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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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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정 선생 조공찬 병서 老稼亭先生曺公贊【幷序】 여양(汝陽)에는 옛날 독행의 선비가 있었으니, 노가(老稼) 선생 조공(曺公)이 그 사람이다. 나는 근방의 후생으로 높은 산처럼 우러른 것이 지금 40년이 되었다.기축년(1889, 고종26) 여름 그의 손자 회계옹(晦溪翁)100)이 선생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벽산(碧山)의 숙소로 나를 방문하여 보여주었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은 평소에 독서는 실천을 위주로 하고 실천은 어버이 섬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근본이 확립되어 도가 생겨나 차례로 확충하였는데 한마디 말과 한 가지 행실이 순수하여 법도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성대한 덕과 지극한 행실은 전날 사우들의 입을 통해 들은 것과 더불어 부절을 맞춘 것 같았고 그 시종의 섬세한 것은 더욱 상세하였다. 회계옹의 문학과 명망이 세상에서 추중 받는 것은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러하겠는가. 《시경》〈대아(大雅) 기취(旣醉)〉에 "군자가 효자를 두었도다.[君子有孝子]"라고 하였고, 《주역》〈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찬(贊)은 다음과 같다.은거하여 효성으로 봉양함에 隱居孝養상제의 법칙 힘써 따랐네 勉循帝則물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지어 漁樵耕稼숙수101)가 끊이지 않았네 菽水不絶지극한 정성이 감응하는 바에 至誠攸感하늘이 상서를 내리네 天翁生祥하루의 봉양을 一日之養삼공과 바꾸지 않네102) 不換三公광채를 숨겨 베풀지 않았지만 潛光不施여풍은 사람에게 남아있네 餘風在人많은 사람들의 칭송 쇠하지 않아 輿誦不衰후백이 서로 천거하네 侯伯交薦포증하는 일명이 貤褒一命돌아가신 뒤에 더욱 융숭하네 身後彌隆서석산103) 남쪽에 瑞石之陽여수가 넘실거리네 汝水洋洋물가에 한 언덕 있으니 濱有一邱화목이 무성하네 有亭瀟灑선생께서 지내시던 곳이네 先生遺庄노가라 편액을 걸었으니 揭以老稼은미한 뜻 더욱 드러나네 微意愈彰후손이 아름다움 계승하여 有孫趾美문과 담장이 공허하지 않네 門墻不空나의 숙소로 방문하여 過我旅榻유문을 보여 주네 示以遺文두 손으로 받들어 장엄하게 읽어보니 雙擎莊讀글자마다 전훈이네 字字典訓생전에 미처 뵙지 못한 것 한스러우니 恨不及時이것을 보고 스스로 힘쓰네 鑑此自勵실추시킨 고아가 失墜孤苦슬피 눈물 흘린들 어찌 쫒을 수 있으랴 哀霣曷追아, 너희 후생들은 嗟爾後生이 유장을 보아라 視此遺狀한마디가 하나의 약석이니 一言一藥어찌 공경한 마음 일으키지 않으랴 曷不起敬 汝陽古有篤行士。老稼先生曺公其人也。余以傍近後生。高山仰止。爲四十年于玆矣。己丑夏。其孫晦溪翁。持先生遺狀。過余於碧山旅舍而示之。謹覵先生。平日讀書以踐履爲主。踐履以事親爲先。本立道生。次第充拓。而一言一行粹然。無不出於規矩繩墨之中。其盛德至行。與前日得於士友之口者。如合左契。而其始終纖悉。則爲加詳矣。晦溪翁之文學聲望。見重於世者。豈無所自而然耶。詩曰。君子有孝子。易曰。碩果不食。曷不偉哉。贊曰。隱居孝養。勉循帝則。漁樵耕稼。菽水不絶。至誠攸感。天翁生祥。一日之養。不換三公。潛光不施。餘風在人。輿誦不衰。侯伯交薦。貤褒一命。身後彌隆。瑞石之陽。汝水洋洋。濱有一邱。花木蔥籠。有亭瀟灑。先生遺庄。揭以老稼。微意愈彰。有孫趾美。門墻不空。過我旅榻。示以遺文。雙擎莊讀。字字典訓。恨不及時。鑑此自勵。失墜孤苦。哀霣曷追。嗟爾後生。視此遺狀。一言一藥。曷不起敬。 회계옹(晦溪翁) 조병만(曺秉萬, 1829~1895)을 말한다. 자는 흠일(欽一), 호는 회계(晦溪),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전라도 화순에 살았던 유학자로 흥선대원군이 실세하여 직곡산장(直谷山莊)으로 은퇴하자 1875년(고종12) 대원군을 고종이 직접 모셔와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위리안치되었다. 저서로는 《회계집》이 있다. 숙수(菽水) 콩죽과 맹물이라는 뜻으로, 가난하지만 효자가 어버이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자로(子路)가 집안이 빈궁해서 효도를 제대로 행하지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극진히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효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하루의……않네 왕안석(王安石)의 시 〈송교집중수재귀고우(送喬執中秀才歸高郵)〉에 "고인이 하루 동안이라도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았네[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라고 하였다.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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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정찬 병서 枕潄亭贊【幷序】 천지 일종의 청수(淸秀)한 기(氣)가 흐르고 솟아 명산(名山)과 호수(好水)가 되고, 배태하여 일인(逸人)과 달사(達士)가 된다. 일인과 달사가 명산과 호수를 만나면 그 취미가 합하는 것은 비록 관포(管鮑)의 교분104)이라도 그 뜻을 넘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만나면 반드시 올라 임해보고, 올라 임해보는 것이 부족하면 반드시 거닐어보고 거닐어보는 것이 부족하면 반드시 그 땅에 나아가 정자를 지어 마치 장차 거기서 몸을 마칠 것 같이 한다.호남에 금오산(金鰲山)105)이 있으니, 대개 남쪽 지방의 승구(勝邱)이다. 중고에 향 선생(鄕先生) 팔우(八愚) 홍공(洪公)106)이 일찍이 이곳에서 장수유식(藏修遊息)107)하였다. 선생은 일찍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할 뜻을 품었으나 결국 등용되지 못하였고, 뜻을 얻은 것은 오직 이 한 구역 수석(水石)일 뿐이었다. 지극한 정은 무정(無情)에 있고, 지극한 맛은 무미(無味)에 있어 여기에서 잠자고 양치하면서 그저 여생을 마쳤다. 오호라! 흥폐(廢興)는 일정하지 않고 유무(有無)는 서로 바뀌니, 사람과 정자는 볼 수 없으나 오직 바위에 걸린 구름, 고개 위의 달, 시냇가의 새, 강가의 원숭이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옛날을 회상하며 다하지 않는 정을 갖게 한다.을유년(1885, 고종22) 봄에 6대손 채주(埰周) 씨108)가 여러 종친들과 도모하여 옛터의 조금 북쪽에 나아가 중건하여 한 번 새롭게 하였으니, 그 계술(繼述)109) 긍구(肯構)110)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은 또 산수를 만난 것 때문만이 아니다. 어진 주인을 만난 것은 금오산의 다행이고, 어진 자손을 만난 것은 침수정의 다행이다. 나는 비록 불민하지만 우선 금오산을 위해 축하하고 이어서 침수정을 위해 축하한다.찬(贊)은 다음과 같다.금오산 아래는 維鰲之下홍씨의 토구111)이네 洪氏菟裘초연히 멀리 떠나 超然遐擧조용히 수양하는 것에 힘썼네 俛焉潛修정자가 황폐해 진 지 이에 오래 되었으니 亭廢斯久후손들이 도모하였네 雲仍是圖이미 정자를 지어 旣肯其構그 도모를 전술할 것 생각하네 思述厥謨종족을 모아 기뻐하고 合族懽忻벗을 불러 절시112)하였네 聚友切偲강습에 과정이 있고 誦習有程가곡113)을 때로써 하네 歌哭以時감화가 미친 곳에 濡染攸曁종유하니 또한 영광일세 從遊亦榮오호라! 세세토록 嗚乎世世그 명성 실추시키지 말지어다 無替厥聲 天地一種淸秀之氣。流峙而爲名山好水。胚胎而爲逸人達士。以逸人達士而遇名山好水。則其趣味之合。雖管鮑之契。不足以兪其意。是以。遇之必登臨焉。登臨之不足。必徜徉焉。徜徉之不足。必卽其地結其亭。若將終身焉。湖之陽有金鰲山。蓋南方勝邱也。中古鄕先生八愚洪公。嘗藏修於此。先先夙抱經濟。竟不見用。而所以相得。惟此一區水石。至情在於無情。至味在於無味。枕焉潄焉。聊以卒歲。嗚乎。廢興不常。有無相禪。人與亭不可得見。而惟有巖雲嶺月。溪鳥江猿。令人有懷古不盡之情。歲乙酉春。六代孫埰周氏。謀與諸宗。就舊址之稍北。重建而一新之。其出於繼述肯構之至意者。又不但爲山水之遇而已也。遇賢主人。金鰲山之幸也。遇賢子孫。枕潄亭之幸也。余雖不敏。先爲金鰲山賀。繼以爲枕潄亭賀。贊曰維鰲之下。洪氏菟裘。超然遐擧。俛焉潛修。亭廢斯久。雲仍是圖。旣肯其構。思述厥謨。合族懽忻。聚友切偲。誦習有程。歌哭以時。濡染攸曁。從遊亦榮。嗚乎世世。無替厥聲。 관포(管鮑)의 교분 춘추 시대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우정을 말한다. 《열자(列子)》 〈구명(九命)〉에 "관중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내가 젊어서 곤궁했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하였는데 내 몫으로 많이 이익을 취해도 포숙은 나를 욕심 많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는 용암산(聳岩山, 547m)의 옛 이름이다.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솟을 용(聳)과 바위 암(岩)자인데, 원래는 산위의 샘에 금자라[金鰲]가 있다고 하여 금오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용암이 솟아오르듯 솟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향 선생(鄕先生) 팔우(八愚) 홍공(洪公) 홍경고(洪景古, 1645~1699)를 말한다. 호는 팔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장수유식(藏修遊息)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채주(埰周) 씨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호는 봉남(鳳南)이다. 계술(繼述) 조상의 하던 일이나 뜻을 끊지 아니하고 이어 가는 것을 말한다. 긍구(肯構)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이다. 기꺼이 집터를 닦고 집을 짓는다는 뜻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아들이 잘 계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은 당(堂)의 터도 만들려고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건물을 만들려고 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토구(菟裘) 춘추 시대 노 은공(魯隱公)이 왕위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려고 한 곳인데, 전하여 은거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春秋左氏傳 隱公11年》 절시(切偲)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이다. 절절은 간곡하고 지극한 것이고, 시시는 자상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붕우 간에 강마하고 권면하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어떠해야만 선비라고 할 만한가를 묻자, 공자가 답하기를 "간곡하고 지극하며 자상하고 부지런하며 화락하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子路》 가곡(歌哭) 신령에게 노래하고 곡(哭)을 하는 것이다.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에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니 노래와 곡을 하기를 청합니다.[凡邦之大烖 歌哭而請]"라고 하였는데, 정현의 주(注)에 "노래하는 자가 있고, 곡을 하는 자가 있는 것은 슬픔으로써 신령을 감동시키고자 한 것이다.[有歌者, 有哭者, 冀以悲哀感神靈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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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량문 上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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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영모재 상량문 密陽朴氏永慕齋上樑文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그 생각 보존하니이에 전대에 지었던 것 보겠네뜻을 잘 계승하여 그 일 전술하니이에 오늘의 긍당이 있게 되었네이것이 자손이 우러러 사모하는 방법이요생도들이 학업을 익힐 장소를 얻게 되었네생각건대 밀양 박씨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능주 서쪽 토구의 고을을 지켰네당부114) 같은 것은의리를 보관한 것 길이 받들고모 수 모 언덕에선영의 나무 그늘 대대로 보호하네한 구역 기둥과 글방은실로 진군의 정자115)이고백년의 구림은이 어찌 계씨의 침문이겠는가상로 내릴 때 처창한 생각116) 깃들이고조석으로 바라보며 절하는 정성 펼치네동상과 서실에서친척의 정 즐거워 하고봄가을 예서와 경서로자제들의 학업 점검하네이에 지은 지 오래되어서는기울고 넘어지는 근심 없지 않네담장은 다시 높아진 위태로움 보겠고서까래는 너무 지나치게 꺾임이 있네낙양의 정자117)는비록 족히 말할 것 없지만안영의 실려118)는절로 전수받은 것이 있네창업하고 보호하여자손들로 하여금 이을 수 있게 하고집을 지음에 법을 이루었으니선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네여러 의론이 일제히 같아공사를 바야흐로 일으키네일은 크고 힘은 부족하니옛날 그대로 따르려 하고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이 썩으니형세가 장차 다시 새롭게 하는데 이르네이에 깎고 세워계사119)와 당실의 위치 정하고저기에 도끼질 하고 톱질하여동량과 두공의 재목 실어오네목수들은 능히 그 책임 다하고마을 사람들은 즐거이 그 일에 달려가네혼중120)의 익진121)이이괘(離卦)의 문명한 상서에 응하고그림자 측량하니 갑경122)의 방향이라사방의 풍기가 모이는 줄 알겠네그런대로 합하고 아름다우니위나라 형의 선거와 같고123)높고 화려하니장노의 미송을 생각하네124)오직 명예를 길이 마칠 것을 헤아리니장차 며칠 되지 않아 이루어지네긴 들보를 들어 올림에짧은 노래 짓네어영차125)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126)문산의 맑은 기운 성대하네강루127)가 지척이라 추로128)를 바라보니성교가 넘쳐흘러 상서로운 기운 통하네어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붓같이 높은 봉우리 삼태성처럼 나열하였네만 리의 무민129) 가까이 바라보이니밤마다 달빛은 가을 연못에 비치네어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한 쌍의 벽학이 하늘에 들리도록 우네누가 장차 철곽으로 오랑캐 방어하여우리 의복을 오랑캐 복식으로 바뀌지 않게 할까어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지석의 맑은 강 쉼 없이 흐르네하늘 끝에서 북두성에 기대 서울 바라보니바라건대 질병 없이 천수를 누리기를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위에는 덕산이 있어 첩첩의 산 열렸네즐비하게 늘어선 네 척의 봉분에천추토록 향기로운 제향 쇠하지 말라어영차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아래엔 후손들 결사를 많이 맺었네구물의 청전130) 여기에서 볼 것이니대대로 이어서 성대하게 유아한 이 많겠네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는천지는 고문의 운수 되돌리고산천은 원기의 빼어남 내려주어자식은 효도하고 신하는 충성하여가문의 기업 영원히 전하고집집마다 현송하여대대로 사림의 법도 있게 하소서 追遠而存其思。聿覩前世之創。善繼志而述其事。玆有今日之肯堂。是子孫瞻慕之方。得生徒肄業之所。惟密陽簪纓之族。守綾西菟裘之鄕。若堂若斧。永奉衣履之藏。某水某邱。世護松梓之蔭。一區阿塾。實是甄君之亭。百年邱林。此豈季氏之寢。寓霜露悽愴之思。伸朝夕瞻拜之誠。東廂西室。悅親戚之情。春禮秋書。課子弟之學。玆當經歷之久。不無傾圮之憂。垣墉見復上之隉。榱桷有大過之橈。洛陽亭館。雖不足言。晏嬰室廬。自有所受。創業垂護。使子孫可繼。作室底法。念先考攸休。僉議齊同。功役方作。事巨力綿。非不欲於因舊。歲久物敗。勢將至於改新。鑿斯築斯。定階所堂室之位。斧彼鋸彼。輸棟樑欂櫨之材。梓匠能勝其任。閭里樂赴其役。昏中軫翼。應三离文明之祥。景測甲庚。知四方風氣之聚。始有富有。同衛荊之善居。輪焉煥焉。念張老之美頌。惟永終是度。將不日而成。聊擧修樑。爲述短唱。兒郞偉抛樑東。文山淑氣鬱蔥蔥。降婁咫尺瞻鄒魯。聲敎洋洋瑞彩通。兒郞偉抛樑南。高峰如筆列台三。嫠閩萬里膽望近。夜夜月廻秋水潭。兒郞偉抛樑西。一雙碧鶴聞天啼。誰將鐵郭防洋竺。毋我衣裳易介蹄。兒郞偉抛樑北。砥石江淸流不息。倚斗望京天一方。庶無疾病壽千億。兒郞偉抱樑上。上有德山開疊嶂。累累成行四尺封。千秋不替苾芬餉。兒郞偉抛樑下。下有雲仍多結社。舊物靑氈監在玆。承承濟濟多儒雅。伏願上樑之後。天地回古文之運。山川降元氣之英。子孝臣忠。永傳門戶之基業。家絃戶誦。世有士林之典章。 당부(堂斧) 분묘(墳墓)를 말한다. 《예기》 〈단궁(檀弓)〉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건대, 봉분하는 것을 마치 마루처럼 쌓아 올린 것이 있고……도끼날처럼 위가 좁게 쌓아 올린 것도 있었으니, 나는 도끼처럼 하는 것을 따르겠다.' 하셨다.[昔者, 夫子言之曰:吾見封之若堂者矣,……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진군(甄君)의 정자 송(宋)나라 때 서주(徐州)의 부호였던 진씨(甄氏) 집안이 진군(甄君)의 대(代)에 이르러 빈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함께 장사지내고 무덤 가에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을 담은 사정(思亭)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古文眞寶後集 卷10 思亭記》 상로(霜露)……생각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낙양(洛陽)의 정자 《주자서절요》 권5 〈답진동보(答陳同甫)〉에 "거센 바람이 불어 정자가 넘어졌는데, 마치 하늘이 때맞추어 일으킨 것 같습니다. 저 낙양의 정자야 심히 부러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大風吹倒亭子, 却似天公會事發. 彼洛陽亭館, 又何足深羡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안영(晏嬰)의 실려(室廬) 안영이 나무로 만든 한 칸의 방에 거처했다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7년에 "제(齊)나라 안환자(晏桓子)가 죽으니, 그의 아들 안영이 거친 상복을 입고 나무로 지은 한 칸의 방에서 거처하였다."라고 하였다. 계사(階戺) 섬돌 양 옆에 비스듬히 놓인 돌인데 당전(堂前)의 의미로 쓰인다. 혼중(昏中) 혼지중성(昏之中星)의 준말로, 28수(宿) 중 초저녁 하늘 중앙의 남방(南方)에 보이는 별을 말하는데, 이 별을 관찰하여 사시(四時)를 확정할 수 있다. 익진(翼軫) 이십팔수 가운데 익수(翼宿)와 진수(軫宿)로, 남방의 별이다. 갑경(甲庚) 길흉이라는 뜻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길하다는 의미이다.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의 선후갑경(先後甲庚)에서 "갑의 앞과 경의 뒤는 길하고 경의 앞과 갑의 뒤는 나쁘다는 것이다. 이 갑과 경의 앞뒤라는 것은 음양학설상 삼합(三合)의 설과 일치된다."라고 하였다. 그런대로……같고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에 거처하기를 잘하였다. 처음 소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갖추었다.'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子路》 높고……생각하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진(晉)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완성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美哉輪焉, 美哉奐焉!]'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윤(輪)은 높고 큼을 말한 것이고, 환(奐)은 많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영차 원문의 '아랑위(兒郞偉)'는 '어영차'의 의성어로, 상량을 어영차 올린다는 뜻이다. 또는 젊은 사람을 뜻하는 아랑(兒郞)의 복수형으로, 상량문에서 도목수(都木手)가 장인(匠人)들을 부를 때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이라는 설이 있다.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옛날에 집을 지을 때 길일을 택하여 상량식을 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떡이나 기타 잡물(雜物)을 싸 가지고 와서 축하하면서 이것을 장인(匠人)들에게 먹인다. 그러면 장인의 우두머리가 떡을 대들보의 상하 사방으로 던지면서 상량문을 읽고 축원을 한다. 《文體明辯附錄 卷13 上梁文》 강루(降婁)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규성(奎星)과 누성(婁星) 두 별이 위치한 자리를 말한다. 춘분(春分) 무렵 초저녁에 나타난다. 추로(鄒魯)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으로,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예교(禮敎)와 학문을 숭상하는 지방을 일컫게 되었다. 무민(婺閩) 무원(婺源)과 민중(閩中)의 병칭으로, 무원은 주자의 선대 고향이고 민중은 주자의 출생지인데, 곧 주자를 가리킨다. 저본의 '嫠'는 '婺'의 오자로 보고 수정하였다. 청전(靑氈) 푸른 모포라는 뜻으로, 선대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이나 가문의 전통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 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王羲之列傳 王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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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164) 개기165) 축문 詠歸亭開墓祝文 능주 남쪽 명승지에칠송촌166)이 있네백 가구가 모여 살며천 년 동안 평안하게 지내왔네강산은 빼어나고신기는 밝고 신령하네까닭에 가만히 도와줌이 많아이에 길이 안녕함을 받았네호남의 선비들 강론하러 모이는 것봄가을로 일정함이 있네인륜에 보탬이 있기를 생각하고나라의 광영이 더해지를 원하네다만 의거할 곳이 부족하니또한 두루 행하기 어렵네한 구역 경영하기 시작하니진실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네땅의 마땅함을 살펴보니이 언덕만한 곳이 없네시초점과 거북점이 모두 길하니아녀자도 함께 도모하네사림이 의로운 마음 내고향리에서 부역을 돕네가리고 준비하여 좋은 날 선택해서일찍 집 지을 터를 마련했네일이 매우 중대하니감히 공경히 고하지 않겠는가정성과 재계를 극진히 하여백복을 기원하네맑고 깨끗한 기 모였고문명한 운수 돌아왔네붕우들 강마하여날로 달로 매진하네언덕의 다북쑥이 무성하고167)현송168)이 양양하네음사가 햇살에 사라지고정교가 해처럼 밝아지네노나라가 되고 추나라가 되는 것은또한 땅의 영광이고보를 낳고 신을 낳음은169)나라의 상서였네신령께서는 이것을 보시고때로 위로하고 도와주소서감히 향기로운 제수 올리니흠향하시기를 바라네 綾南勝區。七松名村。百家生聚。千年奠安。江山秀拔。神氣明靈。故多陰祐。玆受永寧。湖士講聚。春秋有常。思補人紀。願添國光。但乏依據。亦難輪行。一區經始。允愜衆情。相厥宜土。莫如玆邱。蓍龜恊吉。婦孺同謀。士林出義。鄕里助役。涓蠲差穀。肇基開宅。事繫重大。敢不祗告。致誠致齊。以祈百福。氣鐘淸淑。運回文明。朋友講磨。日月邁征。陵莪菁菁。絃誦洋洋。陰邪睍消。正敎日彰。爲魯爲鄒。亦地之榮。生甫生申。爲國之禎。維神鑑玆。以時慰相。敢薦芬芳。庶幾尙饗。 영귀정(詠歸亭):정의림(鄭義林)이 강학을 위해 1893년 12월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會松里)에 건립한 건물이다. 여기에 아홉 성인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다. 개기(開基) 공사를 하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칠송촌(七松村)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에 있는 마을이다. 언덕의 다북쑥이 무성하고 인재를 잘 육성하였다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다북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 군자를 만나고 나니, 나에게 백붕을 준 듯하여라.[菁菁者莪, 在彼中陵. 旣見君子, 錫我百朋.]"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보를 낳고 신을 낳음은 주(周)나라의 기둥인 중산보(仲山甫)와 신백(申伯)을 낳았던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이 신명을 내려 보후와 신백을 탄생시켰네.[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데선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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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죽취정131) 상량문 竹翠亭上樑文 묘소와 가까이 있으니절로 먼 조상 추모하여 바라보며 사모하는 장소이고상숙132)을 본떴으니또 학업을 익히며 지내는 방도가 되네그런대로 합하고 완전하니송도를 잘하였네133)가만히 생각건대 죽취산은호남의 승경이요범씨의 세장이네네 면에 시내와 산이 둘렀으니둘러 읍하고 안고 있는 형상 아님이 없고백 년의 선대 언덕이라맡아 지키고 호위하는 의식 쇠하지 않네죽은 이 섬기는 것은 생각을 다하는 것이니이 곳에 어찌 집이 없을 수 있겠는가해의 그림자를 헤아려보니음양 향배의 마땅함이 바르고기꺼이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집을 지으니규구 방원의 제도를 다하였네오직 편안히 거처하며 제자리를 얻었고아, 길일에 낙성하였네그 정한 것을 궁구해 보건대어찌 산수를 유람하며 감상할 계획이겠는가이 방에 들어와 지냄에글 짓고 술 마시며 한가로이 즐기기 위함이 아니네네 척의 높은 묘소 가까우니종신토록 길이 사모하는 마음 깃들이고주선하며 오르내림에서리와 이슬 내릴 대 처창한 마음 배나 간절하고출입하며 바라봄에누군들 아울134)의 망극한 한이 없겠는가더구나 장수135)할 별장이고길이 계술할 효성스러운 생각이 있음에야봄가을로 시서 읽어가정의 학문 실추 시키지 않고날로 달로 매진하여집안의 명망 더욱 높아지게 하네자신과 어버이를 위하는 것은또한 한 가지 일이고효도와 학문에 힘쓰는 것이또한 어찌 두 가지 일이겠는가선조께서 엄연히 임해 계신 듯하면감히 태만하고 소홀히 할 수 없고나아주신 분에게 욕됨이 없기를 생각하면성인과 현인이 될 수 있네오직 전형이 여기에 있으니바라건대 후손들은 잃지 말아야 하네어진 사람 계승하여정실136)의 아름다움으로 삼고군자가 문채나니더욱 세한의 절조137) 힘쓰네삼가 짧은 글을 지어긴 들보 올리는 것 돕네들보 동쪽으로 던지니만 리의 부상138)에 해가 이미 붉네연무가 사라져 모두 말끔해 지니이로부터 문명을 천하가 함께하리라들보 남쪽으로 던지니노인성의 광채 정히 드리워지네봉래전139)에 공경히 올리길 새로 도모하니수록과 강녕 누려 화락하고 또 즐겁길들보 서쪽으로 던지니아득히 저 한 쪽의 미인을 바라보네진령140)을 캐어 누구에게 줄 것인가한 길 거슬러 올라가려니 길이 막히고 또 높네들보 북쪽으로 던지니뭇 별들 빙 돌아 북극성 향하네덕으로 인도하면 이와 같음이 있으니삼라만상의 마음 얻지 못함이 없네들보 위쪽으로 던지니창창한 은하수 멀리 우러를 수 있네한바탕 거센 바람이 어둠을 쓸어내니사문이 세세토록 보존되어 무탈할 것이네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강물이 흘러 동남쪽 들로 들어가네일통의 조종141)인 온 천하가온갖 제도와 문물 중화로 실어 나르네삼가 바라건대천지가 순박함으로 돌아오고강산이 도와주며개미처럼 조술하여142)대대로 뛰어난 인재가 있으며종사143)가 이에 법도로 삼아대대로 아름다운 제향 계승하게 하소서 密邇墳塋。