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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에 대한 만사 李德哉挽 소년 시절 문자로 명성을 다투었고장년엔 방패와 창으로 의병을 일으켰었지만 번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난 그대와 나사귀는 정 자별한 마음 술과 시를 겸하였어라기성에 자취 얽었다가 혼은 먼저 떠나고용만관의 맹서는 식어 한만 남았네어이 회상하랴, 금교278)에 사절을 멈추고서세 번 부르짖다가 목소리 끊겼던 나를 少年文字爭名日壯歲干戈倡義時萬死一生君與我交情別意酒兼詩箕城迹半1)魂先往灣館盟寒恨獨遺忍想金郊停使節三呼聲斷鄭同知 금교 이성길은 1621년(광해13년 4월 26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금교역(金郊驛-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있는 역참(驛站)에서 60세에 순직하였다. 《창주공 유고》에는 '半'이 '絆'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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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복원에 대한 만사 車復元輓 한양은 대단히 성대하고 송경은 기가 쇠했으니왕기가 비록 옮겨갔지만 산의 기운은 남아 있어라284)천보산의 지령에 인걸이 거처하니285)한 집안 세 준재 중의 차오산이라286)흉금의 도골에는 신선의 풍모가 있으며시격은 교룡이 솟구쳐 오르고 봉황이 나는 듯벗이 조정에 가득해도 자신의 운명은 기박하여겨우 한직인 사도로 추천되었을 뿐이구나 漢京全盛松京古王氣雖移嶽氣餘天寶地靈人傑處一家三秀五山車襟期道骨仙風在詩格騰蛟起鳳如相識滿朝身命薄冷官司導費吹噓 산의……있어라 차천로는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천보산의……거처하니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 것은 그 땅이 신령스럽기 때문이다.[人傑地靈]"라는 말이 나온다. 한……차오산이라 차천로는 아버지 식(軾),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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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태의(鄭太醫)309)【후계(後啓)】에 대한 만사 挽鄭太醫【後啓】 기백(岐伯)과 진(秦)나라 화(和)310)의 심법(心法) 동방에 숨겨져 있으니근세에는 오직 허준(許浚)과 양예수(楊禮壽)311)만을 일컫네의발(衣鉢)을 전하여312) 오묘한 관건을 연 이 누구인가의대(衣帶)를 갖추고서 당당히 높은 행랑에 들어갔네313)변방에서 10년 동안 임금을 모셨고314)내의원에서 세 임금 모시며 태양빛 가까이하였네서산(西山)에 해 기울었다고 노년을 한탄할 필요 없으니315)뜨락 가득한 난초 싹에 남은 향기 넉넉하다네316) 歧秦心法秘東方近代惟稱許與楊傳鉢孰能開妙鍵拖紳公得入崇廊邊塵十載陪龍御內局三朝襯日光離昃不須嗟大耋滿庭蘭茁剩餘芳 정 태의(鄭太醫) 정후계(鄭後啓, ?~1670)를 가리킨다. 효종~현종 연간에 의관(醫官)으로 활동하였다. 기백(岐伯)과 진(秦)나라 화(和) 모두 고대의 명의이다. 《한서(漢書)》 30권 〈예문지(藝文志)〉에, "태고 때에는 기백(岐伯)과 유부(兪拊)가 있었고, 중세에는 편작(扁鵲)과 진(秦)나라의 화(和)가 있었다.[太古有岐伯兪拊 中世有扁鵲秦和]"라 하였다. 허준(許浚)과 양예수(楊禮壽) 모두 조선의 명의이다. 허준(許浚, 1539~1615)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30여 년 동안 내의원의 어의로 재직하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의서(醫書)를 집필하였다. 또한 양예수(楊禮壽, ?~1597)는 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경보(敬甫), 호는 퇴사옹(退思翁)으로, 1565년 어의(御醫)를 지내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명종이 죽자 의관들이 처벌당할 때 투옥되었다가 곧 복직되었고, 이듬해 태의(太醫)로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 선조 초에 박세거(朴世擧)‧손사명(孫士銘) 등과 함께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하였다. 의발(衣鉢)을 전하여 원문은 '전발(傳鉢)'이다. '의발'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말하는데, 학문 따위를 전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흔히 사용된다. 의대(衣帶)를……들어갔네 정후계가 의관이 되어 대궐에 출입하였음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변방에서……모셨고 이에 관한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으나, 효종이 대군(大君)의 신분으로서 청나라에 8년 간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정후계가 의관으로서 그를 모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서산(西山)에……없으니 생사(生死)의 도리를 알아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로, 죽음을 지나치게 슬프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주역》 〈이괘(離卦) 구삼(九三)〉에, "기운 해가 걸려 있음이니, 질장구를 두드려 노래하지 않으면 죽음을 서글퍼 하는 것이므로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뜨락……넉넉하다네 원문의 '난(蘭)은 훌륭한 남의 집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들에게 어떤 자제가 되고 싶은지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뜰 안에 자라는 것처럼 하고 싶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정후계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 자식들이 훌륭하게 자랐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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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의 계사 禮曹啓辭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문부의 사우에 사액과 치제의 일은 마땅히 거행해야 되는데 흉년을 만나 경관(京官)을 내려 보내면 폐단이 있을 것이다.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금방 조정에 하직인사를 하였으니 향과 제문을 내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께서 아뢴 대로 행하라고 윤허하였다. "贈左贊成鄭文孚祠宇賜額致祭事, 當爲擧行, 而値此荒歲, 京官下送有弊, 本道都事, 今方辭朝, 香祭文下送, 使之設行, 何如。" 啓依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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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체관 성명 致祭官姓名 도사(都事) 정화제(鄭華齊), 전사관(典祀官)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지형(李之馨), 대축(大祝) 수성 찰방(輸城察訪) 김진한(金振漢), 찬자(贊者) 전 찰방(察訪) 박흥종(朴興宗), 알자(謁者) 전 참봉(前參奉) 지천석(池天錫)은 실제 와서 제사를 올렸다. 