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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백부 부호군 부군 행장 伯父副護軍府君行狀 우리 선대는 해양(海陽 해남(海南)에서 금수(錦水)2)의 남쪽에 세거하였다. 절도공(節度公) 휘 응규(應奎)에 이르러 한양(漢陽)에 우거하였다. 절도공으로부터 판서공(判書公) 휘 연(演), 사복공(司僕公) 휘 창문(昌門)을 지나 하남공(下南公) 휘 찬(纘)에 이르러 한양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수의 남쪽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다. 하남공으로부터 장사랑공(將仕郞公) 휘 시한(時罕), 남은공(南隱公) 휘 경통(璥通), 선랑공(善郞公) 휘 만철(萬喆), 학생공(學生公) 휘 유(瑜)·휘 이도(履道)를 지나 휘 채(埰)에 이르러 금수 남쪽에서 낭주(郞州)로 이사하였다. 통정공(通政公) 휘 가석(加錫)에 이르러 또 금릉현(錦陵縣)으로 이사하였다. 정종(正宗) 기미년(1799, 정조23) 3월 29일에 금릉현의 월산(月山) 우사(寓舍)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제철(濟哲), 자는 윤서(允瑞)이다. 천성이 낙천적이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일찍 드러났다. 9세에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영특함이 남달랐다. 1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집안에 네 번의 상사가 있어 안으로는 부엌살림을 도맡아서 할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 땔나무를 하고 농사짓는 일을 모두 공이 직접 부지런히 해서 부친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부양하여 은의(恩意)가 매우 돈독하니 향리에서 모두 찬탄하고 칭찬하였다. 18세에 통정공을 모시고 같은 현(縣) 구상리(九祥里)로 이사하였다. 19세에 경주(慶州) 이씨(李氏) 아무개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이씨는 현숙(賢淑)하여 시부모 및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섬김에 매우 은의가 있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술년(1826, 순조26)에 이씨가 졸하자 정해년(1827, 순조27)에 김해 김씨(金海金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복상을 마치고 능주(綾州) 묵계리(墨溪里)에 우거하였다. 기유년(1849, 헌종15)에 장자 종림(宗林)이 죽었다. 경술년(1850, 철종1)에 김씨가 졸하자 일가족이라곤 4세 된 아이와 20세에 과부가 된 며느리뿐이었으니, 객지에서 외롭고 곤궁한 정경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당시 공의 나이는 이미 51세였는데, 며느리 양씨(梁氏)가 후손이 미약한 것을 염려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자, 공이 거절하지 못하고 임자년(1852, 철종3)에 조양 임씨(兆陽林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병자년(1876, 고종13) 8월 6일에 졸하니, 부친의 묘소 계단 아래 장사 지내고 이씨, 김씨를 합장하였다. 공은 체상(體相)이 단아하였고, 풍도(風度)가 훤칠하고 의젓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남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화목한 정은 친척에게 흡족하게 젖었고, 화락한 기풍은 향리에 두루 퍼졌다. 선을 보면 자신에게서 나온 것같이 하고, 악을 보면 자신의 병인 것처럼 하였다. 온화하고 화순한 자태는 늘 봄바람의 온화한 기상과 같았고, 의리와 사정(邪正)을 판단할 때는 목소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는 점이 있었다. 가난한 형편에서 성장하여 몹시 근검절약하였다. 무릇 화려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고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집안 살림이 부족한지 알지 못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요역(徭役)이 있으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하였다. 경사나 상사, 병문안하거나 조문할 적에는 반드시 제때에 맞추었다. 멀리 떨어진 묘소에 성묘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사방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쇠해지자 자질(子姪)로 하여금 수시로 대신 행하게 하였다. 동규(洞規)를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향리에 살면서 만든 규약3)을 모방하였고, 문안(門案)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통합한 의리4)를 따라서 행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는 친척은 친분이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혼인을 주선하여 가계를 꾸리게 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손님과 벗이 찾아올 때면 번번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매우 환대하였다. 백발에 소년 같은 고운 얼굴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으니, 그 기상과 풍채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여 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씨는 1남 2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김씨는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종림(宗林), 창림(昌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 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임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니, 동림(東林), 희림(熙林)이고, 딸은 이항무(李恒茂)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지 200여 년이다. 게다가 타향에서 떠돌면서 살 곳을 잃어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집안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백부(先伯父)께서 평상시 길이 탄식하면서 매양 문호를 세울 계책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권계한 점이다. 백부께서 돌아가신 뒤에 몇 년 되지 않아 사상(死殤)이 잇따라 외롭고 쓸쓸함이 배로 더해졌다. 게다가 독서하는 가풍이 이로 인하여 사라져 조금의 성취도 없었으니, 이 어찌 선백부가 아이들에게 바란 것이겠는가. 선백부의 간절한 뜻을 생각하고 가문이 날로 쇠락해지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고 위축된다. 아, 우리 선백부의 감추어진 광채와 숨은 덕을 누가 수습하여 드러내서 명주(明珠)와 진완(珍玩 진귀한 기호물(嗜好物))이 푸른 바다 모래사장에 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惟我先世。自海陽。世居錦南。至節度公諱應奎。僑寓漢中。自節度公。歷判書公諱演。司僕公諱昌門。至下南公諱纘。自漢中。挈還錦南舊庄。自下南公。歷將仕郞公諱時罕。南隱公諱璥通。善郞公諱萬喆。學生公諱瑜。諱履道。至諱埰。自錦南。移寓郞州。至通政公諱加錫。又移金陵縣。以正宗己未三月二十九日。生公于縣之月山寓舍。諱濟哲。字允瑞。天稟樂易。夙著孝友。九歲就學。穎悟異常。十七歲丁內艱。是時家有四喪。內無主饋。外無執役。炊爨裁線之節。漁樵耕牧之務。無不躬親勤勞以適親體撫養諸弟。恩意甚篤。鄕里莫不嗟異。十八陪通政公。移于同縣九祥里。十九聘慶州李氏某女。李氏賢淑。事舅姑及小郞小姑。極有恩意。家有疾病。輒涕泣廢食。丙戌李氏卒。丁亥系娶金海金氏某女。甲辰丁外艱。服闋。寓居綾州墨溪里。己酉哭長子宗林。庚戌金氏卒。一家百口。只是四歲孩兒與二十歲寡子婦而已。客土孤苦。情景難狀。時公年已望六。子婦梁氏憂嗣續之微。勸之續絃。公不能拒。壬子系娶兆陽林氏某女。壽陞通政大夫副護軍。丙子八月六日卒。葬于考墓階下。李氏金氏合祔。公體相端粹。風度軒雅。立心忠慤。接物和裕。雍睦之情。洽於親戚。愷悌之風。遍於鄕閭。見善如己出。見惡如己病。溫溫愉愉。常如春風和氣。而於義理邪正之際。未嘗不聲氣嚴厲。確然有不可拔者。生長窮約。偏愛儉素。凡華麗之物。不入於家。而於施恤之節。不知家力之不足。公私徭役。必先於人。憂樂問唁。必趁其時。遠處墳墓。省掃無闕。四方知舊。存訊不替。及其衰老。使子姪隨時替行焉。立洞規以倣呂氏居鄕之約。立門案以修程子合族之義。族戚之無依者。分雖疎遠。必爲之昏娶。俾立家計者。十餘人。賓朋至。輒置酒而盡歡。紅顔白髮。言笑款款。其氣象風彩。令人可愛而不可忘。李氏生一子二女。皆夭。金氏生二子二女。子宗林昌林女郭宗協尹滋升。林氏生二子一女。東林熙林。女李恒茂。孫以下不錄。嗚乎。吾家零替二百餘年。加以轉泊失所。不自支存。此先伯父所以平居長歎。而每以門戶之計爲諸兒勉勉處也。伯父歿後。未幾年。死殤相繼。一倍孤弱。且讀書之業。因以汨沒。無有一就。此豈先伯父所望於諸兒者耶。念先志之懇惻。視家戶之日非。不覺哽塞而氣縮。嗚乎。我先伯父潛光隱德。誰能收拾而揄揚之。毋使明珠珍玩。淪落於滄海沙礫之間也耶。 금수(錦水)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과 장동면에서 시작되는 탐진강(耽津江)의 지류인 금강(錦江)을 이른다. 여씨(呂氏)가……규약 송(宋)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고 있던 여대균(呂大鈞)이 제정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이른다. 문중과 향리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약으로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서로 사귐에는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등의 조목을 정하였다. 정자(程子)가……의리 정자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가법(家法)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족인(族人)을 통합해야 한다. 옛사람에게는 화수회(花樹會)가 있었는데, 위씨(韋氏) 집 안의 종회법(宗會法)을 취할 만하다.[程子曰: '凡人家法,須月爲一會,以合族. 古人有花樹,韋家宗會法,可取也.']" 하였다. 《近思錄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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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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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고 부호군 부군 행장 先考副護軍府君行狀 부군(府君)의 휘는 제현(濟玄), 자는 명서(命瑞)이다. 정씨(鄭氏)의 관향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에 이르렀으니,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두 현조(顯祖)이다. 증조의 휘는 이도(履道), 조부의 휘는 채(埰), 선고(先考)의 휘는 가석(加錫), 선비(先妣)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계해년(1803, 순조3) 5월 6일에 강진(康津) 월산(月山)의 우거하던 집에서 부군을 낳았다. 을해년(1815, 순조15)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현(縣)의 구상리(九祥里)에 우거하였다. 신사년(1821, 순조21)에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맞아들였으니, 춘채(春采)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무자년(1828, 순조28)에 어버이의 명으로 능주(綾州) 망방산(望防山)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소요를 피하여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경인년(1830, 순조30)에 주(州)의 대덕동(大德洞)으로 이사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34)에 이씨(李氏)가 졸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에 다시 진원 박씨(珍原朴氏) 치성(致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5)의 후손이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847, 헌종13)에 백씨(伯氏)와 계씨(季氏)가 강진(康津)에서 주(州)의 묵계리(墨溪里)로 와서 우거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에 대덕동(大德洞)에서 품평리(品坪里)로 이사하였다. 정묘년(1867, 고종4)에 묵계리로 이사하였으니, 백씨, 계씨와 함께 만년에 서로 의지하면서 지낼 계획이었다. 무진년(1868, 고종5)에 불초 소생을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백씨(伯氏)가 졸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에 박씨(朴氏)의 상을 당했다. 신사년(1881, 고종18)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부직(付職)되었다. 계미년(1883, 고종20) 2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4월 2일에 묵계리 화수치(火手峙) 미향(未向)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부군은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여 매우 지극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남과 담소를 나누는 경우가 적었고, 일을 만나면 꾸밈이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한가롭게 상량(商量)하는 일이 적었고, 박에 나가서는 한가롭게 벗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았다. 무릇 세간의 바둑, 술자리, 질펀하게 노는 오락에는 한 번이라도 눈길을 둔 적이 없었고, 경박하고 괴이하며 남을 속이거나 허황된 말에는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으며, 이익을 꾀하고 영화를 탐하거나 아첨하고 청탁하는 자리에는 일찍이 한발 자국도 나아간 적이 없었다. 중년에 한번 한양에 가서 성곽, 궁궐, 산천 지리, 인물 풍속을 두루 보고 돌아왔다. 어버이를 떠나 밖에 거처한 적이 있는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빠뜨리지 않고 부모님을 뵈었다.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백씨(伯氏)를 또한 어버이처럼 섬겼다. 만년에 한마을에서 세 형제가 함께 살았는데 나이가 모두 80세였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데도 함께 자고 마주 앉아 종일토록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생업이 있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비가 되어 끝내 내세울 만한 공이 없고, 농부가 되어 끝내 의뢰할 만한 재물이 없다면 이는 기물(棄物)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매우 독실하게 자식을 가르쳐 일찍이 다른 일로 학업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면서 종일 부지런하여 일찍이 나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또한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내는 때가 없었다. 불초 소생이 매번 아침 문안을 여쭐 적에 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지 누워 계신 것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선친께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자 하여 매우 일찍 갔지만 이미 엄연히 일어나 앉아 계셨으니, 4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하루라도 늦게 일어나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평생 각고의 노력으로 분발하고 진작하였기에 가계(家計)를 수립하여 가운(家運)이 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첫째 아들은 한룡(翰龍)이고,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인데 재주가 매우 영특하여 크게 될 가망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오직 불초 소생만 남아 있는데 지금 노년이 된 나이에 낡은 습관을 따르고 나태하여 당시 아버지께서 바라던 뜻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이 한 몸의 죄를 천지간에 어찌 용납하겠는가.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죄송스럽다. 바라건대, 세상의 군자는 혹 가련하게 여겨서 그 자식이 불초하다는 이유로 그 아버지의 훌륭한 명성까지 폐하지 않기를 실로 바라 마지않는다. 府君諱濟玄。字命瑞。鄭氏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其鼻祖也。七傳至諱態官弘文應敎。是生諱應奎。官節度使。是生諱演。副司直贈戶曹判書。皆其顯祖也。曾祖諱履道。祖諱埰。考諱加錫。妣光山李氏德光女。以純廟癸亥五月六日。生府君于康津月山寓舍。乙亥丁內艱。丙子僑寓顯之九祥里。辛巳聘夫人全州李氏春采女。孝寧大君補后。戊子以親命寓居綾州望防山中。蓋避擾先着也。庚寅移州之大德洞。甲午李氏卒。乙未繼娶珍原朴氏致聖女。葦南熙中后。甲辰丁外艱。丁未伯氏季氏自康津來寓州之墨溪里。丙辰自大德洞移品坪里。丁卯移墨溪。從伯季爲晩年相依計也。戊辰命不肖受業于蘆沙奇先生之門。丙子伯氏卒。丁丑朴氏喪。辛巳壽陞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癸未二月二十五日考終。享年八十一。四月二日葬于墨溪之火手峙負未之原。嗚乎。府君天性至孝。生長艱難。備經百故。而盡心盡力。備極忠養。立心忠慤。持身勤儉。與人罕笑語。遇事無表襮。居家少閒商量。處世少閒追逐。非其力不食。非其義不顧。凡世間局戱酒致曠蕩流連之娛。未嘗一寓目焉。浮靡乖僻欺誣狂誕之說。未嘗一傾耳焉。聲利繁華趨附造請之地。未嘗一濡跡焉。中年一赴漢師。周見城郭宮室山川道里風土人物而歸。嘗離親寓外。雖相距迃遠。每月朔月望。省覲無闕。有新味。未嘗先食。親歿後。事伯氏。亦如之。晩年同住一巷三昆季。年皆八十。華顔白髮。連床對榻。終日竟夕。笑語怡怡。嘗言人貴有業。業貴有成。爲士而終無可述之功。爲農而終無可賴之資。則是棄物也。是以敎子甚篤。未嘗以他業間之。平居夙興夜寐。終日孜孜。未嘗有懈怠之色。亦未嘗有暇豫之時。不肖每晨省。常見其坐而未見其臥。一日欲先府君起。早早而往。已儼然起坐矣。在膝下四十年。未嘗見其有一朝之晏起也。平生刻勵勤苦。抖擻拮据。至於樹立家計。家運不競。一男翰龍三男祥林。才性通曉。不無可望。而皆至夭折。惟不肖是在。年紀暮大。因循荒怠。未副當日一分之志。此身罪戾。天地安容。痛死痛死。惟世之君子。或爲之哀憐。不以其子之不肖而倂廢其親之令名歟。實有望焉。 