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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우리 경립(景立)이 병에서 나은 이후로 항상 한번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그럴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 정의(情義)가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말하기 어려운 신고(身故) 때문입니까? 슬픈 마음은 또한 단지 구구한 모임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력이 있을 때 문장을 하여 갑자기 잊어버리는 데 이르지는 않았는지요? 눈앞의 잡다한 일에 얽매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영남에서 보낸 편지는 일전에 월송(月松)33)이 가지고 왔는데, 편지를 통해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의 근황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통의 서찰을 부쳤는데 수령하셨는지요. 선부군(先府君)의 종제(終制)34)가 멀지 않은 시기에 닥쳤으니 풍수(風樹)35)의 추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겠습니다. 이처럼 천하고 비루한 자에게도 평생 서로 이어져 두텁게 대해주심에, 며칠이나 지났다고 상생(象生)36)하는 곳을 또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 줄의 글을 지어서 영결(永訣)하는 끝없는 뜻을 가서 고하고자 합니다만 몸이 병마(病魔)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으니 과연 그럴만한 여유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의림(義林)은 봄 이후로 근력을 점점 빼앗겨서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는 듯이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마치 매우 늙어서 심한 병에 걸린 사람과 같으니, 평생의 지업(志業)을 한 푼이라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경립(景立)은 이때에 미쳐 점검하고 성찰하여 저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自吾景立出病以後。常欲一省而末由也。此其情義之不足耶。身故之難狀耶。悲傷之私。又不但爲區區會聚之久曠也。但未知餘力鉛槧。不至頓忘否。幸不以目前小小。惹絆捱過時日如何。嶺札。日前自月松來到。而知溪艾諸丈近節之安耳。四札付去。考領也。先府君終制。隔在不遠。風樹感慕之情。想無涯極。如淺陋者。係在平生相厚之地。而過了幾日。則象生之所。亦不得以見矣。擬以數行文。往告永訣無窮之意。而未知身戲病魔。果爲之饒貸否也。義林自春以來。筋力漸奪。如微雨漬衣。至於今日。如極老極病之人。而其於平生志業。無一分成就。是爲慨然耳。願景立趁此提省。毋至如此生也。 월송(月松) 이기환(李基煥, 1904~?)이다. 호는 월송(月松)이고 본관은 전주(全州), 거주지는 영광(靈光)이다. 기우만(奇宇萬)과 이종택(李鍾宅)의 제자이다. 종제(終制) 담제(禫祭)를 마치는 것을 가리킨다. 풍수(風樹)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상생(象生) 생전에 망자(亡者)가 사용하던 것들을 사용하는 등, 망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의식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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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 통정대부 부군 행장 祖考通政大夫府君行狀 공의 휘는 가석(加錫), 자는 유경(裕卿), 또 다른 휘는 언복(彦福), 자는 자구(自求)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가 있었는데,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의 5대손 가운데 휘 만철(萬喆)이 있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는 유(瑜)이고, 조부는 이도(履道)이고, 선고(先考)는 채(埰)이며, 선비(先妣)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이택(爾宅)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영조(英祖)) 갑신년(1764, 영조40) 11월 8일에 낭주(朗州)의 우거하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황씨(長水黃氏) 익채(翼采)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가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에게 장가들었지만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다. 다시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중년에 낭주(朗州)에서 금릉(金陵)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정미년(1787, 정조11)에 부친상을 당했고, 무신년(178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객지에 떠돌아다녀 외롭고 고달픈 몸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자신의 신세가 몹시 처량하여 길을 가다가 눈물을 흘렸다. 공은 질박하고 성실하여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람을 응대하며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이라도 꾸미거나 자랑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성품이 부지런하며 농사일에 힘을 다하였고, 권세와 이익, 화려한 명성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자손을 가르치고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릴 적에 일을 분담시키고 맡겼으며1)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워서 성공하기를 책면(策免)하였다. 집안의 많은 어려움을 만나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 성현의 모훈(謨訓)과 고금의 사적에 대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히 살펴보아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부인 이씨(李氏)는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인의 도덕과 규범에 대해서 빠뜨림이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7월 11일에 이씨가 졸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 9월 27일에 공이 졸하니, 향년 81세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성산(星山)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어시랑(御侍郞) 안산(案山)의 인좌(寅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모두 3남 1녀를 두었으니 이씨의 소생이다. 첫째 아들은 제철(濟哲)이고, 차례로 제현(濟玄)과 제일(濟馹)이며, 딸은 황상현(黃祥顯)에게 시집갔다. 장방(長旁)의 아들은 종림(宗林)·창림(昌林)·동림(東林)·희림(熙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의 아들은 의림(義林)이고, 딸은 안모(安模)·이병성(李秉誠)·이광무(李光茂)·김장석(金章錫)·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삼방(三旁)의 아들은 항림(恒林)이고, 딸은 김규원(金奎源)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손자 정의림(鄭義林)은 삼가 기술한다. 公諱加錫。字裕卿。一諱彦福。字自求。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爲鼻祖。七傳有諱態。弘文應敎。是生諱應奎。節度使。是生諱演。贈戶曹判書。判書五世有諱萬喆。卽公之高祖也。曾祖瑜。祖履道。考埰。妣天安全氏爾宅女。英宗甲申十一月八日。生公于朗州寓第。娶長水黃氏翼采女。系娶金海金氏。皆無育。系娶光山李氏德光女。中年自朗州寓居金陵地。丁未丁外艱。戊申丁內艱。流離客土。孤苦無依。其情景懇惻。行路涕零。公質實誠慤。行已酬人。接物處事。未嘗有一毫修飾表襮底意。生長艱難。性勤稼穡。而於勢利聲華。泊如也。敎子孫御家衆。分之以職。授之以事。而嚴立課程。責其成功。遭家多難。辛勤來歸。而於聖賢謨訓。古今事迹。隨暇考閱。以博其義理之趣。夫人李氏溫仁勤儉。閫範無闕。乙亥七月十一日李氏卒。甲辰九月二十七日公卒。享年八十一。壽陞通政。葬星山。移窆于陵州御侍郞案山負寅之原。擧三男一女。李氏出也。長濟哲。次濟玄濟馹。女黃祥顯。長旁男宗林昌林東林熙林。女郭宗協尹滋升。次旁男義林。女安模李秉誠李光茂金章錫洪承命。三旁男恒林。女金奎源。曾孫以下不錄。孫義林謹述。 맡겼으며 일을 맡긴다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주관하는 일과 비상시의 일을 말한다. 《常變通攷 卷3 居家雜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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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어제 송사(松沙)29) 어른의 편지를 받아보고서 근래에 상황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 월고(趙月皐)30) 어른이 봉산(凰山)에 이르러 선생의 묘에 제사를 지낸 다음 이어 우리 고향에 들를 것이라고 하였는데, 단가(丹嘉)의 여러 곳에 보낼 안부 편지 및 조장(弔狀)을 일일이 써놓고 미리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문목(問目)에 저의 대답은, "성정(性情)을 말하자면 심(心)은 그 안에 내포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응하는 마음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주자(朱子)의 편지를 보았는데, 제 말에서 크게 옳지 않은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자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은 것은, 어찌 심이 성(性)을 주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발(已發)의 상태에서 등급에 따른 절도가 어긋나지 않은 것은, 어찌 심이 정(情)을 주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31)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심(心)은 동정(動靜)을 꿰뚫으며 상하를 관통하는데, 말할 수 있는 방소(方所)가 없다면 곧 진실로 성정(性情)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곧, "성정(性情)을 말하면서 심(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주로 생각하는 부분이 없고 붙어 있을 지점도 없는 것이니, 반드시 공허하고 흩어져버리는 데로 귀결될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학자로 하여금 손을 쓸 곳과 발을 디딜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경립(景立)은 빨리 돌이켜 통렬히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돌아보건대 이러한 논의에 대해 우열을 가려보아도, 한두 가지의 적확한 견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외람되이 여러 벗들과 감히 논변한 것이, 매번 이러한 부류가 잘못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스스로 오류에 빠졌고 다른 사람도 잘못하게 하였으니 매우 송구합니다. 昨得松沙丈書。知近節無故。月皐趙丈到凰山。致祭先生墓。因過吾鄕云。丹嘉諸處書問及弔狀。一一修裁。預爲等待如何。向日問目。鄙所答有曰。言性情則心包在其中。有何可對之心。後看朱子書。知此說有大不是處。朱子曰未發而知覺不昧者。豈非心之主乎性者乎。已發而品節不差者。豈非心之主乎情者乎云云。夫心者。貫動靜。通上下。而無方所之可言。則固不可與性情爲對。然若曰。言性情而心在其中。則是無主腦無着落。必至於空虛漫渙之歸。而使學者。無下手着脚處。願景立亟反而痛省之也。顧此愚劣。無一二的見。而猥與諸友敢爲論辨者。安知每每非此類也。自誤誤人。極爲悚然。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8.17.~1916.10.28.)을 가리킨다. 한말의 의병장으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 월고(趙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를 가리킨다.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스승은 기정진(奇正鎭)이고 저서로 《월고문집(月皋文集)》이 있다. 미발의 상태에서 …… 아니겠는가 해당 발언은, 주자가 호광중의 편지에 답한 「답호광중서(答胡廣仲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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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재기 德新齋記 장동(長東)의 덕산(德山) 기슭에 새로 지은 집이 있는데, 바로 난정옹(蘭亭翁)이 만년에 공부하며 노니는 장소로, '덕신(德新)'이라 편액하였다.옹은 일찍이 사방을 경영할 뜻을 가져 세상일을 자세히 살펴보고 시속의 사정을 익숙하게 깨닫고서 자나 깨나 경세제민(經世濟民)할 것을 생각하며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행하고 멈추었으니, 대저 험난하고 평탄한 온갖 풍상들을 천 가지 만 가지 생겨나는 대로 다 받아들이며 낱낱이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견디기 어려워 이제 70을 바라보게 되자,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거지[莵裘]에 별장을 짓고 수레를 걸어 놓은 채41) 두문불출하며 뜬 생각과 외물에 대한 근심이 연기와 구름이 사라지듯 활짝 개어 마음에 티끌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오직 덕에 나아가는 한 가지 일만이 연연하게 마음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에 높은 집의 커다란 벽에 대단히 상서로운 요결을 큰 글씨로 특별하게 써 놓고 아침저녁으로 항상 눈여겨보았으니, 쇠잔하고 늙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잡고 경계한 뜻이 어찌 위(衛)나라 무공(衛武公)42)과 거백옥(遽伯玉)43)만이 전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장소는 외지고, 인적은 드문데다 산은 고요하고, 햇빛은 오래도록 비치는 이곳에서 한가로이 노닐며 공부하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생강이나 계피처럼 머금은 향기가 늙을수록 더욱 매워지고, 시초(蓍草)나 거북처럼 축적한 정기(精氣)가 오래될수록 더욱 신묘해진다면 극진(棘津)의 호변(虎變)44)과 완성(完城)의 우여(牛轝)가 또 70, 80의 나이에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아, 덕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늙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소년이나 청년처럼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한 사람임에랴. 옹을 모시고 가르침을 따르며 이 덕신재에서 학업을 닦는 자들이 보고서 법으로 삼을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長東德山之趾。有新構。卽蘭亭翁晩年藏修之所。而額以德新者也。翁早有四方之志。備閱世故。練解時情。寤寐經濟。酬酢流坎。凡風霜夷險。千生萬受。無不這這嘗試。而叵耐歲月駸駸。已望七于玆矣。退營莵裘。懸車杜門。浮想外慮。曠然休歇。如烟消雲空。無有芥滯於中。而惟進德一着。變變在念耳。是於高堂巨牓。大書特筆。元符要訣。昕夕常目。其不以衰老自恕。而勉勉規儆之意。豈惟衛武邃玉爲專美哉。境僻人稀。山靜日長。優哉游哉。修焉息焉。如薑桂之含薰。老而愈辣。蓍龜之畜精。久而益神。則安知棘津虎變。完城牛轝。又不在於七十八之年乎。嗚乎。德之日新。老猶如此。況丱角衿佩年富力强之人乎。陪從下風而遊業此齋者。視爲柯則。盍相勉焉。 수레를……채 원문의 '현거(懸車)'을 국역한 것으로,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일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설광덕(薛廣德)이 관직을 사퇴하고 은거할 때 임금이 하사한 안거(安車)를 매달아 놓고 자손에게 전하여 광영(光榮)을 보인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위(衛)나라 무공(武公)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의 제후로, 95세가 되었음에도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서 〈대아(大雅) 억(抑)〉을 지어 시종(侍從)으로 하여금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했다고 한다. 