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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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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정대부 좌승지 매곡 정공 유사장 贈通政大夫左承旨梅谷鄭公遺事狀 정복현(鄭福鉉) 군이 그 부형(父兄)의 명으로 그 증대부(曾大父, 촌수가 먼 증조 항렬의 남자) 매곡(梅谷)공의 유적을 받들고 와서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군(君)은 나와 종유하였으니 그 말을 참으로 모른 척 할 수가 없었고, 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인지라 그 유풍과 여운이 귀에 익숙하고 마음으로 사모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감히 내가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는 원상(元相)이고, 자는 현직(賢直)이며, 매곡(梅谷)은 그의 호이다. 정씨의 계파는 하동(河東)에서 나왔으며, 밀직사(密直司)를 지낸 휘가 국룡(國龍)을 비조로 삼았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가 인귀(仁貴)라는 분이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참봉을 지낸 휘 주유(由周)를 낳았으며, 휘 주유가 현감을 지낸 휘 지영(之英)을 낳았다. 휘 지영이 호가 둔재(遯齋)인 휘 여해(汝諧)를 낳았는데, 점필재(佔畢齋)8)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정일두(鄭一蠹)9)와 김한훤(金寒暄)10)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4대를 지나서 호가 송암(松庵)인 휘 흘(忔)이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공에게 5대가 된다. 고조는 휘 문규(文奎)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증조는 복채(復釆)이다. 조부는 탁(鐸)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아버지는 양엽(陽曄)으로 대대로 문행이 있었다. 어머니는 선산 정씨(先山鄭氏) 내광(來光)의 따님으로, 정조 신축년(1781, 정조5)에 능주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순실하고 명민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가(名家)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가르치고 기르는 데 갖은 방법을 다 하였는데, 하나하나 그대로 따르면서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8세에 《소학》을 배우다가 7세에 남녀가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글에 이르러서 이에 말하기를, "나는 지금 8세인데 7세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녀의 예를 분별하고 잡스러운 놀이를 하지 않았으며 비루하고 속된 말을 하지 않았고 날마다 부모를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있으시면 마음으로도 근심하고 얼굴빛으로도 근심하여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약을 지으며 옷에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비록 특이한 산물이거나 구하기 힘든 약재라도 병에 이롭다는 것은 정성과 힘을 다해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이 없었다. 혼인하여 부인을 맞이함에 부모가 분가시키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분가하는 것도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부모가 살아계신데 분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매우 슬퍼하여 거의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렀고, 장례의 모든 도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라 유감이 없게 하였다. 기일을 당하여서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고, 엄숙히 재계하고 깨끗하게 하여 마치 살아계신 듯이 여기는 정성을 다하였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었고, 출입을 간소히 하였다. 재주는 문학에 뛰어났으나 부귀영달을 꾀함이 없었으며, 집이 본래 가난하였으나 봉록의 이로움에 뜻이 없었다. 오직 몸을 검칙(檢飭)하고 행실을 닦는 것으로 구경(究竟)11)의 계책을 삼았으니, 이 때문에 자손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향리에서 그 의리에 감복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군자다운 어른이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철종 계축년(1853, 철종4)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산(莘山) 건너 대방(大坊)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뒤에 자손이 장수하고 귀하게 되어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숙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 복헌(復憲)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범환(範煥)·영환(英煥)·수환(壽煥)·달환(達煥)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선을 쌓는 집안에 남은 경사가 있다."12)라고 하였다. 자손에게 남은 경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선조가 선을 쌓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종사(螽斯)13)와 초료(椒聊)14)처럼 자손이 더욱 번성하였고, 효우와 문학의 기풍이 계속해서 실추되지 않았으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鄭君福鉉。以其父兄命。奉其曾大父梅谷公遺蹟。來謁狀行之文。君從余遊。其言固難恝。公吾鄕先進也。其遺風餘韻。慣於耳而慕於心久矣。豈敢以非其人辭。公諱元相。字賢直梅谷其號也。鄭氏系出河東。以密直諱國龍爲臭祖入。我朝。有諱仁貴戶曹參判。是生諱由周參奉。是生諱之英縣監。是生諱汝諧號遯齋受。業于佔畢齋門。與鄭一蠹 金寒暄爲道義交。四傳諱忔號松庵丙子擧義。贈判尹。於公爲五世。高祖諱文奎嘉善。曾祖諱復釆。祖諱鐸。贈司僕寺正。考諱陽曄。世有文行。妣先山鄭氏來光女。以正宗辛丑生公于綾州莘山里。公以醇實開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有以早敎豫養者。無所不至。而一一遵循。未嘗有違。八歲授小學。至七年男女不同席之文。乃曰我今八歲而不知七歲之敎乎。自此別於男女之禮。不作戱雜之遊。不出鄙褻之語。日侍親側應對惟謹親有疾。心憂色沮。露禱合藥。衣不解帶。雖異產僻材。可利於病者。殫誠竭力。求無不得。及成昏納婦。父母欲爲之分炊。公曰兄弟分炊。本非美事。況父母在而可乎。父母奇而聽之。執喪甚哀。幾至傷生。送終凡具。一違禮制。俾無餘憾。遇忌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慕。齊肅明潔以盡如在之誠。平居寡言笑。簡出入才優文學而無摹乎榮貴。家素貧窶而無意乎祿利。惟以勅身修行爲究竟計。是以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知不知。無不以君子長者稱之。哲宗癸丑二月十八日卒。葬莘山越大坊坤坐原。後以孫壽貴。贈左承旨。 配淑夫人淸道金氏復憲女。生四男。範煥英煥壽煥達煥。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有餘慶。而其祖先之有積善可知也。今距公之世久矣。而螽斯椒聊。愈爲蕃衍。而孝友文學之風。繼繼不墜此豈無所自而然哉。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자는 계온(季昷) 혹은 효관(孝盥)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3년(단종1)에 진사가 되고, 1459년(대조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함양 군수,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가 백욱(伯勗), 본관이 하동이며, 일두는 그의 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다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0년(성종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었다.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강학에 전념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 되었는데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궁극(窮極) 구경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궁극에 이르는, 철저하게 체득하는, 완성에 이르는, 최후의 목적 등의 뜻을 갖는바, 여기에서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 혹은 최고의 원리(原理)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자전서(朱子全書)》 권1 학일(學一) 〈소학(小學)〉에 "세간의 온갖 일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인 만큼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궁리하고 수신하는 것이야말로 구경법이라고 하겠다.[世間萬事, 須臾變滅, 皆不足置胸中. 惟有窮理修身, 爲究竟法耳.]"라고 하였다. 선을……있다 조상의 적선(積善)에 대한 보답으로 후손이 경사(慶事)를 받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종사(螽斯) 메뚜기로, 자손들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螽斯)〉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화목하게 모여드니, 의당 네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리라.〔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초료(椒聊) 산초나무로, 열매가 많이 달리기 때문에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한다. 《시경》 〈당풍(唐風) 초료(椒聊)〉에 "초료의 열매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네. [椒聊之實, 蕃衍盈升.]" 하였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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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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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계은 오공 유사장 溪隱吳公遺事狀 공의 성은 오씨(吳氏), 휘는 치상(致祥), 자는 성로(聖老), 호는 계은(溪隱)이며, 그 선조는 보성사람이다. 고려조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이 그의 시조이다. 6대가 지나 휘 현필(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고, 휘 안주(安宙)는 호가 봉은재(鳳隱齋)로 율곡 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낳은 휘 방한(邦翰, 1574~1593)은 죽천(竹川) 박선생(朴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임진년 전란에 진주(晉州)에서 용맹을 떨쳐15)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진찰(震札)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후유(厚有)는 호가 석계(石溪)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장원(章元)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석윤(錫胤)이며, 생모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연(必鍊)의 따님으로 순조 기사년(1809, 순조9) 11월 8일에 능주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기량이 크고 넓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9세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이 지나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그 대인(大人)이 생명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매번 위로하여 억누르니, 이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곡을 하지 못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공이 몸소 집안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여가에 글공부에 힘써 정해놓은 과정(課程)을 폐하지 않았다. 소후모(所後母, 후사로 들어간 집의 양어머니) 김씨는 성품이 준엄하여 화합하기 어려웠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순종하니 마침내 기뻐하는 데16)에 이르렀다. 백씨(伯氏) 지상(志祥)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책을 물려받아 공부하였으며17) 서로 우애함이 매우 돈독하여 재산과 집물(什物, 집안 살림의 온갖 세간)이 있으나 없으나 공유하였다. 매부(妹夫) 김씨 집안이 공포(公逋)18)가 너무 많았으므로 공은 어버이께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자기 땅을 팔아 그 체납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밭과 집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도록 하고 함께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안에 화재(火災)를 당한 자가 있거든 공이 물력(物力)을 내어 집을 지어주고 흩어져 사는 일이 없게 하였다. 남에게 돈을 내어주었다가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한 것은 공이 대인(大人)에게 아뢰어 그 문서를 불태웠다. 전후로 상을 당하자 애훼(哀毁)함이 예제(禮制)에 지나쳐 정리(情理)로나 예법(禮法)으로나 모두 지극하였다. 글을 읽다가 격언과 중요한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못하면 곧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몸가짐이 법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예가 있으며, 사람을 접함에 의(儀)가 있고, 일을 처리함에 방도가 있어 모든 것을 시행함에 환하게 조리를 갖추었다.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고 깊이 스스로 숨어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권문(權門)에 출입하지도 않았다. 오직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닦는 것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부춘(富春)의 칠송리(七松里)에 집을 짓고 계은(溪隱)이라 자호(自號)하고는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연하에 유유자적하면서 초연히 세상을 벗어날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고산 임공(鼓山任公)19)의 문하에 한 번 찾아가서 여러 날을 강론하고 토론하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장수(長壽)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곧이어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 무인년 8월 16일에 생을 마쳤으며,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20) 마을 뒤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합봉하였다. 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경우(警禹)의 따님으로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하였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태(壽泰)·수화(壽華)·수형(壽衡)·수영(壽泳)·수기(壽奇)이며, 딸은 대구 배달진(裴達鎭)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자성(滋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몽섭(蒙燮)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장섭(長燮)과 덕섭(德燮)이며, 셋째 집의 손자는 명섭(命燮)과 경섭(景燮)이고, 넷째 집의 손자는 문섭(文燮)과 인섭(仁燮)이며, 다섯째 집의 손자는 원섭(元燮)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효우(孝友)의 행실과 삼가고 성실한 풍도가 향리 인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송(傳誦)되었으니 지금 장섭(長燮)의 청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公姓吳氏。諱致祥。字聖老。號溪隱。其先寶城人。麗朝文襄公諱延寵。其始祖也。六傳而諱賢弼。封寶城君。諱安宙號鳳隱齋。受學于栗谷李先生之門。贈吏曹參判。是生諱邦翰。受學于竹川朴先生之門壬辰之後。立憧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七世高祖。諱震花。贈戶曹參議。祖諱垕有號石溪僉樞。贈戶曹參判。考諱錫永號竹湖。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章元女。生考諱錫。妣咸陽朴氏必煉女。純祖己巳十一月八日。生公于綾之七松里。姿相粹美。器量寬弘。幼有至性。事親克孝。九歲遭生庭內艱。擗踊幾絶。其大人慮其傷生。每慰抑之。是以不敢任情號哭。家甚貧。公躬幹凡務。以供甘旨。餘力讀書。不廢課程。所後母金氏。性峻難諧.至誠承順。竟底豫。與伯氏志祥。同案連業。友愛甚篤。財産什物。有無共之。妹夫金氏家。公逋甚多。公恐貽親憂。潛賣已土以脫其逋。又備給田廬。使之安業同隣。二家有被火災者。公出力營構。俾無離散。出錢於人而積年未捧者。公稟於大人。焚其券。遭前後艱。哀毁過制。情文兩至。讀書至有格言要誨。擊節嗟賞曰。若不如此。便不成人。平居持身有法。治家有禮。接人有儀。處事有方。以至凡百施爲。莫不粲然有條。杜門斂迹。深自鞱晦。不見要人。不到要門。惟以窮經硏理。修身勅行。爲身家究竟計。築室於富春之七松。自號溪隱。逍遙文酒。徜徉煙霞。超然有遺世之象。嘗一造鼓山任公之門。講討數日而歸。以壽除僉樞。尋陞同知。戊寅八月十六日考終。契丹陽面多年富村後麓巽坐原。合封。配豐山洪氏警禹女。甚得婦道。生五男二女。男壽泰壽華壽衡壽泳壽奇。女適大邱裴達。鎭坡平尹滋城。長房孫蒙燮。二房孫長燮德燮。三房孫命燮。景燮四房孫文燮仁燮。五房孫元燮。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孝友之行。謹慤之風。爲鄕里人士所傳誦。今於長燮之請。有不敢辭, 용맹을 떨쳤고 원문의 '입근(立慬)'은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기뻐하는 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순 임금이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자 고수가 기뻐하게 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가 교화되었으며,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의 부자의 도가 정해졌으니, 이것을 일러 대효라고 하는 것이다.[舜盡事親之道而瞽瞍底豫, 瞽瞍底豫而天下化, 瞽瞍底豫而天下之爲父子者定, 此之謂大孝.]"라고 하였다. 같은……공부하였으며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 〈형제(兄弟)〉에 "자식들이 어릴 적에, 부모는 왼쪽에서 손잡고 오른쪽에서 끌며, 앞으로는 품에 안고 뒤로는 소매를 잡는다. 밥은 같은 밥상에서 먹고, 옷은 물려 입으며, 공부는 형이 보던 책을 그대로 쓰고, 놀 때는 같은 방소로 함께 간다.[方其幼也, 父母左提右挈, 前襟後裾. 食則同案, 衣則傳服, 學則連業, 遊則共方.]"라는 말이 나온다. 공포(公逋) 국가에 빚을 지거나 또는 국가의 돈을 축내는 것을 말한다. 고산 임공(鼓山任公)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ㆍ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지자 1858년(철종9)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4년(고종11) 대사헌이 되고 이어 좨주(祭酒)가 되었다. 천주학을 극력 배격했다.