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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선교랑 보은현감 금암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宣敎郞報恩縣監錦巖羅公事實記 공의 휘는 덕준(德峻)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성은 나 씨(羅氏)이고, 호는 금암(錦巖)이다. 조상은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대대로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았고, 자손들은 고향을 벗어나지 않아 호남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그 계통의 구체적인 것은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선고(先考)의 〈사실기(事實記)〉에 실려 있다. 선고는 나사침(羅士沈)으로, 중종 때 효자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일찍이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모셔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다. 벼슬은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여러 아들은 종훈(從勳)으로 여러 번 추은(推恩)되었다.두 아내를 두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두 부인은 각자 아들 셋을 두어 육룡(六龍)이라고 일컬어졌으니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다.공이 6살이 되었을 때 윤 부인이 세상을 뜨자, 후비 정 부인은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길러 주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는데, 찬성공 또한 몸소 인륜에 독실하여 귀에 익고 눈에 젖었으니 가정에서 보고 감복한 것이 다만 글의 가르침뿐만이 아니었다. 나이 17~8세에 이미 고인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세속에 휩쓸리거나 과거공부에 개의치 않았다. 아우 나덕윤(羅德潤) 금봉공(錦峰公)과 함께 날마다 서로 학업을 갈고 닦으며 형제를 지기(知己)로 삼았다.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29)은 찬성공에게 이종형(姨從兄)이므로 그 문하에서 배우기를 청하여 선유들의 실마리를 얻어 들었다. 경저(京邸)30)에서 찬성공을 따르며 이름난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 교유하였는데,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과 더불어 《예경(禮經)》을 강론하였고, 사암(思庵) 박순(朴淳)31), 율곡(栗谷) 이이(李珥)32)가 모두 인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는 공을 전송하며 "들으니 남쪽에 정개청(鄭介淸)33)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학행이 독실하여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땅히 종유하여 학업을 마치시오."라고 하였다. 율곡은 내사한 《주자어류(朱子語類)》34) 한 질을 전별품으로 주었다. 정개청은 호가 곤재(困齋)이다. 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성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예를 갖춰 곤재에게 스승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강의계(講義契)를 맺고, 절목은 향약을 더하거나 빼어 법으로 삼고 학령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35)을 준칙으로 삼았으니, 요컨대 학문을 닦고 힘써 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곤재 선생이 늘 공을 애지중지하여 그를 추천하고 장려했던 말이 편지글에서 문답한 글에 나타나 있으니, "타고난 본성이 강하면서도 밝아 소견이 날로 발전하고 두렵고 위로됨이 모두 지극하다."라고 한 것, 또 "뜻이 성현의 공부에 돈독하여 전적으로 수양공부에 나아가 성명(性命)의 온전함을 구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라고 한 것, 또 "그대처럼 고상하고 밝고 두려워할만한 이에게 감히 스스로를 크고 망령되이 높다고 하여 후생이 예의를 지켜 대우하는 것을 기대하겠는가. 그와 함께 의심스런 예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면 탄복하게 된다."라고 한 것들이다.공은 돈후하고 정밀하며 자세하여 몸소 은혜롭고 자애로운 행동을 살펴 남들에게 추앙받았지만 그 스스로는 실례를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례가 매우 많으니, 모두 정 씨의 《우득록(愚得錄)》36)에 기록되어 있다. 집안에 간사한 부인이 유복자라 사칭하여 양자를 기르고자 도모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찬성공이 막 호읍(湖邑)에 부임하여 공의 형제들이 그 일을 가지고 윤리와 기강을 근거로 소장을 올렸으나 오랫동안 지체되어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37)이 고을에 부임하여 거짓을 밝혀내 결단하며 "세상의 쟁송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은 하늘의 이치로써 하니, 그대들은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교유하였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우고 한훤(寒暄)38), 일두(一蠹)39), 정암(靜菴)40), 회재(晦齋)41), 퇴계(退溪)42) 등 다섯 분의 선생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게 했는데 실제 공의 형제가 의논하고 학봉이 지은 것이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있었다. 정여립은 일찍이 거짓된 마음과 가식적인 행동으로 당세를 두루 속였다. 처음에는 율곡과 우계(牛溪) 성혼(成渾)43)에게 발을 들여 칭찬을 받고 인재로 뽑혀 자못 힘을 얻었으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정여립은 비로소 마음과 얼굴을 바꾸어 도리어 율곡을 배척하고 비판하였다. 선조(宣祖)가 교서에서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와 같은 자이다.44)"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개 조정의 의론이 어그러진 이래로 동서가 서로 배척함이 갈수록 격해지자 정철은 속이 좁고 괴팍하여 불평이 많았다. 또 곤재가 일찍이 정철이 주색에 빠지고 예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45) 세상의 도가 유폐될 것을 걱정했는데 이 때문에 정철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홍천경(洪千璟)과 양천경(梁千頃)은 향리에 살면서 행실이 경박하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사류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자들이었는데 오직 정철만을 우러러보면서 곤재를 업신여김이 특별히 심하였다. 공의 형제가 곤재를 따라 공부를 하는 사람 중 가장 이름이 났기 때문에 질투를 받는 것 또한 심하였다. 정여립이 옥사를 일으키기에 이르자, 정철이 위관을 맡아 때를 틈타 없는 죄를 꾸미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생각을 받들어 모함하는 상소를 지어 조야의 유명 인사 30여 명을 무고했는데 곤재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또 공의 부자의 이름을 들어 말하기를,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엄밀히 교유를 맺고 있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죄 없는 사람들을 신원해 주는 글을 꾸몄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공의 형제들의 말을 날조하여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다. 수년이 지나면 반드시 태평한 세상이 올 것이니 기다려라."라고 했으니 그 밖의 다른 말들도 흉악하고 참람하기 그지없었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이 분통함이 심하여 정암수 등이 모인 장소에 가서 면전에서 그를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들의 변란을 틈타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여 몰래 사악한 상소를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벼슬아치들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 그만둘 것이다. 이들은 반드시 간교한 사람들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정암수 등 10인을 잡아와 국문하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더욱 속이고 진실을 가리는 계획을 세워 양사(兩司)와 태학생들을 부추겨 교장(交章)으로 구제하기를 힘써 '상소한 선비는 국문할 수 없다.'라고 말하게 하니 마침내 그 명령이 그치게 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자들이 더욱 많아 향읍으로 하여금 죄인 무리, 홍천경, 품관 중 불량한 자들을 수소문하게 하였는데 유발(柳潑) 등의 무리가 그 사이에서 모함하기도 하였다.경인년(1590) 여름에 곤재가 체포당하고 공의 부자 여섯 사람도 모두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것을 도모했다는 것이 죄의 사안이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특별히 내려 "이름이 효자에 든 자는 용서하고, 증오를 쌓아 무고하게 끌어들인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마침내 곧바로 용서받았지만, 공은 차율에 따라 부령으로 귀양 갔다. 여러 형제 중 어떤 사람은 변방 고을로 옮기고, 혹은 중도에 유배 갔다. 이때 죽음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찬성공의 지극한 행동에 묵묵히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함이 있어서였다. 곤재 또한 경원(慶源)으로 장배(杖配)되어 가는 길에 공의 처소에 들러 마주했는데 근심하는 낯빛이 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에서 위패를 만들어 곡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후회하고 국시(國是)가 안정 되자, 옥사를 주관한 정철이 강계(江界)에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또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자 크고 작은 죄를 지어 귀양 간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에 공도 계사년(1593)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갑오년(1594)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46)이 영의정이 되어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10가지 조목에 따라 선비를 취하여 발생한 난리에 방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청하고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47) 등 3인을 뽑았는데, 공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재상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48)이 천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망운(望雲)49) 감목관(監牧官) 겸(兼) 장모속사(掌募粟事)의 관직을 내렸다. 예전에는 임금께서 목관의 다스림이 허술할까 걱정하여 일찍이 대관(臺官)을 거친 자들을 등용하여 감목(監牧)으로 삼아 수령(守令)들을 규찰하고 왕래하면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 당시에는 마음대로 둔전을 만들어 군대의 양식에 보충할 계획을 세웠으니 아예 사람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한 것이다. 전임 수령과 낭서(郎署)에 임명된 자들을 대부분 임명했으나 공은 초야에서 뽑아 임명했으니 어쩌면 공의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듬해 서애 재상이 나라를 막는 대책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論啟)를 올리라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50)의 종사관으로 공을 취하도록 청하여 전년에 모은 곡식을 품자하여 연변의 여러 둔전에 파종 허가를 청하였는데, 이 일은 《서애유고》에 실려 있다. 이윽고 사포서(司圃署) 별좌(別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찬성공의 나이가 70이 넘었기에 부모를 섬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상례를 치름에 예를 어김이 없었고 장례를 치를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의 배가 갑자기 앞에 있는 강에 이르자 비록 매우 위급한 때를 당하나 슬픔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더욱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 봄에 상복을 벗었다. 그해 가을에 곤재의 원통함을 상소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발탁되었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전에 그를 좋아하지 않은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공의 형제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를 매우 원통해 하며 비록 난리 속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의리상 차마 잊을 수 없어 지하에 계신 분을 위해 한번 씻어주기를 바랬다.그보다 앞서 을미년(1595)에 공의 아우 금봉공(錦峰公)이 처음 상소를 올려 바로잡으려 하였다. 비답에 "너희들의 의론이 지극하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라."라고 하며 비변사에 명을 내리셨다. 재상 서애 유성룡이 회계(回啓)하고 애통해 하면서 애당초 옥사가 너무 지나친 이유를 아뢰고 또 정개청(鄭介淸)이 학술과 검박한 행동으로 자임하다가 우연히 한 편 지은 글로 인하여 몸을 망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이러한 원통함을 하소연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께서는 훗날 얼굴을 마주하고 의논하자고 답하는 데 그치셨다. 이듬해 큰형 나덕명(羅德明) 소포공(嘯浦公)이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맺는 도를 상소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에 이르러 또한 공의 상소가 있었다. 대개 큰 옥사가 있은 뒤에는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의 형제는 위기를 피하지 않고서 소리를 내어 진심을 드러내 앞뒤로 서로 이어 거의 임금께서 생각을 되돌리기를 바랐지만 임금께서는 속으로 어렵게 여기셔서 여전히 사림(士林)들의 섭섭함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사람들 중에 정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또 공의 집안을 원망하여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지만 공은 어려움을 겪고서도 일찍이 근심과 수모 때문에 뜻을 꺾지 않은 채 평탄하게 일을 처리함이 이와 같았다.공은 가정 계축년(1553) 2월 3일에 태어나 52년을 살았다. 만력 갑진년(1604) 8월 28일에 세상을 떠나 남영산(南榮山) 간좌(艮坐)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인조 때 아들 나위소(羅緯素)가 원종(原從)에 참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현종(顯宗) 때 동추(同樞)에 오르자 다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덕을 갖추었고 순수함이 넘쳐 두루두루 교제를 하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정도를 따르면서도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화한 기운과 온후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했음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공의 뜻은 자공(子貢)이 풍부함과 절약 사이에 마음을 두었기에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여 어렸을 때부터 집안 식구들의 생산 작업을 일삼지는 않았다. 그는 학문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의를 강마하여 밝힐 수 있다고 여겼다.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로부터 사서(四書)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했고 또 여러 책에 두루 통하였는데 스승과 벗들을 섬기며 종유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수양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글을 남김으로써 가르쳤으니 마음을 보존하고 체득하며 몸을 이기고 형체를 실천하는 노력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여 그것에 힘쓰라고 했으며 분수에서 벗어나고 몸을 영화롭게 하거나 집에 편안히 거처하면서 스스로 편하게 살려는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신당부하면서 경계하고 조심하도록 하였다. 종신토록 효친의 뜻에 성의를 다하며 "효도란 천경(天經), 지의(地義), 강상(綱常), 윤기(倫紀)의 중한 것과 큰 것이요 모든 행동의 근원이며 사람 도리의 늘 해야 하는 것이니, 학자들은 이를 배울 따름이고 행하는 사람은 이것을 행할 뿐이다. 