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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주에게 답함 答吳汝周 일전에 잠깐 출입하였다가 어자(御者)82) 때문에 헛되이 돌아오게 되어 생각할수록 아쉽습니다. 인편을 통해 다시 다정한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돌아보아 주시고 알아주시는 지극함으로, 더욱 감격스럽고 슬퍼졌습니다. 또한 부모님의 상황이 강녕하시고 여력이 있을 때에는 글을 읽으며, 근래에는 《소학(小學)》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구하게 위로되고 시원하니 실로 듣길 바랐던 소식과 부합합니다. 대저 이 책은 바로 성인(聖人)을 배우는 터전이라 할 수 있으니,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자 한다면 한 단락을 읽으면 또한 한 가지를 행하여야 하고, 두 단락을 읽으면 또한 두 가지를 행하여야 하니, 조금도 소홀하거나 대강 넘겨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매양 생각건대, 지금은 비록 어린아이의 학문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체국(體局)과 식량(識量)은 대인(大人)의 학문을 겸하고 덧보태는데 해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기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말끔히 청소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일에 대하여 반드시 하나하나 깊이 연구하게 되어 그렇게 된 까닭을 알게 된다면 바꿀 수가 없을 것이고, 그 당연한 것과 함께한다면 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되, 그 사이에 의심되거나 명료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일일이 기록하여 후일을 기다려 깊이 헤아리고 결론을 정하십시오. 참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그 사이에서 곡절을 가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스스로 짐작하여 알맞게 조절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리멸렬한 기교에 대해서 어찌 입을 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감히 변변치 않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부디 답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질문】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대답】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더욱 공부에 힘써야 합니다. 주자는, "아직 발하기 전에는 찾아볼 수 없고, 이미 발하고 났을 때는 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평소에 경장(敬莊)과 함양(涵養)의 공부를 지극히 하여 사사로운 인욕에 어지러워지지 않으면 아직 발하기 전에는 맑은 거울이나 잔잔한 물과 같으며 발한 뒤에는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83)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하고 간단하면서도 의미가 깊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경(敬)을 위주로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보다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질문】〈서명(西銘)〉에서, "천지의 장수는 내가 성으로 삼았다."84)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理)가 기(氣)의 장수가 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지(志)가 전일하면 기(氣)를 움직인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志)가 기(氣)를 이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천지에 있다면 바로 이(理)가 기(氣)를 이끄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 있다면 지(志)가 기(氣)를 이끄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어째서인지요?【대답】이(理)가 이끌고 기(氣)가 이끄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다른 점이니, 하늘은 무위(無爲)이고, 사람은 유위(有爲)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志)가 바로 이(理)의 기력과 골자가 있는 것이라면 하늘과 사람이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질문】주돈이(周敦頤)는, "사랑함을 인(仁)이라고 한다."85)라고 하였으며 한유(韓愈)는,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86)라고 하였으니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대답】주돈이는 흘러가는 것을 들어서 근원을 가리켰으며 한유(韓愈)는 곧 흘러가는 것을 인식하여 근원으로 삼았으니 다릅니다.【질문】사람은 이(理)를 온전하게 된 몸으로 태어났는데, 그리하여 이것이 사단(四端)이 되고, 초목(草木)이나 금수(禽獸)는 편벽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리하여 사단(四端)의 이치가 없는 것입니까?【대답】편벽된 기질이 상승하면 또한 사단(四端)과 방불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日者有小出入。致使御者虛歸。追念耿缺。便頭又得情函眷認之至。尤覺感惻。仍審庭候康寧。餘力咿唔。近在小學。區區慰豁。實副願聞。大抵此書。是學聖田地。做人樣子。讀得一段。亦須行得一段。讀得二段。亦須行得二段。毋敢有毫忽放過也。且念左右今雖從事於小子之學。而其體局識量。不害兼補於大人之學。須於事親敬長灑掃應對之事。必一一窮格。知其所以然而不可易。與其所當然而不容已。使之了了分明。間有疑晦。須一一記錄。以俟後日商確也。誠能實心下功。則其間曲折加減。不待人言。而自有斟酌樽節處。況此滅裂伎倆。何足爲容喙也。敢荷不鄙。不容無說。未發時如何用工。未發時。更着甚工夫。朱子曰。未發之前。不可尋覓已發之際。不容安排。但平日敬莊涵養之工至。而無人欲之私以亂之。則其未發也。鏡明水止。其已發也。無不中節。此語明白簡奧。指示學者主敬之方。莫切於此。西銘曰。天地之帥吾其性。是理爲氣之帥也。孟子曰。志一則動氣。是志爲氣之帥也。在天地則理爲氣之帥。在人則志爲氣之帥何。理帥志帥。此天人之別。天無爲人有爲故也。然志是理之有氣力骨子處。則不可謂天人不同也。周子愛曰仁。與韓公博愛之爲仁。語意何如。周子據流而指源。韓子直認流而爲源。所以不同。人得理之專體而生。故有是四端。草木禽獸得偏氣而生。故無此四端之理耶。偏氣上亦有四端之髣髴處。 어자(御者) 말 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가리킨다. 오여주가 출타하여 만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주자전서(朱子全書)》 〈답호남제공서(答湖南諸公書)〉에 실려 있는 편지에 있다. 천지의 …… 삼았다 이 글은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천지의 사이에 가득한 것은 내가 형체로 삼았고, 천지의 장수는 내가 성으로 삼았다.【天地之塞吾其體, 天地之帥吾其性.】"라고 하였다. 사랑함을 인(仁)이라고 한다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성기덕장(誠幾德章) 제3에 나오는 글을 주희(朱熹)가 《근사록》 권1 도체류(道體類)에 수록하였는데,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고,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의라고 하고, 조리 있게 행하는 것을 예라고 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는 것을 지라고 하고, 확고하게 지키는 것을 신이라고 한다.【愛曰仁, 宜曰義, 理曰禮, 通曰智, 守曰信.】"라고 하였다. 널리 사랑하는 …… 인(仁)이라고 한다 한유(韓愈)가 지은 〈원도(原道)〉의 첫 문장으로,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博愛之爲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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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인에게 답함 答尹季仁 지난번에 오는 인편만 있고 가는 인편이 없어서 답장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사이 객지에서 거처하는 정황은 좋으며, 체후는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황생(黃生)에게 보낸 편지는 그대가 이미 보았는데 그 가부(可否)가 어떠합니까? 대저 황생(黃生)의 뜻은 신(神)을 이(理)라 여기고, 영(靈)을 기(氣)로 여겨서 영은 주재하지 못하고 주재하는 것은 신(神)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영(靈)은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없는데,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서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신(神)이라고 하였습니다. 횡설수설하여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닙니다만 그 대체적인 의도는 여기에 근본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영(靈)과 신(神)은 모두 이(理)와 기(氣)가 합쳐지고 나서 생겨난 것입니다. 진실로 이(理)와 기(氣)를 나눠 배치하여 볼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사물로 영(靈)의 오묘함이 사용되는 곳이 바로 신(神)인 것입니다. 신(神)과 영(靈)이 어찌 서로 마주하거나 나란하게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심(心)이 이름을 얻어서 영(靈)이라고 하고, 신령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主宰)할 수 있습니다. 능히 주재하는 것이 바로 영(靈)이므로 주재하는 것은 바로 이(理)이니, 마른 나무나 꺼진 재【灰】와 같은 사물에는 진실로 모두 이(理)가 있으나, 주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영(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허령(虛靈)하여 주재(主宰)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허령(虛靈) 안에는 절로 오묘한 작용의 법칙이 주재할 수 있으니 영(靈)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이(理)는 작용하는 별도의 일이 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 갖추어지고 응하므로 이것은 허령(虛靈)이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생(黃生)은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견해가 혹 왼편으로 치우쳐서 그러한 것이 아닌지요? 매번 한 번 계인(季仁)과 서로 확실하게 토론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자세히 말씀해주신 내용을 받아보고 이에 대략 펴보았으니, 더욱 세심히 연구하여 알맞은 논의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주기론(主氣論)이 무척 성행하고 있으나 오직 한 두명의 선각자들이 여러 책에 훌륭한 글을 후세에 남겨 그 폐단을 구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에 남긴 공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그 설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리(主理)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간혹 지나쳐서 도리어 잘못을 바로잡고 지나치게 직언하는 데로 귀결되는 문제가 없을 수 없으니 이 역시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向便有來無去。未得修謝矣。未審日來旅居節宣。體事佳勝。馳溯不任。向抵黃生書。賢旣視至。則其可否何如耶。大抵黃生之意。以神爲理。以靈爲氣。以爲靈不能主宰。而主宰者神也。靈不能具衆理應萬事。而具衆理應萬事者神也。橫說翌說。其端不一。而其大意。則本於此矣。愚謂靈與神。皆是理與氣合而有者也。固不可分配理氣看。然則只是一物。而靈之妙用處。便是神。神與靈。豈是待對倂立之物哉。且心之得名。以其靈也。靈故能主宰。能主宰者是靈。所主宰底是理。如枯木死灰之物。固皆有理。而謂之主宰則不可。以其不靈故也。若曰虛靈不能主宰。而虛靈之中。自有主宰妙用之則。靈爲無用之長物。理爲作用之別事。朱子曰。虛靈不昧。以具衆理應萬事。具之應之。是非虛靈之爲主宰者耶云云。然黃生竟不見從。未知愚見或左而然耶。每欲一與季仁相確而未果矣。今承詳示之喩玆以略布。幸加細究。以示稱停之論也。近世主氣之論盛行。而惟一二先覺。立言著書。以救其敝。此其有功於斯世者大矣。然後之人聞其說。而不得其意。名爲主理。而又或過之。反不無矯枉過直之歸。此亦不可以不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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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당 박공 행장 愚忍堂朴公行狀 공의 휘는 인진(麟鎭), 자는 학중(學仲), 호는 우인당(愚忍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며 찰방(察訪)을 지낸 휘 위(蔚)가 그의 중조(中祖)이다. 찰방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맹성(孟誠)을 낳고, 첨정은 참의를 지낸 휘 영걸(永傑)을 낳고, 참의는 사맹(司猛)을 지낸 휘 억서(億瑞)를 낳고, 사맹은 감찰을 지낸 휘 지수(枝樹)를 낳았다. 지수는 임진년(1592, 선조25)의 충신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승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휘 천주(天柱)를 낳고, 주부는 휘 성소(成素)를 낳고, 성소는 휘 태흥(泰興)을 낳고, 태흥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휘 상언(尙彦)을 낳고, 첨지중추부사는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필익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경귀(慶龜)이고 조부는 휘 만환(萬煥)이다. 고(考)는 휘 재덕(在德)이고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생고(生考)는 휘가 재응(在應)이며 백부(伯父)의 후사로 나갔다. 헌종 병오년(1846, 헌종12) 12월 30일에 벽지리(碧池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성품과 기질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한결같이 양친을 섬겨 집안에서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부친1)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기고 부친을 추모하고 받드는 제사에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다. 온화한 낯빛으로 어머니를 모시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들었으며 집안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어머니에게 여쭙고 난 뒤 행하였다. 기미년(1859, 철종10)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조행(操行)을 갖춘 뛰어난 배우자로 내조를 잘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생고(生考 생부)가 세상을 떠나자 계부(季父)인 휘 재표(在杓)가 집안일이 학업에 장애가 될까 염려하여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 공에게는 유학(遊學)하여 학업을 성취하게 하였다. 공은 계부를 매우 근실하게 섬겨 출입과 진퇴를 오직 계부의 명에 따랐다. 생고(生考)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래된 상자 안에서 우연히 돈을 빌려준 것과 관련된 문서를 발견하자 즉시 먹칠을 해버리고 말하기를, "저쪽에서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말을 하면 기망(欺罔)의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인정에 편하겠는가."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약관(弱冠) 언저리였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처럼 남다른 면이 있었다. 종족(宗族)이 매우 번창하였으며 같은 마을에 함께 살면서 장유(長幼)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은의(恩義)가 두루 미쳐 모두가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인척(姻戚)과 옛 친구들에 대해서도 왕래하며 안부를 살피는 일을 언제나 그만두지 않았다. 외왕부(外王父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몇 묘(畝)의 땅을 사서 제사에 올릴 물품을 마련하는 데 이용하도록 하였다. 본생(本生)의 외왕부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고 외구(外舅 장인)와 외고(外姑 장모)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고 물력(物力)을 비축하여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이들을 돕고 길사와 흉사에 힘을 보태며 묘제(墓祭)와 봄가을의 시제(時祭)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그 힘을 미루어 방계 친족의 묘제에도 보탬이 되게 하였다. 육촌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살림이 어렵고 병도 나자 공이 데려다 부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뒤 가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관과 삽(翣)2)을 마련하여 도와주었다. 