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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중64)【인진】에게 보냄 與朴學中【麟鎭】 이번 심부름꾼이 와서 형의 병환이 근래 현저하게 줄어든 효과가 있다고 들었으니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나이가 이미 한평생의 반을 넘겼으니 건강하고 평안하더라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다시 이처럼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아우도 일전에 감기로 2, 3일간 괴로웠으며 남은 증상이 아직도 시원스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경립(景立)의 인후통(咽喉痛)은 잘못한 일 없이 생긴 병이니 장차 오래지 않아 평상을 회복할 것입니다. 옛날에 회재 선생(晦齋先生)65)이 이 병에 걸려서 소리를 내어 책을 읽지 못하고 단지 눈으로 읽고 사색하셨지만 끝내 대유(大儒)가 되었습니다. 경립만 이렇게 할 수 없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모름지기 금기(禁忌)를 통렬하게 끊고 간간이 약이 되는 음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묘방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송규(宋圭)는 집을 그리워하는 얼굴빛을 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이것은 그 또래 아이들의 상정(常情)입니다. 대체로 이 아이는 자질은 매우 순수하지만 용맹스러운 기개가 부족합니다. 몸가짐을 삼가고 스스로 조심하는 선비가 되는 것은 염려가 없겠으나 큰일을 하는 자리에 나아가자면 각별히 진작(振作)하고 확충한 다음에야 도달할 수 있겠습니다. 끝내 스스로 힘쓰는 방도를 갖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此使之來。承聞兄愼節。比有顯減之效。爲慰爲慰。吾輩年紀。已過半生。雖康健無故。會合無幾。况疾病沈淹。又復如是乎。弟於日前。亦以感崇叫苦數三日。餘症尙不見快耳。景立喉痛。是無妄之疾。行當非久復常。昔晦齋先生有此病。不能出聲讀書。但看閱思索。而終成大儒。孰謂景立獨不能辨此乎。須痛絶禁忌。間以藥餌調和爲妙。宋圭每不無思家之色。此是兒曹常情。大抵此兒。姿質極其淳慈。而猛氣不足其爲謹勅之士。則無慮矣。而進就大有爲之地。別有振作開拓然後。可以到之。未知終當有以自勵耶。 박학중 학중(學中)은 박인진(朴麟鎭, 1846∼1895)의 자(字)이다. 박인진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우인(愚忍), 즉이재(則以齋)이다. 회재 선생(晦齋先生)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말한다. 이언적의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모셔져 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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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중에게 보냄 與朴學仲 두 차례 나아가 안부를 살폈으나 짧은 사이에 물러나서 온밤을 병고에 시달리는 회포를 위로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인정과 도리에 매우 온당치 않았더라도 형편에 구애를 받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매우 부끄럽고 서글펐습니다. 다만 노형(老兄)의 병화(病禍)를 보건대 짧은 시간에 생긴 극질(劇疾)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하루 아침저녁 사이로 성급하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우선 모름지기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운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다음에야 마음의 화(火)가 가라앉고 울적한 기분이 풀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병을 다스리는 첫 번째 약방(藥方)입니다. 지난번에 형의 뜻을 보았더니 온통 빨리 치료하려고만 하면서 감내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지니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인정으로 볼 때 참으로 응당 이와 같겠지만 상처가 크면 시일이 오래 걸립니다. 어찌 이렇게 위중한 병증(病症)을 만나서 아주 짧은 시간에 나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치는 없습니다. 설령 있더라도 근본 원인을 다스리지 못하면 도리어 나중에 치료하기 어려운 증상으로 바뀝니다. 남조(南朝) 범운(范雲)의 일66)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서둘러 급하게 치료하고자 한다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또 해가 됩니다. 또 슬하에서 병시중을 드는 사람이 그 뜻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형께서는 생각을 편하게 갖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생사(生死)는 천옹(天翁)에게 맡기고 영췌(榮悴)는 조옹(造翁)에게 맡긴 채 이따금 입맛을 돋우는 초목(草木)의 반찬과 조제한 약물(藥物)로 기운을 보완하는 일을 빠트리지 마십시오. 며칠이나 몇 달을 기한으로 삼는다면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늘이 화락한 군자를 돕는 이치가 어긋나지 않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또 자제들의 정성과 효심으로 어찌 하늘이 감동하여 쇠약한 양기가 회복되는 날이 없겠습니까. 兩度進省。霎然告退。未得慰一夕病苦之懷。此於情理。雖極未穩。而其於勢有所拘何。深用歉悵第觀老兄病祟。非一時劇疾之比。恐難以一朝一夕。遽責其效。先須安定其心。平易其氣然後。心火得以降下。氣鬱得以舒散。此是治病第一藥也。向見兄意。切欲急速救治。而有不能堪耐鎭定之狀。此在人情。固應如此。然創巨則爲日久矣。豈有遭此重症而頃刻可愈者乎。此是所無之理。設或有之。根據未化。轉成他日難醫之症。獨不見南朝范雲之事。欲速副急。非徒無益。而又害之。且膝下侍病之人。何以當其意乎。願兄平心坦懷。付死生於天翁。委榮悴於造翁。時以草木之滋。刀圭之劑。珍補無闕。限以幾日幾月。可收其功也。况天佑愷悌。其理不忒。且諸郞誠孝。豈無感天回陽之日乎。 남조(南朝) 범운(范雲)의 일 옛날 남조(南朝)의 범운(范雲)이 진무제(陳武帝)의 속관(屬官)으로 있었는데 상한병에 걸려 왕이 주는 영예를 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서문백(徐文伯)을 청하여 땀을 빨리 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문백이 말하기를 "지금 당장 낫게 하기는 아주 쉽지만 다만 2년 후에 죽을 것이 염려스럽다."라고 하였다. 범운이 "아침에 좋은 말을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은데 어찌 2년 후의 일을 가지고 두려워하겠는가"고 말하자 문백은 곧 방을 덥힌 다음 복숭아잎을 펴고 범운을 그 위에 눕혔다. 얼마쯤 있다가 땀이 푹 난 다음 온분(溫粉)을 몸에 뿌려 주니 다음날 병이 나았다. 범운이 매우 기뻐하였다. 문백이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하더니 과연 2년 만에 범운이 죽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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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삼130)에 대한 제문 祭朴正三文 천태산(天台山) 아래 문산(文山)과 덕봉(德峯) 사이에 덕을 숨기고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함께 서로 잘 아는 사람으로는 오직 우당(愚堂)과 덕헌(德軒)131) 및 공이 이런 사람이네. 이윽고 우당과 덕헌이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나고 오직 공만 살아 있었네. 여러 옥과 이어진 구슬이 서로 비추며 서로 윤택하였던 것은 비록 옛날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외로운 거문고 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아끼고 남은 향기가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 것은 그 마음이 실로 무궁하였는데, 공이 조금 더 살지 못하고 또 다시 문득 가버릴 줄 어찌 알았으랴! 효우(孝友)132)하고 화락한 기풍과 온량(溫良)하고 근칙(謹勅)한 위의는 태허의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로 연기와 구름처럼 사라져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네.오호라! 덕봉(德峯) 아래에 살던 평소133)의 벗들을 지금은 모두 잃었고 오직 수석과 풍월만 남았으니, 나로 하여금 바라보고 상상함에 다하지 않는 슬픔이 있게 하네. 天台之下。文山德峯之間。多隱德之人。余與之相熟者。惟愚堂德軒及公是也。旣而愚堂德軒。相繼謝世。惟公在焉。其群玉聯珠。交映而互潤。雖不及曩時。而所以惜孤絃之未絶。愛餘芳之未歇者。其心固無窮已。豈知公不少延。而又復奄忽耶。孝及愷悌之風。溫良謹勅之儀。烟消雲散於太虛冥冥之中。而不可復見矣。嗚呼。年生知舊在於德峯下者。今皆失之。而惟有水石風月。令人有瞻想不盡之悲。 박정삼(朴正三) 박준원(朴準元, 1849∼1908)을 말한다. 자는 정삼(正三), 호는 덕와(德窩),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신재집》 권20 〈덕와 박공 유사장(德窩朴公遺事狀)〉에 보인다. 덕헌(德軒) 박준채(朴準彩, 1839∼?)의 호이다. 자는 우서(禹瑞),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효우(孝友) 저본에는 '효급(孝及)'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 수정하였다. 평소 저본에는 '연생(年生)'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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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유124)에 대한 제문 祭宋德裕文 홍양125)의 구족이고영남의 명가이네자상하고 화락하니그 사람 매우 아름답네중간에 온갖 어려움 겪어떠돌며 겨를이 없었네잠깐 금북에 유랑하다가만년에 천태산 남쪽에 집을 지었네형제가 서로 의지하며어려움 애써 헤쳐왔네모든 것들 대강 모았고옛 학문 더욱 힘썼네나는 누추한 사람이라늙어서야 직접 보았네이미 인척이 되었고또 이웃에 살게 되었네밤낮으로 서로 따르며창수하지 않은 날 없었네운치는 훈지126)가 합한 듯 하고기운은 교칠127) 같았네돌아보건대 외롭고 쓸쓸한 나는이것을 얻은 것이 족하였네스스로 생각건대 여생에길이 이 즐거움 보리라 여겼네누가 생각했으랴 하루 저녁에갑자기 이렇게 버리고 떠날 줄을마치 패가 낭을 잃은 것128) 같고마치 공이 거를 잃은 것129) 같네나의 말과 나의 생각누구와 통하며 누구와 지극히 논할까슬픈 바람 뼈에 서늘하고지는 달은 빛을 잃었네달려가 한 번 곡하니눈물이 뺨에 줄줄 흐르네제문으로 제사 드리니영령이여 흠향하소서 洪陽舊族。永南名家。慈詳愷悌。其人孔嘉。中嬰百艱。流離靡遑。薄遊錦北。晩築台陽。兄弟相依。拮据艱關。凡百粗集。舊學加勉。義也陋生。老而見親。旣荷結姻。又從接隣。日夕相隨。唱酬靡闕。韻合塤箎。氣若膠漆。顧惟踽凉。得此爲足。自擬餘日。永視此樂。誰謂一夕。遽爾見棄。如狽失狼。若蛩失蚷。我言我懷。誰因誰極。悲風凄骨。落月無色。奔走一號。涕泗交頤。操文致侑。靈其饗之。 송덕유(宋德裕) 송연식(宋演植, 1897∼?)을 말한다. 자는 덕유, 호는 계은(溪隱),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홍양(洪陽) 충청남도 홍성(洪城)의 옛 이름이다. 훈지(壎篪) 고대의 악기 이름으로, '훈'은 흙을 구어서 만든 나팔이고 '지'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데, 이 두 악기를 합주할 경우 성음이 잘 조화되기 때문에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에 "백씨가 훈을 불면, 중씨가 지를 부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하였다. 교칠(膠漆) 부레풀과 옻나무의 칠처럼 뗄 수 없는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 패(狽)가……것 패는 앞다리가 짧아 다닐 때 낭(狼)에 기대야 하기 때문에 낭을 잃으면 다닐 수 없다. 