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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 처사 김공 행장 龍巖處士金公行狀 공의 휘는 우종(佑鍾), 자는 내선(乃善)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전리 판서(典理判書) 휘 광리(光利)가 비조(鼻祖)이다.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누대에 걸쳐 성대하였다. 고조는 휘 명천(命天)이고 증조는 휘 기성(起聲)이며 조부는 휘 윤광(潤光)이다. 고(考)는 휘가 재영(在{王+營})이고 비(妣)는 진양 정씨(晉陽鄭氏) 기택(基宅)의 딸이다. 헌종 정유년(1837, 헌종3) 1월 2일에 진해(鎭海)의 실안리(實安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총명함이 남달라서 부모가 몹시 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 능주(綾州)의 용반촌(龍盤村)으로 옮겨 살았는데, 천 리 거리를 이사하고 집은 네 벽만 서 있을 정도여서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었지만, 대인(大人)은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온 힘을 쏟았다. 서당이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돌을 치우고 나무를 베어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깊은 밤마다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스승과 동학(同學)들을 대접하여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조금 자라자 현능한 사우(士友)를 뒤따라 전국 각지를 유학(遊學)하게 하고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은 헤아리지 않았다. 공은 아버지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더욱 자신을 담금질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학문은 날로 더욱 풍부하고 해박해졌으며 문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덕망과 명성이 원근에 떠들썩하였고 같은 시대의 명사(名士) 가운데 교류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25)이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공이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고 끊임없이 배행하여, 입으로 전하거나 마음으로 전한 핵심과 오묘한 뜻은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많았다. 박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畫)에 대하여 더불어 종유(從遊)할 만하기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하였다. 대인(大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급작스럽게 집안일을 꾸려 가게 되었다. 집에 지닌 것이 없고 빚만 산처럼 쌓였지만, 집으로 찾아와 빚을 독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마도 말하기도 전에 신뢰가 이미 갖추어져 사람들이 공을 매우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빚을 모두 상환하자 비로소 말하기를, "늘 이 일로 말미암아 좋지 않은 말이 선친(先親)에게 미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겠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의 집에 가서 머물며 함께 학업을 닦았다. 하루는 공이 밖으로 나가서 저녁 무렵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곡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내가 나가서 보았더니 공이 계곡 옆 바위에 서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선군(先君)께서 술에 취해 저녁에 돌아오실 때마다 반드시 이 바위 위에서 서서 우룡(禹龍)[어릴 때 공을 부르던 이름이다.]을 불러 등에 업고 건너게 하셨다. 지금 저녁 무렵에 이곳에 이르자니 홀연히 당시의 정경(情景)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곡을 하고 눈물이 흘렀다." 하였다. 하루는 오래된 종이에서 선인의 수묵(手墨 친필)을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눈물을 쏟았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고아를 거두어 혼사를 치르고 가산을 마련해 주어 자기가 낳은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을해년(1875, 고종12)에 노사 선생(蘆沙先生)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선생이 공의 뛰어난 자질을 아끼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으로 보자면 세상에 좋은 자질을 지닌 자가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 가을 영남과 호남 양도(兩道)의 사우(士友), 예를 들어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26),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27) 등과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모여 며칠 동안 강마(講磨)를 하고 돌아갔다. 계사년(1893) 봄 계남과 애산이 능주(綾州)를 지나자 공은 그들을 영귀정(詠歸亭)으로 맞이하여 날이 저물고 밤이 다하도록 쉬지 않고 강론을 벌였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공이 먼저 가면서 석양 무렵에 묵계(墨溪)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애산 등 여러 벗이 품평(品坪)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옹점치(甕店峙)를 넘는데 고개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밀고 당기며 기어오르듯 하느라고 견딜 수 없이 목이 말랐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술과 음식 등을 장만하여 기다리는 공을 만나 일행이 모두 흠뻑 취하여 갈증을 풀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의 치밀함이 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의 책이 아니면 보지를 않았고 상도(常道)에 맞는 인간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예에 맞지 않는 곳에는 이르지 않았고 의에 맞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았으며 몸소 밭을 갈고 손수 김을 매어 자기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생도(生徒)가 사방에서 모여들자 재주의 어짊과 어리석음에 따라 차근차근 엄격하게 가르쳤다. 초야와 산림에 묻혀 지내면서도 한 시대의 문학적 기풍이 성대하여 매우 볼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탕약(湯藥) 시중을 드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로써 평소에 학문을 익힌 힘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이런 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디에 정성을 기울이겠는가.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장차 평생에 걸쳐 후회하게 될 것이다. 힘쓰거라." 하였다. 한 우인(友人)이 고을의 수령이 되자 그를 아는 사람이 현(縣)의 관아(官衙)를 매일 드나들었다. 공이 경계하기를, "옛날에 원찬(袁粲)28)이 포의 시절에 사람을 만나 그와 꽤 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찾아갔으나 원찬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알던 고을 수령이 포의 시절에 만난 원찬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사람을 정도(正道)로 바로잡은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항상 좋은 산수를 꾸미는 것을 여생을 보내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거처를 옮겨 한천(寒泉)의 산중(山中)에 은거하여 곤궁하게 지내면서 봉청리(鳳聽里)라고 이름을 붙였다. 평소 관아에 발길을 하지 않았고 고을 수령을 만나지 않았으며 모든 명예나 이익, 영예나 현달에 대하여 담박하였다. 이때가 되어서는 더욱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교유를 끊고 서적(書籍)에 정신을 집중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회포를 풀었다. 물아(物我)를 벗어나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뿌리가 감춰진 나무, 광채를 간직하고 있는 구슬과 같았다. 무술년(1898, 광무2) 10월 1일에 세상을 떠나 보성(寶城)의 복내진척(福內眞尺) 금성곡(金聲谷)의 유좌(酉坐)에 묘를 썼다. 배(配)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석진(碩鎭)의 딸로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낙부(洛富), 낙인(洛麟)이고 딸은 이서일(李瑞一), 조병채(曺秉采), 정덕홍(鄭德洪), 박선동(朴善東), 위계옥(魏啓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인 두용(斗榕), 기용(基榕)은 큰아들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공은 순후하고 성실하며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성정(性情)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다. 사람을 접하면 온화한 태도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물을 접하면 진실한 마음이 동물(사물)을 감동시켰다. 남에게 간언하여도 그가 비방으로 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만들어도 그 사람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교만한 자는 스스로 굴복하고 험담을 하는 자는 스스로 그만두었다. 공이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태이더라도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고 경박한 장난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왕래하며 친교를 맺어 진퇴(進退)에 서로를 의지하고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서로 안부를 묻고 득실에 대해서 서로 충고를 주고받았다. 인연을 끈끈하게 맺어 가장 가깝고도 오랜 관계이지만 한 번의 언행조차 의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은 사문(斯文)의 순유(醇儒)이고 요즘 세상의 일민(逸民)이라고 이를 만하다. 평소에 알고 지낸 옛날 벗들 가운데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벗의 지행(志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그들을 위하여 행적을 찬술한 것이 많았지만, 유독 공에게만 미치지 못하였다. 몸은 병들어 한 올의 실타래같이 위태로운 숨결인지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백세(百世) 뒤에 다시 공을 아는 자가 누구일지가 늘 두려웠다. 인하여 인품과 재능의 대강을 이처럼 기술하였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공에게 영합하려는 뜻이 있겠는가. 공의 풍도에 대해서 듣고 공의 의리에 탄복한 자는 응당 알 수 있을 것이다. 公諱佑鍾。字乃善。金氏系出光山典理判書諱光利。其鼻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命天。曾祖諱起聲。祖諱潤光。考諱在王+營。妣晉陽鄭氏基宅女。憲宗丁酉正月二日。生公于鎭海之實安里。生而岐嶷。穎悟異常。父母甚器之。是歲移寓于綾州龍盤村。千里遷徙。四壁徒立。調度辛勤。而大人以敎子一事爲十分專務。齋距家爲十里餘。伐石斬木。以坦其路。每於深夜。親齎酒饌。往饋其師及同學者。以慰其勤苦。稍長。令從賢士友。遊學四方。不計家力之不贍。公敬承親志。益自激勵。未始有須臾之或怠。是以問學日益贍博。詞華日益斐蔚。聞望聲輝。藉藉遠近。一時名士。無不願交。時無邪齋朴先生在同鄕。公造門肄業。源源陪從。其口傳心授。肯綮蘊奧。多人所未及者。先生嘗語人曰。翰墨間可與遊從。惟此人而已。大人歿。公猝然當家。家無所有。而積債如山。然未見有一人臨門索債者。蓋信在言前。人已信之也。未幾年。了還其債。乃曰。常恐緣此而使不美之言。及於先親。今而後。可以舒脚眠矣。余嘗往住公家。同硏一日。公出外。日昏不至。忽有哭聲自外聞。余出見之。公立於溪邊石上。問其故。公曰。昔先君每乘醉暮還。必立此石上。呼禹龍【公小字】使負而渡之。今乘昏到此。忽念其時情景。不覺哭泣之發也。一日見先人手墨於舊紙。執之泫然。伯氏早歿。撫其幼孤。爲之成昏設産。無間已出。乙亥往拜蘆沙先生。先生愛其姿質之美。因語人曰。以此一人觀之。世上好姿質何限焉。辛卯秋與嶺湖兩道士友。如崔溪南琡民鄭艾山載圭。會于方丈之華巖寺。講磨數日而歸。癸巳春。溪南艾山過綾州。公邀會于詠歸亭。講討娓娓終日竟夕。臨發公先行。約以夕陽遇墨溪。艾山諸友至品坪小憩。踰甕店峙。極峻急。扶携躋攀。不勝困渴。至嶺上。見公具酒饌等候。一行皆洽醉解渴。其處事糾密多如此。不觀非聖之書。不親非常之人。不到非禮之地。不取非義之物。躬耕手鋤。自食其力。敎授生徒。四方坌集。隨才賢愚。循循雅勅。山林巖穴之間。一時文學之風。蔚然可觀。有人在積年侍湯之中者。公語其人曰。此可以見平日學問之力。爲人子者。於此而不用其誠。惡乎用其誠。如有一毫之不盡。將爲畢生之悔。勉之。一友人爲邑宰。所知每出入縣衙。公戒之曰。昔袁粲遇人於野。頗與之款。後其人往見之。袁粲拒之不納。安知邑宰前日之知。非袁粲野外之遇乎。其勉人以正。皆此類也。常欲粧點好山水爲終老計。乙未移營薖軸於寒泉山中。名之曰鳳聽里。平日不到城府。不見邑宰。凡聲利芬華澹如也。至是益沈晦。杜門斂迹。絶息交遊。遊心於詩書之間。騁懷於風月之中。嗒然充然。如晦根之木。蘊輝之珠。戊戌十月一日卒。墓寶城福內眞尺金聲谷酉坐。配坡平尹氏碩鎭女。二男五女。男洛富洛麟女適李瑞一曺秉采鄭德洪朴善東魏啓玉。孫斗榕基榕長旁出。餘皆幼。嗚乎。公淳實謹慤。沈靜寡黙。接人而和氣薰人。接物而誠意動物。諫人而人不以爲謗。勞人而人不以爲厲。驕敖者自屈。浮放者自戢。凡公之所在。雖稠座紛雜之中。爭競不生。戲褻不作。