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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사에 머물며 김군식에게 써 주다 留新安社。書贈金君式。 고(故) 대곡옹(大谷翁)46)은 우리 사문의 고족(高足 뛰어난 제자)으로, 그의 학술과 행실은 한 시대의 으뜸이 되고 후학의 모범이 될 수 있었는데, 사문(斯文)이 복이 없어 중도에 갑자기 삶이 멈추어 오래도록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였다.임인년(1902) 봄에 내가 사문(師門)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47)로 강성(江城 경남 산청의 옛 지명)의 신안사(新安社)에 갔었는데, 당시에 산석옹(山石翁)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한 소년이 그를 만나보게 하고 말하기를, "이 분은 대곡옹 집안사람으로, 자(字)가 군식(君式)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부친과 여러 종친들이 대곡옹의 유고(遺稿)를 간행할 것을 도모하여 한창 글을 거두어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보내 여기에 오게 된 것이었다.아, 대곡을 보지 못한 지 이십 년 만에 비로소 그 집안사람을 보게 되었으니, 슬프면서도 위안이 되는 마음이 어찌 원빈(元賓)48)을 만나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더욱이 그의 문장을 모아 책으로 간행하여 대곡으로 하여금 백세토록 썩어 없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종친을 돈독히 하는 의리와 어진 이를 숭상하는 정성은 참으로 세상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군식을 삼가 살펴보건대, 함께 지내는 여러 날 동안 몸가짐이 한결같아 지초(芝草)의 뿌리와 예천(醴泉)의 원천임을 또한 속일 수 없었고, 분연히 뜻을 세워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 대곡의 도로 하여금 문정(門庭) 사이에서 실추되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김씨(金氏) 한 가문만의 복일뿐이겠는가. 생각건대, 존대인 어른이 오늘날 애를 태우며 마음을 쓰고, 피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것이 이러한 뜻이 아니라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이다. 故大谷翁我師門高足。其學術行義。足以爲一世之冠冕。來學之標範。斯文無祿。中途遽閼。而爲有識之怊悵久矣。歲壬寅春。余以師門刊事。到江城之新安社。時山石翁在座。一少年使見之曰。此卽大谷翁門內人。字君式也。其大人丈與諸宗。謀刊大谷翁遺稿。而方收聚文字。故送此人來此也。嗚呼。不見大谷二十年。乃見其門內人。其悲慰之情。豈惟如見元賓而已。況收其文刊其書。使大谷不朽於百歲。其惇宗之義。尙賢之誠。信不可謂世無好人也。竊覸君式。相處累日。操守有常。芝醴根源。又不可誣矣。奮然立志。循循不舍。使大谷之道。不墜於門庭之間。此豈惟爲金氏一門之福也耶。尊大人丈今日所以若心血力者。想未必非此意云爾。 대곡옹(大谷翁) 19세기 유학자인 김석구(金錫龜, 1835~1885)로, 대곡은 그의 호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으로, 일신(日新) 정의림(鄭義林),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奎)와 더불어 노문 삼자(三子)라 일컬어졌다. 임인년(1902)……일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 등과 함께 경남 산청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스승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집을 목판으로 삼간(三刊)한 일을 말한다. 원빈(元賓) 원빈(元賓)은 당나라 때의 문장가인 이관(李觀)의 자로, 한유(韓愈, 768~824)의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 한유와 함께 문장 공부를 하면서 서로 우열을 다툰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29세에 요절하였다. 한유는 이관이 죽은 뒤에 이사석(李師錫)에게 답한 편지에서 "원빈을 생각하지만 보지 못하여 원빈이 사귀던 사람을 보면 곧 원빈을 보는 듯하다.[思元賓而不見, 見元賓之所與者, 卽如元賓焉.]"라고 말하였다. 《韓昌黎集 卷3 答李秀才書》 여기에서는 대곡 김석구를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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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덕의 자설 宋士德字說 《시경》에 이르기를, "많고 많은 선비들이 문왕의 덕을 잡았네."50)라고 하였으니, 덕이 무슨 물건이라고 잡을 수 있겠는가마는 보존하고 지켜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단속하고 성찰하여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게 하여 따라 매진하며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는다.[純亦不已]51)"는 경지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한다면 이른바 "문왕이 나의 스승이다."52)라는 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송씨(宋氏)의 자손 병기(秉基)가 삼가례(三加禮)53)를 마치고 사덕(士德)으로 자(字)를 삼았으니, 뜻을 취함이 크지 않는가. 아침저녁으로 힘써서 이 아름다운 자를 지어준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詩云。濟濟多士。秉文之德。德是何物而可以秉執。操存持守。勿使有須臾之離。提撕省察。勿使有毫忽之違。遵循征邁。馴致乎純亦不已之地。則所謂文王我師者。信不我欺矣。宋氏子秉基。三加告畢。字以士德。其所以取義者。不其大矣乎。夙夜勉勵。母負此錫嘉之意也。 많고……잡았네 《시경》 〈주송(周頌) 청묘(淸廟)〉에 나오는 시구(詩句)이다. 순수함이……않는다 《중용》 제26장의 "문왕이 문왕이 된 까닭은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文王之所以爲文王, 純亦不已.]"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문왕이……스승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공명의(公明儀)의 말로, 맹자가 이르기를, "공명의가 말하기를, '주공이 문왕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으니,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文王我師也, 周公豈欺我哉?]'라고 했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삼가례(三加禮) 관례(冠禮) 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으로, 초가(初加)ㆍ재가(再加)ㆍ삼가(三加)로 나뉜다. 《가례》 〈관례〉에 의하면, 초가에서 치포관(緇布冠)과 복건(幅巾)을 씌우면 관자(冠者)는 사계삼(四䙆衫)을 벗고 심의(深衣)로 갈아입은 다음 검은 신발[納履]을 신는다. 재가에서 모자(帽子)를 씌우면 관자는 심의를 벗고 조삼(皂衫)으로 갈아입은 다음 혁대(革帶)를 하고 가죽신[繫靴]을 신는다. 삼가에서 복두(幞頭)를 씌우면 관자는 관직이 있는 경우 공복(公服)과 혁대를 하고 가죽신[納靴]을 신고 홀(笏)을 들며 관직이 없는 경우 난삼(襴衫)을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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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와 정공 묘지명 黙窩鄭公墓誌銘 정군 재한(鄭君在翰)과 이군 승우(李君承愚)는 모두 우리 고을의 선사(善士)이다. 두 사람은 대대로 한마을에 살면서 노년까지 서로 지켜 주며 의연히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어느 날 정군이 그 선대인(先大人) 묵와공(黙窩公)의 유사(遺事)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가장은 바로 이군이 지은 것이다. 이군은 선대부터 교분이 있던 집안의 자제로 배종(陪從)하며 출입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이 아니니, 묵와(黙窩)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군만 한 이가 없다. 게다가 이군은 현명하여 필시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았을 것이니, 그 가장의 말은 실로 믿을 만할 텐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 있겠는가. 그렇지만 교분으로 말하면 모두 벗이니, 이군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내가 어찌 유독 사양하겠는가.살피건대, 공의 휘는 백환(百煥), 자는 익서(益瑞), 호는 묵화(黙窩)이다.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신라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거족(鉅族)이었다. 조선에는 휘 여해(汝諧)가 있는데, 경학과 문장,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하였다. 고조는 휘가 인채(仁采), 호가 덕곡(德谷)인데,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증조는 휘가 석(錫), 호가 반산(盤山)이다. 조부는 휘가 양무(陽武)이고, 부친은 휘가 의상(義相)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기묘년(1819, 순조19) 7월 7일은 바로 공이 태어난 날이다.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계비는 성격이 까탈스러워 어울리기 어려웠지만 공은 정성을 다해 잘 받들었으니, 비록 소 밑을 청소하는 일51)과 회초리를 맞는 고통도 마음에 담지 않고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인(大人)이 매양 계비가 자애롭지 않은 것을 우려하였는데, 공이 울면서 간하기를 "자식이 만약 효도한다면 어머니가 어찌 자애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한 것은 자식의 잘못입니다."라고 하니, 대인이 가련하게 여겨서 그만두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계비가 감동하여 마침 기뻐함에 이르자 친척과 이웃들이 모두 감탄하여 왕상(王祥)의 효성에 견주었다.계비가 세상을 떠나자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졌다. 계비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주환(周煥)이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는데, 함께 잠자며 한 이불을 덮을 정도였고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공의 외삼촌이 매우 가난하여 공에게 와서 의탁하였는데, 낳아 주신 부모처럼 섬겨 무엇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갖가지로 도와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재산을 털어 장사 지내주고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형제라곤 오직 외삼촌만 계셨는데, 지금 모두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평상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았다. 눈으로는 예가 아닌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예가 아닌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였으며,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탄복하였다.기묘년(1879, 고종16) 1월 4일에 졸하였다. 광대동(光大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오씨(寶城吳氏) 오용상(吳龍祥)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은 재한(在翰)이고, 손자는 영현(榮鉉), 장현(章鉉)이고, 딸은 평택(平澤) 임노열(林路烈)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어머니는 매우 수고하셨으니 母氏劬勞나를 낳고 길러 주셨네. 生我育我어린 자식 두고 어머니 떠나셨으니 子幼母違외로운 몸 누구를 의지할까. 煢煢何恃민자건은 갈대꽃 넣은 옷 입었고52) 閔被蘆絮왕상은 모진 고초 겪었네.53) 祥遭楚虐곡진하게 받들어 따랐고 委曲承順말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네. 不見辭色끝내 기뻐함에 이르렀으니 終焉底豫근심스럽게 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았네. 不戚不咨큰 강령 이미 확립되니 大綱旣立온갖 사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네. 萬目可推 鄭君在翰李君承愚。皆吾鄕善士。二人世居一巷。到老相守。毅然爲道義之交。一日鄭君以其先大人黙窩公遺事狀。來謁誌銘之文。狀卽李君所撰也。李君以世交子弟。陪從出入。不啻久矣。則詳黙窩之行宜。莫如李君。且以李君之賢。必不爲阿私。則其言固可證信。何待乎余言。以契分則均是友也。李君之所不辭。余豈獨辭之哉。按公諱百煥。字益瑞。號黙窩。河東之鄭。自羅至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汝諧。經學文行。著稱於世。世云遯齋先生。高祖諱仁采。號德谷。官知中樞。曾祖諱錫。號盤山。祖諱陽武。考諱義相。非淸道金氏相俊女。繼妣金海金氏某女。純廟己卯七月七日。卽公之寅降也。幼喪所恃。繼妣性峻難諧。公克意承順。雖牛下之役。夏楚之苦。不作於意。不見於色。其大人每恐其不慈。公泣而諫曰。子若孝焉。則母豈不慈。母之不慈。子之罪也。大人憐而止之。久之。繼妣感之而竟底豫焉。親戚鄰里。莫不嗟賞。以王祥之孝擬之。繼妣歿。哀毁過禮。繼妣有一男曰周煥。公撫愛甚篤。同寢同被。至老不替。公舅氏至貧。來依於公。事之如所生。凡百周恤。無所不至。其歿也。傾家財以營葬。因語人曰。吾早而失母。母之同氣。惟舅氏在。今皆失之。語了涕下沾衿。平居非其力不食。非其人不友。目不接非禮之色。耳不聽非禮之言。勅身正家。平心率物。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己卯正月四日卒。葬光大洞酉坐原。配寶城吳氏龍祥女。有婦德。男在翰。孫榮鉉章鉉。女適平澤林路烈。銘曰。母氏劬勞。生我育我。子幼母違。煢煢何恃。閔被蘆絮。祥遭楚虐。委曲承順。不見辭色終焉底豫。不戚不咨。大綱旣立。萬目可推。 소 밑을 청소하는 일 진(晉)나라의 이름난 효자인 왕상(王祥)의 고사를 차용한 일화인 듯하다. 《진서(晉書)》〈왕상열전(王祥列傳)〉에, 왕상(王祥)의 계모 주씨(朱氏)가 아버지에게 왕상을 모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왕상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 매양 소 밑을 청소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민자건(閔子騫)은……입었고 《태평어람(太平御覽)》 권819 〈효자전(孝子傳)〉에, "민자건이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겨울에 솜을 넣은 옷 대신 갈대꽃을 넣은 옷을 입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뒤에 그 사실을 알고서 계모를 내보내려고 하자 민자건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한 아들만 얇은 겨울옷을 입지만,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추위에 떨게 됩니다."