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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독재기 耕讀齋記 일찍이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가 지은 〈동생행(蕫生行)〉89)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삼가 생각건대, 그의 지극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반드시 적지 않을 것으로 상상되는데 끊임없이 칭찬하며 말하는 것은 겨우 아침에 밭을 갈고 저녁에 글을 읽었다는 몇 건의 일 뿐이다.나무를 깎아 정전(井田)을 구획한 때로부터 여덟 식구든 다섯 식구든 어느 집이 밭에서 힘들여 일한 집이 아니겠으며,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사를 대신한 때로부터 상상(上庠 태학(太學))이든 하상(下庠 소학(小學))이든 어느 사람이 학교에 나아가 공부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만일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미치지 못하고 형편상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선비가 혹 밭갈이를 병행하기도 하였고, 농부가 혹 독서를 겸하는 것도 항상 밥을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으니, 어찌 동생(董生)의 제일가는 도가 될 수 있겠는가.내가 이것에 대해 일찍이 구구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문자는 우활하고 졸렬한데 일에 한가롭지 못하여 이따금 상충되기도 하였고, 지각과 근력이 매우 피로한 상태로 망망하게 집에 돌아오면 이길 수 없는 노곤함에 혼미함과 졸음이 교대로 침범하여 비록 정신을 차려 깨고자 하더라도 곧바로 다시 전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곤 하였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몸이 이미 일을 시작하게 되면 마음도 함께 갈팡질팡 왔다 갔다 하면서 뜻이 날로 빼앗기게 되니, 비록 여력이 있다 하더라도 책을 마주할 생각이 들지 않고 곧바로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게 된다. 이것이 어찌 나만 그렇겠는가.무릇 사람의 힘은 두 가지 일을 편안하게 수행하기 어렵고,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생각에 작용하기 어려워 이쪽 일에 편안하면 저쪽 일에 방해가 되고, 저쪽에 마음이 작용하면 이쪽에 마음이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의 이른바 주경야독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폐단이 전혀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반드시 독실하고 강인하여 우뚝하게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는 연후에야 한 몸의 기운이 뜻을 따르지 않음이 없게 되어 약했던 것은 강해지고, 혼미했던 것은 명철해지면서 갈팡질팡하던 것들이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다. 이에 문공(文公)이 일컬었던 뜻과 동생(蕫生)이 성취했던 행실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나의 벗 정경지(鄭敬之)는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별호)의 남쪽에 은거하며 그 집의 편액을 '경독(耕讀)'이라 하였으니, 실제로 행했던 일로 말미암아 마음을 세우고 덕에 나아감에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경지는 어려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롭다고 일컬어졌고, 늙어서는 학문을 좋아한다고 알려졌으며, 안으로는 아내와 자식들이 아침저녁으로 근심할 것이 없었고, 밖으로는 벗들과 모여 강학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니, 대체로 동생(董生)이 성취한 바와 깊이 들어맞는 바가 있고, 어리석은 우리들처럼 명분만 따르고 실상이 없이 옛 습관대로 세상일에 빠져 지내는 사람과 비견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인하여 더욱 힘써서 마침내 원대한 뜻을 이룬다면 이릉의 계산(溪山)이 회수(淮水)의 동백산(桐柏山)90)이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자자하게 회자(膾炙)될 줄 어찌 알겠는가. 嘗讀韓昌黎所撰蕫生行。竊意其至行高節。想必不少。而所以娓娓稱道。乃在於朝耕夜讀數件事而已。自剡木畫井。八口五口。孰非力田之家。自造書代繩。上庠下庠。孰非就學之人。至若事力不逮。勢難專業。則士或倂耕。農或兼讀。亦是恒恭飯。奚足爲董生第一道哉。余於此。曾有所區區經試者矣。文字迂拙。不閑事役。而種種撞着。知力甚勞。茫茫歸家。不勝困倒。昏睡交侵。雖欲回醒。旋復如故。豈惟此也。身旣執役。心亦與俱。憧憧往來。志日見奪。雖有餘力。無意對冊。便成坐馳。豈惟余也。凡人力難以兩便。人心難以二用。便於此則妨於彼。用於彼則奪於此。世之所謂耕讀者。安知保無此弊也。必須篤實剛毅。有卓然不可奪之志。然後一身之氣。莫不從令。而弱者可强。昏者可明。憧憧者可以妥帖矣。於是乎知文公所稱之意。董生所造之行。不偶爾之。余友鄭敬之。隱於爾陵之南。扁其堂曰耕讀。因其行事之實。而立心進德。無有切於此者。敬之幼以孝悌稱。老而好學聞。內無妻子朝夕之憂。外有朋友講聚之樂。盖董生所造。深有所契。而非如愚輩徇名無實。因循汨没之比也。若因此加勉。卒究遠大。則安知爾陵溪山不爲淮水桐柏而藉藉於天下耶。 동생행(蕫生行) 한유(韓愈)의 시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을 말한다. 동생(董生)은 당(唐)나라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으로,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주경야독하면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니, 그의 벗 한유가 이 시를 지어서 그를 칭찬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회수(淮水)의 동백산(桐柏山) 동소남(董召南)이 은거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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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화대기 望華臺記 사람은 지극히 정든 곳에 대해 그곳을 떠나게 되면 그리워함이 없을 수 없고, 그리워하면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 중에 언덕에 올라 부모님이 계신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고94), 높은 산에 올라 군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며, 개암나무와 감초를 노래하며 미인(美人)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니95), 이것은 인정상 그칠 수 없는 것이다.운암(雲巖) 어른은 사문(斯文)의 훌륭한 유학자이자 성대한 조정의 저명한 관리로서 명성과 덕망을 한 몸에 받아 조정과 재야에서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는데, 시사(時事)가 일변하자 홀연히 수레를 돌려 만 길 높이 흩날리는 속세 밖으로 멀리 떠나 10 묘(畝)의 농토 사이에서 한가로이 소요하며 편안히 지냈다. 하지만, 오직 진심어린 단심(丹心)으로 그리워하며 해[임금]를 향한 정성스런 마음만은 막을 수 없었기에 마침내 집 옆에 있는 산 정상의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에 하나의 대(臺)를 축조하고 한가한 날에 올라 서울을 우러러 바라보는 장소로 삼았다.아, 문정(文正)은 강호로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을 걱정하였고96), 횡거(橫渠)는 명아주와 콩잎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였으니97), 이는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동서양의 나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에 대한 생각98)을 그만둘 수 없는 지금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알지 못하겠지만, 어른께서 대에 올라 서울을 향해 바라보는 날에 과연 어떠한 감회에 젖어 들었을까? 천고토록 다 없어지지 않을 슬픔에 반드시 노래하고 통곡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아, 서산(西山)99)은 어디이며, 동해(東海)100)는 어느 곳인가? 구름이 깔리고 달이 밝은 산중의 망화대(望華臺)의 한 구역을 어느 누가 오늘날의 서산이 아니며, 동해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入於至情之地。離之則不能無思焉。思之則不能無望焉。古人有陟岵屺而望父母。陟崔嵬而望君子。歌榛苓而望美人。此人情之所不能已也。雲巖丈人。以斯文偉儒。熙朝名宦。聲望期注。朝野拭目。及其時事一變。而幡然回轍。乃遠引遐舉於萬丈軟塵之外。而棲遲偃仰於十畝農圃之間也。惟是赤際丹心戀戀向日之誠。遏住不得。遂就舍傍山頂可舒遠眺處。占築一臺。以爲間日登臨瞻望京華之所。嗚乎。文正江湖之憂。橫渠藜藿之戀。此在平時而猶然。況今東塵西氛。瀰漫天地。而匪風下泉之思。有不可已。未知丈人臨望之日。果作如何懷緖也。其千古不盡之悲。必有非歌哭可足者。噫。西山何地。東海何處。雲月山中一區望華臺。誰謂非今日之西山東海也耶。 언덕에…… 있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로, 《시경》 〈척호(陟岵)〉에 "저 산에 올라서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저 민둥산에 올라서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陟彼岵兮, 瞻望父兮.……陟彼屺兮, 瞻望母兮.]"라고 하였다. 개암나무와……있었으니 미인(美人)은 훌륭한 임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생각하는가, 저 미인은 서방 사람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문정(文正)은……걱정하였고 문정은 북송 초기의 명재상이자 문장가였던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에 처하면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라는 말이 보인다. 《范文正公集 卷7 岳陽樓記》 횡거(橫渠)는……그리워하였으니 횡거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그는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안석(王安石)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며 자신을 등용하고자 했던 신종(神宗)을 염려하였다. 비풍(匪風)과……생각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은 《시경》 〈회풍(檜風)〉과 〈조풍(曹風)〉의 편명으로, 모두 주(周)나라의 왕업이 쇠망해 가는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외세로 인해 점차 쇠망해가는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염려를 말한다. 서산(西山)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은거했던 수양산(首陽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으려 할 적에 불렀다는 채미가(采薇歌)〉에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었으면서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구나. 신농과 우순과 하우가 문득 없어졌으니 나는 누구를 의지해서 돌아가야 하나. 아아, 가야지. 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兮. 以暴易暴兮, 不知其非兮.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兮. 於嗟徂兮, 命之衰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동해(東海) 전국 시대 제(齊)나라  의사(義士)였던 노중련(魯仲連)이 절개를 지켜 빠져 죽고자 했던 동해(東海)를 가리키는 듯하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고서 위(魏)나라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제국(帝國)으로 섬긴다면 포위를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은 저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천자가 된다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은 되지 못하겠다고 한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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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조공 행장 竹溪曺公行狀 공의 휘는 덕기(德琪), 자는 기지(器之), 호는 죽계(竹溪)이다. 조씨(曺氏)의 선계는 창녕(昌寧)에서 나왔으니, 신라 태사(太師)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그의 시조이다. 증조는 효제(孝悌)가 있어 효행으로 재랑(齋郞)43)에 제수되었고, 조부 억원(億元)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아버지 여홍(汝弘)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평택 임씨(澤林氏) 억문(億文)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 정미년(1547) 7월 13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스승에게 나아가44) 배우기 시작하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13세에 《논어》를 읽다가 자하(子夏)가 질문한 '교소천혜(巧笑倩兮)'에 이르러45)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또한 근본에 힘쓴다는 뜻이니, 배워서 본말과 선후를 알지 못한다면 마치 기름덩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힘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46) 라고 하고는, 마침내 마음을 잡아 함양(涵養)하고 근본을 바로잡아 근원을 맑게 하는 경지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 약관에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에 통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47)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절차탁마하여 날로 더욱 발전하니 선생이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줌이 매우 컸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조촐한 음식이나마 한껏 기쁘게 해 드렸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아우 덕련(德璉)과 함께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형제가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어48) 낮과 밤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종족과 붕우에게는 각각 그에 맞는 방도를 다하여 대하였다. 부춘산(富春山) 속에다 오두막집을 지어 세 오솔길49)에 꽃과 대나무를 심어놓고 사방 벽에 도서를 두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휘장을 드리우고서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니 이웃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매번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할 때에는 복건(幅巾)과 망혜(芒鞋) 차림으로 수림(水林)과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하면서 화려한 영화(榮華)를 부러워하거나 외롭고 쓸쓸함을 서글퍼할 줄 몰랐다. 유선생이 일찍이 절구(시) 한 수를 붙여 말하기를,은둔해서는 도연명과 사영운50)의 정취처럼 하고 (隱同陶謝趣)마음으로는 정자와 주자의 글을 배운다 (心學程朱書)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51)이 본도(本道)의 절도사로 있으면서 순시하다가 본읍(本邑)에 왔을 적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 만나보고 탄복하기를, "직접 보니 들은 것보다 훨씬 뛰어나도다."라고 하고서 예물을 보내왔다. 공이 일찍이 그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네가 귀인(貴人)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말을 신중히 하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도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고 학문을 진보시키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선조 때, 향도천(鄕道薦)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인조 갑자년(1624) 5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금오산(金鰲山)52)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부장(部將) 탁(倬)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명서(命瑞)는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딸은 진사 박립(朴立)에게 출가하였으며, 증손 이하로 매우 번창하였다. 숙종 때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아, 재주는 세상에 쓰이기에 충분하였는데도,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문장에 힘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학문은 다른 사람정도를 따라가기에 충분하였는데도,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급급해하지 않았으니, 공의 숭상하는 뜻이 무엇이며,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과 이름의 드러남과 가려짐으로 공을 논할 바가 아니다. 후손 석주(錫柱)가 그 집안에 전하는 문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의 행장을 청하니, 나는 행장을 지을만한 적임자가 아님으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전(家傳)을 바탕으로 대략 윤색을 가하였다. 公諱德琪。字器之。號竹溪。曺氏系出昌寧。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其鼻祖。曾祖孝悌。以孝行除齋郞。祖億元直長。考汝弘軍資監正贈吏曹參判。妣平澤林氏億文女。公以明宗丁未七月十三日生。天稟挺邁。不類凡兒。就傅上學。文理日進。十三讀論語。至子夏問巧笑倩兮。沈思良久曰。此亦務本之意也。學而不知本末先後。則如畵脂鏤氷。勞而無功。遂於操存涵養端本淸源之地。尤致力焉。弱冠通詩書六藝。聲聞藹然。廢擧業。遊於眉庵柳先生之門。薰陶切磋。日益展拓。先生稱許甚重。事父母。怡色婉容。菽水盡歡。居喪廬墓。與弟德璉友愛甚篤。長枕大被。日夕不離。宗族朋友。待之各盡其方。結廬富春山中。三徑花竹。四壁圖書杜門下帷。窮經硏理。隣里罕見其面。每良辰和煦。幅巾芒鞋。逍遙於水林泉石之間。不知芬華之爲可艶。而踽凉之爲可傷也。柳先生嘗寄一絶詩有曰。隱同陶謝趣。心學程朱書。愚伏鄭先生按節本道。巡到本邑。舍車徒入見。歎曰。所見浮於所聞。因致幣物。公嘗戒其子曰。吾願汝爲好人。不願汝爲貴人也。又曰。愼言非惟爲遠禍之道。存心進學。實權輿於此。可不勉哉。宣廟朝。以鄕道薦。除寢郞。仁祖甲子五月八日圽。享年七十八。葬于金鰲山甲坐之原。配南平文氏部將倬女。婦德純備。墓合窆。一男一女。男命瑞漢城左尹。女進士朴立。孫曾以下甚蕃衍。肅廟朝贈工曹參議。嗚乎。才足以售世而不屑屑於沽衒之文。學足以及人。而不汲汲於干進之路。未知公之所尙者何志。所樂者何事。位之軒輊。名之顯晦。非所以論公也。後孫錫柱持其家傳文字。請余狀其行。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家傳而略加潤色云爾。 재랑(齋郞) 재랑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맡은 하급 관리로, 위(魏)나라 때 처음 설치하였는데 태상(太常)에 속하였고, 당나라와 송나라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묘(廟), 사(社), 전(殿), 궁(宮), 능(陵), 원(園) 따위의 참봉을 달리 이르기도 한다. 스승에게 나아가 원문의 '취부(就傅)'는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인 10세를 말한다.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여덟 살이 되면 문호를 출입하고 자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반드시 장자(長者)보다 뒤에 하여 비로소 겸양(謙讓)을 가르친다.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바깥에서 거처하고 잠잔다." 하였다. 