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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박씨전 孺人朴氏傳 유인 박씨(孺人朴)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지수(枝樹)의 후손이다. 고조는 경옥(慶沃)이며, 증조는 문환(文煥)으로 진사를 지냈다. 조부는 재두(在斗)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영진(英鎭)으로 온화하고 자혜로웠다. 어려서부터 효행(孝行)이 있고 유순(柔順)하여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다. 19세에 사인(士人) 이승우(李承愚)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을 섬기고 시부모를 봉양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공경하여 부덕이 두루 지극하였다. 남편 집안은 대대로 문학을 일삼아 매우 청빈하였으므로 유인이 집안일을 맡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살림을 꾸려감에 검소하여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잠시도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집안의 형세가 점차 펴져서 어버이에게 올리는 좋은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 하루는 그 시어머니의 옷상자를 모르게 열어보고는 마침내 자신이 시집올 때 보관해둔 화려한 옷을 꺼내어 빨아서 바꿔 넣었다. 시부모의 물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이처럼 하였다. 만년에 집안이 횡액(橫厄)을 당한 것은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유인(孺人)은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수숙(嫂叔)172) 사이에도 공경이 쇠하지 않았고, 동서 간에 화목함을 잃지 않았으며 어린 조카아이들에게 자애로움이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제가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겨우 6살이 되었을 때 유인이 세상을 떠났다. 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한미한 선비의 아내와 약한 나라의 신하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라 여겼으니, 사람을 보는 데 있어서 쉬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지 말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인의 행실과 도덕 같은 경우는 옛날의 정숙한 여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시경(詩經)》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173)하였으니, 지금 남겨진 아들이 어찌 장래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그 어머니의 어짊을 드러내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孺人朴氏。貫密陽。壬辰忠臣枝樹后。高祖慶沃。曾祖文煥進士。祖在斗折衝。考英鎭。溫仁慈惠。自幼以孝順。鍾愛於父母。十九歸士人李承愚。事君子奉舅姑。必誠必敬。婦德周至。夫家世業文學。淸貧殊甚。孺人勤於幹理。儉於調度。夙興夜處。暫不暇逸。是以家力稍紓。而親旨不匱。一日密啓其姑衣篋。遂出己于歸時所貯華服。澣替其色納之。待乏又如之。晩年家遭橫厄。人所不堪。而孺人少無幾微色。平日敬不衰於嫂叔。和不失於娣姒。慈不替於兒姪。是以終孺人之身。兄弟共爨。未有分離。晩得一子。甫六歲。而孺人謝世。君子曰。寒士之妻。弱國之臣。自古以爲難。觀人不於其所易。而於其所難。若孺人之行之德。視諸古之貞女淑媛。可以無愧矣。詩曰。釐爾女士。從以孫子。今所遺子。安知不將來立揚以顯其母氏之賢也耶。 수숙(嫂叔) 형제와 형제의 아내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시경(詩經)에……준다 《시경》은 대아(大雅)의 〈기취(旣醉)〉편을 이른다. 이 시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釐' 자를 '주다'라는 의미의 '予'로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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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암기 土庵記 토암옹(土庵翁)은 이름이 학(㙾)이고, 자가 자술(子述)이니, 이는 대체로 선친 겸와공(謙窩公)께서 개미 새끼들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들어 명명함으로써 부지런히 힘써서 성취를 이루게 한 것이다. 옹은 평소에 이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수용하여 행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 노쇠하여 혹 실추시키게 될까 염려하다가 마침내 '토(土)' 자로 암자의 이름을 짓고 항상 눈앞에 두고 돌아보면서 경계하는 계책으로 삼았다무릇 때때로 익히는 것은 징험할 길이 없지만, 흙을 쌓는 것은 자취가 있으니, 쌓인 흙의 많고 적음을 보고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알 수 있다. 아, 행실을 보면 그 상서로움을 알 수 있고, 일을 부과하면 반드시 그 공적을 바쳐야 하는데, 이는 몽사(濛汜)로 해가 저물어 갈 때20)에 마지막 결말을 지어 천지 부모(天地父母)와 교환하는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주부자(朱夫子)는 시에서 이르기를, "무두질한 가죽을 차서 부친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무가 뿌리를 감추는 듯 행하여 스승의 전수(傳受)를 삼가 받드네.21)"하였다. 또 침상에는 '위(韋)' 자를 써 놓고, 서재에는 '회(晦)' 자를 걸어 놓고서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옹의 뜻도 이러한 데에 근본을 두고 있을 것이다. 土庵翁名㙾字子述。蓋其考謙窩公。以蛾子述學含土之事。擧而命之。俾其有勤苦作成也。翁平日服膺而受肘焉。及其晩年。恐慮衰而或失墜也。遂以土名庵。爲常目顧警之計。夫時迷無徵。累土有跡。視累土之多寡。而其勤慢可知也。嗚乎。視履可考其祥。賦事必獻其功。此在濛汜殘景。所以爲究竟結杪。而交還於天地父母者。其意豈偶然哉。朱夫子詩曰。佩韋遵考訓。晦木謹師傳。又題韋於寢。揭晦於齋。以寓終身之慕。翁之意。其亦有本於此云爾。 몽사(濛汜)로……때 인생의 노년을 비유한다. 몽사는 해가 지는 곳인데,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올라 몽사로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두질한……받드네 주희(朱熹)가 만년에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의 고정서원(考亭書院)에 적어 놓은 것이다. 앞의 구(句)는 주희의 부친 주송(朱松)이 "조급한 성질이 도를 해친다."라고 스스로 경계하여 자신의 호를 '위제(韋齋)'라고 한 가르침을 이어 따를 것을 다짐한 것이다. 위(韋)는 무두질하여 부드럽게 만든 소가죽을 이르는데,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급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 이것을 차고 다니면서 느긋하게 처신했다는 고사가 전해지며, 예로부터 성급한 자들이 이것을 차고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뒤의 구는 주희의 스승 유자휘(劉子翬)가 주자에게 전수해 준 "나무는 뿌리를 잘 감추어야 봄에 잎이 무성하게 피고, 사람은 몸을 잘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찌는 것이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는 가르침을 삼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주자가 자로 삼은 원회(元晦)ㆍ중회(仲晦)와 호로 삼은 회암(晦菴)ㆍ회옹(晦翁)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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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재기 晩隱齋記 재주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 집안의 융성과 쇠퇴를 본 것이 또한 이미 많았다. 처음에 곤궁하다가 뒤에 태평해진 경우도 있고, 처음에 태평하다가 뒤에 곤궁해진 경우도 있으며, 처음과 뒤 모두 곤궁한 경우도 있고, 처음과 뒤 모두 태평한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본디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또한 일찍이 사람의 일과 서로 연관되지 않은 적이 없다. 조부와 부친께서 성취해 놓은 뒤를 계승하였을 때에 어떤 이는 삼가 부지런히 지켜서 끝까지 안락를 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교만하고 방자하며 제멋대로 행하고 안일하여 스스로 패망을 부르기도 하며, 쇠잔한 집안의 뒤를 계승하였을 때에 어떤 이는 옛날 습성대로 나약하고 게을러서 끝내 진작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힘을 내 분발하여 스스로 수립하기도 하니, 이러한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대략을 알 수 있다만은(晩隱) 백공(白公)은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고로움을 거리끼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빈틈없이 꼼꼼하게 대비하고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함으로써 살아계신 부모님을 봉양할 때에는 그 즐거움을 모두 누리게 하였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장사지낼 때에는 그 예를 다 갖추었다. 심지어 사당을 세우고 묘를 보수하며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제사를 받드는 예절과 종족을 보호하고 친족을 도탑게 대하며 이웃을 구휼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도리, 글방을 열고 서적을 쌓아 두며 선비를 맞이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례대로 배열하고 벌여서 법도에 맞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함에  있어서 완비했다고 이를 만하다.수명은 백세를 누렸고, 지위는 2품에 올랐으며, 네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영예를 바쳤고, 여러 손자들은 앞으로 학문에 대한 희망이 있으니, 어찌 사람의 일을 완비함으로써 하늘이 복을 내려 줌이 또한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만년에 이르러서는 크고 작은 집안의 일들을 일체 쓸어버리고 도외시한 채 별장 하나를 지어 날마다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거문고를 켜고 술을 마시며 음풍농월하고 이리저리 소요하면서 그 즐거움을 다하였으니, 공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리에 있어서도 정밀하였다고 하겠다. 이것이 공을 만은(晩隱)이라 한 이유이다.아, 공은 볼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시의 시고(詩稿) 약간 편뿐이지만, 이것을 열람한 뒤에 인하여 보잘것없지만 추앙하는 소회를 기술하여 은근한 뜻에 부응한다. 不佞生長鄕曲。見人家隆替。亦已多矣。有先困而後泰者。有先泰而後困者。有先後俱困者。有先後俱泰者。此固氣數使然。而亦未嘗不與人事相須也。承父祖成立之餘。或謹勤守成而終享安樂。或驕恣放逸而自速敗亡。承家戶殘替之餘。或因循懦怠而終於不振。或激勵奮發而自爲樹立。觀於此而可以知其人之大略矣。晩隱白公。生於家戶殘替。而服勤殫勞。綢繆拮据。使養生而致其樂。送死而備其禮。至於立祠修墓置田奉祀之節。保宗厚族賙隣賑民之道。開塾儲書延士敎子之方。次第排列無不如儀。此於爲人之事。可謂備矣。壽享百歲。位躋二品。四男供科宦之榮。諸孫有方學之望。豈不以人事之備而天之降福亦若是耶。及其晩年。大小家事。一切掃却。置之度外。修一區別業。日與族戚故舊。鳴琴行酒。吟風弄月。逍遙徜徉。極其行樂。