自是追遠瞻慕之所。依倣庠塾。又爲肄業修息之方。苟合苟完。善頌善禱。竊惟竹翠之山。湖鄕勝境。范氏世庄。四面溪峰。無非環揖拱抱之狀。百年邱隴。不替典守衛護之儀。事死所以盡思。此地靈容無室。揆日之景。正陰陽向背之宜。肯構而堂。盡規矩方圓之制。惟爰居而得所。差穀朝而落之。究厥相攸。豈是山水遊賞之計。入此室處。非爲文酒燕閒之娛。近四尺之有崇。寓終身之永慕。周旋陟降。倍切霜露悽愴之心。出入膽望。誰無莪蔚罔極之恨。矧爲莊修之別業。永言繼述之孝思。春詩秋書。家庭之學不墜。日征月邁。門戶之望愈隆。爲己爲親也。只是一事。務孝務學。亦豈有兩端。若先祖之儼臨。不敢慢不敢忽。思所生之無忝。可以聖可以賢。惟典刑之在玆。庶來裔之無失。賢人攸似。用爲庭實之佳。君子有斐。益厲歲寒之節。恭疏短引。助擧修樑。抛樑東。萬里扶桑日已紅。烟消霧除霍然盡。從此文明天下同。抛樑南。老人星彩正毿毿。新圖拜獻蓬萊殿。壽祿康寧樂且湛。抛樑西。逖彼一方望美兮。蓁苓采采云誰贈。一路溯洄阻且躋。抛樑北。衆星旋繞拱樞極。道之以德有如斯。職職云云無不得。抛樑上。雲漢蒼蒼遙可仰。一陣長風掃黑昏。斯文世世保無恙。抛樑下。江河流注東南野。一統朝宗率土濱。車書玉帛輸諸夏。伏願上樑之後。天地廻淳。江山助發。蛾子以述。代有俊茂之才。螽斯是繩。世襲芬苾之享。 죽취정(竹翠亭) 전라남도 광주시 생용동 죽취산 기슭에 있는데, 야옹(野翁) 범현식(范瀅植 1862~1923)이 지은 재사이다. 상숙(庠塾) 상고 때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로서 제왕의 벽옹(辟雍), 제후의 반궁(泮宮) 등 태학(太學)과 대칭되는 것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 교육하던 것에는 마을에는 숙이 있고, 고을에는 상이 있고, 지방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라고 하였다. 송도를 잘하였네 진(晉)나라 헌문자(獻文子)가 집을 짓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간 대부들 가운데 장로(張老)가 송축을 하고 이에 응수하여 헌문자가 기원한 것을 두고, 군자가 "송축도 잘했고 기원도 잘 했다.[善頌善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아울(莪蔚)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불초한 자식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인 줄 알았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저 천한 쑥이로다. 슬프고 슬퍼라 부모님이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수고하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장수(藏修)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이다. 정실(庭實) 조당(朝堂)에 진열한 진상 물품이라는 뜻으로, 조정이나 종주국에 바치는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세한(歲寒)의 절조 세한은 해가 저물어 가는 한겨울의 매운 추위를 이르는 말인데, 노년의 지조를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부상(扶桑) 동해 속에 있다는 신목(神木)이다. 해가 뜰 때 이 나뭇가지를 떨치고 솟구쳐 오른다 하여 해가 뜨는 곳이나 동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탕곡 위에 부상이 있어 열 개의 해가 목욕하는 곳인데 흑치국의 북쪽에 있다.[湯谷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라고 하였다. 봉래전(蓬萊殿)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궁궐을 가리킨다. 진령(榛苓) 개암나무와 감초(甘草)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 저 미인이여! 서방의 미인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는 "서방의 미인은 서주(西周)의 훌륭한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현자(賢者)가 나쁜 세상의 하국(下國)에서 태어나 서주의 왕을 그리워하여 지은 것이다." 하였다. 진령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저본의 '蓁'은 '榛'의 잘못으로 보고 수정하였다. 조종(朝宗) 본디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가서 알현하는 것으로, 봄에 알현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알현하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 모여드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조회(朝會)하러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강수와 한수가 바다로 흘러가 모여든다.[江漢朝宗于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개미처럼 조술하여 아(蛾)는 개미이고 술(述)은 조술(祖述)하여 익힌다는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개미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워 익힌다.[蛾子時術之]"라는 말에서 왔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 "개미는 작은 벌레이다. 개미의 새끼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조술(祖述)하고 배워서 큰 개밋둑을 만든다. 이것으로 배우는 자도 오랫동안 학문을 쌓아서 큰 도를 이룸을 비유한 것이다.[蟻子小蟲, 蚍蜉之子, 時時術學銜土之事, 而成大垤. 以喩學者由積學而成大道也.]"라고 하였다. 종사(螽斯)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篇名)인데, 자손이 번성한 것을 의미한다. 그 시에 "메뚜기의 깃이 화락하게 모였으니, 너의 자손이 번성함이 마땅하도다.[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하여, 문왕의 비(妃)인 태사(太姒)가 투기하지 않아 자손이 번성함을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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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귀후재144) 상량문 歸厚齋上樑文 삼가 생각건대옛 무덤 새롭게 단장하니이에 현회에 운수가 있음을 보겠고후손이 지나간 선조의 일 이으니첨모에 방법이 없어서는 불가하네경영하여 기꺼이 집을 지으니영령이 오르내리며 자리에 계시네삼가 생각건대 좌승상 여양공145)은우리나라의 화려한 문벌이요고려조의 이름난 경상이네제치146)를 종으로 삼고 회암147)을 조로 삼으니현저하게 세덕의 아름다움 있고아버지는 청계148) 아들은 문절149)이니족히 계술의 아름다움 우러르겠네인부150)에 거주하였으니명성과 업적이 남쪽 고을에서 으뜸이고신안을 본관으로 하니후손들이 팔도의 산천에 퍼져있네오직 세월이 변천하니황발의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정승의 묘소라고 하고아, 능곡151)이 변하니백양152)의 역사 오래 전해져 초목들이 가리키네다행히 이 한 조각 지석이오백 여년 만에 드러났네수일 전에 두 명의 백옥 동자가거주하는 사람의 꿈에 신령으로 나타나고마침 이 때에 한 가닥 상서로운 기운이여럿이 의논하던 분묘에 잇닿았네확실하고 온전하니절로 신명이 수호한 것이고부합하기를 기다렸으니또한 성효의 감통으로 말미암았네당부153) 같으니묘소의 모양 다시 바꾸고이에 비갈을 세우니묘소의 의물이 비로소 갖추어졌네종족에게 도모하여사시로 제향하는 의식 거행하고관사에게 아뢰니산을 둘러 봉식154)하는 절도를 삼가네이곳은 선조께서 내려주신 땅이니추모하는 마음 어떠하겠으며더구나 의리를 보관하였으니소중함이 각별하네현인이 지나간 곳에오히려 노공의 무주 사당155)이 있는데선조의 유허에어찌 진군의 사정을 짓지 않겠는가몇 개월 사이에도모가 합하고 힘을 같이 하며한 가문의 사람들일을 즐겁게 하고 공에 나아갔네높고 화려하니장노의 미송에 부응하고조금 갖추고 많이 갖춤에위나라 형의 선거와 같네156)부엌과 욕실 대청과 정원은거의 대축157)이 예를 봉행하는 장소가 되겠고기둥과 글방, 당과 무는또한 족히 매년 종족이 모이는 규범을 행하겠네연음하며 낙성하여귀후라는 편액 걸고달려와 마주하니158)여재159)의 의형을 바라보네짧은 노래 지어들보 올리는 것 돕네어영차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십자천의 흐르는 물 맑기가 허공 같네부상에 머리 돌려봄에 요망한 기운 다 사라지니밝게 걸린 일월이 무궁하게 비추네어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천운산의 산색 쪽빛같이 푸르네위대한 명성 훌륭한 자취 오래도록 흘러 전하니주조160)는 천년토록 창해에 잠겼네어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우뚝한 국사봉에 저물녘 구름 깔렸네상서로운 광채 문명한 운수 끌어당기니저 강루를 봄에 별들이 규성에 모이네161)어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우뚝한 무등산이 한 지역 진압하네강호의 만 리에 토구를 경영하니충신의 연모하는 마음 북극성 향하지 않을 때가 없네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어진 하늘은 일찍이 사문을 없애지 않았네건건162)하여 쉼 없음이 순환하는 것 같으니군자가 본받아 스스로 힘쓰네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많은 강물 다투어 동남의 들로 달려가네겸손하면 능히 유익함을 받고 가득차면 손해를 부르니이 이치 분명한데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으랴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자손은 창대하고문학은 번성하며영령은 평안하여옛 터가 진실로 아름다움을 돌아보며형작163)이 향기롭고 깨끗하여해마다 제향함에 떳떳함이 있게 하소서 伏以舊塋就新。聿覩顯晦之有數。來孫繼往。不可瞻慕之無方。經營肯堂。陟降在座。恭惟左承相汝陽公。靑邱華閥。麗朝名卿。宗制置而祖晦庵。著有世德之美。父淸溪而子文節。足仰繼述之休。家佳仁夫。聲猷爲南州冠冕。鄕貫新安。苗裔編八域山川。惟星霜之迭遷。黃髮耆舊。相傳政承墳塋。嗟陵谷之變幻。白楊春秋。久貽樵牧指點。幸此一片誌刻。發於五百餘年。前數日兩箇玉童。現靈於居人之夢。適是時一條瑞氣。橫接於僉議之墳。堅確渾全。自是神明守護。等待符會。亦由誠孝感通。若斧若堂。墳樣改觀。乃碑乃碣墓儀始備。謀于族黨。擧四時奠享之儀。聞于官司。謹環山封植之節。此是貽降之地。追慕何如。矧伊衣履之藏。所重自別。賢人所過。猶有魯公撫州之祠。先祖遺墟。豈無甄君思亭之構。數月之間。合謀同力。一門之內。樂事赴功。輪焉煥焉。膺張老之美頌。少有富有。同衛荊之善居。庖湢廳庭。庶可爲大祝奉禮之所。阿塾堂廡。亦足行每歲合族之規。燕飮落成。揭歸厚之標榜。駿奔對越。瞻如在之儀形。短引以裁。修樑助抛。兒郞偉抛樑東。十字川流淸若空。回首扶桑氛祲盡。昭懸日月照無窮。兒郞偉抛樑南。天雲山色碧如藍。偉音遐躅流傳久。朱鳥千年滄海涵。兒郞偉抛樑西。國師峰屹暮雲低。祥光著換文明運。瞻彼降婁星聚奎。兒郞偉抛樑北。瑞石峰峰鎭一域。江湖萬里營菟裘。忠戀無時不拱極。兒郞偉抛樑上。仁天曾不斯文喪。乾乾無息如循環。君子法之以自强。兒郞偉抛樑下。群流爭赴東南野。謙能受益滿招虧。此理分明盍將把。伏願上樑之後。子孫昌大。文學蔚興。英靈妥安。睠舊土之信美。泂酌芳潔。修歲事之有常。 귀후재(歸厚齋)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장동리에 있는데, 주여경(朱餘慶)을 모시는 재사이다. 여양공(汝陽公) 주여경(朱餘慶)을 말한다. 자는 필유(必有), 호는 여양(汝陽),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청계공 주잠(朱潛)의 첫째아들로 남송에 있을 당시 이름은 여(余)였으나 고려로 온 이후 여경(餘慶)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고종 조에 은사과(恩賜科)에 올라 좌승상(左丞相)과 추밀원밀직사(樞密院密直司)를 지냈다. 제치(制置) 제치다원(制置茶院)을 지낸 주자의 8대조 주괴(朱瓌)를 말한다. 무원 주씨(婺源朱氏)의 시조로, 일명 고료(古僚)라고도 하며, 자는 순신(舜臣)이다. 당(唐)나라 천우(天祐) 연간 사람으로, 다원부군(茶院府君)이라고도 한다.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호이다. 자는 원회(元晦)이다. 청계(淸溪) 주잠(朱潛, 1194∼1260)의 호이다. 고려 후기의 귀화인으로 남송(南宋)의 한림원 태학사(翰林院太學士)이자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동국시조이다. 자는 경도(景陶), 본관은 송나라 강남동로(江南東路) 휘주부(徽州府) 신안현(新安縣)으로 오늘날의 중국 강서성 무원현이다. 1224년(고려 고종11년)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전라도 금성(錦城 : 지금의 나주(羅州))에 정착하여 신안 주씨의 동국시조가 되었다. 이후 무주(茂朱) 무풍면(茂豊面)을 거쳐 다시 전라북도 진안(鎭安) 주천면(朱川面) 신안촌(新安村)으로 은거하며 서당을 열어 인재를 기르고 학문 연구와 향풍 교화에 진력하였고 능주(綾州)에 돌아와 죽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주자묘(朱子廟) 경내의 동원사(東源祠),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의 주천서원(朱川書院)과 청계사(淸溪祠)에 배향되었다. 문절(文節) 주열(朱悅, 1227~1287)의 시호이다. 자는 이화(而和), 호는 죽수(竹樹)이다. 1260년(고려 원종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남원 판관(南原判官), 한림학사, 판도판서,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인부(仁夫)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옛 지명으로, 이릉부리(爾陵夫里), 죽수부리(竹樹夫里), 연주부리(連珠夫里)라고도 한다. 능곡(陵谷)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뒤바뀌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했도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백양(白楊) 무덤을 비유하는 시어(詩語)이다. 〈고시(古詩)〉에 "수레 몰아 동문 위로 올라가서, 북망산 묘지를 멀리 바라보니, 백양나무는 바람 속에 소소히 울어 대고, 넓은 길 양쪽에는 송백이 줄지어 섰네.[驅車上東門, 遙望郭北墓, 白楊何蕭蕭, 松柏夾廣路.]"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文選 卷29 古詩十九首》 당부(堂斧) 분묘(墳墓)를 말한다. 봉식(封植) 분묘를 봉축하고 주위에 나무를 심는 것을 말한다. 노공(魯公)의 무주(撫州) 사당 노공은 당나라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이다. 안녹산의 난리 때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상산 태수(常山太守)인 그의 종형 안고경(顔杲卿)과 함께 성을 굳게 지켜 오직 그 두 곳만 적에게 함락되지 않아 반격의 기반이 되게 하였으며, 뒤에 반란을 일으켜 여주(汝州)를 함락한 이희열(李希烈)을 회유하러 갔다가 그에게 수년 동안 구류되어 협박받던 끝에 굽히지 않고 순절하였다. 그가 죽은 지 272년 뒤인 1056년 송 인종(宋仁宗) 지화(至和) 3년에 지무주(知撫州) 섭모(聶某)와 통판무주(通判撫州) 임모(林某)가 그의 충절을 기린 나머지 안진경이 일찍이 그곳의 자사(刺史)를 지냈다 하여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증공(曾鞏)의 〈무주 안노공 사당기(撫州顔魯公祠堂記)〉에 보인다. 조금……같네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에 거처하기를 잘하였다. 처음 소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갖추었다.'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그런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子路》 대축(大祝) '태축'이라고도 하는데,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관장하는 벼슬로 은(殷)나라 천관(天官) '육태(六大)' 가운데 하나이다. 달려와 마주하니 《시경》 〈주송(周頌) 청묘(淸廟)〉에 "하늘에 계신 분을 대하고, 사당에 있는 신주를 분주히 받든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여재(如在) 《중용장구》 제16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조(朱鳥) 주작(朱雀)으로 남쪽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 혹은 봉황을 가리킨다. 별들이 규성에 모이네 송 태조(宋太祖) 건덕(乾德) 5년에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다섯 별이 규성의 별자리에 모인[五星聚奎]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복자(卜者)가 이것을 인재가 많이 배출(輩出)될 조짐이라고 하였다. 건건(乾乾)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는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다.[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형작(泂酌) 소박하지만 정성껏 차린 제수를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 형작(泂酌)〉에 "저 길가에 괸 물을 멀리 떠다가, 저기서 떠내 여기에 붓는 정성만 지극하다면, 제사에 올릴 밥도 만들 수 있으리라.[泂酌彼行潦, 挹彼注玆, 可以饙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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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을 행할 때 문묘에 고하는 축문 行鄕約告文廟祝文 세도가 쇠미하니사설이 번갈아 일어나네생령들은 도탄에 빠지고고을은 오랑캐가 되었네하늘이 발끈 노하여우리 무를 드날리네운무가 걷히고 흩어지니회조가 청명하네172)성조가 징비173)하고현백이 순선174)하네규는 백록을 모방하고175)약은 남전을 따르네176)수령은 이어서 힘쓰고다사들은 달려가 듣네학사를 깨끗이 청소하고글방을 엄숙하고 맑게 하네길한 날을 정하여 엄숙히 재계하여장차 강론하는 의식 거행하려 하네선사께 공경히 배알하며감히 전말을 고하네 世衰道微。邪說交作。生靈塗炭。州里蠻貊。天怒斯爀。我武維揚。雲捲霧散。會朝淸明。聖朝懲毖。賢伯旬宣。規倣白鹿。約遵藍田。知州承勗。多士奔聽。灑掃庠宇。肅淸黌庭。吉蠲齊肅。將擧講儀。先師祗謁。敢告顚委。 회조(會朝)가 청명하네 회조는 회전(會戰)하는 날의 아침이라는 뜻으로 전투에서 이겨 밝은 세상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이때 태사(太師) 상보가 마치 매가 날 듯하여, 저 무왕을 도와서 상나라를 정벌하니, 회전(會戰)한 그날 아침 청명해졌도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징비(懲毖) 징창(懲創)되어 삼간다는 뜻이다. 《시경》 〈주송(周頌) 소비(小毖)〉에 "내 그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予其懲, 而毖後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순선(旬宣)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임금이 소호에게 명하시어 정사를 두루 펴라 하시다.[王命召虎, 來旬來宣.]"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지방관이 되어 왕정(王政)을 펴는 것을 말한다. 규는 백록을 모방하고 주자가 제정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학규를 따른다는 말이다. 주자가 지남강군(知南康軍)에 부임하였을 때 백록동서원을 중건하고 직접 강학하면서 학규를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교(五敎)의 조목, 학문을 하는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체, 접물(接物)의 요체로 이루어져 있다. 약은 남전을 따르네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인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따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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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민군 유사 新川閔君遺事 종족(宗族)들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향당(鄕黨)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한다는 그 말을33)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유유자적함을 법도로 삼으며 어진 이를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한다는 그 말을34)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고(故) 신천(新川) 민군(閔君) 우식(祐植) 세중(世仲)이 그 사람이다. 군은 가학과 법도가 있는 집안35)에서 태어나 간난신고를 겪으며 자랐고, 몸소 밭 갈고 손수 호미질하며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한가한 날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고 옛사람의 위기지업(爲己之業)36)에 종사하였다. 그 후 최면암(崔勉庵)37)ㆍ 정애산(鄭艾山)38)ㆍ정월파(鄭月波)39)ㆍ기송사(奇松沙)40)를 종유하며 왕복강마(往復講磨)하면서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아름다운 천부의 자질로 가정에서 전한 것을 이어받고 사우(師友)의 도움에 젖어서 그 마음을 세우고 처신하며, 사람을 응대하고 사물에 대처하는 데에 찬연(粲然)히 조리가 있고 의연(毅然)히 절도가 있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묵묵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고,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 세속을 따라 영합하지 않았고 시류를 좇아 아첨하지 않았다. 오직 한 표주박의 마실 것41)과 한 책상의 서책이 그 필생(畢生)의 살림살이였다. 몸을 숨기고 자취를 거두어 암연(闇然)히 스스로 닦으면서, 안으로는 그 환심(歡心)을 잃지 않았고 밖으로는 그 훌륭한 명성을 잃지 않았으니, 군을 알건 모르건 이구동성으로 추켜세우지 않음이 없었다. 임인년(1902, 고종39) 3월 28일에 생을 마쳤으니 태어난 계해년(철종14, 1863)과 거리를 따져보면, 향년 겨우 40세였다. 국수봉(菊秀峯)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신라에서 고려까지 저명한 석학이 이어져서 동방(東方)의 거족이 되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이니, 이분이 남쪽으로 낙향한 조상으로 군에게는 15세가 된다. 증조의 휘는 치록(致祿), 조부의 휘는 사호(士鎬)이다. 부친의 휘는 영곤(泳坤)이요,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모(某)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영석(泳碩)이요, 생모(生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수(棕秀)의 따님이다. 군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모(某)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계취(繼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모(某)의 따님인데 2남 병하(丙夏)와 병엽(丙燁)을 두었다. 나는 군과 나이를 잊은 막역한 교분을 맺었었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 8, 9년 되었을 때 병하(丙夏)가 벌써 관례(冠禮)를 하고 찾아와서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 한 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오호라! 군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제 그 외롭게 남았던 아이가 부쩍 자라서 관례(冠禮)42)까지 한 것을 보게 되니, 서글픈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어린 나이에 선친의 미덕을 천술(闡述)할 줄 알고 게다가 선친의 벗을 방문하였으니 기특하고 기특한 일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뜻은 장차 끝을 성대히 할 날이 있으리라.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優遊以法。慕賢而容衆。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故新川閔君祐植世仲。其人也。君生於詩禮法拂之家。長於艱難辛苦之中。躬耕手鋤。以供親旨。餘日涉獵經史。從事於古人爲己之業。旣而從崔勉庵鄭艾山鄭月波奇松沙往復講磨。以博其義理之趣。以天資之美。承襲乎家庭之傳。擩染乎師友之助。其立心行已。酬人處物。粲然有條。毅然有節。平居恬靜簡黙。不妄言笑。不妄出入。非其力不食。非其義不取。不俯仰於世。不趨附於時。惟一瓢之飮。一床之書。其畢生家計也。潛身斂迹。闇然自修。內而不失其歡心。外而不失其令聞。知不知無不一口推詡。壬寅三月二十八日考終。距癸亥寅降。得年纔四十。葬菊秀峯子坐原。閔氏系出驪興。自羅至麗。名碩相望。爲東方鉅族。至諱懷參。號義庵。是爲落南之祖。於君爲十五世。曾祖諱致祿。祖諱士鎬。考諱泳坤。妣南平文氏某女。生考諱泳碩。妣全州李氏棕秀女。吾娶宜寧南氏其女。繼娶濟州梁氏某女。二男丙夏丙燁。余與君爲忘年莫逆之契。而幽明一別爲八九年。丙夏旣冠而來。以其家狀。請爲一言之役。嗚呼。不見君久矣。今見其孤孩漸長。至於突弁。悲愴之感。不覺潛涕。且以稚妙之年。能知闡述先徽。又能訪問先友。奇事奇事。未就之志。其將有大終之日也歟。 종족(宗族)들이……말을 선비다운 인물이라는 뜻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선비의 자격을 묻는 자공(子貢)의 질문에 공자가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유유자적함을……말을 여유 있고 관대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유자는) 유유자적함 법도로 삼으며, 어진 사람을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하고 모난 점을 버리고 원만하게 지내니 그 관대함이 이와 같다.〔優游之法, 慕賢而容衆, 毁方而瓦合. 其寛裕有如此者.〕"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가학과……집안 원문의 '시례법필(詩禮法拂)'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범절을 이어오는 가문을 '시례지가(詩禮之家)'라 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공자가 아들인 이(鯉)에게 "시(詩)를 배웠느냐?〔學詩乎?〕" 하고 묻고, 또 한 번은 "예(禮)를 배웠느냐?〔學禮乎?〕"라고 하였다. '법필(法拂)'은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뜻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안으로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이런 나라는 항상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하였다. 위기지업(爲己之業)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한다.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하였다.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면암(勉菴)은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艾山)은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으로 월파(月波)는 호이다. 