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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와 양공 유사장 聾窩梁公遺事狀 공의 휘는 덕환(德煥), 자는 정서(正瑞), 관향은 제주(濟州)이다. 당요(唐堯 요(堯)임금) 때에 양을나(良乙那)144)144) 양을나(良乙那) :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탐라를 처음 세웠다는 전설상의 세 신인(神人) 가운데 한 명이다.가 제주 한라산(漢挐山)에 내려왔으니, 바로 그 시조이다. 후대에 신라의 조정에 들어가 양씨 성을 하사받았고, 휘 순(洵)이 신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 한라군(漢羅君)에 봉해졌다. 우리 조정에서 휘 이하(以河)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능주(綾州) 삼현사(三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팽손(彭孫)은 교리(校理)인데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과 도의로 사귀었고 시호는 혜강(惠康)이니, 세상에서는 학포 선생(學圃先生)이라고 부른다. 이분이 휘 응기(應箕)를 낳았으니 교위(校尉)이고, 이분이 휘 산립(山立)을 낳았으니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인용(仁容)을 낳았으니 첨정(僉正)으로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산수와 문적(文籍)을 스스로 즐겼다. 이분이 휘 위남(渭南)을 낳았으니 진사이고 참봉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고, 이분이 낳은 휘 우전(禹甸)이 선인(先人)의 정자를 중수(重修)하여 유유자적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지해(之瀣)는 맏형 지항(之沆)과 함께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분이 휘 대하(大夏)를 낳았고, 이분이 휘 익조(益祖)를 낳았으니 현감이며, 이분이 휘 성헌(成憲)을 낳았으니 통덕랑(通德郞)이고, 이분이 휘 일현(一鉉)을 낳았으며,이분이 휘 찬호(贊浩)를 낳았으니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이분이 낳은 휘 양식(梁栻)은 명경(明經)으로 해시(解試 향시(鄕試))에 합격했지만, 누차 예부시(禮部試)에 떨어졌으니 바로 공의 부친이다. 모친 장흥 마씨(長興馬氏)는 마언모(馬彦模)의 따님으로 부원군(府院君) 마천목(馬天牧)의 후손이니, 헌종 계묘년(1843) 11월 3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외모는 헌칠하고 성품은 온화하였으며,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하고, 다닐 때에는 옷을 가누지 못할 듯했다. 평소에 근검은 그의 가계(家計)이고 경근(敬謹)은 일생의 법이었으며, 선행을 즐기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은 천성에서 나왔고, 빈곤하게 살았지만 자기의 분수에 편안했으며,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함부로 교유하지 않아서 성시(城巿)의 가게와 명리(名利)의 번화한 곳에서 공의 얼굴을 알지 못한 자가 많았고, 함께 종유한 자는 적막한 물가에서 한두 명의 가난한 벗일 뿐이었다. 성품이 독서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일일이 수시로 기록하여 벗이 차분하게 강론하고 토론하는 것을 기다렸으니, 그 불치하문(不恥下問)145)이 이와 같았다. 어려서 지극히 착한 성품이 있어서 효성스럽게 봉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고, 맏형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늙어 백발이 되어서도 나갈 때에는 채찍을 나란히 하였고, 들어와서는 침상을 나란히 하였으며, 기뻐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애당초 서로 떠난 적이 없었다. 이를 미루어 족척(族戚)과 벗에 이르렀으니, 죽음을 애도하고 산 사람을 위문하였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환난을 구해주는 일은 힘이 닿는 데까지 행하였다. 늘그막에 더욱 도회(韜晦)146)하여 '농와(聾窩)'라고 자호(自號)하고, 득실과 시비에 대해서는 멍하니 듣지 못하는 듯하였으며, 오직 《논어》 한 책이 책상 위에 있었는데 때때로 이 때문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갑진년(1904) 2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62세이고, 살았었던 마을 뒤 남쪽 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철현(金哲鉉)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회철(會澈)·회수(會遂)·회기(會箕)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모(鄭某)와 해주(海州) 최모(崔某)에게 출가했다. 아, 사람에게 양심(良心)이 있는데 오직 사욕(私欲)이 이를 공격하고, 사욕이 마음을 공격할 때에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니지만, 명리(名利)의 해가 가장 심하다. 그러나 일찍이 화락(和樂)한 자질과 효우(孝友)의 행실로 명리의 사이에 매몰된 적이 없고 그 순수하고 참된 천성을 온전히 한 자는 공이 그러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 힘이 아니면 먹지 않은 것은 서치(徐穉)의 부류이고147), 은거하여 의를 행한 것은 동생(董生)의 무리인데148), 후대 사람들이 송석정의 옛 터를 보고 남창(南昌 서치의 고향)의 산천(山川)과 안풍(安豊 동생의 고향)의 수석(水石)과 같이 돌이켜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공의 형제들과 금석(金石)처럼 굳고 변함없는 우정으로 노쇠할 때까지 서로 좇았는데, 이제 모두 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 외롭고 쓸쓸하게 되어버렸으니, 누구를 따르고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회철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하려는 글을 요청하였는데, 옛일을 추억해보매 몹시 서글퍼져서 감히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德煥。字正瑞。貫濟州。唐堯時有良乙那。降于濟之漢挐山。其始祖也。後世入朝新羅。賜姓梁至諱洵入仕新羅。封漢羅君。我朝有諱以河。贈左承旨。享綾州三賢祠。生諱彭孫。校理。與靜庵趙先生爲道義交。諡惠康。世稱學圃先生。生諱應箕校尉。生諱山立。贈戶曹參判。生諱仁容。僉正。築松石亭。以山水文籍自娛。生諱渭南。進士參奉。孝旌閭。生諱禹甸。重修先亭以寄傲焉。生諱之瀣。與伯氏之沆。幷學尤庵宋先生之門。生諱大夏。生諱益祖。縣監。生諱成憲。通德郞。生諱一鉉。生諱贊浩。文行著名。生諱栻。明經擧解。屢屈禮。部卽公之考也。妣長興馬氏。彦模女。府院君天牧后。憲宗癸卯十一月三十日生。公體相頎而長。性氣溫而和。言若不出口。行若不勝衣。勤儉其平生家計也。敬謹其終身柯也。樂善嗜利。出於天性居貧處困。安於己分。不妄出入。不妄交游。城巿店肆名利繁華之地。不識公之面多矣而所與遊從。只是寂寞之濱一二寒友生而已。性好讀書。老而不懈。有所疑。一一劄記。待朋友從容講討。其不恥下問如此幼有至性孝養著聞與伯氏友悌甚篤至老白直。出則連鞭。入則連床。怡怡湛樂。未始相離。推以至族戚朋友。哀死問生賙窮恤患之節。隨力所及。晩益韜晦。自號聾窩。於得失是非。嗒然若不聞也。惟有論語一書在案上。時以怡顔焉。甲辰二月十六日觀化。得年六十二。葬所居村後南麓壬坐原。齊光山金氏哲鉉女。擧三男二女。會澈會遂會箕。河東鄭某海州崔某。嗚呼。人有良心。惟欲攻之。欲之攻心。不一其端。而名利之害。最爲甚焉。早以愷悌之姿。孝友之行。未嘗乾沒於名利之間。而有以全其純實之天者。公其人耶。非力不食徐穉之流也。隱居行義。董生之徒也。未知後之人視松石遺居。而追想之如南昌山川安豊水石否耶。余與公昆季爲金石之交。衰老相從。今皆棄我而逝。踽踽凉凉。誰因誰倚。會澈以家狀。請爲不朽計撫。念悲悵。不敢以非其人辭焉。 불치하문(不恥下問) 손아랫사람이나 지위나 학식이 자기만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論語 公冶長》 도회(韜晦) 자신의 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감추는 것을 말한다. 자기……부류이고 서치(徐穉, 97~168)는 후한 예장(豫章) 남창(南昌) 사람으로, 자는 유자(孺子)인데, 집안이 가난해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은거하여……무리인데 동생(董生)은 당나라 때 안풍(安豐)에 은거한 동소남(董召南)이다.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을 지어 "수주 속현에 안풍이 있는데, 당나라 정원 연간에 이 고을 사람 동소남이 그곳에 은거하여 의를 행했다.〔壽州屬縣有安豐, 唐貞元年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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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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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문자성에게 답함 答文子惺 심(心)은 기의 정밀하고 맑은 것으로 허령과 지각이 그 본체이며 본질이네. 지금 허령과 지각을 버려두고 다만 일곱 구멍50)이나 다섯 구멍,51) 또는 피지 않은 연꽃 같은 것52)을 가리켜서 기질지심이라고 이르는 것인가? 잘 모르겠네만 이럴 때의 마음은 무슨 마음인가? 형질의 이면에서 오르내리며 유통하는 것은 하나라도 기가 아님이 없으며, 안으로 오장부터 밖으로 모든 신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라도 질(質)이 아님이 없네. 지금 온 몸의 기질 이외에 특별히 심의 기질을 들었으니, 잘 모르겠네만 이 기질은 무슨 기질인가? 편지 내용 중에 '몸의 주재가 된다.'는 말을 '리의 오묘함'으로 고친다면 좋을 것 같네. 만약 임군(任君)의 말과 같다면 기의 신령함은 다만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질문 : '리(理)는 구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달빛은 본래 넓고 좁음의 구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리는 구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창틈으로 넓거나 좁게 받아들인 것이 달빛 아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53)53) 리는……같습니다 : 이에 대해 노사는 "본연(本然)은 달빛과 같고, 품부(稟賦) 받은 편전(偏全)은 창틈의 크고 작음이 있는 것과 같네. 그러나 달빛을 받은 것은 때에 따라 같지 않고 본연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마치 창문의 크고 작은 틈에서 받은 것이 모두 달빛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네. 이치의 본연을 말하지 못한 것은 달빛이 본래 대소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네.〔本然如月光, 所受偏全如窓隙有大小. 而所受月光隨而不同, 本然之理無乎不在者, 如云窓隙大小之所受罔非月光也. 爲理之本然則不可云者, 如云月光本無大小之分也.〕"라고 하였다. 《노사집 권9 답민극증(答閔克中)》 두 번째.그렇다면 구분이 없다고 한 곳은 구분이 없는 것으로 보고 구분이 있다고 한 곳은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괜찮겠습니까.답변 : 성(性)이란 만물의 한 가지 근원이니 과연 구분이 있겠는가.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니, 과연 구분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구분이 없는 가운데 구분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하니, 과연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이르지 않아야 하네.질문 : '천리(天理)'라고 하고 또는 '천명(天命)'이라고 하는데, 리(理)라고 하는 것은 주재처로써 말한 것이며, 명(命)이라고 하는 것은 유행처로써 말한 것입니까.답변 : 존재한 것으로 말하면 리라고 이르고 부여받은 것으로 말하면 명이라 말하네. 유행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라고 하고,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면 상제라고 하네.질문 : 본연지성은 진흙이 혼탁한 가운데 나아가 전적으로 물이 맑은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요, 기질지성은 물과 진흙을 겸하여 말한 것입니까.답변 :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 성이 아니네. 예를 들면 그릇으로 물을 담을 때 물은 참으로 본연지성에 해당하고 물과 겸하여 그릇까지 가리키면 바로 기질지성에 해당한다네.질문 : 심(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기질지성이 있거나 기질지성이 없거나에 대하여 묻습니다.답변 : 내가 일찍이 물로써 비유하였네. 물이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동(動)하지 않으면 그 맑음은 깨끗한 그릇에 담겨 있는 것과 다르지 않네. 그러나 그 그릇을 더러운 그릇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며, 또한 더러운 그릇을 가지고서 물에 더럽고 깨끗한 분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네.질문 : 소자(邵子, 소옹)가 "성이란 도의 형체이다.……"54)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묻습니다.답변 : 도는 만물에 담겨 있지만 소리와 색깔도 없고 일정한 장소도 없는데, 성(性)은 도가 주머니에 담겨져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도의 형체라고 한 것이네.질문 : 주자는 "심(心)은 물과 같으며 성(性)은 물이 고요한 것과 같으며, 정(情)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55)라고 하였으며, 사계는 "심은 그릇과 같고, 성은 그릇 안의 물과 같으며, 정은 물이 밖으로 쏟아진 것과 같다."56)라고 하였는데, 두 말이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답변 : 소자는 "심이란 성의 외성[郛郭]이다."57)라고 하였는데, 외성은 그릇이 아닌가? 심이 성을 갖춘 것으로 말하자면 심은 그릇과 같고 성은 물과 같네. 심이 성정을 거느린 것으로 말하자면 심은 물과 같으며 물이 고요한 것은 성과 같으며 물이 움직인 것은 정과 같네.질문 : 경(敬)과 의(義)의 공부는 참으로 마땅히 함께 나아가야 하니, 정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고 하였으니, 곧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58)고 하였으니, 방정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답변 : '정(靜)할 때는 마음이 깃 들일 곳을 찾을 수 없으며 동(動)할 때는 억지로 안배할 수 없다.'59)고 하였네. 