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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장우일(張友一) 등 상서(上書)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張友一 全羅都巡察使 使[着押] 3顆(8.0×8.3)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91_001 1832년 11월에 전라도 금구현유림 유학 장우일·송철감 등 17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곽영춘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에 대해 공의를 널리 채집하여 정려하는 계제로 삼아 조금이라도 풍속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32년(순조 32) 11월에 전라도 금구현 유림(金溝縣儒林) 유학 장우일(張友一)·송철감(宋喆鑑) 등 17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곽영춘(郭永春)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에 대해 공의(公議)를 널리 채집하여 정려(旌閭)하는 계제로 삼아 조금이라도 풍속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은미한 이치를 밝히고 숨겨진 미덕을 드러내는 것이 사림(士林)의 공의이다. 타고난 효성과 세상에 드문 행실이 있는데도 사라져서 일컬어지지 못한다면 포양(褒揚)의 도리에 있어 흠이 되는 일이다. 금구현에 사는 선비 곽영춘은 정의공(正懿公) 경(鏡, 1117~1179)의 후손이자 청백리 안방(安邦)의 14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수하여 고가(古家)의 기풍이 있었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정성스러워 효의 도를 다할 수 있었다. 그의 늙은 모친이 몇 달 동안 병을 앓았는데 온갖 약이 효험이 없어 거의 죽게 되자 손가락을 찢어서 그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잠깐 회생시켰다. 또 늙은 부친이 숙병으로 몇 년 동안 앓아 누워서 몸을 옆으로 돌아 눕는 데에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하였으나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잠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밖에 봉양하는 데 술과 고기를 반드시 올려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 번도 어버이 뜻을 거역하는 일 없이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또한 형제와 우애를 매우 돈독히 하여 함께 농사짓고 함께 먹어 나와 남의 구분이 없었다. 이에 그의 부모는 항상 '내 아이는 효자'라고 운운하면서 증자와 노래자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일이 없다고 하였으며, 지켜보는 사람 모두 감탄하고 듣는 사람도 모두 가상하게 여겼다. 금구현 유림들은 한 고을에서 평소 보고 감동하여 본보기로 삼는데도 포상하는 은전이 없다면 먼 지방의 궁벽한 시골에서 후인을 권면할 방도가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이에 '공의를 널리 채집하여 선을 포상하고 정려하는 계제로 삼아 조금이라도 풍속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전라도순찰사는 11월 12일에 '효행을 들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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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양경택(梁京澤)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梁京澤 南原府使 使[着押] 1顆(7.1×7.3)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73년 1▣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방에 사는 양경택·소진영 등 유림 17인이 남원부사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종도의 부인 청주 한씨와 이종익의 부인 광주 이씨의 열행이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73년(고종 10) 1▣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방(王之田坊)에 사는 양경택·소진영(蘇震永) 등 유림 17인이 남원부사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종도(李鍾道)의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이종익(李鍾益)의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열행(烈行)이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선(善)을 정표(旌表)하고 풍도를 세우는 것은 국가의 성대한 은전이며, 숨은 덕을 밝히고 아름다운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사림의 공의(公議)이다. 