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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 이공 단하 이 노봉 민공 정중 에게 올리는 편지 이공은 당시 이곳의 평사가 되었으며, 민공은 함경도 관찰사로 있었다. 畏齋李公【端夏】上老峰閔公【鼎重】書【李公時爲此評事, 閔公爲北伯】 제가 융막(戎幕)에 나간 이후로 재주와 학식이 어두워서 조처를 취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주장(主將)이 파면되었기에 이로 인해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장이 이미 파면되었기에 이전의 법을 굳게 지키고서 한 가지 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 병부(兵符)를 차고 장수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으니, 좌막(佐幕)의 관리가 비록 부득이하게 관찰사를 대신하는 일을 맡더라도 또한 그를 능멸하고서 명령을 내어 상하간의 체통을 손상할 수는 없습니다. 군민의 폐단을 바꿔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권한이 이미 손에 있지 않으니 일일마다 바로잡고자 하여도 월권에 가까우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그렇지만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평사인 제가 힘을 써야할 것이 있습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이곳 북평사로 도임하였을 때 관찰사의 지시를 받고 《북관지(北關誌)》를 저술하였는데 분실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이 일에 뜻을 두어 《경성지(鏡城誌)》의 초고를 이미 지었고 《구관사(九官事)》도 그와 마찬가지로 편찬하고자 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면서 《경성지》의 조목과 범례를 써서 보내어 조목 별로 사실을 기록하여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것이 오면 또한 산정(刪定)하여 이어서 편찬하려 합니다.제가 선친의 문자를 수습하면서 한쪽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경성사적(鏡城事績)〉 한 책은 본래 본부(本府)에서 이두문으로 기록한 것인데, 묵음으로 난고(亂稿)의 상자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의 임무를 받은 뒤에 잠시 고향으로 가서 이 책을 찾아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안에 선친께서 직접 쓴 잡기 두어 장이 끼어 있었으니, 수습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별지에 써서 올리오니, 대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일로 선친께서 일찍이 말씀하시며 애석하게 여긴 것입니다. 지금 이 기록을 보고 또 직접 이곳의 인사들을 찾아가 물어보니, 그의 공이 큰데도 살아서 무고를 당하여 세상에서 불우하게 지냈고 죽어서 또한 그의 공을 드러낸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이곳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사당이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김종서(金宗瑞)와 정문부는 그 공이 모두 윤공에게 뒤지지 않으니, 대개 국가의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한 것은 세 사람이 모두 같습니다. 김종서와 정문부 두 공을 윤공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려고 하는데 윤공의 사당을 비록 더 넓혀 짓지 않아도 세 분의 신위를 봉향할 수 있기에, 이런 내용으로 이곳의 인사(人士)와 장교들에게 의논하여보니 모두들 의견이 한결 같았습니다. 다만 듣기에 정공은 계해년 역옥에서 매를 맞아 죽었는데, 그가 살았을 때 사람됨이 강직하여 참으로 질시를 많이 받았다고 하니 세상의 의논이 어떠한지 잘 모르겠습니다.선친께서 〈경성십절(鏡城十絶)〉1)을 지으셨는데, 그 다섯 번째 시에서 "시서에 능한 김종서 장수의 명을 받들었고, 훈척 윤 시중이 정벌을 전담했던 곳. 남긴 사당에 지금 당장 합사하기는 어려워도, 사가로서 어찌 한 사람 공만 드높이리.[詩書命帥金宗瑞, 勳戚專征尹侍中. 遺廟卽今難倂祀, 史家那得獨褒功.]"라고 하였으니, 아래 구절의 의미를 자세히 할 수는 없지만 대개 세 사람을 함께 제향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듯합니다. 또 여섯 번째 시에서 "신공의 한 번 싸워 겹겹의 포위망 풀어 줬고,2) 정자의 지휘 세 번 만에 적을 부수고 돌아왔네. 관문 밖에 일월처럼 걸린 두 분의 충심, 부질없이 장사들 눈물 뿌리게 하누나.[申公一戰解重圍, 鄭子三麾破敵歸. 關外雙忠懸日月, 空令壯士涕交揮.]"라고 하였는데, '신(申)'은 신립(申砬) 공을 가리키는 것 같으며 '정(鄭)'은 분명 문부(文孚)를 가리킵니다. 이는 나란히 대를 맞춰서 한 말로, 이 작품은 바로 선친께서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에 지은 것입니다. 정공이 만약 광해조에 절조를 잃은 일이 있었다면 선친께서 반드시 충성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정공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죽었는데, 유몽인이 정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유몽인은 평소 하는 일이 정신이 나간 자와 같거늘 그가 죄를 승복하고서 죽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또한 가소로운 일인데, 더구나 정공을 끌어들인 것은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공의 충성과 지혜로 평생 수립한 공이 이와 같으니 반정 이후에 흉도들에게 연루될 일이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기에, 이에 합하에게 받들어 아뢰고 겸하여 조정의 친구들에게 의논하였으니, 삼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합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현재 이후로 봄에 영고탑(靈古塔)3)의 형세가 날로 강성해질 것이니 이후 뜻밖의 변고는 예측할 수 없는데, 전대에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을 세상에 밝게 드러내어 교화를 세우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 후대에 충의가 계속해서 나올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이 일은 아마도 현재 북관의 두 번째 가는 일이 아니며, 군정(軍政)을 다지는데 있어서 또한 근본이 되는 일이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와 같은 일은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조정에서도 정공의 마음가짐을 깊이 따져보지 않은 채 그가 죽을 당시의 일만 가지고서 이 일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니, 이 일은 아마도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귀결될 것인데, 합하의 생각이 만일 옳다고 여기신다면 결단을 내려 행하십시오.이 일은 예전에는 풍속을 살피고 지역을 지키는 수령도 또한 그러한 뜻이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다만 저의 소견뿐 만이 아닙니다. 또한 난리에 충성을 바친 사람 가운데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은전에 흠결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붕수(李鵬壽)는 유생으로 창의를 도모한 자이며 끝내는 또한 싸우다가 죽었거늘 지금 그의 자손 가운데 빼어난 인물이 있는데, 이와 같은 사람을 조정에서 차례대로 기용한다면 북관 지역 민심을 흥기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며 훗날 그로 인한 효력도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감사(監司) 서원리(徐元履)가 당시 공을 세운 여러 의사를 위하여 여러 고을에 사당을 세우기로 하였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 견해는 어떻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별도로 사당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으니, 일단 윤공의 사당에 정공을 제향하고 훗날을 기다려 변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숙(持叔) 형4)이 반자(半刺)5)가 되었을 때 싸우다가 죽은 인사에 대해서 제사를 했다고 하는데, 정공의 사적에 대해서는 선친께서 채방한 것만큼 깊이 알지는 못했는가 생각됩니다. 모시고 앉아서 생각을 다 펼칠 길이 없기에 이에 감히 서찰로 길게 늘어놓는데, 병이 깊어 정신이 혼미하여 글이 생각을 제대로 담지 못하였으니, 합하께서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고 재량(裁量)하여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端夏自赴戎幕以來, 不惟才識昏滯, 不能有所措畫, 適値主將見罷, 坐待拿命。彼以旣罷, 故牢守前規, 而一事不欲變通。然猶佩密符而擁將號, 佐幕之官, 雖有不得已代察之事, 亦不可凌掩而出號發令, 失上下之體統也。軍民弊瘼, 可以變通者, 似非一二, 而權柄旣不在手, 欲事事而正之, 則近於侵官而不可得矣。此有一事, 有評事稍可以容力者。先人曾莅此任時, 以方伯指, 述《北關誌》而見失。端夏之來, 有意於此事, 《鏡城誌》業已草定, 《九官事》, 欲一樣編撰, 行關列邑, 書送《鏡城誌》條件凡例, 使之逐條記實以送, 若來則亦欲刪定而續編耳。端夏於先人文字收拾, 不遺片隻, 而惟是〈鏡城事績〉一冊, 本自本府以吏文記錄者, 而束在亂稿箱籠中。端夏受此任後, 暫往故山, 搜取此冊, 而不料其中有先人手草雜記數紙挾置而不見收也。今以別紙錄呈, 蓋鄭評事文孚事, 先人嘗稱道而惜之, 今見此記, 又躬訪於此處人士, 則其功大矣, 而生旣被誣, 不遇於世, 沒又無人表章者, 誠可惜也。 