其見重於人如此。余自童丱。至老白首。出入相友。進退相須。吉凶相問。得失相規。夤緣綢繆。最親且久。而未見其一言一行有不出於義理者。公可謂斯文之醇儒。今世之逸民。余於平生知舊先我逝者。哀其志行之無傳。爲之撰述其行者多矣。而獨於公未之及焉。常恐一縷病喘。朝夕溘然。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因以述其行治之梗槪如此。豈有一分阿好之意。聞公之風而服公之義者。當有以知之。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 박영주(朴永柱, 1803∼1874)를 가리킨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 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이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 《무사재집》이 있다.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원찬(袁粲) 420~477. 남북조 시대의 송(宋)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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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경 【회덕】에게 답함 答梁而敬【會德】 편지를 받고 답장을 못한 지 지금 두 달이나 되었네. 먼 곳에서 떠도느라 막혀서 인편을 찾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다 헤아려 줄 것이라 생각하네. 그대 부친께서 뜻밖에 방문해 주었으니, 지극히 위로 되고 감사한 마음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인하여 그대가 공부하는 것이 근래 《대학》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은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옳은 방법을 얻은 것인데, 다만 〈대학독법(大學讀法)〉을 먼저 읽었는지 모르겠네. 모름지기 이 독법을 한결같이 따라서 경문과 장구 및 《혹문(或問)》을 가지고 십 분의 공부를 착수하여 십 분의 도리를 투득(透得)하여 평생의 가계(家計)를 세우면 이로부터 기본이 될 것이네. 독서하면서 의심을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을 이경(而敬)이 일찍이 스스로 병통으로 여긴 것인데, 실로 그러하네. 그러나 〈대학독법(大學讀法)〉가운데 이른바 "어떠한 것이 명명덕(明明德)이며, 어떠한 것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가?"라고 한 것 같은 것은 정히 마땅히 의심해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한 곳을 타개하여 마음이 점점 익숙해지면 절로 칼을 대는 대로 잘려 나가는 것91)이 있을 것이네. 고인이 말하기를 "후생의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두려워 할 것이 없고, 오직 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92)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네. 의림(義林)은 나이가 들수록 지업은 실추되니, 슬퍼하고 후회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종유하는 입장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마땅히 나를 거울삼을 수 있을 것이네. 承書未復。今再閱月矣。旅滯迂遠。覓便不得。想爲之諒悉。春府丈料外枉過。慰感之至。如何可量。因聞盛課近在曾傳。此在發軔之初。甚爲得計。但未知先看讀法否。須一依此法。將正經章句及或問。下得十分功夫。透得十分道理。以立平生家計。自此而爲基本也。讀書而不會致疑。此而敬嘗自以爲病者。固然。然如讀法中所謂如何是明明德。如何是止至善。其非正當會疑處耶。一處透打。心路漸熟。則自有迎刃而解者矣。古人曰。後生才性過人。不足畏。惟讀書深思推究者。爲可畏。此槩可見也。義林年邁業墜。悲悔奚補。在遊從之地而年後於我者。宜可以監戒哉。 칼을……것 《진서(晉書)》 권34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대나무를 자를 때 몇 개의 마디만 지나가면 모두 칼을 대는 대로 잘려 나간다[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고인이……하였으니 《소학》권5〈가언(嘉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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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보93) 【장환】에게 답함 答李仁甫【長煥】 세월이 멈추지 않아 여름이 또 깊어졌네.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인하여 이런 즈음에 상중의 절도를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으니, 얼마나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 지극하겠는가? 매번 생각건대, 그대가 연로한 어버이를 모심에 곁에는 형제가 없고 아래로는 자식도 적은데 크고 작은 집안일과 일상생활의 많은 실마리가 또 장차 어버이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사이에 자신을 얽매니, 그 고생하는 모습은 나를 대신 걱정스럽게 하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기수(氣數)에 관계 된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이네. 기수에 관계 된 것은 단지 심회를 너그럽고 평탄하게 하여 하늘에 맡겨야 할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은 정히 마땅히 뜻을 독실하게 하고 사려를 경책하여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해야 하니, 오늘의 곤궁함이 훗날 옥성(玉成)94)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모하는 것이 없이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는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우리 당(黨)에 종유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며 몇 년이나 되었는데, 시종 독실하여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음이 두렵네. 생각건대 그대 또한 응당 생각이 여기에 미쳐 이것을 개연해 할 것이네. 또 더구나 영귀정(詠歸亭)을 운영한 지 십 년이 못 되어 선배 중 노성한 분들이 거의 모두 돌아가셨으니, 오늘날 지켜서 이루어야할 책임은 그대 주변의 한 무리가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진학(進學)의 공부는 독서가 아니면 불가하고 독서의 방법은 경(敬)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불가하니, 수레바퀴와 새의 날개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 매우 분명하네. 일용의 사이에 단지 이 두 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간단(間斷)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세간의 만사는 잠깐 사이에 변하여 사라지니,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것이 없고, 오직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을 구경(究竟)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95) 이것은 우리들이 평소 늘 일컫던 말이 아니던가? 작은 것만 보고 큰 것에는 어두우며, 세월만 유유히 보내는 공통된 근심은 맹렬히 반성하고 통렬히 개혁하지 않으면 아마 능히 이 관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日月不住。夏令又深。承疏。因審此際哀節支衛。何等慰感之至。每念哀侍在篤老下。旁無兄弟。下乏子男。而家事巨細。日用多端。又且絆已於蒙率之間。其困苦之狀。令人代悶。然此皆氣數所關。職分所存。氣數所關者。只要寬心坦懷。而付之於天。職分所存者。正宜篤志策慮。而期於有就安知今日之困。不爲他日之玉成哉。嗚乎士生斯世。無所猷爲。而虛生虛死。豈不可惜。吾黨遊從。爲幾許人。爲幾多年矣。而終始篤實可以寄意者。恐無多焉。想哀侍亦應慮及於此。而爲之慨然也。且況詠亭經始未十年。先輩老成幾盡凋零。而今日守成之任。非哀侍一隊人乎。勉之勉之。夫進學之功。非讀書不可。讀書之方。非主敬不可。車輪鳥翼。取譬甚明。日用之間。只將此二。端無有間斷如何。朱子曰。世間萬事。須臾變滅。皆不足置胸中。惟有窮理修身爲究竟法。此非吾輩平日稱道之言耶。見小闇大。悠悠通患。非猛省而痛革之。恐不能透脫此關也。 이인보(李仁甫) 이장환(李長煥, 1874~?)을 말한다. 자는 인보,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주자가……하였으니 《회암집(晦菴集)》 속집(續集) 권4 〈답마기지(答馬奇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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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기공 묘지명 野隱奇公墓誌銘 선비로서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어진 벗을 만나 교유하며 훌륭한 산수를 차지하여 소요하는 것은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가운데 때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을 고(故) 처사 야은(野隱) 기공(奇公)이 또한 그러한 사람이다. 기씨(奇氏)는 사문(斯文)의 명가가 되었으니, 남쪽 고을에서 으뜸이다.공은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자질로 선대에서 남긴 공렬을 이어받았고, 명성과 훤한 풍모로 젊은 시절부터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령문(功令文)과 사장(詞章)은 부모님과 가문의 바람에서 나왔지만 청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끊고 산수간 천석 사이에 마음을 두어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강론하고 시를 수창함에 부지런하여 피곤한 줄 몰랐다. 그 참다운 생각과 고매한 흥취는 우뚝이 세정(世情)을 벗어난 것이었으니 비록 사람들이 말하는 때를 만난 것과는 다르지만 이것이 천지간에 세상에 없는 만남이 됨을 누가 알겠는가. 지금 공의 세대와는 100여 년 차이가 나지만 효도와 우애의 훈계는 자손을 실추시키지 않았고, 겸양하는 기풍은 여전히 향리에 전한다. 당시 수양한 바가 깊고 조우한 바가 두텁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탁월하지 않은가.공의 휘는 상호(商頀), 자는 성원(聖元),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정무공(貞武公) 휘 건(虔)이 중시조가 되니,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이름을 떨쳤다. 진필(震弼), 정상(挺祥), 재동(再動), 종태(宗泰)는 고조와 증조 이하 4대의 휘이다. 모친은 순창 임씨(淳昌林氏)로, 임중형(林重馨)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한신(曺漢愼)의 따님인데, 온화하고 어질며 고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부인의 덕이 지극하였다.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사봉(師鳳), 사범(師範), 사룡(師龍), 사혁(師赫), 사은(師殷)이다. 두 딸은 최창화(崔昌燁), 임우재(任禹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영종(英宗) 경신년(1740, 영조16)에 태어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능주(綾州) 남쪽 상우봉(上牛峯) 가양평(加陽坪) 을좌(乙坐) 언덕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5대손 세진(世搢)이 나와 교유하였는데, 어느 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송사는 유림의 학식이 깊은 원로 선배이니 그 말이 결코 친족에게 사사로이 아부하지 않을 것이기에 백세의 공필(公筆)이 될 수 있다. 생각건대 형편없는 내가 어찌 모름지기 그 사이에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사양하였지만 세진이 계속 간청하기에 삼가 묘표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록한다.금오산21) 기슭 金鰲之麓양자강22)의 물가. 楊子之濱운림에는 푸른빛 감돌고 雲林蒼翠바람 부는 때 깨끗하네. 風日鮮新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封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之藏자손에게 복 남겼으니 貽厥式穀남은 경사 영원하리. 餘慶長長 士之不遇於世久矣。得朋友之賢以從逐焉。占山水之勝以逍遙焉。此可謂不遇而遇者矣。吾鄕故處士野隱奇公。亦其人也。奇氏爲斯文名家。冠冕於南州。公以儁才異質。承襲餘烈。聲望風華。早年藉藉。功令詞章。出於父母門戶之望。而關節捷徑。有所不屑也。及遭大故。絶意進取。寄傲於水林泉石之間。與一時名碩。講劘酬唱。亹亹而不知倦。其眞想逸趣。亭亭物表。雖異乎人之所謂遇者。而誰知此爲天瓖間不世之遇也耶。今距公之世爲一百有餘年。而孝弟之訓。不墜於子孫。廉讓之風。猶傳於鄕里。可見其當日所養者深而所遇者厚也。曷不偉然。公諱商頀。字聖元。貫幸州。貞武公諱虔爲中祖。文學仕宦。奕世磊落。震弼。挺祥。再動。宗泰。高曾以下四世諱也。妣淳昌林氏重馨女。配昌寧曺氏漢愼女。溫仁柔嘉。極有婦德。擧五男。曰師鳳師範師龍師赫師殷。二女適崔昌燁任禹才。孫曾不記。公以英宗庚申生。享年四十八。葬于綾州南上牛峯加陽坪乙坐原雙兆。五代孫世搢。從余遊。一日以松沙奇宇萬所撰墓表來謁誌銘之文。竊忘松沙是儒林老宿。其言必不阿私族親。而足爲百世之公筆。顧蔑蔑無狀。何須加床於其間耶。辭之而世瑨之請不已。謹据表爲之說如是云爾。銘曰。金鰲之麓。楊子之濱。雲林蒼翠。風日鮮新。有封四尺。君子之藏。貽厥式穀。餘慶長長。 금오산(金鰲山) 전라도 장성현(長城縣)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양자강(楊子江) 능주천이 화순군 이양면 강서리 예성산 아래 송석정에 이르면 양자강 또는 용강(龍江)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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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의 천은 조공 묘지명 贈兵曹參議泉隱趙公墓誌銘 공의 휘는 서규(瑞奎), 자는 경천(擎天), 호는 천은(泉隱)이다. 조씨(趙氏)는 본래 함안(咸安) 사람이다. 휘 정(鼎)은 고려에서 벼슬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을 지냈는데, 그 시조이다. 