公於進退之義。亦云精矣。此公之所以爲晩隱也。嗚乎。公不可見。而所可見者。惟當日詩稿若而篇耳。閱覽之餘。因以述區區追仰之懷。以塞勤意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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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빈에게 보냄 與李光彬 전우(田愚)23)의 심설(心說)을 이렇게 저에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理)는 기(氣)가 하는 일을 따른다."라고 하고 또 "기는 이에 의해 주재된다."24)라고 하였습니다. 상단으로 보자면 이가 기에게 명을 받으니 이는 기의 하인이고, 하단으로 보자면 기가 이에게 통제를 받으니 이가 기의 주재가 됩니다. 상하가 전도되어 매우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는 쓸데없는 물건,"25) "붙어 있는 가련한 사물"26)이라는 선사(先師)의 말씀이 이것을 이르지 않겠습니까. "도체(道體)의 본연(本然)이다."라고 하고 또 주석(注釋)하기를 "이와 기는 한 데 뒤섞여 간극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한 데 뒤섞여 있는 이와 기를 도체의 본연이라고 하겠습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신 "진흙에 물을 타는 것"27)과 "골동갱(汨董羹)"28)이 이것을 이르지 않겠습니까. 근세의 기를 위주로 하는 논의가 대개 이와 같지만, 노형은 이를 정견(正見)으로 채택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문장에서 '심(心)을 이(理)로 인식하는 것은 육씨(陸氏)29)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설이다.'라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이를 위주로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듯합니다. 그러나 육씨는 궁리(窮理)에 관한 공부가 부족하여 마음에서 발하는 것을 이(理)라고 하였기 때문에 심(心)을 이(理)라고 인식하는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이(理)를 위주로 하는 설은 이(理)와 기(氣), 주(主)와 복(僕), 수(帥)와 역(役)의 분한(分限)을 구별하니 어찌 저것을 끌어다 이것에 뒤섞을 수 있겠습니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田愚心說。荷此寄示。感感。旣曰理隨氣之所爲。又曰氣爲理之所宰。以上段則理聽命於氣。而理爲氣之僕役也。以下段則氣受制於理。而理爲氣之主宰也。上下顚倒。無義甚矣。先師所謂無用之長物。所謂寄寓可憐。非謂此耶。旣曰道體之本然。又註而釋之曰。理與氣。渾淪而無間。安以理與氣渾淪者。謂道體之本然耶。先師所謂和泥帶水。所謂汨董羹。非謂此耶。近世主氣之論。大率如此。而宜不見取於老兄之正見也。下文認心爲理。陸氏畔道之說。似指今日主理而發。然陸氏欠却窮理一段功夫。而以發於心謂之理。故不免有認心爲理之敝。若今日之主理。是分別理氣主僕帥役之分。烏可引彼而混此哉。諒之。 전우(田愚) 1841~1922. 초명은 경륜(慶倫)ㆍ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ㆍ간재(艮齋)이다. 임헌회의 문인으로, 만년에 전라도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 냈다. 저서로 《간재집(艮齋集)》, 《간재사고(艮齋私稿)》, 《추담별집(秋潭別集)》 등이 있다. 이(理)는……주재된다 《간재선생문집전편(艮齋先生文集前編)》 권2 〈여유치정 갑술(與柳穉程甲戌)〉에 보인다. 용(用)이……물건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권16 〈납량사의(納凉私議)〉에 보인다. 붙어있는 가련한 《노사집(蘆沙集)》 권4 〈답권신원(答權信元)〉에 보인다. 진흙에……것 《노사집(蘆沙集)》 권4 〈답권신원(答權信元)〉에 보인다. 골동갱(汨董羹) 남쪽 지방 사람들이 물고기와 살코기를 뒤섞어 밥 속에 두는 것으로 어지럽게 뒤섞여 분리되지 않은 일을 말한다. 《性理大全補註》 육씨(陸氏) 육구연(陸九淵, 1139~1192)으로, 호는 상산(象山), 자는 자정(子靜),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주자가 정이천의 도문학(道問學)을 존중한 데 반하여, 육구연은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리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고, 육구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제창하였다. 저서에 《상산선생전집》 3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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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에게 보냄 與李德哉 서한에서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근래 형세가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무릇 일본(一本)과 대본(大本)은 본래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분하자면 일본은 이(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대본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만수(萬殊 만물의 다양함)와 대가 되고35) 대본은 달도(達道)와 대가 됩니다.36) 또 일본과 만수는 본래 나뉘는 경계가 없습니다. 일본을 말하면 만수가 이미 갖추어지고 만수를 말하면 일본은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나누어 말하자면 나뉘는 경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현자(賢者 상대방)가 말씀하신 "물은 샘에 근본하고 나무는 뿌리에 근본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氣)는 본래 선후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근원으로 말하면 이 이(理)가 있은 다음에 이 기(氣)가 있으니 이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운행으로 말하면 이 기가 있은 다음에 이 이가 갖추어지니 기가 먼저이고 이가 나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성(性)은 본래 오성(五性)의 총체적 명칭이지만 혼연(渾然)하게 뒤섞여 있는 것 가운데 또 찬연(粲然)하게 구분하여 말할 것이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는 것은 마치 화살의 활촉과 같고 각기 껍질이 있는 것은 석류의 씨와 같다."라고 한다면 잘못입니다. 합하여 말한다면 하나의 성(性)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나누어 말하자면 오성(五性)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자(朱子)가 "하나의 성이 혼연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오리(五理), 오태극(五太極)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조리(條理)나 문리(文理)를 이른다면 천하에 어찌 일찍이 오리만 있겠습니까. 태극이 이(理)의 총체적 명칭이라면 세상에서 또 어찌 일찍이 오태극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성(性)이 이(理)를 감싸 안고 있는 것이라면 일성(一性), 오성(五性)이라고 이르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좁은 견문으로 어찌 조그마한 의미라도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강습(講習)의 도리로 볼 때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보잘것없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거듭 신중하게 생각하여 회답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示喩縷縷。足見近日喫緊。甚不草草。夫一本大本。固無二致。然細分之。則一本是理上說。大本是心上說。是故一本與萬殊爲對。大本與達道爲對。且一本萬殊。固無界位。言一本而萬殊已具焉。言萬殊而一本不外焉。然若以分言之。則不可謂全無界位。如賢所謂水本於源。木本於根是也。理氣本無先後。然若以源頭言。則有是理。而後有是氣。謂之理先氣後可也。若以流行言。則有是氣而後是理具焉。謂之氣先理後可也。性固五性之總名。而渾然之中。又不無粲然之可言。以此意會。其象可見。若曰齊頭倂立。如箭之有簇。各有甲殼。如榴之有核則誤矣。合而言之。則謂之一性可也。分而言之。則謂之五性可也。是以朱子不曰一性渾然云云乎。但五理五太極。不成說理是條理文理之謂。則天下何嘗有五理而已乎。太極是理之總名。則天下又何嘗有五太極之可言乎。若夫性是理之結窠處。則謂之一性五性豈有不可乎。謏聞寡見。安足以發明萬一之意。但於講習之道。不容無答。玆以仰布鄙意。幸加三思而爲之回敎之。如何。 일본은……되고 《주자어류》에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근본이 되는 것과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은,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나가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와 수많은 가지와 잎이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27 論語9 里仁篇下 子曰參乎章》 대본은……됩니다 《중용장구》 제1장에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이른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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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심에게 답함 答洪允深 세모(歲暮)에 그리움은 다른 날보다 배나 더한데, 은혜로운 편지를 받으니 감사하고 위로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시에 매우 바빠서 사의(謝儀)를 쓰지 못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걱정하며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모시고 살피는【侍省】 체절(體節)69)이 한결같이 높고 넉넉한지 거듭 여쭙니다.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피인(被因)'이라 하신 것은 듣건대 매우 염려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잘되어가는 것은 늘 적고 늘 역경(逆境)이 많습니다. 옛날의 성현(聖賢)도 혹 면하지 못한 바인데 하물며 이처럼 기나긴 밤과 같은 말세【衰叔】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하늘의 처분을 들어야 할 뿐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망령되이 스스로를 굽히겠습니까.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70)에 "사생(死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결한다면, 그 밖의 영욕(榮辱)은 알 수 있다네.【以至死生皆處了 自餘榮辱可知之】"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부분이니 어떠합니까? 존선장(尊先丈)의 문자(文字)는 저처럼 천열(淺劣)한 사람이 진실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나 다만 맺은 정의(情誼)의 소중함을 생각하면 감히 굳이 사양할 수는 없을 따름입니다.'일변(一變)'이라고 하신 것은 오직 쇠퇴한 풍속에 대해 탄식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정사를 하는 절도에 있어서 부자(夫子)를 담당하게 하였다면 또한 어찌 한 번 변화하여 점차 나아지는 것이 없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부자(夫子)께서 검소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지 않는 일로 답한 것은, 곧 왕도(王道)와 패도(覇道)가 나누어지는 지점입니다.'편안한 곳을 편안히 여겨서 옮길 줄 안다.