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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 선생 언행록 日新齋先生言行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사(先師) 일신재(日新齋) 광산(光山) 정(鄭) 선생은 헌종 을사년(1845, 헌종11) 11월 7일 갑자에 죽수(竹樹)1) 대덕동(大德洞)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모부인 박씨(朴氏)의 꿈에 어떤 노인이 방으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나는 규성(奎星)의 정기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젖먹이 때 이름을 종규(鍾奎)-어떤 본에는 '달이 품속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그 탄생에 달과 별이 정기를 내리고 강하와 산악이 영기를 모았으니, 자질(姿質)이 뛰어나고 용모는 순수하였으며 그 애초의 선단(善端)으로 순박하고 진실함이 성대하게 드러났다. 5세 때에 이웃 노인이 장난으로 말하기를 "네가 고기를 먹고 있느냐?"라고 하자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나머지를 올려 노인에게 드렸다. 6세 때에 정원의 과일을 따는데 나쁜 것을 갖고 좋은 것은 양보하였다. 7세 때에 굶주려 지친 사람을 보고는 데려다가 먹을 것을 주었다. 8세 때에 외출을 하였다가 소나기를 만났는데 발걸음이 빠르거나 급하지 않았다.-선생의 선고인 통정공(通政公)이 일찍이 전한 말이다.- 9세 때에 입학하여 《효경(孝經)》을 읽었는데 몸이 엄숙하고 정신이 안정되어 항상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민첩하게 이해하였다. 사장(師長)에게 공손하였고 정결하게 물을 뿌리고 쓸었다. 장로(長老)들 곁에서 화이(華夷)와 존양(尊攘)의 의론을 듣고는 번번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일신상의 미악(美惡)도 화이(華夷)로 구분될 수 있으니 존양(尊攘)의 의리를 반드시 엄격히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로들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비록 노숙한 사람이라도 설파할 수 없는 것이다.-글방의 스승인 안방(安枋) 공이 일찍이 칭찬하며 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갈 무렵의 어린 나이에도 우뚝하게 대인 같은 기상이 있었던 것이다. 10세 때에 명촌(明村) 황(黃) 처사(處士)-기현(紀顯)-에게 나아가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체수(滯祟)2)에 시달리다 돌아왔다. 13세 때에 관수재(觀水齋) 박(朴) 선생-영주(永柱)-에게 사서(四書)를 배워 읽었는데 1년이 채 안 되어서 섭렵(涉獵)하고 두루 관통하였다. 14세 때에 관례(冠禮)를 했고 가을에 향과(鄕科)를 치르고 돌아오더니 모부인에게 침구(針具)를 드렸다. 부인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사자(士子)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라며 바로 물리쳤다. 이에 자당이 훈계하여 깨우치는 뜻이 엄중함을 깊이 느끼고 더욱 애써 글을 읽었다. 17세 때에 조용한 곳을 취해 산사(山寺)로 들어가서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역경(易經)》을 강해(講解)하였다. 20세 때에 통정공을 모시고 한성시(漢城試)3)를 보러 갔는데 도성의 사부(士夫)들이 으레 요로(要路)에 드나들면서도4)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과거(科擧)5)에 대한 뜻을 끊고 쇄연(灑然)히 천고를 초월한 마음을 가졌다. 여주(驪州)로 가서 세안당(世安堂) 김(金) 함장(函丈)6)-병준(炳駿)-을 뵙고 경전의 뜻을 강구하며 듣고 물러 나왔다. 부여(扶餘)로 돌아가 족대부(族大父)인 석당(石塘) 선생-귀석(龜錫)-을 뵈었는데 이 어른은 경학(經學)에 밝고 사학(史學)에 박식하였다. 강습(講習)할 때 위기(爲己)와 위인(爲人)7)ㆍ존왕(尊王)과 출패(黜伯)8)의 분별과 더불어 치란(治亂)과 오륭(汚隆)ㆍ흥망과 성쇠의 유래를 들으니 흉금이 저절로 열려 트이고 지각(知覺)이 저절로 멀리 볼 수 있었다. 석당이 그 재성(才性)이 총명하고, 학술이 순정하며, 절조가 확고한 것을 보고서 이내 자부하며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영락한 우리 정(鄭) 씨가 장래에 큰 명성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 선대의 일과 가문의 계책을 깊이 의탁하였다. 돌아오려 할 때 '일신재(日新齋)'를 삼자부(三字符)9)로 써서 주면서 거듭 말하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다. 또 들으니, 같은 도(道)에 노사(蘆沙) 기(奇) 선생이 계시는데 그분의 도학과 문장은 사승(師承)이 없이 곧바로 수사낙민(洙泗洛閩)10)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귀의할 곳이 있어야 하니 너는 가서 스승으로 모셔라."라고 하였다. 24세 때인 무진년(1868, 고종5)에 글과 폐백을 받들고 노사 선생을 진원(珍原)의 사상(沙上)으로 가서 뵈었다. 선생이 예물 폐백을 받고 정면으로 자세히 보면서 안색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기를 "'사미(沙彌)가 병든 스님의 문을 두드리는데 미목(眉目)이 시원하게 밝아 배울만한 기틀이로다.' 하였는데 내가 계방(季方, 정의림)에게 또한 그렇게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또 겸양하며 말하기를 "후학이 도에 들어가는 바른 문으로는 광활하고 명백하기로 《주서(朱書)》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의 훈고(訓詁)와 주석(註釋)은 자주자(子朱子)11)의 모든 정력(精力)을 쏟아 모은 곳이다. 돌아가서 찾아보면 넉넉하게 남은 스승12)이 있을 것이니 어찌 노추(老醜)한 문에 올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선생의 가르침이 자상하여 양단(兩端)을 다 들어주는데13) 한 마디 말씀마다 본원(本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님이 없었다. 마치 큰 집 천만 칸에 허다한 황금과 비단을 저장해놓고 사람이 구하는 데로 응하여 써도 다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이에 충만하게 소득이 있는 것 같아서 이내 스스로 말하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 양귀(良貴)14)와 지보(至寶)가 참으로 여기에 있구나. 낙민(洛閩)15)에서 태어나지 못하여 정주(程朱)16)를 직접 이어받지는 못하였지만 다행히 동방(東方)에서 태어나 노사(蘆沙)를 직접 이어받으니 노사가 바로 낙민의 정주이다."라고 하였다. 또 분연(奮然)히 뜻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천고의 앞과 천고의 뒤에 일생을 다시 살 수 없는 몸으로 어찌 종지(宗旨)를 직접 이어받아 내려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내 묵곡(墨谷)의 가숙(家塾)을 깨끗이 소제하고 '함양(涵養)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경(敬)을 써야 하고 학문을 진전시키는 것은 치지(致知)에 달려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는 두 문구 및 '일신재(日新齋)' 세 글자를 자리 오른 쪽에 크게 써 두고, 종부제(從父弟) 구계공(九溪公)-창림(昌林)-과 책상을 나란히 하면서 함께 연마하였다.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정좌(靜坐)하여 전날의 번잡한 구이지학(口耳之學)17)을 깎아내 버리고 세유(世儒)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 냈다. 공부는 먼저 《대학(大學)》부터 시작하여 읽기를 천 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 "한 부의 책에 격치성정(格致誠正)18)의 공부와 수제치평(修齊治平)19)의 공효의 본말이 상세히 갖춰져 있고 조리가 분명하다. 배우는 자가 이것을 버린다면 그 규모를 정할 수가 없다. 《장구(章句)》에 근본을 두고 《혹문(或問)》을 참고하며 《강의(講義)》20)를 궁구하여 무릇 그 지의(旨義)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게 하되, 한결같이 경(敬)을 주(主)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것은 성학(聖學)의 시작을 이루고 끝을 이루는 것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하고 정제엄숙(整齊嚴肅)21)하며, 항상 하늘의 상제를 마주한22) 것처럼 할 것이니 본원(本源)을 함양하고 총명(聰明)을 개발하는 것이 이 한 글자에 달려있다."라고 하였다. 《논어》의 근본, 《맹자》의 발양(發揚), 《중용》의 미묘함에 이르러서도 자주자(子朱子)를 스승과 법도로 삼아서 강구하여 밝히지 않음이 없었다. 《시경》에서는 성정(性情)과 사정(邪正)의 분별을 궁구하여 우유(優游)하고 함영(涵泳)하는 의취를 다하고, 《서경》에서는 위미정일(危微精一)23)의 관계를 살펴서 정사(政事)와 치란(治亂)의 근원을 고찰하며, 《주역》에서는 정문(正文)을 숙독하면서 정자(程子)의 《역전(易傳)》과 주자의 《본의(本義)》을 참조하고 고증하여 길흉(吉凶)ㆍ소장(消長)ㆍ진퇴(進退)ㆍ변역(變易)의 묘리를 완미하고 또 상(象)과 효(爻)를 관찰하였다. 《춘추삼전(春秋三傳)》24)에서 분명하게 결단하고 상세히 완미하며 익숙히 맛을 보아서 포폄(褒貶)ㆍ상벌(賞罰)ㆍ조종(操縱)ㆍ여탈(予奪)의 왕법을 살폈다. 그리고 《호전(胡傳)》25)에 더욱 조예가 깊었는데 《호전》은 의리를 주로 하기 때문이었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서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26)과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을 깊이 연구하면서 오히려 지리(支離)하고 산만하여 본령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병폐로 여겼다. 백가(百家)의 여러 서적은 만나는 대로 눈으로 보지 않음이 없되, 만약 도(道)와 무관하고 이(理)와 상관이 없으면 깊이 주의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서오경(五書五經)》27)을 항상 돌려가며 정밀하게 보았다. 항상 등불을 밝혀 낮을 이어가면서28) 신묘하게 계합하여 마음으로 깨달은 곳에 이르면 책을 덮으며 눈을 감고 깊이 잠겨 조용하였으니 입정(入定)29)한 스님 같았다. 천인성명(天人性命)30)의 심오함과 현묘함ㆍ음양이기(陰陽二氣)의 대대(對待)31)와 유행ㆍ일리(一理)가 혼연(渾然)한 가운데 만수(萬殊)가 찬연(燦然)한 것에서부터 천서천질(天敍天秩)ㆍ천명천토(天命天討)32)ㆍ예악형정(禮樂刑政)ㆍ관혼상제(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고치실이나 쇠털처럼 작고 미세한 것도 철저히 탐색하고 정밀히 연구하였다. 그러나 감히 자신만을 믿지 않고 매번 사문(師門)에 질정(質正)한 연후에야 참으로 터득하였다고 비로소 믿었다. 노선생(老先生)께서 일찍이 답장하기를 "별지의 몇 조항은 명리(名理)의 핵심33)이 아님이 없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나의 혼미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그대와 함께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 특별한 공부를 한다고 들었는데, 본래 이것이 최상의 법문(法門)이니, 물망물조(勿忘勿助)34)와 연비어약(鳶飛魚躍)35)이라는 이런 곳에서 재미를 얻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힘쓰고 힘쓰라."라고 하였다. 그 사문(師門)에 존중을 받음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일찍이 꿈에서 지은 한 구의 시에 이르기를 "강산의 옛 자태는 봄에도 여전히 남았고, 일월의 새로운 정기는 비 온 뒤에 더욱 맑구나."라고 하였는데 대개 그 일생의 성품이 온아(溫雅)36)하고 학술이 순결하였음을 그림처럼 볼 수 있다. 동문으로 대곡(大谷) 김(金) 선생-석귀(錫龜)-ㆍ애산(艾山) 정(鄭) 선생-재규(載圭)-이 있는데 가장 사이가 좋았다. 지향이 서로 같았고 도를 이해하는 것도 같았다. 강직하고 부드러우며37)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38) 두루 흡족하고 기뻐하였으니 '세 사람이 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는 시(詩)는 진실로 허언이 아니다. 일찍이 을해년(1875, 고종12) 겨울에 사상(沙上)39)에 나아갔는데 애산(艾山)이 사흘 먼저 도착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 여름에도 진원(珍原)에 나아갔는데 애산이 또 사흘 먼저 도착해 있었다. 머나먼 반 천리 길이었으나 애초에 한 마디 약속도 없었다. 그러나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은 일이 한 번 두 번 되면서 마치 북채와 북,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았으니 그 기류(氣類)40)가 서로 감응하여 그런 것이었다. 노선생(老先生)께서 대곡(大谷)을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두 사람의 성씨가 서로 같고, 연령도 서로 비슷하고, 자질도 서로 유사하며, 사는 지역의 이름까지도 다르지 않다. 이는 세상에 드문 매우 기이한 일이니 어찌 각자 기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각기 서로 그것을 기록하였는데 〈사동설기우록(四同說奇遇錄)〉이 이것이다. 이내 시를 짓기를 "사동설(四同說)은 못내 부끄러우나 가장 기이한 건 거듭 만난 인연이라네. 선생께서 기록하라 명하시니 이 뜻이 정말 깊도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노선생(老先生)께서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꺼내 세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진실로 천고의 성현들의 적전 비지(秘旨)인데 오직 노선생께서 홀로 제창하고 스스로 화답한 것으로 본원을 통찰한 것이다. 태극과 주재의 묘리ㆍ이수(理帥)와 기역(氣役)의 구분ㆍ이일(理一)과 분수(分殊)가 서로 포함하는 미묘함ㆍ만수(萬殊)와 일리(一理)가 원융(圓融)하는41) 뜻을 분석하여 판별하고 모아서 총괄하였다. 누차 말하고 반복한 것은 대개 노선생의 진결(眞訣)이었다. 일관(一貫)의 요지42)는 오직 증자가 들었고, 태극(太極)의 묘리는 단지 양정(兩程)43)이 전했는데 논자들은 세 사람을 고정(考亭)의 채황(蔡黃)44)이라고 하였다. 날마다 노선생을 모시고 앉았는데 마침 자리가 한가하고 밤이 고요해지자 넌지시 여쭈기를 "지금 보필하고 치택(致澤)45)하는 임무라면 누가 괜찮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노선생께서 말씀하기를 "경범(景範, 김석귀)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후윤(厚允, 정재규)과 계방(季方, 정의림)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성문(聖門)의 제자(諸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정치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질문한46) 은미한 뜻과 은연중 부합한 것이었다. 또 여쭈기를 "정사(呈辭)하여 세 번 체직되었고 무장(茂長) 현감의 직도 굳이 거절하셨는데 그 큰 뜻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노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신언(愼言)을 아는가?"47)라고 하더니 마침내 사군자(士君子)의 벼슬에 대한 출처 의리와 시국 상황이 그러할 수 없는 내밀한 의론을 상세히 논하였다. 노선생(老先生)께서 선생에게 숨기는 것이 없음을48)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다. 덕망과 명성이 성대하게 드러나니49) 일세의 유자(儒者)들50)이 모두 선생을 알기를51) 원하였고 도백(道伯)과 고을 수령들도 매양 정성스런 예우를 지극히 하였다. 한후(韓侯) 치조(致肇)와 남후(南侯) 학희(學熙)가 공무로 요청하여 강례(講禮)와 음례(飮禮)을 설행하면서 선생을 빈사(賓師)52)의 지위로 높였다. 이내 술을 따르고 제기를 진설하며, 오르내리면서 절하고 읍(揖)하는 절차에 대해 밝아서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태도가 없었다. 강의하고 논변하며 문답하고 응대하는 데에도 명백하여 애매하거나 막히는 대목이 없었다. 그러니 모두가 일대 성대한 행사요 백세의 사표라고 칭송하였다. 두 후(侯)도 감탄하며 말하기를 "남녘 먼 귀퉁이에 이러한 간기(間氣)53)가 모였을 줄 몰랐다. 고아하고 현명함이 도성(都城)54)의 현인들에 가까운 것 같다. 남대(南臺)55)의 청직(淸職)은 바로 이 사람의 자리이다."라고 하면서 매양 고기반찬을 후하게 보내주었는데 통정공(通政公)이 집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통정공이 말하기를 "백성이 고을수령56)이 보내준 것을 받는 것은 지나치게 외람된 것이 아니더냐?"라고 하니 이에 이웃 친구들과 그 영예를 함께 누렸다. 기묘년(1879, 고종16)에 스승이 돌아가시는57) 고통을 당하여 문에 달려가 통곡을 하는데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백건(白巾)에 환질(環絰)58)을 두르고 예월(禮月)59)을 따라 장례를 모셨다.60) 대곡(大谷)ㆍ애산(艾山)과 함께 상례(相禮)의 지위에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만든 원칙을 근본적으로 미루어보고, 마땅히 덜고 더할 것을 참작하면서, 의절(儀節)을 정해 집행하였다. 은전(殷奠)61)을 올리면서 고유문(告侑文)에 이르기를 "3대(三代)62) 여러 성인들 뒤에 공자가 일어났고, 염락(濂洛)63)의 여러 현철들 뒤에 주자(朱子)가 나왔으며, 동방의 여러 유현들 뒤에 선생께서 태어났습니다. 무성하게 배출된 뒤끝에 하늘이 한 사람을 내셔서 학문을 절충하고 집성하게 하여 사문(斯文)의 영원한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강하(江河)의 운수에 부응하고 산악의 영기가 모여 태어난 분으로서 5백년 지대지강(至大至剛)한 기운64)과 천만년 유정유일(惟精惟一)65)의 학문으로, 엄연하여 천 길로 우뚝 선 벽 같고 드넓어서 만곡(萬斛)66)을 포용하는 바다와 같습니다. 인(仁)은 봄의 생기(生氣)와 같았고 의(義)는 가을의 숙살기(肅殺氣)와 같았습니다. 좋은 금과 정련된 옥처럼 순정하여 새기고 다듬은 흔적이 없고, 맑은 바람과 개인 달처럼 깨끗하여67) 세속을 벗어난 의표가 있었습니다. 선생이 동서남북의 밖으로 나서고 도덕인의(道德仁義)의 본원에 앉아서, 통찰하며 밝히고 담소하며 지휘하니, 마치 모든 강의 미친 물결이 올바른 길을 얻어 도도하게 동쪽으로 흘러들어간 것68)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만약 노선생(老先生)의 도에서 참으로 보고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명료하고 통쾌할 수 있겠는가. 연제(練祭)ㆍ상제(祥祭)ㆍ담제(禫祭)ㆍ길제(吉祭)에 정성을 다하고 의례를 갖추어 참석하였고, 단지 노선생의 행한 의(義)와 말씀한 법도 가운데 생전에 일월처럼 빛났던 것에 강한(江漢)69)을 사모하는 뜻을 붙이고 종신토록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임오년(1882, 고종19)에 통정공의 상을 당하여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곡소리가 이어지지도 못하여70) 혼절하였다가 깨어나기도 했다.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상차(喪次)를 떠나지 않았다. 전(奠)을 올리고 곡을 하며 조문을 받는 틈에도 번번이 책상을 마주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을 익혔다. 죽을 먹은 뒤에 거친 밥을 먹고, 거친 밥을 먹은 뒤에 채소와 과일을 먹었으며, 채소와 과일을 먹은 뒤에 단술을 마셨으니71) 성왕(聖王)이 줄이고 낮춘 상례의 뜻을 굽혀 따른 것이었으나, 종신토록 지극한 고통은 마음에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모친상을 당해서도 또한 이와 같았다. 그 거처가 일정하지 못하여 대덕(大德)에서 품촌(品村)ㆍ묵곡(墨谷)ㆍ성동(星洞)ㆍ가산(佳山) 등으로 여러 번 옮겼다. 허름한 토담집은 쓸쓸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천사만종(千駟萬鍾)72)이라도 그 의(義)가 아니면 돌아보지 않으면서 구학(溝壑)의 뜻73)을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안씨(顔氏)가 어찌 흙덩이처럼 책상을 마주하고 날을 마치면서도 쌀독이 자주 비는74) 것을 걱정하지 않았는가? 가난에 처하는 도리는 나의 분수를 따라 힘을 다하는 것이고 힘을 다한 뒤에는 내가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태연할 뿐이었는데 이는 선생의 말씀을 자신도 말한 것이다. 집안에 거처할 때를 말하자면 안팎으로 정숙하고 화목하고 화락하였다. 종족(宗族)을 대할 때는 단지 은덕(恩德)과 정의(情誼)를 돈독히 할 뿐 너와 나를 따지지 않았다. 선조를 제사하는 날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훈채와 생강을 맛보지 않았으며, 담배 도구를 가까이 하지 않고, 산재(散齊)와 치재(致齊)의 재계를 하니, 재계의 대상이 보이는 듯했다.75) 초하루76)에는 새벽에 일어나 세수 하고 머리 빗고 관을 쓰고 옷을 입고서 사당의 감실(龕室)77)에 배알하였다. 서실(書室)에 물러나 앉아서는 안석과 책상을 정돈하고 단정히 거처하며 조용히 침묵하여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다. 앉을 때는 가부좌를 하고 손을 둥그렇게 마주 잡고 어깨와 등을 곧추 세우니, 엄연하여 우뚝 솟은 태산 같았다. 잠잘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무릎을 하나로 모으며 숨을 죽이고 반듯이 누우니, 잠잠하여 숨어 잠긴 거북과 용 같았다. 말할 때는 조급하거나 경솔하지 않고 빠르거나 사납지 않으니, 온화하여 따듯한 봄바람 같았다. 걸을 때는 몸이 곧고 발걸음이 활달하면서도 안정되고 느릿하니, 날개를 편 듯하고 옷자락도 가지런하였다.78) 마시고 먹을 때는 국과 밥의 배열에 바른 위치가 있고, 수저와 젓가락을 들고 놓는 것도 급하거나 느리지 않았으며,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가려서 먹지 않았고, 나물을 먹고도 모든 일을 한다79)는 뜻으로 항상 분발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지인들과 서로 만나 시운(詩韻)을 수창하는 곳에서는 주량에 일정한 양은 없었으나 다만 기분 좋게 취하면 그쳤다. 사람을 접할 때를 말하자면 공경히 대하여 온화한 기운이 넘쳤으니 친숙한 자는 기쁘게 복종했고 소원한 자는 흠모했으며, 난폭하고 사나운 자는 외경했고 오만한 자는 공경히 삼갔다. 따뜻한 봄과 서늘한 가을에는 지인들을 두루 찾았고 비록 나이가 적거나 한참 어려도 하나도 법도를 빠뜨리지80) 않았다. 상(喪)을 조문하고 경사를 축하할 때는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몸소 갔으며 만약 무슨 일로 빠뜨리게 되면 글로 대신하였다. 매양 아름다운 산수와 한가한 정자에서는 번번이 심정을 붙여 회포를 쏟았고 구봉(九峰)의 깊은 곳과 오봉(五峰)의 기이한 절경, 천태(天台)의 그윽하고 외진 곳에서 여러 해를 은거하였다.81) 벽산(碧山)의 갠 달, 쌍산(雙山)의 맑은 바람, 칠송(七松)의 맑은 경치를 찾아 두루 돌아다녔다. 경서를 갖고 와서 강학하는 선비들이 믿고 따르며 마음으로 복종하니 글방에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師道)를 자처하지 않고 단지 강마(講磨)하면서 겸손하였는데 정성스럽게 반복하며 이끌어주고 연마하며 격려하였다. 독서할 때는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고요히 앉아 본원(本源)을 함양하고, 유영(游泳)하여 개발하고 깊이 잠겨 반복하며, 글자는 글자의 뜻을 찾고 글귀는 글귀의 뜻을 찾으며, 글귀를 합쳐 문장을 이루면 또 문장의 뜻을 찾고, 빨리 하려하지 말고 많은 것을 탐하지 말며, 터득하지 못한 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하나 몸에 돌이키도록 하였다. 경전의 뜻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도록 간절하고 부지런히 하면서 과정을 엄정히 세웠다. 편벽될까 염려되면 그들로 하여금 원활하게 소통하게 하였고, 협소하고 비루할까 우려되면 인도해서 흉금을 열어주고 경지를 넓혀주었다. 어렵사리 진보하는 것이 안타까우면 이끌어서 곰곰이 깊이 생각하게 하고 탁 트이게 멀리 보도록 하였다. 재주가 영민한 것을 알면 경계하여 지둔함을 지키게 하고, 박학에만 힘쓰는 병폐가 있으면 면려하여 깎아내도록 하였다. 혹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러나게 하여 그 재질에 따라서 두터이 해주고 그 병폐에 따라 고쳐주었다. 선생은 항상 말하기를 "학문의 본령은 오직 뜻에 달려있다. 뜻이 한결같으면 기(氣)가 따르니 천하에 능하기 어려운 것이 없고 귀신도 장차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지만 경중취사(輕重取捨)의 구분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슨 뜻을 세울 것인가. 학문은 주경(主敬)82)이 근본이지만 조사존망(操舍存亡)83)의 기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슨 경(敬)을 주로 삼겠는가. 학문은 힘써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정선악(邪正善惡)의 분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힘써 행할 것인가.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대학》의 시조리(始條理)84)가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마음을 오래 보존하면 저절로 밝아진다."85)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생각해도 또 터득하지 못하면 신명이 와서 알려줄 것이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궁격(窮格)86)하여 그 진수를 터득하면 정신이 말끔해지고, 그 진수를 터득하지 못하면 정신이 수고롭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충신(忠信)을 주본(主本)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독서는 마땅히 본래의 문장 뜻을 신중히 지키면서 궁격(窮格)하고, 횡설수설(橫說竪說)로 공허한 것을 천착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고, 말하기를 "궁격(窮格)의 공부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성실이며 근면일 뿐이다." 하였고, 말하기를 "궁격(窮格)을 하되 실천이 없다면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새기는87) 격이니, 행할 때는 용자부(勇字符)88)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진실로 담당(擔當)하고 세차고 빠르게 격려하여 천만인을 용동(聳動)시키는 정신과 기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모름지기 일상에 절실하고 비근한 마음 속의 은미한 곳에 나아가서, 차례로 지선(至善)하고 딱 알맞은 곳을 궁격(窮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기우록(奇遇錄)〉을 보고 추억하며 감회에 젖어 말하기를 "공문제자(孔門諸子)들은 천하의 대성(大聖)을 얻어 스승으로 삼고 천하의 대현(大賢)을 얻어 벗으로 삼아서, 스승에게 묻고 벗에게 익히며 벗에게 익히고 스승에게 질정하였다. 굳세고 강직한89) 의표와 간곡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90) 즐거움은 천년 뒤에 상상해도 나도 모르게 감탄하여 흥기하게 된다. 비록 당우(唐虞)의 임금91)과 고기직설(皐虁稷契)92)의 무리를 얻어서 하늘이 대낮처럼 밝은 날에 토론93)을 할 수는 없더라도, 맹자(孟子)가 이른 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삼락(三樂)에 끼지 않는다.'94)고 한 뜻을 미루어 본다면,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는 없다. 내가 경범(景範)ㆍ후윤(厚允)과 사문에서 만난 것이 오래되었는데, 태극성명(太極性命)의 은미한 이치에서부터 삼백삼천(三百三千)95)의 다단한 예(禮)에 이르기까지 각자 들은 것을 진술하고 각자 본 것을 말하면서 익히고 질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세의 대현(大賢)을 얻어서 스승으로 삼고 일세의 대유(大儒)를 얻어 벗으로 삼아 교화를 입고 은덕에 적셔져서 천고나 멀어진 날에 직접 수사(洙泗)96)의 성대한 위의를 보게 된 것이다. 이는 일생에 다시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로 천 백세토록 절대로 없거나 겨우 있는 법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태극설(太極說)〉을 지어 동지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태극(太極)은 천지의 종조(宗祖)요, 조화의 주재(主宰)이며, 만물의 근본으로 천하 고금에 인사(人事)의 준칙이다. 지극히 은미하고 지극히 오묘하여 일상생활에서 떨어질 수 없고,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긴절하여 실로 엄정한 천명에 근원한다. 세상의 치란(治亂)ㆍ사람의 현부(賢否)ㆍ습속의 오륭(汚隆)ㆍ일의 성패(成敗)는 단지 이 도리를 밝히느냐 밝히지 못하느냐 여하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성현이 경(經)을 짓고 전(傳)을 계술하여 천언만어(千言萬語)에 이르도록 이어지고 그치지 않은 것은 이 도리를 밝혀서 모두 사람마다 알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다. 오호라! 성인은 멀어지고 말씀은 사라졌으며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니 혹 태극을 기(氣)를 띤 물건이라고 여기고, 혹은 오성(五性)97)을 기(氣)를 인하여 있다고 여기고, 혹은 명덕(明德)98)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고, 혹은 만수(萬殊)를 기(氣)가 나뉜 것으로 여기며, 달도(達道)99)를 기(氣)가 발한 것으로 여긴다. 이와 같다면 성정(性情)ㆍ체용(體用)ㆍ시종(始終)ㆍ본말(本末)에서 모두 기(氣)가 그 주인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태극(太極)의 주재(主宰)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는 신묘한 것이니, 모름지기 조용히 깊게 탐색하고 오랫동안 존양(存養)100)을 쌓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을유년(1882, 고종22)에 사림들이 천거장(薦擧狀)을 올리는101) 논의를 펴자 선생이 듣고는 겸양하며 사람들을 타이르면서 "칠조개(漆雕開)처럼 현명한 사람도 오히려 '나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102)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칠조개보다 못하면서 어찌 이것을 자신할 수 있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굳게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동지들과 함께 서석산(瑞石山)103)에 올라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수창하였는데 거의 기우(沂雩)104)의 아취가 있었다. 문생(文生) 송규(頌奎)가 말하기를 "이번 유람은 영귀(詠歸)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송규와 성리(性理)에 대해 논하면서 대략 많은 말을 하였는데, 그가 말한 '묘리(妙理)를 묘처(妙處)에서 구하지 않고, 비근하고 거친 곳에 나아가 구하더라도 묘리가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칭탄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참으로 이(理)를 본 말이다."라고 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이 사람이 죽자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哭)을 하였다. 제문을 지어 위로하기를 "계원(啓元)105)이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는가?"라고 하면서 통곡을 하였다. 마침내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지극히 정밀하게 교감을 하고 친히 스스로 서문(序文)을 짓기를 "하락이수(河洛理數)106)와 천문물상(天文物象)을 즐겨 보았다."라고 하였고, 말단에 이르기를 "이것은 소장공(蘇長公)이 낙전(樂全) 선생의 문집을 교정한107) 뜻이니 그 정(情)이 또한 더 두터운 바가 있다."고 하였다. 붓을 잡고 글을 쓰면 사기(辭氣)는 평담하고 필법(筆法)은 단정했으며 그 문장은 포백(布帛) 같았고 맛은 숙속(菽粟) 같았다.108) 은미한 덕을 천양하는 글109)에 더욱 간절하게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세상에서 칭송하여 '신필(信筆)'이라고 하였다. 기축년(1889, 고종26)에 지은 대곡(大谷)의 전(傳)에 말하기를 "정주(程朱)로부터 세대가 멀어지니 의론하는 문파가 많아졌는데, 만약 대공지정(大公至正)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절충함으로써 정주(程朱)의 강토를 예전처럼 넓고 맑게 만든 사람이라면 오직 우리 노선생(老先生)이 그 분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하에 공이 없었다면 천고토록 전해지지 않은 비결과 한 마음에 홀로 터득한 묘리를 거의 품어 거두고서 말할 곳도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이한 만남이요, 세상에 드문 정신의 만남이다. 그 평생을 살펴보건대, 가리켜 논의할 만한 출사(出仕)를 조금도 하지 않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시종 허물이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온갖 고난을 겪고 극성스런 야유에도 호탕하여 안색에 기미도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박문(博文)과 약례(約禮)110)를 함께 닦아 나가면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 해박하되 잡스럽지 않고, 무성하되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가 있되 넘치지111) 않았고, 간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숙연히 공경하고 기쁘게 복종하게 하던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선생과 대곡(大谷)ㆍ애산(艾山)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였으며 함께 진전(眞傳)을 받아서 위대하게 유문(儒門)의 의표가 되었으니, 대곡(大谷)의 전(傳)을 쓴 것은 바로 자기의 전(傳)을 쓴 것이었다. 일찍이 손 가는대로 쓴 기록이 총 수백여 말이다. 말하기를 "음양(陰陽)이 대대(對待)112)하는 것은 교역(交易)이고, 유행(流行)하는 것은 변역(變易)이다.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유행하는 변역을 위주로 말하였다. 그러나 변역의 기(氣)는 곧 대대(對待)하는 교역(交易)의 기(氣)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性) 가운데는 단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가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효제(孝弟)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성(性) 가운데 효제(孝弟)가 없는 것 같으나, 4가지의 이면에는 세조리(細條理)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행(五行)에서 목(木)을 말하면 송(松)ㆍ백(柏)ㆍ예(櫲)ㆍ장(樟)이 모두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수(水)를 말하면 강(江)ㆍ회(淮) 하(河)ㆍ한(漢)이 모두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몸속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113)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일체(一體)임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만약 몸을 떠나 밖에서 찾는다면 한 없이 망망하여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될 것이다.