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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표 孺人李氏墓表 유인(孺人)의 성은 이씨(李氏)로,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의 후손이다. 대부(大父)의 휘는 직무(直茂)이고, 부친의 휘는 병희(秉禧)이다. 모친은 곡부 공씨(曲阜孔氏)로, 계로(啓魯)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에 능주(綾州)의 예암리(禮巖里)에서 유인을 낳았다.자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러웠으니,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18세에 사인(士人) 김권일(金權一)에게 시집왔다. 시부모님를 섬길 적에 공손하고 순종하는 예도를 다하였으며, 행동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오직 명하신 대로 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청(冬溫夏凊)의 예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평상시에 말수가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떠들썩한 소리는 규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사치품은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미신을 믿지 않았으며, 성품이 길쌈하는 데 부지런하여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선대의 기일이 다가오면 미리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였다. 내외 친족과 향리의 노소에 대해서까지 안부를 묻고 구휼하는 것을 때에 따라 행하고 폐하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절약하여 조금의 은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두루 베풀었다.일찍이 밤에 소를 잃은 적이 있는데 집안사람들이 찾고자 하니, 유인(孺人)이 말하기를 "도적이 막다른 길에 있게 되면 어찌 헤아리지 못할 화가 없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적에는 늘 어진 벗과 교유하게 하였고, 무릇 불량한 사람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말게 하였다. 일찍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정도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멀리하는 것은 집안의 자제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더구나 온갖 사설(邪說)이 난무하는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잘 지내며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게 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이다. 어찌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어느 날 몸져눕게 되자 네 아들을 불러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의 형제는 우애롭게 지내며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실추시키지 말라."라고 하였다. 막내아들을 가리키며 세 아들에게 말하기를 "부모가 없다고 하여 막내를 너무 아껴 가르치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으니, 때는 정미년(1907, 순종1) 12월 11일이었다. 향년 52세이다. 장사 지낸 뒤에 어은동(漁隱洞) 진사공(進士公) 묘소 아래 간좌(艮坐)에 이장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봉희(鳳熙), 학희(鶴熙), 용희(龍熙), 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용희는 나와 교유하였는데, 어느 날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평소 익숙하게 아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지금 어른께서 이웃에 산 지 오래되었으니, 저의 돌아가신 모친의 평소 행실에 대해서는 응당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돌아가선 모친을 위하여 훌륭한 글을 남길 붓을 잡을 이는 어른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나는 유인이 어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유장에 기록된 글에서 듣지 못했던 말을 더 알게 되었으니, 더욱 공경할 만하다. 다만 정신이 혼미하고 글이 거칠어, 글로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이는 용희가 마땅히 윤색하는 데 달려 있다. 孺人姓李氏籍公州。恭肅公諱明德后。大父諱直茂。父諱秉禧。妣曲阜孔氏啓魯女。哲宗丙辰。生孺人于綾之禮。巖里資質溫仁柔嘉。有女士風。十八歸于士人金權一。事舅姑。盡恭順之禮。動作進退。惟命是聽。晨昏定省。冬夏溫淸。必誠必謹。未有闕儀。平居。穻言語寡喜怒。喧囂之聲。不出於閨房。奢麗之物。不入於門庭。不用巫覡之術。性勤紡績。未嘗暇逸。値先世忌諱之辰。宿齋戒致潔。至於族戚內外。鄰里老幼。問訊賙恤。隨時不替。遇饑歲。縮衣節食。而升斗之惠。遍於貧乏。嘗夜失牛。家人欲追之。孺人曰。賊當窮途。安知無不測之禍乎。令止之。敎諸子。常令從賢士友遊。凡浮浪之人。紛競之地。勿令近之。嘗戎之曰。守正遠邪。此是人家子弟最初路頭。況在末世百邪交作之日乎。切宜愼之也。又曰。孝於父母。和於兄弟。睦於族戚。信於朋友。勤於學問。篤於行治。此是人道之當然。安有去人道而可以爲人者乎。一日屬疾。招四子而戒之曰。汝兄弟極其友愛。無墜世業也。指季兒而語三子曰。勿以無父母而愛踰於敎也。言訖而終。時丁未十二月十一日也。享年五十二。葬而移窆于漁隱洞進士公墓下艮坐。生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孫以下不錄。龍熙從余遊者。一日抱遺狀。示余曰。凡狀人之行。必平素相熟人乃可。令丈人與相接隣。不爲不久。則吾先妣平日之行。想應聞之。然則爲吾先妣。把立言之筆者。非丈人伊誰。嗚呼。余聞孺人之賢。盖巳久矣。而今於狀辭。益聞其所未聞。尤可敬也。但神昏筆澁。辭不能達其意。此則在龍熙之所宜修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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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암 안공 묘표 淑庵安公墓表 영평(永平) 욱곡면(郁谷面) 반암(盤巖)의 서쪽 기슭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이는 숙암(淑庵) 안공(安公)이 편히 잠든 곳이다. 공의 휘는 후걸(厚傑), 자는 후평(厚平)이다. 안씨(安氏)는 계보가 순흥(順興)에서 나왔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현조(顯祖)이다. 우뚝한 공훈과 높은 관작이 대대로 찬란하였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이 개국할 때 여러 번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으며, 서원(瑞原)의 별장에 거처하다 생을 마쳤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에 우거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는 휘 몽성(夢省)이고, 부친은 휘 경룡(競龍)이다. 모친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효종(孝宗) 경인년(1650, 효종1)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품이 영특하여 범상한 사람과 달랐다. 효성과 우애, 문학으로 젊어서 이름이 났다.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선생이 많은 기대를 하여 손수 "안자와 맹자는 봄처럼 온화하고 가을처럼 준엄하였다.[顔子孟子春生秋殺]"라는 여덟 자의 큰 글씨를 써 주었다. 또 문답을 주고받은 약간의 편지가 있다. 동문인 권 수암(權遂庵), 김 농암(金農巖), 이 한포재(李寒圃齊) 등 여러 명망가와 도의로 사귀어 교유하고 강론하여 노년에도 폐하지 않았다. 선생이 제주(濟州)로 귀양 갈 적에 박손재 광일(朴遜齋光一), 박안촌 광후(朴安村光後) 제공과 더불어 전별하였는데 강진(康津)의 만덕사(晩德寺)에 이르는 여러 날 동안 배종(陪從)하였고, 선생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본 뒤에 돌아왔다. 이로부터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교유를 끊고, 오직 시서(詩書)와 서책을 보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다.숙종(肅宗) 경자년(1720, 숙종46) 11월 24일에 별세하였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선무원종공신(宣務原從功臣) 정일생(鄭鎰生)의 따님이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장자는 사립(士立), 차자는 두칠(斗七), 두생(斗生)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먼 시골의 일개 포의(布衣)로 한적한 곳에서 은거하였는데 당시 석덕(碩德), 홍유(鴻儒), 명공(名公), 거경(鉅卿)이 서로 추중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창한 것이 마치 훈지(壎箎)와 같았으니, 이 어찌 취할 것이 없는데 그러하였겠는가.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시대와 어긋나 산림에 은거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평소 뜻과 사업을 당시에 시험해 보지 못했으니,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 뒤에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遺風)과 남겨진 훌륭한 말씀이 막혀서 드러나지 못하고 전하는 실제의 자취도 육정(六丁)67)이 가져감을 면치 못하여 보존된 것이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니, 더욱 한스러워할 만하다. 8세손 상익(相翊)과 동식(東植)이 유적(遺蹟)을 가지고 와서 묘표의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옛 감회에 잠겨서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永平郁谷面盤巖之西麓。有崇四尺而坐酉向卯者。是淑庵安公妥藏之所也。公諱厚傑。字厚平。安氏系出順興。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顯祖也。嵬勳達爵。世代煒燁。至諱瑗。我朝革命之際。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寓居南平縣。子孫仍家焉。卽公之曾祖也。祖諱夢省。考諱競龍。妣星山李氏某女。以孝宗庚寅生。公天稟潁悟。異於凡常。孝友文學。早歲著稱。師事尤庵宋先生。先生期詡甚重。手書顔子孟子春生秋殺八大字以贈之。又有答問往復若干篇。與同門人權遂庵金農巖李寒圃齋諸名勝。爲道義交。遊從講磨。老而不替。及先生謫于濟州也。與朴遜齋光一朴安村光後諸公。餞至康津之晩德寺。累日陪從。見先生渡海而後歸。自是杜門斂迹。絶遊息交。惟以詩書文籍爲餘日計。肅宗庚子十一月二十四日考終。官同中樞。配河東鄭氏宣務原從功臣鎰生女。墓合祔。擧三男。長士立。次斗七斗生。孫以下不盡錄。鳴呼。公以遐鄕一布衣。隱於閒寂之濱。而當時之碩德鴻儒名公鉅卿。互相推重。往復酬唱。如壎如箎。此豈無所取而然哉。於此而公之爲公。可以槪矣。然事與時違。沈晦林樊。使平日志業。未見有所試於時。識者之恨爲何如耶。身後數百年。雲仍零替。使遺韻餘馥。鬱而不暢。而所傳實蹟。亦不免爲六丁收去。存者不過十之一。尢可恨也。八世孫相翊東植。奉遺蹟。請爲表墓之文。