금의 은택(恩澤)에 비유한다. 당나라 고적(高適)의 〈협중으로 가는 이소부와 장사로 가는 왕소부를 보내다〔送李少府貶峽中王少府貶長沙〕〉 시에 "지금은 태평성대 은택이 많아 잠시 이별하는 것이니 주저하지 말게.〔聖代即今多雨露, 暫時分手莫躊躇.〕"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세 아들 찬소, 계소, 위소에게 경계하다 戒三子纘素繼素緯素 장남은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고, 차남은 허술하여 실속이 없으며, 막내는 협애(狹隘)한데, 모두 식견(識見)이 없다. 그리고 또한 각자의 기질에 병통이 있으니 만약 학문의 공과 변화의 힘을 이루는 데 급급하지 않으면 단지 옛 기량에만 의지한 채 향상되는 점을 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나이가 서른에 가까운데 아직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답습에만 골몰하여 시골 사람과 똑같은 모양이니 부모와 형제의 책망이 이른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느냐? "말이 충신(忠信)하지 못함이 하등인이고, 행실이 독후하고 공경하지 않음이 하등인이다."34)라고 하등의 말을 듣고 하등의 일을 하니 너희들은 장차 하등의 인물이 되는 데 그치려고 하느냐?아! 이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질이 아름답고 또 부지런히 교육하였으나 아직 작은 효과도 보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가 장차 어찌할까? 어버이를 섬기는 절차며 몸을 행하는 방법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 속세의 하등인과 똑같다면 풍모와 절조가 늠름하고 준엄하며 학문이 높고 밝음은 더욱 바랄 수 없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힘써 사우(師友)를 따르고 도의(義議)를 강론하였으나 아직도 진실한 공부를 하지 못하였고, 때때로 또 불우(不遇)하여 궁려(窮廬)의 탄식35)만 하니, 너희들은 늙은 아비를 경계로 삼아 후회가 없어야 한다. 너희들은 몸을 세우고 뜻을 독실히 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36)을 몸소 알고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는 것을 배운다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고, 오히려 향상되고 진보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분수 밖에서 몸을 영화롭게 하고 집에 거처하면서 편안히 있는 것을 군자는 부끄럽게 여기니,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경계하고 경계하며 반드시 겸손하고 공경하면서 스스로 수양하고 맑은 절조로 스스로 힘써 《소학(小學)》을 읽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배워 몸을 검속(檢束)하는 방도로 삼아라. 사서(四書)를 말미암아 육경(六經)에 통달하는 것을 학문하는 방법으로 삼고, 여러 서책을 널리 통섭하여 이치에 밝고 의리를 정밀히 하면 어찌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겠느냐? 너희들이 만약 우둔하고 완악하여 가르칠 수 없다면 그만이니 꾸짖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자질은 가르칠만한 훌륭한 점이 있는 것 같고, 학문은 조금 문리에 통한 점이 있는 것 같으니, 지금 만약 뜻을 세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오히려 기대할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뜻을 세우지 않으며 배움에 독실하지도 않아 이와 같이 끝나버릴 뿐이라면 결국 소인으로 귀착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은 분명하다. 삼재(三才)37)에 참여한 이 몸이 가엾지 않느냐? 원컨대 너희들은 마음을 고치고 반성하여 늙은 아비의 보잘 것 없는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돌아보건대 너희들은 가엾게도 일찍 어미38)를 여의어 어여삐 여겨 가르치지 않았더니 엄숙하게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부족하였다. 그래서 예(禮)가 없고 의(義)가 없어 도리어 이치에 어긋난 일을 하니, 이것은 자식의 죄가 아니라 실로 아비의 허물이다. 