此有尹文肅公瓘之遺廟, 鄙意以爲金宗瑞鄭文孚, 其功俱不下於尹公, 蓋收復國家旣失之土地, 則三人均也。欲以金鄭兩公, 幷享於尹廟, 尹廟雖不加創, 可容三位之享, 以此而議于此處人士將校, 則衆議如一, 而但聞鄭公死於癸亥後逆獄杖下, 且其生時, 爲人峭直, 固多嫉之者云, 未知世議爲如何也。先人賦〈鏡城十絶〉, 其一曰: "詩書命帥金宗瑞, 勳戚專征尹侍中。遺廟卽今難倂祀, 史家那得獨褒功。" 下句之意未詳, 而蓋似惜其不能幷祀也。一絶曰: "申公一戰解重圍, 鄭子三麾破敵歸。關外雙忠懸日月, 空令壯士涕交揮。" 申似指申公砬, 而鄭必指文孚也, 此則偶然對擧之辭, 而此乃先人丙辰年所作也。鄭公若有失身於昏朝之事, 則先人必不以忠許之矣。鄭公死於柳夢寅之獄, 而夢寅引之云然耶。夢寅常時人事, 有同失性者, 其承服被誅, 亦似可笑, 況其援引乎。以鄭公忠智, 平生所樹立如此, 則反正後必無詿誤於兇徒之理, 然此處之人, 以此爲疑, 玆以奉稟於閤下, 兼議於朝中親舊, 伏未知閤下之意如何也。卽今後春靈古之勢, 日以強盛, 日後不虞之變, 有不可測, 前代立大功業之人, 無以昭揭而樹之風聲, 則將何以責後來忠義之繼出乎。此事恐非今日北關第二件事, 而其在軍政之修, 亦有本末之序也, 如何如何。如此事, 人或不樂聞, 朝議或有不深惟鄭公之心迹, 而執其死時事而沮之者, 此事恐歸於不能成, 閤下之意, 如以爲可, 則決欲擧而行之耳。此事從前觀風守土之人, 亦有意而未果云, 非獨端夏之愚見也。且其從難之士, 不得一告身, 實爲國家之欠典。如李生鵬壽, 卽儒生之首倡義謀者, 而終又戰亡, 今其子孫, 亦有俊秀之士, 如此之人, 朝廷亦次第錄用, 則關北人心, 庶有興起之效, 而日後得力, 必不淺也。徐監司元履欲爲當時立功諸義士, 立廟於列邑而未果云, 此見則如何也。鄙意別立廟未易, 姑以鄭公祀於尹廟, 以俟他日變通, 亦可也, 如何如何。持叔兄爲半刺時, 致祭於戰亡之士云, 而鄭公事蹟, 則想或未及深悉如先人之所採訪也。末由奉陪, 盡攄懷抱, 玆敢縷縷於書札, 病痼神茫, 辭不達意, 惟恃閤下恕量, 有以裁敎焉耳。 경성십절 《택당선생집》 권1에 보인다. 신공의……줬고 신립(申砬)이 함경도 경원(慶源)ㆍ경흥(慶興)을 거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있을 때, 호추(胡酋) 이탕개(尼湯介)가 반란을 일으켜 제진(諸鎭)을 침략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했던 일을 말한다. 영고탑(靈古塔) 청(淸)나라의 발원지로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일대에 있다. 여기서는 후금(後金)을 세운 여진족(女眞族)의 범칭으로 쓰였다. 지숙 형 민유중(閔維重)의 자이다. 반자 반자는 중국의 장사(長史)나 별가(別駕) 같은 벼슬을 말하는데, 그 소임이 자사(刺史)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통판(通判)을 칭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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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근체시를 지어 동년배들에게 주다 又近體贈諸同年 푸른 눈76) 들어 무이루77) 바라보니 共擡靑眼撫夷樓붉은 얼굴78) 을묘년 가을 추억하네 倍憶紅顔乙卯秋한 시대 풍류는 길이 꿈속으로 드는데 一代風流長入夢당시 많은 사람 절반이나 무덤 이루었네 當年二百半成丘금산은 비 온 뒤 푸르러 홀 쓰기 적합하고 錦山雨後靑宜笏영수는 가을 전 녹음 있어 배 띄우기에 알맞네 靈水秋前綠可舟이 자리 소중히 여겨 저버리지나 마시오 珍重此筵須勿負내일 밤 적벽의 달빛 아래에서 놀기로 하세 明宵赤壁月中遊 共擡靑眼撫夷樓, 倍憶紅顔乙卯秋.一代風流長入夢, 當年二百半成丘.錦山雨後靑宜笏, 靈水秋前綠可舟.珍重此筵須勿負, 明宵赤壁月中遊. 푸른 눈 원문의 '청안(靑眼)'은 반가운 만남을 뜻한다.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청안을 뜨고 미운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을 떴다고 하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무이루 무이루(無夷樓)는 나주에 있는 누각의 이름이다. 붉은 얼굴 젊은 시절을 말한다. 두보의 시 〈청명(淸明) 2수〉에 "꽃을 탐하는 저 고운 새는 즐겁기만 한데, 죽마 타던 어린 시절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어라.〔繡羽衝花他自得 紅顔騎竹我無緣〕"라고 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8 淸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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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본 것을 기록하다 冬日記所見 가볍게 날리는 눈발 바람 앞에서 춤추고점점이 뭉친 작은 구름 흩어졌다 다시 이어지네몇 마리 저녁 기러기 먼 물가에서 울고어느 해엔가 이별하였던 학 긴 하늘을 건너네안개는 먼 산봉우리에 의지하여 새로운 상투를 꾸미고물은 흐르는 시내에서 울며 오래된 현(絃)을 잇네모두 한가한 가운데 품평하는 것이니참된 뜻 말하고자 하다가 이내 말을 잊었네269) 輕輕飛雪舞風前點點微雲散復連幾箇暮鴻嘶遠浦何年別鶴度長天烟依遠峀粧新䯻水咽流泉續舊絃摠是閒中題品了欲言眞意便忘筌 말을 잊었네 원문은 '망전(忘筌)'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 또는 방편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장자》 〈외물(外物)〉에, "통발은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니 일단 잡으면 필요가 없고,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니 일단 잡으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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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린찬4) 泣麟贊 너의 발굽이 둥그니누가 알랴 말이 아니라는 것을너의 머리에 뿔이 있으니사람들이 대부분 너를 소라고 하는구나너는 덕이 있으니의당 마소가 있는 들판에 대은5)이로다 爾蹄圓。 誰知其非馬。 爾頭角。 人多謂爾牛者。 爾有德。 宜大隱乎馬牛之野。 읍린찬(泣麟贊) '읍린(泣麟)'은 기린을 위해 울었다는 말로, 세상이 쇠하고 도(道)가 다한 것을 슬퍼하는 뜻이다. 《春秋公羊傳 哀公14年》 대은(大隱) 몸은 조정이나 저잣거리에 있으면서도 뜻은 높은 은자(隱者)를 말한다.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소은은 산속에 숨고, 대은은 시조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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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찬 歌鳳贊 까마귀는 애벌레를 쪼고올빼미는 썩은 쥐6)를 다투도다그래도 너는 지각이 있으니기색을 살피고는 멀리 날아가는구나7)더구나 너는 천 길의 날개가 있으니어찌 안개 노을 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랴 烏啄壤虫。 鴟爭腐鼠。 猶有知覺。 色斯遐擧。 况爾有千仞之翼。 盍歸乎烟霞之所。 썩은 쥐 원문의 '부서(腐鼠)'로, 주로 부귀와 공명을 비유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솔개가 썩은 쥐를 얻어 가지고 가다가 원추가 그 위를 날아가자 썩은 쥐를 빼앗길까 봐 '꿱' 하고 소리를 질렀다.[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 嚇.]" 하였다. 기색을……날아가는구나 기미를 살펴 대처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색사(色斯)'는《논어》 〈향당(鄕黨)〉에 "새가 사람의 기색을 보고 날아올라 한참을 빙빙 돈 뒤 내려와 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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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춘에 복원 차오산 천로의 시265)에 차운하다 暮春次車五山復元天輅韻 봄이 주렴을 몇 겹으로 에워싸니너무나도 짙은 봄빛에 잠에서 깨어나누나한가로운 꽃이 희롱하는 나비를 맞이하건 말건날리는 버들솜은 바쁜 벌을 좇아 구분할 수 없네많은 악기의 현은 다행히도 섬섬옥수로 연주하고큰 술잔은 돌무더기 쌓인 가슴에 더욱 좋아라266)만약 주인이 술빚이 없다고 한다면총마가 나는 용과 같은 것을 보시라 春圍簾幕幾重重睡起韶光分外濃一任閑花迎戲蝶不分飛絮趁狂蜂繁絃賴有纖纖手大酌偏宜磊磊胸若道主人無酒債試看驄馬似遊龍 차오산의 시 《오산집(五山集)》 권2에 실려 있는 〈漫興奉呈鄭公子虛求和〉를 가리킨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庭花受日影重重, 坐對眞成晩興濃. 擺撥無端憎啅雀, 經營多事惜遊蜂. 撲衣却勝梅粧額, 鋪地堪憐錦帖胷. 報答春光如得酒, 不妨炰鳳且烹龍." 큰……좋아라 남조 유송(劉宋)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에 왕손(王孫)이 왕침(王忱)에게 "진나라 완적(阮籍)의 주량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비교하여 어떤가."라 묻자, 왕침이 "완적의 가슴에는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기 때문에 모름지기 술로 씻어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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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다시 차복원의 시에 차운하다 初夏復次車復元韻 구십 일 봄 내내 놀라서 꿈에서 깨더니비온 뒤 짙어진 산 경치에 조금은 반갑구나넓은 길은 진흙처럼 미끄러워 바쁜 것은 제비요많은 나무 꽃이 떨어지니 쓸쓸하여 벌도 없어라붉은 빛 도는 술잔에 홍조가 얼굴에 쉬이 일고백설곡267)은 분을 바른 여인에게 주어 노래하기 좋아라내일 동호에 아름다운 약속 있나니생선회 미끼 써서 용을 잡아 삶아보아야지 一春九十驚殘夢稍喜山光雨後濃泥滑九街忙是鷰花空千樹寂無蜂紅潮易暈酣觴面白雪宜呈傅粉胸明日東湖有佳約且將魚膾當烹龍 백설곡 농포의 시가 매우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춘추 시대에 초(楚)나라에서 어떤 나그네가 하리(下里)와 파인(巴人)의 노래를 부르니 수천 명이 따라 불렀고, 양아(陽阿)와 해로(薤露)의 노래를 부르니 몇 백 명이 따라 불렀는데, 양춘(陽春)과 백설(白雪)의 노래를 부르니 몇 십 명밖에는 따라 부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文選 宋玉對楚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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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사의 제사 巡察使題辭 정 평사(鄭評事)의 충절과 업적은 마땅히 백 대에 걸쳐 보답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아 포상하는 일이 없으니 어찌 다만 북방 의사들만 항상 억울하게 여길 뿐이겠는가, 실로 조정의 벼슬아치들도 모두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왕명을 받고 북쪽으로 온 이후로 먼저 포상하고 애통하게 여기는 은전을 청하여 이로써 교화를 세우고 충의를 권면하려고 하였는데, 문득 유생들이 보낸 글을 보니 더욱 내 생각과 같은 사론이 있음을 알게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멈추지 않게 한다.