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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낙청헌 처사 위공 행장 樂淸軒處士魏公行狀 공의 성은 위(魏), 휘는 형권(衡權), 자는 중지(重之), 호는 낙청헌(樂淸軒)이다. 시조의 휘는 경(鏡)으로,12) 당(唐)나라 학사(學士)로 동방에 와서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태종(太宗)을 섬겼고, 관등은 대아찬(大阿飱)이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회주(懷州)는 바로 지금의 장흥(長興)이다. 휘 창주(菖珠)에 이르러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시중(侍中)이었다.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으니, 벌열(閥閱) 가문의 찬란함은 조야(朝野)의 전적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휘 충(种)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따라 보위에 오를 때 추대한 공이 있었다. 4대를 전하여 휘 유형(由亨)에 이르러 승문원 습독(承文院 習讀)을 지냈는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제현과 벗하여 잘 지내면서 기록한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또 3대를 전하여 휘 덕화(德和)에 이르러서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고,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13)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또 4대를 전하여 휘 명덕(命德)에 이르러 병계(屛溪) 윤 선생(尹先生 윤봉구(尹鳳九))을 사사하여 문학과 품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는데 호는 잉여옹(剩餘翁)으로 유고가 세상에 전해지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사갑(師甲), 호는 부계(富溪)로, 학문은 가업을 이었으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의 휘는 수택(守澤), 호는 묵와(黙窩)로, 족숙(族叔)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매우 칭찬하여 중히 여겼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조부의 휘는 영진(榮震), 호는 송탄(松灘)으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익조(益祚), 호는 성성재(惺惺齋)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사우(士友)와 교유하였다. 몸소 실천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선비(先妣)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재규(在奎)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며 규중의 법도에 빠뜨림이 없었다. 순묘(純廟) 기유년(1819, 순조19) 9월 16일에 공을 부(府)의 북쪽 단촌(丹村)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보통사람과는 매우 달랐으니, 할아버지 송탄공(松灘公)이 늘 애지중지하여 "우리 집안 앞날의 희망은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때 학습 과정을 감독하지 않아도 일과를 매우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사의(辭義)를 토론하고 문장을 지을 적에는 뜻이 통창하고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하여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양친을 섬길 적에는 정성과 힘을 다해 봉양하였고, 화락한 안색과 조심스럽고 경건한 위의를 잠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빠뜨림이 없었다. 18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쇠약해진 나머지 병이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위로하고 타일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김에 더욱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입맛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물건을 올림에 좌우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부족하게 한 적이 없었다. 신축년(1841, 헌종7)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자 아버지를 대신한 아픔을 더욱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리(情理)와 예법(禮法)은 일일이 예문과 같이 하였다. 모부인께서 병이 들어 잉어를 드시고자 하였다. 공이 강에 가서 울부짖으니 갑자기 한 자 남짓한 잉어 한 마리가 그물에 뛰어들었다. 잡아서 올렸는데 병이 마침내 나았으니, 사람들이 왕상(王祥)의 효성14)에 견주었다. 병인년(1866, 고종3)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여 예를 행하였는데 노쇠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15)와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은 주위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공경히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하는 것을 초하루와 보름 및 봄가을로 하여 때마다 폐하지 않았다. 기휘(忌諱)하는 때를 만나면 치재(致齋)하고 산재(散齋)하는 것16)을 반드시 삼가고 제사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반드시 직접 마련하였으며, 감개하고 숙연하여 마치 살아 계시듯이 대하는 정성17)을 다 바쳤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하여 《맹자(孟子)》의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라는 구절18)을 읽을 때면 반복해 읊조리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같은 군(郡)에 사는 남파(南坡) 이공(李公)을 스승으로 섬겨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19)에 대해 듣고 부지런히 따라 하면서 오직 부족할까 두려워하였고, 간혹 여가가 있으면 공령(功令 과거(科擧))에 필요한 시문(詩文))과 근체(近體)의 문장을 공부하여 부모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 때문에 문사(文辭)가 풍부하여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니,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두 동생을 사랑으로 보살펴 은의(恩誼)가 융성하였으므로 집 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동생들을 위해 스승을 가려 부지런히 배우도록 하여 큰 유학자가 되게 하였다. 중년 이후에 자식들에게 "내가 전일에 과거 공부하는 잘못을 면치 못한 것은 다만 구구하게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뜻이었다. 부모님을 여읜 지금에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다시 풍부(馮婦)처럼 팔뚝을 걷어붙이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는 짓20)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고 문을 닫은 채 한가로이 마음을 기르며 《논어(論語)》, 《맹자(孟子)》, 성리서(性理書) 등을 가져다 침잠하여 반복하여 읽고 이전에 연구하지 못한 것에 더욱 매진하였다. 매양 자제와 생도들에게 강의할 적에 그들을 위해서 요지를 말하되 매우 자세하고 상세하게 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병인년(1866, 고종3)에 해구(海寇)의 변고21)가 일어나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자 원근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공은 같은 군(郡) 사인(士人) 아무아무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규모가 대략 정해졌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악한 무리들이 매우 치성하니,22)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학(邪學)에 물들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도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 더구나 사학을 하는 자가 반드시 산다고 보장하지도 못하고 정도를 지키는 자가 꼭 죽는다고 보장하지도 못하는 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친족과 벗들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공이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책을 읽고 선을 밝히며 자신의 몸을 닦고 행실을 검속하여 광명정대한 곳에 그 몸을 우뚝이 세우는 것이 사람의 본분에 제일가는 사업이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속여서 구하여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본래 평탄한 길이 있다. 자신을 단속하고 학문에 힘쓰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사람들과 화합하는 것이 모두 복을 받는 길이다. 더구나 제사를 지내면 복이 내린다는 말이 《시경(詩經)》에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님에랴. 부처에게 시주하고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무당들에게 빌고 부적을 부치는 따위는 복을 받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만 있으니, 그것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망치고 가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너희들은 잘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계사년(1893, 고종30)에 본 고을 사또 이후(李侯)가 공을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샘이 흐르고 바위가 있는 고향의 승경지에 거처를 정한 다음 초가집을 짓고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에 도서(圖書)를 가득 채우고 소요하면서 유유자적하였으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에 대해 누가 말세의 완인(完人)23)이라고 하지 않겠으며,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일민(逸民)24)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금상 기해년(1899, 고종36) 12월 28일에 생을 마감하자, 부음을 듣고 사람들이 서로 조문하고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3월 무오에 본군(本郡) 용계면(龍溪面) 연하동(烟霞洞)의 충렬공(忠烈公) 묘소 아래 기슭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사(府使) 김후 택규(金侯宅圭)가 전의(奠儀)를 보냈고, 사방에서 와서 보았으며 여러 고을에서 다 모였다. 배위(配位)는 청풍 김씨(淸風金氏) 인성(麟性)의 따님으로, 모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계홍(啓宖)이고, 딸은 김방현(金邦鉉)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는 해미 곽씨(海美郭氏)로, 1남을 두었으니, 계상(啓尙)이다. 장방(長旁)은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규(性奎)이고, 딸은 조의환(曺毅煥)·신권성(愼權晟)·윤용주(尹瑢柱)·김보인(金輔仁)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은 1남을 두었으니, 수규(壽奎)이다. 성규는 아들 석룡(錫龍)을 두었다. 아, 내가 공의 두 아들과 친하게 지냈으니, 교제한 인연으로 공을 찾아뵙고 절하였다. 공은 풍채가 중후하고 고인의 풍모가 있었으며 말은 간중(簡重)하였으니, 한번 보면 덕이 있는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행실과 평생 이력은 충신(忠信)과 성실에서 벗어나지 않은 데다가 학문으로 성취하였으며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아 연마하고 펼쳐 나갔다. 다스림을 낼 적에는 광채가 있었으니, 아마 부자(夫子)가 이른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라는 것25)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의 수준이 점점 떨어져 위선이 판을 쳐서 선배들의 질박하고 성실한 기풍을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봄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의 두 아들은 노성하여 연세와 덕망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두 손자는 사우(師友)와 교유하여 나이가 젊고 학문에 힘쓰니, 공의 평소 가르침이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기에 당대에 보답 받지 못한 덕은 필시 앞으로 크게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계홍(啓宖)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선군(先君)을 아는 것이 그대만 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행장을 지어서 영원히 후대에 남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그 청을 받아들일 자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평소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公姓魏。諱衡權。字重之。號樂淸軒。始祖諱鏡。以唐學士東來。仕新羅事太宗。官大阿飱。封懷州君。子孫仍貫焉。懷州卽今之長興也。至諱菖珠。仕麗官侍中。世有聞人。閥閱煒燁。朝野載籍。班班可考。至諱种。在我太祖應順之際。有推戴功。四傳至諱由亨。官承文習讀。棄官歸鄕。與南秋江諸賢相友善。有唱酬錄。又三傳至諱德和。彦陽縣監。以扈聖錄勳。贈戶曹判書。又四傳至諱命德。師事屛溪尹先生。文學行義。爲士林所推重。號剩餘翁。有遺稿行于世。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師甲。號富溪。學襲家庭。隱德不仕。曾祖諱守澤。號黙窩。受學于族叔存齋先生之門。先生稱詡甚重。有遺集。祖諱榮震。號松灘。孝友著聞。考諱益祚。號惺惺齋。承襲家學。遊從士友。踐履行治。爲南服儒林之望。妣漆原尹氏在奎女。貞靜柔嘉。閫儀無闕。以純廟己卯九月十六日。生公于府北丹村之第。體相岐嶷。聲音弘亮。穎悟開爽。逈異凡常。王考松灘公每撫愛之曰。吾家前頭之望在此兒。及其就傅。不待程督而課日甚勤。至於討辭解義。行文綴句。通暢贍麗。無異老成。事二親。致誠致力。怡愉之色。洞屬之儀。不以須臾而有間。不以絲毫而有闕。十八丁外艱。哀毁過禮。羸瘠成疾。王考婁慰諭之。俾免傷生。事王考及慈幃。尤盡誠敬。適口之味。適身之物。左右竭蹶。未嘗見乏。辛丑丁王考憂。代父之痛。益不自勝。凡百情文。一日如禮。母夫人病。嘗欲鯉魚。公臨江號泣。忽有一鯉長尺許。躍八于網。持以供之。病乃得愈。人擬之於王祥之孝。丙寅遭內艱。執喪行禮。不以衰老而自恕。繭梅之容。柴骨之象。可以感動傍人。祗謁廟宇。展省墳墓。朔望春秋。隨時不廢。遇忌諱之辰。致散必謹。供具必親。慨然肅然以盡如在之誠。常恨早違所怙。未終其養。讀孟子終身慕之語。未嘗不三復沈咏。聲淚俱發。早師同郡南坡李公。得聞古人爲己之學。遵循娓娓惟恐不足。而間以餘日。及於功令近體之文。以爲父母門戶之望。是以詞藻藹蔚。累捷鄕解。而見屈於禮部。物論惜之。撫愛二弟。恩誼隆洽。庭除之間。無有間言。爲之擇師勤學。至成巨儒。中年以後。謂諸子曰。吾於前日。不免爲場屋之累者。只是區區供悅之意。今風樹孤露。靡所逮及。何爲而復揚馮婦之臂乎。自後不赴公車。杜門養閑。取論孟性理等書。沈潛反復。益究前日之所未究。每講子弟及生徒。爲之說道要義。縷縷詳悉。聽者感服。丙寅海寇之變。沁都失守。遠近汹汹。公與同郡士人某某謀起義旅。規模略定。聞亂靖而罷。甲午匪類大熾。公每戒人曰。與其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況邪者未必得生。正者未必得死耶。是以族戚知舊皆得免焉。公嘗戒子孫曰。讀書明善。修身飭行。卓然立其身於光明正大之地。此是人生本分第一事業。若其枉求非分。沾沾自足。吾所不取也。汝等戒之。又曰。人之獲福。自有坦道。謹身力學。孝於親忠於上和於衆。莫非福也。況祭祀降福之說。見於詩者非一乎。若其供佛飯僧巫覡符章之類。不惟無福而有禍。其爲敗世敎亂家法爲何如哉。汝等切宜識之。歲癸巳。本倅李侯以公孝行。剡薦于朝。除童蒙敎官。所居有邱林泉石之勝。結茅開逕。蒔花裁竹。四壁圖書。婆娑倘佯。其偉韻遐躅。孰不謂叔世之完人。南服之逸民乎。今上己亥十二月二十八日考終。聞者相弔曰。哲人萎矣。翌年三月戊午。葬于本郡龍溪面烟霞洞忠烈公墓下麓艮坐原。府倅金侯宅圭爲致奠儀。四方來觀。數郡畢集。配淸風金氏麟性女。擧一男一女。男啓宖。女適金邦鉉。繼配海美郭氏。擧一男。曰啓尙。長旁一男四女。男性奎女適曺毅煥愼權晟尹瑢柱金輔仁。次旁一男壽奎。性奎男錫龍。嗚乎。余與公二子相友。夤緣過從。拜公於床下。公體厚貌古。言辭簡重。一見可知爲有德君子。若其平生行治終始。履歷不出乎忠信誠慤之外。而濟之以學文師友之助。磨礱展拓。出治光采。庶幾乎夫子所謂從先進者矣。世級浸下。虛僞日滋。而先輩質慤之風。不可以復覩。俯仰今古。寧不慨然。公二子耆老年德。聲聞偉然。二孫遊從師友。年富力學。公平生之敎。可謂不墜於家。而不食之報必將有大來之日矣啓宖持家狀。泣而示余曰。知先君。孰有如吾子。願爲之狀行以垂不朽於來許也。余以殘劣。極知其非所承膺。而慕仰有素。豈忍辭諸。 휘는 경(鏡)으로 장흥 위씨(長興魏氏)의 시조는 위경(魏鏡)으로 당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으로 전해진다. 위경의 동래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신라 태종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였다는 설과,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하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위경은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상서시중(尙書侍中)에 이르렀으며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회주(장흥)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신라 말에 대각관시중(大覺官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하여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간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1604년(선조37)에 세 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2명, 2등은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 31명, 충근정량호성 공신 86명이다. 왕상(王祥)의 효성 진(晉)나라 때의 효자 왕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繼母)의 학대를 받으며 살았으나 늘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계모가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직접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 《예기》 〈옥조(玉藻)〉에 "거상할 적의 모습은 파리하고 실의해서, 낯빛의 모양은 근심스러우며, 보는 모양은 놀라서 다급하고 분명치 못하며, 말하는 모양은 낮고 미미하다.[喪容纍纍, 色容顚顚, 視容瞿瞿梅梅, 言容繭繭.]"라고 하였다. 