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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2) 遺事(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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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 이군 유사 松谷李君遺事 군의 휘는 승일(承一)이고, 자는 성만(成萬)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송곡(松谷)은 그의 호이다. 고려조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을 비조(鼻祖)로 삼아 4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선제(先齊)는 호가 필문(蓽門)으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연산조(燕山朝) 때에 상소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들이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영복(永複)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증조는 광국(光國)이며, 조부 한미(漢微)는 호가 송와(松窩)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 남호(南鎬)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장택 고씨(長澤高氏)는 진오(鎭五)의 따님으로, 철종(哲宗) 병진년(1856) 3월 13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군을 낳았다. 군은 용모와 체구가 대단히 크고 성격과 기질이 호쾌하게 시원스러워 그야말로 천인(千人)을 능가하는 기상이 있었는데, 성동(成童)이 되자 서책을 시렁에 묶어 놓은 채 날마다 젊은 협객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매를 날리며 놀이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대인(大人)이 이를 근심스럽게 여기고 족제(族弟) 지남공(芝南公)에게 말하기를, "옛적에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으니, 군이 그를 타일러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지남공이 이에 군을 불러 말하기를, "소는 밭을 가는 동물인데, 만약 밭을 갈게 할 수 없고 사람을 들이받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소를 좋아하겠느냐? 말은 타는 동물인데, 만약 사람을 태울 수 없고 사람을 차고 무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말을 좋아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해만 있고 유익함이 없으면 소나 말조차도 없애버리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상에 해만 있고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다면 성인(聖人)의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느냐? 또 너에게 자식이 있는데 효도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너에게 동생이 있는데 공경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너의 마음이 이미 편안하지 않은데, 너의 부모와 형만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느냐. 옛적에 마 복파(馬伏波)는 만 리 먼 곳에서 편지를 보내어 형의 아들이 경박한 협객들과 소통하는 것을 훈계하였고21), 제갈 무후(諸葛武侯)22)는 대군을 손에 쥐고 몸이 전쟁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그의 아들에게 몸을 닦고 덕을 기르도록 훈계하였으니, 대체로 진실로 정대한 영웅들은 깊은 못 앞에 선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전전긍긍한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 너는 경박한 협객의 부류들과 떠돌아다니며 노는 습관을 만들어 위로는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처자식에게 고통을 주며 집안의 화를 불러들이고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모두 다 편안함을 바라고 위험을 바라지 않으며, 복을 구하고 재앙을 구하지 않는 법인데, 너는 참으로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위험을 편안하게 여기고 재앙을 이롭게 여기느냐?" 하니, 군이 다 듣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빨리 깨달아 마침내 말은 저자로 돌려보내고 매는 들로 날려 보내주었다. 머리를 숙이고 기운을 가라앉힌 채 책을 끼고 학업을 청하여 《소학》부터 시작해서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미쳐갔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여러 해 동안 밤에 베개를 베지 않았다. 닭이 울 때에 일어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침소에 문안을 드리며 추운지 더운지를 반드시 조심스럽게 살폈고 응대는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으며,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고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식사를 올리고 내림에 때에 맞추어 나아가고 물러났다. 평소에 한가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묵은 솜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며 담박한 것을 분수에 달게 여겼다. 여기저기 드나들며 집안일을 돌보고 곁에서 시중들며 물심양면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무자년(1888)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의절에 예법과 슬픔이 모두 지극하였다. 다음해에 병을 얻어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4세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미좌(未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아!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뜻이 고원하거나 고지식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狂狷]과 함께할 것이다.23)"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고원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의지와 기개는 우뚝하게 견고하고 강인하여 함께 나아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사업과 공명이 위대했던 인물은 이와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베어버린 김 각관(金角干)24)과 검을 꽂아 놓은 채 정진했던 이일재(李一齋)25)와 같은 사람이 모두 이러한 인물들이다. 군은 뛰어난 자질로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침이 우레처럼 맹렬하고 선으로 옮겨감이 바람처럼 신속하였고, 한번 주장을 세워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전일의 잘못은 햇빛에 나타난 눈이나 금옥(金玉)에 난 흠조차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그 자질이 옛날 광견(狂狷)이라 일컬었던 사람과 부합한 점이 있었지만, 지남공이 그를 지도하여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끝내 혼미하여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을 줄 또 어찌 알겠는가. 학문을 연마하고 침잠하여 확충하고 분발해 간다면 앞으로 수립할 것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운수가 궁박하고 수명이 짧아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지도하여 이끌어줌을 얻지 못하거나 천수를 얻지 못한 사람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이끌어줌을 받지 못하고 천수를 얻는 것은 천수를 얻지 못하고 이끌어줌을 받는 것만 못하니, 공자의 이른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26)"라는 말을 보건대, 군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후(在厚)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으니, 계휴(桂休)ㆍ옥휴(玉休)ㆍ태휴(泰休)이다. 태휴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君諱承一。字成萬。貫光山。松谷其號也。以麗朝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四傳諱先齊。號蓽門。官至大提學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燕山朝。抗疏不用。卽日賦歸。生諱好善。號勉齋。官至大司成。皆其顯祖也。高祖永複。贈禮曹參判。曾祖光國。祖漢微。號松窩。贈工曹參判。考南鎬。贈戶曹參判。妣長澤高氏鎭五女。哲宗丙辰三月十三日。生君于薪山里。容體碩大。性氣豪爽。鬱鬱有凌駕千人之氣。至成童。束閣書冊。日與俠少輩。馳馬飛鹰。流連不返。其大人憂之。謂族弟芝南公曰。古者易子而敎。君未可爲之諭之使返於正耶。芝南乃招以語曰。牛耕者也。若不可耕而善博觸人。則汝愛之乎。馬乘者也若不可乘而善踶囓人。則汝愛之乎。對曰未可也。曰有害而無益。牛馬且去之。況乎人而有害於世。而無益於人。則其可免於聖人之誅乎。且汝有子而不孝。則汝心安乎。汝有弟而不恭。則汝心安乎。對曰未可也。曰汝之心旣不安。則爲汝之父兄者。獨可以安於心乎。昔馬伏波萬里致書。以戒兄子之通輕俠。諸葛武侯手握重兵。身在戰陣。而戒其子以修身養德。蓋古之眞正大英確。無非自戰戰兢兢臨深履薄中出來也。今與輕俠之流。作浮浪之習。上以貽父母之憂。下以貽妻子之苦。招家戶之禍。速己身之亡。夫人之情。莫不欲安而不欲危。求福而不求災。汝乃何人。獨安其危而利其災也。聽未了。蹶然而驚。幡然而悟。遂歸馬於市。飛鷹於野。屈首降氣。挾冊請業。自小學爲始。及於四子六經。冬不爐。夏不扇。夜不枕者數年。雞鳴而起。問寢重廷。寒暄必謹。應對必恭。八廚滫灑。備辦甘毳。食上食下。進退須時。平居不接閒人。不打閒話。縕袍麤糲。分甘淡泊。出入幹蠱。左右服勞。以致志物之養。戊子遭內艱。執喪之節。易戚兩至翌年得疾。以十二月十日終。得年三十四。葬池洞前麓負未之原。嗚呼。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蓋狂狷志氣。磊落堅忍。可與進取也。自古人物。有大事業大功名者。無不有這般氣象。在我東如金角干之斬馬。李一齋之揷釼。皆是也。君以魁傑之姿。能自覺悟。改過如雷之猛。遷善如風之迅。一立脚跟。底死不退。回視前日之失。不足爲見睍之雪。金玉之瑕也。此其姿質。有合於古所稱狂狷者。而非有芝南公爲之指引.則又安知終不遠復也耶。磨礱浸灌。充拓而奮張之。則前頭樹立。有不可量。而運窮數局。中途夭閼。豈不可惜以此觀之。世之有英材。而不得其指引。不得其年壽者。又何限焉。然失指引而得年壽。不若失年壽而得指引。觀孔子所謂朝聞夕可之語。君可以無憾矣。齊河東鄭氏在厚女。擧三男。桂休玉休泰休。泰休奉家狀。有不朽之托。 마 복파(馬伏波)는 …… 훈계하였고 마 복파는 후한(後漢)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을 지낸 마원(馬援)으로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 경박한 유협(遊俠)들과 사귀며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하자 편지를 보내어 호협(豪俠)한 두보(杜保)를 본받지 말고 신중(愼重)한 용술(龍述)을 본받으며 입을 조심하라고 간절하게 훈계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小學集註 卷5 嘉言》 제갈 무후(諸葛武侯)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제갈량(諸葛亮)으로, 무후(武侯)는 그의 시호이다. 중도를 ……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말을 …… 김 각관(金角干) 김 각관은 신라 진평왕 시대에 각간을 지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김유신이 화랑시절에 기녀 천관녀(天官女)에 정신이 팔려 수련을 게을리하였다가 어머니 만명부인의 훈계(訓戒)를 듣고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는데, 어느 날 밤 말이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우고 예전 습관처럼 천관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김유신이 술이 깬 뒤에 검(劍)으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破閑集》 검을 …… 이일재(李一齋) 이일재는 이항(李恒, 1499~1576)으로, 일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항지(恒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젊은 시절에 무관에 뜻을 두었다가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고,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한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일재에 관한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로 무관으로서의 뜻을 접고 학문할 당시 칼을 옆에 꽂고서 정신일도하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침에 …… 괜찮다 《논어》〈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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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경84) 자명 梁而敬字銘 상제가 충을 내려주니이것을 명덕이라 하네하늘이 만물을 주관하여이 인극을 세우네기품에 구속되고 외물에 가리니치우침이 없을 수 없네그대로 따르기만 하고 반성하지 않으면서로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네학문하는 도는먼저 그 덕을 밝히는 것이네덕에 들어가는 방법은경을 위주로 하여 곧게 하는 것이네경으로 덕을 모으고덕으로 도를 응집시키네이 관건을 열면분명히 단서가 있네양씨의 아들나이가 이미 17세이네아름다운 아이에게순서대로 관례를 하였네그 이름 회덕이니이경으로 자를 짓네그 뜻이 서로 기다림이마치 체에 용이 있는 것과 같네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숙히 하여연못에 임하듯 얼음을 밟는 듯하네마음이 어둡고 게으르지 않으면이치가 절로 흘러 통하네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여마치 어깨에 짐을 진 듯이 하네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85)밝은 명이 이에 온전할 것이네오호라 이경이여성인의 시작이니어찌 힘써 노력하지 않겠는가앞길이 만 리이네 上帝降衷。是曰明德。參天宰物。立此人極。氣拘物蔽。不能無偏。因循不省。相去愈遠。爲學之道。先明厥德。入德之方。主敬以直。敬以聚德。德以凝道。啓此關鍵。的有端緖。梁氏之子。年已十七。婉變丱角。三加有秩。其名會德。字以而敬。其義相須。如體有用。正冠尊膽。臨淵履氷。心不昏怠。理自流通。顧名思義。如擔在肩。日乾夕惕。明命斯全。嗚乎。而敬。成人之始。豈不勉力。前程萬里。 양이경(梁而敬):양회덕(梁會德, 1874~?)을 말한다. 자는 이경, 호는 용강(龍岡)이다. 종일토록……두려워하면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无咎.]"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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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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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행 군이 떠나기에 임하여 한마디 말로 채찍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니 감히 고루하다고 사양할 수 없어 삼가 몇 구의 사를 지어서 주다 白君子行。臨行求一言。以替鞭策之贈。不敢以固陋辭。謹述數句辭以呈。 순우의 정일95)공안의 박약96)만고의 성학이니이것이 그 표준이네굳건히 척량97) 세워죽기를 각오하여 힘을 다해야 하네급한 여울물에서 배를 저어가고절벽에서 손을 놓는 듯이 하네98)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며게으르지도 말고 빨리하지도 말아야 하네닭이 계란을 품듯99)모기가 철우(鐵牛)를 뚫듯눈 깜짝하거나 숨 쉬는 사이에도 보존하고 길러조금씩 쌓아가야 하네기름이 적시고 하수가 스며들 듯봄기운 따스하여 얼음이 녹는 듯 할 것이네나는 인순고식하여늙어도 이룸이 없네그저 들은 것 외워서부지런한 뜻에 부응하네 舜禹精一。孔顔博約。萬古聖學。此其準的。硬着脊樑。舍死盡力。撑舟急灘。撤手絶壁。勿忘勿助。不慢不疾。如鷄抱卵。如蚊鑽鐵。瞬存息養。銖累寸積。膏潤河浸。春融氷釋。而我因循。老矣無成。聊誦所聞。以塞勤意。 순우(舜禹)의 정일(精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아야 한다.[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것을 말한다. 공안(孔顔)의 박약(博約) 안연(顔淵)이 공자에게서 받은 가르침인 박문약례(博文約禮)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한 것을 말한다. 