하물며 아비가 비록 자애롭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으니39),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의리는 크다고 할 것이다. 하늘의 법과 땅의 의리,40) 삼강오상(三綱五常),41) 윤리와 기강의 중차대한 것이며, 온갖 행실의 근원이요 인도(人道)의 떳떳함이니, 배우려는 사람은 이를 배울 따름이고, 행하는 사람은 이를 행할 뿐이다. 효도하는 집안에서 충신을 찾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들의 식견이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니 더욱 더 생각하고 힘써라. 내가 말한 바를 빈 말로 돌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사람 되는 도리를 다할 것이요, 성인을 배우고 현인에 이를 것이다.임인(壬寅 1602)년 11월 16일 노부 금암이 병석에서 썼으니 만력 30년이다. 長乎固滯, 仲也踈虛, 季則阨狹, 俱無見識, 而亦各有氣質病痛, 若不急急致學問之功變化之力, 則只依舊技倆, 未見有長進之處矣. 而輩年近三十, 尙未竪志, 因循汨沒, 與鄕人一樣, 則父兄責望, 到此左矣. 古不云乎? 言不忠信, 下等人也, 行不篤敬, 下等人也. 聞下等之語, 爲下等之事, 則汝等將作何等人物而止乎? 噫! 旣受天質之美, 又有敎育之勤, 未見有寸效, 而歲月如流, 其將奈何? 至若事親之節行身之方言語之間云爲之際, 只是一般俗下人, 則其風節之凜峻問學之高明, 更不可望矣. 吾亦自少厲學, 從師友講道義, 未有眞實工夫, 時又不遇, 徒有窮廬之歎, 汝等戒老父, 未能之悔立而志篤, 乃學存心體認克己踐形, 庶可以變化其氣質, 而猶有所向進矣. 如分外榮身, 居室有便, 君子恥之, 非吾所願欲也. 戒之警之, 須以謙恭自牧, 淸節自厲, 讀《小學》學《家禮》, 以爲檢身之方. 由四書達六經, 以爲爲學之法, 博通群書, 理明義精, 則何古人之不可及哉? 而等若鈍頑, 不可敎則已矣, 不足責, 以質則似有可敎之美, 以學則稍有文理之通, 今若立志, 更進一步, 則猶有所可望矣. 不然而志不立學不篤, 如是而終焉而已也, 則卒未免爲小人之歸也, 昭矣. 參三此身, 可不惜哉? 願汝曹改心存省, 以副老父區區至望也. 顧憐汝曹, 早失天只, 慈而不敎, 殊欠嚴敬之心, 無禮無義, 反致違理之事, 是非子之罪, 實父之過也. 況父雖不慈, 子不可以不孝, 天下無不是底父母, 子之於親, 孝之義大矣. 如天經地義綱常倫紀之重且大者, 而百行之源人道之常, 所以學之者, 學此而已, 行之者, 行此而已, 求忠臣於孝子之門者, 此也. 汝等識見, 未到此地頭, 更加念之勉之. 勿以吾所言, 歸之於空言, 則人之, 而聖可學而賢可至矣. 歲在壬寅 至月初生魄, 老父錦巖病草, 萬曆三十年也. 말이 …… 하등인이다. 《소학》 〈가언(嘉言)〉에 "말이 충신하지 못함이 하등인이요, 행실이 독후하고 공경하지 않음이 하등인이요, 잘못을 저지르고서 후회할 줄 모르는 것이 하등인이요, 뉘우치되 고칠 줄을 모르는 것이 하등인이다. 하등인의 말을 듣고 하등인의 일을 행하면 비유하건대 마치 방 가운데에 앉아서 사면이 모두 담벽인 것과 같으니, 비록 열어 밝게 하고자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言不忠信, 下等人也, 行不篤敬, 下等人也, 過而不知悔, 下等人也, 悔而不知改, 下等人也. 聞下等之語, 爲下等之事, 譬如坐於房舍之中, 四面皆墻壁也, 雖欲開明, 不可得矣.]"라고 보인다. 궁려(窮廬)의 탄식 허송세월을 하는 데 대한 탄식을 말한다. 궁려는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이다. 제갈량(諸葛亮)의 〈계자서(誡子書)〉에, "나이는 시절과 더불어 치달아 가고 뜻은 날짜와 더불어 떠나가 마침내 쇠락하니 그때 가서 궁려에서 비탄에 잠겨 본들 장차 무슨 수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年與時馳 意與歲去 遂成枯落 將復何及也〕"라고 하였다. 존심양성(存心養性) 원문의 '존심(存心)'은 존심양성의 준말로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배양한다는 뜻인데 성리학에 있어 심성 수양론을 대표하는 말이다. 《맹자집주》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하늘의 도(道)를 세움은 음(陰)과 양(陽)이요, 땅의 도를 세움은 유(柔)와 강(剛)이요, 사람의 도를 세움은 인(仁)과 의(義)이니, 삼재를 겸하여 두 번 하였기 때문에 역(易)이 여섯 번 그어서 괘(卦)가 이루어진다.[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兼三才而兩之, 故易六畫而成卦.]"라고 하였다. 어미 원문의 '천지(天只)'는 어머니의 별칭이다. 《시경》 〈백주(柏舟)〉에 "하늘같은 어머님이 이토록 사람 마음 몰라주시는가.