라고 한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왕상은……겪었네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五倫行實圖 孝子》여기서는 정백환(鄭百煥)이 계모에게 고생한 것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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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고공 묘표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高公墓表 선덕(先德)이 말하기를 "후덕(厚德)한 사람은 반드시 복록과 장수를 누리지만 복택(福澤)은 사악한 사람에게 내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세상에서 이른바 복을 누렸다는 집안을 살펴보건대 그 선대에서 공덕을 쌓은 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지금 우리 고을 고(故) 지재(止齋) 고공(高公)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공은 빼어나고 영특한 자질로 경전에 힘쓰고 학문을 쌓았으며 마음을 세우고 몸을 삼갔으니, 그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신중하고 성실한 행실과 학문하고 시례(詩禮)를 익힌 풍모는 우뚝이 고을에서 명성이 있었다. 평상시 광채를 숨기고 자취를 감춘 채 시속을 따르지 않아, 득실과 이해에 대해서 아득히 알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 묵묵히 듣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오직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만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힘썼다.이 때문에 부모를 섬길 적에는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형제를 대할 적에는 우애가 아주 넉넉하였으며, 친족을 대할 적에는 은덕과 정의가 두루 퍼졌으며, 벗을 사귈 적에는 신의가 뚜렷이 드러났으며, 생도를 가르칠 적에는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그리하여 안팎으로 원망이 없고 원근에서 한목소리로 서로 칭찬하여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후인이 계승하여 선생의 법도가 없어지지 않았고, 신명(神明)이 도와 복록이 끊기지 않았다. 이에 성대하게 한 고을의 모범적인 가문이 되었고 먼 후대에까지 복록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이른바 후덕한 사람은 반드시 복록과 장수를 누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린 바를 살펴보면 그 당시 쌓은 공덕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공의 휘는 인건(仁建), 자는 사영(士英), 지재(止齋)는 그의 호이다. 고씨(高氏)는 계보가 탐라(耽羅)에서 나왔다. 휘 복림(福林)에 이르러 장택군(長澤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휘 열(悅)은 태종 때 호조 참판을 지냈다. 휘 상덕(尙德)은 지평이고, 휘 자정(自貞)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차관(敬差官)으로 본성(本省)을 순도(巡到)하였다. 휘 신긍(愼矜)은 충순위(忠順衛)로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 익심(益深)인데, 진사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이고, 증조는 휘 명진(明進)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조부는 휘 현(鉉)인데, 진사이다. 부친은 휘 경리(景离), 호 둔암(遯庵)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이다. 온후하고 인애하며 곧고 훌륭하였으며 부덕(婦德)을 갖추었다.공은 인묘(仁廟) 경오년(1630, 인조8)에 태어나 을묘년(1675, 숙종1) 9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46세이다. 나중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제민(金濟民)의 따님인데, 규중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묘소는 능주의 이지촌(鯉池村) 오른쪽 언덕 무좌(戌坐)에 있는데, 공과 상하로 봉분을 조성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대기(大器), 차자는 태익(泰益)이다. 장방손(長房孫)은 진모(振謨)이고, 증손은 명복(命復)이다. 차방손(次房孫)은 응성(應星)이고, 증손은 명집(命集), 명윤(命允)이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6세손 진규(鎭圭)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해도 되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글을 짓는다. 先德有言曰。厚德必享祿壽。而福澤不降於滛人。嘗以是說而觀世之所謂享福之家。未有不由其父祖積累之力。今於吾鄕故止齋高公。亦可以見矣。公以挺邁開悟之資。劬經積學。立心飭躬。其孝友謹慤之行。學問詩禮之風。偉然有譽於鄕邦間。平居晦光斂迹。不趨時華。於得失利害。漠然若不省也。於是非毁譽。默然若不聞也。惟於素其位而行其義者。勉勉焉如恐不及。是以事父母而愛敬備至。在兄弟而友悌隆洽。處族戚而恩誼流通。交朋友而信義著行。敎生徒而信從日衆。內外無怨。遠近相得。一口稱賞。無有間言。以至來許承襲而典刑不空。神明扶佑而福祿不替。蔚然爲一鄕法家。百年福宅。此非所謂厚德必享祿壽者耶。觀其所享。而當日之積累。盖可知也已。公諱仁建。字士英。止齋其號也。高氏系出耽羅。至諱福林封長澤君。子孫仍貫焉。至諱臣傳。入我朝。官戶曹參議。諱悅太宗朝戶曹參判。諱尙德持平。諱自貞文科。以敬差官巡到本省。諱愼矜忠順衛。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益深進士昌陵參奉。曾祖諱明進通德郞。祖諱鉉進士。考諱景离號遯庵。有隱德。妣昌寧曺氏義修女。溫仁貞嘉。婦德甚備。公以仁廟庚午生。乙卯九月十九日卒。享年四十六。後贈承政院左承旨。配光山金氏濟民女。閫儀無闕。有女士風。墓綾之鯉池村右岡戌坐上下封。有二男。長大器。次泰益。長房孫振謨。曾孫命復。次房孫應星。曾孫命集命允。玄孫以下不能盡錄。六世孫鎭圭。抱家狀。來請表墓之文。余以非其人。牢辭不獲。謹據狀而爲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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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림재 안공 행장 德林齋安公行狀 공의 휘는 수책(壽策), 자는 인직(寅直), 호는 덕림(德林)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의 후손이다. 회헌 선생의 증손 휘 원형(元衡)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기에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죽성군의 증손 휘 을겸(乙謙)이 영암(靈巖)의 고을원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장흥(長興)에 살았다. 고조의 휘는 영룡(迎龍)이고, 증조의 휘는 한징(漢徵)이다. 조부의 휘는 택인(宅仁), 호는 해옹(海翁)으로, 장흥부의 동쪽 건산촌(乾山村)에 대대로 살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도움을 받아 생활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떨며 구걸하거나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면 문득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또 풀어 준 노비가 백여 구(口)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몽원(夢元), 선비(先妣)는 청주 김씨(淸州金氏) 판관(判官)을 지낸 용채(龍采)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부덕(婦德)까지 겸비하였다. 정묘(正廟) 정사년(1797, 정조21) 11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난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처럼 의젓하였으니, 비록 잠시 잠깐도 개구리 걸음걸이 하는 사이에도37) 어버이의 뜻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해옹공(海翁公)으로부터 대수가 내려오면서 가세가 기울어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이 온 힘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였다. 심지어 농사짓고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며 품팔이하거나 장사하는 것까지 직접 하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비록 곤경에 처하여 떠돌아다니거나 온갖 세파 속에서도 반드시 책을 가지고 다녀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번번이 책을 폈으니, 옛날에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거나38) 나뭇짐을 지고 독서한 자39)와 같았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禮)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어머니를 모실 적에 효심을 다해 봉양하여 어머니에게 질병이 있으면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숟갈 뜨면 자기도 한 숟갈 뜨고 어머니가 두 숟갈 뜨면 자기도 두 숟갈 떴다.40) 하루는 어머니가 옴이 올랐는데, 갑자기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비자(枇子)를 사용하면 낫는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니 이 과일을 파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구하여 바치자 과연 차도가 있었다. 또 어머니가 재차 학질에 걸려 몇 년 동안 낫지 않았다.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든 어버이가 계시는데 외출하였다가 들어가면서 드릴 맛있는 음식이 없구나.' 하였다. 마침 거위 무리가 강에 가득한 것을 보고서 지팡이를 던져 거위 한 마리를 잡아서 마침내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올렸는데 학질이 곧 나았다. 김씨 부인이 언젠가 꿈속에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부르면서 말하기를 "효자 아무개는 이것을 받으라."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공이 없어서 김씨 부인이 나가서 받으니, 바로 종이 뭉치 한 봉(封)이었다. 사람들이 "상천에서 복을 내렸으니 필시 전답 문권(文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가세가 날로 형통해졌다. 중년에 능주(綾州)의 칠송리(七松里)로 이사하여 우거하면서 대문을 닫고 종적을 감춘 채 고요히 자신을 수양하였다. 한 방에 도서를 채우고 세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었으니, 유연히 석인(碩人)의 잊지 못하는 흥취41)가 있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반드시 삼가서 행하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다. 자제(子弟)와 가속들로부터 안팎의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직책을 나누어 주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이 엄정하여 조리가 있었다. 족친과 빈붕(賓朋)을 접대할 때면 모두 기뻐하고 마음에 들어 허물없이 터놓고 지냈다.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2월 9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간리촌(澗里村) 뒤 애운동(靄雲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완산 이씨(完山李氏) 진방(震芳)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첫째 아들은 영({氵+穎}), 둘째 아들은 협(浹)이고, 딸은 서춘구(徐春球)에게 시집갔다. 영은 후사가 없고 세 딸을 두었으니, 문방호(文邦浩)·민정호(閔禎鎬)·이교일(李敎馹)에게 시집갔다. 협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국정(國禎)으로 장방(長旁)의 양자로 갔고, 딸은 양재선(梁在璇)에게 시집갔다. 국정(國禎)은 창섭(昌燮)·종섭(宗燮)·홍섭(弘燮)을 낳았다. 아, 국정은 선사(善士)이다. 독서하고 학문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서 가업을 실추하지 않고 성대하게 능양(綾陽)의 명문가가 되게 하였다. 창섭 형제는 모두 스무 살 안팎 무렵에 특출하다는 소문이 났고 삼가고 조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으니, 안씨(安氏)의 남은 복록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덕림공(德林公)께서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니, '선행을 쌓으면 남은 경사가 있다.'라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의 훈계42)가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옛날에 선친의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서 들었다. 지금 국정이 기술한 가장(家狀) 1편을 얻어서 읽음에 당시 귀로 들은 것처럼 역력하니, 슬픈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다. 삼가 이처럼 서술한다. 公諱壽策。字寅直。號德林。勝朝文成公晦軒先生諱裕後。先生曾孫有諱元衡。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曾孫有諱乙謙。宰靈巖。因寓于長興。高祖諱迎龍。曾祖諱漢徵。祖諱宅仁號海翁。世居府東乾山村。愛人好施。賴活甚衆。行見寒乞僵路。輒解衣衣之。又白放奴婢百餘口。考諱夢元。妣淸州金氏判官龍采女。端淑貞靜。婦德備至。以正廟丁巳十一月某日生。公自幼不戲動不妄言。凝然如成人。雖造次蛙步之頃。未嘗一咈親意。自海翁公下世。家計無聊。公盡力就養。至於耕稼漁樵。行傭賃販。身親爲之。好讀書。雖在流離艱阻。世故萬端之中。而必以書自隨。少有間隙。輒披閱。如古之帶經而鋤。負薪而讀者。十九遭外艱。哀毁過禮。奉慈幃。盡孝養。有疾晝不離側。夜不就寢。一飯再飯。惟親是視。一日患疥瘡。