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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色居然紗薄 貴星奉牋際到 感戢叵量承審堂闈壽體康謐承歡餘棣候連重 廡節俱佳 何等慰鴈之極 査弟之兄依昔遣過 兒子輩各免 而新生幼孫 形端骨奇 足爲按玩之資 且其母幸無餘祟 惟是乳腦未出 爲一大悶事 令大宅昏禮聞在來月 而諸具已至就緖耶 餘惟冀餞迓增祉 掛漏呼倩 不備謝儀乙丑臘晦 査弟李鼎在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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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고산서원(高山書院)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高山書院 高山祠章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제향 대수가 넘어서 신주를 조천(祧遷)하는 사안에 대해 유회(儒會)를 갖고자 한다는 내용의 간찰 1939년 12월 20일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보낸 통문(通文)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제향이 4대(代)가 넘어서 신주를 조천(祧遷)해야 하므로 의견을 모아 사당을 세워 존봉하자는 의견이 지난 가을 제향 때 나왔지만 사안이 중대하므로 널리 의견을 모아야한다고 하였다. 오는 1월 17이 본가의 길제(吉祭) 날이므로 15일 전 을미일에 담대헌(澹對軒)에서 한차례 유회(儒會)를 가져서 공론을 모아 성대한 예식을 완성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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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褒忠祠內薇菊契中回喩文右回喩事 儒文九六士林無麗澤之所 惟我薇菊設契亶 出於春秋相會 暢舒幽鬱之計 而務從儉約 每員下以十錢爲基本以貳拾錢爲當日費者 于今五六載 而契員洽滿爲六百餘數矣 每吟哦舒情之際 醵金經用 非但窘跲太甚 亦有難安者存焉 今日諸君子唱論出義之義其義量其力也 不苟同也 有通常而一二円焉 有特別而十數円焉 此盖當日席上事也 於是乎諸君子出義之義博矣哉 是契之永有辭於百世者 不其在玆歟 嗚呼吹塵成山 可想具瞻巖巖涓涔增海 豈無終見洋洋乎 伏惟僉君子先獲洞悉 庸敢喙焉 亟賜明敎幸甚甲戌二月十五日褒忠祠內忠孝堂薇菊契中代表都有司 朴魯宣掌財 高永文理事 高光瓚別有司 朴淳榮崔基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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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鳳山精舍敬通竊伏惟棟樑一摧 南國大震安放之痛 孰有而孰無 至於門生親戚知舊從遊一節之痛 尤深一節也 然而一生一死 自生民以來 所未免也是以聖賢已歿 而吾輩生於數千載之下 奉之以師者 其貫道之文 載在方冊 目以視之 口以誦之 心以體之 日用動靜之間 行之則人也 捨之則禽獸也 嗚呼惜哉 弦窩先生雖歿 而遺文藏在篋笥 未知幾百年藏在篋笥爲蠧魚之食而乃已耶 或可付諸剞劂 光明于世耶 敢陳一言 蚓雖無爪牙之利筋骨之强 上食埃土 下飮黃泉 用心一也 吾輩心一 則何事不成跬步 而不休跛蹩 千里累土 而不輟邱山 崇成千里崇山都在腔子裏 則千萬諒燭 左記日子 左記場所 特爲枉臨 一以哭几筵失聲之哭 一以論斯文大議論 幸甚 玆敢敬告左記會所 鳳山精舍會日 二月二十九日 雨天翌日乙亥二月十五日 鳳山精舍發起人 李啓琮 李載春 盧鍾龍 鄭友源 李廷相 尹宗林 池應鉉 高光洙 金順模 劉秉龜 李啓翼 尹璟赫 奇東奭 高光瓚 吳東洙 金勝坤 朴魯宣 柳時浚 吳秉南 金在鍾 任漹宰 奇老善 李光秀 宋光世 羅鍾宇 朴日圭 李琫淵 金容涉 柳炳斗 宋鎔輝 梁孝黙 柳春淵 金容燻 崔潤魯[피봉]〈前面〉和順郡道林面草坊梁斯文會甲座下〈後面〉光州郡西倉面鳳山精舍弦窩高先生遺稿刊所通文右敬通事 斯文不幸 惟我弦窩高先生奄棄 後學吾黨之痛 孰有加於此哉 嗚呼 先生雖歿 遺文藏在巾笥 其欲不朽而將壽於來世 則豈非今日吾輩之責歟 是以去念九日之會 僉議循同 畧有措畫 雖然斯文大事 不敢輕擧 故玆奉定規錄于下方 仰質于高明 伏願益加努力 共濟大事 幸甚定規一. 刊役以三月一日始設事一. 遺稿校正 以四月一日爲始 有文各位 以本稿來準 俾無後悔 而非先生手筆 斷不入蒐輯事一. 刊費巨大義扶一款 必須大用心力 然後可以竣是役 則聲氣相應 志契相助 不限於從遊門生及有文之家 各自出義擔任事一. 義扶金必自躬臨刊所 而若勢有所不能 則卽付郵便 以鳳山精舍內司貨名義 而若受領證 則以刊所之章與司貨實印爲憑信事一. 該郡事一任於郡有司與總務 以防淆雜之弊 則雖本刊所巡郡有司 不與郡有司及總務幷行 則切勿信用事一. 