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어버이의 병을 돌보는 상황이 아직 현저히 좋아지는 효과가 없는지요? 밤낮으로 모시고 지키느라 자고 먹을 겨를도 없을 것이니 그 애태우고 고생하는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속담에,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긴 병에도 효자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하루 이틀의 병이라면 누군들 정성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쌓여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난 이후에는 그 효도와 불효의 참된 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맹렬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 수가 있고,27) 난세(亂世)에 충신(忠信)이 드러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평생 동안 책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기를 위하여 큰 사업과 큰 의리에 쓰기 위함이니 이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편치 못한 바가 있으면, 끝내 생전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한이 될 것이니, 부디 힘쓰시기 바랍니다. 다음 달 초 열흘께 포천(抱川)의 인편이 있을 듯한데 소식을 들었는지요? 자인(子仁)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초지(草枝)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혹시 운람(雲藍)에게 나아간 것인지요? 장마가 그치지 않아 분명히 많이 지체될 터인데 걱정이 많습니다. 의림(義林)은 앞으로 봄이 오면 묵계(墨溪)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음강(陰江)28) 가에서 벗들을 만나 하루 동안 시원하게 회포를 풀 것입니다만, 경립과 함께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화암(華巖)에서의 약속이 멀지 않으니 경립은 며칠 동안 함께 바람을 쐴 계획을 함께할 수 없겠는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책을 보는 노력 또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다소의 의리(義理)를 쌓아두어 그때 질정(質正)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湯候尙無顯減之效否。晝夜扶衛。寢食無暇。其焦勞之狀。何以言喩。里言曰。長病無孝子。余謂長病有孝子。若一日二日之病。孰不致誠盡力。至於積月積年而後。其孝不孝之眞情可見。如疾風之勁草。亂世之忠信也。況平生讀書正爲此時用。大事業大義理。此外何有。一有未安。終爲生前難追之恨。勉之勉之。來月旬間。似有抱川便。聞之否。子仁諸人。自草枝尙未還。或爲前進於雲藍所耶。雨潦不止必多見滯。爲慮悶悶。義林向自當春到墨溪。回路會朋友于陰江之上。作一日暢須。恨景立不與也。華巖之約不遠。景立未可共爲數日溯風計耶。然則前此看書之功。亦不可少緩。須蓄積多少義理。爲其時就正之資也。 맹렬히 불어오는 …… 알 수가 있고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는 표현이 있다. 《舊唐書 卷63 蕭瑀列傳》 음강(陰江):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 앞을 흐르는 강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학생 구공 묘표 學生具公墓表 공의 휘는 택현(宅鉉), 자는 규여(揆汝)이다. 경전을 연구하고 학문에 힘쓰며,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조심하여 성대하게 우리 고장 선진(先進)의 반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은거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를 동소남(董召南)68)과 같이 하고, 규문을 정돈하기를 목예공(繆豫公)69)과 같이 하니, 향리에서 믿고 복종하기를 왕언방(王彦方)70)처럼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그 위의와 동작은 모두 하늘에서 본받은 것이다. 하나라도 지극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곧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부귀와 빈천에 구애되어 그 지조를 바꾸지 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대장부(大丈夫)가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많으면 뜻을 손상하고 허물을 보태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륜(經綸)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풍족함을 구하지 않아서 남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이를 가져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아, 한마디 말과 하나의 행동이 모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수 있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인데, 평장사 민첨(民瞻)이 중시조이다. 대대로 훌륭한 덕이 있었다. 조부는 삼락(三樂)이고, 부친은 훈(壎)이다. 모친은 아무 관향의 아무 성씨인데, 생몰 연대는 알지 못한다. 공은 능주(綾州)의 교촌(校村)에서 태어났고, 모년 모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옥치(加玉峙) 안산(案山)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로, 장만주(張萬柱)의 따님이고, 계배(系配)는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김창석(金昌錫)의 따님인데, 모두 부덕(婦德)이 있었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원(潤源), 익원(翼源), 인원(仁源), 복원(福源)이고, 딸은 최봉문(崔鳳文)에게 출가하였다.묘소에 오랫동안 묘표가 없었기에 현손 혁모(赫謨)가 지사(志士)라서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힘썼지만 성취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에 가문에서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혁모의 형 익모(翼謨)가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公諱宅鉉。字揆汝。窮經力學。飭躬謹行。蔚有聲稱于吾鄕先進之列。隱居養親似菫召南。閏閫齊整似繆豫公。鄕閭信服似王彦方。嘗曰。人爲萬物之靈。而其威儀動作。莫非天則也。一有不至。便不成人。又曰。人不以富貴貧賤而易其操。然後方可爲大丈夫。又曰。財者人之所須。而多則未有不損志而盆過。是以經紀調度。不求贏餘。有餘輒推以周諸貧乏。嗚呼。一言一行。皆可以爲法。曷不偉歟。具氏貫綾城。平章事民瞻。其中祖也。世有令德。祖三樂。考壎。妣某貫某氏。年號干支公生于綾之校村。某年月日終。葬于加玉峙案山亥坐原。配興德張氏萬柱女。系配靈光金氏昌錫女。皆有婦德。四男一女。男潤源翼源仁源福源。女崔鳳文。墓久無表。玄孫赫謨志士也。血力拮据。未就而歿。後二年。一門踵而成之。赫謨兄翼謨。以其家狀。俾余爲文云。 동소남(董召南) 당나라 때 안풍(安豐) 사람으로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내용을 읊었다.《小學 善行》 목예공(繆豫公) 예공은 한(漢)나라 목융(繆肜)의 자(字)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명이 재산과 가업을 함께하였는데, 각각 아내를 맞이한 뒤로 아내들이 마침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목융이 깊이 분노하여 문을 닫고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목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서 성인(聖人)의 법을 배움은 장차 풍속을 정돈하려 함인데, 어찌하여 그 집안도 바로잡지 못하느냐."라고 하자, 여러 아우와 그 아내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마침내 고마음을 바꾸어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後漢書 獨行列傳》 왕언방(王彦方) 언방은 후한(後漢) 때 학자인 왕렬(王烈)의 자(字)이다. 의로운 처신으로 부근에 이름이 나서 고을에서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왕열에게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王烈列傳》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18 卷之十八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행장(1) 行狀(1)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일전에 자인(子仁)과 여러 사람들이 우봉(牛峯)에서 와서 그대가 근래 자춘(子春)의 낙상(落傷)하는 우환32)을 겪었다는데 과연 그러한지요? 놀랍고 큰 걱정이 됩니다. 듣자하니 간행하는 사업은 끝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후를 도모하는 약속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아직 한 집안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천하와 국가의 일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옛날부터 지사(志士)들이 뜻을 품고 커다란 탄식을 하였던 부분입니다. 다만 저의 분수 상으로 자신에게 말미암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일단의 일이 있습니다. 힘쓸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 뿐입니다. 자신의 한 마음이 만약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을 말미암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따르지 않는 것은 나의 성의(誠意)에 따른 감동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옛 사람이 감히 다른 이에게 허물을 탓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바라건대 나의 벗께서는 우선 이 일을 제쳐 두고, 앞으로 예전에 배운 학업에 대해 날마다 과정을 세워 힘쓰십시오. 의림(義林)은 날마다 쓸데없이 분주하게 지내고 있어서 조금의 겨를도 없습니다. 다만 밤중에 촛불 아래에서 이처럼 적은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어찌 충분히 보충하겠습니까? 가련하고 또 가소롭습니다. 경립(景立)은 시간을 잘 도모하여 이 사람과 같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日昨子仁諸人。自牛峯來。爲傳左右近有子春下堂之憂。果爾否。驚慮爲多。聞刊事且未免終見緯繣。未知有後圖之期耶。此是何等好事。而尙未能見行於一門之內。況於天下國家之事乎。此自古志士所以齎志浩歎處也。但於吾分上。有由已而不由人一段事。所可勉者。只此而已自家一箇心。若不由自家。則何望其他人由自家意乎。又安知人不見從者。非我誠意之感。有未至乎。此古人所以不敢尤人者。願吾友姑爲倚閣此事。將來舊業。逐日作課程也。義林日日紛冗。無些少暇隙。只於夜中燭下。看得些少文字。此何足有補。可憐又可笑。願景立及時圖之。勿有後悔如此漢也。 자춘(子春)의 낙상(落傷)하는 우환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나오는 말로,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당(堂)을 내려가다가 발을 다쳤다.【下堂而傷其足.】"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낙청헌기 樂淸軒記 낙청헌(樂淸軒) 위공(魏公)은 천관산(天冠山)22) 산중에 은거하며 덕업을 닦고 의리를 행한 세월이 앞뒤로 57년이 되기에 호남의 선비들이 일제히 흠모하여 선배와 큰 덕망을 지닌 분으로 칭송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진실로 이미 어르신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지만, 단지 고루하게 집에만 있었기에 공의 헌(軒)에 올라 '낙청(樂淸)'이라 하게 된 뜻을 묻지 못했다.