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생리(生理)가 온전하다면 미발(未發)의 때에는 천지와 한 몸이고, 이발(已發)114)의 때에는 천지와 함께 흘러간다. 이른 바 '공정하면 만물이 하나가 된다.'115)는 것과, 이른 바 '고요한 가운데서 만물을 관찰하면 모두 봄의 뜻이 있다.'116)는 것도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태극은 하나의 볼 수 있는 사물이 아니고, 하늘에 있으면 만물(萬物)의 총명(總名)이고 사람에게 있으면 만선(萬善)의 총체(統體)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음과 양 두 가지가 비록 아무리 많이 변하더라도 생리(生理)가 두루 흐름이 아님이 없고, 사람이 날마다 쓰는 것이 비록 농기구나 질그릇, 병기나 문서의 따위라도 생리(生理)에 필요한 도구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117)고 할 때의 이 '명(命)'자는 기수(氣數)118)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한결같이 천리를 따르고 인위(人爲)를 범하지 않으며, 무릇 길흉과 영욕이 온 것에 대해 조금도 자초함이 없는 뒤에라야 명(命)에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이익을 보고 달려가지 않고 손해를 보고 피하지 않으며, 오직 의리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니 어찌 군자가 될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유기(游氣)119)는 어떤 기(氣)인가? 천지 음양의 기를 주로 삼으면 만물이 유기가 되고, 만물의 해당 몸체의 기를 주로 삼으면 음양이 유기가 된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사특함을 막으면 성(誠)은 절로 보존되고 사특함을 막는 것 외에 별도로 성(誠)을 보존하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120) 또한 그러하다. 다만 선(善)으로 옮겨가고 과오를 고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긴 하지만, 모두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천리와 인욕(人欲)의 두 가지 길일뿐인 것이다. 천리가 아니면 곧 인욕이요, 인욕이 아니면 곧 천리이니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에 응하는 것은 잘한 것이 있고 잘못한 것도 있어서 만 가지로 다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인욕의 폐해가 대개 3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질이 치우치는 것이요, 둘은 이목이 가려지는 것이요, 셋은 남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유약하고 혼탁하며 난폭하고 강경(剛勁)121)한 것은 기질이 치우친 것이요, 탐색(貪嗇)하고 빠져들고 경영하며 골몰하는 것은 이목이 가려진 것이요, 시기하고122) 잔인하며 괜히 교만하고 부끄러워하여 위축되는 것은 남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3가지는 돌고 돌면서 이어지고 서로 조장하며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기질의 치우침이 그 본령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기질을 변화시킬 것을 말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뜻이 편협한 것이 있으면 광대한 생각으로 극복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진실한 생각으로 극복하며, 태만한 것이 있으면 냉엄한 생각으로 극복하며, 사특한 것이 있으면 정직한 생각으로 극복해야한다. 날마다 이렇게 하여 선행을 행하는 힘이 충분히 그것들을 이길 수 있도록 한 연후에야 진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일본(一本)은 본디 천명의 전체이고 만수(萬殊)는 천명의 유행이다.123) 그렇다면 만수가 과연 기(氣)로 인하여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저번에 〈태극도설〉에서 '동(動)이 극에 달하면 정(靜)하고, 정(靜)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動)한다'는 말을 보고, 이것은 유행(流行)의 한 쪽만 말한 것이고 대대(對待)의 체(體)는 아닐 것이라고 가만히 의심하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動)하여〔動而〕' '정(靜)하여〔靜而〕'라는 것은 유행의 용(用)으로서, 소자(邵子)가 이른바 용(用)은 천지 이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양을 낳는다〔生陽〕' '음을 낳는다〔生陰〕'라는 것은 대대(對待)의 체(體)로, 소자(邵子)가 이른 바 체(體)는 천지 이후에 확립되었다는 것이다.124) 다만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용(用)은 천지 이전에 일어나서 천지 이후에 유행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뉜 뒤에 별도로 일개 유행의 기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정(靜)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動)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이 몸은 나의 사물(私物)이 아니다. 무릇 몸이 보고 듣고 행하고 걷고 먹고 입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천기(天機)가 아님이 없다. 그러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을 둔다면 천칙(天則)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본래 천연적으로 저절로 있는 물건이지 천지 만물과 일체가 되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생생(生生)과 지애(至愛)의 이치가 있게 되면 곧 천지 만물과 자연히 일체인 것이다. 예컨대 한 개의 종자가 단지 생생(生生)의 이치만 있으면 천지만엽(千枝萬葉)의 이치를 자연히 완비하게 되니 이것이 그 인(仁)이므로 일체인 것이다. 만약 시용(施用)된 곳으로 말한다면 또한 한 몸이었으므로 인(仁)이라 할 수 있다. 생생(生生)의 이치가 있으므로 부자(父子)의 나뉨이 있고 또한 부자(父子)가 일체이므로 자애하고 효도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왕년에 계원(啓元)과 이런 뜻을 논하면서 상당히 글을 주고받았는데 다소나마 귀결점이 없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먼저 날마다 쓰는 사물에 나아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궁구해 찾고 눈앞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천리가 유행하는 것을 본 뒤에야 바야흐로 의거하여 지킬 곳이 있다. 만약 단지 고묘(高妙)한 곳만 향하면서 성(性)과 이(理)를 말한다면 도무지 모색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한 몸은 태극의 상(象)이고, 형기(形氣)는 음양의 상이며, 기혈골육(氣血骨肉)은 오행의 상이고, 백해만규(百骸萬竅)는 만물의 상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허공에 뜬 이치란 없기 때문에 또한 별도로 통체(統體)의 태극이 있지 않다. 다만 이것이 양에서 하나의 태극이 되고, 음에서 하나의 태극이 되며, 오행에서도 각기 하나의 태극이 되고, 만물에서도 각기 하나의 태극이 되는데, 음양과 오행과 만물을 합하여 통체의 태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통체의 태극이 각구(各具)125)의 태극보다 많지 않고, 각구의 태극이 통체의 태극보다 적지 않으니, 각구의 태극 가운데 저절로 이른바 통체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에 대해서 사물마다 새기고 다듬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한만(汗漫)하게 절로 그러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지만물은 단지 하나의 몸일 뿐이요 다시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신사체(一身四體)에 생리(生理)가 두루 흐르면서도 서로 관섭하는 바가 없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준기(準基)126)가 허다한 조리(條理)를 말했으나 어찌 항상 기억하여 일에 응할 때마다 또 신경을 쓰고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만상(萬像)이 거울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울의 먼지와 때를 씻고 닦아서 청명하고 통철하게 한다면 사물이 비록 이르지 않아도 만상이 여기에 담겨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설이 아주 좋다. 다만 거울을 닦는 방도127)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실천하는 것에 공력을 쓰지 않고, 만약 단지 눈썹을 치켜뜨고 눈알을 부라리면서 벽을 향해서 마음을 관찰한다면, 반드시 허공의 적적한 곳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정(正)을 중(中)에 짝지우면 중(中)이 중요한 것이 되고, 의(義)를 인(仁)에 짝지우면 의(義)가 근본이 된다. 운운.' 하였다. 주자(周子)의 주정설(主靜說)128)로 본다면 정(正)과 의(義)를 주로 삼은 것 같은데, 주자(朱子)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왜인가?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은 인(仁)과 의(義)가 서로 그 체(體)가 되기 때문이다. 정(正)과 의(義)를 근본으로 삼으면 중(中)과 인(仁)이 용(用)이 되고, 중(中)과 인(仁)을 체(體)로 삼으면 정(正)과 의(義)가 용(用)이 된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성(性)은 태극이고, 태극은 음양동정(陰陽動靜)의 본연의 묘리이다. 그러나 유독 미발(未發)의 상태를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왜인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미발의 상태가 성이 아니고 다만 미발의 상태에 갖춰져 있는 것이 성이다. 미발의 상태는 기(氣)가 발동하지 않아서 도의(道義)가 온전히 갖춰져 있으므로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일본(一本)은 이(理)로써 말한 것이고, 대본(大本)129)은 심(心)으로써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구(各具) 중에 있는 것을 일본이 있다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대본이 있다고 말한다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사람은 태허(太虛)의 음양(陰陽)의 기에 근본하니 물고기는 물에 근본하고 물은 땅에 근본한 것과 같아서 그 동정과 호흡이 일찍이 잠시라도 끊어진 적이 없다. 운운."라고 하였다. 경인년(1890, 고종27)에 애산(艾山) 선생을 영남의 삼가(三嘉)130) 면동(免洞)에서 위문131)하였다. 준기(準基)ㆍ관호(寬鎬)ㆍ승환(承渙)이 선생을 모시고 면동의 상차(喪次)에 이르렀는데 두 어른이 서로 마주하여 한참동안 엎드려 곡을 한 다음 조용히 위로의 말을 하였다. 반 천리 떨어진 심우(心友)를 만났어도 단지 채소와 과일만 올리고 술과 고기132)는 갖추지 않았으니 현인 군자가 예(禮)로써 자처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우한 도리를 볼 수 있었다. 뇌룡정(雷龍亭)-남명(南冥) 선생이 창건했는데 애산(艾山)이 그 터에 중건한 것이다.-에서 설강을 하였는데 선생이 강사(講師)의 자리에 섰다. 모임에 참석해 강의를 듣는 선비가 수 백 명에 이르렀는데 밖에서 서로 말하기를 "의리가 명백하고 언론이 정대하니 애옹(艾翁 정재규)과는 난형난제이고, 곧은 법도와 엄한 위의(威儀)는 오히려 더하다."라고 하였다. 10여일 머물면서 〈유편(類編)〉의 심오한 뜻을 강의하고 논변하였다. 헤어질 때 애산은 당을 내려오지 않고 부복(俯伏)만 하고 전송하였는데 상중에 있는 몸이라 그런 것이었다. 진주(晉州) 월횡리(月橫里)에 도착하여 월고(月皐)133) 조(趙) 선생-성가(性家)-이 저술한 노선생(老先生)의 행장을 살펴보았다. 산천재(山泉齋)-남명(南冥)134) 선생의 강학소이다.-에 들어가 공자(孔子)ㆍ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 네 성현의 유상(遺像)을 봉심(奉審)한 뒤 방장(方丈, 지리산)의 제일봉(第一峰)을 우러러 보고 함양(咸陽)을 향해 출발하였다. 일두(一蠹)135) 선생을 남계(藍溪)에서 봉심(奉審)하려 했으나 길이 멀어서 하지 못하고 섬진강을 배로 건너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유편(類編)〉의 발문을 지어 쓰기를 "성현(聖賢)이 작위(作爲)를 하시되 하늘의 뜻에 앞서서 사람을 깨우쳐주지 않고 각각 때에 따라 가르침을 세우셨다.136) 이 때문에 풍기(風氣)가 열리자 문자가 만들어지고, 대박(大樸)137)이 사라지자 육경(六經)이 지어졌으며, 세교가 쇠퇴하자 사자(四子)138)가 쓰여 진 것이다. 성현이 멀어져 말씀도 사라지니 낙건(洛建)139)의 현철들의 글이 나왔다. 낙건의 뒤에 태어났으니 의당 그 설을 익히고 지켜야 하거늘, 어찌하여 의리가 막히고 의론이 횡행함이 이 때보다 심한 적인 없는 것인가? 이것이 〈유편(類編)〉의 글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에 또 애산과 약속하여 종산(鍾山)의 사찰에서 만났는데 정월파(鄭月波)-시림(時林)-ㆍ최계남(崔溪南)-숙민(琡民)-ㆍ정농산(鄭農山)-면규(冕圭)-도 함께 와서 참여하였다. 각자 문하에 모시고 따라온 선비 또한 매우 많았다. 설강을 하고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140) 3~4 군자가 절충하고 문답을 하는데 위로 선왕의 전례(典禮)부터 학문을 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설파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못 흥국사(興國寺)와 아호사(鵝湖寺)의 즐거움141)이 있었다. 〈종산강록(鍾山講錄)〉을 만들고 인하여 1년에 한 번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사림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년(1892, 고종29)에 사림들을 앞장서 움직여서 칠송리(七松里)에 정자를 세우고 '영귀(詠歸)'로 제액(題額)하였으니 대개 서석산(瑞石山)142)에서 노닐던 남은 뜻에서 근본한 것이다. 오성사현(五聖四賢)의 초상을 봉안하여 봄과 가을에 석채(舍菜)를 하고 인하여 예성의(禮聖儀)ㆍ견례의(見禮儀)ㆍ여수례(旅酬禮)ㆍ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또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 변례(變禮)ㆍ의례(疑禮)에 이르기까지 강론을 하며 청강하는 후학과 생도를 정성스럽게 반복하여 권면하였다. 비록 문단의 노숙한 이들이라도 대부분 의절(儀節)을 처음보고 감복하여 흠모하고 적셔져서 습관을 이루니 거의 3대(三代)143)의 유풍을 회복한 것 같았다. 영귀정의 기문(記文)에 이르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이 되는 도(道)를 추구하려 한다면 학문(學問)이 아니면 불가하고, 학문의 도는 스승과 벗이 아니면 불가하다. 이 때문에 스승과 벗을 가까이 하여 학문을 말미암으려고 하는 자들 또한 그 마땅한 장소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상서학교(庠序學校)144)는 본디 윤리를 밝히고 가르침을 세우는 터전이었는데 3대 이후로 인도하는 것이 예스럽지 않으니 이것이 서원(書院)이 생긴 까닭이다. 그러나 서원의 규칙 또한 옛날과 같지 않으니 오늘의 선비들이 종유(從遊)하여 수업(受業)하는 것이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동학(東學)의 소요가 횡행하면서 영귀정이 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안송하(安松下)-국정(國禎)-에게 일러 말하기를 "당당하게 우리가 성인을 받들고 학문을 익히는 장소가 저 하찮은 무리에게 더럽혀졌구나."라고 하면서 서로 통곡을 하고 손을 잡고 영평(永平) 등의 지역으로 피난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 3월에 생도들을 이끌고 영귀정으로 가서 더러운 기운을 깨끗이 씻어내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고유하여 아뢰기를 "시운(時運)이 액운145)을 만나니 사설(邪說)이 그 사이에 치성하고, 사문(斯文)이 재액을 당하니 우리의 도가 추락합니다. 왕의 군대가 변경에 임하여 하늘의 토벌을 펼치고, 완악한 음기를 속히 제거하고 미약한 양기(陽氣)를 회복하여 빛나게 하소서. 학당의 뜰을 소제하여 의관을 성대히 하고 현송(絃誦)146)을 다시 찾으며 제기(祭器)147)를 진설하였습니다. 의례를 거행하려하니 일의 체모가 정중하므로 신위를 설치하여 향을 올리고 보잘것없는 정성을 공경히 고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또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과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문묘(文廟)에서 고유하기를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지니 삿된 설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고을은 오랑캐 땅이 되어갑니다. 하늘의 노여움이 혁연(爀然)하시니 우리의 무위를 떨쳐서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져 회전(會戰)한 날 아침에 청명하듯148) 하게하며, 성스러운 조정은 징비(懲毖)149)하고 어진 관리는 왕정을 펴게 하소서.150) 학규(學規)는 백록(白鹿)151)을 본뜨고 규약(規約)은 남전(藍田)152)을 따르니 지주(知州, 지방장관)는 받들어 힘쓰고 선비들은 분주히 듣습니다. 학당 건물을 깨끗이 소제하고 학당의 뜰을 말끔히 청소하였습니다. 길일을 택하여153) 엄숙히 재계하고 강의(講儀)를 거행하려 하면서 선사께 공경히 배알하며 감히 전말을 고하나이다."라고 하였다. 8월에 조령(詔令)을 사칭한 단발령(斷髮令)이 급하게 내려지자 결코 굴하지 않겠다154)는 뜻을 맹세하고 곤궁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155)는 의기를 가다듬으며 한 방면의 선비들을 불러 모았다. 맹세문을 지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진실로 한 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하는156) 수치를 갖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온 세상이 두발을 깎고 오직 청구(靑邱)157)의 한 편에서만 상투 묶는 것을 지키고 있는데, 이 상투마저 만약 없앤다면 만세토록 비태(否泰)와 소식(消息)의 기운이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에 송사(松沙) 선생이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능성(綾城)에 보냈다. 선생이 답하기를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보다는 옥으로 부서지는 것이 나으며,158) 물고기도 바랄 바이지만 어찌 곰발바닥만큼 좋겠는가.159)"라고 하였다. 이때 송사(松沙)는 금성관(錦城舘)서 주둔하며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선생이 필마로 가서 만나 함께 방략을 논의했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여러 번 편지로 서로 면려하였다. 진을 광산관(光山舘)으로 옮기자 선생과 다소의 뜻있는 선비들이 광산(光山)으로 가서 사생(死生)의 계책을 세웠는데 선유(宣諭)함을 듣고는 의병을 파하고 중지하였다. 정유년(1897, 고종34)에 아들 상묵(尙默)을 곡하였는데 참화를 맞아 타들어 가는 마음을 다시 무어라 말하겠는가? 그러나 이내 이치로 달래고 마음을 너그러이 눌러서 겉으로는 평탄한 것 같았다. 예종(禰宗)을 이어서 참최복을 입었고 달관하여 근심하지 않았으니 바로 동문(東門)의 현인일 것이다. 무술년(1898, 고종35)에 동지들과 약속하여 월강(月講)을 열었다. 각자 한 권의 책을 외우고 경전을 해석하고 뜻을 강론하면서 종일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배우기를 좋아하는 성의는 노년에 이르러 더욱 두터워졌다. 임인년(1902, 고종39)에 노선생(老先生)의 문집을 신안사(新安社)에서 간행하는데 애산(艾山)과 함께 가서 같이 교감(校勘)을 보았고 면암(勉庵)160) 최(崔) 선생-익현(益鉉)-도 와서 참여했다. 이때 영남사람 권봉희(權鳳熙)와 최동민(崔東敏) 무리들이 시유(時儒)들의 뜻에 영합하여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 선현을 범하고 배척했다."라고 하여 서로 어울리며 분분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어찌 해와 달의 밝음을 손상하겠는가?161) 머리에 선현을 이고서 후배를 현혹하여 그 해로움이 없지 않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선사(先師)께서는 율옹(栗翁)162)에 대해서 독실하게 믿고 높이 흠모하셨으니 여러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163)는 한 단락은 계합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매양 유행(流行)의 한 측면을 폭넓게 보려 하셨다. 그런데 세유(世儒)들이 이 한 단락을 가지고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근원을 따져서 변론하여 통쾌하게 말씀한 것이다. 그 '피음사둔(詖淫邪遁)164)과 전도(顚倒)165)되고 창피함166)'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뒷사람의 폐단을 밝히려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남의 선비들에게 통고하여 말하기를 "온공(溫公)은 《맹자》를 의심했지만167) 그의 아들 강(康)은 경연(經筵)에서 강학할 것을 권했고,168) 유원성(劉元城)169)은 온공의 문인이지만 회와 구운 고기처럼 《맹자》를 즐겨했다. 이천(伊川)은 명도(明道)170)의 《대학》 편차(編次)를 개정하였고, 남헌(南軒)은 오봉(五峰)171)의 잘못된 곳을 분별했으며,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172)의 정설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주자(朱子)는 '주자(周子)는 황로(黃老)와 같다.'고 했고, '정자(程子)는 황로의 유풍(流風)이 있다.'고 했고, '장자(張子)는 석씨(釋氏)에 가깝다.173)'고 했고, 또 '《정몽(正蒙)》174)에 오류가 많다.'고 했다. 이러한 것들을 또한 그 아버지를 무훼(誣毁)하고, 그 형을 무훼하고, 그 스승을 무훼하고, 그 전현(前賢)을 무훼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을 가지고 율곡을 무훼했다고 한다면, 주자(朱子)의 《본의(本義)》175)는 정자(程子)를 무훼한 것이고, 회재(晦齋)의 《보유(補遺)》176)는 주자(朱子)를 무훼한 것인가? 율곡은 성정(性情)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변에서 또한 어찌 퇴계(退溪)의 설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았는가? 전현(前賢)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을 후현(後賢)이 변론하여 밝혔다면 바로 존모(尊慕)의 도리를 십분 다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권(權)과 최(崔) 등이 아는 바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시유(時儒) 몇 사람이 권(權)과 최(崔)의 여론(餘論)을 따르며 반박하여 조목조목 변론했다는 것을 듣고, 선생이 마침내 조목조목 변론하여 밝혔는데 전문이 원집(原集)에 실려 있다. 그 말단에 이르기를 "근세에 주기론(主氣論)이 한 가지가 아니다. 태극(太極)을 분(分)이 없는 일(一)177)로 여기는 것이 있고, 오성(五性)178)을 기(氣)를 띤 사물로 여기는 것이 있고, 명덕(明德)179)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는 것이 있다. 일본만수(一本萬殊)180)를 말하면 만수(萬殊)는 기(氣)가 되고, 대본달도(大本達道)181)를 말하면 달도(達道)가 기가 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182)을 정분(定分)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재(主宰)와 묘용(妙用), 조리(條理)와 단락(段落)에서 한결같이 기(氣)를 중시하여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자식의 아비의 자리를 빼앗고,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의 자리를 빼앗고, 이적(夷狄)이 화하(華夏)의 자리를 빼앗는 것 또한 하나의 예사(例事)일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여 주장을 발휘하여 척결하고 차례로 절충하셨다. 그런데 저들이 일변의 논리만을 오히려 고집하니 단지 제 분수를 알지 못함을 드러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을사년(1905, 고종42)은 바로 선생의 회갑년이었다. 생일날 문하 제생들이 술잔을 잡고 헌수(獻壽)를 하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왔다. 선생이 시를 짓기를 "앞 을사년(1845)엔 갓난아이였던 몸이 뒤 을사년(1905)엔 백발노인 되었구나. 백발로 거듭 살아도 갓난아이 같은데 당에 올라도 다만 내 어버이 뵐 수 없도다."라고 하였는데 부모가 애써 길러준183) 뜻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위태로운 나라의 형세를 차마 말하겠는가?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팔고 5조약184)을 강제로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근심하고 분노하여 소장을 기초하여 완성했는데, 유소(儒疏)185)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개연히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면암(勉庵)과 애산(艾山) 두 어른이 궐리방(闕里房)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뒤미처 듣고 말하기를 "나의 일을 의탁할 곳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궐리방의 약속도 저지되니 책상을 치며 탄식하였다. 하루는 입으로 시를 읊기를 "노사(蘆沙) 선생의 병인년 상소는 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았도다. 당시에 두세 가지 계책만 썼더라도 어찌 오늘날에 사직이 기울었으랴."라고 하였고, 또 읊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기로서니 어찌 지금만 같으랴,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해와 달도 잠겼구나. 문을 닫고 자정(自靖)186)의 계책만 있을 뿐 서산(西山)과 동해(東海)는 찾아갈 것이 없도다.187)" 하고는 문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입명(立命)188)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기유년(1909, 순종2)에 문하 제자들이 사사로이 선생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뒤에 알고는 찾아서 그 위에 쓰기를 "너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너의 생이 측은하구나. 의당 너를 두어야 할 곳은 두어(蠹魚)189)의 곁이로다."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문을 닫으며 담 구멍을 막고,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두발을 보존하며 우리의 도를 지키면서 자정(自靖)의 계책을 행하였다. 경술년(1910, 순종3) 나라가 망했다는 기별을 듣고는 근심과 분노가 병이 되었다. 생도들이 병문안을 오니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내가 평소 독서를 권면하던 말을 잊지 않겠지? 석과(碩果)190)의 성쇠가 우리 당을 말미암지 않으면 장차 그것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10월 10일 계유에 정결한 옷을 입고 치관(緇冠)을 쓰고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서 가천(佳川)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문인들은 백건(白巾)에 환질(環絰)을 둘렀고, 치전(致奠)과 뇌문(誄文), 유문(侑文)이 잇달아 상차(喪次)에 가득했다. 송사(松沙) 선생이 위장(慰狀)을 보내 말하기를 "선인과 문하 생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는데 우뚝하게 영광전(靈光殿)191) 같은 것은 오직 사문(斯文) 뿐이었습니다. 노환이 몹시 심했다고 이전에 듣고는 여뀌를 머금고192) 한 번 병문안을 하였는데 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곳의 저도 같은 병으로 발로 문턱을 넘을 수 없게 된 것이 거의 수개월이라, 밤낮으로 축원하여 다행히 약을 쓰지 않고도193) 빨리 나아서, 망해가는 사문(斯文)을 붙들어 세우고, 밝은 날이 오면 진퇴를 서서히 의논하길 기다렸는데, 하늘이 돕지 않았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지금 세상이 창해상전(滄海桑田)194)이 되어 살 땅도 없어지자 홀연히 떠나시어195) 비로소 물고기가 제 삶을 얻지196) 않음이 없는 격이겠지요. 그러나 연소한 후학은 젖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심정이니 그리움을 어찌 하리오?"라고 하였다. 또 고유문(告侑文)에 말하기를 "오호라, 슬픕니다! 우리 선자(先子)께서 끊어진 학문을 앞장서 밝히고 생도들은 남녘을 기울였는데 차례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소견과 지식이 후세에 전할 만한 사람은 공과 노백 징사(老柏徵士)197)로서 영남과 호남에서 마주 서서 우뚝하게 지주(砥柱)198)가 되었습니다. 비록 유풍(儒風)이 퇴락한 오늘날에도 믿고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기둥을 지탱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하늘은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작년에 대형(大兄)을 곡했고 금년에는 노백헌(老柏軒)을 곡했으니 후생 학자들은 누구를 따라서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누구를 따라 선생의 도를 들을까요? 옛날 양정(兩鄭, 정의림과 정재규)이 기이하게 만났고, 또 문하(門下)에서 기이하게 만났으니 먼저 떠난 대곡(大谷, 김석귀)이 또한 그 일을 곁에서 기록했습니다.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의 심오한 뜻을 세 사람이 같이 모시고 같이 들었었지요."라고 하였다. 애산(艾山) 선생이 위장(慰狀)을 보내 말하기를 "운명이 진사(辰巳)199)에 닥쳐 존사문(尊師門)의 일신(日新) 선생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오호라! 재규(載圭)는 청년 때에 교분을 맺었는데 하나를 알면 반절만 이해하여 매번 뒷전200)이 되었는데, 죽는 한 가지 일까지도 나를 뒤처지게 하십니까?201) 지금 나라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음도 슬퍼할 일이 아니지만, 슬퍼하는 것은 뒤에 죽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고유문에 "망우(亡友) 일신(日新) 선생 정형(鄭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달에야 비로소 실제 부음(訃音)을 받들었습니다. 신위를 만들어 한바탕 통곡을 하고 사람을 대신 보내 제문을 지어 곡하며 영결합니다. 오호라! 형은 지금 끝났구나, 나를 어찌 하리오? 나야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만 선사(先師)의 도를 어찌 하리오? 우리 선사께서 미처 전해지지 않았던 학문을 창도하여 이미 추락해버린 전통을 이었고, 이(理)를 주로 하여 기(氣)를 제어했으며, 성학(聖學)을 호위하여 이단을 배척했고, 고인(古人)에게 질정하여 후인(後人)을 기다리며, 우리 도의 중흥의 운에 부응하고 백성이 한 번 다스려지는 시기를 열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70제자가 죽기도 전에 대의가 크게 어그러지고,202) 맹자가 죽자 그 전수하는 것도 사라진 것은 어찌 계술(繼述)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형의 평생 근심이었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맡기고 홀연히 떠나십니까?"라고 하였다. 오호라! 선생은 세상을 경영하고 시대에 쓰일 도(道)를 품었으나 상응하는 예우203)가 이르지 않아서 끝내 쓰이지 못했다. 선생의 입장에서는 평소 이를 서운해 하지 않았고 번민도 없었으나204) 후학의 입장에서는 어찌 사도(師道)가 흥기하지 못하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 도덕과 문장과 언행 가운데 사업과 이력과 견문 사이에 드러난 것을 감히 말하건대 만분의 일은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 홀로 깨달은 그 진수(眞髓)로서 지극이 정밀하고 지극히 오묘하여 내면에 거두어 품으셨던 것들은 감히 만분의 일도 기술하지 못하였다. 오호라! 백세가 뒤에 있으니 덕을 아는 군자가 있다면 이것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서 거두어 품으셨던 진면목을 강론하기 바라노라.-선생의 맏손자 헌규(憲圭)와 종질 상덕(尙悳)이 치암(恥庵)205)과 홍승완(洪承渙)206)군과 함께 선생의 덕행과 행실이 오래되어 사라질까 두려워하여 준기(準基)에게 미루며 말하기를 "사문에 일찍 올랐으니 이미 직접 행동과 법도를 보았고 또한 도덕의 광휘에 친히 가르침까지 받았으니, 의당 사실을 모으고 선양하여 후세에 보여야 하는 것이 급한 책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준기(準基)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위와 같이 찬술하였다.-문인 밀성(密城) 박준기(朴準基)가 삼가 쓰다. 伏維我先師日新齋光山鄭先生。以憲宗乙巳十一月七日甲子。生于竹樹之大德洞寓第。于時母夫人朴氏夢有老人入室曰。我奎星精云。故乳下名命以鍾奎。【一云月入懷中。】蓋其生也。月星降精。河嶽鍾靈。傑然姿質。粹然容像。厥初善端。淳眞藹見。五歲隣翁嬉曰。汝喫肉否。先生點頭。進其餘而饋翁。六歲掬園果。取劣而讓美。七歲見飢困人。引而餽食之。八歲出外。遇驟雨。步趨不疾遄。【先生考通政公嘗傳言。】九歲上學讀孝經。體疑神定。恒合眼默坐。敏於曉解。恭於師長。淨於灑掃。側長老聞華夷尊攘之義。輒對曰一身上美惡。亦華夷之分。尊攘必可嚴。長老驚曰雖老宿。不得說到。【塾師安公枋嘗稱傳。】在齠齔沖齡。屹然如大人氣像。十歲詣明村黃處士。【紀顯】授小學。困於滯祟而還。十三歲就觀水齋朴先生。【永柱】授讀四書。不期年涉獵融貫。十四歲加弁。秋自鄕科還。獻針具於母夫人。夫人呵責曰。此物非士子所關。卽却之。深感慈訓諷諭之嚴。益刻苦讀書。十七歲取靜入山寺。講解詩書易。二十歲陪通政公。赴漢城試。見都下士夫例以曳裾要路。而靦不知愧。心切恥之。遂絶意場屋。灑然有超趠千古之心。詣驪州。謁世安堂金函丈。【炳駿】講聞經義而退。回扶餘。謁族大父石塘先生。【龜錫】此丈明於經學。博於史學。講服聞爲己爲人。尊王黜伯之分。與治亂汚隆。興亡盛衰之由。胸襟自以開廓。知覺自以遠覽。石塘見其才性之聰慧。學術之純正。操履之堅確。乃自負心喜曰。零替吾鄭。將大名於來世。因深託以先世事門戶計。將歸。書贈日新齋三字符。申言曰。我非敎汝之人。且聞同省有蘆沙奇先生。其道學文章。不由師承。直溯洙泗洛閩之源。士生斯世。依歸有所。汝往師焉。二十四歲戊辰。奉書摯。趨謁蘆沙先生於珍原沙上。先生受禮摯。正面熟視喜形于色曰。沙彌來叩病僧扉。眉目通明可學機。吾於季方亦云爾。且謙讓曰。後學之所以入道正門。滂沛明白。無如朱書。而四子六經訓詁註釋。總子朱子精力注會處也。歸而求之。綽有餘師。何可費枉於老醜之門。因敎諭諄諄。竭其兩端。一言一語。