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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영모재 중수기 密陽朴氏永慕齋重修記 이릉(爾陵 능주(綾州))은 예로부터 산수(山水)가 좋은 고을이라 일컬어졌고, 그 수려하고 맑은 기운이 서쪽 지역에 많이 모여 있었으니, 예컨대 천태산(天台山)이나 해망산(海望山), 문산(文山), 덕봉산(德峰山)처럼 헤아릴 만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덕을 체득한 중립의 모습으로 서쪽 지역의 아름다움을 다 얻은 것으로는 또 덕봉산만한 것이 없다.옛적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충신 박공(朴公) 휘 지수(枝樹)가 왕대인(王大人 조부(祖父)) 감찰공(察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산 아래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감찰공의 6세손 상언(尙彦)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산의 오른쪽 기슭에 나아가 안정(安亭)과 서로 마주보는 곳에 평탄한 한 곳을 얻어 몇 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덕봉과 안정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한편으론 덕안재(德安齋)라 일컬었고, 대대로 우러러 사모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영모재(永慕齋)라 일컬었다. 그러나 청전(靑氈)의 구물(舊物)9)이  이제 거의 200여 년이 되어 가는지라, 굳고 단단했던 것들은 풀어지고 느슨해졌으며, 칠하여 꾸민 것들은 더러워지고 흐릿해져서 다시 긍구(肯構)10)해야 할 우려를 끼치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정해년(1887) 봄에 문중(門中)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 장래에 수리할 것을 도모하였으니, 준채(準彩)가 그 일을 관리하였고, 춘진(春鎭)이 그 공역(工役)을 감독하였으며, 현수(賢秀)가 그 재무를 맡았고, 인진(麟鎭)이 그 장부를 주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8개월 만에 공역을 마쳤다. 동쪽의 방(房)과 서쪽의 실(室), 앞의 대청과 뒤의 침실이 각기 옛 규모를 따라서 환하게 경관이 바뀌었으니,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사업을 잇는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자손으로서 이 재실(齋室)에 들어가는 자들은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니, 효제(孝悌)의 마음이 어찌 세차게 일어나지 않겠는가.맹자가 말하기를, "상ㆍ서ㆍ학ㆍ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재실은 선조를 사모하는 곳이고, 겸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히기 위한 방도이니, 고을의 서당이나 글방에 비해 그 소중함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사람이 살아가며 책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으며, 선대가 자손에게 바라는 것은 무슨 일이겠는가? 한가로이 지내며 경치를 완상하는 것과 같은 무익한 유희를 경계하고, 문장을 꾸미는 것과 같은 쓸모없는 습관을 버리고서 항상 조고(祖考)를 대면하는 것처럼 엄숙하고 공경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한결같이 천서(天敍)와 천질(天秩)11)처럼 사람이 살아가는데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세운 다음에 책을 읽어 이것을 밝히고, 벗들을 모아 이것을 강습하여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함으로써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으로부터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힘써 나아가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한다면 선조를 길이 사모하고 사업을 계승하는 도리가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단지 박씨(朴氏) 한 가문의 복일뿐만이 아닐 것이다.내가 이 재실에서 노닌 지 여러 해인데, 가만히 엿보건대 메뚜기와 산초나무처럼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넘쳐나고, 시례(詩禮)를 묻고 배우는 가풍이 성대하게 한창 펼쳐지고 있으니, 그 아름답고 상쾌하며 맑고 깨끗한 기운이 반드시 도와 발현하게 해주어서 자손들이 구양자(歐陽子)12)와 같은 한 사람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재실에서 노니는 자들은 각각 힘써야 할 것이다. 爾陵古稱山水鄕。其秀爽淸淑之氣。多聚於西方。若天台海望文山德峯。可數者非一。然體德中立。而盡得西方之美者。又莫若德峯焉。昔者宣廟朝。忠臣朴公諱枝樹。葬其王大人監察公於此。子孫因居山下。監察公六世孫尙彦與諸宗。就山之右麓。得一平坦與安亭相對處。構數椽屋子。以其在德峯安亭之間。故一稱德安齋。以其世世爲瞻慕之所。故一稱永慕齋。靑氊舊物。殆二百餘年于玆矣。鞏固者縱緩。塗飾者漫漶。有不免再貽肯構之慮。歲丁亥春。門議齊發。將謀葺理。準彩尸其事。春鎭董其役。賢秀掌其財。麟鎭主其簿。首尾八個月。工役告訖。東房西室。前廳後寢。各遵舊規。渙然改觀。其繼志述事。可謂至矣。爲子孫而入此室者。必有所感而孝悌之心。豈不油然而生乎。孟子曰。設爲庠序學校以敎之。皆所以明倫也。此室是思慕祖先之地。而兼爲諸子孫肄業之方。視諸鄕黨庠塾。其所重。不亦有間乎。人生所以讀書者。爲何事。先世所以期望於子孫者。爲何事。戒燕玩無益之遊。去纂組無用之習。嚴恭寅畏。常若對越祖考。一以天敍天秩人生日用合做底道理。立定課程。讀書以明之。會友以講之。存之於心。體之於身。自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自愛親從兄。至於治國平天下。循循征邁。期有成立。則其於永慕似述之道。爲何如哉。此不但爲朴氏一門之福而已也.予遊此齋有年耳。竊覸其螽斯椒聊。至爲蕃衍。而詩禮問學之風。蔚然方張。其秀爽淸淑之氣。必有以助發。而所産將不止爲一歐陽子而已。遊此室者。其各勉焉。 청전(靑氈)의 구물(舊物) 청전은 푸른 모포라는 뜻으로 선대(先代)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영모재를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훔쳐 가려 하자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라.[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긍구(肯構)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선대가 지은 건물을 다시 중수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천서(天敍)와 천질(天秩) 천서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순서를 말하고, 천질은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등급을 말한다. 《書經 皐陶謨》 구양자(歐陽子) 송(宋)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말한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훌륭한 고문(古文)을 많이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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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당기 愚忍堂記 박 사문(朴斯文) 학중(學中)은 천태산(天台山) 사람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 여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풍모와 거동이 단지 순박하고 예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어느덧 서로 만나지 못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훌륭한 명성이 선비와 벗들 사이에 드러났다. 평상시에 우러러 사모하면서 어떻게 수양했기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생각하였다. 정해년(1887) 봄에 비로소 그의 집에 가서 보건대, 뜰과 책상, 창문 등은 말끔하게 먼지 한 점이 없었고, 주인은 날마다 평상복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우두커니 있었으며,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같은 자제들은 향기로운 목소리로 나란히 서서 곁에서 모시고 있었으니, 그 몸가짐이나 행실의 실제가 또한 들었던 것보다 뛰어났다. 내가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경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주인에게 근래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나는 노둔하고 꽉 막힌 재질로, 눈으로는 흑백(黑白)의 색을 알지 못하고, 귀로는 궁상(宮商)의 음률을 구분하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시비(是非)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이 어느 누가 나와 같겠습니까. 어리석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모든 행위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제멋대로 하는 것들이 아닌 것이 없게 되어 날마다 허물을 향해 달려갈 뿐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10여 년 이래로 통렬하게 스스로를 점검하여 세속의 맛, 예컨대 분노나 욕망, 폄훼, 명예, 재촉, 부탁, 분주함, 다툼 따위를 일체 끊어 버리고 감히 마음에서 싹틔워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분수를 따르고 역량을 헤아려 서책에 종사하며 허물이 적기를 바랐지만, 심지가 견고하지 못해 다시 풍부(馮婦)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일13)이 있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우인(愚忍)' 두 글자를 문미(門楣)에 걸어 놓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점이 있었군요. 선생의 어리석음이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에는 어리석고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에는 지혜로우며, 오늘날 세상에 대처하는 데는 어리석고 옛것을 배우는 데는 지혜로우며, 명성과 이익에는 어리석고 도의(道義)에는 지혜로우니, 이른바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14)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있는 뒤에 행함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두운 가운데 날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 내가 지금 쇠약해졌지만, 다소의 일을 돌려보내고 선생을 따라 소요하며 이 생애를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朴斯文學中。天台山人也。予少時。遇於逆旅。但見其風儀淳古。已而不相見爲二十年。而令聞著於士友之間。尋常向慕。以爲何修而得此。丁亥春。始造其門。見庭除几牑。灑然無一點塵累。而主人日以便服。嗒然其間。蘭玉芳聲。濟濟侍側。其持守操履之實。又有浮於所聞。予不勝斂衽。問主人近來作甚工夫。主人曰。予以鈍滯之質。目不知皀白。耳不分宮商。心不解是非。其爲愚。孰如我者。愚而自用。不有以忍之。則凡百所爲。無非無知妄作。日趨於愆尤而已。是以十餘年來。痛自點檢。一切世味。如忿慾毁譽趨託奔競之類。不敢萌諸心而出諸口。隨分量力。從事簡編。庶幾寡過。而但心地不固。恐復有憑婦揚臂之擧。故以愚忍二字。揭諸楣。以爲常常自警之資也。予曰有是哉。子之愚也.愚於爲人而智於爲己。愚於處今而智於學古。愚於聲利而智於道義。所謂其愚不可及也。孟子曰有所不爲而後。可以有爲。宜其闇然而日章也。嗚乎。予今衰矣。願還多少事。從子逍遙以畢此生也。 풍부(馮婦)가……일 이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풍부는 진(晉)나라 사람으로, 맨손으로 범을 잘 잡았으나 이 일이 광포한 행위임을 깨닫고 선비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판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호랑이를 모퉁이에 몰아넣고 감히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금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했지만, 선비들은 비웃었다는 고사가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그……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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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헌기 愚軒記 윤생 상린(尹生相麟)이 나를 따라 공부한 지 몇 해 되었는데, 하루는 천태산(天台山)의 내 거처를 방문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가친(家親)께서는 일찍이 별호(別號)를 자처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처럼 노년에 이르러 문을 닫고 매우 적막하게 지내시는 때에 도리어 헌(軒)에 '우(愚)'를 표제(標題)하시고 친구들의 시를 얻을 때마다 아침저녁으로 읊조리며 마음을 달래는 바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친구 중에 가친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어르신만이 계실 뿐이니, 바라건대 어르신께서 알고 계신 것을 따라 표제하신 뜻에 대해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옛사람이 그림을 가져다드린 것15)처럼 돌아가 가친께 바친다면 안색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내가 말하였다. "군의 가친께서는 젊고 장성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셨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의를 좋아하셨기에 아름다운 명성이 고을에 드러나 어진 사람으로 추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굳이 어리석음을 자처하여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미 어질게 여기는데 스스로 어질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지 않는데 도리어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비록 겸손하고자 한 것일지라도 어느 누가 믿겠는가. 다만 평소에 실속이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일삼지 않으셨으며, 명성이나 권세를 쫓는 길에서 내달리지 않으셨고, 시비를 다투는 장소에서 오르내리지 않으시면서 분수에 따라 졸렬함을 지킨 채 한결같은 모습으로 노년에 이르셨으니, 헌(軒)의 호를 취한 뜻이 혹 여기에 있을 것이네. 