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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오당기 晩悟堂記 상지(上智)는 깨달을 것이 없고, 하우(下愚)는 깨닫지 못한다. 깨닫는 자는 오직 중품(中品)의 자질뿐이다. 대체로 미혹한 바가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으며, 남다른 자질이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깨달음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목소리에 드러나고 얼굴빛에 징험되어 한 가지 일에서 깨닫는 경우가 있고, 앞에서 징계되고 뒤에 삼가서 한 때에 깨닫는 경우가 있다. 한 가지 일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일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고, 한 때에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때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오직 탈연(脫然)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각성할 수 있고, 황연(惶然)히 봉사가 눈을 뜨듯 볼 수 있어야 안정되고 견고하게 지켜 넓게 펼쳐 나아갈 수 있다. 모르겠지만, 주인이 깨달은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듣기에 주인은 54세에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반드시 갖은 고생을 두루 맛보고 온갖 풍상을 실컷 겪은 다음에 뜬 생각이 사라지고 참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거듭 닦은 거울이 번연(幡然)히 묵은 때가 제거된 것과 같을 것이다. 두텁게 축적한 뒤에 드러나는 것은 그 드러남이 반드시 두텁고, 오랜 막힘 뒤에 통창하는 것은 그 통창함이 반드시 오래가며, 큰소리는 반드시 촉박하지 않고, 큰 걸음은 반드시 좁지 않을 것이니, 나는 주인의 깨달음이 앞으로 여생의 결말이 되어 절대로 한 가지 일이나 한 때의 깨달음에 비견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아, 나는 주인이 깨달음이 있었던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음에도 오히려 예전과 같이 흐리멍덩하니, 끝내 깨닫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하면 쇠잔한 힘을 채찍질하고 다스려서 주인의 뒤를 좇아 상유(桑楡)49)에 만분의 일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上知無悟。下愚不悟。悟之者。其惟中品之資乎。蓋不有所迷。何以有悟。不有所異。何以能悟。然悟有大有小。發於聲。徵於色。而有悟於一事者。懲於前。毖於後。而有悟於一時者。悟於一事者。他事未必然。悟於一時者。他時未必然。惟脫然如熟寐之得惺。怳然如蒙瞽之得視。可以守定得固。展拓將去。未知主人所悟。果何居耶。聞主人以五十有四之歲。而始有所悟。必其備喫辛苦。飽經風霜。而浮念消歇。眞心呈露。如重磨之鑑。幡然而祛塵也。發於厚積之餘者。其發必厚。暢於久鬱之後者。其暢必久。大音必不促迫。闊步必不窄挾。吾知主人之悟。將爲餘日之究竟。切非一事一時之比。嗚乎。余於主人。有悟之年。加有一歲。而尙懵然如故。其終不悟。可知也已。安得策理殘力。追從主人之後。庶幾乎桑楡萬一之悟也耶。是所望也。 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해가 떨어질 때 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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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윤【국조】에게 답함 答安景允【國祚】 편지를 통해 한번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또한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것에 버금하니, 그 위로되고 속시원함을 무엇에 비유하겠습니까. 이어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지내는 것이 즐겁고 화목하며 정황이 더욱 다복해짐을 알았습니다. 열흘 동안 강학을 위해 모였으니 학업에 날로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일상적인 보통의 마음과 힘으로 의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환안(還安)96)'이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이안(移安)했을 때에도 일찍이 알린 바가 없었으니 지금도 역시 고하는 말이 있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미 간략하게 하는 쪽을 따랐으므로 그대로 하는 것이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다'97)라고 하셨는데 반드시 법복을 먼저 말하고 다음으로 법언(法言)을 말한 뒤에 덕행을 말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그 법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법언을 말한 뒤에야 덕행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복을 입지 않고 법언을 말하지 않고서 그저 선왕의 덕행만을 행하고자 한다면 이른바 덕행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리(事理)의 순서와 언어의 맥락이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만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을 말하면서 몸에 간직한 바【所藏乎身】를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몸이 나라와 천하의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구(章句)에, '몸이 닦여지면 집을 가르칠 수 있다.【身修則家可敎矣】'는 것의 '신(身)'자는, 또한 원문(原文)의 '몸에 간직한 것【所藏乎身】'의 '신(身)' 자에 근본합니다. 書中一面。亦對面之亞也。慰豁何喩。仍審侍旁怡愉。候節增祉。結旬講聚。居業日就。此豈尋常心力所可議到哉。還安云云。以鄙意則移安時。曾無所告。則今亦不必有告辭。蓋旣以從簡。則因以如之。似乎可矣。非先王之法服云云。必先言法服。次言法言而後。言德行何。蓋服其法服。言其法言然後。德行可見。若不服法服。不言法言。而徒然欲行先王之德行。則所謂德行者。果何物耶。是其事理次第。言語脈絡。有不得不然。未知得否。是。言治國而言所藏乎身。便見身爲國天下之本也。章句身修則家可敎矣之身字。亦本於原文所藏乎身之身字也。然。 환안(還安)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던 신주를 제자리로 도로 모시는 것을 말한다.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다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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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원【제보】에게 주다 與文世元【濟普】 세초(歲初)에 춘부장(春府丈)께서 왕림하여주시니 감사함을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마침 몸에 병이 있고 아울러 손님으로 분주하여 조용히 말씀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레 인사를 나눈 이후 지금까지 매우 서글픔이 맺혀 있습니다. 달이 이미 바뀌었는데 어버이를 모시고 지내는 정황은 편안하고 즐거우며, 체절(體節)100)도 더욱 다복하며, 여가에 닦은 학업은 해와 함께 모두 새로워져 재미가 진진하신지요? 경모하는 구구한 내 마음이 실로 애타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101) 저의 뜻은 세월과 함께 사그러들고 병세는 해와 함께 깊어만 가니 초라한 집에서 칩거하면서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끝없이 한탄하고 있습니다. 존당(尊堂)의 「겸와기(謙窩記)」는 서로 잘지내왔던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서 붓을 적셔 써서 보내드리니 살펴보시고 육정(六丁)102)에 부치시면 어떻겠습니까? 다만 시봉하며 학문하는 것을 더욱 힘써서 원대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歲初。得春府丈枉駕。感不容喩。但身方有疾。兼以客撓未得穩承提喩。遽爾拜辭。悵耿迄今如結。月已改絃。未審侍奉歡婉。體節蔓吉。餘力居業。與歲俱新。趣味津津否。傾溯區區。實勞願言。義林意與歲去。病與年深。廢蟄窮廬。只切無窮之恨。尊堂謙窩記。難孤相厚之意。泚筆以呈。覽付六丁如何。只祈侍學加勉。以究遠大。 체절(體節)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 그 사람의 기거(起居)나 건강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경모하는 구구한 내 마음이 실로 애타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실노원언(實勞願言)'인데, 이는 《시경》 〈연연(燕燕)〉에, "바라보아도 미칠 수 없어 내 마음 실로 괴롭네.【瞻望弗及, 實勞我心.】"라는 구절과 〈백혜(伯兮)〉에, "그이가 그리워서 머리 아픈 것도 좋아라.【愿言思伯, 甘心首疾.】"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육정(六丁) 육정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정묘(丁卯),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상량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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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오씨 보의회안》 서문 寶城吳氏輔誼會案序 내가 항상 여씨(呂氏)의 향약(鄕約)124)과 범씨(范氏)의 의장(義庄)125)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삼고(三古) 시대126)의 남은 제도에 가장 잘 맞고, 지금의 시대에 행해질 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삼고 시대의 백성에게 행해졌던 정사(政事)는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만큼 치밀했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익을 좇아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면서 점차 쇠락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땅을 쓴 듯 다 사라져 버려졌으니, 선비가 옛날의 도를 배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물러나 시골 마을의 친구들이나 집안의 친족들과 함께 강론하며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어찌 이 두 가지와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나의 벗 송봉옹(松峰翁)은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옛 이름)의 남쪽에 은거하며 함께 거주하는 친족 10여 사람과 의장의 규례를 모방해 모임을 창설하여 '보의회(輔誼會)'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모여 강습함에 때가 있게 하고, 가르치고 봉양함에 재물이 있게 하였으며, 길흉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게 하고, 환난에는 도움이 있게 하였으니, 은혜와 정분을 돈독히 하여 서로 지켜주고 돕는 것이 굳고 단단하면서도 주도면밀하고 상세하다고 이를 만하다. 오씨(吳氏)의 후손이 받게 될 복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나는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처지로 외롭게 떠돌아다니며 거처를 정할 겨를도 없는데, 힘입을 곳이 없는 외로운 사직(社稷)을 탄식하고, 구원을 요청할 곳이 없는 사신(使臣)들을 애통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모임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적으로 감동과 부러움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이 글을 써서 오씨를 위해 축하한다. 余嘗愛呂氏之鄕約。范氏之義庄。最得三古之遺制。而可行於今日。蓋三古維民之政。可謂盛水不漏。而熙往穰來。漸次零替。至於今日。掃地盡矣。爲士者。學古之道。旣不得有爲於斯世。則退而與鄕黨知舊門闌族親。可以講行者。豈非此二事乎。余友松峰翁。隱居爾陵之南。與其族之同居者十餘人。倣義庄之規。倡以設之。命曰。輔誼會。使講聚有時。敎養有資。吉凶有須。患難有助。所以篤恩誼而相維持者。可謂鞏固而周詳矣。吳氏後祿。豈有量哉。余以孤根弱植。煢煢流離。不遑定居。歎杕社之無賴。哀原隰之無求。今於此會之設聞。不勝感艶之私。謹書此爲吳氏賀焉。 여씨(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그 규범은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계하고, 예속(禮俗)으로 서로 사귀고, 환란(患難)을 서로 구제한다는 네 조항이었다. 