《詩經》 거백옥(遽伯玉)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였던 거원(蘧瑗)을 말한다. "나이 50에 49년의 잘못됨을 알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는 고사가 전해진다. 《淮南子 原道》 극진(棘津)의 호변(虎變)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90의 나이에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일을 말하는 듯하다. 《史記 齊太公世家》 참고로 '극진'은 황하에 있는 나루터로,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50세 때에 이곳에서 음식을 팔았다고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7에 "그가 나이 50에 극진에서 음식을 팔고, 70에 조가에서 백정의 일을 하고, 90이 되어서야 천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문왕을 만난 것이다.[行年五十, 賣食棘津, 年七十屠于朝歌, 九十乃爲天子師, 則遇文王也.]"라는 말이 나온다. '호변(虎變)'은 호랑이 등의 무늬가 다채롭게 변하듯이 큰 공훈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주역》 〈혁괘(革卦) 구오(九五)〉에 "대인이 범이 변하듯 함이니, 점치지 않고도 믿음이 있다.[大人虎變, 未占有孚.]" 하였고, 〈구오 상(象)〉에 "'대인호변'은 그 문채가 빛나는 것이다.[大人虎變, 其文炳也.]"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전(傳)에 "대인의 도로써 천하의 일을 변혁하면 마땅하지 않음이 없고, 때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지나는 곳이 신묘하게 변화되고 사리가 밝게 드러나서 범의 문채와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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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행 능주군수 손공 행장 通政大夫行綾州郡守孫公行狀 공의 휘는 인용(麟鏞), 자는 익삼(益三), 호는 신암(愼庵)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휘 부(富), 사도(司徒)를 지낸 밀성군(密城君) 휘 윤(贇)은 모두 상계(上系)의 이름난 조상이다. 문과(文科)를 거쳐 목사(牧使)를 지낸 휘 책(策),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휘 비장(比長)67)은 모두 중엽(中葉)의 이름난 조상이다. 제학공(提學公)은 호가 입암(笠巖)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및 당시의 저명한 석학들과 더불어 15학사(學士)로 불리었으며, 금남공(錦南公) 최부(崔溥)와 임금의 명을 받아 국사(國史)를 함께 편수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벼슬을 내려놓고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으로 물러났다. 고조인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증조인 휘 덕효(德孝)는 생원을 지냈다. 조부 휘 몽두(夢斗), 고(考) 휘 처상(處祥)은 모두 은덕(隱德)을 지녔다. 비(妣)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광인(光仁)의 딸로 품성이 인자하고 순후하며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잘 갖추었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5월 21일에 창평현(昌平縣) 외남면(外南面) 사봉리(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과 기질이 따듯하고 선량하며 외모가 뛰어나 사람들이 큰일을 담당할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3세가 되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땅을 뒹굴고 통곡하여 어린 나이에 끝없이 슬퍼하는 모습에 곁에서 보던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외롭고 어린 나이에 일가도 없이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으니 그 처지를 말로 형용하기 어렵지만, 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화평한 기색과 부드러운 말투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 평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할 방도가 없자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등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쓰지 않은 일이 없었고, 몸에 편안하고 입맛에 맞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마련하여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애통해하여 몸이 야위었고 장례를 치르는 모든 도구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준비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기일(忌日)을 맞으면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정갈히 한 뒤 고기를 썰고 삶는 일을 몸소 하였고 제사에 임해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목소리와 용모를 직접 뵙는 듯이 하였다. 오랫동안 부지런히 애를 써서 중년에 이르러서는 집안의 재력이 넉넉해졌다. 그러자 가까운 조상을 위한 제전(祭田)과 먼 조상을 위한 묘제(墓祭)를 지낼 땅을 마련하고 또 가난한 대종가(大宗家)와 소종가(小宗家)를 도와주었다. 가난하여 혼사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모든 친족에게는 그때마다 곳간을 털어 도와주었다. 안채에서는 무당의 술책을 쓰지 않았고 사랑채에서도 장기나 바둑 따위의 유희를 즐기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의복을 걸치지 않았고 보고 즐기기 위한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직 효성과 우애, 근면과 검약, 청렴과 조용함, 소박하고 진실함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궁극의 계책으로 삼았다. 악류(惡類)들이 변란을 일으키자 친척과 마을 이웃들을 경계하여 단발령(斷髮令)을 따르는 무리에게 물들지 않도록 하고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머리를 깎고 사느니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게 낫다. 너희들은 절대로 세상의 변화에 휘둘리지 말라." 하였다. 을유년(1885, 고종22)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892, 고종29)에 함종 부사(咸從府使)가 되었다. 임인년(1902, 광무6)에 능주 군수(綾州郡守)에 제수되었다. 비로소 부임하여 갑진년(1904) 여름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고을을 다스릴 때는 명성과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며 녹봉(祿俸) 수천을 덜어 고을 전체의 호역(戶役)에 응하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석벽에 새겨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적어두었다. 고을에 최 충의공(崔忠毅公)68)의 정려(旌閭)가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공이 물자를 대주어 수선하게 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노사(蘆沙)69), 화서(華西)70) 두 선생은 실로 유문(儒門)의 정맥(正脈)이다. 문하에 나아갈 수는 없지만 문인(門人) 가운데 면암(勉庵)71)과 송사(松沙)72) 같은 우러러볼 만한 여러 어른이 계시다. 너희는 이들을 뒤따라 학문을 익혀야 한다." 하였다. 공은 면암의 소장(疏章)을 볼 때마다 그의 직언(直言)과 당론(讜論)에 탄복하면서 면암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하였다. 을사년(1905, 광무9) 여름에 병에 걸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았다. 11월이 되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궐연(蹶然)히 일어나 이르기를, "국가 대계(大計)의 망극(罔極)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고는 탄식을 그치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병이 위독해져 약을 넘기지도 못하였다. 하루는 여러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고치고 선행을 보면 반드시 이를 따르는 것이 수신(守身)과 보가(保家)의 첫 번째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며느리와 딸들에게 경계하기를, "부인(婦人)은 순종을 덕으로 삼고 목소리가 규방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집에 전권(錢券)이 있자 가져다 찢으며 말하기를, "단지 다툼의 단서만 일으킬 뿐이다. 내가 선행을 남기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화를 물려주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 세수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자리로 나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니 곧 12월 15일이었다. 향리(鄕里)에서 모두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 원근에서 서둘러 조문을 오는 이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주(州)의 가옥치(佳玉峙) 마을 위에 있는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계효(季孝)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영수(英壽)의 딸이며, 그 다음 계배(系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홍경(弘璟)의 딸로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영렬(永烈)은 선씨가 낳았고, 진사(進士)인 영하(永夏)와 조병상(曺秉相), 나영성(羅營成)에게 출가한 딸들은 백씨가 낳았다. 아들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과 유재홍(柳在弘)과 문제철(文濟哲)에게 출가한 딸은 문씨가 낳았다. 손자 이하는 모두 적지 않는다.내가 같은 고을에 살면서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입은 지가 오래이다. 매번 화락하면서도 신중하고 성실했던 공의 풍도(風度)를 볼 때마다 애호하는 마음이 한없이 일었다. 또 다섯 아들과 다섯 사위, 많은 손자가 뜨락에 가득하고 흰 머리와 붉은 슬갑(膝甲)73)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렸으니 이치가 잘못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아, 하늘이 원로(元老)를 남겨 두려고 하지 않아 공의 목소리와 풍채, 용모는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자손이 많고 남은 복이 끝나지 않았으니 어찌 공의 지업(志業)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영렬(永烈)이 자기 삼종제(三從弟)인 영모(永謨)를 내게 보내어 행장을 부탁하였다. 내가 행장을 적기에 적합한 덕망과 문장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고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을 근거로 수식(修飾)하고 윤색(潤色)하였을 뿐이다. 公諱麟鏞。字益三。號愼庵。孫氏系出密陽。吏部尙書淸城府院君諱富。司徒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文科牧使諱策。弘文館提學諱比長。皆中葉顯祖也。提學公號笠巖。與佔畢齋金先生宗直。及當時名碩。稱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同修國史。燕山朝退休扶安葛村。高祖諱興新贈副護軍。曾祖諱德孝生員。祖諱夢斗。考諱處祥。皆有隱德。妣高興柳氏光仁女。德性仁厚。閫範甚備。以純廟辛卯五月二十一日。生公于昌平縣外南面四峯里第。性氣溫良。體相峻茂。人知爲遠器。三歲而遭外艱。匍匐顚倒。孺哀罔極。傍人無不感涕。孤弱零鮮。生長外家。其情景難狀。而侍慈幃。以怡色婉辭。慰悅其志。家素貧甚無以爲養。漁樵耕牧。凡百事務。無不服勤殫力。使便身適口之物。畢給於前。其遭故也。擗踊毁瘠。送終凡具。必誠必信。俾無餘憾。遇忌諱之辰。沐浴操潔。裁割烹飪。躬親爲之。臨祭而悽愴怵惕。如見音容焉。積累勤苦。至中身而家溫力足。於是置近代祭田。及遠世墓祭之土。又補大小宗家之貧者。凡族親之貧而未能婚與葬者。輒傾囷助之家不用巫覡之術。庭不設博奕之戲。身不着華靡之服。手不持玩好之物。惟以孝友勤儉。廉靜澹泊。爲身家究竟計。非類之變。戒族戚隣里。俾勿浸染。薙令之行。語諸子曰。薙髮而生。不如存髮而死。汝輩愼勿爲世變所遷移也。乙酉除繕工監監役。壬辰咸從府使。壬寅拜綾州郡守。始赴任。甲辰夏解歸。其居官也。著有聲績。捐廩數千。以應一邑戶役。竪碑又磨崖。以識不忘。邑有崔忠毅公旌閭。歲久頹圮。公爲之出力以繕修。嘗語諸子曰。蘆沙華西兩先生。實儒門正脈。縱不能及其門。門人可仰如勉庵松沙諸丈在焉。此汝輩從遊之所也。公每得勉庵疏章。歎其直言讜論。雖不見用。而足以聳人觀聽云。乙巳夏屬疾。累朔沈綿。至十一月。聞有國變。蹶然起曰。國計罔極乃至是耶。歔欷不自勝。未幾疾添劇。藥餌不下。一日顧諸子曰。有過必改。見善必遷。此是守身保家第一事。戒諸婦女曰。婦人以順爲德。勿使聲出於閨旁之間也。家有錢券。取而折之曰。適以惹起爭端。吾雖不能貽之以善。乃反遺之以禍乎。有頃。盥洗着新。就席從容而逝。卽十二月十五日也。鄕里咸曰。善人逝矣。遠近奔弔者。相屬於道。翌年二月。葬于州之佳玉峙村上某坐之原。配寶城宣氏季孝女。系配水原白氏英壽女。系配南平文氏弘璟女。皆封淑夫人。男永烈。宣氏出。永夏進士。女曺秉相羅營成。白氏出。男永吉永鎭永實。女柳在弘文濟哲。文氏出。孫以下不盡錄。余在同鄕。爲公所辱知者久矣。每見其愷悌謹慤之風。令人有愛好無己之意。又見其五男五婿羣孫滿庭。白首朱紱。光榮炫耀。以爲福善禍淫。其理不忒。嗚乎。天不憖遺。而聲音儀容。已千古矣。螽斯詵詵。餘祿未艾。安知公之志業。不有能繼述者耶。永烈伻其三從弟永謨。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不敢承膺。而緬古感今。有不忍終辭者。謹据狀而爲之修潤焉爾。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笠巖),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세조 10년(146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였다 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제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9일 동안 싸우다 전사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이다.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침(外侵)에 대한 6가지의 방비책을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이다. 1808년(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을 하여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배우고,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켜 격문을 열읍에 보내 호응을 촉구하고,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6월 11일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그해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하였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돌아왔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붉은 슬갑(膝甲) 관직을 상징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취호 처사 이공 행장 醉湖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승호(承灝), 자는 도민(道敏), 호는 취호(醉湖)이다. 세계(世系)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고려조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이다. 