비록 이러한 것을 어리석게 여길지라도 사람들이 어질게 여기는 것이 또한 어찌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반드시 나이가 더욱 많아질수록 지식과 생각이 더욱 정밀해지면서 몸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과 말을 위험스럽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에 이르러 때에 따라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어 그 끝맺음을 도모하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이 어찌 옛적에 이른바 '미칠 수 없다.'16)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 때에 시험 삼아 이러한 뜻으로 받들어 질정한다면 반드시 나의 뜻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네."라고 하였다. 尹生相麟。從余遊有年。一日過天台寓舍。告余曰。家親未嘗以別號自居。及此衰暮。閉門苦寂。乃題軒以愚。隨得知舊詩和。爲日夕諷詠遣懷之資。然在知舊。知家親心者。惟丈人在。願從丈人所。得序述所題之意若干語。歸以供親。如古人致畵。而庶幾解顔也。余曰。君之家嚴。少壯孝悌。老而好義。令聞著於鄕坊。未有不以賢人推之。則何必以愚自處而至此標爲也。人旣賢之。而不自賢焉。人不愚之。而乃自愚焉。雖欲謙謙。其孰信之。但其平日。不喜浮華。不事表襮。不馳逐於聲勢之途。不上下於是非之場。任分守拙。一昧到老。軒之取號。其或在是歟。雖欲以此爲愚。而人之賢之。又何嘗不在於此耶。必其年齡益邵。知慮益精。至於身之顯晦。言之危遜。不能不隨時加謹而爲圖維厥終之計者。亶在於是。然則是愚也。豈非古所謂不可及者耶。趨庭之日。試以此意奉質焉。想必不以爲非我意也。 옛사람이……것 북송 때의 문인 소순(蘇洵, 1009~1066)의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에 "본디 나의 선친께서는 물건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평소의 생활도 재계하듯 하시고, 말씀하시고 웃으시는 것도 꼭 필요할 때에 맞게 하셨는데, 다만 일찍부터 그림을 좋아하셨다. 자제와 문인들이 기쁘게 해드릴 만한 것이 없는지라 그 좋아하시는 그림을 서로 가져와 한 번이라도 선친의 얼굴을 펴시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비록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모아진 그림이 공경들처럼 많았다.[始吾先君, 於物無所好, 燕居如齋, 言笑有時, 顧嘗嗜畫. 弟子門人, 無以悦之, 則爭致其所嗜, 庶幾一解其顔. 故雖為布衣, 而致畫與公卿等.]"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古文眞寶後》 미칠……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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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직에게 답함 答曺仲直 지난번 김생(金生)이 돌아왔을 때 마침 급한 일로 인하여 답장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시일이 오래 지나 인편을 찾을 방도가 없어 그대로 지내느라 매우 편치 않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편지를 보낸 이후로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읽으면서 지내는 정황이 신명의 도움을 받아 평안하신지요? 영랑(令郞)14)의 길례(吉禮)를 잘 치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복록(福祿)이 이어져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예는 비록 축하하지 않는 것이나, 구구한 정사(情私)로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번 그대를 보면, 자품(姿禀)이 굳세고 단정하며 행실에 이미 방정함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사람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외람되이 더불어 노니는 사람의 끄트머리에 있으면서, 만분의 일이나마 충심을 바쳐 그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기를 생각하니, 그 마음에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저의 성품이 거칠고 경솔한데다, 더욱 늙고 어두워져 실낱만큼도 서로 도와드릴 것이 없습니다. 매번 그대의 편지를 받을 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랫동안 멍하니 있으니 오직 그대는 부디 힘써서 아홉 길의 공이 한 삼태기 모자란 데서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5)【질문】공자께서 말씀하신, "더불어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고,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이와 더불어 말한다."는 말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말할 만하지 않은데도 말하고, 말할 만한데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대답】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과 접하는 측면을 이야기한 것이고,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음의 측면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질문】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모시는 것은 증자(曾子)처럼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이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자식 된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본분에 지나치는 일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본분에 지나치는 일이 없다【無過分】'는 세 글자가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할 수 있는 것'이란, 적합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합한 일을 하면 이는 곧 본분에 지나치는 것이 아니고,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면 이는 본분에 지나치는 것입니까?【대답】이 단락은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니, 자식이 어버이를 모심에 있어서 순(舜) 임금과 같은 분이 지극하면서 본분에 지나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주공(周公)과 같은 분이 지극하되 본분에 지나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형공(王荊公)은 효로 일컬어졌는데, 그가 말하기를, "주공은 신하가 세울 수 없는 큰 공을 세웠으니, 신하가 쓸 수 없는 예악(禮樂)을 쓸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또한 효를 행함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질문】위(衛) 나라 공자(公子)가 집안 살림을 잘한다는 칭찬은 그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지나치게 호화롭고 화려하게 하지 않았고, 본분에 맞는 전지(田地)를 지켰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집안 살림을 잘한다는 것인가요? 그 집에 거하기를 잘하는 것인가요? 처음과 조금, 그리고 부유하게 된 것으로써 살펴보건대, 아마도 집안의 힘이 점차 펴짐이 있음을 말한 것이겠지요.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고 훌륭하다."'라는 것은 높은 서꺼래의 좋은 저택과 각종 기물에 이르기까지 재력과 지위에 따라 적당히 하고 그만둔 것이니, 아름다움을 다하고자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대답】이번 조목 문답은 《주서(朱書)》에 있는 것이니, 그대의 질문이 아무개와 비슷합니다. 이는 그렇지 않으니, 비로소 조금 부유해졌다는 것은, 것은 집을 짓는데 들인 공역(工役)이 점차 나아간 차례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고 훌륭하다."라는 것은 건축물의 창문을 만들고 꾸미는데 그런대로 절제하였음을 가리킨 것이니, 모든 기물 등과 같은 것들은 여의(餘意)일 따름입니다.【질문】'신명(神明)' 두 글자는 바로 마음의 본체가 밝아 모든 변화의 수응(酬應)하는 오묘함으로 밝고 어둡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허령(虛靈)의 '영(靈)'자와는 어떠합니까?【대답】'신(神)'자는 비교적 '정(精)'의 뜻을 지녔습니다.【질문】《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중용의 효능은】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체를 이루는 요소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빠뜨릴 수 없도다."라고 하였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은 과연 어떻게 형용해야 사물에 체(體)가 되어 존재하는 것입니까.【대답】이(理)를 벗어나서는 사물이 없고, 이미 사물이 있으면 체(體)가 되었다는 뜻이니, 볼 수 있을 것입니다.【질문】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性)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만을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사(子思)가 말한, '천명지성(天命之性)'은 기를 말한 것이 아니고,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성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분명하지 않고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까?【대답】본원의 측면으로부터 말한 까닭에 성(性)을 말하고 기(氣)를 말하지 않았으나, 기는 일찍이 갖추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으로 인하여 말한 까닭에 기를 말하되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이니, 성은 일찍이 분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질문】《맹자(孟子)》 「고자장(吿子章)」의 집주(集註)에서, "성(性)은 형이상이고, 기(氣)는 형이하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理)는 단지 위에서 형상화된 것이라 형이하가 될 수 없으며, 기는 단지 아래에서 형상화된 것이라 형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인가요?【대답】이(理)는 두루 통하고 기(氣)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정자(程子)는, "이(理)는 전체를 두루 통하고 기(氣)는 편벽되었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통하는 것을 따라 온전하게 갖추면 형이상이라고 하고, 그 국한된 것을 따라 편벽되면 형이하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기가 아니면 이가 어떻게 홀로 위에서 형상화되며, 이가 아니면 기가 어떻게 홀로 아래에서 형상화되겠습니까? 向於金生之迴。適因忽急。未得修謝。繼而日久。覓便無階。尙爾闕如不安多矣。未審信后侍旁經履。神相裕謐。令郞吉禮。聞已利行。源源餘祿。曷其有艾。禮雖不賀。而區區情私不能不爲賀也每覸座右。姿禀勁正。行已有方。求之今日。甚不易得。忝在遊從之末。思欲效萬一之忠而俾有以成其美者。其心豈有窮已哉。自惟滅裂。加以衰昏。無絲毫可以相資者。每承座右書。不覺憮然久之。惟座右勉之勉之。使九仞之功。無爲一簣之虧。如何如何。孔子所謂可與言。而不與之言。不可與言。而與之言。與孟子所謂未可以言而言。可以言而不言。有分耶。孔子所謂。是就接人上說。孟子所言。是就心上說。孟子曰。事親若曾子者。可也。程子釋之曰。子之身所能爲者。皆所當爲。無過分之事。無過分三字。有可疑。蓋能爲者。卽得爲者乎。然則。得爲爲之。是乃無過分。而不得爲爲之。是則有過分耶。此段有深意在。子之事親若大舜者。可謂至矣。而無過分之事。臣之事君若周公者。可謂至矣。而亦無過分之事也。蓋王荊公以孝稱之者。而其言曰。周公有人臣不能爲之功。則當用人臣不能用之禮樂。觀於此。其爲孝亦可知也。衛公子善居室之稱。蓋見其生長乎富貴。而不之豪華。能守得本分田地故也。此蓋善其居室乎。善居其室乎以始少富有觀之。似是家力漸次有舒之謂也苟合完美。自禳題堂高之類。及至多般器用等物。隨力稱可而止。不欲盡其美也。如何。此條問答。朱書有之。子之問有若某矣。此其不然。始少富有。指其築室工役。漸就之序也。苟合完美。指其室堂窓牖。經紀修雕。苟可之節也。如凡器物等此乃餘意耳神明二字。是此心本體之明。而酬應萬變之妙。明卽不昧。而神字與虛靈之靈字。何如。神字。較有些子精底意。中庸曰。視之而不見。聽之而不聞。體物而不可遺。旣曰不見不聞。則果何名狀。而體於物歟。理外無物。旣有物。則所以體之之義。可見。程子曰。論性不論氣。不備。論氣不論性。不明。然則。子思言天命之性。不言氣。孟子言浩然之氣。不言性。此皆不明不備歟。自本源上說去。故言性不言氣。而氣未嘗不備也。因吾心上說來。故言氣不言性。而性未嘗不明也。吿子章集註曰。性形而上者也。氣形而下者也。然則理只形於上。而不能形下。氣只形於下。而不能形上歟。理通而氣局。程子言理全而氣偏。朱子以爲從其通且全者。而謂之形上。從其局且偏者。而謂之形下也。蓋非氣理。何以獨形於上。非理氣。何以獨形於下乎。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로, 영식(令息)이라고도 한다. 아홉 길의 …… 어떻겠습니까 《서경》 「여오(旅獒)」에서, "작은 행실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쳐, 아홉 길의 산을 만들다가 공이 흙 한 삼태기 모자란 데서 무너지는 격이 되리라.【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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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명【진섭】에게 답함 答姜子明【晉燮】 지난날 단란하게 모여 여러 날을 머물지 않음이 없다가, 돌아온 후에 그리워하며 다시 옛날처럼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인정이 끝없음을 참으로 알겠습니다. 집안에 뜻밖의 소란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근심을 끼친 것이 아마도 적지 않을 듯하니 멀리 바깥에서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가눌 수 있겠습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환란을 당했을 때에는 단지 하나의 처리 방법이 있을 뿐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극진히 한 다음에 태연히 대처하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 뒤에 놓아 버린다면, 그것은 즉 의(義)도 없고 명(命)도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꼭 염두에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전에 경립(景立)이 심을 성정과 대비시키는 것에 대해 물었는데,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이 끝내 편안치 못하였습니다. 마음은 성정을 거느리는 것인데, 만약 성정을 말하면서 마음이 그 안에 있다고 하면 마음은 빈 그릇이 되고, 성과 정은 뼈대가 없고 귀결도 없는 것입니다. 