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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기 惺齋記 심(心)은 본래 광명(光明)한 물이니, 어떤 미미함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어떤 그윽함도 비추지 않음이 없어 밝음은 일월과 나란하고 광채는 우주에 통한다. 다만 품부 받은 기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려지게 되면 혹 그 밝음을 훼손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마치 거울에 먼지가 끼면 아름답고 추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물이 흙탕물이 되면 작은 티끌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른바 광명보장(光明寶藏)173)이라는 것은 한 구역의 암흑 속174)이 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밝음을 회복하고 그 광채를 되돌리는 것은 그 방법을 장차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175) 상채(上蔡) 사 선생(謝先生)이 말하기를 "경은 성성(惺惺)하게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176) 이것은 만고 유가의 단전(單傳)177)과 요결(要訣)이다. 그러나 '성성' 두 글자는 갑자기 형성하기 어려운데, 급하게 하면 어지러워지고 느슨하게 하면 폐하게 되니, 반드시 과정과 절도를 두기를 마치 궁격(窮格)178)의 공부와 실천의 실상을 좌우에서 견지하고 안팎으로 서로 기른 뒤에야 조성할 수 있는 것과 같고, 하나의 '성성'자만 지켜서 명료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나의 벗 성재자(惺齋子)가 이것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179)으로 간주하여 부지런히 노력한 것이 대개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고생스럽게 이미 시험하여 마음에 묵묵히 계합한 것이 있을 것인데, 모르겠으나 나의 이 말이 자신이 평소 경험한 것과 더불어 크게 어긋남이 있는 데는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글을 남겨두어 성성(惺惺)의 주해(註解)로 삼고 그렇지 않다면 육정(六丁)180)에게 맡겨 혹여 도를 어지럽히는 군더더기 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心是箇合下光明底物。無微不顯。無幽不燭。至於明並日月。而光徹宇宙。但爲氣禀所拘。物欲所蔽。則或不能無虧損其明。如鑑被塵垢而姸媸無分。水攬泥滓。而纖芥不露。所謂光明寶藏者。不過爲一區黑窣窣地耳。然則所以回其明而反其光者。其道將何以耶。程子曰。入道莫如敬。上蔡謝先生曰。敬是惺惺法。此是萬古斯門單傳要訣也。然惺惺二字。猝難湊泊。急之則錯。緩之則廢。必有課程節度。如窮格之功。踐履之實。左右夾持。內外交養。而後可以有造。非守一惺惺字而謂可以了了也。余友惺齋子。以此看作正法眼藏。孜孜用力。蓋已久矣。必有辛苦已試黙契於心者。則未知愚之此言。與自己平日經歷。不至有大悖否。然則留之爲惺惺之註解。不然。付之六丁。無容爲亂道贅言如何耶。 광명보장(光明寶藏) 광명은 불지혜(佛智惠)를 의미하고, 보장은 귀하게 간직된 보물이다. 이 말을 주자가 차용하여 "배우는 사람은 공부를 할 때 반드시 분발하여 마치 안타깝게 무슨 물건을 잃은 사람이 그것을 도로 찾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예컨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하나의 커다란 빛나는 보물[一大光明寶藏]을 다른 사람에게 도둑맞았다면 이 마음에 그냥 버려두고 말겠는가. 반드시 훔친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로 본성이란 뜻으로 쓰였다. 《朱子語類 卷121 訓門人7》 암흑 속 원문의 '흑솔솔지(黑窣窣地)'를 풀이한 말인데, 한밤중처럼 빛이 전혀 없어 새까만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주자가 "사람은 태어날 때 각자 이 이치를 갖추어 태어나는 법이다. 단지 사람으로서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온통 암흑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人之生, 各具此理. 但是人不見此理, 這裏都黑窣窣地.]"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朱子語類 卷31 論語13 雍也篇2》 정자(程子)가……하였고 《근사록》 권4 〈존양(存養)〉에 나오는데, 정이(程頤)의 말이다. 상채(上蔡)……하였으니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에 나온다. 상채 사 선생은 북송(北宋) 때의 학자 사양좌(謝良佐)를 말한다. 단전(單傳) 불교 선종(禪宗)의 교리 전수 방식으로, 문자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여 전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한다.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정법안장(正法眼藏) 학문의 핵심이자 정수라는 의미이다. 원래 불가의 말로 석가가 깨달은 최고의 묘리를 가리킨다. 우주를 밝게 비추는 것을 안(眼), 모든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 하며, 정법(正法)은 이 안과 장을 구비하는 것이다. 육정(六丁) 도교(道敎)에서 이른바 정묘(丁卯)·정사(丁巳)·정미(丁未)·정유(丁酉)·정해(丁亥)·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後漢書 卷50 梁節王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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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기 松下記 소나무라는 식물은 복숭아나무나 오얏나무처럼 향기로운 꽃을 왕성히 피우는 데 모자람이 있고, 오동나무나 버드나무와 같이 짙은 그늘도 적다. 단지 단단한 줄기와 성근 가지, 가느다란 잎, 거친 껍질을 지닌 채 울울창창할 뿐이다. 그러나 성현(聖賢)과 은일(隱逸), 문인과 시인들 중에서 애호하고 숭상하여 노래하고 읊으면서 그 품성을 모든 나무들 위에 올려놓고, 그 부류를 장부의 반열에 견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건대, 봄과 여름 사이에 온 산의 모든 식물들이 푸른빛 일색이다가도 가을 서리가 맹위를 떨치면 쇠락하여 거의 다 그 빛을 잃어버리는데, 오직 빼어나게 자신의 색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소나무뿐이다.아, 절개를 혹 만년에 바꾸기도 하고, 지조를 혹 마지막에 잃기도 하며, 일을 혹 오랜 세월 끝에 폐지하기도 하는데, 더욱이 매우 곤궁한 때와 다급한 즈음에 지조를 잃지 않고 태연하게 나의 의리를 행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만년의 절개를 보호하는 것이 사군자의 첫 번째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창졸간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편안하게 지내는 평소 때부터 궁리하고 실천함으로써 옳음과 그름, 삿됨과 바름이 마음과 안목 사이에서 명료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강대하고 충만하게 한다면 평탄한 때든 험난한 때든 처음과 끝을 보존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나는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처럼 졸렬한 품성으로 풍상에 얽매여 거의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었으니, 지금 이후로 소나무 밑을 따른다면 혹 상유(桑楡)17)에 만분의 일이나마 수습할 수 있지 않겠는가. 松植物也。欠桃李之紛芳。少梧柳之繁陰。而只有硬幹疎枝。細髥鹿甲。鬱然蒼然而已。然聖賢隱逸。文人韻士。無不愛尙歌咏。擅其品於衆木之上。比其類於丈夫之班。其故何在。觀夫春夏之際。滿山品彙。一色蒼翠。及其秋霜動威。零落殆盡。而惟挺然自守者此耳。嗚乎。節或移於晩。守或失於終。事或廢於久。況於窮塞之時。顚沛之頃。能不迷所守而泰然行吾義者。幾人乎此保晩節所以爲士君子第一事也。然此非倉卒可辦。必須窮理實踐於平居燕安之日。使是非邪正。瞭然心目。而浩然之氣。剛大充滿。則其於處夷險。保終始。何難之有哉。余以樗櫟劣品。纏滯風霜。幾不能自保。自今以往。從松下子。庶或有桑楡萬一之收耶。 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해가 떨어질 때 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노년기를 비유한다.  반대로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으로 젊은 시절을 비유한다. 후한(後漢)의 장군(將軍) 풍이(馮異)가 적미병(赤眉兵)과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패주했다가 나중에 적을 격파하자, 광무제(光武帝)가 "동우에는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하였다.[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했던 고사(故事)가 전해진다.《後漢書 卷47 馮異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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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기 松峯記 능주(綾州)의 송석(松石) 마을에 오봉산(五峯山)이 있고, 오봉산 아래에 나의 벗 송봉(松峰)이 거주하고 있으니, 대체로 거주하는 곳을 표지하여 호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일찍 핀 것이 먼저 시드는 것은 일반적인 만물의 이치이고, 처음엔 부지런하다가 나중엔 나태해지는 것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니, 천 리 길을 혹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아홉 길 높이 쌓아올린 산이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무너지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하물며 사람이 늙고 남은 수명이 짧아지면 헛된 욕심이 일어나기 쉽고, 기운이 쇠퇴하고 마음이 약해지면 만년의 절개를 지키기 어려움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옹(翁)은 지금 52세이니, 젊고 장성했을 때의 화려한 시절은 이미 지난 일에 속하고,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오직 앞으로 남은 쇠잔한 시절일 뿐이다. 이는 뭇 초목들이 봄여름의 좋은 시절을 보내고 기다리는 것은 가을날의 서리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옹이 지니고 있는 호가 비록 거처를 표지한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일찍이 한편이나마 현위(弦韋)18)를 뜻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공은 어려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늙어서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도 다른 사람을 따라 둘러대는 뜻이 없었으니, 청컨대 한 가지 일로 말해보겠다. 나는 옹에게 죽마고우로서 죽고 사는 일이나 기쁘고 슬픈 일을 서로 구제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드나들며 놀고 즐길 때도 서로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서로 바로잡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재산을 경영하고 저축하는 데 서로 관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어려서부터 50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일도 서로 속이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면 다른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한(歲寒)의 약속19)을 부칠 수 있고, 스스로 호로 삼는 바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이것을 써서 송봉기(松峯記)로 삼게나. 綾之松石坊。有五峯峯之下。余友松峰翁居之。蓋志其居而號焉者也。然早發先萎。恒物之理也。始勤終怠。凡人之情也。千里之軔。或廢於半途。九仞之山。多虧於一簣。況人老年促。虛欲易動。氣衰情弱。晩節難持乎。翁今五十有二歲矣。少壯繁華。已屬過境。而坐以待之者。惟是前頭衰颯時節。如衆卉群木。閱春夏許多時。而所待者。秋霜而已。然則翁之有號。雖云志居。而亦未嘗不出於一副弦韋之意也。翁幼而孝弟。老而好義。至於凡百云爲。無有徇人回互底意。請以一事言之。余於翁竹馬舊交也。死生歡戚。無不相求。出入遊衍。無不相從。是非得失。無不相規。財産營畜。無不相關。自幼至老五十年。未嘗見其有一事相欺。推此以觀。其他可知。此可以付歲寒之約。而無愧乎所自號者矣。請書此爲松峯記。 현위(弦韋) 활시위와 다룬 가죽을 말하는 것으로, 팽팽함과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 서문표(西門豹)는 성질이 너무 급해 자기의 성질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녔고, 진(晉) 나라 때 동안우(董安于)는 자기의 성질이 너무 느슨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팽팽한 활시위를 차고 다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충하는 자료가 됨을 뜻한다. 《韓非子 觀行》 세한(歲寒)의 약속 만년의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孔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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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현【옥승】에게 답함 答曺士賢【玉承】 방문을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어 그리운 생각 정히 간절하였는데, 뜻밖에 그대 4촌이 방문하였고 그대 편지가 따라왔으니, 직접 얼굴을 보고 진진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위로되는 마음 많았네. 삼가 노친을 모시고 독서하는 체후가 넉넉한 줄 알았으니, 실로 멀리서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색동옷 입고 어버이를 기쁘게 하여100) 하루의 봉양을 삼공(三公)과 바꾸지 않으니,101) 인생의 좋은 시절은 오직 이 때가 그럴 수 있네. 다시 부모님을 모시는 여가에 고서를 읊조리고 옛날 들은 것을 익힌다면, 그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고 그 아취를 취할 만 할 것이니, 옛날에 은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했던 동소남(董召南)102)과 주인궤(朱仁軌)103) 같은 이가 어찌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겠는가? 