【安安而能遷】'71)라고 말한 조목 하나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현(聖賢)의 말씀에서 어느 것이 인의(仁義)를 겸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정(政)'은 대강을 말한 것이고 '사(事)'는 조리입니다. 무릇 조금씩 언급해 가는 것은 진실로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을 하거나, 또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歲暮懷想。有倍他日。際承惠函。感慰曷量。但時適悤劇。未修謝儀。一念耿耿。信餘有日。更詢侍省體節。一直崇裕。馳溯不任。示中被因云云。間甚代慮。世間萬事順境常少。逆境常多。古之聖賢。或有所不免。況此衰叔長夜之時乎。惟當盡其在我之道。而聽天處分而已。豈可恐懼憂惱。妄自隕穫也。康節詩曰。以至死生皆處了。自餘榮辱可知之。此是吾儕所當勉力處。如何如何。尊先文字。以若淺劣。固不當犯手。而但以契誼之重。有不敢牢讓故耳。一變云云。非惟發歎衰俗之意。而亦言其爲政節度處。則使夫子當之。亦豈無一變之漸耶。夫子答以不儉不禮者。卽王覇之所以分也。安安而能遷云云一條。固然。然聖賢之言。其孰非兼仁義者哉。政是大綱說。事是條理。凡因及之漸。固有自大而小者。亦有自小而大者。 체절(體節)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 그 사람의 기거(起居)나 건강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강절(康節)의 시 인용한 시는 〈수미음(首尾吟)〉 135수 중, 제22수의 함련(頷聯)이다. 편안한 곳을 편안히 여겨서 옮길 줄 안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재물을 모으면서 흩어 베풀 줄 알며, 편안한 것을 편안하게 여겨 옮길 줄 안다.【積而能散, 安安而能遷.】"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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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에게 써서 주다 書贈金龜淳 회암(晦庵 주희(朱熹)) 선생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이 부귀와 빈천에 대해 입장이 정해지지 않으면 입문하자마자 곧 어긋나게 된다." 하였다. 무릇 부귀와 빈천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있게 되는 분수이고, 도덕과 인의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있게 되는 성품이니, 부귀하다고 해서 풍부해지지 않고, 빈천하다고 해서 인색해지지 않으며, 부귀하다고 해서 행해지지 않고, 빈천하다고 해서 폐기되지 않는다. 진실로 그 만남을 편안하게 여겨 나의 법을 행할 수 있다면 사립문이나 옹기로 만든 창문은 곤궁함이 되지 않을 것이고, 말채찍을 잡거나 문을 지키는 것은 비천함이 되지 않을 것이다.아, 나에게 있는 지극히 존귀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외면을 향해 바삐 내달리면서 의리와 분수를 침범하여 대낮부터 저물녘까지 말단 벼슬을 추구한다면 어찌 심히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배우는 사람이 입장을 세우는 초기에 분별하여 취사와 향배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어긋나면 큰 근본을 이미 상실한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을 배우겠는가.맹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넓은 집인 인(仁)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인 예(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인 의(義)를 행하면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바뀌게 하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으니, 이러한 사람을 대장부라 이른다."21)라고 하였으니, 아름답구나. 이 말이여!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읊조리면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이 감개한 마음을 갖게 한다.김생(金生) 귀순(龜淳)이 수개월 동안 나를 따라 공부하였는데, 이별할 때에 남은 회포를 이길 수 없기에 이 글을 써서 줄 것을 청하였다. 晦庵先生曰。學者不於富貴貧賤上。立得定。則是入門便差了。夫富貴貧賤。人生所必有之分。道德仁義。人生所必有之性。不以富貴而豊焉。不以貧賤而嗇焉。不以富貴而行焉。不以貧賤而廢焉。苟能安其遇而行吾法。則蓽門甕牖不爲窮。執鞭抱關不爲賤。嗚呼。不求其至尊至貴之在於我者。而向外奔走。犯義犯分。以求一資半級於黃昏白日之間。豈非不思之甚耶。此學者立脚之初。所當分別劈破而爲取舍向背者也。若於此差却。則大本已失。更學何事。孟子曰。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旨哉言乎。三復諷詠。令人有感慨不盡之意。金生龜淳從余遊數月矣。於其別也。不勝餘懷。請書此以贈。 천하의……이른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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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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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대부 호군 만은 백공 묘표 正憲大夫大護軍晩隱白公墓表 장흥(長興) 고읍면(古邑面) 하발촌(下鉢村) 뒤 곤좌간향(坤坤艮向)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정헌대부(正憲大夫) 대호군(大護軍) 백공(白公) 휘는 영필(永弼), 자는 경흥(敬興)의 의발이 묻힌 곳이다.공은 순묘(純廟) 경진년(1820, 순조20)에 태어나 금상(今上) 갑오년(1894, 고종31) 12월 15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4세이다. 타고난 기질과 품성이 온후하고 질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안이 대대로 너무나 가난하였기에 부지런히 일하여 부모님을 봉양하였는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련하여 올렸다. 병간호할 적에는 집 밖에서 기도하고 약을 올리기 전에 먼저 맛보았으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질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흘려 살렸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이 지나쳐서 몸을 상할 정도였으므로 이웃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비석을 세우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더라도 폐하지 않았다. 4대의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오래 유지할 규정을 만들었다. 또 종가(宗家)를 도와주고 구휼하여 본업을 편안하게 영위하게 하였다.몇 칸의 가숙(家塾)을 지어 서적을 소장하고 곡식을 축적한 다음 원근의 명사를 널리 초빙하여 모여서 서로 강론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본받는 바가 있게 하였다. 친척과 벗들 가운데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옷을 마련해주고 굶주린 자가 있으면 음식을 주었다.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조금도 인색한 적이 없었다. 흉년에는 번번이 인근의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이 몇인지 헤아려 달마다 일정하게 주고서 다음 해 보리를 수확할 때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는데, 그 비문에 대략 "100리 땅 안에 공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굶주리는 우리를 살렸으니 많은 사람에게 비석으로 전한다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빌렸다가 갚지 않은 돈이 수백 금이었는데 ,공의 아들이 관아에 보고하여 독촉하고자 하자, 공이 크게 꾸짖기를 "붕우 간에 재물을 융통하는 것은 의리이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것은 형편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리와 우의로 사귀다가 끝에 가서 다투어 송사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즉시 그 문서를 가져다가 태워 버렸다.일찍이 자식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시례(詩禮)는 선비가 늘 행하는 일상의 다반사이니, 이것을 버린다면 마음 쓸 곳이 없어진다. 우리 선대에서는 문학과 관직이 계속 끊이지 않아 향리에서 명문가가 되었다. 만약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서 대대로 전한 옛 가업을 하루아침에 실추하게 한다면 어찌 선조의 죄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집안일을 제쳐두고 세상일도 물리친 다음 별장 한 칸을 짓고 만은(晩隱)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곳에서 날마다 친족 중의 기로(耆老)들, 향당의 벗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유유자적하게 즐기며 애오라지 세월을 보내며 생을 마쳤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위로 3대의 선조에까지 추증되었다. 아들 4인 가운데 3인이 과적(科籍)에 올랐으니, 영광이 성대하게 빛났다.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다.백씨(白氏)는 관향이 수원(水原)이니, 고려 때 충숙공(忠肅公) 휘 장(莊)이 먼 선조이다. 해성군(海城君) 휘 맹하(孟夏), 정해군(貞海君) 휘 수장(壽長), 술고당(述故堂) 휘 민수(民秀)는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종택(宗澤)인데, 호조 좌랑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유(瑜)인데, 통덕랑(通德郞)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남현(南鉉)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이효(金利孝)의 따님이다. 공은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윤철(崔允喆)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어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종현(金宗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4남 1녀를 낳았다. 호인(灝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태인(泰寅)이 있고, 규인(珪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냈다. 우인(禹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딸은 청풍(淸風) 사람 김익천(金益天)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호인이 백발의 노년에 백리 길을 고생하며 찾아와서 묘석(墓石)에 기록할 문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실로 감히 부탁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부지런한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대략 보태고 수정하여 짓는다. 長興古邑面下鉢村後坤艮原。有崇四尺。卽故正憲大夫大護軍白公諱永弼字敬興之衣履攸藏也。公生於純廟庚辰。卒於今上甲午十二月十五日。享年九十四。天稟溫厚質慤。自幼有至行。聞於人。家世貧甚。服勤就養。備盡甘胹。侍病露禱嘗藥。衣不解帶。疾革。血指得甦。執喪過毁。隣里感涕。葬而樹碣表阡。朔望展省。風雨不廢。營置四世祭田。定爲久遠之規。又助恤宗家。使之安業。立家塾數間。儲書籍蓄粮穀。廣延遠近名士。聚相講磨。使諸子諸孫。有所矜式。親戚知舊。寒者衣之。飢者食之。性好施予。未有少吝。遇飢歲。輒計鄰近村落飢戶眷口。月給有程。至明年麥登而已。所活甚衆。鄕人立碑誦之。其文略曰。地惟百里。公其一人。活我飢戶。萬口碑傳。有人負債未償者。