진현관 학사(進賢館學士)를 지낸 휘 기밀(奇密),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휘 홍길(弘吉), 참판(參判)을 지낸 휘 일영(日映), 경창군(慶昌君) 휘 선제(先齊), 이조 참의를 지낸 휘 조원(調元),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휘 호선(好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휘 열(烈)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선조들이다. 고조인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인기(仁基), 증조인 휘 응근(應根), 조부인 휘 광하(光夏), 고(考)인 휘 종진(宗震)은 대대로 문학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신평 송씨(新平宋氏) 성묵(聖黙)의 딸이고, 계비(繼妣)는 진주 형씨(晉州邢氏) 효달(孝達)의 딸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9월 9일에 능주(綾州)의 단양리(丹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도 너그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곁에 머물면서 진퇴(進退)나 출입(出入)에 오직 부모의 명을 따르며 어기는 일이 없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정도를 지나치자 대인(大人)은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매번 공의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하였다. 계모(繼母) 형씨(邢氏)를 섬기는 것도 한결같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하여 온화한 말투와 부드러운 기색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밖에서 돌아오면 그때마다 반드시 무언가를 갖다 드렸으며 생선 한 마리 과일 하나와 같이 미미한 것일지라도 빠트리는 경우가 없었다. 아우들을 보살피고 아꼈으며 은혜로운 정이 순박하고 두터워 집안에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제가(諸家)를 두루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힘차고 풍부하였으며 더욱이 시의 운율에 뛰어났다. 매번 붕우들과 시와 술을 펼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초고를 읊어도 주옥(珠玉)처럼 아름다웠으며 낭랑한 목소리는 시를 토할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를 하면서도 시속의 기호를 따르지 않았고 과장(科場)에 나아가기는 했어도 몰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청탁을 넣지 않았다. 평소에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명예와 이익에 관계된 곳에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 오직 산속의 서재(書齋)와 마을의 서당 등 적막한 구석에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벗들과 모여 강론을 펼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여생의 마지막 계책으로 삼았다. 간혹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경관을 만나거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뜬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지으면서 표연히 속세를 벗어나는 의표가 있고 아득히 천지를 자유롭게 떠돌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마치 사람이 사는 세상의 성쇠(盛衰)나 득실(得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일찍이 서재에 취호(醉湖)라는 편액을 걸고 간혹 성명(姓名)을 적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면 그때마다 강호 취객(江湖醉客)이라고 일컬었으니 대체로 만년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한 말이었던 듯하다. 병술년(1886, 고종23) 7월 12일에 거동(車洞)의 우사(寓舍)에서 생을 마쳤다. 묘는 여러 차례 천장(遷葬)을 거쳐 태봉리(台峯里) 반탁동(半坼洞)에 있는 을좌(乙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영운(永運)의 딸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용휴(龍休)이고 차례대로 진휴(進休), 구휴(球休), 채휴(埰休)이며, 딸은 조병연(曺秉淵)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병순(炳純)과 병근(炳根)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과거(科擧)와 격식에 얽매어 걷잡을 수 없이 함께 휩쓸리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간간이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간혹 시사(時事)에 매달리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풍치와 기상(氣象)이 종종 자질구레한 사람들보다 훨씬 우뚝하여 당시 사람들의 명망이 집중되는 자가 있다. 이들은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가릴 수 없는 것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공이라면 애초에 그런 인물이 아닐 리가 없다. 진휴(進休)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선고(先考)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25년이 되었습니다. 그사이에 세상의 변화가 예측하기 어려웠고 집안도 뿔뿔이 흩어져 당시의 저술이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불초한 이 자식은 애통하고 한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당시에 종유(從遊)했던 분들 가운데 선고와 가장 가까웠던 분으로는 오직 장인(丈人)만 살아계십니다. 원하건대 대략을 찬술하여 후손들에게 선고(先考)의 지행(志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어린 시절부터 오랜 교분이 있고 인척 관계가 더해져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이승과 저승으로 멀어졌으니 옛날과 지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미치지 못하는 한이 늘 절실하였기에 차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姓李。諱承灝。字道敏。號醉湖。系出光山。以麗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鼻祖。進賢館學士諱奇密。直提學諱弘吉。參判諱日映。慶昌君諱先齊。吏曹參議諱調元。大司成諱好善。同副承旨諱烈。皆顯祖也。高祖通德郞諱仁基。曾祖諱應根。祖諱光夏。考諱宗震。世著文行。妣新平宋氏聖黙女。繼妣晉州邢氏孝達女。憲宗丙申九月九日。生公于綾州丹陽里。公天性溫仁慈厚。自幼在父母側。進退出入惟命是從。未有違異。早喪慈幃。哀毁過節。其大人慮其傷生。每寬慰之。事繼母邢氏。一如所生。溫言柔色。務盡其歡。每自外還。必有所獻。雖一鱗一果之微。未有闕焉。撫愛諸弟。恩誼純篤。戶庭之間。無有間言。博涉諸家。文詞宏贍。而尤長於詩律。每値朋友文酒之席。信口呼草。如瓊琚珠玉。琅琅有聲。愈出愈奇。業於程文而不趨時好。赴於試圍而不用關節。平日不見要貴之人。不涉聲利之地。惟掩身斂迹於山齋村塾寂寞之濱。講聚朋徒。課授蒙率。以爲餘生究竟計。或遇山水幽賞之地。風月淸澹之夕。一觴一詠。飄然有出塵之標。邈然有獨往之意。若不知人間世有榮悴得失也。嘗題齋顔以醉湖。或有標識姓名處。輒稱江湖醉客。蓋其晩年寓意也。丙戌七月十二日。卒於車洞寓舍。墓累遷而安厝於台峯里半坼洞乙坐原。齊南平文氏永運女。擧四男一女。長龍休。次進休。次球休。次埰休。女適曺秉淵。孫炳純炳根。餘皆幼。嗚乎。世之儒者局束於功令程式之間。滔滔同流。漫不自振者多矣。間有英才美質。或不免黽勉於時。而其風韻氣象。往往拔出於區區常調之外。而偉然爲時望之所歸。此其天質之美。自然呈露。而有掩不得者如此。如公者。未始非其人也。進休一日過余。泣且語曰。先人之沒。今二十有五載矣。其間世變區測。室家流離。當日著述。隻字不遺。此不肖所以痛恨罔極也。在當日遊從之列而與先人最熟者。惟丈人在焉。願爲之撰述梗槪。使爲後嗣者。知厥考志行之有在也。嗚乎。余於公。以丱角舊交。又忝瓜葛之親。聲氣攸孚。期詡漸密。居未幾何。幽明遽隔。緬古感今。常切未逮之恨。有不忍多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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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화암 처사 이공 행장 華庵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침(忱), 바꾼 휘는 윤제(崙齊), 자는 백규(葵伯),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국초(國初)에 휘 명덕(明德)은 목은(牧隱)의 뛰어난 제자로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공에게는 11대 선조가 된다. 공숙은 이조 참판 휘 효근(孝根)을 낳았고, 참판은 이조 참의 휘 림(琳)을 낳았고, 참의는 철산 부사(鐵山府使) 휘 공필(公弼)을 낳았고, 부사는 맹산 현감(孟山縣監) 휘 교(嶠)를 낳았고, 현감은 주부(主簿) 휘 시돈(時敦)을 낳았다. 주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에 추증된 휘 경운(慶雲)을 낳았고, 동지돈녕부사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휘 영숙(靈肅)을 낳았고, 참의는 진사 휘 위(韡)를 낳았다. 휘 위는 호가 혁회재(衋悔齋)이며 은봉(隱峯) 안(安) 선생74)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혁회재는 진사 휘 동명(東鳴)을 낳았고, 진사는 휘 만휘(萬輝)와 만방(萬芳)을 낳았다. 공은 만방(萬芳)의 아들이었으나 백부인 만휘(萬輝)의 후사로 나갔다. 비(妣)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영장(營將) 오세장(吳世長)의 딸이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말하고 웃고 장난하고 노는 모습조차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면서는 날마다 과정(課程)을 준수하였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공경으로 형과 어른을 섬겼으며 몸가짐이나 말하는 것이 다급한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장해서는 지방의 상서(庠序)나 서울의 태학(太學), 원근에 있는 장덕(長德)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당시의 명사(名士)인 권한수(權寒水)75), 이한포(李寒圃)76), 조이우(趙二憂)77), 이도암(李陶庵)78), 민단암(閔丹巖)79), 섬촌(蟾村)80) 같은 이들이 모두 공의 사우(師友)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위아래가 뒤바뀌는 때를 만나고 게다가 사림(士林)의 당화(黨禍)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한층 격렬해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뒤섞여 오랫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공은 포의(布衣)의 서생(書生)으로 비록 세상에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탄식과 분노는 커다란 무지개와 겹겹이 쌓인 노을이 천 길 높이로 솟은 듯한 기상이 있어 종종 읊는 시나 주고받는 편지에 드러나곤 하였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부터 영조 무신년(1728, 영조4)까지 여러 선정(先正)이 무함을 당하자 도내의 유생들을 이끌고 소장을 올리고 대궐 앞에서 절규한 것이 4~5차례였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구중 대궐에 울리고 바람처럼 온 나라를 진동시켜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경중 고저(輕重高低)를 가름하는 데 힘을 보탰으니 어찌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10년 동안 과거를 중지하라는 하교가 내리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화학산(華鶴山) 아래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마치고자 계획하고 자호(自號)를 화암(華庵)이라고 하였다. 죽음에 임해서는 목욕을 하고 몸을 정갈히 한 뒤 새 자리를 깔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착용하고, 이어 여러 아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집안과 고을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경계하였다. 마지막에 주자(朱子)가 이른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다.81)"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말이 끝나자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때는 계축년(1733, 영조9) 1월 14일이었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세희(世曦)의 딸로 지평 문홍헌(文弘獻)의 현손(玄孫)이다. 계배(繼配)는 강릉 유씨(江陵劉氏) 재창(再昌)의 딸로 산당(山堂) 유호인(劉好仁)의 5대손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정후(政厚), 인후(仁厚), 생후(生厚)이고 딸은 정지숭(鄭智嵩), 김명태(金命泰)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아득한 시골구석에서 태어나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가까이로는 한 고을의 선사(善士)들과 벗하고 멀리로는 한 나라의 선사들과 벗하면서 허물을 고치고 인(仁)을 보충하여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사람과 짐승, 중화(中華)와 오랑캐, 군자와 소인의 분별과 관련된 시비(是非)와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두려움 없이 큰소리로 주장을 펼쳐 스스로 시류(時流)의 분노를 일으키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이 공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읽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감흥을 일으키고 탄식할 것이다. 대절(大節)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82)을 스승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배웠다. 박장(朴丈)이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100년 전 관(官)에서 향유(鄕儒)를 맞이하여 향음례를 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당시 고을에 도암(陶菴)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한 사람으로 교관(敎官) 박헌가(朴獻可)와 화암(華庵) 이윤재(李崙齊) 2인이 있었지만, 교관은 이미 고인이 되어 이공(李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빈(賓)과 주(主), 개(介)와 준(僎)83)의 위치, 오르내리며 절하고 읍(揖)하는 의절(儀節)이 문채가 찬란하고 질서가 엄연하며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매우 조화로웠다. 관에서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이곳이 예절과 법도를 갖춘 고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날 이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공을 흠모하던 뒤에 공의 5대손 병섭(秉燮)을 통하여 비로소 공의 유집(遺集)을 구해 읽어보고 전에 들었던 내용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삼가 차례대로 적어 병섭의 마음에 보답한다. 公姓李。諱忱。改諱崙齊。字葵伯。貫公州國初有諱明德以牧隱高弟官監司贈領議諡恭肅。於公爲十一代祖也。恭肅生吏曹參判諱孝根。參判生吏曹參議諱琳。參議生鐵山府使諱公弼府使生孟山縣監諱嶠。縣監生主簿諱時敦。主簿生諱慶雲贈同知敦寧府使。同知生諱靈肅贈吏曹參議。參議生進士諱韡號衋悔齋。學于安隱峯先生之門。衋悔生進士諱東鳴。進士生諱萬輝萬芳。公卽萬芳之子。而出爲萬輝后。