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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공 봉남126)을 위한 만사 挽洪公鳳南 남쪽 고을에 고상한 선비가 있었으니 (南州有高士)지금 세상에 누가 짝할 수 있으랴 (今世誰與儔)두세 칸 초가집을 짓고 (草屋數三間)오십 년 동안 금서127)를 즐겼네 (琴書五十秋)우뚝이 태어나게 하신 것 응당 뜻이 있었는데 (挺生應有意)느닷없이 빼앗아간 것 또한 무슨 까닭인가 (挺生應有意)벗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우러러볼까 (朋知誰賴仰)진세의 묵은 빚 끝내 갚지 못하였네 (世債未終酬)예로부터 명철한 이들 (自古諸賢哲)응당 백옥루128)에 많을 것이네 (應多白玉樓)시대를 거슬러 벗으로 삼을 만한 점 이분에게 넉넉하였으니 (尙友於斯足)아, 안타까워할 만하네 (于于可遣憂)다만 가련한 것은 이승에 (但憐暘界上)옛 벗이 몇 사람 남지 않은 것일세 (故舊幾人留)모시고 유람하던 곳을 바라보니 (回視陪遊地)침계는 부질없이 절로 흐르네 (枕溪空自流)정자129) 위의 달은 (未知亭上月)옛 교분을 기억하는가 (能記舊交否)사람은 떠났지만 그림자는 아직 남아 있으니 (人去影猶在)서로 어울려 밤마다 유람하리라 (相隨夜夜遊) 南州有高士。今世誰與儔。草屋數三間。琴書五十秋。挺生應有意。遽奪亦何由。朋知誰賴仰。世債未終酬。自古諸賢哲。應多白玉樓。尙友於斯足。于于可遣憂。但憐暘界上。故舊幾人留。回視陪遊地。枕溪空自流。未知亭上月。能記舊交否。人去影猶在。相隨夜夜遊。 홍공 봉남(洪公鳳南) 홍채주(洪埰周, 1834~1887)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경좌(卿佐), 호는 봉남이다. 문집으로는 『봉남집(鳳南集)』이 있다. 금서(琴書) 거문고와 책으로 옛날 선비의 소일거리이다. 『주자대전』 권9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중 「정사(精舍)」시에 "거문고와 책을 벗한 지 40년, 몇 번이나 산속의 객이 되었나. 하루 만에 띳 집을 지어, 어느덧 나도 천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네.〔琴書四十年,幾作山中客?一日茅棟成,居然我泉石.〕"라고 하였다. 백옥루(白玉樓) 상제(上帝)가 사는 곳의 누대를 말한다. 『창곡집(昌谷集)』 외집(外集) 「이장길소전(李長吉小傳)」에 "어느 날 이하(李賀)가 대낮에 졸다가 갑자기 보니 붉은 관복을 입은 도인이 옥판(玉板)을 잡고 있었는데, '상제(上帝)께서 백옥루를 완성하시고, 그대를 불러 기문을 짓게 하려 한다[上帝成白玉樓, 召君作記.]'라고 쓰여 있었다." 하였다. 정자 침수정(枕漱亭)을 이른다.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보리에 있는 정자로, 팔우(八愚) 홍경고(洪景古, 1645~1699)가 17세기 말에 건립하였고, 그의 6세손인 홍채주가 1885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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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청헌의 운에 화운하다 步和樂清軒韻 단계의 수석은 맑아 티끌이 없는데 (丹溪水石絶塵淸)은자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졌네 (賴得幽人更有名)동파의 단방160)을 비밀리에 전수하고 (坡老單方傳授密)잉여옹161)이 남긴 법을 정밀하게 발휘하였네 (剩翁貽法發揮精)몸은 두꺼운 얼음 밟으며 찌는 더위를 식히는 듯하고162) (身如濯熱層踏氷)기운은 양쪽 날개가 생겨 한문에 날아오르는 듯하네163) (氣若羾寒兩翰生)혼연한 우주 속에서 도도하게 공은 일어나지 않으니 (渾宇滔滔公不作)창랑 한 곡조164)는 유독 가슴 아프네 (滄浪一曲獨傷情) 丹溪木石絕塵清。賴得幽人更有名。坡老單方傳授密。剩翁貽法發揮精。身如濯熱層踏氷。氣若羾寒兩翰生。渾字滔滔公不作。滄浪一曲獨傷情 동파(東坡)의 단방 동파는 소식(蘇軾)의 호이다. 소식이 지은 의서 『소학사방(蘇學士方)』을 가리킨다. 잉여옹(剩餘翁) 위명덕(魏命德, 1683~1756)의 호이다. 자는 윤보(潤甫)이다. 낙청헌(樂淸軒)은 위명덕의 후손인 듯하다. 몸은……듯하고 맑고 깨끗하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초가을 무더위에 시달리는데 문서가 계속 쌓이네[早秋苦熱堆案相仍]」에 "남쪽을 바라보니 푸른 솔이 골짜기에 걸쳐져 있는데, 어찌하면 맨발로 두꺼운 얼음을 밟아 볼 수 있을까.[南望靑松架短壑, 安得赤脚踏層氷?]" 하였다. 『杜詩全集 卷5』 기운은……듯하네 주자(朱子)가 공풍(鞏豐)에게 답한 편지에, "이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것이 마치 한문에 날아올라 맑은 바람에 씻은 듯하다.[當此炎燠灑然, 如羾寒門而濯淸風也.]" 하였다. 『晦庵集 卷64 答鞏仲至』 『초사(楚辭)』 왕일(王逸)의 주에, 한문(寒門)은 북극에 있는 차가운 곳이라고 하였다. 창랑(滄浪) 한 곡조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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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 김장여80)【치희】어른에게 드리다 呈愛日堂金丈章汝【致熙】 하늘이 어찌 크고 사람이 어찌 작으랴 (天何嘗大人何小)천지와 함께 유행하여81) 한 이치 진실하네 (上下同流一理眞)넓고도 넓은 흉금은 많은 시내에 비친 달과 같고 (恢廓胸襟萬川月)온화하고 인자한 기상은 온갖 꽃이 만발한 봄과 같네 (溫仁氣像百花春)마음은 장중하고 공손하여 늘 살아 움직여야 하고82) (心須莊敬常常活)도는 깊이 연구하여 나날이 새롭게 하는 데 달렸네83) (道在研窮日日新)득실과 궁달은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得失窮榮非暇念)사람이 어진 뒤에야 진정 사람이 되네 (人仁然後便爲人) 天何嘗大人何小。上下同流一理眞。恢廓胸襟萬川月。溫仁氣像百花春。心須莊敬常常活。道在研窮日日新。得失窮榮非暇念。人仁然後便爲人。 김장여(金章汝) 김치희(金致熙, 1828~?)이다. 자는 장여, 호는 애일재(愛日齋)이다. 천지와 함께 유행하여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지나는 곳에 변화하며, 마음을 둔 곳에 신통함이 있는지라, 위아래 천지의 조화와 함께 운행한다[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마음은……하고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사람의 마음은 항상 살아 움직여야 하니, 살아 움직이면 두루 유행하여 다함이 없어서 한 귀퉁이에 막히지 않는다[人心常要活, 則周流無窮而不滯於一隅.]라고 하였다.『二程遺書 卷5』『近思錄集解 卷4 存養』 도는……있네 탕(湯) 임금이 자신을 경계하기 위하여 목욕하는 대야에 새겨 놓은 글인 반명(盤銘)에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고 하였다. 『大學章句 傳2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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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용한 오공 유사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容閒吳公遺事狀 오씨(吳氏)는 동방(東方)의 거성(鉅姓)인데, 패릉(貝陵)을 관향으로 삼은 자가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고려조에 휘 연총(延寵)101)은 벼슬이 평장(平章)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으로, 영토를 확장한 위훈(偉勳)이 있었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현필(賢弼)이 패릉에 봉해져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5대를 전해 내려와 충을(忠乙)은 우리 조정에서 찬성(贊成)을 지냈고,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익손(益孫)은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며, 침랑공이 패릉에서 능주로 그의 부모를 장사지냈는데, 여묘(廬墓)하면서 이로 인해 거주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창도하여 진주(晉州)에서 입절(立節)102)하였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만상(萬祥)은 효행으로 여러 번 추천에 들었고,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엽(曺光葉)의 따님이니 바로 공의 부친과 모친으로, 정조 정사년(1797) 2월 14일에 부춘방(富春坊)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어렸을 때에 남다른 자질이 있어 말하고 웃으며 즐겁게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스승에게 나아감에 미쳐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항상 무릎을 모아 단정히 앉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였고, 산사(山寺)에서 책을 읽을 때에 집과 1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매일 한 번씩 반드시 안부를 살피자, 부모가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매우 엄하게 저지하였다. 이후부터 부모의 소식이 격조하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났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주선하여 소식을 들은 뒤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니, 그 독실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에 큰 흉년을 만났는데, 공이 이웃 사람들을 진휼(賑恤)하여 이에 힘입어 살게 된 자가 많았다. 약관(弱冠)에 부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집상(執喪)의 모든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행하였고,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갖추어 다했다. 늘그막에 우봉(牛峯)에서 오봉산(五峯山) 아래에 우거하였으니, 대개 고요한 데로 나아가 한가롭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문규(門規)를 세워 종족과 친하게 지내고, 향약(鄕約)을 수행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과 잘 지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가엾게 여겨 잘 보살폈으되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았고, 여러 조카를 보살펴 기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하였으며, 집안이 화목하고 형제가 즐겁게 지내니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준행했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감동하였다. 을해년(1875)에 우로은(優老恩)으로 통정(通政)에 올랐고, 병자년(187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통덕랑(通德郞) 양중현(梁中鉉)의 따님으로 어질고 예가 있어 부도(婦道)를 잘 지녔는데, 공보다 1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자질은 침착하고 무게가 있으며, 기상은 온화하고 아담하며, 언어는 간략하고 어눌하며, 행동거지는 차분하고 세심하였다. 경(經)의 뜻에 심오하고 일 처리하는 데 밝으니, 향려(鄕閭)에 의심나는 일이 있거나 알지 못하는 행정상의 사무가 있으면 매번 공에게 나아가 해결하였다. 아, 공은 바로 선친의 벗이다. 기억하건대 공과 선친께서 백발과 태배(鮐背)103)의 모습으로 평상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시고, 소자(小子)는 그 앞에서 추주(趨走)104)하고 예예[唯諾]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 모두 천고의 이별을 이루었고, 이렇게 애처롭고 외로운 내가 마침내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狀德之文]을 짓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의 손자 오왕홍(吳枉鴻)이 장차 유사(遺事)를 수습하여 후대에 오래 전하려고 할 때, 내가 곁에서 모신 날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대략의 줄거리를 서차(序次)하게 하였을 뿐이다. 吳東方鉅姓。貫貝陵者。爲尤著。勝朝有諱廷寵。官平章諡文襄。有拓地偉勳。六傳諱賢弼。封貝陵。因以爲貫。五傳至忠乙。我朝官贊成。三傳諱益孫。以孝除寢郞。寢郞公自貝陵。葬其親於綾。盧墓而因居焉。三傳至諱邦翰。倡義壬辰。立節晉州。七傳諱萬祥。以孝累入剡薦。夫人昌寧曺氏光葉女。卽公考妣也。以正廟丁巳二月十四日。生公于富春坊七松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不類凡兒。及就傳。文理日就。常斂膝端拱。昕宵不怠。讀書山寺。距家十餘里。每日必一番省候。父母憂其妨功。止之甚嚴。自後音聞有曠。憂形於色。必周旋得聞。然後乃安意讀書。其誠孝之篤如此。遭甲戌大無。賑恤隣保。多所賴活。弱冠連遭考妣喪。執喪諸節。一遵家禮備盡情文。晩年自牛峯。寓居五峯山下。盖就靜養閒計也。立門規以親宗族。修鄕約以和隣里。矜養寡妹。老而不衰。撫育諸姪。同於己出。室家雍睦。兄弟湛樂。子孫遵其敎。鄕里感其義。乙亥以優老恩陞通政。丙子正月六日棄世。夫人濟州梁氏通德郞中鉉女。賢而有禮。甚得婦道。先公十二年而終。公姿質沈重。氣容溫雅。言語簡訥。動止安詳。邃於經義。明於料事。鄕閭之間。事有所疑。政有未達。輒就決焉。嗚呼。公卽先人友也。曾記其䳽髮鮐背。對床款款而小子趨走唯諾於前豈知行未幾何俱成千古。而哀此孤露。乃述其狀德之文耶。公孫枉鴻。將欲收拾遺事。以壽來世。以余侍側日久。使之序次梗槩云耳。 오연총(吳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1096년(숙종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07년(예종2) 부원수(副元帥)로 원수(元帥)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입절(立節) 절개를 지켜서 죽은 것을 말한다. 태배(鮐背) 복어의 등이란 뜻으로, 늙은이를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복어의 등에 있는 얼룩 같은 검버섯이 피부에 생긴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추주(趨走) 윗사람의 앞을 지날 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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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처사 조공 유사장 希庵處士趙公遺事狀 공의 휘는 두열(斗烈), 자는 의지(義之), 호는 희암(希庵)이니, 조씨는 계통이 함안(咸安)에서 나왔다. 중엽에 휘 승숙(承肅)105)은 세상에서 덕곡 선생(德谷先生)이라고 불렀고,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106)하였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종례(從禮)는 호가 율정(栗亭)이고 벼슬은 직제학(眞提學)이며, 휘 림(琳)은 호가 신재(愼齋)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참봉(參奉) 휘 희광(希匡)이 동복(同福)에 거주하였고, 4대를 전해 내려와 감정(監正) 휘 옥생(玉生)이 능주(綾州)에 거주하여 자손들이 이로 인해 이곳에 살게 되었다. 