같은 마을에 아이를 낳게 된 부인이 굶주리다 이로 인하여 목숨이 끊길 지경이었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양식과 음식을 장만하여 돕도록 하여 어머니와 아이가 그 덕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걸객(乞客)이 왔다가 병이 들자 몇 달에 걸쳐 구호하고 치료해주는 것이 집안 식구가 병이 들었을 때와 차별이 없었고, 죽었을 때도 의복과 물건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떠돌며 빌어먹던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어서 길가에 빈(殯)3)을 하였지만 오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길에서 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다. 공이 불쌍하게 여겨 물자를 내어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가난한 일가 한 사람이 수십 민(緡)의 돈을 빌려 가 여러 해가 되도록 돌려주지 않았건만 또한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빌린 돈을 돌려주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에서 이 돈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잊어버렸는데 받는다면 어찌 쓸데없는 물건이 아니겠는가." 하고, 결국 받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검약을 실천하고 남는 재물을 보존했다가 곤궁한 자들을 진휼하여 그동안 공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한 자가 적지 않았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노비가 오래도록 역을 치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풀어주었다. 일찍이 여자 노비 1명을 샀다가 양가(良家)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는 또한 풀어주어 돌려보냈다. 한번은 날아가던 꿩이 산짐승에게 쫓기다 처마 밑에 숨어 엎드려 있었다. 자식들이 잡아 바치자 공이 말하기를, "짐승이 의지할 데가 없어 사람에게 의지했건만 어찌 차마 죽이겠는가." 하고 풀어주도록 하였다. 근세(近歲) 이래로 먼 지역에서 온 매우 공교한 물건들이 시장에 현란하게 넘쳐나 서로 앞다투어 빠져들고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건만 공은 여태껏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공은 선대의 계보(系譜)가 중조(中祖)부터 그 위로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았다. 중간에 선조 한 사람이 다른 집안의 계보를 끌어다 그 위에 붙였는데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 몹시 두려워 최면암(崔勉庵)4), 기송사(奇松沙)5)(성과 호는 붙여 씁니다. 예) 이율곡 「지침」 이하 표시만 해두겠습니다.) 등 예를 아는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뒤 종족(宗族)에게 알리고 바로잡았다. 마을에 재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 위세가 꽤 당당하였다. 그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은 끝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들 준기(準基)에게 허리에 차고 다니는 보도(寶刀)가 있었다. 하루는 그것을 잃어버렸는데 공이 말하기를, "가난한 유자(儒者)에게 보검(寶劒)은 본래 지나친 물건이니 잃어버리는 게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루는 내가 두세 명의 벗과 공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었다. 집안에 불이 나 실성(失聲)한 채로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공은 사내아이 종을 불러 불을 끄러 가도록 하더니 돌아와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공의 아우가 밖에 나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돌아와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잘못이 너에게 있으면 모욕을 당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고 잘못이 저쪽에 있으면 저쪽이 망녕된 사람이다. 망녕된 사람과 무엇을 따지겠느냐." 하였다. 아우가 말하기를, "잘못이 없는데도 모욕을 당했으니 역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공은 "모욕은 잘못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곧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동도(東徒 동학교도)의 난 때 그들의 위세가 매우 강하여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휩쓸렸다. 공이 친척과 오랜 벗들을 모아놓고 사정(邪正)과 순역(順逆),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분별을 설명하여 물드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른 일찍 과거를 준비하여 시문(詩文)을 드날렸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유람을 하면서 종종 호탕한 풍운(風韻)을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세상일을 점점 많이 겪게 되면서 덧없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세상과 교유를 끊었다. 병을 치료하는 여가에 《가례(家禮)》, 《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을 취하여 조용히 깊이 연구하고 차례대로 연역하면서 따뜻한 봄날에 얼음이 녹는 듯 유연히 스스로 즐거워하여 몸에 병이 깊고 적막하고 외로운 삶이 고생스럽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선영(先塋) 아래의 옛집을 고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마련해 놓고 일문(一門)의 자제들이 학업에 전념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년에는 본채의 서쪽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즉이재(則以齋)라 이름 붙이고 자식들이 여력이 있을 때 글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시문(時文)을 짓거나 과장(科場)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잘못은 나로 충분하다. 어찌 너희들까지 거듭 잘못되게 하겠느냐." 하였다. 날마다 독서와 궁리(窮理)로 자신을 다잡고 예법에 맞는 행실을 하고, 과정(課程)을 지도하여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현명한 사우(士友)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거리가 멀더라도 반드시 가서 종유하게 하였고 좋은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형편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사서 집에 두도록 하였다.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인간 세상에 명예와 영화, 영달(榮達)과 같이 좋은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남을 시기하거나 이기려는 생각이 마음에서 싹트지 않고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 선량함이 온 식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날을 맞을 때마다 아우들, 종형제들, 자식들, 조카들이 모시는 자리에서 모여서 마주하며 얼굴마다 표정이 화기애애한 것을 보면 마치 봄날에 온갖 꽃들이 활짝 핀 사이에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에게 만금의 재산이 있는 것은 선행 하나를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 소나 말에게 옷을 입혀 놓은 듯한 저들이 과연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홍범(洪範)〉의 오복(五福)에는 덕이 네 번째 순서에 있지만 실제로는 덕이 오복의 근본이다. 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복 가운데 덕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매번 선(善)을 행하도록 정성껏 인도하고 일깨우는 데 공력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방 안은 네 벽이 텅 비고 소박하여 편지나 서첩(書帖) 외에는 다른 여분의 물건이 없었다. 집에 바둑판 하나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물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몰래 틈틈이 바둑을 두며 노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바둑판을 가져다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성품이 예(禮)를 좋아하여 손수 제의(祭儀)를 베껴 일문(一門)의 자제들에게 주고 익히게 하였다. 속절(俗節), 삭망(朔望), 사시제(四時祭)에 대해서는 사라지고 거행되지 않던 것들을 정리하여 찬연함이 볼 만하였다. 또 언서(諺書)로도 1본(本)을 베껴 며느리와 딸들에게 주어 익히도록 하였다. 일문(一門)에서 관례(冠禮)를 치르는 자가 있으면 삼가(三加)의 예6)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매번 일문의 자제들에게 서사(書社)에 모여 향음(鄕飮), 강규(講規) 등의 의절(儀節)을 익히게 하였다.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경륜(經綸)은 대충대충 처리하지 않아 조리와 두서가 확실하였고 세속의 풍습에 얽매이지 않아 의리가 곡진하였다.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드러나고 감춰진 것이 다를지라도 요컨대 측은하게 여기고 자애롭게 대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다. 산림에 감추어진 면모가 세상에 조금이나마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을미년(1895, 고종32) 6월 25일, 우인당(愚忍堂)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원근의 인사(人士)들이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아이들, 시정(市井)의 장사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탄식하면서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8월 17일 정천(淨川) 뒤에 있는 가옥치(佳玉峙)의 술좌(戌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을 두었는데 준기(準基), 준회(準會), 준규(準奎), 준우(準遇)이다. 무릇 인(仁)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존귀한 작위(爵位)이고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누군들 이 도리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늘로부터 뛰어난 자질을 받고 학문의 공을 성취하여 가정에서는 효성스럽고 유순한 아들이고 향려(鄕閭)에서는 정직하고 신뢰받는 선비이며 남을 사랑하여 남에게 사랑받고 남을 공경하여 남에게 공경받으며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으며 지극히 너그러운 자리에 머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지에 노닐어 이르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고 삶과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을 나는 공에게서 보았다. 공은 예설(禮說)에 정통하고 경전(經典)의 본뜻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역사에 박학하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하며 세사(世事)에 밝아서 함께 얘기하면 마치 샘물이 마르지 않고 세차게 흐르는 듯하였다. 공의 행의(行義)와 풍채는 진실로 사람들마다 모두 함께 보았고 함께 들었지만, 학문의 성취에 대해서 말하자면 두문불출하며 요양(療養)하는 10년 동안 이루어졌기에 부지런히 뒤따르던 자가 아니라면 그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아, 우리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비록 매우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무너진 세상, 쇠락한 풍조 속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한 가닥 실 같이 거의 끊어진 도맥을 지키고 조만간 젊은 후생(後生)들의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건만, 공이 조금도 머물지 않고 서둘러 우리를 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남은 생이 쓸쓸하여 그저 눈물이 옷깃을 적실뿐이다. 아, 나를 아는 것이 공과 같은 사람이 없고 공을 아는 것이 나와 같은 자도 없다. 따라서 평소의 행적과 평소의 덕을 찬술하는 일에 대해서 사양을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 이에 감히 차례대로 서술하여 공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드러내지 못한 덕이나 갖추지 못한 행적은 준기(準基)가 응당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훗날 입언(立言)하는 자의 붓을 기다릴 것이다. 公諱麟鎭。字學仲。號愚忍堂。朴氏系出密城。察訪諱蔚其中祖。察訪生僉正諱孟誠。僉正生參議諱永傑。參議生司猛諱億瑞。司猛生監察諱枝樹。壬辰忠臣贈左承旨。旌閭。承旨生主簿諱天柱。主簿生諱成素。成素生諱泰興。泰興生僉樞諱尙彦。僉樞生諱必益。於公高祖也。曾祖諱慶龜。祖諱萬煥。考諱在德。妣水原白氏。生考諱在應。蓋出爲伯父後也。憲宗丙午十二月三十日。生于碧池里第。天姿朴實。性氣溫良。一事兩庭。庭無間言。嘗恨嚴庭早世。未及承顔。追遠事亡。極其哀誠。侍慈幃。色溫氣和。承順無違。家事巨細。必稟而行。己未委禽于礪山宋氏之門。女士好逑。極有內助。乙丑生考違世。季父諱在杓。慮其以家務妨學。凡百躬自幹理。而使公遊學以就其業。公事季父甚謹。出入進退。惟命是從。生考歿後。偶得出錢券文於故篋中。卽加墨抹曰。彼旣不言。自我言之。則是發其欺誣也。於人情安乎。戒家人勿言。是時公年爲弱冠左右。而其處事偉然已如此。宗族甚繁。同住一巷。長少內外。恩義周遍。各得歡心。至於姻戚故舊。往來存訊。隨時不廢。外王父沒。買爲數畝地。俾資奠獻之具。爲本生外王父亦如之。爲外舅姑亦如之。立門規蓄物力。使貧窮有助。吉凶有須。墳塋香火。春秋有賴。又推其力以及於傍親之墓。再從女弟。嫁而貧且病。公邀而養之。及沒。舁還其家。具棺翣而助之。隣里有婦人解娩。飢因垂絶。公聞之。具糧饌使救之。其母孩得以蘇活。有乞客來而病。數月救治。無間家衆。其死也具衣物而葬之。有人父子行乞。父死殯於道側。久而未葬。哀哭於道。公矜之。出力而營之。貧族一人貸去數十緡錢。積年不還。亦無一言及之。久後還之。公笑曰。吾心中忘此錢久矣。忘而受之。豈非剩物乎。遂不受。遇飢歲。必躬加儉約。而存其羸餘。以賙貧乏。前後賴活不少。家有世來奴婢。悶其久役而放之。嘗買一婢。聞其爲良家女。亦放還之嘗有飛雉爲山獸所逐。竄伏簷下。諸子拱之。公曰。物窮依人。豈忍殺之。令放之。近歲以來。遠方淫巧之物。眩溢市肆。競相耽服。公未嘗接目焉。公先系。自中祖以上。逸而無傳。中間族先一人。引他系而冒於其上。因仍未改者久矣。公大懼倫理之乖悖。往復於崔勉庵奇松沙諸識禮處。告于宗族而反正之鄕裏有豪富人。風勢頗張。累書請見。終不一往。子準基有所佩寶刀。一日見失。公曰。窮儒寶劒。本是過物。失之固當。了無追惜之意。一日余與數三朋友訪公。坐語良久。家內失火。失聲告急。公呼僮僕。使之往救。坐語如常。公弟出外。見辱於人。歸告之。公曰。曲在於汝。則見辱固當。曲在於彼。則彼是妄人。與妄人何計較之有。弟曰。直而見辱。不亦寃乎。曰辱在於曲。不在於直。東徒之亂。威虐甚熾。閭里靡然。公會親戚知舊。喩以邪正順逆利害禍福之分。使無所犯。早治功令。馳騁翰墨。以至文酒遊衍之際。往往有豪宕風韻。閱世漸久。浮想消歇。於是杜門閉帷。絶遊息交。養病之餘。取家禮心經性理等書。從容沈潛。次第紬繹。春融氷釋。逌然自樂。不知沈痾之在身。幽獨之爲苦也。修墓下舊構。儲四子五經。爲門子弟修息之所。晩築數椽於寢之西。命曰則以齋。以爲諸子餘力學文之地。敎諸子。不許作時文赴科場曰。誤我足矣。豈令再誤汝輩耶。日以讀書窮理。檢身飭行。指授課程。俾無放過。聞有賢士友。則程途雖遠。而必使往從之。聞有好文字。則事力雖艱。而必令買置之。其樂善好學。出於至誠。而不知人間世復有名華利達之爲好也。忌克之意。不萌於心。忿戾之氣。不形於色。鄙悖之聲。不出於口。溫仁子諒。闔室薰染。每閒居暇日。見其羣弟羣從諸子諸姪。聚對侍列。面面和氣。怡怡融融。如在春城萬花之中。嘗戒諸子曰。人有萬金之産。不如作一介善士。彼牛襟馬裾者。於人世果何爲也。又曰。洪範五福。德居其四。而其實德爲五福之本。吾以爲天下之福。莫過於德。每惓惓引喩所欲式穀者。無所不用其至。一室四壁。蕭散澹泊。簡墨書帖之外。無他長物。家藏一奕枰。人號寶物。一日見諸兒竊間圍戲。遂取其枰。碎而焚之。性好禮。手抄祭儀。賜門子弟習之。至於俗節朔望及四時之祭。修其廢墜。燦然可觀。又以諺書抄一本。賜婦女習之。門內有將冠者。令依三加而行之。每令門子弟。聚於書社。習鄕飮講規等儀節。平日經綸。著於施爲之間者。不涉苟簡而的有條緖。不囿俗習而曲有義理。雖大小有殊。顯晦不同。而要不出於惻怛慈愛利人澤物之心也。惜其沈晦林樊。不少槪見於世也。乙未六月二十五日考終于愚忍堂。遠近人士知不知。莫不痛惜。操文來哭者相續。至於閭巷婦孺。市井販傭。亦皆一辭嘖嘖。以爲善人逝矣。八月十七日。葬于淨川後佳玉峙戌坐原。有四男。準基準會準奎準遇也。夫仁者天之尊爵也。人之安宅。人生之初。孰不有此箇道理。而受之以姿質之美。濟之以學問之功。在家庭爲孝順之子。在鄕閭爲忠信之士。愛人而人恒愛之。敬人而人恒敬之。與世無怨。與物無競。處於至寬之地。遊於至順之境。無人不得生死活潑者。吾於公見之矣。公邃於禮說。謹於經旨。博於史學。精於物理。明於世故。與之言。滾滾若源泉之不渴也。行義風裁。固人人所共見所共聞。而若學問所就。則此是杜門養病十年間所得。非勤於從逐者。不能悉其裏許也。嗚乎。吾輩殘生。雖甚落莫。而相從於缺界頹波之中。以守一縷幾絶之脈。以待後生少年早晩消息。豈知公不少留。而遽爾相棄耶。餘生踽踽。只有淸血霑襟。嗚乎。知我者。莫如公。知公者。亦莫如我。其於述平生之行。撰平生之德。有不可辭而委諸他手也。玆敢序次以還其家。若其德之有未形。行之有未備。則準基當有以補足之。以俟他日立言之筆也。 부친 소후부(所後父)인 백부(伯父)를 가리킨다. 삽(翣) 상여에 실린 관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부채 모양의 장식이다. 