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와 정공 가장〉 뒤에 적다 題靜窩鄭公家狀後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영특하고 빼어난 자질로 시례(詩禮)18)와 법필(法拂)19)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효제(孝悌)로 향리에 드러났고 장성하여서는 문학으로 붕우 간에 알려졌으니, 그 젖어들고 훈도를 받아 추향과 인도가 실로 남들과 다름이 있었던 것이다. 중년에 이르러 나아가 성담(性潭) 송 선생(宋先生)20)의 문하에서 스승으로 섬겨 차례로 강토(講討)하고 차례로 증정(證正)하여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하며21) 정신으로 이해하고 통하게 하여 안목이 더욱 열려 넓어지고 심회가 더욱 펼쳐져 열리니, 원근의 종유하는 이들과 한 때의 여론이 자자하게 칭찬하며 추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축적한 것은 족히 사물에 미치고 그 품었던 포부는 족히 세상에 쓰일 만했는데, 이에 능히 남쪽 끝 바닷가 모퉁이 사이에 품고 거두어 종정(鍾鼎)22)이 부유함이 되는 것과 헌면(軒冕)23)이 영화24)가 되는 줄 모른 채 여유롭게 노닐고 장수유식(藏修遊息)25)하였으니, 그 뛰어난 운치와 고상한 자취는 어찌 보통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오호라! 같은 도에 백 년 사이에 공과 같은 선진(先進) 숙유(宿儒)가 있었는데도 스스로 생각건대 비루하고 용렬하여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이에 그 가장(家狀)을 읽어 볼 수 있었으니, 아, 또한 늦었도다! 한스럽게도, 능히 90리 길[三舍]을 지팡이 짚고 가서 당일에 거니시던 곳에서 그 정채(精采)를 상상하며 만분의 일의 뜻이나마 갚을 수 없었으니, 삼가 이 글을 써서 감회를 기록한다. 謹按。公以穎異秀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幼以孝悌著於鄕里。長以文學聞於朋友。其擩染薰蒸。趨向指引。固有以異於人者。至中身。進而摳衣於性潭宋先生之門。次第講討。次第證正。聚而辨之。會而通之。眼目益以開廣。衿懷益以展拓。遠近遊從。一時物論。無不藉藉稱道而爲之推重焉。其所積蓄。足以及物。其所抱負。足以需世矣。而乃能懷之卷之於南荒海曲之間。不知鍾鼎之爲富。軒冕之爲勞。而優哉遊哉。修焉息焉。其偉韻遐躅。豈常調人所可涯涘哉。嗚乎。同省百年間。有先進宿儒如公之人。而自惟陋劣。至於老病垂死之日。乃得其家狀而讀之。吁亦晩矣。恨未能策藜三舍。以想象其精采於當日杖屨之地。以酬萬一之意。謹書此而志感焉。 시례(詩禮) 가정교육 또는 가학(家學)을 뜻한다. 공자의 아들 이(鯉)가 뜰에서 공자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가 공자로부터 시(詩)와 예(禮)를 배웠느냐는 질문을 받고 또 그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듣고서 물러나와 시와 예를 배웠던 일에서 유래한 말이다. 《論語 季氏》 법필(法拂) 법가필사(法家拂士)의 준말로, 법가는 대대로 법도 있는 집안을 말하고, 필사는 필사(弼士)와 같은 말로 보필하는 현신(賢臣)을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내부에는 법가와 필사가 없고, 외부에는 적국과 외환이 없는 경우는,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성담(性潭) 송 선생(宋先生) 송환기(宋煥箕, 1728~1807)를 말한다.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의 5대손이자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심성논변에서는 한원진(韓元震)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성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배워서……분변하며 원문의 '취이변지(聚而辨之)를 풀이한 말인데,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이(九二)〉 에 "군자는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하며……이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이다.[君子學以聚之, 問以辨之,……君德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종정(鍾鼎) 종명정식(鐘鳴鼎食)으로, 사람이 많아서 식사 때가 되면 종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리고 솥을 벌여 놓고 회식을 한다는 뜻이다. 부귀한 집안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뜻한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마을에 들어찬 집들은 종을 치고 솥을 늘어놓고 먹는 집들이다.[閭閻撲地, 鍾鳴鼎食之家.]"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2》 헌면(軒冕) 고관(高官)의 거마(車馬)와 면복(冕服)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하여 높은 관작(官爵)을 말한다. 《장자》 〈선성(繕性)〉에 "헌면이 내 몸에 있는 것은 내가 타고난 성명이 아니요, 외물이 우연히 내 몸에 와서 붙어 있는 것일 뿐이다.[軒冕在身, 非性命也, 物之儻來寄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영화 저본에는 '노(勞)'자로 되어 있으나 '영(榮)' 자의 잘못으로 보고 수정 번역하였다. 장수유식(藏修遊息)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 효자 경수 사실〉 뒤에 적다 題曺孝子【暻洙】事實後 내 일찍이 당송(唐宋)의 고사를 보고 진신 사대부 가운데 한휴(韓休)26)·유공작(柳公綽)27)·노종도(魯宗道)28)·여공저(呂公著)29) 같은 제공들의 한 시대 가법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면서 이것은 천지가 문명(文明)하고 국가가 승평(昇平)한 때라고 여겼다. 선비가 이미 삼대(三代) 이전에 태어나지 못하였다면 내려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또한 다행이라 할 것이다. 시사(時事)가 변화함에 이르러 온 천하가 장사치여서 상인[棘人]의 소필(素韠)30)과 도인(都人)의 주직(綢直)31)을 지금은 볼 수가 없네. 당일의 기상을 뒤미처 상상해보면 사무친 그리움과 함께 돌아가고픈 소원이 어떠하겠는가.지금 고흥(高興)의 조 효자(曺孝子) 전 승지 경수(暻洙)의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절개는 실로 사람들에게 회자된 지 오래다. 그 훌륭한 숙인(淑人) 신씨(申氏)의 규문에서의 거동과 법도는 지극히 순수하고 갖추어져 남편을 받듦에 아름다움이 짝한다고 일컬어져 부부가 함께 정려와 포상을 받았다. 네 명의 아우 전수(典洙)·인수(仁洙)·문수(文洙)·기수(錤洙) 또한 모두 독서하고 몸을 단속하여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함께 은혜로운 명을 받았다.오호라! 당시 승평의 기상이 진신 사대부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 이에 시골 사우의 집안에서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록 음도(陰道)가 극성하게 된 날에 있더라도 이른바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32)라는 것은 참으로 빈 말이 아닐 것이다. 옷깃을 여미던 끝에 삼가 권말(卷末)을 더럽혀 앙모하던 만분의 일의 뜻을 깃들인다. 余嘗觀唐宋間故事。歎搢紳士大夫如韓休柳公綽魯宗道呂公著諸公一時家法之美。以爲此是天地文明。國家昇平之會也。士旣不得生於三代之上。則降而生於此時。亦云幸矣。至於時移事變。大宇商商。棘人之素韠。都人之綢直。今不可得以見矣。追想當日之氣像。其菀結之懷。同歸之願。爲何如哉。今高興之曺孝子前承旨暻洙。至行偉節。固膾炙於人久矣。其齊淑人申氏。閫儀閨範。極爲純備。奉承君子。見稱匹休。夫婦俱蒙旌閭褒爵。有弟四人典洙仁洙文洙錤洙。亦皆讀書勅躬。友弟深至。倂蒙恩命。嗚乎。當日昇平之象。在於搢紳士大夫之間者。誰知至於今日而乃是得見於鄕曲士友之家乎。雖在陰道極盛之之日。而所謂陽無可盡之理者。信非虛語矣。歛衽之餘。謹塵穢卷末。以寓慕仰萬一之意云爾。 한휴(韓休) 673~740. 당(唐)나라 경조(京兆) 장안(長安) 사람으로, 자는 양사(良士)이며, 좌보궐(左補闕), 예부 시랑(禮部侍郞), 지제고(知制誥), 상서우승(尙書右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해 모두 극간하였기 때문에 현종(玄宗)이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게 되면 번번이 좌우에게 "한휴가 아느냐?"라고 물었는데,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휴의 상소가 올라왔다고 한다. 《新唐書 卷126 韓休列傳》 유공작(柳公綽) 765~832. 당나라 경조 화원(京兆華原) 사람으로, 자는 관(寬) 또는 기지(起之)이다. 문종(文宗) 때의 명신으로 자는 관(寬)이며 뒤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가법이 엄숙하여 《소학》 〈선행(善行)〉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노종도(魯宗道) 966~1029. 송(宋)나라 명신으로 자는 관지(貫之), 호는 퇴사암(退思巖),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벼슬은 해염령(海鹽令),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해염령 때 고을 동남항(東南港)이 인몰된 것을 다시 준설하여 백성들은 그 항구를 노공포(魯公浦)라 불렀다. 《宋史 卷286 魯宗道列傳》 여공저(呂公著) 1018~1089. 송나라의 명재상으로 자는 회숙(晦叔)이다. 구양수(歐陽脩)와 함께 강학하였으며, 진사에 합격한 후 영주 통판이 되고 여러 차례 어사중승(禦史中丞)을 지냈다. 왕안석(王安石)이 제정한 청묘법(靑苗法)을 반대하였으며, 철종(哲宗) 때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제수되자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신법(新法) 폐지를 주장하다가 당쟁에 말려들어 추방되었다. 신국공(申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소필(素鞸) 하얀 무릎 가리개로 상주의 상복이다. 도인(都人)의 주직(綢直) 도성 사람들의 성대했던 의용(儀容)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도인사(都人士)〉에 "저 서울 양반은 대립에 치포관(緇布冠) 쓰셨고, 저 군자의 따님은 머리숱 많고 예뻤는데, 지금은 볼 수 없는지라 내 마음 기쁘지를 않네.[彼都人士, 臺笠緇撮, 彼君子女, 綢直如髮, 我不見兮, 我心不說.]"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양(陽)은……없다 《주역》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나오는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학헌 김공 가장〉 뒤에 적다 題鶴軒金公家狀後 재행(才行)은 겸비하기 어렵고 문질(文質)은 알맞게 하기가 드문 것은 옛날에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지금 말세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우리 고을 고 처사 학헌(鶴軒) 김공(金公)은 충신하고 성실한 자질이 있고 효우하고 화락한 행실이 있으면서 세고(世故)에 밝게 알고 물정(物情)에 갖추어 관통하며, 주관하여 다스림에 넉넉하고 타일러 깨우치는데 뛰어나며, 옛것을 좋아하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시속을 따르면서도 휩쓸리지 않으며, 세상에 은거하면서도 편벽된 뜻이 없고 일에서 배우면서도 함부로 따르는 뜻이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에 그 짝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내가 약관(弱冠)의 나이에 향교에서 공부할 때 고을 노인이 일제히 모인 것을 보았는데 위의(威儀)와 풍도(風度)가 모두 허술하지 않았다. 20년 뒤에 또 일 때문에 향교에 갔다가 인물의 성대함이 접때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오직 학헌 공이 우뚝함을 보았다.오호라! 지금 또 20년이 지나 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미치지 못하는 것이 또 전날이 그 전날에 미치지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한 고을에서 한 나라에 이르고 한 나라에서 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인물이 날로 시들어가는 것이 아마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니, 더욱 개탄스럽다. 어찌하면 충신과 일을 주관함이 공과 같은 다소의 사람을 얻어 일마다 세상 사이에 포치하여 말속의 병통으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나을 수 있는 날이 있게 하겠는가?공은 이미 볼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유운(遺韻)과 여향(餘馨)이 가장에 드러나 있는 것일 뿐이다. 감개(感慨)한 나머지에 삼가 그 뒤에 써서 돌려보내어 두 집안의 자손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며 우의를 강론하는 바탕으로 삼을 따름이다. 才行之難爲兼備。文質之鮮能均適。在古猶然。況今衰叔之日乎。吾鄕故處士鶴軒金公。有忠信誠慤之質。有孝友愷悌之行。而曉解世故。該貫物情。優於幹理。長於風諭。好古而不泥。從俗而不流。隱於世而無偏枯之意。學於事而無詭隨之志。此在今日。鮮有其儔。余弱冠。遊鄕學。見鄕老齊會。而威儀風度。擧不艸艸。後二十年。又以事往鄕學。見人物之盛。不及曩時。而惟鶴軒公爲挺然耳。嗚乎。今又二十年。而公之沒已久矣。其所不及。又安知不似前日之於前日也。以一鄕而一國。以一國而一世。其人物之日就彫落。恐亦如之。尤可慨也。安得忠信幹理如公者多少人。種種布置在世間。使末俗膏肓。庶有少瘳之日乎。公旣不可見。而可見者。只是遺韻餘馨著於家狀者耳。感慨之餘。謹書其後而還之。以爲兩家子孫源源講誼之地云爾。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봉남유고》 발문 鳳南遺稿跋 봉남옹(鳳南翁)39)이 이미 돌아가시고 그 손자 승환(承渙)40)이 유고를 수습하여 하루는 다산재사(多山齋舍)로 나를 방문하여 교감하고 편집하는 일을 청하였다. 나는 안목이 고루하다는 것으로 오래 동안 굳게 사양하였으나 다만 생각건대 옹은 나의 옛날 금석지교(金石之交)이다. 지금 유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비창(悲愴)하여 한 번 열람할 마음이 없지 않았다. 또 승환은 묘년[妙末]의 나이에 선대의 원고가 귀중한 줄 알고 그 민멸되고 흩어지는 대로 맡겨두려고 하지 않으니, 이 뜻은 지극히 우연이 아니다. 드디어 손 가는대로 교정하고 대략 재량하여 줄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두 달 만에 비로소 일을 마쳤으니, 그 시(詩)·사(詞)·서(書)·서(序)·기(記)·설(說)·문(文)·장(狀)이 모두 1책이다.오호라! 이것이 어찌 내가 손댈 수 있는 것이겠는가. 안목이 고루할 뿐 아니라 아울러 세상 일에 분주하여 능히 세심하게 정밀히 비교할 수 없었으니, 구슬을 버리고 돌을 남겨 두는 폐단이 없지 않을 줄 어찌 보장하겠는가. 