증조 중국(重國)은 통정(通政)을 지냈고, 조부는 달운(達運)이며, 부친은 시복(時福)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이 있었고,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광수(金光洙)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정유년(1777)에 능주 오산리(鰲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녔고 학문의 과정은 가정의 가르침을 따랐다. 점차 성장하면서 고을의 사우(士友) 가운데 어진 자를 좇아 종유하여 강구하고 연마하여 스스로 넓혀나갔다. 효우의 행실이 가정에 드러났고 돈독한 친목의 풍조가 종족에게 알려졌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재난과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으니, 자상하고 측달(惻怛)함이 두텁지 않음이 없었다. 집 한 채를 지어 '망미(望美)'라고 편액하여 걸고, 오직 은은하게 날로 닦되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생도들을 가르칠 때에 과조(科條)가 찬연했다. 때로 좋은 손님 및 벗과 함께 시냇가와 산, 바람과 달 사이에서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놀며 마음을 시원하게 펴면서 유연(悠然)히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있었다. 중년에는 한가한 날에 병학(兵學)을 섭렵하여 대략 대치(大致)를 알았지만 또한 시험해보지 못했다. 철종 병진년(1856) 7월 28일에 고종명하여 산음(山陰) 후록(後麓)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인(曺光仁)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용희(鏞熙)·용기(鏞起)·용직(鏞直)·용순(鏞珣)·용후(鏞厚)이고, 사위는 광산(光山) 이장휘(李章徽)와 공주(公州) 이문현(李文現)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107)"라고 하였으니, 자손의 남은 복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공의 장손 조익제(趙翼濟)는 훌륭한 선비이고, 그의 사촌 형제와 여러 자질(子侄)도 모두 근칙(謹勅)한 사람들이니, 이는 공이 선을 쌓은 데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조씨의 가문에 반드시 번창하고 성대할 날이 있을 것이다. 公諱斗烈。字義之。號希庵。趙氏系出咸安。中葉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麗亡罔僕。我朝有諱從禮。號栗亭官直提學。諱琳。號愼齋大司成。皆顯祖也。諱希匡參奉。寓居同福。四傳至諱玉生。監正。寓綾州。子孫因居之。曾祖重國通政。祖達運。考時福。世有文行。妣光山金氏光洙女。正廟丁酉。公生于州之鰲山里。幼而就塾。學問課程。遵循庭訓。稍長。從鄕裏士友之賢者。遊從講曆。以自展拓。孝友之行。著於家庭。敦睦之風。聞於宗族。賙窮賑匱。赦災恤患。慈詳惻怛。無不款洽。築一室。揭顏以望美。惟以闇然日修。不求人知爲究竟計。訓迪生徒。科條燦然。時與佳賓良朋。觴詠遊暢於溪山風月之間。悠然有出塵之標。中年以餘日。涉獵兵學。略曉大致。而亦未有所試。哲宗丙辰七月二十八日終。葬山陰後麓酉坐原。夫人昌寧曺氏光仁女。生五男二女。鏞熙鏞起鏞直鏞珣鏞厚。光山李章徽公州李文現。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餘祿。而其人可知。公之長孫翼濟善士也。其群從諸子侄。皆謹勅人也。此非公積累之報耶。余謂趙氏之門。必有昌大之日。 조승숙(趙承肅) 1357~1417.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덕곡(德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저서로는 《덕곡집(德谷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書經 微子》 선(善)을……있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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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에서 창수한 시100)【병서와 10수의 시가 있다】 瑞石唱酬韻【幷序十首】 정해년(1887, 고종24) 10월 16일. 이튿날 내가 벽지(碧池)에서 단양(丹陽)에 들렀다가 생질 이기호(李紀鎬)와 함께 칠송(七松)101)의 안국정(安國禎)102) 집에 도착하여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으로 가려 하였는데, 문봉환(文鳳煥), 양규환(梁奎煥)103), 김규원(金奎源), 이병섭(李秉燮)104), 이태환(李泰煥), 이인환(李仁煥), 문송규(文頌奎)105), 오장섭(吳長燮), 오문섭(吳文變)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출발하여 2, 3리에 이르자 이승우(李承愚)106)가 뒤늦게 따라왔다. 화순(和順)의 유촌점(柳村店)에 이르러 투숙하였다. 그 다음 날 빙치(氷峙)를 넘어 수촌점(水村店)에 도착하였다. 문용환(文龍煥), 김경원(金景源)이 어제 약속을 어기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오직 김장석(金章錫)만은 끝내 오지 않았으니, 너무나 이 유람의 흠결이 된다. 몇 리를 가니 창주동(滄洲洞)이 있었다. 사방에는 산이 우뚝 솟았고 붉게 물든 단풍이 앞뒤에서 비췄으니, 참으로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은 강산이었다. 이평중(李平中)을 방문하였다. 오후에 이평중이 길을 안내하여 마을 뒤로 오르니 석굴(石窟)이 있었는데 너비는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였고, 내부에는 작은 굴 하나가 있었는데 맑은 샘물이 솟았다. 굴 비탈을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자 노은곡(老隱谷)이 있었으니, 별천지였다. 토질이 비옥하고 물이 달며 몇 이랑의 밭이 있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짓고 머물러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게 하였다.이평중과 작별하고 영신(永新)에 도착하여 이문방 언씨(李文方彥氏)의 집에 유숙하였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이 도시락을 싸 주었으니, 이는 산에 올라 요기하라는 계책이었다. 조치량(曺治良)이 길을 안내하려는 뜻이 있었기에 또한 함께하였다. 도원동(桃源洞)에 이르러 술 한 병을 사서 조치량에게 차게 하고 올라 농암(籠巖)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광석대(廣石臺)에 이르렀다. 광석대는 산의 중턱에 있었으니, 대개 옛날의 절터이다. 안에는 석조(石竈)가 있었고, 석조 위에는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평평하고 네모반듯하여 백여 명은 앉을 수 있었다. 광석대의 사면은 층층의 기이한 암석이었으니, 세로로 놓은 것은 병풍과 같고 가로로 놓은 것은 교량과 같으며, 둥근 것은 옹기와 같고 네모난 것은 새장과 같았다. 깎아지른 것은 기둥과 같고 높이 위로 솟은 것은 모자와 같았다. 우뚝 솟은 것은 지붕이 되고 쑥 들어간 것은 방이 되고 빙 두른 것은 담이 되었다. 또 절하는 것, 읍하는 것, 끓어 앉은 것, 단정히 손을 마주 잡은 것, 우두커니 선 것이 있었다. 빙 둘리서 중첩한 것은 귀신이 새긴 듯하여 기뻐 마음이 넓어졌다. 풍혈대(風穴臺)가 있었는데, 대의 가운데가 비어 소라 같았다. 안에서 돌아서 위로 나가 풍혈대 위에 앉아서 아래를 보니 곧장 수백 척 낭떠러지인지라 오금이 저려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내려와서 광석대에 앉아서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그 참다운 생각과 뛰어난 흥취는 완연히 안기(安期)107)와 적송(赤松)108)이 푸른 구름과 붉은 노을 사이에서 한가롭게 거닐며 거스르지 않는 것과 같았다.도시락으로 요기하고서 산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서 석문(石門)에 이르렀다. 석문 안에는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붉게 물든 넝쿨이 석실 밖을 칭칭 감고 있어 마치 한 송이 꽃과 같았다. 석실의 서쪽에는 모두 돌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돌 사이에 난 오솔길은 물을 건너는 곳과 같아서 걸을 때마다 발밑에는 모두 평평한 돌이었다. 돌길을 따라서 가니 옛 절터가 있었다. 큰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었는데,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닌 듯하였다. 담장을 두른 것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지만 이끼와 돌이 오래되어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노라니 슬픔이 문득 밀려왔다.아,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미 이 산이 있었다. 그간에 필시 도인과 승려가 있어 계획하여 만들고 배치하여 한 시대에 가장 성대하게 스스로 뽐내었을 텐데 안개처럼 걷히고 구름처럼 사라졌으니, 또 여기에서 몇 번이나 상전벽해를 겪었는지 모른다. 1리쯤 갔을 때 돌길이 갑자기 끊어졌기에 나무꾼에게 물어 목맥적(木麥磧)에 이르니, 목맥적 가운데 수많은 돌이 우뚝 솟아 부처와 같았다. 절정에 오르니 천황봉(天皇峯), 지황봉(地皇峯)이 있었다. 시야가 시원하여 호남의 산들이 무덤처럼 즐비하였다. 동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르고 북쪽으로 계룡산(鷄龍山)에 이르며, 서남쪽은 모두 대해이니, 마치 붉은 구름이 하늘에 잇닿아 있는 듯하였다. 이 산은 바로 한 고을의 종산(宗山)인데도 시야가 먼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한 나라에서 높고 천하에서 높은 산이겠는가. 사람의 식견의 고하와 덕성의 후박은 이것을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북쪽 산기슭으로 내려와 입석(立石)에 이르렀다. 돌은 모두 사각, 육각, 혹은 팔각, 십이각으로 수평을 맞춘 듯 평평하고 먹줄을 놓은 듯 곧으며, 서 있는 것이 기둥과 같고, 포갠 것이 삼[麻]과 같다. 기둥 위에 기둥을 얹고 삼 위에 삼을 연결하여 높은 것은 천 길이나 되고 낮은 것도 백 척을 밑돌지 않았다. 혹 두른 것은 병풍과 같고, 혹 늘어선 것은 목책과 같으며, 층이 진 것은 계단과 같으니, 참으로 천하의 절묘한 곳이다. 대저 이 산에는 가시나무가 자라지 않고, 뱀이 나오지 않는다. 돌은 뾰족하거나 기울어지지 않았고, 봉우리는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았다. 무릇 천지 사이의 정기가 모인 것이 대체로 모두 이와 같다. 입석을 지나 조치량과 작별하고 내려와서 징심사(澄心寺)에 투숙하였다. 다음 날 사찰을 두루 관람하여 반나절의 유람을 하였다. 화순(和順)에 이르러 관여(寬汝 이승우)를 따라 주암서실(舟巖書室)에 들어갔다.다음 날은 바로 23일이다. 교촌(校村)에 이르러 만화루(萬化樓)에 올라 조금 휴식하고, 만연사(萬淵寺)에 이르니 건물은 허물어지고 잡초는 하늘로 뻗어 있었다. 선정암(禪定菴)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한참 동안 시를 읊조렸다. 저녁에 하동서실(荷洞書室)에 이르자 조인환(曺仁煥), 조동환(曺東煥), 조병길(曺秉吉), 조영환(曺永煥)이 모두 왔기에 만나 보았다. 한밤중까지 강학하고 토론하다가 새벽녘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능저(綾邸)에 이르러 영벽정(映碧亭)에 올랐다. 강물이 불어나 산 빛이 난간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잠깐 읊조렸다. 음강(陰江)에 이르러 술 한 병을 사서 속금봉(束錦峯)에 오르니 지는 해가 산에 걸려 있어 풍광이 흡족하였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조린 다음 기쁨을 다 누리고 떠났다.대저 서석산(瑞石山)은 실로 남쪽 지방의 명승지이고, 벗들은 모두 한 고을의 선사(善士)이다. 평소 좋은 벗과 더불어 평소 노닐기 원하던 곳을 유람하게 되었는데, 더구나 날짜도 길한 데다 절기도 좋아 하늘이 깨끗하고 공기가 맑아 행차는 지체되는 근심이 없고, 길에서는 옷을 걷고 벗는 수고로움이 없었다. 가는 길은 화락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절도가 있었다. 바쁘지만 어지럽지 않고 조화롭지만 방탕한 데로 이르지 않아 여유롭게 가고 느긋하게 왔다. 원하건대, 벗들은 돌아가 각각 힘써서 덕을 키우고 명망을 무겁게 하기를 이 산처럼 대대로 모두 우러러보게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유람이 길이 할 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고을의 서석산(瑞石山)도 장차 외진 남방의 바닷가에서 더욱 빛나 응당 길이 적막하지 않을 것이다.열다섯 사람이 와서 유람 길에 오르니 (十五人來一路登)오성에 지는 해가 숲을 붉게 물들었네 (烏城落日入林蒸)나한산 앞 객점에 투숙하여 (夜投羅漢山前店)단란히 토론하며 유유히 다시 심지를 자르네 (團討悠悠更剪燈) 歲丁亥仲秋旣望。翌日予自碧池。過丹陽。與李甥紀鎬。至七松安國禎家。將爲瑞石行。文鳳煥、梁奎煥金奎源李秉燮李泰煥李仁煥文頌奎吳長燮吳文燮先來在座。遂發至二三里李承愚追躡而至。至和順柳村店討宿。厥明。踰冰峙。到水村店。文龍煥金景源昨日迂違在此等候。喜不可言。惟金章錫終不至。甚爲此遊之缺望。至數里。有滄洲洞。四山壁立。丹楓紅蘿。照映前後。眞繡錯江山也。訪李平中。午後平中引路登村。後有石窟。廣可容數百人。內有一小窟。清泉湧出。自窟磴。右旋而上。有老隱谷。盖别局也。土沃泉甘。有田數頃。令人有卜築盤旋之意。別平中。到永新宿。李丈方彥氏家。翌朝。主人裹飯菜。盖爲登山療飢計也。曺治良以指路之意。亦與之俱。至桃源洞。沽一壺酒。尾治良而登。至籠巖小憩。至廣石臺。臺在山之中腰。盖古寺遺址也。内有石竈。竈之上。有廣石。平鋪方正。可坐人百餘。臺之四面。層巖奇石。縱者如屏。横者如橋。圓者如甕。方者如籠。削而直者如柱。秀而翹者如帽。穹窿而爲屋。窈窕而爲室。周遭而爲垣。又有拜者。揖者跪者端拱者凝立者。環列重疊。神鑱鬼刻。怡然而心曠。有風穴臺。臺中有空如螺殼。內旋上出。坐於臺上。下見直數百尺。足慄不可久留。下而坐廣石臺。列坐行酒。歌詩一絶。其眞想逸趣。宛然如安期赤松逍遥唯諾於青雲紫霞之間。因畫飯療飢。乃循山而右。至石門。門之內有石室。紅蘿丹薜。縈繞其外。便若一朶花房。石室之西。皆積石漲。漫石間有徑如濟渡處。步步下足皆平石。由石徑去。得舊寺遺址。積貼巨石以爲堦級。似非人力所造。周垣繞墻。依然尙在。而苔久石古。無跡可據。徘徊移時。悲愴旋至。嗚呼自開闢以來。已有此山。其間必有仙翁釋子。經營排鋪。全盛自誇於一時。而烟消雲空。又不知其閱此幾番滄桑也。行里許。石徑忽斷。問於樵夫。至木麥磧磧中萬石。立立如佛。上絕頂。有天皇峰地皇峯。眼界豁然湖省羣山。累累如培塿。東盡方丈。北至雞龍。西南皆大海。如紅雲連天。此山是一方之宗也。而眼界之遠。猶尙如此。況高於一國高於天下者乎。人之器識高下。體德厚薄。見此可以有感矣。下北麓。至立石。石皆四隅六隅。或八隅十二隅。準以平之。繩以直之。竪之如柱。積之如麻。柱上加柱。麻頭緝麻。高者千仞。卑不下百尺。或繞如屛障。或列如樹柵。或層如階梯。信天下絕妙處也。大抵此山不生荆棘。不産蟲蛇石不尖側。峯不偏斜。凡天地間正氣所鍾。類皆如此。過立石。別治良。下宿澄心寺。翌日。歷覽寺刹以成半日之遊。至和顺隨寬汝入舟巖書室。翌日卽二十三日也。至校村登萬化樓。小憩。至萬淵寺。屋宇毀頹。草莽漲天。至禪定菴點心。暢咏久之。暮至荷洞書室。曺仁煥曺東煥曺秉吉曺永煥皆來相見。達夜講討。雞鳴而寢。翌日。至綾邸。登映碧亭。見江水漲滿。山光搖檻。風詠數餉。至陰江。沽一壺酒。上束錦峯。夕陽在山。風光宜人。一觴一詠。盡歡而去。夫瑞石固南方勝區。諸友皆一鄉善士。與平生好友。遊平生所願遊。況日吉辰良。天朗氣清。行無濡滯之患。道無揭厲之勞。行道雍容進退有節繁而不雜。和而不流。于于而去。悠悠而來。願諸友歸各勉焉。使碩德重望。如此山之世皆仰止。則不惟吾儕今日之遊。永有辭焉。一區瑞石。