이것이 후대에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六 善行》 범씨(范氏)의 의장(義庄) 송(宋)나라 때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자신의 봉급과 재산 일부로 전지(田地) 수천 묘(畝)를 사들여 만든 전장(田莊)을 말하는 것으로, 범중엄은 이 땅에서 거둔 조(租)를 저축해 두었다가 혼가(婚嫁)나 상장(喪葬)을 치르지 못한 종족들에게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宋史 卷314 范仲淹列傳》 《小學 卷5 嘉言》 삼고(三古) 시대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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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욕회안》 서문 風浴會案序 "바람 쐬고, 목욕하고, 노래하며 돌아온다."144)라는 것은 인욕(人欲)이 깨끗이 사라지고 천리(天理)가 유행함으로써 마음이 평탄하여 드넓고 생기가 충만하여 활발하게 흘러넘치는 경지이니, 바로 증점(曾點)이 본 고원(高遠)한 곳이요, 이른바 요순(堯舜)의 기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 자취를 사모하되 그 마음을 잃어버렸고, 그 이름을 좇되 그 실상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 산에 오르고 강물을 마주하여 술 마시고 시 읊는 것을 이따금 여기에 견주며 과시하고 찬미하기까지 한다. 이는 자못 인욕이 다 없어지지 않으면 천리가 유행하지 않아 구구한 한때의 즐거움이 애초에 허랑방탕으로 귀결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남헌(南軒) 장자(張子 장식(張栻))가 말한 "읊으며 돌아온다.[詠歸]"는 말도 도의 본체를 보았다고 이를 수 있다. 맹자도 오히려 행동이 뜻을 받쳐 주지 못한 사람을 광자(狂者)라 하였는데, 하물며 이보다 못한 사람임에랴. 이러한 폐단을 설파한 것이 아니겠는가.정해년(1887)에 나와 고을 친구들이 과감하게 서석산(瑞石山)을 유람하고, 이로 말미암아 영귀회(詠歸會)를 설립했는데, 그 뒤 을사년(1905)에 우리 마을의 젊은이들이 또 서석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풍속회(風浴會)를 설립했다. 이것이 전후 20년간의 일이니, 어쩌면 이리도 꼭 닮은 것인가.정해년의 유람은 늘 이름만 훔치고 그 실상이 없음을 한탄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제공(諸公)들은 어느 쪽을 취할 것인가? 또 실상이 없는 자취를 좇아 답습할 것인가? 스스로 생각건대, 변변찮은 내가 벗들에게 미칠 정도의 착실한 점이 조금도 없이 도리어 허랑방탕한 풍속을 창도한 것인가?아, 천하의 형통한 사람들은 어렵고 막힌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바라건대 제공들은 규범과 준칙 속에서 괴로이 검속하고, 연못과 얼음과 가득찬 물과 옥 위에서 전전긍긍하며 보존하여145) 한 치 한 푼을 축적하고 때와 날로 변화함으로써 위태롭던 것이 안정되고, 서툴던 것이 매우 익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세속을 초탈한 깨끗한 형상과 호탕하게 성대한 기상이 어느 때든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는 사이에 있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풍욕회를 설립한 것이 앞으로 실상이 없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전날의 영귀회도 함께 빛날 것이니,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風浴詠歸。是人欲淨盡天理流行底坦蕩蕩活潑潑也。乃曾點所見高處。所謂堯舜氣象也。後之人。慕其迹而遺其心。循其名而忘其實。至以登山臨水。文酒觴詠。往往比擬而夸美之。殊不知人欲不盡。則天理不行。區區一時之樂。未始不出乎放浪曠蕩之歸而已也。南軒張子所謂詠歸之語。亦可謂見道體矣。孟子猶以行不掩爲狂。而況下於此乎者。其非說破此敝耶。歲丁亥。余與鄕里知舊。果有瑞石之遊。因有詠歸之會。後乙巳。吾黨年少。又往瑞石。歸而設風浴之會。此是前後二十年間事。而何酷似乃爾也。丁亥之遊。常恨夫竊其名而無其實。未知諸公奚取焉。而又且循襲其無實之迹耶。自惟無狀。未有多少着實的及於朋友。而反以放浪曠蕩之風倡之耶。嗚呼。天下之亨。未有不自艱難窒塞中出來。願諸公苦苦檢束於規矩繩尺之中。兢兢持存於淵氷盈玉之上。分累寸積。時移日化。至於杌隉者妥帖。生澁者純熟。則其脫然灑落之象。浩然盛大之氣。將無時而不在於春風沂雩之間矣。然則今日風浴之設。將不至無實。而前日之詠歸。亦與有光焉。勉之勉之。 바람……돌아온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장래 포부를 물어보자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 6명 및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연못과……보존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살얼음을 밟듯, 물 가득 찬 그릇을 받들 듯, 옥을 잡듯이 조심하여 잠시라도 이 같은 마음을 지녀 자신을 보존하라는 의미이다. 《시경》 〈소민(小旻)〉에 "전전하며 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는 옥을 잡은 듯이 하고,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조심조심 공경하여 마치 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장차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듯이 해야 한다.[孝子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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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회안》 서문 興學會案序 완도군(莞島郡)은 남해(南海)의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 있고, 서울에서 천여 리나 떨어져 있어 문물(文物)과 예교(禮敎), 의장(儀章)의 등위(等威)가 내륙 지역의 여러 군(郡)들보다 조금 손색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오래되었다.해의 운세가 양구(陽九)139)를 침범하고, 구야(九野)140)가 막혀 이단의 학설과 가르침이 날로 치성하고 달로 확장하면서 바람에 휩쓸리고 파도에 진탕되어 마르고 깨끗한 땅이 없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완도의 선비들이 먼저 부자묘(夫子廟)를 세우고, 그 다음에 학문을 진흥시키는 규례를 갖추어서 학교에 모여 시서(詩書)의 학업을 강습하고, 제물을 진설하여 읍(揖)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익히는 것이 성대하게 바람이 불 듯 유행하여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이는 내륙 지역의 여러 군에는 없는 것이니, 어찌 기수(氣數)가 순환하여 드러나고 감추어짐에 때가 있어서 그렇겠는가. 어쩌면 하늘이 사문(斯文)을 다 잃지 않고자 하여 한 줄기 양맥(陽脈)을 한 모퉁이 지역에 모아 두게 함으로써 훗날 크게 올 장본(張本 일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것인가?무성(武城)에서 소 잡는 칼을 사용했다고 한 것은 대체로 자유(子游)가 홀로 실행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서인데141), 하물며 오늘날 같은 세상에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문고를 타며 시 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랴. 만약 부자(夫子 공자)가 살아계셨다면 어찌 빙그레 웃을 뿐이겠는가.민중(閩中)142)은 예로부터 먼 남쪽 오랑캐 지역으로 일컬어졌는데, 치산(廌山)과 구산(龜山)143) 두 선생을 얻고 나서 마침내 천하의 문명한 고을이 되었으니, 지금의 완도군이 다만 당시의 민중이 되지 않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완도군의 선비들은 노력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이 계(契)는 김군(金君) 석욱(錫旭)이 창도하였는데, 그의 벗 관산(冠山 장흥(長興))의 김군(金君) 영엽(泳燁)을 통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莞之爲郡在南海窮漠之濱。去京師千餘里。文物禮敎。儀章等威。不能無少遜於內地諸郡久矣。歲侵陽九。九野閉塞。異說異敎。日熾月張。風靡波盪。無地乾淨。然而莞之士。先立夫子廟。次設興學之規。講聚乎庠塾詩書之業。遊習乎樽俎揖讓之節。蔚然風行。俗以丕變。此是內地諸郡所未有也。豈氣數循環。而顯晦有時者然耶。抑天不欲盡喪斯文。而使一縷陽脈。收斂翕聚於一隅之地。以爲他日大來之張本耶。武城牛刀。蓋善子游之獨行。況在今日域中。而得聞其一隊絃誦之聲於窮漠之濱。若使夫子而在焉。則豈惟莞笑而已哉。閩中古稱蠻荒之區。而得廌山龜山兩先生。遂爲天下文明之鄕。安知今日之莞。獨不爲當日之閩耶。惟莞之士。勉之勉之。是契也。金君錫旭倡之。因其友冠山金君泳燁。問序於余云。 양구(陽九)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4천 5백년 되는 1원(元) 중에 다섯 번 발생하는 양액(陽厄)과 네 번 발생하는 음액(陰厄)을 합한 말로, 극에 달한 재액(災厄)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대한제국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을 비유한다. 구야(九野) 하늘의 팔방과 중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온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성(武城)에서……여겨서인데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陽貨》 민중(閩中) 지금의 복건성(福建省)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하며 성리학을 대성하였다. 치산(廌山)과 구산(龜山) 치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유초(游酢, 1053~1123)의 호로, 당시 지부구현(知扶溝縣)이었던 정호(程顥)의 부름을 받아 학사(學事)를 맡고 그때부터 정호 형제를 사사하였다. 구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로, 정호 형제를 사사한 뒤 이정자(二程子)의 도학을 발전시켜 낙학(洛學)의 대종이 되었고,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장식(張栻)ㆍ여조겸(呂祖謙) 등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은 여대림(呂大臨)ㆍ사량좌(謝良佐)와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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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동노인수연시집》의 서문 禮洞老人壽筵詩輯序 인생 육십을 옛사람은 하수(下壽)라 하였으나, 세대가 내려오면서 운수(運數)가 모질어져 백성들이 요절한 경우가 많았고, 요행히 이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병들어 쇠약하고 곤궁하여 외롭게 지내며 삭막하게 세상사는 재미가 없게 되었다. 대체로 사람 중에 하수를 얻은 자가 열에 둘이 되지 않고, 하수까지 살면서 운수에 별 탈이 없는 자가 또 다섯에 하나가 되지 않으니, 이른바 "양(陽)은 획[━]이 하나이고, 음(陰)은 획[╍]이 둘이기에 길함은 적고, 흉함은 많다."라는 것이 바로 이치와 형세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내가 듣건대 예동(禮洞) 하군(河君)의 구갑(舊甲 환갑(還甲))이 되는 생일이 올봄에 있어서 여러 날 동안 장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집안사람은 온화하고 자신은 건강하여 안으로는 함께 늙어가고, 밖으로는 별 탈이 없으며, 아래로는 여러 자제들이 난초의 뿌리처럼 함께 자라고, 손자들이 난초의 잎처럼 서로 비추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복의 풍성함이 오늘날 같은 말세에 견줄만한 이가 드물었다. 모르겠지만, 어떻게 수양(修養)했기에 향유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인가? 듣건대, 맏아들 해수(海秀)가 부지런히 일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여 효성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의복과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휼해 주었다고 하니, 상서로움을 가져오고 복을 받는 것이 또한 여기에서 한 단서를 증험해 볼 수 있다.고을 사람들이 서로 경축하고, 벗들이 모여 축하하며 시를 읊어 주고받은 것이 책을 이룰 만큼 쌓이자, 그해 가을에 손주를 안은 성욱(性煜)이 초라한 내 집으로 찾아와 그 일에 대한 서문을 지어 첫 부분을 장식해주길 요청하였다.