휘 승숙(承肅)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불렀다. 휘 종례(終禮)는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휘 임(琳)은 관직이 대사성이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을 지냈는데, 동복(同福)에 우거(寓居)하였다. 고조는 휘 유보(惟寶)인데, 습독(習讀)을 지냈다. 증조는 휘 호(豪)인데,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조부는 휘가 기벽(奇璧)이다. 부친은 휘 옥생(玉生)으로, 호가 청계(淸溪)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다. 인묘(仁廟) 신사년(1641, 인조19) 3월 29일에 산음(山陰)의 우거하는 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효도와 우애는 타고난 천성이었다. 나아감과 물러남, 묻고 대답하는 예절에 대해서 물 흐르는 듯이 받들고 순종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독서할 적에는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課程)을 따라 공부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통창하였다. 일찍이 동학에게 말하기를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은 비록 두 가지 길이지만 출사(出仕)하여 군주를 섬기며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는 것은 한가지이다. 수하(隨何)와 육가(陸賈)는 문학에 국한되고 강후(絳侯)와 관영(灌嬰)은 무략에 치우쳤으니,23) 그릇처럼 한 가지 쓰임새에 국한되지 않는 군자의 방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독서하는 여가에 《손오병법(孫吳兵法)》24) 같은 병서를 함께 익혀 대략 대의에 통달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여론은 모두 장차 당시에 쓰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우연히 고질병(痼疾病)에 걸려 마침내 천하사방을 평정하는 원대한 일은 접고 문을 닫은 채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평소 마음가짐은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행실은 겸손하였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공경스러웠으며, 일을 처리함에 신중하고 꼼꼼하였다. 종족과 인척으로부터 교유하는 친구에 이르기까지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기를 끊임없이 계속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임신년(1692, 숙종18) 8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장수하고 귀하게 된 손자로 인하여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득영(鄭得英)의 따님이다. 화순(和順) 천운산(天雲山) 을좌(乙坐) 위아래로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징태(徵泰), 징휘(徵徽), 상겸(尙謙)이고, 딸은 낭주(朗州) 최구익(崔久翼)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영민한 재주로 태평성대에 출사(出仕)하여 마땅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지만, 병마가 농간을 부려 끝내 궁벽한 산속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식자의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는데,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행실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孝悌之行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였네. 文武之才벼슬길에 나아갔다면 釋褐登籍훌륭한 일을 하였을 텐데. 庶乎有爲운명이 시대와 어긋나 命與時違산속에서 숨을 거두었네. 沈淹林樊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고 積累不食후손들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 公諱瑞奎。字擎天。號泉隱。趙氏本咸安人。諱鼎。仕麗朝官平章事。其始祖也。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諱從禮。入我朝。官寶文閣直提學。諱琳。官大司成。皆顯祖也。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高祖諱惟寶。習讀。曾祖諱豪。內禁衛將。祖諱奇璧。考諱玉生。號淸溪。軍資監正。妣密陽朴氏永春女。仁廟辛巳三月二十九日。生公于山陰之寓舍。公幼有至行。孝友根天。進退唯喏。承順如流。就傳讀書。不待提督而遵循課程。文理日暢。嘗語同學曰。文武雖是兩途。而其爲出身事君。經世澤民。則一也。隨陸之局於文。絳灌之偏於武。非君子不器之道也。是以讀書之暇。兼習孫吳兵略。略通大儀。丙辰擢武科。物論無不擬之以將爲時用。旣而偶得貞疾。遂還四方之事。以杜門養病爲餘日計。平居持心謹慤。行已謙恭。接人和敬。處事愼密。自宗族姻戚至於知舊從遊。問訊周恤。源源不替。各得其心。壬申八月十三日卒。後以孫壽貴。贈兵曹參議。配河東鄭氏得英女。葬和順天雲山乙坐上下兆。生三男一女。男曰徵泰徵徽尙謙。女適朗州崔九翼。孫以下不錄。嗚呼。以若挺邁之才。出身照朝。宜若有所爲。而二竪作戲。竟不免沈淹於遐曲林樊之間。其爲謙者之恨。爲何如耶。後孫翼濟。以家狀請識玄石。辭不獲已。銘曰。孝悌之行。文武之才。釋褐登籍。庶乎有爲。命與時違。沈淹林樊。積累不食。垂裕後昆。 수하(隨何)와……치우쳤으니 《진서(晉書)》 〈유원해재기(劉元海載記)〉에 "한(漢)나라 수하(隨何)와 육가(陸賈)에게는 무략이 없고, 강후 주발(周勃)과 관영에게는 문식이 없다.[隨陸無武 絳灌無文]"라고 하였다. 《손오병법(孫吳兵法)》 중국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인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오기(吳起)의 《오자병법(吳子兵法)》의 합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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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처사 김공 묘지명 榴軒處士金公墓誌銘 공의 성은 김씨(金氏), 휘는 세익(世翼), 자는 원보(元甫)이며, 유헌(榴軒)은 그의 호이다. 관향은 경주(慶州)이니, 신라(新羅) 때 예원(璿源)이 바로 그 선계(先系)이다.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고 이로부터 고려에 이르렀으니, 이름난 공경(公卿)과 훌륭한 훈신(勳臣),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줄지어 배출되었다. 휘 광우(光宇)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진사(進士)로서 참봉을 지냈으며, 남쪽 지방에 우거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그곳에 살게 되었다. 이분의 아들 세좌(世佐)는 호가 청강(淸江)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의 아들 진(璡)은 참봉이다. 이분의 아들 익환(益煥)은 직장(直長)이다. 이분의 아들 희련(希練)은 교리(校理)이니, 문예와 행실로 세상에 이름났다. 이분의 아들 응규(應虯)는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아우 응원(應遠)과 함께 도모하여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왜적을 물리친 비석이 있다. 이분의 아들 정길(貞吉)은 부장(部將)이다. 이분의 아들은 담(潭)이다. 이분의 아들 화윤(和允)에게는 남몰래 베푼 은덕(恩德)이 있었다. 이분의 아들 경후(慶厚)는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홍려(弘礪)이다. 조부는 택계(宅繼)로, 호는 수산(睡山)인데, 의(義)를 행한 것으로 칭찬 받았다. 부친은 연흠(廷欽)이다. 모친은 장흥 마씨(長興馬氏)로, 마인학(馬仁㶅)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규중의 법도를 넉넉히 갖추고 있었다. 순묘(純廟) 계유년(1813, 순조13) 3월 27일에 부(府)의 덕제리(德堤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기개가 우뚝하고 재능과 기량이 뛰어났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잠자리를 살피고 문안 인사를 드리며, 집안일을 하느라 분주히 왕래하였으니, 어머니의 뜻을 받들고 몸을 봉양하는 데 에 모든 것을 이바지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안에는 어진 부형이 없고 밖에는 엄한 사우(師友)가 없는 것은 고인이 탄식한 바이다.19) 더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나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니 누구를 우러러 의지하고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같은 고을의 이남파(李南坡), 위호산(魏壺山), 백물암(白勿庵) 같은 이름난 석학들과 교유하여 오고가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너무나도 한스러워하여 매양 아버지란 말이 나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하였다. 풍수지리상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이장함에 곡을 하고 발을 구르는 예절과 슬퍼하는 모습을 한결같이 초상을 치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지만 3년을 하루같이 질대(絰帶)를 풀지 않고 궤연을 떠나지 않았다. 기일이 되면 지극한 정성으로 치재(致齋)하여 직접 제수를 장만하여 아련하고 엄숙하게 마치 다시 뵙듯이 듯하였다.몸가짐은 삼갔고 말을 할 적에는 신중히 하였다. 남의 잘못을 들으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고, 남의 선한 행실을 보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친척과 벗들에게는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였다. 은의(恩誼)를 두루 넉넉하게 펼쳐 의탁할 곳이 없는 고아와 과부, 혹 혼기를 놓친 자가 있으면 더욱더 가련하게 여기고 구휼하였다.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고 은혜와 의리가 지극하였다. 친족을 회합하여 고 친목을 다져 계속 끊이지 않게 하였다. 집안에 빚은 술이 있으면 번번이 친구들을 불러 시문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였다. 봄가을로 마을의 생도(生徒)들을 거느리고 예의를 익히고 경서의 뜻을 강론하여 정성스럽게 이끌어 주니 듣는 자들이 감복하고 기뻐하였다. 일찍이 〈계자부(戒子賦)〉를 짓고,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 "척박한 땅뙈기와 초라한 집이라도 분수에 따라 경영하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다. 만약 다시 더 불리고 늘린다면 부지런하고 검소한 마음이 점점 사라져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점점 자라게 되니, 어찌 굳이 지엽적인 의식(衣食)에 구차하게 얽매이겠는가. 고인이 이른바 '뜻을 둔 곳이 있어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할 겨를이 없다.'20)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계미년(1883, 고종20) 11월 14일에 졸하였다. 부(府)의 서쪽 무수봉(舞袖峰) 부병(負丙)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남수(曺南壽)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은 재호(在浩)이고, 사위는 영광(靈光) 김사현(金泗鉉)이다. 손자는 영국(榮國), 영선(榮善), 영철(榮哲)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젊은 시절에는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으며, 늙어서는 예를 좋아하였으니, 내 그 말을 전해 들었고, 내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이웃 고을에 살면서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그 유장(遺狀)을 돌아가신 지 20년 뒤에 읽으니, 뒤늦게 추모하는 감회에 예를 다 펴지 못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영국(榮國)이 그 대인의 편지를 전해주고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용렬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받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정중하게 부탁하니 어찌 차마 끝까지 사양하겠는가. 삼가 가장의 글을 살펴서 차례대로 대략 서술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천도는 겸허하면 더해 주고 天道益謙인정은 덕을 좋아하네. 人情好德진실로 군자다웠으니 允矣君子겸손하고 공경하며 덕이 있네. 謙謙有德번성한 자손들은 螽斯椒聊대대로 그 덕을 이루었네. 世濟其德 公姓金。諱世翼。字元甫。榴軒其號也。以慶州爲貫。新羅璿源。卽其先系也。至敬順王而國絶。自是而至麗朝。名卿嵬勳。鴻儒碩德。磊落相望。至諱光宇。入我朝。進士官參奉。僑寓南土。子孫仍居焉。子世佐號淸江。文科應敎。子璡參奉。子益煥直長。子希練校理。文行著世。子應虯判官。丁酉亂。與弟應遠協謀討倭。有却倭碑。子貞吉部將。子潭子和。允有隱德。子慶垕。於公爲高祖也。曾祖弘礪。祖宅繼號睡山。行義見稱。考廷欽。妣長興馬氏仁㶅女。貞靜柔嘉。閫儀贍備。純廟癸酉三月二十七日。生公于府之德堤里。氣宇軒昂。才器穎悟。三歲失怙。奉慈幃。極其孝順。晨昏定省。出入服勞。養志養體。無不畢給。嘗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此是古人所歎。況不肖無狀。早違庭訓者。何所依仰而能有成乎。遂從同郡名碩如李南坡魏壺山白勿庵諸公。往復講磨。未及省顔爲至恨。每語及。泫然流涕。以風水不利。改葬他所。哀戚哭踊。一如祖括。遭內艱。毁瘠過禮。不脫絰帶。不離几筵。三年如一日。遐忌諱之辰。致誠致齊。躬執濯漑。僾然肅然。如復見焉。持身謹勅。出語愼重。聞人之過。若己病焉。見人之善。若己喜焉。族戚知舊。問訊周恤。恩誼遍洽。有孤寡無託。或婚嫁過時者。尤加矜恤。內外斬斬。恩義兩至。會族親修惇睦。源源不替。家有釀。輒邀朋舊。酬唱歡洽。春秋率坊裏生徒。習禮數講經旨。諄諄誘引。聽者感悅。嘗著戒子賦。