그러므로 '이(以)'자가 '의(義)'자 위에 있으면 또한 억지로 안배하는 병이 없을 수 없네.질문 : 명덕(明德)을 심(心)으로서 말하면 도심(道心)이요, 인심(人心)이 아닙니다. 성(性)으로서 말한다면 본연지성이요, 기질지성이 아닙니다. 정(情)으로서 말한다면 천리요, 인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심이 올바른 곳을 얻으면 곧 도심이요, 기질이 법도를 따르는 곳은 즉 본연지성이요, 인욕이 물러난 곳은 즉 천리입니다.답변 : 두 말이 모두 좋네. 다만 인심은 본래 좋지 않은 것이네.성인이 도의 체용(體用)을 말할 때 대부분 체에 대해 먼저 말한다.성현의 말은 대부분 유행(流行)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가리킨다.'심(心)이 태극이 된다.'60)는 것은 하나로 합치하여 말한 것이고, '성(性)은 태극과 같고 심(心)은 음양과 같다.'61)고 한 것은 따로 분리하여 말한 것이다.영(靈)과 신(神)62)은 비록 두 물건이지만 서로 약간 분수의 차이가 있다.지각은 심(心) 상에 나아가 동정(動靜)을 겸하여 말한 것이고, 정(情)은 다만 동처(動處)로서 말한 것이다.'정허(靜虛)'63)의 '허(虛)'는 미발의 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요, '허령(虛靈)'64)의 '허(虛)'는 미발과 이발을 통틀어서 본심(本心)의 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하늘의 명은,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65)는 말은 하늘의 경을 이르고, "해와 달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시가 어긋나지 않는다."66)는 말은 하늘의 신을 이른 것이다. "천지의 상도(常道)는 그 마음이 만물에 두루 미쳐도 사심(私心)이 없는 것이다."67)라고 하였으니,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만 경은 굳게 잡는다는 의미이니, 대부분 사람의 일에 나아가서 바야흐로 말한 것이다. 아마도 어진 그대는 경(敬)자의 본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봄이 부족한 듯하다.천명과 오상(五常)이 어찌 두 사물이랴. 오상은 다만 천명의 조목이다. 만약 천명을 뒤섞이지 않는 사물이라 하고 오상을 떨어지지 않는 사물이라 여긴다면, 태극은 과연 흐리멍덩하여 골자가 없는 사물이란 말인가。이에 이층, 삼층의 설이 일어나게 된 까닭이다.그대가 '계신(戒愼)'68)에 대해 말하였는데, 주자도 또한 동정(動靜)을 관통하여 말한 것이 있으며, 오로지 정(靜)으로써 말한 것이 있다. 천리는 인사(人事)의 밖에 있지 않으니, 인사상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 바로 천리이다. 그러므로 소당연(所當然)과 소이연(所以然)은 모두 리(理)이다. 心是氣之精爽。而虛靈知覺。其當體也本旨也。今舍虛靈知覺。而但指其七竅五竅如未敷蓮花者。而謂之氣質之心。未知此心何心也。升降流通於形質之裹面者。無一而非氣也。內自五臟。外至百體。無一而非質也。今外周身氣質。而特擧心之氣質。未知此氣質何氣質也.主於身。改以理之妙爲好。若如任君之言。則氣之靈。獨非主於身者耶。有言理無分者。如云月光本無大小之分也。有言理有分者。如云窓隙大小之所受。無非月光也。然則無分處以無分看。有分處以有分看。可乎。性者萬物之一原。果有分乎。乾道變化。各正性命。果無分乎。須知無分中有分。果不至爲一偏之見也。曰天理曰天命。理以主宰處言。命以流行處言。以其所存在而謂之理。以其所賦畀而謂之命。以其所流行而謂之道。以其所主宰而謂之帝.本然之性。就泥濁中。全指水之淸者而言。氣質之性。兼水與泥而言。本然性氣質性。非二性也。如以器貯水。水固本然之性。而兼指其器。則氣質之性也。未發。有氣質性無氣質性云云。愚嘗以水喩之。水在汚器而不動。則其淸。與在潔器者無異。然其器則不可謂非汚器。亦不可以其汚器而謂水有分數也。邵子曰。性者道之形體云云。道在萬物。無聲色無方所。而性其結褁處也。故謂之道之形。朱子曰。心如水。性猶水之靜。情則水之流。沙溪曰。心如器。性如器中之水。情如水瀉出於外。兩說不同何。邵子曰。心者性之郛郭。郛郭非器乎。以心具性言。則心猶器也。性猶水也。以心統性情言。則心猶水。而水之靜猶性也。水之動猶情也。敬義用功。固當倂進。程子曰。以敬直內則。不直亦可。曰以義方外。則不方乎。靜不可尋覓。動不可安排。以字在義字上。則亦不無安排之病。明德以心言。則道心也非人心也。以性言。則本然也。非氣質也。以情言。則天理也非人欲也。然人心之得正處。卽道心也。氣質之循軌處。卽本然也。人欲之退縮處。卽天理也。兩說皆好。但人心。本非不好底。聖人言道之體用。多用先於體。聖賢之言。多沿流而指源。心爲太極。是合一說。性猶太極。心猶陰陽。是分開說。靈與神。雖非二物。而煞有分數。知覺就心上。該動靜而言。情特以動處說。靜虛之虛。指未發之體而言。虛靈之虛。統未發已發。而指本心體而言。維天之命。於穆不已。天之敬也。日月不過。而四時不忒。天之信也。天地之常以其心普萬物而無心。可謂之有意乎。但敬是把捉底意。多到人事上方說得者。恐賢於敬字本旨。欠消詳。天命五常。豈二物乎。五常只是天命之條理。若以天命爲不離底物。五常爲不離底物。則太極果是儱侗無骨之物。而二層三層之說所以起也。戒愼云云。朱子亦有以貫動靜而言者。有專以靜而言者。天理不在人事之外。人事上當然底。是天理也。是以所當然所以然。皆理也。 일곱 구멍 심장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말한다. 이 외에도 사람의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 곧 귀ㆍ눈ㆍ코에 각각 두 개씩 있고 입에 하나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인체가 외부와 통하는 일곱 개의 구멍 곧 눈ㆍ코ㆍ귀ㆍ혀ㆍ입ㆍ항문ㆍ요도를 말하기도 한다. 다섯 구멍 간(肝)은 눈으로 구멍이 나 있고, 심(心)은 혀로 구멍이 나 있고, 비(脾)는 입으로 구멍이 나 있고, 폐(肺)는 코로 구멍이 나 있고, 신(腎)은 귀로 구멍이 나 있다는 한의학 이론이다. 피지……같은 것 심장의 형상을 표현한 말인데, 이 속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천진(天眞)한 기운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성이란 도의 형체이다 소옹(邵雍)의 〈격양집서(擊壤集序)〉에 보인다. 심은……같다 《주자어류》 권5에 보인다. 심은……같다 《사계선생유고》 권10 〈어록(語錄)〉에 보인다. 심이란 성의 외성이다 〈격양집서(擊壤集序)〉에 보인다. 경으로써……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는 '경이직내(敬以直內)'라고 하였는데 정자는 '이경직내(以敬直內)'라고 하였다. 《근사록》 권4에 정자가 말하기를 "경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하여 밖을 바르게 하는 것은 인이다. 만약 경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바르지 않게 될 것이다. 반드시 어떤 할 일을 두고 효과를 예기치 않으면 곧게 될 것이다.[敬以直內, 義以方外, 仁也. 若以敬直內則便不直矣, 必有事焉而勿正, 則直也.]"라고 하였다. 정(靜)할…… 없다 《주자대전》 권64 〈호남의 여러 사람들과 중화를 논한 첫 편지[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에 "아직 발하기 전에는 찾을 수 없으며, 이미 발한 뒤에는 안배할 수 없으니, 오직 평소에 엄숙하고 공경하며 함영(涵泳)하는 공부가 지극하다면 그 발하기 전엔 거울처럼 밝고 물처럼 고요한 것이며, 그 발할 때엔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평소에 쓰는 본령의 공부이다.〔未發之前, 不可尋覓, 已發之後, 不容安排. 惟平日莊敬涵養之工至, 則其未發也鏡明水止, 而其發也無不中節矣. 此是日用本領工夫.〕"라고 하였다. 심이 태극이 된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4 〈관물 외편 하(觀物外篇下)〉에 보인다. 성은……같다 《주자어류》 권5 〈성리(性理)〉에 보인다. 영(靈)과 신(神)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을 가리킨다. 정허(靜虛)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권20 〈성학편(聖學篇)〉에 보인다. 즉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요체가 있는가? 있다。그 요체가 무엇인가? 일(一)이 요체이니, 일이라는 것은 무욕을 말한다。무욕이 되면 정(靜)할 때에는 허(虛)하고 동(動)할 때에는 직(直)하다。정할 때에 허하면 명(明)하고 명하면 통(通)하며, 동할 때에 직하면 공(公)하고 공하면 부(溥)한다。그리하여 명해서 통하고 공해서 부하면 거의 가깝게 될 것이다。[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 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라는 말에서 추출한 것이다. 허령(虛靈) 《대학장구》 경 1장의 주에서 주자는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라고 하였다. 하늘의……않는다 《시경》 〈주송(周頌) 유천지명(維天之命〉에 보이는 말이다. 해와……않는다 《주역》 〈예괘(豫卦)〉의 단전(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천지의……것이다 《근사록》 권2 〈위학(爲學)〉에서 정호(程顥)가 한 말이다. 계신(戒愼) 《중용장구(中庸章句)》 1장(章)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아도 조심하는 것이요,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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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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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여【승현】에게 답함 答黃新汝【承顯】 쓸쓸하고 적막한 가운데 늙고 병들어 있는데 벗의 편지가 오니 또한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버금가네.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인하여 조부모, 부모를 기쁘게 모시는 가운데 신이 위로하여 건강함을 알게 되니, 더욱 우러르는 마음에 위안이 되네. 집안이 깊고 넓어서 주관해야 할 일이 매우 많으니, 전력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네. 자제가 할 일을 하지 않고 한갓 종이 위의 말에 얽매인다면 과연 어찌 학문이라 하겠는가. 보내준 편지를 읽어보니 회한하고 분비(憤悱)69)하는 뜻이 지면에 넘쳐나네. 참으로 이런 마음을 보존하여 평소에 행한다면 어버이를 섬기고 책을 읽는 것을 둘 다 함께 실행할 수 있으며 두 가지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일세. 가장 훌륭한 사업은 이것보다 뛰어날 수 없으니 힘쓰고 또 힘써야 하네. 나는 근래 설사병을 앓아 한 달이 다되도록 차도가 없으니 너무나 괴롭다네. 경함(景涵)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에게 보낼 답서 두 편을 써놨는데, 인편이 없어서 아직까지 오랫동안 부치지 못하였네. 지금 함께 보내니 그가 돌아오면 전달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질문 : '말을 공교롭게 하고 낯빛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에 대해 《집주》에서 주자는 "성인의 말은 박절하지 않으니 전적으로 '드물다[鮮]'고 하면 절대로 없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의 말은 이미 박절하지 않은데, 주자의 말은 어찌 그리 박절합니까. 매우 아쉽습니다.답변 : 본문을 해석한 것이니, 그 말이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네.질문 : 〈미자편〉의 첫머리에서 옛사람의 출처를 보인 연후에 성인의 출처를 보인 것70)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이는 여러 주장을 모아서 절충(折衷)했기 때문이네. 衰病涔寂中。則故人書墨。亦足爲追從對晤之亞也。感感何喩。仍審重侍供歡。神勞多福。尤庸慰仰。家戶深闊。幹務多端。其不得專力讀書。固亦宜矣。不修子弟之職。而徒鎖紙上語。果何學也。及讀來喩。其悔悟憤悱之意。溢於紙面。苟能存此心而行於日用之間。則事親讀書。可以交修倂進。而有以相資矣。太上事業。無出此右。勉之勉之。義林近患痢症。彌月不退。苦事苦事。景涵尙不還家否。此有答書二片。而無便未付久矣。今倂以去。待其還。爲之傳致如何。巧言令色。集註朱子曰。聖人辭不迫切。專言鮮。則絶無可知。孔子之言。旣不迫切矣。朱子之言何其迫切痛缺。解釋本文。其言不得不爾。徵子篇。首以見古人出處然後。以見聖人之出處何。此集衆說折其衷之義。 분비(憤悱) 분비의 분은 마음속으로 뭔가를 통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고, 비는 입으로 말을 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고, 입으로 말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거니와,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로써 세 귀퉁이를 유추해서 알지 못하면 다시 더 말해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미자편의……보인 것 〈미자〉 첫 부분에서 은나라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과 유하혜(柳下惠)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공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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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겸【익섭】에게 답함 答姜子謙【益變】 새 봄이 되었는데 벗을 보지 못하니, 그리는 마음이 잊히지 않네. 그런데 뜻밖에 존부장의 편지를 받아보았으며, 왼쪽으로 돌아보니 또한 한 통의 소중한 편지가 있었네. 차례대로 손에 들고 읽어보니 고마운 마음은 평범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게다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데 부모를 모시면서 모든 것이 더욱 좋으며, 그 남은 힘으로 책을 읽으면서 또한 전념하여 발전한다고 하니, 새해 기쁜 소식이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보내준 편지의 길고 자세히 말한 내용에서 마음을 쓰는 자세가 조금도 허투루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네. 대개 이 일은 다만 치지(致知)와 거경(居敬) 두 가지에 달려 있을 뿐이네. 이른바 수레바퀴나 새의 양 날개는 참으로 좋은 비유라네. 그러나 보내준 편지에서 말한 것이 존양(存養)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이 없으나, 사색하고 문변(問辯)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두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네. 잘 모르겠네만 날마다 한 가지 이치를 궁리하는 것에 대해 과정을 세워 실천하지 못하고서 포기하여 버리는 것이 많이 있는가. 