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ㆍ《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 단양마을은 원래 템부라 부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다년부(多年富)라고 했으며 한편으로 점촌이라 하였는데 단양마을의 원래의 뜻은 도자기를 굽던곳을 불무골 또는 불무실이라 하는데 바로 불무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불무 = 붉다 = 단(丹)」, 「골, 또는 실자는 마을을 의미하는 양(陽)자를 각각 취하여 단양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된다. 1896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전라남도 능주군 단양면이었으나, 1913년 능주군의 폐지로 화순군 단양면,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변경에 의해 화순군 춘양면(春陽面) 양곡리(陽谷里)(장곡리, 단양리, 해하리)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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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성균관 대사성 신재 조공 유사장 成均館大司成愼齋趙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씨(趙氏), 휘는 림(琳), 자는 백원(伯瑗), 호는 신재(愼齋)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고려 평장사 휘 조정(趙鼎)21)이 족보에 오른 시조가 된다. 덕곡 선생(德谷先生) 휘 승숙(承肅)이 그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종례(從禮), 호가 율정(栗亭)으로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염(琰)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경서에 밝고 행실이 조촐하여 세상에 추중을 받았다. 아버지는 휘가 계조(繼祖)이며, 세상에 풍암처사(楓庵處士)라고 불리었고 힘써 배우고 독실히 행하며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공이 태어난 간지(干支)는 산일(散佚)되어 전하지 않는다. 빼어나고 맑으며 총명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조예가 있고 자라서는 덕이 있어 우뚝하게 자신을 세움이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에 진사가 되고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병과(丙科)에 뽑혀 양덕(陽德)·흥해(興海)·무주(茂朱)의 현감을 지냈으며 재차 청성(靑城)을 맡았고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관직에 임하여서는 집안일처럼 처리하였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청송(靑松)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한가로이 지냈다. 일찍이 시(詩)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바위 곁의 초가 정자 신령한 골짜기에 있는데 (巖上茅亭洞壑靈)정자에 올라보니 비와도 좋고 개어도 좋아라 (登臨宜雨又宜晴)고향의 형승은 노년을 보낼만하니 (故國形勝堪終老)부질없이 홍진 속을 달려 온 이내 몸 우습구나 (浪走紅鹿笑此生)라고 하였다.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과 도의의 교분을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계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나 남원 견소곡(見所谷) 풍산(楓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제주 고씨(濟州高氏) 정랑(正郞) 명손(命孫)의 따님이다. 계배(系配)는 동복 오씨(同福吳氏) 원동(元童)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아들 희광(希匡)은 참봉을 지냈으며 이름이 문행록(文行錄)에 실렸고, 희정(希鼎)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다. 희문(希文)은 교리를 지냈고 호가 월계(月溪)이며, 희무(希武)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덕곡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서 연원하였는데, 도덕과 절의가 우뚝하고 밝아서 끼친 교화와 남긴 공렬이 공에게까지 끊이지 않았다. 공은 풍암처사(楓庵處士)가 아버지가 되고 하서 선생이 벗이 되며, 아들로는 월계공(月溪公) 사형제(四兄弟)가 있는데, 어질었다. 그 성대한 만남과 계술(繼述)의 아름다움이 백세(百世)에 전해졌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손이 영락(零落)하여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이 모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5대손 익제(翼濟)가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해 주길 청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公姓趙氏。諱琳。字伯瑗。號愼齋。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爲登講之祖。德谷先生諱承肅。其高祖也。曾祖諱從禮號栗亭直提學。祖諱琰參奉。明經潔行。爲世推重。考諱繼祖。世稱楓庵處士。力學篤行。隱居不仕。公寅降干支。逸而不傳。以秀爽穎悟之資。生於詩禮法拂之家。幼而有造。長而有德。靳然樹立。大異衆人。成化丙午進士。正德癸酉擢丙科。歷宰陽德興海茂朱。再莅靑城。至成均館大司成。處官如家。視民如子。淸謹廉眞。蔚有聲績。靑松民立詞享之。晩年致仕還鄕。杜門養閒。嘗有詩曰。巖上茅亭洞堅靈。登臨宜雨。又宜晴。故國形勝堪終老。浪走紅塵笑此生。可以見其志矣。與河西金先生爲道義交。往復講磨。源源。不絶。甲午十一月十三日卒。葬南原見所谷楓山癸坐原。配濟州高氏正郞命孫女。系配同福吳氏元童女。四男。希匡參奉。名載文行錄。希鼎承仕郞。希文校理號月溪。希武從仕郞。孫以下不錄。嗚呼德谷之學。淵源圃隱。而道德節義。磊落光明。遺風餘烈至於公而未斬矣。公以楓庵處士爲父。河西先生爲友。在子而有月溪公四昆季之賢。會遇之盛。繼述之美。流傳百世。曷不偉然。子孫零替。其嘉言善行。不盡傳於世。是爲可慨也。已十五代孫翼濟奉家狀。託以不朽。牢辭不獲, 조정(趙鼎) 함안 조씨 시조로, 자(字)는 우보(禹寶)이며, 호는 모당(慕唐)이다. 본래 당나라 사람이었는데, 신라 경애왕(924~927) 때 두 아우인 부(釜)와 당(鐺)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권행(權幸)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931년(태조14)에 고창성(古昌城)에서 후백제 진훤군을 대파하여 동경주현(東京州縣)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으며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咸安)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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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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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참판 행 군자감 주부 백담 최공 유사장 贈兵曹參判行軍資監主簿柏潭崔公遺事狀 공의 성은 최(崔), 휘는 여호(汝箎), 자는 대숙(台叔), 호는 백담(柏潭)으로 낭주(朗州) 사람이다. 휘 지몽(知夢)이라는 분은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시호가 민휴(敏休)인데, 그의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는 우리 조정에 군기소감(軍器小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며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여러 세대를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며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며 좌승지를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결(潔)로 참봉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경남(慶男)으로 판관을 지냈고, 아버지 정언(廷彦)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어머니는 장흥 위씨(長興魏氏) 형(衡)의 따님이다. 생부는 휘가 정준(廷俊)이며, 생모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희열(希烈)의 따님이다. 사나운 호랑이가 뜰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니 바로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월 5일이다. 공은 풍골(風骨)이 빼어나고 지기(志氣)가 크고 넓어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대열을 나누고 대오를 지어 포진(布陣)과 행군(行軍)의 의식을 행하였는데 뭇 아이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서당에 나아가 글을 읽고 남은 날에는 병략(兵略)을 함께 익혔는데, 일찍이 《한서(漢書)》를 읽다가 '마혁과시(馬革裹尸)'22)에 이르러서는 책상을 치고 탄식하기를,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붓을 던지고 무과에 합격하였다. 시험에 임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책략을 변론하니 여러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는데, 감독관이 높은 점수에 뽑아 두며 말하기를, "이번 시험에서 간성(干城)의 재목을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금나라 사람들이 의주를 함락하자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거둥하였다. 공은 주부(主簿)로 원사(元師) 남이흥(南以興)23)을 따라 안주(安州)에 이르러 백상루(百祥樓)24) 아래에서 진을 치고 앞장서 공격하여 적을 무수히 살상하자 적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물러났는데, 얼마 뒤 적들이 병력을 총동원해서 이르자, 공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전사(戰死)하였다. 다만 종과 말만이 그 집으로 돌아와서 지동(枝洞) 뒤 기슭 계좌(癸坐)의 언덕에 의리장(衣履葬)25)하였다. 공훈을 기록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일이 「정묘록(丁卯錄)」과 강화충절비(江華忠節碑)에 실렸다. 부인은 남원 여씨(南原盧氏) 사양(士良)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 상률(尙嵂)과 참봉 상업(尙嶪), 문과 급제한 상헌(尙巘)과 생원 상억(尙嶷)이며, 딸은 이환(李晥)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한제(漢齊)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한우(漢宇), 한주(漢宙)이며, 셋째 집의 손자 한진(漢軫)은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넷째 집의 손자는 참봉을 지낸 한익(漢翼)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금나라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중국을 삼킬 뜻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은 우리나라가 그 허점을 틈타 그 뒤를 밟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당시 의주(義州)의 전투에서 김완(金菀)의 순국이 없고, 안주의 전투에서 만약 공과 김준(金浚)26) 등 여러 현인들이 순절한 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대한 치욕은 굳이 연장되어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27) 명실(明室)의 옥사(屋社)의 화(禍)28)는 굳이 갑신년29)에 멀리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성취한 바는 한 시대와 한 나라의 공이 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의리가 또한 백세(百世)에 찬란히 빛나 길이 전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영락하여 유적이 산일되었으니 이것이 개탄스럽다. 10세손 동민(東珉)과 동섭(東燮)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부탁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公姓崔。諱汝箎字台叔。號柏潭。朗州人有諱知夢封東萊侯謚敏休。其鼻祖也。至諱安雨。我朝軍器小監。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累傳諱湫號蘭溪戶曺參判。生諱致湖號尙德齋在左承旨。公之高祖也。曾祖諱潔參奉。祖諱慶男判官。考諱廷彦別提。妣長興魏氏衡女。生考諱廷俊。妣淸州韓氏希烈女。夢猛虎入庭而産公。卽萬曆壬辰正月五日也。風骨岐嶷。志氣磊落。幼與兒戱。分隊作伍。爲布陣行軍之儀。群兒莫敢違其令。就塾讀書。餘日兼習兵略。嘗讀漢史。至馬革裹尸。擊案而歎曰。大丈夫當如是。累擧不中。投筆登榜。臨試講兵書。辨論籌略。諸人莫及。考官擢置高第曰。今試得干城之才。甲子除訓鍊院奉事。丁卯金人陷義州。車駕幸江都。公以主簿從元師南以興至興安州。陳于百祥樓下。挺身奮擊。殺傷無數。賊披靡而退。己而賊悉衆而至。公力戰不屈而死。只有奴與馬歸其家。以衣履葬于枝洞後麓癸坐原。錄勳贈兵曹參判。事載丁卯錄及江華忠節碑。配南原盧氏士良女。生四男一女。尙嵂進士。尙嶪參奉。尙巘文科。尙嶷生員。女適李晥。長房孫漢齊。二房孫漢宇漢宙。三房孫漢軫。孝行著世。四房孫漢翼參奉。曾玄以下不錄。金氏之在瀋陽也。志在於中國而先加兵於我國者。恐我國之乘其虛而躡其後。當時義州之戰。者無金菀之立憧。安州之役。若無公及金浚諸賢之死節。則我國南漢之辱。不必延在丙子。明室屋社之禍。不必遠在甲申。然則公之所就。非止爲一時一國之功。其義又足以輝映百世而不朽也。雲仍零替。遺蹟散逸。是爲可慨也。十世孫東珉東燮持家狀。謁狀行之文。牢辭不獲云, 마혁과시(馬革裹尸) '말가죽에 시체를 싼다'라는 뜻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군 마원(馬援)이 "남아는 마땅히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죽어서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야지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쏘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남이흥(南以興) 1576~16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때 후금의 주력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 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독려하여 용전하다가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백상루(百祥樓) 평안도 안주(安州) 서북쪽에 청천강(淸川江)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있는 누대로,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6년(615)에 건립되었다 한다. 의리장(衣履藏) 유골이 없을 경우 옷이나 신발 등을 가지고 장례를 지내는 것을 의리장(衣履葬)이라고 한다. 김준(金浚) 1582~1627. 본관 언양(彦陽)이며 자는 징언(澄彦)으로 정읍 정문(旌門) 출생이다. 1605년(선조38) 나이 24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발되었고 승진되어 교동 현감(喬桐縣監)으로 나갔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뒤에 여러 벼슬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에 안주 목사 겸 방어사를 지냈고, 안주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신 자결을 하였다.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1636년(인조14)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의 태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같은 해 12월, 청나라는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을 말한다. 명실(明室)의 옥사(屋社) 의 화(禍) 옥사는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1644년 3월에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이 명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의종(毅宗)과 황후 주씨(周氏)가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갑신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멸망한 1644년(인조22)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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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처사 위공 유사장 湖隱處士魏公遺事狀 공의 성은 위(魏), 휘는 상리(相履), 자는 덕희(德希), 호는 호은(湖隱)이다. 시조 휘 경(鏡)은 당나라 학사로 신라에 벼슬하여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회주는 지금의 장흥이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신라부터 고려까지 높은 공훈과 높은 작위가 혁혁히 이어졌는데, 합문기후(閤門祇侯)를 지낸 휘 충(种)에 이르러서는 우리 조정이 하늘에 순응한 처음이었는데, 시중(侍中) 김종연(金宗衍) 등과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30) 곤장형을 받고 먼 지방으로 귀양에 처해졌다. 이분이 휘 진용(悳龍)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고, 휘 진용이 휘 자양(自良)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으며, 휘 자양이 휘 종복(宗復)을 낳았으니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휘 종복이 휘 유형(由亨)을 낳았으니 습독(習讀)을 지냈으며, 장릉(莊陵)31) 말에 바닷가로 은거하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32) 영천(靈川) 신잠(申潛)33)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휘 유형(由亨)이 휘 진현(晉賢)을 낳았으니, 효로 추천받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사가 없어 백씨(伯氏) 진수(晉秀)의 둘째 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진사 휘 곤(鯤)은 호가 당곡(唐谷)이며, 휘 곤이 덕의(德毅)34)를 낳았으니 병조 참의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에 임금을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별칭)까지 호종(扈從)하여 세상에 청계선생(聽溪先生)이라 일컬어졌으며, 죽천사(竹川祠)에 제향하였는데,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정헌(廷獻), 호는 국천(菊泉)으로 진사를 지냈으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동명(東蓂), 호는 상봉(觴峯)으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익무(翊武)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아버지의 휘는 ▣▣으로 문학과 행의가 있어 한 세상에 추존을 받았다. 어머니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목사 성인(成仁)의 증손녀로 유순하고 정갈하며 규범(閨範)이 매우 지극하였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 10월 6일에 부(府)의 옥산(玉山)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 서당에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문리(文理)가 날로 향상되었다. 