爲數百金。公之子。欲聞官督之。公大責曰。朋友通財。義也。貧而無償勢也。始以義誼相交。終以爭訟相加耶。卽取其券焚之。嘗戒諸子曰。詩禮是士子日用茶飯。舍此則無所用心。我先世文學仕宦。綿延不絶。爲鄕里名家。若不謹其身。不勉其學。使世傳舊物。一朝墜地。則豈非先朝之罪人乎。及其晩年。掃斥家務。屛除外事。修別庄一室。題其顔曰晩隱。日與族戚者老。鄕黨故舊。賦詩行酒。談笑歌詠。優遊娛樂。聊以卒歲。壽陞祟品。上以追贈三世。子男四人。三陞科籍。光榮赫然。天之報施有德。果爲不虛矣。白氏貫水原。麗朝忠肅公諱莊。其遠祖也。海城君諱孟夏。貞海君諱壽長。述故堂諱民秀。皆中葉顯祖也。曾祖宗澤戶曹佐郎。贈司僕寺正。祖諱瑜通德郞。贈左承旨考諱南鉉。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利孝女。公娶全州崔氏允喆女。無育。繼娶金海金氏宗鉉女。生四男一女。曰灝寅武科五衛將。曰泰寅。曰珪寅武科監察。曰禹寅武科宣傳。女曰金益天淸風人。孫以下不錄。灝寅白首衰境。百里重硏。托以識墓之文。余以殘劣。固知不敢承膺。而難孤勤意。謹据狀而略加增裁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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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선대부 호조 참판 박공 묘표 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墓表 면주(綿州) 서망산(西望山) 남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공(朴公)의 의발이 묻힌 곳이다. 공의 이름은 경란(慶欄), 자는 자선(子善)인데, 선묘(宣廟) 신축년(1601, 선조34)에 면주(綿州)의 고절리(高節里)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다. 대답하고 응대하며 주선하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뜻을 받드는 봉양과 물질적인 봉양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여섯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잠자며 화목하게 지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화기애애함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 두루 화합하고 공경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포부가 컸으니, 당시 저명한 구화(九華) 나공 무춘(羅公茂春)64)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광해군(光海君)이 정사를 어지럽히자 향리에서 문을 닫고 지내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정권을 장악한 간사한 무리들이 국모를 폐하기를 도모하려 하자, 이에 이익을 탐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곳곳에서 선동하였다. 공이 듣고 크게 놀라서 "자식이 만약 부모를 무시하고 신하가 군주를 업신여긴다면, 이는 천하 만고의 막대한 변고이니, 어찌 둥근 머리와 네모진 발을 가지고 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가 마음에 싹틔워 발설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백씨(伯氏) 직장공(直長公) 경록(慶祿), 종형(從兄) 참판공(參判公) 정(侹), 지봉공(芝峯公) 임(任), 승지 임동(林埬), 진사 신유길(辛惟吉), 사인 이시정(李時挺)과 더불어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대의(大義)로 호소하였다. 또 경내 인사 가운데 적신(賊臣)을 추종한 자를 찾아내어 경외(境外)로 쫓아내었다. 이보다 앞서 함평(咸平) 고을원 박정원(朴鼎元)이 흉도(凶徒)를 쫓아내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기까지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혹 이러한 예를 들어 경계하니,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의리상 해야할 바이니 비록 죽더라도 어찌 회피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당시 의론이 옳다고 여겼다.현종 갑인년(1674, 현종15)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숙종 갑자년(1684, 숙종10) 10월 28일에 별세하였다.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아, 공은 멀고 외진 지방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가난하게 살았고, 훌륭한 자질이 있었는데, 덕을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삼강오륜, 존망과 굴신(屈伸)에 관계된 분수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만한 위엄이나 윽박지르는 위세를 개의치 않고 앞장섰으니, 의연히 수많은 사람을 대적할 만할 기세가 있었다. 만일 평소 깊이 함양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대의(大義)를 만목(萬目) 가운데에서 드러내고 대방(大防)을 당대에 보존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얕겠는가. 당시 조직(趙稷), 정유(鄭維) 같은 제공들이 모두 포의(布衣)로 절개를 드날렸다. 공도 버금가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박씨(朴氏)는 계보가 무안(務安)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국학 전주(國學典酒)인 휘 진승(進昇)이 그 시조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명성이 있었다. 고조 휘 익경(益卿)은 호가 애한정(愛閒亭)인데, 효도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성공 삼문(成公三問), 박공 평년(朴公彭年)과 도의로 교제하였으며, 장릉(莊陵 단종)이 양위(讓位)하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나중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성(城)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고, 조부는 휘 언순(彦純)인데, 호조 참의이다. 부친은 휘가 념(恬)이고, 호가 죽헌(竹軒)인데,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는데 김하서(金河西), 송규암(宋圭庵), 유미암(柳眉巖) 제현과 동문으로 친하게 지냈다.을사사화가 발생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모친은 공인(恭人)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정양공(靖襄公) 심귀령(沈龜齡)의 따님이다. 아들 여섯을 낳았으니, 공은 그중 막내이다. 배위(配位)는 고성 김씨(固城金氏)로, 김시의(金始義)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 여섯을 낳았다. 장자인 중길(重吉)은 호가 청검재(淸儉齋)로 가정의 훈계를 잘 계승하였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효길(孝吉), 숭길(崇吉), 성길(聖吉), 지길(之吉), 진길(眞吉)이니, 모두 유자의 행실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자손이 번성한 것은 어찌 선인이 공덕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후손 기용(淇容)과 안상(顔相)이 한겨울에 발이 부르틀 정도로 고생하면서 멀리서 찾아와 묘표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형편없는 내가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한 것은 백세토록 전해지는 성운(聲韻)에 감회가 절실하고, 양가 선대의 교분도 모른 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綿州西望山南麓負甲之原。有崇四尺。卽故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衣履之藏也。公諱慶欄字子善。以宣廟辛丑。生于綿之高節里。幼而岐嶷。至孝根天。唯諾應對。周旋勤勞。凡百志物。無不克備。兄弟六人。友弟純篤。對床連被。怡怡無間。推以至於族戚鄕黨。和敬周至各得其心。勤身力學。抱負贍博。一時知名如九華羅公茂春諸人。皆其從遊也。光海政亂。閉門鄕閭。不赴公車。及群壬當路。謀廢國母。於是嗜利無恥之輩。在在煽動。公聞之大駭。以爲子而無父。臣而無君。此是天下萬古莫大之變。豈圓頭方足戴天履地者之所可萌諸心而出諸口者耶。與其伯氏直長公慶祿。從兄參判公侹。芝峯公任。承旨林埬。進士辛惟吉。士人李時挺。通諭列邑。聲告大義。又探境內人士趨赴賊臣者。逐出境外。先是咸平宰朴鼎元。以斥出凶徒。至被竄謫。人或擧此爲戒。公奮然曰。義所當爲。雖死何避。時論韙之。顯宗甲寅陞通政。肅宗甲子十月二十八日考終。嘉善其追贈也。嗚呼。公生長遐荒。窮約布素。懷瑾握瑜。闇然不露。而於綱常倫理存亡屈伸之分。不知威武之可畏。氣燄之可拍。而挺身出脚。毅然有千萬人可往之氣。如非素養之深。安能乃爾。聾大義於萬目。存大防於一世。其功豈淺淺哉。當時如趙稷鄭維諸公。皆以布衣著節。公亦其流亞一隊人也。曷不偉然。朴氏系出務安。麗朝國學典酒諱進昇。具始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益卿號愛閒亭。孝除寢郞。與成公三問朴公彭年爲道義交。莊陵遜位。掛冠歸鄕。後贈吏曹參判。曾祖諱城禦侮將軍。祖諱彦純戶曹參議。故諱恬號竹軒。軍資監判官。受學于慕齋金先生。與金河西宋圭庵柳眉巖諸賢。同門友善。乙巳禍作。棄官歸鄕。妣恭人靑松沈氏靖襄公龜齡女。擧六男。公其季也。配固城金氏始義女。墓合祔。育六男。長重吉。號淸儉齋。承襲庭訓。贈左承旨。次孝吉崇吉聖吉之吉眞吉。皆以儒行著聞。孫曾以下。不能殫記。螽斯椒聊。其非積累餘蔭耶。後孫淇容顔相。大冬遠趼。來請表墓之文。余以無狀。不忍牢讓者。以百世聲韻。有切曠感。而兩家先契。又不可以二視之也。 나공 무춘(羅公茂春) 1580~1619.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구봉(九峯)ㆍ구화(九華)ㆍ기지(耆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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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오공 묘표 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公墓表 공의 휘는 응조(應祚), 자는 화여(和汝)이다. 오씨(吳氏)는 계보가 보성(寶城)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의 보성군(寶城君) 현필(賢弼)을 중시조이다. 가문의 명성과 세가(世家)의 덕으로 동방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조는 태유(泰有)인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석규(錫圭)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만상(萬祥)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수남(壽南)인데, 으로, 호가 용한(容閒)이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다. 모친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로, 양중현(梁中鉉)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계유년(1813, 순조13) 6월 4일에 부춘(富春)의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어머니가 품팔이로 절구질하고 바느질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늙은 부모님을 편안하게 봉양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처럼 수고로움을 끼치니 이것이 어찌 자식 된 도리이겠는가."라고 하고는 살림을 맡아 꾸렸다. 이를테면 땔나무하고 가축을 기르며 농사짓고 집을 짓거나 신을 삼고 베를 짜는 일을 모두 자신이 직접하였다. 그렇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림이 차츰 펴졌고, 맛있는 음식을 넉넉히 봉양하게 되었다. 새벽이나 저녁 사이 일을 하는 여가에 조용히 곁에서 모시면서 온화하게 응대하였으며, 잠시 외출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와서 뵈었다. 이어서 밖에서 들은 소식을 전해 주어 적적하지 않게 하였다. 