이는 안타까운 일이네. 또한 휴양하면서 정신을 한가롭게 펼치는 것은 반드시 동정(動靜)을 나눠서 말할 필요는 없으며, 욕심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은 반드시 이 마음이 평담한 뒤에 보이는 것은 아니네.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번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공부를 하는 자네를 보면 그에 비할 자도 드무니 마음에 기대하는 바가 작지 않네. 그런데 최근 들어 독실하게 마음먹고 맹렬하게 나아가는 뜻을 볼 수가 없고 한가롭게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구덩이에 빠진 것이 많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어찌 집안 어른이 기대하는 지극한 마음과 벗들이 고대하는 중망에 부합하겠는가. 더욱 깊이 생각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힘쓰고 또 힘쓰시게. 이를 깊이 바라네. 見新春。不見友生。瞻想耿耿。謂外得尊院府文左顧。又有一角珍函。隨以入手。感豁之私。有非尋常可況。矧詢侍省凡百。俄迓加宜。餘力讀書。亦且一味向上。新年喜消息。曷以喩此。示喩縷縷。足以見用心之容。有不草草。大抵此事。只在致知居敬兩端而已。所謂車輪鳥翼。眞善喩也。然於來喩云云。無非存養邊說話。而於思索問辨之方。未有一二語示及焉。未知於日格一理者。或未能趁趲課程。而多有所廢墜者耶。此則可鬱耳。且休養發舒。不必分動靜說。遏欲存理。不必於此心平淡後見之。試思之如何。每見子謙實心實學。少有其比。而期望於心者。有不淺淺。比年以來。不見其有篤着猛進之意。而多涉於悠泛因循之科。如此而安能副家庭期望之至。朋友佇待之重哉.千萬加意。晨夜勉勉。是企是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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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립에게 답함 答安良立 편지를 받아보고 인하여 부모를 모시면서 건강하다고 하니 마음에 많은 위안이 되네. 서당을 열어 벗을 맞아들여서 날마다 금옥 같이 뛰어난 형제들과 책상을 마주하고 나란히 학업을 하다니, 이 세상에 과연 이러한 일이 있는가. 선대인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세 부자가 함께 책을 읽었으므로 사람들이 복이 많은 집안이라 칭송하였는데, 오늘 또다시 세 형제가 이처럼 책을 읽으니 전날의 복이 많은 집안이 오늘의 복이 많은 집안이 되지 않겠는가. 힘쓰고 또 힘써야 하네. 보내준 편지를 보면 약간 우울하고 답답하며 싫증을 내서 포기하는 뜻이 보이며 두루 무젖어서 통쾌한 맛이 없으니, 이는 초학자에게 있어서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괴로움을 참아가며 오랫동안 공부를 쌓는다면 저절로 마땅히 통쾌하게 되리니, 《주역》에서 말한 "거듭된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함이 있어서 마음이 형통하다."80)라는 것이 이에 해당하네. 통쾌하지 못하다고 해서 싫증을 내서 포기하는 마음을 지녀서는 안 되며, 또한 통쾌한 효과를 빨리 기대하다가 싹을 뽑아 조장(助長)하는 폐단81)을 야기해서는 안 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다만 같은 사물인데, 그 체용을 말하면 허령이 체가 되고 지각이 용이 되네. 그러나 또한 체용이 나뉜다고 해서 허령과 지각을 두 사물로 보아서는 안 되네. 비유하자면 불의 밝음은 체요, 빛[光輝]은 용이네. 그러나 밝음과 빛이 어찌 서로 다른 사물이겠는가. "이전 성인의 책을 전부 하나하나 뽑아본다."82)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자사(子思)를 주어로 본다면 말도 되지 않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을 통틀어 말한 것이요, 측은수오(惻隱羞惡)는 정의 한 부분만을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자사는 "희노의 정이 숨겨진 것보다 더 드러남이 없으며 은미한 것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83)고 하여,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을 대응시켰네. 그 의미는 대략 가리키는 바가 있으니 마땅히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得書。因審侍事貞謐。慰仰實多。開塾延朋。日與金昆玉季。對床連業。此世果有此事否。先大人在時。三父子讀書。人稱福家。今日又三昆季讀書如此。前日之福家。未始非今日之福家也。勉之勉之。示中有少間有鬱塞厭棄之意。無浹洽爽快之味。此在初學。安得不然。須耐辛耐苦。積累久久。自當有爽快處。易所謂習坎心亨是也。不可以不爽快而生厭棄之心。又不可徑萛爽快而生揠苗之蔽也。如何如何。虛靈知覺。只是一物。而言其體用。則虛靈爲體。知覺爲用。然亦不可以體用而認虛靈知覺爲二物也。比如火之明體也。其先輝用也。然明與光輝。豈二物哉。歷選是何義。而乃以子思看耶。不成說矣。喜怒哀樂。是統言之情。惻隱羞惡。是偏言之情。故子思言喜怒之情。莫見乎隱。莫見乎微。隱與見對。微與顯對。其意略有攸。當更詳之如何。 거듭된……형통하다 《주역》 〈감괘〉 괘사(卦辭)의 "습감은 신실함이 있어서 마음만은 형통하니, 계속 나아가면 가상(嘉尙)함이 있으리라.〔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싹을……폐단 억지로 빨리 이루려다가 오히려 해를 자초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어떤 송나라 사람이 밭의 싹을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위로 뽑아 올렸다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전……뽑아본다 《중용》 〈서문〉에서 "옛 성인(聖人)들의 책을 하나하나 뽑아 보건대, 강유(綱維)를 끌어 잡으며 깊은 내용을 열어 보여 주심이 《중용》처럼 분명하고 다한 것은 있지 않다.〔歷選前聖之書 所以提挈網維 開示蘊奧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라고 하였다. 희노의……없다 《중용》 〈수장〉에 보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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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범회에게 답함 答權範晦 강운(江雲) 위수(渭樹)59)에 치달리는 마음 얼마나 되었던가? 멀리 떨어져 쓸쓸히 지내니 나도 모르게 혼이 녹아내렸네. 이런 즈음에 한 통의 편지를 갑자기 받아 어루만지고 읊조리니 위로되고 후련한 마음 어찌 감당하겠는가? 인하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강녕하시고 어른을 모시는 체후가 좋은 줄 알았으니, 더욱 지극히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몇 년 동안 하나의 병이 심해지기만 하고 덜하지 않으니, 이 어찌 세상에 오래 살 수 있겠는가? 공손히 저승사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네. 장차 앞으로 한 번 찾아오겠다고 하였는데, 매우 연로한 분을 모시고 있는 처지에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오직 아침저녁으로 어른을 모시는 나머지에 옛날 학업을 익혀서 날마다 좋은 경지에 나아가야 할 것 이것이 문득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니,60) 어떻게 여기는가? 부모상을 함께 당하였을 때 비록 하루가 차이 나더라도 어머니가 먼서 돌아가셨다면 어머니를 위한 복은 1년이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면 어머니를 위한 복은 3년이니, 더구나 어머니상의 3, 4일 뒤에 아버지 상을 당한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복을 입는 기한은 의심이 없을 것이네.[문] 흐린 물에 나아가 이 보주(寶珠)를 닦는다고 하니, 대개 흐린 물은 기(氣)를 비유한 것이고 보주는 이(理)에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 흐린 물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이 보주를 닦는다고 하니, 이른바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장차 어디에 힘을 써야합니까? 단지 그 이를 힘써 밝히면 기질은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답] 흐린 물을 맑게 하는 것은 기질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고, 명주(明珠)를 닦는다는 것은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을 말하네. 그 공효가 됨은 실로 서로 바탕이 되니 두 가지 일이 아니네. 그러나 예로부터 성현은 일찍이 두 가지로 상대하여 말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극기(克己)를 말하면 반드시 복례(復禮)를 말하고, 한사(閑邪)를 말하면 존성(存誠)을 말하며, 개과(改過)를 말하면 반드시 천선(遷善)을 말하고, 알인욕(遏人欲)을 말하면 반드시 존천리(存天理)를 말하였네.[문] 옥계(玉溪) 노씨(盧氏)가 말하기를 "지선(至善)은 바로 태극(太極)의 이명(異名)이고 명덕(明德)의 본체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명덕의 본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릇 광명정대(光明正大)를 덕의 본체라고 하니, 지선과 같은 것은 정자는 "의리가 정미한 극치[理精微之極]"라고 하였고, 주자는 "사리의 당연한 극치[事理當然之極]"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가 사물에 드러나 그 지극함을 극진히 한 것으로 말하였는데, 노씨는 유독 지선을 명덕의 본체로 돌린 것은 어째서입니까?[답] 태극은 하나인데 통체(統體)의 태극이 있고 각구(各具)의 태극이 있네. 이미 지선을 태극의 이명으로 여겼으니, 지선 또한 어찌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명덕의 본체라는 것은 바로 통체의 지선이고, 이른바 사리의 극치라는 것은 각구의 지선이네.[문] 《혹문(或問)》에서 "물격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각자 그 극처에 나아가는 것이다.[物格者 事物之理各有以詣其極]"라고 하였는데, 이 '예(詣)' 자는 이가 스스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내가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야합니까? 만약 이가 스스로 나아가는 것으로 본다면 이가 어찌 능히 그 극처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답] 옛날 퇴계 선생이 처음에는 심이 이르는 것[心到]으로 보았는데, 뒤에 주자의 이가 이른다[理到]는 설을 보고 이에 그 잘못을 깨달았네. 대저 이도(理到), 이예(理詣)라는 것은 단지 얼음이 녹고 언 것이 풀려 공효가 자연스럽다는 뜻이네.[문] 옥계(玉溪) 노씨(盧氏)가 말하기를 "혼연히 안에 있어 그 본체는 애초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구분이 없고, 감하는데 따라 응하여 그 작용이 비로소 측은(惻隱) 등 네 가지의 구별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인·의·예·지가 그 속에 있을 때 과연 하나의 물이고 말할 수 있는 분별이 없는 것입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비록 적연히 움직이지 않지만 그 속에 조리가 있고 절로 구조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자면 혼연한 가운데 찬연한 구분을 볼 수 있는데 노씨는 구분이 없다는 것으로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또 단(端)이라는 것은 서(緖)이니, 비유하자면 청(靑)·홍(紅)·백(白)·흑(黑)의 실이 한 그릇 가운데 있으면서 밖으로 드러나는 실마리가 절로 네 가지 색깔의 구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속에 있는 실이 한 색깔인데 밖으로 드러나는 실마리가 네 가지 색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화(禾)·마(麻)·숙(菽)·맥(麥)의 네 가지 종자를 혼합하여 한 곳에다 파종했는데 싹이 돋아남에 미쳐서는 바야흐로 이것은 벼의 싹이고 이것은 마의 싹임을 볼 수 있고 숙맥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한 종자에 네 가지 싹이 돋아날 이치가 있겠습니까?[답] 옥계가 이른바 "혼연히 안에 있어 그 본체는 애초 인, 의, 예, 지의 구분이 없다."라고 한 것 이것은 아마 합당하지 않는 듯하네. 근세 주기설(主氣說)은 애초에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네. 그대가 말한 청·홍·백·흑의 비유와 화·마·숙·맥의 설은 지극히 분명하니 매우 좋네. 원컨대 이 뜻을 굳게 지켜 요즘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기를 바라네.[문] 유자(劉子)가 말한 "천지지중[天地之中]"이라는 것61)은 일본(一本)의 체(體)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정자(程子)가 말한 "자유지중(自有之中)"이라는 것은 만수(萬殊)의 용(用)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다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답] 실로 좋네. 그러나 또한 모름지기 체용이 일원(一原)이라는 뜻을 알아야 하네.[문] 《대학》의 주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성이다."라고 하였고, 《혹문》에 "그 본심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성은 심에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행하는 것은 실로 두 가지가 없는 것입니까?[답] 심과 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니, 본심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이른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네. 江雲渭樹。馳懷幾時。涯角落落。不覺消魂。際玆一書。翩然入手。摩挲沈吟曷勝慰豁。因審重庭康寧。侍履佳吉。尤咔願聞之至。義林積年一疾。有加無減。此豈久於世哉。恭俟符到而已。前頭一枉之示。在篤老下情地。豈是易事也。惟晨昏之餘。溫理舊業。日就佳境。此便是朝暮遇。如何如何。父母皆喪。雖一日之間。母先喪則服母期。父先喪則服母三年。况母喪三四日後而遭父喪者乎。股期無疑矣。就濁水中。揩拭此珠。盖濁水是比氣。寶珠是比理。今不曰變其濁水。而只云揩拭此珠。則所謂變化氣質者。將何以用力。只務明其理。則氣質可得以變化否。澄淸濁水。是治氣質之謂也。揩拭明珠。是明明德之謂也。其爲功。固相資而非二事。然自古聖賢未嘗不兩下對說。言克己。必曰復禮。言閑邪。必曰存誠。言改過。必曰遷善。言遏人欲。必曰存天理。玉溪盧氏曰。至善。乃太極之異名。而明德之本體。所謂明德之本體。未易解。夫光明正大曰德之本體。若夫至善。則程子曰。義理精微之極。朱子曰。事理當然之極。皆以理之見於事物而極其至者言之。盧氏獨以至善。歸於明德之本體。