의림(義林)은 위아래로 외롭고 곤궁하여 정경을 표현하기 어렵고, 오직 긴 백발만 있어 이것이 그 천업(倩業)일 뿐이니, 곤궁한 집에서 슬퍼 탄식한들 무슨 수로 미칠 수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교분을 맺어 뜻을 살핀 지 비록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그 공부의 절도와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모습은 또한 그 속내를 상세히 알 수 없었네. 지금 보내온 한 통의 편지에서 그 독실하고 시원함에 대해 그 만 분의 일이라도 대략 알 수 있었고, 더구나 이른바 "기질이 치우치고 뜻이 또 서지 않아 능히 구습(舊習)을 혁파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매우 치밀하고 힘을 쓰는 것에 게으르지 않음을 볼 수 있었네. 무릇 공부의 요처(要處)는 단지 그 뜻을 세우고 구습을 혁파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와 같다면 기습(氣習)이 치우친 것은 별도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또한 없앨 수 있을 것이네. 뜻이 서면 근본이 더욱 견고하고 구습을 혁파하면 덕은 더욱 진보하네. 다만 살피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비록 이 중요한 말이라도 그 요체가 됨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 어떻게 여기는가? 承枉有年。懷想政勤。料襮。令從氏委訪。惠幅隨之。與親承顔範。津津傾倒。何以異哉。慰沃多矣。謹審奉老讀書。候節沖裕。案愜遠外願聞之情。彩趨供歎。一日三公。人生好時節。惟此爲然。更於餘力暇日。諷詠古書。溫理舊聞。其樂可想。可趣可掬。古之隱居養親。如董召南朱仁軌。豈獨專美也。義林上孤下窮。情景難狀。而惟有三千丈白髮。是其倩業耳。窮盧悲歎。何計可追。吾兩人定交視志。雖已有年。而其功夫節度。進修樣轍。亦末得詳悉其裏許。今於來喩一紙。其篤實開爽。可以領略其萬一矣。況所謂氣質偏駁。志又不立。而不能革去舊習云云者。可見自省之甚密。而不懈於用力也。大抵功夫要處。只在於立其志。而革舊習。如此則氣習之偏。不用別方。而亦可銷磨矣。立志則本益固。革舊習則德益進。但恐察之不精。而行之不力。則雖是要語。而不知其爲要矣。如何如何 색동옷……하여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고, 일부러 마루에 물을 뿌려 놓고 미끄러져서 어린애처럼 울기도 하고, 새를 희롱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小學 稽古》 하루의……않으니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옛사람은 하루 동안의 부모 봉양하는 기회를 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았네.〔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臨川文集 卷9 送喬執中秀才歸高郵》 동소남(董召南) 당(唐)나라 때 안풍(安豊) 사람으로 은사(隱士)인데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한 것을 노래 하였다. 주인궤(朱仁軌)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덕용(德容)이다. 평생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자식들에게는 일생 동안 남에게 밭두둑을 양보해도 1묘(畝)의 밭도 손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小學 嘉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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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행에게 답함 答白子行 헤어진 지 오래지 않아 또 편지를 받았고 인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체후가 더욱 복된 줄 알았으니, 실로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설사 증세로 몇 개월 고생하여 원기를 빼앗겨 기식(氣息)이 곧 끊어질 지경이니, 오직 곧장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네. 보여준 "시인(時人)의 문사(文詞)……"라고 한 것은 문장의 폐단을 다 말하여 남은 것이 없다고 할 만 하네. 나에게 달린 문제는 평소에 확충하고 함양하여 의리가 밝아진 연후에 드러내어 문사의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 또한 모두 평직(平直) 통달(通達)하고 위곡(委曲) 조창(條暢)하여 "시유(時儒)……"라고 한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는가?[문]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인심(人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다.[仁者 心之德]"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바로 사랑의 이치이다.[便是愛之理]"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마음의 덕이다."라고 하고서 한 번 돌려 "사랑의 이치"라고 하였으니, 체가 되고 용이 됨에 오로지 주가 되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 또 "인(仁)은 인성(人性)이다."라고 하지 않고 곧장 "인심"이라 하고, 또 "이 몸이 온갖 변화에 수작하는 주인이 됨을 볼 수 있다."라고 하여, 이 마음을 말하지 않고 몸을 말하였으니, 또한 마음이 몸이 되기 때문입니까?[답] 마음의 덕이라는 것은 인을 오로지 말한 것이고, 사랑의 이치라는 것은 인을 한쪽으로 말한 것이네. 심(心)을 이(理)로 말한 것이 있고 기(氣)로 말한 것이 있으니, 맹자가 이른바 "인은 인심이다.[仁人心]"라고 한 것과 정자(程子)가 이른바 "심은 생도이다.[心生道]"라고 한 것은 모두 이로 말한 것이네. 심은 한 몸의 주인이 되는데, 만약 그대 말과 같다면 심이 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가하겠는가?[문]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을 안다.[盡其心者 知其性也]"라고 하였는데, 문의로 구해보면 이것은 성을 안 뒤에 마음을 다하는 듯합니다. 하늘을 섬김[事天]에 이르러서는 먼저 마음을 보존한 뒤에 성을 기르니, 또한 운용(運用)으로부터 본원(本源)에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까?[답] 마음을 다하는[盡心] 것은 《대학》의 지지(知至)이고, 성을 아는[知性] 것은 물격(物格)이네. 먼저 마음을 보존한 뒤에 성을 기르는 것은 성현이 성을 논함에 마음으로 인하여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네.[문]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하여 1년 복을 입고 벗으니,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한 면복(緬服)107)의 제도는 바로 3개월을 따라야 합니까?[답] 어찌 이장[緬遷]할 때 3개월의 복을 입는 제도에 압강(壓降)108)의 이치가 있겠는가?[문] 근본이 하나라는 '일본(一本)'의 본 자 가운데 이미 만 가지로 다르다[萬殊]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만수(萬殊)는 다만 그 하나의 근본 가운데에서 조리가 나온 것입니다. '일'과 '만'은 층절(層節)이 없고, '본'과 '수'는 단지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만 유행하는 쪽에 나아가 말하면 차례대로 조금 차례대로 조금 따르는 것이 있지만 그 실제는 경계와 위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답] 설명한 것이 매우 옳네. 지금 주기(主氣) 폐단은 단지 이런 의(義)를 모르는 것이네.[문] 《주역》 〈건괘(乾卦) 단전(彖傳)〉에 "건도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고 하였으니, 각각 바르게 한다는 것에서 만물이 한 근원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각각 바르게 하는 밖에 별도로 한 근원이라는 성(性)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해도 한 근원이라는 것에 해가 되지 않고 한 근원이어도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는 데 해가 되지 않으니, 이것이 이(理)의 묘처(妙處)입니다.[답] 그대가 본 것이 착오일세. 그러나 모름지기 여기에 나아가 이면의 실체를 보아야 바야흐로 참으로 이(理)를 본 것이네. 分離未久。又承華幅。因審侍省增祉。實叶願聞。義林泄痢之證。數朔作苦。元氣見奪。氣息奄奄。惟俟朝夕就盡而已。所示時人文詞云云。可謂說盡文敝無餘蘊。在於我者。充養有素。義理昭明然後。發而見於文詞之間者。亦皆平直通達。委曲條暢。而可免於時儒云云之敝矣。如何如何。孟子曰仁人心也。朱子曰。仁者心之德。又曰便是愛之理。旣曰心之德。而一轉爲愛之理。爲體爲用似無專主且不曰仁人性也。而直曰人心。又曰可見其此身爲酬酢萬變之主。不曰此心而言身。則抑心爲身故歟。心之德。是專言之仁。愛之理。是偏言之仁。心有以理言者。有以氣言者。孟子所謂仁人心。程子所謂心生道。皆以理言者也。心爲一身之主。若如賢言。則心爲心之主。其可乎。盡其心者。知其性也。以文義求之。則似是知性而後盡心也。至於事天。先存而後養性。抑自運用而沂本源乎。盡心是大學之知至也。知性是物格也。先存心後養性者。夫聖賢論性。無不因心而發。父在爲母。期年而除。若父在爲母緬。服制直依三月乎。豈於緬遷三月之制。而有壓降之理乎。一本本字中。已含萬殊意。萬殊特其一本中條理出來者也。一與萬無層節。本與殊只一致。但就流行邊說。似有次第逐些。而其實非有界位也。說得甚是。今日主氣之敝。只是不知此個義。乾道變化。各定性命。各正上。見得萬物之一原。非各正之外。別有一原之性也。各正而不害一原。一原而不害各正。此是理之妙處。見得錯。然須就此。見得其裏面實體。方是眞見理。 면복(緬服) 부모의 무덤을 이장하여 다시 장사 지낼 때 입는 상복을 가리킨다. 압강(壓降) 존자(尊者)에게 눌려서 정해진 예법보다 등급을 낮추어 행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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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삼117) 【규용】에게 답함 答安敬三【圭容】 은미한 양(陽)의 기운이 처음 움직여 맑은 기운이 바야흐로 올라오니, 이는 군자의 도가 자라는 때인지라 그리운 마음 더욱 간절하네. 마침 묵계(墨溪)118)에 갔다가 그대가 보내준 한 통의 편지를 받아 펼쳐 읽어본 뒤에 참으로 서로 그리워하고 감응하는 뜻이 말하지 않아도 백 리 밖에서 묵묵히 계합하는 것이 있음을 알았으니, 더욱 마음이 경도되었네. 편지를 받은 이후로 다시 생각건대 어버이를 모시는 여가에 경서를 공부하는 체후는 한결같이 넉넉하고 좋으신가? 편지에서 말한 "몸소 사무를 집행하고 남는 여가에 글을 배운다."라고 한 것 이것은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 입장에서는 용이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매우 좋네. 무릇 이 일은 쉬운 듯하지만 실제로는 어려우니, 오직 정성과 노력이 지극히 독실하여 외면의 일과 함께 따라가지 않아야 바야흐로 가할 것이네. 주자가 말하기를 "매사에 도리를 보고 쉽게 지나치지 않게 하고, 다시 그 속에서 평소의 병통을 간파하여 통렬하게 잘라버리면 학문을 하는 방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물리쳐버리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치와 일이 도리어 두 가지로 나누어지니 독서 또한 쓸데가 없습니다."라고 하였고,119) 남헌(南軒) 장자(張子)120)가 말하기를 "어버이 곁에서 모시는 잡무는 자식의 직분 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구차하게 지나쳐 버려서는 불가하다. 다만 경(敬)으로 위주로 삼아 일마다 살피는 것이 학문하는 방도이다."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그대는 이 몇 마디 말에 깊이 더욱 체득하여 평소 복행하는 요체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微陽初動。淑氣方升。此是君子道長之時。懷仰尤切。適到墨溪。得高明所惠一度心畫。披繙以還。儘知相懷相感之意。有不言而默契於百里之外者矣。尤用傾倒信後更惟侍旁經履。一直崇裕。示中躬執事務。餘日學文者。此在家貧親老之地。有所不容易者。甚善甚善。大抵此事似易而實難。惟誠力篤至。不與外面事俱往。方可。朱子曰。每事看得道理。不令容易放過。更於其間。看得平日病痛。痛加剪除。爲學之道。何以加此。若起一排遣厭苦之意。則理事却成兩截。讀書亦無用處。南軒張子曰。侍旁雜務。子職所當爲。不可苟且放過。但敬以爲主。而事事必察焉。學之道也。願吾友於此數語。深加體當。以爲平日服用之要。如何。 안경삼(安敬三) 안규용(安圭容, 1873∼1959)을 말한다. 자는 경삼, 호는 회봉(晦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묵계(墨溪)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마을 이름이다. 주자가……하였고 《주자대전》권49 〈진부중에게 답함[答陳膚仲]〉제6서에 나오는데 내용의 출입이 있다. 남헌(南軒) 장자(張子)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을 말한다.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ㆍ낙재(樂齋), 호는 남헌이다. 호굉(胡宏)에게 정자(程子)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주희(朱熹)와 절친한 벗이기도 하다.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여 남헌 선생(南軒先生)이라 불렀으며, 주희ㆍ여조겸(呂祖謙)과 더불어 '동남(東南)의 삼현(三賢)'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說)》, 《남헌역설(南軒易說)》, 《남헌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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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원123) 【병춘】에게 답함 答閔士元【內春】 이미 안부 편지를 보내 주었고 또 장차 잠시 머물고 있는 평수(萍水)124)를 찾아오려고 하였는데 나를 향한 마음을 알겠으니, 어찌 감사한 마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르겠으나 편지를 받은 이후 여러 날이 되었으니 여행하는 절도는 어떠한가? 병을 조리하는 중에는 바깥으로 사모하는 것을 단절하면 이 때는 독서와 학문에 가장 용이하게 힘쓸 수 있네. 고인 중에 이와 같이 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그대의 옥성(玉成)125)이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우러러 위로하는 마음 매양 진지하네. 