〔母也天只, 不諒人只.〕"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아버지가 …… 없으니 《동몽선습(童蒙先習)》 〈부자유친(父子有親)〉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으니 부모가 사랑하지 않으나 자식은 불효를 해서는 안 된다.〔天下無不是底父母, 父雖不慈, 子不可以不孝.〕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하늘의 …… 의리 원문의 '천경지의(天經地義)'는 천지간의 변경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를 이른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5년 조에 "예는 하늘의 법칙이고 땅의 도리이고 사람들이 본받아 이행하는 것이다.〔夫禮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고 하였다. 《효경》 〈삼재(三才)〉에 "효는 하늘의 법칙이고 땅의 도리이다.〔夫孝 天之經也 地之義也〕"라고 하였다. 삼강오상(三綱五常) 원문의 '강상(綱常)'은 유교 도덕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한다. 삼강은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이고 오상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또 又 너희들은 모두 약관(弱冠) 남짓의 나이인데 재주가 오히려 지금 사람들의 과거(科擧) 글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 과거에 급제하여 몸을 영화롭게 하고 쇠약한 우리 가문을 부지 하겠느냐? 단지 한 가지 기량으로는 천지 사이에서 한낱 용렬한 사람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기질과 품성이 맑고 순수함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또한 바탕이 있어 배울 수 있으니, 만약 옛 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세워 안으로는 마음을 다스리며 밖으로는 용모를 단정하게 하여 반드시 '경근(敬勤)' 두 글자로 시작하고 이를 따라서 올라가면 조존성찰(操存省察)42)하여 이윤(伊尹)이 뜻한 바에 뜻을 두고 안연(顏淵)이 배운 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43) 힘쓰고 힘써 순서를 따르며 부지런히 글을 읽어 마음을 열고 이치를 밝히며, 공경히 존양(存養)하여 자기 사사로움을 제거하면 옛 사람의 문정(門庭)을 거의 엿볼 수 있으니, 어찌 스스로 향리 속의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게 될까 걱정하느냐?아! 사람이 사람이 된 까닭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천지에 참여하여 나란히 서 있으니 그 책임이 지극히 중대하다. 그러나 그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답습에만 골몰하여 쉽게 자포자기에 이르는 사람이 된다면 어찌 애통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느냐? 나 또한 18, 19세부터 개연(慨然)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 집안사람들의 생산 작업은 일삼지 않고 사우(師友)의 뒤를 따라 몸을 맡겨 종사하였다. 뜻을 독실히 하였던 처음에는 성현을 배워 이를 수 있다고 여겼으니, 어찌 오늘날 용렬하게 무너짐이 너무 심하여 다시는 초심을 떨쳐 일으키지 못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느냐? 마침내 평생을 시세(時勢)에 따르다가44) 뜻을 세운 대본(大本)과 사우에게 얻은 것을 여기에 이르러 다 잃어버렸으니, 한밤중에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렵고 너희들에게 저절로 부끄러웠다.이미 네 아비는 배운 것이 없어 텅 빈 것 같다. 또 먹고 입는 생각으로 근심하나 먹고 입는 것은 지극히 미미하고 지엽적인 일이니, 못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죽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젊은 나이의 학자가 어찌 차마 이 속에서 스스로 골몰하는가라는 분명한 훈계가 있었다. 옛날에 자공(子貢)은 넉넉함과 검소함의 사이에 마음을 두었으나 재물과 이익의 해가 심하여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후학들이 살펴 유념해야 할 곳이다. 