삼가 생각건대, 시세(時勢)는 쇠퇴함과 융성함이 있기에 풍속이 모두 순박할 수 없고, 기질은 아름다움과 악함이 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선할 수 없으니, 비록 맑음을 즐긴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느 곳에서 즐길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 즐기는 바가 풍기(風氣)와 형체 밖에 있어서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인가?정해년(1887) 겨울에 내가 선롱(先壠)의 일로 금릉(金陵)23)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단촌리(丹村里)에서 공을 뵈었는데, 그 집안을 살펴보니, 산림과 수석(水石), 정원의 돌과 궤석(几席)이 거울처럼 열려 있고 옥처럼 배열되어 한 점 티끌도 없이 깨끗하였다. 또한 백발에 화사한 얼굴로 높이 관을 쓰고 느슨한 띠를 두른 채 그 사이에서 사쁜사쁜 가볍게 거니는 모습이 표연(飄然)하여 마치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밤새도록 곁에서 모셨는데,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사이에서 나온 말씀들이 모두 지극하고 긴요한 것들이었고, 끊임없는 천기(天氣) 중에서 흘러나왔기에 더욱 나도 모르게 송연(悚然)히 옷깃을 여미었다.아, 풍속이 경박하여 온 세상에 탁류가 넘쳐나는데, 어느 누가 천관산 아래에 이처럼 깨끗한 한 곳이 있을 줄 알겠는가. 영원히 세속을 떠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비록 그 본심이 아닐지라도 한 조각 아교(阿膠)24)가 진흙 물결이 일렁이는 사이에서 쓸모가 없다면 나의 우물을 지키며 홀로 그 맑음을 즐긴다 한들 어느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가슴에 쌓은 경륜을 드러내지 않고, 담박하면서도 간명한 도를 스스로 감춘 것이 세상의 혼탁한 사람과 같지 않아 매우 구별되었는데, 공이 어찌 일찍이 그 맑음을 스스로 말한 적이 있었겠는가. 공이 오히려 감히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공의 맑음을 아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오직 남쪽 고을로 부임해 온 송석(松石) 송공(宋公)만이 한번 보고 알아서 그 헌에 '낙청'이라 썼으니, 낙청의 뜻을 송공이 아니면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지사(志士)가 서로 만나 어울리는 한 부분이다.나의 어리석음으로도 감히 그 사이를 엿보아 헤아리지 못하지만,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사사로이 염모하고 흠앙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이와 같이 그 대략을 기술한다. 樂淸軒魏公。隱居天冠山中。修德行義。前後五七十年。湖之士。翕然向之。稱先輩長德。余自童丱。固已艶聞。而但固陋屛居。未獲登公之軒。問所以樂淸之意。切念時有汚隆。俗不能皆淳。氣有美惡。人不能皆善。雖樂淸。其將何所可樂乎。抑其所樂。有在於風氣形殼之外。而匪夷所思者耶。歲丁亥冬。予以先壠事。往金陵。其歸謁公於丹村里。見其邱林水石。庭石几席。鑑開玉排。瑩然無一點塵累。而華顔白髮。峨冠博帶。婆娑其間。飄然若天仙降坐。予終宵侍側。而發於警咳提喩之間者。皆至言要語。自滚滚天機中流出。尤不覺悚然斂衽也。嗚乎。風澆俗漓。擧世淊淊。而誰知天冠山下有此一區乾淨哉。長往自潔。雖非其心。而一片阿膠。無所用於淈泥揚波之間。則守我井渫。獨樂其淸。孰謂不可哉。然含蘊不露。淡簡自晦。與世之汶汶者不似。大故逈別。則公何嘗自道其淸也。公猶不敢自道。況知公之淸者。幾人哉。惟松石宋公來莅南州。一見知之。題其軒曰樂淸。樂淸之意。非宋公孰能知之。此是志士相遇一副節拍處也。以余之愚。亦不敢窺涯其間。而但以耳目之睹記。不勝艶欽之私。謹述其梗槩如是云爾。 천관산(天冠山)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산이다. 금릉(金陵) 조선시대 김산군(金山郡)의 별호(別號)로 지금은 김천시에 속해 있다. 아교(阿膠) 혼탁한 물을 맑게 하는 약물이라고 한다. 《포박자(抱朴子)》 외편(外篇) 〈가둔(嘉遯)〉에 "얼마 안 되는 아교(阿膠)로는 황하의 흐린 물을 맑게 만들 수가 없다.[寸膠不能治黃河之濁]"라는 내용이 보이고, 주희가 친구 남헌(南軒) 장식(張栻)에게 준 〈수남헌(酬南軒)〉에서 "어찌 한 치의 아교로 천 길의 혼탁함을 구하겠는가.[豈知一寸膠, 救此千丈渾.]"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단계기 丹溪記 천관산(天冠山)25) 남쪽에 살고 있는 단계자(丹溪子)는 바로 내 만년의 벗인데, 하루는 어떤 객이 그곳을 들렀다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단계의 주인과 서로 알고 지냈으니, 또한 단계로 호를 명명한 뜻을 알고 있겠지요? 오색(五色)은 황색이 정색(正色)이 되고, 오채(五采)는 백색이 바탕이 되지만, 단색(丹色)은 정색도 아니고 바탕도 되지 않습니다. 주(周)나라 사람은 적색(赤色)을 숭상하였으되 단색을 말하지 않았고, 노성(魯聖 공자)은 주색(朱色)을 허여하였으되 단색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주인의 집은 청산(靑山)에 있고, 몸은 백옥(白屋)26)에 거처하고 있으며, 평일에 대하는 것은 누런 책[黃卷]이고, 만년에 얻은 것은 하얀 머리털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단색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취하여 편액으로 걸어 놓은 것인지요?" 하니, 내가 말하였다. "황암(黃巖) 위에 거처하였기에 두씨(杜氏)는 황암 처사(黃巖處士)라 한 것이고,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거처하였기에 허씨(許氏)는 백운 선생(白雲先生)이라 한 것인데27), 단산(丹山) 가운데 거처하는 자만 유독 단계의 주인이 될 수 없겠는가.나이가 기노(耆老)28)에 이르도록 두 부모가 모두 살아계신 경우는 예로부터 옛적에 오직 노래자(老萊子)29)와 서형중(徐衡仲) 등 몇 사람뿐이었는데, 지금 주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볼 수 있으니, 쌓아온 덕이 깊고 두텁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천하의 가장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흰 머리가 아롱져 빛날 때까지 기쁜 기색으로 부모님을 모시는 즐거움을 다하고 있으니, 이는 그 마음에 내재된 것도 단색이고, 밖으로 드러난 것도 단색이어서 사람과 만물에 응대하고 접할 때에도 크고 작은 일이 단심(丹心)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뿌리를 감추고 향기를 머금어서 고요하기가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 꿋꿋하게 세한(歲寒)의 절개30)를 지키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내가 알기에 호를 명명한 뜻이 본디 현재 거처하고 있는 지역에서 나온 것이지만, 기쁨을 표하는 마음과 경계를 부친 의리도 일찍이 그 가운데에서 함께 행해지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네. 객이여, 만약 주인을 만나거든 나를 위해 운당(篔簹)의 시31) 한 구절을 읊어주게나. " 라고 하였다. 冠山之陽有丹溪子。卽我晩年友也。一日客有經過而來者。謂余言曰。子與丹溪主人相知。亦知其丹溪命號之意耶。五色黃爲正。五采白爲質。丹則非正非質。周人尙赤而不言丹。魯聖與朱而不及丹。且主人家在靑山。身處白屋。平日所對者黃卷。晩年所得者皓髮。未知何有於丹。而取爲扁揭也。余曰。居於黃巖之上。而杜氏所以爲黃巖處士也。居於白雲之下。而許氏所以爲白雲先生也。則居於丹山之中者。獨不得爲丹溪主人耶。行年耆老。兩庭俱存。自古在昔。惟老萊子與徐衡仲數人而已。而今於主人。又見之矣。其非積累深厚。何以享此天下太上之樂也。白首班斕。恰愉盡歡。此其存於中者丹。而著於外者亦丹。以至酬人接物。大小大事。無非自丹心中流出。況晦根含薰。寂若無有。耿耿爲歲寒之守者。豈其偶爾哉。余知命號之意。固出於見在所居之地。而其識喜之心。寓警之義。亦未嘗不倂行乎其中也。客乎如見主人。爲我歌篔簹詩一絶。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백옥(白屋) 흰 띠로 지붕을 덮은 집이나 기둥과 들보에 채색을 하지 않은 집을 말하는 것으로, 평민(平民)이나 한사(寒士)의 집을 가리킨다. 허씨(許氏)는……하였는데 허씨는 원(元)나라 때의 이학가(理學家)인 허겸(許謙)으로, 원래 송(宋)나라 사람이었는데 나라가 망함에 따라 평생 벼슬하지 않고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며 스스로 호를 백운산인(白雲山人)이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백운 선생이라고 불렀다. 김이상(金履祥)에게 수업하였고, 주자의 학문을 추종하였으며, 사방의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元史 券189 許謙列傳》 기노(耆老) 나이 60세와 70세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 "나이 60세를 '기(耆)'라 하니 지시하여 부린다. 70세를 '노(老)'라 하니 집안일을 물려준다.[六十曰耆指使, 七十曰老而傳.]" 라는 구절이 보인다. 노래자(老萊子) 노래자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로 나이 70에도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고 한다. 《小學 稽古》 세한(歲寒)의 절개 당시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뜻을 지키고 있음을 비유한 말로, 공자(孔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子罕》 운당(篔簹)의 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스러움을 노래한 시이다. 주희가 젊은 시절에 운당포(篔簹鋪)를 지나다가 벽에 "빛나는 영지는 일 년에 세 번 꽃이 피는데, 나는 유독 어찌하여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하는가.[煌惶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는 시를 보고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4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그곳에 와서 당시의 시가 이미 없어졌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언뜻 지나가는 백 년 세월 얼마나 되랴. 세 번 꽃 피는 영지는 무엇을 하려는가. 말년에도 금단은 소식 없으니, 운당포 벽 위의 시가 거듭 한탄스럽네.[鼎鼎百年能幾時? 靈芝三秀欲何爲? 金丹歲晩無消息, 重歎篔簹壁上詩.]"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상산재기 觴山齋記 천관산(天冠山)32)은 본디 남쪽 지방의 명승지이고, 상산(觴山)은 그 산이 품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강과 산이 도와 분발하게 해서 예로부터 많은 위인(偉人)과 일사(逸士)들이 이따금 그 사이에서 머물러 지냈으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마을의 고사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죽은(竹隱) 위공 계창(魏公啓昌)은 산 아래에 사는 원로 대가(元老大家)로, 은거하며 의를 행하여 풍도와 자태가 뛰어났다. 하루는 산기슭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만년에 공부하는 장소로 삼고, 겸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는데, 대체로 달빛과 바람이 모이고, 산과 물이 합쳐져서 집의 기운이 맑고 상쾌하며, 창문에 스며드는 기운이 밝고 깨끗하였으니, 참으로 여기에서 웃고 이야기하며 거처하고 오르내릴 만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정성을 다하고 바쁘게 일한 것이 이미 본받을 만한 데 이른 것은 산수나 경치에 빠지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즐기기 위한 계책도 아니며, 또 문장을 지어 벼슬길을 구하기 위한 계책도 아니다. 단지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마음과 본성을 다스리고 길러서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정성을 다하며 그치지 않았던 뜻이다.선성(先聖 공자)이 말하기를, "무릇 효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부모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33) 하였으니, 이 집에서 노니는 자들이 각기 힘쓴다면 어찌 오늘날 도와 분발하게 하는 것이 지난날만 못할 줄 알겠는가. 天冠固南方勝區。觴山其懷抱中最勝處也。江山助發。自古多偉人逸士。往往盤旋於其間。輿地勝覽。洞中古事。班班可考。竹隱魏公啓昌。山下老宿也。隱居行義。風韻偉然。一日就山之麓。結構數椽。