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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의 자에 대한 설 朴景立字說 사람이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집을 짓는 일과 서로 비슷하다. 용마루는 태극(太極)에 대비되고 귀퉁이를 마주하고 떠받치는 것은 사덕(四德)86)에 대비되고 서까래와 문설주가 종횡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3천 곡례(曲禮)87)에 대비된다. 먹줄, 수평기, 자는 용모와 행동거지를 점검 단속하는 것이고 벽에 회칠하고 무늬를 넣는 것은 문장(文章)이 드러나는 것이고 당(堂)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는 것은 도(道)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기에 모이는 것은 거처의 편안함이고, 종묘(宗廟)와 백관(百官)의 아름다움은 자뢰(資賴)함의 깊음이며,88) 천하의 빈한한 선비를 크게 감싸주는 것은 은혜를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89)이다.그러나 먼저 알맞은 터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면 많은 사물이 모두 똑바로 설 곳이 없게 되니 언제 눈앞에 높이 솟은 이 모습을 보겠는가. 반드시 탁 트이게 하여 막히거나 장애가 되는 우환을 없게 하고 다지고 쌓아서 기울거나 무너질 염려가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하늘에서 비를 내리기 전에 계획을 하고 집을 지으며 길옆에 지나면서 전해주는 다른 말을 끊어 버리고 자신의 부친이 이미 다다른 법도를 생각한다면 넓은 집에 머무르고 바른 자리에 서게 되니90) 아득한 팔황(八荒 온세상)이 모두 내 문지방 안에 놓이게 된다.아, 기초가 있어도 서지 못하는 자가 많다. 하물며 기초도 없이 스스로 수립할 수 있겠는가. 학자가 만약 큰 뜻을 확정하여 성신(聖神)91)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천지를 동체(同體)로 여기지 않는다면 허다한 공부를 장차 어디에서 수립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학문은 반드시 먼저 기초를 갖추어야 하고 기초가 갖추어진 뒤에는 반드시 수립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초를 갖추고 수립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도에 가깝지 않겠는가.나의 벗 박준기(朴準基)가 자(字)를 경립(景立)이라고 하였으니 취한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 人之爲學。與建屋子相似。屋脊方太極。對隅支柱方四德。榱櫨居楔縱橫塡補方曲禮三千。繩墨準尺者。容儀之檢束也。塗墍繪畵者。文章之著見也。升堂入室者。入道之等位也。歌於斯聚於斯。居之安也。宗廟百官之美。資之深也。大庇天下寒士。博施濟衆也。然不先有以辨得其基。則許多物事。都無立定處。而何時眼前見此突兀哉。必須展之拓之。使無阻礙之患。杵之築之。使無傾頹之慮。然後迨天未雨。經之營之。絶道傍携貳之言。念闕考已底之法。則居廣居立正位。而茫茫入荒。皆在我闥矣。嗚呼。有基而不能立者多矣。況無基而能自樹立乎。學者苟不確定大志。以聖神爲已任。以天地爲同體。則多少大功夫。將何自而能樹立哉。要爲學必。先有其基。旣有其基。必要有其立。有基有立。其亦庶幾乎。吾友朴準基字以景立。其取義固在此矣。 사덕(四德) 원래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천지자연의 네 가지 덕, 즉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이르는데, 주자는 이를 사람 마음에 적용시켜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성(性)의 사덕이라 하였다. 《朱子語類 卷6 四端義》 3천 곡례(曲禮) 《예기(禮記)》 〈예기(禮器)〉의 "경례가 3백 가지이고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에서 유래하였다. 자뢰(資賴)함의 깊음이며 맹자가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로써 함은 자득하고자 해서이니, 자득하면 처하는 것이 편안하고 처하는 것이 편안하면 자뢰(資賴)함이 깊고 자뢰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쓰는 데에서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득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孟子 離婁下》 은혜를……것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는 내용이다. 넓은……되니 넓은 집은 인(仁)을, 바른 자리는 예(禮)를 비유하는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는 대장부를 말하면서 "천하의 넓은 집[仁]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큰 도[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그 도를 행하며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해서, 부귀로도 흔들 수 없으며 빈천해도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로도 굽히게 할 수 없는, 이런 사람을 두고 대장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성신(聖神)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크면서도 그 큼을 볼 수 없게 화할 수 있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이르고, 지극히 신묘한 그 성스러움을 측량할 수 없는 사람을 '신인(神人)'이라 이른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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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감찰 강공 묘지명 司憲府監察姜公墓誌銘 공의 성은 강씨(姜氏), 휘는 필영(弼永), 자는 찬서(贊瑞)이다. 세계(世系)는 진주(晉州)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 국자 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의 후손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전해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중엽에 이르러 봉람(鳳覽)이 있으니, 호는 석포(石浦)로, 도승지(都承旨)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고조 택보(澤輔)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증조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태형(泰衡)으로, 호는 도능암(道能庵)이다. 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휘복(彙稪)이다. 부친은 호조 참판에 추증된 학조(鶴照)이다. 모친은 해남 윤씨(海南尹氏)로, 윤규하(尹奎夏)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3월 30일에 부(府)의 유치리(有治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유복자로, 차츰 자라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기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길러 주신 것을 생각하여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심력(心力)을 다 기울였다. 8세때 땔나무를 팔아 등에 쌀을 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만일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으면 시냇가의 나물을 캐고 쌀뜨물을 구걸하여 국을 끓여 올렸다. 이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슬프게 소리내어 우니 이웃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 매양 쌀독이 비면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가 명하면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순종하였고, 어머니에게 병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 지극히 성실하고 측달한 마음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여 행위에 드러났다.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많았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혀를 차며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훗날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밀양 박씨(密陽朴氏) 홍준(弘俊)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박씨는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년에 이르러 집안 살림이 조금 넉넉해졌다. 모친상을 당해 온갖 의례와 절차는 예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하나하나 의례와 절차에 따라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한번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태복(稅服)11)을 입고자 하다가 선유(先儒)의 설을 보고 마침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래도 기일이 되면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소복(素服)을 입고 소식(素食)을 함으로써 종신토록 상을 치른다는 뜻을 부쳤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 매우 독실하여 글방을 짓고 서책을 소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삼고, 스승을 엄선하고 벗을 가려 사귀게 하여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무도한 무리 들이 난을 일으키자12) 자손을 경계하여 신신당부하고 엄히 신칙하여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소모사(召募使)가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정문(旌門)을 세워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서 문에 '의문(義門)'이라고 썼다.공은 기개가 높고 타고난 성품은 낙천적이었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원근의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게 은덕을 베풀었으니, 차마 실정이 아닌 것으로 속이지 않았고 감히 의롭지 못한 짓을 하지 않았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아들은 인형(仁馨), 예형(禮馨), 의형(義馨), 지형(智馨)이고, 손자는 진섭(晉燮), 병섭(井燮), 봉섭(鳳燮)이다. 이외의 손자들은 어리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6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7세이다. 유치리(有治里) 예상등(禮尙嶝) 오좌(午坐)에 장사 지냈다.아, 진섭은 나와 교유한 지 몇 년 되었다. 그는 영특하며 삼가고 조심하여 공이 살아 계실 때 큰 사랑을 받았는데, 공이 별세하고 상례를 마치기 전에 또 이렇게 요절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의형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니,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니 怡愉洞屬효성스러운 사람이라네. 孝子之人질박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니 質實勤儉선배의 자격을 갖춘 부류일세. 先進之倫가르침에는 오로지 경전을 중시하였으니 敎重一經훌륭한 자제들 참신하도다. 蘭玉鮮新예상의 산기슭에 禮尙之麓천추에 향기로운 제물을 올리네. 芬苾千春 公姓姜。諱弼永。字贊瑞。系出晉州。高麗博士啓庸后。文學仕宦。世傳煒燁。爲東方巨族。至中葉。有鳳覽。號石浦。都承旨弘文提學。丙子亂。倡義旅。高祖澤輔。文章名世。曾祖贈司僕寺正。泰衡。號道能庵。祖贈左承旨彙稪。考贈戶曹參判鶴熙。妣海南尹氏奎夏女。以純廟庚寅三月三十日。生公于府之有治里。公以遺腹孤孩。稍長而痛嚴顔之未逮。念慈育之劬勞。艱難拮据。備極心力。八歲賣薪負米。以供親旨。如有未繼。則采溪澗之毛。乞浙米之汁。作羹以進。因不勝悲泣成聲。隣理憐之。每邁空匱。多有助之者。親有命。如恐不及。親有疾。涕泣不離。側其至誠惻怛。根於天性而著於施爲。多有出人之行。聞者無不嘖嘖歎賞曰。此兒其必有後。委禽密陽朴氏弘俊女。