忽夢有老人曰。用枇子可愈。夢訖。有鬻是果者。果見差愈。又患再瘧。積年彌留。一日自外歸家。自念病親下。出入無一味可以歸供。適見羣鵝滿江。因擧杖投之。中一鵝。遂持以供之。瘧疾乃差。金夫人嘗夢有仙人自天而下。呼之曰。孝子某受此。時公不在。金夫人出而受之。乃一封紙塊也。人以爲上天降福。必是土田文券也。自是家享漸息。中年移寓于綾州之七松里。杜門斂跡澹寂自養。一室圖書。三逕花竹。悠然有碩人不諼之趣。平日夙興夜寐。定省必謹。掃洗必淨。自子弟家衆。至內外婢僕。分職授事。嚴有條理。待族戚接賓朋。皆歡欣相得。絶其畦畛。以哲宗己未二月九日卒。得年六十三。葬于澗里村後靄雲洞亥坐原。配完山李氏震芳女。生二男一女。長氵+穎。次浹。女適徐春球。氵+穎無嗣。三女適文邦浩閔禎鎬李敎馹。浹一男一女。男國禎出后長旁。女適梁在璇。國禎生昌燮宗燮弘燮。嗚乎。國禎善士也。讀書學問。修身謹行。使家業不墜。蔚然爲綾陽名家者。昌燮兄弟。皆妙年騰異。謹勅從學。安氏餘祿。豈有量哉。此皆德林公積累不食之報。吾夫子積善餘慶之訓。豈不信然乎。公我先友也。昔者侍先人側。得聞公之行義。今得國禎所述家狀一編。讀之歷歷如當日耳聞。不勝悲感之私。謹述之如此云爾。 개구리……사이에도 개구리 걸음은 선 자리(脚下)가 편안하지 못한 것을 이른다. 경서를……하거나 전한(前漢)의 예관(兒寬)에 대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마다 독송하였다.[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8 兒寬傳》 나뭇짐을……자 육조(六朝) 시대 서진(西晉)의 문신이자 학자 유지(劉智)는 어릴 때 가난하여 나뭇짐을 지고 글을 읽었으며 유행(儒行)으로 이름났다. 어머니가……떴다 《소학(小學)》〈계고(稽古)〉에 "문왕이 병이 나자 무왕은 관과 띠를 벗지 않고 봉양하였다. 문왕이 한 숟갈 먹으면 무왕도 한 숟갈 먹고, 문왕이 두 숟갈 먹으면 무왕 또한 두 숟갈 먹었다.[文王有疾, 武王不說冠帶而養. 文王一飯, 亦一飯, 文王再飯, 亦再飯.]"라는 말이 나온다. 석인(碩人)이……흥취 석인은 어진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선행을……훈계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게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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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광산 이씨 행장 孺人光山李氏行狀 우헌(愚軒) 윤공(尹公) 자욱(滋郁)의 배(配)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고(故) 학생 덕홍(德弘)의 딸로 청심당(淸心堂) 조원(調元)의 후손이며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중황(重黃)의 딸이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8월 10일에 광주(光州)의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 20세에 남편의 집으로 시집왔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끼니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인은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모든 규범이 하나도 잘못되는 경우가 없었다. 존장(尊章 시아버지)인 묵양공(黙養公)은 성품이 엄격하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유인은 공의 뜻을 잘 받들어 한 번도 어기는 경우가 없었다. 고(姑 시어머니) 문씨(文氏)가 나이도 많고 눈도 멀어 20여 년에 걸쳐 일상에 남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여 눈이 먼 고통을 알지 못하였다. 적장자(嫡長子)의 아내로서 누대(累代)의 기일(忌日)을 받들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기(祭器)를 매우 정갈하게 준비하고 차리는 제물도 극히 향기로웠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출입이 간결하며 사치와 화려함을 금하고 무당이나 축사(祝史)를 멀리하였다. 온화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엄격함으로 자식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일에는 검박하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두텁게 베풀어 안팎의 친족이나 같은 마을의 남녀노소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곡진하였다. 신미년(1871, 고종8) 2월 28일 향년 41세에 세상을 떠나 석채동(石菜洞) 선영의 모향(某向)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 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상룡(相龍), 상봉(相鳳), 상귀(相龜), 상린(相麟)이고 딸은 정기현(鄭琪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손자는 모두 적지 않는다. 나는 윤씨(尹氏) 집과 한 마을에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출입하면서 지켜보고 일상적인 안부부터 길사와 흉사, 기쁜 일이나 슬픈 일에 대해서 한 집안인 듯 서로 친숙하였다. 우헌공(愚軒公)이 효자임을 알았고 또 공이 효자라는 명성이 반드시 내조의 힘이 아닐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상린(相麟)이 나에게 말하기를, "제 선비(先妣)의 훌륭한 계책과 덕성은 실로 옛날의 숙원(淑媛)에 부끄러움이 없지만, 규문(閨門) 안의 드러나지 않은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장인(丈人)께서 오래도록 이웃해서 살고 계셨으니 당연히 자세히 아실 것입니다. 선비를 위해 행장을 지어 인(仁)하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아,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말이 오랠수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후손이 번성하여 훗날의 복록이 다하지 않았고 상린(相麟)이 현명한 사우(士友)들과 종유하고 있으니 장차 입신(立身)하여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날이 올 것이다. 결코 고루하고 보잘것없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상린의 부탁이 더욱 간절하여 무심하게 넘기기 어려웠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적는다. 愚軒尹公滋郁齊光山李氏。故學生德弘女。淸心堂調元后。妣水原白氏重黃女。以純祖辛卯八月十日。生于光州馬山里。二十歸于夫家。家貧甚。簞瓢枵如。孺人夙興夜處。左右靡解。凡百家政。無一闕儀。尊章黙養公。性嚴少諧。孺人克意承順一無違忤姑文氏老而盲廢起居須人爲二十餘年。而安心便體。克享其樂。不知盲廢之爲苦也。以長旁冡婦所奉累世諱辰。致誠致齊。盥濯器皿。極其精潔。饋奠籩豆。極其芳馨。平居。寡言笑簡出入。禁奢華絶巫祝。和以御家。嚴以敎子。儉於持己。厚於施人。內外族親。隣里老幼。曲有恩意。以辛未二月二十六日終。得年四十一。葬于石菜洞先隴某原。擧四男一女。相龍相鳳相龜相麟。鄭琪鉉。內外諸孫不盡述。余與尹氏家。同住一巷爲數十年。出入守望。起居寒暄。以至吉凶歡戚。若一家之相熟。而知愚軒公之爲孝子人。又知公之得此聲。又未必非其內助之力也。相麟向余言。我先妣嘉謨懿範。實無愧於古之淑媛。而閨門事隱。誰其知之。惟丈人接隣之久。計應詳悉。願爲之狀。使得免於不仁不明之罪也。嗚乎宗族之稱。鄕黨之誦。一辭嘖嘖。久愈不泯。況螽斯蕃衍。後祿未艾。而相麟從遊賢士友。立揚顯親。將有其日乎。決非固陋無狀所可承當也。但相麟之託愈懇。而有難恝然。謹据其家狀。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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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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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양재 양공 행장 黙養齋梁公行狀 공은 성이 양(梁), 휘가 익환(益煥), 자가 중경(重慶)이며 관향(貫鄕)은 제주(濟州)이다. 당요(唐堯)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가 한라산(漢挐山)으로 내려와 탐라국(乇羅國)을 세우고, 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작위(爵位)와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동방(東方)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휘 팽손(彭孫)29), 호 학포(學圃)가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세상에서는 기묘 명류(己卯名流)로 일컬으며 조정암(趙靜庵) 선생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팽손은 교위(校尉)를 지낸 휘 응기(應箕)를 낳았으며, 응기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산립(山立)을 낳았다. 산립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인용(仁容)을 낳았으며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독서를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인용은 진사(進士) 휘 위남(諱渭)을 낳고 위남은 참봉에 제수되고 효성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위남은 휘 우전(禹甸)을 낳았으며 우전은 덕을 숨기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우전은 휘 지해(之瀣), 호 익우(益愚)를 낳았으며 지해는 우암(尤庵) 송(宋) 선생3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월곡(月谷)의 옛 전장(田莊)에서 송석정으로 나와서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그 지역에 집안을 이루었다. 지해는 휘 대하(大夏)를 낳았고, 대하는 현감을 지낸 휘 익조(益祖)를 낳았다. 익조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성헌(成憲)을 낳았는데,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일현(一鉉)이고 조부는 휘가 찬호(贊浩)이다. 고(考)는 휘가 식(栻)으로 문장과 덕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비(妣)는 장흥 마씨(長興馬氏) 언모(彦模)의 딸로 헌종 기해년(1839, 헌종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체구가 넉넉하고 얼굴이 둥글며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엄숙하고 장중하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다. 어려서부터 포부와 신조를 지니고 있어 말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으며 집안에서 효(孝)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을 표하는 의절(儀節)을 어기지 않았다. 집안이 평소 청빈(淸貧)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음식조차 자주 거르는 형편이었으나 몸소 농사를 지으며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시(詩)와 예(禮)에 밝은 명문가인데다 원림(園林)과 수석(水石)이 빼어난 곳에 살고 있어 평소에 왕래하는 선비나 사계절에 노닐며 즐기는 사람들로 뜨락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지만, 공은 주선하는 일에 힘을 다하고 접대에 정성과 예우를 갖추어 환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한가한 날에는 가숙(家塾)을 깨끗하게 치우고 아우인 덕환(德煥)과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학업을 연마하며 과정(課程)을 그치지 않았다. 평소에 인륜을 소중히 여기고 학식과 품행을 갖춘 선비를 숭상하며 권세나 이익에 빌붙지 않고 영예나 현달을 추구하지 않아 함께 교유한 자들은 모두 누추한 골목의 빈한한 벗들이었다. 남과 어울리는 것은 온화하면서도 정직하여 업신여기거나 예모 없이 대하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너그러워 애매하거나 대충대충 넘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종족(宗族)에게 사랑을 받고 붕우에게 신뢰를 받고 향리(鄕里)에서 흠모를 받았다. 대체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치가 의심스러우면 공에게 의지하고 자문(諮問)하여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중년에 아내를 잃었는데 여러 자녀가 모두 어린 나이였다. 그 정황이 애처로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이유로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다. 가숙(家塾)을 열고 스승을 맞이하여 자녀 교육에 매우 힘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평생의 소원은 오직 글을 읽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매번 경계할 때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독서를 하면서 나물 먹고 물 마시는 것조차 부족하였지만 학업은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들은 예전보다 배가 부르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이를 수 있건만 나태함이 더해서야 되겠느냐. 글을 읽고 행동을 삼가며 집안의 좋은 자손이 되는 것이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삼생(三牲)과 팔진미(八珍味) 같은 진수성찬으로 부모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공은 호방하고 기개가 넘쳤지만 남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늙어서는 더욱 외롭게 지내면서 묵양(黙養)을 자호(自號)로 삼아 만년에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을 기탁하였다. 원계(遠溪)로 연재(淵齋) 송(宋) 선생31)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또 면암(勉庵) 최(崔)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려 끝까지 의지하고 우러러 받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부절이 들어맞듯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았다. 선대(先代)의 전장(田莊)을 중수(重修)하여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어 아우와 노년에 이르도록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겼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을 만날 때마다 근처의 옛 친구를 불러 산 경치가 보이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은거하는 삶의 회포를 풀었다. 