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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갈명 孺人李氏墓碣銘 유인(孺人)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관향은 성주(星州)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후손이다. 증조는 지(沚), 조부는 성회(成檜)이다. 부친은 원형(元衡)이고, 모친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경유(景裕)의 따님이다.유인은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었다. 어릴 적에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자라서 처사(處士) 문세정(文世楨)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섬길 적에는 조심하고 공경하며 삼갔으며, 순종하고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집안사람을 부리고 집안일을 처리함에 온화하고 근검(勤儉)하여 확실하게 정해진 규범이 있었다. 친가에 후사가 없는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후사를 잇는 데 애쓰고 힘써 너희 어머니로 하여금 지하에서 한을 품게 하지 말라. 만일 혹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외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외손이 모시는 제사208)라는 이유로 태만하게 여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생을 마쳤다. 아들 관오(貫吾)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손자는 희복(喜復), 희점(喜漸), 희승(喜升), 희항(喜恒), 희모(喜模), 희성(喜成)이다. 증손 이하는 그 후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아,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물이 멀리 흐른다. 이 때문에 사람의 덕을 보고서 그 후손에게 복록이 있을 것을 알고, 자손이 창대한 것을 보고서 선조의 음덕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나는 문씨(文氏)가 오늘날에 자손들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 당시 유인의 내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7세손 재항(載恒)이 비석을 세우는 일로 그 후면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나는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훌륭한 여사 보내 주어 貽以女士자손들 따르게 하였네.209) 從以孫子유인이 있었으니 孺人有焉만년 동안 밝게 전해지리. 昭垂萬年 孺人姓李。貫星州。興安君濟後。曾祖沚。祖成檜。考元衡。妣慶州崔氏。景裕女孺人天稟溫仁。幼有至行。長適處士文世楨。事舅姑奉君子。小心洞屬。承順無違。以至御家衆處家務。雍容勤儉。的有成規。常恨親家無嗣。語子孫曰。汝輩勉力。爲之繼後。無使汝母抱恨於地下。如或未爾。則守墓奉祀。非外裔之責乎。勿以非族之祀怠焉。某年月日終。子貫吾。有文行。孫喜復喜漸喜升喜恒喜模喜成。曾孫以下。其麗蕃衍。不能盡錄。嗚呼。根固者枝茂。源深者流遠。是以。觀人之德而知其有後祿。觀子孫之昌大。而知其有先蔭。吾知文氏祚胤綿延於今日者。未始非當日內助之爲也。曷不偉然。七世孫載恒。以將竪碣。請誌其陰。余以陋劣。辭不獲已。銘曰。貽以女士。從以孫子。孺人有焉。昭垂萬年。 외손이 모시는 제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권3 〈답왕상서(答汪尙書)〉에 "송공은 외조부에게 후사가 없자 해마다 때맞춰 제사 지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두텁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친족이 아닌 자의 제사는 이치에 이미 온당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훌륭한……하였네 《시경》〈대아(大雅) 기취(既醉)〉에 "그 따름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로다.[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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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亞獻禮 贊引引亞獻官詣盥洗位北向立○盥手拭手○仍詣良僖公李先生罇所西向立○奉爵奠爵升○司罇擧冪酌酒○奉爵受酒○贊引引獻官詣良僖公李先生香案前○奉爵奠爵隨之○獻官北向跪○搢笏○奉爵跪獻官之右以爵授獻官○獻官執爵以爵授奠爵○奠爵自左受之奠于神位前第二坫○奉爵奠爵降復位○獻官俯伏興平身○仍降復位○贊引引獻官詣恭度公徐先生罇所西向立○奉爵奠爵升○司罇擧冪酌酒○奉爵以爵受酒○贊引引獻官詣恭度公徐先生香案前○奉爵奠爵隨之○獻官北向跪○搢笏○奉爵跪獻官之右以爵授獻官○獻官執爵以爵授奠爵○奠爵自左受之奠于神位前第二坫○奉爵奠爵降復位○獻官俯伏興平身○執笏○仍降復位○贊引引獻官詣忠簡公李先生樽所西向立○奉爵奠爵升○司樽擧冪酌酒○奉爵以爵受酒○贊引引獻官詣忠簡公李先生香案前○奉爵奠爵隨之○獻官北向跪○搢笏○奉爵跪獻官之右以爵授獻官○獻官執爵以爵授奠爵○奠爵自左受之奠于神位前弟〖第〗二玷〖坫〗○奉爵奠爵降復位○獻官俯伏興平身○執笏○仍降復位○亞獻官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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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終獻禮 贊引引終獻官詣盥洗位北向立○盥手拭手○仍詣良僖公李先生樽所西向立○奉爵奠爵升○司樽擧冪酌酒○奉爵以爵受酒○贊引引獻官詣良僖公李先生香案前○奉爵奠爵隨之○獻官北向跪○奉爵跪獻官之右以爵授獻官○獻官執爵以爵授奠爵○奠爵自左受之奠于神位前第三坫○奉爵奠爵降復位○獻官俯伏興平身○執笏○仍降復位○贊引引獻官詣恭度公徐先生樽所西向立○奉爵奠爵升○司樽擧冪酌○奉爵以爵受酒○贊引引獻官詣恭度公徐先生香案前○奉爵奠爵隨之○獻官北向跪○搢笏○奉爵跪獻官之右以爵授獻官○獻官執爵以爵授奠爵○奠爵自左受之奠于神位前第三坫○奉爵奠爵降復位○獻官俯伏興平身○執笏○仍降復位○贊引引獻官詣忠簡公李先生樽所西向立○奉爵奠爵升○司樽擧冪酌酒○奉爵以爵受酒○贊引引獻官詣忠簡公李先生香案前○奉爵奠爵隨之○獻官北向跪○搢笏○奉爵跪獻官之右以爵授獻官○獻官執爵以爵授奠爵○奠爵自左受之奠于神位前諸三坫○奉爵奠爵降復位○獻官俯伏興平身○執笏○仍降復位○終獻官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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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辭(8) 徽國公朱熹字仲晦宋人世居徽之嫠源父松田進士用薦歷官司勳吏部郞先生幼穎悟甫能言父指天示之曰天也因問天之上何物父異之就授以孝經一閱題其上曰不若是非人也嘗從群兒戱沙上獨端坐以指畵沙視之八卦也年十八入貢于鄕登進士主同安簿筵民秀日講聖賢修己之道禁婦女之爲僧道者父病亟嘗屬曰籍溪胡原仲白水劉致中屛山劉彦仲三人學有淵源吾死汝往事之而惟其言聽之先生乃復徧交當世有識之士延平李侗嘗學於羅從彦從彦學於楊龜山乃程門高弟也先生歸自同安不遠數百里徒步往從之其爲學大抵窮理以致其知反躬以踐其實嘗謂聖經之旨不明而道統之傳始晦故著爲景本義啓蒙著卦考誤詩集傳大學中庸章句或問論語孟子集註太極圖通書西銘解楚辭集註辨證韓文考異及編有論孟集議孟子指要中庸輯略孝經刊誤小學書通鑑網目宋名臣言行錄家禮近思錄程氏遺書伊洛淵源錄皆行于世而朝廷又以其大學論孟中庸儀禮經傳通解立於學宮平生爲文凡一百卷生徒問答凡八十卷別錄十卷○宋寧宗嘉定元年賜諡文公理宗寶慶二年贈太師封信國公紹定三年改封徽國公淳祐元年從祀【按太學誌 肅宗四十年甲午秋八月以宋道國公周惇頤豫國公程顥洛國公程頤新安伯邵雍郿伯張載徽國公朱熹升配大成殿先是文正公宋時烈上疏請之 上詢于大臣儒臣而許之因歲斂未克擧至是禮曺判書閔鎭遠申請行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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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여91)【준각】에게 답함 答朴仁汝【準珏】 흰머리 늙은이로 쓸쓸하게 지내자니 매양 심 은후(沈隱候)의 '그대와 함께 늙어간다는'92) 탄식이 절실합니다. 하물며 이렇게 세서(歲序)가 바뀌는 때 그리운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형의 서신은 나의 마음을 먼저 이해했다고 이를 만하며 또한 지금껏 먼저 새해 안부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노경(老境)의 보양(保養)과 모든 건강이 새해와 더불어 더욱 새로우신지 모르겠습니다. 형을 향한 그리움이 끊이지 않아 실로 내 마음은 애가 탑니다. 아우는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병약한 육신으로 풍상에 시달리면서 유유히 지나온 것이 이제 벌써 60년입니다. 죽을 날이 문득 임박하려 하건만 평생에 걸친 지업(志業)은 이룬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장성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새벽이 거듭되기 어렵다."93)라는 구절을 읊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되뇌면서 탄식을 합니다. 다만 손자를 가르치는 것이 만년에 심사를 기탁하는 일이지만 이것 역시 지금껏 뜻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포(令抱 상대방의 손자)는 근래 학업의 성취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뛰어난 경지로 나아가 내옹(乃翁 그의 아버지)이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에 위안을 주리라고 생각됩니다. 대체로 학문을 좋아하는 인가(人家)의 어린아이가 매우 드문 것은 왕왕 모두 온갖 세상 경험에 이끌리기 때문이니 애석합니다. 白首落落。每切沈隱候同衰之歎。而況此歲序改易之際。其爲懷想。尤爲何如哉。兄書可謂先獲我心。而亦未嘗不以未能先修歲問之禮爲愧愧也未審老境頤養百度節宣。與歲益新。憧憧懸往。實勞我心。弟殘喘病骨。悠悠捱過於風霜侵凌之餘者。今已六十光陰矣。桑楡之日。奄奄將迫。而平生志業。所就者何事。每誦盛年不重來。一日難再晨之句。不覺三復慨然。只有敎誨兒孫。是爲晩年寓懷之一事。而亦未見其有可意處。未知令抱近來造業果何如。想日趨佳境。而有以慰乃翁期望之意者矣。大抵人家少年有嗜學之意者。甚鮮。往往皆爲世味所引將去。可惜。 박인여(朴仁汝) 인여는 박준각(朴準珏, 1846∼1908)의 자이다. 본관은 밀양, 호는 정재(靜齋)이다. 심 은후(沈隱侯) 은후는 남조(南朝) 양(梁)나라 심약(沈約)의 시호이다. 그의 〈별범안성(別范安成)〉 시는 "우리네 인생살이 젊을 적에는, 헤어져도 만날 기약 하기 쉽더니. 그대와 함께 늙은 지금 이 시절, 더 이상 헤어질 때가 아니라네. 한 잔 술이 별거냐고 말하지 마시오, 내일 다시 이 술잔 잡기 어렵다오. 꿈속에 찾아갈 길 알지 못하니, 무슨 수로 그리움을 달래리오.【生平少年日, 分手易前期. 及爾同衰暮, 非復別離時. 勿言一尊酒, 明日難重持. 夢中不識路, 何以慰相思.】"이다. 《古今詩刪 卷9 梁詩》 장성한……어렵다 도잠(陶潛)이 지은 〈잡시(雜詩)〉 12수(首) 가운데 첫 번째 시 말구(末句)의 "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이 두 번 있기는 어려워라. 제 때에 미쳐 마땅히 힘써야 하나니, 세월은 사람 기다려 주지 않는다.【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古文眞寶前集 卷2》 이 〈잡시〉 12수는 도잠이 50세 때 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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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홍【기현】에게 보냄 與鄭致弘【琦鉉】 영랑(令郞)이 복을 마치고 저를 찾아오니 슬프고 위로하는 마음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상례를 마칠 때 나아가 위로하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앉아서 방문을 받았으니 또한 마음이 부끄럽고도 부끄럽습니다. 삼가 묻건대 형께서는 체후가 안정되고 쾌적하며 중씨(仲氏) 또한 평안하신지요, 신이 화평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일찍이 재덕(才德)이 뛰어난 형제는 보았지만, 70의 노년을 맞아 긴 베개와 큰 이불로 저녁마다 평화롭고 화락하게 지내는 것은 옛날에 그런 말을 들었고 지금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물며 아래로 현명한 자제가 가르침을 받들고 잠자리 시중을 들며 시(詩)와 예(禮)를 물으니 만년의 넉넉한 복이 사람을 탄복하고 부러워하게 합니다. 아우는 형제도 없이 혼자라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지내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처지가 기구하여 여러 해에 걸쳐 객지를 떠도느라 가인(家人)들과 조금이라도 단란하게 지냈던 날이 없었습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역시 제게는 간절한 한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의 세상 소식은 갈수록 더욱 좋지 못하니 끝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고인(古人)의 만산통곡(萬山痛哭)89)도 오히려 헐후어(歇後語)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관산(冠山)의 사우(士友)가 달 전에 정산(定山)으로 갔습니다. 노정(路程)을 계산해보면 며칠 사이에 이곳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요사이 일어난 소식을 이 사람에게 듣게 될 듯하니 열흘 사이에 한 번 왕림하실 수 있으신지요. 몹시 기원(祈願)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令郞闋服過我。悲慰之情。有難勝堪。向於終制時。未遂晉慰之計。而今乃坐得其顧。亦不無愧愧之私也。謹問兄體安重。仲氏亦平適。神相愷悌。固應如此。竊嘗見金昆玉季。七耋衰年。長枕大被。日夕湛樂。此是古聞其語。而今見其人矣。好事好事。況下有賢子弟。趍庭侍枕。問詩問禮。晩年餘祿。令人歎羨。弟終鮮窮獨。踽踽無賴。加以身事奇險。多年羈泊。未得與家人輩有多少團聚之日。若一朝溘然亦未爲非區區之恨也。時耗去益不佳。未知終作何狀。古人之萬山痛哭。猶是歇后語。柰何奈何。冠山士友月。前往定山計。其程道則數日間。當過此矣。時耗似於此便聞之。旬間或可一枉否。雖所深願。而安敢望也。 고인(古人)의 만산통곡(萬山痛哭) 김인후(金麟厚)의 ≪하서선생전집부록≫ 권2에 정철(鄭澈)이 하서를 그리며 지은 시에서 인용하였다. "동방에는 출처에 바른 인물 없건만 오직 담재옹이 있다네. 해마다 7월이 되면 일만 산중에서 통곡을 하네.【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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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헌에게 보냄. 寄憲孫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반드시 귀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부유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모름지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귀함과 부유함은 천명이 있으니, 구한다고 반드시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타인에게서 구할 것도 없고 밖에서 찾을 것도 아니며 다만 나의 본성을 따르고 나의 행실을 닦기만 하면 되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며 집에 거처함에 효도하고 우애하며 게으르지 않고 방탕하지 않으며 죄를 짓지 않고 허물을 만들지 않아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자신의 집을 지킨다면 이것이 이른바 좋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평소에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항상 겸손과 공손으로 자처하고 진심을 다하여 신의로 상대하며, 절대로 업신여기는 생각과 분노하는 낯빛으로 마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에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거든 마땅히 자신을 책망하고 구차하게 남을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책망하는데 힘쓰면 원망이 더욱 쌓이고 자신을 책망하는데 힘쓰면 덕이 날로 나아가니, 그 득실의 거리가 과연 어떠하겠느냐. 맹자는 말하기를 "지극히 성실하고서 감동시키지 않은 자는 있지 않으니, 성실하지 못하면 능히 남을 감동시킬 자가 있지 않다."199)라고 하였다. 대저 자신의 성실이 지극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서 다만 타인이 감동하지 않음을 책망한다면 자신의 몸을 굽혔는데 그림자가 곧지 않음을 미워하는 것 또는 그 근원을 더럽히고서 흘러가는 물줄기가 맑지 못함을 탓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붕우 관계는 진심을 다하여 신의가 서로 통한다면 말을 내면 사람이 믿게 되며, 친척 간에 은혜와 사랑이 서로 무젖으면 말을 내면 사람이 감응하게 된다. 이는 바뀌지 않는 이치이니,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해라. 집에 거처할 때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뜨락을 청소하고 집안일을 맡아 하는 여가에 조금이라도 남은 힘이 있거든 곧 성현의 책을 잡고 읊조리면서 연구하여 의리로 하여금 항상 내 마음에 무젖게 한다면 평소 일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점술과 방술의 책은 불경스럽고 고아하지 않으니 선비가 숭상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바둑과 잡스런 놀이 등은 뜻을 빼앗고 일을 방해함에 가장 심한 것이니, 깊이 생각해 보아라. 나 자신을 생각해보건대, 헐떡이는 실낱같은 숨은 조만간 끊어질 것이니 세상만사를 둘러보아도 다시 기대할 것이 없는데, 다만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마음과 뼈에 새기고 한가로운 이야기라 여기지 말라. 人生斯世。不必要作貴人。不必要作富人。要作好人。是第一事。況貴與富有命焉。求之不可必得。至若做好人則無求於人。無慕乎外。只是順我性分。修我行實而已。何難之有哉。持身謹勅。居家孝友。無怠無荒。無罪無過。以保其身。以守其家。此非所謂好人耶。平日接人爲一大事。常以謙恭自牧。忠信相與。切不可以侵侮之意。忿戾之色。加之也。事有不可。當責己而勿苟責於人也。務責人則怨益積。務責己則德益進。其得失相去。果何如哉。孟子曰。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不誠。未有能動者也。大抵不知已誠之不至。而但貴人之不感動。何異於曲其身而惡影之不直。濁其源而責流之不淸乎。朋友之際。忠信相孚。則言出而人信之。親戚之間。恩愛相浹。則言出而人感之。此是不易之理。千萬勉之。居家夙興夜寐。灑掃庭除。幹蠱之餘。少有餘力。輒把聖賢書。諷詠硏究。使義理常常浸灌吾心則於日用行事。自然有所補助者矣。至於占訊方技之書。不經不雅。非儒者所尙。況碁奕雜戲。其爲喪志妨務。最爲甚焉。千萬戒之。自惟喘喘一縷。朝夕待盡。環顧萬事。無復所望。而所望惟此而已。銘心刻骨。勿視以閑說話也。 지극히……있지 않다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보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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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1 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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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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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가 지은 노사선생 〈납량사의기의〉를 변석함 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 ○〈납량사의(納凉私議)〉1)"분(分)이라는 것은 이일(理一) 안에 있는 세세한 조리(條理)이니 이(理)와 분(分)은 층절(層節)이 있을 수 없다. 분(分)이 이(理)의 대(對)가 아니라 '분수(分殊)'가 곧 일(一)의 대이다."○〈납량사의기의(納凉私議記疑)〉"이 말은 얼핏 보아서는 의심할 만한 점이 없다. 다만 노사(蘆沙)의 〈기경도(奇景道)에게 답하는 편지〉에 이르기를, '하늘에 이 분(分)이 원래 없었다면 사람과 사물이 어디에서 얻어 편전(偏全)2)을 지니게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分)이 세세한 조리라고 한 것은 훗날 사람과 사물이 얻게 되는 편본연(偏本然)과 전본연(全本然)의 근원이 될 것이다.내가 생각건대, 편(偏)과 분(分)은 원래 일관(一串)된 것이 아니다. 분(分)은 일신(一身)의 귀나 눈, 손이나 발과 같고 편(偏)은 한쪽 귀만으로 듣고 몸이 한쪽만 기능하는 것과 같다. 분(分)은 일(一) 안에 본래 있는 이(理)이고 편(偏)은 기(氣)의 측면에서 전(全)의 대가 되는 성(性)이니, 똑같이 얘기하기 어려울 듯하다."○〈변(辨)〉이(理)에 분(分)이 있으므로 물(物)에 편전(偏全)이 있다. 이(理)에 분(分)이 없다면 물(物)이 어디에서 편전(偏全)을 얻겠는가. 지금 "분(分)은 일신(一身)의 귀나 눈, 손이나 발과 같고 일(一) 안에 본래부터 있다."라고 했으니 이 설을 가지고 밝히고자 한다.귀, 눈, 손, 발 등의 백해(百骸 모든 뼈)와 백체(百體 온갖 부분)이 합쳐져 일신(一身)의 전체를 이루고 사람, 짐승, 풀, 나무 등 만상(萬象 모든 형상)과 만물(萬物 온갖 사물)이 합쳐져 천지의 전체를 이룬다. 사람 몸의 전체를 이루는 이(理)가 본래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알면서도 천지의 전체를 이루는 이(理)가 본래 형체가 갖추어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모르는가. 사람의 귀, 눈, 손, 발이 본래부터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새와 짐승의 깃, 털, 발굽, 뿔과 풀과 나무의 줄기, 잎새, 꽃, 열매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은 과연 천명의 본연(本然)이 아니겠는가. 분(分)과 편전(偏全)이 만약 일관(一串)되지 않다면 주자(朱子)는 어떻게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 주는 편벽됨[偏]을 말하였겠는가.3) 또 어떻게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 그 부여받은 형체가 치우치거나 올바른 것은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다고 말하였겠는가.4) 한 귀로만 듣고 한 쪽 몸만 기능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기(氣)가 고르지 못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어찌 이를 인용하여 주장을 펼 수 있겠는가.