자(字) 백언(伯彦),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송사(松沙)는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한……것〔一瓢之飮〕 안빈낙도의 삶을 뜻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건만,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관례(冠禮) 원문의 '돌변(突弁)'으로, 20세가 되어 관(冠)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 〈보전(甫田)〉에 "예쁘고 아름다운 머리 딴 총각을 얼마 후에 보면 돌연 관을 쓰고 있다.〔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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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효부 정씨 유사 烈孝婦鄭氏遺事 내가 옛날 강가에서 노사(蘆沙)43) 선생을 모시다가, 어느 날 "문천상(文天祥)44)이 국가가 패망한 날에 죽지 않고 연옥(燕獄)45)에서 붙잡힌 지 수 삼년 만에 죽음을 내린 이후에야 죽었으니 왜 그랬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생은 "옛날에 개가(改嫁)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개가하지 않는 것을 '열(烈)'로 여겼지만, 우리나라에는 개가하는 법이 없으므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열(烈)'로 여겼으니, 어찌 시부모를 받들고 자식을 길러서 그 집안을 보존하는 것을 '열(烈)'로 여겼겠는가?"라고 하셨다. 내가 듣고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어 평소 잊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열효부(烈孝婦) 정씨(鄭氏)의 행장 한 편을 보고 과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씨는 고(故) 사인(士人) 이문욱(李文郁)의 처인데 친영(親迎)46)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으니 따라 죽기로47) 맹세하고 절대로 먹고 마시지를 않았다. 시부모가 백방으로 누그러뜨리고 타이르자 정씨는 번연(幡然)히48) 마음을 바꾸고 일어나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죽은 남편의 마음입니다."라고 하고는 억지로 미음을 먹고 곡읍(哭泣)과 벽용(擗踊)49)을 예(禮)에 맞게 그쳤다. 시부모를 섬길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기쁜 낯빛으로 극진하게 뜻을 받들어 따랐고, 맛있는 반찬과 정갈한 음식으로 극진하게 정성스런 봉양을 하였다. 병구완을 할 때 약물을 널리 구했는데 그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이 많았다. 몸소 부지런히 길쌈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모든 경비가 덕분에 넉넉해졌다. 조카인 익무(翊茂)를 데려다 후사(後嗣)로 삼고 스승에게 나아가게 하였으며 올바른 교육50)을 다하는 데 힘쓰니 끝내 성취하게 되었다. 오호라! 죽은 남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으니 남편을 따라 죽은 경우보다 나은 것이 훨씬 크지 않겠는가. 이것이 향리의 보고와 사림의 천거가 의당 계속되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부인은 하동(河東)의 저명한 성씨로 고(故) 충의공(忠毅公) 지(地)의 후예이자 효자 준(浚)의 따님이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교화에 젖어 습성을 이룬 것이 어찌 그 유래가 없겠는가? 하루는 그 손자 병규(秉奎)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또 울면서 "우리 선조비(先祖妣)의 지극한 행실과 탁월한 절조는 옛날 어진 부인51)에게 견주어도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지금 세도(世道)가 옛날 같지 않아 진위(眞僞)를 구별하지 못하니 훗날에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전해질 한 편의 문장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간청해 마지않았다. 내가 듣고 흠모하고 부러워하여 감히 고루(固陋)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余昔侍蘆沙先生于江上。一日問文天祥不死於國家敗亡之日。而被執燕獄數三年。至於賜死而後死之。何耶。先生曰。古有改嫁。則以不嫁爲烈。在我東法無改嫁。則以從死爲烈。曷若奉舅姑養嗣息。以存其家之爲烈也。余聞之感悟。尋常不忘。今見烈孝婦鄭氏行狀一篇。果知有其人也。鄭氏故士人李文郁妻。親迎未幾而死。誓以下從。絶不飮食。舅姑寬譬百端。鄭氏幡然而起曰。奉養父母。是亡夫心也。强進餰粥。哭泣擗踊。止於禮。事舅姑。柔聲怡色。極其承順。馨饍潔羞。極其忠養。其侍疾。旁求藥餌。多有孝感之應。躬勤織紝。晨夜不懈。凡百調度。賴以紓焉。取從子翊茂爲嗣。命就傳。務盡義方之敎。卒至成就。嗚呼。心亡夫之心而賢於下從者。不其遠矣乎。此鄕里之報。士林之薦。宜其續續而弗一也。夫人河東著姓。故忠毅公地後。孝子浚女。生長法家。所以擩染而成性者。豈無所自耶.一日其孫秉奎抱狀示余。且泣曰。我先祖妣至行卓節。方古淑媛實無愧焉。而目今世道不古。眞贋莫別。則可以證信於日後者。其獨非一副文字之傳耶。固懇不已。余聞之欽艶。不敢以固陋辭焉。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1831년(순조31) 사마시에 합격하여 호조 참판을 지냈고,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이진상ㆍ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천상(文天祥) 송(宋) 나라 충신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원(元)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벼슬을 간곡히 권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결국 사형을 당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연옥(燕獄) 문천상이 수감되었던 연경(燕京)의 감옥을 말한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이다. 따라 죽기로 원문의 '하종(下從)'으로, 남편이 죽으면 자신도 죽어서 지하(地下)로 따라간다는 뜻이다. 변연(幡然)히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탕 임금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자, 이윽고 마음을 바꾸었다.〔湯三使往聘之, 旣而幡然改.〕"라고 하였다. 벽용(擗踊) 상을 당하여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교육〔義方之敎〕 '의방(義方)'은 올바른 도리로 바르게 가르치는 가정교육을 말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어진 부인 원문의 '숙원(淑媛)'으로, 《후한서(後漢書)》 〈열녀전(列女傳) 조세강처(曹世叔妻)〉에 "만약 숙원하고 겸순한 부인이라면 의를 따라 우호를 돈독히 한다.〔若淑媛謙順之人, 則能依義以篤好.〕"라고 하였는데 이현(李賢)의 주에 "숙은 선함이고 아름다운 여자를 완이라고 한다.〔淑, 善也. 美女曰媛.〕"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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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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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운계 김공 유사 雲溪金公遺事 공의 휘는 기현(奇鉉)이고, 자는 선화(善華)이며, 호는 운계(雲溪)이다. 김씨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신라의 왕자 휘 흥광(興光)이 처음으로 광산에 거주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대(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는데,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과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이 가장 유명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여정(厲精)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처겸(處謙)은 호가 육행당(六行堂)으로 성균관에 올랐고, 부호군(副護軍)를 지냈으며, 광산에서 추성(秋城 담양(潭陽))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응(應)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분이 낳은 휘 대기(大器)는 호가 만덕재(晩德齋)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겨 경학(經學)과 행의(行義)로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며, 구산사(龜山祠)27)에 배향되었다. 이분으로부터 2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성준(聲駿)은 병자란(丙子亂) 뒤에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성산(星山) 아래에 은둔하여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은 채 산수(山水)에 자취를 의탁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이초(履初)는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이분이 낳은 휘 광속(光涑)은 의로운 행실로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조(德祖)이고, 증조 휘 백일(百鎰)은 호는 난산(蘭山)이며, 조부 휘 문추(文秋)는 호가 월천(月川)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 휘 재택(在澤)은 호가 애산당(愛山堂)으로,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시에 중망을 받아 여러 차례 천거에 올랐으며, 응교(應敎) 정희(鄭㵙)28)가 그의 행장을 짓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29)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모친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방옥(邦玉)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갑인년(1854) 7월 27일에 복천의 난산리(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이미 성인으로서의 의절과 모습이 있었으니, 7세 때 대인공(大人公 부친)이 부모의 상을 당하고 다른 형제가 없었는데, 그의 물 뿌리고 씻는 의절과 제기를 진설하는 의식이 한결같이 대인의 뜻과 같았다. 평소에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을 반드시 부지런히 하였고, 응대할 때에는 반드시 공손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는 자신의 몸으로 궤안을 대신하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사(喪事)를 치를 때에는 애통함이 의례보다 더하였고, 인정과 형식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제사지내는 날을 만났을 때에는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제사지내게 한 적이 없었고, 정성과 정결을 다하여 여재(如在)30)의 뜻을 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대해 성대하게 암송하는 부분이 매우 많았고 연구가 매우 정밀하여 강학과 토론에 드러나고 저술에 나타난 것들이 모두 찬연히 빛나 볼 만하였다. 처음에는 공령(功令 과거 공부)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추어 서적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의복 띠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용모를 반드시 단정히 하였으며, 책상의 서책은 가지런하게 정돈하였고, 비록 벼루와 먹, 편지처럼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곳에 두어 어지럽게 놓아둔 적이 없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과 집기는 힘써 질박함을 따랐고, 즐기며 좋아할 만한 화려한 물건이나 먼 곳에서 나는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일찍이 한 번도 몸에 접하지 않았고 한 번도 집안에 들인 적이 없었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31)을 모방하여 동내 사람을 권면하고 이끌었으며, 항상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사방으로 유학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 만년에 송사 기공(기우만)을 따르며 이택(麗澤)32)의 뜻을 붙였다. 원근의 분묘(墳墓)를 빠짐없이 살피고 청소하였으며, 묘갈(墓碣)을 갖추어 표지(表誌)하고 묘전(墓田)을 두어 향사(享祀)하였으며, 묘실(墓室)을 수선하여 우러러 사모하였다. 벗을 사귐에 그 사람의 선(善)ㆍ불선(不善)만을 볼 뿐, 부귀와 빈천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으며, 말과 낯빛을 바르게 하여 일찍이 아부하는 뜻이 없었고, 또한 특이한 행실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서로 믿고, 먼 사람이든 가까운 사람이든 모두 따랐다. 갑오년(1894) 비류(匪類)의 난(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난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여 사람들이 많이 그에게 힘입었다.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충신근근(忠信勤謹)' 네 글자는 진실로 몸을 지키는 데 으뜸인 부적이니, 절대로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는 의로운 행실을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문예의 명성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된다 한들 어찌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년(1892)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고, 다음해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며, 병오년(1906)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본방(本坊)의 서촌(西村) 금옥동(金屋洞) 건좌(乾坐)에 안장하였다. 부인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양홍(陽鴻)의 따님으로, 2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계(永桂)ㆍ영학(永鶴)이고, 딸은 창원(昌原) 정장섭(丁章燮)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는 모두 어렸다. 아아, 나는 공과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음에도 하늘 끝과 땅 모퉁이처럼 떨어져 지내다 갑자기 오늘과 옛날처럼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그의 가장(家狀)을 읽게 되니 미치지 못한 추앙의 회포가 곱절이나 절실해진다. 영계가 나에게 글을 청하여 세상에 길이 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대략 전말을 서술하였다. 公諱奇鉉。字善華。號雲溪。金氏系出光山。新羅王子諱興光。始居光山。自此官平章事者爲十餘世。文安公諱良鑑。文正公諱台鉉。最著焉。入本朝。有諱厲精。登科官漢城判尹。三傳至諱處謙。號六行堂。登庠官副護軍。自光寓于秋城。三傳諱應中。司馬官訓導。是生諱大器。號晩德齋。師事沙溪金先生。經學行義。望重一世。配享龜山祠。二傳諱聲駿。丙子亂後。遯于福川星山之下。絶意仕進。托跡山水。是生諱履初。孝行著聞。是生諱光涑。以行義聞于朝。贈童蒙敎官。於公爲五世祖也。高祖諱德祖。曾祖諱百鎰。號蘭山。祖諱文秋。號月川。世有隱德。考諱在澤。號愛山堂。孝友文學。見重於時。累登剡薦。鄭應敎㵙奇松沙宇萬撰狀與碣銘。妣廣州安氏邦玉女。有婦德。以哲宗甲寅七月二十七日生公于福川之蘭山里。公幼而岐嶷。已有成人儀樣。七歲大人公遭艱。而無他兄弟。其灑濯之節。陳設之儀。一如大人之意。平居晨昏必勤。應對必恭。得一味。未嘗先食。侍親癠。以身替几。晝夜不離。執喪哀毁踰禮。情文俱至。遇忌諱之辰。非有疾病。未嘗代人。致誠致潔。以盡如在之意。自少專心學問。於四子六經。誦殷甚多。硏究甚精。以至著於講討。發於著述者。皆粲然可觀。初業功令。親沒之後。遂不復應擧。杜門斂迹。以書籍自娛。常居衣帶必正。容貌必端。几案書冊。秩秩整勅。雖硯墨札翰之微。置有常處。未嘗混亂。若其器用什物。務從質樸。至於華麗玩好及遠方珍異之物。未嘗一接於身。一入於家。倣藍田呂氏鄕約。勸導坊內。嘗以家貧親老。不得遊學四方爲恨。晩從松沙奇公以附麗澤之義。遠近墳墓。省掃無闕。具墓碣以表誌之。置墓田以享祀之。修墓室以瞻慕之。其交朋友。視其人之善不善而已。不以富貴貧賤而有所取捨焉。正言正色。未嘗有阿附之意。亦未有崖異之行。是以內外相信。遠近咸服。甲午匪類之亂。公戒鄕里勿染。人多頼之。嘗戒諸子曰。忠信勤謹四字。實爲持身之元符。切不可斯須去身。又曰。士君子。當先行義而後文藝。不然。文名冠一世。何足貴哉。壬辰除義禁府都事。翌年陞敦寧府都正。丙午四月十五日考終。葬于本坊西村金屋洞乾坐。配新安朱氏陽鴻女。生二男一女。男永桂永鶴。女昌原丁章變。孫男皆幼。嗚呼。余與公同世矣同省矣。而厓角落落。遽作今古隔世之人。今讀其家狀。倍切追仰靡逮之懷。永桂請余文爲不朽計。辭不獲已。略敍顚末云爾。 구산사(龜山祠) 송순(宋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에 창건한 뒤에 송정순(宋庭筍)과 김언욱(金彦勗) 송희경(宋希璟)·김응회(金應會)·이안눌(李安訥)·송징(宋徵)·김대기(金大器)나무춘(羅茂春)임광필(林光弼)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응교(應敎) 정희(鄭㵙, 1821~?) 고종2년(1865)에 식년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고종 22년(1885) 응교에 제수되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회일(會一)이며, 송사(松沙)는 그의 호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조부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으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재(如在) 부친이 계신 듯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는 제사를 지낼 적에 선조가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가 고을 사람들과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 예의의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라는 네 조항으로 되어 있다. 《小學 卷6 善行》 이택(麗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못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물을 대주듯이 붕우 간에 서로 강습하며 도움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象)〉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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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재 윤공 유사 慕義齋尹公遺事 공의 휘는 학모(學模), 자는 중현(重賢)이다. 윤씨(尹氏)의 선계는 파평(坡平)에서 나왔다.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 영평군(鈴平君) 휘 보(珤)는 모두 상계(上系)의 현달한 조상들이다. 호가 광수(狂叟)인 휘 덕생(德生)에 이르러 우리 장릉(莊陵)52)이 양위(讓位)를 할 즈음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분이 휘 만(蔓)을 낳았는데 감찰(監察)을 지냈고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ㆍ한재(寒齋) 이목(李穆)ㆍ매계(梅溪) 조위(曺偉)와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이분이 휘 자중(自中)을 낳았는데 좌랑(佐郞)이고, 이분이 휘 승문(承文)을 낳았는데 사과(司果)이고 승지(承旨)로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형유(衡柚)를 낳았는데 별제(別提)이고, 이분이 휘 해(海)를 낳았는데 여절교위(勵節校尉)이고 정유(丁酉)의 난 때 순절하였다. 5대를 전하여 휘 효동(孝東)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일서(日瑞), 호는 계송당(桂松堂)인데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조부의 휘는 상진(商鎭)이요, 호는 동은(東隱)이다. 부친의 휘는 일(溢)이요, 호는 학재(鶴齋)인데 문장과 덕행을 대대로 계승하였다. 모친은 개성 차씨(開城車氏) 명철(明轍)의 따님으로 부도(婦道)에 흠결이 없었다. 순묘(純廟) 임오년(1822, 순조22) 5월20일 함평(咸平) 모양리(牟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모가 헌걸차고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응대와 진퇴 간에 일찍이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7세 때 어버이의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는 밤낮으로 부축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울고 부르짖다가 거의 생명을 상할 뻔했으니 보는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했으나 부지런히 일하고 힘을 다해 모친을 봉양하면서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드리는 일과 따뜻하고 시원하게 보살피는 예절을 갖춰 드리지 않음이 없었다. 연로한 어버이가 노쇠하여 걷기 어렵게 되니 공이 매번 업고 뜰을 걸어 다녔다. 하루는 병이 나서 위태로울 뻔했는데 공이 넓적다리를 베어 드려 3일간 목숨을 연장하였다. 집상(執喪)을 할 때는 늙었다고53) 하여 스스로 핑계대지 않고 애훼(哀毁)함이 끝이 없었으며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다. 중년에 화곡리(花谷里)에 우거하며 작은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 거문고와 서적을 대하며 밤낮으로 한가로이 노닐었다. 공은 어려서 독서하고 겸하여 무예를 익혔다. 진을 펼치고 군대를 운용하는 법과 말을 달리고 활을 당기는 방도에 대해 대략 큰 이치를 깨우쳤다. 병인년(1866, 고종3) 강화도의 변란54)으로 조야가 흉흉할 때 김인기(金仁基) 공과 한 고을을 창도하여 장차 의거를 일으키려 하였다. 전략을 보좌하고 계획하여 출발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변란이 평정되니 그쳤다. 만년에는 스스로 재덕(才德)을 깊이 숨겨 감추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빈객과 벗이 들르면 기분 좋게 마시면서 즐거움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숙(家塾)을 열어 자손을 가르쳤고 문규(門規)를 만들어 족친(族親)들을 통합하였다. 이웃 마을 친구에 대해서 까지도 위문과 구휼을 갖추어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해년(1887, 고종24) 4월 13일 생을 마치니 단양면(丹陽面) 동막(東幕) 뒤편 불당동(佛堂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기수(起樹)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으로 명성이 났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병희(炳熙)ㆍ병룡(炳龍)ㆍ병문(炳文), 병호(炳豪)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공휴(文功休)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병인년(1866,고종3)에 거사를 했던 공(公)들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고을에서 연세가 높고 명망이 무거운 분들이었다. 인물이 빼어나고 걸출하였으며 의론은 뛰어나고 시원스러웠다. 계모는 자세하고 빈틈이 없어서 원근 간에 호응하고 대소 간에 감동하였다. 비록 한 때에 공적을 기록할만한 업적은 없더라도 민심을 진작하고 국위(國威)를 조장(助壯)하여 적을 꺾는 원대한 계책을 세웠으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오호라! 이제는 40년 전의 일이 되었구나. 당시의 인물들은 홀연 모두 떠나시고 하늘에 넘치는 거대한 물결55)만 이처럼 가득 찼으니 곧바로 구천(九泉)으로 달려가 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도다. 병희(炳熙)가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글 한 편을 부탁하는지라 옛날을 회상하며 오늘을 슬퍼하니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公諱學模。字重賢。尹氏系出坡平。太師諱莘達。鈴平君諱珤。皆其上系顯祖也。至諱德生。號狂叟。我莊陵遜位之際。棄官南下。累徵不就。生諱蔓。監察。與權睡軒五福李寒齋穆曺梅溪偉爲道義交。生諱自中。佐郞。生諱承文司果。贈承旨。生諱衡柚。別提。生諱海勵節校尉。丁酉亂殉節。五傳諱孝東。卽公之高祖也。曾祖諱日瑞。號桂松堂。孝行著稱。嘉善。祖諱商鎭。號東隱。考諱溢。號鶴齋。世襲文行。妣開城車氏明轍女。壺儀無闕。以純廟壬五月二十日生公于咸平牟陽里器宇軒昂性氣溫良。事親至孝。唯諾進退。未嘗有違。七歲見親疾危劇。晝夜扶持。暫不離側。遭艱擗踊啼呼。幾於傷生。見者嘖嘖。家素貧甚。服勤致力以奉慈闈。甘毳之供。溫凊之節。無不備給。親年衰癃。艱於行步。公每負之而行於庭除。一日屬疾幾危。公割股以進。得延三日。執喪不以耆艾自恕。哀毁罔極。情文俱至。中年寓花谷里築小屋子。花竹琴書。日夕徜徉。公少年讀書。兼習武藝。布陣行軍之法。馳馬挽弓之方。略曉大致。丙寅江都之變。朝野洶洶。與金公仁基倡一鄕。將設義擧。贊畫方略。行發有日。亂平而止。晩年深自鞱晦。不出戶庭。然賓朋過之。未嘗不酣暢以盡其娛。開家塾以敎子孫。設門規以合族親。至於隣里故舊。問訊賙恤。無不備擧。丁亥四月十三日考終。葬丹陽面東幕後佛堂洞乾坐原。齊文化柳氏起樹女。婦德著稱。生四男一女。曰炳熙炳龍炳文炳豪。南平文功休。孫以下不錄。余嘗及見丙寅擧事諸公。皆鄕裏耆舊宿碩也。人物俊偉。言議英暢。謀畫綢密。遠近響應。大小風勤。雖未有一時紀功之蹟。而所以振勵人心。助壯國威。而爲折衡千里之計。不亦大矣乎。嗚呼。今爲四十年前事耳。當時人物。遽皆零落。而陷天巨浪。瀰漫如此。直欲奔告九泉而不可得也。炳熙持遺狀。託以一言之役。緬古傷今。豈忍辭諸。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능으로 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 늙었다고 원문의 '기애(耆艾)'로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艾)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세를 기(耆)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강화도의 변란 1866년(고종3) 9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하늘에……물결 일제의 침입 등을 비유한 것이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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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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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행장 行狀 공의 휘는 의림(義林)이요 자는 계방(季方)으로 학자들은 일신(日新) 선생이라 칭한다. 