갑진년(1904, 광무8) 11월 23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 우봉(牛峰)의 왼쪽 기슭 선영 아래 갑자(甲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혁주(赫周)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기수(箕秀)의 딸이다. 모두 3남 5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회종(會宗), 회윤(會潤)이고 딸은 이기무(李基茂), 박재현(朴梓鉉), 임노일(林魯一), 김모(金某), 오모(吳某)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나와 공의 관계는 부친과 조부 때부터 대대로 교분(交分)이 있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다. 옛날 공의 선대인(先大人) 형제를 기억해보면 나이가 많고 덕이 깊어 풍도(風度)와 운치(韻致)가 뛰어났으며 내 선인(先人)과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불초(不肖)한 내가 만년에 이르러 또 공의 형제와 함께 늙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선대 때와 같으리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다만 공이 좀 더 세상에 남지 않고 보잘것없는 나만 뒤에 남았으니, 나의 끝없는 한이 어찌 우리 고장의 불행에서 그치겠는가. 회윤(會潤)이 조카 일승(一承)을 시켜 가장(家狀)을 지니고 나에게 와 영원히 후세에 전할 문장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보잘것없지만, 공을 잘 알기로는 진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어찌 감히 자꾸 사양하면서 서로 왕래했던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에 눈물을 훔치고 붓을 적시어 적어 보낸다. 公姓梁。諱益煥。字重慶。貫濟州。唐堯時。良乙那降于漢挐山。建國乇羅。至羅麗。世襲爵勳。爲東方著姓。至中葉有諱彭孫校理號學圃。世稱己卯名流。與趙靜庵先生。同享竹樹院。是生諱應箕校尉。是生諱山立贈戶曹參判。是生諱仁容僉正。築松石亭。以文籍自娛。是生諱渭南進士。除參奉。以孝旌閭。是生諱禹甸。隱德不仕。是生諱之瀣號益愚。受學尤庵宋先生之門。自月谷舊庄。出居於松石亭。因家焉。是生諱大夏。是生諱益祖縣監。是生諱成憲通德郞。於公爲高祖。曾祖諱一鉉。祖諱贊浩。考諱栻。世著文行。妣長興馬氏彦模女。以憲宗己亥生。公體厚面圓。風儀峻整。聲音弘亮。幼有志操。言笑不凡。入孝出恭。未有闕儀家素淸貧。簞瓢屢空。躬幹耕稼。備盡忠養。以詩禮名家。兼有園林水石之勝。平日過從之士。四時遊賞之人庭屨常滿。公周旋竭蹶。接待款厚。無一人失歡。間以餘日。淨掃家塾。與弟德煥對兀連業。不廢課程。平日愛好人倫。敦尙儒雅。不附勢利。不趨芬華。所與遊皆坊曲寒友生也。其接人和而正。不見有侵侮好狎之意。其處事公而恕。不見有依違苟且之狀。是以宗族愛之。朋友信之。鄕里慕之。凡事有所難。理有所疑。無不待以咨決焉。中年喪耦。諸子女皆幼。其情景可哀。而少有過差。不以愛憐而有所假借。開塾邀師。敎之甚力曰。平生所願。惟是文種不絶。每戒之曰。吾兄弟幼而讀書。咬菜飮水。猶爲不充。而課業不敢有懈。今汝輩比前日。可謂飽暖而怠惰過之耶。讀書勅行做人家好子孫。此是養志之大者。不然。三牲八珍。何足爲孝也。倜儻寡諧。老益踽凉。自號黙養。寓晩年自遣之意也。拜淵齋宋先生於遠溪。又上書贄於勉庵崔先生。以付究竟依仰之計。與奇松沙宇萬鄭艾山載圭。契遇甚密。往復不絶。重修先庄。栽花種竹。與其弟到老白首。日夕湛樂。每遇良辰佳節。招致備近知舊。婆娑徜徉於山色水聲之中。以敍幽逸之懷。甲辰十一月二十三日。以宿疾終。葬牛峰左麓先塋下甲坐原。配豐山洪氏赫周女。系配天安全氏箕秀女。擧三男五女。男會宗會潤。女李基茂朴梓鉉林魯一金某吳某。孫以下不盡錄。嗚乎。余於公。爲父祖世交。丱角舊遊。記昔公先大人兄弟。耆年淵德。風韻偉然。而與我先人。遊好源源。豈知不肖晩年。又得與公兄弟同衰相從如當日耶。但公不少延。而沙石在後。區區無窮之恨。豈止爲吾鄕之不幸也。會潤伻其姪一承。抱家狀。託以不朽之文。自惟無狀。而知公之深。則固不後於人矣。豈敢多讓而謂非從遊者之責乎。抆淚泚筆。書以還之。 휘 팽손(彭孫)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가리킨다. 자는 대춘(大春)이고,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1630년(인조8)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18) 순천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다. 우암(尤庵) 송(宋) 선생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이름은 시열(時烈),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에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연재(淵齋) 송(宋) 선생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말한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ㆍ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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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기 瑞軒記 남쪽 지방의 산 가운데 혹 서석산(瑞石山)119)보다 큰 것이 있겠지만 그 모습의 단엄(端嚴)함과 기상의 명수(明秀)함은 마치 대인 장자(大人長者)가 높이 공수하여 우두커니 서 있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것은 서석산이 실로 제일이다. 옛날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120)께서 이 산을 가장 사랑하여 소싯적에 유람해 보았고 만년에 마주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 조석으로 바라보았으니, 대개 천지의 정대한 기상은 사람과 산이 차이가 없다.오호라! 하늘이 돌보지 않아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뒤에 태어나 늦게 배운 사람이 갈팡질팡하여 귀의할 곳이 없는데, 당시 첨앙하던 마음을 깃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서석산만 존재하네. 돌아보건대 이 비천한 목숨이 유랑하다 궁벽한 곳에 머물러 노쇠함과 병이 침범하여 문을 닫고 세상을 사절하다보니, 드디어 이 산과 아울러 모두 잃게 되었다.안군(安君) 공삼(公三)121)은 상서로운 사람이다. 이 산의 끝에 살면서 이 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그 전 면목을 안석과 뜰 사이에 드러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고, 심지어 기거하며 출입하고 주선하며 돌아보는 사이에도 단엄 명수한 기상이 아님이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숭악(崧岳)의 준천(峻天)은 길보(吉甫)를 찬미하기 위한 것122)이고, 태산(泰山)의 암암(巖巖)함은 자여(子輿)를 찬미하기 위한 것123)이네. 군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지만 또한 선생의 문도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산을 보고 뒤미처 상상함에 광감(曠感)124)한 마음이 없겠는가. 선생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사랑하고 선생께서 마주하시던 것을 마주하면 그 기상과 체덕(體德)이 말씀으로 가르치던 것 보다 친절한 것이 어찌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의 뒤에 있겠는가. 군은 그칠 곳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네. 내 비록 병들었지만 장차 한번 행차를 준비하여 그대를 따라 서헌에 올라 늦게 태어나 사모하면서도 우러르지 못한 무궁한 회포를 위안 받으려 하네. 南方之山。或有大於瑞石者。而若其體容端嚴。氣象明秀。如大人長者。高拱凝立。使人仰止而不敢慢焉。則瑞石固第一也。昔我蘆沙先生。最愛此山。少時杖屨及焉。晚年築室相對之地。朝夕贍望。盖天地正大之氣。人與山不異也。鳴乎。昊天不弔。泰山已頹。後生晚進。倀倀靡歸。而可以寓當日瞻仰之餘者。惟是瑞石獨存。顧此賤命。流泊僻左。衰病侵尋。杜門謝世。遂幷與此山而失之。安君公三瑞人也。居山之趾。而對山之面。使其全幅無不呈露於几席庭。石之間。以至起居出入。周旋顧眄。無非是端嚴明秀之象。此軒之所以爲瑞者歟。然崧岳峻天。所以美吉甫也。泰山巖巖。所以贊子輿也。君雖不及先生之門。亦不可謂非先生之徒。則見此山而豈無追想曠感者乎。愛先生之所愛。對先生之所對。其氣象體德。所以親切於言語之外者。豈惟不在於及門者之後而已哉。君可謂知所止矣。吾雖病。將一理巾屐。從子登軒。以慰晚慕靡仰無窮之懷云爾。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안군(安君) 공삼(公三) 안규용(安圭容, 1860~1910)을 말한다. 자는 공삼, 호는 서헌(瑞軒),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숭악(崧岳)의……것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고 높은 산악이 치솟아 하늘에 이르도다. 산악이 신을 내려 보와 신을 낳았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 시는 선왕(宣王)의 외숙인 신백(申伯)이 나가 사읍(謝邑)에 봉해지자 윤길보(尹吉甫)가 시(詩)를 지어 그를 전송한 것이다. 길보를 찬미한 것이라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태산(泰山)의……것 《근사록》 권14 〈관성현(觀聖賢)〉에서 정자(程子)가 "공자는 천지와 같고, 안자는 온화한 바람, 상서로운 구름과 같으며, 맹자는 태산에 바위가 중첩하듯 우뚝한 기상이다.[仲尼天地也, 顔子和風慶雲也, 孟子泰山巖巖之氣象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여(子輿)는 맹자의 자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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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기 省野記 성(性)은 실로 동일하여 사람에게 보존 된 것 또한 그다지 서로 멀지 않다. 그러나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의 나뉨과 길흉화복(吉凶禍福) 성패존망(成敗存亡)의 자취는 천차만별이어서 끝이 없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대개 호리(毫釐)의 즈음에 향배(向背)의 기미는 단지 성찰함과 성찰하지 못함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제순(帝舜)께서는 대성(大聖)인데도 자주 성찰하라는 경계를 받았고,125) 증자(曾子)는 대현(大賢)인데도 삼성(三省)126)의 말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 보다 못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성(省)'이라는 한 글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날마다 사용하는 제일의 참 진리여서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불가한 것이다.나의 벗 오군(吳君) 영지(永之)127)가 문미에 붙일 만한 한 마디를 청하였다. 영지는 지사(志士)인지라, 그 뜻은 반드시 보통 바라보려는 계획에 있지 않을 것이니, 표시하여 새겨서 항상 바라보는 것의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어찌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단목씨(端木氏)의 서(恕)128)와 원성공(元城公)의 성(誠)129)과 더불어 전후로 일자부(一字符)가 되고 종신토록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몽매하여 의리에 의심스러움이 있으면 비록 스스로 성찰하려고 해도 그 방법은 말미암을 것이 없을 것이다. 원컨대 영지는 독서하여 궁구하는 공부를 더욱 더하여 시비(是非)와 진망(眞妄)으로 하여금 구분되는 것이 있게 하면 성찰하는 공부를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심술(心術) 염려(念慮)의 은미함과 용모(容貌) 위의(威儀)의 사이와 사물(事物) 응접(應接)의 즈음에 무엇인들 내가 마땅히 성찰해야할 곳이 아니겠는가. 어느 곳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어 흠뻑 젖어들어 융화되어 날마다 원대함을 궁구하면 문미 끝의 한 '성' 자가 순임금의'누성(屢省)'과 증자의 '삼성(三省)'을 이어서 이 세상에 명성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性固一也。而其存乎人者。亦不甚相遠也。然而知愚賢不肖之分。吉凶禍福成敗存亡之跡。千差萬別。有不可紀極者何歟。蓋其毫釐之際。向背之幾。只在於省不省如何耳。帝舜以大聖而有屢省之戒。曾子以大賢而有三省之語。況其下者乎。然則省一字。是人生日用第一眞詮。而不可斯須去身者也。余友吳君永之。請一語可以鎭楣者。永之志士也。其意必不在於尋常觀瞻之計。所以標銘而爲常目之要者。豈有以加於此者哉。可與端木氏之恕。元城公之誠。前後爲一字符。而有終身用之者矣。然知識蒙蔽。義理有疑。則雖欲自省。其道無由。願永之更加讀書窮索之功。使是非眞妄。有所分落。可以下省之之功。凡心術念慮之微。容貌威儀之間。事物應接之際。夫孰非吾合省之地哉。無處不然。無時不然。沈浸融洽。日究遠大。則安知楣端一省字。不繼屢省三省而有聲於斯世也耶。 제순(帝舜)께서는……받았고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제순(帝舜)이 "하늘의 명을 삼갈진댄 때마다 삼가고 기미마다 삼가야 한다.[則天之命, 惟時惟幾.]"라고 하고, 이에 노래하기를, "고굉이 기쁘게 일하면 원수가 흥기하고 백공이 기뻐한다.[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熙哉.]"라고 하니, 고요(皐陶)가 "유념하시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일을 일으키시되 법도를 삼가 공경하시며, 일이 이루어지는가를 자주 살펴 공경하소서.[念哉, 率作興事, 愼乃憲, 欽哉, 屢省乃成, 念哉.]"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省) 《논어》 〈학이(學而)〉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나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 붕우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가? 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오군(吳君) 영지(永之) 오장섭(吳長燮, 1862~?)을 말한다. 