何。太極一也。而有統體之太極。有各具之太極。旣以至善爲太極之異名。則至善。亦安得不然也。所謂明德之本體。卽統體之至善也。所謂事理之極。卽各其之至善也。物格者。事物之理。各有以詣其極。此詣字。作理自詣看。作我所詣看。若作理自詣看。則理豈能自詣其極乎。昔退溪先生初以爲心到。後見朱子理到之說。乃覺其非。大抵理到理詣者。只是氷鮮凍釋。功效自然之意也。玉溪盧氏曰。渾然在中。其體初無仁義禮智之分。隨感而應其用始有惻隱等四者之别。盖此仁義禮智其在中時。果是一物。無分别可言否。朱子曰。性雖寂然不動。而其中自有條理。自有間架。以是言之。渾然之中。可見粲然之分。而盧氏以無分言之何也。且端者緖也。譬如靑紅白黑之絲。在於一器中。其見於外之緒。自有箇四色之分。若曰在中之絲一色。而見外之緖四色。則是安有此理哉。又如禾麻菽麥。四種渾合。播種於一處土。而及其萌芽。則方見得此是禾芽。此是麻芽。菽麥亦然。豈有一種四芽之理乎。王溪所謂渾然在中。初無仁義禮智之分。此恐未安。近世主氣之說。未始不由於此矣。賢所謂靑紅白黑之喻。禾麻菽麥之說。極其分明。甚好甚好。願牢守此意。勿爲時人口氣所遷動。劉子所謂天地之中。以一本之體。不偏不倚者言。程子所謂自有之中。以萬殊之用。無過不及者言。固好。然亦須知體用一原之義。大學註曰。好善惡惡。人之性也。或問曰。其本心。莫不好善而惡惡。盖性是具於心者。故其用之所行。固無二致否。心與性。一而二。二而一。若曰本心。則卽所謂二而一者也。 강운(江雲) 위수(渭樹) 강동의 구름과 위수의 나무로, 벗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 "위수 북쪽엔 봄 하늘에 우뚝 선 나무, 강 동쪽엔 저문 날 구름.[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이라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니 시간을 초월하여 지기(知己)를 만나는 기쁨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만세의 뒤에라도 이 해답을 아는 대성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것도 아침저녁 사이에 만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萬世之後, 而一遇大聖人知其解者, 是朝暮遇之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유자(劉子)가 말한 천지지중(天地之中) 천지지중은 천지의 중정(中正)한 기운이라는 뜻이다.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13년에 "인민이 천지의 중정한 기운을 받아 이로 인해 생장하니 이것이 이른바 명이라는 것이다.〔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유자는 유(劉)나라 군주인 자작(子爵)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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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옥에게 답함 答鄭士玉 평소 종유하여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있지만 지난번에 만났을 때 바쁘고 복잡한 일에 구애 되어 허술하게 보통의 송별을 하게 되었으니, 뒤 미쳐 생각함에 애타는 마음 지금까지 맺혀있었네. 뜻밖에 김장(金丈)이 돌아와 손수 쓴 편지를 받고 당상의 체후가 안녕하고 곁에서 모시는 체후가 진중한 줄 알았으니, 어떤 위로가 이만하겠는가? 다만 그대 아우의 병이 아직까지 낫지 않고 있어 염려되는 마음 매우 간절하네. 신명이 화락한 군자를 위로하여45) 장차 응당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을 것이니,46) 이것으로 기원하네. 편지 끝에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몇 건의 실마리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로 공통의 병통이네. 선덕(先德)의 말에 "사람의 마음이 생각이 많으면 광명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47) 또 말하기를 "뜻을 씀에 분산하지 않아야 기가 신에 모인다."라고 하였으니,48) 바라건대 모름지기 이것을 거울삼아 빨리 돌이키게.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遏人慾存天理]은 실로 일용에 제일의 공부이네. 그러나 초학자의 힘은 우선 갑자기 인욕을 막고 끊을 수가 없으니, 다만 천리를 보존하는 곳에서 이겨 나온다면 저 인욕은 점차 사라져 막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막히고 엎드릴 것이네. 이것은 중궁(仲弓)이 인(仁)을 물었을 때 극기(克己)를 말하지 않고 경(敬)과 서(恕)의 방법을 말해 준 것이네.49) 충과 효는 이치가 실로 한 가지이지만 작용은 각각 다르니, 어찌 오직 충과 효만 그러하겠는가? 만 가지 이치가 그러하네. 공문(孔門)의 일관(一貫)50)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름지기 체와 용이 한 근원이고 만과 일이 서로 포함하는 의를 안 연후에야 바야흐로 치우침이 없음이 되네. 희노(喜怒) 등과 같은 정은 바로 이해하여 공부를 착수해야 할 곳이니, 안자(顔子)의 학문을 말함에 특별히 불천노(不遷怒)로 말한 것51)은 또한 이 뜻이네. 《소학》또한 하학상달(下學上達)이 있고,《대학》또한 하학상달이니, 만약 《소학》과《대학》을 상하로 구분한다면 착오가 있네. 참으로 알기 때문에 참으로 좋아하네. 그러나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은 마땅히 "참으로 좋아한다."라고 해야지, "참으로 알았다."라고 해서는 부당하네. 진발용약(振拔勇躍)의 뜻은 이것은 학자의 본령의 바탕이니, 공자가 광견(狂狷)을 생각했던 것52)이 이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썩은 나무나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은 어찌 성취하는 것이 있겠는가? 《대학장구》 경(經) 1장의 정정안려(定靜安慮)는 공부의 절목이 아니고 단지 공효의 차례이니 그대가 편지에서 말한 것과 같네. 平日遊從。可悉情蘊。有幾人。而向日之奉。拘於悤撓草草作尋常送別。追念耿耿。迄今如結。料外金丈廻。得承手存。仍審堂上安寧。侍旁衛重。何慰如之。但令弟愼節。尙爾稽和。貢慮殊切。神勞愷悌。行應勿藥。以是祈仰。紙末以爲日日所思。不知其幾件條緖。此固通患。先德有曰。人心多則無由光明。又曰。用志不分。氣凝於神。幸須鑑此而亟反之也。遏人慾存天理。固日用第一功夫。然初學之力。姑不可遽爾遏絶。但於存天理處。克將出來。則彼人慾者。漸次消磨。不待遏而自見遏伏矣。此於仲弓之問仁。不言克己而言敬恕之方者也。忠孝。理固一致。而用各不同。豈惟忠孝爲然。萬理皆然。孔門一貫非此謂耶。然須知體用一源。萬一相涵之義然後。方爲無偏。喜怒等情。正是理會着功夫處。言顔子之學。而特以不遷怒言之者。亦此意也。小學也有下學上達。大學也下學上達。若以小大學。分上下則錯矣。眞知之。故眞好之。然好德如好色。當曰。眞好之。不當曰眞知之。振援勇躍之意。此是學者本領田地。孔子之思狂狷。此也。不然朽木糞墻。豈有所成就也。定靜安慮。非功夫節目。只是功效次第如來喩。 신명이……위로하여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화락하신 군자는 신명이 위로하는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약을……것이니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무망의 병은 약을 쓰지 않으면 기쁜 일이 있으리라.[无妄之疾, 勿藥有喜.]"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선덕(先德)의……하였고 《근사록》 권4 〈존양(存養)〉에 나오는데,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말이다. 또……였으니 《장자》〈달생(達生)〉에 "뜻을 씀에 분산하지 않아야 비로소 정신이 집중된다.〔用志不分, 乃凝於神.〕"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중궁(仲弓)이……것이네 《논어》 〈안연(顔淵)〉 2장에서 "중궁이 인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문을 나갈 때는 중요한 손님을 뵙는 것처럼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하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으면, 나라에 있을 때 원망을 받지 않고, 집에 있을 때 원망을 받지 않느니라.'라고 하였다.[仲弓問仁, 子曰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집주에서는 출문(出門)과 사민(使民)을 경(敬)으로 풀이하고 불욕(不欲)과 물시(勿施)를 서(恕)로 풀이하였다. 공문(孔門)의 일관(一貫) 공자가 제자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가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네, 그렇습니다.[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공자가 나가지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충서일 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한 것을 말한다. 《論語 里仁》 안자(顔子)의……것 《논어》 〈옹야(雍也)〉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묻는 애공(哀公)의 질문에, 공자가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라고 한 것을 말한다. 공자가……것 《논어》 〈자로(子路)〉에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 하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할 것이다.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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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옥에게 답함 答鄭士玉 경함(景涵)53)은 주재(主宰)를 이(理)로 여기니, 이것은 주리(主理)가 너무 지나친 소치이네. 무릇 천하의 만사와 만물은 이 이(理)가 아님이 없는데 더구나 주재를 이라고 말한다면 무엇을 말해도 불가하겠는가? 그러나 이 말은 천지조화 상에서 말한다면 가하지만 인심의 운용 상에서 말한다면 의논할 만한 것이 없지 않네. 무릇 천(天)은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이가 주재가 되고, 인(人)은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심이 주재가 되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도체는 무위하지만 인심은 지각이 있다.[道體無爲而人心有覺]"라는 것이 이것이네. 또 심이 주재가 되는 소이는 무엇인가? 허령지각이 있기 때문이네. 만약 허령지각이 아니라면 마른 나무와 꺼진 재나 다름이 없으니, 말할 수 있는 어떤 주재가 있겠는가? 허령지각은 실로 기의 정상(精爽)이지만 허령지각하는 소이는 이(理)이니, 령(靈)이 아니면 능히 각(覺)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각(覺)할 바가 없네. 만약 '소이(所以)' 자를 쓰지 않고 곧장 주재를 이라고 이른다면 이는 작용하는 물이 되고 이와 기, 심과 성이 섞여 경계가 없을 것이네. 대저 주기설은 실로 지금의 고질인데 이른바 주리를 주장하는 사람 또한 교왕과직(矯枉過直)의 폐단이 없지 않으니, 매우 탄식스럽네.[문] 공자가 말하기를 "향원(鄕原)은 덕의 적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해석하기를 "덕(德)과 비슷하나 덕이 아니어서 도리어 덕을 어지럽힌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향원과 광견(狂狷)은 서로 머니,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향원은 진취적이지도 않고 또 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성인이 미워했던 것은 유속(流俗)과 함께 하고 더러움에 영합하여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었던 까닭 때문입니다. 옛날에 애산(艾山) 선생54)께서 소자에게 한 말씀을 내려 주셨는데 그 뜻이 이와 같았고, 스승의 문하에서 귀에 대고 말씀하고 대면하여 타일러 주신 것 또한 애초에 이런 부류에 귀착될까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소자도 자신에게 절실한 실제의 병통이 되는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병은 쉽게 얻고 고치기는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답] 사옥(士玉)은 자질이 십분 순근(醇謹)한데 과감하게 진작하는 기상이 부족하니, 한 사람의 근칙(謹勅)하는 선비가 되기에는 족하지만 무거운 책임을 맡아 멀리까지 도달하는 것에는 흠결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애산 선생이 이른바 "병이 없는 병이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라는 것은 자못 생각할 만 하네. 오호라! 성인께서 이런 순근한 사람을 취하지 않고 특별히 광견한 사람을 취한 것은 그 뜻을 알 수 있네. 기질을 고쳐서 바로잡는 이것은 사람마다 자신에게 절실한 공부이니, 원컨대 사옥은 힘쓸지어다.[문] 주자가 이른바 "이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한다.[發於理發於氣]"라는 것은 그 발하는 근본이 하나인데 이미 발한 뒤에는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발(發)' 자 아래에 이(理) 자와 기(氣) 자를 나누어 둔 것입니다. 퇴계(退溪)가 이른바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분명 이 일변과 기 일변이 상대하고 병립하여 혹 여기에서 발하고 혹 저기에서 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발' 자를 이 자와 기 자 아래에 두었기 때문에 그 뜻이 서로 현격하게 되는 것입니다.[답] "혹 생겨나고, 혹 근원한다."라고 말하면 본원이 하나가 되는 것에 해롭지 않지만, 다만 발할 즈음에 인심과 도심을 변별했을 따름이네. 만약 "기가 발함에 이가 타고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다."라고 한다면 분명 머리를 나란히 하여 서로 발한다는 혐의가 있을 것이네.[문] 성(誠)은 일(一)이니, 이른바 성의(誠意)라는 것은 불일(不一)의 사의(私意)를 하나로[一]한다는 것입니까?[답] 일(一)로 성의의 성을 해석하는 것은 주자가 '실(實)' 자로 해석하여 착수할 곳이 있는 것만 못하네.[문] "고요하고 막막하여 아무 조짐이 없을 때 만 가지 형상이 빽빽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沖漠無朕 萬象森然已具]"라고 하니, 만약 중인으로서 이런 경계를 묵묵히 알려고 하면 새벽녘 사물과 접하지 않아 담연(湛然)하고 허명(虛明)할 때에 가능하겠습니까?[답] 새벽녘 담연할 때 및 우연히 순수함을 회복했을 때가 이것이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려고 하는 뜻이 있으면 문득 무짐(無朕)이 아니고 문득 삼연(森然)이 아니네.[문] 《대학》의 지선(至善)이 바로 《중용》의 중(中)입니까?[답] 지선은 실리(實理)로 말한 것이고, 중은 체단(體段)으로 말한 것이네.