하루는 촌사(村社)에서 잡희(雜戱,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니 달려가 구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공만이 홀로 가지 않아 서당의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 장차 사자(四子)35)와 성리학과 관련된 많은 책을 밤낮으로 연구해서 의취(意趣)를 다하는 데 힘썼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예절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며, 안부를 묻는 일과 달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여 올리는 일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갖추어드렸다. 늙어서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는데, 쇠하고 늙었다고 스스로를 관대하게 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예제를 따랐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날마다 한 번씩 성묘를 하였고,36)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으니 집안사람들이 그 오고 가는 수고로움을 가엽게 여겨 여막을 무덤 곁에 지어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시묘살이를 한다는 이름을 표방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제삿날이 되면 엄숙히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여 그 정성을 다하고,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정을 다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낮에는 책상을 나란히 하여 공부하고 밤이면 베개를 함께하며 매우 즐겁고 화락하게 지내 늙어서도 변치 않았다. 친척과 벗, 이웃과 향당 간에도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는 일을 때에 따르고 절후에 맞추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늙어서는 더욱 숨어 지내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사절하고 조용하고 묵묵히 수양하여 참다운 마음이 안에서 넉넉하였다.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히 등급37)을 두어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니 성취한 바가 많았다.매번 따뜻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이 되면 한두 명의 오랜 벗들과 한가로이 강호(江湖)에서 거닐며 시를 읊조리고 시원스레 속세를 떠날 의표를 가지고 있었다. 경물을 바라보면 감회가 생겨서 붓 가는대로 적었는데 문자를 수식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대명일월숭정유민(大明日月崇禎遺民)' 여덟 자를 벽에 써서 자신의 뜻을 기록하였다. 자손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유해지면 사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치스러워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만함이 이르게 된다. 교만과 사치가 이르면 패망이 뒤따르는 법이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반성하며 남을 보살피고 외물을 접할 때에도 털끝만큼의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자신이 화락한38) 사람이 되고 집안에 효도하고 삼가는 기풍이 있다면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음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조 병자년 9월14일에 생을 마쳤으며, 남면(南面) 장생원(長栍院) 선영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만진(萬震)의 딸로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다.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인(道仁)이며, 딸은 김봉채(金鳳彩)·윤신동(尹新東)·변정홍(卞廷弘)·마인학(馬仁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영백(榮百)·영직(榮直)·영의(榮義)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포부가 담대하고 넉넉하며 조예가 깊고 치밀하여 우뚝하게 한 시대의 촉망을 받았는데도, 바다 모퉁이에서 숨어 지내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아 확고한 뜻을 동요시킬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유운(遺韻)과 암장(闇章)39)을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하였다. 5세손 계창(啓昌)이 그 아들 대량(大良)을 시켜 행장을 청하였는데, 아, 고금의 감회에 어찌 행장을 쓸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公姓魏,諱相履。字德希。號湖隱。始祖諱鏡。以唐學士仕新羅。封懷州君。懷州今長興。子孫仍貫焉。自羅之麗。崇勳嵬爵。赫赫相承。至諱种官閤門祇侯。當我朝應順之初。與侍中金宗衍等謀復。事覺。杖流遠地。生諱悳龍通德郞。生諱自良通德郞。生諱宗復漢城參軍。生諱由亨習讀。莊陵末。遯處海濱。與南秋江孝溫申靈川潛爲道義交。生諱晉賢。以孝薦。授光陵參奉。無嗣。以伯氏晉秀第二子爲後。諱鯤進士號唐谷。生諱德毅兵曹參議。壬辰扈從龍灣。世稱聽溪先生。享竹川詞。於公爲五世。高祖諱廷獻號菊泉進士贈掌樂院正。曾祖諱東蓂號觴峯贈戶曹參議。祖諱翊武。有隱德。考諱文學行義。見重一世。妣咸陽朴氏牧使成仁曾孫女。柔婉靜嘉。閨範備至。肅廟辛未十月六日。公生于府之玉山第。幼穎悟異於凡常。就塾授課。文理日就。一日村社設雜戲。莫不奔觀。公獨不往。塾師奇之。及長專心爲己。將四子及性理群書。晝夜硏究。務盡意趣。事親至孝。晨昏定省。未嘗有闕。寒暄之節。甘腰之供。殫誠竭力。無不畢給。老而遭故。不以衰艾自恕。一從禮制。旣葬而日一展省。風雨不廢。家人閔其往來之勞。欲爲之結盧墓側。公止之曰。吾不欲有盧墓之名。遇忌諱之辰。齊肅明潔以盡其誠。悽愴怵惕以盡其情。兄弟六人。晝則連榻。夜則同枕。怡怡湛樂。老而不替。族戚朋友。隣里鄕黨。存訊周恤。隨時及節。未嘗有闕。老益沈晦。謝絶世紛。潛修黙養。眞情內腴。訓進生徒。嚴有科級。循循引誘。多所成就。每當春和秋淸。一二朋舊。逍遙諷詠於江湖之曲。灑然有出塵之標。覽物敍懷。信筆輒寫。而不有拘拘雕飾之意。嘗題大明日月崇禎遺民八字於壁。以識其志。戒子孫曰。富不期奢而奢至。貴不期驕而驕至。驕奢至則敗亡隨至。此理勢之必然。持身省己。酬人接物。亦不可存一毫驕肆之心。使身爲愷弟之人。家有孝謹之風。則其於無忝所生。不其幾矣乎。英宗丙子九月十四日考終。葬南面長柱院先隴乙坐原。配珍原朴氏萬震女。婦德醇備。生一男四女。男道仁。女適金鳳彩尹新東卞廷弘馬仁㶅。孫男榮百榮直榮義。曾孫以下不盡錄。嗚呼。抱負贍富。造詣邃密。偉然爲一時之屬望。而沈淹海曲。終始不渝。有確乎不可拔者。遺韻闇章。追仰彌至。五世孫啓昌。伻其子大良。請狀行之文。嗚呼。緬古感今。豈以非其人辭。 시중……발각되어 김종연(金宗衍, ?~1390)은 고려 시대의 무인이다. 1390년(공양왕2)에 김종연이 이방춘(李芳春)ㆍ김식(金軾)ㆍ이중화(李仲和)ㆍ윤귀택(尹龜澤) 등과 함께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이성계를 죽이기 위해 모의를 꾀하다 윤귀택의 밀고로 발각된 사건이다. 이때 김종연은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위충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高麗史 卷45 恭讓王2年》 장릉(莊陵)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능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4리에 있다. 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양 출신으로 김종직(金宗直) 의 문인이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전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고 상소한 일로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중종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숙종 때 고양의 문봉서원과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고, 다시 정조(正祖)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추강집(秋江集)》ㆍ《추강냉화(秋江冷話)》ㆍ《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신잠(申潛) 1491~155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이며, 신종호(申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파방(罷榜)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던 중에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덕의(德毅) 위덕의(魏德毅, 1540~1613)는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임금을 알현하니 군신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으로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녹훈(錄勳)되고 사후에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추증(追贈)됐다. 사후 죽천사(竹川祠) 입사(立祠)와 함께 주벽(主壁)으로 배향되고, 또 광주광역시 대촌동 황산사(黃山祠)에도 배향됐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장구》, 《중용장구》, 《맹자》를 가리키는데, 이 저술들의 저자는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로서 4명의 이름에 자(子) 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사자(四子)'라고 칭한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에 "사자는 육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요, 《근사록》은 사자로 올라가는 계단이다.〔四子六經之階梯 近思錄四子之階梯〕"라는 말이 실려 있다. 한……하였고 주희(朱熹)는 "상주가 장례를 치르고 나면 신주가 이미 집으로 돌아와 집이 거상(居喪)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상주는 더 이상 산소 옆의 여묘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끝내 잊히지 않으면 아우들에게 묘소 옆에서 머물며 때로 한 번씩 성묘하게 할 수 있다.[主喪者旣葬當居家 蓋神已歸家 則家爲重 若念不能忘 却令弟輩宿墓 時一展省可也]"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朱子大全 卷63 答胡伯量》 등급 원문의 '과급(科級)'은 단계를 밟아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근사록 서제(近思錄書題)〉에 "강학하는 방법과 일상생활에 몸소 행하는 실제로 말하면 모두 등급이 있으니, 이를 따라 나아가 낮은 데로부터 높은 곳에 오르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에 이른다면 거의 이 책을 찬집한 본의를 잃지 않을 것이다.[講學之方, 日用躬行之實, 具有科級, 循是而進, 自卑升高, 自近及遠, 庶幾不失纂集之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화락한 원문의 '개제(愷弟)'는 '개제(豈弟)'라고도 하며 기상(氣象)이 단아하고 화락함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 〈한록(旱麓)〉에서 문왕(文王)의 덕을 칭송하며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하였다. 암장(闇章)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의 준말로, 군자는 도덕이 심원하여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지만 속에 있는 도덕이 안으로부터 절로 우러나와 그 광채가 날로 드러나 빛난다는 뜻이다. 《中庸章句 第33章》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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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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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운와 처사 정공 유사장 贈童蒙敎官朝奉大夫雲窩處士鄭公遺事狀。 아, 호남에 사는 우리 종족은 그 숫자가 적지 않지만, 문망(門望)과 가운(家運)이 영락(零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었다.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알려지고 인망이 있으면서 근세에 훌륭한 자는 오직 운와(雲窩)40) 처사일 것이다. 공의 휘(諱)는 홍규(弘規), 자는 사건(士建)이다. 정씨는 계통이 광주(光州)에서 나왔고, 고려 찬성(贊成) 휘 신호(臣扈)41)를 비조(鼻祖 시조(始祖))로 삼는다. 대대로 높은 벼슬과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다. 국조(國朝) 중엽에 이르러서 휘 질(晊)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휘 응종(應鍾)42)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휘 서(犀)43)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휘 인녕(仁寧)44)은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휘 만근(萬謹)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니, 이들은 공의 5대 이상이다. 고조 휘 금(錦)은 참의(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득생(得生)은 벼슬이 별제(別提)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익(時益)은 수직(壽職)45)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부친 휘 광훈(光勳)은 호가 남당(南堂)인데 은덕(隱德)이 있어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세위(金世緯)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고, 모친 숙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전익겸(全益謙)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고요하고 아름다워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갖추었으니 영종(英宗) 계유년(1753) 12월 26일에 나주의 거평리(居平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전씨가 하종(下從)46)을 결의(決意)하여 전혀 음식을 드시지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간하여 마침내 정성으로 감동시켜 모친의 마음을 돌렸다. 평소에 시봉(侍奉)할 때 정성과 삼감을 모두 다하였고, 앉고 먹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하루는 모친에게 묻기를 "선고(先考)께서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을 업으로 삼았습니까?"라고 하니, 모친이 "서책을 읽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사람들이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눈물을 떨구며 "소자가 마땅히 선업(先業 선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이고 게을리하지 않아 성동(成童 15세가 된 사내아이)에 이르러 경사(經史)를 모두 통달하고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나고 아름다웠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원근의 훌륭한 명망이 있는 사우(士友)들과 종유하여 연마하고 담금질하여 더욱 확충시켜 나아갔다. 유학(遊學)하여 밖에 있더라도 반드시 열흘에 한 번은 모친을 찾아뵈었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이를 저장해두었다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드렸다. 부모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득실(得失)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 정문(程文)47)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고인(古人)의 학문하는 차례에 따라 가르쳤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불훼(不毁)의 나이로 극도로 몸을 훼손하는 데에 잘못하였고,48) 생강과 계피49)를 입에 넣지 않았고, 최마복(衰麻服)50)을 몸에서 벗지 않았으며,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여막(廬幕)에서 끊어지지 않았는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애통해하는 것이 조괄(祖括)51)하는 때와 다름이 없었고, 아침마다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묘(墳墓)에 전배(展拜)하였으며, 중월(仲月)52)에는 시제(時祭)를 행하였고, 제사를 지낸 뒤에 자손들에게는 《소학》과 《대학》을, 부녀(婦女)들에게는 〈내칙(內則)〉과 《열녀전(列女傳)》을 강하였으니, 내외가 엄격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말년에 한 구역에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雲窩)'라고 편액하고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유유자적하기도 하였으니,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글 36편을 지어 '《운와경필(雲窩警筆)》'이라 하였는데, 그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도와 사람과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은 성현이 남긴 경전을 보좌하여 이 세상을 도와 보탬이 될 수 있으니, 공의 포부와 조예도 이러한 데에서 그 대략적인 줄거리를 대강 짐작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11월 28일에 고종명(考終命)하였으니 향년 84세이고, 백룡산(白龍山) 서쪽 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35년 뒤 경오년(1870) 봄에 도내의 유생 조철호(趙喆浩) 등이 조정에 공을 천거하는 내용으로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고, 가을에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노사(蘆沙)53) 기 선생(奇先生)이 이에 대한 기문(記文)54)을 지었다. 부인 영인(令人)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양엽(李陽燁)의 따님이니 2남 2녀를 낳았고, 계배(系配) 영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이희조(李希祚)의 따님이다. 장남은 정운보(鄭運普)이고 다음은 정운호(鄭運昊)인데 효우(孝友)로 세상에 알려져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장녀는 수원(水原) 최광발(崔光發)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언양(彦陽) 김원택(金元澤)에게 출가했으며, 손자와 증손 이하 약간 명이 있다. 아, 출중하고 비상한 재능으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독서를 궁리하고 격물[窮格]하는 문으로 삼고, 경을 주로 하는[主敬] 것을 지수(持守)의 근본으로 삼았다. 궁격(窮格)을 오래 함에 조리와 두서가 모두 두루 미치고, 지수를 익숙히 함에 법도가 굳게 안정되었으며, 이를 가정에 시행함에 효제(孝悌)가 일어나 행해지고, 이를 고을과 나라에 미루어 감에 신의(信義)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광휘(光輝)를 감추고 천진한 성품대로 분수를 지켜 구림(邱林)의 한적한 물가에서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인간 세상에 천사만종(千駟萬鐘)55)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우리 가문 일대(一代)의 명석(名碩)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남쪽 지방에서 백 년 동안 유림(儒林)의 모범이 될 만하다. 신축년(1901) 봄에 현손 정위석(鄭暐錫)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나를 찾아와 인하여 한마디 부탁하는 말을 하였다. 