且戒之曰。薄田敝廬。隨分料理。足以自遺。若復增益之。是勤儉之意浸銷。驕逸之心漸滋。何必營營於衣食之末乎。古人所謂志有在而不暇及者。此也。癸未十一月十四日卒。葬于府西舞袖峰負丙之原。配昌寧曺氏南壽女。墓合祔。男在浩。女靈光金泗鉉。孫榮國榮善榮哲。曾孫以下不錄。嗚呼。幼壯孝弟。老而好禮。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然倂世隣壤。未及拜床。而乃讀其遺狀於觀化二十年之後。追想曠感。徒切靡逮之懷。榮國奉其大人書。以家狀謁文於余。顧陋劣無狀。有難承當。而見屬鄭重。豈忍牢讓。謹按狀辭。序次梗槪。銘曰。天道益謙。人情好德。允矣君子。謙謙有德。螽斯椒聊。世濟其德。 안에는……바이다 송나라 학자 여희철(呂希哲)이 "안으로 어진 부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가 없으면서 성공하는 자는 드물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小學 善行》 뜻을……없다 《논어》 〈학이(學而)〉편의 주석(註釋)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는 먹을 때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할 때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을 민첩히 하고 말을 삼가며, 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질정(質正)한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것은 뜻을 둔 곳이 있어서 여기에 마음이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不求安飽者, 志有在而不暇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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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현감 박공 묘지명 海南縣監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장(世章), 자는 성재(聖哉)이니, 신라(新羅) 왕자 밀성군(密城君)이 비조(鼻祖)가 된다. 후세에 휘 울(蔚)이 있으니, 관직은 찰방(察訪)이고, 공에게 7대조가 된다. 증조는 휘 억천(億天)이니 감찰이고, 조부는 휘 지춘(枝春)이니 장악원 판사(掌樂院判事)이다. 부친은 휘 사돈(士敦)이니, 주부(主簿)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판관 김중수(金仲秀)의 따님이다. 인조(仁祖) 무인년(1638, 인조16)에 남평(南平) 박곡리(博谷里)에서 공을 낳았다.타고난 자품이 빼어났고, 뜻은 무리 짓지 않는 것을 숭상하였다. 글방에 나아가 수업을 받았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장성하여서 탄식하기를 "남아의 사업은 굳이 한 기예에 치우치고 한 기국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활을 잡고 말을 타며, 군진을 펼치고 행군하는 방법을 겸하여 익혔다. 젊어서 서울에서 유학하였는데 명성이 자자하였기에 당대 명사들이 모두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현종(顯宗) 경술년(1670, 현종11)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충무위 사정(忠武衛司正), 호분위 부사과(虎賁衛副司果)를 지냈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가리포 진관(加里浦鎭管), 고금도 첨절제사(古今島僉節制使),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다.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위엄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기에 현(縣)의 백성들이 비석에 공적을 새겨 칭송하였다.상국(相國) 민노봉(閔老峯) 및 그 아우 여양군(驪陽君)이 매양 원대한 기량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대해서 논의하여 확정한 것이 많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이궁(離宮)으로 물러나자 공이 초하루마다 찬품(饌品)을 봉진(封進)하였다. 일찍이 상국의 사신을 모시고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상이 인견하여 그곳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묻고는 매우 가상하게 여겨 노비 수십 명을 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살게 되자 노비를 풀어 준 다음 각자의 길로 가게 하였다. 평소 인륜에 돈독하고 후하게 베풀었으니,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그를 앞길을 밝히는 횃불처럼 대우하였다. 만년에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나누었는데 형제와 질서(姪婿), 인척과 친구 가운데 가난한 자에게는 또한 모두 미루어 넉넉하게 주었다.신묘년(1711, 숙종37)에 집에서 졸하였다. 남평(南平) 덕곡(德谷) 장등(長嶝)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부사과(副司果) 복(輻)의 따님이다. 모두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검(守儉), 치검(致儉), 자검(自儉)이고, 사위는 황태걸(黃泰傑), 양필장(梁必章)이다. 측실(側室)은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덕검(德儉), 신검(信儉), 중검(仲儉)이고, 사위는 나수경(羅守慶), 조시태(趙始泰)이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서울에서 먼 시골 구석의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스스로 발탁되어 크게 수립하였기에 당대에 이름을 떨쳐 대궐에까지 알려졌다. 공경들은 자문을 구하였고 동류들은 믿고 중시하였다.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자상하고 은혜로운 풍모가 있었고, 변방을 다스릴 적에는 제압하는 위엄이 있었으니, 내면에 보존한 것이 심후한 자가 아니면 시행하고 운용함에 어찌 이처럼 평탄하고 광대하겠는가. 후손이 한미하고 문헌이 부족하지만 의를 행한 풍모는 아마 가릴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공의 8세손 준삼(準三)이 그 족제(族弟) 준기(準基)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준기가 선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그 말이 근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향리의 원로들이 서로 자자하게 전하니, 그 가장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분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감히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덕곡의 언덕에 德谷之阿넉 자의 봉분이 우뚝하네. 四尺其崇이 누구의 무덤인가 伊誰云藏해남 박공이 묻혔네. 朴海南公조정을 빛낸 어진 보필이요 熙朝良輔세상을 맑게 한 훌륭한 사람일세. 淑世偉人선량한 이에게 복을 내려 후손이 번창하니 福善昌後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春 公諱世章。字聖哉。以新羅王子密城君爲鼻祖。後世有諱蔚。官察訪。於公爲七代。曾祖諱億天監察。祖諱枝春掌樂判事。考諱士敦主簿。妣慶州金氏判官仲秀女。以仁祖戊寅生公于南平博谷里。天姿秀爽。志尙不群。就塾受課。淹貫百家。及長慨然曰。男兒事業。不必偏於一藝局於一器。遂兼習操弓馳馬布陣行軍之法。少遊京師。聲聞藹蔚。一時名士。無不願交。顯宗庚戌登武科。歷龍驤衛副司果。訓鍊院主簿。忠武衛司正。虎賁衛副司果。出爲加里浦鎭管。古今島僉節制使。海南縣監。廉勤有威。所至有聲。縣民刻石頌之。閔相國老峯及其弟驪陽君。每以遠器稱之。軍國機務。多所論確。仁顯王后遜于離宮也。公每朔密封饌品以進。嘗陪上國使。入北京。及還。上引問經歷狀。甚嘉賞之。賜奴婢數十口。及退而鄕居。放其奴任其去住。平生篤於人倫。厚於施予。親戚隣里。待以擧火。晩年爲子孫析産。至於兄弟姪婿姻戚知舊之貧者。亦皆推以資給焉。辛卯卒于家。葬于南平德谷長嶝亥坐之原。配原州李氏副司果輻女。擧三男二女。守儉致儉自儉。黃泰傑梁必章。側室生三男二女。德儉信儉仲儉。羅守慶趙始泰。孫曾以下不能盡記。嗚呼。公生于鄕曲遐荒之地。家戶零替之餘。而早自援擢。能大樹立。蜚英一世。動光九陞。公卿待以咨訪。儕流視以倚重。牧民有慈惠之風。莅邊有折衝之威。非存乎內者深厚。其施用云爲。安能若是之坦易滂沛也。雲仍式微。文獻莫徵。而其行義風致。槪乎有不可掩者矣。公八世孫準三。以其族弟準基所撰家狀來。請隧道之銘。余知準基善人也信人也。其言不爲無稽。況鄕里故老相傳藉藉。有不待其家狀而知者耶。不敢以陋劣辭。銘曰。德谷之阿。四尺其崇。伊誰云藏。朴海南公。照朝良輔。淑世偉人。福善昌後。芬苾千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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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여【규홍】에게 답함 答金允汝【奎洪】 친구의 소식이 새로운 봄과 함께 이르니 감사함과 위로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체도(體度)의 절선(節宣)75)이 더욱 태평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저의 기대하는 마음에 더욱 흡족합니다. 저는 흰 머리에다 정신도 몽롱한데 또 나이를 한 살 먹게 되었으니 그저 간절히 옛 사람처럼 빈궁한 초려에서 탄식76)할 뿐입니다. 영랑(令郞)77)의 지난 겨울 공부는 기대와 바람을 만에 하나라도 만족시키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으신지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처럼 쓸쓸하게 되었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다만 그 박실(朴實)하고 영오(穎悟)한 자질은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망이 일찍이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빨리 변화하기를 바라지 말고 조금씩 부지런히 이끌어준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서 시상(時象)78)에 대한 탄식은 같은 배를 탔는데 바람은 만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하늘의 명을 들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편안히 지내면서 천명을 기다린다.【居易俟命】'는 말은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바라보면서 그리운 마음을 보내니 그저 간절히 슬퍼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故人音信。與新春俱至。感豁慰沃。曷以勝喩。矧審體度節宣。復泰增重。尤叶企仰。義林白首懵懵。又添一齒。只切古人窮廬之歎而已。令郞前冬功夫。可以稱塞其期望萬一之意否。切愧無以資助。而遽且落落也。但其朴實之質。穎悟之姿。未嘗無前頭長進之望。勿求速化。勤勤提勑如何。示中時象之歎。可謂同舟遇風。奈何奈何。惟盡其在我者。而聽天所命而已。古人所謂居易俟命。非此之謂耶。相望送情。只切悲悒。 절선(節宣) 계절에 따라 몸을 잘 조섭하는 것을 말한다. 빈궁한 초려에서 탄식 원문은 '포류궁려지탄(蒲柳窮廬之歎)'으로, 유약한 자질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학업에 힘을 쏟지 못하고 또 세상에 포부도 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지레 늙어 버렸다는 의미이다.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시상(時象) 시대 또는 시국의 상황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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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영에게 답함 答洪文寧 아득히 헤어져 만나지 못한지 얼마인가요. 애타는 심정이 너무나 간절하여 잠깐의 틈도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시성(侍省)하는 상황은 절서마다【連序】 왕성하신지요? 가르치는 데 몸이 매여 있더라도 또한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이익을 취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 뵙고자 하지만 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몸이【鼎器】84) 망가져서 한가지를 얻으면 그대로 잃어버려서 전혀 바뀌지 않는 데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슬픔이 밀려와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어보신 권경(權經)에 대한 설은 철저하게 연구한 정밀함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권(權)과 경(經)은 단지 하나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程子)의 말씀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둘로 보고 하나라고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자(朱子)의 말씀이 아니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라고만 보고, 둘이라고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두 설(說)이 서로 연관되어 그 뜻이 갖추어지게 되니 정자의 설이 잘못되었고 주자의 설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자는 경(經)을 이미 정해진 권(權)이라고 하였고, 권(權)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경(經)이라고 하였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다시 평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릇 권(權)과 경(經)은 진실로 분수(分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경이어야 할 때는 경이고, 마땅히 권이어야 할 때는 권인 것입니다. 또 일찍이 경이 아님이 없는 것이고, 또한 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對)로 말하자면 권은 스스로 권이고, 경은 스스로 권입니다. 단언(單言)하면 권은 경이 되기도 하고 경은 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의 두 가지 설을 문득 그 사이에서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경은 일정하게 획정한 것이고 권은 대상의 경중을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두가지 사물로 보신 것입니까? 