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양회을(梁會乙)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高興國島儒會所 梁會乙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2년 10월에 고흥국도유회소에서 양회을(梁會乙)을 한포재 이선생 서원창건소의 유사로 위촉한 망기 1922년 10월에 고흥국도유회소(高興國島儒會所)에서 양회을(梁會乙)을 한포재(寒圃齋) 이선생(李先生) 서원창건소(書院創建所)의 유사(有司)로 위촉한 망기(望記)이다. 망기에는 고흥국도유회소에서 한포재 이선생서원창건소의 유사로 유학 양회을이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이다. 1684년(숙종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후 설서(說書), 수찬(修撰), 교리, 이조정랑, 응교(應敎), 사간, 서장관(書狀官), 우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이조판서 등을 거쳐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 · 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 · 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고흥군에 있는 이건명을 배향하는 서원은 덕양서원인데, 이 문기의 서원창건은 덕양서원이다. 이 서원은 1768년(영조44)에 유허비를 세우면서 사당 형태로 세웠다. 그 뒤 1928년에 비각을 고쳐 세우고 서원을 세웠으며, 황재 이기천·송애 정동준·돈암 이린기·도사 오광생·양촌 노주관·입재 문악연·정소송·정난파·명중화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