○〈납량사의〉"주자(朱子)가 이르기를,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상수(象數)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진 것을 일컫고, 형기(形器)가 이미 갖추어져 있으나 그에 관한 이(理)는 조짐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5)라고 하였다. 상수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직 깨어지지 않은 일(一)이고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졌다면 분(分)이 이미 포함된 것이 아니겠는가. 형기가 이미 갖추어졌다면 이미 정해진 분(分)이고 그에 관한 이(理)는 조짐이 없다면 일(一)의 자재(自在)가 아니겠는가."○〈납량사의기의〉"알 수 없지만, 노사(蘆沙)는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진 것을 사람과 사물이 하늘로부터 받는 편전(偏全)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는가? 삼가 생각건대 이 구절에 담긴 뜻은 부자, 군신 관계가 생기기 전에 자(慈), 효(孝), 예(禮), 충(忠)의 이치가 이미 갖추어지고 사물의 미세함이 있기도 전에 사물의 미세함에 대한 이치가 이미 갖추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성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일(理一) 안에 있는 분(分)과 수(殊)의 온전한 이치를 지니고 있고, 현인(賢人)과 중인(衆人)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온전하지 못한 약간의 이치를 지니고 있고, 지극히 어리석은 자와 매우 악독한 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전혀 바뀌지 않고 전혀 정리(情理)에 맞지 않는 이치를 지니고 있고, 조수 초목(鳥獸草木)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치우치고 막힌[偏塞] 이치를 지니고 있어 각각 온갖 형상이 얻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노사(蘆沙)가 이른 '하늘에 원래 이 분(分)이 없었다면 사람과 사물이 어느 곳에서 얻어 이 편전(偏全)을 가지게 되었겠는가.'라는 것과 판연하게 차이가 나니 의심할 만하다."〈변(辨)〉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은 상수(象數)와 형기(形器)가 아닌 사물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람에 관한 이치는 이미 갖추어지고 사물이 생기기도 전에 사물에 관한 이치가 이미 갖추어진 것에 대해서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저 사람이 이 의리에 대해서 반드시 모르는 것은 아니건만, 고의적으로 기질(氣質), 분수(分數), 지극히 어리석은 자, 매우 악독한 자 등의 말을 인용하여 그 설을 현혹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남을 능가하려는 사사로움을 이루었다. 아,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이치(理致)의 득실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다.하늘은 덮어주는 일에 치우치고 땅은 실어주는 일에 치우치며 해는 낮에 치우치고 달은 밤에 치우치며 눈은 보는 일에 치우치고 귀는 듣는 데 치우치며 손은 쥐는 데 치우치고 발은 걷는 일에 치우친다. 밝디밝은 것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이 온전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으로 하해(河海)를 보면 하해가 온전하며, 잎사귀 하나로 나무 한 그루를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온전하고, 하나의 사지(四肢)로 일신(一身)을 보면 일신이 온전하다. 세상에서 어떤 사물이 과연 편전(偏全)에서 벗어나겠는가. 이것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에 다시는 본연이 없게 된 지 오래일 것이다. 또한 조수 초목이 이(理)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은 어떤 사물이라서 유독 이(理)에 본래 있는 것이 되겠는가. 사람이 이미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慈), 효(孝), 예(禮), 충(忠)의 이(理)는 어찌 유독 본래 지니게 되고 어디에 이미 갖추었겠는가. 어찌 처리하는 데만 급급하여 살필 겨를을 두지 않는가.○ 〈납량사의〉"'성(性)은 같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편전(偏全)의 성(性)을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分) 밖에 이(理)를 두는 것이다. 결국 같은 것을 주로 삼아 다른 것을 폐기한다면 성(性)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는 사물이 된다."○ 〈납량사의기의〉"낙가(洛家)6)들이 성(性)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충(忠), 효(孝), 인(仁), 양(讓)을 가리켜 '이것은 분(分)의 수(殊)이지 본연의 성(性)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분(分) 밖에 이(理)가 있고 성(性)은 용(用)이 없는 사물이 된다. 다만 '만상(萬象 모든 형상)의 성(性)은 체(體)가 본래 온전하며 배워서 아는 사람[學知]부터 날짐승, 들짐승, 초목의 발현에 이르도록 각각 하늘로부터 받은 기(氣)에 따라서 스스로 하나의 성(性)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한 칸을 못 미치는 것[未逹一間]7)에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一點子]8)에 이르기까지, 서로 비슷한 것[相近]에서 완전히 다른 것[絶不同]9)까지, 하늘이 내린 성인[天縱之聖]10)으로부터 지극히 어리석어 바뀌지 않는 사람[下愚不移]11)에 이르기까지 품류(品類)가 만 가지로 다르다.'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모두 본연의 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변〉기(氣)의 청탁(淸濁), 수박(粹駁)은 본래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지지만 온갖 사물이 생겨나고 편(偏)과 전(全)이 나뉘는 것 또한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지겠는가. 만약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진다면 콩은 오이가 될 수 있고 오이는 콩이 될 수 있고 말은 뿔이 날 수 있고 소는 갈기가 날 수 있다. 상제(上帝)가 주재(主宰)하는 것과 건도(乾道)가 각각 바로잡는 것[各正]12)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편(偏), 전(全), 분(分)이라는 말을 지키려다가 상제는 주재의 기능을 놓치고 건도(乾道)는 자기의 직임을 잃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 그르겠는가?만상(萬象)의 성(性)은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하건만 발현(發現) 단계에 이르러 스스로 하나의 성(性)이 된다면,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개의 성(性), 소의 성이 사람의 성(性)과 온전함을 함께하고 풀의 성(性), 나무의 성이 하늘의 성(性)과 그 위대함을 함께하다가 발현의 단계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하늘이 되고 사람이 되고 개나 소가 되고 풀이나 나무가 되겠는가. 말에 근거가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납량사의〉"천하의 성(性)은 온전하지[全] 않으면 치우쳤으니[偏], 참으로 온전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은 성은 없다. 편(偏)과 전(全)이 모두 본연(本然)이 아니라면 천하에 그 본연의 성을 성으로 삼을 수 있는 사물은 하나도 없고 본연의 성은 영원히 허공에 매달린 비어있는 자리가 될 것이니, 장차 어디에 저 성을 쓰겠는가. 정통(正通)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의 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편색(偏塞)과 더불어 똑같이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 정통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개 분(分)이 없는 것을 일(一)로 여긴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게 된다. 각정(各正)의 성(性)을 분수(分殊)에 떨어지고 형기(形器)를 범한 것으로 보아 일원(一原)으로 삼기에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갑변(甲邊)의 의론과 차이가 없을 듯하다."○ 〈납량사의기의〉"'기질(氣質)이 다르다면 천명(天命)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주자(朱子)는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13)라고 하였다. 이것이 낙가(洛家)들이 근본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 만약 이를 비난하여 '천하의 성(性)이 편(偏)도 없고 전(全)도 없다면 비어있는 자리가 되는 데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어찌 남의 말뜻을 다 파악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양하게 살피지 않더라도 명확히 드러난다. '정통(正通)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本然)의 온전함[全]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편색(偏塞)한 것은 단지 본연의 편(偏)만 얻었을 뿐이어서 '천명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이를 바로잡아서 '정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의 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의논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변〉주자(朱子)는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14)라고 하고, 또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그 부여받은 형체가 치우치거나 바른 것은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기 때문이다."15)라고 하였다. 모름지기 이(理)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또 이(理)는 편전이 없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이치를 안다고 이를 수 있다. 천명의 성을 부여한 까닭은 본래 사람과 사물이 귀천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편전이 없음을 이른다. 만수(萬殊)의 분(分)이 일원(一原) 안에 성대하게 이미 갖추어진 것은 편전이 있음을 이른다.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만 알고 사람과 사물에 각정(各正)의 성(性)이 없다고 하거나,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다는 말만 알고 사람과 사물에 일본(一本)의 성(性)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를 고집하여 백을 저버리고 이것을 얻느라고 저것을 잃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입언(立言)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도리어 남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남을 비난하는가. 주자는 "각정(各正)은 만물이 태어나는 초기에 얻는다."16)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통(正通)한 자는 본연의 전(全)을 얻고 편색한 자는 본연의 편(偏)을 얻는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납량사의〉"편전(偏全)은 선(善)의 한쪽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마치 구멍에 크고 작음은 있더라도 달빛은 그대로이고, 그릇에 네모와 둥긂이 있어도 물의 성질이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어찌 본연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기의〉"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벌과 호랑이와 원숭이의 인의(仁義)17)와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인의가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朱子)는 무엇을 가지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수연(粹然)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다18)고 하였는가?"〈변〉저 사람[간재(艮齋)]은 편전(偏全)을 본연이 아니라고 여겨 "만물의 성(性)은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하다."라고 하였다. 편전을 도외시하고 '본래 온전하다'라고 말한다면 벌과 호랑이의 성(性)과 요순(堯舜)의 성은 과연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으니 창을 거꾸로 들고 자신을 공격한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과 사물은 분(分)이 다르다[分殊]고 말하면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한 것으로 반박을 하고,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다고 말하면 벌과 호랑이의 원숭이로 비난을 하니 또한 정론(定論)은 없고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공격하는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납량사의〉"기질(氣質)은 선악을 겸하여 진흙에 섞인 물이 짙거나 맑은 정도가 백 겹이나 되고 창문 너머 비치는 달빛이 밝고 어두운 정도가 각양각색인 것과 같다. 편전(偏全)을 기질이라고 한다면 어찌 편전을 낮추는 것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기의〉"요, 순, 공자의 온전함은 진실로 본연(本然)이다.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가 청(淸)과 화(和)에 치우친 것, 안연(顏淵)과 민자건(閔子騫)이 성인의 체식을 갖추었으나 미미했던 것,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겨우 일체(一體)만 지닌 것19)이 어찌 기질로부터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유형은 선악을 겸했다고 이를 수 없다. 사람조차 이와 같으니 하물며 미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편전(偏全)을 기질로 여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끝내 의심스러울 듯하다."〈변〉백이, 유하혜, 자유, 자하의 치우침은 기질의 선(善)한 부분이다. 걸(桀), 주(紂), 유(幽), 여(厲)의 포악함은 기질의 악(惡)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비록 선(善)이라는 한쪽 부분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약간 미진한 곳은 또한 선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도리어 단지 선한 부분만 들어서 선악을 겸하지 않았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편전(偏全)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변론할 필요가 없다.○〈납량사의〉"기질의 성을 성으로 여기지 않는 군자들이 있는데,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의 성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은 군자들이 있도다!"○〈납량사의기의〉"'기질(氣質)의 성(性)을 성으로 여기지 않는 군자가 있다.'라는 말은 횡거 선생(橫渠先生 장재(張載))의 말에 근거한다. 선생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이 성(性)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통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있고, 가려지는 것에 두텁고 옅음이 있으므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있다.'20)라고 하였다. 만약 위의 한 단락을 편색(偏塞)으로 여겨 본연의 성(性)에 귀속시키고 아래의 한 단락을 기질(氣質)로 여겨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 등급으로 내린다면 문의(文義)나 사리(事理)가 모두 노사(蘆沙)의 말처럼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기질이 같지 않다면 천명의 성도 편전(偏全)이 있는가?'라고 묻자, 주자(朱子)는 '하늘이 부여한 성(性)은 편전(偏全)이 없다.'21)라고 하였으니, 편전의 성(性)이 어찌 주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근거한다면 남당(南塘)과 노사(蘆沙) 둘의 주장은 다시 자세히 논의해야 할 듯하고 천고 불변의 논의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변〉횡거 선생(橫渠先生)의 이 주장은 주된 의도를 오로지 인물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통함이나 가려짐과 열림이나 막힘[通蔽開塞], 두터움이나 옅음과 어려움과 쉬움[厚薄難易]의 구분에 두고 차례대로 얘기하였다. 문세(文勢)와 어맥(語脈)이 본연과 기질에 대해서 미칠 겨를이 없었으니 또 어찌 이 편전은 분(分)이 아니라는 오늘날의 주장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였겠는가. 기질에서 말미암은 편전(偏全)은 본래 성(性)으로 여기지 않지만, 이분(理分)에서 비롯된 편전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는가? 편언(偏言)의 인(仁)과 전언(專言)의 인22) 또한 주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주는[覆載生成] 편(偏)을 천지도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천고 불변의 논의는 아마도 개개인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자는 '사람과 사물의 성(性)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偏正)이 원래 다르다. 그러나 다른 가운데 또 각자 저절로 청탁(淸濁), 수잡(粹雜)의 다름이 있다.'23)라고 하였다. 상단(上段)에서 말하는 다름[不同]은 본연(本然)의 분(分)이고 하단에서 말하는 다름[不同]은 기질의 차이[異]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는 먼저 사람과 사물이 각각 얻는 분(分)을 말하고 다음으로 부여받은 기질이 다르기도 한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 횡거(橫渠)의 이 말 또한 이러한 뜻이다. 어찌 아래 한 부분에서 기질을 말한 것을 가지고 위 한 부분에 거짓으로 연결시켜 또 기질로 간주하겠는가.○〈납량사의〉"이(理)를 이미 만사의 본령이라고 했건만, 기(氣)는 어떤 물건이기에 유독 너는 하나로 보고 나는 다른 것으로 보아 서로 배치되는가? 근세의 여러 선생이 이(理)와 분(分)을 나누어 대체로 모두가 '너는 하나[一]로 보고 나는 다른 것[殊]으로 본다.'라고 의론을 벌였다. 그 폐해는 기(氣)가 이(理)의 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가 기의 제재를 받아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다.'는 한갓 헛된 말이 되었다."○〈납량사의기의〉"이일분수(理一分殊)는 본래 이(理)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분수(分殊)에 대해서 선현(先賢) 가운데는 곧바로 기이처(氣異處)를 가지고 말 한 자가 매우 많다. 지금 우선 틈새에 비친 해[日]로 비유하자면 틈의 길이와 크기는 본래 다르지만 단지 그 해일 뿐이다. 단지 그 해라는 것이 이일(理一)이고 틈이 각각 다른 것이 분수(分殊)이다. 이것은 앞의 일의(一義)와 병행이 가능하며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늘이 명한 성(性)이 비록 매우 온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선(善)하더라도 부여된 형기(形氣)의 차이를 어쩌지 못하여 누구도 본연(本然)을 완수할 수 없다. 비록 성(性)이 체(體)이고 기(氣)가 용(用)일지라도 역시 이(理)가 약하고 기(氣)가 강하기 때문에 가려짐이 없을 수 없다. 만약 분수(分殊)를 오로지 이(理)로 돌린다면 이(理)는 과연 기(氣)를 호령하고 기(氣)는 과연 이(理)에 순종하여 더 이상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가 없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주장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변〉본원(本原)으로 말하자면 조리(條理)와 분수(分殊)가 본래 찬연하게 잘 갖추어졌으니 이것이 도기(道器)가 뒤섞이지 않은 곳이고 태극권(太極圈)24)이 배출(排出)된 까닭이다. 유행(流行)으로 말하자면 조리와 분수(分數)는 기(氣)에 나아가 그 실제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도기(道器)가 떨어지지 않는 곳이고 음양권(陰陽圈)과 오행권(五行圈)이 각각 갖추어지게 된 까닭이다. 선현 중에 기이처(氣異處)에 나아가 분수를 말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틈새에 비치는 해로 비유하자면 틈에 길이와 크기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길이와 크기에 따라 비추는 빛은 본래 찬연하게 해에 갖추어져 있다. 빛이 형체를 이루고 자취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틈에 나아가 실제를 볼 수 있다.