爲晩年藏修之所。兼爲諸子孫肄業之方。蓋其風月之會聚。山水之統合。軒宇之蕭灑。窓牖之明淨。信可以爰笑爰語。攸芋攸躋。雖然血心拮据。旣底于法者。非爲山水景物役也。又非文酒遊衍計也。又非纂組干進計也。只是講明義理。治心養性。以爲修身齊家之地。此其所以惓惓不已之意。先聖有言曰。夫孝者。善繼人之志。善述人之事。遊此室者。其各勉焉。安知今日之助發不如前日也。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무릇……것이다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달효(達孝)'라고 규정하며 말한 것으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하기 竹下記 죽하옹(竹下翁)은 내가 약관(弱冠) 시절에 교분을 맺었던 옛 친구이다. 임술년(1862) 봄에 서울에서 만났고, 이로 인하여 서로 따르며 여러 날 즐겁게 정담을 나누었는데, 이윽고 각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만나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 임인년(1902) 가을에 옹이 일 때문에 영귀정(詠歸亭)에 와서 만났는데, 하얗게 센 귀밑머리와 수염이 다시 옛적에 마주했던 모습이 아닌지라 슬픔과 위로의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떠나면서 죽하기(竹下記)를 부탁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옹의 뜻은 대나무에서 무엇을 취했을까?예전 모두 묘령(妙齡 스무살 안팎)의 청춘으로 태평무사한 때에 한묵(翰墨)과 문예(文藝)의 장에서 함께 상종했던 것이 어제의 일처럼 역력한데 그 사이 시속이 변한 지난 세월 동안 겪어온 풍상이 몇 번이겠으며, 상전벽해가 몇 번이나 일어났겠는가? 옹은 풍도와 기상이 시종 엄격하여 병들고 쇠약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병을 무릅쓰고 도보로 다니면서 무고를 밝히고 도를 지키는 의론을 창도하였으니, 이른바 '세한후조(歲寒後凋)34)'라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옹의 뜻은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나이와 정력이 더욱 들어가고 쇠약해질수록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마음이 바뀌기 쉽고, 세상의 변고가 끝이 없을수록 명예와 절개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때에 이러한 마음이 단청처럼 밝게 빛나니, 이 때문에 차군(此君)35)에 붙여서 마지막 자정(自靖)의 도36)로 여겼을 것이다. 이전에 이미 그러함이 이와 같았다면 이후에도 장차 그러할 것임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더욱이 절차탁마하여 날로 대나무와 같은 푸른 기상으로 나아가고, 또 위 무공(衛武公)37)처럼 늙어서도 나태하지 않는 자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나는 가죽나무나 참나무처럼 졸렬한 품질이어서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을지라도 단풍나무에 뻗어 있는 덩굴이나 겨우살이처럼 남아있는 풍교에 의지하여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데, 모르겠지만 기꺼이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竹下翁余弱冠舊契也。壬戌春。邂逅漢師。因以追從。數日款洽。旣而各還其家。不相見爲四十年。壬寅秋。翁以事來會于詠歸亭。皤然鬚髮。非復昔時相對。悲慰有不勝情。其發也。以竹下記託焉。未知翁之意何取乎竹也。曩也。俱以靑春妙齡。在昇平無事之時。與之相從於翰墨文藝之場。歷歷如昨日。而時變世劫之經過於其間者。爲幾番風霜。幾番滄桑也。翁風裁標致。終始彌礪。至於癃疾衰境。力疾徒步。以倡辨誣衛道之論。所謂歲寒後凋。非是之謂歟。但翁之意。則有不在是。正以年力愈邁。宿心易替。世變無窮。名節難保。此日此心。炳炳如丹。所以寓諸此君。視爲究竟自靖之道耳。已然於前者如是。則將然於後者。從可知矣。況切磋琢磨。日臻乎綠猗。又有如衛武公老而不怠者乎。余樗櫟劣品也雖不足惜而願得庇倚餘風以自植之如蔦蘿之施楓。未知以爲肯可否耶。 세한후조(歲寒後凋) 날씨가 추워진 뒤에 시든다는 뜻으로, 군자의 절개는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알 수 있음을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차군(此君) 대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남의 빈 집에 잠시 거처할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대나무를 빨리 심도록 다그쳤는데, 그 이유를 묻자 "하루라도 이 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자정(自靖)의 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 미자에게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사람마다 선왕에게 그 뜻을 바칠지니, 나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위 무공(衛武公)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의 제후로, 무공은 그의 시호이다. 그는 나이 95세 때에 조정에 포고문을 내려 "모든 벼슬하는 사람은 내가 늙었다고 여기지 말고 번갈아 나를 규간(規諫)하라."고 하면서 거처하는 곳마다 나태함을 경계하는 말을 붙였고, 또 〈억(抑)〉 시를 지어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였다고 한다. 《詩經 大雅 抑》 《國語 楚語上》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우헌기 愚軒記 사람들은 항상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말하고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이때의 어리석음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에 대한 일컬음이다. 공부자(孔夫子)가 안연(顔淵)을 일컬어 어리석다고 하였고38), 또 영무자(寗武子)를 일컬어 어리석다고 하였는데39), 이때의 어리석음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에 대한 일컬음이다.우헌 홍공(愚軒洪公)은 천태산(天台山)40)의 작약봉(芍藥) 속에 은거하여 고요하고 말없이 지내면서 세상에 대해서는 경영하는 것이 적었고, 사람에 대해서는 맞이하여 만나는 것이 적었으며, 일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적었다. 오직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것과 시를 짓고 예를 익히며 글을 짓는 것을 자신과 가족,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삼고서 명성이나 권세, 이익, 영달에 대해서는 더욱 담담하였다.기교를 부리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고, 통달한 자의 입장에서 봐도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을 일컫는 것인가? 아니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일컫는 것인가? 오직 말을 아는 자만이 이를 알 것이니, 굳이 애써 변별하고 해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공의 손자 병희(秉憙)가 나와 여러 해 종유하였기에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人有恒言。曰賢愚曰智愚。此愚是不賢不智之稱也。孔夫子稱顔淵愚。又稱寗武子愚。此愚是爲賢爲智之稱也.愚軒洪公。隱於天台之芍藥。恬靜簡黙。於世少營爲。於人少容接。於事少表襮。惟以耕稼漁樵詩禮文墨。爲身家子孫計。而於聲勢利達。尤泊如也。以奇巧者觀之。則可謂愚矣。以通達者觀之。則可謂愚矣。然則是愚也。乃不賢不智之稱耶。抑爲賢爲智之稱耶。惟知言者知之。不必苦苦辨解也。公抱秉憙。從遊有年。請爲之記。 공부자(孔夫子)가……일컬었고 안연은 공자의 제자인데, 공자가 일찍이 안연에 대해 말기를, "내가 안회와 함께 온종일 이야기를 하였으나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더니, 그가 물러간 뒤에 그 사생활을 살펴보았는데 그대로 행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도다.[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하였다. 《論語 爲政》 영무자(寗武子)를……일컬었는데 영무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로, 문공(文公)이 도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성공(成公)이 무도함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나아가 나라를 잃을 위험에서 구제하였는데, 공자가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따라갈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라갈 수 없다.[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하였다. 《論語 公冶長》 천태산(天台山)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위치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영지46)에게 답함 答吳永之 이전 편지에서 보내주신 문목(問目)은 참으로 천열(淺劣)한 제가 감히 입을 놀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만, 이택(麗澤)의 뜻47)에 있어서는 각각 자신의 견해를 말씀드려서 바른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략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보내오신 편지를 읽어보니 도리어 용납하여주시고 논박하면서 바로잡는 말씀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비설(鄙說)48)에 특별히 잘못된 부분이 없었던 것인지요? 비록 있더라도 차마 직언(直言)으로 공격하고 배척하지 못한 것인지요? 지금 하문하신 여러 조목(條目) 역시 감히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으니 부디 전일처럼 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제1단은 '의(義)와 짝하여 의(義)를 모은다【配義集義】'49)라고 하였으니, 대략적인 뜻이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의(義)와 도(道)에 짝한다는 것은 체(體)와 용(用)을 모두 들어서 말한 것이고 의(義)를 모은다는 것은 단지 공력을 들여야 할 부분【用功處】으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용(用)은 공부할 부분이 있고 체(體)는 공부할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어의(語意)가 두루 온전하지 못하고 공부에 누설되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체(體)와 용(用)에 비록 틈이 있더라도 어떻게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공부할 것이 없는 것이 공부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또 의(義)가 주가 되고 기(氣)가 주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의(義)를 모으는 것은 주가 되는 점으로 말하자면 의(義)이고, 의(義)에 짝하는 것은 주가 되는 점으로 말하자면 기(氣)입니다. 어떻습니까? 제2단의 '물망(勿忘)'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일삼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라.【必有事焉而勿正】'50)라고 했는데 대체로 규모와 의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心勿忘勿助長】'는 것은 친절(親切)하게 공부할 부분입니다. 이 1단은 본래 의(義)를 모으기 위해 말한 것인데 또한 이 마음의 존주처(存主處)로서 매우 절실하고 긴요합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께서는,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라는 것은,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鳶飛魚躍】'는 것과 같은 뜻이다. 더욱 체인(體認)하고 궁행(躬行)한 뒤에야 그 말의 뜻이 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시험 삼아 한 그루의 꽃나무를 보면, 생리(生理)가 두루 흐르고 조금도 쉼이 없는 것을 마음속으로 잊지 않는 것【勿忘】이라고 합니다. 