부친 양씨(梁氏)가 노환으로 앉거나 누울 때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였는데 밤낮으로 간호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은 귀밑털과 머리털이 하얘진 노년의 나이에도 색동 적삼을 소매에 두르고 뜰을 뛰어다니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공을 사람들이 노래자(老萊子)에 견주었다.병인년(1866, 고종3) 8월 21일에 졸하였다. 장사 지낸 다음에 세청면(世淸面) 한한동(閒閒洞) 안산(案山) 해좌(亥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27년 뒤 임진년(1892, 고종29)에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로, 홍수증(洪壽增)의 따님이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양휘영(梁暉永)에게 출가하였다. 묘소는 품평촌(品坪村) 앞의 치촌(峙村) 부을(負乙) 언덕에 있다. 계배(系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홍경주(洪敬周)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홍(在鴻), 재봉(在鳳), 재순(在淳)이고 사위는 정재우(鄭在禹)이다. 묘소는 부군의 왼쪽에 쌍분으로 합장하였다.아, 나는 혼인하기 전에 외람되이 이웃에 살아 공의 댁에 출입하면서 공의 자취 뒤에서 배종(陪從)한 것이 어제처럼 또렷한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4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장자는 세상을 떠나고 어린 자는 늙었으니, 옛일을 떠올리고 지금을 생각해 보면 서글픈 마음 가누기 어렵다. 맏아들 재홍(在鴻)이 나에게 묘표를 부탁하였다. 명을 전한 자는 이방손(二房孫) 창호(昌鎬)이다. 公諱應祚。字和汝。吳氏系出寶城。以麗朝寶城君賢弼爲中祖。門望世德。爲東方鉅姓。高祖泰有。贈司僕寺正。曾祖錫圭。贈左承旨。祖萬祥。贈戶曹參判。考壽南號容閒。同中樞。妣濟州梁氏中鉉女。純廟癸酉六月四日。生公于富春之七松里。幼有至性。見慈夫人行傭眷織。以糊眷口。歎曰。不能安養老親。而反貽勞苦如此。此豈人子之道耶。幹理家務。如樵牧耕稼。板築捆織。無不身親爲之。行未幾何。生理梢紓。而甘旨克然。晨昏之間。事務之暇。從容侍側。溫溫唯諾。有小出入。必反面。因以外間所聞。誦以告之。使之忘寂焉。梁氏以老病。坐臥須人。晝宵扶持。造次不離。公年至耋艾。鬢髮皤如。而班衫彩袖。趨戱盡歡。人擬之於老萊。丙寅八月二十一日卒。葬而移厝於世淸面閒閒洞案山亥坐原。後二十七年壬辰。贈童蒙敎官朝奉大夫。配豐山洪氏壽增女。生一女。適梁暉永。墓品坪村前峙村負乙原。系配豐山洪氏敬周女。擧三男一女。曰在鴻在鳳在淳。鄭在禹。墓祔乾位左雙兆。嗚呼。余在丱弁。忝同隣閈。而出入陪從於杖屢之後者。歷歷如昨日。而荏苒歲月。已作四十年前事矣。長者沒幼者老。緬古想今。悲悵難任。胤子在鴻。屬余爲文以表墓道。將命者。二房孫昌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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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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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5) 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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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회락】1)에게 주다 與梁處中【會洛】 상단(上段)에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人生氣稟, 理有善惡】"라고 한 구절은, 품부받은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이로부터 나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단(下段)에 "악함도 또한 성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라고 한 구절은, 유행(流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과함과 모자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근본이 모두 성(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풀이하신 "품부받은 기질에는 반드시 선과 악의 차별이 있는 까닭도 또한 성의 이이다【所稟之氣, 所以必有善惡之殊者, 亦性之理】"라는 말은, 바로 '이에도 성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과 악의 분별이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애초부터 이가 아님이 없다【以爲氣有淸濁粹駁, 而爲善惡之分者, 亦未始非理】'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칫 그 '이(理)'라는 글자가 '실리(實理)'의 '이'로 간주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말하기를 "여기서 '이'는 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理當如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또한 하단을 해석한 부분에서 바로 '유행(流行)' 및 '과함【過】과 모자람【不及】' 등의 용어에 대해 말한 것은 볼 만합니다. '미발(未發)'은 본시 마음【心】의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니, 품부받은 기질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래 '미발(未發)'이라는 글자가 상단과 하단에 나뉘어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본래 나의 의견이 아닙니다.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경우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材料)이니, 때에 따라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때【未發時】의 경우에는, 다만 전고의 인용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내가 일찍이 '이치상 선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구절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시절이며, 다만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만을 언급한 것이겠습니까.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것【未發】보다 어질다고 하는 것은, 품부받은 기질에 선과 악이 없다고 한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이 오로지 이 마음을 일으켜서 유행한 후의 사물을 보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아 보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논의한 여러 조목이 혹 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어느 곳에서는 "발현이 되지 않은 때에는 기질에 청탁(淸濁)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하였고, 또한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지만 악이 본디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선과 악이 상대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잘못 이해하신 것이니, 이것은 내가 말한 뜻이 아닙니다. 기질이 일에 쓰이지 않으면 담연하고 허정(虛靜)하여서, 진실로 청탁(淸濁)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하물며 선악이 있다고 말할 만하겠습니까. 다만 그 품부받은 기질의 본질은 아주 잠깐의 미발(未發)로 갑자기 성인(聖人)과 같이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설을 멀리서 인용할 필요가 없어서, 다만 그대【高明】가 알려준 '맑고 깨끗한 기질【澄淸之氣】은 성인(聖人)이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것이나, 뭇 사람들은 홀연히 그것을 잃는다'라고 한 말을 그대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홀연히 그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별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 바로 자기의 품부받은 기질이 같지 않은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지 않은 구별이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입니다.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인가【臨發而排定耶】'란 것에 대해서는, 만약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이면, 정자(程子)는 마땅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이 동요하여 선악이 있게 된다'라고 하지, '이(理)에 선악이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理)가 비록 선하거나 악하더라도 그 이는 아직 형질을 갖추지 않는다면, 청탁(淸濁)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악(善惡)이 상대적이라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가만히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으면, 그 더러움이 발동하지 않으나, 그 맑은 것이 깨끗한 그릇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이 설명에 어찌 조금의 의심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극념(克念)과 망념(罔念), 공(公)과 사(私), 향(向)과 배(背)로써 구별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기질(氣質)의 선악으로 갑자기 성인이 되고, 갑자기 광인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안자(顔子)의 홍로지설(洪爐之雪)2)이나 시우지화(時雨之化)3)와 같다면, 한 번 맑아져서 곧바로 변화하여서 성인(聖人)의 기질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큰 근본도 또한 어찌 보면 기질을 떠나서 세운 것이니, 다만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은 상태에서 늘 맑고 고요함은, 이 큰 근본이 서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한 설은, 내가 일찍이 미발(未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단에서 유행(流行)을 설명한 곳과 비교하여서 단락이 없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올바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이에 "곧바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서 말했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봐주길 바랍니다. 변별한 것은 많으나, 구별한 것은 단지 한 곳밖에 없으니, 한 곳이 합당하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대저 '기불용사(氣不用事)' 네 글자를 상세하게 보아서 알아차린다면, 마땅히 막히고 통하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보여주십시오. 上段人生氣稟。理有善惡。是氣稟有淸濁粹駁。而爲善爲惡。於此分焉之謂也。下段惡亦不可不謂之性是就流行上有過不及之差者。其本皆出於性之謂也。朱子解之曰。所稟之氣。所以必有善惡之殊者。亦性之理。此是解理有善惡一句。以爲氣有淸濁粹駁。而爲善惡之分者。亦未始非理云爾。然怕人將此理字。作實理看。故旋又曰。此不是說實理。猶云理當如此。又於解下段處。卽以流行及過不及等語。言之此可見矣。未發。本是心上說。不當於氣稟上。下未發字。分上下段。作未發已發。亦本非愚意也。淸濁粹駁。此是氣稟之本色材料。不可以隨時有無。而於未發時。則但不用事焉耳。況愚未嘗以理有善惡爲未發時節。