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박첨(朴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홍서(朴洪瑞)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박온(朴溫)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海東筆苑》에 오를 정도로 명필이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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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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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비 유인 박씨 행장 先妣孺人朴氏行狀 선비(先妣) 박씨(朴氏)의 관향은 진원(珍原)이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의 후손이다. 증조는 만열(萬烈), 조부는 귀현(貴玄), 선고(先考)는 치성(致聖), 선비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태방(泰邦)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기묘년(1819, 순조19) 장흥(長興) 갈령리(葛嶺里)에서 태어났으니, 바로 박씨의 세거지이다. 아직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던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겨우 일을 살필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사촌 언니의 손에서 자랐다. 사촌 언니는 바로 문씨(文氏)에게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된 이였다. 성품이 엄정하여 과부로 살면서 은장도를 늘 머리맡에 두었으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매우 경계하여 비록 이웃에 있는 친척이라도 일이 없으면 간 적이 없었으니, 엄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 고아가 된 나의 선비를 보고 매우 가련하게 여겨 온 정성을 바쳐 돌보고 가르쳤다. 선비는 17세에 시집왔는데 당시 선고께서는 덕동(德洞)에 우거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이 매우 서툴렀다. 선비께서 어린 나이에 가사를 책임져 온갖 일을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처리하니 살림을 맡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조금 펴졌다. 지아비를 섬길 적에는 부인의 도리를 다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는 법이 없었고 한 마디 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전 부인의 기일이 되면 성의를 다했고, 전 부인이 낳은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시집간 딸의 경우에는 비록 사위와 외손자라도 차별 없이 대하였다. 친척과 이웃 마을에 은혜를 두루 베풀어서 모두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정결하였으며, 기물은 소박하면서도 완전히 갖추었다. 해지거나 파손된 것이 있으면 즉시 보수하였다. 옷 한 벌 버선 한 컬레를 10년 동안 바꾸지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구휼할 적에는 관대하고 넉넉하게 하는 데 힘썼고 아끼거나 인색하지 않았다. 일찍이 친가에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친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고 묘를 지키게 하였는데 은애(恩愛)와 돌봄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두터웠다. 조카며느리 양씨(梁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자 매우 가련하게 생각하여 전답을 나누어 주어서 생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 겨울에 덕동(德洞)에서 품평(品坪)으로 이사하였는데, 온 마을 부녀자들이 모두 친척을 잃은 듯이 눈물을 흘리며 10리까지 따라가 한낮이 되도록 작별하지 못하였으니, 인심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자손에게 학문을 권장하기를 매우 지극하여 현숙(賢淑)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고 장난치거나 잡담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히 경계하였다.(매우 경계하고 금지하였다. "切戒禁之") 명촌(明村) 황 처사(黃處士)와 관수재(觀水齋) 박 선생(朴先生)은 모두 소자(小子)의 어릴 적 사장(師長)인데 철마다 이분들에게 문후하는 것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민속 명절이 되어 한가하게 노니는 날이면 번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한가한 날을 만났는데 어찌 아무개 어른을 찾아뵙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을 아이들을 따라 세시풍속 놀이를 할까 염려해서였다. 소자가 14세 때 과장(科場)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느질하는 도구를 사서 바치자, 선비(先妣)께서 이르기를 "행탁(行橐)에 여유가 있으면 마땅히 서책을 구입할 것이지 바느질하는 물건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으셨다. 중년 이후로 여러 차례 이사하고 자주 혼사를 치르느라 가세가 점점 기울었지만 여유가 있게 처신하였고 남에게 집안의 옹색한 형편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별도로 약간의 물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소자(小子)가 과거를 보러 가는 때나 사우(師友)를 따라 멀리 유람하러 가는 길에는 번번이 힘을 보태 권유하여 보내서 경비가 부족하여 곤란을 겪는 근심이 없게 하였다. 생활비를 다 써 버렸다고 할 때에는 못 들은 척하였으나 종이와 먹이 부족하다고 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셨다. 소자를 따라온 객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쁜 기색이 드러나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에게 타일러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게 하였다. 소자에게 손님을 만류하도록 하고 그가 떠나갈 적에는 노잣돈을 주어서 보내게 하였다. 향리(鄕里)에 조문할 곳이 있으면 반드시 부의(賻儀)를 갖추어 가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인사는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소자가 다른 곳에서 돌아오면 "어찌 늦게 돌아왔는가."라고 하시고, 사문(師門)에서 돌아오면 "어찌 빨리 왔는가."라고 하셨다. 소자가 혹시라도 집안일을 하면 반드시 대신 그 일을 하시고는 서숙(書塾)에 가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지나치게 마음을 다른 곳에 두는가."라고 하셨다. 부인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생존한 자식은 불초 소생뿐이었으니, 애정이 지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입이 짧은 것을 근심하여 생선과 육류 등의 음식을 날마다 보내주셨고, 혈기(血氣)가 허한 것을 근심하여 막걸리를 날마다 마시게 하였다. 제사가 임박하여 장차 치제(致齊)하려고 할 때면 전혀 참견하시지 않았지만 소자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의사가 있으면 통렬하게 꾸짖으셨다. 매달 초하루 참알(參謁)하는 때 혹 초하루인지 잊어버리면 번번이 알려주시어 "오늘 삭조(朔朝)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만약 손님과 함께 앉아 있어 알리기 어려울 때면 도포(道袍)를 보내어서 깨우쳐 주셨다. 소자가 처음에 두 자식들을 두었으니 상묵(尙黙)과 상돈(尙敦)이었다. 한 아이에게는 유학을 공부하게 하고 한 아이에게는 농사짓게 하고자 하니, 선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하고 부귀한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유학이나 농사와는 상관이 없다. 설령 농사지어 부유하더라도 유학을 하여 가난한 것만 못하고, 무식하여 호의호식하는 것이 유식하여 악의악식(惡衣惡食)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흉년이 들었을 때 손자들이 물고기 잡고 나물 캐는 것을 일삼자 선비께서 그들이 학문을 그만둘까 근심하여 조금 한가한 틈이 있으면 번번이 불러서 책을 읽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완전히 그만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셨다. 혹 병중(病中)이나 조석으로 일이 없을 때 아이들로 하여금 모시고 글을 읽게 하면 번번이 즐겁게 들으셨다. 늘 소자를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난하다고 하여 딴마음을 먹지 말고 오직 독서하고 자신을 단속하여 훌륭한 자손이 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죄를 짓지 말라. 죄를 지으면 남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이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너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 6월 4일에 졸하였다. 8월 27일 기유(己酉)일에 장현(章峴)에 장사 지내고, 10년 뒤 병술년(1886, 고종23) 봄에 고묵곡(古墨谷)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선비는 자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며, 규중의 위의가 정숙하여 비속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우 곤궁하고 힘들더라도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매우 노쇠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며 온화하고 양순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였으니, 옛날의 숙원(淑媛)에 견주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아, 형편없는 불초 소생은 3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일찍이 조금도 지물(志物)의 봉양6)을 한 적이 없다. 지금 또 백발이 성성한 늙은 나이인데도 끝내 이룬 것이 없으니, 불효한 죄는 만번 죽더라도 속죄할 수 없다. 오직 끊어질 듯한 실낱같은 목숨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어찌 지하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겠는가. 천지를 우러러 보고 굽어봄에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끝이 없다. 모두 3남 7녀를 두었다. 장녀는 광산(光山) 이병성(李秉誠)에게 시집갔고, 장남 한룡(翰龍)은 지행(至行)이 있었는데 8세에 요절하였다. 둘째 아들은 바로 불초 소생이다. 둘째 딸은 공주(公州) 이광무(李光茂)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청도(淸道) 김장석(金章錫)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요절하였고, 다섯째 딸은 풍산(豐山) 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으로 5세에 요절하였다. 여섯째 딸과 일곱째 딸은 요절하였다. 겨우 1남 4녀만 성장하였다. 네 딸은 시집가서 모두 조신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소문났으니, 사람들이 선비(先妣)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先妣朴氏。貫珍原。葦南熙中后。曾祖萬烈。祖貴玄。考致聖。妣仁川李氏泰邦女。以純祖己卯。生于長興葛嶺里。卽朴氏世居地也。未省事。失所恃。纔省事。失所怙。鞠於從女兄。兄卽適於文氏而早寡者也。性嚴正。其寡居。刀劒不離於寢側。門鎖藩障。極其戒勅。雖親族在比隣。非有故未嘗往之。其衛身之嚴如此。見我先妣之早孤。甚加哀矜。撫養敎誨。務盡其心。先妣年十七于歸。時先考僑寓德洞。生理甚疎。先妣以沖齡當室。凡百幹理。無異老成。行未幾年。家力稍舒。事君子甚得婦道。無一事擅爲。無一言違異。遇前室忌日。備盡誠意。撫前室所生如己出。及適人。雖婿郞外孫。待之無間。族戚隣里。恩意周徧。皆得其心。衣服儉而潔。器用質而完。有所敝缺。隨手補治。一衣一襪。十年不易。而至於周恤匱乏。務從寬厚。無所係吝。嘗恨親家無嗣。令親族一人主祀守墓。而恩愛眷恤。終始彌篤。從子婦梁氏早寡無育。甚加哀憐。分給田地。資其生計。丙辰冬。自德洞移品坪。一村婦女。莫不號泣如失親戚。追至十里。至日中而不能別。其得人心如此。敎子孫勸學甚至。而欲其親近賢淑。至於遊戱喧雜之地。切戒禁之。明村黃處士觀水齋朴先生。皆小子幼時師長也。時節問候。勉令無闕。當俗節遊閑之日。輒曰。迨此暇矣。何不往謁某丈也。蓋恐其從村兒作俗節戲也。小子十四歲。自科場還。買針線之具獻之。先妣曰。行橐有餘。當買書冊。針線之物。何關於汝。責之不已。中年以來。累度搬移。頻經昏嫁。家力至於不贍。而處之裕如。未嘗對人言窘艱之狀。別蓄若干物。每當小子赴擧之日及從師友遠遊之行。則輒助其方而勸送之。俾無拘費難行之患。至若家用告罄。若不聞焉。紙墨告乏。輒副其急。有客從小子至。必喜形于色。戒廚人善其供具。戒小子使之挽留。其發也。具行贐使送之。鄕里有問弔處。必具賻儀。命行之曰。人事不可廢也。小子自他處還則曰。何其遲也。自師門還則曰。何其速也。小子或親家務。必代執其勞。而命之書塾曰。何其外馳之過也。夫人男子三人。所存惟不肖。其慈愛可謂至矣。憂食性之短。而魚肉之羞。日以饋之憂血氣之虛。而酒醪之物。日以飮之。至於臨祭而將致齊焉。則絶不與之。小子有欲食之意。痛責之。當月朔參謁之時而或忘其爲朔日。則輒告之曰。今日非朔朝耶。若與客倂坐而難於告之。則持送道袍以喩之。小子初有二息。曰尙黙尙敦。欲令一兒業儒一兒業農。先妣曰。貧富有命。無關儒農。設令農而富。不若儒而貧。無識而美衣美食。不若有識而惡衣惡食。丙子歲饑。諸孫以漁採爲業。先妣憂其廢學。稍有暇隙。輒招而使讀之曰。如此者其不愈於全廢乎。平日好聽讀書聲。或在病中及晨昏無事之時。使兒輩侍而讀之。輒欣然聽之。嘗戒小子曰。勿以貧窶貳其志。惟讀書勅躬。無失爲佳子孫。是吾願也。又曰。罪不可作。作罪則人雖不知。天可逃乎。汝其勉之。丁丑六月四日卒。八月二十七日己酉。葬于章峴。後十年丙戌春。移葬于古墨谷巽坐原。嗚乎。先妣天姿溫仁。閫儀貞靜。口不出鄙俗之言。身不接奢麗之物。雖困苦之極而不見有怨懟之色。雖衰老之甚而不見有怠弛之氣。從容和順。婦德備摯。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嗚乎。不肖無狀。在膝下三十餘年。曾未有一分志物之養。今且白首頹齡。而迄未有成。不孝之罪。萬死莫追。惟是一縷溘然。行在不遠。而何以見慈顔於地下乎。俯仰天地。至痛罔極。擧三男七女。一女適光山李秉誠。一男翰龍。有至行。八歲而夭。二男卽不肖也。二女適公州李光茂。三女適淸道金章錫。四女夭。五女適豐山洪承命。三男祥林。五歲而夭。六女七女夭。成長僅一男四女。四女適人。皆以謹勤聞。人以爲有先妣之風焉。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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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지난번에 그대의 당숙(堂叔)께서 돌아가신 뒤로 그대로 막연하게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면서 상복을 입고 지내는 정황이 좋으며, 함애(咸哀)38)도 무양(無恙)하게 지내며 책을 읽고 있는지요? 양친이 모두 잘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은 복 있는 집안의 운수라고 할 것이지만 순식간에 기울어져 이와 같은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어버이를 잃은 어린 것들을 어루만져주고 돌보아주십시오. 경립(景立) 또한 한 층 세상의 풍파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만 오늘날 경립의 정세(情勢)는 그 부담이 실로 나머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선친(先親)께서 부탁하신 뜻과 가문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계책 및 사우(士友)들의 기대가 그대의 한 몸에 모여들었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온갖 바쁜 일이 수없이 있어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책을 읽는 한 가지 일은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모쪼록 바라는 것은 1부(副)의 규구(規矩)를 뽑아 정리하여, 몸과 집안을 가장 잘 다스리는 계책으로 삼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의림(義林)은 병든 몸에 실낱같은 목숨이 붙어 있어 날마다 고단한 상황으로39) 나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다소간 자신을 책려(策勵)하여 구업(舊業)을 정리하여 만에 하나라도 뒤미처 보완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매번, "내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였다."40)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슬픔과 한스러움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경립은 나를 전철 삼아 경계하기를 바랍니다. 向者令堂叔返駕後。信息隨以漠然。不審重省下持服衛重。咸哀無恙讀字否。俱存無故。福家氣數。轉眄之頃。至於如此。人生萬事。有難料測撫孤恤哀。景立亦添一層世故矣。但今日景立情勢。其擔負。實有異於餘人者。先親付託之意。門戶禦侮之計。士友期待之望。萃於一身者。爲何如耶。雖百忙千撓之中。而讀書一事。斷不可已。望須折斷得一副規矩。以爲身家究竟之計如何。義林病軀殘喘。日就卷婁。雖欲策理多少。以爲追補萬一之地。而不可得。每讀知我如此。不如無生之語。而不覺悲恨塡中。幸景立視爲前車也。 함애(咸哀) 상중에 있는 조카를 가리킨다. 고단한 상황으로 원문은 '권루(卷婁)'인데, 외물을 좇아 자신의 심신을 고되게 만드는 것이다.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이럴 …… 못하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초지화(苕之華)〉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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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2) 行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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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홍공 행장 聾庵洪公行狀 공은 휘가 규주(圭周), 자는 경휴(卿休), 호는 농암(聾庵)이다. 홍씨(洪氏)는 세계(世系)가 풍산(豐山)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도첨의(都僉議)를 지낸 휘 간(侃)이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중엽에 휘 치(治)는 행의(行義)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휘 준(埈)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휘 경고(景古)는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을 지녀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영한(永漢)이고 조부는 휘가 희우(羲禹)이다. 