척량(脊梁) 등골뼈이니 그 뼈가 전신을 지탱하는 역할을 함이 마치 집에 들보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일컫는 말이다. 전하여 의지나 절조 따위를 비유하여 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2에 "더구나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약해진 때를 당하여 더욱 꿋꿋한 척량을 써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어야 옳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가 "무거운 짐은 반드시 등뼈를 꼿꼿이 편 사나이라야 질 수가 있다.[重擔子, 須是硬脊梁漢, 方擔得.]"라고 하였다. 《二程遺書 卷3 謝顯道記憶平日語》 절벽에서……하네 《대혜어록(大慧語錄)》에 "나뭇가지 잡는 것쯤 기이할 것 없으니, 벼랑에서 손 놓아야 대장부일 것이네.[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닭이 계란을 품듯 이황(李滉)이 "닭이 알을 품는 것은 한시도 중단되지 않으니, 온기가 계속 이어지게 하면 병아리가 되고 잠깐이라도 식으면 병아리가 되지 못한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공부가 계속 이어져야 성불(成佛)할 수 있음을 비유하였다."라고 풀이하였다. 《退溪集 卷11 答李仲久問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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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 박공의 유사 鶴臯朴公遺事 공의 휘는 준량(準亮)이고, 자는 성지(聖智)이며, 호는 학고(鶴臯)이다. 박씨(朴氏)의 선계는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규정(糾正)을 지낸 휘 현(鉉)이 중조(中祖)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강생(剛生)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휘 절문(切問)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휘 중손(仲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녹훈되어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고, 휘 미(楣)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으며, 휘 광영(光榮)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밀성군(密城君)이고, 휘 난(蘭)은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밀평군(密平君)이며, 휘 숭원(崇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밀천군(密川君)이고, 휘 기현(耆賢)은 충청 감사(忠清監使)를 지낸 밀계군(密溪君)이며, 휘 안길(安吉)은 동중추(同中樞)를 지낸 밀흥군(密興君)이니, 이들이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 휘 선증(善曾)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증조 휘 기환(起煥)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재욱(載郁)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친 휘 세진(世鎭)은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모친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증 참의(贈參議) 덕기(德機)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8월 15일에 공을 낳으니, 기운과 골격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자질과 성정이 영특하고 비범하자 그의 대부(大父)가 사랑하여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집안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 이 아이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착하여 부모가 병에 걸리면 곧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않았고, 8세에 공부를 시작해서는 번거롭게 과정(課程)을 정해 독려하지 않아도 여러번 독송하는데 매우 근실하였고, 조금 장성해서는 같은 고을에 사는 만희재(晚羲齋) 양 상사(梁上舍)를 따라 의혹을 질정하고 변별하며 스스로를 넓혀갔다.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잠자리를 살피는 예절과 맛있는 음식을 바치는 도리를 일찍이 어긴 적이 없었는데, 일찍이 한 번은 여러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효도하려 한들 미치지 못하고 우애하려 한들 때가 없는데, 지금 우리 형제들은 위로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시고 아래로 변고가 없다. 이러한 때는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두렵게 여겨야 할 시기이니,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침이 되면 나가서 밭 갈고, 저녁이 되면 글방에 들어와 책상을 마주한 채 책을 읽되 확실하게 과정을 두었으며, 상례를 다스릴 때에는 슬퍼하면서도 인정과 예법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겸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공손함으로 남을 대했으며, 모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이해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흉년이 든 해를 만나게 되면 의복을 줄이고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휼해 주어 공에게 힘입어 살아간 사람들이 자못 많았다. 언젠가 한 번은 흥양(興陽)으로 가는 길에 구걸해 먹고 사는 여인이 맨땅에서 아이를 낳은 것을 보고 때가 한겨울인지라 공이 전대를 털어 객점 주인에게 넉넉히 주어 따뜻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잘 조리하고 보양하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변란 때에는 자제와 친척들을 경계시켜 물들지 않게 하였다. 만년에는 화학산(華鶴山) 아래 산림과 계곡, 괴석 등의 경치가 있는 곳에 집 한 채를 지어 문을 닫아걸고 행적을 숨겨 종유를 끊고 교류를 그만둔 채 흔들흔들 한가로이 거닐며 애오라지 스스로를 즐기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다. 하루는 병에 걸려 자손들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의원이라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단지 너희들이 몸가짐을 조심하여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책을 읽고 학문하여 가업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무술년(1898)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나니, 신풍방(新豊坊) 강촌(江村) 뒤 기슭의 갑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윤해(潤海)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으며, 계배(系配)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영환(永煥)의 따님이다. 1남인 흥래(興來)는 김씨의 소생이고, 손자는 노삼(魯三)ㆍ노언(魯彥)ㆍ노홍(魯洪)이다. 증손자 동규(東奎)는 첫째 노삼의 소생이고, 정규(井奎)는 둘째 노언의 소생이며, 승규(承奎)는 셋째 노홍의 소생이다. 노삼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대략 가다듬고 꾸며서 그의 뜻에 부응하였다. 公諱準亮。字聖智。號鶴臯。朴氏系出密陽。以高麗紏正諱鉉爲中祖。入我朝。有諱剛生。副提學。諱切問。左贊成。諱仲孫。文科策靖難勳封密山君。諱楣。文科禮議。諱光榮。文科刑曹參判密城君。諱蘭贈領議政密平君。諱崇元。文科漢城判尹密川君。諱耆賢。忠清監使密溪君。諱安吉。同中樞密興君。皆其顯祖也。高祖諱善曾。壽陞通政。曾祖諱起煥。贈司僕寺正。祖諱載郁。贈左承旨。考諱世鎭。贈戶曹參判。妣贈貞夫人全州李氏贈叅議德機女。有婦德。純廟甲申八月十五日生。公氣骨峻茂才性穎異。其大父撫愛之曰。家戶之望。其在於此乎。幼有至性。父母有疾。輒涕泣廢食。八歲上學。不煩程督而誦數甚勤。稍長。從同郡晚羲齋梁上舍。質疑辨惑。以自展拓。定省之節。甘脆之供。未嘗有違。嘗語諸兄弟曰。孝有不及。悌有不時。今吾兄弟。上則俱存。下則無故此是一喜一懼之日也。盍相勉焉。朝而出耕。夜而入塾。對床讀書。的有課程。執喪哀毀。情文無闕。持身以謙。接人以恭。凡百處事。不以利害爲取舍。遇饑歲。縮衣節食以周貧乏賴活頗多嘗於興陽路中見乞婆露地産兒。時維隆冬。公傾行橐。厚給店人。使之携入溫室。善爲調養。甲午之亂。戒子弟族戚。俾勿梁。晩築一室於華鶴山下。有邱林泉石之勝。杜門斂跡。絶遊息交。婆娑徜徉。聊以自娛。以壽陞同中樞。一日屬疾。子孫將迎醫。公曰。死生天也。雖醫何爲。只願汝輩持身謹勅。居家孝弟。讀書學問。勿墜家業也。以戊戌八月十九日終。葬新豊坊江村後麓甲坐原。配貞夫人慶州金氏潤海女。有女士行。系配南原梁氏永煥女。一男興來。金氏出也。孫男魯三魯彥魯洪。曾孫男東奎長房出。井奎二房閏。承奎三房出也。魯三奉家狀來。謁不朽之文。謹據狀而略加修潤。以塞其意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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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추 농은 박공 유사 同中樞農隱补公遺事 공의 휘는 국서(國瑞)이고, 자는 내명(乃明)이며, 호는 농은(農隱)이니, 대제학을 지낸 충의공(忠義公) 휘 첨(瞻)이 그의 비조(鼻祖)이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휘 희중(熙中)은 호가 위남(葦南)이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진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분이 휘 희생(暉生)을 낳았고, 이분이 휘 문기(文基)를 낳았고, 이분이 휘 윤원(胤原)을 낳았고, 이분이 휘 위(衛)를 낳았으니, 이상 4대가 모두 사마(司馬)에 올랐다. 이분이 낳은 휘 이인(而認)은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과 도의로 교제하였고, 병자란(丙子亂) 때에는 그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분이 낳은 광보(光輔)는 죽천(竹川) 선생과 종조형제(從祖兄弟)가 되어 문학과 의로운 행실로 한 시대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잠(岑)은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이분이 낳은 휘 영립(英立)은 봉사(奉事)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필(應弼)을 낳았고, 이분이 휘 경호(慶顥)를 낳았고, 이분이 휘 진해(振海)를 낳았으니, 호는 겸암으로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동수(東壽)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성우(成祐)는 호가 매죽헌(梅竹軒)으로 보성(寶城)에서 능주(綾州)로 우거(寓居)하였으며, 호조 참의(户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명혁(命爀)은 호가 용암(龍庵)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모친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는 아무개의 따님이다. 정묘(正廟 정조(正祖)) 을묘년(1795) 2월 19일에 능주의 용두리(龍頭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히 착해 부모를 섬기며 오직 부모의 말씀만을 따랐고, 취학(就學)해서는 번거롭게 이끌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과정(課程)을 준수하였다. 하루는 '제자는 들어와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 이렇게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6)'라는 말을 읽고서 말하기를, "효도와 공경은 자식된 직분이니, 하루라도 닦지 않으면 안 된다. 봉양을 돌보지 않고 한갓 독서만 잘한다면 이런 사람을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 때부터 집안 일을 겸하여 주관하면서 집안의 재력이 조금 펴졌고, 부모의 뜻에 빠뜨리는 것이 없게 되었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며 게으른 기색이 낯빛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겸손과 공경으로 몸을 단속하고 근면과 검약으로 집안을 다스려서 온 집안 내에 가르침이 시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일이 거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도리와 규범이 반듯하였고 은혜와 정의(情誼)가 화기로웠으며,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 이르렀으며, 도의를 귀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만년에는 집안일을 전가(傳家)한 채 한 방을 깨끗하게 다스리고 서적에 깊이 빠졌는데, 이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젊었을 때 노력하지 않다가 늙어서 후회됨을 알겠구나."하고서 여러 자제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전거지감(前車之鑑)7)으로 삼아 제 때에 힘써서 너희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한을 위로하거라."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정축년(1877) 3월 29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용두리 뒷산 위 봉우리 묘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성추(星秋)의 따님으로 2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덕현(德鉉)과 기현(箕鉉)이고, 딸은 민치황(閔致璜)과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첫째 덕현은 자식이 없어 태영(泰瑛)을 후사로 삼았고, 둘째 기현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태영(泰瑛)ㆍ태섭(泰燮)ㆍ태규(泰奎)이고, 딸은 임만갑(林萬甲)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집에 거처할 때에는 효도와 우애의 행실이 있었고, 마을에 거처할 때에는 화락한 풍모가 있었으며, 평소에 은덕을 쌓아 안팎으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고 대질(大耊 80세)에 오르도록 장수하였으며, 자손들이 번성하여 문학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천도가 선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태규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을 글을 부탁하니, 내가 마을의 후배로 평소에 우러러 사모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國瑞。字乃明。號農隱。大提學忠義公諱瞻。其鼻祖也。至我朝。有諱熙中。號葦南官直提學封珍原君。子孫因貫焉。生諱暉生。生諱文基。生諱胤原。生諱衛。以上四世。皆登司馬。生諱而認。與牛山安先生爲道義交。丙子亂。與之擧義。生諱光輔。與竹川先生爲從祖兄弟。文學行義。一時齊名。生諱岑。通政。生諱英立。奉事。生諱應弼。生諱慶顥。生諱振海。號兼巖。於公爲高祖。曾祖諱東壽。贈軍資監正。祖諱成祐。號梅竹軒。自寶城寓居綾州。贈户曹參議。考諱命爀。號龍庵。贈吏曹參議。妣淑夫人金氏某女。正廟乙卯二月十九日。公生于州之龍頭里。幼有至性。事父母。惟命是聽。就學不煩提督。遵循課程。一日讀弟子入則孝。出則弟。行有餘力則以學文之語。乃曰。孝悌是入子職分。不可一日不修。不顧其養而徒能讀書。是果何用也。自是兼幹家務。家力稍舒。親旨無闕。平居夙興夜寐。懈慢之氣。不形於色。持身以謙恭。御家以勤儉。一家之内。敎無不行。事無不擧。倫理井井。恩誼融融。推而至族戚朋友。貴義輕財。賙窮恤匱。晚年傳家事。淨討一室。沈潛墳典。乃歎曰。少而不力。老而知悔。顧諸子曰。爾輩以我爲前車之鎰。及時勉力。以慰乃父未就之恨也。以壽陞同中樞。丁丑三月二十九日。考終于正寢。葬龍頭里後山上峯卯坐原。配宜寧南氏星秋女。舉二男二女。男德鉉箕鉉。女適閔致璜李承奎。長房無育。泰瑛爲後。次房有三男一女。泰瑛泰燮泰奎。女適林萬甲。曾孫以下不錄。嗚呼。居家有孝友之行。居鄕有愷悌之風。平生積累。內外無怨。壽隮大耋。螽斯蕃衍。文學不墜。天道福善。豈不信然。泰奎奉家狀。有不朽之托。余以鄉里後生。慕仰有素。不敢辭。 제자(弟子)는 …… 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전거지감(前車之鑑) 앞의 실패가 뒤의 교훈이 됨을 비유하는 말로, 《한서》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앞서가는 수레가 전복되면 뒷수레가 조심을 한다.〔前車覆 後車戒〕"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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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호 민공 유사 竹湖閔公遺事 공의 휘는 치석(致奭)이고, 자는 윤화(潤華)이며, 호는 죽호(竹湖)로 여흥(驪興) 사람이다. 