生妣海州吳氏營將世長女。以肅宗壬戌。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見者奇之。自就傅。日遵課程。孝事父母。敬事兄長。持身出言造次不放及長出遊於庠序學校及遠近長德之門一時名勝。如權寒水李寒圃趙二憂李陶庵閔丹巖蟾村。皆其師友也。當天地翻覆。冠屨倒置之餘。加以士林黨禍。橫生層激。是非邪正。混久未定。公以布衣書生。雖不得用於世。而其感慨悲憤之意。蓋有長虹層霞。橫互千仞底氣象。而往往發於諷詠往復之間自肅宗甲午至英宗戊申。爲諸先正被誣。率道內儒生陳章叫閽者。爲四五度言雖不用。而其所以聲徹九閽。風動一國。而有力於邪正慝淑輕重低昂之間者。其功豈少補哉。及其有十年停擧之敎也。悵然歸鄕。築室於華鶴山下。爲躬耕終老之計。自號曰華庵。臨歿。沐浴操潔。設新席着深衣大帶因戒諸子以孝弟忠信居家處鄕之道。極其詳悉。末誦朱夫子所謂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直而已之語。語畢從容就逝。時癸丑正月十四日也。配南平文氏世曦女。持平弘獻玄孫。繼配江陵劉氏再昌女。山堂好仁五世孫生三男二女政厚仁厚生厚鄭智嵩金命泰也。嗚乎。公生於遐隅。慨然自拔。近而友一鄕之善士。遠而友一國之善士。攻闕輔仁以自展拓。至於是非義理。有關於人獸華夷君子小人之分者。無不明目張膽。高談大言。至於身觸時怒而不畏焉。使後之人。讀其言誦其行。不覺興感而咨嗟也。大節如此。其餘可槪也。余少師無邪齋朴丈。學鄕飮禮。朴丈因言吾鄕百年前。官邀鄕儒。將行此禮。不知所爲時。鄕有受學於李陶庵先生者。朴敎官獻可李華庵崙齊二人。而敎官已古。請李公爲相於是賓主介僎之位。升降拜揖之節。燦然有文。儼然有秩。不徐不疾。旣洽而止。官曰吾固知此爲文禮之鄕。而不圖今日至此之美也。贊歎不已云。欽慕之後。因公之五代孫秉燮。乃得其遺集而讀之。益信其前所聞者。謹序次以塞秉燮之意云爾。 은봉(隱峯) 안(安) 선생 은봉은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으로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역임했다. 저서로 《은봉전서》가 있다. 권한수(權寒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이다. 1660년(현종1) 진사가 되고 이후 대사헌,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 등이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한포(李寒圃)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68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수찬, 교리, 응교, 대사간, 이조 판서,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에 올랐다. 조이우(趙二憂)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86년(숙종12)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정언, 경연동지사, 호조ㆍ공조ㆍ이조의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남아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도암(李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이다.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702년 알성 문과에, 1707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다. 저서에 《도암집》과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ㆍ(→,)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민단암(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ㆍ세심(洗心)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로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저서로 《연행록(燕行錄)》, 《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사원(士元), 호는 섬촌(蟾村)ㆍ정암(貞庵)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747년(영조23) 집의(執義)ㆍ대사헌ㆍ공조 참판ㆍ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되었다. 천지가 …… 뿐이다 주희가 임종하기 얼마 전에 병이 깊었는데도 제생(諸生)에게 강론하기를 "학문을 하는 요체는 오직 일마다 옳음을 살펴 구하고 그름을 결단코 제거하는 데 있다. 오래도록 쌓아 가면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서 저절로 발하는 바에 모두 사사로이 굽어짐이 없게 된다. 성인이 만사에 응하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 직일 뿐이다.[爲學之要, 惟在事事審求其是, 決去其非. 積累久之, 心與理一, 自然所發皆無私曲. 聖人應萬事, 天地生萬物, 直而已矣.]"라고 하였다. 《朱子年譜 卷4 七十一歲 三月》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ㆍ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주역(周易)》에 해박하고 정밀하였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介)와 준(僎) 향음주례(鄕飮酒禮) 때 행사를 도와 주선하는 자를 가리킨다. 주인을 돕는 자를 준(僎), 빈(賓)을 돕는 자를 개(介)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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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신재 이공 행장 懷愼齋李公行狀 우리 고을은 호좌(湖左 충청남도)에서 시(詩)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근고(近古) 시대에 이르러 경전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더욱 빈빈(彬彬)하였다. 회신재(懷愼齋) 처사(處士) 이공(李公) 휘 춘형(春馨) 또한 그런 인물이다. 공은 공산(公山)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국초의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이 중조(中祖)이다. 5대조 휘 위(韡), 호 혁회재(衋悔齋)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84)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효우(孝友)와 학문(學問)으로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고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이고 증조는 휘 만휘(萬輝)이다. 조부 휘 윤제(崙齊), 호 화암(華庵)은 도암(陶庵) 이 문정공(李文正公 이재(李縡))에게 학문을 익히고 상소(上疏)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두 선생을 구원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고(考)는 휘가 정후(政厚)이고 비(妣)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재탁(再濯)의 딸이다. 영조 갑자년(1744, 영조20)에 능주(綾州)의 부춘방(富春坊)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애롭고 온화하며 근면하고 신중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명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부친의 병을 수발하면서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차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모친이 병들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고생을 이겨내면서 글을 읽어 문사(文詞)가 풍부하였으며 부모를 위해 과거를 준비하기는 했으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중년에는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85)을 찾아뵙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만년에 칠송(七松)으로부터 가솔을 거느리고 헌무정(獻舞亭)으로 이주하여 두문불출하며 심신을 수양하였다. 손수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옮겨 적고 깊이 연구하고 본질을 완미(玩味)하여 그 기쁨에 자신이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지 않았건만 명성과 실제가 더욱 융성해져 마을과 향당(鄕黨)의 오랜 벗이나 생도(生徒)들이 공에게 의지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평소에 저속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사벽(邪僻)한 색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고 몸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선행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기고 악행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겼다. 《춘추(春秋)》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에 대해) 더욱 연구하여 밝히고 힘써 지켜나갔으며 대명유민(大明遺民) 4자를 크게 써서 앉는 자리에 걸어두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상사(上舍) 남익(南熤)과 이웃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학문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봄가을로 향리(鄕里)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며 간간이 나라 안의 장덕(長德)과 종유하며 더욱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아, 공은 고상하고 소탈한 운치(韻致)가 시나 말 등에서 매우 많이 드러날 뿐만이 아니다. 〈권학론(勸學論)〉, 〈신우기(新寓記)〉 등의 저작은 공이 어떤 인물인지 더욱 알 수 있게 한다. 게다가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에서 공을 천거하는 문서가 앞뒤로 빈번하게 이어지고 공이 남긴 성덕(盛德)의 향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바다에 숨겨진 구슬이지만 반드시 훗날 외사씨(外史氏)의 기록에서 빠지지 않아 능양(陵陽)의 고사(故事)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배(配)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철한(澈漢)의 딸이며 아들은 문규(文圭)ㆍ문익(文翊)ㆍ문표(文{白+表})이다. 손자와 증손자 이하는 다 적지 않는다. 너무 많아 적지 않는다는 뜻인 듯합니다.) 묘(墓)는 지동촌(池洞村) 뒤의 입동(笠洞) 을좌(乙坐)에 합장하였다. 현손 장환(長煥)이 유집 1권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어 한마디 말로 공의 덕을 드러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공을 우러러 흠모하였기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吾鄕在湖左。以詩禮稱。至近古。經明行修之士。尤彬彬焉。懷愼齋處士李公諱春馨。亦其人也。公公山著族。以國初恭肅公諱明德爲中祖。五世祖諱韡號衋悔齋中進士。師事隱峯安文康公。孝友學問。爲士林儀表。高祖諱東鳴進士。曾祖諱萬輝。祖諱崙齊號華庵。受學于陶庵李文正公。疏救尤春兩先生。有遺稿。考諱政厚。妣濟州梁氏諱再濯女。以英宗甲子。生公于綾之富春坊。慈祥勤勅。事親無違。幼侍父病。血指見愈。母病又如之。刻苦讀書。詞藻贍富。爲親供擧。不以得失介意。中年謁性潭宋先生。得聞爲己之學。晩自七松。挈移獻舞亭。杜門養靜。手抄心經近思錄等書。沈潛玩素。怡然不知老之將至。潛光鏟輝。望實彌隆。閭里鄕黨知舊生徒。無不倚以爲重焉。平生口不出鄙俚之言。目不覩邪僻之色。足不妄行。身不妄動。見善若己有之。見惡若己凂之。於春秋尊攘之義。尤加講明而力守之。大書大明遺民四字。揭於座側以見志焉。與南上舍熤。結隣對床。講磨無闕。春秋會鄕里士子。講小學大學。間從國內長德。益自展拓焉。嗚乎。其高韻逸趣。見於吟哦咳唾之餘者。不啻多矣。而至若勸學論新寓記諸作。尤可以見公之爲公矣。況鄕道剡報。前後頻仍。而遺芬餘馨。藉藉人口者。足以爲百世不刊之證耶。滄海遺珠。必不見漏於後日外史之筆。而爲綾陽故事之一也。配濟州梁氏諱澈漢女。子文圭文翊文白+表。孫曾以下不能盡錄。墓池洞村後笠洞乙坐合祔。玄孫長煥。持遺集一卷示余。因請一言以狀其德。余以鄕里後生。慕仰有素。不敢以匪其人辭。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은봉전서》이 있다.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 송환기(宋煥箕, 1728~1807)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ㆍ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다.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성담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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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9 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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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탄기 竹灘記 옛적 을묘년(1855)에 내가 어린아이로 천관산(天冠山)의 명촌(明村)에서 독서하였을 때 죽탄옹(竹灘翁)도 어린아이로 함께하였는데, 그 타고난 재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추구하는 것이 독실하여 함께 공부했던 자들이 미칠 수 없었다. 얼마 후 남북으로 흩어져서 40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기까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단지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선친을 여의고 외로운 몸으로 떠돌다가 만년에야 비로소 집안을 세울 계획으로 산양(山陽 보성(寶城))의 죽천(竹川)에 우거(寓居)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벗이 갑작스럽게 풍상을 만난 뒤에 과연 처음 지녔던 뜻을 바꾸지 않을 수 있을지 없을지 궁금하였다. 그런데 계사년(1893)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한 사람이 천태산(天台山)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였는데, 보고도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다가 묻고 나서야 비로소 옹인 줄 알았다.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댄 채 밤새도록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나누어 보니, 학문에 대한 공부와 살아오면서 이룩한 업적이 처음 지녔던 뜻을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발하여 확장하고 넓게 펼쳐서 성대하게 노성(老成)다운 풍모가 있었다.아, 옹이 '죽탄(竹灘)'이라 한 것이 어찌 단지 그가 사는 곳만을 표지할 뿐이겠는가. 세한(歲寒)45)에 힘쓸 것을 기약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부들이나 버드나무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이 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먼저 시들어 떨어질게 될까 경계하는 마음46)이 간절하였으니, 어찌하면 여울가 한 가지의 봄기운을 얻어 만년의 풍경을 의지할 수 있을까? 昔在乙卯。余以童丱。讀書于冠山之明村。竹灘翁亦以童丱。與之俱焉。其才性之聰敏。趨向之篤實。同業者莫及。旣而分散南北。至四十年之久。而未得一面焉。但聞其未冠失怙。隻身流離。晩始樹立家計。寓於山陽之竹川。余以爲此友在風霜凌遽之餘。而果能不渝初志否。歲癸巳。有皤然一老人。訪我於天台寓舍。見之不記爲誰。問之乃知爲翁。握手促膝。達夜娓娓。其學問之功。履歷之業。不惟爲不渝初志。奮張展拓。蔚然有老成風範。嗚乎。翁之爲竹灘。豈特誌其所居。所以期勉於歲寒者。可知矣。余以蒲柳孱質。常切望秋之戒。安得灘上一枝春。以庇依晩景耶。 세한(歲寒) 대나무가 엄동설한의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푸른빛을 유지하는 것처럼 만년에 초심을 변치 않고 지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이 보인다. 