고(考)는 휘가 수모(壽謨)이고 비(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대현(大鉉)의 딸이다. 순조 을유년(1825, 순조25)에 능주(綾州)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서 백부 수영(壽榮)의 후사로 나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처음에 서당에 나아가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읽으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발전하였다. 하루는 연로한 부모님이 매우 고생스럽게 일하는 것을 보자 바로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기를, "자식 된 자라면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커다란 직분이다. 어찌 편안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 늙으신 부모에게 봉양을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등, 직접 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매번 셋째 아우 채주(埰周)에게 경계하기를, "너의 재주와 성품은 내와 견줄 바가 아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고 또 네 형이 이루지 못한 소원을 위로해다오." 하면서 유학(遊學)하여 명유(名儒)가 되기를 권하였다. 아우들, 여러 사촌 형제와 한마을에 모여 살아 대문과 담장이 서로 이어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마주하여 은의(恩誼)가 매우 두터웠으며 일찍이 한마디 말로 서로 따지면서 화합을 해친 적이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면 진휼하고 병에 걸리면 도와주고 죽어서 장례를 치르면 서둘러 달려가 같은 마을의 오랜 붕우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모두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아들과 손자들에게 경계하기를, "집안의 흥성과 쇠퇴는 자손이 현명한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고, 자손이 현명하고 그렇지 못하고는 학문에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에 달려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스승으로 삼을 만한 덕을 지닌 자가 있다면 그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더라도 응당 가까이하고 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하물며 집 안에 그런 인물이 있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너희 숙부는 평소에 입으로 하는 말에 가릴 것이 없고 몸으로 하는 행동에도 가릴 것이 없어 내가 매우 아끼고 있다. 너희들은 숙부를 모범으로 삼거라." 하였다. 숙부는 아마도 호가 봉남(鳳南)인 채주(埰周)를 가리키는 듯하다. 일찍이 해적(海賊)이 변경을 침범하여 시끄러운 소문이 크게 떠돌자 집을 버리고 도망가 숨는 백성이 많았다. 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놓고 일깨우기를, "이웃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달려가 구원해야 마땅하다. 하물며 화란이 드러나지도 않았건만 성급하게 부모와 집안을 버린다면 이것이 인정이겠는가.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이다." 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감히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행의(行義)가 사람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무자년(1888, 고종25) 7월 16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4세였다. 해하리(海鰕里)의 선영 아래에 장례를 치렀다가 나중에 우봉(牛峰) 뒤의 사좌(巳座)로 이장(移葬)하였다. 배(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광식(光植)의 딸로 좌상(左相)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 1411~1456))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뛰어났고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석(祐錫), 우전(祐銓)이고 딸은 문석휴(文錫休)에게 출가하였다. 계배(系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용(祐鏞), 우건(祐鍵)이고 딸은 최환필( 崔煥泌), 임봉우(林逢雨)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외모가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풍의(風儀)는 대범하며 언사(言辭)는 간결하고도 어눌하며 행동은 간략하고 곧았다. 다른 사람과 큰소리를 내거나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았고 일에 임하여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듯하고 이해와 득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계책이나 농락, 간계와 부정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나 가무(歌舞)나 사치(奢侈), 유랑(遊浪)이나 방탕에 관한 것에는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섞지도 않고 한 발자국도 딛지 않았다. 오직 산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의를 행하여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농사를 지으며 여유롭게 세월을 보내는 것이 곧 평생에 걸쳐 계획하고 살아가는 방도였다. 오늘날 인심은 날로 부화(浮華)해지고 선비들의 풍습은 날로 보잘것없어지는 것이 수심(水深)이 더욱 깊어지듯 하니 당시에 선배가 보여준 풍도를 다시금 볼 수 없으리라! 이에 성인(聖人)이 선진(先進)을 따랐던 뜻이 우연이 아님을 비로소 알겠다. 뒤늦게 회포를 드러내는 것이 집안 간의 교분과 대대로 교유한 우호를 끝내 잊을 수 없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우석(祐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로 세상에 영구히 전할 계책으로 삼고자 청하였다. 내가 행장을 지을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로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해 삼가 이와 같이 적는다. 公諱圭周。字卿休。號聾庵。洪氏系出豐山。麗朝都僉議諱侃爲顯祖。中葉有諱治。以行義除厚陵參奉。諱埈。中司馬兩試。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參判。曾祖永漢。朝羲禹。考壽謨。妣順天朴氏大鉉女。以純廟乙酉。生公于綾之牛峯里。旣長。出爲伯父壽榮后。天稟朴實。事親至孝。初就塾。讀擊蒙諸書。文理日進。一日見老親幹務甚勞。輒掩卷太息曰。人子之職。忠養爲大。豈安坐讀書。而被養於老親乎。於是漁樵耕稼。無不躬親爲之。以極甘旨之奉。每戒其三弟埰周曰。君之才性非我比。勉之以副父母之望。又以慰乃兄未就之願也。勸令遊學以成名儒。與羣弟諸從。聚居一巷。門墻相接。日夕聚對。恩誼甚洽。未嘗有一言相稽以失其和也。其有飢寒則賙之恤之。有疾病則扶之將之。有死喪則匍之匐之。以至隣里朋舊。無不各得其心焉。嘗戒子孫曰。人家興替。在子孫賢否。子孫賢否。在學問勤惰。又曰。有德可師者。雖在鄕隣。猶當親近遊從。況在家內乎。汝之叔父。平生口無擇言。身無擇行。吾甚愛之。汝等視爲表則也。叔父蓋指埰周號鳳南也。嘗有海賊犯邊。騷說大作。民多棄室奔竄。公招村人喩之曰。隣里有急當赴救。況禍色未形。而遽棄其父母室家者。此人情乎。曾禽獸之不若也。村人感之。無敢逃者。其行義之服於人。類如此。戊子七月十六日考終。享年六十四。葬于海鰕里先壠下。後移于牛峰後巳坐。配全州李氏光植女。左相文安公思哲后。極有婦德。生二男一女。祐錫祐銓。文錫休。系配金海金氏。生二男二女。祐鏞祐鍵。崔煥泌林逢雨。嗚乎。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辭簡而訥。施爲約而直。與人少欸曲。臨事少表襮。是非毁譽若不聞也。得失利害若不知也。凡機關籠絡詭譎回僻之人。聲技繁華遊浪曠誕之地。未嘗與之接一語着一步。惟是隱淪林樊。守吾分行吾義。使內不愧於心。外不愧於人。而山水桑麻。優哉游哉。乃其平生計活也。目今人心日就浮華。士習日就菲薄。如水益深。則先輩當日之風。不可得以復覩乎。於是乃知聖人從先進之意有不偶爾也。追言想感。非直爲通家之講。誼世之好。有不能終諼也。祐錫持家狀示余。因請一言。爲傳世不朽之計。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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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 문공 행장 梧溪文公行狀 행실이 돈독하면서도 문장이 화려하며 명리(名利)에 담담하면서도 바쁘게 경쟁하여 우뚝하게 일가(一家)의 법도를 이루어 대대로 이를 잃지 않고 지켜온 자를 근세에서 찾자면 오직 우리 고을의 오계(梧溪) 문공(文公)이 그런 인물이다. 문공의 휘는 봉환(鳳煥), 자는 익중(翊中)이고 오계(梧溪)는 공의 호이다. 고려조의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이름난 조상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자수(自修)는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내고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증조는 휘가 혁진(爀鎭), 호가 오재(鰲齋)이고 조부는 휘가 영덕(永德)이고 본생조(本生祖)는 휘가 영수(永壽), 호가 죽와(竹窩)이다. 고(考)는 휘가 정휴(定休), 호가 긍재(兢齋)이다. 처음에 파평 윤씨(坡平尹氏) 휘 종진(宗鎭)을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식(栻)의 딸로 철종 기유년(1849, 즉위년) 10월 3일에 부춘(富春)의 우봉(牛峯)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양씨가 꿈에서 신인(神人)이 비단 주머니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집안의 보물이니 조심해서 간직하거라." 하였는데, 이윽고 해산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자애롭고 온화하여 부모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히게 되자 매우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8세에 들에 나아가 새를 쫓다가 새 그물을 세워놓은 기둥에 "소호(少昊) 시대에는 새의 이름으로 관직을 삼았는데 네가 관명(官名)을 지니고서 어찌하여 나라의 싹을 해치는가."라고 적어놓아 보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죽와공(竹窩公)이 만년에 늘 병석에 누워 있었다. 공은 대인(大人)이 곁에서 모시면서 밤낮으로 힘을 다해 섬기는 것을 보고 매번 서당에서 돌아오면 그 수고를 대신하고 간혹 아우에게 하루씩 교대로 대신하게 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가을에 벽산재(碧山齋)에서 책을 읽었다. 하루는 마음이 갑자기 놀라고 뛰어 마침내 급히 집으로 돌아와 죽와공을 뵈었더니 병이 이미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죽와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 가운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경오년(1870, 고종7) 가을 대인(大人)이 아주 심한 이질(痢疾)에 걸리자 대인이 한 숟갈을 들어야 공도 한 숟갈을 먹고 대인이 두 숟갈을 들어야 공도 두 숟갈을 먹으면서 지극히 근심하였고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기도 하였다. 의원이 자라 탕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자, 당시에 강물도 줄고 날씨도 추웠건만 공은 그물을 마련하여 자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마침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낮은 모래밭에 나와 있어 마침내 갖다 바치자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임신년(1872, 고종9) 봄 대인이 또 병에 걸리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공에게 이르기를, "네가 약질(弱質)의 몸으로 상례를 치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다. 거처나 음식 등, 몸을 보양하는 데 관계된 모든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네 아버지가 죽어서도 걱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말라." 하자, 공은 울음을 삼키면서 승낙하였다. 대인이 운명하자 스스로 남긴 당부를 생각하여 감히 마음껏 슬픔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인정과 예를 다 갖추었다. 홀어머니를 섬길 때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반드시 여쭙고 유순하고 곡진하게 어머니의 뜻대로 모셔 어머니를 대하는 도리를 잘 갖추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기일보다 며칠 전에 집 안팎에 훈계하고 술과 고기를 금하고 쓸고 닦아 정갈하게 하도록 힘을 쏟았으며 방에 들어가거나 문을 나서면서 감개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제사를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 셋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선행으로 인도하고 학문을 면려하는 것이 너그러우면서도 정성이 가득하여 한 번도 화락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경계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그 단서가 규문(閨門)을 먼저 바로잡는 데 달려있다. 규문이 올바르지 않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부부 사이에 절대로 허물없이 가까이하지 말고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화곡(花谷)과 임동(林洞)의 일족과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수시로 친선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았다. 봉남(鳳南) 홍공(洪公)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처음 학문에 나아갈 때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의심스러운 사항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며 병이 들거나 무슨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찍이 서로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봉남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服制)인 심상(心喪)을 하였다. 구암(龜巖) 문송규(文頌奎)와는 도의(道義)로 교제를 맺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강론을 벌이고 학문을 익혔으며 서로 의기가 매우 잘 투합하였다. 고향 마을의 사우(士友)들과 모여 향음(鄕飮), 향사(鄕射), 강규(講規), 독법(讀法) 등의 예를 행하는 것을 봄가을의 상례(常例)로 삼았다. 병자년(1876, 고종13)의 흉년에는 공이 약간의 물자를 내어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인 향리(鄕里) 사람들을 진휼하였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대는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하건만 도리어 남을 우선으로 삼으니 어찌 상정(常情)을 거슬러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죽을 지경에 놓이지는 않았다. 넉넉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진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물을 중시하고 의리를 가볍게 여기는 장사치들의 상담(常談)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계미년(1883, 고종20)부터 그 이후로 공이 우연히 병에 걸리더니 앞뒤로 8~9년에 걸쳐 차도가 있기도 하고 발병하기도 하고 심해지기도 하고 좀 덜하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어버이를 섬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 붕우에게 나아가 강론하고 익히는 방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어 자기 몸에 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의 좌우 벽에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인설도(仁說圖),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기타 요언(要言)과 격회(格誨)를 걸어놓고 몸소 상관(常冠)과 일상복 차림으로 중앙에 단정히 앉아 항상 눈으로 접하며 경계하고 성찰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경인년(1890, 고종27) 8월 29일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 송석면(松石面) 성곡촌(聲谷村) 뒤에 있는 도지연(倒池蓮) 비탈 아래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능성 구씨(綾城具氏) 본수(本修)의 딸이고 계배(繼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 규환(奎煥)의 딸이다. 서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재연(載淵), 재인(載寅)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아, 문씨(文氏)는 예전부터 지금껏 대대로 유학(儒學)을 계승한 유서 깊은 집안으로 죽와공(竹窩公)과 그의 아들 긍재공(兢齋公)은 모두 효우(孝友)와 행의(行誼)로 향리(鄕里)에서 이름이 높았다. 공은 선대인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행실을 삼가고 학문을 쌓아 가정에서 효제(孝悌)를 행하고 향리(鄕里)에서 충신(忠信)으로 이름이 나 문채가 화려한 한 고장의 선사(善士)였다. 지초(芝草)에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있음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내가 보잘것없는 처지로 욕되게도 공의 지우(知遇)를 입어 타계하실 때 손수 편지를 보내 남아 있는 아들의 학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재연(載淵)이 학문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으니 대대로 계승한 학문은 또한 장차 실추되지 않을 것이다. 