평장사 휘 영모(令謨)와 상서(尙書) 휘 식(湜), 여흥군(驪興君) 휘 지(漬)가 모두 현조(顯祖)로, 함께 《고려사》에 실려 있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이고, 유일(遺逸)로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세조조(世祖朝)에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풀려나 돌아왔는데, 이로 인하여 능주(綾州)에 거주하면서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분의 현손(玄孫) 휘 대승(大昇)은 호가 농은(農隱)으로,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창도하여 그 일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렸으니, 공의 8세이다. 고조의 휘는 제범(濟範)이고, 증조 휘 일신(一臣)은 문학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조부의 휘는 백렬(百烈)이고, 부친의 휘는 진현(振顯)이며, 모친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수속(遂續)의 따님으로 문충공(文忠公) 지연(芝衍)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정해년(1827) 5월 8일에 부춘(富春)의 용두리(龍頭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바탕이 온화하고 인자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데 법도가 있었고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어 일찍이 장난하거나 방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몸을 비스듬하게 하거나 한쪽 다리에 의지해 서는 모습이 없어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효성이 지극하여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갖추지 않음이 없었고, 집상(執喪)할 때에는 한결같이 예법과 제도를 따랐다. 집안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도리와 규범이 엄정하였고, 종족을 대함에 있어서는 은덕과 정분이 두루 미쳤으며, 벗들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온화함과 공경함이 모두 지극하였다. 무릇 굶주리거나 병든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어 내버려두지 않았다. 대대로 가학으로 향리의 명가가 되었는데, 공이 이를 계승하고 훈육되어 감히 실추시킴이 없었다. 족숙(族叔) 사애 선생(沙厓先生 민주현(閔胄顯))이 바로 매산(梅山) 홍문경공(洪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의 뛰어난 제자로 학문에 연원이 있었기에 공은 사애를 따라 그 학문의 일부를 들으며 사숙(私淑)의 의리를 붙일 수 있어 학문의 조예가 높고 깊었으며, 명성과 인망이 성대하고 장중하여 당시 사우(士友)들에게 의지함과 우러름을 받았다. 일찍이 격언(格言)이나 중요한 말을 모아 자리의 오른쪽에 붙여두고 스스로를 비추어 살폈고, 또 그 말을 들어서 자제와 제자들을 경계하였다. 계유년(1873) 5월 29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청면(世清面) 어촌(漁村) 오른쪽 세동(細洞)의 경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재찬(在燦)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유순하였으며, 부인으로서의 법도를 잘 갖추었다. 자녀는 4남1녀를 두었으니, 선호(善鎬)는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고, 다른 아들은 계호(啓鎬)ㆍ상호(尚鎬)ㆍ창호(昌鎬)이며, 딸은 공주(公州) 이병귀(李秉龜)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영하(泳夏)ㆍ영은(泳殷)ㆍ영주(泳周)이고, 나머지는 어렸다. 아아, 공은 우리 마을에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우며 화락한 행실이나 문학과 시례(詩禮)의 풍모가 마을 자제들의 모범이 되었는데, 수명이 오십도 되지 못하고 갑자기 이 세상을 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옛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오늘을 슬퍼하니 단지 남은 생애의 한이 절실할 뿐이다. 영하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감히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致奭。字潤華。號竹湖。驪興人。平章事諱令謨。尚書諱湜。驪興君諱漬。皆顯祖也。俱載麗史。至我朝。有諱懷參。號義庵。逸執義。世祖朝謫守大靜縣。放還因居綾州。子孫世居焉。至玄孫諱大昇。號農隱官奉事。丙子倡義旅。事載節義錄。於公爲八世。高祖諱濟範。曾祖諱一臣。文行著世。祖諱百烈。考諱振顯。妣河東鄭氏遂續女。文忠公芝衍後。純廟丁亥五月八日。生公于富春之龍頭里。天資溫仁。語默有常。動靜有節。未嘗有戱嬉放慢之色。傾側跛倚之容。自在髫齡。人皆敬之。事親至孝。志體之養。無不畢給。執喪要遵禮制。御家人倫理嚴正。待宗族恩誼淶洽。接朋友和敬備至。凡有饑饉疾戚。隨力扶恤。未有關遺。世以詩禮爲鄕里名家。公承襲擩染。無敢失墜。族叔沙厓先生。卽梅山洪文敬公高第弟子也。學有淵源。公從沙厓得聞其緖餘。以附私淑之義。造詣崇深。聲望隆重爲。一時士友所倚仰。嘗聚格言要語。貼于座右。以自鏡考。又舉以戒子弟及生徒。癸酉五月二十九日考終。葬世清面漁村右細洞庚坐原。配密陽朴氏在燦女。貞靜柔嘉。閫儀甚備。四男一女。善鎬出爲伯父后。啓鎬尚鎬昌鎬。女適公州李秉龜。孫男泳夏泳殷泳周。餘幼。嗚呼。公吾鄉先進宿儒也。其孝友愷悌之行。文學詩禮之風。爲鄉子弟所矜式。豈知壽未半百而遽棄斯世也耶。緬古傷今。只切餘生之恨。泳夏奉家狀。有不朽之託。不敢以非其人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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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춘헌 임공 유사 樂春軒任公遺事 공의 성은 임(任)이고, 휘는 수환(秀煥)이며, 자는 윤문(允文)이다. 시조(始祖) 휘 호(灝)가 중국 소흥부(紹興府)에서 동쪽으로 와서 회주(懷州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아래에 정착하면서 자손이 그대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작위와 공훈으로 저명한 석학들이 대대로 찬란하였다. 휘 광세(光世)에 이르러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졌으며, 이분의 손자 발영(發英)이 임진년 변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용만(龍灣 의주)까지 호송하였는데, 선묘(宣廟 선조)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시를 지어 말하기를, "하늘이 임발영을 낳으니, 우리 사직의 신하라네[天生任發英, 爲我社稷臣.]"하고 정훈 이등(正勳二等)으로 예양군(汭陽君)에 봉하였다. 이분의 손자 설(渫)에 이르러 훈련 부정(訓錬副正)으로 발포(鉢浦)의 전쟁에서 순절하자,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공에게는 7세조가 된다. 증조 휘 명중(命重)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시오(時五)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흥언(興彦)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고, 모친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광직(光稷)의 따님으로 순묘(純廟) 신미년(1811) 9월 16일에 공을 낳았다. 형제 셋에 공이 막내였는데, 집안이 대대로 매우 가난하였기에 맨손으로 분가하여 고생고생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하였다. 일의 형세와 재력이 조금 펴지자 항상 말하기를, "나이든 부모님이 집에 계시고 두 형님이 모두 가난하여 콩죽이나 물을 바쳐 기쁘게 해드리니, 이 몸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자신은 묵은 솜의 베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부모님의 몸에 편안한 옷과 입에 맞는 음식을 모두 갖추어 드리지 않음이 없었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데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모두 자신이 마련하여 남은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두 형님을 섬길 때에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있든 없든 함께하였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여러 조카들을 보살펴 양육함에 자기에게서 나온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마음가짐은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몸가짐은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며, 근면과 검약으로 집안을 다스렸고 온화함과 너그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으니, 이 때문에 각기 환심을 얻어 안팎으로 원망이 없었다. 일찍이 한 번은 길을 가는 중에 도적을 만나 지니고 있던 자기의 물건과 이웃 사람이 맡긴 물건을 모두 잃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잃은 것을 말하지 않고 이웃의 물건을 하나하나 갖추어 주었고, 이웃에 사는 사람이 밤에 수확한 벼를 훔치다 다른 사람에게 붙잡히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간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그에게 준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았다. 길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만나 상해를 입었을 때에 여러 자제들이 이를 분하게 여기자, 공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는데, 무슨 따질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싸우는 실마리는 모두 남의 옳지 못한 것만 보고 자기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못한 데에서 비롯하니, 만약 마음과 생각을 평안하고 너그럽게 하여 자기자신처럼 남을 용서할 수 있다면 어찌 다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때문에 평생 동안 남과 화를 내며 다투어 화평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두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은 하나의 몸으로 밭을 갈고 책을 읽는 일을 겸하였는데, 하물며 너희 형제들은 두 개의 몸으로 도리어 이것을 하는데 부족함이 있겠는가. 형은 책을 읽고 동생은 밭을 가는 것도 또한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을 만하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하에 휼륭한 일은 모두 갖은 어려움을 겪고 애써 힘쓰는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부지런함은 복을 일구는 밭이고, 나태함은 화를 부르는 계제임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은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이니, 이 마음의 바름은 바야흐로 봄기운이 화창하고 따사로울 때에 볼 수 있다." 하고서 인하여 '낙춘(樂春)'을 헌(軒)의 편액으로 걸어두었다. 금상(今上 고종(高宗)) 계유년(1873)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享年) 63세였으며, 웅치(熊峙) 梨木嶝(이목등) 진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종유(宗瑜)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봉규(奉奎)ㆍ태규(台奎)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현(金在鉉)에게 시집갔다. 손자 삼현(三鉉)ㆍ오현(五鉉)은 첫째 봉규에게서 나왔고, 철현(喆鉉)ㆍ문현(文鉉)은 둘째 태규에게서 나왔다. 아, 충직하고 참되며 질박하고 성실함은 순박하고 고아한 선진(先進)의 풍모이니, 그 남은 운치와 향기는 비록 풍속이 야박해지고 사라진 때라 하더라도 또한 다하는 날이 있지 않음을 공에게서 알 수 있다. 태규가 칠순의 노쇠한 나이에 눈보라를 맞으며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그의 뜻을 애닯게 여겨 감히 번다하게 사양하지 못했다. 公姓任。諱秀煥。字允文。始祖諱灝。自中國紹興府東來。止於懷州天冠山下。子孫仍貫焉。自是爵勳名碩。世代煒燁至諱光世。封冠山君。有孫發英。壬辰之變。奉廟社。扈于龍灣。宣廟嘉之。有詩曰。天生任發英。爲我社稷臣。以正勳二等封汭陽君。至孫渫。以訓錬副正。殉節于鉢浦之役。命旌閭。於公爲七世。曾祖諱命重。贈司僕寺正。祖諱時五。贈左承旨。考諱興彦。通德郞。妣仁川李氏光稷女。以純廟辛未九月十六日生。公兄弟三人。公其季也。家世貧甚。赤手分炊。而辛勤拮据。事力稍紓。常曰。老親在堂。二兄皆貧。菽水供歡。其非此身之專責乎。自衣縕袍。自喫處糲。而所以安其體適其口者。無不畢給。遭內外艱。初終凡具。皆自營辦。俾無餘憾。事二兄。友悌甚篤。有無共之。及其歿。撫養諸姪。無間已出。宅心醇實。持身謙恭。御家勤儉。接物和裕。是以各得歡心。内外無怨。嘗路中遇賊。所携己物及隣人所付物。竝失之。歸家不言所失。隣物一一備給。隣氓夜竊穫禾。爲人所執。公曰非竊也。吾固與之耳。其含容如是。路次遇酗酒人見傷。諸子忿之。公曰。彼卽酒妄。有何計較也。嘗曰。人之爭端。皆由於只見人之不是不見己之不是處也。若能平心坦慮。恕人類己。則豈有爭也。是以平生未嘗與人忿爭以失其和也。戒二子曰。古人以一箇身。兼耕讀之業。況汝兄弟以二箇身。而乃有闕於此乎。兄讀弟耕。亦可爲家户之計也。又曰。天下好事。皆自艱難辛苦中來。是知勤苦爲福田。懶怠爲禍階。汝等戒之。又曰。仁者天地生物之心。此心之正於方春和煦之時可見。因以樂春揭軒。今上癸酉五月二十三日卒。享年六十三。葬熊峙梨木嶝辰坐原。配天安全氏宗瑜女。有婦德。生二男一女。男奉奎台奎。女適光山金在鉉。孫三鉉五鉉長房出。喆鉉文鉉次房出。嗚呼。忠信質慤。此是醇古先進之風也。其餘韻遺馥。雖在風澆俗喪之日。而亦未有可盡之日。觀於公可以知矣。台奎七耋衰齡。觸冒風雪。有不朽之託。悲其意不敢多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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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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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정대부 덕재 윤공 유사 贈通政大夫德齋尹公遺事 공의 휘는 필중(必中)이고, 자는 익서(益瑞)이다. 윤씨(尹氏)의 계보는 파평(坡平)에서 나왔으니, 고려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을 시조로 삼았으며, 문정공(文靖公) 휘 집형(執衡)ㆍ문숙공(文肅公) 휘 관(瓘)ㆍ문헌공(文獻公) 휘 위(威)가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문헌공이 적을 토벌하여 남원(南原)에서 공을 세우고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삼았기에 자손들이 그대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휘 만동(萬東)에 이르러 능주(綾州)에 우거하였다. 고조 휘 상양(商鍚)은 호가 신재(愼齋)로 은거하여 도의를 행하였는데, 언제가 한번은 흉년을 만나 한 마을의 조세를 대신 내주자 마을 사람들이 비(碑)를 세워 칭송하였으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증조 휘 홍도(弘道)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조부 휘 창종(昌宗)은 호가 계남(溪南)이며, 부친 휘 일주(壹周)는 호가 봉남(鳳南)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덕립(德立)의 따님이다. 공은 정종(正宗) 기유년(1789)에 능주(綾州) 동면(東面) 회덕리(懷德里)에서 태어났다. 풍채와 기골이 뛰어났고, 성품과 기질이 온유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응대하는 것이 공손하였고, 받들어 따르는 것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스승에게 나아가 《소학》 책을 받아 읽게 되어서는 일상생활의 절도를 하나하나 준수하여 입으로는 비루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내지 않았고, 손으로는 부잡한 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않는 모습이 성인처럼 의젓하였으니, 이웃 마을에 사는 통정 대부 이공(李公) 인석(寅錫)이 공의 남다름을 듣고서 딸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재산과 집기를 있거나 없거나 함께하였고, 내외의 친척에게 은덕과 정의가 융성하고 흡족하여 각기 환심을 얻었다. 일찍이 한번은 크게 흉년이 든 적이 있었는데, 대소 가솔이 모두 한 집에 모여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집안에 불화가 없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슬픔이 깊었고,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온갖 정성과 형식을 한결같이 예법과 제도를 따랐다. 공은 평소에 명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았고 평판이나 권세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분수에 편안하고 천성에 따라 유유자적하였다. 