불삽(黻翣, '기(己)' 자가 등지고 있는 문양을 그려 넣은 것), 운삽(雲翣, 구름의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보삽(黼翣, 도끼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이 있다. 운삽은 화삽(畵翣)이라고도 한다. 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삼가(三加)의 예 관례를 할 때 관을 세 차례 씌우는 예를 말한다. 《가례(家禮)》에 따르면,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를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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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함60) 【재연】에게 보냄 與文仁涵【載淵】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과 울적함이 날로 쌓이네. 근래 어버이를 모시고 지내는 체후는 만복하며, 공부하는 과정은 독실히 하여 멈추지 않는가? 매번 인함(仁涵)이 일찍 아버지를 잃어 집안을 담당하고 거듭 많은 일을 당한 것을 생각함에 나의 가엽고 절박한 정이 없을 수 없었네. 그러나 영고(榮枯)와 통색(通塞) 이것은 실로 천지 사이에 없을 수 없는 일이니, 마치 한서(寒暑)와 주야(晝夜)가 앞에서 서로 교대하는 것과 같아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네. 다만 마땅히 하늘의 뜻을 들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고, 힘쓸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서와 수신(修身)이니, 나의 성분에 진실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일이라, 또 곤궁(困窮)과 불울(拂鬱)함이 두려워하고 힘써 옥성(玉成)61)시키는 바탕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나이가 젊고 기운이 강하여 앞길이 만 리 인데, 어찌 갑자기 스스로 상실하여 한편으로 선장(先丈)62)께서 기대하고 바랐던 무거움을 저버리고 한편으로 사우가 부탁한 부지런함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평소 집안일을 주관하는 여가에 한 방을 깨끗이 쓸고 《논어》《맹자》 및 《심경》《근사록》등의 글을 가지고 몇 줄을 보고서 의취(義趣)를 궁구하기에 힘써, 마음을 조금이라도 방일하게 하지 않는다면 차츰 쌓은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절로 마땅히 공효를 보게 될 것이네. 의림(義林)은 비록 지극히 보잘것없지만 선장에게는 일찍이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고, 또 임종 때 슬프고 간절하게 한 부탁을 받은 것이 진중할 뿐만이 아니었네. 오호라! 어느새 여러 해가 흘러 묘목(墓木)이 이미 굵어졌네. 매번 한 생각이 생기면 유명(幽明) 간에 저버림이 무궁할까 두렵고, 만약 하루아침에 덜컥 죽게 되면 또 무슨 말로 저승에서 만나게 될 날에 알리겠는가? 이것이 감히 이렇게 그대에게 경계하는 이유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蒼莽涯用。戀菀日積。未詢邇來侍省百福。鉛槧程曆慥慥不住否。每念仁涵早孤當室。荐遭多故。而不能無區區憫迫之情。然榮枯通塞。此固天地間所不無之事。如寒暑晝夜相代乎前。而有不可以移易者也。只當聽天順受。而所可勉者。惟讀書修身。性分固有底一事而已。又安知困窮拂鬱。不爲惕勵玉成之地耶。少年强氣。前程萬里。而豈可遽自隕穫。一以負先丈期望之重。一以孤士友付託之勤乎。平日幹蠱之餘。淨掃一室。將論語孟子及心經近思等文字。看得多少行。務窮義趣。勿令心少有放逸。則積累多後。自當見功矣。義林雖極無狀。而在先丈。未嘗不是知舊之一。且受其臨終悲懇之托。不啻珍重。嗚乎星霜累變。墓木已拱矣。每一念到。恐負幽明無有窮已。而若一朝溘然。則又以何語而報之於泉下相見之日乎。此所以敢爾奉規於吾友者也。如何如何。 문인함(文仁涵) 문재연(文載淵, 1873~?)을 말한다. 자는 인함,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옥성(玉成)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그대를 빈궁하게 하고 시름에 잠기게 하는 것은, 장차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 함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古文眞寶後集 卷10》 선장(先丈) 문재연의 부친 문봉환(文鳳煥, 1849~1890)을 말한다. 자는 익중(翊中), 호는 오계(梧溪),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권19〈오계 문공 행장(梧溪文公行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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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일【창규】에게 답함 答文斗一【昌奎】 보내온 말이 끊임없이 이어져 편지에 가득한 하였는데 말과 의리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성대한 학업의 조예가 범상치 않음이 있을 뿐 아니라 분을 발하고 사려를 격동시켜 용감하게 곧장 나아가는 뜻이 말 밖에 은연중에 드러났는지라, 여러 차례 읽어봄에 감격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어찌 내 자신이 그렇게 한 것과 다르겠는가? 문목 한 통은 단지 어리석은 나의 견해에 의거하여 가부를 질정하니, 바라건대 회답하여 가르쳐 주시게. "삼년칭고(三年稱孤)……"라 한 것은 제가의 설이 같지 않으니, 혹 장사 뒤에는 효자라고 일컫는다고 하며, 혹 졸곡(卒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부제(祔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연제(練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대상(大祥)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부제 뒤에 효자라 일컫는 것이 합당할 듯하니, 선유의 설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네. "친진(親盡)69)……"이라 한 것은 이미 친진하였다면 종자(宗子)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하니, 최장방(最長房)70)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 못하네. "질명(質明)……"이라 한 여기에서의 '질(質)'은 질정(質定)의 뜻이네. 무릇 동이 틀 무렵은 모든 사물의 형상을 질정할 수 있는 때이니, 마치 여러 신하가 조회할 때 색깔을 구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조정에 들어간다는 뜻과 같네. 이미 "날이 샐 무렵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으니, 한 밤중이 아님이 분명하네, 선유 또한 "5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읍(揖)은 붕우와 빈주가 서로 만났을 때의 의식이고 존자(尊者)에게는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마 또한 그러한 듯하네. 來喩娓娓盈幅。辭義俱到。不惟盛業造詣。有不草草。而所以發憤激慮勇往直前之意。隱然於言外。三復感仰。奚異在已也。問目一紙。只據愚見。以質可否。幸以回敎之也。三年稱孤云云。諸家之說不一。或云葬後稱孝。或云以卒哭後。或云以祔祭後。或云以練後。或云以祥後。然以愚見。則祔後稱孝。似爲得中。先儒說亦多如此。親盡云云。旣已親盡。則用宗子之名。不可不如用最長房之名。質明云云。質是質定之義。夫欲明未明。凡物形可質之時。如群臣之朝。別色始入之義。旣曰質明行祀。則非夜半明矣。先儒亦不曰五更行祭非禮也乎。揖是朋友賓主相接之儀。而於尊者無之云。恐亦然矣。 친진(親盡)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대,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최장방(最長房) 4대 이내의 자손 중에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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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암 처사 고공 묘지명 遯庵處士高公墓誌銘 우리 고을에 옛날에 은사(隱士)가 있었으니, 둔암(遯庵) 고공(高公)인 휘 경리(景离), 자 광우(光宇)가 그 사람이다. 산에서 나물 캐고 강에서 낚시하여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올렸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경서를 읽었다. 함부로 교유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택하였으며, 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곳을 택하였다. 예에 맞지 않는 책은 보지도 않고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하고 받으며 얻고 주는 일에 이르러서는 합당한 의리가 아니고 합당한 도리가 아니면 만종(萬鍾)이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조금도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관찰사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국사봉(國師峰) 아래에 집을 짓고 세 갈래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엔 책이 가득하였다. 소쇄하고 고즈넉하여 그 사이에서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생활하였다. 때때로 은봉(隱峰)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경서를 강론하고 산수 간에 노닐며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는 흥취를 다하였으니, 〈천태유산록(天台遊山錄)〉과 같은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이다. 휘 신전(臣傳)은 호조 참의를 지내고, 휘 열(悅)은 호조 참판를 지냈으며, 휘 상덕(尙德)은 지평을 지냈는데, 모두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휘 익심(益深)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냈고, 조부는 휘 명진(明進)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부친은 휘 현(鉉)으로 진사를 지냈다. 모친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첨추(僉樞) 언상(彦祥)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참봉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원건(元健)이고, 차자는 인건(仁健)이다. 손자는 태제(泰濟)이고, 증손은 가한(可漢)이며, 현손(玄孫)은 명림(命霖), 명주(命舟), 명좌(命佐)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묘소는 수동(壽洞) 선영(先塋) 좌측 자좌(子坐)에 있고 쌍분(雙墳)이다. 10세손 광무(光茂)가 대인(大人)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옷 속에 옥을 품고 손에 옥 지니고 懷瑾据瑜산림에 은거하였네. 枕山樓谷한가롭게 소요하며 婆娑徜徉즐거움 알리지 않기로 길이 맹세하였네. 永矢不告커다란 운치, 은둔한 자취는 偉韻逸躅저 언덕에 있네. 在彼阿陸선조가 복을 다 누리지 않아 碩果不食후손이 대대로 복을 누리네. 世世式穀 吾鄕古有隱士曰遯庵高公。諱景离。字光宇。其人也。採山釣水以供親旨。焚膏繼晷以讀古經。不妄交遊而必擇其人。不妄出入而必擇其地。目不觀非禮之書。口不道非法之言。至於辭受取予。非其義也。非其道也。萬鍾有所不屑。一毫有所不苟。州郡擧之而不起。侯伯邀之而不赴。結廬於國師峰下。三逕花竹。四壁圖書。瀟灑幽。閴寄敖其間。時從隱峰安先生。講討墳籍。登臨水石。以償風詠之趣。如天台遊山錄諸篇可見。高氏貫長興。諱臣傳。戶曹參議。諱悅。戶曹參判。諱尙德。持平。皆其中系顯祖也。曾祖諱益深。昌陵參奉。祖諱明進。通德郞。考諱鉉。進士。妣東萊鄭氏僉樞彦祥女。公娶昌寧曺氏參奉義修女。擧二男。長元健。次仁健。孫泰濟。曾孫可漢。玄孫命霖命舟命佐。以下不錄。公墓在壽洞先兆左傍子坐雙墳。十世孫光茂。奉大人命。以其家狀。謁誌墓之文。銘曰。懷瑾据瑜。枕山樓谷。婆娑徜徉。永矢不告。偉韻逸躅。在彼阿陸。碩果不食。世世式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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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안》 서문 鄕約案序 선왕(先王)이 천하의 전토(田土)를 구획하자 백성들이 모여살며 생활하였는데, 사는 곳을 각기 구분 짓고 통속(統屬)하는 바를 두었다. 이런 까닭에 5가(家)를 인(隣)이라 하고 인에는 인장(隣長)을 두었으며, 5린을 이(里)라 하고 이에는 이장(里長)을 두었으며, 4리를 족(族)이라 하고 족에는 족장(族長)을 두었으며, 5족을 당(黨)이라 하고 당에는 당정(黨正)을 두어 주(州)ㆍ향(鄕)ㆍ방(邦)ㆍ국(國)에 이르렀다. 이렇게 조리(條理)와 기강(紀綱)이 찬란하게 빛나고 어지럽지 않게 되어 교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아, 삼고(三古) 시대94)의 아름다운 법이 땅을 쓴 듯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훗날의 군자들이 오히려 남아 있는 법을 주워 모아 향촌과 마을 사이에서 모방하며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횡거(橫渠)의 정제(井制)95)와 남전(藍田)의 향약(鄕約)96)과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대로 여러 임금이 연이어 일어나 더욱 향수(鄕遂)97)의 제도를 중시하고 상서(庠序)98)의 가르침을 밝혔으니, 그 깊이 젖어 들고 배어든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우리 능주(綾州) 고을에 마을[黨]이 여덟 곳인데, 송석(松石) 마을은 그중 하나이다. 강의 상류 쪽에 위치해 있고, 들과 산이 서로 섞여 있어 예로부터 의관을 차려입은 지체 높은 집안과 유림(儒林)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이 많아 유풍과 여운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것이 어찌 유래한 바가 없겠는가. 다만 세대가 내려오면 기풍이 시들고, 법이 오래되면 실정이 쇠퇴하기 때문에 답습해 오던 것들이 흩어지고 사라져서 이에 이르렀다.내가 변변찮은 사람으로 간혹 이곳에서 부형과 장로의 뒤를 따르며 삼가 들은 것이 있었다. 고금을 돌아봄에 사사로이 감개한 마음이 없을 수 없는데, 닦아 거행하고 고쳐 새롭게 할 것을 도모함에 어찌 분수에 넘친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무릇 가정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공손한 행실이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덕(厚德)한 풍속이 있으며, 골목에는 거문고를 타며 시를 암송하는 소리가 있고, 들판에는 망을 보며 지키는 관리의 도움이 있으며, 마을에는 예의를 지켜 사양하는 풍도가 있다. 어느 마을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 없어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미쳐나간다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우리 동향의 여러 군자들은 서로 각기 이에 힘써서 자신에게 있어서는 몸을 수양하고, 집에 있어서는 그 집안을 가지런히 다스리고, 이웃에 있어서는 그 이웃을 교화하고, 마을에 있어서는 그 마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여 《여씨향악(呂氏鄕約)》99)의 규약처럼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며,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휼해야 한다. 또한 옛 규약을 참작하여 늘리거나 줄이는 등 알맞게 고쳐서 한 통을 써 놓고 매달 초하루 회합하기로 약속한 날이나  향음(鄕飮)과 향사(鄕射)100)를 행하는 날이 되면 반드시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면서 서로 갖추게 하고 깨우치게 해야 한다. 게다가 훌륭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한 두 개의 장부를 만들어서 권면하고 경계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어찌 삼고 시대의 남겨진 법이 아니겠으며, 우리나라의 여러 임금께서 선포한 조칙이 아니겠는가. 先王疆理天下。居聚生息。各有區分。而有所統屬。是故五家爲隣。隣有隣長。五隣爲里。里有里長。四里爲族。族有族正。五族爲黨。黨有黨正。以達於州鄕邦國。條理紀綱。燦然不亂。而敎化可興也。嗚呼。三古美法。掃地久矣。後之君子。猶能掇拾遺經而依倣鄕里間者。如橫渠之井制。藍田之鄕約而已。至於我東。列聖繼作。尤重鄕遂之制。明庠序之敎。其所以涵濡薰蒸者。蓋已久矣。惟我綾之鄕。爲黨者八。松石其一也。處於上流。山野相錯。多衣冠舊族儒林名家。而遺風餘韻。猶有存焉。此豈無所自耶。但世降則氣有所蔽。法久則情有所替。故因仍渙解。以至于玆。余以無似。間從父兄長老之後於此。竊有所聞矣。緬古覸今。不能無感慨之私。而謀所以修擧更張者。又安得以僭踰而辭也。夫家有孝悌之行。里有仁厚之俗。巷有絃誦之聲。野有守望之助。黨有禮讓之風。無黨不然。自近及遠。則國治而天下平矣。維我同鄕諸君子。胥各勉焉。在身則修其身。在家則齊其家。在隣則化其隣。在里則正其里。以德業相勸。過失相規。禮俗相交。患難相恤。如呂氏鄕約之規。而且爲增損裁酌。書其一通。至於月朔會約之時。及鄕飮鄕射之日。必爲抗聲讀過。使相備曉。且立善惡二籍。俾有勸戒焉。此豈非三古遺法。而我朝列聖之所宣勑者耶。 삼고(三古) 시대 중국 고대를 세 시기로 나누어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라 하는데,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복희를 상고, 신농(神農)을 중고, 오제(五帝)를 하고라 하기도 하고, 복희(伏羲)를 상고, 문왕(文王)을 중고, 공자(孔子)를 하고라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성인이 정치와 교화를 담담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하ㆍ은ㆍ주 삼대(三代)를 가리키는 듯하다. 횡거(橫渠)의 정제(井制) 횡거(橫渠)는 송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의 호이고, 정제(井制)는 장재가 "정전법을 천하에 시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고을에서 시험해 볼 수는 있다."라고 하여 시행하려고 했던 정전제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맹자집주》 〈등문공 상(滕文公上)〉의 정전제에 대한 주석에 보인다. 