사당을 세우는 한 가지 조목에 대해서는 계문(啓聞)의 선후는 미리 계산하지 않고 다만 공을 세운 곳에 일찍 세우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하다. 고서를 읽고 고인을 스승처럼 존모하는 후학들은 충효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으니, 즉 북방의 학자들로 하여금 사당의 곁에 서당을 세워서 학문을 강습하여 오직 평사의 충의를 스승으로 삼고 법으로 삼는다면 또한 어찌 유자의 가르침에 어긋나겠는가. 공사의 비용인 쌀과 베는 마땅히 순행할 때 넉넉하게 보조할 것이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급히 거행하고 주저하지 말라. 鄭評事忠節功業, 宜受百世之報, 而至今泯沒無表章之擧, 豈惟北方義士所常鬱抑, 實亦中朝縉紳之所共慨惜者也。受命北來, 先欲追請褒愍之典, 以之樹風聲而勵忠義, 忽見儒狀之來, 尤可見一脈士論之有在, 令人感歎不已。立廟一款, 無預於啓聞先後, 早爲營建於立功之地, 誠合事理。後學之讀古書, 師慕古人, 莫不以忠孝爲本, 則使北方學者, 設塾講習於廟傍, 惟評事忠義, 是師是法, 亦豈有違於儒者之敎也。役費米布, 當於巡過時從優相助, 宜循羣情, 急擧無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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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의 답서 老峰答書 정 평사(鄭評事)의 유사에 대해 편지로 알려주었거늘 아우는 실로 견문이 고루한데다가 동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캄캄합니다. 지금 보내준 편지를 받들고서 감개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전대 사람들의 숨겨진 덕과 감춰진 업적을 드러내어 후대의 아름다운 모범과 법을 세우니, 실로 우리 주자(朱子)가 마음속에 잊지 않았던 일인데 충효와 절의의 인물에 대해 더욱 마음을 쏟았으니 어찌 불행한 때를 만난 것에 느낌이 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형의 말씀이 정문부(鄭文孚)에 대해 언급한 것은 또한 우리 주자가 남긴 뜻과 같으니, 이는 실로 북방 20년 이래로 듣지 못한 말로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감동함이 일게 하니 즐겨 듣고서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까.그러나 사체(事體)로써 말한다면 반드시 조정에 알린 연후에 바야흐로 빛이 더할 것이며 의병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들도 또한 차례대로 포상 받게 될 것입니다. 형은 모름지기 나를 위해 글 한 편을 지어 전말을 자세하게 서술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그 당시 실상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 평사의 말년 일도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삼가 선상국(先相國)의 시어6)에 대해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시서에 능한 김종서(金宗瑞)는 훈척인 윤관(尹瓘)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또한 윤관에게는 사당이 있는 반면 김종서에게 사당이 없는데 시서에 능한 이와 훈척의 형세가 같지 않다는 뜻에서 그 시를 지은 것 같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풍자하려고 지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아우의 생각은 조정에 청을 허락받은 뒤에 육진(六鎭)에 김종서의 사당을 세우고 의병을 처음 일으켰던 어란리(禦亂里)에 정문부의 사당을 세워서 공을 포상하고 후대에 알려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所示鄭評事遺事, 弟實聞見孤陋, 而至於東史, 尤所昧昧。今承來敎, 感慨難勝。發前人之潛德鞱輝, 立後世之懿範令則, 實吾朱夫子之所嘗眷眷者, 而尤致意於忠孝節義之間, 豈非遭時不幸, 有所感而然耶。吾兄之言, 乃及於此, 亦惟吾朱夫子之遺意, 此誠北方二十年來所未聞之說, 益令人慽慽於心也, 敢不樂聞而從命。然以事體言之, 必須聞諸朝廷, 然後方爲增重光耀, 從義諸人, 亦可次第追褒, 兄須爲弟, 草作一狀, 甚悉顚末, 使朝廷明知其時實蹟如何, 鄭評事末年事, 亦可幷及也, 如何如何。謹以先相國詩語, 追想其指意所向, 則金之詩書, 不當幷祀於尹之勳戚, 又似有尹有廟, 而金無祠者, 亦出於詩書勳戚之勢不同之意, 得非譏諷世人之作耶。弟意則得請之後, 立金廟於六鎭中, 立鄭廟於禦亂里首事之地, 以之褒功示後可也。 선상국의 시어 바로 앞에 보이는 택당 이식의 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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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가 노봉에게 두 번째 올린 편지 畏齋再上老峰書 근래에 삼가 답서를 받고서 엄동에 존체가 편안하다고 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제 마음이 대단히 위로가 됩니다. 가르쳐 주신 뜻을 삼가 잘 알겠으니, 저번에 아뢴 일에 대해여 다만 흔쾌하게 허락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별도로 김종서(金宗瑞)와 정문부(鄭文孚) 두 공의 사당을 세우려고까지 하였으며 또한 이에서 나아가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그들의 업적을 더욱 빛내려고 하니, 이 지역의 인사들이 이를 듣고서 모두 고무되어 교화를 진작시키려는 공의 뜻을 우러르고 있습니다.이곳 인사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곳에 정공을 위하여 이런 일을 도모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지금까지도 일이 성취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게 되었으며 합하께서 또한 이미 허락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만약 다시 조정에 청하여 가부를 기다린다면 허락을 기필할 수 없게 되며 또다시 성취하지 못할까 하는 염려가 있으니, 이에 합하에게 글을 올려 먼저 사당을 세우려고 합니다. 원컨대 합하께서는 사당을 세우고서 뒤미처 조정에 알려 이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대개 이러한 일은 사론의 공의에 근거하였으니 비록 조정의 명이 없더라도 또한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염려하는 것도 또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청한 바를 굽어 들어주시는 것이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겠습니까. 제생들이 직접 정문(呈文)을 올리려고 하였지만 먼 곳에서 오가는 동안 일이 점차로 지체될까봐 이에 문서를 파발로 부치는 예에 의거하여 받들어 올립니다.재물이 나올 곳이 없으니 본부의 영곡(營穀)을 만약 넉넉한 숫자로 지급해 주신다면 이번 겨울에 처리하여 내년 봄에 곧바로 지을 수 있을 것이니, 합하께서 북쪽으로 순행하다가 돌아가는 날에는 제가 모시고 가서 그 성취된 일을 보고서 가신다면 어찌 천고에 통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한편 윤관에게는 사당이 있는데 김종서에게는 사당이 없다는 것에 대해, 저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김공이 죽을 때의 일로 인하여 함께 제사 지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시서에 능한 사람과 훈척은 함께 제사지내기 어렵다.'고 의심하시니, 선친의 시어가 과연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비록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보내주신 말씀은 그 의미가 절로 좋으니 또한 어찌 함께 제사를 지내겠습니까. 만약 육진 가운데 행영 근처에 별도로 사당을 세운다면 더욱 영광이 될 것입니다. 다만 김공의 일에 대해 제가 의심하는 바는 관계 되는 일이 한 도에 그치지 않고 한 나라의 윤리와 관계되는 큰 일이니, 이 일은 만약 청을 얻게 되면 온 나라에 빛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허락은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별지에서 아뢴 바를 바라건대 자세히 들으시고서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계를 초고를 지어 올렸는데 고칠 곳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한 선친이 기록한 내용을 만약 장계 안에 수록한다면 장계의 내용일 너무 산만할 듯하여 별도로 장계의 뒤에 기록하였으니, 잘 모르겠습니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또한 별도로 기록하여 공이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사당에 배향할 인물의 가부에 대해 먼저 가르침을 주시고 또 계문하여 자손을 녹용하며 혹은 본도로부터 휼전(恤典)을 더하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육진의 의사의 사적을 미처 전부 탐문하지 못하였는데, 이후로 마땅히 기록을 더하여 올려 보낼 것이니, 일단은 이것으로써 품의의 바탕을 삼으십시오. 