가을이……마음 남들보다 일찍 늙고 쇠하는 허약한 체질을 염려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열지(顧悅之)가 간문제(簡文帝)와 동갑이었는데도 이른 나이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자 황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은 포류와 같은 체질이라서 가을이 가까워지기만 해도 벌써 낙엽이 지고 맙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해진다. 《世說新語 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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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기 悔軒記 어떤 객이 회헌(悔軒)의 주인을 힐난하며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후회는 움직이는 데서 생겨나니,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주인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질박하고, 행실이 이미 뒤로 물러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서 젊어서부터 말을 적게 하고 화려한 꾸밈을 생략하였으며, 출입을 간소하게 하고 교유를 끊으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한 지 50년 동안 족적이 일찍이 한 번도 명성과 이욕이 어지럽게 날리는 티끌 사이에 미친 적이 없었으니, 어수선한 세상 사람과 비교하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후회한다고 말하는 것은 음식을 먹지도 않고 목이 메었다고 말하거나 술을 마시지도 않고 취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사람이 상등의 지혜가 아니라면 누구인들 후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평생 졸렬함을 지키면서 요행히 면한 것은 단지 뚜렷한 과실과 후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태만한 채 더 살피지 않고서 만약 어느 날 만나는 바가 오늘날과 달리 조금씩 발을 내디뎌 다소의 자가당착이 있게 된다면 어찌 지금껏 해오던 습관대로 그럭저럭 넘어가면서 뜻밖의 후회가 없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오늘날 후회가 없다는 것이 바로 훗날 후회가 있게 되는 뿌리가 될 것입니다.병은 발작한 날에 일어나지 않고, 재앙은 발생한 때에 생겨나지 않으니, 병이 없을 때에 병을 다스리고 재앙이 없을 때에 재앙을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회헌(悔軒)'이라 명명한 뜻입니다. 다만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아 나이와 근력이 이미 늙고 쇠약해졌는데, 어스름 날이 저물어 갈 때에 먼 나루터를 묻고, 갈증이 일어날 때에 깊은 우물을 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시작이 있고 끝맺음이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과 대현(大賢)뿐이고, 그 다음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모두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정원의 꽃을 경계하는 것은 일찍 시들기 때문이고, 뜰의 국화를 아끼는 것은 늦은 계절에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언회(禇彦回)는 젊었을 때에 아름다운 명망이 없지 않았으나 끝내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고,47) 풍절후(馮節候)는 동우(東隅)에서 약간의 실수가 없지 않았으나 마침내 개국(開國)의 공훈을 세웠습니다.48) 이것으로 보건대, 시작은 있되 끝맺음이 없는 것이 어찌 시작은 없되 끝맺음이 있는 것만 하겠습니까. 더욱이 주인께서는 한창 장년과 노년이 교차되는 시기에 있으니,  훗날을 위해 뿌리를 심고 가꾸는 것이 어찌 늦었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주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객에게 그 말을 적어 회헌의 기문(記文)으로 삼을 것을 부탁하였다. 客有難於悔軒主人曰。凡天下之悔。生於動。不動。何悔之有。主人天姿質樸。行已恬退。自少寡言語。略文華。簡出入。息交遊。杜門潛處五十年。足跡未嘗一及於聲利紛塵之間。視諸世之撓撓者。可謂靜而不動矣。不動而言悔。猶不食而言噎。不飮而言酲。其可乎。主人曰。人非上智。孰能無悔。顧平生守拙所以倖免。只是顯然過悔而已。視以爲足。漫不加省。若一日所遇。異於今日。而有小小出脚。多少撞着。則安得因仍捱過。而保無不虞之悔哉。然則所謂今日之無悔者。政爲他日有悔之根柢也。病不作於作之日。禍不生於生之時。治病於無病。銷禍於無禍。此吾所以名軒之意也。但日月不貸。年力已替。問遠津於薄暮。掘深井於臨渴有是理乎。客曰。有始有終。惟聖人與大賢。其次皆不能兩全。園花之戒。以其早萎也。庭菊之愛以其晩秀也。禇彦回非無少年令望。而卒爲負義之人。馮節侯非無東隅小失。而終作開國之勳。以此觀之。有始而無終。曷若無始而有終乎。況主人方在壯衰之交。所以爲栽種後日之根株者。豈云晩乎。主人逌然而笑。屬客書其語。以爲軒記 저언회(禇彦回)는……되었고 남조(南朝) 송(宋)나라와 제(齊)나라 때의 관리 저연(褚淵)으로, 언회는 그의 자이다. 그는 젊었을 때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훗날 송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를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南史 卷28 褚裕之列傳》 풍절후(馮節候)는……세웠습니다 풍절후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의 장군인 풍이(馮異)로,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는데 처음에는 대패하였다가 군사를 재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자, 황제가 직접 글을 지어 그 노고를 치하하기를 "처음에 회계(會稽)에서는 날개를 접었으나 끝내 민지(澠池)에서 떨쳐 비상하니, 참으로 '동우(東偶)에서 잃었다가 상유(桑楡)에서 수습하였다.'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馮異列傳》 동우는 해가 뜨는 곳으로 젊은 날을, 상유는 해가 지는 곳으로 만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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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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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만회당 윤공 행장 贈嘉善大夫吏曹參判晩悔堂尹公行狀 공의 휘는 태행(泰行), 자는 낙행(樂行), 호는 만회당이다. 윤씨(尹氏)는 세계(世系)가 파평(坡平)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시조 휘 신달(莘達)61)은 태사(太師)를 지냈고, 휘 집형(執衡)62)은 시호가 문정(文靖)이고, 휘 관(瓘)63)은 시호가 문숙(文肅)이다. 휘 위(威)는 시호가 문헌(文獻)인데 남원(南原)에서 역적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므로64) 자손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만동(萬東)에 이르러 병화(兵火)를 당하자 능주(綾州)의 해망산(海望山) 산중에 우거(寓居)하면서 덕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분이 공의 10대조이다. 5대조 휘 상석(商錫)은 기근을 겪은 해에 온 고을의 공세(公稅)를 대신 납부하여 현종조(顯宗朝)에 성은(聖恩)을 입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고조 휘 홍도(弘道)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증조는 휘 창종(昌宗)이고 조부 휘 일주(壹周)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필중(必中)이고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완산(完山) 이인석(李寅錫)의 딸로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으며 남편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순조(純祖) 신미년(1811, 순조11) 9월 1일에 회덕리(懷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진솔하며 겉으로 꾸미지 않았고 성품은 온화하고 침착하였으며 교유하는 이들이 모두 선사(善士)였다. 어려서부터 지조(志操)를 지녀 말하고 웃는 것도 범상치 않았고 일찍이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언급한 적이 없으나 선악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거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절(儀節)은 추위가 혹독하고 덥거나 비가 내리더라도 조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8세에 서당 선생에게 나아가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을 배웠는데,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정하고 읽고 사색하는 일을 밤낮으로 멈추지 않았다. 장로(長老)들이 기특하게 여기고 공을 아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평범한 애들과 달라서 성취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하였다. 본래 집안이 곤궁하여 공은 물고기 잡고 나무하고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일을 몸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는 기쁘게 하기에 힘썼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공경을 다 하였으며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시(詩)와 예(禮)를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사촌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음식은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고 술도 혼자 마시는 일이 없어 화락한 기운이 일가에 넘쳐났다. 몸가짐은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여 업신여기거나 예의 없는 기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일 처리는 주도면밀하고 세심하여 망설이거나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정상이 마음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서로 왕래하는 빈객과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지만 정성스럽게 대접하여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친의 병환이 매우 위독해지자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피를 마시게 하여 3일이면 끝날 수명이 늘어나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상을 치를 때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전(奠)을 올리고 곡(哭)을 하는 의절(儀節)이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빈(殯)65)이 끝난 뒤에도 상복(喪服)의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추워도 옷을 껴입지 않았고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얼굴빛은 검어지고 소식(素食)을 하는 것이 옛 효자에 뒤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도 아버지의 상을 치르던 때와 같았다. 하루는 유서(遺書)를 남기며 이르기를, "내 죽음은 3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선(善)하지도 못하면서 오만하게 날뛰며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보다는 정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또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천도(天道)를 거스르면 화가 생겨나고 천도를 따르면 복이 이른다. 선(善)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惡)은 따라서는 안 된다. 겸허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검소함과 간략함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삼가고 조심하며 책을 읽어 집안의 선한 자손을 만드는 것이 내가 평생 바라던 일이다." 하였다. 하루는 장경일강(莊敬日强)66) 4자를 벽에 써놓고 아침저녁으로 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평소에 윤리(倫理)를 소중히 여기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며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뒤쫓지 않아, 곤궁함을 고수(固守)하고 졸렬(拙劣)함을 편안히 여겼다. 좋은 계절을 만날 때마다 술을 빚고 안주를 장만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으로 마을의 오랜 친구들을 불러 술에 취해 소요하면서 하루를 즐겼으니 공은 풍류와 흥취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어떤 인물인지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금상(今上) 신묘년(1891, 고종28) 9월 2일에 편안히 생을 마쳐 본리(本里) 안산(案山)의 오른쪽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일엽(日燁)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계배(繼配)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해인(海仁)의 딸로 1녀를 두었다. 아들 병임(秉臨)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여산(礪山)의 송두옥(宋斗玉)에게 출가한 딸은 선씨 소생이고 홍기모(洪基謨)에게 출가한 딸은 박씨 소생이다. 종질(從姪)인 병현(秉玹)을 후사로 삼았으며 병현은 광산(光山) 이주태(李周泰)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정섭(定燮)을 낳았다. 정섭이 대인(大人)의 명으로 가장(家狀)을 내게 가지고 와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행장을 적을 덕망과 문장을 지닌 인물이 못되지만, 병현이 나의 벗이니 참으로 그의 말이 징험할 만하기에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적어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취사(取捨)를 기다린다. 公諱泰行。字樂行。號晩悔堂。尹氏系出坡平。爲東方大姓。始祖諱莘達太師。有諱執衡諡文靖。諱瓘諡文肅。諱威諡文獻。討賊南原。以功食菜南原。子孫仍貫焉。至諱萬東。當兵火。寓綾之海望山中。隱德不仕。寔公十世。五世祖諱商錫。遇歲饑。替納一邑公稅。顯宗朝蒙恩贈參判。鄕人士立碑頌之。高祖諱弘道通政。曾祖諱昌宗。祖諱壹周贈通政。考諱必中贈參議。妣完山李寅錫女。婦德甚備。無違君子純廟辛未九月一日公生于懷德里體相峻茂眞率不爲表襮。和厚詳審。所交遊皆善士。幼有志操。言笑不凡。未嘗短長人。而淑慝甚嚴。天性至孝。定省之節。進退之儀。雖祈寒暑雨。少無闕焉。八歲就學塾師。授小學孝經等書。嚴立課程。俯讀仰思。晝宵不輟。長老奇而愛之曰。此兒異於凡。進就不可量也。家素貧窶。漁樵耕牧。無不躬幹。其養親也致其樂。其接人也致其敬。以承庭訓詩禮爲家法。與諸從弟。友愛甚篤。食必均味。酒無獨酌。怡怡之氣。洋溢家門。其持身也和而莊。侵侮好狎之意。不見於貌。其處事也。詳而密。依違苟且之狀。不介于心。過從之賓。遊賞之人。連絡不絶。接待款厚。無一人不歡。親疾甚劇。露禱灌血。得延三日之命。終以天年。擗踊之儀。奠哭之節。一遵禮制。旣殯不脫絰帶。寒不重衣。暑不揮扇。面墨行素。不下於古孝也。遭內艱。亦如前喪。一日遺書曰。吾死不過三年。匪類鴟張。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又戒子孫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以違。惡不可以從。持己以謙恭。處家以儉約。謹勅讀書。做人家好子孫。吾畢生所願也。一日以莊敬日强四字。書于壁右爲朝夕常目之資。平日愛好倫理。敦尙儒雅。不慕名利。不趨權勢。而固窮守拙。每遇佳節。釀酒備肴。邀鄕黨知舊。婆娑徜徉於山水奇絶處。以成終日之樂。風流興致。有異於人。此其非出塵之表。何以若此乎。令人可想。當宁辛卯九月二日考終。葬本里案山右艮坐原。配寶城宣氏日燁女。擧一男一女。繼配咸陽朴氏海仁女。擧一女男秉臨早死。無育。女礪山宋斗玉宣氏出。洪基謨朴氏出。以從姪秉玹爲后。娶光山李周泰女。生男定燮。定燮以大人之命。抱家狀。有一言之託。顧非其人。秉玹余友。信其言可徵。序次之如右。以竢立言君子裁擇焉。 