刊費出義優助者 遺稿一帙進呈事乙亥三月二日 鳳山精舍儒會所發文[印]都有司金東洙副有司李光秀 吳東洙 尹喜祥 李啓翼校正 李鍾宅 高冕柱 奇東奭 高光烈 鄭琦 吳弼善 金箕錫 梁會甲 奇老善司書 梁鎰黙 李琫淵 鄭燾洪 奇淙燮 羅炳觀 林炳一 金珍鉉 金在鍾 林禎圭 朴炯緖 高在華 李炳宰司書 高在弘 朴魯烈 柳永稷 崔洙華 柳秉魯 鄭坊珪 李相皓 任明宰 許國馨監董 朴魯宣 李起俊 高光永 河東秀 曺光鎬 金永燦 白亨敦 崔仁煥 張安燮 朴璋柱 金永燮 宋在鶴 洪起唐 劉箕鍾 李敎台 金容環 李元雨監董 金炳瓘 李應相 丁秉燮 高光益 張永采 金正安 李炳夏 李銓亮 張興燦 金容涉 鄭在夏 宋良鎭 曺喜南 蔡允錫幹事 高在鶴 鄭允植 宋世根 宋泰謙 金天洙 劉秉周 金容實監印 鄭大鉉 尹璟赫 朴載元 尹宗林 安鍾基監印 朴日圭 宋鎔輝 林鍾炫 吳永烈 吳根浩 李贊鎬 尹一炳 李震休 梁夏黙 高光維 宋光世 鄭喆煥 鄭尙龜掌財 高濟萬 盧軫永 高濟鏞 李會春 金鍾律 金容鶴司貨 高在廷直日 劉秉龜 高光淑 金商順直月 金鍾㦳 吳壽根 高光冕書寫 金漢洙 柳達根 李駿範 劉貞熙 李春行 宋基鳳 金棕坤 李洪秀 金漢奎 文正基 吳炳敎 趙相紀 朴濟喆 金龍準 李伯休 安炯淳 吳平基 洪宇義 鄭海均 裴錦澤 奇男度 李允行 金容圭內務 奇觀燮 羅鍾宇 高光瓚內務 高永文外務 高光秀 池應鉉 尹永淇 朴升柱 丁鳳泰 高益柱 崔潤魯 成夏鼎會計 金勝坤 朴夏炯 吳炳鎰 梁時瑽總務 柳炳斗 任漹宰 吳秉南 梁孝黙 李灃來 李載春都監 李啓琮 朴魯禎 高光洙 李廷相 李喜凡 高維相 朴夏玉右敬通于斯文 座下郡有司吳然澤郡總務朴俊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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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안규일(安圭壹) 부고(訃告) 고문서-서간통고류-부고 安圭壹 趙東㵿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316_001 1943년 4월 16일에 호상 안규일이 양회갑의 친상을 알리기 위해 조동효에게 보낸 부고장과 피봉 1943년 4월 16일에 양회갑(梁會甲)의 친상(親喪)을 알리기 위해 작성된 부고장이다. 사망일은 4월 16일 신시(申時)이며, 20일에 장례를 거행한다는 내용이다. 이 부고장은 호상(護喪) 안규일(安圭壹)이 조동효(趙東㵿)에게 보냈으며, 안규일이 망자(亡者)를 자형(姊兄)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에서 그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피봉이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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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子夏曰賢賢易色事父母能竭其力雖曰不學矣吾必謂之學矣今此貴郡富安面士人鄭溵弼云歟其人系出東萊卽藝文館應敎諱 承甫之十六代孫大護軍諱 絪之十五代孫吏曺判書諱 昇之十四代孫禮曺判書諱可宗之十三代孫吏曺判書諱守弘之十二代孫兵曺判書諱 傑之十一代孫生員進士通訓大夫諱孝孫之十代孫參奉諱確之九代孫甲山府使諱緝之八代孫忠孝家風簮纓世德東 朝華閥南土望族也斯人粤自齠齡家勢極艱全無朝夕糊口之責身兼傭賃以供父母之養傷㦲貧也仲由之負米孝及竭力不讀詩■(盡)〔書〕禮敬長老能知有序賢比易色是可謂不學而能學之士矣其親沉病累年百方藥餌一心調治晝宵侍側甞糞察候以驗重歇乃至丁憂也泣血哀慕之痛吊者悅服遽經襄禮搆廬墓側日以三省夜以五起事死如生誠之所格物性應爲感發故一雙白嶌數叢黃菊三時來賀四節發英苟非根天之孝至於物性之感歟年將七旬每日巡山山磎成路至於諱日前三日行素治齋復如袒䄆〖括〗之日沒身不忘父母之達孝矣且修身之方戒子之訓齊家之節接賓之禮少無違越安分守拙棲息於山水之林下不求名譽賁然德行及於一省公議故不可含默玆以發文惟願 僉章甫使此純篤之宲蹟俾聞楓陛特蒙擢用之恩千萬幸甚右敬通于古阜儒林 丁丑四月二十一日 [印]光州褒忠書院齋會所發文 李喆相 奇昌衍 朴彰壽 高錫相 金貞鉉 李龍求 崔奎烈 宋祉源 朴命煥 吳應善 尹學鎭 白弘洙 高時旭 丁永坤 金在文 申正模 安永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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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남원향중(南原鄕中)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南原鄕中 古阜鄕校 1顆(墨印, 6.5×5.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7년 1월 남원향중 선비 18인이 고부향교에 아직 포장이 내려지지 않은 정은필의 효행에 대해 집사들이 다시 공의를 더하여 정포의 은전을 입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1877년(고종 14) 1월 남원향중 선비 18인이 고부향교(古阜鄕校)에 아직 포장(褒獎)이 내려지지 않은 정은필(鄭溵弼)의 효행에 대해 집사들이 다시 공의를 더하여 정포(旌褒)의 은전을 입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서두에 『시경』의 "효자의 효행은 다함이 없다. 길이 너의 동류에게 주라"는 한 구절을 인용한 뒤, '어버이에게 효도한 뒤에 임금을 섬기면 충성을 다하고, 어른을 섬기면 공경을 다하여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이 효(孝)라는 한 글자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는 등의 효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진실로 타고난 효성과 은둔한 행실이 있다면 어찌 조정에서 권장하는 성대한 은전과 사림이 천거하는 공의(公議)가 없을 수 있겠는냐'고 반문하였다. 이어서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계보가 동래에서 나온즉 예문관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 사호(賜號)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으로, 충효의 고가(古家)이고, 명망높은 집안'이라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다. 