바라건대 너희들이 외물의 유혹에 초연하여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뜻과 학문을 독실하게 하여 선대의 뜻과 공업을 잘 계술(繼述)한다면45) 내가 비록 죽더라도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내 세 아들에게 바라건대 경계하고 경계하며 게을리 태만하지 말라.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은 사람의 본성이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공손히 따르는 것은 사람의 행실이니, 배우는 것은 이것을 배울 따름이니 어찌 이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건대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히고 극기복례하여 실천하는 것을 내면의 자기 공부로 삼는다면 진실로 지금 사람이 옛 사람처럼 되어 몸도 이미 대장부요 마음도 대장부일 것이다. 부디 너희들에게 바라는 점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 而輩年皆弱冠餘, 以才則猶不逮今之人科擧之文, 其何以決科榮身, 以扶持我衰門耶? 只是一種伎倆, 天地間一庸人而止耳. 然而汝輩氣稟, 雖不至於淸粹, 亦可以有質而可學, 若竪志於古人爲己之學, 內以治心, 外以整容, 須着敬勤二字, 循之以上, 則操存省察, 足以志伊尹之所志, 學顏淵之所學, 勉勉循循, 勤以讀書, 開心明理, 敬以存養, 克去己私, 則庶可以覬覦古人門庭, 何患乎自歸了鄕里中常人乎? 噫! 人之所以爲人, 以渺然之身, 參天地而並立, 則其責至重至大, 但其志不立, 因循汨沒, 甘爲自棄底人, 寧不痛惜? 吾人亦自年十八九, 慨然有求道之志, 不事家人生産作業, 追從師友, 委己從事, 篤志初頭, 以爲聖賢可學而至, 豈意今日庸頹已甚, 無復振起初心. 畢竟是乾沒平生, 立志之大, 師友之得, 到此喪盡, 每中夜思之, 惕然自愧汝輩. 旣無汝父之學, 而空空如也. 又病於衣食之念, 衣食至微末事, 不得未必死. 古有明訓, 年少學子, 何忍自汨了這裡耶. 昔子貢留心於豐約之間, 而財利之害甚, 至於不及顔曾, 則宜後學省念處. 幸汝輩超然外誘, 以起新意思, 篤志篤學, 善繼善述, 則吾雖死矣, 亦可以瞑目於地下矣. 願吾三子, 戒之警之, 毋怠毋荒. 至若仁義忠信, 人之性也, 孝親悌順, 人之行也, 所以學者, 學此而已, 豈可外求於他乎? 復以講學明理克己踐形, 爲向裏自做底工夫, 則實今人之古人, 身旣丈夫, 心亦丈夫, 須有望於汝輩也. 汝輩戒之. 조존성찰(操存省察)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하는 공부를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져 일정한 시간과 방향 없이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이윤(伊尹)이 …… 것이다 《근사록(近思錄)》 권2 〈위학류(爲學類)〉에 "이윤이 뜻을 두었던 것에 뜻을 두고 안연이 배웠던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여 이들을 능가하면 바로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요, 제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비록 따라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명성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 過則聖, 及則賢, 不及則亦不失於令名.〕"라는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의 말이 나온다. 시세(時勢)에 따르다가 원문의 '건몰(乾沒)'은 《사기집해(史記集解)》 권122 〈혹리열전(酷吏列傳) 장탕전(張湯傳)〉 주(注)에 "시세에 따라 부침(浮沈)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선대의 …… 계술(繼述)하면 원문은 '선계선술(善繼善述)'인데, 선계는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하며, 선술은 선대의 공업을 잘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효도란 것은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며, 어버이의 사업을 잘 따라 행하는 것일 뿐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금봉습고 錦峰拾稿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次具府使【壽聃】相别 天髙民未一䄵借臥轍難留泣下多村婦不知離别恨隔林猶唱五袴歌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금성삼고 발문7) 錦城三稿跋 【原無題】 우리 증조부의 형제 6인에게 육룡(六龍)이라는 호칭이 있었다. 