시조 휘 신달(莘達) 윤신달(尹莘達, 893~973)으로 918년에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 벽상익찬 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휘 집형(執衡)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윤금강(尹金剛)의 아들이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아버지로, 검교 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냈으며,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휘 관(瓘) 윤관(尹瓘, ?~1111)으로 자는 동현(同玄)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102년에 지공거를 맡았고 이어서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숙종 대 후반에서 예종 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고 이후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애걸하자 조정의 결정으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하였다.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래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인종(仁宗) 8년(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에 배향하면서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李氏)의 시호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역적을 …… 받았으므로 윤위(尹威)는 1200년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관찰사가 되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살면서 본관을 남원으로 하면서 파평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장경일강(莊敬日强)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군자는 장중하고 공경함으로 날마다 굳세어지고, 안일함과 방자함으로 날마다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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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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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절작변무문 節酌辨誣文 도리(道理)는 무궁하지만, 시세(時世)는 다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성현의 말은 시세와 인정에 따라 혹 같지 않을 수 있다. 전대의 성인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후대의 현인이 밝혀 확충하거나 전대의 학설이 미진했던 점을 후대의 유학자가 변론하여 밝히는 것이 어찌 새로운 학설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전대의 현인보다 뛰어남을 추구하고자 해서이겠는가. 도리어 도리를 밝혀 시대의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장자(張子)가 "좋지 않은 점을 함께 고치는 것이 바로 후학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주자가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일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학자가 선대 현인들에 대해 선대 현인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데에 모든 노력을 다함으로써 혹시라도 선대의 현인들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이나 미쳐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또한 감히 내버려둔 채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도리를 십분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과입실(操戈入室)1)이 옛사람들이 학문에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선사이신 노사(蘆沙) 선생은, 율곡(栗谷) 선생이 원래 가학(家學)이 유래한 연원이 되기에 일생 동안 독실하게 믿으면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대체로 율곡이 이치를 강론한 말은 그 전체를 총괄하면  "이(理)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氣)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와 "기가 아니면 발현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현하는 바가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고, 그 단서를 정확히 가리켜보면 "온갖 정은 모두 이에서 발현된다."와 "사단과 칠정은 별개의 정이 아니다.", "이와 기는 호발함이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다. 선사께서는 매번 그 말이 정확하고 완전하여 만세토록 바뀌지 않을 정론(定論)이고, 더욱이 오늘날 주기(主氣)의 증상에 맞는 진정한 약제라며 감탄하였다. 다만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그 기제(機制)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 조금 이치에 맞지 않은 점이 있지만, 매번 융통성 있게 보고자 하면서 이 말은 단지 유행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속의 유학자들이 정론과 종지(宗旨)를 잘못 알고 내버려둔 채 강구(講究)하지 않으면서 오직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일단의 말에만 집착하여 주기(主氣)의 증안(證案)으로 여김으로써 율곡의 은미한 뜻이 막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선사께서 마침내 〈사의(私議)〉2) 등의 글을 지어 "이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라는 말의 뜻을 밝혔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또 〈외필(猥筆)〉3)을 지어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구절에 대해 조금 타당하지 못한 것이 전전하다가 잘못된 뜻에 이르게 되었음을 논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전대의 현인이 이것을 밝힌 것이 너무나 명쾌하여 훗날의 폐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대 현인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아 고친 이유이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외필"이라 하였고, 오히려 감히 스스로 독단하지 않고 "참으로 질정을 드리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감히 스스로 옳다 여기지 않고 "내가 의심한 것이 망령된 것이라면 유문(儒門)의 다행이다."라고 하였으니, 말이 더욱 간절하고 예의가 더욱 공손하여 이른바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여 밝힌다."라는 것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근래에 영남 사람 최동민(崔東敏)과 권봉희(權鳳熙) 무리들이 〈외필〉 가운데 한두 구절의 말을 지적하며 선사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여 서로 연이어 통지문을 보내며 방자하게 헐뜯었다.아, 선사께서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인가? 본령이 둘이다라고 말한 것과 천명이 멈추었다고 말한 것, 헛된 명칭이 있다고 말한 것들은 "이는 장수이고, 기는 역졸이다[理氣帥役]"라는 말의 뜻을 설명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피음사둔(詖淫邪遁)4)이라 말한 것과 전도되어 창피스럽다고 말한 것은 주기(主氣)에 대한 후세 사람의 폐단을 말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이것만으로 뭇사람을 선동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퇴계와 우암을 조롱한 것이라고 하였고, 단지 이것만으로 그 죄를 무겁게 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주자(朱子)를 침범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소인이 군자를 무함하고 헐뜯을 때면 성현을 앞세우고 경전의 뜻을 빙자함으로써 간악함과 속임수, 시기와 거짓의 계책을 팔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대개가 본디 이와 같다.무릇 의리는 천하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동생이 형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후대의 현인이 전대의 현인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다. 온공(溫公)이 《의맹(疑孟)》편을 지었지만5) 그의 아들 강(康)은 맹자를 가장 순수하게 여겨 경연에서 진강(進講)하였고, 명도(明道)가 《대학(大學)》의 편차(編次)를 정했지만 이천(伊川)이 그것을 개정하였으며6), 오봉(五峰)의 잘못된 논의를 남헌(南軒)이 논변한 것이 많았고7), 고정(考亭)이 정립한 학설을 면재(勉齋)가 간혹 어기기도 하였다8). 주자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이 장자(莊子)나 노자(老子)와 같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은 황노(黃老)의 유풍이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며, 장자(張子 장재(張載))에 대해 직접적으로 "석씨(釋氏)에 가깝다."라고 하였고, 또 "《정몽(正蒙)》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라고 하였다.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회재(晦齋)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개정하였고9), 율곡이 퇴계(退溪)의 사칠의론(四七議論)을 변별하였으며10), 퇴계의 차의(箚疑)를 우암(尤庵)이 개정한 것이 많았고, 우암의 차의를 농암(農巖)이 간혹 논변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이것을 가지고서 아버지를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형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며, 스승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전대의 현인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아, 선사는 율곡을 정신으로 융회(融會)하고 마음으로 전수받아 깊이 좋아하고 독실하게 믿었으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한 마음이 일상적인 글 사이에 드러나서 낱낱이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인데, 우선 한 편에서 논한 것을 말해 보겠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하환성재(河喚惺齋)가 율곡을 신구(伸救)한 상소12)를 논하면서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계 된다."13)라고 하였고, 또 "이 상소에는 천지 뒤의 떳떳한 법이 있다."14)라고 하였으며, 또 "하늘이 이 옹(翁)을 낸 것은 바로 만세에 비태(否泰)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다."15)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율곡을 아는 자가 선사만한 사람이 없고, 율곡을 존경하는 자 또한 선사만한 사람이 없으니, 일찍이 한 구절의 말을 해석한 것으로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이르는 것이 사리에 옳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이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온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고 만인의 눈을 가려 속이고자 하니, 매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터무니없는 말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단 말인가?우리나라가 분당(分黨)한 지 수백 년 동안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헐뜯었던 여러 선생의 말이 문자에 드러난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지만, 어느 한 마디도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말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유독 노사 선생께서 이치를 밝히고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 했던 지극히 공정한 말에 대해서만은 사납게 성내고 심하게 배척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곡절이란 말인가? 비유하자면 이는 한 우매한 사람에 대해 그와 길을 함께 걷는 치욕은 달게 받으면서도 그와 방을 함께 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경계와 같은 것이니, 아, 서글프구나.중암(重庵) 김 선생(김평묵(金平默)이 일찍이 〈외필〉을 구하여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화서(華西) 선생(이항로(李恒老))의 말과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기정진과 이항로 두 선생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선사를 안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아, 도(道)는 굽혀지기도 하고 펼쳐지기고 하며, 때는 소멸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니, 예로부터 성현들은 한때 굽혀졌지만 마침내 만세토록 펼쳐졌다. 오늘날 시끄럽게 떠드는 저들도 또한 이규(李槼)ㆍ유직(柳稷)16)과 같은 부류일 뿐이니, 어찌 그들과 잡다한 말로 논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집집마다 그 글을 보관하고 그 말을 욀 수 없으니, 열 번 치는 나무와 세 번 전해지는 호랑이17)가 어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입을 잘 놀리는 사람들에 의해 먹혀들지 않을 바가 될 줄 보장하겠는가. 이에 감히 대략적인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여 우리 유가의 학문하는 선비들에게 고한다. 道理無窮。而時世有異。是以聖賢之言。因時世人情而容有不同焉。前聖所未發。後賢發而擴之。前說所未盡。後儒辨而明之。是豈欲創立新說。求多於前人哉。乃所以明道理而捄時弊者。不得已也。張子曰。其未善者。共改之。正所望於後學。朱子曰。尊畏先輩。講明義理。竝行而不悖者。其非此意耶。然則學者之於先賢。當以先賢之心爲心。講明義理。十分盡底。而或有偶失照管者。未及細思者。則亦不敢放過。是乃十分尊畏之道。此操戈入室。古人之所以善學也。先師蘆沙先生於栗谷先生。原來是家學淵源之所自也。一生篤信而尊慕之。蓋栗谷論理之說。其總括全體。則曰理通氣局。及非氣不能發。非理無所發等語是也。其的指端緖。則曰萬般之情。皆發於理。及四七非兩情。理氣無互發等語是也。先師每歎其的確渾全。爲萬世不易之定論。而尤爲今日主氣之對證眞劑也。但於陰靜陽動。其機自爾。非有使之之語。有少未契。而每欲活看以通之。以爲此特流行邊說話矣。及見世儒之錯認。定論宗旨。遺而不講而專執陰靜陽動一段語。以爲主氣之證案。使栗谷微旨。鬱而不彰。先師遂著私議等說。以明理通之義。極其詳悉。又著猥筆。以辨陰靜云云之句。有些下語之未妥。以至輾轉差謬之意。因曰。前賢於此發之太快。而後弊之至此。容有未之思也。此所以發明前賢之意。而矯捄今日之弊者也。然猶不敢自安而曰。猥筆。猶不敢自專而曰。實有奉質之願。猶不敢自是而曰吾之所疑者妄。則儒門之幸也。言愈切而禮愈恭。所謂尊畏講明者。可以倂行而不悖矣。不意邇者。有嶺人崔東敏。權鳳熙輩。指摘猥筆中一二句語。謂先師攻斥栗谷。相繼投通。肆其詆毁。噫。先師之攻斥栗谷。果何事耶。曰雙本嶺。曰天命息。曰有虛名等語。是說理氣帥役之義。而彼曰攻斥栗谷。曰詖淫邪遁。曰顚倒倡披。是說後人主氣之弊。而彼曰攻斥栗谷。