털끝만 한 급박함과 억지스러움, 그리고 인위(人爲)를 받아들임도 없는 것을 억지로 조장하지 않는 것【勿助】이라고 합니다. 성인(聖人)이 덕(德)으로 들어가는 신묘함을 열어서 보여준 것이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말의 병통과 마음의 잃음을【言之病心之失】 보내주신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간(肝)에 속하고 귀는 콩팥【腎】에 속하는데 간과 신장이 조화를 잃으면 귀와 눈에 병이 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50묘(畝)의 땅에는 공전(公田)이 5묘이고, 70묘의 땅에는 공전이 7묘이며 100묘에는 공전이 10묘가 됩니다. 그리고 다만 여사(廬舍)에는 10묘, 14묘, 20묘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10의 세금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어진 자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부자는 어질지 않다는 것은,51) 대략 세운 뜻의 방향성을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부자들이 모두 어질지 않고, 어진 자들은 전부 부자가 아니라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규전(圭田)52) 역시 공전(公田)으로 백성들 사이에 있는 것인데 경(卿)․대부(大夫)의 제사에 쓰이는 경비를 대기 위해서 어떻게 세금을 다시 거둘 수 있겠습니까? 여부(餘夫)의 밭은 자력(自力)으로 경작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세금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진 사람이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직책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포괄하는 직책이 매우 넓은 것이고, 갑병(甲兵)과 전곡(錢穀)처럼 각각 하나의 직책이 있는 것과는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위와 직책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지, 지위가 있으면 반드시 직책이 없어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만 축내는 것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어진 자는 반드시 능력이 있지만, 능력 있는 자가 반드시 어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맹공작(孟公綽)53)과 같은 자는 어질지만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리(義理)의 성(性)은 좋은 도리(道理)이고 기질(氣質)의 성은 좋지 않은 도리라고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약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미 태어난 것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성(性)으로 부를 수 있으며, 이미 태어나면 어떠한 선(善)이 갖추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성선(性善) 두 글자는 1서 7편(一書七篇)54)의 강령(綱領)이니 어찌 다만 지언(知言), 양기(養氣)55)만을 일컫는 것이겠습니까? 계선(繼善)56)이라는 것은 비록 공자의 학설이지만 그저 조화(造化)가 발육(發育)하는 측면을 가지고 말하였기 때문에 성선(性善)의 설은 맹자(孟子)에게서 처음으로 나와 밝히지 못했던 의리를 확장하였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 조목의【條】 중요한 핵심에 대해서는 저같이 우매한 자가 감히 논할 바가 아니나, 저의 억측으로 논변하였으니 어찌 오류가 없음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더욱 깊이 생각하여 사실에 부합하는 논의를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前書問目。固知非淺劣所敢容喙。而其在麗澤之義。不可不各陳已見。俾歸於正。故略有云云。今讀來書。倒蒙領可而無一言駁正處。未知鄙說別無差失歟。雖有之而不忍直言攻斥耶。今於俯詢諸條。又不敢緘黙如此。幸加一一訂砭。勿似前日之爲。如何。第一段配義集義之云。大意固然。然配義與道。是統擧體用而言。集義特以用功處而言。若曰用則有做工夫處。體則無做工夫處。則語意不圓全。功夫有滲漏矣。體與用雖有間。而豈可謂專無工夫耶。所謂無工夫處是工夫者。此也。且云義爲主。氣爲主者。亦未安。當曰集義是所主而言者。義也。配義是所主而言者。氣也。如何。第二段勿忘云云。亦然。必有事焉而勿正。是大體規模。意思當如此。心勿忘勿助長。是親切下功夫處也。此一段本爲集義語。而亦於此心存主處。極爲要切。是故程子曰。勿忘勿助。與鳶飛魚躍底意同。更加體認躬行然後。方知斯言之有味也。試以一株花木觀之。生理周流。無少停息者。是勿忘也。無一毫急迫强排容其人爲者。是勿助也。此是聖人開示入德之妙。莫切於此矣。言之病。心之失。來示得矣。比如目屬肝。耳屬腎。肝腎失和。則耳目受病也。五十畝則公田爲五畝。七十畝則公田爲七畝。百畝則公田爲十畝。而但廬舍有十畝十四畝二十畝之分。故合於十一之稅耳。爲仁不富。爲富不仁。槪以立心向背言之。豈有富皆不仁。仁皆不富之理耶。圭田亦是公田之在民間者。以供鄕大夫祭祀之用。有何更征耶。餘夫之田。以其自力耕作者。則其有征必矣。賢者在位。能者在職。如三公論道經邦所包甚廣。非如甲兵錢穀。各有一職之比也。故以位與職分言之。非謂位必無職而尸位素餐也。賢必有能。能不必有賢。然如孟公綽者。可謂賢而不可謂能也。義理之性。是好底道理。氣質之性。是不好底道理。此言誠是。若以未生已生分言之。則不可未生何性之可名。而已生何善之不具。性善二字。此是一書七篇之綱領。豈特知言養氣之謂歟。繼善雖是孔子之說。而只就造化發育處言。故謂以性善爲始出於孟子。而擴所未發耳。諸條肯綮。有非愚昧昕敢上下者。而臆說取辨。安知保無疪纇。更加細思。以示稱停之論。如何。 오영지(吳永之) 오영지의 이름은 장섭(長燮)이다.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崔益鉉)의 문집에 오장섭에게 답하는 편지가 남아있어 이들 사이의 교유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택(麗澤)의 뜻 이택(麗澤)은 친구 사이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학문을 강습한다는 의미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는 이것으로 붕우 사이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다. 비설(鄙說) 자신의 학설에 대한 겸칭이다. 의(義)와 짝하여 의(義)를 모은다【配義集義】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속성을 말한 부분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의 속성은 의(義)와 도(道)에 짝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난다. 의는 어느 날 갑자기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허전함이 있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게 된다.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則餒矣.】"라고 하였다. 반드시……기대하지 말라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온 구절로,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일로 삼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는 내용이 있다. 어진 자는 …… 않다는 것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부자는 어질지 않고, 어진 자는 부자가 되지 못한다.【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라는 말이 양호(陽虎)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규전(圭田) 고대에 국가에서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가 제사를 지내는 데 소요되는 경비에 쓰도록 나누어 준 전지(田地)를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경(卿) 이하는 반드시 규전(圭田)이 있는데, 규전의 면적은 50무(畝)이다."라고 하였는데, 조기(趙岐)의 주에 "고대에 경으로부터 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규전 50무를 받았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는 경비를 제공하는 것이다. 규(圭)는 정결하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맹공작(孟公綽)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이다. 청렴하고 욕심이 적었지만 재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공자가 "맹공작이 조씨와 위씨의 가신(家臣)의 우두머리가 되기에는 넉넉하지만 등나라와 설나라의 대부가 될 수는 없다.【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라고 하였다. 1서 7편(一書七篇) 《맹자》를 가리킨다. 《맹자》는 원래 7편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한(後漢)의 조기(趙岐)가 주석을 달고, 매 편을 각각 상하(上下)로 나누어 총 14편으로 만들었다. 지언(知言), 양기(養氣) 모두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언(知言)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진의를 잘 파악하는 것이다. 양기(養氣)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양기(養氣)로써, 밖으로부터 의가 들어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행실을 쌓아 자신의 마음에 아무 부끄러움이 없는 충만함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계선(繼善)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한 번 음(陰)이 되고 한 번 양(陽)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일음일양(一陰一陽)을 계속하여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것이 선이고, 사물이 생겨나면서 갖추고 있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홍윤심【승원】에게 답함 答洪允深【承源】 학문은 치지(致知)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치지(致知)는 독서(讀書)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성현(聖賢)의 마음 씀과 행한 일과 선악(善惡)의 본받고 경계할 만한 것이 모두 책에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 편(篇)에서는 한 편(篇)의 뜻을 구하고, 한 장(章)에서는 한 장(章)의 뜻을 구하고, 한 구(句)에서는 한 구(句)의 뜻을 구합니다. 만약 《소학(小學)》을 읽는다면 마땅히 물뿌리고 비질하며 청소하는 것과 손님을 응대하는 일을【灑掃應對】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어버이를 친애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을【愛親敬長】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대학(大學)》을 읽는다면 마땅히 명덕(明德)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신민(新民)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한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째서 이겠습니까? 아무런 의심이 없이 마음에 보존시키고 몸에 체득하고서 하는 일에 베푼다면 이것이 궁리(窮理)가 귀한 것이고 학문(學問)에서 우선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장구(章句)의 말단에 뜻이 막히고 음독(音讀)의 사이에 마음이 빠져버려서 천착(穿鑿)하고 부회(傅會)하면 그 아는 바가 옛 글을 외우기만 하는 천박한 학문에 불과하게 될 뿐이니, 이러한데도 어찌 실제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있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보내주신 별지(別紙)는 모두 간절히 묻고 가까운 데서 생각하여【切問近思】 의논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전혀 그러한 병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혹 오랫동안 사색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입으로 말하는 병폐가 있다면 이 뜻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답(問答)에 대해 따로 말씀드린 내용은 급하게 붓을 휘둘렀기에 아마도 잘못된 것이 많은 듯합니다. 