남전(藍田)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남전현(藍田縣)에서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여씨향악(呂氏鄕約)이라고도 한다. 그 대강은 "덕행과 공업을 서로 권하고,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며,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로 구성 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세 향약의 모범이 되었다. 《宋史 呂大防列傳》 향수(鄕遂) 지방의 고을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周)나라 때 왕성(王國) 밖 100리 이내를 향(鄕)이라 하고, 100리에서 200리 사이를 수(遂)라 하여 각각 육향(六鄕)과 육수(六遂)로 행적 구역을 나눈 데서 유래하였다. 《周禮 地官司徒》 상서(庠序) 국가의 교육 기관을 비유하는 말로, 하(夏)나라 때에는 교(校)라고 하였고, 은(殷)나라 때에는 서(序)라고 하였고, 주(周)나라 때에는 상(庠)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여씨향악(呂氏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그 대강은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德業相勸],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휼한다[患難相卹]."라는 등의 네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향음(鄕飮)과 향사(鄕射)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말한다. 조선 세종 때에 이루어진 《오례의(五禮儀)》에 의하면 향음주례는 한성부(漢城府)와 외방 각 고을에서 매년 10월에 날을 가려서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과 재행(才行)이 뛰어난 사대부나 서인들을 모아 술을 마시게 하면서 충효와 교화 등을 펴는 의례이고, 향사례는 개성부(開城府)와 외방 각 고을에서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를 좋아하고 행실이 난잡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면서 유학의 도덕과 기풍을 배양시키던 의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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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유고》 서문 竹林遺稿序 글이 세상에 전해진 경우 중, 한 가지는 의리를 밝혀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 가지는 경륜(經綸)을 펼쳐서 이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고, 달빛이나 이슬 등 아름답게 꾸며대는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비록 많다 한들 또한 무엇 하겠는가. 이 때문에 최고의 글은 천하에서 시행되어 만고에 바꿀 수 없는 경전이고, 그 다음의 글은 한 나라에서 시행되는 것이고, 또 그다음의 글은 한 집안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한 집안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한 나라에서 시행하고, 한 나라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천하에서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협소하다고 여겨 시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오직 시행한 곳이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무릇 자식은 어버이에 대해 어버이의 손때가 책에 남아 있으면 차마 손상시키지 못하고, 침이 땅에 떨어져 있더라도 오히려 반드시 거두는 법인데, 하물며 유언(遺言)과 유고(遺稿)는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고 평생토록 행한 일이 실려 있는 것이니, 조심스럽게 지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 혹 천하나 한 나라에서 시행될 수 없는 글이라면 한 집안에 보관하여 자손에게 전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에 가지셨던 뜻과 행하셨던 일을 알게 해야 한다. 또 이것이 일찍이 조상을 추모하고 사모하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죽림(竹林) 황공(黃公)은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공무로 분주하였다. 이 때문에 전해진 저술이 많지 않았는데, 맏아들 작(稓)이 상자에 남아 있는 글을 찾아 살펴보고 약간 편의 글을 모을 수 있게 되자 이를 간행하여 집안에서 시행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겸손한 마음에 두려워하고 꺼려하여 감히 사람들에게 널리 배포하지 못해서였다.삼가 살펴보건대 편질(編秩)이 협소한데다 언사가 간결하고 질박하여 구구하게 꾸며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혹 세속의 안목에 맞지 않은 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요컨대 의리의 문장과 경륜의 방책이 되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내가 생각건대 단지 한 집안의 글이 될 뿐만이 아닌 듯하니, 지금 비록 세상에서 시행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뜻이 있는 자가 취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文之傳於世也。一則發明義理。可以羽翼乎斯文。一則敷陳經綸。可以裨補乎斯世。非是二者。而出於月露組繪之口。則雖多亦奚爲也。是以上焉者。行於天下。而爲萬古不刊之典。次焉者。行於一邦。又次焉者。行於一家。以一家之文而行於一邦。以一邦之文而行於天下。則人必少之以爲不足行。此非文之過也。惟行之非其所也。夫子之於親。手澤在書。不忍傷焉。口液落地。猶必收之。況其遺言遺稿。爲精神心術之所寓。平生行事之所載者。可不思所以謹守哉。其言或不得爲天下及一邦之文。則當藏之一家。傳之子孫。使知乃祖乃父當日之志行。又未嘗不是追遠思成之一助也。竹林黃公早年釋褐。奔走靡監。是以所傳著述爲不多也。胤子稓搜閱巾衍。裒稡得若干篇。付剞劂氏。將欲行之於家。蓋其謙謙畏忌。有不敢廣布於人也。竊覸其編秩狹少。言辭簡訥。不見有區區組繪之態。此所以或不無寡諧於時眼。而其旨意去處。要不失爲義理之文經綸之策也。吾恐不止爲一家之文而已。今雖不欲行之於世。而安知有志於斯世者。不之取焉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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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인에게 답함 答尹季仁 편지에 답장이 늦어진 채 지금 벌써 몇 달이 지났습니다. 궁벽한 곳에 우거하느라 세상의 습속에 빠졌으므로 그 퇴락한 모습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겠습니다. 혹독한 더위가 위세를 거두고 시원함이 잠깐 생겨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부친의 기력은 강녕하시며, 시봉하는 정황은 기쁘고 즐거우며, 체후는 더욱 다복하신지요? 가르치고 배우던 시절에 소견이 얕지 않으니 매번 성대히 축원하였습니다. 의림(義林)은 긴 여름 동안 숨 가쁜 더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였는데, 지금은 가을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나 또 학귀(瘧鬼)가 번뇌롭게 하여 원기를 다 빼앗긴 채 골골하며 죽을 지경일 따름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여러 조목의 문목(問目)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날 마주하고 공부할 적에 이미 논파(論破)했던 것들이 아닌지요? 이에 사의(謝儀)를 써서 감히 함께 언급합니다. 예(禮)에서는 증조부(曾祖父)는 현고부(顯考父)로, 고조부(高祖父)는 황고부(皇考父)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의 주(註)에서는, "현고(顯考)에게는 사당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기(氣)가 지(志)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사람이 지나치게 취하면 뜻이 어지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志)가 기(氣)를 움직이면 사람이 장중하고 공경함이 날로 강해지는 것과 같으니 덕(德)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이것입니다. 부리지포(夫里之布)87)는 곧 한 사람의 지아비와 1리(里)에 부과되는 세금이니, 만약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벌하여 이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전국(戰國) 시대에 이미 이를 벌하였습니다. 또한 시장이나 주택이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가을볕을 여름볕처럼 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정삭(正朔)을 고치되 월수(月數)를 고치지는 않았으니, 하물며 여름을 가을로 고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맹자(孟子)》에, "이 기(氣).……"88)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몰라 감히 억측하여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맹자(孟子)가 경추씨(景丑氏)에게 가서 묵은 것은 장차 현인을 감히 부를 수 없는 뜻을 말하여 제(齊)나라 왕이 그것을 듣게 하려고 한 것이었지, 맹중자(孟仲子)의 둘러대는 말을 따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닙니다.89) 一紙稽復。今幾月矣。居寓僻左。墮在世臼。其頹落之狀。卽此可驗。酷炎收威。新凉乍生。未審尊庭氣力康寧。侍旁怡愉。節宣增祉。斅學時節。見到不淺。每用翹祝。義林長夏喘暑。喫盡苦況。今則秋涼入戶。而又爲瘧鬼所惱。元氣見奪。㱡㱡欲盡耳。奈何。問目諸條。未知向日面穩時。業已論破耶。玆修謝儀。敢此倂及。禮以曾祖爲顯考。以高祖爲皇考。故中庸註曰。顯考無廟。氣動志。如人過醉亂志。玩物喪志是也。志動氣。如人莊敬日疆。作德心逸是也。夫里之布。是一夫一里之布。若有無業之人。則罰之使出此布也。戰國時。旣有此所罰。又一切施之於市宅之民。秋陽之爲夏陽。似甚不然。古者。改正朔而不改月數。況可改夏爲秋乎。在孟子是氣云云。愚所未瑩。不敢臆說。宿景丑氏。將以語不敢召之義。使齊王聞之也。非爲欲遂仲子之權辭也。 부리지포(夫里之布)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부포(夫布)와 뽕나무나 삼(麻)을 심지 않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이포(里布)를 가리킨다. 이 기(氣)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 上)」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특징을 설명한 부분을 가리킨다. 맹자가 …… 것이 아닙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 2장인 장조왕장(將朝王章)의 내용으로, 임금이라도 현인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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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인【상린】에게 답함 答尹季仁【相麟】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에 오랫동안 답을 하지 못하였으니 불민함이 많습니다. 봉성(鳳城)에서 돌아온 뒤에 여러 날 동안 정신없이 바빠 잠깐의 틈이나 눈 깜빡할 시절도 없었으니, 그저 스스로 번민할 뿐이었습니다. 심기설(心氣說)에 대해 질문한 것은 마음에 의심스런 점이 있으면 대충 부질없이 넘겨버리지 않음을 볼 수 있었으니, 대단히 축하드릴 만합니다. 대저 김장(金丈)이 말한, '기(氣)는 심(心)에 있다.'는 한 구절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心)은 기(氣)로써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理)로써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이(理)로써 말한다면 그 본래 그러한 주재(主宰)하는 오묘함이 있으니 진실로 기(氣)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기(氣)로써 말한다면 다시 어떠한 기(氣)가 기(氣) 안에 있겠습니까? 저는 이(理)가 마음에 갖춰져 있다고는 들었으나, 기(氣)가 심(心)에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계인(季仁)의 말은 병통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인데 그는, "심(心)이 주재(主宰)하면 기(氣) 또한 따라 속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기(氣)란 어떠한 물건이기에 시절에 따라 따르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떨어지지도 섞이지도 않고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으니, 바로 이(理)와 기(氣)의 경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계인(季仁)은 심(心)과 기(氣)가 서로 섞인다는 실수를 보완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심(心)과 기(氣)를 서로 떨어뜨리는 실수에 빠져버렸으니 그 실수는 같은 것입니다. 덕(德)을 커다란 종에 비유하는 것 또한 그와 나란히 놓을 수 있습니다. 만약 큰 종에 비유한다면 큰 종은 바로 심(心)입니다. 아직 두드리지 않았지만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성(性)입니다.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정(情)입니다. 두드리는 것은 외물(外物)에 의해 촉발되는 것입니다.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의(意)입니다. 만약 종을 치는 것을 심(心)이라 여긴다면 소리가 나는 것은 기(氣)라 할 수 있는데, 거의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없으니 피차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어떠합니까? 向書久未修答。不敏多矣。自鳳城返後。連日奔忙。無霎隙開睫時節。只庸自悶。所詢心氣說。可見心有所在。不草草浪過。可賀可賀。大抵金丈所謂氣在心中一句。不成說話心有以氣言者。有以理言者。若以理言。則其本然主宰之妙。固已不犯乎氣矣。若以氣言。則更有何氣在乎氣中乎。吾聞理具乎心。未聞氣在乎心者也。且季仁之言。未免有病。其曰心爲主宰。而氣亦隨屬。夫氣是何物。而有隨屬時節耶。不離不雜。不先不後。此理氣之界至也。季仁欲補心氣相雜之失。而反坐心氣相離之失。其失均矣。德哉洪鍾之喩亦左矣。若以洪鍾喩之。洪鍾是心也。未撞聲在。是性也。撞之聲發。是情也。撞之者。是外物觸之也。餘韻延連。是意也。若以撞之者爲心。聲之者爲氣。則殆不成比類。彼此無所據矣。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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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 처사 안공 행장 松下處士安公行狀 공의 성은 안(安), 휘는 국정(國禎), 자는 순견(舜見), 호는 송하(松下)이다. 고려조의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7)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문성공의 증손(曾孫)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훈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죽성군은 휘 면(勉), 호 쌍청당(雙淸堂)을 낳았고 쌍청당은 좌찬성을 지내고 이목은(李牧隱)8)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쌍청당은 휘 정생(挺生)을 낳았고, 정생은 본조에 들어와 관직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정생의 아들 휘 을겸(乙謙)이 영암군(靈巖郡)을 다스리게 되자 이로 인해서 남쪽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을겸의 아들 휘 여재(汝再)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장흥(長興)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자손이 이로 인해 장흥에 거주하였다. 직장공의 10대손인 휘 택인(宅仁), 호 회옹(海翁)이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는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몽원(夢元)이고 조부는 휘가 수책(壽策), 호가 덕림(德林)이며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다. 가업이 조금 넉넉해지자 선행을 좋아하고 남에게 잘 베풀었다. 고(考)는 휘 영({氵+潁}), 호 금방(錦舫)이며 비(妣)는 해주 최씨(海州崔氏) 수완(粹玩)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휘가 협(浹), 호가 춘탄(春灘)으로 곧 금방공의 아우이다. 형제가 모두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9월 9일에 능주의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와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하며 성격과 기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부모를 곁에서 모시거나 명을 따르는 것이 공손하여 물이 흐르듯 하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갑자기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반드시 단정하고 바르게 앉으며 움직임도 반드시 침착하고 차분하였으니 대체로 천품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6세에 조부상을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릴 때 반드시 참여하고 빠지는 일이 없었다. 동학(同學) 가운데 굶은 아이를 보면 반드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은 상에 함께 밥을 먹었다. 