기휘(忌諱)하는……것 《예기》 〈제의(祭義)〉에 "안에서 치재하고 밖에서 산재하여, 재계하는 날에 조상이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며, 그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뜻과 생각을 생각하며,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즐기던 것을 생각하여, 재계한 지 3일에 마침내 그 재계한 조상을 보게 된다.[祭義曰: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하였다.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 《중용》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성대하게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맹자(孟子)에……구절 《맹자》〈만장 상(萬章上)〉에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나니, 50세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것을 나는 대순에게서 보았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풍부(馮婦)처럼……짓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진(晉)나라의 풍부라는 사람이 호랑이를 잘 때려잡았는데 뒤에 마음을 바꾸어 선비가 되었다. 어느 날 들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호랑이를 산모퉁이에 몰아 놓고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가 풍부가 수레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맞이하니, 풍부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기뻐하였으나 선비들은 풍부가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孟子 盡心下》 병인년 해구(海寇)의 변고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프랑스의 로즈(Roze)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귀리에르(Guerriere)를 비롯하여 함대 7척과 6백 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14일 강화부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점령하였다. 갑오년에……치성하니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봉기를 이른다. 완인(完人)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화나 당쟁 같은 변란 속에서도 자신의 절조와 목숨을 모두 온전하게 지킨 사람을 가리킨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 활동한 유안세(劉安世)가 그런 인물이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났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일민(逸民) 뛰어난 학문과 덕행을 소유하고서도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부자(夫子)가……것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이르기를 "예악을 행함에 있어 선배들은 촌사람처럼 순박하였고 후배들은 군자처럼 문채가 나는데, 내가 만약 행한다면 나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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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정랑 죽림 황공 행장 吏曹正郞竹林黃公行狀 공의 휘는 기한(起漢)인데 후에 처원(處源)으로 개명하였다가 또 기원(基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응조(應肇), 호는 죽림(竹林), 장수(長水) 사람이다. 고(故) 상국(相國) 방촌(厖村) 휘 희(喜)의 후손이다. 선생은 열성공(烈成公) 휘 수신(守身)을 낳았고, 열성공은 장원군(長原君) 휘 신(愼)을, 장원군은 대사간(大司諫) 휘 성창(誠昌)을, 대사간은 현령(縣令) 휘 칙(則)을, 현령은 학생 휘 사민(師閔)을, 학생은 판서 휘 눌(訥)을, 판서는 참의(參議) 휘 천일(千鎰)을, 참의는 참판(參判) 휘 용립(龍立)을, 참판은 참판 휘 종익(宗翼)을 낳았으며, 참판은 충의위(忠義衛) 휘 하서(河瑞)를 낳았으니 하서가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자중(宇中), 조부의 휘 상곤(象坤)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유진(有鎭)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선비(先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이흥(以興)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190년, 우리 순조(純祖) 정축년(1817, 순조17)에 장흥(長興) 천포면(泉浦面)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기질이 특이하고 남달리 영특하였으므로 그를 본 사람들은 공이 큰일을 해내리라는 것을 알았다. 6세에 통정공(通政公)26)이 가족을 데리고 능주(綾州) 연화동(蓮花洞)으로 이사하였고, 10세에 마을 학당에서 배웠다. 어느 날 같이 배우는 자 가운데 이웃의 닭을 훔치기를 도모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자기 집의 송아지를 끌고 와 잡게 하였다. 같이 배우는 자 가운데 가난하여 서책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혹 학업을 그만두기까지 하니, 공이 몇 묘(畝)의 전답을 팔아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등 다소의 책을 구입하여 재실(齋室)에 두고서 보게 하였다. 그의 기량(氣量)과 풍도는 이러한 유가 많았다. 18세에 유씨(柳氏) 춘수(春樹)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헌종(憲宗) 5년 기해년(1839, 헌종5)에 정시(廷試)에 합격하였지만 공은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학업을 성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여가가 있으면 더욱 열심히 독서하였다. 경자년(1840, 헌종6)27)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842, 헌종8)에 효릉 별검(孝陵別檢)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던 날 동산과 연못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수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조경묘 영(肇慶廟令)으로 옮겼다. 무신년(1848, 헌종14)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도의 예(禮)를 지극히 하였다. 상기가 끝나자 노부인(老夫人)이 계시다는 이유로 벼슬하고자 하지 않았다. 무오년(1858, 철종9)에 강씨 부인의 병이 깊어짐을 근심하여 단지(斷指)의 정성으로 소생하게 하였다. 경신년(1860, 철종11)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어머니의 명으로 억지로 관직에 나아갔다. 임술년(1862, 철종13)에 철종대왕(哲宗大王)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친히 문신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또 응제(應製)에 삼정책(三政策)을 올려 기용(器用)과 복식은 토산품을 사용하고 외국에서 생산된 물건은 사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고,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다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864, 고종1)에 봉사(封事)를 올려 조경전(肇慶殿), 경기전(慶基殿)의 의물(儀物)을 개수하기를 청하였다. 이해 여름에 자인 현감(慈仁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치적이 있었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866)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도(江華島)를 함락하여 도성의 민심이 흉흉하여 대성(臺省)이 비니, 어떤 이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자, 공이 말하기를 "지방의 산관(散官)이라도 오히려 분문(奔問)하는 의리28)가 있다. 더구나 도성에서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변고를 만났는데 자기 한 몸만 빠져나가는 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스스로 요동하지 않으니, 당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정묘년(1867)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거상(居喪)하는 일에 나이 많은 것을 핑계로 스스로를 관대하게 하지 않았다. 상기가 끝나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여러 번 옮겨 정언(正言) 및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맡았다. 을해년(1875)에 외직으로 나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다. 무인년(1878)에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879) 3월 15일에 병으로 관아에서 졸하였다. 그때 아들 작(稓)이 관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4월 17일에 보성군(寶城郡) 도촌면(道村面) 용호동(龍湖洞) 마을 뒤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장흥(長興) 천포면(泉浦面) 화동(花洞) 연봉(鳶峯) 아래 호은공(湖隱公) 묘소의 좌측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방촌 상국(厖村相國)으로부터 대대로 청렴결백한 것으로 서로 계승하였다. 내가 관직 생활한 이후로 일찍이 물건 하나에 스스로 얽매여 우리 방촌 선조가 남기신 교훈을 저버린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가업을 꾸리기를 권유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산업(産業)을 자손에게 남겨주면 어떻게 자손들이 청렴결백하기를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일을 부탁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관직에 있을 때 남에게 청탁을 받은 적이 없는데, 지금 사제(私第)에 거처하면서 도리어 남의 청탁을 받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성품은 또 관간(寬簡)하여 평소 옆에서 어린아이가 울더라도 조금도 꾸짖거나 금하지 않았다. 하루는 서찰을 써서 책상 위에 두었는데, 아이가 그 위에 물을 엎질렀지만 조금도 화내는 기색이 없었고, 또 시속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종족에게 화목하며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군주에게는 충성을 다해 섬기고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니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칭찬이 자자하였다. 다만 출사한 지 40여 년 동안 하급 관료에 머물러 있었기에 명망과 지위가 드러나지 않고 자신의 뜻이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유감스럽겠는가. 公諱起漢。後改處源。又改基源。字應肇。號竹林長水人故相國厖村先生諱喜之后。先生生烈成公諱守身。烈成生長原君諱愼。長原生大司諫諱誠昌。大司諫生縣令諱則。縣令生學生諱師閔。學生生判書諱訥。判書生參議諱千鎰。參議生參判諱龍立。參判生參判諱宗翼。參判生忠義衛諱河瑞。卽公之高祖也。曾祖諱宇中。祖諱象坤。考諱有鎭。副護軍。妣晉州姜氏以興女。以崇禎一百九十年。我純祖丁丑。生公于長興泉浦面闢新洞。幼有異質。穎悟絶人。見者知其爲遠器。六歲。通政公挈移于綾州蓮花洞。十歲出就里塾。一日同學者謀攘隣雞。公曰何必攘人之物。遂牽其家犢。令屠之。同學之貧者。多艱於書冊。或至廢業公賣數畝田。具四子六經多少書。貯之齋室以資之。其氣量風義。多此類。十八歲聘夫人柳氏春樹女。憲宗五年己亥。中廷試。公以少年登科。學業未就爲憂。公私之暇。讀書愈苦。庚午除承文院正字。壬寅除孝陵別檢。到莅之日。見園池湮廢。修而新之。乙巳除成均館典籍。旋移肇慶廟令。戊申拜司憲府監察。以親老歸養。壬子丁外艱。哀禮備至。服闋以老夫人在堂。不肯從仕。戊午憂姜夫人疾病。血指得甦。庚申除司諫院正言。以親命黽勉就職。壬戌哲宗大王臨春臺。親試文臣。公居魁。又應製上三政策。請器用服飾。用土物。勿用異物。拜監察。旋爲禮曹正郞。移宣傳官。拜吏曹正郞。甲子上封事。請修肇慶慶基兩殿儀物。夏出莅慈仁縣監。有治績。乙丑拜司憲府持平。丙寅洋夷陷江都。都下恟恟。臺省爲空。或勸之歸鄕。公曰散官在外。尙有奔問之義。況在輦轂之下。遭此非常之變。而脫身自私者。豈臣子之道耶。終不自撓。時論多之。丁卯遭內艱。哀毁之節。不以耆艾自恕。服闋。拜禮曹佐郞。累遷正言及吏曹正郞。乙亥出爲黃山道察訪。戊寅拜開城府經歷。己卯三月十五日。病卒于官。時子稓輿櫬歸鄕。以四月十七日。葬于寶城郡道村面龍湖洞村后艮坐之原。後移葬于長興泉浦面花洞鳶峯之下。湖隱公墓左子坐之原。公嘗曰。吾家自厖村相國。世以淸白相承。吾自守官以來。未嘗以一物自累以負我厖村先祖貽謨云。或勸立産業。公笑曰以産業遺子孫。何如以淸白爲子孫計耶。在家時有人以事來囑。公曰。吾在官未嘗受人囑。今居私第而反爲人行囑耶。其人慚而退。性又寬簡。平居僮幼啼呼於側。略不呵禁。一日業札而置於席上。僮幼溺其上。小無怒色。又不爲時好所趨。嗚乎。公孝於父母。睦於宗族。信於朋友。事君忠莅民愛。所至皆有聲稱。但出身四十餘年。低廻下僚。名位不揚。已志不伸。其爲斯世之憾。爲何如哉。 통정공(通政公) 부호군을 지낸 부친 황유진(黃有鎭)의 품계가 통정대부이므로 이렇게 호칭한 듯하다. 경자년 원문은 '庚午'인데, 《승정원일기》 헌종 6년 7월 20일 괴원 분관(槐院分館) 기사에 근거하여 '午'를 '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분문(奔問)하는 의리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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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송암 오공 정려기 孝子松庵呉公旌閭記 효자는 고(故) 임진년의 충신 증(贈) 병조 참판(兵曹參判) 휘 방한(邦翰)의 8세손으로, 세상에 충효로 알려졌다. 효자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에게 병환이 있으면 곧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버이가 시킨 일을 처리할 때에는 뜻을 다해 받들어 따랐다.8살 때에 들녘에 나갔다가 부친이 직접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서 무더위를 무릅쓴 채 고생하시는 것을 걱정하여 몰래 주점으로 가 술을 사서 부친에게 드리려고 하자, 술집 여인이 그의 생각에 감동하여 좋은 안주까지 함께 주고 돈을 받지 않았다.14살 때에 형과 함께 가숙(家塾)에서 독서하였는데, 하루는 형에게 말하기를, "집이 이렇게 가난하여 늙으신 부모께서 몸소 힘든 일을 하시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자식으로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응당 직접 집안일을 주관해야만 형님께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좌우로 노역을 맡아서 남은 힘을 다 쏟아 내면서 집안의 형편이 점점 펴지고 변변찮은 음식일망정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가정을 이루었을 때에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 분가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리는 예절을 빠뜨린 적이 없었고, 모든 일은 반드시 부모님 일을 먼저하고 자신의 일은 나중에 하였다. 형제 다섯이 차례로 분가할 때마다 효자는 반드시 자신이 집기를 마련해 주었고, 형님 집에 비용을 분담시키거나 손상시키지 않게 하였다.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매달 자신이 15일의 음식을 바쳤고, 나머지 15일은 동생 셋이 각각 5일의 음식을 바쳤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하여 미담으로 삼을 정도였다. 모부인(母夫人)이 병에 걸려 매우 위독했을 때 효자가 손가락을 깨문 피로 다시 소생시켰으나 이틀이 지난 뒤에 끝내 일어나시지 못하자, 슬픔이 너무도 심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홀로 남은 부친을 모시는 데 더욱 정성을 다하여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니면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허전하고 적적하신 마음을 위로해 드렸고, 부친께서 좋아하셨던 옛 친구 분들을 힘껏 초청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초상을 집행하는 예절에 늙고 쇠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의례에 따라 마음을 다하였고,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상차(喪次 상주가 머무는 방)를 떠나지 않았으며, 하루걸러 묘소를 살폈다.그 형님을 섬김에 마치 엄한 부친을 섬기는 것처럼 하여 진퇴와 출입,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여쭈어 행하였고,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슬픔이 자못 심하였지만, 상례(喪禮)에 관한 모든 일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집행하고 집안사람이나 자제들에게 맡긴 적이 없었다.형의 아들이 혼사를 의논하면서 혼례 물품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훗날로 미루고자 하자, 효자가 그를 위해 몸소 모든 물품들을 마련하여 혼례를 거행하였고, 이러한 마음을 친족과 인척, 벗들에게까지 미루어서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는데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이 있었다.아,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풍속이 나빠져 진실한 마음이 날로 야박해져 가지만, 효자와 같은 참된 마음과 진실한 행실을 지닌 사람은 오늘날 세상에 옛사람이라 이를 만하였으니, 종친과 친족들은 효성스럽다고 일컬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손하다고 칭찬하였으며, 아름다운 소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정려(旌閭)의 표창이 성대하고 장중하게 내려왔다. 골짜기에 핀 난초의 향기와 깊은 못에서 우는 학의 울음소리는 끝내 절로 숨길 수 없으니, 그 이치가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는가.그의 맏아들 장섭(長燮)이, 내가 부친과 종유(從遊)한 날이 오래되고 부친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가장 익숙하다고 하여 한마디 말로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孝子故壬辰忠臣贈兵曹叅判諱邦翰八世孫。世以忠孝著聞。孝子幼有至性。親有疾。輒涕泣廢食。執使令。極意承順。八歲出野。見其父躬耕。悶其冒暑作苦。竊往店肆。將沽酒以餉之。酒媼感其意。輒具佳肴以與之。不受其直。十四歲與其兄。讀書家塾。一日告兄曰。家貧如此。而老親親執勞役。此豈人子安心處乎。吾當躬幹家務。兄主可以讀書。自是左右服勞。靡遺餘力。使家力漸舒。而菽水有賴。及有室。以親命分爨。而晨昏之節。未嘗廢闕。凡百事務。必先幹父。而後遂及於私。兄弟五人。漸次分爨。孝子必自備什物以給。使兄家無分損之費。其養親也每月自供十五日之饌。餘十五日。弟三人各供五日。鄕里傳以爲美談。母夫人遘疾甚危。孝子血指得甦。居二日竟至不起。哀毁過甚。幾於滅性。侍偏嚴。尤盡其誠。非甚故。不離側。以慰其窮寂。凡故舊所喜。