왕지전방의 광석촌(廣石村)에 사는 이현범(李玹凡)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 종도(鍾道)는 청주 한씨 계륜(啓倫)의 딸과 혼인하였고, 셋째 아들 종익(鍾益)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상순(尙珣)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현범 집안의 운수가 불행하여 1869년(기사)에 맏아들 종도가 몇 달 동안 병을 앓다가 죽을 지경이 되자 그의 부인인 청주 한씨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를 종도의 입에 넣어주어 며칠 동안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런데 또 불행히도 지난 해인 1873년에 셋째 아들 종익까지 몇 달 동안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에 그의 부인 광주 이씨도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어 열흘 동안 목숨을 연장하였으니 한 집안에서 두 열녀가 나오는 경우는 예로부터 보기 드문 일로, 온 고을이 놀라면서 감탄하고 사방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소진영 등은 남원부사에게 '이와 같은 두 열녀의 행실이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남원부사는 1▣월 24일에 '감영에 보고할 길이 있을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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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안석원(安錫元)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安錫元 暗行御史 暗行御史[着押] 3顆(마패지름 9.2)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78년 2월에 전라도 남원에 사는 안석원·이기충 등 유생 50인이 암행어사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종도의 부인 청주 한씨와 이종익의 부인 광주 이씨의 뛰어난 열행을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의 포상을 내려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78년(고종 15) 2월에 전라도 남원에 사는 안석원·이기충(李基忠) 등 유생 50인이 암행어사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종도(李鍾道)의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이종익(李鍾益)의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뛰어난 열행(烈行)을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의 포상을 내려 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효열(孝烈) 두 글자는 우주에 동표(棟標)이자 인륜에 벼리이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정려하여 포상하는 은전이 있었고, 사림들은 밝히고 드러내는 도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중 하나도 행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효열을 모두 겸비한 경우라면 더욱 정포하고 드러내야 한다. 남원읍 왕지전(王之田)에 사는 선비 이현범(李玹凡)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4세손이자 서원군(瑞原君)의 13세손이며, 고림군(高林君)의 12세손, 칠산군(柒山君)의 11세손, 호은공(壺隱公)의 10세손으로, 대대로 효행과 우애로 칭송되는 집안임을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현범의 맏아들 종도(鍾道, 족보 이름은 會{各+日})는 청주 한씨 계륜(啓倫)의 딸과 혼인하였고, 셋째 아들 종익(鍾益)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상순(尙珣)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두 부인은 모두 효부이자 열녀로, 혼인 전에는 부모를 봉양하는 데 한번도 법도를 어김이 없었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뜻을 유순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혼인한 뒤로는 친정부모에게 했던 대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1869년(기사) 즈음에 맏아들 종도가 우연히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그의 부인인 청주 한씨가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줄 것을 하늘에 빌고, 남편의 똥을 맛보면서 차도를 시험하여 모두를 감탄시켰다. 남편이 죽음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를 종도의 입에 넣어주어 5일 동안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런데 또 셋째 아들 종익이 위중한 병에 걸려 몇 달 동안 앓게 되자 그의 부인 광주 이씨가 약을 마련하는 정성과 음식을 바치는 절도가 한씨의 지성과 똑같았다. 종익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광주 이씨도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어 열흘 동안 회생시켰다. 이렇듯 한 집안에서 두 열녀가 나오는 경우는 예로부터 보기 드문 일로, 예사로운 일도 숨겨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런 뛰어난 열행(烈行)은 더욱 드러내야 할 일이다. 