효자의 집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어 평생의 한으로 여겨 영리에는 생각을 끊고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는 데 뜻을 두었다. 타인을 만날 때도 집안에서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부모님께 음식을 올릴 때에도 그것을 나누어 드려야 되는지를 여쭈어 부모님의 뜻을 받들었다.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정 부인(鄭夫人)은 공의 집에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은 별좌(別坐)의 집에서 거처하는 것이 편안하다고 늘 말하였다.공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을 때 아우 나덕신이 막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으니 영화로움과 부모 모양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으며 공은 능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왕래하고자 하였다. 고을 사람들 중 자손을 가르치고 두 번째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보은(羅報恩)을 모범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선조의 제사가 있을 때면 반드시 3일 전부터 소복을 입고 조용히 거처하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옛사람을 사모하여 형제들과 함께 살며 당(堂)은 같지만 실(室)은 달리하려는 제도를 계획하여 장차 의전(義田)51)을 만들고자 했으나 생각지 못한 화를 당한데다가 다시 나라의 난리까지 더해져 모든 뜻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종족을 극진히 사랑하고 정다운 마음이 망운에 있었다.52) 심한 흉년을 만나 백성이 매우 곤궁해지자 공은 장랑(長廊)을 짓고 일가의 자제들을 모두 모아 기근에서 구제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서 학문을 권장하니, 전하는 자들이 미담으로 삼아 칭찬하였다. 그의 실제 행동이 집안에서 드러난 것이 대략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장수 황씨(長水黃氏) 어모장군(禦侮將軍) 황호(黃顥)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領議政)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6세손으로, 신해년(1551) 8월 9일에 태어나 45년을 누리고 을미년(1595)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렴(柳濂)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의 8세손으로 정축년(1577) 7월 22일에 태어나 30년을 누리고 병오년(1606)에 세상을 떠났다. 기일은 같은 정월 10일이다.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모두 공의 무덤에 합장하였다.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를 지냈고, 나계소(羅纘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고을에서 고생을 하다가 만년53)53) 만년 : 원문 '질대년(秩大年)'은 대년질(大年秩)과 같은 장수하여 맡은 직책을 말한다. 곧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인데, 여기에서는 만년에 벼슬함을 표현한 것이다.에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공의 첫째 딸은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가서 절의를 지키다 죽어 정려로써 표창 받았고, 둘째는 선교랑(宣敎郎)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이들은 황 씨가 낳았고, 나치소와 나경소는 유 씨가 낳았다. 또 양자로는 나함소(羅緘素)가 있다.나찬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나겁(羅衱)은 선교랑(宣敎郎)을 지냈고, 딸은 김훈(金壎)에게 시집갔다. 나계소는 아들이 없어 동추(同樞)의 셋째 아들 나진(羅袗)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위소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세 아들 중 나염(羅袡)은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냈고, 나금(羅襻)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고, 나진(羅袗)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첫째 딸은 생원 김만수(金晩壽)에게, 둘째 딸은 이만종(李萬鍾)에게, 셋째 딸은 서령(署令) 정기수(鄭岐壽)에게 시집갔다. 김잡은 후손이 없고, 최광헌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최명해(崔鳴海)와 최익해(崔翼海)가 있는데, 최익해는 생원시에 합격했고, 딸은 조종경(趙宗慶)에게 시집갔다. 나치소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장남 나기(羅褀)는 통덕랑(通德郎)을, 나겸(羅衤兼 )은 선교랑(宣敎郎)을, 나균(羅袀)은 수작(壽爵)으로서 부호군(副護軍)을, 나형(羅衤瑩 )은 통덕랑을 지냈다. 두 딸은 강석종(姜碩宗), 정두형(鄭斗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경소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적(羅襀)은 통덕랑을 지냈고, 나단(羅襢)과 나선(羅䙋)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딸은 이진교(李震嶠)에게 시집갔다. 나함소는 딸을 하나 두었는데 양변(梁忭)에게 시집갔다. 나겁은 나두천(羅斗天)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는 나두우(羅斗宇)이다. 나염은 나두삼(羅斗三)을 낳았는데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 나두장(羅斗章)은 교관을 지냈다. 나반은 아들이 없어 나두장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진의 첫째 나두춘(羅斗春)은 좌랑을 지냈고, 나두하(羅斗夏)와 나두추(羅斗秋)는 모두 통덕랑을 지냈으며, 나두동(羅斗冬)은 생원에 합격했다. 나기는 나두규(羅斗奎), 나두서(羅斗緖), 나두집(羅斗集), 나두홍(羅斗弘)을 낳았다. 나겸은 두회(羅斗會)를 낳았다. 나균은 자식이 없어 나두선(羅斗璇)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형은 나두선, 나두종(羅斗琮)을 낳았다. 나적은 나두남(羅斗南)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차남 나두창(羅斗昌), 나두형(羅斗亨)은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나단은 아들이 없어 나두형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선(羅䙋)은 첫째 나두원(羅斗元), 둘째 나두문(羅斗文)을 낳았는데 모두 통덕랑을 지냈고, 셋째 나두도(羅斗度)를 낳았다. 나두천은 나만형(羅晩亨)을 낳고, 나두우는 나만성(羅晩成)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나머지 내외의 자손들 모두 거론할 수 없다,아! 공의 재주와 학업과 품행과 도의로써도 불행한 때를 만나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하셨으며, 돌아가신 지 또 백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장차 이름이 묻혀 전하여지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동추(同樞)의 따님이다. 내가 일찍이 작은 외삼촌을 섬기고 또 여러 내종형제를 종유하여 매번 선조의 옛일에 대해 들었는데 그 말들이 마치 어제 들은 것과 같다. 내외증손들 중 뒤에 죽은 자들로 하여금 다만 몇 명 있지만 남은 사람들 또한 많이 늙었다. 이에 나두동 씨가 세월이 장차 멀어질수록 더욱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을 개탄하여 사적들 가운데 여러 문적에서 뒤섞여 나오는 것을 모으고 또 집안에서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를 가지고 증거로 삼아 후세에 볼 수 있게 도모하고자 고개 넘어 천리에 부쳐 나로 하여금 다듬고 수정하여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 삼가 이 뜻에 감격하여 감히 보잘 것 없는 말로 거절할 수가 없기에 일의 본말을 차례대로 서술하여 〈사실기〉로 삼는다.숭정(崇禎) 정축(丁丑) 후(後) 85년인 임인년(1722) 3월 16일에 외증손 전 참봉(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公諱德峻, 字大之, 姓羅氏, 號錦巖. 自上祖麗朝監門衛上將軍富以來, 世貫羅州, 子孫不出鄕, 爲湖南望姓. 其系具在先考贈贊成事實記. 先考諱士忱, 中廟世, 旌孝子之閭. 嘗師履素齋李氏仲虎, 以學行聞, 官尼山縣監, 追爵左贊成, 用諸子從勳, 累推恩也. 兩妣坡平尹氏府使彦啇之女若光州鄭氏僉使虎之女, 俱贈貞敬夫人. 兩夫人各有丈夫子三人, 有六龍之稱, 公其第二也. 生六歲, 尹夫人歿仰, 後妣鄭夫人, 撫育如所生. 公天資純美, 贊成公又躬篤人倫, 濡染耳目, 有得於觀感家庭者, 非特文字之敎而已. 十七八歲, 已有志古人之學, 不以流俗擧子事屑意. 與其弟德潤錦峰公, 日相砥礪爲業, 兄弟爲知己. 眉巖柳文節公於贊成公姨兄也, 請學其門, 得聞儒先緖論. 從贊成公于京邸, 遍遊名流間, 與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朴思庵淳 李栗谷珥, 皆許可之, 送公南歸謂曰 : "聞南中有鄭介淸者, 學行篤實, 可爲人師表, 宜從遊卒業也." 栗谷以內賜朱子語類一帙爲之贐. 鄭介淸乃號爲困齋者也. 公旣還鄕,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以禮請困齋爲師. 與同志學子, 結講義契, 節目以增損鄕約爲法, 學令以白鹿洞規爲準, 要以講磨力行, 困齋常敬重之. 其推獎之言, 發於簡牘答問者有曰 : "資稟剛明, 所見日進, 畏慰俱極." 又曰 : "志篤聖賢, 功專進修, 以求必得夫性命之全, 是所謂君子爲己之學." 又曰 : "如賢高明可畏, 其敢自大而妄尊, 待以待後生之禮乎. 至於與之論疑禮則歎服." 公敦厚精詳, 躬督恩愛之行, 能善推於人, 而示其自悔失禮之意, 凡若此類, 甚多, 俱在鄭氏愚得錄. 門有陰譎婦人, 詐稱遺孕, 謀育假兒, 時贊成公方任湖邑, 公兄弟以其事, 稟據倫紀, 申狀卞之事, 久滯未決, 金鶴峰誠一莅州, 燭其僞斷之曰 : "世之爭訟以利, 而君等所爭爲天理, 君等眞義士也." 遂心許之, 與爲交. 城西大谷洞創書院, 俎豆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五先生, 令士林有所肯式, 實公兄弟奉議, 鶴峰所經紀也. 己丑冬, 有鄭汝立獄事. 汝立者嘗僞情飾行, 以博洽欺當世, 初托迹於栗谷及成牛溪渾, 吹獎汲引, 頗得其力. 栗谷旣歿, 汝立又始改頭換面, 反攻斥栗谷. 宣廟之敎所云, 汝立今之邢恕者, 此也. 蓋自朝議睽乖以來, 東西互相排擯, 轉加層激, 鄭澈褊愎積不平. 又困齋嘗以澈眈荒酒色, 蘧蒢禮法, 惧流弊世道, 爲澈所銜. 洪千璟 梁千頃等, 居鄕里, 輕佻無行, 不齒士類. 惟澈俯仰, 嘲侮困齋特甚. 公兄弟從困齋遊, 最有名稱, 故被媢嫉亦甚. 及汝立獄起, 澈爲委官, 乘時羅織, 凡異諸己者, 靡不待以機穽. 丁巖壽 洪千璟 梁千頃等, 承望投疏誣陷朝野名流三十餘人, 困齋亦入其中. 且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爲汝立密交, 知禍及己, 譸張伸救." 又捏公兄弟曰 ; "不必應擧衰世, 過數年, 須待太平. 其他說話, 凶慘罔極." 公之弟德顯 德憲等, 忿忿甚, 往巖壽等會所, 面折之甚峻. 及其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岩壽等十人鞫之. 澈恐事覺, 益爲欺蔽計, 囑兩司及太學生等, 交章力救, 謂之疏儒不可鞫問, 遂得還寢其命. 獄又益多株累, 令鄕邑搜問罪人黨與千璟與品官不逞者, 柳潑輩媒蘖其間. 庚寅夏, 困齋被逮, 公父子六人, 亦幷就理, 以謀沮岩壽疏爲罪案, 上敎特曰: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遂卽蒙宥, 公用次律, 竄富寧, 諸兄弟或徙邊邑, 或配中道. 當是時, 得免就殞桁楊, 實賴贊成公至行, 有所默感上衷也. 困齋亦杖配慶源路, 過公所相對, 無慽慽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歿于配所, 爲位哭之. 明年, 上心追悔, 國是乃定, 主獄者澈, 栫棘江界. 又明年, 當倭亂, 命釋大小竄謫人, 公乃於癸巳赦還. 甲午, 柳西厓成龍爲首相, 建請勿拘資格, 以十條取士, 以備撥亂之用, 選韓久菴百謙等三人, 而公居其一, 斗巖金相應南薦也. 初授望雲監牧官兼掌募粟事. 前時, 上慮牧政虛疏, 嘗命用曾經臺官者, 爲監通糾守令, 往來撿察, 又時當搶攘設屯田, 爲補軍食計, 擇人幹其事, 前任守令郞署者, 率多見差, 公自草野被掄爲任, 蓋欲試公才也. 明年, 西厓相論啓防守措置事, 請令統制李舜臣從事官取公. 前年所聚穀, 以資沿邊諸屯播種, 語在西厓遺稿. 尋除司圃署別坐, 時贊成公年逾七旬, 以事親日短, 辭不就.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執喪, 無違禮, 旣葬, 廬墓下. 丁酉, 倭舡猝到前江, 雖當顚沛, 不弛哀慽, 人益稱之. 己亥春, 服闋. 是秋上困齋訟寃疏, 不得命. 已而, 擢拜報恩縣監, 未之官, 爲不悅者所嗛. 公兄弟嘗痛師至寃, 雖在亂離遑遑之中, 義不忍忘, 願爲泉壤一洒之. 先是乙未年間, 公之弟錦峰公, 始陳疏卞之, 批曰 : "爾等之論, 至矣. 當議處." 下備邊司. 西厓相回啓痛陳當初獄事, 多濫之由, 且言鄭介淸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箸論, 以至滅身, 宜此訴冤云云. 答以後當面議而止. 其明年, 伯氏德明嘯浦公, 上疏言感天意結人心之道, 而請伸己丑寃死, 至是又有公疏. 蓋大獄之後, 人心惴惴未息. 公之兄弟, 不避危機, 倡聲瀝血, 前後相繼, 庶幾有回天之望, 而上意持難, 未見施士林憾之. 人之護澈者, 又怨公家不置, 而公經歷險難, 未嘗以患辱挫其意, 處之夷如也. 公生以嘉靖癸丑二月三日, 得年五十二, 萬曆甲辰八月二十八日歿, 葬州南榮山艮坐坤向之原. 仁廟世, 以子緯素參原從追, 贈承政院左承旨, 至顯廟世, 又以躋同樞, 故加贈戶曹參判. 公稟性眞醇, 德宇粹盎, 通而不汙, 貞而不諒, 和順之氣, 溫厚之風, 令人望之, 可知也. 其志嘗以爲子貢留心於豊約之間, 故不及於顔曾也, 自少時, 不以家人生産作業爲事. 其學以爲氣質可以變化, 義理可以講明. 自小學家禮, 由四書達六經, 又以博通群書, 從事師友, 以修其可願也. 有訓諸子遺文, 以存心 體認 克己 踐形之功, 眷眷焉勸勉之, 以分外 榮身 居室 自便之恥, 申申焉, 警飭之. 終致意於孝親之意曰 : "天經 地義 綱常 倫紀之重且大者, 而百行之源, 人道之常, 所以學之者, 學此而已, 行之者, 行此而已, 求忠臣於孝子之門者, 此也." 公以早違慈顔, 爲平生恨, 絶念榮利, 專意奉養. 凡遇物, 不私於家, 獻于親庭, 聽其分與, 以承志意. 贊成公旣卒, 鄭夫人處公家爲多, 嘗言處別坐家, 得心身俱安. 公之除報恩也, 弟德愼方爲茂長, 致榮養而聞, 公得縣決意欲從往. 鄕人有訓子孫奉繼母者, 必曰以羅報恩爲法也. 遇先忌, 必前期三日素服, 靜處不接人, 以行祀事. 嘗慕古人, 兄弟同居畫同堂異室之制, 且營義田, 中罹奇禍, 加以亂離, 齋志未就, 愛宗族克盡, 情款在望雲. 値歲歉甚, 人民顚連, 公作長廊, 多聚一家子弟, 以濟其飢, 且爲之勸學, 傳者稱爲美談. 其實行之著于家, 大略如此. 初聘長水黃氏禦侮將軍諱顥之女, 領議政翼成公喜之六世孫也. 辛亥八月九日生, 四十五而歿于乙未. 繼娶文化柳氏諱濂之女, 右議政文簡公寬之八世孫也. 丁丑七月二十二日生, 三十而歿于丙午. 忌日同正月十日. 幷贈貞夫人, 葬皆祔公壟. 有五男二女, 曰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 爲怨家所中落拓州郡, 秩大年同中樞, 贈左參贊. 女長適主簿金磼, 節死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黃氏出也, 曰緻素 經素, 柳氏出也. 又有側子緘素. 贊素一男, 衱宣敎郞, 一女適金壎. 繼素無子, 取同樞第三子袗爲嗣. 緯素三男, 袡戶曺正郞, 襻成川府使, 袗禁府都事. 三女長適生員金晩壽, 次適李萬鍾, 次適暑令鄭岐壽. 金磼無后. 崔光憲二男, 鳴海 翼海生員, 一女適趙宗慶. 緻素四男, 褀通德郞, 衤兼 宣敎郞, 袀壽爵副護軍, 衤瑩 通德郞. 二女適姜碩宗 鄭斗亨. 經素三男, 襀通德郞, 襢 䙋文科掌令, 一女適李震嶠. 緘素一女, 適梁忭. 衱生斗天武科縣監, 斗宇. 袡生斗三縣監, 斗章敎官. 襻無子, 取斗章爲嗣. 袗生斗春佐郞, 斗夏 斗秋 皆通德郞, 斗冬生員. 褀生斗奎 斗緖 斗集 斗弘. 衤兼 生斗會. 袀無子, 取斗璇爲嗣. 衤瑩 生斗璇 斗琮. 襀生斗南武科宣傳官, 斗昌 斗亨, 皆通德郞. 襢無子, 取斗亨爲嗣. 䙋生斗元 斗文, 皆通德郞, 斗度. 斗天生晩亨, 斗宇生晩成, 文科持平. 自餘內外玄雲, 不可悉擧. 嗟乎! 以公之才學行誼, 遭時不幸, 未能有施于世, 歿且百有餘歲, 將名凐滅而無傳, 豈不悲哉! 重元先母, 同樞女也. 重元嘗逮事仲舅, 且從諸內兄, 每聞稱說先世故事, 其言若前日聞, 令內外曾孫之後死者, 只有若而人亦旣老矣. 迺者斗冬氏有慨於世將愈遠而愈無徵也, 裒聚事蹟之雜出諸文籍者, 證以家中舊聞, 啚所以垂示後世, 寄來嶺外千里, 使重元磨正成編. 竊感是意, 不敢以鹵莽辭, 敍次本末爲事實記. 崇禎丁丑, 後八十五載壬寅季春旣望, 外曾孫 前參奉 八溪鄭重元, 謹述.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을 말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호가 미암(眉巖)이며, 해남 출신이다. 경저(京邸) 조선 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서 그 지방의 공물(貢物), 입역(立役)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사무소를 말한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 등이 있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송대 유학의 집대성자인 주희가 강학하면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어록 모음집이다. 모두 140권이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가 훤당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말한다. 자는 백욱(伯勗)이고, 호가 일두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말한다.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가 정암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31)을 말한다.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가 회재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말한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가 퇴계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자는 호원(浩源), 호는 묵암(黙庵), 우계(牛溪)이다. 오늘날의 …… 자이다 스승을 저버리고 배반한 제자를 가리킬 때 흔히 거론하는 인물이 형서(邢恕)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형서의 자는 화숙(和叔)으로, 《근사록(近思錄)》 권9 치법류(治法類)에 자기의 스승인 정명도(程明道)를 통유(通儒)요, 전재(全才)라고 극찬한 말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보주(補註)에 "형서가 명도에 대해서는 이처럼 추앙하며 심복하였지만, 명도의 아우인 이천에 대해서는 아마도 불만스러운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배운 벗들이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많이 꾸짖게 되었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자기 …… 해석하여 원문 '거제(蘧蒢)'는 악한 병의 이름이다. 