極力招致。以悅親意。及遭故執喪之節。不以耆衰自恕。一遵情文。三年身不離喪次。間日展墓。事其兄如嚴父。進退出入。家事巨細。必稟而行。及兄歿。哀戚殊甚。喪事凡百。必自親執。未嘗委之於家人子弟。兄之子將議昏。以昏具未備。欲退後。孝子爲之躬辦凡具以行之。推以至於族戚朋友。賙窮恤匱。弔死問生。曲有恩意。嗚乎。世降俗下。眞情日薄。而如孝子之實心實行。可謂今世之古人也。宗族稱孝。鄉黨稱弟。以至令聞上徹。旌褒隆重。谷蘭之香。皐鶴之音。終有不得自掩者。其理豈不信然。其胤子長燮。以余從遊日久。見聞最熟。請一言以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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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기 晚翠軒訣 천하의 식물들은 똑같지만, 그 종류에 따라 품평하여 등급을 나눈다면 하루 이틀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고, 한두 달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어 그 등급이 혹 서로 두 배나 다섯 배가 되기도 하고 혹 서로 열 배나 백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욕수(蓐收)71)가 절기를 살피고 매서운 서리가 한껏 맹위를 떨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저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던 식물들은 시름시름 빛을 잃어가고, 꺾이듯 생기를 잃어간다. 이러한 시기에 한 때의 위세에 뜻을 빼앗기지 않고, 큰 동요에 절개를 바꾸지 않은 채 울울창창하여 우뚝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은 과연 어떤 식물인가? 아, 세한(歲寒)에 대한 우리 부자의 탄식72)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이 지나도록 다 사라지지 않는 뜻을 갖게 한다.대저 절개는 혹 만년에 변하기도 하고, 행실은 혹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폐해지기도 하며, 일은 혹 마지막에 실패하기도 하니, 이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근심하는 것이다. 더욱이 위급하거나 급박한 때에 헤아릴 수 없는 재앙으로 겁박한다면 의기소침하여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주 선생(朱先生)이 말하기를, "만약 진실로 깨달음이 있어 참되게 공부한 것이 있다면 쇠로 만든 바퀴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라도 또한 어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소 한가한 때에 절차탁마하여 담금질하고 단련하더라도 위급한 때에 힘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한가로이 담소나 나누고 무리지어 논쟁이나 하면서 무르고 연약한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임에랴."하였으니, 이 말은 부자의 탄식을 드러내 밝혀서 한 해의 정경이 추워지기 전에 미리 수양하게 한 것이다.나의 벗 만취자(晚翠子)는 어렸을 때나 장성했을 때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그 고상한 뜻과 법도 있는 풍모가 충분히 믿을 만한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며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만취(晚翠)' 두 글자를 문미에 표시해 두고 늘 바라보았다. 이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가 드러내 탄미했던 은미하고 깊은 뜻을 알고서 오늘날 궁구해야 할 결말에 적합한 뜻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니,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것이 비록 지극히 덧없다 하더라도 나의 법을 행하고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찌 여유롭지 않겠는가.나는 갯버들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 기운만 바라봐도 시들어 버리는 것에 대한 경계가 절실하였으니, 만취자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아서 겨우살이나 덩굴 식물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하는 것처럼 풍상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호를 받기를 바랄 뿐이다. 天下之植物一也。然以其彙類而品第之。則有得一日二日之春者。有得一月二月之春者。或相倍蓰。或相什佰。而至於蓐收按節。嚴霜肆威。則彼林林叢叢。無不苶然而失色。摧然而喪氣矣。于斯時也。不爲時威所奪。不爲衆撓所移。而欝欝蒼蒼。挻然自守者果。何物也。噫。吾夫子歲寒之歎。令人有千載不盡之意。夫節或移於晚。行或廢於久。事或失於終。此人之所同患也。況在顚沛急遽之際。而劫之以不測之禍。其有不銷屈者乎。朱先生曰。若使眞有所見。實有下功夫處。則便有鈇輪。頂上轉旋。如何動得他。又曰。平居暇日。琢磨淬礪。緩急之際。未易爲力。況游談聚議習爲軟熟者乎。此語是發明夫子之嘆。使之豫養於歲色未寒之前也。余友晚翠子。幼壯孝悌。老而好學。其志尚風儀。有足可恃。而猶且歉斂然。恐其不及。以晚翠二字。標諸楣而常目。可謂知先聖先師發歎微奥之旨。而得今日着題究竟之義也。世路遭遇雖極無常。而所以行吾法遂吾志者。豈不綽綽然耶。佘以蒲柳殘質。常切望秋之戒。企見不棄於晚翠子。如蔦蘿之依松柏而得庇風霜之萬一耳。 욕수(蓐收)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서방(西方)의 신(神)으로,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를 주관한다. 소호(少皥) 혹은 금신(金神)이라고도 한다. 《禮記 卷5 月令》 세한(歲寒)에……탄식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말하여 혼란한 세상이나 곤궁한 때를 당하여야 군자의 변치 않는 절개를 볼 수 있다고 탄식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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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기 臺隱記 죽수(竹樹) 관아 남쪽 10리에 연봉(鳶峯)이 있고, 연봉 아래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곳이 가승동(佳勝洞)87)이다. 연봉의 중간 허리쯤에 대(臺)가 있는데, 너비는 수십 보가 되고, 높이는 수십 길이나 된다. 구불구불 이어져 오던 골짜기가 평평하게 멈추고, 깊고 으슥한 정경이 툭 트이면서 뭇 산들이 형상을 바치고, 수많은 시내가 모여드는 이곳이 바로 정공(鄭公)의 은일처[薖軸]이다.공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시작하여 사조(詞藻)가 아름답고 뛰어났는데, 여러 번 향시(鄕試)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빛나는 문장을 도로 거두어들이고 몸이 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삼을 기르고 기장을 심어 여러 식구들에게 제공했고, 경전 공부에 힘쓰고 문장을 닦아 후학들에게 응대하였으며, 본성에 맡기고 분수를 지키며 영리를 추구하거나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그 뛰어난 풍도와 빼어난 자취만은 잠겨 있어도 밝게 보이고 감추어도 드러나서 사방의 선비들이 대에서 은둔하고 있는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공에 대해 말할 때면 반드시 '대은(臺隱)'이라 일컬었으니, 그 지역을 일컫는 것이 그 사람을 일컫게 된 것이다.아, 사람은 진실로 한 시대에 뛰어난 사람이고, 지역도 한 지역에서 뛰어난 곳이니, 사람이 지역과 부합하고, 경계가 성정과 어울려서 서로 맞아 떨어질 수 없고, 서로 필요로 하여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백세가 지난 뒤에 이 마을을 지나면서 이 대에 임하는 자들 중에 어느 누가 백세 전에 공이 존재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삼봉(三峯)의 천 길 높이에서 위승경(魏升卿)의 문장을 볼 수 있고, 비수(肥水)의 백 리 굽이에서 동소남(董召南)의 의로운 행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88) 竹樹治南十里。有鳶峯。峯之下閭閻櫛比者。是佳勝洞。峯之中腰有臺。廣可數十武。高可數十尋。逶迤而平停。窈窕而軒敞。羣峀獻狀。百川朝堂。卽鄭公薖軸也。公早業功令。詞藻藹蔚。累舉鄉解。不利禮部。回光斂輝。身不出臺外一步。藝麻種黍以供百口。劬經績文以應後學。任眞推分。無營無欲。惟其偉韻逸躅。潛昭闇章。而四方之士。無不知公之隱乎臺矣。是以語及於公。必以臺隱稱之。稱其地。所以稱其人也。嗚乎。人固一時之勝。地亦一方之勝。人與地符。境與情稱。相得而不可離。相須而不可闕。百世之下。過是洞而臨是臺者。誰不知公之在於百世之上乎。三峯千仞。可以見魏升鄕之文章。肥水百里。可以想董召南之行義。 가승동(佳勝洞) 현 전남 화순군 춘양면 가봉리(佳鳳里)로, 예전 가승동(佳勝洞) 마을의 가(佳)자와 봉무정(鳳舞亭)마을의 봉(鳳)자를 합하여 가봉리라 하였다. 삼봉(三峯)의……것이다 성당(盛唐) 시인 잠삼(岑参)은 장안(長安)에 있을 때에 〈송위승경(送魏升卿)〉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고 동도(東都)로 돌아가는 위승경(魏升卿)의 문장이 삼봉(三峯)과 같다고 칭송하고, 한유(韓愈)는 〈차재동생행(差哉蕫生行)〉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회수(淮水)와 비수(淝水) 사이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동소남(董邵南)을 칭송하였는데, 이러한 옛 일에 견주어 연봉((鳶峯)과 대(臺)를 보면 위승경처럼 뛰어난 문장과 동소남만큼이나 훌륭한 행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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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정공 묘지명 莘齋鄭公墓誌銘 공의 휘는 의상(義相), 자는 사균(士均), 호는 신재(莘齋)이다. 정씨(鄭氏)는 본래 하동(河東) 사람이다. 고려 때 밀직 부사(密直副使) 국룡(國龍)이 그 비조이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지영(之英)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여해(汝諧)를 낳았으니 지평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휘 기령(箕齡)은 호가 양심재(養心齋)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문원(文黿)인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인채(仁采)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조부는 휘 석(錫)인데, 호가 반산(盤山)이다. 부친은 휘 양무(陽武)인데, 니, 문장과 행의(行誼)로 세상에 이름났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기유년(1789, 정조13) 7월 28일에 능주(綾州)의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평범한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나아가고 물러남과 응대하는 예절이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어른에게 공경하였으며 자상하고 민첩함이 어른과 같았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을 올리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공은 집안일을 잘 주간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몸에 맞거나 입에 맞게 하여 어버이가 충분히 기뻐하시도록 힘썼다.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은혜로웠다. 전처와 후처가 모두 자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온 고을에 두루 거처하였으니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시공지친(緦功之親)45)하는 자가 수십 호였다. 사람이 태어나면 축하하고 죽으면 위문하였으며, 흉년에 구휼하여 상황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고 은의(恩意)가 두루 미쳤다.공은 몸가짐[容儀]이 매우 위엄이 있어, 보는 자가 자연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마치 술을 마시고 스스로 취한 듯하였다. 세상일을 잘 알고 물정에 해박하였으며, 말을 하는 데 장점이 있었고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났다. 이 때문에 공이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일을 할 때면 모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향리에서 언쟁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과 복잡하게 뒤얽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비록 완강하여 교화하기 어렵고 완악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도 공의 말을 들으면 어느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화합하게 한 훈계46)를 모방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고을에서 거처하던 위의47)를 따랐다. 선조인 둔재(遯齋) 선생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편집한 다음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불러 효도하고 우애 있게 하라고 경계하고, 친족들을 불러 화목하게 지내라고 경계하였다. 또 가까이 사는 붕우를 맞이하여 사람마다 영결을 고하였다. 이윽고 자리에 나아가 별세하였으니, 바로 갑자년(1864, 고종1) 11월 24일이다. 이곡(耳谷)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풍류치(風流峙)에 있는 선영의 부건(負乾) 언덕으로 이장하였다.배위(配位)는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백환(百煥), 차자는 주환(周煥), 딸은 양달환(梁達煥)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재한(在翰), 차방(次房)은 후사가 없어 종형(從兄) 명환(明煥)의 아들 재수(在洙)를 양자로 삼았다.아, 공은 우리 고을 선진(先進)이며 숙유(宿儒)이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우레 같은 높은 풍의(風義)를 익숙히 들었으나 가난과 병마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공은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뒤에 재한(在翰)과 교유하게 되고, 지금 또 유장(遺狀)을 얻어서 읽어 보니, 더욱 당시에 듣지 못한 일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지금 아득히 세상이 바뀌어 옛 것은 다 사라졌지만 오직 이 어른의 발걸음이 닿았던 촌락의 풍속은 순후하고 예스러워 현송(絃誦)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당시에 그분이 창도(唱導)한 힘이 아니겠는가. 아, 공경할 만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둔재 선생의 고가요 遯齋古家능주의 명문가일세. 綾陽名門선조 뜻 계승해 헛되지 않으니 繼述不空전형이 보존되었네. 典刑斯存전야에서 광채를 숨겼고 潛光畎畝산속에서 한가로이 지냈네. 養閒林樊그 유풍과 여운 遺風餘韻사랑스러워 할 만하네. 俾也可愛 公諱義相。字士均。號莘齋。鄭氏本河東人。勝朝密直副使諱國龍。其鼻祖也。入我朝。有諱之英。官縣監。生諱汝諧持平。受學于佔畢齋金先生。與一蠹寒暄爲道義交。世稱遯齋先生。諱箕齡號養心齋。中進士。皆其顯祖也。高祖諱文黿。贈參議曾祖諱仁采。壽陞正憲。祖諱錫號盤山。考諱陽武。以文行著世。妣長澤高氏命復女。以正宗己酉七月二十八日。生公于綾之華山里。幼而岐嶷。不類凡常。進退唯諾。出入孝弟。委曲敏贍。一如成人。家素貧。菽水戛戛。公極幹家務以就其養。便身適口。務盡其歡。御家衆。嚴而有恩。前後室皆有子女。而內外斬斬。無有間言。宗族甚繁。遍於一鄕。而緦功之親。同住一巷者。數十戶。生死問唁。飢饉賙恤。隨時無闕。恩意浹洽。公容儀甚嚴。見之者自然畏憚然接人酬語。溫溫諄諄。如飮醇自醉。諳於世故。該於物情。長於言辭。優於幹理。是以語人無不服。作事無不集。鄕里間。有爭辨而未平者。有盤錯而未解者。無不待公咨決。雖强梗難化頑忍無恥者。聽公言。不覺赧然愧屈。立門規。做程子合族之訓。說洞約。遵呂氏居鄕之儀。先朝遯齋先生遺稿。蒐輯編摩。刊行於世。臨終招二子。戒以孝友。招諸族戒以敦睦。又邀居近朋友。面面告訣。已而就枕而逝。卽甲子十一月二十四日也。葬耳谷。後移于風流峙先壟負乾原。配淸道金氏相俊女。系配金海金氏某女。有二男一女。長百煥次周煥。女適梁達煥。長房孫在翰。次房無嗣。以從兄明煥子在洙爲後。嗚呼。公吾鄕先進宿儒也。余在弱冠。艶聞風義。如雷灌耳。但貧病苟活。未得一就拜床。而因循之頃。公已千古矣。後得與在翰遊從。今又得其遺狀而請之。益聞當日之所未聞。方今桑海茫茫。舊物掃地。而惟是杖屨所經。村俗淳古。絃誦不絶。此非當日倡遵之力耶。吁可敬也。銘曰。遯齋古家。綾陽名門。繼述不空。典刑斯存。潛光畝畝。養閒林樊。遺風餘韻。俾也可諼。 시공지친(緦功之親) 시마친(緦麻親)과 대공친(大功親), 소공친(小功親)을 이른다. 정자(程子)가……훈계 정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하였다. 《近思錄》 여씨(呂氏)가……위의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을 만들었는데 이를 여씨향약(呂氏鄕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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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 매곡 최공 묘지명 察訪梅谷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광(銧), 자는 중백(重伯), 호는 매곡(梅谷),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甫相) 흔(昕)이 그 시조이다. 휘 지몽(知夢)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는데,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난계(蘭溪)이고, 관직은 참판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상덕재(尙德齋)로, 교리를 지냈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결(潔)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조부는 휘 경남(慶男)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부친은 휘 정민(廷敏)인데,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이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경우(閔敬雨)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1월 13일에 장흥(長興) 와리(瓦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기개가 빼어나고 성정과 도량이 온화하고 순량하였다. 집안에서는 부모를 섬기고 나가서는 어른을 섬겼다. 말은 마치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고 몸가짐은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여 마침내 명경(明經)으로 과거 공부하여 기쁘게 해 드리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 낙방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시상(時象)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마침내 은거하여 응시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달아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으니 나이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때문에 과거 공부를 접고자 하니, 친척이 권유하여 말하기를 "비록 기쁘게 해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책에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례에 따라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계사년(1653, 효종4)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업무를 본 지 한 해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에서 능주(綾州)의 가옥치(佳玉峙)로 이사하였다. 