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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헌기 止軒記 하늘이 위에서 그쳐 일월이 빛나고 밝으며, 땅이 아래에서 그쳐 산천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그치고 자식은 효도에 그치며, 임금은 인(仁)에 그치고 신하는 공경에 그치며, 여러 사물과 종류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칠 곳에 그쳐 천하의 이치가 얻어진다. 솔개는 연못에서 뛸 수 없고 물고기는 하늘에 이를 수 없으며, 배는 육지에 다닐 수 없고 수레는 물에 다닐 수 없으니, 이것은 하늘이 낳을 때 굳게 정하여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도리이다. 이 때문에 행실은 방정하게 하려고 하여 움직임에 반드시 법도로써 하는데 성인의 입장에는 "당신의 마음이 그치는 바에 편안히 하라."라고 하며,229) 현인의 입장에는 "그 그침을 공경하라."라고 하였다.230) 그러나 사물에 나아감에 반드시 먼저 마땅히 그칠 바를 궁구함이 있어야 이에 능히 그 마땅히 그칠 바를 얻어 그칠 수 있다. 성현의 글은 비록 가리키는 뜻이 같지 않고, 학자의 공부는 비록 과정과 조목이 동일하지 않으나 요컨대 그칠 곳을 알아 그침을 얻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이다. 학문사변(學問思辨)은 그 그침을 아는 소이이고, 조존천리(操存踐履)는 그 그침을 얻는 소이이다. 수레의 바퀴와 새의 날개는 형세가 반드시 서로 기다리지만 체(體)와 용(用), 본(本)과 말(本末)은 또 경중의 구분이 없을 수 없다.오호라! 물이 그치면 맑고 거울이 그치면 허명하니, 《주역》에서 이른바 "지도(止道)는 광명(光明)하다."231)라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조자명(曺子明) 군이 '지(止)'자로 헌(軒)에 이름을 붙여 고인이 반우(盤盂)의 명(銘)232)을 지었던 것에 견주었으니, 그 요체를 얻어 힘쓸 바를 안다고 이를 만하다. 더욱더 힘쓸지어다. 天止於上而日月光明。地止於下而山川寧謐。父止於慈。子止於孝。君止於仁。臣止於敬。以至庶事庶類。各止其止。而天下之理得矣。鳶不可以躍淵。魚不可以戻天。舟不可以行陸。車不可以行木。此是天生鐵定不可移易底道理也。是以行欲其方。動必以矩。而在聖人則曰安汝止。在賢人則曰欽厭止。然卽事卽物。必先有以窮其所當止。乃能有以得其所當止而止之。聖賢之書。雖指意不同。學者之功。雖課條不一。而要不出乎知止得止而已。學問思辨。所以知其止也。操存踐履。所以得其止也。車輪鳥翼。勢必相須。而體用本末。又不無輕重之分。嗚乎。水止則淸。鑑止則虛。羲經所謂止道光明者。不以是耶。曺君子明以止號軒。視爲古人盤盂之銘。可謂得其要而知所務矣。益加勉焉。 성인의……하며 《서경》 〈익직(益稷)〉에서 신하인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한 말이다. 현인의……하였다 《서경》 〈태갑 상(太甲上)〉에서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한 말이다. 지도(止道)는 광명(光明)하다 《주역》 〈간괘(艮卦) 단사(彖辭)〉에 "간(艮)은 그침이니, 때가 그쳐야 할 경우에는 그치고 때가 가야 할 경우에는 가서 동(動)과 정(靜)이 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道)가 광명(光明)하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반우(盤盂)의 명(銘) 반(盤)은 세수나 목욕을 할 때에 쓰는 그릇이고, 우(盂)는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근사록》 〈존양(存養)〉에 "옛사람은……소반과 사발, 안석과 지팡이까지 명을 새기고 경계의 말을 새겼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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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5 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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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와기 醒窩記 바야흐로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스스로 평소의 진경(眞境,)이라 여기고 그것이 꿈임을 모르다가 꿈에서 깨어 그 허무(虛無)하고 환망(幻妄)함을 추산하면 허탈한 웃음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호라! 온 세상사람 가운데 꿈속에 있지 않는 이가 몇 명인가? 꿈속에 있으면서 진경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또 몇 명인가? 긴 밤이 지루하여 도깨비[鬼魅]가 서로 침범하여 전도되어 미친 듯 울부짖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니, 만일 꿈꾸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곁에 있게 한다면 누군들 그를 위해 측은하게 여겨 깨어날 수 있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구주[九有]는 회양(懷襄)233)하고 육경(六經)은 쓸어버린 듯한데, 완도와 해남[莞海]의 물가에 현송(絃誦)234)이 성대하다고 들어 항상 공경하고 부러워하여 매번 그 사람을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근래에 김여회(金汝晦)를 통하여 전공서(全公瑞) 군의 어짊을 듣고 비로소 완도와 해남에 흥학(興學)의 기풍은 참으로 이유가 있는 줄 알았으니, 이가 스스로 깨어서 남을 깨우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깨우는 방법은 어떠한가? 학문사변(學問思辨)은 몽교관(夢覺關)이고 존양성찰(養省察)은 인귀관(人鬼關)이니,235) 모르겠으나 성와(醒窩)의 성(醒)은 과연 여기에 관계된 점이 있는가. 모름지기 큰 소리로 길게 불러 천만 사람들의 꿈을 깨우기를 마치 어두운 길가의 촛불같이 해야 할 것이다. 方其夢也。自以爲平日之眞境。而不知其爲夢。及醒而追算其虛無幻妄。不過爲虛發一笑。嗚乎。擧一世而不在夢中者。幾人。在夢而不以爲眞者。又幾人。長夜漫漫。鬼魅交侵。顚倒狂叫。非死非生。如使不夢人在於其側。孰不爲之惻然思有以醒覺乎。九有懷襄。六經掃如。而聞莞海之濱。絃誦蔚然。尋常欽艶。每欲求其人而不得。近因金汝晦。聞全君公瑞之賢。姶知莞海興學之風。良有以也。此非自醒而醒人者乎。然則其醒之之術若何。學問思辨。是夢覺關。存養省察。是人鬼關。未知醒窩之醒。果能有在於此乎。須大聲長呼。以醒千萬群夢。如昏衢之旁燭也。 회양(懷襄)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로, 재앙이 매우 큼을 뜻한다.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넘실거리는 홍수가 널리 해를 끼쳐 거세게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넘는다.[湯湯洪水方割, 蕩蕩懷山襄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학문사변(學問思辨)은……인귀관(人鬼關)이니 주자가 "격물은 몽교관이요, 성의는 인귀관이다.[格物是夢覺關, 誠意是人鬼關.]"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 권15 〈대학〉에 나온다. 몽교관은 꿈을 꾸느냐 잠을 깨느냐의 관문을 말하고, 인귀관은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는가의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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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양씨전 烈婦梁氏傳 열부 양씨(梁氏)는 제주 사람으로 아버지는 상룡(相龍), 조부는 주진(柱震), 증조는 홍우(鴻友)이다. 기묘명현 혜강공(惠康公) 양팽손(梁彭孫)167)의 12세손으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에 능주 초방리(草坊里)에서 태어났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고, 《열녀전》과 《소학》 등의 책을 읽고 대략 그 대의를 깨우쳤다. 부모를 섬김에 온화한 말과 공손한 낯빛으로 말을 듣고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18세에 사인(士人) 박서진(朴瑞鎭)에게 시집갔는데, 박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좌승지에 추증된 박지수(朴枝樹)168)의 후손이다.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서진이 병으로 위독하자 열부(烈婦)가 단지(斷指)하여169) 소생시켰으나 조금 있다 다시 숨이 끊어졌다. 열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맹서하고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는데, 시부모와 집안사람들이 매우 간절히 타이르고 힘써 막으니 열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혼수로 해온 장신구와 복식(服飾), 금비녀와 옥반지 등을 헐값으로 팔아 상례와 장례의 비용을 마련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170)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삼갔으며, 비린 고기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시부모를 곁에 모시면서 슬퍼하는 마음이 얼굴과 말에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음을 다해 힘써 장만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힘썼다. 종자(從子, 조카) 준옥(準珏)을 후사로 삼고 가르치고 기름에 법도가 있어 마침내 이름난 선비가 되게 하였다. 하루는 병이 깊어지자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서 그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일찍 남편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죽지 못한 것은 다만 너를 가르치고 성취시켜 너의 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 할 일은 이미 다하였으니 죽은들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너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침상에 드러누워 영면하였다. 고을에서 그 열효(烈孝)를 아름답게 여겨 추천하여 상사(上司, 상급 관청)에 보고함이 전후로 끊이지 않았다. 고을 사람인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일찍이 노사 선생을 모시고 문문산(文文山)171)이 죽지 않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충신과 열부는 그 뜻이 하나다. 부인이 그 남편을 잃었을 적에는 그 궤전을 받들고 그 장례를 경영해야 하며, 자식이 있으면 양육하고 자식이 없으면 이어야 하며, 가르치고 성취시켜 그 후손을 전하고 그 집안을 보존해야 하니, 어찌 다만 남편을 따라 죽는 것만을 열(烈)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아,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그러한 사람을 보았도다. 훗날 삼강의 붓을 잡은 자가 마땅히 높은 행실과 훌륭한 여인의 자리에 편입한다면 그들의 아름다운 행적에 필적할 것이다. 烈婦梁氏。濟州人。考相龍。祖柱震。曾祖鴻友。己卯名賢惠康公彭孫十二世孫也。以純廟癸巳生于綾之草坊里。貞靜柔嘉。婦德純備。列女傳小學等書。略曉大義。事父母。溫言恭色。聽從女流。十八歸士人朴瑞鎭。朴氏貫密陽。壬辰忠臣贈左承旨枝樹后。歸未幾瑞鎭得劇疾。烈婦血指得蘇。俄而復絶。烈婦誓下從。絶不飮食。舅姑及家人。諭之甚懇。防之甚力。烈婦不得已而起。斥賣資裝服飾金釵玉環等物。以爲治喪營葬之費。朝夕饋奠。必誠必愼。腥臊之味。不入於口。在舅姑側。悲慘之意。不形於色辭。甘毳之供。極意營辦。務悅其心。以從子準珏爲後。敎養有法。遂成名士。一日沈疾。沐浴着新衣。招其子語曰。早失所天。而至今未亡。只爲汝敎養成就。使汝父不至乏祀也。吾事已畢。死復何恨。只願汝無負吾期汝之意也。言訖就枕而逝。鄕里嘉其烈孝。剡報上司。前後續續。鄕里人鄭義林曰。余嘗侍蘆沙先生。問文文山不死。先生曰。忠臣烈婦其義一也。婦人之喪其夫也。奉其饋奠。營其窆葬。有子則養育之。無子則繼續之。敎誨成就。以傳其後。以存其家。豈只以從夫死爲烈哉。嗚乎。余嘗聞其語而今見其人矣。後之秉三綱之筆者。宜其編入於高行令女之次。與之匹美而齊休也。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 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나아갔지만, 곧 사임하고 다음 해에 죽었다. 박지수(朴枝樹) 1552~159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으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단지(斷指)하여 원문의 '혈지(血指)'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는 것인데, 효자가 생명이 위독한 부모에게 자신의 피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제전(祭奠) 원문의 '궤전(饋奠)'은 매장하기 전까지 제사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음식을 올리는 예를 말하나, 일반적으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지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문문산(文文山) 문산(文山)은 남송(南宋)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송 이종(宋理宗) 때 우승상(右丞相)으로 화의(和議)하러 원(元)의 궁중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밤에 도망쳐서 온주(溫州)로 돌아왔다. 