내가 공경히 받아 삼가 보고 일어나서 "기 선생(奇先生)이 이미 저술한 것이 있고, 여력재(餘力齋)56) 장 선생(張先生)이 또 그 유서(遺書)에 발문(跋文)을 지었으니, 천만세(千萬世) 영원한 공안(公案 관공서의 문안(文案))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어찌 가문 안의 보잘것없는 한 후생(後生)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현자를 사모하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한 가문에서 철식(綴食 배향(配享))하는 상황에 있는 자에게는 어떠하겠는가. 공에게는 진실로 족히 만분의 일도 기릴 것이 못 되지만, 보잘것없는 여생(餘生)의 입장에서는 말광(末光)에 의지할 것을 사모하는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嗚呼。吾宗之居在湖南者。其麗不尠。而門望家韻之零替不振。垂二百餘年于茲矣。若其文學行義之有聞有望。而偉然於近世者。貴惟雲窩處士乎。公諱弘規。字士䢖。鄭氏系出光州。以高麗贊成諱臣扈爲鼻祖。簪纓文學。世有聞人逮至國朝中葉。贈左賛成諱晊。判書諱應鍾。地平諱犀。掌令諱仁寧。贈掌樂院正諱萬謹。寔公五世以上。高祖諱錦贈參議曾祖諱得生官別提贈參判。祖諱時益壽資憲。考諱光勳號南堂。有隱德。贈承旨。妣淑夫人光山金氏世緯女。無育。妣淑夫人天安全氏益謙女。溫仁靜嘉。閨範甚備。以英宗癸酉十二月二十六日。生公于羅之居平里第。七歲遭外艱。全氏決意下從。絶不進飮食。涕泣苦諫。卒以感回親意。平居侍奉。備盡誠謹。坐食進退。不命不敢。一日問于母氏曰。先考在。世所業何事。母氏曰。讀書勅行。人稱善士。公聞之泫然曰。小子當繼述先秦。自是就博受學。刻苦不懈至成童。淹貫經史。詞藻斐蔚。旣冠追從遠近士友有雅望者。磨礱浸淬。以益展拓。遊學在外。必十日一覲。風雨不廢。遇美味。必儲而藏之。待歸而供焉。爲親應擧。不以得失經心。敎生徒。亦不以程文爲急。必依古人爲學之序而授之。遭內艱也。以不毁之年。而過於致毁。薑桂之滋。不入於口。衰麻之服。不釋於身。哭泣之聲。不絶於次。三年如一日。遇忌日。哀痛無異祖括時。每朝謁廟。朔望展墳。仲月行時祭。祭後講子孫以小大學。講婦女以內則列女傳。內外斬斬無有間言。晩築書社一區。扁以雲窩。遊焉息焉。不如年數之不足。著者三十六編。名曰雲窩警筆。其修身齊家之道。酬人應物之方。可以羽翼乎遺經。而裨補乎斯世。公之抱負造詣。亦可卽此而領略其梗槩矣。以憲宗丙申十一月二十八日考終。享年八十四。葬于白龍山西麓甲坐原。後三十五年庚午春道內儒生趙喆浩等剡聞于朝贈童蒙敎官。秋命旋閭。蘆沙奇先生撰其記。配令人陽城李氏陽燁女。擧二男二女。系配令人咸平李氏希祚女。男長運普。次運昊。孝友聞世。贈持平。女長適水原崔先發。次適彦陽金元澤。孫曾以下若干。嗚呼。以若出類不常之才。早自覺悟。以讀書爲窮格之門。以主敬爲持守之本。窮格之久而條緖該浹。持守之熟而規秬堅定。施之家庭而孝悌興行。推之鄕邦而信義著聞。潛光蘊輝。任眞推分。婆娑徜徉於邱林閑寂之濱。而不知入間世有千駟萬鍾之樂也。其偉韻遐躅。不惟爲吾門一代之名碩。而亦可爲南土百年間儒林之標範也。歲辛丑春。玄孫暐錫奉家狀過余。因有一言之託。余祇受而謹閱之。作而曰。奇先生旣有所述。餘力齋張先生又跋其遺書矣。千萬世不朽之公案。無過於此。何待乎門內渺藐一後生之言哉。雖然慕賢好德。他人猶然。況在一門綴食之地。而爲何如耶。在公固不足爲揄揚之萬一。而在區區餘生。思附末光之情。有不能自己云爾。 운와(雲窩) 정홍규(鄭弘規, 1753∼1836)의 호이다. 7세에 부친을 잃고 모친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라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사후에 고종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동몽교관을 증직했다. 문집으로 《운와유고(雲窩遺稿)》가 있다. 정신호(鄭臣扈) 광주 정씨(光州鄭氏)의 시조로, 고려말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걸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 門下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추봉되었다.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응종(鄭應鍾) ?~? 자는 자행(子行), 호는 퇴은재(退隱齋)이다. 부친은 참봉(參奉),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질(鄭晊)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아뢰었고 정란(政亂)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정서(鄭犀) ?~? 자는 비연(斐然)이다.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정인녕(鄭仁寧) 1519~? 중종 39년(1544) 갑진(甲辰)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수직(壽職)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이다. 하종(下從)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는 것을 말한다. 정문(程文) 과거 볼 때 쓰는 일정한 법식의 문장이다. 불훼(不毁)의……잘못하여 이는 거상(居喪)하는 예절을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가 되면 몸을 극도로 훼손하지 말고, 60세가 되면 몸을 훼손하지 말며, 70세가 되면 몸에 최마(衰麻)의 상복(喪服)을 입을 뿐,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집 안에서 거처한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라는 말이 나온다. 생강과 계피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들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반드시 초목의 양념도 있어야 한다.'라고 했으니, 생강과 계피를 말한 것이다.〔曾子曰: '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한 말이 나온다. 최마복(衰麻服) 부모의 상을 당한 상주가 입는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이다. 조괄(祖括) 초상을 치르는 법도이다. 중월(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로, 음력 2월, 5월, 8월, 11월을 이른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이고, 자는 대중(大中)이다. 저서로는 《납량사의(納凉私義)》·《노사문집(蘆沙文集)》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문(記文) 《노사집(蘆沙集)》 권22에 〈효자 운와 정공 정려기(孝子雲窩鄭公旌閭記)〉가 실려 있다. 천사 만종(千駟萬鐘) 4천 마리의 말과 1만 종의 많은 녹(祿)이란 뜻으로, 부귀함을 뜻한다.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 1777~1867)의 호이다. 자는 유장(幼長)이다. 1777년(정조1) 9월 27일 나주  다시면 송촌리(松村里)의 구제(舊第)에서 태어났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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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계암 박공 유사장 溪庵朴公遺事狀 호남은 문헌(文獻)의 땅으로 유현들이 배출되었으니, 고(故) 왕자 사부(王子師傳) 문강공(文康公) 죽천(竹川)57) 박 선생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 선생의 후손 휘 형덕(馨德) 은 호가 완이당(玩易堂)인데 선생이 가정에서 전한 것을 얻어 산양(山陽)의 서쪽에서 도를 강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그 문하에 나아가 자신의 학업을 마친 자가 많았으니, 근고(近故)의 계암(溪庵) 박공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재무(載茂)이고 자는 내실(乃實)이니, 바로 죽천 선생의 8세손이고 완이당에게는 족질이 된다. 정조 정유년(1777) 9월 19일에 관산(冠山) 삼수리(三水里)에서 태어났는데,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고 재기(才器)가 민첩하고 풍부하였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때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과 시격(時格) 및 문장의 각 체에 이르러서는 모두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자, 사원(詞垣)에서 으뜸으로 추앙하여 훌륭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어느 날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유문(儒門)의 사업은 따로 있는데 문사(文詞)를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완이당 선생을 가서 찾아뵙고 학문하는 절도를 들었다. 이때부터 마음을 비워 뜻을 겸손하게 하였고, 전심으로 노력을 다하여 의리(義理)의 깊은 뜻에 침잠하고 본원(本原)의 요점을 잡고 보존하였으며, 연마하고 무젖으며 쌓고 확충시켜 나아가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할 때와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할 때에도 법도를 따라 일찍이 허물이 있지 않았다. 부모를 섬길 때에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고 집상(執喪)할 때에 애훼(哀毁)58)가 매우 지나쳤으며, 3명의 아우와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있고 없는 것을 함께하였다. 평소에 옷깃을 바로 하고 바르게 앉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비록 아이들과 비천한 무리일지라도 따뜻한 말로 자상하게 타일러 성난 목소리를 가하지 않았다. 생도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치지(致知)와 거경(居敬)으로서 체험하고 실천하여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었으니 분명한 성규(成規)가 있었다. 을미년(1835) 3월 6일에 고종명(考終命)하여 살았었던 마을 오른쪽 학송산(鶴松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본관은 진원(珍原)이니, 직제학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9)은 바로 국초(國初)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선비와 고관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광전(光前)에 이르렀으니, 바로 죽천 선생이다. 참봉 만하(萬廈)·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무석(武鍚)·좌승지에 추증된 수원(守遠)·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장근(章根)은 바로 고조 이하 4대의 휘함(諱銜)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세준(張世浚)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이진계(李震啓)의 따님이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니, 공은 바로 장씨의 소생이다. 공의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선정덕(宣廷德)의 따님이고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중흥(重興)과 중회(重會)이고 딸은 관산(冠山) 임채환(任采煥)·진주(晉州) 정방형(鄭邦亨)·진주 정순충(鄭淳忠)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길현(吉鉉)과 명현(命鉉)이며, 증손은 태경(泰敬)·태정(泰禎)·태업(泰業)·태과(泰科)이다. 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된 까닭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이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죽고 난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성함과 쇠함, 빈궁과 영달에 이르러서는 시운(時運)에 따라 우연히 오는 것이니, 그 사람을 논하는 방도가 아니다. 공은 덕망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일찍 스스로 스승을 만나 문로(門路)가 바르고 분명하였으며, 출입하면서 몸에 배어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훌륭하게 이처럼 수립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최고의 사업이고 생순사안(生順死安)60)한 곳이다. 비록 바닷가 궁벽한 마을에 묻혀 살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나에게 있는 것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남긴 여운과 남은 향기가 전해져 사람들에게 있으니, 백세토록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만하다. 湖南文獻之地。儒賢軰出。故王子師傅文康公竹川朴先生。卽其一世。先生後孫。諱馨德號玩易堂。得先生家庭之傳。講道于山陽之西。四方學者。多就其門。而卒其業者。近故溪庵朴公。亦其一也。公諱載茂。字乃實。卽竹川先生八世孫。在玩易堂爲族姪也。正宗丁酉九月十九日。生于冠山之三水里。天姿穎悟。才器敏贍。就傳上學。文理日進。至於功令時格。筆翰各體。無不俱極其精。詞垣推先。聲華藉甚。一日慨然歎曰。儒門事業。自有所在。文詞奚爲。遂往謁玩易堂先生。得聞爲學節度。自是虛心遜志。專意致力。沈潛乎義理之藴。操存乎本原之要。磨礱浸灌。積累展拓。一動一靜一。語一默。遵循規矩。未嘗有過。事父母。忠養備至。執喪哀毁過甚。與弟三人。怡怡湛樂。有無共之平居正衿危坐。不見有怠慢之容。平心率物。不見有暴戾之色。雖在兒侄卑賤軰。溫言諄諄。不以厲聲加之。訓進生徒。必以致知居敬。體驗踐履。循循提誘。的有成規。乙未三月六日考終。葬所居村右鶴松山子坐原。公本珍原人。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卽國初顯祖也。衿紳簪纓。奕世不絶。六傳至諱光前。卽竹川先生也。參奉萬廈。贈司僕寺正武鍚。贈左承旨守遠。贈戶曺參判章根。卽高祖以下四世諱御也。妣興德張氏世浚女。系妣仁川李氏震啓女。皆贈貞夫人。公卽張氏出也。公配寶城宣氏廷德女。生二南三女。曰重興重會。冠山任采煥晉州鄭邦亨晉州鄭涼忠也。孫曰吉鉉命鉉。曾孫曰泰敬泰禎泰業泰科也。嗚呼。人生斯世。其所以爲人者。果何事耶。此是風夜勉勉。死而後已者也.至於陞沈窮通。時爾適爾。非所以論其人也。公生長德門。早自得師。門路端的。出入擩染以至文學行誼偉然樹立如此。此是太上事業。生順死安處。雖沈溣海曲。世不見知。而何損於我之有哉。遺韻餘芬。傳之在人。足令百世起敬。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호이다.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선조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애훼(哀毁)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이다. 1406년(태종6)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에 임명됐고, 이어 세자부(世子傅)·좌정자(左正字), 이듬해에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의 은전을 입었다. 생순사안(生順死安)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가 천리에 따라 순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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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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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양한당 윤공 유사장 養閒堂尹公遺事狀 공의 휘는 방형(邦衡), 자는 완여(完汝), 계통은 파평(坡平)에서 나왔으니, 소정공(昭靖公) 휘 곤(坤)61)의 후손이다. 증조 동정(東貞)은 문학과 효우가 있어 세상에서 남호 처사(藍湖處士)라고 불렀고, 조부는 인탁(仁坼), 부친은 면은(勉殷)이고 호는 학암(學庵)이며, 생부는 중은(重殷)으로 정조 정사년(1797) 6월 1일에 남평(南平) 남석리(藍石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빼어난 외모에 총명하였고 타고난 자품은 뛰어났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봉양할 때 지물(志物)62)을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남은 힘으로 글을 배웠는데 이치를 연구함이 날로 향상되었다. 능주(綾州 화순(和順))로 장가가서 이로 인해 처가살이한 것은 외로이 형제가 적어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났지만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분명히 정해진 계획이 있었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집안일이 절로 안정되어 일과 재력이 점점 풀렸다. 고난 속에서 형통하고 우환(憂患) 속에서 살아 만년(晩年)에 먹고 쓸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그 규모와 경영을 모두 본받을 만하다. 금오산(金鰲山) 아래 집을 지었는데, 삼경(三逕)63)에는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았으며, 날마다 평상복을 입고 그 사이를 소요하였다. 학규(學規)를 세워 마을의 수재들을 가르치고, 동약(洞約)을 세워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부터 상서(庠序)와 학교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에서 지시하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여러 유생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고, 학문의 도는 다만 사람이 일상 생활하면서 마땅히 행하는 것이지만,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이치의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학》의 8조목64)에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처음이고, 《논어》의 사교(四敎)65)에서 문(文)과 행(行)이 우선한다."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 윤규석(尹奎錫) 공이 그 집을 '양한(養閒)'이라고 명명하였으니, 대개 그 뜻을 기록하여 칭찬한 것이다. 계유년(1873) 8월 13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여 고을 동쪽 부춘면(富春面) 대억동(大億洞)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풍산 홍씨는 홍일우(洪一禹)의 따님이고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의진(誼鎭)이고 딸은 송규진(宋奎鎭)에게 출가했다. 의진은 8촌 의진(儀鎭)의 아들 자영(滋英)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고, 딸은 양성종(梁性鍾)에게 출가했다. 자영은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상의(相義)·상석(相奭)·상호(相浩)·상연(相淵)이고, 딸은 홍돈희(洪敦憙)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아, 나의 선인 3명의 형제가 건복(巾服 옷과 갓)과 장구(杖屨 지팡이와 신) 차림으로 서로 왕래할 때마다 먹고 마시며 웃고 담소하면서 지극히 정겨웠는데, 어찌 상해(桑海)66)의 광경이 갑자기 눈앞에 있게 되며 쓸쓸한 여생도 또 몽범(濛氾)67) 시절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예와 지금을 돌아봄에 슬픈 감회를 견디지 못하여 이에 상의의 요청에 끝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邦衡。字完汝。系出坡平。昭靖公諱坤后。曾祖東貞。文學孝友。世稱藍湖處士。祖人坼。考勉殷號學庵。生考重殷。正宗丁巳六月一日。生公于南平藍石里。秀爽穎悟。天姿不群。居貧養親。志物俱至。餘力學文。硏理日就。委禽于綾州地。因以贅寓。盖孤露終鮮。無以爲計也。煢煢漂泊。百苦拂亂。而凡百料理。的育成算。未嘗見其有後役之私。而家務自集。事力稍舒。其所以亨於險阻。生於憂患。爲晩景餉用之地者。其規模經紀。皆可爲法築室金鑿山下。三逕花竹。四壁圖書。日以便服。逍遙其間。立學規以課村秀。設洞約以和隣保。以至庠序學校之地。爲出入風儀。左右指晝者。未嘗不爲鄕人之倚重焉。每誨諸生曰。人生斯世。非學問。無以爲人。而學問之道。只是人生日用所當行者但不學問無以知其理之所在。故大學八條。格致爲始。論語四敎。文行在先。州倅尹公奎錫題其室曰養閒。盖志其意而嘉之也。癸酉八月十三日卒于正寢。葬州東富春面大億洞丙坐之原。配豐山洪氏一禹女。一男一女。男誼鎭。女適宋奎鎭。誼鎭取三從儀鎭子滋英爲後。女適梁性鍾。滋英四男二女。男相義相奭相浩相淵。女適洪敦憙。餘幼。嗚呼。我先人三昆季。巾服杖屨。每相經過。飮食笑語。極其款款。豈知桑海光景。遽在目前。而孤露餘生。又是濛氾時節耶。俯仰今古。不勝悲感之私。玆於相義之請。有不敢終辭。 윤곤(尹坤) ?~1422.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아우 윤향(尹珦)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은 윤곤이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지물(志物) 지(志)는 양지(養志)로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물(物)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8조목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사교(四敎)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네 가지로 가르쳤으니,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하였다. 