자하(子夏)가……이르러 자하(子夏)가 공자(孔子)에게 "옛 시에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진실한 자질이 있은 뒤에 예의와 문학을 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論語 八佾》 이……것이다 얼음을 조각한다는 것은 곧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덩이에다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다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사돈간이며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긴……덮어 형제간에 우애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서》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에, "현종이 태자로 있을 적에 큰 이불과 긴 베개를 만들어 여러 아우들과 함께 썼다[玄宗爲太子, 嘗製大衾長枕, 將與諸王共之.]."라는 고사가 있다. 세 오솔길 원문의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본디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친구인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서로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가리키는데,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도연명과 사영운 원문의 '도사(陶謝)'는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병칭이다. 두보(杜甫)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난 것을 보고 지은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어찌하면 시상(詩想)이 도연명, 사영운 같은 이를 얻어서 그로 하여금 시 짓게 하고 함께 노닐꼬.[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 정경세(鄭經世, 1563~1633)로 우복은 그의 호이고, 자는 경임(景任), 본관은 진주(晉州), 초시(初諡)는 문숙(文肅), 개시(改諡)는 문장(文莊)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1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검열 등을 거쳐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尙州)의 인사들이 의병을 규합하고 정경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과 맞닥뜨리게 되어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해 겨울에는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호서(湖西) 지역으로 가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임진왜란 후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는 용암산(聳岩山, 547m)의 옛 이름이다.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솟을 용(聳)과 바위 암(岩)자인데, 원래는 산위의 샘에 금자라[金鰲]가 있다고 하여 금오산(金鰲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산 정상에 용암이 솟아 오르듯 솟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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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 정공 행장 晩翠軒鄭公行狀 만취헌(晩翠軒) 처사 정공(鄭公)은 무신년(1908)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53) 한 달 뒤 거주지 가까운 땅 운주동(雲柱洞)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순진(淳珍)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내가 사는 봉양(鳳陽)의 누추한 집으로 찾아와서 사적(事蹟)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아, 처사는 바로 나의 50년 지기 옛 친구이며, 양세(兩世)에 걸쳐 종유하고 일심으로 의기투합하였으니 어찌 차마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공은 체구가 장대(長大)하고 훌륭한 용모에 수염도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준걸스럽고 박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성품과 기질은 온순하고 화락하였으며, 행동거지는 안정되고 자상하였다. 선행을 즐겨하고 의를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온화하고 자상하여 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드니 자상하고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가 풍부하였지만 시류를 붙좇고 사정(私情)을 따라 요행으로 벼슬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과업(科業)이 사람을 그르치는 것을 개탄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밤낮으로 두루 열람하여 의취(義趣)를 힘써 궁구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장(文章)에 발현되고 행위에 드러난 것이 늙을수록 더욱 치밀하여 찬란하게 문채가 났으니, 학문을 함에 법도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어버이를 섬길 때에 살아계실 적에는 그 기쁨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기일(忌日)54)에 이르러서는 어렴풋이 뵙는 듯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55) 마치 살아계신 듯이 모시는 정성56)을 다하였다. 그 아우와의 우애가 순수하고 독실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지냈는데,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고아가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기르면서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아이였을 적에, 노상에서 한 노인이 땔나무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그 노인을 불쌍히 여겨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갈증을 풀도록 도와주었으며, 엄동설한에 한 일가 사람이 지나가자 그 입고 있는 것이 매우 얇은 것을 보고 한 벌의 옷을 내어 그에게 준 적이 있었다. 중년에 서울에 갈 때, 동행 중 한 사람이 병이 매우 심하였는데, 동반한 여러 사람은 모두 가버리고 공만이 홀로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강도(江都)에 변란57)이 일어나 풍문이 매우 흉흉하자, 사람들이 일찍 돌아가라고 권유하여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말게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났을 때 서로 구휼함은 평상시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천 리 밖에서 위급한 상황에 닥쳤다고 버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차도가 있어 함께 돌아왔다. 하루는 한 여자가 이웃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양가의 딸로 흉년에 구걸하다가 남에게 팔려 종이 되었다는 것을 물어서 알고는 이에 산 사람에게 권유하여 마침내 속량(贖良)58)하여 돌려보냈다. 흉년을 만나면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그 남은 것을 친척과 오랜 친구 중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며, 시절마다 안부를 묻는 것과 길흉사나 경조사에도 은혜가 두루 미치고 일찍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효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들으면 공은 그를 불러다가 타일렀는데, 말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곡하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깨닫고는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변란59)에 비적의 무리가 크게 일어나자 의리(義理)와 화복(禍福)을 진달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타이르고 이해시키니 고을이 이에 힘입어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은 자가 매우 많았다. 문규(門規)를 세워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였고, 동약(洞約)60)을 만들어 예속의 사귐을 밝혔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시문(時文)61)을 지어 과거를 쫓지 못하게 하고 항상 최면암(崔勉庵)62)과 기송사(奇松沙),63) 정애산(鄭艾山)64)의 문하에서 종유하게 하였다. 불량한 사람과 접촉하지 않았고, 분잡하고 화려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빛나는 광채를 간직한 채 산수 좋은 고을에서 유유자적 지내니 그 세속을 벗어난 뛰어난 운취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할 만하게 하였다. 공은 하동(河東)사람으로 휘는 기현(奇鉉), 자는 치홍(致弘)이다. 고조 인철(仁哲)은 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수국(遂國)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조부 권열(權烈)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효성으로 정려(旌閭)의 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재일(在馹)이며 어머니는 밀성 박씨(密城朴氏) 명원(命源)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갑진년(1844, 헌종10) 2월 19일에 바로 공이 태어났다. 16세에 공주 이씨(公州李氏) 의무(宜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65), 아들 순진(淳珍)과 문일수(文日洙)에게 출가한 딸은 이씨의 소생(李氏)이며, 순학(淳學)、순룡(淳龍)、순경(淳璟)、순호(淳鎬)와 문병우(文秉禹)에게 출가한 딸은 진씨(陳氏)의 소생이다. 아 나와 공은 평생 교분을 맺어 늘그막에도 곁에서 서로 지켜보면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천고의 사람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물을 닦고 붓을 적셔 삼가 그 행실을 기술하여 돌려보낸다. 晩翠軒處士鄭公。以戊申二月二十五日觀化。踰月而葬于所居近地雲柱洞戌坐之原。遺胤淳珍奉家狀。過余鳳陽敝廬。謁不朽之文。嗚乎。處士是余五十年舊要。兩世遊從。一心密勿。豈忍以非其人辭。公身長體碩。好容顔美鬚髥。見之可知其爲峻茂朴實人也。性氣溫良。擧止安詳。樂善嗜義。愛人喜施。溫溫諄諄。和氣薰人。可知其爲慈詳愷悌人也。少業功令。文詞贍富。而未嘗趨時徇私爲僥倖干進計。晩年慨歎科業之誤人。遂將心經近思錄等書。晝夜閱覽。務窮義趣。是以其發於文詞。著於施爲者。老益邃密。斐然有章。可知其爲學問規矩人也。其事親也。生而盡其歡。死而盡其哀。至於夫日之臨。僾然愾然以盡如在之誠。與其弟友愛純篤。長枕大被。老而不替。撫育孤姪。無間已出。兒時路上見一老人負薪而行。悶其老。出囊金以資其解渴。冬雪中。一族人過之。見其所着甚薄。出一襲衣與之。中年赴京。同行一人。得疾甚劇。諸伴皆去。公獨晝夜救護。居未幾日。江都變起。風聞甚駭。人勸之早歸。毋貽親憂。答曰。疾病相恤。平時猶然。況在千里之外而可以危急相棄乎。月餘見差同還。一日有一女子逃匿隣家。問知其以良家女。凶年行乞。因以見賣爲婢於人。乃諭所買者。遂得贖良而還之。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周親戚知舊之貧者。時節寒暄吉凶慶弔恩意周遍未嘗有闕有人以不孝聞公招諭之。言極懇惻。其人感悟。卒爲孝子。甲午之變。匪類大熾。爲陳義理禍福。面面諭解。鄕里賴不染邪者甚多。立門規。講敦睦之義。設洞約明禮俗之交。敎子不令作時文覓科第。常令遊從於崔勉庵奇松沙鄭艾山之門。身不接浮浪之人。足不到紛華之地。潛光蘊輝。婆娑邱林。其偉韻逸趣。令人可敬。公河東人。諱奇鉉。字致弘。高祖仁哲贈參判。曾祖遂國五衛將。祖權烈通政。以孝命旌。考在馹妣密城朴氏命源女。憲宗甲辰二月十九日。卽公之寅降也。十六委禽于公州李氏宜茂女。男淳珍。女文日洙李氏出。淳學淳龍淳璟淳鎬。女文秉禹。陳氏出也。嗚乎。余與公爲平生之契。而到老相守。益切煦濡之情。誰知今日而奄作千古人耶。抆淚泚筆。謹述其行以還之。 세상을 떠났다 원문의 '관화(觀化)'는 만물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에 "사람의 생명은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은 주야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生者假借也. 假之而生, 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而化及我, 我又何惡焉?]"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기일(忌日) 원문의 '부일(夫日)'은 그날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기일(忌日)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에게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으니, 기일을 이른다. 기일에는 일상적인 업무를 보지 않으니, 이것은 불길한 날이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날〔夫日〕에는 내 마음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서이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보인다. 어렴풋……듯 《예기》〈제의(祭義)〉에, "제사하는 날에 묘실(廟室)에 들어가서 어렴풋하여 반드시 조상이 신위에 계심을 뵙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면서 주선하여 방문을 나올 때에 숙연하여 반드시 조상이 거동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고 방문을 나와 들을 때에 반드시 조상이 크게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마치……정성 선조의 영혼이 와 계신 듯이 정성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선조의 제사를 지내실 적에는 선조가 계신 듯이 하셨으며, 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는 말이 있다. 강도(江都)에 변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많은 사람들이 순절한 것을 말한다. 강도는 강화(江華)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속량(贖良)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매매되고 사역(使役)되던 비복(婢僕)ㆍ백정(白丁)ㆍ무격(巫覡)ㆍ배우(俳優)ㆍ창녀(娼女) 따위의 종들이 대가(代價)를 바치고 노비(奴婢)의 신분을 면제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갑오년의 변란 1894년(고종31)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통상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고 한다. 이후 민씨(閔氏) 정권은 붕괴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하여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게 된다. 이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유생(儒生)들은 갑오변란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적 개화 정권의 개혁 정책을 민족 존망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까지 전개하였다.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3권,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1989》 동약(洞約) 조선 중기(16세기) 이후 지방의 양반들이 신분질서의 유지와 결속을 위하여 만든 동단위 자치조직으로 동계(洞契)·동의(洞議)·동안(洞案)이라고도 한다. 향약이 국가 차원에서 장려되었지만, 향촌 전체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데는 비효율적이었으므로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진 동에 거주하는 양반들이 결속하여 스스로의 관심과 이해를 반영시킨 동약을 실시했다고 한다. 시문(時文) 고문(古文)에 상대되는 말로 당시에 유행하는 문장을 가리키며, 과거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문체의 글을 뜻한다.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이 있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장가들었는데 원문의 '위금(委禽)'은 혼례(婚禮)에서 납채(納采)할 때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올리던 데에서 유래하여, 장가드는 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원년 기사에 "춘추 시대 정나라 서오범의 여동생이 아름다웠다. 공손초가 그녀에게 장가들려 했는데, 공손흑이 또 심부름꾼을 보내 억지로 기러기를 맡겼다.[鄭徐吾犯之妹美, 公孫楚聘之矣, 公孫黑又使强委禽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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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 처사 이공 행장 澗齋處士李公行狀 공의 휘는 기백(琪白), 자는 광빈(光斌), 호는 간재(澗齋)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전주(全州)에서 나왔으며 신라 시대에 사공(司空)을 지낸 휘 한(翰)이 시조(始祖)이다. 사공 이하 21대는 조정(朝廷) 왕실의 계통과 같으며 완풍군(完豐君) 휘 원계(元桂)에 이르러 처음으로 별자(別子)32)를 계승한 대종(大宗)이 되었다. 완풍군은 천우(天祐)33)를 낳았고, 천우는 관직이 병조 판서에 이르러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도공(襄度公)이다. 양도공은 굉(宏)을 낳았으며 굉은 관직이 부총제사(副摠制使)에 이르렀고 부총제사는 명인(明仁)을 낳았다. 명인은 주부(主簿)를 지냈고 담양(潭陽)의 풍서(豐墅)로 남하하여 살았다. 주부는 효상(孝常)을 낳았고 효상은 부사맹(副司猛)을 지냈으며 담양에서 영광(靈光)으로 이주하였다. 사맹(司猛)부터 8세가 지나 휘 상후(相厚)에 이르러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는데, 상후는 공의 6대조이다. 증조부는 이덕(以德)이고 조부는 윤택(潤宅)이다. 고(考)는 문계(文繼)이고 비(妣)는 화순 최씨(和順崔氏) 봉권(鳳權)의 딸이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10월 16일에 간리(澗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절조(節操)가 남달라 스스럼없이 굴거나 다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침착하고 차분하여 어른스러운 예의와 법도를 갖추었다. 스승에게 나아가34) 공부하게 되자 날마다 과정(課程)을 지켜 소소한 일로 그만두거나 거르는 경우가 없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매우 근실하여 뜻을 받들고 물품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상례(喪禮)를 봉행하는 데도 애통한 마음을 다하여 상례의 내용과 형식에 유감이 없었다. 기일(忌日)이 돌아와 산재(散齋)35)와 치재(致齋)36)를 올리면 몸을 깨끗이 하고 모든 제구(祭具)를 주관하며 밤 깊도록 단정하게 앉아 제사가 행해지기를 기다렸다.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과 슬퍼하는 안색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할 만하였다. 형제가 즐겁게 지내 화목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의지할 곳 없는 친척은 거두어 양육하기도 하고 도와주어 혼사를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향당(鄕黨)의 오랜 벗에게는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새해 첫날에 문안하는 일을 힘닿는 만큼 예를 갖추어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 외가의 선조를 섬기는 것도 집안 선조를 섬기듯 하여 기일이 되면 반드시 가서 참여하였다. 