세상일이 어긋날 때를 낭패라고 한다. 여기서는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공(蛩)이……것 공은 공공(蛩蛩)이고 거는 거허(蚷虛)인데, 전설상의 두 짐승의 이름이다. 공공은 북해 가운데 있다는 말 비슷한 짐승이고 거허는 수말과 암나귀 사이에서 난 짐승인데, 늘 같이 따라 다닌다고 한다. 교분이 두터워 항상 같이 다니는 친한 관계를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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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숙【윤채】에게 보냄 與金漢淑【潤采】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멀리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와 새로운 거처와 새해를 맞는 상황을 물어주셨으니, 이것은 일상적인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동오경(董五經)처럼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없어 잠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바람에58) 결국 서로 어긋났습니다. 곧장 차비를 갖추고 가서 사례를 표하는 의례를 행하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를 물으셨습니다. 고인(古人)은 오히려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으로 보아59) 기년복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살아계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무릇 상복은 처음 제정한 것으로 결정을 하니60) 기년복을 하는 것에 무슨 의문이 있겠습니까. 신주를 적고 축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완전히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61) 혜량(惠諒)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不憚崎懾遠入天台山中。爲問新寓新年之狀。此意已非常調可辦。但無董五經前知薄言出外。竟致相違卽欲理屐。以修回謝之禮。而末由也已。問父喪中母死者。古人猶以父在服朞。況父在時母死已久乎。凡服以始制爲斷。服朞何疑也。至於題主及祝辭。則不可專以知生而玖生之也。諒之如何。 동오경(董五經)처럼……바람에 동오경과 정이(程頤)의 고사를 가리킨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숭산 앞에 동오경이란 사람이 있는데, 은자이다. 이천이 그의 명성을 듣고 경전을 궁구한 선비일 것이라 생각하여 특별히 찾아갔다. 동오경은 평소 암자를 나간 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차와 과일을 지고 돌아오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대는 정 선생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이천이 특이하게 여겼다. 그 사람이 '선생이 오시려고 한다는 소식이 매우 크기에 제가 특별히 성안으로 들어가 조금의 차와 과일을 마련하여 장차 선생을 대접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천은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다시 함께 그 집에 이르러 매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또한 남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없었고, 다만 오래도록 사물과 접하지 않아 마음이 고요하고 밝았다.【又嵩山前有董五經, 隱者也. 伊川聞其名, 謂其爲窮經之士, 特往造焉. 董平日未嘗出庵, 是日不値, 還至中途, 遇一老人負茶果以歸, 且曰君非程先生乎? 伊川異之. 曰先生欲來, 信息甚大, 某特入城置少茶果, 將以奉待也. 伊川以其誠意, 復與之同至其舍, 語甚款, 亦無大過人者. 但久不與物接, 心靜而明也.】" 《二程外書 卷12》 아버지가……보아 아버지가 사망하여 상중이기는 하지만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는 여전히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상복은……하니 상복은 처음 결정한 것을 도중에 상황이 변하더라도 바꾸지 않고 입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생존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성복(成服)일에 '부재위모기(父在爲母期 아버지 생존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면 기년을 한다)'의 규정에 따라 자최장기복(齊衰杖期服)을 입는다. 성복을 하고 어머니 상을 치루는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부졸위모자최삼년(父卒爲母齊衰三年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사망하면 자최삼년을 한다)'의 규정을 다시 적용하여 자최삼년복(齊衰三年服)으로 바꾸지 않는다. 신주를……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하면 어머니상의 상주는 남편인 아버지가 되므로 신주나 축사에 '망실(亡室)'이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면 상주는 맏아들이 되어 '현비(顯妣)'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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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7 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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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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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좌승지 상덕재 선생 최공 묘지명 左承旨尙德齋先生崔公墓誌銘 선생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치호(致湖), 자는 평원(平遠)이다. 초휘(初諱)는 업(嶪)이었으며, 호는 상덕재(尙德齋),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때 동래후(東萊侯) 휘 지몽(知夢)이 그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조선에 입조(入朝)하였으니 관직은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운(雲)을 낳았는데, 호는 덕암(德庵)이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휘 득초(得超)에 이르러 장악원 정랑(掌樂院正郞)을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자혁(自赫)으로,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조부는 휘 추(湫)로, 호가 난계(蘭溪)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선고의 휘는 근지(近池)로, 호는 월계(月溪)이며, 사성(司成)을 지냈다. 모친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참의 민식(閔湜)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명종19) 10월 16일에 서울 남부(南部)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겨우 말을 할 만한 나이에 문득 시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영오시(詠烏詩)〉에 "새 가운데 너는 효도할 수 있으니, 고인이 현자에 견주었네.[鳥中爾能孝, 古人比於賢.]"라고 하였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해 유인(孺人)에 대한 애도가 망극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복을 벗자 글방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었다. 스승이 그가 자주 내정(內庭)으로 들어가 혹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자가 평소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반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반은 스승에게 향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독서할 적에는 손을 단정히 모으고 꼿꼿하게 않아 전심치지(專心致志)하되 송독하는 횟수는 한도가 있었으나 연구에는 일정한 한계를 두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부터 제자백가 자(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충분히 반복 학습하여서 깊게 통달하고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석담(石潭)1) 이 선생(李先生)이 성리학에 심오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서 배웠다. 또 임공 숙영(任公叔英), 고공 용후(高公用厚), 홍공 입(洪公雴), 김공 반(金公槃), 고공 전천(高公傳川), 민공 성징(閔公聖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서로 충고하고 절차탁마하며 더욱 스스로 확충하여 훌륭하다는 명성과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에 낭천(狼川)에 임명되는 명이 있었지만 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정해년(1587)에 과거에 급제하여 바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고 요순의 지위가 있으며 요순의 백성이 있는데, 요순과 같은 은택이 나라에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채침(蔡沈)이 말하기를 '후세의 군주가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삼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구한다.[求其心]'라는 석 자가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구하는 법은 선성(先聖)의 가르침이 서책에 매우 자세히 드러나 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유현(儒賢)을 친히 가까이하여 아침저녁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이치를 밝히고 그 실제를 행한다면 마음을 구하는 방법이 터득되고 다스리는 근본이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무자년(1588)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訥)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어느 날 주상이 경연에 나아가 《서경》의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를 강론하다가 이어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뜻을 물으니, 공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고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한마디가 또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데 성상(聖上)의 물음이 여기에 미치니 감히 나라를 흥하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경인년(1590)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과거 시험에서 사람을 선발할 적에 오로지 문예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아뢰기를 "장구(章句)나 익히는 학문은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이 아니며, 문장을 짓는 기교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장구나 익히고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가지고 선비를 선발하면서 세상을 경영하고 잘 다스리는 효과를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임진왜란 때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천거하여 서기(書記)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계책을 내었기에 드러난 공적이 많았다. 