朴氏孝養厥姑。夙夜靡懈。至中身。家力稍饒。遭內艱。凡百儀節。問于識禮處。一一遵循。俾無遺憾。嘗以早違嚴庭爲至恨。欲稅其服。見先儒說。而遂不果行。遇忌辰。至誠哀痛。素服素食。以寓終身之喪。敎子孫甚篤。結塾儲書以資其修息。擇師取友以正其趨向。甲午匪類之亂。戒子孫。申申嚴勅。俾不染跡。召募使聞而嘉之。旌門稱賞。因書門扉曰義門。公氣宇軒昂。天性樂易。自內外族戚至遠近朋知。皆歡然有恩。不忍以非情欺之。不敢以非義加之。戊子除司憲府監察。又陞嘉善。男仁馨禮馨義馨智馨。孫晉燮井燮鳳燮。餘幼。丙申二月二十六日終。享年六十七。葬有治禮尙嶝午坐。嗚呼。晉燮從余遊有年矣。其穎悟謹勅甚爲公當日之鍾愛。誰知公歿未終喪。而又此夭逝耶。義馨持家狀。屬余以誌諸幽道者。嗚呼。豈忍辭。銘曰。怡愉洞屬。孝子之人。質寶勤儉。先進之倫。敎重一經。蘭玉鮮新。禮尙之麓。芬苾千春。 태복(稅服) 세월이 이미 지난 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추후에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대공(大功) 이상의 복은 태복을 하고 소공(小功)은 가벼운 복이라 하여 태복을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上》 갑오년……일으키자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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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와 민공 묘지명 謙窩閔公墓誌銘 호남은 문헌(文獻)이 있는 곳으로 시례(詩禮)와 행의(行義)로 저명한 가문이 많은데 겸와(謙窩) 민공(閔公)의 가문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공의 휘는 삼현(三顯), 자는 중덕(仲德)이니, 의암(義庵) 휘 회삼(懷參)의 후손으로, 사월헌(沙月軒) 휘 상동(相東)의 손자이며, 교채와(咬菜窩) 선생 휘 백우(百)의 둘째 아들이다. 선생은 송 문간공(宋文簡公)을 스승으로 섬겼고, 문장과 경술(經術)이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받았으며, 저술로 《심경집해(心經集解)》, 《홍범수해(洪範數解)》, 《주서보주(朱書補註)》가 세상에 전한다. 모친은 나주 임씨(羅州林氏)로, 임세진(林世鎭)의 따님으로, 승지 임붕(林鵬)의 후손이다. 법도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타고난 성품이 곧고 얌전하여 여자로서의 덕성을 매우 잘 갖추어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공은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따라 뜻을 세워 학문하여 백씨(伯氏) 학생공(學生公), 종형(從兄) 진사공(進士公)·참판공(參判公)과 함께 나란히 수업을 받아 명성이 자자하였으니, 사람들이 삼봉팔용(三鳳八龍)13)에 견주었다. 장성하여서는 홍매산(洪梅山 홍직필(洪直弼)), 기노사(奇蘆沙 기정진(奇正鎭)) 두 선생의 문하에서 노닐면서 강론하고 논변하여 더욱 스스로 확충하였다. 오서오경(五書五經)으로부터 염락(濂洛)14)의 여러 서적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의리의 귀착점을 넓혀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을 단속하며 세상일에 응수하고 외물에 응함에 확고하게 이루어진 규범이 있어 평탄히 행하여 발과 눈이 모두 이르고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여 덕기(德器)가 이루어졌으니, 뭇사람들과 아주 달랐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는 군주를 섬기는 계제(階除)이니 선비 된 자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매양 한가한 날이면 공령(功令)과 근체(近體)의 문장에 힘을 기울이니, 문사가 뛰어나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였지만 예부시(禮部試 대과)에서 낙방하였는데 언제나 당락(當落)에 개의치 않았다. 어떤 사람이 뇌물을 주어서 유사(有司)에게 청탁하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락은 하늘에 달렸으니, 내가 어찌 위험한 짓을 하여 요행을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일찍이 춘첩시(春帖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운명에 달린 빈천은 버릴 수 없고, 분수가 아닌 부귀는 구할 수 없다.[有命貧賤不可去, 非分富貴不可求.]"라고 하였다. 매양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단정히 앉아 칠서(七書) 가운데 한 책 및 정자와 주자의 책, 〈이소경(離騷經)〉,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의 글을 돌아가며 암송하였다. 물러나서는 여러 종형제와 책상을 마주하여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종일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겸손으로 자기를 단속하였다. 친족에게는 은애로 대우하고 벗에게는 신의로 대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사람이 되는 도리가 어떠한지, 사람이 독서하는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려 주었는데 곡진하고 간절하여 듣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이에 경전을 가지고 찾아오는 등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일찍이 말하기를 "근세 시속의 풍조가 크게 무너졌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주역》〈규괘(睽卦)〉 상(象)에 '군자가 보고서 같으면서 다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남이 야박하게 하면 나는 후하게 하고, 남이 탐욕을 부리면 나는 청렴하게 하고, 남이 속이면 나는 정도(正道)로 하고, 남이 사사롭게 하면 나는 공적으로 하고, 남이 사치하면 나는 검소함으로 하고, 남이 게으르면 나는 부지런함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를 일일이 자신에게 돌이켜 적용한다면 아마 이욕만 넘실대는 세태에서 저절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세의 주기설(主氣說)에는 조금의 의혹도 없다. 가령 중화(中和)에 대해 말해보자면 중(中)은 미발(未發)의 이(理)인데 이의 체(體)이고, 화(和)는 이발(已發)의 이(理)인데 이의 용(用)이다. 만일 화(和)를 기(氣)로 여기는 것이 근일의 의론과 같다면 이(理)와 사(事)가 각각 양절(兩截)이 되고 분수가 구분되어 기(氣)보다도 중하게 되어 버리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다.무자년(1888, 고종25) 10월 6일에 별세하였으니, 태어난 을해년(1815, 순조15)으로부터 74년이 된다. 현(縣)의 원동(院洞) 괘등등(掛燈嶝)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충주 박씨(忠州朴氏)로, 박효조(朴孝祖)의 따님인데, 눌재(訥齋) 선생 박상(朴祥)의 후손이다. 온순하고 자혜로워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학(), 전(塼)이고, 딸은 이기전(李基琠), 이용헌(李龍憲), 유영주(柳永主)에게 각기 출가하였다.아,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이 말하기를 "안으로 어진 어버이와 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벗이 없으면서 성공하는 자가 드물다."라고 하였다. 지금 교채와(咬菜窩) 선생 같은 어진 아버지가 있고, 임 부인(林夫人) 같은 어진 어머니가 있고, 진사공(進士公)과 같은 어진 형제가 있고, 매산(梅山)과 노사(蘆沙) 같은 어진 스승과 벗이 있으니 비록 성공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갈고닦고 침잠하여 당대에 훌륭한 유자가 된 이유이다. 그런데 도(道)가 시대와 어긋나 시험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유풍과 여운은 집안에서 계승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져 먼 후대에서도 징험되고 법식이 될 것이니, 어찌 당대의 실의(失意)와 득의(得意)를 가지고 실망하거나 의기양양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평리(坪里)에서 참판공에게 인사드리고 나아가 사촌(沙村)에서 공에게 인사드렸는데, 그 기상이 단정하고 엄정하며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점잖은 것을 보았고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 옛날 현인의 법언(法言)와 격론(格論)이어서 완전히 심취하였다. 물러난 뒤에 다시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통한은 비록 간절하지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공의 장자 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순서를 잡아서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복천의 남쪽 福川之南산수가 훌륭하네. 山明水清덕 있는 가문에 인재 모이고 德門聚星온화한 기운 정기를 모으네. 和氣毓精교채와(咬菜窩)는 후손이 있고 菜窩有胤사애(沙厓)는 어진 형이었네. 沙厓難兄선대의 훌륭함에 영향을 받았고 擩染箕裘전범을 계승하였네. 似述典刑초야에서 한가롭게 지냈으나 婆娑邱園감추어진 문채 은연중에 드러났네. 絅錦闇章훌륭한 운치 빼어난 자취를 偉韻逸躅잊을 수 있겠는가. 俾也可忘괘등등(掛燈嶝) 기슭에 掛燈之麓의복을 갈무리하였네. 衣履是藏봄가을로 향기로운 제수 올리니 春秋芬苾자손들이 번성하네. 螽斯繩繩 湖南文獻之地。以詩禮行義。著爲名家者多矣。而謙窩閔公之家。其一也。公諱三顯。字仲德。義庵諱懷參后。沙月軒諱相東孫。咬菜窩先生諱百次子。先生師事宋文簡公。文章經術。望重一世。所著有心經集解。洪範數解。朱書補註。行于世。妣羅州林氏世鎭女。承旨鵬后。以法家遺裔。天資貞靜。壺儀閨範。有女士風。公自幼。遵循庭誨。立志爲學。與伯氏學生公。從兄進士公。參判公。共方連業。聲譽譪蔚。人以三鳳八龍擬之。及長。遊於洪梅山奇蘆沙兩先生之門。講討問辨。益自展拓。自五書五經至濂洛群書。無不淹貫該洽。以博其義理之歸。以之存心行已。以之酬世應物。的有成規。而坦然由之。足目俱到。心口相應。德器成就。大異衆人。嘗曰。料擧是事君階除。爲士者所不可廢。每以餘日。着力於功令近體之文。文詞斐然。見稱一時。屢魁鄕解。屈於禮部。未嘗以得失關心。或勸行關節以干有司。公曰。得失天也。吾豈行險而徼幸者耶。嘗題春帖詩曰。有命貧賤不可去。非分富貴不可求。每日夙興端坐。輪誦七書中一書及程朱書離騷經歸去來辭等書。退而與群從昆季。對床硏討。終日靡懈。以誠敬存心。以謙恭持已。遇族戚以恩愛。待朋友以信義。敎人必告所以爲人之道何如。人所以讀書之意何如。諄諄懇懇。聞者感服。執經踵門。信從日衆。嘗曰。近世俗尙大壞。誠可痛歎。易暌之象。君子以同而異。如人以薄我以厚。人以貧我以廉。人以譎我以正。人以私我以公。人以奢我以儉。人以惰我以勤。如此之類。一一反之。庶幾自援於滔滔矣。又曰。近世主氣之說。此非細誤。如言中和。則中是未發之理而理之體也。和是已發之理而理之用也。若以和爲氣。如近日之論。則理事各成兩截。而分數段落。歸重於氣。其可乎。戊子十月六日考終。距寅降乙亥爲七十四。葬縣之院洞掛燈嶝乾坐原。配忠州朴氏孝祖女。訥齋先生祥后。溫順慈惠。克有婦德。二男三女。嶨。塼。李基琠李龍憲柳永主。嗚呼。呂榮公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而能有成者少矣。今有父之賢如咬菜窩先生。母之賢如林夫人。兄弟之賢如進士公。師友之賢如梅山蘆沙。則雖欲其無成得乎。此所以磨礱沈灌以成一世之偉儒也。道與時違。未有所試。識者茹恨。然遺風餘韻。述之在家。傳之在人。足可以徵式於百世。豈以一時之詘伸爲低仰耶。余嘗拜參判公於坪里。進而拜公於沙村。見其氣象端嚴。動止雍容。終日語皆。古賢哲法言格論。充然心醉。退未再造。而公已辭世矣。靡逮之恨。雖切何補。公長子嶨。奉家狀以請幽道之銘。謹据狀而爲之序次焉。銘曰。福川之南。山明水清。德門聚星。和氣毓精。菜窩有胤。沙厓難兄。擩染箕裘。似述典刑。婆娑邱園。絅錦闇章。偉韻逸躅。俾也可忘。掛燈之麓。衣履是藏。春秋芬苾。螽斯繩繩。 삼봉팔용(三鳳八龍) 당(唐)나라 설원경(薛元敬)이 젊어서 숙부 설수(薛收), 족형(族兄) 설덕음(薛德音)과 같이 문재(文才)로 이름이 났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하동(河東)의 삼봉(三鳳)이라고 하였다. 《舊唐書 薛收列傳》 동한(東漢) 때 순숙(荀淑)에게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 등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다고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고 불렀다. 《後漢書 荀淑列傳》 염락(濂洛)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 등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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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헌 권공 묘지명 聾軒權公墓誌銘 권씨(權氏)는 본래 김씨(金氏)이니 바로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이다. 