자는 영지,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단목씨(端木氏)의 서(恕) 단목은 자공(子貢)의 성(姓)이고 이름은 사(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행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라고 묻자, 공자가 "서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원성공(元城公)의 성(誠) 원성공은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데 그가 원성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유안세는 성격이 강직하여 휘종(徽宗) 때 간신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에게 미움을 받고 7번이나 유배를 당하여, 멀리 광주(廣州) 및 광서(廣西) 지방을 전전하였으나 하루도 병든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비결을 묻자 "성실함[誠]뿐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스승 사마광(司馬光)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요체로 꼽은 덕목이었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宋元學案 卷20 元城學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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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교관 양 효자 정려기 贈教官粱孝子旌閭記 성상께서 즉위한 지 40년(1764, 영조40) 여름에 본도 유생 최병교(崔秉教)의 등장(等狀)101)에 고 사인 양복문(粱福文)의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를 내려 포장하고 증직과 복호(復戶)102)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등장을 살펴보건대, 효자는 시례를 익힌 저명한 가문에서 집안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지극한 성품과 행실이 일찍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버이의 병을 시중 들 때 왼쪽 다리 살을 베어 소생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다시 심해지자 또 오른쪽 다리 살을 베어 며칠의 목숨을 연장시켰다. 돌아가시자 슬퍼하여 몸을 훼손한 것이 심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 먼 조상을 추모함에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친척과 향리에서 한결같은 말로 탄복하며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마을에서 보고하고 고을에서 추천한 것이 전후로 계속 이어져 구고(九臯)의 학이 울어 소리가 하늘에 들리기까지 하였으니,103) 잠긴 것이 밝게 드러나고104) 어둑하여 은은한 가운데 날로 드러나는 것105)은 그 이치가 실로 그러한 것이다.나의 거처가 이웃 고을에 있어 익히 들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의 현손 정묵(正黙)과 5세손 재근(在瑾)이 그 일을 기록해 주기를 청하니, 내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聖上卽阼四十年夏。本道儒生崔秉教等。狀報故士人粱福文孝行于朝。以有旌褒贈貤及復戶之典。按狀。孝子以詩禮著族。承襲庭訓。至性至行。夙聞於人。侍親劑。割左肱。得蘇。居無何。疾復劇。又割右股。延數日命。及沒。哀毀過甚。幾於傷生。送終追遠。情文無闕。族戚鄕里。莫不一辭歎賞。村報鄕薦。前後續續。以至於九臯之鶴。聲聞于天。潛昭闇章。其理固然。居在隣壤。稔聞已久。其玄孫正黙五世孫在瑾。請記其事。余不敢以非其人辭。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연명(連名)하여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이나 청원서, 진정서를 말한다.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소지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올리지만, 등장은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올린다. 복호(復戶) 충신이나 효자 등에게 조세(租稅)나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구고(九皐)에……하였으니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잠긴……드러나고 《시경》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더라도 또한 매우 밝다.[潜雖伏, 亦孔之昭.]"라고 한 것을 축약한 것이다. 어둑하여……것 《중용장구》 제33장에 "군자의 도는 어둑하여 은은한 가운데 날로 드러난다.[君子之道, 闇然而日章.]"라고 한 것을 축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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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회안》 서문 資學會案序 옛적에는 15세에 학교에 들어가서 40세에 이르러 벼슬에 나갔는데,152) 그 사이 25년 동안 일신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학교에 의지하였다. 이 때문에 뜻이 정밀해지고, 학업이 온전하여 성취함이 쉬웠다. 그런데 학교의 행정이 폐지되어 거행되지 않게 되면서 선비들이 안심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져 이리저리 의식(衣食)을 꾀하는 데 급급하여 뜻이 나뉘고, 학업이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성취가 있기를 바라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우리 마을의 정기현(鄭基鉉)과 김권준(金權俊), 김덕희(金德熙) 세 젊은이들이 약간의 재력을 갹출해 합쳐서 계(契)를 만든 지 이미 몇 년째 되어 가는데, 하루는 나에게 찾아와 계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 젊은이들은 모두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영재들이고, 한창 진보하여 그침이 없는 자들이니, 그 뜻이 반드시 재화를 탐해 이자를 불릴 것을 꾀하고, 또 술과 안주를 마련해서 모여 노니는 즐거움을 위함이 아닐 것이다. 어찌 집안에만 있으면 사세(事勢)와 재력이 혹 미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이 계를 만들어서 서적과 먹 등 학업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원근의 선비들과 종유(從遊)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삼대(三代)153) 시대의 선비를 기르던 규범은 이미 볼 수 없지만, 당시 선비들이 스스로를 위해 도모했던 것도 응당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학(資學)이라 이름을 짓는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있다. 선(善)을 권면하고 인(仁)을 도우며, 충심으로 알려주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줌이 이것이다. 한갓 저것만 도움이 되는 줄 알고, 이것이 도움이 되는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는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보존하는 것이며, 내면에 소홀하고 외면에 급급해하는 것이니, 이를 더더욱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바라건대, 제군들은 쑥대와 삼대처럼 서로 부축하여 지탱해주고, 옥과 돌처럼 서로 갈고 다듬어 주면서 오래도록 지켜보아 변하지 말고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서 같은 무리의 물고기가 용과 돼지154)로 나뉘게 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古者十五而入學。至四十而出仕。其間二十五年。一身所須。皆資於學。是以志精業全。易於成就。自學校之政。廢而不擧也。爲士者。無所聊賴。營營衣食。志分業奪。如此而欲望其有成。不亦難乎。吾黨有鄭基鉉金權俊金德熙三少年。出若干力。合而作契。已有年矣。而一日向余。請其所以名之者。余竊覸三少年。皆學文英秀。方進而未己者也。其志必不爲貨利牟殖之計。又爲杯盤遊聚之娛。則豈不以家居事力。或有不逮。故姑爲此擧以爲文墨支用之需。遠近遊從之費耶。三代養士之規。旣不可見。則士之所以自爲謀者。亦不應不如是矣。然則名之以資學。不亦宜乎。然學之所資。有大於此者存焉。責善而輔仁。忠告而善道。是已。徒知彼之爲資。而不知此之爲資可乎。是遺其大而存其小。緩於內而急於外。此尤不可以不知也。願諸君扶持之如蓬麻。琢磨之如玉石。視久勿替。偕之大道。毋使同隊之魚。至有龍猪之分焉。 옛날에는……나갔는데 〈대학장구서〉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부터 공, 경, 대부, 원사의 적자와 백성들 중에 준수한 사람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여 그들에게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다.[及其十有五年, 則自天子之元子衆子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40세가 되면 관직에 나아가고, 70세가 되면 관직에서 물러난다.[四十始仕, 七十致仕.]"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가리킨다. 용과 돼지 용은 준수한 사람을, 돼지는 노둔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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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4 卷之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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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기 詠歸亭記 지난 정해년(1887) 가을에 나는 여러 벗들의 뒤를 따라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에서 바람을 쐬고 영강(映江)에서 목욕하고서 읊조리며 부춘(富春)의 들녘으로 돌아왔다.1) 이로 인하여 규약을 만들어서 봄가을에 모여 강습하는 일을 행하였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고, 의례가 번다했기 때문에 큰 마을에 소속시켜 돌아가며 모임을 가졌고, 한가로운 들녘을 택해 베풀어 행하였는데, 이를 설행한 지 조금 오래되면서 모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자, 촌마을의 재력으로는 계속 이어가기 어렵고, 들녘의 장소는 대부분 햇볕에 노출되어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신묘년(1891) 9월 용리(龍里)의 모임에서 집을 짓자는 의론이 제기되어 임진년(1892) 봄에 칠송(七松) 마을에 터를 잡고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겨울 12월에 낙성하였는데, 방과 대청, 문, 행랑 등이 반듯하고 치밀한데다 크고 넓어서 거처할 만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빈한한 선비들의 쇠잔한 힘으로 고생스럽게 부지런히 힘써 모아서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성취를 보게 된 것인데, 그 뜻이 장차 무엇을 위해서인가? 고요한 곳을 찾아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한 계책을 위해서인가?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돕기 위해서인가? 글을 지어 벼슬을 구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서인가?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된 도리를 구할진댄 학문이 아니면 불가하고, 학문을 하는 방도를 구할진댄 사우(師友)들이 아니면 불가하니, 사우들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말미암는 것도 또한 그 장소가 없으면 안 된다. 상ㆍ서ㆍ학ㆍ교(庠序學敎)2)가 본래 인륜을 밝히고 교육을 확립시키는 곳이었지만, 삼대(三代)3) 이후로 인도하고 통솔하는 것이 예스럽지 못하였고, 또 저자와 성곽 안에서는 분주하게 다투거나 열기로 떠들썩한 뜻이 많았고, 고요하고 한가로운 정취가 적었으니, 이것이 서원(書院)이 창설된 이유이다. 그러나 서원의 규례가 또 옛날과 같지 않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선비들이 서로 교제하며 학업을 닦는 곳으로 이곳보다 훌륭한 곳이 아마도 없을 듯하다.이 정자에서 노니는 자들은 《소학》으로 기본을 세우고 《대학》으로 규모를 정하여, 집에 들어가서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에게 공경하며, 나가서는 스승을 높이고 벗들을 가까이하며,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세우고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몸을 지키며, 강습과 토론으로 이를 밝히고 바로잡음과 경계로 이를 독려하며,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지킴을 고치지 않아서 날로 원대한 것을 궁구한다면 아래로는 가정의 법을 세우고 마을의 풍속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위로는 세도(世道)를 힘쓰게 사람들을 격려하고 나라의 영광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대 학교의 유제(遺制)이고, 또한 오늘날 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던 뜻이다. 往在丁亥秋。余從諸友後。風乎瑞石。浴乎映江。詠而歸於富春之野。因以創設規約。爲春秋講聚之擧。始以人衆儀繁。屬鉅村輪會。擇閒野設行。行之稍久。會者愈夥。村力難繼。野處多暴。人莫不病之。辛卯九月龍里之會經室之議起。壬辰春卜地于七松之里。秋設役。越明年冬十二月落之。其房室廳堂。牑戶序廂。端密宏敝。可以爰居爰處。然是擧也。以冷士殘力。辛勤拮据。積歲積年。乃始見就者。其意將欲何爲耶。爲尋寂耽閒之計耶。爲燕飮玩戱之資耶。爲作文干進之所耶。嗚乎。士生斯世。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學問之道。非師友不可。所以親師友而道問學者。亦不可以無其所。庠序學校。固明倫立敎之地。而三代以降。導率不古。且在朝市城郭之中。多奔競熱閙之意。少寂寞寬閒之趣。此書院所由起也。然書院之規。又不如古。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遊此室者。以小學立基本。以大學定規模。入則愛親敬兄。出則隆師親友。立心以忠信。持身以端莊。講討以明之。規警以督之。不厭不改。日究遠大。則下可以立家範正鄕俗。上可以勵世道補國光。此是三代學校之遺制。而亦今日經始之意云爾。 지난……돌아왔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라는 물음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하자, 공자 이를 허여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산천 유람을 표현하였다. 상ㆍ서ㆍ학ㆍ교(庠序學敎) 중국 고대의 교육기관으로, 《맹자》 〈등문공 상〉에서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이다. 하나라는 '교', 은나라는 '서', 주나라는 '상'이라고 불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다.