都事鄭華齊, 典祀官鏡城判官李之馨, 大祝輸城察訪金振漢, 贊者前察訪朴興宗, 謁者前參奉池天錫, 實來行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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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청한 소장 증손 전 주부 정삼(鄭杉) 지음 請諡疏【曾孫前主簿杉】 신이 삼가 아룁니다. 공적을 보답하고 충성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을 격려하는 큰 방도이고, 선을 한 가지로 드러내고 이름을 바꾸는 것32)은 죽은 이를 높이는 성대한 은전입니다. 진실로 탁월한 업적을 세워 명성과 공훈이 크게 드러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의 의론은 통례에 한정하지 않고 자손의 청은 친족이라는 혐의에 구애되지 않은 것이 또한 고금의 통의입니다.신의 증조부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문부(鄭文孚)는 일찍이 문예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선조 임진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만나 북평사(北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적 국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정청(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관찰사가 그 공을 가려 공적에 그에 대한 상이 걸맞지 않았으며, 후에 다시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 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으니, 당시 여론은 큰 벼슬에 임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불행히 옥사에 잘못 연루되어 마침내 시안(詩案)으로 곤장을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신의 증조부의 대략적인 본말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같은 집안사람의 사사로운 말로써 찬양하지 못하고, 대중이 존숭하여 믿을만한 근대 명신(名臣)과 선배들의 말을 대략 들어 그 한두 가지를 증명하기를 청합니다.관북의 적을 토벌한 일은 고 판서(判書)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의 평사가 되어 채록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가장 자세합니다. 그 내용에 "임진년 6월 왜장 청정(淸正)이 승승장구하여 북방을 노략질하니 병마사(兵馬使)의 군대는 궤멸되어 달아났다. 적이 드디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지역에 들어갔으며, 회령에 들어가 왕자를 사로잡아 경성 진보(鎭堡)에 돌아오니 반란의 병사들이 앞 다퉈 수령과 장수를 결박했으므로 온 성이 적을 따랐다. 그러나 평사(評事) 정문부 혼자 탈출하여 유생 두서너 명과 함께 근처의 뭇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등이 다 와서 모여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정문부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아 역적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진에 조리 돌리고, 명천과 길주 지역으로 진격하는데 계속하여 적을 만나 장덕(長德)에서 크게 짓밟았고 재차 쌍포(雙浦)에서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柵)을 여러 차례 포위하였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원하였다. 청정(淸正)과 더불어 백탑교(白塔郊)에서 싸워서 앞뒤로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북으로 육진(六鎭)을 다니면서 변방 오랑캐를 복종시켰으며 반란한 무리를 찾아 토벌하니, 관북이 마침 평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개 모두 그의 힘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쪽 지방을 안찰할 때 포상과 추증, 사당을 세워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당시 왜적과 북쪽 오랑캐가 번갈아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의 침입을 받았으며 반역하는 주민들도 그 가운데서 일어나 이윽고 역적이 되었다. 왜적은 비록 물러갔으나 역적들은 북쪽 오랑캐를 붙따랐는데, 두세 유생이 일개 종사관(從事官)을 추천하여 적은 군사로 많은 역적을 격파하고 마침내 큰 공을 세워 예전 왕의 선조들이 살던 강토를 오랑캐에게 함락되지 않게 하였다. 그 의열이 이와 같았으나 마침 관찰사가 그 공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공을 숨겼으므로 세상에 드러나 정상(旌賞)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통해 하면서 왕사(王事)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그가 시안으로 억울하게 죽은 일은 선왕조(先王朝) 을사년에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서 그 원통함을 변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정문부의 충절은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난리에 드러났으며, 광해군 때에 있어서 조금도 더러움에 물든 일이 없었습니다. 반정 뒤에 원수(元帥)로 추천되어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는데 박래장(朴來章)의 옥사에 무고를 입고 끌려 들어가서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습니다. 정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십절(詠史十絶)〉이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바로 초회왕(楚懷王)의 일을 읊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33) 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34) 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35) 孱孫何事又懷王이는 본래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원하시고 벼슬을 추증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그 당시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 등이 입대할 적에 같은 말로 극력 진달하여 신의 조부가 공이 있고 죄가 없으며 억울하게 죽은 곡절을 밝혔고, 또 고 상신(故相臣) 조익(趙翼)이 그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어 항상 그 원통한 정상을 말한 것을 인용하니, 이에 선왕이 품계를 뛰어 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방의 사람들이 신의 조부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 지역에 사당을 세워 함께 거의한 사람들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의 계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아! 