이는 고요한 곳에서 한가롭게 지낼 계책이었으니, 옛 벗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교유하였다.기유년(1669, 현종10) 6월 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능주의 서쪽 오리동(五利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후장(金厚璋)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순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동망(東望), 차자는 동로(東老), 삼남은 동효(東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문룡(鄭門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온갖 고생을 하였지만 아름다운 광채를 간직하였고, 70세에 이르러 비로소 찰방 한 직임을 받고 그쳤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것이 어찌 공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잘되는 보응(報應)은 마땅히 누리는 때가 있을 것이니, 최씨 후손은 힘쓸지어다.8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하늘에 달렸고 遇不遇天얻고 얻지 못함은 명에 달렸네. 得不得命이 때문에 군자는 是以君子천명을 즐거워하고 명을 편안하게 여기네. 樂天而安命 公姓崔。諱銧。字重伯。號梅谷。貫朗州。新羅元輔昕。其始祖也。至諱知夢。事麗太祖。封東萊侯。諡敏休。至諱安雨。入我朝。軍器寺小監。六傳而諱湫號蘭溪。官參判。再傳而諱致湖號尙德齋。校理。於公爲高祖。曾祖諱潔。典牲署參奉。祖諱慶男。禦侮將軍。考諱廷敏。訓鍊奉事。妣驪興閔氏敬雨女。以萬曆己丑正月十三日。生公于長興之瓦里。氣宇秀爽。性度溫良。入事父母。出事長上。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性勤讀書。手不釋卷。嘗念家貧親老無以爲養。遂業明經爲供歡計。累擧鄕解。輒屈禮部。當光海時。見時象不佳。遂隱不赴試。繼而連遭內外艱。服闋。年己耆艾。因欲廢擧。親戚强之曰。雖無獻悅之地。獨不爲門戶計耶。己丑擢第。例授奉常寺直長。癸巳除栗峯道察訪。視職歲餘。以老謝歸。自長興移寓于綾州之住玉峙。盖爲就靜養閒計也。與知舊士友。文酒相從。己酉六月十日卒。得年八十一。葬于綾之西五利洞前麓酉坐原。配金海金氏厚璋女。婦德純至。擧三男一女。長東望次東老次東曉。女適河東鄭文龍。孫以下不錄。嗚呼。公積若累艱。蓄章儲輝。至於行年七十。而始得攻駒一職而止。位不稱德。豈有如公者乎。然不食之報。當有享受之日。崔氏其勉乎哉。八世孫昌柱南杓奉家狀。來謁誌銘之文。銘曰。遇不遇天。得不得命。是以君子。樂天而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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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성재 고공 묘지명 通政大夫惺齋高公墓誌銘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진오(鎭俉), 자는 성순(聖巡), 호는 성재(惺齋)이니,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계보는 장흥(長興)에서 나왔는데, 신라와 고려 사이에 대대로 작위와 공훈으로 이름이 났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휘 가한(可漢)에 이르렀는데, 호가 봉강(鳳岡)으로,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명림(命霖), 호는 경재(敬齋)인데,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의 휘는 산택(山宅)이니,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은 휘 세은(世殷), 호가 담암(澹庵)인데, 효우로 칭송을 받았다. 모친은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이영(李榮)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무오년(1798, 정조22) 2월 5일에 공이 이지촌(鯉池村)에서 태어났다.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부지런히 일하고 봉양하여 몸에 편안 것은 다 바쳤고, 평소 모친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숙사(塾舍)에 있을 때면 날마다 반드시 세 번 문안을 드렸다. 모친에게 병환이 있으면 몹시 근심하여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다른 일은 제쳐 두고 모친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장례의 모든 절차를 갖추어 반드시 성실하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다. 중년에 개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논어》, 《맹자》,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의 책들을 가지고 주야(晝夜)로 연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보이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들리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48)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제일의 방법이니, 잠시라도 소홀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 붙여 놓고서 늘 보았다. 규문을 정돈하고 자손을 가르침에 화평하면서도 은혜로웠으며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친척과 친구의 자손 가운데 고아가 되어 혼인하지 못하고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주어 혼인할 시기를 놓치거나 배우는 때를 놓치는 탄식이 없게 하였다. 흉년에는 그의 도움으로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무진년(1868, 고종5) 1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지(鯉池) 왼쪽 산기슭 원봉(圓峯)의 아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동일(李東一)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제문(濟文), 제옥(濟玉), 제식(濟植)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남호(李南鎬), 광산(光山) 이치호(李致鎬), 이천(利川) 서학규(徐學奎), 남평(南平) 문영욱(文永郁)에게 출가하였다. 장방(長房)은 2남이니, 황(榥)과 모(模)이다. 이방(二房)은 3남이니, 용주(容柱), 헌주(憲柱), 만주(萬柱)이다. 삼방(三房)은 1남이니 기주(麒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광무(光茂)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늘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惺惺維何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한 것일세. 戒愼恐懼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大本旣立온갖 선이 갖추어지네. 萬善斯具멀고 외진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婆娑遐隅세상과 서로 잊었네. 與世相忘넉 자의 무덤이 있으니 圓峯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維藏 公姓高。諱鎭俉。字聖巡。號惺齋。壽階通政。系出長興。羅麗間。世著爵勳。至諱臣傳。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司憲府持平。至諱可漢號鳳岡。卽公之高祖也。曾祖諱命霖號敬齋。文行著世。祖諱山宅。有隱德。考諱世殷號澹庵。孝友見稱。妣光山李氏榮女。正宗戊午二月五日。公生于鯉池村。早失所怙。以未得逮養爲終身恨。事母夫人。服勤就養。便身畢給。平居未嘗離側。若在塾舍。則日必三省。有疾極其憂。不就寢席。不御酒肉。舍置餘事。惟以迎合爲急。遭故。哀毁罔極。絶而復蘇。送終凡具。必誠無憾。早業功令。文詞夙就。中年慨然有志乎爲已之學。將論孟心經近思錄及性理諸書。晝夜硏究。嘗曰。恐懼不睹。戒愼不聞。此是端本第一法。不可斯須而忽忘。書諸座側以常目焉。修整閨門。敎誨子孫。和而有恩。嚴而有法。親戚知舊。有孤而未婚貧而未學者。爲之助力。俾無失時失業之歎。遇饑歲。待以擧火者爲不少。戊辰正月十一日卒于正寢。葬鯉池左麓圓峯下子坐原。配全州李氏東一女。有三男四女。濟文濟玉濟植。女適光山李南鎬光山李致鎬利川徐學奎南平文永郁。長房二男榥模。二房三男容柱憲柱萬柱。三房一男麒柱。以下不錄。曾孫光茂以家狀。謁誌銘之文。銘曰。惺惺維何。戒愼恐懼。大本旣立。萬善斯具。婆娑遐隅。與世相忘。圓峯四尺。君子維藏。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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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오【재희】에게 답함 答文敬五【載熙】 서신을 받은 후에 며칠이 지났는데 한가로이 거처하는 체후가 계속해서 몹시 좋고 하부(下部)의 뜻밖에 생긴 질병도 속히 절로 낫기를 거듭 바랍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편지에서 '분을 내어 뛰어오르고, 떨쳐서 빨리 일어난다.【發憤勇躍, 奮迅興起】'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학문(學問)의 본령(本領)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릇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을 새기는 것처럼 될 것이니 어찌 근거하여 지킬 만 한 바가 있겠습니까? 또 '위태위태하면79) 나아가 편안할 수가 없고, 무미건조하고 껄끄러우면 즐길만한 맛이 없다.【危殆捏扤, 無可卽之安, 枯燥生澁, 無可嗜之味】'라고 하셨는데 이는 함양(涵養)이 미숙(未熟)하여 밝지 않음을 끝까지 구하면서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무릇 독서(讀書)는 진실로 궁리(窮理)의 일단입니다. 그러나 종일토록 고달프게하면서 정신이 피폐해지면 또한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문장의 단과 마디를 따라서 끝까지 궁구해 파헤쳐보면 십분 분명해질 것입니다. 거듭 남은 힘이 있으면 단정하고 고요하게 앉아서 정신(精神)을 모으고 뜻을 오로지하면 이것이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주자(朱子)께서, '반나절은 독서하고 반나절은 정좌한다.【半日讀書, 半日靜坐】'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또한 날마다 생활하는 모든 사항에 의리(義理)를 다할 수 있도록 힘쓰고 조금도 구차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는 폐단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쌓여서 이어지고 그치지 않는다면 선한 힘이 점점 확장되고 악한 힘은 점점 줄어들어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른바, '안과 밖, 손님과 주인의 구분【內外賓主之分】'80)이니 대처할 방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이 일에 대하여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한나라의 힘은 본래 초나라를 상대하기에 부족하였지만 고조(高祖)가 관중(關中)을 평정함으로써 먼저 근본을 보존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계책을 썼습니다. 또한 모신(謀臣)과 맹장(猛將)으로 하여 위(魏) 나라를 치고 조(趙) 나라를 공격하여 그 손과 발을 잘라버렸더니 항우(項羽)는 스스로 무너졌던 것입니다. 만약 고조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서 갑작스럽게 항우를 공격하였다면, 항우를 반드시 이길 보장은 없고 단지 자신의 멸망만 자초하였을 것입니다. 무릇 오직 은미한 마음과 충분하지 못한 힘으로 그 습관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오래된 폐단과 단단하게 굳은 삿된 것들이 사방에서 흘러나와 뻣뻣하여【倔强】 복종하지 않게 되리니 마치 살아 생동하는 용과 호랑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자 문하의 여러 자제들은 오직 안자(顔子)의 학문이 건도(乾道)에 속하며 염자(冉子) 이하로는 모두 경서(敬恕)를 지양(持養)하는 사이를 종사함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서로 깊이 그리워하고 있기에, 어리석은 견해를 망령되이 보내드립니다. 書後有日。更請齋居候節。連護茂謐。下部無妄。趁早勿藥。懸溯無任。所云發憤勇躍。奮迅興起云者。此是爲學問本領。不然凡所云爲。無非脂畵氷鏤。何足有所據守哉。又云危殆捏扤。無可卽之安。枯燥生澁。無可嗜之味。此是涵養未熟窮索未明之致也。夫讀書固是窮理之一端。然終日矻矻。疲獘精神。亦無益也。須逐段逐節。窮覈到底。截斷得十分分明。而更於餘力。端莊靜坐。使精神注泊。志慮精專。此是端本淸源太上法。朱子所謂半日讀書。半日靜坐者。正此意也。且於日用凡百。務盡義理。不要有一毫苟且自欺之獘。積以歲月。接續不綴。則善力漸長。惡力漸縮。而張子所謂內外賓主之分者。可以知所處矣。愚嘗謂此事如漢楚之交爭。漢之力。本不足以敵楚。而高祖定關中。先爲存本固根之計。又使謀臣猛將。擊魏攻趙。剪除其手足。而羽已自獘矣。若使高祖不量其力。而徑欲攻羽。則羽未必勝。而適以自速滅亡也。夫以惟微之心。未充之力。而欲祛其習。則久放蔽累膠固之私。滲漏四出。倔强不服。如生龍活虎也。是以孔門諸子惟顔子之學。爲屬乾道。而自冉子以下。皆不免從事於敬恕持養之間。此蓋可見也。相向之深。妄輸愚見。 위태위태하면 원문은 '올날(扤捏)'이다. 《서경》 〈주서(周書) 진서(秦誓)〉의 끝에 진나라 목공(穆公)이 건숙(蹇叔)의 말을 따르지 않고 다른 신하의 말을 듣고서 정(鄭)나라를 쳤다가 패배하고 난 뒤 뉘우치면서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안과 밖, 손님과 주인의 구분 이 말은 《논어집주》 〈옹야〉 5장 장하주에서 장재(張載)가, "학문을 시작하는 요점은 '삼월불위(三月不違)'와 '일월지언(日月至焉)' 중에서 무엇이 안이고 밖인지와 무엇이 손님이고 주인인지의 차이를 알아야하는 것이다.【始學之要, 當知三月不違, 與日月至焉, 內外賓主之辨.】"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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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열에게 써서 주다 書贈魏士悅 공자가 말하기를, "자제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54)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집안일이 번다하면 학문을 하는데 방해가 되니, 이는 본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힘써 공부하는 실제의 바탕이 되니, 매사에 도리를 간파하여 쉽게 지나쳐버리지 말고 다시 그 사이에서 평소의 병통을 간파하여 통렬하게 잘라 제거한다면 학문을 하는 방도로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만약 벗어나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배척해 버리려는 생각이 생기면 이치와 일이 도리어 둘로 나뉘게 될 것이니, 책을 읽더라도 또한 사용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55)라고 하였다.이는 일상생활에서 자제의 직분에 제일가는 말이기에 나는 젊어서부터 이 말을 매우 아끼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또한 하루도 실제로 여기에 힘을 쓴 적이 없어 머리가 희도록 성취함이 없는 데 이르고서야 마침내 인생의 끝없는 회한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위 사문(魏斯文) 사열(士悅)이 바야흐로 독로(篤老 70세 이상의 노인) 아래에서 집안일을 주관하면서 책을 읽어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는 말을 듣고 부족하나마 공자와 주자의 두 문단의 말을 외어 알려 준다. 사열은 시험 삼아 이것을 착실하게 체험하고 감당하여 오래오래 쌓아서 하루아침에 성대하게 효과를 보게 된다면 번거롭더라도 보잘것없는 적막한 물가로 소식을 전해주어 평생토록 성취하지 못한 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바란다. 孔子曰。弟子入則孝。出則弟。謹而信。沈愛衆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朱子曰。家務叢委。妨於學問。此固無可奈何。然只此便是用功實地。每事看得道理。不令容易放過。更於其間。看得平日病痛。痛加剪除。爲學之道。何以加此。若起一脫去之心。生一排遣之念。則理事却成兩截。讀書亦無用處矣。此是說爲人子弟日用職分第一語也。余自少也。未嘗不酷愛此語。而亦未有一日實用力於此。以至白首無成。竟抱人生無窮之恨。今聞魏斯文士悅。方在篤老下。而幹蠱讀書。有不可偏廢。聊誦孔朱語二段以告之。願士悅試於此着實體當。久久積累。至於一朝而有沛然見效。則煩爲寄聲於區區寂寞之濱。以慰此平生未就之意也。 자제들은……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집안일이……것이다 주희(朱熹)가 60세 때 진공석(陳孔碩)에게 답한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朱子大全 卷49 答陳膚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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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 원경의 자설 李生元敬字說 이생(李生) 기일(基一)이 원경(元敬)을 표덕(表德 자(字))으로 삼았으니, 내가 일찍이 명명해 준 것이다. 하루는 그에 대한 설(說)을 지어 줄 것을 청하기에 그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음에도 오히려 학문에 힘쓰고자 하는 뜻을 잊지 않는 것을 가엾게 여겨 삼가 '일(一)'에 부응하는 말을 들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지어 보낸다.아, '일'의 뜻은 한 가지가 아니다. 순수하여 섞임이 없는 것을 '일'이라고 이르니, 겨우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이나 망령됨이 있다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시종일관 간단(間斷)이 없는 것을 '일'이라고 이르니, 겨우 눈을 한 번 깜박이거나 숨을 한 번 쉬는 짧은 시간이라도 간단함이 있으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빠뜨린 것 없이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일'이라고 이르니, 만 가지 선 가운데에 한 가지 선이라도 갖추지 않으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이것은 천지조화의 근원이며, 성신(聖神)이 신묘하게 작용하는 본원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고 이것을 체득하게 하는 것은 오직 '경(敬)'일 뿐이다. '경'은 '주일(主一)'의 뜻이니, 두 가지 일로 마음을 둘로 나누지 않고, 세 가지 일로 마음을 셋으로 나누지 말아서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보는 것39)을 '경'이라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외면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갖기만 하면 마음이 전일하게 된다."40)라고 하였다. 외면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이 학자에게 주일(主一)의 시작이 되니, 여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李生基一表德元敬。余嘗所命也。