정씨(鄭氏)는 그 선조가 광산인(光山人)으로 고려 때 찬성(贊成)인 휘 신호(臣扈)가 그 시조이다. 감사(監司)인 휘 인진(麟晉)이 처음 조선조에 벼슬을 하였고, 응교(應敎)인 휘 웅(熊), 절도사(節度使)인 휘 응규(應奎), 사직(司直)인 휘 연(演)은 호조 판서17)에 추증되어 3세가 연이어 현달하였다. 3대를 전하여 휘 찬(纘)에 이르러서는 벼슬살이에 담박하여 금성(錦城)18)에 은둔하면서 대대로 유자의 덕행을 독실하게 하였다. 증조 휘 채(埰)는 낭주(朗州)19)로 옮겼고 조부 휘 가석(加錫)은 금릉(金陵)20)으로 옮겼다. 선고(先考)의 휘는 제현(濟玄)으로 두 세에 걸쳐 수직(壽職)21)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하였으며 자식을 가르치는데 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한양에서 유학할 때 "명예와 이익은 사람을 그르치니 우리 도(道)의 한 맥은 마땅히 산림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당세(當世)에 대한 뜻을 끊고 밭 갈고 글 읽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았다. 선비(先妣)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부친이 치성(致聖)으로 위남(葦南) 희중(熙中)의 후손이며 정숙하고 예절이 있었다. 헌종 을사년(1845, 헌종11) 11월 갑자에 능주(綾州)의 대덕동(大德洞)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꿈에 달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눈을 흘겨보지 않으며 항상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말하기를 "눈은 한 몸의 일월(日月)이니 일월이 어둡고 이지러지면 천지가 막히고 닫힌다."라고 하였다.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무렵에 글방 아이들이 《소학(小學)》을 읽는 것을 곁에서 듣고 능히 많은 뜻을 이해하고는 말하기를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이 치평(治平)의 근본이다."라고 하면서 손수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을 신중히 하였다. 일찍이 장로(長老)를 따르다가 화이(華夷)와 존양(尊攘)22)에 대해 듣고는 문득 묻기를 "똑같은 사람인데 어찌하여 화(華)와 이(夷)로 나눕니까?"라고 하니, 장로가 답하기를 "땅에는 안과 밖이 있고 풍속도 아름다운 것과 나쁜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한참동안 묵묵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사람의 한 몸에도 또한 화(華)와 이(夷)가 있으니, 아름다운 것은 화(華)요 나쁜 것은 이(夷)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먼저 한 몸에 있는 화(華)를 높이고 이(夷)를 물리쳐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듣는 자들이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말은 노사(老師) 숙유(宿儒)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문(儒門)의 대사업이 장차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밖을 나가서 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모두 달려가는데 홀로 서서히 태연자약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천지와 나란하고 나의 성(性)은 성현과 같으니 그 무거움이 어떠한데 가벼이 달려서 예용(禮容)을 잃겠는가?"라고 하였다. 매양 나가 놀면서 아이들이 어지럽게 노는23) 경우를 만나면 반드시 급히 돌아와 말하기를 "부모가 경계한 바였습니다."라고 하고, 장로들 곁에 있었으면 서서히 돌아와 말하기를 "부모가 좋아하는 바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고서 부모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지 않는다면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기쁘고 화순한 기색으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며24) 찬 지 따듯한 지를 살폈다.25) 전후로 당한 상(喪)에서는 모두 애훼(哀毁)함이 심하였고 일과로 정하여 묘소에 올라갔다. 대대로 전해온 선대의 원고를 수집하여 소중히 보관하였다. 처음 입학하여 《효경(孝經)》을 배울 때 구절마다 훤히 이해하고, 이해하면 번번이 체험을 하니 통정공(通政公)이 그 지향하는 바가 있음을 알고는 다른 일로 방해되지 않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은 업(業)이 있는 것이 귀하고, 업은 성취가 있는 것이 귀하다."라고 하였다. 공은 이 말씀을 받들어 가슴 속의 경구(警句)26)로 삼고 조용한 데 처하여 애써 공부하면서 먹고 자는 것도 잊으며 많은 책과 경전을 상세하게 익히니 약관(弱冠)을 전후하여 학업이 이미 두각을 드러냈다. 이에 사조(詞藻)27)를 부화(浮華)한 것으로 여기고 공령(功令)28)을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계(家計)를 꾸리는 데는 냉담하고 강송(講誦)을 다반사로 여기면서, 남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고, 남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니 견식이 이미 시유(時儒)들보다 탁월하였다. 이 때 유학의 학술이 분열되어 성명(性命)의 학설이 제멋대로 터져 나오고 이기(理氣)의 학설이 어지러워져서 하늘은 주재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본원(本源)은 허위(虛位)가 되었다. 대략 제가(諸家)를 두루 고찰하고 실마리를 궁구하면서, 참된 지식과 실질적 식견도 없이 입으로 다투어 떠들어대는 것을 병폐로 여겼다. 24세 때인 무진년(1868, 고종5)에 노사(蘆沙) 선생을 사상(沙上)29)에서 배알하였는데 선생이 공을 한 번 보고는 자주 칭찬하며 말하기를 "타고난 자품이 화락하고 평이하며 식견이 매우 바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미(沙彌)가 병든 중의 문을 두드리는데 미목(眉目)이 시원하게 밝아 학문할 만한 기틀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계방(季方, 정의림)에게 그렇게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은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칼을 맞은 대가 쪼개지듯 시원스럽게 제가(諸家)의 쭉정이를 쓸어버리고 성철(聖哲)의 참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돌아와서 말하기를 "세상에 사도(師道)를 자임한 자가 모두 오류를 인습하면서 단지 한 쪽만을 보고서, 들은 것을 기술하고 강설(講說)하니 틈 사이의 빛과 한 국자의 물30)을 얄팍하게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오직 선생의 자질은 생지(生知)31)에 가깝고 도는 《중용(中庸)》에 근본을 두고서 곧바로 주자(朱子)를 접하여 대체(大體)을 세웠으니 말씀마다 본원(本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님이 없었다. 마치 큰 집 천만 칸에 허다한 황금과 비단을 저장해놓으니 사람들이 구하는 대로 따라 써도 다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제대로 보았고 제대로 말한 것이다. 한 번 보고 대번에 이렇게 일컬었으니 자기의 조예가 높고 깊으며 터득한 바가 참되고 절실하지 않다면 이처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찍이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고금에 허다한 유지자(有志者)들이 가르침을 받을 터전을 얻고서도 오히려 탁 트이게 꿰뚫지 못한 것은 단지 중도에 그치는 것이 병폐였던 것이다. '일신우신(日新又新)'32)이 이 병폐에 대한 약이다."라고 하고 '일신(日新)' 두 글자를 자리 오른쪽에 걸어놓고 항상 보면서 힘을 다하였다. 이전에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도 개연히 탄식한 것은 안자(顔子)가 위연(喟然)히 탄식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니, 그 아래의 말들은 무궁한 스승의 도를 우러르며 따르고자 한33) 지극한 뜻이 아님이 없다. 묘계(妙契)의 관문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대개 여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여쭈니 답하기를 "또한 좋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세상과는 서로 잊고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34) 하나의 기틀이다. 다만 이곳에 입장을 확고히 정해야 비로소 의론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또한 허여함이 깊었다. 동문 중에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ㆍ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가장 사이가 좋았는데 대개 그 지향이 같고 견해도 같았다. 물러나서는 강해(講解)하고 나아가서는 질정(質正)을 받으면서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니35), 항상 부자(夫子)의 미소를 띠게 하였다.36) 하루는 상자에 보관해 둔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꺼내 보여주셨는데 대개 선생의 심오한 이치를 편 것이었다. 이른 바 성(性)과 천도(天道)37) 및 제자들이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세 군자가 이 때에 듣게 되었다. 선생의 뜻은 대략 "세상에 진절(眞切)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후세의 자운(子雲)과 요부(堯夫)38)를 기다렸는데, 세 사람은 견식이 있으니 내가 너희에게 숨길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일관(一貫)의 요지39)는 오직 증자가 들었고 태극(太極)의 묘리는 단지 양정(兩程)40)이 들었는데, 논자들은 이것을 선생이 도를 진전(眞傳)한 것이라고 여겼으니 대개 옳은 것이다. 애산(艾山)과는 서로 떨어진 거리가 십사(十舍)41)41)ㅍ 십사(十舍) : 사(舍)는 옛날 중국의 군제(軍制)에서 군대(軍隊)의 하루 행정(行程)인 삼십 리를 이르던 말이니, 십사는 삼백 리가 되는데, 일정하지는 않다.인데 매번 사문에서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만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개 그 기류(氣類)42)가 서로 감응하였기에 그 응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한 바탕 화합을 하면 조화로운 음악 가락43)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 흥미진진한 모습을 보았다. 선생이 대곡(大谷)에게 일러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성(姓)이 같고 뜻이 같으며 사는 마을〔里〕의 이름도 같은데 매번 이렇게 자리도 같이 하니, 기록하여 훗날의 고사(故事)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자 모두 기뻐해마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조차 누차 거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편안히 여겨 개의치 않고 그 즐거워하는 것을 바꾸지 않았으니 거의 도에 가까웠다.44) 원근의 배우는 자들이 믿고 따르며 책 상자를 지고 와서 학당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도(師道)의 명망이 저절로 모였으나 겸손하여45) 빈 듯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생도를 계도하는 방도는 이런 것으로 혹시라도 허술히 하지 않았고, 상세하고 간절하게 인도하고 격려하여 점차 다듬어 이루게 하였다. 혹 고요히 앉고 체험케 하며 혹은 변론하고 반증46)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진전을 바랄만하면 기쁨이 안색에 드러났고, 둔하고 막혀서 깨우치기 어려우면 잘못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다. 나아간 경지가 정밀하고 깊은 자는 도와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고, 국한되고 편협하게 보는 자는 가르쳐 달통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였다. 훤하게 깨우쳐주니 듣는 자가 쉽게 깨우쳐서 고갈된 자는 두루 적셔지고 얽매인 자는 벗어났다. 절근(切近)하고 긴요한 곳은 교묘하게 천착하려 하지 않았고, 평탄하고 명쾌한 곳이라도 대략 흘려버리려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책을 볼 때는 모름지기 마음에 붙게 하고 몸에 간절하게 하면 의미가 자연히 깊어진다. 범범하게 널리 읽고 애매모호하게 이해하여 귀결처가 없기보다는 차라리 정밀함을 지극히 하여 요해처를 차지함이 낫지 않겠는가. 한 치를 얻고 한 자를 얻어 가면 진보처가 있는 것이다. 독서가 어찌 문인재자(文人才子)가 되어 급제(及第)를 추구하고 봉록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이겠는가. 단지 한 글자에는 한 글자의 유익함이 있고, 하루에는 하루의 진보가 있을 뿐이다. 아득한 만사는 흉중에 둘 것이 없고, 득실(得失)과 귀천(貴賤)47)은 저 하늘48)에 맡기는 것이다. 뜻이 서지 않으면 한 때의 선한 마음은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새기는49) 것에 불과하며, 많은 경전의 격언과 중요한 말도 문구(文具)나 책방에 불과하다. 사람이 황금 조각이나 옥 부스러기를 얻어도 오히려 애호하여 실추할까 두려워하면서, 이 몸이 얼마나 중요한데 애호하는 방도를 다하지 않겠는가. 일언일행(一言一行)을 삼가지 않고 일각일시(一刻一時)를 삼가지 않으면 모두 스스로 그 몸을 잃으며, 스스로 거만한 자는 남이 반드시 업신여기고, 스스로 버리는 자는 남도 역시 버린다. 의리는 무한하고 사업은 무궁하다. 7, 8분(分)의 공부를 하면 7, 8분의 사람이 되고 10분의 공부를 하면 10분의 사람이 되니, 자기 지위의 고저(高低)는 자기 노력의 다과(多寡)에 달려 있다. 우리들이 이미 세상에서 큰일을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성현의 책을 읽고 성현의 도를 지켜서 붕우들과 함께 하고, 또 이를 후세에 전하여 사문(斯文)의 일맥을 무궁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를 제2의(第二義)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무거운 짐은 한쪽 팔로 움직일 수 없고, 달려드는 물결은 한 줌의 흙으로 막을 수 없다. 비록 고치실ㆍ좁쌀ㆍ모발50) 같은 사소한 현능이나 두공(斗拱)ㆍ빗장ㆍ문설주51) 같은 하찮은 재목이라도 쌓고 쌓아 더욱 기발해지고 서로 의기투합한 연후에야 많은 세상사를 수습할 수 있고 많은 세교(世敎)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크게 입을 떠벌리며 이(理)를 말하고 기(氣)를 말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나아가서 옳은 것을 찾아 구하고 그른 것을 결연히 제거함만 못하다. 아마도 이것이 이기(理氣)의 실제 일일 것이다.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발현되어 가르침이 되었으니, 흐름을 따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실천의 실제를 대략 엿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지인ㆍ생도들과 서석산(瑞石山) 정상에 올라서 풍영(諷咏)하고 돌아왔는데 유연(悠然)히 기우(沂雩)52)의 즐거움이 있었다. 많은 선비들이 정자를 지어 설강(設講)을 하고 '영귀(咏歸)'로 편액을 하였다. 오성사현(五聖四賢)의 초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로 석채(舍菜)53)ㆍ여수(旅酬)54)ㆍ상읍례(相揖禮)를 마친 뒤에 청강하는 경학생(經學生)과 배우는 자들이 빙 둘러 모시고 질문을 하니 삼대(三代)의 유풍이 있었다. 영남(嶺南)55)을 한 번 유람하면서 애산(艾山)과 최계남(崔溪南)56) 등 제공을 만났는데 따르는 문인이 수 십 인이었고, 계남과 애산도 각기 모시고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유명한 정자와 명승지를 두루 다녔는데 이르는 곳마다 경서를 갖고 묻고 논란하며57) 문답을 한 뒤에 도리(道理)를 익히고 연마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추로(鄒魯)58)의 유풍이 모두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또 애산(艾山)과 계남(溪南) 및 족형인 월파(月波)와 약속하여 방장(方丈 지리산)의 종산(鍾山)에서 만났다. 영호남 선비들이 설강을 하고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59) 군자 서너 명이 절충하고 문답을 하는데 위로 선왕의 전례(典禮)부터 학문을 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설파하지 않음이 없었다. 삼산(三山) 권기덕(權基德)이 이를 모두 기록하여 〈종산강록(鍾山講錄)〉을 만들었다. 이날 술이 반쯤 거나해지자 공이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공문제자(孔門諸子)들이 대성(大聖)을 얻어 스승으로 삼고 대현(大賢)을 얻어 벗으로 삼으며 스승에게 묻고 벗에게 익혔다. 그 지극한 즐거움을 상상하면 천년 뒤에도 오히려 느끼는 바가 있다. 선비가 오늘에 태어나서 비록 당우(唐虞)의 임금60)과 고기직설(皐虁稷契)61)을 만나 대낮처럼 밝은 때에 토론62)을 할 수는 없더라도, 맹자(孟子)가 이른 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삼락(三樂)에 끼지 않는다.'63)고 하여 그 경중에 구분을 두었으니,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노사(蘆沙) 선생 같은 스승을 얻었고 대곡(大谷)ㆍ애산(艾山) 등 제군자와 같은 벗들을 얻어서 교화를 입고 은덕에 적셔졌다. 수사(洙泗)64)의 성대함을 옛날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진 날에도 직접 보게 되었으니 이는 일생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홀연 선사(先師)께서 돌아가시고65) 대곡(大谷)도 이어 세상을 떠났으며, 계남(溪南)과 애산(艾山) 제군자는 멀리 십사(十舍)의 밖에 있다. 그러니 대의가 칠십 제자66)의 몸에서 어긋나고, 떨어져 살면서 서하(西河)의 죄67)를 면치 못하는 것처럼 될까 두렵다. 원컨대 종산(鍾山)의 모임을 결성하여 1년에 한 번 만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승낙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 이뤄지지 못했으니 사우(士友)들이 한스러워 했다. 조정에서 병자년(1876, 고종13)에 외교를 한 뒤로 해적들이 교통68)을 하게 되자 세도(世道)의 근심을 깊이 품고 유인(幽人)의 정조69)를 굳게 지켰다. 매번 비바람이 치는 밤이면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서 장남헌(張南軒)70)의 "평생 비바람 치는 저녁이라, 매양 명절(名節)을 지키기 어려움을 생각하네."라는 시구를 크게 외우니, 처연하여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을미년(1895, 고종32) 8월의 사변71)이 있고 계속하여 단발령(斷髮令)72)으로 협박하는 일이 있자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이런 때의 일은 단지 목숨을 버려 죽는 한 길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애산(艾山)에게 편지를 급히 보내 함께 모여 의논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 봄에 내가 의병을 일으켜 토복(討復)하자는 것으로 능성(綾城)에 격문을 보냈다. 격문에 답해오기를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보다는 옥으로 부서지는 것이 나으며,73) 물고기도 바랄 바이지만 어찌 곰발바닥만큼 좋겠는가.74)"라고 하였다. 내가 무릎을 치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 벗 정일신(鄭日新)의 말투이다. 절의가 마음에 뿌리하고 충용이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글귀를 지어 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격문의 내용을 듣고는 한 지방 사람들을 부르고 맹세문을 지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진실로 한 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하는75) 수치를 갖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온 세상이 머리털을 자르는데 오직 청구(靑邱)76)의 한 편에서만 상투를 매는 것을 지키고 있다. 이 상투마저 만약 없다면 만세토록 비태(否泰)와 소식(消息)의 기틀은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란(論難)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저 쪽은 칼이고 우리 쪽은 고깃덩이니 반드시 요행이란 없을 것이다. 일명(一命)의 군자도 없는데 이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77)"라고 하였다. 공이 늠연히 말하기를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토벌을 하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이니78) 의리를 논하고 힘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의리를 지키는데 어찌 다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나는 금성관(錦城舘)에서 주둔하며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이 필마로 와서 모여 함께 방략을 논의했고, 돌아가서도 여전히 여러 번 편지로 서로 면려하였다. 진을 광산관(光山舘)으로 옮기자 공과 다소의 뜻있는 선비들이 나와 함께 광산(光山)에서 사생(死生)의 계책을 세우려 했다가 선유(宣諭)79)를 듣고는 의병 군대를 파하고 중지하였다. 그런데 계속하여 의거를 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협박하는 명령이 있었으니, 대개 적신(賊臣)들이 임금의 권위를 끼고 조령(詔令)을 사칭하여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내가 의리를 함께 한 이들에게 글을 보내서 "이것은 우리 임금의 뜻이 아니다. 죽임에 나아가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종적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다."라고 하니 공도 그렇다고 하였다. 공이 산간을 떠돌다가 내가 체포되었다는 거짓말을 듣고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서 체포를 기다리며 말하기를 "의리상 혼자만 살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곧 거짓말이었음을 알고는 그 일은 묻어두고 묻지 않았다. 후배 계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고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은 감옥 안에서도 《상서(尙書)》를 배웠고80) 배 안에서도 《대학(大學)》을 배웠는데81) 어찌 세상이 어지럽다하여 강학(講學)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한 달에 한 번 강학하는 학규를 정하여 혹 산재(山齋)에서 혹 계정(溪亭)에서 종일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 영남 사람 권봉희(權鳳熙)와 최동민(崔東敏) 무리들이 시유(時儒)들의 뜻에 영합하여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 선현을 범하고 배척했다."라고 하면서 서로 어울리며 분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해도 어찌 일월(日月)의 밝음을 손상하겠는가.82) 선현을 머리에 이고서 후배를 현혹하여 그 해로움이 없지 않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율옹(栗翁)83)에 대해서 독실하게 믿고 높이 흠모하셨으니 여러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음(陰)과 양(陽)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84)는 한 구절은 계합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매양 유행(流行)의 한 측면을 폭넓게 보려 하셨다. 그런데 세유(世儒)들이 이 한 단락을 가지고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근원을 따져서 변론하여 통쾌하게 말씀한 것이다. '피음사둔(詖淫邪遁)85)과 전도(顚倒)86)되고 창피함'87)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뒷사람의 폐단을 밝히려 하신 것이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88) 그의 아들 강(康)은 경연(經筵)에서 《맹자(孟子)》를 강학할 것을 권했고,89) 유원성(劉元城)90)은 온공의 문인이지만 회와 구운 고기처럼 《맹자(孟子)》를 즐겨했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91)의 잘못된 곳을 분별했으며,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92)의 정설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주자(朱子)는 '주자(周子)는 황로(黃老)와 같다.'고 했고, '정자(程子)는 황로의 유풍(流風)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 또한 그 부사(父師)와 전현(前賢)을 무훼(誣毁)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전현(前賢)이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을 후현(後賢)이 변론하여 밝혔다면 바로 존모(尊慕)의 도리를 십분 다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권(權)과 최(崔) 등이 아는 바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통고하여 그 죄를 분명히 알게 하였다. 