공이 타계하고 3년이 지난 여름 재연이 중부(仲父)가 지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先親)을 가장 잘 아시기로는 장인(丈人)만 한 분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행장(行狀)을 지어서 사가(私家)에서 대대로 전하는 실제 자취로 삼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 마음이 애처롭고 뜻이 가상하여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軒質行而輊文華。右恬退而左奔競。偉然爲一家之成法。世守而不失者。在近世惟吾鄕梧溪文公是耳。諱鳳煥。字翊中。梧溪其號也。麗朝江城君諱益漸爲名祖。至中葉有諱自修。官谷城縣監。腏享于鄕祠。曾祖諱爀鎭號鰲齋。祖諱永德。本生祖諱永壽號竹窩。考諱定休號兢齋。初娶坡平尹氏諱宗鎭女。無育再娶濟州梁氏諱栻女。以哲宗己酉十月三日。生公于富春之牛峯。先是梁氏夢神人遺以錦囊曰。此是汝家寶物。謹受而藏之也。已而解娩。天性慈詳溫雅。承順親意就傅上學。執業甚勤。八歲出野打鳥。書于鳥幕柱上曰。少昊之世。以鳥記官。爾帶官名。而何以害邦國之苗乎。見者奇之。竹窩公晩年常病在床。公見其大人侍側。晝夜服勞。每自書塾歸。輒代執其苦。或令其弟更日代之乙丑秋。讀書碧山齋。一日心忽驚動。遂急還家。見竹窩公病已危劇矣。翌日平明棄世。隣里莫不驚異之。庚午秋。大人患痢甚劇。一飯再飯。極其致憂。嘗糞甛苦。醫云鱉湯最良。時水落天寒。公擧網將求之。適有一大鱉。出在淺沙。遂持以供之。病果見差。壬申春。大人又遘疾。自知不起。謂公曰。汝以弱質。若欲執禮。必至傷生。居處飮食。凡係衛養之節。一一斟酌。不使乃父抱歸未忘之心。公飮泣諾。及遭故。自念遺托。雖不敢任情致毁。而必誠必愼。備盡情文。事偏慈。大小必稟。柔順委曲。甚得幹母之道。祭祀必先期數日。戒飭內外。絶酒肉灑掃洗濯。務令潔淨。入室出戶。愾然肅然。以致如在之誠。與弟三人友愛純篤。導之以善。勉之以學。從容懇惻。未嘗失和。嘗戒之曰。孝於父母。友於兄弟。其端在於先正閨門。閨門不正何事可行。夫婦之間。切戒狎昵之私。必以莊敬涖之。可見其效矣。與花谷林洞諸族。作花樹會。爲隨時講好之資。與鳳南洪公同里閈。自初上學。至老白首。質疑問業。疾病甚故之外。未始相離。及其沒也。服心喪之制。與文龜巖頌奎爲道義之交。往復講磨。相得甚深。會鄕坊士友。行鄕飮鄕射講規讀法等禮。春秋爲常。丙子荒年。公出若干力。以賙鄕里之濱死者。或曰。子將自救不贍。而反急他人。豈無矯情干譽之譏耶。公曰。吾雖不贍。尙不至濱死。若諉不贍而不急人。則此是賈兒販竪。重財輕義之常談也。自癸未以來。公偶然遘疾。或差或發。或加或減。首尾八九年。備經艱楚。而事親服勤之節。就友講討之方。未嘗不自力。不知病之在身也。居室左右。揭太極西銘仁說敬齋箴圖。及他要言格誨。自以常冠便服。端坐其中。常目警省。日以爲常。庚寅八月二十九日。以宿疾終于正寢。葬松石面聲谷村後倒池蓮崎下巽坐之原。配綾城具氏本修女。繼配利川徐氏奎煥女。徐氏生二男一女。男載淵載寅。女幼。嗚乎。文氏素是詩禮古家。竹窩公及其子競齋公。皆以孝友行誼。聞于鄕里。公承襲先訓。謹身績學。孝悌行於家庭。忠信著於鄕里。蔚然爲一方之善士。芝根醴源。豈不信然。余以無狀。辱爲公知。臨歿手書。致其遺孤學問之託。余固知不敢承當。而追念悲悵。不覺涕零。然載淵立志向學。刻勵不怠。其世世繼述之業。又將不墜矣。歿後三年夏。載淵奉其仲父所撰家狀。示余而言曰。知先親最密者。莫如吾丈。願狀其行以爲私家傳世之實蹟也。哀其情嘉其志。不敢以非其人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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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소29)【우용】에게 답함 答淇德韶【祐鏞】 지난번 보내준 편지를 받았으나 미적거리다가 답장을 못했는데, 갑자기 하산(霞山)30)의 강석(講席)에서 만나게 되었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 요란하여 다정히 대화할 수 없었으니, 뒤미처 생각함에 매우 서글펐네. 그동안 삼가 묻건대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는 생활이 어떠한가? 남는 힘으로 글을 읽어 더욱 조리와 두서가 있어서 한 가문의 여러 선비들이 많이 종유할 것이니, 매번 그리워하는 마음 감당할 수 없네. 질문한 몇 조목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 뜻31)을 족히 볼 수 있었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말단에 결어(結語)가 같고 다른 것은 혹 문세로 인하거나 혹 말뜻으로 인해서이지만 글자를 놓고 말을 함에 각각 마땅한 바가 있으니, 위아래의 글을 상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네. 본말장(本末章)에 대해……라 한 것은 '청송(聽訟)' 한 구절로 말하자면, '송사를 없게 한다[使無訟]'는 것은 본(本)이고 '송사를 듣는다[聽訟]'는 것은 말(末)이며,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한다[大畏民志]'는 것은 본이고 '그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게 한다[不敢盡其辭]'는 것은 말이네. 이것은 명덕과 신민의 본말의 뜻을 해석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바라건대 더욱 마음을 두어 정밀하게 연구하시게. 向承惠幅。因循未復。而遽爾相面於霞山講聚之席。然人海撓撓。未得穩款。追思悵悵。邇來謹問侍旁起居何似。餘力咿晤。益有條緒。一門群彦。濟濟遊從。每不勝依然。俯詢數條足見不得不措之意明德新民末段結語之同異或因文勢。或因辭義。而下字下語。各有攸當詳考上下文可知也。本末章云云。以聽訟一節言之。使無訟。本也。聽訟末也。大畏民志。本也。不敢盡其辭。末也。此非釋明新本末之意者耶。惟加意硏精。 홍덕소(洪德韶) 홍우용(洪祐鏞, 1872~1941)을 말한다. 자는 덕소, 호는 우산(牛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우산유고(牛山遺稿)》가 있다. 하산(霞山) 《일신재집》권14〈하산기(霞山記)〉에 내용이 보인다. 터득하지……뜻 《중용장구》 제20장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일단 생각할진댄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有不思, 思之, 不得, 不措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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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백32)【홍기】에게 답함 答金毅伯【弘基】 접때 그대 집에 갔으나 서로 어긋나 만나지 못하였더니, 뜻밖에 그대 아우가 내 집에 찾아왔고 또 그대의 편지를 전해주어 펼쳐 읽어봄에 감사하여 완연히 그대 얼굴을 마주한 듯 하였네. 의림(義林)은 오래 병을 앓은 뒤라 후유증으로 파리해 지는 것이 점점 심해지니, 이것은 늙어가는 광경인지라 매번 "의리는 미루어 찾기 어렵고 공부는 중간에 끊어지기 쉬운데, 세월은 물처럼 흘러간다."33)라는 말을 외움에 개연(慨然)히 망연자실하지 않은 적이 없네. 생각건대 의백은 이 청양(靑陽)한 좋은 시절에 평생의 큰 사업을 해 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실로 우리 유학과 세도(世道)가 박복(剝復)34)하고 왕래하는 기괄(機括)35)이니, 부디 힘써 노력하시게. 순제(旬題)36)는 시속을 따라 응납(應納)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다만 득실(得失)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네. 청한다고……한 것은 그대가 생각하지 못한 것인가? 돌아보건대 이렇게 쇠잔하고 병든 나는 이런 글에 대해 사양하고 짓지 않은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으니, 비록 억지로 힘써 그대의 두터운 뜻에 부응하려고 해도 거북 등에서 털을 깎는 것과 같은 것37)을 어찌하겠는가? 曩到貴軒。交違未穩。謂外令弟臨門。又傳惠幅。披玩感感。完對芝字。義林積病之餘。餘悴轉甚。此是催老光景。每誦義理難推尋。工夫易間斷。而日月如流之語。未嘗不慨然自失也。惟毅伯趁此靑陽好時節。辨得平生大事業。如何如何。此實斯文世道剝復往來之機括也。勉旃勉旃。旬題從俗應納。何妨也。但不爲得失所累則可矣。俯請云云。吾友其未之思耶。顧此殘病餘喘。於此等文字。廢閣已多年雖欲勉强以副厚意。而龜背刮毛何哉。 김의백(金毅伯) 김홍기(金弘基, 1870~?)를 말한다. 자는 의백, 호는 태곡(台谷),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의리는……흘러간다 《주자대전》 권33 〈여백공에게 답함[答呂伯恭]〉에 나온다. 박복(剝復) 성쇠를 뜻한다.《주역》의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가리키는데, 〈박괘〉는 음(陰)이 성하여 양(陽)이 쇠한 것을 의미하고, 〈복괘〉는 음이 극에 이르러 다시 양이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기괄(機括) 쇠뇌의 시위를 거는 곳[弩牙]과 화살의 시위를 메우는 부분[箭括]을 말하는데, 곧 사물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뜻한다. 순제(旬題) 열흘마다 한 번씩 보이는 시험이다. 순시(旬試)와 같은 말이다. 거북……것 거북의 등은 아무리 긁어 봤자 터럭을 얻을 수 없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수고만 할 뿐이라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동파팔수(東坡八首)〉에 "거북의 등에서 터럭을 긁어내어, 어느 때에 털방석을 만든단 말인가.[刮毛龜背上, 何時得成氈?]"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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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일【흥묵】에게 답함 答裴正一【興黙】 지난번에 답신을 계원(啓元) 편에 부쳤습니다. 지난달 그믐 무렵에 계원의 집에 갔다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응당 조만간 전해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뜻밖으로 또 혜서(惠書)를 받들었으니 매우 고맙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부모를 모시고 공부하는 상황이 한결같다는 것을 알았으니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겠습니까.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고(無故)하여 족하(足下)께서는 이미 하늘로부터 즐거움 하나를 얻었으니 자신에게 달린 두 가지 즐거움40) 또한 힘을 쏟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시절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의림(義林)은 효를 행하고 싶어도 미치지 못하고 학문을 닦는 것도 때가 지났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저 애석한 마음만 절실할 뿐입니다. 족하께서는 저를 전철(前轍)로 삼으십시오. 《주역(周易)》 공부는 지금 몇 권에 이르렀습니까? 읽고 난 뒤 다시 《논어》, 《맹자》 등의 책을 받아서 평이하고 천근한 일에서 착실하게 체인(體認)하여 일대본령(一大本領)을 갖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는 단지 도(道)와 기(器)의 경계에서 말하는 것이지 실로 상하가 대치하듯 하는 것을 이르지 않습니다. 경(敬)은 정(靜)만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경은 동(動)과 정(靜)을 관통하므로 《예기(禮記)》 〈곡례(曲禮)〉에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음과 양이 서로 뿌리가 되고 동과 정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41)라고 하였습니다. 획이 없는 역(易)이 바로 태극이지 어찌 일찍이 별도의 획이 없는 역이 태극보다 먼저【先】 있었겠습니까. 이 '선(先)' 자는 소위 '미발 이전'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건괘(乾卦) 구이(九二)에서는 성(誠)을 말하고, 곤괘(坤卦) 육이(六二)에서는 경(敬)을 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논어》 중궁문인장(仲弓問仁章) 아래의 주석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는 건도(乾道)이고 주경행서(主敬行恕)는 곤도(坤道)이다."라고 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는 박괘(剝卦)와 복괘(復卦)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박괘(剝卦)의 상효(上爻)에서 이미 사라진 양(陽)이 아래에 복괘(復卦)의 초효에서 생겨나는 양이 되어42) 초목의 꽃과 열매가 시들어 떨어진 뒤에 양기(陽氣)가 다시 뿌리에서 생기듯 하겠습니까. 向者答書。付送啓元便。前月晦間。過啓元家。見尙爾留滯當早晏傳達也。謂外又泰惠諭。感感多矣。仍審省做如一。何等願聞。父母俱存。兄弟無故。足下旣得其一樂於天。則其二樂之在我者。亦將勉而可得矣。好時節。豈不可惜。義林欲孝靡及。爲學過時。向誰尤爲。只切痛惜。惟足下視爲前車也。羲經之課。今至幾卷耶。讀了後。更授如論孟等書。就平易切近。着實體認。辦得一大本領。如何。形而上下。特以道器界至言。非實有上下如對待之云也。敬非主於靜而已。是貫乎動靜。故禮曰無不敬。陰陽互根。動靜交資。故曰知者樂水。仁者樂山。無畵之易。便是太極。何嘗別有無畵之易。在於太極之先耶。此先字。當看如所謂未發之前。乾九二言。誠坤六二言敬云云。論語仲弓問仁章下註曰。克己復禮。乾道也。主敬行恕。坤道也。推此可見。消長之理。當觀於剝復之間云云。豈剝上旣消之陽。下爲復初方生之陽也。如一草木之花實雕落。而陽氣復生于根。 두 가지 즐거움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지혜로운……좋아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박괘(剝卦)의……되어 《주역》 64괘의 순서상 복괘(復卦)는 박괘(剝卦) 뒤에 온다. 박괘는 다섯 개의 음효(陰爻) 위에 하나의 양효(陽爻)가 있는 형상으로, 음이 극성하여 양기가 모두 소멸될 위기에 처한 괘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다섯 음효의 아래 하나의 양효가 생성되는 복괘로 받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괘전(序卦傳)〉에서는 "물건은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박이 위에서 다하면 아래로 돌아오기 마련이므로 복으로 받았다.【物不可以終盡, 剝窮上反下, 故受之以復.】"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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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수재 재연 에게 주다 贈文秀才【載淵】 효는 인륜 중에 가장 가깝고 쉬워 어린아이도 행할 수 있는 것이고, 우매한 사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덕(先德 덕망이 있는 선배)의 말 중에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못하니,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덕을 이루는 이상의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가깝고 쉽다.'라는 것이 이처럼 높고도 먼 것인가?무릇 효의 뜻은 포함된 바가 매우 넓으니, 말 한마디와 행실 하나라도 진실로 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효의 지극한 경지를 말한다면 본성을 다한 성인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여기에 해당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순(舜)에게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공경과 점점 다스려지게 하는 덕이 없었다면 어찌 그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데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으니, 단지 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순만 못하며,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순만 못하며,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이 순만 못하며, 덕이 순만 못하며, 지혜가 순만 못할 뿐이로다. 만약 한 터럭만큼이라도 순에게 미치지 못함이 있다면 자식으로서의 직분에 본분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문생(文生) 재연(載淵)이 나를 따라 공부하였는데, 어느 날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대해 물었다. 문생은 법도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 가정에서 보고 배우는 바에 반드시 나 말고도 다른 스승이 있을 것이니, 어찌 비루한 나의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주역ㆍ고괘(蠱卦)ㆍ구이(九二)》에 이르기를, "어머니의 일을 주관함이니,  고집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고, 《정전(程傳)》18)에 이르기를, "자식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순함과 공손함으로 보좌하고 인도하여 의리에 맞게 해야 하니,  순하지 않아서 패고(敗蠱)를 초래하면 이는 자식의 죄이다."라고 하였다.무릇 은미하게 간하는 일은 있되 위엄을 범하여 간언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기미를 보아 간하되 은미하게 풍간해야 한다. 이것이 어버이를 섬기는 절도인데, 하물며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오직 순도(順道)로 서로 받들 뿐, 더욱 알직(訐直)19)을 용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에랴. 반드시 온화한 기운을 흡족할 만큼 흘러넘치게 하고 정성스러운 뜻을 측은하게 여길 만큼 간절하게 하여 말을 곡진하게 하고 사리를 상세하게 밝힌다면 저절로 어버이의 뜻이 순하게 되어 일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다.대저 학문을 하는 것과 효를 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학문이 한 걸음 진보하고, 효가 한 걸음 진보하여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에 이른다면 어버이에게 순종함이 지극할 수 있을 것이니,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문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일을 맡은 적자(嫡子)로서 지금 한창 어머니의 일을 주관하는 자이기 때문에 삼가 〈고괘(蠱卦)〉의 말로 고한다. 孝於人倫。最近且易。孩提之所能行。愚蒙之所能知。然先德之言曰。不誠乎身。不順乎親。誠身是成德以上事也。所謂近且易者。若是其高且遠耶。夫孝之爲義。所包甚廣。一節一行。固不可謂非孝。而語其至。則非聖人盡性。不足以當之。若使舜無夔慄之敬。烝乂之德。何以能底豫其父。天下無不是底父母。但吾所以愛親者。不如舜乎。敬親者。不如舜乎。養親者。不如舜乎。德不如舜乎。智不如舜乎。如有一毫不及舜。便於子職有不盡分處。文生載淵從余遊。一日問事親之道文生法家子孫。其所擩染。必有餘師。而何待於鄙說哉。蠱卦九二曰。幹母之蠱。不可貞。傳曰。子之於母。當以柔順輔導之。使得於義。不順而致敗蠱。則子之罪也。夫有隱無犯。幾諫微諷。此是事親之節。況母子之間。專以順道相承。尤非可容訐直之地。必使和氣浹洽。誠意懇惻。言辭委曲。事理詳明。則自然親意順而幹務得矣。大抵爲學爲孝。本非兩事。學進一分。孝進一分。至於誠身。可以爲順親之至。勉之勉之。文生早孤當室。方是幹母之蠱者。故謹以蠱卦說告之。 정전(程傳) 송(宋)나라 유학자 정이(程頤)가 《주역》을 해설한 것이다. 알직(訐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자신의 정직함을 삼는 것을 말한다. 《논어》 〈양화(陽貨)〉에 "불손한 것을 용맹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고,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어 정직하다고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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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윤의 자설 金德潤字說 김생(金生)이 이별하고 떠나간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하루는 관례를 치르고 찾아왔다. 