이이서, '어버이가 병든 지 몇 달 동안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구하여 온마음으로 치료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려 얼굴이 검은 빛이 되었으며, 모든 장례 절차를 예로써 하여 살아 있는 사람을 섬기듯'이 했던 정은필의 효행 실적을 열거하고, '이 때문에 유림의 공의와 영읍(營邑)의 뎨김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 정려(旌閭)가 내려지지 않아 자손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유림에게도 실망이 되었다'고 언급한 뒤, '여러 집사들이 다시 공의를 더하여 정문(旌門)을 내려 포상하는 은전을 입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라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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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詩不云乎孝者不匱永錫爾類孝親然後事君則盡忠事長則盡敬六德六行著發於孝之一字中也是故粤自周漢之世司徒賓興之敎刺史貢擧之典莫不先於興孝勸善之政矣際玆我東 聖明之世苟有根天之孝隱淪之行則豈可無 朝家勸獎之盛典士林進擧之公議耶仄聞 貴郡士人鄭溵弼系出東萊即藝文館應敎諱承甫之十六代孫大護軍諱絪之十五代孫吏曺判書諱昇之十四代孫禮曺判書諱可宗之十三代孫吏曺判書賜號楓川諱守弘之十二代孫兵曺判書諱傑之十一代孫也忠孝古家簮纓望族斯人也玆在齠齡天性誠孝至於長成入孝出恭化隣敦睦子侄戒訓之節不失尺寸矣其親沉病數月百方藥餠一心調治及其丁憂也泣血面墨送終以禮襄奉以禮事死如生誠益不損常如袒䄆〖括〗之日豈非沒身不忘之大孝也是以章甫之公議 營邑之題音已有宿昔尙未㫌 贈之恩非但若子若孫之抑欝亦爲冠儒服儒之缺望故其在同道之誼玆以發通惟願 僉執事更加公議俾蒙旌褒之典千萬幸甚右敬通于古阜鄕校 [印]丁丑正月日南原鄕中多士發文 崔遇年 申哲模 尹泰永 金永錫 盧東鉉 李炳純 蘇應述 張載雲 崔炳九 林貞洙 邊相黙 權琦錫 金宗烈 晉命秀 宋祉豊 李東信 陳正洙 房斗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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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무성서원도회소(武城書院道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武城書院道會所 古阜鄕校 1顆(墨印, 7.5×5.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6년 12월 무성서원 도회소 21인이 고부향교에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 정은필의 실적이 사라져서는 안되므로 유생들이 한목소리로 고부군수에 아뢰어 관찰사와 예조에 고하게 하여 포장의 은전을 입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 1876년(고종 13) 12월 무성서원 도회소 21인이 고부향교(古阜鄕校)에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 정은필(鄭溵弼)의 실적이 사라져서는 안되므로 유생들이 한목소리로 고부군수에 아뢰어 관찰사와 예조에 고하게 하여 포장(褒獎)의 은전을 입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문서 서두에 '민자건의 효는 『논어』에서 일컬어졌고, 동중서의 행실은 한유의 글에서 드러났으며, 고금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실효(實孝)와 독행(篤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포상하고 그 행실을 천명하는 것이 하나의 큰 성전(聖典)'이라는 인효(仁孝)의 포양(褒揚)을 강조한 뒤에 '얼핏 듣자니 고부군 부안면(富安面)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계보는 동래에서 나온즉 예문관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 생진사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이라고 열거하여 그가 명문가 자손임을 밝혔다. 실재 정은필의 효행과 독행(篤行)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효(仁孝)는 하늘에 근본하며, 덕과 선이 남보다 뛰어났다. 부모를 섬김에 겨울철 온돌을 지피느라 하룻밤에 다섯 번이나 일어났으며, 여름철 잠자리에서 부채질하느라 매 시간마다 3번씩 깼다. 장성하여서는 효로써 옮겨 행하여 자연 속에 은거하고서 두문불출하여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완색(玩索)하였으며, 하늘의 도를 이용하고 땅에서 나는 이로움을 써서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가르치고 친족을 화목하게 하는 도리와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방도를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경계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평소 심성은 근검 절약하고 남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으며, 장차 나이 70세에 사사로이 남과 싸운적이 없었다. 