자세히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蒼莽葦刀。貽阻幾時。耿耿懷逞。無間晷刻。未審侍省候節。連序茂謐。絆身斅學。亦不無相長取益之方。爲之瞻溯。不在願聞。義林昇器敝漏。隨得隨失。其爲不移之歸決矣。撫念悲悼曷以云喩俯詢權經之說足見硏窮之密然愚意以爲權與經。只是一而二而一者也。非程子之言。則人見其爲二。而不見其爲一。非朱子之言。則人見其爲一。而不見其爲二。二說相須。其義乃備。不可以程子之說爲失。而朱子之說爲得也。朱子所謂經是已定之權。權是未定之經者。已是十分明白。無容更評夫權與經。固有分數。然當經而經。當權而權。亦未嘗不是經。又不可不謂之權也。是故。對言則權自權。經自經。單言則權便是經。經便是權。不當將程朱兩說。而輒可取舍於其間也。且來諭以爲經是一定畵定。權是稱物輕重。則此果二物乎。細思之如何。 몸이【鼎器】 원문의 '정기(鼎器)'는 원래 단약(丹藥)을 고아내는 솥인데, 여기서는 육신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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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유고》 서문 愼庵遺稿序 뽕나무나 가래나무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손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릇이나 잔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입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 손자취와 입 기운도 이처럼 공경하고 사모하는데, 하물며 정신과 마음이 당일의 기술(記述) 사이에 깃들어 있는 것임에랴. 보배롭게 여겨 보호하고, 진귀하게 여겨 간직하고자 생각할 것이니, 그러한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신암(愼庵) 손공(孫公)은 집에 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롭다고 소문이 났고, 관직에 임해서는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일컬어졌으며, 심지어 베풀어 행하는 모든 일이 어느 것 하나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만물에 은택을 입히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글에 나타난 것이 또 어찌 다만 평범한 월로(月露)115)에 비하겠는가.천성이 질박하고 진실한데다 담박하고 조용하여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문사(文辭)가 어눌하고 저술한 것도 적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글을 짓지 않았고, 글을 짓더라도 일찍이 건연(巾衍 책이나 글을 넣어 두는 상자)에 보관하여 후대에 보일 계책으로 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해진 것이 많지 않아서 편질(編帙)과 문류(門類)가 쓸쓸할 정도였다. 그러나 백세토록 정신을 전하여 끝없는 사모의 정을 붙이는 바탕으로 삼는 것을 어찌 편질의 많고 적음으로 차이를 둘 수 있겠는가.공의 맏아들 영렬(永烈)이 종제(從弟) 영모(永謨)로 하여금 모아 편집하게 함으로써 대대로 전해 실추시키지 않을 계책으로 삼고, 이어서 나에게 현안(玄晏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공에게 외람되게도 두터운 지우(知遇)를 받은 지 오래되었고, 공의 맏아들과는 또 서로 따르며 노니는 교분을 계속 이어오고 있으니, 어찌 감히 사람이 미천하고 문장이 졸렬하다 하여 구구하게나마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桑梓之不敢慢焉。以手迹之所在也。杯圈之不敢用焉。以口澤之所存也。嗚呼。以手之迹口之澤。而敬慕之如此。況精神心術之寓於當日記述之間者。思欲爲之寶護而珍藏者。其心豈有窮己哉。愼庵孫公。居家以孝友聞。莅官以慈惠稱。以至凡百施爲。無一不出於利人澤物之心。則其著於文字者。又豈止爲尋常月露之比也。天性質實澹黙。不喜表襮。訥於文辭。簡於著述。非有甚故。未嘗下筆。下筆又未嘗貯之巾衍。以爲示後計。是以所傳無多。而編帙門類。至爲寂寥。然百世傳神以爲寓慕無窮之地者。豈以編帙多寡而有間哉。遺胤永烈。令其從弟永謨。裒稡而編摩之。以爲傳世不墜計。因有玄晏之託。余於公。猥承辱知之厚者久矣。而於遺胤。又有源源遊從之契。豈敢以人微文拙。而不有區區一言之役也耶。 월로(月露)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소재인 풍화월로(風花月露)의 준말로, 내용은 없으면서 겉만 화려하게 꾸민 시문(詩文)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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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으로 가는 양순집을 전송하는 서문 送梁順集往漢北序 호남(湖南)과 한북(漢北 한양(漢陽)의 북쪽)은 천 리나 떨어진 지역이고, 전쟁의 기운이 가득한 풍진 세파를 도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데도 우리 벗 순집(順集)은 사문(師門)과 종유(從遊)하여 일 년에 한 번씩 다녀오는 것을 너무 멀다는 이유로 꺼리지도 않고,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그만두지도 않았다. 진실로 도를 지향하는데 근면하고 뜻을 세움이 독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나는 약관(弱冠) 때부터 이미 이러한 행차에 뜻을 두었으나 전후로 30년 동안 끝내 이루지 못했고, 지금 순집이 가는 것을 보면서 또 천리마의 꼬리에 붙은 파리116)가 되지도 못했다. 아, 나는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미치지 못함이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순집의 이 행차가 만약 벼슬살이를 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얻음과 잃음, 통달함과 막힘이 진실로 나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고, 만약 유람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즐거움과 괴로움,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또한 나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벼슬살이를 구한 것도 아니고, 또 유람하는 것도 아니니, 진실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이 오직 도의(道義)에 있지 않겠는가.도의(道義)는 하나이니, 간간(侃侃)하게 강직하고 은은(誾誾)하게 화락한 모습으로 봄바람 앞에 앉아 있는 듯하고 눈이 쌓이도록 서서 기다리는 것처럼 하면서117) 천하의 도(道)를 강론하고, 천하의 의(義)를 밝히는 것이 어찌 한 집안이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돌아와 돌이켜보고 나머지 파급될 만한 것들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대가 들은 것이 바로 내가 들은 것이고, 그대가 얻은 것이 또한 내가 얻은 것이 될 것이다.나는 늙은 몸이라 비록 억지로 행장을 꾸릴 수 없지만, 사우(師友)를 인연한 관계로 소문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대에게 기대를 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생각건대, 천 리 먼 길 사람을 전송함에 예의상 노자가 있어야 하는데, 서생의 집에 장물(長物)118)을 가진 것이 없기에 단지 졸렬한 말 몇 줄로 노자를 대신하고, 또 "누가 물고기를 요리하는가? 작은 가마솥과 큰 가마솥을 씻어 주리라. 누가 장차 서쪽으로 돌아갈까? 좋은 목소리로 위로하리라."119)라는 한 문장을 노래하여 전송할 뿐이다. 湖南漢北。千里之地。干戈風埃道路抵搪。吾友順集。從遊師門。一年一行。不以絶遠而憚焉。不以多難而沮焉。苟非向道之勤。立志之篤烏能辦此也。余自弱冠。已有意此行。而前後三十年。竟未就矣。今見順集之行。又未作附驥之蠅。嗚呼。余獨何人。其所不及若是懸絶哉。雖然。順集此行。若出於干進。則其得失通塞。固無關於我矣。若出於遊觀。則其苦樂勞佚。亦無有於我矣。旣非干進。又非遊觀。而所以血心尋覓。獨不在於道義乎。道義一也。侃侃誾誾。坐春立雪。講天下之道。明天下之義者。豈一家一人之私哉。況歸而顧之。不吝餘波。則子之聞卽我之聞也。子之得。亦我之得也。吾老矣。縱不能强理鞭策。而所以夤緣師友。得聞所聞。未嘗不有望於子也。但念千里送人。禮合有贐。而書生門戶。無有長物。只用蕪詞數行。以替贐儀。又歌誰能烹魚。漑之釜鬵。誰將西歸。懷之好音。一章以送之。 천리마의……파리 선현이나 명사(名士)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정의림이 양순집을 따라가서 한북에서 사문과 종유하는 것을 비유한다.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독실하게 학문을 닦았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었기 때문에 그 행실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의 주(注)에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천리에 이르듯,[蒼蠅附驥尾而致千里] 안회(顔回)도 공자 덕분에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간간(侃侃)하게……하면서 원문의 "侃侃誾誾, 坐春立雪"을 국역한 것으로, "간간은은(侃侃誾誾)"은 《논어》 〈선진(先進)〉에 "민자가 옆에서 모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자로는 굳세었고, 염유와 자공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좌춘(坐春)"은 스승의 훈도와 덕화를 뜻하는 것으로,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여남(汝南) 땅에서 뵙고 돌아와 "광정이 봄바람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 "입설(立雪)"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성을 뜻하는 것으로, 송나라 양시(楊時)가 처음 정이(程頤)를 찾아갔을 때 마침 정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므로 인기척을 내지 않고 서서 기다렸는데, 정이가 눈을 떴을 때는 문밖에 내린 눈이 한 자가량이나 쌓여 있었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장물(長物) 여유 있는 물건이나 좋은 물건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공(王恭)이 숙부인 왕침(王忱)의 요청을 받고 단 하나밖에 없는 돗자리를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왕침이 미안하게 생각하자, "숙부께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저는 원래 장물(長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世說新語 德行》 누가……위로하리라 《시경》 〈비풍(匪風)〉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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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회와 김익부를 전송하는 소서 送鄭景晦金翼夫小序 을사년(1905) 겨울에 정군 경회(鄭君景晦)와 김군 익부(金君翼夫)가 영상(嶺上)으로부터 가천(佳川)의 아픈 나의 집을 방문하여 이틀 밤을 서로 마주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의 해박한 포부와 정밀하고 깊은 조예가 참으로 소년 중에서 뛰어났다.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 한마디 해줄 것을 청하였다.무릇 그대들은 문명한 교령(嶠嶺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고, 높은 덕을 지닌 애산(艾山)120)의 문하에서 노닐었으니, 학문의 절도(節度)에 대해 반드시 상세하게 들었을 것이고, 덕을 쌓고 공업을 닦는 방법에 대해 반드시 익히 배웠을 것인데, 이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무슨 들을 만한 것이 있겠는가. 스스로 생각건대, 천박하고 용렬한 내가 설령 조금 아는 것이 있어 멀리서 찾아온 뜻에 부응하고자 한들 구구하게 소나 말의 발굽 자리에 고인 물이 어찌 바다를 구경한 눈에 물로 보일 수 있겠는가.아, 온 세상이 기나긴 어둠에 잠기고 온 천하가 서양의 물결로 뒤덮이고 있는 때에 간혹 공맹(孔孟)의 책을 읽고 공맹의 학문을 따르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또한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고 찢기어 온통 참됨에서 벗어나고 바름을 잃었는데, 연원을 지켜 순박하면서도 잡되지 않은 경우는 오직 존사문(尊師門)121) 뿐일 것이다.선비가 되어 이러한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문하에서 노니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기이한 만남이라 이를 만하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못된다. 만약 존사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한 가닥 바른 학맥이 더이상 붙어 있을 곳이 없을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존사문이 말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대들이 과연 이것을 알고 힘쓸 수 있다면, 오늘날 석과(碩果)의 씨앗이 되는 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추운 계절에 그대들을 전송하며 아득히 끝없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삼가 이 글을 써서 노자를 대신한다. 歲乙巳冬。鄭君景晦金君翼夫。自嶺上過佳川病廬。信宿相對。娓娓傾倒。其抱負之該洽。造詣之精深。信是少年翹楚。將行。請以一言之贈。夫君輩生於嶠嶺文明之邦。遊於艾山碩德之門。其學問節度。聞之必詳。進修蹊逕。講之必熟。外此而有何可聞於人者乎。自惟淺劣。設有一知半解。欲以塞遠來之意。而區區蹄涔。何足爲水於觀海之眼乎。嗚呼。大宇長夜四海懷襄。間或有讀孔孟之書。從孔孟之學。而亦且千分萬裂。擧不免離眞失正。若其淵源持守。醇而無雜。其惟尊師門乎。爲士而居此世遊此門者。可謂千載奇遇也。餘不足言。若使尊師門之學而有不傳焉。則一縷正脈。更無可寓。豈不可惜。此則尊師門所不言者也。君輩果能知此而勉焉。不失爲今日之碩果種子耶。歲寒相送。不勝悠悠無窮之感。謹書此而贐焉。