일찍이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선(善)을 쌓으면 반드시 훗날 복이 있을 것이고, 불선(不善)을 쌓으면 반드시 훗날 재앙이 있을 것이다. 복과 재앙은 자기 자신이 구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병진년(1856) 2월 5일에 삶을 마치니, 본면(本面) 원산(院山) 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이씨(李氏)는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며 규문의 법도에 빠짐이 없었다. 1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태행(泰行)이고, 딸은 여흥(驪興) 민치호(閔致鎬)와 김해(金海) 김규엽(金圭燁)에게 시집갔다. 태행은 외아들 병임(秉臨)이 일찍 죽어 자식이 없자 종부제(從父弟) 태승(泰勝)의 아들 병현(秉玹)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병현의 아들 정섭(定燮)이 나와 종유(從遊)하였는데, 하루는 대인(大人)의 명으로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한마디 말을 적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오래도록 굳게 사양하였으나 정섭의 요청이 갈수록 간절하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수식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必中。字益瑞。尹氏系出坡平。以麗太師諱莘達爲始祖。文靖公諱執衡。文肅公諱瓘。文獻公諱威。皆其顯祖也。文獻討賊南原。有功食米南原。子孫仍貫焉。至諱萬東。寓綾州。高祖諱商鍚。號愼齋。隱居行義。嘗遇饑歲。替納一鄕之稅。鄉人立碑頌之。贈參判。曾祖諱弘道。通政。祖諱昌宗。號溪南。考諱壹周。號鳳南。通政。妣金海金氏德立女。公以正宗己酉。生綾之東面懷德里。風骨岥嶷。性氣溫裕。事親至孝。應對唯諾。承順如流。就傳授讀小學書。日用節度。一一遵循。口不出鄙悖之言。手不作浮雜之戱。端坐斂膝。偉然如成人。隣里通政李公寅錫。聞其異。以女妻之。與其弟友愛甚至。財產什物。有無共之。內外族戚。恩誼隆洽。各得歡心。嘗遇大無。大小家眷。渾聚一室。同鼎綴食。而庭無間言。遭內外艱哀毀過甚。不脱絰帶。不御酒肉。凡百情文。一遵禮制。平日不慕名利。不遂聲勢。安分任眞。囂囂如也。嘗戒子孫曰。積善必有餘慶。積不善必有餘殃。惟慶惟殃。無非自已求之。何怨天尤人之有。丙辰二月五日考終。葬本面院山壬坐原。齊李氏貞靜溫柔。閫範無闕。舉一男二女。男泰行。女驪興閔致鎬金海金圭燁。泰行有一男秉臨早死無育。取從父弟泰勝子秉玹爲後。秉玹子定燮。從余遊。一日以其大人命抱家狀。有一言之託。余牢辭久之。而定燮之請愈勤。謹据狀以修潤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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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월담 처사 장공 유사 月潭處士張公遺事 공의 성은 장(張)이고, 휘는 정규(珽奎)이며, 자는 성팔(聖八)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니, 포음(圃蔭) 선생 휘 정필(貞弼)을 비조(鼻祖)로 삼았다. 포음은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동쪽(신라)으로 와서 본국 사람 권공(權公) 행(幸)ㆍ김공(金公) 선평(宣平)과 함께 삼한(三韓)11)을 통합하는데 공적이 있어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12)에 함께 배향되었다. 휘 연우(延佑)에 이르러 벼슬이 호부 상서(户部尚書)에 이르렀고 흥산군(興山君)에 봉해지자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휘 합(合)은 조선조에 들어와 선공감 정(繕工監正)을 지냈는데,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5대를 전해 내려온 휘 희성(希聖)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냈으며, 문장과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드러났다. 이분이 낳은 휘 경한(景翰)은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갑자년(1604)에 적을 토벌하는데 공적이 있어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운구(雲衢)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병자년(1636) 북쪽 오랑캐의 변란 때 나라가 화친을 맺고 신주(神州)가 침몰하는 것을 보자 개연(慨然)히 세상을 등진 채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산중으로 들어가 과축(薖軸)13)을 꾸미며 노년을 마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숭정(崇禎)14)의 숨어 사는 백성[逸民]'이라 하였으니, 공의 5대이다. 고조 치언(致彥)은 호가 일송(一松)으로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학생을 가르치는데 성취가 많았다. 증조 효지(孝智)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조부 한신(漢臣)은 호가 추와(秋窩)이다. 부친 욱(旭)은 호가 창파(滄坡)로 세상에 은덕이 있었으며, 모친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필달(馝達)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한데다 조용하고 아름다워 규문의 범절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정종(正宗 정조) 갑인년(1794) 4월 16일에 동복(同福) 학당리(學堂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온후하고 강직한데다 총명하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좋지 않은 옷이나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농으로 하는 말이나 장난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감히 어리다고 그를 홀대하지 않았다. 7세 때 취학(就學)하여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적에 종일토록 읽지 않아도 등지고 암송하는데 매우 익숙하였는데, 글방 스승이 말하기를, "너의 재능은 참으로 영민하다. 그러나 영민하여 읽지 않고도 암송하는 것은 우둔하여 많이 읽고 암송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자, 이때부터 여러 차례 암송하는데 매우 부지런하였다. 조금 장성해서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어 글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순상(巡相 관찰사)이 도회(都會)의 시소(試所)를 설치하여 금성(錦城 나주)에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에 공이 지은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이로 인해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가려고 하자, 공이 부모님이 계시다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자자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직접 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물이 흐르듯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따랐으며, 아침에 문안인사를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거나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의절이 잠깐 사이나 창졸간에도 처음부터 어긴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이 나면 지극한 정성으로 근심을 다하여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 밤까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면서도 온갖 의절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젋은 시절에는 가난하여 봉양하지 못했고, 지금은 조금 넉넉하다고 할 만한데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서 인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며 옷을 적셨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분가할 때에 논밭과 가옥, 세간살이들을 한결같이 설포(薛包)15)가 했던 것처럼 스스로 나쁜 것만 차지하였다. 만년에 하나의 서재를 지어 '모락재(慕樂齋)'라고 쓴 편액을 걸어 놓았으니, 대체로 추모하고 화락하게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거처하는 곳에 수십 이랑을 개간할 만한 황무지가 있었는데, 공이 마을 장정들을 감독하여 제방을 쌓게 하고 이웃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간하도록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지 않았다. 평소 생활이 담박하여 명리와 영화, 온갖 기이한 물건과 완상품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을 이롭게 하고 은택을 베풀거나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급급하였다. 만년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마침내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여 격언(格言)이나 요언(要語)를 만나면 반드시 벽에 써서 항상 눈앞에 두고 보았으며, 늘 말하기를,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참으로 좋긴 하지만, 만약 기미를 살펴 혼자만의 생각을 삼가지 않는다면 좌치(坐馳)16)에 귀결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끝까지 사색하고 연구하였으며,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공부하는 것을 쇠약한 노년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았다. 규산(圭山) 조영승(曺瑩承)ㆍ상사(上舍 진사) 송정옥(宋廷玉)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여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학문을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17)이 말하기를, "말세의 분주하게 다투는 풍속에서 욕심이 적은 선비를 보지 못했는데 오직 우리 고을의 장(張) 아무개만이 거의 이러한 선비에 가까울 뿐이다." 하였다. 병이 들었을 때에 집안사람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태어나서 일컬을 만한 일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애석하랴. 또 내 나이가 예순하나로 장수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옥과(玉果) 율천(栗川)의 안산(案山) 두리봉(斗理峯) 사좌(巳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선산 유씨(善山柳氏)는 연수(年樹)의 따님으로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희춘(希春)의 후손이며, 온화하고 인자한데다 정숙하였으며, 부녀자로서의 덕행을 모두 갖추었다. 공보다 2년 뒤 7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본현(本縣) 안심촌(安心村)의 주지봉(冑地峯) 사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동식(東植) 하나를 두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동식은 4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용(聲容)ㆍ태용(泰容)ㆍ채용(彩容)ㆍ익용(益容)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구(金在鳩)에게 출가하였다. 성용이 아들이 없어 둘째 태용의 아들 기홍(基洪)을 후사로 삼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기선(基善)이다. 아아! 이처럼 빼어나고 맑은 자질로 학문의 힘을 겸하여 갈고닦으며 침잠하였기에 성취한 바가 크고 넓었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흥기되어 행해졌고, 고을에서는 신의가 드러났으며, 친척들은 공의 온정을 생각하였고, 벗들은 공의 풍모를 앙모하였으니, 남쪽 지방의 뛰어난 선비요, 말세에 고상한 인물이라 이를 만하였다. 다만 산림 속에서 배회하고 언덕과 골짜기에 묻혀 지내며 세상을 경영할 뜻을 조금도 시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남긴 덕의 향기가 집안에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퍼져 있으니, 베풀지 않은 베풂이요, 공효가 없는 공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홍이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써 한창 진보해 마지않으니 공의 뜻과 학업이 이 손자를 석과(碩果)의 씨로 삼아 후세에 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기홍이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姓張。諱珽奎。字聖八。號月潭。以圃蔭先生諱貞弼爲鼻祖。圃蔭素以中州浙江人。渡海來東。與本國人權公幸金公宣平。有統合三韓之功。共享安東太師廟。至諱延佑。官户部尚書。封興山君。子孫因貫焉至諱合入我朝。官繕工監正。命禮葬。五傳至諱希聖。文典翰。以文章行義。著聞於世。生諱景翰。主簿。甲子討賊有功。錄振武功臣。生諱雲衢。通政。丙子北虜之亂。見國家媾和。神州陸沈。慨然謝世。入福川山中。裝點薖軸爲終老計。自謂崇禎逸民。是爲公五世。高祖致彥。號一松。學行著聞。教生徒多成就。曾祖孝智。階嘉善。祖漢臣。號秋窩。考旭。號滄坡。世有隱德。妣全州李氏馝達女。端淑靜嘉。壺範無闕。正宗甲寅四月十六日。生公于福之學堂里。溫厚剛方。穎悟秀爽。自幼不恥惡衣惡食。不作戱言戱動。人不敢以幼而忽之。七歲就學。授千字文。終日不讀。而能背誦甚熟。塾師曰。汝之才固敏矣。然敏而不讀而通。不如鈍而多讀而通也。自此誦數甚勤。稍長。遍閱經史。詞藻藹蔚。巡相設都會。試士於錦城。見公所製。大加稱賞。因欲載與俱去。公以親在不許。自是聲華藉藉。家貪甚。躬執漁樵。柔聲怡色。承順如流。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造次倉猝。未始有違。親有疾。至誠致憂。露禱嘗藥。夜不解帶。及遭艱。擗踊過哀。凡百儀節。一遵家禮。嘗曰。少日貧窶。無以爲養。今則可謂稍饒而親不在焉。此余終身之恨。因泣下沾衿。與其弟友愛甚篤。及析箸。田廬什物。自取荒頓。一如薛包之爲。晩築一齋。揭顏以慕樂。盖寓追慕湛樂之意也。所居有荒野。可墾數十頃。公董邑丁築堰。命隣里貧者。分以墾之而不專。其利平居恬澹於聲利芬華。凡百技玩。一無所好。至若利人澤物。周窮恤匱。汲汲如飢渴也。晩廢擧業。遂專心爲己。遇格言要語。必書諸壁以常目焉。嘗曰。終日靜坐固善。然若不察其幾而愼其獨。則其不爲坐馳之歸乎。是以窮索研究。日有課程。至衰老而不替也。與曺圭山瑩承宋上舍廷玉。交好甚密。講磨不輟。河圭南百源曰末俗奔競。未見有寡欲之士。而惟吾鄕張某庶幾焉。及其屬疾也。家人迎醫。公止之曰。生而無述。死且何惜且吾年六十一。不可謂不壽。復何望焉。竟以二月十七日考終。墓玉果栗川案山斗理峯巳坐原。配善山柳氏年樹女。眉巖文節公希春后。溫仁貞淑。婦德甚備。後公二年七月二十六日卒。葬本縣安心村冑地峯巳坐原。擧一男。曰東植。文行著世。東植有四男一女。曰聲容泰容彩容益容。光山金在鳩。聲容無男。以仲房子基洪爲後。側室子曰基善。嗚呼。以若秀爽之質。濟以學問之力。磨礱浸灌。所就宏贍。是以在家庭孝友興行。在鄉閭信義著聞。族戚懷其情。朋友仰其風。可謂南服之偉儒。叔世之高蹈。但婆娑林樊。沈淹邱壑。使經世之志。未得有少試焉。此爲可憾也已。然遺芬餘馥。傳之在家。播之在人者。不可謂非不施之施無效之效也。基洪從師力學。方進不已。安知公之志業。不以此爲碩果之種。而將大來於來許耶。基洪抱家狀。來謁不朽之文。不敢以非其人辭。 삼한(三韓) 후삼국(後三國)인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사당으로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삼태사, 즉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삼공신 묘(三功臣廟)라 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중건과 더불어 이름을 태사묘(太師廟)라 개칭하였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과축(薖軸) 은둔 생활을 뜻하는 것으로 《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이다. 숭정(崇禎)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설포(薛包) 동한(東漢) 여남(汝南) 사람으로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은 나쁜 것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형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좌치(坐馳)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몸은 가만히 앉아 있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 치달리는 것을 말한다.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치행(穉行)·효일(孝一)이며 규남은 그의 호이다. 