안빈낙도하며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알았으며, 입조심과 삿된 생각을 굳게 억제하였다'고 하나하나 거론하여 드러내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마을의 의를 행하는 사람이자 한 고을의 선을 쌓는 선비가 지금까지도 민몰되어 있으니 이는 절대 사림의 분의(分議)가 아니므로 이에 통문을 유생들이 한목소리로 함께 응하여 바로 관에 아뢰어 관찰사와 예조에 고하게 하여 특별히 포장의 은전을 받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성서원은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서원으로 최치원과 신잠(申潛)을 모시고 있다. 처음에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칭하였으나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유지되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현재 사적 정식 명칭은 '정읍무성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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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희현당도회소(希顯堂道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希顯堂道會所 全州長館 1顆(墨印, 5.1×4.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7년 1월 희현당 도회소 선비 31인이 전주장관에 고부군에 사는 정은필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하게 하여 민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 1877년(고종 14) 1월 희현당 도회소 선비 31인이 전주장관(全州長舘)에 고부군에 사는 정은필(鄭溵弼)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하게 하여 민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서두에 '민자건의 효는 『논어』에서 일컬어졌고, 동중서의 행실은 한유의 찬(贊)에서 드러났으나 효와 행이 모두 아름다운 행적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이 모두 아름다운 실적을 갖췄으니 지금까지 이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그의 실적을 높게 평하였다. 이어서 '그의 계보는 동래에서 나온즉 홍문관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 생진사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으로 충효의 명성이 있는 남쪽의 명문가임을 언급하였다. 정은필의 효행과 독행(篤行)에 대해 '인효(仁孝)를 타고나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절도를 스스로 깨우쳤으며, 조금 장성해서는 어버이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낮에는 물고기 잡고 땔나무 하고, 저녁에는 베를 짜 좋은 의식으로 봉양하는 데 힘썼다. 여름에는 잠자리에서 부채질하고, 겨울밤에는 온돌을 따뜻하게 지폈으며, 한결같이 뜻을 봉양하였다. 부모가 여러해 병을 앓자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구하여 온마음으로 치료하고, 똥을 맛보고 안부를 살피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하늘과 산에 제사지내며 지극한 정성으로 천명(天命)을 기도했던' 실적 및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장례에 예를 다하고, 매일 소식하고 죽을 먹으며 3년 여묘살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70세가 다 되어가는데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를 다녀 산골짜기에 길이 생긴 일, 젊었을 때부터 노성하여 의를 행하고 선을 닦고, 안분자족하며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며, 자질을 가르칠 때 항상 성선(性善)과 효제(孝悌)의 도를 칭한 일 등의 일화를 하나하나 드러냈다. 끝으로, 한 성의 사림(士林)이 모두 모인 곳에서 침묵할 수 없어 통문을 보내, 여러 군자들이 이처럼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감영과 예조에 아뢰어 그 행실을 드러내고 그 사람을 발탁하여 민몰되지 않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희현당은 현재 신흥중고등학교 있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에 있었던 정자로, 관찰사로 부임한 김시걸(金時傑, 1653~1701)이 학교를 일으키고 지방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1701년(숙종 27)에 건립한 학당이다. 