余以曠感攸激。不忍終辭云爾。 육정(六丁) 도교(道敎)의 이른바 정묘(丁卯)ㆍ정사(丁巳)ㆍ정미(丁未)ㆍ정유(丁酉)ㆍ정해(丁亥)ㆍ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도사(道士)의 경우 부록(符籙)을 사용하여 이들을 불러서 부릴 수가 있는데, 이 귀신을 잘 부리면 먼 데 있는 물건도 가져오게 할 수 있고 일의 길흉도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 《後漢書 卷50 梁節王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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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문씨 묘표 孺人文氏墓表 유인(孺人)의 성은 문씨(文氏),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중대에 휘 자수(自修), 호 면수재(勉修齋)란 분이 계셨다. 고조는 휘 복영(福榮)이고, 증조는 휘 종진(宗鎭)이며, 조부는 휘 영학(永學)이다. 부친은 휘 필휴(弼休)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시오(金時五)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8월 20일에 유인(孺人)을 능주(綾州)의 화곡리(花谷里) 사제에서 낳았다.유인(孺人)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단정하고 자상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소학(小學)》, 《열녀전(列女傳)》을 읽고 대략 대의를 깨달았다. 나이 18세에 사인(士人) 오장섭(吳長燮)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를 섬길 적에 매우 조심하였으니, 닭이 울 때 침소에서 문안하고 물 흐르듯 응대하였다. 시집올 때 치장(治裝)하여 보낸 옷과 기물이 매우 많았는데, 수시로 부족할 때마다 시어머니에게 바치고 자신이 입은 것이라곤 다만 시집올 때 입었고 이젠 다 해진 옷뿐이었다. 치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려하게 꾸미는 습속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자며 길쌈하는 것을 오직 부지런히 하였다.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집에서 술을 빚었는데, 유인은 반드시 별도로 간수 해 두었다가 적절한 때 올렸고 일찍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동서지간에 서로 아껴서 한솥밥을 먹은 지 10년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분가할 적에 재산이나 자질구레한 용품은 있든 없든 고루 나누었다. 종족과 이웃 사람을 대할 적에는 각각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친익척의 상사와 혼사에 부족하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반드시 시부모에게 여쭌 뒤에 적절하게 구휼해 주었다. 시부모가 병이 들자 남은 일을 제쳐두고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너무나 슬퍼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였고, 온갖 의절(儀節)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삼가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선조를 추모하는 예절은 매우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여 나물 등 온갖 음식을 미리 마련해 두어 부족한 것이 있지 않았다.신축년(1901, 고종38) 겨울에 병들어 낫지 않자, 하루는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위로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계시는데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였으니 사람을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며느리를 불러 연로하신 시어머님을 잘 봉양하라고 부탁하였다. 말을 마치고 별세하였으니, 때는 11월 24일이다. 단양면(丹陽面) 회활리(會活里) 안산(案山) 도리봉(道理峯) 정좌(丁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동(在東), 재남(在南)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용휴(李龍休), 조갑성(曺甲成), 정돈철(鄭燉哲)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딸은 어리다. 재동(在東)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용호(龍鎬), 봉호(鳳鎬), 인호(麟鎬)이다. 내가 가까운 고을에 살아 유인이 어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 재동이 글을 지어 달라고 간청한 것에 대해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孺人姓文氏。本南平。中系有諱自修號勉修齋。高祖諱福榮。曾祖諱宗鎭。祖諱永學。考諱弼休。妣淸道金氏時五女。哲宗己未八月二十日。生孺人于綾之花谷里第。溫仁端詳。幼有至行。讀小學列女傳。略曉大義。年十八。歸于士人吳長燮。事舅姑甚謹。雞鳴問寢。應對如流。于歸時。裳送衣物甚多。而隨時隨乏。獻之於姑。自身所着。只是慶敞而巳。不屑膏沐之飾。不喜華靡之習。夙興夜寐紡績惟勤。其舅愛酒。家有釀。孺人必別蓄而藏之。待時以進。未嘗乏絶。焍姒相愛。共爨十年。庭無間言。及其析箸。財産什物。有無共之。待宗族鄰里。各得其心。有喪戚昏姻。貧乏災患。必稟於舅姑。隨時周恤。舅姑有疾。捨置餘事。專力調養。其遭故也。致哀過禮。凡百儀節。必誠必愼。俾無遺憾。至於奉先追遠之節。豊潔兩至。蔬菜几羞。宿戒預蓄。未有見乏。辛丑冬。屬疾彌留一日曰。我死必矣。上有老姑。未克終養。人理缺矣。因呼子婦。託以善養老姑。言訖而終。時十一月二十四日也。葬丹陽面會活里案山道理峯丁坐原。擧二男四女。男在東在南。女適光山李龍休曺甲成鄭燉哲次幼。在東生三男。曰龍鎬鳳鎬麟鎬。余在鄕隣之近。聞孺人之賢久矣。今於在東一言之懇。有不忍牢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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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둔재 안공 묘표 孝子遯齋安公墓表 공의 성은 안씨(安氏), 휘는 달득(達得), 자는 내성(乃成), 호는 둔재(遯齋)로, 순흥(順興) 사람이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 초기에 형조 판서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으로 이사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증조는 휘 수린(壽麟), 조부는 휘 영(泳)이다. 부친은 휘가 종복(宗福), 호가 죽림재(竹林齋)이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채경(金彩敬)의 따님인데, 정종(正宗) 정사년(1797, 정조21)에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효성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왕왕 지극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일찍이 어버이가 병을 앓아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고 이어서 집 정원에서 신약(神藥)을 얻어 이를 달여 올리니 과연 차도가 있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매우 심하였기에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낸 다음 묘소의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배곡(拜哭)하되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나무를 베고 돌을 파내어 그가 왕래하는 길을 닦아 주었다.공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포부가 원대하고 문사는 성대한 명성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다.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 가운데 그와 교유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만년에 봉악산(鳳嶽山) 아래에 초당을 짓고 한가롭게 노닐며 노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기둥에 바람이 불고 창엔 달빛 비치며, 수죽(水竹)이 뜰에 가득하여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며 유연(悠然)히 속진(俗塵)을 벗어난 의표가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갑술년(1874, 고종11) 1월 2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죽곡면(竹谷面) 팔룡동(八龍洞) 봉악산(鳳嶽山) 동쪽 산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도경(朴道敬)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는데, 장자는 평일(平一), 차자는 평길(平吉)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효라는 것은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니, 큰 근본이 확립되면 만인에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다. 공은 효순(孝順)한 덕에 보은을 받아 장수하는 복을 받았는데, 안으로는 자제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종친들이 그 은혜에 감동하였으며, 밖으로는 벗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고 향리 사람들이 그 기풍을 칭송하였으니, 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후손이 그 뜻을 계승하기를 생각하고 선조를 더럽히지 않는 터전으로 삼는 것 또한 어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원하건대 안씨(安氏)는 힘쓸지어다.증손 동식(東稙)이 나에게 묘도(墓道)에 기록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삼가 전하는 유적(遺蹟)에 근거하여 글을 첨삭하여 다듬었을 따름이다. 公姓安氏。諱達得。字乃成。號遯齋。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中系顯祖也。至諱瑗。當我朝初。以刑曹判書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移寓于南平縣。子孫因居焉。曾祖諱壽麟。祖諱泳。考諱宗福號竹林齋。贈左承旨。妣光山金氏彩敬女。以正宗丁巳生公。公性孝根天。自幼往往以至行聞於人。嘗有親癠。久而彌留一夕感異夢因得神藥於家園供而進之果見差愈。執喪哀毁過甚。見者釀涕。及葬。廬于墓側。晨昏拜哭。三年如一日。里人感之。爲之伐木鑿石。以修其來往之路。公涉獵百家。抱負贍富。文詞聲華。擅望於時。一時知名之士。無不與之結交。晩營邁軸於鳳獄山下。爲養閒終老計。風楹月戶。水竹滿庭。婆娑嘯詠。悠然有出塵之標。壽陞同中樞。甲戌正月二日卒。葬竹谷面八龍洞鳳嶽山東麓庚坐原。配密陽朴氏道敬女。生二男。長平一。次平吉。孫以下不盡錄。嗚呼。孝者百行之本。萬善之長。大本旣立。萬目可推。公服孝順之德。膺難老之福。內而子弟遵其敎。宗族感其恩。外而朋友服其義。鄕里頌其風。此豈無所自而然哉。然則今日後嗣之所以思述其志而爲無忝之地者。亦豈有以外於此者乎。願安氏勉之哉。曾孫東稙。謁余文以表墓道。