無非自本源上滴滴流出來。如大廈千萬間。貯藏許多金帛。隨人所求而酬用不竭。於是充然如有所得。乃自語曰。天德王道。良貴至寶。眞在此矣。不生洛閩。不得親承程朱。幸生東方。親承蘆沙。蘆沙卽洛閩之程朱。且奮然勵志曰。以前千古後千古。一生不再之身。胡不親承其宗旨而來。乃淨掃墨谷家塾。大書涵養須用敬。進學則在致知兩句。與日新齋三字於座右。與從父弟九溪公。【昌林】連案同硏。半日讀書。半日靜坐。刊落前日口耳之繁。洗滌世儒糠粃之汚。用工先自大學爲始。讀之至於千遍而不已。常謂一部書。而格致誠正之工。修齊治平之效。本末詳具。條理分明。學者舍此。無所以定其規模。本之以章句。參之以或問。究之於講義。凡可以解釋其旨義者。無所不用其極。而一以敬爲主。且言敬者。聖學之所以成始成終。而主一無適。整齊嚴肅。常若對越。則涵養本源。開發聰明。在此一字。至於論語之本根。孟子之發越。中庸之微妙。無不以子朱子爲師法而講明之。於詩究性情邪正之分。盡優游涵泳之趣。於書審危微精一之際。考政事治亂之原。於易熟讀正文。而參互考證於程朱之傳與本義。以玩其吉凶消長進退變易之妙。且觀其象爻。而著決之於春秋三傳。詳玩熟味。以審其褒貶賞罰操縱予奪之王法。而尤邃於胡傳。以胡則主於義理故也。於周禮禮記。深究天理節文。人事儀則。而猶病其支離汗漫。難會得本領矣。百家諸書。無不隨遇眼閱。而若無關於道。不涉於理。則無甚注意而經心焉。五書五經。常循環精輪。屢焚膏繼咎。而至於妙契心會處。則俺卷瞑目。潛潛寂寂。若入定之僧。自天人性命蘊奧微玄。陰陽二氣對待流行。一理渾然中萬殊燦然者。以至天敍天秩。天命天討。禮樂刑政。冠婚喪祭。蠶絲牛毛。毫忽微纖。無不覈究精硏。然不敢信己。而每質正師門。然後始信其眞得及。老先生嘗答曰。別紙幾條。無非名理肯綮。自顧昏翳如此。安能與之上下其論。又曰。聞比來做別樣活計。自是太上法門。勿忘勿助。鳶飛魚躍。正好此處得滋味。勉之勉之。其見重於師門。類如是。嘗夢著一句詩曰。江山古態春猶在。日月新精雨更晴。蓋畵朕其一生性分之溫確。學術之純潔矣。同門有大谷金先生【錫龜】艾山鄭先生【載圭】而最相善。蓋志尙相同。聞道亦同。其侃誾切偲。該洽歡悅。三人合作一人身之詩。信不虛也。嘗乙亥冬。進沙上。艾山先三日至。丙子夏進珍原。艾山又先三日至。漫漫半千里。初無一言之約。然不先不後。至一至再。如桴鼓影響。其氣類相感應而然。老先生顧謂大谷曰。二君姓氏相同。年紀相近。材性相似。至於所居地名亦不異。此是曠世奇絶事。盍各記諸。各相記之。蓋四同說奇遇錄是也。仍有詩曰。堪愧四同說。最奇再遇緣。先生命以記。此意正淵淵。一日老先生出凉議猥筆。示三君子。此固千古聖賢宗傳秘旨。而惟老先生獨唱自和。洞見本源。太極主宰之妙。理帥氣役之分。理分相涵之微。萬一圓融之旨。柝以辨之。會以統之。屢言反復。蓋老先生之眞詮耳。一貫之旨。惟曾子聞之。太極之妙。只兩程傳之。論者以三君子謂考亭之蔡黃焉。日侍坐。適座閑夜靜。微禀曰。當今輔弼致澤之任。誰可其人歟。老先生曰。景範是也。又曰。厚允與季方其亞矣云。乃暗合於聖門諸子問爲邦與從政之微旨。又周呈辭三遞。固却茂長之職。其大義可得聞歟。曰子知愼言乎。遂細論士君子出處義理。與時象不然之密議。可驗得老先生於先生吾無隱乎爾也。德望聲譽。藹菀絅章。一世章掖。摠願識荊。道伯邑宰。每致禮勤。韓倭致肇南侯學熙。請以公事。設講禮飮禮。尊以賓師位。乃於樽勺俎豆。升降拜揖。燦然無遲疑迍邅之態。講辨論難。答問酬應。明白無依違晦塞之端。咸稱之以一代盛擧。百世師表。兩侯喟然曰。不知南荒遐隅。鍾此間氣。雅賢若近於輦轂。則南臺淸職卽是人也。每厚饋饌肉。以通政公在堂故也。通政公曰。民而受土主所饋。無乃過濫乎。因與隣友。共享其榮貴焉。己卯遭樑摧之痛。奔門痛哭。如喪考妣。白巾環絰。禮月襄奉。與大谷艾山居相禮位。推本制作之原。參酌損益之宜。定爲儀節以行之。致殷奠告侑。文曰。三代群聖之後。孔子作。濂洛群哲之後。朱子出。東方群儒之後。先生生。蓋天生一人於蔚興輩出之餘。使折衷集成。爲斯文萬世計者也。先生膺運河瀆。鍾靈山嶽。五百年至大至剛之氣。千萬古惟精惟一之學。儼口若壁立千仞。蕩蕩若海涵萬斛。仁如春生。義如秋肅。良金精玉。粹然無彫琢之痕。光風霽月。灑然有出塵之標。先生出於東西南北之外。而坐於道德仁義之源。洞見昭晣談笑麾之。如百川狂瀾。得其道而浩然東注也云。如非於老先生之道。眞見得實體驗來。安能乃爾直截痛快也。練祥禫吉。盡誠具儀而參。只寓江漢思慕。於行義言範。在世炳然如日星者。而若將終身焉。壬午丁通政公喪。攀號不偯。頓絶方蘇。不脫絰帶。不離喪次。奠哭受吊之暇。輒對案講喪祭禮。饘粥而疏食。疏食而菜果。菜果而醴酒。則俯從聖王除降之義。而終身至痛。則心恒存之。曾於內難也亦如之。不恒厥居。自大德至于品村墨谷。星洞佳山。屢度遷徙。而環堵蕭然。少不介懷。而雖千駟萬鍾。如非其義則不顧。而不忘在溝壑之志焉。嘗曰。顔氏豈塊然對案終日而屢空不憂耶。處貧之道。隨吾分盡力。盡力後我將何焉。但泰然矣。此自道先生之言也。以言乎居家。則外內整肅。雍睦和悅。待宗族。則只敦恩誼而不較爾我。祭先之日。不御酒肉。不味葷薑。不近烟具。散致齊戒。如見其所爲齊者焉。吉月晨興。盥櫛冠服。瞻謁祠龕。退坐書室。整頓几案。端居靜黙。如有所思焉。其坐也加趺圓拱。肩背竦直。儼口若泰嶽之矗立。其寖也齊兩手斂一膝。屛氣正臥。寂寂若龜龍之蟄潛。言語也不躁妄不疾厲。溫溫若春風之和暖。行步也體直武闊。安詳徐緩。翼如也襜如也。其飮食也羹飯行列有正位。匙箸擧措不頻緩。珍羞藜藿不揀取。而常激昻於咬菜做事底意。性愛酒。於知舊相迎詩韻唱和之地。盃勺無量。只醺洽而止。以言乎接人。則敬以待之。和氣融融。親熟者悅服。疏遠者欽慕。暴悍者畏敬。傲慢者恭謹焉。春暄秋凉。周訪知舊。雖年下最少。無一漏戞。而於問喪賀慶。尤勤恪身進。若甚故闕如。則以書替行。每於佳麗山水。閒曠亭榭。輒寓情瀉懷。而九峰深邃。五峰奇絶。天台幽僻。行藏乎屢年。碧山霽月。雙山淸風。七松淸景。杖屨乎殆遍。執經講學之士。信從思服。以致黌舍之不容。然不以師道自居。只以講磨謙之。諄複誘掖。琢磨淬勵。其於讀書也。必使之靜坐而涵養本源。游泳開發沈潛反復。字求字義。句求句義。合句成章。又求章義。毋欲速。毋貪多。不得不措。而一一反之於身。使經傳之旨不爲空言。惓惓娓娓。嚴立課程。慮其偏僻。則使之以圓闊疏通。憂其隘陋。則導之以展拓胸襟。開廣地步。憫其難進。則誘之以淵然深思。曠然遠覽。知其才敏。則戒以守鈍。病其務博。則勉以刊落。或進之或退之。因其材而篤之。隨其病而藥之。常曰。學問本領。惟在乎志。志一氣隨。則天下無難能。而鬼神其將通之。曰學問以立志爲先。然全不識輕重取舍之分。則立箇甚志。學問以主敬爲本。然全不識操舍存亡之幾。則主箇甚敬。學問以力行爲重。然全不識邪正善惡之別。則力行箇甚。此格物致知。所以爲大學之始條理也。曰存久自明。曰思之又思。思又不得。則神明來告。曰窮格而得其眞。則心神灑然。不得其眞。則心神勞苦。曰學者以忠信爲主本。曰讀書當謹守本文而窮格。毋以橫竪而鑿空。曰窮格之工。不在乎他。惟誠勤是耳。曰窮格而無踐履。則只畵脂鏤氷。行之貴勇字符。曰眞實擔當。奮迅激勵。有聳千萬人底精神氣力。曰須就日用切近心術隱微處。次第窮格得至善恰好處。追感奇遇錄。乃曰。孔門諸子。得天下之大聖以爲師。得天下之大賢以爲友。問之於師而講之於友。講之於友而質之於師。行行侃侃之儀。切切偲偲之樂。想像千載之下。不覺感歎而興起也。雖不得唐虞之君與臯虁稷契之徒。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以孟氏所謂王天下不與三樂之義推之。則寧可遺於彼而不可失於此久矣。余與景範厚允。遇於師門。自太極性命之微。至三百三千之多。無不各陳所聞。各道所見。而講之質之。得一世之大賢以爲師。得一世之大儒以爲友。薰蒸涵洽。親見洙泗盛儀於千古已遠之日。此不惟爲此生難再之遇。而實千百世絶無僅有之事也云。著太極說示同志曰。太極是天地之宗祖。造化之主宰。萬彙之根柢。天下古今人事之準則也。至微至妙。而不離乎日用之常。至近至切而實原乎天命之嚴。世之治亂。人之賢否。俗之汚隆。事之成壞。只在乎此箇道理明不明如何耳。是以聖賢作之經述之傳。以至千言萬語娓娓不已者。無非明此理而使人人得以見之。嗚呼。聖遠言堙。世敎不明。或以太極爲帶氣之物。或以五性爲因氣而有。或以明德爲形而下。或以萬殊爲氣分而以達道爲氣發。如此則性情體用。始終本末。無非氣爲之主。而所謂太極主宰者。果安在哉。但道理是無形之妙也。須從容沈索。積久存養。乃可以見之云。乙酉。士林發薦剡登徹之議。先生聞之。謙讓諭衆曰。賢如雕開。而猶云吾斯之未能信也矣。則況下於雕開。而豈有能信於斯矣之理乎。固挽而寢之。丁亥。偕同志上瑞石。風詠唱酬。殆有沂雩之趣。文生頌奎曰。此遊可名之以詠歸。與頌奎論性理。無慮多言。稱其所言妙不以妙處求。卽卑卽粗而妙無不在。曰此眞見理之言。戊子斯人也歿。設位而哭。操文而慰曰。啓元其將棄我而先耶。哭之慟。遂收集遺默。極精校勘。親自序之曰。好觀河洛理數天文物象。末段曰。此蘇長公所以校定樂全先生文集之義。而其情抑又有甚焉者云。凡把筆著書。辭氣平淡。筆法楷正。布帛其文。菽粟其味。而於闡揚幽微。尤極懇到記實。世稱道以信筆也。己丑著大谷傳曰。程朱世遠。議論多門。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者。惟我老先生其人也。然先生之門。若未有公。則其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不其幾於懷之卷之而無可告語耶。可謂千載奇遇。曠世神會也。觀其平生。無少少出脚可以指讓。而超然遐擧。終始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幷臻。而天德王道。有體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起敬。恰然自服者何人云。蓋先生與大谷艾山。一而三。三而一。同受眞傳。偉然爲儒門之表。率其所以傳大谷者。適所以自傳也。嘗隨手誌錄。總數百餘言。而曰陰陽之對待者。是交易也。流行者。是變易也。周子太極圖說。是主流行變易而言。然變易之氣。便是對待交易之氣。曰程子曰。性中只有箇仁義禮智。曷嘗有孝弟來。據此。似若性中無孝弟。然四者裏面。細條理都包在了。如五行言木則松柏櫲樟。都包在裏面。言水則江淮河漢。都包在裏面。曰程子曰。滿腔子是惻隱之心。於此見天地萬物一體。最爲的實。若去腔子外尋覓。浩浩茫茫無交涉云。夫私欲淨盡。生理渾全。則其未發也。與天地同體。其已發也。與天地同流。所謂公則一。所謂靜中觀萬物。皆有春意者亦此意。曰太極不是一箇可見之物。在天爲萬物之總名。在人爲萬善之統體。曰陰陽兩端。雖極萬變。而莫非生理之周流。人生日用。雖耒耟陶冶甲兵簿書之類。莫非生理所須之具。曰不知命。無以爲君子。此命字。指氣數而言也。人生一循天理。無犯人爲。凡吉凶榮辱之來。無一毫自取而後。可諉於命。知此則見利不趨。見害不避。惟知有義理而已。豈不爲君子乎。曰游氣何氣也。以天地陰陽之氣爲主。則萬物爲游氣。以萬物當體之氣爲主。則陰陽爲游氣。曰閑邪則誠自存。不是閑邪之外別有存誠也。克己復禮亦然。但遷善改過。自是二事。蓋發於心者。則天理人欲二途而已。非天理便是人欲。非人欲便是天理。無兩相對峙故也。應於事者。則有善底有過底。有萬不同也。曰人欲之害。大槪有三。一則氣質之偏也。二則耳目之蔽也。三則物我之形也。柔懦昏濁暴戾剛輕者。氣質之偏也。貪嗇浸淫經營汨沒者。耳目之蔽也。忌克殘忍虛驕羞縮者。物我之形也。三者輾轉因仍。相助益深。然氣質之偏爲其本領。故古人以變化氣質言之。曰意有所褊隘。則以廣大底意思克之。有所虛僞。則以眞實底意思克之。有所怠散。則以嚴疑底意思克之。有所邪曲。則以正直底意思克之。日日如此。使爲善之力。足以勝彼然後。可以有進。曰一本固天命之全體。而萬殊是天命之流行也。然則萬殊果是因氣而有者哉。曰向看太極圖說動極而靜。靜極復動之語。竊疑此是流行一邊說。而非對待之體。追後思之。動而靜而者。是流行之用。邵子所謂用起天地先者也。生陽生陰者。是對待之體。邵子所謂體立天地後者也。但一動一靜之用。起於天地之先。而行於天地之後。非分陰分陽之後別生一箇流行之氣也。是故。曰靜極復動也。曰此身非我私物。凡身之視聽行步。喫着語默莫非天機。纔着一毫私意。不是天則。曰仁者合下天然自有之物。不爲天地萬物一體而有也。然纔有生生至愛之理。則便是天地萬物自然一體。如一箇種子。只有生生之理。所以千枝萬葉之理。自然完具。此其仁故一體也。若以施用處說。則亦可謂一體故仁也。有生生之理。故有父子之分。而且父子一體也。故有慈孝之道。昔年與啓元論此義。頗費往復。不無小小歸宿。曰先就日用事物上。窮索得仁義禮智。見眼前至近天理流行然后。方有據守處。若只向高妙處。說性說理。都無着摸。曰一身太極之象。形氣陰陽之象。氣血骨肉。五行之象。百骸萬竅。萬物之象。曰無懸空之理。故亦不曾別有統體之太極。只是在陽爲一太極在陰爲一太極。在五行亦各一太極。在萬物亦各一太極。合陰陽五行萬物。爲統體之太極。然統體之太極。不多於各具之太極。各具之太極。不少於統體之太極。是各具中。自有所謂統體者。曰天於萬物。非物物刻而雕之也。亦非汗漫不關聽其自爾也。天地萬物。只是一體。更無分別。如人之一身四體。生理周流。無不相管。準基說許多條理。安能常常記念。應事時。又安能着意安排。比如明鏡照。物不成萬像常在鑑中。但洗磨塵垢。使淸明通徹。則物雖不至。而不可謂萬像不涵於此。未知何如。先生曰。此說固好。但磨鏡之方。不向格致踐履上用功。而若只撑眉努眼。向壁觀心。則必人空寂寂地去矣。曰朱子曰。以正配中。則中爲重。以義配仁。則義爲本云云。以周子主靜之說觀之。似以正義爲主。而朱子之言如是何耶。蓋陰陽互爲其根者。是仁義互爲其體故也。以正義爲本。則中仁爲用。以中仁爲體。則正義爲用。曰性卽太極也。太極是陰陽動靜本然之妙也。然獨以未發爲性何也。曰未發非性也。但具於未發者是性也。未發則氣不用事。而道義全具。故謂之性。曰一本以理言。大本以心言。故各具中謂有一本則可。謂有大本則不可。曰人根於太虛陰陽之氣。如魚根於水。水根於土。其動息呼吸。未嘗須臾間斷云云。庚寅慰艾山先生於嶺右三嘉之免洞。準基寬鎬承渙陪行抵免洞喪次。兩丈相向俯伏哭。良久。微敍慰唁。半千里心反之遇。只設菜果。而無臑酒炙鼇之具。可見賢人君子。以禮自處以禮處人之道矣。設講於雷龍亭。【南冥先生所刱建。而艾山因址重建。】先生居講師位。會參應講之士。至數百員。相語於外曰。義理之明白言論之正大。難元季於艾翁。而繩尺之直。威儀之嚴。猶加焉。留旬餘。講辨類編奧意。別來。艾山不下堂。只俯伏而餞。以哀疚在躬而然。到晉州月橫里。考閱月皐趙先生【性家】所述老先生行狀。入山泉齋。【南冥先生講學所】奉審孔周程朱四聖賢遺像。瞻仰方丈第一峰。而出向咸陽。意奉審一蠹先生於藍溪。而路迂未果。浮蟾津而還。夏四月著類編跋曰。先賢有作。不先天而開人。亦因時而立敎。是以風氣開而書契造。大機散而六經作。世敎衰而四子著。聖遠言湮。洛建群哲之書出。生於洛建之後。惟宜講守其說。而何義理晦塞。議論橫決。未有甚於此時。此類編之書所以出也。辛卯又約艾山於鍾山蕭寺。鄭月波【時林】崔溪南【琡民】鄭農山【冕圭】亦竝駕來參。各脚下陪從之士。亦甚衆。設講請益。三四君子。折衷答問。上自先王典禮。以至爲學節度。靡不說到。頗有興國鵝湖之樂。而有鍾山議錄。因以爲一年一遇之約矣。世亂未諧。士林恨之。壬辰倡動士林。建亭榭于七松里題以詠歸。蓋本於遊瑞石餘意。奉五聖四賢遺眞。春秋舍菜。因行禮聖儀。見禮儀。旅酬禮。相揖禮。且講冠婚喪祭以及變禮。疑禮且聽講後學生徒。諄複勸勉。雖詞垣老宿。多刱見儀節。感服欽賞。濡染成習。庶回三代遺風矣。記曰。士生斯世。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學問之道。非師友不可。所以親師友而道學問者。亦不可以無其所。庠序學校。固明倫立敎之地。而三代以降。導率不古。此書院所由起也。然書院之規。又不如古。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甲午東擾跳梁。詠亭爲渠輩所據。謂安松下【國禎】曰。堂堂吾奉聖講學之所。爲彼幺麽所汚染耶。相痛哭。携手逃亂於永平等地。乙未三月。率諸生詣詠亭。灑滌氛穢。將行釋菜禮。告由先聖先師曰。運値陽九。邪說間熾。斯文在厄。吾道將墜。王師臨境。天討維揚。頑陰霍除。微陽回光。灑掃黌庭。衣冠振振。絃誦復尋。樽俎式陳。將以擧儀。事體鄭重。設位載香。敬告微衷。又與一鄕多士。行鄕約于文廟。告由曰。世衰道微。邪說交作。生靈塗炭。州里蠻貊。天怒斯爀。我武維揚。雲捲霧散。會朝淸明。聖朝懲毖。賢伯旬宣。規倣白鹿。約遵藍田。知州承勗。多士奔聽。灑掃庠宇。肅淸黌庭。吉蠲齊肅。將擧講儀。先師祗謁。敢告顚委。八月剃矯之急也。矢柏舟靡他之志。厲澤水不懼之氣。而徵召一方人士。作誓曰。我東方苟有一分人心者。孰不有共天之羞。況今四海淨髮。獨靑邱一片。得保撮髻。此髻若亡。則萬世否泰消息絶矣。丙申松沙先生以討復擧義發檄綾城。先生答曰。瓦而全。不若玉而碎。魚之欲。曷若熊之美。時松沙駐陣錦城館。先生匹馬往會。與論方略而歸。猶屢書相勉。及移陣光山館。先生與多少志士。往于光山爲死生計。聞宣諭。罷兵而止。丁酉哭胤子尙默。逆慘心燬。謂復何如。而乃遺理寬抑。外若坦然。爲繼禰宗而服斬。其達觀不憂。卽東門之賢歟。戊戌約同志設月講。各誦一卷書。解經講義。竟日不倦。其好學之誠。至老彌篤。壬寅刊老先生文集於新安社。往與艾山同視校勘。勉庵崔先生【益鉉】亦來參。時有嶺人權鳳熙崔東敏輩。承望時儒風旨。謂凉議猥筆。犯斥先賢。相與紛紜。先生曰。彼雖欲自絶。何損於日月之明。而頭戴先賢。眩惑後學。不無其害。不可以不辨。乃曰。先師於栗翁。篤信而尊慕。考諸文集可見。但於陰陽動靜。其機自爾。非有使之一段語。有所未契而每欲活看以流行一邊矣。及見世儒執此一段。爲主氣之證案。推原辨之。謂發之太快。而其曰。詖淫邪遁顚倒揖披。所以明後人之獘也。乃通古于嶺中章甫曰。溫公疑孟。而其子康勸講於經筵。劉元城其門人。而嗜如膾炙。伊川改定明道大學編次。南軒辨五峰差處。勉齋或有違於考亭定說。朱子謂周子似黃老。謂程子有黃老流風。謂張子近釋氏。又謂正蒙多差處。此亦可以誣毁其父。誣毁其兄。誣毁其師。誣毁其前賢。律之乎。若以此爲誣毁栗谷。則朱子之本義。爲誣毁程子。晦齋之補遺。爲誣毁朱子耶。栗谷於性情四七之辨。亦何不一從退溪之說乎。前賢之偶失照管。後賢辨而明之。乃十分尊慕之道。此豈權崔輩之所知乎。又聞有時儒若而人。從權崔之餘論。駁爲條辨。先生遂逐條辨明。而全文載於原集。其末段曰。近世主氣之論不一。有以太極爲無分之一。有以五性爲帶氣之物。有以明德爲刑而下。言一本萬殊。則萬殊爲氣。言大本達道。則達道爲氣。陰陽五行謂非本然。人物偏全謂非定分。主宰妙用。條理段落。一歸重於氣。氣奪理位。則臣奪君。子奪父。妻奪夫。小人奪君子。夷狄奪華夏。亦一例事。先師爲是之懼。發揮剔決。次第折衷。而一邊之論。猶斷斷。多見其不知量也。乙巳卽先生回甲之年也。晬日門下諸生。執觶獻壽。至無慮多員。先生詩之曰前乙巳年赤子身。後乙巳年白髮人。白髮重生如赤子。升堂獨不見吾親。蓋感其劬勞之意也。伊時國勢之岌嶪。尙忍言耶。聞賊臣賣國。勒成五條。憂忿草疏。旣成。聞儒疏不納。慨然焚稿。追聞勉庵艾山兩丈。約會闕里房擧義之計曰。吾事有託矣。居無何。闕約亦沮。拍案而嘆之。一日口占曰。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又曰。自古喪邦孰若今。天飜地覆日星沈。惟有杜門自靖計。西山東海不須尋。顧謂門弟子曰。此吾立命之地云。己酉門弟子。私寫出眞像。後覺之索之。書其上曰。爾形可憎。爾生可惻。宜爾置之。蠹魚之側。自後掩戶塞竇。衣吾衣。存吾髮。守吾道爲自靖計焉。庚戌聞無邦之報。憂忿成疾。諸生問疾而來。强病扶坐曰。君輩能不忘吾平日勸勉讀書之言乎。碩果消息。不由吾黨。而將委諸何人。十月十日癸酉。着淨衣。加緇冠。正臥席。考終于佳川之寓舍。門人白巾環絰奠誄侑文。陵續盈喪次。松沙先生致慰狀曰。先人及門生徒。次第徂謝。巋然如靈光者。惟斯文而已。老患苦劇。前此聞之。含蓼一問。情不可已。而顧此同病。足不逾閾。殆數朔。日夜之祝。惟幸勿藥遄和。以扶將喪之斯文。庶待昭明之日。徐議進退。而天所不祐。其奈斯何。見今滄桑。無地可居。浩然觀化。未始非於魚得計。而年少後學失乳之情。介介奈何。又告侑文曰。嗚呼哀哉。吾先子倡明絶學。生徒傾南服。次第徂謝。其見而知之。可傳於後世者。公與老柏徵士。嶺湖對峙。屹然爲砥桂。雖儒風頹弛如今日。而所恃而無恐者。惟撑柱有人耳。何天欲喪斯文。去年哭大兄。今年哭老柏。後生學者。誰從而講先生之學。誰從而聞先生之道。昔年奇遇之兩鄭。又且奇遇於脚下。先逝之大谷子。又能在傍記其事。凉議猥筆之奧。三子同侍而同聞耶云。艾山先生致慰狀曰。運迫辰巳。尊師門日新先生。竟至於斯。嗚呼。載也靑年定交。一知半解。每每爲沙礫。至於返眞一事。亦使我後耶。到今萬分地頭。死非所哀。可哀者後死耳。又告侑文曰。亡友日新先生鄭兄。旣歿之翌月。始承實音。爲位一慟。替人操文哭訣。嗚呼。兄今已矣。奈我何。我何足道。奈先師之道何哉。我先師倡不傳之學。紹已墜之緖。主理而御氣。閑聖而闢異。質諸古而俟諸後。可以膺吾道中與之運。啓生民一治之期矣。雖然七十子未喪。而大義已乖。孟氏之沒。其傳泯焉者。庸非嗣述之無其人耶。此吾兄終身之憂。而屬之阿誰。遽然而逝耶云爾。嗚呼。先生抱經世需時之道。而善價不至。終不試用。在先生則素不慍無悶。而在後學則安得無師道不興之歎歟。其道德也文章也言行也。著於事業履歷見聞之間者。則敢曰敍述其萬一。而若其獨覺其眞。至精至妙。卷而懷之者。則無敢以名狀得萬分之一耳。嗚呼。百世在後。有知德君子者。庶因此而溯。講得卷懷底眞面也矣。【先生冢孫憲圭從姪尙愼與恥庵漢君承渙。懼先生之德行操履。久而泯晦。推於準基曰。早登師門。旣親見動作規矩。且薰炙於道德光輝。則宜捃摭揄揚以示來世。非所急之責耶。準基不獲辭。謹纂述如右。】門人密城朴準基謹識 죽수(竹樹) 능주(綾州)의 옛 이름으로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이다. 체수(滯祟) 먹은 음식(飮食)이 잘 삭지 않아 생기는 병의 빌미를 말한다. 한성시(漢城試) 문과(文科)와 생진과(生進科)의 초시(初試)로서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던 시험이다. 요로(要路)에서 드나들면서도 '예거(曳裾)'는 옷자락을 끈다는 뜻으로, 권세가의 집에 출입하여 출세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추양전(鄒陽傳)〉에 "고루한 마음을 꾸미려고만 들었다면, 어느 왕의 문에서인들 나의 긴 옷자락을 끌고 다닐 수 없었겠는가?〔飾固陋之心, 則何王之門, 不可曳長裾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과거(科擧) 원문의 '장옥(場屋)'으로 과거(科擧) 시험장인데 여기서는 과거의 뜻으로 쓰였다. 함장(函丈) 스승의 강석(講席)을 칭하는 말로 여기서는 스승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만일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청한 손이 아니거든, 자리를 펼 때에 자리와 자리의 사이를 한 길 정도가 되게 한다.〔若非飮食之客, 布席, 席間函丈.〕"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이에 상대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말한다. 위기지학은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위인지학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하는 공부를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존왕(尊王)과 출패(黜伯)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覇道)를 내치는 것이다. 덕(德)으로 다스리는 것이 '왕도'이고,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패도이다. 맹자가 왕도와 패도정치를 비교하면서 "힘으로 인(仁)의 명분을 빌리는 것은 패자(覇者)이니 패자는 반드시 큰 나라를 소유해야 하고, 덕(德)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자(王者)이니 왕자는 나라가 클 필요가 없다.〔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삼자부(三字符) 좌우명 또는 자신이 지키는 학문의 요결을 말한다. 주자가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에게 성인의 도(道)로 들어가는 차례를 묻자, 병산은 "나는 《주역》에서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았으니 이른바 '불원복(不遠復)'이 바로 나의 삼자부이다." 하였다. 《心經 卷1 不遠復章》 수사낙민(洙泗洛閩) '수사'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나라에 있었던 두 물의 이름인데,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낙민'은 낙양(洛陽)과 민중(閩中)으로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낙양에, 회암(晦庵) 주희(朱熹)는 민중에 살았으므로 곧 공맹(孔孟)과 정주(程朱)를 총칭한 것이다. 자주자(子朱子) 주자(朱子)를 말한다. 앞에 '자(子)'를 붙인 것은 후학(後學)이 높이는 칭호이다. 남은 스승 원문의 '여사(餘師)'로 배울 만한 스승이나 본받을 만한 곳이 많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주자의 책이 스승이 되어줄 것이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그대가 돌아가 찾기만 한다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子歸而求之, 有餘師.〕"라고 하였다. 양단(兩端)을 다 들어주는데〔竭其兩端〕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지만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물을 경우, 그가 아무리 무지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양쪽을 들어서 다 말해 준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하였다. 양귀(良貴) 참으로 귀한 것으로, 본래 간직하고 있는 덕성과 덕행을 이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니,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人之所貴者, 非良貴也, 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라고 하였다. 낙민(洛閩) 낙(洛)은 낙양(洛陽)으로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민(閩)은 민중(閩中)으로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정주(程朱)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및 주희(朱熹)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구이지학(口耳之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격치성정(格致誠正) 《대학(大學)》의 이른바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말한다 수제치평(修齊治平) 《대학(大學)》의 이른바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장구(章句)에……강의(講義)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짓고 해설을 붙인 《대학장구(大學章句)》ㆍ《대학혹문(大學或問)》ㆍ《대학강의(大學講義)》를 말한다. 경(敬)이라는……정제엄숙(整齊嚴肅) 주희(朱熹)의 《대학혹문(大學或問)》에, "경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의 처음과 끝이다.……그렇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 정자는 이에 대해서 일찍이 '주일무적'으로 말하였고, 또 일찍이 '정제엄숙'으로 말하였다.〔敬之一字,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者也……程子於此嘗以主一無適言之矣, 嘗以整齊嚴肅言之矣.〕" 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마음을 한 지경에 집중시켜 어느 쪽으로도 이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그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란 외모를 정돈함으로써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늘의 상제를 마주한 원문의 '대월(對越)'로, 하늘에 계신 상제를 우러러 마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시경》 〈청묘(淸廟)〉에 "하늘에 계신 분을 대하고 사당에 계신 신주를 분주히 받든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라고 하였다. 위미정일(危微精一)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이를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인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 또는 '천성상전심법(千聖相傳心法)'이라 강조한 이래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중시되었다. 《論語 堯曰》 《書經 大禹謨》 춘추삼전(春秋三傳)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관한 세 가지 주석서인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호전(胡傳) 남송(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이 지은 《춘추전(春秋傳)》 30권을 가리킨다. 종래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주장에 입각해서 해설을 하였는데, 특히 주자학자(朱子學者)들에게 중시되면서, 전부터 전해 오던 춘추삼전(春秋三傳)과 함께 춘추사전(春秋四傳)으로 일컬어졌다. 천리(天理)의 절문(節文) 예(禮)를 말한다. 천리(天理)는 자연의 법칙을 뜻하며 절문(節文)은 조절해서 표현한다는 의미로, 자연의 법칙을 인간사에 적용하여 표현한다는 뜻이다. 오서오경(五書五經) 유학의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五經)에 《소학(小學)》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등불을……이어가면서 한유의 〈진학해(進學解)〉에 부지런히 독서하고 글을 짓는 모습을 묘사하여 "등잔불을 밝혀 낮을 이어가며, 항상 부지런히 힘써 해를 마친다.〔焚膏油以繼晷, 恒兀兀以窮年.〕"라고 한 것을 인용한 표현이다. 입정(入定) 불교의 용어이다. 스님이 고요히 앉아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천인성명(天人性命)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 대대(對待) 서로 상반되는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음(陰)과 양(陽)을 대대관계(對待關係)라고 한다. 천서천질(天敍天秩)ㆍ천명천토(天命天討) 천서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순서이고, 천질은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등급이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하늘이 펼쳐서 법을 두셨으니 우리 오전(五典)을 바로잡아 다섯 가지를 후하게 하시며, 하늘이 차례지어서 예를 두셨으니 우리 오례(五禮)로부터 시작하여 다섯 가지를 떳떳하게 하소서. 군신(君臣)이 함께 공경하고 화합하여 충(衷)을 함께 이루소서. 하늘이 덕(德)이 있는 자에게 명령하시거든 다섯 가지 복식으로 다섯 가지 등급을 표창하시며, 하늘이 죄가 있는 자를 토벌하시거든 다섯 가지 형벌로 다섯 가지 등급을 써서 징계하시어 정사를 힘쓰고 힘쓰소서.〔天敍有典, 勅我五典, 五惇哉, 天秩有禮, 自我五禮, 有庸哉. 同寅協恭, 和衷哉. 天命有德, 五服五章哉, 天討有罪, 五刑五用哉, 政事, 懋哉懋哉.〕"라고 하였다. 핵심 원문의 '긍경(肯綮)'으로, 사물의 가장 긴요한 곳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소의 관절 사이에는 빈틈이 있고, 나의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그 칼을 빈틈이 있는 관절 사이에 집어넣으면, 그 공간이 넓고 넓어 칼을 놀릴 때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따라서 근육과 뼈가 엉켜 있는 핵심 부위〔肯綮〕에도 칼날이 다쳐 본 적이 없는데, 더구나 큰 뼈와 같은 것이겠는가."라는 백정의 말이 있다. 물망물조(勿忘勿助) 의리를 쌓는 데 있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쌓아 가라는 뜻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반드시 무슨 일을 하되 미리 기약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 말며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고 하였다. 연비어약(鳶飛魚躍)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인 자연 만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다. 온아(溫雅) 원문은 '溫確'인데 문맥상 '溫雅'로 고쳐 번역하였다. 강직하고 부드러우며 원문의 '간은(侃誾)'으로 간간(侃侃)하고 은은(誾誾)한 것인데,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향당(鄕黨)에 있을 때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강직하게 하고, 상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간쟁하였다.〔朝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라고 하였다.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 원문의 '절시(切偲)'로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인데, 《논어》 〈자로(子路)〉에 "붕우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며 형제간에는 화락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사상(沙上)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 있는 장성(長城)을 말한다. 기류(氣類) 지기(志氣)가 비슷한 동류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그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일(理一)과……원융(圓融)하는 이치는 하나이면서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른 것으로,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을 말한 것이다. 《性理大全 理氣 總論》 일관(一貫)의 요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일리(一理)가 만사(萬事)를 관통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우리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꿴다.〔吾道一以貫之〕"라고 일러 준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도통을 전해 주는 한마디 요결을 뜻한다. 《論語 里仁》 양정(兩程) 송(宋) 나라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周敦頤)의 제자이다. 고정(考亭)의 채황(蔡黃) '고정'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하던 곳으로 주희를 일컫는 말이다. '채황'은 그의 제자인 채침(蔡沈)과 황간(黃榦)을 말한다. 치택(致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제자(諸子)가……질문한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안연이 공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물은 것〔顔淵問爲邦〕'과, 《논어》 〈옹야(雍也)〉에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제자들이 '정치에 종사할 만 지〔可使從政〕'를 물은 내용이 있다. 그대는 신언(愼言)을 아는가 굳이 벼슬을 하지 않아도 말에 허물이 적고 행실에 후회가 적으면 녹봉이 그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벼슬해서 출세하는 방법을 묻는 자장(子張)의 질문에 대해 공자(孔子)는 "많이 듣고서 의심하는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어지고,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니,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라고 하였다. 숨기는 것이 없음을〔吾無隱乎爾〕 스승이 제자에게 숨김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드러나니 원문의 '경장(絅章)'인데 은은하게 가려진 군자(君子)의 덕이 날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둑하여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유자(儒者)들 원문의 '장액(章掖)'으로, 《예기》 〈유행(儒行)〉의 "저(공자)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冠)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선생을 알기를 원문의 '식형(識荊)'으로, 한 형주(韓荊州)를 안다는 말인데 평소 존경하는 인물을 한번 만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당(唐)나라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장사(荊州長史)로 명망이 높아서 한 형주로 일컬어졌는데,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생전에 만호후에 봉해질 필요 없고, 오직 한 번 한 형주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다.〔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는 말이 나온다. 빈사(賓師)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임금에게서 빈객과 스승의 예우를 받으며 자문에 응하거나 학문을 강하는 사람을 이른다. 간기(間氣) 세상에 드문 영걸의 기운을 뜻한다. 정의림을 비유한 것이다. 맹자가 "오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태어나는데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인물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有名世者〕"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도성(都城) 원문의 '연곡(輦轂)'으로, 임금이 타는 수레 이름으로, 여기서는 임금이 있는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남대(南臺) 조선 시대에 특히 은일(隱逸)로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사헌부의 장령(掌令), 지평(持平) 등에 천거되어 뽑힌 벼슬아치를 이른다. 고을수령 원문의 '토주(土主)'으로, 백성이 자기 고을의 수령을 이른 말이다. 스승이 돌아가시는 원문의 '양최(樑摧)'로,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말인데 스승의 죽음을 비유한다. 공자(孔子)가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를 부른 뒤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 환질(環絰) 한 가닥의 삼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삼줄로 감아 상복의 허리나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禮記 雜記》 예월(禮月)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장례하는 달을 말한다. 장례를 모셨다 원문의 '양봉(襄奉)'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에 이르기를 "정공(定公)을 장사 지내는데 비가 내려서 양사(襄事)를 하지 못하였다.〔葬定公, 雨不克襄事〕."라고 하였는데, 주에서 이르기를 "양(襄)은 성(成)이다."라고 하였다. 은전(殷奠) 큰 제사라는 뜻으로, 상례(喪禮)에서 평소에 올리는 조석전(朝夕奠)과는 달리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성대하게 올리는 전을 말한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부와 사가 빈(殯)을 한 뒤에 임금이 조문 갈 경우에는 사람을 시켜서 미리 알린다. 그러면 주인은 은전의 예를 갖추고서 대문 밖에서 기다린다.〔大夫士旣殯而君往焉, 使人戒之. 主人具殷奠之禮, 俟于門外.〕"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은(殷)은 크다는 뜻이다. 조석(朝夕)에는 소전(小奠)을 올리고 매달 초하루에는 대전(大奠)을 올린다."라고 하였다. 정현이 말한 대전은 곧 은전이다. 《禮記注疏 卷45 喪大記》 3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를 말하는데, 이 시대를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여긴다. 염락(濂洛) 염계(濂溪)에 살았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에 살았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킨다. 