아, 나도 올해 또한 회갑이 되는 사람이지만, 이미 병으로 피폐한데다 또 홀로 곤궁하게 지내고 있으니, 덕과 복이 있는 집안사람과 비교하면 그 운수가 미치지 못함이 어찌 30리 뿐이겠으며, 옥돌 잔에 들어있는 술과 질항아리에 담긴 평범한 음식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병을 무릅쓰고 글을 지어 부럽게 여기는 뜻을 담아 보내고, 또 같은 세상을 함께한 동경(同庚 동갑(同甲))으로 인생의 막바지에 만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칠 따름이다. 人生六十。古人謂之下壽。然世降氣促。民多夭折。幸而至於此者。又多衰癃窮獨。索然無聊。蓋於人而得下壽者。未爲十之二。下壽焉而氣數無恙者。又未爲五之一所謂陽一而陰二。吉少而凶多者。乃理勢之使然也。余聞禮洞河君舊甲晬日。在於今春。而行壽老之宴者。有日矣。家溫身康。內而偕老。外而無故。下而羣蘭倂茁。孫葉交映。其天餉之豊。在今衰叔而鮮見其比。未知何修而所享若是。聞其胤子海秀。服勤致養。以孝著聞。縮衣節食。以賙貧乏。其所以致祥受福。亦可卽此而驗其一端矣。鄕閭相慶。朋友聚賀。歌詠酬唱。積爲卷軸。其年秋。抱孫性煜過敝廬。請序其事以弁其端。嗚呼。余於今年。亦爲回甲人矣。而旣病廢矣。又窮獨矣回視德門福家。其氣數之不相及。奚啻三十里哉。瑟瓚黃流。瓦缶褻味。蓋不可易也。玆敢力疾行墨。以酬歆艶之意。又以寄倂世同庚戀戀覯降之思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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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순81) 【재덕】에게 답함 答吳景純【在德】 보지 못한 지 지금 얼마나 되었는가? 한 통 편지를 받은 기쁨이 백붕(百朋)82)에 대적하네. 더구나 앓던 병이 점차 화평해져 음식과 동작이 거의 평상시와 같은 줄 알게 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섭양하고 조리함에 방도가 있을 뿐 아니라 화락한 군자를 신명이 도움이 정히 응당 이와 같으니, 매우 위로되는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다시 바라건대 더욱더 자애하여 소소한 남은 증세는 마치 눈이 햇빛을 보고 녹듯이 다 사라질 수 있도록 하시게. 의림(義林)은 이전에 지나가다가 여러 차례 그대 집을 찾아갔으나 서로 어긋나 만나지 못하였네. 그러나 병중의 동정은 매번 인편을 통해 종종 물어서 알고 있었네. 고인은 병중에 이치를 보아 득력(得力)한 것이 많으니, 대개 외물과 접하지 않아 잡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네. 그대 또한 응당 알고 있는가?[문] 《중용》은 인물로부터 말하였기 때문에 도(道)가 성(性) 뒤에 있고, 《대전(大傳)》에서는 조화(造化)로부터 말하였기 때문에 도가 성의 앞에 있는 것입니까?[답] 《대전》은《주역》〈계사전(繫辭傳)〉을 가리켜 말하니, 이른바 "일음일양(一陰一陽)……"이라 한 것83)을 말하는 것인가? 계사는 천도(天道)로 말하였고, 《중용》은 인물(人物)의 도(道)로 말하였네.[문] 원두(源頭)로부터 말하면 성(性)은 만물의 한 근원[一原]인데, 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는 것은 기품(氣稟)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까?[답] 이른바 한 근원이라는 것은 본래 기를 떠나 독립한 곳에 있으니, 단지 기에 나아가 오로지 본래 없는 오묘함[本無之妙]을 가리킨 것이 이것이네. 또한 모름지기 한 근원은 또한 구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네.[문] 재(才)는 의리(義理)에 나아가 말하고 재(材)는 용(用)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까?[답] 재(才)는 덕(德)의 용(用)이니 사람의 능력이고, 재(材)는 재료를 말하는 것이네.[문] 정자(程子)가 "둘로 하면 옳지 않다.[二之則不是]……"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 성(性)만을 논하고 기질을 논하지 않으면 타고난 자질의 다름을 볼 수 없고, 기질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의리가 같음을 볼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접때 애장(艾丈)84)의 말과 서로 어긋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답] 애장의 말 또한 이와 같은데, 무엇으로 서로 어긋난다고 하는 것인가? 다만 주자가 해석한 '불시이지(不是二之)'는 '불시(不是)'의 주석인데, 경순(景純)은 생각건대 잘못 인용한 것 같네.[문] 《맹자》 〈고자 하(告子下)〉순발어견묘장(舜發於畎畝章)에서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부귀한 집안에서 생장하여 겪을 우환이 없는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안락함이 두려워 할 만함을 염려하고 천명은 일정하지 않음을 생각하여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부귀에 가려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곤심 횡려(困心橫慮)85)하여 비로소 살 수 있는 방도입니까?[답] 근심이 없었던 사람은 문왕(文王)인데도 "조심하고 공경하였다."라고 하고, "밥 먹을 겨를도 없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86) 이것은 천고 심법(心法)의 종지(宗旨)이네. 不相見今幾時。一書喜敵百朋也。矧審愼節漸次向和。飮饍興作。幾於視常者乎。此是攝理調養。不惟有方。而神相愷悌。定應如此。慰慰曷已。更願益加自愛。使小小餘證如雪見晛也。義林前此經過。累次扣扁。而交違未面。然其所愼動靜。每因便而種種問知耳。古人於病中看理。多所得力。蓋外物不接。雜慮不作故也。未知吾友亦應諒之耶中庸自人物而言。故道在性後。大傳自造化而言。故道在性先耶。大傳指易繫辭而言。所謂一陰一陽之云耶。繫辭以天道言。中庸以人物之道言。自源頭言。則性者萬物之一原也。而爲人爲物。在於氣稟之不同。所謂一原。本在離氣獨立之地。只是就氣上。專指本無之妙是也。且須知一原。亦非無分之謂。才就義理說。材就用上說耶。才是德之用也。人之能也。材是材料之謂。二之則不是云云。朱子解之曰。論性不偏氣。則無以見生質之異。論氣不論性。則無以見義理之同。與向日艾丈之言。相爲向背者何耶。艾丈之言亦如此。何以謂相背耶。但朱子所解。不是二之則不是底註脚。景純想誤引矣舜發於畎畝章。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若生長富貴。無憂患可歷者。當如之何。必也念安樂之可畏。思天命之無常。戒謹恐懼。不爲富貴之所蔽者。是乃困心衡慮方生之道也耶。無憂者文王。而其不曰小心翼翼不遑暇食乎。此是千古心法宗旨。 오경순(吳景純) 오재덕(吳在德, 1874~?)을 말한다. 자는 경순, 호는 제월(齊月),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백붕(百朋) 많은 재물을 뜻한다. 옛날에는 패각(貝殼)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5패를 1관(串)이라 하고 2관을 1붕(朋)이라 했다 한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고 보니, 나에게 백붕을 준 것 같도다.[旣見君子, 錫我百朋.]"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이른바……것 《주역》〈계사 상(繫辭上)〉 제5장에 "일음일양을 도라고 하니, 잇는 것이 선이고, 이룬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애장(艾丈)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곤심 횡려(困心橫慮) 노심초사하면서 떨쳐 일어날 계책을 세우라는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마음에 곤하고, 생각에 걸린 뒤에 분발한다.[困於心 橫於慮而後作]"라고 한 것을 말한다. 근심이……않았던가 《중용》 제18장에 공자가 "근심 없는 자는 오직 문왕이로다! 〔無憂者, 其惟文王乎! 〕"라고 한 것과《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오직 이 문왕만이 조심하고 공경하셨네.[維此文王, 小心翼翼.]" 라고 한 것과《서경》 〈주서(周書) 무일(無逸)〉에 "아침부터 한낮과 저녁이 되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민을 평화롭게 하였다.[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和萬民.]"라고 한 것을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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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87) 【기호】에게 답함 答李景元【基皓】 지난 날 찾아 왔을 때 저녁이 되어 문득 떠났으니, 뒤 미쳐 생각함에 서글프고 허전한 마음이 마치 목에 음식물이 걸린 것 같았는데, 뜻밖에 편지를 받아 감사한 마음 참으로 깊었네. 인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절도가 줄곧 많은 복을 누리고 있는 줄 알았으니, 위안되는 마음 실로 깊었네. 그대 공부가 지금 《근사록》을 보고 있다고 하니, 매우 좋네. 의리의 정미함은 이 책보다 상세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능히 익숙히 읽고 정밀히 생각하여 하나하나 체인(體認)한다면 이른바 '비상한 기질'을 반드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네. 편지에서 "춘생지(春生之)……"라고 하였는데, 봄은 봄기운이 생기고 여름엔 봄기운이 자라고 가을엔 봄기운이 성숙하고 겨울엔 봄기운을 간직해 두네. 그러므로 봄이 사시의 처음이 되는 것이 인(仁)이 사덕(四德)의 장(長)이 되는 것과 같네. 또 춘하추동의 이치는 하늘에 있어서는 원형이정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의예지가 되니, 이 이치를 밝게 터득하면 어찌 극기복례(克己復禮)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체(體)는 체용(體用)의 체가 있고 체단(體段)의 체가 있으니, 대개 귀산(龜山)88)은 만물이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인(仁)으로 여기니, 호상(湖湘)89)의 학자들이 이것을 인의 체라고 여겼네. 그렇다면 이 '체' 자는 체용과 체단을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이네. 모든 사물은 체와 용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나무의 뿌리는 체이고 그 지엽은 용이며, 물의 근원은 체이고 갈래의 물줄기는 용이네. 인심(人心)에 있어서는, 미발(未發)은 체가 되고 이발(已發)은 용이 되며, 사덕(四德)은 체가 되고 사단(四端)은 용이 되네. 체단의 체 같은 것은 그 당체(當體)의 실두(實頭)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말의 맥락이 조금 다르네. 그 아래 문장에서 주가가 말하기를 "이것은 인(仁)의 체가 아니라, 인의 양(量)이다."라고 하였으니,90) 원컨대 경원(景元)은 여기에 더욱더 생각하여 무엇이 인의 체가 되며 무엇이 인의 양이 되는지를 뚜렷하고 분명하게 한다면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네. 向日枉顧。觸暮旋發。追念悵缺。如物在喉。匪意承書。感戢良深。因審侍中節宣。連膺茂祉。慰浣實深。盛課今在近思錄云。甚善甚善。義理精微。莫詳於此書。苟能熟讀精思。一一體認。則所謂甚生氣質。必有以得之於此矣。示中春生之云。夫春者春之生也。夏則春之長也。秋則春之成也。冬則春之藏也。故春爲四時之首。仁爲四德之長者然也。且春夏秋冬之理。在天爲元亨利貞。在人爲仁義禮智。曉得此理。豈不可以克己復禮乎。且體有體用之體。有體段之體。蓋龜山以萬物與我爲一。爲仁。湖湘學者。以此爲仁之體。然則此體字。兼指體用體段而言之也。凡物莫不有體有用。木之根體也。而其枝葉用也。木之源體也。而派流用也。在人心。則未發爲體。已發爲用。四德爲體。四端爲用。若體段之體。指其當體實頭而言。語脈微別矣。其下文朱子曰。此不是仁之體。是仁之量。願景元於此。更加入思。以爲何者是仁之體。何者是仁之量。使之了了分明。想不無益。 이경원(李景元) 이기호(李基皓, 1874~?)를 말한다. 자는 경원,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귀산(龜山) 송(宋)나라 때 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이다. 자는 중립(中立)이다. 정호(程顥)ㆍ정이(程頤)의 제자로, 뒤에 도남학(道南學)을 창시하였다. 정호ㆍ정이의 학문은 양시를 거쳐서 나종언(羅從彦)에게 전해지고, 다시 이동(李侗)을 거쳐서 주희(朱熹)에게 전해졌다. 저서로는 《귀산집》이 있다. 호상(湖湘) 호는 동정호(洞庭湖), 상은 상강(湘江)을 말하는데, 호굉(胡宏)이 호상학파(湖湘學派)를 개창하였다. 주가가……하였으니 《주자어류》권6〈성리3(性理三) 인의예지명의(仁義禮智等名義)〉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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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락【내귀】에게 답함 答趙仲洛【來龜】 오래 격조하던 차에 한 폭의 고마운 편지는 어찌 보배로운 큰 옥98)과 같을 뿐이겠는가? 더구나 여행하는 체후가 손상이 없음을 알았으니, 위로되고 후련한 마음 말할 수 없네. 모르겠으나 가르치고 배우는 여가에 옛날 학업은 한결같이 긴요한데 착수하여 실마리를 찾았는가? 이 일은 단지 뜻 세움에 책임이 있으니, 뜻을 세우지 못하면 실로 말할 만한 것이 없네. 뜻이 진실로 서면 그 면려하고 신칙하는 것은 어찌 곁에 있는 사람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치 나그네가 집으로 가고 밥 먹는 사람이 배부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계단과 길, 절도는 스스로 아는 곳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세월은 쉽게 흘러가고 공부는 진보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네.