그 중에서 답해드렸던 자최(齊衰)65)에 대한 한 조목은 더욱 이치에 어긋나기에 생각하면 황송합니다. 부자(夫子)께서 특별히 자최(齊衰)를 거론한 것은 가벼운 것을 들어서 무거운 것을 보인 뜻입니다. 보내드렸던 답지(答紙)는 즉시 지워 없애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사덕설(四德說)」은 안배하고 보충한 것이 많은데 글자를 배치하는 것에 대한 병통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요(大要)는 혹 기(氣)를 리(理)로 인식하고 혹 정(情)을 성(性)으로 인식하는 것인데 제 생각에는 대략 점평(點評)을 가하며 살펴주셔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이 또한 잘못된 것이 없을 줄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사단칠정(四端七情)66)은 모두 생각할 겨를 없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다만 선(善)만 있는지, 선악(善惡)을 겸하는지의 다름이 있을 뿐이니, 혹 그 병통으로 인하여 공격을 하고 그 밝음으로 인하여 계도하는 것입니다.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67)라고 한 것과 '재물을 좋아하고 색(色)을 좋아한다.【好貨好色】'68)는 것과 같은 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學莫先於致知。致知以讀書爲先。以聖賢用心行事。及善惡之可效可戒者皆。在於書故也。一篇求一篇之義。一章求一章之義。一句求一句之義。如讀小學。則當思灑掃應對當如何。愛親敬長當如何。讀大學則當思明德當如何。新民當如何。又思所以當如此者。是何故。使之了了無疑。存之於心。體之於身。施之於事。此窮理之爲貴。而爲學問之先者也。若或滯意於章句之末。溺情於音讀之間。穿鑿傳會。則其所知者。不過爲記聞口耳之學而已。尙何望其有助於實用哉。所示別紙。皆切問近思合商量處。然其間不可謂全無此病。又或有不能耐久思索。而徑遽出口之獘。此意不可不知也。如何。問答別告。悤卒信筆。想多謬妄。其中答齊衰一條。尤爲悖理。追念惶悚。夫子之特擧齊衰者。是擧輕見重之意也。所去答紙。卽爲抹去如何。四德說多安排牽補。其下字之病。不可枚擧。大要或認氣爲理。或認情爲性。以鄙意略加點評。覽可知矣。然安知鄙意亦無差謬也。更詳之也。四端七情。皆是不暇思慮而發。但有善與兼善惡之不同。或因其病而攻之。或因其明而納之。如何必曰利及好貨好色之語。可見。 자최(齊衰) 오복(五服)의 하나이다. 조금 굵은 생 베로 만드는데 아래 가를 좁게 접어서 꿰맨 상복이다. 부모상에는 삼 년, 조부모 상에는 일 년, 증조부모 상에는 다섯 달, 고조부모 상에는 석 달을 입고, 처상(妻喪)에는 일 년을 입는다.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가리킨다.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 상에 나오는 구절로, 사람이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일을 행하면 얻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따르게 마련이며, 오직 인의(仁義)에 입각해서 일을 하라는 취지의 발언이다. 재물을 좋아하고 색(色)을 좋아한다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 하에 나오는 구절로, 맹자가 제선왕에게 재물과 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백성들과 함께 누릴 것을 제안한 발언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잡저 雜著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고경부에게 주다 書贈高經夫 옛사람이 말하기를, "뜻[志]이 장수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뜻에 달려 있다." 하였다.  꽃을 구경하고 버들가지를 꺾으며 물이나 나무를 운반하는 것은 소소한 일이지만 뜻을 세우지 않고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없는데, 하물며 학문을 하는 것은 큰 공부이고, 성현이 되는 것은 큰 사업이니, 뜻이 없이 얻을 수 있겠는가.천지간에 천성인 형색을 실천하고 본성을 다하여 천만년 오래도록 표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만이 이러한 사람일 뿐이니, 나 또한 성인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을 자기의 분수에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삼고, 자신을 작게 여겨 뒤로 물러나려는 마음이 조금도 들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뜻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뜻을 세우는 것이 학문의 첫 출발점이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세운 뜻을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않고 태만하거나 중단하면 연지로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새기는 일인들 어찌 이룰 수 있겠는가. 이는 뜻을 지키는 것이 학문의 요법(要法)이 되는 이유이다.뜻은 형체가 없으니, 그것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가지며, 용모를 바르게 하고 생각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을, 마치 상제(上帝)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전쟁의 진지(陣地)에 있는 것처럼 하는 것들이 모두 뜻을 지키는 방법이니, 진실로 뜻을 세움이 높고 지킴이 확고하며, 또 사색하고 실천해 나가는 공부로 수레의 바퀴와 새의 날개처럼 서로 닦고 도와서 오래오래 그치지 않는다면 성인처럼 되는 것을 바라는 공부에 가깝지 않겠는가.고군(高君) 경부(經夫)는 용모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진중하며 말과 논변에 근거가 있었다.나는 오래전부터 그가 뜻을 지닌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부족하나마 그에 대해 들었던 것을 외어서 소원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의 만분의 일이나마 답한다. 古人曰。志帥也。又曰。功成惟志。夫看花折柳。運水搬柴。小小事。未有志不立而能有成者。況學問大功夫。聖賢大事業。可以無志而得之乎。天地間。能踐形盡性而爲千萬古標準。惟聖人是己。我亦以希聖爲己分合做底事。不使有一毫自小退托之心。便是立志。此立志所以爲學問之初着也。然持之不固。怠忽間斷。則脂畵氷鏤。曷以有成。此持志所以爲學問之要法也。志無形。其持之當如何。正衣冠。尊瞻視。動容貌。整思慮。如對上帝。如在戰陣。皆是持之之法。苟能立之高。持之確。又以思索踐履之功。交修而夾輔之。如車之輪鳥之翼。久久不息。則於希聖之功。不其幾矣乎。高君經夫容止端詳。言論有據。吾知其爲有志之人久矣。聊誦所聞。以塞其不遐之萬一。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강여명과 유계뢰, 하로익에게 써서 주다 書贈姜汝明柳季雷河魯益 사군자가 마음을 세우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는 본래 그 방도가 있으니, 평탄하거나 험난하다고 해서 나아가거나 물러나지 않고, 영화롭다거나 괴롭다고 해서 나아가거나 등지지 않아서 넘어지고 떠도는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 비록 만 가지로 매우 많다 하더라도 나의 의리를 행하는 것은 본디 그대로이다. 그러나 학문으로 앎을 열고 성경(誠敬)으로 마음을 길러서 지킴을 견고하게 하고 행함을 독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뜻이 기운을 통솔하지 못하고 기운이 몸에 충만하지 못하여 평상시 생활하는 사이에 저절로 뜻과 기운이 쇠퇴하고 게을러져서 열에 칠팔은 새어 버리는 폐단이 있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인데, 하물며 창졸간의 위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힘을 내어 우리가 지키던 것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읽고 배 안에서 《대학》을 읽었다는 것이 오활한 유자(儒者)의 졸렬한 방법인 것 같지만, 진실로 환난에 처해서 환난대로 행하는 제일의 일인 것이다.세 군이 사문(師門) 애산(艾山)22)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의 명으로 오백 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부춘(富春)의 영귀정(詠歸亭)을 찾아온 것은 대체로 세한(歲寒)의 풍상에 매우 고생하여 영결(永訣)을 알리기 위한 뜻이었다. 떠나려 하면서 한마디 말을 해 줄 것을 청하니, 아, 비록 군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구구하게 서로 돈후하게 대하는 뜻이 또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다만 세상의 변고가 이와 같아서 앞으로 만날 일을 알 수 없으니, 우리들이 서로 알려 주고 권면하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부하다고 해서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 준다면 다행이겠다. 士君子立心行己。自有其道。不以夷險而前却。不以榮悴而向背。以至顚沛流離。雖極萬端。所以行吾義者。固自如矣。然非有學問而開其知。誠敬而養其心。使守之固而行之篤。則志不率氣。氣不充體。尋常日用。自不免有衰颯偸惰七漏八滲之弊。況於倉卒緩急。何以爲力而不失吾所守哉。古人所謂獄裏尙書。舟中大學。似涉於迃儒拙法。而實是素患行患第一事。三君以其師門艾山之命。跋涉半千里。相訪於富春之咏歸亭。蓋致其歲寒風霜辛勤告訣之意也。臨發。請以一言之贈。嗚呼。雖靡君敎。而區區相厚之意。又豈量哉。但世變如此。前頭遭遇。有不可知。則吾輩所以相告而相勉者。豈容有他般義諦哉。勿以陳腐忽之幸矣。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ㆍ물계(勿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임생(任生)이 와서, 또한 보내주신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편지를 통해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체후가 더욱 평안하다는 것을 알고서, 위로되고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는 권루(卷婁)12)하여 마음이 어수선하여, 도무지 말할 것이 못 됩니다.심(心)은 오직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영묘하지 못하여서 마른 나뭇가지나 불 꺼진 재【枯木死灰】13)와 같다면, 어찌 주재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단에 '능자자(能字者)'라는 글자는 심(心)을 말한 것입니다. 영묘한 바는 이(理)가 있기 때문이니, 이(理)가 아니면 어찌 이 영묘함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단에 '소자저(所字底)'라는 글자는 성(性)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氣)의 영묘함이요, 깨닫게 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주재(主宰)하는 것은 심(心)이요, 주재하는 것의 근원은 성(性)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심성(心性)의 경계에 구분을 분명히 하여서, 부디 세 번 생각을 더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理) 위에 이가 있고, 이로써 이를 부린단 말입니까. 아마도 꼼꼼히 살피지 못하여서, 그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저 심(心)과 성(性)은 진실로 두 개로 나뉜 것이 아니니, 그 본체의 이름과 뜻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가르침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任生來。又承惠存。以審侍體增謐。慰浣無任。義林卷婁憒憒。無足云喩。心惟靈故能主宰。若不靈如枯木死灰則何有主宰之可言。此所以下能字者字而言心。然其所靈以有理故也。非理安有此靈。此所以下所字底字而言性。朱子曰。能覺者氣之靈。所覺者心之理。又曰。主宰者心。主宰底性。