원래는 죽석(竹席)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으로 둥근 곳집〔囷〕을 만들면, 마치 종기가 나서 구부릴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추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나쁘게 만듦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厓)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망운(望雲) 전라남도 영광의 망운면을 말한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1598. 자는 여해(汝諧)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옥포 대첩, 사천포 해전, 당포 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하였다. 의전(義田) 문중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하는 전지(田地)이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처음 명명한 것으로, 범중엄은 한창 현달했을 때에 부곽(負郭)의 좋은 토지 천묘(千畝)를 마련하고 이를 의전이라 호칭하여, 여기에서 수확한 재물로 가난한 종족들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310 范仲淹列傳》 정다운 …… 있었다 원문의 '망운(望雲)'은 타향에서 멀리 떨어진 부모나 형제, 친지를 그리워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멀리 남쪽으로 흰 구름 하나가 떠가는 것을 보고는, 저 구름 아래에 부모님이 계실 것이라면서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구름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떠났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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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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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조선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 금봉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錦峰羅公事實記 나 씨(羅氏)는 대대로 나주(羅州)에 살면서 덕이 두텁고 경사스러움이 쌓여 벼슬이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호남의 명문가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 씨를 말한다. 고려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가 실로 시조이며, 후대의 나진(羅璡)에 이르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어 공양왕 2년(1390) 영산(榮山)에서 조창과 축성을 감독했으니, 이 일은 《여지지(輿地志)》54)에 실려 있다.아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우왕 7년(1381)에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는데, 이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아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지냈고, 아들 자강(自康)은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아들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郎)을 지냈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행이 있어, 중종께서 정려로 표창 하셨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동문들이 모두 추대하고 중히 여겼다. 선조 초에 관찰사(觀察使) 서교(西郊) 송찬(宋贊)이 그를 학행으로써 천거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이르렀는데, 그의 거사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가 있네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두 분은 각기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도사(都事)를 지낸 나덕명(羅德明)으로, 영특하고 호걸스러워 명예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둘째는 현감을 지낸 나덕준(羅德峻)으로 곧 나의 증조부이다. 효도와 우애와 품행과 도의로 이름이 났었다. 공은 바로 셋째이다. 그 다음 넷째는 처사 나덕현(羅德顯)으로, 효행이 있어 추증되었다. 또 그 다음 다섯째는 군수(郡守)를 지낸 나덕신(羅德愼)이며, 막내는 수사(水使)를 지낸 나덕헌(羅德憲)인데, 두 분 모두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웠고, 오랑캐의 조정에서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기도 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나서, 어떤 이는 찬성공의 만사에사 씨 집안의 쌍벽55)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순호의 팔룡56)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라고 했으니, 공의 형제들을 칭송한 것이다.공의 휘는 덕윤(德潤)이다. 처음엔 자를 유지(有之)라고 했다가 훗날 성지(誠之)로 고쳤다. 금봉(錦峰)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36년인 정사년(1557) 3월 1일에 태어났다. 이듬해 9월에 어머니 윤 부인(尹夫人)이 세상을 뜨자 공은 울면서 젖을 먹지 못하여 늙은 여종에게 길러졌다. 나이 열다섯57)이 되자 비로소 학문에 나아갔다.임신년(1572)에 찬성공이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공이 따랐는데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어도 문사는 이미 통달하였다. 당시 같은 고을 사람 함양(咸陽) 이언양(李彦讓)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58)의 문인으로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난 인물이었는데 찬성공과 함께 경저(京邸)에서 생활하면서 수 년 동안 공을 가르쳐 선비의 정식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전수하니 공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이공은 그의 재주를 매우 아껴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장성하여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둘째 형과 뜻을 같이 하여 학문에 힘써 늘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에게 의심나는 것을 물었으니, 미암은 곧 찬성공의 이종형으로 학문이 넓고 들은 것이 많아 경연의 이름난 선비였다. 매번 공을 장려하여 힘쓰도록 하였고 기량이 크고 중하다고 여겼다. 또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을 종유하며 《예경(禮經)》을 강론하였는데 이로부터 벗들에게 크게 인정받았고 사암(思庵) 박순(朴淳)59), 율곡(栗谷) 이이(李珥)60) 같은 이들도 더욱 가상하게 여겨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61)의 어짊을 칭찬하며 공의 형제들이 종유하여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권장하였다. 마침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 고을 성의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곤재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 동지들과 강의계를 결성하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특히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힘썼다.정축년(1577) 무렵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막 좌막(佐幕)62)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스승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상을 당하자 달려가 곡을 하고 난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비단 방석에 앉아 관직의 일을 임하였다. 대개 김천일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일재에게 학업을 받아 실로 가르침을 받아 추천에 힘입어 세상에 중임을 맡게 되었으나, 스승이 돌아가셨는데도 상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공은 마음속으로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곤재에게 편지를 올려 스승의 상복제도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다. 김천일의 문인들 가운데 질책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공은 개의치 않았으니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이 일은 《우득록(愚得錄)》63)에 실려 있다. 이보다 앞서 공의 큰아버지 목사공(牧使公)의 후처 서 씨(徐氏)가 성격이 사납고 사람들을 잘 속이며 질투가 심하여 전처의 자손들이 이미 쫓겨나게 되었다. 아들 나덕순(羅德純)이 일찍 죽은 뒤 서 씨는 그의 부인 임 씨와 함께 몰래 남의 자식을 데려다 유복자라고 속였다. 공의 형제들은 그의 패륜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찬성공에게 자문하고 미암에게 의논하여 관에 소장을 올려 일을 밝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64)가 이른바 "나 씨 가문에서 그의 거짓됨을 변별하고 집안을 어지럽힌 것을 쟁송하였다."라고 한 것은 대개 이 일을 가리킨다. 여러 번 추핵(推覈)을 거치고 몇 년 동안 결판이 나지 않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목사로 부임함에 이르러 그 거짓이 밝혀지고 곧장 판결을 하였다. 학봉이 공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쟁송들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이 쟁송은 천리로써 하니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진심으로 교유를 맺었다. 이에 공의 형제들이 학봉에게 의논을 드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워 한훤(寒暄), 일두(一蠹),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 등 오현(五賢)을 함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는데 일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 채 학봉이 물러나게 되자, 임윤신(任允臣)65)이 와서 그 일을 대신하여 이루었다.정해년(1580) 겨울에 비로소 봉안의 예를 행했는데, 그 제문이 바로 공이 지은 것이다. 공이 스승을 따른 지 십 수 년이 되었지만 틀에 박힌 공부를 일삼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뜻에 따라 억지로 향시를 보아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하였다. 총산(葱山) 정언응(鄭彥?)은 함께 같은 시험장에 들어가 공이 지은 것을 보고 글이 근원이 있고 넓어 저절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 통하게 한다고 칭찬하였다.이듬해 무자년(1581) 봄, 진사에 급제했으니 바로 선조 21년이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나누어지고 더욱 더 격렬해지자 정철(鄭澈)은 늘 뜻을 잃고 원망하고 있었기에 나주 사람 홍천경(洪千璟)과 창평 사람 양천경(梁千頃) 등이 그의 부하66)가 되어 당을 만들고 무리를 결성하여 뜻을 마음대로 하고 바른 것을 날조하여 곤재가 더욱 천경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공의 형제가 곤재의 문하생으로 모두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여 이를 갈고 틈을 노린 것이 대개 수년이나 지속되었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의 반역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기미를 틈타 없는 죄를 꾸몄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67)이 훗날 등대(登對)68)하였을 때, 기축년의 옥사가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짓이라고 진설하였다. 동복(同福) 사람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상소를 하여 여러 이름난 사람들을 무고하니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69)와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70)은 모두 임금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인데 상소에 들어 있었고 심지어 공의 부자 이름 또한 들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정여립과 교유를 긴밀하게 하다가 일이 드러나자 거기에서 자신을 구하려 한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들이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으니, 장차 태평시대를 기다려라."고 했으니 어의(語義)의 흉악함이 극심하다. 공의 동생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무고를 받은 것을 분하게 여겨 상소한 자들이 모인 곳에 가서 지극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드러나지 않은 말을 거짓으로 꾸미고 사악하고 속이는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이나 이름 난 경(卿)들까지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 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신배들의 부추김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는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여 국문하여 죄를 밝히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걱정하여 대간(臺諫)과 태학생(太學生)들을 시켜 힘써 구제하게 하자 이미 낸 명령이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옥사가 오랫동안 끝나지 않자 옥사는 더욱 심해졌다.경인년 여름에 또 군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들과 홍천경, 품관(品官) 유발(柳潑), 정여릉(鄭如陵) 등을 염탐하게 하여 묵은 감정을 드러내 이에 따라 죄목에 묶으려 하였다. 이에 곤재가 체포되었고 공의 여섯 부자 또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전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이유로 죄목을 엮은 것이었다. 심문의 답변이 이르자 임금께서 특별히 전교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사람은 용서하고, 무고하여 미움을 받은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다행히 곧바로 사면되었지만 공의 형제 다섯은 모두 풀려나지 못하였다. 공은 회령으로 유배 갔고, 나머지 형제 중 어떤 이는 바닷가로, 어떤 이는 도형(徒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때 재앙을 예측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감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학봉(鶴峯)71)만은 홀로 편지를 써서 위로하며 "한 집안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있는 이유는 진실로 효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72)이 회령에 먼저 유배 갔었는데 공이 유배지에 이르자 마침내 서로 종유하며 마음으로 인정하고 글을 써서 회포를 풀어 시름을 보냈다. 곤재 또한 장형을 받고 유배가게 되어 북쪽으로 가다가 공의 유배지에 들렀는데 조금도 원망하는 말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서 달려가 간호했으며 초상이 나자 공서(公西)의 일73)을 행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비로소 정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아시고는 간악하고 악독한 정철에 관한 교서를 특별히 내리시고 방을 붙여 조정에 알렸다. 헌장(憲章) 이원익(李元翼) 등이 마침내 달아난 정철을 잡아야 된다는 장계를 올리고 형벌의 법률을 추가하였는데 공론이 대개 이렇게 정해졌다.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자 동강이 은혜를 입어 먼저 사면되어 시를 지어 공에게 회포를 보냈는데, 공도 그 운에 따라 답시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온갖 흉악한 자들 눈앞에 모였으니 百兇叢目下슬프다! 우리가 뒤에 태어남이여 哀哉我生後적들이 무리지어 이미 안에서 시끄러운데 賊莽旣內訌추악한 오랑캐들마저 밖에서 짓밟고 있네 醜虜又外蹂계사년(1593)에 공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혼란한 상황을 당해서도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지극한 원통함을 의리상 잊을 수가 없었다. 