[문]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궁리(窮理)', '진성(盡性)', '지명(至命)'이라 하였는데, '궁(窮)', '진(盡)', '지(至)'라고 한 것은 대개 천하의 사물은 이(理)가 있지 않는 것이 없지만 오직 이(理)에 궁구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에 그 지(知)가 다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반드시 궁구한 뒤에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궁' 자를 놓았던 까닭입니다. 성(性)은 나에게 있는 것이고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 다만 능히 들어서 다할 뿐입니다. 또 만물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데 잠시 외면하는 마음이 있으면 문득 성을 다하지 못하니, 이것이 '진' 자를 놓았던 까닭입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는데, 이미 성을 다하면 명(命)에 이르기 때문에 "성을 다하여 명에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지' 자를 놓은 까닭입니다.[답] '궁' 자는 '궁구 사색[窮索]'의 공이 될 뿐 아니라, 또 '궁극(窮極)'의 뜻이 있네. 그대가 논한 것은 의의가 있는 듯 하지만 다만 '재유외지지심(纔有外之之心)'은 '일리미명(一理未明)'으로 고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문] 이(理)는 철두철미하여 포함하지 않음이 없으니, 선과 악은 이(理)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이 이를 말함에 대부분 모두 선을 말하고 악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개 이것은 세상을 따라 교구(矯捄)하는 뜻입니다. 고인은 이를 말하지 않았으나 다만 '중(中)', '충(衷)', '칙(則)', '이(彝)'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중', '충', '칙', '이' 등의 글자는 변하여 하나의 '이'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 자를 "순전히 선하여 악이 없다.[純善而無惡]"라고 하는 까닭입니다.[답] 이는 비록 포함하지 않음이 없지만 또한 어찌 일찍이 그 가운데 악을 포함하였던가? '무소불포(無所不包)' 네 글자는 실로 모르는 사람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하문에 지금 사람은 이를 선으로 말하고 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크게 실언한 것에야 어떠하겠는가?[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보건대, 정 선생의 뜻은 스스로 주재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단지 하나의 심(心)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함으로 인해 도리어 두 개가 있는 듯하니, 자세히 보면 이것은 하나의 심이다."라고 하였으니,99) 어떻게 스스로 주재가 될 수 있습니까?[답] 스스로 주재가 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곳이네. 안배하고 조작하여 종종 병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 능히 스스로 주재가 되지 못하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네. 阻閡之久。一幅惠墨。何趐爲尺葵拱璧也。矧審旅體無損。慰豁不可言。未知斅學之餘。舊業一着。喫緊就緖否。此事只在責志。志不立。則固無話可說。志苟立矣。則其勉勵勸勅。豈在傍人之頰舌哉。如行者之赴家。食者之求飽。而其階逕節度。自有領略處矣。如何如何。日月易得。功夫難進。此是可憂也。窮理盡性至命。曰窮曰盡曰至者。蓋天下之物。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故其知有不盡。是以必窮之而後可知。此所以下窮字。性是在我者。非由外而得。但能擧而盡之而已。且萬物皆備於我。纔有外之之心。便是不盡性。此所以下盡字。天命之謂性。旣盡性則可以至命。故曰盡性知命。此所以下至字。窮字。非惟爲窮索之功。且有窮極之義。所論似有義。但纔有外之之心。改以一理未明。如何。理是徹頭徹尾。無所不包。善惡莫非理。然則今人言理。擧皆以善言。而不以惡言之者。何也。蓋是隨世矯捄之義。古人不言理。但有曰中曰衷曰則曰彝之語。及至乎今。中衷則彝等字。變而爲一理字。此所以以理字。謂純善而無惡。理雖無所不包。亦何嘗包惡在其中。無所不包四字。固不可對不知者言之。況下文今人言理以善。不以惡者。大是失言。程子曰。以心使心。朱子曰。觀程先生之意。說自作主宰耳。只是一箇心。被他說得來。却似有兩箇。仔細看來。只是這一箇心。如何可以自作主宰。自作主宰。此是要處。安排造作。種種病痛。皆從不能自作主宰中出來 보배로운 큰 옥 저본의 '척규공벽(尺葵拱璧)'을 풀이한 말이다. '葵'는 '圭'의 오자로 보인다. 정자(程子)……하였으니 《주자어류》권34〈논어16(論語十六) 술이편(述而篇)〉인원호재장(仁遠乎哉章)에 나오는데, 글자의 출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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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헌기 鶴軒記 죽수(竹樹 능주(綾州)) 남쪽 20리에 화학산(華鶴山)50)이 있는데, 산이 높고 골짝이 깊어 구름 낀 숲이 창연하였기에 예로부터 많은 일인(逸人)과 달사(達士)들이 그 사이에서 소요하며 머물렀다. 그런데 김공 석문(金公錫文)이 이곳에 터를 잡고서 30여 년 동안 발이 산에서 나가지 않은 채 어리석음을 껴안고 졸렬함을 지켰으며, 쟁기와 괭이를 잡고 굶주리면서 목석과 함께 늙어 갔으니, 자신을 감추는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산 밖 사방의 이웃들이 이미 그의 이름을 알았고, 단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뒤이어 학헌 거사(鶴軒居士)라 불렀다.《시경》에 이르기를,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울음소리가 들녘에 들리도다."51) 하였고, 《주역》에 이르기를,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52) 하였다. 무릇 지성(至誠)이 밖으로 드러나고, 믿음이 만물에 미쳐가는 것이 본래 이와 같은 점이 있으니, 이 이후로 그 소문이 미쳐가는 바가 또 어찌 단지 여기에 그치겠는가.맏아들 기경(箕敬)이 나를 따라 공부하였기에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竹樹南二十里。有華鶴山。山高谷邃。雲林蒼然。自古多逸人達士。盤旋其間。金公錫文卜築於此。三十餘年足不出山。抱愚守拙。把犂鋤而餓。同木石而老。其所以輡晦者。可謂至矣。而山外四隣。己知其名。不但知其名。又從以號之曰鶴軒居士。詩曰。鶴鳴九皐。聲聞于野。易曰。嗚鶴在陰。其子和之。夫誠之著外。孚之及物。自有如此者。自玆以往。其所聞所及。又豈但止此哉。允子箕敬從余遊。請爲之記。 화학산(華鶴山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과 도암면에 걸쳐 있는 산(614m)으로, 산세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학이……들리도다 《시경》 〈학명(鶴鳴)〉에 나오는 구절로, 학은 보통 은거하는 현자를 상징하고, 깊은 산중에서 우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녘에 들린다는 것은 아무리 깊은 곳에 은둔하더라도 진실한 덕은 감출 수 없어 저절로 알려지게 된다는 말이다. 우는……화답하도다 《주역》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에 나오는 말로,  지성(至誠)에 감통(感通)하여 동류들이 서로 응함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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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기 五峯記 오봉산(五峰山)도 능주(綾州) 남쪽의 여러 산처럼 명망이 있는 산으로, 차례대로 나란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줄지어 나는 기러기 같고, 뾰족하게 솟구쳐 있는 삼엄한 모습은 적을 상대하는 창 같으며, 동글고 두터우며 한데 뭉쳐있는 모습은 마치 봄기운을 머금은 연꽃 같았으니, 하늘에 배치하고 땅에 펼쳐 놓은 것이 귀신이 그려놓은 그림처럼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곧 이 산이 있었으니, 정령(精靈)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몇 사람이 배출되었겠으며, 수석(水石)을 완상하는 이곳에서 몇 사람이 소요했겠는가? 돌이켜 아스라이 생각하자니 아득하게 연기와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진다.나의 벗 오군 기서(吳君基瑞)는 산 아래 사람이다.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게 되자 얽매임에서 벗어나 산수에 뜻을 부치고서 지팡이 짚고 거니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유람의 즐거움을 다하면서 문을 닫아건 옛집에서 병든 몸을 돌보고 늙음을 기다리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대체로 그 풍취와 기상은 사람과 땅이 서로 부합하고, 비경과 마음이 서로 맞았다고 이를 만하다.나는 풍파에 시달리는 일개 백성일 뿐으로, 병진년(1856)에 덕동(德洞)에서 산 아래로 옮겨가서 우거하다가 정묘년(1867)에 가족을 데리고 구봉산(九峯)으로 들어갔고, 정해년(1875)에 구봉산에서 산 아래 옛적에 거처했던 곳으로 돌아왔으며, 경인년(1890)에 천태산(天台山)53) 산중으로 들어왔으니, 전후로 30여 년 동안 동서남북으로 무상(無常)하게 옮겨 다녔지만, 산은 진실로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아, 기구하고 험난한 여생 동안 티끌 같은 세상의 인연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명산의 물과 바위 사이에서 평생의 좋은 벗과 함께 늙어가지 못했다. 산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저버린 적이 많았으니, 그러한즉, 시종 산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으로 또 누가 군만 하겠는가. 오봉산이 훌륭한 주인을 만난 것을 축하하며 인하여 기문(記文)으로 삼기 바란다. 五峰亦綾南群山之望也。列立比次。如鴻雁之聯翩。尖秀森嚴。如戈戟之待敵。圓厚融結。如芰荷之含春。天排地鋪。鬼繪神畵。有不可名狀。噫。自開闢以來。便有此山。精靈所會。鍾得幾人出來。水石所賞。住得幾人盤旋。緬思追想。茫茫然烟銷雲空。余友吳君基瑞。山下人也。早業功令。累試不中。擺脫絆累寓意山水。一笻一屨。極其游歷。杜門舊庄。爲養病待老計。蓋其風韻氣趣。可謂人地相符。境情相得也。余一風波氓耳。歲丙辰。自德洞搬寓山下。丁卯挈家入九峯。丁亥自九峯返山下舊居。庚寅入天台山中。前後三十餘年。東西南北遷徙無常。而山固自如矣。嗚乎。崎險餘生。塵緣未袪。不得與平生好友共老於名山水石之間。山不負人。而人之負山多矣。然則終始不負山。又孰若君。願爲五峯山賀得好主人。因爲之記。 천태산(天台山) 화순군 도암면 천태리에 자리한 산(482m)으로 능주의 서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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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미정기 木美亭記 내가 듣건대, 천관산(天冠山)54) 북쪽에 높이 우뚝 서 있는 산을 우산(牛山)이라 하고, 산 아래에 날아오를 듯 있는 정자를 목미정(木美亭)이라 하는데, 고(故) 악와(樂窩) 안 처사(安處士)55)가 축조하고,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56)이 이름을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다만 모르겠지만, 그 산의 나무는 맹자 때에 이미 그 기름을 잃어서 민둥산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57), 더욱이 수천 년이나 지난 뒤에 어찌 유독 그렇지 않아서 도리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진(秦)나라 내의 황죽(篁竹)은 옛날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고, 낙양(洛陽)의 모란[牧丹]58)은 과거에 없었으나 후대에는 있게 되었으니, 그 물산(物産)의 번성과 쇠퇴는 또한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매양 한번 찾아가고 싶었지만 병으로 발걸음이 미치지 못하다가 근년에 산 아래의 벗이 찾아와 종유(從遊)할 수 있었는데, 기상과 풍모가 대체로 범상치 않은 것이 요림 옥수(瑤林玉樹)59)와 같아서 매우 애호할 만하였다. 아, 평소 자나 깨나 잊지 못했던 이 산을 방문을 나가지 않고서도 만날 수 있었으니, 물산은 본디 번성과 쇠퇴가 있지만, 진실로 수양함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속적인 해침에서 벗어나 성취한 바가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아, 맹자는 어느 때 사람이며, 우산(牛山)은 어느 지역에 있었던가? 