안석원 등은 모두 떳떳한 본성이 있기에 이 일을 듣고 공경하고 감탄하였으며, 보는 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에 암행어사에게 '한 집에서의 두 열녀의 뛰어난 행실을 긍휼히 여겨 임금께 보고하여 정포(㫌褒)하는 은전을 입어서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암행어사는 2월 28일에 '한 집안에서의 두 열녀의 실행을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 포양(褒揚)하는 은전은 더욱더 공의(公議)를 채집해야 할 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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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之田坊化民等謹再拜上言于城主閤下伏以旌善而樹風國家之盛典是白乎旀闡幽而揚美士林之公議是白乎等以民等齊聲仰籲於 城主閤下爲白去乎伏願 城主閤下一以光盛典一以振頽俗焉爲白齊本▣▣(坊廣)石村居李玹凡有子三人而長子鍾道娶於淸州韓氏啓倫之女是白遣其三子鍾益娶廣州李氏尙珣之女是▣▣李玹凡家運不幸去己巳年分長子鍾道數月委痛至於▣▣▣(殞絶之)境是乎其妻韓氏斷指出血以續數日之命是白遣何不幸今年其三子鍾益數月嬰疾亦至殞命是乎▣▣▣(其妻)李氏亦爲斷指以續一旬之命是乎則一門二烈歷古罕聞之事是如乎一鄕莫不驚歎四方爲之爲之流涕是乎則伏願 城主閤下如是二烈無至湮沒之地千萬祈祝之至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使[署押]癸酉十▣月 日後 蘇震永 沈濟 張極楸 金應遠 蘇河永 張潤邦 朴圭憲 韓用五 黃秉幰 許鏞 梁京澤 朴廷旭 吳幸圭 尹漢錫 崔完實 趙性祺 魯順弼 等〈題辭〉從有報營之道向事卄四日[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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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儒生安錫元李基忠金禮遠等謹齋沐再拜上書于繡衣閤下伏以孝烈二字棟標宇宙綱紀人彛是以 朝有旌褒之典士有闡揚之道一人之身一行猶難況兼二行乎本邑王之田居士人李玹凡卽 璿源華胃孝寧大君十四世孫瑞原君十三世孫高林君十二世孫柒山君十一世孫壺隱公十世孫也世世家行孝友稱道一鄕所共知其長子鍾道[譜會{各+日}]娶於淸州韓氏啓倫之女其三子鍾益娶於廣州李氏尙珣之女也而孝哉是兩夫人烈哉是兩夫人在家之時養其父母一不踰矩順志焉供旨焉靡不庸極至於于歸之後事其舅姑小不忒於所生之父母去己巳年分鍾道偶然得病至於孔劇則其妻韓氏祝天願代之誠甞糞試差之節孰不感欽至於壽盡之境割指注血以濟旣絶之命於五日雖是天命有限果非至誠之所感乎其三子鍾益又得重症呻吟數月其妻李氏供藥之誠奉饋之節亦如韓氏之至盛〖誠〗而殞絶之境斷指注口更甦一旬而終一家二烈古今罕聞男子强膓者實是難行以夫人柔性能立此節令人驚歎者久矣至於凡事猶不掩匿況此卓異烈行安可不揄揚乎生等皆有秉彝之性聞之莫不欽歎見者爲之流涕故玆敢齊籲於按廉仁政之下矝其一門雙烈之卓行 上達 天陛俾蒙㫌褒之恩無至泯沒之地謹冐昧以 陳行下向敎是事繡衣閤下 處分暗行御史[署押]戊寅二月 日安宗濂 金漢卓 盧鼎壽 金礪啇 崔遇祥 許漍 安秉浩 金弘術 許表 金處啇 安時經 崔錫泰 柳煥涉 李會澈 洪宜爕 金文述 韓裕權 崔秉璣 金轍遠 李恒林 朴奎采 金鳴述 盧鳳儀 房賢相 梁在琪 金奎烈 李圭鐸 張喆淳 吳在善 張時華 房煥瑛 宋凞睦 安宗河 李承愚 趙鍾豊 蘇秉柱 陳錫在 尹正誼 丁庠圭 房煥星 權芝壽 鄭載河 李奎煥 沈鎭恒 朴一鉉 金龍柱 李圭寶 等〈題辭〉一門雙烈聞極嘉尙褒揚之典當益採公議向事卄八日[馬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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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최정구(崔玎九)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崔玎九 行官[着押] 5顆(7.2×7.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97년 11월에 전라도 남원에 사는 유학 최정구·안석문 등 유림 49인이 효자 이동우의 지극한 행실 및 열부 청주 한씨와 광주 이씨의 실적을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 포상의 은전을 입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관에 청원한 상서 1897년(광무 1) 11월에 전라도 남원에 사는 유학 최정구·안석문(安錫文) 등 49인이 효자 이동우(李棟宇)의 지극한 행실 및 열부(烈婦)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실적(實蹟)을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 포상의 은전을 입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관에 청원한 상서이다. 왕지전방에 거주하고 있는 선비 이동우는 효령대군 보(補)의 15세손이자 호은공(壺隱公) 수(洙)의 11세손으로, 고관과 충효로 대대로 그 미덕을 계승하였다. 이동우의 어머니 청주 한씨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그 뜻을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효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남편이 병을 앓을 때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자르는 열행(烈行)을 이루었다. 이동우의 숙모인 광주 이씨 또한 효성의 절도가 한씨와 같았으며, 남편이 병에 걸렸을 때에 손가락을 잘라 남편 입에 피를 흘려 열흘 동안 회생시켰다. 이에 고을에서 여러 차례 청원하여 암행어사의 판결과 감영의 찬탄이 앞뒤로 있었으므로 속히 임금의 포상을 입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공의(公議)가 억울해 하는 점이다. 이동우는 이러한 효열의 후사로, 태어난 지 3일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아침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공부하여 가정의 가르침을 계승하였으며, 겨울에는 온돌을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면서 모친의 안부를 안락하게 하였다. 모친이 병에 걸리자 단을 만들어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쏟은 피를 모친 입에 넣어 회생시켰다. 모친상에는 달을 넘겨 집 가까운 5리 즈음에 장사지내고, 날씨에 상관하지 않고 한번도 빠짐없이 묘에 조석으로 문안하였으며,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어리를 베고 자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다. 