저의 실언을 돌이켜보니, 황공하여 불안함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복괘(復卦)를 운운했던 것은, 선유(先儒)는 모두 정(靜)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주자에 이르러, "동(動)하는 단서가 곧 천지의 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자 또한 복괘를 인용하여 발하지 않았을 때의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다는 뜻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는 마땅히 뜻을 따라 상호 참작해야 하니, 성급히 하나의 설만 고집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동정(動靜)은 사물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고,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은 마음의 차원으로 말한 것입니다. 천지 다음에 '미발(未發)'이란 글자를 둔 것은 마땅치 않으니, 헤아려주심이 어떻겠습니까?【질문】복괘 하단의 한 획은 동처(動處)라,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역시 이발(已發)로써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장흠부(張欽夫)에게 답한 글에 말하기를, "마음이 보존되어 있을 때는 사려(思慮)가 아직 싹트지 않았어도 지각(知覺)은 어둡지 않다. 이것은 정(靜) 가운데의 동(動)이니, 복괘를 통해 천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복괘를 통해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마음이 미발(未發)하였을 때를 말한 것입니까?【대답】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차례로 말하면, 복괘는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동(動)하는 것이니 정(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음양이 서로 내재하는 체(體)로 말하자면, 복괘는 음 중에 양이 있는 것이요, 정 가운데 동이 있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사려(思慮)가 아직 싹트지 않았어도 지각(知覺)은 어둡지 않다는 시절이 되는 것입니다. 각각의 차원으로 나아가 그 말의 뜻이 있는 곳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질문】밝아서 통하고 공평하여 넓게 되니, 밝아짐은 인(仁)이요, 통함은 의(義)이며, 공평함은 예(禮)요, 넓어짐은 지(知)입니다. 그런데, "사랑함을 인이라 하고 마땅함을 의라 하고 다스림을 예라 하고 통함을 앎이라 한다."16)는 것으로 말하자면, 통함은 지(智)에 속하지 않고 의(義)에 속하는 것은 어째서인지요?【대답】통함은 밝음의 성대함이니, 예에 속하는 것이 맞을 것인데, 이를 일러 의에 속한다고 한 것입니까? 예는 불과 짝하고, 불이 뻗쳐서 환히 드러나는 것은 통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智)가 물과 짝하는 것은 물이 두루 흘러가기에, 또한 통함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질문】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서명(西銘)」에서 그 경지가 이미 높아졌다 하였는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절로 따로 보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동명(東銘)」과 같은 글은 의미에 다함이 있다. 어찌 「서명」에 담긴 상하로 통하는 도【徹上徹下】와 모든 이치가 하나로 관통되는【一以貫之】 뜻과 더불어 같이 두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말을 통해 본다면, 하학(下學)의 공부에 있어서 보완함이 없을 수 없고, 정자의 뜻을 통해 보면, 이러한 위치에 도달한 연후에 절로 보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떻습니까.【대답】초학은 초학에서 터득하는 것이 있고, 현인(賢人)은 현인이 터득하는 바가 있으며, 성인은 성인으로서 터득하는 바가 있으니, 공부된 바가 더욱 깊고, 소견이 더욱 다릅니다.【질문】「정성서(定性書)」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에도,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분노가 치솟을 때를 당하여, 어찌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옳고 그름을 살피는 것을 생각하여서 능히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대답】분노를 잊었기 때문에 능히 옳고 그름을 살필 수 있으니, 만약 분노가 치밀어 급박하게 한다면 어떻게 사리를 살필 수 있겠습니까? 분노를 잊고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피는 것은 두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하니, 다만 존양(存養)을 익숙하게 하고 밝은 지혜로 비추는 바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깨닫게 될 겁니다. 또한,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피고 깊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얻는 것도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疇曩圑聚。非不累日。而歸來戀戀。旋復如故。儘覺人情無窮已。聞門內方有橫來之撓。其貽憂虞。想亦不細。遠外曷勝貢悶。朱子曰。人於患難。只有一䓢處置。盡人謀之後。却須泰然處之。若不會處置了放下。便是無義無命。此言當留心也。如何。昔者。鄙答景立以心對性情之問。果爲未安。心是統性情者也。若曰。言性情而心在其中。則心爲虛器。而性與情。爲無骨子沒着落矣。追念失言。不勝悚仄。復卦云云。先儒皆以靜爲見天地之心。至朱子以爲動之端。乃天地之心。然朱子亦引復卦。以證未發時知覺不昧之義。此當隨意互看。不可遽執一說也。動靜是物上說。未發已發是心上說。不當於天地。下未發字。諒之如何。復卦下面一晝。是動處。則在人心。亦以已發言。而朱子答張欽夫書曰。方其存也。思慮未萌。而知覺不昧。是則靜中之動。復之所以見天地之心也。然則。所謂復見天地之心。專以人心未發之時言之耶。以陰陽消長之序言。則復是一陽初動。不可謂靜也。以陰陽互藏之體言。則復是陰中之陽。靜中之動。在人心。爲思慮未萌。知覺不昧時節也。各就地頭。而觀其旨意之所在可也。明通公溥。明仁也。通義也。公禮也。溥知也。而以愛曰仁。宜曰義。理曰禮。通曰智言之。則通不屬於智。而屬於義何也。通是明之盛。則屬於禮可也。而謂之屬於義耶。禮配於火。火之宣著者。有通之意。智配於水。水之周流者。亦有通之意。程子曰。西銘其地位已高。到此地位。自別有見處。朱子曰若東銘。則意味有窮。安得與西銘徹上徹下。一以貫之之意同日而語哉以朱子之說則於下學功夫不能無補而以程子之意則到此地位然後自有所補如何初學有初學見處。賢人有賢人見處。聖人有聖人見處。所造愈深。所見愈別。定性書。第能於怒時。觀理之是非。蓋當怒急遽之時。何以觀理之是非耶。觀是非是慮而能得之意否忘怒故能觀是非。若當怒急遽。則何以觀理也。忘怒觀理非是。有兩樣心。但存養所熟。明睿所照。自然不言而喩。且觀理是非。與慮而能得。是一般時節。 사랑함을 인이라 …… 앎이라 한다 《근사록》 권1의 성무위장(誠無爲章)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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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명17)에게 답함 答姜子明 생각을 지극히 하여 마음이 상해 무근(無根)의 화(火)18)가 날마다 가슴속에 성하게 생긴다고 하니, 이것은 알지 못하겠네. 만약 태사공(太史公)이 빌미를 만든 것19)이 아니라면 혹 사마자휘(司馬子徽)의 좌치(坐馳)20)를 범한 잘못일 것이네. 저것 때문이든 이것 때문이든 모두 좋은 의사는 아니네. 지금 사람은 대부분 단계를 뛰어넘고 쉽게 여겨 망령되이 행동하여 고생만 하고 실득이 없어 이런 병을 초래하네. 만일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말하자면 마땅히 일상의 평이한 곳에서 그 사물을 변별하여 곧 공사(公私)의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또렷하고 분명하도록 하고, 만일 실천을 말하자면 마땅히 어묵(語默)과 동정(動靜)에 십분 힘을 붙여 성(誠)을 기르고 진(眞)을 쌓아 오래 되어 절로 편안히 쉬는 날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요, 흐릿하고 아득한 곳에서 탐색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보존하고 지키는 공부에 안배하고 조작하여 마음이 수고롭고 기가 부족하도록 하여 병폐를 생기게 해서는 불가하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창포(菖蒲)나 복령(伏令) 등으로 효험을 바랄 수 없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마음을 보존한다는 '존심(存心)' 두 글자는 실로 창편(倉扁)21) 집안 제일의 법문(法門)이 되니, 모름지기 허다한 생각과 허다한 수고와 분주한 것을 쓸어내어 어린아이가 처음 학교에 갈 때의 모양을 하여 쇄소응대(灑掃應對)와 사친종형(事親從兄)을 하는 것에서부터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성심(誠心)이 날마다 자라도록 힘쓴다면 사의(私意)는 사라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사라질 것이니, 반드시 채워지지 못한 힘으로 갑자기 배척하고 공격하다가 스스로 낭패를 취하지 않을 것이네.〔문〕심술(心術)의 사이에 염려의 은미함이 조금이라도 미진한 것이 있는 것 이것이 안자(顔子)의 비례처(非禮處)이니, 시청언동(視聽言動) 상에 무슨 비례(非禮)가 있어 사물(四勿)22)로 알려준 것입니까?〔답〕심술염려와 시청언동은 비록 내외의 구별이 있지만 그 작용은 서로 기다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심술에서 잃고서 시청에서 얻는 자가 있겠는가?〔문〕쇄소응대(灑掃應對)는 효제(孝弟) 가운데 한 가지 일이고, 효제는 성명(性命) 가운데 한 가지 일이라면 쇄소응대의 소이연(所以然)은 효제이고, 효제의 소이연은 성명입니다.〔답〕실로 그러하네.〔문〕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을 적에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음에 비견된다고 하였는데,23) 병들어 침상에 누운 사람은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모와 자식을 말하는 것입니까? 허씨(許氏)의 설24)로 보면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으며, 진씨(陳氏)의 설25)로 보면 부모와 자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답〕허씨 설은 조금 상고하였다고 하겠지만 끝내 진씨 설이 평온한 것만 못한 듯하니, 율곡(栗谷)이 진씨 설을 따랐던 이유이네.〔문〕"사람이 능히 이와 같지 못한 것은 단지 실리(實理)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 실리라는 것은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는 것이다."26)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실리(實理)와 실견(實見)은 같지 않으니, 아마 기록할 때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理)는 실하지 않음이 없고 다만 보는 것이 실하지 않음이 있는데, "실리라는 것은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보면 실제로 봄이 있은 뒤에 실리가 있는 듯하기 때문에 주자가 "기록할 때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라고 말한 것입니까?〔답〕실리는 천연적으로 절로 인력(人力)과 상관이 없으니, 어찌 사람이 보는 것의 실불실(實不實)이 어떠한가를 기다리겠는가? 만약 수양하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실제로 본 뒤에 실리가 있는 것이네. 致思傷心。無根之火。日熾于中。此則未喩。若非太史公作祟。則或犯司馬子徽坐馳之失耶。以彼以此。皆非好意思。大抵今人。多是躐易忘作。徒勞無得。致有此病。如言窮理。則當於日用平易處。辨別其物。則公私天理人欲之分。使之了了分明。如言踐履。則當於語默動靜上。十分着力。使之養誠積眞。久自有稅駕之日。不可探索摸想於悅惚渺茫之地。安排造作於操存持守之功。使心勞氣乏。以生病敗也。然則此非菖蒲伏令等所可責效。來喩所謂存心二字。實爲倉扁家第一法門。切須掃却許多思量。許多勞攘作小兒子初上學時模樣。自灑掃應對事親從兄上。今日行一事。明日行一事。務使誠心日長。則私意不期消而自消。不必以未充之力。遽加排攻。而自取狼狽也。心術之間。念慮之微。少有未盡者。是顔子之非禮處。則視聽言動上。有何非禮。告之以四勿。心術念慮。與視聽言動。雖有內外之別。而其用。則未嘗不相須。豈有失於心術而得視聽者哉。灑掃應對。是孝弟中一事。孝弟是性命中一事。則灑掃應對所以然。孝弟是也。孝弟所以然。性命是也。固然。病臥於床。委之庸醫。比之不慈不孝。病臥於床者。以身之謂耶。以父母與子之謂耶。以許氏說觀之。則非以身之謂耶。以陳氏說觀之。則非以父母與子之謂耶。許氏之說稍考。終不似陳說之爲平穩也。所以栗谷從陳氏之說。人不能若此者。只爲不見實理。實理者。實見得是。實見得非。朱子曰。實理與實見不同。恐記錄漏字。蓋理無不實。但見未有實。而以實理者。實見得是。實見得非之文。觀之。則似有實見然後。有實理。故朱子言記錄之漏否。實理。是天然自有不犯人力底。何待乎人之見實不實如何也。若以修爲上言之。有實見而後實理者。 강자명(姜子明) 강진섭(姜晉燮, 1870~?)을 말한다. 자는 자명,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의 문인이다. 무근(無根)의 화(火) 명문(命門)과 원양(元陽)의 병 기운으로 되는 화를 말한다. 허해서 생기는 화〔虛火〕라고도 한다. 《국역 동의보감》 태사공(太史公)이……것 지나치게 책을 읽어 병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주자대전》 권47 〈여자약에게 답함〔答呂子約〕〉26서에 "다만 보내신 편지에서 보면 수고롭게 심력을 소비한 소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벗들의 편지에서도 독서하는데 지나치게 힘을 들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무슨 책을 읽는지요? 성현이 남긴 말들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일이 아님이 없으니, 결단코 도리어 병을 생기게 하는데 이르러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태사공이 병의 빌미를 만들었을 것입니다.〔但來書以爲勞耗心力所致, 而諸朋友書亦云讀書過苦使然, 不知是讀何書? 若是聖賢之遺言, 無非存心養性之事, 決不應反至生病. 恐又只是太史公作祟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사마자휘(司馬子徽)의 좌치(坐馳) 조용히 앉아 있는 듯해도 마음속으로는 온갖 번뇌가 치달리는 것을 말한다. 좌치는《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저 비어 있는 공간을 볼지어다. 텅 빈 방에 햇살이 비치니 길상은 고요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또한 (길상이 머물지 않는 것은) 마음이 고요히 머물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몸은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마음이 이리저리 치닫는다고 한다.[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 夫且不止, 是之謂坐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송(宋) 나라 사마자휘(司馬子徽)가 《장자》에 나오는 '좌망(坐忘)'의 설을 좋아하여 〈좌망론(坐忘論)〉을 짓자, 정자(程子)가 "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좌치(坐馳)에 떨어진 것이다."