신유가(新儒家)를 대표하는 송유(宋儒)들을 말한다. 5백년……기운 세상에 드문 기운을 갖고 태어난 영걸(英傑)이라는 뜻으로, 맹자(孟子)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태어나는데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인물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有名世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유정유일(惟精惟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이를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인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 또는 '천성상전심법(千聖相傳心法)'이라 강조한 이래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중시되었다. 《論語 堯曰》 《書經 大禹謨》 만곡(萬斛) '곡(斛)'은 용량의 단위인데 만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것을 말한다. 맑은……깨끗하여 원문의 '광풍제월(光風霽月)로,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로, 인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비유한다. 《산곡집(山谷集)》 권1 〈염계시(濂溪詩)〉의 서(序)에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를 평하면서 "용릉(舂陵)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가슴속이 깨끗하여 마치 비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다.〔人品甚髙, 胷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하였다. 모든……것 부정한 학설을 되돌려 놓은 공로가 있음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모든 강을 막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미 거꾸로 흐르는 미친 물결을 되돌렸으니, 선생은 유학에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障百川而東之, 迴狂瀾於旣倒, 先生之於儒, 可謂有勞矣.〕"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강한(江漢) 돌아간 스승의 큰 덕을 칭송하는 말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스승의 도덕을 칭송하며 거부하기를 "안 된다.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여 더할 나위가 없으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곡소리가 이어지지도 못하여 원문의 '불의(不偯)'로, 기운이 다하여 곡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효경(孝經)》 〈상친장(喪親章)〉에, "효자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곡을 할 때 곡소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며 예를 행할 때 꾸미지 않으며, 말을 할 때 수사를 부리지 않는다.〔孝子之喪親也, 哭不偯, 禮無容, 言不文.〕"라고 하였다. 죽을……마셨으니 상례의 절차를 지켰다는 뜻이다. 《예기》 〈간전(間傳)〉에 "부모의 상에 우제와 졸곡제를 마치고서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으며, 기년에 소상제를 지내고서 채소와 과일을 먹으며, 또다시 기년에 대상제를 지내고서 초장이 있으며, 한 달을 사이하여 담제를 지내는데 담제를 지내고서 단술을 마신다.〔父母之喪, 旣虞卒哭, 疏食水飮, 不食菜果, 期而小祥, 食菜果, 又期而大祥, 有醯醬, 中月而禫, 禫而飮醴酒.〕"라고 하였다. 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구학(溝壑)의 뜻 '구학(溝壑)'은 도랑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학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지조를 굳게 지키는 것을 비유한다. 쌀독이 자주 비는 원문의 '누공(屢空)'으로, 가난한 살림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안회(顔回)는 거의 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자주 쌀독이 비었다.〔回其庶幾乎, 屢空.〕"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 산재(散齊)와……듯했다 제사를 정성껏 치른 것을 말한다. 제사 때 재계(齋戒)하면서 선조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정성을 이른다. 정성이 간절하면 이에 감응하여 선조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안에 치재를 하고 밖에 산재를 해서, 제사하는 날에 제사하는 분의 거처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뜻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즐거워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기호하시던 것을 생각해서, 재계한 지 3일이 되면 비로소 위하여 재계했던 분 즉 선조를 볼 수 있는 것이다.〔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보인다. 또 《예기》 〈제통(祭統)〉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산재 7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치재 3일로써 재계하는 것이다. 안정시킴을 재(齊)라 하니, 재(齊)란 정밀하고 밝음의 지극한 것이니, 그런 후에 신명과 교접할 수 있다.〔散齊七日以定之, 致齊三日以齊之, 定之之謂齊, 齊者精明之至也, 然後可以交於神明也.〕" 초하루 원문의 '길월(吉月)'로, 《논어》 〈향당(鄕黨)〉에 "초하루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에 나갔다.〔吉月, 必朝服而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감실(龕室) 사당(祠堂) 안의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는 곳이다. 날개를……가지런하였다 걸음걸이가 단정했다는 뜻이다. '익여(翼如)'와 '첨여(襜如)'는 모두 《논어》 〈향당(鄕黨)〉에 나오는 표현이다. "옷의 앞뒤 자락이 가지런하셨다.……나아갈 적에는 날개를 편 듯하셨다.〔衣前後襜如也.……趨進翼如也.〕"라고 하였다. 나물을……한다〔咬菜做事〕 청빈하게 살면서도 뜻을 잃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캐 먹고 살 줄만 알면, 어떤 일이라도 모두 행할 수 있다.〔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라는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의 말을 듣고는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는 말이 송(宋)나라 여본중(呂本中)의 《동래여자미사우잡지(東萊呂紫微師友雜志)》에 나온다. 법도를 빠뜨리지 원문의 '누알(漏戞)'로, '알(戞)'은 법도의 뜻이다. 《서경》 〈강고(康誥)〉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크게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不率大戛.〕"라는 용례가 있다. 은거하였다 용행사장(用行舍藏)의 준말로, 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도 하고 은거하기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써 주면 나의 도를 행하고 써 주지 않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경(主敬)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정이(程頤)는 주경 공부를 학문의 요체로 파악하면서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란 외모를 말끔히 정돈함으로써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묶는 것이고,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마음을 한 지경에 집중시켜 어느 쪽으로도 이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조사존망(操舍存亡) 마음을 잡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맹자》 〈고자 상〉에 "공자가 말하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달아난다. 들어오고 나감에 일정한 때가 없어 그 방향을 알 수 없다.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하였다. 시조리(始條理) 조리(條理)를 시작하다는 것으로,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집대성이란 음악을 연주할 적에 금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옥으로 거두는 것이다. 금으로 소리를 퍼뜨리는 것은 조리를 시작함이요 옥으로 거두는 것은 조리를 끝냄이다.〔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라고 보인다. 마음을……밝아진다〔存久自明, 何待窮索.〕 이는 정명도(程明道)의 〈식인편(識仁篇)〉 첫머리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궁격(窮格) 궁(窮)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한다. 기름에……새기는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수로(殊路)〉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보람은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용자부(勇字符) '용(勇)'이라는 글자를 경구로 삼는 것이다. '자부(字符)'는 경전(經傳)이나 고인의 글 중에서 뽑아 자신의 학문과 덕행을 닦기 위해 지표로 삼는 경구(警句)를 말한다. 굳세고 강직한〔行行侃侃〕 《논어》 〈선진(先進)〉에 "민자가 옆에서 모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자로는 굳세었고 염유와 자공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간곡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切切偲偲〕 《논어》 〈자로(子路)〉에 "붕우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며 형제간에는 화락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당우(唐虞)의 임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가리킨다. '당우'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로, 곧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고기직설(皐虁稷契) 현신(賢臣)들을 가리킨다. 순 임금의 신하로 법의 집행을 맡았던 고요(皐陶), 전악(典樂)으로서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기(虁),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 민정 장관이라 할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토론 원문의 '도유우불(都兪吁咈)'로, 본래 군주와 신하가 서로 자유롭게 정사를 의논하고 의견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도(都)와 유(兪)는 찬성의 의미, 우(吁)와 불(咈)은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우가 말하였다. '아, 훌륭합니다. 황제시여. 자리에 있을 때를 삼가소서.' 제순(帝舜)이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옳다.'〔禹曰都帝, 愼乃在位, 帝曰兪.〕"라고 하였다. 또 《서경》 〈요전(堯典)〉에 "화제가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말이 옳지 않다.'〔帝曰吁, 咈哉.〕"라고 하였다. 천하에……않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삼백삼천(三百三千) 예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다. 수사(洙泗) 수강(洙江)와 사강(泗江)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강이다. 공자의 고향에 이곳과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 내지 학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다. 주희(朱熹)는 "사람이 하늘에게서 얻은 것으로 텅 비고 영묘하며 어둡지 않아 온갖 도리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풀이하였다. 달도(達道) 천하에 공통된 도를 말하는데, 《중용장구》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 가지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간,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 붕우간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 인,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敎也. 五者天下之達道也, 智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라고 하였다.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천거장을 올리는〔薦剡登徹〕 '섬(剡)'은 원래 진한(秦漢) 시대에 회계군(會稽君)에 속한 현인데, 그곳에서 종이가 생산되었다. 옛날에 그 섬지(剡紙)에 추천하는 글을 적었으므로 '천섬(薦剡)'이 추천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등철(登徹)'은 상주문(上奏文)을 임금에게 올린다는 말이다. 칠조개(漆雕開)처럼……없습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하도록 권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자가 기뻐하였다.〔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라고 하였다. 서석산(瑞石山)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 기우(沂雩) 기수(沂水)와 무우(舞雩)를 가리키는데, 초연히 산수 간에 노니는 즐거움을 언급할 때 나오는 지명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계원(啓元) 문송규(文頌奎)의 자이다. 하락이수(河洛理數) 《주역》의 상수역(象數易)을 말한다. 소 장공(蘇長公)이……교정한 소 장공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경칭이다. 낙전(樂全)은 북송의 문신인 장방평(張方平)의 호인데 소식이 평생 은인으로 여긴 사람이다. 소식(蘇軾)이 지은 〈낙전선생문집서(樂全先生文集敍)〉에 "오직 공의 문집을 구하여 내가 손수 교정해서 집에 보관하고, 또 그 대략을 논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릴 뿐이다.〔獨求其文集, 手校而家藏之, 且論其大略, 以待後世之君子.〕"라고 한 내용이 있다. 문장은……같았다 평이하면서도 맛이 깊었다는 것이다. 포백(布帛)은 옷감이고 숙속(菽粟)은 곡물인데,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송사(宋史)》 권127 〈정이열전(程頣列傳)〉에 정자를 찬미하여 "그 말씀의 아름다움이 포백과 숙속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라고 하였다. 은미한……글 죽은 이의 덕을 드러내는 행장이나 묘지명 같은 글을 말한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학문을 널리 익히고 예로써 행동을 단속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부자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넘치지 저본에는 "隘"로 되어 있으나, 《대곡유고(大谷遺稿)》 권6 〈傳〉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는 "溢"로 되어 있어 고쳐 번역하였다. 대대(對待) 서로 상반되는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음(陰)과 양(陽)을 대대관계(對待關係)라고 한다. 몸속에……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미발(未發)의……이발(已發) 성리학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을 '미발(未發)', 이미 일어나서 동(動)할 때를 '이발(已發)'이라고 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라고 보이는데, 주자(朱子)는 "희ㆍ노ㆍ애ㆍ락은 정(情)이니, 이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으면 성(性)이다. 중(中)은 성(性)의 덕이고 화(和)는 정(情)의 덕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후로 희ㆍ노ㆍ애ㆍ락은 정(情)으로 마음이 이발(已發)한 상태를 이르고, 성(性)은 마음이 미발(未發)인 상태를 이르게 되었다. 공정하면……된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공정하면 하나가 되고 사사로우면 만 가지로 달라지니, 인심이 사람의 얼굴처럼 각기 다른 것은 다만 사심 때문이다.〔公則一, 私則萬殊, 人心不同如面, 只是私心.〕"라고 한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고요한……있다 《근사록집해》 권4 〈존양(存養)〉에 "고요한 뒤에 만물이 자연히 모두 봄의 뜻이 있을 볼 수 있다.〔靜後, 見萬物自然皆有春意.〕"라고 한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명(命)을……없다 《논어》는 〈요왈(堯曰)〉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라는 공자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기수(氣數) 사람의 길흉(吉凶)ㆍ화복(禍福)의 운수를 말한다. 유기(游氣) 구름, 아지랑이, 안개 등등 공중에 떠다니는 기운을 말한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신의 사욕을 이겨 천하의 공도(公道)인 예(禮)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하였다. 강경(剛勁) 저본에는 '剛輕'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剛勁'의 잘못인 듯하다. 시기하고 '기극(忌克)'은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것이다. 《좌전(左傅)》 희공(僖公) 9년에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으며 의심을 품지도 않고 이기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夷吾의 말에는 의심과 이기려는 뜻이 많으니, 나라를 안정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無好無惡, 不忌不克之謂也. 今其言多忌克, 難哉.〕"라고 하였다. 일본(一本)은 ……유행이다 일본은 하나의 근원으로, 도(道)의 본체이고 그것이 드러나는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일본만수(一本萬殊)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소자(邵子)가……것이다 소자의 말은 《격양집(擊壤集)》 권14 〈관물음(觀物吟)〉에 "체는 천지 이후에 확립되었고 용은 천지 이전에 일어났다.〔體在天地後, 用起天地先.〕라고 보인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인용되어 있다. '소자'는 소옹(邵雍)으로, 북송의 성리학자인데 《주역》에 정통하였다. 통체의 태극이 각구(各具) '통체'는 총체 혹은 전체라는 말과 같고, '각구'는 만물 속에 각기 하나의 태극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대개 합해서 말하면 만물 전체가 하나의 태극이요, 나누어 말하면 일물이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라는 주희의 말이 나온다. 준기(準基) 박준기(朴準基)로 자는 경립(景立)이며 정의림의 문인이다. 거울을 닦는 방도 마음을 닦는 방도를 비유한 것이다. 주정설(主靜說) 마음을 고요히 하여 외물(外物)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주자(周子)는 송나라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성인은 중ㆍ정ㆍ인ㆍ의로써 정하되 정(靜)을 주로 하여, 사람의 극을 세우셨다.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立人極焉.〕"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는 주정이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안정시켜 스스로 주재(主宰)가 되게 한 것이다.〔正是要人靜定其心, 自作主宰.〕'라고 설명하였다. 《朱子語類 卷94 周子之書》 대본(大本) 하늘이 명한 성(性)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이 미발한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해서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하였다. 주희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하기를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이니, 천하의 이치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도의 체이다.〔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라고 하였다. 영남의 삼가(三嘉) '영우(嶺右)'는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삼가(三嘉)'는 합천(陜川)의 옛 이름이다. 위문 1889년(고종26) 3월에 모친상을 당한 정재규를 위문한 것이다. 술과 고기 원문의 '노주(臑酒)'는 본래는 난주(暖酒)인데 데운 술을 말하고, '자오(炙鼇)'는 구운 자라인데 고기를 비유한 것이다. 《소학(小學)》 〈가언(嘉言) 광명륜(廣明倫)〉에, 송나라 여릉왕(廬陵王) 의진(義眞)이 무제(武帝)의 상중에 있으면서 장사(長史) 유침(劉湛)이 들어오자 장사 유침이 들어오자 '술을 데우고 바다조개를 굽도록 하자〔命臑酒炙車螯〕' 유침이 일어나면서 '이미 예로서 자처하지도 못하고 또 능히 예로서 남을 대하지도 못하십니다.〔旣不能以禮自處, 又不能以禮處人.〕'라고 한 일이 나온다. 월고(月臯) 조성가(趙性家)의 호이다. 자는 직교(直敎),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리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한말의 급변하는 과정에 유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이다. 사후에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호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다.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성현(聖賢)이……세우셨다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지은 〈춘추전서(春秋傳序)〉에 "2제(堯‧舜) 이전에는 성현이 대대로 나와서 때에 따라 작위를 하시되 풍기를 마땅하게 맞추고, 하늘의 뜻에 앞서서 사람을 깨우쳐주지 않고 각각 때에 따라 정사를 세우셨다.〔二帝而上, 聖賢世出, 隨時有作, 順乎風氣之宜, 不先天以開人, 各因時而立政.〕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近思錄 卷3 致知》 대박(大樸) 태초의 질박한 대도(大道)를 말한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장구》, 《중용장구》, 《맹자》를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에 "사자는 육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요, 《근사록》은 사자로 올라가는 계단이다.〔四子六經之階梯, 近思錄四子之階梯.〕"라고 하였다. 낙건(洛建) 낙양(洛陽)과 복건(福建)으로, 정자(程子)는 낙양에서 살고 주자(朱子)는 복건에서 살며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 원문의 '청익(請益)'으로,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솔선할 것이며 부지런히 해야 한다' 하자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다.〔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曰, 無倦.〕"라고 하였다. 흥국사(興國寺)와 아호사(鵝湖寺)의 즐거움 학문을 강론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원문의 '흥국(興國)'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로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에 있던 사찰인데, 북송의 대학자들인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이곳에서 종일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二程遺書 卷2 上》. '아호(鵝湖)'는 신주(信州)에 있는 사찰 아호사(鵝湖寺)를 말하는데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이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宋史 卷434 陸九淵列傳》 서석산(瑞石山)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 3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를 말하는데, 이 시대를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여긴다. 상서학교(庠序學校) 중국 고대의 교육기관으로, 상은 주(周)나라, 서는 상(商)나라, 교는 하(夏)나라, 학은 삼대(三代)가 모두 동일했다. 《孟子 滕文公上》 액운 원문의 '양구(陽九)'로, 흔히 큰 액운을 뜻한다. 4617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1원(元)에서 106년에 처음으로 발생되는 양액(陽厄)을 가리키는 말이다. 《漢書 卷21上 律歷志上》 현송(絃誦) 수업하고 송독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 《시경(詩經)》을 배울 때에 거문고와 비파 등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는데 이를 현가(絃歌)라 하고, 악기의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 하였는데, 이 둘을 합하여 '현송(絃誦)'이라고 칭한다. 제기(祭器) 원문의 '준조(樽俎)'는 제사(祭祀) 때에 술을 담는 '준(樽)'과 고기를 담는 '조(俎)'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제수를 가리킨 것이다. 회전(會戰)한……청명하듯 적을 정벌한 것을 말한다. 《시경》 〈대명(大明)〉에 "이때 태사(太師) 상보(尙父)가 마치 매가 날 듯하여, 저 무왕 도와서 상나라를 정벌하니, 하루아침에 아침 청명했도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라고 하였다. 징비(懲毖) 지난 일을 교훈 삼아 훗날의 일을 삼간다는 뜻이다. 《시경》 〈소비(小毖)〉에 "내가 징계를 당했으므로 훗날의 일을 삼가노라.〔予其懲而毖後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왕정을 펴게 하소서 원문의 '순선(旬宣)'으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임금이 소호에게 명하시어 정사를 두루 펴라 하시다.〔王命召虎, 來旬來宣.〕"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지방관이 왕정(王政)을 펴는 것을 말한다. 학규(學規)는 백록(白鹿)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릴 때 손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동규(白鹿洞規)이다.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규약(規約)은 남전(藍田) 중국 북송(北宋)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인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을 말한다.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라는 등의 네 조목을 골자로 하는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善行》 길일을 택하여 원문의 '길견(吉蠲)'으로, 《시경》 〈천보(天保)〉에 "길일을 잡아 정결히 술밥을 지어 이것을 효성으로 제향하네.〔吉蠲爲饎, 是用孝享.〕"라고 하였다. 결코 굴하지 않겠다〔栢舟靡他〕 '백주(柏舟)'는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본래는 과부가 죽을지언정 개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읊은 것인데, "둥둥 떠 있는 저 잣나무 배여, 황하 가운데에 있도다. 저 다팔머리 드리운 분이시여, 실로 나의 짝이시니, 죽을지언정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으리라.〔汎彼柏舟, 在彼中河. 髧彼兩髦, 實維我儀. 之死, 矢靡他.〕"라고 하였다. 곤궁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澤水不懼〕 원문의 '택수(澤水)'는 《주역》의 〈곤괘(困卦)〉로, 곤궁한 상황을 말한다. 《주역》의 〈곤괘(困卦) 상(象)〉에 "못에 물이 없음이 곤이니, 군자가 본받아 명(命)을 지극히 하여 뜻을 이룬다.〔澤无水困 ,君子以, 致命遂志.〕"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전(程傳)에서 "군자가 곤궁할 때를 당하여 방비하고 염려하는 도(道)를 다하였음에도 면할 수 없다면 이는 명(命)이다. 마땅히 명을 미루어 지극히 하여 뜻을 이루어야 한다. 명의 당연함을 알았다면 궁색(窮塞)과 화환(禍患)에 마음을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의(義)를 행할 뿐이다." 하였다. 원수와……하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는다.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청구(靑邱)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질그릇으로……나으며 차라리 정의(正義)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한 절의를 비유한 말이다.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열전(元景安列傳)〉에 "대장부가 차라리 옥그릇으로 부서짐을 당할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大丈夫, 寧可玉碎, 不能瓦全.〕"라고 하였다. 물고기도……좋겠는가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가지겠다. 삶도 내가 원하고 의리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이다. 어찌……손상하겠는가 험담하고 비방하여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 편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비방하자 자공(子貢)이 "그렇게 하지 말아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의 어짊은 언덕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 같아서 넘을 수 없느니라. 사람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해와 달을 어찌 손상하리오. 다만 자기의 분수를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로다.〔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율옹(栗翁)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가리킨다. 음(陰)이……않다 이이(李珥)가 〈성호원에 답함〔答成浩原〕〉에서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동하면 이(理)가 동(動)에 타는 것이요 이가 동하는 것은 아니며, 음이 정하면 이가 정(靜)에 타는 것이요 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陰靜陽動, 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也.〕"라고 한 내용이 있다. 《栗谷全書 卷10》 피음사둔(詖淫邪遁) 병폐가 있는 4가 종류의 말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언(知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맹자(孟子)는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전도(顚倒) 저본에는 '顚側'로 되어 있으나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을 참고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피음사둔(詖淫邪遁)과 전도(顚倒)되고 창피함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기정진이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에서 "지금 사람들은 '도리(道理)' 두 글자를 아득하여 생각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내고, 조금만 발현하고 환히 드러난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기(氣)에 속하게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理氣)를 안다고 하고, 이렇지 않은 사람은 이기를 모른다고 하니, 헛된 이름과 과거의 말로 도를 말하고 이를 말하지만, 그 실상은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아 모든 사물의 본령으로 삼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천하에 다시는 피음사둔이 없을 것이니 전도되고 창피함이 무슨 일엔들 없겠는가. 〔今人驅道理二字於冥漠不可思議之地, 而纔有發見昭著, 一屬之氣. 如此者爲識理氣, 不如此者爲不識理氣, 雖以虛名過去說, 說道說理, 而其實則氣奪理位, 爲萬事本領而已. 若是則天下更無詖淫邪遁矣, 顚倒昌披, 何事不有.〕라고 한 내용을 말한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 온공(溫公)은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으로, 맹자(孟子)의 말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고 산정(刪正)한 《의맹(疑孟)》을 지었다. 그의……권했고 사마강(司馬康)은 사마광의 아들로, 철종(哲宗)에게 말하기를 "《맹자》는 글이 가장 순정하고, 왕도(王道)를 진술한 것은 더욱 살펴보기에 마땅합니다.〔孟子爲書最醇正, 陳王道, 尤所宜觀覧.〕"라고 한 내용이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7에 보인다. 유원성(劉元城) 송나라 때의 학자 유안세(劉安世)를 말한다. 원성은 그의 봉호이다.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이천(伊川)은 명도(明道) 이천(伊川)은 정이(程頤), 명도(明道)는 정이의 형인 정호(程顥)이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 '남헌'은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남헌은 그의 호이다. '오봉'은 호굉(胡宏)의 호이다. 그의 자는 중인(仲仁)으로 제자로 남헌(南軒)을 두었다.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 '면재'는 송(宋)나라 문신 황간(黃幹)이다. 주자(朱子)의 제자이다.