상해(桑海)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준말로,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될 정도로 세상이 몰라보게 바뀌었다는 뜻이다. 몽범(濛氾) 만년(晩年)을 말한다. 몽범은 해가 지는 곳으로,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몽범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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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곡 처사 배공 유사장 隱谷處士裴公遺事狀 공의 휘는 상섭(相涉), 자는 군방(君邦), 호는 은곡(隱谷)이니, 배씨는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를 시조로 삼는다. 고려조에 휘 현경(玄慶)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서 벼슬은 태사(太師)이고 시호는 무열(武㤠)이다. 휘 운룡(雲龍)은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서 해동 군자(海東君子)로 일컬어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니, 자손들이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정지(廷芝)68)는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을 쳐서 물리쳤고, 탐라(耽羅)를 쳐서 평정했으며, 벼슬은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원우(院宇)69)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성경(成慶)은 벼슬이 통판(通判)인데,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모두 홍의적(紅衣賊)과 싸우다 목숨을 바쳤고, 휘 문우(文祐)는 벼슬이 흥위위(興威衛)이고 호는 회은(晦隱)인데, 고려말에 망복(罔僕)70)하였다. 휘 두유(斗有)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察訪)이고 호는 우재(寓齋)인데, 단종(端宗) 말에 능성(綾城)에 은둔하였으며,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휘 윤덕(允德)은 호가 빙연(冰淵)인데, 효행으로 천거되어 어필 서명(御筆書名)의 포상(褒賞)이 있었고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으며, 휘 경생(慶生)은 진사(進士)로 호가 후송(後松)인데, 인조 갑자년(1624)에 의병을 일으켰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종영(宗泳), 증조의 휘는 득효(得孝), 조부의 휘는 이현(以絢)이고 부친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이찬지(李贊之)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를 잘 갖추었고, 순조 경인년(1830) 윤4월 20일에 능주(綾州) 대곡리(大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얼굴빛이 좋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온량(溫良)하고 화락(和樂)하여 온화한 기운이 사람을 감화시켰다.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공을 사랑하는 한 이웃 노인이 공에게 희롱하는 말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린아이에게 항상 속이지 않는 것을 보여야 하는데, 어찌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를 속인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이웃 노인이 부끄러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지만 온화한 얼굴빛으로 봉양하는 것[色養]을 모두 지극히 하였고,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고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했으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치재(致齊)71)하고 산재(散齊)72)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형제 3인 가운데 공이 둘째인데, 위로 공손하고 아래로 우애하여 화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년에 수동(壽洞)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두문불출하여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깊이 감췄으며, 식구 수를 계산하여 밭을 경작하고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 한가한 날에는 시가를 읊고 서적을 스스로 즐겼다. 겸손하고 온화함으로 몸가짐을 하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친척을 구하여 도와주고 친구를 찾아가 안부 전하는 것을 제때에 빠뜨림이 없었다. 자손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고, 시문(時文)73)을 지어 벼슬을 구하려는 계획은 하지 않았다. 후생 가운데 초학자들을 보면 매번 묻기를 "《대학》은 읽었느냐? 이는 학문하는 전지(田地)이고 수신(修身)의 본령이니,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맹자》의 '잡으면 보존된다.74)'라는 일구(一句)는 성현(聖賢)이 열어 보인 긴요한 말이니, 세상에서 무슨 일이건 마음이 보존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평소에 무당을 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대하지 않았으며,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고 권귀(權貴)를 만나보지 않았으며, 함께 종유(從遊)한 자들은 모두 향리(鄕里)에 사는 약간의 가난한 벗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대학》 및 《논어》 몇 편 읽기를 마치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면전에서 경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 손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되는 도가 있으니 그 도를 잃으면 사람이 아니고, 선비에게는 선비답게 되는 업이 있으니 그 업을 잃으면 선비가 아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75)'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밥 한 끼를 먹는 사이에도 인(仁)을 떠나서는 안 된다.76)'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음에 잘 새겨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아라."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오려 할 때 갑자기 병에 걸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베개에 누웠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무술년(1898) 9월 13일이다. 장사를 지냈다가 한천면(寒泉面) 산음(山陰) 증봉(甑峯) 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익충(文益忠)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2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경묵(慶黙)과 흥묵(興黙)이고, 딸은 문재황(文載璜)·정석규(鄭錫圭)·이계환(李桂煥)·이병채(李秉采)·임노성(林魯成)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동향(同鄕)에 있었기에 외람되이 알게 되어 끊임없이 서로 어울리면서 마음을 터놓고 속마음을 이야기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그 용모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그 말은 자상한 것을 보았고, 남에게 이익을 주고 사물에 은택을 끼치는 뜻은 성대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천진한 성품에 맡겨 분수를 지켜 담박하게 영위(營爲)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의리(義理)의 소재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탐하고 사모하며 욕심내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였다. 이해득실을 따질 때에 묵묵히 분변하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일의 실정에 익숙하고 세상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원용(援用)하여 헤아려 의논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때와 어긋나 자신의 포부를 시험한 적이 없고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종신토록 빛을 감추었으니, 공의 입장에서야 본래 유감이 없겠지만 식자(識者)의 한은 어떠하겠는가. 공의 손자 규덕(奎悳)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고금의 감회가 깊은 나머지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相涉。字君邦。號隱谷。裴氏以文讓公諱祇沱爲始祖。麗朝有諱玄慶。以開國元勳。官太師諡武㤠。諱雲龍聘上國。稱海東君子。封達城君。子孫仍貫焉。諱廷芝。擊却哈舟。討平耽羅。官戶部尙書密直副使。配食院宇。諱成慶官通判。與子光裕。並殉於紅衣賊。諱文祐官興威衛號晦隱。麗季罔僕。諱斗有文科察訪號寓濟。莊陵末。遯居綾城。諱尙絅文科定州牧使。燕山朝。觧印歸鄕。諱允德號冰淵。以孝薦剡。至有御筆書名之褒。除齋郞。諱慶生進士號後松。仁廟甲子擧義旅。於公爲八世祖也。高祖諱宗泳。曾祖諱得孝。祖諱以絢。考諱廷綵。妣完山李氏贊之女。閫範甚備。純廟庚寅閠四月二十日。生公于州之大谷里第。好容顔。美鬚髥。溫良愷悌。和氣薫人。自幼不好戱狎。有隣老愛之。有戱語。公曰。幼子常視無誑。豈長者而誑幼子乎。隣老慚之。家貧躬耕。色養備至。執喪哀毁。一遵禮制。遇忌日。致齊散齊以致如在之誠。兄弟三人。公居其中。上恭下友。未嘗失和。中年移寓壽洞。杜門斂迹。深自韜晦。計口而田。度身而蚕。暇日諷詠書籍以自娛。持身謙和。御家勤儉。親戚賙恤。知舊問訊。隨時無闕。敎子孫必以義方。不爲做時文干祿計。見後生初學。輒問讀大學否。此是爲學田地。修身本領。不可不讀也。又曰。孟子操則存一句。是聖賢開示切要之言。曾見世間甚事有心不存而可爲者乎。平居不用巫覡。不對博奕。不入店肆。不見要貴。所與遊從。皆鄕里多少寒友生也.一日未明而起。讀大學及論語數篇訖。招家人而面戒喩。又招孫兒軰曰。人有爲人之道。失其道則非人也。士有爲士之業。失其業則非士也。孔子曰。朝聞道夕死可矣。又曰。君子無終食之間違仁。此言爾其服膺爲平生家計也。日將明。忽遘疾。左右扶之。就枕而逝。時戊戌九月十三日也。葬而移窆于寒泉面山陰甑峯下艮坐原。配南平文氏益忠女。有婦德。二男五女。慶黙興黙。文載璜鄭錫圭李桂煥李秉釆林魯成。嗚呼。余在同鄕。猥荷辱知。源源相尋。開懷話心。積有年所。每見其容也溫溫。其言也諄諄。利人澤物之意藹然可掬。任眞守分。澹然若無所營爲。而至有義理所在。則耽慕嗜欲。如恐不及。利害得失之際。默然若無所分辨。而練熟事情。曉解世故。所以援引而擬議者。皆鑿鑿有據。入與時違。未有所試。而婆娑林下。潛光沒齒。在公固無憾焉。而識者之恨爲何如哉。奎悳公之抱孫也。持家狀。託以不朽之文。緬古感仐。不敢以非其人辭。 배정지(裵廷芝) 1259~1322. 본관은 대구(大邱), 초명은 배공윤(裵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1291년(충렬왕17)에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합단적(哈丹賊)을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크게 무찔렀다. 1318년(충숙왕5)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목사와 왕자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김성(金成)·엄복(嚴卜)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원우(院宇) 고려 중기 이후,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 등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 은(殷)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치재(致齊) 산재에 이어 안에서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산재(散齊) 제사 며칠 전에 밖의 일에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잡으면 보존된다 마음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이른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아침에……좋다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군자는……된다 《논어》 〈이인〉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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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처사 선생 명촌86)【기현】의 운에 삼가 차운하다 謹次黃處士先生明村【紀顯】韻 산속에 천지가 열려 일월이 밝으니 (山闢乾坤日月明)선생의 고아한 아취 속세의 때가 적었네 (先生高趣世塵輕)숭정87) 이후로 천년의 한이 서렸고 (崇禎以後千年恨)대은88)은 이 사이에서 백세의 맹세를 하였네 (大隱斯間百歲盟)율리89)의 맑은 바람에 도연명은 취하고 (栗里淸風陶老醉)안풍90)의 아침 햇살에 동생은 밭을 가네 (安豐朝日董生耕)춘추대의의 한 맥이 문미에 있으니91) (陽秋一脈楣端在)예사롭게 붙인 이름 아니라네 (不是尋常以寓名) 山闢乾坤日月明。先生高趣世塵輕。崇禎以後千年恨。大隱斯間百歲盟。栗里清風陶老醉。安豐朝日董生耕。陽秋一脈楣端在。不是尋常以寓名。 명촌(明村) 황기현(黃紀顯)의 호이다. 작자가 10세에 황기현 선생에게『소학(小學)』을 배웠다. 숭정(崇禎) 숭정은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라는 말이다. 대은(大隱) 몸은 번잡한 세상에 있으면서 뜻은 속세를 벗어나 고원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소은은 산속에 숨고, 대은은 시조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율리(栗里)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지명으로, 진(晉)나라가 쇠망의 길로 들어서자 도잠(陶潛)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의 벼슬을 버리고 율리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晉書 隱逸列傳 陶潛』 은자의 거처를 뜻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안풍(安豐) 당(唐)나라 때 동소남(董邵南)이 은거한 곳이다. 그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면서 주경야독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韓昌黎文集 卷2 古詩 嗟哉董生行』 춘추대의의……있으니 원문 '양추(陽秋)'는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이 사람의 호가 명촌(明村)으로, 즉 명나라 마을이기 때문에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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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추 고공 유사장 同中樞高公遺事狀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시련(時連), 자는 학천(學天), 호는 침암(沈庵)으로 계통은 장택(長澤 장흥(長興))에서 나왔으니, 제봉(霽峯) 충렬공(忠烈公) 휘 경명(敬命)77)은 공의 8대조이다. 증조 휘 한대(漢大)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는데, 광주(光州)에서 남평(南平) 국사봉(國師峯) 아래 침동(沈洞)으로 우거(寓居)했고, 조부 휘 폭(曝)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정흔(廷欣)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지린(金之麟)의 딸이니, 순조 갑자년(1804) 4월 2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골격이 훌륭하고 신체는 매우 크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영리하여 범상(凡常)한 사람과 크게 달랐다. 6세에 입학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7, 8세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 뛰며 울부짖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자, 본 자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하여 믿을 데가 없이78) 외롭고 쓸쓸하게 되자, 남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품팔이하면서 먹고 살았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무리 지어 땔나무하고 가축을 먹였는데, 장난치며 노는 것을 하지 않고 가요(歌謠)의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비린내 나는 물건은 입에 넣지 않고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한겨울 심한 추위에 알몸과 맨발로 품팔이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겨 두꺼운 명주로 만든 솜옷 하나를 주었는데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부모님의 체백(體魄 시신(屍身))이 아직 천토(淺土 임시로 매장한 무덤)에 있는데, 제가 어찌 차마 스스로 몸을 편안히 하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자, 마을의 장로들이 모두 찬탄해 마지않고 서로 다투어 의연금을 내어 장례(葬禮)를 맡아서 해주었다. 제삿날이 돌아와 제사 지낼 집이 없자 제수(祭需)를 갖추어 산소 앞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밤새도록 울부짖고 곡하기를 한결같이 처음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처럼 하였고79), 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위해 보호하고 따라가서 밤을 꼬박 새웠다. 가정을 이루자 또 내규(內規)를 두었고, 힘써 부지런히 일하여 사력(事力 사세(事勢)와 물력(物力))이 조금 넉넉해졌다. 일찍이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어버이를 하루도 봉양한 적이 없다가, 이제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그런대로 의식을 댈 것이 있는데 봉양할 계책이 없으니, 이는 평생의 한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는 뒤늦게 봉양할 수 없고, 미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사 지낼 때 그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사판(祀板)을 추조(追造)하고 사당을 세워 봉안(奉安)하여, 초하루와 보름, 봄과 가을, 비 오고 이슬 내리며, 서리 내리고 눈 올 때, 두려워하고 슬퍼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회갑 생일날이 돌아와 여러 자식이 헌수(獻壽)의 잔치를 베풀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된다80)는 것은 옛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냐.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죽지 않고 오늘을 보니, 그 비통함이 어찌 다만 마땅히 배가 될 뿐이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만류하였다. 향리(鄕里)에서 그의 효에 감동하여 관사(官司)에 알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실상 없는 이름으로 남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면, 이는 나의 불효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힘써 저지하였다. 