병신년(1596)에 부친상을 당했고, 계묘년(1603)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1605)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광해군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을 때 상소를 올려 직간하였는데, 그 상소 중에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한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광해군이 몹시 화를 내며 이르기를 "그대는 나를 진(秦)나라 이세(二世)에 견주는 것인가?"라고 하니, 천천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세에 비견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이세의 행실을 따르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더욱 노여워하여 장(杖)을 치고 의금부에 3일 동안 가두었다가 사죄(死罪)에서 1등급을 줄여 진도(珍島)로 유배보냈다. 이에 연관된 시가 아래와 같다.의금부 서리 행차 재촉하여 남쪽으로 문 나서니 禁吏促行南出門이 몸은 살아서 향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此身生不返鄕村소슬하게 비바람 치는 지난밤 꿈에 蕭蕭風雨前宵夢상강으로 날아가 굴원을 보았네.2) 飛入湘江見屈原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즉시 유배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입었고, 부제학으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장흥(長興)의 와리(瓦里)에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고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다가 정묘년(1627, 인조5) 10월 16일에 졸하였다. 와리 뒤쪽 산기슭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의 민순(閔絢)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결(潔)은 참봉(參奉), 숙(淑)과 해(海)는 진사이다. 딸은 변극중(邊克中)과 김인복(金寅福)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 14세손 동민(東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을 열어주어 天啓照運명철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났네. 明良際出금당과 옥서3)에서 玉署金堂군신 간에 정사를 논하고 문답하였네. 都兪密勿세상에 다 베풀지 못했는데 不竟厥施창오의 구름 아득하네.4) 梧雲茫茫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身不見容갑자기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네. 奄竄南荒우레치고 비 내리는 가운데 雷雨繼作동쪽 언덕에 누웠네. 因臥東岡먼 후대에 회상해 보면 追惟百世그 풍도와 운치 더욱 드러나리라. 風韻彌彰 先生姓崔。諱致湖。字平遠。初諱嶪。號尙德齋。貫朗州。麗朝東萊侯諱知夢。其鼻祖也。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是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至諱得超。掌樂院正郞。公之高祖也。曾祖諱自赫司醞寺直長。祖諱湫。號蘭溪。戶曹參判。考諱近池。號月溪。司成妣驪興閔氏參議湜女。明宗甲子十月十六日。生公于京之南部私第。幼有異質。穎悟過人。纔能言。便能綴句。詠烏詩曰。鳥中甭能孝。古人比於賢。七歲丁外艱。孺哀岡極。見者釀涕。服闋。就讀塾師。師見其頻入內庭。或久而不出。問其故。對曰。小子平日戀戀意。半是慈親半是師。師奇之。讀書端拱危坐。專心致志。誦數有程。硏究無方。自四書五經以至諸子百家。循環熟復。淹貫該洽。聞石潭李先生邃於理學。遂往學焉。又與任公叔英高公用厚洪公雴金公槃高公傳川閔公聖徵爲道義交。規警切磋。益自展拓。令聞令望。藉甚一時。癸未中司馬。除禮賓寺參奉。乙酉差江原道都事。以親老不就。旋除造紙署司紙。丙戌有狼川之命。又以親老不就。丁亥擢第。卽拜弘文館校理。上疏辭。略曰。殿下有堯舜之資。有堯舜之位。有堯舜之民。堯舜之澤。未洽於國家者何也。宋臣蔡沈之言曰。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然則求其心三字。豈非今日急先之務乎。求心之法。先聖謨訓。著於簡冊者。至爲詳悉。必須親近儒賢。夙夜講究。以明其理。以踐其實。則求心之法得。而爲治之本立矣。戊子除司諫院獻訥。尋遷司憲府掌令。一日上御經筵講夏五子之歌因問民惟邦本之義公對之甚悉。且曰。孔子云一言而興邦。一言而喪邦。今此一言。亦興喪之所由繫。而聖問及此。敢不爲興邦賀。庚寅拜執義。見科試取人。專尙文藝。啓曰。章句之習。非經綸之學。文詞之術。非治平之策。今取士於章句文詞之間。而望其有經綸治平之效。不其難矣乎。壬辰之亂。柳相國成龍。擧公爲掌書記。參謀機務。多有著績。丙申遭內艱。癸卯除世子侍講院輔德。乙巳移左副承旨。光海辛亥陞都承旨。抗疏直諫。疎中有嚴法刻刑等語。光海大怒曰汝比予於秦二世乎徐對曰殿下若愧比二世則勿行二世之行。光海愈怒。杖囚禁府三日。減死一等。流于珍島。因有詩曰。禁吏促行南出門。此身生不返鄕村。蕭蕭風雨前宵夢。飛入湘江見屈原。癸亥改玉。卽蒙解放。以副提學累徵。不赴。因居于長興之瓦里。以山水文酒自娛。丁卯十月十六日卒。葬瓦里後麓甲坐原。配驪興閔氏參議絢女。生三男二女。男潔參奉。淑。海進士。女適邊克中金寅福。孫以下不錄。十二世孫昌柱南杓十四世孫東珉。以家狀來謁誌銘。銘曰。天啓照運。明良際出。玉署金堂。都兪密勿。不竟厥施。梧雲茫茫。身不見容。庵竄南荒。雷雨繼作。因臥東岡。追惟百世。風韻彌彰。 석담(石潭)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별호이다. 상강으로……보았네 상강은 중국의 소상강(瀟湘江)으로,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다가 죽은 곳이다. 금당(金堂)과 옥서(玉署)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이곳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는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조선 시대에는 홍문관이나 규장각 등 문신들이 근무하는 곳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묘지명의 주인공인 최치호(崔致湖)가 홍문관 교리로 제수된 적이 있기 때문에 사용한 듯하다. 창오의 구름 아득하네 최치호를 인정해 주었던 선조(宣祖)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오운(梧雲)은 창오(蒼梧)의 구름이라는 말로, 창오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 이름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돌려 순 임금 향해 절규하노니, 창오의 구름이 정녕 시름겨워서.[廻首叫虞舜, 蒼梧雲正愁.]"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同諸公登慈恩寺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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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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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모정 형공 묘지명 茅汀邢公墓誌銘 옥새 찍힌 교서(敎書)를 내려 격려하고 금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더하였으니, 한(漢)나라 때 양리(良吏)가 여기에서 성대해졌다.5) 이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이고 태평의 상징이니, 삼대(三代) 이하의 시대에서는 견줄 만한 왕조가 드물었는데, 오직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즈음이 또한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권유하고 포상하는 전지(傳旨)가 날로 주군(州郡)에 내려지고 직분을 나누어 맡은 지방 관원이 날로 선(善)을 장려하자 어진 관리가 성대히 출현하고 칭송하는 소리 또한 자자하여 무궁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모정(茅汀) 형공(邢公)은 또한 당시의 어진 관리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 경인년(1530, 중종25)에 외직으로 나가 남평(南平)을 다스렸고, 계사년(1533, 중종28)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치적이 으뜸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유서(諭書)를 내렸다. 그 유서에 이르기를 "지금 관찰사 송흠(宋欽)6)이 아뢴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남평을 다스릴 때부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이미 드러나 그대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유서를 받았는데, 하교하기를 "그대의 청렴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표리 1습을 하사하니, 그대는 받들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있어 구름이 용을 좇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이 의기와 기질이 맞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선비가 삼대(三代) 때 태어나지 못해 이미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이 태평성대에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방이 흥성한 시대에 태어나 위로 성스럽고 명철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 온화하고 고상한 신하가 있었으니, 송흠(宋欽) 선생 같은 분이 추천하고 칭송하기를 이와 같이 정중하게 한 것은 옳다. 그 나머지 작위를 받지 못하고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 어찌 공에서 보탬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이겠는가.공의 휘는 자관(自寬), 자는 장백(長伯), 모정(茅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방(昉)이 그 중시조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정벌한 공로로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진양군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와 군철(君哲)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 경승(慶承)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은 용인(用仁)은 진사(進士)이다. 모친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11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고아한 지조가 있으며 청렴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대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1519)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남평(南平)과 하양(河陽)의 고을 원을 역임하였는데, 남평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병오년(1546, 명종1) 3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남평 저포면(猪浦面) 하류촌(下流村) 안산(案山)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주부(主薄) 김숭령(金崇齡)의 따님이다. 