一日請爲其說。哀其早孤靡依。猶不忘勉學之志。謹擧一副語。以效其一分之助。嗚呼。一之義不一。純粹無雜之謂一。以爲纔有纖毫私妄。便不是一也。終始無間之謂一。以爲纔有瞬息間斷。便不是一也。該括無遺之謂一。以爲萬善之中。一善未備。便不是一也。此是天地造化之原。聖神妙用之本。然其所以致此而體此者。其惟敬乎。敬者主一之義也。不二以二。不三以三。惟心惟一。萬變是監。非敬之謂耶。程子曰。纔整齊嚴肅。則心便一。整齊嚴肅。是學者主一之始也。勉之哉。 두……것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 제6장에 "두 가지 일로 마음을 둘로 나누지 않고 세 가지 일로 마음을 셋으로 나누지 말아서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보라.[弗貳以二, 弗參以三, 惟心惟一, 萬變是監.]"라는 구절이 보인다. 외면을……된다 정이천(程伊川)이 제시한 수양법으로, 《근사록(近思錄)》 4권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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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기 石梧記 용한당(容閒堂) 주인은 나의 죽마고우이다. 하루는 그의 족대부 석오당(石梧堂)의 당기(堂記)를 보여 주었는데, 기문을 지은 사람은 금오 산인(金鰲山人) 홍공(洪公)139)이었다.오호라! 내가 석오당에 올라 이른바 석오라는 것을 본 지 오래 되었다. 일찍이 기억하건대, 그 한 구역의 돌이 평평하게 깔려 방정하였는데 넓이는 십여 명을 용납할 만하였고, 한 그루 오동나무는 둥글기가 수레의 일산 같았고 드리운 그늘은 또 족히 그 돌을 덮을 만하였다. 주인옹은 여기에서 노닐며 읊조리고 여기에서 머물며 지냈는데, 그 그윽한 경치는 형언할 수 없었다.몇 해 전에 듣건대 주인옹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를 옹의 흥치로 지금 비록 이 돌과 오동나무를 소유할 수 없지만 새로 우거하는 문 앞에 반드시 어떤 물건이든 다시 돌과 오동나무 같은 것을 두었으리라 여겼다. 지금 당의 기문을 보건대, 바로 다시 석오(石梧)로 자처하였으니, 어찌 옹은 사물에 국한되는 것이 이와 같은가? 아!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로 통달한 것이다.무릇 사물을 완호하면 국한되고 이치를 따르면 통달하니, 돌과 오동나무는 하나의 사물이지만 돌과 오동나무가 될 수 있는 이치는 실로 하나의 사물이 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능히 지절(志節)에 힘쓰고 힘써 확고하여 꺾이지 않는다면 누가 내 마음이 돌이 아니라 하겠으며, 진실로 능히 취사(取舍)를 분별하여 그 큰 것을 확립하면 누가 그 오가(梧檟)를 버리라140)고 하겠는가. 선을 가려서 굳게 지키는 도는 그 대강이 절실하여 은연히 보통의 명물(名物)에 함축시키는 것이다. 이에 옹이 돌과 오동나무를 위한 것은 사물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안 지가 오래 되었으니, 어찌 한 구역 돌과 한 그루 나무가 있고 없는 것에 얽매이겠는가. 이것이 집을 떠나 임시로 지내는 곳에 돌과 오동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옹이 돌과 오동나무를 위하는 것은 실로 여전한 이유이니, 전날 경물의 사이에 서로 기약한 것은 그 알았던 것이 또한 너무 천박하지 않은가.의림(義林)은 비루한 사람이라 본래 족히 따질 만한 것이 없으니, 원컨대 석오옹(石梧翁)의 뒤를 따라 이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또 금오 산인과 용한당 주인과 함께하여 노년의 계획으로 삼기를 바란다. 容閒堂主人。余竹馬友。一日示其族大父石梧堂堂記。記之者。金鰲山人洪公也。嗚乎。余升石梧堂。見所謂石梧者久矣。曾記其一區石。平鋪方正。廣可容十數人。一株梧。團如車盖。所吐之陰。又足以庇其石。主人翁游詠於斯。盤旋於斯。其窈窕景致。不可名狀。數歲前。聞翁移寓他所。余謂以翁之興致。今雖不得有此石梧。而新寓門前。必有何物復有如石梧者。今見堂記。乃復以石梧自居。何翁之局於物如是耶。噫。非局也。乃所以通也。夫玩物則局。循理則通。石梧一物也。而其可以爲石梧之理。固非一物之所獨得。苟能勉勵志節。確然不拔。則孰謂我心匪石。苟能辨别取舍。立乎其大。則孰謂舍其梧檟。擇善固執之道。其梗槩切實。隱然含蓄於尋常名物之地。於是乎知翁之爲石梧。不在於物而在於己久矣。豈繫乎一區右一株木之有無哉。此所以離室僑居。不與石梧相近。而翁之爲石梧。固自若也。前日之相期於景物之間者。其爲知不亦淺乎。義林鄙生也。本不足爲有無。願從石梧翁之後。講明此義。又與金鰲山人容閒主人共之。以爲桑榆之計。 금오 산인(金鰲山人) 홍공(洪公) 홍경고(洪景古, 1645~1699)를 말한다. 호는 팔우(八愚),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오가(梧檟)를 버리라 맹자가 "지금 장사가 오동나무와 개오동나무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기른다면 천한 원예사가 되는 것이다.[今有場師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데, 이는 곧 사람이 중대한 자기의 심지(心志)는 기를 줄 모르고 사소한 구복(口腹)이나 채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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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 처사 이공 행장 芝南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지호(贄鎬),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이다. 관향은 광산(光山)이니, 고려(高麗) 때 명신인 상서 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일영(日映)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호는 옥봉(玉峯), 관직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선제(先齊)를 낳았으니, 호는 필문(蓽門), 관직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으니,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징벽(徵辟)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호선(好善)을 낳았으니, 호는 면재(勉齋),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렬(烈)을 낳았으니, 호는 졸암(拙庵), 관직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이분들은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언규(彦規)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영근(永根)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광우(光佑)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면휘(勉徽)로, 호는 묵재(黙齋)이며,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이긍(履兢)의 따님이니 참판에 추증된 세규(世規)의 현손(玄孫)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11월 22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필봉(筆峯)이 용으로 변하여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므로 어릴 때 자를 '필룡(筆龍)'이라고 하였다. 공은 자태와 용모가 의젓하였다. 조금 지각이 있을 적에 묵재공(黙齋公)의 곁에 있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돈을 보내자, 묵재공이 말하기를 "사지금(四知金)30)도 받지 않는데 더구나 오지금(五知金)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곁에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공에게 일마다 규범을 따르도록 가르쳤고, 일찍이 고식지계(姑息之計)를 낸 적이 없었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적에 백씨, 중씨 형과 함께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학업을 익혔으니,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성동(成童)의 나이에 오서(五書)31)와 오경(五經)을 돌아가면서 섭렵하여 문리(文理)와 문장이 현저하게 일취월장하였다. 어느 해에 구씨(具氏) 가문과 혼인하였으니, 바로 첨지중추부사 상윤(相允)의 따님이다. 관례를 행한 뒤에 같은 고을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박 선생을 배알하고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한 나머지 거의 생명을 해칠 지경이었는데도 전후의 의식 절차는 한결같이 예경(禮經)대로 하였다. 맏형수 송씨(宋氏)가 병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공이 부인 구씨와 더불어 다른 일은 제쳐두고 한마음으로 병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여 여러 달 동안 낮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맏형수가 세상을 뜨고 백형(伯兄)이 또 고질을 앓으니, 공이 또 맏형수에게 한 것처럼 6개월 동안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는 절차와 연상(練祥)의 의절에 정성을 다하고 예문을 갖추니, 이웃 마을에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부모나 장인 장모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아가 된 어린 조카를 매우 애처로운 마음으로 키우며 자기 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 중년에 개연히 탄식하기를 "내가 시문(時文)에 인생을 그르쳤으니 비록 이전의 잘못은 뒤미처 고치지는 못하지만 아마 만년의 공부는 조금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연구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태극도(太極圖)」, 「경재잠(敬齋箴)」, 구용구사(九容九思)32)를 좌우(座右)에 붙여 두고 늘 스스로 경계로 삼았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적에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따라 응대하고 진퇴(進退)하는 절차와 몸가짐과 행동거지에 대해서 착실하게 이끌어주고 신칙하여 확실하게 과정(課程)을 두었다. 늘 생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입지(立志)는 학문을 하는 근본이다.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궁격(窮格)33)과 존양(存養)34)은 교차하여 힘을 쏟아야지 한쪽을 폐해선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敬)은 성시성종(成始成終)35)이고 철상철하(徹上徹下)이다.'36)라는 말은 성인이 제시하신 덕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이 말한 "심(心)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主宰)이니, 만약 맑게 한다면 허명하고 깨끗한 부고(府庫)가 되고, 맑게 하지 못한다면 더럽고 탁한 주머니가 된다."라는 말을 늘 암송하였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가 말한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생존하는 이치가 그만 끊어지게 된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는 심학(心學)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자손이 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안의 규범을 정하여 돈독하고 화목한 도리를 강론하였고, 마을 규약을 만들어 서로 구휼하는 의리를 밝혔다. 학문계(學問契)를 만들어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익히는 비용을 마련하고, 흥학계(興學契)를 만들어 동네 생도들을 강학에 모으는 계책으로 삼았다. 원전(原錢)은 양사재(養士齋)에 두어서 온 고을 장보(章甫)들이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는 경비로 삼게 하였다. 수시로 향방(鄕坊)과 상숙(庠塾)에 모여서 개강(開講)하거나 예를 익혔으므로 제기가 질서 정연하고 의관이 단정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경인년(1890, 고종27) 봄에 선비들을 모아 《정암선생문집(靜庵先生文集)》을 중간(重刊)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신묘년(1891)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임진년(1892) 3월 24일에 졸하였다. 신산(莘山) 뒤 기슭 술좌(戌坐) 언덕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다.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시집갔다. 공은 용모가 단아하였고 절조가 굳세고 우뚝하여 뺏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고, 남에게 뒤지지 않는 언변이 있었다. 담론(談論)을 잘하고 풍자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현인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며, 선을 즐거워하고 의리를 좋아하는 것은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다. 포부와 경륜은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거처하는 바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를테면 여리(閭里)와 향방(鄕坊) 같은 곳에서 고심하고 주선하여 유풍(儒風)과 예속(禮俗)을 성대하게 일으켰으니,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 것이 적지 않았다. 나는 함께 종유한 사람으로 매양 간절하게 추억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그 자손이 영원히 남길 글을 지어 달라는 청에 대해서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더하고 뺀다. 公姓李。諱贄鎬。字東賢。號芝南。系出光山。以麗朝名臣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入我朝。有諱日映。號玉峯。副提學。生諱先齊。號蓽門。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生諱好善。號勉齋。大司成生諱烈。號拙庵。同副承旨皆其顯祖也。高祖彦規贈戶曹參議。曾祖永根。贈兵曹參判。祖光佑。贈掌樂院正。考勉徽。號黙齋。妣咸陽朴氏履兢女。贈參判世規玄孫。憲宗丙申十一月二十二日。生公于綾之莘山里第。夢筆峯化爲龍。入懷而有娠。故小字曰筆龍。姿相岐嶷。稍有知。在黙齋公側。適有人餽以錢物。黙齋公曰。四知金猶爲不受。況五知乎。蓋指公之在側也。是以敎公事事循蹈規矩。未嘗爲姑息計。及就傅上學。與伯仲二兄同案連業。友悌甚至。至成童。五書五經。循環涉獵。文理詞華。斐然日就。某歲委禽于具氏之門。卽僉樞相允女也。旣冠。造謁同鄕無邪齋朴先生。因受周易。遭內外艱。哀毁過甚。幾於傷生。前後儀節。一遵禮經。伯嫂宋氏有疾彌留。公與具氏舍置他事。專以迎合調治爲務。晝不就席。夜不就枕者數月。及歿。伯兄又得貞疾。公至誠救護亦如之。至六朔而竟不起。喪葬之節。練祥之儀。備盡情文。隣里感歎。以爲雖在父母舅姑。無以過之。撫其幼孤。極加哀矜。養育敎誨。無間已出。中歲慨然歎曰。吾爲時文所誤。縱不能追補前闕。庶可以少收晩業。遂將心經性理諸書。沈潛硏究。手不釋卷。太極圖敬齋箴九容九思。貼之座側。常自鏡攷。敎授蒙率。一依小學。應對進退。威儀容止。循循提勅。的有課程。常戒生徒曰。立志是爲學之本。本旣立則窮格存養。交致其力。不可偏廢。又曰。敬是成始成終徹上徹下語。聖賢所示人德之方。無有切於此。每誦淸心堂所謂心者一身之主宰。苟能淸之。則爲虛明瑩澈之府。不能淸之。則爲汚陋穢濁之囊。履素齋所謂動靜語黙之間。毫釐有差則生理便息之語曰。此是心學切要之語。凡爲學者所當佩服不忘。況其爲子孫者乎。定門規以講敦睦之道。立洞約以明周恤之義。設學問契爲村中子弟肄業之資作興學契爲坊裏生徒講聚之計。置原錢養士齋爲一鄕章甫飮射之需。隨時會聚於鄕坊庠塾之間。或開講或習禮。樽俎之秩秩。衣冠之濟濟。觀者感悅。庚寅春。會多士。重刊靜庵先生文集。布行于世。辛卯中鄕解。赴禮部見屈。壬辰三月二十四日卒。權葬於莘山後麓戌坐原。擧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公體相端粹。志節勁特。有不可奪之操。有不可屈之辯。善於談論。長於風諭。好學慕賢。出於至誠。樂善嗜義。如恐不及。抱負經綸。未得見試於時。而隨其所居所接。如閭里鄕坊之地。苦心周章。使儒風禮俗。蔚然興行。其爲世敎之補不少矣。余以從遊餘生。每切追惟之悵。今於其遺胤不朽之托。不忍牢辭。謹据家狀爲之增刪云。 사지금(四知金) 후한(後漢) 때의 학자 양진(楊震)과 관련한 고사이다. 양진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茂才)로 천거받았던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金) 10근을 바치자, 양진이 "그대의 친구인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故人知君, 君不知故人, 何也?]" 하니, 왕밀이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하고 금을 물리쳤다. 《後漢書 楊震列傳》 오서(五書) 사서(四書)인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와 《소학(小學)》을 이른다. 구용구사(九容九思) 구사(九思)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할 때는 충성되기를 생각하고,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묻기를 생각하고,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고서는 의리에 맞는지를 생각하라.〔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論語 季氏》 구용(九容)은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處身)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이다. 《禮記 玉藻》 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이고, 격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성시성종(成始成終) 주자(朱子)가 "경은 성학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다.[敬者, 聖學之所以成始成終者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경(敬)을 통해 학문을 시작하고 경을 통해 학문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철상철하(徹上徹下) 상하를 모두 통한다는 말이다. 《논어》〈자로(子路)〉에 "거처할 때에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때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 충성스럽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비록 이적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라고 하였는데 그 집주에 "정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상하를 모두 통하는 말씀이니 성인은 애당초 두 말씀이 없는 것이다.[程子曰, 此是徹上徹下語, 聖人初無二語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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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계 홍공 행장 竹溪洪公行狀 공의 휘는 정모(珽謨), 초휘(初諱)는 수정(壽挺), 자는 의범(懿範), 호는 죽계(竹溪)이다.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일송(一松) 휘 치(治)의 후손이다. 고조는 휘 천규(天奎)로,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다. 증조의 휘는 이발(履潑)이고, 조부의 휘는 영구(永九)이며, 선고(先考)의 휘는 양우(亮禹)이다. 