외조카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자 매우 극진히 보살피고 도와주었으며, 가업(家業)을 남에게 빼앗기자 공이 관에 알리어 억울함을 바로잡아 편안히 살도록 해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난 때는 자제와 족친들에게 사교(邪敎)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산속 골짜기로 난을 피했을 때 갑자기 적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니더냐." 하고는 즉시 소 1척(隻)을 주면서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난이 평정된 뒤 누군가가 소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나 공은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공은 평소에 담박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었다. 일찍이 아우 상백(常白)과 산에 올라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우가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참된 생각, 고상한 정취가 절로 마음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객이 찾아왔으나 안부를 묻는 것 외에는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객이 떠나자 아우가 말하기를, "객을 대접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냉랭하십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서권(書卷)을 마주하고 고인(古人)과 얘기하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금인(今人)과 얘기를 하겠는가." 하였다. 상백(常白)이 일찍이 덕성(德性)을 수양하는 요체를 묻자, 공이 즉시 주자(朱子)의 〈경제잠(敬齋箴)〉과 범공(范公)37)의 〈좌우계(座右戒)〉를 써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앉아 있는 자리에 걸어두고 항상 부사(父師)가 엄숙하게 내려다보듯 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누군가가 "부모가 안 계시니 효도하고자 하여도 미치지 못한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계실 때처럼 섬기고 안 계실 때에도 계실 때처럼 섬기며 몸을 상하지 않고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모두 효이다. 어찌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어린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집안사람이 공에게 꾸짖게 했더니 공은 아이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면서 슬프고 참담한 기색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부모에게 불효하였다. 불효자의 자식이 또 불효를 저질렀으니, 이것은 예전에 불효한 죄에 대한 보답이다. 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벌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물러나 자신을 매질하고 스스로 새롭게 변하였다. "먹는 것은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38)", "일은 원칙 없이 무턱대고 따르지 않고 물건은 구차하게 취하지 않는다[事不苟從 物不苟取]",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행동을 규범에 맞도록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39)", "신묘하게 밝히고 묵묵히 이룬다[神而明之 黙而成之]40)" 등을 벽에 적어놓고 항상 자신을 견주어 살폈다. 아들 건신(建身)이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41)를 읽자, 공이 말하기를, "격언(格言), 요어(要語)가 이것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너는 이 시 1편을 평생의 표준으로 삼아 오늘 아버지가 너에게 경계하는 것처럼 여기거라."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맺은 사우(士友)들을 재숙(齋塾)으로 불러 모아 봄가을로 모여 강론을 펼치는 규약을 정하였다. 또 이웃 마을의 6, 7동지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30일 동안 학습한 내용을 강론하였다. 아마도 늙어서 학업을 그만두는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때문에 식견은 늙어갈수록 더욱 심오해졌고 지조는 늙어갈수록 더욱 단단해져서 함께 강론을 펼친 사람들이 모두 "볼 때마다 진보가 있는 사람은 간재(澗齋)뿐이다."라고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몸은 요인(要人)과 접촉하지 않고 발길은 요문(要門)에 이르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경학(經學)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며 물아(物我)와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인간 세상에 다시 이것과 바꿀 수 있는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그 맑은 운치와 아득한 자취는 참으로 지금 시대를 살았던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42)라고 이를 만하다. 계묘년(1903, 광무7) 2월 23일 집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향리(鄕里)의 인사(人士), 부녀자, 어린아이, 노복들이 탄식하면서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서로 알게 된 지가 20년에 가깝다. 그동안 서신을 주고받고 서로를 따르며 함께 유람하며 흉금을 털어놓는 일이 끊이지 않았지만, 일찍이 한 마디의 망령된 발언이나 한 번의 망령된 행동을 보지 못하였다. 병신년(1896, 건양1) 봄 공이 거의소(擧義所)로 나를 만나러 왔다. 인하여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시사(時事)에 어두워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경거망동하는가. 하지만 평소에 서로 가깝게 지냈으니 어찌 위난 때문에 서로를 따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원수에게 함께 대적하고 같이 죽는 것은 내가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으니, 이 일로 공을 알 수 있다. 다만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골몰하는 각종 공부가 근거할만한 바탕이 있어서 장차 얼마나 높고 큰 영역으로 나아갈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이 그의 장수에 인색하고 귀신이 그의 나이를 빼앗아가서 사문(斯文)과 사림(斯林)이 이렇듯 갑자기 복을 잃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비통하다! 배(配)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문호(文鎬)의 딸이며 모두 2남을 두었다. 장남 건신(建信)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를 아내로 맞았고 차남은 아직 어리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 건신(建信)이 숙부에게 부탁하여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장례를 치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묘갈(墓碣)이나 묘지(墓誌) 등 제반 문자(文字)는 반드시 먼저 행장(行狀)을 갖춘 다음 비로소 이를 근거로 지을 수 있습니다. 선인을 잘 알고 선인의 행장(行狀)을 지을 수 있는 분은 장인(丈人)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생각하니, 실제적인 덕을 갖췄건만 세상에 드날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벗의 책임이다. 하물며 죽어서 후세에 완전히 사라지게 하겠는가. 이에 건신의 청에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琪白。字光斌。號澗齋。李氏系出全州。以新羅司空諱翰爲始祖。司空以下二十一世。與國朝璿系同。至完豐君諱元桂。始爲繼別之祖。完豐生天祐。官兵曹判書。封完山君。諡襄度公。襄度生宏官副摠制副摠制。生明仁官主簿。南下潭陽豐墅居焉。主簿生孝常官副司猛。自潭移靈光。自司猛入世而至諱相厚。移綾州。是公六世祖也。曾祖以德。祖潤宅。考文繼。妣和順崔氏鳳權女。哲宗甲寅十月十六日。生公于澗里居第。幼有異操。不好戲狎。不好爭競。凝然有成人儀度。就傅上學。日遵課程。未嘗以小小事務。有所廢闕。事親甚謹。志物俱至。執喪致哀。情文無憾。遇忌諱之辰。致散齋潔。躬執凡具。竟夕危坐。以待行祭。其嚴敬之意。哀戚之色。可以感動傍人。兄弟湛樂。未嘗失和。親戚之無依者。或收而養育之。或助而昏娶之。至於鄕黨知舊。吉凶之問。歲時之存。隨力致禮。未有闕焉。事外先如己先。忌日必往參。表侄幼孤。撫恤甚至。家業見失於人。公爲之聞官辨枉。俾安其生甲午之亂。戒子弟族戚。勿染邪敎。逃難山谷。忽遇賊。公曰。汝等所欲非此物耶。卽以牛隻與之。少無吝色。亂平後。人有告牛在處者。公笑而不應。平居恬黙寡言。嘗與弟常白。登山遊賞。過半日而無一言。弟問其故。公曰。眞想逸趣。自在其心言語何爲。一日客來。寒喧外。不交一語。良久客去。弟曰。待客何其冷耶。公曰。對卷方與古人言。何暇與今人言。常白嘗問自修之要。公卽書朱子敬齋箴及范公座右戒以與之。因曰。揭之座側。常如父師之儼臨。則不爲無助也。人或言父母不在。欲孝靡及。公曰。事死如生。事亡如存。不虧其體。不辱其身。皆是孝也。奚謂靡及耶。一日兒子輩有爭端。家人令責之。公招置於前。不誚讓。有悲慙之色。人問其故。曰吾曾不孝於親。不孝之子。又爲不孝。此所以報前日不孝之罪也。於渠何誅。兒輩退而自撾。而自新焉。書食無求飽。居無求安。事不苟從。物不苟取。敬以直內。義以方外。神而明之。黙而成之。等語於壁上。常自鏡攷。子建身信讀范魯公戒子詩。公曰。格言要語。此外何有。汝以此詩一通。看作平生弦韋。如乃父今日之戒汝也。中年以來。遊從士友。排置齋塾。定爲春秋講聚之規。又與隣閈六七同志。一月一聚。相講三十日所課之書。蓋慮其老而廢業也。是以其見識老而益精。持守老而益固。至使同講之人皆曰。每見每有進益。惟澗齋是已云。身不接要人。足不到要門。勤耕服穡以糊其口。劬經力學以求其志。于于洋洋於物我形骸之表。而不知人間世復有何樂可以易此也。其淸韻遐躅。信可謂南州今日之高士也。癸卯二月二十三日。考終于家。鄕里人士。婦孺輿儓。莫不嗟惜。至有涕下者。嗚乎。余與公相知近二十年矣。其間往復從逐。游衍傾倒。非不源源。而未嘗見其有一言妄發一事妄行。丙申春。公來見我於擧義所。因責之曰。子何昧時而輕擧至此耶。然居常相從者。豈以危難而有不相從之理。同仇一死。吾所甘心云。此可以見公矣。但存養窮索。種種功夫。方有田地可據。而將趨乎崇深遠大之域。有不可量。誰知天嗇其壽。鬼奪其年。使斯文斯林遽此無祿耶。痛哉痛哉。配光山李氏文鎬女。擧二男。長建信娶濟州梁氏。次幼。公歿未葬。建信屬其叔父來曰。營葬有日矣。墓碣墓誌諸般文字。必先有行狀而後。乃可以據此而作。知先人熟而可以狀先人行者。其非丈人乎。因念人有實德而不揚於世者。此朋友之責也。況死而使之泯然於後乎。玆於建信之請。有不敢多辭云爾。 별자(別子) 제후의 중자(衆子)를 장자(長子)와 구별하여 별자라고 한다. 제후의 중자는 새로운 대종(大宗)의 시조가 된다. 천우(天祐) 이천우(李天祐, 1354~1417)이다.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 1330∼?)의 둘째 아들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산재(散齋) 제사하기 전 외출은 하지만 말타기, 음악, 조문(弔問) 등을 하지 않음으로써 몸가짐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치재(致齋) 제사를 올리는 대상에 대하여 거처하던 곳, 말씀하던 모습, 즐기던 것, 지향하던 것, 좋아하던 음식 등 생전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범공(范公) 송(宋)나라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아들인 범충(范沖, 1067~1141)이다. 〈좌우계(座右戒)〉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먹는 …… 않는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경(敬)으로 …… 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이다. 신묘하게 …… 이룬다 《주역》 〈계사전(繫辭傳) 상〉에 나오는 말이다.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 범노공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노국공(魯國公) 범질(范質)을 가리킨다. 그 조카 고(杲)가 승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시를 지어 주며 조급히 승진하려는 것을 경계시켰던 것을 말한다. 시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로 불렸다. 이를 원용하여 간재(澗齋) 공을 서치에 빗댄 것이다. 《後漢書 卷83 徐穉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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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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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기은 정공 행장 箕隱鄭公行狀 유생 정유흠(鄭瑜欽)은 나에게 배운 지 여러 해인데, 그 사이에 선대인(先大人,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 상기를 마친 뒤에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가장의 기록에 의하면, 공의 휘는 덕주(德周), 자는 화앙(華仰), 호는 기은(箕隱)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온화하고 화락한 풍모가 있고 출중(出衆)하고 탁월한 기개가 있었으니, 그 기국과 인물을 품평하는 것이, 대개 지금처럼 쇠퇴한 세상의 인물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아가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가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66)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모에게 양육을 받으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마음이 편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이때부터 살림살이가 힘입은 바가 있어서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들을 모두 넉넉히 갖추어 드렸다. 5명의 형제 중에 공은 둘째였는데, 장가들고 나자 어버이의 명에 따라 분가하였으나, 조석으로 맛있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는 일과 나고 들며 부지런히 집안일을 맡아 다스리는 일을 분가하였다는 이유로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해서는 반드시 성심을 다하고 반드시 미덥게 하였으며,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는 마음에 유감이 없도록 하였는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는67) 예절은 예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백씨(伯氏)를 부친과 같이 섬겼으며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오직 명(命)대로 하였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의 아들 및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려서 공이 곁에서 도와주었으니, 지극한 정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한결같이 공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차례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 집안 생계를 꾸리게 했는데,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고남아있는 자제들을 어루만져 보살피기를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제기(祭器)와 제전(祭田)을 갖추고 노비를 사서 종가(宗家)에 바치고, 조상의 산소에 아직 표지(表誌)가 없는 경우에는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으며, 아직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경우는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글방을 건립하여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한 되 한 말의 혜택도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고, 절신(節辰, 명절날)을 맞아서는 고기반찬을 보낼 때에 연로한 이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을 차리는 초기에는 거친 옷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빈틈없이 준비하여68) 부지런히 일하였다.69) 중년에 이르러서는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조금 평안해지자 그 학문을 일찍 포기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자식 가르치기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다. 글방을 열어 책을 마련하고 어진 스승을 택하여 두어 그 과정과 절도를 엄격하게 조리를 두었다. 소년 중에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보면 더욱더 사랑하고 중히 여겨 반드시 불러서 자제들과 함께 종유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 중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폐백을 드리고 가서 수학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기록된 내용의 대략이다.내가 사우(士友)를 따라 공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의 가장과 당일(當日)에 들은 말이 다른 말이 없으니, 그 어버이를 속이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내가 일찍이 공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병세가 이미 극심한 상태에서 병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켜 간절하게 죽은 뒤를 부탁하였으니, 오직 그 자제를 잘 인도하여 불의(不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효제(孝弟)로 입신(立身)하며 근검(勤儉)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선(善)을 좋아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지만, 평생 쌓아온 덕행에 대한 보답은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공(公)의 후록(後祿)은 이로부터 장차 크게 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정씨(鄭氏)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충장공(忠莊公) 휘 분(苯)은 그의 중계(中系) 현조(顯祖)이시다. 증조는 택의(宅宜), 조부는 인모(仁謨), 아버지는 재충(載忠)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어머니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정채(挺采)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憲宗) 정미(1847, 헌종13)에 태어나 금상(今上, 고종) 갑진년(1904) 4월 22일에 졸하였다. 부인은 수원 백씨(水原白氏) 낙홍(樂弘)의 따님으로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글을 요청한 것이다. 딸은 광산(光山) 김세현(金世鉉), 광산 김영대(金永台), 남평(南平) 문수엽(文洙燁)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손자는 해성(海成), 해봉(海琫), 해현(海顯)이다. 공의 무덤은 본방(本坊) 서당동(書堂洞) 선조의 묘 오른쪽 산등성이 모좌(某坐)의 언덕에 있다. 鄭生瑜欽。從余遊有年。間遭其先大人喪。服闋而奉家狀來。謁不朽之文。按狀。公諱德周。字華仰。號箕隱。體相碩大容止端嚴。溫溫有愷悌之風。軒軒有倜儻之氣。其器局品第。蓋非衰世人也。幼而就塾。與兄連業。稍長。見家甚艱。甘旨不充。慨然曰。爲人子者。不能忠養父母。而反被養於父母。何忍一日安心。遂竭力服勞。暫不暇逸。自是生理有賴。而便身畢給。兄弟五人。公居第二。及其有室。以親命分炊。而朝夕甘腝之洪。出入幹理之勤。不以分炊而有少異。遭內外艱。必誠必信。時月之制。無憾於心。而擗踊之節。有過於禮。事伯氏如嚴父。進退惟命。兄歿。兄子及諸弟皆幼。公左右扶持。至情懇惻。一如所生。待其長。次第昏娶。俾立家計。次第歿。哀痛殊甚。撫恤遺孤亦如之。具祭器備祭田買奴婢。納于宗家。先世墳塋。有未表誌者。伐石以竪之。有未設享者。置田以祭之。營構齋塾。爲村子弟肄業之所。當飢歲。升斗之惠。遍及於貧乏。遇節辰。饌肉之饋。不遺於高年。設産之初。菲食惡衣。綢繆拮据。至於中身。事力稍䌥。嘗恨早失其學。敎子甚篤。開塾儲書。擇置賢師。課程節度。嚴有條緖。見少年有文行者。甚加愛重。必招延之。使與子弟遊。有老成可師者。爲贄幣。使之往從焉。此皆狀辭大略也。余從士友。聞公之名久矣。而今日之狀與當日之聞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余嘗一過於公。