국가에서 신의 조부에게 보답하여 주는 것이 어찌도 이같이 잘 갖추어 주십니까! 이미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씻어주었으며 작질(爵秩)을 더하였고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며, 이어 그 사당을 정포(旌褒)하여 길이 교화를 세웠습니다. 사방에서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들 고무되었으니, 조부가 황천에서 이를 안다면 반드시 감읍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시호를 하사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청을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비록 후손들이 잔미한 소치라 할지라도 어찌 성조(聖朝)의 한 가지 미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신이 들으니 국조 고사에 실직(實職) 정 2품 이상이라야 시호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것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경우는 이 한계에 관계치 않습니다. 도학이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예를 들면 참봉(參奉) 신 서경덕(徐敬德)의 시호가 '문강(文康)'인 것이 그것이며,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예를 들면 제독(提督) 조헌(趙憲)의 시호가 '문렬(文烈)',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시호가 '충렬(忠烈)'인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최진립(崔震立)36) 같은 경우에는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수사(水使)인데도 시호를 내렸고, 정온(鄭蘊)37)과 김권(金權)38)은 강직하여 감히 간언하고 높은 절조로 윤리를 수립하였으므로 다 참판(參判)인데도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선대 조종(祖宗)께서 선(善)을 포상하는 법이 애초부터 작질의 고하에 구애받지 않은 것입니다.지금 신의 조부가 국가에서 은전으로 시호를 주는 벼슬에서 한 등급이 부족하며 유현을 숭상하고 권장하는 체제에 견주면 비록 차이는 있더라도 국가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창의하여 난리에 항거하였으니, 그 충성과 공훈을 어찌 앞의 두어 사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세상에서는 간혹 순직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예부터 나라를 위하여 죽을 신하가 혹 죽기도 하고 간혹 죽지 않는 것은 다만 한 때의 행과 불행에 관계될 뿐이며, 본래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만 번 죽을 각오로 한 번 살아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생각이 이미 그 처음에 결정이 되었으면 필경 일의 성패와 자신의 존망을 가지고서 그 충성의 경중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성명(聖明)께서 신의 조부의 공을 가상히 여기고 신의 조부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겨 누대 조정에서 포상하는 뜻을 따라 맡은 부서에 급히 명하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의론하게 하신다면 후진들을 밝게 권장하고 무너진 풍속을 격동시킬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다만 지하에 계신 조부의 영광이 되고 자손의 다행만 되겠습니까?신은 미천한 정성으로 우러러 임금의 위엄을 더럽혔으니 광망하고 참람한 죄는 실상 피할 곳이 없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비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고 내용을 다 알았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臣伏以酬功顯忠, 勵世之大方, 節惠易名, 崇終之盛典。苟有樹立卓異, 聲烈表著者, 則有司之議, 不限於常格, 子孫之請, 毋拘於親嫌者, 亦古今之通誼也。臣之曾祖父贈左贊成臣文孚, 早以文藝著名, 擢第登仕, 當宣廟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 倡義起兵, 誅土賊鞠世弼等, 破倭將淸正兵, 關北以定, 而被臬司掩蔽, 功賞未稱, 復値昏亂, 屛斥於外。反正之後, 卽拜全州府尹, 時議大用, 而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 枉死於桁楊, 此臣祖本末大致也。然而臣不敢輒以一家私言, 有所揄揚, 請略擧近代名臣先輩衆所崇信之說, 以證其一二焉。其關北討賊事, 則故判書臣李植, 曾爲評事於北幕, 多所採訪, 最得其詳。有曰: "壬辰六月, 倭將淸正, 長驅寇北, 兵馬使軍潰而走, 賊遂入吉明鏡富等境, 入會寧擄王子, 還趨鏡城鎭堡, 叛兵爭縛守將, 擧城附賊, 而評事鄭文孚獨脫免, 與儒生數輩, 號召近境, 鍾城府使鄭見龍等, 皆來會。衆推文孚爲大將, 斬叛賊鞠世弼等十三人, 以徇諸鎭, 進兵明吉界, 連與賊遌, 大蹂于長德, 再捷于雙浦, 屢圍吉州城及嶺東柵。踰嶺, 捄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討叛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故相臣閔鼎重, 按察北路時, 啓請褒贈立祠。有曰: "當時倭胡交亂, 腹背受敵, 逆民中起, 旣爲叛賊, 倭雖退, 其勢當附於胡,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從事, 以小擊衆, 卒就大功,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義烈如此, 而適被按道之臣, 恥其功不出己, 誣啓掩功, 未獲顯被旌賞, 至今人心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其詩案枉死事, 則先王朝乙巳年, 儒臣李端夏疏, 卞其冤。有曰: "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其在昏朝, 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 將大用, 而朴來章之獄, 適被誣引, 置對辨明, 將見釋, 而適又臺諫有以詩案深論者。文孚曾爲昌原府使時, 有〈咏史十絶〉, 其一卽楚懷王事, 而其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此本昏朝時所作, 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復其詩意, 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 國人莫不傷之, 請伸冤贈爵。" 其時, 大臣鄭太和等, 因登對, 同辭極陳以明臣祖有功無罪枉死委折, 且引故相臣趙翼, 爲其時問事郞廳, 常言其冤狀, 先王命超品贈職, 錄用子孫。先是北人, 爲臣祖立祠於起義之地, 而配以同事之人, 相與俎豆之。又因司諫呂聖齊啓請, 特令賜額致祭。嗚呼, 國家之於臣祖, 所以酬報之者, 何其備歟。旣已雪其冤枉矣, 加其爵秩矣, 錄其子孫矣, 又從而旌其祠而永樹風聲矣。四方觀聽, 莫不聳動, 九原有知, 其必感泣, 而惟是贈諡一事, 迄未上請, 此雖後嗣殘微之致, 而亦豈非聖朝之一闕事也。臣聞國朝故事, 實職正二品以上, 乃得諡。然有所取而諡之者, 亦不係此限, 有道學則諡, 若參奉臣徐敬德之諡文康, 是也。有節義則諡, 若提督臣趙憲之諡文烈, 招討使臣高敬命之諡忠烈, 是也。至如崔震立之力戰死事, 則以水使而諡焉, 鄭蘊金權之勁直敢言, 抗節扶倫, 則皆以參判而諡焉。然則祖宗彰善之規, 初不拘於爵秩之高下也。今臣祖於國典例諡之秩, 未準一階, 視儒賢崇奬之體, 雖或差異, 而乃若爲國忘身, 倡義抗難, 則其精忠勳烈, 豈必多讓於前數人哉。世或以死事爲重, 而自古徇國之臣, 或死或不死者, 特係一時之幸與不幸耳, 其心則一也。