亦非此意耶。此於心性界至。截得分明。願加三思。如何理上有理。以理使理。恐偶未照管而說得到此耳。大抵心性固非二物。而其當體名義。有不可苟也。更示之爲望。 권루(卷婁)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말로, 외물을 좇아 자신의 심신을 고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고목사회(枯木死灰) 불교에서 흔히 쓰는 화두(話頭)로서, 사람이 욕심이 없거나 생기가 없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유학자가 불가(佛家)의 참선(參禪)을 비판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근사록집해》 권13 〈변이단(辨異端)〉에 정호(程顥)의 말을 인용하여 "마음의 근원이 안정되지 못하므로 마른 나무나 꺼진 재와 같아지려고 한다.【釋爲心源不定, 故要得如枯木死灰.】"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앞에 보낸 편지와 뒤에 보낸 편지가 동시에 도착을 하여 열어 읽어보고는, 마음이 활짝 트여서 긴 여름날에 우울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그러졌습니다. 이로 인해 경전을 읽으며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한 것을 알고서, 간절히 바라는 바에 더욱 들어맞아 흐뭇하였습니다. 저는 어지럽고 못난 채로 시간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괴로울 뿐입니다. 심설(心說)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는데, 이끌어 깨우쳐준 그 가르침이 지극하여서, 모두 그 학문의 경지가 깊고 남을 위한 충직한 마음이 지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였습니다. 주재자(主宰者)와 주재저(主宰底)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데, 그렇다면 주재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영묘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재저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덕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性)은 무엇입니까. 이(理)가 심(心)에 가춰진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性)은 곧 이(理)이니, 성과 이를 어찌 구별한단 말입니까. 심의 영묘함이 진실로 이(理)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이가 행하는 바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氣)가 아니면 영묘함을 발휘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영묘한 바가 없으니, 영묘하기 때문에 주재하는 것입니다. 영묘함을 버리고서는 아마도 별도로 주재처(主宰處)를 구할 수 없으니, 어찌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이 목석과 같고서 능히 주재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삼가 그대와 경함(景涵)의 생각을 살펴보건대, 영묘함은 전적으로 기(氣)에 속해 있고, 주재함은 전적으로 이(理)에 속해 있다는 것은 각기 일정한 근거가 있고 각기 알맞은 때가 있는 듯하지만, 마음의 영묘함이 바로 신묘한 주재처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더욱 합치되지 않는 것입니다.무릇 영묘함과 주재함에 대해 평탄하게 설명하면, 정밀하고 거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파고들어 말하면, 실로 피차의 구분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심(一心)의 사이에 어찌 영묘함이 있고 또 신묘함이 따로 있어서 대치하고 병립한단 말입니까. 그대가 '주재자(主宰者)'를 '이(理)'자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理)가 심(心)에 상대함이 있고, 이 위에 이가 있다는 등의 말들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재저리(主宰底理)'를 '주재성정(主宰性情)'이라고 간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의리(義理) 상에 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법(文法) 상에서도 부당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재자(主宰者)는 진실로 마음의 영묘함이니, 이를 주재(主宰)의 성정(性情)이라고 한다면, 이(理)가 주재(主宰)라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주자(朱子)께서 마땅히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요, 주재하는 바는 성정이다"라고 했을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소(所)와 소이(所以)에도 또한 그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주자께서 이른바 '소이연(所以然)은 이(理)이고, 소당연(所當然)은 의(義)이다'라 한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저(底)'자는 또한 '소(所)'자나 '소이(所以)'자와는 그 뜻에 다름이 없었는데, 옛사람들의 글자를 배치한 뜻이 이와 같은 경우가 진실로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前書後書。一時倂至。開玩豁然。長夏紆鬱。不覺消釋。因審經體衛安。益協懇祝。義林憒劣捱遣。見無一狀可煩耳。心說娓娓提諭。極其緘悉。其造詣之深。謀忠之至。令人歎服夫主宰者。主宰底。煞有分別。主宰者何物。非指心之靈而言耶。主宰底何物。非指心之德而言耶。性是何物。非指理之具於心者而言耶。然則性卽理也。性與理有何分別乎。心之靈。固不可遽謂之理。而亦不可謂非理之所爲。非氣不能靈。非理無所靈。靈故主宰。舍靈則恐無別求主宰處。曷嘗見冥頑如木石而能主宰者乎。竊覵賢與景涵之意。以靈專屬之氣。以主宰專屬之理。似涉乎各有占據。各有時節。而殊不知心之靈。乃是神妙主宰處也。宜乎多言而愈不合也。夫靈與主宰。以平坦說去。則若有精粗之可言。而究而言之。則實無彼此之可見。一心之間。豈有靈又有神。對峙而倂立乎。賢以主宰者。作理字看。故有以理對心。理上有理等。多少說話也。且賢以主宰底理。看作主宰性情云爾。則非惟於義理有欠。亦恐文法不當如是也。主宰者。固是心之靈。而曰主宰性情云。則理爲主宰之義。顧安在耶。若如賢意。則朱子當曰。主宰者心。所主宰者性情云云。固不當如是而止也。所與所以。亦未見其有異。朱子所謂所以然理也。所當然義也。此亦可見矣。底字亦與所字所以字。其義無異。古人下字之義如此處。固非一二也。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지난번에 황생(黃生)과 함께 논변한 바가 있었는데, 끝내 설득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지리멸렬하게 흐리기만 하여 그의 마음을 돌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오직 그대【東溪】14)의 힘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니 도리어 그대와 황생의 의견이 같았습니다. 이에 나의 비루한 견해가 과연 어긋나고 잘못되어 의견을 바꾸어 바로잡아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나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와 황생은 신(神)자를 이(理)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끝없는 갈등을 야기시키는 듯합니다. 이 마음이 이미 쏠리는 바람에 창졸지간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청컨대 주자(朱子)의 설로 질문을 하여도 괜찮겠습니까. 명덕(明德)장 주석에서 '허령(虛靈)'이라 하였고, 진심(盡心)장 주석에서는 '신명(神明)'이라 하였으며, 혹문(或問)에서 또한 '신명'이라 하고, 혹은 '허령'이라 말하고, 혹은 '신명'이라고 하였는데, 어째서입니까. 영(靈)은 기(氣)의 영묘함이요, 신(神)은 기(氣)의 신묘함이니, 영과 신은 서로 맞닿아 있고, 허와 명은 서로 응하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 말하여도 서로 차이가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신명(神明)을 이(理)로 여긴다면, 이(理)로 이(理)를 갖추고 이(理)로 이(理)를 신묘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옳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공자(孔子)께서 마땅히 '도(道)로써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라고 하였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장자(張子)는 '성(性)으로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라고 하였지, '심(心)으로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본래 둘로 나뉜 것이 아니니, '구(具)․응(應)․묘(妙)․재(宰)'라고 한 것들이 모두 그 하는 바이니, 내가 이른바 "단지 이 영묘함뿐이니, 바로 이것으로 주재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 주자(朱子)의 설과 반대되는 바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가 보기에 몹시 놀라서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지요. 주자께서 말하길 "허령(虛靈) 두 글자는 명덕(明德)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15)라고 하였으니, 덕(德)은 심(心)에 비하여 더욱 정밀한데, 오히려 '이미 충분하다【已足】'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심(心)의 본지(本旨)가 어찌 이보다 부족함이 있어서 단지 사물 자체만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무릇 영(靈)은 체(體)에 가깝고, 신(神)은 용(用)에 가까우며, 영은 비교적 실(實)에 해당하고, 신은 비교적 허(虛)에 해당하나, 그 형이하(形而下)가 됨은 하나입니다. 묘용(妙用)을 신(神)이라 여긴 것은, 아마도 신(神)이 바로 이(理)의 묘용임을 말한 것입니다. 다만 신(神)이 바로 이(理)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자께서 어찌 "신령(神靈)은 성(性)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겠으며, 또한 어찌 "신명(神明)은 물(物)이요, 이(理)가 아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신(神)은 천지(天地)의 묘용(妙用)이며 음양(陰陽)의 불측(不測)을 말한 것이니, 본래 무위지물(無爲之物)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무위(無爲)하면서 유위(有爲)의 주(主)가 된다고 하니, 어찌 무위함이 있으면서 신(神)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께서 말하길 "심(心)은 몸에서 주(主)가 되고, 성(性)은 심(心)의 이(理)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심(心)은 이기(理氣) 합일(合一)의 물(物)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능히 주재하는 자【能主宰者】는 영(靈)이요, 주재하는 대상【所主宰底】은 이(理)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주체자【能者】가 대상자(所者)를 부리는 것이 되고, 장수가 되는 것이니, 이 어찌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소이(所以)를 두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理)가 주(主)가 되는 것에는 신(神)자를 끌어다가 이(理)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연후에 이(理)가 비로소 주(主)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본령(本領)과 기(氣)를 이(理)로 착각하고 있다고 그대를 나무랐던 것은, 마땅히 남을 책망하는 것으로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모든 조항마다 모두 예를 들어서 열거하기 어려우나, 만약 '영(靈)이 기(氣)이고, 신(神)이 이(理)이며, 신(神)은 장수이고, 영(靈)은 병졸이며, 영(靈)은 신(神)이 아니면 영묘하지 못하고, 신(神)은 영(靈)이 아니면 신묘하지 못하다'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말들은 병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신(神)과 영(靈)을 나누어서 이(理)와 기(氣)에 배속하고서 논리를 세우는 데 어긋나지 아니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동계(東溪) 한 사람만의 견해가 아니니, 근래에 주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혹 많이들 이와 같이 합니다. 