같은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깊은 밤에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같이 고생하는 사람을 대접하였다. 공의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공은 두 집안에서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니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하지만 교만하고 경솔한 습성이 일체 마음에서 싹트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독서를 하는 절도(節度)는 지시나 감독이 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을 다하여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한결같이 과정(課程)을 준수하여(였으므로,)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어서는 문장(文章)이 탁월하게 되었다. 집안이 대대로 본래 효성스럽고 근신(謹愼)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데다 집안의 영향을 받아 지켜 따르고 경륜을 키우는 것이 일반 사람과 크게 달랐다. 본생부모(本生父母), 소후부모(所後父母), 승중(承重)의 상(喪)9)을 치른 것이 앞뒤로 모두 15년이었지만 상례(喪禮)를 봉행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의절(儀節)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내외의 친족 가운데 본래 곤궁한 이가 많아 끊임없이 진휼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常例)였는데 농토와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혼인을 도와주기도 하며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잘 보살펴 주었다. 같은 동네의 오랜 친구에 이르기까지 공의 덕으로 목숨을 부지한 자가 많았다. 빈객(賓客)이 이르면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매우 넉넉하게 대우하여 앉은 자리에는 술동이가 비지 않았고 문밖에는 찾아온 이의 지팡이와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비록 옹색하고 초라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찍이 냉대(冷待)하는 기색을 하지 않았다. 아픈 곳을 얘기하면 반드시 직접 약을 달였으며 치료가 끝난 뒤에야 보내주었다. 일찍이 어떤 이가 집안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찾아와 패악한 짓을 벌였지만, 공의 말을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사죄를 하고 돌아갔다. 하루는 머슴이 소를 때려 다치게 하여 소가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공이 그 상황을 듣고는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 소가 스스로 뿔로 들이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스스로 노사(蘆沙)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받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고 마침내 선생의 손자인 송사(松沙)10)와 문인인 최계남(崔溪南)11), 정월파(鄭月波)12), 정애산(鄭艾山)13)과 편지를 주고받아 강론을 펼치면서 선생이 남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자 사숙(私淑)의 의리를 기탁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노사(蘆沙)와 벽계(檗溪) 두 선생이 뒤늦게 근세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세도가 이처럼 비루하고 스승이 전수(傳授)한 학설이 이처럼 분열되었건만,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이 동방(東方)에서 천 년이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두 선생의 힘 덕택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벽계(檗溪)의 문하14)에서는 김중암(金重庵)15), 최면암(崔勉庵)16), 홍여지(洪勵志)17) 등 여러 현자가 앞뒤로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보위하여 이 세상에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습을 따른 지 오래일 것이다. 우리 조정 500년의 강상(綱常)이 오늘날 전부 벽계의 문하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면암(勉庵)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리고 학업을 연마할 길을 열었다. 하루는 고을의 수령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이 끝내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충고하기를, "사민(土民)이 되어 거만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거만한 것이 아니라 사민(土民)으로서 분수를 지키는 것이 진실로 그러할 뿐이다." 하였다. 무릇 권세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마을 이웃에 있더라도 아득하게 대하며 상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오직 학문과 행의(行義)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만 관계가 소원할지라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서로 친숙하게 지냈다.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남전(藍田)의 향약18)과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19)를 본받아 향음(鄕飮), 향약(鄕約), 강의(講儀), 독법(讀法)에 관한 의절을 봄가을로 상례로 삼아 여러 해 동안 거행하였다. 또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벗과 서로 물자를 내어 정사(亭社)를 짓기 시작하였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공사(工事)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전부 직접 주관하였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지출과 수입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영남, 호남의 여러 벗과 실내가 넓은 재숙(齋塾), 예컨대 삼가(三嘉)의 뇌룡정(雷龍亭), 단성(丹城)의 신안사(新安社), 장성(長城)의 담대헌(澹對軒), 능주(綾州)의 영귀정(詠歸亭) 등을 골라 격년으로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규정을 만들어 한두 차례 거행했지만, 세상이 혼란해져 그만두었다. 당시에 사설(邪說)이 점차 번성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강회(講會)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를, "우리 중에서 사학(邪學)에 물든 자가 있다면 응당 성토(聲討)하고 내쳐야 한다." 하고 마침내 조례를 적어 재사(齋舍) 벽에 걸었다. 갑오년(1894, 고종31) 봄 사악한 무리가 고부(古阜)를 침범하고 연달아 주변 고을을 어지럽힌 뒤 진격하여 전주(全州)를 함락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가느다란 물줄기도 막지 않으면 결국 강수(江水), 하수(河水)가 되고 실타래도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들을 이르지 않겠는가. 쑥대같이 잔약한 인생이라 큰일을 할 수는 없으니 자기 한 몸을 수양하는 계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하였다. 가을에 사악한 무리가 더욱 기승을 부려 도처를 점거하고 모여 지내어 영귀정(詠歸亭)도 도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공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를, "한 줄기 희미한 햇살이 이곳에 의지했건만 이제는 이곳마저 빼앗겼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였다. 둘이 의논하여 적을 무찌를 계책 6~7조를 진술하여 관사(官司)에 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대규모로 본주(本州)에 침입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침내 자제, 친족, 동지(同志) 5~6인과 영평(永平) 지역으로 재난을 피하였다. 몇 달이 지나고 난이 평정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재산이나 기물이 약탈당한 것을 보고 나중에 그 상황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전혀 묻는 바가 없었다. 을미년(1895) 겨울 삭발령(削髮令)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탄식하기를,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는 머리카락을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지금이야말로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때이다." 하였다. 마침내 동지 여러 사람과 산에 들어가 자신을 수양할 계책을 세웠다. 병신년(1896, 건양1) 1월 정애산(鄭艾山)이 호남의 사우(士友)들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원수에 대적하자는 뜻을 알렸다. 얼마 뒤에는 기송사(奇松沙)가 대의소(大義所)를 설치한 뒤 도내(道內)에 통지하여 알리고 2월 30일에 각 고을의 병사를 광주(光州)에 모으기로 약속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더니 즉시 달려가 군무(軍務)를 의논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뒤이어 본주(本州)에서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나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공은 광주에서 돌아와 운영과 계획에 자못 수고를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을의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공이 여러 벗과 약속하기를, "송사(松沙)가 만 번 죽을 힘으로 이 일을 준비하였다.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가 비록 고을의 의병을 이끌고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오랜 벗 몇 명과 위난(危難)에 달려가 함께 죽을 계책도 세우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벗들과 기일을 정하였다. 기일이 되기 2, 3일 전에 관동(關東)의 의병(義兵)이 무너지고 남쪽 지방이 동요하고 광주(光州)에서도 병사들이 흩어져 전황(戰況)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은 마침내 나와 보성(寶城)의 동복(同福) 등지로 재난을 피하였다가 한 달 남짓 지나서 돌아왔다. 앞뒤로 겪은 일이 매우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급하고 급박했지만, 뜻이 확고하고 생각이 차분하여 일찍이 압박을 받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수양하려는 일념은 단청처럼 빛나 온갖 시련을 겪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단발령(斷髮令)이 잠잠해지더라도 훗날의 화를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아니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또 어찌 한스럽겠는가. 옛사람이 배 안에서 《대학》을 읽은 것20)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마침내 서숙(書塾)을 청소하고 서적을 비치하여 날마다 강론과 연구에 힘을 쏟았다. 서숙이 매우 넓고 맡은 일이 쌓여있어 종종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일을 처리하고 난 뒤에는 편안히 서안(書案)을 마주하고 평상시처럼 책을 읽어 일찍이 터럭만큼도 마음에 구애받는 일이 없었다. 바람이 시원하고 달이 밝은 좋은 날을 만날 때마다 절친한 벗들과 한가롭게 이리저리 거닐거나 시를 읊으면서 아득히 속세를 벗어난 풍도(風度)를 보이거나 격앙되어 세상을 걱정하는 회포를 드러내었다. 무술년(1898, 광무2) 봄 나이가 비슷한 벗인 정창림(鄭昌林), 윤자선(尹滋宣), 김장석(金章錫), 이병섭(李秉燮), 김기수(金基洙), 이기백(李祺白), 이인환(李仁煥), 그리고 나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강론을 열기로 규약을 정하였다. 대체로 노쇠하고 떨어져 살다 보니 규약이 해이해지는 것이 두려워 이를 단속하려고 했던 듯하다. 10월 12일이 되어 윤자선의 집에 모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한 뒤 하루를 묵고 헤어졌다. 또 하루가 지난 뒤 공이 위독하여 서둘러 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근사록》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 이처럼 변하지 않았다. 인리(隣里)와 향당(鄕黨)의 남녀노소로부터 어린아이, 비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친척이 세상을 떠난 듯이 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길에는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원근에 사는 유자(儒者)들이 끊이지 않았다. 12월 3일, 살던 마을 오른쪽에 있는 방애동(方藹洞)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 세교가 쇠퇴한 이래로 덕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 의지가 굳센 자는 온화하고(함과) 유순함이 부족하고 순후하고 신실한 자는 활달함과 쾌활함이 부족하고 원만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청렴함과 강직함이 부족하다. 조화를 이루면서도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세속과 절연(絶緣)하지 않으며 겸허하고 온화한 태도로 자신을 지키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며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수양하지만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다잡는 것은 매우 신중하지만 남을 대하는 것은 매우 너그러우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매우 간략하지만, 남에게 베푸는 것은 매우 두터워 《서경(書經)》에서 말한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다)[直而溫]21)',(는 것과) 《주역(周易)》에서 말한 '같으면서도 다르다[同而異]22)'는 것이 아마도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원망이 없고 위아래가 서로 믿으며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베풀면 화답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거만하고 사나운 자는 멈출 줄 알고 교만하고 오만한 자는 공경할 줄 알고 탐욕스럽고 인색한 자는 수치를 알게 되었다. 비록 평상시에 공의 면모를 몰랐던 자라 하더라도 흠모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다른 의견이나 헐뜯는 말도 없었다. 아, 인심(人心)을 얻고 인정(人情)을 신복(信服)하게 한 것은 고인(古人)일지라도 공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빈곤하고 지위가 미천하여 널리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뿐이다. '선행을 보면 목이 마른 듯하고 악행을 보면 뜨거운 물을 만지듯 하였다.[見善如飢渴 見惡如探湯]23)'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보았다. '마음에는 정한 바가 있고 행실에는 지키는 바가 있으며 부귀로도 더하지 못하고 빈천으로도 덜어내지 못한다.[心有所定 行有所守 富貴不足以益 貧賤不足以損]24)'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을 보았다. 만약 하늘이 몇 년의 수명을 더 내려주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면 어찌 정미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광채를 발산하여 사문(斯文)의 도맥이 오래 유지되고 세도(世道)의 희망이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애석하고 애석하다! 행실을 기록하고 덕을 형용하여 후세에 전하고 사라져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일이야말로 평소에 서로 왕래하던 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삼가 이처럼 대략을 기술하였다. 배(配)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영현(泳鉉)의 딸로 고봉(高峯) 문헌공(文憲公)의 후손이다. 3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창섭(昌燮), 종섭(宗燮), 홍섭(弘燮)이고 딸은 오재동(吳在東)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둘은 아직 어리다. 公姓安。諱國禎。字舜見。號松下。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生諱勉號雙淸堂。官左贊成。與李牧隱爲道義交。雙淸堂生諱挺生。入本朝官直提學。子諱乙謙。宰靈巖郡。因寓南土。子諱汝再官直長。寓居長興。子孫因居焉。直長公十世孫諱宅仁號海翁。積德行義。鄕里著稱。