亦將增光於南荒海曲之間。而不應長寂寂也。十五人來一路登。烏城落日入林蒸。夜投羅漢山前店。團討悠悠更剪燈。 서석(瑞石)에서 창수한 시 작자가 1887년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7일간 친구나 문인들과 함께 화순에서 무등산의 광석대(廣石臺), 상봉(上峯), 징심사(澄心寺)를 거쳐 다시 화순의 만연사(萬淵寺) 선정암(禪定庵), 능주의 영벽정, 동귀봉(東歸峯) 등을 유람하고 지은 시이다. 칠송(七松)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를 이른다. 안국정(安國禎) 1854~1898. 자는 순견(舜見), 호는 송하(松下)이다. 양규환(梁奎煥) 1852~?. 자는 문오(文五), 호는 석오(石塢)이다. 이병섭(李秉燮) 1853~?. 자는 봉서(鳳瑞), 호는 백헌(栢軒),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문송규(文頌奎) 1859~1888. 자는 계원(啓元), 호는 귀암(龜巖)이다. 이승우(李承愚) 1855~1919. 자는 관여(寬汝), 호는 난계(蘭溪)이다. 안기(安期) 동해(東海)의 봉래산(蓬萊山)에서 살았다는 전설상의 선인(仙人) 안기생(安期生)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방사(方士) 이소군(李少君)이 자기는 장생불사의 술법을 알고 있고 또 신선도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하여 무제의 신임을 얻었는데, 그가 "제가 일찍이 해상에서 노닐 적에 안기생을 만났더니, 참외만 한 크기의 대추를 먹고 있었습니다.[臣嘗遊海上, 見安期生, 安期生食巨棗大如瓜.]"라고 하였다.『史記 封禪書』 적송(赤松) 고대 전설상의 선인(仙人)인 적송자(赤松子)를 이른다. 적송자는 장량(張良)이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세운 뒤에 권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史記 留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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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을 상심하여 우연히 적다【7수】 傷時偶題【七首】 재앙의 단서는 외부에 있지 않으니 (厲階不在蕭墻外)오직 날로 부지런히 패망을 자초하네 (速敗招亡惟日勤)어찌하여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자제가 (如何喬木世家子)오랑캐가 되어 개국의 공훈을 세우고자 하는가 (甘作仇戎開國勳)입 다물면 누가 시집 안 간 처녀라고 하겠나 (緘口誰稱未嫁女)글을 보내면 혹 원수와 같은 사람이라 배척하네 (發文或斥同仇人)유문의 의리 이미 이와 같으니 (儒門義理已如此)다시 누가 있어 어버이를 저버리지 않으랴 (復有阿誰不後親)노사 선생의 병인년 상소174)는 (蘆沙夫子丙寅疏)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네 (大義森嚴日月明)당시 두세 가지 대책을 썼더라면 (當時若用二三策)어찌 오늘날 사직이 기울어졌겠는가 (安有今朝社稷傾)앞에는 긴 뱀이 있고 뒤에는 사나운 범이 있으니 (前有長蛇後猛虎)부모 잃은 어린 아이는 응응 우네 (孩兒失母泣呱呱)믿을 것이라곤 다만 위에 있는 하늘인데 (所恃只惟天在上)누가 원통하고 애통함을 청도 호소할까 (誰將哀怨訴淸都)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鳴乎今日是何日)만백성이 절명할 때라네 (萬萬生靈絶命辰)천 리 망망한 해내에 (環海茫茫千里地)어찌 한 대장부가 없는가 (胡無一箇丈夫人)마루 위의 서생은 이미 백발이 되었으니175) (堂上書生已白頭)어찌 이 때문에 이부 칠실의 근심176)을 지으랴 (何須爲此漆嫠憂)애석하구나, 요순 삼대의 문물이 (可惜唐虞三代物)도도히 흐르는 큰 물결에 다 쓸려가네 (盡歸洪水滔滔流)예부터 나라를 잃음이 어찌 오늘과 같았으랴 (自古喪邦孰若今)천지가 뒤집히고 해와 별이 어두워졌네 (天翻地覆日星沈)다만 문을 닫고 자정할 계책을 세울 뿐 (惟有杜門自靖計)서산이나 동해로 찾아갈 필요 없네177) (西山東海不須尋) 厲階不在蕭墻外。速敗招亡惟日勤。如何喬木世家子。甘作仇戎開國勳。緘口誰稱未嫁女。發文或斥同仇人。儒門義理已如此。復有阿誰不後親。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前有長蛇後猛虎。孩兒失母泣呱呱。所恃只惟天在上。誰將哀怨訴清都。鳴乎今日是何日。萬萬生靈絶命辰。環海茫茫千里地。胡無一箇丈夫人。堂上書生已白頭。何須爲此漆嫠憂。可惜唐虞三代物。盡歸洪水滔滔流。自古喪邦孰若今。天翻地覆日星沈。惟有杜門白靖計。西山東海不須尋。 병인년 상소 기정진이 1866년(고종3)에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즉 프랑스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한강 연안과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 올린 소(疏)를 이른다. 마루……되었으니 두보(杜甫)의 시에 "마루 위의 서생은 공연히 머리만 세었을 뿐, 바람결에 몇 번이나 향내 맡으며 우노매라.[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3 芻虞歎』 이부(嫠婦) 칠실(漆室)의 근심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 고을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의 근심이지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이다. 서산(西山)이나……없네 은(殷)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서산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가 있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동해 바다를 밟고서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였다. 『史記 伯夷列傳,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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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암【익현】어른의 신안사 간행소에서 감회가 있다는 시에 차운하여 드리다 次呈勉庵崔丈【益鉉】新安刊所有感詩 바라봄에 산두178)와 같아 우리 동방을 지키니 (望如山斗鎭吾東)부녀자나 천한 사람이나 앙모하는 마음 같네 (婦孺輿儓慕仰同)탐욕스러운 무리179)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니 (封豕長蛇眞可畏)집안에서 다투는 것 이것이 무슨 풍조인가 (鬩墻闘室此何風)풀뿌리에 붙은 반딧불180)은 빛이 되기 어렵고 (草根螢爝難爲照)불길 앞 한 잔 물181)은 공이 되지 못함 부끄럽네 (杯水車薪愧不功)오직 선생만이 지휘하여 넓히는 힘이 있어 (惟有先生揮廓力)은연중에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졌네 (脗然歸合一家中) 望如山斗鎭吾東。婦孺輿儓慕仰同。封豕長蛇眞可畏。鬩墻闘室此何風。草根螢爝難爲照。盃水車薪愧不功。惟有先生揮廓力。脗然歸合一家中。 산두(山斗)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 세상 사람들이 흠앙(欽仰)하는 훌륭한 사람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최익현(崔益鉉)을 비유한 말이다. 탐욕스러운 무리 여기서는 왜적을 비유한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 조에 "오나라는 큰 돼지와 뱀이라서 끊임없이 상국을 침범하고 있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고 하였다. 풀뿌리에 붙은 반딧불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글에 "반딧불과 촛불은 하찮은 빛이지만, 해와 달에 광휘를 더하리이다.[螢燭末光, 增輝日月.]"라고 하였다. 『曹子建集 卷8 求自試表』 불길……물 『맹자』「고자 상(告子上)」에 "오늘날 인을 실천하는 자는 한 잔의 물로 한 수레 가득한 땔나무의 불을 끄려고 하는 꼴이다.[今之爲仁者, 猶以一杯水救一車薪之火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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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경계하다 自警 내 태어나 삼십 세가 된 지금 (我生三十歲)무슨 일을 하였는가 (問爲何事哉)농사짓는 일 익히지 않았고 (不治農圃業)창검술도 배우지 않았네 (不學弓劍才)다만 문장 짓는 일로 (只以文字事)세월을 보내고 또 보냈네 (經歲又經年)집안에는 권면하는 부형이 있고 (內有父兄責)밖에는 어진 사우가 있으니 (外有師友賢)성취한 것 얕지 않아야 하건만 (所就宜不淺)다시 어찌 이리 어리석은가 (復何倥倥爲)자신을 돌아보며48) 스스로 점검하니 (回光自點檢)그 까닭을 알기 어렵지 않네 (其故不難知)공명은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功名謂可辦)고관대작 사이에서 분주하였네 (奔走槐棘間)이리저리 다니며 쓸데없는 망상을 하며49) (營營算甕轉)몇 번이나 스스로 덧없는 꿈50)을 꾸었던가 (幾自槐安還)아름다운 산수 간에 차지하려 하여 (擬占好山水)지팡이 짚고 다니며 잠시도 쉬지 않았네 (笻鞋不暫休)사람을 만나면 풍토에 대해서 묻고 (逢人問風土)나그네 마주하면 산수를 말하였네 (對客談峙流)때때로 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時將花下酒)마음껏 취해 봄 세 달을 보냈네 (荒醉度三春)가련한 것은 황량한 누대의 저녁에 (可憐荒臺夕)끊이지 않고 자주 꿈을 꿨던 것일세51) (未斷夢魂頻)장기바둑 두며 노닐던 곳 (博奕遊戱地)옛일을 생각하니 문득 생생히 떠오르네 (舊念輒復全)남령초52)의 냄새를 몹시도 좋아하여 (偏嗜南靈臭)연기를 들이마시지 않은 때가 없었네 (無時不吸煙)강력한 유혹에 빈틈이 없으니 (牽連無暇隙)온갖 방법으로 끊으려 애썼네 (攻之千百端)거울에 때가 끼면 비추지 못하고 (垢鑑索照未)의원에게 숨기면 병을 치료하기 어렵네 (諱醫療疾難)어찌 두렵게 생각하여 (寧不惕然念)낱낱이 자신에게 돌이키지 않으랴 (一一反諸身)공명과 산수를 좋아하는 뜻 (功名山水志)맞닥뜨리는 때에 온전히 맡기네 (全付所遇辰)주색 같은 온갖 욕망은 (酒色各般欲)통렬히 끊어서 싹트지 못하게 하고 (痛剗訾不萌)가난한 상황에서도 학문을 연마한다면 (修息蓬蓽裏)은연중에 날로 성취함이 있으리 (闇然日就程)경을 주장함은 지도리와 굴대처럼 중심을 잡고 (主敬如樞軸)뜻을 세움은 등뼈처럼 곧게 하며 (立志是脊樑)길을 나서선 주저하지 말아야 하니 (登程莫躊躇)이렇게 미혹됨을 경계하는 방법을 드러내네 (著此警迷方) 我生三十歲。問爲何事㢤。不治農圃業。不學弓劒才。只以文字事。經歲又經年。內有父兄責。外有師友賢。所就宜不淺。復何倥倥爲。回光自點檢。其故不難知。功名謂可辨。奔走槐棘間。營營算甕轉。幾自槐安還。擬占好山水。笻鞋不暫休。逢人問風土。對客談峙流。時將花下酒。荒醉度三春。可憐荒臺夕。未斷夢魂頻。博奕遊戱地。舊念輒復全。偏嗜南靈臭。無時不吸烟。牽連無暇隙。攻之千百端。垢鑑索照未。諱醫療疾難。寧不惕然念。一一反諸身。功名山水志。全付所遇辰。酒色各般欲。痛剗訾不萌。修息蓬蓽裏。闇然日就程。主敬如樞軸。立志是脊樑。登程莫躕躇。著此警迷方。 자신을 돌아보며 회광(回光)은 회광반조(回光反照)의 줄임 말로, 불가(佛家)에서는 자기의 본분을 돌아보아 수양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자신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뜻으로 쓰였다. 쓸데없는 망상을 하며 옛 속설(俗說)에 항아리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그 항아리 속에 들어가 자다가, 항아리를 살 때 약간 남기고 팔 때 약간 남기면 그 이문이 갑절이 된다고 여겨 마침내 기뻐서 일어나 춤을 추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항아리를 깨뜨리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36』 덧없는 꿈 당나라 이공좌(李公佐)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 순우분(淳于棼)이 괴목(槐木) 아래서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30년간 남가 태수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다가 깨어 보니 괴목 아래에 큰 개미굴이 하나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가련한……것일세 이 내용은 두보(杜甫)의 「영회고적[詠懷古跡]」 두 번째 수의 "강산의 고택에는 부질없이 문장만 남았으니, 황폐한 양대(陽臺)에 운우지정 꿈엔들 생각하랴[江山故宅空文藻, 雲雨荒臺豈夢思.]"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남령초(南靈草) 담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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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 성명【시귀】에 대한 만사 挽金公聖名【時龜】 능주는 경치가 좋은 고을이니 (紅綾山水邑)남쪽에 높은 하봉이 있네 (南有霞峯高)운림엔 푸른빛 감돌고 (雲林擁蒼翠)천석은 주위를 둘렀네 (泉石圍周遭)십여 호의 마을에 (籬落十餘戶)김씨가 은거한 곳 남아 있네 (金氏菟裘存)화목함은 향리에 드러났고 (惇睦著鄕里)시례는 자손에게 전하였네 (詩禮傳子孫)공이 온 것 그 어느 해였나 (公來昔何年)선업을 잘 계승하였네 (克肖先業美)풍도는 고인과 같고 (風度古人如)예악은 선배와 같았네 (禮樂先進似)효우는 집안에 넉넉하였고 (孝友洽于室)충신은 사람을 탄복시켰네 (忠信服於人)직접 농사지어 삼생199)으로 봉양하였고 (躬耕養三牲)술을 마련하여 사방 이웃을 모았네 (得酒會四隣)오직 천공만 알았으니 (惟有天翁知)복록은 은택이 많았네 (福祿多嘉惠)처자와 천수를 누렸고 (合琴共百齡)벗들은 한 기예를 지켰네 (群蘭守一藝)상복을 입고 함께 골목에 모이니 (緦服共巷聚)비난하는 말 들리지 않네 (未聞齗齘言)평생 온화한 기운을 간직하며 (平生和氣裏)소요한 즐거움 잊을 수 없네 (逍遙樂未諼)우리 집안과 주진200)같은 우의는 (鄙家朱陳誼)계속해서 어긋난 적이 없었네 (源源不曾虧)선군께서 살아 계실 적에 (先君在世日)노쇠한 나이에 친구가 드물었는데 (癃耋罕舊知)공이 찾아와 외롭고 적막함을 위로하여 (公尋慰孤寂)밤새 재미있게 담소를 나누셨네 (達夜語津津)작별하려다 도리어 오래 머물렀고 (欲别還留久)가자마자 자주 왔었네 (纔去復來頻)선군이 별세한 뒤에 (先君棄世後)공의 병이 선친과 같았네 (公病如先君)소자가 안부를 살피는 일 (小子省候節)다만 공처럼 부지런하지 못했네 (但末如公勤)쇠락하여 겨를이 없었지만 (沈没無暇隙)정녕코 하루인들 잊었겠나 (期擬何日忘)누가 알았으랴 기다리지 않고 (誰知不相待)갑자기 제향201)으로 가실 줄을 (遽爾歸帝鄕)이로부터 향린에는 (自此鄉隣間)선친의 벗 더 이상 있지 않네 (先友更無有)귀를 잡고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 (提耳諄諄誨)아, 어느 곳에서 받을 수 있으랴 (嗚乎何處受)밤 누대 위에서 아득히 생각하니 (緬想夜臺上)옛 유람 선친과 함께 하리라 (舊遊共先親)소자가 저승에서 선친을 모실 때 (小子歸侍日)수일 안으로 응당 찾아가리라 (行應不多辰) 紅綾山水邑。南有霞峯高。雲林擁蒼翠。泉石圍周遭。籬落十餘萬。金氏菟裘存。惇睦著鄕里。詩禮傳子孫。公來昔何年。克肖先業美。風度古人如。禮樂先進似。孝友洽于室。忠信服於人。躬耕養三牲。得酒會四隣。惟有天翁知。福祿多嘉惠。合琴共百齡。群蘭守一藝。緦服共巷聚。未聞齗齘言。平生和氣裏。逍遙樂未諼。鄙家朱陳誼。源源不曾虧。先君在世日。癃耋罕舊知。公尋慰孤寂。達夜語津津。欲别還留久。纔去復來頻。先君棄世後。公病如先君。小子省候節。但末如公勤。沈没無暇隙。期擬何日忘。誰知不相待。遽爾歸帝鄕。自此鄉隣間。先友更無有。提耳諄諄誨。嗚乎何處受。緬想夜臺上。舊遊共先親。小子歸侍日。行應不多辰。 삼생(三牲) 소·양·돼지 세 가지 고기를 갖추어 봉양하는 것이다. 