장계는 삼가 바라건대 일단 연기하여 다시 진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日者, 伏承下復書, 伏審隆寒, 台體履萬安, 區區無任伏慰之至。且伏悉敎意, 曾所陳達之事, 不惟快蒙頷可, 至欲別立金鄭兩廟, 而又從而啓聞, 以增重光耀, 此地人士聞此, 已皆聳動, 咸仰振作風敎之至意也。第聞人士所言, 此中欲爲鄭公謀此擧久矣, 而至今未成, 今幸公議齊發, 而閤下亦已許之, 則此誠千載一時之會也。若復請於朝廷, 待其許否, 則其許有未可必, 而又有不能成之慮, 玆以呈文於閤下, 欲先立廟宇, 願閤下追聞于朝而賁餙之。蓋此等事, 根於士論之公, 則雖無朝命, 亦可爲之, 而其所慮, 亦有意見, 伏望俯從所請, 未知如何。諸生等欲躬進呈文, 而遠地往復之間, 事漸稽遲, 玆依文狀付撥之例, 收捧以上矣。物力無出處, 本府營穀, 若蒙優數題給, 則今冬可以料理, 明春卽可營造, 閤下北巡廻還之日, 端夏陪侍往觀, 見其就事而出去, 則豈非千古一快耶。且尹有祠而金無祠者, 鄙意則必是緣金公死時事, 而有難於幷祀也。今承下示, 以詩書勳戚不當幷祀爲疑, 則先人詩語, 雖未知果出於此意否也, 然來敎之意自好, 又何必幷祀也。若別立於六鎭中如行營近處, 則尤有顏1)光矣。但金公事, 端夏所疑, 則所關係非止一道事, 此係一國倫常之大者, 此事若得請, 於一國有光矣, 而但朝廷之許, 有未可必也。別紙有所稟, 幸關聽而敎之如何。狀啓草搆上, 而似多有可改處。且先人記事, 若收入於狀中, 則狀辭似太冗, 別錄於狀後, 未知如何。當時從義之人, 亦別錄以備裁擇。蓋廟享人當否, 先賜下敎, 且或啓聞, 錄用子孫, 或自本道加恤典如何。六鎭義士事蹟, 未及盡訪, 從當加錄以上, 姑以此爲稟議之地耳。狀啓則伏望姑遲之, 以待更有所達, 如何。 저본에 '顔'으로 되어 있으나 '顯'의 오자인 듯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의 별록 從義人別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된 이붕수(李鵬壽)는 경성(鏡城)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지조가 굳셌으며 기개와 도량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임진년 역적 국세필(鞠世弼), 국경인(鞠景仁)의 반란 때 이붕수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앞장서서 도모하여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를 구하여 주장(主將)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러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정 평사(鄭評事)가 지달원(池達源), 최배천(崔配天) 두 사람과 함께 이붕수의 집에 찾아가니, 이붕수가 나와 보고서 대단히 반겨하면서 온 집안 살림을 기울여 그를 받들어 주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나아가서 역적 국씨들을 죽이고 창의별장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였으며 모두 세 차례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백탑교(白塔橋)의 전투에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습니다.정공이 길주 목사가 되었을 때 '백탑교에서 이 전중을 애통해하다.'라는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 보게 하였습니다. 경성 사람들이 《의려록(義旅錄)》을 지었는데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토벌한 그의 공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판관(判官) 민유중(閔維重)이 그를 위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판관(判官) 홍여하(洪如河)가 묘갈명을 지었습니다. 대개 정공은 붕수가 아니면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고 붕수는 정공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이붕수를 으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정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운다면 마땅히 이 사람으로 배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증손 7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빼어난 선비로 이동백(李東白), 이동영(李東榮), 이진영(李震英), 이발영(李發榮) 등이 있는데, 이동영은 일찍이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고 합니다.○판관(判官) 최배천(崔配天), 참봉(參奉) 지달원(池達源) 두 사람은 경성 사람으로 모두 의를 좋아하였습니다. 정 평사가 처음 두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이붕수의 집에 가서 의병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서 역적 국씨들을 죽이고 왜구들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시종 이 두 사람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최배천은 첩서(捷書)를 품고 행재소에 나아가 아뢰니 선조대왕께서 인견하고서 비단을 하사하고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이란 직첩을 내려주었습니다. 당시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은 정공의 업적이 자신의 업적을 가릴까 시기하여 두 가지 일을 날조하여 위에 보고하였기에 정표(旌表)와 상격(賞格)이 행해지지 않았으며, 난리에 의병을 일으켜 따르던 선비들 가운데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지달원은 후에 선원전 참봉(璿源殿參奉)이 되었는데, 이는 조정에 친한 사람이 그의 현능(賢能)함을 알아 천거한 것이지 전공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사람과 강문우(姜文佑)를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으며 또한 확실하지 않아서 어렵다는 의논이 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만 세 사람의 공은 모두 《의려록(義旅錄)》에 실려 있습니다. 판관(判官) 민유중(閔維重)이 이들 모두를 위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니 그 공은 실로 보통보다 뛰어난데, 최배천은 직접 행재소에 갔기 때문에 겨우 영직(影職)7) 오품첩을 얻었고 지달원은 전혀 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의 자손을 비록 녹용(錄用)하기 어렵지만 또한 마땅히 휼전(恤典)을 보태 주어야 합니다.지달원은 적통이 없고 성해(成海)와 학해(學海) 두 첩의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문장에 능하고 학식을 갖추어 그 부친의 풍모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모친이 내비(內婢)이기 때문에 천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애석합니다. 지달원의 군공은 참으로 뒤미처 포상해야 하므로 만약 그 두 아들을 면천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최배천의 자손에 대해서는 민유중 공이 판관으로 있을 때 조정에 보고하여 면강(免講)8)시켜 주었으며 도사(都事)가 간혹 거론할 때도 있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합하께서 가을 순행할 때 하교하기를 '무릇 의병을 일으킨 자손들은 마땅히 별도로 대우하라.'고 하였다는데, 분명하게 지시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첩문을 만들어 지급하게 된다면 마땅히 실질적인 은혜가 될 것입니다. 최배천의 손자 최익(崔瀷)은 유생으로 바야흐로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고 합니다.○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는 경성 사람이다. 전 권관(權管)으로 정공을 따라 군사를 일으켜 역적 국경인을 포박하였습니다. 선봉장으로 왜적을 토벌하여 능히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에 돌격하였으며 싸우면 반드시 공을 세웠습니다. 사람됨이 호방하고 강건한 장부로 약속한 말은 무겁게 지키며 의기를 중시하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의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손자 가운데 세상의 중망을 받는 자도 있으며 학식을 갖춘 유생도 있습니다. 또한 천한 손자도 있는데, 강민(姜敏)과 강인(姜仁) 두 사람은 관청의 종입니다.○이기수(李麒壽)는 경성 사람으로 이붕수의 형입니다. 정공이 의병을 일으킬 때 좌수(座首)로써 의병을 일으킬 것을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또한 역적 국경인이 왜적을 맞이하여 성과 해자, 창고가 다 타버리자 불에 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문을 봉하고 재물을 모아 의병을 기다렸습니다.○서수(徐遂)는 경성 사람입니다. 전 좌수로써 이기수와 함께 의를 행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천한 손자 서주(徐冑)는 바야흐로 행영의 관노로 있습니다.○충의(忠義) 허진(許珍)과 무사(武士) 김국신(金國信)은 길주(吉州) 사람입니다. 허진은 적개공신(敵愾功臣) 허유례(許惟禮)의 증손으로, 김국신과 함께 임진왜란을 당하여 충심에서 일어난 분노가 격렬하였으니, 몰래 산골짜기를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여 정공을 따라 역적을 죽였습니다. 