이후 퇴락하여 1907년경에 미국인 선교사가 기독교 학교인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세워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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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광주포충서원재회소(光州褒忠書院齋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光州褒忠書院齋會所 古阜儒林 1顆(墨印, 6.5×4.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7년 4월 21일 1877년 4월 21일 광주 포충서원 재회소에서 고부유림에 부안면에 사는 정은필의 순수하고 독실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서 그가 발탁되는 은전을 입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 1877년(고종 14) 4월 21일 광주 포충서원 재회소 17인이 고부유림(古阜儒林)에 부안면에 사는 정은필(鄭溵弼)의 순수하고 독실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서 그가 발탁되는 은전을 입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서두에 "자하가 말하기를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고,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말하겠다"는 『논어』 문장을 인용하여 인효(仁孝)의 중요성을 언급한 뒤, 고부군(古阜郡) 부안면(富安面)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16대조인 예문관 응교 승보(承甫)부터 8대조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까지 9대조의 계보를 열거하여 그가 명망있는 문벌 후손임을 말하였다. 실재 정은필의 효행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집이 너무 가난하여 입에 풀칠할 계책도 전혀 없어 품팔이 하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시경』과 『서경』을 읽지 않았는데도 어른을 예의와 공경으로 대하고, 차례가 있음을 잘 알며, 어진이를 여색 좋아하듯 하였으니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배움에 능한 선비라고 할 만 하다'고 칭송하였다. 또, '어버이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자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써서 온마음으로 치료하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똥을 맛보고 안부를 살펴 거듭 나아지는 효험을 보았다. 부모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여 조문하는 자가 열복(悅服)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묘 곁에 여묘살이 하며 하루에 3번 성묘하고 밤에 5번 일어나 살아 계실 때처럼 섬기니 정성이 하늘에 닿아 사물의 본성이 감발(感發)되었다. 이때문에 한 쌍의 백조가 몇 떨기 황국(黃菊)을 물고 세 때에 와서 위로함에 네 계절 내내 황국이 피었으니, 하늘에 근본한 효성이 아니라면 물성이 감흥했겠는가?'라며 그의 실적에 감탄하였다. 이어서 정은필이 근 70세에도 부모 산소에 매일 성묘하여 산골짜기에 길이 생기고, 부모 기일 3일 전부터 소식(素食)하고 재계하며 죽을 때까지 부모를 잊지 못한 달효(達孝) 및 수신(修身)의 방도와 제가(齊家)의 절도, 접빈(接賓)의 예 등을 열거한 뒤 '빛나는 덕행이 한 성의 공의에 미쳤으므로 침묵할 수 없어서 이에 통문을 보내니 여러 선비들이 이 순수하고 독실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 특병히 발탁되는 은혜를 입으면 매우 다행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포충서원은 현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에 있는 포충사(褒忠祠)로, 임진왜란 초기 호남 지방에서 의병 7천 명을 모집하여 금산성 전투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안영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03년(선조 36)에 건립하여 사액받은 사당이다. 