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존사문(尊師門) 상대방의 스승에 대한 경칭으로,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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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경에게 써 준 서문 贈曺彛卿序 조군 이경(曺君彛卿)은 선정신(先正臣)의 후예이며 법도 있는 집안의 자제로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있고, 현철한 사우(師友)가 있어서 시례(詩禮)135)와 학문의 가르침에 종사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고,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136)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겠다.아, 서계(書契)137)가 만들어진 이후로 책 읽는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으며, 십실(十室)138)이 형성된 이후로 충신(忠信)의 자질을 지닌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 도를 듣고 천하 후세에 법을 드리운 사람은 얼마 없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바라건대 이경은 이것을 돌이켜 구하여 통렬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사람으로 말하면 성인을 표준으로 삼고, 학문으로 말하면 도를 표준으로 삼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지극하지 못하거든 우리의 일에 결함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연히 이치를 가까이 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저절로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이다. 훗날 호남 고을에서 도를 창도한 기풍이 동남쪽 사이에서 크게 떨쳐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나는 이경의 한 무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曺君彛卿。以先正裔孫。法家子弟。有姿質之美。有師友之賢。而從事於詩禮學問之敎。眞所謂可與共學。可與適道者也。嗚呼。書契以後。讀書者何限。十室以往。忠信之質何限。然而聞其道而垂法於天下後世者。無幾焉。其故何居。願彛卿於此。反求而痛省之。言人則以聖爲準。言學則以道爲準。以爲一毫未至。便是吾事有闕。則自然切實近理。自住不得矣。他日湖鄕。若聞有倡道之風。大振於東南之間。則吾以爲出於彛卿一隊人也。 시례(詩禮) 가정에서 조부나 부친으로부터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뜰에 혼자 서 있을 때에 아들 이(鯉)가 지나가자 그에게 시(詩)와 예(禮)를 배웠는가 물어보고 그것의 중요성을 일러 주며 공부하라고 훈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더불어……있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말하기를 "더불어 학문을 함께 할 수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십실(十室) 조그마한 고을을 비유하는 말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말하기를 "10여 가구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나[丘]처럼 충신한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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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운약에게 써 준 서문 贈鄭君雲躍序 지금까지 영남 내의 여러 군(君)들을 전별하며 말을 해준 것이 다소 없지 않지만, 유독 운약(雲躍)의 요청에 더욱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나와 운약은 지난봄에 뇌룡정(雷龍亭)127)에서 한 번 만나고, 지금 또 화엄사(華巖寺)에서 다시 만났으니, 교분이 오래되고 마음이 맞았다. 게다가 운약이 애산옹(艾山翁)128)의 종부제(從父弟)가 됨에랴. 그 교분과 정분으로 보면 구구하나마 한마디 말을 해주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뒤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발굽에 고인 물은 바다를 구경한 눈에는 물로 보이기 어렵고, 반딧불의 빛은 촛불을 마주한 자리에서 빛이 되기 어렵다. 나는 운약에게 발굽에 고인 물이나 반딧불이 되겠지만 사양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털끝만큼이나마 보탬이 되려함은 어째서인가? 말을 해주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고,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다.명(明)나라의 유학자 방손지(方遜志 방효유(方孝孺))의 말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저명한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지만, 일반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비단 자손만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친속(親屬 친족)의 경우도 그렇다. 선(善)은 크지 않으면 책무에 걸맞을 수 없고, 악은 비록 작더라도 오히려 조롱을 끼칠 수 있으니, 운약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내가 운약에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말을 해준다면 이 말보다 먼저 말해줄 것이 없으니, 운약은 힘쓰기 바란다. 今爲嶺中諸君之別。不無多少贈言。而獨於雲躍之請。尤有所不敢者何哉。吾與雲躍。去年春。一見於雷龍亭。今又再見於華巖寺。舊交矣心契矣。而又爲艾山翁從父弟乎。以其契誼。則區區一言之贈。必不在他人之後矣。然蹄涔之滴。難爲水於觀海之眼。螢爝之光。難爲照於對燭之筵。吾於雲躍。爲蹄涔螢爝。有所不辭。而其絲毫之補何。不欲無言者。爲艾翁之弟故也。不敢有言者。亦艾翁之弟故耳。明儒方遜志有言曰。人莫不喜爲名人子孫。而不知其尤難於衆人。非但子孫爲然。在親屬亦然。善不大。則不足以稱其責。惡雖小。而猶足以貽其譏。雲躍知之乎。吾於雲躍。不告則已。如告之。則無有先於此者。願雲躍勉之。 뇌룡정(雷龍亭)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45세 때 모친의 상을 당하고 고향인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여묘를 마친 뒤에 이곳에 세운 정자로, 60세까지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애산옹(艾山翁)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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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유고》129) 서문 雲巖遺稿序 《주역》에 이르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한지라 하루를 마치지 않고 떠나가니, 정하고 길하다."130)라고 하였는데, 부자(夫子 공자)가 이 말을 찬미하여 말하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하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바로 결단함을 알 수 있다. 군자는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알며, 유순함을 알고 강함을 아니, 수많은 사람이 우러러본다."131)라고 하였다. 송자(宋子 송시열)가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소중옹(疏仲翁)132)을 안타깝게 여겨 대서특필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운암옹(雲巖翁)은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대직(臺職)133)을 역임하고, 명성과 덕망이 드높아 융중한 자리에 의망(擬望)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니,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 어버이를 빛나게 하고 만종(萬鍾)의 봉록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들이 앞날에 차례대로 있을 일로 기약되었다. 그러나 기미를 보고 용감하게 결단하여 호연(浩然)하게 〈귀거래사(歸去來辭)〉134)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구름이 걸쳐 있는 적막한 숲속에서 화락한 모습으로 유유자적하며 노닐었다. 아,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며, 얻을 줄만 알고 잃을 줄 몰라 승두(升斗)만한 조그마한 이익에 턱을 늘어뜨린 채 부유한 사람들이 가엾게 여기며 주는 음식에 침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이러한 의리를 알 수 있겠는가.평소에 지었던 문고(文稿)는 산실되어 수습하지 못하였고, 만년에 주워 모은 것들 사이에서 얻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의 붓을 잡는 사람들이 송자(宋子)가 소중옹(疏仲翁)을 가엾게 여긴 것처럼 반드시 그를 대서특필하여 백세토록 썩지 않게 할 것이니, 보잘 것 없는 문고가 있든 없든 또는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자손의 마음에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삼가 모아서 약간을 엮었을 따름이다. 易曰。介于石。不終日貞吉。夫子贊之曰。介如石。焉用終日。斷可識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宋子哀疏仲翁所以見與於春秋綱目之書。而大書特書者。其不以是耶。雲巖翁少年釋褐。歷踐臺職。聲望藹蔚。期擬隆重。專城之榮。萬鍾之養。此其前頭次第事耳。然而見幾勇決。浩然賦歸。囂囂徜徉於雲林寂寞之中。嗚呼。知進而不知退。知得而不知喪。朶頤於升斗之利。垂涎於輕肥之憐者。曷足以知此等義諦耶。平日文稿散逸不收。而得於晩後掇拾之間者。亦無幾焉。然世之秉春秋綱目之筆者。必將大書特書。使之不朽於百世。如宋子哀疏仲翁。何待於區區文稿之有無與多寡哉。但子孫之心。不欲其泯然。謹輯之爲若干編云耳。 운암유고 대한제국 때 장흥(長興) 출신의 문신 정두흠(鄭斗欽, 1832~1901)의 문집인 《雲巖集》을 말하는 것으로, 1918년에 아들 제하(濟夏)가 편집ㆍ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4권2책이며, 목활자본이다. 운암은 정두흠의 호이고, 자는 응칠(應七)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처음 최상관(崔相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항로(李恒老)를 사사하였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을 올렸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개가……길하다 《주역》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보인다. 절개가……우러러본다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보인다. 소중옹(疏仲翁) 벼슬길에서 한창 득의(得意)했을 때 미련 없이 물러나 초야에서 자신의 지조를 지켰던 옛 인물이다. 대직(臺職) 대간(臺諫)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말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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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부40) 【상의】에게 답함 答尹仁夫【相義】 금오산(金鰲山)41)을 바라봄에 일찍이 거룻배도 용납하지 못하는데42) 외롭게 소식이 막힘이 이렇게 오래되었단 말인가? 모르겠으나 부모님을 모시는 체후의 절도는 형통하여 더욱 복을 누리며, 남는 힘으로 글을 읽어 새로운 아취가 흘러넘치는가? 의림(義林)은 풍파를 겪은 뒤 쇠잔한 정신을 수습하여 목전의 상황을 버텨낼 계획을 하지만 냉랭하기가 마치 마른 나무, 식은 재와 같아 정경이 가련하네. 모르겠으나 우리 인부(仁夫)는 기력을 부지하여 와서 이 노쇠한 벗으로 하여금 다소 뜻을 만족하게 해 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보건대 인부은 자질이 아름답고 뜻이 두터워 내면으로 향상하니, 항상 아끼고 바라는 마음 실로 적지 않았네. 원하건대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는 이 좋은 시절에 맞추어 자신의 평소 큰 계획으로 하여금 미적거리다가 후회하는 데 이르게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네. 그대 증조부 어른43)의 실기는 부지런한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감히 둔필(鈍筆)을 적시지만 사람은 미천하고 필력은 졸렬하여 도리어 누를 끼침을 면하지 못할까 몹시 염려되니, 송구스런 마음이 그지없네. 그러나 어버이를 드러내는 방도는 몸을 세워 도를 행한다는 '입신행도(立身行道)' 네 글자에 달렸으니, 원컨대 인부는 더욱 힘쓰시게.〔문〕일용의 사이에 인심(人心)이 도심(道心) 앞에 먼저 발하는 것입니까?〔답〕선악의 분수는 사람마다 같지 않아, 오로지 도심을 따라 발하는 경우가 있고 오로지 인심을 따라 발하는 경우가 있으며, 도심을 먼저하고 인심을 뒤로하는 경우가 있고 인심을 먼저하고 도심을 뒤로하는 경우가 있으니, 어찌 일괄 인심이 도심 앞에 먼저 발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문〕내면으로 하나의 성(誠) 자를 가지고 보존해 두면 사(邪)가 비록 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올 수 없습니까?〔답〕이미 외면에서 하나의 성 자를 잡아 보존해 두는 것이 아니라면 또 어찌 별도로 내면에 하나의 성 자를 잡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용모를 바르게 움직이고 사려를 정돈한다.[動容貌整思慮]"라는 것44)은 공부를 착수한 뒤에 하는 것이 이미 십분 명백하네.〔문〕사람 가운데 경으로써 내면을 바르게 하는 데만 오로지 힘쓰고 외면을 방정하게 하는 데는 힘쓰지 않는 자가 있고, 또 외면은 비록 긍지를 가지지만 내면은 독실함이 드문 자가 있습니다.〔답〕내면을 바르게 하기를 겉과 같게 하고 외면을 방정하게 하기를 그림자 같이 하면, 어찌 겉은 단정하면서 그림자가 바르지 않는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학자의 병통은 혹 내면에 힘쓰면서 외면에 소략한 경우가 있고, 혹 외면은 자세히 살피면서 내면에 간략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네.