허진은 우척후장이 되고 김국신은 좌척후장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니, 자세한 것은 《길주사적(吉州事蹟)》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전공은 경성의 강문우와 비슷하니, 서원리(徐元履)가 순찰사로 있을 때 이 사람들을 위해 또한 길주에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끝내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을 만약 사당에 배향한다면 경성의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 세 사람도 마땅히 사당에 배향하여야 하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위의 두 사람을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합당한지요.허진의 손자 허철(許喆)은 지식을 갖춘 유생이며, 김국신의 증손 김형(金衡)은 무예를 닦고 있습니다. 김형의 부친 김기남(金起男)은 두 번이나 임금을 위해 병사를 일으켜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하였습니다. 목사(牧使) 최유해(崔有海)가 소장을 올려 의병장의 자손을 거두어 쓰라고 청하니, 임금에 감사에 명하여 남은 자손들을 채록하여 녹용(錄用)하라고 하였는데 해당 관청에서 아직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허진과 김국신 두 사람의 자손이 만약 녹용하게 된다면 이붕수의 자손을 참으로 마땅히 먼저 등용해야 하며, 최배천과 지달원 그리고 강문우의 자손도 또한 마땅히 녹용해야 합니다. 대개 최유해의 소장에 대해 이미 선왕의 윤허를 받았는데 해당 관청에서 지금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은전에 흠결이 되니, 더구나 지금 국가에서 바야흐로 북변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자손을 더욱 특별히 녹용하여 장려함을 보여야 합니다.○김려광(金麗光)은 경성 사람이며, 충의위(忠義衛) 허대성(許大成)은 길주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전투에서 죽었는데 전공을 상고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다만 전투에서 죽었다고 짐짓 이붕수처럼 배향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다만 전투에서 사망한 자손은 또한 휼전을 더하지 않을 수 없는데 두 사람의 자손에 대해 세금을 감면하는 일이 없으니, 이는 원통한 일입니다. 마땅히 본부(本府)와 본주(本州)에 관문(關文)을 보내 세금을 면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대성은 공신의 후손으로 그 자손은 으레 면강을 하였는데, 김려광의 자손은 면강첩이 없으니 또한 마땅히 만들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수문장(守門將) 박은징(朴銀澄), 부장(部將) 박연주 삼형제는 경성 사람입니다. 정공을 따라 전공을 세워 선무(宣武) 3등에 참여하여 자손들이 면강되었으며 강문우도 또한 이등에 참여하였는데, 그 밖의 유생은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종공신(原從功臣)9)은 반드시 무인이었으니 공을 기록할 때 상경하여 스스로 호소하였고, 유생은 상경할 수 없어서 누락된 것입니다.○박유일(朴惟一)은 경성 사람입니다. 왕자가 왜놈에게 사로잡혔을 때 구출해 낸 공이 있는데, 왕자가 그 이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왕자가 잡힌 것을 슬퍼하여 구출하였는데, 이름은 물을 필요 없습니다."라 하고서 답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대개 그 사람됨이 효성스러워 온 마을이 칭송하였으며 정공을 따라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은 또한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자손에게 면강첩을 준다면 어떻겠습니까.○오윤적(吳允)은 회령(會寧) 사람입니다. 본래 유생으로 국경인이 난리를 일으키자 창의(倡義)를 모의하여 향교에서 유생들을 불러 모았는데 국경인이 향교를 포위하고서 위협하며 수창한 자를 나오게 하자, 오윤적이 자수하면서 나갔습니다. 마침 군인 신세준(申世俊)이 요각(鐃角)을 훔쳐서 객사 문밖에서 부니 역적 무리들이 국경인이 명령을 낸 것으로 착각하고서 일제히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유생들이 그들을 위협하여 따르게 하여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고서 나아가 국경인을 공격하였습니다. 유생들이 거짓으로 이르기를 "만약 오윤적을 풀어주면 마땅히 전투를 그만두겠다."라고 하니, 국경인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드디어 국경인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오윤적은 본래 거의를 앞장서서 수창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며, 다만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의 직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손 오준(吳鐏)과 오일(吳鎰)은 지금 향임(鄕任)을 하고 있습니다.○출신(出身) 차응린(車應麟)은 이미 권관이 되었고, 양손(養孫) 차지행(車地行)은 일찍이 향임을 지냈습니다.○출신 박극근(朴克勤)의 아들 박희열(朴希悅)과 박희발(朴希)은 일찍이 향임을 지냈습니다.○유생 김전(金銓)의 양손 김상인(金尙仁)은 장수하여 벼슬을 받았고, 그의 아들 김여익(金汝益)은 유학을 익히고 있습니다.○김경(金鏡)의 손자 김주현(金柱玄)과 김주우(金柱宇)는 장수하여 벼슬을 받았습니다.○유생 차득도(車得道)의 손자 차병(車柄)은 바야흐로 좌수(座首)로 있으며, 그의 아들 차천준(車天遵)은 유생입니다.○출신 황수(黃垂)의 손자 황중경(黃重瓊)은 바야흐로 향임으로 있습니다. 오윤적 이하는 모두 회령 사람입니다.○출신 김사주(金嗣朱)와 도훈도(都訓導) 최경수(崔敬守)는 모두 종성 사람입니다. 정 평사를 따라 거의하였으나 공이 없어서 상을 받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후에 오랑캐를 토벌한 공으로 모두 당상관에 올랐습니다. 김사주의 첩손 김수(金銖)와 최경수의 아들 득례(崔得禮)는 출신이라고 합니다.○원충서(元忠恕)는 경흥(慶興) 사람입니다. 정 평사를 따라 거의하여 전공이 뛰어나 원종공권을 받았으며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습니다. 증손 원자명(元自明)은 지금 향임으로 있습니다. 원충서의 첩의 아들 시발(時發), 시득(時得), 시길(時吉), 시말(時末)은 그 모친이 내비(內婢)이기에 지금 모친의 신분을 따르고 있습니다.○정윤걸(鄭允傑), 정응성(鄭應聖) 부자는 경성 사람입니다.○여정(余貞)은 본래 온성(穩城)의 관노입니다. 계미년에 신립(申砬) 장군을 따라 전공을 세웠으며, 정 평사를 따르다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다만 아들 하나를 남겼는데 지금은 죽었으며, 손자 송학(松鶴)이 바야흐로 관노로 있습니다. 공로를 세웠는데 전투하다가 죽은 자손을 비록 면천하기는 어렵더라도 세금을 면하고 휼전을 내리는 것도 미치지 않으니 탄식이 일어납니다.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정공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였으나 당시 사실을 채록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사적을 찾아 보내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것이 온다면 마땅히 추가로 기록하여 올리겠습니다.아! 북관을 차지한 이래로 변방을 열어 넓히고 오랑캐를 쳐서 공을 세운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당시에 모두 공로를 표창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정공은 낮은 관리로써 큰 공을 세웠음에도 당시 감사와 병사가 시기한 나머지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서 그 공을 가려 결국 난리에 거의한 사람들에게 공로의 표창이 내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하면서 "지금도 사람들이 분개하고 한탄하면서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당초에 조정에서 듣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만 한둘의 거짓 장계에 의거하여 믿게 되었다. 그 후로 20년간을 언덕과 습지를 가리지 않고 향촌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음이 없었으나 으레 이전의 일이라고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끝내 사실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할 때는 지금부터 50년 전입니다. 그 사이에 다만 민 판관만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또한 자손들을 면강해 주었습니다. 감사(監司) 서원리(徐元履)는 그 선조가 이곳에서 난리를 피하였는데 의병의 도움을 받아 재앙에서 벗어나게 되었기에 당시의 일을 마음에 두고서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옛 것을 좋아하고 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어찌 드물겠습니까. 아! 이전 일이라고 하여 마음에 두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세속 사람들이 일처리 하는 방식입니다. 옛날의 현인과 군자는 일찍이 이러한 일을 급급하게 드러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한 것과 민 판관이 제사를 지낸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선친의 기록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다행이도 합하께서 순행하는 날을 만났으니 다시 이에 힘을 쏟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된다면 사리에 있어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자세히 이렇게 썼으니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이러한 뜻을 혜량하여 이들을 널리 드날린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贈司憲府監察李鵬壽, 鏡城人, 自少時有志槩, 氣宇不凡。