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이다. '고정'은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거했던 곳으로, 고정서원(考亭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장자(張子)는 석씨(釋氏)에 가깝다 장자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로,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석씨는 불교를 말한다. 그는 한동안 불교와 도가의 서적을 연구했다가 정호(程灝)ㆍ정이(程頤) 형제와 교제하면서부터 유교 연구에 전념하였다. 정몽(正蒙) 장재(張載)의 저서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논했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 《주역》을 해석한 책으로 정자는 《역전(易傳)》을 지었고, 주자가 다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지어 서로 차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회재(晦齋)의 보유(補遺)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고, '보유'는 그가 저술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말한다. 《대학장구보유》는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분(分)이 없는 일(一)〔無分之一〕 여기서 말하는 '분(分)'과 '일(一)'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때의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말한다. 참고로 노사 기정진은 논란이 되었던 〈납량사의(納凉私議)〉에서 분(分)이 없는 일(一)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납량사의(納凉私議)〉 참조.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서 주희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在明明徳〕"를 풀이하면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徳者, 人之所得乎天而虚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일본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이르기를 "삼아, 우리 도는 한 이치로써 오만 일을 관철시키는 것이다.〔參乎 吾道一以貫之〕" 한 데 대하여,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충서(忠恕)를 논함에 있어, 서(恕)가 충(忠)에서 분파(分派)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수가 한 근본이 되는 것과 한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이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 나가서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서 허다한 지엽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朱子語類 卷29》 대본달도(大本達道) 대본은 중(中)이고, 달도는 화(和)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 주희(朱熹)의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物)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된다.〔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라고 하였다. 부모가 애써 길러준 원문의 '구로(劬勞)'로, 부모의 은덕을 말한다. 《시경》 〈육아(蓼莪)〉에 "슬프다 우리 부모, 나를 낳아 기르느라 고생이 많으셨네.〔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 5조약 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를 말한다. 자정(自靖)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서산(西山)과……없도다 현실을 외면하여 피해 숨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이다.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는,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위(魏)나라 사자(使者)인 신원연(新垣衍)과 담판을 하면서,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東海)를 밟고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卷83 魯仲連鄒陽列傳》 입명(立命)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절하거나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아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입명은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인위로 해치지 않음을 이른다.〔立命, 謂全其天之所付, 不以人爲害之.〕"라고 하였다. 두어(蠧魚) 책을 갉아먹는 좀인데, 여기서는 서적을 뜻한다. 석과(碩果) 과일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로서,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군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았다.〔碩果不食.〕"라고 하였다. 영광전(靈光殿) 원문의 '영광(靈光)'으로,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세운 궁전인데, 홀로 남은 원로(元老)나 석학(碩學)을 비유한다. 후한(後漢) 왕연수(王延壽)의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 서문에 "서경의 미앙과 건장 등 궁전이 모두 파괴되었는데도,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었다.〔西京未央建章之殿皆見隳壞, 而靈光巋然獨存.〕"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여뀌를 머금고 원문의 '함료(含蓼)'로, 쓴 약재인 여뀌를 맛보며 병을 돌본다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선주전(先主傳) 주(注)에 배송지(裴松之)가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하여 "인심을 결집하는 이유를 보건대 어찌 단지 술을 버리고 추운 이를 어루만지며 여뀌를 머금으며 병을 돌보는 데 그치겠는가.〔觀其所以結物情者, 豈徒投醪撫寒含蓼問疾而已哉.〕"라고 하였다. 약을 쓰지 않고도 원문의 '물약(勿藥)'으로,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구오는 잘못이 없는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을 것이다.〔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라고 하였다. 창해상전(滄海桑田)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만큼 큰 변화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이 조선을 삼킨 것을 비유한 것이다. 떠나시어 원문의 '관화(觀化)'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에 "사람의 생명은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은 주야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生者假借也. 假之而生, 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而化及我, 我又何惡焉?〕"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물고기가……얻지 원문의 '어어득계(於魚得計)'로, 물고기가 강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처럼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데, 정의림의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진인(眞人)을 설명하면서 "개미에게서는 지혜를 버리고, 물고기에게서는 계책을 얻으며, 양에게서는 의지를 버린다.〔於蟻棄知, 於魚得計, 於羊棄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노백 징사(老柏徵士)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를 말한다. '징사'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은사(隱士)를 말한다. 지주(砥柱)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시(三門峽市)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산으로,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것이 기둥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비유된다. 진사(辰巳) 현인(賢人)의 죽음을 의미한다. 후한 때의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이 어느 날 공자가 "일어나라, 일어나라, 금년의 태세는 진에 있고, 내년의 태세는 사에 있다.〔起, 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일러 준 꿈을 꾸고 나서 참서(讖書)로 맞추어 보고는 스스로 자기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는데, 이윽고 병이 깊어져서 죽었기에, 뛰어난 사람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뒷전 원문의 '사력(沙礫)'으로, 모래와 자갈인데, 자신의 지식이 뒤떨어졌다는 겸사이다. 진(晉)나라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가 서로 앞을 양보하면서 걸어가다가 뒤에 처지게 된 왕탄지가 "곡식을 까불며 바람에 날리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게 마련이다.〔簸之颺之, 糠粃在前.〕"라고 한마디 하자, 범계가 "조리질을 하며 물에 흔들면 모래와 자갈이 뒤에 있게 마련이다.〔淘之汰之, 沙礫在後.〕"라고 응수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죽는……하십니까 자신보다 앞서 죽었다는 뜻이다. 원문의 '반진(返眞)'은 죽음을 말한다. 송나라 진관(秦觀)의 〈한추밀부인만사(韓樞密夫人挽詞)〉에 "천상에서 화려한 큰 집이 열렸는데 홀연 구산의 참다운 세계로 돌아갔네.〔天上華屋開 丘山忽返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0제자가……어그러지고 '70제자'는 공자의 걸출한 제자들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부자께서 돌아가시자 미언이 끊어졌고, 70제자가 죽자 대의가 어그러졌다.〔夫子沒而微言絶, 七十子喪而大義乖.〕"라고 하였다. 상응하는 예우 원문의 '선가(善價)'로, 좋은 값인데 능력에 상응하는 예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궤에 담아서 감춰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니, 공자가 "팔겠다, 팔겠다.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하였다. 서운해……없었으나 《논어》 〈학이(學而)〉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말과,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함이 없고, 세상이 즐거우면 도를 행하고 세상이 걱정스러우면 물러난다.〔不見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라고 한 것을 말한 것이다. 치암(恥庵) 《일신재집(日新齋集)》 권14에 〈치암기(耻庵記)〉에 자가 윤여(允汝)로 나오고, 권5 〈김윤여에게 답함-규홍-〔答金允汝-奎洪-〕〉라는 편지를 참고할 때 김규홍의 호가 치암이고, 자가 윤여인 듯하다. 홍승완(洪承渙) 《일신재집(日新齋集)》 문인록에 자가 사증(士拯)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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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범1)【석귀】에게 보냄 與金景範【錫龜】 겨울철이 이미 저물어 가는 가운데 모친을 모시고 강녕(康寧)하시며, 험난한 시대에 어떤 능력으로 자신을 지탱해가십니까. 저는 상중에 첩거하면서 힘이 닿는 대로 책을 펼치는 것을 감히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다만 곁에 든든한 벗이 없으니 어찌 끝내 퇴보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겠습니까. 지금부터 20일이 지나면 40세가 됩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고인이 두려워하지 않은 바입니다.2) 설령 이로부터 계속하더라도 과연 얼마나 진보가 있겠습니까. 다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말로 만년을 보전할 계책으로 삼지만 선인과 선사의 뜻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것이 구구한 이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노형께서는 저를 애처롭고 가련하게 여겨 끝까지 깨우쳐 주십시오. 저는 이전에 공부한 것은 조장(助長)하는 곳에서 몹시 그르쳤기에 마음이 늘 수고로웠으니, 도리어 잊어버리고 아무 일 없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3) 근래 이러한 병통을 깨달았으니 힘 쓸 곳이 있을 듯합니다. 대저 심(心)은 활발발(活潑潑)4)한 것인지라 자연스러운 주재(主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사로운 뜻으로 부질없이 더 집착하여 억지로 별도의 주재(主宰)를 만들었으니, 천기(天機)를 빼앗고 주인의 자리를 침탈하는 것이 너무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임택지(林擇之)에게 보낸 편지에 "몸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이라면 몸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滿腔子是惻隱之心 腔子外是甚底]"라고 한 구절을 근래 보고서 저는 스스로 '몸 밖에는 천지의 측은지심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회일(會一)은 이사한 나머지에 모든 일이 무사한지요? 후윤(厚允)에게서 근래 서신을 받았습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느 때에 기약하겠습니까. 동오(東塢)와 운람(雲藍)은 종종 서로 모입니까? 경산(經山)이 세상을 떠난 뒤로 우리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끝까지 서로 교유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백언(伯彦)에게 보내는 편지는 삼가 이미 전하였습니다. 冬候已暮。奉慈康寧。險歲事力。何以友吾。弟哀蟄之餘隨力開案。不敢自已。但傍無疆輔。安保其終不退轉也。此過二十日。便是四十歲。到此無聞。古人所不畏。設或從此接續。其所進果幾何哉。但以朝聞夕死爲桑楡之計。而少酬先人先師萬一之意者。是區區之至願也。願老兄爲之哀矜。終始警策也。弟前日工夫。於助長處。偏受其害。心下常常勞撓。反不如忘之之爲無事。近覺得此病痛。似有用力處。大抵心是活潑潑自然底主宰。人以私意謾加把持。彊作別樣主宰。其奪天機侵主位。不已勞乎。近閱朱子抵林擇之書。有曰。滿腔子。是惻隱之心。腔子外。是甚底。弟因自思以爲腔子外。是天地惻隱之心。未知得否。會一搬寓之餘。凡節無撓。厚允近有得信否。闊焉涯角。際晤那有期耶。東塢雲藍種種相聚否。自經山頹。吾儕渙散。未知有可以終始相從者。幾人也。向者所與伯彦書。謹已傳去耳。 김경범(金景範) 김석귀(金錫龜, 1835~1885)로,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범, 호는 대곡(大谷),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대곡리로 이사하였고, 27년간 기정진의 문하를 왕래하였다. 고인이……바입니다 《논어》〈자한(子罕)〉에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고 했다. 조장(助長)하는……것입니다 맹자가 사람이 의리를 쌓는 데 있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 가라는 뜻에서 "반드시 하는 일이 있어야 하되 결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고 빨리 자라도록 돕지도 말라.[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勿助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孟子 公孫丑上》 활발발(活潑潑) 천리(天理)가 한곳에 응체되어 있지 않고 활발하게 운행하고 있는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12장에서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시경》의 시를 인용한 것에 대해, 정호(程顥)가 "자사가 긴요하게 사람을 위한 곳으로 매우 생동감이 있다.[子思喫緊爲人處, 活潑潑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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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칙에게 보냄 與崔元則 지난겨울에 장아(蔣雅) 편에 보낸 편지는 받아 보셨습니까?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또 이미 반년이 지났습니다. 덕성을 함양하는 체후는 만중하시며, 댁내 제절(諸節)은 만복하시며, 영남의 벗들은 험난한 세상에 모두 무사히 지내십니까? 눈앞에 보이는 형세가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이 앞서게 하니, 천리에서 서로 그리워함에 어찌 마음이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나이와 기력이 이미 노쇠하였으니 구구하게 강론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모름지기 연배가 비슷한 사람끼리 중간에 편안한 곳을 정해 해마다 한번 모일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대곡(大谷) 옹의 뜻이었는데 이루지 못한 것이니, 형께서 도모해 주십시오. 아, 얼음이 얼고 밤이 긴 때 온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비풍(匪風)》→〈비풍(匪風)〉의 시5)를 읊조리고 괄낭(括囊)의 경계6)를 생각하여 친한 벗과 강론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혼란하여 강론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합니다.) 노형(老兄)께서는 고요히 거처하며 홀로 생각하시는 중에 또한 어떤 감개를 일으키십니까. 《시경(詩經)》에 이른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서 널 낳으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라고 한 이 한 구절의 말이 우리들이 귀결처입니다. 봄 사이 송사(松沙)의 편지를 받고 한 달에 두 번 강회를 열었는데 100여 인이 모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흉년에 가난한 유자(儒者)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닌데 이 형이 어떻게 이것을 마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듣건대, 이달 10일에 선비들이 선생의 묘소에서 석존제(釋奠祭)를 지내고 향음주례를 묘소 아래에서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前冬蔣雅便書。趁入照徹否。荏苒光陰。又已半年。未審養德衛重。諸節百福。嶺中知舊。險世經過。一一無事否。滿目風色。令人作惡。千里相向。安得不馳情。吾輩年力已邁。區區講聚之樂。能有幾何。須與年輩若而人。取中間穩便處。爲逐年一聚之計。如何。此是大谷翁之意而未就者。願兄圖之也。嗚乎。堅氷長夜。渾區滔滔。咏匪風之詩。念括囊之戒思欲與親知講之而不可得也。未知老兄靜居獨念。亦作如何感慨。詩所謂夙興夜寐。母忝爾所生。此一語是吾人歸宿處也。春間得松沙書。知一月兩次會講爲百餘人。此非荒年窮儒可堪之事。而未知此兄何以辨此耶。且聞今十日。多士釋奠于先生墓。因行鄕飮酒禮于墓下云耳。 비풍(匪風)의 시 《시경》〈회풍(檜風)〉의 편명이다. 주(周)나라 왕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의 국력이 약해 일본에 유린당한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괄낭(括囊)의 경계 자신의 재지(才智)를 감추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울한 시대의 경계를 말한다. 괄낭은 주머니의 끈을 졸라맨다는 뜻으로, 곧 말을 조심한다는 의미이다. 《주역》 〈곤괘(坤卦) 육사(六四)〉의 "주머니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고 칭찬도 없을 것이다.[括囊无咎无譽]"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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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형 백언7)【시림】에게 보냄 與族兄伯彦【時林】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가 마침 내렸는데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까. 우리들이 서로 교유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금년에 만나도 다만 지난해의 공부 수준에서 진보가 없고 오늘 만나도 다만 전일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정도이니, 분발하여 힘쓰는 뜻은 도리어 이전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대저 사람이 뜻을 세우는 초기에는 대체로 왕성한 기세가 일어 진보할 가망이 있을 듯하지만 오래되면 의지가 약해지고 마음이 해이해져 끝내 떨치지 못하고 마니, 이는 일반 사람들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우리들의 공부가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말 뿐이라면 당일 서로 기약한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일 뿐만이 아니니, 천하의 도리가 또 어찌 진보하지도 않고 퇴보하지도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산중에서 문을 닫은 채 외롭게 홀로 거처하느라 강습하지 않고 경계하는 것도 없으며, 보고 느끼는 것이 적고 다짐한 마음이 해이해져 허송세월을 보내며 진보는 없고 퇴보만 있으니 어찌합니까. 안으로는 부형을 속이고 밖으로는 사우를 속여 부형과 사우의 바람을 끝내 저버리게 하였으니, 이는 소생의 크나큰 죄입니다. 벗과 사우 가운데 만일 매우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들 가련하게 여겨 구제하기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족형께서는 가장 가까이에 살고 깊이 알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부터 왕래할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구구하게 허여하는 습속을 절대 본받지 말고 모름지기 맹렬하게 충고하고 통렬하게 꾸짖어,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여 뜻이 어지럽고 마음이 해이해져 명성을 떨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근심이 없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사상의 행차가 보름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그때 만나자는 약속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省楸返程。驟雨時至。未審駕旋安穩否。吾輩相從。不爲不久矣。今年相逢。只是去年工夫。今日相逢。只是前日說話。而其奮勵勉作之意。則反有不及於前。夫人於立志之初。多爲銳氣所使。似有進及之望。而及其久也。則意爛心解。終於不振者。此常情通患也。吾輩工業。止於此而已。則不惟不能副當日相期之意。而天下道理。又豈有不進不退者哉。弟杜門峽庄。孑然獨居。講習廢而規警絶。觀感疎而繩約弛。日邁月征。未見其進。而只見其退。奈何。內欺父兄外欺師友。而使父兄師友之望。竟歸差池。則此生罪戾。大矣。知舊士友。苟有相愛之深者。孰不爲之矜然。而思有以救之。况族兄居之最近。服之最深者乎。自今而有往復。切勿效世人區區推與之習。須猛告痛責。使之畏懼修省。俾無意爛心解終於不振之患。幸甚。沙行。望後爲料否。伊時聯鞭之約。倘記念耶。 백언(栢彦) 정시림(鄭時林, 1839∼1912)으로,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이다. 보성 출생으로, 기정진의 문인이며, 정의림의 사촌 형이다. 문집으로 《월파집(月波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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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당 이공 유사 梧月堂李公遺事 공의 휘는 민변(敏釆)이고, 자는 달서(達瑞)이며. 호는 오월당(梧月堂)이다. 이씨는 공산(公山) 사람으로,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 이후로 문학과 잠영(簪纓)1)이 대대로 찬란하게 빛났다. 호가 혁회재(衋悔齋)인 휘 위(韡)는 만력(萬曆)2) 연간에 이름난 진사로 사림(士林)이 제사를 모셨으니, 바로 공의 8세이다. 증조는 기형(基馨)이고, 조부는 문갑(文甲)이며, 부친은 택무(擇茂)이고,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순조(純祖) 무자년(1828)에 능주(綾州)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말하거나 웃을 때 복스럽고 장난끼가 있으면서도 출입할 때 걸음걸이가 의젓하여 어른스러운 모습이 있었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고 스승과 벗을 따를 때에는 학문을 하는 절차와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운 행실이 성대하여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부모를 섬기고 장사 지내며 제사 지낼 때에는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고, 직접 제례(祭禮)를 가려 뽑아 집안의 자제들에게 주어 외고 익히게 하였으며.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여러 여식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서 말하길, "제사를 받드는 것은 규문의 큰 예절이니, 반드시 이것을 잘 알아야 출가한 사람으로서 부인의 도리를 이룰 수 있다." 하였다. 항상 "검약한 생활로 잘못되는 경우는 적다.3)"와 "생각함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4)"라는 말을 좋아하여 자리 오른편에 써 붙여 놓고 밤낮으로 반성하며 말하길, "성인의 말씀은 말이 간략하지만 의미가 갖추어져 있고, 글이 비근하지만 뜻이 심원하니, 진실로 이 두 구절을 체득하여 미칠 수 있다면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을 지키며,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방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밤에 이웃에 사는 아이가 몰래 정원에 들어가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고 있음에도 공은 속으로 참으면서 말하지 않고, 또한 집안사람들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그 아이가 갑자기 떨어져 다칠까 염려해서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신이 지닌 듯하였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신의 병통인 양하였으며, 마음 씀은 충후(忠厚)했고 일을 함은 꼼꼼하였으니, 향촌에서 안면이 있든 없든 그를 군자로 지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갑술년(1874)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남평(南平) 반계(潘溪)의 뒷산 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대호(大鎬)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었다. 지난 경신년(1860)에 내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죽수서원(竹樹書院)5)을 유람하면서 향촌 유생들의 큰 회합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어르신이 있었는데 자태와 형상이 단정하고 후덕하였으며, 풍채와 거동이 온화하고 화락하였으며, 말을 하거나 의론을 내면 사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주목하였다. 그 분이 누구인지 묻고서야 오월당 이공임을 알았다. 여러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어수선하였기에 비록 조용히 가르침을 받들지는 못했지만 흠모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덧없는 인생에 변고가 많아 다시 문안을 여쭈지도 못하였다가 돌아가신 지 수십년이 지난 뒤에서야 공의 아들을 만나 함께 따르고 강마하는 것이 이처럼 친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의 아들 인환(仁焕)이 울며 말하길, "선군(先君)의 아름다운 이름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불초(不肖)한 내가 일찍 아버님을 여의었기에 그 분의 실제 행적에 대해 보고 기억한 것이 없고, 유문(遺聞)에서 얻은 것이 단지 그저 몇 단락 말씀뿐이지만 사라지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바라건대 글을 지어 없어지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게나." 하였다. 아아,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나이에 선배의 장후한 풍도를 추상하니 구구한 가슴에 사무친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기에 감히 강하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敏釆。字達瑞。號梧月堂。李氏公山人。恭肅公諱明德後。文學簪纓。世代煒燁。至諱韡。號衋悔齋。爲萬曆名進士。士林俎豆之。卽公八世也。曾祖基馨。祖文甲。考擇茂。妣濟州梁氏聖源女。以純祖戊子。生公于綾州七松。言笑禧戱。出入步趨。疑然有老成風度。至於擩染家庭。從逐師友。爲學節度。孝友行治。蔚然爲儕流之推重焉。生事葬祭。情文備至。手抄祭禮。賜門子弟誦習。每於行祭時。輒令諸女觀之曰。奉祭祀是閨閫大節。必須通此可以適人成婦道。常愛以約失之者鮮。及思不出其位之語。書付座右。日夕顧省曰。聖人之言。言約而意備辭近而旨遠。信能於此二句。體當得及。則存心持己應事接物之方。可以幾矣。嘗夜有隣兒。竊入園中。登樹摘果。公隱忍不發。亦不令家人知之。盖隱其倉卒落傷也。見人之善。若己之有。見人之惡。若己之病。用心忠厚。作事周詳。鄕黨知不知。無不以君子目之。甲戌三月九日卒。葬南平潘溪後麓庚坐原。配驪興閔氏大鎬女。擧一男三女。曩在庚申。余弱冠。遊竹樹書院。見鄕儒大會。而中有一丈人。姿相端厚。風儀愷悌。發言出議。四座屬目。問之乃知爲梧月堂李公也。稠座撓撓。雖未能從容承誨。而滿心欽艷。久而不忘。誰知浮生多故。未及再候。而歿後數十年之餘。乃得其遺胤。與之從逐講磨。若是密勿哉。遺胤仁焕。泣而語曰。先君令名。人誰不知。不肖早孤。其於實行。未有所睹記。而得於遺聞者。只是零星數段語而已。不可任其泯沒。幸爲下筆以惠不朽也。嗚呼。白首頹齡。追想先輩長厚之風。不勝區區感愴之情。有不敢牢辭云耳。 잠영(簪纓) 관(冠)에 꽂는 비녀와 갓끈을 말한 것으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비유한다. 만력(萬曆) 명나라 제13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연호로, 1573~1620년에 해당한다. 검약한 …… 적다 공자의 말로 《논어(論語)》 〈이인(里仁)〉 제23장에 보인다. 생각함이 …… 않는다 《주역》 〈간괘(艮卦) 상(象)〉에 "산이 거듭함이 간이니, 군자가 본받아 생각이 그 지위에 벗어나지 않는다.〔兼山艮, 君子以, 思不出其位.〕"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증자가 "군자는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君子 思不出其位〕"라고 하였다. 죽수서원(竹樹書院)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능주(綾州)로 귀양 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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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 김공 유사 莘溪金公遺事 공의 휘는 만원(萬源)이고, 자는 명은(明恩)이며, 호는 신계(莘溪)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경주(慶州) 사람으로, 고려조에 휘 충한(冲漢)이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는데, 이분이 계보(系譜)에 오른 시조(始祖)이다. 휘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이고, 진사(進士)였는데,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여 마침내 선생의 학문을 전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명철(命哲)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일으켰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이분이 낳은 휘 횡(鑅)은 호가 태암(泰巖)으로 동중추(同中樞)를 지냈고 병자란(丙子亂) 때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 안방준(安邦俊))을 따라 의병을 창도하였으니, 이분들이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 휘 희학(希學)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휘 지형(之炯)은 문학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조부 휘 홍기(鴻基)는 호가 농와(聾窩)로 은덕(隱德)이 있었으며, 부친 휘는 종국(鍾國)이고, 모친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욱해(郁海)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임인년(1842) 12월 12일에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7세에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이끌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과정(課程)을 준수했다. 장성해서는 이웃 마을의 지남(芝南) 이공(李公)을 통해 비로소 과거 공부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이 아님을 알고서 마침내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받아 읽으며 나아갈 방향을 밝혔고, 이로 인해 사자(四子)와 육경(六經)8)에 미쳐가면서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처음부터 그친 적이 없었다. 집안 형편이 평소 넉넉하지 않았기에 산에서 나무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밭을 일구고 힘써 거두어 좌우에서 봉양하는 것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형제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재물을 함께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공의 형체와 관상은 질박하고 예스러웠으며, 풍모와 거동은 너그럽고 평이하였으며, 말은 어눌하게 하여 민첩하지 않았고, 문장은 서툴게 표현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천성에 맡기고 분수를 지킨 채 구구하게 꾸미는 태도가 없고 쉴 새 없이 일에 빠져 몰두하려는 뜻이 없어 일상생활의 말과 행동이 곤곤한 하늘의 조화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다툼이 없었고, 일에 임해서는 겉으로 공을 드러냄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매번 곤궁한 집과 차가운 걸상이나 푸성귀 아침과 소금국 저녁을 볼 때마다 담박한 맛이 손으로 움켜 쥘 만큼 넘쳐흘렀다. 