그는 부모를 언급할 때마다 먼저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이 일은 이웃에서 목격한 것이고, 원근의 사람들이 전파한 소문이다. 단효(單孝)와 단열(單烈)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한 효자와 두 열부가 모두 한 집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그런 어머니 밑에 그런 아들이 있다고 할만하다. 이에 최정구 등은 이동우와 한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침묵할 수 없어, 이동우의 지극한 행실 및 한씨와 이씨의 실적(實蹟)을 관에 아뢰어 '사실을 취하여 부(府)에 보고해 임금께 계달(啓達)하여 한 효자와 두 열부에게 특별히 정포(㫌褒)의 은전을 내려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행관은 11월 18일에 '효열은 모두 한 가문을 빛내는 것이니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은 반드시 근원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듣고서 매우 흠탄하였으니 의당 표창이 있어야 하나 계문(啓聞)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므로 갑자기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우선 회답을 기다릴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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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양기영(梁棋永) 등 소지(所志) 초(草)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化民 梁棋永 等 陵州牧使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9_001 1875년(고종12) 10월에 도림면 쌍봉리에 사는 양기영·양상오·양준묵 등 3인이 능주목사에게 종가 터를 사적으로 매매한 이들을 고발하며 이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해결을 청원한 소지의 초안 1875년(고종12) 10월에 능주목 도림면(道林面) 쌍봉리(雙峯里)에 사는 양기영(梁棋永)·양상오(梁相五)·양준묵(梁俊黙) 등 3인이 능주목사에게 종가 터를 사적으로 매매한 이들을 고발하며 이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해결을 청원한 소지의 초안이다. 종족 간에 서로 소송을 하는 일은 풍화에 관련한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 이지만 부득이해서라며 사안을 올렸다. 종가(宗家) 후록(後麓)에 있는 기지(基址)를 족인 양상락(梁相樂)이 남정수(南廷洙)와 부화뇌동하여 사적으로 매매하고 문기(文記)를 위조한 일로 두 사람을 불러다가 의리로써 타일렀더니 남정수는 스스로 잘못을 알고 돈을 받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남정수의 3촌 아재비인 남준룡(南俊龍)이 다시 양상락과 모의하여 남의 집 종기(宗基)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사적으로 매매하고는 한결같이 완거히 버틴다며 법에 우매한 양상락과 개인적으로는 조처하기가 어려운 남민을 법정에 잡아다가가 남의 종기(宗基)에 손을 댄 죄, 재리(財利)에 욕심을 부린 죄를 다스리고 종기를 즉시 돌려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 문서는 초안을 잡고 관에 올리지 않은 미발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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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허용(許鏞)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許鏞 兼官[着押] 3顆(6.3×6.3)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97년 4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 2리에 사는 허용·소화영 등 12인이 겸관에게 이동우의 효성과 청주 한씨의 열행을 감영에 전보하여 임금께 보고하게 하여 표창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97년(광무 1) 4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王之田) 2리에 사는 허용·소화영(蘇鏵永) 등 12인이 겸관(兼官)에게 이동우(李棟宇)의 효성과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열행(烈行)을 감영에 전보(轉報)하여 임금께 보고하게 하여 표창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효라는 것은 인간의 떳떳한 본성이고, 천하의 아름다운 행실이니 누구나 이런 성이 있으나 그 천성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자는 드물고, 누구나 이런 행실이 있으나 그 덕을 보존 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왕지전 2리에 사는 선비 이동우는 효령대군 보(補)의 15세손이자 호은공(壺隱公) 수(洙)의 11세손으로, 태어난 지 3일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커가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것을 위주로 하여 사소한 일이나 물건이라도 반드시 어머니에게 물은 뒤에 행하였으며, 아침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독서하였다. 