익왕(益王)이 즉위하여 그를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강서(江西)의 도독(都督)으로 삼았으나 또 원군에게 패전하였다. 위왕(衛王)이 즉위하여서는 신국공(信國公)의 봉(封)을 받고 조양(潮陽)에 주둔하였다가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전하여 포로가 되어 연경에 3년 동안 억류(抑留)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충절(忠節)을 나타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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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묵재 문공전 敬默齋文公傳 문공의 휘는 영찬(永瓚), 자는 사규(士圭), 경묵(敬默)은 그이 서재 이름이다. 계파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중엽(中葉)에 단성(丹城)으로부터 능주(綾州)로 옮겨와 머물러서 대대로 유림(儒林)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증조는 휘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는 휘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아버지는 휘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형구(馨久)의 따님으로 영조 기묘년(1759, 영조35)에 능주 백암리(白巖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4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142) 지나치게 애통해하니 이웃 사람들도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부지런히 일해 봉양하고 입에 맞는 음식이나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계모(繼母) 정씨(鄭氏)를 섬김에 그 순순히 받들기를 지극히 하니 조금도 흠잡는 말이 없었다. 무신년(1788, 정조12)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 동안 바람과 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여막을 이용해 서실을 지어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니 무덤 아래 마을 사람들이 그 뜻에 감동하여 온 산 하나를 문씨의 땅이라고 하고 서로 경계하며 침범하지 말도록 하였다. 아우 2명은 영권(永權)과 영국(永國)이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말 한 마디도 화순함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공이 문묘(文廟)에 예기(禮器)가 부서진 것을 보고 이에 법제를 강구해서 중수하여 한껏 새롭게 하였다. 능주의 북쪽에 개와 평전(蓋瓦坪田) 수천 이랑이 있었는데, 예부터 도랑에 물을 댈 수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당한 적이 많았다. 그러므로 공이 형세를 헤아려 둑을 쌓고 도랑을 통하게 하였으니 이에 땅이 비옥하게 되고 풍년이 들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물을 건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공이 돌을 운반하여 다리를 놓아 옷을 입거나 걷고 건너는143) 근심을 없게 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이가 많았는데, 공이 의연금을 내고 진대(賑貸, 진휼(賑恤)하여 빌려 주던 일)하여 살아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 자상하고 화락하며 넓고 단아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사물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마음을 쏟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일가친척들로부터 효성스럽다는 칭찬을 받고 향당으로부터 공손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붕우(朋友)는 그 믿음을 칭찬하고 사림(士林)은 그의 현명함을 칭찬하여 아녀자와 종들까지도 군자다운 사람으로 그를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2월 10일 정침(正寢,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서 향년 57세로 생을 마쳤다. 선영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100년 안팎이 되었다. 우리 조정의 문명(文明)이 전성(全盛)한 운세가 공의 대에 와서는 해가 중천에 뜰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다. 매번 당시의 공경대부 및 향리 사족들을 볼 때마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풍류가 돈후하고 기상이 드높아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왕왕 이와 같았으니, 이는 열성(列聖)께서 배양하심이 깊고 선정(先正)이 찬조(贊助)한 두터운 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문묘(文廟)에 들어가 제사 돕는 일을 맡은 적이 여러 번이었으며, 개와평(蓋瓦坪)을 지나 백암교(白巖橋)를 건넌 것도 또한 여러 번이었지만, 아직껏 뇌준(罍樽)144)과 변두(籩豆)145)를 수리하고, 관개(灌漑)와 제도(濟渡)를 설행한 것이 일찍이 공에게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 이목(耳目)의 고루함이 어쩌면 이 정도란 말인가. 아, 백성들 일상생활의 중대한 일들이 그의 공로에 힘입었는데도 그 공로를 알지 못하고, 그의 덕을 누리고도 그 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일 뿐이겠는가. 불행히 문명이 전성한 날에 태어나지 못하고, 또 불행히 선진(先進)146)이 계시던 100년 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여 그 글을 읽고 그 풍성을 칭송함에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통탄스럽고 더욱 그리워하게 할뿐이다. 이에 감히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전을 짓는다. 文公諱永瓚。字士圭。敬默其齋號也。系出南平。中葉自丹城寓綾州。世爲儒林名家。曾祖諱命吾贈掌樂院正。祖諱喜孟贈戶曹參議。考諱弼鎭贈戶曹參判。妣興陽李氏馨久女。以英宗己卯。生公于州之白巖里。幼而岐嶷。異於凡兒。四歲遭內艱。孺慕過哀。隣里釀涕。家素貧甚。服勞就養。適口便身。無不周備。事繼母鄭氏。極其承順。了無間言。戊申丁外艱。廬墓三年。風雨不廢。服闋。因廬爲齋。以寓終身之慕。墓下村人感其義。環一山爲文氏地。相戒勿侵焉。弟二人。曰永權永國。友愛甚篤。自幼至老。未有一言違和也。公見文廟禮器殘缺。乃講求法制。重修而一新之。州之北。有蓋瓦坪田。可數千頃。古無溝洫可漑。民多見旱。公相度形便。築堤通渠。於是土沃而歲熟。所居濱江。人常病涉。公運石成橋。俾無揭厲之患。甲戌大無。民多餓殍。公出義賑貸。所活爲數百人。其慈祥愷悌。博雅長厚。眷眷於利人澤物者。皆此類也。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朋友稱其信。士林稱其賢。以至婦孺輿儓。莫不以君子人目之。乙亥二月十日。考終于正寢。享年五十七。葬于親塋丑坐之原。後生鄭義林曰。今去公之世爲一百內外年矣。我朝文明全盛之運。至公之世。不啻爲日中之昃。而每見當時公卿大夫及鄕里士族。治家有法。行己有恥。風流篤厚。氣像藹蔚。可以爲後世模範。往往如此。列聖培養之深。先正贊助之厚。可以推矣。余嘗入文廟而執助祭之役者累矣。過蓋瓦坪。渡白巖橋者。亦數矣。而尙未知罍樽籩豆之修。灌漑濟渡之設。曾在於公。其耳目固陋。一至於是耶嗚乎。民生日用大小大事。賴其功而不知其功。食其德而不知其德者。豈但此一事也。不幸而不生於文明全盛之日。又不幸而不生於先進百年之世。讀其書誦其風。徒使人痛歎而增懷也。玆不敢以昧劣辭。謹爲立傳云爾。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 원문의 '유모(孺慕)'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듯 깊이 사모함을 말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유약(有若)이 자유(子游)와 함께 어린애처럼 사모하는 자를 보고 자유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중에 발을 구르는 의미를 전혀 몰라서 없애고자 한 지가 오래였는데, 슬퍼하는 정이 이 발 구르는 데에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옷을……건너는 원문의 '게려(揭厲)'는 《시경》〈패풍(邶風) 포유고엽(匏有苦葉)〉에 "깊거든 옷 입은 대로 건너고, 얕거든 옷을 걷고 건널 것이다.[深則厲 淺則揭]"를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시경》 주(註)에 "옷 입은 채로 건너는 것을 여, 옷을 걷고 건너는 것을 게라 한다.[以衣而涉曰厲 蹇衣而涉曰揭]"라고 하였다. 뇌준(罍樽) 청동으로 만든 호형(壺形)의 술 단지이다. 양효왕에게는 뇌준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값이 천금이나 나가는 것이었다. 양효왕이 죽을 적에 많은 재산과 보물이 있었는데도 유독 이 뇌준을 아끼어 "이 뇌준을 잘 보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라."하였다. 그 뒤에 이 뇌준을 차지하기 위하여 친족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史記 卷58 梁孝王世家》 변두(籩豆) 변(籩)은 과일이나 포(脯)를 담기 위하여 대를 엮어서 만든 그릇이고, 두(豆)는 식해나 김치 등을 담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그릇이다. 흔히 제기(祭器)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선진(先進) 학문이나 지위가 남보다 앞서거나, 어떤 분야에서 연령, 지위, 기량 등이 앞서는 사람, 즉 선배와 같은 뜻이다. 공자가 "선진이 예악에 야인이요, 후진이 예악에 군자라고 하나니,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진의 것을 쓰리라.[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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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곡 조공전 翠谷曺公傳 공의 휘는 여흠(汝欽)이고, 자는 사명(士明)이며, 취곡(翠谷)은 그의 호이다. 조씨의 계파는 창녕(昌寧)에서 나왔는데 대악서(大樂署)를 지낸 승겸(承謙)이 그의 원조(遠祖, 고조 이전의 먼 조상)가 된다. 철야군(鐵冶君)을 지낸 정통(精通)과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경식(景湜)은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부 청(淸)은 문과 급제하고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증조부 효신(孝信)은 유일(遺逸)147)로 광양 현감(光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조부 걸(傑)은 호가 묵헌(默軒)이며 은덕(隱德)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 언인(彦仁)은 호가 만은(晩隱)으로 장예원(掌隷院)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의젓하고 총명하며148) 재주가 영민하였다. 3세에 육갑(六甲)을 외우고, 4세에 《효경》을 배웠으며, 5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한번 보면 외웠다. 6~7세에 글을 짓고, 9세에 《대학》을 읽어 대의(大義)를 살폈다. 이때부터 사자 육경(四子六經)을 차례로 관통하였다. 한문공(韓文公)의 '눈물을 머금고 패수를 건넌다'[含淚渡灞]'는 구절149)을 읽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도리를 힘쓸 뿐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15세에 율곡 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자 선생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칭찬하고 매우 아꼈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떨쳐버리고 오로지 심성(心性)을 보존하여 기르고 독실히 실천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 기쁜 얼굴빛과 부드러운 태도로 지물(志物)의 봉양150)에 빠뜨림이 없었다. 병환이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간호하였으며,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한데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며 자신의 몸으로 어버이의 병을 대신하도록 빌었다. 