항상 일찍 고아가 되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서당을 열고 서책을 쌓아 두었으며, 여러 자손을 가르칠 때에 과정(課程)의 법을 두었고, 안팎의 족척(族戚)은 화목으로 풍습을 이루었으며, 원근의 친구들은 신의(信義)로 행실이 드러났고, 우환으로 병든 친척은 구휼(救恤)하기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때와 절기, 춥고 더울 때 변함없이 안부를 물었고,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혼인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어 도와주었으며, 매장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관곽(棺槨)을 갖추어 부의(賻儀)를 보내주었다. 늘그막에 능주 서쪽 봉학동(鳳䳽洞)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사랑하여 한가롭게 지내면서 노년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임오년(1882) 4월 8일에 세상을 떠나 국사봉 좌측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김동유(金裕女)의 따님이고 진사(進士) 김사직(金思直)의 손녀로 4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필진(弼鎭)·국진(國鎭)·영진(永鎭)·봉진(鳳鎭)이고, 딸은 정신규(鄭信奎)·문원보(文元保)·조사민(趙士玟)·구모(具某)·이규헌(李圭憲)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제운(濟雲)과 홍우환(洪佑煥)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제방(濟邦)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제형(濟珩)과 제일(濟日)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제신(濟紳)은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훼치(毀齒)81)의 나이로 부모를 모두 잃어 외롭고 고달프며 어리고 약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정경(情景)은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험난하고 질색(窒塞 막힘)한 곳에서 스스로 벗어나 능히 가계(家計)를 수립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계승했다. 이에 집안에는 자손의 번성함이 있었고 자신은 장수와 건강의 복을 누렸으며, 노인을 우대하는 은총과 영광이 하늘에서 떨어져 높은 관직과 높은 품계로 마을을 빛냈으니, 그 심력(心力)의 규범(規範)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이는 하늘이 효성스럽고 유순한 사람을 도왔고, 신이 화락한 군자를 위로해주었기에 만년(晩年)의 복록이 이처럼 흘러넘친 것이다. 증손 익주(翊柱)는 넷째 아들이 낳은 손자로 나와 종유(從遊)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공의 덕행을 후세에 영원히 전할 계획을 세웠다. 公姓高氏。諱時連。字學天。號沈庵。系出長澤。霽峯忠烈公諱敬命。其八世祖。曾祖諱漢大司僕寺正。自光州寓居南平國師峯下沈洞。祖諱曝贈左承旨。考諱廷欣贈戶曹參判。皆以公貴也。妣贈貞夫人光山金氏之麟女。以純祖甲子四月二十三日生。公骨骼埈茂。身體碩大。聰敏潁悟。大異凡常。六歲入學。文理日就。七八歲連遭內外艱。擗踊啼呼。幾絶復甦。見者莫不濳涕。靡怙靡恃煢煢孤孑。遂托身人家。賣傭資食。日與村兒樵牧爲群。而不作嬉戱之遊。不聽歌謠之聲。腥躁之物。不入於口。溫厚之衣。不着於身。隆冬盛寒。裸跣行傭。有人憐之。賜一綈袍。公泣曰。二親體魄。尙在淺土。吾何忍爲自身安便計乎。固辭不受。里中長老。皆嘖嘖歎賞。競相出義。以營其葬。遇忌諱之辰。無室屋可以行祭。具祭品。尊於墓前。終夜號哭。一如袒括。傍人多爲之護行以守其夜。及其有室。又有內規。辛勤拮据。事力稍饒。嘗謂諸子曰。吾早孤。未有一日之養。今賴先蔭。粗有衣食之資。而逮養無計。此是終天之恨也。又曰。已沒之親。不可追養。所可追者。惟祭盡其誠而已。遂追造祀板。立廟以安之朔望春秋。雨露霜雪。怵惕悽愴以盡如在之誠。遇回甲晬日。諸子欲設獻壽之宴。公曰。富倍悲痛。非古人之訓乎。余早孤不死。得見今日。其爲悲痛。豈但當倍而已乎。固止之。鄕里感其孝。將聞于官司。公曰。以無實之名。欺人欺君。是重吾不孝也。遂力沮之。常恨早孤失學。開塾儲書。敎諸子孫。克有課法。內外族戚。雍睦成風。遠近知舊。信義著行。憂患疾戚。周恤備至。時節寒暄。問訊不替。有不能婚娶者。輒具資粧以助之。有不能葬埋者。輒其棺槨而賻之。晩年卜築于綾西之鳳䳽洞。愛其山高谷邃。爲養閒終老計。以壽陞同中樞。壬午四月八日考終。葬國師峰左麓艮坐之原。齊慶州金氏東裕女。進士思直孫也。擧四男五女。男弼鎭國鎭永鎭鳳鎭。女鄭信奎文元保趙士玟具某李圭憲。孫男濟雲。女洪佑煥。長房出。濟邦二房出。濟珩濟日三房出。濟紳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毁齒之年。俱違怙恃。孤苦稚弱。情景難狀。而自拔於險難窒塞之中。能樹立家計。紹述世業。家有嗣續之蕃。身享壽康之福。優老恩榮。有隕自天。而嵬秩崇品。光輝閭里。其心力規範。非有以過人。何以致此。此所以天相孝順。神勞愷悌。而晩祿之津津有如是矣。曾孫翊柱四房孫也。從余遊有年。一日以其家狀過余。爲不朽計。 고경명(高敬命)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에서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저서로는 《제봉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부모를……없이 대본의 시(恃)와 호(怙)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믿는다는 뜻으로,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겠는가.〔無父何怙? 無母何恃?〕"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처음……하였고 대본에 '단괄(袒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단(袒)은 한쪽 어깨의 옷을 벗는 것이고, 괄(括)은 머리를 묶는 것이다. 이는 처음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하던 예법으로,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주인이 소렴을 마치고 한쪽 어깨의 옷을 벗고 머리를 묶는다.〔主人旣小斂, 袒括髮.〕"라고 하였다. 마땅히……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6에 "부모가 살아계시지 않는 사람은 생일에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되는데, 다시 어찌 차마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 更安忍置酒張樂以爲樂? 若具慶者可矣.〕"라고 한 데서 나왔다. 훼치(毀齒) 젖니가 빠지는 7, 8세쯤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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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초은 손공 유사장 楚隱孫公遺事狀 공의 성은 손(孫), 휘는 승경(承憬), 자는 사오(士悟), 호는 초은(楚隱)으로, 계통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시조 휘 구례마(俱禮馬)82)는 바로 모량(牟梁) 육부(六部) 대인(大人) 가운데 한 명이다.83) 신라부터 고려까지 유명한 재상과 대신이 빛나게 서로 이어졌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계경(季敬)은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의화(義和)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민(敏)은 현감을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비장(比長)84)은 호가 입암(笠巖)이고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세기(世基)는 덕릉 참봉(德陵參奉)을 지냈고, 조부 휘 중로(重老)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부친 휘 홍적(弘績)85)은 호가 도봉(道峯)으로 한림(翰林)에 있다가 대교(待敎)로 벼슬이 올랐는데, 을사년(1545)에 안명세(安名世)86) 공과 사국(史局)에 있을 때, 시사(時事)를 직필(直筆)했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위원(渭原)으로 유배당하여 졸하였다.87) 그러나 선조(宣祖) 3년 경오년(1570)에 신원(伸冤)되고 복직되었으며, 부안 옹정원(甕井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모친 공인(恭人) 우주 황씨(紆州黃氏)는 진사 황언규(黃彦珪)의 따님으로, 곧고 조용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규문의 예의가 매우 잘 갖춰졌으니, 가정(嘉靖) 경자년(1540)에 부안 요촌(蓼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매하고, 재능과 국량, 뜻과 기개가 뛰어나고 출중하였다. 약관에 종숙 한계공(寒溪公)과 함께 일재(一齋)88)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을 때, 선생이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화(史禍) 뒤에 깊이 통한(痛恨)을 품어 모친을 모시고 초산(楚山) 동쪽에 은거하면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지어서 맛있는 음식을 드렸고, 세로(世路)에 출신(出身)하여 나아가 벼슬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선조조(宣祖朝)에 참봉(參奉)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년(1592)의 난에 적의 우두머리가 장차 전주(全州)를 침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한계공 및 물재(勿齋) 안의(安義) 공과 함께 경기전(慶基殿)89)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받들고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이안(移安)하였는데, 조중봉(趙重峯)90)이 금산(錦山)에서 해를 입었다는 것을 듣고 격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유년(1597)에 적의 세력이 다시 거세지자, 공이 한계공과 물재공에게 이르기를, "어진(御眞)의 봉안(奉安)을 내 장차 공들에게 맡길 것이니, 공들은 힘써 노력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병 수천 인을 모아 행군하여 양성(陽城)에 이르러서 적을 맞아 온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다. 가동(家僮) 차곡석(車曲石)과 이악금(李惡金) 등이 공이 순절(殉節)한 것을 보고 모두 적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으니, 바로 9월 5일이었다. 묘소91)는 정읍 용호동(龍虎洞) 앞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있고 묘갈(墓碣)이 있다.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참봉 나응기(應箕)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익정(金益精)의 따님이니, 아들 한 명은 진종(振宗)이고, 딸은 오충갑(吳忠甲)과 김지영(金地英)에게 출가했다. 손진종의 5남은, 영엽(永燁)·통훈(通訓) 영욱(永煜)·영환(永煥)·영형(永炯)·영위(永煒)이다. 영엽의 1남 처유(處裕)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영욱의 2남은, 참의(參議) 세유(世裕)와 태유(泰裕)이며, 영환의 계자(系子)는 필유(必裕)이고, 영형의 2남은 필유와 후유(後裕)이며, 영위의 3남은 계유(繼裕)·성유(聖裕)·혜유(惠裕)이다. 4세손 봉문(鳳文), 5세손 연(縯), 6세손 경엽(景曄), 7세손 철우(哲宇)와 석량(鍚亮)은 모두 효행으로 널리 알려져 정려(旌閭)를 하사받았으니, 이는 공이 후손을 위하여 남겨준 계책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공은 가학과 법불(法拂)92)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도덕과 연원이 있는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니, 평소에 영향받은 것이 있고 본성을 확충하여 양성하는 데에 방도가 있었다. 이때문에 비록 위태롭고 떠돌아다니는 상황에 있었지만 향상하는 일념(一念)은 단(丹)과 같이 환하였고, 자신이 끓는 물과 뜨거운 불 속으로 달려가는 데에 이르러서도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여93)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다만 후손들이 영락(零落)하여 아직도 포증(褒贈)의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그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8세손 종순(鍾純)이 흰 머리에 늙은 나이로 고생스럽게 멀리서 건너와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姓孫。諱承憬。字士悟。號楚隱。糸出密陽。姓祖諱俱禮。卽牟梁六部大人之一也。自羅至麗。名公鉅卿。煒燁相承。入我朝。有諱策牧使。是生諱季敬。隱德不仕。是生諱義和縣監。是生諱敏縣監。是生諱比長號笠巖。文科重試副提學。卽公之高祖也。曾祖諱世基德陵參奉。祖諱重老忠順衛。考諱弘績號道峯翰林陞待敎。乙巳與安公名世在史局。以眞書時事。見忤群壬。竄渭原卒。宣祖三年庚午。伸枉復職。享扶安甕井院。妣恭人紆州黃氏進士彦珪女。貞靜柔嘉。壺儀甚備。嘉靖庚子生公于扶安之蓼村。天稟甚高。才局志槩穎脫不群。弱冠與從叔寒溪公。受業于一齋李先生之門。先生以遠器期之。史禍後。深懷痛恨。奉母夫人。隱居楚山之東。漁樵耕稼以奉其旨。未嘗出身世路以有干進之心。宣祖朝。以參奉屢微。不就。壬辰之亂。聞賊酋將犯全州。與寒溪公及勿齋安公義奉肇慶廟御眞。移安于井邑內藏山龍窟庵。聞趙重峯錦山被害。不勝憤激。丁酉賊勢更熾。公謂寒溪勿齋曰。御眞奉安。吾將委之於公。公其勉之。募義旅數千人。行至陽城。遇賊力戰。不屈而死。家僮車曲石李惡金等。見公殉節。皆赴賊而死。卽九月五日也。衣屨之藏。在井邑龍虎洞前麓巽坐原。有碣配羅州羅氏參奉應箕女。系配光山金氏益精女。一男振宗。女適吳忠甲金地英。振宗五男。永燁永煜通訓。永煥永炯永煒。永燁一男。處裕武科宣傳官。永煜二男。世裕參議。泰裕。永煥系子必裕。永炯二男。必裕後裕。永煒三男。繼裕聖裕惠裕。四世孫鳳文。五世孫縯。六世孫景曄。七世孫哲宇鍚亮。命以孝行聞。旋閭。此非公之貽謨攸及耶。公生於詩禮法拂之家。遊於道德淵源之門。擩染有素。充養有方。是以雖在顚沛流離之地。而向上一念。炳然如舟。至於身赴湯火。會魚取熊。使百世綱常。不墜於地。曷不偉哉。但雲仍零替。尙未蒙褒贈之典。其爲識者之恨何如哉。八世孫鍾純。白首頹齡。艱關遠涉。托以不朽之文。辭不獲已。謹據家狀。爲之修潤焉。 구례마(俱禮馬) 신라 시대에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을 말한다. 대본에는 구례(俱禮)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시조……명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사로국(斯盧國)에는 원래 6촌이 있었는데, 그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인 구례마가 처음에 이산(伊山)에 하강하여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손비장(孫比長) ?~? 자는 영숙(永叔), 부안 출신이다. 1469년(예종1) 예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世祖實錄)》 및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 1485년(성종16)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손홍적(孫弘績) 1510~1549. 자는 언선(彦善), 부안 출신이다. 1540년(중종3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543년(중종3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승정원 주서 등을 지냈다. 안명세(安名世) 1518~1548.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다. 을사년(1545)에……졸하였다 1548년(명종3)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 등의 무고에 의하여 안명세사초사건(安名世史草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에 유배당한 일이 있었다. 안명세는 1545년(인종1)에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1548년(명종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인종실록(仁宗實錄)》·《명종실록(明宗實錄)》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기전(慶基殿) 대본에는 '肇慶廟'로 되어 있는데, 태조의 어진은 경기전에 있었으므로 바로 잡아 번역하였다.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이고 중봉은 그의 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묘소 대본의 '衣履之藏'은 시신을 거두지 못했을 때, 초혼장(招魂葬)을 하고 의복 등의 유품으로 장례을 치르는 것으로, 유골은 없다는 뜻이다. 법불(法拂) '법가불사(法家拂士)'의 줄임말로,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들어가면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나오면 적국과 외환이 없는 자는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말이 나온다. 물고기를……취하여 초은 손공이 정유재란 때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했다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웅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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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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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재 이공 유사장 默齋李公遺事狀 내가 일찍이 우리 지방의 선배 인물의 성대함을 보았더니, 고(故) 묵재(默齋) 이공(李公)의 집안이 가장 성대하였다. 공의 동조 형제(同祖兄弟 4촌)가 8명에 이르는데, 모두 체격과 용모는 훌륭하고 뛰어나며 문학은 풍부하여 사람들이 고양팔룡(高陽八龍)94)에 견주었다. 공의 휘는 면휘(勉徽)이고 자는 중서(仲敘)이니, 총명하고 빼어나며 시원한 자질로 가학과 법불(法拂)95)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영향받고 훈도(薰陶)받았으며, 보충하여 증장하고 넓혀나가 일찍이 효우(孝友)로 널리 알려졌고, 만년에 행의(行義)로 널리 알려져 위대하게 말세의 일사(逸士)96)가 되었다. 공이 부모를 섬길 때에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모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드렸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나아가 봉양하여 부모의 입과 몸에 맞게 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먼저 알아차리고 받들어 순종하여 그 마음과 뜻을 편안히 해드렸다. 전후의 상(喪)은 애훼(哀毁)에 지나쳤지만 정문(情文)97)을 빠뜨림이 없었고, 동산에 맛 좋은 복숭아가 있었으나 부모님이 즐겨 드시는 것이었기에 끝내 차마 입에 넣지 못했다. 공은 형제들과 온화하고 화락하게 지내어 분가할 때에 밭은 거칠고 척박한 것을, 기구는 썩어 문드러진 것을 자신이 취하고, 품질이 좋은 것을 미루어 그의 아우에게 주었다. 중부(仲父)의 아들이 환포(還逋 환곡의 포흠)를 범하자, 공이 중부에게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몰래 자기의 토지를 팔아서 이를 갚아주었다. 늦게 아들 한 명을 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공이 매우 사랑하였기에 집으로 안고 돌아오라고 명하여, 10여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하였으니, 이는 효우의 실상이다. 천성이 간략하고 중후하며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어리석은 듯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했지만 《소학》과 《대학》에 더욱 정통(精通)하였다. 문사(文詞)는 화려하면서도 실속이 있고, 식견은 넓으면서도 정밀하였으며, 비방과 칭찬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고, 득실(得失) 때문에 느긋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바른말을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자,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어려워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금품을 보내오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사지금(四知金)98)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어린아이가 곁에 있으니, 어찌 오지(五知)99)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집안에 불이 난 것을 보았는데 손해 본 것이 적지 않았으니, 대개 여비(女婢)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이 여비를 보고 이르기를, "너는 화상을 입은 곳이 없느냐?" 