모친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지자 항상 곁에서 문안하고 약시중을 들었으며,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줄 것 빌었다. 창졸간에 별세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쏟은 피를 모친 입에 넣어 곧바로 회생하였으나 바로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장례는 모두 예절에 따라 치르고, 달을 넘겨 집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안장(安葬)하였다. 춥든 덥든 매일 성묘하여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어리를 베고 자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부모를 언급할 때마다 먼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동우의 어머니 청주 한씨는 열행(烈行)이 탁월하여 이미 각 방(坊)의 통문(通文)과 암행어사의 판결이 거듭 있었으나 아직까지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 집안에서 효열(孝烈)이 함께 온전한 경우는 드문 일이니, 참으로 그런 어머니 밑에 그런 아들이 있다고 할만하다. 이 일은 이웃에서 목격한 것이고, 원근의 사람들이 전파한 소문으로, 허용 등이 한 마을에 살고 있으면서 침묵할 수가 없어서 겸관에게 감영에 전보(轉報)하여 임금께 계달(啓達)하게 하여 이 실행을 밝혀서 드날리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겸관은 4월 18일에 '자모(子母)의 효열(孝烈)에 대해 들으니 매우 감탄스럽다. 속히 포앙(褒揚)해야 마땅하므로 전보하여 공천(公薦)에 보답해야 할 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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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林面雙鳳 化民梁棋永梁相五梁俊默右謹言 伏以宗族間相訟 風化攸關 恐涉損軆 而事出於不淂已之事 民以宗家後麓基址事 已爲呈訴 題敎截嚴 至有都副正曉諭之擧 則族人相樂符同南廷洙 私相買賣 以成僞造文記云 故招致兩人 諭以義理 則廷洙自知理屈 順受價文 終無扁言 到今南廷洙三寸叔南俊龍 暗生奸計 又符同族人相樂 不知他人世基之所重 但知私賣之重價 一向頑拒 究厥所爲 則相樂之昧法尤甚 於南民私難措處 故玆敢冒昧仰達 伏乞參商敎是後 上項南俊龍叔侄梁相樂捉致法庭 一以繩不知宗基之所重 一以繩但知財利之所慾 累代宗基卽之還推 以杜日後起鬧之端 望良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 乙亥十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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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양시영(梁始永)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化民 梁始永 等 陵州牧使 使[着押] 3顆(7.0×6.9)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5_001 1835년(헌종1) 9월에 능주 하동면에 사는 양시영(梁始永)·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후(梁相垕) 등 4인이 능주목사에게 올린 소지 1835년(헌종1) 9월에 능주(綾州) 하동면(下東面)에 사는 양시영(梁始永)·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후(梁相垕) 등 4인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이다. 산송의 일은 성주께서 이미 통촉해 주시어 투장한 남준옥(南俊玉)이 아직 감옥에 갇혀있지만 우매한 백성을 상법으로 다스리니 그가 너그럽게 교유(敎誘)하는 정책인지 모르고 도리어 큰소리로 말하길, "형제가 돌아가며 갇히다가 6년이 지나면 우리 장지(葬地)를 보존할 수 있다"고 원망하고 미운 말을 한다는 것, 이때에 마침 수령께서 서울로 행차를 떠나시게 됨에 풀려나기를 꾀한다며 저들의 완악함이 더욱 심해지고 있고 우리들의 분을 씻을 수가 없다며 그들을 엄히 다스리고 즉시 무덤을 독굴(督掘: 강제로 파내는 것)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해 능주목사는 남준옥이 또 죄를 지었으니 감옥에 가두라는 판결을 11일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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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양일영(梁一永) 등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化民 梁一永 等 陵州牧使 使[着押] 4顆(6.8×6.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5_001 1835년(헌종1) 3월에 능주목 하동면 쌍봉리에 사는 양일영, 양직영, 양주영 등 3인이 남준옥의 투장 사건으로 능주목사에게 올린 소지 1835년(헌종1) 3월에 능주목(綾州牧) 하동면(下東面) 쌍봉리(雙峯里)에 사는 양일영(梁一永), 양직영(梁直永), 양주영(梁柱永) 등 3인이 남준옥의 투장 사건으로 능주목사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작년 11월에 어머니 상을 당한 남준옥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을 뒷동네 아래에 묻었는데 어젯밤에 뜻하지 않게 대촌(大村)의 주맥(主脈)이자 자신들의 종가(宗家) 사당 뒤쪽의 가까운 곳에 이빈(移殯)하였다는 것, 그것을 저지하려고 자신들이 금장(禁葬)하자 남가 3형제가 80세 되어 장차 돌아가실 지경인 병든 아버지를 지고 와서 칼을 빼들며 행악(行惡)하였다며 사부가의 여러 대 내려오는 종가의 사당 뒤쪽 가까이에 시체를 묻은 그 3형제를 우선 윤리의 측면에서 다스리고 도형을 즉시 만들어 법대로 