夫萬死不顧一生之計, 已決於其初, 則畢竟事之成敗, 身之存亡, 蓋有不必論其輕重矣。倘蒙聖明嘉臣祖之功, 愍臣祖之冤, 追累朝奬餙之意, 亟命所司, 議易名之典, 則足以昭勸方來, 激勵頹俗, 豈獨泉塗之榮耀, 子孫之私幸而已哉。臣以螻蟻微懇, 仰瀆宸嚴, 狂僭之罪, 實無所逃。臣不勝惶隕感激, 涕泣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선을……것 '절혜(節惠)'는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여 주고 사적을 절취(節取)하여 그 선(善)을 전일하게 한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하였으니, 시호를 뜻한다. '역명(易名)'은 이름을 바꿔 시호를 내린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공숙문자(公叔文子)가 졸(卒)하자 그의 아들이 임금에게 시호를 청하기를 "세월이 흘러 장사 지낼 때가 되었으니 이름을 바꿀 것을 청합니다.[日月有時 將葬矣 請所以易名者]"라고 하였다. 예언한 남공의 말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무관에 들어가자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 여린……됐다더냐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최진립 1568~163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생포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고 도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용인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정온 1569~164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참수(斬首)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촌으로 낙향하였다. 김권 1549~1622.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중(而中), 호는 졸탄(拙灘),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17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강계 ·무안 등지에 유배,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설을 듣고 식음을 전폐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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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의 회계 禮曹回啓 전 주부(主簿) 정삼(鄭杉)의 상소를 계목(啓目)에 의거하여 증거 서류를 덧붙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전 주부 정삼의 이 상소 내용을 보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신의 증조부 정문부(鄭文孚)가 일찍이 문예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선조 임진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만나 북평사(北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적 국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정청(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관찰사가 그 공을 가려 공적에 그에 대한 포상이 걸맞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제수되었으니, 당시 여론은 큰 벼슬에 임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불행히 옥사에 끌려 들여가 마침내 시안(詩案)으로 곤장을 맞아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것이 신의 증조부 본말의 대략입니다. 그 후에 판서(判書) 신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의 평사가 되어 채록한 것이 많았으며,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쪽 지방을 안찰할 때 장려하여 벼슬을 추증하고 사당을 세워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을사년 이르러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서 그 원통함을 변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정문부의 충절은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난리에 드러났습니다.'라고 하니, 선왕이 품계를 뛰어 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의 계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시호를 하사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청하여 올리지 않았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해당 관청에 명하시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의논케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정문부의 충절에 대해 그 자손이 찬양하는 말은 비록 믿을 수 없더라도 선배 명신들이 혹은 그 의열을 아뢰고 혹은 그 억울하게 죽은 것을 따졌으며, 혹은 증직을 주고 그 자손을 채용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한 사원을 세워 사액하고 치제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렬과 절의는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의 고사에 실직(實職) 정 2품 이상이라야 이에 시호를 얻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것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자에게는 이 한계에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렸으니, 제독(提督) 신 조헌(趙憲)과 초토사(招討使) 신 고경명(高敬命)의 시호가 '문렬(文烈)', '충렬(忠烈)'인 것이 그것입니다.세상에서는 간혹 순직 여부를 중히 여기는데, 예부터 나라를 위하여 죽을 신하가 혹 죽기도 하고 간혹 죽지 않는 것은 다만 한 때의 행과 불행에 관계될 뿐이며, 본래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땅히 소장의 내용에 의하여 특별히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어지러운 풍속을 격려하게 하소서. 이 일은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신의 예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가하여 주심이 어떻습니까?계하(啓下)하기를 "회계(回啓)한대로 시행하라"라고 하였다.계미년 10월 7일. 前主簿鄭杉上疏, 據啓目粘連啓下是白有亦。觀此前主簿鄭杉疏辭, 則以爲"臣之曾祖父贈左贊成文孚, 早以文藝著名, 擢第登仕。當宣廟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倡義起兵, 誅土賊鞠世弼等, 破倭將淸正兵, 關北以定, 被臬司掩蔽, 功賞未稱。逮仁廟反正之後, 卽拜全州府尹, 時議大用, 而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冤死於桁楊, 此臣祖本末大致也。