그러나 나무 인형 만들 때 코를 크게 해 두면 장차 영근(郢斤)이 흙을 깎아내는 것41)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승환의 책임이니, 원컨대 돌아가 힘쓸지어다! 鳳南翁旣沒。其孫承渙收拾遺藁。一日過我於多山齋舍。請校勘編摩之役。余以眼目固陋。牢辭久之。但念翁是余疇昔金石之交也。今見遺墨。不覺悲愴。不無一番繙閱之願。且承渙以妙末之年。知先藁之爲重。而不欲任其泯散。此意極不偶然。遂隨手點校。略加裁減。首尾二朔。乃始斷手。其詩詞書序記說文狀總二冊子。嗚乎。此豈余所可犯手者哉。不惟眼目固陋。兼以世故鞅掌。不能細心精較。安保無遺珠藏石之獘也。然木偶大鼻。將不無郢斤之斲堊。此承渙之責也。願歸而勉之哉。 봉남옹(鳳南翁)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다른 휘는 종진(鍾鎭), 자는 응중(應仲), 호는 봉남,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신재집》 권18 〈봉남 홍공 행장(鳳南軒洪公行狀)〉에 보인다. 승환(承渙):홍승환(洪承渙, 1870~?)을 말한다. 자는 사증(士拯)이다. 영근(郢斤)이……것 영(郢) 땅 사람이 자귀질하여 흙을 깎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시문을 잘 고치는 감식안을 말한다. 여기서는 정의림이 지은 글을 다른 유능한 사람이 수정해 줄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영인(郢人)이 장석(匠石)의 솜씨를 철저히 믿어 자신의 코끝에다 마치 파리 날개만 한 흙을 바르고는 장석을 시켜 그 흙을 깎아내게 하였는데, 과연 장석이 바람소리가 휙휙 나도록 자귀를 휘둘러 깎아냈는데도 흙만 깨끗이 다 깎이고 코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괴암 김공 가장〉 뒤에 쓰다 書槐庵金公家狀後 조씨(晁氏)는 이도(以道)의 거듭한 경계를 따르고,33) 이씨(李氏)는 종악(宗諤)이 제정한 것34)을 좇아서 따라 지켜 잃지 않아 가법의 아름다움으로 중국 사대부의 모범이 되었다. 지금 회촌(會村)의 김씨(金氏) 또한 돈목(敦睦) 근칙(謹勅)으로 우리 고을의 명가가 되니, 대개 그 선대부 괴암공(槐庵公)이 창시한 덕분이다.내가 약관의 나이 때 통가(通家)35)의 자제로 책상 아래에서 공에게 인사드리고 자못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그 몸은 후중하고 모습은 예스러우며 기는 온화하고 말씀은 엄격한 것을 보고 덕 있는 장자(長者)인 줄 알았다. 집안에서 존유(尊幼) 대소(大小)로부터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온화하고 즐거워 한마디도 패려(悖戾)한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자손들이 계승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공은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충신(忠信)을 입심(立心)의 근본으로 삼고 청근(淸謹)을 지신(持身)의 근본으로 삼고 근검(勤儉)을 어가(禦家)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그 규구(規矩)와 승척(繩尺)을 이미 고인의 법문(法文)에서 얻은 것이다. 버려진 것을 지켜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상을 받지 않은 것과 노인을 불쌍히 여겨 부역을 면제해 주고 그 사례를 받지 않은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덕이 두터운 것이어서 남들이 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안으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종족에 화목하며, 밖으로는 벗들에게 미덥고 고을에 화합하여, 돌아가신 뒤에도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준수하고 사림들은 그 풍성을 칭송하는 것은 누구인들 스스로를 경계하는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오호라! 소년(小年)이 대년(大年)에 미치지 못하고 후진(後進)이 선진(先進)만 못하니, 이것은 옛 사람이 이미 탄식을 일으킨 곳인데, 더구나 시대의 상황이 날로 타락하고 선비들의 추향이 날로 잘못되는데 선진과 대년의 질실(質實) 충각(忠慤)하고 박아(博雅) 장후(長厚)한 기풍을 볼 수 없단 말인가? 나는 공의 손자 장석(章錫)36)이 지은 가장(家狀) 한 편에서 광감(曠感)37)의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 삼가 몇 줄의 거친 말로 써서 기록한다. 晁氏因以道之申戒。李氏由宗諤之所制。遵守不失。以家法之美。爲中州士大夫之楷範。今會村金氏。亦以敦睦謹勅。爲吾鄕名家。蓋其先大父槐庵公創始之力也。余在弱冠。以通家子弟。拜公於床下。頗源源焉。見其體厚貌古。氣和言厲。可知爲有德長者。閤門之內。尊幼大小。下至婢僕。皆溫溫怡怡。未聞一言有悖戾之聲。公歿而子孫承襲之。不敢廢墜。爲三十餘年于玆矣。公嘗自警。以忠信爲立心之本。淸謹爲持身之本。勤儉爲禦家之本。此其規矩繩尺。已得古人之法文。至於守遺還主而不受其賞。悶老除役而不納其謝。皆德之厚而人所難能也。內而孝於家庭。睦於宗族。外而信於朋友。和於鄕井。以至身沒而子孫遵其敎。士林誦其風者。夫孰非自自警中出來耶。嗚乎。小年不及大年。後進不如先進。此是古人已所興歎處。況今時象日汚。士趨日非。而先進大年。質實忠懿。博雅長厚之風。不可得以見之耶。余於公之孫章錫所撰家狀一編。不勝曠感之思。謹以數行蕪辭。書以識之。 조씨(晁氏)는……따르고 《소학》 〈선행(善行)〉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 근세 고가에 오직 조씨가 이도가 자제를 거듭 경계함으로 인하여 모두 법도가 있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도(以道)는 조열지(晁說之, 1059~1129)의 자이다. 자호(自號)를 경우생(景迂生)이라 하여 흔히 경우(景迂) 선생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유언(儒言)》, 《조씨객어(晁氏客語》 등이 있다. 종악(宗諤)이 제정한 것 송나라 재상 이방(李昉, 925~996)의 집안은 자손이 몇 대를 거치면서 가족이 200여 명이 되었는데도 함께 기거하고 함께 식사하며 대가족 생활을 하였다. 전장과 상점 운영에서 나온 수입과 관직에 있는 자의 봉록을 모두 한 창고에 모아서는 식구 수대로 날마다 양식을 공급하였으며, 혼례와 장례에 소요되는 경비에도 모두 액수를 정하였다. 집안의 자제들에게 이러한 일을 분담하여 맡게 하였는데, 이러한 가정 경제의 제도는 이 재상의 아들인 한림학사 이종악(李宗諤, 964~1012)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小學 善行》 통가(通家) 대대로 사귀어온 집안이나 인친(姻親)의 사이를 말한다. 장석(章錫) 김장석(金章錫, 1853~?)을 말한다. 자는 보현(甫賢), 호는 하산(鰕山),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오래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를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밀양 박씨 변정세계서〉 뒤에 쓰다 書密陽朴氏辨正世系序後 무릇 윤상(倫常)은 지극히 무겁고 세리(勢利)는 지극히 가볍다. 사해(四海)의 귀함을 들어 천륜을 바꾸는 것은 할 수 없고, 한 가지 일의 그릇된 것을 행하여 천하를 얻더라도 하지 않으니, 사람이 사람 되고 금수와 다른 까닭이 바로 이곳에 있다. 시대가 내려오고 풍속이 떨어져 윤리가 밝지 못하고 인욕이 멋대로 행해져 이익을 사모하여 선조를 잊고 세력을 좆아 어버이를 배신하는 자가 흘러넘치니, 이루 탄식을 감당하겠는가.밀양 박씨(密陽朴氏) 일파가 능주(綾州)에 살면서 잠영(簪纓)과 시례(詩禮)로 호남에 알려진 것이 오래되었다. 다만 그 중엽의 명휘(名諱)가 영체(零替)되고 실전(失傳)되었는데 중간에 다른 계보를 인용하여 그 결함을 보충하였다. 대개 그 가문의 한 사람이 세계의 중요함을 강구하지 않고 갑자기 중간에 끊어진 것을 흠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나의 벗 사문(斯文) 박인진(朴麟鎭)38)은 독행(篤行)의 선비이다. 이것으로 항상 분탄(憤歎)하게 생각하였는데, 하루는 선계는 지극히 엄하여 옮기거나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서술(序述)하여 글을 지어 종족과 향당에 두루 고하여 빨리 되돌렸다. 무릇 효자가 어버이 명에 대해 실로 소홀하거나 어기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불의를 당하여서는 애써 간하고 힘껏 다투어 회초리를 맞아 피가 흐르더라도 그만 두지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대개 이치를 따르는 것은 어버이를 따른 것이고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은 선대 항렬의 당일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빨리 바른 데로 돌려야 하니, 어찌 자손이 뜻을 계승하는 효가 아니겠는가.내가 보건대, 사람들의 집안에 종종 이러한 일이 있지만 편안히 일상으로 여기고 뻔뻔하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다. 혹 그 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눌러 참고는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자도 또한 있을 것이다. 오직 사문 박인진은 안으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 남을 속이지 않아 붕우들과 강론하고 종족과 도모하여 천리의 바름에 합할 것을 생각하여 인심의 편안함에 나아간 사람이니, 가위 명백(明白) 탄이(坦夷)하고 뇌락(磊落) 정대(正大)하다고 하겠다.오호라! 이것은 백성이 살아가는 떳떳한 윤리 가운데 제일의 의체(義諦)이다. 나는 원컨대 표시하여 드러내어 한 시대를 밝게 깨우쳐 천부(淺夫)와 소인(宵人)들로 하여금 모두 알 수 있게 한다면 말속의 병폐가 거의 나음이 있을 것이다.나는 서로 아는 처지에서 찬탄(贊歎)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분수에 넘는 것을 잊어버리고 위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夫倫常至重。勢利至輕。擧四海之貴而易天倫不得。行一事之非而得天下不爲。人之所以爲人而異於禽獸者。正在此處。世降俗下。倫理不明。人欲橫流。慕利而忘先。趨勢而背親者。滔滔焉。可勝歎哉。密陽朴氏一派。居於綾州。以簪纓詩禮。聞於湖省者久矣。但其中葉名諱。零替失傳。而間引他系。以補其缺。蓋其門內一人。未講世系之重。而遽以中絶爲欠故也。余友朴斯文麟鎭。篤行士也。以此常懷憤歎。一日以其先系至嚴不可移易之意。序述爲文。遍告于宗族鄕黨而亟反之。夫孝子之於親命。固不可毫忽違逆。然當不義則苦諫力爭。至於被撻流血而不已。其故何哉。蓋順理所以順親也。敬天所以敬親也。況此事非出於先行當日之本心。則亟爲反正。豈非子孫繼志之孝乎。余見人家種種有此。而恬以爲常。靦不知愧者。固不足道。或有知其非義。而畏難隱忍。不敢下手者。亦有矣。惟斯文。內不欺心。外不誣人。講之於朋友。謀之於宗族。思所以合乎天理之正。而卽乎人心之安者。可謂明白坦夷。磊落正大矣。嗚乎。此是民生彛倫第一義諦也。吾願表以出之。曉喩一世。使淺夫宵人。皆得以知之。則末俗之膏肓。庶其有瘳乎。忝在相知。不勝贊歎之私。忘其僭越。而爲之說如是云爾。 사문(斯文) 박인진(朴麟鎭) 1846∼1895. 자는 학중(學中), 호는 우인당(愚忍堂),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회와 박공 가장〉 뒤에 적다 題悔窩朴公家狀後 고인의 말에 이르기를 "안으로 어진 부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가 없으면서 능히 성취함이 있는 자는 적다."라고 하였는데,42) 지금 회와(悔窩) 박공(朴公)의 유장(遺狀)을 읽고 가만히 부합하는 점이 있음을 알았다. 공의 조카 인진(麟鎭)이 일찍 고아가 되어 집안일을 맡게 되자, 공이 집안일 때문에 학문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경계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금수에 가까운데, 더구나 부모의 바람과 가문의 책임이 너의 몸에 있으니, 그 중요함이 어찌 다만 집안일과 견주겠느냐?"라고 하고, 이에 대소가의 일을 몸소 스스로 주관하여 관리하고 그로 하여금 안심하고 오로지 힘써 어진 사우들과 종유하게 하였다. 여러 해가 쌓여 그 학업을 성취하여 마침내 사문(斯文)의 순유(醇儒)와 오당(吾黨)의 위인(偉人)이 되었다. 그러나 회와공의 훈도한 힘이 아니었다면 그 수립한 것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었겠는가. 이 한 가지 일에서 공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나는 그의 조카와 더불어 종유하며 강마한 지 10여 년 동안에 책상 아래에서 공에게 인사 드릴 수 있었던 것이 또한 자못 자주 있었다. 가만히 보건대 공의 형체와 모습이 풍후(豊厚)하고 의용(儀容)이 장중(莊重)하여 남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는 것이 적었고, 일에 임하여 표시 나게 드러내는 것이 적었으니, 아름답게 옛 선진의 기풍이 있었다.오호라! 공과 조카가 차례로 돌아가신 지 장차 지금 20년이 되어가니, 모시고 따르던 나는 외롭고 쓸쓸하여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다만 그 아들 규진(奎鎭)43)과 종손(從孫) 준기(準基)44)가 경전에 힘쓰고 몸을 신칙하여 바야흐로 진보가 끝이 없을 것이라, 또한 공께서 가르친 방법이 돌아가신 뒤에도 실추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아, 공경할 만하다. 삼가 가장 뒤에 기록하여 내가 뒤미처 생각하는 만분의 일의 정을 깃들인다. 古人有言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而能有成者少矣。今讀悔窩朴公遺狀。竊有槪焉。公從子麟鎭。早孤當室。公慮其以家務而妨於學問。戒之曰。人而不學。近於禽獸。況父母之望。門戶之責。在於汝躬者。其重豈特家務之比哉。於是大少家務。躬自幹理。使之安心專力。遊從賢士友。積歲積年。以就其業。卒爲斯文之醇儒。吾黨之偉人。然非悔窩公訓迪之力。其所樹立。安能乃爾。於此一事而可以見公之爲公也。余與其從子。遊從講磨十餘年。得以拜公於床下者。亦頗頻頻矣。竊見公體相豊厚。儀容莊重。與人寡言笑。臨事少表襮。偉然有古先進之風。嗚乎。公與從子次第就幽。將二十稔于玆。陪從餘生。踽凉奚依。但其遺胤奎鎭從孫準基。劬經勅躬。方進未已。亦可以見公之敎法。不墜於身後。吁可敬也。謹識狀後。以寓區區追想萬一之情云爾。 고인의……하였는데 《소학》 〈선행(善行)〉에 나오는 여희철(呂希哲, 1039~1116)의 말이다. 아들 규진(奎鎭):박규진(朴奎鎭, 1858~1934)을 말한다. 자는 대규(大圭),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종손(從孫) 준기(準基) 박준기(朴準基, 1864~1940)를 말한다. 자는 경립景立), 호는 겸산(謙山),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저서로는 《겸산유고(謙山遺稿)》가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만회옹전〉 뒤에 쓰다 書晩悔翁傳後 지난 계유년(1873, 고종10)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면암 선생(勉庵先生) 최공(崔公)이 언사(言事)로 죄를 얻어 장차 제주도[耽羅]로 귀양 가게 되었다. 