누가 그 말을 만 리 머나먼 바닷가에서 비로소 서로 얻어 왕춘(王春)60)의 한 가닥 맥으로 하여금 얼음이 어는 한겨울과 같은 시기에 실추되지 않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이후로 또 어찌 숭산(嵩山)의 다섯 아름 되는 나무와 형산(衡山)의 천 길 되는 재목이 장차 숲을 이루며 빽빽하게 늘어서서 큰 집을 지탱하고 용마루를 떠받드는 기둥으로 쓰이지 않을 줄 알겠는가. 이것이 악와공이 이 정자를 짓게 된 뜻이다. 그러나 식물도 또한 다양하니, 여름에 휴식을 얻고 가을에 열매를 얻는 것은 어떤 식물이며, 휴식을 얻지 못하고 가시를 얻는 것은 어떤 식물인가? 이는 씨를 뿌리는 초기에 구별되는 바이니, 굳이 성숙해지는 때를 기다려 "좋은 쑥이 아니라 나쁜 쑥이로다."61)라는 탄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양하는 방법은 우산장(牛山章)에 갖추어져 있어 평소에 익혔을 것이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나는 잡목 같은 졸렬한 자질로 풍상(風霜)에 곤욕을 당하여 오래도록 사방 한 치 되는 나무조차 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면 남은 풍교를 뒤따라서 구구하나마 상유(桑楡)의 시기62)에 다소간 봉마(蓬麻)의 도움63)을 받을 수 있을까? 余聞天冠之北。有巋然而特立者曰牛山。山之下。有亭翼然曰木美。故樂窩安處士所築。錦谷宋先生所錫名也。但未知其山之木。在孟子時。已失其養而至於濯濯。況後於數千載。何獨不然。而乃以美云耶。然秦中篁竹。昔有而今無。洛陽牧丹。前無而後有。其物産盛衰。又不可以一槩可評。每欲一者屨及。而病未能焉。近年得山下友之過從。氣象風裁。槩不草草。若瑤林玉樹。蔚然可愛。噫。平日所寤寐此山者。不出戶而可以覯降矣。物產固有盛衰。苟非有養焉。則安能免於侵尋。而其所就乃爾耶。嗚乎。孟子何時。牛山何地。誰謂其說乃始相得於海荒萬里之濱。使王春一脈。不墜於窮陰堅冰之時耶。率是以往。又安知無嵩山五園之樹。衝山千尋之材。將林立叢列而爲支厦負棟之用耶。此是樂窩公經始之意也。然植物亦多矣。夏得休息而秋得其實者。何物。不得休息而得其刺者。何物。此在下種之初所當區別。不必待日至之時而有匪莪伊蒿之歎也。若其滋養之術。牛山章備矣。講之素矣。夫何贅焉。余以樸樕劣品。厄於風霜。不得爲方寸之木久矣。安得追躡餘風。以受多少蓬麻之助於區區桑楡之日乎。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면 일원에 위치한 산(723m)이다. 악와(樂窩) 안 처사(安處士) 안국심(安國心, 1838~1890)으로, 악와는 그의 호이다.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 조선후기에 부호군, 대사헌, 찬선 등을 역임한 문신 송내희(宋來熙, 1791~1867)로, 금곡은 그의 호이다. 자는 자칠(子七)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838년(헌종 4)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된 후 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으며,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금곡문집(錦谷文集)》이 있다. 그……이르렀는데 목미정이 자리한 산의 이름이 우산(牛山)인 연유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 우산장(牛山章)에서 맹자가 양심(良心)을 잃게 되는 이유를 말하면서 제(齊)나라 동남쪽에 있는 우산이 무성하게 우거졌지만, 도시 근처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끼로 베어 가고, 또 소와 양이 남은 그루터기의 싹을 뜯어 먹어서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낙양(洛陽)의 모란 당나라의 측천무후(624~705)가 어느 겨울날, 꽃나무들에게 당장 꽃을 피우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다른 꽃들은 모두 이 명령을 따랐으나 모란만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불을 때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려고 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화가 난 황제는 모란을 모두 뽑아서 낙양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이후로 모란은 '낙양화'로도 불리게 되었고, 불을 땔 때 연기에 그을린 탓에 지금도 모란 줄기가 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2004, 나카무라 고이치, 뿌리와이파리.) 요림 옥수(瑤林玉樹) 요림 경수(瑤林瓊樹)와 같은 말로, 옥으로 이루어진 숲의 옥으로 만들어진 나무처럼 인품이나 풍도가 매우 고결하고 훌륭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이 당시의 태위(太尉) 왕연(王衍)을 두고 "태위는 신성한 자태가 고상하여 마치 옥으로 이루어진 숲의 옥으로 만들어진 나무와 같으니 자연히 풍진(風塵) 밖의 인물이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43 王戎列傳》 왕춘(王春) 음력으로 신춘(新春)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을 표시하기 위해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 조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데서 유래하였다. 좋은……쑥이구나 《시경》 〈육아(蓼莪)〉에 보인다. 상유(桑楡)의 시기 저물녘에 떨어지는 해가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봉마(蓬麻)의 도움 훌륭한 벗의 도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자라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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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 이공 묘지명 藥圃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영복(永複), 자는 계실(季實), 호는 약포(藥圃)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다.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휘 선제(先齊) 호 필문(篳門)에 이르러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는데,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천거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종덕(種德)인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경(㯳)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조부는 휘 필광(必光)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언구(彦矩)이니,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성중(全聖中)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27) 5월 22일에 공을 화산리(華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천품이 온후하고 굳세고 방정하였다. 집안에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겨 아우와 자식 된 직분에 매우 충실하였다. 여력이 있고 한가한 날이면 등불을 밝히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여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르러 문사(文詞)가 넉넉하여 시원스레 통하였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끝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과거 공부는 접고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여 애오라지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렸으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성실한 뜻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늙은이와 젊은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믿고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흉년을 당했을 적에 수확한 벼가 논에 남아 있었는데, 밤에 가서 보니 어떤 사람이 벼를 훔쳐서 가다가 공을 보고 이랑 사이에 숨겼다. 공이 그에게 의리에 대해 말하면서 정성스럽게 깨우쳐 주니 그 사람이 사죄하고 돌아가서는 결국 착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상 군자(梁上君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간 군자(畝間君子)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웃 마을에 살인자가 있어 장차 관아에 고하려고 하였는데, 마을 사람이 모두 달아나고자 하니, 공이 엄히 금하여 농사 짓는 사람은 농사짓게 하고 독서하는 자는 독서하게 한 다음 공은 뜰을 쓸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서 관원을 맞이하자, 관원이 마음대로 침탈하는 바가 없어 마을이 마침내 편해졌다.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퍼하기를 예법에 정한 것보다 더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니, 향리에서 감동하여 마침내 상위 관아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무자년(1768, 영조44) 1월 21일에 졸하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론(公論)이 위에서 행해지지 않아 인재가 아래에서 흩어져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와 같이 의(義)를 행하고 이와 같이 원대한 뜻을 품고 외진 곳에 서 은거하여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는 실로 보탬이 되거나 손해되거나 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으로 보아서는 어떻다고 하겠는가. 바다에 빠뜨린 진주25)는 비록 열 겹으로 감싸서 광채를 숨기더라도 백세의 뒤에까지 절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배위(配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박성곤(朴聖坤)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광국(光國), 광렬(光烈), 광인(光寅), 광진(光震)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사욱(文思郁), 흥덕(興德) 장계인(張啓仁)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한휘(漢徽), 덕휘(德徽)이고, 딸은 강욱(姜旭)에게 출가하였다. 차자의 아들은 만휘(萬徽), 주국(周國), 주장(周璋), 주진(周鎭)이고, 딸은 문영기(文永璣)에게 출가하였다. 셋째는 주국(周國)을 양자로 삼았다. 넷째의 아들은 숙휘(淑徽)이고, 장녀는 경주(慶州) 김일기(金馹基)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밀양(密陽) 박영호(朴英浩)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손 태휴(泰休)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시례의 가문에 詩禮門庭효도와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네. 孝友式穀광채를 감추었으니 潛光含章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 없었네. 世莫我識선조가 공덕을 쌓고 누리지 않아 積累不食후손들이 복 받았네. 雲仍蒙福지동의 무덤에 池洞斧堂억만년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億 公諱永複。字季實。號藥圃。李氏系出光山。勝朝左僕射諱珣白爲鼻祖。至諱先齊。號篳門。官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薦至吏曹參議。皆其顯祖也。高祖諱種德。丙亂擧義。贈吏曹參議。曾祖諱㯳。贈僉中樞。祖諱必光。贈掌樂院正。考諱彦矩。同中樞。妣天安全氏聖中女。以英宗辛未五月二十二日生。公于華山里。公天稟溫厚剛方。八事父兄。出事長上。甚得弟子之職。餘力暇日。焚膏懸䯻。刻苦下功。年至成童。文詞贍暢。累捷鄕解。竟屈禮部。於是謝絶擧業。隱居求志。聊以自娛。平心率物。推己恕人。惻怛之情。孚實之意。交濟竝行。是以鄕里之間。老少上下。無不信服。嘗遇飢歲。稷禾棲畝。乘夜行視。有人竊禾以去。見公。匿於畝間。公爲陳義理。曉喩諄諄。其人服罪而去。卒爲善人。人曰。古有梁上君子。今爲畝間君子。村隣有殺人者。將告官。村人皆欲逃避。公嚴禁之。使耕者耕。讀者讀。公掃庭除。具衣冠。出迎官。官人無所肆其侵掠。村中遂晏如也。遭艱。哀毁踰節。廬墓三年。鄕里感賞。遂剡薦于上司。除童蒙敎官。戊子正月二十一日卒。葬池洞前麓午坐原。嗚呼。公論不行於上。而人才散逸於下久矣。以若行義。以若抱負。隱淪遐荒。世無知者。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謂何如耶。