신해년(1491, 성종22) 9월 2일에 태어났고, 무신년(1548, 명종3) 1월 18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현(世賢)이고, 딸은 각각 양응기(梁應箕), 조국성(曺國聖)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현은 자식이 없어 양씨(梁氏)가 외손으로서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문적(文蹟)은 병화에 유실되었는데, 만년의 것은 양씨의 집안에서 약간의 유고(遺稿)를 얻었다. 종(從) 9세손 도열(道烈)이 눈물을 닦으며 붓을 들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호남의 군현을 다스렸고 分憂湖郡영남 고을을 맡아 다스렸네. 歷典嶺邑봄볕이 빛을 발하였으니 陽春動輝성상의 표창이 융성하였네. 天褒隆洽어진 관리 계속 전해짐에 良吏續傳누가 감히 공을 빠뜨리랴. 誰敢遺公훌륭한 풍도와 위대한 공적 英韻偉蹟무궁한 후대에 밝게 드리우리라 昭垂無窮 璽書勉勵。增秩賜金。而漢世良吏。於斯爲盛。此其明良之會。昇平之象。三代以下。鮮見其比。而惟我成宗中宗之際。亦庶幾焉。獎諭褒旨。日下州郡。而字牧分職。日勤於善。所以良吏蔚興。頌聲倂作。而用底于無疆之休也。茅汀邢公。亦當時之良吏也。靖陵庚寅。出莅南平。癸巳移河陽。以治平第一。特蒙恩諭。有曰。今仍觀察使宋欽所啓。知爾自爲南平時。薄賦愼刑。廉勤己著。民有去後之思。予甚嘉之。賜表裏一襲。以示褒獎之意。爾其體予至懷。終始不渝。明年春。又蒙諭。有曰。嘉爾淸白卓異。特賜表裏一襲。爾其頌受。嗚呼。上有願治之主。下有效忠之臣。雲龍風虎。何等盛儀也。士不生三代之上。旣不得與臯夔稷契都兪吁咈於太和照皞之中。則生於大東日中之世。上有聖明之君。下有儒雅之臣。如宋欽先生。而推引賞識。若是鄭重則可矣。其餘爵位之不揚。祚胤之不昌。曷足以加損於公也耶。公諱自寬。字長伯。茅汀其號也。麗朝平章事昉。其中祖也。再傳至公美。征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自晉陽君三傳至君哲。入我朝。官忠淸兵使。卽公之曾祖也。祖慶承。仕郞贈戶曹參判。考用仁進士。妣淸州韓氏。以弘治戊申十月三日生。公天資端詳。雅操廉潔。孝友文學。見重一時。丁丑中生員。己卯除中部參奉。歷宰南平河陽。南平民建祠。春秋享祀。丙午三月十九日卒。享年五十九。葬南平之猪浦面下流村案山丙坐。淑夫人光山金氏主薄崇齡女。辛亥九月二日生。戊申正月十八日卒。墓合祔。有一男二女。曰世賢。曰梁應箕。曺國聖。世賢無育。梁氏以外裔奉公祀。文蹟失於兵燹。晩於梁氏家得若干遺實。從九世孫道烈。抆淚沘筆以序其事。仍請余以誌墓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分憂湖郡。歷典嶺邑。陽春動輝。天寢隆洽。良吏續傳。誰敢遺公。英韻偉蹟。昭垂無窮。 조서를……성대해졌다 선제(宣帝)는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여, 치적이 있는 지방관은 새서(璽書)로 권면하여 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은 품계를 높여 주고 관내후(關內侯)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漢書 循吏傳》 송흠(宋欽) 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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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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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 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아, 여기는 병좌병향(丙坐丙向)에 좌병향임(坐丙向壬)7)으로 혈(穴)과 봉분을 함께한 곳인데, 고(故) 만희당(晩喜堂) 홍공(洪公)과 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의 무덤이다. 조금 내려와 정좌(丁坐) 언덕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무덤이다. 공은 숙종(肅宗) 임진년(1712, 숙종38)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60세 되던 해에 졸하였다. 졸한 지 125년 뒤에 현손(玄孫) 형주(馨周), 기주(基周), 경주(慶周)가 무덤 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또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를 도모하여 장차 무덤에 묘지명을 새기려고 행장(行狀)과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금석문은 만년의 계책8)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선조를 향한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공의 휘는 이발(履潑), 자는 자함(子涵)이니, 세계(世系)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직학사(直學士) 휘 지경(之慶)이 그 현조(玄祖 5대조)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대대로 그 미덕을 더하였다. 고조는 휘 준(埈)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휘 덕우(德遇)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경고(景古)인데,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천규(天奎)이고 호가 오은(鰲隱)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이인량(李仁亮)의 따님이다.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웠으니, 집이 가난하여 직접 집안 살림을 꾸렸고,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를 거행함에 지나치게 애통해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부친의 훈육을 받고 경전을 읽고 학업에 매진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면서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으며, 의리를 행하여 환하게 빛났다. 오서육경(五書六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회통(會通)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였으니, 순환하면서 복습하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하여 노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수(山水) 사이의 경치 좋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형제간에 다정하게 마주 보며 강론하고 토론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학당동(學堂洞)이라고 불렀다.아들 영구(永九)는 나씨(羅氏)의 소생이다. 아들 영범(永範), 영조(永兆)와 김양려(金陽麗)에게 시집간 딸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홍씨(洪氏) 일문(一門)은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가법(家法)이 향리에 소문이 나서 학문에 뜻을 둔 많은 선비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만희옹(晩喜翁)과 같은 여러 선배가 선도한 힘이 아니겠는가. 유풍과 여운이 더욱 백세토록 뻗어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분이 다하지 않았으니 좋은 방향으로 계승한 민첩함이 마땅히 이러함에랴. 우러러보면서 감동하는데, 감히 그 부지런한 뜻에 일부나마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은둔하여 곤궁하면 형통하니 遯肥困亨대대로 옛 음덕을 누렸네. 世食舊德무덤에 글을 실으니 載辭幽堂억만년 수를 누리리라. 用壽斯億 嗚呼。此坐丙而向壬。竝穴而同墳者。故晩喜堂洪公及共夫人羅州羅氏之藏也。稍下而負丁者。系夫人河東鄭氏窆焉。公以肅宗壬辰生。生六十歲而卒。卒一百二十五年。而玄孫馨周。基周慶周竪墳前短碣。又謀記實。將以銘諸幽竁。持行狀及碣文來。命於義林。此是金石萬年計也。托非其人。恐涉疏歇。而其向先追遠之誠。誠可謂能子能孫矣。公諱履潑。字子涵。系出豊山。直學士諱之慶。其玄祖也。文學行誼。世濟其美。高祖諱埈。贈掌樂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議。祖諱景古。號枕漱亭。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有隱德。妣仁川李氏仁亮女。公性孝。家貧躬幹。忠養備至。執喪過毁。廬墓三年。早襲庭訓。劬經績學。文詞贍暢。行義煒燁。自五書六經至程朱諸說。無不淹貫會通。尤邃易學。循環紬繹。至老不倦。結茅山水間。兄弟對床講討。遠近士子。聞風空集。人號其地爲學堂洞。子永九羅氏出。永範永兆女金陽麗。鄭氏出也。洪氏一門。椒聊蕃衍。而家法之美。聞于鄕邦。濟濟志學之士。方蔚然而未艾。此非先輩諸公如晩喜翁垂創之力歟。流風餘韻。加以亘百世而不泯。況今澤未斬而親未竭。其式穀似述之敏。宜乎內爾也。瞻感攸至。敢不勉副勤意之一二也。銘曰。遯肥困亨。世食舊德。載辭幽堂。用壽斯億。 좌병향임(坐丙向壬) 묘소의 방향을 말한 것으로, 병(丙 방위로는 남녘에 해당)을 등지고 임(壬 방위로는 북녘에 해당)을 향함을 의미한다. 만년의 계책 〈능고대(凌敲臺)〉 시에 "백 년 인생에 지었을 만년의 계책이여, 바위 위 옛 비석엔 푸른 이끼만 남았네.[百年應作萬年計, 巖上古碑空綠苔.]"라는 시구가 있다. 《唐百家詩選 卷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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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 형공 묘지명 道谷邢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영(世英), 자는 춘영(春榮), 호는 도곡(道谷)이다. 신라(新羅) 때 휘 옹(顒)이 있었는데, 당(唐)나라 학사로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왔으니, 이 분이 상조(上祖)이다. 중대 휘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있어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이 분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 문궤(文軌)를 낳았고, 문궤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휘 찬(贊)을 낳았으며, 찬이 진사를 지낸 휘 군철(君哲)을 낳았는데, 군철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경(慶)이니,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용인(用仁)인데, 진사이다. 선고(先考)는 휘 자홍(自弘)인데,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모친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인데, 정덕(正德) 2년 우리 중종(中宗) 정묘년(1507, 중종2)에 공을 낳았다.공은 생래적으로 기개가 높고 도량이 넓으며,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우뚝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경전을 읽으면서 힘써 배웠는데, 더욱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에 관한 책을 깊이 연구하여 발휘하고 확충하여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은 구차하고 소홀한 뜻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일찍이 모질고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중년에 능주(綾州) 도동(道洞)으로 이사한 다음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짓고 시냇물을 끌어다 꽃을 심고 한가로이 노닐면서 그윽하고 빼어난 흥취를 두루 만끽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지만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향리에서 이름난 양학포(梁學圃) 제현과 서로 날마다 어울리면서 회포를 시로 읊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조정암(趙靜庵)이 본주(本州)에 귀양 오자 가서 위문하였다. 