이(理)가 기(氣)의 주인이라는 말이 어찌 일찍이 작용(作用)이 있고 호령(號令)을 하는 것을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 이(理)가 없으면 그 일이 없고 그 이(理)가 있으면 그 일이 있다. 작용의 이(理)가 있으므로 기(氣)가 작용할 수 있고 호령의 이(理)가 있으므로 사람이 호령할 수 있다. 만약 조리(條理)와 분수(分數)를 모두 기(氣)에 귀결시킨다면 3백, 3천의 예(禮)25)가 모두 본연(本然)이 아니니 세교(世敎)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미 '분(分)은 이(理) 안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분수(分殊)를 오로지 해가 비치는 틈에 돌리며, 이미 '천명(天命)의 성이 십분(十分) 온전하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분수(分殊)를 오로지 이(理)로 돌리지 않으니, '이(理)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일이며 '십분(十分)'이라는 것은 과연 몇 푼이나 되겠는가. '병행하면서 서로 장애가 되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다.성(性)이 체(體)이고 기(氣)가 용(用)이라고 한다면 성(性)은 체(體)는 있지만 용(用)이 없는 사물이겠는가. 이와 같다면 정자(程子)가 이른바 '체(體)와 용(用)은 하나의 근원이다.[體用一原]'라는 것은 2개의 근원[二原]이 되고 이른바 '드러남과 은미함은 간격이 없다.[顯微無間]'26)는 것은 간격이 있게[有間]이 되고 이른바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나중이 아니다.[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27)라는 것은 선후(先後)가 있게 된다. 근세의 주기설(主氣說)은 잘못된 것이 대체로 여기에서 기인한다.만약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때문에 이(理)가 주인이 아니라고 의심한다면 덕을 질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덕을 좋아한다는 말을 배척하고 성품이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폐기하는 것이니 그 설이 궁색함을 알 수 있다.○〈납량사의〉"오상(五常)이 사람과 사물에게 같은지 다른지는 결국 어디에서 정해지는가? 이것은 선각자(先覺者)의 말에 의해 정해진다. 주자(朱子)가 참으로 이것을 많이 논하였다. 《사서(四書)》에 대한 그의 주해(注解)와 설명에 보이는 내용은 직접 썼다는 점과 합당함으로 보자면 기록이나 편지에 견줄 바가 아니다. 《사서》의 주해에서 사람과 사물의 오상(五常)에 관해서 말한 것이 모두 세 곳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에 반드시 이 이(理)를 얻은 뒤에 건순(健順)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있게 된다.'라고 말한 것은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나온다.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에 각각 이(理)를 타고나서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은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나온다. 이 두 조목은 모두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설명을 하였으니, 문리에 대략 통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변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 '얻어서 성(性)으로 삼는다.', '얻어서 덕으로 삼는다.'라고 한 것은 모두 모두 〈계사전〉에서 말한 성지자성(成之者性) 이하의 일에 속하지 계지자성(繼之者善) 이상의 일이 아니니, 주자의 의도는 사람과 사물의 성이 생겨날 때 이 오상을 동일하게 갖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유독 《맹자》 '생지위성(生之謂性)' 장의 집주에서 '이(理)로 말하면 인의예지의 순수함이 어찌 사물이 온전히 얻을 바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전우(田愚)가 살피건대, '수연(粹然)'은 어떤 본에는 '품(稟)'으로 되어 있고 '이(以)'는 '이(而)'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곳이다. -전우가 생각건대, 이 주석 또한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위 문장에서 성(性)은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하였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이 성(性)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이 성(性)은 무슨 성인가? 바로 이른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이다. 이는 《중용장구》와 《대학혹문》이 같다. 만일 '사물이 어찌 온전함을 얻었겠는가.'라고 한 것을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는 단안으로 여긴다면 《중용장구》의 다음 문장에서 어찌 '기품에 차이가 있으므로 과불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대학혹문》의 다음 문장에서 어찌 '저 미천하여 사물이 된 것은 형기에 질곡되어 그 온전함을 확충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 두 조목은 또 모두 《맹자》 주석의 내용과 조금의 차이도 없다. 내가 생각건대, 세 곳은 모두 체는 같고 용은 다르다는 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어찌 온전히 얻겠는가.'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물은 함께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또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동일하게 지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가 이 주장을 한 것이 어찌 새로운 논의를 펼치기 좋아하여 인도(人道)를 만물과 동일시한 것이겠는가.대체로 이 이치 외에 더 이상 다른 이치는 없다. 따라서 단지 다만 위 성현에서부터 인성이라는 글자를 넷으로 쪼개고 만물에까지 일관시켰다고 해서 혐의쩍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전우가 생각건대, 이상의 논의는 낙가(洛家)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더라도 일(一)이면서 분(分)이 없다면 내가 말하는 일(一)이 아니다. 그래서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서 곧 말하기를 '새와 짐승, 풀과 나무가 생길 때 겨우 형기(形氣)의 치우침만 얻고 전체를 관통하지 못했으니, 저 천하여 사물이 된 것들은 형기의 치우치고 막힘에 구애를 받아 그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28)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이 일리(一理)를 함께 지니고 있더라도, 이(理)에서 다시 나뉜 한계[分限]가 없을 수 없음을 말한다. 기(氣)는 이 이(理)를 태우고 싣는 것이므로 형기를 떠나서 분(分)을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일(一)에 분(分)이 없었던 적이 없음을 여기에서 인하여 볼 수 있다.위와 아래의 이 문의(文義)를 합하여 보자면, 《맹자》 '생지위성(生之謂性)' 장의 집주와 또한 뜻이 다르지 않다. 후세 사람들이 각각 절반씩을 점유하여 올리고 내리고 하니, 이것이 어찌 주자가 예상할 수 있었던 바이겠는가. 이를 통해 물(物)과 아(我)가 오상(五常)을 균등히 가지고 있는 것은 이(理)의 일(一)이고, 오상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은 일(一) 안에 있는 분(分)임을 알 수 있다. 대개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으로부터 이(理)와 분(分)이 원융(圓融)하여 간극이 없기 때문에 만물에서 성(性)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선각자들이 성을 논할 때 이(理)가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이(理)가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서로 주장이 괴리되는 것이 아니다.공공의 관점에서 그 묘(妙)를 논할 때는 배출(排出)의 측면에서 말하고 참되고 분명하게 그 체(體)를 가리킬 때는 즉기(卽氣)의 측면에서 밝힌다. 배출(排出)의 측면이라면 이(理)는 본래 하나이므로 이일(理一)이 주가 되어 만수(萬殊)가 그 가운데에 포함되고, -전우가 생각건대, 치우치고 온전하지 않은 것을 만수(萬殊)로 보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즉기(卽氣)의 측면이라면 기(氣)가 이미 나누어지므로 분수(分殊)가 주가 되어 이일(理一)이 그 사이에 있다. 이로부터 말에 두 가지가 있게 된 것이지 어찌 성(性)에 다양한 층절(層節)이 있겠는가. 제가(諸家)는 이(理)와 분(分)이 일체(一體)가 되는 곳으로 인하여 깊이 착안하지 못하였다. 다름을 말하면 오상(五常)을 홀로 차지하려 하고 같음을 말하면 이내 편전(偏全)을 낮추어 보니, 털끝만큼의 차이로 천리(千里)가 어긋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납량사의기의〉"《중용혹문》, 《대학혹문》이 만약 미물(微物)만 단언(單言)하고 중인(衆人 평범한 사람)을 함께 거론하지 않았다면 노사(蘆沙)의 말과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 문장에서 지우(知愚)와 현부(賢否)의 기품(氣稟)이 다름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말하고 또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에는 혼잡(昏雜)한 바가 있어 받은 바의 바른 것을 온전히 할 방도가 없다.'라고 하고, 또 '이른바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이미 폐단이 없을 수 없어 온전함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미물은 통하지 못하여 확충한 방도가 없다.'라는 것과 말의 뜻이 일치하여 유별(類別)과 체례(體例)에 다름이 없으니 '통하지 못하여 확충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본연의 성(性)으로 귀결시키고 '온전히 할 방도가 없다', '온전함을 잃었다'는 것을 기질의 성으로 귀결시키면 공평함을 잃었다는 혐의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노사(蘆沙)에게 묻기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덕성(德性)이 균일한 것은 이(理)의 일(一)이고, 덕성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은 일(一)의 분(分)이다.'라고 묻는다면 장차 대답하기를 옳다고 하지 않겠는가."〈변〉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오성(五性 오상(五常))을 아울러 거론한 것은 3곳이다. 그래서 선사(先師)께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하문(下文)에서 있고 없음을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기품이 간혹 다르다."라고 한 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기품(氣稟)이 같지 않음을 구분한 것이다.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인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화육(化育)하고 생장(生長)하게 한다."라는 조에 있으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이 본연(本然)의 분(分)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체(體)는 같지만 용(用)이 다르다."29)라는 주장과 "성(性)은 체(體)이고 기(氣)는 용(用)이다."라는 주장은 동일한 권투(圈套, 올가미를 씌우는 수단)이니 많은 변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른바 낙가(洛家)와 같다는 것은 실제로는 같지 않다. 선사(先師)가 같다고 한 것은 곧 실(實)의 같음이고 제가(諸家)가 같다고 한 것은 도리어 허(虛)의 같음이다.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은 주로 천명(天命), 명덕(明德), 인물(人物)의 일원(一原)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시말(始末)의 곡절과 다과(多寡)의 분수(分數)를 구별하였다. 그래서 초목과 금수로부터 중인(衆人)과 현인(賢人)에 이르고 성인(聖人)이 본성(本性)을 발휘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쳤다. 어맥(語脈)과 차례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에 대해서는 원래 달리 주장하였으니 구별할 겨를이 없다.《중용장구》에 "사람과 사물은 각각 부여받은 이(理)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또 "사람과 사물은 각각 성(性)의 자연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대학혹문》에서는 "전체를 관통함이 없다."라고 하고 또 "그 본체를 확충할 방도가 없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중용장구》에 대해서는 포양을 하고 《대학혹문》에 대해서는 폄훼를 하였는가.대체로 《중용장구》에서는 부여받은 본연의 묘(妙)를 말하고 《대학혹문》에서는 부여받은 분수(分數)의 이(異)를 말하였다. 이제 폄훼한 것을 보고 본연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포양한 것까지 더불어 본연이 아니라고 여기겠는가. '온전히 할 방도가 없고', '온전함을 잃는다'는 것이 곧 《중용장구》에서 말하는 "기품(氣稟)이 다르기도 하다."라는 것이고 도를 닦고 교화를 펼치는 곳이 된다.○〈납량사의〉"본체(本體)이면서도 '확충할 수 없다.[無以充]'라고 하였으니 본체가 본성의 영역[性分]이 되는가, 아니면 '무이충(無以充)' 3자에 이르러 비로소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전체(全體)이면서도 '통할 수 없다.[不能通貫]'라고 하였으니 전체가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아니면 '불능관통(不能通貫)' 4자에 이르러 비로소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내가 말하기를, '본체와 전체는 곧 본성의 영역 중에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요, 확충할 수 없고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그 본성의 영역 중에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다. 두 가지 사리(事理)는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인데 지금 반드시 둘로 나누어 논하려 하니 잘못되었다.'라고 하였다."○〈납량사의기의〉"'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형기(形氣)가 치우치고 막힌 병통이다. 지금 만약 반드시 성(性)의 분수(分殊)로 여긴다면 사람들을 의혹스럽게 할 것이다. 또 《대학》으로 논하더라도, '하늘이 백성을 낳으면서 모두에게 성(性)을 부여하였다.'라고 한 것은 본성의 영역 중에서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고, '기품(氣稟)이 가지런하지 않아서 모두 온전할 수가 없다.'30)라는 것은 본성의 영역 중에서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다. '허령(虛靈)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는 것은 덕의 영역 중에서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고, '얽매이고 가리워져 혼매하기도 하다.'31)는 것은 덕의 영역 중에서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니,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보는 이들이 깨달음의 계기가 되는 한 마디를 알려 주기 바란다."〈변〉'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이 어찌 주자(朱子)가 초목과 조수(鳥獸)는 요(堯)의 복식을 입지 못하고 요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해서 한 말이겠는가. 단지 천명(天命)과 명덕(明德)에 근거하여 보존하고 있는 서로 다른 분(分)이 이와 같음을 말했을 뿐이다. 사람이 요의 복식을 하고 요의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장차 그를 성인으로 여길 것이다. 초목과 조수이건만 요의 복식을 하고 요의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장차 괴이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온전할 방도가 없고', '온전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본래 기품(氣稟)이 가려졌기 때문이니 '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이 사물 입장에서는 어찌 본연의 분(分)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이(理)로 말하면 만물이 일원(一原)이어서 본래 인물에 귀천의 다름이 없다.'32)는 이 하나의 구절은 이른바 배출의 측면에서 그 묘(妙)를 말한 것이니, 이일(理一)이 주가 되는 것이다. '기(氣)로 말하면 그 바르고 통함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되고, 그 편벽되고 막힘을 얻은 것이 사물이 된다.'33)는 이 하나의 구절은 이른바 즉기(卽氣)의 측면에서 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니 분수(分殊)가 주가 되는 것이다."○〈납량사의기의〉"위 1절(節)은 하나의 성(性) 안에 온갖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어 하나의 성은 이일(理一)이고, 온갖 이치는 분수(分殊)이며 사람과 사물은 이 일원(一原)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비록 온갖 이치가 분수라 하더라도 사람과 사물의 귀천이 차이가 없음에 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에 근거하면 분편(分偏)을 가지고 비교 검토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자세히 알아야 하는 부분이다.- 아래의 1절은 도리어 기품(氣稟)에 관한 일만 집중적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대체로 아래 1절의 21자(字)는 이(理)가 실제적인 작용을 하는 곳을 가리킬 수 있는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없이 노사(蘆沙)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의심할 만하다."〈변〉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는 것이 본연의 분수(分殊)에 달려 있지 않다면 이른바 분수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일인가? 이른바 사람과 사물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과 사물의 구분[分]은 본래 일원(一原)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사람의 것도 단지 이 이(理)이고 사물의 것 또한 이 이일 뿐이다. 그래서 귀천(貴賤)의 다름이 없다고 한다. 사람과 사물의 구분은 본래 이미 미리 정해졌지만, 기(氣)에 의해 형체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 실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기(氣)에 나아가 실상을 가리킨다."라고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일음 일양(一陰一陽)을 도(道)로 여기고 정자(程子)는 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川流不息]을 도체(道體)로 여기고 주자(朱子)는 오행(五行)을 도(道)의 체단(體段)으로 여겼다. 사람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천지에 가득한 형형색색(形形色色)이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정통 편색(正通偏塞)을 이(理)의 실체(實體)가 아니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理)라는 글자, 도(道)라는 글자, 태극(太極)이라는 글자를 말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理)라고 이르겠는가? 일점일획 운운한 것은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든다.○〈납량사의〉"마음이 기(氣)의 분수에 해당하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갖춘 바는 성(性)이다. 마음이 성을 갖춘 것은 범인과 성인이 같지만, 마음이 성(性)을 극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범인과 성인이 다르다. 그 같음이나 다름이나 모두 그 중한 바가 성(性)에 있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곧 그 같은 것을 망각하고 그 다른 것을 주장하여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다르다.[聖凡異心]'는 설을 법문(法門)으로 삼았으니, 그 또한 성인의 뜻에 모순이 된다. 남당과 논변한 사람도 그 중한 바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고, 구구하게 그 광명(光明)한 마음의 분수(分數)를 비교하여 이로써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同聖凡之心]'라고 하려 하였으니, 벙통을 찌르지 못한 것이다."○〈납량사의기의〉"기질(氣質)이라는 것은 청탁 수박(淸濁粹駁)이 전혀 가지런하지 않고, 마음[心]이라는 것은 허령 신묘(虛靈神妙)가 유일무이(有一無二)하다. 남당(南塘)은 곧 이 두 가지를 변별할 수 없는 사물로 여겼다. 만약 광명(光明)에 우열 분수(優劣分數)가 없음을 지적하지 않고 단지 마음이 성(性)을 갖추는 것은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다는 점만 거론하여 변석한다면 남당(南塘)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하물며 마음[心]이 성(性)을 갖추는 것은 미물(微物)도 그러하니 어찌 남당의 의심을 풀 수 있겠는가."