壬辰鞠賊之亂, 鵬壽首謀擧義, 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 而未得其人。鄭評事與池達源·崔配天兩人, 同至鵬壽家, 鵬壽出見大喜, 傾家奉之, 推爲主將。留一月, 進誅鞠賊, 爲倡義別將, 轉討倭寇, 凡三捷立功, 白塔之戰, 中丸而死,追贈司憲府監察。鄭公牧吉州, 以白塔郊哀李殿中出題試士。鏡城人著《義旅錄》, 詳錄其倡義討倭之功。閔判官維重爲文致祭, 洪判官如河撰墓碣銘, 蓋鄭公非鵬壽, 無以擧義, 鵬壽非鄭公, 無以成功。當時之士, 鵬壽當爲第一。若爲鄭公立廟, 當以此人配享。今有曾孫七十餘人, 其中儒士之俊秀者, 李東白·李東榮·李震英·李發榮, 而東榮則曾經順陵參奉云。判官崔配天·參奉池達源兩人, 鏡城人, 皆好義者也。鄭評事初遇兩人, 同至李鵬壽家, 恊謀擧義, 誅鞠賊討倭寇, 終始宣力最多。配天懷捷書奏行在, 宣祖大王引見賜帛, 給軍器寺判官職帖。時觀察使尹卓然, 嫉鄭公聲績掩己, 加以搆捏二事交上, 故旌賞格不行,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坐此故也。達源後爲璿源殿參奉, 此由朝廷有所親, 知其賢而擧之, 非以戰功也。此兩人及姜文佑, 有幷爲配享之議, 而又有疑難之議, 未知如何如何。但三人之功, 俱在《義旅錄》。閔判官維重, 皆爲文致祭, 其功實出尋常, 而配天以躬往行在, 故僅得影職五品帖, 達源全未蒙賞, 此三人子孫, 雖難錄用, 亦宜加恤。達源則無嫡子, 有妾子兩人成海學海, 皆能文有識, 有乃父風, 而以其母內婢, 故從賤役, 可惜可惜。達源軍功固當追褒, 若免其兩子, 使之奉祀, 則可無遺憾。配天子孫, 閔判官時, 報使免講, 而都事或有擧論之時。伏聞閤下秋巡時, 下敎'凡倡義人子孫, 當爲別樣處置'云, 而未有明白指揮, 若蒙成給其帖文, 則當爲實惠耳。配天之孫瀷, 以儒士方治經云耳。僉使姜文佑, 鏡城人。以前權管, 從鄭公起兵, 縛鞠賊, 以先鋒將討賊, 能冒死赴敵, 而戰必有功。爲人豪健丈夫, 能立然諾, 重義氣, 詳在《義旅錄》。其孫有世望者, 有識儒生耳。又有賤孫敏仁兩人, 爲府奴。李麒壽, 鏡城人, 鵬壽之兄。鄭公倡義時, 以座首, 共謀倡義。且鞠賊迎倭, 城池府庫板蕩之餘, 收其餘燼, 封閉修輯, 以待義兵。徐遂, 鏡城人。以前座首, 與李麒壽同事有功。有賤孫胄, 方爲行營官奴。忠義許珍·武士金國信, 吉州人。珍, 敵愾功臣惟禮之曾孫, 與國信當壬辰之亂, 忠憤激烈, 潛行山谷, 募義兵, 從鄭公誅叛賊。珍爲右斥候將, 國信爲左斥候將, 討倭立功, 詳在《吉州事蹟》。此兩人戰功, 如鏡城之姜文佑。徐巡使元履時, 欲爲此等人, 亦立廟於吉州而未果云。此兩人若廟享, 則鏡城之崔池姜三人, 亦宜廟享, 但未知右兩人廟享合當否也。珍孫喆, 有識儒生。國信曾孫衡, 業武。其父起男, 再度勤王, 終始從軍, 牧使崔有海陳疏, 請收用義兵將子孫, 上命監司, 採訪遺孫, 以裨錄用, 而該曹尙不施云。珍國信兩人子孫, 若被錄用, 鵬壽子孫固當先用, 如配天達源文佑子孫, 亦當錄用矣。大槩有海之疏, 旣被先朝允許, 則該曹之至今不施, 實爲欠典, 況今國家方軫北邊事, 此等人子孫, 尤當特爲錄用, 以示奬勸也。金麗光, 鏡城人, 忠義許大成, 吉州人。此兩人戰亡, 而無事功可考文字, 不可只以戰亡, 故廟享如鵬壽也。但戰亡子孫, 亦不可不加恤, 而兩人子孫俱無復戶之事, 此爲冤痛, 宜行關本府本州, 使之復戶也, 如何。大成則以功臣後裔, 其子孫例爲免講云, 而麗光子孫, 則無免講帖, 亦宜成給也, 如何如何。僉正朴銀柱·守門將朴銀澄·部將朴連柱三兄弟, 鏡城人也。從鄭公有戰功, 參宣武三等, 子孫免講, 姜文佑, 亦參二等, 而其他儒生, 則皆未參。原從, 必是武人, 則錄功時, 上京自訴, 儒生則不能上京而漏落也。朴惟一, 鏡城人。王子被執時, 有救解之功, 王子問其名, 則答曰: "吾哀王子救之, 名則不必問也。" 因不答而去。蓋其爲人, 有孝行, 一鄕稱之。從鄭公起兵云, 而無可考事實, 然如此人, 亦不可無褒賞, 若給子孫免講帖, 則如何如何。吳允迪, 會寧人。本以儒生, 鞠景仁之亂, 倡謀聚會儒品於鄕校, 景仁圍鄕校, 脅出首倡, 允迪自首而出。適軍人申世俊, 竊取鐃角, 吹于客舍門外, 叛徒疑景仁出令, 齊會, 儒生輩仍勒率, 斬其不從者, 進攻景仁。儒生誑謂'若給允迪, 當罷戰', 景仁從之, 遂窮討景仁斬之。允迪本首倡, 而無成功, 只授軍器主簿職帖, 其孫鐏鎰, 方爲鄕任。出身車應麟, 已行權管, 養孫地行, 曾經鄕任。出身朴克勤子希悅·希發, 曾經鄕任。儒生金銓養孫尙仁, 老品官, 子汝益業儒。金鏡孫柱玄·柱宇, 老品官。儒生車得道孫柄, 方爲座首, 子天遵儒生。出身黃垂孫重瓊, 方爲鄕任。吳允迪以下, 皆會寧人。出身金嗣朱·都訓導崔敬守, 皆鍾城人。從鄭評事而無功賞。兩人後以討胡功, 皆陞堂上。嗣朱妾孫金銖, 敬守子得禮, 出身云。元忠恕, 慶興人。從鄭評事戰功特異, 受原從功券, 官至萬戶。曾孫自明, 方爲鄕任。忠恕妾子時發·時得·時吉·時末, 以其母內婢, 故方從母役。鄭允傑·鄭應聖父子, 鏡城人。余貞, 本穩城官奴, 癸未, 從申砬有戰功, 從鄭評事死於嶺東之戰。只有一子而今死, 有孫松鶴, 方爲官奴。有功戰亡之子孫, 雖難免賤, 復戶恤典亦不及, 可歎。右人等皆從鄭公討賊, 而時未採得事實, 今方行關各邑, 使之求覓以送, 若來則當追錄以上矣。噫, 自有北關以來, 開拓土境擊胡, 有功之人何限, 而當時皆蒙旌賞, 獨鄭公以卑官立大功, 爲其時監兵使妬忌, 誣啓掩功, 以致從難之士, 旌賞闕然。先人記事曰: "至今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又曰: "當初朝聞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隰咨詢, 而例不以前事爲意, 終未有記其實者"云。先人記事時, 距今五十年矣。其間惟有閔判官爲文致祭, 且使子孫免講。徐監司元履以其先世避亂此地, 賴義兵脫禍, 故留意當時事, 欲爲立廟而未果。世間好古慕義之人, 何其鮮也。噫, 不以前事爲意, 此乃流俗之人事。古之賢人君子, 未嘗不以如此等事, 爲汲汲表章之地, 先人之記事, 閔判官之致祭, 卽出於此意, 而端夏今持先人記事而來此, 幸遇閤下巡宣之日, 而不復着力於此事, 使之永歸於泯沒, 則其於事理, 當如何也。玆以縷縷至此, 伏惟閤下諒此意, 有所褒揚, 不勝幸甚。 영직 실제로 맡아서 하는 일은 없으면서 그 직함만 빌려 가지는 벼슬을 이르던 말이다. 면강 조선시대 교생(校生)이 강경시험(講經試驗)에서 떨어져 군역에 나가게 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강경을 면제하는 것을 이른다. 원종공신 큰 공을 세운 정공신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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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가 집으로 보낸 편지 畏齋家書 근래 변방의 소식이 연달아 이르니, 오랑캐가 강을 따라 오가는 것이 평소와 다르거늘 그 까닭을 알 수 없는데 지금 비로소 답이 왔다. 어떤 이는 '후춘(厚春)이 불러 항복하였던 우지개(亏知介)의 무리들이 영고탑(靈古塔)의 오랑캐를 배반하였는데,12) 그들을 안정시켜 살게 하려고 하니 배반한 자들이 내려갔다.'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깊은 곳에 오랑캐들이 인삼을 캐기 위해 온다.'라고 하니, 두 말이 같지 않기에 일단 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데, 병사(兵使)는 계문(啓聞)을 하려고 한다.대개 눈앞에 어떤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 있어서 점점 좋지 않은데, 이것이 내가 이전부터 걱정하던 것으로 반드시 정문부(鄭文孚)의 사당을 세워 의사의 마음을 거둬서 민심을 한 곳으로 모으는 토대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방백이 지금 이미 흔쾌하게 허락하였으며 또한 공사비용까지 지급하니, 내 생각으로는 먼저 신원을 청하려고 하였는데 방백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의논하고서 조정에 계문하여 의병에 종사한 사람들의 자손을 녹용하라고 청하려고 한다.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 방백이 개인적으로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문의하였는데, 이미 정공을 위해 완벽하게 신원했다고 하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내가 이곳에 와서 이 일을 힘쓴 것이 헛되지 않게 되었다. 近日邊報續至, 胡人之沿江往來, 異於常時, 而莫知其由, 今始有所答。或云, '厚春所招降亏知介輩, 叛靈古塔之胡, 欲爲安集, 叛者而下去。' 或云, '深處, 胡人爲採蔘出來。' 兩言不同, 姑俟後報, 而兵使欲爲啓聞耳。大槩目前, 有何變故而萌兆, 漸似不好, 此吾從前所憂, 而必欲立鄭廟, 爲收拾義士心之地矣。方伯今已快許, 且給工費, 吾意欲先請伸冤, 而方伯以爲不必然。歸路欲更議, 啓聞仍請錄用從義人之子孫耳。立廟事, 方伯以私書問于領台, 則已爲鄭公伸冤甚悉, 多幸多幸。吾之此來, 得辦此事, 庶不爲虛行也。 후춘(厚春)이……배반하였는데 후춘은 만주족(滿洲族)의 이름으로, '후춘호(厚春胡)' 또는 '후춘 부락(厚春部落)'으로도 불리었다. 영고탑(靈古塔)은 청(淸)나라의 발원지로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일대에 있다. 함경도 경흥(慶興)의 건너편에 있는 야춘(也春) 지역에 살다가 점차로 경원(慶源)의 후춘강(厚春江) 건너편으로 이주하였으며, '우지개(于知介)'라는 종족(種族)이 주종을 이루었고, 토지가 비옥하고 성질이 강포하여 자주 우리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仁祖實錄 24年 8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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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에서 신을 주운 일1)을 그린 그림 圮橋取履圖 다리 위에는 한 노인 있고다리 아래에는 한 선비 있으니노인은 다리 위에서 신을 떨어뜨리고선비는 다리 아래서 신을 줍네신을 주우라는 명 이미 너무 거만한데꿇어앉아 바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그가 어른이기에 내가 어른으로 대한 것이니가지를 꺾는 듯 어려운 일 아니로다2)한나라를 보좌할 지략을 전수하니한나라가 망한 치욕을 끝내 씻었네지금까지도 그림 속에서여전히 영웅의 풍모 일어나누나 橋上有一翁橋下有一士翁墜橋上履士取橋下履命取已太倨跪進亦何意彼長我長之折枝非難事一授佐漢略竟雪亡韓恥至今畫圖中尙有英風起 이교에서……일 장량(張良)은 한(韓)나라에서 대대로 상신(相臣)을 지낸 가문의 후예로, 한나라가 망하자 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을 맹세하고 지내던 중 하비(下邳)의 이교(圮橋)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이 신발을 이교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신발을 주워오라 명하자, 장량은 신을 주워 꿇어앉아서 노인에게 신겨주고 노인으로부터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 받았다. 