在後判書臣李植, 曾爲評事於北幕, 多所採訪, 故相臣閔鼎重, 按察北路時, 啓請褒贈立祠。及至乙巳年, 儒臣李端夏疏, 卞其冤。有曰: '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先王命超品贈職, 錄用其子孫。又因司諫呂聖齊啓請, 特令贈額致祭, 而惟是贈諡一事, 迄未上請, 伏願聖明亟命所司, 議易名之典亦爲白有臥乎所。" 文孚忠節, 以其子孫揄揚之言, 雖不可取信, 而前輩名臣, 或陳其義烈, 或訟其枉死, 或請贈秩錄其子孫, 又令立祠而贈額致祭, 其功烈節義, 無復可議者矣。國家故事, 實職正二品以上, 乃合得諡, 然有所取而諡之者, 亦不拘此限, 有節義則諡, 若提督臣趙憲·招討使臣高敬命之諡文烈忠烈, 是也。世或以死事爲重, 而自古徇國之士, 或死或不死者, 特係一時之幸與不幸, 其心則一也。所當依疏辭, 特贈嘉諡, 以激頹波是白乎矣。事係恩典, 臣曹不敢擅便, 上裁何如。啓依回啓施行。癸未十月初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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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고 범옹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홍중일 敬次先王考泛翁韻【洪重一】 태평 시대에 병마가 객이요승지에는 촉룡서당 서있네산봉우리에 초승달 비끼고호수 빛이 술잔에 비치네수양112)에는 의병 있었고통덕은 본래 유향이었네조부님의 시 벽에 걸려화답하니 두랑에 부끄럽네 淸時兵馬客勝地燭龍堂峀勢橫新月湖光映綠觴睢陽曾義旅通德本儒鄕王父詩懸壁賡吟媿杜郞 수양(睢陽) 《농포집》 권6 〈임명대첩가(臨溟大捷歌)〉 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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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조 범옹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홍성보 敬次族祖泛翁韻【洪聖輔】 여러 공이 공렬 드러낸 곳에모두 한 사당에 영령 모셨네사액의 은전에 처마 빛나고향긋한 술잔 해마다 올리네대의는 일월처럼 밝게 빛나고풍성과 권면 먼 고을에 높네남조의 선비들에 부끄러우니오직 이 시랑이 있을 뿐이네113) 諸公彰烈地一體妥靈堂簷耀恩頒額椒香歲薦觴日星昭大義風礪聳遐鄕堪愧南朝士惟存李侍郞 남조의……뿐이네 남조는 송나라를, 이 시랑(李侍郞)은 북송의 이약수(李若水, 1093~1127)를 가리킨다. 1126년 북송이 금나라에 항복한 뒤에 휘종과 흠종 등이 볼모로 잡혀갔는데, 이부 시랑(吏部侍郞) 이약수도 흠종을 따라 금나라에 갔다. 금나라에서 흠종에게 황제의 복장을 뺏으려고 핍박할 때 이약수가 안 된다고 간하였고, 금나라 장수를 꾸짖다가 구금되어 끝까지 굴하지 않고 죽었다. 그 뒤 북방에서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금나라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요(遼)나라가 망할 때는 절의를 지켜 죽은 자가 10여 명이었는데, 남조에는 오직 이 시랑 한 사람뿐이었다.[遼國之亡, 死義者十數, 南朝惟李侍郞一人.]'라고 하였다." 하였다. 《宋史 卷446 李若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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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그루 버들에 봄이 온 줄도 모르다343) 십운으로 월과이다. 不知五柳春 十韻月課 오류선생은 어떤 사람인가기노344)의 천지에서 진나라 유민으로 지냈네.세상의 그물에 걸려 형역을 힘들게 함을 부끄럽게 여기고서전원으로 돌아와 지내며 속진을 피했어라.세상에 중산왕345)이 없어 당시 지우를 받지 못하였고자는 제갈량을 따랐으나346) 뜻은 펼치지 못하였구나.생애는 무릎이나 들어갈 세 간의 집좋은 물건은 농 위의 일각건이라네.만년에 술과 벗을 맺고서여생은 오랫동안 취향과 이웃하였어라.옥산이 무너진 곳347)에 시간을 보낼 수 있고달이 뜬 은빛 바다에서 밤중에 문득 봄을 감상하누나.문득 술잔 속에 황국의 계절임을 알았는데어찌 문밖에 녹양의 때인 줄 알겠는가.노란 버들눈 터트리고 푸른 가지 늘어뜨려도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데이슬 지니며 이내 머금고 절로 새롭구나.맘대로 날리는 버들솜 거센 바람에 떨어지건 말건교태로운 앵무새는 무슨 일로 자주 와서 우짖는가.날이 추워지면 따로 마음을 아는 곳이 있으리니-원문 6자 결락- 대. 五柳先生何許人寄奴天地晉遺民羞從世網勞形役歸臥田園避俗塵世乏中山時未遇字追諸葛志難伸生涯容膝三間屋長物籠頭一角巾末契且將歡伯友餘生長與醉鄕鄰玉山倒處堪消景銀海昏時便賞春但覺杯中黃菊節寧知門外綠楊辰拖黃拂翠無人管帶露含烟自在新狂絮任他飄落盡嬌鶯何事喚來頻歲寒別有知心處【六字缺】筠 다섯……모르다 이백(李白)의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 시에 "도령은 날마다 취하여, 다섯 그루 버들에 봄이 온 것도 몰랐네. 소박한 거문고는 본래 줄이 없었고, 술을 거르는 덴 갈건을 사용했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희황상인이라 일컬었지. 그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의 친구를 한번 만나 볼거나.[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何時到栗里, 一見平生親.]"라고 하였다. 기노 진(晉)나라를 멸하고 남조 송(宋)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유(劉裕)의 어릴 때 이름이다. 중산왕 유비는 중산왕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자는 제갈량을 따랐으나 도연명의 자는 원량(元亮)이다. 옥산이 무너진 곳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서도 진(晉)나라 산간(山簡)을 두고 읊기를 "맑은 바람 밝은 달은 한 푼 돈이라도 들여 살 것 없고, 옥산은 스스로 무너졌지 남이 민 게 아니로다.[淸風明月不用一錢買, 玉山自倒非人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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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공 유정○바로 선생의 장손이다 이 외재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1666년, 현종7) 鳳崗公【有禎○卽先生長孫】與畏齋書【丙午】 근래 초여름에 삼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존체는 어떠하신지요. 삼가 어른을 존모하는 못난 저는 미천한 정성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유정(有禎) 등은 젊었을 때부터 먼 지방을 떠돌면서 집사(執事)의 성대한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찾아뵙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사모할 따름입니다.지금 어른께서 조부(祖父)의 옛날 삭방(朔方)의 공을 뒤미처 포상하여 이전의 공로에 보답해달라고 청하신 것은 저희들은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상소한 말과 사지(祠志)를 받들어 보니 더욱 마음속으로 탄복합니다. 또 선 상국(先相國) 택당공(澤堂公, 李植)께서 평사(評事)가 되었을 때 조부가 창의한 일을 기록한 것과 및 감영한 한 절구25)를 보니 더욱 지극한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 상국(先相國)은 조부와 일찍이 한 번도 서로 만나본 교분이 없었는데 이미 공적을 기록하였고 또 충성이 있다고 시로 읊으셨으니, 어찌 조부의 충성이 무고를 당한 것을 슬퍼하고 조부의 공을 보답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집사께서는 조부를 이어 50년이나 지난 뒤에 평사가 되었는데, 선친께서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긴 것에 느낌이 일어 능히 장사(壯士)의 숙원을 충실히 따라 방백(方伯)에게 말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허락하게 하였고, 조정에 알려서 소급하여 포상하여 줄 단서를 드러내도록 청하였습니다. 