하고는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족척과 친구의 길흉(吉凶)과 경조(慶弔), 기근(饑饉)에 구하여 도와주되, 때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정의와 예의를 모두 흡족하게 하였다. 향방(鄕邦)의 상숙(庠塾)100)과 연회 석상의 문단(文壇)에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의 처리하는 일은, 그 위의(威儀)가 엄숙하고 말하고 웃는 것이 정다워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히 마음으로 기쁘게 하고,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대문에 이르는 걸객(乞客)을 보면 후하게 베풀어 주었는데, 불쌍히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으니, 이는 행의(行義)의 실상이다. 경신년(1860) 8월 23일에 졸하였으니, 태어난 신유년(1801)과의 시간적 거리를 계산해보면 향년 60세이다. 주(州) 남쪽 풍류재[風流峙]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비사등(飛沙嶝) 부신(負申)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내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것이 어제처럼 역력한데, 부모를 잃고 외롭게 된 지 지금 5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태평한 문문(文物)의 시대에 향당(鄕黨)의 큰 덕망을 지닌 원로의 풍채를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의 일을 생각하면 절절하여 끝없이 슬플 뿐이다. 이씨는 관향이 광산(光山)으로, 고려조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이순백(李珣白)을 등보(登譜)의 조(祖)로 삼는다. 중엽에 휘 선제(先齊)는 경창군(慶昌君)으로 호는 화문(華門)이고, 휘 조원(調元)은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불러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니,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대대로 많았다. 고조 필광(必光)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 언규(彦規)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영근(永根)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부친 선우(先佑)는 호가 균헌(筠軒)이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상규(文祥奎)의 따님이다. 공은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이긍(朴履兢)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낳았으니, 동한(東漢)·문호(文鎬)·지호(贄鎬)·인호(仁鎬)이고, 딸은 죽산인(竹山人) 안의환(安義煥)에게 출가했다. 손자 승두(承斗)와 혁회(赫會)·현규(現圭)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규(承奎)와 기백(琪白)·배한숙(裵漢淑)에게 출가한 손녀는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손자 승우(承愚)·승일(承一)과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한 손녀는 셋째 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지(承祉)·승태(承泰)와 박제영(朴齊英)·손사규(孫士圭)·문모(文某)에게 출가한 손녀는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글을 요청한 자는 승우이다. 余嘗及見吾鄕先輩人物之盛。而故默齋李公之家。最爲蔚然。公同祖兄弟。至爲八人。而皆體相峻茂。文學宏贍。人以高陽八龍擬之。公諱勉徽。字仲敘。以頴悟秀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擩染薰陶。充長展拓。早以孝友著。晚以行義聞。偉然爲叔世之逸士。其事親也。怡色柔聲以樂其耳目。服勤就養以適其口體。先意承順以安其心志。前後喪。過於哀毁。情文無闕。園有好棰。以親之所嗜。終不忍入口。其處兄弟也。溫溫湛樂。析箸時。田取荒薄。器取朽敗。而推其品好者。以給其弟。仲父之子嘗犯還逋。公恐貽憂於仲父。潛賣已土以償之。有一妹晚有一子。公甚愛之。命抱還於家。育之敎之十餘年。如己出。此孝友之實。天性簡重沈默。終日如愚。淹貫經史而尤邃於。小學大學。文詞華而實。見識博而精。不以毁譽而爲喜怒。不以得失而爲舒慘。正言正色。人皆敬憚。嘗有人饋以錢物。公笑曰。古人不受四知金。今吾稚兒任側。豈非五知乎。一日自外還。見家中失火。見損不少盖女婢不謹致然。公顧謂婢曰。汝無所爛乎。終無一言。族戚知舊。吉凶慶弔。饑饉賙恤。隨時無闕。情禮俱洽。鄕邦庠塾之地。樽俎翰墨之場。所以出入風儀。左右酬應者。其威儀抑抑。言笑款款。令人怡然而心悅。肅然而心服。見乞客臨門。厚加施及。而矜惻之意。刑於色。此行義之實。庚申八月二十三日卒。距寅降辛酉得年爲六十。葬州南風流峙。後移于飛沙嶝負申原。呼嗚。余在童艸。侍先人側。得聞公之賢。歷歷如昨日。風樹孤露。今五十有餘年矣。昇平文物。鄕黨長德之風。不可得以復見。俯仰今古。只切無窮之悲而已。李氏貫光山。以勝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登譜之祖。中葉有諱先齊。慶昌君號華門。諱調元。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號淸心堂。文學仕官。奕世相望。高祖必光贈掌樂院正。曾祖彦規贈吏曹正郞。祖永根贈戶曹參判。考先佑號筠軒。妣南平文氏祥奎女。公娶咸陽朴氏履兢女生四男一女。東漢文鎬贄鎬仁鎬。女適安義煥竹山人。孫承斗。孫女李赫曾李現圭。長房出。承奎李琪白裴漢淑二房出。承愚承一吳桂泳三房出。承祉承泰朴齊英孫士圭文其。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謁文者承愚也。 고양팔룡(高陽八龍) 동한(東漢) 때에 순숙(荀淑)의 아들 8명이 모두 재주가 뛰어났기에, 상고(上古) 시대의 제왕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재주가 뛰어난 아들 8명에 비겼다. 그리고 그가 살던 마을은 본래 서호리(西豪里)였는데 고양리(高陽里)로 변경하여 부르게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순숙의 8명의 아들을 팔룡(八龍)이라 불렀다. 《後漢書 卷92 荀淑列傳》 법불(法拂) 〈초은 손공 유사장(楚隱孫公遺事狀)〉 주 참조. 일사(逸士) 절의가 빼어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선비를 말한다. 정문(情文)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말한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자식으로서 부모를 잃은 슬픔과 초상을 치르는 데 있어 정해진 예법을 말한다. 사지금(四知金)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昌邑)에 도착했을 때,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 10근을 바치며 "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오지(五知) 사지(四知)인 천지(天知)·신지(神知)·아지(我知)·자지(子知)에 어린아이가 아는[稚兒知] 것을 더한 것을 말한다. 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집에는 숙을 두고 당에는 상을 두며, 술에는 서를 두고 나라에는 학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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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217)에서 창수하다【서문을 붙이다】 楊子江唱酬【幷序】 능주(綾州)의 부춘(富春)은 경치가 훌륭한 것으로 호좌(湖左)에 이름났다. 산으로는 금오산(金鰲山), 예성산(禮星山)이 있고, 강으로는 양호(楊湖), 음강(陰江)이 있고, 누대로는 부춘정(富春亭)218), 현학정(玄鶴亭)219), 침수정(枕漱亭)220)이 있다.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며 노숙한 인물을 다 기록할 수 없으니, 고인이 "강산(江山)의 기운이 도움을 준다[江山助發]"라고 한 말이 어찌 허언이겠는가. 나의 거처가 근래 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사사를 받은 사람이 몇이었으며, 형으로 섬긴 사람이 몇이었던가. 가난하게 살며 오래 칩거하다가 산과 강을 찾고 싶은 생각이 나면 갔고, 벗들과 헤어져서 혼자 외로이 살며 강습할 생각이 있으면 갔다. 비록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세월 속에서 속진의 번뇌를 씻고 비루한 마음을 없애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지금 군자들의 거처가 가까이로는 담장을 잇대고 있고 멀어도 이웃 동리인데,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재숙(齋塾)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서로 모였으며, 또 부족하다고 여겨 남은 힘으로 산과 강을 찾아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는 흥취를 다했다.아, 같이 자고 먹고 마시며, 드나들고 산보하고, 대화를 나누고 읊조리며, 시를 짓고 학문을 익히는 곳에서 서로 헤어지지 않고 서로 관찰하고 서로 터득함이 이와 같으니, 쉽게 성취하는 것이 나와 같은 자에 견준다면 어찌 백 배는 되지 않겠는가. 또 천지간에는 만나는 사람이 매우 적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이는 고금의 뜻 있는 선비들이 무릎을 치며 탄식했던 부분이다. 지금 군자들은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장소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사람과 장소 둘 다를 만나는 것이겠는가.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지만 만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나는 비록 못났지만 군자들을 위해 삼가 어리석은 의견을 말한다. 이 모임에서 시를 주고받고 유람하는 것은 문을 닫고 학문을 탐구하는 여가에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규(講規)와 향음례(鄕飮禮)를 행하는 절차와 같은 것은 또한 이 모임으로 인하여 선후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성리(性理)를 강구하고 예용(禮容)을 보고 느낀다면 그 유익함이 아마 얕지 않을 듯하다. 군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부춘의 경치는 호동에서 으뜸이니 (富春水石擅湖東)그 속에서 현자들 옛 풍도를 강론하네 (中有群賢講古風)침수정 앞 강에 비친 달은 밝고 (枕漱亭前江月白)금오산 북쪽 들에 핀 꽃은 붉네 (金鰲山北野花紅)석대에서 약속하여 와서 학을 찾고 (石臺有約來尋鶴)하늘가에 무심히 앉아서 기러기를 전송하네 (天畔無心坐送鴻)이 모임 그대들에게 묻노니 어느 때 시작하였는가 (此會問君何日始)미천한 몸 함께하지 못한 것 많이 부끄럽네 (鰕生多愧未曾同) 綾之富春。以泉石之勝。名於湖左。金鰲禮星其山也。楊湖陰江其水也。富春玄鶴枕漱其亭榭也。文章學問耆舊人物。不可殫記。古人所謂江山助發。豈虛語哉。余居。近爲諸君子辱知。師事之者幾人。兄事之者幾人。窮居久蟄。有登臨之思則往焉。離群索居。有講習之思則往焉。雖不種種。而所以滌塵累消鄙吝於歲月之間者。爲力大矣。今諸君子之居。近則連墻。遠則比里。猶以爲未足。結構齋塾朝夕相聚。又以爲未足。餘力登臨。盡其風咏之趣。鳴乎。於興寢喫着。出入步趨。言笑吟哦。咳唾遊衍之地。不離不分。相觀相得如此。其成就之易。視如義林者。豈不百倍乎。且天地之間。相遇者至少。不相遇者至多。此古今志士咸慨節拍處也。今諸君子。可謂相遇矣。不惟遇其人。亦可謂遇其地矣。一遇不易。況兩遇乎。遇不遇在天。其不負所遇在人。義雖無似。爲諸君子。謹貢一愚。此會之唱酬遊賞。在杜門攻苦之餘。所不可已者也。然如講規飮禮之節。亦可因此會而先後之耶。講究性理。觀感禮容。其益恐不淺淺。未知諸君子以爲何如。富春水石擅湖東。中有群賢講古風。枕漱亭前江月白。金鰲山北野花紅。石臺有約來尋鶴。天畔無心坐送鴻。此會問君何日始。鰕生多愧未曾同。 양자강(楊子江)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능주천을 이른다. 지석천 또는 능주천으로 불리지만 이양면 강서리 예성산 아래 송석정에서는 양자강(楊子江) 또는 용강(龍江)으로, 이십리를 흘러서 능주 잠정리에 이르러서는 충신강, 다시 1.5km쯤 흘러 관영리 영벽정가에 이르러서는 영벽강으로 불린다. 부춘정(富春亭)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 부춘마을에 있는 정자이다. 현학정(玄鶴亭)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용두리에 있는 정자이다. 침수정(枕漱亭)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보리에 있는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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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일【경식】에게 답함 答文士一【敬植】 연초에 성산(星山)으로 길을 나섰는데, 매우 급한 일이 있었네. 그래서 곧바로 가는 길을 취하였다가 즉시 돌아왔기에 그대의 집에 들르지 못하였네. 그런대 뜻밖에 인편을 통해 보내준 편지를 받게 되니 고마우면서 위안이 됨이 어떠하겠는가. 인하여 부모님을 모시면서 그대 건강이 한결같이 좋은 것을 알게 되니, 실로 내가 듣고 싶었던 것에 부합하네. 의림은 늙고 병든 지 오래되어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데, 보잘 것 없는 오랜 학업은 텅 비어서 하늘의 뜬 구름과 같으니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랴! 보내준 편지의 길고 자세히 말한 것에서 그대의 뜻이 게으르지 않음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매우 감탄하네. 별지의 예설에 대해 삼가 나의 생각을 조목에 따라 답하였는데 그것을 귀숙처로 삼지 말고 더욱 더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답변28) : 복제 중에 지친의 상은 기년(期年)으로 끊는데,29) 《의례》 〈상복도〉에서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고 한 것은 누이[姉妹]에 대해 말한 것으로 누이도 또한 지친이기에 특별히 지친 기년을 입는 뜻을 말한 것이네. 혼인은 남에게 시집 간 것을 이른 것이니, 시집간 누이는 대공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출가한 자는 한 등급 내려서 입는 뜻을 특별히 말한 것이네. 열아홉 번째 안팎의 질문 조목에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歲初星山之行。緣有悤故。取直道徑歸。未得委造仙扃。謂外便頭得承惠存。感沃慰豁。何又如之。仍審侍省候節。一衛崇祉。實副願聞。義林衰病浸淹。有難支吾。而區區舊業。曠然若先天浮雲。歎恨何爲。示喩縷縷。足見尊意之不懈。感服多矣。別幅禮說。謹以鄙意。隨條仰答。勿爲歸宿。更加玩索。如何。服制。至親以期斷。喪服圖不杖期云者。姊妹亦至親也。故特言其至親服朞之義也.嫁是適人之謂也。嫁大功云者。特言其出嫁者。降一等之義也。十九內外。不須言。 답변 편지의 본문 내용을 보면 질문하는 조목을 보냈다고 하였는데, 그 질문은 생략하고 답변만 기록한 것이다。이 책에는 이러한 형식의 글이 많이 보인다. 지친의……끊는데 《예기》 〈삼년문(三年問)〉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부모를 위한 본복(本服)은 기년에 해당하지만 가륭(加隆)을 해서 삼년복을 입는 것이다. 부모뿐만 아니라 집안의 지친의 복은 원래 기년복을 입는데, 상황에 따라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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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길【운형】에게 답함 答金士吉【潤亨】 편지를 받은 뒤 여러 날이 지났는데, 잘 모르겠네만 부모를 모시고 공부하는 가운데 근황은 어떠한가? 사길은 자질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우며 재능이 밝게 뜨여 오당(吾黨)의 젊은이 가운데 두려운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 지난 번 신안사(新安社)에서 계남(溪南)과 애산(艾山)30) 등 여러 어른과 이런 자네에 대해 말이 미쳤는데, 다만 두 아이31)가 장난을 쳐서 비록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저들이 비록 기운을 빼앗더라도 봄날의 꽃샘추위나 가을날의 늦더위처럼 오래 가지 않을 것이네. 다만 바라건대 더욱 더 마음을 굳게 하고 생각을 정하여 양명정대(陽明正大)한 기운으로 하여금 나날이 채워 자라게 한다면, 저 하찮은 여증(餘證)은 다만 눈이 햇빛에 녹는 것처럼 사라질 것일세. 나를 따르며 친밀하게 지내는 한 무리의 젊은이 가운데 우리 그대 같은 이에 대해 나는 부탁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성(性)이란 만물의 한 가지 근원이니, 어찌 일찍이 '가깝다' '가깝지 않다'고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서로 가깝다."32)고 한 것은 이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네. 그러나 이른바 '기질지성'이란 것도 또한 다른 곳에 있는 또 다른 한 성이 아니네. 전적으로 이(理)를 가리켜 말한다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이요, 기를 겸하여 말한다면 기질지성이네. 이(理)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理)의 바탕이 되니, 어찌 일찍이 선후(先後)를 말할 수 있는가. 이 때문에 근원에 나아가 그 물줄기를 보는 것이 있으며 흐르는 물에 나아가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 있으니, 각각 가리키는 것을 따라 선후를 말하는 것도 또한 어찌 해로움이 되겠는가. 書后有日。未審侍旁學履。近節何如。士吉天姿謹慤。才性開爽。在吾黨少年。未始非可畏人也。向於新安社。與溪艾諸丈語及矣。但二竪作戱。雖若可憾。而彼已奪氣如春寒秋熱之不能久。惟益加堅心定慮。使陽明正大之氣。日日充長。則彼小小餘證。不啻見晛矣。從遊親密。一隊少年。如吾友者不能無區區寄托之意如何。性者萬物之一原。何黨有近不近之可言。其言相近者。是指氣質之性而言。然所謂氣質之性。亦非別有一性在別處也。單指理言之。則本然之性也。兼指氣言之。則氣質之性也。理是氣之主。氣是理之質。何嘗有先後之可言。是以有卽源而見流者。有溯流而指源者。各隨所指而說先後。亦何妨耶。 계남(溪南)과 애산(艾山) 계남은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최숙민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칙(元則)으로, 기정진의 문인으로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정재규의 본관은 초계, 자는 영오(英五), 후윤(厚允)으로,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 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 아이 원문의 '이수(二竪)'는 병마(病魔)의 별칭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의 꿈에 병마가 두 아이[二竪]의 모습으로 나타나 고황(膏肓) 사이에 숨는 바람에 끝내 병을 고칠 수 없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傳 成公10年》 서로 가깝다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지는 것이다.[性相近也 習相遠也]"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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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길에게 답함 答金士吉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마침내 받아 보았네.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는데, 잘 모르겠네만 어른을 모시면서 상을 치르는 건강은 잘 유지하는가? 그렇게 하여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바라네. 편지에서 학업에 대한 걱정을 말하였는데, 이 일에 대해 잊지 않는 마음을 알 수 있네. 그러나 일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일이 없으니, 일마다 이치를 살펴서 망령되이 행하지 않음에 이르는 것이 바로 학문하는 으뜸의 법이네. 어찌 사물을 떠나서 도가 될 수 있겠는가. 다만 이(理)는 자취와 흔적이 없으니 궁구하지 않으면 밝힐 수가 없네. 그러므로 책을 읽어서 밝혀야 하니, 모름지기 맹렬하게 정채로운 정신을 집중하고 엄하게 과정을 세워 오늘 이처럼 하고 내일 이처럼 하여 오랫동안 공이 쌓인다면 절로 그 공효를 볼 것이네. 이것이 내가 어진 그대에게 다소간 전하고 싶은 말이네. 