見病已劇矣。力疾而作。眷眷身後之託。惟是善道其子弟。使不入於不義。以忠信存心。以孝弟立身。以勤儉成家。樂善嗜義。賙窮恤匱。平生積累。不食其報。余謂公之後祿。從此而將有大來之日。鄭氏貫晉陽。忠莊公諱苯。其中系顯祖也。曾祖宅宜。祖仁謨。考載忠。世有隱德。妣珍原朴氏挺采女。公以憲宗丁未生。今上甲辰四月二十二日卒。配水原白氏樂弘女。生一男四女。男謁文者。女光山金世鉉光山金永台南平文洙燁。次幼。孫海成海琫海顯。公墓在本坊書堂洞先隴右岡某坐原。 충심으로 봉양 원문의 '충양(忠養)'은 충심으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효자가 노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그 뜻을 어기지 않으며,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해 드리고 그 잠자리를 편안하게 해 드리며, 그 음식을 가지고 충심으로 봉양해야 한다.[孝子之養老也, 樂其心, 不違其志, 樂其耳目, 安其寢處, 以其飮食忠養之.]"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가슴을……구르는 원문의 '벽용(擗踊)'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극도로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효경(孝經)》 〈상친(喪親)〉에 "벽용하며 곡읍을 하고, 슬퍼하며 보내 드린다.[擗踊哭泣, 哀而送之.]"라는 말이 나온다. 빈틈없이 준비하여 원문의 '주무(綢繆)'는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는 뜻으로, 빈틈없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미리 준비해서 환란을 예방한다는 말이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아직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너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혹시라도 감히 우리 새들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였다 원문의 '길거(拮据)'는 《모전(毛傳)》에서 "길거는 극국(撠挶)이다." 하였는데, 공씨(孔氏)의 소(疏)에 "극(撠)은 가진다[持]는 것이다." 하였다. 극국은 '손톱으로 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길거는 둥지를 만들 때 손과 입을 함께 움직이며 바삐 일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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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유인70) 함양 박씨 행장 孺人咸陽朴氏行狀 조익제(趙翼濟) 군은 착한 선비이다. 나와 만년에 이웃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따르고 쫒은 지 10여년이 되었다. 하루는 선유인(先孺人)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이 대대로 아름다운 덕을 지녔던 것은 진실로 이미 익히 들었으나, 다만 사람이 미천하고 학문이 얕아 받들어 감당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네. 그렇지만 두터운 인연을 헤아려 볼 때 또 완강히 사양할 수 없겠네."라고 하였다. 유인(孺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상서공(尙書公) 휘 선(善)이 시조(始祖)이며, 영암군(靈巖君) 휘 통(通)이 그 중조(中祖)이다. 증조는 휘 종윤(宗允), 조부는 휘 경은(景殷), 아버지는 휘 원(源)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참봉 기대(箕大)의 따님이다. 순조 경진년(1820, 순조20) 11월 3일에 유인은 영암(靈巖) 송정리(松亭里)에서 태어났다. 유인 박씨는 정숙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장난하는 모습이 없었고, 놀러 다니는 습관도 없었으며,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때에는 순종하며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규방(閨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하였다.71) 그 몸가짐이 엄격함과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과 일을 다스리는 부지런함은 제칙(提勅)하지 않아도 한결같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16세에 고(故) 학생 조용희(趙鏞熙) 공에게 시집갔는데, 조공은 함안(咸安)의 저명한 종족이었다. 문에 들어가 시부모를 알현하자 친척 내외가 그 덕용(德容)과 예모(禮貌)를 보고는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달라서 현부(賢婦)를 얻었다고 하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잘 때까지 집안일을 살펴 일이 크든 작든 반드시 여쭈어 행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드리고 문안드리는 의식과 겨울과 여름에 온청(溫淸)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삼가서 시종 변함이 없었다. 시부모가 병이 있으면 낮에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아 지극히 근심하다가 혹 음식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시어머니 조씨(曺氏)가 몹시 늙고 병들어 사지를 가누지 못한 지 6년이나 되었는데, 유인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눕고 일어나는 것을 손수 부축하였고, 먹고 마시는 것을 손수 떠 주었으며, 머리가 가려우면 손수 빗질해주었고, 대소변을 흘리면 손수 닦아주었다. 병상을 부지런히 비질하고 병석에 입었던 옷을 자주 빨아 병실을 항상 청결하게 하니 사람들이 악취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씨가 매번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내가 근근이 목숨을 이어 죽지 않고 6년이나 된 것은 모두 새 며느리의 은덕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을 섬김에 예의가 있어 사사로이 지낼 때의 안일한 뜻을 경계하고 함부로 친압하는 태도를 끊어 공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번번이 너그러운 말로 규간(規諫)하였고, 성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차분하게 깨우쳐 주고 오해를 풀었으며, 독서하고 근칙하도록 권하여 유업(儒業)을 실추시키지 않게 하였다. 동서를 대함에 항상 굶주리고 추위에 떨까 염려하고 그 노고를 근심하여 음식과 의복은 반드시 균일하게 하였고, 재산과 기물은 반드시 빌려주었으며, 곡직(曲直)을 서로 따지지 않았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서로 겨루지 않았으므로 매우 화락하여 누구도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친족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때에 따라 안부를 묻고 일에 따라 돌보아 주며 은혜와 의리가 있어 각각 그 마음을 얻었다. 태만한 기운을 몸에 베풀지 않았고 이치에 어긋난 비루한 소리를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화려한 물건은 방에 들이지 않았고 무격(巫覡) 같은 무리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항상 어진 사우(師友)를 따라 배우게 하였는데, 예가 아닌 곳과 의롭지 못한 사람은 금하여 가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며 항상 말하기를,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는 연연해 할 것이 없고, 높고 화려한 관직은 부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인가(人家)에 좋은 자손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자기를 꾸짖는 데에 두텁고 남을 꾸짖는 데에 박하며, 스스로를 받드는 것에 검소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에 넉넉하였다. 따라서 한 집안의 안에 은의(恩誼)가 넘쳐흐르고 윤리가 정연하여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일이 거행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식자(識者)들이 옛날의 정녀(貞女) 숙원(淑媛)에 견주었다. 임진년 6월 17일에 세상을 떠나 부춘면(富春面) 담덕동(澹德洞) 뒤 기슭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익제(翼濟), 차남은 순제(順濟)이며 딸은 능성(綾城, 능주) 구치복(具致福)과 광산(光山)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내룡(來龍)과 내구(來龜)이며, 둘째 집의 손자는 내주(來柱)이다. 증손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규방의 안에 숨겨진 덕과 그윽한 행실이 상세하지 않은 듯하여도 밖에 드러난 것은 마치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열 눈이 주시하는 것처럼 밝을 뿐만 아니다. 시부모님은 그 효성을 칭찬하고, 친척은 그 자애로움을 칭찬하며, 자손은 그 가르침을 준수하고, 이웃은 그 뜻에 감동받아 고을의 오랜 벗과 원근의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씨(趙氏)를 덕문법가(德門法家)라고 일컫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72)"라고 하였으니, 나는 조씨가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임을 알겠다. 趙君翼濟善士也。余晩接隣閈。日月從逐。爲十餘年。日以其先孺人遺狀。有立言不朽之託。余曰。君家世德之美。固已稔聞。但人微學淺。有不足以承堪。而揆以事契之重。又不可以牢讓。孺人姓朴氏。貫咸陽。尙書公諱善。始祖。靈巖君諱通。其中祖也。曾祖諱宗允。祖諱景殷。考諱源。妣光山金氏參奉箕大女。純廟庚辰十一月三日。孺人生于靈巖松亭里。貞靜柔嘉。自幼無戲嬉之容。無遊走之習。侍側聽順。未有違忤。稍長不出閨旁。夜行以火。其持身之嚴。養親之誠。執業之勤。不費提勅而一如成人。十六歸于故學生趙公諱鏞熙。趙卽咸安著族也。及入門拜舅姑。親戚內外。見其德容禮貌。異於凡常。莫不賀其得賢婦。夙興夜寐以視宮事。事無大小。必稟而行。朝夕滫瀡之供。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必誠必謹。終始無替。舅姑有疾。晝不就席。夜不就枕。極其致憂。或至廢食。姑曺氏極老極病。四體不收。至爲六年。孺人晝宵在側。臥起則手扶之。飮啖則手匙之。頭癢則手梳之。遺矢則手除之。勤掃病榻。頻濯病衣。使病室常常潔淨。人不見其有臭惡之氣。曺氏每對人言曰。吾延命不死而至於六年之久者。皆新婦之賜也。事君子有禮。戒燕私之意。絶褻狎之態。敬之如賓。有過則輒寬裕以規諫之。有怒則必從容以諭解之。勸令讀書飭身。不墜儒業。待娣姒。常念其飢寒。悶其勞苦。飮食衣服必均一。財産器用必假貸。不以曲直相稽。不以利害相較。怡怡湛樂。了無間言。至於族戚隣里。隨時問訊。隨事扶恤。有恩有義。各得其心。怠慢之氣。不設於身。鄙俚之聲。不出於口。華麗之物。不入於房。巫覡之類。不納於家。敎子孫必以義方。常令從賢師友遊。至於非禮之地。非義之人。禁不得使之相接焉。常曰。良田美土。不足爲戀。嵬官華職。不足爲羨。但見人家有好子孫。是吾大願也。厚於責已而薄於責人。儉於自奉而豐於施人。一門之內。恩誼融融。倫理井井。敎無不行。事無不擧。識者以古之貞女淑媛擬之。壬辰六月十七日卒。葬富春面澹德洞後麓乾坐原。生二男二女。男長翼濟。次順濟女。適綾城具致福光山李承奎。長房孫來龍來龜。次房孫來柱。曾孫幼不錄。嗚乎。閨房之內。潛德幽行。宜若不詳而其著於外者。不啻若十手十目之爲昭昭也。舅姑稱其孝。親戚稱其慈。子孫遵其敎。隣保感其義。以至鄕邦知舊。遠近人士。無不稱趙氏爲德門法家。詩曰釐以女士。從以孫子。余知趙氏之必有後也。 유인(孺人) 9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품계이다. 밤에 횃불을 사용하였다 《소학》 〈명륜〉에 "그러므로 여자는 규문 안에서 날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백 리 먼 길의 초상에 달려가지 않는다.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없고 행실을 독단적으로 이룸이 없어서, 참여하여 알게 한 뒤에 행동하고 증험이 있은 뒤에 말한다. 낮에는 뜰에 나다니지 않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한다. 이는 부덕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是故女及日乎閨門之内, 不百里而犇喪, 事無擅爲, 行無獨成, 叅知而後動, 可驗而後言, 晝不遊庭, 夜行以火, 所以正婦徳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너에게……하리라 《시경》 〈기취(旣醉)〉에, "그 따름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其僕維何. 釐以女士. 釐以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여사는 여자 중에 선비의 행실이 있는 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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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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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문공 행장 學生文公行狀 우리 고을에 있는 선배 중에 박아하고 후덕하며 자상하고 온화한 덕이 있어 이구동성으로 고을에서 탄복하고 군자와 장자(長子)로 지목한 사람이 있으니 학생(學生) 문공(文公)이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치욱(致郁)이며 자는 우서(禹瑞)로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의 후손이다. 증조는 휘 세동(世東), 조부는 휘 봉주(鳳周)이다. 아버지는 휘 환상(煥相)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동우(東宇)의 따님으로, 순조 기묘년(1819, 순조19) 1월 1일에 능주의 입교리(笠橋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자태와 용모는 단아하고 품성은 화락하였으며, 마음을 보존함은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하였다. 그 말은 어눌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듯하였고, 그 행동은 움츠러들어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73) 부모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였고, 형제를 대함에 우애로써 하였으며, 친척을 대함에 화목함으로 하였고, 붕우를 대함에 충성스럽게 하였으므로 가정에서부터 미루어 고을에까지 모두 기뻐하며 각각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남을 이기거나 해치는 잔인한 생각을 일찍이 마음에 품지 않았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시비(是非)와 훼예(毁譽)에 관한 소리를 한 번도 귀에 거치게 하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여 남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고 사물을 구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굶주리고 목이 마른 듯 급급하게 하였다. 초년에 과거공부를 하여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중년에는 향시에 합격하여 예부시(禮部試)74)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가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선발될 수 있다고 하니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권세가에 빌붙기를 힘쓰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인하여 과거공부를 그만 두었다. 공의 맏아들75) 송규(頌奎)76)가 훌륭한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사람들이 권하여 시문(時文)을 지으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자식을 가르침에 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게다가 사람의 귀함은 명(命)에 달려 있어서 구한다 한들 보장할 수 없는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마침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계(家計)77)를 세우게 하였다. 만년에 가족을 데리고 화학산(華鶴山)78) 안에 들어가 교유(交遊)하는 것을 사절하고 더욱 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79) 초의(草衣)를 입고 갈건(葛巾)을 쓴 채80) 밤낮으로 흰 구름과 붉은 등라의 사이에서 노닐며 시를 읊조렸다. 나와 송규(頌奎)는 학문의 교분을 정하고 종유(從遊)하며 왕복한 지 전후 몇 년 동안 거의 빠뜨린 달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찾아뵙고 문안하는 것이 빈번하였다. 경진년(1880, 고종17) 봄에는 공이 묵계리(墨溪里)로 선인(先人)을 찾아와 두 집안의 자식들이 종유하는 정의(情誼)를 말씀하셨는데, 종일토록 시립(侍立)하면서 감격하여 잊지 못할 말씀을 많이 하셨다. 4년 뒤에 선인이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갑신년(1884, 고종21) 12월 10일에 공이 또 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아, 바람에 나무는 고요할 수 없고81) 음성과 용모는 날이 갈수록 멀어지며, 추위와 더위가 바뀌고 서리와 이슬이 변한 지 이제 몇 년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옛 학업은 그대로 실추되어 당일 기대하였던 만에 하나의 뜻에 부응할 수 없지만 오직 송규만은 재주가 민첩하고 뜻이 확고하며 나아가기만 하고 멈추지 않아,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양가(兩家) 돌아가신 부모의 바람이 전혀 아무런 결과가 없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송규가 또 병을 앓고 있는데, 여러 해 조리하면서 아직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조옹(造翁)의 뜻이 장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는 송규가 편지를 보내 나에게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불초가 무탈할 때에 일찍이 선인의 행장을 써두지 못하였는데, 지금 병이 이미 심해져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천고의 한이 될 듯합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불초를 위하여 한 때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마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아, 고로 여생(孤露餘生, 어려서 부모 잃은 것)이 예전에 교유하였으니 그 사모하는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진실로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며, 더구나 송규가 병에 걸려 간절히 부탁하니 더욱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감히 대강을 차례대로 적어 훗날에 입언(立言) 하는 자로 하여금 취할 바가 있게 하였다. 공은 제주 양씨(濟州梁氏) 상기(相基)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송규와 언규(彦奎)이며, 딸은 고홍진(高弘鎭), 이승옥(李承玉), 민모(閔某), 윤의호(尹懿浩)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공보다 7년 앞서 정축년(1877, 고종14)에 세상을 떠나 고을의 동산(東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무덤은 화학산(華鶴山) 동쪽 기슭 술좌(戌坐)의 언덕에 있다. 在吾鄕先輩。有博雅長厚慈詳愷悌之德。翕然爲鄕里所服。而無不以君子長者目之者。學生文公其人也。公諱致郁。字禹瑞。江城君諱益漸后。曾祖諱世東。祖諱鳳周。考諱煥相。妣達城徐氏東宇女以。純廟己卯正月一日。生公于綾之笠橋里。公姿相端雅。稟性樂易。存心質慤。持身謹勅。其言訥訥若不出口。其行縮縮若不勝衣。事父母以孝。處兄弟以愛。待族戚以和。接朋友以忠。自家庭推至鄕閭。無不驩然各得其心。忮克殘忍。未嘗一萌於心。俚俗鄙倍。未嘗一出於口。是非毁譽。未嘗一經於耳。至於樂善好義急人濟物。則不顧前後。汲汲若飢渴然。初業功令。爲親應擧。中年參鄕解。赴禮部。有人勸以往見要人。可得選。公正色曰。富貴在天。豈趨附可辦耶。終不應親歿之後。因廢擧業公主器頌奎有才性過人人勸以做時文公曰吾敎子不願爲貴人。只要作好人。況人貴有命。求未可必耶。遂令從學於蘆沙奇先生之門。專意學問以立家計。晩年挈家入華鶴山中。謝絶交遊。益自鞱晦。草衣葛巾。日夕嘯咏於白雲紅蘿之間。義林與頌奎。定爲學問之交。從遊往復。前後幾年。殆無闕月。是以拜床承候爲頻頻矣。歲庚辰春。公訪先人于墨溪里。爲道兩家子從遊之誼。侍立終日。多有感鏤不忘之語。後四年先人棄世翌年甲申十二月十日。公又繼逝。嗚乎。風樹莫靜。音容日遠。寒暑霜露之變。今幾年矣。宿心舊業。因仍失墜。無以副當日萬一之志。而惟頌奎材敏志確。進且不住。私竊以爲兩家先父母之望。不至專歸無有。頌奎且病矣。積年調理。尙不告效。未知造翁之意。且將何居耶。