처단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내용의 서술 과정에서 남준옥이 어머니를 묻은 곳은 지난 을사년에 그의 5촌 아저씨가 암장(暗葬)을 했다가 관에 의하여 굴거(掘去)를 당한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10일에 차사(差使)와 면임(面任)에게 '양반가의 사당 가까운 곳에 어찌 감히 늑장(勒葬: 남의 땅에 억지로 장사를 지냄)을 할 수 있는지, 상황을 도척(圖尺)으로 만들고 남가 형제를 잡아 오라'고 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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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황병헌(黃秉憲)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黃秉憲 暗行御史 暗行御史[着押] 3顆(마패지름 9.2)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74년 7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방에 사는 황병헌·소진영 등 유림 17인이 암행어사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종도의 부인 청주 한씨와 이종익의 부인 광주 이씨의 열행에 대해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74년(고종 11) 7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방(王之田坊)에 사는 황병헌·소진영(蘇震永) 등 유림 17인이 암행어사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종도(李鍾道)의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이종익(李鍾益)의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열행(烈行)에 대해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旌閭)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삼강(三綱)은 충·효·열(忠孝烈)로써 확립되고 오륜(五倫)은 충·효·열로써 펴지게 되므로 선(善)을 정표(旌表)하고 풍도를 세우는 것은 조정의 성대한 은전이고, 숨은 아름다움을 천양(闡揚)하는 것은 사림의 공의(公議)이다. 왕지전방의 광석촌(廣石村)에 사는 선비 이현범(李玹凡)은 효령대군의 후예로, 맏아들 종도(鍾道)는 청주 한씨 계륜(啓倫)의 딸과 혼인하였고, 셋째 아들 종익(鍾益)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상순(尙珣)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운세가 불행하여 1869년(기사)에 종도가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자 그의 부인인 청주 한씨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를 종도의 입에 넣어주어 며칠 동안 생명을 연장시켰다. 남편이 죽자 한씨도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시부모가 '어린애가 아직 살아있다'고 울부짖으며 애걸하여 죽지 않고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였다. 셋째 아들 종익도 지난 해인 1873년에 병에 걸려 죽게 되자 부인 이씨도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어 열흘 동안 목숨을 연장하였으니 한 집안에서 두 열녀가 나오는 경우는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소진영 등은 모두 떳떳한 천성이 있기에 이 일을 듣고 모두 공경하고 감탄하였으며, 보는 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에 선을 드러내고 악을 벌하는 암행어사에게 '자랑할 만한 이 두 열녀의 행실을 임금께 아뢰어 정포(旌褒)의 은전을 입어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암행어사는 7월 23일에 '더욱이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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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王之田坊化生等謹齋沐再拜上書于繡衣閤下伏以忠孝烈三者三綱以之而立五倫以之而敘故旌善樹風 朝家之盛典闡幽揚美士林之公議也本坊廣石村居士人李玹凡卽 璿源洪緖孝寧后裔世世行家也玹凡之長子鍾道娶於淸州韓氏啓倫之女三子鍾益娶廣州李氏尙珣之女矣家運不幸去己巳年長子鍾道得病至於殞絶之境則其妻韓氏斷指出血以延數▣(日)之命而矢死從之故其舅姑以乳兒尙在號泣懇乞僅保不死是白遣其三子鍾益又去年嬰疾至於殞絶則其妻李氏亦爲斷指出血以延旬日之命是乎則一門雙烈罕覩稀聞之事也民等皆有秉彝之性聞之莫不欽歎見者爲之流涕故玆敢齊聲仰籲爲白去乎伏願繡衣閤下位在於揚善罰惡之政是乎時所若是可矝二烈之行 上達 天陛使蒙旌褒之恩典無至湮沒之地千萬伏祝之至行下向敎是事繡衣閤下 處分暗行御史[署押]甲戌七月 日後 蘇震永 沈濟 張極楸 金應遠 蘇河永 張潤邦 朴圭憲 韓用五 黃秉憲 許鏞 梁京澤 朴廷旭 吳幸圭 尹漢錫 趙性祺 崔完實 魯順弼 等〈題辭〉益竢公議宜當事卄三日[馬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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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東面化民 梁始▣梁直永梁柱永梁相垕等右情由事 民等山訟事 吾 城主已素洞燭 而偸葬者南俊玉尙在囚禁是乎乃 至愚無法之民 例以常法治之 則渠不知 寬洪敎誘之政 而反以爲寬限遷然之機會 渠乃大言曰 兄弟迭囚 過了六年 吾葬因存 至有怨言惡說 且聞 京中行次 逆料放送 法之當掘 亦已久矣 而渠之頑惡 日甚一日 民等之憤 無時可雪 伏乞 特加嚴治當刻督掘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乙未九月日使[署押](題辭)南俊玉又爲得罪 牢囚事十一日[官印] 