휘 행(幸)이 있었으니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운 공으로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대대로 문벌 좋은 가문으로 이름나 우리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휘 단(漙)이 있으니, 호는 국헌(菊軒),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기를 건의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성리학은 그가 창도하여 밝힌 것에 힘입었다. 고조는 통덕랑(通德郞) 진성(震成)이고, 증조는 덕의(德義)이고, 조부 동의(東誼)는 호가 양졸당(養拙堂)인데, 한평생 남몰래 베푼 은덕(恩德)이 있었다. 부친은 종수(宗燧)이다. 처음에 청주 한씨(淸州韓氏) 한택기(韓宅基)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후취(後娶)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한정(柳漢鼎)의 따님이다.공은 순조(純祖) 갑자년(1804, 순조4) 12월 16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고, 성격과 도량은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8세에 부친상을 당해 사모하는 마음이 망극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고기 잡고 땔나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어느 날 마을의 글방을 지나다가 아이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고 모친에게 고하여 나아가 배우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네가 가서 배우면 집안일은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낮에 일하고 저녁에 독서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부인이 허락하였다. 이날 밤에 즉시 글방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글방의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소학(小學)》을 주었다. 이로부터 엄격하게 학습 과정(課程)을 세워 밤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해가 뜨면 일어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고 땔나무를 등에 진 채로 암송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그 학업에 진전이 있어 공부만 하는 동학보다 나았다. 《소학》을 다 읽었지만 오히려 반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혹 다른 책을 배우기를 권유하자, 공이 말하기를 "많은 책을 보아 정밀하게 익히지 못하느니 적은 책을 보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 낫다. 또 이는 사람 노릇을 하게 하는 책이니 평생 읽더라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할까 근심스러운데, 어찌 구두(句讀)를 대략 이해하고 갑자기 다 읽었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20세가 넘어도 혼인을 서두를 생각을 하지 않자, 혹자가 너무 늦은 것을 염려하니, 공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30세에 가정을 이룬 것과 비교하면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24세에 비로소 하동 정씨(河東鄭氏) 집안과 혼인하였으니, 바로 정효렬(鄭孝烈)의 따님이다. 어느 날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옛날에 가난한 자 중에는 점을 쳐 주고 돈을 받거나 약을 팔아서 생계를 꾸린 자가 있었다.15) 이는 비록 선비의 평소 일이 아니지만 역시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는 것이니, 땔나무를 하고 품팔이를 하는 것보다 매우 편할 것이다."16)라고 하고, 마침내 간간이 의학(醫學)을 섭렵하였다. 한편으로는 자급하려는 계책이고 한편으로는 널리 구제하려는 계책이었으므로 다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고 음덕을 쌓아 전후로 대비가 많았다.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어머니를 섬길 적에 정성과 힘을 다하였으니, 몸을 편안케 해 주는 물건을 두루 제공하지 않음이 없었다.모친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적에는 거의 노쇠한 나이였는데도 예법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는 데 이르렀다. 어느 날, 허약해져서 병들었는데, 아들들이 고기를 올려 먹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목숨을 상하게 하는 것이 실로 불효이다. 그러나 나의 병은 목숨을 상하게 할 염려가 있지 않으니, 어찌하여 좋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어 예법을 무너뜨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은 관로(官路) 근처이고 점사(店肆)와 가까웠다. 마침내 천운산(天雲山)에다가 집을 지어 만년에 한가롭게 지낼 계획을 세웠다. 이윽고 조공 병만(曺公秉萬)도 와서 이웃이 되어 밤낮으로 교유하며 서로 매우 즐겁게 지냈다. 뜰에는 다른 물건이 없고 오직 떨기로 자라는 국화 몇 이랑만 있었다. 매양 날씨가 추워지는 늦가을에 꽃이 만발하면 문득 배회하며 시를 읊조리며 그지없이 사랑스러워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도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이 국화를 몹시 사랑한 뜻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 가까이에는 운림(雲林)과 천석(泉石)의 승경지가 많아서 매양 나막신 신고 지팡이 짚고서 종일 오르내리며 아득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몸가짐이 매우 엄격하여 거만한 적이 없었고, 사람을 대할 적에는 매우 공경하여 농담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아무리 한량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도 공을 보면 반드시 자신을 단속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사기(史記)》를 우선하여 문장을 짓는 계책을 본받지 않았다. 이어서 경계하여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고 실제 일이니,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문장을 짓고 부귀해지기를 구하는 것은 그다지 돌아볼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음식은 배고픔을 면할 만큼만 먹고, 의복은 추위를 가릴 만큼만 입으면 된다. 화려하고 진귀한 물건은 다만 덕을 잃고 화를 초래할 뿐이다. 더구나 입는 것은 법복(法服)이 아니고 사용하는 것은 토산품이 아닌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성격은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혹 저술한 것이 있으면 번번이 자질구레한 시문은 던져 버리고 이르기를 "고인의 저술에 갖추어져 있다. 많으면 남고 되풀이하면 어지럽다. 몸소 실행하여 실제에 힘쓰라."라고 하였다. 겉을 보기 좋게 꾸미거나 화려한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 고종11)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을해년(1875) 9월 24일에 별세하였다. 현(縣)의 남쪽 호동(壺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6인이니 종익(鍾翼), 종우(鍾禹), 종모(鍾謨), 종길(鍾吉), 종열(鍾悅), 종규(鍾規)이고, 손자는 7인이니 홍수(弘洙), 인수(寅洙), 학수(學洙), 갑수(甲洙), 용수(龍洙), 만수(萬洙), 익수(益洙)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춘식(春植)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아, 춘식은 나와 교유한 지 몇 해 되었는데, 빼어나고 삼가함을 보니 참으로 법도 있는 가문의 유풍이 있었다. 이는 그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실로 응당 원인이 있고,17) 석과(碩果)의 종자(種子)18)가 되는 까닭이 또 처음부터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과 인을 쌓았지만 積善累仁보답을 받지 못했네. 不食其報후손에게 남겨주었으니 以遺後昆남은 경사 널리 미치리라. 餘慶斯普 權本金氏。卽新羅宗姓也。有諱幸。佐麗太祖有功。賜姓權。世著勳閥。爲東方巨族。有諱漙。號菊軒。諡文正。嘗以朱子四書集註。建白刊行。東方性理之學。其倡明之力也。高祖震成通德郞。曾祖德義。祖東誼號養拙堂。世有隱德。考宗燧。初娶淸州韓氏宅基女。系娶高興柳氏漢鼎女。公以純祖甲子十二月十六日生。天姿挺異。性度寬仁。八歲遭外艱。孺慕罔極。家貧漁樵供母。事無鉅細。必稟而行。一日過村塾。見群兒讀書。告於母夫人。欲孰學。夫人曰。汝若就學。家務委誰。對曰。晝而幹務。夜而讀書何如。夫人許之。是夜卽就塾請敎。塾師奇之。授以小學書。自是嚴立課程。逐夜無闕。日出而作。帶經而鋤。負薪而吟。未幾何。其業之進。勝於同學之專業者。讀小學訖。猶循環不已。或勸授他書。公曰。多之而粗。不若寡之而精。且此書是做人樣子。平生讀之。猶患不給。豈可粗解句讀而遽云了業耶。年踰二十。未嘗有汲汲營娶之意。或慮其太晩。公曰視古人三十而有室。不其太早乎。二十四始委禽於河東鄭氏之門。卽孝烈之女也。一日喟然歎曰。古之貧者。有賣卜賣藥以資其生者。此雖非士者雅業。其爲坐而讀書。則便於負薪行傭遠矣。遂間涉醫學。一以爲自給之計。一以爲廣濟之策。其保活殘命。積累陰德。前後備多。嘗恨早孤。未得逮養。事慈幃。罄竭誠力。便身之物。無不周給。及其遭故。年幾衰艾。而致毁踰禮。一日羸疾作。諸子進肉物。勸之食。公曰。傷生固爲不孝。然我疾非有傷生之慮。則何爲而恣食珍羞以壞禮防乎。所居傍官路。近店肆。遂卜築於天雲山中。爲晩年養閒之計。己而曺公秉萬。亦來結隣。日夕遊從。相得甚歡。庭除之間無他物。惟有嚴菊數畦。每當寒天晩節。開花燭漫。輒徘徊吟哦。愛之無己。因曰。吾今而後。知陶靖節偏愛之意也。近居多雲林泉石之勝。每一笻一屐。竟日遊陟。悠然忘歸。持身甚嚴。未嘗箕踞。接人甚敬。未嘗戱謔。是以鄕里間。雖號慢浪之人。見公必加斂飭。敎子孫。必以小學爲先。不效時人先史記作文詞計。因戒之曰。事親敬長。修身謹行。此是人生本分實事。吾之所望於汝等者也。若其作文章求富貴。甚非所願也。又曰。食取克腹。衣取蔽寒。若華嚴珍。怪之物。適以喪德而速禍。況所着非法服所用非土物乎。汝等戒之。性不好著述。或有所述。輒投之散墨曰。古人之述備矣。多之則剩反之則亂。其躬行務實。不求外華。類如此。甲戌以壽陞通政。乙亥九月二十四日考終。葬于縣南壺洞前麓酉坐原。男六人。鍾翼鍾禹鍾謨鍾吉鍾悅鍾規。孫男七人。弘洙寅洙學洙甲洙龍洙萬洙益洙。曾玄以下不盡錄。曾孫春植奉家狀。託以幽道之銘。嗚呼。春植從余游有年。見其秀爽謹飭。儘有法家餘風。此其靈芝醴泉。固應有自。而所以爲碩果種子者。又未始不在於此也。銘曰。積善累仁。不食其報。以遺後昆。餘慶斯普。 점을……받으며 군평(君平)이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전한(前漢)의 술사(術士) 엄준(嚴遵)은 촉 땅 성도(成都) 시내에서 점복(占卜)으로 생활하면서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앉아 《노자(老子)》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한다.《漢書 王貢兩龔鮑傳》후한(後漢)의 한강(韓康)은 산에서 약초를 캐 장안(長安)에서 팔다가, 약을 사러 온 여인이 자기 이름을 거론하자, 숨어 살려는 본의가 어긋났다며 패릉산(霸陵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고 한다.《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이는……것이다 《擊蒙要訣》 〈處世章〉에 "과거 공부가 비록 이학(理學)과는 다르나 역시 앉아서 글 읽고 글 짓는 것이다. 농사짓고 품팔이하고 쌀을 등에 지는 것보다는 백 배 이상 편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신령한……있고 좋은 조상이 있어야 좋은 자손이 있다는 뜻이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라고 하였다. 석과(碩果)의 종자(種子) 평생에 자신의 복을 다 누리지 않아 자손이 그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역》〈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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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여에게 답함 答李寬汝 10월이 다하려 하고 추위의 위세가 맹렬한데 가르치고 배우면서 지내는 안부가 계절에 맞추어 편안하신지 그리운 마음 늘 지극합니다. 계원(啓元)은 결국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총명함과 깨달음이 실로 비통하기만 합니다. 지난날 병환이 위독할 때 편지를 보내 작별 인사를 청하기에 마침내 경립(景立) 등 여러 벗과 찾아갔습니다.