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近思錄 卷4 存養》 창편(倉扁) 한나라 때 창공(倉公)과 전국 시대 편작(扁鵲)으로, 모두 명의(名醫)로 일컬어진다. 사물(四勿) 《논어》 〈안연(顏淵)〉에서 공자의 제자 안연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 것을 말한다. 병들어……하였는데 《소학》 〈가언(嘉言)〉에 나오는 정이(程頤)의 말이다. 허씨(許氏)의 설 병상에 누운 사람은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자신이 병들어 누운 것이라고 하였다.《소학집주증해》에서 이 문장의 고증(攷證)에 나온다. 허씨는 허형(許衡, 1209~1281)을 말한다. 진씨(陳氏)의 설 이 구절 주석에 나오는 진순(陳淳, 1159~1223)의 설을 말한다. 사람이……것이다 《근사록》 권7 출처(出處)에 나오는 정이(程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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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휴당 선생 최공4) 정려중수기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 옛적 임진왜란의 변고에 절개와 의리를 지키다 죽은 이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우뚝하고 꿋꿋했던 기상이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처럼 천하에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백세(百世)에 회자(膾炙)되는 분으로는 삼장사(三壯士)5)처럼 더욱 성대한 이가 없었으니, 일휴당(日休堂) 최공(崔公 최경회(崔慶會))가 바로 삼장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대 사람들이 공을 위해 능주(綾州)에는 정려문(旌閭門)을 세웠고, 진주(晉州)에서는 제사를 지냈으니, 대개 능주는 공이 살았던 고향이고, 진주는 순절한 지역으로, 잊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을 부치는 데에 차이가 있지 않았다.임진년 가을에 진주의 선비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할 것을 도모하여 사문(斯文) 성복윤(成福閏)과 전주일(全柱一), 하용진(河龍辰)에게 부탁하여 호남으로 가서 의론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능주를 지나가다 정려문이 무너지고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 개탄하며 말하기를, "이번 발걸음은 본래 사우를 위해 계획한 것이지만, 지금 정려문이 이와 같으니, 어찌 사우만 중수하고 정려문은 중수하지 않겠는가."하고서 마침내 가던 길을 멈추고서 전대를 열어 목재를 모으고 장인을 모집하더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아, 선생이 삼강오륜을 일으켜 세우고 명교(名敎)6)를 창도(唱導)하여 권면한 것은 그 공이 천지와 더불어 존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니, 한 지역의 정려문만으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물을 일으켜 마음을 부치는 데에 그 장소가 없을 수 없으니, 오늘날의 역사(役事)를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후대 사람들이 진실로 사문(斯文)7)의 동지(同志)들과 함께 이어서 이를 수리하여 그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이 정려문도 선생과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삼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昔在龍蛇之變。伏節死義。前後相望。而其磊磊落落。如靑天白日。輝映於天下。膾炙於百世。未有如三壯士之爲尤盛也。日休堂崔公卽三壯士之一。後人爲之棹楔於綾。俎豆於晉。蓋綾是杖屨之鄕。而晉是殉節之地也。所以寓追慕不忘之心者。靡有間焉。壬辰秋。晉之士謀修祠宇。屬斯文成福閠全柱一河龍辰來湖南收議。因過綾。見旌閭頹敝。慨然曰。此行本爲祠宇計。而今旌閭如此。豈重修祠宇而不修旌閭乎。遂停鞭開橐。聚材募工。不幾日而一新之。嗚乎。先生所以扶植綱常。倡勵名敎者。其功可以與天壤俱敝。非一區棹楔能輕重。然興物寓情。不可無所。則今日之役。亦豈可已者耶。後之人。苟與斯文同志。繼以修之。無失其時。則此屋亦將與先生不朽。竊有望焉。 일휴당 선생 최공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일휴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선우(善遇)이며, 전라남도 능주(綾州) 출신이다. 양응정(梁應鼎)ㆍ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중(喪中)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패전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와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이 함락될 때 최경회와 함께 투신 자결했던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고종후(高從厚, 1554~1593) 세 사람을 가리킨다.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儒敎)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사문(斯文) 유학(儒學)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였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사문'을 없애려 하였다면 내가 사문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문은 도(道)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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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당 황공8) 정려중수기 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 아, 이곳은 고(故)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명신(名臣) 양건당(兩蹇堂) 황공(黃公)의 충효(忠孝)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여 처음에는 효건(孝蹇)으로, 뒤에는 충건(忠蹇)으로서 끝내 대방성(帶方城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는 날에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킬 수 있었으니, 지극한 행실과 큰 절개, 곧은 충정과 위대한 공열은 천하에 강상(綱常 삼강오륜)을 부지하고, 백세토록 나약하거나 완악한 사람을 흥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적(事蹟)의 대략적인 내용은 야사(野史)와 국승(國乘 나라의 역사)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굳이 중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종(正宗 정조(正祖)) 을묘년(1795)에 정려문을 세우라는 임금의 명으로 7세손 진규(鎭奎)가 여러 종친과 함께 처음 건립하였고, 97년 뒤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오년(1894)에 추증(追贈)의 은전을 받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현판을 고쳐 써서 게시하는 것과 단청을 새롭게 칠하는 꾸밈은 9세손 간(柬)이 주관하였다. 14년 뒤 정미년(1907)에 세월이 오래되어 목재가 썩게 됨에 따라 무너지는 우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고쳐 건립하여 완전히 새롭게 하였으니, 10세손 경현(慶炫)과 12세손 열주(悅周)가 여러 종친들에게 제창(提唱)하여 중수한 것이다.아,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져 온 천하가 닫히고 막혔으니, 공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도 이 일을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중건이 애당초 세상의 교화를 돕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嗚乎。此故宣廟朝名臣兩蹇堂黃公忠孝褒旌之閭也.公事親至孝。事君盡忠。始以孝蹇。後以忠蹇。卒能殞身立。慬於帶方城陷之日。至行大節。貞忠偉烈。足以扶綱常於天下。起懦頑於百世。若其事蹟梗槩。野史國乘。昭載備錄。此不必架疊焉。至正宗乙卯。棹楔成。命七世孫鎭奎與諸宗創始之。後九十七年。今上甲午。承贈貤之典。因以改題揭板及新丹雘之飾。蓋九世孫柬尸之也。後十四年丁未。以歲久材朽。慮有頽圮之患。將改建而一新之。蓋十世孫慶炫十二世孫悅周。倡諸宗而經營之也。嗚乎。世衰道微。九野閉塞。未知公之忠魂義魄。其亦有以鑑此耶。今日之重建。未始非裨補世敎之一助云爾。 양건당 황공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던 황대중(黃大中, 1551~1597)으로, 양건당(兩蹇堂)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정숙(正叔)이며, 전라남도 강진(康津) 출신이다.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 약재로 사용하면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효건(孝蹇)이라는 호를 얻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壯士)로 뽑혀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해상 전투 중 총탄을 맞아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절게 되자 이순신으로부터 "효건(孝蹇)이 이제 충건(忠蹇)이다."라는 찬탄을 받으며 효건과 충건, 즉 양건당으로 불려졌다. 정유재란 때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남원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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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정씨 십충전 河東鄭氏十忠傳 정공(鄭公) 열(悅)은 자가 구남(懼南)이고 호가 모암(慕庵)이다. 고조 여해(汝諧)는 일두 선생(一蠹先生)121)과 종형제가 되고, 호는 둔재(遯齋)로 지평(持平)을 지냈다. 공은 지향하는 뜻이 고결하고 문장은 해박(該博)하였으니,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가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막사로 달려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많았고, 갑자년(1624, 인조2)에 같은 고을 양위남(梁渭南)122)과 배경생(裵慶生)123) 등과 함께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에 달려갔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또 의병을 모집하여 난리에 달려가다가 완산(完山)에 이르렀을 때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일이 《절의록(節義錄)》에 실려 있다. 칙(恜)은 자가 충보(忠甫), 호가 우수(愚叟)이며 열의 종형제[從父弟]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으며, 문학이 화려하고 풍부하여 효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임진년에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유격대로 적을 정탐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절개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군수 김득광(金得光, 당시 보성군수)이 왜노를 기습하여 격파하니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다. 예교(曳橋)·첨산(尖山)·노양(露梁)·안치(鴈峙) 등지에서 힘써 싸우다가 많은 적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갑자년과 정묘년에 종형(從兄, 정열을 말함)과 함께 난리에 달려갔다. 인기(仁紀)는 자가 원기(遠期)로 열의 사종제이다. 영특하고 웅대한 자질로 '충의(忠義)' 2자를 허리에 찬 칼에 새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자년의 변란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124)의 막사에 나아가 사흘 동안 연달아 싸워 이겼는데 갑자기 탄알을 맞고 죽었다.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 문상(文翔)은 자가 일경(一卿)이며 호가 화은(華隱)으로 칙의 아들이다. 강개한 절개가 있어 정묘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의병으로 나아갔다. 병자년에 안문강공(安文康公)125)을 가서 방략(方略)을 많이 도왔다. 문웅(文熊)은 자가 우경(虞卿)이며 호가 회은(晦隱)으로 열의 아들이다. 지극한 행실이 있으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문리(文鯉)는 열의 종자이다. 의기(義氣)를 좋아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갑자년에 의병으로 나아가고, 병자년에는 문강공을 따라갔으나 얼마 뒤 그만두고 돌아왔다. 부자형제, 숙질 조손이 전후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모두 10명이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온 고을 전체에서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하북(河北)의 열읍(列邑)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다126) 하였다. 이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와 같이 성대한 시대에도 그러한데, 지금 정씨(鄭氏) 한 집안 안에 어찌 충신(忠信)과 의사가 이와 같이 성대하단 말인가. 아, 상(庠)ㆍ서(序)와 학(學)ㆍ교(校)는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127)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 성스러운 임금이 잇달아 일어나 유현(儒賢)이 성대하게 일어나고 예의의 가르침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기풍이 가득하여 막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그렇다면 정씨(鄭氏)의 열 충신이 어찌 다만 한 집안과 한 고을의 광택이 될 뿐이겠는가. 鄭公悅。字懼南。號慕庵。高祖汝諧。與一蠹先生爲從昆季。號遯齋。官持平。公志尙高潔。文章該洽。早年上庠。聲望藹蔚。壬辰亂。赴崔忠毅公慶會幕。多贊畫。甲子與同郡梁渭南裵慶生等。赴賊适之變。丁卯又募義赴難。至完山。聞賊退還鄕。事載節義錄。恜字忠甫。號愚叟。悅之從父弟也。事親至孝。文學華贍。以孝廉薦除順陵參奉。壬辰從李忠武公舜臣。遊軍覘候。爲賊所執。抗節不屈。旣而爲郡守金得光襲破賊奴。遂得脫。力戰于曳橋尖山露梁鴈峙等地。多所斬獲。甲子及丁卯。與從兄共赴難。仁紀字遠期。悅之四從弟也。英邁雄偉。忠義二字。銘佩腰劒。登武科。甲子之變。以宣傳官赴都元帥張晩幕。三日連捷。忽中丸而死。贈濟用監正。文翔字一卿。