장량은 훗날 한 고조(漢高祖)의 모신(謀臣)이 되어 한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했다. 《史記 留侯世家》 가지를……아니로다 장량이 이교의 노인에게 신을 신겨주고 공경을 표한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왕도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맹자가 "노인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왕께서 왕도정치를 행하지 않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爲長者折枝, 語人曰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王之不王, 是折枝之類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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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에서의 연회188)를 그린 그림 瑤池宴圖 약수189) 서쪽에 왕래하는 길 끊겼으나요지는 원래 푸른 복숭아 사이에 있네희왕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 거슬러 올라 당도하니황하를 세상에 내보낸 것 후회하네190) 弱水西邊斷往還瑤池自在碧桃閒姬王却遡東流至悔遣黃河出世間 요지에서의 연회 요지(瑤池)는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하던 곤륜산(崑崙山)의 선경이고, 요지연(瑤池宴)이란 바로 주 목왕(周穆王)이 서왕모를 찾아가 요지 가에서 함께 연회를 가졌던 데서 온 말이다. 《열자》 〈주목왕(周穆王)〉에 "마침내 서왕모의 손님이 되어 요지 가에서 연회를 가졌다.[遂賓于西王母, 觴于瑤池之上]"라고 하였다. 약수(弱水) 신선이 사는 봉래(蓬萊) 섬 주위를 약수가 에워싸고 있는데, 그곳은 새털처럼 가벼운 물체도 금세 가라앉기 때문에,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전설이 있다. 《海內十洲記》 희왕이……당도하니 희왕은 주 목왕을 가리키는 말로, 주나라 왕실의 성이 희(姬)씨이므로 희왕이라 한 것이다. 황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주 목왕이 황하를 거슬러 올라 찾아왔으므로, 세상에 황하를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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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191)가 바둑 두는 모습을 그린 그림 四皓圍碁圖 바둑 한 판에서 승패가 나는 형세유희인 줄 알면서도 또한 마음 쓰네산속에 은거하면서 기략과 권모를 쓰니중원의 초한 전쟁을 부질없이 피했구려 一局圍碁勝敗形自知爲戲也關情山居亦用機權手枉避中原漢楚爭 사호(四皓)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해 상산(商山)에 들어가 은거하던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 이들 모두 수염과 눈썹이 흰 노인이었기 때문에 사호(四皓)라고 불렀다. 상산사호(商山四皓) 라고도 한다. 《史記 留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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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서241)의 시를 부기하다 附孫文恕韻 층층 얼음 쌓인 잔도를 얼마나 가고 갔는가첩첩 눈 쌓인 오랑캐 산에서 만리 밖 고향 생각나네오직 꿈속에서 그리워하다가안개 낀 달 속에 행영에 이르렀네 層氷閣路幾行行疊雪胡山萬里情惟有相思一片夢惹烟和月到行營 손문서(孫文恕) 1566~?. 본관은 안동, 자는 인부(仁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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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석316)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317) 지었다 射虎石 赴燕時作 원숭이 팔 장군318) 밤에 사냥 갔다 돌아올 때말 앞에 무엇인가 희미하게 보였어라.산의 동쪽 양들이 일어났는지319) 처음에 의심하였고흙다리 위에 다니는 사람인가320)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곧 아니어라.범이 산모퉁이 등진 것 같으니 어찌 두려워 쫓으랴점차로 길을 막으니 손으로 비키라고 할 수 있으랴.만약 나귀를 보인다면 응당 재주를 다할 것이며321)곧 여우가 온다면 참으로 위세를 빌릴 듯.눈동자 놀람에 커져 다만 내 솜씨만 믿을 뿐담이 크니 어찌 심기를 잃으랴.금복고322)를 뽑아 유성처럼 번득이니오호궁323)을 당겨 쏘니 달빛도 떨어지네.천둥이 활시위에 응하여 골짜기를 울리고귀신이 화살촉 따라 숲을 쪼개누나.오묘하게 꿰뚫으니 어찌 맨손으로 잡는다고 자랑하랴큰 사냥은 합동으로 포위하는 것과는 무관하네.다만 털 짐승으로 보이는 바위에 화살을 꽂으니324)산골이 본래 자갈로 이뤄진 것을 어찌 알랴.세 겹의 갑옷도 뚫는 사람은 적고한 발에 암퇘지를 연달아 잡는 것325)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네.용맹함으로 맹수를 잡으니 생각건대 기상이 굳세며활을 쏴 금석을 뚫으니 그 이치 어디에 의거하였나.기의 감응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원래 다르지 않으니집중으로 견고함을 꿰뚫은 것은 그 이치에 어긋나지 않네.창을 휘둘러 지는 햇빛을 되돌린 것326)을 모름지기 믿으며흐르는 피가 빈 옷을 적신 것을 의심하지 말라.어찌하면 단단한 바위에 정성이 남을까마침내 제후로 봉해질 것인데 운명이 박하였어라.327)오랑캐 변방 저절로 조용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고한나라 은총은 대단히 박하여 사관도 오히려 비난하였지.전속국 소랑은 숫양이 새끼를 낳지 못하였고328)오랑캐 금은 제후를 봉할 때 다만 말만 살지게 기르면 될 뿐.황제는 웅걸찬 재주 지녔지만 오히려 장수는 잃었으니바위는 신물이 아니지만 다만 기미를 알았네.천추 동안 안개에 숨어 유적으로 남았으니한 바위가 석양을 마주하고 있어라.지난 일 지금은 새가 지나간 듯한데행인은 옛날 조상하며 말을 멈추누나.어찌하면 연연산의 빗돌329)로 바꾸어당시 한나라 비장군의 행적 새겨 넣을까. 猿臂將軍夜獵歸馬前何物見依俙山東羊起初疑是圯上人行近却非乍似負嵎寧畏逐漸成當道可能揮若令驢見應輸技卽有狐來定假威目駭只憑吾手法膽麤那失此心機抽來金僕流星閃彎罷烏號落月輝霹靂應弦傳谷響鬼神隨鏑擺林霏妙穿何用誇徒搏大獵非關作合圍但道毛蟲能飮羽豈知山骨本成磯三重洞甲人猶鮮一發連豝古亦稀勇奪爪牙思卽壯射開金石理何依氣通物我元無間誠貫堅頑故不違須信揮戈回返景莫疑流血濺空衣如何介石精誠在畢竟分茅命道微胡塞自裁人共惜漢恩偏薄史猶譏蘇郞屬國非羝乳金虜封侯但馬肥帝有雄才猶失將石非神物獨知幾千秋霧隱留遺跡一片雲根對夕暉往事至今如過鳥行人弔古駐驂騑若爲化作燕然石銘記當年漢將飛 사호석 한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이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을 때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의 돌을 보고 호랑이라고 여겨 활을 쏘아 맞혔는데, 가서 보니 큰 바윗돌 속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漢書 卷54 李廣傳》 연경에……때 1610년 46살 때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원숭이 팔 장군 이광이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천성적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원숭이처럼 긴 팔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산의……일어났는지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서 "황초평이 15살 때 집에서 양을 키우게 하였다. 도사를 따라 금화산 석실에서 도를 닦았다. 40여 년이 지난 뒤에 형이 찾아와서 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초평이 '워이! 양들아 일어나라.'라고 하니, 이에 흰돌이 모두 일어나 수만 마리의 양이 되었다."라고 했다. 흙다리……사람인가 선인(仙人) 황석공(黃石公)을 이른다. 진(秦) 나라 말기에, 다리 위[圯上]에서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 일편(一篇)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13년 후에 네가 나를 제북(濟北)에서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 누런 돌이 바로 나일 것이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55》 만약……것이며 검주(黔州)에는 본디 나귀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귀를 싣고 들어가 그곳 산 밑에 풀어 놓았더니, 호랑이가 처음에는 나귀의 큰 체구와 큰 울음소리로 인해 그를 대단히 무서워했으나, 그 후 나귀와 점차 가까워진 다음 나귀의 발길에 한 번 채여 보고 나서는, 나귀에게 그 밖의 다른 기능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나귀를 물어 죽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柳河東集 卷19》 금복고 《춘추좌씨전》 장공(莊公) 11년 조에 "승구의 전쟁에서 장공이 금복고로 송나라 대부 남궁장만을 쏘아 맞혔다.[乘丘之役, 公以金僕姑射南宮長萬.]"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금복고는 화살 이름이다."라 하였다. 이후 좋은 화살을 가리켜 말할 때에 쓰인다. 오호궁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서 "활을 쏘는 자는 오호궁(烏號弓)을 집어 들고 기위전(綦衛箭)을 먹여 쏜다."라고 하였다. 그 주에 "오호는 뽕나무인데, 재질이 탄력성이 강하다. 