정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니151) 대개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힌 것152)이었다. 용강(龍岡)의 기슭에 학당을 짓고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끊고 학문을 익히는 데에 마음을 다하니 원근의 사우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모인 자가 매우 많았다. 은병학규(隱屛學規)153)에 의거하여 과정(課程)을 세우고 정성껏 인도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사람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은 남보다 낫기를 힘쓰고 처신함은 항상 남에게 낮추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또 시문(時文, 과거시험을 위한 문체)을 일삼는 자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덕을 지닌 자는 훌륭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154) 성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끝내 문장의 오묘함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55), 지천(芷川) 김공희(金公喜)156),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7), 서곡(書谷) 임분(林賁, 1501~1556) 등 명가(名家)들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석천이 공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호산의 비범한 기상에 규성이 내려와158) (湖山奇氣降奎躔)젊은 나이159)에 남두160)의 향기로운 명성 떨쳤네 (南斗香名屬妙年)문장의 이치 깨우침은 오히려 여사요 (文章契悟猶餘事)집안에서 의를 행함은 천성대로 하는구나 (行義居家素性然)만력 기묘년(1579, 선조12)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31세였다. 2남을 두었는데, 주부를 지낸 장일(長日)과 장두(長斗)이다. 외사씨(外史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공은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161) 학문을 연마하고 넓혀나간 것이 이처럼 성대하였지만, 멀고 외진 곳에서 재능을 감추고 수명도 또 길지 않아서, 나아가서는 그 의를 행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그 도를 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과 사람이 서로 도모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아, 우리 조정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께서 다스리던 밝은 세상에 태어나 살았으며,162) 이 문성 선생(李文成先生, 이율곡)을 스승으로 삼아 수사낙민(洙泗洛閩)163)의 학문을 얻어 들었으니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수명의 길고 짧음이 어찌 경중이 되겠는가. 公諱汝欽。字士明。翠谷其號也。曺氏系出昌寧。以大樂署承謙爲遠祖。鐵冶君精通。忠淸監司景湜。皆其中葉顯祖也。高祖淸文科淸道郡守。曾祖孝信遺逸除光陽縣監。祖傑號默軒。隱德不仕。考彦仁號晩隱。以掌隷直長。歸老鄕里。以嘉靖己酉生。公體質岐嶷。才性穎悟。三歲誦六甲。四歲授孝經。五歲讀小學。一覽成誦。六七歲能綴文占句。九歲讀大學。究見大義。自是四子六經。次第淹貫。讀韓文公含淚渡灞之句。歎曰。君子自處。當勉其在我者而已。何必乃爾。成童贄謁栗谷先生。先生見而異之。稱許甚重。自是刊落擧業。專以存養踐履爲主。事親也怡色婉容。志物無闕。有疾則衣不解帶。夜不就枕。露禱稽顙。祈以身代丁卯中司馬。蓋爲親屈也。結塾於龍岡之麓。杜門絶迹。專心治學。遠近士友。聞風來集者甚衆。依隱屛學規以立課程。諄諄誘掖。多所成就。嘗戒人曰。學問則務勝於人。處己則常屈於人。又戒人之業時文者曰。有德者有言。全昧性理之學者。終不得文章之妙。與林石川金芷川白玉峯林書谷諸名勝爲道義交。石川贈公詩曰。湖山奇氣降奎纏。南斗香名屬妙年。文章契悟猶餘事。行義居家素性然。萬曆己卯終。享年三十一。二男。曰長日官主簿。曰長斗外史氏曰。公以英才偉器。早年發軔。琢磨展拓。若是其盛。而潛光遐隅。壽又不遐。使進不得行其義。退不得傳其道。豈天人之不相謀。有如是耶。嗚乎。生於我朝明宣日中之世。以李文成先生爲師而得聞洙泗洛閩之學。則不可謂不遇於世矣。亦不可謂不遇於人矣。彼位之崇卑。壽之長短。曷足爲軒輊哉。 유일(遺逸) 숨은 인재, 즉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유일로 천거되면 왕이 불러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의젓하고 총명하며 원문의 '기억(岐嶷)'은 《시경》 〈대아(大雅) 생민(生民)〉에 "실로 기어서 능히 숙성(夙成)하였다.[誕實匍匐, 克岐克嶷.]"고 한 데서 온 말로, 총명하고 조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형용할 때 쓰는 말이다. 한문공(韓文公)의……구절 한유(韓愈)의 시 〈현재에서 생긴 감회[縣齋有懷]〉에 "서책을 품고 황도를 떠나, 눈물을 머금고 푸른 파수 건너네.[懷書出皇都, 銜淚渡淸灞.]"라고 읊은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한유가 정원(貞元) 11년 박학굉사시(博學宏詞試)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경사(京師)를 떠나 낙양(洛陽)으로 간 사실을 읊은 것이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이후 보편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거나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파수를 건넌다[渡灞]'라고 표현한다.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정묘년에……합격하였으니 조여흠은 1567년(丁卯, 명종22) 당시 19세의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 47위로 합격하였다. 어버이의……것 한(漢) 나라 모의(毛義)가, "태수 사령장을 받고 기뻐한 것은 늙은 부모를 위해서이다[奉檄而喜爲親屈也]." 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69 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序》. 은병학규(隱屛學規)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천(石潭川)에 은거하면서,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았던 것을 본떠서, 1576년(선조9)에 석담천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만든 규약을 말한다. 《輿地圖書 黃海道 海州》 덕을……있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말이 있지만, 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하였다. 임억령(林億齡) 1496~1568.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태수(太樹), 호는 석천이다. 을사사화 때 아우 임백령(林百齡)이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가담하는 것을 보고 해남(海南)에 은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저서에 《석천집》이 있다. 김공희(金公喜) 1540~160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지명(之明)·지천(芝川)으로 조선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1564년(명종19)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사관(從事官), 영광 군수를 거쳐 남원 부사를 지냈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이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라 불리며 당풍의 시들을 남겼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를 즐겼다. 저서로 《옥봉집(玉峰集)》이 전한다. 규성이 내려와 규전(奎躔)은 28수(宿)의 하나인 규성(奎星)의 자리로, 그 별자리의 모양이 문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여, 문장(文章) 혹은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젊은 나이 원문의 '묘년(妙年)'은 '묘령(妙齡)'과 같은 말로 20세 전후의 젊고 꽃다운 나이를 뜻한다. 남두 이십팔수의 하나인 두수(斗宿)로, 남쪽 하늘에 여섯 별로 구성되었으며, 북두칠성같이 술구기 모양이어서 남두(南斗)라고 하였다. 벼슬을 시작하여 원문의 '발인(發軔)'은 수레바퀴의 버팀목을 빼고 수레를 출발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젊어서부터 청운의 벼슬길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조여흠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명종(明宗)과……살아 조여흠은 기유년(1549, 명종4)에 태어나 기묘년(1579, 선조12)에 세상을 떠났으니 명종과 선조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수사낙민(洙泗洛閩) 유학을 말한다. 수사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 곡부 근처를 흐르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인데, 공자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였기 때문에 대개 공자와 그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낙민은 송나라 때의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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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자전 金孝子傳 김효자(金孝子)의 휘는 기원(基源), 자는 군진(君眞), 호는 심헌(心軒)으로 계파는 김해(金海)에서 나왔다. 고(故) 충신 염헌공(淡軒公) 김극검(金克儉)187)의 후손이며, 효자 참봉 김선(金銑)의 7세손이다.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집안살림이 가난하여 시서(詩書)를 공부할 방도가 없었지만, 천성이 유순하고 신중하여 홀어머니를 섬김에 매우 효성스러웠고, 산에서 나물을 캐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몸을 삼가고 집안을 잘 다스려 그 뜻을 받들었다. 어머니가 병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걷고 크게 웃지도 않으면서188) 한데에서 기도를 올리고 약을 먼저 맛보며189) 지극히 근심하였다. 하루는 병이 위독해지자 마침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이미 끊어진 목숨을 되살아나게 했다. 초상을 당해서는 애통해 하고 슬퍼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와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종제 중 한 사람이 일찍이 그의 땅을 몰래 팔아먹었는데, 효자는 그 어머니가 들어서 알까 두려워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들어서 알고는 밥상을 마주하고 드시지 않았다. 효자는 남몰래 스스로 돈을 빌려 값을 지불하고 땅을 돌려받았는데, 어머니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전날에 몰래 팔아먹었다고 한 것은 헛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표형(表兄)이 하루는 집에서 기르던 소를 빼앗아 가자 어머니가 또 밥상을 마주하고 드시지 않았다. 효자가 이에 쫓아가 잡고는 본래의 값만큼 형에게 주고서 소를 끌고 돌아와 어머니의 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렸는데, 또 소 값을 지불한 연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제와 표형 대하기를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얼마 뒤 종제가 의지할 곳 하나 없자 효자가 집을 경영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또 한 친척이 공포(公逋, 국가의 재물을 사사로이 소비함)를 범함이 적지 않으니 효자가 타일러 말하기를, "내가 비록 집이 가난하나 마땅히 3분의 2를 갚아줄 것이니 그 3분의 1은 네가 일찌감치 마련하여 관청의 독촉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관리가 이미 잡아간 것을 알고는 효자가 즉시 쫓아가 관가의 뜰에 이르자 바야흐로 엄중한 장형을 당하고 있었는데, 효자가 울부짖으며 간절히 빌며 말하기를, "기간을 어긴 죄는 나에게 있고 저 사람에게 있지 않으니 그 곤장을 나누어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관리가 물어서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그 기한을 늦추어 주니 효자가 힘을 다해 빌려서 그 3분의 1까지도 모두 지급하였다. 