주진(朱陳)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 「주진촌(朱陳村)」에 나오는 옛 마을의 이름으로, 한마을에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씨만 살면서 대대로 서로 혼인하여 세의(世誼)가 있었다고 한다. 제향(帝鄕)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로, 『장자(莊子)』「천지(天地)」에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乘彼白雲, 至於帝鄕]"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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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읊조리다【5수】 偶吟【五首】 밤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벽닭 울음소리 듣고 (夜來未幾聽晨鷄)아침에 일어났는데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우네 (朝起於焉覺日西)이 사이에서 좋은 시절 놓치기 쉬우니 (此間易失好時節)힘써 고인을 따라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네 (勉逐古人要與齊)심전에 학문의 씨를 뿌리는 것 제때에 해야지 (種學心田須及時)사사로운 뜻 제거하여 양지를 배양214)하리라 (剗鋤私意培良知)익지 않으면 어찌 돌피의 비웃음215)이 없겠는가 (不熟寧無稊稗笑)등림216)에서 가장 높은 가지가 되길 힘쓰네 (鄧林勉作最高枝)이곳에 와서 나그네로 칩거한 지 오래지만 (來茲羈蟄已多時)문 밖의 풍광 혼연히 알지 못하네 (門外風光渾不知)석양녘에 객을 보내고 창을 열어 보니 (夕陽送客推窓看)시내 버들 드리워 봄이 가지에 가득하네 (溪柳垂垂春滿枝)저물녘에 비 그치고 맑은 바람 부니 (晚來雨歇動淸風)서실엔 티끌 없어 옥거울과 같네 (書室無塵玉鑑中)또 처음 달 뜰 때 오늘밤 약속 남겼으니 (更留初月今宵約)한 칸 작은 창이 동쪽 향해 열려 있네 (一間小牕開向東)밤부터 내리던 비 막 그치고 정오가 되니 (宿雨初晴午日臨)뜰 가득 깨끗하게 맑은 그늘 드리웠네 (滿庭瀟灑動淸陰)들 기운은 푸릇푸릇하여 발 밖에 맺히고 (野氣蔥蘢簾外纈)시내 버들을 휘어져 침상 가에 드리웠네 (溪柳委曲枕邊侵) 夜來未幾聽晨雞。朝起於焉覺日西。此間易失好時節。勉逐古人要與齊。種學心田須及時。剗鋤私意培良知。不熟寧無稊稗笑。鄧林勉作最高枝。來茲羈蟄已多時。門外風光渾不知。夕陽送客推窓看。溪柳垂垂春滿枝。晚來雨歇動淸風。書室無塵玉鑑中。更留初月今宵約。一間小牕開向東。宿雨初晴午日臨。滿庭瀟灑動清陰。野氣蔥蘢簾外纈。溪柳委曲枕邊侵。 양지(良知)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능한 것은 양능(良能)이요, 생각하지 않고서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라고 하였는데, 주희가 그 주에서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이른바 양능이고 양지이다."라고 하였다. 『孟子集註 盡心上』 돌피의 비웃음 『맹자』「고자 상(告子上)」에 "오곡은 종자 중에 아름다운 것이지만 만약 익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니, 인 또한 익숙히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五穀者 種之美者也 苟爲不熟 不如荑稗 夫仁亦在乎熟之而已矣〕"라고 하였다. 등림(鄧林) 좋은 재목으로 가득하다는 전설상의 숲이다. 여기서는 뛰어난 재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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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신령(神靈) 및 부곽설(郛郭說)을 다시 이렇게 제기하니,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 뜻23)이 얕지 않다는 것을 족히 보겠네. 나는 가만히 다음과 같이 생각했네. 령(靈)을 오로지 말하면 신(神)이 령 가운데 있고, 신을 오로지 말하면 령이 신 가운에 있어, 실로 말할 만한 계분(界分)과 시절(時節)이 없네. 만약 '신령(神靈)' 두 글자를 상대하여 거론해서 말하면 령은 체(體)와 가깝기도 하고 용(用)과 가깝기도 하니, 령은 비교적 실(實)하고 신은 비교적 허(虛)하네. 령은 비유하자면 거울의 밝음과 같아 연치(姸媸)와 대소(大小)를 갖추어 다 드러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신이네. 기가 아니면 능히 령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령할 곳이 없으며, 기가 아니면 능히 신(神)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신할 곳이 없으니, 령과 신은 실로 모두 이기가 합한 것이라, 그대의 논의에서 신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여기고 령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겨 령의 밖에서 별도로 묘용의 신을 구하여 이 심의 주재로 삼은 것과는 같지 않네. 이와 같다면 령 밖에 신이 있고 심 밖에 이가 있어, 령은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이 되고 이는 작용의 별사(別事)가 되니,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닌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대가 이미 나의 설을 믿지 않고 정자와 주자의 설이 만약 이와 같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따르겠다고 여기니, 여기에서 선현을 돈독히 믿고 또한 책을 오로지 의지하지 않음이 없는 뜻을 볼 수 있겠네. 그러나 또 정자와 주자의 설로 증명해 보건대, 《중용》에서 지성(至誠)의 도를 말하면서 귀신의 덕을 인용하여 밝혔네. 귀신이라는 것은 음양의 령이니, 이것은 령이 이의 묘용처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학》의 주에 "허령불매(虛靈不昧)……"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령이 문득 능히 주재묘용 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정자와 주자의 설이 이와 같이 분명한데 오히려 보고 살피지 않으니, 다시 어떤 설이 이것보다 분명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부곽설 또한 그렇지 않네. 심이 주재가 되는 것은 능히 응하기 때문이네. 이것으로 부곽의 뜻이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곧장 부곽을 주재한다는 뜻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하네. 또 《주자어류》는 문인이 기록한 것이니, 어찌 친필의 《주자대전》이 더욱 믿을 만한 것과 같겠는가? 그렇다면 부곽이 심통성정(心統性情)과 같다고 말한 것은 마땅히 너무 가볍게 본 것 같으니, 다시 상세히 살펴보기를 바라네. 神靈及郛郭說。復此提起。足見不得不措之意。有不淺淺。妄竊自謂。專言靈則神在靈中。專言神則靈在神中。固無界分時節之可言。若以神靈二字。對擧而言。則靈近體近用。靈較實。神較虛。靈比如鑑之明。具姸媸大小無不畢見。此神也。非氣不能靈。非理無所靈。非氣不能神。非理無所神。靈與神。固皆理氣之合者也。非若賢論以神。爲形而上。以靈爲形而下。而於靈之外。別求妙用之神以爲此心之主宰也。如此則靈外有神。心外有理。靈爲無用之長物。理爲作用之別事。此非小病。奈何奈何。賢旣不信鄙說。以爲程朱說若有如此。則當從之。此可見篤信先賢。亦不無專靠書冊之意也。然且以程朱說證之。中庸言至誠之道。而引鬼神之德以明之。鬼神者。陰陽之靈也。此非靈爲理之妙用處乎。大學註曰。虛靈不昧云云。此非靈之便能主宰妙用。且衆理應萬事處乎。程朱說分明如此。而猶不見省。更安有何說分明於此者乎。郛郭說亦未然。心之爲主宰。以其能應也。以此而謂郛郭之義則可。直以郛郭看作主宰義則不可。且語類是門人所記。豈若大全親筆之爲尤信乎。然則郛郭與心統性情同云者。似當輕輕看。更詳之爲望。 터득하지……뜻 《중용장구》 제20장의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생각할진댄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有不思, 思之, 不得, 不措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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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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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거 감회【6수】 齋居感懷【六首】 천지가 한번 열린 뒤에 (乾坤一以闢)성인들이 계승하고 개도하여 밝혔네 (聖聖繼開明)주나라 쇠약하여 황극9)이 실추되자 (周衰皇極墜)하늘이 중니를 내리셨네 (天降仲尼生)진채10)에서 날이 저물었으니 (陳蔡日云暮)수레를 돌려 옛길로 돌아왔네 (回車返舊程)산정하고 조술하여 성현의 법도 보존하여 (删述存聖軌)만고에 태양처럼 밝게 드러내었네 (萬古太陽呈)사물11)로 심법을 전하고 (四勿傳心法)팔조목12)으로 학규를 보였네 (八條示學規)무성13)에서 노년을 마치려 할 때 (武城終老日)바름을 얻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得正復何爲)성손14)이 이어서 나셨으니 (聖孫來繼作)도를 근심하여 『중용』을 지을 때 (憂道著書時)치우치지 않고 바뀌지 않는 이치15)를 (不偏不易理)손바닥 가리키듯 쉽게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네 (指掌要人知)제나라와 양나라에서 초빙을 받아 유세하러 다녔지만16) (齊梁遊聘路)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다시 어디로 가랴 (不遇復何之)우리에게 넓고 편안한 집을 열어 주었으니17) (開我廣安宅)호연하여 끝이 없네 (浩然無岸涯)바른길이 이미 덤불로 막혔으니 (正路已榛塞)현능한 사람 견문에 빠졌네18) (賢才溺見聞)누가 성악설을 전파하였나 (誰傳性惡說)사람들 아름답고 신기한 문장 저술하네 (人著美新文)비록 칭찬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雖有可稱者)어그러진 것은 본원에 있네 (所差在本源)가상한 용문자19)는 (可愛龍門子)우뚝히 혼탁한 시속에서 벗어났으나 (勃然出俗昏)집을 짓는 것은 아이의 일이 아닌데 (竪屋非兒事)어떻게 함부로 잘난 체하는가 (如何妄自尊)창려20)는 저술이 많으니 (昌黎多著述)간간이 전현의 말을 확대하여 넓혔네 (間間擴前言)문인의 들뜨고 방만한 습속 (文人浮放習)공에게 남아 있는 것 애석하네 (可惜於公存)용릉21)에는 봄날 낮이 고요하니 (舂陵春晝靜)태극도22)를 새로 완성하였네 (太極圖新成)쓸쓸한 천년 뒤에 (寥落千秋下)성인을 이어 후학을 인도한 공 가볍지 않네 (繼開功不輕)이정23)은 학문을 성취하여 (二程登肄業)전수한 것이 성명에 있었네 (傳受在誠明)혼연히 원기가 모이니 (渾然元氣會)진실로 그 베풂이 넓었네 (允矣厥施宏)혁혁한 유작과 양시24)의 무리는 (赫赫游楊輩)귀의하여 모두 명성이 났네 (得歸倂有聲)동남쪽 도를 창도한 곳에서 (東南倡道地)나종언25)은 영걸 중에 뛰어났네 (羅氏出群英)빛을 감추자 남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潛輝人不識)오직 연평 이동26)만 알았네 (惟有李延平)은거한 지 사십 년 (屛居四十載)빙월27)은 광채를 드러내었네 (氷月露光精)민 땅28) 냇물 검포29)에서 나왔으니 (閩溪出劍浦)낙수와 사수30)가 근원일세 (洛泗是其源)태극의 심오한 이치를 발휘하고 (發揮太極蘊)여러 사람의 말을 모아 절충하였네 (集折諸家言)인간의 틀을 보존하게 하여 (爲存人樣子)우리를 짐승에서 벗어나게 하였네 (俾我免鷄豚)태산이 갑자기 무너지니31) (泰山忽已壞)은미한 뜻 다시 가라앉아 어두워지려 했는데 (微義復沈昏)황간과 채원정32) 등의 제자들 (黃蔡二三子)사도를 존숭할 수 있게 하였네 (能令師道尊)심의의 부탁33)을 저버리지 않으니 (不負深衣托)어떤 집안의 자손에게 전하랴 (傳之何氏孫)진실하고 각고면려한 말을 (眞實刻苦語)가슴에 새겨 늘 보존하였네 (佩服常存存)긴 휘파람34) 우리들의 일이 아니니 (長嘯非吾事)왕백35)은 늦게 문하에 나아갔네 (王公晚及門)왕공의 문하에 길보36)가 있으니 (王門有吉父)금화산에서 도를 창도하였네 (倡道金華山)어찌 모두 선하게 하려는 뜻37) 없으랴 (豈無兼善志)허형과 오징38)의 반열을 따르지 않았네 (不逐許吳班)정성스럽게 전한 의발이 (眷眷傳衣鉢)백운 처사39)에게 돌아갔네 (白雲處士還)여러 공이 힘써 준 덕택에 (賴此諸公力)오랑캐조차 공자와 안자를 알았네 (虜人解孔顏)어찌 알았으랴 육씨40)의 화가 (寧知陸氏禍)명나라 연간에 더욱 심해질 줄을 (轉劇皇明間)오직 경헌41)이 있어 (惟有敬軒子)우뚝이 속태를 벗었네 (挺然出俗寰)요어 두세 편42)은 (要語數三編)읽으면 완악함을 깨뜨릴 수 있네 (讀之可砭頑) 乾坤一以闢。聖聖繼開明。周衰皇極墜。天降仲尼生。陳蔡日云暮。回車返舊程。删述存聖軌。萬古太陽呈。四勿傳心法。八條示學規。武城終老日。得正復何爲。聖孫來繼作。憂道著書時。不偏不易理。指掌要人知。齊梁遊聘路。不遇復何之。開我廣安宅。浩然無岸涯。正路已榛塞。賢才溺見聞。誰傳性惡說。人著美新文。雖有可稱者。所差在本源。可愛龍門子。勃然出俗昏。竪屋非兒事。如何妄自尊。昌黎多著述。間間擴前言。文人浮放習。可惜於公存。舂陵春晝靜。太極圖新成。寥落千秋下。繼開功不輕。二程登肄業。傳受在誠明。渾然元氣會。允矣厥施宏。赫赫游楊輩。得歸倂有聲。東南倡道地。羅氏出羣英。潛輝人不識。惟有李延平。屛居四十載。冰月露光精。閩溪出劒浦。洛泗是其源。發揮太極蘊。集折諸家言。爲存人樣子。俾我免雞豚。泰山忽已壞。微義復沉昏。黃蔡二三子。能令師道尊。不負深衣托。傳之何氏孫。眞實刻苦語。佩服常存存。長嘯非吾事。王公晚及門。王門有吉父。倡道金華山。豈無兼善志。不逐許吳班。眷眷傳衣鉢。白雲處士還。賴此諸公力。虜人解孔顏。寧知陸氏禍。轉劇皇明間。惟有敬軒子。挺然出俗寰。要語數三編。讀之可砭頑。 황극(皇極)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천하를 경륜하는 법으로 제시한 아홉 가지 법[九疇] 가운데 다섯 번째 항목으로, 임금이 중도를 지키고 서서 천하 백성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書經 洪範』 진채(陳蔡) 진과 채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시절 온갖 고난을 겪었던 지역이다. 사물(四勿) 안연(顔淵)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바로 인이다."라고 대답하면서, 구체적인 조목으로 제시한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顔淵』 팔조목(八條目) 공자의 제자 증자가 지었다는 『대학장구』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무성(武城)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고을로,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의 읍재(邑宰)가 되어 백성들에게 예악을 가르친 일이 있다. 성손(聖孫) 자사(子思)를 가리킨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지었다. 치우치지……이치 정이천(程伊川)은 중용을 해석하기를 "치우치지 않음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음을 용이라 하니, 중은 천하의 바른 도이고 용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이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라고 하였다. 제나라와……다녔지만 맹자(孟子)는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과 제 선왕(齊宣王)의 초빙을 받아 일정한 책임이 없는 객경의 신분으로 제나라와 위나라를 왕래하였다. 『孟子 梁惠王, 公孫丑』 넓고 편안한 집 인(仁)을 뜻하는 말로,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고 하였다. 현능한……빠졌네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견문(見聞)에 빠져서 세속을 따라 일상적인 것만을 고수한다는 말이다. 