사림들은 길에 나와 전송하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거리에서 모여 구경하였으며 심지어 주막이나 시장 점포의 백정이나 술파는 아낙도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지 않음이 없어 노참(路站)은 시장처럼 북적였고 술상은 비가 내리는 듯 침울하여, 물리쳐도 떠나지 않고 금지해도 중지하지 않았으니, 지나가는 천리 길에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나루터에 도착하자 전송하는 사람들은 돌아가고 모였던 사람들은 흩어져 감히 함께 배를 타는 사람이 없었고, 가시울타리 속에 갇혀 있어 또 달려가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대개 제주도는 푸른 바다 만 리 가운데 있어 악어 같은 물결과 고래 같은 파도가 거세고 험하여 조금이라도 역풍이 불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배를 저어 왕래한 것은 예로부터 매우 드물었다.오직 고 만회 처사(晩悔處士) 최승현(崔勝鉉) 공은 선생과 일면식의 친분도 없는데 힘을 팔아 양식을 모아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선생이 제주도에서 풀려나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갔는데, 흑산도는 제주도에 비하여 더욱 험하고 멀었지만 공이 또 갔다. 옛날 채명원(蔡明遠)은 안 노공(顔魯公)이 조정에 있었던 날에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지만 강회(江淮)에서 굶주릴 때 쌀을 운반하여 대접하였고,45) 장의보(張毅甫)는 문문산(文文山)이 재상이 되었을 때 나아가지 않았으나 연옥(燕獄)에 구금되었을 때 몸을 맡겨 따랐으니,46) 지금 공의 일은 이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것은 모두 고금의 영렬한 대장부이니, 풍치를 상상함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일어난다. 탁계순(卓契順)이 해남(海南)으로 한 번의 행차를 한 것47)도 오히려 족히 백세토록 불후하였으니, 더구나 공이 힘썼던 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고 그 마음을 먹고 의에 나아간 것은 또 탁계순이 견줄 것이 아닐 것이다.공은 우리 고을 사람이다. 이 때 나는 묵계(墨溪)의 집에서 어버이 병을 시중들고 있어 선생이 도내를 지난다고 들었으나 문을 나가 전송하지 못하였고, 같은 고을에 있으면서 또 선생을 본 사람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능히 보지 못하였으니, 푸른 바다를 건넜던 사람과 비교하면 어찌 다만 황곡(黃鵠)과 양충(壤虫)48)의 차이일 뿐이겠는가. 그 뒤에 공이 나를 한 번 방문하였고 내가 공을 한 번 방문하였지만 모두 만나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돌아가셨다. 풍의(風義)를 뒤미처 생각하니 단지 슬픔과 후회만 간절하네.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공의 아들 영호(永皓) 씨가 천태 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집안에 보관하던 글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청하였다. 나는 매몰된 천한 자취로 실로 감히 받들어 응할 수 없지만 다만 평소 향하여 우러르던 처지에 이미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니, 혹 이것으로 인하여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유향(遺響)을 의탁할 수 있을 것인가.아! 인간에게 도리가 있는데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그 본령이 되니, 진실로 이 마음이 없다면 백 가지 행실 만 가지 선을 어디에 붙이겠는가. 공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단지 바다를 건넜던 한 가지 절개에서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평생 의를 행하였던 상세함 같은 것은 면암 선생이 이미 기록하였으니,49) 족히 천고에 불후할 공안(公案)이 될 것이다. 往在癸酉。戶部侍郞勉庵先生崔公。言事得罪。將貶謫于耽羅也。士林出送於道。婦孺聚觀於巷。以至店幕市肆屠夫沽媼。無不加額瞻望。路站如市。酒盤如雨。揮之而不去。禁之而不止。所經千里。接屬無間。及到津頭。送者返。聚者散。無敢與之同舟者。在棘中。又寂然奔訊之人。蓋耽羅在滄溟萬里之中。鰐浪鯨波。瀰漫洶涌。少有逆風。性命難保。是以舟楫往來。自古絶罕。惟故晩悔處士崔公勝鉉。與先生無一面之分。而賣力聚粮。冒危凌險而赴之。先生自耽羅解歸。未幾。又謫于黑山。黑山視耽羅。尤爲險遠。而公又往焉。昔蔡明遠無問於顔魯公立朝之日。而在淮飢餓。運米而餉之。張毅甫不就於文文山作相之時。而被燕獄拘幽。委身而隨之。今公之事。不其類此乎。此皆古今烈烈大丈夫。想像風致。不覺興歎。卓契順辦海南一番之行。而猶足不朽於百世。況公之所辦。非止一番。而其設心就義。又非契順比耶。公吾鄕人也。是時余侍親疾于墨溪村舍。聞先生過省內。而未得出門相送。在同鄕。又欲見見先生之人而不能得。視諸越涉滄溟者。奚但黃鵠壤虫之分耶。其後公一過余。余一過公。皆未遇而公已千古矣。追念風義。只切悲悔。歲辛卯春。公胤子永皓甫。訪余於天台寓舍。袖示家藏文字。因請一言。余以埋沒賤迹。固不敢承膺。但平日向仰之地。旣違顔範。則或可因此而托遺響於冥冥耶。噫。人之有道。好賢爲其本領。苟無此心。百行萬善。何所附着也。欲知公者。只於涉海一節。可以槪矣。若其平生行義之詳。勉庵先生已記之。足可爲千古不朽之公案。 채명원(蔡明遠)은……대접하였고 채명원은 파양(鄱陽)의 교위(校尉)고, 안 노공(顔魯公)은 노군공(魯郡公)에 봉(封)해진 당(唐)나라 안진경(顔眞卿, 709~784)을 말한다. 이 사실은 안진경이 51세 때에 채명원에게 보답의 의미로 써 준 글씨 〈채명원파양첩(蔡明遠鄱陽帖)〉에 보인다. 《顔魯公集 年譜》 장의보(張毅甫)는……따랐으니 문문산(文文山)은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장의보가 문천상의 해골을 업고 길주(吉州)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던 것을 말한다. 탁계순(卓契順)이……것 소식(蘇軾)이 유배를 당했을 때 찾아 주었던 일을 말한다. 《동파전집(東坡全集)》 권23 〈차운정혜흠장로견기(次韻定慧欽長老見寄)〉의 서(序)에 "소주(蘇州) 정혜사 장로 수흠이 그 문도 탁계순을 혜주(惠州)로 보내 나의 안부를 물었다."라고 하였다. 황곡(黃鵠)과 양충(壤蟲) 남만 못한 데 대한 탄식을 말한다. 전국(戰國) 시대의 연(燕)나라 사람 노오(魯敖)가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많은 곳을 유람한 자가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북쪽의 몽궐산(蒙闕山)에 올라 한 도사(道士)를 만나서 천상천하(天上天下)를 다 돌아다녔다는 말을 듣고는 "이 도사는 한 번의 날갯짓에 천 리를 나는 황곡(黃鵠)과 같고, 나는 땅을 기어가는 작은 벌레[壤蟲]와 같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淮南子 道應訓》 면암 선생이 이미 기록하였으니 《면암집(勉菴集)》권40〈최만회옹전(崔晩悔翁傳)〉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범회50)의 《이택회첩》 뒤에 쓰다 書權範晦麗澤會帖後 두 연못이 서로 걸려 상호간에 적셔주고, 끊임없이 이어져 다하지 않아 붕우 간에 상관(相觀)51)하고, 상호간에 규계하고 경계하여 순순하게 진보가 있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특별히 이 뜻을 《주역》에 드러내어 만세에 벗을 취하는 자의 경계로 삼은 까닭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남에게 미칠 수 있는 선이 없고 남의 입장에서 나에게 미칠 수 있는 선이 없다면 이것은 마른 연못이다. 마른 연못이 서로 걸려 있다면 말할 만한 어떤 유익함이 있겠는가. 반드시 모름지기 먼저 그 우물을 파되 구인(九仞)의 수고로움52)을 꺼리지 않아 샘물이 솟아남에 이른다면 이어서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 날로 더욱 깊게 고여 멀리로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고 넓게는 만물을 윤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원컨대 이택회(麗澤會)의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兩澤相麗。互相滋潤。源源不竭。朋友相觀。互相規警。循循有進。此聖人所以特著此義於大易。以爲萬世取友者之戒也。然在我無善可以及人。在人無善可以及我。則是渴澤也。以渴澤相麗。有何資益之可言哉。必須先掘其井。不憚九仞之勞。以至於及其泉焉。則所以因仍相資者。日益渟滀。遠可以達海。廣可以澤物。願麗澤諸君勉乎哉。 권범회(權範晦) 권춘식(權春植, 1879~?)을 말한다. 자는 범회,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상관(相觀) 친구 간에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본받는 것을 말한다. 《예기》 〈학기(學記)〉에 "대학의 교육 방법은 좋지 않은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예라고 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르치는 것을 시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르치는 것을 손이라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을 마라고 한다.[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구인(九仞)의 수고로움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함이 있는 자는 비유하면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우물을 아홉 길을 팠더라도 샘물에 미치지 못하면 오히려 우물을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有爲者辟若掘井, 掘井九軔而不及泉, 猶爲棄井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황경함53)의 《암간우록》 뒤에 쓰다 題黃景涵巖間偶錄後 하나의 태극인데 나누어 말하면 건순(健順)이고, 또 나누어 말하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다. 단지 이 네 가지는 또 무한한 조리를 함축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기(氣)나 물(物)을 말하지 않아도 이(理)의 체단(體段)은 본래 이와 같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른 곳을 말함에 한결같지 않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무릇 이른바 이(理)가 같다는 것은 구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곳이 곧 원형이정이고 이곳이 곧 원형이정이니, 성색 모상(聲色貌象)과 운운 직직(云云職職)54)이 하나라도 이 네 가지의 밖을 벗어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理)가 같다는 것이다. 물에 비유하자면, 씻고 빨며, 삶고 마심에 그 용도는 같지 않지만 그것이 물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과 같다. 물은 실로 동일한데 씻고 빨고 삶고 마실 수 있는 구분은 이미 물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른바 일(一)이라는 것은 어찌 일찍이 구분이 없는 일(一)이겠는가.그대의 의론은 대체로 모두 좋으나 다만 다섯 째 단락에서 소는 밭 갈고[耕] 말은 달리며[馳] 솔개는 날고[飛]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는[躍] 다름을 말하면서 "이미 형기(形氣)가 같지 않음이 있으면 갖춘 바의 이(理) 또한 다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어찌 형기(形氣)에 떨어진 뒤에서 분수(分殊)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견해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억양의 사이에 말투가 그러했기 때문일 뿐이네.여덟째 단락에 또 '기질성지기(氣質性之氣)'의 기(氣)를 '기질(氣質)'이라고만 말할 때의 기(氣) 자와 같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 말 또한 의아스럽네. 기질은 단지 기질이니, 어찌 일찍이 두 단계의 기질이 있었던가. 이 말은 선사(先師)55)께서 발명하신 것이 상세하니, 바라건대 취하여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또 입론(立論)은 이치를 발명하는 것일 뿐이니, 세상을 나무라는 불평한 뜻을 그 사이에 두어서는 불가하니, 바라건대 헤아려 주시겠는가? 一太極矣。而分以言之。則健順。又分以言之。則元亨利貞。只此四者。又且涵蓄無限條理在。不須說氣說物。而理之體段。本自如此。然而先覺說理同氣異處不一。其故何耶。夫所謂理同者。非無分之謂也。那底便是箇元亨利貞。這底便是箇元亨利貞。聲色貌象。云云職職。無一出乎此四者之外。此所謂理同也。比如水。漑之濯之。烹之飮之。其用不同。而其爲水則一也。水固一也。而可漑可濯可烹可飮之分。已悉具於水。則所謂一者。何嘗是無分之一耶。賢論大槪皆好。但於五段。言耕馳飛躍之異。而曰旣有形氣之不同。則所具之理亦異。此語豈不是求分殊於隨形氣之後者耶。然非是見不到。只爲抑揚之間。語勢然耳。八段又以氣質性之氣氣。與單言氣質字不同。此言亦可訝。氣質只是氣質。何嘗有兩段氣質耶。此言先師發明詳悉。幸取看之如何。且立論貴乎發明理致而已。不可有譏世不平之意於其間。惟諒之否。 황경함(黃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을 말한다. 자는 경함,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운운직직(云云職職) 운운과 직직은 모두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노자》에 "무릇 만물은 무성하다가도 각각 그 뿌리에 복귀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라고 하였고, 《장자》 〈지락(至樂)〉에 "만물이 번성하나, 모두 무위로부터 자라는 것이다.[萬物職職, 皆從無爲殖.]"라고 하였다. 저본의 '운운(云云)'은 '운운(芸芸)'의 오류로 보인다. 선사(先師)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임성주ㆍ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계암 조공 유사장 溪庵曺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曺), 휘는 학신(學臣), 자는 내권(乃權), 호는 계암(溪庵)이다. 휘 계룡(繼龍)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108)와 혼인하여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고, 이로 인하여 창녕(昌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으니 바로 그 시조이다.