신묘년(1891) 가을에 향촌 내의 여러 벗들과 함께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가서 최계남(崔溪南)9)ㆍ정애산(鄭艾山)10)과 종유하며 여러날 강학하고 토론하였는데,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지만 벗들과 술마시는 흥취에는 남보다 뒤질까 두려워하였으며, 매번 산중 누각에 달이 떠오르는 밤이나 강둑에 봄바람이 불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화락하게 도취하여 그윽한 감상의 흥취를 다하였다.임인년(1902) 10월 7일에 삶을 마치니, 신산(莘山) 오른쪽 기슭 갑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계진(啓鎭)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권주(權柱)이고, 딸은 정재우(鄭在禹)에게 시집갔다. 아아, 공은 세상에 발을 내딛지 않고 세속에 머리를 적시지 않은 채 백발이 되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유유자적하게 스스로를 즐기면서 만년의 행로에 때 묻지 않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친구 중에 매우 얻기 쉽지 않다. 공의 풍모를 우러러 추억하니 어찌 참담한 슬픔을 가눌 수 있겠는가. 이에 행적을 기록해 달라는 권주의 부탁을 차마 번다하게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萬源。字明恩。號莘溪。金氏本慶州人。麗朝有諱冲漢。官禮儀判書。是爲登譜之祖。至諱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遂傳其學。生諱命哲。壬辰擧義。贈掌樂院正。生諱鑅。號泰巖同中樞。丙子亂。從牛山安先生倡義旅。皆其顯祖也。高祖諱希學。贈戶曹參議。曾祖諱之炯。文行著世。祖諱鴻基。號聾窩。有隱德。考諱鍾國。妣商山金氏郁海女。憲宗壬寅十二月十二日。公生於莘山里。七歲上學。幼儀不待提督而遵循課程。及長。因隣閈芝南李公。始知功令之業。非爲己之學。遂授讀石潭要訣。以明其趨向。因以及於四子六經。研精覃思。未始有己。家泰不贍。樵山漁水。服田力穡以爲左右就養者。無所不至。與其弟友愛甚篤。同財共㸑未有分異。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語訥而不捷。文辭拙而不巧。任眞推分。無拘拘矯飾之態。無營營汨没之意。而日用云爲。無非自滾滾天機中出來。是以接人無爭競。臨事無表襮。處事無逕庭。每見其窮齋寒榻。朝齏暮鹽。澹泊氣味。津津可掬。辛卯秋。與鄕裏諸友。往從崔溪南鄭艾山於方丈之華巖寺。累日講討。性恬淡。若無所嗜好。而於朋酒興致。惟恐不先於人。每於山樓夜月。江堤春風。携多小知舊。觴咏陶暢。俾盡幽賞之趣。壬寅十月七日卒。葬莘山右麓甲坐原。配坡平尹氏啓鎭女。有婦德。生一男一女。男權柱。女適鄭在禹。鳴呼。公不出脚於世。不濡首於俗。而白首窮經。囂囂自樂。不失爲晚路之完人。此在知舊。甚不易得。追仰風韻。曷勝悲愴。茲於權柱誌行之託。有不忍多辭焉。 사자(四子)와 육경(六經) 사자는 공자(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네 선생의 가르침이 담긴 《논어(論語)》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ㆍ《맹자(孟子)》를 가리키며, 육경은 유가의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예경(禮經)》ㆍ《악경(樂經)》ㆍ《역경(易經)》, 《춘추(春秋)》를 가리키는데 《악경》은 진(秦)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 없어져 지금은 오경(五經)만 남아 있다. 최계남(崔溪南) 조선 후기와 개항기의 유학자인 최숙민(崔琡民, 1837~1905)으로 계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이고, 호는 존와(存窩)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삭발령이 내렸을 때 죽을지언정 삭발할 수 없다고 항거하는 등 유학의 도를 지키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정애산(鄭艾山) 조선 후기와 개항기의 유학자인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학문에 몰입하였으며,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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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8)【재규】에게 답함 答鄭厚允【載圭】 구진(邱珍)이 짐을 꾸려 돌아간 지 지금 얼마나 되었습니까? 소년 시절과 장년 시절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노쇠한 나이에 서로 그리워하니, 평소 애틋한 심정을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난겨울에 보내신 편지는 초가을에 초지(草枝)에서 도착하였고, 이어서 오장(吳丈)이 돌아오는 편에 또 존신(尊訊)과 여러 형들이 보낸 편지 수십 통을 받았습니다. 삼가 읽고 감축하며 '나는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 그런데도 외람되이 당대 현덕(賢德)에게 버림을 받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까. 삼가 연래에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는 중에 복됨을 알았으니, 실로 멀리 떨어져 있는 저의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다만 중제(重制)9)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극한 마음 더욱 융중(隆重)할 것이니,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견디십니까. 크게 흉년이 든 것은 영남도 호남과 같을 것이니, 숙수(菽水)의 어려운 정상10)이 눈에 선합니다. 다만 아무도 모르게 홀로 깨달은 실상이 날로 더욱 드러나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니, 바야흐로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진 나머지에 한 도맥을 부지하여 사방에서 추앙을 받는 것은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생도들이 운집하였는데 뜻을 부칠 수 있는 자는 몇입니까? 대저 자품이 온후한 자는 과감함이 부족하고 영특한 자는 독실함이 부족하니, 행실이 중도에 맞는 사람을 얻기 어려움은 예전에도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오직 형세에 따라 잘 인도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근래 과거의 규정이 옛날과 달라 과문을 익힌 자가 나아가 과거를 보지 않으므로 물러나 여기에 의탁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겉으로는 성대한 기풍이 있는 듯하지만 이욕을 추구하여 따르니, 그 폐단이 아마 역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의리(義利)' 2자는 말이 매우 간절합니다. 대저 천고 만고에 치란과 흥망이 애초에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고 성현의 천언만어도 다만 이 경계를 발명한 것입니다. 노형(老兄)께서 이것을 제일의 의체(義諦)로 삼으시니 번다하지 않고 요체를 얻어 힘쓸 바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용한 태사공(太史公)의 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한번 크게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세상에서 장각(章閣)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비록 우리 유자 가운데 실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우에도 종종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니, 괴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거경(居敬)은 의리를 정밀하게 하는 것이니, 이미 거경 공부가 없는데 어떻게 의리를 정밀하게 하겠습니까. 이는 일에 임할 때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려 시비와 사정(邪正)이 늘 전도되는 것이니, 이는 우리들이 바로 급급하게 처방법을 강구해야 할 곳입니다. 이로써 마음을 보존하고 단속하는 공부를 더욱 알아 초학자가 제일의 법문으로 삼으면 신체에 지키는 바가 있어 이 마음이 바야흐로 머물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기본이 이미 확립되면 위로는 덕에 나아갈 수 있고, 아래로는 삼가고 조심하는 선비가 되는 데 차질이 없을 것입니다. 문군 송규(文君頌奎)는 이달 15일에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실로 우리들에게 있어 불행입니다. 통탄스럽고 애석합니다. 《답문유편(答問類編)》은 이미 완성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사문(斯文)의 다행입니다. 그 범례(凡例)를 보건대 휘류(彙類)는 조리가 있고 칭정(稱停)11)은 정밀하니 물을 담아도 새지 않는다고 할 만합니다. 지나친 곳을 찾아내라고 한 말은 우매하고 용렬한 제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제가 이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은 비록 형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기갈 든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의 견해로 헤아려 보건대 권질(卷帙)이 너무 방대한 듯합니다. 모름지기 질문한 말 가운데 지리하고 중복되는 것은 일체 삭제하여 정밀하고 간결함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원집(元集)은 아직 간행하지 않은 책이니 원집과 중첩된 곳은 줄일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쪽의 사우가 늦게 나아갔으니, 백언(伯彦)은 맨 앞에 서는 것을 사양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사람은 박식하고 정밀하며 모든 거취에 매우 조리가 있습니다. 이 형과 함께 한번 나아가 질정하고자 하지만 이 형도 세파에 시달리느라 몸을 빼기 쉽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제가 근년에 겪은 일을 모두 거론하지는 못하지만 몸을 빼기 어려운 점은 또한 이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당초에 제가 조금 집안의 형편이 넉넉하였을 때 백언이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여 남에게 자기를 얽매이는 것을 가지고 오유(迃儒)라고 하자, 백언은 내가 사람마다 역량이 각각 조금 차이가 있어 억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나를 오유라고 하였으니, '오유' 2자를 서로 미룬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뒤에 경범(景範)이 듣고서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백언의 말을 따르겠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경범의 처지가 백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어찌 나 역시 백언의 말을 따라야 함을 모르겠습니까. 평생 사업은 끝내 성취한 것이 없고 쇠퇴하는 조짐은 날로 달로 달라지는 것을 매양 매우 스스로 근심하였습니다. 이번 겨울에 벽산서실(碧山書室)에 갔는데 박생 준기(朴生準基)라는 사람이 그 주인이었습니다. 또 김홍기(金弘基), 박용동(朴容東), 홍승환(洪承渙), 송광수(宋光壽)가 있어서 바야흐로 함께 교유하였는데 모두 단정하여 사랑스러웠습니다.문군(文君)이 죽기 전에 편지를 보내 영결의 말을 청하였습니다. 제가 벗들과 함께 즉시 달려갔지만 병이 이미 깊었습니다. 제가 형이 보낸 위장(慰狀)을 전하니, 문군이 눈물을 머금고 감격하여 말하기를 "애산(艾山) 어른을 한번 보는 것은 이미 가망이 없고, 정신은 온전하지 않으며 호흡은 가빠 또 답장을 쓰지 못하겠다. 후일 애산 어른을 보거든 나를 위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몹시 슬펐습니다. 그가 죽자 향리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겨 신위를 만들어 곡하거나 제문을 지어 애도를 표하거나 했으니, 본성을 지니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아직 민멸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만일 뒤에 인편이 있다면 형께서 혹 제문을 지어 보내 이 슬픈 혼백을 위로해 주십시오. 邱珍治任。今機日月。少壯相分。衰暮相思。其尋常飢渴。謂何如。前冬惠書。初秋自草枝來到。繼而吳丈之廻。又拜尊訊及僉兄書數十度。伏讀感祝。以爲此是何等無狀。而猥爲一時賢德所不棄若是也。恭尋年來省歡百福。實慰遠情。但重制聞之恒然。惟至情加隆。哀痛何堪。年侵大無。嶺亦如湖。菽水戞戞之狀。如在目前。惟闇然獨覺之實。日以益章。信從者衆。方世衰道微之餘。所以扶持一脈而爲四方依仰之地者。顧不大歟。生徒坌集。可以寄意者。幾人。大抵資稟溫厚者。欠果敢開悟者。少篤實。中行之難。在古已然。惟因其勢而利導之。在乎敎者之如何耳。但近來科規不古。爲詞令者。進無所售。故退而託於此者。甚多。外若有蔚然之風。而懷利從逐。其敝想亦不細矣。示中義利二字。語甚切至。夫千萬古治亂興亡。未始不由於此。而聖賢千言萬語。只是發明此箇界至者也。老兄以此作第一義諦。可謂不煩而要。知所務矣。所引太史公說。不覺令人喟然一晞也。世上章閣之勿說。雖吾儒中稱爲實心人。往往出脫此關不得。可謂咄咄怪事矣。夫居敬所以精義。旣無居敬。何以精義。此於臨事之際。含胡籠罩。是非邪正。常爲迭用此吾輩正當汲汲用方處也。以此益知持斂之功。爲初學者第一法門。身體有所持循。此心方有頓放處。基本旣立。上可以進德。下不失爲謹勅之士矣。文君頌奎。今十五日。竟不起。實吾輩之不幸。痛惜痛惜。答問類編聞已斷手。誠斯文之幸。見其凡例。彙類條理。稱停精密。可謂置水不漏矣。櫛過之云。以弟昧劣。豈爲敢然。但區區願見之心。雖靠兄敎。不啻飢渴矣。然以愚料之卷帙似爲浩大。須於問語中。其支離者重複者。一切刪去。以存精約。如何。且元集是不刊之書。與元集疊見處。亦可減裁也。竊念此邊士友晩來進就。恐伯彦不得讓其頭矣。此人博洽精詳。凡百去就。甚有條理。欲與此兄一晉相訂。而此兄亦是困於世放者。抽身不易。奈何。弟年來經歷。都不擧似。而其抽身之難。亦與此人無異。當初弟稍有家力特以伯彦不能自獄家計。而絆已於人。謂之迃儒。伯彦以予不知人之事力。各有分寸。不可强謂予爲迃儒。以迃儒二字相推久之。其後景範聞之笑曰。吾則從伯彦之言。蓋景範身體與伯彦同故也。以今觀之。豈知吾亦從伯彦之言也。平生志業。迄無所就。而衰頹之徵。月異而日不同。每切自悶。今冬住碧山書室。蓋有朴生準基者。其主人也。又有金弘基朴容東洪承渙宋光壽者。方與同遊皆端勅可愛。文君未死之前。走書請訣。予與諸友卽馳往。病已劇矣。予傳兄所抵慰狀。文君飮泣感激。且曰。一見艾丈。已矣無望。而神短氣促。又未修答。日後見艾丈。幸爲我謝焉。其意極可悲也。其沒也。鄕里痛惜。或設位而哭。或操文而侑。可見彛好之不泯也。如有後便。則兄或爲之製送侑文。以慰此哀魂也。 정후윤(鄭厚允):정재규(鄭載圭, 1843~1911)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후윤(厚允), 호는 애산(艾山) 또는 노백헌(老栢軒)이다. 중제(重制) 상례 복제(喪禮服制)에서 사촌이나 고모 또는 고종사촌 등 대공친(大功親) 이상의 상사 때 입던 상복(喪服)이다. 숙수(菽水)의 어려운 정상 숙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식이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함을 말한다.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극진히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효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下》 칭정(稱停) 내용이 과장됨이 없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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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후윤에게 답함 與鄭厚允 세월이 머무르지 않아 선부인(先夫人)의 연사(練事)12)가 이틀 뒤에 행해질 것이니, 삼가 생각건대 애모(哀慕)함이 망극한 가운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먼 외지에서 사모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영남에서 2월 7일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 다음 날에 숙부님의 상을 당하였으니 지극히 통탄스러운 마음 어떻게 말로 형용하겠습니까. 유명(遺命)에 따라 돌아가신 다음 달에 선산에 장사 지냈습니다. 기력은 날마다 떨어지고 세상사는 나날이 어지러워지니, 구구한 이의 평소 마음은 그 가운데 한둘도 부합하지 못하였고, 지금 또 시골 숙사(塾舍)에 머무르며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분분하게 날로 마음이 치달리니 어찌 침체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만난 것은 십수 년 만이었으니 정히 크게 논의가 있을 때였는데 저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에 가까웠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노형께서는 언론이 분명하고 의리가 밝으며, 행동거지와 법도가 정연하여 본받을 만하였습니다. 편찬한 《언행록(言行錄)》및 논한 바 심성론(心性論) 등의 책 약간 편을 보니 세밀하고 자세히 분석하여 이치는 분명하고 말은 사리에 맞았으니,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이러한 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공경스럽고 감격스럽습니다. 「문답편(答問編)」은 지난번에 송사(松沙)의 편지를 받으니 간행하여 유포할 뜻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을 아직 주석하지 않았으니, 행여 다소라도 진전이 있기를 바라서"라는 말13)을 인용하여 고하였는데, 송사(松沙)의 답장에 "《역전》은 정자가 스스로 지은 것이므로 신중함이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이는 다만 종류대로 덧붙여 편을 만든 것이니, 그 의체(義諦)와 아주 다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견해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옛날에 두 분 정자(程子)의 유서(遺書)는 전사하는 과정에서 진면목을 잃은 것이 많아 구산(龜山)이 삭제하여 바로잡고자 하였지만 감히 실행하지 못했고, 남헌(南軒)은 《희안록(希顔錄)》14)을 편찬하면서 문득 삭제한 것이 많았습니다. 오봉(五峯) 호자(胡子)는 이에 대해서 "이는 종신토록 해야 할 일이니, 곧 함부로 삭제해선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15) 그렇다면 삭제하여 바로잡는 것과 스스로 논의를 세우는 것은 어렵게 여기거나 쉽게 여기는 데에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이 편지는 지난번에 비록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헤아려 볼 점이 없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원하건대, 형이 비록 갑자기 광범위하게 수정하지 못하더라도 모름지기 가까이 사는 노성하고 박아(博雅)한 몇 사람과 며칠의 일정을 정하여 다시 세밀하게 다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서 명덕(明德)을 논하여 기(氣)라고 하는 자는 그 설이 《대학(大學)》에서 허령(虛靈)하다 운운한 것16)을 잘못 알고 말한 것입니다. 그 설에 "허령하고 어둡지 않은 것[虛靈不昧]은 심(心)이요, 심은 기(氣)의 맑은 것이니, 명덕은 기(氣) 쪽에 속한 것이지 이(理) 쪽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허령하고 어둡지 않다는 이 한 단락은 사람이 태어나서 정(靜)하다는 이하의 말이다. 덕(德)은 얻는 것이다. 이는 마음에서 얻고 자기에게서 얻는 것을 이르니, 주자(朱子)가 '덕(德)' 자에 근거하여 풀이하였으므로 그 형세상 어쩔 수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면서 정(靜)한 상태 이전에는 본래 태극이 있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하여 음(陰)을 낳으니, 모름지기 명덕이 태극과 같아서 동정은 태극 가운데의 일이고 허령은 명덕 가운데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떠합니까? 회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슬픔을 절제하고 변화에 순응하여 멀리 있는 저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日月不留。先夫人練事。行將隔日。伏惟哀慕罔極。何以堪支。遠外慰戀。不任下誠。弟自嶺中。二月初七日始返巢。再明日遭叔父喪。至情之痛。夫何言喩。從遺命。以翌月葬於先麓耳。年力日替。世故日深。區區宿心未有以副其一二今又住接村塾耳目酬應。紛然日馳。其何不爲汨沒之歸耶。向日相奉。是出於十數年之後。正是大有議論之日。而弟則不啻墮坑而落塹矣。但老兄言論光明。義理昭晣。動靜規矩。粹然可則。及觀所撰言行錄及所論心性等書若干篇。其毫析縷分。理明辭達。眞有德之言。未知今日域中有此等文字耶。敬感萬萬答問編。向得松沙書。有刊布之意。弟引程子易傳未傳。尙覬有進之語以告之。松沙答云易傳是程子所自作。故審愼固有如此者。此則只是類附成編。與其義諦逈別。然以愚思之。恐未然。昔二程子遺書。多傳寫失眞處。龜山欲刪正。而未敢下筆。南軒編希顔錄。輒多刪去。五峯胡子謂之曰。此是終身事。不可便容易而削之也。然則夫刪正與自己立說。其難易似無異矣。此書向日雖未了閱。追來思之。恐不無合商量處。願兄縱未能遽加廣訂。須與居近老成博雅幾許人。定爲幾日之規。更加細櫛。如何世之論明德爲氣者。其說誤認大學虛靈云云而發焉。其說曰。虛靈不昧。心也。而心是氣之精爽。則明德是屬氣邊底。非屬理邊底。余曰虛靈不昧此一段是人生以靜以下語。德者得也。是得於心得於己之謂。則朱子據德字而解之。故其勢不得不從地盤上說來。然人生而靜上面。自有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須知明德猶太極也。而動靜是太極中事。虛靈是明德中事。未知此說何如回敎之爲望。只祝節哀順變以副遠望。 연사(練事) 연제(練祭), 즉 소상제(小祥祭)를 말한다. 연(練)은 삼베를 마전하는 것으로 소상부터는 마전한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행여……말 《근사록》 권3 〈치지(致知)〉에 보인다. 희안록(希顔錄) 장식(張栻)이 정자(程子)로부터 오도(吾道)를 맡을 사람이라고 크게 권면하는 편지를 받은 뒤 고무되어 옛 성현을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안자(顔子)의 언행을 수집하여 엮은 책이다. 《성리전서(性理全書)》 권41 〈장식(張栻)〉에 실려 있다. 오봉(五峯)……하였습니다 호자(胡子)는 송(宋)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아들로 오봉 선생이라고 일컬어졌던 호굉(胡宏)을 가리킨다. 그의 문집인 《오봉집(五峯集)》 권2 〈여장경부(與張敬夫)〉에 이 말이 수록되어 있다. 대학(大學)……것 《대학장구(大學章句)》 경(經) 1장 주희(朱熹)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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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에게 보냄 與鄭厚允 연전에 장(蔣) 노인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맏아들이 돌아가는 편에 여러 통의 편지를 부쳤는데 잘 도착하였습니까? 봄 사이에 담헌(澹軒)의 강회에 갔다가 형이 이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새로 이사한 나머지에 황량한 곳의 절선(節宣) 등 모든 일이 어떠하십니까? 어디를 간들 가난하지 않겠으며, 어디에 거처한들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이는 선대의 고향이니, 생각건대 끝없이 흠모하는 생각을 붙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현종(賢從 상대방의 종제)과 침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정담을 나누며 만년에 정신을 함양하는 곳으로 삼은 것은 그 뜻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저는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가산을 탕진하고 전혀 의지할 곳이 없이 아침저녁 사방으로 떠도는 것이 마치 낙엽이 바람에 따라 굴러다니는 것과 같은 신세입니다. 구구한 이의 생각은 다만 옛집으로 돌아가 선영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늘그막의 여생을 보낼 계책으로 삼고자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노형께서는 어떻게 이것을 이루었습니까. 듣자니 승룡(乘龍)의 짝은 명호(明湖)의 조카로 정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의 기골은 일찍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양가는 덕을 짝한 것이니 남은 복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 편지에서 논한바 완이(莞爾) 어른과 주고받은 몇 가지 조목과 산석(山石)이 보여준 우리들이 주고받은 부분의 말은 이미 보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라건대 절충하여 이렇게 몽매함을 제거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종산강록(鍾山講錄)》17)과 제가 지은 《영행록(嶺行錄)》18)은 또한 일일이 밝게 살피고 헤아려 보신 다음 아울러 돌려보내 주십시오. 병자년(1876, 고종13) 여름에 우리 두 사람이 송별한 글은 이는 선사(先師)의 명이니, 심상하게 저술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체제는 좋지 않으니, 다시 편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참으로 형의 말과 같습니다. 저는 돌아와 분주하여 이에 힘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인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비로소 창졸간에 붓을 들었지만 오히려 20년 전 옛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학업의 진보가 없는 것이 도리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지난번에 면암(勉菴) 어른의 편지를 받고서 성재(省齋)가 논한바 심설(心說)이 자못 자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개 성재의 뜻은 '심(心)은 물(物)로 말할 수 있지만 칙(則)으로 말할 수 없다. 화장(火臟 심장)으로 말하면 화장은 실로 물이고 인의(仁義)는 칙(則)이 되며, 신명(神明)으로 말하면 신명도 물이고 인의는 칙(則)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사 벽계(檗溪) 선생이 일찍이 신명을 가지고 기(氣)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물칙(物則)의 구분에 대해서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형도 근래 이 설을 보았습니까? 이 어른은 평소 수학(邃學)이라고 불렸는데 그 언론이 도리어 근세의 그릇된 폐단을 답습한단 말입니까. 대저 기(氣)의 묘용(妙用)을 실로 신(神)이라고 하고, 이(理)의 오묘한 곳을 또한 신(神)이라고 하니, 비록 기의 묘용이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이 이가 운행하는 손발에 불과합니다. 심은 물(物)을 가지고 말하는 자가 있고 칙(則)을 가지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물을 가지고 말한다면 인(仁)은 그 칙(則)이 되고, 칙으로 말하면 신(身)이 그 물(物)이 됩니다. 맹자가 이른바 인은 인심(人心)이라고 한 것과 정자(程子)가 이른바 "하늘에 있으면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으면 성(性)이라 하고, 몸에서 주재(主宰)하면 심(心)이라 한다."19)라고 한 이러한 '심(心)' 자는 또한 모두 물(物)로 간주하는 것입니까? 평소 이해하지 못하여 감히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내년 봄에 쌍계(雙溪)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앞으로 또한 머지않았습니다. 약속을 정할 때 그 사이의 시간을 보니, 넉넉히 공부하여 만날 때 문변(問辨)할 자료로 삼을 수 있을 듯하였는데, 곧이어 다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끝내 쓸데없이 어울리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종산(鍾山)의 모임에서 이미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강론하는 본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처럼 세월을 보낸다면 몇 년 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은 채 생을 마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할 만합니다. 또 두세 동지가 조용히 서로 약속해도 그 끝내는 필시 큰 모임이 될 텐데, 더구나 빽빽한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약속하는 것이 이미 많은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때 두 도(道)의 인사(人士)가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형은 미리 조약(條約)을 정해 번거롭고 산만한 폐단이 없이 보고 느끼는 실제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더 아끼십시오. 年前蔣老人事。想已聞之矣。其遺胤回便付上諸札。不至浮沈耶。春間赴澹軒講會。聞兄搬移之報矣。未審新移之餘蕪處節宣。凡百何如。安往而不貧。何處而不困。惟是桑梓故邱。計寓贍慕無窮之思。而又與賢從聯兀對討。爲晩年游養之所者。其意豈偶然哉。弟蕩失先業。漫無聊賴。朝東暮西。如落葉隨風。區區之念。只欲返舊庄瞻近墳墓。爲殘生終老之計。而不能得未知老兄何以辨此耶聞乘龍之擇。在明湖之姪。此郞氣骨。曾所艶見。兩德作述。餘祿可量。前書所論莞爾丈往復數條。及山石所示吾輩往復一段語。想已照及。幸爲折衷。祛此蒙部如何。鍾山講錄反弟所述嶺行錄。亦爲一一澄裁。倂以見還也。丙子夏吾兩人送別文字。此是先師之命。則非尋常著述之比。而但其體裁未善。不可不更爲修潤者。誠如兄敎矣。弟歸來役役無暇及此。今聞有便。及始倉卒下筆。而猶不免再誦二十年舊語。其業之不進。及如是耶。向得勉菴丈書。知省齋所論心說頗詳。蓋省齋之意。以爲心可以物言。不可以則言。以火臟言。則火臟固物也。而仁義爲則。以神明言。則神明亦物也。而仁義爲則。至謂其師檗溪先生。未嘗以神明言氣者。於物則之分。不甚端的云。未知兄亦近見此語否。此丈素號邃學。而其言論反襲近世謬獘耶。夫氣之妙用。固謂之神。而理之妙處。亦謂之神雖曰氣之妙用。而亦不過此理運行底手脚也。心有以物言者。有以則言者。以物言則仁爲其則。以則言。則身爲其物。孟子所謂仁人心。程子所謂在天爲命。在人爲性。主於身爲心。此等心字。亦皆以物看耶。尋常未瑩。敢此仰布。以爲如何。明春雙溪之約。將亦不遠矣。定期之初。見其間日月。若可以優着功夫。爲供臨時問辨之資。而旋復因循。竟未免一場閒追逐。其於鍾山之會。已可見矣。此不惟非吾輩講聚之本意。而如是捱過。未幾年。其不終於無聞耶。可懼。且二三同志。從容相約。其終必至於浩大。況稠座衆諾所及已多乎。其時兩省人士必將不少。願兄預定條約。無繁渙之獘。有觀感之實。如何更乞珍重加愛。 종산강록(鍾山講錄) 권기덕(權基德, 1856~1898)이 벗들이나 문하생들과 역사, 예절, 성리학, 경전 등에 대해 문답한 것으로 현재 《삼산유고(三山遺稿)》에 실려 있다. 영행록(嶺行錄) 정의림이 영남을 유람하고 기록한 책이다. 하늘에……한다 이 말은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보인다. 어떤 이가 심(心)에도 선악(善惡)이 있는가를 물었는데, 정이(程頤)가 "하늘에 있으면 명(命)이라고 하고 사물에 있으면 이(理)라고 하고 사람에 있으면 성(性)이라고 하고 몸에서 주재하면 심(心)이라고 하니, 그 실제는 하나이다. [在天爲命, 在物爲理, 在人爲性, 主於身爲心, 其實一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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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에게 보냄 與鄭厚允 변방의 적막한 모퉁이에 현인군자가 한번 왕림해 주시어 산천초목으로 하여금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뒤에 소식이 막혀 적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7월 사이에 을지(乙枝)에 도착하여 비로소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후로 고요히 수양하시는 체후는 시절과 더불어 강녕하시며, 영종씨(令從氏)는 어떠하십니까?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산석(山石 김현옥(金顯玉)), 순경(舜卿), 자후(子厚) 및 알고 있는 벗들은 모두 편안합니까. 농사가 흉년이 든 가운데 귀중(貴中)은 어떠하신지요? 동쪽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날마다 마음이 달려갑니다. 저는 현재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며 나머지는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날로 몸은 노쇠하고 세상사는 나날이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구구한 이의 구업(舊業)은 만분의 일도 수습하지 못하니, 슬픔과 탄식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작년 2월에 은혜로이 보내 주신 편지는 지금 하형(夏兄)이 왔을 때 비로소 받았지만 바쁘고 어수선하여 자세히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보니 또한 다소 논의할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전 편지에서 "원두(源頭)로 말하면 이 이(理)가 있고 이 기(氣)가 있으니, 이는 이(理)가 주재(主宰)가 되는 소이(所以)이다. 당체(當體)로 말하면 이 기가 있어 이 이를 갖추고 있으니, 이는 심이 주재가 되는 소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형이 논박하여 말하기를 "이가 주재가 되는 것은 다만 원두에서 말할 수 있지만, 품부받은 이후는 한결같이 기가 주(主)가 되는 것이니 이른바 이가 주재가 된다는 것은 다만 근거가 없는 허황된 말이어서 실사(實事)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이 이(理)가 있으면 이 신(神)이 있으니, 신이라는 것은 이(理)의 오묘한 것입니다. 그 묘용을 헤아릴 수 없어 절로 일에 따라 교부(交付)하여 소이(所以)가 없어도 절로 이(以)가 되는 것이 이(理)가 주재가 되는 소이입니다. 나중에 《율리만록(栗里漫錄)》을 구했는데, 형이 산석(山石)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를 보니 "만약 이가 절로 주재가 되어 사람을 기다림이 없다고 한다면 성현이 논한바 극(極)을 세워 성(性)을 정하여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주가 되게 한다는 여러 가지 말씀은 모두 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전 편지의 뜻과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전 편지에서 말한 원두(源頭)니 당체(當體)니 하는 것은 뚜렷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당체에 나아가 그 본연을 궁구한다면 이것이 곧 원두입니다. 이미 이 이(理)가 있은 뒤에 이 기가 있는 것이니 이 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가 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비록 심이 주재가 되더라도 주재가 되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니, 사람은 도를 넓힐 수 있고 심은 성을 단속할 수 있습니다. 형께서 인용한 "극을 세워 성(性)을 정한다.", "도심으로 하여금 주가 되게 한다."