용문자(龍門子) 수(隋)나라 때 경학가 왕통(王通, 584 ~617)을 이른다. 자는 중엄(仲淹)이고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이다. 촉군 사호서좌(蜀郡司戶書佐), 촉왕 시독(蜀王侍讀) 등을 역임하였다. 육경(六經)의 효용을 중시하였으며, 그 체재를 본떠 여러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고, 『논어』를 모방하여 지은 『중설(中說)』만 남아 있다. 창려(昌黎) 당(唐)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의 호이다. 용릉(舂陵) 중국 호남성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지명인데, 북송(北宋)의 철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이곳에 살았다. 태극도(太極圖) 주돈이(周敦頤)가 우주의 근본과 만물 발전의 이치를 표현한 도형이다. 이를 해설한 것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인데, 송대(宋代) 철학(哲學)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이정(二程) 송나라 때의 학자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말한다. 정호의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이고, 정이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이다. 당시에 형제가 도학군자로 칭송을 받았다. 유작(游酢)과 양시(楊時)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유작의 자는 정부(定夫), 호는 광평(廣平),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양시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검남(劍南) 사람이다. 나종언(羅從彦) 북송(北宋)의 유학자이다. 자는 중소(仲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복건성(福建省) 남검(南劍) 출신으로, 동향의 선배 구산(龜山) 양시(楊時)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흔히 예장선생(豫章先生)이라 일컬어진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온종일 단정히 앉아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구산 문하의 일인자가 되었다. 정자(程子)의 학문이 바로 양시를 거쳐 나종언에게 전해지고 다시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거쳐 주자(朱子)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연평(延平) 이동(李侗)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이다. 자는 원중(願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남검(南劍) 사람이다. 나종언(羅從彦)이 양시(楊時)에게 낙학(洛學)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종언에게 가서 배워 양시, 나종언과 함께 '남검 삼선생(南劍三先生)'으로 칭해진다. 빙월(氷月)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줄인 말로, 고결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이다. 남송(南宋)의 등적(鄧迪)이 주자의 스승인 이동(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얼음으로 된 호로병에 밝은 가을 달이 담겨 있는 것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宋史 李侗列傳』 민 땅 민중(閩中)을 가리킨다. 민중은 주희(朱熹)가 강학하던 곳으로, 주희나 주자학(朱子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검포(劍浦) 이동(李侗)이 남검주(南劍州) 검포(劒浦) 사람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낙수(洛水)와 사수(泗水) 낙수는 낙양 근처에 있는 강 이름이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는 낙양(洛陽) 사람이다. 이곳에서 두 형제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사수는 노(魯)나라 곡부(曲阜)에 흐르는 강이다. 이곳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공자가 이 지역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으므로 유교 학문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태산이 갑자기 무너지니 현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주자가 죽었다는 의미이다. 황간(黃榦)과 채원정(蔡元定) 모두 주희(朱熹)의 제자이다. 황간은 자가 직경(直卿), 호가 면재(勉齋), 시호가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채원정은 자가 계통(季通), 호가 서산(西山), 시호가 문절(文節)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심의(深衣)의 부탁 수제자로서 도통(道統)을 전해 받았다는 뜻이다. 주자가 병이 들어 위독해졌을 때 심의와 저서(著書)를 제자인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 주면서 "내 도(道)의 부탁이 여기에 있다. 이제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하였다.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副本庚申』 긴 휘파람 은자가 부는 휘파람이란 뜻으로,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유(王維)의 시 「죽리관(竹里館)」에 "깊은 대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길게 휘파람 부네.[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라고 하였다. 왕백(王栢) 1197~1274. 남송(南宋) 때 경학가로 자는 회지(會之) 또는 백회(伯會), 호는 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금화(金華) 사람이다. 왕백은 하기(何基)에게서 배웠고 하기는 주자의 제자인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서 배워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주자가 죽기 3년 전에 왕백이 태어났으므로 이렇게 말한 듯하다. 길보(吉甫) 송말원초의 학자인 김이상(金履祥)의 자이다. 김이상은 만년에 인산(仁山)에 은거하였다. 하기(何基)와 왕백(王柏)에게 정주학을 배워 주자의 학통을 이었다. 송나라가 멸망하자 벼슬하지 않고 금화산(金華山)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모두……뜻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은 뜻을 이루면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을 수양하여 세상에 드러난다. 궁하면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모두 선하게 한다[古之人, 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허형(許衡)과 오징(吳澄) 허형은 원나라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중평(仲平), 호는 노재(魯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원나라 초기의 학계에 주자학(朱子學)의 기초를 닦았으며 주자와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조화시키려 노력했고, 공담(空談)만을 일삼는 이학(理學)을 비판하였다. 오징은 원나라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유청(幼淸), 호는 초려(草慮)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자의 사전제자(四傳弟子)로, 이학(理學)을 위주로 하면서 심학(心學)을 아울러 취하여 주륙이가(朱陸二家)의 사상을 조화시켰다. 백운 처사(白雲處士) 허겸(許謙)으로, 자는 익지(益之)이다. 자호가 백운산인(白雲山人)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백운 선생이라고 불렀다. 김이상(金履祥)에게 배웠다. 동양(東陽)의 팔화산(八華山)에서 40년 동안 강학하였다. 하기(何基)·왕백(王柏)·김이상 등과 함께 금화(金華) 주자학의 중요한 전승자로, 금화 사선생(金華四先生)이라고 불렸다. 육씨(陸氏) 육구연(陸九淵)을 이른다. 육구연은 남송의 유학자로, 호는 존재(存齋) 또는 상산(象山)이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동시대 주희(朱熹)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후에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는 육학(陸學)을 정립하였다. 경헌(敬軒) 명나라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설선(薛瑄, 1389~1464)의 호이다. 자는 덕온(德溫), 시호는 문청(文淸)으로 성조(成祖) 영락(永樂) 19년(1420)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겸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에 이르렀다. 평생 독실하게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여 명대 성리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진다. 요어(要語) 두세 편 명나라의 이학가(理學家) 설선(薛瑄)의 저술인 『독서록(讀書錄)』을 가리킨다. 총 2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평소 몸소 실천하면서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기록한 책으로, 주로 이기(理氣)와 성리(性理) 문제를 다루었다. 명나라 초기 정주학의 대표적인 저술이다.『明史 儒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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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를 적다 書懷 가난한 사람은 부유하고자 하고 (貧人思欲富)천한 사람은 귀하고자 하네 (賤人思欲貴)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하고자 하고 (富人又欲富)귀한 사람은 더욱 귀하고자 하네 (貴人又欲貴)물처럼 날로 욕심 더욱 깊어지니 (如水日益深)죽을 때까지 스스로 편안하지 않네 (没身不自安)귀천을 어찌 선택할 수 있으랴 (貴賤奚須擇)가난과 부귀는 실로 한가지라네 (貧富固一般)나에게 태곳적 비결이 있으니 (我有太上訣)주어진 처지에 순응하여 절로 여유롭다네 (素位自裕然)아침에는 산속의 나물을 캐고 (朝採山中藿)저녁에는 돌 아래 샘물을 마시네 (暮飲石下泉)관솔불 피워 놓고 고서를 보며 (燃松看古書)대나무 심고 새 봄을 기다리네 (種竹見新春)문을 두드려 남에게 요구하지 않고 (不叩要人門)살찐 말 뒤를 따르는 것43) 부끄러워하네 (慙隨肥馬塵)때때로 동지들이 찾아와 (時有同志至)나를 위해 성과 이를 말하네 (爲我談性理)가슴에 새김에 남은 뜻이 있으니 (佩服有餘意)부지런히 되풀이하고 그치지 않네 (娓娓不能已)성쇠는 추위와 더위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榮悴猶寒暑)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네 (修身以俟天)우주 사이에서 부앙하니 (俯仰宇宙間)더 이상 누구를 허물하고 원망하랴 (復誰尤怨焉) 貧人思欲富。賤人思欲貴。富人又欲富。貴人又欲貴。如水日益深。没身不自安。貴賤奚須擇。貧富固一般。我有太上訣。素位自裕然。朝採山中藿。暮飲石下泉。燃松看古書。種竹見新春。不叩要人門。慙隨肥馬塵。時有同志至。爲我談性理。佩服有餘意。娓娓不能已。榮悴猶寒暑。修身以俟天。俯仰宇宙間。復誰尤怨焉。 살찐……것 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나귀 타고 삼십 년 동안, 장안의 봄을 나그네 신세로 살아 왔네. 아침이면 부잣집 문을 찾아가고, 저녁이면 살진 말의 뒤를 따랐어라. 남은 술과 식은 고깃점, 가는 곳마다 남몰래 몹시 서러웠네[騎驢三十載, 旅食京華春. 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杯與冷炙, 到處潛悲辛.]"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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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재 문공전 好德齋文公傳 호덕재(好德齋) 문공의 휘는 영국(永國), 자는 사랑(士良)으로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이 현조가 된다. 휘가 자수(自修)이며 호가 면수재(勉修齋)라는 분은 고을 사람들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고조는 세휘(世輝)로 진사를 지냈고, 증조는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정부인(鄭夫人)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골격이 준수한 어떤 어르신이 엄숙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와서 스스로를 '분양거사(汾陽居士)'174)라 말하였는데, 얼마 뒤에 공을 낳았다. 또 하루는 기어가다가 우물에 떨어진 것을 집안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는데, 까치떼가 우물을 둘러싸고 지저귀니 부인이 가서 보고 건져냈다고 한다. 3세에 참판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다하여 울부짖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니를 섬김에 기쁘고 화한 안색으로 효도를 다하였는데,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심어 온갖 필요로 하는 것은 몸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흉년을 당하여서 백리 밖에서 쌀을 짊어지고 올 때에 무뢰배들이 도적을 방비하고 막는다고 하면서 빼앗고자 하자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이분은 백암(白巖)의 문효자이시다." 라고 하니 마침내 보호하여 보내주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너무 슬퍼한 탓에 거의 목숨을 잃을175) 뻔하였고, 염습하는 도구와 매장하는 절차, 궤전의 의례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였다. 중년 이후로 집안의 형편이 조금 펴지고, 아래로 자제(子弟)의 봉양이 있었다. 