余謹据所傳遺蹟爲修潤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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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행130) 【봉흠】에게 답함 答白景行【奉欽】 한 모퉁이의 진귀한 편지가 3년 동안 격조했던 오랜 뒤에 나왔으니, 그 위로되고 시원한 마음 과연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경서를 공부하는 기거가 시절 따라 평안한 줄 알았음에랴. 실로 두 손 모아 축원하던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노쇠한 질병으로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이치이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옛날부터 먹었던 옛 학업에 대한 마음은 성취한 것도 없는데 엄자(崦嵫)131)의 광경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으니, 단지 인생은 되돌리기 어려운 한이 절실할 뿐이네. 보내온 편지에서 나에 대해 일컬은 것은 이것이 어찌 알맞게 비긴 말이라 하겠는가? 매우 부끄럽고 송구하여 감당할 수 없네. 보여준 〈착정동금조(鑿井洞琴操)〉132)는 표격(標格)이 고매(高邁)하고 사운(詞韻)이 청절(淸絶)하여 읊조린 뒤에 마치 천년 위에서 경착(耕鑿) 호호(皥皥)의 기상133)을 보는 것 같았네. 그렇다면 오늘 주인이 요순의 도를 즐기면서 만족하여 욕심이 없는 것을 대략 상상할 수 있겠네. 운자에 따라 지어 지성스러운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답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필력이 졸렬하고 의사가 껄끄러워 묘사해 낼 수 없고, 단지 한 수 절구를 지어 대신하네. 문채가 없음이 심하니, 바라건대 보고나서 한 번 웃으며 적료함을 깨뜨리는 자료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착정산 중의 우물 파는 노인 鑿井山中鑿井老지금 우물 몇 길이나 팠는가 如今鑿到幾尋深끊임없이 흐르는 물 솟아나는 것 볼 터이니 會看活水源源出마른 곳 적실 한 잔의 물 따라주길 사양 말게 霑涸休辭一勺斟 一角珍緘。出於三載阻違之久。其爲慰豁。果何如哉。矧審經體起居。對時安謐者乎。實協拱祝。義林衰替病痼。日就澌頓。理也奈何。但宿心舊業。未有所就而崦嵫光景。遽至於此。只切人生難追之恨而已。來喩所以稱道者。此豈着題可擬之語哉。愧悚萬萬。不敢承當。俯示鑿井洞琴操。標格高邁。詞韻淸絶。諷詠以還。如見耕鑿皥皥之象於千載之上。然則今日主人所以樂堯舜之道而囂囂焉者。槩可想矣。切欲追步。以答勤意之萬一。而筆拙意澁。摸寫不得。只構得一絶詩以代之。不文甚矣。幸加視至。以爲一笑破寂之資如何。鑿井山中鑿井老。如今鑿到幾尋深。會看活水源源出。霑涸休辭一勺斟。 백경행(白景行) 백봉흠(白奉欽, 1859~1909)을 말한다. 자는 경행, 호는 명강(明岡),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저서로는 《명강유고(明岡遺稿)》가 있다. 엄자(崦嵫) 엄자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해가 져서 이 산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만년 또는 노년의 비유로 쓰인다. 착정동금조(鑿井洞琴操) 《명강유고》권1에 실려 있다. 경착(耕鑿) 호호(皥皥)의 기상 태평성대의 기상을 말한다. 경착은 밭 갈고 우물 판다는 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뜻이다. 요 임금 때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내 우물 파서 마시고 내 밭을 갈아서 먹을 뿐이니, 제왕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호호는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덕으로 왕업을 이룬 임금의 백성은 태평하다.〔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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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시집》 서문 除夜詩集序 아, 이 책은 고(故) 봉남 처사(鳳南處士) 홍공(洪公)이 종가(宗家)에서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며 느낀 감회를 읊고, 그 자제와 조카, 손자들이 이어 화답한 것이다.무릇 섣달그믐날 밤은 묵은해와 새해가 서로 갈마들어 사람의 마음에 슬픔과 기쁨이 쉽게 느껴지는 때인데, 공은 기애(耆艾)150)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 편안히 앉아 자손들이 장수를 칭송하는 즐거움을 누려도 안 될 것이 없지만, 반드시 종가(宗家)에서 밤을 지새우며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다른 날에 비해 배가 되어 마치 선조의 영령이 와 계시는 것처럼 느끼는 마음의 정성을 부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공이 선조를 모셨으니, 자제된 자들이 어찌 부형(父兄)을 모시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서로 선창하고 번갈아 화답하는 것이 화기애애하고 질서정연하였다. 옛사람의 이른바 '즐거운 일[樂事]'이나 '정겨운 대화[情話]'151)라는 것은 단지 평범하고 일시적인 사이의 일일 뿐이니, 어찌 여기에 견줄 수 있겠는가.1년이 지나 2년이 되고, 10년이 지나 20년이 되도록 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이러한 관례를 좇아 따르며 바꾸지 않았으니, 그 가문의 법도와 규범을 이로 미루어 대략 알 수 있다. 홍씨(洪氏)에게 앞으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이니, 삼가 이 서문을 써서 책 앞에 뜻을 보인다. 嗚呼。此故鳳南處士洪公。守歲於宗家。有感而作。而其子姪孫所賡和者也。夫歲除。是新舊遞代之交。而人情悲歡易感之時也。公以耆艾之年。便坐私室。以享子孫稱壽之樂。未爲不可。而必於宗家者。豈非慕先之心。有倍他日。而以寓如存之誠耶。公旣侍先祖。則爲子弟者。獨不侍父兄耶。此所以更唱迭和。而和氣融融。等威秩秩。古人所謂樂事情話。特尋常一時間耳。曷足以況此哉。一年而二年。十年而二十年。至公沒之久而遵循不替。其家模門規。推此可槪。洪氏其將有後乎。謹書此以見志於篇端云爾。 기애(耆艾) 노인을 지칭하는 말로, 60세를 기(耆)라 하고, 50세를 애(艾)라 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서 "50을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을 기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즐거운……대화 '즐거운 일[樂事]'는 이백(李白)이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동산에 모여 천륜의 즐거운 일을 편다.[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 듯하고, '정겨운 대화[情話]'는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친척들과의 정겨운 대화를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해소한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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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사우간독》 서문 希庵師友簡牘序 나의 벗 양군 여정(梁君汝正)이 사우(師友)와 평소 주고받았던 서찰을 편집해서 '사우간독(師友簡牘)이라 이름을 짓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외로이 떨어진 곳에서 홀로 공부하는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주고받은 서찰에서 바로잡아 경계해준 말뿐이고, 그 말을 또 아침저녁으로 보며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책으로 엮어서 열람하고 고찰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우리 그대가 서문을 써 주게나."하였다.아, 내가 젊었을 때에는 자못 스승을 섬기며 벗들을 따라다녔는데, 어느덧 태산은 기울어 무너지고,146) 벗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나도 또한 세상의 변고에 곤란을 겪으며 첩첩산중의 궁벽한 곳으로 물러나 칩거하게 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생각하면 까마득하게 선천(先天)의 그림자처럼 무(無)의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지만, 때때로 옛 종이 뭉치 속에서 간혹 당시에 주고받았던 편지를 발견하고 시험 삼아 읽어보면 그 십 년 세월의 면모와 천 리 머나먼 길의 종적이 모두 뚜렷하게 떠오르며 마치 같은 방에서 자리를 함께하는 듯하였다. 또한 서로 기약하며 힘써 노력했던 뜻이 일찍이 이와 같았는데, 스스로 오늘날 성취한 바를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며 심장과 간담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아 매번 차례대로 편집하여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했지만, 아득히 세월만 흘려보내며 이루지 못한 지도 10여 년이 되어 간다.지금 보건대 여정이 뜻을 세움은 나보다 늦었으나 성취는 나보다 앞섰으니, 태만한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의 차이가 이처럼 현격한 것인가? 전수받아 익히는 일에 태만하지 않고 경계하여 바로잡아준 것을 잊지 않았으니, 또한 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만약 이 간독을 스스로 문집을 만들어서 남들에게 알려지는 데에 급급해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여정은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하여 한창 나아가기만 하고 그치지 않으니, 어찌 이 간독을 얻은 것에 스스로 만족하여 대뜸 너무 이른 계책으로 삼겠는가. 행위는 같되 마음은 다름을 또한 여기에서 변별해야 한다. 余友梁君汝正。編其師友平日所與往復之書。名以師友簡牘走書於余曰獨學孤居所賴惟是往復規警之語。而其語又不可不朝夕觀省。故編爲卷帙。以便考閱。願吾子爲之序也。嗚呼。余於小少。頗事從逐。旣而泰山傾頹。朋知零散。余亦困於世故。退蟄於窮山萬疊之中。回念過境。茫然若先天影子。銷散於有無之中。而時於舊紙堆。或値當日往復。試以讀之。其十年面貌。千里蹤跡。皆渙然若同堂合席。且相期勉勉之意。曾已如此。而自顧今日所就。不覺骨寒毛聳。而心膽墮地。每欲次弟編輯。以爲警省之資。而悠悠未就者。十有餘年。今見汝正志在我後。而成在我先。人之勤慢不相及。若是其懸耶。其傳習之不怠。規戒之不忘。亦可以見其一端矣。若以此謂自作文集。急知於人。則非其心也。汝正年富力强。方進而不已。豈得此自足。遽爲太早計者耶。同行異情。亦當於此辨之。 태산은……무너지고 스승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대들보가 쓰러지겠구나. 철인이 시들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병이 나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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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모선록》 서문 曺氏慕先錄序 스스로 생각건대, 서계(書契)147) 이후로 예전의 말과 지나간 행적들을 모두 갖추어 기록하지 않음이 없게 되면서 서적을 겹겹이 쌓아 놓으며 그 많음을 싫어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읊고 외우면서 그 익숙함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현인을 사모하는 마음은 타고난 본성에서 나와 그치지 않음이 이와 같다.