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귀공명은 정해진 명이 있으니 추구하지 못하였고 평생에 걸친 포부와 소망이 궁리(窮理)와 수신(修身)이었습니다. 천지 사이에 헛되이 왔다 가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제 병세가 이와 같으니 분명히 이 세상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장(吾丈)께서는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자기 선인(先人)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는데, 저는 병세가 매우 위급한 것을 보고 물러나 즉시 행장을 지어 이달 14일에 비로소 부쳐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생사가 위급하고 정신과 기력이 다한 시각에도 오직 학문에 관한 일만은 간절히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품었던 마음을 살펴보자니 매우 비통합니다. 바라건대 오당(吾黨)의 익우(益友)들은 이렇게 한가하고 탈이 없는 때를 맞아 더욱 힘을 쏟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 벗이 죽음을 맞으면서까지 간절하게 잊지 못했던 정의(情意)를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익중(翊中)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벗께서 먼저 논의를 꺼내어 병 중에 있을 때는 먹을 것을 도와주고 죽은 뒤에는 모여서 조문하는 의절을 마련하셨다니, 가까이 교제했던 사이에 서로를 돌보는 후의(厚意)에 감복(感服)하였습니다. 일전에 보낸 익중의 편지는 혹시 보셨습니까? 기근이 비록 심하더라도 제힘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필 이렇게까지 근심을 끼치겠습니까. 다시 여러 형과 의논하여 거둔 물품을 다시 나누어 돌려주십시오. 간절히 바랍니다. 陽月垂盡。寒威漸緊。卽惟斅學節宣。以時勝適。溯仰每至。啓元竟作泉臺人。其聰明開悟。實可痛傷。何日病劇時。走書請訣。遂與景立諸友往之。握手語曰。富貴功名。有命不可求。平生志願。是窮理修身。庶不爲天地間虛來底人。今病勢如此。其不得爲陽界人決矣。惟吾丈益加勉勵也。且以其先人行狀托之。余見病勢甚危。退卽構之。今十四日始付去。而此人乘化。在十五日。其入覽與否。未可知也。嗚乎。雖在死生危急神氣耗奪之時。而惓惓不忘。惟在於學問一事。究其情曲。極可悲也。願吾黨諸益。迨此閒暇無故之時。益可勉焉。又以慰此友臨歿惓惓不忘之意也。昨得翊中書。自吾友發論。病時有饌物之助。歿後有會哭之節。無非親契間相厚之義。感服感服。日前所與翊中書。或見之耶。飢饉雖甚。而私力可支。何必貽慮至此也。更與僉兄議之。所收之物。更爲散還也。企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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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견에게 답함 答李光見 한결같은 마음을 독실히 지켜 세속의 어지러운 일에 이끌리지 않으시니 좋은 일입니다. 우러러 기상(氣象)을 생각하자니 저도 모르게 청상(淸爽)함이 부럽습니다. 지금부터 지속해 나가서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용납하지 않게 된다면 공자(孔子)ㆍ안자(顔子)의 즐거움,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ㆍ정자(程子 정호(程顥))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은 인품37)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을 꾸리는 여가에 펼쳐 놓고 감상하는 것이 근래에 「홍범(洪範)」에 있으니 우리 벗께서 심력을 다하는 근실함은 일반 사람이 미칠 수 없습니다. 어찌 옛날의 위 무공(衛武公)38)과 거원(蘧瑗)39)만이 미덕(美德)을 독차지하겠습니까. 의림(義林)은 타고난 기질이 매우 박약하고 또 평소에 배양한 힘도 없습니다.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쇠퇴한 정도가 더욱 심해서 비록 애써 일으켜 세우고자 하더라도 곧 다시 옛날대로 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벗께서 저를 위해 채찍질하여 때를 놓치고 상황이 지나버린 뒤 끝에 터럭만큼의 수확이라도 거두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기를 처음부터 바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謹守一心。不爲俗撓所牽引。好事好事。想仰氣象。不覺淸爽可艶。從此接續。至於些子不容。則孔顔之樂。孟子之浩然。周程之光風霽月。可以見之矣。幹務餘力。所以被玩。近在洪範。吾友心力之勤實。非常調人可及。衛武蘧瑗。豈惟專美於古也。義林稟氣甚薄。又無素養之力。至於老而頹靡益甚。雖欲作力扶竪。而旋復如故。奈何奈何。願吾友爲之鞭策之。俾有絲毫之收於失時過境之餘者。未始非區區之望也。 화창한……인품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일컫기를, "인품이 매우 높아서 가슴속의 시원함이 마치 광풍제월과 같다.【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하였고, 주희는 정명도(程明道)의 군자다운 모습에 대해 "봄기운처럼 따뜻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웅장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고 칭송하였다. 《宋史 卷427 周敦頤列傳》 《朱子全書 卷66 六先生畫像贊 明道先生》 위 무공(衛武公) 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울 만한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고 전한다. 《시경(詩經)》 〈위풍 기욱(淇奧)〉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시로 알려져 있다. 거원(蘧瑗)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로 자가 백옥(伯玉)이다. 《장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육십이 되는 동안 육십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蘧伯玉, 行年六十而六十化.】"라고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나이 오십에 사십구 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 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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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오【현옥】에게 답함 答金豐五【顯玉】 《답문편(答問編)》70)은 이미 일을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그 애를 쓴 마음과 진심 어린 정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형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아마도 여러 무덤이나 책 상자에 들어있는 자질구레한 시문(詩文)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발문(跋文)을 지으라는 부탁은 아우가 적절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대곡(大谷)71)이 죽은 뒤 이미 해가 세 번 바뀌었지만, 체백(體魄)이 여전히 낮은 땅속에 있으니 이것 또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형께서 천 리 밖에서까지 글을 거두어들인다고 들었습니다.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가상(可尙)하여 구름 속의 방장산(方丈山)이 한 층 더 높아졌습니다. 유문(遺文)은 몇 권이나 편집하셨습니까? 보고 싶은 마음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보내주신 정사시(精舍詩)와 서문(序文)을 여러 번 읊조리니 완연하기가 마치 이 몸이 방장산 위에 있자니 산의 기상(氣象)이 천만 가지로 변하여 빽빽하게 주변을 두르고 있는 듯합니다. 방장산은 평소에 선옹(仙翁)의 굴혈(窟穴)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하루아침에 문교(文敎)가 밝아지고 도리를 강설하는 지역이 되어 천고에 황당한 이야기를 깨트리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조정에 나가지 못하는 선비는 산림(山林)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산림의 즐거움을 어찌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겠습니까. 노형(老兄)께서는 어떤 마음과 어떤 능력을 지녔기에 근실하게 고인을 따르는 것이 매사에 이처럼 우뚝한 기상을 보이십니까? 내년에 가려는 계획을 따르게 된다면 방장산의 뛰어난 천석(泉石)이 혹여 저속하고 비루하다고 저를 가로막지나 않을까요? 애초에 형의 경률(瓊律 상대방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고 싶었지만, 인편의 재촉을 받아 우선 그만두었습니다. 答問編聞已了緖。其苦心血誠。令人斂衽。非兄與艾山。此書幾不爲諸冢巾衍中散墨耶。跋語之託。弟非其人。豈敢爾也。大谷之沒。三燧已改。而體魄尙在淺土。此亦吾儕之責也。奈何奈何。聞兄千里收文。風義可尙。雲裏方丈。更高一層矣。遺文編得幾卷耶。願見之心不啻飢渴。俯示精舍詩若序。諷詠數回。完然若身在方丈山上。氣像萬千。森羅左右也。方丈素以仙翁窟穴。有名於天下。豈知一朝爲文明講道之區。而破其千古荒唐之說耶。士之不得於朝者。山林。然山林之樂。豈人人所可得。老兄以何心力每事勤遵古人若是磊落耶。來歲行。若如所料。則方丈泉石之勝或不以俗累見拒耶。瓊律初欲賡呈爲便人所促姑爲中止耳。 답문편(答問編) 《답문유편(答問類編)》을 가리킨다. 기정진(奇正鎭)이 옛 지기 및 문인들과 서찰로 문답한 학문적 내용을 분류해 엮은 책으로 목판본이며 15권 6책으로 이루어졌다. 1902년 단성(丹城)에서 기양연(奇陽衍),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 등 문인들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 1835~1885)의 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대곡리(大谷里)로 이사하였고, 27년간 기정진의 문하를 왕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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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행오72)【달삼】에게 보냄 與安行五【達三】 강가의 이별이 매우 총망(悤忙)하였고 천 리 멀리 산과 바다로 헤어진 것이 한자리에 모였던 친분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은 역시 마음과 뜻이 자연스럽게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다행스러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날 강가에서 길을 떠나고부터 궁벽한 바닷가에 눈바람이 몰아쳤는데 한 조각 조그만 배로 조천(朝天 제주시 조천리(朝天里))까지 무사히 당도하셨습니까? 소식이 아득하니 잠시도 걱정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학문과 덕행을 닦는 도리는 끊임없이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물러나 스스로 학문을 닦아 헛된 명성으로 결말이 나지 않는다면 의지하고 서로를 보면서 감동하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좌하(座下)께서는 남쪽 지역의 시골 모퉁이에서 몸을 일으켜 천 리 멀리 북쪽으로 유학을 오셨으니 뜻이 장대하다고 이를 만하고 성의가 독실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어찌 언언(言偃)73)과 진량(陳良)74)만 옛 시대에서 미명(美名)을 독차지하겠습니까. 바라건대 힘써 노력하여 우리 선생께서 권애(眷愛)하신 뜻에 부응하고 이 영주(瀛州 제주도)의 시골 모퉁이가 문교(文敎)에 밝고 도리에 앞장서는 고을로 이름을 드날리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이우(李友) 경운(慶雲)은 비록 평소 교분은 없지만 우러러 흠앙한 지 오래입니다. 그와 더불어 책상을 나란히 하고 마주 앉아 토론한다면 날로 서로에게 좋은 점을 본받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영윤(令允)은 자질이 매우 아름다우니 세속인들이 자제를 가르치는 방도로 가르치지 마시고 한결같이 《소학(小學)》의 예에 따라 날로 북돋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江上一別。非不悤劇。而山海千里。使不失一席雅分者。亦聲氣自然之應也。何幸如之。自江上那日啓程。而風雪窮海。一片孤帆。好抵朝天耶。信息杳然。是庸耿耿。吾儕所居落落。其於切磋之道。縱未源源。惟當退而自修。不爲虛聲所歸。則其所以依藉觀感。豈淺淺哉。惟座下崛起南隅。千里北學。其志可謂壯。而其誠可謂篤矣。言偃陳良。豈專美於古也。願克加勉旃。以副我先生眷愛之意。而使此瀛州一隅。擅爲文明倡道之鄕。如何。李友慶雲。雖無雅分。傾仰則久矣。與之連丌對討。日有相觀之益耶。