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뛰어난 공훈과 현달한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조정 초에 이르러 휘 서(庶)는 시호가 청간(淸澗)이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상국(上國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황제(高皇帝 주원장(朱元璋))가 특별히 총애하여 도핵배(桃核杯)를 하사하였다.109)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국병(國柄)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능성(綾城)에 살았고,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고조 휘 봉인(鳳人)은 호가 동파(桐坡)이고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증조의 휘는 동근(東覲)이고, 조부의 휘는 현묵(賢默)이며, 부친의 휘는 명화(命貨)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한봉(張漢鳳)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순수하게 갖춰졌으니, 순조 12월 20일에 청계리(淸溪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후(淳厚)하고 활달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곁에서 어버이를 모시면서 응대하고 대답하며 잘 받들어 따르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였으며, 맛있는 것을 구하면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드렸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을 때 번거롭게 지휘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약관에 널리 제가(諸家)를 섭렵하여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 나고 아름다웠으며,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여 죽을 먹고 물을 마셨으며, 삭망(朔望)마다 성묘하여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형제 3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산을 매입하여 과일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고기를 길러서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 이로써 봉양을 올렸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로써 제수를 올렸다. 늘그막에 청계(淸溪) 가의 한 구역에 정사(精舍)를 지어 그 편액에 '벽류(碧流)'라고 쓰고, 사촌 형제들과 밤낮으로 서로 마주 대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정을 다하였다. 또 집안 자제와 마을의 수재를 모아 학업을 익히게 하자, 사방의 친구들이 그 일을 노래하여 화답하였다. 평소에 삼가고 경계함으로 몸가짐을 하였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공손함과 용서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때 덕이 있는 자를 친근하게 하여 절차(切磋)의 유익함이 있게 하고자 하였다. 일찍이 자식을 가르치는 시를 짓고 말하기를, "이미 옛것을 익히고 또 새것을 알아야 하니[旣溫其故又知新], 성인 되고 우자 되는 건 본디 자신에게 달려 있다네.[爲聖爲愚自在身] 그 가운데 진실하고 분명한 곳을 알고자 한다면[欲識箇中眞的處], 내가 어른을 어른으로 존경하는 것과 친척을 친히 하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明吾長長與親親]"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마음속에 보존된 것을 알 수 있다. 계사년(1893) 4월 12일에 졸하여 천운산(天雲山) 아래 부임(負壬)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윤성연(尹聲淵)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모두 지극하였고 4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승(仁承)·의승(義承)·예승(禮承)·지승(智承)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동호(李東鎬)·하동(河東) 정장현(鄭章鉉)·양성(陽城) 이봉기(李鳳基)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누적한 행실과 풍부한 재능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에 시험되지 못하여 빛을 숨기고 아름다움을 속에 품은 채 멀리 황량하고 누추하며 적막한 물가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공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손상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동향(同鄕)에 있으면서 미적거리고 일이 많아 미처 찾아뵙지 못했는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였다. 노년에 비로소 공의 유장(遺狀)을 구해 읽었는데, 간절하게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생(李生) 승복(承福)은 바로 공의 외손으로 나와 종유(從遊)했는데, 공의 큰아들이 낳은 손자 병규(秉圭)의 명으로 나에게 행실을 기록하는 글을 요청하였다. 公妣曺。諱學臣。字乃權。號溪庵。有諱繼龍。尙眞平王公主。封昌城君。因以昌寧爲貫。卽其始祖也。自羅至麗。名勳達爵。奕世不絶。至我朝初。有諱庶。號淸澗官直提學。奉使上國。高皇帝寵異之。賜桃核盃。六傳而諱國柄。濟用監正。退寓于綾城。子孫世居焉。高祖諱鳳人。號桐坡中司馬。文行著聞。有遺集。曾祖諱東覲。祖諱賢默考諱命貨。妣興德張氏漢鳳女。閨範純備。以純廟十二月二十日。生公于淸溪里。姿稟淳厚開爽。自幼不好戱美。不好爭競。日侍親側。應封唯諾。承順如流。得一味不入口。必袖而供之。就傳受業。不煩提督而文理日就。弱冠博涉諸家。詞藻斐蔚。執喪哀毁。啜粥飮水。朔望省掃。風雨不廢。兄弟三人。友愛純篤。買山種果。鑿池蓄魚。親在以供其養。親沒以供其奠。晩年築一區精舍於淸溪之上。題其顏曰碧流。與群從昆季。日夕相對。以盡湛樂之情。又聚門子弟村秀才。使肄業。四方知舊歌其事而和之。平居持身謹勅。御家勤儉。接人恭恕。敎子孫。欲其親近有德。俾有切磋之益。嘗有訓子詩曰。旣溫其故又知新。爲聖爲愚自在身。欲識箇中眞的處。明吾長長與親親。此可以見其所存矣。癸巳四月十二日卒。葬天雲山下負壬原。配咸安尹氏聲淵女。婦德備至。生四男三女。男仁承義承禮承智承。女適光山李東鎬河東鄭章鉉陽城李鳳基。孫以下不錄。嗚呼。有積累之行。贍富之才。而不見知於人。不見試於世。潛光含章。遐擧遠引於荒陋寂寞之濱。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爲何如也。余在同鄕。因循多故。未及拜床。而奄隔千古。衰暮之日。始得其遺狀而讀之。區區追仰之情。尤切罔喩。李生承福。卽公之外孫。而從余遊。以其長房孫秉圭命。謁誌行之文。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된 덕만 공주(德曼公主)를 말한다. 사명(使命)을……하사하였다 1398년(태조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를 만나 공물(供物)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가 참소를 당해 수년간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명나라 황제는 강직한 충절에 탄복하여 사면해주었고, 복숭아 씨앗에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해서 만든 도핵배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다. 《高麗列朝登科錄》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신천 처사 정공 유사장 新泉處士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수현(洙鉉), 자는 성첨(聖瞻)이고 계통은 하동에서 나왔다. 휘 도정(道正)은 평장사(平章事), 휘 국룡(國龍)은 도첨의(都僉議),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이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충공이 낳은 휘 익(翊)이 우리 조정에 와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였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 선생(金佔畢齋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분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이고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으며,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중(德中), 증조의 휘는 명윤(命潤), 조부의 휘는 구원(矩元), 부친의 휘는 재대(在大)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으로 드러났다. 모친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순조 계유년(1813) 1월 24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고 시원하며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어려서부터 모든 장난과 저속한 말은 입에서 내지 않았고, 음란한 물건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가서는 장상(長上)을 섬기되 공경하고 삼가기를 한결같이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학문하는 절도와 몸가짐의 위의(威儀)와 모양은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점차 자라면서 동향(同鄕)의 만희재(晩羲齋)120)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121) 박영주(朴永柱) 공과 종유하여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하였다. 중년에 와서 하석(霞石)122) 성 선생(成先生)과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고 평소에 간직했던 경전의 은미하고 심오한 뜻과 전례(典禮)의 의심스럽고 난해한 절목을 의논하여 확정 짓고 헤아려 질정하였으니, 확충시켜 나아간 바가 많았다. 일찍이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 근체(近體)의 문장에 비록 매우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시속을 따라 부지런히 노력하여 가문의 바람에 응하였는데, 이때 와서 드디어 한 번에 모두 사양하여 물리치고, 두문불출하여 세상과 사절한 것은 고요함을 지키고 한가롭게 지내려고 해서였다. 이에 한 구역에 정사(精合)를 짓고 물을 끌어와 샘을 만들어 '신천(新泉)'이라 편액하고, 날마다 마을의 뛰어난 자들을 데리고 와서 글을 읽었다. 고을에서 매번 예회(禮會) 및 문예(文藝)의 연회를 베풀 때면 반드시 공을 빈객으로 맞이했는데, 공이 유건(儒巾)과 유복(儒服)으로 풍의(風儀)가 매우 훌륭하여 이 때문에 온 좌중이 숙연하였고, 고을 자제들을 대하여 자상하게 이끌어 깨우쳐 주되 성의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듣는 이들이 절로 감복하였다. 평소에 온화하고 어질고 자애로워 화기(和氣)가 사람을 감동시켰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려 빠지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속세와 단절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모든 이들이 원망함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이 서로 믿었으며, 똑같은 말로 추켜세우고 이간하는 말이 없어 사림(士林)에서 공을 조정에 추천하는 데에 이르렀다. 무자년(1888) 12월 26일에 세상을 떠나 부등(釜嶝)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모(某)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8남을 두었으니, 순철(淳哲)·순기(淳基)·순귀(淳龜)·순룡(淳龍)·순원(淳䲶)·순별(淳鱉)·순홍(淳鴻)·순필(淳弼)이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정병국(鄭炳國)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요청하였다. 아, 내가 어렸을 때에 이분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일이 어제처럼 또렷한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한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향방(鄕邦)에서 당시의 덕망 높은 어른들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여생에 다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그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洙鉉。字聖瞻。系出河東。平章事諱道正。都僉議諱國龍。贊成事文忠公諱芝衍。皆顯祖也。文忠生諱翊。入我朝。官兵曹判書。六傳諱汝諧。受學于金佔畢齋先生。以學行薦。拜司憲府持平。世稱遯齋先生。是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五傳諱殷河號六松。隱德不仕。以孝旌閭。於公爲六世。高祖諱德中。曾祖諱命潤。祖諱矩元。考諱在大。世著文行。妣晉州姜氏某女。有婦德。純廟癸酉正月二十四日。生公于綾之車洞里。氣宇秀爽。性度至孝。自幼。凡嬉戱俚近之語。不出諸口。淫邪之物。不接於目。入事父兄。出事長上。克敬克謹。一如成人。爲學節度。持身儀樣。一以古人爲法。稍長從同鄕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講討問辨。至中歲。往拜霞石成先生蘆沙奇先生。以平日所蓄經傳微奧之旨。典禮疑難之節。商確裁質。多所展拓。嘗於功令近體之文。雖不甚屑意。而隨俗黽勉以應門戶之望。至是遂一令掃斥。杜門謝世。爲守靜養閒計。築一區精舍。引流爲泉。顔曰新泉。日引村秀才子。尋行數墨。鄕中每設禮會及文藝之遊。必邀公爲賓。公以儒布儒服。風儀甚偉。一座爲之肅然。對鄕子弟。諄諄提諭。誠意懇至。聽者自服。平居溫仁慈愛和氣動人和而不流貞不絶俗是以內外無怨。遠近相信。一辭推詡。無有間言。至有士林剡薦。戊子十二月二十六日考終。葬釜嶝子坐原。配驪興閔氏某女。系配密陽朴氏某女。有八男。曰淳哲淳基淳龜淳龍淳䲶淳鱉淳鴻淳弼。孫以下不盡錄。曾孫炳國抱家狀來。謁不朽之文。嗚呼。余在小少。陪從杖屨。承奉聲咳。歷歷如昨日。而奄然千古之隔。已二十餘年。鄕邦間。不復見當日耆舊人物之盛。其爲餘生不盡之恨何如。玆不敢以非其人辭。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하석(霞石) 성근묵(成近黙, 1784~1852)의 호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화암 양공 유사장 華庵梁公遺事狀 공의 휘는 재성(在成), 자는 대집(大集)이다. 양씨는 계통이 제주(濟州)에서 나왔고 대대로 성주(星主 제주 목사)를 물려받았다. 고려 의종(毅宗) 때에 와서 휘 원준(元俊)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휘 문성(文聖)은 우리 조정에서 벼슬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휘 팽손(彭孫)123)은 교리(校理)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혜강(惠康)이니, 세상에서 학포 선생(學圃先生)으로 불렀다. 