라는 등의 말은 모두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理)의 자연함은 실로 소이(所以)가 없고 본래 이(以)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의 신령함이 있은 뒤에 바야흐로 이 오묘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고목과 불이 꺼진 재도 이 오묘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사(事)와 물(物)의 뜻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를 말하면 물이 그 가운데 있고, 물을 말하면 사가 그 가운데 있지만, 사와 물을 상대하여 말하면 사는 절로 사이고 물은 절로 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심성(心性)" 2자의 뜻도 이와 같다고 말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부동심(不動心)을 정심(正心) 이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니, 비록 성인의 지극한 공이라도 정심 이후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정심장(正心章)」에서 이른바 우(憂), 환(患), 공(恐), 구(懼) 등의 말20)은 동심(動心)의 공이 아님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더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을지(乙枝)에서 《대곡유집(大谷遺集)》21)을 본 다음 가지고 와서 깨끗하게 써서 편을 완성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 노형(老兄)께서 교정하고 교감하고 산석(山石)이 편집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도 당시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어찌 홀로 조금이라도 보충하고 성과를 내는 수고로운 정성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격언(格言)과 요어(要語) 및 논변한 것이 정밀한 곳은 아침저녁으로 펴서 읽을 수 있어서 손에서 놓지 않고자 합니다. 행장(行狀)은 송사(松沙)가 이미 기술하였고, 전(傳)은 제가 형의 말씀대로 또한 집필하였습니다. 《정암집(靜菴集)》 2질은 삼지재(三芝齋)에게 부탁하였지만 다만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지금 경락(京洛)에 있으므로 운반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 내년 봄 뇌용정(雷龍亭) 유람은 송사(松沙)께서 장차 옮겨서 황산재(凰山齋)22)에서 모임을 가지려 하니, 아마도 그때 선사의 묘비(墓碑)에 관한 일이 마무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天荒寂寞之隅。得賢人君子一番光顧足令草水勤榮。駕旋消息。寂然無際。七月間到乙枝。始得聞之矣。未審伊後燕養候節。與時康泰。令從氏何狀。溪南山石舜卿子厚及所知諸益。一齊平適耶。年事不均。未知貴中何如。瞻向東雲。無日不馳情。弟見樣依舊。餘無可道。惟是衰徵日侵。世故日深。而區區舊業。未見有萬一之收。悲憤憂嘆。曷有涯極。去年二月所惠書。今夏兄來時。始已得之。而拘於怱撓未得仔細追後見之亦不無多少商確處鄙前書有曰以源頭而言。則有是理而有是氣。此理之所以爲主宰也。以當體而言。則有是氣而具是理。此心之所以爲主宰也。兄駁之曰。理爲主宰。只可以言於原頭。而稟賦以後。一是氣爲之主。則所謂理爲主宰者。只是懸空虛說。而無實事也。夫有是理。斯有是神。神也者。理之妙也。其妙用不測。自有隨事交付。無所以而自以者。此理之所以爲主宰也。其後得栗里漫錄。見兄所抵山石第二書。有曰。若以理自爲主宰。而謂無待乎人。則聖賢所論立極定性使道心爲主諸般說話。皆可廢歟云云。此與前書之意。不其大相懸絶耶。弟前書所云源頭當體。非有判然地頭。卽此當體而究其本然。則這便是源頭也。旣有是理而后有是氣則是氣之自始至終。非理之所爲耶。然則。雖曰心爲主宰。而其所以爲主宰。理也。人能弘道。心能檢性。及兄所引立極定性使道心爲主等語。皆非此義耶。理之自然。固無所以而自以然必須氣之靈而後。方有是妙。不然。枯木死灰。亦可謂有是妙耶。朱子言事物之義曰。言事則物在其中。言物則事在其中。事物對言。則事自事物自物弟以爲心性二字之義。亦如是云耳。且以不動謂之正心以後事。不可。雖聖人之極功。於正心以後。更無可去處。況正心章所論憂患恐懼等語。其非不動心之功耶。幸加敎之也。向於乙枝見大谷遺集。因以袖來。思欲淨書成篇耳。嗚乎。老兄勘校之。山石編輯之。而弟亦不可謂非當日知舊之一。則安獨無一分補效之勞乎。況其格言要語。及論辨精微處。有可以晨夕披玩而不欲離也。行狀松沙已述之傳。則弟依兄敎。亦爲下筆耳。靜菴集二帙。託于三芝齋。但其主事諸員。今在京洛。故未得運送耳。明春雷龍之游。松沙將欲移爲凰山之會。蓋其時先師墓碑役。將就故也。 정심장(正心章)에서……말 《심경부주》 권2 〈정심장(正心章)〉에 "우환(憂患)과 공구(恐懼)는 똑같은 뜻인 듯하다고 묻자, 주자가 똑같지 않다. 공구는 당장에 핍박함이 긴급한 것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공구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게 하는 것이요, 우환은 장래에 큰 화복과 이해가 있음을 사려하여 미리 방비하는 것이다.[ 問憂患恐懼四字, 似一般. 曰不同, 恐懼是目下逼來得緊底, 使人恐懼失措. 憂患是思慮預防將來有大禍福利害.]"라고 한 내용을 이른다. 대곡유집(大谷遺集) 김석귀(金錫龜)의 문집으로 1902년에 간행하였다. 황산재(凰山齋) 전라남도 장성군 동화면 황산마을에 있는 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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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에게 보냄 與鄭厚允 영남과 호남은 동떨어져 있어 인편이 없습니다. 더구나 시상(時象)은 헤아릴 수 없고 도로가 막혔습니다. 세간의 일이 쇠락하고 종유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남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문을 닫은 채 병으로 신음함에 다만 한없는 회포가 밀려오니, 마치 늙은 누에 뱃속의 실처럼 쌓이고 또 쌓여 답답할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함안(咸安) 박군(朴君) 편에 인편이 급하여 겨우 몇 글자를 적어 보냈는데 받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논변한 전변(田辨)은 과연 너무나 소략합니다. 형이 분별한 것에 의지하여 대략 수정하여 조만간에 나아가 질정할 계획입니다. 삼가 형이 분별한 것을 보니, 인용한 것이 매우 넓고 헤아린 것이 매우 합당합니다. 그 말은 조리가 있고 뜻은 엄밀하여 사문(斯文)의 우익(羽翼)이 되고 후학의 사표가 될 수 있으니, 비단 한쪽 사람만 거울삼아야 할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쓸쓸히 홀로 지내는 나머지에 입으로는 강론하는 것이 없고 귀로는 경계하는 말을 듣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크게 강론하거나 크게 경계하는 말을 집을 나가지 않고 여기에서 누릴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비록 자리를 함께하는 때라도 곡진하고 섬세함은 필시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소소하게 흐릿한 곳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대략 아뢰겠습니다. 대저 '심(心)' 자의 본래 면모는 영(靈)과 이(理)를 합하여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른바 "성과 지각을 합해서 심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合性與知覺 有心之名]"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러나 심(心)을 영(靈)이라고 하더라도 실로 불가하지 않고, 심을 이(理)라고 하더라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령한 바는 이(理)에 있고 중요한 바도 이에 있으니, 형이 이른바 성정 밖에는 더 이상 달리 심이 없다는 것과 영이 도움이 된다는 등의 말은 모두 지나친 의론이 아니고, 제가 종전에 이것이 지나친 의론이라고 의심한 것이 바로 참으로 지나친 의론입니다. 그러나 '심(心)'과 '성(性)' 자를 가지고 대거(對擧)하여 말하면 또한 분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저절로 법도를 넘지 않았다.[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한 말, "안회는 그 마음이 인을 어기지 않았다.[回也 不違仁]"라고 한 말,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 있다.[人能弘道]"라고 한 말과 장자(張子)가 이른바 "심은 성을 검속할 수 있지만 성은 심을 검속할 줄 모른다.[心能檢性 性不知檢其心]"라고 한 말과 주자가 이른바 "허령한 것이 심이고 성실한 것이 성이다.[靈底是心 實底是性]"라고 한 말은, 이는 대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심(心)' 자는 오로지 이(理)로 간주해서는 안 될 듯하니, 허령한 뜻이 많은 듯합니다. 이미 법도를 넘지 않고 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넘지 않고 어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물(物)이 있어야 합니다. 심과 이는 하나여서 혼연히 간격이 없으니, 여기에서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 신묘함이 됨을 알 수 있고, 기가 그 법도를 따라 오래 하여도 잃어버리지 않으니, 여기에서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이 공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넘지 않고 어기지 않는 것을 뭉뚱그려 이(理)라고 한다면 순치(馴致)하고 순숙(純熟)한 공을 볼 수 없고, 넘지 않고 어기지 않는 것은 굳이 성현이 된 뒤에 가능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넘지 않고 어기지 않는 것은 두 물건이 상대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한 물건일 뿐이라면 어찌 어기지 않고 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은 지(知)로써 시작하고 예(禮)로써 지키는 것을 가지고 이(理)로써 이(理)를 갖추고, 이로써 이를 오묘하게 한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로써 시작한다.[知以始之]"의 '이(以)'와 "예로써 지킨다.[禮以守之]"의 '이(以)'는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게다가 "이로써 이를 갖춘다.[以理具理]"의 '이(以)'와 "이로써 이를 오묘하게 한다.[以理妙理]"의 '이(以)'는 또 무슨 물건입니까. 만약 이러한 '이(以)' 자를 뭉뚱그려 이(理)라고 한다면 이(理)에 대해서 허탄하다는 비난이 없겠습니까.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다.[人能弘道]"의 '능(能)'과 "마음은 성을 단속할 수 있다.[心能檢性]"의 '능(能)'은 또한 전적으로 이(理)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와 영을 합한 뒤에 바야흐로 일신의 주재가 되니 영이 아니면 주재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주재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이 되는 소이와 심이 심이 되는 소이는, 이 이(理)때문이니, 심이 주재하고 이가 주재하는 소이입니다. 이처럼 주장한다면 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또 이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될 듯합니다. 형께서는 "다만 이것은 한 이(理)인데 주재하여 항상 정해진 것은 심이고,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허령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지만 그 주장의 귀착점은 한쪽으로 치우침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쪽 사람은 다만 심이 기가 되는 것만 알아서 심이 인을 어기지 않고 심이 성을 단속할 수 있다는 설을 인용하여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으니, 실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전적으로 이(理)라고 인식할 수 없는 곳에서 또한 전적으로 이(理)라고 인식한다면 본문의 뜻을 잃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신명(神明)은 전적으로 이라고 할 수 없으니, 주자 문인이 신명을 물로 삼은 것에 대해서 주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학(大學)》, 《맹자(孟子)》의 주(註)에 모두 허령과 신명으로 뭇 이치를 갖추고 온갖 일에 응한다고 하였으니,23)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정상(精爽), 허령(虛靈), 신명(神明)은 다만 한 가지 일일 뿐이고 신(神)은 다만 그 묘처(妙處)입니다. 일심(一心) 내에 어찌 정상이 있고 또 허령이 있으며, 또 신명이 있고, 또 신(神)이 있겠습니까. 형이 이른바 허령은 신명의 정상(情狀)이라고 한 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이러하니, 이렇게 한가하게 말해선 안 되지만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멈출 수 없으니, 형은 합당한 때가 아니라고 배척하지 말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어 몽매함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실낱같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지극의 의론을 듣는 것이 또한 저의 바람입니다. 嶺湖厓角。便禠落落。況時衆區測。途路阻搪。人事之衰替。游從之零散。如此乎。杜門吟病。惟有無窮之懷。如老蠶腹中之絲。積之又積而已。向於咸安朴君便。便急僅付數字。未知人照耶。弟所辨田辨。果疎略甚矣。依倣兄辨略加修潤。爲早晩就正計耳。竊覵兄辨。其援引甚博。稱停甚當。其辭條暢。其義嚴密。足以爲斯文之羽翼。後學之準的。非但爲一邊之人所當鑑也。弟離索之餘。口絶講討。耳絶規警。久矣。誰知大講討大規警。不出戶而得之於此耶。雖有合席之日。其委曲纖悉。想必不能如是也。但於其中。不能無小小未瑩。請略陳之。大抵心字本來面目。合靈與理而得名者也。張子所謂合性與知覺。有心之名。卽此意也。然喚心爲靈。固無不可。喚心爲理。亦無不可。況所靈在理。所重在理。則兄所謂性情之外。更別無心及靈爲資助等說。皆非過論。而弟之從前疑其爲過論者。及眞過論也。然把心性字。對擧而言。則亦不容無分別。孔子所謂從心所欲不踰矩。及回也其心不遠仁。及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性不知檢其心。朱子所謂靈底是心。實底是性。此非對擧而言者耶。此等心字。似不當專作理看。而恐靈底意爲多也。旣曰不踰不違。則其能不踰不違者。必有其物。心與理一。渾然無間。此可以見不踰矩之爲妙也。氣循其軌久而不失。此可以見不違仁之爲功也。若倂其不踰不違者而謂之理。則無以見其馴致純熟之功。而不踰不違。不必聖賢而後可也。是知不踰不違。是兩物相待之名。若只一物而已。則安有不違不踰之可言哉。兄以知以始之禮以守之。爲以理具理。以理妙理之證。然其知以始之之以。禮以守之之以。是甚物耶。且以理具理之以以理妙理之以。又是甚物耶。若以此等以字。倂謂之理。則理其無懸空之嫌耶。人能弘道之能。心能檢性之能。亦不可專謂之理。必合理與靈而後。方爲此身之主宰。非靈不能主宰。非理無所主宰。然人之所以爲人。心之所以爲心。是理也。則心之主宰。及理之所以主宰也。如此立說。恐爲不偏於彼。又爲不偏於此矣。兄曰只此一理。而主宰常定者。心。發出不同者。性。此其意非不知靈之包在裏許。而其立言所歸。不其有偏乎。一邊之人。只知心之爲氣。而引心不違仁。心能檢性之說。以爲主氣之證案。固不足道。若於不可專認爲理處。亦且專認爲理。恐亦不能無失乎。本文之義也。且神明不可專謂之理。朱門人以神明爲物。朱子不以爲不然。而於大學孟子註。皆以虛靈與神明爲具衆理應萬事。此可見也。夫精爽也。虛靈也。神明也。只是一事。而神特其妙處也。一心之內。安有精爽。又有虛靈。又有神明。又有神哉。兄所謂虛靈是神明之情狀者。未知其何如也。世色如此。不宜有此等閒說話。而心有所疑。自住不得。願兄勿以非其時而斥之。詳細永及。以祛蒙蔽。如何。一縷未泯之前。得聞至論。亦區區之願也。 대학(大學)……하였으니 《대학장구》 경 1장의 '재명명덕(在明明德)'에 대한 집주에 "명덕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 제1장의 집주에 "심(心)이라는 것은 사람의 신명(神明)이니, 중리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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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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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후윤에게 답함 答鄭厚允 몇 년 전부터 저와 가정의 모든 일은 늙은 형의 모습을 보고 저의 노쇠함을 알 수 있고, 가난한 저의 사정을 통해 형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구구하게 서로 끝을 볼 수 있는 계획을 삼기로 기약한 것은 날로 달로 퇴락하여 더 이상 여지가 없으니, 이것이 형과 비슷하지 않는 점일 따름입니다. 서글프고 한탄스러워도 어찌하겠습니까. 앞서는 여정(汝正)이 갔었고 뒤에는 송사(松沙)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같은 도(道)와 동향에서 인편이 이처럼 있었는데 모두 한 자의 안부 편지가 없었으니, 세상사에 골몰하여 칩거하는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중(處中), 경함(景涵) 두 벗이 질문한 것에 기대어 형의 많은 말을 볼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웠습니다. 기질 운운한 것에 대해 두 벗이 모두 미발(未發)일 때에는 기질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기질은 태어날 적에 얻으니 때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수는 없다. 다만 기(氣)가 작용하지 않으면 보존된 성(性)은 순수하여 하자가 없다. 이를테면 더러운 그릇에 물을 담아 물이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흙탕물이 일어나지 않아 담은 물이 깨끗한 그릇에 있는 것과 차이가 없지만 그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라고 할 수 없다. 이로써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은 기질상(氣質上)에서 말한 것이 아닌 줄 알겠다. 정자(程子)가 이른바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를 품부 받으므로 이치상 선악이 있게 마련이다.[人生氣稟 理有善惡]'라고 하였으니, 이는 기품상에서 말한 것이다. 하단에서 바야흐로 심성을 말하면서 '여기에서 볼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理)에 선악이 있는 것을 미발 때라고 규정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형의 의론을 보면 모두 저의 뜻과 합치합니다. 다만 사람이 태어날 때 기를 받으므로 이에 선악이 있는 것을 발용상에서 말한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매우 옳다고 여긴 것은, 이는 조금 분명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이에 선악이 있는 것은 다만 그 기품의 이를 논하였을 따름이니, 어찌 모름지기 발용과 발용하지 않은 것을 말하겠습니까. 형이 이른바 "형기(形氣) 이전에 있어서 굳이 이 성의 미발을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 것이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경함(景涵)이 또 영(靈)은 주재할 수 없고 구응(具應)할 수 없고 오직 신(神)만 주재가 되고 구응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 뜻은 영(靈)을 주재로 삼는다면 이(理)가 주재를 잃지만 영(靈)이 주재가 되는 소이가 바로 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듯합니다. 저는 '영이 아니면 죽은 고목과 식은 재일 따름이니, 고목과 식은 재가 무슨 주재함이 있겠는가. 오직 영한지라 이 때문에 곧 주재할 수 있고 곧 구응할 수 있다. 신(神)은 다만 묘용(妙用)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의 명칭이니, 어찌 영 밖에 또 별도로 신(神)이 있어 더불어 대대(待對)하겠는가.'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또한 형의 뜻과 합치합니다. 다만 주재가 된다는 설은 대개 묘맥(苖脈)이 있습니다. 형은 몇 해 전 신안(新安)의 간소에서 밤에 이야기할 때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형과 제가 앉아 있을 때 벗 권군오(權君五)가 곁에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군오가 말하기를 "주재자는 심이고 주재하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하였고, 저는 "그렇다면 심은 양쪽으로 주재함이 있는가?"라고 하고, 인하여 이것은 누구의 말인지 물으니, 군오가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형은 묵묵히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물러나 생각하기를 "군주는 한 나라의 주인이지만 명직(命職)을 받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주가 되는 소이는 명직이니, 어찌 이것으로 양쪽의 주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군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보잘것없는 이의 정견(定見)을 삼아 경함(景涵)과 말하여 과연 이렇게 운운한 것이 있었으니, 이 뜻은 이미 자세합니다. 지금 형의 편지를 보니 오히려 애매모호합니다. 또 말하기를 "한 영인데 양쪽으로 사용하여 기분(氣分)의 일이고, 이의 묘용이다."라고 하였으며, 단언하여 "과연 무슨 영(靈)을 가리키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개의 영이 있는 듯합니다. 형께서 이미 경함(景涵)이 영(靈)과 신(神)을 두 물로 보는 그릇됨을 말해 놓고서 도리어 한 영(靈)을 나누어 두 개로 만든 것입니까. 인(仁)하므로 영(靈)합니다. 영의 체는 실로 이(理)이니, 이와 영이 합해야지 바야흐로 묘용이 있습니다. 영(靈)의 용(用)도 이(理)입니다. 한 '영(靈)' 자에 나아가 주(主)로 하여 말한 바의 것은 기분(氣分)과 이분(理分)이 같지 않은 것이 있어서이니, 어찌 양개(兩箇)와 양용(兩用)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미발(未發)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동정(動靜)은 물(物)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무릇 물이 동하지 않는 것을 모두 정(精)이라고 하면 정과 미발은 그 간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태극음양권(太極陰陽圈) 운운한 것은 매우 소상합니다. 다만 심(心)은 음양(陰陽)과 같으니 정히 태극이 된다는 한 구는 견강부회한 뜻이 있는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말하기를 "심(心)이라는 것은 신(身)을 주재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 몸이 없으면 이 심이 없어서 기를 풀어버리고자 해도 그럴 수 없고, 그 진체(眞體)의 묘용은 이 이의 묘용이고 신(神)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이미 매우 지당합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또 말하기를 "이는 절로 신이 있다.[理自有神]"라고 하였으니, 이 4자는 지나치게 고원한 폐단이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또한 "심(心)은 성(性)과 지각(知覺)을 합한 이름이니, 지각은 영(靈)이다. 영을 제외하고는 단지 성이라 할 수 있으며, 성을 제외하고는 단지 영이라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두 가지를 합한 뒤에야 심이라고 이른다. 이 때문에 혹 영(靈)을 가지고 심이라고 말하지만 이(理)는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은 적이 없고, 혹 이를 가지고 심을 말하지만 영(靈)은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은 적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삼가 심을 이(理)로 인식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가 되는 것만 알고 기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며, 심을 기로 인식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가 되는 것만 알고 이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쪽 사람은 그 기가 되는 것만 보고 이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쪽 사람은 그것이 이가 되는 것만 보고 기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서로 실수한 것입니다. 영(靈)을 가지고 이(理)라고 한 것은 중하게 여기는 바가 이에 있고, 심을 가지고 이라고 한 것은 중하게 여기는 바가 이에 있고, 주재를 가지고 이라고 한 것은 중하게 여기는 바가 이에 있는 것이니, 어찌 한 '이(理)' 자를 뽑아내어 영(靈)이라고 하고 심(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理)는 절로 신(神)이 있다고 말하니, 이와 같다면 한쪽에서 작용(作用)이라는 비난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또 어찌 말류의 폐단이 과연 작용으로 귀결됨에 이르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겠습니까. 경함의 이른바 영(靈)은 구응(具應)할 수 없다는 설은 또한 처음 노형이 열어준 것입니다. 기억하건대, 예전에 형이 경함에게 보낸 편지에 "묘용(妙用)이 행해지는 것과 정영(精英)이 발하는 것이 바로 이른바 심(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설이 많습니다. 지금 뒤미처 기억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 "묘용이 행해진다면 정영은 그 가운데 있다."라고 하면서 도리어 정영을 들어서 대대(對對)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묘용이 행해지는 것은 오로지 이(理)에 속하여 정영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다만 진체(眞體)의 묘용이라고 운운한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또 "이(理)는 절로 신(神)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오로지 이에 속하게 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신(神)이라 하고 이(理)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옳지 않은 듯하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신(神)을 가지고 전적으로 기(氣)로 간주하는 것은 또 그릇되었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이 두 가지 말을 보면 신(神)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근세에 주기설(主氣說)이 성행하는데, 입언(立言)하여 지향하는 것이 곧 이단의 학문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 선생님과 화서(華西), 한주(寒洲) 두세 선생이 밝힌 것이 명확합니다. 다만 한주의 말은 지나친 곳이 있는 듯합니다. 함께 교유한 반열로 곽면우(郭俛宇)와 같은 이는 따라서 또 지나쳤습니다. 이를테면 정영(精英)을 이로 삼고, 부곽(郛郭 외성)을 주재로 삼고, 심(心)은 음양과 같다는 것을 가지고 기록의 오류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곳이 실로 많습니다. 하지만 노형의 말이 또 종종 조금 지나친 곳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노형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에게 있는 것이 비록 십분 칭정(稱停)하여 조금도 치우침이 없더라도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다 보면 반드시 착오가 없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곧게 하는 것은 또한 굽은 것일 따름입니다. 어떻게 한쪽의 마음을 복종시켜 타성일편(打成一片)24)에 이르겠습니까. 이는 바로 오늘날 노형의 책임입니다. 저는 다행히 노형께서 알아주시어 그간에 받은 은혜가 많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선생님이 떠나신 뒤에 붕우들은 흩어지고 오직 노형만 우뚝하여 오늘날의 영광이 되니, 비록 계속해서 따르고 좇지 못했지만 일심으로 향해 가서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매양 형의 논의를 보고서 혹 마음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기에 우리 두 사람의 견해는 조금의 차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우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삼가 죽기 전에 급급하게 나아가 질정하여 천추의 한이 되는 것에는 이르지 않고자 하였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원하건대 노형께서 자세히 분석하여 지당한 의론을 내려 주시어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구구한 저의 뜻에 부응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별지보여 주신 아무개의 변론에 대해 삼가 어리석은 저의 견해로 대략 분변하였으니, 원하건대, 형께서 일일이 보시고 가부를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의 변론을 분변하면서 다시 결점이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분변하겠습니까. 영(靈)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만 성(性)의 측면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理)가 아니면 영한 바가 없으니, 영한 것이 바로 이입니다. 그렇다면 기의 영(靈)은 바로 이의 묘(妙)이니, 어찌 일찍이 두 영(靈)이 있겠습니까. 묘용(妙用)할 수 있고 주재할 수 있으니, 주재하지 못하는 것이 형의 말씀과 같겠습니까. 음(陰)의 영(靈)과 양(陽)의 영은 또한 다만 이 영이고,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한 것도 다만 이 영입니다. 다만 가장 영한 가운데 영한 것은 상문(上文)의 태극과 상대하므로 혹 태극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가장 영한 것은 태극이 아닙니다. 가장 영하기 때문에 태극의 전체가 갖추어졌을 따름입니다. 하늘은 행위가 없으므로 태극으로 말하고, 사람은 행위가 있으므로 가장 영한 것으로 말하니, 공자(孔子)의 이른바 "사람은 도(道)를 크게 할 수 있다.[人能弘道]"와 장자(張子)의 이른바 "심은 성을 검속(檢束)할 수 있다.[心能檢性]"라는 것이 모두 이 뜻입니다. 그렇다면 "크게 할 수 있다.[能弘]"의 '능(能)'과 "검속할 수 있다.[能檢]"의 '능(能)'이 이른바 주재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반드시 그러한 결과가 있을 것이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양단이 있다고 하면서 집에는 두 주인이 있고, 나라에는 두 군주가 있는 것처럼 하겠습니까. 언젠가 저와 형 및 대곡(大谷)이 선생님을 강상(江上)에서 모셨을 적을 기억해 보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이(理)가 어떤 물건인지 모르고 다만 '소이(所以)' 2자를 이(理)로 간주한다. 오늘날 소이(所以)를 가지고 말하는 자는 모두 이(理)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제가 신안(新安)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소이(所以)' 자를 말하자, 형이 꾸짖으면서 "소이(所以)의 뜻은 곧 이단(異端)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수선하여 제가 비록 더 이상 말하지 못했지만 내심 삼가 의심을 품어 '소이(所以)'를 가지고 이를 말한 것은 사서(四書)의 훈석(訓釋) 및 여러 선생님의 기록에 드러난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당시 사람들의 폐단을 구제한 것이니 실로 이와 같아야 어찌 하지만 노형께서 따라서 이처럼 잘못하시는 것입니까. 노형의 오늘날 말은 또한 당일의 견해가 아님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비록 매우 어리석지만 대략 주기(主氣)의 그릇됨을 아니, 어찌 전적으로 심(心)을 기(氣)로 인식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실로 이(理)로 여기지만 형이 "이(理)는 절로 신(神)이 있다."라고 한 말과는 같지 않은 듯합니다. 부디 살펴 주십시오. 이전 편지에서 이미 완성하였지만 또 여운이 남아 있어 감히 이렇게 언급합니다. 대개 인편을 구하기 어려우니, 또 어느 때 이것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운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지만 우선 그칩니다. 年歲以來。身家凡百。以兄之老。而可以知弟之衰。以弟之貧。而可以知兄之生。但區區相期以爲究竟之計者。日頹月落。更無餘地。此爲不似兄處耳。悲嘆何爲。前有汝正之去。後有松沙之行。同省同鄕。便禠若此。而皆未有一字之問。其滾蟄之狀。從可知矣。賴有處中景涵二友所質問。得見兄多少說話爲幸。氣質云云。二友皆以爲未發無氣質云。故弟謂氣質得於有生。不可以隨時有無。但氣不用事。則所存之性。純粹無瑕。如汗器貯水。水止不動。則泥滓不起。而所貯之水。與在潔器者。無異。但其器。則不可謂之潔器也。是知未發已發。非氣質上說。程子所謂人生氣稟。理有善惡。是氣稟上說。至下段方說心性。此可見也云云。而未嘗以理有善惡爲未發時。今見兄論。皆與鄙意合。但以人生氣稟。理有善惡。爲發用上說。爲極是。此則小有未瑩。理有善惡。特論其氣稟之理而已。何須說發用與未哉。兄所謂及在於形氣上面。而不必言此性未發者。非此意耶。景涵又以爲靈不能主宰。不能具應。惟神爲主宰爲具應。蓋其意。若以靈爲主宰。則恐理之失主宰。而不知靈之所以爲主宰者。卽理也。弟謂非靈。則枯木死灰耳。枯木死灰何主宰之有。惟其靈也。是以便能主宰。便能具應神只是妙用不測之名。豈靈之外。又別有神與之待對哉。此亦與兄意合。但所以爲主宰之說。蓋有苖脈。兄不記昔年新安刊所夜話時乎。兄與弟坐。權友君五在傍語次。君五曰主宰者心。主宰底性。弟曰。然則心有兩主宰乎。因問此誰語也。君五曰。朱子語也。兄則黙然無語。弟退而思之。以爲君爲一國之主。而非所受之命職。則無以爲主。此所以爲主者。命職也。豈可以此而爲兩主乎。遂以所聞於君五者。爲區區之定見。而與景涵語。果有是云云矣。此意已熟。今見兄書。而猶瞢然也。又云一靈而兩用之。曰氣分事。曰理之妙。而斷之曰。果指甚箇靈。詳其語意。似有兩箇靈。兄旣言景涵靈神二物之非。而乃析一靈爲兩箇耶。仁故靈。靈之體。固是理。理與靈合。方有妙用。靈之用亦是理。是就一靈字。而所主而言者。有氣分理分之不同。曷嘗有兩箇兩用之可言乎。未發是心上說。動靜是物上說。凡物之不動者。皆謂之靜靜與未發不其有間乎太極陰陽圈云云極爲消詳。但心猶陰陽正爲太極一句。似有些牽强底意。未知何如。又曰。心者主乎身而得名者也。無是身則無是心。卸却氣者不得。而其眞體妙用。乃此理之妙。至神而不測者也。此語。已是十分亭當。而其下又曰。理自有神。此四字。不其無過高之敝耶。弟亦以爲心是合性與知覺之名。知覺則靈也。際了靈。只可謂之性。除了性只可謂之靈。必合二者而後。方謂之心。是以或以靈言心。而理未嘗不在其中。或以理言心。而靈未嘗不在其中。弟嘗竊謂認心爲理。非病也。知爲理而不知爲氣。是病也。認心爲氣。非病也。知爲氣而不知爲理。是病也。今一邊之人。見其爲氣而不見其爲理。一邊之人。見其爲理而不見其爲氣。蓋胥失之也。以靈爲理者。以所重在理也以心爲理者。以所重在理也。以主宰爲理者以所重在理也。豈可剔撥出單理字。而謂之靈。謂之心乎。今曰理自有神。如此則何以解一邊作用之譏。又安知未流之敝果不至作用之歸乎。景涵所謂靈不能具應之說。亦未始非老兄啓之也。嘗記昔年兄與景涵書。有曰。妙用之行。精英之發。卽所謂心。如此說多矣。而今不可追記。但曰。妙用之行。則精英在其中矣。而及擧精英曰對之。然則妙用之行。專屬於理。而無俟乎精英矣。今但曰眞體妙用云云。則好矣。而又曰理自有神。然則至神不測。專屬乎理也。朱子曰。謂神謂理。却恐未然。又曰將神專作氣看。又誤。只此二語。神之爲義。不其瞭然乎。近世主氣之說盛行。其立言指歸。便同異學。惟我先師及華西寒洲一三先生發揮之廓如也。但寒洲之言。恐有過處。其游從之列。如郭俛宇因以又過之。如以精英爲理。以郛郭爲主宰以心猶陰陽爲記錄之誤。如此處固多矣。不意老兄之言。又不無種種微過處。未知老兄以爲如何。在我雖十分稱停。無一毫之偏。一傳再傳。不可保其必無差失。況矯枉過直。是亦枉而已。何以服一邊之心。而至於打成一片乎。此正今日老兄之責也。弟幸爲老兄所辱知。而前後受賜。不啻多矣。況師門逝後。朋知零散。而惟老兄巍然。爲今日之靈光。雖不能源源從逐。而一心向逞。何嘗以斯須而忽忘哉。每見兄論。或不能無疑於心。以爲吾兩人之見。不宜有絲毫之差爽。兩且乃爾耶。切欲汲汲就正於未死之前。無至爲千古之恨。而迄未遂矣。願老兄細細分析。垂賜至當之論。以副區區朝聞夕可之意如何。別紙俯示某辨。謹以愚意。略加辨焉。願兄一一視至。以可否之也。辨人之辨。而不免復有疵類則何以辨爲夫靈可以言心。不可以言性。然非理則無所靈。