[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중국 고대 성인이 세운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요순 시대와 함께 '훌륭한 다스림이 행해졌던 시대'라는 의미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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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김 상사 행장 白波金上舍行狀 내 일찍이 시골의 부로(父老)를 모시는 자리에서 우리 고을 근고의 인물의 성대함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풍의(風儀)가 수려하고 언론이 뛰어나서 활달하여 범상하지 않은 기상이 있는 분으로는 애당초 백파(白波) 김공(金公)을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휘는 재탁(再鐸), 자는 맹경(孟警), 호는 백파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휘 추(錘)의 후손이다. 고려 말에 휘 이안(履安)이란 분이 계셨는데, 판삼사(判三司)로 절개를 세웠으니, 공에게는 1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성옥(聲玉), 호는 온면당(穩眠堂)이고, 조부의 휘는 시춘(始春), 선고(先考)의 휘는 응복(應福), 선비(先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빈(彬)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10월 7일에 도장리(道莊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장난치고 노는 것이 여느 아이와 매우 달랐다. 조금 성장하여 재종제(再從弟) 앙탁(仰鐸)과 함께 스승을 찾아가 배워서 뜻을 넓히고 학업을 넓게 펼쳤다. 이 때문에 지향하는 뜻이 넓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대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교제하기를 원했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양지(養志)와 양체(養體)7)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간호할 적에 외진 바닷가나 험한 산중에서 의원을 찾고 약을 구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첩첩산중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그의 범상하지 않는 행실은 이러한 유가 많았다. 젊었을 때 남애(南厓) 정공(鄭公)에게 수업을 받았기에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어서도 매양 그 묘소에 성묘하였고, 그 아비 잃은 자식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잊지 않았다. 종족과 이웃 마을에 대해서는 애정이 두루 미쳤고 오래된 벗에 대해서는 안부를 묻는 것이 줄어들지 않았다. 향리와 학교의 사이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가 경영하고 계획한 것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온면당(穩眠堂)을 중건하여 돌아가신 분을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8)을 부쳤고, 집 곁 시냇가 바위 위에 백파정(白波亭)을 지어서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모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노니는 장소로 삼았다. 중년 이후로 산천 구경을 좋아하였다. 동복 한 명을 대동하고 나귀 한 마리를 타고 여장(旅裝)은 단출하게 하여, 가다가 기이하고 빼어난 산과 수석이 맑게 펼쳐진 전경을 만날 때마다 이리저리 거닐며 시를 읊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숙하기도 하였다. 평생 은거하였지만 명망과 실제가 더욱 융성하였으므로 여리(閭里)에서는 그 효성에 보답하고 주군(州郡)에서는 그 재주를 천거하기까지 하여 그가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년(1827, 순조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병오년(1846, 헌종12) 5월 7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71세이다. 조치(鳥峙) 방축동(防築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동완(東完)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신중하며 온유하여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처신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익(漢益), 한창(漢昌)이고, 딸은 임처상(林處相), 이인휘(李仁徽), 고시상(高時相)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지금 쇠미한 말세에 인물이 보잘것없는데 이렇게 평지에서 돌출하듯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태어난 것은 하늘의 뜻이 우연이 아닌 듯하지만 끝내 또한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공은 병오년(1846)에 돌아가시고 나는 을사년(1845, 헌종11)에 태어났다. 이는 삼성(參星)이 막 빛을 발하자 상수(商宿)가 갑자기 사라진 것과 같아서,9) 30리 한 고을에 이렇게 어질고 덕이 있는 장로가 있었지만 세상을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남아 있는 전장(田莊)을 바라봄에 직접 뵙지 못한 한스러움만 간절해진다. 공의 현손(玄孫) 홍기(弘基)가 그의 유집 2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교감해 주기를 부탁하고,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후생이 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공의 명성을 향리의 부로들에게 들었다. 지금은 향리 부로들의 얼굴과 함께 모두 보지 못하고, 오직 이 한 책을 후생이 노년이 된 날에 얻었으니, 책을 어루만지며 서글퍼서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겠다. 이에 교정하는 일을 마치고 돌려주고 또 이어서 이처럼 행장을 서술한다. 余嘗侍鄕父老。聞吾鄕近古人物之盛。而其風儀秀爽。言論英暢。有磊落不常之氣。則未始不以白波金公爲第一焉。公諱再鐸。字孟警。號白波。新羅敬順王子諱錘之後。麗末有諱履安。以判三司立節於公爲十五世也。曾祖諱聲玉。號穩眠堂。祖諱始春。考諱應福。妣全州李氏彬女。以正宗丙申十月七日。生公于道莊里。幼而嬉遊。絶異凡兒。稍長與再從弟仰鐸。負笈從師。開廣其志。展拓其業。是以抱負博洽。聲聞藹蔚。一世名碩。無不願交。天性孝順。養志養體。無不備至。其侍疾也。尋醫求藥於窮海艱險之中。其遭故也。築室侍墓於深山萬疊之中。其偉行多此類。少時受業於南厓鄭公。至老白首。每省其墓。恤其孤。眷眷不忘。於宗族隣里。恩愛周洽。故舊朋友。存訊不替。出以風議於鄕邦學校之間。其經紀條畫。多有可觀焉。重建穩眠堂以寓羹墻之慕。結白波亭於宅畔溪石上。爲延賓會友文酒遊衍之所。中年以後。好遊山水間。以一僮一驢。裝服蕭然。行遇林巒奇絶。水石淸曠。輒徘徊吟哦。或移時焉。經宿焉。平生隱淪。望實益隆。以至閭里報其孝。州郡擧其才。莫不欲其爲世用也。丁亥中進士。丙午五月七日終。享年七十一。葬鳥峙防築洞酉坐原。配全州李氏東完女。淑愼柔嘉。甚得婦道。二男三女。漢益漢昌。女林處相李仁徽高時相。孫以下不能記。嗚乎。當今衰叔。人物藐然。鍾此出夷不常之器。天意似不偶然。而終亦沈淹何耶。公歸於丙午。而余生於乙巳。參星纔出。商宿遽沒。使同鄕一舍。有此賢德長老。而未見倂世之樂。瞻言遺庄只切罔及之恨。公玄孫弘基。奉其遺集二卷。屬余校勘。且請狀德之文。嗟惟晩生。旣失公之面。而得公之聲於鄕父老。今則倂與鄕父老之面而皆失之矣。惟此一書。得於晩生垂老之日。撫卷悲愴。有不忍終辭。玆以了還校役。又從而狀述之如是云爾。 양지(養志)와 양체(養體) 양지는 어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것이고, 양체는 물질적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해 드리는 것으로,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을 국[羹]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삼성(參星)이……같아서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있고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있어서 각각 뜨고 지는 시각이 다른 관계로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다. 《春秋左氏傳 昭公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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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 선생 문공 행장 思齋先生文公行狀 사재(思齋) 선생 문공(文公)의 휘는 빈(彬), 자는 군보(君甫)이며, 남평(南平) 사람이다.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多省)이 그의 시조이다. 휘 익점(益漸)에 이르러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는데 세상 사람들이 삼우당(三憂堂) 선생이라고 불렀다. 고조의 휘는 화(和), 호는 만은(晩隱)이며,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하였고, 도승지(都承旨)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증조의 휘는 염(琰)이고, 정읍 현감(井邑縣監)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상행(尙行), 시호는 경숙(敬肅)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옹(雍), 호는 도암(道庵)이며,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순(忠純)이다. 선비(先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인걸(仁傑)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종23)에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평소 가풍에 무젖었다. 조금 성장하여서는 어진 이를 섬기고 인한 사람을 벗하여 학문에 조예가 있어 펼치고 넓혀서 문망(聞望)과 명성이 원근에 회자되었다. 단종조(端宗朝)에 맹산 현감(孟山縣監)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사무를 본 지 한 해가 지나자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세조(世祖) 초기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수석(水石)을 읊조리며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살았다. 새로 서재를 짓고 학규를 만들어 생도들을 권장하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을 만년의 계책으로 삼았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기웅(起雄)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구연(九淵), 구택(九澤), 구심(九潯)이다. 장방(長旁)은 2남을 두었는데, 우주(遇周)는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복주(復周)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방(二旁)은 4남을 두었는데, 억붕(億鵬), 억도(億道), 억수(億壽), 억명(億明)이다. 공의 묘소는 아무 산 아무 좌(坐)의 언덕에 있다.아, 이렇게 후한 덕이 있고 인망이 매우 두터웠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바다 모퉁이에서 은거하며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식자들의 실망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유풍과 여운이 집안에 전하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사당을 건립하고 제단을 설치하여 영원토록 제향을 폐하지 않을 것이니, 이른바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는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16세손 경식(敬植)이 가장(家狀)을 받들어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참으로 감히 승낙할 수 없지만 어진 이를 사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좋아하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고, 게다가 경식은 평소 종유한 친분이 있기에 그 뜻을 또 저버릴 수 없어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대략적으로 기술한다. 思齋先生文公諱彬字君甫。南平人。武成公諱多省。其始祖。至諱益漸封江城君。世稱三憂堂先生。高祖諱和。號晩隱。受學于牧隱李先生。官都承旨。諡景惠。曾祖諱琰。井邑縣監。祖諱尙行。諡敬肅。考諱雍。號道庵。官左贊成。諡忠純。妣河東鄭氏仁傑女。正統辛酉。生公于綾州月谷里。早襲庭訓。擩染有素稍長。事賢友仁。學問造詣。奮張展拓。而聞望聲華。膾炙遠邇。端宗朝。特除孟山縣監。視事踰年。治蹟大著。世祖初解官歸鄕。粧點水石以自寄敖。開講室立學規。以獎進生徒。訓迪子孫。爲晩年計。配密陽朴氏起雄女。三男。九淵九澤九潯。長旁二男。遇周將仕郞。復周府使。二旁四男。億鵬億道億壽億明。公墓在某山某坐原。嗚乎。以若厚德重望。未有試於斯世。而潛光海曲聊以卒歲。其爲識者之缺望何如也。然遺風餘韻。傳之在家。播之在人。建祠設壇。百世不替。所謂屈短伸長。非此之謂耶。十六世孫敬植。奉家狀。託以不朽之文。余以非其人。固不敢承膺。而慕賢好德。出於秉彛。而且敬植有平昔游從之分。其意又不可孤。謹據狀而纂述梗槪如右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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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남헌 홍공 행장 鳳南軒洪公行狀 공의 휘는 채주(埰周), 자는 경좌(卿佐), 다른 휘는 종진(鍾鎭), 자는 응중(應仲), 호는 봉남(鳳南)이다. 홍씨(洪氏)의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고려(高麗)의 직학(直學) 휘 지경(之慶)의 후손이다. 침수정(枕漱亭) 휘 경고(景古)의 6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이수(履洙), 증조의 휘는 영한(永漢), 조부의 휘는 희우(羲禹), 선고(先考)의 휘는 수모(壽謨)이다. 선비(先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휘 대현(大鉉)의 따님이니, 칠졸재(七拙齋) 창우(昌禹)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오년(1834, 순조34) 8월 25일에 우봉리(牛峰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였고 2세 때 능히 말을 하였다. 6세에 이웃집 아이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가서 공부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지만 부형은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8세에 가숙(家塾)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다.'