아, 옛날의 현인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선조(先祖)에게 법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칭송하며 기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공류(公劉)의 풍화(風化)에 대한 기술148)이 자기의 집에서 나오고, 공백(龔伯)의 술동이나 대접에 새겨진 명(銘)149)이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다면 작게는 보존하여 한 집안의 계책과 교훈으로 삼고, 크게는 전하여 한 시대의 모범과 법식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효자와 어진 사람의 마음이다.나의 벗 조군 석준(曺君錫俊)이 선대의 사실을 기록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조씨(曺氏)는 충의(忠義)의 큰 절개와 효우(孝友)의 지극한 행실로 혹 나라에서 빛나기도 하고, 혹 고을에서 드러나기도 한 것이 전후로 수백 년이 되었지만, 유고(遺稿)가 흩어져 없어지고,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어 자손들이 세월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사라지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유실된 것들을 수습하여 세고(世稿)를 편집해 만들고서 길이 전할 계책으로 삼았다.아, 자손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근본을 사모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과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이어 나갈 생각이 어찌 성대하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로 인하여 더욱 힘써서 자신을 맑게 하여 안으로는 가족을 보호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며, 밖으로는 세상을 일깨우고 세속에 모범이 된다면, 이 책이 어찌 한 가문의 건연(巾衍 서적을 넣어두는 상자) 속에서 전해지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自惟書契以來。凡前言往行。無不備錄。連編累牘而不厭其多。朝吟暮誦而不厭其熟。蓋慕賢之心。出於秉彛而有不可已者如此。嗚呼。在先賢猶然。況在先祖而有可以爲法焉。則所欲稱述者。其心爲何如哉。公劉風化之述。出於其家。龔伯尊敦之銘。不在他人。小則存以爲一家之謨訓。大則傳以爲一世之矜式。此孝子仁人之心也。余友曺君錫俊。持其先世事實一冊。請余弁之。竊惟曺氏以忠義大節。孝友至行。或光于王國。或著于鄕里者。前後數百年矣。遺稿散逸。存者無幾。子孫懼其愈久而愈泯。收拾遺漏。編成世稿。以爲不朽計。嗚呼。爲子孫而讀此書。其懷本追遠之情。繼志述事之意。豈不油然而生乎。因此加勉以淑其身。內而保族宜家。外而牖世範俗。則此書豈止爲一門巾衍之傳而已哉。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문자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공류(公劉)의……기술 공류는 후직(后稷)의 증손으로, 하(夏) 나라의 박해를 피해 빈(豳)으로 이주한 뒤에 후직의 유업을 닦아 농사에 힘쓰며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훗날 주(周)나라가 일어날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주나라가 창업된 뒤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할 때에 공류의 풍화(風化)를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 편에 기록하여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였다. 여기에서는 세속의 교화에 공헌한 선조의 기록을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공백(龔伯)의……명(銘) 원문의 "공백준대지명(龔伯尊敦之銘)"을 국역한 것으로, 선조가 사용하던 그릇이나 물건에 새겨 놓은 글을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참고로 원문의 "공백준대(龔伯尊敦)"는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의 주에 "옛 기물에 이르기를. '?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감히 아름다운 천자의 명을 대양(對揚)하여 짐의 황고(皇考)인 공백(龔伯)의 술동이와 대접을 받드노니, ?은 미수(眉壽)를 누려 만수무강하게 하소서' 하였다.[古器物銘云 : '?拜稽首, 敢對揚天子休命, 用作朕皇考龔伯尊敦, ?其眉壽, 萬年無疆.']"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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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헌기 德軒記 호에는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 있는데, 서산(西山)이나 북산(北山) 따위가 이것이고, 그 덕을 표시한 것이 있는데, 경재(敬齋)나 의재(義齋) 따위가 이것이다. 능주 서쪽에 있는 천태산(天台山)는 남쪽 지방의 명승지로, 천태산(天台山)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구불구불 이어져 오다 10여 리 쯤 되는 곳에 이르러 고개를 돌린 채 단정히 선 모습으로 우뚝 수려하게 솟구쳐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덕봉(德峯)이라 한다.내 벗 박공 우서(朴公禹瑞)의 집이 그 아래에 있는데, 그 집을 덕헌(德軒)이라 명명하였으니, 대체로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성문(聖門)의 요결(要訣)이 옛 문헌에 드러난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덕' 한 글자처럼 요약되고 극진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비록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덕을 표시한 것도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공은 몸가짐이 조심스러웠고 세상에 쓰일 재주를 품었으면서도 이 세상에 없는 듯 자취를 감춘 채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으니, 덕을 몸에 쌓음이 깊었다.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시례(詩禮)64)를 익히고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자손들이 성대하게 번창하였으니, 덕을 집안에 폄이 두터웠다. 덕을 쌓고 폄이 이미 깊고 두터웠음에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서 항상 바라보며 경계하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이 비록 수석(水石)의 아름다운 이름에 있더라도 감히 태만하지 않았으니, 이곳에 반드시 덕봉의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모여서 장차 후세에 도와 발현시킬 것을 또한 헤아릴 수 있겠는가.백세 이후에 이 산을 보고서 공의 거처를 알 것이고, 이 산의 모습을 보고서 공이 체득한 덕을 알 것이니, 공은 산이 아니라고 기필하지 못할 것이고, 산 또한 공이 아니라고 기필하지 못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조그만 언덕이나 개밋둑만하니, 비록 바람결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탱하고자 하더라도 높은 산 아래에서는 단지 산이 되기 어렵다는 것만 알게 될 뿐이다. 號有識其居者。西山北山之類是已。有識其德者。敬齋義齋之類是已。綾之西有天台山。盖南方勝區也。山一支北行。透迤至十許里。而有回頭疑立。挺然尖秀者曰德峯。余友朴公禹瑞家其下。名其軒曰德。盖識其居也。然聖門要訣。著於往牒者。不爲不多。而未有若德之一字。爲約而盡也。然則雖識其居。而所以識其德者。又未嘗不在其中。公持身謹勅。才抱需世。而泯然斂迹。不少槩見。則德之畜於身者深矣。孝友詩禮。箕裘承襲。而螽斯椒聊。蔚然茁長。則德之種於家者厚矣。蓄之種之旣深且厚。而猶不自足。有以常目警省者。雖在水石佳名。而不敢慢焉。此必德峯之靈爲之降聚。而將以助發於來許者。又可量乎。百世之下。見此山而識公之居。見此山之容而識公之體德。則公未必非山。而山亦未必非公也。如余培塿邱垤也。雖欲依附風際。以自友爲。而高山之下。秖見其難爲山也。 시례(詩禮) 집안에서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아들 이(鯉)에게 시(詩)와 예(禮)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훈계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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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기 澗齋記 죽수(竹樹) 남쪽 한 고을에 연화봉(蓮華峯)이 있고, 연화봉 아래로 청량한 시냇물 한 줄기가 넘실넘실 굽이져 흐르는데, 그 깊이가 옷자락을 걷어 올려야 건널 수 있는 정도였다. 시냇가에 울타리가 쭉 늘어서 있는 마을을 간리(澗里)라 하고, 마을 곁에 맑고 깨끗한 한 가옥을 간재(澗齋)라 하는데, 나의 벗 이 사문(李斯文) 광빈보(光彬甫)가 그 주인이다.하루는 그 집을 찾아갔다가 인하여 무슨 뜻으로 집을 '간(澗)'이라 한 것이지 물으니, 사문이 웃으며 말하기를, "시냇가에 있는 마을을 간리라 하는데, 간리에 있는 집만 유독 간재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네. 무릇 이름을 유독 다르게 짓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네. 지금 시냇물이 천태산(天台山)에서 수십 리를 길게 뻗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고, 이 시냇물을 끼고 있는 집이 수백 가옥이나 되는데, 모두 간재라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사문의 은미한 뜻이 있을 것이네.아, 세상에 나가고 은둔하는 것과 도를 행하고 감추는 것은 사군자가 몸을 세우는 큰 절목이네. 한 가지 예절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달갑게 여기지 않고, 한 가지 일이라도 합당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데, 하물며 온 천지가 혼탁하여 세상이 도와 어긋나는 때임에랴.사문은 정연(挺然)히 스스로 분발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뜻을 지킨 채 홀로 자고 깨어 말하고 지내지만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면서 장차 옛사람이 은둔하며 지냈던[考槃] 시내65)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연화봉의 시내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고, 고반의 시내는 군만이 홀로 대하는 것이네.《주역》 〈규괘(睽卦)〉의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군자는 이를 본받아 함께하고 달리한다.' 하였는데, 정자가 이를 주해하여 말하기를, '크게 함께할 수 없는 자는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이고, 홀로 달리할 수 없는 자는 세속을 따라 나쁜 것을 익히는 사람이다.' 하였네. 요점은 함께하면서도 달리할 수 있는데 있으니, 이것이 여러 사람이 함께 대하는 연화봉의 시내가 군만이 홀로 대하는 고반의 시내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하니, 사문이 말없이 오랫동안 있다가 인하여 〈고반〉시 3장을 노래하고 시냇가에서 나를 전송하였다. 