증조의 휘는 한영(漢永), 조부의 휘는 상기(相麒), 부친의 휘는 제묵(悌默)이니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광산 이씨는 이용하(李龍河)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 무신년(1848) 12월 25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선량한 성품이 있었기에 부모를 섬길 때에 오직 삼가서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 여러 아이와 놀 때도 입으로는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손으로는 경솔하고 잡된 장난을 치지 않았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진퇴와 응낙(應諾)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매우 부지런히 독서하여 과정(課程)에 흠결이 없었다. 평소에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것을 몸소 주관하지 않음이 없어서 구체(口體)의 봉양(奉養)124)에 모자람이 없었다. 거처할 때에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에 즐거움을 다하여 온 집안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는데 늙어서도 여전하였고, 재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여 굶고 배부른 것이 고르지 않은 탄식이 있은 적이 없었다. 모든 혼례비용과 출입할 때의 재물과 빈객의 대접을 모두 자력으로 공급하였고, 미루어 족친과 인척, 친구와 종유하는 자에게까지 모두 기쁘게 은혜를 베풀고 찬연(燦然)히 예로 대하였다. 계미년(1883)에 화학산(華鶴山)에 살면서 몇 칸짜리 집을 짓고, 형제가 서로 마주 대하며 말하고 웃으며 화락하게 지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자식과 조카들이 곁에서 모시면서 독서하고, 친한 벗들이 책상을 둘러싸고 수창(酬唱)하였으니, 그 세속을 끊은 모습과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었다. 상(喪)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늙었다고 하여 스스로 용서하지 않고, 빈궁하다 하여 스스로 기운을 잃지 않아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에 유감이 없었다. 갑오년(1894)의 난에 이웃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이 정도를 지키면서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고,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하늘을 거스르면 화가 발생하고 하늘을 따르면 복이 이르며, 선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은 좇아서는 안 되니,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들이 살고 죽는 명맥(命脈)이다. 공은 동생 양재해(梁在海)에게 천 리 밖의 스승에게 배우고 사방에 유학(遊學)함으로써 거의 헛되게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권하고, 피와 땀으로 힘써 일하여 그 비용을 감당하자 향리(鄕里)에서 탄복하고 칭찬하여 '이러한 형이 있어서 이러한 동생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그리워하지 않고 명성과 위세를 바라지 않았으며, 거친 의복과 거친 음식에도 고궁(固窮)125)하고 안빈(安貧)하였지만, 흠모한 것은 선인(善人)과 정사(正士)이고 힘써 노력한 것은 경사(經史)와 서적(書籍)이었다. 시냇가와 산 사이에서 소요하고 쑥대 우거진 궁벽한 곳에 파묻혀 유유자적하면서 애오라지 인생을 마쳤으니, 그 고상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세상에서 진실로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공과 같은 땅에 살면서 비록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친밀함은 조석으로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백발의 노년에도 앙모하는 바가 적지 않았는데, 어찌 공이 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계묘년(1903) 12월 21일에 세상을 떠나 장흥(長興) 장서면(長西面) 운곡(雲谷) 삼개봉(三開峯) 아래 정방(丁方)을 향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찬휴(文粲休)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회중(會中)·회연(會沇)·회구(會求)이고, 딸은 하동 정순봉(鄭淳鳳)에게 출가했다. 양재해가 가장(家狀)을 지어 나에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기에, 삼가 가장의 말을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在成。字大集。梁氏系出濟州。世襲星主。至高麗毅宗朝。有諱元俊。門下侍郞平章事。有諱文聖。仕我朝皆其顯祖也。至諱彭孫校理贈吏判諡惠康。世稱學圃先生。曾祖諱漢永。祖諱相麒。考諱悌默。皆有隱德。妣光山李氏龍河女。公以憲宗戊申十二月二十五日生于綾之莘山里。幼有至性。事親惟謹。未嘗有違。與群兒遊。口不出鄙俚之言。手不作浮雜之戱。七歲上學。進退唯諾。不類他兒。讀書甚勤。課程無闕。家素貧甚。漁樵耕牧。無不躬幹。口體之養。不至見乏。居致其敬。養致其樂。二家之內。和其藹如也。與弟友愛甚至。長枕大被。老而猶然。有無共之。未嘗有飢飽不均之歎。凡皆嫁之用。出入之資。賓客之供。皆自力以給。推以至於族親姻戚。知舊遊從。皆驩然有恩。燦然有禮。癸未僑寓於華䳽山中。構數椽屋子。兄弟相對。言笑湛樂。日以爲常。子侄侍傍讀書。親朋繞床酬唱。其絶俗之標。出塵之象。可艶而不可忘也。遭喪哀甚。不以耆艾而自恕不以貧寠而自沮。情文無憾甲午之亂。戒隣里人曰。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戒子弟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違。惡不可從。爲善去惡。此是民人生死命脈也。勸其弟枉海。從師千里。遊學四方。殆無虛歲。而血力拮据以應其費。鄕里歎賞。以爲有是兄有是弟。平生不慕名利。不赳聲勢。惡衣菲食。固窮安貧。而所慕者善人正士。所務者經史書藉。徜徉於溪山之間。沈淹於蓬蒿之中。優哉游哉。聊以卒歲。其高韻逸躅。世固有知之者矣。余與公居在同壤。雖未能源源相聚。而襟期之密勿。未嘗非朝夕合席也。白首歲寒。所仰不細。豈知公不少延而遽至於此耶。以癸卯十二月二十一日觀化。葬長興長西面雲谷三開峯下向丁之原。配南平文氏粲休女。有婦德。先公一年而終。生三男一女。會中會沇會求。女適河東鄭淳鳳。在海撰家狀示余。因有一言之托。謹据狀辭。略加修潤焉。 양팽손(梁彭孫) 1488~1545.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1519년(중종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구체(口體)의 봉양(奉養)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양지(養志)의 효도와 상대되는 말로,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孟子 離婁上》 고궁(固窮) 군자는 곤궁할 때에도 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진실로 곤궁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제멋대로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구심재 정공 유사장 求心齋鄭公遺事狀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유(先儒)이니, 김점필재(金佔畢齋)의 문인으로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훌륭하게 세상에 유명해져 자손들이 계승할 만한 바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후손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때때로 유학(儒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근고(近古)의 호는 구심재(求心齋), 자(字)는 성언(成彦)인 처사(處士) 휘 양훈(陽勳)도 그중 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모습이 있어서 장난치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뛰어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날마다 곁에서 어른을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책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서 그 뜻을 듣고 인하여 말하기를, "만일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의리를 알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한가한 틈을 타서 이웃 마을 경암(敬庵) 정공(鄭公)의 문하로 나아가 배웠으니, 경암은 바로 그의 친족 장로(長老)이다. 정공(鄭公)은 평소에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가르치는 데에 법이 있었는데, 공이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준수하여 어긴 적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서부터 제사(諸史)와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순조롭게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문리(文理)와 시문(詩文)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고, 의리의 근원에 침잠하여 핵심적인 깊은 뜻에서 실마리를 뽑아내어 찾았으니, 이는 마치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마음에 보존되어 몸에 체득한 것과 남에게 시행하여 일에 조처한 것이 찬연히 조리가 있고 엄연히 법이 있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 과거 공부를 하여 시문(時文)110)의 각 체가 풍부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 종적을 감추고 전원에 빛을 숨겼으며, 삼경(三逕)111)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러니 그 뛰어난 운치와 지취, 고아한 풍격과 뛰어난 자취를 또 어찌 보잘것없이 부침하는 것으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막힌 데에서 형통한 곳으로 변하여 가고112)[否之亨], 곤란한 데에서 통하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113)[困之通] 애초에 사군자(士君子)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 아님이 없다. 공은 하동(河東)의 저족(著族)이다. 고조 휘 흘(忔)은 호가 송암(松庵)으로 정동계(鄭桐溪)114)의 문인인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이가 돈재 선생의 4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문참(文參)이고, 조부의 휘는 세채(世采)이며, 부친의 휘는 집(鏶)이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모친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조상민(趙尙敏)의 따님이니, 영조 정사년(1737) 6월 7일과 순조 기사년(1809) 8월 6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고, 묘는 신산(莘山) 응막동(鷹幕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흥상(興相)과 필상(必相)이고, 딸은 제주(濟州) 양은호(粱殷浩)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족손 정재우(鄭在禹)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저술이 적지 않았는데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어 한 글자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 있는 유풍(遺風)과 여열(餘㤠)은 고을 인사들이 전송(傳誦)한 말뿐입니다. 연대가 더욱 멀어질수록 전송(傳誦)이 점점 미약해지면 백세(百世) 뒤에 누가 다시 공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마디 은혜로운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추앙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遯濟鄭先生。吾鄕先儒也。以金佔畢齋門人。文學行義。偉然名世。而爲子孫可繼之地。是以詵詵來許。紹休趾美。往往以儒學著聞。近古求心齋處士諱陽勳。字成彦。亦其人也。自幼凝然有成人儀樣。不好戱嬉。不事遊走。日侍長者側。應對惟謹。一日見入授讀。從傍聽其義。因曰。若不讀書。何以知此等義理乎。遂挾閒就學于隣閈敬庵鄭公之門。敬庵卽其宗黨長老也。平日持守有方。敎授有法。公一遵其敎。未有違越。年弱冠。自四書五經至諸史百家。無不輪流淹貫。文理詞華。斐然成章。沈潛乎義理之源。紬縪乎肯綮之蘊。如冰解而凍釋。是以其存於心而體於身。施於人而措諸事者。燦然有條。儼然有則。每以餘日。游於功令之業。時文各體。無不贍麗。而不以得失關心。斂迹窮荒。潛光畎畝三逕花竹。四壁圖書。婆娑徜徉。聊以自遣。其偉韻逸趣。高風遐躅。又豈可以區區陞沈而差殊觀哉。否之亨。困之適。未始非士君子安身立命處也。公河東著族。高祖諱忔。號松庵。鄭桐溪門人。丙子擧義。贈判尹。是遯齋先生四世孫也。曾祖諱文參。祖諱世采。考諱鏶參奉。妣咸安趙氏尙敏女。英宗丁巳六月七日。純祖己巳八月十六日。卽其懸弧與屬纊也。墓莘山鷹幕洞亥坐原。齊淸道金氏。擧二男一女。男興相必相。女適濟州粱殷浩。孫以下不錄。族孫在禹。持家狀過余曰。著述不爲少矣。而屢失回祿。隻字不遺。其遺風餘㤠所可想象者。鄕人士傳誦之語而已。年代愈遠。而傳誦浸微。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乎。願勿悋一言之惠也。聞之不勝追仰之私。有不敢多辭云。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막힌……가고 비(否)는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비색하고 막히는 때이니, 이러한 때에는 절개를 굳게 지키면 길하여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전(象傳)〉에 "천지가 사귀지 않음이 비이니, 군자가 보고서 덕을 검약하여 난을 피해서 녹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天地不交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라고 하였다. 