令允才質甚佳勿以世俗所以敎其子弟者。敎之。而一依小學例。日加栽培。如何。 안행오(安行五) 행오는 안달삼(安達三, 1837~1886)의 자이다. 안달삼의 호는 소백(小柏)이며 제주도 조천(朝天) 출신으로 기정진의 문인이다. 언언(言偃)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정사에 능했던 제자이다. 자(字)는 자유(子游)이고 오(吳)나라 사람이다. 노(魯)나라 무성(武城)의 원으로 있으면서, 담대멸명(澹臺滅明)이 어진 사람임을 알고 등용하였다. 진량(陳良) 전국 시대 비속(鄙俗)한 남초(南楚) 지역 사람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진량은 초(楚)나라 사람인데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사모하여 북쪽으로 가서 중국에서 공부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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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4 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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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 오공에 대한 제문 祭竹坡吳公文 오호라! 공이 이 세상을 버린 지 세월이 이미 2년이 지나 묘소의 풀이 이미 묵었으니, 예로는 비록 곡하지 않아도 되지만 궤연이 아직 철거되지 않았으니, 정을 말할 수 없겠는가.나는 공과 나이는 같은 연배가 아니고 사는 곳은 또 차이가 나지만 그 취미가 같고 교분이 친밀함은 교칠(膠漆)94)과 같네. 만년에 식구들을 데리고 살면서 오봉산(五峯山)의 풍월을 마주하여 사시로 강마하였고, 영정(詠亭)95)에 함께 모임에 의관이 정연하였고, 나란히 경상 우도를 찾아다니며 자못 유람하며 감상하는 흥취를 다하였고, 천태산(天台山)96)으로 행차하여 이별의 회포를 펼쳤네.오호라! 운명이 아름답지 못하니 서설(棲屑)97)의 외로움을 염려하고 나이가 노년이 되어가니 신관(神觀)이 움츠러드는 것이 걱정이니, 누가 알았으랴 한 번의 병으로 천고에 문득 막힐 줄을!재작년 봄에 영남의 벗 최숙민(崔琡民)98)·정재규(鄭載圭)99)·권기덕(權基德)100) 등 여러 사람이 이 고을을 지나면서 인하여 나와 함께 들어가 궤전(几前)에서 곡하였으니, 고인이 이른바 "그 사람을 생각하여 그 곳에 이르니, 그 곳은 있지만 그 사람은 없네."라는 것101)이 정히 이 때의 정경과 합하여 여러 벗들이 슬픔이 넘쳐나 실성하지 않음이 없었네. 공의 영령은 또한 천리에서 좋은 벗들이 온 것을 알아 이 때문에 더욱 감격하여 슬퍼하시겠는가?오호라! 이 몸은 천지가 맡긴 기여서 영췌(榮悴)와 개락(開落)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아 순응하여 받아들일 뿐 나의 의사와 상관이 없으니, 일체의 모든 일을 따질 것이 없네. 또 저승에 대한 말은 참인가, 망령된 것인가? 망령된 것이라면 내 장차 끊임없이 만물의 떠도는 기운과 함께 태허(太虛)의 망망(茫茫)한 가운데 동화되어 털끝만큼도 얽매임이 없을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참이라면 공의 집안의 선친께서 이미 응당 여기에 계실 것이니, 슬하에 나아가 모시면서 당시에 다하지 못하였던 한을 갚을 수 있을 것이네. 나의 선친과 그대의 선친께서는 이승에서 좋은 벗이었으니 저승에서도 또한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인데, 나 또한 늙어 세상의 빚을 갚고 저승에서 선친을 따라 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두 집안의 부자와 두 세대의 좋은 벗이 저승에서 장차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잡고서 천만년의 무궁한 유람을 할 것이니, 어찌 오늘 유명 간에 잠시 막히게 된 것을 한으로 여기겠는가. 嗚呼。公之棄斯世也。日月已再期矣。墓草已宿。禮雖不哭。几筵未撤。情可無言。吾於公齒非輩行。居又參差。而其臭味之孚。契義之密。如膠如漆。晩年挈寓相對。五峯風月。四時講磨。共聚詠亭。衣冠秩秩。聯筇嶠右。頗盡游賞之趣。枉駕天台。爲敍別離之懷。嗚呼。命道不媚。念棲屑之煢煢。年齡垂暮。憂神觀之蹙蹙。誰知一疾不起千古奄隔哉。昨昨春。嶺友崔琡民鄭載圭權基德諸人。行過此邑。因與我入哭几前。古人所謂思其人至其處。其處在其人亡者。正合此時情景。諸友無不哀溢失聲。公之靈。亦知千里好友之來。而爲之一倍感愴耶。嗚呼。此身是天地之委氣也。榮悴開落。有不在我。順而受之。無容我焉。則一切萬事勿論可也。且冥府之說。眞耶妄耶。妄耶則吾將與萬物遊氣。混混同化於太虛茫茫之中。無纖毫係累。豈不快哉。眞耶則公家先君。已應在此。趨侍膝下。可以酬當日未逮之恨矣。鄙先君與尊先君。陽界好友。在陰界亦應相從。吾亦老矣。致還世債。下從先君將有其日。二家父子。兩世好友。將倂臂携手於泉臺之間。以爲萬萬年無窮之遊。豈以今日幽明小小阻隔爲恨哉。 교칠(膠漆) 부레풀과 옻나무의 칠처럼 뗄 수 없는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영정(詠亭) 영귀정(詠歸亭)으로, 정의림(鄭義林)이 강학을 위해 1893년 12월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會松里)에 건립한 건물이다. 여기에 아홉 성인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다. 천태산(天台山):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천태리에 있는 산이다. 서설(棲屑) 일정한 거처 없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두보의 시 〈영회(詠懷)〉에 "지친 몸 구차히 계책 생각하지만, 그저 분망할 뿐 베풀 곳이 없어라.[疲苶苟懷策, 棲屑無所施.]"라고 하였다. 최숙민(崔琡民) 1837∼1905. 자는 원칙, 호는 계남·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권기덕(權基德) 1856∼1898. 자는 자후(子厚),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저서로는 《삼산유고(三山遺稿)》가 있다. 고인이……것 《자치통감강목》 권10 〈한 장제 건초(漢章帝建初)〉에 "황제가 동평에 이르러 헌왕을 추념해서 그의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분을 사모하여 이 지방에 왔으나 살던 곳만 남아 있고 이분은 안 계시다.' 하고는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帝至東平, 追念獻王, 謂其諸子曰思其人, 至其鄉, 其處在, 其人亡, 因泣下沾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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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원102)에 대한 제문 祭文啓元文 태허(太虛)의 광대한 기가 오르내리며 변화하고 움직여 일찍이 그친 적이 없는데, 맑고 탁하며, 순수하고 섞이며, 길고 짧으며, 통하고 막히는 구분이 생긴다. 이 기를 타고난 사람이 지혜롭고 어리석으며, 어질고 어질지 못하며, 장수하고 요절하며, 궁하고 영달하는 것이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하·은·주 삼대(三代) 이후로 대박(大檏)이 날로 흩어져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장수하고 영달하는 것은 아니며, 어리석고 어질지 못한 사람이 반드시 요절하고 궁한 것은 아니어서 종종 총명하고 걸출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뜻을 가지고도 펼치지 못하고 중도에 요절하니, 기수(氣數)가 떳떳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군은 먼 시골에서 우뚝 일어나 천품이 총명하고 일찍 스승의 문하에서 배워 문로가 이미 발랐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깊은 뜻과 신심(身心)과 성경(誠敬)의 오묘함으로부터 음양의 소장(消長)과 사물의 상수(象數)에 이르기까지 궁구하지 않음이 없어 차례로 펼치고 넓혀서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는 실상103)이 있었는데, 어찌 바야흐로 자라는 나무가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갑자기 풍상에 꺾이게 될 줄 알았으랴!의림(義林)은 화를 당한 끝에 가난과 병이 날로 심해져 다시는 사방으로 행차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여 계원(啓元)과 아침저녁으로 상종하여 다소의 구경(究竟)104)의 효과를 거두어 선친[先人]과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만분의 일의 뜻이나마 저버리지 않으려 하였는데,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 하시는지요? 능운(凌雲)105) 한 편은 단지 어루만지며 애석해 하는 마음만 간절하고 양춘(陽春)106)의 고상한 곡조는 독창(獨唱)의 음인 줄 누가 알겠는가?군이 병이 위독할 때 나를 불러 영결하기를 "지업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문득 죽게 되었으니, 오직 오장(吾丈)께서는 더욱 면려하여 우리 두 사람이 상종한 뜻으로 하여금 길이 후세에 말할 것이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오호라! 기가 빼앗기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여 호흡이 가물가물하였는데도 오히려 또 나를 선으로 면려하였으니, 내가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감동할 줄 모르겠는가. 다만 계원의 뜻을 보건대, 처창(悽愴)하고 불평한 기색이 조금 있었으니, 소년의 씩씩한 기상으로 갑자기 이런 지경을 만남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만고에 함께 그러한 것이니, 수명의 많고 적음과 세상 빚을 갚고 못 갚는 것은 다만 그 사이의 소소하게 빠르고 늦는 일일뿐이다. 고금에 어찌 일찍이 일을 마쳤던 사람이 있었던가? 오직 눈을 감는 날이 바로 일을 마치는 때이네. 공자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하였고, 또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이 적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말해 보건대, 알려짐이 없이 장수하는 것은 알려짐이 있고 요절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그 사이에 또 장수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공자의 제자 안연[子淵]과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더구나 물아가 일체이고 고금이 한 순간이니, 한 순간 가운데 그 궁달[窮榮]과 요수(夭壽)를 논하는 것은 또한 구구하지 않겠는가. 대자연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은 입술이 합하듯 차이가 없어 줄지어 왔다가 양양하게 떠나니, 나는 계원의 영령이 반드시 어두운 저승에서 슬퍼하지 않을 것이 있음을 알겠네. 太虛坱圠之氣。升降推盪。未嘗止息。而淸濁粹駁脩短通塞之分生焉。人之稟是氣者。所以有知愚賢不肖壽夭窮榮之不齊也。然三代以降。大樸日散。賢知者。未必壽而榮。愚不肖者。未必夭而窮。往往有聰明魁偉之才。齎志未申。中道夭折。氣數之反常。一至於此耶。君崛起遐隅。天資穎悟。早從師門。門路已正。自天人性命之蘊。身心誠敬之妙。以至陰陽消長。事物象數。無不深究。次第展拓。有闇然日章之實。豈知方長之木。秀而不實。遽爲風霜所摧折哉。義林禍故之餘。貧病日甚。其不得復爲四方之行決矣。擬與啓元晨夕相從。以收多少究竟之效。庶不負先人先師萬一之遺意。天乎胡忍爲此。凌雲一篇。只切撫惜之心。陽春高調。誰知獨唱之音。君之病劇也。速余相訣曰。志業未就。中途奄逝。惟吾丈益加勉勵。使吾兩人相從之意。永有辭於來後也。嗚乎。氣奪神禠。呼吸奄奄。而猶且勉人以善。我非木石。寧不知感。但見啓元之意。微有悽愴不平之色。以少年壯氣。遽遭此境安得不然也。然有生有死。萬古同然。壽限之多不多。世債之了未了。特其間少少早晩事耳。古往今來。何嘗有了事底人惟其瞑目日乃是了事時孔子曰朝聞道。夕死可也。又曰。老而不死賊也。由此言之。無聞而壽。不如有聞而夭。若其間又欲壽考。則此是子淵伯魚所不得之事也。況物我一體。古今一息。一息之中。論其窮榮脩短。不亦區區乎。大化爲徒。脗然無間。于于而來。洋洋而去。吾知啓元之靈。必有不戚戚於冥冥之中者矣。 문계원(文啓元) 문송규(文頌奎, 1859∼1888)를 말한다. 자는 계원, 호는 귀암(龜巖)·면수재(勉修齋),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은은하되……실상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구경(究竟) 불가(佛家)의 용어로, 최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 혹은 최고의 원리(原理)를 말한다. 능운(凌雲) 능운필(凌雲筆)로, 필력이 굳세어서 속태(俗態)를 벗어난 글씨나 문학 작품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희위육절구(戲爲六絶句)〉에 "유신의 문장은 노련하고 완성되어, 구름 뚫는 굳건한 붓 종횡으로 치달리네.[庾信文章老更成, 凌雲健筆意縱橫.]"