竹樹南一坊有蓮華峯。峯下一條清澗。透迤渟滀。其深可揭。澗之上。藩落櫛比曰澗里。里之畔。一字蕭灑曰澗齋。余友李斯文光彬甫。其主人也。一日造其齋。因問齋之爲澗何義。斯文笑曰。里之在澗上者爲澗里。則齋之在澗里者。獨不爲澗齋乎。余曰否。夫名所獨獨。所以别之也。今澗自天台。延流十數里。夾澗而家者。不下數百。皆可爲澗齋乎。必有斯文微意之存焉。噫。出處行藏。士君子立身大節目。一禮之未備。有所不屑。一事之不合。有所不就。況在九有渾渾世與道違之日乎。斯文挺然自拔。確然自守。而獨寤寐言。永矢不諼。將有慕於古人考槃之澗。然則蓮華之澗。衆所同也。考槃之澗君所獨也。易睽之象曰。君子以同以異。程子解之曰。不能大同者。亂常拂理之人也。不能獨異者。循俗習非之人也。要在同而能異。此非澗之所以爲澗乎。斯文默然久之。因歌考槃詩三章。送我於澗之濱焉。 홀로……시내 《시경》 〈고반(考槃)〉의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어 말하지만,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弗告.]"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고반은 고사(高士)가 은둔해 지내는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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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한성부 판관 김공 묘지명 通訓大夫漢城府判官金公墓誌銘 공의 휘는 성준(成俊), 자는 시응(時應), 호는 금계(錦溪)이다. 김씨(金氏)의 본관은 광산(光山)인데, 신라(新羅) 왕자 휘 흥광(興光)이 지파(支派)의 시조가 된다. 이로부터 12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모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휘 류(流)에 이르러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덕룡(德龍)은 대사헌을 지냈으며 휘 신좌(信佐)는 공조 판서를 지냈고, 효충(孝忠)은 관직이 홍문관 응교를 지냈는데, 모두 본조에 들어온 이후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치섬(致銛)인데, 진사이고, 증조는 휘 철(轍)인데, 생원이다. 조부는 휘 정언(廷彦)인데, 생원이고, 부친은 휘 홍(洪)인데, 첨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생원 이학(李鶴)의 따님이다. 명종 임자년(1552, 명종7)에 나주(羅州) 장원도(壯元洞)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성격이 조용하고 풍도가 고결하여 많은 사람 속에서 운학(雲鶴)처럼 무리와 견주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물건 파는 놀이를 하였는데, 어른이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 맹자(孟子)가 이 놀이를 할 적에 학궁(學宮)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아마 장돌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어찌 맹자가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듣고 개연히 물리치고 더이상 장난하지 않고 마침내 책을 가지고 서당에 나아가 날마다 수업을 받았다. 영특한 자질로 더욱 독실하게 노력하고 계속하여 매진하니 문장이 넉넉하고 시원하여 훌륭하다는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병자년(1576, 선조9)에 문과에 급제하고 갑술년(1574, 선조7)에 주서(主書)에 제수되었다.32) 정축년(1577, 선조10)에 외직으로 나가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이 되었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청렴하고 신중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공의 중씨(仲氏) 좌랑공(佐郞公)이 일찍이 연이어 당화(黨禍)를 입어 제명에 죽지 못하였기에 공이 늘 통한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당론이 성행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않으니, 공이 스스로 과거의 일을 깊이 교훈으로 삼고는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날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으로 삼았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등나무 덩굴 비추던 달빛 사랑스러우니 愛藤蘿月아름다운 자태 옛 모습 드러내네. 娟舊面開남은 생 얼마나 될까 生能幾許시절의 경물 재촉하지 말라. 時物莫相崔하였으니, 여기에서 그의 뜻을 알 수 있다.어버이를 섬기는 효성에 있어서는 간병(看病)할 적에 지극히 근심 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이 절도를 넘었으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출사하여 군주를 섬길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주저하거나 구차한 마음이 있지 않았다. 기미를 보고 용기있게 결단하여 바닷가 산골 마을 고요한 곳으로 멀리 떠나 성내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그럭저럭 지내면서 한평생을 마쳤다. 일관된 의리와 출처의 절도는 먼 후대에서도 늠름하게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갖게 할 것이다.경신년(1620, 광해군12) 10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주의 세동(細洞) 왼쪽 산기슭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수(鄭琇)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극윤(克潤)으로 훈련원 주부이고, 차남은 방윤(邦潤)으로 통정대부이다. 딸은 원윤(裵元胤)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위(煒), 차자의 아들은 오규(五圭), 중규(重圭),신규(信圭), 환규(桓圭), 참의(參議)에 추증된 만규(萬圭)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0세손 영하(永夏)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같이 명을 짓는다.은미함도 알고 드러남도 아는 것 知微知彰고인도 어렵게 여겼네. 古人所難벼슬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投緩還山가난한 생활을 즐거워하였네. 樂我瓢簞등나무 덩굴 비추던 달빛 藤蘿之月호해의 기개가 있는 벗일세. 湖海之友시와 술로 날을 보냈으니 文酒日夕그 풍류와 운치 상상할 수 있네. 風韻可想 公諱成俊。字時應。號錦溪。金氏本光山人。新羅王子諱興光爲分系之祖。自此至十二世。在麗朝。皆官平章事。至諱流。官監察御史。諱德龍。官大司憲。諱信佐。官工曹判書。諱孝忠。官弘文應敎。皆入我朝以後顯祖也。高祖諱致銛進士。曾祖諱轍生員。祖諱廷彦生員。考諱洪僉中樞。妣完山李氏生員鶴女。明宗任子生公于羅州之壯元洞舊第。性氣恬靜。風儀高潔在稠人中。如雲鶴之在難群。幼而與群兒戱爲沽衒。長老責之曰。昔孟子作此戱。若非學宮之敎。幾不免爲市賈之人。何以爲孟子乎。公聞之慨然。絶不復戱。遂挾冊就塾。日受其業。以穎悟之資。加篤實之力。接續征邁。贍富宏暢。令聞令望。藉藉一時。丙子擢文科。甲戌除注書。丁丑出爲江華府經歷。壬午入爲漢城府判官。所至皆以淸謹見稱。公仲氏佐郞公。嘗連累於黨禍。未得考終。公常痛恨之。至是黨論盛行。朝家不靖。公深自懲毖。遂棄官歸鄕。杜門斂迹。日以文酒自娛。嘗有詩曰。可愛薦蘿月。娟娟舊面開。餘生能幾許。時物莫相催。此可以見其志矣。事親至孝。侍疾致憂。夜不解帶。執喪哀戚過節。見者釀涕。出身事君。一於誠信。未嘗有依違苟且之意。及其見幾勇決。而遐擧遠引於海山閒寂之濱。不慍不悶。聊以卒歲。其終始之義。出處之節。百世之下。凜凜然令人起敬。庚申十月十三日卒。葬羅之細洞左麓子坐原。配河東鄭氏琇女。生二男一女。男長克潤。訓鍊主簿。次邦潤。連政。女適裵元胤。長房孫煒。二房孫五圭重圭信圭桓圭萬圭。贈參議。曾玄以下不錄。十世孫永夏抱家狀來。謁誌墓之文。銘曰。知微知彰。古人所難。投緩還山。樂我瓢簞。藤蘿之月。湖海之友。文酒日夕。風韻可想。 병자년에……제수되었다 원문에는 '丙子擢文科甲戌除主書'로 되어 있다. 문맥에 근거할 때 병자와 갑술의 간지가 바뀐 듯하다. 갑술년에 급제하고, 병자년에 주서가 된 듯하나, 일단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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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참판 난계 최공 묘지명 戶曹參判蘭溪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추(湫), 자는 양호(養浩), 호는 난계(蘭溪),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휘 지몽(知夢)이 있는데,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1천(千) 호의 식읍(食邑)을 받았다. 이분이 족보에 기록된 선조가 된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고,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으로,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는데, 두 이름난 선조이다. 고조는 휘 사경(思敬)인데, 지용주사(知龍州事)를 지냈다. 증조는 휘 홍의(弘毅)인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조부는 휘 득초(得超)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자혁(自赫)인데,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이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현감 김시(金時)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 12월 3일에 공이 서울 남부(南部)에서 태어났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민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에 따랐으며, 별도로 풀이하지 않아도 글 뜻을 알았다. 장성하여서는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암송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물이 솟아나는 듯이 산이 우뚝 솟은 듯이 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전의 성현이 저술하고 이론을 내세운 것은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후인이 독서하고 학문하는 것은 또한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과문(科文)이나 문장을 꾸미는 습속을 버리고 경서를 배우고 여러 책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몸으로 익혀 실천함과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음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격언(格言)과 중요한 가르침이 있으면 반드시 자리 곁에 기록해 두었다.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에는 명(銘)이나 잠(箴)을 새겨 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성종(成宗) 임진년(1472, 성종3)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신년(1476)에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였다. 