내가 표덕(表德 자(字))을 무엇으로 했는지 묻자, "덕윤(德潤)입니다. 부친께서 명명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 "의미가 있구나. 명명함이여. 의로운 방도로 가르쳤다고 이를 만하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 몸이 항상 펴지고 느긋한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성대한 기운이 몸에 가득하고, 산처럼 의연하게 서며, 얼굴이 옥빛처럼 아름답고,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쟁쟁한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덕이 맑게 얼굴에 드러나며 등에 가득하여 사체(四體)가 말하지 않아도 깨닫게 되는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좌로 준승(準繩)이 되고 우로 규구(規矩)가 되어 거동과 용모가 예에 맞는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진실로 존양성찰(存養省察)36)의 공부가 쌓여서 지극히 순수하고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공자가 말하기를, '덕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라고 하였는데, 대저 '덕' 한 글자를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드물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여기에 반드시 지극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모르겠네만 덕윤은 그 뜻을 알고 있는가? 부친께서 명명하신 것인데 모른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내 자신이 이름으로 삼은 것인데 모른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친구들이 부르는 것인데 실상도 없이 응답해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덕윤'의 실상이 있는 뒤에야 '덕윤'이라는 이름에 부응하고, 부친께서 명명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김생을 위해 두렵게 여기네." 金生別去有年。一日突弁而來。余問其表德云何。曰德潤。大人所命。余曰。有意哉命之也。可謂敎之以義方也。心無愧怍。體常敍泰者。德之潤身也。揚休山立。玉色金聲者。德之潤身也。粹面盎背。四體不言而喩者。德之潤身也。左準繩。右規矩。動容中禮者。德之潤身也。苟非存養省察積累純熟之至。何以及此。孔子曰。知德者鮮。夫德之一字。人孰不知而曰鮮何也。此必有至義存焉。未知德潤知之乎。大人所命。其可曰不知乎。吾身所名。其可曰不知乎。朋友所呼。其可曰無實而答之乎。必有德潤之實而後。可副德潤之名。而不負大人丈命之之意也。吾爲生懼焉。 존양성찰(存養省察) '존양'은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을 말하며, '성찰'은 자신의 사욕을 살펴 막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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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선경에게 주다 贈鄭君善敬 공자가 말하기를,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맹자가 이 말을 인용하여 칠편(七篇)37)의 끝에서 여러 성인이 도통을 전수한 말 앞에 써 놓았으니, 그 뜻이 심원하다.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는 뜻과 도를 전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르칠 만한 인재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정군(鄭君) 선경(善敬)은 자태와 국량이 진실로 일반 사람과 달랐으니, 호탕하고 씩씩하여 어디에 얽매이지 않았고, 불우한 상황에서도 짝할 자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으며, 훤칠하니 수레를 뒤엎는 말과 같은 기상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혼잣말로, '이러한 사람은 애초부터 옛적에 일컬었던 광자와 같은 부류의 선비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귀의할 곳이 없어 홀로 쓸쓸히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닌 적이 없으니 어찌 함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점점 흘러 풍상(風霜)을 겪고 군의 나이가 이미 40을 넘게 되자 들뜬 생각이 사라지고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면서 슬픔과 회한이 더욱 절실해지고, 분발함이 더욱 지극해졌다. 이에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춘 채 《 대학(大學)》 한 책에 침잠하여 곱씹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아, 자애롭고 착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은 좋은 사람이 아닌 적이 없지만 나아가 성취하는 데에 힘이 없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취하지 않고 유독 광자와 견자를 취하신 이유이다. 김군은 이미 마음을 굽히고 머리를 수그리며 여기에 종사하고 있으니, 과감하게 나아가는 힘은 두려움 없이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며, 강인한 뜻은 만 명의 사내라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 말에 이르기를,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한 가운데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군은 힘쓰게나. 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狂者進取。狷者有所不爲。孟子引此語。而書之於七篇之終群聖傳統之前者。其旨遠矣哉。聖賢誨人之意。傳道之心。非不切至。而非有可敎之才。則將何以爲之。鄭君善敬姿相器局。固已異於人矣。而豪爽不羈。落拓不群。軒軒然有覂駕之氣。余嘗自語。以爲此未始非古所稱狂士之流亞。而踽踽不遇悠悠不歸者。豈不可借。旣而歲月侵尋。風霜荏苒。而君之年。已四十有餘矣。浮念銷歇。眞心呈露。悲悔轉切。奮發愈至於是社門斂迹。將大學一書。沈潛咀嚼。蓋已久矣。嗚乎。慈善溫柔的。未爲不是好人。而其於進就無力焉。此聖人所不取而獨取狂狷者也。今君旣已屈心低首。從事於斯。則其果敢之力。剛毅之志。必將有獨立不懼。萬夫莫奪者矣。古人語曰。眞正大英雄自戰戰兢兢中出來。君其勉乎哉。 칠편(七篇) 《맹자》의 별칭으로, 본래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후한(後漢)의 학자 조기(趙岐, 108~201)가 환제(桓帝) 때에 처음으로 주석을 내고, 매 편을 각각 상하(上下)로 나누어 총 14편으로 만든 이후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맹자》는 모두 14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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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 김공 진의록》 서문 山南金公振義錄序 대장부의 평소 포부는 똑같지만, 그 사적과 공적은 성공과 실패, 드러남과 감추어짐 등의 차이가 있으니, 평소의 포부가 이미 바르다면 비록 조그만 공효가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숭상할 만한 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남들보다 뛰어난 불세출의 공적이 있다 하더라도 취하지 않는 바가 있다.산남(山南) 김공(金公)은 우리 고을의 선배이다. 신장이 9척에 이르고, 근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품은 뜻이 강개하고 우뚝하여 천만 명이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는 기상이 있었다. 그의 학문은 기억하고 암송하는 세속 선비들의 관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사물의 이치에 해박하고 세상일에 통달하였으며, 산수와 말타기, 활쏘기, 진(陣)을 펴고 수레를 모는 등의 방법에 이르러서도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병인년(1866)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에, 공이 개연히 스스로 분발(奮發)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배운 것을 여기 말고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마침내 격문(檄文)을 써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알렸다. 이에 고을의 자제들 중 풍문을 듣고 모집에 응한 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활과 창, 갑옷, 양식이 바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훈련을 하고 기강과 군율을 세운 뒤에 출군(出軍)할 날을 잡았으나 적들의 변란이 평정되어 미쳐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었다.아, 당(唐)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89)은 한 지역을 지키는 관리였고, 우리나라의 건재(健齋)90)와 여러 공들의 경우에는 비록 몸은 초야에 있었지만, 이름은 조정의 반열에 있었다. 그런데 공과 같은 경우에는 한 지역을 지키는 관리도 아니었으며, 조정의 반열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산남의 일개 벼슬하지 않은 선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외침이 한번 나오자 떨쳐 일어나 모집에 응한 자들이 사방에서 이르렀고, 기약한 월일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온갖 일을 맡을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었다. 만약 평소 의로운 행실이 진중하여 다른 사람을 감복시킬 수 없었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비록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명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평소 바른 포부만큼은 단연코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다.의로움을 지키는 자는 일에 임하여 반드시 이익을 바라보지 않고, 공변됨을 유지하는 자는 난리에 임하여 반드시 사심을 따르지 않으니, 만약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조금만 항복을 늦추어 산남의 의로운 깃발이 심도(沁都 강화도(江華島))에 도착했다면 수양(睢陽)의 큰 승리와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위대한 절개91)가 다만 공에게 있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 드러남과 감추어짐은 때와 만남에 관계된 것이고, 사람을 논하는 수단이 아닐 것이다.내가 고을의 후배로 효상(爻象 형적(形跡))을 목격한 것만도 이미 30년간의 일이고, 당시 고을의 장로들이 지금은 모두 죽었지만, 오직 찬란한 풍도와 의리만큼은 역력하게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지라 우러러 감복하는 나머지 삼가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외사씨(外史氏)92)가 취하기를 기다린다. 大丈夫素抱一也。而其事功則有成敗隱顯之不同。素抱旣正。雖靡尺寸之效。有足可尙。不然。雖有絶人不世之功。有所不取。山南金公吾鄕先進也。身長九尺。膂力過人。懷慨磊落。有千萬人吾往之氣。其學不屑屑於俗儒記誦之習。而博於物理通於世故。至於算數騎射布陣行車之法。無不精通。丙寅洋醜之變。公慨然自奮曰。平生所學。捨此焉用。遂草檄文。喩以擧義。於是鄕子弟。聞風應募者。陸續雲集。弓弩戈戟。甲冑芻粮。無不立辦。錬習紀律。啓行有日。而賊變告平。未及有爲而止。嗚呼。唐之張許。守土者也。我朝之健齋諸公。雖身在草野。而名在朝班。至若公非守土非朝班。而只是山南一布衣耳。然而義聲一出。奮募四至。不喩期月。衆務自集。如非平日行義之重。有以素服於人。安能如此。此雖功未就名未著。而其素抱之正。斷然有不可掩者矣。守義者。臨事必不見利。持公者。臨亂必不徇私。若使洋醜少緩授首。而山南義旗。達於沁都。則安知睢陽大捷。晉陽偉節。獨不在於公乎。然則成敗隱顯。時也遇也。非所以論人也。余以鄕里後生。目擊爻象。已是三十年間事。當日鄕老。今皆殞沒。而惟有風義煒燁。歷歷在人。感仰之餘。謹述略干語。以待外史氏取焉。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함락하자, 진원 현령(眞源縣令)인 장순과 수양 태수(睢陽太守)인 허원(許遠)이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굳게 지키며 반란군을 수차례 격파하였으나, 구원병이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마침내 성이 함락되면서 모두 사로잡혔으나 끝까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新唐書 忠義列傳 張巡, 許遠》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ㆍ경상ㆍ전라ㆍ충청 4도에서 활약하였다. 진주성에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하였다. 수양(睢陽)의……절개 수양(睢陽)의 큰 승리는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에서 안녹산의 장수 윤자기(尹子奇)가 이끄는 대군을 막아 크게 격파한 일을 말한다.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위대한 절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에서 김천일(金千鎰)과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등이 의병을 이끌고 왜병에 맞서 항거하다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한 일을 말한다. 외사씨(外史氏) 외방에 거주하면서 조정 이외의 외부에 관계된 사항을 기록하던 사관(史官)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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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회안》 서문 詠歸會案序 삼대(三代)72) 때 교화를 일으킨 실마리는 반드시 고을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다섯 명씩 백성을 묶고, 아홉 등분씩 정전(井田)을 나누어 화합하고 함께 살면서 떠돌지 않게 하였고, 통속(統屬)하고 유지하여 혼란스럽지 않게 하였다. 집안에는 부형의 가르침이 있었고, 마을에는 삼노(三老)73)의 훈육이 있었으며, 학교에는 스승과 동학(同學)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골목에는 출입하는 벗들이 있었으며, 들에는 지키고 망보는 도움이 있었고, 향촌에는 양노(養老)와 양현(養賢), 삼물(三物)과 팔법(八法)74)이 있었으니, 무릇 출입하고 기거하는 것과 가고 머무는 것, 말하고 침묵하는 것 등이 애초부터 하루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풍속이 아름답고, 어진 인재가 많았으니, 후세에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아, 시대가 멀어지고 사람이 없어지면서 유풍(遺風)이 땅을 쓴 듯 사라져 고을과 마을 사이에 은덕(恩德)과 정의(情誼)가 서로 이어지지 않고, 권면과 경계가 서로 미치지 못하여 일반 사람들은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고, 선비들은 학문을 사사롭게 여겨 이단(異端)의 말과 행위가 끝없이 멋대로 흘러넘치는 데에 이르렀다. 비록 그렇지만 여남은 집밖에 안 되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나오고, 한 고을에도 반드시 착한 선비가 있어 예로부터 지금까지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았으니, 진실로 그들의 음성과 기색을 본받아 화합하면서 그들과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면 비록 삼대의 교화가 깨끗하게 사라져 완전히 무료한 시대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부족한 점을 다스리고 나의 훌륭한 점을 권면하는 데에 길이 없을까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정해년(1887) 중추(仲秋 음력 8월)에 내가 고을의 벗들을 따라 육칠 일에 걸쳐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유람하며 자못 바람을 쐬고 읊조리는 정취를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이별할 때에 한마디 말로 서로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거처하는 곳이 가깝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정이 두텁지 않은 것도 아닌데, 뿔뿔이 흩어져서 한 가지 선도 책망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의리도 강론하지 못한 채 이처럼 하염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평소 서로 알아주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오늘의 모임으로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규약을 정하여 남전(藍田)의 향약(鄕約)75)처럼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백록(白鹿)의 학규(學規)76)처럼 서로 강학하여 때에 따라 서로 모여 차례대로 거행하되 헛된 명성으로 귀결되지 않고 하나하나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찬성하였다. 이에 시골 마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제도와 재력을 따르고, 벗들이 모여 강학하는 방법을 덧붙여 참작하고 증감하여 오래도록 유지될 규례를 정하였다.아, 한편으로는 시골 마을이고, 한편으로는 벗들이지만, 우리들이 만년에 어렵게 이러한 모임을 거행함으로써 삼대의 유의(遺儀)를 그래도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운수가 궁박하여 다시는 사방에서 벗을 취할 만한 힘이 없어 궁벽한 집에 틀어박힌 채 그저 쓸쓸히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찌 이러한 상황에서 시골 마을의 벗들과 더불어 오르내리고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사이에서 노닐 줄 알았겠는가. 다만 용렬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이것이 두려울 뿐이다.