而特以氣稟上本色材料言之耶。賢於未發。謂無氣稟善惡則可矣。而若以淸濁粹駁。專作此心流行後物事看。恐不然矣。更詳之如何。所論諸條。或不無不諒鄙意處。有曰。未發時。氣有淸濁駁混。又曰。氣不用事。而惡自在。又曰善惡相對云云。鄙說若果如此則誠誤矣。然此非愚之言也。氣不用事。澹然虛靜。固無淸濁之可言。況有善惡之可說乎。但其氣稟本質。有不可以霎刻未發。而遽變如聖人。今不必遠引他說。只以高明所諭澄淸之氣。聖人常久而不失。衆人忽然而失之之言。言之。其常久而不失。其故何在。忽然而失之。其故何在。其故不在別處。不在別人。而在於自己氣質所稟之不同。然則其不同之分。自來已然耶。至於臨發而排定耶。若臨發而排定。則程子當曰。人生氣稟。動有善惡。不當曰理有善惡。理雖善惡。而其理未形。則不可謂淸濁混。亦不可謂善惡對矣。水雖在濁器。而止而不動。則濁不用事。而其淸與在淨器者。無異。此說何須疑也。作聖作狂。以克念罔念。公私向背言之。何嘗以氣質善惡。忽然而聖。忽然而狂耶。如顔子洪爐之雪。時雨之化。則一澄淸便渾化。却與聖人氣質無異矣。大本亦何嘗離氣質而立。但氣不用事而湛一虛靜。此大本所以立也。人生氣質理有善惡之說。愚未嘗認作未發看。但比下段說流行處。不能無段落耳。如此看。恐爲正當。而乃曰迂回耶。更詳之爲望。所辨雖多。而所分只在一處。一處合則無不合矣。大抵氣不用事四字。詳細看取。宜無許多窒礙矣。如何如何。更示至當之歸也。 양회락(梁會洛, 1862~1935)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홍로지설(洪爐之雪) 큰 불화로 속에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顏淵)이 인을 지키다가 잠시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마치 큰 화로 속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어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우지화(時雨之化) 초목이 철 맞게 내린 비에 잘 자라듯이 교화가 미침을 말한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가르침이 다섯 가지인데, 때맞게 감화하듯 한 것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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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직접 찾아와 준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섣달 추위에 덕을 함양하면서 신명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의 생활도 평안하신지요?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그저 궁벽한 시골집에 칩거하면서 나날이 더욱 쇠약해져만 갑니다. 단지 절절하게 그리워하며 만나 뵙지 못하는 아쉬움만 더할 뿐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러운 이 시기에 실심(實心)으로 이 일을 대하는 이는 오직 그대【高明】 한 사람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애초부터 가졌던 구구한 소원이 아님이 없었지만, 험하고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나아갈 만한 여력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보여주신 문목(問目)은 조목마다 응답해 나아갔으니, 다시 상세하고 확실하게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음양(陰陽)·강유(剛柔)·인의(仁義)에는 삼재(三才)의 도(道)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섞이지 않은 본체의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陰陽)·강유(剛柔)는 진실로 도(道)가 아니며, 체용이 떨어지지 않은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과 강유는 '도가 아니다【非道】'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理)가 이(理)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세심하게 살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말하길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장자(張子)는 "기화(氣化)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도의 체용(體用)은 음양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 모두를 참고할 만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한데, 어째서 선한지 않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성악설(性惡說)을 논파할 만한 때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先德)께서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설명하여서, 성선설(性善說)을 보완하고 성악설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인(後人)들은 이(理)가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기고, 나아가 미발(未發)도 또한 기질지성이며, 요순(堯舜)도 또한 기질지성이라 여깁니다. 오호라, 선덕(先德)들이 논리를 세워서 장차 성악설을 배척하려고 하였는데, 후인들이 이 세 글자를 가지고 도리어 성악설을 증명하는 말로 사용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만약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긴다면, 천하의 어떤 이(理)인들 기(氣)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공허한 의론에 묶이고 얽매일 것이니, 우뚝 홀로 선 연후에야 본연의 성품이 될 것입니다. 이(理)의 묘처(妙處)를 신(神)이라고 하는데, '묘(妙)' 자와 '신(神)' 자를 만약 기(氣)에 속해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理)는 완전히 공허하여 하나라도 쓸 데가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 용(用)의 측면에서 신(神)이라고 한 상단과 하단의 글들은 태극(太極)의 참다운 면목을 말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 중단(中段)의 '신(神)' 한 글자에 대해서만 홀로 기(氣)에 대해 말한 것이겠습니까. 칠정(七情)은 사람의 정(情)을 통틀어 말한 것이니, 사단(四端)은 특히 이 칠정 중에 나아가, 그 선한 것만을 끄집어낸 것입니다. 칠정과 사단은 본래 양단으로 나뉜 것이 아니니, 어찌 내외로 구별을 두었겠습니까.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4) 또한 불가한 것이니, 다만 사단(四端)과 상대되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委枉何等感荷。未審臘寒養德有相。動止珍休。馳仰不任。義林跧伏窮廬。衰索日甚。只切悠悠靡逮之恨而已。缺界滔滔。實心此事者。惟高明其人也。昕宵遊從。未始非區區之願。而崎嶇險釁。無力可就。奈何奈何。所示問目。逐條塡去。更加詳確如何。陰陽剛柔仁義。三才之道備矣。以不雜者言之。陰陽剛柔固非道也。而以不離者言之。陰陽剛柔不可謂非道也。理之爲理。正在於此。惟細心看之可得。是故孔子曰一陰一陽之謂道。張子曰。由氣化有道之名。朱子曰。道之體用。不外乎陰陽。此皆可攷也。人性本善而何故而有不善只此不善二字。若不區處。則性惡之說。無時可破。是故。先德說氣質性三字。以補性善之說。以斥性惡之論。後人以理之具於氣者。統謂之氣質之性。至以爲未發亦有氣質之性。堯舜亦有氣質之性。嗚乎。先德立論。將以斥性惡之論。豈知後人將此三字。反以爲性惡之證佐耶。若以具於氣者。統謂氣質之性。則天下何理有不具於氣者。必懸空係虛。兀然獨立然後。爲本然之性耶。理之妙處謂之神。妙字神字。若屬氣邊看。則理是空空一殼無用之長物矣。況其用則謂之神上下文段。無非太極眞面說。豈於中段神一字。獨言氣乎。七情統言人之情。四端特就七情中剔出其善者矣。七情四端。本非兩端。則何嘗有內外之別也。謂之旁榮側秀亦不可。但與四端對言云然耳。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 《심경부주》 권2 〈성의장〉에 조치도(趙致道)가 주자에게 질문한 것으로 "혹 옆에서 나와 꽃이 피고 곁에서 빼어나 기생하는 겨우살이나 사마귀와 혹과 같은 것은 이것도 비록 성이 동한 것이기는 하나 인심의 발현이요 사욕의 유행이니, 이른바 악이라는 것입니다.【其或旁榮側秀, 若寄生疣贅者, 此雖亦誠之動, 則人心之發見, 私欲之流行, 所謂惡也.】"라고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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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3월 6일에 보내온 편지를 4월 보름에 이르러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상하게 다 알려주시어,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어찌 감사할 줄 모르겠습니까. 주자(朱子)께서 성(性)을 논한 것에 대해, 어떤 이가 말하길 "비유컨대 약성(藥性)을 논하면, 오한과 발열도 또한 형상을 논한 곳이 없는데, 단지 복용을 완료한 후에야 열이 떨어지기도 하고, 열이 오르기도 하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라고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왕왕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성(性)이라고 여기니, 이는 단지 심(心)에 대해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무릇 오한과 발열은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약을 복용한 후에 곧바로 열이 내리거나 오르는 것이 바로 신(神)인 것입니다. 인성(人性)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는 것을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이(理)가 있어서 곧바로 허다한 일에서 나오게 되어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과 같은 것이 바로 신(神)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께서 신(神)자에 대해 기(氣)로 말한 경우가 있고, 이(理)로 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령(神靈)을 성(性)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신(神)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이(理)의 발용(發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혹은 이(理)가 아니라고 말하고, 혹은 기(氣)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신(神)이 바로 이(理)입니다.'라고 하면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謂神卽是理, 却恐未然.】"라고 하고, 뒤이어 "신(神)을 완전히 기(氣)로 간주하여 보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將神全作氣看, 則又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설들을 관찰해보면, 신(神)의 뜻을 분명히 알 게 될 것입니다. 전날에 있었던 한 편의 말은 이(理)로 인정하고, 다른 한 편의 말은 기(氣)로 인정한 것은, 어찌 치우친 의논이 아니겠으며, 왜곡된 견해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에 대해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로부터 그것을 삼가 지킬 것을 생각해봐야 하니, 그대도 또한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힘써 귀착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단의 절반과 하단의 절반에서 기(氣)의 신(神)과 이(理)의 신(神) 등에 대한 설명도 또한 옳지 못하니, 신(神)은 두루하여 정해진 방소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상단과 하단의 절반에 옳은 말이 있겠습니까. 