자로(子路)가 진수성찬을 먹고 호화롭게 생활하면서도 직접 쌀을 져 올 수 없다고 탄식했던 말176)을 욀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백중(伯仲)을 섬김에 공경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을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빈곤하여 백방으로 집안 일을 맡아서177)하였는데, 매번 한가한 날이면 형제들이 모여 마주하고 경전을 토론하였다. 하루는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책장사가 지나가자 마침내 밭가는 소를 책과 바꿔 글방을 열어 책을 쌓아두고 널리 어진 사우(士友)를 맞이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평생 태만한 모습이 없었고, 빨리 말하거나 바쁜 기색이 없었다. 실질에 힘쓰고 형식적인 화려함을 제거하였으며, 의를 귀히 여기고 재물을 가벼이 여겼다. 무릇 오랜 벗과 친척 중에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대로 돌보지 않음이 없었다. 가난해서 장사하지 못한 자를 장사지내주었으며, 그 시집가고 장가들지 못한 자를 시집 장가 보내주었다. 일찍이 자손을 경계하기를, "궁핍하게 홀로 사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화려하고 사치함을 따르지 말며, 술과 고기를 즐기지 말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 하지 말며, 선비든 농부든 간에 각자 자기의 생업에 부지런히 힘쓰고 부귀와 문장을 능사로 삼지 말고, 다만 대대로 부지런하고 삼가는 자손을 두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부인 광산 김씨는 정숙하고 온유하여 시부모 봉양하기를 효도로써 하였고, 남편 섬기기를 공경으로써 하였으며, 집안사람들 대하기를 화목함으로 하였다. 부부가 동갑으로 오래도록 해로하다가 회근례(回巹禮)178)를 행하였다. 공의 나이 95세일 때에 정상원(鄭相元, 1678~1754) 부객(府客)이 듣고 이를 가상히 여겨 천거하니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숭정대부지중추부사(崇政大夫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대개 이는 우로(優老)의 특별한 은전(恩典)179)이었다.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고을의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상고(上古)시대에는 질박함이 흩어지지 않은데다가 성왕(聖王)이 계속 일어나 표준을 세우고 복록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인민(人民)이 번성하고 집안이 평안하여 온 세상을 태평성대의 세상180)에서 살게 하였다. 그러나 말세(末世)로 내려와서는 풍속이 경박하여 재앙의 징조가 늘 있는 듯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일찍 요절하거나 번뇌181)에 시달리며 의지할 곳이 없이 외롭거나 노쇠한 곤액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오복 중의 한두 개를 얻을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일을 살펴보니, 인가(人家)의 흥망성쇠를 겪는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순전한 길복과 완전한 아름다움은 공의 집만한 곳이 없었다. 집에는 재물을 쌓는 두터움이 있고, 가정에는 후사를 잇는 번성함이 있었으며, 몸은 백수를 누려 지위가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강녕하여 아무 탈이 없고 고상하고 아름답게 일생을 마쳐182) 자손 백여 명이 모두 박아하고 두터워 각각 한 가지 기예에 통달하였으니, 옛사람들이 이른바 제일가(第一家)라는 것에 못지않을 것이다. 아, 감천(甘泉)은 반드시 예천(醴泉)183)의 근원에서 시작하고, 찬란한 옥찬(玉瓚)은 반드시 황류(黃流)를 기다려야 하니,184) 만일 덕과 인을 쌓아 하늘을 감동시켜 화기(和氣)를 부른 자가 아니라면, 세상의 수준이 점차 낮아지는 날에 어찌 하늘이 주신 복을 이처럼 두텁게 누릴 수 있었겠는가. 동생(董生)185)의 행의(行義)는 본래 천옹(天翁, 하늘)이 굽어 살피심이 있어서였고, 최씨(崔氏) 가문이 창대함은 실로 당씨(唐氏)의 효경(孝敬)에 힘입은 것이로다.186) 好德齋文公諱永國。字士良。江城君益漸爲顯祖。有諱自修號勉修齋。鄕人祭于社。高祖世輝進士。曾祖命吾贈掌樂院正。祖喜孟贈戶曹參議。考弼鎭贈戶曹參判。妣鄭夫人嘗夢。有一丈人。風骨俊偉。儼然入室。自稱汾陽居士。己而産公。一日匍匐而落於井。家人不知也。有羣鵲擁井而噪。夫人往視而拯救之。三歲參判公違背。索呼孺啼。晝夜不輟。見者無不釀涕。事慈幃。極其怡愉。家素貧。傷無以養。漁樵耕稼。凡百所須。無不身親爲之。遇飢歲。負米百里之外。無賴輩稱以防禁。欲攘奪之。有一人知之曰。此白巖文孝子。遂護送之。遭艱。致哀毁。幾滅性。襲斂之具。掩厝之節。饋奠之儀。必誠必信。中年以後。家力稍紓。下有子弟之奉。每誦子路列鼎累茵。歎不得爲親負米之語。而不覺嗚咽沾衿。事伯仲。敬之如嚴父。出入進退。必稟而行早孤貧。幹蠱百端。而每於暇日。兄弟聚對。討論經籍。一日出耕于野。有冊商過之。遂以耕牛易之。開塾儲書。廣延賢士友。以資諸子孫肄業。平生無怠慢之容。無疾遽之色。務實而祛華。貴義而輕財。凡知舊族戚有窮乏者。無不隨力存恤葬其不能葬者。嫁娶其不能嫁娶者。嘗戒子孫不侮窮獨。不服華靡。勿嗜酒炙。勿近博奕。於士於農。各勤其業。不以富貴文章爲能事。但世世有勤勅子孫。是吾願也。齊光山金氏。貞靜柔嘉。奉舅姑以孝。事君子以敬。待家衆以和。同庚偕老。行回巹禮。公年九十有五。鄭相元府客聞而嘉賞薦。除五衛將。尋拜崇政大夫知中樞府事。蓋優老別恩典也。後三年而終。鄕里後生鄭義林曰。上古大樸未散。加以聖王繼作。建極錫福。是以生齒繁庶。家用平康。躋四海於壽域。降及叔季。俗澆數薄。咎徵恒若。人之生於其間多夭札缺漏煢獨殘悴之厄。而得有其五福之一二者。無幾人矣。余自省事。閱人家興替。不啻多矣。而其純吉全美。未有若公家也。家有居積之厚。庭有似續之蕃。身享百壽。位躋崇品。康寧無恙。高朗令終。子孫百餘人。皆博雅長厚。各通一藝。古人所謂第一家者。不爲專美矣。嗚乎。甘泉必自醴源。瑟瓚必待黃流。如非積德累仁感召和氣者。則在世級浸降之日。而豈能享此天餉若是其厚耶。董生行義自有天翁之降監。崔門昌大。實賴唐氏之孝敬。 분양거사(汾陽居士)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장수 곽자의(郭子義)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곽분양(郭汾陽)이라 부른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功)을 세웠다. 아들 여덟에 사위 일곱 명이 모두 조정에서 귀현(貴顯)하였고, 손자 수십 명은 다 알아보지 못하여 문안 때면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상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 인신(人臣)으로서의 영화와 자손의 번성함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인물이다. 목숨을 잃을 원문의 '멸성(滅性)'은 부모의 상을 당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한다.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사흘이 지나면 죽을 먹고, 석 달이 지나면 머리를 감고, 일 년이 지나면 연제(練祭) 이후의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지극히 애통해하더라도 자기의 생명만은 해치지 말아서,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三日而食, 三月而沐, 期而練, 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고 하였다. 자로(子路)가……말 자로가 일찍이 공자(孔子)를 뵙고서 "예전에 제가 두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항상 명아주와 콩잎만 먹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버이를 위하여 100리 밖에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곤 했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로 남쪽으로 초나라에 노닐 적에 따르는 수레가 100여 대요, 만종의 곡식을 쌓아 두고 요를 여러 겹으로 깔고 앉아서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먹으면서는 다시 명아주 콩잎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져 오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昔者由也事二親之時, 常食藜藿之實, 爲親負米百里之外. 親沒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願欲食藜藿, 爲親負米, 不可復得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孔子家語 致思》 가업(家業)을 계승 원문의 '간고(幹蠱)'는 간부지고(幹父之蠱)의 준말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하였다. 회근례(回巹禮) 혼인(婚姻)한 지 60주년(週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회혼례(回婚禮)라고도 한다. 우로(優老)의 특별한 은전(恩典) 나라에서 노인을 공경하는 뜻으로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官職)을 내리는 은전을 말한다. 태평성대의 세상 원문의 '수역(壽域)'은 인수지역(仁壽之域)의 준말로, 천수(天壽)를 다하며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의 "한 세상의 백성들을 몰아서 인수의 지역으로 인도한다면 풍속이 어찌 성강 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수명이 어찌 고종 때처럼 되지 않겠는가.[驅一世之民 濟之仁壽之域 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번뇌 원문의 '결루(缺漏)'는 불교 용어로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심신을 얽매므로 결(缺)이라 하고, 눈 귀 등의 6근으로부터 밤낮으로 누설하기 때문에 누(漏)라고 한다. 고상하고……마쳐 훌륭한 행실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시경》 〈기취(旣醉)〉 3장에 "광명정대함이 환히 빛나니 고명(高明)하여 마침을 잘 하리라. 마침을 잘하는 데 시작이 있으니, 제사의 시동(尸童)이 좋은 말을 고하도다.〔昭明有融 高朗令終 令終有俶 公尸嘉告〕"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천(醴泉) 감미로운 물이 솟아난다는 신비한 샘인데, 훌륭한 자손이 나는 가문에 그 조상의 근원이 있음을 말한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 하였다. 찬란한……하니 옥찬(玉瓚)은 옥 손잡이에 바닥은 금으로 된 국자로 강신제 때 쓰며, 황류(黃流)는 종묘의 제사에 쓰기 위하여 울금향을 넣어 만든 술이다. 울금의 뿌리를 넣으면 술빛이 황색으로 변하므로 황류라고 한 것인데, 모두 귀한 인재를 뜻한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아름다운 저 옥 술잔에 황류가 담겨 있도다.[瑟彼玉瓚, 黃流在中.]"라고 하였다. 동생(董生) 동생은 중국 당(唐)나라의 동소남(董召南)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동소남의 모습을 그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한유가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이라는 고시를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엔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네. 하루 종일 쉬지를 않으며,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물에 가서 고기도 잡네. 주방에는 맛난 음식 갖춰져 있고, 대청에선 평안한지 물어본다네. 부모님은 근심을 아니하시고, 처자식은 탄식을 아니 한다네.[嗟哉董生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戚戚, 妻子不咨咨.]"라고 칭찬하였다.《韓愈集 卷2 古詩》 최씨(崔氏)……것이로다 최씨 가문에 시집온 당부인(唐夫人)이 효경(孝敬)으로 최씨 집안을 창대하게 하였다는 말로, 김씨 부인을 칭찬한 표현이다.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부인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82 崔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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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내가 지은 〈양성당명(養性堂銘)〉12)은 지금 기억도 못하겠는데, 그대는 어디에서 얻어 보았는가? 대개 명(銘)에서 말한 부곽(郛郭)은 윤곽[匡郭], 지반(地盤)의 뜻이네. 심(心)을 성(性)의 주재(主宰)로 여긴 것은 이(理)의 주재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심을 성의 부곽으로 여긴 것은 기(氣)의 정상(精爽)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정상과 기질은 비록 정추(精粗)가 있지만 기질은 또한 정상의 부곽이 아닌가? 그 사이에 한 겹의 꺼풀이 있는 것 같지만 부곽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네. 기질과 정상이 부곽이 되지 않으면 다시 어떤 물건이 있어 이 성을 갖추어 실을 수 있겠는가? 부곽을 주재로 삼은 것은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아마 크게 옳지 않은 듯하네. 그대가 평소 기꺼이 정령(精靈)을 주재(主宰)로 간주하려고 않으면서 지금 이에 부곽을 주재로 여기는가? 또 상문(上文)에 비록 본심을 말하였으나 중간에 '기질(氣質)' 두 글자로 섞어서 말하였으니, 하단에 방일(放逸)의 마음을 말한 것은 아마 불가함이 없을 것 같네. 내가 간장(澗丈)에게 준 편지에서 분수처(分殊處)를 말한 것은 과연 주자의 본의가 아니네. 그러나 천하의 물(物)은 뒤섞여 만 가지로 변함에 단지 '곧바로 이루는 것[直遂]'과 '곧바로 이루지 못한 것[不直遂]'일 뿐이니, 직수를 정통(正通)으로 여기고 불직수를 편색(偏塞)으로 여기는 것 또한 하나의 설이 되는데 해롭지 않네. 하문의 장단 비척(長短肥瘠)은 형기의 나뉨이 이른바 원습(原濕)에 사는 사람은 풍성하고 두텁고 사토(沙土)에 사는 사람은 파리하고 가늘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지 물류(物類) 상에 나아가 그 분수(分殊)의 본연이 아닌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교구(矯捄) 변화(變化)와 사람이 사람 되는 연유의 여부에 대해서는 애초에 자주 언급할 겨를이 없었네. 더구나 거처가 기상을 바꾸고 봉양이 체질을 변화시키니 체질 또한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있고, 기질을 변화시키니 질(質) 또한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있음에야 어떠하겠는가? 이런 등은 활간(活看)13)하는 데 달려 있으니, 어떻게 여기는가? "작용(作用)……"이라 하였는데, 근래 《주자대전》을 보니 설명해 놓은 곳이 많이 있었네. 대서 석씨(釋氏)가 작용을 성(性)으로 여긴 것은 고자(告子)의 "생리적인 본능을 성(性)이라고 한다."는 것과 같네. 그러나 그 작용이 삼연(森然)히 이미 갖추고 찬연(粲然)한 조리 가운데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끝내 스스로 사사롭게 한 것을 면하지 못하네. 그대가 이른바 "작용을 성이라 하는 것은 실로 불가하고 작용을 심이라 하는 것 또한 불가하다."라고 한 것은 매우 옳네.