염계 주 선생(濂溪周先生 주돈이(周敦頤))이 말하기를, "지극히 높은 것은 도이고, 지극히 귀한 것은 덕이다."77)라고 하였는데, 벗들로 인해서 존귀하게 되었으니, 그 의리가 또한 소중하지 않겠으며, 그 모임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여러 벗들에게 바라니, 곧음과 신실함으로 서로 가르쳐주고 서로 알려주어서 내가 날로 나아가거든 너는 달로 나아간다면 고을의 풍속이 오직 평원(平原)만 아름답지 않을 것이고, 고을의 어진 인재가 오직 고령(古靈)에만 많지 않을 것이며78), 한 모퉁이에 있는 홍릉(紅綾 능주(綾州))도 또한 군자의 고을이 되지 않겠는가. 이 계(契)는 마침 서석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린 나머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인하여 영귀(詠歸)라 이름을 지었으니, 이 또한 여러 벗의 뜻이었다. 夫三代興化之端。必自鄕井始。是以五五其民。九九其井。使合同而不離。統維而不亂。家有父兄之詔。里有三老之訓。庠有師友之敎。巷有出入之友。野有守望之助。鄕有養老養賢三物八刑之法。凡出入起居。行住語黙。未始一日而離於正。此所以風俗之美。賢才之多。非後世之能及也。噫。世遠人亡。遺風掃如。鄕井之間。恩誼不相接。勸戒不相及。以至人私其身。士私其學。而異言異行。橫流滔滔。雖然。十室之忠。一鄕之善。亘古亘今。不無其人。苟能聲氣比和。與之源源。則雖在蕩然無聊之日。而所以攻吾闕勉吾善者。不患無其路矣。歲丁亥仲秋。予從鄕友之後。遊瑞石首尾六七日。頗盡風詠之趣。其別也。一辭相別曰。吾輩居非不近。情非不厚。而落落渙散。未有責一善講一義。如是悠悠。烏在其平生相知之意耶。若因今日之會。爲之面定規約。以德業相勸如藍田之約。講學相從如白鹿之規。隨時相聚。次第擧行。不爲虛聲所歸。而俾有一一實效如何。衆皆唯唯。於是因其鄕井之制力可及者。而附以朋友講聚之方。斟酌增減。定爲久規。嗚呼。一則鄕井也。一則朋友也。吾輩晩生。間關擧此。而三代遺儀。庶有親見之日。豈非幸耶。況義林孤露蹇滯。力不復取友四方。而跧蟄窮廬。只有離索待盡而已。豈知到此而與鄕井知舊。遊於升降進退切磋琢磨之間耶。但醜劣無狀。叨忝於一鄕善士之間。是爲可懼也已。濂溪周先生曰。至尊者道。至貴者德。因朋友而得貴且尊。其義不亦重乎。其聚不亦樂乎。願諸友維直維諒。胥訓胥告。我日斯邁。爾月斯征。則鄕俗之美。不獨平原。鄕賢之多。不獨古靈。而一隅紅綾。亦不爲君子之鄕耶。此契也。適成於瑞石風詠之餘。故因以詠歸名之。此亦諸友之意也。 삼대(三代)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 때를 가리킨다. 삼로(三老) 한(漢) 나라 때 교화를 관장하던 관직으로, 향(鄕)마다 한 사람씩 두었다. 《한서(漢書)》에 "백성 중에 50살 이상으로 덕행이 있고 사람들을 이끌어 선(善)을 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삼로를 두었는데 향(鄕)에 한 사람이다. 향삼로(鄕三老) 가운데 한 사람을 가려 현삼로(縣三老)로 삼고서 현령과 승위(丞尉)와 더불어 정사로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漢書 高帝紀上》 삼물(三物)과 팔법(八法)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로 만민을 교화하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國學)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는 말이 나오고, 또 "향학의 팔형(八刑)으로 만민을 바로잡는다.[以鄕八刑糾萬民]"라는 말이 나온다. 삼물은 삼사(三事)와 같은 말로, 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를 가리키는데, 육덕은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를 말하고,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가리킨다. 팔형은 8종의 범죄행위에 대해 가해진 형벌로, 불효지형(不孝之刑)ㆍ불목지형(不睦之刑)ㆍ불인지형(不婣之刑)ㆍ부제지형(不弟之刑)ㆍ불임지형(不任之刑)ㆍ불휼지형(不恤之刑)ㆍ조언지형(造言之刑)ㆍ난민지형(亂民之刑)을 말한다. 남전(藍田)의 향약(鄕約) 남전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가리키는 것으로,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을 말한다.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德業相勸], 허물과 잘못을 서로 경계하며[過失相規], 예의와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에 서로 구휼한다.[患難相恤]"라는 네 조목이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6 善行》 백록(白鹿)의 학규(學規)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말한다. 주희가 지남강군(知南康軍)에 부임하였을 때 백록동서원을 중건하고 직접 강학하면서 학규를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교(五敎)의 조목, 학문을 하는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체, 접물(接物)의 요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晦菴集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지극히……덕이다 《통서(通書)》 〈사우상(師友上)〉에 보인다. 고을의……것이며 고령은 원래 산 이름이었는데, 송(宋)나라 때 문신이자 학자였던 진양(陳襄)이 고령서원(古靈書院)을 세우고 글을 읽었으므로 진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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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파보》 서문 豊壤趙氏派譜序 민가에서 보책(譜冊)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역사이니, 세계(世系)를 밝히고 종족(宗族)을 거두어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선이 문무(文武)의 계책과 공열(功烈)로 지켜온 5백 년 동안 사대부 집안에서 보책(譜冊)을 숭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중히 여기며,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혜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성대하게 풍속을 이루었다.풍양 조씨(豊壤趙氏)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로, 일파가 대대로 강진(康津)에서 살았는데, 조정의 반열에 올라 훌륭한 공적을 이룬 감사공(監司公)과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참판공(參判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절을 세운 주부공(主簿公) 같은 분들이 우뚝하게 빛났고, 그 나머지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음관(蔭官), 문학(文學), 효행(孝行), 열행(烈行) 등으로 향리(鄕里)에서 칭찬을 받은 자들이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일파의 문벌과 신망, 명성과 업적 등으로 볼 때 또한 남쪽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종족이었다.보계(譜系)는 정종(正宗) 정사년(1797)에 처음으로 수찬(修撰)하였고, 50년이 지나 헌종(憲宗) 병오년(1846)에 다시 수찬하였으며, 병오년부터 지금까지 54년이 흐르면서 생존했던 사람은 죽고 어렸던 사람은 장성하여, 태어나고 죽은 날짜와 함자(銜字), 혼인, 무덤 등에 관한 기록이 잘못되고, 상고할 것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이에 문중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고, 충분한 상의 끝에 의론이 하나로 모아져서 경영하고 간행하는 일이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다.내가 생각건대 조씨의 보책이 일반 사람의 것과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으니, 족파(族派)가 번다하지 않고, 보책을 만드는 기간이 촉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근세 보가(譜家)의 경우에는 으레 대부분 족파를 넓히는 것에 힘써 원근(遠近)과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한데 섞어 한 편으로 만드니, 속임과 망령됨이 어느 것인들 극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조씨는 단지 도강(道康 강진의 옛 이름) 일파만 함께 하였으니, 규모가 협소한 것 같지만 친근한 이를 친근하게 하는 데에서 소원한 이에게까지 미쳐갔으니,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다.근세 보가(譜家)의 경우에는 보책을 만드는 기간이 늦거나 빨라 일정하지 않아서 혹 어제 마쳤는데 오늘 시작하기도 하고, 혹 아침에 간행하였다가 저녁에 폐기시키기도 하여 통문을 보내는 일이 연이어지고, 돈을 분배하여 거두어들이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씨가 오십 년에 한 번씩 수찬한 것은 삼십 년의 규례와 비교하면 조금 느슨한 것 같지만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았으니, 이치가 또한 이와 같다. 이것으로 문중의 풍습이 두텁고, 마음을 쓰는 것이 치밀함을 볼 수 있다. 아, 선공(先公)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이대로 나아간다면 조씨의 문중이 어찌 창대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써야 할 것이다.창구(昌九)은 참판공 16대손인데, 문중 부형의 명을 받들고 와서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진실로 받들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지만, 대대로 맺어온 교분이 무겁기에 감히 고집스럽게 사양하지 못했다. 譜於人家。亦一史也。所以明世系收宗族。而有補於世敎。爲何如哉。恭惟我朝。文謨武烈五百年。士大夫家。莫不崇譜規而尊祖重本。正倫篤恩。蔚然成風。豊壤趙氏東方巨姓也。而有一派世居康津。若監司公之立朝偉蹟。參判公之文學行義。主簿公之殉國立慬。磊落光明。而其餘文武官蔭。文學孝烈。見稱鄕里者。有不殫記。其門望聲猷。亦南州之望族也。譜系在正宗丁巳。始修之。至五十年而憲宗丙午。再修之。今距丙午爲五十四年矣。存者沒。幼者壯。生卒諱銜。昏娶墳墓。將不無失錄無稽之慮。於是門議齊發。爛商歸一。經紀刊釐。不勞而成。余謂趙氏之譜異於人者。有二焉。族派之不煩也。年限之不促也。近世譜家。例多務廣。不計遠近親疎。而混同一編。欺誣幻妄。何所不至。今趙氏只與道康一派共之。規模似若狹小。而親親及疎。理固如此。近世譜家。遲速無常。或昨訖而今始。或朝刊而暮毁。發通絡繹。排斂仍疊。今趙氏五十年而一修。較諸三十年之規。似若少緩。而矯當時之敝。理亦如此。可以見門風之厚而用心之密矣。嗚呼。諸先公之遺風餘韻。爲不食矣。率是以往。趙氏之門。安得不昌大乎。勉旃焉。昌九參判公十六代孫也。奉其門父兄之命。來謁弁卷之文。余固知非可以承當者。而世契之重。有不敢牢讓云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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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유고》 서문 松庵遺稿序 이 몸을 소유한 사람 중에 선조께서 남겨준 기(氣)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기가 이어지고 이어지며 태어나고 태어났기에 지극히 친근하고 절실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더욱 오래될수록 그 음성과 안색을 상상할 만한 것이 없어지면서 어떤 모습의 사람이었는지 막연하여 알 수 없게 된다. 서책이나 그릇을 사모하는 것은 입 기운과 손때가 있어서일 뿐이고, 선산의 뽕나무와 가래나무에 깃들어 있는 것은 상로지감(霜露之感)93)일 뿐이다. 비록 진짜 모습을 모사하여 시험해 보더라도 터럭만큼도 어긋나지 않게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어긋나지 않게 하였더라도 영대(靈臺 마음)의 경우는 또 형상해 낼 수 없으니, 어찌 비단 칠분(七分 초상화)에 불과할 뿐만이 아닌, 정신과 심술이 발현되고, 행의(行義)와 풍범(風範)이 남아 있는 평소의 유묵(遺墨)만 한 것이 있겠는가.오 사문(吳斯文) 정섭(長燮)이, 선대인(先大人) 송암공(松庵公)이 일찍이 소요하면서 읊었던 약간의 글을 수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슬하에서 섬길 때의 음성과 용모가 눈에 선하기에 비록 부모를 여읜 지 오래되었어도 한 가닥 모습만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일찍이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에서 손자로, 손자에서 또 손자로 이어지면 우러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이 유고에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저를 위해 현안(玄晏 서문)을 짓는 일을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하였다.아, 똑같이 사람의 자식이지만 효성이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버이를 잊었느냐 잊지 않았느냐 때문이다. 옛사람은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도 감히 부모를 잊지 못하고, 심지어 소리가 없는 곳에서도 듣고, 형체가 없는 곳에서도 보는 듯 여겼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사문(斯文)이 이미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고, 또 대대로 자손들이 길이 효도할 바탕을 만들었으니, 어버이를 드러내는 정성과 후대에 물려줄 계책이 무관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송암공(松巖公)은 우리 향촌의 선배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친인척 간에 화목한 행실과 진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질박하고 성실한 풍모는 이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하니,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이 어찌 한 집안에서만 우러러 사모하는 바탕이 될 뿐이겠는가. 마땅히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人有此身。孰非祖先之遺氣。接續生生。至爲親切。然世代彌久。其聲音顔色。無處可想。而邈然不知爲何狀人。書冊杯圈。所慕者口手之澤而已。邱隴桑梓。所寓者霜露之感而已。雖摸眞而省試之。不可使毫髮不爽。設有不爽。至於靈臺。則又莫狀焉。曷若平日遺墨。精神心術之所發。行義風範之所存者。匪但爲七分哉。吳斯文長燮。蒐輯其先大人松庵公所嘗吟詠往復若干文字。編爲一卷。持以示余曰。逮事膝下。音容在目。雖孤露之久。而一縷不泯。何嘗可忘。然子而孫。孫而又孫。則所可瞻想。獨不在是耶。願爲我勿辭玄晏之役也。呼呼。均爲人子。而孝有不同者。以其忘親與不忘也。古人之一出言一擧足。而不敢忘父母。以至聽於無聲。視於無形者。其不以是耶。斯文旣寓終身之慕。又爲世世子孫永言孝思之地。其於顯親之誠。貽後之謨。可謂無關矣。然松庵公吾鄕先進也。其孝友睦婣之行。忠信質慤之風。可以爲斯世之模範者。則此書之成。豈止爲一家瞻慕之資而已。當與鄕黨子弟共之。 상로지감(霜露之感)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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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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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가을바람이 교외에 불어오니 그대에 대한 그리움이 참으로 간절합니다. 어버이를 모시는 상황이 모두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생가(生家) 왕부인(王夫人)의 상기(祥期)44)는 따져보면 이미 지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병으로 칩거하는 와중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달려가 위로해 드릴 수가 없었으니, 부끄럽고 슬퍼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종숙(從叔) 어른과 여러 형제들은 변제(變制)45)하고 길함에 나아가셨는지요? 개확(慨廓)46)한 마음을 어찌 견디는지요? 그저 구구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입니다. 용연(龍淵)47) 댁과 백순관(伯順寬) 어른, 직부(直夫)의 여러 상황은 모두 평안한지요? 아침저녁으로 따라 모여서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을 것이니 매번 간절히 흠모해 마지않습니다. 그대는 영특한 자질로 일찍부터 뜻을 세우니 이미 사방의 사우(士友)가 우러러 본 지 오래입니다. 이로부터 계속하여 끝까지 궁구하고 원대하게 된다면 어찌 선대인(先大人)이 당일 간곡하게 말한 지극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손가락 하나로 가려도 태산의 높음을 잃어버릴 수 있고, 한 마디 구름이 태양의 밝음을 덮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구구하게 가깝고 자질구레한 계획에 눈앞을 가리워진다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중요하고 큰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천번 만번 거듭 헤아리고 살피는 것이 제가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형편없는 자신을 돌아보면 외람되이 선장(先丈)의 당일에 정의(情誼)를 받들어 어둑어둑한 사이에서 매번 지극한 뜻을 헛되이 저버린 것이 두려워서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뿐입니다.【질문】태극(太極)이 움직여서 양(陽)이 생겨나고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겨납니다. 양(陽)이 변하여 음(陰)과 합해지면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가 생겨납니다. 여기에서 '생(生)' 자와 묘합(妙合)하여 응결한다는 '응(凝)' 자, 그리고 만물(萬物)을 화생(化生)한다는 '생(生)'자는 모두 어떠한 때를 가리키는 것인지요? 아니면 말할 수 있는 선후(先後)와 차례가 있는 것인지요?【대답】선사(先師)48)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태극(太極)을 설한 말은 대저 '자리는 비어있고 이치는 채워져 있다【位虛理實】'는 넉 자면 충분히 그 뜻을 다할 수 있다네. 「태극도(太極圖)」 중에서 상면의 1권자(圈子)부터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권자(圈子)49)까지 어찌 일찍이 확정된 계층과 등급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자리는 비어있다【位虛】는 것이네. 다섯 층의 권자(圈子)는 모두 한결같이 맛이 순백하고 담담하며 원만하고 구족하여 흠결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는 채워져 있다【理實】는 것이네.……"5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의문을 기다렸다가 말한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이(理)로 말하자면 통체(統體)가 각각 갖추어져 있는데 어떠한 장소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심(心)으로 말하자면 통체(統體)가 갖추어져 있는데 어떠한 장소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보는 바가 어떠한가에 있을 뿐입니다.【질문】'배우는 자는 이 마음을 온전히 체득해야 한다.'51)는 말에서 '체(體)' 자는 아마도 마음으로 마음을 보존하라는 뜻인 듯합니다.