〈변〉심(心)과 기질(氣質)은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사물이 아니다. 청탁 수박(淸濁粹駁)에 따라 그 허령함[靈]은 분수(分數)가 없을 수 없으니 본래 이것을 가리켜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광명(光明)한 것만을 마음[心]으로 인식하여 성인과 범인이 다르다고 이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중시하는 것 외에 다시 어찌 우열 분수(優劣分數)가 없는 사물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아니면 혹시라도 형이하(形而下)의 명덕(明德)이 있겠는가. -임전재(任全齋)34)는 명덕(明德)을 형이하(形而下)로 간주하였다.-근세의 유자(儒者)들 가운데 기질(氣質)은 신체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또 허령(虛靈)은 기질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아서 '상제가 허령을 내려주니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라는 말이 있어 마침내 이것을 명덕(明德)으로 여기고 이것으로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그 빛이 번쩍번쩍하여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이단의 설과 어찌 구별이 있겠는가.무릇 기질(氣質)이라는 것은 단지 이 몸에 있는 음양(陰陽)의 모임이고 마음[心]은 곧 그것의 정상(精爽)이다. 기(氣)에 이미 청탁 수박(淸濁粹駁)이 있다면 그 정상은 분수(分數)가 없음을 용납하지 못하지만 다만 갖추고 있는 것은 성(性)이다. 이른바 본심(本心), 양심(良心), 인의심(仁義心)이 어찌 일찍이 성인과 범인의 다름이 있었는가. 지금 광명(光明)에 분수가 없다는 말을 보면 그 오류를 계승하고 착오를 답습한 것이 일조일석에 비롯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납량사의〉"찢어진 종이에서 녹문(鹿門) 임씨(任氏)의 의론 한 단락을 얻었는데, '다름을 말하자면 성(性)이 다를 뿐 아니라 명(命)도 다르다. 같음을 말하자면 성이 같을 뿐 아니라 도(道)도 같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얼핏 겉만 보면 사슴 곁에 있는 것이 노루이고 노루 곁에 있는 것이 사슴이라는 것35)과 같지만, 실제로는 도리의 근원을 물 샐 틈 없이 설명하였다.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이일분수(理一分殊)' 넉 자가 녹문에 힘입어 일맥(一脈)이 동방에서 추락하지 않았도다. 그의 전서(全書)를 얻어서 살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납량사의기의〉"이천(伊川)이 어찌 일찍이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성(性)을 논하였는가. 다만 〈서명(西銘)〉으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理)를 미루어 그 일(一)을 알게 하고 의리를 보존하여 분(分)을 세우게 할 뿐이었다.36) 양시(楊時)37), 이통(李侗)38), 주자(朱子)의 논의 또한 모두 이와 같다. 나 정암(羅整庵)39)에 이르러 비로소 이 4자를 내걸고 성명(性命)의 오묘함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가 말하기를, '기(氣)를 받은 초기에는 이(理)가 하나지만 형체를 이룬 뒤에는 분(分)이 달라진다.'40)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사(蘆沙)의 뜻과 거리가 멀다. 또 말하기를,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성(性)을 논하면 자연히 천명(天命)과 기질(氣質)이라는 두 명칭을 세울 수 없다.'41)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더욱 어긋나게 된다. 또 그가 이기(理氣)를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고 이기(理氣)가 두 가지 사물이라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심하게 책망한 것은 더 말할 수가 없다.우리 동방의 임 녹문(任鹿門)이 또 나 정암이 말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지취를 조술(祖述)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건(乾)의 건(健)이 곧 태극(太極)이고 건(健) 안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다. 곤(坤)의 순(順)이 곧 태극이고 순(順) 안에 원형이정이 있다. 원형이정은 곧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다. 그러나 건(乾)의 원형이정은 여전히 건(健)일 뿐이고 곤(坤)의 원형이정은 여전히 순(順)일 뿐이다. 그렇다면 건(乾)과 곤(坤)의 태극은 자연히 서로 다름에 해가 되지 않는다.'42)라고 하였다. 또 인물성도(人物性圖)를 만들어 인권(人圈)에서는 오상(五常)과 태극(太極)을 자세히 적었지만, 물권(物圈)에서는 단지 태극만 적고 오상을 적지 않았다. 또 '혼연한 태극이 하나의 사물 안에 갖추어져 있다.'라는 주자의 학설을 논의하기를, '이것은 이 각일기성(各一其性)43)의 측면에서 천리(天理)가 완전하여 휴흠(虧欠)이 없다는 것을 이를 뿐, 하나의 사물이 온갖 이치를 구비했다는 것을 이르지 않는다.'44)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분수를 잘못 보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또 인성의 선함을 논하면서 '이는 기질 이외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45)라고 하였다. 이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노사(蘆沙)가 다시 살아나서 이를 본다면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면서 장탄식을 할 것이다. 노주(老洲) 오 선생(吳先生)46)은 일찍이 나 정암과 임 녹문 양가(兩家)에 대해서 매우 많은 논의를 하였다. 이제 세 단락을 아래에 덧붙여 보여 노사 문하의 제공(諸公)이 자세히 보게끔 한다."○《노주집잡지(老洲集雜識)》에 이르기를, "정암(整庵)과 녹문(鹿門)이 똑같이 이(理)와 기(氣)가 하나의 사물임을 논하였지만, 정암은 이일(理一)에 비중을 두었고 녹문은 분수(分殊)에 비중을 두었다. 이일(理一)에 비중을 둔다면 자연스럽게 이(理)가 주가 되고 분수(分殊)에 비중을 둔다면 결국에는 기(氣)가 주가 된다. 이것을 가지고 득실을 비교하여 논하자면 정암이 아마도 흠이 적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정암과 녹문이 모두 추리(推理 이(理)를 미루어 감)의 관점에서 합일(合一)의 오묘함을 본 것은 얼핏 보자면 고묘(高妙)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궁극에는 모두 주기론(主氣論)으로 귀결되었다. 정암은 그래도 일일이 이 이(理)를 일으켜 세운 뜻이 있다. 하지만 녹문은 줄곧 기(氣)라는 한 자로 천하의 이(理)를 모두 덮어버리고는 다시는 이(理)가 이(理)가 되는 까닭을 궁구하지 않았다. 대체로 녹문의 견해는 실로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에 근본하였지만, 기(氣)에 대한 주장은 자못 정암을 능가한다."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정암은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이(理)와 기(氣)를 말하는 저울로 삼았다. 그가 말하기를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고 도(道)는 형(形)이기 때문에 다르다.'라고 한 것은 매우 옳다.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바로 미발(未發)한 상태에서 이일(理一)을 가리키고, 도는 형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은 이발(已發)한 상태에서 분수(分殊)를 가리킨다. 녹문은 그의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조술(祖述)하면서도 유독 이 말을 심하게 배척하였는데 무엇 때문인가? 끝내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에 구애되어 성(性)과 도(道)에 비록 체용(體用)의 다름이 있더라도 일원(一原)의 동일함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였다."〈변〉덕(德)에는 일정한 법이 없어 선(善)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법이 되며 선(善)은 일정한 주인이 없이 능히 한결같음에 합한다.47)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돌아감은 같으나 길이 다르다."48)라고 하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꿴다."49)라고 하고, "그것의 사물됨이 변하지 않으니 사물을 냄이 측량할 수 없다."50)라고 하고, "널리 배우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장차 돌이켜 간략하게 말하고자 함이다.51)"라고 하였다.자세히 연구하고 상세히 완미하면 경전(經傳) 안에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뜻을 말한 부분이 매우 많으며 이 마음[心]과 이 성(性)의 오묘함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님이 없다. 주자(朱子)는 "이(理)와 기(氣)에 대해서는 이천(伊川)의 말이 뛰어난데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하였다."52)라고 하였다. 이일분수는 곧 이천이 평소에 하던 말이지 이것이 어찌 〈서명(西銘)〉에 인하여서만 한 말이겠는가. 정자(程子)는 또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형체가 없지만, 온갖 형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53)라고 하였다. 장자(張子)는 "성(性)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의 일원(一原)이다."54)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성(性)을 논할 수 없겠는가. 양씨(楊氏)와 이씨(李氏)가 인의(仁義)를 가지고 이일 분수(理一分殊)를 논하였으니 어찌 나씨(羅氏)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것을 들어 성(性)을 설명하였겠는가.녹문(鹿門)의 건순 태극(健順太極)에 관한 학설은 해가 없을 듯하지만 '원형이정(元亨利貞)이 곧 음양오행이다.'라는 조항의 설은 이(理)와 기(氣)를 하나의 사물로 여기는 병통이 있다. 나 정암(羅整庵)의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고 도(道)는 형(形)이기 때문에 다르다.'55)라는 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성과 도는 비록 같지만[性道雖同]"56)이라고 하였다. 만물이 화생(化生)한 다음이라면 '비록 같다[雖同]'는 것의 '같음'은 이미 분수의 같음에 해당하니 어찌 형태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달라지겠는가? '형(形)' 자를 '기품이 혹 다르다[氣稟或異]'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형태와 기품은 그 의미가 현격하게 구별되니 녹문의 배척이 옳다. 다만 〈인물성도(人物性圖)〉와 기질(氣質)이 선(善)하다는 학설은 과연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그의 말까지 폐기할 수 없으니 하물며 이 말의 잘못 때문에 다른 말의 타당함까지 폐기할 수 있겠는가.○〈납량사의〉"제가(諸家)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을 언급하면서 한결같이 모두 이(理)를 분(分)이 없는 것이라 여기고 분(分)은 기(氣) 때문에 생긴다고 여겨, 형기(形氣)를 벗어난 곳에다 이일(理一)을 제한시키고 형기에 떨어진 이후에다 분수(分殊)를 국한시킨다. 이에 이(理)는 이대로 있고 분(分)은 분대로 있어 성(性)과 명(命)이 단절된다."○〈납량사의기의〉"만약 낙가(洛家)가 태극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없고 성(性)에는 인의예지가 없다고 여겼다면 응당 '이(理)는 분(分)이 없는 사물이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만약 원형이정은 기(氣)로 인하여 비로소 존재하고 인의예지는 기(氣)에 의지하여 비로소 생겨난다고 여긴다면 '분(分)은 기(氣)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理)는 이대로 있고 분(分)은 분대로 있는 근심이 어디에 있겠는가?"〈변〉원(元)은 만물을 낳는 이(理)이고 두루 포용하고 보호하지 않음이 없으며, 형(亨)은 만물을 키우는 이(理)이고 조리와 등급이 찬연하고 밝게 드러나며, 리(利)는 만물을 완성하는 이(理)이고 제재와 차별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정(貞)은 만물을 갈무리하는 이(理)이고 대화(大和)를 보전하고 각각 성(性)과 명(命)을 바르게 한다. 이 이(理)는 하늘에서는 하늘의 이(理)가 되어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사람에게서는 사람의 이가 되어 만사의 이를 갖춘다. 이제 태극에 원형이정이 있음을 알면서도 원형이정의 이면에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과 자연(自然)의 분(分)이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사람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천하의 일을 주관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의 몸을 가지면 이 몸을 주관하는 자가 있어야 하니 군상(君上)이 이에 해당하고, 이 몸을 낳은 자가 있어야 하니 부모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의 앞뒤로 태어난 자가 있어야 하니 형제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과 짝을 이루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부부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과 동류인 자가 있어야 하니 붕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몸이 만물의 영장이라면 만물을 주재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이 몸이 천지의 마음이라면 천지를 돕는 이가 있어야 한다. 사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하늘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늘에 대해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관찰한다.하단(下段)의 〈외필변(猥筆辨)〉에서 이미 '기(機) 상의 이(理)만을 가리키면 태극이라 하고 사시(四時)의 기를 함께 거론하면 원형이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사시의 기(氣)를 함께 거론한 뒤에야 원형이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기(氣)로 인하고', '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납량사의〉"지금 한 덩어리의 쇠가 있다고 할 때 이것으로 그릇을 만들 수 있고 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분수가 일(一)에 포함된 것이다. 이른바 찬연(燦然)하다는 것57)은 한편으로는 그릇을 만들 수 있고 한편으로는 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릇을 만드는 화로에 들어가면 그릇이 되고 칼을 만드는 화로에 들어가면 칼이 되어 각각 그 본분에 맞는 하나를 얻는다."○〈납량사의기의〉"가령 누군가가 말하기를, '경청로(輕淸爐)에 들어가면 하늘이 되고 중탁로(重濁爐)에 들어가면 땅이 되며 청수로(淸粹爐)에 들어가면 상지(上智)가 되고 탁박로(濁駁爐)에 들어가면 하우(下愚)가 되며 양강로(陽剛爐)에 들어가면 남자가 되고 음유로(陰柔爐))에 들어가면 여자가 된다. 이것은 각각 본연(本然)의 일(一)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장차 어떻게 변론하여 이를 물리치겠는가?"〈변〉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며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은 쇠가 대야가 되고 사발이 되며 칼이 되고 검(劒)이 되는 것과 같다. 현자(賢者)가 되고 우인(愚人)이 되는 것은 쇠가 노구(爐鞲)의 긴밀함과 헐거움에 따라 단련(鍛鍊)의 정도가 정밀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것과 같다. 또 대야나 사발이 되고 칼이나 검이 되는 것이 쇠가 스스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장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인가?"○〈납량사의〉"이미 분(分)을 기(氣)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고 여겼으니, 사람과 사물이 동일하게 오상(五常)을 지닌 것을 본연의 성[本然之性]이라 하고 편전의 성[偏全之性]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여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다고 논해도 괴이할 것이 없다."○〈납량사의기의〉"편전(偏全)과 통색(通塞)은 분수(分殊)의 분(分)과 등급상 다른 점이 있다. 분수(分數)는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전에 갖추어져 있지만, 편전(偏全)과 통색(通塞)은 도리어 부여받은 기(氣)에 달려있다. 또한 편전(偏全)은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학지(學知) 이하로는 기(氣)의 청탁(淸濁)에 많고 적음이 있고 이(理)가 온전하거나 빠지거나 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있다.'58)라고 하였다. 이제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오상을 지닌 것을 본연(本然)의 성(性)으로 여기고 이(理)가 온전하거나 빠지는 것을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장애가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사람의 성(性)에 대해서도 미루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변〉편전(偏全)으로 사람과 사물을 말하는 것은 본연(本然)의 분(分)이고 성인과 범인을 말하는 것은 기품(氣稟)의 이(異)이다. 만약 사람의 온전함을 본연이라고 하고 사물의 치우침을 기질이라고 한다면 사람만이 본연의 성(性)을 얻고 사물이 얻는 것은 기질의 성(性)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솔개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노는 것59),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를 향해 타오르는 것60)이 모두 본연이 아니게 되니 천하에 자기의 성(性)을 성(性)으로 지닐 수 있는 사물이 어찌 하나라도 있겠는가.분(分)은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편전(偏全)을 도리어 부여받은 기에 달려있다고 여긴다면 사람과 사물의 분(分)은 편전(偏全)을 버려두고 다시 어떠한 분(分)이 있겠는가. 그 주장이 막히는 곳을 알 수 있으니 너무나도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납량사의〉"오상이 사물에 따라 치우치거나 온전한[偏全] 것은 바로 이 이(理)의 본분이니,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편전(偏全)이 같지 않은데도 오히려 같다[同]고 하는 것은 마치 대야와 사발, 칼과 검(劍)을 쇠라고 한다면 같다고 할 때의 동(同)이지, 혼동해서 대야와 사발, 칼과 검의 차이가 없어서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편전의 성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릇이나 칼을 벗어나 쇠를 찾는 말이다."○〈납량사의기의〉"사람과 사물의 일원(一原)61)에는 오상(五常)이 있으니, 이것이 이(理)의 본분(本分)이다. 이제 오상(五常)이 기(氣)에 따라서 발현되는 과정에 전결(全缺)이 있는 것을 이(理)의 본분(本分)이라고 여기고 성(性)의 본연(本然)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주자(朱子)가 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 성(性)이 기질(氣質)에 떨어져 있는 것'62)이라는 것과 그 부류가 다르다. 이른바 기질(氣質)의 성(性)과 기질로 논하자면 대체로 성(性)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얼음이 녹는 듯 분명한 해석인데 두 주장이 서로 어긋남이 없겠는가?"〈변〉사람과 사람이 다르고 사물과 사물이 다른 것은 기질(氣質)의 편전(偏全)이고 사람과 사물이 다른 것은 본연(本然)의 편전이다. 주자(朱子)는 "사람과 사물의 편정(偏正)은 원래 다르다."63)라고 하였다. 정자(程子)는 인(仁)을 말하면서 "편언(偏言)하면 하나의 일이지만 전언(全言)하면 4가지를 포괄한다."64)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전(偏全) 또한 모두가 본연이 아니겠는가?○〈납량사의〉"'일(一)'로 '오(五)'를 견주어 보면 '오(五)'는 '일(一)'과 같고 '오(五)'로 서로 견주어 보면 분(分)이 여기에 존재한다. 산수(散殊)65)가 끝이 없다고 해도 모두 본분(本分)에 속하는 일이니 편전(偏全)을 낮추어 보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납량사의기의〉"일신(一身)의 관점에서 사지(四肢)를 보면 사지는 똑같이 일신이고 사지의 관점에서 서로를 보면 분(分)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것은 본래 그러하다. 그러나 어찌 사지와 분수(分殊)로 편전을 나누겠는가. 그래서 나는 분(分)과 편전(偏全)은 다르다고 말한다. 편(偏)을 말하고자 한다면 응당 사지가 마비되어 불편하거나 중풍이 들어 팔다리를 쓰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편(偏)이라고 이를 수 있다. 낮춰보지 않고자 하더라고 그것이 가능하겠는가."〈변〉일신(一身)을 통틀어 말하자면 이일(理一)과 같고 온갖 부분을 가리켜 말하자면 분수(分殊)와 같다. 