卽公之高祖也。曾祖諱夢元。祖諱壽策號德林。移寓綾州家業稍溫。樂善好施。考諱氵+潁號錦舫。妣海州崔氏粹玩女。生父諱浹號春灘卽錦舫公弟也兄弟俱以孝友文學著名。以哲宗甲寅九月九日。公生于州之七松里第。儀容端粹。性氣溫仁。左右趨諾。承順如流。不戲色不暴怒。坐必端直。行必安詳。蓋其天稟然也。六歲遭王考喪。朝夕饋奠。必參無闕。見同學有飢者。必邀至家。同案共食。見隣里有飢者。歸告父母。俾有所恤。每深夜讀書。必具雞酒。以饋同苦者其風儀自幼如此。公以兩家一子。生長富饒。其慈愛可謂至矣。而驕易之習。未嘗一萌於心。奢華之物。未嘗一近於身。至於讀書節度。不甚提督而自能刻意孜孜。一遵課程。至於丱弁。文詞斐然。家世素以孝謹聞公以天姿之美。加以擩染之助。持循展拓。大異衆人。居所生所後及承重喪者。前後凡十五年矣。而執喪之節。送終之儀。必誠必信。終始如一。內外族戚素多貧乏。源源周恤。歲以爲常。或爲之備給田廬。或爲之助成婚姻。遇飢歲。尤加眷戀。至於隣里知舊。賴以存活者多。凡賓客之來。接之甚款。待之甚厚。座上杯樽不空。戶外杖屨常滿。雖寒乞遇之。未嘗以冷色加之。告病則必親煮藥餌。待其治療而後遣之。嘗有人怒門內一人。來肆悖惡。聽公言。不覺愧謝而去。一日。雇奴打傷其牛。幾斃。公聞其狀。佯若不知曰。此必非人所忍爲。必其牛之自觸致然也。中年以後。遂廢擧子業。專心性理之學。自以未及受業於蘆沙先生之門爲至恨。遂從先生之孫松沙及其門人崔溪南鄭月波鄭艾山。往復講磨。得聞其餘論。以付私淑之義。嘗曰蘆沙檗溪兩先生之晩出於近世者。天意甚不偶然。世道若是汗下。師說若是分裂。而使程朱正脈。不絶於東方千載之後者。未必非其力也。又曰。檗溪之門。金重庵崔勉庵洪勵志諸賢之前後斥邪衛正。大有功於斯世。不然。吾輩之爲被髮左袵久矣。孰謂我朝五百年綱常。在今日而不盡出於檗溪之門耶。遂上書贄於勉庵先生。以開講業之路。一日邑宰請見。公終不往。或規之曰。爲土民而倨傲如是耶。公曰。我非倨傲也。守土民之分。是所固然耳。凡聲勢之右於己者。雖在鄕隣。邈然若相忘。惟學問行義之勝於我者。則雖在疎遠。誠心愛好。綢繆相熟。與鄕裏士友。擬藍田及鹿洞規例。行鄕飮鄕約講儀讀法之節。春秋爲常。行之有年。又患講聚之無所。與諸友互相出力。經始亭社。首尾三年。凡百功費。皆自尸之。而無一人問其出入者。其見信於人如此。又與嶺湖諸友。擇齋塾寬闊如三嘉之雷龍亭。丹城之新安社。長城之澹對軒。綾州之詠歸亭。爲間年會講之規。一再行而以世亂止。時邪說漸熾。公嘗於講會席上。颺言曰。在吾儕而如有浸染邪學者。當鳴鼓而攻黜之。遂書條約。揭于齋壁。甲午春。邪類犯古阜。連撓旁邑。進陷全州。公聞之歎曰。涓涓不壅。終爲江河。綿綿不絶。或成網羅者。非是之謂耶。蓬蓽殘生。旣不能有爲。則只爲一身自靖之計可也。秋邪類益熾。在在盤聚。詠歸亭又爲賊所據。公不勝忿憤。要余相見於中路。放聲大哭曰。一縷微陽。所寄在此。而今乃見奪。吾輩其將安往乎。議陳勦除之策六七條。獻于官司。未幾。賊大入本州。禍不可測。遂與子弟族戚及同志五六人。逃難于永平地。數月亂平歸家。見生産什物。沒被侵掠。追知其狀甚悉。而一無所問。乙未冬。削令甚急。公歎曰。與其薙髮而生。何如存髮而死。舍魚取熊。此其時也。遂與同志諸人。爲入山自靖計。丙申正月。鄭艾山寄書湖南士友。示以同仇之意。旣而奇松沙設大義所。通喩道內。期以二月三十日。聚各邑兵於光州。公聞卽馳往。贊議戎務。繼而本州又謀擧義。余亦參其謀。公自光州還頗費經畫。未幾日。以鄕議不合而罷。公與諸友若曰。松沙出萬死之力。已設此擧。而勤王有日。則吾輩雖不能以鄕兵赴之。獨不可與知舊多少人爲赴難同死之計耶。遂與定期。前期數三日。關東義兵潰。南方繹騷。光州又罷兵。火色甚急。公遂與余逃難於寶城同福等地。月餘而還。前後所遭蒼黃震越。極其區測。而志定慮靜。未嘗有怵迫萎索之氣。至於自靖一念。炳然如丹。雖千生萬受。而有所不渝也。公曰。薙令雖浸。而後日之禍。寧可測耶。固知吾輩死亡無日。而朝聞夕死。又何恨焉。古人之舟中大學。良以是也。遂掃塾儲書。日以講討爲務。家戶深闊。事務叢委。往往有難堪耐處。而處置了後。晏然對案。讀書如常。未常有一毫介滯於中者。每當風月良辰。輒與朋知逍遙吟哦。悠然有出塵之標。慨然有傷世之懷。戊戌春。與年輩友鄭昌林尹滋宣金章錫李秉燮金基洙李祺白李仁煥及余爲一朔一講之規。蓋恐衰老離索。繩約廢弛。而爲此團束之也。至十月十二日。會于尹滋宣家。講近思錄一宿而別又一宿而公病馳往見之則氣息已絶。而近思錄猶在其手矣。好學之誠。至死不渝者如是。隣里鄕黨老少男女。至於童幼卑賤。無不咨咨涕洟。如喪親戚。遠近章甫操文來哭者。屬屬於道。十二月初三日。葬于所居村右方藹洞乙坐之原。嗚乎。自世敎衰。而德之難全久矣。剛毅者欠和裕。醇實者欠開爽。圓通者欠廉介。若夫和而不同於流。貞而不絶於俗。溫溫自持而有不可犯者在焉。謙謙自牧而有不可輕者存焉。檢身甚詳而待人甚恕。奉已甚約而施人甚厚。書所謂直而溫。易所謂同而異者。公其庶幾焉。是以內外無怨。上下相信。言之而人無不服。施之而人無不和。强梗者知戢。驕敖者知敬。貪吝者知恥。雖平日之不知面貌者。無不愛慕欽欽。無異言間辭。嗚乎。得人之心。服人之情。雖古之人。恐無以過之。但其窮約布素。而所及者不廣耳。見善如飢渴。見惡如探湯。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心有所定。行有所守。富貴不足以益。貧賤不足以損。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若使天假之年。從容優游。磨礱浸灌。豈不能究極精微。出治光彩。以壽斯文之脈。以係世道之望哉。痛惜痛惜。至於記其實狀其德。以傳諸後。不使任其泯沒。則此非平日遊從者之責也耶。玆不敢付諸別人。而謹述梗槪如是云耳。齊幸州奇氏泳鉉女。高峯文憲公之後。擧三男三女。男昌燮宗燮弘燮。女適吳在東。餘二幼。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 안향(安珦, 1243~1306)을 가리킨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최초의 주자학자라 할 수 있다. 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승중(承重)의 상(喪) 가통(家統)을 잇는다는 뜻이다. 맏아들이 아버지가 사망하여 가통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할아버지 생존 중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뒤에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 즉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받아 할아버지에게 승중복으로 참최 삼년복을 하였다는 뜻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가리킨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가리킨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계남집》이 있다. 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을 가리킨다.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가리킨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벽계(檗溪)의 문하 벽계는 경기도 양근의 개울가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살던 곳이다. 이항로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성리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김중암(金重庵)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말한다.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인이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홍여지(洪勵志) 홍재학(洪在鶴, 1848∼1881)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문숙(聞叔)이다. 남전(藍田)의 향약 남전은 남전 여씨(藍田呂氏)로,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를 이른다. 이들이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으니, 이것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이다.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릴 때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동규(白鹿洞規)이다. 옛사람이 …… 읽은 것 남송(南宋) 때의 충신인 육수부(陸秀夫)는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배를 타고 도망가면서도 《대학(大學)》을 강학(講學)하기를 권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경(講經)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구덕(九德)의 하나이다. 구덕은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것[寬而栗],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것[柔而立], 성실하면서도 공손한 것[愿而恭], 가지런하면서도 공경스러운 것[亂而敬], 온순하면서도 굳센 것[擾而毅], 곧으면서도 온화한 것[直而溫], 간략하면서도 반듯한 것[簡而廉], 억세면서도 독실한 것[剛而塞], 용맹하면서도 의를 좋아하는 것[彊而義]이다. 《書經 皐陶謨》 같으면서도 다른 《주역》 규괘(睽卦)의 상(象)에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上火下澤, 睽. 君子以, 同而異.]" 하였다. 선행을 …… 하였다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마음에는 …… 못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권1 〈상로제일(相魯第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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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72) 【창섭】에게 답함 答安慶伯【昌燮】 지난번 보내준 한 통의 편지에 결국 답장도 못했는데 또 이렇게 편지를 받게 되니,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심정이 함께 생기네. 빼어나고 영특한 재주로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무고한 날에 있으니, 이것은 정히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있는 때이네. 어버이를 섬기는 한 가지 일은 자식이 입신(立身)하는 큰 절도이니, 독서와 학문은 어찌 이것을 밝혀 이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응대(應對)와 진퇴(進退), 온청(溫淸)과 정성(定省)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강구하고 실천하여 반드시 지당하고 흡족한 곳에 이르되 조금도 미적거리거나 유유범범한 뜻이 없다면, 고인이 이른바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겨난다."는 것이 거의 가까울 것이네. 더구나 그대 부친께서 이미 창시(創始)하셨고 그대 형제가 또 다시 계술(繼述)하니, 대대로 유가의 큰 집안이 되지 않겠는가?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을 뿐이네. 질문한 '격물궁리(格物窮理)' 이것은 가장 최초로 착수해야 할 것이니, '절문근사(切問近思)'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네. 이것을 놓아두고 이기(理氣)를 말하는 것은 등급과 절도를 뛰어 넘는 것이니, 실로 근래 학자들의 큰 병폐이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모사하는 것이니, 무슨 유익함73)이 있겠는가? 무릇 격물(格物)은 실로 한 가지 단서가 아니니, 혹 독서하여 그 의리를 궁구하고,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득실을 분별하고, 혹 사물과 접하여 그 당부(當否)를 처리함에 소당연(所當然)을 궁구하여 그만두지 않고 소이연(所以然)을 궁구하여 바꾸지 않는 것이 있지 않아 이렇게 오래 쌓은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절로 초탈한 곳이 있을 것이네. 초학자의 병통은 대부분 의도를 두어 조장하는데 있으니, 과연 능히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한 것처럼 하면 의도를 두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보존한 것이 절로 익숙할 것이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치지(致知)도 못하고서 갑자기 성의(誠意)를 하려는 것 이것은 등급을 뛰어 넘는 것이라, 힘써 억지로 행하는 자는 어찌 능히 오래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74) 이것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네. 向書一度。竟未謝復。而又此承貺。感與愧倂。以秀爽開悟之才。在俱存無故之日。此正可與有爲之秋也。事親一事是人子立身大節。讀書學問。豈非所以明此而行此者乎。應對進退。溫淸定省。大小凡百。一一講究。一一踐行。必至乎至當恰好之地。而無一毫因循悠泛之意。則古人所謂本立而道生者。可庶幾矣。況春府丈旣已創始之。君兄弟又復繼述之。則其不爲世世斯文大家耶。周子所謂至尊至貴者。在此而已。俯詢格物窮理。此是最初第一着。切問近思。亦不越乎此也。舍此而曰理曰氣者。末嘗不是躐等凌節。實近日學者之大獘也。捕風摸影。何所禪益哉。大抵格物固非一端。或讀書而窮其義理。或論古今人物而辨其得失。或接事物而處其當否。莫不有以窮其所當然而不容已。與其所以然而不容易。積累多後。自當有脫然處矣。初學之病。多在於着意而助長。果能實見得是。實見得非。如好好色。如惡惡臭。則無待乎着意。而所存自熟矣。程子曰。未致知。遽誠意。是躐等也。勉强行者。安能持久。此當留念也。 안경백(安慶伯) 안창섭(安昌燮, 1874~?)을 말한다. 자는 경백,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유익함 저본에는 '선(禪)'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보(補)'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정자(程子)가……하였으니 《근사록》권2에 정이천(程伊川)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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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에게 답함 答安慶伯 뜻밖에 심부름꾼이 와 보내준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한 마음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더구나 어버이를 모시는 절도가 알맞고 넉넉한 줄 알았으니, 더욱 듣고 싶었던 마음에 부합하네. 의림(義林)은 명승지에서 여러 뛰어난 분들을 따라 열흘 동안 마음을 펼칠 수 있었으니, 박한 운명에 이런 좋은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선장(先丈)께서 이미 돌아가시어 함께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네. 지금 면암(勉庵) 어른75)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귀정(詠歸亭) 주인 안모(安某)가 돌아가신 소식을 들은 지 오래 되었네. 지금 세상에 이 같은 선인(善人)이 있는데 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애통하고 한스럽네. 자제는 몇이며, 또 모두 혼사를 치렀으며, 또 모두 학문하여 족히 가업을 전술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선생에게 추중 받은 것을 볼 수 있고, 나의 마음에 또한 위로되는 사사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네. 바라건대 경백은 이 뜻을 헤아려 더욱 힘쓰시게. 돌아오는 길에 작별할 때 애장(艾丈)76)이 경백이 오지 않은 것 때문에 또 책망하는 말을 하였고, 나를 위해 경백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였네. 料外伻來。得奉惠書。感沃曷量。矧審侍節沖裕。尤副願聞。義從諸名勝於名勝之區。以得旬日之暢。誰知薄命有此好事耶。但恨先丈已故。不與之俱耳。今者勉庵丈謂余而言曰。詠歸亭主人安某不淑之報。聞之久矣。今世有如此善人。而未得其壽。誠可痛恨。子弟幾人。又皆成娶。又皆向學足述家業否。此可見見重於先生。而於鄙心。亦不自勝其慰感之私矣。幸慶伯諒此意而加勉焉。回路相別也。艾丈以慶伯不來。亦有致責之言。而爲我言於慶伯云云耳。 면암(勉菴) 어른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군과 싸우다가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애장(艾丈)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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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필【상량】에게 답함 答魏殷弼【祥良】 작별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맑은 목소리와 우아한 모습은 일찍이 단 하루도 마음과 눈앞에서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남애(南厓)와 북각(北角)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앉지 않는다고 했겠습니까. 하물며 어버이를 모시고 살피는【侍省】 상황이 순조롭고 일상생활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실로 듣고 싶던 소식과 부합하였습니다. 이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괴로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고궁(固窮)72)으로도 면하지 못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나 힘과 여유가 허락하는 대로 예전의 학업을 익히고 정리한다면 오히려 나무를 지고 물을 긷는 것보다 편함이 백 배 이상일 것입니다. 하물며 네 가지 이익【四益】에 대한 설73)은 장횡거(張橫渠)74) 선생이 말한 것이 아닙니까? 힘쓰고 힘쓰십시오. 저는 쇠한 몰골과 병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이는 학문을 닦지 않은 소치입니다. 뒤따라 보충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세상 길의 위험함을 어찌 이야기하겠습니까. 오직 독서(讀書)하고 궁리(窮理)하여 더욱 굳은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할 뿐입니다. 주자(朱子)의 시에, '삼군(三軍)도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고, 아홉 번 죽어도 장사(壯士)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네.【三軍莫奪匹夫志, 九殞難嶊壯士腸.】'라고 하였습니다. 읽어보면 사람을 개연(慨然)하게 만듭니다. 奉別三載。淸韻雅儀。未嘗一日不往來於心目間。誰謂南厓北角。非同堂合席耶。矧審侍省怡愉。起居珍勝。實副願聞。承知有絆己之苦。此固固窮所不免。然隨力隨暇。溫理舊業。猶有便於負薪汲水。不啻百倍。況四益之說。其非張先生所云乎。勉之勉之。義林衰相病情。日甚一日。此是不學之致。追補無計。奈何奈何。世路之危險。夫何言哉。惟宜讀書窮理。益加堅心之功而已。朱子詩三軍莫奪匹夫志。九殞難嶊壯士腸。讀之令人慨然。 