號華隱。恜之子也。慷慨有節。丁卯侍親﨣義。丙子從安文康公。多贊方略。文熊字虞卿。號晦隱。悅之子也。有至行。擧孝廉。文鯉悅之從子也。好氣義有膽略。甲子赴義。丙子從文康公。尋罷還。父子兄弟。叔姪祖孫。前後起義。凡十人。外史氏曰。闔郡大都。不擧忠信一人。河北列邑。未有一人義士。此在漢唐之盛而猶然。今鄭氏一家之內。何忠信義士若是彬彬耶。嗚乎。庠序學校。所以明人倫也。恭惟我朝聖聖繼作。儒賢蔚興。禮義之敎浹骨淪膚。而親上死長之風。有藹然不可遏者。然則鄭氏十忠。豈徒爲一家一鄕之光澤哉。 일두 선생(一蠹先生) 일두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오현(五賢)의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선생유집(一蠹先生遺集)》이 있다. 양위남(梁渭南) 1574~1633.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호는 구봉(九峯)으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며 1610년(광해군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괄의 난에 격문을 돌리고 정열(鄭悅)·배경생(裵慶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에도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전주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배경생(裵慶生)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유선(由善), 호는 후송(後松)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의리(義理)를 강구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양위남(梁渭南)·정열(鄭悅)·홍덕임(洪德任)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거의(擧義)하였다. 정읍에 이르렀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후송정(後松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장만(張晩) 1566~1629.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1624년 이괄의 반란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진압한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서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안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조익(趙翼)의 천거로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항의신편》, 《혼정편록(混定編錄)》, 《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이 있는데, 문집인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하북(河北)에……없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북 지역이 모두 항복하였다. 현종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 "하북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는가?"라고 탄식하였으나, 나중에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물리쳤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크게 기뻐하였다. 《古今歷代標題註釋十九史略通攷 卷5 唐 玄宗 天寶14年》 상(庠)……것이다 《맹자》 〈등문공 상〉에 "상, 서, 학, 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라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라 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으면 소민들이 아래에서 친해집니다.[設爲庠序學校, 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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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처사 김공 경범전 大谷處士金公景範傳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석귀(錫龜),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며, 계파는 가락(駕洛)에서 나왔다. 6대조 재록(載祿)이 남양(南陽)에서 남원(南原)으로 와 머물렀는데, 자손들이 그곳에 그대로 살았다. 증조는 정삼(鼎三), 조부는 재곤(再坤), 아버지는 낙현(洛賢)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공은 헌종 을미년(1835, 헌종1)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처음 학교에 나아가 동학(同學)들이 《소학》을 읽는 것을 보고 곁에서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더니, 앉을 때에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행동할 때에 반드시 삼가고 찬찬히 하였으며, 쇄소(灑掃)와 정성(定省)128)을 하나하나 준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학》을 수업 받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8세에 들어가는 《소학》은 지금은 행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책을 끼고 집으로 돌아가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강습함에 법도가 있었다. 그때에 곡성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이곤수(李崑壽)129)라는 분이 명망이 높은 선배 대학자로 행의가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를 따랐다. 18세에 노사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고서 학문하는 방법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광주(光州)의 대곡(大谷)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대개 사문(師門)을 가까이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마저 자주 걸렀으며, 직접 밭을 갈고 손수 호미질하여 어버이의 음식을 장만하였다. 학당에 들어가 독서130)하며 생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곁에서 부지런히 시중들며 안팎으로 수응(酬應)하였다. 다시 여가의 시간이 나면 시를 수창하고 정서를 함양하여 성현의 뜻을 구하였으며, 면밀히 연구하고 생각을 펼쳐서 사물의 은미한 뜻을 끝까지 궁구하였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몸소 살펴 실천하는 실상을 다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며 과묵하게 본원의 요체를 함양하였다. 그 일상생활의 절도는 정확한 규범이 있었으니, 마음을 세우는 것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아 비록 홀로 방구석131)의 깊고 은밀한 곳에 있을지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였고,132)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함으로 근본을 삼아 비록 평소 사사로운 자리에서 다급한 때라도 언제나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었다. 스스로 기약함은 성인으로 기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미치지 않으면 문득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고, 스스로의 임무는 천하를 자신의 법도로 삼아 한 가지라도 빠짐이 있으면 반드시 나의 기운이 관여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 뜻을 바르게 하여 따지거나 피하려는 뜻이 없었고, 남을 대할 때에는 인(仁)을 드러내어133) 시기하거나 원망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청렴하고 절개가 있어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134) 기량(氣量)은 바다가 만곡(萬斛)을 실은 배를 포용하듯 그 끝을 볼 수 없었다. 문사(文辭)로 말하자면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135) 비록 그다지 귀하지는 않아도 일상생활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았고, 출처(出處)할 때에는 궁벽한 마을에서 늙어 죽더라도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136)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었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에서부터 일용의 전례(典禮)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고 분석[勘覈]하여 조리가 서로 이어졌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자 자잘한 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긍지(矜持)하던 것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마디 말과 행실에 이르러서는 안배(按排)하거나 조작(造作)한다든지 주저하거나 구차스러운 모양이 전혀 없었다. 노선생(老先生, 노사(蘆沙) 선생을 가리킴)의 초상 때 장례에 모인 수천 명이 공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을 추대하여 상례(相禮)137)로 삼았으니, 제작(制作)의 근원을 미루어 근본하고, 손익(損益)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의절(儀節)을 정하여 행하였다.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늙어 집으로 물러나서는 스승의 도가 전해지지 못할까, 예전의 학업이 성취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조금도 자신에게 관대함이 없었다. 을유년(1885, 고종21) 8월 8일 묵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1세였다. 그의 벗 정의림(鄭義林)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시대가 정주(程朱)로부터 멀어져 의론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후생(後生)이 늦게 진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할 바를 모르지만, 그 대공지정(大公至正, 지극히 공변되고 올바름)하여 사람들을 모아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강토(疆土)를 예전처럼 깨끗할 수 있게138)138) 깨끗할 수 있게 : 원문의 '확청(廓淸)'은 부정(不正)ㆍ악습(惡習)ㆍ부패(腐敗) 등을 없애어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한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하에 만약 공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천고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에 대해 선생께서 한마음으로 홀로 터득한 신묘한 이치를 가슴속에 품어둔 채로 거의 누구에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특별한 지우(知遇)라고 할 만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마음으로 통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벗을 사귐에 그 뜻이 숭상하는 바를 살펴봄이 매우 많았다. 그 평생에 소소한 출사(出仕)가 없는 것을 보더라도 지적하여 논의할 수 있는데, 초연히 멀리 떠나와서 종시토록 얽매임이 없는 자는 누구이며, 갖은 고생 끝에 야유(揶揄, 남을 빈정대며 놀림)가 심한데도, 당당하게 어떠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학문을 널리 닦고 예(禮)로 자신을 검속하는 공부139)가 서로 닦여 함께 이르렀는데도,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용(體用)이 있는 자는 누구이며, 넓으면서도 잡스럽지 않고 번다하고도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를 가지고 있되 속이 좁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화락하게 절로 탄복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아, 나는 공에게서 이러한 것을 보았도다. 공의 도는 비록 그 시대에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공의 풍도를 듣고 공의 글을 읽는 자는 반드시 이 말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세 뒤에도 그와 함께 마음으로 이해하고 정신으로 사귀고자140) 하는 것임을 알리라. 옛날 채백개(蔡伯諧)가 곽유도(郭有道)의 비명(碑銘)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141) 나도 내가 지은 이 전(傳)에 대해 또한 그렇게 말할 뿐이다. 公姓金。名錫龜。字景範。號大谷。系出駕洛。六世祖載祿。自南陽寓南原。子孫仍居焉。曾祖鼎三祖再坤考洛賢世有隱德。公以憲宗乙未生。幼而岐嶷。初就塾。見同學有讀小學者。側聽其所受。坐必端拱。行必周折。灑掃定省。一一遵循。因以小學請業。塾師曰。八歲小學。今不可行也。遂挾冊歸家。淨掃一室。講習有程。時寓谷城地。聞同縣李崑壽。以先進宿碩。行義偉然。遂從之。十八贄謁蘆沙先生。得聞爲學之方。挈家寓光州之大谷。蓋就近師門計也。家貧甚。菽水屢空。躬耕手鋤。供給親旨。入塾行墨。課授生徒。左右服勤。內外酬應。更於暇日餘力。諷詠涵暢以求聖賢之旨。硏精覃思以極事物之蘊。鞭辟體察以盡踐履之實。恬靜澹默以養本源之要。其日用節度。的有成規。立心以忠信爲主。雖幽獨屋漏之地。而可以對越上帝。持己以端莊爲本。雖燕私造次之時。而常若卓然山立。自期以聖人爲準。以爲一毫不及。便是吾事未了。自任以天下爲度。以爲一物有闕。便是吾氣不管。處事則正其義而無計較趨避之意。接物則顯諸仁而無忌克怨尤之心。廉介則係馬千駟而不顧也。氣量則海涵萬斛而不見其涯也。文辭則菽粟布帛。雖不甚貴而日用不可無也。出處則老死窮巷而枉尺直尋。有所不屑也。自太極性命。至於日用典禮。鑽硏窮覈。倫類相次。日久月深。零碎者融會。矜持者純熟。至於一言一行。絶無安排造作依違苟且之狀。老先生之喪。會葬者數千人。推公及艾山載圭爲相禮。推本制作之源。參酌損益之宜。定爲儀節以行之。持服三年。退老於家懼師道之無傳。舊業之未就。刻苦激勵。不以衰且病有少恕焉。乙酉八月八日。以宿疾終。享年五十一。其友鄭義林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者。惟我(老)先生生其人也。然先生之門。若未有公。則其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不其幾於懷之卷之而無可告語耶。此可謂千載奇遇。曠世神會也。義林自少小。取友視志。非不多矣。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終始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倂臻。而天德王道。有體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起敬。