사물은 변화를 받지 않으면 재목을 이룰 수 없고 사람은 어려운 일을 겪지 않으면 지식이 밝아지지 않으니, 오늘의 곤궁하고 답답함이 어찌 훗날에 형통하여 활짝 열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겠는가. 힘쓰고 또 힘쓰시게나.질문 : "지자(知者)는 동적이고 인자(仁者)는 정적이다."33)는 말에 대해 《집주》에서는 '동정은 체(體)로써 말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보씨(輔氏)는 "이 체(體)자는 바로 인과 지의 체단(體段)을 형용한 것이지, 체용(體用)에서의 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답변 : 이 체(體)자는 참으로 체단(體段)으로 말한 것이네. 그렇지만 요(樂)와 수(壽)는 상대하여 말한 것으로 즉 체용의 체로 보아도 아마도 무방하네.질문 : "즐거워 근심을 잊어버린다.[樂而忘憂]"34)라는 말에서 '낙(樂)'자는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樂在其中]"35)는 말의 '낙(樂)'자와 같지 않은 듯합니다。앞의 낙자는 천리가 혼연하여 절로 그 즐거움이 있는 것이니 성인의 극처로 말한 것이요, 뒤의 낙자는 깨우친 것을 즐거워함이니 공부의 나아간 바로 말한 것입니다.답변 : 주자도 또한 "'즐거워 근심을 잊어버린다.'는 말은 일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36)라고 하였네.질문 : 이미 "용모를 움직일 때."라고 함에는 참으로 '말을 냄[出辭氣]'이 그 안에 포함되는데,37) 또한 특별히 '말을 냄'이라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답변 : 사물(四勿)38)과 마찬가지로 통틀어 말하면 '예가 아닌 것'에 금지하는 행동을 다 포함하였지만, 나누어 말하면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각각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라네. 向疏。果爲得見矣。繼而有日。未審侍旁哀節。得爲支嗇慰往區區。示中學業之憂。可見心不忘此事。然事外無道。道外無事。隨事循理。無至妄作。此是爲學第一法。安有離事絶物而可以爲道者哉。但理無形迹。非窮格則不明。故讀書以明之耳。須猛着精彩。嚴立課程。今日如此。明日如此。績累之久。自當見功。此區區不能無多小寄意於賢者也。物不受變。材不成。人不涉難。知不明。今日之困窮拂鬱。安知不爲他日之亨泰者乎。勉之勉之。知者動仁者靜。集註動靜以體言。輔氏曰。此體字.乃形容仁知之體段。非體用之體。此體字。固以體段言。然以樂壽對言。則看作體用之體。恐無妨。樂而忘憂。此樂字。與樂在其中樂字。似不同。上章樂字。是天理渾然。而自有其樂者。以聖人之極處言。此章樂字。是樂其所得者。以工夫造詣言。朱子亦曰樂而忘憂。是逐事上說。旣曰動容貌。則正顧出辭在其中。而又特言之何。如四勿。統言則非禮盡之矣。而分言則視聽言動。各自不同。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니,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며, 지자는 낙천적이고 인자는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라 하였다. 즐거워 근심을 잊어버린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학문에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학문이 즐거워서 근심도 잊은 채 늙어 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發憤忘食 樂而忘憂 不知老之將至〕"라고 자평하였다.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못하고서 부유하고 귀한 것은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자도……말한 것이다 앞의 공자가 "학문에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학문이 즐거워서 근심도 잊은 채 늙어 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發憤忘食 樂而忘憂 不知老之將至〕"라고 한 부분의 소주(小注)에 보이는 말이다. 이미……포함되는데 《논어》 〈태백(泰伯)〉에서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귀히 여기는 도가 세 가지가 있으니, 용모를 움직일 때는 사납고 거만함을 멀리할 것이며, 낯빛을 바르게 하는 데는 신실함에 가깝도록 할 것이며, 말을 함에 있어서는 상스럽고 도리에 어긋난 것을 멀리할 것이다。제기를 다루는 일은 유사가 맡아서 하는 것이다.[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斯遠暴慢矣 正顔色斯近信矣 出辭氣斯遠鄙倍矣 籩豆之事則有司存]"라고 한 것을 이른다. 사물(四勿)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의 질문에 답한 인(仁)의 실천을 위한 네 가지 조목, 곧 비례물시(非禮勿視)ㆍ비례물청(非禮勿聽)ㆍ비례물언(非禮勿言)ㆍ비례물동(非禮勿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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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성【형】에게 답함 答文子惺【炯】 마음을 수렴하고 함양하는 것은 참으로 가장 으뜸가는 법문인데, 다만 오랫동안 놓아버린 마음을 갑자기 가둬서 안정시키는 것은 아마도 싹을 뽑아 조장(助長)하는 근심39)이 없을 수가 없네. 이것이 가장 걱정이 되니, 이는 자신이 스스로 헤아리고 노력하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옆 사람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주자는 "리(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심(心)과 성(性)도 또한 그와 같네. 이른바 '한 가지'로서 말한다면 심을 리(理)라 불러도 누가 그르다고 하겠는가. 이른바 '두 가지'로서 말한다면 심과 리는 경계를 나누지 않을 수가 없네. 선철들이 말을 한 것이 같지 않은 것이 대개 이 때문이네. 보내준 편지에서 "리(理)가 있으므로 신령한 것이지, 신령한 것이 곧 리라고는 할 수 없다."40)라고 한 것과 또한 "기의 신령한 곳은 즉 리가 부린 것이다."라 한 것은 모두 대단히 옳은 말로서 다시 평할 것이 없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은 근대 리(理)를 주장한 사람인데, 항상 기를 주장함에 혹 크게 어긋난 폐단이 없지 않음을 걱정하였으니, 예를 들면 그가 '성(性)과 정(情)을 합하여 심(心)이라 명명한다.……'41)라고 한 것은 또한 그의 잘못된 곳이네. 대개 그 의도는 심으로 리를 삼고 지각으로 심을 삼고 싶지 않아서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네. '하늘에 사람 마음[人心]이 있다.'는 말은 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욱 심한 자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그 기를 주장하는 폐단이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탄식이 이네. 사람은 형체가 있으므로 인심(人心)이 있지만, 하늘에 어찌 일찍이 사람과 같은 형체가 있어서 인심이 있겠는가. 심포(心圃)42)의 명문(銘文)은 마땅히 힘이 닿으면 도모하되 그 시기를 기필하지 말게나. 收斂涵養。固是太上法門。而但恐久放之心。猝然窒定。或不無揠苗之患。此最可慮。此在自家自斟酌自着力如何耳。非傍人所可容言之地也.朱子曰。理與氣。一而二。二而一.惟心與性亦然。以所謂一者言之。則喚心爲理孰云不可以所謂二者言之。則心與理不可無界分。先哲之立言不同。蓋以此耳。來喩所謂有理故靈。而不可靈便是理。又曰。氣之靈處。卽理之所使。此言皆親切的當。無容更評。寒洲是近世主理之人。而每慮其主氣。或不無太過之敝。如所謂合性與情有心之名云云。亦其過處也。蓋其意以心爲理.而不欲以知覺爲心故云然耳。天有人心。此說出於主氣尤甚者之口。而其主氣之敝。一至於此。可歎。人有形體故有人心。天何嘗有形體如人而有人心乎。心圃銘當隨力圖之。其早晏姑未必也. 싹을……근심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송나라의 어느 농부가 밭에 가서, 곡식을 빨리 성장시키기 위하여 그 싹을 뽑아 자란 것처럼 해 놓고,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자랑하기를, '내가 오늘 곡식을 조장(助長)하였다.' 하기에, 아들이 다음 날 밭에 가서 보니 싹은 말라 죽어 있었다."라 하였다. 리가……없다 《노사집(蘆沙集)》 〈답김경범문목(答金景範問目)〉 2에서 김경범이 "주자가 말하기를 '기(氣) 속에는 절로 영령한 물사(物事)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영(靈)이 곧 이(理)입니까?"라 물으니, 노사가 "이(理)가 있으므로 신령하다고 한 것이지 영을 곧 이라고 할 수는 없네."라는 대답이 보인다. 성과……명명한다 《한주선생문집》 권8 〈답윤사선별지(答尹士善別紙)〉에서, 윤사선이 "다만 성(性)자만 들고 지각(知覺)을 겸하여 들지 않으면 심자를 말하는 것이 다하지 못합니다.〔單擧性字, 而不兼擧知覺, 則說心字不盡.〕"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를 "주자가 일찍이 횡거의 이 말을 논하기를 '명도로 형상하게 하였다면 결단코 이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명도가 만약 이에 대해 논하였다면 '성과 정을 합하여 심이란 명목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을 것이다. 지금 성밖에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심과 성이 두 근본이 된다.〔朱子嘗論橫渠此說曰, 使明道狀出, 決不如此. 愚謂明道若論此則當曰, 合性與情, 有心之名, 今謂性外有知覺, 乃心性二本也.〕"라 하였다. 심포 문형(文炯)의 호이다.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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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성에게 답함. 答文子惺 내 개인적으로 그대가 평소에 한 말을 따져보면 두 사람의 논의는 그 맥락을 같이 하니 명확한 의논이라 할 수 있네. 한주(寒洲)는 전적으로 심(心)을 리(理)라고 여기니, 그러므로 그의 말이 이와 같네. 한편 마음의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니, 허령하기에 지각하는 것이네. 주자가 "고요하여 동하지 않는데 지각이 어둡지 않는 것은 바로 정(靜)하는 가운데의 동(動)이다.……"43)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네. 어진 그대가 지각을 전적으로 심이 발한 이후의 일로 여기기에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이네.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는 비록 지(知)와 행(行)의 구분이 있지만, 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도움을 주니 참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네. 이런 까닭으로 정자는 "앎을 지극히 함에 경에 있지 않는 자가 없다."44)라고 했으며, 또한 "거경은 의를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45)라고 했으며, 또한 "오랫동안 보존하면 저절로 밝아진다."46)라고 한 것이 모두 이런 의미이다. '아내를 내보내는 것'에 대해 논한 것은 정암의 말47)이 지극한 논의이니, 《역전》에서 "남편이 도를 잃지 않았는데 부인이 남편을 제어할 수 있는 경우는 있지 않다."48)라고 하였으며, 또한 "위엄을 자신에게 먼저 행하지 않으면 타인은 원망하며 복종하지 않는다."49)라고 하였네. 대저 자신에게 있는 모범이 되어 인도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서 급하게 내쫓는 것이 어찌 권도(權道)이며 올바른 도리라고 하겠는가. 私議雅言。同條共貫。可謂確論。寒洲專以心喚做理。故其言如此。且虛靈知覺。不是兩物。虛靈故知覺。朱子曰寂然不動而知覺不昧者。此靜中之動云云。正此意也。賢認知覺專爲發後事。故及之耳。居敬窮理。雖有知行之分。而其相須相資。固相離不得。是故程子曰。未有致知而不在敬者。又曰居敬所以精義。又曰存久自明。皆此意也。出妻云云。靜庵之說爲至論。易傳曰未有夫不失道而婦能乘之。又曰威嚴不先行於己。則人怨而不服。夫在我未能盡表率之道。而遽爾棄斥。豈權而合宜之謂乎。 고요하여……동이다 《주자대전》 권32 건도(乾道) 5년에 장식(張栻)에게 보낸 〈답장흠부서(答張欽夫書)〉에 실려 있다. 앎을……없다 정이(程頤)의 말로 《주자어류》 권9 〈학(學) 3〉에 나온다. 거경은……것이다 정자의 말이 아니라 호굉(胡宏)의 말이다. 《심경부주(心經附註)》 권2의 주(註)에 보이는 말이다. 오랫동안……밝아진다 정호(程顥)가 한 말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에 보이는 말이다. 정암의 말 《정암집》 〈부록〉 권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선생(조광조)이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선생과 같은 해에 진사가 된 동기 중에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내를 쫓아내고 싶어서 선생에게 친한 사람을 보내 칠거지악을 근거로 문의하였다. 선생이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며 만복의 근원이니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요하다. 부인의 성품은 어둡고 무지하니,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군자로서는 바른 도리로 이끌고 감화시켜 함께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두터운 덕이다. 모범을 다하지도 않고서 갑자기 쫓아내려 한다면 너무 야박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것은 한 집안의 윤리에 관한 일이니, 바깥사람이 감히 논의할 수 없다. 헤아려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남편이……있지 않다 《역전》 〈소축(小畜)〉 구삼의 효사에서 한 말이다. 원문의 '승(乘)'은 '제(制)의 잘못이다. 위엄을……않는다 《역전》 〈가인(家人)〉 상구의 효사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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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 생원 봉양 손공 유사장 成均生員鳳陽孫公遺事狀 공의 휘는 덕효(德孝), 자는 왈현(曰賢), 호는 봉양(鳳陽)이니, 손씨는 계통이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신라 문효공(文孝公) 휘 순(順)이 그 시조(始祖)인데, 고려에 와서 훈벌(勳閥)126)이 혁혁히 빛나 우리나라의 거성(巨姓)이 되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책(策)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경(敬)은 그의 백씨(伯氏 맏형) 휘 검경(儉敬)이 뜻을 굽히지 않아 보성(寶城)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홍문 제학(弘文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호는 영귀당(詠歸堂)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일(逸)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이고, 부친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이다.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양효영(梁孝永)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대구 서씨(大邱徐氏)는 서문강(徐文綱)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워 부덕(婦德)이 매우 갖춰졌으니, 영조 무인년(1758)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재성(才性)이 총명하여 스스로 말의 뜻을 알았고, 한 번 들으면 매번 잊지 않았으며, 나아가 배워 공부할 때에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 매우 민첩하였다. 어느 날 종가(宗家)에 가서 사당이 불완전하여 제사를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돌아와 부친에게 고하여 묘우(廟宇)를 수선하고 종가를 구휼(救恤)하자고 청하자, 부친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이와 같으니 가문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글방을 열어 스승을 맞이하여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및 백가(百家)의 책을 쌓아놓고 강학(講學)을 도와주었으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방기함이 없게 하였다. 부친이 질병에 걸려 임종할 때 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가문의 계책은 다만 독서에 달려 있으니, 내가 죽은 후에 네가 일심(一心)으로 향학(向學)하여 한결같이 변함없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 운명(殞命)하였다. 공은 슬프고 비통함이 끝이 없어 여러 번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송종(送終 장사(葬事))의 절차와 집상(執喪)의 법은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친이 임종할 때에 부탁한 것을 생각하여 더욱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잠시도 편안히 한가하게 지내지 않았고, 문장이 성대하고 명성이 매우 자자하여 순조 갑술년(181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영귀(榮歸)127)함에 미쳐 친척과 친구들이 환영하면서 축하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공이 기뻐하는 얼굴빛 없이 말하기를, "부모를 잃은 처지로 외람되이 과거에 합격하여 귀가하여 문으로 들어왔는데 기쁨을 드릴 곳이 없으니, 정경(情景)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서럽고 슬플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밤에는 나란히 누워 자고, 낮에는 책상을 맞대며 기뻐하면서 화락하게 지냈으며, 재산과 집물(什物)은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다. 병술년(1826) 4월 4일에 졸(卒)하여 인량동(仁良洞) 좌곡사동(左谷寺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5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두(啓斗)·몽두(夢斗)·필두(弼斗)·채두(采斗)·인두(寅斗)이고, 딸은 남원 윤필창(尹必昶)·탐진 최주효(崔柱孝)·탐진 최홍규(崔弘奎)·광산 김모(金某)에게 출가했다. 손자 처호(處護)·처진(處震)·처팔(處八)·처수(處修)는 장남이 낳았고,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권(處權)과 처영(處英)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처범(處範)은 넷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종은 다섯째 아들의 뒤를 이었다. 현손 영렬(永烈)이 그의 부친 군수공(郡守公)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그의 8촌 동생 손영모(孫永謨)로 하여금 나에게 가문에 길이 전하려고 하는 글을 요청하게 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처럼 말한다. 公諱德孝。字曰賢。號鳳陽。孫氏系出密陽。新羅文孝公諱順。其鼻祖。至麗朝。勳閥烜爀。爲東方巨姓。我朝有諱策文。牧使。生諱敬。見其伯氏諱儉敬。以不屈謫寶城。公亦與之南下。三傳至諱比長文科重試官弘文提學吏曹參議。燕山朝退休扶安。號詠歸堂。世有隱德。高祖諱遇節。贈戶曹參議。曾祖諱逸。贈工曹參判。祖諱始䧺。同中樞。考諱興新。副護軍。妣濟州梁氏孝永女。系妣大邱徐氏文綱女。溫仁柔嘉。婦德甚備。以英宗戊寅十月十四日生。公才性穎悟。自能解語。一有所聞。輒不忘。就學授課。記誦甚敏。一日往宗家。見廟貌不完。祭儀未備。歸告大人。請爲之修繕廟宇。周恤宗家。大人心奇之。語人曰。有兒如此。家戶有望矣。遂開塾延師。貯四子六經及百家書以資講學。朝夕戒勅。俾無放闕。大人遘疾臨終。顧謂公曰。門戶之計。只在讀書。我死之後。汝若一心向學。終始無替。則我之目。可以瞑矣。言訖而終。公哀痛罔極。屢絶而甦。送終之節。執喪之儀。一遵禮制。念大人臨沒之託。益加刻勵。暫不暇逸。文瀾藹蔚。聲華藉甚。純廟甲戌中司馬。及其榮歸也。親戚知舊。無不歡迎稱慶。公無喜色曰。風樹餘生。猥參科名。而歸家入門。獻悅無所。追念情景。只切悲愴而已。與其弟友愛甚篤。夜則連枕。書則連床。怡怡湛樂。財産什物。有無共之。丙戌四月四日卒。葬仁良洞左谷寺洞子坐原。齊光山金氏昌瑞女。五男四女。男啓斗夢斗弼斗采斗寅斗。女適南原尹必昶耽津崔柱孝耽津崔弘奎光山金某孫處護處震處八處修長房出。處祥處茂處宗二房出。處權處英三房出。處範四房出。處宗系五房。玄孫永烈以其大入郡守公所撰家狀。使其三從弟永謨。請余文爲傳家不朽計。辭不獲。謹据狀爲之說如是云爾。 훈벌(勳閥) 국가에 공훈(功勳)이 있는 문벌(門閥)을 말한다. 영귀(榮歸) 과거에 급제한 후 근친(覲親)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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