기해년(1479)에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경자년(1480)에 외직으로 나가 고창 군수(高敞郡守)가 되었다.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윤리를 밝히고 풍교를 순후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규약을 엄히 하고 권선징악의 뜻을 보이며 상벌을 미덥게 하니, 시행한 지 몇 년 안 되어 간사하고 교활함이 자취를 감추고 폐단의 근원이 사라졌으며, 관리들은 그 위엄에 복종하고 백성들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다. 경내에 학문하고 효제(孝悌)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물어보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어느 날 백성 중에 자기 자식이 불효하다고 말하며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공이 마침내 불효하는 사람을 잡아다 효자의 집안에 잡아 보낸 뒤 한 달 남짓 만에 풀어주니,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결같이 그 효자처럼 부모를 섬겼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능성(綾城縣監)으로 관직을 옮겨 다스렸고, 무신년(1488)에 장성(長城)으로 관직을 옮겼으며, 기유년(1489)에 광양(光陽)에 부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으니, 공의 공적을 찬양해 기록한 풍비(豐碑)는 만인이 칭송하였다. 임자년(1492)에 군을 잘 다스린 치적을 높이 평가받아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3)에 효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기미년(1499)에 치사(致仕)하고 낙향하였다.정묘년(1507, 중종2) 7월 26일에 사제에서 졸하였다. 와리(瓦里) 뒤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기계 유씨(杞溪俞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근지(近池)는 사성(司成)이다. 딸은 황보손(皇甫孫), 김석중(金碩中), 조승안(曺承安), 설등산(薜登山), 고상겸(高尙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셋이니, 치함(致涵)은 참봉이고, 치담(致淡)은 부위(副尉)이고, 치호(致湖)는 승지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후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대구(對句) 맞추어서 문장 아름답게 꾸며 抽黃對白성취하는 바가 무슨 일이랴. 所就何事돌이켜 요약하고 근원을 궁구하며 反約窮源착실하고 자신에 절실하게 공부해야 하네. 近裏著己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니 厚積薄發하늘에서 떨어짐이 있네. 有隕自天출사하여 조정에 나아가 釋褐登廷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자임하였네. 致澤經綸무성에서 소 잡는 칼을 어디에 쓰리오 武城牛刀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 들리네.33) 絃誦有聲진원은 처벌하지 않았으니 陳元不罪난봉이 상서로움을 드러내네.34) 鸞鳳著祥고을을 두루 다스려 공적 드러났으니 歷典著績포상이 융숭하였네. 褒賞隆重나이 많아 치사하고 산중으로 돌아갔으니 引年歸山그 풍모와 운치 숭상할 만하네. 風韻可仰 公姓崔。諱湫。字養浩。號蘭溪。貫朗州。有諱知夢。仕麗朝。封東萊侯。食邑千戶。是爲登譜之祖。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皆其名祖也。高祖諱思敬。知龍州事。曾祖諱弘毅。司憲府監察。祖諱得超。掌樂院正。考諱自赫。司醞寺直長。妣靈光金氏縣監時女。正統丙辰十二月三日。公生于京之南部。幼有異質。英邁過人。就傳上學。不煩提督而遵循課程。不常訓釋而曉解文義。及長博涉諸家。成誦無遺。綴文點句。水湧山出。旣而自語曰。前聖所以著書立言者。其意欲何爲。後人所以讀書學問者。亦其意欲何爲。遂廢功令組繪之習。將經學念書。沈潛硏究。體察涵養。夜以繼日。造次不懈。有格言要誨。必書之座側。至於盤孟几杖。有銘有箴。常常寓目以自警焉。成宗壬辰擢文科。授奉常寺直長。尋遷司僕寺正。丙申赴江原都事。己亥入爲吏曹佐郎。庚子出宰高敞。爲政一以明倫理厚風敎爲主。嚴規約示勸懲信賞罰。行之有年。奸猾斂迹。弊瘼滌源。吏服其威。民懷其德。境內有學問孝悌者。必訪問之。厚加賞賜。一日民有來言其子不孝。請爲之懲治。公乃押送不孝之人於一孝子之家。月餘放之。其人歸家。事父母一如孝子人。甲辰移宰綾城。戊申遷長城。己酉赴光陽。所至皆有治績。豐碑萬口。壬子以治郡高第。入爲禮曹參議。丁巳陞戶曹參判。已未告老還鄕。丁卯七月二十六日卒于居第。葬瓦里後麓負甲原。贈戶曹判書。配杞溪俞氏贈貞敬夫人。生一男五女。男近池司成。女適皇甫孫金碩中曺承安薜登山高尙謙。孫三男致涵參奉。致淡副尉。致湖承旨。曾孫以下不錄。後孫昌柱南杓抱家狀。奉謁誌銘。銘曰。抽黃對白。所就何事。反約窮源。近裏著已。厚積薄發。有隕自天。釋褐登廷。致澤經綸。武城牛刀。絃誦有聲。陳元不罪。臠鳳著祥。歷典著積。褒賞隆中。引年歸山。風韻可仰。 무성(武城)에서……들리네 지방을 다스릴 때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선정을 베푼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 고을에 갔는데,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하였다. 《논어 양화(陽貨)》 진원(陳元)은……드러내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주부(主簿) 구람(仇覽)에게 "주부가 진원(陳元)의 과실을 듣고서도 처벌하는 대신에 교화하였는데, 새매의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힐책하자, 구람이 "나는 새매가 난새나 봉황만은 못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循吏列傳 仇覽》 여기서는 최추가 덕으로 교화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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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고공 묘지명 敬齋高公墓誌銘 공의 휘는 명림(命霖), 자는 내여(乃汝), 호는 경재(敬齋)이다. 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인데, 신라(新羅)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저명한 석학이 있었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지평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경리(景离)이고, 호가 둔암(遯庵)이다. 증조는 휘 원건(元健)이고, 조부는 휘 태제(泰濟)로 참봉을 지냈다. 부친은 휘 가한((可漢)이고, 호가 봉강(鳳岡)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만웅(文萬雄)의 따님이다. 숙묘(肅廟) 경인년(1710, 숙종36) 2월 3일에 이지촌(鯉池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체격이 단아하고 재능이 특출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서 부모의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고 대답함에 잘 받들어서 어김이 없었다. 7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어린아이가 행할 모든 예법을 일일이 준행하였다. 10세에 《논어》와 《맹자》를 배워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되었다. 관례를 함에 미쳐서는 포부가 크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다. 의리(義理)를 변론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선배와 숙유(宿儒 학식이 많은 선비)가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진전시키고 지혜를 늘리는 데에는 구사(九思)보다 절실 중요한 것이 없고,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데에는 구용(九容)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35) 인(仁)의 체단(體段)을 구하는 데에는 〈서명(西銘)〉36)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학문하는 규모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보다 잘 구비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서 걸어두고 스스로 경계하였다.한 마을에 같이 사는 시공(緦功)의 친척37)이 30여 가구였는데,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여 은의(恩誼)가 있고 화목하였다. 수십 년이 되었지만 흠잡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가문의 규약을 지어 매월 초하루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고해주었다. 그 규약에 "첫째, 부모를 잘 섬기고, 형장을 잘 섬긴다.[善事父, 母 善事兄長.] 둘째, 학문을 권장하고 농사에 힘쓴다.[勤文學, 力農桑.] 셋째, 부세를 잘 납부하고 요역을 회피하지 않는다.[先賦稅, 趁徭役.] 넷째, 주색을 가까이하지 말고, 놀음을 배우지 말라.[勿近酒色, 勿學賭博.] 다섯째, 혼사와 상사에는 서로 돕고, 흉년에는 서로 구휼한다.[婚喪相扶, 饑饉相恤.] 여섯째, 쟁송을 경계하고 미신을 멀리 하라.[戒爭訟, 遠巫覡.]"라고 하였다. 집안의 후생(後生)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질이 특출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한 글방에 모아놓고 스승을 잘 선택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매달 직접 시험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는지 게으름을 피우는지를 살폈다. 늘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인생 사업은 다만 사(士)와 농(農) 두 가지만 있을 따름이다.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미치는 자는 실로 마땅히 공부에 전념해야 하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동소남(董邵南)38)처럼 주경야독(晝耕夜讀)해야 한다. 이것이 선비의 본분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무술년(1778, 정조2) 7월 9일에 졸하니, 천년동(千年洞) 당산등(堂山嶝)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로, 선정기(宣廷夔)의 따님인데, 아들 둘을 낳았다. 계배(系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진휘(李震輝)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낳았으니, 산각(山珏), 산중(山重), 산택(山宅), 산언(山彦)이다. 7세손 광무(光茂)가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이미 그 몸 깨끗하게 하여 旣淑其身집에서 예법으로 막았네.39) 以閑有家미루어 확대하여 실행하였으니 推以行之가문의 법도가 또한 드러났네. 門規亦嘉곤륜산의 옥은 광채 숨기고40) 昆玉潛光못 속의 구슬은 광휘 감추었네.41) 淵珠藏輝자손들이 가법을 받들었으니 子孫承式명성과 업적 작지 않네. 聲猷不微 公諱命霖。字乃汝。號敬齋。高氏貫長興。自羅至麗。世有名碩。至諱臣傳。入我朝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持平。