그 마음을 미루어 나가 붕우와 향당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이해를 다투지 않으며 화락하고 온화하였으므로 모두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독서하고 학문하는 근본 목적은 자신을 수양하여 행함에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인데, 겉치레만 숭상하는 폐해가 날로 많아져 진솔한 정이 날로 침체되었다. 효자처럼 가난하고 누추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글을 읽고190) 종유할 방도가 없는데, 일찍이 스스로 깨달아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순한 자식이 되고, 형제들 간에 있어서는 돈독하고 화목한 사람이 되며, 향려(鄕閭)에 있어서는 충신한 선비가 된 분으로 말하자면, 어찌 지금사람이면서 옛 사람이 아니겠으며, 배우지 않고도 배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떳떳한 본성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에 향리(鄕里)의 천거와 사림(士林)의 보답이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인 것이 당연하다. 金孝子諱基源。字君眞。號心軒。系出金海。故忠臣淡軒公克儉后。孝子參奉銑七世孫也。早孤貧。居寓甚僻。無詩書遊業之方。而天性馴謹。事偏慈甚孝。採山釣水以供其旨。謹身克家以奉其志。有疾則不翔不矧。露禱嘗藥。極其致憂。一日疾劇。遂嚼指注血。以甦旣絶之命。及遭艱。哀傷慘怛。出於至誠。隣里聞之。莫不釀涕。有一從弟。嘗竊賣其土。孝子恐其母氏聞之。匿不以言。頃之母氏聞之。對案不食。孝子乃潛自稱貸。給價還土。而告于母氏曰。前日之竊賣云者是浪言也。其表兄一日攘家牛而去。母氏又對案不食。孝子乃追而得之。依價與兄。牽牛而還。以慰悅親意。而又不言給價之由。然待從弟與表兄。與平時無異。旣而從弟蕩然無依。孝子爲營室屋。使之安業。又有一族親。犯公逋不少。孝子諭之曰。吾雖貧。當報三分之二。其一汝宜早辦。毋見官督也。一日自外還。見官吏已捉去矣。孝子卽時追去至官庭。方被嚴杖。孝子號泣懇乞曰。愆期之罪。在我不在彼。願分受其杖。官問而奇之。特寬其限。孝子盡力假乞。倂其三分之一而給之。推而至於朋友鄕黨。不與之較曲直。不與之爭利害。而愷悌溫良。皆得其歡心焉。外史氏曰。讀書學問本欲修身利行。而文弊日繁。眞情日替。若孝子生長於艱難朴陋之中。寡佔畢遊從之方。而早自開悟。事父母爲孝順之子。處兄弟爲惇睦之人。在鄕閭爲忠信之上。豈非今人而古人。無學而有學耶。秉彛攸好。鄕里之薦。士林之報。宜其不一而多矣。 김극검(金克儉) 1439~1499.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렴(士廉), 호는 괴애(乖崖)이다. 문장에 능했고 성품이 청렴결백했다. 《대조실록(世祖實錄)》ㆍ《예종실록(睿宗實錄)》ㆍ《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ㆍ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조심스럽게……않으면서 부모가 병환이 있을 때, 행동을 경계한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행불상 소부지신(行不翔笑不至矧)"이라 하여, "다닐 때에도 조심하여 나는 듯이 걷지 말고 웃어도 잇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즉 크게 웃지 않는다."고 하였다. 약을 맛보며 원문의 '상약(嘗藥)'은 약을 맛본다는 뜻으로 부모님이 병환이 있어 약을 드실 경우 자식이 그 약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먼저 약을 맛보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임금이 병이 들어 약을 먹을 경우에는 신하가 먼저 맛보고, 부모가 병이 들어 약을 먹을 경우에는 자식이 먼저 맛본다.[君有疾, 飲藥, 臣先嘗之, 親有疾, 飲藥, 子先嘗之.]"라고 하였다. 즉 어버이를 정성껏 효도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글을 읽고 《예기》 〈학기(學記)〉에 "오늘날 가르치는 자들은 그 글자만 보고 웅얼거릴 뿐이다.[今之敎者 呻其佔畢]" 하였다. 신(呻)은 음(吟)의 뜻이고 점(佔)은 시(視)의 뜻이고 필(畢)은 간(簡)의 뜻이니, 오늘날 경서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경서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간편(簡片)에 있는 글자만 보고 송독(誦讀)하여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다. 대개 '점필'은 글의 내용은 모른 채 입으로만 송독한다는 다소 부정적인 뜻인데, 후세에는 글을 송독하는 것을 범칭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송독'의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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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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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열녀 설씨전 烈婦薛氏傳 설씨(薛氏)의 본관은 순창(淳昌)으로 진사 응룡(應龍)의 딸이며, 참판 옥천군(玉川君) 훈현(勳玄)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정숙하였으며, 부인의 덕행을 일찍 성취하였다. 19세에 첨정(僉正) 정진(鄭縉)191)에게 시집갔는데, 정진은 본래 나주 사람으로 문정공(文靖公) 가신(可臣)의 후손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현(士賢)의 아들이다. 설씨는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 적에 내칙을 준수하여 종족에게 칭찬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첨정공(僉正公)이 재종숙인 정응(鄭鷹)·정홍(鄭鴻) 두 사람과 의병을 일으켜 충렬공 고경명의 막하에 나아갔다. 한달 여 만에 금산에서 패배하였다는 소식이 이르자 설씨가 말하기를, "패하였다고 하니 부군도 필시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고는 갑자기 자결하고자 하니 집안사람들이 힘써 만류하였다. 그날 저녁에 남몰래 후원(後園)으로 들어가 또 스스로 목을 매려고 하자 시어머니 김씨가 뒤를 밟아 구원하여 풀어주고 말하기를, "네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첨정공이 과연 이르렀는데, 마침 일 때문에 밖에 있어서 죽지 않았던 것이다. 정유재란에는 첨정공과 김억추(金億秋) 등 여러 공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 대동강을 방어하고 지켰다. 이때에 설씨는 늙은 시어머니 및 재종숙모 정씨와 김씨를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하고, 여종 몽란(夢蘭)이 따라왔다. 하루는 적이 갑자기 이르러 먼저 그 시어머니를 해치고 또 설씨에게 향하자 설씨가 높은 바위 벼랑에 앉아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비록 견양(犬羊)과 같은 오랑캐이지만 어찌 조선의 예의의 풍속을 모른단 말이냐."하고는 마침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정씨와 김씨도 모두 가까운 곳에 있다가 또 따라 몸을 던져 죽었다. 몽란이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이어 돌에 부딪혀 죽었다. 그때에 첨정공은 서북 길에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충무공의 막하에 속하였는데, 노량의 전투에서 재종숙 두 사람과 동시에 순절하였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천보(天寶)의 난192)에 의사(義士)는 오직 안노공(顔魯公)193) 한 사람뿐이었으며, 오계(五季)194)의 말엽에 정녀(貞女)는 오직 왕응(王凝)의 처 이씨(李氏)195) 한 사람 뿐이었다. 충렬(忠烈)의 어려움이 예로부터 이미 그러한데, 정씨 일문에 충신과 열부가 성대하여 끊이지 않았으며, 그 크나큰 기강과 절개, 유풍과 여운이 환하게 사람의 이목을 비추었으니 아, 공경할 만하도다. 다만 구중궁궐은 깊고도 멀어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하는 일이 적막하여 비록 유감스러운 것 같지만, 만고의 강상(綱常)에 공이 있는 자는 응당 만고의 강상과 시작과 끝을 함께할 것이니, 어찌 한 때에 드러나고 묻힌 것으로 낮다 높다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薛氏貫淳昌。進士應龍女。參判玉川君勳玄孫。自幼溫仁貞靖。婦行夙就。十九歸僉正鄭縉。縉本羅州人。文靖公可臣后。嘉善士賢子。薛氏事舅姑。奉君子。克遵內則。見稱宗族。壬辰之亂。僉正公與再從叔二人鷹鴻倡義。赴忠烈公幕。月餘錦山敗報至。薛氏曰。一陳敗北。夫君亦必不免。遽欲自處。家衆挽之甚力。其夕潛入後園。又欲自經。姑金氏跟至救解曰。汝夫生死不可知。未晩也。居數日。僉正公果至。適以事在外而得不死也。丁酉再亂。僉正公與金億秋諸公。復起義旅。防守大同江。是時薛氏奉老姑及再從叔母鄭氏金氏。逃難于山峽。婢夢蘭隨之。一日賊猝至。先害其姑。又向薛氏。薛氏據危巖而坐。大聲責之曰。汝雖犬羊。豈不知朝鮮禮義之俗乎。遂投巖下而死。鄭氏金氏俱在傍近。又從而投死。夢蘭抱尸痛哭。因觸石而死。時僉正公自西北路。轉戰南下。隸李忠武幕。露梁之戰與再從叔二人。同時殉節。外史氏曰。天寶之亂。義士惟顔魯公一人。五季之衰。貞女惟王凝妻一人。忠烈之難。自古已然。鄭氏一門。忠臣烈婦。磊落相望。而其宏綱大節。遺風餘韻。炳炳然照人耳目。吁可敬也。但九閽深遠。旌褒寥寥。雖若可憾。然有功於萬古綱常者。當與萬古綱常同其始終。豈一時顯晦所能低昂也耶。 정진(鄭縉) 미상~1598.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의(子儀)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삼종형제인 정응(鄭鷹)·정홍(鄭鴻)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의진(義陣)에 합세하였다.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전투에서 패배하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묘막에 잠시 피하였다가, 정부에서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진(陣)에 보내는 문서를 전달하는 데 공을 세워 훈련원첨정에 임명되었다. 그 뒤 1598년 노량해전에 참가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천보(天寶)의 난 천보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이다. 즉 당시에 일어난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가리킨다. 안노공(顔魯公)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진 당나라의 안진경(顔眞卿, 709~785)을 이른다. 자가 청신(淸臣)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아 혁혁한 공을 세우자, 현종(玄宗)이 하북 초토사(河北招討使)로 삼아 북방 일대의 의병(義兵)을 이끌게 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제수되고 대종(代宗) 때에 노군공에 봉해졌다. 덕종(德宗) 때에 태자 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초유(招諭)하러 갔다가 구금되어 3년간 온갖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오계(五季)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나기까지의 다섯 나라를 말하는데,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등이다. 왕응(王凝)의 처 이씨(李氏) 왕응은 당(唐)나라 때 학자로, 지방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을 만나 끝까지 성(城)을 지켰다. 왕응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유해(遺骸)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개봉(開封)에 들러 숙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고 수상하게 여겨 숙박을 거절하며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자, 이씨가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내가 여자가 되어 수절하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손이 잡혔으니, 이 손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고는 도끼를 가져다 팔을 잘라 버렸던 고사(故事)가 있다. 《新五代史 卷54 雜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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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박창현전 朴都正昌鉉傳 도정(都正) 박창현(朴昌鉉)은 자가 영화(永化)이고, 밀양(密陽) 사람으로 강진현(康津縣)에 살았으며, 도정은 그의 직함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칭송이 일찍 드러났다. 