이를 인연으로 강론하고 질정하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 사약을 내리는 명이 이르자 슬퍼하고 상심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심정을 토로하였다.신사년(1581, 선조4) 10월 13일에 사제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5세이다. 죽동(竹洞)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니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공의 오른쪽에 있다. 계배(繼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 갑좌(甲坐)에 있다. 모두 3남이니, 응지(應祉), 응식(應植), 응희(應禧)이다.12세손 도열(道烈)이 못난 나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만 고루(固陋)하고 용렬하여 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지만 유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도곡의 산은 道谷之山쉬고 노닐 수 있네. 可以棲遲도곡의 물은 道谷之水굶주림도 즐길 수 있네. 可以樂飢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니 山高水長운치는 전과 다름이 없네. 風韻依然백세토록 생각나게 하니 百世興想지나는 사람 머무르네. 過者留連 公諱世英。字春榮。號道谷。新羅時有諱顒。以唐學士。浮海東來。是其上祖也。至中系諱公美。討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是生諱文軌。禮部尙書。是生諱贊。版圖判事。是生諱君哲。進仕於公爲高祖。曾祖諱慶。將仕郎贈戶曹參判。祖諱用仁。進士。考諱自弘。碧潼郡守。妣延安李氏。以正德二年我中宗丁卯生。公生而氣宇峻茂。孝友根天。稍長屹若成人。劬經力學。尤蓫小學近思錄及性理之書。發揮展拓。體用無闕。平生行已。未見有苟且簡慢之意。亦未嘗有斬絶矯激之行。中年移寓綾州之道洞。買山結亭。引流裁花。逍遙徜徉。備盡幽逸之趣。以學行除齋郞。疏辭不就與鄕裏名勝梁學圃諸賢。日相追逐。唱酬遺懷。己卯趙靜庵謞本州。往省之。因以講討問辨。源源不絶。及後命至。不勝哀傷。爲賦一絶詩以寫其情。辛巳十月十三日卒于居第。享年七十五。葬于竹洞艮坐之原。配韓山李氏某女。墓附右。繼配水原白氏某女。墓同原甲坐。擧三男曰應祉應植應禧。十二世孫道烈。走書不侫。謁誌墓之文。顧固陋微劣。固知不敢承當。而曠感餘風。有不忍終辭者。銘曰。道谷之山。可以棲遲。道谷之水。可以樂飢山高水長。風韻依然。百世興想。過者留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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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정 문공 묘지명 竹汀文公墓誌銘 관산부(冠山府) 유치방(有治坊) 작소동(雀巢洞)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간방(艮方 동북방)을 등지고 곤방(坤方 서남방)을 향한 것이 바로 고(故) 효자 죽정(竹汀) 문공(文公)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세월이 오래 되었지만 묘지명이 없었다. 어느 날 후손 진호(振浩)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가천(佳川)에 있는 나의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대저 훌륭한 글이 널리 알려져 백세토록 잊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도리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러한 사람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다만 쇳조각과 흩어진 구슬이 유실될까 염려하여 제때에 수습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갈고 다듬어 빛나게 하는 것은 조만간에 저절로 합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삼가 살피건대, 공의 성은 문씨(文氏), 휘는 종현(宗鉉), 자는 국현(國賢)이니, 순묘(純廟) 정축년(1817, 순조17) 1월 29일에 대리(大里)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대대로 너무나 가난하여 재물이 될 만한 것이 없어 농사짓고 고기 잡고 나무하며 힘든 일도 부지런히 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되 몸에 맞거나 입에 맞는 것이면 전부 바치지 않음이 없었다. 한가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먹을 갈고, 글을 읽고 외우며 연구하여 지식을 쌓아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부모님을 간병할 적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끊어지려는 목숨을 살렸으며, 거상(居喪)할 적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고, 벗들은 그 행실에 탄복하여 여러 번 추천하려는 의론이 있었다. 공이 듣고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설령 탁월한 행실이 있더라도 본래 자식의 본분이니, 실로 구구하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내가 한 바는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없는데 도리어 이렇게 추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힘껏 거절하였다.금상(今上) 을유년(1885, 고종22) 9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였으니, 태어난 정축년으로부터 69년 후이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 행장을 지어서 관아에 보고하고, 이어서 암행 어사에게 보고하고 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문씨(文氏)는 세계가 남평(南平)에서 나왔다. 신라(新羅)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多省)이 시조가 된다. 고려 때 이르러 휘 익점(益漸)이 있으니,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다. 본조에 들어와 도승지를 지낸 휘 화(和)가 있고, 호가 풍암(楓庵)인 휘 위세(緯世)가 있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성광(聖光), 영복(永福), 사길(思吉), 기보(基普)는 고조와 증조 이하 4대의 휘이다. 배위는 장흥 위씨(長興魏氏)로, 위익조(魏益祚)의 따님이다. 묘소는 중군봉(中軍峯)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모두 5남 2녀이니, 아들은 진호(振浩), 욱호(郁浩), 면호(勉浩), 병호(丙浩), 관호(寬浩)이고, 딸은 김지현(金之鉉), 윤제신(尹濟臣)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행하였으니 潛修獨行겸손함이 더욱 드러나네. 撝謙彌彰내 명문을 지어 我作銘詩무덤에 새기네. 用誌斧堂 冠山府有治坊雀巢洞。有崇四尺。背艮而向坤者。卽故孝子竹汀文公衣履之藏也。歲久無誌。一日遺胤振浩。持家狀。過佳川敝廬。屬余文之。夫立言揄揚。百世不朽。顧何等重事。而乃於淺淺膚末如此生者見託耶。但零金散璧。慮有遺落。其收拾之不可不以時。而若其琢磨淬礪。出治光彩。則早晩自有其人焉。謹按。公姓文。諱宗鉉。字國賢。以純廟丁丑正月二十九日。生於大里第。天姿淳實。幼有至行。家世貧甚。無以爲資。耕稼漁樵。服勤就養。便身適口。無不畢給。暇日餘力。入塾行墨。諷誦硏究。蘊蓄該洽。侍疾血指。以甦旣絶。居喪過毁。幾於傷生。隣里感其孝。朋友服其行。累有剡薦之議。公聞之歎曰。設有卓絶之行。自是人子常分。固不爲區區干聞。況我之所爲。無一毫近似。而乃有此擧耶。此欺天誣人。罪有甚焉。遂力拒之。今上乙酉九月二十七日。卒于正寢。距丁丑懸弧爲六十九歲矣。於是鄕人狀其行。聞於官。繼而聞於繡衣。又聞於道伯。文氏系出南平。新羅武成公諱多省爲始祖。至麗朝有諱益漸封江城君。入我朝。有諱和都承旨。有諱緯世號楓庵。皆其顯祖也。聖光。永福。思吉。基普。高曾以下四世諱也。配長興魏氏益祚女。墓在中軍峯亥坐原。擧五男二女。曰振浩郁浩勉浩丙浩寬浩。金之鉉尹濟臣。孫以下不盡錄。銘曰。潛修獨行。撝謙彌彰。我作銘詩。用誌斧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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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빈에게 보냄 與李光彬 "성(性)에는 삼품(三品)이 있다."라는 것은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말인데, 근세의 삼층(三層)13)이라는 말이 이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중용(中庸)》의 성(性), 도(道), 교(敎)는 체용(體用)과 수양의 순서로 말한 것이지 어찌 일찍이 성(性)에 삼층(三層)이 있다고 여겼겠습니까. 일본만수(一本萬殊)14)는 진실로 경계를 구분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수(分殊)로 말한다면 역시 체와 용, 본과 말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이(至異)하지만 지동(至同)한 것이 있고 찬연(粲然)히 구별되지만 혼연(渾然)하게 뒤섞인 것이 있으니 어찌 지동(至同)과 지일(至一)의 오묘함이 다시 발붙일 곳이 없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일본(一本)을 분수(分數)가 없다고 이른다면 일본이라는 것은 반드시 공허하고 아득한 지경으로 떨어집니다. 시험 삼아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올린 율시 2수에서 그 뜻을 대략 말하였습니다. 성(性)은 만물의 일원(一原)이고 만물의 이치는 본래 일원 안에 이미 가득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만물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만약 "본연에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임시로 배정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무슨 도의(道義)이겠습니까. 근세의 기(氣)를 위주로 하는 설은 곧 여기에서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性有三品。此是昌黎語。近世三層之語。不其類此乎。中庸之性道敎。此以體用修爲之序言之。何嘗以性爲有三層乎。一本萬殊。固無界分之可言。然若以分殊言之。亦不無體用本末之可言。況至異而有至同者存焉。粲然而有渾然者在焉。則烏可謂至同至一之妙。更着無地耶。若以一本謂無分數。則所謂一本者必墮於空虛冥漠之地矣。試思之如何。向者所呈詩律二首。槪言其義矣。性者萬物之一原。而一原之中。萬物之理固已森然矣。不然。萬物何從而出乎。若曰不具於本然。而爲臨時排定云。則此何道義乎。近世主氣之說。卽於此蹉了故也。 삼층(三層) 한원진(韓元震)이 주장한 학설로, 성삼층설(性三層說)이라고도 하는데,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한 것이다. 일본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자어류》에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근본이 되는 것과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은,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나가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와 수많은 가지와 잎이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27 論語9 里仁篇下 子曰參乎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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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중에게 보냄 與朴學仲 경립(景立)이 담헌(澹軒)에서 돌아왔을 거라고 짐작하고 사온(士溫)을 보내 안부를 묻게 했더니, 사온(士溫)이 길을 가던 중간에 경립을 만나 함께 돌아왔습니다. 한창 걱정스럽던 시기에 마음이 매우 흡족하였습니다. 제게 끊임없이 물으시니 노형(老兄)께서는 역시 예학(禮學)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고 세밀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용렬하고 천박한 사람이 어떻게 견줄 수 있겠습니까. 제 의견으로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주장에 비해서 더욱 온당한 듯합니다. 