怡然自服者何人。嗚乎。吾於公見之矣。公之道。雖不得行於一時。而聞公之風。讀公之書者。必有知斯言之非阿好。而欲與之心會神交於百世之下矣。昔蔡伯諧以郭有道碑銘爲無愧。余於此傳亦云爾。 쇄소(灑掃)와 정성(定省) 쇄소는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제자(弟子)된 예의를 말하며, 정성은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을 말한다. 이곤수(李崑壽) 1808∼1888. 자가 이회(而晦)이고 호가 심재(心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천품이 단아하고 효도의 마음을 극진히∨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관통하였으며. 홍매산(洪梅山)과 기노사(奇蘆沙)에게 출입하며 종유(從遊)하였다. 저서로는 《심재집(心齋集)》이 있다. 독서 원문의 '행묵(行墨)'은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깊은 이치를 탐구하지 않고 글자만 따라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독서에 대한 겸사이다. 방구석 원문의 '옥루(屋漏)'는 고대에 실내(室內)의 서북쪽 모퉁이에 장막을 치고 신주(神主)를 모시던 곳을 이르는데, 전하여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네가 홀로 방안에 있음을 보니, 여기서도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게 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한다.[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고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인(仁)을 드러내고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인에 드러나며 용에 감추어져, 만물을 고무하되 성인과 함께 근심하지 않으니, 성덕과 대업이 지극하도다.[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것은 인자한 공덕을 발휘하여 만물에 은혜를 입히고, 그 공적을 은밀히 감추어 알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유능한 인재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비유한다. 말……않았으며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상탕(商湯)의 현상(賢相)인 이윤(伊尹)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면서, "의롭지 못하거나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천하를 그에게 녹봉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不顧也, 繫馬千駟, 不視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 곡식이나 포백은 의식(衣食)의 주요 물품으로서, 이것은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전하여 극히 평범하면서도 대단히 유익한 사물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일상생활에 절실한 문장을 의미한다. 한……펴는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도리를 굽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利)로써 말한 것이다. 만일 이로써 말한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펴 이로울 경우에도 그것을 하겠는가?[夫枉尺而直尋者, 以利言也. 如以利, 則枉尋直尺而利, 亦可爲與?]"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상례(相禮) 관례를 올리는 당사자를 인도하여 예를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학문을……공부 박문(博文)은 학문을 널리 하여 사물의 이치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으로 도문학(道問學)에 속하고, 약례(約禮)는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것으로 존덕성(尊德性)에 속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이르기를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하였다. 정신으로 사귀고자 원문의 '신교(神交)'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다만 정신으로 사귄다는 말이다. 채백개(蔡伯諧)가……하였으니 사실에 입각하여 비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 128~169)를 가리킨다. 채옹(蔡邕)이 그의 비문을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란 제목으로 짓고 노식(盧植)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명(碑銘)을 지은 것이 많았는데, 모두 그 덕(德)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오직 이 사람의 비문은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8 高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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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영국】에게 답함 答金箕洪【榮國】 푸른 갈대에 흰 이슬 내리니 치달려 가는 마음 얼마였던가? 뜻밖에 영랑(令郞)110)이 나의 집에 찾아왔고 고마운 편지가 나의 책상을 빛나게 하였으니, 오랜 병으로 겨우 숨이 붙어있어 아직 죽기 전에 벗의 자제와 벗의 편지를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위로와 감사함의 지극함은 말로 형언하지 못할 것이 있네. 몇 년 전부터 체후의 절도가 줄곧 보호되어 정길(貞吉)하고, 큰 절도의 모든 것이 한결같이 여전한 줄 알았으니, 화락한 군자를 신명이 돕는 것은 이치가 응당 이와 같네. 어려움이 많았던 끝에 친구의 좋은 소식은 무엇이 이것보다 좋겠는가? 진실로 지극히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노쇠한 몰골이 끝내 심하여 문을 닫고 칩거한 지 이미 지금 몇 년이 되었네. 황천으로 갈 기일이 조석 사이에 있을 것이니, 어찌 제기하여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드님은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 비록 능히 마음속에 온축한 것을 평온하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기골이 준수하며 의용(儀容)이 단정하고 진중한 것을 보았으니, 덕 있는 그대 집안의 가르치는 법도를 볼 수 있었네. 석과(碩果)111)의 소식은 앞길이 만 리이니, 부디 더욱 의로운 방도로 가리켜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보내준 물품은 진심으로 준 것이니 감사하네. 蒼葮白露。馳懷幾時。謂外令郞臨門。惠幅賁案。誰知積病餘喘。及其未死。而得見故人子弟故人心畫哉。慰感之至。有不可以言諭。承審年歲以來。體候節宣。連護貞吉。大節凡百。一視平昔。神相愷悌。理應如此。多艱之餘。知舊好消息。何踰於此。允叶願聞之至。義林衰相卒甚。杜門貞蟄。已有年于玆矣。黃壤行期。非朝則夕。夫何提喩之有哉。令郞稠撓之中。雖未能穩叩所蘊。而見其氣骨峻茂。儀容端詳。可以見德門敎法矣。碩果消息。前程萬里。幸加義方之敎以待之如何。惠饋心貺。可感。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로 영식(令息), 영윤(令胤)이라고도 한다. 이하는 아드님으로 풀이하였다. 석과(碩果)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서 "하나 남은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아 장차 다시 생겨나게 되는 이치를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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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보112) 【용동】에게 답함 答朴寬甫【容束】 매번 생각건대 우리 관보(寬甫)는 의용(儀容)은 단정하고 순수하며 재성(才性)은 열리고 시원하여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며 경전에 힘쓰고 학문을 쌓았지만, 부족한 점은 단지 격려하여 진작하는 뜻일 뿐이었네. 이것은 전체에 있어서는 한 가지 선이 미비한데 불과하지만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요체와 귀결을 논하자면, 어찌 다만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는 것113)일 뿐이겠는가? 보잘것없는 벗의 마음은 일찍이 이것을 염려하여 갖가지에 대해 어리석은 견해를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네. 경문(景文)이 와서 그대 편지를 받았으니, 뉘우쳐 깨닫고 근심하여 분발하는 뜻이 언사(言辭)에 넘쳐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졌네. 오호라! 이 같이 좋은 자질에 또 이러한 좋은 의사를 가지고 있으니, 이로부터 진취(進就)하는 것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전지(田地)가 이미 마련되었으니 농사짓고 수확하는 것을 바랄 수 있고, 근원이 이미 확립 되었으니 지류는 통달할 수 있네. 다시 바라건대 지금부터 이후로 이 뜻을 굳게 지켜 조금이라도 해이한 때가 없게 하여, 음식과 기거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이 일일이 이 뜻에서 나오도록 하시게. 문목은 조목대로 답하지만 어찌 오류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다시 깨우쳐 주시게.[문]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천하에 성을 말함은 고일 뿐이다.〔天下之言性也 則故而已矣]"라고 한 것은 성(性)을 형용할 수 없어 단지 이미 그러한 사적을 들어서 말한 것이니, 성선(性善)을 말함에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다114)는 뜻과 같은 것입니까?[답] 실로 그러하네.[문] "진심(盡心)"의 '심(心)' 자는 온전히 이(理)의 심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기(理氣)의 심을 가리키는 것입니까?[답] 이 심 자는 이(理)의 양(量)이네. 每念我寬甫儀容端粹。才性開爽。樂善嗜義。劬經績學。而所少者。只是激厲振發底意耳。此在全體。不過爲一善之未備。而論其進修要歸。則奚但大車之無輗。小車之無軌而已哉。區區知舊之心。曾不無以此爲慮。而種種效愚者也。景文來。得承心晝。其悔悟憂憤之溢於言辭。娓娓而不止。嗚乎。以若好資質。又有此好意思。從此進就。豈有涯量。田地旣辨。耕獲可望。根源旣立。枝流可達。更願自今以往。堅守此志。勿使少有解散時節。至於飮食起居凡百云爲。一一自此志中流出也。問目逐條奉答。安知無差謬也。幸再諭之。天下之言性也。則故而已云者。性不得形言。而只擧已然之事迹而言。如道性善。必稱堯舜之意耶。固然。盡心之心字。是全指理之心耶。理氣之心耶。此心字。是理之量。 박관보(朴寬甫) 박용동(朴容東, 1860~?)을 말한다. 자는 관보,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큰 수레에……것 《논어》 〈위정(爲政)〉에 "사람으로서 신의가 없다면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대거에 예가 없거나 소거에 월이 없으면, 어떻게 굴러갈 수가 있겠는가.〔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대거는 짐수레, 소거는 병거(兵車)나 사냥하는 수레를 말한다. 예(輗)는 수레 앞에 뻗친 두 개의 채장〔轅〕 끝에 가로로 붙인 나무인데, 이것을 소의 멍에에 묶어서 끌게 하는 것이고, 월(軏)은 원(轅)의 끝에서 위로 구부러진 것으로, 가로 댄 나무〔橫木〕에 걸어서 말의 목에 얹어 끌게 하는 것이다. 성선(性善)을……일컬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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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운여에게 답함 答魏雲汝 이별한 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니 나뭇가지에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리워하는 슬픈 감회는 그대보다 내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편지를 받았으니 그 지극한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 어른들이 건강하시며 부모님을 모시며 잘 지내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참으로 소식을 듣고 싶었던 제 마음에 합치됩니다. 《주서절요(朱書節要)》는 유가의 참된 진리가 담긴 글【眞詮】로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께서 이른바, "도가 넓고 커서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하는가? 오직 이 책이 입문하는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책이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께서는 이른바 "육경(六經) 이후로 그 뜻이 광대하고 분명한 것은 《주서절요》만한 것이 없다."라고 한 책입니다. 지금 그대의 과업(課業)은 이제 여기에 달려있으니, 힘쓸 곳을 알고 목표로 삼을 곳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밤낮으로 깊이 탐구하면서, 급히 보거나 많이 보기를 바라지 말고 오래도록 보며 그치지 않는다면, 저절로 딱 들어맞아 두루 이해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 유가의 풍습과 선비들의 기풍이 거의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으나, 오랫동안 알고 어울리던 이들을 보니 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 떨쳐 일어나 담당하거나 왕성하게 힘을 쓰는 자가 없어, 평상시 개탄스러워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그대는 타고난 성품과 지향하는 뜻이 사우(士友)의 기대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금 학문에 있어서의 조예도 또 이와 같으니, 벗들의 마음에 어떻게 위로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부지런히 힘써 주십시오.【질문】《대학(大學)》 전문(傳文)의 체재는, 모두 두 가지 일을 아울러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심(正心)'을 말할 때 반드시 '수신(修身)'을 아울러 말했고, 수신을 말할 때 반드시 '제가(齊家)'를 아울러 말했습니다.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6章에서 '성의(誠意)'만 홀로 말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대답】치지(致知)와 성의(誠意)에는 '아는 것【知】'와 '행하는 것【行】'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의는 '다시 자신을 닦는 것【自修】'의 처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연이어 두 조목을 들지 않고, 특별히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誠其意】'라고 말했습니다.