【대답】'체(體)'라는 말은 체인(體認)하고 체찰(體察)한다는 뜻의 체(體)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두 마음을 두었다는 혐의가 있다면 진심(盡心), 정심(正心), 구방심(求放心)과 같은 부류에서도 모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겠습니까?【질문】사람에게 있어서는 성(性)이 되고 몸을 주재하는 것은 심(心)이 됩니다. 몸은 사람의 몸인데 분별하여 설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대답】성(性)은 품부(稟賦) 받은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사람으로써 말한 것이고, 심(心)은 주재(主宰)하는 것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곧 그 몸으로 말한 것입니다.【질문】심(心)은 기(氣)의 정상(精爽)인데, 이 기(氣)는 이오(二五)의 정(精)52)입니다.【대답】이오(二五)의 정(精)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로 말한 것이고, 정상(精爽)이라고 한 것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측면에서 지극히 허령(虛靈)하고 밝은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질문】"몸속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53)라고 하였는데, 이 심(心)은 미발(未發)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발(已發)을 말하는 것입니까? 특별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거론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대답】몸속에 가득한 측은지심에 어찌 일찍이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간격이 있겠습니까. 측은지심이 사단(四端)을 포함하는 것은 인(仁)이 사덕(四德)을 포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질문】배우는 사람들이 성인(聖人)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배우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성인의 기상(氣象)을 익숙하게 완미(玩味)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서 성인의 기상을 완미할 수 있습니까?【대답】곧 그 말씀을 완미하면 성인의 기상(氣象)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논어(論語)》 〈향당편(鄕黨篇)〉에서 성인(聖人)을 묘사한 내용은 어떠하겠습니까?【질문】"하나이기 때문에 신묘하다.【一故神】"54)에서, 이 '신(神)'이라는 글자는 오로지 이(理)로 인식할 수도 없고 역시 오로지 기(氣)로 인식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기를 합하여 볼 수 있겠습니까?【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理)에 있습니다.일과 사물마다 본래부터 하늘에서 생겨나는 철저하고 바꿀 수 없는 도리(道理)가 있습니다. 사람도 마땅히 그 이치를 따라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른다면 어떠한 어지러움과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마음의 주장이 정하게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질문】고요한 뒤에 만물(萬物)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모두 봄 뜻이 있습니다. 이는 미발(未發) 이전의 기상(氣象)입니까? 이발(已發) 이후의 기상입니까?【대답】여기에서 '고요하다【靜】'는 글자는 동정(動靜)에서 정(靜)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대학(大學)》에서 '정정(定靜)'55)이라고 한 정(靜)과 같습니다.【질문】성(性)이라는 것은 만물(萬物)의 일원(一原)인데, 이 '성(性)'이라는 글자는 오로지 '인생이정이상(人生而靜以上)'56)을 말한 것인지요?【대답】형기(形氣)의 이전인 일원(一原)으로 돌아가는 것과 형기(形氣)의 이후인 만수(萬殊)에 국한되는 것은 이는 근래 이(理)를 논한 것의 폐단이니 빨리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질문】입도(入道), 수도(修道), 응도(凝道), 달도(達道), 행도(行道)에 구분할 수 있는 글자의 의미가 있습니까? 또 말할 수 있는 차례가 있습니까?【대답】입도(入道)는 배우는 자의 일이고, 수도(修道) 성인(聖人)의 일입니다. 수도(修道)는 사물을 이루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고, 응도(凝道)는 자신을 이루는 것으로 말한 것이며, 달도(達道)는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행도(行道)는 몸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질문】호승심(好勝心)과 자긍심(自矜心)과 원망하는 마음과 욕심내는 마음57)을 모름지기 뿌리부터 제거하여 다스리려면 그 제거하는 공부를 시작하는 곳이 미발(未發)의 때입니까, 아니면 이발(已發)의 때입니까?【대답】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공부는 진실로 미발(未發)할 때에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제어하여 그 안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면 뿌리를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공부가 또한 이발(已發)할 때에 있지 않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질문】성(性)은 탁연(卓然)하여 볼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 뜻은 마땅히 태극(太極)이 하늘에 걸려 있는 어떤 물건이 아니라는 뜻과 서로 참고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까?【대답】이른바 '참고하여 살펴본다'는 것은 아마도 무극태극(無極太極)의 의미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합니다.【질문】근세(近世)에도 간혹 이(理)를 주장하는 이가 있고, 간혹 기(氣)를 주장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理)를 주장하면 그 결과가 어떠하며 기(氣)를 주장하면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대답】이(理)가 기(氣)의 주(主)가 된다는 것은, 마치 임금이 신하를 통솔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통솔하고 지아비가 아내를 통솔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氣)가 이(理)의 주(主)가 된다는 것은 마치 신하가 임금의 지위를 빼앗고, 자식이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고, 아내가 지아비의 지위를 빼앗는 것과 같으니 그 득실(得失)을 볼 수 있습니다.【질문】선유(先儒)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에는 보이고 들리는 곳에 나아가 공부했다면, 나중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공력을 쏟아야 바야흐로 세밀해질 수 있다. 너희들은 평일에 가르침을 들으면 반드시 보지 않고 듣리지 않는 미발(未發)할 때의 공부가 있어야만, 바야흐로 보이고 듣리는 이발(已發)할 때에도 힘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참고하여 본다면 아마도 서로 반대되는 듯합니다.【대답】각각 그 기질(氣質)의 아름다움과 공부(功夫)의 깊이에 따라서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니, 그 말에 대략의 완급(緩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공부(功夫)의 차서(次序)로 말하자면 선유(先儒)의 말씀은 진실로 정당하고, 체용(體用)의 완급(緩急)으로 말하자면 평소에 들은 것이 또한 긴요하고 절실할 것입니다.【질문】하늘의 도(道)를 세운 것을 음(陰)과 양(陽)이라고 하고, 땅의 도를 세운 것을 부드러움【柔】과 굳셈【剛】이라고 하고, 사람의 도를 세운 것을 인(仁)과 의(義)라고 합니다. 하늘은 기(氣)로 말한 것이고, 땅은 형(形)으로 말한 것이고, 사람은 덕(德)으로 말한 것이라 하는데 어떠한 것인지요?【대답】천지(天地)의 주된 역할은 사물을 생성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氣)와 형(形)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천지(天地)와 같이 사물을 생성하지 못하고 오직 사물에 상응하는 법칙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理)로 말한 것입니다.【질문】수(水)는 음(陰)이고 화(火)는 양(陽)입니다. 수(水)는 밖이 어두우나 안이 밝아서 양(陽)이 음(陰) 가운데 있습니다. 화(火)는은 밖이 밝으나 안은 어두워서 음(陰)이 양(陽)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음양(陰陽)은 서로 그 근본이 되는데, 수(水)화 화(火)가 서로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대답】이(理)에 있어서는 서로 수용하겠지만 기(氣)에 있어서는 서로 수용하지 않습니다.【질문】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귀신(鬼神)이라는 것은 조화의 자취이다."58)라고 하였습니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귀신은 두 기(氣)의 양능(良能)이다."59)라고 하였습니다. 자취로 기(氣)를 말하면 이(理)와 기(氣)를 겸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요?【대답】귀신(鬼神)이라는 두 글자는 본래 이(理)와 기(氣)가 묘하게 합하여 하나로 된 것입니다. 지금 자취가 기(氣)에 속한다고 하여 양능이 이(理)에 속한다고 하면 아마도 지리(支離)하고 구차(苟且)한 데 빠지게 될 것입니다.【질문】"담일(湛一)이 기(氣)의 본체이다."60)라고 하는데 기(氣)의 정상(精爽)과는 어떠합니까?【대답】담일(湛一)은 기(氣)의 체단(體段)이니 정상(精爽)은 그 영처(靈處)입니다.【질문】"하나이기 때문에 신묘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몸속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이라는 말과 함께 본다면 어떠합니까?【대답】이 '일(一)'이라는 글자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들어 말한 것이기 때문에 아래의 글에서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 비유하였습니다.【질문】금(金)은 인(寅)에서 끊어지고, 수(水)와 토(土)는 사(巳)에서 끊어지고, 목(木)은 신(申)에서 끊어지고, 화(火)는 해(亥)에서 끊어집니다. 이 뜻은 상극(相克)으로서 본 것입니까? 신(申)은 서방(西方)으로 금(金)이 되고, 해(亥)는 북방(北方)으로 수(水)가 되면 목(木)이 끊어지는데, 화(火)가 끊어지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금(金)이 끊어지면 목(木)과 토(土)도 끊어지는데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대답】목(木)은 화양(火陽)입니다. 양(陽)이면 자신을 극(克)하는 곳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금(金)은 수음(水陰)입니다. 음(陰)이면 자신을 극(克)하는 곳에서 끊어지게 되니 대개 음양(陰陽)의 성질이 그러한 것입니다.【질문】"주인이 증한다.【主人贈】"61)는 것은 대저 주인(主人)이 그 부친을 존경하여 물건을 주는 의(義) 인지요? 아니면 망인(亡人)이 후토(后土)를 존경하는 의(義)인지요? 주(註)에서는, "검은색 비단 6단과 담홍색 비단 4단【玄六纁四】"62)이라고 하였는데 6단과 4단의 검은색과 담홍색 비단은 천지(天地)를 형상화한 것인데 모두 음수(陰數; 짝수)를 쓴 것은 어째서인지요? 또한 장(丈) 8척(尺)으로 한정한 것은 무슨 의미인지요?【대답】기석례(旣夕禮)63)에서는, '널이 방문(邦門)까지 이르면 군주가 재부(宰夫)를 파견하여 현훈 두 색깔의 비단 1속(束)을 보낸다.'라고 하였고, '하관(下棺)을 마치고 나서는 주인이 이 현훈을 사용하여 묘(墓)의 들에서 죽은 분에게 준다.'64)라고 하였습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가 말씀하시기를, "후세에는 임금이 하사하는 예가 없는데도 《가례(家禮)》에 이 예를 기재한 것은 애례존양(愛禮存羊)65)의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질문】누군가 묻기를, "8세에 어머님을 여의고66) 서모(庶母)에게 【어머니의 역할이】 승섭(承攝) 몸은 이미 길러짐을 입었는데 【서모가 돌아가신다면】 복(服)을 어떻게 해야만 정례(情禮)에 합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대답하기를, "아들이 있는 경우, 중자(衆子)67)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뜻으로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부후(父後)68)가 되었는데 서모(庶母)에게 아들이 없으면 응당 복(服)이 없습니다. 또 《예기(禮記)》 〈잡기(雜記)〉에는, '정실부인과 첩의【主妾】69)의 상(喪)에는 부군이 직접 부제(祔祭)를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그 주(註)에는, '본처【女君】가 죽으면 첩이 본처를 대리한다. 이 첩이 죽으면 남편이 그의 상을 주관하고 합사제(合祀祭)도 남편이 직접 주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주관한다는 글은, 《가례(家禮)》의 〈팔모도(八母圖)〉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에 따라 복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의리상 5월의 복(服)을 입는 제도로 참고하여 살펴본다면 【어머니의 역할을】 승섭(承攝)한 은혜가 있고 또한 길러진 은혜가 있으니 다른 사례와 구별됩니다. 아마도 당연히 5월 복에서 줄여서는 안 될 듯합니다.【대답】복이 없다면 지나치게 가벼운 것이고 5월이면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알지 못하겠으나 3월이면 어떻겠습니까?【질문】《가례(嘉禮)》 〈분상(奔喪)〉조에, "이미 장사 지냈으면 먼저 묘소로 간다.……"라고 하였습니다. 효자(孝子)는 부모님에 대하여 그 용모와 음성을 항상 마음에 두고 눈앞에 계신 듯이 하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황황망망(皇皇望望)한 마음 때문에 먼저 체백(體魄)70)을 모시는 것입니까?【대답】예(禮)는 영좌(靈座)가 우선이나 정(情)은 체백(體魄)이 더 중합니다.【질문】명덕(明德)은 이(理)와 성(性)과 심(心)에 있어서 치우쳐 말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말해야 그 본래의 뜻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서 얻은 이(理)를 명덕(明德)이라고 하는 것인지요?【대답】이(理)는 심(心)에서 얻어서 성정(性情)을 포괄하는 것은 덕(德)입니다.【질문】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인(仁)을 하려고 하되 아직 배움에 뜻을 두지 않았다."71)라고 하였는데 배움에 뜻을 두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인(仁)을 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대답】지금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는데 학문(學問)과 공부(功夫)를 하지 않는 사람이 그러한 경우입니다.【질문】인(仁)은 애(愛)가 미발(未發)한 것인데, 인(仁)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대답】치우치게 말하였으므로 인(仁)을 다할 수 없는 것이니 하물며 정(情)을 성(性)이라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秋風動郊。懷人政切。未審侍履珍勝。生王庭祥期。計已經過。而病蟄多故。末由趨慰。愧愴何言。從叔丈昆季變制就吉。慨廓何堪。只切區區溯往之情。龍淵宅及伯順寬甫直夫諸節。皆爲平安。晨夕聚從。爲德不孤。每切馳仰。賢者以雋異之姿。早年立志。已有四方士友之望久矣。從此接續卒究遠大。豈非先大人當日惓惓之至意耶。一指之蔽而泰山失其高。寸雲之翳。而太陽失其明人之蔽於目前區區近小之計。而不知有重且大焉者。何以異此也。千萬諒察。是所深望。顧此無狀。猥受先丈當日之誼。而幽明之間每恐其虛負至意。故敢此及之耳。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此等生字及妙合而凝之凝字。化生萬物之生字。皆指何時乎。抑有先後次第可言。先師嘗曰。太極說話。大抵位虛理實四字。足以盡之。圖中上面一圈至萬物化生圈。曷嘗有層等確定。此所謂位虛也。五層圈子。皆一昧白淡淡底。圓足無欠缺底。此所謂理實也云云。此言似爲等待今日之疑而發。幸取詳之。以理言。則統體各具。不可謂有方所。以心言。則統體具。亦不可謂無方所。只在所見之如何耳。學者全體此心。體字似有以心存心之意。體是體認體察之體也。若以此爲有二心之嫌。則盡心正心求放心之類。皆可謂有二心耶。在人爲性。主於身爲心。身卽人身也。而分別說。何耶。性是稟受說。故以人言。心是主宰說。故卽其身而言。心者氣之精爽。此氣是二五之精。二五之精。以陰陽五行之氣言。精爽之云。就陰陽五行上。指其至靈至明者而言。滿腔子是惻隱之心。此心以未發言耶。以已發言耶。特擧惻隱何耶。滿腔子惻隱。何嘗有未發已發之間。惻隱之包四端。猶仁之包四德。學者不學聖人則已。欲學之。須熟玩味聖人氣象。何處玩味氣象耶。卽其言。玩其辭。無非氣象之可見。況如鄕黨篇之畵聖人者乎。一故神。此神字。不可專認爲理。亦不可專認爲氣。合理與氣而看如何。得之。然所重在理。事事物物。本自有天生鐵定不易底道理。人當各循其理而止其所止。則有何攪亂之有。此所以作得心主定。靜後見萬物。自然皆有春意。此是指未發前氣象耶。已發後氣象耶。此靜字。是包動靜之靜。如大學定靜之靜。性者萬物之一原。此性字。專指人生而靜以上而言耶。歸一原於形氣之前。局萬殊於形氣之後此近日論理之獘。亟宜反之。入道修道凝道達道行道。有字義之可分。又有次序之可言耶。入道是學者事。修道是聖人事。修道是成物上說。凝道是成己上說。達道是事上說。行道是身上說。克伐怨欲。須從根上除治。其除治功夫下手處。在於未發時耶。已發時耶。端本淸源之功。固在於未發時。而制之於外。以安其內。則端本淸源之功。亦不可謂不在於已發時矣。性不是卓然一物可見者。此義當以太極非懸空底物之意。相參看耶。所謂參看者。恐有見於無極太極之義。近世或有主理。或有主氣。主理則其末委何如。主氣則其末委何如。理爲氣主。如君之統臣。父之統子。夫之統妻。氣爲理主如臣奪君位。子奪父位。妻奪夫位。其得失可見矣。先儒說曰。先且就睹處與聞處做了。後就不睹不聞處用功。方能細密。小子平日聞命。則必有不睹不聞未發時工夫。方於睹聞已發時。有所得力。以此參看。則似爲相反。各隨其氣質美惡功夫淺深而告之。其言不得不略有緩急。以功夫次序言。則先儒說固爲正當。以體用緩急言。則平日之聞。亦爲緊切。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天以氣言。地以形言。人以德言。何耶。天地主生物。故以氣形言之。人則不能生物如天地。而惟有應物之則。故以理言之。水陰火陽。而水則外暗內明。陽在陰中也。火則外明內黑。陰在陽中也。以此觀之。陰陽互爲其根。然而水火不相容者。何耶。理則相涵。而氣不相容。程子曰鬼神者造化之迹張子曰鬼神者二氣之良能迹言氣。能兼理氣言否。鬼神二字。本是理氣合一之妙。今以跡屬氣。以能屬理。恐涉支離苟且。湛一氣之本。與氣之精爽。何如。湛一氣之體段。精爽其靈處也。一故神。此處。合以滿腔子惻隱之心看。如何。此一字擧天地萬物而言。故下文以人身取譬。金絶於寅。水土絶於巳。木絶於申。火絶於亥。此義以相克看耶。申是西方而爲金。亥是北方而爲水。則木絶火絶似然。而於金絶木土絶。不會其意。木火陽也。陽則絶於克我之地。金水陰也。陰則絶於我克之鄕。蓋陰陽之性然矣。主人贈。大抵贈是自主人而尊敬厥考之義耶。無乃自亡人而尊敬后土之義耶。註曰玄六纁四。六四玄纁。是天地之象。而皆用陰數何耶。且限以丈八尺。何義耶。旣夕禮。柩行至邦門。公使宰夫贈玄纁束。旣窆。則主人用以贈死者於墓之野。沙溪曰。後世雖無君贈之禮。而家禮存之。疑亦是存羊之義。人問八歲先妣見背。有承攝之庶母。而身已被養。則其服當何如合於情禮耶。曰以有子者。衆子服緦之義。觀之。旣爲父後。