이미 "시기가 지나면 담제(禫祭)67)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면, 담제를 지내는 달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내는 것은 시기가 지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날을 가려 대상제를 지내고 그 다음에 중순이나 하순에 다시 날을 가려 담제를 지내는 것은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왕숙(王肅)이 "그달 안에"라고 한 것 또한 하나의 증거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시기가 지나면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공제(公祭 국가의 제사)와 사제(私祭 사가(私家)의 제사)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상중에는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주장은 본래 부모의 상을 동시에 치르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가벼운 상의 장례를 치른 뒤 무거운 상의 담제를 지내지 않겠습니까. 그렇더라도 가벼운 상이 만약 장례를 치르기 전이라면 무거운 상의 담제를 지낼 수 없습니다. 2년이 되는 날 이미 고사(告辭)를 했다면 대상제(大祥祭) 때의 축문(祝文)은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모두 천박한 견해이고 근거 없는 말이니 노형께서 다시 지당한 논의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축하드릴 만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노형께서 근래 병에 매여 계시니 누구인들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을 닫고 홀로 지내며 쓸데없는 빈객을 맞지 않고 쓸데없는 얘기를 듣지 않으며 오직 성현의 서적에만 침잠 반복(沈潛反復)하실 뿐입니다. 이 때문에 지식이 날로 열리고 사유(思惟)가 날로 넉넉해지니 시력을 일찍 잃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주부자(朱夫子)의 말을 알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두 자제가 아침저녁으로 감화를 받는 기회가 되는 것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위로가 됩니다. 意景立自澹軒還。送士溫候之。士溫行到中路。逢景立俱還。企慮之際。甚愜情緖。俯詢縷縷。足見老兄於禮學。亦甚詳密。顧此疏慵淺劣。何足以上下也。鄙意尤菴同春。比沙溪說。似益穩當。旣曰過時不禫。則禫月行祥者。不可謂過時矣。卜日行祥。其次中旬及下旬。又卜日行禫。何所不可乎。王肅所謂是月之中者。亦不可謂非一副證佐矣。且過時不禫一也。豈有公祭私祭之別乎。喪中不禫。本以父母偕喪說也。豈以輕喪葬後不行重喪之禫乎。然雖輕喪若其葬前。則不可行禫也。再期日。旣有告辭。則祥時祝文。似無異同矣。如何如何。此皆淺見臆說。幸老兄更示以至當之論。第有一說可奉賀者。老兄近來爲病所縶。孰不悶慮然閉戶獨居。不接閒人客。不聞閒說話。而所沈潛反復。惟是聖賢書籍而已。是以知識日開。神明日腴足見朱夫子却恨盲廢不早之語也。况爲令允兄弟日夕薰染之地者。豈有量哉。慰仰。 담제(禫祭) 삼년상에서 25개월이 되는 달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낸 뒤 한 달을 건너 27개월째에 지내는 제사이다. 담은 담담한 듯 평안하다는 뜻으로, 대상제를 통해 실제적인 삼년상의 과정을 마무리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친애(親愛)의 정감을 다할 수 있었던 효자(孝子)의 마음을 표상하는 상제(喪祭)이다. 담제를 지내고는 음악을 연주하고 정사(政事)에 복귀하는 등 상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는 정현(鄭玄)의 주장에 따라 27개월째에 지내지만 대상제와 동일하게 25개월이 되는 달에 지낸다는 왕숙(王肅)의 이설(異說)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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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지【재홍】에게 답함 答鄭敬之【在洪】 두보(杜甫)의 시(詩)에 "봄이 오면 오래도록 회포를 펼치리라고 생각했건만, 늙어가면서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 얼굴 보기 드물다."96)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궁벽한 골짜기에서 움츠리고 지내서 찾아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매번 이 노인의 시는 오로지 저를 위해서 마련하고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한번 읊조리고 한번 탄식하면서 그럭저럭 자신을 위로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노형(老兄)께서 뭇사람이 버린 상황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고 글과 술로 저를 맞이하고 뛰어난 시로 저에게 넌지시 간하며 저에게 안부를 묻고 강론과 토의로 저를 면려하는 것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정겨움이 넘쳐났습니다. 그 뜻을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그 뜻을 어찌 소홀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두보가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르러 내가 이룰 수 있으리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위로되는 마음 가득합니다. 보내신 서신에, "눈앞에 놓인 어지러운 시속(時俗)은 별달리 다스릴 방도가 없고 벗들과 의리를 강구하는 것처럼 급박한 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근심이 없는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선비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 일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추구할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외부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고, 군자가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니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남은 생애가 지금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찌 뜨락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문을 걸고 담 구멍을 막아 세상과 서로를 잊으며 내 옷을 입고 내 음식을 먹으며 내 책을 읽어 늘그막에 조그마한 공을 거두는 것이 가장 좋은 요결(要訣)입니다. 형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杜子詩曰。春來準擬開懷久。老去親知見面稀。弟跧滯窮峽。過終絶罕。踽踽凉凉。無以爲懷。每疑此老詩偏爲此生準備而作也。一諷一歎。聊以自慰。幸有老兄不棄於衆棄之中。邀我以文酒。諷我以瓊律。訊我以寒暄。勉我以講討。不徐不疾。款款津津。其義何可忘。其義何可少耶。杜子所以準擬而未就者。安知至於今日而我得就之耶。滿心慰慰。來喩以爲目今俗擾。別無所營。從友講義。莫此爲急。此固然矣。然非惟今俗爲然。雖在昇平無虞之時。士之所當求者。此事而已。外此了無一事可求者。是以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然彼求無益於得。求在外故也。此求有益於得。求在我故也。況吾輩殘生。坐在今日世界。豈容一步於門庭之外耶。杜門塞竇。與世相忘。衣吾衣。食吾食。讀吾書。以收桑楡萬一之功。此是太上要訣。想兄已諒悉矣。 봄이……드물다 두보의 〈십이월일일삼수(十二月一日三首)〉 가운데 3수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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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남 홍공67)에 대한 제문 祭鳳南洪公文 공은 준수하고 시원한 자질로 가정에서 학문한 공을 익혀 위연(偉然)히 효우(孝友) 개제(愷弟)의 행실이 있었고, 의연(毅然)히 강방(剛方) 정직(正直)한 덕이 있었고, 충연(充然)히 경륜(經綸) 시위(施爲)의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가 때와 더불어 어긋나고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오솔길을 내어 꽃을 심고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지어 만년에 기오(寄敖)68)할 장소로 삼았는데, 조물주가 시기하고 좋은 일에 장난치는 일이 많아 오래도록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갑자기 이렇게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오호라! 궁통(窮通)은 운명이고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렸으니, 하늘과 운명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있고, 내가 한 덩이 혈기로 하여금 능히 그 명정(明淨)하고 순결(純潔)함을 보호하여 천지 부모에게 돌려놓는 것은, 공은 여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의림(義林)은 왕래하며 지낸 것이 가장 오래여서 지우를 받아 친밀하여, 꽃피는 아침이나 달뜨는 저녁, 바람 부는 대낮이나 눈 내리는 밤엔 생각하여 그리워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글방이나 정자, 산과 들 시내와 다리에서 서로 연이어 함께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이나 기·차·운·율(記劄韻律)에 대해 경도되지 않은 말이 없었습니다. 서로 만나면 밤새도록 잠자는 것도 잊고 날이 다하도록 밥 먹는 것도 잊어 끊임없이 담론하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고, 만나지 못하면 날마다 인편을 보내고 달마다 우체 편을 통해 서간이 이어지고 서찰이 쌓여 장황해도 그칠 줄 몰랐는데, 지금은 끝나버리고 끝나버렸습니다.여생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건대, 지금부터 이후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 만나는 온갖 감회는 누구에게 토로할 것입니까? 혹시 쌓아두고 또 쌓아두어 훗날 서로 만난다면 장차 황천의 달 아래서 악수하고 실컷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변하여 사라진 것은 형체이고 그 정영(精英)과 기상(氣爽)은 항상 상상하고 꿈꾸는 사이에 흘러 통하니, 장차 꿈과 생시가 섞이고 사생이 하나여서 형체나 외물의 얽매이는 밖에서 끊임없이 왕래하며 서로 노닐 것입니까?그 마을에 들어가니 누대와 연못은 옛날 같이 있는 것을 보겠고, 그 문에 들어가니 소나무와 국화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겠고, 그 집에 들어가니 서책과 거문고가 어제같이 정연함을 보겠는데, 하나의 작은 방에는 유독 주인옹을 볼 수 없으니. 오호 통재라! 公以俊茂秀爽之姿。服詩禮學問之功。偉然有孝友愷弟之行。毅然有剛方正直之德。充然有經綸施爲之才。道與時違。世莫我知。開經栽花。買山結亭爲晩暮寄敖之所。誰知造物有猜。好事多戱。使未得久享其樂。而遽此謝世耶。嗚乎。窮通命也。死生天也。天與命有不在我。而我之所以使一團血氣。能保其明淨純潔。而交還於天地父母者。公其至此。庶乎無憾矣。義林過從最久。見知密勿。花朝月夕。風日雪夜。無時而不思想。庠塾亭樓。山野溪橋。無處而不牽連。經史子集。記劄韻律。無言而不傾倒。相見則竟夜忘寢。竟日忘食。娓娓而不知倦。不見則日便月禠。連簡累牘。張皇而不知止。今焉已矣。今焉已矣。顧念殘生。未知自此能保幾年。而其間所遇百感萬懷。向誰討破也。其或積之又積。使他日相逢。將握手劇談於泉臺夜月之下耶。抑所化者形也。而其精英氣爽。常常流通於想像夢寐之間。其將混夢眞一死生。而源源相遊於形骸物累之外也耶。入其洞。見䑓池如古。入其門。見松菊猶存。入其室。見書冊琴瑟。秩秩如昨。而一區方丈間。獨不見主人翁。嗚呼痛哉。 봉남(鳳南) 홍공(洪公)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호는 봉남,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저서로는 《봉남집》이 있다. 