전비(前妣)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지옥(之玉)의 따님이고, 선비(先妣)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윤호(允鎬)의 따님이다. 인릉(仁陵 순조(純祖)의 능호) 정해년(1827, 순조27) 10월 6일에 우봉리(牛峯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무릇 출입하거나 장난칠 때 한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품속에 넣어 가서 어버이에게 드렸다. 집안이 늘 가난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조차 자주 잇지 못하였으므로, 몸소 물고기를 잡거나 땔나무를 하고 직접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곁에서 봉양하였다. 부모가 이에 의지하여 편안하였고 가업이 그 덕분에 흥성하였다. 11세에 어버이의 병이 매우 심해지자 목 놓아 울면서 실신할 듯이 하였다. 한밤중에 홀로 의원을 찾아가는데 깊은 산 험준한 고개에서 맹수가 우는데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벽에 의가(醫家)에 이르렀다. 의원이 그에게 물어보고서 사정을 알고는 놀라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지극한 정성이 이러하니 어버이의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청도 김씨(淸道金氏) 홍만(弘萬)의 따님을 맞아들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김씨가 졸하고, 병오년(1846, 헌종12)에 밀양 박씨(密陽朴氏) 재호(在浩)의 따님을 맞아들였는데 평소에 서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공경하였다. 박씨 또한 온화하고 인자하고 유순하였으며 부도(婦道)를 잘 지켰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고, 갑자년(1864, 고종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심하고 슬퍼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치르는 도구와 상례를 거행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여 한결같이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을 따랐으니, 대개 살아 계실 때 섬기며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禮)로써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에게는 아우 하나가 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밤낮으로 단란하게 모여 다정하게 웃고 이야기하였으며, 음식과 의복 등 온갖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이를 미루어 확대하여 족친과 붕우, 이웃 마을과 향당에까지 미쳤으니, 자상하고 화락한 풍습이 두루 퍼졌다. 일찍이 성내는 말이나 화난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기에 남들도 감히 바른 이치가 아닌 것을 가지고 간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젊었을 때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가숙(家塾)을 세우고 훌륭한 스승을 초빙하여 자식과 손자를 가르쳐 권면하고 힘쓰게 한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가문의 규범을 세워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강론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서 예의 바른 풍속으로 사귀는 법을 밝혀서 상서(庠序)와 교원(校院)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 계획하고 경영한 것이 그의 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침수정(枕漱亭)은 선조 팔우공(八愚公)이 지은 것인데 퇴락한 지 오래되었다. 공이 일찍이 개탄스러운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족질(族侄) 채주(埰周)와 함께 도모하여 중건하여 날마다 족친, 빈붕(賓朋)과 더불어 그 정자에서 소요하고 시를 수창하였으니, 그 풍모와 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앙모하게 하였다. 기축년(1889, 고종26) 11월 7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3월 13일에 부춘동(富春洞) 굴등(窟嶝)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원근의 사우들이 제문을 지어 와서 조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아들은 형주(馨周)·근주(垠周)·기주(基周)이고, 딸은 이진표(李晉杓)·구치모(具致模)에게 시집갔다. 형주의 아들은 우팔(祐八)·우경(祐璟)이고, 근주의 아들은 우열(祐烈)이며, 기주는 재종숙부(再從叔父) 각모(珏模)의 양자로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어려서나 장성해서나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노년에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니, 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군자나 장자(長者)로 추중(推重)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홍우경(洪祐璟)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천태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후대에 남길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어 삼가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公諱珽謨。初諱壽挺。字懿範。號竹溪。系出豐山。一松諱治後。高祖諱天奎通德郞。曾祖諱履潑。祖諱永九。考諱亮禹。前妣慶州金氏之玉女。妣昌寧曺氏允鎬女。以仁陵丁亥十月六日。生公于牛峯里第。公性至孝。自幼凡出入嬉戱。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懷而供之。家素貧。菽水屢空。躬幹漁樵。親執滫瀡。左右就養。父母賴以安。家業賴以興。十一歲。親癠甚劇。號泣不能支。夜半獨行尋醫。深山峻嶺。虎豹叫嘷。公少不畏。曉頭至醫家。醫問知驚異曰。至誠如此。親疾必瘳。甲辰聘淸道金氏弘萬女。乙巳金氏卒。丙午聘密陽朴氏在浩女。平居相待如賓。朴氏亦溫仁柔嘉。克執婦道。歲壬子丁外艱。甲子丁內艱。哀傷慘怛。見者無不釀涕。送終之具。執喪之節。必誠必信。一遵情文。蓋其生事死葬。可謂終始以禮矣。公有一弟。友愛甚篤。日夕團聚。笑語款洽。飮食衣服。凡百資用。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隣里鄕黨。慈詳愷悌之風。浹洽周徧。未嘗以忿言戾色。加於人。人亦不敢以非理干之。嘗恨少貧失學。立家塾延賢師。敎子課孫。勸勉甚至。立門規講敦睦之義。修洞約。明禮俗之交。出以風議於庠序校院之間。其所以謀畫經紀。多其力焉。枕漱亭先祖八愚公所構。而頹廢久矣。公嘗懷慨歎。與族侄埰周。合謀重建。日與族親賓朋。逍遙酬唱於其中。其風儀趣想。令人可仰。歲己丑十一月七日。考終于正寢。以三月十三日。葬于富春洞窟嶝子坐原。遠近之友。操文來弔者甚衆。男馨周垠周基周。女適李晉杓具致模。馨周子祐八祐璟。垠周子祐烈。基周出爲再從叔父珏模後。餘皆幼。嗚呼。幼壯孝悌。老而好義。知不知。皆以君子長者推之而無異辭。辛卯春。祐璟抱家狀。訪余於天台寓舍。請不朽之託。余以無似。牢辭不得。謹次如右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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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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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기공 행장 忍齋奇公行狀 인재 기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先輩) 항렬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는 공의 현덕(賢德)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 공의 후사(後嗣)인 기종섭(奇{土+宗}燮)과 벗이 되고 또 공의 손자인 기세진(奇世搢)과 서로 교류하면서 공의 전형(典型)에 대해서 개괄할 수 있었다. 또 그 후에는 집안에 보관된 글을 보고 공의 평소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 같은 고을이고 또 같은 시대였건만 백발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 속의 고인(古人)으로 대하였구나! 행장과 같은 글은 진실로 나처럼 보잘것없는 자가 손을 대면 안 되지만, 고금을 돌이켜 보니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짓는다. 공은 휘가 동규(東奎)이고 자는 윤집(允集)이다. 기씨(奇氏)는 세계(世系)가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지역의 옛 지명)에서 나와서 신라, 고려 시대부터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시호(諡號)가 정무(貞武)인 휘 건(虔)은 응교(應敎)를 지낸 휘 찬(襸)을 낳고 휘 찬은 호가 물재(勿齋)인 휘 진(進)을 낳았다. 물재는 아우인 복재(服齋)43)가 기묘년(1519, 중종14)의 화를 당하자 마침내 광주(光州)로 물러나 지냈다. 재랑(齋郎)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대림(大臨)을 낳았는데, 대림은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고봉(高峰) 선생 기대승(奇大升)44)의 형으로 공에게는 11대 선조이다. 고조는 휘가 종태(宗泰)이고 증조부는 휘가 상호(商頀)이며 조부는 휘가 사봉(師鳳)이다. 고(考)는 휘가 하진(夏震)이며 비(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달권(達權)의 따님이다. 순종(純宗) 무자년(1828, 순조28)에 능주(綾州 전라도 화순 지역의 옛 지명)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되어서는45) 응대 진퇴(應對進退)나 평소의 과정(課程)이 스승이 이끌어 주거나 깨우쳐 주지 않아도 법도를 따르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대학》에 더욱 정통하였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평생에 걸쳐 실천해야 하는 요결(要訣)로 삼았다. 이해하지 못하면 손에서 놓지 않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정이 격앙되어 분하고 답답하게 여기다가 뜻을 이해하게 되면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기뻐하는 얼굴빛과 온순한 용모로 모시고 봉양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필요한 물품을 모두 넉넉하게 공급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이를 미루어 친족과 벗들에게 미치니 공경스러우며 즐겁고도 편안하여 원망 섞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는 정성스럽게 알려주고 상세하게 일깨워 듣는 자가 자기도 모르게 성심을 다해 흠모하고 복종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시렁 위에 있던 책자(冊子)가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가져간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 간 것이 아니라 빌려 가면서 미처 주인에게 알리지 못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누군가가 사과를 하고 돌려주었다. 향리(鄕里)의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분쟁을 일으킨 뒤 마침내 원한이 쌓여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공만이 깨우치고 화해시켜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내게 하였다. 공의 충직하고 순후한 마음이 만물에 미치고 정성과 신의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경오년(1870, 고종7)에 중병에 걸렸다. 하루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부모를 섬기는 것이 보잘것없었다. 지금 또 병이 들어 장차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니 불효한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구나. 너는 반드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섬겨서 네 아비가 땅속에서 품고 있을 한을 위로해다오." 하였다. 끝내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양평(加陽坪)의 선영 아래 을좌(乙坐)에 매장하였다가 뒤에 배위(配位) 염씨와 합장하였다. 배(配)는 파주 염씨(坡州廉氏) 백우(柏佑)의 딸이다. 착하고 온순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부덕(婦德)에 모자람이 없었다. 을유년(1825, 순조25) 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둘을 두었으며 이름은 종섭({土+宗}燮), 정섭(楨燮)이다. 손자는 세진(世搢), 세엽(世曄), 세만(世萬)이며 손녀는 선영기(宣永基)에게 출가하였다. 이들은 장방인 종섭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물살이 도도하게 흐르듯 세상이 점차 쇠퇴하여 민간과 선비들의 풍습이 실로 한심스러워할 만하고 향당(鄕黨) 선배의 근후(勤厚)한 풍도는 끝내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이를 붙잡아 되돌려 놓는 것을 지금 세상의 책무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자손이 되어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할 방도만은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진(世搢)이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사우(士友)들과 종유(從遊)하고 있으니 집안의 학업이 그에게 의뢰하여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忍齋奇公。吾鄕先輩行也。余小少聞其賢。而未及承顔。其後得與其遺胤琮燮友。又得其孫世搢相過從。而公之典刑。可以槪矣。又其後得家藏文字。而公之平生行義。可以詳矣。嗚乎。旣同鄕矣。又倂世矣。而至於白首之年。始對以卷中古人耶。狀行之文固非淺劣所可犯手。而撫念今古。不勝曠感。謹据家狀。公諱東奎。字允集。奇氏系出幸州。自羅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虔。諡貞武。生諱襸應敎。生諱進。號勿齋。弟服齋。遭己卯之禍。遂退居光州。除齋郞不就。贈左贊成。封德城君。生大臨。贈左承旨。高峰先生大升之兄也。於公爲十一世。高祖諱宗泰。曾祖諱商頀祖諱師鳳。考諱夏震。妣河東鄭氏達權女。以純宗戊子。生公于綾州牛峯里。幼而騰異。不類凡兒。及就傅。應對進退日用課程。不待提勅而循循不怠。尤邃於大學。以格致誠正爲一生受用之訣。不得不措。激昂憤悱。至有會意。輒怡然如也。性至孝。怡色婉容。左右服勤。志物之養。莫不畢給。推以至於族戚儕友。愷悌樂易。人無怨言。敎授生徒。指意懇到。開喩詳悉。使聽者不覺誠心向服。一日失架上冊子。傍人欲推尋。公曰。非竊去也。必是借去而姑未及告於主人耳。未幾。有人果謝而還之。鄕里有人與人忿爭。遂成嫌隙。積年不平。人無有能解者。公獨喩和之。使如平昔。蓋其忠厚之及物。誠信之感人。多此類也。歲庚午沈疾。一日語其子曰。吾平日事親無狀。今又嬰疾。勢將不起。不孝之罪。莫大於此。汝須善事二親。以慰乃父泉下之恨也。竟以十一月二十七日卒。葬于加陽坪先隴下乙坐合祔。配坡州廉氏柏佑女。和順勤儉。婦德無闕。乙酉生。後公十七年卒。擧二男。曰琮燮楨燮。孫世搢世曄世萬。孫女宣永基。長旁出也。餘皆幼。嗚乎。世級漸下。如水淊淊。民風士習。實可寒心。而鄕黨先輩長厚之風。終不可得以復見耶。縱不能把持挽迴以爲斯世之策。而爲人子孫者。獨不思所以繼述闕祖者乎。世搢有志學問。方從遊士友間。庶幾家庭之業。賴之而不墜於地。余有望焉。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의 호이다. 자는 자경(子敬),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유배지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저서로 《복재집(服齋集)》,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558년(명종1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벼슬이 대사간ㆍ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스승에게……되어서는 10살 무렵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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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구씨 행장 淑夫人具氏行狀 부인은 성이 구씨이고 세계(世系)는 능성(綾城)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민첨(民瞻)이 상세(上世)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고조인 휘 삼익(三益)은 진사(進士)였고 증조인 휘 채(埰)도 진사였으며 조부인 휘 찬원(贊源)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 상윤(相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비(妣)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석윤(錫淵)의 딸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 12월 14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어려서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첨지중추부사공이 언문(諺文)으로 《소학(小學)》을 적어 부인을 가르쳤다. 또 "남자는 요순(堯舜)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여자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46)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고, 인하여 학임(學任)으로 이름을 짓고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르자 희임(希任)으로 자(字)를 지어 주었다. 부인은 교도(敎導)와 훈계(訓戒)를 따르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18세에 처사공(處士公) 이지호(李贄鎬)에게 출가하였다. 공경과 순종으로 시부모를 받들고 남편을 섬겼으며 동서들에게도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게 지내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시어머니 박씨(朴氏)가 나이도 많고 병환이 위중하여 항상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한 번도 편안히 쉬지를 않아 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소박하고 초라한 의복과 음식으로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이웃의 아녀자가 조롱하며 비웃는 말을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농사를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배부르기를 기약하지만, 유학을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굶주릴 것을 각오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소 살림살이는 매우 검약하였지만 제사를 받들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은 어떻게든 주선하고 장만하여 기어코 풍성하고 정갈하게 준비하고자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고 피땀을 흘리며 고생스럽게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여유롭게 되었다. 