을미년(1595) 봄에 둘째 형님과 함께 임금께 글을 올려 몇 차례나 스승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사건이 비변사에 내려지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애당초 옥사를 다스림이 지나쳤던 이유를 모두 진설했으며 또 정개청(鄭介淸)은 호남 사람 가운데서도 더욱 이름이 난 사람으로 평소 학술과 행실의 검박함으로 자임한 자인데 우연히 한 편의 글을 지었다가 자신을 죽게 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덕윤과 무리들이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발을 싸고 대궐의 문을 두드리며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아뢰었지만, 임금께서는 처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다. 비록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았지만 화를 당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 기운을 잃고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먼저 피눈물을 토하며 마음을 드러내어 사림(士林)들로 하여금 흥기하도록 하여 점차 회복될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힘이었다. 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시자 무안(務安)의 주룡(住龍) 나루에 장사를 지내고 곧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자 비록 난리를 피해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상례를 한결같이 예를 지켜 마쳤다.기해년(1599)에 또 둘째 형님과 함께 곤재의 원통함을 거의 앞뒤로 대궐에 하소연하여 두 번 세 번 지속하자 마침내 유음이 내려졌다. 공은 처음에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사은하고 곧장 그만두었다. 또 금부 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곧이어 그만두었다.광해군 초 무신년(1608)에 왕자의 사부에 으뜸으로 의망(擬望)되었다가, 3월에 다시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그만두고 12월에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이 되었으며, 신해년(1611)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계축년(1613) 5월에 또 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경력(經歷)이 되었으며 갑인년(1614)에 사재감 주부(司宰監注簿)로 승진했다가 7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8월에 후처 정 부인(鄭夫人)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나이 60이 다 되었지만 상례를 게을리 않았고 상을 치른 뒤에는 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공이 만년에 벼슬에 나간 것은 단지 어버이를 위하여 뜻을 굽힌 것이었다. 얼마 후 어버이께서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면서 종신토록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하게 살며 스스로 편안히 지내기로 마음먹은 지 5~6년 지나 신유년(1621) 윤달 2월 28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찰방(察訪) 이극부(李克扶)는 공의 막역한 친구로서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중년에 기러기를 놀라게 할 활을 함께 만들고 中年共作弓驚鴈만년엔 눈 덮힌 소나무를 함께 보자 했었지 晩歲同爲雪後松대개 공이 험난한 일을 겪고도 지키는 바의 확고한 바를 탄식한 것이었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훌륭하고 뛰어났으며 기량이 출중했고 예를 잘 지키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효우의 가르침을 받들어 어버이 모시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하고 몸을 바로잡기를 예로 하였다. 또 스승의 문하에 올라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의리의 심오함을 강구하니 스승 곤재가 그를 칭찬하여 세상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공이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를 잃었을 때 유모의 남편이 극진하게 양육의 도리를 다 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자 함께 밥을 먹은 식구가 죽은 듯 시복(緦服)의 의리로 백건(白巾)을 쓰고 곡을 하며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는 공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작은 절개이지만 작은 것도 잊지 않는 은혜로운 마음이 또한 높이 칭송할 만하다. 형제들과 함께 화락하고 허물없이 지냈으며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자 당(堂)을 같이 하면서 실(室)만 다르게 살 계획을 세우자 찬성공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격려하였다. '너의 부모를 더럽히지 말라.'74)는 가르침을 두고 실천하려 했지만 재앙과 변란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집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 반드시 정명과 분수를 우선으로 삼았다. 집안이 엄숙하여 질서가 있으니 사람들 가운데 출입하는 자들은 모두 경외하면서 감히 분수를 넘는 사람이 없었다.약관의 나이로부터 이미 선생과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 훌륭한 스승을 얻어 귀의하였다. 처음에는 사암과 율곡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중년 이후 명성이 날로 드러나 학봉이나 동강 같은 일대의 유현들이 공을 인정하여 그냥 두지 않았다. 심지어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75)은 공을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76)는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공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알아주고 대우해준 것에 사례하였다. 유학(儒學)의 연원, 전후, 법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자들은 공과 함께 공사를 의논하여 순안(巡按)하던 날이면 그때마다 공을 머물게 하여 대접하려는 뜻을 미리 관문(官文)으로 알렸으니 고을사람들은 전하여 미담으로 삼았다. 매번 스승과 벗들이 원통하게 죽은 아픔을 생각하며 그들의 원통함을 씻어내길 바랐으나 임금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밤낮으로 마음아파 하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77),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78), 남이공(南以恭), 정협(鄭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변(申抃)하는 말을 하였다. 또 스승을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곤재의 사우를 지어 제사를 올려 덕을 숭상하는 정성을 드러내는 일을 의논하였으니 그 섬기는 바를 한결같이 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였다.공은 처음 고을의 금성산(錦城山) 북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뒤에 점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집에 이롭지 않다고 하여 병신년(1656) 3월에 현손(玄孫) 만석(晩錫) 등이 대안(大安) 동쪽의 자라바위 위 건좌(乾坐) 손향(巽向)79)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96년이 되는 해였다. 아내인 의인(宜人)80) 이 씨는 본관이 양성(陽城)81)으로, 정사년(1557) 5월 17일에 태어나 경신년(1620)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와 이천 부사(伊川府使)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을 지냈고, 나의소(羅宜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는데, 성품이 대범하고 우뚝하여 세상과 더불어 뜻이 뭉개져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부사(府使)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성(羅衤成 ) 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고, 나첨(羅襜)은 통덕랑을 지냈고, 사위 이명구(李鳴衢)는 진사에 합격하였다. 선교(宣敎)는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었는데, 아들은 나일(羅衵)이고, 사위는 윤적망(尹啇望), 임고(任暠), 조정오(曺挺五), 진사에 합격한 정헌(鄭櫶)이다. 정랑(正郎)은 후사가 없어 나첨을 후사로 삼았다. 선전(宣傳)은 아들 나두정(斗正)과 서출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나두점(羅斗占), 문과에 급제한 나두평(羅斗平)이다. 나일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두흥(羅斗興), 나두진(羅斗鎭), 나두응(羅斗應)이다. 나첨은 서출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두원(羅斗遠), 무과에 급제한 나두승(羅斗承), 나두주(羅斗冑), 나두영(羅斗盈)이다. 나두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만석(羅晩錫), 나만우(羅晩遇)이다. 나두흥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나만현(羅晩賢)이다.아! 내가 언젠가 공의 제문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증조의 제문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함께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시와 예를 공부하고82), 같은 스승을 섬겨 학문을 강습했으니,83) 마음과 덕을 함께했던 즐거움이 어찌 다만 형을 형으로 섬기고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는 대의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형제간이요 지기라고 할 만하다." 이 글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 지금 나만석이 공의 소장, 문적, 역관(歷官), 편지 등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차례로 글을 엮어 후손에게 전해지도록 요청하니 더욱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감히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의 전말을 써서 보낸다.숭정(崇禎) 병자(丙子) 후(後) 80년 병신(1716) 윤3월 모일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羅氏世居羅州, 德厚慶積, 簪紳不絶, 世之人數湖中望閥, 必稱羅氏, 在麗朝, 有監門衛上將軍諱富, 實爲始祖, 後至諱璡工曺典書, 恭讓二年, 監榮山漕倉築城, 事載在輿地誌. 子諱公彦典農寺正. 禑之七年, 從都巡問使李乙珍, 克倭有功, 事載麗史. 子諱諿式目都監錄事, 子諱自康務安縣監. 子諱繼祖將仕郞, 是公高祖. 曾祖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童而有至行, 中宗命旌閭, 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人皆推重. 宣祖初, 道臣宋西郊贊薦學行, 累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句. 贈議政府左贊成. 前聘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 長都事公諱德明, 以英傑不覇名. 仲縣監公諱德峻卽我曾王父, 以孝友行誼名, 公卽序居第三. 其次處士公諱德顯, 以孝贈職. 又其次郡守公諱德慎, 季水使公諱德憲, 俱以武擧進, 或殲倭立功, 或抗節胡庭. 兄弟六人, 俱有聞當世. 有人挽贊成公詞曰, "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者, 蓋贊公兄弟也. 公諱德潤, 初字有之, 後改誠之, 錦峰, 其號也. 嘉靖三十六年丁巳三月初一日生, 明年九月尹夫人歿, 公呱呱失乳, 養于老婢, 甫成童, 始就學歲. 壬申, 贊成公供仕京中, 公從之, 年纔十六, 文詞已達. 時同鄕有李咸陽公彦讓, 以金河西麟厚門人, 知名士類間者也. 與贊成公同舍京邸, 數歲敎公, 以士子程式, 仍授小學四書及心經近思錄, 所造日就, 李公愛其才, 以女妻之. 年旣長, 不屑擧子業, 與仲氏同志力學, 常質疑於柳眉岩希春, 眉岩卽贊成公姨兄, 而博學多聞, 爲經幄名儒者也. 每於公獎勗而器重之. 又從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自此大爲朋輩所偢倈, 如朴思菴淳 李栗谷珥 尤嘉尙焉. 仍稱鄭困齋介淸之賢, 而勸公兄弟從游以卒業. 遂南歸,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奉困齋師事之, 結同志爲講義禊, 討論經傳, 尤致力於朱子書. 丁丑間, 金倡義使千鎰, 方任佐幕, 而遭其師李一齋恒之喪, 奔哭之後, 卽返于家坐花茵, 奉官供, 蓋金早孤, 受業一齋, 實賴敎誨推薦之力, 取重於世, 及師死不爲之服, 故公心非之, 以書上困齋, 講論師喪服制. 金之門人, 多有詆責者, 而公略不介意, 時公年二十一矣. 事載愚得錄. 先是, 公之伯父牧使公之繼配徐氏, 性鷙悍多譎憎嫉, 前室子孫當已出. 子德純夭折之後, 與其婦林氏, 潛謀取他人子, 詐爲遺孕, 公兄弟憤其悖倫, 稟贊成公且議眉岩, 狀于官斥之. 鄭寒岡逑, 所謂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者, 蓋指此也. 累經推覈, 積年不決, 及金鶴峯誠一牧州, 明其爲僞卽斷之. 鶴峯謂公兄弟曰 : "世之爭訟者以利, 而君輩所爭則天理, 眞義士也." 遂結爲心交. 於是, 公兄弟奉議鶴峯, 營建書院於城西大谷洞, 以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 五賢, 竝享之, 欲爲士林模範之, 所功未及, 訖鶴峯遞歸, 任公允臣來, 代之踵成其事. 以丁亥冬, 始行奉安之禮, 其祭文, 公所製也. 公從師十數年, 不事科臼之工, 而爲順親旨, 强赴鄕解, 俱占兩場. 鄭葱山彥?同入試圍, 見公作, 稱詞源浩汗, 自令人意思通暢云. 明年戊子春, 成進士, 卽宣祖二十一年也. 時朝議, 已岐轉加層激, 鄭澈常失志怏怏. 羅州人洪千璟 昌平人梁千頃等, 爲其爪牙, 連黨結侶, 恣意醜正, 而困齋尤被千璟輩所誚詆. 公兄弟以困齋門生, 俱有令名, 奸人惡之, 磨牙俟隙, 蓋有年矣. 己丑冬, 鄭汝立逆獄起, 澈爲委官, 乘機羅織, 李梧里元翼, 後日登對時, 所陳己丑治獄, 人所不忍者也. 同福人丁岩壽與洪千璟 梁千頃等, 承澈旨, 投疏誣陷諸名流, 領相李山海 禮判柳成龍, 皆上之所倚毘者, 而入於疏中, 至於公父子之名, 亦與焉. 有曰 : "與汝立交密, 顯爲伸救." 或曰 : "不必應擧衰世, 且待太平." 語意極其凶慘. 公之弟德顯 德憲等, 憤受誣, 往疏會, 極言峻斥. 巖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來岩壽等十人, 推鞫定罪. 澈恐其情跡之敗露, 使臺諫及太學生, 力救之, 還寢成命. 獄久不竟, 鍛鍊愈酷. 庚寅夏, 又令郡邑廉問罪人黨 與洪千璟與品官柳潑 鄭如陵等, 逞宿憾, 隨而媒孽. 於是, 困齋被逮, 公之六父子, 亦就理, 蓋以前沮岩壽疏, 構成罪目也. 及置對, 上特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幸卽蒙宥, 而公兄弟五人, 俱未得脫. 公謫會寧, 餘或徙邊, 或徒配. 當是時, 禍網叵測, 人皆畏怵無敢問者, 而鶴峯獨致書慰問, 有曰 : "一家全活, 寔賴孝感"云. 金東岡宇顒先配于會, 及公到配, 遂與從遊許以心期, 論文敍懷以自遣. 困齋亦杖流, 朔北過公所, 少無嗟怨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病篤, 馳往救護, 旣喪, 仍行公西之事. 明年, 上始覺爲澈所誤, 特下奸澈毒澈之敎, 榜示朝堂. 憲長李原翼等, 遂發竄澈之啓, 仍加栫棘之律, 公論蓋於是定矣. 壬辰倭亂, 東岡先被恩赦, 以詩詠懷贈公, 公步其韻以謝有; "百兇叢目下, 哀哉我生後. 賊莽旣內訌, 醜虜又外蹂."之句. 癸巳, 公始得宥. 還時, 當搶攘而亡師至寃, 義不忍忘. 乙未春, 與仲氏上章伸卞, 縷縷甚悉. 事下備局, 柳西厓成龍, 洞陳當初治獄濫及之由, 且曰鄭介淸於湖南人中, 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裹足, 叩閽訴寃也." 云云. 上意持難事. 雖不見施, 然禍網之餘, 人皆喪氣, 無敢容喙, 而公能先傖瀝血致, 令士林興起, 稍有陽復之望, 皆公之力也.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奉襄務安住龍渡, 仍守墓下. 丁酉, 倭寇再肆, 雖在奔避顚沛中, 持喪一以禮. 己亥, 又與仲氏爲困齋訟寃, 凡前後叫閽, 至再至三, 而兪音竟閟. 公初授顯陵參奉, 謝恩卽已. 又除禁府都事, 尋罷. 光海初戊申, 首擬王子師傅, 三月再除禁府都事, 旋遞, 十二月爲靑嚴都察訪. 辛亥, 中人嗛罷. 癸丑五月, 又爲禁府都事, 轉經歷. 甲寅, 遷司宰監主簿, 七月爲司憲府監察. 八月丁繼妣鄭夫人憂, 公年迫六十, 喪禮不懈. 旣葬又廬墓, 以終三年. 公晩年從仕, 只是爲親屈也. 旣親不待養痛恨, 終身不復以世事, 爲意閑居自頤者五六年, 以天啓辛酉閏二月二十八日卒, 得年六十五. 李察訪克扶, 公之莫逆友也. 詩以哀之曰 '中年共作弓驚鴈, 晩歲同爲雪後松.' 蓋歎公經歷險巇, 所守確如也. 公禀賦英邁, 器局凝重, 生長禮法之家, 奉承孝友之訓, 事親以誠, 律身以禮. 又登師門, 好學不倦, 講究義理之奧, 困齋稱之, 以間世人物. 嘗在襁褓失恃之日, 乳母之夫, 極盡育養之道, 故及其死也, 用同爨緦服之義, 白巾以哭之, 具棺歛以葬之, 此在公爲一瑣節, 而其不忘之恩, 亦可尙矣. 與兄弟湛樂無間, 欲同居一室, 畵同堂異室之制, 贊成公深加嘉勉. 至有毋忝爾所生之敎, 而遭禍亂未就. 居家接下, 必以正名分爲先. 門庭肅然有序, 人之出入者, 擧皆敬畏, 無敢犯分者. 自弱冠時, 已見重於先生長者, 其得賢師爲依歸. 初以思菴 栗谷所指敎者, 而中歲以後聲名日益著, 如鶴峯 東岡, 皆一代儒賢推許公不置. 至於金斗岩應南則待之以國士, 鄭愚伏經世爲方伯, 公有書謝知遇, 論儒學淵源前後處臬者, 欲與公議公事. 當其巡按之日, 輒以公留待之意, 預示于官文, 鄕人傳之, 以爲美談. 每念師友寃死之痛, 期以一洒不得回天, 日夜疚心. 與李漢陰德馨 韓久庵百謙, 及南公以恭 鄭公協, 有往復書牘備, 及伸卞之語. 又與景慕者, 議建困齋祠宇, 以俎豆之庸, 表尙德之誠, 其所以事之如一者, 吁亦至矣. 公初葬于州之錦城山北麓, 其後卜人皆謂兆宅不利. 歲丙申三月, 玄孫晩錫等, 移窆于大安東鱉岩上乾坐巽向之原. 距公歿爲九十六年. 配宜人李氏, 籍陽城, 生于丁巳五月十七日, 歿于庚申十二月二十日, 合祔公墓. 生三男曰 繪素武科通政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曺正郞. 性簡伉與世抹摋, 而官未達, 人皆惜之. 府使生二男, 衤成 武科宣傳官, 襜通德郞, 一女李鳴衢進士. 宣敎生一男衵, 四女尹啇望 任暠 曺挺五 鄭櫶進士. 正郞乏嗣, 以襜後. 宣傳生一男斗正, 又有庶出子二人, 斗占斗平武科. 衵生三男, 斗興 斗鎭 斗應. 襜有庶出子四人, 斗遠 斗承武科 斗冑 斗盈. 斗正生二男, 晩錫 晩遇. 斗興生一男晩賢. 嗚呼! 