서원철폐령 당시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은 전라도 지방의 2개 서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폐사되었다가 광복 후 지역의 유림에서 재건립하였으며, 1974년 5월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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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閔子之孝穪於魯夫子之論董生之行著於韓文公之賛而曾未聞孝與行兼美之蹟而今此古阜郡士人鄭溵弼純孝篤行并美宲蹟稽古亘今無雙一人矣系出東萊弘文應校〖敎〗諱承甫之十六代孫大護軍諱絪之十五代孫吏曺判書諱昇之十四代孫禮曺判書諱可宗之十三代孫吏曺判書 賜號楓川諱守弘之十二代孫兵曺判書諱傑之十一代孫生員進士諱孝孫之十代孫參奉諱確之九代孫甲山府使諱緝之八代孫而忠孝風聲名閥世德蔚于南土斯人也自在孩提天賦仁孝愛親敬長之節自悟自警稍至長成親老家貧晝以漁樵夜以織梱克奉口軆之養夏日扇枕冬夜燃突怡悅承順一以養志其親沉病累年百方藥餌一心調治甞糞察候暫不離側祝天祭山至誠禱命天年有限竟至殞絶也泣血殫誠子羔之孝也襄奉盡節季良之忱也三年廬苫行素食粥終始不懈年將七旬望朔省掃山磎成路自小少老大心存戒性志在定已行義修善祖述堯舜之道追慕程朱之學篤老操履知足安分遠謝公門不求名譽齊家庭訓子侄言必稱性善孝悌之道是以鄕剡之論道院之議不謀同辭如出一口則其在一省士林僉會之地不可含默玆以發通望須僉君子使此純孝篤行稟告于 棠軒春曺闡發其行擢用其人毋至泯沒之地幸甚右敬通于全州長舘丁丑正月日 [印]全州希顯堂道會所發文多士 李継浩 蘇敬述 金斗源 林彰洙 鄭濟黙 崔龍煥 高龍鎭 南濟 黃載淵 尹正鉉 朴始浩 權相奎 盧學秀 吳永泰 邊琦容 奇光衍 宋永豊 金文海 柳恒豐 林璟相 李章漢 金性淵 姜昌壽 許杓 洪秉一 趙炳鎬 白鳳洙 金永朝 曺世浩 任泰憲 金炳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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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전주수장관(全州首長館)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全州首長館 古阜儒林 1顆(墨印, 7.0×5.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7년 1월 전주수장관 선비 15인이 고부유림에 작은 고을의 충신과 한 고을의 선의인 정은필을 위해 순찰사에게 연명으로 상서할 생각이므로 한 목소리로 호응해 줄 것을 촉구한 통문 1877년(고종 14) 1월 전주수장관 선비 15인이 고부유림(古阜儒林)에 작은 고을의 충신(忠信)과 한 고을의 선의(善義)인 정은필(鄭溵弼)을 위해 순찰사에게 연명으로 상서할 생각이므로 한 목소리로 호응해 줄 것을 촉구한 통문이다.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은 동래 정씨로 예문관 대제학 겸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 생진사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으로 명망과 절개가 있는 고가이다. 정은필은 겨우 열 살에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도 올리지 못하자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베를 짜서 겨우 몇 고랑 되는 밭을 얻어 음식 바치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한결같이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였다. 부모가 몇 년 동안 병을 앓자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매일 약수발을 드는 등 옛 효자의 실적에 부합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려 낯빛이 검게 변하였고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예제보다 지나쳤다. 3년 동안 여묘살이 할 때 아침 저녁으로 애달프게 곡하며 삭전(朔奠)과 망제(望祭)를 성실히 지냈다. 나이 근 칠순인데도 매일 성묘하여 산골짜기에 길이 생겼으며, 선조와 부모 기일 3일 전부터 소식(素食)과 죽을 먹으며 모두 예제를 따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분수를 알고 도를 즐기면서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말과 삿된 뜻을 굳게 단속하였다. 자연 속에 은둔하여 송죽의 절개에 취미를 부쳤으며, 처사의 지조는 군자의 기상이었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질들을 가르치는 방도와 종족을 돈독히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여러 절도에 조금도 마땅함을 잃지 않아, 작은 고을의 충신(忠信)과 한 고을의 선의(善義)를 정은필에게서 다시 보았다. 