화순 출신의 실학자로 1803년(순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물을 뿜어 올리는 자승거(自升車)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한 공로로 세상에 알려져 1834년에 음직(蔭職)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고, 형조좌랑을 거쳐 석성현감에 나아갔으나 토호(土豪)와의 알력으로 인해 이듬해 보령으로 귀양갔다가 다음 해 바로 풀려나고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규남문집(圭南文集)》을 남겼으며, 작품으로는 〈만국전도(萬國全圖)〉·《영모화(翎毛畵)》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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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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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동몽교관 박공 유사 贈童蒙教官朴公遺事 공의 성은 박(朴)이고, 휘는 종안(鍾安)이며, 자는 도현(道賢)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다. 신라(新羅) 밀성대군(密城大君)이 별자(別子)를 계승한 선조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울(蔚)이 찰방(察訪)을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지수(枝樹)는 감찰(監察)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는 10대 선조가 된다. 고조는 경시(慶始)이고, 증조 장환(章煥)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으며, 조부는 재희(載禧)이다. 부친 효원(孝源)은 효성으로 마을에 정문이 세워졌고, 모친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순길(順吉)의 따님으로 문강공(文康公) 광전(光前)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5월 17일에 정천리(淨川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천성이 순박하고 진실했으며,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였다. 곤궁함 속에서 나고 자라 온갖 고생을 두루 겪으면서도 응대하거나 일을 주선하는 것이 물이 흐르듯 민첩하고 넉넉하여 일찍이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형제가 넷이었는데, 서당에 가서는 나란히 함께 앉아 형과 아우가 서로 매진하며 날마다 분량을 정해 공부하였고, 밤이 되면 긴 베개와 커다란 이불을 함께 하며 애초에 서로 떠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온갖 일을 힘을 다해 주관하고 다스려서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바쳤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공이 이미 늙은 나이임에도 몸이 훼손될 정도로 너무나 지나치게 슬퍼하며 인정과 예법, 형식과 슬픔에 빠뜨린 의절이 없었다.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무익한 일이나 유람은 하지 않았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면서 근면하고 검약하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겼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기의 병통인 것처럼 여겼으며, 친척과 친구들의 좋거나 나쁜 일, 기쁘거나 슬픈 일에 안부를 묻고 도와주는 데 정성스럽고 넉넉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언제가 한번은 어떤 사람이 엽전 수십 꿰미를 빌려가고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미 돌려주었다고 속이자, 공이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서책을 살 때에는 값을 흥정하지 않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전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어찌 저자거리에서 사고파는 것처럼 하겠는가." 하였다. 이웃 사람이 밤에 집으로 들어와 조세 가마니를 훔쳐가는 것을 공이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하고서 집안사람들에게 누설하지 말도록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어찌 한 섬의 조세 때문에 남을 헤아릴 수 없는 곤경에 빠트리겠는가." 하였다. 계미년(1883) 1월 26일에 삶을 마쳤고, 묘지는 서창촌(西倉村) 왼쪽 산기슭 신좌(辛坐)이며, 갑오년(1894)에 동몽교관(贈童蒙教官)에 증직되었다. 배(配)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태원(泰元)의 따님으로 명고(鳴皐) 임전(任錪)의 후손이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경주(慶州) 이진기(李鎭基)에게 시집갔다. 계배(系配)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원(載元)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조용한데다 유순하고 착했으며 규중의 법도를 두루 갖추었다. 1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 윤동(潤東)은 군수를 지냈고, 딸은 신평(新平) 송연심(宋淵心)과 이천(利川) 서용수(徐鎔洙), 능성(綾城) 구교주(具教周)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의 평생을 더듬어 보건대 효성과 우애로 화락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약한데다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니, 이것이 뜻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법으로 가정에 훌륭한 계책을 남기고 고을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나게 한 이유이다. 계승시켜 나아갈 전통을 남김이 이미 이와 같으니, 산초 열매나 메뚜기 알처럼 번성한 자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질 경사를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윤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公姓朴。諱鍾安。字道賢號野隱。新羅密城大君爲繼别之祖。至中葉有諱蔚。察訪。四傳至諱枝樹。監察。壬辰之變。殉節旌閭。贈左承旨。於公爲十世。高祖慶始。曾祖章煥。文章鳴世。祖載禧。考孝源。孝旌閭。妣珍原朴氏順吉女。文康公光前后。純廟甲申五月十七日。公生于淨川里第。天資朴實。性氣溫仁。生長窮約。備經辛苦。而應對周旋。敏贍如流。未嘗一咈親意。兄弟四人。就塾連業。我邁爾征。日有課程。夜則長枕大被。未始有違。家間凡務。殫力幹理。以供菽水。內外艱。公已耆艾。而致毁過甚。情文易戚。未有闕儀。平居不作無益之事。不爲無益之遊。夙興夜寐。克勤克儉。見人之善若己出。見人之惡若己病。親戚知舊。吉凶歡戚。存訊賙恤。無不款洽。嘗有人貸去錢數十緡。久後誣以已還。公不與之辨。卽折其券。買書冊不上下價曰。聖經至重。豈若市井買賣之爲。隣人夜入家竊租苞。公若不見也。戒家人勿泄曰。豈以一石租而陷人於不測乎。癸未正月二十六日終。墓西倉村左麓辛坐。甲午贈童蒙教官。配豊川任氏泰元女。鳴皐錪后。有婦德。生一女適慶州李鎭基。系配河東鄭氏載元女。貞靜柔惠。閫儀備至。生一男三女。男潤東郡守。女適新平宋淵心利川徐鎔洙綾城具教周。孫以下不錄。嗚呼。迹公平生。孝友愷弟。勤儉質慤。是其立心行己之則。而所以貽佳謨於家庭。著令聞於鄉閭者也。垂統可繼。旣已如此。則螽斯椒聊。綿綿餘慶。又豈可量哉。潤東持家狀過余。託以不朽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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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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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봉강 김군 유사 鳳岡金君遺事 학생 김용희(金龍熙)가 나를 따라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자기 선친의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께서는 신체가 매우 크고 모습이 매우 헌걸찼습니다. 얼굴은 넓고 입은 컸으며, 눈썹은 치켜 올라갔고, 수염은 아름다웠으며, 목소리는 우렁차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말은 어눌하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그 기상과 풍모가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하게 하였고 싫어할 수 없게 하였으며, 친근하게 하였고 소원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거처하거나 고을에서 처신할 때에 사람은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았고, 일은 쉽든 어렵든 가리지 않으셨으며, 상사(喪事)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기며 도와주셨고, 재난과 우환이 있으면 다스리고 보호해 주셨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풀어주고 구원해 주셨으니, 남의 근심을 걱정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힘이 다하도록 주선하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일을 헤아리는 데 재주가 있으셨고 사람들에게 완곡하게 말씀하시는 데에 뛰어나시어 친척과 친구, 고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선친께 자문하여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대체로 분쟁을 해결하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밖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직접 보셨던 것이 아니신지요? 가친(家親)께서 백부의 양자로 나가 양부모를 섬기실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삼감으로 그 뜻과 몸을 봉양하시어 수십 년 동안 집안에서 흠잡는 말이 없었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시고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에 남은 유감이 없으셨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을 다하시고 제기(祭器)를 씻는 일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하셨습니다. 규방 안에서는 무람없는 습관이 없으셨고, 집안에서는 사치스러운 기풍이 없으셨으며, 집안사람을 근면과 검약으로 다스리셨고, 자손들을 시서(詩書)의 학과에 힘쓰고 현숙한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안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보셨던 일이 아니신지요? 그러나 밖의 행실로 안의 행실을 미루어 본다면 또한 대략 짐작하여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머물러 있지 않아서 선친의 음성과 용모가 날로 멀어지니,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보존하고 추모의 정을 붙이기 위한 것으로 문자의 서술이 또한 없을 수 없습니다. 혹 이를 위해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시겠지요?" 하였다. 내가 그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말하기를, "나 또한 들은 것이 있다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선친과 함께 앉아 있을 적에 어떤 객이 왔는데, 그대의 선친이 친척 집안의 생계 형편을 묻자, 객이 말하기를, '근래에 매우 곤궁합니다.' 라고 하니, 그대의 선친이 말하기를, '이는 좋은 소식이군요. 가난한 선비로 분수를 지키고 상도를 편안하게 여기니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충족하다고 했다면 반드시 옳지 못한 구함이 있었을 것이니 듣기를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네. 내가 옳은 말이라 여기고 탄복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네. 또 일찍이 나를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나이가 들고 기운이 쇠약해지면 실수하기가 쉬우니, 만약 독서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공의 근래 생활을 보건대 서책을 대하는 것이 드무니 자못 염려스럽네. 사람이 술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기운으로 술을 이겨야 하는데, 지금 공은 기운이 쇠약함에도 술 마시는 것을 줄이지 않으니 술로 곤욕을 당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내가 모두 탄복하여 마음에 새겨두었다네. 이 세 가지 말은 그대가 듣지 못했을 것이네. 이것으로 보건대, 이 말 외에도 또 듣지 못한 것이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만년에 이웃 마을에서 나의 공부를 도와주는 훌륭한 벗을 하나 얻었다가 근래에 이런 규범과 경계를 듣지 못하여 벗의 마음에도 오히려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자손이 된 입장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들은 것들을 모두 기록하여 가장으로 삼게나." 하였다. 군의 휘는 권일(權一)이고, 자는 권중(權中)이며, 호는 봉강(鳳岡)이다. 김씨(金氏)의 계보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그 시조이다. 휘 충한(冲漢)은 호가 수은(樹隱)으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고려 말에 조선에 굴복하지 않아 남원(南原)으로 귀양을 갔으며,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영전(永傳)은 호가 필암(蓽庵)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고, 능주(綾州)의 신산(薪山)에 우거하였다. 이분의 손자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로 진사(進士)이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신산에서 가승동(佳勝洞)으로 옮겨 왔다가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분의 아들 명철(名哲)은 임진왜란 때 김대인(金大仁) 장군과 함께 예성산(禮聖山)에 웅거하여 적을 죽이고 이겼으니, 이 일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고조는 양욱(陽旭)이고, 증조는 사충(思忠)이며, 조부는 종만(鍾萬)이다. 양부는 석원(錫源)이고, 양모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동지(同知) 계환(桂煥)의 따님이다. 생부의 휘는 일원(鎰源)이고, 생모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상길(相吉)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정사년(1857)과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진년(1904) 4월 20일이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부인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시변(時釆)의 따님이다. 자녀는 4남1녀이니, 아들은 봉희(鳳熙)ㆍ학희(鶴熙)ㆍ용희(龍熙)ㆍ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한우치(閒牛峙)에 장묘지를 썼다가 송석면(松石面) 탄현(炭峴)의 경좌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아아, 군의 인품과 재주가 말세에 보기 드문데 나이가 오십도 되기 전에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나 평소에 가졌던 뜻과 사업을 백에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비통하고 애석한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난초 가지와 산초 가지가 무성하여 뜰에 가득하고, 용희가 또 뒤를 이어 사문(斯文)에 종사하여 한창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으니, 당시의 뜻을 계승하여 이루어 낼 날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金生龍熙從余遊。日以其先親家狀示之曰。先親身幹碩大。體相俊茂廣面大口。軒眉美鬚。聲弘而遠。言訥而詳。其氣象風度。令人可欲而不可惡。可親而不可遠。居家處鄕。人無親疏。事無難易。有死喪則扶戀之。有災患則營護之。有冤枉則伸捄之。其有以憂人之憂。樂人之樂。而周旋竭蹶者。無所不至。長於料事。優於諷人。親戚知舊。隣里鄉黨。事有未決者。無不待以咨處焉。盖其解紛剸劇。有以異於人。此行義之在外者也。非先生之所親見乎。家親出後伯父。事所後。志物之養。一於誠謹。數十年。庭無間言。喪致其哀。而時月之制。無有餘憾。祭致其誠。而漑濯之役。必自執之。閨房之中。無褻狎之習。庭除之間。無奢靡之風。御家衆以勤儉。教子孫以勉課詩書。親近賢淑。此行義之在内者。非先生之所見也。然以外推內。亦可以領略矣。日月不居。音容日遠。所以存其思而寓其慕者。文字之述。亦不可無也。或爲之不吝一言耶。余悲其意而不忍辭。因曰。吾亦有所聞。吾嘗與尊先君坐。有客至。君問其親戚家計活之狀。客曰。近日極困云。君曰。是好消息。以窮儒而守分安常。安有不困。若云充足。則必有所枉求。非所願聞也。余以爲格論。歎賞不已。又嘗戒余曰。年老氣衰。易致失墜。苟非讀書之助。何以扶持。