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1》 양춘(陽春)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로, 상대방의 시를 칭찬할 때 쓰는 용어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곡(下里巴人曲)을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다음으로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다음으로 양춘백설가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어, 곡조가 더욱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文選 卷23 對楚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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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석【복기】에게 답함 答徐元陽【復基】 세시(歲時)의 왕래로 인하여 가까이 사는 벗들은 모두 소식을 들었지만, 영평(永平)의 고인(高人 수신인을 말함)께서는 어떤 상황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정감이 담긴 편지를 받으니 궁벽한 음지에서 햇빛을 보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곤궁한 재력(財力)으로 천애지각(天涯地角)에 살고 있으니 몸소 나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정담을 나누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곧 서신만이 서로 따르며 가깝게 지내는 방도입니다. 하물며 안부를 묻는 외에 또 강론과 사색에 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끊임없이 종이 폭을 채우니,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계발하도록 하는 방도로 볼 때 편지가 대면하는 것에 못미친다고 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여러 조항 운운한 것은 노형(老兄)의 말씀이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만물을 생(生)함과 사람의 마음이 인(仁)한 것은 본래 두 개의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현상은 만 가지로 달라도 근본은 하나【萬殊一本】이므로 본래 고정된 모습이 없습니다. '성(誠)' 자를 가지고 본다면 성(誠)이 하나의 근본【一本】이고 '경(敬)' 자를 가지고 본다면 경(敬)이 하나의 근본입니다. '인(仁)', '의(義)', '중(中)', '정(正)' 자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로 삼아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뿐입니다. 또 모든 현상에는 각각 갖추고 있는 하나의 근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효(孝)' 자나 '혜(惠)' 자 같은 부류가 그렇습니다. 나갈 때는 아뢰고 돌아와서는 고하며,101)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102) 등 시봉하는 모든 방법이 '효(孝)' 한 글자에서 나옵니다. 조존(操存)103)과 격물(格物)의 설에 대한 대답도 훌륭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것104)은 분명히 미발의 때이고 사려(思慮)만 막 싹터 나오는 때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모두가 어둡고 은미하여 남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것입니다. 계신공구(戒愼恐懼) 또한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숙하게 하며105), 생각하는 듯 엄숙한 자세를 가지고106) 감히 태만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하문하신 것은, 저처럼 과문한 소견으로는 일반적인 사례(士禮)에도 어두운데 하물며 제후의 예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후사로 나간 아들은 친생부(親生父)에 대해 살아계실 때는 감히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고 돌아가셔도 감히 예(禰 아버지의 사당))에 받들지 못하며 상복은 감히 3년을 입지 못합니다. 하물며 공자(公子)의 아들로서 입계(入繼)하여 왕통을 이은 경우야 말한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공조례(公朝禮)가 있고 가인례(家人禮)가 있습니다. 공조례는 공의(公議)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고 가인례는 사적인 은의(恩誼)를 펴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형(曺兄)이 말한 창업을 이룬 군주와 입계한 군주는 그 예가 다르다고 한 것은 옳습니다만, 입계한 군주도 가인으로서의 예가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因歲時往來。居近朋友。皆得聞信。而但未知永平高人作何狀。謂外情緘。不啻若窮陰之見陽也。吾儕俱以窮約事力。居在涯角。躬駕面穩。豈易事也。只是書尺一路。便是相從。況寒暄之外。又以講討思索多少語。娓娓盈幅。其所以令人資發。誰謂書不如面也。諸條云云。老兄之言得矣。然天地之生。人心之仁。本非兩項物事。大抵萬殊一本。本無定體。以誠字看之。誠爲一本。以敬字看之。敬爲一本。仁義中正字之類。莫不皆然。惟觀其所主而言者。如何耳。且事事物物上。有各具之一本。如孝字惠字之類。是也。出告反面。冬溫夏凊。凡百侍奉。皆是一箇孝字出來。操存格物說。所答亦善。不覩不聞。固是未發之時。獨是念慮初萌處。然凡幽暗隱微。人所不知而己所獨知者。皆是也。戒愼恐懼。亦非着意爲之。只是正衣冠。尊瞻視。儼若思。不敢慢之謂。俯詢云云。以若謏見寡聞。尋常士禮。猶且茫昧。況於諸侯之禮乎。然夫出後子之於所生。生不敢父。死不敢禰。服不敢三年。況以公子之子。而入承大統乎。是以有公朝禮。有家人禮。公朝禮者。所以正公義也。家人禮者。所以伸私恩也。曺兄所謂創業之君。入繼之君。其禮不同者。得之而但不知入繼之君。亦不無家人禮耳。更詳之如何。 나갈……고하며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은 집을 나갈 때 반드시 어버이에게 가는 곳을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인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겨울에는……해드리는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무릇 자식이 된 예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이다."라고 보인다. 조존(操存)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마음이라는 것은 잡아 두면 있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는 것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 1 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의관을……하며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五美〕'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면 그 모습이 엄숙해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외경심을 갖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대목이 보인다. 《論語 堯曰》 생각하는……가지고 《예기》 〈곡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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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낙현【재성】에게 답함 答安樂賢【載性】 일전에 보내신 서신을 열어 본 이래로, 강습(講習)하는 즐거움이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저의 정성에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학습 과정이 정명(精明)하고 세밀하여 사람을 발전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기쁘고 다행스럽기가 실로 어떻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인하여 좁은 소견 한두 가지로 감히 다시 우러러 아뢰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학(下學) 운운한 것을, 노형(老兄)께서는 '상(上)', 하(下)' 2자를 도(道)와 기(器)로 인식하십니까, 아니면 도와 기의 경계를 이르는 것입니까? 만약 곧장 도와 기라고 말한다면 하(下)에는 정녕 형상(形象)과 방위(方位)가 있으며, 다만 도와 기의 경계라고만 한다면 상(上)에 이미 형상과 방위가 없는데 하(下)에만 형상과 방위가 있겠습니까. 성인은 이(理)와 기(氣)를 나눌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형이(形而)'107) 두 자를 쓰고 이와 기가 뒤섞일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상하(上下)' 두 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역(易)》에 처음 나타나고 《논어(論語)》에서 반복되었으니108)108) 《논어(論語)》에서 반복되었으니: 《논어》 〈헌문(憲問)〉의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라는 말을 가리킨다.그 경계가 매우 정밀합니다. 학자들은 단지 일상적인 인사(人事)에 종사하면서 행해야 하는 의리를 다하는 데 힘써서 격물 궁리(格物窮理)의 깊은 뜻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렇게 지극히 비근(卑近)한 곳으로 나가지만 지극히 고원(高遠)한 곳이 생생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어찌 현묘한 곳에 나아가는 것을 미리 근심하여 도와 기의 경계를 어지럽히겠습니까. 부디 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日前手存。披閱以還。不惟講習之樂。有以慰此期仰之誠。其盛課之精明詳密。有以開發人處。區區喜幸。實難名喩。因以一二菅見。敢復仰溷。幸見敎也。下學云云。老兄以上下二字。認爲道器耶。抑謂道器之界至耶。若是直說道器。則下固有形象方位。只是說道器界至。則上旣無形象方所。下獨有形象方所乎。聖人於理氣之不可分開處。下形而二語。於理氣之不可混雜處。下上下二字。始著於大易。反復於論語。此其界至極爲精密矣。學者但當從事於日用人事之間。務盡其當行之義。而不失其窮格之蘊。則卽此至近至卑而至高至遠者。躍如矣。豈有預憂玄妙之馳而亂道器之界至哉。千萬諒之。 형이(形而)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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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봉여【동익】에게 답함 答奇鳳汝【東翼】 형의 편지는 뜻밖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 우거(寓居)하여 편지를 조금 늦게 받았고 이어서 먼 길을 가야 하는 일이 있어 지금까지 답장을 올리는 것이 늦어졌으니 부끄러움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더운 여름이 깊어 가는데 안부가 편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형을 향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우가 오랜 세월 어려움을 겪은 것을 뒤미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문을 걸어 닫고 칩거하자니 이따금 무익하기만 한 끝없이 이는 회포를 가누지 못할 뿐입니다. 아, "물고기 삶는 가마솥에 물을 부으려네."111) "집 없는 장초(萇楚) 처지를 즐긴다."112)는 구절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읊조리려니 아득한 옛날이 멀다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회포가 산처럼 쌓여 바람에 임하여 서글퍼하면서 그저 옛사람이 말한 "언제나 한 동이 술을 놓고 다시 더불어 글을 자세히 논할까."113)라는 구절을 읊어 형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兄書可謂出於意外。而亦不可謂不出於意中也。但身寓他所。奉書差晩。繼而有春糧之行。一紙謝復。尙爾稽緩。愧可道耶。未審夏令屆深。體度崇適。馳溯不任。弟經艱閱劫不必追提。而杜門頹蟄。時不勝悠悠無益之懷耳。嗚乎漑釜鬵之烹魚。樂萇楚之無家。沈吟反復。不知千古之爲遠也。積懷如山。臨風悵然。只誦古人所謂何時一樽酒。重與細論文之句。而煩爲兄謝焉。 물고기……부으려네 《시경(詩經)》 〈회풍(檜風) 비풍(匪風)〉에 "그 누가 물고기를 쪄 먹을 건가. 가마솥에 물을 부으려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망해 가는 주(周) 나라를 일으키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돕겠다는 말이다. 집……즐긴다 《시경》 〈습유장초(隰有萇楚)〉에 "진펄에 보리수나무가 있으니, 야들야들한 그 가지로다. 어리고 곱고 반들거리니 너의 집 없음을 즐거워하노라."