所靈乃理也。然則氣之靈。卽理之妙也。曷嘗有二靈。有能妙用者。有能主宰者。有不能主宰者如兄敎乎。陰之靈陽之靈。亦只是此靈。得其秀而最靈。亦只是此靈。但最靈之靈。與上文太極相對。故或認以爲太極。然最靈非太極最靈。故太極之全體。具焉耳。天無爲。故以太極言。人有爲。故以最靈言。孔子所謂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皆此意也。然則能弘之能。能檢之能。非所謂主宰處乎。旣有其能。必有其所。豈可以此而謂有兩層。如家之有二主國之有二君乎。嘗記弟與兄及大谷侍先師于江上也。先師曰。今人不識理爲何物。但將所以二字作理看。今之言所以字者。皆不識理之人也。其後弟之往新安也。有人言所以字。兄責之曰。所以之義。便同異端云云。稠擾之中。弟雖不能更請。而心竊疑之。以爲以所以言理。著於四書訓釋及諸家者。不啻多矣。先師之言。捄時人之敝。固當如此。而豈老兄因以過之如此乎。老兄今日之言。亦未始非當日之見也。如何如何。弟雖至愚。粗知主氣之非。豈有專認心爲氣之理乎。弟固以爲理而但不似兄所謂理自有神之語耳。千萬諒察。前書旣成而又有餘菀。敢此及之。蓋便人難得。又不知何時可以論此故也。餘菀非止於此。而姑止之耳。 타성일편(打成一片) 불교(佛敎)의 용어로, 피아(彼我)ㆍ주객(主客)ㆍ선악(善惡)ㆍ호오(好惡) 등 모든 상대적 대립 관념을 타파하여 차별이 없는 평등의 세계로 조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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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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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후윤25)에게 보냄 與鄭厚允 방장산(方丈山)에서 헤어진 뒤 두 해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데 형의 체후(體候)는 동정(動靜)이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농사가 풍년이니 영남도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흉년이 거듭된 뒤라 위로가 될만할 듯하지만 시국이 이처럼 소란스러우니 앞으로 편안히 앉아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문(同門)의 옛 친구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고 남아 있는 이가 이제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모두가 노쇠하여 수백 리 먼 곳에 떨어져 지내느라 서로 소식도 접하지 못하고 어려움에도 서로 관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번 머리를 들어 동쪽을 바라볼 때마다 커다란 탄식을 이기지 못할 따름입니다. 면우(俛宇)26)가 세상에 나갔을 때 형도 더불어 나아갔으니 시사(時事)는 과연 어떤지, 처하는 곳은 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자세히 알지 못하기에 늘 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아, 눈앞에 닥친 시색(時色)이 진펄에서 위태로움을 기다리고27) 칼이 살갗에 이른28) 듯합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지금에 와서 절실합니다만 그럴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형은 근년에 산재(山齋)에 머무르셨습니까, 계정(溪亭)에 머무르셨습니까? 만년에 성정(性情)을 함양하는 운치, 영재를 키우는 즐거움이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지난가을에 계획했다가 이루지 못한 호남행은 올가을에 다시 도모하시는지요? 저는 해마다 묶여 있는 채 벗어날 수 없어 상황이 고달프기만 합니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날개(새)가 앞으로 마음껏 날아오르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정(咏亭)에 기와를 얹는 일을 마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경비를 아직도 갚지 못하여 매번 이것이 근심이었습니다. 일전에 송사(松沙)29)의 편지를 받았더니 가족을 데리고 금계산(金雞山)으로 들어갈 생각이며 금계산은 옥과(玉果)와 담양(潭陽) 등에 걸쳐있다고 합니다. 연간에 황생 철원(黃生澈源)30)과 의견을 주고받은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황생은 "영(靈)은 묘용(妙用)을 주재(主宰)하지 못하고 묘용을 주재하는 것은 신(神)이다. 영은 온갖 사물의 이치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하지 못하고 온갖 사물의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영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이(理)는 작용(作用)과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대체로 심(心)은 원래 허령(虛靈)한 것이고 허령한 것은 본래 오묘하게 합합니다. 이 때문에 당체(當體)로 보자면 기(氣)라고 하고 본체(本體)로 보자면 이(理)라 하고 묘처(妙處)로 보자면 신(神)이라고 합니다. 신(神)과 영(靈)이 어찌 일찍이 별도의 방향이나 처소가 있고 별도로 시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황생은 여전히 그렇다고 믿지 않으니 또 제 견해에 잘못이 없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형께서 상세히 분변하여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대체로 심(心)은 기(氣)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理)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있어, 진실로 각각 한 쪽만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다만 기(氣)를 위주로 말하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주장을 바로잡을 근거를 도리(道理)의 측면에서 자세히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선사(先師)께서 '정상(精爽)은 피상적인 것이다.'31)라고 말씀하신 까닭이고, 노형(老兄)이 '기(氣)를 자조(資助 돕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황생의 견해는 대체로 여기에 근원을 두면서도 지나쳐 이렇게 허령한 것은 심(心)이 아니라는 말까지 하였으니 옳겠습니까. 삼가 기억하건대 요 몇 해 사이에 형께서 황생에게 편지를 보내서 "묘용(妙用)의 운행과 정영(精英)의 발현이 곧 이른바 심(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제 생각에는 매번 의혹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묘용의 운행이 비록 이(理)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정영(精英)을 포괄하고 있으니 하단에 별도로 정영을 말하여 짝지은 것은 지나친 췌언(贅言)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理)만 말하고 정영은 간여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른바 이(理)는 작용(作用)으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기자이(機自爾 기(機) 자체의 작용)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승(理乘 이가 기를 타고 주재하는 것)의 의리를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지난번에 면우(俛宇)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보았더니 간간이 지나치게 이(理)를 위주로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혼자 제멋대로 개탄하기를, "나에게 있는 도가 대공지정(大公至正)하더라도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해지다 보면 착오가 없을 수 없다. 하물며 나에게 있는 것이 먼저 잘못되었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후학들에게 이와 같은 폐단이 결코 없으리라는 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方丈一別。星霜再周。未審秋高。兄體動止何似。年形得稔。想嶺中如之耶。荐凶之餘。有若可慰。而時騷如此。未知前頭可以安坐飽喫否也。同門舊契。零星餘存。見無幾人。而又皆衰老。相滯於落落數百里之遠。音聞不相接。痛癢不相關。每矯首東望。不勝浩歎而已。俛宇之出。兄與同升。未知其時事果何如而所處又何如。遠未相悉。每切願聞。嗚乎。目前時色。如需之至泥。如剝之到膚。惠好同歸之思於斯爲切。而不可得。奈何奈何。兄近年住着在山齋乎溪亭乎。晩年恬養之趣。英育之樂。想有不淺淺者矣。前秋所營湖行而未就者。更於今秋圖之耶。弟年年絆已。出脫不得苦況苦況。未知縶籠之翼。其將有任意翶翔之日乎。咏亭蓋瓦了已有年。而債費尙未了刷。每以爲悶曰。前得松沙書。有絜家入金雞山中之意。山在玉果潭陽等地云耳。年間與黃生澈源有所論說者。蓋黃生以爲靈不能主宰妙用。而主宰妙用者。神也。靈不能具衆理應萬事。而具衆理應萬事者。神也。弟以爲如此。則靈爲無用之長物。理爲作用之別事。夫心合下是虛靈底。虛靈合下是妙合。是以以其當體則謂之氣。以其本體則謂之理。以其妙處則謂之神。神與靈。曷嘗是別有方所別有時節者哉云云。而黃生猶不信之然。又安知鄙見不有差誤處耶。願兄詳辨以示之也。大抵心有以氣言者。有以理言者。固不可各執一邊與之嘵嘵也。但在今世主氣之日。而所以捄之者。不得不於道理上加詳焉。此先師所以有精爽皮殼之語。老兄所以有氣爲資助之說。黃生之見。蓋源於此而過之。至爲此虛靈非心之語者。可乎。竊記頃年兄與黃生書。有曰妙用之行。精英之發。卽所謂心。此語於鄙意。每不能無疑。妙用之行。雖是理。而包精英在其中。下段別言精英以配之。不已贅乎。若曰專言其理。而精英無與云爾。則所謂理者。不其歸乎作用乎。此與說其機自爾。而繼言理乘之義。恐無異矣。曩見俛宇與人書。間間有主理太過處。私竊慨嘆。以爲道之在我。大公至正。而一傳再傳。猶不無差失。況在於我者。已不免先有差失乎。此後學之敝。不可保其必無也。如何如何。 정후윤(鄭厚允)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자이다. 또 다른 자는 영오(英五)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 애산(艾山), 물계(勿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정방훈(鄭邦勳)의 아들로 1864년(고종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圭), 권운환(權雲煥) 등이 있으며, 합천 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 49권이 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호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명원(明遠)으로 경상도 단성(丹城) 출신이다. 25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03년 통정대부, 비서원 승에 제수되었고 저서로는 《면우문집(俛宇文集)》이 있다. 진펄에서 위험을 기다리고 《주역》 〈수괘(需卦) 초구(初九)〉에 "먼 들녘에서 기다린다."라고 하고, 〈구이(九二)〉에 "모래밭에서 기다린다."라고 하고, 〈구삼(九三)〉에 "진펄에서 기다린다."라고 하여, 점점 험난한 지역에 접근함으로써 위험에 빠지게 됨을 비유하였다. 칼이 피부에 이른 《주역》 〈박괘(剝卦) 육사(六四)〉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르니 흉하다."라고 하고, 그 상전(象傳)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르는 것은 재앙이 매우 가까워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27)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가학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1895년 이후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하였다. 황생 철원(黃生澈源)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능주(綾州) 운곡(雲谷)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경함(景涵)이며 호는 중헌(重軒), 은구재(隱求齋)이다. 정상(精爽)은……것이다 《노사집(蘆沙集)》 권6 〈답박형수(答朴瑩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호흡(呼吸)의 나가고 들어옴, 영위(榮衛)의 오르고 내림이 모두 이 기(氣)입니다. 반드시 '기(氣)' 자 아래에다 '정상(精爽)'이란 글자를 붙여야 '심(心)' 자의 경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정상'이란 글자도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就人身而言, 噓吸之出入, 榮衛之陞降, 皆是物也. 必氣字下, 著精爽字, 方說入心字境界.然精爽亦是皮殼說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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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윤에게 보냄 與鄭厚允 연전의 편지에 대해서 인편(人便)이 없어서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형의 체후(體候)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울분에 차 있고 감정이 격앙되어 여지가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때문에 몸이 손상되지 않기만 바랍니다. 먼 곳에서 걱정스러운 마음만 절실합니다. 아우는 지난여름 초에는 손자며느리의 상을 치르고 겨울 초입에는 집사람의 상을 치렀습니다. 1년 안에 질병과 시름이 거의 거르는 날이 없었으며 뒤이어 신병(身病)으로 여러 달에 걸쳐 고통을 겪고 있건만 아직도 이렇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제 상황이 참으로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은 말하지 않으니만 못하니 모두 그만두겠습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형이 찬술한 〈기의(記疑)〉32)는, 해박하고 적합하며 정밀하고 상세하며 명백하고 강직한 것을 보니 선사(先師)의 지결(旨訣)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일세의 몽매한 자들을 깨우치게 하신 것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 오늘날의 성안에 이러한 문장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한쪽 사람들이 본다면 세 치 혀가 있더라도 다시 무슨 말로 형을 힐난하겠습니까. 한쪽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아우처럼 오래도록 고심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던 자일지라도 안개가 걷히듯 확연해지니 어찌 위안이 되고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조짐이 이와 같고 육신의 쇠함이 이와 같으니 강론과 토론의 자리에서 자주 뵙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쭙고자 하는 한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심(心)은 분명히 이(理)이고 영(靈)은 그 본지(本旨)입니다. 만약 영(靈)을 자조(資助)로 여긴다면 본지에 대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조목에 "성정(性情) 이외에는 다시 따로 심(心)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아마도 지나칠 정도로 명쾌하게 말씀하신 듯합니다. '인으로 사랑하고 예로 공경하고'33)에서 이 '이(以)' 자는 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쌓인 회포가 가득하지만 종이에 세세하게 다 늘어놓을 수 없으니 그저 서글픔만 절실합니다. 어느 때가 되어야 한자리에 같이 앉아 이 마음을 펼치게 될까요? 농산(農山)34) 형은 근래 안부가 어떠십니까? 겨를이 없어 아직 안부를 묻지 못하였더니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年前書。無便未復久矣。未審兄體何似。憂憤慷慨。想無餘地。幸不以此致損否。遠外馳慮。徒切下情。弟去夏初哭孫婦。冬初哭室人。一年之內。疾病憂戚。殆無間日而繼以薪憂。數朔叫苦。尙此不退。殘年身況。誠難聊賴。時象不如不言。都閣之。兄所述記疑。荷此俯示。見其該洽精詳明白截直。使先師旨訣足以不墜於地。而開一世之瞽蒙者。甚不偶爾也。嗚乎誰知今日域中。有此等文字乎。使一邊之人見之。雖有喙三尺。更有何言相詰乎。不惟警一邊之人。雖如弟而宿苦疑菀。確然霧除。曷不慰幸。但時氛如此。身衰如此。未能源源於講討之末也。然有一節奉質者。心固理也。而靈其本旨也。若以靈爲資助。則其於本旨。果何如也。目曰。性情之外。更別無心。此等處。恐或不爲發之太快耶。以仁愛。以禮敬。此以字。非心之謂耶。積懷滿腔。不能縷悉臨紙只切悵恨。何時合席。以敍此意。農山兄近節何如。忙未修候。不安不安。 기의(記疑) 《노백헌선생문집(老栢軒先生文集)》 권28 〈잡저(雜著)〉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을 가리키는 듯하다. 전우(田愚)가 기정진의 〈납량사의(納涼私議)〉와 〈외필(猥筆)〉에 대한 변론을 지어 유포하자, 이에 대해 변무하는 글을 지어 기정진이 주리론의 입장에서 이이의 학설을 계승 보완하였음을 밝힌 글이다. 인으로……공경하고 《회암집(晦菴集)》 권67 〈잡저(雜著)〉 '원형이정설(元亨利貞說)'에 나오는 말이다.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성(性)이고, 생(生)하고 장(長)하고 수(收)하고 장(藏)하는 것은 정(情)이며, 원(元)으로 생(生)하고 형(亨)으로 장(長)하고 이(利)로 수(收)하고 정(貞)으로 장(藏)하는 것은 심(心)이다.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성(性)이고, 측은과 수오와 사양과 시비는 정(情)이며, 인(仁)으로 애(愛)하고 의(義)로 오(惡)하고 예(禮)로 양(讓)하고 지(智)로 지(知)하는 것은 심(心)이다.【元亨利貞性也, 生長收藏情也, 以元生以亨長以利收以貞藏者, 心也. 仁義禮智性也, 惻隱羞惡辭讓是非情也, 以仁愛以義惡以禮讓以智知者, 心也.】" 농산(農山) 정면규(鄭冕圭, 1850~1916)의 호(號)이며 정면규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사촌형인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의 문인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을 방문하여 충남 노성(魯城)에서 의거(義擧)를 계획하였으나 외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곽종석(郭鍾錫), 허유(許愈), 기우만(奇宇萬), 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권병구(權秉球) 등과 서신으로 왕래하였으며 저서로는 《농산문집(農山文集)》 15권 8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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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35)【우만】에게 보냄 與奇會一【宇萬】 늦봄에 복중(服中)의 체후36)가 우위(友衛)하시다니 위로되고 그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 우제(虞祭)37)와 부제(祔祭)38), 그리고 졸곡(卒哭)39)이 차례대로 지나갔습니다. 아, 우리 선생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은 세월이 어느덧 지금에 이르렀습니까.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40) 같은 모슷ㅂ은 하루하루 멀어지고 면봉산(面凰山)의 새 무덤에는 이미 풀빛이 푸르릅니다. 애처롭게 남아 있는 이 목숨은 어리석기만 하니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아우는 정성이 깊지 못하고 형편에 구애받아 움막을 짓고 궤연을 모시지41) 못하고 급하게 되돌아와 내 집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이것이 한결같이 섬기는 도리42)이겠습니까. 아, 선생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고, 선생의 도를 실추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어찌 우리가 독실하게 힘을 다해야 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노형(老兄)께서 더욱 스스로 힘을 쏟아 덕을 상고하려는 천하 학자들의 행렬이 선생의 뜨락에 끊이지 않게 하고 모두 선생께서 훌륭한 손자를 두셨다고 한다면 노형(老兄)께서 선생의 뜻과 공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당일에 문하에 이르렀던 선비들 또한 흩어지지 않고 귀의하는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주상이 내리는 치제(致祭)는 과연 이달 안에 거행하겠습니까?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일은 성급하게 논의하기 어렵더라도 1년, 2년의 기한을 두고 사방에서 널리 구하여 수합하고 교감한 다음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이미 완성되었을 때 거사(居士)라고 적은 것은 제 마음에 의혹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널리 듣고 예에 밝은 선비가 반드시 신중하게 살펴서 반드시 절충해야 하겠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거사(居士)는 선생께서 평소에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으니 스승을 받드는 후학의 처지에서도 자신을 낮췄던 말로 스승을 일컫겠습니까. 유서(遺書)에 "노사 거사(蘆沙居士)로 충분하다."라고 하신 것은 주된 의미가 별도로 다른 데 있지 거사(居士)라는 두 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선생 같은 백세 종사(百世宗師)를 단지 거사라고 일컫는 것이 과연 온당하겠습니까. 또 명정(銘旌)43)에 이미 노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니 신주(神主)의 앞면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명정과 신주의 앞면이 달리 일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 선유(先儒)의 논의가 있습니다. 다시 상의하여 확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春暮服體友衛。慰慕無任。襄奉之餘。虞祔卒哭。次第經過。鳴乎。我先生不在世者。歲月已至此耶。光風霽月。日遠一日。而凰山新阡。草色已靑矣。哀此餘生。蠢蠢奚依。弟誠淺勢拘。未得築場侍几。而遽然退歸。燕處私室。此其事一之道耶。鳴乎先生之望。不可負也。先生之道。不可墜也。此豈非吾輩慥慥盡力之日耶。惟老兄益加自勵。使四方學者考德之行。不絶於先生之庭。而皆曰先生有孫。則非但老兄之所以繼述者。至矣。而當日及門之士。亦將不至渙散。而有所依歸者矣。自上致祭。果爲月內行之耶。遺稿登刊。雖難遽議。限以一年二年。廣求四方收聚校勘然後。可以下手矣向於旣成時。書以居士者。於愚意不能無疑。但博聞長禮之士。極其愼審。必有所折衷者。而不敢開喙。退而思之。終始未瑩。夫居士者。先生平日所自謙者。則後學宗師之地。亦以自謙者稱之乎。遺書有云蘆沙居士足矣者。其主意。別有所在。而不在居士二字矣。以我先生百世宗師。只稱居士者。果為穩當耶。且銘旌旣稱蘆沙先生。則粉面亦當如之。銘旌粉面。不可二稱者。又有先儒之論矣。更加商確。如何。 기회일 회일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이다. 기우만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이며 호는 송사(松沙)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늦봄에 복중(服中)의 체후 조부인 기정진(奇正鎭)이 사망한 것이 1879년 12월이다. 여기서 말하는 늦봄은 1880년을 가리킨다. 우제(虞祭) 체백(體魄)을 떠난 혼령을 안정시키기 위한다는 뜻에서 매장 당일부터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신분에 따라 9번, 7번, 5번, 3번 지낸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에 "세 번 우제(虞祭)를 지낸다.【三虞】"라고 한 것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우(虞)는 상제(喪祭)의 이름이다. 우는 안정시킨다는 뜻이다.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정기는 가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효자는 그 혼령이 방황하지 않도록 세 번 제사를 지내 안정시킨다. 아침에 장례를 치르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우제를 지내는 것은 차마 하루라도 혼령이 돌아갈 곳이 없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虞, 喪祭名. 虞, 安也. 骨肉歸於土, 精氣無所不之, 孝子爲其彷徨, 三祭以安之. 朝葬, 日中而虞, 不忍一日離.】"라고 하였다. 부제(祔祭) 졸곡제 다음날 지내는 제사의 명칭으로, 소목(昭穆)의 반차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이다. 진호(陳澔)는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부(祔)라는 말은 덧붙인다는 뜻이다. 부제(祔祭)란 조부에게는 다른 묘(廟)로 옮겨야 함을 알리고, 이번에 죽은 이에게는 이 묘로 들어가야 함을 알리는 것이다.【祔之爲言附也. 祔祭者, 告其祖父, 以當遷他廟, 而告新死者, 以當入此廟也.】" 하였다. 졸곡(卒哭) 우제(虞祭)를 모두 마친 다음 첫 번째 강일(剛日)에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슬픔이 줄어들어 이후로는 무시(無時)로 하던 곡을 그치고 조석곡(朝夕哭)만 하므로 졸곡제라고 한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의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卒哭.】"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졸곡(卒哭)은 삼우제(三虞祭) 뒤에 지내는 제사 명칭이다. 처음에는 조석곡을 하는 사이라도 슬픔이 밀려오면 곡을 하지만, 이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는 그치고 조석곡만 할 뿐이다.【卒哭, 三虞之後祭名. 始朝夕之間, 哀至則哭, 至此祭, 止也, 朝夕哭而已.】"라고 하였다. 화창한……밝은 달 황정견(黃庭堅)이 《산곡집(山谷集)》에서 주돈이(周敦頤)를 두고 "주무숙은 속이 시원스러워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인품의 뛰어남에 대한 비유이다. 움막을……모시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 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한결같이 섬기는 도리 부모와 임금, 그리고 스승은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의 말 가운데 "백성은 부모, 임금, 스승 셋의 은혜로 살아가니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國語 晉語》 명정(銘旌) 생전에 사용하던 깃발이나 따로 마련한 비단 또는 베에 죽은 사람의 관직, 성씨 등 호칭을 써서 표시한 상례(喪禮)의 기물이다. 명(銘) 또는 명정(明旌)이라고도 한다. 《가례 상례 입명정(立銘旌)》에 "강색(絳色) 비단으로 명정(銘旌)을 만든다. 너비는 온폭이고, 3품 이상은 9자, 5품 이하는 8자, 6품 이하는 7자이다. '모관모공지구(某官某公之柩)'라고 쓰고, 관직이 없으면 살아 있을 때의 호칭을 따른다.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되 명정의 길이만큼 하여 영좌의 오른쪽에 기대 놓는다.【以絳帛爲銘旌. 廣終幅, 三品以上九尺, 五品以下八尺, 六品以下七尺. 書曰某官某公之柩, 無官即隨其生時所稱. 以竹爲杠, 如其長, 倚於靈座之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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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에게 보냄 與奇會一 따듯한 봄날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일상의 평안하고 화락하며 절기가 매우 좋아 거처를 옮긴 이후로 점차 안정을 찾아 괴로운 상황에 이르지는 않으시는지요? 석역(石役 무덤에 석물을 세우는 일)은 곤궁한 형편에 어떻게 처리하셨는지요? 성과는 이루셨는지요? 일찍 사람을 보내 묻고 싶었지만, 정월(正月) 이래 병도 많고 일도 많아 줄곧 이에 골몰하느라 매양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는 이번 강회(講會)에 직접 가서 안부를 여쭈려고 했으나 계획이 또 어긋나서 그저 2, 3명의 우생(友生)이 가는 것으로 대략이나마 이렇게 대신 안부를 여쭙습니다. 강론할 때 돌아가신 선생의 자리를 마련하고 일변일두(一籩一豆)로 제사를 올려서 간략하게나마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을 펼치자는 것이 영남의 여러 벗이 주창한 논의이고 이미 충분히 의논한 사항입니다만, 이번 회합에서는 과연 이대로 거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담헌(澹軒 담대헌(澹對軒))은 당시에 전영(尊楹)44)을 하신 장소이고 관복(冠服)과 장리(杖履 지팡이와 신발)를 살아계실 때처럼 진설해 놓았으니 마음이 끌려 사모하는 절실함이 어찌 다른 선성(先聖)이나 선사(先師)가 백세(百世) 뒤 천년(千年)을 지난 것에 견주겠습니까. 의절(儀節)을 자세히 정하여 지금부터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春令方深。伏惟燕閒怡養。節候崇適。搬寓餘僓。漸次妥帖。不至貽惱否。石役。窮節事力。何以經紀。有以垂就否。早欲遣人相問。開歲以來。多病多故。一味淟汨。每庸歎恨。初以今番講會。爲躬造承穩計。計又差池。只因二三友生之去。畧此替候耳。講時設先先生位。以一邊一豆。畧伸瞻慕之誠者。此是嶺中諸友所倡之論。而已有爛商者。則未知今番之會。果能依此行之耶。澹軒是當日奠楹之地。而冠服杖履象設如在。則其感慕之切。豈他先聖先師曠百世越千年之比而已哉。詳定儀節。從今行之如何。 전영(奠楹) 훌륭한 인물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기주소(禮記註疏)》 권7에 "은나라 사람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를 마련하였다.……나는 은나라 사람이다. 내가 어젯밤 꿈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전헌을 받았다.……명왕이 나오지 않으니 천하에 누가 나를 높이겠는가. 내가 장차 죽을 것이다.【殷人殯於兩楹之間.……丘也殷人也. 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間.……夫明王不興, 而天下其孰能宗予? 予殆將死也.】"라고 하였는데, 7일 뒤에 과연 공자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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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 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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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원72) 자명 李希遠字銘 상하 사방을우라 하고지난 옛날 오늘의 지금을주라 하네오직 성인은 하늘을 바라그 덕을 넓게 운용하고오직 현인은 성인을 바라73)이 법칙을 넓고 굳세게 하네이씨의 아들나이가 바야흐로 14세이니길일을 택하고74) 길일을 받아75)관례를 마쳤네몸을 바로하기를 넓음으로 하고덕을 드러내기를 멂으로 하네넓어야 무거운 것을 감당하고굳세어야 멀리까지 도달하네천 근의 짐이 등에 있고만 리의 길이 앞에 있네날로 달로 매진하여혹시라도 허물이 없도록 하라 上下四方。是之謂宇。古往今來。是之謂宙。惟聖希天。廣運其德。惟賢希聖。弘毅是則。李氏之子。年方二七。差穀涓吉。三加告畢。正體以弘。表德以遠。弘以任重。毅以致遠。千斤在背。萬里在前。日邁月征。無或有愆。 이희원(李希遠) 이홍신(李弘信, 1895~?)을 말한다. 자는 희원,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오직……바라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지학(志學)〉에 "성인은 하늘을 본받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본받기를 바라고, 선비는 현인을 본받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길일을 택하고 원문의 '차(差)'는 '선택'의 뜻이고, '곡(穀)'은 '선(善)'의 의미이다. 길일을 받아 원문의 '연길(涓吉)'을 풀이한 말이다. 길한 날을 받는다는 뜻으로, 납폐와 사주단자를 받은 신부 측에서 혼례식 날짜를 받아서 신랑 측에 '연길장(涓吉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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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 文仁涵字銘 문생 재갑이관례를 이미 마쳤네인함으로 자를 지으니그 뜻이 무엇인가원이 만물을 퍼뜨리고형이 갖가지 형상을 유행시키네형통했다가 회복하지 못하면사물이 어찌 이룸이 있겠는가까닭에 이와 정이대화를 보합하네77)석과는 먹히지 않고78)신령한 뿌리는 또한 감추네바야흐로 아직 토해내지 않았을 땐껍질이 단단하고 둥그네생생하는 이치 내면에 포함하고 있어태극이 이에 온전하네만 가지 변화의 기축이고백 가지 이치의 창고이네해치지도 말고 잃지도 말아이것을 보호하고 길러야 하네그 뜻이 매우 정밀하니가슴에 새겨 싫어하지 말라우레가 치고 비가 조화로우면장차 껍질이 터지는 것 보리라79) 文生載甲。冠已三加。字以仁涵。其義何居。元播群彙。亨流品形。通而不復。物豈有成。所以利貞。保合大和。碩果不食。靈根亦晦。方其未吐。甲包團圓。生理內函。太極斯全。萬化機軸。百理庫藏。勿害勿喪。是保是養。其義甚精。銘佩無斁。雷解雨和。將見甲柝。 까닭에……보합하네 《주역》 〈건괘(乾卦) 단(彖)〉에 "건도가 변하여 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루니, 대화를 보합하여 이에 이롭고 정하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석과는 먹히지 않고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이는 양효(陽爻) 하나가 다섯 개의 음효(陰爻) 위에 있으면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레가……보리라 《주역》 〈해괘(解卦) 단(彖)〉에 "천지가 풀려서 우레가 치고 비가 오고, 우레가 치고 비가 오니 온갖 과목과 초목의 껍질이 모두 터지니, 해의 때가 크도다.[天地解而雷雨作, 雷雨作而百果草木, 皆甲坼, 解之時大矣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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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경80) 자명 任宇卿字銘 상하 사방을우주라 하네크기로는 밖이 없고멀기로는 다함이 없네군자는 이것을 본받아더불어 체를 함께하네요임금의 성덕은 광대하게 운행 되고81)증자의 현철은 넓고 굳세었네82)되와 말 부와 곡83)을종정과 강해처럼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합하는 것 가려서 수용하네경계가 어긋나면일곱 군데로 배어들고 여덟 군데로 새게 되네울타리를 가르고 부수어물과 나를 공평하게 하네확연히 크게 공평하면천지가 문안에 있네아, 우경이여이 자를 볼지어다 上下四方。是之謂宇。大則無外。遠則不禦。君子是則。與之同體。堯聖廣運。曾賢弘毅。升斗釜斛。鍾鼎江海。以量而容。擇合而受。畦畛逕庭。七滲八漏。剖破藩籬。蕩平物我。廓然大公。八荒在闥。嗟乎宇卿。視此表德。 임우경(任宇卿) 임태주(任泰柱, 1881~1944)를 말한다. 자는 우경,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성재집》이 있다. 요임금의……되고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익(益)이 제순(帝舜)에게 "요제(堯帝)의 덕이 광대하게 운행되어 거룩하고 신묘하며 무와 문의 덕을 모두 구비하자, 황천이 돌아보고 명하여 사해를 다 소유하고 천하의 군주가 되게 하였습니다.[帝德廣運, 乃聖乃神, 乃武乃文, 皇天眷命, 奄有四海, 爲天下君.]"라고 제요(帝堯)를 찬미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증자의……굳세었네 《논어》 〈태백(泰伯)〉에 증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니 무겁지 않겠으며, 죽은 뒤에야 그만두니 멀지 않은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부(釜)와 곡(斛) 부는 6말 4되, 곡은 10말이 들어가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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