[문] 혹 고요히 앉아 수렴하지만 혼매하고 치달려 만족스럽지 못한 때가 있기도 하고, 혹 수렴할 겨를도 없는데도 부지불각 중에 스스로 만족스러운 때도 있는데, 모두 어렴풋하여 그 실마리를 모르겠으니, 어찌하면 가하겠습니까?[답] 이것은 함양이 미숙하여 실심(實心)이 안정되지 못한 소치이니, 정히 마땅히 더욱 힘써야 하네.[문] 맹자가 말하기를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라고 하였으니, 다만 욕심을 적게 하는 곳[寡欲]에서 몇 년의 공부를 쏟으면 천기(天機)가 자연한 본체는 보존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보존되겠습니까?[답]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은 실로 마음을 기르는 제일의 방법이네. 그러나 욕심이라는 것은 단지 식색(食色)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법도에 따르지 않는 모든 곳이 모두 욕심이니, 장차 모름지기 거친 곳에서 정밀한데로 들어가는 것이 가할 것이네.[문] 기(氣)는 볼 수 있는 바탕이 있지만 이(理)는 볼 수 있는 형상이 없으니, 다만 바탕이 있는 기에 나아가 형상이 없는 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답] 이것은 아래 한 절의 설이니 만약 위 한 절에 나아가 말한다면 어찌 일찍이 기를 기다려 이를 말하겠는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네.[문] 다만 마땅히 그 선념(善念)을 보존하기만 하면 악념(惡念)은 자연스럽게 물러납니다. 만약 선념이 생기는 곳에 가서 접속하지 않고 다만 악념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마치 도둑이 동서로 치달려 들어오는 것과 같고 마치 불을 끄려고 하면 더욱 치솟아 번지는 것과 같아 그 형세는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답] 고인의 기허(器虛)와 기실(器實)의 비유55) 또한 이 뜻이네. 이것은 고생스럽게 경험한 속에나 나온 말이니, 어찌 귀하지 않은가? 힘쓰고 힘쓰시게![문] 정자(程子)는 이른바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한다."라는 것은 바로 사람이 태어나 고요한 상태 그 이전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태어난 이후를 성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고자(告子)는 바로 그 지각운동(知覺運動)을 가리켰기 때문에 맹자가 물리친 것입니다.[답]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한다."라는 것에 정자의 뜻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이 바로 기이고 기가 바로 성이라고 여긴 것이고, 하나는 사람이 태어난 뒤에 바야흐로 성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인데, 고자는 오로지 기에 나아가 말하였네.[문] 수렴(收斂) 제철(提綴)하여 허명(虛明) 정일(靜一)함은 바로 이른바 "이미 놓아 버린 마음을 가져다 돌이켜서 몸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56)입니다. 대저 심(心)과 인(仁)은 본래 두 가지 물이 아니니, 심이 보존되면 인이 보존되고, 심이 달아나면 인이 달아납니다. 그렇다면 방심을 구하는 것은 바로 인을 구하는 공부입니다.[답] 자네 말이 좋네. 景涵以主宰爲理。是主理太過之致也。夫天下萬事萬物。莫非是理。況以主宰謂之理。孰云不可。然此言在天地造化上說則可。在人心運用上說。則不能無可議者。夫天無爲。故理爲主宰。人有爲。故心爲主宰。程子所謂道體無爲。而人心有覺者。此也。且心之所以爲主宰。何也。以其有虛靈知覺故也。若非虛靈知覺。則與枯木死灰無異。有何主宰之可言也。虛靈知覺。固氣之精爽。而所以虛靈知覺者。理也。非靈則不能覺。非理則無所覺。若不下所以字。而直以主宰謂理。則理爲作用之物。而理與氣。心與性。混無界至矣。大抵主氣之說。固今日之膏肓。而所謂主理者。亦不無矯枉過直之敝。可歎可歎。孔子曰。鄕原德之賊。朱子釋之曰。似德非德。反亂乎德。大抵鄕原與狂狷相遠。狂者進取。狷者有所不爲。鄕原者未嘗進取。又無所不爲。聖人所惡者。以其同流合汚。不可與有爲故也。昔艾山先生賜小子一言。其意在此。師門平日耳提面命者。亦未始非恐歸此流。小子亦非不知爲切己實病。而病易得而難瘳。如之何則可。士玉姿質。十分醇謹。而少果敢振作之氣。其爲一箇謹勅之士則足矣。而於任重致遠。不其有欠乎。此艾山先生所謂不病之病。最爲難治者。殊可念也。嗚呼。聖人不取此醇謹底人。而特取狂狷之人者。其意可知。矯捄氣質。此是人人切己之功。願士玉勉之。朱子所謂發於理發於氣者。是其發之本一也。而及其已發之後。有不同者。故一發字下。分着理氣字。退溪所謂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者。是分明有理一邊。氣一邊。相對竝立。或發於此。或發於彼。盖其着發字於理氣下。故其義相爲懸殊。曰或生或原則。不害爲本原之一。而特於臨發之際。辨別其人心道心之義而已。若曰氣發而理乘。理發而氣隨。則分明有齊頭互發之嫌。誠一也。所謂誠意者。是一其不一之私意。以一釋誠意之誠。不如朱子以實字釋之。而有下手處沖漠無眹。萬衆森然已具。若以衆人而欲黙識此境界。則於平朝未與物接。湛然虛明之時。可乎。平朝湛然。及偶然圓淳之時。是也。然纔有欲識底意。則便非無眹便非森然。大學之至善。卽中庸之中。至善以實理言。屮以體段言。或靜坐收斂。而有昏昧走作不慊之時。或未暇收斂。而有不知不覺自好之時。皆怳惚而莫知其端。如何則可。此是涵養未熟。實心未定之致。正宜加勉。孟子曰。養心莫善於寡欲。但於寡欲上。費得幾歲幾年工夫。則天機自然之體。不期存而自存否。寡欲固養心第一方。然欲非特食色之謂凡心不循軌處。皆欲也。且須由粗入精。可也。氣則有質可觀。而理則無形可見。但就有質之氣。知其有無形之理乎。此是下一節說。若就上一節說。則何嘗待氯而言理。如曰無極而太極。是也。但當存其善念。惡念自然退聽。若於善念處。不之接續。而但欲除去惡念。則如寇之東驅西入。如火之愈撲愈熾。其勢有不可得以除者。古人器虛器實之喩。亦比意。此是辛苦經歷中出來語。豈不可貴。勉之勉之。程子所謂生之謂性。正以其人生而靜以上。不容說。故以爲生以後。謂之性。告子則正指。其知覺運動。故孟子闢之。生之謂性。程子之意。有兩般焉。一則以爲性卽氣。氣卽性。一則以爲人生以後。方說性。告子專就氣說。收斂提綴。虛明靜一。卽所謂將己放之心。反復入身來。大抵心與仁。本非二物。心存則仁存。心亡則仁亡。然則求放心。卽求仁工夫好。 경함(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의 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주석 "황경함(黃景涵)" 참조. 애산(艾山) 선생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주석 '애산(艾山)' 참조. 고인의……비유 《근사록》 권4 존양류(存養類)에 정호(程顥)가 "빈 그릇을 물속에 넣으면 물이 자연히 들어가겠지만, 하나의 그릇에 물을 채워서 물속에 두면 물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대개 내부에 주가 있으면 실하니, 실하면 외부의 환란이 들어올 수 없어 자연히 무사할 것이다.[虛器入水, 水自然入, 若以一器實之以水, 置之水中, 水何能入來? 蓋中有主則實, 實則外患不能入, 自然無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른바……것 《맹자》 〈고자 상(告子上)〉 '구방심장(求放心章)'의 주석에서 명도(明道)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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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직부에게 보냄 與朴直夫 소식이 막혀 매우 우울하였는데 뜻밖에 선장(善長)이 들러주어 모친의 체후가 근래 혈증(血症)을 앓고 있다는 것을 물어보고 들었으니, 염려가 실로 깊었지만 알맞게 조리함에 신명의 도움이 있어 장차 평상을 회복하기를 매우 축원하네. 어른을 모시는 나머지 공부하는 것은 날마다 과정이 있어 점차 넓혀가고 있는가? 비상(非常)한 공부는 반드시 비상한 사람을 기다리는 법이라, 저 성현들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이니, 일심으로 공부를 착수하여 이 하나의 대사를 힘써 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명성을 좆아 실제를 잊어버리는 것은 온 세상이 그러하여 바랄 수 있는 후생 소년 또한 많지 않으니, 매번 서글픈 마음 감당하지 못할 뿐이네.[문]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서 "계속하여 이어가는 것은 선이다.[繼之者善]"라고 한 것은 이(理)가 발하지 않은 것이고, "이룬 것은 성이다.[成之者性]"라고 한 것은 이가 발한 곳인데, 맹자가 성선을 말한 것은 이미 태어난 뒤를 가리키는 것입니까?[답] "계속하여 이어가는 것은 선이다."라고 한 것은 천도가 유행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이룬 것은 성이다."라고 한 것은 만물이 성(性)을 이룬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맹자가 성선을 말한 것은 인심(人心) 상에 나아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가리킨 말이니, 가리키는 바가 본래 절로 같지 않네.[문]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정사를 하면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지혜롭다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선왕의 도는 바로 인(仁)인데 지(智)를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답] 선왕의 도가 바로 인이기 때문에 하문에서 지를 말하였으니, 마치 《논어》 〈이인(里仁)〉에서 "가려서 인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네.[문] 군자는 자득(自得)하고자 하고, 학자는 이 마음을 공경히 지키는 것이 격물치지의 도입니까?[답] 이 말은 실로 옳네. 그러나 자득하는 의는 아마 적절하지 않을 것이니, 정자가 〈식인편(識仁篇)〉에서 "[성(誠)과 경(敬)으로] 간직하기를 오래하면 저절로 밝아진다."라고 한 것은 자득을 말한 것이네.[문] 공자께서는 나갈 때에 예(禮)로써 하고, 물러날 때에 의(義)로써 하시면서도 의(義)가 없다, 명(命)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데,13) 여기에서의 '명(命)' 자는 이(理)를 가리키는 것입니까?[답] 여기에서의 '명(命)' 자는 기수(氣數)의 명(命)이니 만약 '이(理)' 자로 간주하면 '의(義)' 자와 중첩되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문] 《근사록》에 명도(明道)가 "종일토록 건건(乾乾)함은 군자가 마땅히 종일토록 하늘을 대하듯 함이다."라고 하였는데, 건건은 불식(不息)의 뜻이니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하여 불식에 따르는 이치입니까?[답] 경(敬)하여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이른바 불식이네. 만약 "경을 위주로 하여 불식에 따른다."라고 한다면 주경(主敬)과 불식(不息)은 두 가지 물이 되네. 消息間阻。頗用紆鬱。料外善長歷入。扣聞堂候近患血症。爲慮實深。迎合有相。行將復常。是祝。是祝餘力鉛槧逐日有程。漸次展拓否。非常之功。必待非常人。彼丈夫我丈夫。一心下功。辦此一副大事。如何。徇各忘實。舉世滔滔。後生少年可以寄望者。亦無多人。每不勝悵然耳。繼之者善。理之未發。成之者性。理之發處。而孟子之言性善。指已生之後歟。繼之者善。指天道流行而言。成之者性。指萬物成性而言。孟子言性善。是就人心上沿流指源之說。所指本自不同。爲政不因先王之道。可謂智乎。先王之道卽仁也。而言智。先王之道是仁也。故下文言智。如曰擇不處仁。焉得智。君子欲其自得之。學者敬守此心。格物致知之道乎。此言固是然於自得之義。恐非襯貼。程子所謂存久自明。是自得之謂。孔子進以禮退以義。不言無義無命。此命字指理乎此命字。氣數之命。若作理字看。則與義字不爲疊說耶。終日乾乾。君子當終日對越在天。乾乾是不息之義。必主敬而循乎不息之理耶。敬而無失。卽所謂不息。若曰主敬而循乎不息。則主敬與不息爲二物. 공자께서는……않았는데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공자께서는 나갈 때에 예(禮)로써 하고, 물러날 때에 의(義)로써 하시어, 얻고 얻지 못함에 '천명(天命)에 달려있다.'라고 하셨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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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9 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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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8) 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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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회1) 【재혁】에게 답함 答鄭景晦【在爀】 영남과 호남은 동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편지를 받은 지 3년이 되도록 실로 편로(便路)가 없어 지금까지 답장을 미루고 있었으니, 민첩하지 못한 허물이 항상 석연치 못하였네. 그런데 뜻밖에 여름쯤에 또 보내준 안부 편지를 받았으니, 그대의 따지지 않는 아량은 실로 얕지 않음을 헤아릴 수 있겠기에 한편 감사하고 한편 부끄러워 사례할 바를 모르겠네. 겨울이 깊어가는 이즈음 기쁘게 부모님을 모시는 체후는 신명의 도움으로 모두 복되시는가? 스승을 따라 집을 옮겨 좋은 이웃과 가까이 지내고 있으니 그 덕을 숭상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독실함은 여기에 나아가 상상할 수 있겠고, 또 앞뒤의 편지에 길게 한 말들은 절실하고 진밀(縝密)함이 공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없었으니, 읽어봄에 나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였네. 의림(義林)은 젊어서는 노력하지 못하였고 늙어서는 알려진 것이 없어 매번 어진 사우들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부끄러워 대답할 수 없었네. 오직 그대는 추로(鄒魯)의 고을2)에서 태어나 문로(門路)의 바름을 얻어 독실하게 매진하여 이와 같은데 이르렀으니, 결국 사문(斯文)의 희망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는가? 앞의 편지에서 우리들이 가장 급하게 해야 할 것은 숭안(崇安)3)을 묵묵히 외우는 것이고 저렇게 포효(咆哮)하는 것은 오히려 다음의 일이라고 하였으니, 매번 이 말을 외우며 당장의 단방(單方)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여겼네. 오호라! 오늘날이 어떤 날인가? 그 위험의 늠름함은 비록 지난날 한 쪽에서 포효했던 것과 견줄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을 위한 계획이 또한 어찌 이것을 벗어남이 있겠는가? 더욱 우리의 학업을 힘써 삼가 천명을 기다리는 것일 뿐이니, 어떻게 여기는가?[문] 맹자가 말한 개의 성(性)·소의 성·사람의 성이라는 이런 '성' 자는 본연의 성입니까, 기질의 성입니까? 《논어》 〈양화(陽貨)〉의 "성은 서로 비슷하다[性相近]"라고 한 세주(細註)에 주자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의 성은 천하를 통틀어 하나의 성이니, 어찌 서로 비슷함이 있겠는가? 