斗冬嘗見公祭, 我曾王父文略曰 : "共趨鯉庭, 幾承詩禮, 同事師門, 麗澤是資, 同心同德之樂, 豈但兄兄弟弟之大義哉!云. 爾則斯可謂兄弟間知己者也."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 今者晩錫持公疏章文迹及歷官資牒, 示斗冬, 要令撰次以傳後, 尤有所感於中者, 不敢以不文辭, 謹敍顚末以歸之. 崇禎丙子後八十年丙申閏三月日, 從曾孫生員斗冬謹記. 여지지(輿地志)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펴낸 지리서이다. 사 씨 …… 쌍벽 원문 '사가(謝家)'는 진(晉)나라 때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을 말한다. 또 '쌍벽(雙璧)'은 본래 한 쌍의 옥벽(玉璧)을 말하는데, 전하여 형제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귀한 집안이나 벼슬을 한 훌륭한 자식 등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순호의 팔룡 후한(後漢) 때,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을 가리킨다. 모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므로 '순씨팔룡'이라고 불렸으며, 후세에 남의 자제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할 때 흔히 사용한다. 열다섯 원문 성동(成童)은 15세를 말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과 등이 있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좌막(佐幕) 조선 시대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견외(遣外)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이다. 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다. 6대조 정총(鄭摠)과 그 아우인 정탁(鄭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살았다. 임윤신(任允臣) 1529~1588. 자는 경룡(景龍)이다. 부하 원문 '조아(爪牙)'는 여기에서 '앞잡이', '부하'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자는 공려(公勵)이고, 호가 오리(梧里)이다. 등대(登對)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말한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공서(公西)의 일 공서(公西)는 공자의 문인으로, 공서(公西)가 씨(氏)이고 적(赤)이 이름이며, 자는 자화(子華)이다. 공자 앞에서 공자의 여러 제자들이 자신의 소원을 각자 말했는데, 공서화는 '예복(禮服)과 예관(禮冠) 차림으로 종묘의 제사를 돕는 일이 소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너의 …… 말라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노력하여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祖寐, 毋忝爾所生.]"에서 나온 말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가 우복(愚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가 한음이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건좌(乾坐) 손향(巽向) 풍수지리에서, 묏자리 또는 집터 따위가 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말한다. 의인(宜人) 조선 시대, 정육품과 종육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어지던 품계이다. 양성(陽城)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일대이다. 함께 …… 공부하고 원문 '이정(鯉庭)'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鯉)는 공자(孔子)의 아들 이름으로 자(字)가 백어(伯魚)인데, 뜰에 계신 공자의 앞을 지나다가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고사가 있으므로, 자신이 이(鯉)처럼 뜰을 지나면서 부모의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학문을 강습했으니 원문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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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렬사 이명환 彰烈祠【李明煥】 임진년 일에 비분강개하는이 강토에 젊은이 많았네누가 공처럼 한번 창도하여장사들 앞다투게 하겠는가의리와 공렬 변경에 떨치고풍성은 역사책에 전해졌네사당 앞 무계의 호숫물은바다로 모이듯 끝없이 넓네 慷慨龍蛇歲靑邱多少年誰如公一倡能得士爭先義烈關山振風聲竹帛傳祠前武溪水宗海浩無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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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을 방문했는데 만나지 못해 시를 남기다 訪金生不遇留詩 지붕 위 까마귀도 좋거늘8) 屋上烏猶好하물며 소나무 아래에서 만나 동자임에랴 況逢松下童동자야 나의 뜻을 전해다오 童乎傳我意밝은 달이 낚시터에 떴다고 明月釣臺中 屋上烏猶好, 況逢松下童.童乎傳我意, 明月釣臺中. 지붕 위 까마귀도 좋거늘 나덕명과 김생은 일찍이 매우 친한 사이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옥상오(屋上烏)'는 지붕 위의 까마귀라는 말로, 강태공(姜太公)이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 그 사랑이 지붕 위의 까마귀에까지 미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 그 미움이 마을 모퉁이의 바람벽에까지 미친다.〔愛人者, 兼其屋上之烏, 不愛人者, 及其胥餘.〕"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尙書大傳 大戰》 두보(杜甫)의 〈봉증사홍이사장(奉贈射洪李四丈)〉에도 "장인의 지붕 위에 까마귀가 있는데, 사람이 좋으니 까마귀도 좋네요.〔丈人屋上烏, 人好烏亦好.〕"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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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유고부록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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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승훈랑 행 의금부도사 소포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承訓郞行義禁府都事嘯浦羅公事實記 공의 휘(諱)는 덕명(德明)이고, 자는 극지(克之)이며, 호는 구암(龜巖) 또는 소포(嘯浦)이고, 성은 나 씨(羅氏)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고려 시대 나부(羅富)는 감문위(監門衛)1) 상장군(上將軍)으로 곧 공의 시조가 된다. 이후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에 이르러 매우 귀하게 되었다. 나진은 전농시(典農寺)2) 정(正) 나공언(羅公彦)을 낳았는데 홍무(洪武)3) 연간에 왜적을 물리친 공훈이 있어 대대로 호남의 명문집안이 되었다.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져 중종(中宗)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를 받았다. 선조(宣祖) 초에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어짊을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을 지냈고 벼슬이 이산 현감(尼山縣監)4)에 이르렀다. 그의 거사비(去思碑)5)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각기 세 아들을 낳았기에 그들을 육룡(六龍)이라 불렀는데 공은 그 중 장자로 자질과 품성이 빼어나고 훌륭하여 식견을 지닌 자들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나이 8~9세에 길에서 고을 아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아전이 예로써 대하지 않자 공은 이치를 들어 꾸짖으니 아전이 곧바로 숙연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탄복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만력(萬曆)6) 기묘년(1579) 진사에 급제하니 때는 선조 12년이었다. 전조(銓曹)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는데, 임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명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두 아우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은 정곤재(鄭困齋)7)의 문인으로 모두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마침내 그들을 좋게 여기지 않은 자들의 시기를 받았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8)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위관(委官) 정철(鄭澈)9)이 기미를 틈타 있지도 않은 죄를 꾸몄다.10) 정암수(丁巖壽), 양천경(梁千頃), 홍천경(洪千璟)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세상의 유명 인사 30여명을 모함하였다.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등이 정여립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게 교유를 하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빠져나가려고 하니 모두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장을 심사하는 자리에 나가 큰 소리로 그들을 배척하였다.정암수의 상소가 임금에게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몰래 사악하고 간교한 상소를 올려 훌륭한 재상과 이름 있는 경들까지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교한 사람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이도록 하셨다. 이에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태학생(太學生)들로 하여금 혹은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혹은 글을 올리도록 하여 임금의 명이 중단되었다.얼마 후 무안 유생 배명(裵蓂)이 곤재(困齋)와 공의 부자의 원통한 상황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상소하였으나 정철은 끝내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한 것으로 죄목을 엮어 공의 여섯 부자가 일시에 심문을 받게 되었다.찬성공(贊成公)은 특별히 효로 용서받았고, 공은 경성(鏡城)11)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며, 여러 아우들은 각지에 나뉘어 유배 갔다. 공이 유배지에 이르러 시를 지어 아우에게 척강(陟岡)의 회포12)를 부쳤다.변방의 구름 높이 떠가고 기러기 무정한데 關雲迢遞鴈無情어느 곳 외로운 성에서 부모형제 그리나 何處孤城憶父兄촛불 깜박이는 깊은 밤 서리 맞은 잎 소리에 殘燭夜深霜葉響꿈속의 연못 풀은 자라나지 못하네 夢中池草不能生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들끓어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이 말을 달려 쳐들어오니, 북쪽 변방의 회령(會寧)13)사람 국경인(鞠景仁)14)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및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15) 황정욱(黃廷彧)16) 등을 잡아두고 왜적에게 대응하였다. 이에 진보(鎭堡)17)의 배반한 군졸들이 지키던 장수들을 다투어 결박하고 적들에게 항복했으니 종성(鍾城)18)사람 국세필(鞠世弼)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19),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공은 함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한백겸(韓百謙)20)과 함께 그들의 계획에 힘을 모으기로 찬성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도 역시 와서 모여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목을 베어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졌다. 이듬해 봄에 별장(別將) 이붕수(李鵬壽)21)와 만호(萬戶) 이희당(李希唐)이 왜적과 전투를 하던 도중 같은 날 죽었다. 공과 정문부가 시를 지어 이 일을 슬퍼했는데, 이 일은 택당(澤堂) 이식(李植)22)이 편찬한 《북관지(北關志)》23)에 실려 있다. 그해 공이 비로소 죄를 용서받고 풀려나 돌아왔다.병신년(1596)에 찬성공(贊成公)의 장례를 무안(務安) 주룡(住龍) 나루에서 치르고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공이 여러 동생들과 함께 주룡으로부터 은적산(銀積山)24)으로 난리를 피하려할 때 고향사람 효자 이유경(李有慶)이 공과 함께 나루를 건너고자 하였다. 공이 이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건너십시오."라고 하자, 이공이 사양하면서 "주객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비록 뒤에 떨어져 낭패를 당한다 한들 형세가 그러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내가 만약 먼저 나루를 건너간다면 우리 집의 종들이 반드시 그대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그를 먼저 건너게 하였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는 데 피차 양보함이 없음을 칭찬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주룡 소포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안히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다. 매번 선산을 성묘할 때면 회포를 노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아침마다 선산에 올라 朝朝上丘壟떠나려다 또 주저하네 欲去還躕踟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度幾侍誾誾늘 평생의 거동 보이리라 一見平生儀공은 가정(嘉靖)25) 신해년(1551)에 태어나 60세에 돌아가셨으니 만력(萬曆) 경술년(1610) 5월 28일이었다. 찬성공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은 키가 매우 크고 위용이 경외할만하여 그를 본 사람들은 산하 간의 기운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본주의 목사는 공과 나이가 비슷했으나 반드시 그를 '노형'이라고 불렀고, 대여섯 살 적은데도 반드시 '어르신'이라고 불렀으니 그 공경하고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고을 사람 문화(文化) 임환(林懽)은 재주와 기개로써 당세에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잘 지냈다. 한번은 산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임공이 먼저 도착하여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는 듯 거침없이 담론하다가, 공이 뒤이어 이르자 임공은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잃고 공이 말하기만 하면 '예, 예' 하고 대답만 하였다. 당시 절의 승려 가운데 이를 목격한 자가 이 미담을 전하였다. 성품 또한 호방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고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화장실을 가려는데, 지주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가까스로 맞아 당에 오르고는 곧장 섬돌 위에다 볼일을 보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상에 설사를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였다.공은 이미 남쪽에서도 명성이 알려져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모두 일면식이라도 있기를 원하여 여러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찾아왔는데 맞이할 때의 예모는 자못 단출하였다. 그러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26)가 영암(靈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주룡으로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문에서 응대하는 자로 하여금 곽거사가 당도했음을 들어가 전하게 하자, 공은 허둥지둥 옷과 갓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공이 평소 남에게 굽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거사에게만 공께서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곽공과 토론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 뒤 곽공이 조정으로 돌아가 임금이 원수(元帥)의 재주를 가진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을 천거했다고 한다.공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뜻과 절개로 시대를 걱정하여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방법을 상달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할 것과 잘못된 정치를 혁파하고 고역을 균등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청하였고 조목조목 나열한 바를 두어 각 영에 설치한 둔전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 병신년 상소와 기해년의 저촉은 병서와 그림을 통해 모두 징험할 수 있다.