곤란한……것은 곤(困)은 곤란하고 험난한 때이니,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의를 잃지 않으면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곤괘(困卦) 단전(彖傳)〉에 "험하지만 기뻐하여 곤란하여도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일 것이다.〔險以說, 困而不失其所亨, 其唯君子乎.〕"라고 하였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동계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좌승지 송류정 민공 유사장 贈左承旨松柳亭閔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방(榮邦),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류(松柳)이니 계통은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휘 칭도(稱道)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의 봉어(尙衣奉御)였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휘 영모(令謨)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문경(文景)이고, 휘 지(漬)는 도첨의 정승(都僉議政承)으로 시호는 문인(文仁)이며, 휘 근(瑾)은 여산 부원군(驪山府院君)이니, 모두 여사(麗史)에 드러나 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중립(中立)은 판전교령(判典校令)을 지냈고, 휘 소생(紹生)은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를 지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으로, 세조조(世祖朝)에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고115), 풀려나 마침내 능주(綾州) 월곡(月谷)에 살았으니 이분이 11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해익(海翼), 증조의 휘는 수귀(壽龜), 조부 휘 정수(挺洙)는 교관(敎官)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상록(相祿)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인(淑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언규(李彦珪)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계비(系妣) 숙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광흡(李光熻)의 따님이니, 영조 을미년(1775)에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고 조숙하여 엄연히 성인의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점차 자라면서 개연히 고인(古人)의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고, 도가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고, 《소학(小學)》으로 전지(田地)를 정하고, 《대학》으로 규모를 세우며, 《논어》와 《맹자》로 조리(操履 몸가짐과 마음가짐)를 밝혔다. 그래서 매우 부지런하게 여러 번 독송하고 깊이 사색에 잠겨 이를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하였으니,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처럼 편안히 자득하였다. 자리 곁에 구용(九容)116)과 구사(九思)117)를 써놓고 출입하고 기거할 때에 늘 거울삼아 살폈다.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때 분명하게 과정(課程)을 두고 차근차근 질서 있게 매진하여 성취한 것이 많았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과 장례를 치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인정(仁情)과 예문(禮文)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늘그막에 집 한 채를 지어 편액에 '송류정(松柳亭)'이라 쓰고, 자유롭게 소요하면서 날마다 서적을 스스로 즐겼고, 명예와 이익, 화려함에 관해서는 담박하였다. 문규(門規)를 정하여 친척 간의 두텁고 화목한 정을 익혔고, 향약(鄕約)을 세워 예속(禮俗)의 사귐을 밝히자 내외의 사람들은 원망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였으니, 몸이 집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친 이익과 혜택이 많았다. 경자년(1840)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나 선하동(仙荷洞)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고암촌(鼓巖村) 앞 반룡산(盤龍山) 북쪽 기슭 정좌(丁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계사년(1893)에 손자 민덕호(閔德鎬)의 귀함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희대(文喜大)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매우 갖춰졌고 묘는 합장했으며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치형(致衡),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치승(致昇), 호조 참판에 추증된 치화(致華)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시창(金時昌)과 달성(達城) 배원태(裵元台)에게 출가했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욱(泳郁)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했을 때,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니기에 진실로 감히 받들어 감당하지 못하지만, 단지 민영욱과는 조부, 아들, 손자 3대의 가깝고 두터운 정분이 있었기에 차마 결국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榮邦。字季彬。號松柳。系出驪興。諱稱道。仕麗朝官尙衣奉御。是爲鼻祖。諱令謨平章事文景。諱漬都僉議政承文仁。諱瑾驪山府院君。竝著麗史。我朝有諱中立判典校令。諱紹生三陟都護府使。諱懷參號義庵。世祖朝謫守大靜。解放。遂寓于綾州之月谷。是其十一世祖也。高祖諱海翼。曾祖諱壽龜。祖諱挺洙贈敎官。考諱相祿贈司僕寺正。妣淑人慶州李氏彦珪女。有女士行。系妣淑人光山李氏光熻女。英宗乙未。生公于松石坊五柳村。生有異質。穎悟夙就。嚴然有成人儀度。稍長。慨然有志於古人爲己之學。嘗自警曰.非學無以知道。非道無以爲人。以小學定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明操履。誦數甚勤。思索甚苦。存之於心。體之於身。氷解凍釋。怡然自得。書九容九思於座側。出入起居。常常鏡考。敎誨生徒。的有課程。循循征邁。多所成就。性孝。生事葬祭。一遵禮制。情文兩至。晩築一室。題其顔曰松柳亭。寄敖徜徉。日以書籍自娛。至於聲利芬華泊如也。定門規以講敦睦之誼。立鄕約以明禮俗之交。內外無怨。遠近胥悅。身不出家。而利澤之及人者多矣。庚子五月十八日考終。葬仙荷洞。後移窆于鼓巖村前盤龍山北麓丁坐原。癸巳以孫德鎬之貴。贈承政院左承旨。配淑夫人南平文氏喜大女。壹儀甚備。墓祔。三男二女。男致衡。致昇出爲季父后。致華贈戶曹參判。女適光山金時昌達城裴元台。孫曾以下不盡錄。曾孫泳郁奉家狀來。有不朽之託。余以非其人。固不敢承當。而但於泳郁。有祖子孫三世契分之厚。不忍終辭云爾。 세조조(世祖朝)에……좌천되었고 1456년(세조2)에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盷)에게 송현수와 판관 권완(權完)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했는데, 민회삼이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 《梅山集 卷40 義菴閔公墓誌銘》 구용(九容)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진중하게[足容重], 손은 공손하게[手容恭], 눈은 바르게[目容端], 입은 무겁게[口容止], 목소리는 조용하게[聲容靜], 머리는 곧게[頭容直], 숨소리는 엄숙하게[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이 있게[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하는 것이다. 《禮記 玉藻》 구사(九思)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마음가짐으로,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귀 밝음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함을 생각하고[色思溫], 모습은 공손함을 생각하고[貌思恭], 말할 때는 충성스러움을 생각하고[言思忠], 일할 때는 경건함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스러울 때는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疑思問], 화를 낼 때는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재물을 얻을 때는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것이다. 《論語 季氏》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돈재 조공 사실 遯齋曺公事實 돈재(遯齋) 조공(曺公)의 휘는 일리(一履)이니, 바로 내가 사는 고을의 근고(近古) 사람이다. 타고난 자태가 빼어나고 시원하며 화락하고 단아하여 어려서부터 의젓하였다. 가난하게 살면서 어버이를 봉양할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했고,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받들어 모시면서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잘 갖추었다. 고기 잡고 나무한 뒤에 여가가 있으면 매번 책상을 마주해 단정히 바르게 앉아 시가를 읊고 학문을 궁구하니 문사(文詞)가 날로 진보하였다. 어버이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분수를 지키고 뜻을 구했지만 가난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명예와 화려한 겉치레, 기호(嗜好)에 담박하였고, 출입을 간략히 하였으며, 교제 맺는 것을 신중히 하였다. 부춘(富春)에서 성 동쪽 필봉(筆峯) 아래로 우거하여 소요하고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노년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아, 광휘(光輝)를 숨겨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평소에 마음속으로 깊이 품은 포부를 조금도 시험하지 못했으며, 세상을 떠난 뒤의 유고(遺稿)도 화재로 재앙을 입어 사람들에게 전해 보여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필봉은 뾰족하고 빼어나며 용산(龍山)이 둘러 있으며, 공이 오가던 곳을 지나감에 정채(精彩)가 여전하였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뛰어난 자취를 볼 수 있다. 많은 자손이118) 번성하고 화목하며 시와 예를 가업으로 계승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유교(遺敎)를 볼 수 있다. 효자의 영예와 처사의 훌륭한 운치가 전후 2백 년 동안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고 자자했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진실한 행실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분수를 닦고 자신의 천진한 성품에 맡긴다면,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얻은 것이 많을 것이니, 저 4천 마리의 말과 만종(萬鍾) 같은 부귀함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돈재공답게 되는 이유이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서 선생을 사모함하고 있었는데, 지금 조필승(曺弼承)의 청에 대해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을 서술하여 공의 사실(事實)로 삼았다. 遯齋曺公諱一履。卽吾鄕近古人也。天姿秀爽愷弟。自幼凝然。居貧養親。殫竭血力。蔀室斗屋。承歡甚備。漁樵之餘。輒對案危坐。諷詠溫繹。文詞日就。爲親應擧。不以得失累意。守分求志。不以貧窶動心。泊於聲華。淡於嗜好。簡出入。愼交結。自富春寓於城東筆峯之下。徜徉婆娑爲終老之計。嗚呼。潛光鞱輝。世莫我知。素所蘊抱。未得少試。而至於身後遺稿。亦且厄於回祿。未有以傳示於人者。然筆峯尖秀。龍山繞匝。杖屨經過。精彩如古。於此而見公之遐躅也。螽斯椒聊。蕃衍雍睦。箕裘詩禮。藹蔚有聲。於此而見公之遺敎也。孝子令譽。處士高韻。前後二百年。藉藉不絶於里老巷竪之口。於此而見公之實行也。修吾分。任吾眞。雖擧一世不知而所得多矣。彼千駟萬鍾。於我何加哉。此所以爲遯齋公也。余以卿里後生。竊有慕於下風。今於弼承之請。不敢牢讓。謹以所嘗聞知者。述以爲公之事實。 많은 자손이 대본의 종사(螽斯)와 초료(椒聊)는 각각  《시경》 〈주남(周南)〉과 〈당풍(唐風)〉의 편명으로, 여기서는 자손이 많음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벽람재 정공 유사장 碧嵐齋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환(英煥), 자는 내실(乃實), 호는 벽람재(碧嵐齋)이니 하동 사람이다. 밀직(密直) 휘 국룡(國龍)과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모두 상계(上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중엽에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를 사사(師事)하였고,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 일컬었으니, 공에게 10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복채(復采), 증조의 휘는 탁(鐸), 조부의 휘는 양엽(陽曄)이고 부친의 휘는 원상(元相)이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김복헌(金復憲)의 따님이니, 순조 병자년(1816)에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개와 도량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성품과 도량이 겸손하고 검약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성인(成人)의 위의(威儀)와 모양이 있어 다른 사람과 장난치지 않고 다투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았고, 발은 분잡(紛雜)한 곳에는 이르지 않았다. 