이것은 이른바 기질의 성이니, 맹자가 말한 개·소·사람의 성이라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을 항상 의심스러워하였습니다.[답] 개의 성과 소의 성이 만약 본연의 성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의 성만이 유독 본연의 성이 되겠는가? 주자의 설은 절로 하나의 뜻이니, 아마 정자(程子)와 남헌(南軒) 장씨(張氏)의 말과 섞어서 보아서는 불가할 듯하네.[문] 기질의 성은 발한 뒤의 이름이니, 발하지 않았을 때 별도로 기질의 성이 있어 한 쪽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데 주자는 "발하지 않았을 때 기질의 성 또한 모두 그 속에 있다."라고 한 것이 의심스럽습니다.[답] 기질의 성은 때에 따라 있고 없는 물이 아니지만 다만 발하지 않았을 때로는 말할 수 없네. 주자가 말한 "기는 용사하지 않는다.[氣不用事]"라는 네 글자는 아마 이 설의 단안(斷案)이 될 것이네.[문] 《대학》제가장(齊家章)에서 서(恕)를 말하지 않고 치국장(治國章)에 이르러 비로소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애옹(艾翁)4)은 제가(齊家)에서 편벽된다는 다섯 개 '벽(辟)' 자는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지 못한[不恕] 병통으로 여겼는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답] 다섯 개의 '벽' 자는 실로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지 못한[不恕] 병통이네. 그러나 두터움으로부터 박한데 미치고 친함으로부터 소원한데 미치니, '서(恕)' 자의 뜻은 나라와 천하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네. 嶺湖東西何。其遙濶也。承書三載。苦無便路。迄稽謝復。不敏之咎。尋常不釋。謂外夏間。又承惠存。賢者不較之量。實非淺淺者所可算也。且感且愧。不知所以爲謝也。冬令垂深。未審侍省怡愉。神相百福。從師遷舍。近接芳隣。其尙德好學之篤。卽此可想。而又於前後書幅。娓娓說話。無非切實縝密自功夫中出來。讀之令人斂袵義。林少而不力。老而無聞。每得賢士友書。愧無以仰對也。惟座右生於鄒魯之邦。得門路之正。慥慥征邁。至於如此。究竟斯文之望。豈在他人乎。前書以爲吾輩最可急者。是崇安黙誦而彼之咆哮。猶屬第二件。每誦此言。以爲目下單方。無過於此。嗚呼。此日何日。其危險凜凜。雖非曩時一邊咆哮之比。而爲吾輩之計者。亦豈有外於此乎。益勉吾業。恭俟天命而已。如何如何。孟子所謂犬之性牛之性人之性。此等性字。是本然性與。氣質性與。論語性相近註。朱子曰。天命之性通天下一性。何相近之有。此所謂氣質之性也。孟子所謂犬牛人性是也。此說尋常可疑。犬之性牛之性。若非本然。則豈人之性。獨爲本然乎。朱子之說。自是一義。恐不可與程張語混看。氣質之性。是發後之名。非未發時別有氣質之性。伏在一邊。而朱子曰。未發之時。氣質之性。亦皆在其中。可疑。氣質非隨時。有無之物。但不可以未發言。朱子所謂氣不用事四字。恐爲此說之斷案。大學齊家章。不言恕。而至治國章。始言之何也。艾翁以爲齊家五箇辟字。是不恕之病。未知如何。五辟字。固不恕之病。然自厚而薄。自親而疎。則恕字之義。至國與天下而始大。 정경회(鄭景晦) 정재혁(鄭在爀)을 말한다. 자는 경회,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인이다. 추로(鄒魯)의 고을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인데, 여기서는 영남을 뜻한다. 숭안(崇安) 중국 복건성 숭안현을 말하는데, 주자가 이곳의 무이산(武夷山)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어 강학하였다. 애옹(艾翁)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애산(艾山)ㆍ노백헌(老柏軒)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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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로5) 【재동】에게 답함 答吳陽路【在東】 한 통의 편지가 얼마나 위로되고 후련했겠는가? 다만 바쁜 일로 인하여 즉시 답장을 못했으니 더욱 이 때문에 미안하고 서글펐네. 늦은 봄 날씨가 따뜻한데 조부모와 부모님의 체후는 한결같이 왕성하고 평안하신가? 부모님이 모두 계시고 형제가 탈이 없으며, 나이는 젊고 기력은 왕성하며, 마을 서당이 있고 이웃에 스승이 있어 학업을 닦음에 방도가 있을 것이니, 이는 급급하게 큰일을 해야 할 날이 아니겠는가? 미적거리며 등한히 보내는 것은 우리 일을 가장 해치는 것이니, 힘쓰고 힘쓰시게. 가만히 보건대 양로(陽路)의 자질은 깨우치는 데는 뛰어나지만 침착하고 고요한 의사에는 혹 부족함이 있는데, 이것은 학문과 덕을 축적하는데 실로 작은 흠결이 아니니, 바라건대 돌이켜 살펴 바로잡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의림(義林)은 변변찮고 산란하여 족히 말할 것이 없네. 응수에 겨를이 없고 노경에는 어렵다고 한 말은 실로 나를 아끼고 나를 가련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이 또한 명수(命數)에 관계된 곳이니. 순순히 받아들이는 이외에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중용》에 대한 문목은 유념하여 궁구하고 탐색하여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는 뜻을 볼 수 있으니, 어떤 다행이 이만하겠는가? '심(心)' 자는 실로 《중용》의 요지이지만 어떤 경서인들 또한 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겠는가? 주자가 말한 "불편불의(不偏不倚)"는 미발의 중을 설명한 것이고, "무과불급(無過不及)"은 이발의 중을 설명한 것이며, 정자가 말한 "불편(不偏)"은 미발과 이발의 중을 통틀어 말한 것이네. "활발발(活潑潑)"은 연어(鳶魚)에 나아가 말한 것이고, "만물막불개연(萬物莫不皆然)"은 아마 훈어(訓語)를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하니, 다시 상세히 살펴보시게. 一書何等慰豁。但因悤故。趁未修復。尤庸斂悵。春暮日暄。重省履況。一直茂謐。俱存無故。年力方冨。村塾隣師居業有方。此其非汲汲有爲之日乎。因循等待。最善吾事勉之勉之。竊覵陽路姿質長於開悟。而於沈靜意思。容有遜焉。此於積學蓄德。實非細欠。幸反省而矯捄之。如何。義也碌碌憒憒。無足云喩。酬應無暇。老境爲難之語。實出於愛我憐我之意。而此亦命數所關處也。順受之外。有何方法哉。中庸問目。可見留心竊索。不欲放過之意也。何幸如之。心字固爲中庸要旨。而何經何書。亦有以外於心者哉。朱子所謂不偏不倚。是說未發之中。無過不及。是說已發之中。程子所謂不偏。是統未發已發之中。而言之者也。活潑潑。就鳶魚而言。萬物莫不皆然。恐非訓語之謂也。更詳之。 오양로(吳陽路) 오재동(吳在東, 1881~?)을 말한다. 자는 양로, 호는 이당(鯉堂),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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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로에게 보냄 與吳陽路 근년 이래로 가만히 듣건대 그대가 밖으로 치달리는 것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돌리고 생각을 바꾸어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함에 날마다 과정이 있다고 하니, 이것은 인간 세상에 얼마나 좋은 계획이며, 이것은 지구(知舊) 사이에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대저 그대는 자질이 본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의사는 본래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이유 없이 발을 내 디뎌 속진에 함부로 달려 한 때 어긋나고 잃은 것이 적지 않았네. 이윽고 번연히 개오(改悟)하여 곧장 바른 데로 돌아옴이 이미 이와 같아, 이른바 전날 잃은 것은 거울에 낀 먼지를 씻는 것이 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이에 양심은 반드시 돌아오는 날이 있고 아름다운 자질은 끝까지 혼미한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네. 그러나 전날의 어긋나고 잃은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으니, 오늘 바른 데로 돌아온 것 또한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그대의 마음은 남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생각건대 반드시 분명하게 이미 깨달았을 것이네. 일신의 득실은 관계된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오직 한 때의 지극한 경계가 될 뿐 아니라 이를 지켜 평생의 요결(要訣)로 삼아 어진 이와 친하고 덕 있는 이에게 나아가 끝까지 수립하는 바탕으로 삼기를 매우 바라네.[문] 재동(在東)은 《맹자》〈양혜왕 하(梁惠王下)〉제3장에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에 보전한다.[畏天之威于時保之]"라고 한 상문에 낙천(樂天)과 외천(畏天)을 함께 말했는데 여기에서 단지 외천을 말한 것은 소주(小註)에서 이른바 한 쪽만 논한 것7)이라고 한 것을 옳다고 여기고, 철원(澈源)8)은 바야흐로 위의 외천을 이었기 때문에 그 한 쪽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인용한 《시경》을 나누어도 절로 한 단락이 되니 대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대저 낙천은 또한 외천에서 나오니, 능히 외천하여 그 나라를 보존하면 낙천하여 천하를 보존할 수 있는지라, 낙천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낙천의 공부를 참으로 말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재동은 "태왕(太王)과 구천(句踐)은 모두 지자(智者)의 일로 말한 것이지만 그 일은 크게 같지 않은 점이 있다. 태왕은 자연히 의리의 당연함을 알고 시세의 필연을 알았기 때문에 그 도를 따라 어김이 없었던 것이고, 구천은 그 이해를 보고서 그 형세가 감히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그 이치는 감히 어그러지게 할 수 없음을 알아 억지로 그 도를 인하여 어기지 않은 자이다. 주자가 이른바 '의사가 절로 같지 않다.'라고 한 것9)은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철원은 "그런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답] "낙천은 또한 외천에서 나오기 때문에 절로 한 단락이 된다."라고 한 것은 옳네. 내 일찍이 생각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이 의론을 봄에 어긋나지 않으니 기쁘네. 재동이 태왕과 구천의 등급을 나눈 것은 매우 상세하고 또 자세하여 한 구절도 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보지 못하겠네.[문] 《중용장구》 제1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라고 한 장구(章句)에서 "사람과 사물이 각각 부여받은 이(理)를 얻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람과 사물이 각각 부여받은 이를 얻었다."라고 하였다면 사람은 온전하고 사물은 치우침을 볼 수 있으니, 허다한 분수(分殊)는 천명(天命)의 본연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을 삼는다."라고 하였으니, 분수(分殊)는 이일(理一)을 벗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람과 사물이 각기 그 성(性)의 자연을 따른다."라고 하였으니 분수(分殊)이고, 또 "성(性)과 도(道)가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일(理一)이 분수(分殊)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나뉘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나뉘니, 이것이 이의 오묘함입니다. 세상의 선비들이 편전(偏全)을 기질로 여기는 것은 결코 주자의 뜻이 아닙니다.[답] 그대가 말한 의미를 곱씹어 음미해 보니, 매우 공평하고 바르네.[문]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사람이 도를 크게 한다.[人能弘道]"라고 하였는데, 이 '인(人)' 자는 인심(人心)이 주재하는 곳입니다. 주재가 이미 이 이(理)인데, 주재의 이로 이 도를 주재하니, 이로 이를 주재하는 혐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심이 성정을 통솔하는 오묘함을 이에 볼 수 있습니다.[답] 본 것이 바르네.[문] 《대학장구》 전(傳) 7장에서 '노(怒)'라고 하지 않고 '분치(忿懥)'라고 하고, '희(喜)'라고 하지 않고 '호요(好樂)'라고 하였으니, 대개 분치는 노가 드러나 또 머물러 있는 것이고 호요는 희가 드러나 또 심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드러난 것에 나아가 분명하게 살피게 하려는 것입니다.[답] 만일 "심에 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심에 기뻐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면 말과 뜻이 갖추어지지 않아 반드시 정이 치성한 뒤에는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 많네.[문] 명덕장(明德章)에서는 '하늘의 밝은 명[天之明命]'으로 말하였고, 신민장(新民章)에서는 '그 명이 오직 새롭다.[其命維新]'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이에 '명(明)'과 '신(新)'은 모두 천명 가운데의 일이고 인력이 사사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답] 위아래의 '명(命)' 자는 의가 같지 않는 것이 있네.[문] 재동(在東)은 "기(器) 또한 도(道)이고 도 또한 기이니, 기 또한 도라는 것은 아래에서 위로 설명한 것이고 도 또한 기라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미루어 온 것이다."라고 하고, 철원(澈源)은 "이것은 상하가 없는 곳에 상하가 있는 것이다. 도 또한 기라는 것은 바로 체용이 일원이라는 것이고 기 또한 도라는 것은 현미(顯微)가 간격이 없다는 것이다. 명도(明道)는 사람들이 도와 기를 가지고 두 가지 물로 간주할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기 또한 도이고 도 또한 기라고 하였고, 이천(伊川)은 사람들이 도와 기를 가지고 하나의 물로 간주할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도는 절로 도이고 기는 절로 기이다고 하였으니, 성현의 가르침이 치밀함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답] 설명한 것이 어긋나지 않네. 近年以來。竊聞賢者擺脫外驚回心易慮。講討問辨。日有課程云。此是人世間何等勝算。此是知舊間何等好消息。大抵賢者資質本非不美。意思本非不好。而中間無端出脚。浪走塵土。一時差失。至爲不少。旣而幡然改悟。旋卽反正己如此。所謂前日之失。不過爲洗鑑之舊塵而已。乃知良心有必反之日。美質無終迷之理。然前日之差失。必有其故。今日之反正。亦豈無其故賢者之心。不須人言。而想必了然已悟矣。一身得失所係如此。豈不可畏。此不惟爲一時之至戒。持以爲平生要訣。親賢就德。以爲究竟樹立之地企仰。