而庶母又無子。則應無服。又以雜記所謂主妾之喪。則自祔。註女君死。妾攝如君。此妾死。則君主其喪。其祔祭。自主之文。與八母圖自少慈己者。義服五月之制。參看。則有承攝之恩。又有被養之恩。與他自別似當不減於五月耳。無服則過於輕。五月則過於重。未知以三月何如。奔喪條。旣葬則先之墓云。孝子於父母。其容貌聲音。常在心目。而奄忽不見。有皇皇望望之情。故先之體魄所藏否。以禮則靈座爲先。以情則體魄爲重。明德於理於性於心。不可以偏言。則當何云而得其本旨耶。曰理之得於心者。謂明德。理之得於心而該性情者。德也。張子曰。欲仁而未志於學。其未志於學者。有何欲仁之可言耶。今有一樣人孝於親。友於兄弟。而無學問功夫者。是也。仁是未發之愛。則不能盡仁何耶。偏言故不能盡仁。況認情爲性。 상기(祥期) 상제(祥祭)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상제는 상(喪)을 벗는 제사인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이 있으나 대개 대상을 가리킨다. 변제(變制) 우제(虞祭), 연사(練祀), 상제(祥祭), 담사(禫祀) 등 상기(喪期)의 경과에 따라 상복의 제도를 가벼운 쪽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말한다. 개확(慨廓)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로, 개(慨)는 소상(小祥)을 당하여 세월이 빠른 것을 탄식하는 마음을 말하고, 확(廓)은 대상(大祥) 때 정의(情意)가 허전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禮記 壇弓上》 용연(龍淵) 이용연(李龍淵, 1897~?)으로 자는 일용(用日), 호는 경당(敬堂)이다. 선사(先師) 여기에서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가리킨다. 태극도(太極圖) …… 권자 「태극도(太極圖)」는 총 오층의 권역으로 나뉘어 있다. 위가 제 1층으로 태극 권역이며, 그 아래 2층이 음양 권역, 그 아래 삼층이 오행 권역, 그 아래 4층이 남녀 권역, 그 아래 5층이 만물 권역이다. 권역이란 둥근 원을 말한다. 태극(太極)을 설한 …… 것이네 이 말은 《노사집(蘆沙集)》 권12, 「김경범의 문목에 답함(答金景範問目)」의 첫 번째 문목에 실려 있다. 배우는 …… 한다 정호(程顥)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존양(存養)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오(二五)의 정(精)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정체(精體)를 가리킨다. 몸속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이다 정자(程子)가 한 말로, 《맹자집주(孟子集註)》 「공손추상(公孫丑上)」의 주석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 하나이기 때문에 신묘하다 장재(張載)의 《정몽(正蒙)》 〈태화편(太和篇)〉에, "하나의 물(物)에 두 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기(氣)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신묘하고, 둘이기 때문에 변화한다. 이것이 천(天)이 삼(三)이 되는 이유이다.【一物兩體, 氣也. 一故神, 兩故化. 此天之所以參也.】"라는 말이 나온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상이한 두 개의 요소가 하나의 존재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신묘하게 서로 감응하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정정(定靜)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나오는 내용으로, '정한 뒤에 고요할 수 있다【定而后能靜.】"라고 하였다. 인생이정이상(人生而靜以上)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다. 성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미 그것은 성이 아니다.【人生而靜以上不容說. 才說性時, 便已不是性也.】"라고 한 말에 대해서, 주희(朱熹)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답변한 바가 있다. 호승심과 …… 욕심내는 마음 원문은 '극벌원욕(克伐怨慾)'인데, 각각 호승심(好勝心)과 자긍심(自矜心)과 원망하는 마음과 욕심내는 마음을 가리킨다.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의 제자 원헌이 '극벌원욕이 행해지지 않게 하면 인(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仁矣.】'라고 자부하며 물었을 때, 공자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인(仁)인지는 알지 못하겠다.【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라고 대답하였다. 귀신이라는 것은 조화의 자취이다 이 내용은,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다.【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라는 경문에 대해서, 주희는 "천지는 도요,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다.【天地者道也, 鬼神者造化之迹也.】"라고 해설한 것이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9장에 보인다. 귀신은 두 기(氣)의 양능(良能)이다 이 내용은 《근사록》 〈도체〉 등에서 천지의 공용【天地之功用.】, 조화의 자취【造化之迹】, 두 기의 양능【二氣之良能.】 등의 개념로 귀신을 설명하고 있다. 담일(湛一)이 기(氣)의 본체이다 장재(張載)의 《정몽(正蒙)》 〈성명(誠明)〉에, "담일이 기의 본체이고, 공취가 기의 충동이다.【湛一氣之本, 攻取氣之欲.】"라는 명제가 나온다. 주인이 증한다 《예기》 「잡기」의 주에 이르기를, "곽(槨) 안에 물품을 넣어서 죽은 자를 송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검은색 비단 6단과 담홍색 비단 4단 《가례》 〈상례(喪禮)〉에, 하관할 때에 주인(主人)이 광중(壙中)에 검은색 비단 6단과 담홍색 비단 4단【玄六纁四】을 넣되, 주인이 가난하여 수량을 구비할 수 없다면 검은색 비단과 담홍색 비단을 각각 1단씩만 넣어도 된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기석례(旣夕禮) 《의례》의 편명. 〈사상례(士喪禮)〉의 하편(下篇)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사(葬事) 지내기 전에 치러야 할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 하관을 …… 준다 《집설》에 "영구가 길을 떠나 성문에 이르면 공(公 제후왕)이 재부(宰夫)로 하여금 현훈의 묶음을 주도록 하니, 이미 하관을 한 뒤에 이 현훈을 사용하여 묘(墓)의 들에서 죽은 분에게 준다.【柩行至城門, 公使宰夫贈玄纁束. 旣窆, 則用此玄纁, 贈死者於墓之野.】"라고 보인다. 애례존양(愛禮存羊)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자공이 희생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께서 '사야,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를 아까워한다.' 하였다.【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라고 한 데서 나온 고사로, 예를 보호하기 위해 형식일 뿐이라도 옛 제도를 보존한다는 말이다. 여의고 원문은 '견배(見背)'인데 친족의 죽음을 말할 때 해당 표현을 쓴다. 중자(衆子) 적자(適子), 즉 맏아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후(父後) 아버지의 후계 즉 적자를 말한다. 정실부인과 첩의 정처(正妻)가 죽어서 정처의 역할을 대신하는 첩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정실 부인과 첩을 동시에 가리킨다. 체백(體魄) 죽은 시신과 혼백을 일컫는 말로, 곧 무덤에 묻힌 송장을 가리킨다. 인(仁)을 하려고 하되 아직 뜻을 배움에 두지 않았다 이 말은 《논어》 「선진(先進)」 19장의 주(註)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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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민자경【관호】에게 답함 答閔子敬【寬鎬】 이별한 뒤에 소식을 갖가지로 주고받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벗을 떠나 쓸쓸히 살아가는 감회는 마치 풀을 베어도 다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뜻밖에 보내주신 편지72)는 위로됨이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물며 문목(問目) 한 장은 핵심적이고 절실한73) 말이 아님이 없습니다. 읽어보면 황홀하여 마치 한 공간에서 무릎을 마주 대고 있는 것 같아 그 맛이 한량이 없었습니다. 보내주신 시편은 더욱 정성스럽고 간곡한 뜻을 볼 수 있어서 읊조리기를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부탁이 과중하여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서로 아는 입장에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문목(問目)에 대해서는 삼가 저의 뜻으로 답을 하여 보내드립니다만, 확실한 결론74)으로 삼지는 말아 주시고 더욱 자세히 생각하여 의견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고요할 때 잠이 많은 것은 지(志)가 기(氣)를 통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고인(古人)이 정신을 깨우치는75) 말을 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깨우치는 것은 또한 어떻게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다만 용모를 움직임에 거만함을 멀리하고76) 생각을 정돈하면 자연스럽게 깨어 있게 되어 잃어버린 마음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이미 잃어버렸다면 구하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무릇 잃어버린 것은 마음이고, 구해야 할 것 역시 마음입니다. 이것은 서로 대하고 있는 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잠깐 놓아버리면 구할 수 없고 잠깐 구하면 방일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은 마치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인심(人心)이 스스로 움직이면 그것은 곧 놓아버리는 것이다."77)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부자(程夫子)의 말씀이지 공자(孔子)의 말씀이 아닙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단지 '부자왈(夫子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아마도 구별이 없다는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다만 정자(程子)가 인심(人心)에 대해 말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통틀어 말한 것입니다. 위대한 순(舜) 임금이, 인심(人心)의 형기(形氣) 측면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別後消息。非不種種。離索之懷。如剗草復生。料外心畵。慰不可言。況問目一紙。無非肯緊親切語。讀之。怳然若同堂促膝。趣味津津。瓊律尤見懇惻之意。諷咏無已。但見屬過重。有令人不敢當處。相悉之地。豈容有是。問目謹以鄙意答去。勿爲歸宿。更加細思。幸以見示也。靜時多睡。此是志不率氣之故。此古人所以有喚醒之語。然喚醒亦着何功夫。只是動容貌。整思慮。則自然惺惺。求放心。心旣放。求之者誰。夫放之者心也。求之者亦心也。此非有兩心相對。只是纔放不求。纔求不放。如寒暑相禪人心自由。便放去。此是程夫子言。非孔子言。來諭但稱夫子曰者。恐嫌無別。但程子之言人心。是統言人之心也。大舜之言人心。是指形氣一邊說。 편지 원문은 '심화(心畵)'인데 이는 《법언(法言)》의, "말은 마음의 소리요, 서예는 마음의 그림이다."고 한 데서 나왔다. 핵심적이고 절실한 원문은 '긍긴(肯緊)'인데, 긍경(肯䋜)의 뜻으로, 뼈와 근육이 한데 엉켜서 칼을 대기가 어려운 부위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이른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소의 관절 사이에는 빈틈이 있고 나의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그 칼을 빈틈이 있는 관절 사이에 집어넣으면, 그 공간이 넓고 넓어 칼을 놀릴 때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근육과 뼈가 엉켜 있는 복잡한 부위에도 칼날이 다쳐 본 적이 없는데, 더구나 큰 뼈와 같은 것이겠는가."라는 백정의 말이 있다. 확실한 결론 원문은 '귀숙(歸宿)'인데 자리 잡고 머무른다는 의미이다. 정신을 깨우치는 당(唐)나라 때 서암(瑞巖)이란 승려가 매일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주인옹아! 깨어 있느냐?" "깨어 있노라."라고 하였다 한다. 《심경(心經)》에서, 마음이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도록 시시각각(時時刻刻) 일깨우는 지경(持敬) 공부의 한 방법이다. 용모를 움직임에 거만함을 멀리하고 증자(曾子)가 "군자가 도에 귀한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용모를 움직임에 포만함을 멀리하며 안색을 바르게 함에 믿음에 가깝게 하며 말을 냄에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남을 멀리하라.【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라고 한 것을 이른다. 《論語 泰伯》 인심(人心)이 …… 놓아버리는 것이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8 〈유원승수편(劉元承手編)〉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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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여주에게 답함 答吳汝周 매양 그대를 볼 때마다 자질이 훌륭하고 재주가 빼어난 것이 비할 만한 이가 드물었으니 마음으로 아꼈습니다. 편지 끝에서 보여준, "유약(柔弱)하다는 병통은 가장 변화하기 어렵습니다.……"라는 것은 그대가 근심하는 바이지만, 이는 나의 숙증(宿症)이기도 합니다. 20년 전부터 주제 넘게 이 일에 대해 뜻을 두었으나 아직까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모두 '유약(柔弱)'이라는 두 글자가 빌미가 되었을 따름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위해 도모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여주(汝周)를 위해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일찍이 경험한 자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례에 따라 학문을 하지 않으면 인(仁)의 방법을 알 수가 없으니 이른바 구구하게 힘을 쓰는 자는 단지 사사로이 임시로 미봉책79)을 쓰게 되니 하물며 중간에 끊어지면서 따르는 경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기질(氣質)은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며, 학문은 갑자기 논할 만한 일이 아니니 어찌 지리멸렬한 것으로 능히 명료히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한갓 기질(氣質)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아! 이전의 실수를 생각해보아도 후회막급하니 오직 여주(汝周)는 나이가 젊고 힘이 있으니 바로 지금이 시작할 만한 때이니, 나를 전철 삼아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병은 오직 스스로 알지 못함이 근심이니, 이미 그 병을 안다면 이는 곧 병을 치료할 약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성현(聖賢)의 경(經)과 현인(賢人)의 전(傳)은 한 글자 한 구절이 나에게 약석(藥石)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중용(中庸)》에서, "과연 이 방법 대로만 한다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명석해지고 비록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진다."80)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도입니까? 찾아 헤아려 여기에서 터득함이 있다면 힘을 쓰는 방법을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주역(周易)》의 「풍뢰 익괘(風雷益卦) 상(象)」에서는, "군자가 선을 보면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라고 하였고, 「뇌천 대장(雷天大壯)」에서는, "군자는 예가 아니면 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이 세상에가 가장 분발(奮發)하는 것으로 우레와 같은 것이 없고, 가장 빠른 것으로 바람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곧 군자가 허물을 고치고 선함으로 옮겨가는 이유와 예가 아니라면 처하지 않는 공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주(周以)는 《중용(中庸)》에서 말한 것으로 그 과정을 세우고, 《주역(周易)》에서 말한 것으로 기력(氣力)을 세워 부지런히 노력하여 한갓 기질(氣質)의 품부(稟賦)를 받은 것에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면, 전날에 발호(拔扈)한 것이 오늘날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每覵左右。質美才高。鮮見其比。心乎愛矣。尾示柔弱之病。最難變云云。子之所患。是我宿症也。二十年前。妄意於此事。尙今未進一步者。皆柔弱二字爲之祟耳。自家猶不能爲自家謀。安能爲汝周謀耶。請以曾絰者言之。學不循序。仁不知方。而所謂區區用力者。只是安排牽補之私。而況又間斷隨之乎。氣質非遽變之物。學問非遽議之事。而豈滅裂者之所能了辨哉。此不可徒歸咎於氣質也。嗚乎。追念前失。悔恨莫追。惟汝周年力甚富。正是發軔之日。以我爲前車之鑑如何。大抵人之病。惟患不自知。旣知其病。則卽此便是治病之藥。況聖經賢傳。一字一句。無非吾藥石哉。中庸曰。果能此道矣。雖愚必明。雖柔必剛。所謂此道。是何道也。尋繹而有見於此。則用力之方。躍如矣。易之風雷益曰。君子以見善則遷。有過則改。雷天大壯曰。君子以非禮不履。夫天下奮發之物。莫如雷迅疾之物莫如風則君子所以遷善改過。非禮不履之功。可知矣。願汝周以中庸所言。立其課程。以大易所言。立其氣力。勉勉孜孜。毋徒歸咎於氣稟。則安知前日之拔扈。不爲今日之臣僕耶。 임시로 미봉책 원문은 '견보(牽補)'인데, 담쟁이덩굴을 끌어다가 새는 지붕을 덮는다는 견라보옥(牽蘿補屋)의 준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강구하지 않고 임시로 미봉책을 쓴다는 의미이다. 중용(中庸)》에서 …… 강해진다 《중용장구(中庸章句)》 20장의 내용으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이라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 과연 이 방법대로 잘 행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아무리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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