일찍이 여러 며느리에게 경계하기를, "아녀자의 행실은 순종이 으뜸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훈계나 명이 규중(閨中)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말소리가 문밖으로 들리지 않았으니, 가풍(家風)이 어떠하였겠는가. 만년에 집안이 어렵고 궁핍해져 여러 아들이 이를 걱정하자 부인이 책망하기를,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너희들이 학문을 그만두어 집안의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행동거지가 침착하여 태만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종족(宗族)은 온화하면서도 절도있게 대하고 동복(僮僕)은 은혜로우면서도 엄하게 다스려 가까운 이웃에 이르기까지 기뻐하면서 흡족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갑진년(1904, 고종41)에 숙부인에 봉해졌는데, 이는 추증(追贈)된 남편을 따라 봉호(封號)를 받은 것이다. 무신년(1908, 순종2) 1월 4일에 생을 마쳐 비사등(飛沙嶝) 선영의 오른쪽 산등성이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고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어리다. 아, 내가 지남옹(芝南翁)47)과 종유(從遊)하고 또 그의 윤자(胤子)와 앞뒤로 수십 년간 교유하면서 숙부인이 집안에서 보인 품행이 훌륭하고 자애로운 가르침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익히 들었다. 지금 그 집안의 가장(家狀)을 보니 전에 들은 내용과 다르지 않으니 부모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다. 더욱 힘을 쏟아 학문을 그만두지 않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당시 숙부인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 도리일 것이다. 夫人姓具氏。系出綾城。麗朝平章事諱民瞻。其上系顯祖也。高祖諱三益進士。曾祖諱埰進士。祖諱贊源贈戶曹參判。考諱相允僉樞。妣固城李氏錫淵女。以純祖癸巳十二月十四日生。夫人幼而能言。僉樞公以諺文。書小學以敎之。且曰。男子當以堯舜爲法。女子當以任姒爲法。因名之以學任。及笄字之以希任。夫人遵循敎戒。無敢違越。十八歸于處士李公贄鎬。奉舅姑事君子。克敬克順。與娣姒溫恭和洽。未有間言。其姑朴氏年高沈疾。常在床褥。晝夜侍供。殫誠竭力。雖勞苦之極。未嘗就便。見者一辭稱賞。家貧甚。縕袍麤糲。處之裕如。隣家婦女。有譏笑之言。夫人曰。業農之家。其妻必飽。業儒之家。其妻必飢。此是常事。何足怪也。日用調度。極其儉約。而至於奉祭祀接賓客。周旋營辨。期於豐潔。夙興夜寐。血力拮据。以至事力稍紓。嘗戒諸婦曰。女子之行。以順爲上是故敎令不出於閨中言語不聞於門外。其家風爲何如也。晩年家力艱乏。諸子以爲憂。夫人責之曰。貧者士之常。不足爲憂。而但恐汝輩失學以墜家聲也。性度溫仁。動止安詳。怠慢之氣。不形於色。華麗之物。不近於身。待宗族和而節。御僮僕惠而嚴。至於比近隣里。無不懽然稱愜焉。甲辰封淑夫人。蓋從其君子追贈也。戊申正月四日卒。葬飛沙嶝先壟右岡午坐原。生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孫男女皆幼。嗚乎。余從芝南翁遊。又與其胤子遊。前後數十年。其內行之備。慈誨之美。稔聞久矣。今見其家狀。與前所聞者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更惟勉力。無失其學。無墜家聲如當日之敎也。此實立揚顯親之道。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사는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모두 어진 후비(后妃)였다. 지남옹(芝南翁) 남편인 이지호(李贄鎬, 1836∼1892)의 자호(自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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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오공 행장 松庵吳公行狀 송암 오공의 휘는 수화(壽華), 자는 태중(泰仲)이다. 고려조의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48)이 공의 시조(始祖)이다. 4대를 내려와 휘 현필(賢弼)에 이르러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지고 이로 인하여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대대로 작위와 공훈이 드러났다. 휘 충을(忠乙)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현손(玄孫)인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다. 보성으로부터 능주(綾州)의 대곡(大谷)에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인하여 무덤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부터 오씨는 능주에 살게 되었다. 증손인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절제사(節制使)로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여 조정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공의 8대조이다. 고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후유(厚有)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이다. 고(考)는 휘가 치상(致祥)이고 호는 계은(溪隱)이며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경우(警禹)의 딸로 일송(一松) 홍치(洪治)49)의 후손이다. 헌종 을미년(1835, 헌종1) 11월 무자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스스로 말하고 먹을 줄 알게 되자 응대와 대답에 어김이 없이 순종하였으며, 부모가 병환을 앓으면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8세 때 대인(大人)이 몸소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몰래 주막으로 가서 술을 사서 대인을 대접하려고 하자, 주막 아낙이 공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안주까지 갖추어 주고서 값을 말하지 않았다. 맏형과 뜻을 같이하고 경서를 물려받아 쓰면서 밤낮으로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세가 되자 맏형에게 이르기를,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셨으니 우리 형제는 형편상 함께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맡아 늙은 부모를 편안히 모시고 또 형님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몸소 부지런히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대인(大人)의 성품이 준엄하여 노기를 띨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공은 그때마다 온화한 말로 넌지시 간하여 대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대인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둘째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저절로 풀어진다."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매우 위독해지자 여러 날에 걸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바쳤으며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몸이 말라 뼈만 앙상한 채로 애통해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대인이 연로한 나이에 배필을 잃은 것을 보고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가까운 옛친구들을 초빙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중년의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분가(分家)를 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집안일은 반드시 부친의 일을 먼저 처리한 뒤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형제 5인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각각 성가(成家)를 하여 차례차례 분가(分家)하게 되자 살림을 차리는 데 필요한 온갖 것에 대하여 공이 반드시 물자를 대어주어 형 집에서 나누어 내는 비용이 없도록 하였다. 얼마 뒤 여러 아우에게 이르기를, "아버님의 연세가 매우 많으시다. 공양하는 의절은 나중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찌 오로지 큰형님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겠는가. 한 달 중에서 15일 치 양식은 내가 드릴 것이니 나머지 15일은 너희 세 명이 각각 5일 치씩 드리거라."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번갈아 양식을 대어 매우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 노쇠했다는 이유로 애통함을 누그러트리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와 산재(散齋)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큰형을 섬기는 것도 엄부(嚴父)를 섬기는 듯하여 크고 작은 집안일을 반드시 여쭌 다음 거행하였다. 큰형이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설사를 하면 그때마다 자기 손으로 치웠다. 형의 자식을 보살피는 일도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여 갖가지 보살피는 일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와 여러 제부(弟婦)도 역시 서로 친애하여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함께 나누었다.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까지 미치니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도중에 그 사람이 병에 걸리자 함께 오던 이들은 모두 먼저 떠났지만, 공은 행낭 안의 물건을 팔아 그를 치료해주고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왔다. 이웃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집을 짓도록 물자를 대주어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고 열읍(列邑)의 선비들이 글방을 마련하려고 하자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다방면으로 알아보아 일이 진척되도록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마련하여 종족(宗族)을 화목하게 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빈궁한 교우(交友)나 가난한 친족이 살아가기 어려우면 그때마다 진휼(賑恤)하였고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사망(死亡)과 상사(喪事)에 문안하거나 물품을 보내는 일을 그때마다 빼놓지 않았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비적(匪賊) 무리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공은 자제(子弟)들과 친척을 모아놓고 잘못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평소에 인륜(人倫)을 사랑하고 선(善)을 즐겨 행하며 의(義)를 좋아하였고 화려한 명성이나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별서(別墅)를 짓고 작은 길을 내어 오가며 시를 읊조리고 빈객이나 벗이 이르면 그때마다 곧바로 잔을 돌려 술에 취하면서 몹시 즐거워하였다. 평소 행실이 쌓이자 명망이 암암리에 드러나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의 유림이 조정에 천거하고 아뢰어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표창을 받았다. 여러 아들이 정문을 세우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무엇 하나 잘한 것이 없건만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되어 하늘을 속인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굳이 물리쳤다. 이 때문에 여러 아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을미년(1895) 봄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롭게 되자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효(孝)로 선조를 받들고 의(義)로 자식을 가르치며 선한 자가 아니면 사귀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야 선대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보화(寶貨)는 써버리면 다 사라지지만 충효는 누려도 끝이 없다. 학식을 쌓자면 반드시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삼자면 반드시 힘을 다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하거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세상을 떠나니 곧 3월 27일이었다. 향리(鄕里) 인사(人士)들은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칠송(七松)의 가락동(嘉樂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곧 전배(前配) 고씨(高氏) 묘의 왼쪽이었다. 고씨는 본적이 장택(長澤)이고 시우(時祐)의 딸이며 참의를 지낸 신부(臣傅)의 후손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다. 계배(系配)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석우(錫祐)의 딸이며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후손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장섭(長燮), 덕섭(德燮)이고 딸은 이승정(李承正)에게 출가하였다. 장섭은 재동(在東), 재남(在南), 재경(在慶)을 낳았고 덕섭은 재원(在元)을 낳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로웠으며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었다. 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함에 가까웠으며, 처신은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자애롭고 인정이 넘쳤으며 일 처리는 공평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사람이나 외부인이나 공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공을 편안하게 여겼다. 자신은 화락함을 누리고 집안은 이로써 평안하였으며 훌륭한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시경》 〈벌목(伐木)〉에서 노래한 '신이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하게 되리라.'는 것이 공을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어 앞뒤로 20년에 걸쳐 논의를 반복하며 깨우침을 얻었고 출입하며 의지하였으니 그 힘이 적지 않았다. 어찌 공이 조금 더 머물지 않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버릴 줄 알았겠는가. 장섭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행장은 평소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습니다. 대인과 서로 잘 알던 분으로 말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한 몸이라서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차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을 약술하여 돌려 보낸다. 松庵吳公諱壽華。字泰仲。勝朝文襄公諱延寵。其鼻祖。四傳至諱賢弼。封寶城君。因以貫焉。世著爵勳。至諱忠乙。入我朝。官贊成。玄孫諱益孫。以學行除寢郞。自寶城葬其親於綾州大谷。因寓墓下。綾之有吳始此。至曾孫諱邦翰。壬辰之亂。以節制使殉節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八代祖也。高祖諱世觀贈戶曹參判。曾祖諱厚有。僉樞。祖諱錫永號竹湖。考諱致祥號溪隱。孝友著聞。妣豐山洪氏警禹女。一松治后。以憲宗乙未十一月戊子。生公于七松里。自能言能食。應對唯諾。承順無違。父母有疾。涕泣廢食。八歲見大人躬耕。心甚悶然。竊往店幕。將沽酒餉之。酒媼嘉其意。具與肴饌而不言其直。與伯氏共方連業。晝夜不懈。至成童。謂伯氏曰。家貧親老。吾兄弟勢難倂學。吾當幹家。安養老親。又使兄專業。不亦可乎。躬服勤勞。家力稍舒。大人性峻。每有怒色。家人莫出一語。公溫言幾諫。輒廻其意。大人嘗語人曰。吾與二兒言。不覺怒氣自解。母夫人有病甚劇。血指延數日。遭故。毁瘠過甚。哀動傍人。見大人年高喪耦。慮有窮寂之懷。日夕不離側。招致故舊所善以悅其意。中年以親命析箸。而晨昏不廢。家務必先幹父而後及於私。兄弟五人。友愛甚篤。及各有室。次第析箸。而其設産凡百。公必資給。使兄家無分損之費。旣而謂諸弟曰。親年極隆。供養之節。不可歇后。豈可專委於伯氏耶。一月之內。十五日之養。我當供之。餘十五日。君三人各供五日也。自是迭相進供。備極其養。執喪哀戚。不以衰老自恕。遇諱辰。致齋散齋。極其誠敬。事伯氏如嚴父。家事巨細。必稟而行。有疾。晝夜扶持。泄痢輒掬而除之。撫愛兄子恩意甚至。種種周恤。無所吝。諸弟諸婦。亦相親愛。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各得其心。嘗自京還。同行一人。中路遘疾。諸伴皆先去。公賣行槖什物。爲之調治。俟其愈而同歸。隣有火患。出力營構。使之安堵。列邑多士。將營講舍公嘉其意。爲之血力周章。俾就其緖。設門憲以睦宗族。立洞規以和鄕井。遇飢歲。窮交貧族。有難存活。輒加賑恤。吉凶死喪。存訊贈遺。隨時不替。甲午匪徒大熾。公會子弟族戚。戒勿犯。平日愛好人倫。樂善嗜義。於聲華利達泊如也。築室開逕。嘯詠其中。賓朋至。輒行酒酣暢。極其歡洽。平生積累。聲譽闇章。鄕道儒林。薦報於朝。除寢郞。蒙旌褒諸子將營棹楔。公曰。無一善狀而至有此擧是欺天也。人而欺天。於心安乎。固却之。是以諸子不果。乙未春。遘疾幾危。會家衆戒之曰。奉先以孝。敎子以義。非善不交。非禮不行。可以不失先業也。寶貨用之有盡。忠孝享之無窮。績學必要其成。業農必盡其力。爾輩識之。言終而逝。卽三月二十七日也。鄕里人士知不知。莫不痛惜。葬七松之嘉樂洞午坐原。卽前配高氏墓左也。高氏籍長澤。時祐女。參議臣傅后。早逝無育。系配金海金氏錫祐女。鶴城君完后。生二男一女。長燮德燮。李承正也。長燮生在東在南在慶。德燮生在元。嗚乎。公孝於父母。友於兄弟。睦於宗族。信於朋友用心近厚。行己周愼。接物慈惠。處事公平。是以內外懷之。上下安之。身享和樂。家用平康。令聞令望。藉藉人口所謂神之聽之。終和且平者。非公之謂耶。猥受知遇。前後二十年之間。所以往復規警出入倚仗者。其力爲不少矣。豈知公不少留而遽棄乃爾耶。長燮持家狀示余曰。狀行。非平素相熟不可。與大人相熟。匪公伊誰。余以淺陋。固知其有難承膺。而撫念事契。有不忍終辭者。略舒梗槪以還之。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윤관(尹瓘)과 여진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였다. 홍치(洪治) 1441~1513.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여평(汝平), 호는 일송(一松)이다. 저서로 《심학장구집주대전(心學章句集註大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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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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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6) 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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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묵계 박공 행장 贈嘉善大夫戶曹參判黙溪朴公行狀 공의 휘는 장근(章根), 자는 진초(震初)이고 묵계는 그의 호이다. 