첫째는 소포공(嘯浦公)이고, 둘째는 금암공(錦巖公)이며, 금봉공(錦峰公)이 그 다음이다. 모두 성대하게 한 시대에 명성이 있어 담론하는 자들이 영특하고 호걸하며 얽매임이 없는 것으로는 소포공을 추대하고, 독실한 학문과 훌륭한 행실로는 금암공과 금봉공을 추대하니, 아! 성대하였도다.소포공은 일찍이 저술한 것이 있으나 전사(傳寫)한 것에 섞인 글이 많아 나는 이전부터 이것을 근심으로 여겼고 또한 원고가 산실되어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편차하고 베껴 적으니 시와 부와 약간의 편지글과 상소문 총 60여 편이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금암과 금봉 두 분도 모두 약간의 글이 있어 또한 차마 사라지게 할 수가 없으므로 소포공의 글 끝에 모두 부치고 또 〈세계(世系)〉, 〈장(狀)〉, 〈녹(錄)〉 등을 실어 하나의 책으로 합쳤다. 마침내 소포공의 현손 나만운(羅晩運)과 금봉공의 증손 나두흥(羅斗興)과 함께 어떻게 출판할 것인지 협의하고 판각하는 사람에게 부쳐서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였다. 다만 정곤재의 《우득록》을 보면 금암공에게 준 편지가 많아 40여 수에 이르고 그 학문과 예에 대해 논하며 추장한 말들이 공을 예우하여 권면하는 글뿐만이 아니었으니 필시 원고가 사라져 용사(龍蛇)의 병화에서 일실되어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이처럼 원고가 소략하니 참으로 애석하다.아! 옛날을 회상하니 어느덧 1백여 년이 지났으나 오직 이 유문(遺文)은 사라지지 않았거늘 이제야 이 일을 실행하여 몇이라도 보존된 것이 있는 듯하니 또한 자손들에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역(工役)이 이미 완성되어 전말을 위와 같이 대략 쓴다.숭정(崇禎) 후(後) 두 번째 신축(1721) 1월 신미에 금암공의 증손인 생원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惟我曾王父兄弟六人, 有六龍之稱. 其伯曰嘯浦公也, 其仲曰錦巖公, 而錦峰公又其次也. 皆蔚有聲名一時. 談論者以英傑不羈推伯氏, 以篤學修行, 推仲叔, 吁其盛矣. 嘯浦公嘗有所著而傳寫多 魚魯, 斗冬旣以是病之, 又恐其散失無傳, 爲之編次繕寫摠詩賦若書疏六十餘首也. 仍伏念錦巖 錦峰二公, 俱有若干文字, 亦不忍其湮沒, 幷附諸其下, 且載以世系狀錄合成一冊子. 遂與嘯浦公之玄孫晩運, 錦峰公之曾孫斗興, 協議經紀, 付諸剞劂氏, 以啚不朽, 而第見鄭困齋愚得錄, 則與錦巖公書多, 至四十餘首, 而其所論學論禮, 推獎之語, 不啻勤摯. 公必有所覆而逸於龍蛇病禍, 今其存者, 如是草略, 可勝惜哉. 嗚呼! 感念今昔, 焂已百有餘年, 而惟此遺文不泯, 始擧斯役, 似若有數存焉, 而亦可謂子孫幸也. 工旣訖功, 略敍顚末如右云爾. 崇禎後再辛丑正月辛未, 錦巖公之曾孫生員冬, 謹識. 금성삼고 발문 제목은 없다. 내용상 삼고(三稿)의 발문에 해당되기 때문에 역자가 임의로 정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나유지【훗날 성지라고 자를 고쳤다.】에게 낸 편지 【무인년(1578)이다.】 與羅有之【後改誠之】書 【戊寅】 이별한 뒤로 세 번이나 문안 편지를 받고 보니 글의 뜻이 간절하고 말이 절실하여 마치 아침저녁으로 자주 만나는 날이 많은 것 같네. 이는 자네가 강직하고 우뚝한 지조가 있어 멀고 가까우나 따르고 어기는 것으로 변하는 바가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십분 감탄하고 위로가 되네.보내온 글에 《논어》를 읽고 반드시 마음으로 깨우치고 묵묵히 아는 점이 있어 저절로 가슴 속이 즐겁고 몸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몹시 부러운 마음 이길 수가 없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의 장(章)3)을 매우 깊이 연구하고 완미하여 장래에 자기의 임무로 삼아 굳건하게 정립하여 실천하겠다니 천 리 떨어진 곳에서 쇠약한 채 형구를 차고 있는 나의 바람에 위로가 되었다네. 그대의 타고난 자질은 진실로 강직한 것을 실행하는 데 걱정할 일이 없음을 알고는 있으나 강직함을 실천하는 일을 대단한 힘써야 바야흐로 얻을 수 있네. 대저 《논어》의 글은 성현의 문답으로 수천만의 말이 있지만 그 직접적인 요지를 구한다면 '존심(存心)'에 불과할 뿐이니, 존심이 완성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네. 