근래 주자의 글 약간 편을 보니, 간간이 나를 감발시키는 곳이 있었네. 다만 한스럽게도 나의 쇠퇴함이 이와 같아 힘을 기울여도 전날의 허물을 만분의 일도 보완할 수 없네. 鄙所述養性堂銘。今不可記憶。未知賢於何處得見耶。蓋郛郭是匡郭地盤之義也。以心爲性之主宰者。是指理之主宰而言。以心爲性之郛郭者。是指氣之精爽而言。精爽氣質。雖有精粗。而氣質亦非精爽之郛郭耶。其間若有一重膜子。而其爲郛郭則一也。氣質精爽。不爲郛郭。則更有何物可以該載是性也。以郛郭作主宰者。以愚料之。恐大不是。賢平日不肯以精靈作主宰看。而今乃以郛郭作主宰耶。且上文雖言本心。而中間以氣質二字。措以爲語。則下段言放逸之心。恐無不可也。鄙與澗丈書言分殊處。果非朱夫子之本意。然天下之物。參錯萬變。只是直遂與不直遂而已。以直遂爲正通。以不直遂爲偏塞。亦不害爲一說也。下文長短肥瘠。其非形氣之分。如所謂原濕之人豊而厚。沙土之人瘦而細者耶。此特就物類上。指其分殊之非本然者而言。至於矯捄變化。與夫人之爲人關由與否。初不數數暇及也。況居移氣。養移體。則體亦有可移者。變化氣質。則質亦有可變者乎。此等在所活看。未知何如耶。作用云云。近看大全。多有說起處。大抵釋氏以作用爲性。如告子生之謂性。然其作用。不自森然已具。粲然有條中出來。則終不免於自私而已。賢所謂以作用謂性。固不可。而以作用謂心。亦不可者。極是極是。近閱朱書若而編。間間有感發人處。但恨衰頹如此。無以致力以補前愆之萬一也。 양성당명(養性堂銘) 《일신재집》권9에 실려 있다. 활간(活看) 글을 볼 때에 글자나 글귀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널리 보아 본의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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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보내온 편지의 제1단락에서 "령(靈)은 심의 당체(當體, 실체)이니, 그 가운데 나아가면 절로 주재(主宰)와 묘용(妙用)의 신(神)이 있기 때문에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체용이 있음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주자가 《대학》명덕(明德)의 주에서 어찌 "허령불매(虛靈不昧)한 가운데 절로 주재와 묘용의 신이 있어 중리를 갖추었다.……"라고 하지 않고, 단지 "허령불매"하다고만 하였겠는가? 단지 이 령은 문득 주재하기도 하고 문득 묘용이 되게 하기도 하니, 이 령을 제거하면 완연(頑然)한 하나의 흙과 나무일뿐이니, 다시 어떤 물이 있어 주재할 수 있으며, 묘용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인(仁)하기 때문에 령(靈)하니 인이 아니면 어찌 이 령이 있겠으며, 인하기 때문에 각(覺)하니 인이 아니면 어찌 이 각이 있겠는가? 이로써 능히 깨닫는 것은 령(靈)이고 깨닫게 하는 것은 성(性)이며, 능히 주재하는 것은 령이고 주재하게 하는 것은 성이며, 능히 묘용하는 것은 령이고 묘용하게 하는 것은 성이라, 능(能)이라는 것은 부려지는 것이고 소(所)라는 것은 장수이며, 자자(者者)라는 것은 종이 되고 저저(底底)라는 것은 주인이 되니, 이른바 령이라는 것은 바로 이(理)가 주재 묘용하는 것임을 알겠네. 지금 이것을 모르고 바로 령의 밖에서 별도로 하나의 현현(玄玄)하고 망망(茫茫)한 영상(影象)을 찾아 주재와 묘용으로 삼으려하니, 이 물이 어떤 물인지 모르겠네. 이(理)인가, 기(氣)인가? 기라고 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주재를 기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성이라고 한다면 성이 성을 점검하니 심이 성을 점검한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고, 성이 성을 통솔하니 심이 성을 통솔한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네. 마음에는 령이 있고 또 신이 있어 각자 점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니, 이것이 사리에 과연 온당하겠는가? 근래 애산(艾山)의 심설(心說)은 진실로 과당한 곳이 있는 줄 깨달았으니, 이른바 "진실로 이 기가 없으면 정(靜)은 붙을 것이 없고 동(動)은 탈 것이 없기 때문에 합(合)이라고 한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네. 이것은 성(性) 자의 본 뜻을 완곡하게 설명한 것이고 심을 말한 것은 아니네. 선사(先師)께서 일찍이 애산의 물음에 답한 것에 "성(性)을 말하는 데로 차츰차츰 흘러 들어간다."라고 한 것이 있으니,14) 잘못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이러했음을 생각한 말임을 알 수 있네. 제2단락에서 말한 것은, 당체(當體)의 원두(源頭)에 어찌 일찍이 각각 지분(地分)이 있었던가? 음양은 시작이 없고 동정은 실마리가 없어 천지에 원두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물건이 없네. 이른바 원두는 또한 당체(當體)에서 보아야 하네. 이 이가 있기 때문에 이 심이 있으니 이것이 원두이고, 이 심이 있기 때문에 이 이를 갖추니 이것이 당체인데, 어찌 위의 반과 아래의 반이 층으로 나뉘어 서로 현격함이 있겠는가? 제3단락에서 말한 것은, 태극(太極)·성(性)·신(神)·심(心)은 하나의 이(理)일 뿐이니, 그 주재와 묘용이 되는 것은 실로 두 가지가 없네. 심은 주재아 묘용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실로 나의 뜻이 아니니, 당시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겠는가? 제4단락의 주재와 묘용이 절로 심의 진면목과 본지(本旨)라는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말한 것과 같네. 그러나 이것은 그대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알고 있으니, 교왕과직(矯枉過直)은 여기에 있지 않네. 다만 령을 심으로 인식하는 것은 주기(主氣)에 혐의스럽기 때문에 령의 밖에서 별도로 한 개 주재 묘용을 취하여 심의 본지로 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귀결[着落]할 곳이 없고 의거하여 지킬 것이 없게 하는 것이 마치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매어두려는 것 같으니, 이것이 교왕과직이 아니겠는가? 제5단락에서 말한 것은, '심통성정(心統性情)'의 '통' 자는 성정의 위에 있으니, '심' 자가 주제(主制)한다는 뜻이 절로 드러나네. 심이라는 것은 성정의 총명(總名)이고 '총' 자는 성정의 아래에 있으니, 성정의 밖에 다시 별도로 심이 없는 것이 마치 '성의(誠意)'와 '의성(意誠)'을 말함에 공(功)과 효(效)가 나누어지고, '경이(敬以)'와 '이경(以敬)'을 말함에 직(直)과 부직(不直)이 판별되는 것과 같네. 제6단락에서 "겨우 성(性)을 말하면 성이 아니기 때문에 도(道)는 깨닫는 이치는 있지만 깨닫는 일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 설과 같다면 겨우 성을 말하기 이전에 도는 깨닫는 것이 있고 성을 말한 뒤에는 깨닫는 것이 없네. 또 말하기를 "심은 주재의 이(理)이고 묘용의 신(神)인데 그 돕는 것을 말하면 정령(精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심과 정령을 나누어 두 가지 물로 여기는 것이네. 또 말하기를 "깨닫는 것은 령이고 깨닫게 하는 것은 주재와 묘용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령과 주재 묘용을 나누어 두 조각으로 만든 것이네. 이물(二物)과 양편(兩片) 이것이 어찌 일본(一本)과 주재(主宰)의 뜻이겠는가? 나는 실로 "기는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심이 능히 성을 점검한다."라고 하였지, 어찌 일찍이 곧장 "기가 능히 성을 점검한다."라고 하였던가? 술이 보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리를 마신다고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한갓 기가 성을 점검하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제어하는 것 같음만을 알고, 이가 성을 점검하는 것은 임금이 임금을 제어하는 것이 되는 줄 모르는가? 또 심이 성을 점검하는 것은 성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을 따르는 것이니, 마치 장군이 바깥에서 제어하는 것은 임금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임금의 명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과 같네. 만약 장군이 바깥에서 제어하는 것을 가지고 참람되고 핍박하는 혐의가 있다고 여겨 금지하여 간여할 수 없게 하고, 음식을 전달하고 북을 울리는 등 해야 할 모든 일을 임금 스스로 한다면, 임금의 권세가 높다고 하겠는가, 없다고 하겠는가? 지금 의론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겠는가? 제7단락에서 "준로(峻露)……"라고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령(靈)이라는 물(物)은 비록 기를 떠나지 않지만 그것을 곧장 기라고 한다면 정추(精粗)의 구분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에 준로(峻露)라고 했을 뿐이네. 무릇 심이라는 것은 오행(五行)의 정영(精英)이고 일신(一身)의 신명(神明)이니, 이른바 주재가 이로 말미암아 서고 이른바 묘용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어찌 정령을 버리고 별도로 주재와 묘용의 신을 구하여 심의 본지(本旨)로 삼는 것이 가하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성과 심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으로 말한 것이고, 맹자가 이른바 "인은 인심이다.[仁人心]"라고 한 것과 소옹(邵雍)이 이른바 "심은 택극이 이것이다.[心太極是也]"라고 한 것은 하나이면서 둘인 것으로 말한 것이고, 공자가 이른바 "그 마음이 인을 어기지 않는다.[其心不違仁]"라는 것과 주자가 이른바 "심은 음양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心猶陰陽是也]"라고 한 것은 합하여 하나로 하려고 하되 반드시 먼저 나누어 정밀하게 해서 피차의 경계가 실로 구차해서는 불가하다는 것과 같네. 주자가 또 말하기를 "신령한 곳은 단지 심이다.[靈處只是心]"라고 하였으니, 주자는 어찌 주재와 묘용을 말하지 않고 단지 령으로 말한 것인가? 대개 령은 주재와 묘용이 되는 소이(所以)이기 때문이네. 《대학》의 주에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한 것으로……"라고 하였는데, 덕(德)은 득(得)이니, '소득(所得)' 두 글자로 '허령(虛靈)……'이라는 위에 두었으니, 허령은 명덕(明德) 가운데의 일이 됨을 알 수 있네. 세상 사람들은 '소득' 두 글자가 윗부분에 있는 줄 모르고 단지 하단의 '허령……'이라고 한 사이에서 명덕을 찾고 심지어 명덕이 형이하(形而下)가 된다고 하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는가? 이로서 령은 이(理) 가운데의 일이고 령이 주재묘용이 되는 것은 바로 이가 주재 묘용 하는 것임을 알겠네. 어떻게 여기는가? 부곽(郛郭)의 설은 편지를 통해서와 만나서 이야기 한 것이 상세히 다했을 뿐 아닌데, 이에 다시 이렇게 제기하는가? 선입견은 옮기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 줄 알 수 있겠네. 비록 답하려고 하여도 앞에서 말한 것 이외에 다시 남은 말이 없으니, 어찌하고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이단의 학문이 침범하는 날을 당하여 이런 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네. 이런 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또 모두 주기(主氣)의 오류를 주장하여 각자 서로 배격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우리 유학의 도가 고약(孤弱)함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노쇠하고 궁하여 침체되어 있어 외롭고 무료한데, 오직 그대가 있어 서로 바라봄에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보거(輔車)15)처럼 의지하고 공거(蛩蚷)16)처럼 도움을 받는다면,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하는 사이에 입술이 들어맞듯 회통(會通)하여 한 곳으로 함께 귀결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컨대 그대는 선입견을 주장하지 말고 공정하게 듣고 나란히 관찰하여 지당한데 돌아가기를 바라네. 來書第一段。謂靈是心之當體。就其中。自有主宰妙用之神。故有是具衆理應萬事之體用如此。則朱子於大學明德註。何不曰虛靈不昧之中。自有主宰妙用之神。以具衆理云云。而止曰虛靈不昧耶。只此靈也。便能主宰。便能妙用。除却此靈。則頑然一土木而已。更有何物可以主宰。可以妙用。但仁故靈。非仁安有此靈。仁故覺。非仁安有此覺。是知能覺者是靈。而所覺底是性。能主宰者是靈。而所主宰底是性。能妙用者是靈而所妙用底是性。能者爲役而所者爲帥。者者爲僕而底底爲主。則所謂靈者。卽理之所以主宰妙用也。今不知此。而乃於靈之外。別討一箇玄玄茫茫底影象。以爲主宰妙用。未知此物何物。是理耶氣耶。以爲氣也。則賢必不以主宰爲氣。以爲性也則是性檢性。不當曰心檢性。是性統性。不當曰心統性也。方寸之間。有靈又有神。各自占據。此於事理果穩當耶。近覺得艾山心說。誠有過當處。如所謂苟無是氣。則靜無所榙。動無所乘。故謂之合。此是完轉說性字本旨出來。非所以言心。先師嘗答艾山問有曰。駸駸流入說性去。可知誤入者。想未始非此之謂也。第二段云云。當體源頭。何嘗各有地分。陰陽無始。動靜無端。上天下地。無一物可以喚做源頭。所謂源頭。亦只於當體上見之。有此理故有此心。此源頭也有此心故具此理。此當體也。豈有上一半下一半層節之相懸耶。第三段云云。太極也性也神也心也。一理而已。則其爲主宰妙用。固無二致也。心不可以主宰妙用言者。實非愚意。當時緣何而云爾耶。第四段主宰妙用。自是心之眞面本旨。誠如來喩。然此非但賢知之。愚亦知之。矯枉過直。不在於此。但認靈爲心。嫌於主氣。故於靈之外。別取一箇主宰妙用。以爲心之本旨。使人沒着落無据守。如捕風繫影。此其非矯枉過直者耶。第五段云云。心統性情。統字在性情之上。則心字主制之義自著。心者性情之總名。總字在性情之下。則性情之外。更別無心。如曰誠意意誠。而功與效分焉。敬以以敬。而直不直判焉。第六段才說性。不是性。故道有覺之理。而無覺之事。若如此說。才說性以前。道有覺。而說性而後。無覺也。又曰心是主宰之理。妙用之神。而言其資助則精靈也。此以心與精靈。分爲二物也。又曰覺者靈也。覺之者主宰妙用也。此又以靈與主宰妙用。分爲兩片也。二物兩片。此豈一本主宰之義耶。愚固曰氣有爲。故心能檢性。何嘗直曰氣能檢性耶。以酒醴之出於來牟。而謂之飮來牟可乎。徒知氣檢性之如以臣制君。而不知理檢性之爲以君制君乎。且心之檢性。非制性乃循性也。如將軍之制於外。非制君。乃所以行君之命也。若以將之制外。而謂有僭逼之嫌。禁之使不得干預。而傳餐鳴鼓。凡百執事之役。君自爲之。則君之勢可謂尊乎貶乎。今之論何以異於是。第七段峻露云云。非他也。靈之爲物。雖不離氣而直謂之氣。則於精粗之分。有未愜者。故謂峻露耳。夫心者。五行之精英。一身之神明。所謂主宰。由此而立。所謂妙用。由此而生。豈可捨精靈而別求主宰妙用之神。以爲心之本旨乎。朱子曰性與心一而二。二而一。以二而一者言之。孟子所謂仁人心。邵子所謂心太極是也。以一而二者言之。孔子所謂其心不違仁。朱子所謂心猶陰陽是也。如欲合而一之。必先有以分而精之。而彼疆此界。固不可苟也。朱子又曰靈處只是心。朱子何不言主宰妙用。而只以靈言耶。蓋靈所以爲主宰妙用也。大學註曰。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云云。德得也。以所得二字。冠之於虛靈云云之上。可知處靈之爲明德中事也。世人不知所得二字在上頭。只於下段虛靈云云之間。尋求明德。至以明德爲形而下。豈不誤哉。是知靈是理中事。而靈之爲主宰妙用乃理之所主宰妙用也。如何如何。郛郭之說。以書以面。不啻詳悉。而乃復提起如此耶。可知先入之難移。有如是矣。雖欲奉答。而前說之外。更無餘言。奈何奈何。當此異學侵畔之日。而知有此事者。無幾人焉。知有此事者。又皆爲主氣所誤。各相排抑。去而愈甚。吾道之孤弱。爲何如耶況此衰窮淟渧。煢煢無聊。而惟有吾友相望。在不遠地。倚之如輔車。資之如蛩蚷。則其於講討問辨之間。可不脗然會通。思所以同歸一轍乎。願吾友不以先見爲主。