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흉년과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차라리 장초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집도 없는 것이 부럽다는 뜻이다. 언제나………논할까 두보(杜甫)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시에 "내가 있는 위수(渭水) 북쪽엔 봄날의 나무, 그대 있는 장강(長江) 동쪽엔 저녁의 구름. 어느 때나 한 동이 술로 서로 만나서, 다시 한번 글을 함께 자세히 논해 볼까.【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한 시구에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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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배의 자에 대한 설 吳景拜字說 사문(斯文) 오창호(吳昌鎬)가 관례(冠禮)를 치른 지 이미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자(字)가 여주(汝周)였는데 나중에 송사(松沙) 기장(奇丈)102)께서 경배(景拜)로 고쳤다. 대체로 《서경(書經)》의 "우(禹)가 고요(皐陶)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을 하였다."103)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시험삼아 한번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징험해 보니,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며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여 잘못되고 그릇된 일을 문식(文飾)한 뒤에야 그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분을 참으면서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용납하지 않다. 이것은 모두가 성실하게 선(善)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미친 사람에게도 가려서 들을 만한 말이 있고 나무꾼에게도 물을 수 있다. 하물며 강직하게 간언(諫言)하고 보필(輔弼)하는 것이 마치 정문(頂門)에 침을 놓고 등에 채찍을 가하는 것과 같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사랑이 그치지 않으면 진실로 공경해야 하고 공경스러움이 그치지 않으면 진실로 절을 해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뜻을 낮추고 온 마을에서 하는 말을 아울러 받아들이면 마을 전체의 훌륭한 선비가 되고, 온 나라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나라 전체의 훌륭한 선비가 되고, 천하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천하의 훌륭한 선비가 된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백 번 절을 한 다음에 한마디 말을 듣고자 하고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 하나를 구했던 까닭이다.아, 대우(大禹)는 성인이었건만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원하건대 경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한다.'라는 부적(符籍)을 학문 세계에 진입하는 나침판으로 삼아 부지런히 노력하고 착실히 법도를 지켜나가 천하의 선(善)이 모이고 빠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것이 어찌 송사 장(松沙丈)께서 진중하게 이름을 정한 뜻이 아니겠는가. 吳斯文昌鎬。冠已久矣。表德初以汝周。後松沙奇丈改以景拜。蓋取書經禹拜昌言之義也。嘗驗之於人。聞有一言逆耳。無不勃然而怒。嘵嘵然。文其過餙其非而後已。不然則强意忍忿。外若容受而內實氷炭矣。此皆無誠實爲善之心故也。如有誠實爲善之心。則狂夫可擇。蒭蕘可詢。況强諫直輔。若針頂鞭肯之爲耶。愛之無已。固當敬之敬之無已。固當拜之。虛心遜志。兼受一鄕之言。則爲一鄕之善士。受一國之言。則爲一國之善士。受天下之言。則爲天下之善士。此古人所以乞一言於百拜之餘。求一敎於千里之遠者也。嗚呼。大禹聖人。猶拜昌言。況其下者乎。願景拜以拜昌言三字符。爲入學指南。勉勉循循。以至於集天下之善而無闕焉。則豈非松沙丈珍重命名之意耶。 송사(松沙) 기장(奇丈)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우(禹)가……하였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우가 고요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하며 옳다고 하였다."라는 말이 나오고,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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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백순의 자에 대한 설 朴伯順字說 내가 일찍이 우인(友人) 박 사문(朴斯文)을 위하여 그의 이름을 효동(孝東)이라 명명하고 자(字)를 백순(伯順)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사문(斯文)이 나에게 말하기를, "제 이름을 지어 주신 이래로 부형(父兄)이나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저의 이름을 부르고 저의 자(字)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때마다 항상 척연히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좋은 이름이 사람에게 주는 도움은 대야나 물그릇, 지게문이나 창호(窓戶)에 적는 명문(銘文)보다 큽니다. 자(字)를 지어 주고 설명을 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일입니다. 어찌 저를 위해 은혜를 베풀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그래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서(天舒)와 천질(天秩)105)은 그 단서가 끝이 없이 많지만, 벼리가 되는 큰 이치는 오직 효(孝)가 그것이다. 효는 천하의 대순(大順)이고 순(順)은 천하의 지당(至當)이다. 이는 천심(天心)과 인리(人理)가 끝없이 생겨나 두루 흘러서 바뀌거나 그치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효라고 이르는 것이 어찌 단지 슬하에서 부모의 뜻을 받들거나 힘든 일을 하고 봉양하는 것을 이를 뿐이겠는가. 부모가 나에게 온전한 성명(性命)을 남겨주었으니 내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은 모두 효이다. 모름지기 미루어 넓혀나가 흠결이 되는 것이 없으며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경지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여 도덕이 완벽한 군자다운 사람이 된다면 효(孝)를 행하고 순(順)을 행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효제(孝弟)는 순덕(順德)이다.'106)라고 하였다. 사문(斯文)은 힘쓰라!" 余嘗爲友人朴斯文。命其名曰孝東字伯順。久之。斯文向余道。一自錫嘉。在父兄師友之間。聞其名我字我。輒不無惕然愧懼自反自省之意。嘉名之有助於人。過於盤盂戶牖之有銘遠矣。字之有說古也。盍爲我加惠焉。余曰。天舒天秩。其端無窮。而綱理之大。惟孝是己。孝者天下之大順也。順者天下之至當也。此天心人理。生生周流。不容易不容已處。然所謂孝者。豈但承順膝下服勞致養之謂而已耶。父母以性命之全。遺之於我。我之身所當爲者。皆孝也。須推而擴之。無所虧欠。立其身於光明正大之域。而爲全德君子之人。則其爲孝爲順。顧何如哉。程子曰。孝弟順德也。斯文勉之。 천서(天敍)와 천질(天秩) '천서'는 하늘의 윤서(倫敍)로,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윤서를 이르고, '천질'은 하늘의 품질(品秩)로,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높고 낮은 품질을 이른다. 《서경》 〈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에 "하늘이 윤서로 법을 두시니 우리 오전을 바로잡아 다섯 가지를 돈후하게 하시며, 하늘이 품질로 예를 두시니 우리 오례로부터 하여 다섯 가지를 떳떳하게 하소서."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효제(孝弟)는 순덕(順德)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 〈학이(學而)〉에 보이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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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빈에게 답함 答李光彬 보내신 서한에서 심성(心性)에 대해 운운하신 것은 하나하나 타당한 말씀이라서 다시 따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한 시대의 뒤얽힌 논의를 타파하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사우(士友)들의 논의는 기(氣)를 위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이(理)를 위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를 위주로 하는 경우는 진실로 말할 가치가 없고 이를 위주로 하는 경우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심(心)은 기(氣)의 정상(精爽)이고 성(性)은 이(理)의 결과(結裹)입니다. 명의(名義)와 경계가 본래 이와 같지만, 옛 성현들이 입언(立言)을 통하여 전한 교훈은 각각 어세(語勢)로 인하여 크게 달랐습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말한 "심은 성을 검속할 수 있지만 성은 그 심을 검속할 줄 모른다."15)라는 것과 주자(朱子)가 말한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다."16)라고 한 것은 구분하여 말한 것입니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다."17)라는 맹자(孟子)의 말, "심은 태극이다."18)라는 소자(邵子 소옹(邵雍))의 말, "오직 마음은 상대할 것이 없다."19)는 주자(朱子)의 말은 심과 성을 합하여 말한 것입니다. 합하여 말하면 성(性)은 본래 심 안에 있으니 대립시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쪽 사람들은 전체를 말하면 심이고 한쪽을 말하면 성이라고 봅니다. 또 이(理)로 이(理)를 갖추고 이(理)로 이(理)를 묘합한다고 여겨 별도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명명(冥冥)한 곳에 앉아 있는 듯합니다. 이같이 하면서 어떻게 기를 위주로 하는 논의를 굴복시켜 귀일하게 하겠습니까. 형께서는 "성(性)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본연(本然)을 성으로 여기고 심(心)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본심(本心)을 심으로 여긴다."라고 하시고, 또 "'인(仁)은 인심(人心)이고'20) '심(心)은 생도(生道)이며'21) '복괘(復卦)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22)라고 할 때의 '심(心)' 자는 기(氣)인가, 이(理)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말씀입니다. 기(氣)를 위주로 하는 사람은 나뉘는 것만 볼 뿐이지 합치되는 것을 모르고 이(理)를 위주로 하는 사람은 합치되는 것만 볼뿐이지 나뉘는 것을 모릅니다. 서로 잘못된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형의 논의는 저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또 이쪽에 치우치지도 않는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示喩心性之云。節節亭當。無容更評。足破一時繳繞之論。近日士友之論。有主氣者。有主理者。其主氣者。固不足言。其主理者。亦不無可疑矣。大抵心者氣之精爽也。性者理之結裹也。其名義界至。本自如此。而從古聖賢。立言垂訓。各因語勢而煞有不同。張子所謂心能檢性。性不知檢其心。朱子所謂性猶太極。心猶陰陽。是分而言之者也。孟子所謂仁人心。邵子所謂心太極。朱子所謂惟心無對。是合而言之者也。合而言之。則性固在中而不必對擧說下矣。然以一邊人以爲全言則心。偏言則性又以爲以理具理。以理妙理。似若別有一箇無位眞人。坐任冥冥之中。如此而何以屈主氣之論。而使之歸一哉。兄謂論性者。必以本然爲性。論心者。必以本心爲心。又曰。仁人心。心生道。復見天地之心。此等心字。是氣乎理乎。此說甚善。主氣家但知其分。而不知其合。主理家但知其合。而不知其分。不其歸於胥失乎。兄論可謂不偏於彼。而又不偏於此矣。 마음은…… 모른다 《논어집주》 〈위령공(衛靈公)〉에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한 경문에 대한 집주에 장재(張載)가 "마음이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 도(道)를 크게 하는 것이요, 성(性)은 마음을 검속할 줄 모르니, 이것은 도(道)가 사람을 크게 함이 아닌 것이다.