공이 한번은 여름날 주룡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산모퉁이에서 큰 뱀이 기어와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이 잠에서 깨어 그것이 뱀인 줄 알고는 끝내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스스로 떠나가기를 기다렸으니 그 기량과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또 장을 청소하는 방법에 능통하여 저녁마다 물은 한 그릇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토해내 반드시 그 그릇에 가득 찼다. 홍시 같은 과일도 삼켰다가는 한참 후에 씨와 벌레를 토해내니 사람들 중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웅대하면서도 맑고 씩씩하여 국한 되지 않는 훤칠한 기개가 있으나 이는 공에게 그저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읊조린 시 몇 수가 있기는 하지만 글자에 잘못된 것이 많아 그 진수를 전할 수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공이 돌아가시자 아우 나덕윤(羅德潤)이 글을 지어 곡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가슴에는 운몽을 삼키고27) 胸呑雲夢말은 보불을 토하도다28) 詞吐黼黻뜻은 우주를 넘고 志凌宇宙눈은 천지를 초월하네 眼空霄壤용처럼 강가에 누워 龍臥江潭자신을 관중과 제갈공명에 견주었네 自擬管葛공의 평소 뜻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공을 세상에 낼 때는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한 것인데 끝내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공의 첫째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문과에 급제하여 담양(潭陽) 부사(府使)를 지낸 김경헌(金景憲)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절(劉節)의 따님이다. 모두 나주(羅州) 장흥동(長興洞)에 장사를 지냈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와 나인소(羅因素)는 김 씨가 낳았고, 나성소(羅成素)와 나취소(羅就素)는 유 씨가 낳았다. 나성소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나이소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나인소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나결(羅袺), 나격(羅䙐)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시화(柳時華)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를 두었는데 나겹(羅裌)이다. 나성소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參奉) 이소(李韶)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나취소는 후손이 없다. 공의 자손이 대를 이어 점차 쇠락하다가 나결의 손주 나만영(羅晩榮)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올라 집안의 명성을 다시 떨치니 이를 통해 남은 경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아! 공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6년이 되었다. 그 평생 행적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증험할 것이 없으므로 간략하게나마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한다. 만에 하나라도 훗날 공에 대해서 더 논할 것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하여 공의 간략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숭정(崇禎) 병자년(1636) 이후 79년 을미년(1715) 7월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쓴다. 公諱德明, 字克之, 號龜菴, 又號嘯浦, 姓羅氏, 羅州人. 麗朝有諱富爲監門衛上將軍, 是公鼻祖也. 後至工曺典書諱璡, 最貴顯, 生典農寺正諱公彦, 洪武間, 有克倭功, 仍世爲湖之右族. 曾祖諱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師事履素齋李仲虎, 以至行聞, 中宗旌其閭復其戶. 宣祖初, 道臣薦其賢, 累除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詩, 贈議政府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人, 以六龍目之, 公卽其冢嗣, 資稟魁偉傑特, 識者, 期以遠大器. 嘗在約年八九時, 路逢州吏, 吏不爲禮, 公擧理叱責, 吏乃肅然敬服, 聞者咸奇之. 萬曆己卯擧進士, 實宣祖十二年也. 銓曺聞公名, 除義禁府都事, 罷遞歸鄕時, 公蔚有聲華, 爲人所偢倈. 二弟德峻 德潤, 以鄭困齋門人, 俱有令名, 遂被不悅者所忌嫉. 己丑冬, 有鄭汝立上變事, 委官鄭澈, 乘機羅織, 丁岩壽 梁千頃 洪千璟等, 承澈旨, 投誣疏陷諸名流三十餘人, 而又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與汝立交至密, 知禍及己, 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弟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其疏會, 大言斥之. 及岩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禁府, 拿鞫岩壽等十人. 於是, 澈懼使臺官及太學生, 或陳啓, 或上章, 寢其命. 俄而務安儒生裵蓂, 疏伸卞困齋及公父子寃狀甚悉, 而澈竟以謀沮岩壽疏, 搆成罪目, 公之六父子, 一時就理. 贊成公特以孝見原, 公謫鏡城, 諸弟等幷分配. 公到配, 吟詩寄弟, 以寓陟岡之懷曰 : "關雲迢遞鴈無情, 何處孤城憶父兄. 殘燭夜深霜葉響, 夢中池草不能生." 壬辰, 島夷充斥, 賊將淸正長駈至, 北邊會寧人鞠景仁, 遂作亂, 執王子臨海君珒 順和君?及宰臣金貴榮 黃廷彧等, 以應倭. 於是, 鎭堡叛卒, 爭縛守將, 相繼附賊, 鐘城人鞠世必, 卽其渠魁也. 北評事鄭文孚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彦 輸城察訪崔東望等, 謀起義兵. 公與同謫人韓百謙, 協贊其謀. 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等, 亦來會, 捕得首惡者, 斬之, 軍聲仍以大振. 明年春, 別將李鵬壽 萬戶李希唐等, 與賊戰, 同日死. 公與文孚作詩, 以哀之事, 載李澤堂植小撰北關志. 其年, 公始得宥還. 丙申, 丁贊成公憂, 奉行襄禮于務安住龍渡, 仍居墓下. 丁酉, 倭賊更熾, 公與諸弟, 自住龍將避于銀積山, 同鄕孝子李有慶, 偕公舡欲渡, 公謂李公曰 : "君可先渡." 李公辭曰 : "主客有異, 吾雖落後狼狽, 理勢固然耳." 公曰 : "吾若先渡, 吾家奴必不致誠於君." 竟使之先渡. 人稱顚沛必是之義, 彼與此無讓矣. 亂定, 作亭于住龍嘯浦上, 優游以終老. 每省拜先壟有詠懷詩曰 : "朝朝上丘壟, 欲去還躕踟. 度幾侍誾誾, 一見平生儀." 公生于嘉靖辛亥年, 六十卒, 卽萬曆庚戌五月二十八日也. 葬贊成公墓下. 公體甚長大, 威容可畏, 見之者, 以爲得山河間氣. 本州牧與公年相敵者, 必稱老兄, 少五六歲, 必稱丈, 其見敬禮如此. 鄕人林文化懽, 以才智氣槪, 知名當世, 公與之相善. 嘗約會山寺, 林公先到, 談論自若傍若無人者, 及公追, 至林公, 自不覺沮喪, 公出言輒唯唯, 其時寺僧之目擊者, 傅以爲美談. 性又豪放, 不拘小節, 傲視一世, 於人少許可. 一日, 將如厠, 地主猝至, 公僅得延之上堂, 仍卽遺矢于堦上, 處之晏然曰 : "此愈於在堂上滑泄." 人服其廣度. 公旣名重南, 服人皆願一識, 使星冠蓋歷候者絡繹, 而迎接之除, 禮貌破簡. 至於郭忘憂堂再祐之謫居靈岩也, 訪公住龍, 使應門者入傳郭居士來到, 公顚倒衣冠, 下堂迎之, 一村人皆驚曰 : "公平生未嘗屈於人, 何狀居士, 能令公致敬若是哉?" 公遂與討論, 襟懷甚相得. 其後郭公還朝, 上問元帥才, 至以公薦剡云. 雖在草野, 志切憂時, 以感天意結人心之道, 有所上達, 而請伸己丑寃死之類, 以革弊政均賦役之策, 有所條列, 而請罷各營屯田之設, 此於丙申疏及己亥抵兵書畵中, 俱可徵也. 公嘗於夏日, 晝眠于住龍, 山隅有大蛇來, 蟠于腹上, 公覺來知其爲蛇, 終不動身, 以待其自去, 其器量凝重類如是矣. 又能通洗腸之術, 每夕飮水一器, 翊朝還吐, 必滿其器. 至於紅柿等物呑下, 良久吐其核與虫屑, 人莫不異之. 爲詩語必雄放淸健, 有不局底氣岸, 然此特公之餘事耳. 其所吟詠者, 有若干首, 而字多訛誤, 不得傳其眞, 可勝歎哉. 公之歿也, 弟德潤爲文, 哭之其略曰 : "胸呑雲夢, 詞吐黼黻, 志凌宇宙, 眼空霄壤. 龍臥江潭, 自擬管葛." 可謂摹得公之平生也. 惜乎! 天之生公, 宜若有爲, 而竟未克一試, 命也. 公先聘光山金氏文科潭陽府使景憲之女, 繼娶文化柳氏節之女, 俱葬羅州長興洞. 有四男曰以素 因素, 金氏出也, 曰成素 就素, 柳氏出也. 成素武科宣傳官, 以素有四男, 褕 襑 袿 袨. 因素有二男, 袺 䙐, 一女, 柳時華. 又有庶出子裌. 成素有一女, 李韶參奉. 又有庶出子表 衤方 袁 三人. 就素無後. 公之子孫, 連世陵替, 而袺之孫晩榮, 擢文科壯元, 官至持平, 能使家聲復振, 斯可見餘慶之未艾也. 嗚呼! 公之歿, 今已百有六年矣. 其平生行蹟, 必不止此, 而久遠無徵, 略述見聞記, 其萬一後之尙論公者, 亦可因此而得公之梗槪矣. 崇禎丙子後七十九年, 乙未七月日, 從曾孫生員斗冬, 謹記. 감문위(監門衛) 고려 시대 육위의 하나로,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과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의 통솔 아래 1영의 군대가 있었다. 전농시(典農寺) 고려 말기에 국가의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당시의 연호로,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사용되었다. 이산 현감(尼山縣監) 이산(尼山)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이며,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서 현의 수장이다. 거사비(去思碑)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만력(萬歷) 중국 명(明)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부터 1619년까지 사용되었다. 정곤재(鄭困齋) 1529~1590. 자는 의백(義伯), 이름은 개청(介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나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 씨(羅氏)이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이해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임금만 볼 수 있는 비밀 장계(지방에 나간 관원이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올렸고, 글 속에는 정여립이 주도하는 세력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은 사실을 미리 알고 피했으나,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끌고 와서 포위하여 자결하였다. 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 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정철은 파직되어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있지도 …… 꾸몄다 원문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경성(鏡城) 함경북도 경성군을 말한다. 척강(陟岡)의 회포 원문 '척강(陟岡)'은 《시경》 〈척호(陟岵)〉에서 나온 표현으로, 행역(行役) 나간 효자가 "저 언덕에 올라 형을 바라보네.〔陟彼岡兮, 瞻望兄兮.〕"라고 한 것에서 파생하여, 부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함을 말한다. 회령(會寧)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의 옛 지명이다. 국경인(鞠景仁) ?~1592.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명천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김귀영(金貴榮) 1520~1593.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황정욱(黃廷彧) 1532~1607.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진보(鎭堡) 진영(鎭營)과 보루(堡壘)를 함께 이르는 말로 대개 군대의 진영을 말한다. 종성(鍾城) 함경북도 종성군을 말한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자는 중항(仲恒)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북관지(北關志) 북관 각 군의 읍지(邑誌)를 개괄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식(李植)이 북평사로 있을 때에 함경도 북부 지방의 각 군읍지를 모아 편집에 착수한 것을 그 아들 이단하(李端夏)가 계승, 완성하였다. 은적산(銀積山) 황해북도 은파군(銀波郡)에 소재한 산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로, 1522년(중종17)부터 1566년(명종21)까지 사용되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가슴에는 …… 삼키고 광대한 포부가 있음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나라에는 칠택이 있고 그중에 하나인 운몽택은 사방이 9백 리인데, 운몽택 같은 것 여덟아홉 개를 삼키어도 가슴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楚有七澤, 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말은 …… 토하도다 벼슬할 만한 재주가 있음을 말한다. 보불(黼黻)은 임금이 대례(大禮)에 사용하던 제복(祭服)이다. 구장복(九章服)에 용(龍), 산(山), 화충(華蟲), 화(火),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그림을 수놓는다. 전하여 벼슬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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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평사 숙필의 시에 차운하다 외재 이단하 次申評事叔弼韻【畏齋李端夏】 형양에서 영원할 훈명 세웠으니72)함께한 공들의 의로운 명성 드러났네묘우에 새로운 시 썼다는 말 듣고한마디 말로 다시 장성73)에게 응수하네 滎陽千載樹勳名同事諸公著義聲聞道新詩題廟宇一言應復敵長城 영원히……세웠으니 한(漢)나라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당해 위급해졌을 때, 기신(紀信)이 한나라 왕 행세를 하면서 항우에게 항복하고 유방을 탈출하게 하였는데, 항우가 그 사실을 알고 불태워 죽였다. 《漢書 卷1 高帝本紀上》 장성(長城) 중후한 사람이나 견고하여 꺾을 수 없는 역량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는 평사 신숙필(申叔弼)의 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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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를 적어 촉룡서당의 제군들에게 보내다 외재 이단하 感懷書寄燭龍堂諸君案下【畏齋】 궁벽하고 외진 변방 이곳이 내 고향인가지난날 골짝을 구르던 생활 잊지 않았네쫓겨나74) 오히려 고향 땅으로 돌아왔으니촉룡서당에서 다잡은 초심 저버렸네­공의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내가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이미 정공의 사당을 세웠고, 또 사당의 담장 밖에 서당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병사(兵使)에게 가서 보자고 요구하자, 병사가 웃으면서 '나는 이 일을 하느라 고생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내가 내 집을 지은 것은 훗날 귀양살이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골짜기에서 지낼 때를 잊지 못한다는 말도 했는데, 제군들이 함께 들었으니 또한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지금 죄를 지어 쫓겨났는데도 오히려 고향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이는 지난날에 스스로 기약한 것이 아니므로 이 절구 한 수를 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窮荒絶塞是吾鄕邱壑從來意不忘放逐尙還狐首地初心孤負燭龍堂【公自註云"生在北幕時, 旣營鄭公祠宇, 又營書堂于祠墻外。一日要兵使往見, 兵使笑'我勤苦於是役', 對以'吾營吾舍, 以備他日謫居之所', 仍有不忘在邱壑之語, 諸君同聽, 亦必記取矣。今得罪放黜, 猶得偸安田里, 非向時所自期者, 故占此一絶矣"。】 방축(放逐) 1674년에 숙종이 즉위하였는데, 외재가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에 삭직 당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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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암242) 兄弟巖 아우가 형을 업신여기지 않고 형은 침해하지 않으니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져 반씩 산그늘 만드네단단한 암석이 풍교에 관계된 줄 누라 알랴비슷한 사물 살펴보니 바야흐로 조화옹의 마음 알겠네 弟不凌兄兄不侵同根分作半山陰誰知頑石關風敎觸類方看造化心 형제암(兄弟巖)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작은 시내가 그 사이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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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서 천추사의 시에 차운하고, 먼저 떠나는 이들을 송별하다 遼東 次千秋韻 先行送別 객이었다가 다시 객의 행렬 전송하게 되었으니이별함이 그 누가 서쪽으로 가는 나만 하랴이 뒤에 만난 날 알고자 한다면북경에서 한양으로 돌아갈 때이리라 作客翻成送客行別離誰似我西征欲知此後相逢處待到燕京返漢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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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서 사람을 만나다 그 아버지가 요동 유격(遼東遊擊)이다. 