또 호남의 선비들을 영귀정(咏歸亭)에 모아서 간절하게 변론을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당의 선비들은 금일의 변론을 한 번 보라. 이기설(理氣說) 같은 것은 그 득실을 후학들에게 맡겨둘 수 없으니 마땅히 곧장 살펴서 밝혀야 한다. 만약 자기는 식견도 없으면서 남을 따라 칭찬하고 비방한다면, 그대로 답습하고 구차히 하는 사이에, 이 몸이 편파적인 죄과에 빠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은 자신과 가문의 대계(大計)이니 어찌 이 한 가지 일만을 마치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시유(時儒) 몇 사람이 권(權)과 최(崔)의 여론(餘論)을 따라 반박하고 조목조목 변론했다는 것을 듣고, 조목을 따라 변론하여 밝혔는데 전문이 원집(原集)에 실려 있다. 그 말단에 이르기를 "근세에 주기론(主氣論)이 한 가지가 아니다. 태극(太極)을 분(分)이 없는 일(一)93)로 여기는 것이 있고, 오성(五性)94)을 기(氣)를 띤 사물로 여기는 것이 있고, 명덕(明德)95)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는 것이 있다. 일본만수(一本萬殊)96)를 말하면 만수(萬殊)는 기(氣)가 되고, 대본달도(大本達道)97)를 말하면 달도(達道)가 기가 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과 사물의 치우침과 온전함을 정분(定分)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재(主宰)와 묘용(妙用), 조리(條理)와 단락(段落)에서 한결같이 기(氣)를 중시하여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자식이 아비의 자리를 빼앗고,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의 자리를 빼앗고, 이적(夷狄)이 화하(華夏)의 자리를 빼앗는 것 또한 하나의 예사(例事)가 될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여 주장을 발휘하여 척결하고 차례로 절충하였다. 그런데 일변의 논리만을 오히려 고집하니 단지 자기의 역량을 알지 못함을 드러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오늘날 동방에 주기(主氣)의 한 학설이 있는데, 종유(從遊)하는 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어떻게 가려서 대처할까요?"라고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벽계(蘖溪)98) 이(李) 선생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계책이 광명정대하여 우리 선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저술한 평소 말씀은 스스로 주재(主宰)가 되어 도기수역(道器帥役)99)의 분수를 밝히고 일종의 명기론(明氣論)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 또한 선사와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았으니 진실로 천하의 도(道)는 하나임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팔고 5조약100)을 강제로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근심하고 분노하여 소장을 썼다. 첫머리에는 섬 오랑캐는 물리쳐야지 화친할 수 없으며 나라의 적신들은 참해야지 용서할 수 없음을 말하고, 중간에는 종묘를 품고 사직을 위해 순절하는 의리를 말하여 임금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였으며, 끝에는 죽음을 바쳐 떠나지 않겠다는 의리를 말하였다. 소장을 이미 작성하였는데 유소(儒疏)101)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개연히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얼마 뒤에 면암(勉庵)과 애산(艾山)이 궐리방(闕里房)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듣고 말하기를 "나의 일을 의탁할 곳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궐리방의 약속도 저지되니 책상을 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접어(鰈魚)의 등 위의 한 조각 땅102)이 저들이 들어와 물고기를 그물질하는 곳이 되겠구나. 진(晉)나라가 화하(華夏)의 맹주였을 때 계씨(季氏)의 뇌물을 받고 소공(昭公)을 건후(乾侯)에서 죽게 했는데103) 지금 외딴 지역 오랑캐104) 부류들이 유독 그 뇌물에 취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우리나라 선비들의 여론이나 백성의 여론이 굳이 꺼리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위를 향하는 마음이 없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했으니, 온 하늘 아래가 큰 오랑캐와 작은 오랑캐들이다. 신포서(申包胥)처럼 통곡105)을 한들 그 보존할 땅도 없어졌는데 초(楚)나라106)를 보존하려는 계책을 어찌 바랄 날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근심과 분노가 병이 되었다. 대개 천하가 침몰107)하여 갈 곳도 없었기에 사는 집을 서산(西山)으로 삼고 앉은 곳을 동해(東海)로 삼아, 차라리 굶어 죽고 동해에 빠져 죽겠다는 뜻108)을 누차 안색과 말에 드러냈다. 하루는 입으로 시를 읊기를 "노사(蘆沙) 선생의 병인년 상소는 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았으니, 당시에 만약 두세 가지 계책만 썼더라도 어찌 오늘날에 사직이 기울었으랴."라고 하였다. 또 읊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기로서니 어찌 지금만 같으랴,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해와 달도 잠겼구나. 문을 닫고 자정(自靖)109)의 계책만 있을 뿐, 서산과 동해는 찾아갈 것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문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입명(立命)110)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초상을 그리자고 청하니 공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께서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었고, 더구나 지금은 온 세상이 재난에 빠져111) 무덤의 해골도 땅이 없는데 하필 헛된 초상을 남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인들이 이르기를 "이 일은 생도들의 일이지 선생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사사로이 서로 어울려 초상화를 그려냈다. 공이 뒤에 알고는 찾아서 그 위에 쓰기를 "너의 생이 측은하구나. 의당 너를 두어야 할 곳은 두어(蠹魚)112)의 곁이로다."라고 하였다. 나라가 망했다는 기별을 듣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나라가 망하면 죽어야할 의리가 하나이니 신하가 사직에 죽는 것이었다. 지금 나라가 망함에는 죽어야할 의리가 둘이니 사람과 짐승이 나뉘는 때라 사람이라면 죽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땅히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며,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두발을 보존하며 우리의 도를 지켜서 자정(自靖)113)의 계책을 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생도들이 병문안을 오니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서책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무너져도 이 학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과(碩果)114)의 성쇠가 우리 당을 말미암지 않으면 장차 그것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곁에서 넌지시 아뢰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광택(光澤) 산인(山人)은 사영(四營)115)이 이미 궤멸된 이후에도 붙잡히지 않고 그 종적을 숨기면서 우리의 도(道)를 껴안고 있으니 굳이 필사의 계책을 지을 필요는 없겠습니다."라고 하니 답하기를 "군자가 의리에 대처하는 데에는 때가 있을 뿐이다.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하늘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 같은 물건이 아닌데 오늘날 어찌 붙잡히지 않는 방법이 있겠는가. 광택 산인도 사람인데 그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제자 5~6인이 모시는데 공이 말하기를 "두심언(杜審言)이 말하기를 '조물주에게 고통을 받는다.'116)라고 하였는데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진실로 유쾌하다.117) 내가 죽은 뒤에 그대들은 내가 평소 권면하던 말을 잊지는 않겠지?"라고 하고는 자리를 바르게 하고 치관(緇冠)118)을 씌우도록 하고는 태연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경술년(1910, 순종3) 10월 10일 계유(癸酉)였다. 문인들이 백건(白巾)에 환질(環絰)119)을 두르고 신산(薪山) 뒤편 곤좌(坤坐)의 언덕에 안장하니 치전(致奠)과 뇌문(誄文)이 길에 잇달았다.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 치환(致煥)의 따님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워 내조(內助)가 있었는데 공에 앞서 세상을 떠나 모(某) 산에 안장하였다. 1남 상묵(尙默)은 일찍 죽었고, 세 딸은 광산(光山) 이진휴(李進休)ㆍ홍주(洪州) 송광수(宋光壽)ㆍ밀성(密城) 박경동(朴敬東)에게 시집갔다. 손자 2남은 헌규(憲圭)가 가업을 잘 계승하였고120) 범규(範圭)가 있으며, 손녀 하나는 남평(南平) 문제준(文濟俊)에게 시집갔다. 문하 제자들이 그 유문을 수습하여 판각(板刻)을 이미 마치고 또 언행 중에 평일에 드러난 것을 기초(起草)했다. 대개 소위 잘 관찰하고 잘 말한 것으로 예컨대 청수온직(淸粹溫直)ㆍ화엄온장(和嚴溫莊)ㆍ기량관홍(器量寬弘)ㆍ표리형철(表裏泂澈)한 것들이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를 전후하여 이미 시대의 중망(重望)을 졌으며 기른 덕(德)이 날로 성대해지고 참된 성심이 해로 쌓여갔다. 스승의 문하에 올라서는 그 진결을 터득하여 홀로 밝고 트인 경지에 섰다. 끽긴활발(喫緊活潑)하며, 재능을 품고 있어서 세상을 경륜하고 시대에 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응하는 예우121)가 이르지 않아서 비록 사업에 발휘할 수는 없었으나 내면에 쌓여 덕행이 된 것이 아름다워 볼만하였다. 그 겉모습을 본 자는 몸가짐을 삼간 한 가난한 선비122)로 여겼고, 그 논하는 것을 들은 자는 경전을 읽는 한 노숙한 서생으로 여겼으며, 그 참으로 알고 실제로 본 자는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망정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은'123) 사람으로 여겼다. 뜻이 치택(致澤)124)에 있었는데 행해지지 못했으나 그 도(道)를 작게 쓰려 하지 않았다. 광휘를 감추고 문채를 없앴어도 비단옷의 아름다움이 날로 드러났다.125) 비록 홀로 그 자신을 선하게 하면서126) 곤궁하게 처했지만 바른 학문을 밝히고 선비들의 의취를 바로잡아 사문(斯文)을 도왔으니 그 공적이 어떠한가? 영민한 자질을 갖고도 지둔하게 공부를 하였으며, 관대하고 유쾌하게 마음을 쓰면서도 세밀하고 치밀하게 하였다. 주리(主理)를 가계(家計)로 삼고 지경(持敬)127)을 생애(生涯)로 삼았다. 조용한 가운데 깊이 생각하였으며 담담한 가운데 참된 재미를 가졌다. 그 마음가짐은 마치 창해가 비록 광활해도 그치지 않고 노를 저어가면 그 해안에 닿을 수 있고, 태산이 비록 높아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면 그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외로운 군사가 강한 적을 만나면 목숨을 버리고 앞으로 향하여 적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처럼 하였다. 쇠털이 그 섬세함을 싫어하지 않고 고치실이 그 치밀함을 싫어하지 않듯, 혹 올바르게 보고 뒤집어 보기도 하고, 혹 떼어놓고 보기도 하고 합쳐서 보기도 하면서 쉽게 풀리지 않는 공부에 항상 신고(辛苦)의 노력을 다하였다. 가까이서 취하고 멀리서 취하여128) 조리와 두서를 명백히 살피고129) 올바른 뜻과 곁가지의 뜻은 한계를 정연히 하여 지극히 쌓아나가니 얼음이 풀어지듯 시원스럽고 빗물이 적시듯 흡족하였다. 저 피부(皮膚)처럼 표피적인 학문130)에나 공력을 쓰고 아침저녁으로 실효를 바라는 자가 어찌 그 심오함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타고난 바탕이 몹시 약한데다 어려서 병이 많아 힘써 매진하지 못하였는데, 거칠게나마 문자를 알고 대략 도리를 이해하는 것은 깊이 사색하고 완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생 소년들로서 받은 기품이 완후(完厚)한 자131)가 궁격(窮格)의 공부132)를 더한다면, 도에 나가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또 주서(朱書)에 마음을 붙이고 말하기를 "내가 많이 쇠해져서 피 흘려 싸우듯 공부를 할 수 있는133) 때가 아니다. 그러나 사색하는 능력 한 가지는 예전과 비교해 줄어든 것은 없다. 다만 심히 쇠잔해져서 힘써 행할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라고 하였다. 매양 생도들을 모아놓고 강의하고 예를 익히는 것 외에 나머지 일이 없었다. 혹이 이르기를 "모임에 참석한 자가 모두 진실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 명성을 좋아하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마음에 진실이 없으면 그 진실을 더욱 권면하고 행실에 실효가 없으면 더욱 그 실효를 책려해야 한다. 만약 명성을 좋아하는 혐의를 피한다면 선(善)을 행할 길이 없으니 어찌 이것을 혐의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함께 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안색은 온화하게 한다'134)는 것과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135)는 것이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오랫동안 공력을 들인 뒤에야 용모를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안색을 온화하게 하려는 생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수렴하고 총괄하여 한 몸의 생리(生理)를 두루 흘러 통하게 하면 지각(知覺) 또한 날로 열린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를 아울러 선생에게 아뢰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것은 자신이 겪어본 가운데서 나온 것이니 매우 좋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마음 씀이 주밀하고 상세하며 향상되기를 잊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항상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며,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136) 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137) 어깨와 등을 세워 곧게 하였는데, 비록 심히 노쇠하고 병이 들어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병중에 고통이 없으십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앉은 것이 이와 같고, 병 때문에 마음을 더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어찌 병 때문에 스스로 나태해지겠는가."라고 하였다. 형 하나와 동생 하나가 모두 일찍 죽었다. 자매와는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는데 해마다 두 세 번은 가서 보고 정성을 다하였다.138) 종부제(從父弟)인 구계(九溪) 창림(昌林)이 학업을 같이하고 방소를 함께 하면서 늙도록 변함이 없었다. 족대부(族大父)인 석당공(石塘公)이 일찍부터 유림에 명망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무릇 서로 아는 사이에는 태어남에는 서로 기뻐하고 죽음에는 서로 슬퍼하였으며 예의(禮意)를 빠뜨림이 없었다. 친구가 죽자 유고를 수습하고 책을 만들어 그 아들에게 주었다. 그 어린 고아를 가르치면서 잘하면 가상히 여기고 능하지 못하면 안타깝게 여기면서 또 말하기를 "유명(幽明) 간에 도리를 저버릴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무사(無邪) 박(朴) 공은 어렸을 때의 숙사(塾師)였는데 해마다 반드시 성묘를 하였고, 각 집안의 상자에서 유문(遺文)을 찾아 점검하여 한데 모아139) 책을 만들고 손수 2본을 베껴서 그 집안 후손에게 돌려주고 하나는 집에 보관하였다. 허름한 토담집은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가릴 수 없었으며, 척박한 전답은 죽을 만들어 먹기도 부족하였으나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라면 마땅히 지푸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새겨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천사만종(千駟萬鍾)140)이라도 돌아보지 않는 바가 있게 된다.141)"라고 하였다. 공이 문장을 지을 때는 말은 뜻을 전달하고142) 이치는 순조로우면 그뿐이고, 번잡하게 수식하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선비들이 사부(詞賦)를 두고 경쟁하여 본원(本源)을 버리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어찌 정주(程朱)를 배워놓고 끝내 잡역부가 되겠는가. 반마가(班馬家)143)에 들어가 상객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까지 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며 억제하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공의 문장을 두고 '포백(布帛) 같은 글이요 숙속(菽粟) 같은 맛이다.'144)이라고 추켜세웠으니, 선조를 드러내서 후세에 전하려는145) 자는 반드시 공의 신실한 문장을 얻으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 항상 병기(兵機)ㆍ산술(筭術)ㆍ율력(律曆)ㆍ풍토(風土) 따위에 마음을 썼으나, 뒤에 자신을 닦고 삼가는 것에도 미처 겨를이 없음을 깨닫고 점차 중지하였고 지금은 바로 냉담해졌다."라고 하였다. 운치 있는 물가나 이름난 산에서 바람을 쐬며 읊기를 좋아하였고, 따듯한 봄과 서늘한 가을에는 벗들을 이끌고 술을 갖고 가서 날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그윽이 쌓인 심정을 쏟아냈으니 그 흉금이 초탈하여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 평일의 서소(書疏) 중에 강해(講解)한 문답으로서 간직할 만하고 빠뜨릴 수 없는 것 및 그 성품과 행실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원집(原集)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배우는 데 뜻을 둔 자라면 어찌 이 글들을 가지고 상고하지 않겠는가. 헌규(憲圭)와 문인들이, 내가 선사(先師)의 손자로서 공의 덕을 아는 데에는 의당 나만한 사람이 없다하여 공의 덕을 기술하는 글을 부탁하기에 삼가 그 문인이 기록한 것을 근거로 하고 대략 산삭과 윤색을 가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공이 일찍이 김대곡(金大谷)의 전(傳)을 지어 말하기를 "정주(程朱)로부터 세대가 멀어지자 의론하는 문파가 많아지니 후생(後生) 만학(晩學)들이 딱히 추향할 곳이 없다. 대공지정(大公至正)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절충함으로써 정주(程朱)의 강토를 예전처럼 넓고 말끔히 만든 사람으로 말하자면 노선생(老先生)이 바로 그런 분이다. 비록 그렇지만 선생의 문하에 공이 없었다면 천고토록 전해지지 않은 비결과 한 마음에 홀로 터득한 묘리를 거의 거두어 품고서 말할 곳도 없었을 것이니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이한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그 평생을 살펴보건대, 가리켜 논의할 만한 출사(出仕)를 조금도 하지 않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시종 허물이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온갖 고난을 겪고 극성스런 야유에도 호탕하여 안색에 기미도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박문(博文)과 약례(約禮)146)를 함께 닦아 나가면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 해박하되 잡스럽지 않고, 무성하되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가 있되 넘치지147) 않았고, 간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숙연히 공경하고 기쁘게 복종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공과 대곡(大谷)ㆍ애산(艾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으며 함께 진전(眞傳)을 전수받아서 성대하게148) 유문(儒門)의 의표가 되었다. 그 대곡(大谷)의 전(傳)을 쓴 것은 바로 자기의 전(傳)을 쓴 것이었으니, 내가 무슨 흠잡을 것이 있겠는가. 삼가 이것으로 끝을 맺고 묘도에 새길 자가 채택하기를 고하노라.숭정후 5주(崇禎後五周) 임자년(1912, 순종5) 동지(冬至)149)에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이 쓰다. 公諱義林字季方。學者稱日新先生。鄭氏其先光山人。高麗贊成諱臣扈其肇祖。監司諱麟晉。始仕國朝。應敎諱熊。節度諱應奎。司直諱演贈地官卿。三世連顯。三傳至諱纘。泊於仕進。遯錦城。世篤儒行。曾祖諱埰移朗州。祖諱加錫移金陵。考諱濟玄。兩世壽通政。忠養二親。敎子有法度。嘗遊漢師。謂名利誤人。吾道一脈。當在林下。遂斷當世意。耕讀爲家計。妣珍原朴氏父致聖。韋南熙中后。貞淑有禮。憲宗乙巳十一月甲子。生公于綾之大德第。夢月入懷中。生而聰穎。自幼目無睇視。常合眼默坐曰。眼爲一身上日月。日月晦蝕。天地否閉。甫能言。傍聽塾兒讀小學。能會多少義。乃曰灑掃爲治平之本。手執灑掃惟謹。 嘗從長老聞華夷尊攘。輒問均是人也。何分華夷。曰地有內外。俗有美惡。默念良久曰。人於一身上。亦有華夷。美者爲華。惡者爲夷。人當先尊攘一身上華夷。聞者大驚異之曰。嘗出外遇雨。羣兒皆奔走。獨徐緩自如曰。吾心參天地。吾性同聖賢。其重何如。而輕走失容耶。每出遊遇羣兒繳繞。則必遄返曰父母所戒。在長老之側。遲遲而歸曰父母所樂。常曰。自心其心。不心父母心。非佳子弟。愉婉定省。在視寒暖。前後喪皆毁甚。課日上塚。世傳先稿。蒐粹珍藏焉。始上學授孝經。逐句另解。解輒軆驗。通政公知其志尙有在。不使他業閒之。且曰人貴有業。業貴有成。受爲懷中?。處靜攻苦。忘食忘寢。羣書羣經。講貫詳密。弱冠前後。學已頭顱矣。於是以詞藻爲浮華。功令爲自衒。冷淡爲家計。講誦爲茶飯。味人所不味。樂人所不樂。而見識已卓然於時儒矣。于時儒術分裂 性命橫決 理氣汩亂 上天失主宰本源爲虛位衆嘗遊歷諸家 以究緖餘 而病其無眞知實見 而喙口爭爲二十四戊辰。拜蘆沙先生於沙上。一見而亟稱曰。天資樂易。識見已正。且曰沙彌來叩病僧扉。眉目通明可學機。吾於季方云爾。言下迎刃。掃諸家之釁粃。溯聖哲之異源。充然而歸曰。世之以師道自任者。皆承襲差繆。祇見一邊記聞講說。不過爲隙光勺水淺淺排着。而惟先生資近生知。道本中庸。直接朱子。建立大軆。言言無非自本源上流出來。如大廈千萬間。貯藏許多金帛。隨人所求而用之不竭。善觀而善言。一見而遽以是稱。非自家所造之崇深。所得之眞切。道不得如此。嘗慨然歎曰。古今許多有志者。得受敎之地。而猶不能洞豁貫熟者。只是閒斷爲病。日新又新。爲對病之藥。以日新二字揭座右。常目而致力焉。其無上事而慨然。與顔子喟然者。一串貫來。而其下說話。罔非仰鑽瞻忽。欲從末由之至意。透得妙契關。盖將在此。而因以書稟于先生。答曰。不亦善夫。此正與世相忘。從吾所好之一副機括。但於此處確定脚跟。始可議到。槪亦許之深也。同門有金大谷錫龜,鄭艾山載圭最相善。蓋其志尙同而見解亦同也。退而講解。進而就正。誾誾侃侃。常發夫子之莞爾。而一日出篋藏凉議猥筆以示之。蓋先生之蘊奧所發。而所謂性與天道。及門諸子所不容易得聞。而三君子至是得聞之。先生之意槪曰 世無眞切見解。以待後世之子雲堯夫。而三子者知見。吾可以無隱乎爾也。一貫之旨。惟曾子聞之。太極之妙。惟兩程聞之。謝者以是爲先生眞傳者。槪是耳。與艾山相距十舍。每師門不期而遇。非止一再。蓋其氣類相感。其應有如此者。其一場該洽。不啻宮商律呂。傍人亦見其津津。先生謂大谷曰。二君同姓而同志。居里同名。每此同席。可記之以爲異日故事。蓋喜之無已也。家窶甚。不恒厥居。簞瓢不啻屢空。而晏然不以爲意。不改其樂。殆庶乎。而遠近學者。信從負笈。以致黌舍不能容。師道之望自歸。而粥粥然若虛若無。導迪之方。不以是而或歇后。委曲懇到。誘掖激勵。漸磨成就。或使之靜坐而軆驗。或使之辨論而反隅。步趣可望則喜形於色。鈍滯難開則若癏在己。造詣精深者。贊其莫安於小成。局定偏見者。諭之使進於圓通。曉譬昭然。聽者易曉。枯渴者浹洽。繳繞者脫灑。切近喫緊而不欲巧曲穿鑿。寬坦明快而不欲活略流蕩。嘗曰看書。須要貼心切己。意味自然深長。與其泛濫閑汩而無所歸宿。曷若致精據要。得寸得尺。爲有進步處。讀書豈欲爲文人才子。爲覓第干祿計耶。只是一字有一字之益。一日有一日之進。悠悠萬事。無足置胸中。得喪軒輊。任諸彼蒼。志不立。則一時之善心。不過爲畫脂鏤冰。羣經之格言要語。不過爲文具書肆。人得片金零玉。猶愛護而恐其失墜。此身何等至重。而不盡愛護之方乎。一言一行之不謹。一刻一時之不謹。皆自失其身。自慢者人必慢之。自棄者人亦棄之。義理無限。事業無竆。做得七八分工夫。爲七八分人。做得十分工夫。爲十分人。自家地位高低。在自家用力之多寡。吾輩旣不得有爲於世。則所可爲者。讀聖賢書。守聖賢道。以與朋友共之。又以傳於後。以存斯文一脈於無竆。此不可看作第二義。重任非隻肘可運。奔波非捧土可塞。雖絲粟毛髮之賢。欂櫨店楔之材。積積愈奇。交驩相得然後。可以收拾得多少世事。裨補得多少世敎。大開口說理說氣。不如就日用事物。尋求其是。決去其非。似是理氣實事。蓋公躬行心得。發之爲訓。因流溯源。其踐履之實。槪可覰見矣。嘗與知舊生徒。登瑞石絶頂。風詠而歸。悠然有沂雩之樂。多士築亭。設講扁用詠歸。奉五聖四賢遺眞。每春秋舍菜。旅酬相揖。禮畢聽講。經生學者環侍質問。有三代之遺風。一遊嶠南。會艾山及崔溪南諸公。門人從者數十人。溪艾亦各有弟子陪從。名亭勝地。屨及殆遍。所至執經問難。答問之餘。講劘道理。觀者以爲鄒魯遺風。盡在是矣。後又約溪艾及其族兄月波會方丈之鍾山。嶺湖士。設講請益。三四君子。折衷答問。上自先王典禮。以至爲學節度。靡不說到。權三山基德並記爲鍾山講錄。是日酒半。公揚觶而言曰。孔門諸子。得大聖以爲師。得大賢以爲友。問於師講於友。想像其至樂。千載猶感。士之生於今日。雖不得唐虞之君。與皐夔稷契。都兪吁咈於亭午之日。以孟氏所謂王天下不與三樂。其輕重有分。寧可遺於彼。不可失於此。吾輩得師如蘆沙先生。得友如大谷艾山諸君子。薰蒸涵濡。親見洙泗之盛於去古已遠之日。是一生難再之遇。而忽焉先師奠楹。大谷繼逝。溪艾諸君子。又遠在十舍之外。大義恐乖於七十子之身。離索亦不免西河之罪。願結鍾山之會。以爲一年一遇之地。衆皆唯唯。而世亂而未諧。士友恨之。國朝自丙子外交之後。海寇交通。深懷世道之憂。固守幽人之貞。每風雨夜。衣服冠而坐。大誦張南軒平生風雨夕每念名節難之句。悽然若將泣下。乙未有八月之變。繼有毁髮脅制。奮然曰。此時事只有捐殉一路而已。馳書艾山。約與會議。丙申春。余以擧義討復。發檄綾城。答檄有曰瓦而全。不如玉而碎。魚之欲。曷若熊之美。余擊節而起曰。此吾友鄭日新口氣。非義節桹於心。忠勇發於義。則做不得此句來。及後叩之。果是也。及聞其檄召一方人。作誓言曰。我東方苟有一分人心者。孰不有共天之羞。况今四海淨髮。髮獨靑邱一片。得保撮髻。此髻若亡。則萬世否泰消息絶矣。難之者謂彼方爲刀。我方爲肉。必無幸矣。未有一命之君子。何有於是。公凜然曰。亂賊人人討之。春秋之義論義而不論力。君子之仗義。豈復有希覬哉。時余駐陣在錦城館。匹馬來會。與論方略。歸猶屢書相勉。及移陣光山館。公與多少志士。將同余于光山。爲死生計。聞宣諭罷兵而止。續有義擧諸人逮捕脅令。蓋賊臣挾天矯詔爲此也。余貽書諸同義。此非吾君之意。就戮無義。匿跡待時。爲深得計。公亦云爾。棲屑山間。聞余被逮。訛言。遂還家待逮曰義無獨生。旋聞爲訛而事亦寢不問。以訓迪後輩爲己任。謂生徒曰。古人獄中猶尙書。舟中猶大學。