【心能盡性, 人能弘道也, 性不知檢其心, 非道弘人也.】"라고 한 말이 실려 있다. 성은……같다 《주자어류》에 "성은 태극과 같고, 마음은 음양과 같다. 태극은 단지 음양 속에 있으니, 음양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극을 논할 경우에 태극은 자체로 태극이고, 음양은 자체로 음양이다. 오직 성과 마음이 또한 그러하니,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라는 것이다.【性猶太極也, 心猶陰陽也. 太極只在陰陽之中, 非能離陰陽也. 然至論太極自是太極, 陰陽自是陰陽. 惟性與心亦然, 所謂一而二, 二而一也.】"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5 性情心意等名義》 인은……마음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보인다. 심은 태극이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외편 하(觀物外篇下)〉에 "도가 태극이 되고, 심이 태극이 된다.【道爲太極 ,心爲太極.】"라는 말이 보인다. 오직……없다《주자어류(朱子語類)》 권5, 권98에 보인다. 인은……인심이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보인다. 심(心)은 생도(生道)이며 《이정유서》 권21과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 〈도체(道體)〉 등에 보이는 이천 선생의 말로, "마음은 생도이다. 이 마음이 있어야 이 형체를 갖추어 태어나니, 측은지심은 사람의 생도이다.【心, 生道也. 有是心, 斯具是形以生, 惻隱之心, 人之生道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마음이 생도라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데 사람이 이를 얻어서 마음을 삼은 것을 말한다.【心生道也, 謂天地以生物爲心, 而人得之以爲心者.】"라고 하였다. 복괘(復卦)에서……본다 이 말은 《주역》복괘(復卦)의 단사(彖辭)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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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지에게 답함 答吳永之 댁의 당함(堂咸 당질)이 와서 혜서(惠書)를 받들었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는 안부가 강녕하시고 여력으로 닦는 공부가 거듭되어 의심스럽고 난해한 문제들이 편지 폭에 가득함을 알았으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과단성이 있어야 나중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43)"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천하의 일은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벗께서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사단(四端)은 사람이 반드시 지니는 마음이고 사체(四體 사지(四肢))는 사람이 반드시 지니는 사물입니다. 쉽게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보기 어려운 이치를 증명하여44) 사람들에게 반드시 지니고 있으며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발(已發)과 서로 유사하지만 미발(未發)과 유사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미발은 비록 혼연(渾然)한 전체이지만 혼연한 가운데 찬연(粲然)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입니다. 이것을 구한다면 미발을 모호하고 애매하다고 여겨 두서도 없고 체계도 없이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근세에 이(理)를 위주로 논하는 이들의 커다란 병통입니다. 경계하십시오. 예악(禮樂)은 잠시라도 몸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것이 형체가 없는 예(禮)이고 소리가 없는 악(樂)입니다.45) 이미 공경과 사손(辭遜)이 예의 근본임을 알았다면 유독 관대함과 공평함, 조화와 순리가 악의 근본임을 모르겠습니까. 令堂咸來。承惠緘。因審省節康寧。餘力尋溫。疑難滿幅。不任欣仰。書曰。惟克果斷。乃罔後艱。朱子曰。天下事。非燕閒暇豫之可得。願吾友勉之。四端人所必有之心。四體人所必有之物。以易見之形。證難見之理。使人知必有而不可無。然安有已發相似。而未發不相似之理。未發雖曰渾然全體。而渾然之中。有粲然者存。所謂仁義禮智是也。求之無乃以未發爲儱侗昆侖無頭脚無間架看耶。此是近世論理家大病。戒之戒之。禮樂不可斯須去身。此是無體之禮。無聲之樂。旣知恭敬辭遜爲禮之本。則獨不知寬平和順爲樂之本耶。 과단성이……않는다 성왕(成王)이 관리들에게 훈계한 내용 중 하나로, "너희 경사들에게 경계하노니 공이 높음은 뜻 때문이요, 업이 넓음은 부지런함 때문이니, 능히 과단해야 뒤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戒爾卿士, 功崇惟志, 業廣惟勤, 惟克果斷, 乃罔後艱.】"라고 하였다. 《書經 周官》 쉽게……증명하여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형체가……악(樂)입니다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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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현【장현】57)에게 답함 答朴而顯【章鉉】 금옥과 같은 형제들이 편지【雙魚】58)를 동봉(同封)하였고, 편지를 가지고 온 자는 또 그대의 당질이었습니다. 누추한 저희집에 만 갈래의 빛이 드리우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다만 당시에 마침 밖에 있어 서로 어긋났기에, 옛날 천 리 밖에서 정신으로 사귀는 것에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편지를 받은 뒤 여러 날이 지났는데 시탕(侍湯)하는 사이에 동정(動靜)과 기거(起居)는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먼 곳에서 염려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존종씨(尊從氏)59)가 순절(殉節)하신 거룩한 자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에 충분합니다. 우선 본장(本狀)60)에 근거하여 대략 서술하였는데 이는 구구하게 어진 이를 사모하는 정성【緇衣之誠】61)으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안(公案)으로 정본(定本)을 만들지 말고 거듭 대방가(大方家)의 큰선비를 구하여 후손에게 찬양하도록 하여 세도(世道)를 위한 계책으로 삼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각각의 편지에 답장을 드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일이지만 이처럼 예(禮)를 생략하였습니다. 공경함이 부족하여 자못 황공합니다. 부디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金昆玉季。雙魚同封。將之者。又其賢堂咸也。足令陋室光紫萬丈。但時適在外。交相差池。其有愧於古之千里神交者。多矣。信後有日。未審侍湯之餘。動靜起居。不至有損。遠外貢慮。不勝耿耿。尊從氏殉節偉蹟足以不朽百世。姑據本狀。而序述梗槪。此是區區緇衣之誠有不能自己也。勿以爲定本公案。更求之大方巨手。以揄揚於來許爲世道計。如何如何。理合各幅。而若是省禮。欠敬殊惶。俯諒如何。 박장현(朴章鉉) 호는 이현(而顯) 자는 정일(正一)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916년에 출생하였고 고창(高敞)에 거주하였다. 스승으로 기우만(奇宇萬) 등이 있다. 편지【雙魚】 멀리서 보내 온 두 마리의 잉어 뱃속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서신(書信)을 의미한다. 쌍리(雙鯉), 혹은 이소(鯉素)라고도 한다. 존종씨(尊從氏) 상대방의 조카에 대한 존칭이다. 본장(本狀) 편지에서는 박장현(朴章鉉)이 정의림(鄭義林)에게 존종씨(尊從氏)에 대한 글을 요구하였는데, 그 글을 쓰기 위한 근거가 되는 글로 보인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술한 가장(家狀)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어진 이를 사모하는 정성【緇衣之誠】 치의(緇衣)는 《시경》의 편명으로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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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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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의서【재봉】에게 보내는 별지 與吳儀瑞別紙【在鳳】 뜻밖의 불길한 변고로 댁의 종조(從祖) 어른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부고(訃告)를 받들자니 놀랍고 서글픔을 멈출 수 없을 뿐입니다. 하물며 천 리 밖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정경(情景)을 생각하니 가슴이 막힙니다. 운상(運喪)하는 절차는 어떻게 치르셨습니까? 극인(棘人)의 슬픔은 어떻게 억누르고 계십니까? 대체로 이것은 의례(疑禮)이고 변례(變禮)입니다. 하물며 이 사람의 좁은 견해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상례를 잘 치르는 일을 노형(老兄)께서 이미 하문하셨으니 또 어찌 소견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성복(成服)88)은 시신을 수습하여 염을 하고 입관(入棺)을 하고 빈소(殯所)를 마련한 다음의 일입니다. 시신이 객지에 있어 아직 수습하여 염하고 입관하고 빈소를 차리지 못하였다면 효자의 심정으로 볼 때 어찌 먼저 성복을 하겠습니까. 하물며 분상(奔喪)하는 도리는 한시가 급하니 또 어찌 편안히 성복을 기다리겠습니까. 아우가 생각은 이렇습니다. 부고를 들은 초기에는 피발(被髮 머리를 풀어 헤침)을 하고 곡을 하여 애통함을 모두 드러내며, 노정(路程)에 오르면 속발(束髮 머리를 묶음)을 하고 사각건(四脚巾)을 착용하며 소복(素服)을 입고 승대(繩帶)를 두릅니다. 그리고 시신이 있는 장소에 이르면 다시 피발을 하고 습렴(襲斂)의 절차를 진행한 연후에 성복을 하고 돌아와 상례를 치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집에 머무는 사람은 부고를 듣고 피발을 한 뒤 다시 속발을 하며 허위(虛位)를 마련하여 조석전(朝夕奠)과 조석곡(朝夕哭)을 거행하고, 시구(尸柩)가 집에 당도하면 다시 초상(初喪) 때처럼 피발을 하고 3일이 된 뒤에 성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각건의 제도에 대해서는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실려 있으니 고람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신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성복을 한 다음에는 길을 갈 때는 수질(首絰)과 요질(腰絰), 그리고 상관(喪冠)과 최복(衰服 상복(喪服))을 착용해야 합니다. 집에서 변고를 당하는 것도 가장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천 리 먼 곳에서 당하는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생각하니 경악을 금치 못하여 저도 모르게 심담(心膽)이 땅으로 떨어집니다. 정으로 보나 예로 보나 효자께서 여정을 떠나는 때 곧바로 달려가 위로를 드려야 하지만, 마침 구애되는 일이 있어 몸이 빠져나올 계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정이고 도리이겠습니까. 부끄럽고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천 번 만 번 자세히 살피시고 유감(遺憾)이 없으시기를 기원합니다. 不意凶變。令從祖丈棄世。承計驚怛。不能已已。況離鄕千里。奄然至此。其情景念之胸塞。運喪之節。何以經紀。棘人攀擗。何以支抑大抵此是疑禮也變禮也。況此謏見。何足言之。但愼終之地。老兄旣爲下問。則又豈不以所見言之乎。夫成服者。收斂尸身。入棺成殯然後事也。尸在客土姑未有收斂棺殯之節。則在孝子之情。豈可先爲成服乎。況奔喪之道。一時爲急。又豈晏然俟成服耶。弟意則聞訃之初。被髮哭盡哀。登程則束髮着四脚巾。衣素服。帶繩帶。到尸側。又被髮行襲斂之節然後。成服返喪。似乎宜矣。若在家之人。則聞訃被髮然后。更爲束髮。設虛位。行朝夕奠。朝夕哭。尸柩到家更爲被髮如初喪時至。三日而后成服。如何。四脚巾制度。在於備要。考之如何。到尸側。旣爲成服則行道之時。當着首腰絰。及冠與衰服耳。在家遭故。猶爲第一難事。況於千里遠程之外耶。念之驚愕。不覺心膽墜地。以情以禮。卽當匍匐赴慰於孝子發程之時。而事適有碍。抽身無計。此何情道耶。萬萬愧悚。只祝千萬慎審。母之遺憾如何。 성복(成服) 사망한 지 4일째 되는 날에 상복(喪服) 짓기를 끝내고 상복으로 갈아입는 절차, 성복한 뒤에는 죽을 먹기 시작하며 조석곡(朝夕哭)과 무시곡(無時哭)만을 하고 대곡(代哭)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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