일신을 말하지만 백체(百體 온갖 부분)가 그 안에 있고 백체를 말하지만 일신이 그 안에 있으니, 일신 밖에 별도로 백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백체 밖에 별도로 일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일(理一)과 분수(分殊)가 각각의 범위가 있고 각각의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님이 이와 같다. 지금 일신을 사지(四肢)와 대립시켜 이일(理一)을 일신에 국한시키고 분수(分殊)를 사지에 제한하여 이일과 분수를 고정된 간격이 있는 사물로 여겼다. 이것이 본체는 같지만 작용은 다르므로 편전은 분이 아니라는 학설이 있게 된 까닭이다.○〈납량사의〉"《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서 이미 음양오행설을 따라 그 강리(綱理 벼리가 되는 이)가 같음을 언급하고, 이어서 음양오행의 편전(偏全)으로 그 조건이 같지 않음을 언급하였다. 한때의 일을 앞뒤로 말하였으니 무슨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는가."○〈납량사의기의〉"음양오행의 편전은 본래 기질(氣質)에 속하고 건순오상(健順五常)의 조건은 본래 분수(分殊)에 속한다. 어찌 곧장 분수를 가리켜 편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손발의 명칭이 다른 것을 편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 되지 않을 듯하다."〈변〉장자(張子 장재(張載))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군자는 성으로 여기지 않는다."66)라고 하였다. 이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본연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오행이 생겨날 때 그 성을 하나씩 갖는 것67)을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보았다. 이것은 장자(張子)의 말과 다르기는 하지만 각각 일의(一義)가 되기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본연의 분(分)이 아니라고 이를 수 없다. 간재의 〈납량사의기〉에서 이미 기질지성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고 음양오행의 편전을 기질에 귀속시켜 이른바 마비, 중풍과 같은 부류로 여겼으니 매우 말이 되지 않는다.그렇다면 양강 음유(陽剛陰柔), 수윤 화조(水潤火燥)68)가 모두 본연이 아니라는 것인가. 천지 만물은 있으면 다 있으니 인체(人體)의 사지(四肢)와 백해(百骸 모든 뼈)가 더할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이 완벽하게 충족되어 비거나 빠진 부분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태극(太極)의 대전(大全)이고 조화(造化)의 묘용(妙用)이다. 만약 "음양오행은 부여된 기에 달려있고 때가 되면 배정될 뿐이다."라고 한다면 태극은 결과적으로 헛된 명칭이 되고 조화를 행하는 자가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 것은 사람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과 같다. 만사에 응하는 이(理)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인성(人性)의 본체에 흠결이 있게 된다. 만물을 낳는 이(理)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천명(天命)의 본원에는 소루함이 있게 된다. 천명의 본원과 인성의 본체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주자(朱子)는 "사람과 사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偏正)이 정녕 본래 같지 않다. 그러나 편정한 가운데 다시 절로 청탁혼명(淸濁昏明)의 차이가 있다."69)라고 하였다. 위 단락의 '본래 같지 않다.'는 것은 본연(本然)에 의한 분(分)이고 아래 단락의 '다시 절로 같지 않다.'는 것은 기에 따른 분(分)이다. 만약 위 단락과 아래 단락을 합쳐서 한결같이 기분(氣分)70)으로 귀결시킨다면 되겠는가. 凉議曰。分也者。理一中細條理。理分不容有層節。分非理之對。分殊二字。乃對一者也。○記疑曰。此語驟看。無可疑者。但蘆沙答奇景道書云。在天原無此分。則人物何處得來而有此偏全。然則此言分者細條理。將爲異日人物所得。偏本然全本然之源。愚意偏之與分。元非一串。分如一身耳目手足。偏如一耳獨聽。半身偏遂也。分是一中本有之理。而偏是氣上對全之性。恐難做一樣說也。理有分。故物有偏全。理若無分。物何自而有偏全乎。今曰分如一身之耳目手足。而爲一中之本有。請以此說明之。合耳目手足百骸百體。而爲一身之統體。合人獸草木萬象萬物。而爲天地之統體。知人身統體之理。本有於未生之前。而不知天地統體之理。本有於未形之前耶。知人耳目手足之本有。則鳥獸之羽毛蹄角。草木之枝葉花實。亦不可謂非本有矣。然則人物偏全。果非天命之本然乎。分與偏全。若非一串。朱子何以曰覆載生成之偏。又何以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合下不同耶。至若獨聽偏遂。此是氣失其平。而爲未成之物也。烏可援而爲說耶。凉議曰朱子曰太極者象數未形而其理已具之稱。形器已具而其理無眹之目。夫象數未形。則未破之一矣。而其理已具。則非分之己涵乎。形器已具。則旣定之分矣。而其理無眹。則非一之自在乎。○記疑曰未審蘆沙以其理已具。爲人物所稟偏全之源乎。竊意此句指意。恐是父子君臣未生之前。慈孝禮忠之理已具。事物微細未有之先。事物微細之理已具云爾。非聖人未生之前。已有理一中分殊之全理。賢人衆人未生之前。已有幾分未全之理。下愚大憝未生之前。已有十分不移十分乖戾之理。鳥獸枯槁未生之前。已有偏塞之理。而各爲萬象所得之源也。然則似與蘆沙所謂在天源無此分。則人物何處得來而有此偏全云者。判然殊別矣。可疑。盈天盈地。若大若細。無一物而非象數與形器也。然則人未生而人之理已具。物未生而物之理已具者。何足多辨彼於此義。必非不知。而故引氣質分數下愚大憝之語。眩混其說。以濟其一時忌克之私。噫。用心如此。此等理致之得失。猶是小事也。天偏於覆。而地偏於載。日偏於晝。而月偏於夜。目偏於視而耳偏於聽。手偏於持。而足偏於行。以昭昭而視周天。則周天爲全。以涓涓而視河。海則河海爲全。以一葉而視一樹。則一樹爲全。以一肢而視一身。則一身爲全。天下何物果有外於偏全者哉。以此爲非本然。則天下更無本然久矣。且以鳥獸草木。謂非理之所本有。則人是何物。獨爲理之所本有耶。人旣非本有。則慈孝禮忠之理。豈獨爲本有而已具於何處耶。豈以急於取辨而有不暇察也耶。凉議。曰性同者。吾不曰不然。而以偏全之性。爲非本然。則是分外有理也。遂主同而廢異。則性爲有體無用之物矣。○記疑曰。洛家若指性中發出來底忠孝仁讓。而曰此分之殊。非本然之性也。則分外有理。而性爲無用之物矣。但謂萬象之性。其體本全。而自學知以下。至於翔走枯槁之發見。各隨所稟之氣而自爲一性。由未達一間。至於一點子。由相近至絶不同。由天縱之聖。至下愚不移。其品有萬不齊。是安可皆謂本然之性乎。氣之淸濁粹駁。固隨遇而適然。萬物之生。偏全之分。亦隨遇而適然者乎。若隨遇而適然。則豆可以瓜。瓜可以豆馬可以角。牛可以鬛。上帝之主宰。乾道之各正。果是何事。欲守偏全分之語。而至於上帝失其宰。乾道失其職。可乎不可乎。萬象之性。其體本全。至於發見自爲一性。此果成說乎。然則犬之性牛之性。與人之性同其全。草之性。木之性。與天之性同其大。而至於發見而後。乃始爲天爲人爲犬牛爲草木耶。言之無謂。令人代赧。凉議曰。天下之性不全則偏。固未有不全又不偏之性也。偏全皆非本然。則天下無一物能性其本然之性者。而本然之性永爲懸空之虛位。卽將安用彼性矣。所貴乎正通者。以其得本然之性也。若與偏塞者。均之爲非其本然。則何正通之足貴乎。蓋以無分爲一。其敝必至於此。其以各正之性。爲落分殊犯形器。不足以爲一原。與甲邊之議。恐無異同。○記疑曰。問氣質不同。則天命之性。有偏全否。朱子曰。非有偏全。此洛家之所本也。今若譏之曰。天下之性。旣無偏又無全。則不過爲虛位云爾。則豈得爲盡人之言者耶。此不待多般而明矣。所貴乎正通者。以其得本然之全。然則偏塞者所得。只是本然偏矣。無乃與天命之性。非有偏全者。相盭矣。若改之曰。所貴乎正通者。以其能全本然之性。則似無可議矣。朱子曰。非有偏全。又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須知理之非有偏全。又知理之不容無偏全。然後方可謂識理矣。天命之性所以賦予者。固無人物貴賤之殊者。是無偏全之謂也。萬殊之分。森然已具於一原之中者。是有偏全之謂也。徒知非有偏全之語。而謂人物無各正之性。徒知合下不同之語。而謂人物無一本之性者。皆執一而廢百。得此而失彼者也。旣不能盡乎朱子立言之意。而乃反譏人以不能盡人言之意耶。朱子曰。各正得於有生之初。然則正通者。得本然之全。偏塞者。得本然之偏。又何疑乎。凉議曰偏全指善一邊。如孔隙雖有大小。而月光自若。盤盂雖有方圓。而水性無恙。豈不是本然。○記疑曰信斯言也。蜂虎果然之仁義。堯舜周孔之仁義。毫無殊別矣。然則朱子何以言仁義禮智之粹然者。人與物異乎。彼以偏全謂非本然。而曰萬象之性。其體本全。外偏全而言本全。則蜂虎之性。與堯舜之性。果無毫髮差殊。可謂倒戈而自攻。言人物分殊。則以其體本全駁之。言人物性同。則以蜂虎果然譏之。亦可謂無定論。而隨其人之所在而攻之者也。凉議曰氣質是兼善惡。如和泥之水。稠淸百層。隔窓之月。明暗多般。以偏全爲氣質。豈不低陷了偏全。○記疑曰堯舜孔子之全。固當爲本然。至於夷惠之偏於淸和。顔閔之具體而微。游夏之僅有一體。則豈非出於氣質乎。此類不可謂兼善惡也。人猶如此。況於微物乎。今不欲以偏全爲氣質。恐終可疑。夷惠游夏之偏。是氣質之善一邊也。桀紂幽厲之暴。非氣質之惡一邊乎。雖以善一邊言之。其些有未盡處。亦不可謂非未善也。今乃特擧善一邊。而謂之不兼善惡可乎。偏全之云。不須再辨。凉議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人物偏全之性。君子亦有不性焉者乎。○記疑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本橫渠先生語。先生又嘗言。凡物莫不有是性。由通蔽開塞。所以有人物之別。由蔽有厚薄。故有知愚之別。今以上一股爲偏塞。而屬於本然之性。下一股爲氣質。而降爲不性之科。恐文義事理俱難如蘆沙之言矣。問氣質不同。則天命之性。亦有偏全否。朱子曰。非有偏全。偏全之性。豈非朱子之所不性焉者乎。據此則南塘蘆沙兩說。似當更加商確。恐未可認爲千古不易之論也。橫渠先生此說。主意專在於人物賢愚通蔽開塞厚薄難易之分。而次第說來。其文勢語脈。於本然與氣質。有不暇及。又安知今日有此偏全非分之說。而豫爲準備之耶。偏全之出於氣質者。固不性焉。偏全之由於理分者。亦不性焉乎。偏言之仁。專言之仁。亦朱子不性焉乎。覆載生成之偏。天地亦不性焉乎。千古不易之論。恐非人人所得知也。朱子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然於不同之中。又各自有淸濁粹駁之不同。上段不同。是本然之分下段不同。是氣質之異。中庸章句。先言人物各得之分。次言氣稟或異。橫渠此言。亦是此義。豈以下一股言氣質。而賺連上一股。亦作氣質看耶。凉議曰理旣云萬事本領。氣是甚樣物事。乃獨你一我殊背馳去。近世諸先生圻開理分。大抵皆你一我殊之論。其蔽也。氣無聽命於理。理反取裁於氣。天命之性。徒爲虛語耳。○記疑曰。理一分殊。固是理中事。然分殊。先賢直就氣異處說者。極多。今且以隙日譬之。隙之長短大小。自是不同。然只是此日。只是此日。理一也。隙自不同。分殊也。此與前一義。可倂行而不相礙也。至若天命之性。雖十分大全。十分至善。無奈所賦形氣有異。莫能遂其本然。雖是性體而氣用。亦是理弱而氣强。故不能無蔽也。若以分殊專歸之理。則理果號令乎氣。氣果隨順於理。而更無不治之國。更無爲惡之人也。恐難如此立語。以本原而言。則條理分殊。固粲然已具。此道器不雜處。太極圈所以排出也。以流行而言。則條理分數。可以卽氣而見其實。此道器不離處。陰陽五行圈所以爲各具也。先賢多就氣異處。說分數者。此也。如以隙日譬之。隙雖有長短大小。而其長短大小必照之光。固燦然已具於日矣。至於光之成形著迹。則可以就其隙而見其實也。理爲氣主。曷嘗是有作用行號令之謂。然無其理則無其事。有其理則有其事。有作用之理。故氣能作用。有號令之理。故人能號令。若以條理分數。一歸於氣。則三百三千。皆非本然。其有關於世敎。爲何如哉。旣曰分是理中矣。而繼以分殊專歸於日之隙。旣曰天命十分大全矣。而繼以分殊不專歸於理。則所謂理中事。果何事。所謂十分者。果是幾分耶。未見其倂行而不相礙也。若曰性體而氣用。則性爲有體無用之物耶。如此則程子所謂體用一原。爲二原矣。所謂顯微無間。爲有間矣。所謂未應不是先。已應不是後。爲有先後矣。近世主氣之說。其失蓋原於此。若以不治之國爲惡之人。而疑理不爲主。則是見有媢德之人。而斥烝民好德之言。見有性惡之人。而廢孟子性善之說。可見其說之窮矣。凉議曰。五常人物同異。畢竟惡乎定。曰定於先覺之言。朱子之論此固多。其見於四子註說者。則手筆稱停。非記錄書疏之比。其言人物五常。凡有三處。曰人物之生。必得是理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者。大學或問也。人物之生。各得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者。中庸章句也。此皆不區分人物。一例說去。粗通文理者。初不難辨。且得以爲性。得以爲德之云。皆屬成性以下。而非繼善以上事。則朱子之意。明以人物之生爲同五常矣。獨於孟子生之謂性章集註。以理言之。則仁義禮智之粹然者。豈物之所得以全哉。【田愚按。粹然者。本作稟。以本作而】此爲區分人物處。【田愚按。此註亦不專於區分人物。何以言之。上文旣言性形而上者。人物之生。莫不有是性。是性何性。卽所謂仁義禮智之性也。是章句或問之同矣。如以物豈得全爲區分人物之斷案。則章句下文。豈不曰。氣稟或異。故不能無過不及之差。或問下文。豈不曰彼賤而爲物者。梏於形氣。而無以充其全矣乎。此二條。又皆與孟註之云。無些子異意。愚按。謂三處俱是同體異用之說也。】然而只曰物豈得全。不曰物莫得與。則此亦人物同五常之說也。朱子之爲此說。豈喜爲刱新之論。以同人道於庶類哉。蓋此理之外。更無佗理。是以直以從上聖賢。四破人性的字。一萬物而貫之。不以爲嫌也。【田愚按。以上所論。無不與洛家同。】雖然。一而無分。非吾所謂一也。故庸學或問。卽言鳥獸草木之生。僅得形氣之偏。而不能有以通貫乎全體。彼賤而爲物者。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此言人物之性。雖同此一理。而理中之分限。不能無也。氣所以承載此理。故雖不離形氣而言分。而一之未嘗無分於此因可見矣。合此上下文義而觀之。其與生之謂性集註。亦非有異義也。後人各占二半。就生軒輊。此豈朱子之所能料哉。是知物我均五常者。理之一也。五常有偏全者。一中之分也。蓋自統體一極。理分圓融而無間。故其成性於萬物者。又如此。故先覺論性。有言理同理不同者。非相戾也。共公以論其妙。則排出而言之。眞的以指其體。則卽氣而明之。排出則理本一。故理一爲主。而萬殊涵於其中。【田愚按。以偏而不全者。爲萬殊。殊不可曉。】卽氣則氣已分。故分殊爲主。而理一存乎其間。自是話有兩般。何曾性有多層。諸家緣理分一體處。未甚着眼。說異則欲獨擅五常。說同則乃低視偏全。差以毫釐。謬以千里。豈不信乎。○記疑曰。庸學或問。若單言微物而不倂擧衆人。則猶或可如蘆沙之言矣。今其文明明言知愚賢否氣稟之異。而曰於其所謂性者。有所昏雜而無以全其所受之正。又曰。其所謂明德者。已不能無弊。而失其全矣。此與微物之不能通無以充者。語意一致。類例無二。而以不能通無以充歸之本然之性。無以全失其全。歸之氣質之性。則無亦有失其平之嫌乎。如有人質於蘆沙曰。聖凡均德性者。理之一也。德性有偏全者。一之分也。則將應之曰然乎否乎。就人物上倂擧五性字而言之者。有此三處。故先師云然耳。下文之區分有無。不須論也中庸章句氣稟或異非人物之區分。是就人物上區分其氣稟之不同。若人物之區分。則已在於上文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條。此亦可以知人物偏全爲本然之分也。同體異用與性體氣用之說。同一圈套。不足多卞。所謂與洛家同者。其實有不同焉。先師所謂同。卽實底同。諸家所謂同。乃虛底同。庸學或問。主言天命明德人物一原。而究別其源委曲折多寡分數。故自草木禽獸。至於衆人賢人。以至於聖人之盡性而乃已。其語脈次第。固應如此。至若本然與氣質。自是別說。有不暇區別。章句曰。人物各得所賦之理。又曰人物各循其性之自然。或問曰。無以通貫全體。又曰無以充其本體。何其褒於章句而貶於或問也。蓋章句言所稟本然之妙。或問言所賦分數之異。今見其貶者。以爲非本然。則倂與其褒者而以爲非本然耶。無以全。失其全。正章句所謂氣稟或異者。而爲修道立敎處也。凉議曰。本體而云無以充。本體爲性分耶。至無以充三字。始爲性分耶。全體而云不能通貫。全體爲性分耶。至不能通貫四字。始爲性分耶。曰本體全體。卽性分中理一處。無以充不能通貫者。卽性分中分殊處也。兩項事理。有則俱有。今必欲二而論之。謬矣。○記疑曰。無以充不能通貫。分明是形氣偏塞之病。今必以爲性之分殊。使人聽瑩。且以大學論之。天降生民。莫不與性。性分中理一處。氣稟不齊。不能皆全。性分中分殊處。虛靈具應德分中理一處。拘蔽或昏。德分中分殊處。如此說亦得否。請觀者爲下一轉語。無以充不能通。豈朱子歎草木鳥獸之不能服堯服言堯言而爲是說耶。只是據天命明德。而言其所存不同之分。有如此耳。人而服堯言堯。人將以爲聖矣。草木鳥獸而服堯言堯。人將以爲怪矣。然則無以全。失其全。在人固爲氣稟之蔽。無以充。不能通在物豈非本然之分耶。凉議曰以理言之。則萬物一原。固無人物貴賤之殊。此一節。所謂排出以言其妙。理一爲主也。以氣言之。則得其正且通者爲人。得其偏且塞者爲物。此一節。所謂卽氣以指其實。分殊爲主者。○記疑曰。上一節。言一性之中含具萬理。一性理一也。萬理分殊也。人物同此一原也。【雖萬言分殊。不害其無人物貴賤之殊。據此可見分偏之不可以相準。此一着最可領悟。】下一節却只專言氣稟事。蓋此二十一字。無一點一畵可指理之實處。而蘆沙之言如此。可疑。爲人爲物。不在本然分殊之中。則所謂分殊。果是何事。所謂人物。果從何處來。人物之分。固已具於一原之中。而人底只是此理。物底亦只是此理。故曰無貴賤之殊也。人物之分。固已素定。而至氣以成形而後。方見其實。故曰卽氣而指其實。孔子以一陰一陽爲道。程子以川流不息爲道體。朱子以五行爲道之體段。人苟達於理致。則盈天地形形色色。莫非道理也。今以正通偏正。謂非理之實體。則必言理字道字太極字而後。乃謂之理耶。一點一畵之云。令人可笑。凉議曰。心雖氣分事。而乃所具則性也。心具性。凡聖同。心不能盡性。凡聖異。其同其異。皆所重在性也。南塘乃忘其同者。主張其異者。以聖凡異心爲法門。其亦矛盾於聖人之意矣。與南塘辨者。亦不言其所重之有在。區區較其光明之分數。欲以此爲同聖凡之心。未爲箚着痛處。○記疑曰。氣質者。淸濁粹駁。有萬不齊。心者虛靈神妙。有一無二。南塘乃認兩者爲無辨之物。今不指其光明之無優劣分數。只擧心具性聖凡同者以辨之。其不被南塘之哂者鮮矣。況心之具性。微物亦然。何足以辨南塘之疑乎。心與氣質。不是判然二物。隨其淸濁粹駁。而其靈不能無分數。固不可指此而謂聖凡同。亦不可專認光明爲心而謂聖凡異。然則所重之外。更安有一物獨無優劣分數者乎。抑或有形而下之明德耶。【任全齋以明德爲形而下。】近世諸儒。多以氣質爲不囿於身體。又以虛靈爲不根於氣質。有上帝降靈坐在方寸之語。遂以此爲明德。以此爲同聖凡。此與異說其光爍爍死而不滅。何別。夫氣質者。只是此身陰陽之團聚。而心則其精爽也。氣旣有淸濁粹駁。則其精爽不容無分數。但所具者性也。所謂本心良心仁義心。何嘗有聖凡之異。今見光明無分之語。可知其承誤踵訛。非一朝一夕之故也。凉議曰。碎紙中。得鹿門任氏一段議論。苟言異則非但性異。命亦異也。苟言同則非但性同。道亦同也。此言驟看外面。殆若鹿邊者獐。獐邊者鹿。而其實說得道理原頭。無有滲漏。伊川理一分殊四字。賴此公而一脈不墜於東方歟。恨未得其全書而攷閱也。○記疑曰。理一分殊。伊川何嘗以之論性。只因西銘。使人推理而知其一。存義而立其分而已。楊李朱子所論。亦皆如此。至羅整庵始揭此四字。以爲性命之妙。無出於此。其言曰。受氣之初。其理惟一。成形之後。其分則殊。此與蘆沙之意遠矣。又曰。以理一分殊。論性。則自不須立天命氣質兩名。則其說更乖矣。又其認理氣爲一物。而深病乎朱子理氣二物之訓。則愈不可說矣。我東任鹿門。又祖述羅氏四字之旨。而其言曰。乾之健卽太極。而健之中。有元亨利貞。坤之順卽太極。而順之中。有元亨利貞。元亨利貞卽陰陽五行也。然乾之元亨利貞。依舊是健。坤之元亨利貞。依舊是順。然則乾坤之太極。自不害其不同也。又作人物性圖。人圈具書五常。太極物圈只書太極而不書五常。又論朱子渾然太極各具一物之說云。此謂卽此各一處。天理完全無所虧欠耳。非謂一物具萬理。此皆看得分殊之過。而至於如此。又論人性之善曰。此乃氣質之外。別有善底性也。此尤不可曉矣。使蘆沙復起見此。不覺蹙頞而長太息也。老洲吳先生。嘗有論羅任兩家者極多。今擧三段附見于下。使蘆門諸公看詳焉。○老洲集雜識曰。整庵鹿門均爲理氣一物之論。然整庵於理一看得重。鹿門於分殊看得重。看理一重。則自然理爲主。看分殊重。則畢竟氣爲主。以此較論得失。整庵殆其少疵矣乎。又曰。整庵鹿門皆從推理看得合一之妙者。驟看非不高妙。然其究也。皆歸於主氣。而整菴則猶有每每提掇此理之意。鹿門直以一氣字。盡冒天下之理。更不求理之所以爲理。蓋鹿門之見。實本於整菴。而其主張氣字。則殆過之耳。又曰。整庵以理一分殊。爲說理氣底枰子。其曰。性以命同。道以形異者。極是。性以命同。卽未發而指理一也。道以形異。卽已發而指分殊也。鹿門祖述其理一分殊。而獨深斥此語。何也。終是拘於人物之偏全。不能疏觀性道雖有體用之異。不害其一原之同也。德無常師。主善爲師。善無常主。協于克一。曰一致而百慮。同歸而殊塗。曰吾道一以貫之。曰其爲物不貳。則其生物不測。曰博學而詳說之。將以反說約也。細究而詳玩之。則經傳之中。說理一分殊義甚多。而無非所以明此心此性之妙也。朱子曰。理與氣。伊川說得好。曰理一分殊。理一分殊。卽伊川所雅言也。豈但因西銘而發哉。程子又曰。沖漠無眹。萬象已具。張子曰。性者萬物之一原此不可以論性耶楊李二氏以仁義論理一分殊是豈至羅氏始揭以說性耶。鹿門健順太極之說。恐無害。而其曰元亨利貞卽陰陽五行一條說。有理氣一物之病。羅整庵性以命同道以形異之說。有不可曉。中庸章句性道雖同。在化生萬物之後則雖同之同。已是該分之同。豈待形而後異哉。形字若作氣稟或異看。則形與氣稟。意義逈別。鹿門斥之是矣。但人物性圖及氣質之善之說。果不可曉。然不以人廢言。況以此言之失而廢他言之得乎。凉議曰諸家言人物之性。一是皆以理爲無分之物。分爲因氣而有。限理一於離形氣之地。局分數於墮形氣之後。於是理自理。分自分。而性命橫決矣。○記疑曰。若使洛家謂太極而無元亨利貞。性而無仁義禮智。則當曰理爲無分之物矣。若謂元亨利貞因氣而始有。仁義禮智待氣而始生。則當曰分爲因氣而有矣。今旣不然。則安有理自理分自分之患乎。元是生萬物之理。而包含徧覆。無不周徧。亨是長萬物之理。而條理等威。粲然宣著。利是成萬物之理。而裁制差別。無不恰當。貞是藏萬物之理。而保合大和。各正性命。此理也。在天爲天之理。而萬物之理具焉。在人爲人之理而萬事之理具焉。今知太極之有元亨利貞。而不知元亨利貞裏面。有人物偏全自然之分耶。人有一箇身。便須管着天下事。夫何故。有一箇身。必有主此身者。君上是也。必有生此身者。父母是也。必有此身先後生者。兄弟是也。必有此身對配者。夫婦是也。必有此身同類者。朋友是也。此身爲萬物之靈。則必有宰萬物之理。此身爲天地之心。則必有輔相天地之理。人猶如是。況於天乎。善言天者。必於人觀之。下段猥筆辨。彼旣曰單指機上之理則曰太極。兼擧四時之氣則曰元亨利貞云云。必兼擧四時之氣而后曰元亨利貞。則此非因氣待氣而何。凉議曰。今有一塊銅鐵。可以爲盤盂。可以爲刀劒。是分殊之涵於一。所謂粲然者。非東邊可爲盤盂。西邊可爲刀劍。則渾然。及其人盤盂爐而爲盤盂。入刀劒爐而爲刀劍。各得其本分之一。○記疑曰。假如有人言入輕淸爐而爲天。入重濁爐而爲地。入淸粹爐而爲上智。入濁駁爐而爲下愚。入陽剛爐而爲男。入陰柔爐而爲女。是各得其本然之一云。將如何辨破。爲人爲物。爲男爲女。是銅鐵之爲盤爲盂爲刀爲劒也。爲賢爲愚。銅鐵之遇爐鞲緊歇。而鍛鍊有精鹿也。且爲盤盂爲刀劒。是銅鐵之自爲邪。有主張者存乎否。凉議曰。旣以分爲因氣而有。則無怪其以人物同五常。爲本然之性。而偏全之性。爲非本然。有人物性同之論。○記疑曰。偏全通塞。與分殊之分。殺有不同。分雖具於天地人物未生之前。而偏全通塞。却繫於所賦之氣。且偏全非可單言於人物。亦可幷言於聖凡。故朱子言學知以下。氣之淸濁有多寡。而理之全缺繫焉。今以聖凡同五常。爲本然之性。而理之全缺者。爲非本然。有何窒礙乎。如此則人之性。可以三隅反也耶。偏全以人物言者。本然之分也。以聖凡言者。氣稟之異也。若以人之全謂本然。而物之偏謂氣質。則人獨得本然之性。物之所得。只是氣質之性而已耶。然則鳶飛魚躍。水潤火燥。皆非本然也。天下安有一物能性其性者耶。旣曰分已具於人物未生之前。而猶以偏全謂却繫於所賦之氣。夫人物之分。舍偏全而更有何分乎。可知其說之窮矣。不思之甚也。凉議曰。五常之隨物而偏全。乃此理之本分。何可同也。偏全不同。而猶謂之同者。如盤盂刀劒爲銅鐵則同之同。非以混同無盤盂刀劒而謂之同也。偏全之性非本然。離盤盂刀劒而求銅鐵之說也。○記疑曰。人物一原之中。有五常。此爲理之本分。今以五常之隨氣而發見有全缺者。謂之理之本分。而喚做性之本然。此與朱子性之在氣質者。其品不一。所謂氣質之性。與以氣質論則凡言性不同者。皆氷釋之訓。無或相戾乎。人與人不同。物與物不同。此是氣質之偏全。人與物不同。此是本然之偏全。朱子曰。人物偏正。固自合下不同。程子言仁曰。偏言則一事。全言則包四者。此言偏全。亦皆非本然耶。凉議曰。以一視五。五者同一。以五相視。分於是存。雖散殊之無窮。皆本分中事。欲低視偏全可乎。○記疑曰。以一身視四肢。四肢同一身。以四肢相視。分於是存。此固然矣。然豈可以四肢與分殊。分偏全乎。愚故曰。分與偏全不同。如欲言偏。當曰四肢或有痿痺不仁。癱瘓不遂。然後方可謂之偏。雖欲不低視得乎。統一身而言。則猶理一也。指百體而言。則猶分殊也。言一身而百體在其中。言百體而一身在其中。非一身之外別有百體。非百體之外。別有一身。理一分殊之非各有方所各有時節。如此。今以一身對四肢。而局理一於一身。限分殊於四肢。以理一分殊爲局定間隔之物。此其所以有同體異用偏全非分之說也。凉議曰庸學或問。旣從陰陽五行說來。言其綱理之一般。繼以陰陽五行之偏全。言其條件之不同。一時事而先後言之。有何可疑之端乎。○記疑曰陰陽五行之偏全。自屬氣質。健順五常之條件。自屬分殊。何可直指分殊爲偏全乎。若如此則手足之異名。而可謂之偏全。恐不成言。張子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此言氣質性之非本然也。朱子以五行之生。各一其性。爲氣質之性。此與張子之言。雖不同。而不害其各爲一義也。此則不可謂非本然之分也。彼旣以氣質之性。謂非本然。而以陰陽五行之偏全。歸之於氣質。而與所謂痿痺癱瘓者。同科。其無謂甚矣。然則陽剛陰柔。水潤火燥。皆非本然耶。天地萬物。有則俱有。如人身之四肢百骸。加不得。減不得。完全周足。無有空闕。此是太極之大全。造化之妙用。若曰陰陽五行。繫於所賦之氣。而爲臨時排定云爾。則太極果是虛位。而爲造化者。不已勞乎。天之生萬物。猶人之應萬事。應萬事之理。不先具。則人性之體。有欠闕矣。生萬物之理。不先具則天命之原。有疎漏矣。若曰天命之原。與人性之體。有不同云。則非愚之所知也。朱子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然於偏正之中。又各自有淸濁昏明之不同。上段合下不同。是本然之分也。下段又自不同。是隨氣之分也。今合上下段。而一歸之氣分可乎。 납량사의(納凉私議) 기정진(奇正鎭)이 1843년에 작성한 성리학 저술로,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편전(偏全) 치우침과 온전함, 부분과 전체, 소와 대의 차이 등을 나타낼 때 쓰는 성리학 용어이다. 주자(朱子)는……말하였겠는가 《중용장구》 제12장에 "천지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스러워하는 바가 있다."라고 한 데 대한 주희의 집주에 "사람이 천지에 대하여 한스러워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주는 편벽됨과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人所憾於天地, 如覆載生成之偏及寒暑災祥之不得其正者.]"