라는 구절29)에 이르러서 즉시 문을 열고 하늘을 보며 말하기를 "저 어둡고 검은 것은 무슨 물건입니까?" 하자, 말하기를 "이것은 운기(雲氣)이다. 구름이 걷히면 하늘이 실로 가볍고 맑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리가 일취월장하여 문장을 지으매 매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5세 되던 무신년(1848, 헌종14)에 하동 정씨(河東鄭氏) 가문 원렬(元烈)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니, 금성군(錦城君) 성(盛)의 후손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향당(鄕黨)의 여러 선생을 찾아뵙고 공손하게 제자의 예를 올렸다. 동년배의 사우(士友)로 말하면 남들에게 추앙을 받는 문학과 조행(操行)이 있는 사람이 모두 깊이 교제를 맺어 끓이지 않고 왕래하였다.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시험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와 정시(廷試)에 해마다 응시하였는데 합격 불합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성품이 명민(明敏)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또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진신 사대부(縉紳士大夫)들이 정사에 통하지 않는 점이 있고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찾아와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은 옛일을 끌어다가 현재의 문제를 바로잡아 밝힘에 응답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향당(鄕黨)과 상서(庠序)에서 풍속의 기율을 돈독히 하고 장려하며, 사대부의 풍습을 가지런히 하고 바르게 한 것은 그의 힘이 또한 컸다. 경오년(1870, 고종7)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경진년(1880, 고종17)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 과거에 응시한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던 뜻이었는지 모르겠거니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쇠약함과 병만 더욱 깊어졌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대문을 닫고 세상 사람들을 사절하려는 마음을 먹고 산 한 기슭을 매입하여 침수정(枕漱亭)을 중건하여 남은 생애를 편안하게 의탁할 곳으로 삼았다. 때때로 친구나 마을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문장을 지으며 유유자적하였으니, 이러한 즐거움을 늦게 얻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정해년(1887, 고종24) 윤4월 10일에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마을 뒤 국수봉(菊秀峯)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자식이 없어 종자(從子) 우전(祐銓)을 후사로 삼았다. 우전의 아들은 승환(承渙), 승택(承澤), 승준(承浚)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매우 고상하였고, 풍도(風度)가 범상하지 않았으니, 많은 사람 속에 있으면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았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매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처자식을 대할 적에는 엄격하면서도 다정하였으며, 종족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벗과 교제하고 향려(鄕閭)에 거처한 것으로 말하면 평탄하고 곧고 자애롭고 미더운 풍모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평상시 말하고 웃는 것을 삼가고 출입을 간소하게 하였다. 항간의 비루한 습속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향인에 대해서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에게 학문하기를 권유한 것으로 말하면 간절하게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의 문장은 온후하고 화평하여 화려하거나 기이하며 괴벽하거나 난삽한 뜻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스스로 탄복하였으니,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돌아가신 다음 해 겨울에 승환(承渙)이 유문(遺文)을 가지고 벽산서실(碧山書室)로 나를 찾아와 덕을 형용할 수 있는 문장을 지어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이는 당일에 종유하던 분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보잘것없는 내가 실로 남의 집안에서 영원히 전할 글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감히 손을 대지 못하지만 깊은 교분으로 인하여 끝까지 사양하기 어려웠다. 보고 들은 것을 수습하여 후일 훌륭한 글을 지을 사람의 붓을 기다린다. 公諱埰周。字卿佐。一諱鍾鎭。字應仲。號鳳南。洪氏系豐山。高麗直學諱之慶後。枕漱亭諱景古六世孫。高祖諱履洙曾祖諱永漢。祖諱羲禹。考諱壽謨。妣順天朴氏諱大鉉女。七拙齋昌禹後。以純廟甲午八月二十五日。生公于牛峰里第。體質歧嶷二歲能言語。六歲見隣兒讀書。累請就學。父兄以其幼不許。八歲出就家塾授讀。至輕淸在上。卽開門仰天曰。彼昏黑者何物。曰此是雲氣也。若雲捲則天固輕淸也。自是文理日就。綴文點句。每驚傍人。十五歲戊申委禽于河東鄭氏之門元烈女。錦城君盛后。旣成人。出見鄕黨諸先生。恭執弟子之禮。至於年輩士友。有文學操履爲人推服者。無不深相結納。往復不絶。以親命學擧子業。鄕解廷試。逐年應擧。而不以得失經心。性明敏。長於料事。又邃禮學。縉紳士大夫。政有所不通。事有所可疑。多就咨訪。公援古訂今。酬答如流。至於鄕黨庠序之間。所以敦獎風紀。齊整士習者。其力亦多矣。歲庚午遭外艱。庚辰遭內艱。自念平生赴擧。未見所以供悅之意。而風樹遽驚。衰病轉深。於是有杜門謝世之志。買山一麓。重建枕漱亭以爲餘日寄傲之所。時與親朋鄕子弟。或行酒或講文。悠然自適。恨其得此之晩。丁亥閏四月十日。以宿症終于正寢。葬里後菊秀峯壬坐原。公無育。以從子祐銓爲後。祐銓子承渙承澤承浚。公天稟甚高。風儀不羣。在稠人中。如雲鶴之於野雞。事父母。極其愛敬。處兄弟。極其友悌。御妻孥。嚴而有恩。待宗族。和而有節。至於交朋友處鄕閭。易直子諒之風。感動於人。平居愼言笑簡出入。里巷俚俗。不經於目。鄕人毁譽。不出於口。至於導人爲善。勉人以學。懇懇不遺餘力。其文章溫厚和平。無華麗奇巧隱僻艱澀之意。而見者怡然自服。可知其爲有德之言也。公沒翌年冬。承渙抱遺文。訪予于碧山書室。請狀德之丈曰。此非當日從遊人之責乎。嗚乎。予以無狀。固不敢犯手於人家不朽之託。而契誼甚厚。有難牢讓。收拾見聞以俟後日立言之筆。 가볍고……구절 《동문선(東文選)》 「청향정기(淸香亭記)」에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누어질 때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게 되었는데, 인물이 생겨날 때 이 기운을 온전히 타고난 자는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된다.[天地之判也, 輕淸者在上, 而人物之生, 禀是氣以全者, 爲聖爲賢.]"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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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와 홍공 행장 竹窩洪公行狀 공의 휘는 이수(履洙), 자는 자원(子源), 호는 죽와(竹窩)이다. 홍씨(洪氏)는 관향이 풍산(豐山)이니, 직학사(直學士)인 휘 지경(之慶)을 비조(鼻祖)로 삼는다. 조선에 들어와 휘 귀(龜)인 분이 계셨는데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고조의 휘는 애(埃)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덕우(德遇)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경고(景古), 호는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이 있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천규(天奎), 호는 오은(鰲隱)이고, 선비(先妣)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통정대부 인호(仁毫)의 따님이다. 명릉(明陵) 을유년(1705, 숙종31)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성실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어버이를 섬길 적에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10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종기를 앓아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공이 주야로 울부짖으며 백방으로 치료할 방법을 상고하여 마침내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다. 오은공(鰲隱公)이 일찍이 부증(浮症)을 앓아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두꺼비 고기를 먹는 것이 가장 효험이 있다."라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눈이 쌓여 있는 때라 사방으로 구했지만 구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큰 두꺼비 한 마리가 앞에 있었다. 이것을 잡아서 돌아가 올리니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외출하였는데 갑자기 가슴이 뛰고 몸에 땀이 나기에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오은공이 위독한 병을 앓아 실낱같은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마침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어 결국 회생하게 하였으니, 남다른 행실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몸가짐은 단정하고 정중하였고 말은 간략하면서 어눌하였다. 비록 한가할 때라도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비록 위급한 상황이라도 다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득실(得失), 이해(利害), 시비(是非), 훼예(毁譽)에 이르러서는 귀를 막아 듣지 못한 듯이 하고, 담담하게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날마다 두 아우 및 종반들과 함께 한 방에서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고 수양하였는데 신망(信望)이 사방으로 퍼져 생도들이 문하에 운집하였고 붕우들이 그를 관아에 천거하였다. 임신년(1752, 영조28) 가을에 오은공의 상을 당하여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여위었고 장사 지낸 뒤에 시묘살이하느라 수척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 해 6월 14일에 여차(廬次)에서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아, 선인 군자(善人君子)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며 은거하여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하지만 남에게 미치는 이로움과 은택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향리에서 가법이 있다고 이름난 사족(士族) 가운데 홍씨(洪氏)가 그 하나인데, 후세 자손 중에 또 성대하게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많았으니 이 어찌 유래가 없는 것이겠는가. 당대에 쓰이지 못한 것은 족히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된다.배위(配位)는 함풍 이씨(咸豐李氏) 두평(斗平)의 따님으로 부원군(府院君) 언신(彦信)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있었고, 모두 2남을 두었으니, 영환(永桓)과 영표(永杓)이다. 계배(繼配)는 진주 정씨(晉州鄭氏) 통덕랑(通德郞) 최(最)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막(永漠)과 영극(永極)이고, 딸은 정혁(鄭爀)에게 시집갔다. 공의 묘소는 주(州)의 해하리(海鰕里) 병좌(丙坐) 언덕에 있다. 이씨는 합장하였고, 정씨는 묘혈 아래 사좌(巳坐)에 있다. 6대손 승환(承渙)이 그의 숙조(叔祖) 영택(永宅)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남길 글을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公諱履洙。字子源。號竹窩。洪氏系出豐山。以直學諱之慶爲鼻祖。入我朝有諱龜。中郞將。高祖諱埃。中司馬兩試。贈掌樂院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判。祖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妣仁川李氏通政仁毫女。明陵乙酉。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至性。事親無遠。十歲。母夫人患癰幾危。公晝夜號泣。百方稽效。遂吮之得愈。鰲隱公嘗患浮症彌留。醫云。用蟾肉最妙。時天寒雪積。四求不得。忽有一大蟾當前。持之以歸。病果得差。一日出遊。忽心驚體汗。卽歸家。鰲隱公方患劇疾。奄奄垂絶。乃血指注口。竟見回甦。其出人之行。多此類。儀狀端重。言語簡訥。雖燕閒之時。未嘗有怠慢之容。雖顚沛之時。未嘗有急遽之色。至於得失利害是非毁譽。充然如不聞也。泊然如不見也。日與二弟及羣從。同處一室。讀書硏理。晦養積久。孚信旁達。生徒坌集于門。朋友薦報于官。壬申秋。遭鰲隱公喪。哀毁過甚。旣葬廬墓。以羸瘠成疾。翌年六月十四日。卒于廬次。得年四十九。嗚乎。善人君子之於世也。窮居潛藏若無所爲。而其利澤之及人。有不可誣者也。吾鄕士族名有家法者。洪氏居其一焉。而後嗣子孫。又彬彬多志學之人。此豈無所自耶。其不得試於一時者。不足爲輕重也。配咸豐李氏斗平女。府院君彦信后。有婦德。擧二男。曰永桓永杓。系配晉州鄭氏通德郞最女。貞靜端淑。閨門雍睦。擧二男一女。曰永漠永極。鄭爀。公墓州之海鰕里負丙之原。李氏祔左。鄭氏祔下巳坐。六代孫承渙。以其叔祖永宅所撰家狀。來請所以立言垂後者。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據家狀而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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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 오공 행장 農隱吳公行狀 내가 약관의 나이에 집을 떠나 상서(庠序)에서 공부할 적에 우리 고을의 인물을 보니 원로와 저명한 선비가 많았는데 유독 농은(農隱) 오공(吳公)이 풍의(風儀)와 언론이 탁월하고 곧았으므로 그를 마음에 가장 흠모하였다. 