見公近年罕對書冊。殊可慮也。人之飲酒。必須氣以勝之。今公氣衰而飲不減。其不爲酒困乎。余皆歎服而銘佩焉。此三言者。汝之所不聞也。以此觀之。此言之外。又安知無所未聞也。余晚接隣閈。得一強輔。近不聞此等規警。朋友之心。猶不能無恨。況爲子孫地乎。竝記所聞者。爲之狀。君諱權一。字權中。號鳳岡。金氏系出慶州。新羅敬順王。其始祖也。至諱冲漢。號樹隱。官禮儀判書。麗末不屈。謪南原。享開城表節祠。七傳諱永傳。號蓽庵。修義副尉。寓綾州之薪山。孫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自薪山移佳勝洞。仍居焉。子命哲。壬辰之亂。與金將軍大仁。據禮聖山。殺賊得捷。事載邑誌。高祖陽旭。曾祖思忠。祖鍾萬。考錫源。妣珍原朴氏同知桂煥女。生庭諱鎰源。妣綾城具氏相吉女。哲宗丁巳今上甲辰四月二十日。卽君生卒也。配公州李氏時釆女。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墓閒牛峙。移葬于松石面炭峴庚坐原。嗚呼。人品材局。叔世罕見。而年未五十。遽已告逝。使平日志業。百未一就。曷勝痛惜。蘭枝椒條。蕃衍盈庭。而龍熙又從事斯文。方進不已。安知當日之志。不有繼述成就之日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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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심계 배군 유사 心溪裴君遺事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 중년의 벗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배군 흥묵(裴君興默)과 문군 송규(文君頌奎)가 이들이다. 두 군은 한 무리 중에서 영특함과 빼어남으로 뜻을 함께 하고 학문을 같이 하며 맹렬하게 분발하여 기세를 떨쳐나갔으나 불행히도 모두 멀리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배군의 조카 규덕(奎悳)이 찾아와 숙부의 행장(行狀)에 관한 글을 청하였다. 아, 내가 문군에 대해서는 사후의 글을 편술하여 그가 남긴 아들에게 부쳐주었지만, 유독 배군에 대해서만은 아직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매번 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나만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늙어가는 것이 염려스러울 때마다 죽기 전에 그의 지조와 행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의 집에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니, 비록 규덕의 요청이 없다 하더라도 잊지 않고 있었던 일이었다. 군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조용한데다 단정하고 자상하여 유희나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모님 곁에 있을 적에는 응대하는 것을 조심하였고, 밖으로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책을 읽는 데 매우 근면하였다. 그의 대인(大人) 은곡공(隱谷公)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어린아이를 기르는 온갖 것을 한결같이 옛사람이 학문 하던 차례를 따르게 하였고, 과거 시험을 위한 문장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거나 녹봉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지 않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여 문군과 종유하게 되어서는 서로 살펴보고 바로잡아 주면서 연마하고 훈도하여 서로 함께 날로 달로 매진하였다. 대체로 문군은 지혜가 열리어 도를 깨닫는 데 뛰어났고, 배군은 지조를 지키는 데 뛰어났으니, 이것이 서로 필요로 하고 도움이 되어 공공(蛩蛩)과 거허(駏驉)18)처럼 서로 없으면 안 되고 장님과 절름발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유였다. 살펴보건대, 군은 평소 집에 거처할 때에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뜰을 청소하였고, 온화한 말과 기쁜 낯빛으로 어버이께 잠자리와 음식을 여쭈었다. 깨끗한 방 한 칸을 두어 사방 벽에 도서를 둘러놓고 구용구사(九容九思)와 〈동명(東銘)〉ㆍ〈서명(西銘)〉ㆍ〈경재잠(敬齋箴)〉19)과 같은 글을 좌우에 걸어 두거나 붙여 놓았는데 질서 정연하여 법도가 있었다. 매번 부지런히 일하고 여가가 있을 때마다 두 손을 맞잡고 단정하게 앉아 조용히 책을 대하면서 침잠하고 연구하여 밤으로 날을 이었으니, 대체로 거경(居敬)과 치지(致知)의 공부를 잠깐 사이에도 놓은 적이 없었다. 겸손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기르고 담담함과 침묵으로 스스로를 지키면서 강론하고 토론하거나 묻고 변별하는 것 외에는 한가로이 수작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낸 적이 없었으며, 제멋대로 방자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분분하게 다투는 곳은 가지 않았다. 그의 몸가짐이 구차스럽지 않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아아,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뜻이 있고, 이러한 뜻이 있으면 이러한 학문이 있기에 앞날의 조예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하늘이 수명을 빌려 주지 않아 중도에 떨어져 꺾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군의 처음 휘(諱)는 학순(學舜)이고, 자는 정일(正一)이다. 계보가 달성(達城)에서 나왔으니,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ㆍ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ㆍ달성군(達城君) 휘 운룡(雲龍)ㆍ금헌공(琴軒公) 휘 정지(廷芝)ㆍ회은(晦隱) 선생 휘 문우(文祐)가 모두 상계(上系)의 현조(顯祖)이다. 우재(寓齋) 휘 두유(斗有)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내다 장릉(莊陵 단종(端宗))이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자 능주의 대곡(大谷)에 은둔하였고, 자손이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휴재(休齋)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내다 혼조(昏朝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조의 휘는 득효(得孝)이고, 증조의 휘는 이현(以絢)이며, 조부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부친 휘 상섭(相涉)은 호가 은곡(隱谷)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영평 문씨(永平文氏)는 익충(益忠)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정사년(1857) 8월 27일과 을축년(1889) 7월 26일이 바로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며, 묘지는 본주(本州) 동쪽 방축(防築) 안 사좌(巳坐) 언덕에 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천호(天浩)의 따님이다. 뒤를 이을 자제가 없어 규덕의 동생 규상(奎祥)을 후사로 삼았다. 규덕과 규상이 한창 학문에 뜻을 두고 있어 군이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할 사람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써 보내어 더욱 힘쓰게 하였다. 余在鄕里。有中年友二人。裴君興默文君頌奎是已。二君以一隊英秀。同志同學。蔚然奮張。不幸皆遠已久矣。一日裴君從子奎悳。來謁其叔父狀行之文。嗚呼。余於文君。身後文字。編述之。付其遺胤。而獨於裴君。尚闕焉。每念知君者莫如我。而我老矣。未死之前。思記其志行之實。以貽其家。雖靡奎悳之請。所不忘也。君自幼沈靜端詳。不好戱美。在親側。應對惟謹。就外傳。讀書甚勤。其大人隱谷公奇之。蒙養凡百。一依古人爲學之序。而不令做時文。爲覓科干祿計。稍長與文君遊。相觀相規。磨礱浸灌。我日斯邁。爾月斯征。盖文君長於開悟。裵君長於持守。此其所以相須而交資。如蛩蚷之不可以相無。瞽躄之不可以相離也。見君平日居家。夙興夜寐。灑掃庭除。溫言怡色。問寢問饍。置淨室一間。四壁圖書。如九容九思東西銘敬齋箴之類。左揭右貼。秩然有法。每於服勤之餘。高拱危坐。靜對方冊。沈潛硏究。夜以繼日。蓋其居敬致知之功。未嘗有須臾之間。謙恭自牧。澹黙自持。講討問辨之外。未嘗出一語爲閒酬酢。身不接放浪之人。足不踐紛競之地。其持身不苟。類如此。嗚呼。有是入而有是志。有是志而有是學。前頭造詣。有不可量。誰知天不假年。而中道隕折哉。君初諱學舜。字正一。系出達城。文讓公諱祗沱。武烈公諱玄慶。達城君諱雲龍。琴軒公諱廷芝。晦隱先生諱文祐。皆其上系顯祖。至寓齋諱斗有文察訪。莊陵遜位。遯綾之大谷。子孫仍居焉。再傳休齋諱尙絅。文牧使。昏朝解印。高祖諱得孝。曾祖諱以絢。祖諱廷綵。考諱相涉。號隱谷。世有隱德。妣永平文氏益忠女。有女士行。丁巳八月二十七日。己丑八月二十六日。卽君懸弧與屬纊也。墓州東防築內已坐原。配南平文氏天浩女。無嗣。以奎悳弟奎祥爲後。奎德奎祥方志于學。君未就之志。紹述有人。書此歸之。以增其勉。 공공(蛩蛩)과 거허(駏驉) 공공과 거허는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전설상의 짐승 이름으로, 둘다 말 처럼 달리기를 아주 잘하여 항상 함께 붙어 다니면서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서 달리지 못하는 짐승 궐(蟨)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궐을 등에 업고 달아나 궐에게 맛있는 풀을 얻어 먹었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구용구사(九容九思) …… 경재잠(敬齋箴) 구용은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예기》〈왕조(玉藻)〉에"발은 진중해야 하고, 손은 공손해야 하고, 눈은 단정해야 하고, 입은 무거워야 하고, 목소리는 차분해야 하고, 머리는 곧아야 하고,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자세는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고 한 것이고, 구사는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생각으로,《논어》〈계씨(季氏)〉에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경건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난 것은 묻기를 생각하고, 화를 낼 때에는 어려움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볼 때에는 의리에 맞는가를 생각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라고 한 것이다. 〈동명〉과 〈서명〉은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걸어 놓고 재생(諸生)을 경계시킨 잠명(箴銘)으로, 〈서명〉은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땅을 어머니로 삼아 우리 모두가 한 형제라는 대동(大同) 사상에 입각하여 인의(仁義)에 어긋나는 완악한 자신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완(訂頑)〉이라 했던 것이고, 〈동명〉은 어리석음을 고친다는 뜻으로 〈폄우(砭愚)〉라 했던 것인데, 이러한 이름은 논쟁의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동명(東銘)〉과 〈서명〉으로 하자는 정이(程頤)의 제안에 따라 개칭한 것이다. 〈경재잠〉은 주희(朱熹)가 장식(張栻)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경(敬)을 위주로 한 사언시 40구를 지어 자신을 경계한 글로, 《주자대전》과 《심경(心經)》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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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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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 이군 유사 竹谷李君遺事 군의 휘는 승규(承奎)이고, 자는 내권(乃權)이며, 죽곡은 호이다. 이씨(李氏)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그의 먼 조상이다. 휘 선제(先齊)는 호가 전문(蕇門)으로,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고,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며,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열(烈)은 호가 졸암(拙庵)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으니, 이분들이 모두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고조 휘 영근(永根)은 호가 사촌(沙村)이고, 증조 휘 광우(光佑)는 호가 균헌(筠軒)이며, 조부 휘 면휘(勉徽)는 호가 묵재(黙齋)이다. 부친의 휘는 문호(文鎬)이고,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지환(之煥)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임술년(1862) 12월 25일이 군이 태어난 날이다. 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며 어머니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고, 자신 또한 병이 많았지만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봉양하였는데, 부인이 군에게 병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군이 올린 맛난 음식을 간혹 도로 주면 군은 거짓으로 먹는 척하고 몰래 다른 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뒤에 다시 올렸다. 성품이 예의를 좋아하였고, 또 남의 위급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친척이나 친구의 상사(喪事)에 반드시 남보다 먼저 달려가서 온갖 의절을 몸소 직접 지휘하였으며, 관례와 혼례는 반드시 옛날 예법을 따랐고 구차스럽게 세속을 따르지 않았다. 고을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거나 의례를 강론하는 모임이 있을 때에는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가서 그 의례를 도왔다. 어떤 친척이 전염병으로 죽고, 그 가족들도 모두 한창 고통스러워하자 군이 그들을 위해 염습하여 관에 안치하였고, 영남 사람이 〈외필(猥筆)〉의 말을 가지고 노사(蘆沙) 선생을 무함하자20) 군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함을 변박하여 억울함을 푸는 일을 하려고 했다가 일이 가라앉음으로써 그만두기도 하였다. 군은 목소리가 크고 시원한데다 언사가 아름답고 뛰어나 분쟁을 해결하고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데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으며, 나이 많은 어른을 공경하고 벗을 추양함에 이르러서는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이 하였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자기의 가난함을 알지 못하고 남의 가난함을 근심하였고, 자기의 선행을 알지 못하고 남의 선행을 부러워했으니, 대체로 선행을 즐거워하고 인의를 좋아한 것은 본래 성품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병오년(1906)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나니, 중산(中山)의 선영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용희(鏞熙)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으니, 철휴(哲休)ㆍ장휴(章休)ㆍ동휴(同休)이다. 아아, 군은 빼어나고 화락한 자질로 의기가 있고 기민함이 있어 함께 공부하고 선행을 할 만하였기에 내가 의지하며 만년의 벗으로 여겼는데, 만리를 굴러갈 바퀴가 반도 가지 못하고 갑자기 꺾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그의 아들이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참담한 서글픔이 그날처럼 새로운지라 눈물로 붓을 적셔가며 그 대강을 기술하여 돌려주었다. 君諱承奎。字乃權。竹谷號也。李氏系出光山。尙書左僕射諱珣白。其遠祖也。有諱先齊。號蕇門。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生諱好善。號勉齋。文科大司成。生諱烈。號拙庵。文科承旨。皆其名祖也。高祖諱永根。號沙村。曾祖諱光佑。號筠軒。祖諱勉徽。號黙齋。考諱文鎬。妣河東鄭氏之煥女。哲宗壬戌十二月十五日。卽君之寅降也。早失所怙。未得逮養爲至恨。事母盡誠。家貧甚。身又多疾。而血力服勤。以就其養。夫人悶其有疾。所進甘毳。或反賜之。君佯若食之潛置他器。後復進之。性好禮。又好副人之急。親戚知舊之喪。必先人奔往。凡百儀節。躬親指揮。冠昏必依古禮。不爲苟且從俗。鄕坊行飮射講聚之儀。非甚病。必往以相其禮。有族人以染疾沒。其家又皆方痛。君爲之襲斂而殯焉嶺人以猥筆語。誣蘆沙先生。君不勝忿鬱。將爲辨誣伸枉之擧。以事寢而止。君聲音弘暢。言辭英發。解紛剸劇.恢恢有餘。而至於敬謹長老。推讓朋友。身若不勝衣。言若不出口。不知己貧而憂人之貧。不知己善而羨人之善。蓋其樂善嗜義。素性然也。丙午四月二十六日卒。葬中山先隴負壬原。配咸安趙氏鏞熙女。生三男。哲休章休同休。嗚呼。君以秀爽愷悌之姿。有氣義有機警。可與共學。可與爲善。余倚以爲晩年之契。豈知萬里之轍。未至半途而遽爾摧折哉。今於其遺胤不朽之託。悲愴如新。和淚泚筆。述其梗槩而還之。 영남 …… 무함하자 노사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고, 〈외필〉은 기정진이 81세 때에 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대한 답설(答說)로 지은 글이다. 