또 편지 가득한 말과 뜻은 후회하고 감발하는 지극함이 아님이 없었으니, 이와 같이 마음을 세운다면 어찌 얻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궁벽한 곳에 벗들과 떨어져 쓸쓸히 지내고 있어 보고 들으며 상종할 유익한 벗이 적을 것이니, 이것이 매우 근심스럽네. 양(羊)으로 소[牛]를 대신 하게 한 것은 만약 다른 온당한 방법이 있었다면 맹자가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선왕(宣王)이 행한 것과 맹자가 말한 것이 바로 온당한 방법이었네. 등문공(勝文公)이 끝내 큰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멀리 헤아리는 것은 불가하니, 고인이 이른바 의심스러운 것은 놓아둔다[闕疑]는 것은 정히 이러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이지(夷之)가 다시 찾아뵙고 다시 찾아뵙지 않은 것에 대해 또한 어찌 헤아려 추측할 수 있겠는가? 문인이 매번 찾아가 뵙는 것은 다른 말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실로 번거롭게 다하려는 것은 불가하네. "곡종(穀種)……"이라 한 것은 자라서 결실을 거두니, 이것은 행하여 사업이 된 곳이네. 만약 인의(仁義)의 단서라고 말하면 불가하다고 한 것은 인의의 단서는 정(情)이 아닌가? 인의예지는 성(性)이고, 측은(惻隱)과 수오(羞惡)는 정(情)이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과 정의 경계를 말한 것이 극도로 분명하네. 만약 "측은지심은 인(仁)이다."라고 한다면 정을 인식하여 성으로 여기는 듯하니, 이 때문에 한유(韓愈)의 박애(博愛)를 인(仁)이라 한다는 설126)이 후세 사람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네. 다만 맹자 시대에는 성선설(性善說)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혹 성이 악하다고 여기고 혹 성이 선악이 섞여 있다고 여겼네. 그러므로 맹자가 사단(四端)을 설명해 내어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밝혔네. 대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가리킨 뜻이니, 절대로 한유가 정을 인식하여 성으로 여긴 것과 견줄 것이 아니네. 형이상(形而上)의 것은 도(道)이니, 형상화 된 뒤의 것[形而後]과 함께 상대해서 거론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하네. 기질(氣質)의 성(性)은 실로 성인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본연(本然)의 성은 비록 하우(下愚)라도 또한 가지고 있으니, 어찌 성을 회복하는[復性] 전후를 가지고 기질의 성과 천지의 성을 나누겠는가?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하였는데, 성(性)은 인의(仁義)이고, 정(情)은 희노(喜怒)이네. 이 성을 갖추어 이 정을 발하는 것은 심(心)이니, 심이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성(性)은 공경(公卿)과 같다고 한 것은 또한 말이 되지 않네. 성(性)은 비유하자면 임금이고, 심(心)은 비유하자면 장수이고, 기(氣)는 비유하자면 졸도이네. 이것으로 보면 심과 성의 구분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네. 旣垂惠存。又且相尋於萍水一宿之地。仰認傾嚮。曷勝感感。未審伊後有日。旅節何似。調病之中。斷制外慕。此時讀書學問。最易爲力。古人多有如此者。則安知吾友玉成。亦不在此乎。慰仰每摯。且滿幅辭意。無非悔恨感憤之至。如此立心。安有不得之理。但僻處離索。少聞見過從之益。此爲悶悶也。以羊易牛。若有他穩當道理。孟子何不言之。宣王之所行。孟子之所言。便是穩當道理也。滕文公之終未有爲。不可懸度。古人所謂闕疑。正指此等事而言也。夷之之更見不更見。亦何可揣測也。門人之每每進見。非有異言可述。則固不可煩悉也。穀種云云。長而結實。是行之爲事業處。若曰仁義之端則不可。仁義之端非情耶。夫仁義禮智性也。惻隱羞惡情也。故孟子曰。惻隱之心。仁之端也此言性。情界至。極其分明。若曰惻隱之心仁也。則似乎認情爲性。是以。韓子博愛謂仁之說。見譏於後人。但孟子時性善之說。不明於世。而或以性爲惡。或以性爲善惡混。故孟子說出四端。以明性之本善。蓋沿流指源之意也。切非韓子認情爲性之比也。形而上是道。不可與形而後。對擧而言之也。氣質之性。固聖人之所無。而本然之性。雖下愚亦有之。豈可以復性前後。分氣質之性。天地之性耶。心統性情云云。性是仁義。情是喜怒。具此性而發此情者。是心也。心之統性情。不亦宜乎。性如公卿。亦不成說。性譬則君也。心譬則將也。氣譬則卒徒也。以此見之。心性之分。槩可知矣。 민사원(閔士元) 민병춘(閔丙春, 1878~?)을 말한다. 자는 사원,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평수(萍水) 부평초가 물위에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객지를 뜻한다. 옥성(玉成) 사람을 옥처럼 훌륭히 완성시켜 준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한유(韓愈)의……설 한유가 〈원도(原道)〉에서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博愛之謂仁]"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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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칠127) 【권주】에게 답함 答金應七【權柱】 노쇠하여 칩거하고 있어 하나의 식지 않은 시체일 뿐이니, 어찌 족히 있으나 마나 한데 사람들 축에 끼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버리지도 멀리하지도 않고 매번 찾아와 주고 거듭 안부 편지를 보내어 전후로 끊임이 없음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네. 이것은 필시 선대인(先大人) 어른께서 살아 계실 때 종유하던 계분을 잊지 않고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니, 고상한 의리에 감복하는 마음이 또 어찌 단지 보통 왕복하던 것과 견줄 뿐이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을 살펴보면, 그 몸가짐과 행동을 삼가고 경계하여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뜻이 대단히 지극하다고 하겠네.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석과(碩果)128)의 소식이니, 매우 기쁘고 기쁘네. 고인의 시에 "이미 밭 갈고 또 씨 뿌려 놓았으니, 때때로 돌아와 내 읽고 싶은 책을 읽노라.[旣耕亦已種 時還讀我書]"라고 하였으니,129) 이것은 그대의 오늘 일이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다시 기원하건대 더욱 아끼고 보중하여 그대에게 향하는 나의 마음을 위로 해주게. 의림(義林)은 쌓인 병이 오래 되어 원기가 점점 탈진되어 숨이 끊어져 거의 다하려하는 것은 형세이니 어찌하겠는가? 단지 그대로 맡겨 둘 뿐이네. 衰朽跧蟄。一未令尸耳。曷足爲有無。而可以比數於人哉。然而座右。不棄不遐。每賜枉顧。荐辱書存。前後源源。至於如此。此必不忘先大人丈當日遊從之契。而繼其志述其事者也。感服高義。又豈止爲尋常往復之比而已。觀此一事。則其謹身勅行。無忝所生之意。何所不至。先丈逝後。碩果消息。可喜可喜古人詩曰。旣耕亦已種。時還讀我書。此非座右今日事耶。勉之勉之。更祈加愛增重。以慰相向義林積瘁之久。元氣漸奪。㱡㱡垂盡。勢也何爲。只得任之耳。 김응칠(金應七) 김권주(金權柱, 1878~?)를 말한다. 자는 응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석과(碩果)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고인의……하였으니 도잠(陶潛)의 시 〈산해경을 읽고[讀山海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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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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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채와유고》65) 서문 咬菜窩遺稿序 내가 젊었을 때에 무사재(無邪齋) 박(朴) 어른66)을 따라 공부를 하면서 교채와(咬菜窩) 선생의 경학(經學)과 행의(行義)가 우뚝하여 남쪽 지방에서 신망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선생이 편찬한 《심경(心經)》67)과 붉은 점으로 선별한 주해(註解)를 얻어 읽고 그 박식함과 정밀함이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었음에 감탄하였다. 그 뒤로 또 중화(中和)와 비은(費隱) 등의 설(說)을 얻어 읽어 보니, 그 변석(辨析)과 발휘(發揮)가 공정하고 합당하여 당시 유가(儒家)의 주기(主氣)에 대한 비난을 배척할 수 있었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당시 뜻과 진실로 부합하였다.일찍이 근세(近世) 이후로 정자와 주자의 강토(疆土)를 지켜 구물(舊物)을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와 벽계(蘗溪 이항로(李恒老))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언론과 견해가 나와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되는 것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선생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이 이르지 않다고 이를 수 없고, 선생을 안 것도 늦지 않다고 이를 수 없으니, 산두(山斗)68)를 추억함에 어찌 미칠 수 없는 한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선생의 손자 학69)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함께 늙어가면서 끊임없이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유고(遺稿)를 받들고 와서 외람되게도 현안(玄晏)70)을 부탁하였다. 내가 하찮은 식견으로 감히 그 부탁을 받들어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본디 알고 있었지만, 삼가 전후로 내가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한 이유를 서술하여 옛사람이 책심(責沈)한 뜻71)에 견주어본다. 余少從無邪齋朴丈遊。聞咬菜窩先生經學行義。偉然爲南服之望者久矣。最後得先生所撰心經及朱選註解。讀之歎其博洽精詳。足以羽翼斯文。最後又得中和費隱等說。讀之其辨析發揮。稱停的當。有以斥時儒主氣之非。而允合乎程朱當日之旨。嘗以爲近世以來。守程朱疆土而不失舊物者。惟蘆沙蘗溪兩先生而已。誰知先生言論見解。不約而合。有如是耶。嗚呼。聞先生不可謂不早。而知先生亦不可謂不晩矣。追想山斗。易勝靡逮之恨。先生孫壆。白首同衰。源源相從。一日奉遺稿。猥有玄晏之託。余以淺末。固知不敢承膺。而謹述前後鄙懷之所以慕仰愈至者。以擬古人責沈之意云爾。 교채와유고(咬菜窩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민백우(閔百우(火+右), 1779∼1851)의 시ㆍ서(書)ㆍ제문ㆍ잡저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증손 민영래(閔泳來)의 발문이 있다. 불분권 1책이고, 목활자본이다. 무사재(無邪齋) 박(朴) 어른 박영주(朴永柱, ?~?)로, 무사재는 그의 호이다. 정의림((鄭義林)이 어렸을 때 그에게서 사서를 배웠다고 한다. 심경(心經) 민백우가 《심경》에 대한 제가의 해설을 모은 《심경집해(心經集解)》를 말하는 것으로, 1888년에 민백우의 손자 민영래(閔泳來)에 의해 간행된 주석서이다. 권두에 기정진(奇正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안수록(安壽祿)ㆍ김문옥(金文鈺)의 발문이 있다. 4권 3책. 목판본이다. 산두(山斗)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 세상 사람들이 흠앙(欽仰)하는 훌륭한 사람을 비유한다.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에서 그에 대한 찬(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 그의 말이 크게 행해져,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학 한자 표기는 土+學이다. 현안(玄晏)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號)로, 당시 좌사(左思)가 10년 동안의 구상을 거쳐 〈삼도부(三都賦)〉를 짓고, 황보밀이 서문을 써서 이를 크게 칭찬하자 부자와 귀족들이 서로 다투어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일시에 폭등하였다는 고사로 인해 후대에 훌륭한 글의 서문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晋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책심(責沈)한 뜻 당시의 현자(賢者)를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책하는 것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학자인 진관(陳瓘)이 당시의 명현(名賢)이었던 정호(程顥)를 알아보지 못하고 범조우(范祖禹)에게 물은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서 춘추 시대 섭공(葉公) 심저량(沈諸梁)이 공자가 어떤 분임을 모르고 자로(子路)에게 묻자 자로가 대꾸하지 않았던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고사에 의거하여 심저량을 책망하는 뜻으로 책심문(責沈文)을 지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書言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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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재유고》 서문 無邪齋遺稿序 군자의 도는 진실로 두 가지로 귀결됨이 없지만, 일에 드러난 것은 각각 다른 점이 있으니, 만약 성공과 실패로 그 자질을 논하고, 출세와 침체로 그 덕을 논한다면 어찌 사람을 아는 것이라 하겠는가.우리 선생의 도덕과 조예는 진실로 후학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예를 들면 뜻을 지킴이 확고한 것과 품고 있는 식견이 해박한 것, 행실이 독실한 것들은 근래에 찾아보아도 실로 드물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먼 시골구석에서 나고 자라서 지방 수령이 천거를 할 수 없었고, 재상이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선생의 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한 이유이다.여항(閭巷)의 선비들은 선생의 학문을 별개의 일처럼 여긴데다 또 사모할 만한 명성이 없다고 여겼으니, 어느 누가 기꺼이 좋아하는 바를 버리고 이처럼 쓸쓸한 사람을 따르려 했겠는가. 이것이 선생의 도가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한 이유이다.세 아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두 손자는 어린 고아로 흩어져서 타향을 떠돌아 다녔기에 계승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도가 집안에 전해지지 못한 이유이다.