기오(寄敖) 오만한 마음을 부친다는 뜻으로,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남쪽 창가에 기대어 오만함을 부치니, 무릎을 용납할 만한 곳이 편안하기 쉬움을 알겠노라.[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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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중134)에 대한 제문 祭文翊中文 우리 두 사람은 처음에 얼굴로만 사귄 것이 10년이었고 마침내 마음으로 사귄 것이 10년이었으니, 취미는 날로 더욱 서로 부합하고 경계는 날로 더욱 서로 친밀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날로 더욱 서로 부지런하였는데, 사생과 유명으로 작별함이 갑자기 오늘에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오호라! 공은 법도 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여 평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고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워 잡아 지키는 것이 여유가 있어, 평탄함과 험준함이 일정하지 않아 겪은 세월이 점점 많아짐에 이르러서도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이 쇠하지 않고 취사가 더욱 정밀하여 그 모으고 머물렀던 것으로 만년의 절개를 보호하고 지켰던 것은 넉넉히 여유가 있었는데, 조물주가 좋지 못하여 좋은 일에 장난이 많았으니, 애통하고 애통하도다!의림(義林)은 부모 잃은 여생에 형제가 드문 외로운 신세로 노년에 의지할 이는 오직 벗들 뿐이었는데, 나를 알고 나를 아끼는 공과 같은 사람이 또 나를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장 생각할 만한 것이 있으니, 공이 돌아가시기 전 5일에 내가 와서 문병하자 공이 손을 잡고 울면서 영결하면서 고아를 부탁하였고, 다음날 또 손수 편지를 써서 작별을 고하면서 다시 앞서의 부탁을 말하였네. 무릇 죽음에 임하여 고아를 부탁하는 것은 반드시 백수(白水)와 병산(屛山)135) 같은 사람이라야 감당할 수 있고, 멸렬하고 용렬함이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 같은 내가 어찌 능히 담당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목석이 아닌 이상 평생의 벗이 돌아가실 때 부탁한 것에 대해 힘은 비록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어찌 갑자기 잊어버리겠는가. 영령이 지각이 있다면 이 어리석은 충심 알아주시게. 吾兩人。始以面交者爲十年。終以心交者爲十年。臭味日益相符。規警日益相密。從逐日益相勤。豈知死生幽明之別。遽在今日耶。嗚呼。公生長法家。擩染有素。稟賦美質。操守有餘。至於夷險不一。閱歷漸多。而好尙不替。取舍愈精。其所以蓄聚住停。爲保守晩節之計者。綽有餘地。造物不媚。好事多戱。痛哉痛哉。義林風樹餘生。終鮮煢煢。殘暮所賴。惟是朋友。誰知知我愛我如公者。又且棄我耶。最有所可念者。公歿前五日。余來問疾。公執手泣訣。託以遺孤。翌日又手書告別。復伸前託。夫臨歿遺孤之託。必白水屛山而後。可以當之。顧滅裂頹塌。如倒水不起者。安能擔負也。然我非木石。其於平生知舊臨歿之託。力雖未逮。心豈遽忘。靈其有知。諒此愚衷。 문익중(文翊中) 문봉환(文鳳煥, 1849∼1890)을 말한다. 자는 익중(翊中), 호는 오계(梧溪),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 권19 〈오계 문공 행장(梧溪文公行狀)〉에 보인다. 백수(白水)와 병산(屛山) 백수(白水) 유면지(劉勉之)와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를 말한다. 주희의 아버지가 병이 위독했을 때 아들 희(熹)에게 유언으로 말하기를 "적계 호원중, 백수 유치중, 병산 유언충 세 사람은 학문에 연원이 있어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분들이니, 내가 죽거든 네가 가서 그분들을 스승으로 섬기어 오직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籍溪胡原仲、白水劉致中、屛山劉彦沖三人, 學有淵源, 吾所敬畏, 吾卽死, 汝往事之, 而惟其言之聽.]"라고 하였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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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에게 적어 보이다 書示諸同志 태극(太極)은 천지의 종조(宗祖)이고 조화(造化)의 주재자(主宰者)이며 만물(萬物)의 기저(基底)이고 천하 고금(天下古今)에 걸친 인사(人事)의 준칙이다. 지극히 미묘하지만 일용(日用)의 상도(常道)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히 가깝고 절실하지만 실로 천명(天命)의 엄중함에 근원을 두고 있다. 세상의 치란(治亂), 인물의 현부(賢否), 풍속의 오륭(汚隆), 일의 성패가 오로지 이 도리가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고 사람의 마음에는 가려짐[蔽]이 있다. 마음이 이미 가려졌다면 비록 형기의 거친 흔적마저 명백히 볼 수 없다. 하물며 형체가 없는 오묘한 도리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경(經)을 짓고 현인(賢人)이 전(傳)을 찬술하여 천언 만어(千言萬語)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펼쳤던 것은 이 이치를 밝혀서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삼대(三代) 이후로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여 순경(荀卿), 양웅(揚雄)과 같이 세상에 드문 호걸조차도 기(氣)를 성(性)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그들보다 못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오랜 세월 어둠에 뒤덮여 헤매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낙양(洛陽)과 민중(閩中)1) 사이에서 2~3명의 선각자가 역량을 발휘하여 성선(性善)의 뜻을 세상에 크게 밝혀놓았다.우리 동방에서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여러 선생께서 이를 독실하게 믿고 신중하게 지켜 노맥(路脈)이 안정되었다. 아, 유풍(遺風)이 점점 멀어지면서 미언(微言)이 쉽게 가리어져 태극(太極)이 기(氣)를 띤 사물이라고도 하고, 오성(五性)이 기(氣)로 인하여 있다고 하기도 하고, 명덕(明德)이 형이하(形而下)라고 하기도 하고, 만수(萬殊)가 기분(氣分)이라고 하기도 하며, 달도(達道)가 기발(氣發)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다면 성정(性情)과 체용(體用), 시종과 본말은 기(氣)가 주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른바 태극의 주재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대강(大綱)이 이미 어그러졌으니 나머지가 어떨지는 모두 알 수 있다.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이 몹시 애를 태우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미언(微言)이 가리어진 상황에서 이것을 밝혀놓았건만, 이제 이미 밝아진 뒤에 다시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니 탄식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 이치를 강구하고 토론하여 눈앞에 밝게 드러나도록 했더라도 운용(運用)의 과정에 이르면 쉽게 잘못을 저지른다. 하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형기(形氣)가 거칠고 조악한 사물이니 정밀하고 순수한 민이(民彝 사람의 도리)에는 어떠하겠으며, 세도(世道)에는 어떠하겠는가.오직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께서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지으신 까닭이다. 변석(辯析)하고 회통(會通)하여 선철(先哲)의 미지(微旨)가 세상에 다시 밝게 드러나기를 바랄 만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건만 영남의 권(權)2), 최(崔)3) 등 여러 사람이 어구(語句)를 지적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거짓된 사실로 전현(前賢)을 헐뜯었다. 이 사람들의 이 행위가 공심(公心)에 의해 일어났는지 아니면 시기와 혐의(嫌疑)에 부림을 당해서인지 모르겠다. 이제 《외필》이 간행되어 사방에 널리 퍼졌으니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애오(愛惡)가 차츰 쇠미해졌으니 공의(公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저 입을 닫고 혀를 묶어둔 채로 청정(淸靜)한 마음을 지키고 분변을 하지 않으면서 백세(百世) 뒤의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그러나 다만 오당(吾黨) 선비들이 오늘날 변론을 벌이는 이기설(理氣說) 등을 시험 삼아 본다면 어느 것이 득(得)이고 어느 것이 실(失)이라고 여기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후대에 맡길 수 없으며 즉시 사실을 규명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자기는 지식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칭찬에 따라 편리함을 택하고 좋아하는 대로 편든다면 인습(因襲)과 구차스러움을 행하는 사이에 이 몸이 혹여 한쪽에 치우치는 죄과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는 오묘함이다. 모름지기 침착하고 독실한 태도로 오래도록 존심 양성(存心養性)을 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 힘쓰라! 이것이 학문(學問)의 기본 법칙이고 자신과 집안을 위한 중대한 계책이니 또 어찌 이 하나의 일만 해내고 말 뿐이겠는가. 太極是天地之宗祖。造化之主宰。萬彙之根柢。天下古今人事之準則也。至微至妙。而不離乎日用之常。至近至切。而實原乎天命之嚴。世之治亂。人之賢否。俗之汚隆。事之成壞。只在乎此箇道理明不明如何耳。然道理無形而人心有蔽。心旣有蔽。則雖形器粗迹。見且猶不得了了。況無形之妙乎。是以聖賢作之經。述之傳以至於千言萬語。娓娓而不已者。無非所以明此理。使人人得以見之。然三代以降。世敎不明。雖間世豪傑如荀卿揚雄之徒。猶不免認氣爲性。至有性惡之說。況其下者乎。百世長夜。擿埴倀倀。至宋。洛閩間有二三先覺出而發揮之。使性善之義大明於世。曁于我東。如靜退栗尤諸先生。篤信謹守。路脈坦然。嗚呼。遺風浸遠。微言易晦。或以太極爲帶氣之物。或以五性爲因氣而有。或以明德爲形而下。或以萬殊爲氣分。而以達道爲氣發。如此則性情體用始終本末。無非氣爲之主。而所謂太極主宰者。果安在哉。大綱旣差。餘皆可知。先聖先賢。苦心苦口。所以明之於旣晦之餘者。今不免復晦於旣明之餘。可勝歎哉。人於此理講之討之。使昭然在目。至運用之際。易致差失。況目前所見。無非形氣鹿粗之物。則其於民彝何。其於世道何。惟我蘆沙先生。嘗慨然於此。思有以救之。而納凉猥筆之書所以作也。析以辨之。會而通之。使往哲微旨庶幾復明於世。不意嶺中權崔諸人。指摘句語。眩惑視聽。以爲誣毁前賢。未知此人此擧是公心所發耶。是猜嫌所使耶。今猥筆之書。刊布在四方。有眼者。皆可得以見之。況時移歲久。愛惡稍衰。則所餘者公議而已。只有緘口結舌。守靜無辨。以俟百世之人可也。然惟吾黨之士。試觀今日所辨如理氣之說。以爲何者爲得。何者爲失。此則不可委之於後。而所當卽下究覈者也。若已無知識。而隨人毁譽。惟便是擇。惟好是阿。則因仍苟且之頃。安知此身或不陷於偏側之科乎。但道理是無形之妙也。須從容沈索。積久存養。乃可以見。勉之勉之。此是學問大法。身家大計。又豈足止爲了此一事而已耶。 낙양(洛陽)과 민중(閩中) 낙양은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민중은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권(權) 《일신재집》 〈통고영남열읍장보문〉에 따르면 권봉희(權鳳熙)를 가리킨다. 최(崔) 《일신재집》 〈통고영남열읍장보문〉에 따르면 최동민(崔東敏)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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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기우록 湖上奇遇錄 갑술년(1874, 고종11) 가을에 친족인 사문(斯文) 백언(伯彦)4)이 사상(沙上)5)에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께서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의 안부를 매우 자세히 물으셨다. 