【질문】《맹자(孟子)》 「고자(告子)」 편에서 "사람들은 '임금이 똑똑한 체 하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人將曰訑訑, 予旣已知之矣】"라고 한 것에서, 원문(元文)으로 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다.【予旣知之】'라고 한 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아는 체 한다【訑訑】'는 것을 일컫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원 보씨(輔氏)가 '내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 마음에서 싹튼 것이다.'라고 운운한 주석으로 보면, 마치 '잘난 체하는 것【訑訑】'이 자신을 일컫는 말인 듯합니다.【대답】'이이(訑訑)'에 주석에 대한 경원 보씨의 설을 별도의 한 뜻이니, 아마도 본문의 바른 듯은 아닌 듯합니다. 別後荏苒。秋風已在樹矣。悵恨之懷。賢未必非我也。謂外承書。其喜劇可知也。矧又庭候康寧。侍節衛重者乎。允愜區區願聞之情。朱書節要此是儒門眞詮。退溪所謂道之浩浩。何處下手。惟此書可以爲入頭處。蘆沙所謂六經以後。滂沛明白。無如此書。今左右課業。方在於此。可謂知所務而得所歸矣。惟願夙夜沈索。母欲速母欲多。久久不已。自有脗然浹洽處矣。嗚呼。儒風士氣。幾乎掃地。而竊觀知舊遊從。無一人爲之奮然擔當沛然用力者。尋常慨然久矣。惟左右資稟志趨。未嘗不爲士友之寄望。而今日之所造。又如此。朋友之情。安得不慰悅乎。千萬勉勉。大學傳文之體。皆兼言兩事。如言正心。必兼言修身。修身必兼言齊家。以至平天下。無不皆然而獨於六章單言誠意者。何義。致知誠意。有知行之別。而誠意又是自修之首。故不連擧兩條。而特言誠其意。告子篇。人將曰訑訑。予旣已知之矣。以元文看之。則所謂予旣知之者。似人稱訑訑者。然而以輔氏註予旣知之之意。萌于中云云看。則有若訑訑者。自稱焉。訑訑註。輔氏說。自是一義。恐非本文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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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칠설을 황경함에게 보여주다 四七說示黃景涵 칠정(七情)은 공자가 말한 것으로, 《예경(禮經 예기(禮記))》에 드러나 있다.43) 이것은 사람의 정에 이 일곱 가지가 있음을 통틀어 말한 것인데, 맹자는 어찌하여 공자가 이미 완성해서 말한 칠정을 취하지 않고 도리어 이처럼 사단(四端)이라는 이름을 따로 말한 것인가?대체로 칠정은 본디 모두 본성에서 발현되어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기제(機制)가 악으로 흐르기 쉬워 모두 반드시 선하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 그것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때문에 칠정 중에 특별히 모든 사람이 똑같아서 선하지 않을 수 없는 정을 취하여 실증한 것이니, 그 뜻이 지극하다. 이미 선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만을 취한 것이라면 성냄[忿懥]이나 기뻐함[好樂]처럼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이 그 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무슨 해가 되겠는가. 선과 악을 겸하기 때문에 사단(四端)을 포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칠정은 본디 대번에 선과 악을 겸한다고 말할 수 없음에랴. 만약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사단이 칠정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오직 '측은(惻隱)' 두 글자만으로도 천하의 정을 포괄할 수 있다. 만약 그 자체로 나누어 말한다면 사단은 그대로 사단일 뿐이고, 칠정을 포괄할 수 없다. 예컨대, 인(仁)을 넓은 의미로 말하면 본디 사덕(四德 인의예지(仁義禮智))을 겸하지만, 만약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인은 그대로 인이고, 의는 그대로 의일 뿐이니, 어찌 서로 섞일 수 있겠는가.또 참조할 만한 말이 한 가지 있다. 《대학(大學)》의 사유소(四有所)44)와 같은 것도 애초에 사덕에서 발현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을 사단(四端)이라 말하더라도 또한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특별히 '측은' 등의 사단을 말하였고, 《대학》에서는 특별히 '분치(忿懥)' 등의 사유소를 말하였으니, 이처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또 노사(蘆沙)선생이 사단을 근본으로 여긴다고 말한 것은 그것이 발현되어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욕에 의해 뒤섞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일 뿐, 우리 벗의 말처럼 칠정을 지엽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 벗의 말처럼 사단을 근본으로 여기고, 칠정을 지엽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무슨 의리이겠는가. 다시 더욱 생각해 보게나. 七情是孔子之說而著於禮經者也。是統言人之情有此七者。則孟子何不取孔子已成說底七情。而乃別說四端之名如是云耶。蓋七情固皆發於性而無不善者。但其機易流於惡。而不能皆保其必善。則引之不足爲人人性善之證案。故乃於七情之中。特取其人人所同然而不得不善之情以實之。其意至矣。旣取其情之不得不善者。則其情之易流於惡者。如忿懥好樂。謂不在其中。亦何害耶。非謂兼善惡之故而能包四端也。況七情本不可遽以兼善惡言之耶。若專言則不惟四端包七情。惟惻隱二字。足以包天下之情。若就當體上分言。則四端自四端。而不能包七情矣。如仁專言。固該四德。若偏言則仁自仁義自義。胡可相混耶。且有一語可旁照者。如大學四有所。亦未始不發於四德。則謂之四端。亦非過語也。然則孟子特言惻隱等四端。大學特言忿懥等四有所。而若是不同何耶。且蘆沙先生以四端爲根本說者。以其發而直遂。不被物欲混淆云耳。非以七情爲枝葉如吾友言也。若如吾友之言。以四端爲本根。以七情爲枝葉。此何義理也。更加思惟也。 칠정(七情)은……있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무엇을 칠정이라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니,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何謂七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 弗學而能.]"라는 구절이 보인다. 사유소(四有所)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는 네 가지 병통인 '분노[忿懥]', '두려움[恐懼]', '좋아함[好樂]', '근심[憂患]' 을 말하는 것으로, 《대학장구》 전(傳) 7장에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心有所忿,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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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규의 자설 曺元圭字說 원규(元圭)여! 그대는 덕을 옥에 비유함을 아는가?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아름다운 자질이 있다 하더라도 학문을 하지 않고서는 그 자질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위시(衛詩)〉63)에 이르기를, "잘라 놓은 듯하고, 다듬은 듯하며, 쪼아 놓은 듯하고, 간 듯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학문으로 스스로를 닦고, 이미 정밀해졌거든 더욱더 정밀한 경지를 추구함을 말한 것이다.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다른 산의 돌로도 옥을 다듬을 수 있다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음을 움직여 일으키고 성정을 참아서 의로운 행실을 갈고 닦음을 말한 것이다. 〈대아(大雅)〉에 이르기를, "잘 다듬은 문장이요, 금옥 같은 바탕이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도덕이 충실하여 빛나게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제값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출처와 거취를 반드시 그 도로써 함을 말한 것이다.이 몇 가지 말을 살펴보건대, 옥을 덕에 비유할 뿐만 아니라, 덕에 나아가는 방법도 또한 알 수 있으니, 진실로 여기에 종사하여 보배가 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머물러 있는 경우에는 산악(山嶽)을 빛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갈 경우에는 교묘(郊廟)64)에서 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원규를 표덕으로 삼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元圭乎。君知比德於玉乎。學記曰。玉不琢不成器。此言雖有美質。而不學無以成其材。衛詩曰。如切如磋。如琢如磨。此言學問自修。己精而益求其精也。小雅曰。他山之石。可以攻玉。此言動心忍性而砥礪行義也。大雅曰。追琢其章。金玉其相。此言道德充實而光輝宣著也。論語曰。沽之沽之。我則待賈。此言出處去就。必以其道也。觀是數說。不惟比之於德。而造德之方。亦可知矣。苟能從事於此。而無失其爲寶。則止可以輝映山嶽。進可以特達郊廟。此非君表德以元圭者耶。勉之勉之。 위시(衛詩) 위(衛) 나라의 시, 즉 《시경(詩經)》 〈위풍(衛風)〉을 말한다. 교묘(郊廟) 고대 제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장소인 교궁(郊宮)과 선조를 제사 지내는 종묘(宗廟)를 합하여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조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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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세고》 서문 鄭氏世稿序 무릇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 몸은 선조가 남겨준 기(氣)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씨를 뿌리고 계속해서 태어나고 태어났기에 그 소속감이 가장 친근하고, 그 은혜가 가장 절실하다. 그러나 세대가 번갈아 바뀌고, 옛날과 오늘날이 매우 동떨어지면서 그 용모와 기상을 볼 수 없고, 그 음성과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그 움직임과 행위를 알 수 없게 되니, 이처럼 기운이 같고 친근함이 절실했던 사이가 소원해지고 서먹해져서 또 이와 같이 되는 것인가. 추억하고 상상하여 비슷하게나마 마치 조상이 계시는 듯이 여긴다는 뜻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언(遺言)과 유서(遺書) 뿐일 것이다.우리 선세(先世)는 평소 문학(文學)과 벼슬로 조선 중기에 저명하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극도로 쇠락해졌다. 이리저리 떠돌며 외롭고 고달파서 자신을 보존하는 데에 겨를이 없으니, 반남(潘南)의 옛터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에 파묻혔고, 가야(伽倻)의 선롱(先壟 조상의 무덤)은 소슬하게 구슬픈 바람만 불고 있다. 아, 남쪽 월(越) 땅의 새와 북쪽 오랑캐 땅의 말들도 오히려 애틋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이 있는데, 하물며 이런 지경에 이른 사람이야 하늘에 닿는 슬픔과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어떠하겠는가.용모와 음성은 형세상 본디 막연해지겠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문고(文稿)마저도 또한 흩어지고 사라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젊은 시절부터 샅샅이 찾아서 짧은 말이나 글을 만나게 되면 금가루처럼 아끼고 거두어 모아두었다가 이를 합쳐 책으로 만들어 《정씨세고(鄭氏世稿)》라 명명하였다. 그사이에 간혹 삭제해야 한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겠지만, 삭제하여 근거로 삼을 바를 독단적으로 없애는 것보다는 어찌 보존하여 살펴볼 바가 있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선조의 세대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났을 뿐만 아니고, 선조의 고향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을 뿐만이 아니지만, 선조의 기상과 말이 이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말을 완미(玩味)하고 그림을 살펴보면 마치 직접 음성과 용모를 받드는 것처럼 황홀하여 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 우리 선조의 자손들이 이 책을 보고서 슬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사람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대로 전할 덕을 세워 내려주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느끼고, 가문의 운이 쇠락한 지 오래되었음을 슬퍼한다면, 몸을 삼가고 학문에 힘쓰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종족을 보존하여 선조의 일을 계승하여 완성시킬 바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니, 아마 이것을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 夫人之有此身。孰非祖先之遺氣哉。種下種子。接續生生。其屬爲最親。其恩爲最切。然世代迭遷。今古懸隔。其面貌氣象。不可得以見矣。聲音笑語。不可得以聞矣。動靜作爲。不可得以知矣。以若一氣親切之地。而其疎且闊。又如此耶。若其追惟想象。以寓彷彿如在之意。則其惟遺言遺書乎。我先世。素以文學仕宦。著名中葉。而零替至今日而極矣。流離孤苦。不遑自存。潘南遺墟。荒草蕪沒。伽倻先壟。悲風蕭瑟。嗚呼。越鳥胡馬。猶有懷本戀戀之情。況人生到此。而其窮天之感。切骨之痛。爲何如哉。面貌聲音。勢固漠然。而至於世傳文稿。亦且散逸無有存者矣。余自早歲。到底搜覓。遇片言隻字。愛如金屑而收拾之。合以成編。名之曰鄭氏世稿。其間或不無存削之可言。然與其削之而專無所據。曷若存之而俾有所稽耶。去先祖之世。不啻久矣。去先祖之鄕。不啻遠矣。而先祖之氣象言辭。具在於是。玩辭考畵。怳若親承音容。而不知百世之爲曠也。嗚呼。爲吾祖子孫者。覽是書而無悲感之心。則其可謂人情乎。感世德創垂之艱。悲家運零替之久。謹身力學。宜家保族。圖所以繼述成立之地。蓋將有不能已焉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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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오기 竹塢記 죽오(竹塢) 주인은 내가 만년에 사귄 벗이다. 몸을 지켜 자취를 거두어 천진에 맡기고 본분을 미루어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 늙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스스로 재주와 덕을 숨기고, 오직 학문에 힘썼다.하루는 내가 그를 방문하였는데 그 집이 씻은 듯 깨끗하여 하나의 좋은 물건은 없고 오직 몇 그루 대나무만 뜰 사이에 푸른 것을 보았다. 