豈可以世亂而忘講學乎。定爲一朔一講之規。或山齋或溪亭。終日無倦。時有嶺人權鳳煕,崔東敏輩。承望時儒風旨。謂凉議猥筆。犯斥先賢。相與紛紜。公謂彼雖欲自絶。何損於日月之明。而頭戴先賢。眩惑後輩。不無其害。不可以不辨。乃曰先生於栗翁。篤信而尊慕。攷諸文集可見。但於陰陽動靜。其機自爾。非有使之一句語有所未契。每欲活看。以流行一邊。及見世儒執此一段。爲主氣證案。推原辨之謂發之太快。而其曰詖淫邪遁。顚倒猖披。所以明後人之弊也。溫公疑孟。而其子康勸講於經筵。劉元城其門人而嗜如膾炙。南軒辨五峯差處。勉齋或有違於考亭定說。朱子謂周子似黃老。謂程子有黃老流風。此亦可以誣毁其父師及前賢律之乎。前賢之偶失照管。後賢辨而明之。乃十分尊慕之道。此豈權崔輩之所知乎。通告嶺中章甫。使明知其罪。又會湖儒於詠歸亭。懇懇辨論曰。吾黨之士。試觀今日所辨。如理氣之說。其得失不可委之於後。當卽下究覈。若己無知見。隨人毁譽。則因仍苟且之頃。安知此身不陷於偏側之科乎。此則身家大計。豈止爲了此一事而已耶。又聞有時儒若而人。從權崔之餘論。有所記辨。駁爲條辨。 遂條辨駁。全文在原集。其末段曰。近世主氣之論不一。有以太極爲無分之一。有以五性爲帶氣之物。有以明德爲形而下。言一本萬殊則萬殊爲氣。言大本達道則達道爲氣。陰陽五行謂非本然。人物偏全謂非定分。主宰妙用。條理段落。一歸重於氣。氣奪理位。則臣奪君。子奪父。妻奪夫。小人奪君子。夷狄奪華夏。亦一例事。先師爲是之懼。發揮剔抉。次第折衷。而一邊之論猶齗齗。多見其不知量也。或問今日東方。有主氣一學。所從遊不可不愼。當何擇處。曰蘗溪李先生。其斥邪衛正之策。光明磊落。與我先師。同條共貫。所著雅言。所以自作主宰。明道器帥役之分。斥夫一種明氣之論。又與先師。若出一口。信知天下之道一而已。及聞賊臣賣國。勒成五條。憂憤忿草疏。首言島夷可攘而不可和。國賊可斬而不可貸。中言毅宗殉社之義。以堅上心。末言效死不去之義。旣成。聞儒疏不納。慨然焚稿。已而聞勉菴艾山。約會闕里。爲擧義之計。曰吾事有託矣。居無何。闕約亦沮。拍案而歎曰。鰈魚背上一片地。爲彼入網鱗哉。晉爲華夏盟主。而受季氏之賂。使召公卒於乾侯。今安知絶域鱗介之類。獨不醉於彼賂乎。我國之士論民論。亦必無所忌憚。民無向上。人化爲獸。一天之下。大倭小倭。包胥之哭。亦無其地。存楚之計。何望有日。憂忿成疾。盖以天下陸沈。無可往矣。居室爲西山。坐處爲東海。嗟殂之嘆。欲蹈之志。屢形於色辭。一日口占曰。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又自古喪邦孰若今。天飜地覆日星沈。惟有杜門自靖計。西山東海不須尋。顧謂門弟子曰。此吾立命之地。門弟子請寫眞。搖手曰。先師之所不屑。矧今寰宇昏墊。塚骨無地。何必以虛影留之。門人謂此生徒事。非先生事。私相與寫出。後覺之。索之書其上曰。爾生可惻。宜爾置之蠧魚之側。及聞無邦之報。潸然下淚曰。古之亡國也。可死之義一。臣死於社稷。今之亡國也。可死之義二。人獸之判。人不可以不死。只當掩戶塞竇。衣吾衣存吾髮守吾道。爲自靖計而已。諸生問疾而來。強病扶坐曰。君輩能親近書冊乎。海枯山崩。此業不可忘。碩果消息。不由吾黨。將委諸何人。有從傍微禀者曰。光澤山人。不被執於四營已潰之後。隱其跡袍吾道。不必作必死計。曰君子之處義。時而已。何可同也。人非翼天鱗海之物。今日豈有不被執之術。光澤山人亦人其日奈何。疾革。弟子五六人侍。公曰杜審言言爲造化所苦。吾亦云爾。然吾死固快活。吾死之後。君輩能不忘吾平日勸勉之言乎。命正席整緇冠。恬然而逝。時庚戌十月十日癸酉。門人白巾環絰。葬薪山後坤原。奠誄相屬於道。夫人驪興閔氏致煥女。柔嘉有內相。先公圽。葬某山一男尙默早卒。三女適光山李進休洪州宋光壽密陽朴敬東。孫二男。憲圭克家。範圭。一女適南平文濟俊。門弟子收拾其遺文。剞劂已畢。又草其言行之著於平日者。蓋所謂善觀而善言者。若曰淸粹溫直。和嚴溫莊。器量寬弘。表裏泂澈。成童前後。已負時望。而養德日茂。眞誠歲積。及登師門。得其眞詮。獨立昭曠。喫緊活潑。懷抱才具。可以經世需時。而善價不至。雖不得發於事業。而蘊之爲德行者。約綽可見。見其外者以爲勅躬一措大。聞其論者以爲讀經一老生。而其眞知而實見者以爲寧學聖人而未至。不欲以一善成名。志在致澤而不行。不欲小用其道。韜光鏟采。錦絅日章。雖其獨善竆居。而其明正學正士趨。羽翼斯文。其功爲何如哉。以敏底質。做鈍底工。用寬快心。着細密地。主理爲宗計。持敬作生涯。從容中有深思量。平淡中有眞滋味。其執心如滄海雖關。撓棹不停則可達其岸。泰山雖屹。運步不駐則可躋其頂。孤軍遇勁敵。舍死向前。敵不死則我死。牛毛不厭其細。蠶絲不厭其密。或正倒看。或離合看。常用極辛苦不快活工夫。近取遠取。條緖斤斤。正義傍義。界限井井。積累之至。渙然如冰釋。洽然如膏潤。彼用工於皮膚。責效於朝暮者。何能髣髴其壼奧也。嘗曰吾稟質甚癯。小少多疾。不能努力趲進。而粗識文字。略曉道理者。潛思玩索。得於天性。以知後生少年受氣完厚者。加以竆格之工。則於進道也不難矣。晩年。又着心於朱書曰。衰甚非血戰攻堅時節。而思索一路。較昔無減。但摧頹之甚。不能力行。爲可歎。可歎每會生徒。講義習禮之外。無餘事。或謂彼在會者。未必皆有誠心。好名或不無其嫌。公曰。心有未誠。益勉其誠。行無實效。益責其效。若避好名之嫌。則無爲善之路。豈嫌於是而幷廢其所當爲者耶。嘗疑色溫容莊或相背。用力之久。始知容莊不在思溫外。收斂管攝。使一身生理。周流通徹。則知覺亦曰開。並擧似於先生。答曰。此是自身經歷中出。甚善。盡其用心周詳。不忘向上。有如此者。常夙興盥櫛。正衣冠尊瞻視。儼然若思。肩背聳直。雖衰病之甚猶然。或謂病裏得無苦惱。曰吾平生所坐如此。非以病而加之意也。亦何以病而自惰。一兄一弟皆早夭。姊妹相距非甚近。歲二三往見。致款洽。從父弟九溪昌林。同業共方。至老無替。族大父石塘公早有儒望。自少服事。凡於相知。生相慶而死相哀。禮意無闕。朋友死。收遺墨。編摩而遺其子。訓其孤幼。嘉善而矜不能。且曰。恐負幽明。無邪朴公。童子時塾帥。歲必展墓。搜檢遺文於各家巾衍。裒粹成袠。手寫二本。歸其家孫。一藏于家。環堵蕭然。不蔽風雨。薄田不足以供饘粥。而處之裕如。嘗曰。士當以一介不取意思。鏤在肝膈上。方於千駟萬鍾。有所不顧。其爲文章。辭達理順。枝蔓雕飭。所不屑焉。嘗病時士競詞藻遺本源。至謂寧學程朱。卒爲廝役。不欲入班馬家作上客。蓋救時抑揚之意也。是以當時以布帛之文菽粟之味推許之。而闡先乖後者。必欲得其信筆也。嘗曰小少嘗用心於兵機筭術律曆風土之類。後覺自己修勅。有不暇及。漸次銷歇。至今直是冷淡耳。韻水名山。雅好風詠。春暄秋凉。挈朋攜酒。竟曰而歸。以陶寫其幽菀。盖其襟懷飄灑。不爲世故所惹絆者然也。其平日書疏中講解答問。可有而不可闕者。與其照管性行。皆載在原集。今姑略之。有志於學者。盍就而攷諸。憲圭與諸門人。以宇萬爲先師之孫。知德宜莫余若。屬筆於狀德。謹据其門人所記而略加刪潤。序次如右。公嘗傳金大谷。有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老先生其人也。雖然若先生之門。未有公則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幾於卷而懷之。無可告語。而此可謂千載奇遇。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始終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並臻。而天德王道有軆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而敬。怡然而服者何人。蓋公與大谷,艾山。一而二。二而一。同受眞傳。蒙然爲儒門之表率。其所以傳大谷者。適所以自傳也。吾何間然。謹以是終焉。以告表隧者採焉。崇禎後五周壬子陽復日幸州奇宇萬撰。 호조 판서 원문의 '지관(地官)'은 호조(戶曹)의 별칭이다. 금성(錦城) 전라도 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靈巖)의 옛 이름이다. 금릉(金陵) 전라도 강진(康津)의 옛 이름이다. 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존양(尊攘) 중화(中華)를 존중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어지럽게 노는 원문에는 '繳緩'으로 되어 있으나 문의가 통하지 않아,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 '繳繞'으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 번역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며 원문의 '정성(定省)'으로, 자식이 이른 아침에 부모님의 침소를 찾아 문안을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돈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모든 자식이 된 사람의 예는 겨울이면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찬 지……살폈다 부모의 음식을 잘 살피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에 "음식을 올릴 적에 반드시 차가운지 따뜻한지의 적절함을 살피며, 상을 물리거든 드신 음식을 물으셨다.〔食上, 必在視寒暖之節, 食下, 問所膳.〕"라고 하였다. 가슴 속의 경구(警句) 원문의 '회중간(懷中簡)'은 '가슴 속의 간서(簡書)'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경계하는 문구의 의미이다. 《시경》 〈출거(出車)〉에 "국사가 어려움이 많아 편안히 쉴 수가 없네.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이 간서가 두렵다네.〔王事多難, 不遑啓居. 豈不懷歸, 畏此簡書.〕"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을 말한다. 공령(功令) 과거시험에 쓰이는 시문을 말한다. 사상(沙上)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 있는 장성(長城)을 말한다. 틈……물 작고 하찮은 지식을 비유한 것이다. 생지(生知)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준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상등(上等) 자질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 자질이고, 많은 노력을 들여 배우는 자가 또 그 다음 자질이니, 많은 노력을 들여 배우지 않으면 백성으로서 하등(下等)의 자질이 된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고 하였다. 일신우신(日新又新) 《대학장구》 전(傳) 2장에,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을 끌어와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又日新.〕"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무궁한……한〔仰鑽瞻忽欲從末由〕 안연(顔淵)이 일찍이 공자의 도(道)가 한없이 깊고 커서 따라가고자 해도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인데, 정의림이 노사의 학문에 대해 감탄한 것을 이에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부자(夫子)의 도(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볼 때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부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해 주시므로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한지라, 그를 따라가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라고 하였다. 내가……따르는〔從吾所好〕 부귀(富貴)와 같은 외물에 연연하지 않고 의리(義理)를 따를 것임을 말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부를 추구해서 얻을 수 있다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자의 일이라도 내가 또한 그것을 하겠지만,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리라.〔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고 하였다.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니 원문의 '간간은은(侃侃誾誾)'으로 아랫사람과 대화를 할 때 강직하고 윗사람과 말할 때는 부드럽게 간쟁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향당(鄕黨)에 있을 때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강직하게 하고, 상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간쟁하였다.〔朝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허씨설문(許氏說文)》을 인용하여 "간간은 강직(剛直)한 것이요, 은은은 화열(和悅)하되 시비는 다투는 것이다.〔許氏說文, 侃侃, 剛直也, 誾誾, 和悅而諍也.〕"라고 하였다. 항상……하였다 스승으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웃을 짓게 하였다는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 다스리는 무성(武城)에 가서 현가 소리를 듣고 "공자가 빙그레 웃으셨다.〔夫子莞爾而笑.〕"라고 하였다. 성(性)과 천도(天道)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자공이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었지만, 부자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하였다. 자운(子雲)과 요부(堯夫)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인데, 보통 당대(當代)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줄 만한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전한(前漢)의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어 놓고 "후세에 양자운(揚子雲 양웅)이 나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하였고, 송대의 소옹(邵雍)이 《황극경세(皇極經世)》를 지어 놓고 "요부(堯夫 소옹)가 후세의 요부에게 드린다."라고 했다. 일관(一貫)의 요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일리(一理)가 만사(萬事)를 관통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증자(曾子)를 불러 "삼(參)아, 내 도는 한 가지로 꿰뚫고 있다.〔參乎, 吾道, 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가 이 의미를 즉시 이해하여 의심 없이 대답하기를 "예,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論語 里仁》 양정(兩程) 송(宋) 나라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周敦頤)의 제자이다. 기류(氣類) 지기(志氣)가 비슷한 동류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그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조화로운 음악 가락 두 사람 사이가 음악이 화음을 이룬 것 같았다는 것이다. 원문의 '궁상(宮商)'은 오음(五音) 가운데 궁음(宮音)과 상음(商音)으로, 흔히 음률이나 악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율려(律呂)'는 육률(六律)과 육려(六呂)로 역시 음악의 뜻으로 쓰인다. 먹고……가까웠다 매우 가난했으나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고, 또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안연은 도에 가까울 것이다.〔顔氏之子, 其殆庶幾乎.〕"라고 하였다. 겸손하여 원문의 '죽죽(粥粥)'으로, 본래 유약하여 무능한 듯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겸손한 모양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의관이 바르고 동작이 신중하며……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며 유약하여 무능한 듯이 보이니, 그 용모에 이와 같은 점이 있다.〔儒有衣冠中, 動作愼,……其難進而易退也, 粥粥若無能也, 其容貌有如此者.〕"라고 하였다. 반증 원문의 '반우(反隅)'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한 귀퉁이를 들어보였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로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귀천(貴賤) 원문의 '헌지(軒輊)'로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수레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고 한다. 《시경》 〈유월(六月)〉에 "융거가 이미 편안하니 지(輊)와 같고 헌(軒)과 같다.〔戎車旣安, 如輊如軒.〕"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귀천(貴賤)을 비유한 것이다. 하늘 원문의 '피창(彼蒼)'으로 《시경》 〈황조(黃鳥)〉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 좋은 사람을 죽이도다. 만약 대속(代贖)할 수 있다면 사람마다 그 몸을 백번이라도 바치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라고 하였다. 기름에……새기는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수로(殊路)〉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보람은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고치실ㆍ좁쌀ㆍ모발〔絲粟毛髮〕 하찮은 것들을 말한다. 두공(斗拱)ㆍ빗장ㆍ문설주〔欂櫨店楔〕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작은 소재들이다. 기우(沂雩) 기수(沂水)와 무우(舞雩)를 가리키는데, 초연히 산수 간에 노니는 즐거움을 언급할 때 나오는 지명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석채(舍菜) 석채(釋菜)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학교에 입학할 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채소류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전례(典禮)를 이른다. 여수(旅酬) 정제(正祭)가 끝난 뒤에, 제사에 참여했던 친족이나 빈객들이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 서로 공경의 예를 표하며, 술잔을 권하는 의례이다. 영남(嶺南) 원문의 '교남(嶠南)'으로 조령(鳥嶺) 이남(以南)인 영남(嶺南)을 말한다. 교는 중국의 교령(嶠嶺)으로, 우리나라의 조령을 교령에 비유한 것이다. 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말한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경서를……논란하며 많은 선비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향사례가 끝나고 천자가 정좌하여 직접 강(講)하면 제유가 경서를 지니고 그 앞에서 묻고 논란하는데, 관대를 하고 홀을 꽂고 띠를 맨(搢紳) 사람들로 교문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饗射禮畢, 帝正坐自講, 諸儒執經問難於前,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蓋億萬計.〕"라는 말이 《후한서》 〈유림열전(儒林列傳)〉 서문에 보인다. 추로(鄒魯) 공자(孔子)ㆍ맹자(孟子)의 학문을 말한다. 추(鄒)는 맹자의 출생지이고, 노(魯)는 공자의 출생지이다.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 원문의 '청익(請益)'으로,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솔선할 것이며 부지런히 해야 한다' 하자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다.〔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曰, 無倦.〕"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당우(唐虞)의 임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가리킨다. '당우'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로, 곧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고기직설(皐虁稷契) 현신(賢臣)들을 가리킨다. 순 임금의 신하로 법의 집행을 맡았던 고요(皐陶), 전악(典樂)으로서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기(虁),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 민정 장관이라 할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토론 원문의 '도유우불(都兪吁咈)'로, 본래 군주와 신하가 서로 자유롭게 정사를 의논하고 의견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도(都)와 유(兪)는 찬성의 의미, 우(吁)와 불(咈)은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우가 말하였다. '아, 훌륭합니다. 제이시여. 자리에 있을 때를 삼가소서.' 제순(帝舜)이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옳다.'〔禹曰都帝, 愼乃在位, 帝曰兪.〕"라고 하였다. 또 《서경》 〈요전(堯典)〉에 "제가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말이 옳지 않다.'〔帝曰吁, 咈哉.〕"라고 한 예가 있다. 천하에……않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수사(洙泗) 수강(洙江)와 사강(泗江)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강이다. 공자의 고향에 이곳과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 내지 학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돌아가시고 원문의 '전영(奠楹)'은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는 것으로, 죽음을 에둘러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전(奠) 올리는 것을 받은 꿈을 꾸고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병으로 누운 지 7일 만에 별세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칠십 제자 공자의 제자 70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노사의 걸출한 문하생을 뜻하는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나온다. 떨어져……죄 무리와 헤어져 지낸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은둔해 있었는데, 아들이 죽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실명(失明)하였다. 증자(曾子)가 문병을 오자, 자하는 죄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이 찾아왔다고 한탄하였다. 이에 증자가 자하의 죄를 낱낱이 따지자, 자하가 그 말에 수긍하면서 "내가 지나쳤다, 내가 지나쳤다. 내가 벗들을 떠나 홀로 머물러 지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吾過矣, 吾過矣. 吾離羣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병자년(1876, 고종13)에……교통 고종 13년(1876)에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맺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 부산ㆍ인천ㆍ원산의 3항(港)을 개항하고 서울에 일본 공사관을 설치하게 된 일을 말한다. 유인(幽人)의 정조〔幽人之貞〕 '유인(幽人)'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에 "행하는 도가 평탄하니 그윽한 사람이라야 정하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라고 하였는데, 이는 굳센 정조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장남헌(張南軒) 남송의 학자인 장식(張栻)의 호로,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이다. 을미년 8월의 사변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단발령(斷髮令) 일본이 1895년(고종32)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1월에 단발령을 내린 것을 말한다. 질그릇으로……나으며 차라리 정의(正義)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한 절의를 비유한 말이다.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열전(元景安列傳)〉에 "대장부가 차라리 옥그릇으로 부서짐을 당할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大丈夫, 寧可玉碎, 不能瓦全.〕"라고 하였다. 물고기도……좋겠는가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가지겠다. 삶도 내가 원하고 의리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원수와……하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는다.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청구(靑邱)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일명(一命)의……있는가 '일명(一命)의 군자'는 최하급 관리를 말한다. 주대(周代)의 일명에서 구명(九命)까지의 관계(官階)에서 유래하였다. 최하급의 관직도 하지 않았으니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뜻이다. 난신적자(亂臣賊子)는……의리이니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의 "말로써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수 있는 이라면 성인의 문도이다.〔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춘추》의 법도에 따른다면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다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여야 할 필요는 없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는 말이 나온다. 선유(宣諭) 임금의 유지(諭旨)를 선포하는 것이다. 옛사람은……배웠고 한(漢)나라 때 순리(循吏)인 황패(黃霸)가 하후승(夏侯勝)과 함께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곡히 요청한 결과 하후승에게 《상서(尙書)》를 배워 뒤에 현달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5 夏侯勝傳 卷89 循吏傳 黃霸》 배……배웠는데 송나라의 충신 육수부(陸秀夫)가 금(金)나라 군사에게 쫓겨 남쪽 바닷가 애산(厓山)에서 떠돌던 위급한 상황에도 배 안에서 매일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어린 황제에게 강독을 권했다. 애산(崖山)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먼저 처자식을 빠져 죽게 하고는 자신은 왕을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때 배 안에서 죽기 직전까지 강독했다고 한다.《宋史 卷451 陸秀夫傳》 저들이……손상하겠는가 험담하고 비방하여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비방하자 자공(子貢)이 "그러지 말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의 어짊은 언덕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 같아서 넘을 수 없느니라. 사람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해와 달을 어찌 손상하리오. 다만 자기의 역량을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로다.〔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율옹(栗翁)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가리킨다. 음(陰)이……아니다 이이(李珥)가 〈성호원에 답함〔答成浩原〕〉에서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동하면 이(理)가 동(動)에 타는 것이요 이가 동하는 것은 아니며, 음이 정하면 이가 정(靜)에 타는 것이요 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陰靜陽動, 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也.