滄海遺珠。雖十襲鞱輝。而百世之下。自有不可得而掩者矣。配順天朴氏聖坤女。有四男二女。光國光烈光寅光震。女適南平文思郁。興德張啓仁。長房男漢徽德徽。女適姜旭。二房男萬徽周國周璋周鎭。女適文永璣。三房周國爲後。四房男淑徽。女長適慶州金馹基。次適密陽朴英浩。會孫以下不盡錄。玄孫泰休徵玄石之銘。不敢辭。銘曰。詩禮門庭。孝友式穀。潛光含章。世莫我識。積累不食。雲仍蒙福。池洞斧。堂芬苾千。億 바다에 빠뜨린 진주 보배를 모으는 사람이 바닷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여 빠뜨렸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여 등용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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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교수 이당 박공 묘지명 東學敎授梨堂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승수(承洙), 자는 석여(錫汝), 호는 이당(梨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가 신라(新羅)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에게서 나왔다. 후세에 여덟 명의 대군(大君)이 분봉(分封)하게 되었으니, 그 장자가 밀성군(密城君)으로, 바로 밀성 박씨로 계보가 나누어지게 된 선조이다. 후손 가운데 휘 현(鉉)이 있으니, 고려 때 사헌부 규정(司憲府紏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문유(文有)를 낳았는데,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사경(思敬)을 낳았는데,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심(忱)을 낳았는데, 본조에 들어와 개국원종훈(開國原從勳)으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강생(剛生)을 낳았는데,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이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절문(切問)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중손(仲孫)을 낳았는데, 호는 묵재(默齋)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미(楣)를 낳았는데, 호는 존성재(號存誠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광영(光榮)을 낳았는데,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모두 합격하고 형조 참판을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난(蘭)을 낳았는데, 호가 오정(梧亭)이고,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평군(密平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인원(仁元)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전한(典翰)을 지냈다. 이분이 휘 준현(俊賢)을 낳았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호종훈(扈從勳)에 책록(策錄)되었다. 이분이 안정(安檉)을 낳았는데, 참봉(參奉)을 지냈고,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모친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유현(金有鉉)의 따님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파주(坡州)의 덕현(德峴)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재성(才性)이 영특하여 문학을 일찍 성취하였다. 일찍 성균관에 들어가 동학 교수(東學敎授)에 제수되었다. 사우(師友)들과 교유하고 출중한 사람들과 사귀어 끊임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더욱더 확충하여 훌륭한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다. 공은 퇴우당(退憂堂) 휘 승종(承宗)과 더불어 종고조(從高祖) 형제가 된다. 퇴우당이 화를 당한 뒤에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얼마 되지 않아 또 병자호란이 일어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공은 마침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전주(全州)의 봉서산(鳳棲山) 선영 아래에 이르러 거처하였다. 3년을 거처하였는데 도회지와 가까워 출세를 위해 인연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한강(韓康)26)의 이름을 아는 자가 다만 한 여자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을 보고, 이에 남쪽 변방 산골 가장 깊은 곳을 찾다가 능주(綾州) 이목동(梨木洞)에 이르러 멈추었다. 숲속에 집을 짓고 고용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름이 문밖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발은 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림자를 숨기고 자취를 없애며 교유를 끊어 세상을 버린 백성으로 자처하여 스스로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공이 어느 곳에서 떠돌아다니는지 몰랐고,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공이 귀족의 자제인 줄 몰랐다. 여유롭게 노닐면서 배운 것을 익히고 노닐면서 익히듯이 학문에 전념하여 뽕을 따는 자처럼 한가롭고,27) 대식(代食)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좋아하여28) 인간 세상에서 더이상 종경(鍾磬)과 옥백(玉帛)이 어떤 물건인지 몰랐다.정사년(1677, 숙종3)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 거처하던 곳 뒤쪽 산기슭 자좌(子坐)에 장사 지내고 부인과 합장하였다. 배위(配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참판 이무(李武)의 따님이다.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자희(自禧)이다. 손자는 일징(逸徵), 초징(楚徵)이다. 초징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이름이 성원(晟源)으로 장자의 후사가 되었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대대로 훌륭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태평성대의 명사(名士)로, 그 포부와 조예는 장차 이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가문의 운수가 떨치지 못하고 시사(時事)에 어려움이 많았다. 마침내 천애(天涯)의 머나먼 변방에 초연히 은둔하여 폐인으로 자처하여 생을 마감하였으니, 탁월한 풍격은 먼 후대에 서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 할 것이다. 다만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과 남은 향기가 파묻힌 채로 알려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자손의 무궁한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9세손 학(鶴)이 와서 깊이 개탄하며 전해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수습하여 장차 묘도(墓道)에 새기려고 하면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번다함 사절하고 고요한 곳 찾아 謝繁就靜외진 물가에 이르렀네. 止于遐濱은거할 곳 마련하였는데 菟裘是卜이곳에 새로 무덤을 만들었네. 斧堂仍新두텁게 쌓으면 반드시 발현하고 厚積必發오래도록 막히면 반드시 펴지게 마련이네. 久屈必伸후손이 번창하리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시냇물처럼 이르리라. 餘慶川臻 公諱承洙。字錫汝。號梨堂。朴氏系出新羅始祖王赫居世。後世至八大君。分封其長曰密城君。卽密城繼別之祖也。後孫有諱鉉。䴡朝官司憲紏正。是生諱文有。慶州判官。是生諱思敬。典法判書。是生諱忱。入我朝。以開國原從勳。贈戶曹典書。是生諱剛生。號蘿山耕叟。集賢殿副提學。是生諱切問。文科正字。贈左贊成封密山君。是生諱仲孫。號默齋。文科都承旨。是生諱楣。號存誠齋。文科官承旨。是生諱光榮。中司馬文科官刑曹參判。封密城君。是生諱蘭。號梧亭。中司馬兩試。北評事。贈領議政封密平君。是生諱仁元。文科典翰。是生諱俊賢。中司馬。壬辰著扈從勳。是生諱安檉。參奉。卽公之考也。妣安東金氏有鉉女。歲丙辰生公于坡州之德峴。公才性穎異。文學夙就。早上庠。除東學敎授。遊從師友。交結英雋。琢磨淬礪。愈益展拓。蜚英馳譽。藉藉一時。公與退憂堂諱承宗。爲從高祖兄弟。退憂堂遘禍後。公退歸鄕第。杜門謝客。未幾又經丙子之亂。時事大變。公遂無意於世。挈家南下。至全州之鳳棲山先壟下居焉。居三年。見地近通都。夤緣漸繁。而知韓康之名者。不止爲一女子而已。於是行尋南荒山谷最深處。至綾州之梨木洞止焉。因樹爲屋。與同傭人。名不出門。足不出山。匿影滅跡。絶遊息交。自處以遺世之民。自謂以無名之人。洛中故舊。不知公之爲流落何處。洞裏居人。不知公之爲貴遊子弟也。優哉游哉。脩焉息焉。同桑者之閑閑。樂代食之維好。不知人間世復有鍾磬玉帛之爲何物也。丁巳十月十五日考終。葬所居後麓子坐合窆。配全義李氏參判武之女。擧一男曰自禍。孫男曰逸徵楚徵。楚徵有一男曰晟源。出後長房。玄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世家華胃。照朝名士。其抱負造詣。將以有爲於斯世。而家運不競時事多難。乃超然遐擧於天涯地角之遠。自分貞廢以終其世。其風韻之偉然。百世之下。令人斂袵。但年代浸遠。雲仍零替。使其遺風餘芬。鬱而不暢。豈不爲子孫無窮之恨耶。九世孫鶴來。深懷慨歎。收拾遺間。將以揭諸墓道。因請誌銘之文。余不忍以非其人辭。銘曰。謝繁就靜。止于遐濱。菟裘是卜。斧堂仍新。厚積必發。久屈必伸。螽斯椒聊。餘慶川臻。 한강(韓康)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가 백휴(伯休)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명산의 약초를 캐다가 장안(長安) 시장에서 늘 똑같은 값으로 팔아 왔는데, 어느 날 어떤 여자가 그와 흥정을 하다가 "당신이 한백휴라서 값을 깎아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진 것을 탄식하며 패릉산(霸陵山) 속으로 들어가 숨었지냈다 한다. 《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뽕을……한가롭고 《시경》〈위풍(魏風) 십묘지간(十畝之間)〉에 "십 묘의 사이에 뽕을 따는 자가 한가롭고 한가로우니, 장차 그대와 더불어 돌아가리라.[十畝之間兮, 桑者閑閑兮, 行與子還兮.]"라고 하였다. 대식(代食)하는……좋아하여 대식은 농사짓는 소득으로 녹식(祿食)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대아(大雅) 상유(桑柔)〉에 "가색을 좋아하여, 농민과 함께 일하면서 대식하노니, 이는 가색을 보배로 여기고, 대식하는 것을 좋아함이로다.[好是稼穡, 力民代食. 稼穡維寶, 代食維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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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 황공 묘지명 湖隱黃公墓誌銘 무성한 꽃과 잎을 보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연원(淵源)이 깊다는 것을 안다. 사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선인의 벗 황 이랑공(黃吏郎公)은 먼 지방에서 떨쳐 일어나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쳤으니, 성대하게 밝은 시대의 어진 신하가 되고 태평성대의 명사(名士)가 되었다. 자손들이 모두 법도를 준수하여 찬란하게 시례(詩禮)의 기풍이 있었으니, 다가올 복록이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평소 흠모하여, 선조가 쌓기만 해놓고 누리지 않은 공덕이 필시 선대에 있었는데 아직 후손이 끌어오지 못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 여름에 이랑공의 맏아들 작(稓)이 증왕고(曾王考) 호은공(湖隱公)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머무는 벽산(碧山)의 집으로 찾아와 묘도에 세울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양대에 걸쳐 50년 동안 집안끼리 서로 친하게 지낸 우의로 볼 때 어찌 차마 굳게 사양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상곤(象坤), 자는 후지(厚之), 호은(湖隱)은 그의 호이다. 국초의 명재상 익성공(翼成公) 휘 희(喜)의 후손이다. 부친은 휘 자중(字中)이다. 모친은 밀양 손씨(密陽孫氏)로, 손덕삼(孫德三)의 따님인데,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에 장흥(長興)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났다. 과거 공부를 하여 문장이 넉넉하며 시원하였다. 