一日頌奎走書要余。且曰。不肖無恙時未曾爲先人下狀德之筆。今病已劇矣。若遂溘然。恐爲千古之恨。願吾子爲不肖。勿吝一時之勞。嗚乎。孤露餘生。於先行交遊。其所以思慕感惻。固非常人之比。而況頌奎之臨病懇託。尤有所不忍辭者。玆敢序次梗槪。使後日立言者。有所取焉。公娶濟州梁氏相基女。擧二男四女。男頌奎彦奎。女高弘鎭李承玉閔某尹懿浩。夫人先公七年丁丑卒。葬于州之東山丙坐原。公墓在華鶴山東麓戌坐原。 몸은……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문자는 그 몸이 겸퇴하여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으며, 그 말이 어눌하여 마치 그 입에서 제대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文子其中退然如不勝衣, 其言吶吶然如不出諸其口.]"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공손하고 겸양하였다는 말이다. 예부시(禮部試) 과거의 본고시로 958년(광종9)부터 실시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대과(大科)와 연결된다. 예부가 주관하므로 예부시(禮部試)라고 하며, 예위(禮闈)·춘관시(春官試)·춘위(春闈)·동당시(東堂試)로도 불렸다. 합격자는 급제(及第)·등제(登第)·중제(中第)·중과(中科) 등으로 표현된다. 예부시 과목은 제술업(製述業)·명경업(明經業)이 양대업(兩大業)을 이루었는데, 제술업이 가장 중시되었다. 맏아들 원문의 '주기(主器)'는 종묘(宗廟)의 제기(祭器)를 주관할 적장자로 맏아들을 말한다. 송규(頌奎) 문송규(文頌奎, 1859~1888)이다. 개항기 화순 출신의 학자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계원(啓元), 호는 구암(龜巖)·면수재(勉修齋)이다.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으며, 하락이수(河洛理數, 개개인의 품성과 운명에 대한 연구)와 천문(天文)의 물상을 확연하게 융회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의 요체를 깨닫고, 심성과 이기의 묘리를 세밀하게 분석하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가계(家計) 학문이나 공부를 말한다. 주희가 말하기를 "사서는 혼잡하고 경서는 냉담하니, 후생들은 마음과 뜻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외면으로 향하지 않는 이가 적다.[史書鬧熱, 經書冷淡, 後生心志未定, 少有不偏向外去者.]"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答呂伯恭》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모름지기 심신을 수렴하여 냉담한 가계(家計)로써 고되고 힘든 공부를 해야 한다. 이에 연찬하고 되씹되 오래도록 그만두지 않아야 바야흐로 그 맛이 좋은 줄을 참으로 알아 힘을 얻게 될 것이다.[惟學者, 先須收斂身心, 以冷淡家計, 作辛苦工夫. 於此鑽硏咀嚼, 久久不輟, 方始眞知其味之可悅, 而得其力也.]"라고 하였다. 《退溪集 卷19 答黃仲擧 別紙》 화학산(華鶴山)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와 청풍면 청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세가 학이 날개를 펼쳐놓은 듯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 원문의 '도회(韜晦)'는 재주나 지혜, 학문, 자취 등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 초의(草衣)를……채 초의는 은자가 입는 옷이고, 갈건(葛巾)은 처사나 은사(隱士)들이 쓰던 두건을 말한다. 바람에……없고 원문의 '풍수(風樹)'는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구오자(丘吾子)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묻자,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요, 다시 뵐 수 없는 것은 어버이이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來者年也, 不可再見者親也.]"라고 대답하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致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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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경헌 이군 행장 敬軒李君行狀 군(君)의 성은 이(李), 휘는 인환(仁煥), 자는 덕재(德哉), 호는 경헌(敬軒)이다. 공주(公州) 사람으로 철종(哲宗) 무오년(1858)에 태어났다. 개국 초기에 공숙공(恭肅公)은 휘가 명덕(明德),82) 호가 사봉(沙峯)으로 좌의정에 증직되었는데, 목은(牧隱)83)의 고제(高弟)로 태조의 명신이 되었으니 바로 군(君)의 17대조이다. 16대조 휘 효근(孝根)은 참판을 지냈고, 15대조 휘 종림(宗琳)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4대조 휘 공필(公弼)은 철산 부사(鐵山府使)를 지냈고, 13대조 휘 교맹(嶠孟)은 현감을 지냈으며, 12대조 휘 시돈(時敦)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11대조 휘 경운(慶雲)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고, 10대조 휘 영숙(靈肅)은 공조참의를 지냈다. 9대조는 휘가 위(韡)84), 호가 혁회재(衋悔齋)이고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우산(牛山)85)의 고제(高弟)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으니, 사림이 제사를 지냈다. 8대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를 지냈고, 7대조 휘가 만시(萬蒔)이며 호가 석련(石蓮)은 진사를 지냈으며, 6대조는 휘 계제(桂齊), 5대조는 휘 재후(載厚), 고조는 휘 기형(基馨), 증조는 휘 문갑(文甲), 조부는 휘 택무(擇茂), 아버지는 휘 민채(敏采)이며 문행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군은 타고난 자질이 돈후하고 품성이 인자하였다. 어려서부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였으며, 말하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보는 자들이 칭찬하였다. 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나 위기(爲己)의 학문86)을 알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스스로 손수 베꼈다. 남의 선을 보기를 자기가 지닌 것처럼 하고, 남의 악을 보기를 자기 몸의 병처럼 여기니 원근의 붕우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밤낮으로 책상을 대하였는데, 만약 의아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장덕(長德, 나이 많고 덕행이 있음)인 계남(溪南)87)과 애산(艾山) 및 최면암(崔勉庵)과 기송사(奇松沙)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제대로 알지 못하면 놓아두지 않는88) 뜻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어버이가 연로한 날에 곁에 형제가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몸에 병이 있었기 때문에 멀리 유람하여 그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봄날 날씨가 따뜻할 때나 가을바람이 쓸쓸할 때마다 번번이 벗을 맞이하여 술을 싣고서 높은 곳에 올라 소요(逍遙)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으니, 그 드넓은 흉금과 표일한 자취가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초월한 기상이 있었다. 평소의 몸가짐은 법도가 있고 말을 냄에 문장이 있었으며, 자상한 뜻은 가정에 넘쳐나고 화락한 풍모는 고을에 두루 미쳤다. 남이 곤경에 처함을 보면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한 줄 모르고 반드시 구휼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흉년을 만나면 의식을 절약하여 그 남은 것을 미루어 친족과 이웃의 가난한 자들에게 이르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난리 때 마을이 흉흉하였는데, 군(君)은 태연히 스스로의 지조를 잘 지키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산으로 골짜기로 피난가는 매우 험난한 상황에 처하여도 자정(自靖)하려는 뜻이 더욱 확고하였다. 을미년(1895) 단발의 변란에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89)은 한강 북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송사 기우만은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나는 군(君) 및 여러 벗들과 약속하여 송사에게 가서 원수를 함께 치려고 하였는데90) 그 울분과 강개함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평소에 권문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고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 세속의 명성이나 이로움,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친척의 무리가 혹여 당시에 등용되어도 돕지 않았으며, 수령의 관원이 혹 세력을 이용해 불러도 가지 않기도 하였으니, 남의 권세를 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임인년(1902) 5월 18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도장면(道莊面) 정천촌(淨川村) 뒤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해남 윤씨(海南尹氏) 주봉(柱琫)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기일(基一)과 기복(基福)이며, 딸은 하동(河東) 정귀채(鄭貴采)와 제주(濟州) 양모(梁某)에게 시집갔다. 아, 이같이 순후한 자질과 화통한 재주로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며 종유하고 강마(講磨)하여 안목이 점차 열리고 기세가 한창 올랐으니, 누가 천 리를 가는 수레를 중도에 그치고 백 번 단련한 금을 중간에 훼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군보다 나이가 좀 더 많고 교분을 맺음이 조금 늦었지만 서로 뜻이 맞아서 험난한 상황 속에서 서로 종유하며 세한(歲寒)91)에도 서로 지키려는 생각을 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지금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났단 말인가. 종유했던 오랜 벗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없으니 군을 아는 자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고 난 뒤에 사적을 길이 전할 책임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는가. 그 대강을 간략히 서술하여 그의 아들에게 주어 그가 조금 자라거든 이 글을 보고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고 계술(繼述)할 방법을 생각하게 하노라. 君姓李。諱仁煥字德哉。號敬軒。公州人。以哲宗戊午生。國初恭肅公諱明德號沙峯贈右議政。以牧隱高弟爲太祖名臣。卽君之十七世祖也。十六世諱孝根參判。十五世諱宗琳吏曹參議。十四世諱公弼鐵山府使。十三世諱嶠孟山縣監。十二世諱時敦戶曹參判。十一世諱慶雲同知敦寧府事。十世諱靈肅工曹參議。九世諱韡號衋悔齋中生員。以牛山高弟。倡丙子義旅。士林俎豆之。八世諱東鳴進士。七世諱萬蒔號石蓮進士。六世諱桂齊。五世諱載厚。高祖諱基馨。曾祖諱文甲。祖諱擇茂。考諱敏采。以文行著世。君天姿敦厚。稟性仁慈。自幼入孝出恭。語輒驚人。見者稱之。君早孤靡依。知爲己之學。心經近思錄等書。自手謄書。見人之善。若已有之。聞人之惡。若已之病。朋友遠近。莫不心悅誠服。日夕對案。若有疑訝。則必走書於諸長德溪南艾山及崔勉庵奇松沙而咨決之。其不得不措之意如此。然親老之日。傍無兄弟。親沒之後。身有疾病。是以未得遠遊以造其門。常以爲恨。每當春日和煦。秋風蕭散之時。輒邀友載酒。登臨徜徉。竟日而歸。其曠襟逸躅。悠然有出俗超塵之象。平日持身有法。出言有章。慈詳之意。溢於家庭。愷悌之風。遍於鄕閭。見人在阨。不知己力之不逮。而必周恤之無已。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及族戚隣里之貧者。甲午之亂。閭里汹汹。君晏然自持。少不爲撓。至於奔山竄谷。備極艱險。而一端自靖之志。愈益確如也。乙未薙削之變。柳毅庵麟錫擧義漢北。奇松沙擧義湖南。余約君及諸友。擬赴松沙同仇。見其忿憤慷慨。終始不渝也。平日不入要門。不見要人。於聲利芬華。漠然若無所好。親表之屬。或爲時用而不援之。守宰之官。或以勢邀而不往之。其忘人之勢如此。壬寅五月十八日。以疾終於家。葬道莊面淨川村後庚坐原。配海南尹氏柱琫女。生二男二女。男基一基福。女適河東鄭貴采濟州梁某。嗚乎。以若醇厚之質。開爽之才。立心爲己。遊從講磨。眼目漸滑。步趨方張。誰爲千里之駕。止於中途。百鍊之金。毁於半功哉。余於君。雖年紀稍長。結交差晩。而密勿相得。間關相從。爲歲寒相守之計者。顧何如。而今乃棄我如遺耶。從遊知舊。十亡八九。知君者不可謂非我。然則身後不朽之責。豈在於他人乎。略敍其梗槪而授之遺胤。待其稍長而見之。俾知厥者之心。而思所以繼述云爾。 명덕(明德) 이명덕(李明德, 1373~ 1444)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시호는 공숙(恭肅),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1396년(태조5)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보직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ㆍ장령(掌令)ㆍ사인(舍人)ㆍ집의(執義)ㆍ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ㆍ형조참의(刑曹參議) 겸 지도관사(知都官事) 등을 역임했다.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성균시에 합격하여 대제학,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위(韡) 이위(李韡, ?~?)이다. 화순 출신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안방준(安邦俊)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을 성취하고, 「분의편(奮義篇)」과 「계자서(戒子書)」를 저술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동지들과 안방준을 도와 서기가 되고, 말을 달려 여산까지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1660년(현종 1)에 생원시에 올랐고, 효행으로 여러 번 도천(道薦)에 올랐으며, 뒤에 수직(壽職)으로 가선 대부 동지중추에 제수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충효전(忠孝傳)」을 지어 극찬하였다. 사림이 칠송리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춘추로 향사한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또 다른 호는 은봉(隱峰)이다.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효종 초에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공조 참의가 되었다. 《은봉전서》ㆍ〈항의신편(抗義新編)〉ㆍ〈호남의록(湖南義錄)〉ㆍ〈혼정편록(混定編錄)〉ㆍ〈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을 남겼다 위기(爲己)의 학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제대로……않는 《중용장구》 제20장에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잘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라고 하였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조선 말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星), 호는 의암(毅庵)이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어받았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12월 24일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며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저서로 《의암집》이 있다. 원수를……하였는데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 세한(歲寒)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훈대부 칠원 현감 퇴은 안공 행장 通訓大夫漆原縣監退隱安公行狀 공의 휘는 신일(信一), 자는 군유(君有), 호는 퇴은(退隱)이며, 고려조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이 그의 현조(顯祖)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로가 있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으로 삼았다. 휘 정(挺)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직제학이 휘 을겸(乙謙)을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다. 군수가 휘 여주(汝舟)를 낳았는데 직장을 지냈으며, 장흥(長興)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직장이 휘 거(矩)를 낳았는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좌랑이 휘 신동(愼同)을 낳았는데 직장(直長)을 지냈다. 직장이 휘 양필(良弼)을 낳았는데 봉사(奉事)를 지냈고, 봉사가 휘 기(磯)를 낳았는데 부장(部將)을 지냈으며, 부장이 휘 여지(汝止)를 낳았는데 판관(判官)을 지냈다. 판관이 휘 우주(宇宙)를 낳았는데 참봉을 지냈으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봉사를 지낸 희순(希淳)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8월 10일에 부(府)의 중산리(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하고 활달하여 또래들보다 훨씬 탁월하였다. 겨우 8~9세 때, 병사 오정방(吳定邦, 1552~1652)이 겸부사(兼府使)로서 연병관(鍊兵館)에서 강무(講武)92)하였는데, 공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가서 구경하니 오정방이 각각 배 하나씩를 주었다. 여러 아이들은 받은 즉시 베어 먹는데, 공만이 홀로 품속에 넣자 오정방이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장차 돌아가 어버이께 드리려고 하는데, 하나가 모자랍니다."라고 하니, 오정방이 기특하게 여겨 곧바로 백여 개의 배와 고기를 주었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지극히 근심하여 밤에도 띠를 풀지 않았고, 부모가 잠을 자도록 하라고 꾸짖으면 그때마다 물러나 문 밖에 서 있다가 조금 지나서 다시 들어왔으니 그 지성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12세에 족대부(族大父) 동애(桐厓) 휘 중묵(重默)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국상(國喪)을 당하여 여러 장로(長老)가 모두 관아의 뜰로 달려가 곡을 행하자 공은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단(壇)을 설치하고 재계한 뒤에 망곡례(望哭禮)94)를 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18세에 참봉공의 명으로 청음(淸陰) 김선생95)을 가서 뵙고 인하여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이 매번 칭찬함이 끊이지 않았다. 광해군 정사년(1617, 광해군9)에 폐모(廢母)의 변고96)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이는 천지가 있은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하고는 곧장 소장(疏章)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언로(言路, 임금에게 말을 아뢰는 길)에 막혀 결행하지 못했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도적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하기를, "대가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가 집안에 편안히 앉아 있을 때이겠는가."라고 하더니, 칼을 잡고 부원수(副元師) 신경원(申景瑗)97)의 막사에 나아가 군무를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루어, 병절교위(秉節校尉)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98)에 오랑캐인 금나라 침략하자, 공은 전 부사(府使) 민기(閔機)99) 등과 힘을 합해 호종(扈從)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의위 부사과(忠義衛副司果)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29, 인조7) 봄, 상소를 올려 군사 장비를 정비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 동쪽에 강성한 왜구들이 있어 원망을 맺음이 이미 깊고, 서쪽에는 사나운 북쪽 오랑캐가 있는데, 얕잡힌 것이 이미 많아 위급한 형세가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빨리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그 의견을 옳다고 생각했다. 