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람에게 전해 주고, 사람에게 전해지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집안에 전해주는데,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여 시종 들려오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선생같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변고에 처한 한때의 운수뿐만 아니라, 험난한 일신의 운명도 여지가 없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살아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이 될 뿐이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성내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여유가 있었던 이유이다.선생(先生)의 글은 담담하여 화려하지도 않았고, 졸렬하여 꾸밈도 없었다. 평소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일찍이 남을 위해 붓을 잡지 않았고, 혹시라도 서술할 글이 있으면 곧바로 산묵(散墨 자잘한 시문)을 던져주며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이 서술한 글에 갖추어져 있으니, 많이 지으면 군더더기가 되고, 잘못 지으면 어질러놓음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글이 남에게 전해져 암송되는 것이 매우 적었다.선생의 도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또 글로 전해진 것도 없으니, 백세 뒤에 어느 누가 백세 전에 선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나 천하의 만물은 무릇 동류끼리 모두 서로 비슷하니, 무너지지 않는 산악에서 선생의 기상을 볼 수 있고, 마르지 않는 강물과 바다에서 선생의 도량을 볼 수 있으며, 길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서 선생의 지조와 절개를 볼 수 있고, 가없는 바람과 달빛에서 선생의 감회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도가 비록 한때에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천지 사이에 보존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아, 오늘날 이 책을 편집한 것은 선생의 뜻이 아니고, 또 후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산묵(散墨)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것이 비록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후세 사람으로서 어찌 사라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내가 우매하여 참으로 그 사이에서 손을 댈 수 없지만, 문하의 반열에 있기에 그 책임을 사양하지 못했고, 게다가 그럴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문류(門類)를 나누어 정하고, 두 편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안목이 있는 자가 더욱더 바르게 해주기를 기다린다. 선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유고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옛사람이고, 도는 옛날의 도이지만, 그 기상과 위의(威儀)는 천지 사이에 있는 정기(正氣)가 모두 이것이라 하겠다. 君子之道。固無二致。而其所以見諸事業者。各有不同。若以成敗論其材。升沈論其德。則豈所以知人者哉。我先生道德造詣。固非後學所可擬測。而見於外者。如持守之堅確。抱負之該洽。操履之篤實。求之近古。實所罕見。然生長遐隅。剌史不能薦。宰相不知名。此先生之道。所以不行於世也。閭巷士子。視先生之學如別件事業。而又無聲勢之可以艶慕者。則孰肯捨所好而從此寥寥哉。此先生之道。所以不傳於人也。三郞繼逝。兩孫藐孤。分散流寓。繼述無聞。此先生之道。所以不傳於家也。不行於世者。必有傳於人。不傳於人者。必有傳於家。而彼此不遇。終始無聞者。其孰先生若也。不惟一時氣數之變。而一身命道之險。亦無餘地矣。先生嘗曰。生則爲義人。死則爲義鬼。如斯而已。復何恤焉。此其所以不慍不悔。而常有餘裕者也。先生之文。淡而不華。拙而不巧。平素非不得已。未嘗爲人下筆。或有所述。輒投諸散墨曰。古人之述備矣。多則剩。失則亂。是以其文字之傳誦於人者。絶少焉。先生之道。旣不傳於人。而又不有傳於文字者。則百世之下。誰知有先生於百世之上乎。然天下之物。凡同類者。擧相似。喬嶽不頹。可見先生之氣象。河海不渴。可見先生之宇量。松柏長春。可見先生之志節。風月無邊。可見先生之衿懷。然則先生之道。雖不顯於一時。而其存於天地之間者。豈有窮已哉。嗚呼。今日之編輯是書者。非先生之意。又非所以見知於來後也。特其零星於散墨之間者。雖十不一存。而爲後人者。豈可任其泯滅乎。余以愚昧。誠不足下手於其間。在門下之列。而不辭其責者。又無其人。故謹爲之分定門類。錄爲二篇。以竢後人有眼者。更加正焉。至於欲知先生者。則不必求於此。人則古之人。道則古之道。其氣象威儀。則正氣之在天地之間者。皆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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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강씨 묘지명 淑夫人姜氏墓誌銘 기군 동익(奇君東翼)은 내 고향의 옛 벗인데, 중년 이후로는 나의 집과 매우 가까운 데 살았다. 이 때문에 그 대부인(大夫人)의 훌륭한 규문의 법도를 들을 수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한두 가지뿐만이 아니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동익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전에 들은 것이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 가장에 기록된 내용은 또한 과언이 아니다.부인이 시집왔을 초기에 남편의 집이 매우 가난하여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부인이 친히 부지런히 일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집안 형편이 펴져 변변찮은 음식이라도 봉양할 수 있었다. 시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하고 즐거운 기색(氣色)으로 물 흐르듯이 응대하였다. 시부모가 늙고 병이 많아 항상 병석에 있었는데, 음식이 입에 맞는지 약 처방이 잘 되었는지 반드시 살펴보고 맛을 본 뒤에 올렸다. 전후로 당한 상에 매우 슬퍼하였고, 장사 지낼 때 쓰는 여러 기물도 일일이 스스로 마련하였으니,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장자에게 수고로움을 양보하지 않았다. 남편을 섬길 적에는 매우 온순하였으니,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물어본 뒤에 행하여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서로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규방(閨房)에서는 온화하고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였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천한 노복에 이르기까지 혼사에는 부조하고 상사에는 부의하였다. 평상시 옷은 사치스럽게 입지 않았고 음식은 소박하게 차렸다. 집안에서는 무당을 쓰지 않고 문안으로 광대를 들이지 않고 오직 부지런함으로 스스로 단속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 길렀다. 만년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고 집안이 평온하였으며, 장수와 복을 누렸다.부인의 관향은 진주(晉州)이니, 신라(新羅) 병부 상서(兵部尙書) 휘 민첨(民瞻)이 시조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훈벌의 가문으로 이름났다. 중엽에 이르러 휘 덕룡(德龍)이란 분이 계셨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함창 현감(咸昌縣監)에 제수되었으니, 바로 부인의 7대조이다. 증조는 휘 우하(遇河)이고, 조부는 휘 택주(宅周)이다. 부친은 휘 진오(鎭五)이니, 통정대부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종언(全宗彦)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5월 26일에 태어났다. 연일 현감(延日縣監) 기공 하운(奇公夏雲)에게 출가하였고, 남편의 관직에 따라 숙부인에 봉해졌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바로 동익(東翼)이고, 딸은 문재항(文載頊)에게 출가하였다. 동익은 4녀를 낳았는데, 고석주(高錫柱), 윤상의(尹相義), 민영제(閔泳悌), 윤봉혁(尹鳳赫)에게 출가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3일에 졸하였다. 도장면(道莊面) 옥동촌(玉洞村) 뒤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나라의 흥망 邦之隆替집안의 성쇠. 家之盛衰실로 내조에 달렸으니 實係內助예부터 그러하였네. 自昔然而처음엔 가난하다가 만년에 넉넉해졌고 早嗇晩豊먼저는 곤궁하고 나중엔 창대하였네. 先困後昌향리에 드러나 빛났으니 著耀鄕里남은 복록 다함이 없네. 餘祿無疆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가 問何因爾부인의 현숙함 때문일세. 夫人賢淑백세토록 향기로운 재물을 올리니 百世芬苾옥동의 산기슭일세. 玉洞之麓 奇君東翼。余鄕井舊要也。中年以來。敞寓尤密邇焉。是以得聞其大夫人閫範之美。爲人所稱道者。非止一二。夫人沒後九年。東翼抱其家狀。請幽竁之誌。前所聞。果非虛傳。而今所狀者。亦非過語也。夫人于歸之初。天家貧甚。無以爲計。夫人親服勤勞。夙夜不懈。自是而生理有賴。菽水不罄。事舅姑。氣和色愉。應對如流。舅姑老而多病。恒在床褥。其飮饍之宜。藥餌之方。必審視而嘗進之。遭前後喪。哀戚殊甚。喪具凡百。一一自備。不以次房而遜於長房。事君子。極其婉順家事巨細。咨而行之。未嘗以一言相稽。閨房之內。雍容靜暇。若無人聲。自內外族戚以至婢僕之賤。婚嫁有助。死喪有賻。平居衣不華奢。食不甘美。家不用巫覡。門不納玩戱。惟以勤勞自持。儉約自養。至於晩歲。身安家溫。備享壽祿。夫人貫晉州。以新羅兵部尙書諱民瞻爲始祖。自是世著勳閥。至中葉有諱德龍。壬辰倡義。除咸昌縣監。卽夫人七世祖也。曾祖諱遇河。祖諱宅周。考諱鎭五。官通政。妣淑人天安全氏宗彦女。純廟癸未五月二十六日生。適延日縣監奇公諱夏雲。從夫職封淑夫人。擧一男一女。男卽東翼。女適文載頊。東翼生四女。曰高錫柱尹相義閔泳悌尹鳳赫。以丙申二月二十三日卒。葬道莊面玉洞村後乙坐原。銘曰。邦之隆替。家之盛衰。實係內助。自昔然而。早嗇晩豊。先困後昌。著耀鄕里。餘祿無疆。問何因爾。夫人賢淑。百世芬苾。玉洞之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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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생 청계 최군 묘지명 故學生淸溪崔君墓誌銘 군의 성은 최씨(崔氏), 이름은 창렬(昶烈), 자는 성규(性圭), 본관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초에 휘 지몽(知夢)이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식읍(食邑) 1천 호(戶)를 받았으니,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선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안우(安雨)는 조선에서 벼슬하여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장성(長城), 능성(綾城), 고창(高敞), 광양(光陽)의 수령을 지냈다. 휘 치호(致湖)는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휘 광(銧)은 호가 매곡(梅谷)인데,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가 인수(仁受),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중추(僉中樞)에 올랐다. 증조는 휘가 성각(聖覺)이고, 조부는 휘가 진후(鎭厚), 호가 운곡(雲谷)으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부친은 휘 의한(義漢)이다. 모친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로, 양시중(梁時仲)의 따님이다. 을묘년(1855, 철종6) 6월 23일 산음리(山陰里)에서 군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였으니, 어려서 독서하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고 외워서 전할 수 있었다. 스승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하였다. 성동(成童)에 이르러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여러 번 송독하여 매우 익숙하였기에 글을 지음에 문채(文彩)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나의 이전 공부는 다만 쓸데없이 마음과 힘을 허비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였다.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만약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하지 않으면 말로 지껄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장구(章句)나 찾고 대구(對句)나 맞추면서 글을 지어 겉만 꾸미는 것이 어찌 학문이겠는가. 이는 다만 사람의 허황되고 부화한 습속을 자라게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이로부터 지엽적인 것을 제거하고 근본을 배양하였으니, 〈사물잠(四勿箴)〉, 삼성(三省),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써서 자리 곁에 붙여 놓고 늘 보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정이(程頤)) 같은 여러 현인(賢人)의 격언과 요결(要訣) 수십 조(條)를 써서 아침저녁으로 읊조렸다. 일찍이 말하기를 "강절(康節 소옹(邵雍)) 선생이 수년 동안 백원산(百源山)에서 독서하며 밤에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데 학문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오(吳), 초(楚), 제(齊), 노(魯), 양(梁), 진(晉)나라 사이에서 유람하면서 천하의 선비와 두루 교유하고 천하의 풍속을 두루 관찰하였으니, 이 일이 매우 좋다. 