이윽고 번연히 생각을 바꾸어 수신을 위한 학문에 종사하였으니, 대개 타고난 훌륭한 자질로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바른길로 돌이킨 것이다. 문을 닫고 휘장을 친 채 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하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날마다 학습해야 할 과정을 두었다.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고, 하늘이 부여한 명(命)과 사람이 부여받은 성(性)29)을 정밀하게 분석하였다. 예학(禮學)에 더욱 심오하였는데 《상변통고(常變通攷)》와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대학(大學)》, 〈홍범(洪範)〉 등의 말을 가지고 분류하고 강목과 조목을 만들어 자리 오른쪽에 붙여두고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다. 매일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참배하였다. 대답하고 응대함에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고, 좌우에 있거나 출입할 적에는 매우 힘써 일하였다. 하늘에 빌어 역병을 물리쳐 아버지가 끝내 탈이 없었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자 어머니도 살아났다.상례를 거행할 적에 3일 동안 미음을 먹지 않았고, 묘소에서 곡하는 것은 눈보라가 쳐도 3년 동안 폐하지 않았다. 동생과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즐거워하는 기색이 말과 낯빛에 넘쳤다. 남의 선행을 보면 자신이 선을 행한 듯이 하였고, 남의 근심을 보면 자신의 근심처럼 여겼으며, 남의 불선함을 보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다. 정성스럽게 경계하고 신칙하여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교화된 사람이 많았다.인천 이씨(仁川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이정기(李廷夔)의 따님인데, 부인의 덕을 지녀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갑인년(1794, 정조18) 5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9세이다. 어은동(魚隱洞) 연봉(鳶峯)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세 아들은 세진(世鎭), 유진(有鎭), 재진(再鎭)이다. 유진의 아들 기원(基源)이 바로 이조 정랑이다.세상에는 실로 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내면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데, 호은공(湖隱公)과 같은 분이 어찌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장담하겠는가. 내 지금 이후에 황씨(黃氏) 복록의 원대함이 유래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선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린다30)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운명이 어찌 어긋났으며 命何不揚수명을 어찌 누리지 못하였는가. 壽何不長그 보답을 받지 않고 不食其報자손에게 남겨 주었네. 貽于孫子자손들에게 좋은 일 내려주니 孫子錫類음덕이 그치지 않으리라. 餘蔭未已 見花葉之茂而知根荄之固。見派流之長而知淵源之深。物猶然矣。矧伊人乎。先友黃吏郎公。崛起遐遠。早年騰颺。蔚然爲昭代之良輔。照朝之名士。子孫皆遵守規矩。彬彬有詩禮之風。其福祿之來。尙未艾也。尋常欽艶。意其積累不食之德。必有在於其先而未之叩焉。歲乙未夏。吏郎公胤子稓。以其曾王考湖隱公狀。行訪余於碧山止舍。請墓道誌銘之役。嗚呼。兩世通家五十年久要之誼。豈忍牢辭哉。謹按公諱象坤。字厚之。湖隱其號也。國初名相翼成公諱喜後。考諱字中。妣密陽孫氏德三女。以英宗丙子生公于長興闢新洞。幼有至性。孝友著稱。治擧子業。詞藻贍暢。旣而幡然改圖。從事爲己之學。盖天資之美。不待提諭而自爾反正也。杜門下帷。斂膝加趺。讀書窮理。日有課程。經史子集。淹貫該洽。天人性命。剖析情密。尤深於禮學。常變疑禮。無不旁通。以九容九思及大學洪範等語。彙分綱條。粘付座右。常自鏡考焉。每日早起。省親謁廟。唯諾應對。極其承順。左右出入。極其服勞。祈天驅疫而父竟無恙。割指注血而母亦回甦。執喪而水漿不入口者三日。哭墓而風雪不廢者三年。與弟友愛甚篤。怡悅之氣。溢於色辭。見人之善如己之善。見人之憂如己之憂。見人之不善如己之病。諄諄警勅。不露聲氣。而人多化之。娶仁川李氏廷夔女。婦德甚備。閫範無闕。公以甲寅五月十六日卽世。得年三十九。葬于魚隱洞鳶峯子坐原。三子世鎭有鎭再鎭。有鎭之子基源卽吏郎也。世固有潛修獨善含章內腴之人。而如湖隱公者。安知非其流耶。吾今而後。知黃氏福祿之遠有自來矣。天道福善。豈不信哉。銘曰。命何不揚。壽何不長。不食其報。貽于孫子。孫子錫類。餘蔭未已。 하늘이……성(性) 원문은 '천인성명(天人性命)'이다. 《주역대전(周易大傳)》 〈건괘(乾卦) 단(彖)〉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매 각각 성과 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和氣)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본의(本義)》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하고, 물(物)이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선한……내린다 원문은 '天道福善'이다.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선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화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天道福善禍淫]"라고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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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지명 孺人李氏墓誌銘 고(故) 귀암 처사(龜巖處士) 문군 송규(文君頌奎)는 나와 20년 동안 교유하였는데, 평소 매양 외삼촌인 양씨(梁氏) 어른 집안의 규문의 법도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10여 년 뒤에 양군 재해(梁君在海)가 그 선유인(先孺人) 이씨(李氏)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임시로 거처하는 천태산(天台山)으로 찾아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양재해는 바로 양씨 어른의 맏아들이다. 유인(孺人)의 어짊은 내가 실로 잘 알고 있다. 다만 부탁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양재해의 간청에 대해서 어찌 차마 끝까지 거절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유인의 성은 이씨(李氏)인데, 그 선조는 광산(光山) 사람으로,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조부는 이사철(李師哲), 부친은 이용하(李龍河)이다. 모친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그 아버지가 김계(金啓)이다. 순묘(純廟) 을유년(1825, 순조25) 8월 17일에 태어났다. 18세에 양씨(梁氏)에게 시집가서 2남을 낳았으니, 재성(在成), 재해(在海)이다. 병술년(1886, 고종23) 9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2세이다. 남평(南平) 저포(猪浦)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화학산(華鶴山) 아래 무학동(舞鶴洞) 포만등(匏蔓嶝) 건좌(乾坐)에 이장하여 부군과 합장하였다.유인은 생래적으로 남다른 지조가 있어 계례(笄禮)31)하기 전에 이미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부모가 항상 귀여워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였다면 우리 가문은 일어날 가망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섬기고 지아비를 받듦에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유인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수고스러운 일을 다 하였으나 스스로에 대한 보양은 매우 검소하였다. 이로부터 생계가 힘입는 바 가 있어 맛있는 음식을 끊이지 않고 부모님께 올렸으며,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자면서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정(冬溫夏凊)의 예절에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조심하였다.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너그러웠기에 규방에서는 원망하거나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바른길로 인도하여 도가 있는 이를 가까이하게 하였다. 여항(閭巷)의 비루한 곳이나 시정의 광대놀이 하는 곳에는 금하여 가지 못하게 하였다. 매양 음식을 장만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게 하였고, 번번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는 너의 외사촌 문송규(文頌奎)를 보지 못했느냐. 나는 너희들이 그를 본받았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아, 유인의 어짊은 옛날 열부(烈婦)나 숙원(淑媛)처럼 아름답고 훌륭하다 할 것이다.양재해는 지금 천 리 멀리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는 데에 매우 힘을 기울이니, 참으로 선조가 후손에게 물려준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후일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드러내는 것이 어찌 미미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잘하고 잘못함도 없는 것은 無非無儀여자의 떳떳한 도리일세. 女道之常유인이 있으니 孺人有焉규문의 법도가 날로 드러났네. 閫範日章자식이 잘 본받아 有子式穀그 모훈을 계승하였네. 思述厥謨아, 저 새로운 언덕에 吁彼新阡길이 보존하는 것 근심이 없네. 永保無虞 故龜巖處士文君頌奎。余二十年從遊也。平日每稱其舅氏梁丈家閫範之美。後十數年。梁君在海。奉其先孺人李氏狀。訪余於天台寓舍。以請幽室之銘。在海卽梁丈胤子也。孺人之賢。余固稔念。但以托非其人。牢辭久之。而在海之請。豈忍終拒也。謹按孺人姓李氏。其先先山人。淸心堂調元後。祖師哲。考龍河。妃金海金氏。父啓以純廟乙酉八月十七日生。十八歸梁氏。生二男曰在成在海。丙戌九月二十五日終。享年六十二。葬南平猪浦。移葬于綾州華鶴山下舞鶴洞匏蔓嶝乾坐合兆。孺人生有異橾。未笄時。已有至行。父母嘗愛之曰。汝若爲男子。則吾門庶有望焉。及適人。事舅故奉君子。極有婦道。家世素貧。孺人備經艱楚。殫服勤勞。而凡百自奉。極其儉約。自是生理有賴。而甘旨之供不匱。夙興夜處。定省溫情之節。必誠必謹。天性溫仁慈恕。閨房之間。未聞有怨慰愁苦之聲。敎養子孫。必以義方。當使親近有道。凡閭巷俚戱市井聲伎之地禁不得往來。每具粮饌。使之從師就塾。輒戒之曰。爾不見爾外弟文頌奎耶。吾欲汝曹效之。嗚呼。孺人之賢。可以與古之烈婦淑媛。倂美而匹休矣。在海今且千里從師求道甚力。信不負當。日垂裕之志。而爲他日立揚顯親之地者。豈淺淺哉。銘曰。無非無儀。女道之常。孺人有焉。閫範日章。有子式穀。思述厥謨。吁彼新阡。永保無虞。 계례(笄禮) 옛날에 여성에게 행해지던 성인례이다. 여자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자(字)를 지어 주었다. 여자가 혼인을 허락하면 혼인 전에 계례를 행한다. 하지만 15세가 되면 혼인의 약속이 없어도 계례를 하였다. 계례 당사자나 부모가 1년 이상의 복(服 상복을 입음)이 없어야 행할 수 있다. 절차는 관례의 절차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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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균【계두】에게 답함 答魏致均【啓斗】 남쪽에서 머물러 있는 구름120)을 바라보니 달려가고픈 마음이 가득 할 때 뜻하지 않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하고 상쾌한 마음을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편지를 받고서 조부모님과 부모의 건강을 살피며 지내는 상황에 신의 보살핌으로 복이 많은 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멀리서 바라는 마음에 부합합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나약해져서 아뢸만한 것이 없습니다. 늘 친구들의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과 그대 고을의 많은 선비의 융성함을 생각할 때마다, 계속해서 교류함으로써 만년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다소의 도움거리로 삼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서, 공자의 상(喪)에 "자공(子貢)이 홀로 3년을 더 거처했다.【子貢獨居三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상복을 더 입었다.