3箇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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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俊玉父母塚南俊興仲父塚南俊玉假殯處南俊玉破掘處梁相必新葬父塚南俊玉父塚 乙未年十二月日掘去南俊玉五寸叔母 戊子年十月日掘去處巒頭層下處南俊玉家梁氏祠堂梁氏家南壽明父塚崔塚自梁相必新葬父塚 至南俊興仲父塚 步數十四尺半 坐立俱見自梁相必新葬塚 至南俊玉父母塚 五十四尺半 坐立俱見自梁相必新葬塚 至南壽明父塚 八十一尺半 坐立俱不見自梁相必新葬塚 至梁氏祠堂 七十三尺 坐立不見自梁相必新葬塚 至南俊玉家 七十七尺半 坐立俱見起訟南俊玉[着名]南壽明[着名]訟隻梁相必[着名][押](배면)圖形摘奸 則梁相必入葬處 在於南壽明親山腦後八十步是矣 坐立不見是遣 圖形中南俊興仲父塚言之 則爲十四步是矣 此是無後塚 則無以擧論是遣 穴下穴上有訟掘舊壙 此皆南哥之見屈於梁氏處也 此一山崗可知其梁家之地是如乎 在訟理不當禁是遣 以其人家言之 則旣在百步之內 則其欲禁葬 無恠是矣 亦非家後與對衝 則以其斜見難禁於他人之葬 其自己之地是如乎 南哥之今此爭訟者■似以前日相訟之嫌 有此紛紜 訟理旣如此 則自歸落科事丁酉十一月十三日[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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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東面雙峯里 化民梁一永梁直永梁柱永等右謹言切憤事 同里居南俊玉爲名人 昨年十一月日遭其母喪 殯于村後洞下矣 昨日夜不意中暫移其母柩於大村主脉 民之累世宗家廟後逼迫之地 欲爲掩土 故民等卽爲禁葬 責其不法非禮之狀 則同南哥三兄弟負來其八十將死之病父 且拔釖行惡 罔有記極人莫進前是如乎 當喪者之生慾山地 暗葬脅葬之弊 世或有之 渠以世居隣民壓葬於士夫家累世宗家廟後 已極愚濫 且爲其旣骨之母運來 將死之父觸風露處 奄奄促命 而言必曰 若死則可以死得其所 可以安葬云云 有若促壽鬻尸者 然薄其生父者 何其厚於死母乎 究厥所爲山上之外 繫開傷倫 分加除良 盖此地亦有殷鑑 徃在乙巳年 渠矣五寸叔暗葬見掘文狀昭然 渠安敢更爲生意發惡乎 擧措危慘 私難禁斷 故擧槩仰籲爲去乎明政執法之下 洞燭其南俊玉三兄弟拔劍行惡之習 運其欲死之病父 藉賣脅人之弊 別遣將校 卽爲禁斷敎是遣 仍卽圖形 依法處斷 俾杜後弊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乙未三月 日使[署押](題辭)兩班家祠堂咫尺之地何敢勒葬形止圖尺厥漢兄弟捉來向事初十日差使 面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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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內儒生柳載益等 謹齋沐上書于巡相閤下 伏以人莫不有其親 亦莫不如孝之爲貴 而自非出天之至性 淵源之所從來者 能孝者鮮 故士林有稱揚之公議 朝家有褒旌之盛典 此是我東方四百▣德敎之所以興隆者也 挽近以來 習俗漸降 虛美紛騰 實行泯沒 則生等所以爲世道慨惜者 而惟彼至行之實孝 則有如崑山縕玉 輝自發暎 不可掩人耳目者矣 道內金溝士人郭永春 卽古正懿公諱鏡之後 淸白吏諱安邦十四世孫 壬辰功臣紅衣將軍諱再祐之七代傍孫也 其傳家忠孝 備載 國乘史記 固不待生等之臚列 而可以俯燭矣 嗟哉郭生以玄風世家 流寓本縣 已經三代 而自其童年 能知家法 事親之節 出於▣▣ 四隣感服其誠 一鄕共稱其孝孝哉 郭生去在庚寅 慈母▣厲 幾至革命 則裂指垂口 乃淂回甦 又於辛卯其父有疾 經年沈痼 嘗糞祝天願以身代 更淂回甦 孝哉郭生 若非其淵源之家行 出天之至性 則豈其人所易能者哉 友于兄弟 信于朋友 特其活源之餘波矣 本邑儒生 以此至孝聯名擧狀 則本官之題曰 郭永春孝友 無愧於古人 余庸嘉尙 而報 營 軆重更待公議事 故生等俱以好懿之輿情瞻聆所在 不敢含嘿 謹以煩瀆 伏願巡相閤下 特採郭家世傳之孝 啓達天門 俾蒙褒獎之典 無至泯沒之至 千萬幸甚 謹冒昧以陳壬辰閏九月 日井邑 幼學 柳載益 李臣厚 李台柱 安冕壽 黃鍾燮 孫錫良 柳星煥 金敬龍 古阜 幼學 崔鶴性 金鳳玄 柳鼎鎭 崔永孝 李宗敏 崔永八 淳昌幼學 楊志文 進士 洪龍燮幼學 楊啓白 全州幼學 金箕成 宋南憲 吳致八 崔致文 李始一 宋文龍 金載坤 羅州幼學 羅性立 吳相喆 光州幼學 奇士直 朴喆玄 金守一 李賢大任實幼學 洪鳳祚 韓洪喆 李賢三 朴鼎河 吳錫臣 南原進士 盧錫璋 幼學 崔景卓 李達顯 興德幼學 崔灝性 金景宅 金邦一 扶安進士 南齊天 幼學 李源豊 金重基 長城進士 金邦柱 金英煥 奇士仁金溝幼學 崔學集 金 淑 崔錫善 張載恒 李魯赫 鄭東植 景錫權 宋承源 金洛震 溫德基 金載善 吳致瓛 李 晩 宋永源 金堤幼學 尹昌華 羅珍郁幼學 羅象洪 趙重倫 朴師德 泰仁幼學 金 瓅 趙挺鐸 李懽燮 金圭欽 權思玄 茂長幼學 金光煥 鄭基翊 高敞幼學 金位澤 曺 吉 昌平進士 鄭載璋 幼學 高時元 等巡使[暑押](題辭)郭永春孝行 聞甚嘉尙向事卄五日[全羅道觀察使印] 3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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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장우일(張友一)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金溝縣 幼學 張友一 等 金溝縣令 官[着押] 3顆(6.7×6.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90_001 1892년(고종29) 9월에 금구현(金溝縣)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장우일(張友一)등 17인이 금구현령에게 본현의 하서면(下西面)에 사는 사인(士人) 곽영춘(郭永春)을 효우(孝友)로 포장하여 정려 내려 주기를 청한 상서(上書). 1892년(고종29) 9월에 금구현(金溝縣)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장우일(張友一)등 17인이 금구현령에게 올린 상서(上書)로 금구현 하서면(下西面)에 사는 사인(士人) 곽영춘(郭永春)의 효행을 칭찬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포장(襃獎)하여 정려(旌閭) 내려 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곽영춘은 정의공(正懿公) 곽경(郭鏡)의 후손이자 청백리 곽안방(郭安邦)의 14세손으로 어려서 천성이 유순하고 집안의 고풍을 이어서 노모를 위하여 효성을 다하므로 지역의 공의(公議)에 따라서 포상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금구현령은 '정말 이 말대로라면 곽영춘의 효우(孝友)는 이름난 고인에 뒤지지 않는다. 