고기 잡고 나무한 뒤에 한가한 날이면 조용히 곁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고, 제멋대로 편한 곳으로 나아간 적이 없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때에 게으르지 않고 과정(課程)을 따르자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형제 4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으니 화기(和氣)가 집안에 가득 찼고,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좁쌀도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으며, 제부(諸婦)도 이처럼 하자 가정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부모상을 당해 몹시 슬퍼하여 수척하고 야위었으며, 정문(情文 인정과 예문)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 평생토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분수를 지켜 천진한 성품대로 산림에서 한가로이 지냈지만, 여휘(餘輝)가 은은하게 날로 그 빛이 드러나119) 원근의 인사들이 자자하게 칭송하여 군자로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벽람(碧嵐)' 두 글자를 편액으로 써서 걸어 자신의 뜻을 부쳤다. 정축년(1877) 8월 8일에 세상을 떠나 신산(莘山) 계월봉(桂月峯)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운규(李雲奎)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헌(在憲)이고 딸은 문종휴(文鍾休)에게 출가했다. 계배(系配)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이신(文以新)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오른 재관(在寬)·재탁(在卓)·재의(在義)이고, 딸은 홍우전(洪祐銓)과 이성재(李成在)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손자 복현(福鉉)이 가장(家狀)을 들고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여 불후하게 전하려고 했을 때, 내가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英煥。字乃實。號碧嵐齋。河東人。密直諱國龍。文忠公諱芝衍。皆上系顯祖也。中葉有諱汝諧。師事金佔畢齋。世稱遯齋先生。於公爲十世。高祖諱復釆。曾祖諱鐸。祖諱陽瞱。考諱元相。妣淸道金氏復憲女。純祖丙子。生公于莘山里。氣字端嚴。性度謙約。自在幼稚。凝然有成人儀樣。不與人戱狎。不與人爭競。身不着華麗之服。足不到紛雜之地。漁樵餘日。從容侍側。應對惟謹。未嘗私自就便。就傳執業不怠。遵循課程。文理日就。兄弟四人。友悌甚篤。長枕大被。和氣滿室。尺布斗粟。有無共之。諸婦亦如之。庭無間言。遭內外艱。哀毁欒欒。情文兩至。一生沈晦。推分任眞。婆娑林樊。而餘輝闇章。遠近人士。藉藉稱誦。無不以君子人推之。揭碧嵐二字以寓其意。丁丑八月八日終。葬莘山桂月峯甲坐原。配全州李氏雲奎女。一男一女。男在憲。女適文鍾休。系配南平文氏以新女。三男二女。男在寬壽陞同中傴。在卓在義。女適洪祐銓李成在。孫以下不錄。公之孫福鉉以家狀。過余謁文爲不朽計。辭不獲。謹據狀而略加修潤焉耳。 은은하게……드러나 대본의 '암장(闇章)'은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의 준말로, 군자의 도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아 은은하지만, 도가 내면에 있기에 날로 그 빛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中庸章句 第33章》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파 처사 정공 유사장 松坡處士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순영(淳榮), 자는 현여(顯汝), 호는 송파(松坡)이다. 정씨는 하동(河東)을 관향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평장사(平章事) 휘 도정(道正)이 처음으로 보첩(譜牒)에 오른 선조가 된다.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휘 익(翊)은 중현 대부(重顯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휘 인귀(仁貴)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휘 여해(汝諧)는 호가 돈재(遯齋)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겨 학행(學行)으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모두 중계(中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지평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니 문행(文行)이 세상에 드러났고, 참봉의 현손 문상(文翔)은 호가 화은(華隱)으로 병자년의 난에 의병을 창도하였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명윤(命潤)은 호가 잠곡(潛谷)이고, 증조 휘 구원(矩元)은 호가 농암(聾巖)이며, 조부 휘 재칠(在七)은 호가 죽와(竹窩)이고, 부친의 휘는 국현(國鉉)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으니, 순조 신묘년(1831) 8월 12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살이 쪘으며, 풍모는 장중(莊重)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웃지 않았다. 정성(定省)128)과 감취(甘毳 맛있고 연한 음식)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삼갔으며, 성품이 독서하는 데 부지런하여 날마다 과정(課程)이 있었고, 많은 서적과 경서를 교대로 섭렵하였으며, 문사(文詞)의 각 체는 지은 글이 넉넉하고 시원스러워서 한 시대의 거벽(巨擘 대가(大家))들이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만 운명에 막혀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공론이 원통하게 여겼지만, 공은 편안히 처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다. 만희재(晩羲齋)129)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130) 박영주(朴永柱) 공은 모두 고을의 덕망이 높은 선비이니, 공이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계속해서 학문을 익히고 닦았다. 늘그막에 선거(選擧)의 폐단을 보아 마침내 관리가 되려는 뜻을 끊고, 한결같이 요약(要約)함으로 돌아와 근원(根源)을 궁구할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이에 《중용》·《대학》·《논어》·《맹자》 등의 책을 가지고 밤낮으로 이치를 연구하고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날에 보았던 것은 매독환주(買櫝還珠)131)일 뿐만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늙으면 지혜로워지지만, 모(耄)132)가 뒤따른다.133)'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장흥(長興)의 어곡리(漁谷里)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산이 깊고 마을이 후미져서 세속의 경계가 요원하고, 마을의 뛰어난 선비 몇 사람만이 문정(門庭) 사이에서 글을 읽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여 빛을 감추었으니, 은은하게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 것134)과 같았다. '송파(松坡)'라고 자호(自號)하고 시를 지어 뜻을 보였으니, "추워진 뒤에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보았으니[特立坡松寒後見], 애오라지 만년의 절조를 지키면서 서로 같아지고자 한다.[聊持晩節願相如]"라고 하였다. 정미년(1907) 2월 18일에 졸(卒)하여 부등(釜嶝) 정좌(丁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낭주 최씨(朗州崔氏)는 최한신(崔漢信)의 따님으로 6남을 두었으니, 우채(瑀采)·봉채(琫采)·학채(䳽采)·필채(弼采)·발채(發采)·기채(琪采)이다. 손자는 찬협(燦協)·찬주(燦宙)·찬일(燦佾)·찬홍(燦弘)·찬회(燦懷)·찬의(燦宜)·찬명(燦明)·찬직(燦直)·찬석(燦錫)이다. 아, 공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배이다. 내가 상숙(庠塾)135)에서 연회(宴會)하는 자리와 사우(士友)들이 글을 짓고 술 마시는 장소에서 인연으로 종유(從遊)하여 감화를 받았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헤어지고 가난과 질병으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어곡리 산중으로 찾아가 그가 덕을 진전시킨 공(功)을 보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영원히 세상을 떠난지라 따라가려 해도 오직 미치지 못하니 매우 통한스러울 뿐이다. 정찬협이 한창 부모상 중에 있으면서 가장(家狀)을 들고 찾아와 불후(不朽)의 글을 청했을 때,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진실로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가장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눈물이 줄줄 흘러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淳榮。字顯汝。號松坡。鄭氏本河東人。平章事諱道正。爲登譜之祖。諱芝衍。贊成事諡文忠公。諱翊重。顯大夫贈兵曹判書。諱仁貴戶曹參判。諱汝諧。號遯齋。師事佔畢齋金先生。以學行除司憲府持平。皆中系顯祖也。持平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文行著世。參奉玄孫文翔。號華隱。丙子亂倡義旅。生諱殷河。號六松。孝旌閭。於公爲七世也。高祖諱命潤。號潛谷。曾祖諱矩元。號聾巖。祖諱在七。號竹窩。考諱國鉉。世有隱德。妣淸道金氏某女。壼範純備。純廟辛卯八月十二日。生公于綾之車洞里。公面圓體厚。風儀莊重。自幼不好戱美。不妄言笑。定省甘毳。必誠必謹。性勤讀書。日有課程。群書群經。輪流涉獵。文詞各體。栽述贍暢。一時巨擘。無不推先。但厄於命。未得有遇於時。物論稱屈。而處之恬然。未見有不平之意。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皆鄕裏宿德也。公隨時省候。講磨不輟。晩年見選擧之敝遂絶意干進。一以反約窮源爲究竟計。將庸學論孟等書。日夜硏理。乃歎曰。前日之見。不帝爲買櫝而還珠也。古人所謂將知而耄至者。非此之謂耶。寓居長興之漁谷里。山深洞僻。俗境遙遠。惟有村秀才子多少人。尋行數墨於門庭之間。閉戶塞竇。潛光鏟輝。誾然如尙絅之錦。自號松坡。賦詩以見志。有曰。特立坡松寒後見。聊持晩節願相如。丁未二月十八日卒。葬釜嶝丁坐原。配朗州崔氏漢信女。擧六男。瑀采琫采䳽采弼采發采琪采。孫燦協燦宙燦佾燦弘燦懷燦宜燦明燦直燦鍚。嗚呼。公吾鄕先進也。余於庠塾樽俎之地。士友文酒之場。得以夤緣遊從。有所薰染。曉暮分離。貧病苟活。未能一造漁谷山中得觀其進德之功。而公已千古矣。追惟靡逮。只切痛恨。燦協方在重哀之中。以家狀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知不敢承膺。而撫狀釀涕。有不忍終辭云。 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면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매독환주(買櫝還珠) 상자만 사고 구슬을 돌려준다는 뜻으로,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천히 여기고, 천하게 여겨야 할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春秋) 시대 정(鄭) 나라 사람이 초(楚) 나라 사람에게서 궤[櫝]를 살 때, 그 궤에 장식된 좋은 구슬들은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궤만 차지했던 고사에서 나왔다. 《韓非子 外儲說》 모(耄) 80세 노인이 늙으면 정신이 혼미하여 노망이 든다는 말이다. 늙으면……뒤따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 원년(昭公元年)〉에 나온다. 은은하게……것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와 손공 유사장 松窩孫公遺事狀 공의 휘는 몽두(夢斗), 자는 원칠(元七), 호는 송와(松窩)이고 밀양 사람이다. 문효공(文孝公)의 휘는 순(順),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의 휘는 부(富), 응천군(凝川君)의 휘는 익감(翼減), 광리군(廣理君)의 휘는 극훈(兢訓), 밀성군(密城君)의 휘는 빈(贇)이니, 모두 상계(上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고, 의화(義和)는 현감을 지냈다. 비장(比長)은 호가 입암(笠巖)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 제학(弘文提學)을 지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과 15학사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금남(錦南)136) 최부(崔溥) 공과 전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다. 그러나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살았으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일(逸)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 조부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 부친 덕효(德孝)는 생원으로 호는 봉양(鳳陽)이다.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규중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고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으며, 정조 병오년(1786) 11월 11일에 정동리(井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몸가짐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8세에 입학하여 《소학(小學)》 책을 가르쳤는데 진퇴와 응대가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따랐고, 어버이의 명으로 처음에 공령(功令)을 업으로 삼아 글을 짓고 구두점을 찍었으며, 시문(詩文)이 문채 나고 아름다웠다. 갑술년(1814)에 부친 봉양공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공이 이때부터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하는 데에 마음을 오로지 하였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기를, "의리는 반드시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하니[義理須尋日用間], 정성스럽게 해 나가면 안연(顔淵)을 기대할 수 있네.[諄諄往邁可希顔]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은 모두 어떤 모습인가.[風雲月露皆何狀] 시인(時人)들이 미혹하여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네.[可惜時人迷不還]"라고 하였다.