이는 심(心)이 주재(主宰)가 된다는 말을 보고서 기(氣)가 주인의 자리를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허령(虛靈)의 밖에 별도로 신(神)이라는 한 글자를 찾아서, 억지로 이름지어 이(理)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운용(運用)․작위(作爲)함은 모두 귀일되는 것이니, 만약 선유(先儒) 가운데 기질을 논하는 자가 온몸의 기질을 버리고서 희미하고 아득한 사이에서 별도로 심(心)의 기질을 찾는다면, 그 말류(末流)의 병폐됨이 어찌 주기론에만 그치겠습니까. 무릇 도리(道理)란 무형(無形)이라, 알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견해가 아직 명확하지 못한데 억지로 판별해내려고만 한다면, 이는 바람을 붙잡거나 그림자를 묶어놓는 격이니, 죽을 때까지 세월을 보낸다 한들 어찌 학문의 완성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에 우리는 더욱 존양(存養)함에 몰두하고 정진하여서 갖가지 강학과 토론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니, 부디 늙은 나이【桑楡】16)라도 학문에 수확이 있기를 혹 희망해봅니다. 曩與黃生有所論辨。而終不回頭。顧惟滅裂。無力可回。所恃者。惟東溪之力可以助之。及讀來書。反與黃生之見同焉。可知愚陋之見。果是差謬而所當回頭者。未始非此漢也。然賢與黃生。錯認神字作理看了。是以生出無恨葛藤此意已熟。有非倉卒可解。請以朱子說質之可乎。明德註曰。虛靈云云。盡心註曰。神明云云。或問又曰。神明云云。或言虛靈。或言神明何耶。靈是氣之靈。神是氣之神。靈與神相貼。虛與明相應。故一例互言。而非有差殊也。如以神明爲理。則是以理具理。以理妙理可乎。如此則孔子當曰。道能弘道。不當曰人能弘道。張子當曰性能檢性。不當曰心能檢性也。虛靈神明。本非二物。而曰具曰應曰妙曰宰。皆其所爲則。愚所謂只此靈也。便能主宰云云。何嘗與朱子說。有所背馳。而賢者見之以爲大驚小怪耶。朱子云。虛靈二字。說明德意已足。德於心較精。而猶云已足。況心字本旨。有何不足於此。而只以當體爲言耶。夫靈近體。神近用。靈較實。神較虛。而其爲形而下者則一也。以妙用爲神者。蓋言神是理之妙用云爾。非直以神爲理也。不然朱子何以曰。神靈不可以言性。又何以曰。神明是物非理云耶。且神是天地妙用陰陽不測之謂。則本非無爲之物。今曰無爲而爲有爲之主。安有無爲而可以謂之神者耶。朱子曰心是主於身。而性是心之理也。以此言之。心是理氣合一之物也。愚故曰。能主宰者是靈。所主宰底是理。能者爲役所者爲帥。此安有所以之上復有所以之嫌耶。於此可見理之爲主。而不必引神字作理然後。理始爲主也。然則兩本領。及認氣爲理之譏。賢者恐當以責人者自責。庶乎可矣。諸條固難枚擧。而如云靈是氣。神是理。神爲帥。靈爲役靈非神不靈。神非靈不神。此等句語。無非病痛。安有分神靈屬理氣。而立論不差者乎。然此非東溪之獨見。近日主理之論。或多如此。蓋見心爲主宰之語。而恐氣之奪主也。遂於虛靈之外。別討一神字。强名之曰理。凡運用作爲。一切歸之。如先儒之論氣質者。舍周身氣質。而別求心之氣質於渺茫怳惚之間者也。其爲末流之獘。豈但主氣而已哉。夫道理無形。難知亦難言。況見之未明。而强辨不置。則如捕風繫影。卒歲窮年。寧有了期耶。此吾輩尤當汲汲存養沈索。以開種種講討之路。庶幾桑楡之收。或有望焉。 동계(東溪) 조선 말기 유학자였던 양회락(梁會洛, 1862~1935)로,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입니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허령(虛靈) …… 충분하다 주자(朱子)가 "허령불매 네 글자로【虛靈不昧四字】 명덕의 뜻을 이미 충분히 말하였다【說明德意已足】"고 하였다. 상유(桑榆) 늙은 나이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서쪽의 해가 지는 곳으로 저녁을 가리키는데, 당초에는 일이 잘못되었으나 마침내 성공하였음의 비유로 쓰인다. 마원(馬援)이 "처음에는 비록 회계에서 날개를 드리웠지만 마침내 민지에서 날개를 떨칠 수 있었으니, 동우에서는 잃었지만 상유에서 거두었다 이를 만합니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이(理)는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또한 신(神)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神)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또한 무엇입니까. 반드시 낱낱이 이해하여 바로 알아야 비로소 이(理)자의 본래 뜻을 틀림없이 깨닫게 됩니다. '신명(神明)' 두 글자에 대해서는 더욱 이(理)라고 말할 바가 아니니, 《맹자집주(孟子集註)》와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이른바 '신명(神明)을 이(理)라고 보지 않은 것이 오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허령(虛靈) 아래에 단지 '이(以)'자만을 붙였는데, 그 위에 글에 이미 '소(所)'자가 있으므로, 쓸데없이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疊牀】,17) 소이(所以)의 뜻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본래 분명하게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억지로 소(所)자의 유무를 끌어다가 이(理)가 되고 기(氣)가 되는 증좌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나의 벗인 그대의 견해로 본다면, 뜻밖에 천착하다가 전하여 알게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덕(德)으로 도(道)를 응집하고 의(義)로써 이(理)에 처하여, 이(理)로 이(理)를 갖추었다는 설은, 도와 이는 사물에 산재해 있으나 덕과 의는 심상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란 것과 같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응집하다라고 하였고, 처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이(理)를 갖추는 바에 지반(地盤)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인께서 성(性)을 논하심에 심(心)을 인하여 발하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하였고, 또한 말씀하시길, "기(氣)가 아니면 형체가 없으니, 성(性)이 부여하는 바는 없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국자의 물을 저장하려고 할 때 그릇이 아니면 불가한 것이니, 어찌 물로써 물을 저장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항마다 낱낱이 받들어 답할 겨를이 없으나, 보내온 편지를 보니 나의 설을 주재(主宰)의 권한이 오로지 기(氣)에 귀속된다고 되어 있는데, 나의 설이 어떻게 그대에게 전달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신명(神明)을 이(理)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까. 신명이 비록 이(理) 자체는 아니지만, 이 이(理)의 호위병이요, 종복이니, 이(理)가 주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신하는 직책을 수행하여서 밥을 나르고 낭관을 때리는 일을 직접 행한다면, 그 위세가 나날이 줄어들어서 끝내 주재함을 잃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자(朱子)의 「왕장유에게 답하는 편지【答汪長孺書】」에 이르기를 "신령(神靈)이라는 두 글자는 성(性)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자(告子)가 말한 '타고나는 것이 성이다'라는 말과 불교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작용이 바로 성이다'라는 말은, 그 잘못이 바로 여기에 떨어졌기 때문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그대가 발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고통이 심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일찍이 편작과 화타【扁華】18)와 같이 일깨워주시니, 그 정성스러운 마음에 매우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편작과 화타는 갑자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만 이렇게 보내주신 편지 한 통은 아무래도 사양할 수 없으니, 편작과 화타의 좋은 약제가 될 것입니다. 다만 혼폐함이 심하여서 끝내 병을 키우고 치료를 기피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듯하니, 두렵고 두렵습니다. 선덕(先德)이 말하길 "신(神)은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또한 "천지의 신묘한 변화를 궁구하여 아는 것【窮神知化】은 생각하고 힘쓰는 것만으로는 미칠 수 없다"19)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들과 같은 역량으로 어찌 감히 그 경지를 터득하겠습니까. 그러나 각자가 학설을 내세우고 억지로 변별하여 이에 이르면, 그 안목이 있는 자들이 옳지 못한 의논을 펼치는 것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도라는 것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라는 경문에 대한 주장의 장구(章句)에 "성의 덕은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性之德而具於心】"20)라고 하였는데, 회락(會洛)21)은, 성의 덕은 바로 도(道)의 체(體)를 말한 것이라 여겼으니, '성(性)' 다음에 또한 '덕(德)'자를 더한 것은 도의 체에 나아가서 극언(極言)하여 찬미(讚美)한 말입니다. 철원(澈源)22)은 덕(德)은 득(得)의 의미이고 결료(結料)의 뜻이라고 여겼으니, 아마도 도의 전체를 말한 듯합니다.성의 덕은 이른바 성의 도(道), 성의 이(理), 성의 선(善)과 같은 것입니다. 글에 의거하여 읽어 나가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찬미(讚美)라고 한 것은 진실로 마땅치 않고, 결과(結窠)라고 한 것도 또한 그 필연 됨을 모르겠습니다.회락(會洛)이 '미발일 때에 기질의 성(性)이 있다고 한다면 불가하지만, 기질의 성이 혹 미발일 때가 있다고 한다면 가하다'고 하였는데, 기질이 우연히 법도를 따른 경우입니다. 철원(澈源)이 '이미 기질의 성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미발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미 미발이라고 한다면 곧 기질의 성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기질의 성이라는 것은 혹 미발일 때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또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우연히 순박함을 회복한 것은 바로 본래 그러한 것이지, 기질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회락(會洛)이 '호랑이의 인(仁)은 가히 본연의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성의 본연이라고 하면 불가하다'라 하였고, 철원(澈源)은 '호랑이는 단지 인(仁)만을 알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옳으나, 본연의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을 성의 본연이라고 한다면 불가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인(仁)이라는 것이 성의 본연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노사(蘆沙)23) 선생이 이른바 개와 소가 다르지만 저들 또한 참되다【犬牛異處彼亦眞.】24)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성의 본연이 아니면 이 사물들이 무엇으로부터 나온단 말입니까.철원이 '사람의 사지와 골격에는 정해진 수가 있고, 나무의 가지와 줄기에는 정해진 수가 없다'고 한 것은, 그 바름과 그름, 통함과 막힘을 구분한 것입니다. 