신(神)은 하나이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 이(理)와 기(氣)가 각각 그 신(神)과 하나가 된다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명(神明)' 두 글자는 끝내 다 합쳐지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 또한 상세하게 연구해보면, 저절로 바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주서(朱書)에 신명(神明)은 바로 물(物)이라는 논설이 분명히 있는데, 다시 그것을 운운한단 말입니까. 저의 논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주서(朱書)의 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지난번에 〈경함에게 보내는 편지【與景涵書】〉5)가 있었는데, 아울러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三月六日書。四月望間始得見矣。縷縷纖悉。警發多矣。曷不知感。朱子論性有曰。比如論藥性寒熱。亦無討形象處。但服了後。做得寒做得熱。便是性。今人往往指有知覺者。爲性。只說得箇心。夫寒熱固不可以言神。然服了後。便做得寒熱。便是神。人性之有仁義禮智。固不可以言神。然旣有此理。便有許多事出來。如惻隱羞惡辭讓是非。便是神。是以朱子之於神字。有或以氣言。或以理言。如曰神靈不可以言性。及神者理之發用之說是也。有或言非理。或言非氣。如曰謂神卽是理。却恐未然。及以神專作氣看。又誤之說是也。觀是數說。神之爲義。若可領了矣。前日之一邊之言。認以爲理。一邊之言。認以爲氣者。豈非偏論曲見耶。區區於此。不覺瞿然自失。思以爲從此謹守之計。賢亦深思之。而勉爲歸宿也。若其上一半下一半。及氣之神理之神等說。又恐不然。神周而無方者也。豈有上下一半之可言。神一而不二者也。豈有理氣各一其神之可名。且神明二字。終有未盡合處。此亦細細詳究。自有結案之日矣。朱書明有神明是物之論。而乃復有所云爾耶。鄙說固不足道。而朱書說亦將何以區處乎。向有與景涵書。倂以照及如何。 경함(景涵) 조선 말기 유학자인 황철원(黃澈源, 1878~1932)으로, 자는 경함(景涵)이고,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입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광무 6) 전라남도 구례(求禮) 천은사(泉隱寺)에서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과 강론을 벌였고, 스승 정재규의 권유로 「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 등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광주(光州)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 10권 4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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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세월은 자꾸 흘러서 거의 한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한 번 서로 만나 토론하는 것을 여태까지 빠뜨리고 하지 못하였으니, 가슴 속에 쌓인 슬프고 아쉬운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남쪽을 바라보며 그리운 벗【停雲】6)을 떠올리니, 아침저녁으로 그리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 보내온 편지를 받고,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하시다는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트이는 것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義林】는 그저 빈집에 틀어박혀서 그럭저럭 간신히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남은 시간을 보낼 계책으로 삼고 있으나, 온전히 그것을 위해 보내고 있지 못하여서, 매번 개탄할 뿐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구구절절하신 말씀은 재차 제기해보고서 저의 미천한 식견을 알 수 있었으니, 전날의 말들은 분명치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층이층(一層二層), 미발이발(未發已發)'이라고 한 것은, 그 말의 뜻이 고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도 또한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미발이발(未發已發)'은 바로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기질(氣質)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질은 태어남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니, 진실로 때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의 성품이 혼연하여 도리(道理)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그 청탁(淸濁)과 미악(美惡)의 다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 기질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본(大本)에 저해가 되며, 어찌 성선(性善)에 해가 되어서, 반드시 이 기질이 발현되지 않는 일층과 이층의 설을 그렇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청컨대 미발(未發) 시에 '성인의 성품이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 '성인의 기질은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 다시금 더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남당집(南塘集)》7)을 보았는데, 이 가운데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부분을 '정(靜)에 속할 수 없다'고 하며, 또한 '비은(費隱)'이라고 한 부분은 '동정(動靜)으로 나누어 배속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이 말부터 「경함의 편지【景涵書】」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비은(費隱)을 동정(動靜)으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진실로 옳으나,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말이 정(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조금 더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부디 이에 대해 답변하여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歲華荏苒。洽已半年矣。而一番握討。尙此闕如。懷緖悵恨。謂何如耶。南望停雲。日夕難任。謂外承備審侍省之餘體節佳適。慰豁不可言。義林係蟄空齋。粗聊捱過。而至於尋溫舊業。以爲多少餘日之計。則全未有之。每用慨然。示喩縷縷。復此提起。可見愚陋前日之言。有未瑩也。但所謂一層二層。未發已發。不惟語意不雅。而求之於心。亦未見其可也。大抵未發已發。此是心上說。非氣質上說也。氣質與生具生。固不可以隨時有無。然在此心未發時。一性渾然。道理全俱。而不見其淸濁美惡之異者。以其氣不用事故也。此何害於大本。何害於性善。而必爲此氣未發一二層之說乃爾耶。且請未發之時。謂聖人之性與凡人同乎。謂聖人之氣質與凡人同乎。試於此而更加思省。如何。向見南塘集謂。沖漠無眹。不可便屬於靜。又謂費隱不可分屬動靜。未知此說如何。向以此語及於景涵書中矣。愚意費隱之不分動靜。固然。而至於沖漠無眹之非靜。恐有可商量者。幸爲之示及。如何。 정운(停雲) 하늘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그리운 벗을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정운(停雲)〉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한 벗을 생각해서 지은 시입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남당집(南塘集) 조선 영조(英祖) 때 문인 한원진(韓元震)의 시문집으로, 44권 22책으로 되어 있다. 잡저(雜著)에 심성론(心性論)에 관한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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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與梁處中 봄부터 멍하니 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한 번 만나 뵐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서 한 해가 이미 저물어 갑니다. 그리워하는 마음 절절하여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경함(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과 함께 논설한 바가 있었는데, 그대가 경함에게 보내온 편지도 또한 얻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또한 경함의 편지에 답하였으니, 대략 말하자면,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8)라고 하였는데,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마땅히 '일의 이치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요, '마음의 이치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생생(生生)하기 때문에 영(靈)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각(覺)하는 것이니, 상채(上蔡)9)가 말하길 "마음에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智)는 마음의 정(貞)이요, 지(知)의 이치이며, 사덕(四德 : 仁義禮智)의 근본이고, 만 가지 이치의 창고이니, 이것이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사(先師 : 奇正鎭)께서 이른바 '이치를 싣고 있는 것이 체(體)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靈)이 아니면 능히 깨닫지 못하며, 이(理)가 아니면 깨달을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깨달음의 주체【能覺】'라는 한 구절이 없이 다만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말한다면, 진실로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게 되는 혐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의 주체【能覺】와 깨달음의 대상【所覺】을 상대적으로 들어서 말하였으니, 또한 어찌 이러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혹 어떤 사람이 선사(先師)께 단지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들어서 지각(知覺)하는 것을 이치라고 여기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답하여 말하길 '어찌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깨닫는 행위 주체가 바로 영(靈)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면(下面)에서 '이치를 싣는 것이 체이다【載理爲體】'라는 한 단락의 말을 들어 채운 것입니다. 무릇 선현(先賢)의 말씀은 상대방이 묻는 것에 따라 답을 하는 것이니, 비록 그 답이 똑같이 않더라도 그 지향하는 바는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주재하는 바【所以主宰】'라는 말이 싫은 나머지 이를 두 주재함의 혐의가 있다고 여기고, 또 지각을 주재한다고 여기니, 이는 곧 소이연(所以然)입니다.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어떤 소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논변한 바가 있으나, 바빠서 미처 편지로 써서 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디 그대가 다시 한 마디 일깨움을 주는 말【一轉語】10)을 적어서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스스로의 집착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진실로 이 사람의 병이니,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특이한 것을 만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自春以來。