아버지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어머니 김씨가 풍비(風痺)를 앓아 앉거나 누울 때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자, 사방을 다니면서 훌륭한 의원을 두루 구하였고, 온갖 초목(草木)의 자미(滋味)196)와 침과 뜸의 방법을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끝내 낫지를 못했다. 이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행한 것이 몇 개월이 되었지만 또한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낭주(朗州, 전남 영암의 옛 지명)의 소금강(小金剛, 월출산을 가리킴)으로 들어가 산신령에게 기도하였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빙설이 뒤덮혀도 매달의 상례로 삼았는데, 어느 하루 저녁 꿈에는 다른 징조가 있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김씨 또한 이날 밤에 꿈속에 어떤 한 노인이 두 개의 흰 대나무로 아픈 곳을 세 번 쳤는데, 이때부터 병세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가자 김씨가 놀랍고 기쁜 마음에 갑자기 일어났는데,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소치라 여겼다.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지기가 우뚝하여 일찍이 개연(慨然)히 절의(節義)로 자부하기를, "내가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하는 것에는197) 기필할 수 없지만 절의를 위하여 죽는 일이라면 어찌 남에게 양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삼장사(三壯士)198)를 논하여 말하기를, "그 절개는 높고 아름답지만, 다만 곧장 앞으로 나아가 적을 참수하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것이 한스러운 뿐이다."라고 하였다. 중년 이후로는 문을 닫고 《삼략(三略)》과 《육도(六韜)》199), 《병학지남(兵學指南)》200)과 《연기신편(演機新篇)》201) 등의 책 읽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았고, 포진(布陣)과 행군(行軍), 진퇴(進退)와 합변(合變)하는 방도202)에 대해 연구하여 자세히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오년에 동학 교도(東學敎徒)들이 맹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이 북받쳐 가서 절도사(節度使)를 만나 소탕할 계책을 진달하고 마침내 옆 고을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민병(民兵) 700명을 얻어 나주 영장(羅州營將)과 합병(合兵)하여 전주(全州)로 향하다가 옥과(果果)의 경계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하라는 전지를 받고 돌아왔다. 적들이 전주를 함락시킨 이후로부터 곳곳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날로 더욱 불어나더니, 6월에는 적 수천 명이 장흥(長興)에서 강진(康津)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공이 절도사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저에게 포군(砲軍) 백 명을 빌려주면 가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따라주지 않자 공은 혀를 차며203)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적들은 공을 매우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사람들이 혹 피하기를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삼척의 대환도(大環刀)204)가 있어 적들을 감당할 수 있는데, 어찌 머리와 꼬리를 감추어 구구하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적들은 평소에 그 위엄과 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12월에 적이 장흥과 강진 등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병영을 침범하려고 하여 10리 떨어진 곳에서 묵었는데, 절도사가 급히 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모두 한민(閒民,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고 저들도 오합지졸이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저들이 먼저 공격하면 우리가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은 참으로 알기 쉬운 형세입니다. 오늘 밤 민병들만으로 성을 지키게 하고 포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습격한다면 썩은 것을 부러뜨리는 형세와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위험한 계획이라 여겨 쓰지 않았다. 단지 본면(本面)의 민병들만 거느리고 성 밖의 채책(寨柵)205)을 지켰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들이 일자(一字)로 포진하여 오자, 공이 말하기를, "벌건 대낮 큰 길에서 행렬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만약 선봉을 패배시킨다면 뒤에 비록 10만의 군사가 이어 온다 하더라도 형세상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중도의 요해지에서 습격하십시오."라고 하였는데, 또 따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적들이 이르자 채책을 지키던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채책은 비록 온전하나 적들이 다른 채책을 따라 들어온 지 오래되었으니,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중군과 힘을 합쳐 성을 지키는 것이 낫겠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성을 들어갔는데, 성 안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남아있는 이가 없고, 적들의 선두 기병이 이미 이따금씩 떼를 지어 거리를 휘젓고 다니니, 공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가 만나는 적들마다 베었다. 얼마 안 있어 많은 무리가 이르렀다. 공이 멀리서 바라보고 군대를 지휘하여 나가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충돌하다 갑자기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적이 죽었다고 여겨 아무 걱정 없이 왔는데,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적의 수급 몇 명을 참수하고 죽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절도영(節度營, 절도사가 있는 본영)은 바로 한 도(道) 관방(關防)206)의 요해처이며, 절도사는 바로 한 도 도독(都督)의 중대한 직임이다. 성지(城池)가 천험(天險)하고 병갑(兵甲)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5백 리를 호령하고, 기고(旗鼓)와, 부월(鈇鉞)207)이 그 손아귀에 있어 60주(州)를 조발(調發, 군사를 불러 모음)한다면 기계(器械)와 추속(芻粟, 병마(兵馬)의 군량)이 어찌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반란군208)과 유랑민, 좀도둑209)들이 쳐들어오자 넋이 나가 허둥지둥 달아나 숨어서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고 국위(國威)를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아, 사람을 얻으면 10만의 적병(敵兵)이라도 많지 않으며, 사람을 잃으면 천리의 관방(關防)이라도 웅대하지 않는 법이다. 당시에 절도영 아래에 오직 박도정 한 사람만이 있었는데, 쓰지 않았으니 패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를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이뿐만 아니라 만약 그의 계책이 일찌감치 행해지고 의병을 모집한 군대가 전주(全州)에 도달하였다면 비류(匪類)의 난이 필시 흉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라의 상황이 또한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한 도의 성을 지킴에 만전을 기하는 계책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관계된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천고 지사(志士)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창 적이 드셀 때에는 술과 고기를 갖추고 북치고 피리 불며 분주하게 보내고 맞이하는 자가 길에서 끊이지 않다가, 매우 두려워져서는 성을 버리고 고을을 떠나 몸을 빼내 구차하게 살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아, 이러한 때에 이러한 사람이 없었다면 호남 지역이 어찌 한 사람도 의로운 선비가 없다는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기품과 곧은 절개가 백세토록 칭송하기에 충분하니 뜻을 펴지 못하고 공을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朴郁正昌鉉。字永化。密陽人。居康津縣。都正其官啣也。天性至孝。稱譽夙著。考病血指。延三日命。妣金氏患風痺。坐臥須人。行四方。遍求良醫。凡草木之滋。針炙之方。無所不試。而竟不愈。於是乃沐浴齊潔。致誠行禱者數月。而亦不愈。於是入朗州之小金岡。禱於山靈。冒風雨藉氷雪。月以爲常。一夕夢有異徵。心竊喜之。金氏亦於是夕。夢有一老人。以兩紈竹。三撾痛處。自是病勢漸減。後數日。下山歸家。呼母而入。金氏驚喜忽起。因以行步如常。人以爲孝感致然。膂力過人。志氣磊落。嘗慨然以節義自許曰。吾於撥亂反正。則有不可必。若伏節死義。則豈讓於人乎哉。又論壬辰之三壯士曰。其節則高矣美矣。但恨不能直前斬賊而先自投死也。中年以來閉門讀三略六韜兵學指南演機新篇等書。晝夜不輟。於布陣行軍進退合變之方。無不硏究而詳熟焉。甲午見東匪大熾。不勝忿憤。往見節度使。陳勦滅之策。遂傳檄傍郡。得民兵七百人。與羅州營將合兵。向全州。至玉果界。得罷兵之旨而還。賊自陷全州以來。在在屯據。日益滋蔓。六月賊數千。自長興將入康津。公請於節度使曰。假我砲軍百人。可以往擒。不從公咄咄歸家。是以賊疾公甚。欲殺之。人或勸之避。公曰。我有三尺大環刀。可以當之。何藏頭隱尾作區區懦夫樣耶。賊素畏其威望。不敢犯之。十二月賊陷長康諸邑。將犯兵營。宿於距十里之地。節度使急邀公議之。公曰。我軍皆閒民彼亦烏合。我先之彼必走。彼先之我必潰此固易知之勢也今夜只以民兵守城。用砲軍。分兩路襲擊。則勢若拉朽矣。衆以爲危計而不用。只得率本面民兵。守城外寨柵。翌朝賊以一字延互而來。公曰。白畫坦路。行不成列。若敗其先鋒。後雖有十萬繼來者。勢何能相及哉。請及其未至而邀擊於中路要險之地。又不從。俄而賊至。守寨者皆遁。公曰我寨雖完賊從他寨入久矣。獨守此何爲。不如入城中軍。合力守城遂入城。城中軍無一人留者。賊先騎。已往往作隊。橫行街路。公奮劒馳逐。逢則斬之。已而大羣至。公望見之。麾軍而出。大呼衝突。忽中丸而仆。賊以爲死。無慮而來。及近。忽起身。斬數賊而死。外史氏曰。節度營是一路關防要害之地。節度使是一路都督重大之任也。城池天險。兵甲山積。號令五百里。旗鼓鈇鉞。在其掌握。調發六十州。器械芻粟。何恨不集。乃於潢池流亡鼠竊狗偸之來。魂飛魄散。蒼黃奔竄。使城池不守。國威不振。其故何哉。嗚呼。得人則十萬敵兵。不足爲衆。失人則千里關防。不足爲壯。當時節度營下。惟有一朴都正而不爲用焉。則其所取敗。勢所必至。非惟此也。若使其計。早見得行。而募義之兵。達於全州。則匪類之亂。必不至鴟張。而國家爻象。亦不至如今日也。豈止爲一路城守萬全之計而已哉。人之用舍。所係如此。詎不爲千古志士無窮之恨乎。然方賊之倔强也。具牛酒張鼓吹。奔走送迎者。絡繹於道。及其甚恐。則棄城亡郡。脫身偸生者。項背相望。噫。此時焉而不有此人焉。則全湖之地。烏得免無一人義士之責乎。偉韻直節。足以有辭於百世。不可以志之未伸功之未就議之也。 초목(草木)의 자미(滋味) 입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반드시 초목의 자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생강과 계피 등을 말한 것이다.[曾子曰: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하였다. 난세를……것에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애공(哀公) 14년조에, "난세를 다스려 그것을 정도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은 춘추(春秋)보다 좋은 책은 없다.[撥亂世, 反諸正, 莫近於春秋.]"라고 하였다. 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진주의 촉석루에 올라가 당면한 국가의 장래를 통탄(痛歎)하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세 장사를 말한다. 삼장사는 영남 삼장사, 호남 삼장사로 나누어 말하는데, 여기서는 호남 삼장사인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를 가리킨다. 영남 삼장사는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킨다. 《鶴峯集 註》, 삼략과 육도(六韜) 《삼략》은 중국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상ㆍ중ㆍ하 3권의 병서(兵書)로 조선 시대 무과 시험 과목인 무경 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이다. 