고궁(固窮) 도의(道義)를 고수하면서 빈궁한 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네 가지 이익【四益】에 대한 설 《근사록(近思錄)》 권10 〈정사(政事)〉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유익함을 말한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으니, 자신을 얽어매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남에게 자주 가르쳐 주다 보면 자신도 글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어린이를 대할 적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의젓하게 갖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기로 인해서 남의 재주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걱정하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니 네 번째의 유익함이다.【敎小童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必正衣冠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人之才爲憂則不敢惰, 四益也.】"라고 하였다.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이다. 정씨 형제의 삼촌뻘이며 그들과의 많은 대화와 논쟁을 통해 북송 도학의 탄생을 예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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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회안 서문》 五常會案序 송(宋) 나라 신하 서안국(徐安國)의 집에 일락당(一樂堂)이 있었고, 남헌(南軒) 장 선생(張先生 장식(張栻))이 그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이는 대체로 안국의 양친이 기모(期耄)106)에 이르도록 장수하여 모두 생존해 계시고, 안국의 사형제가 기애(耆艾)107)가 되도록 아무런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즐거움 중에 이보다 좋은 것이 없지만, 이러한 즐거움을 얻은 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간혹 있었는데, 지금 강씨(姜氏)의 오상계(五常契)가 또한 그것에 딱 맞는 경우라고 이를 만하였다.나는 강 사문(姜斯文) 문욱(文郁)과 평소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을유년(1885) 여름에 내가 일이 있어 금릉(金陵 강진(康津))에 갔다가 지나는 길에 관산(冠山 장흥(長興))의 아름다운 마을로 강 사문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발에 별 탈 없이 풍채가 늠름한 분을 뵈었는데, 이분이 사문의 대인이었고, 의관을 가지런히 한 채 책상을 마주하고 걸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분들은 사문의 형제 네 사람이었다.아, 만약 선조께서 공덕을 쌓아 당대에 누리지 않은 보답이 없었다면 인간의 좋은 운수가 어찌 유독 이 한 집안에만 모여 있겠는가. 이른바 일락(一樂)108)이 서씨와 다름이 없었는데, 다만 연령이 위로는 기모에 이르지 않았고, 아래로는 기애에 이르지 않았으니, 현재를 기준으로 헤아려 계산하면 비록 조금 손색이 있는 듯하지만, 앞으로 누릴 복은 도리어 더 나을 것이다.내가 떠나려고 할 때 사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우리 형제들이 맏이를 인형(仁馨), 둘째를 예형(禮馨), 셋째를 의형(義馨), 막내를 지형(智馨)이라 명명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각기 한 몸씩 점유하게 되었으나 '신(信)' 글자의 자리가 비게 되었기 때문에 강신회(講信會)를 만들어 이를 채우고 '오상(五常)'이라 명명하였으니, 그대가 서문을 지어주기 바라네.하니, 내가 말했다. "오행(五行)은 토(土)가 아니면 생성되지 않고, 오상(五常)은 신(信)이 아니면 성립되지 못한다. 지금 사문의 형제가 비록 각기 하나의 덕을 차지하고 있지만, 충신(忠信)과 진실함이 그 본령이 아니겠는가. 아! 여러 부류로 말한다면 부모님이 모두 생존하신 것은 양의(兩儀)이고, 형제가 무고한 것은 사상(四象)이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것은 팔괘(八卦)이니, 팔괘가 낳고 쌓여서 효(爻)가 되는 것이 사 백이고, 변하여 괘(卦)가 되는 것이 사 천이며109), 그 작용은 광대하여 만물의 수를 다해도 끝이 없다. 내가 생각건대, 강씨(姜氏) 자손이 매우 많아지고, 복록이 가득 넘쳐나는 것이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부모를 여읜 몸으로 홀로 외롭게 지내기에 일락당의 기문을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여러 번 감탄하였는데, 지금 오상계(五常禊)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네." 宋臣徐安國家有一樂堂。南軒張先生爲之記。蓋安國之二親。期耄而俱存。安國之兄弟四人。耆艾而無故也。余謂天下之樂。無以加此。而得之者。絶無而僅有焉。今姜氏之五常契。亦可謂與之的對矣。余與姜斯文文郁有雅。乙酉夏。余有事往金陵。歷訪姜斯文於冠山之芳村。見白首無恙。風儀偉然。是斯文大人也。對床連榻。衣冠濟濟是斯文兄弟四人也。噫如無積累不食之報人間好氣數。豈獨萃此一門耶。所謂一樂者。與徐氏無異。但年齡上不至期耄。下不至耆艾。則目前經算。雖若少遜。而前頭享用。反復勝焉。臨發。斯文謂余曰。吾兄弟命名。伯曰仁馨。仲曰禮馨。叔曰義馨。季曰智馨。仁義禮智。各占一身。而信字位虛。故作講信會而足之。名曰五常。願吾子爲之序焉。余曰。五行非土不生。五常非信不立。今斯文兄弟。雖各據一德。而忠信誠慤。非其本領耶。噫。以衆類言之。父母俱存。是兩儀也。兄弟無故。是四象也。宜爾室家。是八卦也。八卦生積。而爲爻者四百。變而爲卦者四千。其用之廣。至於盡萬物之數而無窮焉。吾謂姜氏子孫之兟兟。福祿之穰穰。必將有如之者矣。義林風樹餘生。隻身煢煢。每讀一樂堂記。不覺三復感歎。今於五常禊。亦然云。 기모(期耄) 80세에서 100세의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는 80, 90세를 모라 한다[八十、九十曰耄.]"라고 하였고,  "100세를 기라 하니, 봉양을 받는다.[百年曰期, 頤.]"라고 하였다. 기애(耆艾) 50세에서 60세의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50을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을 기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일락(一樂)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즐거움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팔괘가……천이며 팔괘가 중첩되어 8괘✕8괘=64괘가 되고, 하나의 괘마다 6개의 효로 구성되어 64괘✕6효=384효가 되는데, 이를 반올림하면 400효가 되며, 64괘가 다시 중첩되어 64괘✕64괘=4,096괘가 되는데, 이를 반올림하면 4000괘가 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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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승동동안》 서문 佳勝洞洞案序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뜻을 얻는다면 요순(堯舜)시절의 임금과 백성처럼 천하 사람들과 선(善)을 함께하는 것이 진실로 평소의 포부이다.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산림 속으로 물러나 숨어 지내면서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과 함께 향례(鄕禮)와 향약(鄕約)의 절목을 강론하고 실행하여 서로 바로잡고 경계하며, 서로 친근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애초에 하나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장횡거(張橫渠)는 정전(井田)을 그리고110), 주회암(朱晦庵)은 사창(社倉)을 설치하여111) 혹 학자들과 함께하기도 하였고, 혹 시골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경우에 이문순공(李文純公) 온계(溫溪)의 향약112)과 이문성공(李文成公) 석담(石潭)의 학규113)가 모두 이러한 것이다.능주의 부춘방(富春坊)114)에 가승동(佳勝洞)이 있는데, 또한 남쪽 지방에서 이름난 마을이었다. 산수가 탁 트이고, 바람과 햇볕이 모여 예로부터 의관을 차려입은 지체 높은 집안과 시례(詩禮)의 가학(家學)이 전승되어온 명망 높은 가문이 옛부터 많이 거주하였으니, 마을의 풍속이 아름답고, 인심이 순박한 데에는 대체로 유래가 있었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면 폐지되고, 일이 오래되면 쇠퇴하게 되니, 이는 예로부터 공통된 근심거리였는데, 하물며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사문(斯文) 김경원(金景源)과 김권회(金權晦)는 마을에서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선비였는데, 개연히 옛 규례를 회복하는 데에 뜻을 가지고 장로(長老)에게 여쭈어 아뢰고 동료들과 모의하여 동안(洞案)을 다시 수정하였다. 이어서 동약(洞約)을 세우되 시대에 적합한 것을 참고하고 지방의 풍속을 참작함으로써 오랫동안 준행(準行)될 수 있도록 계획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아, 천하의 일 중에 이미 내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진실로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지만, 내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일 몇 가지뿐이다. 더구나 이것을 말미암아 나아간다면 선을 함께하는 바탕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우리들이 노력하느냐, 노력하지 않느냐, 성실하느냐, 성실하지 않느냐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어 버렸지만, 이 삼대(三代)로부터 남아 전해진 의례(儀禮)가 우리 고을 사이에서 행해짐을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실로 구구한 바람이다. 바라건대 여러 군자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士生斯世而得其志。則堯舜君民。兼善天下。固其素抱也。不爾則退藏於山林之中。與鄕井知舊。講行鄕禮鄕約之節。互相規警。互相親睦。未始非一副當好事也。張橫渠井田之畫。朱晦庵社倉之設。或與學者共之。或與鄕隣同之。至我東李文純公溫溪之鄕約。李文成公石潭之學規。皆是也。綾之富春坊有佳勝洞。亦南州之名村也。山水開爽。風日會聚。衣冠舊族。詩禮名家。自古多居焉。其村俗之美。人心之醇。蓋有所自來矣。然法久則敝。事久則替。此是自古通患。況在今日而安保其不然乎。斯文金景源金權晦。洞之秀士也。慨然有意於復古之規。稟告長老。謀及儕友。重修洞案。因立洞約。參以時宜。酌以土俗。爲視久準行之計。甚盛擧也。嗚呼。天下事。旣非吾力可及。則固無可爲之道。而吾力可及者。其惟此等事數件而已。況由此而進。安知不爲兼善之本乎。惟在乎吾輩之勉不勉誠不誠如何耳。余老且病。萬念如灰。而使此三代遺儀。得親見其行於吾鄕井之間。實區區之願也。願諸君子勉乎哉。 장횡거(張橫渠)는……그리고 장횡거는 송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로, 횡거는 그의 호이다. 《맹자집주》 〈등문공 상(滕文公上)〉의 정전제에 대한 주석에서 장재가 "정전법을 천하에 시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고을에서 시험해 볼 수는 있다."라고 하여 시행하려고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주회암(朱晦庵)의 사창(社倉) 주회암(朱晦庵)은 남송의 주희(朱熹)로, 회암은 그의 호이다. 사창은 주희가 효종(孝宗) 건도(乾道) 4년(1168)에 건녕부(建寧府) 숭안(崇安)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재해를 입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시한 구제책이다. 주희는 본부(本府)에 곡식 600섬을 청하여 백성들의 사정이 급할 때 2할의 이자를 받고 빌려주되 조금 가뭄이 들면 이자의 반을 면제해 주고, 크게 가뭄이 들면 이자를 모두 면제해 줌으로써 백성들이 부자들에게 미곡을 빌려 쓰고 높은 이자를 착취당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민가에서 보관하기가 불편하므로 사창(社倉)을 세워 미곡의 관리를 전담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 결과 1171년 건녕부 숭안현(崇安縣) 개요향(開耀鄕) 오부리(五夫里)에 사창이 세워졌으며, 1181년 8월에 절동 제거(浙東制擧)에 임명된 뒤에 사창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황제에게 아뢰어, 전국에 확대하여 시행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려졌다. 《朱子大全 卷13 辛丑延和奏箚4》 《朱子年譜 卷2》 《朱子大全 卷77 建寧府崇安縣五夫社倉記》 《宋史 卷35 孝宗本紀3》 이문순공(李文純公) 온계(溫溪)의 향약 퇴계 이황이 1556년(명종11)에 경북 안동 예안(禮安) 지방에서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 제정한 〈예안향약(禮安鄕約)〉으로, 문순과 온계는 이황의 시호와 호이다. 이문성공(李文成公) 석담(石潭)의 학규 율곡 이이가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부임하여 제정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해주에 머물 때 제정한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말하는 것으로, 문성과 온계는 이이의 시호와 호이다. 부춘방(富春坊) 옛 능주의 부춘면을 말한다. 훗날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능주군이 화순군에 통합되면서 부춘면도 단양면과 통합되어 각각 한 글자씩 취한 춘양면으로 바뀌고 화순군에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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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로 돌아가는 김군 성유를 송별하는 서문 送金君聖惟歸關西序 옛날 사마자장(司馬子長)은 20세에 남쪽으로 강회(江淮)를 유람하였는데103), 지금 박천(博川)의 김군(金君) 성유(聖惟)가 수천 리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남쪽으로 영호남 사이를 유람하기에 나이를 물어보니, 그도 20세였다. 이는 전후의 취지가 일치하고, 고금의 자취가 똑같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강회의 유람은 평상시의 일이었고, 영호남의 유람은 변란 때의 일이니, 그 마음을 세우고 일을 성취하는 것이 옛사람보다 더욱 어렵지 않았겠는가. 다만 부모가 생존해 계시면 멀리 나가지 않으니, 이는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변란과 우환이 눈앞에 가득하여 길목마다 저지당하고 부딪히는 때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침저녁으로 마을 어귀의 문에 기대어 자식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에게 끼쳐드릴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니,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빨리 수레를 돌려 산으로 돌아갈 계책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기성(箕聖)의 옛 도읍104)은 내가 평소에 유람해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이미 늙었다. 만약 혹시라도 하늘이 몇 년의 수명을 연장해주고, 어지러운 시세가 조금 안정된다면 오늘날 다하지 못한 유람이 대동강(大同江)과 연광정(練光亭)105)사이에서 다시 이어지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昔司馬子長。二十南遊江淮。今博川金君聖惟。不遠數千里。南遊嶺湖之間。問其年亦二十。此可謂前後同調。今古一轍。然江淮之遊。平時事也。嶺湖之遊。亂時事也。其所以立心就事。不爲尤難於古人乎。但親在不遠遊。此在平時猶然。況艱虞滿目。途塗阻搪之日乎。其貽尊庭朝暮倚閭之苦。想亦不少矣。迨天氣未寒。早爲回轅還山之計如何。箕聖舊都。余平生所願遊。而今已老矣。如或天暇數年。而時紛稍帖。則今日未盡之遊。安知不復續於大同練光之間耶。 옛날……유람하였는데 사마자장(司馬子長)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으로, 자장은 그의 자이다. 그는 20세 때에 남쪽으로 강회(江淮)ㆍ회계(會稽)ㆍ우혈(禹穴)ㆍ구의(九疑)ㆍ원상(沅湘)을 유력하고 북쪽으로는 문사(汶泗)를 건너고 제노(齊魯)의 땅에서 강학(講學)하고 양초(梁楚)를 지나 돌아왔다고 한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기성(箕聖)의……도읍 기성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숙부인 기자(箕子)를 말하고, 기성의 옛 도읍은 평양을 가리킨다. 기자는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대법(大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고 조선의 평양(平壤)으로 옮겨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연광정(練光亭) 평양부의 대동강(大同江) 가 덕암(德巖) 위에 있는 정자로, 감사 허굉(許硡, 1471~1529)이 지었다고 한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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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성【기경】에게 답함 答金子惺【箕敬】 전일에 그대 아버님께서 찾아와서 감사하는 마음이 무척 큽니다. 돌아가는 길은 평안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편지지에 가득한 긴 이야기는 간절한 질문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떠한 감격이 이와 같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서 "사사로움을 따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뜻을 세우지 못한 병통입니다. 진실로, "순(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90)와 같이 비상한 큰 뜻을 세워서 분발하고 격려하여, 천 명이나 만 명의 장부도 꺾을 수 없는 뜻을 둔다면 구구한 외부의 유혹에도 자연스레 얽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경(居敬)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마음에 안정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혹 그렇지 않다면 외부의 유혹이 있을 때, 한갓 구구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동쪽에서 없어지면 서쪽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날마다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어떠합니까? 