逢峽西人【其親爲遼東遊擊】 그대는 산 서쪽 지방의 제일가는 명사요나는 저 멀리 해동 구성 사람이라오요양성 밖에서 마찬가지로 객살이 하니하늘 끝 양쪽 땅의 근심을 나누어 가졌구나 君是山西第一流儂家遙隔海東陬遼陽城外同爲客分占天涯兩地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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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부윤이 천추사 서장관을 증별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次義尹贈別千秋書狀韻 그대에게 먹인 술을 내가 어찌 사양하랴술자리 떠나자 곧바로 길 갈라지네갈림길에서 이별하는 서글픔 표현할 수 없으니술 깬 뒤에 시 읊는 것이 어찌 취하여 시 없는 것만 하랴 飮君之酒我何辭離却樽前便路岐岐路別愁摸不得醒吟爭似醉無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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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함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汝涵韻【二首】 압구정 가 달 밝은 가을에마름 끝에 맑은 바람 일어 객선 보내네세상에 오늘 밤처럼 술 마실 날 없으랴만평생에 이런 곳에서 노닐기는 어렵다오기이한 돌 높다란 벼랑 고목에 가을 드니깊은 밤 풍로 속에 돌아오는 배 가득하네달 밝은 삼경에 긴 피리 소리 들려오니봉래산 섬 속에 들어와 노니는 듯하여라 狎鷗亭畔月輪秋蘋末淸風送客舟人世豈無今夜飮百年難向此間遊奇石巉巖老樹秋夜深風露滿歸舟一聲長笛三更月疑入蓬萊島裏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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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尹國韻【二首】 동한의 장사 모두 서쪽 변방으로 가니아녀자들 멀리 남편 걱정에 애 타리라무슨 일로 산중에서도 이별이 있는가하의를 백의로 바꿔 입고 길 떠나네318)왕의 군대가 오랑캐 소탕한다 들었으니나라 은혜 받고서 어찌 사정 돌아보랴이제부터 오랑캐 사로잡을 날 점칠 수 있으니백면서생도 칼 지니고 길 떠나는구나 東韓壯士盡西征可是閨人惱遠情底事山中亦有別荷衣換着白衣行聞道王師有濯征國恩那得顧私情從今可卜擒胡月白面書生杖劍行 하의(荷衣)를……떠나네 하의는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의 옷차림을 뜻하며, 백의(白衣)는 벼슬하지 않는 일반 백성의 옷차림을 뜻한다. 은거하던 사람도 일반 백성으로서 전장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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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유사》의 뒤에 쓰다 題錦峰遺事後 나의 외가인 나주 나 씨(羅州羅氏) 상사(上舍)84) 나두동(羅斗冬) 종형과 삼종 나두흥(羅斗興) 아우가 함께 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선고조(先高祖) 금호공(錦湖公), 증조 금암공(錦巖公), 금봉공(錦峰公) 형제의 행적에 대해 추술(追述)한 일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지극한 뜻과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감히 임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내준 여러 기록을 상고하여 외람되이 그 사이를 고쳐85), 금호와 금암 2대의 〈사실기(事實記)〉를 지었다. 돌아보건대 금봉의 사적은 상사 종형이 장초(狀草)한 것으로 절로 편의 체제를 이루어 처음과 끝이 차서가 있고 어의(語義)에 흠이 없었다. 끝부분에 증조 금암공의 제문을 인용하고 그에 대하여 "여러 번 이 글을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라고 쓴 글 또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도외시하지 않는 뜻에서 그 가운데 나아가 더러는 한 글자를 빼기도 하고 더러는 한 글자를 바꾸기도 한 곳이 약간 있었을 뿐이니 어찌 굳이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삼가 살펴보건대 금봉은 금암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지만,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같고, 스승을 따른 바가 같고, 추구한 바의 뜻이 같고, 강론한 바의 학문이 같고, 힘쓴 바의 행실이 같고, 세상의 변란을 만난 바와 어려움을 겪은 바도 같다. 어려서는 공손하고 장성해서는 글을 짓고 늙어서는 덕을 쌓아 당세 훌륭한 사람과 군자들에게 어질다는 칭송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었으나, 다른 것이라고는 생사의 연월과 벼슬 경력과 계급 차서에 불과하였다. 옛날 이천 선생(伊川先生)86)이 명도(明道)87)의 행장(行狀)을 쓰고 문인들에게 "나의 도는 거의 명도와 같으니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글에서 구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지금 금봉의 뜻과 학업, 품행과 도의는 그 평생을 개괄해 볼 때 실로 금암과 같다. 나는 금암의 사실기를 지은 뒤 또 붓을 옮겨 금봉의 사실기를 짓고자 했으나 한 편의 같은 글로 귀결되었다.나는 상사 종형에게 장초한 글의 제목을 고칠 것을 청하며 "금봉의 사실기와 금암의 사실기가 모두 전하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 글을 합하여 서로 참고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이러한 말을 책 뒤에 써서 돌려보낸다. 나는 금암의 생증손(甥曾孫)이다.임인년(1662) 봄 3월 하순에 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 쓰다. 吾外氏錦城羅上舍斗冬從兄曁三從斗興弟, 幷抵重元書, 見層以先高祖錦湖公 曾祖錦巖 錦峰兄弟公行蹟追述事. 重元感至意勤懇, 不敢辭以非其人, 按所寄示諸錄, 猥檃括其間, 爲錦湖 錦巖兩世事實記. 顧錦峰事, 上舍兄所爲狀草, 自成篇體, 首尾有次, 語意無欠, 至末端引祭曾祖錦岩公文而爲之語曰 :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云者, 亦足令人感動. 第以不自外之意, 就其中或有省一字易一字若干處而已, 何必改作爲哉. 竊觀錦峰少錦岩四歲爲弟, 受庭訓同, 遊師門同, 所求之志同, 所講之學同, 所勉之行同, 遭罹世變, 履險涉艱又同. 幼而遜弟, 長而有述, 老而蓄德, 于躬爲當世鉅人君子之所賢, 始終無不同, 其所不同者, 不過生卒年月官歷階次焉耳矣. 昔伊川先生狀明道行, 與門人言 "我之道, 蓋與明道同, 欲知我者, 求之此文, 可也." 今夫錦峰之志業行誼, 槪其平生, 實與錦巖同. 重元旣爲錦巖事實記, 又轉其筆, 欲爲錦峰有所云云, 則歸疊一件文字也. 已請以上舍兄所爲狀草改題目曰 : "錦峰事實記與錦巖事實記, 俱傳, 使觀者, 合兩文有以互看參考之爲善也." 遂以是說書其後歸之. 重元, 錦巖之甥曾孫也. 歲壬寅春三月下澣, 外後屬八溪鄭重元題. 상사(上舍) 생원이나 진사를 일컫는 말이다. 고쳐 원문 '은괄(檃括)'은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기구를 말하니, 여기에서는 다소의 수정을 가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굽은 것을 잡는 것을 은(檃)이라 하고, 모난 것을 잡는 것은 괄(括)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에, "그 굽은 것이 발라지게 되는 것은 은괄의 힘이다.〔其曲中規, 櫽括之力.〕" 하였다. 이천 선생(伊川先生)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으로, 정이(程頤, 1033~1107)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명도(明道)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로, 정호(程顥, 1032~1085)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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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보유 【경신년 추가 간행】 附錄補遺 【庚申追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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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종 26년이다.2)】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먼 길을 내달려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關北)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 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성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4)에 숨자, 민가의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성의 현문(懸門)에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 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을 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국세필 등 13인을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보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자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노리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과 길주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那)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績)》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5)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다투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사양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노략질하여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 보낼 일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격려하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고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일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사대부들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의 장좌(將佐)가 이따금 불려가 매질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여 공도 없이 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정문부가 비로소 군병을 해산하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고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한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정예병으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으로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6) 같은 옛 영 영토가 오랑캐의 땅7)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8)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여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바가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출신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출신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출신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萬曆二十年 【宣宗二十六年】 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 明 鏡 富等鎭, 入曾寧, 擄王子, 從渡江, 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渡江, 歷入穩城 慶源 慶興 沿海路, 還趨鏡城. 於是, 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 鏡城則寺奴鞠世弼 【世弼, 乃是官奴, 寺字, 或誤, 疑卽寺奴, 而移屬官奴】 爲首,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 八月, 淸正使一偏將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 安邊 各置重兵, 以爲聲援. 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獲脫免. 遂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彥 輸城察訪崔東望 謫人韓伯謙 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 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 文孚復窘, 匿禦亂里, 民家儒生等, 聞而赴之. 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 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 及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 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 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 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糧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己者, 爲裨將. 【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 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 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斬, 以徇諸鎭. 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 "本興義兵, 國耳, 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 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 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 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 又激見龍等主文孚軍, 六易將, 軍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 其間誤戰機多, 以此故. 見龍初恇怯,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 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止之. 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 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 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嗚呼, 關北俗, 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 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 從事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 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 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反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 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濕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紀其實者. 頃於從役之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飾,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槪, 僭付于事蹟之末. 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 奉事吳大男, 鏡城出身權管姜文佑, 訓導李生鵬壽 【戰死】 朴銀柱, 儒生崔配天 池達源 朴惟一 金麗光 【戰死】 吳允迪, 富寧出身車應麟 朴克謹, 儒生金銓 金鏡 車得道, 慶源人鄭允傑 應聖父子, 鏡城出身金嗣朱 崔敬守 南繼仁 【本官奴】, 穩城余貞, 【本官奴, 癸未從申砬有戰功, 至是死於嶺東之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자는 여고(汝固)이며, 호가 택당(澤堂)이다. 장유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종 26년이다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여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팔문장가로 꼽혔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준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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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초 【농포 정문부】 狀啓抄 【農圃 鄭文孚】 장계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병조 좌랑(兵曹佐郎) 서성(徐渻)과 정배인(定配人) 나덕명(羅德明)이 외촌(外村)에서 마을에 사는 군정(軍丁)들을 잘 타이른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모두 성 【즉 경성(鏡城)이다.】 으로 들어갔습니다. 【만력 20년인 임진년 10월 14일이다.】신이 대장에서 체직된 뒤에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大將)으로 삼았습니다. 