기정진은 〈외필〉에서 이이가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알려지자 권봉희(權鳳熙), 권명희(權命熙) 등 영남 지역의 노론들 사이에서 율곡을 모욕했다고 하여 문집의 훼판(毁板)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해제, 노사집, 노백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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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 강공 유사 溪沙姜公遺事 내가 시골 마을 사이에 있으면서 매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교유하며 이야기하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마치 한 입에서 나오듯 계사(溪沙) 강공(姜公)이 선인 군자(善人君子)라고 자자하게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내가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살펴보니, 사는 곳이 매우 외졌고 집은 질박하여 누추하였으나 신발이 뜰을 채우고 의관을 갖춘 사람이 자리에 가득하였으며, 공은 편한 복장에 촌스러운 두건을 쓰고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응접하여 굶주린 사람은 밥을 먹게 하고,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시게 하며, 추운 사람은 덮어주고, 병든 사람은 소생시켜 주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각기 그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손자 흥섭(興燮)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고 인하여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아아,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훌륭한 행실과 위대한 절개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저술가의 필법이니, 나의 문장이 비록 이를 감당할 수 없겠지만, 예전부터 평소 공경하고 염모했던 입장에서 어찌 차마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의영(義永)이고, 자는 인교(仁敎)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시조(始祖) 휘 이식(以式)은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수 양제(隋煬帝)의 동쪽 정벌 군사를 막았다. 휘 사진(思進)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원충(元忠)이다. 휘 구만(九萬)은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정절(正節)이며, 처음으로 진주의 대봉산(大鳳山) 아래에 거주하였다. 휘 희경(希經)은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시호가 문성(文成)이다. 휘 군보(君寶)는 봉산군(鳳山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휘 한(漢)은 호가 금재(琴齋)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휘 위구(渭龜)는 호가 모헌(慕軒)으로, 임진왜란 때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절개를 지키며 전사하였다. 이들 모두가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증조 휘 이희(爾熙)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재령(載齡)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사회(士會)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성인(聖仁)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해년(1815) 4월 12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너그러운데다 온후하며 마음이 여리고 자애로워 부모를 섬김에 효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와 친척을 대함에 은덕과 정의가 융성하고 흡족하였으며, 벗들과 사귐에 신뢰와 의리의 행실이 드러났고,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더욱 급급하여 집안의 재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지 못했다. 경서와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고 풍부하였지만 벼슬을 구해 나아가는 것에 담담하였다.조비(祖妣) 문씨(文氏)의 열행(烈行)과 8대조 교관공(敎官公)의 효행(孝行), 9대조 모재공(慕齋公)의 충절(忠節)이 우뚝하고 뛰어났음에도 오랫동안 표창을 받지 못한 것을 공이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지난 무오년(1858)에 향도(鄕道)의 추천을 통해 증직과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는 은전을 받자 여론이 경사라고 칭하면서 모두 공의 효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사곡산(沙谷山) 중에 집을 지은 것은 수석(水石)의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만년을 보내려는 마음을 부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빈객과 벗들이 매일 찾아와 글과 술이 비지 않은 채 밤낮으로 수창하며 흥취와 즐거움이 넘쳐났다. 흉년을 만나 빈객 중에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이 직접 약을 조제하여 소생시킨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또 십여 사람이었는데, 공이 습렴(襲斂)을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었다. 이웃 마을에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수시로 곡식을 빌려주어 밥 짓는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어떤 한 부인이 연로한데다 의탁할 곳이 없자 더욱 가엾게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임종할 날이 다가오자 빚 문서를 가져와 불에 태우면서 말하기를, "생전에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 것이 없는데, 어찌 죽고 나서 폐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사년(1893) 7월 18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곡의 안산(案山) 경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명천(命天)의 따님이고, 계배(繼配)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익필(益弼)의 따님이다. 안씨는 1녀를 두었는데, 공주(公州) 이계무(李季茂)에게 출가하였다. 노씨는 1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 병신(秉甡)은 참봉(參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지현(鄭祉鉉)과 제주(濟州) 양중묵(梁仲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흥섭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이것이 가장 내용의 대략이다. 아, 내가 일찍이 한 번 나아가서 보고 느낀 것은 단지 공이 쌓은 행실 중의 한 가지 일일뿐이지만, 이 한 가지 일로 가장 전체에 기술된 내용이 공에 대한 실제의 말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탐욕이 날로 불어나고 잔인함이 고질이 되어 가는 때에 공처럼 장후(長厚)하고 너그러운 풍모를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고인의 유풍을 우러러 추억하니 단지 여생의 감회가 절실해질 뿐이다. 공의 자손들이 더욱 힘써 생전의 법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 余在鄕里間。每聞群聚遊談之言。無不以溪沙姜公爲善人君子。藉藉稱道。如出一口。一日余過而拜之。見其洞宇深僻。軒室襆陋。而屣履盈庭。衣冠滿座。公以便服野巾。應接如流。使飢者食之。渴者飮之。寒者庇之。病者蘇之。無不歡悅。各充其願。後二十餘年。公之孫興變。持示家狀。因有不朽之託。嗚呼。顯微闡幽。使至行偉節。不至淪沒。此著家筆法。余之文。雖不足以當此。而在平昔欽艶之地。豈忍以非其人辭。公諱義永。字仁敎。晉州人。始祖諱以式。以兵馬元帥。禦隋焬帝東伐之師諱思進。官平章事封靑城君諡元忠。諱九萬。封陽川君諡正節。始居晉之大鳳山下。諱希經。入我朝。官直提學諡文成。諱君寶。封鳳山君諡文敬。諱漢。號琴齋。官縣監。鄕人立祠享之。諱渭龜。號慕軒。壬辰從趙重峯先生立慬錦山。皆其名祖也。曾祖諱爾熙。贈司僕寺正。祖諱載齡。贈左承旨。考諱士會。贈戶曹參判。妣南平文氏聖仁女。公以純廟丁亥四月十二日生。天性仁恕溫厚。惻怛慈愛。事父母。孝養備至。處兄弟族戚。恩誼隆洽。與朋友交。信義著行。而於賙窮恤匱。尤汲汲焉。不知家力之不逮也。博涉經史。文詞贍富。於干進泊如也。祖妣文氏烈行。八世祖敎官公孝行。九世祖慕齋公忠節。磊落卓絶。而久未見褒。公常恨之。去戊午。因鄕道剡薦。得蒙贈貤表旌之典。物論稱慶。皆以爲公誠孝致然。築室於沙谷山中。以其水石幽閒爲晩年寄敖計也。賓朋日至。文酒不空。日夕酬暢。趣樂津津。遭飢歲。客有曳病而至者。公親調藥餌。使得甦活無數。未愈而死者。又十餘人。公爲具襲斂而葬之。隣里有飢者。必隨時假貸。俾無絶火。有一婦人。年老無托。甚加哀矜。使之寄留。臨歿取債券焚之曰。生而無所利於人。豈可死而貽其弊乎。癸巳七月十八日卒。葬沙谷案山庚坐原。配竹山安氏命天女。繼配光山盧氏益弼女。安有一女。適公州李季茂。盧有一男二女。秉甡。參奉。女適河東鄭祉鉉濟州梁仲黙。孫男與變。餘皆幼。此是狀辭大略也。噫。余之所嘗一造而觀感者。特其積行中一事耳。然以此一事。而知全狀所述。無非其實際語也。貪婪日滋。殘忍成痼。如公長厚寬博之風。安得以復見之耶。追仰遺韻。只切餘生之感。願公子孫益加勉焉。使當日典刑。無墜於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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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30) 유 어른【중교】께 올림 上省齋柳丈【重敎】 연전에 두 통의 편지를 보낸 것은 실로 오랫동안 앙망해 오던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매번 전해지지 못할까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함평(咸平)의 인편을 통해 뜻밖에 은혜로운 편지를 보내 종이 가득 온갖 말을 나열해 주시니, 그 순순하고 측달한 말씀은 비록 10년 동안 강석 사이에서 부지런히 배우며 정성을 다한 자라도 어찌 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아, 덕이 성대하고 예가 공손한 문장(文丈)께서 멀리 있는 사람을 잊지 않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 지극한 뜻을 알았습니다. 돌아보면 이렇게 무능하고 어둡고 용렬한 사람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삼가 사양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소생은 젊어서 노사(蘆沙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학업을 마치기 전에 갑자기 스승님이 돌아가시는 슬픔을 만났습니다. 저는 삼가 생각건대, '천하가 도도하게 흐르니, 이 몸을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화서(華西) 문하의 두세 군자일 따름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일신과 집안은 채무로 나락으로 떨어져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느라 거처할 겨를이 없는 지 십수 년 되었습니다. 비록 문하에 찾아가 인사드리지는 못했지만 기대하고 기다리며 어찌 하루라도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위엄이 매우 엄절하고 예수(禮數)가 본디 있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총애를 믿고 갑자기 번거롭게 해 드리는 죄를 짓겠습니까. 이것이 이전 편지에서 아뢰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감히 소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이윽고 편지를 주고받을 길이 열려 묻고 가르치는 교분을 이미 맺었으니 구구한 마음에 위로되고 흡족함을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학문을 논하자면 주리(主理)를 큰 종지(宗旨)로 삼고, 시의(時義)를 논하자면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을 제일의로 삼는다."라고 하였고, 또 "우리 유자의 학문은 실로 나아감에 바름을 얻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바름을 얻은 뒤에는 또 반드시 덕을 증진하고 학업을 닦는 절도가 두루 다하여 치우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고에 폐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고 오늘날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진정한 처방전이니, 감히 명심하여 좌우명으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살피는 방도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리(主理)" 2자는 소생이 일찍이 노사 선생의 문하에서 들었고, 나중에 또 벽계(檗溪) 선생의 편지에서 보았습니다. 아, 이(理)는 실로 기(氣)의 주재이니, 어찌 사람이 주재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세상에 주기(主氣)의 폐단이 지극합니다. 태극을 논하면 대기(帶氣)라고 하고, 오상(五常)을 논하면 인기(因氣)라고 하며, 명덕(明德)을 논하면 형이하(形而下)라고 하며, 중화(中和)를 논하면 화(和)를 기로 삼고, 비은(費隱)을 논하면 비(費)를 기로 삼습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이르러서는 무릇 용(用)에 발하여 행(行)에서 베풀어지는 것이 조금이라도 조리가 있고 조금이라도 신묘하면 모두 기라고 하면서 마침내 이(理)를 미련하고 흐릿한 것으로 삼아 기식(氣息)이 없는 한 덩어리 죽은 물체로 여기니, 이것이 과연 강충(降衷), 병이(秉彛), 서질(敍秩), 명토(命討)의 의리입니까. 두 선생이 고심하여 매우 힘써서 사문(斯文)과 세도를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이 실로 굳건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질정해도 의심이 없을 수 있었습니다. 벽계(檗溪)의 문하에 다행히 여러 노련하고 덕이 훌륭한 분들이 있어 또 이어서 밝게 서술하였고, 영호남의 선비들이 또 왕왕 믿고 따르는 자가 있어 두 선생의 논의가 세상에 유행하게 되었습니다.연간에 삼가 문장(文丈)의 말씀을 들으니 심(心)은 기(氣)이지 이(理)가 아니며, 물(物)이지 칙(則)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설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문장께서 사문(師門)의 종지(宗旨)를 받아 힘써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시지만 그 논의가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그 사이에 달리 의의가 있는 것입니까? 대략 비루한 견해를 아뢰어 가부의 명을 듣겠습니다. 대저 이와 기는 통틀어 말한다면 기는 다만 이 가운데의 일이니 나란히 하거나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 말한다면 형상(形上) 형하(形下)가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이 형상 형하의 뜻을 논하여 말하기를 "형의 유무를 가지고 말하면 물과 이가 서로 단절되어 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형체가 없는 것이 이가 되는 것을 알고 형체가 있는 것은 처음에 도가 아님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단절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심이라는 물건은 지극히 허령하여 당체(當體)에 있어서는 실로 기의 정상(精爽)31)이 되고 기타 질실(質實)한 골자(骨子)는 어찌 일찍이 이 이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선각(先覺)이 어떤 때는 이로 말하였다가 어떤 때는 기로 말한 것이 실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 어찌 유독 그 기가 되는 것만 인정하고 이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게다가 일찍이 문장(文丈)께서 완이(莞爾) 어른과 저의 스승님께서 문인과 문답한 몇 조항의 말을 논한 것을 구해서 읽은 적이 있는데 사람을 경계하여 깨우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가만히 노사(蘆沙)의 뜻을 살펴보면 흡사 선과 불선이 함께 태극에 근본하는 듯하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스승님의 뜻이 전혀 아닙니다. 스승님의 말씀 가운데 "'선악은 모두 천리(天理)이다.'