只此恐不足以動其衆。則曰譏切退尤。只此恐不足以重其罪。則曰犯斥朱子。自古小人誣陷君子者。未嘗不頭戴聖賢憑藉經訓以售其奸譎猜險之計者類固如此。夫義理天下之公物也。子不得以私其父。弟不得以私其兄。弟子不得以私其師。後賢不得以私其前賢。溫公作疑孟篇。而其子康以爲孟子最醇而進講於經筵。明道定大學編次。而伊川改定之。五峯差處。南軒多辨之。考亭定說。勉齋或違焉。朱子於周子直曰。其言似莊老。於程子直曰。其言不免有黃老之風。於張子直曰。近釋氏。又曰。正蒙多差處。至於我東。則晦齋改定朱子大學章句。栗谷辨別退溪四七議論。退溪之箚疑。尤庵多改之。尤庵之箚疑。農巖或辨焉。然未聞有一人以此誣毁其父。誣毁其兄。誣毁其師。誣毁其前賢者也。噫。先師之於栗谷。所以神會心授。而悅之深信之篤者。可謂至矣。其發於尋常文字之間者。不可枚擧。而姑以一篇所論言之。先師嘗論河喚惺齋伸捄栗谷疏有曰。參天地關盛衰。又曰。此疏有天地後經法。又曰。天生此翁。乃爲萬世傳否泰消息。詳味此意。知栗谷者。莫如先師。尊栗谷者。亦莫如先師。曾以一句語解而謂攻斥者。於事理可乎不可乎。此不足以瞞三尺之童。而乃欲以熒惑一世。欺蔽萬目。其不思甚矣。人之無據。一至於此乎。我東分黨數百年。詆毁先正諸先生之言。著於文字者。不啻多矣。而無一言攻斥。獨於蘆沙先生明理捄敝至公至正之言。怒之暴。斥之甚。而使不相容。抑何曲折歟。比如一昏愚之人。甘受行路之辱。而不忍同室之戒者也。吁可哀也。重庵金先生嘗得猥筆。讀之歎曰。此與我華西先生之言。不約而合。又曰。尊栗谷者。莫如奇李二先生。此可謂知先師矣。嗚呼。道有屈伸。時有消長。自古聖賢。未嘗無一時之屈。而竟伸於萬世。今日彼輩之嘵嘵。亦一李槼柳稷之流耳。何足與之多辨。但不能家蓄其書。戶誦其說。而十伐之木。三傳之虎。安保其不爲巧言利口之所入乎。玆敢略述梗槪。以告于吾黨遊從之士云。 조과입실(操戈入室) 자기의 창으로 자기 집을 공격하여 쳐들어온다는 말로, 배운 학문으로 가르쳐 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이른다. 청출어람(靑出於藍)과 같은 말이다. 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며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쥐고서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탄식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鄭玄列傳》 사의(私議)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말한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46세 때에 남암(南庵)으로 피서(避暑)를 가서 처음 초고를 짓고 죽기 직전까지 교정한 것으로,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기정진은 이 글에서, "근세에 성(性)을 논하는 자들이 이일(理一)과 분수(分殊)에 대하여 모르는 까닭에 이일을 형기(形氣)에서 떨어진 것으로 한정하고, 분수를 형기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한정시켰으며, 그 결과 이일과 분수가 별개의 것이 되고 성과 명(命)이 제멋대로 결정되어 성에 대한 논의가 분열되었다."라고 전제한 뒤에 이일원적(理一元的) 관점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전개하고 있다. 외필(猥筆) 81세 때에 지어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세상에 내놓았던 글로, 율곡이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나온 뒤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이 논박하며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피음사둔(詖淫邪遁) 말의 네 가지 병폐를 가리키는 것으로,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의 준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방탕한 말에서 그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사특한 말에서 그 마음이 도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온공(溫公)이……지었지만 온공(溫公)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1019~1086)을 말하고, 《의맹(疑孟)》은 사마광이 《맹자(孟子)》의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여 맹자를 비판한 저술로 모두 11편이며 《온국문정사마공문집(溫國文正司馬公文集)》 권73에 실려 있다. 명도(明道)가……개정하였으며 명도(明道)는 북송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의 호이고, 이천(伊川)는 정이(程頤)의 호이다. 이들은 형제 사이로 이정(二程)이라 일컬어졌다. 오봉(五峰)의……많았고 오봉(五峯)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호굉(胡宏, 1105~1161)의 호이고, 남헌(南軒)은 장식(張栻, 1133~1180)의 호이다. 이들은 사제관계로, 장식이 호굉에게 사사하였다. 고정(考亭)이……하였다 고정(考亭)은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의 별칭이다. 면재(勉齋)는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황간(黃榦, 1152~1221)의 호로, 주희의 제자이자 셋째 사위이다. 회재(晦齋)가……개정하였고 회재(晦齋)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일부 구절의 차례를 옮기거나 바꾸어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편집하였다. 율곡이……변별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주희(朱熹)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학설에 근거하여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여기에 타는 것이다.'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氣)가 발하면 이(理)가 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을 부정하였다. 퇴계의……하였다 이황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해를 위해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를 저술하였고, 송시열이 《주자서절요기의》를 재정리ㆍ보완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라 하고서 권상하(權尙夏)에게 주며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마무리를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김창협은 노론 학인들과 토론하며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였다. 하환성재(河喚惺齋)가……상소 하환성재(河喚惺齋)는 하락(河洛, 1530~1592)으로, 환성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도원(道源)이다. 진주(晉州) 출신으로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가르쳤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상소를 올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등의 무고를 구제하였다. 천지에……된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이……있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하늘이……위해서이다 비태(否泰)는 《주역》의 〈비괘(否卦)〉와 〈태괘(泰卦)〉를 말하는데, 〈비괘〉는 건괘(乾卦 ☰)가 위에 있고 곤괘(坤卦 ☷)가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지 않아 막히는 상이고, 〈태괘〉는 이와 반대로 건괘가 아래에 있고 곤괘가 위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여 통하는 상으로, 세도의 비색(否塞)함과 태평(泰平)함을 뜻한다. 이 말은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이규(李槼)ㆍ유직(柳稷) 1650년(효종1)에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다시 주장하자, 이이에 대해서는 "천륜을 끊고 불가로 도망하여 숨었다."라고 비난하고, 성혼에 대해서는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도 임금이 파천(播遷)하던 날 달려오지 않았다."라고 비난하며 반대 상소를 올린 900여 명 중 대표 인물들이다. 《孝宗實錄 1年 2月 22日》 세……호랑이 세 사람이 저자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된다는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로,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자꾸 말하면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다.《淮南子 說山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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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오의 자에 대한 설 文敬五字說 사문(斯文) 문재희(文載熙)가 처음에는 경오(敬於)를 자(字)로 삼았는데, 대체로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169)에서 취하였는데, 어느날 내가 '오(於)'를 '오(五)'로 고치기를 권하여 곧 경오(敬五)가 되었다. 경오(敬五)가 말하기를, "자(字)에 설(說)이 있는 것은 옛 법도입니다. 저를 위해 설명을 덧붙여 그 뜻을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경오는 내 고향의 선사(善士)170)이다. 평소에 아끼고 우러렀기에 굳이 사양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망녕되이 고친 것이 있건만 감히 고치게 된 뜻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겠는가. 무릇 학문의 도는 단지 지선(至善)의 소재를 밝히고 지선(至善)의 경지에 머물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선의 소재를 밝히는 방도는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반드시 거듭 쌓이고 계속된 다음에야 그 공을 알 수 있으며, 지선의 경지에 머무는 방도는 막혀 있는 채로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이르지 않고 반드시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기른 다음에야 힘을 쏟을 수 있다. 이것은 집희경지(緝熙敬止) 이 네 자에 이미 남김없이 전부 담겨있다.그러나 선후 완급(先後緩急)의 순서에 적합하지 못하면 이른바 '밝힌다[明]'라는 것은 바람을 움켜잡고 물에서 달을 건지려고 생각하게 되고 이른바 '머문다[止]'라는 것은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돕는171) 우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집희경지(緝熙敬止)의 아래 문구에 '임금이 되어서는[爲人君]' 이하 다섯 가지의 세목172)이 있게 된 까닭이다. 이 다섯 가지는 바로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으로 손을 대고 첫걸음을 내딛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약여(躍如)173)하지 않겠는가.'희(熙)' 자로 이름을 짓고 '경오(敬五)'를 자로 정하였으니 그 뜻이 서로 의지하고 그 공부가 번갈아 갖추어져 체(體)가 있으면 용(用)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수 있다. 경오는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진하기 바란다. 이른바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지만 도가 거기에 있다."174)라는 말도 또한 처음부터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文斯文載熙。表德初以敬於。蓋取於緝熙敬止之語也。一日余勸其改於以五。卽敬五也。敬五曰。字之有說古也。願爲之敷衍其義也。夫敬五吾鄕善士也。尋常愛仰。有難牢讓。況妄有所改。而敢不輸道其改之之意耶。夫學問之道。只是明夫至善之所在。而求止乎至善之地。明之之道。非一日頓悟之謂。必積累繼續而後。可見其功止之之方。非膠滯不顧之謂。必莊敬持養而後。可以爲力。此緝熙敬止四字。已說盡無餘蘊矣。然非有以適於先後緩急之序。則所謂明者。有捕風撈月之想。所謂止者。有揠苗助長之患。此緝熙敬止下文。所以有爲人君以下五者之目也。五者是人生日用平常切近之地。而所以示人下手發足之方。其不躍如乎。名之以熙。字之以敬五。其義相須。其功交備。可以有體而有用有始而有卒矣。願敬五顧名思義勉勉循循。則所謂不下帶而道存。亦未始非此耳。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 《시경》 〈문왕(文王)〉에 "심원하도다, 우리 문왕이시여. 아, 실로 계속해서 공경하는 덕을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煕敬止.]"라고 하여 문왕의 덕을 칭송한 말이다. 선사(善士)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善士), 즉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한 고을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한 나라의 선사일 경우에는 한 나라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일 경우에는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또 옛사람을 숭상하여 논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싹을……돕는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이……세목 《대학》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목목한 문왕이여, 아! 계속하여 밝혀 공경하여 머무르셨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무르시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무르시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머무르시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머무르시고, 나라 사람과 사귈 때는 믿음에 머무르셨다."라고 하였다. 약여(躍如)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군자는 활을 당기고 쏘지 않으나, 약여하여 중도에 서 있거든 능한 자가 따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표현이다. 시선이……있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말은 평이하면서도 뜻은 심원한 것이 좋은 말이고, 지키기는 간단해도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 좋은 도이니, 군자의 말은 눈앞의 일상을 얘기하지만 거기에 도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의 주에 "옛사람들은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리띠 위는 바로 눈앞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지극히 가까운 곳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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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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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일신재집 권13 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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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온의 자설 李士溫字說 이씨(李氏)의 아들 기휴(基休)가 관례를 치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표덕(表德 자(字))을 물었다. 내가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사물은 기본을 먼저 세우지 않으면 용도를 베풀 곳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백색은 다섯 가지 채색의 기본이 되고, 단맛은 다섯 가지 맛의 기본이 되며, 씨를 뿌리는 것은 수확의 기본이 되고, 집터를 마련하는 것은 집을 짓는 기본이 된다.《시경》에 이르기를, "온후하고 온후하여 공손한 사람은 덕의 기본이 된다."27)라고 하였다. 