까마귀가 뽕나무 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려고 하면 그 가지가 아래로 휘어졌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므로 까마귀가 감히 날지 못하고 그 가지에서 운다. 사람들이 그 가지를 베어 활을 만들어 오호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화살을 꽂으니 초나라 웅거자(熊渠子)가 밤에 길을 가다가 바위를 범으로 오인하고는 활을 쏘았는데 바위에 워낙 깊이 박혀서 화살 끝의 깃털이 보이지 않을 정도[飮羽]였다는 일화가 《한시외전》 권6 24장에 보인다. 한……것 《시경》 〈소남(召南) 추우(騶虞)〉에서, "저 무성한 갈대밭에, 다섯 암퇘지를 한 발에 쏘아 잡네.[待茁者葭, 一發五豝.]"라고 하였다. 창을……것 옛날 노 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적에 해가 마침 서쪽으로 기울자, 창을 잡고 해를 향하여 휘두르니, 해가 90리나 되돌아왔다는 '휘과회일(揮戈回日)'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마침내……박하였어라 이광은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와 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모두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그만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하였다. 전속국……소랑 소랑은 한 무제 때 전속국(典屬國)의 벼슬로 있다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이다. 흉노의 선우가 항복하라고 위협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다 땅굴 속에 구금되어 담요의 털을 눈[雪]과 뭉쳐 먹으며 연명하였다. 북해(北海)로 옮겨 양(羊)을 기르게 하며 선우가 말하기를 "숫양[羝羊]의 젖이 나오면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했다. 그 뒤 갖은 고생을 하며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면서 돌아오게 되었다. 《漢書 卷54 蘇建傳》 연연산의 빗돌 후한(後漢) 때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개선(凱旋)하여 연연산(燕然山)에 이르러 비(碑)를 세워서 그의 공업(功業)을 기술하였다. 그 글은 그를 수행했던 반고(班固)가 지었다. 《後漢書 竇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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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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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순찰사의 장계 巡察使狀啓 신이 임무를 받고 북쪽으로 온 지가 벌서 1년이 지났습니다. 세 차례 여러 고을을 순행하여 본도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당장 급하게 염려되는 것은 군정을 정비하고 민심을 굳게 뭉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가운데 민심이 또한 근본이 되는데, 변방은 도성에서 대단히 멀어 왕의 교화가 미치기 어렵고 풍습이 강하고 사나우며 습속이 어리석어서 난리에 쉽게 유혹되고 이치로써 깨우치기 어렵습니다.이미 지나간 일로 말하자면, 옛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가 모반을 하고서 '조정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북방민을 모두 죽이려한다.'고 속이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미혹되어 일도(一道)가 역적을 따랐습니다. 국가에서 다섯 도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겨우 토벌, 안정시켰습니다. 임진년의 변란이 일어나 왜구들이 북방에 들어오자 지방민들이 함께 일어나 반란을 일으켜 장리(長吏)를 앞 다퉈 포박하고 온 성이 왜적을 따랐습니다.당시 좌의정(左議政) 김귀영(金貴), 부원군(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승지(承旨) 황혁(黃赫) 등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모두 반란의 역적들에게 결박되어 왜적에게 넘겨졌으며, 남북의 병사(兵使)들과 여러 진의 수재(守宰)들이 적에게 함락되어 거의 다 죽었습니다. 다만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일찍이 지방민들과 잘 지냈기에 그들의 구원에 힘입어 겨우 목숨은 면하였습니다. 장차 바닷길로 남쪽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유생들이 요청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먼저 반란의 역적을 죽이고 이어서 왜구를 토벌하였습니다. 남도의 의사들이 함께 일어나 합세하자 전투를 벌일 때마다 반드시 승리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니 함경도가 다시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당시 왜구와 오랑캐가 함께 난리를 일으켜서 배와 등으로 적을 상대하는데 반역의 백성이 그 안에서 일어나 이미 반란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왜적이 비록 물러났지만 그 형세는 응당 오랑캐를 따르려고 하였는데, 두세 유생이 일개 종사관을 추대할 줄 알아 적은 병사로 많은 적병을 격파하여 마침내 큰 공을 세워 우리 제왕이 일어났던 예전 강토가 오랑캐에게 빼앗기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열이 이와 같은데, 마침 그 도를 다스리던 신하가 그 공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공적을 숨기게 된 처사를 당하게 되어 마침내 의병을 규합했던 선비들로 하여금 드러나게 정상(旌賞)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이곳 민심은 분통을 터뜨리고 한탄하면서 '왕의 일이 이뤄질 수 없다.'고 하니, 국가에서 공훈에 보답하고 백성을 격려하는 도리로 본다면 어찌 은전에 큰 흠결이 없겠습니까.더구나 지금은 북방에 커다란 근심이 있는데, 북도에 만약 변란이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일어난다면 도내 민심은 믿기 어려움이 아마도 이전보다 심할 것입니다. 이전 의사의 공을 이처럼 가려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후대에 충의의 인물이 계속 나올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간담이 서늘합니다. 그 당시 의사가 비록 모두 타계하였더라도 뒤미처 휼전을 베푸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지금 신이 여러 고을에서 채방하여 뚜렷하게 공을 세우고서 전투에서 죽은 자 10여 명의 성명을 찾아서 뒤편에 기록하여 삼가 올려 보냅니다. 각각의 성명 아래에 대략 사실을 기술하여 조정에서 참작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습니다. 혹은 관직을 추증하고 혹은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혹은 전결을 주거나 세금을 감면하여 주고 혹은 자손을 면천하여 주는 등 경중을 나눠 휼전을 거행하여 민심을 굳게 뭉치게 하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 실로 오늘날 북방의 제일가는 급선무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저의 주제넘은 생각으로 황공하게 장계를 올립니다. 을사년 11월 모일. 臣受任北來, 已過一年。三巡列邑, 審察本道形勢, 目前緊急之慮, 不出於修治軍政, 固結人心而已。然於二者之中, 人心又爲之本, 而邊土絶遠, 王化難及, 風氣強悍, 習俗愚蠢, 易惑於亂, 難曉以理。以已往之事言之, 昔在世祖朝, 李施愛謀叛, 誘以'朝廷遣兵, 盡殺北民', 則人皆驚惑, 一道從逆, 國家悉發五道之兵, 僅討平之。至于壬辰之變, 倭寇入北, 土人幷起爲亂, 爭縛長吏, 擧城附賊。時左議政金貴榮·府院君黃廷彧及其子承旨爀等, 奉臨海·順和兩王子, 皆被叛賊縛執與賊, 南北兵使, 諸鎭守宰, 陷賊殆盡。獨評事鄭文孚, 曾與土居儒生相善, 故賴其救護, 僅以身免。將由海道南還, 儒生輩要與共起義兵, 先誅叛賊, 繼討倭寇, 南道義士, 幷起合勢, 每戰必捷, 平定大難, 咸鏡一道, 復爲我有。當時倭胡交亂, 腹背受敵, 逆民中起, 旣爲叛賊, 倭雖退, 其勢當附於胡,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箇從事, 以少擊衆, 卒就大功,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義烈如此, 而適被按道之臣恥其功不出己, 誣啓掩功, 遂使糾義之士, 未獲顯被旌賞, 至今人心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其在國家酬報激勸之道, 豈非大端欠典乎。況今北方深憂方在, 北道脫有事變出於意外, 則道內人心之難恃, 恐有甚於前日。旣往義士之功, 若是其掩蔽, 則將何以責後來忠義之繼出乎。言念及此, 心膽俱寒。其時義士, 雖盡作故, 不可無追恤之道, 故今臣採訪列邑, 得其表著立功死事者十數姓名, 開錄于後, 謹此上聞。各人名下, 略註事實, 以備朝廷裁處。或追贈官職, 或錄用子孫, 或田結復戶, 或子孫免賤, 分輕重擧行恤典, 以爲固結人心之本, 則實爲今日北方第一急務, 故敢此妄料, 惶恐馳啓事。乙巳十一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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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렬사에 쓰다 송성명 題彰烈祠【宋成明】 파도 부서지듯 의기 떨친 곳이요마구 쳐들어온 흉도 섬멸한 전장이네공이 아니면 북도 땅 없었을 터선왕께서 공렬을 표창하셨네사당은 호숫가 내려다보고풍성은 바닷가 고을에 떨쳤네격전의 모습 골똘히 생각하니장백산처럼 높고 울창할 테지 奮義波頹地殲兇豕突場靡公無北土彰烈在前王廟貌臨湖曲風聲振海鄕永思酣戰狀鬱嵂白山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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