조정으로 소환되자 공은 제 조부 공이 큰데도 보답하지 못하며 원통함을 품고 죽었는데 신원 받지 못한 상황을 극진히 말하였으므로 대신이 이로 인하여 임금 앞에서 자세히 진달하였으며 이에 주상께서 특별히 높은 벼슬을 추증해서 뒤미처 포상하게 하였습니다. 1백 년 동안 이미 방치된 공적을 하루아침에 문득 지하에서 보답을 받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덕이 망극하여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만분의 일도 보답할 수 없으니, 다만 스스로 감읍할 따름입니다.만약 집사가 방백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방백이 어디에서 들어서 조정에 알렸겠습니까? 또 만약 집사의 봉소(封疏)가 전하에게 진달되지 않았으면 대신이 어떻게 임금에게 진달하였겠으며, 전하께서 어찌 밝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집사가 소급하여 포상하도록 강력하게 청한 것이 비록 국가가 보답하는 의리라고 할지라도 우리 자손의 입장에서는 그 감격한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것은 사람이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변고는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충의와 공렬이 사라질까 애석히 여겨 그 일이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방치하지 않고 반드시 찬양하고자 하는 것은 덕의가 지극히 두터운 것이며, 국가의 변고가 때로 있을 것이니 앞으로 올 것을 미연에 방비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려고 한 것은 생각이 심원한 것입니다. 그 중대한 것을 알아서 이 급무를 앞서 처리하니, 집사는 국사에 대해여 참으로 먼저 할 바를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사람이 일을 할 적에 의도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하는 자가 많거늘 집사의 이런 행위는 다만 사리에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니, 어찌 의도한 바가 있어서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남헌(張南軒)이 말하기를 "의도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하는 것은 이(利)요, 의도한 바가 없는데 하는 것은 의(義)이다."26)라고 하였습니다. 집사가 이 일을 함은 오직 의(義)를 위해서입니다. 공(公)이란 한 글자는 군자를 만드는 틀입니다. 집사께서 충의를 널리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공심(公心)이요, 국가를 위하여 뒷날을 염려하는 것도 공심(公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공변되면 즉 하나가 된다.'27)라 하였으니, 집사의 마음가짐이 이미 공(公)입니다. 집사께서 학문하실 때 세상의 이치를 하나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니, 타인 보기를 자신 같이 하여 이 마음을 다하는 것은 군자의 충서(忠恕)요,28) 남이 억울함을 당한 것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서 걱정해 주지 않는 것은 속인의 상정(常情)인 것입니다. 옛날에 증자가 남을 위하여 도모하면서 충심을 다하는 것을 날로 성찰하는 공부로 삼았으니,29) 그가 남을 위하는 데 마음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집사께서 이러한 마음을 평소 알지 못하던 사람에게 다 하셔서 그 무고 받은 것을 밝혀 주었고 그 공을 드러내었으니, 집사가 이런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남을 위해 도모하기를 충심으로 하는 공부가 있기 때문입니다.남을 관찰하는 자는 다만 그 마음 쓰는 곳을 보기 때문에 한 가지 일만 보아도 족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한 가지 일에서 삼가 집사의 마음 쓰는 곳을 보니 어찌도 이와 같이 허다한 선(善)을 지니고 있습니까. 또한 집사께서 저의 조부를 뒤미처 드날린 것은 저의 조부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성대한 의열(義烈)을 알고 나서 있는 힘을 다해 말한 것입니다. 제가 성대하게 집사를 칭송하는 것은 다만 저의 조부의 의열을 찬양해 준 때문만이 아니라 집사의 이와 같은 선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칭송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저의 조부를 찬양하는 것에 혐의를 두어서 집사의 선을 칭송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성인이 칭송하기를 즐기라는 훈계가 없고 군자가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혐의를 피하려는 사사로운 생각일 따름이니, 어찌 공심과 직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누이 칭송하면서 스스로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집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전부터 우러러 존모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또 거듭 오늘날 탄복하는 진심이 우러나는데, 어찌 집사의 집에 한번 나아가 친히 안색을 받들고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부친의 연세가 높고 숙환이 위중하여 조금도 곁을 떠날 수 없어서 이에 봉함한 한통의 편지를 올려 에오라지 이 정성을 표하면서 천리를 바라보니, 다만 간절하게 정신만 달려갈 뿐입니다. 집사께서는 바라건대 모름지기 살펴주소서. 卽者初夏, 伏不審尊體若何。伏慕區區, 不任賤誠。有禎等自少時, 流落遐鄕, 竊聞執事之盛名, 久矣, 而尙未得登龍門也, 只自慕仰而已。今此請追褒祖父昔日朔方之功, 以酬其旣往之勞者, 出於意所未料, 奉見疏辭若祠志, 益切歎服于中, 而仍又得見先相國澤堂公爲評事時所記祖父倡義事蹟及感詠一絶, 則尤不勝感歎之至。先相國之於祖父, 曾無一識之分, 而旣記以功, 又詠以忠者, 豈非慨其忠而見誣, 惜其功不見酬之故也。執事繼爲評事於五十年之久, 而有感先人之慨惜, 克從壯士之宿願, 言于方伯, 許其立祠, 請聞于朝, 以發追褒之端。逮夫召還, 極言其功大莫酬抱冤莫伸之狀, 大臣因備陳於榻前, 而自上特贈崇秩以追褒之, 百年旣置之功, 一朝奄酬於泉下, 天恩罔極, 非隕結之所可報其萬一也。只自感泣而已。若非執事言於方伯, 則方伯何從而聞於朝也, 若非執事封疏以達於宸聽, 則大臣何以陳, 白聖明何以燭之乎。執事之固請追褒, 雖是爲國家酬報之義, 而在吾子孫之心, 其爲感激, 當作何如情也。夫旣往者, 人之所易忘者也, 將來者, 人之所難慮者也。惜其忠義功烈之泯滅, 不以其事在旣往, 而必欲追揚之者, 德義之至厚也。念夫國家邊患之有時, 慮未然於將來, 必欲聳動人心者, 意慮之深遠也。知其大者, 先此急務, 執事之於國事, 眞可謂知所先矣。人之作事也, 有所爲而爲之者, 多矣, 執事此擧, 只以其事理之當然而已, 豈謂其有所爲而爲之。張南軒曰: "有所爲而爲之者, 利也。無所爲而爲之者, 義也。" 執事之制是事也, 其惟以義乎。公之一字, 做君子樣子也。執事之欲表章忠義者, 公心也, 而爲國家後慮者, 公心也。程子曰: "公則一。" 執事之存心也, 其已公矣。執事之進學也, 其將惟一乎。視人猶己, 能盡此心者, 君子之忠恕也。聞人被枉, 恝視不顧者, 俗人之常情也。