라고 한 것을 이른다. 사람과……않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보인다. 태극(太極)이라는……가리킨다 《주역전의대전》 〈역본의도(易本義圖) 복희팔괘차서지도(伏羲八卦次序之圖)〉에 〈계사전〉을 인용하여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았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 아래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주희(朱熹)의 말에 보인다. 낙가(洛家) 낙론 또는 낙파라고 한다. 심(心)과 성(性)에 대한 이해(理解)의 문제로 성리학자들이 대립하여 진행된 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은 미발은 마음의 본체로서 순선(純善)하여 선악이 없고 사람과 물건의 성은 본연지성으로 이(理)와 같으므로 같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고, 호론(湖論)은 미발한 마음의 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으며 현실에 드러나는 본연지성은 기질의 맥락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과 물건의 성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 있어 주로 서울ㆍ경기 지역에 거주한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외암(巍巖) 이간(李柬) 등이 한 파를 이루어 이를 낙론 또는 낙파라 하였으며, 충청 지역에 사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등이 또 한 파를 이루어 이를 호론 또는 호파라 하였다. 한 칸을……미치는 것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권9 〈자한(子罕)〉에 "양씨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등급인 선인(善人)으로부터 선(善)을 충실히 하여 빛나는 등급인 대인(大人)에 이르기까지는 역행(力行)을 쌓아서 될 수 있지만, 대인이 성인이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역행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안자가 성인의 경지에 한 칸을 못 미친 이유이다.[可欲之謂善, 充而至於大, 力行之積也. 大而化之, 則非力行所及矣. 此顏子所以未逹一間也.]' 하였다."라고 하였다. 일점자(一點子) 주희가 인물지성(人物之性)에 대해 논한 대목 가운데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예컨대 춥고 따스한 것을 느끼는 것이나,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아는 것이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는 것 등은 인(人)과 물(物)이 모두 같다. 반면에 이(理)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예컨대 벌과 개미의 군신은 단지 그 의(義)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며, 범과 이리의 부자는 단지 그 인(仁)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다.[氣相近. 如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 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 有一點子明.]"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朱子語類 卷4 性理1 人物之性氣質之性》 서로……다른 것 주희가 말한 이(理)와 기(氣)의 차이를 의미한다. "만물은 근원이 하나라는 점에서 논하면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르다. 그러나 만물의 체(體)가 다르다는 점에서 살펴보면 기(氣)는 그래도 서로 비슷하지만 이(理)는 완전히 다르다.[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 而理絶不同.]" 《朱子語類 卷4 性理1 人物之性氣質之性》 하늘이 내린 성인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공자를 찬양하며 "진실로 하늘이 내신 성인이시다.[固天縱之將聖.]"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지극히……사람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건도(乾道)가……바로잡는 것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여 각 생명의 타고난 성품이 바르게 길러지도록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는 말이 나온다. 편전이……아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편전(偏全)이……아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사람과……때문이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보인다. 각정(各正)은……얻는다 《주역본의(周易本義)》 〈건괘(乾卦)〉에 보인다. 벌과……인의(仁義)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1, '인물지성기질지성'에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예컨대 춥고 따스한 것을 느끼는 것이나,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아는 것이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는 것 등은 인(人)과 물(物)이 모두 같다. 반면에 이(理)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예컨대 벌과 개미에게 군신간의 의리가 있는 것은 단지 그 의(義)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며, 범과 이리에게 부자간의 의리가 있는 것은 단지 그 인(仁)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다.[氣相近. 如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點子明.]"라는 내용이 보인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다르다 《맹자집주(孟子集註)》 〈고자〉 주자주에 보인다. "성(性)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이(理)이고 생(生)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기(氣)이니, 성(性)은 형이상이고 기(氣)는 형이하이다. 사람과 물건이 태어날 때에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또한 기(氣)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한다면, 지각과 운동은 사람과 물건이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이(理)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의 본성을 받은 것을 어찌 물건이 얻어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성(性)이 불선함이 없어서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유이다.[性者, 人之所得於天之理也; 生者, 人之所得於天之氣也. 性, 形而上者也; 氣, 形而下者也. 人物之生, 莫不有是性, 亦莫不有是氣. 然以氣言之, 則知覺運動, 人與物若不異也; 以理言之, 則仁義禮智之稟, 豈物之所得而全哉? 此人之性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라고 하였다. 안연(顏淵)과……지닌 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하ㆍ자유ㆍ자장은 모두 성인의 한 지체를 가졌고 염우ㆍ민자건ㆍ안연은 그 전체를 소유하였으되 광대하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모든……있다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4 〈성리습유(性理拾遺)〉와 《근사록》 〈도체편〉에 보인다. 하늘이……없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편언(偏言)의……인(仁) 편언은 다른 개념과 상대적으로 말한 것고 전언은 전체로 말했을 때를 가리킨다. 《주자어류》에 "편언이나 전언이라는 것은, 단지 인만 말했을 때에는 곧 체로서의 인을 말하지만, 의를 말했을 때는 곧 인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도리라는 것이다.[偏言、專言者, 只說仁, 便是體; 才說義, 便是就仁中分出一箇道理.]", "편언은 한 가지 일이고, 전언은 인ㆍ의ㆍ예ㆍ지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94 周子之書 太極圖, 卷95 程子之書1》 사람과……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나오는 말이다. 태극권(太極圈)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의 글을 지었다. 도의 맨 위가 1층으로 태극권이며, 그 아래 2층이 음양권, 그 아래 3층이 오행권, 그 아래 4층이 남녀권, 그 아래 5층이 만물권이다. 3백, 3천의 예(禮) 예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 백이고 곡례가 삼 천인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체(體)와……없다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은 정주학의 유명한 명제(命題) 중의 하나인데, 체(體)가 본질이요 본체요 이치[理]요 형이상(形而上)의 절대적 진리를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미(微)를 그 속성으로 한다면, 용(用)은 작용이요 기능이요 자취[迹]요 형이하(形而下)의 현상 세계를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현(顯)을 그 속성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녹문집》 권20 〈존존감기(存存龕記)〉에, 정이가 경(敬)을 주일(主一)로 설한 것에 대해서, 녹문이 "이것 역시 천기를 너무 누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其亦可謂太漏洩天機者矣.]"라고 평한 대목이 나온다. 미응(未應)이……아니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에 "텅 비어 조짐이 없을 적에 이미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히 갖추어져 있으니,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뒤가 아니다. 예를 들면 100자 되는 나무가 근본으로부터 지엽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꿰여 있는 것과 같다.[沖漠無眹, 萬象森然已具, 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 如百尺木, 自根本至枝葉, 皆是一貫.]"라는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새와……없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보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되기 때문에 귀해지기도 하고 천해지기도 하여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저 천하여 물이 된 것은 이미 치우치고 막힌 형기에 구속되어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고, 오직 태어나면서부터 바르고 통하는 기운을 얻은 사람만이 그 본성이 가장 귀하게 되기 때문에 방촌의 사이가 허령하고 통철하여 모든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요순이 되어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을 도울 수 있는 것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명덕이라는 것이다.[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乃得其氣之正且通者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 蓋其所以異於禽獸者, 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讚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체(體)는……다르다 호굉(胡宏, 1106~1161)의 《지언(知言)》에 보인다. 호굉은 호안국(胡安國)의 아들로서 양시(楊時)에게 배웠다. 그가 성(誠) 속에 이미 선과 악의 씨앗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석한 이른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체는 같고 용이 다르다.'고 주장한 설을 가리킨다. 하늘이……없다 《대학장구》 〈서(序)〉에 보인다. 허령(虛靈)하여……하다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라고 하였다. 이(理)로……없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경 1장에 보인다. 기(氣)로……된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경 1장에 보인다. 임전재(任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사슴……사슴이라는 것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 1044~1076)이 어릴 때 어떤 사람이 사슴과 노루를 한 우리에 넣고서 어느 것이 노루이고 어느 것이 사슴인지 묻자, 한참을 생각하다가 "노루 곁에 있는 것이 사슴이고, 사슴 곁에 있는 것이 노루입니다." 하니, 왕안석이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활달한 사유 방식을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古今說海》 그러나 주희(朱熹)는 《사서혹문》 〈논어혹문(論語或問)〉에서 경전을 해석함에 '어느 것이나 아는 바가 없어서 노루 곁 사슴, 사슴 곁 노루처럼 무한히 순환 반복하기만 하고 끝내는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다.[彼此俱昧, 而欲互以相明, 如獐邊之鹿鹿邊之獐, 循環無端, 而卒無所决其偶.]'고 하여 피차간에 정확한 분변을 하지 못하는 병폐를 뜻함. 이천(伊川)이……뿐이었다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서명을 두고 "이치는 하나이나 분수가 다름을 밝혔다."라고 평한 바 있다. 《古文眞寶後集 卷10》 《近思錄 卷2 爲學》 양시(楊時) 1053~1135.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사양좌(謝良佐), 유작(游酢), 여대림(呂大臨)과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그의 학문은 나종언(羅從彦)ㆍ이동(李侗) 등을 거쳐 주희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 발전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구산어록(龜山語錄)》 등이 있다. 이통(李侗) 송나라 때 남검주(南劍州) 태생으로, 자는 원중(愿中)이며 통칭 연평 선생(延平先生)으로 불린다. 주자가 한때 그에게 수학한 바 있다. 그는 후학을 지도할 때, 강론(講論)보다는 말없이 앉아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송사(宋史)》 권428ㆍ《송원학안(宋元學案)》 권39. 나 정암(羅整庵) 명나라 때의 유학자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을 말한다. 정암은 호이고 자는 윤승(允升)으로,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과 이부 상서(吏部尙書) 및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불교의 선학(禪學)을 연구하였으나 후에 주자학으로 돌아섰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 《속기(續記)》, 《나정암집》 등이 있다. 기(氣)를……달라진다 《곤지기(困知記)》 권상에 보인다. 이일분수(理一分殊)로……없다 《곤지기(困知記)》 권상에 보인다. 건(乾)의……않는다 《녹문선생문집》 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각일기성(各一其性)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오행은 한 음과 양이고, 음과 양은 한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간직하였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라고 하였다. 이는……아니다 《녹문선생문집》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이것은……않는다 《녹문선생문집》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노주(老洲) 오 선생(吳先生) 오희상(吳煕常, 1763~1833)으로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저서에 《노주집》이 있다. 덕(德)에는……합한다 《서경》 〈상서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이치는……다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천하가 돌아감은 같으나 길은 다르며,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의……꿴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이며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한 말이다. 그것의……없다 《중용장구》 제26장에 "천지의 도는 한마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니, 그 물건 됨이 변치 않는다. 그리하여 물건을 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널리……함이다 《맹자》 〈이루하(離婁下)〉에 보인다. 이(理)와……하였다 《주자어류》 권1, 〈이기(理氣)상〉에 보인다. 텅 비고……있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보인다. 성(性)이라는……일원(一原)이다 《정몽(正蒙)》 〈성명(誠明)〉에 보인다. 성(性)은……다르다 《곤지기속록(困知記續錄)》 권상에 보인다. 성과……같지만 《중용장구》 제1장 제1절 주희(朱熹)의 주에 "성과 도는 비록 같지만 기품이 혹 다르기 때문에 과하고 불급한 차이가 없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른바……하다는 것 《주자대전》 권42 〈답오회숙(答吳晦叔)〉에 나오는 말이다. 해당 부분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의리를 이해하려면 모름지기 먼저 명의(名義)의 경계와 구분을 분석해 내어 각각 귀착할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에 절로 관통처(貫通處)가 있을 것이니, 비록 '관통(貫通)'이라고 하였으나 혼연(渾然)한 가운데 이른바 '찬연(粲然)'한 것은 애초에 어지러웠던 적이 없었다.[理會義理, 須先剖析得名義界分, 各有歸著. 然後於中自有貫通處. 雖曰貫通而渾然之中所謂粲然者, 初未甞亂也.]" 학지(學知)……달려있다 《주자전서》 권43 〈성리(性理)〉에 나오는 말이다. 솔개가……뛰노는 것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물이……타오르는 것 《서경》 〈홍범〉에 "첫 번째 오행으로 말하면, 첫 번째는 수(水)이고, 두 번째는 화(火)이고, 세 번째는 목(木)이고, 네 번째는 금(金)이고, 다섯 번째는 토(土)이다. 수는 윤하(潤下)이고, 화는 염상(炎上)이고, 목은 곡직(曲直)이고, 금은 종혁(從革)이고, 토는 이에 가색(稼穡)을 한다. 윤하는 짠 것이 되고, 염상은 쓴 것이 되고, 곡직은 신 것이 되고, 종혁은 매운 것이 되고, 가색은 단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일원(一原) 《주자대전》 권4 〈재거감흥 20수〉의 제20수에 "내가 전인의 가르침에 어두운 것은, 이 가지와 잎이 무성하기 때문이네. 분발하여 영원히 깎아낸다면, 일원에서 큰 공을 거두리라.[曰余昧前訓, 坐此枝葉繁. 發憤永刊落, 奇功收一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의 '일원(一原)'에서 "정자의 〈이천역전서(伊川易傳序)〉에 '체와 용은 하나의 근원이다.'라고 하였다. ○웅씨가 말하기를 '이 편은 천도는 말을 하지 않고 성인은 말이 없는데, 후세에 말을 많이 하는 폐단을 논하였다.'라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감흥시〉는 처음에는 하나의 리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져 만사가 되고 끝에서는 다시 합해져 하나의 리가 되니, 이것은 《중용》의 뜻이다.[程子易傳序 體用一原. ○熊氏曰, 此篇論天道不言, 聖人無言, 後世多言之弊. ○愚竊謂感興詩, 首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此中庸之義也.]"라고 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있는 것 《주자전서(朱子全書)》 권42, 〈성리(性理)〉에 "기질의 성은 단지 이 성이 기질에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기질에 따라 각각 하나의 성이 된다[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随氣質而自爲一性]"라는 말이 보인다. 사람과……다르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과 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이 정녕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 편정한 가운데 다시 청탁혼명의 차이가 본래 있다.[人物之性, 其賦形偏正, 固自合下不同. 然隨其偏正之中, 又自有清濁昏明之異.」)" 편언(偏言)하면……포괄한다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 〈건괘(乾卦) 단사(彖辭)〉에서 "사덕의 원이 오상의 인과 같으니, 따로 떼어서 말하자면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의 일이고 통틀어서 말하면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라고 한 것에 근거하였다. 산수(散殊) 각양각색, 각각 구별이 있다는 말이다. 《예기》 〈악기(樂記)〉에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그 중간에 만물이 각양각색으로 산재하여 예의가 행해진다.[天高地下, 萬物散殊, 而禮制行矣.]"