〕"라고 한 내용이 있다. 《栗谷全書 卷10》 피음사둔(詖淫邪遁) 병폐가 있는 4가지 종류의 말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언(知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맹자(孟子)는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전도(顚倒) 저본에는 '顚側'로 되어 있으나 '顚倒'의 오기인 듯하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도 '顚倒'로 되어 있다. 피음사둔(詖淫邪遁)과 전도(顚倒)되고 창피함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기정진이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에서 "지금 사람들은 '도리(道理)' 두 글자를 아득하여 생각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내고, 조금만 발현하고 환히 드러난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기(氣)에 속하게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理氣)를 안다고 하고, 이렇지 않은 사람은 이기를 모른다고 하니, 헛된 이름과 과거의 말로 도를 말하고 이를 말하지만, 그 실상은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아 모든 사물의 본령으로 삼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천하에 다시는 피음사둔이 없을 것이니 전도되고 창피함이 무슨 일엔들 없겠는가. 〔今人驅道理二字於冥漠不可思議之地, 而纔有發見昭著, 一屬之氣. 如此者爲識理氣, 不如此者爲不識理氣, 雖以虛名過去說, 說道說理, 而其實則氣奪理位, 爲萬事本領而已. 若是則天下更無詖淫邪遁矣, 顚倒昌披, 何事不有.〕라고 한 내용을 말한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 온공(溫公)은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으로, 사후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으로 부른다. 맹자(孟子)의 말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고 산정(刪正)한 《의맹(疑孟)》을 지었다. 그의……권했고 사마강(司馬康)은 사마광의 아들로, 철종(哲宗)에게 말하기를 '《맹자》는 글이 가장 순정하고, 왕도(王道)를 진술한 것은 더욱 살펴보기에 마땅합니다.〔孟子爲書最醇正, 陳王道, 尤所宜觀覧.〕'라고 한 내용이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7에 보인다. 유원성(劉元城) 송나라 때의 학자 유안세(劉安世)를 말한다. 원성은 그의 봉호이다.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 '남헌'은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남헌은 그의 호이다. '오봉'은 호굉(胡宏, 1106~1161)의 호이다. 그의 자는 중인(仲仁)으로 제자로 남헌(南軒)을 두었다.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 '면재'는 송(宋)나라 문신 황간(黃幹)이다. 주자(朱子)의 제자이다.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이다. '고정'은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거했던 곳으로, 고정서원(考亭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분(分)이 없는 일(一)〔無分之一〕 여기서 말하는 '분(分)'과 '일(一)'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때의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말한다. 참고로 노사 기정진은 논란이 되었던 〈납량사의(納凉私議)〉에서 분(分)이 없는 일(一)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납량사의(納凉私議)〉 참조.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서 주희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在明明徳〕"를 풀이하면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徳者, 人之所得乎天而虚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일본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이르기를 "삼아, 우리 도는 한 이치로써 오만 일을 관철시키는 것이다.〔參乎 吾道一以貫之〕" 한 데 대하여,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충서(忠恕)를 논함에 있어, 서(恕)가 충(忠)에서 분파(分派)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수가 한 근본이 되는 것과 한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이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 나가서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서 허다한 지엽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朱子語類 卷29》 대본달도(大本達道) 대본은 중(中)이고, 달도는 화(和)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벽계(蘖溪) 이덕수(李德壽)의 호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로(仁老)이다. 선조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713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문의 현감(文義縣監)에 임명되고, 이후 대제학(大提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기수역(道器帥役) '형이상'이 도(道), '형이하'가 기(器), 수(帥)는 이(理), 역(役)은 기(氣)를 말한다. 5조약 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를 말한다. 접어(鰈魚)의……땅 조선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나라 바다에 접어(鰈魚 가자미)가 난다 하여, 우리 나라를 접해(鰈海)니 접역(鰈域)이니 한다. 진(晉)나라가……했는데 노소공(魯昭公) 25년에 소공이 삼가(三家)의 핍박을 받아 제(齊)나라로 피신하였다가 노나라로 돌아올 때, 계씨(季氏)가 제나라에 뇌물을 써서 노 소공이 빨리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6년의 전(傳)에 "여름에 제후(齊侯)가 소공(昭公)을 노나라로 들여보내고자 하여 신하들에게 노나라 계씨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하였다.……〔夏, 齊侯將納公, 命無受魯貨.……〕"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계씨의 가신이 비단 두 필을 말아 폐백을 만들어 제나라 고기(高齮)를 통해 자유(子猶)를 움직여 소공이 순탄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소공은 결국 건후에서 죽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32년조 참조. 오랑캐 원문의 '인개(鱗介)'로, 비늘이 있는 물고기와 딱딱한 껍질을 지닌 개충(介蟲)을 가리키는데,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78 〈양종전(楊終傳)〉에 "광무제(光武帝)가 서역(西域)의 나라들과 국교를 단절하여, 개린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상으로 바꿔 입지 못하게 하였다.〔光武絶西域之國, 不以介鱗易我衣裳〕"라고 하였는데, 이현(李賢)의 주에, "개린은 먼 오랑캐를 비유한다.〔介鱗, 喻遠夷.〕"라고 하였다. 신포서(申包胥)처럼 통곡 '포서(包胥)'는 신포서(申包胥)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이다.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서 7일 밤낮을 통곡하니, 진(秦)나라 애공(哀公)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구원병을 출동시켜 구해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초(楚)나라 여기서는 조선을 비유한 것이다. 침몰 원문의 '육침(陸沈)'으로, 나라가 외적(外賊)에게 침입을 당하여 망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경저(輕詆)〉에 "환공(桓公)이 개연히 이르기를, '드디어 신주(神州)로 하여금 육침(陸沈)되게 하여 백 년 동안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왕이보(王夷甫) 등 여러 사람들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桓公慨然曰, 遂使神州陸沈, 百年丘墟, 王夷甫諸人, 不得不任其責.〕'"라고 하였다. 서산(西山)으로……뜻 무도한 세상에서 살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원문의 '嗟殂'는 '嗟徂'의 뜻과 같다. '서산(西山)'과 '차조(嗟徂)의 탄식'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 즉 서산(西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기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저 서산에 올라, 그 고사리를 캐도다.……아아 떠나가리라, 천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矣.……於嗟徂兮, 命之衰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동해(東海)'와 '욕도(欲蹈)의 뜻'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東海)를 밟고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자정(自靖)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입명(立命)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절하거나 장수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입명은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인위로 해치지 않음을 이른다.〔立命, 謂全其天之所付, 不以人爲害之.〕"라고 하였다. 재난에 빠져 원문의 '혼점(昏墊)'으로, 재해를 입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홍수가 하늘까지 닿아 질펀하게 산을 삼키고 언덕을 넘으니 백성이 재난에 빠졌다.〔洪水滔天, 浩浩懷山襄陵, 下民昏墊.〕"라는 말이 나온다. 두어(蠧魚) 책을 갉아먹는 좀인데, 여기서는 서적을 뜻한다. 자정(自靖) 자정은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석과(碩果) 과일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로서,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군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았다.〔碩果不食.〕"라고 하였다. 사영(四營) 훈련원(訓鍊院)ㆍ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ㆍ총융청(摠戎廳)을 이른다. 두심언(杜審言)이……받는다 생사는 운명이라는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唐)나라 두심언(杜審言)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송지문(宋之問) 등 동료 문인들이 찾아가서 위문하자, "조화 소아에게 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甚爲造化小兒相苦, 尙何言.〕"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201 杜審言列傳》 나의……유쾌하다 죽어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죽음을 유쾌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치관(緇冠)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이른다. 환질(環絰) 저본의 '環經'은 '環絰'의 잘못인 듯하다. 한 가닥의 삼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삼줄로 감아 상복의 허리나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禮記 雜記》 가업을 잘 계승하였고 원문의 '극가(克家)'로, 조상의 사업과 집안일을 잘 계승할 수 있는 훌륭한 자제를 지칭하는바, 《주역》 〈몽괘(蒙卦) 구이(九二)〉에 "구이는 몽매함을 포용해주면 길하고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일을 잘하도다.〔九二, 包蒙吉, 納婦吉, 子克家.〕"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상응하는 예우 원문의 '선가(善價)'로, 좋은 값인데 능력에 상응하는 예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궤에 담아서 감춰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니, 공자가 "팔겠다, 팔겠다.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하였다. 가난한 선비 원문의 '조대(措大)'로 큰일을 조치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난한 선비를 가리킨다. 차라리……않은 이 말은 여대림(呂大臨)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애사(哀詞)를 지으면서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차라리 한 사람이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병통을 삼을지언정 일시적인 이익으로 자신의 공을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寧學聖人而未至, 不欲以一善成名, 寧以一物不被澤, 爲己病, 不欲以一時之利爲己功.〕"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近思錄 觀聖賢》 치택(致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비단옷의……드러났다 군자(君子)의 성대한 도(道)는 은은하게 가리어져 있으나 날로 밝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운 듯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홀로……하면서 원문의 '독선(獨善)'인데, 독선기신(獨善其身)의 준말로, 세상에 나가 뜻을 펴지 못하면 자기 일신을 선하게 하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나니, 곤궁하면 홀로 그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여 뜻을 펴면 천하를 선하게 하였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지경(持敬)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서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가까이서……취하여 원문의 '근취원취(近取遠取)'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복희씨(伏羲氏)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를 만들 때를 설명하면서 "가까이로는 자신에게서 취하고 멀리로는 물건에서 취한다.〔近取諸身, 遠取諸物.〕"라고 하였다. 명백히 살피고 원문의 '근근(斤斤)'으로, 《시경》 〈집경(執競)〉에 "저 성왕과 강왕으로부터 곧 사방을 소유하시니 밝게 살피는 그 현명한 분이로다.〔自彼成康, 奄有四方, 斤斤其明.〕"라고 하였다. 모전(毛傳)에서는 "'근근(斤斤)'은 명백히 살피는 것이다.〔斤斤, 明察也.〕"라고 하였다. 피부(皮膚)처럼 표피적인 학문 '피부(皮膚)'는 표피적인 천근한 학문을 비유한 것이다. 《문자(文子)》 〈도덕(道徳)〉에, 노자가 말하기를 "상등의 학문은 정신으로 듣고 중등의 학문은 마음으로 듣고 하등의 학문은 귀로 들으니, 귀로 듣는 자는 학문이 피부에 있고 마음으로 듣는 자는 학문이 살에 있고 정신으로 듣는 자는 학문이 골수에 있다. 〔上學, 以神聽; 中學, 以心聽; 下學, 以耳聽. 以耳聽者, 學在皮膚; 以心聽者, 學在肌肉; 以神聽者, 學在骨髓.〕"라고 하였다. 후생 소년들로서 받은 기품이 완후(完厚)한 자 저본에는 "得於天性, 以知後生少年, 受氣完厚者"로 되어 있으나 문세가 순하지 않아서 "後生少年受氣完厚者"로 되어 있는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따라 번역하였다. 궁격(窮格)의 공부 궁(窮)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하는데,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공부를……있는 원문의 '공견(攻堅)'은 학문을 잘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예기》 〈학기(學記)〉에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마치 목수가 견고한 나무를 다듬듯이 한다.〔善問者, 如攻堅木.〕"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안색은 온화하게 한다 원문의 '색온(色溫)'으로, 군자가 생각하는 아홉 가지 일 즉 구사(九思) 가운데 "안색은 온화하기를 생각한다〔色思溫〕"는 것을 말한다. 《論語 季氏》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 원문의 '용장(容莊)'으로, 구용(九容) 즉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 가운데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色容莊〕'는 것을 말한 것이다. 《禮記 玉藻》 의관을……하며 《주자어류》 권12에 "경에 대한 설은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단지 '정제엄숙'과 '엄위 엄각'과 '동용모 정사려'와 '정의관 존첨시'와 같은 이 몇 마디 말에 대해 충분히 음미하면서 실제로 공부를 해 나간다면, 이른바 '직내'와 '주일'의 상태가 자연히 이루어져서 굳이 안배할 필요도 없이 몸과 마음이 숙연해지며 안과 밖이 여일하게 될 것이다.〔敬之說, 不必多言. 但熟味整齊嚴肅. 嚴威儼恪. 動容貌. 整思慮. 正衣冠. 尊瞻視. 此等數語. 而實加功焉. 則所謂直內. 所謂主一. 自然不費安排. 而身心肅然. 表裏如一矣.〕"라고 하였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이하 정의관(正衣冠) 존첨시(尊瞻視)까지의 말들은 정이(程頤)가 주일(主一)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들이다. 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儼若思〕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공경하지 않은 것이 없어, 엄연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한다.〔毋不敬 儼若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정성을 다하였다 저본에는 '致欸洽'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致款洽'의 잘못인 듯하다. 한데 모아 저본에는 '裒粹'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裒稡'로 고쳐 번역하였다. 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지푸라기……된다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의 도를 좋아하여 그 의가 아니고 그 도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천사를 매어 놓아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그 의가 아니고 그 도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며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伊尹耕於有莘之野, 而樂堯舜之道焉. 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弗顧也, 繫馬千駟, 弗視也. 非其義也, 非其道也, 一介不以與人, 一介不以取諸人.〕"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말이 뜻을 전달하고 원문의 '사달(辭達)'로,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공자가 "말은 뜻을 전달할 뿐이다.〔辭達而已矣.〕"라고 하였는데, 문장은 아름다운 수사보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반마가(班馬家) 문장가를 말한다. 반마(班馬)는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을 병칭한 말로, 한나라 때의 대표적인 문장가들이다. 포백(布帛)……맛이다 평범하면서도 맛이 깊고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말한다. 포백(布帛)은 옷감이고 숙속(菽粟)은 곡물인데,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송사(宋史)》 권127 〈정이열전(程頣列傳)〉에 정자를 찬미하여 "그 말씀의 아름다움이 포백과 숙속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라고 하였다. 후세에 전하려는 저본에는 '乖後'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垂後'로 고쳐 번역하였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학문을 배워 식견을 넓히고, 그 지(知)를 예(禮)로 요약하여 행(行)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넘치지 저본에는 "隘"로 되어 있으나, 《대곡유고(大谷遺稿)》 권6 〈傳〉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는 "溢"로 되어 있어 고쳐 번역하였다. 성대하게 저본에는 '蒙然'으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菀然'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동지(冬至) 원문의 '양복일(陽復日)'로, 순음(純陰)에서 양(陽)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날인데 동지(冬至)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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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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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일신재선생언행록 日新齋先生言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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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임씨 유사 孺人林氏遺事 조군(趙君) 익제(翼濟)는 자가 사빈(士彬)이요, 함안인(咸安人)이다. 효우(孝友)하고 돈목(敦睦)하며 선(善)을 즐거워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군과 나는 중년의 벗인데 만년에 비로소 이웃에 접하여 서로 어울렸다. 이 때문에 부인의 아름다운 부덕(婦德)과 많은 내조(內助)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부인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고(故) 충절공(忠節公) 팔급(八汲)의 후손으로 경인(景仁)ㆍ수길(守吉)ㆍ준원(俊源)이 그 증조 이하 3세의 휘이다. 모친은 한산 정씨(韓山程氏) 석조(錫祚)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기유년(1849, 즉위년) 11월 20일에 태어났다. 부인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16세에 시집을 와서56) 시부모를 받들어 모시면서 정성과 봉양을 다하여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올리고 신혼(晨昏)57)의 예절에 날마다 일정한 규정을 두었다. 시할머니 조씨(曺氏)의 깊은 병환이 오래되어 10년에 이르도록 부인은 마음으로 걱정하며 낯빛도 풀이 죽었다.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58)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선잠도 자지 않을 정도였다. 남편을 섬길 때는 화순(和順)하고 공경함을 모두 지극히 하여 한 마디 말도 따지지 않았고 규방에서는 온화하고 조용하여 사람 소리가 없는 것 같았다. 자손을 가르치고 기를 때는 의로운 방도를 다하기에 힘썼고, 상스러운 놀이를 경계하며 화려한 꾸밈을 금하였다. 취학시킬 때가 되면 반드시 어진 사장(師長)을 택해서 보내고, 매양 술과 음식을 갖춰서 사장에게 바치게 하고 정성을 다하였다. 족척(族戚)과 이웃에게는 은혜로운 뜻을 두루 흡족하게 하였고, 안부를 묻고 보내 주는 것을 때에 따라 변치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더욱 더 불쌍히 여겨 구제한 바가 많았다. 기해년(1899, 고종36) 12월에 남편이 병이 들어 위중해지자 부인은 매일 밤에 기도를 올리면서 자기 몸으로 대신할 것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병은 조금 차도가 있었는데 부인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임종할 때 자식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의 부친이 이미 차도가 있으니 내가 죽는 들 어찌 한스러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글을 배우는 데 힘써서 가업을 폐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니 바로 경자년(1900, 고종37) 정월 6일이었다. 안장하였다가 가승동(佳勝洞)의 안산(案山) 활인봉(活人峰)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내룡(來龍)ㆍ내귀(來龜)이다. 두 딸은 여흥(驪興) 민사호(閔社鎬)ㆍ경주(慶州) 김용희(金龍熙)에게 시집 갔다. 오호라! 부인의 훌륭한 지모와 아름다운 풍범은 옛날의 어진 부인들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이 때문에 조씨의 집안이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서 향리에 자자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표장하여 당세에 열녀전(烈女傳)을 편찬하는 자에게 알리기를 원했었는데 내룡(來龍)과 내귀(來龜)가 나를 따라 종유하다가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비록 형편없으나 다만 정의(情誼)가 깊은지라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전일에 들은 것과 오늘의 가장에 근거하여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이 글을 짓노라. 