《육도》는 중국 주(周)나라의 태공망(太公望)이 지었다고 하는 병서(兵書)로, 문도(文韜)ㆍ무도(武韜)ㆍ용도(龍韜)ㆍ호도(虎韜)ㆍ표도(豹韜)ㆍ견도(犬韜)의 6권으로 되어 있다. 병학지남(兵學指南) 명(明) 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 중에서 조련법(操鍊法)을 간추려 편찬한 책이다. 원래 선조(宣祖) 때에 간행되어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군사 훈련 교범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정조(正祖) 때 왕명에 의해 이상정(李象鼎)이 수정하고 주석을 첨부하여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를 만들었다. 연기신편(演機新篇) 조선 중기 안명로(安命老, 1620~?)가 편찬한 병서이다. 1660년(현종1) 진법(陣法)의 비조라 일컫는 풍후(風後)·악기(握奇)의 법에 따라 진법을 논하고, 여기에 척계광(戚繼光)의 병제를 개선하여 음양가(陰陽家)의 제법(諸法)을 덧붙여 《연기신편》 3권 3책을 엮었다. 1664년 안명로가 양산군수로 있을 때 《연기신편》을 조정에 보내어 병제의 개편을 요청하였으나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병서들과 함께 병사훈련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합변(合變)하는 방법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하는 병법(兵法)을 말한다. 혀를 차며 원문의 '돌돌(咄咄)'은 속마음은 걱정스러우면서도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으로, 혀 차는 소리를 나타낸다. 진(晉)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있다가 모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밖으로는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나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무슨 글자를 썼다. 이에 사람들이 엿보니 '쯧쯧 괴이한 일이로다'란 뜻인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黜免》 대환도(大環刀) 조선시대에는 긴 외날을 가진 칼을 대부분 환도라고 했다. 길이에 따른 분류로 소환도(小環刀), 중환도(中環刀), 대환도(大環刀) 등으로 나누었다. 환도류 무기 중에서도 크기가 큰 대환도는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채책(寨柵) 사방에 울타리를 친 방어진지를 말한다. 관방(關防) 좁고 막힌 험애(險隘)한 곳에 관소(關所)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켜 방어하는 것, 또 그러한 곳을 말한다. 기고(旗鼓)와 부월(斧鉞) 기고는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쓰이고, 부월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여기서는 절도영의 지휘를 맡은 절도사를 가리킨다. 반란군 원문의 '황지(潢池)'는 외지고 좁은 땅이란 뜻으로 반역이 일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곧 임금의 어진 정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진 곳에 사는 백성들이 지방 관리들의 폭정으로 인해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것을 비유한다. 한나라 공수(龔遂)가 선제(宣帝)의 하문을 받고 "백성은 기한에 시달리건만 관리들이 돌보아 주지 않자, 폐하의 적자들이 폐하의 병기를 훔쳐 황지 가운데서 장난을 쳐 본 것뿐입니다.[其民困于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 盜弄陛下之兵于潢池中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89 龔遂傳》 좀도둑 원문의 '서절구투(鼠竊狗偸)'는 쥐와 개처럼 몰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인데, 조선 시대에 변경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야인(野人)이나 왜적(倭敵)을 일컫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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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0 卷之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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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애장(艾丈)의 심설(心說)은 실로 좋지만 '주재(主宰)는 이(理)'라는 한 구절은 조금 경약(徑約)10)한 듯하네. "그 주재를 말하면 심이고 그 주재하는 것을 말하면 이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근래 이른바 주기론(主氣論)은 실로 말할 것이 없고, 주리자(主理者)도 또한 종종 설이 너무 고상하여 오로지 '심'을 '이' 자로 간주하고 심지어 성은 치우치고 심은 온전하며 성은 영쇄(零碎)하고 심은 총회(總會)라고 하여, 심과 성 두 물이 대치하여 병립한 것 같이 여기고 또 별도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이 여기네.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니니, 어찌하고 어찌 하겠는가? 합일분수(合一分殊)는 당초 나의 뜻은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뜻으로 보아 인력으로 끌어다가 합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네. 지금 동계(東溪)와 경함(景涵)의 말을 보고 과연 그것이 온당하지 않은 줄 알았으니, 어찌 경계할 줄 모르겠는가?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두 가지 의가 있으니, 곧장 생(生)을 가리켜 성(性)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인 설이고, 생한 뒤를 성이라 하는 것은 전후의 설인데, 어찌 전혀 구분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남과 계교하기를 좋아함은 사욕이 앞선 폐단이네. 그 사용이 앞서는 것을 버리는 것이 인을 구하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세속에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지 않아 나의 의(義)를 행할 수 있고 의사를 홀로 세움이 있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과 더불어 계교하지 않는 것은 인을 구하는 방법이니 학자의 공부이고, 남과 계교함이 없는 것은 안자(顔子) 이상의 일이네. 艾丈心說固好。但主宰則理一句。稍涉徑約。如曰言其主宰則心。言其主宰底則理。何如耶。近日所謂主氣之論。固無足道。其主理者。亦往往說得太高。專以心看作理字。至以性爲偏。心爲全。性爲零碎。心爲總會。似若心性二物對峙竝立。又若別有無位眞人。坐在冥冥之中此非小疵。奈何奈何。合一分殊。當初愚意。看作理一分殊之義。非待人力牽合之謂也。今得東溪及景涵之語。果知其未穩。曷不知戒。生之謂性有二義者。眞指生謂性是對待說。生而後謂之性。是前後說。何謂專然無分耶。好與人校。是私勝之敝也。去其私勝。非求仁之方耶。不同流合汚。可以行吾義。有獨立意思。非所以爲義耶。不與物校。是求仁之方。學者之功也。與物無校。是顔子以上之事也。 경약(徑約) 박문(博文)하고서 약례(約禮)해야 하는데도 박문은 거치지 않고 바로 약례에만 치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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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遺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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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판 행 부산 첨사 오공 유사장 贈兵曹參判行釜山僉使吳公遺事狀 예로부터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있으면, 위로는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 있고 아래로는 야사(野史)에 흩어져 나오거나 혹은 쇠와 돌에 새겨져 후대에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붓을 들어 쓴 말은 부회(附會)한 것을 답습하기도 하고 혹 아부하는 것에 가깝다. 금석(金石)이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면 연기나 구름처럼 사라져 봄날의 새와 가을날의 곤충처럼 아득하여 소리가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仁)은 세상을 두루 덮어준 것이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아래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마음에 부합하여 여항의 궁벽한 곳에 자자하니, 이것이야말로 믿을 만한 사승(史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며, 오래 갈 수 있는 금석(金石)인 것이다. 우리 고을에, 옛날 오공이란 분이 있었는데 휘가 방한(邦翰)이고 자는 원중(元仲)이며, 보성(寶城) 사람이다. 묘년(妙年, 스물 안짝의 나이)에 죽천 선생(竹川先生) 박공(朴公) 광전(光前)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2)하여 벼슬이 개운 만호(開雲萬戶)를 지내고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에 정예병(精銳兵) 수백 명을 모아 행재소(行在所)3)로 달려갔는데, 임금이 위로의 말을 해 주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시며 영남을 방비하게 하니 공이 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주로 들어갔다. 그때에 같은 고을의 진사 문홍헌(文弘獻)이 최경회(崔慶會)의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공을 추천하여 막좌(幕佐)로 삼고 항상 전략을 세우는데 참여하게 했다. 성이 함락되자 공이 성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며 쏘아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자 문홍원과 같은 날 순절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계사년(1593, 선조26) 6월 29일이었다. 그 강개(慷慨)한 절개와 충렬(忠烈)의 의리는 함께 순절한 여러 공들과 그 자취가 같았는데, 다만 명성과 지위가 드러나지 못하고 후손들이 쇠락하여 오랜 세월이 흐름으로 인해 묻혀서 을사년의 녹훈(錄勳)을 받지 못하고 진주(晉州)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공조(公朝)의 사첩(史牒)과 초야의 기문(記聞)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았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만 적막하게 몇 마디 말에 그쳤을 뿐이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다만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당일의 일들을 말해줌에 눈으로 직접 보는 듯 역력하기에 부녀자나 아이들, 하인이라도 감개(感慨)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들이 없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아, 당일의 의로운 처신이 만약 명백하고 직절(直截)하지 않으면서 유전(流傳)되고 부회(附會)하여 제동 야인(齊東野人)4)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찌 오래될수록 이처럼 절실하게 되었겠는가. 사승(史乘)은 더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부로(父老)와 부유(婦孺)는 기망(欺罔)할 수 없고, 금석(金石)도 때로 사그라지는 때가 있지만 병이(秉彝)와 호덕(好德)5)의 본성은 실추시킬 수 없으니, 그 믿을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이 어찌 사승, 금석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을유년(1885, 고종22)에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아울러 병조 참판에 추증하였으니, 또한 공의 여러 사람의 칭찬이 민멸하지 않고 덕을 좋아하는 본성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는 한 세상의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죽어서는 장홍(臧洪)의 무리들6)과 지하에서 노니니 어찌 장쾌하지 않겠는가. 나는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보고 들어서 추앙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였고, 또 명보(名寶)의 구분에 우연히 느낀 바가 있어 삼가 이와 같이 기록한다. 