이에 한 도의 공의가 일제히 일어, 순찰사에게 연명으로 아뢸 생각이므로 이 통문을 보내 여러 집사들에게 한 목소리로 호응해 줄 것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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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閔子之孝稱於魯論董生之行著於韓文而稽古亘今苟有宲孝篤行則褒其人闡其行苟是一大盛典也側聞貴郡富安面寓居士人鄭溵弼系出東萊即弘文應校〖敎〗諱承甫之十六代孫大護軍諱絪之十五代孫吏曺判書諱昇之十四代孫禮曺判書諱可宗之十三代孫吏曺判書諱守弘之十二代孫兵曺判書諱傑之十一代孫生員進士諱孝孫之十代孫參奉公諱確之九代孫甲山府使諱緝之八代孫也而淸宦名閥行義文質襲世傳家斯人也自在孩提天賦雍容仁孝根天德善過人事其父母也冬日燃突一夜五起可肩於孝己之誠夏日扇枕每時三省追慕於曾賢及其長也以孝移行棲息山水之間杜門蔵蹤不求名譽晝以耕宵以索用天之道因地之利克奉先代之香火訓子睦族之節修身齊家之方自悟自警不失規度平日心性勤儉節約畏人如虎年將七旬終無與人私闘未見公門食貪樂道知足知分守口如甁防意如城見善如佩蘭蕙即就而從之聞惡如負芒刺永却遠之大矣㦲以若十室行義之人一鄕修善之士尙今泯沒切非士林之分議故玆以發通惟願 僉章甫齊聲同應即爲稟 官俾告棠軒 春曺特蒙 啓褒之典幸甚右敬通于古阜鄕校 丙子十二月日 [印]武城書院道會所發文 進士李以鉍 進士崔峻翊 進士宋曦玉 幼學金龍祖 李東旭 高錫相 林烱洙 朴蓍東 鄭海斗 金堯晙 趙炳鎬 安學律 南鑽 柳秉善 金相浩 邊大容 黃基煥 盧東鉉 蘇敬述 尹相鎭 洪秉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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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玉蘊荊山寶彩輝世蘭蔵幽谷淸香襲人仅者士固純孝篤行之美不求名譽然賁行卓蹟及於遠邇者豈不類於荊玉之輝也谷蘭之香歟側聞 貴郡士人鄭溵弼系出東萊藝文舘大提學兼應敎公諱承甫之十六代孫大護軍諱絪之十五代孫吏曺判書諱昇之十四代孫禮曺判書諱可宗之十三代孫吏曺判書賜號楓川諱守弘之十二代孫兵曺判書諱傑之十一代孫生員進士諱孝孫之十代孫參奉公諱確之九代孫甲山府使諱緝之八代孫而名節古家淸宦世族斯人也自在孩提天賦仁孝性率謹愼事親之道敬長之節自悟自警年甫十歲親老家貧全無菽水之供晝以耕耘夜以織梱僅得數畝之田克盡奉供之道一以養志其親沉病累年不離病側每日侍湯長夏扇枕允合於古孝子之宲蹟至於丁憂也泣血面墨哀毁逾制遽經襄禮三年廬墓朝夕哭哀望朔祭奠終始不懈年將七旬逐日省掃山磎成路每當先代與考妣之諱日前期三日行素食粥一遵禮制自少至老知分樂道勤儉節約守口如甁防意如城口不道惡言足不入亂方大矣顔之處巷賢㦲董之隱淮篤老年光不知公門遯名於山水之間付趣於松竹之節處士之志操君子之氣像齊家庭訓子侄敦宗族接賓客之諸節不失尺寸十室忠信一鄕善義復覩於斯人矣是以一道公議齊發聯名告稟 巡相之意玆以發文望須 僉執史齊聲同應之地千萬幸甚右敬通于古阜儒林 丁丑正月日 [印]全州首長舘多士發文 李重榮 朴時昌 柳弼養 宋佑鉉 蘇相述 任泰悅 李時浩 權鴻壽 鄭海文 姜昌永 吳永煥 李炳憲 金益聲 安基祥 尹興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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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전주장관도회소청(全州長館道會疏廳)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全州長館 道會疏廳 古阜鄕校 1顆(墨印, 7.4×5.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80년 4월 전주장관 도회소청 선비 27인이 고부향교에 효의 지극한 정성과 수신의 큰 근본을 실행한 정은필이 아직까지 포장 받지 못하고 있어 조정에 보고할 할 생각이므로 함께 동참하여 이 실행이 초야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촉구한 통문 1880년(고종 17) 4월 전주장관 도회소청 선비 27인이 고부향교(古阜鄕校)에 효의 지극한 정성과 수신(守身)의 큰 근본을 실행한 정은필(鄭溵弼)이 아직까지 포장(褒獎) 받지 못하고 있어 조정에 보고할 할 생각이므로 함께 동참하여 이 실행(實行)이 초야(草野)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촉구한 통문이다. 섬김 중 어버이를 섬김이 가장 크고, 지킴 중 몸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데,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효의 지극한 정성이고, 마음을 다해 몸을 지키는 것은 지킴의 큰 근본이다. 얼핏 듣기로는 고부군 부안면(富安面)에 사는 처사 정은필은 동래(東萊)에서 계출(系出)한 즉 예문관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진사 임(任)의 11대손, 생진사 행통훈대부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으로 우리나라의 거족이자 호남의 명망있는 문벌이다. 정은필은 나이 겨우 열 살 때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 음식을 올릴 방법이 전혀 없자 땔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한결같이 어버이의 뜻을 봉양하였다. 갑자기 어버이가 병들자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써서 온마음으로 치료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몸을 상하며 슬피 우는 소리에 사방 이웃에서 조문하러 온 자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소식(素食)하고 죽을 먹으며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기일 3일 전부터 목욕재계하면서 장례 때처럼 슬프게 통곡하였으니 효의 지극한 정성이다. 