皆冥顯祖也。高祖諱景离。號遯庵。曾祖諱元健。祖諱泰濟參奉。考諱可漢。號鳳岡。妣南平文氏萬雄女。以肅廟庚寅二月三日生公于鯉池村。體容端雅。才氣挺邁。自幼有至性。侍父母側。應對唯諾。承順無違。七歲受小學書。凡百幼儀。一一遵循。十歲受論孟。文理日就。及官抱負贍富。造詣精深。至於辨論義理處。先進宿儒。皆自以爲不及。嘗曰。進學益智。莫切於九思。收斂身心。莫切於九容。求仁體段。莫先於西銘。爲學規模。莫備於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五者。書揭座側以自警焉。緦功之親同住一巷者。爲三十餘家。問訊周恤。恩誼雍睦。積數十年。未有間言。著門規。每於月朔。聚而告之。其規有曰。一善事父母。善事兄長。二勤文學力農桑。三先賦稅趁徭役。四物近酒色。勿學賭慱。五婚喪相扶。饑饉相恤。六戒爭訟遠巫覡。門內後生。有儀形端正。才性穎悟。必聚之一塾。擇師敎之。每朔躬親試之。以考其勤慢。常戒子孫曰。人生事業。只有士農兩件而已。事力可及者。固當專業於文字。如其不然。則如蕫邵南晝耕夜讀可也。此是士子本分。勉之勉之。以戊戌七月九日卒。葬于千年洞堂山嶝乙坐原。配寶城宣氏廷夔女。生二男。系配全州李氏震輝女。生四男。山珏山重山宅山彦。七世孫光茂謁余文以誌陰石。銘曰。旣淑其身。以閑有家。推以行之。門規亦嘉。昆玉潛光。淵珠藏輝。子孫承式。聲猷不微。 학문을……없고 구사와 구용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이라는 뜻으로, 《예기》 〈옥조(玉藻)〉와 《논어》 〈季氏〉에 나온다. 서명(西銘) 송나라 장재(張載)가 지은 글로, 천지가 나의 부모이고 만물이 나의 동포라는 이치를 담고 있다. 《張載全書》 시공(緦功)의 친척 시공은 상복(喪服) 제도에서 가장 가벼운 3개월 동안 입는 시마복(緦麻服)과 5개월 동안 입는 소공복(小功服)의 친척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豐)에 은거하여 주경야독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유(韓愈)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嗟哉董生行》 집에서 예법으로 막았네 《주역》〈가인괘(家人卦) 초구(初九)〉에 "집에서 예법으로 막으면 뉘우침이 없어지리라.[閑有家, 悔亡.]" 하였으니, 집안을 다스리는 초기에 법도로 막으면 은혜를 손상하지 않고 의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집안에서 처하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곤륜산의……숨기고 《서경》 윤정(胤征)에 "불이 곤륜산을 태워 버리면 그 속에 있던 옥과 돌도 함께 다 타 버린다.[火炎崑岡, 玉石俱焚.]" 하였다. 못……감추었네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법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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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실【정현】에게 답함 答朴元實【鼎鉉】 올해가 되기 전에 이미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받았는데, 새해 초에 또 그대의 아우를 보내 이처럼 위문하시니, 그대의 정성스런 마음을 알겠으니 감사한 마음 헤아릴 수 없습니다. 편지를 받고 삼가 할머님과 어머님께서 건강하고 평안하며, 네 형제는 명성이 뛰어난 줄 삼가 알겠으니, 새해의 좋은 소식에 기뻐서 축하하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노력하고 더욱 힘써 하늘이 나에게 매우 후하게 베풀어준 뜻에 보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눈앞의 모든 일을 근근이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말년에 접어들고 있는데도 구구한 내가 일생을 마칠만한 계책으로는 터럭만큼도 마음을 둘 곳이 없으니 매양 생각할 때마다 혀만 찰뿐입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주 방문해서 마치 더불어 말할 것이 있는 듯이 하니, 내가 비록 감히 굳건하게 사양하지 못했으나, 그대들에게는 어찌 헛되이 다리 힘을 소비하고 수고로우나 공효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멍하니 자책하며 어떻게 사례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자(朱子)는 "천하의 일은 평소 한가하게 지내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이 한 몸은 하늘이 낳아주고 땅이 길러주어서 아주 많은 도리를 부담하고 있으니, 이 도리를 다할 수 있어야 개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밟을 수 있어서 이 삶을 저버리지 않는다. 만약 이 도리를 다할 수 없으면, 단지 부질없이 살고 부질없이 죽으며 부질없이 형체를 갖추고 부질없이 세상 사람의 밥을 먹는 것이며, 도리를 보고 알기를 모두 많은 하찮은 물건으로 여기고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주경(主敬)이란 것은 존심(存心)의 핵심이고 치지(致知)라는 것은 진학(進學)의 일이니, 이 두 가지를 서로 드러내어 밝히면 아는 것이 날로 더욱 분명해지고, 지키는 것이 더욱 견고해져, 예전에 익숙해진 잘못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날로 고쳐지고 달로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이전에 읽어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공허함은 한 마디 말로써 도울 수 없기 때문에 주자의 학설 두세 조목을 신중하게 외워서 알려주니, 부디 마음에 새겨서 반복해 읽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歲內旣專伻矣。歲初又送令弟。若是致問。仰認勤意。感佩沒量。謹審雙幃康寧。四棣芳茁。新年好消息。何等欣賀也。惟願努力加勉。以答天翁餉我至厚之意。如何。義林眼前凡百。姑且捱過。而惟是年力垂暮。區區所以爲究竟之計者。無絲毫可意處。每念咄咄而已。賢輩不諒此狀。種種垂訪。有若可與語者在。我雖不敢牢辭。在賢輩。豈不是枉費脚力。勞而無功乎。撫然自咎。不知爲謝也。朱子曰。天下事。非燕閒暇豫之可得。又曰。此身是天造地設底。擔負許多道理。盡得這道理。方成箇人。方可拄天踏地。方不負此生。若不盡得此理。只是空生空死。空具形體。空喫了世間人飯。見得道理透。許多閒物事。都沒要緊。要做甚麽。又曰。主敬者。存心之要。致知者。進學之功。二者交相發焉。則知日益明。守日益固。而舊習之非。自將日改月化於冥冥之中矣云云。未知曾見此語否胸中空疎。無一言可以相助。故謹誦朱子說二三條以告之。幸留意而反復焉。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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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오【원례】에게 답함 答李鉉五【原禮】 외지고 누추한 호남 구석의 진부한 늙은이가 무슨 영향력이 있기에, 먼저 편지를 보내주신 은혜를 베푸시면서, 이처럼 친절하고 정성스럽습니까? 저는 그대 스승과는 외람되이 동문의 교분이 있지만 버림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옛 친구는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뿐입니다.121) 어찌 조금이라도 견줄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스승의 벗인 까닭으로 나에게 문안하는 것이라면 혹 괜찮겠지만 만약 그대의 스승을 섬겼던 것처럼 나를 섬기겠다고 한다면 실정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상황이 점점 험난해지고 스승의 학설이 분열되어서, 후배인 젊은 학생이 향해 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그대는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선생과 같은 스승을 구해 섬겨서, 밤낮으로 조용히 주도면밀하게 계도해주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것은 이 시대의 좋은 만남일 것입니다. 그대도 역시 마땅히 이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어도, 간혹 지향하는 것이 바르지 않고 식견이 고르지 않아서 편벽되고 방탕하게 되는 귀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스승을 선별하지 않아 초래된 까닭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학문에 힘쓰는 것은 스승을 구하는 데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스승을 구했다면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조예가 얕고 깊어지는 것은 다만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僻陋湖隅一腐朽。何足爲有無。而乃蒙執事者先施之惠。若是鄭重耶。愚於尊師門。猥有同門之契。而至見不棄者。以故舊之不寁也。豈可有萬一之比況哉。執事以師之友而見存。則或可而若事之如所事云耳。則非其情矣。如何如何。目今世路低險。師說分裂。後生小學。莫適所向。惟執事得師如艾山先生而事之。日夕從容。誘掖周至。此是今日之好際會。執事亦應如此否。人雖有志於學。而或趨向不正。見識不平至不免爲詖淫之歸者。無非所以不擇師之致也。古人所謂務學不如務求師者。非此義耶。執事旣已得之。則幸之又幸。而所造淺深。只在自己之勉不勉如何耳。 옛 친구는 …… 때문일 뿐입니다 《시경》 〈준대로(遵大路)〉에서 "큰길에 달려 나가 그대의 소매를 부여잡았노라. 나를 미워하지 말지어다. 옛 친구를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느니라.【遵大路兮, 摻執子之袪兮. 我無惡兮, 不寁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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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8 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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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7) 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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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1) 【철원】에게 답함 答黃景涵【澈源】 신여(新汝)2) 편에 갖가지 소식을 들었네. 삼가 묻건대 당상의 체후는 모두 평안하신가? 그대 아우는 관례와 혼례를 무사히 치렀다고 하니, 어떤 위안이 이만 하겠는가? 호설(湖說)의 삼층(三層)3)에 대한 변론은 옳지만, 나의 설에 삼층이 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지나치네. 그대는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人與人同 物與物同]"라고 한 것은 본래 좋은 말이 아니라고 여기고, 나는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라고 한 것은 본래 좋지 않은 말이 아니라고 여겼네. 다만 호설로 인하여 좋지 않게 여긴 것일 뿐이니,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것은 이른바 "각각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라는 곳이 아니겠으며,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萬)'과 '일(一)'의 동이(同異)는 비록 서로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궁구하여 말하자면, '일본(一本)'을 말할 때는 인물(人物)의 성이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고, '만수(萬殊)'를 말할 때는 인물의 성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네. 