在東以爲畏天之威于時保之上文。倂言樂天畏天。而此只言畏天者。少註所謂偏論者是。澈源以爲方承上畏天。故帶言其一邊。然分此引詩。而自爲一段盖有意。大抵樂天。亦自畏天中出來。能畏天而保其國。則可以樂天而保天下。其所以不言樂天者。乃所以眞言樂天之功夫也。在東曰。太王句踐。皆以智者事言之。其事大有不侔。太王是自然明乎義理之當然。而識其時勢之必然。故循其道而無違。句踐則見其利害。而識其勢之不敢逆。知其理之不敢悖。强因其道而不違者也。朱子所謂意思自不同者。以此也澈源曰似然。樂天亦自畏天中來。故自爲一段者。得之。吾嘗思得如是。今見此論不爽。可喜。在東分太王句踐之等。甚詳且悉。未見有一句相違於吾意。天命之謂性。章句人物各得其所賦之理云云。旣云各得其所賦之理。則可見人全物偏。許多分殊。莫非天命之本然也。繼曰以爲健順五常之德。則可見分殊之不外乎理一也。又曰人物各循其性之自然則分殊也。而又曰。性道同。則理一不外乎分殊也。分而一一而分。此理之妙也。世儒以徧全爲氣質。決非朱子意也。咀嚼出意味。甚平正。人能弘道。此人字。是人心主宰處。主宰旣是理。以主宰之理。主宰此道。似有以理主理之嫌。然心統性情之妙。於是乎可見。見得正。不曰怒而曰忿懥不曰喜而曰好樂。盖忿懥。是怒之著且留。好樂。是喜之著且甚。盖欲使人就其著。而明察之。如曰心有所怒。則不得其正。心有所喜。則不得其正云云。則語意未備。必情熾而後。多不得其正。明德章。以天之明命言之。新民章。以其命維新言之。乃知明新皆天命中事。非人力之所私也。上下命字。義有不同。在東曰。器亦道道亦器。器亦道。自下說上去。道亦器自上推下來。澈源曰。此是無上下處有上下者。道亦器。卽體用一原也。器亦道。即顯微無間也。明道憂人把道器看作兩物也。故曰。器亦道。道亦器。伊川憂人把道器看作一物也。故曰道自道。器自器。聖賢垂教之密。如此。說得不錯。 소주(小註)에서……것 이 장의 소주에 신안(新安) 진씨(陳氏)가 "《시경》을 인용하면서 낙천 한 쪽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또한 우연일 뿐이다.[引詩不及樂天一邊, 亦偶然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철원(澈源)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을 말한다. 자는 경함(景涵),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주자가……것 《차의(箚疑)》에 "태왕은 이의 당연함을 알고서 경으로써 이를 따랐고, 구천에 이르러서는 순전히 사사로운 뜻이기 때문에 절로 같지 않다.[太王知理之當然而敬以循之者, 至於句踐, 則純是私意, 故曰自不同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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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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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사원14) 【치묵】에게 답함 答裴士遠 【致黙】 일과로 글공부하는 것을 집에서 하는가, 서재에서 하는가? 함께 종유하는 이들은 또 어떤 사람인가? 한 구역 고요한 방을 마련하여 먼저 이 몸을 편안히 할 곳을 만들어 때와 힘에 따라 한결같이 과정에 좆아 가고, 절대로 한가한 손님을 대하여 한가한 이야기를 나누며 유유하게 날을 보내서는 불가하네.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뜻이 있다면 불을 끄듯이 도망한 이를 추격하듯이 하여 남이 한 번 하면 자신은 백 번 하고 남이 열 번 하면 자신은 천 번 노력하는 것, 이것이 제일의 방법이네. 더구나 보내온 편지에서 "분주한 날은 항상 많고 전일한 날은 항상 적다."라고 하였고, 또 "망조(忘助)15)의 병을 면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아는 것이 깊고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겠네. 그러나 이미 이와 같은 것이 병통인 줄 알면 바로 이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니, 이것을 놓아두고 어찌 별다른 처방이 있겠는가? 한 폭의 가르침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나는 적임자가 아니어서 단지 부끄럽기만 하네. 순문(純文)16)은 재성(才性)이 개오(開悟)하여 더불어 함께 학문할 만하니 이는 붕우 사이에 있어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더구나 족친의 사이이니 어찌 기쁘고 다행하지 않은가? 오직 모든 것들을 서로 규계하여 함께 집안의 장래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네. 課日咿唔。於家乎於齋乎。所與游從。又是何人。討一區靜室。先爲此身安頓之所。隨時隨力。一味趲程。切不可對閒人客。做閒說話。悠悠而廢日也。無志則已。旣有志焉。則如救火。如追亡。人一己百。人十己千。此是第一法。況來喩粉紜之日常多。專一之時常少。又曰未免忘助之病。此可謂自知之深。而自省之切也。然旣知如此是病。便是不如此是藥。舍此。豈有别方哉。一幅示訓。吾非其人。只切愧愧。純文才性開悟。可與共學。此在朋友。有不易得。況族親之間。寧不喜幸。惟種種相規。共爲門戶大來之望。懇望。 배사원(裴士遠) 배치묵(裴致默, 1881~?)을 말한다. 자는 사원, 호는 인산(仁山),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망조(忘助) 잊어버리는 것[忘]과 조장하는 것[助]을 말한다.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호연장(浩然章)에 잊지 말고 조장하지 말라는 것에서 인용한 말이다. 순문(純文) 배석면(裵錫冕, 1885~?)의 자이다. 호는 노암(魯庵),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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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사원에게 답함 答裴士遠 《주역》은 몇 권까지 읽었는가? 무릇 공부는 단지 치지(致知)와 거경(居敬)에 있으니, 치지가 아니면 능히 거경할 수 없고 거경이 아니면 치지할 수 없네. 마치 수레에 두 개의 바퀴가 있고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것과 같아 서로 기다려 서로 도와야 일을 할 수 있네. 항상 단장재숙(端莊齊肅)하여 상제(上帝)를 대하는 듯, 전장(戰場)에 있는 듯이 하여 하루 12시 동안 이 마음이 간단(間斷)하는 바가 없어야 하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이른바 "경이직내(敬以直內)"라는 것과 자사(子思)가 이른바 "계신공구(戒愼恐懼)"라는 것과 맹자가 이른바 "구방심(求放心)"이라는 것인데, 또 치지의 본령이 되네. 원컨대 사원(士遠)은 한 번 여기에 의지하여 노력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지난번에 한 마디 말을 해달라고 하였으나 미적거리는 병통 탓으로 그 뜻에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 말을 거론하여 언급하니, 바라건대 내가 나의 마음으로 미루어보지도 않고 징험하지도 못한 말이라고 하여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이와 같으니, 우리 사원이 옛날 학업을 잊지 않고 진중하게 부탁함이 이와 같은데 이르렀으니, 개인적인 마음에 매우 감사하네. 나를 후대하려는 뜻은 지극히 얕지 않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를 어쩌겠는가?[문] 도(道)와 기(器)는 다만 '형(形)' 자로 나누어지는 경계인데, 이(理)는 통창하고 기(氣)는 국한되며, 이전 온전하고 기는 치우쳤다는 것은 접때 이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돌아와 생각해 봄에 하나이면서 둘이고[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이며[二而一], 서로 떠나지도 않고[不相離]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不相雜]는 것은 항상 분명하지 못하니, 원컨대 한 마디 가르침을 주시지요.[답]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에서 보면 기를 이라고 부를 수 없고 이를 기라고 부를 수 없으며,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에서 보면 기는 이의 바탕이고 이는 기의 소이연(所以然)이네.[문]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이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고,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만반(萬般)의 정은 모두 이에서 발한다."라고 하였습니다.[답] 상단은 그 전체를 총괄함을 말한 것이고, 하단은 그 단서를 가리킨 것이네.[문] 형기(形氣)와 기질(氣質)에 대해 묻습니다.[답] 형기는 사물로 말한 것이고 기질은 사람으로 말한 것이네. 형기의 편색(偏塞)은 견고하여 열 수가 없고, 기질의 청탁(清獨)은 변화시킬 수 있네.[문] 감(感)과 동(動)은 실로 서로 필요하고 서로 돕지만 감할 때 동이 그 가운데 있고 동할 때 감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감은 심(心)에서 말한 것이고 동은 신(身)에서 말한 것이니,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답] 바르게 보았네.[문] 《논어》에 인(仁)을 풀이하기를 "전체불식(全體不息)17)"이라 하였고, 또 "사랑의 이치이고 마음의 덕이다.[愛之理 心之德]"라고 하였습니다.[답] 전체불식은 인도(仁道)의 큼을 풀이한 것이고, 사랑의 이치이고 마음의 덕이라는 것은 '인(仁)' 자의 뜻을 풀이한 것이네.[문] 혹자는 수(水)와 화(火)를 치음(稺陰)과 치양(稺陽)으로 여기고, 혹자는 목(木)과 금(金)을 치음과 치양으로 여기니, 어째서입니까?[답] 형화(形化)로 말하면 수와 화가 치음과 치양이 되고, 사시의 순차로 말하면 목과 금이 치음과 치양이 되네.[문] 주자가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다.[性猶太極 心猶陰陽]"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심은 성과 정의 주재이다.[心者 性情之主宰]"라고 하였습니다.[답] 심과 성을 상대하여 말하면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으며, 용처(用處)로 보면 심이 하는 바가 아님이 없네. 그러나 그 주재하는 것은 심이지만 주재하게 하는 것은 성이 아니겠는가?[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지(智)와 총명예지(聰明睿智)의 지(智)는 체와 용이 있는 듯합니다.[답] 인의예지의 지는 성(性)이고, 총명예지의 지는 심(心)이네.[문] 원성(元城) 유 선생(劉先生)18)은 사마온공(司馬溫公)에게 배웠는데, 사마온공이 재상이 된 뒤로부터 한 번도 왕복하지 않았으니, 어진 사람도 또한 혐의를 피함이 있습니까?[답] 이것은 혐의를 피한 것이 아니라, 사(士)가 된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네.[문]《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면을 바르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치묵(致默)은 "사람은 혹 내면에 힘쓰면서 외면에 간략한 이가 있고, 사람은 혹 외면에 힘쓰면서 내면에 간략한 이가 있으니, 두 가지는 한 쪽을 폐할 수 없다."라고 여기고, 규덕(奎德)은 "막 내면을 곧게 하면 문득 외면이 바르게 되니, 마치 겉모습이 바르면 그림자가 바른 것과 같으니, 어찌 겉모습이 바른데 그림자가 바르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다만 내면을 바르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라고 여깁니다.[답] 두 설이 모두 아름답지만 치묵의 설이 더욱 정밀하네.[문] 《중용장구》 제1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라고 하였는데, 치묵은 "위아래 '성(性)' 자의 뜻이 같으니, 솔성(率性)은 바로 하늘이 명한 성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여기고, 혹자는 "위아래 '성' 자의 뜻은 같지 않음이 많이 있으니, 솔성의 성은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여깁니다.[답]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 되고, 사물에 있어서는 이(理)가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 되네. 이미 성을 말한다고 했다면 혼연히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나는 그 같지 않음을 보지 못하겠네. 義經讀至幾卷耶。大抵功夫。只在致知居敬。非致知不能居敬。非居敬無以致知。如車之有兩輸。鳥之有兩翼。相須交資。可以有爲。常常端莊齊肅。如對上帝。如在戰陣。一日十二時。此心無所間斷。此便是孔子所謂敬以直內。子思所謂戒愼恐懼。孟子所謂求放心者。而又爲致知之本領也。願士遠試依此而用力焉。如何。何也有一言之請。而因循病故。未副其意。故敢擧此而及之。幸勿以不恕無驗之言而忽之。如何。世紛如此。惟吾士遠不忘舊日之業。而見屬珍重。至於如此。私心感感。所欲相厚。極不淺淺。而其於倥倥何。道器。特以形字分界至。而理通氣局。理全氣偏。向旣聞命矣。歸而思之。一而二。二而一。不相離。不相雜者。尋常未瑩。願下一言之教。以一而二者觀。則氣不可喚做理。理不可喚做氣。以二而一者觀。則氣是理之質。理是氣之所以然。先儒云。非理無所發。非氣不能發。又云萬般之情皆發於理。上端說其摠括全體。下端指其端緒。形氣氣質。形氣以物言。氣質以人言。形氣偏塞牢不可開。氣質清獨可以變化。感與動。固相須相資。而感時動在其中。動時感在其中。感心上說。動身上說。未知如何。得。論語訓仁曰全體不息。又曰愛之理。心之德。全體不息。訓以仁道之大。愛之理。心之德。訓以仁字之義。或以水火。爲稺陰稺陽。或以木金爲稺陰稺陽。何也。以形化言。則水火爲稺陰稺陽。以四時序次言。則木金爲稺陰稺陽。性猶太極。心猶陰陽。又曰心者。性情之主宰以心性對言。則性猶太極。心猶陰陽。以用處觀。則莫非心之所爲也。然其主宰者心。而其所以主宰底非性耶。仁義禮智之智。與聰明睿智之智。似有體用。禮智智性睿智智心。元城劉先生受業于司馬溫公。自溫公爲宰相後。一無往復。賢人亦有避嫌乎。此非避嫌。爲士之道。當如是。敬以直內。義以方外云云。致默以爲人或有務於內而簡於外者。人或有務於外而簡於內者。二者不可偏廢。奎悳以爲纔直內便方外。如表端而影正。豈有表端而影不正之理乎。但務直內。二說俱佳。而致黙說尤密。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致黙以爲上下性字義同。率性卽率天命之性。或人以爲上下性字義。煞有不同。率性之性。兼氣質而言。在天爲命。在物爲理。在人爲性。旣曰言性。非渾然在天者。吾未見其不同。 전체불식(全體不息) 《논어》 〈공야장(公冶長)〉 옹야인이불녕장(雍也仁而不佞章)에 "인의 도는 지극히 커서 체를 온전히 하여 그치지 않는 자가 아니면 해당될 수 없다.〔仁道至大, 非全體而不息者, 不足而當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원성(元城) 유 선생(劉先生) 유안세(劉安世, 1048~1125)를 말한다. 자는 기지(器之), 호는 원성이다. 송(宋)나라 때 직신(直臣)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기개가 강직하여 천자의 진노를 무릅쓰고 거리낌 없이 직언을 잘하여 전상호(殿上虎)라 불렸다. 저서로는 《진언집(盡言集)》이 있다.