라고 한 것은 두 가지가 나란히 하여 각자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천하에는 본래 악이 없다는 것인데 이른바 악이란 것은 바로 선의 얼자(孼子)이니, 얼자는 일찍이 자기의 혈통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악 또한 천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32)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천하에는 두 가지 종자가 있을 수 없으니, 악이라 할지라도 또한 선에 뿌리를 두고 생겨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원두(原頭)로부터 말한다면 이(理)는 본래 기를 낳고 유행(流行)으로부터 말한다면 기는 혹 이를 해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소에 늘 하신 말씀입니다. 「답김경범문목(答金景範問目)」에 "우매한 자를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선한 것은 이(理)에 근본하고 불선한 것은 기에서 만들어진다고 한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평상적으로 말한다면 불선은 기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괜찮지만,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불선 또한 이(理)에서 생겨납니다. 이를테면 정자(程子)가 이른바 "악 또한 성(性)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대저 어찌 정자의 말을 가지고 선악이 태극에서 함께 근본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다면 그래도 성악설을 주장하지는 않을 텐데 어찌 스승님께서 이러한 말을 하였겠습니까. 또 완이(莞爾) 어른의 문목을 보니 "일(一)은 이(理)가 관통함이요, 만(萬)은 형(形)이 다른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어찌 만 가지로 나뉘는 이(理)가 있은 이후에 만 가지 다름에 대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 설은 저의 생각에 선명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일(一)이라는 것은 만 가지가 모인 것이고, 만(萬)이라는 것은 일이 나누어진 것이니, 어찌 일을 이(理)로 삼고 만을 형(形)으로 삼겠습니까. 만(萬)은 일(一)이 나누어진 것이니 만 가지로 나뉘는 이치가 이미 일(一)에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본래 만 가지로 나뉘는 이(理)가 없어서 때에 임하여 배정해서 만 가지 다름에 응하겠습니까. 문장(文丈)의 답서를 보니, 한마디 말도 옳지 않다고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한 부(副)의 강토(講討)가 이미 답서 외에 있는 것입니까? 바라건대, 재량하여 가르쳐 주시어 몽매한 이를 깨우쳐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다시 바라건대 도를 위해 더욱 보중하십시오. 年者再度奉書。固出於積仰之私。而程途遙夐。每疑其不免浮沈。月前咸平便。不謂辱賜惠幅。滿紙臚列極其諄惻。雖十年席間服勤致情者。何以加此。於以見文丈德盛禮恭。不忘遐遠。不遺細微之至意也。顧此悾悾昧劣。何以當之。切欲解使去已而不可得也。生少師蘆沙先生。未及卒業。而遽遭山樑之痛。區區竊念寰宇滔滔。可以爲此身依歸之地者。惟是華西門庭數三君子而已。然而身家債業。墜在於水山雲雷之中。流離瑣尾。不遑其居。以來十數年矣。雖未能抱刺踵門。而期擬等待者。何嘗一日而忘也。然等威切嚴。禮數自在。則豈敢自恃隻愛。而遽犯煩瀆之罪乎。此前書所以不能不達。而亦不敢不略也。旣而一往一復。書路已開有問有敎。契分已定。區區慰洽。不容名喩。下喩有曰。論學問則以主理爲大宗旨。論時義則以斥羊爲第一義。又曰吾儒之學。固以趨向之得正爲急先務。而及其待正。則又必以進修節度之周盡無偏爲貴。此是千古不刊之典要。今日對證之眞劑。敢不書紳銘座。爲日夕顧諟之方也。然主理二字。生嘗聞之於蘆沙先生之門矣。後又得見於檗溪先生之書矣。嗚呼。理固氣之主。何待乎人之主之也。世之主氣之獘極矣。論太極則謂之帶氣。論五常則謂之因氣。論明德則謂之形而下。論中和則和爲氣。論費隱則費爲氣。以至三綱五倫。凡發於用施於行者。才有條理。才涉神妙。皆謂之氣。遂以理爲冥頑儱侗。没氣息底一塊死物。此果降衷秉彛敍秩命討之義耶。二先生所以苦心極力。爲斯文世道計者。實可以建不悖而質無疑矣。檗溪之門。幸有諸老長德。又從而紹述之。嶺湖士子。又有往往信從者。庶幾二先生之論。見行於世矣。年間伏聞文丈之言。以爲心氣也。非理也。物也。非則也。未知此說果爾否。文丈受師門宗旨。力主主理之論。而其論若果如此。則抑別有意義於其間耶。略陳鄙見以聽可否之命。夫理與氣。統言之。則氣只是理中事。非比倂對峙之物也。分言之。則形上形下是也。然朱子論此上下之義曰。若以無形有形言之。則便是物與理相間斷了。若知無形之爲理。而不知有形之未始非道。則不其幾於間斷乎。心之爲物。至虛至靈。在當體。固爲氣之精爽。而其他骨子實頭處則何嘗不是理耶。此先覺所以或以理言或以氣言者。固不一二矣。今何獨與其爲氣而不與其爲理也。且曾得文丈與莞爾丈論鄙師門與門人問答數條語。讀之。其警發人。甚多。但其中有曰。竊觀蘆沙之意。恰似善不善同根於太極。此則甚非先師之意也。先師之言曰。善惡皆天理云者。不是兩端倂立。各自出來。正以天下本無惡。而所謂惡者。乃善之孼子。孼子未嘗非已之血脈。故惡亦不可不謂之天理也。又曰。天下不容有兩種子。雖慝亦根於淑而生者也。又曰。自原頭言。則理本生氣。自流行言。則氣或害理。此其平日雅素之言也。至若答金景範問目有曰。爲昧者言。不得不曰。善者根於理。不善者作於氣云云。夫平說則謂不善作於氣可也。極言之則不善亦生於理。如程子所謂惡。亦不可不謂之性也。夫豈以程子之言謂善惡同根於太極乎。稍有知識者。猶不爲性惡之說。豈先師而有是言乎。又見莞爾丈問目有曰。一者理之通萬者。形之異。又曰。豈有萬分之理而後。可以酬應萬殊乎。此說。於鄙意多未塋。一者萬之總。萬者一之分。豈以一爲理而以萬爲形乎。萬爲一之分。則萬分之理。已具於一矣。豈本無萬分之理。而臨時排定。以應萬殊乎。見文丈答書。無一言以爲不然者。未知一副講討。已在於答書之外耶。望乞俯賜裁敎。以開蒙蔀。如何。天氣漸寒。更乞爲道增重。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로,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치정(穉程), 호는 성재이다. 한말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고, 심설(心說)에 대한 학술 논쟁을 전개하는 등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상(精爽)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마음은 기의 정상이다.[心者, 氣之精爽也.]"라고 하였는데, 정상은 일종의 신명(神明)과 같다. 마음은 이 신명이 있어서 지각운용(知覺運用)의 묘(妙)를 발현하게 된다. 선악은……없다 이 내용은 《노사집(蘆沙集)》「담김경범(答金景範)」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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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33) 최 어른【익현】에게 올림 上勉菴崔丈【益鉉】 의림(義林)이 약관의 나이에 호중(湖中)을 유람하여 삼가 화서(華西) 선생이 경기(京畿)에서 창도(倡道)하자 원근의 학자가 흡연(翕然)히 따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마땅히 물러나 더욱 힘써서 학문에 조금이라도 진보가 있은 뒤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야겠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몇 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왔으니, 개인적으로 놀라고 탄식하며 '나의 학문이 비록 진보하더라도 장차 어디에서 질정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뒤에 신미년(1871, 고종8)에 다시 호중을 유람하다가 삼가 문장(文丈)께서 선생의 고제자로 물러나 전원에서 직접 농사지어 부모님을 봉양하며 자신이 즐기던 바를 미루어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사사로이 삼가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며 '선생이 비록 돌아가셨지만 선생의 도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니, 내 장차 문장께 나아가 절하고 선생의 남은 의론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윽고 문장께서 나와 세도를 위한 계책을 세우셔서 훌륭한 말씀과 곧은 절개가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있으니, 어질다는 명성이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 것이 또 어찌 구구한 제가 나아가 질정한 뒤에 있겠습니까. 상대가 어질다는 명성이 이미 자자하므로 제가 배우러 간 뒤에 그 명성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인 듯합니다.) 천 리에 큰 물결이 쳐도 동요됨이 없이 머물러 있은 지 몇 년 되었으니, 북두에 의지하고 달빛 아래 거닐고 싶은 생각을 무엇으로 위로하겠습니까. 의림은 궁벽한 고을의 미천한 종적입니다. 어버이는 늙고 집은 가난하여 구차하게 살아남아 생활하니, 10일 간의 여가를 내어 담장 밖에 나아가 오래된 소원을 이루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남쪽으로 영주(瀛洲)를 바라보며 슬픈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안생 진환(安生進煥)이 가는 편에 감히 이렇게 대신 정성을 펴니, 번거롭게 해 드려 너무나 송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 아끼고 보중하여 나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義林弱冠而遊湖中。伏聞華西先生倡道畿中。遠近學者。翕然從之。自以爲吾當退而加勉。使學有少進而後。有以從事於先生之門也。未幾年。易簀凶音。出於夢外私心驚歎。以爲吾學雖進。將何取正乎。後辛未之年。再遊湖中。伏聞文丈。以先生高弟。退歸田里。躬耕養親。推其所樂。以淑後徒。於是私竊喜幸。以爲先生雖殁。先生之道。猶在於人。則吾且晉拜文丈。得聞先生餘論也。旣而文丈出而爲世道之計。偉韻直節。膾炙萬口。其仁聲之入人也。又豈在於區區就正之下哉。鯨波千里。無撓利稅。而淹留有年。倚斗步月之思。何以自慰耶。義林窮鄕賤蹤也。親老家貧。苟存生活。願得一旬之力。進身棘外。以償宿昔之願。而不可得。南望瀛洲。不勝悵然。玆因安生進煥去。敢此替伸情悃。跡涉煩越。旋切悚仄。伏乞加愛保重。以副家國之望。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대학장구》,《논어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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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 임 좨주29) 어른【헌회】에게 올림 上全齋任祭酒丈【憲晦】 의림(義林)은 삼가 아룁니다. 예부터 사문에 이름이 있었던 군자는 모두 사우의 도움을 받아 그 학문을 성취하였습니다. 비록 안자(顔子), 증자(曾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같은 현인이라도 반드시 스승에게 전수받은 뒤에 더욱 그 덕을 드러내었습니다. 더구나 그 아랫사람은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를테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시대 절의와 문장이 있는 선비는 그 재주와 그 인품을 가지고 만약 공자(孔子)를 만나 배웠다면 그 성취한 것이 어찌 한 기예와 한 행적이 드러난 선비 정도에서 그쳤겠습니까. 매번 《한서(漢書)》와 《당서(唐書)》를 읽을 적에 일찍이 이러한 인물에 대해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의림의 혼우한 재주는 그 누구보다도 심하고 거처하는 곳은 매우 외지며, 또 이끌어 주는 어진 사우가 없어 갈팡질팡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 마땅히 문을 닫고 스스로 수양하여 우선 학업에 조금 진보한 뒤에 세상에 나가서 도가 있는 문하에 나아가 질정해야겠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인하여 몇 년 동안 학문하였지만 더 진보하지 않았고, 금곡(錦谷), 삼계(三溪), 화서(華西)와 같은 선생들이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났으니, 외롭게 오늘날 세도의 기대를 받는 사람이 몇이겠습니까. 이에 평소의 계획이 허사가 될까 매우 두려워 여러 날 힘들게 가서 문하에 절하였으니, 소생의 평소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치쯤 되는 가는 죽간으로는 큰 종을 울릴 수 없고, 썩은 나무는 봄 햇살을 받아 살 수 없으니, 이른바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처음부터 소생에게 해당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문장(文丈)께서는 특별히 포용해 주시는 은혜를 내리고 가르쳐 주시는 정성을 곡진히 쏟아 오랫동안 중병을 앓는 이에게 알맞은 처방을 내리는 것과 같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마땅히 명심하고 가슴에 새겨 평소 수용할 자료로 삼겠습니다. 생은 출발에 앞서 구구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미진한 뜻을 삼가 서신으로 감히 이렇게 번독스럽게 아뢰니, 너무나 송구한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義林伏以自古君子之有名於斯門者。莫不由師友之助而成就其學焉。雖顔曾程朱之賢。必待其師而益彰其德。況其下者乎。如漢唐之世節義文章之士。其才器也。其人品也。若遇孔子而從事。則其所就進。豈止於一藝一行之士而已哉。每讀漢唐書。未嘗不爲此等人物而惜之也。義林才稟昏愚最出人下。所居深僻。又無賢師友之指引。擿埴倀倀者。已二十有餘年矣。初以爲吾當杜門自養。姑俟學業之少進然後。出而就正於有道之門矣。因以有年學不加進。而如錦谷三溪華西諸先生。相繼下世則煢煢爲今日世道之望者。爲幾人乎哉。於是切懼素計之歸虛。累日跋涉。獲拜門下。小生平日之願。可謂遂矣。然寸筳不能發洪鍾之音。朽木不能受陽春之化。所謂下愚不移。未始非此生也。伏願文丈特軫包荒之惠。曲加俯就之敎。使積年膏肓。如得對證單方也。第當書紳服膺。以爲平日受用之資。生將臨行。不勝區區。未盡之意。謹以咫尺之書。敢此煩瀆。不任悚仄之至。 임 좨주(任祭酒)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ㆍ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1874년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ㆍ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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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장에게 올림 上勉庵崔丈 세월은 빨리 흘러 해가 바뀌었습니다. 삼가 애체(哀體)는 어떻게 견디며 지내십니까. 의림(義林)이 일찍 문하에서 배우고 싶은 바람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 이루지 못한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오활한 뜻과 노년이 된 나이가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벽계(檗溪) 선생께서 만년에 걷잡을 수 없는 변고를 만났지만 미리 헤아리고 깊이 근심하며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도를 지키려는 계책이 분명하고 확고하였으니, 노사(蘆沙) 선생과 더불어 조목이 같고 맥락이 같습니다. 돌아가신 뒤에 선생께서 지은 《아언(雅言)》 몇 편을 구해서 읽었습니다. 태극의 주재(主宰)와 명덕(明德)의 본연의 묘리를 밝혀 일종의 주기론(主氣論)을 물리친 것은 그 말이 또 노사 선생과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하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도는 한 가지뿐임을 알겠습니다. 천지 사방에서 누가 표준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아, 천고의 종지(宗旨)를 밝히고 일세의 대방(大防)을 보존한 것은 두 선생님의 공이니, 어찌 보탬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가령 두 선생님이 오늘날 살아 계셨더라면 어찌 백성들과 세도를 위한 계책이 될 만한 모종의 큰 의론(議論)을 세우지 않았겠습니까. 미련한 여생은 우러러 물어볼 곳이 아득히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통탄스럽습니다. 문장(文丈)께서는 벽계 선생 문하의 적통으로서 후학을 인도하여 우뚝이 사방에서 추앙을 받으니, 두 선생님이 비록 돌아가셨지만 오늘날 시의(時義)를 조치한 것은 또한 비슷함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평소 배알하려는 마음은 구구하게 안부나 묻는 예를 펴기 위해서가 아니고, 일신과 집안의 큰 계책과 관련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다만 가난과 병이 날로 심해지고 농사가 거듭 흉년이 들어 예사롭게 움직이는 것도 자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조금 한가해져 편달해 주실 만한 틈이 있다면 마땅히 한번 문하에 나아가 간절한 마음을 다 펴겠습니다. 日月流駛。燧穀一改。伏惟哀體。何以堪居。羲林早有掃門之願。而因循未就。今三十有餘年矣。志意之迃緩。年力之遲暮。乃至於此耶。檗溪先生晩遭履霜之變。而其豫計深憂闢邪衛正之策。光明磊落。與蘆沙先生同條而共貰。及其沒。而得所著雅言數篇而讀之。所以明太極主宰明德本然之妙。斥夫一種主氣之論者。其言又與蘆沙先生若出一口。信知天下之道一而已。天上天下。南海北海。何所不準。嗚呼明千古之宗旨。存一世之大防者。兩先生之功。豈少補云哉。若使兩先生在於今日。則豈無一副大議論可以爲生民世道計者耶.蠢蠢餘生。漫無所仰。念之及此.不覺號痛。文丈以檗門嫡傳。指引後學。屹然爲四方之所宗仰。則兩先生雖不在世。而所以措置得今日之時義者。亦不可謂無似之者矣。平日拜謁之願。非爲區區寒暄之禮。而有關於身家大計者。非止一二。但貧病日甚。年事荐險。尋常運動。未由自力。將來若有小小暇隙。可給鞭策。則當一登龍門。畢暴情懇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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