昔者, 曾子以爲人謀忠, 爲日省工夫, 其盡心於爲人, 可見矣。今執事盡此心於素不識之人, 明其被誣, 彰厥功烈, 執事之能盡此心者, 其必有謀忠工夫乎。夫觀人者, 只觀其心用之之處, 故見一事而足以決矣。今於此一事, 竊見執事之心用之之處, 是何有如此許多之善也。且執事之追揚吾祖者, 非私於吾祖也, 知其義烈之盛而極言之也。某之盛稱執事者, 非獨以揚吾祖之義烈也, 見執事如許之善而樂道之耳。今若嫌於揚吾祖, 而不稱道執事之善, 則是聖人無樂道之訓, 而君子無好善之心也。此固避嫌之私意而已, 亦豈公心與直論哉。故稱道縷縷, 不知自止, 執事以爲何如哉。夫以其向來慕仰之心, 而又重以今日歎服之誠, 豈不欲一進軒下, 親承顔色, 奉聞緖言乎。親年極高, 宿疾添重, 不能少離, 玆緘一書, 聊寓此誠, 瞻望千里, 只切馳神, 執事幸須垂察焉。 창의한……절구 창의한 일을 기록한 것은 〈북관지(北關志)〉를 가리키며, 감영한 한 절구는 《택당선생집》 권1의 〈경성십절(鏡城十絶)〉 가운데 제5수를 가리킨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신공이 활을 한 번 쏘아 겹겹의 포위 풀었고, 정자가 세 번 진경하여 왜적을 물리쳐 돌려보냈네. 관외의 두 충신은 해와 달처럼 우뚝하니, 부질없이 장사로 하여금 눈물 흐르게 하네.[申公一箭解重圍, 鄭子三麾破敵歸. 關外雙忠懸日月, 空令壯士涕交揮.]" 장남헌이……의이다 《근사록(近思錄)》 권7 〈출처류(出處類) 맹자변순척지분(孟子辨舜跖之分)〉의 주(註)에 "사적인 목적이 없이 하는 것이 의이고, 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것은 이이다.[無所爲而爲之者義也 有所爲而爲之者利也]"라는 남헌 장씨의 말이 나온다. 남헌 장씨는 주희(朱熹)의 절친한 벗으로, 주희ㆍ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동남(東南)의 삼현(三賢)으로 일컬어진 장식(張栻)을 가리킨다.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여 남헌 선생이라고 불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다. 정자가……된다 《근사록집해》 권1 〈도체(道體)〉에 "공정하면 하나가 되고 사사로우면 만 가지로 달라지니, 인심이 사람의 얼굴처럼 각기 다른 것은 다만 사심 때문이다.[公則一 私則萬殊 人心不同如面 只是私心]"라고 한 이천(伊川) 선생의 말이 보인다. 학문하실……충서요 일지(一之)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준말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예, 그렇습니다.[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증자가……삼았으니 증자(曾子)가 자신은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한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않았던가?.[爲人謀而不忠乎]"라고 하였다. 《論語 學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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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가 답한 편지 畏齋答書 북방에서 조정으로 돌아와서 상사(上舍) 첨윤(僉胤)의 내방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그대의 소식을 알았습니다. 비록 몸씨 기쁘고 위로가 될지라도 영남은 멀고 막혀서 찾아가서 회포를 펴지 못하니 한이 됩니다. 뜻밖에 멀리서 외람되이 보낸 긴 편지를 받아 보니 사의(辭意)가 진중하여 받들어 반복해 읽어 보니 마치 의범(儀範)을 마주하여 간곡한 정을 펴는 것 같습니다. 구구한 기쁨을 마음에 다 담을 수 없습니다. 다만 고루한 저에 대해 칭송한 것을 감당하지 못하니 대단히 부끄럽습니다.선친께선 당론이 분분하던 시대에 태어나셨는데 공론을 채집하여 한 시대의 참된 시비를 결정하는 것은 평소 마음속에 생각한 것이니, 선 상국(先相國)의 공렬에 대해 힘써 기술한 것도 또한 이 때문입니다. 그 두어 종이에 기록한 문자는 화재를 당하여 유실되고 남은 것인데, 제가 북관에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자못 하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그 뜻을 계승하여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지 않았다면 이는 곧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으로 그만두지 못할 것이지, 단하가 특별히 선한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들으니 교대할 때 여군(呂君)이 조정에 돌아와서 임금의 앞에서 아뢰어 또한 사당에 사액이 있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의열을 좋아함이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제가 전 달에 고향에 돌아온 뒤로 보내준 편지가 인편을 통해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돌아가는 인편이 없어 답서가 오랫동안 지연되었습니다. 이제 답서를 보내는데 마침 병으로 인하여 짧은 폭 어지러운 초서로 회포의 만분의 일도 다 펼 수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그대는 존양에 힘쓰고 선열을 계승하여 멀리서 기대하는 저의 마음에 부응하여 주십시오. 삼가 바라건대 첨하(僉下)는 살펴주십시오. 自北還朝, 獲荷僉胤上舍來訪, 憑諳高居消息, 雖切欣慰, 而恨嶺嶠脩阻, 無因拜敍, 不圖遠辱長牋, 寄意珍重, 奉讀以還, 怳如奉接儀範, 款曲披展。區區欣浣, 不容于中, 第於淺陋所以稱道之者, 有不敢承當焉者, 深用愧怍。先人生於黨論之世, 採輯公議, 以定一代之眞是非者, 卽平生之所存, 其於先相國之功烈, 力加記述, 亦爲此也。其數紙文字, 見漏於回祿之餘, 而爲端夏携入北關者, 此殆天意有存, 端夏若不繼其志而有所表章, 卽非人也。此自人之常情, 有所不能已者, 非端夏特有善狀而然也。今聞交代, 呂君歸奏榻前, 又賜廟額云, 亦可見人心有同好於義烈也。僕前月下還松楸, 來書傳至, 而苦無歸便, 久稽奉謝。今始修敬, 而適因病困, 短幅胡草, 不能盡所懷之萬一。只祈僉尊, 遵養珍勉, 以紹先烈, 以副遐企。伏惟僉下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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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상인(淳淨上人)의 시축에 제하다 題淳淨上人軸 눈처럼 흰 납의(衲衣) 산수 사이를 막 지나니156)시 주머니 함께 차고서 흰 구름처럼 돌아가네죽헌(竹軒)【시인의 호다.】의 맑은 음률 속세의 생각 깨우치니이로부터 교외의 삶 꿈 또한 한가하리 雪衲新歷山水間詩囊兼帶白雲還竹軒【詩人號】淸律開塵慮從此郊居夢也閒 지나니 원문은 '마(磨)'인데, 문맥을 살펴 '력(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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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버지의 시에 차운하여 니산 충의 한응몽에게 주다 謹次嚴君韻贈尼山韓忠義應夢 산루에서 노성면18)을 놀라 바라보고 山樓驚見魯城面그리운 마음 전달하고파 밤에 잠 못 이루네 欲道相思無夜眠어느새 하늘은 절반도 열리지 않았는데 忽忽不曾開一半붉은 태양이 이미 새벽노을 주변을 비추네 紅輪已輾曙霞邊 山樓驚見魯城面, 欲道相思無夜眠.忽忽不曾開一半, 紅輪已輾曙霞邊. 노성면 충청남도 논산시 북부에 있는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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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서재에서 아버지를 모시는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시를 읊어 올리다 大安書齋奉侍嚴君聽琴詠詩以獻 장마 비가 개이자 황혼이 열리고 積雨晴來暮色開남산의 신록은 뜨락의 괴목까지 이어졌네 南山新翠接庭槐촉 땅 거문고19)로 또 요지20)곡을 연주하고 蜀琴又奏瑤池曲삼천갑자 동방삭21) 되시길 바라며 술 한잔 올리네 方朔三千屬一杯 積雨晴來暮色開, 南山新翠接庭槐.