이때 극악한 역적 백룡(白龍)100)이 도당을 불러 모았는데,101) 남원(南原)이 더욱 심하였다. 부사 박정(朴炡)102)이 편지를 보내 공을 부르며 말하기를, "그대의 계략은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부디 와주시어 시국의 어려움을 같이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편지를 받고 곧장 가서 책략을 도모하여 거의 다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목장흠(睦長欽)103)이 박공(朴公)을 이어 남원(南原)에 부임하여 공이 이룩한 계책에 힘입어 마침내 잔당을 소탕하자 경내가 평안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봄, 경상 우도(慶尙右道)104)가 기근이 심하여 도적이 다투어 일어나자, 박정이 공을 추천하여 칠원 현감(漆原縣監)에 임명되었다. 공이 혼자 말을 타고 부임하여 세금을 감면해 주고 진대(賑貸)105)하여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나타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평안해졌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주고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크게 쳐들어오자 공이 달려가 감사(監司) 심연(沈演)106)을 만나 일을 의논하니 심연이 말하기를, "급히 본현으로 가서 병사를 모아서 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현으로 돌아와 동구(同仇) 의리로써 타이르니 현의 사람들이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수천 명을 모아 심공과 합세하여 곧장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병사 김준용(金俊龍)이 광교(光敎)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여러 군사가 모두 흩어지자 공이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군령(軍令)의 무엄함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본현(本縣)의 장졸들을 불러 말하기를, "오직 내가 여기에 있는데, 너희는 장차 어디로 가려하느냐.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가는 자가 있으면 참형(斬刑)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읍의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칠원의 병사들만은 독전(獨全)하여 영산(靈山)의 수령 윤면지(尹勉之)와 함께 길을 배로 재촉하여 나아갔다. 얼마 안 있어 남한산성에서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는 소식107)을 듣고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윤공과 이별하며 시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통곡하고 어느 곳으로 돌아갈거나 (痛哭歸何處)동쪽 바다 이곳이 살기 좋겠네 (東溟是好居)라고 하였다. 2월에 어버이의 병 때문에 보고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2월에 관직을 버리고 같은 고을 사람 웅천 현감(熊川縣監) 위정렬(魏廷烈, 1580~1644)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숭덕(崇德)108)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모든 서찰 아래에 오직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몇 년이라고만 써서 풍천(風泉)의 생각109)을 부쳤으며, 인산(仁山)의 아래에 집을 지어 '지수정(智水亭)'이라 편액을 걸고 날마다 벗들과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근심을 떨쳐냈다. 그 뒤에 나이가 많아 가선대부 품계로 승진하였는데,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새 직함을 쓰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청국(淸國)의 연호(年號)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오년(1666, 현종7)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2월 수문포(水門浦) 왼쪽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사문(斯文)의 이름난 가문으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현향(賢鄕, 상대방의 고향)의 장덕(長德) 문하에서 공부하여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절도는 진실로 이미 대체(大體)를 터득하였지만, 다만 당시의 세상일이 우환이 많음을 보고 개연(慨然)히 세상에 뜻을 두어 환란에 미리 대비할110) 계책을 세웠다. 또 무략(武略)에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매번 한가하고 조용한 틈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익히곤 하였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서는111)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분주하게 절충(折衝)112)하고, 드나들며 보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전후로 이와 같이 성대하였으니, 공은 문무(文武)의 재능과 장상(將相)의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다고 이를 만한데, 낮은 관직을 맴돌며 오히려 그가 품은 생각을 크게 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물며 여기에 더 나아가 아무 일이 없는 때를 만나 조용히 간언(諫言)113)하고 임금의 덕을 보좌했다면 이 세상을 도용(陶鎔)114)한 것이 어떠했겠는가. 공이 말한 '학문과 절의는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는 실제(實際)의 말이니, 백년 뒤에 공의 글을 읽고 공의 세상을 논하는 자가 마땅히 모두 다 알 것이다. 부인은 장연 변씨(長淵邊氏)로, 참봉을 지낸 덕룡(德龍)의 따님이다. 부덕이 있었으며 공의 묘에 합장되었다. 자녀가 없어 종증조(從曾祖) 형 언두(彦斗)의 둘째 아들 인업(仁業)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장손 이행(而行)은 호가 포옹(圃翁)이며, 차손은 이형(而亨)이며, 증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8세손 인환(仁煥)은 어진 선비이니, 그 종질 규칠(圭七)을 보내 나에게 행장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고루하고 미천하고 용렬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다만 두터운 교분으로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公諱信一。字君有。號退隱。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至諱挺。仕我朝官直提學。是生諱乙謙郡守。是生諱汝舟直長。始居長興。是生諱矩佐郞。是生諱愼同直長。是生諱良弼奉事。是生諱磯部將。是生諱汝止判官。是生諱宇宙參奉。卽公之考也。妣漆原尹氏奉事希淳女。以萬曆乙未八月十日。生公于府之中山里。穎悟開爽。絶山等夷。纔八九歲時。兵使吳定邦。以兼府使。講武于錬兵館。公與羣兒往觀之。吳各賜一顆梨。羣兒卽受而啗之。公獨懷之。吳問之曰。將歸遺二親。而但少一顆耳。吳奇之。乃賜百顆及肉物。遇親癠。極其致憂。夜不解帶。父母責令就睡。則輒退立門外。少頃復入。其至誠如此。十二受學于族大父桐厓諱重默之門。一日遭國恤。諸長老皆赴縣庭行哭。公與羣兒設壇齋後。行望哭禮。見者異之。十八以參奉公命。往謁淸陰金先生。因受業焉。先生每稱賞之無已。光海丁巳。聞有廢母之變。歎曰。此是有天地以後所未有之擧。卽製疏章。竟爲言路所沮。未果上。辛酉登武科。甲子賊适之叛。公不勝忿憤曰。大駕播遷。此豈臣子安坐屋裏時乎。杖劒詣副元師申景瑗幕。贊助戎務。多所效績。拜秉節校尉宣傳官丁卯三月。金虜人寇公與前府使閔機等戮力扈從。拜宣略將軍忠義衛副司果。己巳春。上疏請修武備。略曰。我國東有倭寇之强。而構怨旣深。西有建胡之狠。而見弱已多。危急之勢。朝不慮夕。亟令修葺軍器。錬習武士。以備緩急。識者韙之。時劇賊白龍。嘯聚徒黨。南原尤甚。府使朴炡以書邀公曰。吾君算略。已所稔知。庶肯來思共濟時艱。公得書卽行。謀畫方略。斬獲殆盡。睦長欽繼朴公而莅南原。賴公成算。竟勦餘黨。境內晏然。丙子春。嶺右饑甚。盜賊倂起。朴炡薦公爲漆原縣監。公單騎赴任。蠲除賑貸。恩威幷著。民賴以安。朝廷嘉賞之特。賜表裏一襲。冬北寇大入。公馳見監司沈演議事。沈曰。急往本縣收兵以來。公還縣。諭以同仇之義。縣人莫不願從。遂募得數千與沈公合勢。直向南漢。至中路。聞兵使金俊龍敗於光敎。諸軍皆散。公大呼曰。軍令無嚴何至此也。招本縣將卒曰。惟我在。此。汝將何之。若有退一步者斬。是以列邑軍皆散。而漆原兵獨全。與靈山守尹勉之。倍道而行。旣而聞南漢出城之報。痛哭而還。別尹公有詩曰。痛哭歸何處。東溟是好居。二月以親病。申省請遞。不許。十二月。棄官與同郡人熊川宰魏廷烈。同還鄕里。不復仕進。不用崇德年號。凡書尺下。惟書崇禎幾年。以寓風泉之思。築室仁山之下。扁曰智水亭。日與知舊。文酒自遣。後以年老。陞嘉善階。戒子孫曰。我死勿用此新銜。蓋以有淸國年號故也。丙午十二月十日捐館。明年二月葬于水門浦左麓艮坐原。嗚乎。公以斯文名家。稟質挺異。而從事於賢鄕長德之門。立心爲己。學問節度。固已見得大體矣。但見時事多虞。慨然有志於世而所以爲綢繆陰雨之計。又不可以不閒於武略。故每於簡黙之暇。兼習弓馬。至於出身通籍。一心徇國。而奔走折衝。出入捍衛。所以樹立勞勩者。前後磊落如此。公可謂文武全才。將相偉器。而低廻下僚。猶未能大展其所蘊。爲可恨也。況進於此。遭時無事。從容啓沃。輔翼允德。則其陶鎔斯世者。爲何如哉。公所謂學問節義。本非二事者。是實際語也。百歲之下。讀公之書。論公之世者。當有以悉之也。夫人長淵邊氏參奉德龍女。有婦德墓合祔。無育。取從曾祖兄彦斗第二子仁業爲嗣。孫長而行號圃翁。次而亨。曾玄以下不錄。八世孫仁煥賢士也。送其從姪圭七。屬余以狀行之文。余以固陋微劣。有不容承膺。而但以契誼之厚。有不敢終辭云爾。 강무(講武) 조선조 때 1년에 두 번 봄철과 가을철에 행하던 행사의 하나로, 지정(指定)한 곳에 장수와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임금이 주장하여 사냥하여 아울러 무예(武藝)를 연습하던 일을 말한다. 중묵(重默) 안중묵(安重默, 1556~1607)으로, 자는 기현(基賢), 호는 동애(桐崖),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박광전(朴光前)ㆍ정개청(鄭介淸)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의 효렴(孝廉) 천거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ㆍ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등을 지냈다. 병법(兵法)에도 능하여 정유재란 중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찾아오자 병론(兵論)을 전수해 주었으며,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저서로는 《동애선생실기(桐崖先生實記)》가 있다. 망곡례(望哭禮) 임금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서울에서는 대궐 문 앞에 모여 곡하고, 지방에서는 서울 쪽을 바라보면서 곡하는 의식을 말한다. 청음(淸陰) 김선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이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폐모(廢母)의 변고 1617년(광해군9)에 조정에서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서궁(西宮)에 유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말한다. 신경원(申景瑗) 1581~1641. 본관은 평산, 자는 숙헌이다. 1605년(선조38)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선전관을 거쳐 온성 판관·부사를 지내고, 1619년(광해군11) 영유현령이 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황주 신교에서 패한 관군을 모아 안현에서 반군을 대파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평안·황해·함경·강원 4도 부원수로 맹산 철옹성을 지키다가 포로가 되자 단식으로 항거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 전쟁인 정묘호란을 말한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나라에게 빼앗긴 것이다. 민기(閔機) 1568~164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선(子善), 호는 서한당(棲閑堂)이다. 1597년(선조30)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주 부윤을 지냈다. 백룡(白龍) 인조(仁祖) 대에 남원 지역에서 출몰하던 도적의 괴수를 말한다. 《漫浪集 卷9 睦參判墓碑銘, 韓國文集叢刊 103輯》 불러 모았는데 원문의 '소취(嘯聚)'는 도적들이 그들의 도당을 신호인 휘파람을 불어서 모으는 일을 뜻한다. 박정(朴炡) 1596~1632.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박동선(朴東善)의 아들로, 1619년(광해군11) 정시(庭試)에 급제, 춘추관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훈3등(勳三等)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함평현감ㆍ통정(通政)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좌승지ㆍ대사간ㆍ병조 참의ㆍ참지를 거쳐 1629년(인조7)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강적(强賊)을 평정하여 금주군(錦州君)에 피봉되었다. 이조 참판ㆍ병조 참판ㆍ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목장흠(睦長欽) 1572~1641.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 1599년(선조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내직을 두루 거친 뒤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1613년에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 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승지에 임명되어 판결사, 함경도 관찰사, 경주 부윤 등을 거쳐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1641년에 도승지가 되었다. 경상 우도(慶尙右道) 원문의 '영우(嶺右)'는 경상 우도로,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태종 7년(1407)에 군사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 서쪽을 경상 우도라고 하였다. 성주(星州)ㆍ선산(善山)ㆍ합천(陜川)ㆍ함양(咸陽)ㆍ의령(宜寧)ㆍ남해(南海)ㆍ거창(居昌)ㆍ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창원(昌原) 등 28개의 군현이 여기에 속하였다. 진대(賑貸) 재난이나 흉년이 든 해에 나라의 곡식을 풀어서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 주던 일을 말하는데,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빈민 구제책으로 춘궁기(春窮期)에 관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거두어들이던 제도이다. 심연(沈演) 1587~164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峯)이다.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하여 재판을 공정히 하고 선정을 베풀어 현을 주로 승격시키고 그곳의 목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패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 한성부 판윤, 대사간 등을 거쳐 경기 관찰사를 역임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임지에서 죽었다. 남한산성에서……나와 1636년(인조14)에 청나라가 재차 침입하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로 행할 것'을 조건으로 강화한 일을 말한다. 숭덕(崇德) 청나라 태종(太宗)의 연호(1636~1643)이다. 풍천(風泉)의 생각 풍천(風泉)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의 국력이 약해 청나라에 유린당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명(明)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멸망한 명(明)나라를 생각하는 존주 대의(尊周大義)의 뜻이 담겨 있다. 환란에 미리 대비할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조처하여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에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지 않을 때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牑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 '출신'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뜻하며, 원문의 '통적(通籍)'은 문표(門標)에 성명ㆍ연령 등을 올리면 궁문의 출입을 허락하던 명패(名牌)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하고서 처음 관직에 진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절충(折衝) 절충어모(折衝禦侮)의 준말이다. 적의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간언(諫言) 원문의 '계옥(啓沃)'은 내 마음을 열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간언하여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도용(陶鎔) 도용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처럼 인재를 배양해서 육성한다는 뜻으로, 보통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유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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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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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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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 경연참찬관 월헌 조공전 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經筵參贊官月軒曺公傳 조공(曺公)의 휘는 현(顯), 자는 희경(希慶)이며 월헌(月軒)은 그의 호이다. 신라 태사 계룡(繼龍)이 비조(鼻祖)가 되고,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자기(自奇), 비서소감(祕書少監) 사단(思旦),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장양공(莊襄公) 저(著)가 그의 현조(顯祖)이다. 조부 세창(世昌)은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으며, 아버지 억년(億年)은 참봉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태어났다. 공은 지기(志氣)가 무리보다 뛰어나고 강개함이 장대하여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여 명종(明宗) 을묘년(1555, 명종10)에 나가 달량진(達梁鎭, 해남 달랑포)을 지켰다. 그 당시 섬 오랑캐들이 침범해오자 변방 성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115)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났는데, 공이 휘하를 독려하여 성에 올라 힘써 싸우자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는데도 밖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적들이 성을 수겹으로 에워싸자 칼을 뽑아 공격하여 수십여 수급을 베었고 검도 부러졌다. 그리하여 지붕의 기와를 걷어 던져 적을 죽이고 부상을 입힌 것이 매우 많았으나 기와가 다 떨어져 성은 함락되었다. 적들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공을 굴복시키고 등을 갈라 간을 드러내기까지 하였는데, 도적을 꾸짖는 소리가 오히려 끊이지 않았다. 적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 관을 갖추고 시체를 거두었으니, 그때의 나이가 21세였다. 3년이 지난 정사년(1557, 명종12)에 병조 참의에 추증하였고, 선조 무인년(1578, 선조11)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116) 효종 을미년(1655, 효종6)에는 포충사(褒忠祠)117)에 올려 제향하였고, 숙종 계미년(1703, 숙종29)에는 정려를 명하였다. 