公聽倂觀。歸於至當是望。 선사(先師)께서……있으니 《노사집(蘆沙集)》권12〈정후윤의 문목에 답함[答鄭厚允問目]〉에 나온다. 보거(輔車) 보(輔)는 협보(頰輔)로 뺨에 붙은 뼈를 가리키고, 거(車)는 아거(牙車)로 어금니 아래 뼈이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5년에 "속담에 이른바, '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거(蛩蚷) 공공(蛩蛩)과 거허(蚷虛)를 말하는데, 전설상의 두 짐승의 이름이다. 공공은 북해 가운데 있다는 말 비슷한 짐승이고 거허는 수말과 암나귀 사이에서 난 짐승인데, 늘 같이 따라 다닌다고 한다. 항상 함께 지내며 서로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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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앞의 설이 자못 상세하여 이로부터 거의 하나로 귀결될 희망이 있다고 스스로 여겼더니, 보내온 편지를 받아봄에 하나로 귀결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다시 가지에서 가지가 생겨나고 덩굴에서 덩굴이 생겨나 얽히고설킨 것이 또 심하였네. 모르겠으나 나의 설이 통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인가, 그대의 견해가 가려진 것이 있는 것인가? 반드시 여기에 하나는 있을 것이네. 지금 구절마다 답장을 하려고 하여도 잡다한 일로 여가가 없고, 비록 답장을 해도 또한 신뢰를 받을 리가 없으니, 어찌하고 어찌하겠는가? 우선 그 큰 요체 가운데 서로 합하지 않는 곳을 들어서 말하니, 여기에 합하면 합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라, 또 어찌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절로 하나의 물이네. 령(靈)은 실로 이(理)의 령이고 신(神) 또한 기(氣)의 신이며, 신은 실로 이의 묘(妙)이고 령 또한 이의 묘이네. 이른바 묘용을 신으로 여긴 것은 그 뜻이 대개 신은 이의 묘용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요, 곧장 신을 이로 여긴 것은 아니네. 그러므로 주자의 글에 신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긴 곳이 하나가 아니니, 예를 들면 후씨(侯氏)17)는 신명(神明)을 이(理)로 여기고 만정순(萬正淳)18)은 신명을 물(物)로 여겼는데, 주자는 만정순의 설을 따랐으니, 여기에서 볼 수 있네. 지금 그대는 신을 이로 여기고 명은 령으로 여기며, 령을 지반(地盤)으로 여기고 신을 주재(主宰)로 여기며, 령을 당체(當體)로 여기고 신을 본지(本旨)로 여기네. 또 말하기를 "깨닫는 것은 령이고 깨닫게 하는 것은 신(神)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령은 기가 발한 것이고 신은 이의 작용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은 류가 한둘이 아니라 매우 많네. 이와 같다면 령과 신은 머리를 나란히 하여 병립해서 각각 점거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돌고 돌아 나오는 것이 각각 시절이 있는 것인가? 기를 이로 인식하고 성을 작용으로 인식해서 명의와 위치가 어긋나지 않음이 없네. 신령하게 하는 것을 주재와 묘용으로 여기고 작용의 권한을 한결같이 령에 돌리면 반드시 석씨(釋氏)처럼 작용을 성으로 여긴 뒤에야 권한을 이에 돌린다고 하겠는가? 령의 전권을 신에 돌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숙장(宿將)이 병권을 담당하는 것을 싫어하여 병권을 총신(寵臣)에게 돌린 것과 같네. 고인이 임금에게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도에 대해 말하기를 "오직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쓰지 않아야 비로소 사람을 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19) 이가 스스로 쓰지 않아도 주재가 되는 데 해롭지 않은 것은 그 상이 또한 이와 같네. 남당(南塘)이 이른바 "천리를 밝히는 주재의 오묘함은 그 말이 작용에 빠져들기 쉽다."라고 한 것20)은 애초에 까닭이 있어서 발한 것임을 비로소 알았네. 뒤에 그대 편지에서 인용한 한주(寒洲)의 "심이 성과 다른 것은 정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21)은 앞에서 이른바 "성과 정을 합하여야 심이라는 이름이 있다."라는 것과 "심은 성정의 총명(總名)이다."라고 한 것과 동일한 권투(圈套)이니, 그대가 명백하고 공평하다고 인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네. 이미 이와 같이 인정해 놓고 또 의논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또 한주의 설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음을 아니, 자신의 설 또한 의논할 것이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는가? 지난날 송복재(宋復齋)22)의 문집을 교정할 때 문집 가운데 "정상(精爽)은 기의 령인데 심이 타고 있다."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이 말은 또한 어떠한가? 나의 뜻에는 좋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대는 반드시 매우 좋다고 여길 것이네. 세상의 유자들은 대부분 태극(太極)은 기를 띠고 있고, 오성(五性)은 기를 인하는 것이고, 명덕(明德)은 형이하(形而下)라고 여기니, 이것은 실로 이를 해치는 심한 것이네. 간혹 그 폐단을 보고 돌이킬 수 있기를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또 교왕과직을 면치 못하여 작용이 성이라는 설을 하기에 이르니, 이와 같은데 어찌 그 일변(一邊)이 나에게 복종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前說頗詳。自謂自此而庶有歸一之望。得來書。不惟不一。而更於枝上生枝。蔓上生蔓。紕繆轇轕。抑又甚焉。未知鄙說有未暢歟。賢見有所蔽歟。必居一於斯矣。今欲逐節奉答。而冗撓未暇。雖奉答而亦恐無見信之理。柰何奈何。姑擧其大要之不相合處言之。於此合則無不合矣。又何必煩爲哉。夫虛靈也神明也。自是一物靈固理之靈。神亦氣之神。神固理之妙。靈亦理之妙。所謂以妙用爲神者。其意蓋曰神是理之妙用云爾。非直以神爲理也。故朱書以神爲形而下者。非一。如侯氏以神明爲理。萬正淳以神明爲物。朱子從正淳之說。此可見矣。今賢以神爲理。以明爲靈。以靈爲地盤。以神爲主宰。以靈爲當體。以神爲本旨。又曰覺者靈也。覺之者神也。又曰靈者氣之發。神者理之用。如此類。不一而足。如此則靈與神。是齊頭竝立。各有占據耶。抑旋旋出來。各有時節耶。認氣爲理。認性爲用。而名義位置。無不乖戾矣。以靈之爲主宰妙用。而作用之權一歸於靈。則必如釋氏之作用爲性然後。可謂權歸於理乎。惡靈之專權於神。猶唐德宗惡宿將典兵。而歸柄於寵臣也。古人語人君任下之道曰。惟不自用。乃能用人。理之不自用。而不害爲主宰者。其象亦猶是也。始知南塘所謂明天理主宰之妙。則其言易涉於作用者。未始非有爲而發也。後惠書所引。寒洲心之異於性。以其兼情故也之語。與前所謂合性與情。有心之名。及心者性情之總名。同一圈奪。賢以明白公平許之。固矣。旣許之如此。而又以爲有可議何耶。且知寒洲之有可議。而安知已說之亦無可議耶。曩日校澄宋復齋集。集中有曰精爽。氣之靈也而心乘焉。此語亦何如耶。於鄙意有不好。而賢必以爲大好矣。世之儒。多以太極爲帶氣。五性爲因氣。明德爲形而下。此固害理之甚者。間或有見其敝而思有以反之者。又不免矯枉過直。至爲作用是性之說。如此而安望其一邊之服於我耶。 후씨(侯氏) 후중량(侯仲良)을 말한다. 자는 사성(師聖)ㆍ희성(希聖), 호는 형문(荊門)이다. 송나라 때 경학가로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호안국(胡安國)에게 배웠다. 저서로는 《논어설(論語說)》,《후자아언(侯子雅言)》등이 있다. 만정순(萬正淳) 만인걸(萬人傑)을 말한다. 자는 정순·정순(正純), 호는 지재(止齋)이다. 송(宋)나라 흥국군(興國軍) 대야(大冶) 사람이다. 처음에 육구령(陸九齡)에게 배우다가 후에 육구연(陸九淵)의 제자가 되었고, 그 후에 남강(南康)에 가서 주희(朱熹)를 만난 뒤로 주희의 제자가 되었다. 《宋元學案 卷69》 고인이……하였으니 육지(陸贄)가 당나라 덕종(德宗)에게 한 말인데, 《통감절요》권45〈당기(唐紀) 덕종황제 하(德宗皇帝下)〉에 나온다. 남당(南塘)이……것 《남당집(南塘集)》권34〈한수재 권 선생 행장(寒水齋權先生行狀)〉에 나오는 말이다. 남당은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호이다. 자는 덕소(德昭),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나자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洛論)에 맞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며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저서로는 《남당집》,《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역학답문(易學答問)》 등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한주(寒洲)의……말 《한주집(寒洲集)》권32〈심즉리설(心卽理說)〉에 나오는 말이다. 한주는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호이다. 자는 여뢰(汝雷),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숙부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배웠다. 저서로는 《한주집》이 있다. 송복재(宋復齋) 송진봉(宋鎭鳳, 1840~1898)을 말한다. 자는 치승(致承). 호는 사복재(思復齋),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김평묵(金平默)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사복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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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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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황경함에게 보냄 與黃景涵 신령설(神靈說)은 지난번 인편에 답하여 보냈는데 받아보았는가? 무릇 그대가 령(靈)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고 신(神)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여기니, 이 설은 아마 분개(分開)가 너무 과한 듯하네. 만약 신을 이(理)로 여기고 령을 이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령은 이로 말미암지 않고 절로 령한 것인가? 만약 령을 기(氣)로 여기고 신을 기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신은 기를 기다리지 않고 절로 신한 것인가? 또 령이 아니면 중리(衆理)를 갖춘 것은 어떤 물이며 만사에 응하는 것은 어떤 물인가? 나는 이 때문에 "신은 실로 이의 묘함이고 령 또한 이의 묘함인데, 단지 이 령은 문득 능히 중리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 다만 령은 체에 가깝고 신은 용에 가까우니, 령은 비교적 실하고 신은 비교적 허하다."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나의 설을 그렇게 여기지 않고 인하여 "정자와 주자가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은 설을 한 곳이 있었던가?……"라고 하니, 정자와 주자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대는 보지 못했던가? "허령 통철하여 만 가지 이가 모두 갖추어졌다."라고 한 것이 있고, 또 말하기를 "허령불매하여 중리(衆理)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기질(氣質)은 실한 것이고, 혼백(魂魄)은 반은 허하고 반은 실한 것이고, 귀신(鬼神)은 허의 분수가 많고 실의 분수가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모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대저 그대는 신(神)은 너무 무겁고 령(靈)은 너무 가볍다는 것을 보고서, 이(理)를 정의(情意)가 있고 물사(物事)를 조작함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령(靈)을 일개 구속되어 무용(無用)한 장물(長物)로 여기니, 이 생각이 이미 익숙하여 비록 주자의 설이 있어도 살피지 않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곽설(郛郭說)은 지난번 장흥(長興)의 한 사우(士友) 집에서 《주자어류》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소요부(邵堯夫)의 부곽설은 매우 좋으니, 만약 이 심(心)이 없다면 도리어 성(性)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있었으니, 이와 같은 곳의 서너 조목은 다 기억할 수 없네. 진북계(陳北溪)의 말에 "대개 부곽 가운데 허다한 인가의 연기는 문득 심중에 갖춘 이와 비슷하다.……"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한 곳도 부곽으로 주재를 설명한 곳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네. 무릇 부곽은 거친 부분의 설인데도 오히려 또 지난(持難)24)이 이와 같이 심하니, 더구나 신령의 설은 어떠하겠는가? 답답하고 답답하네. 또 보건대 《주자어류》가운데 "동하는 곳은 심(心)이고 동하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깨닫는 것은 심의 이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의 령이다."라는 두 조목이 있었는데, 이른바 "주재하는 자[主宰者]는 심이고, 주재하는 것[主宰底]은 성이다."라는 한 조목은 보지 못했네. 그러나 위의 두 조목으로 미루어보면 아래 한 조목의 설은 또한 해가 없을 듯하니, 어떻게 여기는가? 이 말은 또한 실로 신뢰를 받지 못할 줄 알겠으나 근래 본 《주자어류》의 설은 서로 보여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대략 이렇게 언급하였네. 神靈說。向便奉答。未知入照否。大抵賢以靈爲形而下。神爲形而上。此說恐分開太過矣。若以神爲理。而以靈爲非理。則靈是不由理而自靈者耶。若以靈爲氣。而以神爲非氣。則神是不待氣而自神者耶。且非靈則且衆理者何物。應萬事者何物。愚故曰。神固理之妙。靈亦理之妙。而只此靈也。便能具衆理應萬事。但靈近體神近用。靈較實。神較虛。賢以鄙說爲不然。而因曰程朱何嘗有如此說處云云。程朱如此說不一。而賢其未之見耶。有曰虛靈洞澈。萬理處備。又曰虛靈不昧。以具衆理應萬事。又曰氣質是實底。魂魄是半虛半實底。鬼神是虛分數多實分數少底。此言皆何謂耶。大抵賢看得神太重靈太輕。以理作有情意有造作物事。以靈作一箇局束無用之長物。此念已熟。雖有朱子說而莫之省。奈何奈何。郛郭說。向於長興一士友家。得見語類。其中有曰邵堯夫郛郭說。甚好。若無箇心。却將性在甚處云云。如此處三四條。不可殫記。至陳北溪語曰。蓋郛郭中許多人烟。便是心中所具之理相似云云。未見有一處以郛郭說主宰處。夫郛郭是粗底說。而猶且持難如是之甚。況神靈之說乎。可菀可菀。且看語類中有曰。動處是心。動底是性。又曰。所覺者心之理。能覺者氣之靈二條。而至於所謂主宰者心。主宰底性一條。則未之見矣。然以上二條推之。下一條說。亦似無害矣。如何如何。此言亦固知其不見信。而近見語類云云之說。有可相示者。故略此及之。 지난(持難) 어렵게 여겨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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