自古人物有聞於世者。上焉則昭載國乘。下焉則散出野史。或刻之金勒之石。以壽其傳。然載筆之言。或襲附會。或沙阿好。金石雖固。而時移世變。烟消雲空。如春鳥秋蟲。漠然無聲也。惟其盛德至仁。徧覆宇宙者尙矣。下至一言一行。合乎匹夫匹婦之心。而藉藉於委巷窮曲之間者。此是可信之史乘。可久之金石也。吾鄕古有吳公諱邦翰。字元仲。 寶城人。妙年受學于竹川先生朴公。光前之門。 登武科。 官開雲萬戶。 移釜山僉使。壬辰之變募精兵數百。赴行在。上慰論之。賜弓矢。使備嶺南公拜命南下。入晉州。時同郡文進士弘獻爲崔公慶會從事官。薦公爲幕佐。常參謀畵。及城陷。公登城大呼。射殺甚多。及矢盡力窮。與文弘獻同日殉節卽。癸巳六月二十九日也。其慷慨之節。精烈之義。與同殉諸公同軌一轍。而但名位不揚。雲仍零替。時久歲移。因以堙沒。未蒙乙巳之錄勳。未配晉州之彰烈。至公朝史牒。草野記聞。皆無傳焉。而於湖南節義錄。止寂寞數語耳。豈不可憾。但鄕父老相傳。說當日事。歷歷如目擊。雖婦孺隷儓。未嘗不感慨歡仰。嘖嘖不容口。嗚呼。當日處義。若不明白直截。而流傳附會。出於齋東野人之口。則豈愈久而愈不忘。至於若是之切耶。史乘或不能盡信。而父老婦孺不可以欺罔。金石或有時銷泐。而秉彛好德。不可以失墜。其可信可久。豈史乘與金石之比耶。及夫乙酉。命旌閭。兼有兵參之。贈。亦可以見其公誦詩之不泯而好德之攸在也。生而扶一世之綱常。死而與臧洪輩遊於地下。豈不快哉。余以鄕里後生。平日瞻聞。偏切追仰之誠。又於名寶之分。偶有所感。謹述之如此云爾。 박공(朴公) 광전(光前)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항(李恒)·유희춘과 함께 호남5현의 한 사람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이 되어 싸웠다. 학문에 있어서 지행의 어느 하나만을 내세울 수는 없으며, 그 둘은 서로 의지하여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행호진의 관계를 강조했다. 저서로 《죽천집》이 있으며, 퇴계 이황과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은 그의 깊은 성리학적 식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보성 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이다. 무과에 급제 오방한은 무예가 뛰어나 경인년(1590, 선조2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무슨 일로 인하여 대궐을 떠나 있을 경우, 임금이 머물고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곳을 말한다. 제동 야인(齊東野人)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로, 그 말은 근거가 없는 황당한 이야기여서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제나라 동쪽 시골 사람의 말이다.[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병이(秉彝)와 호덕(好德) 병이는 하늘이 부여한 떳떳한 본성을 말한다. 호덕은 사람이면 모두 천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다. 《시경》 〈증민(烝民)〉에 "사람이 떳떳한 본성을 가진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장홍(臧洪)의 무리들 함께 죽은 이들을 뜻한다. 장홍은 삼국 시대 사람으로 자가 자원(子源)이다. 그가 원소(袁紹)에게 생포되어 죽을 때 평소 장홍과 동향(同鄕) 사람으로 장홍을 흠모하던 진용(陳容)이 원소에게 장홍을 죽이는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진용을 끌어내면서 "그대는 장홍의 무리도 아닌데 공연히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하니, 진용이 "대저 인의(仁義)란 어찌 일정한 기준이 있겠는가. 이를 실천하면 군자요 이를 저버리면 소인이다. 오늘 차라리 장홍과 같은 날 죽을지언정 장군과 같은 날 살지는 않겠소."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臧洪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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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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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집목록 日新齋集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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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전후의 심설(心說)은 장황하게 반복하여 개오(開悟)한 뒤에 그만 두기를 기약하니, 나를 아끼고 나에게 은혜로운 것이 지극하여 매우 감사하네. 무릇 심은 어떤 물인가? 기가 있는 것을 심이라 한다면 천하에 기 아닌 물이 없고, 이가 있는 것을 심이라 한다면 천하에 이 바깥의 물이 없네. 이것을 심으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심을 심으로 여기는 것은 단지 기의 신령한 곳으로 말하기 때문이네. 령(靈)은 심 자의 본래 면목이니, 신령하기 때문에 능히 갖추고 능히 응하고 능히 주재하고 능히 신묘하네. 만약 완준(頑蠢)하여 신령함이 없어 마른 나무와 꺼진 재와 같다면 어찌 능히 갖추고 능히 응하고 능히 주재하고 능히 신묘하겠는가? 그렇다면 심 자의 경계를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이가 아니면 능히 신령하지 못하니, 신령함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네. 이 때문에 나누어 말하면 기의 정상(精爽)이라 하고 합하여 말하면 이의 주재(主宰)라 하네. 그 어세를 따라 뜻이 각각 마땅한 것이 있으니, 지금 이에 각자 하나의 견해를 잡고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지금 능히 낱낱이 거론하여 세세히 진술하지는 못하지만 그대의 의론은 대개 영명(靈明)과 묘용(妙用)에 정추(精粗)가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는 기에 속하게 하고 하나는 이에 속하게 하니, 이것이 가장 온당하지 못하네. 기의 령이 바로 이의 묘용이니, 어찌 기 스스로 하나의 령이 있고 이 스스로 하나의 신(神)이 있어 서로 점거하고 있겠는가? 또 "이 몸이 있어 이 이를 갖추고 있어서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고, 이 이를 갖추어 이 신이 있어서 심(心)이라는 이름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 또한 온당하지 않네. 이 설과 같다면 이 성을 갖추고 있는 시절에 이 심을 말할 만 한 것이 없고 이 신(神)이 있은 뒤에 바야흐로 이 심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무슨 물인가? 내 생각은 처음에 애장(艾丈)의 설을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것이 아니네. 다만 그 가운데 나아가 심성과 주재의 의를 깊이 밝힌 것일 뿐인데, 점점 설을 펼쳐 나감에 이렇게 장황하게 된 것은 실로 처음의 의도가 아니네. 대저 나의 뜻은 평소 주기론을 깊이 싫어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그러나 우리 주리를 주장하는 사람 또한 혹 교왕과직(矯枉過直)11)의 폐단이 없지 않기 때문에 감히 말한 것이지, 고의로 옛날 견해를 버리고 저 주기론에 나아간 것은 아니네. 어떻게 여기는가? 前後心說。張皇反復。期欲開悟而後已。其所以愛我惠我者至矣。感感萬萬。夫心是何物。以有氣而謂之心。則天下無非氣之物。以有理而謂之心。則天下無理外之物。不以此爲心。而必以心爲心者。特以氣之靈處言故也。靈是心字本來面目。靈故能具能應能主宰能神妙。若頑蠢無靈。如姑木死灰。則何以能具能應能主宰能神妙乎。然則心字界至。斷可知矣。然非理則不能靈。靈非自爲。乃理之使然。是以分以言之。謂之氣之精爽。合以言之。謂之理之主宰。隨氣語勢。而意各有當。今乃各執一見。互相圭角可乎。今不能枚擧細陳。而賢論槪以靈明與妙用。謂有精粗。而一屬之氣。一屬之理。此最未穩。氣之靈。卽是理之妙用。豈氣自有一靈。理自有一神互相占據乎。且曰有此身。具此理。而有性之名。具此理。有此神。而有心之名。此亦未穩。如此說。則具此性時。節無此心之可言。而有此神而後。方有此心耶。然則具此性者。是何物耶。鄙意初不以艾丈說爲不然也。但就其中。深明心性主宰之義而已。轉輾說去。至此張旺。實非初意也。大抵鄙意。平日非不深惡主氣之論。然吾輩主理之人。亦或不無矯枉過直之敝。故敢有云云。非故欲舍舊見而趨於彼也。如何。 교왕과직(矯枉過直) 구부러진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너무 곧게 하는 것으로, 곧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치어 오히려 나쁘게 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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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人與人同 物與物同]는 설은 일찍이 한 벗의 질문으로 인하여 창졸간에 답한 것이 이와 같아 한 생각이 허전하여 십분 알맞은 뜻이 아니라고 여겼네. 그 뒤 돌이켜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 점을 보지 못하여 생각할수록 더욱 그 설에 들어가니, 이것이 경함(景涵)의 말이 전후로 누누이 이어졌지만 끝내 옳다고 수긍하지 못한 까닭이네. 일전에 우연히 《중용》을 가지고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한가로이 보다가 《중용집주》에 이른바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 받은 바의 이(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 오상(五常)의 덕(德)을 삼는다."라는 한 단락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황연히 깨달았네.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됨은 분수는 비록 다르지만 건순 오상을 덕으로 삼는 것은 동일하네. 하문에 "성과 도는 비록 다르지만"이라고 한 것은 어찌 이 구절에 응하여 붙여서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고집하는 것은 과연 이유가 있고, 나의 견해를 고집하는 것은 혼미함을 돌리기 어려우니, 매우 부끄럽네. 그러나 분변하기를 힘쓰지 않는다면 앎이 견고하지 못하니, 전날 다소의 허비한 설이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매우 감사하네. 또 '만수(萬殊)'라고 하는 것은 '일본(一本)'의 안산(案山)이니, 오로지 이분(理分)으로 말하였지 어찌 일찍이 기분(氣分)으로 설명하였던가? 그러나 일변의 논의에 이를 혼연하여 구분이 없는 물로 여겨 주재와 구별은 모두 기로 말미암는다고 여기니, 이것은 성악(性惡)의 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설의 오류를 보고 돌이킬 수 있기를 생각한다면 분수(分數)의 단락이 이미 이(理)에 갖추어졌다고 여겨야 하니, 이 설은 일변의 설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네. 그러나 한갓 분수의 단락이 이미 갖추어진 것만 알고 절충함이 있지 않으면 이른바 악(惡)이라는 것이 귀속(歸屬)할 곳이 없어 도리어 성악의 논의에 점점 빠져들 것이네. 그렇다면 장차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 반드시 분수 상에서 절단하여 이기(理氣)를 보아야 바야흐로 귀착할 곳이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횡측(橫側)으로 치달려 천차만별한 것을 똑같이 이(理)가 가진 것이라 이르겠는가? 이것이 만수(萬殊)에 이분(理分)과 기분(氣分)의 설이 있는 까닭이네. 정통 편색(正通偏塞)은 인물(人物)의 큰 구분이고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것이 되니, 비록 기(氣)이지만 이(理分)이라 하는 것이 가하네. 내가 이른바 이분은 실로 교구(矯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이 뜻이 아님이 없는데, 그대는 도리어 끝까지 힐난하여 "금수를 교구하는 것이 사람의 정통(正通)이 된다.……"고 하니, 어찌 남의 말을 믿지 않음이 이와 같은가? 선사(先師)5)께서 이른바 "형기를 떠나서 분(分)을 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理)가 일찍이 분(分)이 없지 않음을 볼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또한 그 이분의 설을 가리킨 것이네. 사람이 불선을 하는 것과 금수가 치고 깨무는 것과 초목이 요얼(妖孼)이 되는 것 같은 것을 어찌 일찍이 이(理)가 가진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던가? 이분과 기분은 그 설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자못 힘을 들여 구처(區處)한 것이 이와 같으니, 과연 전현에게 죄를 얻지 않을지 모르겠네. 지난번 보여준 책자는 연이어 어지럽고 쓸데없는 일로 인하여 미처 살펴보지 못하다가 지금 겨우 한 번 보았을 뿐이네. 삼가 나의 뜻으로 대략 말한 것이 있으니, 살펴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네. 다시 더욱 자세히 생각하여 인편에 따라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도리어 생각건대 보잘것없는 나는 벗들을 떠나 쓸쓸히 지내며 노쇠하여 옛 학업이 황폐해진 지 오래 되었으니, 만일 그대가 나를 위해 단서를 열어 주지 않으면 어찌 한 생각이 이러한 의체(義諦)에 미치겠는가? 