감영에 보고할 것이나 사체가 중하니 공의(公議)를 기다려 봄이 마땅하다'고 9월 1일에 뎨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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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송철감(宋喆鑑)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宋喆鑑 禮曹判書 禮曹[着押] 3顆(7.8×8.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91_001 1840년 2월에 전라도 금구현 유림 유학 송철감·장우일 등 16인이 예조에 효성과 우애가 돈독한 곽영춘의 실행을 임금께 아뢰어 포양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40년(헌종 6) 2월에 전라도 금구현(金溝縣) 유림 유학 송철감·장우일 등 16인이 예조에 효성과 우애가 돈독한 곽영춘(郭永春)의 실행(實行)을 임금께 아뢰어 포양(褒掦)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하늘이 낸 효성과 세상에 드문 행실을 지니고 있는데도 먼 지방 궁벽한 골짜기에 있는 탓에 포상의 은전을 입지 못한 경우에는 산에 있는 옥과 골짜기에 있는 향기로운 난초를 보고 감동한 사림들이 옥을 품고 와서 바치고, 난초를 보고 천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라도 금구현에 사는 선비 곽영춘은 본관이 현풍(玄風)으로 충효(忠孝)를 세습(世襲)하였다. 정의공(正懿公) 경(鏡, 1117~1179)의 후손으로, 청백리 안방(安邦)의 14세손이고, 임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 1554~1613)의 7세손이며, 정려 효자(旌閭孝子) 청계당(聽溪堂) 후태(后泰)의 5세손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고, 뿌리가 깊으면 가지도 무성한 것이 이치인지라, 곽영춘은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효행(孝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자이다. 순수한 성품을 지닌 곽영춘은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였다. 그의 늙은 모친이 몇 달 동안 병을 앓았는데 온갖 약이 효험이 없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찢어서 그 피를 어머니 입속에 흘려 넣어 회생시켰다. 또 늙은 아버지가 숙병으로 몇 년 동안 병상에 앓아 누워 있었으나 지극정성으로 부지런히 봉양하였고, 아버지의 차도를 확인하기 위해 똥을 맛보았으며, 밤낮으로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밖에도 봉양하는 데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또한 동생 영복(永福)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애초 서로의 구분이 없어, 의식(衣食)과 재물을 서로 양보하였다. 이에 그의 부모는 항상 "내 아들은 효자"라고 말하였으며, 마을 사람들도 모두 "곽 효자의 효성과 우애는 옛사람들도 능가하지 못한다"고 칭찬하였으니, 이를 통해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을 알 수 있다. 부모 곁에서 약시중을 할 때마다 으레 똥을 맛보는 것을 일상의 일로 삼고, 위급한 순간에 손가락을 찢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던 그의 순수하고 지극한 성심(誠心)과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이 아니었다면 죽어가는 자를 회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효행이 먼 지방에서 일어난 탓에 포상을 받지 못하였기에 금구현 유림들이 예조에 상서를 올려 '그의 효행 실적을 임금께 계달(啓達)하여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예조는 2월 14일에 '듣고서 매우 가상했다. 포양(褒揚)의 절차는 오직 식년(式年)에만 있으니 도계(道啓)할 것'을 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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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金溝縣儒林幼學宋喆鑑等謹齋沐再拜上書于春官閤下伏以璞玉在山抱之而泣者以其美寶之不收也芝蘭在谷遇之而歎者以其幽香之見遺也然則人之有出天之孝希世之行而在於遐鄕窮谷未蒙褒美之 典者豈非玉之在山蘭之在谷而凡爲士林之觀感者可無抱玉而獻遇蘭而薦耶本縣士人郭永春系出玄風世襲忠孝而正懿公諱鏡之後也淸白吏諱安邦之十四世孫也壬辰功臣伴松堂興懋之七世孫也旌閭孝子聽溪堂后泰之五世孫也源淸者流潔根深者枝茂固其理也而斯人之克追家風又以孝行名於世者其在秉彝之同得而豈無欽仰而艶慕㢤斯人也禀質純粹孝親敬長自有天成其母遘疾累月沈痼百藥無效幾至殞絶裂脂垂口竟至回甦其父宿病累年委席極誠孝養不懈不怠賞糞甜苦驗其差劇晝夜祝天願以身代其他順旨之事養體之方無所不用其極盡人子職且與其弟永福友愛甚篤初無物我之心衣食相讓貨財相推其父母常曰吾兒孝子吾兒孝子鄕隣稱之曰郭孝子之孝友古人莫過云則其實行實心可推而知也盖毁身成孝人情之所難也穢口供職人子之未易而斯人則每於侍湯之際例以賞糞爲常事或在危急之際以裂脂爲恒式苟非一心純至之誠感天之孝則安有轉死回生之理乎孝㢤斯人猗歟所行遐鄕逖未蒙褒賞之 典故生等裂裳褁足匍匐仰籲於春官閤下伏乞摭實 啓達于天陛之下以爲微顯闡幽之地千萬祈懇不勝屛營春官閤下 處分禮曹[署押]庚子二月 日儒林幼學宋喆鑑 張友一 崔光岳 金淑 宋承源 李昉 金昌鉉 張友仁 溫鳳元 金在鉉 崔錫珪 吳致瓛 李晩 宋永源 李魯赫 溫德基 等〈題辭〉聞極嘉尙褒揚之節惟在式年道 啓向事十四日[禮曹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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