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왕치면광치리노동계소(王峙面廣峙里勞働稧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王峙面廣峙里勞働稧所 王峙面廣峙里勞働稧所, 1顆(2.4×2.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925년 12월 15일에 남원군 왕치면 광치리 노동계소 계장 이상의·총무 박병남 등 18인이 발급한 통문으로, 광치리에서 사는 선비 이면의의 보기 드문 효성과 우애를 중론에 따라 반포하므로 후세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 1925년 12월 15일에 남원군 왕치면 광치리 노동계소 계장(稧長) 이상의(李相儀)·총무 박병남(朴炳南) 등 18인이 발급한 통문으로, 광치리에서 사는 선비 이면의(李冕儀)의 보기 드문 효성과 우애를 중론에 따라 반포하므로 후세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누구에게나 어버이가 있지만 그 효를 극진히 할 수 있는 자는 드물고, 누구에게나 형제가 있지만 그 우애를 극진히 할 수 있는 자 또한 드물다. 지금 본동 동회(洞會)에서 중론((衆論)으로 추천하는 인물은 광치리에서 사는 선비 이면의이다. 이면의는 효령대군 보(補)의 16세손이자 장령(掌令) 호은(壺隱) 선생 수(洙)의 12세손으로, 대대로 집안에 전해온 효성과 우애가 칭송되는 것은 온 고을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본성이 지극히 온화하고 후덕하여 놀 때마다 감히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밖에서 과실을 얻으면 꼭 싸와서 부모님께 바쳤다. 장성하여 부모님을 섬김에 맛있는 음을을 한번도 부족하게 올려본 적이 없었으며, 겨울에는 방을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일과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살피는 일을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또 여러 명의 남매와 사심 없이 화목하게 의식을 함께 하였으며, 동생들과 여러 차례 집과 재물을 똑같이 나누는 데 전혀 원망이 없게 하여 온 집안의 화기를 스스로 즐겼다. 1919년과 1920년 사이에 물가가 폭등하고 폭락하여 가업에 손실이 생겨 매우 어려워졌는데 근년에 가뭄으로 농사의 수확이 전혀 없자 부모님께 올릴 음식이 없을까 걱정되어 자신의 몸을 담보로 빚을 얻어 구역 밖에서 쌀을 지고 와 안으로는 10여 명의 식구가 굶지 않았고, 밖으로는 친구들에게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처럼 보고 듣기 드문 효성과 우애는 무심코 지나치기 힘들었는데 이제야 겨우 중론에 따라 반포하므로 후세에 자식된 자들에게 모범이 되어 사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