온후하고 온후하다는 것은 또한 덕에 나아가는 기본이 되는데,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의 큰 덕을 '인(仁)'이라 하니, '생'과 '인'은 단지 온후한 뜻이다. 만약 항상 마음속에 있는 온후한 뜻을 보존할 수 있다면 드러날 때에 이르러 자연히 드러날 것이고, 강단(剛斷)할 때에 이르러 자연히 강단할 것이며, 수렴할 때에 이르러 자연히 수렴할 것이다. 그러므로 〈순전(舜典)〉에 이르길, "온후하고 공손하고 성실하고 독실하시다."28)라고 하였고, 《노론(魯論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온후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셨다."29)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온후하면서도 엄숙하셨다."30)라고 하였으며, 〈상송(商頌)〉에 이르기를, "아침저녁으로 온후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정성스럽게 하였다."라고 하였다.예로부터 성인의 도를 칭송하여 서술한 자는 온후함을 우선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온후함이 덕의 기본이 되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내가 특별히 '온후하다'는 글자를 들어 기휴를 위해 자로 삼았으니, 사온은 힘쓰기를 바란다. 李氏子基休冠已久矣。一日問其表德於予。予竊念天下之物。基不先立。用無所施。是以白者五采之基。甘者五味之基。播者肯穫之基。堂者肯構之基。詩曰。溫溫恭人。維德之基。溫溫者亦進德之基也。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德曰仁。生也仁也。只是溫厚底意思。若常存得溫厚意思在這裏。到宣著時。自然會宣著。到剛斷時。自然會剛斷。到收斂時。自然會收斂。故舜典曰。溫恭允塞。魯論曰。溫良恭儉讓。又曰。溫而厲。商頌曰。溫恭朝夕。執事有恪。自古稱述聖人之道者。無不以溫爲先。溫爲德之基者。不其較如乎。予特擧溫字。爲基休字之。願士溫勉之。 온순하고……된다 〈대아(大雅) 억(抑)〉에 보인다. 온화하고……독실하시다 순 임금의 덕을 표현한 말이다. 온순하고……겸양하셨다 자공(子貢)이 공자의 덕을 형용한 말로,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셨다 공자의 덕을 표현한 말로, 《논어》 〈술이(述而)〉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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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의 자설 士沃字說 계옥(啓沃)은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한 말인데33), 지금 군이 '계(啓)'로 이름을 삼고, '옥(沃)'으로 자(字)를 삼았으니, '계옥' 두 글자는 군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옥할 바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사자(四子)와 육경(六經)34)은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요법 아닌 것이 없으니, 자신의 마음을 계옥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계옥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거칠고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방법이 아니고, 지리멸렬하고 맛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방법이 아니니, 반드시 글자에서 그 뜻을 구하고 구절에서 그 뜻을 구하여 마음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장중함과 공경함으로 보존하고, 젖어들고 노님으로 기른다면 이것이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것에 거의 괜찮을 것이고,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 때에도 계옥하는 직임을 담당하여 장맛비로 삼게 하고 배와 노로 삼게 하는 것35)이 옛날에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啓沃。是高宗命說之辭也。今君啓以名之。沃以字之。啓沃二字。是君平生所擔負也。然則可不深思其所以啓沃者哉。四子六經。無非啓沃吾心之要。不啓沃吾心。而能啓沃人之心者。有之乎。鹵莽厭煩。非所以啓沃吾心也。滅裂忘味。非所以啓沃吾心也。必須字求其義。句求其義。會之於心。體之於身。莊敬以存之。涵游以養之。則此其啓沃吾心者。庶乎其可。而前頭際遇。亦可以擔當啓沃之任。使霖雨舟楫。不至專美於古也。 계옥(啓沃)은……말인데 계옥은 정성을 다 바쳐 임금을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을 재상으로 삼고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내 마음에 대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說命上》 사자(四子)와 육경(六經) 사자는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의 언행에 관계된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가리키고, 육경은 유가(儒家)의 경전인 《시경》, 《서경》, 《주역》,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를 이른다. 장맛비로……것 은나라 고종이 부열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일 큰 냇물을 건넌다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을 것이며, 만일 큰 가뭄이 들면 그대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說命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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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유고》 서문 芝南遺稿序 이 책은 고(故) 처사(處士) 지남공(池南公)의 유고(遺稿)이다.84) 공은 일찍부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뜻을 품었으나 끝내 그럴 기회를 만나지 못하자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학을 궁구하여 의로운 행실이 드높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10여 년 뒤에 맏아들 승우(承愚)85)가 유묵(遺墨)을 수습해 적은 분량의 책을 만들고서 아우 승일(承一)을 보내 욕되게도 나에게 현안(玄晏 서문)을 부탁하였다.아, 부모님이 직접 심고 가꾸어 손때가 묻어 있는 뽕나무와 가래나무조차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사용하여 입 기운이 남아있는 그릇과 잔으로는 물도 마시지 않는데, 하물며 이 유고는 부친의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고, 생각과 가르침이 남아있는 것이니,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자손이 진귀한 보물처럼 보호하고 소장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어버이를 여의고 외롭게 지내면서 음성과 모습이 더욱 멀어진 날에 미칠 수 없는 부모에 대한 끝없는 슬픔을 위로하고, 마치 보이는 듯, 살아계시는 듯 느껴지는 정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있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이 사당에 어버이의 글을 소장하고, 제사에 어버이의 가르침을 진설했던 것이 이런 뜻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이 유고는 권질(卷帙)이 간략하여 번다하지 않고, 문체가 질박하여 화려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말과 뜻은 진실한 마음에서 편편이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단지 한 집안의 자손들만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는 바탕이 될 뿐만이 아니니, 돌아가서 사우(士友)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此故處士芝南李公遺稿也。公夙抱經濟。終不見遇。而白首窮經。行義偉然。及其歿而後十餘年。胤子承愚。收拾遺墨。爲若干編。伻其弟承一。辱有玄晏之托。嗚呼。桑梓手澤之所經。而不敢慢焉。杯圈口澤之所存。而不能飮焉。況此精神心術之所寓。謨訓之所貽。而孝子慈孫寶護珍藏之心。爲何如耶。在風樹孤露。音容愈遠之日。所以慰靡逮網極之痛。而寓如見如在之情者。不可謂不在於此矣。古人之廟藏其書。祭設其訓。非此意耶。然是稿也。卷帙簡而不繁。文體質而不華。其立言命意。無非自赤際中片片出來。不但爲一家子孫寓慕之資而已。歸而與士友共之也。 이…… 유고(遺稿)이다 처사(處士) 지남공(池南公)은 이지호(李贄鎬, 1836~1892)로, 지남은 그의 호이다. 광주 이씨이고, 자는 동현(東賢)이며,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유고(遺稿)는 《지남집(芝南集)》을 말한다. 서문은 정의림(鄭義林)이 썼고, 발문은 윤자현(尹滋鉉)과 정시림(鄭時林)이 썼다. 아들 승우(承愚)가 1967년에 간행하였다. 1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활자본이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http : //gjsgcc.or.kr 검색일 : 2022. 3. 7.》 승우(承愚) 1855~1919.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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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집》86) 부록의 서문 晩羲集附錄序 정씨(程氏)는 중앙에서 활동하고, 영중(瑩仲)은 남동부에서 생장하여 서로의 거리가 먼데도 오히려 〈책심문(責沈文)〉을 지어 자신을 꾸짖었는데87), 나는 같은 고을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한 번도 만희(晩羲) 선생의 문하로 나아가 뵙지 못했으니, 만약 형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찌 단지 자신을 꾸짖었을 뿐이겠는가.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가 바로 내가 성동(成童 15세)이 될 무렵이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에 선생의 이름을 알았고, 장난치며 뛰어다녔을 때에 선생에 대한 풍문을 들어서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할 뿐만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하며 질병이 많아서 평소의 생활을 답습한 채 세월만 보내고 말았으니, 어찌 삼성(參星)과 진성(軫星)88)처럼 서로 마주하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을 줄 알았겠는가. 그러나 큰 종은 두드림이 끝나도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소리는 여전히 멀리 퍼지고, 사방을 비추는 촛불은 불이 꺼져도 심지에 남아 있는 불빛은 여전히 오래 탄다. 마을의 장로와 당시 문하에 있던 선비들을 따라 좇으면서 선생께서 주신 가르침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매우 얕겠는가.선생의 족손(族孫)인 재경(在慶)이 유고를 편집하고 목판에 새겨 간행하니, 이는 진실로 사림(士林)의 다행스런 일이다. 내가 변변찮은 식견으로 진실로 감히 이 일에 참여하여 들을 수 없지만, 평소의 뜻으로 헤아려보건대 또 한마디 말을 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程氏作於中土。瑩仲生長東南。相去遠矣。而猶作責沈文以自訟焉。義林居在同鄕。一未造謁於晩羲先生之門。若以瑩仲視之。則豈但自訟而已哉。嗚呼。先生卽世之日。卽義林成童左右歲也。孩提知名。遊戱聞風。不啻充然于中。而稚弱多疾。居常因循。豈知參軫不相待。蕪鴻不相及。有若是哉。然洪鍾罷叩。遺音尙遠。旁燭斂照餘輝猶久。其所以從逐於鄕里長老當日及門士。而受先生之賜。又豈淺淺哉。先生族孫在慶。編輯遺稿。鋟繡棗梨。誠士林之幸也。余以無狀。固不敢與聞於斯役。而揆以平素之意。又不可無一言以志慕仰之誠云爾。 만희집부록 《만희집(晩羲集)》은 화순 능주 출신의 조선 후기 학자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문집이고, 부록은 저자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12권, 부록 2권, 합 14권 6책이다. 1895년에 후손 재경(在慶)이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과 이건창(李建昌)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성대영(成大永)·안철환(安澈煥)·재경 등의 발문이 있다. 정씨(程氏)는……꾸짖었는데 정씨(程氏)는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程顥)로, 낙양(洛陽) 사람이고, 영중(瑩仲)은 북송의 유학자인 진관(陳瓘, 1057~1122)으로, 사현(沙縣) 사람이다. 진영중이 당대의 대학자인 명도(明道) 정호를 몰라보고 범순부(范淳夫)에게 물은 일을 부끄럽게 여겨, 공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라서 자로에게 물은 초나라 섭현의 심저량(沈諸梁)의 고사에 견주어 자신을 책하는 내용의 〈책심문((責沈文)〉을 지었다고 한다. 《書言故事》 삼성(參星)과 진성(軫星) 28수(宿) 가운데 하나로, 삼성은 서방에 있고, 진성은 남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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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예의를 생략합니다. 생가(生家)의 왕부인(王夫人 조모)의 상사(喪事)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데서 나왔습니다. 삼가 효성스러운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한 데다 또다시 풍수(風樹)의 탄식41)을 하는 나머지 그 애통한 슬픔이 분명히 몇 배는 될 것일 터인데 찾아가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버이를 모시는 복체(服體)42)는 어떠하신지요? 원부(院府)에 계신 형제 어르신들은 애절(哀節)을 어떻게 지탱하고 계신지요? 산지(山地)에 과연 뛰어난 점쟁이가 있어 장례를 지낼 길일을 택하셨는지요? 매번 소식을 듣고 싶었습니다. 의림(義林)은 지난달에 사문(師門)에 일이 있어 영남(嶺南)으로 가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어른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방장(方丈)의 산수(山水) 사이에서 여러 명승지를 달포 가량【旬月】 노닐었습니다. 영남과 호남에서 모인 자들이 역시 무려 백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그대의 당숙(堂叔)과 그대가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한 사람이 모자란다는 탄식43)이 없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산(艾山) 어른은 이별할 적에 또한 이러한 뜻으로 간곡하게 부탁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이 말을 나를 위해 경립(景立) 숙질(叔姪)에게 전해주시게.……"라고 하셨습니다. 영남(嶺南)의 발문(發文)에서 말한 것은 이미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하려면 글이 매우 길어질 것이니 제기할 수가 없겠습니다. 오직 훗날 만나서 회포를 풀어볼 뿐입니다. 省禮。尊生庭王夫人喪事。出於千萬料外。伏惟孝心純至且在風樹之餘。其哀痛感愴。必有倍蓰者。爲之慰溯不任。未審侍愉服體何如。院府昆季丈哀節。亦何以支持耶。山地果有宿占。而襄奉亦有定日否。每庸願聞。義林月前有事師門。作嶺南行。得與勉庵丈及艾山溪南松沙諸名勝。作旬月之遊於方丈山水之間。而嶺湖會者。亦無慮百餘人。但尊堂叔及景立不與焉。不能無少一之歎。艾山丈臨別。亦以此意惓惓不已。而至曰。願以此言。爲我告于景立叔姪云云耳。嶺南發文云云。想已聞之矣。言之甚長。不能提起。惟在日後面敍耳。 풍수(風樹)의 탄식 춘추 시대 공자(孔子)가 길을 가는데 고어란 사람이 나무를 안은 채 슬피 울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고는 서서 울다가 말라 죽었다 한다. 이를 풍수(風樹)의 정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어버이 생전에 모시지 못하고 사후에 슬퍼하는 마음을 뜻하는 고사로 쓴다. 복체(服體) 상중에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물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한 사람이 모자란다는 탄식 원문은 '소일지탄(少一之歎)'인데, 이는 왕유(王維)의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라는 시에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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