일흔 살에 두문불출하며 은둔하여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말과 생각을 굳게 제재하였으니 지킴의 큰 근본이다. 말은 충성스럽고 행동은 독실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자제를 가르치는 절도는 당세 은거하는 선비이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향도(鄕道)의 천망(薦望)에 올랐고, 예조에서 계사를 올렸으나 아직까지 성상의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공의(公議)의 흠전(欠典)이다. 이에 소청(䟽廳)에서 사론(士論)의 한목소리로 조정에 보고할 할 생각으로 통문을 보내, 이와같은 실행(實行)이 초야(草野)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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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시장매매명문(柴場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시장문기 李應澤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에 이응택(李應澤)이 능주군 회덕면(懷德面) 백암리(白巖洞)에 있는 시장을 방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903년 6월 26일에 이응택(李應澤)이 시장을 방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시장을 수년 동안 가꿔오다가 사채(私債)로 인해 하는 수 없이 방매하게 되었다. 시장의 소재지는 능주군 회덕면(懷德面) 백암동(白巖洞) 윗 골짜기의 동쪽 볕드는 비탈 한쪽이고, 경계는 위쪽 밭머리에서부터 아래로 길까지라고 표시하였다. 매매가는 전문(錢文) 31냥이고, 해당 시장의 구문기(舊文記)는 없이 신문기(新文記) 1장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강봉열(姜鳳烈)이 증인으로 참여하여 착명(着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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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癸卯六月二十六日 前明文右明文事由來柴場累年禁養是多可私債所在不得已伏在懷德面白巖洞上谷東陽地燈一片柴場界限上自田頭下至路傍㐣價折錢文參拾壹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相左之端則持此文記告官卞呈事柴場主李應澤[着名]證人姜鳳烈[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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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伍十伍年庚戌十月十九日幼 學張漢臣前明文右明文爲事段 衿得耕食是如可移賣次 伏在同福內西面滄浪坪陽字畓二斗落只二夜味負數六卜九束庫乙 價折錢文四十二兩 依數交易奉上爲遣 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 本文記段 他田畓幷付 故不得出給爲去乎 日後如有雜談則 持此文記 告 官卞呈事畓主自筆幼學金在元[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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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장한신(張漢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金在元 張漢臣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90년(정조14) 10월 19일에 답주 유학 김재원(金在元)이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창랑평에 있는 논을 유학 장한신(張漢臣)에게 팔면서 발급해 준 토지매매명문 1790년(정조14) 10월 19일에 답주(畓主) 유학(幼學) 김재원(金在元)이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내서면(內西面) 창랑평(滄浪坪)에 있는 논을 유학 장한신(張漢臣)에게 팔면서 발급해 준 토지매매명문이다. 김재원은 자기 몫으로 분재 받아 갈아 먹던 논을 다른 땅으로 옮겨 사기 위하여 팔게 되었다고 방매사유를 밝혔다. 방매 토지는 창랑평에 있는 양자(陽字) 답(畓) 2배미 2마지기(결부수로는 6卜 9束)되는 땅이다. 이 논을 전문(錢文) 42냥을 받고 팔았다. 본문기(本文記: 이전 거래 및 소유 증명문서)는 다른 전답과 함께 붙어 있어내 주지 못한다고 명시했다.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은 답주 김재원 1인이다. 답주가 자필(自筆)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토지소재지인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창랑평은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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