인하여 서찰 봉투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삼가(三嘉)에 사는 정재규(鄭載圭)6)의 편지이다. 이 사람은 의림(義林)과 성씨도 서로 같고 나이도 서로 비슷하며 재능과 성격도 서로 닮았으며 사는 곳의 지명 또한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관했다가 의림에게 보이고자 한다.'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삼가(三嘉)에 정 사문(鄭斯文)이라는 현자가 있다는 말은 이보다 앞서 이미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있고 나란히 사문(師門)의 칭찬을 받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정(私情)이 두려워 감히 사문의 뜻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정 사문을 우러러 흠모하는 나의 마음은 이때부터 더해갔다. 이에 전편(轉便)을 통해서 삼가 통성명은 하였으나, 직접 뵙는 일까지는 아득하여 기약이 없었다.다음 해인 을해년(1875) 겨울 10월에 내가 사상(沙上)으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후윤(厚允 정재규(鄭載圭)의 자)이 3일 전에 당도해 있었다. 그다음 해 여름 4월에 내가 진구(珍邱)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후윤이 또 3일 먼저 당도해 있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이 꾀한다해서 되는 일이겠는가. 얼굴을 마주하고 약속을 하며 손을 맞잡고 언약을 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둘이서 응낙하더라도 끝내는 서로 형편이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다. 하물며 아득히 먼 500리 땅에서 애초에 한마디의 약속도 없던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으며 메아리처럼 합치된 것이 귀신과 같아 한 번, 두 번 기약이라도 한 듯이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예사로운 입장에서도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건만 도리어 함께 하는 것이 있고 스승에게 칭찬을 들었으니 참으로 진귀하고 소중한 일이다.선생께서 두 제자를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이것은 세상에 드문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다. 어찌 각자 기록을 남겨서 잊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삼가 전말(顚末)을 서술하고 이로 인하여 후윤의 학문과 지절(志節)을 돌이켜 기억하자니 실로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뒤로 이어진 기이한 우연이 이처럼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니 후윤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는 공자의 교훈7)을 고집스럽게 지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처럼 무능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은혜롭게 대하고 멀리하지 않으며 이끌고 일깨워주어 자기와 함께 돌아가도록 한다면 이처럼 세상에 드문 우연에 부응할 뿐만이 아니며, 또한 우리 선생께서 끊임없이 칭찬하신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네 가지가 같다는 말씀은 부끄럽지만 堪愧四同說두 번씩이나 만난 우연이 더욱 기이하구나 最奇再遇緣선생께서 기록으로 남기라 명하시니 先生命以記이 뜻이 참으로 깊고도 깊도다 此意正淵淵 歲甲戌秋。鄙族伯彦斯文。自沙上過余而言。老先生問季方安否甚悉。因指一幅封題曰。此是三嘉鄭載圭書也。此人與義林。姓氏相同。年紀相近。才性相似。至於所居地名亦不異。甚非偶然。故留此欲爲義林示之也。三嘉有鄭斯文之賢。前此蓋已稔聞。豈知醜差之身。與有所同。而倂見稱道於師門哉。私情悚惕。固知不敢承膺。而區區嚮仰之心。自此而有加矣。玆因轉遞。謹以姓名自通。而至於一番承接。則闊然無期。越明年乙亥冬十月。余往拜先生於沙上。厚允先三日至。明年夏四月。余往拜先生於珍邱寓舍。厚允又先三日至。是豈人謀所及哉。面以證期。手以置契。兩諾俱應。極其丁寧。而終至汗渙緯繣不如吾意者。十居八九。況漫漫半千里。初無一言之約哉。然不先不後。嚮合如神。至一至再。奉接如期。此在尋常之地。猶爲奇絶。乃有所同而見道於師門。曾是珍重者耶。先生顧謂二子曰。此是曠世奇絶事。盍各記諸以示不忘也。於是謹序述顚末。而因念厚允學問操守。實非如愚所可及者。然前後奇遇。若是種種。則厚允於母友不如之訓。似不當膠守矣。矜此不能。惠爾不遐。提挈警覺。俾與之同歸。則不惟爲副此曠絶之遇。而亦豈非我先生眷眷稱道之意耶。仍有詩曰。堪愧四同說。最奇再遇緣。先生命以記。此意正淵淵。 백언(伯彦) 정시림(鄭時林, 1833~1912)의 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월파(月坡)이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보성(寶城)에 거주하였다. 사상(沙上) 기정진이 거처하던 노산(蘆山) 아래 하사(下沙)를 이른다. 정재규(鄭載圭) 1843~191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이다. 청계(淸溪)는 초계의 이칭(異稱)이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에 의한 개화운동이 시기상조임을 밝히고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유림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최익현(崔益鉉)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자기만……교훈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우는 것 또한 견고하지 못하다. 충(忠)과 신(信)을 주로 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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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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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기우록〉을 읽고 감회가 일어 적다 閱奇遇錄有感而記 내가 일찍이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천하의 대성(大聖)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천하의 대현(大賢)을 만나 벗으로 삼아 스승에게 계발을 받고 벗과 강론을 하며 벗과 강론을 하고 스승에게 물어 바로잡았던 것을 생각해보니, 항항 간간(行行侃侃)한 위의(威儀)8)와 절절 시시(切切偲偲)한 즐거움9)이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상상이 되어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감흥이 일었다.비록 요(堯)나 순(舜) 같은 군주와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과 같은 무리를 만나 격의 없이 정사를 논하지는10) 못했을지라도 맹자(孟子)가 말한 천하에 왕(王)이 되는 것은 삼락(三樂)에 포함하지 않는 의리11)로 미루어 보자면 경중(輕重)과 저앙(低昂)의 분별은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내가 을해년(1875, 고종12), 병자년(1876) 연간에 선생의 문하에서 김경범(金景範)12), 정후윤(鄭厚允)13), 기회일(奇會一)14), 정주윤(鄭周允)을 만났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의 은미함으로부터 3백 경례(經禮), 3천 곡례(曲禮)의 다양함에 이르기까지 각기 들은 바를 펼치고 각기 본 바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물러나서는 사실(私室)에서 강구하고 나아가서는 강석(講席)에서 질정(質正)하며 한 시대의 대현(大賢)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한 시대의 대유(大儒)를 만나 벗으로 삼아 넘치는 훈도(薰陶)를 받고 빠져들고 젖어 들어 옛날과 동떨어진 시기에 사수(洙泗 공자의 문하)의 성대한 법도를 직접 경험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로 천백 세(世)에 걸쳐 겨우 한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아, 세월이 덧없이 흘러 이제 벌써 17년이 지났다. 선사(先師)께서 이미 타계하시고 김경범도 이어서 세상을 떠나고 남아있는 2~3자(子) 또한 멀리 헤어져 있다. 나 또한 가난과 질병으로 이곳저곳 떠돌아 옛 학문은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고 나이는 이미 늙고 정력은 이미 쇠퇴하였다. 병중에 묵은 종이 더미를 열람하다가 우연히 서문(序文) 1통(通)을 발견하였다. 이를 읽자니 부끄럽고 슬프고 분하여 스스로 제재하지 못하고 삼가 이 글을 지어 뜻을 보인다. 余嘗思孔門諸子。得天下之大聖以爲師。得天下之大賢以爲友。開之於師而講之於友。講之於友而質之於師。行行侃侃之儀。切切偲偲之樂。想像千載之下。不覺感歎而興起也。雖不得唐虞之君與皐夔稷契之徒。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以孟子所謂王天下不與三樂之義推之。則其輕重低昂之分。寧可遺於彼而不可失於此久矣。然則天下之樂。其有以大於此乎。余於乙亥丙子年間。與金景範鄭厚允奇會一鄭周允。遇於先生之門。自太極性命之微。至三百三千之多。無不各陳所聞。各道所見。退而講之於私室。進而質之於函席。得一世之大賢以爲師。得一世之大儒以爲友。薰蒸洋溢。涵濡浹洽。親見洙泗盛儀於去古己遠之日。此不惟爲此生難再之遇。而實千百世絶無僅有之事也。嗚呼。荏苒日月。已十有七年于玆矣。先師已沒。景範繼逝。其餘二三子。又且離違在遠。余亦貧病流離。舊學未就。年力已替矣。病中偶閱舊紙堆。得所贈序文一通。讀之感愧悲憤。有不自裁者。謹書此而見志焉。 항항 간간(行行侃侃)한 위의(威儀) 제자가 스승을 모시고 있을 때 굳세고 강직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옆에서 모시는데 민자건(閔子騫)은 온화하였고, 자로(子路)는 굳세었고, 염유(冉有)와 자공(子貢)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내용이 있다. 절절 시시(切切偲偲)한 즐거움 친구 간에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고 격려하는 일, 서로 도의(道義)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일을 의미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어떠해야 선비라고 이를 만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화락(和樂)하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 붕우(朋友)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형제는 화락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격의……논하지는 원문은 '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이다. '太虛亭午之日'이 문맥에 맞지 않아 이 부분을 생략하고 번역하였다. 천하에……않는 《맹자》 〈진심상(盡心上)〉에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김경범(金景範) 경범은 김석구(金錫龜, 1835~1885)의 자이다. 김석구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범, 호는 대곡(大谷)으로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대곡리(大谷里)로 이사하였고, 27년간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정후윤(鄭厚允) 후윤은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자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으로, 개화(開化)에 반대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기회일(奇會一) 회일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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