이에 주인이 그 집에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았고, 또 그 학문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진보하고 몸은 때에 맞게 숨긴 것은 또한 애초에 여기에서 터득함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대나무의 무성함을 보고 학문에 절차탁마하는 아름다움을 취하고 대나무의 곧음을 보고 명절(名節)을 힘써 닦는 견고함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고인을 보고 본받아 상수(桑收)의 계획141)과 세한(歲寒)의 계책142)으로 삼아 넉넉하게 여유가 있을 것이다.오호라! 고 처사 간재옹(澗齋翁)143)은 바로 주인옹의 원방(元方)144)이다. 나와 막역한 교분이 있어 세한에도 서로 지키자는 약속을 한 것이 실로 얕지 않았는데, 옹이 죽어버리고 이 약속이 또 그 아우에게 있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고금을 두루 돌아봄에 비탄을 감당할 수 없네. 그러나 오늘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당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니, 우리 두 사람은 어찌 서로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평소 절차탁마하는 공부가 있지 않다면 세한에 힘써 닦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竹塢主人。余晩年友也。守身斂迹。任眞推分。非其力不食。非其義不爲。至於老而益自鞱晦。惟學是力。一日余過之。見其垣宇蕭灑。無一長物。惟有數竽竹。蒼然於庭除間。乃知主人所以名其室者。有在於此。又知其學與年進。身與時晦者。亦未始非有得於此也。瞻彼掎而取學問切磋之美。見其貞而思名節砥礪之固者。想必視法古人而爲桑收之計。歲寒之策。綽有餘地。嗚乎。故處士澗齋翁。卽主人之元方也。與余有莫逆之契。而寄歲寒相守之約。實不淺淺。豈知翁不見留而此約又在於其季難也耶。俯伂今古。不勝悲慨。然今日之不相負約。乃所以爲不負當日之約。吾兩人。盍相共勉焉。非有平日之切磋。無以爲歲寒之砥礪也。 상수(桑收)의 계획 만년에 공적을 거두는 계획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의 장수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처음 싸움에서 대패하고, 얼마 뒤에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에서 깃을 접었으나 나중에는 민지에서 떨쳐 비상하니, '동우에 잃었다가 상유에 수습하였다.'라고 할 만하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동우(東隅)'는 동쪽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인데 젊은 시절을 가리키고,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지는 해의 그림자가 이 나무의 끝에 남아 있다 하여 해가 지는 곳인데 만년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47 馮異列傳》 세한(歲寒)의 계책 세한은 해가 저물어 가는 한겨울의 매운 추위를 이르는 말인데, 노년의 지조를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간재옹(澗齋翁) 이기백(李琪白, 1854~1903)을 말한다. 자는 광빈(光彬), 호는 간재(澗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 권19 〈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에 보인다. 원방(元方) 후한(後漢) 진기(陳紀)의 자이다. 진기와 그의 아우 진심(陳諶) 계방(季方)이 훌륭하여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데서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에서는 형님인 이기백을 빗대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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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탄기 春灘記 동경(東京)149)이 어떤 때이며, 부춘(富春)150)이 어떤 땅인가? 희희양양(熙熙穰穰)151) 왕래하다 안개와 구름이 사라지고 텅 비면 아득히 넓고 큰 바다의 한 알 좁쌀 같고, 산고수장(山高水長)152)하여 위대한 운치와 빼어난 자취가 천고에 빛나는 해와 별과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완연히 마치 운산(雲山)과 강수(江水)의 사이에서 바라보고 대하고 있는 것 같게 한다.호남(湖南)에도 또한 부춘강이 있으니 강가에 고 처사 정공(鄭公)이 장수(莊修)153)하던 곳이다. 공은 광채를 감추고 세상을 만나지 못해 남쪽 고을의 한 선비[布衣]에 불과할 뿐이다.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칭송이 자자하여 춘탄(春灘)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대개 그 지역을 기록한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그 덕을 사모하기 때문이니, 이 강과 이 산은 이미 끝날 기약이 없으니, 공이 사람들에게 사모를 받는 것은 생각건대 또한 엄 선생(嚴先生)154)과 같을 것이다. 저 고거사마(高車駟馬)155)를 많은 사람들이 창야(唱喏)156)하는 것은 바로 철새나 후충(候虫)157)이 한 때 귀를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내 비록 당시에 끊임없이 왕래하지는 못하였지만 만년에 이 강가에 우거하며 정채(精釆)를 상상하고 우러르니, 삼가 이것을 써서 뜻을 드러낸다. 東京何時。富春何地。熙往穰來。烟消雲空。渺然滄海之一粟。而山高水長。偉韻逸躅。日星於千古。得使人人。完若瞻對於雲山江水之間。湖之南。亦有富春江。上有故處士鄭公莊修之地。公潛光蘊輝。不遇於世。不過爲南州之一布衣耳。没世旣久。而稱誦藉藉。至以春灘目焉。蓋志其地。所以思其人。思其人。所以慕其德。此江此山。旣無有了期。則公之所以見慕於人者。想亦與嚴先生同矣。彼高車駟馬。千人唱喏。卽時鳥候虫一時之聒耳。余雖不能源源於當日。而晚寓此江之上。想仰精釆。謹書此而見志焉。 동경(東京) 후한(後漢)의 도성인 낙양(洛陽)으로, 곧 후한을 가리킨다. 부춘(富春) 부춘산(富春山)으로, 후한(後漢) 때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초빙을 물리치고 은거한 산이다. 희희양양(熙熙穰穰) 이익 추구를 위해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사기》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천하가 희희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양양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天下熙熙, 皆爲利來, 天下壤壤, 皆爲利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양(穰)과 양(壤)은 통용이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君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의 우뚝 솟음과 큰 냇물의 흐름에 비유했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 "구름 낀 산 푸르고 푸르듯, 저 강물 곤곤히 흐르고 흐르듯, 선생의 풍도 역시 산고수장이로세.[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장수(莊修)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로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 〈학기편(學記篇)〉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저본의 '장(莊)' 자는 '장(藏)'의 오자로 보인다. 엄 선생(嚴先生)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을 말한다. 자는 자릉(子陵)이다. 광무제(光武帝)가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에 함께 공부하던 사이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성명을 고치고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광무제가 찾아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았다. 《後漢書 逸民列傳 嚴光》 고거사마(高車駟馬) 수레덮개가 높은 수레와 네 마리의 말이란 뜻으로, 부귀한 사람이 타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안(長安)으로 들어가던 중 고향인 성도(成都)를 지나다가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높은 수레와 사마를 타지 못하면 다시는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不乘高車駟馬, 不過此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57 司馬相如傳》 창야(唱喏) 남자가 읍하면서 소리를 내어 공경을 보이는 것이다. 후충(候蟲) 철따라 생기는 벌레를 뜻하는데, 예컨대 봄에는 나비, 여름에는 매미, 가을에는 귀뚜라미 등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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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기 霞山記 하(霞)는 멀다는 뜻이다. 연기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며 아지랑이도 아니고 안개도 아니면서 연기와 구름, 아지랑이와 안개 위에 멀리 솟아 있으니, 이것이 영대(靈臺)167)가 관측하는 것이고 신선이 깃들어 지내는 곳이다. 천하의 산은 연기와 구름, 아지랑이와 안개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없는데 여기에 유독 '하(霞)' 자로 이름하였으니, 그 고상(高爽)하고 청수(淸秀)한 모습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라는 사물은 걷었다 펼치는 것이 일정함이 없고 숨었다 드러나는 것이 방소가 없어 아침저녁으로 모습이 다르고 흐리고 맑음에 따라 기후가 달라 오색의 문양을 토해내고 사시의 경치를 제공함에 자욱하다 흩날려 천만 가지로 변화하지만 산은 실로 여전하다. 대개 지극히 고요하여 바뀌지 않는 체(體)가 그 가운데 보존됨이 있으면 절로 지극히 움직여 쉬지 않는 용(用)이 밖으로 드러남이 있으니, 이것이 천지 만물의 실정이고 학문(學問)과 인도(人道)의 떳떳함이다.나의 벗 김백현(金伯顯) 군은 그 산에 사는 사람으로 은거하며 뜻을 구하였는데, 그 마음 속 생각을 보건대 마음이 초연하여 만 길 멀리 솟은 기상이 있으니, 대개 그 풍기가 도와 드러내 준 것은 우연이 아닌 점이 있다. 그렇다면 동정 체용(動靜體用)의 이치에 또한 묵묵히 이해하여 가만히 수양하는 것이 있는가? 궁구하지 못한 것을 더욱 궁구하고 부지런히 하지 못한 것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본원의 바탕으로 하여금 정정(定靜) 순고(純固)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굽힘이 없게 한다면 사위(事爲)의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장차 천만 가지 변화에 응수해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영대(靈臺)의 상서로움을 드러내고 들어와서는 신선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 같은데 이르러서는 오직 만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霞。遐也。非烟非雲。非雺非霧。而遐擧於烟雲雺霧之上。此靈臺之所俟望。仙翁之所棲息也。天下之山。未有不在於烟雲雺霧之中。而此獨以霞名。其高爽淸秀之容。槩可想也。然霞之爲物。捲舒無常。隱現無方。朝暮殊象。陰睛異候。吐五色之文。供四時之景。氤氳飄颻。千變萬化。而山固自如矣。蓋有至靜不易之體。存乎其中。則自有至動不息之用。著見於外。此天地萬物之情。學問人道之常也。余友金君伯顯。其山人也。隱居求志。而見其懷想。衿抱超然。有遐擧萬丈之像。蓋其風氣助發。有非偶然者耳。然則其於動靜體用之理。亦有所黙會而潛修者否。益窮其所未窮。益謹其所未謹。使本源之地。定靜純固。無一毫撓屈。則其發於事爲之間者。將酬千變應萬化而有餘矣。至若出而呈靈臺之祥。人而同仙翁之樂。則惟在所遇之如何耳。 영대(靈臺) 중국 고대에 제왕(帝王)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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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기 黙庵記 공자께서 위인(爲仁)의 물음169)에 답한 것 가운데 "인자는 그 말하는 것을 참아서 어렵게 한다."170)라고 한 것이 있고,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진심행기(盡心行己)의 질문에 답하기를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하였고,171) 정자(程子)는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는 〈언잠(言箴)〉에서 "말을 낼 때에 조급함과 경망함을 금하여야 중심이 이에 고요하고 전일해 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마음을 보존하고 덕에 나아가는 요체는 '묵(黙)'이라는 한 글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진실로 능히 침묵하여 스스로 지켜 조급하고 경망한 실수가 없으면 존양(存養)이 순수하고 견고하여 대본(大本)이 확립될 것이다. 학문 사변(學問思辨)과 성찰 천리(省察踐履)의 갖가지 공부가 어찌 일찍이 이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옛날 말에 이른바 "연못처럼 고요히 있는 것이 도리어 우레 소리를 낸다."라는 것172)이 이것이다.묵암(黙庵) 주인 김찬배(金燦培)가 90리 길[三舍]을 산 넘고 물 건너 가천(佳川)의 내 집을 방문하여 인하여 한마디 말을 청하기에 감히 과루(寡陋)하다고 스스로 도외시 할 수 없어 그저 들은 것을 외워 나를 멀리하지 않은 뜻에 보답할 뿐이다. 孔子答爲仁之有曰。仁者。其言也訒。司馬溫公答盡心行己之問有曰。自不妄語始。程子非禮勿言箴有曰。發禁躁妄。內斯静專。蓋存心進德之要。莫有先於黙之一字矣。苟能沈黙自持。無操妄之失。則存養純固。而大本立矣。學問思辨。省察踐履。種種功夫。何嘗不從此中出耶。古語所謂淵黙却雷聲是也。黙庵主人金燦培。跋涉三舍。過我佳川敝廬。因有一言之請。不敢以寡陋自外。聊誦所聞。以塞其不遐之意云爾。 위인(爲仁)의 물음 원문의 '答爲仁之'는'答爲仁之問'의 오류로 보고 풀이하였다. 인자(仁者)는……한다 사마우(司馬牛)가 인에 대해 질문한 것에 답한 말로,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하였고 《심경부주》 권2 〈성의장(誠意章)〉에 "유 충정공[유안세(劉安世)]이 사마 온공을 뵙고는 마음을 다하고 몸을 행하는 요점 중에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묻자, 공은 '성일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이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劉忠定公見溫公, 問盡心行己之要, 可以終身行之者, 公曰其誠乎! 又問行之何先? 公曰自不妄語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옛날……것 《장자》 〈재유(在宥)〉에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며, 못처럼 고요히 있다가 우레처럼 큰 소리를 낸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라고 한 것을 변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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