대개 존심이라는 것은 마땅히 존재할 곳에서 이 마음을 얻는 데 있으니 다른 사물에게 이끌려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네. 예컨대 '배우고 때로 익힌다.'4)를 읽었다면, 어떻게 해야 배움이 될 것이며 어떻게 해야 때로 익히는 것인지를 생각하여 만약 이를 추론하고 궁구한다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다른 생각의 여지가 없을 것이네. 또 '자기 몸을 이겨 예를 회복한다.'5)를 읽었다면, 어떻게 해야 자기의 몸을 이기고 어떻게 해야 예를 회복하는지 또 몸에는 무엇이 있는지, 예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끝까지 궁구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에 돌이켜 구한다면 행하는 바와 존재하는 바가 몸이고 예일 것이네. 만약 이르지 못했다면 있는 힘을 다해 장차 나아가 천리에 합치되도록 구해야 한다네. 이와 같은 공(功)이 비록 하루 아침저녁에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지런히 노력하여 세월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기질이 변화하여 내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천리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천지에 사람이 삼재(三才)로 참여하여 오직 이에 대장부가 되었으니 그대는 반드시 힘써야 하네.나의 평소 뜻 또한 다른 데 있지 않으나 타고난 성질이 굳어 변화되기에는 어려워 노쇠한 지금에 이르렀으니, 아! 애석하다네. 바라는 바는 오직 우리 그대의 강직하고 굳은 뜻으로 천만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네. 화천정(花川正)6)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이 사랑스럽고 그 지조 또한 속되지 않아 더불어 큰일을 할 만한 사람이네. 자네가 때때로 맞이하여 권면할만하니 권면함이 어떻겠는가. 남과 더불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군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라네. 別後三奉問書, 意懇辭切, 似有深於朝夕亟見之日, 是知賢侍毅貞立之操, 不以遠近從違而有所變易也, 嘆慰十分. 示諭讀論語, 其必有心悟默識, 自樂於胸中而得效於身上, 不勝健羡之至.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章, 切須深究玩味, 將來以爲己任, 立定脚跟做將去, 以慰千里衰朽之望. 賢侍之天資, 固知其不患於做毅, 而於做弘處, 大段着力, 方得. 大抵論語之書, 其聖賢問答幾千萬言, 而求其直指, 則不過曰存心. 存心之熟, 則仁在其中, 蓋存心者, 存得此心於所當存之地而不爲他物引將去之謂也. 如讀學而時習, 如何而可以爲學, 如何而可以時習, 如此推究, 自然心不暇他念. 又讀克己復禮, 如何而可以克己, 如何而可以復禮, 又窮極其己是甚底, 禮是甚底, 反求諸自家身心上, 所行所存, 是己歟禮歟. 如或未至, 則盡力克將去以求合乎天理. 若此之功, 雖非一朝一夕之見效, 循循勉勉, 積至歲月, 自然變化氣質, 從吾心之所欲, 莫非天理, 豈不大快活乎. 參三天地, 唯此爲大丈夫, 賢須勉之, 鄙人平生之志, 亦不在他, 而稟固難化, 至於衰朽, 嗚呼惜哉. 所可望者, 唯如賢侍之剛毅, 千萬努力. 花川正天稟可愛, 其志操亦不俗, 可與有爲者也, 賢侍時有引接可勸則勸之如何, 與人爲善, 亦君子之所當勉也. 선비는 …… 장(章) 원문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은 《논어》 〈자로(子路)〉에 보인다. 배우고 …… 익힌다 원문 '學而時習'은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자기 …… 회복한다 원문 '克己復禮'는 《논어》 〈안연(顔淵)〉에 보인다. 화천정(花川正) 이수붕(李壽鵬)을 가리킨다. 이수붕은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정개청에게 수학하였고,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교유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의 숙조(叔祖) 윤전(尹烇)이 그에게서 수학하였다. 《愚得錄 卷2 論禮 答花川正壽鵬書》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敬次(4) 申泰五沃溝曾設德陽祠尊吾壯節祖背山彌屹岑臨水益淸滸忠義今從周祀儀己至魯位庄有誌誰庶復耀千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