공의 부친이 일찍이 권학(勸學)의 뜻으로 칠송정(七松亭)에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이로 인해 칠송정 아래 집 한 채를 지어 '송와(松窩)'라고 편액하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소나무 아래 한 칸의 집에[松下一間屋], 맑은 바람이 옷깃에 가득 불어오누나.[淸風吹滿衣] 세한(歲寒)137)은 진중(珍重)한 뜻이니[歲寒珍重意], 내 너(소나무)와 함께 돌아가리라.[吾與爾同歸]"라고 하였고, 계신공구(戒愼恐懼)138)와 인일기백(人一己百)139) 등의 말을 자리 곁에 써 두고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렸으며,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할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병을 간호할 때에 근심을 다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집상(執喪)할 때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수척해진 나머지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으며, 제삿날이 되면 서글퍼하고 두려워하여 종신의 상(喪)140)을 부쳤고, 형제 5명과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으면서 즐겁고 매우 화목하게 지냈다. 평소에 마음가짐은 성실하고 몸가짐은 장중(莊重)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고, 겸손함과 공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으며, 남에게 선행이 있으면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사랑했고, 남에게 악행이 있으면 자기의 병처럼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의 경로와 참된 진리의 원부(元符 매우 큰 상서(祥瑞))가 사서(四書)에 있는데, 다만 근심스러운 것은 매운 고추의 껍질을 삼키듯이 숙독하지 않고 생각을 정밀하게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복은 화려할 필요가 없고 몸을 가리면 될 뿐이며, 음식은 감미로울 필요가 없고 배를 채우면 될 뿐이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은 오직 학문 이 한 가지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밝은 창 아래 책상에 우두커니 정좌(靜坐)하여 침잠(沈潛)하고 연구하며 날마다 일정한 과정(課程)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 와서 간혹 산수가 맑고 빼어난 곳을 만나면 동지들을 이끌고 가서 소요하고 시문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폈는데,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생각이 있었다. 계사년(1833)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나 고을 인량동(仁良洞) 미현(微峴)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고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이고, 딸은 서문원(徐文源)에게 출가했다. 큰아들이 낳은 손자 인용(麟鏞)은 군수(郡守)이고, 둘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진용(璡鏞)과 종용(琮鏞)이며, 셋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되었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렬(永烈)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는데, 내가 고루한 데다가 병으로 몸을 폐한 상태이지만 그 은근한 뜻을 어기는 것이 어렵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夢斗。字元七。號松窩。密陽人。文孝公諱順。淸城府院君諱富。凝川君諱翼減。廣理君諱兢訓。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入我朝。有諱策。文科牧使。至孫義和。縣監至孫比長。號笠巖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入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子孫仍居。世有隱德。高祖逸。贈工曹參議。曾祖始䧺。同中樞。祖興新。副護軍。考德孝。生員號鳳陽。妣光山金氏昌瑞女。閫儀純備有女士風。正宗丙午十一月十一日。生公于井洞里。姿性溫仁。容儀粹美。八歲上學。授小學書。進退應對。一遵其敎。以親命初業功令。綴文點句。詞華斐蔚。歲甲戌。大人鳳陽公登庠。公自是遂廢擧業。專心治學。且有詩曰。義理須尋日用間。諄諄往邁可希顔。風雲月露皆何狀。可惜時人迷不還。其大人嘗以勸學之意。命寓于七松亭。亭下因築一室。顔曰松窩。有詩曰松下一間屋。淸風吹滿衣。歲寒珍重意。吾與爾同歸。以戒愼恐懼人一己百等語。書于座側。視爲自警。事親孝。晨昏定省。朝夕滫瀡。致誠致力。俾無有憾。侍疾致憂。夜不解帶。執喪過哀。杖而後起。遇忌諱之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喪。兄弟五人。長枕大被湛樂隆洽。平居立心忠慤。持身莊重。御家以勤儉。接人以譙恭。人有善。愛之如己出。入有惡。畏之如己病。嘗戒子弟曰。學問蹊逕。眞詮元符。在四子書。但患讀之不熟思之不精。如辣椒之皮呑耳。又曰。衣服不必華麗。蔽身而已。飮食不必甘美。充腸而已。所可盡心盡力。死而後已者。惟是學問一事。明窓棐几。兀然靜坐。沈潛硏究。日有程磨。値良辰佳節。或遇水石淸絶處。携同志ㅡ逍遙酬暢。超然有出塵之想。癸巳十二月二日考終。葬州之仁良洞微峴壬坐原。齊南平文氏始奎女。有婦德生三男一女。處祥處茂處宗。女適徐文源。長房麟鏞郡守。二房孫璡鏞琮鏞。三房出爲季父後。曾孫以下不盡錄。曾孫永烈抱家狀。屬余爲文以壽其傳。余以固陋。加以病廢。而重違勤意。謹据狀而略加修潤云爾。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의 호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이고 나주 출신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저서로는 표류기인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가 1769년(영조45)에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세한(歲寒) 추운 계절이란 뜻으로, 어려운 역경에도 변치 않는 절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계신공구(戒愼恐懼)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인일기백(人一己百) 《중용장구》 제20장에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을 할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종신지상(終身之喪) 기일(忌日)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군자는 종신의 상이 있으니, 이는 기일을 말한다. 기일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날은 뜻을 오로지 하여 감히 사사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덕와 박공 유사장 德窩朴公遺事狀 공의 휘는 준원(準元), 자는 정삼(正三)이니, 박씨의 계통은 밀양에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서 휘 울(蔚)은 찰방(察訪)이고, 이분이 휘 맹성(孟誠)을 낳았으니 첨정(僉正)이며,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으니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으니 사맹(司猛)이다. 이분이 낳은 휘 지수(枝樹)141)는 감찰(監察)로 임진년(1592)에 입근(立慬 절개를 지켜 죽은 것)하였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정려(旌閭)의 명이 내려졌다. 이분이 낳은 휘 천주(天柱)는 주부(主簿)이고, 이분이 휘 성소(成素)를 낳았으며, 이분이 휘 상언(尙彦)을 낳았으니 첨추(僉樞)이고, 이분이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이분이 낳은 휘 경린(慶麟)은 첨추이니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영환(英煥)이고, 조부는 재기(在璣)이며, 부친은 규진(圭鎭)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2녀를 두었고,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모의 따님이니, 헌종 기유년(1849) 5월 6일에 능주(綾州) 벽지리(碧池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히 착한 성품이 있어 효우(孝友)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9세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 슬프게 부르짖음이 다함이 없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본 자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모친과 조부모를 섬길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으니, 몸을 편안히 해드리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는 데에 모두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모친의 성품이 엄하였지만, 공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여 간모(幹母)142)의 도를 잘 얻었다. 어느 날 상자에서 우연히 그 선인(先人)이 기록한 전권(錢券)을 손에 넣고 말하기를, "저 사람이 빌려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만일 내가 발설한다면 그가 반드시 불복할 것이니, 쟁단(爭端)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이를 불태웠다. 공의 족숙 우인공(愚忍公)과 함께 산소 아래에 있는 옛집을 청소하고 스승을 택하며 벗을 맞이하여 자손들의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는데, 가르치는 과정(課程)과 모든 절도가 분명하여 조리와 두서가 있었다. 종족이 번성하여 같은 마을에 함께 사는 자가 백여 집이었는데, 은의(恩誼)가 조화롭고 흡족하여 한 사람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하고 장중(莊重)하며 질박하고 성실하여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출입은 간소했으며, 속되고 잡스러운 장난을 눈으로 보지 않고, 진귀하고 보기 드문 물건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으며, 성기(聲伎)143)·잔치·세력과 이익·번화한 것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오직 빛을 감추고 종적을 감추어 어리석음을 안고 졸렬함을 지키는 것을 궁극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무신년(1908) 12월 24일에 고종명하였는데,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위로 구순의 늙은 어버이가 계신데 내가 이 지경이 되어 불효의 죄가 크다. 너희들은 잘 섬기고 잘 봉양하여 구천(九泉)에 있는 네 아비의 한을 무겁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같은 동네 신정리(新井里) 뒤 기슭 조부 산소 아래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정호(李貞鎬)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박경동(朴敬東)과 박시동(朴時東)이고, 딸은 전주 이근무(李根茂)와 진주 형시만(邢時萬)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중년에 공과 벗이 되었고 또 외람되게 인척이 되어 친밀하게 왕래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이에 그의 행동거지와 풍모, 마음가짐과 일 처리가 질박하고 참되며 성실하고 삼가는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조금도 거짓으로 꾸미고 속이는 뜻이 없었음을 보았으니, 옛날에 이른바 '선진(先進)'이란 자는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선진이 삼대(三代 하, 은, 주)의 말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야인(野人)'이라고 하니, 이는 공이 종신토록 침체되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유이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살고 죽는 것에 활발하고 저승과 이승에 유감이 없었으니, 이와 같을 뿐이었다. 박경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늙고 게다가 병까지 들어 받아서 감당하기 어려움이 있었지만 옛일을 생각해보고 또한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準元字正三。號德窩。系出密陽。我朝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曹參議。是生諱億瑞。司猛。是生諱枝樹監察。壬辰立慬。贈左承旨命旌閭。是生諱天柱。主簿。是生諱成素。是生諱尙彦。是生諱必益。是生諱慶麟。僉樞。是公之高祖。曾祖英煥。祖在璣。考圭鎭。世有隱德。妣公州李氏某女。有二女。妣金海金氏某女。憲宗己酉五月六日。生公于綾州碧池里。幼有至性。孝友著聞。九歲遭外艱。哀號罔極。幾絶復甦。見者嘖嘖。事慈夫人及祖父母。盡誠力。便身適口。無不畢給。慈夫人性峻。公怡色婉容。甚得幹母之道。一日篋笥中。偶得其先人所錄錢券。乃曰。彼不言借貸。若自我發口。彼必不服。非所以惹起爭端乎。遂焚之。與其族叔愚忍公。掃墓下舊構。擇師邀友。爲子孫肄業之所。而指授課程。凡百節度。的有條緒。宗族蕃衍。同住一巷者。爲百餘家。而恩誼諧洽。無一人失和。禀性沈重質慤。平居寡言笑簡出入。俚雜之戱。不接於目。珍怪之物。不入於家。於聲伎遊宴勢利紛華泊如也。惟以潛先斂迹。抱愚守拙。爲究竟家計。戊申十二月二十四日考終。臨終顧二子曰。上有九耋老親。而吾至於斯。不孝罪大。汝等善事善養。母重乃父九泉之恨也。葬同坊新井里後麓祖墓下乾坐原。配光山李氏貞鎬女。圭二男二女。敬東時東。女適全州李根茂晉州邢時萬。嗚呼。余中年得與公友。又忝瓜誼。綢繆往來數十年。見其容止風儀。處心行事。無不出於質實誠慤。而無一毫欺誣矯僞之意。古所謂先進者。公其庶幾焉。然先進在三代之末。猶謂之野人。此公所以終身沈淹而不見知於人也。然人之知不知。於公何有。生死活潑。幽明無憾。斯焉而己矣。敬東奉家狀。屬以不朽之文。余老且病。有難承堪。而撫念疇昔。又不忍終辭云。 박지수(朴枝樹) 1552~1593.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간모(幹母) 《주역(周易)》 〈고괘(蠱卦) 구이효(九二爻)〉에 "어머니의 일을 주관함이니, 곧고 굳세게 해서는 안 된다.〔幹母之蠱, 不可貞.〕"라고 한 데서 나왔다. 성기(聲伎) 궁중이나 귀족의 집에 종사하는 가희(歌姬)와 무녀(舞女)를 말한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