趙君翼濟。字士彬咸安人。以孝友敦睦。樂善嗜義。見稱于鄕里間。君余中年友也。而晩始接隣相從。是以聞其壺範之美。內助之多。其夫人平澤林氏。故忠節公八汲之後。景仁守吉俊源。其曾祖以下三世諱也。妣韓山程氏錫祚女。以哲宗己酉十一月二十日生。溫仁慈柔。幼有至性。十六于歸。承奉舅姑。備盡忠養。甘毳之供晨昏之節。日有常程。王姑曺氏沈疾彌久。至於十年。夫人心憂色沮。露禱嘗藥。晝不離側。夜不儼寐。事君子。和敬兩至。未嘗以一言相稽。閨房之間。雍容幽靜。若無人聲。敎養子孫。務盡義方。戒鄙俚之戱。禁華麗之餙。及其就學。必擇師長之賢者而送之。每具酒饌。使獻之而致誠焉。族戚鄰里。恩意周洽。問訊贈遺。隨時不替。遇飢歲。曲加矜恤。多所濟活。己亥十二月。其夫遘疾危劇。夫人每夕行禱。請以身代。未幾夫病少差。而夫人遘疾。臨終顧諸子曰。汝父親旣得向差。吾死何恨。又曰。孝於親。友於兄弟。勤於學文。勿替家業也。言訖而逝。卽庚子正月六日也。葬而移窆于佳勝洞案山活人峰巽坐原。擧二男。曰來龍來龜。二女適驪興閔社鎬慶州金龍熙。嗚呼。夫人之佳謨懿範。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此趙氏之家所以著有令聞而藉藉於鄕里者也。吾願表以出之以諗于世之編烈女傳者。來龍來龜從余遊。一日以家狀屬余爲文。顧以無狀。但以事契之重。有不忍牢讓。謹据前日之聞今日之狀。爲之說如此云爾。 시집을 와서 원문의 '우귀(于歸)'로,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것이다. 《시경》 〈도요(桃夭)〉에 "야들야들 복사꽃, 열매가 주렁주렁. 이분 시집감이여, 집안을 의당 화목하게 하리로다.〔桃之夭夭, 有蕡其實. 之子于歸, 宜其家室.〕"라는 말이 나온다. 신혼(晨昏)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약을 맛보면서 윗사람에게 약을 올리기 전에 먼저 맛보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하(曲禮下)〉에 "임금이 병이 들어 약을 마실 때에는 신하가 먼저 맛을 보며, 어버이가 병이 들어 약을 마실 때에는 자식이 먼저 맛을 본다.〔君有疾, 飮藥, 臣先嘗之, 親有疾, 飮藥, 子先嘗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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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 민공 유사 梅史閔公遺事 공의 휘는 치규(致圭)요, 자는 우문(遇文), 호는 매사(梅史)이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고 상의봉어(尙衣奉御) 휘 칭도(稱道)가 그 비조(鼻祖)이다. 호가 의암(義庵)인 휘 회삼(懷參)에 이르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우리 세조(世祖) 때 대정 현감(大靜縣監)에 전보되었다가 방환(放還)되어 그대로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 거주하였다. 증조의 휘는 정사(挺泗)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상일(相一)이다. 부친의 휘는 향방(響邦)이고, 모친은 평택 임씨(平澤林氏) 수중(守重)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신묘년(1831)59) 3월 11일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이 좋았다. 언사는 온화하고 선량했으며 행동은 안정되고 조용하였다. 그 용모를 쳐다보면 근칙(謹勅)한 선비임을 알 수 있고, 그 말을 들으면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산에서 땔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갖춰 드렸다.한가한 날에는 경전(經典) 공부에 힘썼는데 확실하게 과정(課程)을 두었다. 구용구사(九容九思)60) 및 경재잠(敬齋箴)61)을 자리 옆에 걸어놓고 보면서 몸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하는 것과,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62)는 선비의 본분과 실지(實地)이다. 이 밖으로는 이단이요 사설(邪說)이다."라고 하였다. 평소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함부로 교유하지도 않았다. 몸가짐은 담담하고 조용하여서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것 같았고, 남을 대할 때는 관대하고 여유로워서 취하고 버리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63) 오솔길을 내서64) 글방을 짓고 꽃을 가꾸며 대나무를 심어서 빈객과 붕우들이 글 짓고 술 마시는 장소로 삼았다. 묘실(墓室)을 중수하여 서적65)을 쌓아놓고 가문 자제들이 노닐며 학업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향당(鄕黨)의 학교66)에도 출입하며 마음껏 의론하고67) 도우면서 가리킬 수68) 있었으니 우뚝하게 한 고을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갑신년(1884, 고종21) 4월 8일에 세상을 뜨니 본방(本坊)의 풍정(風亭) 계좌(癸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명수(明樹)의 따님으로 2남 방호(方鎬)ㆍ찬호(璨鎬)를 두었다. 찬호는 출계(出系)하여 당숙인 치은(致殷)의 후사가 되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사원(詞垣)과 한묵(翰墨)의 마당ㆍ학교와 연향의 자리에 출입하며 모시고 따르면서 적셔진 여훈(餘薰)이 충만할 뿐만이 아니었다. 오호라! 선배와 숙유(宿儒)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 향리에서 다시는 당일의 풍도와 의용을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보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제 그 남은 후손 영언(泳彦)의 부탁을 받고 보니 차마 내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公諱致圭。字遇文。號梅史。閔氏系出驪興。尙衣奉御諱稱道。其鼻祖也。至諱懷參。號義庵。仕至兵判。我世祖朝。補大靜縣監放還因居綾州月谷里。曾祖諱挺泗。贈司僕寺正。祖諱相一。考諱響邦。妣平澤林氏守重女。憲宗辛卯三月十一日。生公于松石坊之五柳村。美鬚髥。好容顔。言辭溫良。動止安詳。瞻其容。可知其爲謹勅士也。聽其言。可知其爲愷弟人也。家貧甚。樵山釣水。備供親旨。餘日劬經。的有課程。九容九思及敬齋箴揭之座側。視爲律身之本。嘗曰。愛親敬長。隆師親友。誠意正心修身齊家。是士子本分實地。外此則異端也邪說也。平居不妄言笑。不妄交遊。持身恬靜。若無所營爲。處物寬裕。若無所取舍。開逕結塾。栽花種竹。爲賓朋文酒之所。重修墓室。貯積墳典。爲門子弟遊業之地。至於鄕黨庠序之間。有以出人風儀。左右指畫。偉然爲一鄕之儀表。甲申四月八日卒。葬本坊風亭癸坐原。妣文化柳氏明樹女。擧二男。方鎬璨鎬。璨鎬出爲堂叔致殷后。余自小少。猥爲公辱知。詞垣翰墨之場。黌宮樽爼之席。出入陪從。擩染餘薰。不啻充然。嗚呼。先進宿儒。擧皆千古。而鄕井之間。不復見當日之風儀。俯仰今古。有淚如注。今於其遺孫泳彦之託。不忍以非其人辭。 헌종(憲宗) 신묘년(1831) 원문에 '헌종'으로 되어 있으나 헌종의 재임기에는 신묘년이 없으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구용구사(九容九思) '구용(九容)'은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예기》 〈옥조(玉藻)〉에 "군자의 용모는 펴지고 느려야 하니, 존경할 사람을 보고는 더욱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 발 모양은 무겁게 하며,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하며, 눈 모양은 단정하게 하며, 입 모양은 그치며, 소리 모양은 고요하게 하며, 머리 모양은 곧게 하며, 숨 쉬는 모양은 엄숙하게 하며,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며, 얼굴 모양은 장엄하게 해야 한다.〔君子之容舒遲, 見所尊者齊遫. 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고 하였다. '구사(九思)'는 또한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마음가짐으로, 《논어》 〈계씨(季氏)〉에 "보는 데 밝게 볼 것을 생각하며,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며, 낯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며,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며, 말은 충직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일은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난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하며, 분이 날 때는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며,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라고 하였다. 경재잠(敬齋箴) 주희(朱熹)가 '경(敬)'에 관련된 글을 모아 자신을 경계하는 뜻으로 지은 글이다. 《朱子大全 卷85 敬齋箴》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 《대학》에 나오는 8조목을 가리킨다. 8조목은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이다. 취하고……같았다 상황에 따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솔길을 내서 원문의 '개경(開逕)'으로, 한(漢)나라 때의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일찍이 정원에 세 오솔길을 내고 오직 좋은 친구 구중(求仲), 양중(羊仲)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도잠(陶潛)의 〈귀전원(歸田園)〉에 "내 본심이 정히 이와 같으니, 오솔길 내고 좋은 친구만 바라노라.〔素心正如此, 開逕望三益.〕"라고 하였다. 서적 원문의 '분전(墳典)'으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준말인데, 여기서는 유교 서적 등을 말한다. 학교 원문의 '상서(庠序)'로, 지방의 학교를 말한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맹자가 양혜왕에게 왕자(王者)의 다스림에 대해 논하면서 이르기를 "상서의 가르침을 삼가서 효제의 의리로써 거듭한다면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길에서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을 것입니다.〔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養,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라고 하였다. 출입하며……의론하고 저본에는 '出人風儀'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出入風議'의 잘못인 듯하다. 《시경》 〈북산(北山)〉에 "혹은 출입하며 마음껏 말하거늘 혹은 하지 않는 일이 없도다.〔或出入風議, 或靡事不爲.〕"라고 하였다. 가리킬 수 원문의 '지획(指畫)'으로,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며 가리키는 것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 제장(諸將)의 의견이 엇갈리자, 농서(隴西)에서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자문을 구했는데, 마원이 '쌀을 모아 쌓아서 산과 골짜기의 모양을 만들어서 지형을 가리켜가며 여러 군대가 경유할 곳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자〔聚米爲山谷, 指畫形勢, 開示軍衆所從道徑.〕' 광무제가 "오랑캐가 내 눈 안에 들어왔다."고 기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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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조공 유사 孝子趙公遺事 지난 정유년(1897, 고종34)에 내가 듣건대 향리의 많은 선비들이 천거장에 연명(聯名)하여 조경제(趙慶濟)와 그의 처 이씨(李氏)의 효행을 관사(官司)에 보고했는데 항간의 여론이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다. 13년 후인 기유년(1909, 순종2)에 효자 후손 내성(來成)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요청하기에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경제(慶濟)는 집이 몹시 가난해서 품팔이로 어버이를 모시면서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과 입에 맞는 음식을 모두 해드리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기이한 병이 있어서 3년이 되도록 낫지 않자 부부가 번갈아 모시면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았다. 눕고 일어날 때면 부축하고, 옴으로 가려워하면 문질러 긁어드리며, 변을 보시면69) 움켜서 치웠다. 의원에게 묻고 약을 조제하며, 북두성에 기도하고 하늘에 축원하며, 정성을 다하고 힘을 쏟기를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하루는 홀연 올빼미가 꿩을 쳐서 뜰에 떨어뜨리니 가져다 드린 일이 있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실로 효성에 감응한 소치였다. 운운." 이 가장(家狀)의 내용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면 어찌 당일의 칭송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실행(實行)과 실적(實蹟)에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70)을 알 수 있다. 효자 조씨는 함안(咸安)의 저명한 성씨로 덕곡(德谷) 선생 휘 승숙(承肅)이 그 중조(中祖)이다. 휘 종례(從禮)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직제학(直提學) 벼슬을 지내고, 휘 희광(希匡)이 참봉(參奉) 벼슬을 지내면서 동복(同福)에 우거하였다. 4대를 전하여 휘 옥생(玉生)은 호가 청계(淸溪)인데 감정(監正) 벼슬을 지내고 동복에서 또 능주(綾州)로 옮기면서 자손들이 그로 인해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가 달운(達運)이다. 증조는 휘가 시복(時福)인데 호는 가정(嘉亭)이다. 조부는 휘가 두열(斗烈)인데 호는 희암(希庵)이다. 부친의 휘는 용후(鏞厚)로 세상에 문장과 덕행으로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 돈효(敦孝)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용필(鏞弼)인데 소후부(所後父 양부)의 오종(五從) 형제이고, 생모(生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영철(英哲)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 12월 23일에 공은 산음리(山陰里)에서 태어났다. 지극한 효성은 천성으로 타고났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근(鍾根)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유순하며 정숙하고 아름다워 지극한 부덕(婦德)이 있었다.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어김이 없었으니 친척과 이웃들도 이구동성으로 찬탄하며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라고 하였다. 효자는 갑진년(1904, 고종41) 6월 15일 세상을 마쳤고 단양면(丹陽面) 천곡(泉谷) 오른쪽 기슭 방축동(防築洞) 좌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이 글을 요청한 자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채호(文彩浩)에게 시집을 갔다. 내가 늙고 병들어 남의 집안의 글을 짓기가 어렵지만 평소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往在丁酉。余聞鄕裏多士。聯名擧狀。以報趙慶濟及其妻李氏孝行于官司。而閭巷物議。莫不稱愜焉。後十三年己酉。孝子遺胤來成持其狀。謁不朽之文。按狀有曰。慶濟家貧甚。行傭供親。而其便身之物。適口之味。無不畢給。親有奇疾。三年彌留。夫妻替侍。晝夜不離。臥起則扶持之。苛癢則抑搔之。遺矢則掬除之。問醫合藥。祈斗祝天。殫誠竭力。三年如一日。一日忽有鴟鴞。摶稚墜庭中。持以供之。此非適然。實是孝感所致云云。夫此狀之辭。如其浮實。則豈當日之稱愜。有如是耶。于以見其實行實蹟。有不可誣耆矣。孝子咸安著姓。德谷先生諱承肅。其中祖。至諱從禮。入我朝。官直提學。諱希匡。官參奉。寓居同福。四傳諱玉生。號淸溪。官監正。自同福又移綾州。子孫因居焉。高祖諱達運。曾祖諱時福。號嘉亭。祖諱斗烈。號希庵。考諱鏞厚。世著文行。妣咸豊李氏敦孝女。生考諱鏞弼。於所後爲五從兄弟也.妣密陽朴氏英哲女。哲宗丙辰十二月二十三日。公生于山陰里。誠孝根天。遭內外艱。一遵禮制.配李氏全州人鍾根女。溫柔靜嘉。極有婦德。善事舅姑。無違夫子。親戚隣里。一口歎賞以爲是夫是婦。孝子以甲辰六月十五日終。葬丹陽面泉谷右麓防築洞子坐原。有一男一女。男卽謁文者。女適南平文彩浩。余老且病。有難犯手於人家文字。而觀感有素。有不忍牢辭云爾。 변을 보시면 원문의 '유시(遺矢)'로 시(矢)는 똥〔屎〕이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염 장군이 늙었어도 아직 밥을 잘 먹습니다. 하지만 신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변소에 갔습니다.〔廉將軍雖老. 尚善飯. 然與臣坐, 頃之三遺矢矣.〕"라고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에 "자주 일어나 변소에 갔음을 말한 것이다. 시(矢)는 어떤 본에는 시(屎)라고 되어 있다.〔謂數起便也, 矢一作屎.〕"라고 하였다. 속일……것 저본은 '有不可誣耆'로 되어 있는데 '耆'는 '者'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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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신종록 日新齋信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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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 신종록 서 日新齋信從錄序 성학(聖學)1)에는 연원이 있으니 수사(洙泗)2)에서 시작하여 염락(濂洛)3)에서 성대했다. 세도(世道)의 명암(明暗)과 국가의 성쇠(盛衰)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실로 천지의 원기(元氣)요 정맥(正脈)이니 그 뜻이 어찌 무겁게 않겠는가? 우리 선생은 노문(蘆門)4)이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5) 때를 맞아 입실조과(入室操戈)6)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7)의 심오한 말과 은미한 뜻을 홀로 터득하고 묵묵히 깨달았다.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는 서로 포함하고, 만수(萬殊)와 일본(一本)이 두루 융화한다.8) 이(理)가 장수(將帥)이고 기(氣)는 역졸(役卒)이니 주가 되는 것은 이(理)에 있다.'라는 이 적료(寂廖)한 몇 마디는 뭇 성현들의 비건(秘鍵)이다. 오직 선생이 마음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융통하고 활발하여 좌로 가도 우로 가도 근원을 만나니, 그 높은 조예와 바른 행실은 대곡(大谷)9)ㆍ애산(艾山)10) 두 옹과 함께 염문(濂門)의 양정(兩程)11)에 비견되었다. 다만 때가 어긋나고 명(命)이 어그러져 세상에 큰일을 할 수 없으니 광채를 숨기고서 후생 계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남녘의 선비들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니12) 인도하고 격려하여 점차 연마하여 성취시켰다. 둔하고 막혀 열어주기 어려운 자는 점차 달통(達通)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은 자는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게 하였다. 혹 정좌(靜坐)하고 체험하게 하고 혹은 변론하고 반증13)하게 하여 각자 그 재질(才質)에 따라 계도하였다. 다만 문하(門下)의 생도들이 비록 독실한 바탕이 없지 않더라도 작은 성취에 안주하면 도의 극치에 나아가기를 추구할 수 없다. 더구나 다시 스승이 돌아가신14) 후 떨어져 산15) 것이 이미 오래되어 대의(大義)가 장차 어그러지고 선생의 가르침이 쓸어버린 듯 없어지게 된다면 어찌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겠는가? 제생(諸生) 중에 의론하는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우리 동문(同門)의 선비들이 이미 선생의 도를 계승할 수도 없고 또한 장차 옛날 수업하던 의리도 잊어버릴 것이니, 감히 선현들의 〈문생록(門生錄)〉을 본떠서 〈수업록(受業錄)〉을 만든다면 장차 제생을 흥기시키고 도를 추구하는 뜻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우리 동문 사람들은 속유(俗儒)들의 문구(文具)에 급급해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지 말고, 이제부터 더욱 더 격려하여 그 책을 책으로 여기고 그 도(道)를 도로 여겨서16) 광명정대한 영역을 끝까지 궁구한다면 후일에 야사씨(野史氏)가 〈유학연원편(儒學淵源編)〉에 채록해 넣을 것이니 어찌 다만 〈종유급문록(從遊及門錄)〉이 되는데 그치겠는가? 〈신종록(信從錄)〉을 장차 출판하게 되니 선생의 행장(行狀) 등 문자를 책의 첫머리에 놓아서 후생들이 덕을 상고하는 터전으로 삼노라.정묘년(1927) 6월 상순에 문인 제주(濟州) 양회락(梁會洛)이 삼가 쓰다. 聖學之有淵源。始於洙泗。而盛於濂洛。世之晦明。國之汚隆。未嘗不由於此。此實天地之元氣正脈。其義豈不重哉。惟我先生。當蘆門繼開之日。入室操戈。天人性命之奧言微旨。獨契黙悟。理分相涵。萬一圓融。理帥氣役。所主在理。此寂廖數語。爲千聖秘鍵。而惟先生。會之心而體之身。融通活潑。左右逢原。其造詣之高。踐履之正。與大谷艾山兩翁。擬之於濂門兩程。但時乖命舛。不得有爲於世。鞱光鏟采。以開迪後生爲己任。南方之士。近悅遠來。誘掖澈勵。漸摩成就。鈍滯難開者。使之漸進於圓通。造詣精深者。使之莫安於小成。或使之靜坐而體驗。或使之辨論而反隅。各隨其才質而導迪之。但脚下諸生。雖不無篤實之資。而安於小成。不能求造道之極。況復山頹之後。離索已久。大義將乖。使先生之敎。將歸於掃如。豈不歎惜哉。諸生中有議者。以爲吾同門之士。旣無以承先生之道。而亦將忘舊日受業之義。敢效先賢門生之錄。以修受業之錄。則將與起諸生。而有助於求道之志矣。嗚呼。惟我同門之人。勿規規於俗儒文具。以爲能事。自是後而益加激勵。書其書道其道。卒究於光明正大之域。則他日野史氏。採人于儒學淵源之編。豈止爲從遊及門錄而已哉。錄將入梓。以先生行狀等文字。冠之于首。爲後生考德之地云爾。歲丁卯六月上澣。門人濟州梁會洛謹書。 성학(聖學) 공자(孔子)의 학문을 말한다.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가리킨다. 공자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하였다고 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와 너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부자(夫子)를 섬긴다.〔吾與女事夫子于洙泗之間.〕"라고 하였다. 이후 '수사(洙泗)'는 공자와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쓰인다. 염락(濂洛) 염(濂)은 염계(濂溪)로 주돈이(周敦頤)가 살았던 곳이고, 낙(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았던 낙양(洛陽), 송대의 성리학을 지칭한다. 노문(蘆門) 노사(蘆沙)인 기정진(奇正鎭)의 문파를 말한다. 기정진(1798~1879)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가 노사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선성(先聖)을……인도하는 원문의 '계개(繼開)'로, 과거 성현의 학문을 잇고 앞으로 올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 준다는 뜻이다. 주자(朱子)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공자의 덕을 찬양하면서, "옛 성인을 잇고 후대의 학자를 열어 줌은 그 공이 요순보다도 낫다.〔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하였다. 입실조과(入室操戈) 본래 상대의 논리를 써서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스승의 학문을 배운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하휴(何休)의 저술을 정현(鄭玄)이 반박하자, 하휴는 이를 보고 "정강성(鄭康成 정현)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들어서 나를 공격하였구나.〔康成入吾室, 操吾矛以伐我乎.〕"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5 鄭玄列傳》 천인성명(天人性命) 천도(天道)와 인사(人事), 인간의 본성과 천명을 말한다. 이일(理一)과……융화한다 이치는 하나이면서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른 것으로,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을 말한 것이다. 《性理大全 理氣 總論》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 1835~1885)이다.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의 3대 제자로 불렸다. 문집으로 《대곡선생문집》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이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문집으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염문(濂門)의 양정(兩程) '염문(濂門)'은 송나라 때 성리학을 창도한 주돈이(周敦頤)의 염계학파를 말한다. 염계(濂溪)는 주돈이의 호이다. 신유학의 기초 이론을 정리하였다. '양정(兩程)'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가까이……찾아오니〔近悅遠來〕 초(楚) 나라 섭현(葉縣)의 윤(尹)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사모하여 찾아오게 해야 한다.〔近者悅, 遠者來.〕"라고 한 말이 《논어》 〈자로(子路)〉에 나온다. 반증 원문의 '반우(反隅)'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퉁이를 가르쳐 주었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유추하여 반증하지 못한다면 다시 가르쳐 줄 수 없다.〔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하였다. 스승이 돌아가신 원문의 '산퇴(山頹)'로, 태산(泰山)이 무너졌다는 말인데 스승의 죽음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별세할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게 되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다. 이후 태산이 무너진다는 것으로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禮記 檀弓上》 떨어져 산 원문의 '이삭(離索)'으로,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 또한 이미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 하였다." 하였다. 그……여겨서〔書其書道其道〕 경서(經書)를 소중히 여기고 그 도(道)를 따라 행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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