또 만수는 이분(理分)에 속하고 기분(氣分)에 속하는 것이 있으니, 호설의 사람마다 같지 않고 동물마다 같지 않다는 것은 마땅히 기분이어서 성(性)을 말할 수 없네. 그렇다면 나의 설은 단지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된다."는 뜻인데, 어찌 일찍이 호설과 같은 삼층이 있었던가? 그대가 간장(澗丈)4)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통 편색(正通偏塞)을 성으로 여기면서 유독 인동 물동(人同物同)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간장이 인물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누누이 말을 하였는데 인동 물동의 설을 하는 사람을 기롱한 것은 유독 인물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가? 정통 편색을 이(理)가 소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가하지만, 참으로 정통 편색을 성(性)으로 여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으니, 이것은 실로 인물이 한 번 정해진 분수이고 만수가 이분에 속하는 것이네. 단지 이 만수는 실로 이미 이일(理一)의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지만 벌집이나 석류 알처럼 되는 것이 아니니, 같다고 해도 가하고 같지 않다고 해도 가하네. 더구나 '성(性)과 도(道)는 비록 같지만'이라는 '성도수동(性道雖同)'이 '사람과 사물이 각각 그 성의 자연을 따른다.'는 '각순기성(各循其性)'의 아래에 있으니,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고 말함에 어떤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대는 솔성지도(率性之道)를 만수로 여기면서 유독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설을 취하지 않으니, 또한 무슨 곡절인가?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바깥에 어떤 별도의 만수가 있는가? 이것은 비유하자면 자규(子規)를 귀하게 여기면서 두우(杜宇)를 천하게 여기고, 창경(倉庚 꾀꼬리)을 싫어하면서 황리(黃鸝 꾀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네. 《중용집주》에서 이른바 "기품이 혹 다르다."는 것 이것은 실로 사람마다 같지 않고 물물마다 같지 않아 만수가 기분에 속하는 것이네. 그대가 이른바 "관맹 강약(寬猛强弱)"이라 한 것은 옳네. 간장이 그대가 정통 편색을 이(理)로 여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理)는 실로 이와 같다고 여긴다면, 어찌 본연의 이(理)에 교구(矯捄)하는 공을 더함이 있겠는가? 의심스러운 것이 정히 여기에 있다면 변론하여 해설할 때 마땅히 "만수에는 이분이 있고 기분이 있으니, 이분은 실로 교구할 수 없으나 교구할 수 있는 것은 기분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적막한 물가에 벗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것이 매우 심하여 이러한 설로 서로 고쳐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오직 그대가 나를 멀리하지 않고 갖가지 보여주는 것이 이와 같이 곡진하니, 나의 위안됨과 감사함이 어떠하겠는가? 조금이라도 노년에 거둘 수 있는 희망은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의론하는 사이에 소소한 위합(違合)을 혐의로 삼지 말고 더욱더 부지런히 제기하여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기약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新汝便。承信種種。謹詢堂候萬安。令弟冠娶利行。何慰如之。湖說三層之辨得矣。而至以鄙說謂有三層則過矣。賢謂人與人同。物與物同。本非好語。愚謂人與人同物與物同。本非不好語。但因湖說而爲不好耳。人同物同。非所謂各正性命處乎。非所謂一本之所以萬殊者乎。萬一同異。雖曰相涵。而究而言之。言一本時。不可曰人物之性不同。言萬殊時。不可曰人物之性不異。且萬殊有屬理分底。有屬氣分底。湖說人人不同物物不同。當氣分。而不可以言性。然則鄙說只不過一本萬殊之義。而何嘗有三層如湖說乎。賢抵澗丈書。以正通偏塞爲性。而獨以人同物同爲不然。何也。以澗丈壞人物之分。縷縷爲言。而譏人同物同之說者。獨非壞人物之分耶。以正通偏塞爲理之所有則可。眞以正通偏塞爲性則不成說矣。人與人同。物與物同。此固人物一定之分。而萬殊之屬於理分者也。只此萬殊固已涵於理一之中。而非如蜂房榴核之爲。則謂之同可也。謂之不同亦可也。況性道雖同在於各循其性之下。則謂之人與人同。物與物同。有何不可乎。賢以率性之道爲萬殊。而獨不取人與人同物與物同之說。抑何曲折耶人與人同物與物同之外。有何別般萬殊乎。此比如貴子規而賤杜宇。惡倉庚而愛黃鸝者也。集註所謂氣稟或異。此固人人不同。物物不同。而萬殊之屬於氣分者也。賢所謂寬猛强弱者得矣。澗丈見賢以正通偏塞爲理。故以爲理固如此。則安有本然之理。而加矯捄之功乎。所疑正在於此。則其辨而解之之說。當曰萬殊有理分底。有氣分底。理分固不可以矯捄。而所可矯捄者。氣分云爾。則何如耶。寂寞之濱。離索殊甚。無一人以此等說相規。而惟吾友爲之不遐。種種示及。若是繾綣。區區慰感。謂何如耶。一分收棄之望。惟吾友是倚。幸勿以議論間小小違合爲嫌。益加勤提。期有所就。如何。 황경함(黃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을 말한다. 자는 경함,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신여(新汝) 황승현(黃承顯)의 자이다. 호설(湖說)의 삼층(三層) 호론(湖論)의 좌장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 주장한 학설로, 성삼층설(性三層說)이라고도 한다.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한 것이다. 간장(澗丈) 이기백(李琪白, 1854~1903)을 말한다. 자는 광빈(光彬), 호는 간재(澗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권19〈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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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기 三坡記 이릉(爾陵)114)의 치소 북쪽 10리에 백암(白巖)이 있는데 대개 이름난 마을이다. 물이 동남쪽으로부터 오는 것의 천만 갈래 물길이 여기에 이르러 합해져 앞에서 멈추어 고이고, 산이 서북쪽으로부터 뻗어 오는 것의 천만 봉우리가 여기에 이르러 그쳐서 좌우로 나열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면서 시원하고, 주위를 둘러싸면서도 넓고 평평하여 이미 이름하여 형상할 수 없다. 북쪽에는 상좌봉(上座峰), 남쪽에는 발우봉(拔尤峰), 서쪽에는 응봉(鷹峯)이 있어 셋으로 나열하여 정치(鼎峙)하고 있으니, 마치 거인(鉅人)과 장덕(長德)이 밝은 거울과 그림 병풍 사이에 서로 마주하여 함께 인사하고 있는 것 같다. 대개 백암은 이릉의 빼어난 승경이고, 이 삼봉은 또 백암의 승경이다.나의 벗 삼파자(三坡子)는 이곳에 세거하여 그대로 호로 삼았다. 그러나 '봉(峰)'이라 하지 않고 '파(坡)'라고 하였으니, 또한 설명할 것이 있는가? '봉'은 높은 것이고 '파'는 낮은 것이니, 외면의 이름은 낮게 하려고 하고 내면으로 힘쓰는 실상은 높게 하려고 한다. 하늘의 높음으로 산보다 낮은 것이 축(畜)이 되고,115) 산의 높음으로 땅보다 낮은 것이 겸(謙)이 되니,116) 지금 외면으로는 파이고 내면으로는 산인 것은 또한 어찌 겸손하고 겸손한 대축(大畜)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바로 군자가 경금(褧錦)117)하는 제일의 법이니, 내 알건대 삼파(三坡)의 봉(峯)은 반드시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118)과 더불어 그 높이를 같이하고 한 지방의 빼어난 승경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爾陵治北十里有白巖。盖名村也。水之自東南來者。千派萬流。至此而合。渟滀於前。山之自西北來者。千峯萬峀。至此而止。羅列於左右。幽深而軒敝。周遭而廣平。已不可名狀。北有上座。南有拔尤。西有鷹峯。參列鼎峙。如鉅人長德。相對拱揖於明鏡畫屏之間。盖白巖爾陵之選勝。三峯又白巖之選勝也。余友三坡子。世居於此。因以號焉。然不曰峰而曰坡。抑有說耶。峯高者也。坡下者也。名之在於外者。欲其下。實之務於內者。欲其高。以天之高而下於山則爲畜。以山之高而下於地則爲謙。今外坡而內山。亦豈非謙謙大畜之義耶。此是君子褧錦第一法。吾知三坡之峯。必得與魏升卿五千仞。同其高。而不止爲一方之選勝也。 이릉(爾陵) 이릉부리현(爾陵夫里縣)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綾州面)의 옛 지명이다. 하늘의……되고 산천대축(山天大畜)의 《주역》 〈대축괘(大蓄卦)〉 형상을 말한다. 산의……되니 지산겸(地山謙)의 《주역》 〈겸괘(謙卦)〉 형상을 말한다. 경금(褧錦) 비단 옷 위에 다시 홑옷을 덧입어서 화려함을 감춘다는 뜻으로,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에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덧입었다.[衣錦褧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 잠삼(岑參)의 시 〈위승경을 전송하며[送魏升卿]〉에 "그대는 삼봉이 곧장 오천 길을 올라간 것을 보지 못했겠지만, 군의 문장을 보건대 또한 이와 같네.[君不見三峰直上五千仞, 見君文章亦如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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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학헌115) 양장【상정】께 드리다 呈心學軒梁丈【相鼎】 골짜기 협소하여 우물 안과 같으니 (峽裏小如井底天)때때로 돌아보매 옛 감회에 잠겨 정히 끝이 없네 (時回曠感正無邊)높아서 파도가 미치지 못하니 지주116) 바라보는 듯하고 (屹不逐波瞻砥柱)가난 속에서 지조를 지키니 탐천117)을 따르는 듯하네 (窮加勵操酌貪泉)재능을 숨긴 채118) 다만 허물을 없애려 노력하고 (蘊櫝但勤磨玷力)무리를 떠나니 누가 소금 수레119)를 끄는 채찍을 잡으랴 (漏群誰着服鹽鞭)선생은 근래 무슨 일을 하시는가 (先生近日干何事)바람 불고 달 뜬 한가한 뜰에 우두커니 앉았으리 (風月閒庭坐嗒然) 峽裏小如井底天。時回曠感正無邊。屹不逐波瞻砥柱。窮加勵操酌貪泉。蘊櫝但勤磨玷力。漏羣誰着服鹽鞭。先生近日干何事。風月閒庭坐嗒然。 심학헌(心學軒) 양상정(梁相鼎)의 호이다. 전라남도 화순 능주(綾州) 출신으로 가선대부 부호군을 거쳐 1893년 호군을 역임하였다. 지주(砥柱) 황하(黃河) 중류에 우뚝 서 있다는 돌기둥을 말한다. 역경과 고난에 맞서서 변함없이 버티어 나가는 큰 인물의 지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탐천(貪泉) 중국 광주(廣州) 땅에 있는 샘이다. 진(晉)나라 오은지(吳隱之)가 광주 자사(廣州刺史)로 부임하였는데, 그곳에는 욕심을 일으킨다는 탐천(貪泉)이라는 샘이 있었다. 그는 청렴한 사람은 탐천을 마셔도 지조를 변치 않을 것이라는 시를 지었다.『晉書 良吏列傳 吳隱之』 재능을 숨긴 채 『논어』「자한편(子罕篇)」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좋은 옥이 여기 있습니다. 독(櫝)에 넣어서 감추어 두겠습니까, 비싼 값을 줄 사람을 구해서 팔겠습니까?' 하였다."라고 하였다. 소금 수레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吊屈原賦)」에 "천리마가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 수레를 끌도다.[驥垂兩耳兮服鹽車]"라고 하였는데, 이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천한 역(役)에 종사함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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