〔문〕학문은 위기(爲己)와 위인(爲人)45)의 구분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초학자의 입각 공부는 진실로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답〕위기와 위인 이것은 천리와 인욕이 나누어지는 것이고 학자가 최초 시작할 때 제일로 착수해야 하는 것이네. 그렇지 아니하면 천만 가지 모든 것들이 가죽 없는 털과 밀가루 없는 수제비46)일 것이네.〔문〕정자(程子), 사씨(謝氏), 윤씨(尹氏)가 말한 경(敬)의 차이에 대해 묻습니다.〔답〕성성(惺惺)47)은 마음이 어둡지 않는 것으로 말하였고, 불용일물(不容一物)48)은 마음을 수렴하는 것으로 말하였고, 정제엄숙(整齊嚴肅)49)은 내외를 겸하여 말한 것이네.〔문〕사특함이 없다는 '무사(無邪)'와 사특함을 막는다는 '한사(閒邪)'를 두 항목으로 나누어 말하면, 무사는 외물이 접하지 않았을 때이고, 한사는 외물이 막 접할 때입니까?〔답〕무사는 《시경》에서 나왔고 한사는 《주역》에서 나왔으니, 만약 본문의 문의(文義)로 본다면 무사는 '용(用)'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한사는 '체(體)'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네.〔문〕계간(溪澗)의 풀은 먼저 생장의 기운을 받고 산정(山頂)의 나무는 먼저 숙살의 기운을 받는 것은 《복괘(復卦)》의 양이 아래에서 시작하고 《구괘(姤卦)》의 음이 위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까?〔답〕《구괘》또한 아래에서 시작하니, 어찌 일찍이 위에서 시작하였던가? 초목이 피고 지는 빠름과 늦음은 지세(地勢)와 풍기(風氣)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네. 瞻望金鰲。曾不容刀。而煢煢貽阻。乃至此久耶。未審侍省體節。履亨增祉。餘力咿晤。新趣津津否。義林風波之餘。收拾殘魂。爲目前支拄計。而冷冷如枯木死灰。情景可憐。未知吾仁夫扶竪得氣力出來。使此衰頹一友生。得有所多少差强底意否。竊覸仁夫質美意厚。近裏向上。尋常愛仰。實不淺淺。願趁此具慶好時節。使我平生大計。無至因循貽悔。千萬千萬。尊曾王考丈實記。難孤勤意。敢泚鈍筆。而切恐人微筆拙。反不免有所貽累。悚悚。然顯親之道在於立身行道四字。願仁夫勉勉焉。日用之間。人心先發於道心之前。善惡分數。人人不同。有專從道心發者。有專從人心發者。有先以道心而後以人心者。有先以人心而後以道心者。豈可槩謂人心先發於道心之前耶。內而將一箇誠來存着。則邪雖欲入而不能入旣不是外面捉一箇誠來存着。則又豈別有內面一箇誠可把捉。所謂動容貌整思慮者。其於下功。已是十分明白人有專務敬以直內。不務方外者。又有外雖矜持。而內鮮篤實者。直內如表。方外如影。豈有表端而影不正之理。然學者之病。或有務於內而略於外者。或有審於外而簡於內者。此皆正宜矯捄也。學莫先乎爲己爲人之分。初學立脚功夫。誠不外是。爲己爲人。此是天理人欲之分。而學者最初發軔第一着也。不然。千般萬般。皆是不皮之毛。無麵之托。問程子謝氏尹氏言敬之異。惺惺。以心之不昧言。不容一物。以心之收斂言。整齊嚴肅。兼內外而言。無邪閒邪。分兩項說。則無邪是外物不接時。閒邪是外物方接時。無邪出於詩。閑邪出於易。若以本文文義觀之。則無邪是用上說。閑邪是體上說。溪澗之草。先受生長之氣。山頂之木。先受肅殺之氣。以復之陽始於下。姤之陰始於上故歟。姤亦始於下。何嘗始於上也。草木之開落早晏。是地勢風氣之使然耳。 윤인부(尹仁夫) 윤상의(尹相義, 1872~?)를 말한다. 자는 인부, 호는 오산(鰲山),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있는 산이다. 일찍이……못하는데 가까운 거리여서 쉽게 갈 수 있음을 말한다.《시경》 〈위풍(衛風) 하광(河廣)〉에 "누가 하수가 넓다고 이르는고? 거룻배도 용납할 수 없도다.[誰謂河廣? 曾不容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대 증조부 어른 윤방형(尹邦衡, 1797~1873)을 말한다. 자는 완여(完汝), 호는 양한당(養閒堂),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일신재집》권20에〈양한당 윤공 유사장(養閒堂尹公遺事狀)〉이 있다. 이른바……것 《심경》역건지구이장(易乾之九二章) 아래 부주(附註) 정이천(程伊川)의 말인데, 여기에 두 가지 토가 있다. 하나는 '동용모에'라는 것이 있고 하나는 '동용모하며'라는 것이 있다. 둘 다 퇴계의 토인데,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후자가 뒤에 단 토라고 하였다.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이른다. 《논어》 〈헌문(憲問)〉의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가죽……수제비 근본적인 요소가 준비되지 않고는 어떤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성(惺惺) 마음이 맑게 깨어 있음을 뜻하는데, 사양좌(謝良佐)가 경(敬)에 대해 "항상 마음을 맑게 깨어 있게 하는 것[常惺惺然]"이라고 하였다. 《大學或問 經1章》 불용일물(不容一物) 한 가지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공부를 말하는데, 윤돈(尹焞)은 경(敬)을 "그 마음을 수렴해서 한 가지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다.[其心收斂, 不容一物.]"라고 하였다.《大學或問 經1章》 정제엄숙(整齊嚴肅) 몸가짐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정이(程頤)가 경(敬)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大學或問 經1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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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백연55) 【내룡】에게 답함 答趙伯淵【來龍】 설월(雪月)의 광경이 근래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흥을 타고 노를 저어 험한 물결 거슬러 올라가다가 산음(山陰)에서 머뭇거렸던 처지56)와 같으니 서글픈 마음 어찌 감당하겠는가? 다만 세밑이 가까워졌으니, 벗의 고향 방문이 일간에 있어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여겼네. 모르겠으나 몇 개월 동안 가르치고 배우던 동안 예전의 학업을 익히고 새로운 지식을 배양하여 이번 행차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만나서 그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기를 기다릴 뿐이네. 중락(仲洛)57)이 떠나려고 하기에 몇 마디 적고, 지난번에 질문하였던 것에 뒤늦게 답하면서 아울러 작별한 뒤의 안부를 묻네.〔문〕명덕(明德)은 마음의 본체이니, 명이라 하고 덕이라 한 것은 모두 의미가 존재합니다. 만약 이것을 '이(理)'라 한다면 천하의 사물에 이가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사물을 가리켜 명덕이라 하는 것이 가합니까? 만약 이것을 '기(氣)'라 한다면 천하의 사물은 이 기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사물을 가리켜 명덕이라 하는 것이 가합니까? 진실로 천하의 사물이 모두 이 명덕이라면 성인께서 하필 사람의 본심을 가리켜 명덕이라 하였습니까?〔답〕이가 아니고 기가 아니라면 이른바 명덕이라는 것은 또 무슨 물(物)인가? 또한 절반은 기와 관계 되고 절반은 이와 관계 되어 화니대수(和泥帶水)58)의 모양과 같은가? 그대의 의론은 매번 이와 같으니, 이것은 견해가 직절(直折)하지 못한 까닭이네. 빨리 마땅히 돌이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명덕은 단지 이 이가 마음에 얻어진 것인데 그 조리와 절문이 찬연하여 어지럽지 않기 때문에 명덕이라 한 것이네.〔문〕미발(未發)의 애(愛)는 인(仁)이 이것이고, 이발(已發)의 애는 공(公)이 이것입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인의 도는 요컨대 단지 하나의 '공' 자를 말하기만 하면 되니, 공은 단지 인의 이치인지라, 공을 가지고 문득 인이라 해서는 불가하고, 공평하면서 사람이 체득하기 때문에 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59) 바로 이 뜻입니까?〔답〕공 자를 가지고 전적으로 이발(已發)에 소속 시키면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니겠는가?〔문〕사려가 어지러울 때 진망(眞妄)을 변별하여 의근(意根)이 절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은 건도(乾道)이고, 한 가지 일을 별도로 궁구하는 것은 곤도(坤道)이니, 두 가지의 고하와 천심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진실로 능히 한 가지 일을 별도로 궁구하는 사이에 종사하여 얻음이 있으면 또한 장차 구별할 만한 진망이 없을 것입니다.〔답〕만약 이것이 건도라면 곧장 잘라 제거할 뿐이니, 어찌 변별을 사용할 것이 있겠는가? 변별 또한 곤도이네. 雪月光景。近非不好。而乘興一棹。溯洄阻隮於山陰止舍之下。悵然遐懷。曷以勝堪。但歲除在近。故人還山之行。想在日間。而可以面穩矣。末知數朔斅學之餘。溫理舊業。培養新知。而有可以不負此行者否。第俟相奉得聞緖餘之萬一耳。仲洛將行。略修數語。追答向日之問。兼詢別後節宣。明德是心之本體也。曰明曰德。皆有意存焉。若以此謂之理。則天下之物。莫不有理。然則指天下之物而謂之明德可乎。若又謂之氣。則天下之物。莫非是氣。然則指天下之物而謂之明德可乎。苟天下之物。皆是明德。則聖人何必特指人之本心。謂之明德。非理非氣。則所謂明德者。又是何物。抑半涉於氣。半涉於理。如和泥帶水樣耶。吾友議論。每每如此。此是見不直折之故也。亟宜反之如何。明德只是此理之得於心者。而其條理節文。粲然不亂。故謂之明德。未發之愛。仁是也。已發之愛。公是也。伊川曰。仁之道。要之只消道一公字。公只是仁之理。不可將公。便喚做仁公而以人體之。故爲仁。卽此意否。將公字。專屬之已發。不已偏乎。思慮紛擾。辨別眞妄。使意根自正。此乾道也。別窮一事者。坤道也。二者之高下淺深。於此可見。然學者誠能從事於別窮一事之間而有得焉。則亦將無眞妄之可別。若是乾道。則直加斷除而已。何用辨別之爲。辨別亦是坤道。 조백연(趙伯淵) 조내룡(趙來龍)을 말한다. 자는 백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설월(雪月)의……처지 찾아가고 싶었지만 만나지 않고 돌아오게 될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하루 밤에는 설월(雪月)의 경치를 보다가 홀연히 섬계(剡溪)에 있는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그리워서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가서 대안도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만나보지 않고 돌아왔다. 누가 물으니 그는 답하기를, "흥(興)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 되면 돌아가는 것이지 하필 안도를 볼 것이랴."라고 한 고사에서 원용한 말이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중락(仲洛) 조내룡(趙來龍)의 아우 조내귀(趙來龜)의 자이다. 화니대수(和泥帶水) 진흙에 물을 탄 것처럼 선(善),악(惡),시(是),비(非) 등이 뒤섞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음을 뜻한다. 이천(伊川)이……하였으니 《근사록》 권2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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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63) 【기현】에게 보냄 與朴世顯【冀鉉】 지지난 달에 그대 집을 들러 숙원을 푼 것이 실로 적지 않았네. 다만 돌아오는 길에 장애가 생겨 지나쳐 오게 되었으니, 뒤에 생각함에 매우 서글프고 서운하였네. 이후 가을이 겨울로 교체되어64) 햇볕이 차가워져 가는데, 당상(堂上)의 병환은 원기를 회복하였는지 모르겠지만 금옥 같은 형제들의 지극한 정성과 효성에 어찌 감응하여 변화하는 기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항상 축원하며 멀리서 생각하는 마음 감당할 수 없네. 의림(義林)은 옛날 그 쪽에서 돌아 온 뒤로 아들이 죽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거듭 백모 상을 당하였으니, 인가(人家)의 화액(禍厄)은 늘 있는 일이지만 어찌 이와 같이 참혹하단 말인가? 슬프고 애통하여 차라리 덜컥 죽어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네. 지난 갑오년(1894, 고종31)에 그대 4촌이 순절한 위대한 사적은 접때 그 쪽으로 갔다가 비로소 그 상세한 내용을 알았는데, 나의 고루함이 심함이 부끄러웠네. 지척의 이웃 고을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천하의 선비와 벗하여 위로 만고의 선을 논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 순절한 전말 및 동시에 화약고에서 분사(焚死)한 사람은 성은 김씨인데 이름은 무엇인가? 또 중군(中軍)의 성명을 상세히 기록하여 보내주기를 바라네. 이것은 어찌 비바람 속에 닭이 울고65) 큰 물결 속의 지주(砥柱)66)로 만세에 불후할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덕문(德門)의 행의(行義)는 실로 감탄하며 우러를 만하네. 그대 4촌은 이미 이와 같은 위대한 절의가 있고, 그대 형제는 또 효우의 행실로 사림에 자자하니, 고인이 이른바 "비록 깎아 내어 다하는 날에 있어도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라고 한 것67)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再去月。歷進仙庄。獲償宿願。實不淺淺。但廻程有礙。未免戛過。追切悵缺。伊後金水交遞。日色向寒。未審堂上愼節。有臻天和。金昆玉季。至誠至孝。安得無感應轉移之機也。常常顒祝。不任遠情。義林昔自那上還。遭家兒化逝。又未幾日。荐遇伯母喪事。人家禍厄。未或不有。而豈有若是之慘酷耶。悲霣痛怛。寧欲溘然而無知也。往在甲午。令從氏殉節偉蹟。向日那邊之行。始得其詳。可愧固陋之甚也。咫尺隣壤。猶尙如此。況敢望友天下之士。尙萬古之善乎。其殉節顚末。及同時焚死火藥庫者。姓金氏名云誰也。且中軍姓名。詳悉錄送爲望。此豈非風雨雞鳴。洪流砥柱。而爲萬世之不朽者乎。大抵德門行義。實可歎仰。從氏公。旣有若是之偉節。左右兄弟。又以孝友之行。藉藉士林。古人所謂雖在剝盡之日。而陽無可盡之理者。豈不信然耶。 박세현(朴世顯) 박기현(朴冀鉉, 1864~?)을 말한다. 자는 세현, 호는 강재(剛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가을이 겨울로 교체되어 원문의 '금수교체(金水交遞)'를 풀이한 말이다. 오행(五行)의 금(金)은 가을에 해당 되고 수(水)는 겨울에 해당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비바람……울고 《시경》〈정풍(鄭風) 풍우(風雨)〉에 "비바람 자욱한데, 닭소리 그치지 않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風雨如晦, 鷄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남녀 간의 풍속이 문란한 시로 보았으나 고주(古註)에 "풍우는 군자를 생각함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군자를 생각하여 그 법도를 바꾸지 않는다.