라고 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을……않는다 북송의 유학자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를 이룬 뒤에 기질의 성이 있으니, 본래의 선으로 돌아가면 천지의 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不性者焉.]"라고 하였다. 《張橫渠集 卷3 誠明篇》 오행이……갖는 것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오행은 한 음과 양이고, 음과 양은 한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간직하였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라고 하였다. 수윤 화조(水潤火燥) 물이 축축한 곳으로 흐르고 불이 마른 곳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말한다. 사람과……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과 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이 정녕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 편정한 가운데 다시 청탁혼명의 차이가 본래 있다.[人物之性, 其賦形偏正, 固自合下不同. 然隨其偏正之中, 又自有清濁昏明之異.]" 기분(氣分) 개인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가지고 있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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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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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손자익【영모】에게 답함 答孫子翼【永謨】 연전에 올린 서찰은 역시 때가 매우 늦었습니다. 급히 달려가 조문하려 했으나 도리어 차질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서찰로 대신 위로를 드렸습니다. 인정과 도리로 보자면 매우 실정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시(哀侍 상중에 있는 상대방)께서 저를 허물하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서찰을 보내셨으니 극도로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때에 부모를 잃은 슬픔과 사모하는 마음을 어떻게 견디시는지 다시 묻습니다. 멀리서 그리움이 간절하여 견디기 어렵습니다. 의림(義林)은 늙고 병든 몸으로 칩거하느라 만사를 다 제쳐 두었지만, 배움을 놓쳤다는 탄식만은 잠시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매번 아직 남아있는 동료들 가운데 견줄 이가 매우 드문 애시(哀侍)의 문장과 품행을 볼 때마다 늘 경애하는 마음이 들어 가까이하면서 밤낮으로 가르침을 받아 조그마한 성취를 이루는 데 도움을 얻고자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이 순탄하지 않고 얽매인 몸이 벗어나지 못해 매번 애시의 풍류와 운치를 우러러보면서 그저 그리운 마음만 절실할 뿐이었습니다. 어찌 집사(執事)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고 이렇게 서신으로 왕래하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이처럼 부지런하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만년에 이른 저의 보잘것없는 소원이었으니 감히 지극한 뜻을 받들어 힘쓰기를 스스로 도모하지 않겠습니까.문목(問目)의 여러 조항은 모두가 핵심이 되는 말들이니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한 경지에 나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찌 그 사이에서 우열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물었는데 답을 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에 가까우니 감히 비루한 견해를 대략 말씀드립니다. 다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문】 지손(支孫)이 부제(祔祭)62)할 때 간혹 종자(宗子)가 멀리 나가 있다면 종자가 돌아온 뒤로 물리어 행합니까, 지손이 섭주(攝主)가 되어 행합니까? 또 종가(宗家)가 멀리 있으면 지손의 집에서 지방(紙傍)으로 행하는 것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답】 종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간을 정해 기다릴 수 없다면 섭행(攝行 대신 거행함)하는 사유를 고하고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종자가 먼 곳에 산다면 지방(紙榜)으로 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문】 무릇 제사에서 유식(侑食)63)의 절차를 행할 때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바르게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삼년상 동안 제사할 때는 어디에도 없으니 무엇 때문입니까?【답】 우제(虞祭)64)를 지낼 때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바르게 한다는 규정이 없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에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이를 보충해65) 넣었습니다.【문】 우제와 졸곡(卒哭)66), 대상(大祥)67)과 소상(小祥)68)에 참신(參神)69)의 절차가 없는 것이 삼년상 동안 항상 살아계실 때처럼 궤연을 모시는 상주의 의리 때문이라면 사신(辭神)70)의 절차도 없어야 하건만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답】 상례의 제사에서 참신을 하면서 재배(再拜)를 한다는 규정이 없더라도 또한 곡을 하는 것으로 참신을 대신하는 절차도 없습니다. 사신을 하면서 재배를 하는 것은 끝맺음을 귀하게 여기는 예(禮)의 정신 때문인 듯합니다.【문】 "무릇 제사에서 삼헌(三獻)을 하면서 술로 고수레를 하는 것은 신령을 대신하여 고수레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제(時祭)의 경우는 술을 올린 뒤에 고수레를 하고 우제의 경우는 고수레를 한 뒤에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답】 고수레를 하고 올리는 것은, 이때는 슬픔에 경황이 없는 중이라서 세세한 절문을 다 갖출 수 없어서 생략하는 듯합니다.【문】 '지지능득(知止能得)'71)부터 '물유본말(物有本末)……'72)까지 보건대, 《전(傳)》 4장에서 본말에 대해서만 풀이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장이 삼강령(三綱領)의 뒤 팔조목(八條目)의 앞에 들어가 있는데 또한 둘 곳이 있습니까? 삼강령과 팔조목 사이에 둘 공간이 있느냐는 뜻인 듯합니다.)【답】 '지지(知止)'와 '물유(物有)' 두 구절은 삼강령과 팔조목의 중간에서 맥락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지(知止)는 바로 지지(知至)73)를 말하니 별도의 전문(傳文)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본말(本末)' 2자는 바로 그사이의 요체가 되는 곳이므로 특별히 풀이한 것입니다. 年前一疏。亦已晩矣。期擬匍匐。輒見差池。而爲此不得己替慰之擧。揆以情理。太不稱停。然而哀侍不以爲咎。而辱賜手疏。極其懇惻。不知所以攸答。更問歲次餞迓哀慕孝思。何以支堪。馳溯憧憧。不在情懇。義林衰病跧伏。萬事都休。而惟是失學之歎。耿耿難遣耳。每覵哀侍文學操履。在今儕流。甚罕其比。尋常愛仰。思欲獲近日夕擩染光薰。以爲毗倚扶竪。萬一之計。而命道不媚身繫莫解。每瞻望風韻。只切依然。豈意執事爲之不遐。開此書疏往復之路。若是密勿哉。此誠葉楡區區之願。敢不承膺至意以自圖勉也。問目諸條。無非肯綮語。可見所造之情且深也。以若膚淺。何足以上下其間。然有問無答。近於不恭。敢以鄙見。略綽言之。幸復見敎也。支孫祔祭時。或宗子出遠。則退行於宗子返後耶。以攝主行之耶。此宗家遠。則紙傍行之。未知如何。宗子之還。若不可以日月支待。則告攝行之可也。且宗子遠居。則紙榜行之亦可。凡祭侑食。雖有扱匙正筋之文。而三年內竝無之何虞之無扱匙正筋。殊涉可疑。故備要補入之。虞卒哭大小喪。無參神之節。是三年內孝子常侍之義。則辭神亦當無而獨有之。何耶 喪之祭。雖無參神再拜之文。而亦無以哭代參之節乎。辭神之有再拜。似是禮貴有終之義也。凡祭三獻祭酒。乃代神之祭。而時祭則獻而後祭。虞祭則祭而後獻。何也。祭而後獻。此在哀遽之中。似不得盡其節文之委曲。故略之也。自知止能得至物有本末云云。傳四章特釋本末者。何義。此章八於三綱後八條前。亦有所措歟。知止物有兩節。此是三綱八條中間脈理連續處。然知止卽知至之謂。不必別立傳文。但本末二字。乃其間總要處。故特釋之。 부제(祔祭)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다음 날 지내는 상제(喪祭)의 명칭이다. 사당(祠堂)에서 부제를 마친 후 새로 죽은 사람의 신주(神主)는 협제(祫祭)를 지낼 때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정침(正寢)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 후 삼년상이 끝나는 일정한 시점에 친진(親盡)한 고조의 신주를 조묘(祧廟)로 옮겨 안치하고 새로 죽은 사람의 신주를 사당에 들이는데 이를 천묘(遷廟) 또는 부묘(祔廟)라고 한다. 유식(侑食) 제사의 한 절차로, 신에게 식사를 권한다는 뜻이다. 삼헌(三獻)을 마친 뒤 밥에 숟가락을 꽂고서 모든 제관(祭官)이 밖으로 나와 문을 닫고 서서 아홉 숟갈을 먹는 시간【九飯之頃】을 기다린다. 우제(虞祭) 매장을 한 뒤 혼령이 방황하지 않도록 안정시키기 위하여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신분에 따라 9번, 7번, 5번, 3번 지낸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에 "세 번 우제(虞祭)를 지낸다.〔三虞〕" 한 것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우(虞)는 상제(喪祭)의 이름이다. 우는 안정시킨다는 뜻이다.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정기는 가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효자는 그 혼령이 방황하지 않도록 세 번 제사를 지내 안정시킨다. 아침에 장례를 치르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우제를 지내는 것은 차마 하루라도 혼령이 돌아갈 곳이 없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虞, 喪祭名. 虞, 安也. 骨肉歸於土, 精氣無所不之, 孝子爲其彷徨, 三祭以安之. 朝葬, 日中而虞, 不忍一日離.】"라고 하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보충해 《상례비요(喪禮備要)》 〈우제(虞祭) 유식(侑食)〉의 "집사자가 주전자를 들고 나아가 잔에 첨작을 한다.【執事者執注, 就添盞中酒.】" 구절의 소주(小註)에 "밥에 손잡이를 서쪽으로 향해서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은 바르게 놓는다. ○ 살피건대, 모든 제사에서 유식을 하고 나서는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똑바로 올려놓는다는 문구가 있으나, 《가례》의 우제ㆍ졸곡ㆍ부제ㆍ소상ㆍ대상ㆍ담제에는 다 같이 없고, 《가례의절》에도 없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扱匙飯中 西柄, 正筯. ○ (按) 凡祭侑食, 俱有扱匙正筋之文, 而家禮虞卒哭祔練祥禫祭幷無之, 儀節亦無, 未知何也.】"라고 하였다. 졸곡(卒哭) 우제(虞祭)를 모두 마친 다음 첫 번째 강일(剛日)에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슬픔이 줄어들어 이후로는 무시(無時)로 하던 곡을 그치고 조석곡(朝夕哭)만 하므로 졸곡제라고 한다. 졸곡제 이전에는 살아 있는 분을 섬기듯이 하는 예를 계속 적용하지만 졸곡제를 지낸 다음에는 신명(神明)으로 대우하게 되므로 귀신의 이름을 공경하는 뜻에서 사자(死者)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卒哭.〕" 한 것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졸곡(卒哭)은 삼우제(三虞祭) 뒤에 지내는 제사 명칭이다. 처음에는 조석곡을 하는 사이라도 슬픔이 밀려오면 곡을 하지만, 이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는 그치고 조석곡만 할 뿐이다.【卒哭, 三虞之後祭名. 始朝夕之閒, 哀至則哭, 至此祭, 止也, 朝夕哭而已.】"라고 하였다. 대상(大祥) 죽은 지 만 2년째(기년상의 경우는 13개월째)에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상(祥)이라고도 한다. 고례(古禮)에 따르면, 삼년상의 경우 만 2년째인 25개월에, 특별히 아버지가 생존 중인 상황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하는 기년상의 경우에는 13개월째에 지내는 제사로, 상주가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은 채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길(吉)로 나아간 것이 아니므로 잿물에 담갔다가 말려 희고 부드럽게 하지 않은 호관(縞冠)만은 착용하고, 아침저녁의 정해진 곡을 하지는 않지만 슬픔이 북받칠 때는 곡을 하며, 고기도 먹을 수 있다. 소상(小祥) 돌아가신 지 만 1년째(기년상의 경우는 11개월째)에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연(練)이라고도 한다. 연(練)은 누인다, 곧 '잿물에 담갔다가 말려 희고 부드럽게 한다'는 뜻으로, 소상(小祥)에는 누인 대공포(大功布)로 만든 중의(中衣)와 누인 대공포로 만든 관(冠)을 착용하고 상제(喪祭)를 지내므로 소상을 연제(練祭) 또는 연이라고 한다. 연제를 지낸 뒤에야 야채와 과일을 먹을 수 있다. 아버지의 생존 중에 어머니가 사망한 기년상의 경우에는 11개월째에 연제를 지낸다. 참신(參神) 제사 지낼 때 신주(神主)에 절하고 뵙는 것을 이른다. 사신(辭神) 종헌(終獻)한 다음 신주를 들이기 전에 신주에게 절하고 작별하는 의식이다. 지지능득(知止能得) 《대학장구》 경(經) 1장에서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한 뒤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 얻을 수 있다.【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라고 하였다. 물유본말(物有本末) 《대학》 경 1장에 "물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깝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라고 하였다. 지지(知至) 《대학장구》 경 1장에 "사물이 이른 뒤에 앎이 지극하고【物格而后知至.】"라고 하였는데, 집주에 "지지(知至)는 내 마음의 앎이 다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吾心之所知, 無不盡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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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좌【양현】에게 답함 答金舜佐【良鉉】 영랑(令郞)이 저를 찾아오고 혜서(惠書)가 함께 이르렀으니 위안되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게다가 부모님을 모시는 즐거움이 더욱 경사스럽고 안부가 평안하시다니 더욱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편지에 가득한 자세한 내용과 별지(別紙)의 여러 조목은 모두가 공을 들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내 벗처럼 이러한 일을 마음에 담고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의림(義林)은 젊어서 의지가 단단하지 못하였고 늙어서는 더욱 거칠고 피폐하여 이와 같은 벗의 서한을 받고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흐르는 땀에 옷이 젖었습니다. 영랑은 지금 《중용(中庸)》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략 뜻을 물었더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비상합니다. 이렇게 나아간다면 이른바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한다."74)라는 말이 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기의변(記疑辨)》75)은 다른 사람이 빌려 가서 보내드리지 못합니다. 훗날의 계획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자사(子思)의 말은 근원에서 지류를 가리켜 한 말이고 주자(朱子)의 말은 지류에서 근원을 가리켜 한 말이니 간략하고 심오함과 상세하고 정밀함으로 나누어 보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또한 "성(性)이 곧 이(理)이다."라고 한다면 옳지만, "이가 곧 성이다."라고 한다면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이미 "만물을 화생(化生)한다."76)라고 하였다면 어찌 인(人)과 물(物)의 구분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만약 인과 물의 구분에 뜻이 없었다면 인과 물이 어디에서 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최근에 기(氣)를 위주로 삼는 주장이니 나의 벗께서는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기로 형체를 이룬다."라고 할 때의 '기'는 모두가 음양과 오행이 흩어져 나뉜 기이지만, 이(理)가 갖추어져 있는 것은 과연 그릇에 물이 담겨 있는 것과 같습니다. 초목은 거꾸로 자라고 금수는 옆으로 자라지만, 사람은 머리가 위에 있고 발이 아래에 있으며 모나고 둥글고 평평하고 곧은 것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통하거나 막힌 형체의 구분이 아니겠습니까. 건순오상(健順五常)77)은 인(人)과 물(物)을 아울러 말한 것이니 이것은 이일(理一 이는 동일하다는 의미)에 해당하며, 이는 동일하지만 현상은 다르다는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만약 물(物)이 하늘이 명한 성(性)을 따랐다면 말은 발로 차지 않고 소는 뿔로 받지 않을 것이니, 어찌 사람의 오상(五常)을 저 물(物)에게 요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시 자세히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令郞垂訪。惠幅伴至。慰感曷量。矧審省歎增慶。體事晏重。尤叶願聞。滿幅覼縷及別紙諸條。無非自用功體驗中出來。在今日而實心於此事如吾友者。有幾人哉。義林少不厲志。老益荒廢。得朋友書如此處。不覺愧汗沾衣也。令郞今讀中庸云。故略問其義。無不曉解。奇事奇事。率是以往。所謂後生可畏者。安知不在於此也。記疑辨爲人借去。未得付呈。留俟後日計耳。子思之言目源指流之言。朱子之言。自流指源之言。恐不可以簡奧詳密分以觀之。且性卽理也云則可。理則性也云則恐未穩。旣曰化生萬物。則烏可謂無人物之分耶。天若無意於人物之分。則人物何處得來。此是近世主氣之說。願吾友物似之也。氣以成形之氣。莫非陰陽五行散殊之氣。而理無不具。果如器之貯水也。草木倒生。禽獸橫生。而人則頭上足下。方圓平直。此非通塞之形耶。健順五常。兼人物言之。此是理一處。理一而分殊在其中矣。使物而循天命之性。則馬不踶牛不觸。何嘗以人之五常去責那物耶。更詳之如何。 후생을……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니,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짐이 없는 사람이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기의변(記疑辨)》 정재규의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을 가리킨다. 《납량사의》는 노사 기정진(奇正鎭)이 1843년에 작성한 성리학 저술이다.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만물을 화생(化生)한다 《중용장구》 제1장에서 주희가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라는 경문을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하매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를 또한 부여한다.【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 理亦賦焉.】"라고 해설한 것을 이른다. 건순오상(健順五常) 《중용장구》 제1장의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에 대한 주희의 주석에 "인과 물이 세상에 나올 적에 각기 부여받은 바의 이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ㆍ오상의 덕을 삼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성이라는 것이다.【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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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중【기환】에게 답함 答文仁仲【麒煥】 천태산(天台山)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옮겨와 벗들과 아득히 사방으로 멀어졌는데 옛 벗의 서신 한 통이 나를 찾아올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음이 서로 맞는다면 깊고 험한 산골짜기도 멀어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편지에 가득히 적힌 자세한 내용에 성실함과 분발심이 넘쳐나니 존경스럽습니다. 또한 '변득실심(辨得實心 실심을 식별하는 것)' 4자는 학자가 근거로 삼는 첫 번째 맥락입니다. "도는 넓고 넓은데 어디에서 시작하리오? 오직 진실한 뜻을 세워야만 의거할 곳이 있다."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충신(忠信)뿐이다."91)라는 정자(程子)의 말이 모두 이것을 이릅니다. 그렇다면 보내신 서신에서 말씀하신 "지극한 요체를 보여주었다."라는 것은 아마도 이 4자를 벗어나지 않고 또한 반드시 좌우(左右)께서 이미 본 소릉(昭陵)92)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초학자는 실(實)과 부실(不實)을 쉽사리 변별하지 못합니다. 학문으로 밝히고 공경으로 부지(扶持)하여 잠깐 사이의 틈조차도 없도록 한 다음에야 차츰차츰 이어나가 활연관통(豁然貫通)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의 몇 가지 조항은 답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이렇게 추함을 드러냅니다.