외사씨(外史氏)118)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옛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119)이 회양(睢陽)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논하는 자들이 고금 천지의 쌍혼(雙魂)으로 그들을 인정하였는데, 공이 장순 허원과 함께 고금의 3혼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 조정이 태평할 때에 공이 먼 지방의 보잘 것 없는 관원으로 우뚝하게 떨쳐 한 시대에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풍의(風義)를 빛냈으니, 38년이 지나 임진년의 변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했던 일이 영호남(嶺湖湖) 사이에 잇달아 있었던 것이 공이 이끈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 집에서 잠도 자고 일어나서 날마다 먹고 마시며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으니, 삼가 전(傳)을 지어 후대의 재필(載筆)120)할 사람을 기다린다. 曺公諱顯。字希慶。月軒其號也。以新羅太師繼龍爲鼻祖。高麗平章事自奇。秘書少監思旦。都僉議政丞莊襄公著。其顯祖也。祖世昌掌隷院判決事。考億年參奉贈刑曹參判。公生于嘉靖乙未。志氣不羣。慷慨磊落。投筆登武科。明宗乙卯。出守達梁鎭。時島夷入寇。邊城海戍。望風奔潰。公督管下。登城力戰。賊不敢近。居數日。矢盡力竭。外援不至。賊圍城數匝拔劒擊斬數十級。劒亦折。捲屋瓦投之。殺傷甚衆。瓦盡城陷。賊憤其久不下。伏公刳背。至於露肝。而罵賊之聲。猶不絶。賊義之。具棺斂尸。時年二十一。越三年丁巳贈兵曹參議。宣廟戊寅。遣官致祭。孝宗乙未。躋享褒忠祠。肅廟癸未。命旌閭。外史氏曰。昔張巡許遠。死於睢陽之戰。論者以古今天地一雙魂。與之。公之於巡遠。謂之古今三魂。非過論也。當我朝昇平恬憘之際。公以遐土冗官。崛然奮張。扶綱常於一時。耀風義於萬目。後三十八年。壬辰之變。倡義殉節。相望於嶺湖之間者。安知非公倡之耶。載寢載興。日用飮食。受賜多矣。謹爲立傳以以俟後之載筆者。 바다를 지키는 수군 원문의 '해수(海戍)'는 바닷가의 수자리이다. 이백(李白)의 자류마(紫騮馬)에 "흰 눈이 덮인 관산은 멀고 누런 구름 자욱해 해수는 아득해라.[白雪關山遠, 黃雲海戍迷.]" 하였다. 관리를……했으며 1578년(선조11)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구충연(具忠淵)을 보내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치루는 제사)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포충사(褒忠祠)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죽수서원 옆에 위치한다. 1610년(광해군2)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만 모셨으나, 1630년(인조8)에 당시 이조판서인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문홍헌(文弘獻)을 배향하였다. 이후 1657년(효종8) 을묘왜란때에 해남 달랑포에서 전사한 조현(曺顯)을 추배 했으며, 1860년(철종11)에 구희(具喜)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외사씨(外史氏) 《사기》 등에는 사관이 어떤 일을 논하는 논평의 글이 나오는데, 이 글은 사관의 글이 아니므로 외사씨라고 한 것이다. 소설에서 끝에 작가 개인 의견을 표출하는 대목에서 '외사씨왈(外史氏曰)' 표현을 많이 쓴다.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재필(載筆)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운문을 '문(文)', 산문을 '필(筆)'이라 하였다. 후대에 재필(載筆)은 '필기도구를 휴대하고 군왕의 언행을 기록한다.'는 것으로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이른다. 또는 '소차(疏箚)나 표문(表文)을 짓는다.'라는 등의 문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양서(梁書)》 권14 〈임방전(任昉傳)〉에 "임방이 매우 글을 잘 지었는데 더욱이 재필을 잘 지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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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경【수혁】에게 답함 答李致慶【洙爀】 처음에 건산(巾山)이 방재(傍材)보다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접때 두 소년이 떠날 때 운여(雲汝)에게는 편지를 쓰고 치경(致慶)에게는 쓰지 않았네. 소년이 돌아와서야 비로소 멀다고 여겼던 곳이 가깝고 가깝다고 여겼던 곳이 먼 줄을 알았고, 심지어 전인(專人)109)이 있었는데도 한 글자의 안부도 묻지 못했으니, 저버린 마음 매우 부끄러워 사례할 길이 없네. 다만 그대는 이런 것들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손수 편지를 보내 정성스러운 뜻이 편지에 넘쳐나니, 넓게 포용하는 마음을 알겠기에 더욱 감탄하네. 모르겠다만 편지를 받은 지 여러 날이 되었으니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공부하는 체후는 절서에 따라 더욱 진중한가? 그리운 마음 감당할 수 없네. 의림(義林)은 비루하고 용렬함이 어제와 같아 말할 것이 없네.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설은 매우 상세하니, 조예가 정밀하여 참으로 헛되지 않은 줄 알겠네. 중인(衆人)들이 비록 미발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바람이 안정 된 뒤에도 오히려 여파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더욱 온전히 형용해 낸 곳이네. 대개 일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맞이하고 일이 이미 지나갔는데 그것을 잡으면,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혹 어두웠다가 어지러워져 평온한 경계가 없을 것이네. 그러나 또한 전적으로 미발한 시절이 없다고 해서는 불가하니, 마치 야기(夜氣)가 아침에 갑자기 휴식하여 우연히 순수한데로 돌아가는 곳 같은 것이 이런 경우이네. 공부의 요체는 바로 이런 곳에 있으니, 다만 뜻을 붙여 잡으려고 하다가 병폐를 생기게 해서는 불가할 것이네. 주자가 이른바 "일용의 사이에 장경(莊敬)과 함양(涵養)의 공부가 지극하여 인욕의 사사로움이 어지럽게 하는 것이 없으면 발하기 전에는 맑은 거울 잔잔한 물과 같으며, 발한 뒤에는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만고의 지극한 말씀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初謂巾山遠於傍材。故向日兩少年之去。修書於雲汝。而未及於致慶矣。其迴也始知遠者近而近者遠。至有專人而無一字相問。愧愧負負。無以謝爲。但賢者不較不猶。致此手訊。繾綣之意溢於幅面。仰認包洪。尤可感歎。未審信後有日。侍旁經履。連序增重。慰溯無任。義林陋劣如昨。無足奉提。未發已發之說。極其詳悉。可認造詣精密。儘不虛矣。衆人雖曰未發。而如風定之後猶有餘波者尤形容十分處。蓋事未至而迎之。事已過而將之。乍起乍滅。或昏或亂。無有妥帖境界。然亦不可謂專無未發時節。如夜氣平朝。霎爾休息。偶然回淳處。是也。工夫要處。正在此處。但不可着意把捉。以生病敗也。朱子所謂日用之間。莊敬涵養之功至。而無人欲之私而亂之。則其未發也。鏡明水止。其發也。無不中節。眞萬古至言也。如何如何。 전인(專人) 어떤 소식이나 물건을 전하기 위해 특별히 사람을 보내는 것 또는 그 사람을 말하며, 전족(專足), 전팽(專伻)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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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형【치운】에게 답함 答鄭士亨【治運】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련만【無大過】'89)이라는 말과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았네【不貳過】'90)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는 성인(聖人)이 스스로 겸손하게 여긴 말씀이고, 하나는 안자(顔子)께서 나아간 공이니 어찌 나란히 하여 같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밥은 정(精)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食不厭精】'91)라는 것은 입을 즐겁게 하고 배를 채우려는 욕망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아닙니다. 호학(狐狢)의 갗옷92)은 가볍고 따뜻한 아름다움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아닙니다. 술은 한량하지 않고 마신다【惟酒無量】93)는 것은 술을 탐하도록 좋아하여 매우 심하게 취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니 우(禹) 임금이 거친 음식을 먹고, 나쁜 의복과 나쁜 음식을 먹고 입은 것과 같은 종류와 어찌 서로 다르겠습니까?'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답다.【里仁爲美】'94)라고 한 것은 군자(君子)가 거처하는 영원한 법칙입니다.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셨다.【欲居九夷】'95)는 것은 성인(聖人)이 세상을 근심한 통달한 권도(權道)입니다. 앞의 몇 가지 조목의 설에서 묻기를 좋아하는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억지로 밀거나 이끌고자 하는 병통이 없습니다. 이것은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切問近思】는 것에 있어서 다소 부족함이 없지는 않을 듯합니다. 대저 성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면 자연스럽게 의문점이 생기게 되니, 굳이 지엽적인 구두(句讀)에 견강부회하여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에 대해 나란히 견주는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無大過。不貳過。一則聖人謙己之言。一則顔子所造之功。豈可比而同之耶。食不厭精。非極口腹之欲。狐狢之裘。非極輕煖之美。惟酒無量。非耽嗜沈醉之謂。則與禹菲飮惡衣惡旨之類。有何相違背耶。里仁爲美。君子居身之常法。欲居九夷。聖人憂世之達權。數條說。可見好問之意。然或不無强排牽引之病。此於切問近思。恐不無少遜矣。大抵誠心爲學。則自然有疑。不必傳會於句讀之末。而爲此比竝對較於別無義味之地耳。如何如何。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련만【無大過】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나에게 몇 년 더 수명을 허락하여 끝내 역을 배울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련만.【假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라고 하였다.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았네【不貳過】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는 말로, "안회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하였다. 밥은 정(精)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食不厭精】 《논어》 〈향당(鄕黨)〉에 나오는 말로, "밥은 정(正)한 것을 싫어하지 않고, 회(膾)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食不厭精, 膾不厭細.】"라고 하였다. 호학(狐狢)의 갗옷 여우와 오소리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옷을 가리킨다. 술은 한량하지 않고 마신다【惟酒無量】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나오는 말로, "술은 한량하지 않고 마시되, 뜻을 어지럽히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하였다.【惟酒無量, 不及亂.】"라고 하였다. 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답다.【里仁爲美】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인후한 풍속을 지닌 마을을 골라 살겠다는 것이다. "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다우니, 인후한 마을을 가려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셨다.【欲居九夷】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로,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시니,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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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장【황】에게 답함 答徐聖章【璜】 학문의 도는 아는 것【知】와 행하는 것【行】 두 가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그것을 행할 수 없으므로, 학문은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窮理】을 우선으로 삼습니다.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방법도 역시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니, 모든 천지의 만물과 고금의 사변 등, 내가 깊이 연구해서 지극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근한 것을 먼저 깊이 연구한 이후에 원대한 것에 이르고, 쉬운 것을 먼저 깊이 연구한 이후에 어려운 것에 이르는 것이 학문의 절도입니다.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 앉고 눕고 가고 걷는 것, 신심(身心)과 성정(性情), 인륜과 일상생활의 사이에서부터 먼저 하나하나 음미하고 찾아내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어서 그만둘 수 없는 것과 그렇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어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보고, 오늘 한 건을 깊이 연구하고 내일 한 건을 깊이 연구하며 나날이 이같이 해서 혹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서로 이어서 유추하게 되고 미묘한 것도 환하지 않음이 없어져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독서 역시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만약 《대학(大學)》을 읽으면, 먼저 성인이 대학을 지은 뜻이 무엇이고, 또 대인(大人)의 학문이 무엇이며, 명덕(明德)이 무엇이고, 신민(新民)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합니다. 한 글자마다 한 글자의 뜻을 구하고 한 구절마다 한 구절의 뜻을 구해서, 모두 아주 분명하게 해서 털끝만큼이라도 남은 의심이 없기를 구해야 하는데, 이것을 궁리(窮理)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에서 증험하고 몸에서 체득해서, 성현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고 성현의 행동을 자기의 행동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앎과 행동이 서로 융합되었을 때 체득하는 것에서 말하였으니, 오로지 궁리(窮理)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敬)과 존심(存心)은 두 항목의 일이 아닙니다. 경은 곧 보존하는 것이고 보존하는 것은 곧 이 경을 보존하는 것이니, 지극히 정미한 것에 처해서, 절대 조장(助長)하는 데 마음을 쏟아서 병폐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자(程子)는 "앎을 지극히 하고서도 경(敬)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未有致知而不在敬】"라고 하였으니, 경이 아니면 마음을 보존할 수 없고 마음을 보존하지 않으면 이치를 궁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하는 것이니,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의 선후로써 논할 수 없습니다. 또 존양(存養)109)을 존심(存心)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찰(省察)을 궁리(窮理)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찰(省察)은 방미(防微)110)와 지기(知幾)111)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서 '단정하게 앉아 몸가짐을 추스른다.【端坐斂形】'라고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 씀씀이가 너무 지나쳐, 혹 천태산(天台山)에 은거한 사마승정(司馬承禎)을 좌치(坐馳)112)라고 비난한 일을 겪게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113) 따라서 단지 하루 12시간에 항상 상제(上帝)를 마주하고 큰 손님을 만나듯이 해서, 절대로 조금의 게으름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받들고 다른 사람을 대접하거나 만물의 변화에 순응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기만하거나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일이 없이, 진심을 쌓고 성실함을 길러서 천리(天理)와 분수(分數)로 하여금 날마다 기르고 길러 주(主)가 되게 하고 내재할 수 있게 한 이후에야 여기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낸 편지에서, 덕(德)을 이룬 이후의 일로 여긴 것은, 적절한 듯합니다. 그러나 어찌 덕을 이룬 이후의 일이라는 것에 핑계를 대고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경(敬)은 주일(主一)의 뜻이니, 초학자로서 오래도록 마음대로 한 상태에서 갑자기 주일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사물의 드러난 자취에서 일정한 규율을 먼저 정해서, 이 일을 마주할 때는 다른 일이 있는 줄 모르고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다른 책인 있는 줄 모르며 이 이치를 깊이 연구할 때는 다른 이치가 있는 줄 모르게 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면 점차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 문하의 가장 중요한 도리이니 힘쓰고 힘쓰기를 바랍니다.보낸 편지에서, 모두 스스로 내면에서 제재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자신의 사욕을 알아서 금지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앞뒤를 바꿔 말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천하의 일은, 그것이 천리가 되고 그것이 인욕이 되는 줄 안 이후에 극기복례의 일을 착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먼저 제재한 이후에 그것이 사욕인 줄 알겠습니까? 또 수응(酬應)하는 곳에는 매번 후회와 의혹이 많은 것은, 이 일이 오기 전에 생각이 어지러워서 초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억지로 굽히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식이 점차로 열리고 실천이 점차 확고해지면 자연히 매우 타당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함양(涵養)의 묘법은, 굳게 지키고 오랫동안 쌓아서 정신으로 융회하고 마음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니, 말로써 지도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일이 없을 때 생각이 삼대처럼 가득하면 가장 가라앉히기 어려우니,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손님을 하는 가운데 성실함을 기르고 진심을 쌓아서 차례대로 힘써 나갈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정심장(正心章)에 대해 말한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착한 행동을 하라【遷善】'라는 것을 설명할 때 먼저 '허물을 고쳐라.【改過】'라고 하였고 '성실함을 보존하라【存誠】'라는 것을 설명할 때 먼저 '사악함을 막아라.【閑邪】'라고 하였으며 '예를 회복하라【復禮】'라고 설명할 때 먼저 '자신의 사욕을 이겨라.【克己】'라고 하였습니다.《맹자》 「고자 상」에서 '잡으면 보존된다.【操則存】'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나는 인심의 변화는 헤아릴 수 없이 오묘하다고 여긴 적이 있으나, 음양의 변화가 어떻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인(聖人)과 평범한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찌 단지 성인의 마음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겠습니까?