【加服】'고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러러 사모하는 처지에 차마 갑자기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3년을 더 머문 것입니다. 《맹자(孟子)》「고자 하」의 "이이여기지지(訑訑予旣知之)"에서 '여(予)'자에는 '인장왈(人將曰)' 3자가 이미 위의 문장에 있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서로 묻는 것이, 벗들과 학문을 익히고 닦는 의리이고 나아가 그대가 공부하는 과정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서할 때는 먼저 대의에 통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대학》을 읽는다면, '명덕(明德)'은 어떤 것이고 '신민(新民)'은 어떤 것인가 하는 종류를 통달해야 하고, 그 글자의 뜻이나 문장의 구두와 같은 것은 소소하게 보고 이해해야지, 성급하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단정하고 엄숙한 자세로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길러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끊어짐이 없게 하면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는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南望停雲。馳懷多時。一角珍緘。獲之不意。感豁之私。有難形喩。因審重省餘經履。神相多祉。實副遠望。義林衰病淟涊。無足奉聞。每念吾友天姿之美。貴鄕多士之盛。恨未得源源。以爲收桑多少之助也。子貢獨居三年。恐非加服之謂。想是瞻慕之地。而不忍遽去故也。訑訑予旣知之。此予字。人將曰三字旣在上文。則恐非別人也。疑難相問。此是朋友講磨之義。而尤可見賢者課程之有在也。然讀書先須務通大義。如讀大學。則如明德是如何。新民是如何之類。若其字義句讀。小小見解不必汲汲爲也。更須端莊存養。隋時隨處。無所間斷。則讀書窮理。尤宜爲力矣。 머물러 있는 구름 친구를 가리키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정운(停雲)〉 서문에서 "정운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시이다.【停雲思親友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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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선【희원】에게 답함 答朴子善【熙元】 천태(天台)가 어떤 벽지인데, 금과 옥 같은 형제가 영광스럽게도 나란히 말을 달려서 왕림해 주셔서, 매우 고마워서 그 풍모를 잊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는데, 백아(白雅)가 찾아와서 그대의 편지를 소매 속에서 꺼내주었습니다. 편지를 받고서, 부모님을 모시며 기뻐하고, 형제간에 화목해서, 평화로운 기운이 상서로움을 불어와 온갖 복이 넘쳐나는 것을 알았으니, 고개를 들어 우러러보며 축하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여력이 있을 때 복습하고 정리함에 날마다 일정한 과정을 두었습니까? 보내온 편지에서 "복잡한 세상의 일에 속박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로 사람들 마다 공통적으로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한 몸에도 많은 일이 있는데, 하물며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자제들을 돌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게다가 가문이 매우 깊고 넓으니, 일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업무가 어찌 보통의 사람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집안의 일을 끊어버리고 우뚝하게 혼자 앉아서 공부하기만을 바란다면 이것이 어찌 학문이겠습니까? 주자(朱子)의 「답진부중서(答陳膚仲書)」에서 "집안일이 번잡해서 학문에 방해가 된다는 것으로 근심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공부하는 현실일 뿐입니다. 다만 모든 일에 도리를 살펴서 이해하고 쉽게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하고, 또 그 속에서 평소의 병폐를 살펴보고 힘껏 제거해야 합니다. 학문을 하는 방도에서 무엇을 여기에 더하겠습니까. 만약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고 물리치고 싶다는 생각이 생겨나면, 일과 이치가 도리어 두 개로 나누어져 버리니, 독서해도 역시 쓸 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내가 평소에 매우 사랑하면서도 체득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지금 그대를 위해 한번 외워봅니다. 부디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일상에서 경계할 말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天台是何等僻隅。而金昆玉季。賁然聯鞭。軫賜儼顧感感。風義令人不忘。料外白雅見過。袖致光函。因審侍省怡愉。塤箎湛樂。和氣致祥。百福津津。翹首瞻賀。不任傾倒。餘力溫理。日有課程否。來喩所謂纏縛於世故叢中云者。固人人通患。然人有一箇身。便有許多事。況上省下率。門戶深闊。日用應務。豈尋常人比哉。若欲廢人事絶家務。而兀然獨坐者。此何學耶。朱子答陳膚仲書有曰。承以家務叢委。妨於學問爲憂。此固無可奈何。然只此便是用功實地。但每事看得道理。不令容易放過。更於其間。看得平日病痛。痛加剪除。爲學之道。何以加此。若起脫去之心。生排遣之念。則事與理。却成兩截。讀書亦無用處矣。此語。愚所尋常酷愛而不得者。今爲左右一誦之。幸加三復。以爲平日之箴。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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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광 처사 진공 묘표 溪狂處士陳公墓表 공의 성은 진씨(陳氏), 휘는 석형(錫馨), 자는 윤영(允英), 호는 계광(溪狂)이다. 관향은 여양(驪陽)이다. 고려 때 휘 총후(寵厚)라는 분이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는데, 바로 그 비조(鼻祖)이다. 증조는 휘 성언(聖彦)이고, 조부는 휘 덕리(德履)이다. 부친은 휘 광표(光表)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복형(鄭福亨)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무인년(1818, 순조18) 2월 8일에 능주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총명하고 영특하여 범상한 사람과는 매우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이끌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바깥일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 휘장을 내린 채 밤낮으로 공부에 전념하여 오서(五書), 오경(五經)으로부터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섭렵하여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윽고 같은 고을에 사는 만희재(晩羲齋) 양 상사(梁上舍)에게서 차츰 듣지 못하던 바를 듣고, 차츰 보지 못하던 바를 보고 더욱 학문을 갈고닦아서 채우고 확충하였다. 이에 문사가 찬란하여 거침없고 분방함이 물이 샘솟는 듯 산이 우뚝 솟은 듯하였으니, 비록 급작스럽게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하여 급히 지어주는 상황이라도 물 흐르는 것처럼 민첩하고 빨랐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시를 읊조렸고 붓으로는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갔으니, 옛날 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65)나 온정균(溫庭筠)의 팔차(八叉)66)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사원(詞苑)의 거벽(巨擘)으로 당대에 재능을 떨치던 자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공에게 선두(先頭)를 양보하며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명망과 명성이 원근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니, 서울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주군(州郡)의 관찰사 가운데 혹은 편지를 보내 공경하는 뜻을 보이고, 혹은 집으로 찾아와 교유하기를 청하였다.과장(科場)에 들어갈 때마다 과장에 가득한 응시자들이 가리키면서 서로 말하기를 "아무개 선생이 왔다."라고 하였으며, 붓을 들어 글씨를 쓰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에워싸곤 하였다. 다만 시대와 어긋나고 운명이 기구하여 주옥같은 시문으로 명성을 떨친 자를 조정에 천거하여 문장의 성률(聲律)을 조화롭게 하여 나라에 영화(榮華)를 보태게 하지 못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실망이 어떠하였겠는가. 산재(山齋)와 촌숙(村塾)에서 생도를 가르칠 때 아침에는 부추를, 저녁에는 소금 반찬을 먹으며 궁핍함 속에서 고생을 두루 겪었는데, 오직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소요하고 수창하는 즐거움은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말은 반드시 삼갔으며, 젊은 후생(後生)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옛 선현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적을 인용하여 사람에 따라 일에 따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샘물이 마르지 않는 것과 같았다.무인년(1878, 고종15) 2월 26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품평촌(品坪村) 뒷산 직동(直洞)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만환(朴萬煥)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성수(性洙), 차자는 문수(玟洙)이며, 딸은 문영주(文永周)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동윤(東潤)이고, 차방(次房)은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아, 내 어렸을 적에 한묵(翰墨) 사이에서 공을 배종(陪從)하였기에 받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득히 옛일이 되었으니, 회상하매 슬픈 마음 매양 감당하지 못하겠다. 지금 동윤이 묘갈명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어찌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양하겠는가. 公姓陳氏諱錫馨。字允英。號溪狂。貫驪陽。高麗時。有諱寵厚。封驪陽君。卽其鼻祖也。曾祖諱聖彦。祖諱德履。考諱光表。世有隱德。妣河東鄭氏福亨女。純廟戊寅二月八日。公生于綾之淨泉里。聰明開悟。絶異凡常。就傳上學。不待提飭而孜孜不怠。稍長。益自奮勵。掃却外事。杜門下帷。焚膏繼晷。自五書五經至諸子百家。次第涉躐。無不淹貫。旣而從同鄕晩羲齋梁上舍。益聞所未聞。益見所未見。磨礱淬濯。克長展拓。於是文瀾詞華。淓沛奔放。如水湧而山出。雖在忽卒副急。而敏速如流。口不絶呼。筆不停草。古之曺七步溫八叉。無以過之。詞苑巨擘蜚英一時者。無不斂衽推先。自以爲不可及。聞望聲譽。膾炙遠邇。京洛縉紳。州郡侯伯。或抵書致款。或造門請交。每入試圍。滿場擧子。指而相語曰。某先生來矣。至揮毫行墨。觀者如堵墻焉。但畸於時危於命。使瓊据大聲。未得薦之郊廟協之聲律。以增國家之光。其爲一時之缺望何如耶。山齋村塾敎授生徒。朝薤暮塩。備經窮約。惟是風月文酒逍遙唱酬之樂。綽綽有餘地。平居夙興。衣帶必勅。言語必謹。對後生少年。必引古之嘉言善行。隨人隨事。懇懇誘解。如源泉之不渴也。戊寅二月二十六日卒。墓品坪村後山直洞亥坐。配密陽朴氏萬煥女。擧二男一女。長性洙。次玟洙。女適文永周。長房孫東潤。次房出爲仲父後。嗚呼。余在小少。陪從翰墨間。受賜爲不少矣。而荏苒日月。漠然若先天事。追惟悲慨。每不勝堪。今於東潤碣文之託。豈忍以非其人辭諸。 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조식이 지은 칠보시를 말한다. 조식은 문재(文才)가 뛰어났는데, 이를 시기한 형인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짓게 하고, 만일 짓지 못하면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조식은 과연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연두시(燃豆詩)를 지었다. 《世說新語》 온정균(溫庭筠)의 팔차(八叉) 당(唐)나라 온정균은 재주가 민첩하여 부(賦)를 지을 때 팔짱을 끼고 구상하였는데, 여덟 번 팔짱을 끼면 팔운(八韻)을 다 완성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온팔차(溫八叉)로 일컬었다. 《北夢瑣言 卷4 溫李齊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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