《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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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집》7) 발문 遯齋集跋 호남은 문헌의 고장으로 스승으로 사모할 만한 선진(先進)과 장덕(長德)이 성대하게 이어져 서로 바라보이니, 우리 고을 고 지평(持平)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선생은 일찍 김점필재(金佔畢齋)8)를 스승으로 모셔 한훤당(寒暄堂),9) 일두(一蠹),10) 탁영(濯纓),11) 추강(秋江)12)등 제현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으니, 이것은 동방연원의 한 가닥 정맥이다. 그 말과 마음으로 전수한 진전(眞詮)과 요결(要訣)은 반드시 고향 마을[鄕井] 서당[庠塾]의 선비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을 것인데, 희희양양(熙熙穰穰)13) 왕래하여 성운(聲韻)이 더욱 아득해지고 오직 지석강(支石江)14)의 청풍과 해망산(海望山)15)의 명월만이 거니시던 곳에 의연하여 나로 하여금 모습을 상상함에 끝없는 감회가 있게 한다.옛날 계해년에 후손 제공들이 시와 부, 기문 약간 편을 옛 상자와 흩어진 종이 가운데서 수습하여 목판으로 새겨 세상에 간행하였다. 이윽고 후손 재홍(在洪), 재우(在禹). 우현(禹鉉) 등이 당일 간행할 때 혹 고증과 교감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이에 더욱더 증정(證訂)하고 윤색(潤色)하여 거듭 간행하여 멀리 전할 계획으로 삼았다.오호라! 이것은 그 책을 만든 것이 엉성하고 적료(寂寥)하여 선생께서 평소 온축한 것을 발명하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 그러나 한 갈고리만 들어보아도 좋은 쇠는 와력(瓦礫)16)이 아님을 알 수 있고 한 가지만 꺾어보아도 단계(丹桂)는 저력(樗櫟)17)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고을 인사들이 추모하고 상상하는 조금의 뜻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湖南文獻之地。先進長德可師慕者。磊落相望。若吾鄕故持平遯齋鄭先生。亦其人也。先生早師金佔畢齋寒暄一蠹濯纓秋江諸賢。爲道義交。此是東方淵源一條正脈也。其口傳心授。眞詮要訣。必有流傳於鄕井庠塾襟紳章掖之間。而熙往穰來。聲韻愈邈。惟支石淸風。海望明月。依然於杖屨之所。而令人有想像不盡之感。昔在癸亥之年。後孫諸公。收拾詩賦記文若干篇於舊篋散紙中。刻之棗梨。行之于世。旣而後孫在洪在禹禹鉉。以當日之役。或不無考校未精之歎。於是更加證訂而潤色之。重行釐刊。以爲傳遠之計。嗚乎。此其爲書。零星寂寥。有不足以發明先生平日之蘊。然擧一鉤而知良金之非瓦礫。折一枝而知丹桂之非樗櫟。此可以慰鄕人士追想萬一之意云爾。 돈재집(遯齋集) 정여해(鄭汝諧, 1450~1520)의 문집이다. 1917년 1책의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정여해는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으로, 자는 중화(仲和), 호는 돈재,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일두(一蠹) 정여창(丁汝昌)의 4종제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삭주 교수(朔州敎授),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말한다. 자는 계온(季昷)ㆍ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9년(세조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은 무오사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호이다. 자는 대유(大猷),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 1480년(성종11) 사마시에 합격, 1494년(성종25)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이 된 후 군자감 주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인하여 희천(熙川)과 순천(順天)으로 유배되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사사(賜死)되었다. 관련 자료로는 《경현록(景賢錄)》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 파직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1504년에 사망한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이다. 자는 계운(季雲), 다른 호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주로 언관에 재직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 도왔다. 1498년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일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저서로는 《탁영집》이 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백공(伯恭), 다른 호는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소릉(昭陵 문종의 비 권씨의 능) 복위를 상소한 일이 있다 하여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이 좌승지에 추증하고, 숙종 때에는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다른 생육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정종(正宗) 때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희희양양(熙熙穰穰) 이익 추구를 위해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는 모습을 형용한 말인데, 여기서는 세월이 지나간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사기》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천하가 희희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양양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天下熙熙, 皆爲利來, 天下壤壤, 皆爲利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양(穰)과 양(壤)은 통용이다. 지석강(支石江)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강이다. 해망산(海望山)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에 있는 산이다. 와력(瓦礫) 부서진 기와나 벽돌 조각으로, 쓸모없거나 하찮은 것을 비유한다. 저력(樗櫟)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말하는데, 이 나무들은 재목이 될 수 없는 쓸모없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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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정씨 쌍효 정려기〉 뒤에 쓰다 書河東鄭氏雙孝旌閭記後 내가 태어나 겨우 일을 살필 때 이미 같은 고을의 신기리(新機里)에 어진 정 효자(鄭孝子) 형제가 있다는 것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 그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절개는 자자하게 전해져 한 고을 인사들 중 노소(老少)나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믿어 기뻐하고 참으로 복종하며 사랑하여 사모하고 가상히 여기지 아니함이 없어 마치 자신에게서 나온 것 같이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모르겠으나 효자는 어떻게 닦아 이런 평가를 얻었는가?일찍이 보건대, 순고(淳古)한 시대에는 인륜이 밝고 풍속이 바른데도 충효가 역사에 전해지는 것은 겨우 적료하여 몇 명뿐이었고, 시대가 내려와 말세에 이르러서는 인륜과 풍속이 모두 옛날과 같지 못한데도 충효가 마을과 향리에 드러난 것은 두루 알아 다 셀 수가 없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대저 말세에는 허위가 불어나 사사로움을 따라 좋아하는 것에 아부하니 그 폐단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오직 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덕을 좋아하는 천만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은 또한 거의 없고 겨우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께서 민자건(閔子騫)의 효를 칭찬하기를 "효성스럽도다!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 형제의 말에 이간하는 말을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민자건의 발아래 일컬을 만한 지극한 행실이 많을 뿐만이 아닐 것인데 이에 단지 이간하는 말이 없다는 것으로 말하였다. 부성(孚誠)이 이르는 바에 원수도 복종시킬 수 있고 허위(虛僞)가 있는 바에는 어린 아이도 속이기 어려우니, 이것이 인심의 향배를 보고 그 효를 알 수 있는 까닭이다.그렇다면 정공 형제의 효는 한 고을 인사들이 도모하지 않고도 함께 일컬어 다른 말이나 이간하는 말이 없는데 이르렀으니, 가깝지 않겠는가.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 거론하여 말해서 훗날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10년 동안 병을 시중든 정성과 칠순의 나이에 몸을 훼손한 절도 및 다사들이 수령에게 천거하여 조정에서 정려를 내려 포상한 은전 같은 것은 지주(知州) 윤 후(尹侯)가 찬술한 것에 갖추어져 있으니, 중첩할 필요가 없다. 余生而纔省事。已聞同鄕新機里有鄭孝子兄弟之賢久矣。其至行偉節。流傳藉藉。而一鄕人士。無老無少。無愚無賢。莫不信悅誠服。愛慕嘉賞。不啻若出於自己。未知孝子何修而得此。竊嘗觀夫淳古之世。人倫明風俗正。而其忠孝之傳於靑史者。僅寂寥若而人。降而至於叔世。人倫風俗。皆不古若。而忠孝之旌於閭里者。不可周知而悉數之。其故何歟。大抵末路滋僞。循私阿好。其獘何限。而惟其出於千萬人秉彛好德之口者。則亦未可不謂絶無而僅有矣。孔子稱子騫之孝曰。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在子騫脚下。其至行可稱者。不啻多矣。而乃只以無間言言之。孚誠所格。仇讐可服。虛僞所在。孩提難欺。此所以觀人心向背。而其孝可知也。然則公兄弟之孝。至於一鄕人士不謀同稱。而無異言間辭。則不其幾矣乎。此在今日。不可不擧而言之。以告後之秉史筆者焉。若其十年侍疾之誠。七耋致毁之節。及夫多士薦剡朝家旌褒之典。具在於知。州尹侯所撰。不必架疊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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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선생의 《답문류편》1) 발문 蘆沙先生答問類編跋 성현이 흥기하여 하늘의 뜻에 앞서 사람을 깨우치지 아니하였고, 또한 때를 따라 가르침을 세웠다.2) 이 때문에 풍기(風氣)가 열리자 서계(書契)가 만들어지고, 대박(大樸)3)이 흩어지자 육경(六經)이 지어지고, 세교(世敎)가 쇠퇴하자 사서[四子]가 저술되었다. 성인이 멀어지고 말씀이 인몰되자 낙건(洛建)4)의 여러 철인들의 책이 나왔고, 낙건의 뒤에 태어났으니 오직 마땅히 그 설을 삼가 지키면 되는데 어찌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 의론이 멋대로 결정되는 것이 이 때보다 심함이 있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 류편(類編)의 책이 나온 이유이다.선생의 학문은 천지를 포괄하여 한 치 한 푼을 분석하여 곧장 궁구하여 근원에 도달하고 밝게 통하여 끝이 없으니, 모든 천하 시비의 천차만별인 것이 깨끗이 씻고 다시 고쳐서 알맞고 적당하게 함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아래로는 학자들이 추향하는 문을 바르게 하고 위로는 낙건의 여러 철인, 사서, 육경의 뜻을 밝혔으니,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계되어 생민(生民)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말들이었다. 태산은 우러르기 어렵고 은미한 말은 잃어버리기 쉬우니, 여러 사람들이 수집하기를 도모하여 간행하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사문(斯文)의 깊고 원대한 사려이다.오호라! 책을 펼쳐 봄에 숙연하여 선생께서 자리에 계시는 듯하여, 당일에 듣지 못한 것이 지금 모두 여기에 있으니, 미진한 뜻을 더욱 궁구하고 옛 학업을 힘써 마쳐 대의(大義)가 70명의 제자에게서 민멸되게 하지 않는다면,5) 이른바 "부처의 은혜를 갚는다."6)라는 것이 여기에 있고, 오늘의 일이 거의 뜻은 잃고 말만 전하는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聖賢有作。不先天而開人。亦因時而立敎。是以風氣開而書契造。大樸散而六經作。世敎衰而四子著。聖遠言堙。洛建群哲之書出。生於洛建之後。惟宜謹守其說。而何義理晦塞。議論橫決。未有甚於此時。此類編之書所以出也。先生之學。包圍天地。剖析錙銖。直窮到源。洞澈無彊。凡天下是非。千差萬別。無不有以刷滌更張。稱停的當。下以正學者趨向之門。上以明洛建群哲四子六經之旨。參天地關盛衰。有生民不可無之言也。泰嶽靡瞻。微言易失。僉謀蒐輯。以至鋟梓。誠斯文深遠慮也。嗚乎。開卷肅然。先生在座。當日所未聞者。今皆在是。益究餘蘊。勉卒舊業。使大義不泯於七十子之身。則所謂報佛恩在此。而今日之役。庶不爲失意而傳言也。 노사 선생(蘆沙先生)의 답문류편(答問類編)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문인들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편지를 별도로 모아 내용을 분류해 엮은 문답서이다. 1891년(고종28) 기양연(奇陽衍)·정재규(鄭載圭)·정의림(鄭義林) 등의 문인들에 의해 목활자본으로 편집·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성현이……세웠다 정이(程頤)가 〈춘추전 서(春秋傳序)〉에 나오는 말을 변용하였다. 《近思錄 卷3 致知》 대박(大樸) 원시의 질박한 큰 도를 가리킨다. 낙건(洛建) 낙양(洛陽)과 건양(建陽)을 말한다. 낙양은 송(宋)나라 때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던 곳이고, 건양은 주희(朱熹)가 살던 곳으로, 정주학(程朱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대의(大義)가……않는다면 《대학혹문》의 "70명의 제자가 미처 죽기도 전에 공자의 대의가 이미 어그러졌다.[不待七十子喪, 而大義已乖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처의 은혜를 갚는다 《주자대전》 권36 〈답진동보(答陳同甫)〉에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진찰을 받든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명분상 부처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다.[佛者之言曰 : 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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