지난해 12월 그믐께 정현룡이 겸절도사(兼節度使)에 차임되어 육진(六鎭)을 순하였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로 대장을 개정(改定)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巡察使)의 관문(關文)에 오응태를 대장에서 체차(遞差)하고 전처럼 평사(評事)를 다시 대장으로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 겸 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체차되어 북쪽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1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도사가 왜적을 토벌하는 정예병을 자기가 거느리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져 왜적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이러한 때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지극히 염려되므로 신도 관문을 보내어 병사를 모아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각별히 사목(事目)을 주어 그 숫자대로 병사를 모으게 하는 일로 누군가를 방어사(防禦使)라 칭하여 정현룡에게 내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언뜻 들으니 팔도 중 남도(南道)에서는 이미 과거가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유독 이 북도(北道)에서는 과거를 보러 갈 수 없으니 진작시키려는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순찰사가 임금께 아뢰어 처치해 달라고 청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변변찮은 소관(小官)이 임금께 아뢰어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내(道內)에서 의병을 일으킨 우두머리인 경성에 사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驥秀), 경성에 정배(定配)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富寧) 좌수 김전(金銓) 등이 온 힘을 다하여 내달려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들을 잘 타일렀으니 지금까지 일을 거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바입니다.지난번에 상(賞)을 논할 때 과거(科學)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던 유생들 가운데 금위(禁衛)를 임명한 일을 원통하게 여기는 듯하여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했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본부 역시 큰 도회지라서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태반이나 마련하는데 진에 머물고 있는 가장(假將)인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은 책응(策應)하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치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잘 아뢰어 주소서. 만력(萬歷) 21년 계사(1593), 1월 16일." 略曰 兵曹佐郞 徐渻 定配人 羅德明 在外村, 曉喩村居軍丁爲白如乎, 節段竝只入城 【卽境城】 爲白有齊云云. 【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 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 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 在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 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 入歸是如爲有臥乎所,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加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 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 仄聞爲白乎矣, 八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 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 座首徐遂 李麒壽, 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 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 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厼, 詮次以善啓向敎是事. 萬曆二十一年癸巳, 正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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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산 어른의 만사 挽羅尼山丈 【김익성, 자는 유응(裕應)이며 광산 사람으로, 고을의 성서에 거주하였다, 광해군 때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사람들은 생전이 귀하다지만 人也生前貴공은 돌아가신 뒤에 영예롭네 公惟死後榮사 씨 집안의 쌍벽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순호의 팔룡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땅은 시서의 차례를 덮었고 地閉詩書秩하늘은 예의의 밝음을 감췄다네 天慳禮義明평생 충과 효로 행동하셨으니 百年忠孝事바람이 백양79)에 소리 내어 하소연한다네 風訴白楊聲 【金益成, 字裕應, 光山人, 居州之城西. 光海朝, 廢科, 詩酒自娛.】人也生前貴, 公惟死後榮.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地閉詩書秩, 天慳禮義明.百年忠孝事, 風訴白楊聲. 백양 백양(白楊)은 무덤을 가리킨다. 도잠(陶潛)의 〈만가시(輓歌詩)〉에 "황량한 풀은 어이 그리 아득한가, 백양나무 또한 쓸쓸하기만 하네."라고 하였다. 《陶靖節集 卷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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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록 師友錄 이소재(履素齋) 선생은 휘가 중호(仲虎)이고, 자는 풍후(風后)이다. 종실인 고안(高安)80) 정(正) 이정(李精)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효공(靖孝公) 이보(李補)81)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태종 때 좌의정(左議政) 충경공(忠景公) 이직(李稷)의 후손이다. 고안 정(正) 이정이 아내로 맞이하여 정덕(正德)82) 임신년(1512) 9월 무자일에 선생을 낳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 장성함에 뜻을 엄하게 하여 문장을 지음에 그 문체가 기이하고 우뚝함을 숭상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83)이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귀신이 아니면 저렇게 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서봉(西峰) 처사 유우(柳藕)84)에게 학업을 전해 받았는데 서봉은 바로 한훤당(寒暄堂)의 문인이니, 그 학문은 대개 연원이 있다.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사람들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85)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침내 깨닫는 바가 있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을 두고는 낮에는 외우고 밤에는 사색하여 잠자고 밥 먹는 것조차 잊기에 이르렀다. 죽간에 구용(九容)과 구사(九思)86)를 새겨 혁대에 꿰어 차고 종신토록 지녔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띠를 묶어 종일 강론하고 정미하게 분석하니, 서화담(徐花潭)87)이 그와 함께 수일을 강론하고 감탄하며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기묘사화(己卯士禍)88) 이후 《소학》의 가르침이 세상에서 크게 금지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후학을 가르치니 학도들이 모여들자 반드시 《소학》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으로 《근사록》을 가르친 뒤 점차 여러 경전에까지 이르렀다. 논의가 뛰어나 배우는 사람들의 학문을 북돋아 진작하는 효과가 있기에 전조(銓曹)에서 교직(敎職)에 천거하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병이 심해져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언관(言官)들이 그의 품행과 도의를 칭송하여 계속 서울에 머물도록 청하자 명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6품의 관직을 내렸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가정(嘉靖) 갑인년(명종 9, 1554) 11월 26일로 향년 43세였다. 문인들이 그의 상례를 다스리고 이듬해 정월 25일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선영에다 장사지냈다. 그의 저술은 〈심성정도(心性情圖)〉, 〈성리명감(性理明鑑)〉, 자경(自警)의 시문 수백 편이 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깊이 생각하여 곧장 이해해서 직접 제작한 물건이 조금도 도수가 어긋나지 않았다. 【〈이소재묘지유사(履素齋墓誌遺事)〉와 박상 세채(朴相世采)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보인다.】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은 자가 연지(衍之)이고, 동래(東萊) 사람이다. 봉상시 정(奉常寺正)89) 정유인(鄭惟人)의 아들이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나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였다.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은 자가 인지(訒之)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서봉(西峯) 선생 유우(柳藕)의 아들이다. 가정 계사년(1533)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의뢰할 곳이 없어 다소 무리배였으나 훗날 뜻을 고쳐 이소재의 문하에서 배워 학업에 뜻을 둔 것이 남달랐고 특히 예(禮)에 밝았으며 각기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 퇴암(退菴) 박응남(朴應男), 월담(月潭) 최황(崔滉) 등 막역한 교우를 맺었다. 만력 계미년(1583)에 남봉이 우의정에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충과 효와 큰 절개가 있어 삼군(三軍)의 장군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침내 출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자, 공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걸어서 임금을 따라가 2년을 지냈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90)은 총재(冢宰)로서 공의 충성과 절개를 알려 통정(通政)91)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599)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92)에 보인다.】홍용(洪溶)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판관(判官) 홍필세(洪弼世)의 아들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익원군(益原君) 홍경림(洪景霖)의 손자이다. 벼슬은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에 이르렀다.정유신(鄭惟愼)은 동래(東萊) 사람으로, 돈녕부(敦寧府) 정(正) 정익겸(鄭益謙)의 아들이고 참봉(參奉) 정위겸(鄭撝謙)의 양자이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이다. 벼슬은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이르렀다.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93)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살펴보니 "이소재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스승의 도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94) 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이나 되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그 문하에서 배움을 청한 선비들이 이처럼 많았을 것이나 문인 가운데 우리 선조께서 크게 인정했던 이들로는 다만 남봉, 범애, 홍공, 정공 네 사람뿐이므로 위와 같이 선별하여 기록한다.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履素齋李先生, 諱仲虎, 字風后, 宗室高安正精之子, 孝寧大君靖孝公補之玄孫. 妣星山李氏, 太宗朝左議政忠景公稷之後也. 高安正竝娶焉, 以正德壬申九月戊子生先生. 早失怙, 及長勵志, 爲文章, 體尙奇偉, 金慕齋安國見而奇之曰 : "非鬼神, 不能!" 受業於西峯柳處士藕, 而西峯卽寒暄堂門人也. 其學蓋有所淵源焉. 嘗讀孟子, 至人皆可以爲堯舜, 遂有所悟屛棄科業, 慨然有求道之志, 晝誦夜思, 至忘寢食, 刻九容九思於竹簡, 串以革帶, 終身佩服, 雖隆寒盛暑, 整冠束帶, 講論終日, 剖於精微, 徐花潭與之講論數日歎曰 : "不可及也." 自己卯士禍以後, 小學之敎, 爲世大禁, 而先生能杜門敎誨, 學徒坌集, 必先小學, 次及近思錄, 漸達諸經. 論議超詣, 致有聳動振作之效, 銓曺薦爲敎職, 累辭不就. 晩年病痼, 將欲歸田, 言官稱其行誼, 仍請留洛, 明廟嘉之, 授六品職, 不數月而歿, 卽嘉靖甲寅十一月二十六日也. 享年四十三. 門人經紀其喪, 明年正月二十五日, 葬于楊州松山先塋. 所著有心性情圖 性理明鑑 自警詩文數百篇. 至於璿璣玉衡之制, 致思輒解, 手自裁造, 度數不差. 【見履素齋〈墓誌遺事〉, 及朴相世采〈東儒師友錄〉】鄭南峰芝衍, 字衍之, 東萊人, 奉常寺正惟仁之子, 領議政文翼公光弼之曾孫也. 生于嘉靖乙酉, 隆慶己巳登第, 官至右議政. 萬曆癸未卒, 年五十九.柳汎愛祖訒, 字訒之, 晉州人. 西峯先生藕之子也. 生于嘉靖癸巳, 少無賴, 後折節, 爲學游履素齋門, 志業兼人, 尤以知禮各與鄭南峯芝衍 朴退菴應男崔 月潭滉爲莫逆交. 萬曆癸未, 南峯以右相薦公, 有忠孝大節, 可將三軍, 始出仕. 壬辰倭亂, 車駕西幸, 公適家食徒步追, 至居二年. 金斗巖應南, 以冢宰白公忠節, 陞階通政, 拜戶曹參議. 己亥卒, 年六十七. 【見東儒師友錄】洪溶, 南陽人, 判官弼世之子, 工曺判書益原君景霖之孫也. 官至掌隷院司議.鄭惟愼, 東萊人, 敦寧府正益謙之子, 參奉撝謙之繼子, 文翼公光弼之孫. 官至淸風郡守.按李芝峯睟光類說曰 : "履素齋當己卯士禍之後, 以師道爲己任, 摳衣受業者, 日數百人."云云, 則當時踵門請益之士, 若是其多矣, 而同門人中, 吾先祖所與之最相推許者, 只是南峯 汎愛 及洪公 鄭公四人, 故抄錄如右. 玄孫斗冬謹書. 고안(高安) 경기도 용인군 내사현의 옛 이름이다. 이보(李補) 1396~1486.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으로,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인 세종(世宗)에게 세자의 지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많은 불사를 주관하여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로, 중종 원년(1506)~16년(1521)까지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자는 국경(國卿)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고, 15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천녕현(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서봉(西峰) …… 유우(柳藕) 1473~1537. 자는 양청(養淸)이며, 서봉(西峰)은 그의 호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갑자사화로 스승이 죽음을 당한 뒤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심하였다. 사람들 …… 있다 《맹자》 〈고자(告子)〉하 제2장을 말한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 구사(九思)는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용모는 공손하기를, 말할 때는 충성스럽기를,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의심날 때는 묻기를,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얻을 것을 보고서는 마땅히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구용(九容)은 《예기》 〈옥조(玉藻)〉에 나오는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함에 있어서 응당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등을 말한다.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으로, 자는 가구(可久), 본관은 당성(唐城), 화담은 그의 호이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선시대 제사(祭祀)와 시호(謚號)의 의정(議定)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봉상시(奉常寺)의 정삼품(正三品) 관직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이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통정(通政) 조선조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말한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조선 후기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신라시대부터 조선 선조까지 유학자들의 사우 연원을 밝혀놓은 책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보인 학자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저술로는 문화백과사전의 성격을 띠는 《지봉유설》과 사후에 그의 글들을 모은 《지봉집》이 전한다. 옷자락을 …… 치켜들고 원문 '구의(摳衣)'는 스승이나 어른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어른이 계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 실내 구석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얼른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에 응대를 반드시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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