이윽고 공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 수현(壽玹)이 공이 남긴 사적(事跡)을 수록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30년 전 일이 되었다. 향당(鄕黨)에서는 풍의와 언론이 더 이상 당시처럼 인물의 성대함을 보지 못했고 젊어서 배종하던 나 같은 자도 이미 늙었다. 만약 다시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명망과 자취가 더욱 사라질 것이니 어떻게 훗날의 역사가가 사실에 의거하여 훌륭함을 드러내는 바탕으로 삼겠는가. 이것이 내가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공의 휘는 지상(志祥), 자는 성심(聖心)으로, 고려(高麗) 때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을 비조로 삼는다. 문양공의 후손 가운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진 현필(賢弼)이란 분이 있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고, 휘 방한(邦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하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된 휘 진례(震禮), 증조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휘 세관(世觀), 조부는 휘 시유(始有)이다. 선고(先考)는 휘 석윤(錫胤),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련(必煉)의 따님으로, 지족당(知足堂) 박성인(朴成仁)의 6대손이다. 순묘(純廟) 병인년(1806, 순조6) 12월 6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어서 12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한편으로 곡을 하고 한편으로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기절하였다. 대인(大人)께서 건강을 손상할까 염려하여 매양 위로하고 억제하여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대인이 출타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때마다 슬픈 마음을 다 드러내었다. 계비(繼妣) 장씨(張氏)는 성품이 매우 엄격하여 거의 용납하지 못하였지만 공은 곡진하게 받들고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니, 부지런히 봉양하는 것은 지성에서 나왔다. 장씨가 끝내 기뻐하자 마치 자기가 기쁜 듯이 여겼다. 부친 병간호를 할 적에 너무나도 근심하여 대변을 맛보고 차도가 있는지를 점검하였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소생시켰다. 부친상을 당해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수척하였으며, 정성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아우 치상(致祥)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일상생활할 적에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재산과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22세 때 함안 윤씨(咸安尹氏) 범수(範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에 추증된 기견(起畎)의 후손이다. 효성스럽고 유순하며 온화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은 평소 몸가짐에 절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며 자제를 가르치고 동복(僮僕)을 부릴 적에 모두 분명하게 조리가 있었다. 이웃 마을이나 향당, 상서(庠序)나 학교의 일에 대해 명백하지 않은 것을 판단하고 폐단을 없애 한 고을의 풍기(風紀)를 세운 데는 그가 노력하여 힘쓴 공이 적지 않았다. 타고난 품성이 기개가 있고 곧아 사사로운 마음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남들도 감히 의롭지 않다고 보지 않았다. 만년에 금오산(金鰲山)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석정(石亭)에서 가족을 데리고 가서 머물렀는데, 유연히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뜻을 두어 농은(農隱)이라고 자호하였다. 갑술년(1874, 고종11)10) 3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단양(丹陽)의 덕현(德峴)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4년 뒤에 부인 윤씨(尹氏)가 졸하자 공의 묘소 오른쪽 산등성이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수현(壽玹)·수빈(壽彬)이고, 딸은 홍우명(洪祐明)·문석홍(文錫弘)에게 시집갔다. 수현의 아들은 정섭(定燮)·창섭(昌燮)이고, 딸은 이인채(李仁采)·박두현(朴斗玹)에게 시집갔다. 수빈의 아들은 남섭(南燮)이다. 아, 공의 재주와 기개가 어찌 한 고을의 인물이 될 따름이겠는가. 향당에 매양 이러한 인물이 있다면 후생이 어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으며, 향리의 풍속이 어찌 아름답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는가. 공의 행실에 대해서 비록 대략적으로도 보지 못했지만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어서 서술하여 후세에 알리게 할 자는 또한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余在弱冠出遊庠序中。見吾鄕人物。多耆舊名碩。而惟農隱吳公。風儀言論。俊偉宏直。最有欽艶於心。旣而公沒。而其遺胤壽玹。收錄遺事以請狀德之文。嗚乎。叵耐歲月。已屬三十年前事。鄕黨之間。風儀言論。非復當時人物之盛。而陪從少年如義林者。亦已老矣。若復少加日月。則聲望風蹟。益就泯然。而何以爲後史氏据實揄光之地乎。此余所以不敢牢辭者也。公諱志祥。字聖心。以麗朝文襄公諱延寵爲鼻祖。文襄之後。有賢弼封寶城君。子孫因貫焉。至我朝。有諱益孫。以學行除靖陵參奉。諱邦翰。壬亂殉節晉州。皆顯祖也。高祖贈戶曹參議諱震札。曾祖贈戶曹參判諱世觀。祖諱始有。考諱錫胤。妣咸陽朴氏必煉女。知足堂成仁六世孫。以純廟丙寅十二月六日。生公于七松里。幼有至行。年十二遭內艱。至誠哀痛。哭踊頓絶。大人慮有傷生。每慰抑之。不敢徑情。俟大人出。輒盡哀。繼妣張氏。性甚嚴。幾不見容。公委曲承順。毫忽無違。服勤就養。出於至誠。張氏竟底豫如己出。侍親癠。極其致憂。嘗糞以試差劇。血指以甦旣絶。及遭故。過於哀毁。情文備至。與弟致祥友愛甚篤。居處出入。未始相離。財産什物。有無共之。二十二聘咸安尹氏範壽女。贈領相起畎后。孝順柔嘉。其得婦道。公平居持身有度。治家有法。奉祭祀接賓朋敎子弟御僮僕。皆燦然有條。至於隣里鄕黨庠序學校之地。所以裁決疑晦刷滌弊瘼而立一方之風紀者。其力爲不少矣。天性儻直。未嘗以私干人。人亦不敢以非義見之。晩愛金鰲山水之勝。自石亭挈家往住之。悠然有終老之意。自號農隱。甲午三月二十一日考終于正寢。葬于丹陽之德峴甲坐原。後四年夫人尹氏卒。葬于公墓右岡艮坐原生二子二女。壽玹壽彬。女洪祐明文錫弘。壽玹子定燮昌燮。女李仁采朴斗玹。壽彬子南燮。嗚乎公之才局氣槪。豈惟爲一鄕人物而已。鄕黨之間。每有此等人物。則後生何患無賴。鄕俗何患不美哉。公之行。雖不槪見。而其爲創業可繼者若是。則繼而述之使之。有聞於後世者。想亦不無其人焉。 갑오년 원문은 '甲午'인데, 《松沙集》 「농은오공묘지명(農隱吳公墓誌銘)」에 근거하여 '午'를 '戌'로 바로잡았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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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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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훈련원 봉사 농은 민공 행장 訓錬院奉事農隱閔公行狀 공의 휘는 대승(大昇), 자는 승여(昇汝), 호는 농은(農隱),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묵헌(黙軒) 선생 휘 지(漬)의 후손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저명한 선비들이 즐비하였다. 휘가 회삼(懷參)이란 분에 이르러서는 호가 의암(義庵)인데, 세조(世祖)가 양위를 받자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대정현(大靜縣)으로 좌천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나서는 능주(綾州)에 은둔하였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희점(希點)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충익(忠翼)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선고(先考)의 휘는 영우(英雨)로, 병절 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선비(先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세화(世華)의 따님이다. 선묘(宣廟) 계유년(1573, 선조6)에 주(州)의 서정리(西亭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장성해서는 문사(文詞)가 특출하고 무예까지 겸비하였다. 호방하고 강개(慷慨)하였으며, 기절(氣節)과 담략(膽略)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붓을 던지고 무과로 출신하여 관직을 옮겨 훈련원 봉사(訓錬院奉事)에 올랐다. 어느 날 상이 문관과 무관에게 재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품계를 건너뛰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권귀(權貴)의 눈 밖에 나서 관직에서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서는 외부 일에 관심을 끊고 대문을 닫고 휘장을 드리운 채 옛날에 익힌 학문을 복습하고 정리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자, 우산(牛山) 안 선생 방준(安先生邦俊)과 의병을 일으켰다.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浡), 찰방(察訪) 이기발(李起浡), 순창 군수(淳昌郡守) 최온(崔蘊),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집(柳楫), 전 찰방 김선(金旋) 등이 일시에 호응하여 기한 내에 모였다. 광주(光州)의 경계에 이르러 전군(前軍)이 지체하면서 나아가지 않자, 공이 큰소리로 매우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군주가 치욕을 받으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대의(大義)이다. 나라가 이처럼 위급한데 도리어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온 군중이 숙연하였다.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당하게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차마 머리를 풀고 좌임(左袵)하는 오랑캐가 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인하여 '원컨대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곧장 누란왕을 베어 죽였으면 한다.[願將腰下劍 直爲斬樓蘭]'라는 시구11)를 읊조리며 끊임없이 혀를 차며 애석해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대문을 닫고서는 다시 출사하지 않았다. 작은 정자를 짓고 망미정(望美亭)이라고 편액하고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산수에서 노닐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지냈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 현종5) 10월 29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주(州)의 세청면(世淸面) 개선동(改善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주준(柱俊)의 따님이다. 장자는 성(誠), 차자는 간(諫)으로, 병자년(1636, 인조14)에 아버지를 모시고 의병에 나아갔다. 측실(側室)의 두 아들은 의(誼), 계(誡)이고, 딸은 이두연(李斗延)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행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마음이 잘 맞는 때를 만났지만 산관(散官)의 반열에서 배회하여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았기에 산림으로 물러나 종적을 감추고 은거한 채 평소 포부를 조금도 드러내지 못 하였으니, 식자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오직 의병을 일으킨 일로 말하면 비록 중도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늠름한 충의, 엄정하고 분명한 기율, 신속하게 호응하여 모인 것에서 평소 수양의 깊이와 신망의 중함을 알 수 있어 먼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니, 저 한때의 부침을 가지고 어찌 경중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9세손 재호(在鎬)가 가장(家狀)을 보여 주고 인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 추앙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公諱大昇。字昇汝。號農隱。驪興府院君黙軒先生諱漬后也。世襲簪纓。名碩磊落。至諱懷參。號義庵。當光廟受禪。以定順王后親屬。謫守大靜縣。及放還也。遯于綾州。子孫因居焉。於公爲高祖也。曾祖諱希點。忠順衛。祖諱忠翼。忠順衛。考諱英雨。秉節校尉。妣水原白氏世華女。以宣廟癸酉。生公于州之西亭里。幼有至行。及長文詞出夷。武藝兼至。倜儻慷慨。有氣節瞻略。屢中鄕解。見屈禮部。於是投筆。出身遷至訓錬院奉事。一日上試藝文武官。公居第一。特命超資折衝。旣而爲權貴所忤。退歸田里。掃却外事。杜門下帷。以溫理舊業。獎進後學。爲畢生計。及丙子朔警。與牛山安先生邦俊。倡起義旅。玉果縣監李興浡察訪李起浡淳昌郡守崔蘊前翰林梁曼容前察訪柳楫前察訪金旋等。一時響應。刻期赴會。至光州界。前軍遲留不進。公揚言大責曰。主辱臣死。此是大義。國之危急如此。而乃玩愒時日乎。一軍肅然。至礪山。聞和成。北向痛哭。且曰忍令吾堂堂禮義之邦。淪爲被髮左袵耶。因誦願將腰下劒直爲斬樓蘭之句。咄咄不已。還鄕杜門。不復出仕。築一小亭。扁其額曰望美。與一時名士。遊從於山水文酒之間顯宗甲辰十月二十九日終。葬州之世淸面改善洞午坐原。夫人淸州韓氏柱俊女。長子誠次子諫。丙子侍親赴義。側室二子誼誡。女李斗延。孫曾以下不能悉記。嗚乎。公以孝友之行。文武之才。當明良會遇之際。而低廻散班。位不稱德。退休林樊。斂跡潛光。使平日所抱。不少槪見。爲識者之缺望大矣。惟其擧義一事。雖未免中途左次。而其於忠義之凜烈。紀律之嚴明。應聚之敏速。可見素養之深。宿望之重。而百世之下。足令人起敬。彼一時之低昂。何足爲輕重也。九世孫在鎬示以家狀。因請狀德之文。余以鄕里後生。追仰有素。不敢辭。 원컨대……시구 이백(李白)의 〈새하곡(塞下曲)〉에 나오는 구절이다. 《李太白集 卷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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