회락이 '동물은 모두 정해진 수가 있는데, 식물은 모두 정해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수(鳥獸)는 정해진 수가 있고, 초목은 정해진 수가 없으며, 일월성신은 정해진 수가 있고, 산악유천은 정해진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번잡한 기(氣)는 정말로 그러합니다.회락이 '《중용》 서문에서 "두 가지가 방촌 사이에 뒤섞여 있어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二者雜於方寸之間 不知所以治之】"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는 치(治)자를 논하여서 도심(道心)이 항상 일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 하여서, 즉 치(治)는 그 도심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니, 이 설은 옳습니다. 철원은 이미 잡(雜)이라고 하였으면, 치(治)자는 잡(雜)자가 되어 발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명백합니다.칠정(七情) 또한 성악이 섞인 것이기 때문에 치(治)자를 배치한 것입니다. 理固不可以言神。亦容有不能不言神處。其不可以言神是如何。其不能不言神。又是如何。須一一理會得。乃於理字本旨。見得不差。至若神明二字。尤非所以言理。孟子集註及大學或問所謂神明不可作理字看久矣虛靈下只着以字。以上文已有所字。不必疊牀。而所以之義。自足故也。虛靈神明。本非判然二物。而强引所字有無。以爲爲理爲氣之證佐耶。以吾友高明之見。而不意穿鑿傳會。乃如是也。且德以凝道。義以處理。以理具理之說。不同道與理散在事物。而德與義。以心上說。故謂之凝。謂之處。若理之所具。非有地盤則不可。是故。朱子曰。聖人論性。無不因心而發。又曰。非氣無形。性無所賦。此可見也如貯一勺水。非器則不可。豈有以水貯水之理乎。今不暇逐條奉答。但來喩以鄙說謂主宰之權。專歸之於氣。未知鄙說何如。而至於乃爾耶。抑以神明謂非理故耶。神明雖非理。而乃是此理之輿衛也。僕役也。則理之爲主宰也。顧不自若矣乎。若君行臣職。而傳餐撞郞。親自爲之。則吾恐其威勢。日替而不得爲主宰矣。朱子答汪長孺書曰。神靈二字。非所以言性。告子所謂生之謂性。佛者所謂作用是性。其失正墮於此。不可不深究也。此言似爲今日賢者而發也。閔我之加痛。而喩以早尋扁華。其意甚感。然扁華不可遽得。而只此垂喩一幅。恐不得辭爲扁華之良劑也。但昏蔽之甚。竟不免爲護疾忌醫之歸。悚悚。先德曰。神不可致思。又曰。窮神知化。非思勉之能强。況以吾輩力量。豈敢覰却其藩籬也。然而梗自立說。强辨至此。其貽有眼者。不韙之議。想亦不少矣。道也者。不可須臾離。章句性之德而具於心。會洛以爲性之德。是說道之體。而性下又加德字者。就道之體。極言而贊美之辭。澈源以爲德得也。是結料之義。蓋言道之全體也。性之德。如所謂性之道性之理性之善云爾。據文讀過。其義自見。謂之贊美。固未穩。謂之結窠。亦未知其必然也。會洛以爲謂未發有氣質之性則不可。而氣質之性。或有未發時則可也。氣質之偶然循軌處是也。澈源以爲旣曰氣質之性。則當不可言未發。旣曰未發。則便不可言氣質之性。謂之氣質之性。或有未發時。亦似未安。偶然回淳。便是本然。着氣質不得。會洛以爲虎狼之仁。可以見本然之理。無乎不在。而謂性之本然則不可。澈源以爲以虎狼之只知仁而不知他言則固可。曰本然之理無乎不在。而謂之性之本然則不可。然其仁者。則非性之本然而何。蘆沙先生所謂犬牛異處彼亦眞者。此也。若非性之本然。則此物何從出來。澈源以爲人之肢骸。有定數。木之枝幹。無定數。蓋其正倒通塞之分。會洛以爲動物皆有定數。植物皆無定數是故鳥獸有定數。而草木無定數。日月星辰有定數。山岳川流無定數。繁氣固然。會洛以爲中庸序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先儒論治字。以爲道心常爲一身之主者。卽治也非治其道心也。此說是。澈源以爲旣曰雜。則治字是爲雜字而發。蓋言其明辨也。七情亦善惡雜焉。故下治字。 첩상(疊牀) 첩상가옥(疊床架屋)의 줄인 말로, 침대 위에 침대를 겹쳐 놓고, 지붕 위에 지붕을 얹는다는 뜻이다. 쓸데없이 반복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세설신어》 등에서 유래되었다. 편화(扁華)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의인 편작(扁鵲)과 화타(華佗)를 말한다. 《성호선생사설(星湖先生僿說)》 24권에 나오는 말이다. 도라는 것은 …… 갖추어져 있다 《중용장구》 제1장 제2절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도는 일용사물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이치입니다. 모두 성의 덕으로서 마음에 갖추어져 있어서 사물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때마다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떠날 수 있다면, 어찌 '솔성'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라는 내용이 보인다. 회락(會洛) 조선 말기 유학자였던 양회락(梁會洛, 1862~1935)로,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철원(澈源) 조선 말기 유학자인 황철원(黃澈源, 1878~1932)으로, 자는 경함(景涵)이고,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입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광무 6) 전라남도 구례(求禮) 천은사(泉隱寺)에서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과 강론을 벌였고, 스승 정재규의 권유로 「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 등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광주(光州)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 10권 4책이 있다. 노사(蘆沙)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자는 대중(大中)이고, 호는 노사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8, 9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3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증광시(增廣試)에 낙방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표적인 저술로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노사집(蘆沙集)》이 있다. 개와 소가 다르지만 저들 또한 참되다 《노사집(蘆沙集)》 권2 〈오상영기회정(五常詠寄晦亭)〉에, "순 임금과 도척이 똑같이 사람으로서 가장 귀하고, 개와 소가 다르지만 저 또한 온전합니다. 다만 이 자의 진면목을 잃음으로 인연하여, 성 중에 나아가 헛되이 연구하느라 애쓴다.【舜跖同時吾最貴, 犬牛異處彼亦全. 只緣理字失眞面, 枉就性中費究硏.】"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건당집》 서문 兩蹇堂集序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왜구의 변란으로 인한 재앙이 임진년보다 참혹한 적이 없었고, 충의로운 선비 또한 임진년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다. 대체로 하늘이 기수(氣數)에 쫓겨 한 때 어지러운 운수가 없을 수 없지만, 어지러운 때에는 또 반드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다스릴 인재를 배출하여 부지하게 하였다. 예컨대 방책을 정하고 임금을 호종한 백사(白沙) 이문충(李文忠)79)과, 구원병을 요청하고 화급한 일에 부응한 서천(西川) 정충익(鄭忠翼)80), 왜적을 토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덕풍(德豊) 이충무(李忠武)81), 관리로서 지역을 지키다 순절한 천곡(泉谷) 송충렬(宋忠烈)82),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세운 중봉(重峰) 조문렬(趙文烈)83) 등과 같은 분들이 모두 우뚝하여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을 분들이었다.지위는 낮지만 맡은 일이 많고, 녹봉은 적지만 일이 번다하게 많았던 분들의 경우에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일을 주선하고, 힘이 다하여 쓰러질 때까지 여기저기 출입하다 끝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다하였다. 양건당(兩蹇堂) 황공(黃公)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선양(宣揚)되지 않은 명성과 지위나 공에게 걸맞지 않은 추증(追贈)과 포창(褒彰)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유묵(遺墨)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계사년(1893) 봄에 9세손 간(柬)이 그것을 가지고 천태산(天台山)의 집으로 나를 찾아와 교감의 일을 부탁하였다. 아, 나는 공에게 미생(彌甥 자매나 남매의 손자)이 된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선인(先人)을 모시는 곁에서 그분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못 흥미진진하였는데, 어찌 어버이를 여의고 외로이 지낸 지 50년 만에 비로소 그분의 유고(遺稿)를 볼 수 있게 될 줄 알았겠는가. 또 간은 죽마고우로 총각 때에 헤어졌다가 머리가 하얗게 세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슬픔과 위로되는 마음이 또 어떠하겠는가?평소 보고 들은 지식이 적어 생각이 좁고, 질병까지 더해져 정신과 근력을 수습해 끌어 올릴 수 없으니, 어찌 한 집안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일의 부탁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감이 지극한 바인지라 차마 고집스럽게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에 우선 문류(門類)를 나누어 한 책으로 정하여 돌려보내니, 원본과 대조하여 정밀하게 교정하고 극진하게 윤색하는 일은 담당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恭惟我朝開國以來。寇亂之禍。莫慘於壬辰。忠義之士。亦莫盛於壬辰。蓋天迫於氣數。不能無一亂之運。而其亂也。又必生撥亂之材以扶持之也。若白沙李文忠之定策扈聖。西川鄭忠翼之乞師副急。德豊李忠武之討賊制勝。泉谷宋忠烈之守土死節。重峰趙文烈之倡義立慬。皆卓犖不世之出也。至於位卑而任多。祿薄而事煩。上下周章。出入竭蹶。終致殺身殉國之節者。兩蹇堂黃公。亦其人也。烏可以名位之不揚。贈褒之不稱論之哉。遺墨散逸。所存未爲十之一。癸巳春。九世孫柬。持以過余於天台寓舍。屬以校勘之役。嗚呼。余於公爲彌甥也。是以自幼侍先人側。得聞其事實。頗津津焉。豈知風樹孤露五十歲。乃始得見其遺稿耶。且柬是竹馬舊交也。丱角相分。白首相逢。其悲慰之情。又何如哉。素以寡陋。兼滯病痼。精神筋力。收拾不上。安有可以擔當人家不朽之託者哉。但情感攸至。不忍全然牢却。於是姑分門類。定爲一冊而還之。若其讐校精訂。極其潤色。則在乎其人焉爾。 백사(白沙) 이문충(李文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 백사는 그의 호이고, 문충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 요청을 건의하였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다녀와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천(西川) 정충익(鄭忠翼)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 1538~1602)로, 충익은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우승지에 올라 선조를 의주(義州)에 호종하고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파견토록 했으며,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오자 영위사(迎慰使)로 그를 영접하는 한편, 평양에 머물러 있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서울의 수복을 재촉하는 등 국가의 최대 수난기에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덕풍(德豊) 이충무(李忠武) 德豐府院君(德豐府院君) 이순신(李舜臣, 1545~1598)으로, 충무는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둬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천곡(泉谷) 송충렬(宋忠烈) 송상현(宋象賢, 1551~1592)으로 천곡은 그의 호이고, 충렬(忠烈)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왜적에 맞서다 순절하였다. 중봉 조문렬(重峰趙文烈) 조헌(趙憲, 1544~1592)으로, 중봉은 그의 호이고, 문렬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했으며,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錦山) 전투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