늘 마음에서 잊지 않고 배운 것이 진보하기를 기다려 또한 장차 이 노인처럼 사방을 유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무자년(1888, 공종25) 6월 11일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죄와 한(恨)이 한가지씩 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죄이고, 강절 선생처럼 유람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외신산(外薪山) 중턱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치장(閔致章)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창주(昌柱)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순학(鄭淳鶴)에게 출가하였다.아, 군은 영특한 자질로 일찍 스스로 깨달았으니, 근본을 두터이 하고 실질에 나아가 향상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천명을 누리지도 못하고 품은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이처럼 급하게 중도에서 요절할 줄 누가 알았으랴. 창주는 철들기 전에 부친을 여의어 그 모습과 음성, 치적과 행적을 아득히 기억하지 못하였기에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 선인(先人)의 벗 난계옹(蘭溪翁)을 모시고 그 유사(遺事)를 기록한 다음 그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비록 선인의 음성과 용모를 대하지 못했지만 직접 본 것 같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원하건대 한마디 은혜로운 말을 보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묘령(妙齡)의 나이에 이미 세상을 떠난 어버이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한 집안에 자손이 끊어지지 않을 소식이다. 그 당시 펴지 못한 뜻이 이로 인하여 펴지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秀而不實일은 실로 편안하기 어렵네. 不食有報뜰의 난초는 날마다 자라네. 庭蘭向榮 君姓崔。諱昶烈。字性圭。系出朗州。麗初有諱知夢。事麗祖封東萊侯。食邑千戶。其登譜之祖也。至中系有諱安雨。仕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諱湫。號蘭溪。文科。歷宰長城綾城高敞光陽。諱致湖。文科承旨。諱銧。號梅谷。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中樞。曾祖諱聖覺。祖諱鎭厚。號雲谷。有文行。考諱義漢。妣濟州梁氏時仲女。以乙卯六月二十三日。生君于山陰里。姿稟穎悟。幼而在讀書。側聞其聲而能誦傳之。及就傳。文理日就。至成童。小大學論孟詩書。誦數甚熟。綴文緝句。詞義斐然。一日忽語于心曰。我前日之功。只是枉費心力。枉費光陰。先哲有言曰。若不存養。只是說話。今尋章摘句。抽黃對白。以爲粧撰皮毛者。此何學也。適足以長人虛夸浮靡之習而已。自此刊落枝葉。培養本源。書四勿三省九容九思及夙興夜寐箴。貼之座側。以爲常目警省之地。又書濂洛群賢格言要誨數十條。晨夕諷誦。嘗曰。康節先生。讀書百源山中。夜不就枕。數年。學旣有成。乃出遊於吳楚齊魯梁晉之間。遍交天下之士。遍觀天下之俗。此事甚好。尋常不忘於心。俟所學有進。亦將出遊四方如此老也。戊子六月十一日。以疾終于家。臨歿言曰。吾有一罪一恨。先父母而歸。一罪也。未遂康節之志。一恨也。葬外薪山中山下酉坐原。配驪興閔氏致章女。擧一男一女。男昌柱。女適河東鄭淳鶴。嗚呼。君以穎悟之姿。早自覺悟。敦本就實。方進不已。誰知命道不媚。齎志未伸。而中途夭折。若是遽遞耶。昌柱未及省事而失所怙。儀容聲音。行治事爲。漠然不記。以是爲平生恨。從其先友蘭溪翁。得記其遺事。以其狀過余而言曰。雖未及見先人之音容。而可以寓如見之情者。惟在於此。願爲之加惠一言也。余曰。賢以妙齡。思欲不忘其己沒之親。至於如此。此是人家子孫碩果消息。當日未伸之志。安知不因此而有伸也。哀其意而不忍辭。銘曰。秀而不實。事固難平。不食有報。庭蘭向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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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최공 묘지명 雲谷崔公墓誌銘 내가 일찍이 민치환(閔致煥) 어른과 교유한 적이 있어 운곡(雲谷) 최공(崔公)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그 말 가운데 "공은 한천(寒泉) 산중에 은거하여 발걸음은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학에 뛰어나고 의를 행하는 데 돈독하였다. 규문을 정돈함에 화평하면서도 예가 있었으며,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은 바로 민씨(閔氏) 어른과 혼인한 집안의 벗이고, 민씨 어른은 바로 나의 장인이니, 그 말은 실로 믿을 만하여 낱낱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증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그 가장을 살펴보고 과연 민씨 어른의 말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장에서 말한 것이 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공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맑고 고아하여 신선과 도인의 풍모(風貌)처럼 속기(俗氣)가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그와 교제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루함이 사라질 정도였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여, 마음에 온축하여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물과 같이 깊고 깊어서 다함이 없었다. 《소학(小學)》으로 바탕을 삼고, 《대학(大學)》으로 규모를 세우고, 《논어(論)》와 《맹자(孟子)》로 맥락을 바로잡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으로 진취하였으니, 과정과 절도에 정연하게 법도가 있었다. 자기에게 행하고서 남에게 미쳤기에 애초에 다른 것이 없었다.기쁜 마음으로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살아 계시는 부모님을 섬기고, 몸이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선조를 추모하였다. 평소 거처할 적에 의관은 반드시 단정하게 하고, 얼굴빛은 반드시 위엄 있게 하였다. 집안사람을 다스릴 적에는 히히거리며 가볍게 웃는 실수가 없게 하였고,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습속이 없게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청렴하고 검소함은 자신을 단속하는 부절(符節)이고,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평하고 온순함은 남을 대하는 요체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이를 자리 곁에 써서 놓아두고 늘 귀감으로 삼았다. 분수를 지키고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겼으며 광채를 마음속에 온축하고 있어 편안하고 여유롭게 지냈다. 애오라지 생을 마칠 때 일찍이 시를 지어 "봄 새싹 돋자 남쪽 이랑에 김을 매고, 가을 국화 피자 동쪽 울타리에서 따네. 세상을 경영하는 것 나의 일이 아니니, 은거하는 것 평소 기약한 것이라네.[春苗鋤南畝, 秋菊採東籬. 經濟非吾事, 隱淪是素期.]"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볼 수 있다.경술년(1910, 순종4) 11월 7일에 졸하였고, 기유년(1849, 헌종15)에 태어났으니, 향년 62세이다. 산음(山陰) 뒤쪽 산기슭 부간(負艮)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의 휘는 진후(鎭厚), 자는 윤옥(允沃), 낭주(朗州) 사람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輔相) 휘 흔(昕)이 시조이다. 아들 지몽(知夢)은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는 호가 죽계(竹溪)이고,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의 아들 휘 자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현감을 지냈다.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냈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선(銑)은 호가 매곡(梅谷)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동로(東老)이고, 증조는 휘 태항(泰恒)이다. 조부는 휘가 인수(仁受)이고,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추(僉樞)에 올랐다. 부친은 휘 성각(聖覺)이고, 호가 눌암(訥庵)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조하량(曺夏良)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의한(義漢), 차자는 의택(義澤)이다. 딸은 각각 공주(公州) 이일무(李日茂)와 여흥(驪興) 민장호(閔章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내가 태어나 아무것도 모를 때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삼성(參星)과 진성(軫星)은 서로 마주 보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공의 풍모와 기품을 추념하여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한스러움만 간절할 따름이다. 이에 오늘 묘지명을 써달라는 간청에 대해서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천명과 시운이 어긋나 命與時違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네. 世莫我知산림에 은거하여 枕山樓谷광채를 숨겼네. 潛光蘊輝성동엔 수죽이 푸르고 城東水竹산음엔 눈과 달빛 비치네. 山陰雪月먼 후대에 남은 자취를 百歲遺躅뒤미쳐 상상할 수 있네. 追想髣髴 余嘗從閔丈致煥。得聞雲谷崔公之賢久矣。其言。曰公隱於寒泉山中。足不出門。名不出世。而優於文學。篤於行義。修整閨門。和而有禮。敎授生徒。嚴而有法。盖公卽閔丈之婚友。而閔丈卽余之婦翁也。其言固爲可信。而歷歷不忘於心。後五十餘年。公曾孫昌柱南杓以家狀。來謁誌行之文。謹按其狀。果知閔丈之言爲有據。而家狀之云又非誣也。公容儀端潔。襟懷淸高。如仙風道骨。無一點塵氛。人爲其容接者。不覺鄙吝自消。博涉經史。該貫古今。有以蘊畜於中而施應於外者。如有源之水。深深而不渴也。以小學爲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正路脈。以詩書展步趨。課程節度。秩然有章。由己及人。未始有異。怡愉洞屬以事其生。擗踊毁瘠以送其終。悽愴怵愓以追其遠。平居冠服必整。容色必莊。御家衆無嘻嘻之失。敎子弟去靡靡之習。常曰。勤謹淸儉。持身之符。溫恭和順。接人之要因。書之座右以常鏡考焉。守分安遇。潛光蘊輝。優哉游哉。聊以卒歲嘗有詩曰。春苗鋤南畝。秋菊採東籬。經濟非吾事。隱淪是素期。此可以見其志也。庚戌十一月七日卒。距寅降已酉得年爲六十二。葬山陰後麓負艮原。公諱鎭厚。字允沃。朗州人。以新羅元輔諱昕爲始祖。子知夢。事麗祖封東萊侯。諡敏休諱安雨號竹溪。軍器寺小監。子雲號德庵縣監。五傳諱湫號蘭溪。文科參判。再傳諱致湖。號尙德齋。文科承旨。四傳諱銑號梅谷。文科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東老。曾祖諱泰恒。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樞。考諱聖覺號訥庵。妣長澤高氏命復女。公娶昌寧曺氏夏良女。生二男二女。男義漢次義澤。女適公州李曰茂驪興閔章鎬。孫以下不錄。嗚呼。余生未省事。而公已謝世矣。參軫不相對。燕鴻不相値。追惟風韻。只切靡逮之恨。玆於今日之請不敢牢辭云。銘曰。命與時違。世莫我知。枕山樓谷。潛光蘊輝。城東水竹。山陰雪月。百歲遺躅。追想髣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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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용감 첨정 약포 조공 묘지명 濟用監僉正樂圃曺公墓誌銘 우리 고을의 선덕(先德)으로서 치사(致仕)하고 물러나 절개를 지켜 우러러 볼 만한 분이 십 수인데, 낙포(樂圃) 조공(曺公)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국병(國柄), 자는 신경(愼卿)이다. 명종(明宗) 때 벼슬하여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지냈다. 이윽고 물러나 능성(綾城)의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은거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시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 와서 밭을 개간하고, 북쪽으로 바라봄에 은하수 높네. 비봉산 아래 맑은 바람 부니, 밤에 《이소경》을 읽네.[南來田疇闢, 北望河漢高. 淸風鳳岡下, 夜讀楚離騷.]"라고 하였다. 세대가 멀어 문고(文稿)가 전해지지 않고, 전하는 것이라고는 단지 초라하게 이 절구 한 수뿐이다. 그러나 상상하고 시를 음미해보면 그 충후하고 측달한 뜻과 울분에 차고 감개한 뜻은 먼 후대에서 마음이 통하고,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생각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저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만을 읊어 시문이 쌓여 있은들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다면 세상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이를 살펴보면 충분할 것이다.대대로 서울에 살아 선조의 무덤이 인천(仁川)에 많았다. 임시로 살고 있는 곳에서 외롭고 쓸쓸하면 매양 뿌리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집 뒷동산에다 작은 누대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올라서 고향을 바라보았으니, 세상에서는 망향대(望鄕臺)라고 전해진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명리(名利)를 멀리하며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경전을 연구하고 이치를 찾으며 생도를 가르치는 것을 노년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향인(鄕人)의 자제 가운데 성취한 자가 많았다.조씨(曺氏)의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신라(新羅) 태사(太師)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을 시조이다. 휘 서(庶)에 이르렀는데, 호가 청윤(淸潤)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낸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는 휘 홍단(弘袒)인데, 오위장(五衛將)이고, 조부는 휘 숙문(淑文)이니, 계공랑(啓功郎)이다. 부친은 휘 정윤(貞允)인데, 지사(知事)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구원성(具遠成)의 따님이다. 