〇 주경(主敬)이라는 것이 어찌 한 번의 발걸음으로 쫓아가서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일부러 조장해서 병폐가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마음이 안정되면 몸이 바르게 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마음은 본래 비어 있어 착수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형적이 있는 외면부터 공부하였습니다.〇 발을 세워 발꿈치를 엉덩이에 붙이는 것을 위좌(危坐)라고 하고 무릎을 모아 바닥에 붙이는 것을 단좌(端坐)라고 하고 넓적다리를 교차하여 가로로 굽히는 것을 평좌(平坐)라고 합니다. 평좌도 법도에 맞는다고 할 수 있지만 존자(尊者) 앞에서는 과연 공경스러움이 부족하게 됩니다.〇 기질은 생명을 부여받는 초기에 얻고 물욕은 외물을 접한 뒤에 생깁니다. 이른바 기질을 교정하고 바로잡으면 물욕이 얽어매지 못한다는 것은 제대로 살피지 못한 듯합니다.〇 기왕에 물동이를 가지고 비교한다면 물【水】은 성(性)이고 동이는 마음이며 동이에서 흘러나오는 물【水】은 정(情)이라고 해야 합니다. 정자(程子)는 "성에서부터 동(動)하는 것을 마음이라 하고 마음으로부터 동하는 것을 정이라 한다."93)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두 개의 '동(動)'자는 서로 발하는 두 가지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황에 따라서 명칭과 의미가 어떠한지를 찾아낸 것일 뿐입니다.〇 내일 해야 할 일을 오늘 궁구하는 것을 마음이 얽매이는 것【心累】이라고 한다면 심모원려(深謀遠慮)나 장마에 대한 온갖 대비도 모두 심루이겠습니까. 다만 공정한가 사사로운가에 달려있을 뿐입니다.〇 부끄러움이 없다면 선(善)이 어디에서 생겨나겠습니까. 부끄러움은 선의 시작이니 안자(顔子 안회(顔回))가 순(舜) 임금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과 같습니다.〇 마음먹고 보는 것이 '시(視)'이고 사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견(見)'입니다. 마음먹고 듣는 것이 '청(聽)'이고 소리가 귀로 들어오는 것이 '문(聞)'입니다.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이 모두 정(情)이지만 사단은 선의 한 측면이고 칠정은 선과 악을 아울러 말하는 것입니다. 移入天台山最深處。漠然與朋知四遠。安知故人一書相尋入來也。儘知人情所孚。山豁之深險。不足間之也。滿紙縷縷。其誠實憤悱。溢於辭意。敬服敬服。且辨得實心四字。是學者立脚第一路脈也。程子所謂道之浩浩。何處下手。惟立誠纔有可居之處。又曰終日乾乾。大小大事。却只是忠信者。皆謂是也。然則來喩所謂下示至要者。恐不出此四字。而亦未必不爲左右已見之昭陵也。但實與不實。初學有未易遽辨。惟學以明之。敬以持之勿使少有須更之間然後。可以漸次接續。打成一片矣。如何。下方諸條。不容無答。敢此露醜主敬之云。豈有一蹴可到之理。但不可着意助長以生病敗也。且心定則外體正者。恐不然。心本虛。沒把珿。故古人多從外面有形迹上。做工夫來。立足着尻。謂之危坐。斂膝着地。謂之端坐。交股橫屈。謂之平坐。平坐亦不可謂不中於法度。而但於尊前則果爲欠敬。氣質得於稟生之初。物欲生於接物之後。所謂矯捄氣質。則物欲不累者。似失照管。旣以水盆比之。則當云水是性。盆是心。水之自盆中流出是情。程子云。自性之有動者。謂之心。自心之有動者謂之情。兩動字。非有兩樣互發也。但就其地頭。求其名義之如何耳。若以今日窮究明日可爲之事。謂之心累。則凡深謀遠慮。陰雨綢繆之備。亦皆爲心累耶。只在公私之間。無恥。善安從生。恥者爲善之先路。如顔子以不及舜爲恥也。有心視之爲視。物來現前爲見。有心聽之爲聽聲來入耳爲聞。七情四端。同是情四端善一邊。七情兼善惡說。 정자(程子)가……충신(忠信)뿐이다 《근사록(近思錄)》 권2 〈위학(爲學)〉에 보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종일토록 힘써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만 '충신은 덕을 진척시키는 것이다'라는 것은 실제로 공부하기 시작하는 곳이며, '말을 닦아 성을 세운다'는 것은 실제로 덕업을 닦는 곳이다.【終日乾乾, 大小大事. 却只是忠信所以進德, 爲實下手處, 修辭立其誠, 爲實修業處.】" 소릉(昭陵) 모든 상황을 꿰뚫어 환히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에서부터……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5 〈창잠도본(暢濳道本)〉에 보인다. "성의 선함을 도라고 한다. 도와 성은 하나이다. 성의 선함이 이와 같으므로 성이 선하다고 한다. 성의 근본을 명(命)이라 하고 성이 본디 그러한 것을 천(天)이라 한다. 성으로부터 형태를 갖게 된 것을 심(心)이라 하고 성으로부터 움직인 것을 정(情)이라한다. 무릇 이 몇 가지 것은 모두 동일하다. 성인은 일에 따라 이름을 제정하므로 이처럼 다르다. 후대의 학자들은 문장에 따라 의미를 분석하고 기이한 설을 구하다가 성인의 뜻에서 멀어졌다.【稱性之善謂之道. 道與性一也. 以性之善如此, 故謂之性善. 性之本謂之命, 性之自然者謂之天, 自性之有形者謂之心, 自性之有動者謂之情. 凡此數者, 皆一也. 聖人因事以制名, 故不同若此, 而後之學者, 隨文析義, 求奇異之說, 而去聖人之意遠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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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청일【재덕】에게 답함 答梁淸一【在德】 인편으로 매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부를 물으시는데 거리가 멀수록 편지는 더욱 정성스럽고 교제가 오랠수록 정의(情誼)는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어리석고 국량이 좁은 사람은 1전(錢)의 가치도 없는 처지이니 어떻게 고명(高明 상대방)에게 이와 같은 대우를 받겠습니까. 고마운 마음은 크지만 조금이라도 고명의 뜻에 부응할 방도가 없으니 죄송스럽습니다. 학문에 관해 하문하신 뜻이 간절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웠지만 이처럼 분별없는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나 벗 사이에 강습(講習)하는 도리는 절대로 의심을 쌓아두고 단점을 비호하여 지극히 합당한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면 안 됩니다. 다시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대체로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이고 만사(萬事)의 본령(本領)입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몸에 주재가 없고 만사에 근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법도는 풀어진 마음을 수습하는 것【收放心】을 우선하지 않은 적이 없고 풀어진 마음을 수습하는 도리는 반드시 경(敬)을 첫 번째로 삼았습니다. '경(敬)' 자의 뜻을 정자(程子)는 일찍이 정제 엄숙(整齊嚴肅)84)이라고 하였고 또 주일 무적(主一無適)85)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여 엄숙한 태도로 항상 상제(上帝)의 뜻을 받들어 섬기듯이 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책을 읽기만 하고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기만 하여 두 가지 일을 하지도 않고 세 가지 일을 하지도 않으며 동쪽으로 가지도 않고 서쪽으로 가지도 않는다면 정신은 자연스럽게 안정되고 도리는 자연스럽게 모여듭니다. 또 모름지기 오늘 하나의 이치를 바로잡고 내일 하나의 이치를 바로잡으며,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여 과정(課程)을 엄정하게 세우고 목숨을 바쳐 앞으로 나아간다면 쌓인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저절로 초탈하여 구속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점은 입지(立志)가 단단하지 못하고 입심(立心)이 미덥지 못하여 꼼꼼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없이 늑장을 부리다가 일정함이 없이 중간에 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해가 다 지나가도 어찌 성취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의림(義林)은 일찍이 사우(師友)를 따랐기 때문에 대략 이와 같은 것을 알았지만 지금도 오하아몽(吳下阿蒙)86)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때를 놓치고 안타까워하는 탄식은 죽더라도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좌하(座下)의 총명함과 독실함으로 반드시 이 점에 대해서 소릉(昭陵)을 보듯 했으리라고87) 생각되니 달빛 아래 촛불을 밝히고 시주(詩酒)를 즐기는 것이 어찌 제가 하고자 하는 바이겠습니까. 단지 고루한 견해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고 또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합니다. 便頭每得死生之問。地愈遠而書愈勤。交愈久而誼愈篤。顧此愚劣褊淺。不直一錢漢。何以得於高明如此。爲感則厚。而無以副其萬一之意爲可罪也。下問爲學之意。非不懇惻。而奈此倥倥何。然朋友講習之道。切不可蓄疑護短。以昧至當之歸。幸復回敎也。夫心者一身之主宰。萬事之本領也。心有不存。則一身無主。萬事無本。是以從古聖賢敎人之法。無不以收放心爲先。收放心之道。必以敬爲第一義。敬字之義。程子嘗以整齊嚴肅言之。又以主一無適言之。必須整衣冠。尊瞻視。儼然肅然。常若對越上帝。而讀書時只讀書。着衣時只着衣。不二不三不東不西。則精神自然凝定。道里自然湊泊。又須今日格一理。明日格一理。今日行一事。明日行一事嚴立課程。舍死向前。則積累多後。自當有脫然處。最怕立志不牢。立心不實。而悠悠泛泛。間斷無常。則卒歲窮年。豈有所成就也。義林早從師友之後。粗知如此。而尙今吳下阿蒙者。亦爲是故也。無念失時之歎。有死莫追。以座下明睿篤實。想必於此有昭陵之見。則月下擧燭。愚豈所欲也。但固陋之見。不可不正。又以塞不鄙萬一之意。 정제 엄숙(整齊嚴肅)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 〈입관어록(入關語錄)〉에 "다만 외면을 정제하고 엄숙히 하면 마음이 곧 전일해지니, 전일해지면 저절로 사악함이 침범하는 일이 없게 된다.【只整齊嚴肅 則心便一, 一則自無非辟之干.】"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일 무적(主一無適)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주일을 경이라 이르니, 안을 곧게 한다는 것은 바로 주일의 뜻이다.【主一之謂敬, 直內乃是主一之義.】"라고 하고, 또 "마음은 지키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출입하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어 그 방향을 알 수 없으니, 다시 어떻게 마음을 붙여 둘 곳을 찾겠는가. 그저 마음을 지킬 뿐이니, 마음을 지키는 방도는 경을 하여 안을 곧게 하는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更怎生尋與寓? 只是操而已. 操之之道, 敬以直內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오하아몽(吳下阿蒙) 학식이 없는 사람을 기롱하는 말이다. 오하아몽은 삼국(三國) 시대 오(吳)나라 장수 여몽(呂蒙)을 가리키는데, 손권(孫權)이 여몽과 장흠(蔣欽)에게 학문을 하여 깨우치라고 하자 여몽이 독실하게 공부를 하였다. 그 뒤 노숙(魯肅)이 주유(周瑜)를 대신하여 도독(都督)이 되어 여몽에게 들렀는데 그가 괄목상대할 만큼 학문의 진전을 이룬 것을 보고 여몽의 등을 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무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박학하고 영준한 것을 보니 더이상 오하아몽이 아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三國志 卷54 吳書 呂蒙傳 注》 소릉(昭陵)을……했으리라고 수많은 학설을 모두 독파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황후인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이다. 태종이 황후를 장사 지낸 뒤 후원(後苑)에 망대(望臺)를 만들어 놓고 늘 올라가 바라보다가 한번은 위징과 함께 올라갔었는데, 위징은 당 태종이 소릉을 가리키는데도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뗐다. 위징의 본의도 모르고 당 태종이 저것이 아니냐고 답답한 듯이 말하자 위징이 비로소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진작부터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헌릉은 태종 어머니의 능이니, 이것은 태종이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고, 부인만 생각한다고 꼬집은 것이다. 이리하여 태종은 울면서 그 망대를 헐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唐書 魏徵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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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청일에게 답함 答梁淸一 뜻밖의 인편으로 또 이렇게 서신을 주고받아 잇달아 위로를 받으니 고마움을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성성설(惺惺說)88)을 다시 이렇게 언급하시니 간절히 묻고 가까운 일부터 생각하며 날마다 나아가고 멈추지 않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경(敬)'은 윤익법(輪翼法)89)이니 본래 판연하게 앞뒤를 구분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학(小學)》의 서문으로 말하자면 '경(敬)'이 우선이고 《대학(大學)》의 서문으로 말하자면 '지(知)'가 우선입니다. 대체로 초학자가 공부를 시작할 때는 정제엄숙(整齊嚴肅)에 의거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또 정제엄숙만 할 뿐이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단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정제엄숙이라는 것은 단지 사람을 어리벙벙하게 헤매어 목석처럼 우매하게 만들뿐이니 어찌 천하의 으뜸가는 근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자(朱子)는 "각자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경(敬)의 천심(淺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청일(淸一)의 공부도 모름지기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과 사색(思索)에 번갈아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예전에 익힌 《소학》의 공을 뒤미쳐 보완할 수 있고 지금 《대학》을 공부하는 터전도 아울러 누실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謂外便頭。又有此往復。續續披慰。感不容喩。惺惺說復此提起。其切問近思日就不己之意。可以領略。夫敬是輪翼法。固不可以判然先後言之。然以小學之序言。則敬爲先。以大學之序言。則知爲先。夫初學下手。莫若整齊嚴肅之爲可據。而又只整齊嚴肅而已。而不求其格物致知之端。則所謂整齊嚴肅者。只是黑窣窣地。如木石冥頑曷足爲天下之大本哉。然則朱子所言各隨其人之地分。而敬有淺深故也。惟吾淸一今日之功。正須存養思索。交致其力然後。可以追補前日小學之功。而爲今日大學之地。可以兼擧而無漏矣。如何。 성성설(惺惺說) 《심경부주(心經附註)》에 있는 상채 사씨(上蔡謝氏), 즉 사양좌(謝良佐)의 "경은 항상 마음이 깨어 있게 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는 말을 가리킨다. 윤익법(輪翼法)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에서 "모름지기 이치를 궁구하되 함양과 궁색 두 가지는 하나라도 폐할 수 없으니,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亦須窮理, 涵養窮索二者, 不可廢一, 如車兩輪, 如鳥兩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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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낙서【범환】에게 답함 答文洛瑞【範煥】 병이 쌓여 건강치 못한 몸으로 눈보라를 뚫고 먼 곳까지 이 몸을 찾아오셨으니, 그 뜻은 건강한 사람이 평소에 서로를 따르는 것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이렇게 한번 왕림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몹시 마음이 편치 않았건만 올봄에 이르러서는 또 한 번 왕림하셨으나 뵙지를 못하였습니다. 또 서한을 받았건만 답장이 지체되었습니다. 모두 헛수고를 면치 못하셨는데 오늘 또 이렇게 서한으로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대체로 좌우(左右 상대방)는 마음 씀씀이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취에 구애받지도 않고 신분을 따지지도 않고 애틋한 정을 버리지 않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지극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이러한 정의를 베푼 것이 저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현자(賢者)를 좋아하고 의(義)를 즐기는 경지와 본령이 남들보다 한 등급만 높을 뿐만이 아닙니다. 고맙기 그지없어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현자께서 관산(冠山)의 객이 되었다는 소식은 애초에 들었습니다. 여행 중의 조양(調養)과 근래의 안부는 어떠하십니까? 자상하고 온화하며 총명하고 준수하여 함께 학문을 익히고 함께 도에 나아갈 만했건만 공연히 뜻하지 않은 일에 괴로움을 겪고 세월만 허비하면서 지금껏 지체하고 있습니다. 뜻과 운수가 서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와 같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아직 나이가 젊고 앞길도 여전히 머니 오늘은 약간 위축되더라도 나중에 크게 뜻을 펼치는 터전이 될 것입니다. 어찌 좌우처럼 현명하건만 오래도록 이수자(二豎子)90)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건강을 잘 살피는 일에 관해서라면 모든 방도를 다하고 힘을 쏟아 점차 조화를 이루고 완전히 회복하여 갑작스럽게 스스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以積瘁不健之身。訪人於風雪迂遠之地。其意與强健人平常時從逐。大故不同。只此一枉。已極不安。而至於今春又有一枉而見違焉。又有一書而見溯焉。皆不免虛費勤勞。而今日又有此書之存。大抵盛意所包。非夷所思。不拘形迹。不視皮毛。而眷眷不舍。愈久愈至。其旋之於無狀者。雖失照管。而好賢樂義田地本領。不啻加於人一等矣。感仰萬萬。不知爲謝。賢者之客於冠山。初聞消息也。於中調養。近節何狀。慈祥愷弟穎悟秀爽。可與共學。可與適道。而公然爲無妄所惱。曠歲曠年。彌留至此。志與數之不相及。豈若是耶。雖然年齡尙富。前程尙遠。安知今日小縮。不爲他日大伸之張本耶。其有賢如左右而久於二竪。子場中也。節宣攝理。隨方加力。以至浸和漸完。而勿遽自頹塌也。 이수자(二豎子) 병마(病魔)를 뜻한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이수자가 고황(膏肓 심장과 격막 사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고황에 병이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 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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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辭(7) 洛國公程頤字正叔明道先生弟也號伊川年十四受學於周茂叔年十八上書闕下勸仁宗以王道爲心生靈爲念出世俗之論期非常之功繼遊太學胡翼之主敎道試以顔子所樂何事論得其論大駕卽延見處以學職呂原明首以師禮事焉四方之士從遊者日益衆嘗入侍經筵講罷上起戱折柳枝乃進曰方春發生不可無故摧折上不悅文潞公輩入侍經筵退而相與歎曰眞侍講也在職累月不言祿亦不爲妻求封邑一時人士歸其門者甚盛而先生亦以天下自任論議褒貶無所顧忌由是同朝之士有以文章名也如蘇公軾輩疾之如仇與其黨類巧爲謗詆後以宣義卽致仕時先生春秋傳已出易傳成久學者莫得傳授至寢疾始以授尹焞張繹遂卒于家年七十五門人高弟多已先亡無有形容其德美者○宋嘉定十三年賜諡正公理宗淳祐元年從祀封伊陽公元至順元年封洛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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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賓 設席于堂簾東上【西階之東北面】樂正升自西階立于西階東工席之西北向○工四人入【二瑟二歌瑟先歌後】升自西階北向立東上○二工彈瑟二工歌鹿鳴四牡皇皇者華○卒歌【三終】主人詣尊所坐取爵于篚實爵○執爵興詣工長席前南向立○工皆左置瑟【避授爵也】○工長一人興北面再拜坐受爵○主人詣阼階上北面再拜送爵○執爵者薦脯醢于席前○工長左執爵右祭脯醢○卒飮授主人爵○獻次工三人【罍唱】主人進受爵詣尊所坐實爵○執爵興詣次工席前南面立○次工坐受爵○執事者薦脯醢于席前○次工祭酒卒飮授主人爵○獻三工畢主人受爵坐奠于西楹南興復位北面○笙四人立於兩階間磬南北面東上○樂南陔白華華黍○樂終【三終】主人坐取爵詣尊所實爵○執爵興詣西階上南面立○笙長一人北面再拜受爵降復位○主人拜送爵○執事者薦脯醢于席前○笙長坐祭酒立飮卒爵興○授主人爵降復位○獻次笙三人【罍唱】主人執爵詣尊所坐實爵興詣西階南面立○吹笙坐受爵○執事者薦脯醢于席前○次笙坐祭酒立飮卒爵授主人爵降復位○獻三笙畢主人執爵降奠于篚升自阼階西面立○乃間歌魚麗笙由庚歌南有嘉魚笙崇丘歌南山有臺笙由儀【三終】○乃合樂【堂上堂下】關睢葛覃卷耳鵲巢采蘋采蘩○磬北面鼓之○工長興告樂正曰樂備○樂正告于賓曰正樂備降復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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閩華字說 炳庵金駿滎鄭生之名曰海直艮翁命也請余字之余曰以其閩華乎人之生也直聖人敎也晦菴夫子後孔子也尤菴先生後朱子也而其臨歿告戒一生受用亦皆此道也則直之一字聖賢相傳旨訣也後之學聖賢者舍是而何以哉況今世亂不啻百倍於宋之南渡明之末運則爲士者尤當以直字符貼在額上利害禍福之際一刀兩段當生則生當死則死艮翁微意其在是乎然其用功亦只是九容九思四勿三畏而已願閩華學朱宋而進至乎聖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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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司正 主人降立於阼階下東面向相者曰使相爲司正○司正禮辭○主人申請○司正許○主人再拜○司正少退西面答拜○主人升階復位西面立【樂旣備矣衆賓或有解怠以司正監之】○司正詣洗南坐取觶于篚洗觶○執觶興升自西階適阼階上北面立受命于主人○主人曰請安于賓○司正詣西階上北面告于賓○賓禮辭○司正申請○賓許○司正詣阼階上北面告于主人遂立兩楹間以相拜○主人再拜○賓答再拜○主人揖○賓答揖○皆卽席○司正詣尊所坐實觶興降自西階北面坐奠觶興少退拱手小立○執事者薦脯醢○司正坐取觶不祭遂飮卒觶興○遂拜執觶興復中庭位北面坐奠觶退立于觶南○司正乃曰【仰惟國家率由舊章崇尙禮敎今玆擧行鄕飮非專爲飮食而已凡我長幼各相勸勉忠於國孝於親內睦於閨門外比於鄕黨無或愆墮無忝所生】○在位者皆再拜【此下有賓主介獻一節而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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