나머지는 별지(別紙)에 있습니다.독서할 때에는 먼저 옷깃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상제(上帝)를 대하듯 해야 하니, 그렇게 하면 심지(心地)가 자연스럽게 전일(專一)하게 됩니다. 만약 몸이 흔들리거나 기울어져서 어지러워져서 검속하지 못하다면 그 마음이 전일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혼매(昏昧)하면 반드시 광명(光明)이 필요하고, 나태하고 게으르면 반드시 엄숙함과 공손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광명과 엄숙함과 공손함은 다만 천리(天理)에서 화합하여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뜻을 둠이 있겠습니까? 겨우 뜻을 둔다면 문득 두서가 여러 갈래로 되어 번잡함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보내준 편지에서, "대단히 힘을 쏟는다."고 한 것이니 아마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대저 함양(涵養)이라는 것은 범범하게 붙잡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익숙하게 되고, 힘써 행하고 실천함으로써 길러내야 합니다. 안팎으로 서로 도와주니 그 덕이 있어 외롭지 않을 것이고, 그 근본이 자연스럽게 순수하고 단단해질 것입니다.유능하면서 무능한 자에게 물어보는 것은 안자(顏子)가 큰 뜻을 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의리(義理)가 무궁하다는 것만을 알고 물아(物我)의 간격이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았을 따름입니다.무릇 엄숙(嚴肅)한 것은 예(禮)이며, 화평(和平)한 것은 악(樂)입니다. 이것들은 잠깐이라도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니, 예(禮)를 통해 원칙을 세우고. 악(樂)을 통해 덕성을 완성하는 것91)에 이르러서는 사물에서 드러난 절문(節文)과 도수(度數)를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고, 남이 한 번 하면 본인은 백번 하는 것은 근면한 뜻입니다. 성인(聖人)은 원하면서도 욕심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向日春府丈枉顧。感戢良多。未審返旆安寧。馳溯無任。滿幅縷縷。無非切問。何感如之。示諭循私云云。此皆志不立之病。苟能立得舜何我何非常大志。奮迅激勵。有千萬夫不可回撓底意。則區區外誘。自然惹絆不得。而所謂居敬。所謂亦行。亦有所頓放處矣。苟或不然。而徒爾規規於外誘之除。則所謂滅東生西。日亦不足矣。如何。餘在別幅。讀書時。先須正襟肅容。如對上帝。則心地自然專一。若身體搖動攲斜。漫不檢束。而求其心之一。不可得矣。昏昧則須要光明。怠慢則須要肅恭。然光明肅恭。只是天理合下如此。何着意之有。纔着意。便是三頭兩緖。不勝其擾擾矣。來喩所謂大段着力者。恐不得。大抵涵養。不是凡然把捉之謂。須是讀書窮理以浸灌之。力行實踐以培養之。內外交資。其德不孤。而本源自然純固矣。以能問於不能。可見顔子衿懷大處。惟知義理之無窮。不見物我之有間。故如此耳。凡嚴肅抵是禮。和平底是樂。此不可斯須去身者也。至若立於禮成於樂。兼指節文度數著於事物者而言之。欲上人。是驕矜之心。人一己百。是勤勵之意。聖人所謂欲而不貪也。 순 임금은 …… 어떤 사람인가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안연(顔淵)은,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 임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또한 순 임금과 같이 될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하였다. 예를 통해 …… 완성하는 것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시를 통해서 마음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서 원칙을 세우고, 음악을 통해서 덕성을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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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성에게 답함 答金子惺 지난 편지는 인편이 없어 답하지 못하였는데, 뜻밖에 또다시 보내준 안부 편지를 받았으니 받은 감동을 말로 다 하기 어렵습니다. 삼동(三冬)이라 공부하여 얻은 것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 실마리를 물어볼 길이 없으니 이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대저 그대는 타고난 자품(資品)을 확실하여 재능과 품성을 깨달음이 종종 서로 넘어서서 매번 진보함이 있고 물러남이 없었으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문인 중에서 젊은 한 무리의 사람들로 뜻을 부칠 수 있는 이는 일찍이 이 사람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절도(節度)에 있어 친절하고 용이하게 해야 할 지점에서 만약 조금이라도 다잡지 않고 범범하게 한다면 일을 해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이 외에 묘한 해답을 별도로 구한다면 또한 아득할 뿐이고 의거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또한 마땅히 일상생활 속에서 하학(下學)의 공부를 지극히 하고 독서하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정을 세세하게 세워서 번거로움을 이겨내며 착실하게 하되 빠르게 이해하기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보존하고 지키면서 때와 장소에 따라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을 것이니 가까운 공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계속 축적하여 3~5년 동안 공부한다면 자연스럽게 심의(心意)가 점점 순조로워지고 근본이 대략 서게 되어 근거할 만한 곳이 있게 될 것이다. "92)라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일찍이 이러한 말을 보셨는지요? 이는 초학자에게 있어서 실로 통행할 법칙이라 할 수 있으니 지금 그대를 위한 모의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으로 보이니 어떠한지요? 자그마한 견해로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오직 독실하게 담당하고 중간에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야만 도(道)에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의림(義林)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일전에 과연 손자 하나를 얻었는데, 일찍이 만년에 조금은 마음 붙일 만한 곳을 얻었으니 큰 위로가 됩니다.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다만 지극히 없으면서 지극히 있는 것이고, 지극히 비어있으면서 지극히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어찌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 경계로 말한다면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천주(天主)가 물(物)을 나게 하고, 지주(地主)는 물(物)을 완성시키며, 인주(人主)는 물(物)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음양(陰陽)과 강유(剛柔)와 인의(仁義)의 구별이 있게 됩니다.보통 사람의 마음은 어둡지 않으면 혼란스럽고, 대략 사물을 접하지 않으면 미발(未發)한다고 개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연히 순후(淳厚)한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물(萬物)이 아직 생성되지 않았을 때 한 줄기 양(陽)의 첫 움직임을 가장 볼 만한 단서(端緖)는 이 밖에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니 생물지심(生物之心)93)이 아닙니다.【질문】아직 응하지 못함과 이미 응한 것을 선후(先後)로 보지 않고 체용(體用)으로 보는 것은 어떠한지요?【대답】아직 응하지 못함과 이미 응한 것은 진실로 하나는 체(體)이고 하나는 용(用)입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체와 용은 근원이 하나라는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질문】기발(旣發)은 정(情)이라고 이를 만합니다.【대답】기발(旣發)한 것은 정(情)인데 또한 심(心)이라 이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성(性)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발(未發)한 것은 성(性)인데 또한 심(心)이라 이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정(情)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총괄하기 때문입니다.【질문】횡거(橫渠) 선생이 말하기를, "떠돌아다니는 기운이 어지러이 뒤섞이며 합쳐져 형질(形質)을 이루는데, 이것이 만 가지로 다른 인과 물을 생성되게 한다."94)라고 하였습니다. 천지 사이에는 음양(陰陽)의 기(氣)가 아님이 없으니 떠돌아다니는 기운은 어떤 기입니까?【대답】봄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더우며, 가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 추운 것이 바로 음양(陰陽)의 양단(兩端)이며, 천지(天地)의 원기(元氣)입니다. 온갖 만물이 계속하여 생겨나니 이것이 천지의 떠돌아다니는 기운입니다.【질문】'정성(定性)'은 《대학(大學)》에서, "그칠 곳을 안 뒤에 정한다."라고 하였으니 '정(定)'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것입니까?【대답】《대학(大學)》에서의 '정(定)'이란 지(知)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정성(定性)'은 행(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그 얕고 깊음이 같지 않습니다.【질문】대인(大人)은 비록 말에 신용이 없고 행동이 과감하지 않더라도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말의 신용과 행동의 과감성을 얻지 않겠습니까?【대답】의(義)를 위주로 삼는다면 말의 신용과 행동의 과감성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질문】적자(赤子)의 마음은 미발(未發)하여도 진실로 맞아떨어지는 것입니까?【대답】적자(赤子)의 마음은 순일(純一)함과 무위(無僞)함을 취할 뿐이니 맞아 떨어지는 것의 여부는 진실로 논하기에 부족합니다.【질문】"천하에서 성(性)이라고 말하는 것은 발현된 현상을 유추한 것일 뿐이다."95) 발현된 현상이란 이미 그렇게 된 자취이니, 어찌 기(氣)가 아니라고 이르겠습니까?【대답】물(物)은 이(理)가 운행하는 손이나 다리와 같습니다. 물(物)이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이(理)가 그렇게 된 이유와 같으니 어진 이의 뜻을 살펴보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뜻이 있는 듯하다면 당시 선비들의 구기(口氣)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질문】공자(孔子)께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린다.……"96)라고 하셨습니다.【대답】구하는 것과 잡는 것은 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하여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시절이니 공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向書無便未復。謂外復承委存。感感難喩。三冬所得。想必不少。而無由叩其緖餘。是所紆鬱。大抵左右天姿確實。才性開悟。種種相過。每見其有進而無退。私竊喜幸。以爲吾黨少年一隊人。可以寄意者。未嘗非此人也。然其日用節度親切近易處。如或有小小悠泛。則足以害事。若外此而別求妙解。則又浩浩茫茫。無依據矣。朱子與人書曰。且當就日用間。致其下學之工。讀書窮理。則小立課程。耐煩着實。而勿求速解。操存持守則隨時隨處。收斂省覺而無計近功。如是積累。做得三五年功夫。自然心意漸馴。根本粗立。而有可據之地。未知曾見此語否。此在初學。實爲通行之典。而今爲左右謀。亦恐無過於此矣。如何。小小見解。不濟事。惟篤實擔當。無所間斷者。可與適道也。義林勞劣。姑遣。日前果得一孫。未嘗不是晩景一副寄懷處。慰慰。無極而太極。只至無而至有。至虛而至實之義。豈有太極陰陽互爲表裏之理。若言其界至。則說形而上下可矣。天主生物。地主成物。人主應物。故有陰陽剛柔仁義之別。常人之心。不昏則亂。不可槪以不接物爲未發也。然亦不無偶然回淳底時節。萬物未生。一陽初動。最是可見之端。非謂此外。非生物之心也。未應已應。不是先後看。而以體用看。如何。未應已應。固是一體一用。然須知體用一源之義。旣發則可謂之情云云。旣發情也。而亦可謂之心。但不可謂之性未發性也而亦可謂之心。但不可謂之情。心統性情故也。橫渠先生曰。遊氣紛擾。合而成質。生人物之萬殊。蓋天地之間。莫非陰陽之氣。而遊氣者。是何氣也。春溫夏熱秋涼冬寒。是陰陽兩端。天地之元氣也。品物庶類。化化生生。天地之遊氣也。定性。與大學知止后有定定字。如何。大學之定。是知上說。定性之定。是行上說。淺深不同。大人雖不信果。而在學者。豈不由於信果。所主者義。則信果在其中。赤子之心。其未發則固是中也。赤子之心。取其純一無僞而已。中不中固不足論。天下言性也。則故而已矣。故是已然之跡。則豈非氣乎云云。物是理之運行乎脚也。物之所已然。是理之所已然。觀賢意。似有牽强底意。不免於時儒口氣。孔子曰。操則存。捨則亡云云。求與操。是儼然肅然。不二不三時節。功夫要處。正在於此。 또한 마땅히 …… 있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근사록(近思錄)》 25장 〈교학(敎學)〉에 나오는데, 주자가 손인보(孫仁甫)에게 답한 편지를 인용한 것이다. 생물지심(生物之心) 만물을 낳아 기르는 마음을 가리킨다. 떠돌아다니는 …… 생성되게 한다 《정몽(正蒙)》 〈태화(太和)〉에 나오는 구절이다. 《근사록(近思錄)》 〈도체(道體)〉에도 소개되어 있다. 천하에서 …… 것일 뿐이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구절이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린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구절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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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승환】에게 답함 答洪士拯【承渙】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단지 공부하는 과정에서의 득실을 예전처럼 면려하여주셨고, 부모와 어른을 섬기는 도로 책망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전에 서로 경계하여주던 뜻을 생각해보면, 과연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실질에 힘쓰자는 뜻을 더욱 우러러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문과 효제(孝弟)는 본디 두 가지의 일이 아니니 존심(存心)은 효제(孝弟)를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며, 치지(致知)는 효제의 이치를 이해야 하기 때문이고, 역행(力行)은 효제의 실질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하(子夏)가 이른바,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자신에게 있는 것부터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100)는 뜻과 같습니다. 어찌 노새를 타고 있으면서 노새를 찾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마음 속이 어지러우면 이치를 끝까지 따지지 못하여, 정심(正心)이 격치(格致)의 앞에 있다는 것도 의심하기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그 이전에 거경(居敬)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때는 먼저 《소학(小學)》 가운데에서 함양하고 수렴하여 잡스럽고 어지러운 마음을 제거한 이후에, 《대학(大學)》에 나아가 이 세상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이를 일컫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앞의 편지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권하였던 것은 또한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주경(主敬)이 아니라면 치지(致知)를 할 수가 없으며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이 아니라면 마음과 몸 역시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대학(大學)》의 차례이니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에 혼정신성(昏定晨省)101)하지 않고 돌아가시면 밤낮으로 곡하는 자는 비록 거짓된 것 같으나 돌아가시기 전에도 실수하고 돌아가신 뒤에 끝내 헤매는 것은 불가합니다. 示喩只以功程得失。從前勉勵。而未聞以事親事長之道。責之。追念前日相規之意。果有是矣。其內省務實之意。尤可仰認。然學問孝弟。本非兩件物事。存心所以爲孝弟之地也。致知所以解孝弟之理也。力行所以踐孝弟之實也。如子夏所謂博學篤志。切問近思。仁在其中之意也。何其騎驢覓驢乃爾耶。又云。胸次撓亂。不能窮理。而至疑正心之不在格致之先。此則從前無居敬之功故也。古人敎人先有以卽夫小學之中。涵養收斂。以去夫雜亂之心而後。卽夫大學。以窮其天下事物之理者。非謂是耶。愚於前書。勸之以靜坐者。亦此意也。非主敬。不能致知。非知至意誠。則心體亦不可得以正。此大學之序。不可誣矣。生不定省。而死爲朝夕哭者。雖似矯僞。然不可以失於前。而又終迷於後也。 학문을 …… 그 가운데 있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오는 말이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는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보살핀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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