공의 생몰 연대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배위(配位) 숙인(淑人)은 진양 신씨(晉陽辛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묘소는 고을 서쪽 내동(內洞) 왼쪽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있으니, 쌍분이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진사 대수(大秀), 진사 대현(大玄), 그리고 대서(大緖)이다. 장방(長房)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정희(廷禧)를 낳고, 봉사는 중일(仲逸)을 낳고, 중일은 부호군(副護軍) 순효(舜孝)를 낳고, 부호군은 한징(漢徵)을 낳고, 한징은 통정대부 봉의(鳳儀)와 진사 봉인(鳳人)을 낳았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병홍(秉泓)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루가 지나지 않아 돌과 같이 不日介石홀연히 잘못을 뉘우쳤네.49) 幡然回轍고반이 언덕에 있고50) 考槃在阿도서가 집에 가득하였네. 圖書滿室편안고 여유롭게 노니니 優哉遊哉풍모와 운치 더욱 영원하리. 風韻彌長우뚝한 넉 자의 봉분 有崇四尺비봉산 남쪽에 있네. 飛鳳之陽 吾鄕先德。有致仕退休風節可仰者。爲十數人。樂圃曺公亦其人也。公諱國柄。字愼卿。仕明宗朝。濟用監僉正。旣而退營菟裘於綾城之飛鳳山下。因有詩曰。南來田疇闢。北望河漢高。淸風鳳岡下。夜讀楚離騷世代曠遠。文稿不傳。而所傳只此寂廖一絶詩而已。然而想象諷詠。其忠厚惻怛之意。憂憤感慨之志。可謂千載合席。曠世同轍彼風雲月露連編累牘果何用哉。然則世之欲知公者。觀於此足矣。世居京洛。墳墓多在仁川地。僑寓踽凉。每不勝懷本戀舊之意。就家後山頂。築小臺。朝夕登臨以瞻望焉。世傳爲望鄕臺。杜門屛跡。恬澹無爲。而以劬經硏理。訓迪生徒。爲從老計。鄕人子弟。多有成就者。曺氏貫昌寧。以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爲始祖。至諱庶號淸澗。入我朝。寶文閣直提學。卽公之六世祖也。曾祖諱弘袒。五衛將。祖諱淑文。啟功郎。考諱貞允。知事。妣淑人綾城具氏遠成女。公生卒年紀。逸而無傳。配淑人晉陽辛氏有婦德。墓州西內洞左麓酉坐雙兆。三男大秀進士。大玄進士。大緖長房生諱廷禧。訓鍊院奉事。奉事生諱仲逸。仲逸生諱舜孝。副護軍。護軍生諱漢徵。漢徵生諱鳳儀。通政。鳳人進士。以下不盡錄。十二代孫秉泓。奉其家狀。以徵幽竁之誌。不敢以非其人辭。銘曰。不日介石。幡然回撤。考槪在阿。圖書滿室。優哉遊哉。風韻彌長。有崇四尺。飛鳳之陽。 하루가……뉘우쳤네 《주역》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에 "견고함이 돌과 같아서, 과거의 잘못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제거해 버리나니, 정하고 길하니라.[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다. 고반(考槃)이 언덕에 있고 고반은 원래 《시경》〈위풍(衛風)〉의 편명으로, 은거하여 유유자적하게 도를 즐기고 덕을 이룸을 뜻하는데, 은자의 거처를 두루 이르는 말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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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탄 처사 구공 묘지명 春灘處士具公墓誌銘 종족은 효성스럽다고 하고, 향당에서는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컬어 한 고장의 선한 선비가 되는 데 어긋나지 않는 자가 가까이 우리 고을에 있으니, 춘탄(春灘) 구공(具公)과 같은 이가 그 사람이다.공의 휘는 철수(澈洙), 자는 성서(聖瑞)이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함에 부지런히 고기 잡고 나무하여 몸에 편안하고 입에 맞는 것은 모두 다 마련하여 올렸다. 평소에는 그 공경을 지극히 하고, 병환이 들었을 땐 근심을 지극히 하며, 상을 당했을 땐 슬픔을 지극히 하고, 제사에는 엄숙함을 지극히 하였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이 있지 않았다. 형제 두 사람은 화목하고 우애가 있어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을 깁고 찧는 것도 모두 함께하였다. 친족과 붕우에게는 온화함으로 대하고 신의로 사귀었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늘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해마다 좋은 때에 초대하여 마음껏 즐기면서 수일 동안 흥겹게 지냈다. 평상시에 겸손하고 공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경전을 연구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실린 대략이다. 아, 부침(浮沈)하는 것은 명(命)이고, 가고 머무름에는 때가 있다.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였으니, 그 행실은 부침과 가고 머무르는 것을 벗어난 데 있었다.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이니, 평장사 민첨(民瞻)이 그 상대(上代)의 선조이다. 고조 준익(俊翼)은 참봉을 지냈고, 증조 용주(龍珠)는 이조 참의를 지냈고, 호는 오헌(梧軒)이다. 조부 담(壜)은 가선대부이다. 부친 상년(相年)은 공조 참의를 지냈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통정대부 김상희(金尙喜)의 따님이다. 공참공(工參公)은 종조부 승지 상묵(相黙)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 분이 바로 춘탄(春灘)이다. 본생비(本生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판관 이동좌(李東佐)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무진년(1808, 순조8)에 태어났고, 철종(哲宗) 정사년(1857, 철종8) 12월 13일에 졸하였다. 마을 동쪽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송사(松沙) 기공 우만(奇公宇萬)이 그 묘갈명을 지었다. 배위(配位)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현감 정재린(鄭在麟)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희모(希謨)이고, 차자는 경모(慶謨)이다. 딸은 안명록(安命祿)에게 출가하였다. 차자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교륜(敎倫), 교신(敎信)이고, 딸은 이은환(李殷煥)에게 출가하였다. 교륜은 장방(長房)의 양자로 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을 쌓고 積累其善광채는 감추었네. 潛晦其光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영원하리라. 餘慶長長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而不失爲一鄕之善士者。近在吾鄕。若春灘具公。其人也。公諱澈洙。字聖瑞。家貧養親。服勤漁樵。便身適口。無不畢給。以至居致其敬。病致其憂。喪致其哀。祭致其嚴。生死始終。無有憾焉。兄弟二人。雍容湛樂。尺斗縫眷。與之共焉。以至族戚朋友。接之以和。交之以信。賙窮恤匱。常若不及。每歲良辰。招邀酣歡。以爲數日之暢。平居以謙恭持身。以勤儉御家。硏覽境典。手不釋卷。此皆狀辭大略也。嗚呼。陞沈命也。流坎時也。素其位而行。其行在於陞沈流坎之外。此可見公之爲公矣。具氏貫綾城。平章事諱民瞻。其上祖也。高祖俊翼參奉。曾祖龍珠吏參。號梧軒。祖壜嘉善。考相年。工參夫人金海金氏通政尙喜女。工參公取同祖承旨相黙子爲後。卽春灘也。本生妣全州李氏判官東佐女。公以純祖戊辰生。哲宗丁巳十二月十三日卒。葬里東艮坐。松沙奇公宇萬撰其碣銘。配延日鄭氏縣監在麟女。有婦德。擧二男一女。長希謨次慶謨。女適安命祿。二房生二男一女。敎倫敎信。李殷煥。敎倫系長房。銘曰。積累其善。潛晦其光。螽斯椒聊。餘慶長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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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정 처사 문공 묘지명 退亭處士文公墓誌銘 선비가 삼대(三代)에 태어나지 않아 이미 고요(皐陶)와 기(夔), 원개(元凱)54)의 부류와 더불어 태평성대에 제제(濟濟)하게 서로 사양하는 지경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면, 아래 시대로 내려와 말세에 태어나 당대의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과 함께 교유하더라도, 이 또한 괜찮을 것이다. 고(故) 처사 퇴정(退亭) 문공(文公)은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을 스승으로 섬기고, 선원(仙源) 김 문충공(金文忠公),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노봉(老峯) 민 문충공(閔文忠公),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을 벗하여 우리나라의 태평 시절에 교제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서로 연마하였으니, 그 성대한 만남과 고고한 기상은 먼 후대에 사람들에게 공경심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아, 공의 현명함이여!공의 휘는 존도(存道), 자는 성기(聖器)로, 남평(南平) 사람이다. 고려 말기 삼우당(三憂堂) 휘 익점(益漸)이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우창(佑昌)은 통정대부이고, 증조 민(敏)은 생원이며, 조부 언관(彦寬)은 선전관(宣傳官)이고, 선고 운룡(雲龍)은 부호군인데, 대대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배위(配位)는 익산 소씨(益山蘇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순전히 갖추었다. 만력(萬曆) 임인년(1606, 손조35) 9월 19일에 보성(寶城) 도개리(道開里)에서 공이 태어났다.공은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으니 동배(同輩)에서 특출하였다. 8세에 호군공(護軍公)이 운자(韻字)를 부르니, 공이 부르는 즉시 대답하기를 "창밖에 눈과 달빛 희니, 깨끗함에서 인심을 보겠네. 눈과 달빛 나의 곡조를 일으키니, 오늘 밤 누가 나를 알아주랴.[窓外雪月白, 潔潔見人心. 二白唱我曲, 今宵誰知音?]"라고 하였으니, 그 기상이 어릴 적부터 이미 이와 같았다. 모부인(母夫人)이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고 매우 근심하며 방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고 북두성에 빌고 하늘에 빌었는데 한 달여 만에 병이 나았다. 그날 저녁 호군공의 꿈에 어떤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처가 나은 것은 그대 아들의 효성 때문이다. 내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 수명을 90세까지 연장하였다."라고 하였다. 독서에 매우 힘써서 문사(文詞)가 날로 성취되니, 과거 시험의 각 문체에 영민하고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마침내 은봉(隱峯) 안 선생(安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선생이 그 영특함을 아껴 매우 기대하였다. 이로부터 사장(詞章)의 기습을 떨쳐 버리고 요체를 파악하고 근원을 찾는 곳에서 힘쓰고 착실하게 연마하기를 비로소 그만두지 않았다.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이 강도(江都)에 행행(幸行)하니 조정과 민간(재야(在野)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당시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완산(完山)에서 군사를 독려하였는데, 공은 평소 그와 서로 잘 알고 지냈기에 즉시 달려가서 난을 평정할 계책을 아뢰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상하였다.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머물고 세자는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안팎으로 연락이 끊겨 군신 상하가 매우 놀랐다. 공이 의병 30여 명을 규합하여 은봉(隱峯)의 막하에 나아갔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완산(完山)에 도착하였는데, 지나는 곳의 여러 고을에서 즉각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군사를 점검하면서 지은 시에 "당대의 남아 칼을 차고 노래 부르니, 사방 적의 형세 어떠한가? 군사 점검하는 이 밤 영웅호걸들 승전고 울릴 내일 아침 의기가 충만하리라.[一代男兒杖釰歌, 四邊賊勢問如何? 點軍此夕英豪士, 乘勝明朝意氣多.]"라고 하였다. 각 도에 격문을 띄워 함께 군사를 일으키는 의리를 깨우치고, 또 순찰(巡察) 이시방(李時昉)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전쟁에서의 기무(機務)를 진달하였다. 다음 날 여산(礪山)에 이르러 강도(江都)는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은 포위가 풀렸다는 보고를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의병을 파하였다. 공이 그 삼종형(三從兄) 재도(載道)가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며 여러 날 추위에 떨며 분을 참지 못하여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달려가서 만나 보았다. 이어서 난리 끝에 서울이 피폐하고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보고 비분강개함을 견디지 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고관대작의 저택 도리(桃李)는 절로 열매 맺었지만, 강도엔 다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네.[朱門桃李自成實, 盡落江都渺渺流.]" 하였다. 2월에 집으로 돌아오자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가 이처럼 치욕을 당했으니, 이 어찌 신하가 차마 말할 바이겠는가. 다만 내 일찍 죽지 못하여 이러한 상황을 만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이보다 앞서 도개리(道開里)에서 원봉리(元峯里)로 이사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을 굽어보는 형세라 경치가 감상할 만하였다. 인지당(仁智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에 이르러 퇴정(退亭)이라고 편액을 고쳐 그 뜻을 붙였다. 날마다 편복(便服)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부앙하며 풍월을 읊조리고 책 속에 파묻혀 지내 득실과 부침에 대해서 담담하였다. 