[風雨, 思君子也. 亂世則思君子, 不改其度焉.]"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뜻을 취한 것이다. 지주(砥柱)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三門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黃河) 강줄기 안에 서 있었다. 《水經注 河水4》 황하의 세찬 물결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그 형상으로 인해, 세상 풍파를 견디며 굳센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비유할 때에 인용하는 말이다. 고인이……것《주역》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나오는 말인데, 변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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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에게 답함 答安慶伯 노쇠하고 황폐하여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는 차에 벗들은 영락하여 흩어져, 온갖 감회가 생겨 고할 말이 없어, 들어와서는 지붕만 쳐다보고 나가서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어찌 우리 경백(慶伯)이 또한 한번 찾아와 이 괴로운 심정을 위로해 주지 않는가? 뜻밖에 편지를 받음에 족히 만나서 얼굴을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으니, 어떤 위로가 이만하겠는가? 인하여 어버이의 체후가 보중한 줄 알았으니, 더욱 마음에 부합하네. 혼례에 축하하지 않는 것77)은 옛날에 그런 말이 있고, 더구나 경백의 오늘 일은 어버이를 생각하는 감회가 생각건대 남들과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견디며 어떻게 부지하는가? 고맙게 초대해 주니, 비록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나의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다만 근래에 감기 때문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지가 오래 되었네. 그 때 괴로움의 가감(加減)을 헤아려 결정할 것이니, 비록 감히 잊지 않겠지만 또한 기필할 수 없네. 사당에 고하는 한 가지는 실로 폐해서는 불가하고 작은집 사당에도 또한 일례로 고해야 하네. 다만 축사는 사앙(士仰)78)이 마땅히 주관하고 속칭(屬稱)은 '사손(祀孫)'이라고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상세히 헤아리는 것이 가할 것이네.[문] 《근사록》 권1 도체류(道體類)에 "천지 사이에 정정당당하여 위아래로 곧은 바른 이치이니, 벗어나면 옳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출(出)'은 치우침을 말하는 것입니까?[답] '출'은 실로 치우침으로 말한 것이지만, 분명 이미 발한 뒤의 과불급(過不及)을 겸하여 말한 것이네.[문] 창섭(昌燮)은 '불천노불이과(不遷怒不貳過)'에서 먼저 '천노(遷怒)'를 말한 것은 대개 만약 노여움을 옮기면 이것 또한 허물이기 때문에 뒤에 '이과(貳過)'를 말하여 위로 '천노'를 포함하였다고 생각하는데, 황철원(黃澈源)79)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것도 한 가지 설이다. 사람의 정 가운데 발하기는 쉬우나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심하기 때문에 먼저 '천노'를 말하였으니, 《대학》정심장(正心章)에서 '분치(忿懥)'를 먼저 말한 것과 같다. 이것 또한 한 가지 설이다.[답] 창섭과 철원의 의론은 모두 의의가 있네. 그러나 또한 하나의 기(氣)가 있으니, '노(怒)' 자는 마음에서 말하였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고, '과(過)' 자는 일에서 말하였기 때문에 뒤에 말한 것이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맹자가 "지(知)의 실제는 이 두 가지를 알아서 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 가운데 원래 양단(兩端)이 합하니 이미 아는 것이 분명하고 또 지키는 것이 견고한데, 《근사록》권1에서 주돈이(周敦頤)는 도리어 "덕(德)은 애(愛)를 인(仁)이라 하고, 의(宜)를 의(義)라 하고, 이(理)를 예(禮)라 하고, 통(通)을 지(知)라 하고, 수(守)를 신(信)이라 한다."라고 하여 '지'에 단지 '통'을 말하고 별도로 '수'를 '신'에 말하여 각각 부합하지 않음이 있으니, 의심스럽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주돈이는 원두로부터 '성(誠)'을 말하고 '기(幾)'를 말하면서 다섯 가지 덕의 이름을 분별하였으니, 이것은 태극과 음양오행의 순서이고, 맹자는 다만 양심이 발현된 곳을 취하여 그 용공의 절도를 말하였으니, 뜻은 각각 있는 곳이 있고 말 또한 같지 않다. 또 상세히 말하자면, '지'는 이미 알아서 버리지 않기 때문에 능히 통하니, '통' 자 가운데 이미 '불거(不去)'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수를 신이라 한다고 한 것은 '수' 자는 실제로 있다는 뜻이니, '불거'와는 같지 않고 '수' 자 이면에 사덕(四德)을 포함하고 있다.[답] 본 것이 상세하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정자(程子)는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다.[鬼神造化之迹]"라고 하였고, 장재(張載)는 "두 기의 양능이다.[二氣之良能]"라고 하였는데, 정자는 기로 말하였고, 장재는 이로 말하였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양능을 곧장 가리켜 이(理)라 하는 것은 불가하니, 대개 양능 상에서 이를 볼 뿐이다. 양능은 이기가 자연히 유행하는 것이라, 안배의 뜻이 있지 않으니, 오로지 이로 보는 것은 불가한데, 더구나 확고하게 기로 간주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그러나 그 주가 되는 것은 이(理)이고 기(氣)는 이(理) 가운데의 일이니, 오로지 이로 보는 것이 오히려 확고하게 기로 보는 것보다 낫다.[답] 양능은 이(理)이네. 만약 양능을 곧장 가리켜 이라고 하지 못한다면 기가 도리어 주가 되고 이는 사용할 곳이 없을 것이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분치(忿懥)는 의(義)가 발한 것이고, 공구(恐懼)는 예(禮)가 발한 것이고, 호요(好樂)는 인(仁)이 발하는 것인데, 우환(憂患)은 무엇이 발한 것입니까?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우(憂)는 마음의 염려이고, 환(患)은 이 염려가 심한 것이니, 우와 환은 바로 지(知) 측면의 일이다.[답] 옳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근사록》권1에서 "맹자는 그 가운에 나아가 또 호연지기를 발휘해 내었다."고 하니, 흡사 기(氣)가 이(理) 가운데 섞여 있는 듯합니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기는 이 가운데의 일이니, 바로 이 이가 유행하고 운용하는 수단이다.[답] 실로 그러하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건도(乾道)는 남자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자를 이룬다."는 것은 사람과 사물을 겸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남녀는 보기 쉽고 사물의 남녀는 보기 어렵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무릇 한 사물이 있으면 문득 음양이 있으니, 비록 하나의 작은 먼지라도 등[背]과 상하가 있다. 선유가 이른바 "대나무에 자웅(雌雄)이 있고, 삼에 빈모(牝牡)가 있다."라고 하였으니,80) 또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남여' 두 글자는 본래 사람으로 인한 이름이지만 성인은 다만 사람과 사물을 겸하여 꿰뚫어 혐의로 여기지 않았다.[답] 옳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사문(師門)의 답훈(答訓)에 "반드시 표리와 정추가 이르지 않음이 없어야 바야흐로 물리(物理)의 극처(極處)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사문의 뜻은 대개 반드시 표리와 정추의 사물이 이르지 않음이 없는 뒤에야 바야흐로 이치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라 여기니, '필(必)' 자와 '방시(方是)' 자를 보면 이런 뜻이 있는 듯하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사문의 뜻은 그렇지 않다. 표리와 정추는 바로 물리의 극처이니, 《대학》에서 말한 격물(格物)의 물은 모두 물(物)의 이(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답] 나의 뜻도 실로 그러하네. 衰索踽涼。知舊零散。百感萬懷。無可吿語。入則仰屋。出則仰蒼。豈以吾慶伯而亦未有一番相顧。以慰此苦苦耶謂外得書。足以替其顔而代其話矣。何慰如之。因審省候衛重。尤副願言。昏禮不賀。古有其語。而況慶伯今日之事。則其思親之感。想有以異於人者。何以堪遣。何以支將。俯招之惠。雖未有示。而吾之心。豈有已哉。但近日來。以感祟委頓。叫苦久矣。其時。量所苦之加減而爲之進退。雖不敢忘。而亦不可必也。告廟一款。固不可廢。而小宅祠堂。亦當一例告之。但祝辭。士仰當主之。而屬稱則云祀孫可矣。如何如何。詳諒之可也。天地之間。亭亭當當直上直下之正理。出則不是云云。出謂偏倚。出固以偏倚言。然的兼已發後過不及言昌燮以爲不遷怒不貳過。先言遷怒者。蓋若遷怒則是亦過也。故後言貳過。而上包遷怒也。黃澈源以爲此是一說。人之情易發而難制者。惟怒爲甚。故先言遷怒。如大學正心章之先忿懥。此亦一說也。昌燮澈源之論。皆有意義。然而亦有一氣。怒字。以心上說。故先言之。過字以事上說。故後言之。昌燮曰。孟子曰知之實。知斯二者。不去云云。知中元合兩端。旣知之明。又守之固。周子却云。德愛曰仁。宜曰義理曰禮。通曰知。守曰信。於知只言通。而別言守於信。各有不孚。可疑。澈源曰。周子是自原頭言誠言幾。而分別五德之名。是太極陰陽五行之序也。孟子特取良心發見處。言其用功節度。則意各有在。言亦不同。且細言之。則知旣知而不去。故能通。通字中。已含不去意。守曰信。守字是實有之意。與不去不同。守字裏面。包含四德。看得詳。昌燮以爲程子曰。鬼神造化之迹。張子曰。二氣之良能。程以氣。張以理。澈源以爲良能不可直指爲理。蓋於良能上見理耳。良能是理氣自然流行。不有安排之意。不可專作理看。況可硬作氣看乎。然其所主則理也。氣是理中事。則專作理省者。猶勝於硬作氣看者耳。良能理也。若以良能而不直指爲理。則氣反爲主。而理無所用矣。昌燮曰。忿懥義之發。恐懼禮之發。好樂仁之發。憂患何發。澈源曰。憂是心之慮。患是慮之甚。則憂患正是知邊事。是。昌燮以爲孟子去其中。又發揮出浩然之氣。恰似氣雜在理中矣。澈源以爲氣是理中事。乃此理流行運用之手脚。固然。昌燮曰乾道成男。坤道成女。兼人物而言之者也。人之男女昜見。而物之男女難看。澈源曰。凡有一物。便有陰有陽。雖以一塵之微。有背而上下。先儒所謂竹有雌雄。麻有牝牡。亦最易見者也。但男女二字。本是因人而名。然聖人直兼人物而貫之。不以爲嫌。是。昌燮以爲師門答訓曰。必表裏精粗。無不到。方是物理之極處。無不到云云。師門之意。蓋謂必表裏精粗之物。無不到而後。方是理無不到之謂耶。看必字方是字。似有此意。澈源以爲師門之意不然也。表裏精粗。卽物理極處。大學言格物之物。皆指物之理而言。鄙意固然。 혼례에……것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나오는 말이다. 사앙(士仰) 안종섭(安宗燮, 1877~?)의 자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황철원(黃澈源) 1878~1932. 자는 경함(景涵),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선유가……하였으니 《주자어류》권74〈역10(易十) 상계 상(上繫上)〉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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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직【영하】에게 답함 答閔子直【泳夏】 한 통의 편지가 어디에서 왔는가? 벗이 돌보아주는 두터움에 항상 감사 감사하네. 인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근래의 절도가 또한 다시 어떠한지를 알았네. 밝은 창가 책상에서 조용히 연구하여 진보가 끝이 없는 점이 있는가? 이경(而敬)은 생각건대 또한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토론하고 있을 것이네. 체천(遞遷)96)할 때 묘소에 고한다는 설은 아마 그렇지 않은 듯하네. 비록 신주가 없더라도 기제(忌祭)나 절천(節薦)으로 인하여 체천의 뜻을 고해야 하네. 만일 기제나 절천의 때가 아니라면 별도로 지방을 갖추어 고하여 행하는 것이 가하니, 어찌 집을 놓아두고 묘소에 가는 일이 있겠는가? 일위(一位)를 실전(失傳)하여 일위만 제사 지낸다면 인정에 과연 편치 못하니, 함께 설위하는 것이 정과 예에 합할 듯하네. 그러나 반드시 먼저 고유를 하고 행하는 것이 가할 듯하네. 돌아가신 달을 알고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면 고인이 날짜를 점쳤던 방법으로 통용하는 것이 가하네. 고인은 대상과 소상에 기일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이 달 안에 날짜를 점쳐 행하였으니, 후세에 기일을 사용하는 것은 간편한 것을 따른 것이네. 그렇다면 이것은 돌아가신 달 안에 하루를 점쳐서 사용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이미 날짜를 점쳤다면 반드시 해마다 정할 것은 없을 듯하네. 집에서 제사지내지 않고 묘소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그렇지 않을 것이네.이것은 모두 견문이 적은 사람의 말이라 믿을 것이 못되니, 부디 더 상세히 살펴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一書自何而來。故人傾眷之厚。尋常感惻。因審侍省近節。亦復何如。明窓棐几。從容硏究。有進進不已者否。而敬。想亦與之聯丌對討。昕夕孜孜也。遞遷吿墓之說。恐不然。雖無神主。因其忌祭。或節薦。而告以遞遷之意。如非忌祭節薦之時。則別具紙榜。告以行之可也。豈舍家適墓之有哉。一位失傳。但祭一位。則於人情果未安。倂設恐合情禮。然必先告由而行之。似可。知亡月而不知亡日。則以古人筮日之法。通用之爲可。古人於大小祥。不用忌日。只於此月內。筮日行之。後世之用忌日。從簡便也。然則此於亡月內。筮一日用之。豈不可乎旣筮日。則恐不必爲年年元定也。不祭於家而祭於墓。則不然矣。此皆寡聞謏見。不足取信。幸加詳之。如何。 체천(遞遷) 봉사손(奉祀孫)이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神主)를 최장방(最長房)으로 옮겨 제사를 받들게 하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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