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방법【窮理之方】은 진실로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따라 깊이 연구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특별한 하나의 일을 일으켜서 깊이 연구하기도 하니, 어찌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선후와 완급의 차례는 없어서는 안 됩니다.정자(程子)가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라고 하면 적절하지 않다. 다만 망령되이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면 적절하다."라고 하였으니, 보낸 편지에서 이른바 '다만 사악한 마음을 막아라.【但防邪意】'라고 한 것도 또한 이 뜻일 것입니다.독서할 때 틈틈이 휴양하는 것은, 단지 다른 생각을 그만두게 할 뿐만 아니라 근본을 배양하고 근원을 깨끗하게 하니, 진실로 마땅히 이와같이 해야 합니다. 夫學問之道。是知行二端而已。然不知則無以行之。故學以窮理爲先也。窮理亦非一端。凡天地萬物。古今事變。無非吾窮格處。然先近而及遠。先易而及難。此其節度也。自灑掃應對。坐臥行步。身心性情。人倫日用之間。先須一一玩索。見其所當然而不容已。與其所以然而不可易。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日日如此。無客間斷則推類相次。無微不徹。而自當脫然矣。讀書亦窮理之一端。如讀大學。則先求聖人所以作大學之意是如何。且大人之學是如何。明德是如何。新民是如何。一字求一字之義。一句求一句之義。皆要了了分明。無毫髮餘疑。此之謂窮理也。若其驗之於心。體之於身以聖賢之心爲己心。以聖賢之行爲己行。此是知行交際體認上說。非可以專屬於窮理也。敬與存心。非兩項事。敬便存存便存。此處極精微。最不可着意助長以生病敗也。程子曰。未有致知而不在敬者。非敬無以存心。非存心無以窮理。存心是徹頭徹尾底。不可以窮理先後論也。且以存養謂存心則可。以省察謂窮理則不可。省察是防微知幾底說也。端坐斂形不思不語之云。非不好矣而但恐用心太過。或致天台山人坐馳之譏也。但一日十二時。常常如對上帝。如見大賓。母或有一毫怠慢。至於奉親接人。應物處事之間。無有自欺自斂之端。積眞養誠。使天理分數。日以長長。足以爲主爲內而後。可以得力於此矣。來喩以爲成德以後之事者。得矣。然豈可諉諸成德而不之自求乎。但敬是主一之義也。初學其在放心之久。猝難主一。先於事物粗迹上。先定劃一規矩應此事時。不知有他事。讀此書時。不知有他書。窮此理時。不知有他理。久久不已。且將漸次得力矣。此是聖門第一義。勉之勉之。示喩以爲皆得自內制之然後。知其私欲而禁之。此是倒說。夫天下事。知其爲天理。知其爲人欲而後。可下克復之功。豈有先制之而後。知其私欲者哉。又曰酬應處。每多悔惑。是事來前思慮紛紜之致也。此說固然。然思慮强伏不得。惟是知識漸開。踐履漸固。則自然見得妥帖矣。涵養之妙。持守積累。自當神會心得。非言說所可指授。無事時。思慮如麻。最難按伏。不如就日用應接上。養誠積眞。次第得力去。正心章云云。固然。故聖人說遷善。先言改過。說存誠先言閑邪。說復禮。先言克己。操則存云云。愚嘗以爲人心變化不測之妙。未嘗言陰陽變化云云矣。凡言聖人凡人之心如此。豈但指聖人之心而言者耶。窮理之方。固非一端。或隨其思慮之所起而窮之。或別起一事而窮之。何妨也。但其先後緩急之序。則不可無也。程子曰。謂之無思慮則不可。但無妄思可矣。來喩所謂但防邪意者。亦此義耶。讀書時。間間休養。非特爲要息外念。培本淸源。固當如此。大抵激勵奮發。勿使少有怠緩而後可。不然畵脂鏤氷。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심(本心)을 보존하고 본성(本性)을 기른다는 뜻이다. 《맹자》 「진심 상」에 "본심을 보존하고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방미(防微) 잘못이나 나쁜 일을 경미할 때 막는 것이다. 지기(知幾) 일의 기미를 알아채는 것이다. 좌치(坐馳)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지만 잡념이 끊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혹 …… 두렵습니다 사마승정(司馬承禎, 643~735)은 당나라 현종ㆍ예종 때의 도사(道士)로서, 자는 자미(紫微)이고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다. 천태산에 은거해,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 도와 일체가 된 정신세계를 추구한다는 내용의 《좌망론(坐忘論)》 등을 지었는데, 정자(程子)는 "이것이 바로 좌치(坐馳)이다."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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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중의 자설 洪希中字說 권도(權道)가 중도가 되는 것은 중도가 사리에 지극히 합당하고 학문의 지극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학(共學) 네 조목에서 권도가 가장 중요하고, 〈이괘(履卦)〉와 〈겸괘(謙卦)〉 등 아홉 괘에서 권도가 마지막에 처한 것이다.59)홍생(洪生) 권희(權憙)가 희중(希中)을 표덕(表德 자(字))으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반드시 제1등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는 데에 뜻을 둔 것이니, 젊은 나이의 진취를 어찌 높이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먼저 택중(擇中)과 치중(致中)의 공부가 있는 다음에 그 영역에 이를 수 있으니, 택중은 《대학》에서 이른바 치지격물(致知格物)60)이고, 치중은 《中庸》에서 이른바 계신공구(戒愼恐懼)61)이다. 이는 바퀴와 날개처럼 서로 나아가는 법이니, 바라건대 군은 더욱 체득하여 아름다운 자를 지어준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權所以爲中。中者事理之至當。學問之極功。是以共學四條。權最爲重。履謙九卦。權居其終。洪生權憙。表德希中。此其志必不以第一等讓與別人。妙年步趨。豈不可䙡。然必先有擇中致中之功。然後可造其域。擇中卽大學所謂致知格物。致中卽中庸所謂戒愼恐懼。此是輪翼交進法。顧君克加體認。勿負所以錫嘉之意。 공학(共學)……것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말하기를 "함께 배우는 것은 가하더라도 함께 도에 나가는 것은 불가하며 함께 도에 나가는 것은 가하더라도 함께 서는 것은 불가하며 함께 서는 것은 가하더라도 함께 권도를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고 했는데,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이 대목에 대한 홍씨(洪氏)의 말을 인용하기를, "《주역》의 아홉 괘가  '손괘(巽卦)의 덕으로 권도를 행한다.'에서 끝났으니, 권도는 성인의 큰 작용이다. 능히 서지도 못하면서 권도를 말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능히 서지도 못하면서 걸어가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쓰러지지 않을 이가 드물다.[易九卦, 終於巽以行權, 權者聖人之大用. 未能立而言權, 猶人未能立而欲行, 鮮不仆矣.]"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참고로 아홉 괘는 이괘(履卦), 겸(謙卦), 복(復卦), 항(恒卦), 손(損卦), 익(益卦), 곤(困卦), 정(井卦), 손(巽卦)를 말한다. 《周易 繫辭傳下》 치지격물(致知格物) 앎에 이르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는 뜻으로, 《대학장구》 경(經) 1장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조목이다. 계신공구(戒愼恐懼)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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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회부 중기 에게 써서 주다 書贈李君晦夫【中基】 내가 일찍이 서울에 갔을 때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수천 리 쯤를 동행하면서 보니, 그의 몸은 매우 구부정하고, 그의 발은 매우 둔해서 다른 사람에 비해 짧은 걸음을 여러 번 내딛어야 겨우 한 걸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비웃으며 그 사람처럼 느리게 함께 걷다가 앞서 가버렸다. 이 때문에 항상 홀로 걸었고 함께 가는 사람이 없었다. 십 여일 뒤 서울에 들어가서 그 노인을 만났는데, 이미 먼저 남대문 아래에 와 있었다. 이는 대체로 그의 걸음걸이가 비록 느릴지언정 종일 길을 걸으면서 잠시 잠깐도 멈추거나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학문하는 방법을 알고서 몰래 스스로 힘쓰면서도 오히려 잘할 수 없을까 근심하였는데, 끝내 '간단(間斷)' 두 글자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었다. 아, 어찌 나만 그렇겠는가. 세상의 학자들이 끝내 성취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오직 이 때문이다.보건대, 회부(晦夫)는 지금 한창 나이가 젊고, 힘이 강하며, 앞길이 만리이니, 모름지기 안장과 고삐를 다스리고 정돈하여 혹시라도 그치거나 멈추지 말고 끝내 한만(汗漫)과 서로 기약한 곳62)에 이르러서 나처럼 이 노인에게 비웃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을 지금 회부를 위해 말하니, 회부는 힘쓰기 바란다. 余嘗之京師。道遇一老人。同行數里許。見其體甚傴。其足甚鈍。視他人數步頃。僅運一步。路人莫不笑之。同行若其遲而先去之。是以常獨行而無伴。後十數日。入京見老人。已先來在南門下矣。蓋其運步雖遲。而終日在道。無霎刻停息故也。余於此知爲學方法。竊自勉之而猶患不能。竟以間斷二字。枉過一生矣。嗚呼。豈獨余也。世之學者。不能終有所爲者。職此之由也。見晦夫方年富力强。前程萬里。須理鞍正轡。母或間斷停輟。終至於汗漫相期之地。勿爲此老人所笑如義林也。平日所蘊蓄。今爲晦夫發之。願晦夫勉之。 한만(汗漫)과……곳 한만(汗漫)은 세상 밖에서 노니는 신선, 즉 세상 밖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광대무변한 학문의 경지를 말한다. 옛날에 도인(道人) 노오(盧敖)가 일찍이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몽곡(蒙穀) 위에 이르러 약사(若士)라는 선인(仙人)을 만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나와 서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子殆可與敖爲友乎?]"라고 하자, 약사가 웃으며 이르기를 "나는 저 한만과 더불어 구해의 밖에서 노닐기로 기약했으니, 내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吾與汗漫期于九垓之外, 吾不可以久駐.]"라고 하고 바로 떠나 버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淮南子 道應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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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기 蘭溪記 난초는 여러 화초에 견주어보면 같은 식물인데 《주역》에 드러나고, 《예기》에 보이며, 《시경》에서 노래하고, 《이소(離騒)》에서 회자되어 그 명칭과 품제(品題)가 여러 꽃들의 위에서 독차지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람은 덕을 향기로 삼고 꽃은 향기로 덕을 삼으니, 난초가 칭송을 받는 것은 대개 그 덕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九畹)에 이미 심어130) 그윽한 골짝에 길이 생겨 채집하고 꿰매어 차고, 깔거나 안고서 화려한 집에 바치고 금 쟁반에 드리니, 그 냄새가 정성스러워 호고(胡考)가 평안하고131) 그 향기가 비로소 올라가니 상제가 흠향하네.132)오호라! 쑥을 차는 이133)는 어떤 사람이며, 향주머니에 채운 것134)은 어떤 물건인가? 이상한 냄새 나는 유(蕕)는 함께 거처할 수 없고, 오로지 아첨하는 초(椒)135)는 함께 말할 수 없네. 적막한 곳에 외로운 뿌리 의탁하여 여러 화초와 더불어 짝이 되니, 사람이 있다고 하여 더 영화롭지 않고 사람이 없다하여 향기를 풍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향기 머금고 뿌리에 감추어 그 덕을 축적하는 것이 마치 생강과 계피는 늙을수록 더욱 매워지는 것136) 같고, 마치 시귀(蓍龜)는 오랠수록 더욱 신령한 것과 같으니, 그 난초는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 난계자(蘭溪子)를 위하여 〈의란조(猗蘭操)〉137) 한 곡을 노래하니, 원컨대 그대는 주부자(朱夫子)의 난두시(蘭杜詩)138) 한 절구로 이어서 화답하시게. 蘭於衆卉。同植物也。而著於易。見於禮。歌於詩。膾灸於離騒。其名稱品。題擅於衆芳之上者何耶。人以德爲馨香。花以馨香爲德。蘭之見稱。盖以其有德也。九畹旣藝幽。谷成蹊。采之紉之。以藉以包。薦於華屋。進於金盤。其臭亶時而胡考是寧。其香始升而上帝是歆。嗚乎。服艾何人。充幃何物。異臭之蕕。不可與居。專佞之椒。不可與語。托孤根於寂寞。與衆艸而爲伍。不以有人而加榮。不以無人而不芳。含薰晦根。以畜其德。如薑桂之老而愈辣。如蓍龜之久而益神。則其爲蘭也。不亦美矣乎。我爲蘭溪子。歌猗蘭操一闋。願子以朱夫子蘭杜詩一絶。繼以和之也。 구원(九畹)에 이미 심어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내가 구원의 땅에다 이미 난초를 심고, 다시 백묘의 땅에다 혜초를 심었노라.[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호고(胡考)가 평안하고 호고는 수고(壽考)와 같은 뜻이다. 《시경》 〈주송(周頌) 재삼(載芟)〉에 "음식이 그 향기로우니 국가의 영광이며, 후추가 향기로우니 호고의 편안함이로다.[有飶其香, 邦家之光. 有椒其馨, 胡考之寧.]"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그 향기가……흠향하네 《시경》 〈대아(大雅) 생민(生民)〉에 "그 향기 비로소 올라가니, 상제가 편안히 흠향하시도다.[其香始升, 上帝居歆.]"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쑥을 차는 이 굴원의 〈이소〉에 "집집마다 쑥을 허리춤에 가득 차고 다니면서 유란(幽蘭)은 찰 것이 못 된다고 한다네.[戶服艾以盈腰兮, 謂幽蘭其不可佩.]"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향주머니에 채운 것 굴원의 〈이소〉에 "거름을 가져다가 향주머니를 채우고, 신초는 향기롭지 않다고 말하네.[蘇糞壤以充幃兮, 謂申椒其不芳.]"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오로지 아첨하는 초(椒) 굴원의 〈이소〉에 "산초는 오로지 아첨하여 거만하네.[椒專侫以慢慆兮]"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생강과……것 《송사(宋史)》 〈안돈복열전(晏敦復列傳)〉에 "나는 끝내 내 한 몸을 위하여 국가를 그르치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내 생강과 계피 같은 성질은 늙을수록 더 매워짐에랴.[吾終不爲身計誤國家, 況吾薑桂之性, 到老愈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의란조(猗蘭操) 공자가 지은 금곡(琴曲)이다.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에 돌아온 뒤에 깊은 골짜기에 핀 향기로운 난초를 보고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주부자(朱夫子)의 난두시(蘭杜詩) 주자의 시 〈봉동장경부성남십이영(奉同張敬夫城南二十詠)〉에서 여섯 번 째 난간(蘭澗)에 대한 절구에 "광풍이 푸른 시내 위에 떠가니, 난초와 방두는 나날이 성하도다.[光風浮碧澗, 蘭杜日猗猗.]"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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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기 玉蓮亭記 주 부자(朱夫子) 시에 이르기를 "강을 건너 연꽃 따니, 열 번이나 반복해도 마음에 싫증나지 않네. 무극옹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깊은 속마음 마침내 누가 알아주랴.[涉江采芙蓉, 十反心無斁. 不遇無極翁, 深衷竟誰識?]"라고 하였는데,161) 읽을 때마다 사물에 의탁하여 정을 붙여 감개가 무량한 뜻을 볼 수 있었다.무릇 연(蓮)이라는 사물은 《시경》에 드러나고〈이소(離騷)〉에 보이고 여러 시인들이 읊조린 작품에 섞여 나오는데, 염계 부자(濂溪夫子)의 〈애련설(愛蓮說)〉에 이르러 비로소 발휘되어 남은 뜻이 없게 되었고, 이어서 그 속마음을 깊이 얻은 것이 있으니, 바로 주 부자의 이 시이다. 이것은 양춘(陽春)의 원기는 천년에 한 맥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노사 선생(蘆沙先生)162)의 증손 눌경(訥卿) 씨가 연(蓮) 꿈을 꾸고 연을 얻어 인하여 연못에 심고는 그 가에 정자를 지어 편액을 옥연(玉蓮)이라 하였다. 옛날에 매화·소나무·꽃·풀에 대해 꿈을 꾼 것이 하나가 아니고 많이 있다. 대개 성리 사화(聲利詞華)와 유방 사상(遊放思想)의 정이 각각 그 유(類)로써 응한 것이다. 지금 눌경의 뜻이 성리 사화와 유방 사상의 사이에 있지 않으니, 힘쓰고 힘써 기대할 것은 오직 가정의 사업과 염민(濂閩)163)의 학문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꿈속에 드러남이 있는 것은 생각건대 또한 한가로운 초목에 있지 않을 것이다.오호라, 슬프도다! 이 때가 어느 때인가? 완악한 음의 기운이 긴 밤을 이루고 천지가 막혔으니, 원컨대 눌경은 그 뿌리를 깊이 숨기고 그 아름다움을 잘 감추어 박괘(剝卦)의 위164)와 복괘(復卦)의 아래165)에서 먹히지 않는 종자로 삼으면 내 장차 옥련의 한 가지를 보고서 봄이 오는 소식을 찾을 것이네. 朱夫子詩曰。涉江采芙蓉。十反心無斁。不遇無極翁。深衷竟誰識。每讀之。可見其托物寓情感慨不盡之意。夫蓮之爲物。著於詩。見於離騷。雜出於諸家歌詠之作。至濂溪夫子愛蓮說。始發揮之無餘蘊。繼之而有深得其衷者。卽朱夫子此詩也。此非陽春元氣千載一脈也耶。蘆沙先生曾孫訥鄕甫。夢蓮得蓮。因栽于池。築亭其上。題其顔曰玉蓮。古有夢梅夢松夢花夢草。不一而多矣。蓋其聲利詞華遊放思想之情。各以其類而應焉。今訥卿之志。不在於聲利詞華遊放思想之間。而所以勉勉期待者。惟是家庭之業。濂閩之學而已。然則其有以發於夢寐者。想亦不在於閒草木也。嗚乎悲夫。此時何時。頑陰長夜。九野閑塞。願訥卿深晦其根。好藏其艶。以爲剝上復下不食之種也。吾將視玉蓮一枝。以訪開春消息焉。 주 부자(朱夫子)……하였는데 주자의 시 〈봉동장경부성남십이영(奉同張敬夫城南二十詠)〉가운데 열 넷째 탁청(濯清) 시를 말한다.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염민(濂閩) 염계(濂溪)와 민중(閩中)으로, 염계는 호남성(湖南省)에 있는데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이고, 민중은 복건성(福建省)에 있는데 주희(朱熹)가 살던 곳이다. 박괘(剝卦)의 위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한 것을 말한다. 복괘(復卦)의 아래 《주역》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지라 후회하는 데 이르지 않으니, 크게 선하여 길하다.[初九, 不遠復, 毋祗悔 元吉.]"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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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기 玉山記 《예기》〈학기(學記)〉에 이르기를"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무릇 옥이라는 물건은 광물로 바탕으로 하고 있고 박옥(璞玉)으로 온축하고 있어 그 겉은 거칠고 그 본질은 희니, 반드시 숫돌로 다스리고 창(磢)으로 연마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다스리면 거친 것이 정밀해지고 오래 연마하면 흰 것이 광채가 난다. 더욱 정밀하고 더욱 광채가 나는 데 이르러 천하의 보배가 이루어 질 수 있으니, 이것이 고인이 학문을 옥에 견주었던 까닭이다. 학문이 이미 조예가 있으면 덕은 진보할 수 있는데, 옥이 온화하면서 윤택함은 인(仁)이고, 치밀하면서 견고함은 지(智)이고, 모가 져도 상처내지 않음은 의(義)이고, 드리워 떨어질 듯함은 예(禮)이고, 부윤(孚尹)이 사방에 두루 통함은 신(信)이라고 하였으니,166) 이것이 고인이 덕을 옥에 견주었던 까닭이다. 학문이 이미 성취가 있고 덕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면 출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한 보배가 몸에 있으면 실로 바깥에 아름다움을 자랑해서는 불가하고 또 남에게 팔기를 구하는 것이 불가하니,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자랑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반드시 깨진 옥인 줄 알 것이다. 이것이 고인이 출처를 옥에 견주었던 까닭이다.사문(斯文) 이영일(李榮一)은 고가(古家)의 이름난 후예이고 우리 고을의 걸출한 선비이다. 옥산(玉山)에 살기에 그것으로 재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 뜻을 취한 것은 생각건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감히 빈말로 언급할 수 없어 삼가'옥(玉)'한 글자를 거론하여 붕우 간에 절차탁마하는 뜻을 다할 뿐이다. 禮曰。玉不琢。不成器。人不學。不知道。夫玉之爲物。藉之以礦。蘊之以璞。其殼也麤。其質也素。必攻之以礛。磨之以磢。攻之勤則麤者精。磨之久則素者光。至於益精益光。而天下之寶。得以成焉。此古人所以比學於玉也。學旣有造。則徳可以進。溫而澤仁也。密而栗知也。廉而不劌義也。垂之如墜禮也。孚尹房達信也。此古人所以比德於王也。學旣有成。德無不全。則可以語出處矣。至寶在躬。固不可以誇美於外。又不可以求售於人。若有一毫自衒之心。吾見其必敗玉矣。此古人所以此出處於玉也。李斯文榮一。古家名裔。吾鄕偉儒。所居玉山。因以名齋。其意所取。想不出此。余亦不敢以謾語及之。謹擧玉一字。以效朋友切磨之義云爾。 옥이……하였으니 《예기》 〈빙의(聘義)〉에 나오는 말이다. 부윤(孚尹)에 대해 정현(鄭玄) 주(注)에는 "옥의 채색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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