서울 친구 가운데 공을 추천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굳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다만 나의 선친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하나의 명성도 없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청음(淸陰) 선생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55)는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56)은 수감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이 노인은 수감되었다가 살아 돌아왔지만 그 큰 기상과 큰 절개는 생사를 가지고 다르게 보아선 안 된다. 아, 이 노인은 바로 오늘날의 문산이거니와, 나는 그의 벗으로 당일(당시) 강직한 신하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노봉(老峯) 민공(閔公)이 일찍이 본성(本省)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은거하는 곳의 단장이 소산하고 담박한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남주(南州)의 고상한 선비이다."라고 하고, 그 집의 편액을 원봉(元峯)이라고 하였다. 또 시를 남겼는데, 그 시에 "바쁘게 행장을 꾸려 저물녘에 찾으니 청산의 구름 걸린 높은 나무 고인의 마음이로다.……[草草行裝簿暮尋, 靑山雲樹故人心. 云云.]" 하였다. 여러 책과 경전을 돌아가며 익숙히 반복하여 읽어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환하게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논어(論語)》 한 책에 대해서는 더욱 많이 공부하여 일상 생활하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기유년(1669, 현종10)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락동(加樂洞) 가정(柯亭)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안진(安震)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진(時振)이다. 손자는 일화(日華)이고, 증손은 홍덕(弘德), 취덕(就德), 명덕(命德), 윤덕(潤德), 응덕(應德)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은 외진 고을의 일개 선비로 이름은 사적(仕籍)에 있지 않고, 몸은 조정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매양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나아감에 한결같아 그칠 줄 몰랐다.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당겨도 일어나지 않고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며, 교유를 끊고 한가롭고 한적하게 지냈으니, 처하는 데 한결같아 나아감을 알지 못하였다. 어찌 전후의 출처가 이처럼 훌륭한 것인가. 대개 그가 주장한 바는 의리에 한결같은 것일 따름이다. 일개 부인이지만 칠실(漆室)의 근심이 있었고 일개 동자이지만 왕기(汪錡)에게는 상(殤)의 예를 적용하지 않았는데,57) 더구나 공은 홍유(鴻儒) 숙덕(宿德)으로 한 지방의 기대를 받는 자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담암(澹庵)이 소조정(小朝廷)의 수치가 된다는 것58)을 생각하고 첩산(疊山)이 한가로운 백성이 된 것59)을 생각하였으니, 이는 공이 만년의 절조를 가다듬은 바로서, 한겨울의 송백(松柏)과 같은 것이다. 아, 공경할 만하다.7세손 형(炯)이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청하였다. 유장을 살피니 바로 우리 무사재(無邪齋) 박 선생(朴先生)이 지은 것이었다. 어루만지며 훑어보니 더 한층 감격스러웠다. 그 말에 "비록 처한 상황이 다르고 수립한 바가 각각 다르더라도 그 뜻은 선원(仙源), 청음(淸陰)과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행적에 걸맞고 합당하여 먼 후대에도 바뀌지 않을 의론이니, 소자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다른 말을 첨언하겠는가. 삼가 유장의 말에 근거하여 그 청에 부응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孝親忠君현명한 이를 섬기고 어진 이 벗하네. 事賢友仁사문의 훌륭한 선비요 斯文偉儒밝은 시대의 은일자로다. 昭代逸民시사가 크게 변하자 時事一變돌아와 동강에 은거하였네. 歸臥東岡고상한 풍모와 정취, 큰 절개 高韻大節백세 뒤에 더욱 빛나리라. 百世彌彰 士不生三代上。旣不得與皐夔元凱之類。濟濟相讓於亭午照皞之域。則降而生於叔季之世。得一時賢德與之遊從。斯亦可矣。故處士退亭文公。以隱峯安文康公爲師。以仙源金文忠公。淸陰金文正公。老峯閔文忠公。月沙李文忠公。梧里李文忠公爲友。往復切磋於大東昇平之日。其會遇之盛。氣象之高。百世之下。足令人起敬。嗚呼。公其賢乎哉。公諱存道。字聖器。南平人。麗季三憂堂諱益漸其中系顯祖也。高祖佑昌通政。曾祖敏生員。祖彦寬宣傳。考雲龍副護軍。世有文行。配益山蘇氏某女。閫範純備。萬曆任寅九月十九日。公生于寶城道開里。天資秀爽。出於等夷。八歲護軍公拈韻呼之。公應口而對曰。窓外雪月白。潔潔見人心。二白唱我曲。今宵誰知音。其氣趣自幼己如此。母夫人有疾。致誠致憂。不離房側。每夕齋沐。祈斗祝天。月餘病愈。其夕護軍公夢有一老人來言曰。君妻之愈。以其子之孝也。吾感其孝。延其壽九十云。讀書刻苦。文詞日就。功令各體。無不敏贍。弱冠遂就學于隱峯安先生之門。先生愛其開悟。深寄意焉。自是刊落詞章之習。而於反約窮源處。勉勉循循。未始有已。丁卯之亂。車駕幸江都。朝野洶洶。時李相國元翼。在完山視師。公素與相善。卽馳詣爲陳剿亂之策。未幾。見賊退而還。壬申遭外艱。居廬三年。哀毁過節。丙子之亂。車駕駐南漢。世子入江都。內外阻絶。上下震駭。公糾合議旅三年餘人。赴隱峯幕。丁丑正月行到完山。所過列邑。響應影從。中夜點軍有詩曰。一代男兒杖釰歌。四邊賊勢問如何。點軍此夕英豪士。乘勝明朝意氣多。傳檄各道。喩以同仇之義。又馳書於李巡察時昉。以陳機務。明日至礪山。聞江都失守南漢解圍之報。北向痛哭而罷。公聞其三從兄載道。扈從南漢。累日觸寒。因以忿憤成疾。卽馳往見之。因見亂離之餘。京都凋殘。舊知零散。不勝悲慨有詩曰。朱門桃李自成實。盡落江都渺渺流。二月還家。族戚皆會。公歎曰。國家羞辱如此。此豈臣子所忍言。只恨吾死不早。見此爻象耳。先是自道開移寓元峯里。負山臨水。景致可賞。題其顔曰仁智堂。至是改題以退亭。以寓其意。日以便服。偃仰其間嘯詠咏風月。沈潛書籍。於得失陞沈淡如也。洛中舊遊。有擬公剡薦者。公固拒之曰。吾志己定。決不可回。但吾先人。文學著世。而未有一名。是可恨也。一日聞淸陰先生自瀋陽還。歎曰。文文山被囚而殺死。此老被囚而還。其宏綱大節。不可以生死而差殊觀也。嗚呼。此老卽今日之文山。而余以一友生。未得爲當日之張一鶚。可恨。老峯閔公嘗按廉本省。因來訪之。見薖軸粧黙點。蕭散淡泊。歎曰。子眞南州高士。題其室曰元峯。且留詩曰。草草行裝簿暮尋。靑山雲樹故人心云云。群書群經。循環熟複。微辭奧義。無不昭晣。而於論語一書。尤加功焉出入起居。手不釋卷。己酉十月十七日考終。葬加樂洞柯亭坐壬之原。配竹山安氏震女。生一男曰時振。孫日華。曾孫弘德就德命德潤德應德。玄孫以下不錄。公以窮鄕一布衣。名不在仕籍。身不參朝班。而每有警急。忘身殉國。一於出而不知止。及其謝歸鄕里也。挽之而不起。呼之而不應。絶遊息交。投閒置散。一於處而不知進。何前後出處若是遼絶耶。盖其所主者。一於義而已。一婦人也而。漆室有憂。一童子也而汪齮勿殤。則況以公鴻儒宿德而負一方之望者乎。懷澹庵小朝之恥。慕疊山閒民之爲。此公之所以砥礪晩節。如大冬之松柏也。吁可敬也。七世孫炯奉遺狀。來謁誌銘之文。按狀卽我無邪齋朴先生所撰也。摩挲繙閱。尤增一層感慨也。其言曰。雖所遇不齊。樹立各異。而其意則仙源淸陰同一歸也。此可爲稱停的當。百世不易之論。小子後生。何敢復容他說哉謹據狀說以塞其請。銘曰。孝親忠君。事寶友仁。斯文偉儒。昭代逸民。時事一變。歸臥東岡。高韻大節。百世彌彰。 원개(元凱) 팔원(八元)과 팔개(八凱)를 합친 말로, '원(元)'은 선(善)을 '개(凱)'는 화(和)를 뜻한다.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온화한 사람[八凱]과 고신씨(高辛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八元]을 가리킨다. 이들은 순(舜)이 요(堯) 임금의 신하가 된 뒤에 등용되어 백사를 주관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청음……돌아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인조 18년(1640) 12월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6년이 지난 23년(1645) 2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仁祖實錄 18年 12月 8日, 23年 2月 23日》 문문산(文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이자 시인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자는 송서(宋瑞)ㆍ이선(履善), 호는 문산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저서로는 《문산전집(文山全集)》이 있다. 왕기(汪錡)……않았는데 노 나라 동자 왕기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어려서 죽은 사람에게는 상(殤)이라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장사 지내지 않는 예법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왕기는 동자이지만 무기를 잡고 국가를 수호하였으니 성인의 예를 써도 된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11年》 담암(澹庵)이……것 호전(胡銓)은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방형(邦衡)이고 호가 담암(澹庵)이다. 금(金)나라가 쳐들어왔을 적에 "만약 화의(和議)를 하면 소 조정(小朝廷)이 될 것이니, 소 조정에서 구차히 살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화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宋史 胡銓列傳》 첩산(疊山)이……것 첩산은 남송(南宋)의 학자 사방득(謝枋得)의 호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당석산(唐石山)에 은둔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는데, 원(元)나라 사람이 강제로 북행(北行)하게 하자 곡기를 끊고 죽었다. 《宋史 謝枋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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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문산재 박군 묘지명 通訓大夫司憲府監察文山齋朴君墓誌銘 군의 성은 박씨(朴氏), 휘는 세진(世鎭), 자는 달지(達之), 호는 문산재(文山齋)이다. 밀양(密陽) 사람인데,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가 그 시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울(蔚)이 있는데, 찰방(察訪)을 지냈다. 이분이 맹성(孟誠)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는데,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는데,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지수(枝樹)를 낳았는데, 호가 모봉(茅峰)이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사직(社稷)을 위해 순절(殉節)한 공훈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천주(天柱)를 낳았는데, 호는 회재(悔齋)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행이 있었다. 모친은 노씨(魯氏)인데, 열부(烈婦)의 행실이 있었서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분이 휘 이소(以素)를 낳았는데, 호가 태암(台庵)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태형(泰馨)을 낳았는데, 호가 월산(月山)이다. 이분이 휘 상욱(尙郁)을 낳았는데, 호가 송계(松溪)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필사(必思)를 낳았는데, 호가 도은(道隱)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군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경표(慶杓)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풍환(豊煥)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재원(在源)인데, 호가 쌍순재(雙筍齋)이고,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진주 형씨(晉州邢氏)인데, 형석찬(邢錫贊)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에 추증된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찬영(李贊英)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11월 19일에 주(州)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군을 낳았다.군은 천성이 온후하고 자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군이 곁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출입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해 드리고, 구체(口體)의 봉양을 알맞게 하여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병환이 나자 근심스러운 마음과 염려하는 기색으로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으로 흘려 넣었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평상시 자신이 사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었고, 재물도 사적으로 축적하지 않았다. 평소 출입할 때에는 오직 어버이가 명하신 대로 따랐으며, 크고 작은 일을 경영할 때는 반드시 여쭈어본 뒤에 행하였다. 자신의 직분을 행하고 나서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독서하여 과정에 따라 차근차근 해 나갔고, 이를 폐하거나 빠뜨리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서 절기마다 안부를 묻고 경조사를 챙기고 위급할 때 도와주는 것은 각각 그 실정에 알맞게 하고 각각 그 마음에 흡족하게 하였다. 비루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화나는 기색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경박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은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언행을 삼가고 경계하기를 50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향리에서 그 효성을 칭찬하여 장차 관아에 아뢰고자 하였는데, 군이 듣고서 즉시 그 문서를 빼앗아 불 속에 던지고 말하기를 "나에게 불효를 거듭 짓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숙병(宿病)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어느 날 그 아들 문채(文采)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늙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누가 대신 봉양하겠는가. 