無日不佇待一穩。而荏苒侵尋。歲已暮矣。憧憧懷思。曷有己已。近與景涵有所論說。而賢所抵景涵書。亦得以見之矣。日前又答景涵書。略曰。朱子曰。能覺者心之靈。所覺者。心之理。若賢意。則當曰事之理。不當曰心之理。生生故靈。生生故覺。上蔡云。心有知覺之謂仁。卽此意也。此非所覺者心之理乎。智者心之貞。知之理。四德之本。萬理之藏。此非所覺者心之理乎。先師所謂載理爲體。卽此也。非靈不能覺。非理無所覺。若無能覺一句。而只說所覺。則固有以理覺理之嫌。今以能覺所覺對擧言之。又安有此嫌耶。或人之問於先師。只擧所覺。而認知覺爲理。故先師答云。安有以理覺理之理乎。此言能覺者。是靈故也。是以其下面。擧載理爲體一段語以足之。夫先賢之言。隨問隨答。雖若不同。而其致則一也。云云。且駁所以主宰之語。以爲有兩主宰之嫌。又以爲主宰知覺。卽所以然。而所以之上。復有何所以云云。未知此說何如耶。愚已有所論辨。而忙未書呈耳。願賢更下一轉語以示之。如何。自執太固。固此人之病。而不知其喜新立異至於此也。 《주자어류》 권5에 "지각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질의 영(靈)입니다.【所覺者心之理, 能覺者氣之靈.】"라고 한 말이 있다. 상채(上蔡) 중국 북송 때 성리학자 사량좌(射良佐, 1050〜1130)의 호입니다. 정호(程顥)의 주요한 제자로, 여대림(呂大臨)․양시(陽時) 등과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리며, 뒷날 육구연(陸九淵)의 상산학(象山學)에 영향을 주었다. 일전어(一轉語)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 마디의 번뜩이는 선어(禪語)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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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동지【南至】11)가 장차 가까워져서 양덕(陽德)이 상승하려고 하는 시기에,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부모의 병환은 시절과 더불어 모두 회복되었는지요. 매번 치달리듯 그리워하는 마음 지극하고 절절합니다. 보내 준 편지에 구구절절한 말들은 경계시키고 계발시켜 주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에 혹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 대략 그 내용을 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주재(主宰)를 말하고 나서, 다시 주재(主宰)하는 바를 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과 태극(太極)의 주재(主宰)의 묘(妙)로서 말한 것이니, 진실로 당연하고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그대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또한 알고 있는 것이고, 나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위(無爲)이고, 사람은 유위(有爲)이니, 무위이기 때문에 이(理)가 주가 되고, 유위이기 때문에 심(心)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심(心)은 오로지 이(理)라고 부를 수도 없고, 기(氣)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理)와 기(氣)가 묘하게 합하여서 있는 것입니다. 묘하게 합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묘함【靈】'인 것입니다.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지각할 수 있고,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人能弘道】'고 한 것과 장자(張子)가 이른바 '마음은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心能檢性】'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능히 넓힐 수 있는 능력과 능히 검속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재(主宰)를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능력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용하는 바가 있게 됩니다. 만약 능력을 가지고 주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능소(能所)' 두 글자는 하나만 유지하고 하나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도리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니, 이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면, 모든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경함(景涵)이 이른바 '영묘함은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靈不主宰】'라고 한 것과 '넓게 보면 영묘함은 주재(主宰)가 되고, 상세히 보면 신묘함이 주재(主宰)가 된다'라고 한 말들이 모두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자네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기를 잘 다스려서 다시금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능히 이와 같은 경지에 합하게 되면, 이른바 여러 가지 설명들이 모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는 조목마다 따라가면서 낱낱이 들어서 말하지 말 것이니, 말단에서 위를 범하는 내용을 읽고 나서 놀랐습니다. 마음이 이미 주가 되면, 능소(能所)의 분단이 없을 수 없으니, 만약 그 능(能)을 보존하고자 그 소(所)를 폐한다면, 위를 범하는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한단 말입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에 내가 말한 '마음에는 지각이 있다【心有知覺】'와 '지혜는 지각하는 것의 이치이다【智是知之理】'라는 주장을 옳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만약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지각(知覺)하는 까닭의 이치라고 한다면, 지각하는 것은 심(心)의 영역이 아니라, 성(性)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되므로, 이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지각하는 까닭의 이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평소 지리멸렬한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정신까지 흐리멍덩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을 갈고 닦는 의리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부디 나의 말을 배척하지 마시고 끝내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南至將近。陽德方升。未審生處愼候。與時俱復。每切馳慕之至。示喩縷縷。警發多矣。但於鄙意或不能無疑請略陳之旣言主宰。不當復言所主宰。此以天命本然太極主宰之妙言之。固當固當。非但賢知之。愚亦知之。非但愚知之。人皆知之。但天無爲。人有爲。無爲故理爲之主。有爲故心爲之主。此心不可專喚做理。不可專喚做氣。必是理與氣妙合而有者也。妙合是何物。曰靈而已矣。靈故能知覺。靈故能主宰。孔子所謂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是也能弘之能。能檢之能。其非主宰之謂耶。旣有其能則必有其所。若以能謂非主宰則已。不然。能所二字。不可存一而廢一。不其明矣乎。此是道理大頭臚於此錯。則無不錯矣。景涵所謂靈不主宰。及泛看靈爲主宰。細看神爲主宰之說。皆不以此耶。願高明平心易氣。更加三思也。苟能有合於此。則所謂諸般說話。皆有下落處矣。玆不復逐條枚擧也。末段犯上之云。讀之瞿然。然心旣爲主。則能所之分。斷不可無。若欲存其能而廢其所。則犯上之患。正在於此。如何如何。但來喩以愚所云心有知覺。及智是知之理之說。謂不然。而曰若以仁義禮智之性。爲所以知覺之理。則知覺非心也乃性也云云一條。最不可曉。仁義禮智之性。非所以知覺之理而何。可試思之也。素以滅裂之學。加以昏忘。何足以上下於此等議論乎。但講磨之義。不容無言。幸勿揮斥。終以見喩也。 남지(南至) 24절기의 하나인 동지(冬至)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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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일전에 왕림하여 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병들어 쇠약하여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지팡이를 집고 찾아가서 답례할 예의도 갖추지 못했는데,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서 거의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근래에 경학에 힘쓰며 지내시는 생활은 때에 맞추어 평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러러 그리워하는 구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제대로 힘을 쏟지 못하였고 늙어갈수록 더욱 황폐해지고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에 이르지 못할까 절박하게 한탄만 할 뿐입니다. 애산(艾山)의 자【尺】와 저울【枰】에 대한 가르침은 전날에 우리 두 사람이 마주하여 펼친 내용들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합일(合一)과 분수(分殊)를 성(性)의 측면에서 보는 것은 합당하나, 거기에 심(心)이라는 한 글자를 더하여 넣어서 합일로 간주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일전에 영남의 선비 한 사람이 호남의 한 곳에 보내온 편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편지에 "치우쳐서 말하면 성(性)이요, 전체적으로 말하면 심(心)이다"라고 하였고, 또 "오성(五性)은 각기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그것을 하나로 합하는 것이 바로 심(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영남의 여러 노숙(老宿)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설과 같다면, 찬연히 분명히 나뉜 것이 성(性)이고 혼연하여 하나로 된 것이 심(心)이며, 소덕(小德)이 성이고 대덕(大德)이 심이며, 체용(體6用)이 서로 다른 성품이고 본말(本末)이 서로 다른 형상이니, 그 뜻이 불가함이 당연합니다. 무릇 심(心)에 대해 극히 정미한 경지에서 말한다면, '심(心)은 태극(太極)과 같다'라 하고, '오직 심(心)만이 상대되는 것이 없다'라고 하며, '몸에서 주재하는 것이 심(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경계에 이르러 말하면, 심(心)이 곧 성(性)이고, 성이 곧 심이니, 어찌 구별하여 말하여 한 개의 성(性)자를 심(心)과 서로 견주어서, 한편으로는 치우침에 속했다가 한편으로는 전체에 소속시키겠습니까. 경함차록(景涵箚錄) 책자에 또한 이 내용이 담겨 있으니, 그와 함께 찬찬히 서로 의논하여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日者枉顧。何等感戢。而病骨殘喘。末由杖。策以擧回謝之儀。而駸駸日月。又爲幾旬朔矣。未審經體動靜。與時安宜。溯仰區區不任。義林少而不力。老益荒廢。日暮道遠。只切難逮之恨而已。艾丈尺枰之喩。前日吾兩人對攄之說盡矣大抵合一分殊當於性上看不當添入一心字以作合一看。日前得嶺儒一人抵湖南一處書。有曰。偏言則性。全言則心。又曰。五性各一其理。而其所以合一者心也。未知此說出於嶺中諸老宿之口耶。若此說。則粲然底是性。渾然底是心。小德也是性。大德也是心。體用異品。本末殊狀。其不可也決矣。夫心極其精而言之。則曰心猶太極也。曰惟心無對。曰主於身爲心。說到此境界。心便是性。性便是心。豈別說出一箇性字與心對頭。使一屬之偏。一屬之全哉。景涵箚錄冊子中。亦有此意。幸與之從容商確。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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