세계(世系)는 진원(珍原)에서 나왔으며 직제학을 지낸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0)이 공의 중조(中祖)이다. 세자사부(世子師傅) 증 이조 판서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51)이 공의 7대조이다. 죽천(竹川)은 휘 근효(根孝)를 낳았다. 근효는 호가 만포(晩圃)이고 관직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훈(功勳)으로 이름이 났다. 군자감 정은 휘 춘수(春秀)를 낳았다. 춘수는 호가 아수(我誰)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직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병자년(1636, 인조14)에 의병을 일으켰다. 직장은 휘 몽형(蒙亨)을 낳았다. 몽형은 호가 농은(農隱)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보성(寶城)에서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살았으며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만리(萬履)는 참봉을 지냈고 조부 휘 무석(武錫)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고(考)인 휘 수원(守遠)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진주 소씨(晉州蘇氏) 식(植)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계비(繼妣)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유중(維重)의 딸로 부덕(婦德)으로 칭송을 받았고 영조(英祖) 계유년(1753, 영조29) 10월 9일에 장흥부의 녹동리(鹿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장난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부모님 곁을 지키며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스승에게 나아가52) 공부하게 되자 송독하여 익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조금 자라서는 직접 집안일을 처리하여 집 안팎을 드나들며 온 힘을 다하였고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끝나고 여력이 있으면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고 책을 읽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문장의 이치와 문사(文詞)의 화려함이 찬연하게 날로 성취를 이루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를 위한 공부는 위기(爲己)의 학문이 아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또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다." 하였다. 늘 경전의 주지(主旨)에 몰두하고 예설(禮說)의 단서를 찾는 것을 존심치기(存心治己)의 근본으로 삼았다. 집안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반드시 의절(儀節)을 강구(講求)하여 하나하나 예를 따랐으며 일찍이 임시방편으로 시속(時俗)을 따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친척이나 오랜 벗들이 공을 본받아 행하였으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앞다투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을 당했을 때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애통함에 몸이 무척 수척하게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났다. 봄, 가을이 되면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슬퍼하기를 마치 부모를 대하는 듯이 하였고 삭망(朔望)이 되면 분영(墳塋)에 성묘를 빠트리지 않았다. 형제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함께 자는 일을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재숙(齋塾)을 세워 서적을 비치하고 사우(師友)를 맞이하며 자손의 과정(課程)을 점검하였는데 분명하여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친척이나 이웃이 병이 들거나 죽어서 상례를 치르거나 굶주리거나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안부를 묻고 진휼하면서도 집안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선영 아래에 집 한 칸을 짓고 영모(永慕)라고 편액을 걸었다. 매번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계절이 오면 친족을 불러 모아 정겨운 담화를 펼치고 벗들을 모아서 그윽한 정취를 드러내고 자제와 향리(鄕里)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강서(講書) 규정이나 독법에 대한 의절을 거행하였다. 평소에 공경과 근신(謹愼)으로 자신을 지키고 충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여 소문이 미치는 곳에서는 애모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군자다운 어른으로 추앙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 6월 4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83세였으며 살던 동네인 시근등(柿根嶝)의 사좌(巳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정환(廷煥)이 수직(壽職)53)을 받아 귀하게 되면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 세준(世浚)의 딸로 3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재무(載茂), 재충(載忠), 재철(載喆)이다. 계배(繼配)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진계(震啓)의 딸로 2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계환(桂煥), 정환(廷煥)이며 정환은 수직(壽職)으로 대호군(大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손자는 중흥(重興), 중회(重會)54), 중운(重運)55),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56),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57)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준수하고 특출한 자질로 시(詩)와 예(禮), 문헌을 갖춘 집안에 태어나서 가풍의 영향을 받고 학문과 덕행을 갈고닦아 이처럼 우뚝하게 수립하였다. 마땅히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쳐 한 시대에 쓰여야 했건만 동강(東岡)58)을 굳게 지키고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공에게는 진실로 유감이 없겠지만 사세(斯世)의 아쉬움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계윤(季胤)59) 중순(重淳)이 아들 기현(琦鉉)을 보내 공의 덕을 서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근방에 사는 후생(後生)으로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삼가 공을 우러러 흠모한 지 진실로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약간의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보태었다. 公諱章根。字震初。黙溪其號也。系出珍原。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其中祖也。世子師傅贈吏曹判書竹川先生諱光前。其七世祖也。竹川生諱根孝。號晩圃。官軍資監正。壬辰著勳。監正生諱春秀。號我誰。中司馬。官直長。丙子擧義。直長生諱蒙亨。號農隱。通德卽。自寶城移寓長興府。是公之高祖也。曾祖諱萬履。參奉祖諱武錫。贈司僕寺正。考諱守遠。贈左承旨。妣晉州蘇氏植女。無育。繼妣寶城宣氏維重女。以婦德稱。以英廟癸酉十月九日。生公于府之鹿洞里。幼而岐嶷。不好戱遊。日侍親側。唯諾唯謹。就傅上學。誦習不放。家貧甚。稍長。躬幹家務。出入竭蹶。備極忠養。行有餘力。輒侍側讀書。以悅親志。文理詞華。斐然日就。嘗曰。功令非爲己之學。居今之世。雖不可廢。而亦不可以專力於此也。每潛沈經旨。紬繹禮說。以爲存心治己之本。家有冠婚喪祭。必講求儀節。一一從禮。未嘗苟且循俗。是以親戚知舊。效而行之。有未瑩處。爭來取決焉。遭前後喪。一遵家禮。哀毁備至。杖而後起。春秋霜露。悽愴如見。朔望墳塋。展省無闕。與兄弟友愛甚篤。長枕大被。老而不替。立齋塾儲書籍。邀師友課子孫。無不的有成規。族戚隣里。有疾病死喪及飢饉匱乏。輒存訊之賙恤之。不知家力之不贍也。晩構一室於先壟下。題其顔曰永慕。每以佳辰良節。會族親以舒情話。聚朋舊以暢幽情。招子弟及鄕里少年。行講規讀法之儀。平居以恭謹持己。以忠慤接物。風聲攸曁。無不愛慕欣欣。以君子長者推之。乙未六月四日考終。享年八十三。葬于所居坊柿根嶝巳坐原。以子廷煥壽貴。贈戶曹參判。配興德張氏世浚女。擧三男。曰載茂載忠載喆。繼配仁川李氏震啓女。擧二男。曰桂煥廷煥。壽陞大護軍。孫曰重興重會重運重玟重萬重龍。重淳官通政。重熙重憲。曾孫以下不盡錄。嗚乎。公以秀爽雋異之資。生於詩禮文獻之家擩染濯磨偉然植立如此宜其有展布蘊藉。以需一時之用。而固守東岡。優遊卒歲。在公固無憾焉。而爲斯世之缺望爲何如耶。公季胤重淳。伻其子琦鉉來謁狀德之文。余以傍近後生。雖靡倂世。而嘗竊慕仰。固已久矣。玆不敢以匪其人牢辭。謹据家狀。略加修潤焉。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 1368?∼1446?. 초명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 1526∼1597.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헌릉 참봉(獻陵參奉), 왕자의 사부(師傅), 함열(咸悅)·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이 되었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중흥(重興), 중회(重會) 《송사집》에 실린 〈증호조참판박공묘지명(贈戶曹參判朴公墓誌銘)〉에 따르면, 첫째인 재무(載茂)의 아들이다. 중운(重運) 둘째인 재충(載忠)의 아들이다.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 넷째인 계환(桂煥)의 아들이다.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 다섯째인 정환(廷煥)의 아들이다. 동강(東岡)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는 곳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선세(先世) 이래로 국가에 대한 공훈과 임금의 은총이 대를 이어 왔는데 그대만 어찌하여 동강의 언덕을 지키려고 하는가?[自先世以來, 勳寵相承, 君獨何爲守東岡之陂乎?]"라는 구절이 있다. 계윤(季胤) 막내아들의 맏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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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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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죽와 처사 문공 행장 竹窩處士文公行狀 공의 휘는 영수(永壽), 자는 극여(極汝), 호는 죽와(竹窩)이다. 세계(世系)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공의 상조(上祖)이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대대로 능성(綾城)에 살았으며 충효와 시(詩)ㆍ예(禮)를 세업(世業)으로 삼아 사림(士林)에 이름이 났다. 고(考)는 휘가 혁진(爀鎭)이고 호는 오재(鰲齋)이며,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영환(永桓)의 딸이다. 순조 신유년(1801, 순조1)에 우봉리(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홍씨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곰[熊]을 홍씨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잘 기르거라. 이 아이가 너희 집안의 천리마이다." 하였다. 공이 태어난 뒤 소자(小字)를 웅(熊)이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기와 국량이 남다르고 타고난 자질이 자애롭고 선량하였다. 아이들과 놀면서 한 번도 다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구하면 차마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가지 못하고 반드시 가슴에 품고 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갑술년(1814, 순조14)에 큰 흉년이 들어 쌀 동이가 텅 비게 되었다. 공은 겨우 10여 세였건만 항상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어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부모의 몸에 편하고 입맛에 맞는 물품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형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채소, 나물 따위일지라도 반드시 한 그릇에 담아 형과 함께 먹었다. 그해에 온 가족이 돌림병에 걸려 형이 죽고 양친이 모두 위태로웠다. 공은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양친이 복용할 약을 맛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때때로 형의 널을 어루만지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몇 달이 지나 양친이 모두 회복되자 향리(鄕里)에서 감탄하며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학업에 전력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자손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일에 더욱 간절하게 마음을 쏟았으며 의방(義方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오산(金鰲山)의 뛰어난 산수를 좋아하여 초가를 엮고 오솔길을 열어 도서(圖書)와 금(琴)과 술을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렸으며 빈객이나 붕우가 이따금 이르면 시를 창화(唱和)하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자못 흥취를 다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7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배(配)는 공주 이씨(公州李氏) 문길(文吉)의 딸로 성품이 부드럽고 온순하며 행실이 단정하고 얌전하여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묘(墓)는 작약산(芍藥山) 아래 정좌(丁坐)에 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정휴(定休)는 백부의 후사가 되었고 효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둘째는 석휴(碩休)이다. 딸은 광산(光山)의 이선호(李瑄鎬), 강화(江華)의 최익교(崔益敎), 전주(全州)의 이문종(李文宗)에게 출가하였다. 정휴(定休)의 아들은 봉환(鳳煥), 석휴(碩休)의 후사가 된 용환(龍煥), 천휴(千休)의 후사가 된 기환(麒煥), 그리고 귀환(龜煥)이 있다. 아, 공은 곧 옛날의 유로(遺老)와 같은 인물이다. 어려서는 효제(孝悌)로 이름이 났고 장성해서는 신의(信義)로 알려졌으며 늙어서는 염정(恬靜 물욕 없이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칭송을 받았다. 말을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일을 처리하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집안에서 고을에 이르고 친척에서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을 흠모하고 공경하면서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의림(義林)60)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때 공에 관한 얘기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주저하면서 실행하지 못하고 일도 많아서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이제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선인(先人)의 또래가 차례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 박아(博雅)하고 장자(長者)의 후덕한 풍모를 가진 향당(鄕黨)의 원로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봉환(鳳煥)이 공의 유장(遺狀)을 안고 와 나에게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청하였다. 나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진실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지만, 요행스럽게 혼자만 살아남은 인생이 머리가 흰 늙은이가 되어 향당 선배의 유언(遺言)과 유사(遺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비통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永壽。字極汝。號竹窩。系出南平。江城君諱益漸。其上祖也。至中葉。世居綾城。以忠孝詩禮著爲世業聞于士林考諱。爀鎭。號鰲齋。妣豐山洪氏永桓女。以純廟辛酉。生公于牛峯里第。先是洪氏夢一老人持熊與之曰。善養之此其汝家千里駒也。旣生。小字曰熊。自幼志局不羣。天姿慈諒。與兒曺遊嬉。未嘗爭競。得一美味。不忍先入口。必懷而獻之。當甲戌大無。甁罌枵如。公方十餘歲。常漁採爲養。而便身適口之物。未嘗乏焉。與其兄友愛甚至。得蔬食菜咬。必共一器而食。是歲渾家犯疫。兄歿。兩庭俱危。公露禱嘗藥。夜不解帶。時時撫柩哀號。居數月。兩庭皆蘇。鄕里莫不歎賞。嘗以不得專力學業爲恨。敎子訓孫。尤惓惓致意。導以義方者。無所不至。愛金鰲水石之勝。結茅開逕。圖書琴酒。日夕嘯咏。賓朋時至。唱和酬酢。頗盡其趣。以乙丑七月二十七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五。配公州李氏文吉女。婉順貞靜。閫範無違。墓在芍藥山下丁坐合兆。二男三女。男定休。系伯父。以孝薦剡。碩休。女光山李瑄鎬江華崔益敎全州李文宗。定休男鳳煥龍煥系碩休后。麒煥系千休后。龜煥。嗚乎。公卽古之遺老也。幼以孝弟著長以信義聞。老以恬靜稱。出言而人無不信。處事而人無不服。自家庭至鄕閭。自親戚至朋友。皆愛慕欽欽。各得其心。義林幼侍先人側。得聞公久矣。而因循多故。未得一承顔範。今爲三十年間事耳。先人年行。次第奄歿。而鄕黨耆舊。博雅長厚之風。不可得以復見矣。鳳煥抱其遺狀。請予脩潤。以予無似。固不敢下手。而孤露餘生。至老白首。得見鄕黨先輩遺言遺事。其悲感爲何如也。玆不敢辭。 의림(義林) 본 행장의 지은이인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이다.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3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일신재집(日新齋集)》 21권 10책과 《일신재 선생 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 3권 2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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