너는 마땅히 힘써 구천에 있는 네 아비의 무한한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임종하였으니, 바로 무신년(1908, 순종2) 6월 20일이다. 동방(同坊) 작약산(芍藥山) 아래 반기동(半圻洞)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재헌(鄭在憲)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지극히 갖추었다. 부군보다 18년 먼저 졸하였다. 살던 마을 뒤쪽 소강산(小康山) 아래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준룡(準龍)으로 일찍 죽었고, 차자는 문채(文采)이다. 손자 이하는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아, 옛날에도 오히려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은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한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충신한 자'60)와 맹자(孟子)가 말한 '한 고을의 선한 선비'61)는 또한 만나 보기 어려울 것이다. 군은 순후한 자질을 타고났고 효도하고 삼가는 행실이 있었으니, 마땅히 공덕을 쌓은 응보가 있어야 하지만 침체되어 드날리지 못하고 수명도 누리지 못하였으니, 친구의 애석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문채(文采)가 상복을 입고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부탁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작약산에 새로 묘도를 내어 芍藥新阡봉긋하게 봉분 만들었네. 若斧若堂을좌(乙坐) 신향(辛向)의 언덕 坐乙向辛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하늘이 돕고 신이 돕는 것 天佑神勞효자라야 그러하네. 惟孝爲然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으니 孝子不匱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年 君姓朴氏諱世鎭。字達之。號文山齋。密陽人。新羅王赫居世是其始祖也。至中系。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參。是生諱億瑞通政。是生諱枝樹號茅峰監察。壬辰之亂。殉社著勳。贈左承旨。又贈戶曹參判。是生諱天柱號悔齋主簿。有孝行。妣盧氏有烈行。俱蒙褒旌。是生諱以素號台庵通政。是生諱泰馨號月山。是生諱尙郁號松溪通政。是生諱必思號道隱。贈司僕寺正。於君爲高祖也。贈祖諱慶杓。贈左承旨。祖諱豊煥。贈戶曹參判。父在源號雙筍齋。壽同中樞。妣贈貞夫人。晉州邢氏錫贊女。系妣贈貞夫人。完山李氏贊英女。有婦德。哲宗己未十一月十九日。生君于州之淨泉里。君天稟溫厚慈詳。自幼以至行聞於人。家素貧甚。君左右拮据出入竭蹶。有以樂其心志適其口體者。無不備至。親有疾。心憂色沮。夜不解帶。斫指汪血。祝天冀代。平居身不私有。財不私蓄。尋常出入。惟命是聽。巨細營爲。必稟而行。行有餘力。入塾看書。循循課程。未嘗廢闕。推而至於宗族鄕黨時節寒暄之問。吉凶慶弔之禮。急難周恤之風。各稱其情。各得其心。俚雜之言。不出於口。忿戾之氣。不形於色。足不到奔競之地。身不接浮浪之人。隱居養親。勤身勅行。五十年如一日。鄕里擧其孝。將聞于官司。君聞之。卽奪其狀投之于火曰。母重吾不孝爲也。有宿疾。久而不瘳。一日招其子文采曰。余必不起矣。老親在堂。誰其替養。汝宜勉力。以慰乃父九泉無窮之恨也。言訖而終。卽戊申六月二十日也。葬同坊芍藥山下半圻洞乙坐原。齊淑人河東鄭氏在憲女。閨範備至。先君子十八年卒。葬所居村後小康山下庚坐原。有二男。長準龍早逝。次文采。孫以下幼不錄。嗚呼。才難之歎。在古猶然。況今衰叔之世乎。孔子所謂十室之忠。孟子所謂一鄕之善。亦難得以見之矣。君稟醇厚之質。服孝謹之行。宜其有積累之應。而沈淹不揚。壽又不遐。知舊慨惜之心爲何如耶。文辨采曳衰抱狀。託以誌銘之文。嗚呼。豈忍辭諸。銘曰。芍藥新阡。若斧若堂。坐乙向辛。孝子攸藏。天佑神勞。惟孝爲然。孝子不匱。芬苾千年。 공자(孔子)가……자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라고 하였다. 맹자(孟子)가……선비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라야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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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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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경암 정공 묘지명 敬庵鄭公墓誌銘 이릉(爾陵)은 옛날에 문명이 있는 고을이라고 불렀는데, 근고(近古)에 이르러 학문을 탐구하고 도의를 행하는 선비가 여전히 훌륭하게 있었으니 경암(敬庵) 정공(鄭公)과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 유풍과 남긴 자취는 백여 년이 지났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자못 기억하는 자가 있다. 다만 그 유고(遺稿)는 제 때에 수습하지 못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전하는 것이라곤 남 상사(南上舍)가 지은 추천장 한 통뿐이었다. 그 추천장을 살펴보니 "세대가 내려오면서 풍속이 야박해져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입에 넣는 것을 효라고 하고, 병든 어버이를 위해 다릿살을 베어 먹이는 것을 효라고 하며, 물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왕상(王祥)의 잉어62)라고 하고, 죽순 하나를 얻으면 맹종(孟宗)의 죽순63)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의 행실과 하나의 일에 나타난 것을 뽑아내고, 창졸간의 다급한 상황에서 분별해낸 것을 성대하게 효라고 하는 자는 평소 어버이를 봉양한 것을 돌아보면 과연 유감이 없겠는가. 오직 정흠(鄭欽)이 어버이를 섬긴 것이야말로 실로 이른바 평소에 유감이 없다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 부모의 나이가 93세이고, 정흠의 나이도 60세에 이르렀다. 어버이를 섬긴 이후로 다른 곳에서 유숙한 적이 없고,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적에는 한 발짝도 부모 곁을 감히 떠나지 않았다. 무릇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과 봉양하는 일에 있어 즐거워하는 표정과 온순한 모습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하루같이 하였다."라고 하였다.아, 남공(南公)은 우리 고을의 이름난 진사(進士)이니, 그 말은 믿을 수 있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큰 솥에 끓인 국은 고기 한 점만 맛보아도 그 전체의 맛을 다 알 수 있으니, 유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한스럽겠는가.또 그 현손 재우(在禹)가 지은 가장(家狀)을 살펴보니, 거기에 "공이 항상 말하기를 '공경하면 온갖 선이 확립되고, 게으르면 온갖 선이 폐해진다. 옛 성인이 사람에게 보인 요체는 '경(敬)'만 한 것이 없고, 후학이 덕(德)에 들어가는 문호 또한 '경'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경암(敬庵)'이란 글자를 써서 재실의 편액으로 걸고 늘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다.이 한 조목은 비록 당시 추천장에 실린 내용이 아니지만, 그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조는 '경(敬)'이 아니면 어찌 행할 수 있으랴. 이름을 흠(欽)이라고 하고 자를 경심(敬心)이라 하고 호를 경암(敬庵)이라고 한 것에서 더욱 이 '경(敬)'을 항상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학문은 '경'을 위주로 하고 다스림은 '효'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여기에서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정씨(鄭氏)는 계보가 하동(河東)에서 나왔다.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인 휘 국룡(國龍)이 중시조이다. 7세대 뒤 휘 여해(汝諧)는 호가 둔재(遯齋)이고, 지평(持平)을 지냈으니, 공에게는 7대조가 된다. 고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천경(天經)이고, 증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침(忱)이고, 조부는 참판에 추증된 휘 문원(文黿)이다. 부친은 판서를 지낸 휘 인채(仁采)이다. 모친은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윤임(尹任)의 따님이다.공은 경종(景宗) 신축년(1721, 경종1)에 태어나 정종(正宗) 병오년(1786, 정조10) 7월 28일에 졸하였다. 화산(華山) 대방동(大榜洞) 술좌(戌坐)에 장사 지냈으며, 배위(配位)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합장하였다. 김씨는 김명구(金命九)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 석(錫)의 아들 양문(陽文)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각각 문혁룡(文赫龍), 김중신(金重臣)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효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고 孝爲仁本공경은 몸의 기틀일세. 敬者身基효도와 공경 曰孝曰敬간직하니 서로 바탕이 되네. 夾持交資두봉에서 노닐었고 頭峰杖屢대방동에 무덤 있네. 榜洞斧堂뒤미쳐 여운을 생각하매 追想餘韻지나는 사람 배회하네. 過者彷徨 爾陵古稱文明之鄕。至近古。而問學行誼之士。尙彬彬焉。若敬庵鄭公亦其人也。其遺韻餘躅。至百餘年之久。而頗有能記之者。但其遺稿。收不以時。歸於烏有。而所傳只是南上舍所撰剡薦狀一通而已。按狀有曰。世降俗渝。以一指之斷爲孝。以一股之割爲孝。得一魚則謂之王祥之鯉。得一菜則謂之孟宗之筍。摘其一行一事之立辨於倉卒急遽之間而藉藉爲孝者。顧其平日之養親。果無所憾者乎。惟鄭欽之事親。眞所謂無憾於平日者也。其親年九十有三。欽年又至六十矣。親老之後。未嘗經宿於他所。親病之日。不敢離側於跬步。凡諸扶奉之誠。供養之勤。愉色婉容。殫心竭力。自始至終。恒若一日云。嗚呼。南公是吾鄕名進士也。其言足可徵信。而爲不朽於來世矣。全鼎一臠。未爲不知其味。則遺稿散逸。亦何恨焉。又按其玄孫在禹所撰家狀。有曰。公常言敬則萬善立。怠則萬善廢。前聖示人旨訣。莫如敬。後學入德門庭。亦莫如敬。乃書敬庵字。揭于齋顔以常目焉。此一條。雖非當日薦狀中所載者。然其至行偉節。非敬安能做得來耶。名之以欽。字之以敬心。號之以敬庵。尤可見其眷眷於此而不忘也。學問則敬以爲主。行治則孝以爲本。公之爲公。於斯可槪矣。鄭氏系出河東。高麗密直諱國龍。其中祖也。七傳諱汝詣號遯齋官持平。於公爲七世。高祖贈參議諱天經。曾祖贈參議諱忱。祖贈參判諱文黿。考判書諱仁采。妣漆原尹氏任之女。公以景宗辛丑生。正宗丙午七月二十八日卒。葬華山大傍洞戌坐。齊光山金氏祔焉。金氏諱命九女。有婦德。無男。取次弟錫子陽文爲嗣。二女文赫龍金重臣。銘曰。孝爲仁本。敬者身墓。曰孝曰敬。夾持交資。頭峰杖屢。榜洞斧堂。追想餘韻。過者彷徨。 왕상(王祥)의 잉어 왕상이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맹종(孟宗)의 죽순 맹종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三國志 吳書 三嗣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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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최공 정려기 孝子崔公旌閭記 효자 최공(崔公)의 휘는 시달(時達), 자는 경숙(敬淑), 호는 모와(慕窩), 본관은 해주(海州), 문헌공(文憲公) 휘 충(沖)의 후손이고, 학생 휘 득준(得俊)의 아들이다. 모친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니, 순조 병자년(1816) 9월 14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성정과 기질이 온량(溫良)하였다. 이를 갈 나이의 어릴 때부터 받들어 순종하고 응대하여 한 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와 드렸고,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독서하여 지물(志物)181)이 갖추어 지극하였다. 병을 시중들 때는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차도를 점검하였고, 상을 치를 때는 슬픔이 너무 심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3년 동안 여묘 살이 하며 조석으로 절하며 곡하여 묘소 앞의 무릎이 닿는 곳에 풀이 시들었다. 전후의 부모상에 모두 이와 같이 하였으니, 향리에서 찬탄하며 한결같은 말로 칭찬하였다.기묘년(1879, 고종16) 9월 18일에 돌아가셨고, 그 뒤 기축년(1889)에 유림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고 수령의 보고가 이어져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정려를 명하여 정미년(1907)에 정려각이 비로소 이루어졌다.오호라! 사람의 떳떳한 본성은 하늘이 다하도록 실추됨이 없어 양지(良知)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니, 경금(褧錦)의 문장182)과 고학(皐鶴)의 들림183)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정려각을 지나는 자는 마땅히 공경할 줄 알아 사모하는 마음 일으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孝子崔公。諱時達。字敬淑。號慕窩。本海州人。文憲公諱沖後。學生諱得俊子也。妣宜寧南氏。以純祖丙子九月十四日生公。天姿穎悟。性氣溫良。自在髫齡。承順唯諾。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袖而供之。朝耕夜讀。志物備至。其侍疾也。嘗糞甛苦。以試差劇。執喪。哀戚過甚。幾於傷生。廬墓三年。朝夕拜哭。墓前當滕。草爲之枯。前後喪皆如之。鄕里嘖嘖。一辭稱賞。己卯九月十八日卒。後己丑。儒論齊發。剡報相續。贈童蒙敎官。命旌閭。丁未棹楔始成。嗚乎。人之秉彝。極天網墜。有其良知。好是懿德。褧錦之章。皐鶴之聞。其不以是耶。過此閭者。宜無不知欽而興慕也。 지물(志物) 지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경금(褧錦)의 문장 비단옷의 문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홑옷 안에 은은하게 감추는 것을 말하는데, 군자의 도리가 날로 은은하게 빛남을 비유한다. 《중용》에서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쳐 입는다'고 하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한 것이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中庸章句 第33章》 고학(皐鶴)의 들림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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