감사한 마음 끝이 없네. 바라건대 모름지기 부지런히 힘써 더욱 높고 깊은 경지에 나아가시게. 사옥(士玉)6)은 요즘 함께 지내고 있는가? 독실하고 근칙(謹勅)하니,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네. 밤낮으로 서로 지켜주면 도움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네. 人與人同物與物同之說。曾因一友生之問。倉卒酬答者如此。而一念缺然。以爲非十分稱停之義。其後反而思之。未見其不然。愈思而愈入其說。此所以景涵之言前後縷縷。而終不肯可者也。日前。偶將中庸早晩閒看。及到集註所謂人物之生。因各得其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一段語。不覺怳然而覺悟也。爲人爲物。分則雖殊。而其爲健順五常則一也。下文性道雖同。豈非所以應貼此句而言者乎。賢之固執。果有以。而鄙見之執迷難回。可愧可愧。然辨之不力。則知之不固。前日之多少費說。爲何傷也。謝謝。且萬殊之云。是一本之案山。專以理分言。何嘗以氣分說也。然一邊之論。以理爲渾然無分之物。而以爲主宰區別。皆由於氣。此非性惡之說而何。見其說之差謬。而思有以反之者。則以爲分數段落。已具於理。此說比一邊之說。不啻天淵。然徒知分數段落之已具。而不有以折衷之。則所謂惡者。無所歸屬。而反有以駸駸乎性惡之論矣。然則將何以折衷哉。必於分數上。折斷得理氣看。方有着落處。不然橫側奔逸。千差萬錯。槪謂之理之所有耶。此所以有萬殊理分氣分之說也。正通偏塞。是人物之大分。而爲萬世不可易底。則雖氣也而謂之理分可也。鄙所謂理分固不可以矯捄者。未始非此意。而賢反窮詰之。以爲矯捄禽獸爲人正通云云。何不諒人言之若是耶。先師所謂雖不離形氣言分。而理之未嘗無分可見云者。亦指其理分底說也。若人之爲不善。禽獸之爲搏囓。草木之爲妖孼何嘗言理之所有耶。理分氣分未知其爲說何如。而區區所以頗費區處者如此。果不知獲罪于前賢否耶。向來所示冊子。連因紛冗。未及繙閱。今纔一番看過耳。謹以鄙意略有云云。考可悉矣。更加三思。隨便示及。如何如何。顧惟無狀。離索衰替。而舊業之荒廢久矣。如非吾友爲之發端。則安有一念及於此等義諦耶。感感亡已。望須勉勉益造崇深也。士玉近日同處否。篤實謹勅。所望非細。昕夕相守。資益想不淺淺。 선사(先師)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임성주ㆍ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사옥(士玉) 정순진(鄭淳珎, 1878~?)의 자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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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일본만수(一本萬殊)는 이(理)로 말하면, 하늘의 이가 바로 땅의 이이고 사람의 이가 물의 이여서 실로 말할 만한 계위(界位)가 없으며, 분(分)으로 말하면, 만물은 하늘에 통솔 되고 만사는 마음에 통솔 되고 만민은 임금에게 통솔 되고 만지(萬枝)는 뿌리에 통솔 되고 만류(萬流)은 근원에 통솔 되니, 이것이 유독 일본만수의 의가 아닌가? 보내온 편지에서 "어찌 한 개의 일본만수인데 이(理)에 있고 심(心)에 있는 다름이 있겠는가?"라고 여겼으니, 어찌 그 설이 너무 명쾌하고 변론이 너무 심한 것인가? "천하의 악은 따로 근두(根頭)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스스로 한 단락을 제기한 것이고 윗 문장의 뜻과 연루시킨 것이 아니네. 보내온 편지에서 '심(心)' 자를 바꾸어 '기(氣)'라 하여 기를 심에 해당 시킨 등의 말은 남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할 만하네. 경(敬)은 인(仁)을 구하는 요체가 되니 이것은 인을 체득하는 공으로 말한 것이고, 서(恕)는 인을 구하는 방법이 되니 이것은 인을 행하는 공으로 말한 것이니, 《논어》에 '이것은 인의 근본이다[是仁]'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行仁]'라는 구별이 있는 것과 같네. 그러나 서(恕)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려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하는 뜻인즉, 경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은 적이 없으니, 경을 말하면 서가 그 가운데 있다는 것과 같네. 영남으로 행차하였다가 간소(刊所)에서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 자신의 사정은 실로 움직이기 어려우니 매우 불안하네. 사옥(士玉)과 근래 상대하고 있어 외롭고 쓸쓸한 처지가 매우 위로 되네. 순실(淳實)하고 근칙(謹飭)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향학(向學)하는 것이 사옥과 우경(宇卿)7) 같은 이는 매우 쉽게 얻을 수 없으니, 그대의 말이 또한 나의 뜻이네. 책자는 가을과 겨울이래로 한결같이 어수선하여 펼쳐 볼 여가가 없었고, 근래 비로소 한 번 보았는데 종종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이 많아 나로 하여금 절로 심취하게 하였네. 가숙(家塾)이 새로 이루어졌으니, 그대의 공부하고 휴식하는 계획을 얻었을 것이네. 다만 마땅히 편액을 붙일 것을 생각하여 그대가 밤낮으로 면려하려는 뜻에 만 분의 일이라도 부응해야 할 것이니, 우선 기다려 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명덕(明德)……"이라 한 것은 선유의 설이 아마 해롭지 않을 듯한데, 다만 "이것은 하늘의 인의예지에서 받았다."라고 하니, '성(性)' 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이 흠결이 될 뿐이네.무릇 합일분수(合一分殊)는 성(性)으로 말하면 마땅히 성에서 보아야 하고, 심(心)으로 말하면 마땅히 심에서 보아야 하네. 다만 합일분수를 심과 성에 분속시켜 보는 것은 불가하네. 합일분수도 오히려 분속시키는 것이 불가한데, 더구나 편전(偏全)을 심과 성에 분속시킬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인용하여 비유한 것은 지극히 그 단서가 많지만 단지 긴 행랑의 기둥을 다시 세는 것8)에 불과하네. '신명(神明)' 두 글자는 절로 '심(心)' 자의 본 뜻이니, 신명을 놓아두고 심을 말하면 공적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이후로는 마땅히 성을 말해야 하고 심을 말해서는 부당하네. 애산(艾山)9)이 말한 "심은 성정(性情)의 통명(統名)이다."라고 한 것을 그대는 어떻게 여기는가? 나는 심이 성정을 통솔한다고 하는 것은 가하다고 여기고, 심이 성정의 통명이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기네. 왜 그런가? 성정의 바깥에 심이 없기 때문이네. 신명은 심의 본 뜻이고 신명하게 하는 것은 이(理)가 아닌가? 이와 같은 설은 이가 주재가 되지 못할까 근심이 없을 것이네. 그대는 심 자를 보는 것이 애산의 설과 같아 종종 이런 갈등을 이루게 되니, 다시 상세히 살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一本萬殊。以理言之。天之理卽地之理。人之理卽物之理。固無界位之可言。以分言之。萬物統於天。萬事統於心。萬民統於君。萬枝統於根。萬流統於源。此獨非一本萬殊之義乎。來喩以爲豈一箇一本萬殊。而有在理在心之異。何其說之太快。而辨之太深也。天下之惡。非別有根頭云云。此是自起一段。非所以連累上文之意。來喩換心爲氣。以氣當心等語。可謂不諒人意矣。敬爲求仁之要。此以體仁之功言。恕爲求仁之方。此以行仁之功言。如論語有是仁行仁之別。然恕是己立立人己達達人之義。則敬未嘗不在其中。如言敬而恕在其中。嶺行。自刊所催促。非一非再。而身故姑難動作。不安不安士玉近與相對。頗慰孤索。淳實謹飭。一意向學如士玉宇卿。甚不易得。賢言亦吾意也。冊子秋冬來。一向紛汨。未暇披看。近始一覽。往往多格言至論。令人不覺心醉。家塾新就。吾友修息之計得矣。第當思其所以扁揭者。以副吾友日夕警勉萬一之意。姑俟之如何。明德云云。先儒說恐無害。而但曰是所受於天之仁義禮智云。則與性字何別。此爲所欠耳。大抵合一分殊。以性言之。則當於性上看之。以心言之。則當於心上看之。但不可以合一分殊。分屬心性看也。合一分殊。猶不當分屬。況以偏全分屬心性乎。賢所引喩。極其多端。而只不過再數長廊桂也。神明二字。自是心字本旨。舍神明而言心。則其不近於空寂乎。過此以往。則當言性。不當言心。艾山所言心是性情之統名者。賢以爲何如耶。愚以爲心統性情則可。以爲心是性情之統名則未可也。何者。以性情之外。無心故也。神明是心之本旨。而所以神明者。非理乎。如此說。不患理不爲主宰矣。賢看心字如艾山說。種種致此葛藤。更詳之如何。 우경(宇卿) 임태주(任泰柱, 1881~1944)의 자이다.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성재집》이 있다. 긴……것 공연히 의심하여 다시 문제 삼는 것을 말한다. 《근사록》〈존양(存養)〉에 "정명도(程明道)가 예전에 장안의 창고 안에 한가로이 앉아서 긴 행랑의 기둥을 보고 마음속으로 세었다. 이미 의심이 없었으나 다시 세어 보니 부합하지 않자 사람으로 하여금 일일이 소리 내어 세어 보게 하였는데, 결국 처음 세었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伯淳昔在長安倉中閑坐, 見長廊柱, 以意數之. 已尙不疑, 再數之不合, 不免令人一一聲言數之, 乃與初數者無差.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또 다른 호는 노백헌(老柏軒)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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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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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가선대부 호조참의 매죽헌 박공 유사장 贈嘉善大夫戶曹參議梅竹軒朴公遺事狀 공의 성은 박씨이며 휘는 성우(成祐)이고, 자는 화언(華彦)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대제학(大提學) 충의공(忠義公) 휘 첨(瞻)이 그의 비조(鼻祖)이다. 휘가 희중(煕中)이며 호가 위남(葦南)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문장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사신으로서 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다. 또 중국에 사신으로 갔으며,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문학과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다. 증조는 휘가 경호(慶顥)이며, 조부는 휘가 진해(振海), 호가 겸암(兼巖)으로 행의가 세상에 드러났다. 아버지는 휘가 동수(東壽)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병절(秉節)의 따님으로, 영조 갑진년(1724, 영조1)에 보성 마흘치(馬屹峙)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고 재능이 영특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시험을 좋아하지 않아 개연히 자기를 위한 학문에 뜻을 두었고, 책 상자를 짊어지고 폐백을 갖추어 섬촌(蟾村)의 민 선생 우수(閔先生遇洙)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함양(涵養)과 치지(致知)를 안팎으로 서로 닦고 뜻을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여 동과 정이 서로 의지하였으며,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켜 일찍이 하루라도 놓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앎이 더욱 정교하고 학업이 더욱 치밀해져 한 때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정조 신축년(1781, 정조5) 4월 21일에 생을 마쳤으며, 능주 풍류치(風流峙)의 노상(路上) 병좌(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제범(濟範)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는데, 중혁(重赫)·재혁(再赫)·명혁(命赫)이다. 현손(玄孫)인 태근(泰根)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나는 병으로 문필을 폐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다만 향리의 후생으로 선진(先進)을 사모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으므로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해서 대략 다듬고 윤색하였다. 公姓朴氏。諱成祐。字華彦。號梅竹軒。大提學忠義公諱瞻。其鼻祖也。至諱煕中號葦南道德文章。冠冕一世。奉使日本還。又使上國。封珍原君。子孫因貫焉。自是文學忠孝。世代箸聞。曾祖諱慶顥。祖諱振海號兼巖。行義著世。考諱東壽 贈軍資監正。妣興德張氏秉節女。英廟甲辰。生公于寶城馬屹峙第天稟挻異。才性穎悟。自少小不屑功令。慨然有志於爲己之學。負笈齎贄受業於蟾村閔先生遇洙之門。涵養致知。內外交進。持守力行。動靜互資。得寸守寸。得尺守尺。未嘗有一日之放過。至於晩年。知愈精而業愈密。一時士類。無不倚重焉。正廟辛丑四月二十一日考終。葬綾州風流峙路上丙坐原。配驪興閔氏濟範女。生三男。重赫再赫命赫。玄孫泰根奉家狀。謁余文爲不朽計。余病廢鉛槧。不敢承膺。而但以鄕里後生。慕仰先進之意。有倍餘人。謹据家狀。略爲之修潤云爾。 민 선생 우수(閔先生遇洙) 1694~175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庵)이다. 김창협(金昌協)ㆍ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영조 대에 등용되어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저서에 《정암집(貞菴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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