蜀琴又奏瑤池曲, 方朔三千屬一杯. 촉 땅 거문고 원문의 '촉금(蜀琴)'은 한(漢)나라 때 촉 땅에서 살았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사용하던 거문고를 말한다. 그가 거문고를 잘 연주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유우석(劉禹錫)의 〈상진주행(傷秦姝行)〉에 "촉현이 울리고 손가락은 옥 같나니, 황제의 악공이 연주하는 상가곡일세.〔蜀弦錚摐指如玉, 皇帝弟子常家曲.〕"라고 하였다. 《劉賓客文集 卷30》 요지 전설에 나오는 곤륜산의 연못으로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곳이다. 주 목왕(周穆王)이 서쪽으로 요지 가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났다고 한다. 삼천갑자 동방삭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람으로, 골계(滑稽)와 해학(諧謔)의 솜씨를 능숙하게 발휘하면서 직언(直言)을 곧잘 하여 국정을 바로잡았다.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은 덕분에 죽지 않고 장수했다고 하여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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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종제【해영(海英)153)】를 전송하며 送從弟【海英】應擧之京 남자의 행장은 예의 있고 마땅해야 하니한 터럭의 재주와 지혜는 기이한 것이 아니라네근래 듣건대 서울에 유자(儒者)들 많다고 하니경서(經書) 가지고서 의문 나는 점 물어야 하리두 번째비 내려 좋은 가을 씻어낸 8월의 하늘맑은 구름 다 흩어지고 물은 마치 안개 깔린 듯아름다운 이 사람 필마 타고 화양(華陽)154)의 길에 오르니걸음이 삼청(三淸)155)의 북쪽 변경 가에 가까워지네 男子行裝禮與宜一毫才智未爲奇近聞京洛多儒者須抱遺經問所疑其二雨洗良秋八月天淡雲消盡水如烟佳君匹馬華陽路行近三淸紫塞邊 해영(海英) 김해영(金海英)을 가리킨다. 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화양(華陽)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숨어 살던 곳이다. 도홍경은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에 뜻을 두어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호를 화양진일(華陽眞逸)이라 하였다. 삼청(三淸) 도교에서 말하는 천상 세계로, 삼동(三洞)의 교주(敎主)가 사는 최고의 선경(仙境)인 옥청경(玉淸境), 상청경(上淸境), 태청경(太淸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임금이 있는 도성을 천상 세계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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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대나무를 읊다 詠松竹 왕대12)는 오늘의 소무13)이고 苦竹今蘇武장송은 옛날의 백이네 長松古伯夷그윽한 집에 나보다 뛰어난 것이 많으니 幽軒多勝己어찌 선현들 뒤좇아 따르는데 마음을 쓰랴 何用費追隨 苦竹今蘇武, 長松古伯夷.幽軒多勝己, 何用費追隨. 왕대 원문의 '고죽(苦竹)'은 참대 혹은 왕대라고도 하는데, 중국이 원산지이다. 죽순의 맛이 쓰다고 해서 고죽이라 한다. 소무 한 무제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의 임금 선우(單于)에게 억류되었으나, 북해(北海) 가에서 양을 치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절개를 지키다가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와서 전속국(典屬國)이란 벼슬에 임명되었다. 《漢書 卷54 蘇武傳》 《史略 卷2 西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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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절구 七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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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에게 부치다 寄舍弟 관문의 구름은 아득하고 기러기도 무정하니 關雲迢遞雁無情외로운 성 어느 곳인들 부모 형제 생각나네 何處孤城憶父兄꺼져가는 촛불 밤 깊은데 서리 맞은 잎 울리니 殘燭夜深霜葉響꿈속에서도 연못의 풀은 자랄 수가 없구나 夢中池草不能生 關雲迢遞雁無情, 何處孤城憶父兄.殘燭夜深霜葉響, 夢中池草不能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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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중신 정상14)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鄭提督仲愼詳韻 二首 인간세계 고뇌에서 달아난 것이 기뻐라 自喜人間苦惱逃가을바람에 붉게 물든 단풍이 봄날 복사꽃보다 낫네 秋風紅染勝春桃대나무 평상에서 다행히 아름다운 시구15)를 얻으니 竹床幸得瓊瑤句저물도록 읊조려도 피곤한 줄 모르겠네 底暮吟來不覺勞주룡해16) 굽이에서 십 년 은일하며 住龍海曲十年逃머리에 윤건17) 쓰고 손수 복숭아를 심었네 頭戴綸巾手種桃아득히 바라보니 흰 구름으로 갈 길 잃었지만 遙望白雲迷去路선경을 찾고자 수고로움 꺼리지 않네 欲尋仙境不憚勞 自喜人間苦惱逃, 秋風紅染勝春桃.竹床幸得瓊瑤句, 底暮吟來不覺勞.住龍海曲十年逃, 頭戴綸巾手種桃.遙望白雲迷去路, 欲尋仙境不憚勞. 정상 1533~1609.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신(仲愼), 호는 창조(滄洲)이다.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의 후손이다. 1574년 갑술(甲戌) 별시(別試)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운(鄭運) 송희립(宋希立) 등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싸웠으나 한산도대첩 때 병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순신의 군진에 아들 정여린(鄭如麟)과 종손 정란(鄭瀾)을 시켜 쌀을 보냈다. 문집은 《창주선생일고(滄洲先生逸稿)》가 있다. 아름다운 시구 원문의 '경요(瓊瑤)'는 아름다운 시를 가리킨다. 《시경》 〈목과(木瓜)〉에 "내게 복숭아 던져 주길래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했네. 갚으려는 게 아니라 길이 좋게 지내고 싶어서지.〔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라고 하였다. 주룡해 전남 무안군 일로읍에 주룡(住龍)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흐르는 물가로 영산강의 줄기이다. 나덕명은 노년에 주룡 마을에 입향하고 주룡적벽(住龍赤壁) 위에 적벽정(赤壁亭)을 지었다. 윤건 푸른 실로 엮은 두건을 말하는데, 제갈량이 평소 애용하던 두건이라 하여 제갈건(諸葛巾)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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